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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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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래를 북한에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했다든지, 남한의 반체제세력이 애창한다 든지 등등 여타의 이유를 들어 그 가요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반민주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 노래가 두 가지 필요조 건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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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법 제34조제1항제3호에 따른 노인전문병원 2. 국민건강보험법 제40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요양기관(약국을 제외한다) 3. 삭제< > 4. 의료급여법 제2조제2호의 규정에 의한 의료급여기관 제9조 (건강진단) 영 제20조제1항의 규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입장

4) 이 이 6) 위 (가) 나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다 문득 신라의 삼국 통 일을 못마땅해하던 당신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 커지는 것이라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면,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기로 하고 이룩한 통 일은 더 작아진 것이라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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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E1-정답및풀이(1~24)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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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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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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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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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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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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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zb 2)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운다. 그러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해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 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정 - ( ᄀ ) - ( ᄂ ) - 국군 - 방백 - 황왕 (나)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이지, 무슨 목민관이 있 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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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되지만,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세력 은 5.18기념식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받은 데 이어 이 노래까지 공식기념곡으로 만 들어 5.18을 장식하는 마지막 아우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런 움직임이 이른바 호남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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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호 (2월) 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호 (2월) 6 겨울이 되면 1-4 박지예 겨울이 되면 난 참 좋아. 겨울이 되면 귀여운 눈사람도 만들고 겨울이 되면 신나는 눈싸움도 하고 겨울이

640..

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지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이 작업을 3번 반복 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간다. 그들이 제작진에게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재료를 얻기 위해서다. 그 이상의 생각은 하고 싶어도 할 겨를이 없다. 이 땅은 헬조선이 아니다.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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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민락초신문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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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외구사( 三 畏 九 思 ) 1981년 12월 28일 마산 상덕법단 마산백양진도학생회 회장 김무성 외 29명이 서울 중앙총본부를 방문하였을 때 내려주신 곤수곡인 스승님의 법어 내용입니다. 과거 성인께서 말씀하시길 道 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어울려야만 道 를 배울 수 있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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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이슈리포트 제 호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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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고1 전국연합학력평가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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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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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ON2009사업계획(v5.0)-3월5일 토론용 초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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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설-경건회(2011년)-68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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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관

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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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시장 동향 1) 주택 매매 동향 2) 주택 전세 동향 3) 규모별 아파트 가격지수 동향 4) 권역별 아파트 매매 전세시장 동향 토지시장 동향 1) 지가변동률 2) 토지거래 동향 강남권 재건축아파트 시장동향 15 준공업지역 부동산시장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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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공개)

교육실습 소감문

1

Transcription:

제 24회 檀國大學校 日本硏究所 國際學術심포지엄 司會 : 韓京子(檀國大 日本硏究所 硏究敎授) 13:00~13:20 接受 및 登錄 13:20~13:30 開會辭 (鄭灐 檀國大 日本硏究所長) 企劃主題: < 近代期 日本의 弘報文化政策과 朝鮮 臺灣의 文學> 13:30~14:10 경성과 동경의 카페 문화에 대한 상호 비교 연구 13:30~14:10 京城と東京の カフェ 文化に対する比較研究 13:30~14:10 - 禹政權 (단국대 교수) 2 23 13:3 指定討論 - 裵開花 (단국대 교수) 14:10~14:50 진화천의 道 와 잡지 문예대만 을 중심으로 13:30~14:10 陳火泉の 道 と雑誌 文芸台湾 をめぐって 13:30~14:10 - 廖秀娟(臺灣元智大 敎授) 25 39 13:3 指定討論 - 徐東周(서울대 일본연구소 연구원) 14:50~15:10 休息 15:10~15:50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13:30~14:10 帝国日本の 文化外交 に関する小考 13:30~14:10 - 金弼東 (세명대 교수) 13:3 指定討論 - 南相虎 (경기대 교수) 15:50~16:30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13:30~14:10 - Carnegie재단주최동양시찰미국기자단 을 중심으로 13:30~14:10 帝国日本の対外宣伝活動と植民地朝鮮 13:30~14:10 - Carnegie財団主催東洋視察米国記者団 をめぐって 13:30~14:10 - 小林聰明 (大阪市立大 研究員) 44 68 70 13:3 指定討論 - 李利範 (강릉대 교수) 107 16:30~17:30 종합토론 13:30~1 司會 - 李相薰(한국외대 교수) 111 13:30~14 討論 - 鄭灐, 金弼東, 小林聰明, 禹政權, 廖秀娟 13:30~14:1 南相虎, 李利範, 裵開花, 徐東周 Reception

경성과 동경의 카페 문화에 대한 상호 비교 연구 - 禹政權 (단국대 교수) 指定討論 - 裵開花 (단국대 교수) 프 로 필 우정권(禹政權, Woo Jeong-Gueon) 단국대학교 교수 한국문학 주요저서 및 논문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연구 공저, 2005 조명희의 연해주에서의 문학활동에 관한 연구 우리말글 2005. 4 1970년대 농촌과 환경의 문제 문학과 환경 2006. 6 경성의 모더니즘 문학에 나타난 동경체험에 관한 연구 일본학연구 2009. 1 외 다수

경성과 동경의 카페 문화에 대한 상호 비교 연구 경성과 동경의 카페 문화에 대한 상호 비교 연구 우 정 권(교수, 미디어아트및스토리텔링연구센터장) 1. 경성과 동경의 카페 문화 생성 동경에 1920년대부터 생겨난 카페가 모던한 도시의 밤문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불을 밝힌 동경의 카페는 진보쪼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일본 최초의 카페라 할 수 있는 프렝탕(Printemps)은 마츠야마 쇼조( 松 山 正 造 )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사람의 만남과 대화의 공간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 당시 예술가와 작가, 배 우, 비평가, 정치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술과 커피를 마시고, 서양 음식을 먹으면서 서 구의 체험에 대한 향수를 느끼거나 색다른 경험에 흥미를 가졌다. 카페 라이온, 카페 파우 리스타는 긴자 거리에 세워졌고, 평범한 사람들을 주요 고객으로 맞이하였다. 일본에서 카 페(Cafe)는 원래 커피점. 서양요리점, 끽다점 두 가지 뜻 외에도 바도 아마 포함될 것이 다 1) 라고 한다. 카페는 원래 유렵에서는 커피를 마시는 가게이지만, 가벼운 알코올류가 있는 경우도 있다. 점차 경양식도 취급하게 되고, 레스토랑도 카페라고 부르게 된다. 그렇 지만 미국에서는 카페는 주점, 바-와 동의어인 것 같다. 그렇다면 다이쇼 시대의 카페(かふ え)는 유럽적이고, 쇼와시대의 카페(かふえ)는 미국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동경의 카페가 커피점과 구별되면서 술을 파는 가게로 변모하면서 조선의 경성에 들어올 때는 커피를 파는 끽다점과는 완전히 구별되었다. 동경의 카페가 처음 문인들이 모여 이야 기를 나누는 만남과 사교의 공간이었는데 차츰 여급을 두고 술을 팔기 시작하면서 돈 많은 업자나 샐러리맨들이 주로 출입하는 유흥업소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동경의 카페는 1910년대 후반부터 20년대까지 흘러오는 과정에서 다방과 분화되어 나갔는데, 이것이 조선 경성에 들어올 때는 처음부터 다방과 카페가 둘로 나눠져 들어왔다. 조선의 경성에서는 남촌과 북촌에 카페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32년 5월 5일 동아 일보 에 난 카페 경영망 북촌에 진출, 음식점수가 굉장히 늘어 작년보다 삼배격증 기사 를 보면, 종로서 관내의 음식점은 1931년 말에 280개소였다. 이것이 4개월이 지난 1932년 봄, 48개소가 1) モダン 流 行 語 辞 典 ( 喜 多 壯 一 郎 監 修, 実 業 之 日 本 社, 1933) 2) 鈴 木 貞 美, モダン 都 市 の 表 現 : 自 己 幻 想 女 性, 白 地 社, p.54. 3

경성과 동경의 카페 문화에 대한 상호 비교 연구 증가하여 총 328개소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현저한 증가를 보인 것은 카페로서 6개소에서 17개소가 되었고 카 페와 비슷한 업소도 30여 개소가 증가하였다. 카페의 증가 요인은 일본인들이 북촌으로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카페가 존재하지 않았었는데, 1932년에는 17개소의 카페 중에 5개소를 뺀 12개소 를 일본인이 운영한다. 남촌에서 시작된 카페가 북촌에까지 진출하여 급속도로 그 숫자가 늘 어났다는 것이다. 30년대 경성의 유흥문화를 주도하였던 카페는 1910-20년대의 기생이 있 는 요리집을 계승하였다. 비록 시작이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남촌에서 시작되었지만,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북촌에까지 확대되면서 요리집의 영화( 榮 華 )를 뛰어넘게 되었 다. 초창기의 남촌과 북촌의 카페 모습은 사뭇 달랐다. 남촌의 카페는 대개 다다미방에 하얀 분을 바르고 기모노 복장을 한 여급들이 있고, 술은 주로 양주와 삿뽀르, 아사히 맥주가 잘 팔렸으며, 일본 가요와 재즈 등의 음악을 듣고 춤을 추었다. 그런데 북촌의 카페는 다다미 방보다는 칸막이 사이로 의자와 테이블이 주로 있었고, 기모노 복장을 한 여급과 양장을 한 여급들이 같이 있었으며, 한국 가요와 재즈 등의 음악을 주로 들었다. 물론 손님도 남촌 에는 일본사람들이 주를 이뤘고, 북촌에는 조선사람들이 주를 이뤘다. 남촌의 카페가 일본 의 카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은 모습을 띠었다면, 북촌의 카페는 옛날 요리집의 모 양을 갖추고 있어 술과 음식이 모두 제공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이 둘의 구 분은 모호해져갔다.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여급을 중심으로 한 퇴폐와 타락의 온상지로 전락 하여 갔다. 2. 에로서비스를 제공한 여급 동경의 카페 여급들은 소규모의 요리집인 오뎅집과는 달리 에로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카페 정서라고 하는 것도, 지금에 와서는 과거의 물건에 지나지 않은 군요, 저 문화 주택 지의 집에서 위스키 따위를 마신다 해도 즐겁지도 않아요, 하지만 여자 종업원이 미인에 잔이라도 들려준다면, 일단, 서양 게이샤의 기분이 들겠지요, 이 여급을 그대로 두는건 세 계에서 일본 밖에는 없겠죠. 3) 게이샤와 같이 술을 마시려면 사전에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고 돈도 많이 들었지만, 카페 여급을 통해 손쉽게 게이샤와 같은 기분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동경 카페 여급들 의 출신 성분을 보면 가난한 농촌 지방 출신이 많았고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것에 비해 경성 카페 여급들은 도시 출신이 많았고, 여배우 출신이거나 보통학교 이상의 졸업생 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경성의 카페 문화가 동경과는 달리 도시 문화가 낳은 전형적인 모던한 유흥문화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예가 된다. 경성의 카페 여급들은 인텔리 남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기도 하는 순정파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경성이나 동경의 여급들 모두 노동 현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생 3) 鈴 木 貞 美, モダン 都 市 の 表 現 : 自 己 幻 想 女 性, 白 地 社, p.50. 4

경성과 동경의 카페 문화에 대한 상호 비교 연구 계를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의 주 수입원은 손님들로부터 받는 팁이 전부였다. 당시 동경 카페 여급들의 수입은 대략 중산층 수입 보다 더 많이 벌었다고 하고, 경성 카 페 여급들 대부분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배우 출신 여급이나 인기 있는 여급들은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문제는 그들의 수입원이 팁이라는 데 있다. 많은 손님들을 끌기 위 해 카페 안에서 자극적이며 퇴폐적인 행동 4) 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러면서 점차적으 로 밀매음을 하게 되었다. 경찰은 이곳을 집중 단속하여 카페에서 남녀가 에로틱한 장면을 연출하거나 춤을 추는 것을 엄금 5) 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매춘부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강요가 아닌 자의적 의사에 의해 매음을 하는 것이므로 요리집의 기생과는 달랐다. 6) 카페 여급의 매음 행위는 순전히 자신의 의사에 의해 이뤄짐으로 인해 여성이 성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체성을 갖게 되었고, 사회적 경제 활동을 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점에서 의의가 있 다. 특히 일본에서는 근대기 사회 변화와 관계를 지으면서 여성의 주체성과 능동성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였다. 7)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들에 대한 시각이 여전히 좋지 못하다. 여 급이 카페 생활을 하면서 벌은 돈을 집에서 무위도식하는 인텔리 유부남에게 모두 갖다 바 치고, 그러면서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이 당시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 중에 하나 였는데, 이 점은 이조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급들의 복장은 대개 기모노 복장을 하였지만 양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가슴까 지 내려오는 에이프런을 하였다. 카페의 여급의 모습은, 기모노의 위에 가슴부터 내려오는 에이프런을 걸치고, 매듭을 리본 같이 뒤에 묶었다. 홍록이라도 그렇게 했다. 꿈에 그린 듯한 카페의 여급의 운치가 남아 있습니다.후지아이스의 웨이트리스는 모두 기모노를 입고 있다. 분명 자줏빛에 민무늬의 울로 된 기모노는 그 시대에는 없었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Serge 같은 일식복장이 제 복이었다. 웨이트리스라고 해도, 오오마사 시대의 카페의 여급 모습에서 나풀나풀 대는 에 이프런을 입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1930년 정도에 끝난 것만은 아니겠지. 자줏빛 일식복장에, 십자모양으로 띠를 조이고, 종아리의 조금 위 부분까지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 기모노가, 뭐라 할 것 없이 기본 복장이었다. 상련의 손님에게는 짧은 대화를 나누고, 절대로 지나치게 교태를 부리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친한 친구 같은 감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커피와 와플과 어린이 프라이 따위를 날랐다. 8) 경성 카페 여급들은 기모노와 양장을 같이 입었다. 남촌에 있는 카페 여급들이 주로 주 로 기모노복을 입었다면, 북촌은 양장을 입은 여급들도 상당수 있었다. 4) 풍기문란의 대본영- 카페 를 집중단속-웨트레스 공포시대가 올 터, 동아일보,1929년 9월 29일 9면 5) 카페 에서 땐스를 嚴 禁, 동아일보, 1939년 4월 22일 4면 6) Silverberg, The Modern Girl as Militant, pp.256~257. 7) 대부분의 카페 여자종업원은 살아가기 위해 이 직업을 택했고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성의 관계에 대한 가능성과 문화적인 성의 실천 같은 것은 분명히 보였고 이것은 일본 근대 기의 사회변화와 함께 나타났다(p.55) 8) 鈴 木 貞 美, モダン 都 市 の 表 現 : 自 己 幻 想 女 性, 白 地 社, p.56. 5

경성과 동경의 카페 문화에 대한 상호 비교 연구 3. 여급과 손님의 로맨스, 순애보와 자유연애 카페를 출입한 손님들은 주로 학생들이었고, 그 다음으로 샐러리맨, 지식인 문사, 영화업 종사자, 은행업자, 광산업자 등이었다. 카페에 가서 술 한 지뫝으려면 10원 정도(현 지화폐 로 22여만원)들었는데, 웬만한 월급 갖고는 힘든 사항이었다. 돈이 없는 샐러리맨들은 동대 문이나 경성 변두리에서 선술집이나 오뎅집에서 술을 하였지만, 돈 많은 모던보이들은 일본 인들이 주로 가는 남촌의 카페들을 출입하였다. 그러면서 카페 여급과의 연애가 빈번하게 이뤄졌다. 당대 잡지나 신문에서 다루는 카페 관련 기사에는 여급과 남성고객(학생, 셀러리 맨, 지식인 문사 등)과의 연애 이야기들이 자주 소개되었으며, 박태원, 이효석, 안회남 등의 소설에서도 카페 안 연애이야기가 주된 제재로 등장한다. 카페 여급이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회사원과 사랑을 하여 결혼을 하려고 하였는데, 결국 회사원에게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 파혼을 당하기도 한 사건이 벌어졌다. 9) 이와 같은 사건 이 당시 경성 내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으며, 그 속에서 당시 카페 여급이 유흥가의 술 집 작부였지만 그래도 한 인간으로서 사랑에 대해 갈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기로 하였는데, 그 남자가 결혼하여 주지 않자 비관하여 자살을 기도한 사건 10) 도 일어났다. 이 밖에 여러 기사에서 카페 여급들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자살을 기도한 사건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 한강 十 三 번지 모던카 페 군자가 사랑의 실패로 인해 머리에 물들이는 약 유리와 를 마시고 자살을 기도 11) 한 것부터 시작하여 신천지( 新 天 地 )의 여급 에리나(본명 김정숙(19))가 가정이 있는 사람과 사랑에 빠졌으나 결국 버림을 받자 자살을 도모 12) 한 것에 이르기 까지 실연과 자살은 긴밀 한 상관성을 가졌다. 여급의 애정 상대자가 회사원, 학생, 유부남, 룸펜 등의 다양한 계층 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과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용을 당하기도 하였다. 13) 카페 여급의 낭만적이면서 아름다운 사랑은 당시 사 회의 문화적 코드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대정시대에 자유연애, 직업부인 등과 같은 모던한 사고방식이 생겨났 다. 메이치 시대 기타무라 도코쿠( 北 村 透 谷 )의 연애지상주의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성관계 도 노골적으로 묘사되었다. 자유연애 는 연애지상주의에 편승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 상주의와 같은 금욕성은 없다. 대정 말기에는 <성애론>이 유행하고, <직업부인>이 주목받 는 분위기 속에서 개방적인 연애 기분이 문화의 일부가 되어 젊은 남녀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었다. 이처럼 일본의 자유연애 란 다이쇼 모더니즘을 배경으로 해서 해방된 남녀의 화 9) 삼아사속 오십전군과 부호양, 동아일보 1929년 11월 19일, 4면 10) 낙원회관 의 여급 이정옥이 자살을 기도하였다. 百 年 芳 盟 水 泡 情 郎 結 婚 하자 飮 毒 -낙원회관 카페의 여급 紅 燈 의 봄을 등지고, 동아일보, 1934년 4월 15일, 석간 2면. 11) 女 給 이 飮 毒, 동아일보, 1934년 4월 8일 2면 12) 自 殺 에도 競 爭, 동아일보, 1933년 11월 14일, 2면. 13) 엔젤 카페의 여급 이성자가 어느 남자와 동거를 하였는데, 이 남자는 다른 여급과 바람을 피고 자신의 돈 천 여원 (현재 약 2천 3백여만원)도 소비하여 이성자가 자살을 기도하였다. 사랑이 원수로 정산은 정수에 - 피섞인 돈 천원만 날아가 카페에 피고인 홍련, 동아일보, 1933년 7 월22일, 2면. 6

경성과 동경의 카페 문화에 대한 상호 비교 연구 려한 연애를 말한다. 대다수의 여성은 자유연애를 동경했지만 엄격한 순결규범 속에서 순수 한 애정으로 맺어진 상대와의 연애결혼을 꿈꾸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카페 여급에 대 한 시선은 그렇게 곱지 않았다. 나가이 카푸( 氷 井 荷 風 )의 장마전후 에서 카페 여급 키미 에는 성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순결하고 정숙한 여자와는 거리가 멀다. 키미에는 시 골에서 태어나 동경에 와 카페 여자종업원이 되었고, 그러면서 많은 남자 손님들을 만나면 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워 나갔다. 카페 여급들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워 나가는 것이 강한 것은 동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경성에서는 그 보다 오히려 순정적이며 헌신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여급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즉 경성의 여급들이 유부남이며 무위도식하는 인텔리 남성을 위해 헌 신적인 사랑을 하고, 그것이 성취되지 못하였을 때 자살을 감행하곤 하는 것은 동경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4. 실화, 범죄와 사건의 온상지 일본 동경에서 카페는 각종 범죄의 온상지였다. 이점은 경성에서도 마찬가지이다.카페에 서 무전취식을 하는 자들이 늘어만 갔다. 돈이 없음에도 카페에 당당히 출입하여 결국은 카페에서 경찰서로 직행해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킹홀 카페에 유흥을 하다 돈이 모자라 무전취식하게 되어버린 상인 14), 공산당원이라고 주장하며 가짜 권총으로 카페 엔젤 의 여급을 협박하여 무전취식한 청년 15), 돈 한푼 없이 카페에 들어 와 30여원의 술과 음식을 무전취식한 두 청년 16), 평안 카페에서 무전호유를 하던 손님 이 여급에게 폭행까지 가한 사건 17) 등이 그러하다. 카페를 선술집 정도로 생각하고 카페를 처음 출입한 이들이 무전취식으로 종로서 보안계로 인치되었다. 선불금으로 낸 2원을 음식 값이라 여겼으나, 알고 보니 그것은 여급에게 주는 팁이었고, 나머지 음식회계값은 21원 70전은 따로 지불해야 했다. 결국 그들은 가지고 있는 돈이 없었으므로 자연히 종로서로 향하게 되고 만 것이었다. 18) 그 반면에 술값을 속여 손님에게 부당한 요금을 청구한 곳도 있다. 3원 50전하는 매주주 를 양주로 속여 한 병에 25원을 받다가 덜미를 잡힌 카페 19) 도 있었다. 거의 10배에 가까운 가격을 손님에게 부당청구한 것이다. 이러한 폐해들이 늘어남으로 총독부 물가전문위원회에 서는 술, 맥주의 공정가격을 검정하고 20), 그에 따라 공정가격을 고시하여 실시 21) 하는 방침 14) 갓 쓴 시골 商 人 카페 出 入 웬 말, 동아일보, 1933년 12월 23일 2면 15) 假 拳 銃 靑 年 女 給 脅 迫 取 食 - 자기는 공산당원이라고 카페엔젤에 또 怪 事, 동아일보, 1934년 1월 8일 석간 2면 16) 카페 怪 男 兒 結 局 無 錢 取 食, 동아일보,1934년 1월 31일 석간 2면 17) 鑛 業 家 逢 變, 카페에서 무전호유, 동아일보, 1939년 8월 8일 2면 18) 카페에 出 入 타 逢 變 한 두 靑 年, 동아일보, 1934년 1월 28일 2면 19) 술 한 병에 二 十 五 圓 也 - 暴 利 의 先 鋒 隊 카페- 와 빠 鍾 路 네온 街 의 異 聞, 동아일보, 1939년 10월 6일 석간 2면 20) 料 理 飮 食 店 카페 에 淸 麥 酒 價 格 을 公 定 違 反 者 를 經 警 이 嚴 重 團 束 飮 酒 黨 은 安 心 하라, 동아일보, 1940년 5워 30일 2면 21) 料 理 店 카페 一 等 의 酒 삐루 價 格 決 定 - 今 日 物 價 委 員 會 에서, 동아일보, 1940년 6월 7일 2면 7

경성과 동경의 카페 문화에 대한 상호 비교 연구 이 생기기도 하였다. 돈은 없고, 카페는 이용해야 하는 이 기괴한 현상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범죄를 저질 러서라도 돈을 마련하여 카페로 향하는 이들이 늘어만 갔다. 카페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절도를 일삼는 사람도 있었다. 16회에 걸쳐 외투와 축음기들을 절취하여 전당포에 맡긴 돈 540여원을 카페에서 호유한 사건 22), 경성제대 복장을 한 가짜 대학생이 백화점에서 절취한 것으로 카페를 출입한 사건 23), 성실하던 상점점원이 자신이 일하던 상점과 부근 상점에서 돈을 훔쳐 유흥하다 붙잡힌 청년 24), 그리고 은행을 털어 카페 국수 에서 유흥을 즐기고 도망중인 사람 25), 종로 우편소에 근무하던 사람이 공금 1200원을 횡령하여 카페에서 유흥 을 하다 체포된 사건 26) 등등이 그러하다. 술로 익어가는 카페 안에서는 유흥이라는 쾌락이 있는 반면에 폭행도 벌어졌다. 술에 취 해 카페 여급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폭력단원들의 검거 소탕작전 27), 술에 취해 여급을 폭 행 28) 하고, 여급을 폭행하던 손님을 말리려던 사람들이 칼에 찔리고 중상을 입는 사건 29) 등 이 있었다. 또한 말다툼으로 시작해 살인으로 끝난 사건도 있었다. 여급을 사이에 두고 말 다툼을 하던 중 상대를 칼로 찔러 즉사하게 만든 사건이 있어 가해자는 십년의 구형을 언 도받은 사건 30) 도 있었다. 술과 여급의 웃음으로 시작한 카페가 폭행과 살인의 범죄의 온상 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일본에서는 카페를 출입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모던보이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 이후 등장한 모던문화에 대한 감각을 구비한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모걸 과 같이 자유분방한 자유연애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직장인인 하이칼라 나 멋쟁이 예술 가인 '댄디'라 불리는 남성들이 서양풍의 풍속을 받아들이면서 카페를 출입하면서 각종 범 죄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5. 결론 동경의 카페가 조선의 경성에 전해 오면서 그 양상은 조선적으로 변화하였다. 일본 너 머에 유럽과 미국이 있는 것처럼 조선 경성에서의 카페 문화는 일본식과 서구식이 결합된 양상을 띠었다. 여급들의 복장이 기모노와 양장을 같이 병행되었고, 술이 양주와 일본 맥주 22) 절도질하야 카페서 호유, 동아일보, 1933년 3월 26일 석간 3면 23) 假 字 大 學 生 카페 에서 暴 行, 동아일보, 1935년 1월 23일 석간 2면 24) 카페에서 醉 한 술- 商 店 돈을 窃 取 하야갖고 豪 遊 留 置 場 에서 깬 靑 年, 동아일보, 1936년 6월 30일 2 면 25) 犯 行 後 七 日 市 內 潛 伏 菊 水 카페에서 豪 遊 京 城 郵 便 局 서 名 古 屋 에 送 金 各 處 에서 劇 的 場 面 演 出, 동아일 보, 1938년 2월 11일 2면 26) 카페 出 入 에 亡 身 한 靑 年, 동아일보, 1934년 2월 16일 석간 2면 27) 권총등무기휴대 효두에 일대결전 - 카페 녀급새두고 완연한 전쟁 에로 테로 雙 奏 曲, 동아일보, 1933년 3월 1일 석간 2면 28) 카페 에서 폭행 - 부내원동 금홍묵, 동아일보, 1934년 11월 29일 석간 2면 29) 카페 殺 人 犯 殺 人 罪 로 公 判 에 廻 付, 동아일보, 1935년 7월 10일 석간 2면 30) 카페 살인사건 십년을 구형 - 공범인에게는 삼년의 징역, 재판장이 실지검증, 동아일보, 1935년 10월 6일 2면 8

경성과 동경의 카페 문화에 대한 상호 비교 연구 가 섞였으며, 노래가 서구식 재즈가 유행하였으며, 서구의 영화를 보면서 몽파리 패션이 유행한 것 등에서 그 양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조선적인 전통 양식은 여급들의 사랑 방식에 나타났다. 순정적이며 순수한 사랑에 대한 갈구는 그들이 매음을 하였지만 성 의 상품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음을 입증하여 준다. 더욱이 욕망을 해방구로서 카페 를 이용하지 않은 점은 일본 여급들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여 성의 성적 주체성이 강화되면서 육체적 사랑에 대한 터부가 사라지기 시작한 반면에 조선 에서는 정조 관념이 여전히 유효하게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비록 매음을 하여 도 정신적 사랑만은 지켜나가겠다는 여급들의 의지 속에 또 다른 형태의 정조 관념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와 같은 사랑의 방식이 오늘날 드라마와 영화 속에도 나타나 순수한 사랑의 로망을 갈구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나 한다. 이것이 일본에는 없 는 한국만의 방식에 의한 사랑인 것이다. 이 문제는 본고의 논의를 벗어나기 때문에 차후 에 매체를 통해 드러난 한국과 일본의 사랑 방식이라는 주제로 상론하기로 한다. 아무튼 경성과 동경의 카페에 대한 비교를 통해 유흥문화가 일본의 욕망을 분출하는 장 소이면서 새로운 감성의 자극제가 되었고, 그 속에서 모던 문화의 다양한 형태를 받아들이 고, 체험하면서 감각적 존재 를 확인시켜 주는 요소로 작용 하였다. * 참고문헌 <한국> 권보드래(2003), 연애의 시대, 현실문화연구. 1. 일차 자료 권오만 외(2002), 종로: 시간, 장소, 사람,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여성, 별건 곤, 女聲, 女性, 조광, 東光, 만세보, 인문평론, 문장, 곤, 三千里, 민, 新女性, 별건 新東亞, 新生活, 신 朝光, 朝鮮之光, 매 일신보, 대한매일신보, 서울학연구소. 김경일(2003a),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 백산서당. (2003b), 한국 사회사상사, 나남출판. (2004),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푸른역사. 김기호 외(2003), 서울 남촌: 시간, 장소, 사람, 서울학 연구소. 2. 이차 자료 김미지(2005), 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 여학생과 연애, 살림. 1> 저서 김영모(1982)a, 韓國社會階層硏究, 一潮閣. 강준만 오두진(2005), 고종 스타벅스에 가 다, 인물과 사상사. (1982)b, 일제하의 민족 생활사, 현암사. 김주리(2005), 모던걸, 여우 목도리를 버려라, 살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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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城と東京の カフェ 文化についての相互比較 硏究 京城と東京の カフェ 文化についての相互比較 硏究 ウ ジョンコン(教授 メディアアート ストーリーテリング研究センター所長) 1. 京城と東京のカフェ文化の生成 東京に1920年から生まれたカフェがモダン都市の夜文化を主導していた 派手なネ オンサインで灯っていた東京のカフェは 神保町を中心に広く存在していた 日本の最初のカフェといえるPrintempsは 松山正造により成立したが 人の出会 いと対話の空間の場として始められた ここに当時 芸術家や作家 俳優 批評家 政治家が集まってきた 彼らは酒とコーヒーを飲み 西洋の食べ物を食べながら西欧 の体験の香水を感じたり 味わったことのない経験に興味を持った カフェライオ ン カフェパウリスタは銀座に立ち並び 平凡な人々を主な顧客に迎えた 日本でカ フェ(Cafe)は 元来コーヒーショップ 西洋e理店 喫茶店の二つの意味以外にも バーもたぶん含まれるだろう 1)という カフェはもともと西欧ではコーヒーを飲 む店だが 軽いアルコールがおいてあるところもある 次第に軽洋食として扱われ レストランもカフェと呼ばれるようになる しかし 米国ではカフェは飲み屋 バー と同意語のようだ 大正時代の かふえ は西欧的で 昭和時代の かふえ は米国 的だといえよう 2) 東京のカフェがコーヒーショップと区別されながら酒を売る店に変貌し 朝鮮の京 城に入ってくるときは カフェはコーヒーを売る喫茶店とは完全に区別されていた 東京のカフェは初め文人たちが集って話をする会合や社交の空間であったのに 次第 に女給をおき 酒を売り始めるにつれ お金がたくさんある業者やサラリーマンが主 に出入りする遊興業所になり始めた このように東京のカフェは 1910年代後半から 20年代まで時代の流れの過程で茶房と分化されたのだが これが朝鮮の京城に入って くるときは 初めから茶房とカフェが二つに分れて入ってきたのである 朝鮮の京城では 南村と北村にカフェが雨の後の竹筍のように生まれた 1932年5 月5日 東亞日報 に書かれた カフェ經營網北村に進出, 飮食店件数が格段に増え 去年より 三倍激増 記事を見ると 鐘路で 管內の飮食店は1931年末に280個所だった これ が4個月過ぎた1932年春 48個所が増え 総328個所になった その中でも顕著な增加を見せたのは カ フェで 6個所から17個所になった カフェと似た業所も30余個所が増加した カフェの増加の 要因は 日本人が北村に進出したためである 昔は日本人が運営するカフェが存在しなかったが 1932年には 17個所のカフェの中に5個所を除いた12個所を日本人が運営する 南村で始まったカフェが北村 1) モダン流行語辞典 (喜多壯一郎監修, 実業之日本社, 1933) 2) 鈴木貞美, モダン都市の 表現 : 自己 幻想 女性, 白地社, p.54. 13

京城と東京の カフェ 文化についての相互比較 硏究 にまで進出し 急速にその数が増えたのである 30年代京城の遊興文化を主導してき たカフェは1910-20年代の妓生のいる料理店を継承した はじめは 日本人が主に居 住する南村で始まったが 朝鮮人が多く集まっている北村にまで拡大し 料理店は栄 華を極めた 草創期の南村と北村のカフェの姿は 全く違った 南村のカフェは大概畳部屋で 白いおしろいを塗り着物を着た女給たちがいて 酒は主に洋酒とサッポロ アサヒ ビールがよく売れた 日本の歌謡とジャズなどの音楽を聴き 踊りを踊った とろこ が 北村のカフェでは畳部屋よりは衝立を間に椅子とテーブルが主にあり 着物姿の 女給と洋服を着た女給がいっしょにいて 韓国の歌謡とジャズなどの音楽を主に聴い た もちろん 客も南村では日本人が主で 北村では朝鮮人が主であった 南村のカ フェが日本のカフェをそのまま移した姿であったのに対し 北村のカフェは 昔のe 理店の姿を保ち 酒と食べ物の両方を提供した しかし 時間が次第に流れるにつ れ この二つの区分が曖昧になった それに伴い徐々に女給を中心とした退廃 墮落 の溫床地に転落していったのである 2. エロサービスを提供した女給 東京のカフェの女給たちは 小規模のe理店のおでん屋とは違いエロサービスを提 供した カフェの情緒というものも今では過去の物に過ぎないですね 文化的な住宅地の住 まいでウィスキーなどを飲んだとしても楽しくもありません しかし 女性の従業員 が美人で一杯ついでくれたら とりあえず西洋の芸者の気分になるでしょう この女 給をそのままおいておくのは世界で日本だけでしょう 3) 芸者のように酒を飲もうとしたら事前に複雑な手順を踏まなくてはならず多くのお 金も必要だが カフェの女給を通し手軽に芸者のような気分を味わえたという 東京 のカフェの女給の出身を見たら貧しい農村の地方出身が多く ほとんど教育を受けら れなかった者たちだ それに対し京城のカフェの女給たちは都市の出身が多く 女優 出身や普通の学校以上の卒業生が大部分であった これは京城のカフェ文化が東京と は違い 都市文化が生まれた典型的なモダン遊興文化であることがわかる3になる 京城のカフェの女給はインテリ男性と話をすることを好み 愛のために自分の全ての 者をあげようとする純情派でもあった それでも京城や東京の女給はすべて労働現場 で仕事をする人として生計を立てるしかなかったのであるが 彼女たちの主な収入源 は 客からもらったチップが全部であった 当時東京のカフェの女給の収入はだいた 3) 鈴木貞美, モダン都市の 表現 : 自己 幻想 女性, 白地社, p.50. 14

京城と東京の カフェ 文化についての相互比較 硏究 い中産層の収入以上に稼いでいたという 京城のカフェの女給は大部分十分ではな かったが 俳優出身や人気のある女給は相当な財産を得たという 問題は彼女らの収 入源がチップであったというところである 多くの客を導くためにカフェの中では刺 激的で 頽廃的な行動4)をせずにはいられなかったのであり 次第に密賣淫をするよ うになった 警察はこのような場所を集中的に取締り カフェで男女がエロチックな 場面を演出したり 踊りを踊ったりすることを厳禁5)とした しかし 彼女らを売春 とはしない 彼女らは強制的ではなく恣意的意思によって賣淫をしたのであるから e理店の妓生とは違った 6) カフェの女給の賣淫行為は純然に自分の意思によって 行っていたため 女性が性の奴7になってはおらず主体性を持つようになり 社会的 経済活動をするための契機を得たという点で意義がある 特に日本では 近代期社会 の変化と関係により女性の主体性と能動性という点で高く評価した 7) しかし 朝鮮 では これらに対する見方は 変らず良くない 女給のカフェ生活をしながら稼いだ 金を家で無爲徒食するインテリ男性 既婚者 にすべて貢ぎ それでも愛を渴求する 姿が当時の社会では よく見られる現象の中の一つであったが この点は李朝時代か ら伝わった伝統的な男性中心的なイデオロギーの所産と言えよう 女給の服装は大抵きものであったが 洋装をするときもあった 胸から下げるエプ ロンをした カフェの女給の姿は きものの上に胸から下げるエプロンをかけ 後ろでリボン結び をした 夢を見たようなカフェの女給の韻致が残っています フジアイスのウェイト レスは全部きものを着ている はっきりした紫で ウールのきものは その時代には なかったが そんな感じだった Sergeのような日本式の服装が制服だった ウェ イトレスと言っても ひらひらしたエプロンを着ていたのではない それは1930年ぐ らいに終わ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 紫の日本式服装に 十字模様にひもを締め ふく らはぎまで白いエプロンをかけていた なんとなくそのきものが 基本の服装であっ た 常連客には短い会話をし 絶対に過度に嬌態を見せたりしなかったが とても親 しい友達のような感覚を持っているように見えた コーヒーとワッフルとフライのよ うなものが飛び交った 8) 京城のカフェの女給は きものと洋装を共に着た 南村にあるカフェの女給が主に きものを着たが 北村は洋装を着た女給たちも相当数いた 4) 풍기문란의 대본영- 카페 를 집중단속-웨트레스 공포시대가 올 터, 동아일보,1929년 9월 29일 9면 5) 카페 에서 땐스를 嚴禁, 동아일보, 1939년 4월 22일 4면 6) Silverberg, The Modern Girl as Militant, pp.256~257. 7) 대부분의 카페 여자종업원은 살아가기 위해 이 직업을 택했고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성의 관계에 대한 가능성과 문화적인 성의 실천 같은 것은 분명히 보였고 이것은 일본 근대 기의 사회변화와 함께 나타났다(p.55) 8) 鈴木貞美, モダン都市の 表現 : 自己 幻想 女性, 白地社, p.56. 15

京城と東京の カフェ 文化についての相互比較 硏究 3. 女給と客のロマンス 純愛と自由恋愛 カフェを出入りした客は 主に学生たちだった その次に サラリーマン 知識人 である文士 映画業界の従事者 銀行業者 鑛産業者などだった カフェに行き 酒 を一杯飲もうとするなら10ウォンぐらい(現在の貨幣で22余万ウォン)かかり 普通の 月給では行けなかった お金がないサラリーマンたちは 東大門や京城の外れの方で 立ち飲み屋やおでん屋で酒を飲んだが お金がたくさんあるモダンボーイたちが主に 行く南村のカフェを出入りした そしてカフェの女給との恋愛が頻繁に見られるよう になった 当時雑誌や新聞で扱われるカフェ関連の記事には女給と男性顧客 学生 サラリーマン 知識人である文士など との恋愛話がよく紹介され パク テウォ ン イ ヒョソク アン フェナムなどの小説でもカフェの中の恋愛話が主な題材に 登場した カフェの女給が自分の身分を隠して会社員と恋愛し結婚しようとしたが 結局 会 社員に自分の身分がわかり破婚したという事件も起きた 9) このような事件が当時 京城内で一度や二度ではなく数多く起こった 当時のカフェの女給は遊興の町の飲み 屋の酌 だったが それでも一人の人間として愛情を渴求する心がいかに強かったか 垣間見ることができる ひいては 愛する男性と結婚しようとしたのに その男性が 結婚してくれず悲観し 自殺を図った事件10)も起きた この他にさまざまな記事から カフェの女給たちが叶わぬ愛により 自殺を図る事件が数多く起こった 漢江十三番 地 モダンカフェ のクンジャが恋愛の失敗により髪の毛を染める薬 ユリワ を飲 み自殺を図った 11)ことから始まり 新天地の女給のエリナ(本名キム ジョンスク (19))が家庭のある人と恋に落ち 結局捨てられて自殺を図った12)ことまで 失恋と自 殺は緊密な相関性を持った 女給の愛情の相手が会社員 学生 既婚者 ルンペン 浮浪者 などの多様な階層の人々であったが 彼らと純粋で美しい恋愛をしたりも したが 時には 愛という名で利用されたりもした 13) カフェの女給の浪漫的で美 しい愛は 当時の社会の文化的なコードであったのである 日本では 大正時代に 自由恋愛 職業 人 などのようなモダンな思考方式 が生まれた 明治時代に 北村透谷の恋愛至上主義には見られなかった性関係も露骨 的に描写された 自由恋愛 は 恋愛至上主義に便乗していくように見えるが 至 上主義のような禁欲性はない 大正末期には<性愛論>が流行し <職業 人>が注目さ れる雰囲気の中で開放的な恋愛気分が文化の一部になり 若い男女の間で共有されて 9) 삼아사속 오십전군과 부호양, 동아일보 1929년 11월 19일, 4면 10) 낙원회관 의 여급 이정옥이 자살을 기도하였다. 百年芳盟水泡 情郎結婚하자飮毒-낙원회관 카페의 여급 紅燈의 봄을 등지고, 동아일보, 1934년 4월 15일, 석간 2면. 11) 女給이飮毒, 동아일보, 1934년 4월 8일 2면 12) 自殺에도 競爭, 동아일보, 1933년 11월 14일, 2면. 13) 엔젤 카페의 여급 이성자가 어느 남자와 동거를 하였는데, 이 남자는 다른 여급과 바람을 피고 자신의 돈 천 여원 (현재 약 2천 3백여만원)도 소비하여 이성자가 자살을 기도하였다. 사랑이 원수로 정산은 정수에 - 피섞인 돈 천원만 날아가 카페에 피고인 홍련, 동아일보, 1933년 7 월22일, 2면. 16

京城と東京の カフェ 文化についての相互比較 硏究 いた このように日本の 自由恋愛 という大正モダニズムを背景にし解放された男 女の派手な恋愛をいう 大多数の女性は 自由な恋愛を憧れたが 厳格な純潔規範の 中で純粋な愛情で結ばれた相手との恋愛結婚を夢見るのが全部であった しかし カ フェの女給に対する視線は そんなに温かいものではなかった 氷井荷風の つゆの あとさき でカフェの女給のきみえは 性的欲望をそのまま顕にし 純潔で貞淑な女 性とは距離がある きみえは田舎で生まれ 東京に上京しカフェの女子従業員にな り 多くの男性客と会い自分の性的欲望を満たした カフェの女給が自分の性的欲望を満たしていくのが強いのは 東京で多く見られる 現状である 京城ではそれよりむしろ純情で献身的な愛を渴求する女給がもっと多く 見られる すなわち 京城の女給が既婚者であれ無為徒食のインテリ男性であれ 献 身的に愛しそれが成就されなかったとき自殺を強行したりしたのは 東京ではあまり 見られなかった現象である 4. 実話 犯罪 事件の温床地 日本の東京でカフェは各種の犯罪の温床地であった この点は京城でも同じであ る カフェで無錢取食する者たちが増え続けた 金がなくてもカフェに堂々と出入り し 結局はカフェから警察署に直行しなければいけないことが多くあった 田舎から 上京し キングホール カフェで遊興をし お金が足りず無錢取食するようになった 商人14) 共産党員と主張し おもちゃの拳銃でカフェ エンジェル の女給を脅迫し 無錢取食した青年 15) 1銭の金も無しにカフェに入り 30余ウォンの酒と食べ物を 無錢取食した二人の青年16) 平安 カフェで無錢豪遊をした客が女給に暴行まで加 えた事件17)などがそうである カフェを立飲み屋ぐらいに考えてカフェを初めて入っ た彼らが無錢取食で鐘路で引致された 前払いで払った2ウォンを食べ物の代金として 考えたが それは女給にあげるチップであった 残りの飲食会計額は21ウォン70銭は 別に払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結局 彼らは持ち金がないということで 自然に鐘 路に向かう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 18) その反面 酒代をごまかし客に不当なe金を請求したところもある 3ウォン50銭 する高級酒を普通の洋酒に混ぜ 一瓶25ウォンとしてもらったのがばれ捕まったカ フェ 19)もあった 約10倍近い価格を客に不当請求したのである このような弊害が 14) 갓 쓴 시골 商人 카페 出入 웬 말, 동아일보, 1933년 12월 23일 2면 15) 假拳 銃靑年 女給脅迫取食 - 자기는 공산당원이라고 카페엔젤에 또 怪事, 동아일보, 1934년 1월 8일 석간 2면 16) 카페怪男兒 結局無錢取食, 동아일보,1934년 1월 31일 석간 2면 17) 鑛業家逢變, 카페에서 무전호유, 동아일보, 1939년 8월 8일 2면 18) 카페에 出入타 逢變한 두 靑年, 동아일보, 1934년 1월 28일 2면 19) 술 한 병에 二十五圓也 - 暴利의 先鋒隊 카페- 와 빠 鍾路 네온 街의 異聞, 동아일보, 1939년 10월 6일 석간 2면 17

京城と東京の カフェ 文化についての相互比較 硏究 増えるにつれ 総督府の物価専門委員会では 酒 ビールの公定価格を検定し20) そ れによって公定価格を告示し実施21)する方針が生まれもした 金もなく カフェは利用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の奇怪な現象の欲求を埋めるため に 犯罪を犯しても金を用意しカフェに向かうこのような者が増えるだけ増えた カ フェの遊興費を準備するために窃盗をする者もいた 16回にかけて外套と蓄音機を 窃盗し 質屋に預けた金540余ウォンをカフェで豪遊した事件22) 京城除隊服裝をし た偽物の大学生が百貨店で窃盗し カフェを出入りしていた事件23) 誠実だった商店 店員が自分が働いていた商店と近所の商店でお金を盗み 遊び捕まった青年24) そし て 銀行強盗をしカフェ ククス で遊興を楽しみ逃亡中の者25) 鐘路の郵便所で勤 務していた人が公金1200ウォンを横1しカフェで遊興をして逮捕さえた事件26)などな どがそうである 酒で熟していくカフェの中では遊興という快楽がある反面 暴行も広がった 酒に 酔い カフェの女給を間において繰り広げられた暴力団員の検挙の掃討作戦27) 酒に 酔って女給を暴行28)し 女給を暴行する客を止めようとした人々がナイフに刺され 重症を負った事件29)などがあった また 口喧嘩で始まり殺人に終わった事件もあっ た 女給を間におき 口喧嘩をしているうちに相手をナイフで刺し 即死させた事件 もあり 加害者は10年の求刑を下された事件30)もあった 酒と女給の笑いで始まった カフェが暴力と殺人の犯罪の温床になってしまったのである 日本ではカフェを出入りする人々の中の相当数がモダンボーイであった 第1次世 界大戦の好景気以後 登場したモダン文化に対する感覚を伝承した新しい類型の人物 たちであった 彼らは モガール のように自由奔放な自由恋愛を追求した そし て 会社員である ハイカラ や格好いい芸術家である ダンディ と呼ばれる男性 たちが西洋風の風俗を受け入れながら カフェを出入りし各種の犯罪を引き起こしも したのである 20) 料理 飮食店 카페 에 淸麥酒 價格을 公定 違反者를 經警이 嚴重團束 飮酒黨은 安心하라, 동아일보, 1940년 5워 30일 2면 21) 料理店 카페 一等의 酒 삐루 價格決定 - 今日 物價委員會에서, 동아일보, 1940년 6월 7일 2면 22) 절도질하야 카페서 호유, 동아일보, 1933년 3월 26일 석간 3면 23) 假字大學生 카페 에서 暴行, 동아일보, 1935년 1월 23일 석간 2면 24) 카페에서 醉한 술- 商店돈을 窃取하야갖고 豪遊 留置場에서 깬 靑年, 동아일보, 1936년 6월 30일 2 면 25) 犯行後 七日 市內潛伏 菊水카페에서 豪遊 京城郵便局서 名古屋에 送金 各處에서 劇的場面 演出, 동아일 보, 1938년 2월 11일 2면 26) 카페出入에 亡身한 靑年, 동아일보, 1934년 2월 16일 석간 2면 27) 권총등무기휴대 효두에 일대결전 - 카페 녀급새두고 완연한 전쟁 에로 테로 雙奏曲, 동아일보, 1933년 3월 1일 석간 2면 28) 카페 에서 폭행 - 부내원동 금홍묵, 동아일보, 1934년 11월 29일 석간 2면 29) 카페 殺人犯 殺人罪로 公判에 廻付, 동아일보, 1935년 7월 10일 석간 2면 30) 카페 살인사건 십년을 구형 - 공범인에게는 삼년의 징역, 재판장이 실지검증, 동아일보, 1935년 10월 6일 2면 18

京城と東京の カフェ 文化についての相互比較 硏究 5. 結論 東京のカフェが朝鮮の京城に伝わる過程でその様相は朝鮮的に変化した 日本の向 うに西欧と米国があるように 朝鮮の京城でカフェ文化は日本式と西欧式が結合した 様相を帯びた 女給の服装はきものと洋服が併用され 酒は洋酒と日本のビールが愛 用され 歌は西欧式ジャズが流行し 西欧の映画を見ながら もんぱり ファッショ ン流行など その様相を見ることができた そういう変化の中 朝鮮的な伝統様式は 女給の愛の方式に現われた 純情で純粋な愛の渇望は彼女たちを売淫させたが 性の 製品化を露骨に現さなかったことを立証している さらに 欲望の解放口としてカ フェを利用しなかった点は 日本の女給にはあまり見られなかった場面である 日本 が明治維新以後 女性の性的主体性が強化され 肉体的な愛に対するタブーが消え始 めた反面 朝鮮では貞操観念が変らず有効に社会的規範として腰を据えていた 3 え 売淫しても精神的な愛だけは守り抜くという女給の意志の中にまた別の形態の貞 操観念があったことがわかる 事に依るとこのような愛の方式が今日のドラマや映画 の中にも現われ 純粋な愛の浪漫を渇望することで現われ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 こ れが日本にはない韓国だけの方式による愛なのであろう この問題は本稿の論議を逸 脱するため 次回メディアを通し現われる韓国と日本の愛の方式という主題で詳論す ることにする いずれにしても京城と東京のカフェの比較を通し 遊興文化が日本の欲望を噴出す る場所であり新しい感性の刺激剤になり その中でモダン文化の多様な形態を受け入 れ体験しながら 感覚的な存在 を確認させてくれる要素として作用したのである * 参考文献 <한국> 1> 저서 1. 일차 자료 강준만 오두진(2005), 고종 스타벅스에 가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여성, 별건 다, 인물과 사상사. 곤, 女聲, 女性, 조광, 東光, 권보드래(2003), 연애의 시대, 현실문화연구. 만세보, 인문평론, 문장, 권오만 외(2002), 종로: 시간, 장소, 사람, 곤, 三千里, 민, 新女性, 별건 新東亞, 新生活, 신 朝光, 朝鮮之光, 일신보, 대한매일신보, 매 서울학연구소. 김경일(2003a),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 백산서당. (2003b), 한국 사회사상사, 나남출판. 2. 이차 자료 (2004),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푸른역사. 김기호 외(2003), 서울 남촌: 시간, 장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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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 城 と 東 京 の カフェ 文 化 についての 相 互 比 較 硏 究 지정토론 배 개 화 경성과 동경의 카페 문화에 대한 상호 비교 연구 토론문 1. 글쓴이는 동경 카페 여급들의 출신 성분을 보면 가난한 농촌 지방 출신이 많았고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것에 비해 경성 카페 여급들은 도시 출신이 많았고, 여배우 출신이거나 보통학교 이상의 졸업생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경성의 카페 문화가 동경과는 달리 도시 문화가 낳은 전형적인 모던한 유흥문화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예가 된다. 고 동 경의 카페 문화와 경성의 카페문화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조는 동경의 카페 문화가 전형적인 도시 문화, 모던한 유흥문화가 아니라는 의미로 읽힐 수 있습니 다.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2. 또한 이러한 카페 문화에 대한 평가는 뒤에 오는 동경의 카페 여급의 주체성과 경성 의 카페 여급의 주체성을 비교한 것과는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필자는 동경의 카페 여급 의 경우 에로서비스를 선택 및 결정할 권리가 여급 자신에게 있었다는 점을 들어 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능동성이 나타난다고 평가하고 있음에 반해 경성의 카페 여급의 경우 가 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는 앞부분에서 경 성의 카페 문화가 동경에 비해서 근대적, 도시적이었다는 것과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3. 1930년대 동경과 경성에서 자유연애 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비교를 부탁드 립니다. 경성의 여급들의 경우, 카페를 통해서 인텔리 남성들과의 자유연애를 많이 하였음 에 비해서, 동경의 여급들은 자유연애보다는 에로서비스에 더 치중하였다는 것인지요? 4. 카페라는 문화를 형성하는 한 축이었던 카페 여급들의 출신성분이나 교육 정도가 동 경과 경성에서 차이가 났던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식민지 근대 성의 성격은 무엇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23

京 城 と 東 京 の カフェ 文 化 についての 相 互 比 較 硏 究 지정토론 ぺ ゲファ 京 城 と 東 京 の カフェ 文 化 についての 相 互 比 較 硏 究 討 論 文 1. 論 述 の 東 京 のカフェの 女 給 の 出 身 を 見 ると 貧 しい 農 村 地 方 出 身 が 多 かった ほと んど 教 育 を 受 けられなかった それに 対 し 京 城 のカフェの 女 給 は 都 市 出 身 が 多 く 女 優 出 身 や 普 通 の 学 校 以 上 の 卒 業 生 が 大 部 分 であった これは 京 城 のカフェ 文 化 が 東 京 とは 違 い 都 市 文 化 が 生 んだ 典 型 的 なモダン 遊 興 文 化 であることがわかる 例 になる と 東 京 のカフェ 文 化 と 京 城 のカフェ 文 化 の 違 いを 説 明 しています このような 対 照 は 東 京 のカ フェ 文 化 が 典 型 的 な 都 市 文 化 モダン 遊 興 文 化 ではないという 意 味 として 読 み 取 れま す これに 対 する 補 充 説 明 をお 願 いいたします 2.また このようなカフェ 文 化 に 対 する 評 価 は 後 の 東 京 のカフェの 女 給 の 主 体 性 と 京 城 のカフェ 女 給 の 主 体 性 を 比 較 するのとは 矛 盾 したことのようです 筆 者 は 東 京 のカフェ の 女 給 の 場 合 エロサービスを 選 択 または 決 定 する 権 利 が 女 給 自 身 にあったという 点 を あげ 女 性 の( 性 的 ) 主 体 性 と 能 動 性 の 現 れだと 評 価 する 一 方 で 京 城 のカフェの 女 給 の 場 合 家 父 長 的 なイデオロギーの 影 響 下 にあったと 評 価 しています このような 評 価 は 前 の 部 分 で 京 城 のカフェ 文 化 が 東 京 に 比 べ 近 代 的 都 市 的 であったということと 矛 盾 してい るようであります 3.1930 年 代 東 京 と 京 城 での 自 由 恋 愛 は どんな 意 味 を 持 っていたのか 比 較 を お 願 いいたします 京 城 の 女 給 の 場 合 カフェを 通 じインテリ 男 性 との 自 由 恋 愛 をたくさ んしたということですが それに 比 べ 東 京 の 女 給 は 自 由 恋 愛 よりはエロサービスの 方 が 多 かったのでしょうか 4.カフェという 文 化 を 形 成 する 一 つの 軸 だったカフェの 女 給 の 出 身 や 教 育 の 程 度 が 東 京 と 京 城 で 差 が 出 た 理 由 は 何 なのか そして これを 通 して 見 られる 植 民 地 近 代 性 の 性 格 は 何 なのか 説 明 をお 願 いいたします 24

진화천의 도 와 잡지 문예대만 을 중심으로 진화천의 도 와 잡지 문예대만 을 중심으로 陳火泉の 道 と雑誌 文芸台湾 をめぐって - 廖秀娟(臺灣元智大 敎授) 指定討論 - 徐東周(서울대 일본연구소 연구원) 프 로 필 廖秀娟 (Liao Hsiu-Chuan) 台湾元智大學 敎授 日本近現代文學 昭和文學 주요저서 및 논문 中島敦 牛人 論 解釈 第49巻1 2月号 2003.02 中島敦 李陵 論 他者との対峙 阪大近代文学研究 2006.03 太宰治 惜別 論 私 の語りから 台大日本語文研究 2007.7 中島敦 虎狩 論 台灣日本語文學報 2007.12 외 다수 25

진화천(陳火泉) 道 와 문예대만(文藝臺灣) 진화천(陳火泉) 道 와 문예대만(文藝臺灣) 廖秀娟(元智大学助理教授) 1. 시작하는 말 진화천 道 는 1943년 7월 문예대만 제 6권 3호에 발표된 소설이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청남(靑楠)은 전매국의 제뇌시험소(製腦試驗所)에 근무하는 본도인(本島人)이다. 장뇌(樟腦) 의 원동력이 되는 가마개량에 몰두하고 대만총독부 식산국장의 추천으로 산업전사훈장을 받을 정도 로 우수한 기사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4년 전부터 검토되었던 기수(技手)임관은 내지 인인 다케다(武田)에게 밀려서 실패로 끝나고 만다. 한 때, 신경쇠약에 걸린 그였지만, 어느 날 지금 까지의 자신 안에 국어 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본도인적인 사상을, 본도어로 생각하 는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하여 이 일을 계기로 재기할 기회를 잡는다. 그리고 대만육군특별지원병에 지원하여 피를 흘림으로써 제국과의 혈연적으로 관련이 없는 본도인에서 황민(皇民)으로 변신하는 길을 가고 자 꾀하였다. 우선 주목하고 싶은 것은 문예대만 의 편집후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는 부분이다. 우선 신 인 진화천씨의 道 (163매)를 읽어 주었으면 한다. 이 본도인 문학에 대해서는 이미 본문중의 추 천사에서 자세히 기술하였으니 여기에서 다시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그 내용면으로 볼 때도 나누어 게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얼마나 본사가 큰 희생을 치르고 이것을 일괄 게재할 결심을 했는지, 8 포인트활자로 하여 55페이지를 필요로 하는 이 대작을 읽어서 그 이유를 독자도 부디 잘 이해해주 기 바란다. 道 야말로 실로 글자그대로 문제작이다1). 여기에 적혀 있는 것과 같이 道 는 400자원고지로 163매, 자수 약 6만 5천자정도의 대작 이었지만 전체가 일괄게재되었다. 그 분량 은 그 때까지의 문예대만 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규모였다. 따라서 이하에서 본 발표가 주목한 것은 이 파격적인 대우에 대해서이다. 얼마나 본사가 큰 희생 을 치르고 이것을 일괄 게재할 결심을 했는지, (중략) 그 이유를 독자도 부디 잘 이해해주기 바란 다 라는 편집자의 말에 착목하여, 의도된 이유 라는 것이 도대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모색하고 道 를 고찰해 보는 것이 본 발표의 목적이다. 1) 文藝臺灣 제 6권 3호 1943. 7, P172 26

진화천( 陳 火 泉 ) 道 와 문예대만( 文 藝 臺 灣 ) 2. 道 의 해석 그럼 우선 道 의 연구사를 간단히 확인해 두고자 한다. 道 는 발표당시부터 대만문단에서 확 고한 위치를 구축하고 있었던 濱 田 隼 雄 西 川 満 두 사람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2). 또, 같은 해 말 의 좌담회 징병제에 대해서 에서는 神 川 淸 에게서도 황민문학의 결정( 結 晶 ) 이라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전후가 되자 鍾 肇 政 에 의해 가정( 苛 政 )과 폭력, 학대 하에서 고통으로 가득 찬 항의문 학 3) 이라고 평가받고 작품의 재평가가 화두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道 는 저항문 학으로서 읽혀지기 시작했지만, 垂 水 千 惠 는 진화천이 전시 중에 참가한 좌담회, 하이쿠( 俳 句 ), 동인 지에 발표된 작품을 근거로 하여 진화천에게 당국에 대한 항의 의도가 있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 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4). 선행연구에서 道 가 황민문학인지 저항문학인지라는 점에서 논의되었던 것은 거꾸로 이 작품은 양쪽모두 해석 가능한, 즉 양의적인 요소를 포한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문예대만 편집자가 道 를 통해서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생각 이란 무엇이었는가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서 道 를 재검토해 보고자 한다. 우선 西 川 満 의 소설 道 에 대해서 5) 부터 생 각해 보자. 니시카와는 다음과 같이 道 를 평가하고 있다. 작품의 중간정도까지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읽었다. 너무나도 세련되지 못하다. 조사사용이 잘 못된 곳도 많다. 그렇지만, 후반에 들어서 나도 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것은 굉장한 문학 이라고 생각하여 앉은 자세를 바로 하였다. 누구라도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리내어 읽 었다. 그리고 그 때에 있는 그대로 감동했다. (밑줄은 필자, 이하 동일)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40년 1월 1일, 西 川 의 노력으로 대만시인협회를 대신하여 대만문예가협회가 설립되고 그 기관지 문예대만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그 후 문예대만 의 편집방침은 西 川 의 의 도가 크게 반영되게 되었다. 따라서 西 川 의 후반에 들어서 나도 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는 한 마디는 문예대만 의 생각 을 살펴보는 데에 있어 중요한 힌트를 제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 西 川 를 크게 감동시킨 道 의 후반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 道 는 주인공 청남이 특무기관에 있었던 경험이 있는 다케다와의 승진경쟁에서 패한 부분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 를 맞이한다. 작품의 전반부에서 청남과 계장의 논의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그려진 것은 다음과 같은 청남의 주장이었다. 즉 존황양이( 尊 皇 攘 夷 ) 라는 일본정신을 가지면 본도인이라도 조선인이라도 대만인이라도 황민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편으로 (천황의 피를 이어받은) 내지인이라고 해도 그 행동이 일본정신에 부합하와의 승 한, 황민이라고승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청남이 혈통이라는 벽 을 부수고 일본정신의 유무에서 좋은 일본인 에 대한 재정의를 시도한 것에 중점이 놓여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 승진경쟁에 패한 청남은 일기에서 국화는 국화. 꽃은 벚꽃. 모란은 결국 꽃이 아닌가!! 천황각하만세를 외치고 죽을 수 있는 것은 황군뿐이니, 이 한 몸을 나라를 위해 목숨 2) 좌담회 徵 兵 制 をめぐって 文 藝 臺 灣 제 7권 1호, 1943. 12, P17 3) 鍾 肇 政 日 據 時 代 臺 灣 文 學 的 盲 點 對 皇 民 文 學 的 一 個 考 察 聯 合 報 1979. 6. 1 일본어 번역문은 垂 水 千 惠 日 本 統 治 と 皇 民 文 学 陳 火 泉 の 場 合 ( 台 湾 の 日 本 語 文 学 五 柳 書 院 1995.1,p83)에서 인용한다. 4) 垂 水 千 惠 는 진화천은 일본인이 기뻐할 모범적인 황민상을 그림으로써, 작가로서의 명성과 직장에서의 승진 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고 그의 의도를 서술하고 道 의 항의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日 本 統 治 と 皇 民 文 学 陳 火 泉 の 場 合 台 湾 の 日 本 語 文 学 五 柳 書 院 1995.1 P75-P101) 5) 文 藝 臺 灣 제 6권 3호, 1943.7, P142 27

진화천( 陳 火 泉 ) 道 와 문예대만( 文 藝 臺 灣 ) 을 바치는 것은 황국신민뿐이니, 본도인인 나는 결국 황민이 아닌가? 아아, 결국 인간이 아닌가? 라 고 자신의 심경을 적고 있다. 즉, 종래의 천황신앙과 통치정부의 허위성을 간파한다는 일종의 도달 점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리에 떠오른 多 蝨 不 癢, 多 債 不 想 이라는 대만어 속담으로 본도인에게 주어진 차별문제를 국어 문제로 전환해가는 것이다. 즉, 청남은 자신이 본 도인적인 사 문제뱜도어로 생각 해 버리는 것문제철저하게 국어 생활문제추구하와의 았기 때문이 라고 생각하고 본도인생활문제추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내지인에 의한 부당한 차별문제이러한 형태로 합리화하 문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전환해 내지인의 본도인에 대한 불공평한 차별대우라는 문제는 얼버무려지게 되고, 거꾸로 철저남이 궹어 생활문제열렬는 추구하는 청남의 모습이 초점화 강조되게 된다. 더욱이 청남은 일본정신을 갖추는 것으로 인한 황민자격취득이라는 종래의 지론을 포기것문제 철동일한 목표를 향해서, 동일한 적에 대해서 본도인 내지인과 함께 땀을 흘리고, 함께 피를 흘리와의 으면 황민이 될 수 없다어로 피를 흘리는 것밖에 황민이 되는 길은 없다고 주장하기에제이른다. 결 국에는 허약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육군특별지원병에 지원하게 된다. 여기에서 西 川, 함눈시 울을 뜨겁게 것문, 굉장한 문학이다어라고 말하게 한 것의 존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작 품 후반부에 그려진 청남의 궹어 추구뭘제철저함룼 피를 흘 전환해 황민이 문제하는 생각 결의이 다. 뭴제추론은 문예대만 의 다른 기사에서도 증명된다. 長 崎 浩, 周 金 波, 진화천( 陳 火 泉 ), 神 川 淸 이 참가한 좌담회 징병제에 대해서 6) 에서 진화천의 道 에 관한 언급이 몇 군데 나온다. 예를 들면, 長 崎 浩 는 진씨의 道 에서는 주인공의 마음 의 상극이 애처로울 정도로 그려져 있다. 징병제에 대한 황민의 기분을 추구해 가는, 거기에 큰 반 성도 있고 그것을 계기로 개척해 가야 하는 새로운 문학의 길도 제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언급하고 있다. 道 에서 청남이 징병소집장 에 대해 미야자키( 宮 崎 )라는 일본인에게 한 말- 나를 생각해 봐라. 너에게는 언젠가 소집될 기쁨이 있지만 나는 기대조차 할 수 없다. 원해도 얻 을 수 없어 -가 이 발언의 근거가 되었는지, 그는 道 를 본도의 징병제실시와 관련지어서 논하 고 있다. 또한 長 崎 浩 는 계속해서 국어 상용문제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국어문제에 대해서도 道 에서 하나의 반성으로 언급되는 단어가 있지요.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주인공이 국 어로 생각하고 국어로 사색하는 것조차 자신에게는 불가능했는가? 라는 부분이 있어요. 심각한 반성 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징병제실시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국어습득이 시급했습니다만, 본도 청년 뿐만 아니라 대만내지인도 국어가 일본정신의 혈액이라고 생각하여 국어를 보급, 순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대만 문학자의 큰 사명 중 하나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 아 온 것처럼, 작품 후반부에 들어서 청남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좋은 일본인 의 재정의 문제는 지원병과 국어상용문제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작품세계 외적인 부분에서도 長 崎 浩, 神 川 淸 7)의 발언 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바로 이 부분이 초점화되어 있는 것이다. 3. 문예대만 의 전환 전술한 바와 같이 문예대만 의 편집자는 道 를 일괄 게재하는 고심을 이해해 달라고 독자에 6) 文 藝 臺 灣 제 7권 1호, 1943. 12, P3-P17 7) 징병제실시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주장한 것은 역시 이 천황각하만세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황민문학의 결정 ( 結 晶 )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진씨의 道 는 수로안내였다고 생각한다 ( 神 川 淸 徵 兵 制 をめぐって 文 藝 臺 灣 제 7권 1호, 1943. 12, P17) 28

진화천( 陳 火 泉 ) 道 와 문예대만( 文 藝 臺 灣 ) 게 호소할 정도로 道 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 기대의 내실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밝 히기 전에 문예대만 이 전시하의 대만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문예대만 은 1940년 1월에 西 川 満 에 의해 창간된 대만최초의 종합문예잡지였지만, 그 발행기관 인 대만문예협회가 대만시인협회에서 개편, 조직된 것이었기 때문에 초기작품은 시가 대부분이었다. 또 게재된 작품의 대다수가 西 川 満 의 색채를 띤 남국정서 이국취미 적이었던 것이 결국 비판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국적인 것, 예를 들면 붉은 사당의 지붕이라든지, 서낭신의 제례라든지, 마 조( 媽 祖 )의 제전과 같은 것을 소재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아름답고 진귀 하지만 뭉클하게 가슴에 아 닿는 저력이 비교적 적다 8), 문학작품의 창작의도 중에서 이국적인 정서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외지문학의 사도( 邪 道 )이다 9) 라고 있듯이, 西 川 의 이국취미가 비판받았 을 뿐만 아니라 문예대만 은 西 川 개인의 취미잡지에 지나지 않는다 10) 고 하여 문예대만 그 자 체의 가치가 부정되었다. 이들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 1941년 6월 20일에 각의( 閣 議 )결정된 지원병 제도도입이 계기가 되어 같은 해 9월 발행된 제 2권6호에는 지원병을 테마로 한 소설, 周 金 波 의 志 願 兵, 川 合 三 良 의 出 生 이 게재되었으며 이 이외에 전쟁시 특집도 실리는 등, 문예대만 의 편집방침은 크게 전환된다. 그 이후 문예대만 은 어용잡지의 색채를 점점 강화해 간다. 그 역할 중 하나는 국어 상용의 고취이다. 평소부터 周 金 波 囝 子 の 辯 解 (제 3권 제1호, 1940.10) 와 新 垣 宏 一 의 소설 城 門 (제 3권 제 4호, 1942. 1), 河 合 譲 大 東 亞 の 言 葉 (제 4권 제 4호, 1942. 8)를 통해서 국어사용의 중요성을 고취하고 있다. 또, 두 번째는 전쟁찬미이다. 특히 1941년 12월 8일 진주만공격이후 전쟁을 찬미하는 시가 많이 실린다. 게다가 1942년부터 1944년 1월 종간 될 때까지 매년 12월호에 12월 8일의 특공공격을 기념하는 특집 대동아전쟁 이 특집으로 편성된 다 11). 그리고 1943년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던 때에는 高 橋 比 呂 美 国 に 捧 げて 12) 와 같은 나라의 징병모집에 기쁘게 응하는 시까지 쓰고 있다. 이전에 명예로운 소집장을 어머니에게 보이고/ 남동생은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어머니 제 몸 은 이미 나라의 것입니다 라고/ 그 말대로 그의 몸은 나라에 바쳐졌다/ 지금 대동아전쟁 하에 서 설령 부름을 받지 않아도/ 나도 또한 단호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제 몸도 나라의 것이다 라고/ 나라에 바친 후방의 1억 명의 몸은/ 지금이야말로 뜨거운 철이 되어서 적군 격멸에 역투 하고 있다 (이하 생략) 세 번째는 정책선전이다. 1943년 5월, 황민봉공회( 皇 民 奉 公 會 )의 산하에 있었던 대만문예가협회가 조직 개편되어 새롭게 대만문학봉공회로 편성되었지만 그것이 일본문학보국회 대만지부와 표리일체 관계인 것은 지부간사임원 13) 이 문예대만 의 동인과 거의 중복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으며 또 제 8) 黃 得 時 臺 灣 文 壇 建 設 論 臺 灣 文 學 제 1권 2호, 1941. 9, P7 9) 中 村 哲 昨 今 の 台 湾 文 学 について 臺 灣 文 學 제 2권1호, 1942. 2, P3 10) 文 藝 臺 灣 은 결국 소설을 공부하는 사람을 위한 기관이 아니고 취미잡지로 추락했다. (중략) 정말로 西 川 滿 군 개인의 취미잡지 의외( 意 外 -원문 및 인용문 그대로임. 번역자주)에 아무것도 아니다 ( 鹿 子 木 龍 文 藝 詩 評 臺 灣 公 論 제 4호, 1942.4) 본문인용은 日 本 統 治 期 臺 灣 文 學 硏 究 序 說 ( 綠 陰 西 方, 2004. 3, P36) 에서 한다. 11) 文 藝 臺 灣 詩 集 大 東 亞 戰 爭 제 5권2호, 1942. 12, P6-P32. 文 藝 臺 灣 詩 集 大 東 亞 戰 爭 제 7권1호, 1943. 12, P3-P32. 12) 文 藝 臺 灣 제 6권6호, 1943. 11, P2 13) 사단법인 일본문학보국회 대만지부의 지부규정 에서는 (지부장) 失 野 禾 積 (이사장) 西 川 滿 (이사) 島 田 謹 二, 瀧 田 貞 治, 齊 藤 勇 松 居 桃 樓, 張 文 環, 山 本 孕 江 孕, 濱 田 隼 雄 (간사장) 濱 田 隼 雄 (간사) 龍 瑛 宗 이라고 지부 임원을 공표하는 문장이 있다. ( 文 藝 臺 灣 제 6권 5호, 1943.5, P69) 29

진화천( 陳 火 泉 ) 道 와 문예대만( 文 藝 臺 灣 ) 6권 제 2호의 편집소식 여월소식 14) 에서도 그것은 공언되고 있다. 문예대만 제 7권 제 1호에서는 쇼와 20년부터 대만에서 징병제가 실시되는 것 때문에 좌담회 징병제에 대해서 가 기획되어서 그 내용이 전문 게재되고 있는데, 잡지의 말미 편집소식에서 문예대만 의 정책협력 자세가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본지가 황민문학 수립을 위한 존재인 것은 새삼스럽게 쓸 필요도 없지만, 이 목표 때문에 우리 는 단단한 동지적 결합으로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다. 본 호의 좌담회 내용 등, 우리의 방향을 어 느 정도까지 독자제현 앞에서 피력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5) 문예대만 이 보여준 이러한 방향 을 보면 편집자가 道 에 위탁한 <생각>이라는 것도 쉽 게 상상될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작가 진화천이 문예대만 의 편집자 측의 의도를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인 것이다. 진화천이 언제 문예대만 의 동인이 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문예대만 제 3권 제 1호 사 보의 소설단평 란에서 산이 높으면 진화천군이 큰 로망이 될 듯한 멋진 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 테마가 정해지지 않았다. 소설구성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더욱 제대로 착수하였으면 하고 생각 한다 16) 라고 있듯이 진화천의 작품 산이 높으면 을 평론하는 글이 보이는 것과 濱 田 隼 雄 의 소설 道 에 대해서 에서 진군은 1년 이상도 전에 역시 제뇌인( 製 腦 人 )을 그린 적도 있었지만, 그 때는 내가 차분하게 장편을 써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을 잊고 있었을 즈음, 이 작품을 받았다 17) 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진화천은 적어도 1940년 10월에는 문예대만 동인과 교섭을 가지고 투고 등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진화천은 문예대만 의 어용문학으로서의 자세는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문예대만 의 편집자 측이 좋아할만한 테마, 즉 지원병과 국어상용문제를 작품소재로 한 진화천에 대해서 일본인이 기뻐할 규범적인 황민상을 그림으로써 작가로서의 명성과 직장에서의 승진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18) 와 같은 비판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별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道 라는 작품이해에 대해서 일의적인 제 한을 추가해도 좋다는 이유가 될 리 없다는 것에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싶다. 즉 道 라는 텍 스트 자체에 담겨있는 <비판의식 19) >도 또한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 텍스트의 반역 작품의 전반부, 내지인인 계장이 청남의 승진실패원인을 그 자신이 본도인 이었던 것에서 찾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식민지정부의 일시동인( 一 視 同 仁 ) 이라는 슬로건 이면에 감추어진 차별도 역시 동시에 폭로하고 있다. 또, 전시하의 국민에게 결전을 선양( 宣 揚 )하는 <모범>이 된 바 쇼( 芭 蕉 )를 열렬히 추구하는 청남의 자세에 대비하는 형태로 다케다가 또 바쇼야? 라고 말한 것 과, 미야시로가 그것, 누구의 말이야? 라고 말한 것이 묘사되고 있지만, 그것에 의해서 본도인이 얼마나 일본제국의 언설을 엄격히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고 해도 제국이 약속한 일시동 14) 文 藝 臺 灣 제 6권 2호, 1943. 6, P50 15) 文 藝 臺 灣 제 7권 1호, 1943.12, P34 16) 文 藝 臺 灣 제 3권 1호, 1940.10, P89 17) 文 藝 臺 灣 제 6권 3호, 1943.7, P142 18) 주 4)와 동일 19) 졸고 陳 火 天 道 論 語 りからみる 作 品 の< 批 判 性 > 台 湾 日 本 語 文 学 会 25호, 2009.6, P105-126 30

진화천( 陳 火 泉 ) 道 와 문예대만( 文 藝 臺 灣 ) 인 에 배반당한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 한편으로 태어나면서 일본인은 아무런 노력과 번뇌 없이 너무나도 간단히 황민이 되고 황군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야유적 색채를 띠면서 대비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 작품 안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는, 언뜻 본 줄거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듯 보이는 부부간의 어긋남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道 는 청남부부의 빈곤생활을 그 리고 있지만, 청남의 대군의 방패가 되어 지금 우리들/ 기쁘게 용기내어 죽을 것이다/ 이미 버린 몸이니 욕심은 없다/ 그저 우리가 황민이 될 것이다 라는 당시 지원병을 고취하는 노래가 작품말미 에 실려 있는 것은 바쇼의 성빈생활( 聖 貧 生 活 )을 추구하는 남편의 배후에서 금전에 관심이 없는 남 편으로 인한 부인의 고생, 황민이 될 자격을 얻기 위해서 육군에 지원한 남편에게 버려진 부인과 4 명의 어린 아이의 <비명>이 압살되려 하는 것을 고발하고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에서 보이는 비판성이 진화천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문맥 안에서 은폐된 것인지 아닌지 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텍스트자체는 문예대만 편집자의 <의도>와 작가 진화천의 <의도>를 초월하여 식민지 정부가 선전하는 미사여구 이면에 있는 차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인 것이다. 31

진화천(陳火泉) 道 와 문예대만(文藝臺灣) 陳火泉 道 と 文藝台湾 廖秀娟(元智大学助理教授)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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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천( 陳 火 泉 ) 道 와 문예대만( 文 藝 臺 灣 ) 38

진화천( 陳 火 泉 ) 道 와 문예대만( 文 藝 臺 灣 ) 지정토론 서동주(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HK연구교수) 황민화시기 문학을 바라보는 시점과 그 의의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에서도 식민지 시기(일제강점기)의 문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경우 재평가의 핵심은 해방 이후 식민지 시기 문학연구에서 공식담론의 역할을 해왔던 이른바 '민족주의적 시각' 혹은 '민족해방적 시각'에 대한 문제제 기라고 할 수 있다. 즉, 민족주의 문학(저항문학)과 친일문학(협력의 문학)을 선별하는 데 집중했던 기존의 연구태도를 상대화하고, 나아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친일(협력)과 반일(저 항)의 이분법이라는 식민지 시기를 바라보는 고착화 된 시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무엇보다도 제국일본의 전체주의 적 지배 속에서 실제로 협력과 저항이 과연 선명하게 구분될 수 있으며, 특히 1940년대 이 후 총동원 체제 속에서 유의미한 저항의 거점이 과연 얼마나 존재했는가라는 문제의식에 촉발된 바가 적지 않다. 따라서 연구의 논점도 협력과 저항을 구분하는 것에서 제국의 지 배가 식민지에서 어떻게 관철되었으며 제국은 어떠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지배체제 속으로 포섭(동원)했는가라는 '지배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른바 문학텍스트를 다루는 방식은 좀더 세심한 주의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관통하는 기조( 基 調 )되는 의미의 존재를 승인하더라도, 텍스트는 동시대 의 관련되는 담론과 표상 그리고 관념체계와 다양한 교섭의 산물 그것이 어떤 정치적 목 적을 위해 만들어진 경우에도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텍스트가 구조적으로 지배 담 론과의 긴장관계 속에 놓여짐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그 긴장 관계를 통해서 지배 담론 의 작동 방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때때로 그것이 장악하지 못한 '공백' 혹은 '틈새'를 드러내 는 일이며, 다른 한편으로 저항의 담론마저 포섭해 가는 지배의 교활함과 역동성을 포착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볼 때, 陳 火 泉 의 道 에 대해 친일문학인가 저항문학인가라는 기존의 독해방식을 상대화하면서, 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식적으로 조응하면서도 바로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거역하는 요소가 공존하는, 달리 말하면 어떤 모순적 양면성을 구조화 한 텍 스트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발표자의 시도는 현재의 연구동향과 깊이 공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식민지 조선과 식민지 타이완에서 특히 1940년대 황민화 시기 문 39

진화천( 陳 火 泉 ) 道 와 문예대만( 文 藝 臺 灣 ) 학의 존재양상에 대한 총합적인 이해를 위한 귀중한 연구 성과라는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 한다. 여기에서는 본 논문이 갖는 이상과 같은 학문적 현재적 의의를 전제한 위에서 다음과 같 은 질문을 제기해 보고자 한다. 1. 1940년대 타이완의 일본어문학을 재조명하는 작업에서 陳 火 泉 이라는 작가 그리고 道 라는 텍스트가 차지하는 위상 혹은 의미는 어떤 것인가? 당시 국어(일본어)의 권장과 및 징병제 실시를 협력의 관점에서 주제화한 텍스트는 道 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 상황 에서 특히 이 작가와 텍스트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달리 말하면 道 라는 텍스트 와 陳 火 泉 이른 작가가 황민화 시기 타이완문학에서 갖는 고유한 의미는 어떤 것인가? 2. 논문의 마지막 부분( 四, テクストの 反 逆 )에서 道 라는 텍스트가 내포하고 있는 제국 을 향한 비판성의 문제를 여러 논거를 들어 논증하고 있다. 여기서 발표자는 주인공이 주 위의 일본인으로부터 '제국의 신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건은 ' 一 視 同 仁 '을 주창하는 제 국의 배신을 의미하며, 여기에 일본인과 비일본인(타인완인)에 대한 제국의 차별을 드러내 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사건은 신민이라는 정체성에 자각적이지 못한 일본인이 진실한 타이완인의 신민으로의 변신을 가로막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 까? 이것은 일견 제국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지만, 이상적 황민과 현실의 황민(소설 속의 일 본인)을 구별한 위에서 결국 이상의 실현을 가로막은 현실의 문제를 지적할 뿐, 황국신민으 로의 ' 道 '이라는 이상을 부인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제국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 것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또한 발표자는 황국신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방치된 빈곤에서 텍스트의 지배에 대한 반역을 읽어내고 있지만, 실제로 1940년대 식민지에서 생산된 다수 의 일본어문학작품은 식민지의 빈곤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빈곤은 道 에서와 마찬가지 로 주인공의 제국의 중심을 향한 정신적 기투( 企 投 )를 선명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 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빈곤을 다루는 것 자체가 바로 지배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지 않 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상의 문제를 포함해 이 텍스트의 비판성에 대한 좀더 부연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3. 한편 道 가 갖는 비판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 텍스트의 비판성을 규명하는 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道 가 실 린 < 文 藝 臺 灣 >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西 川 滿 가 창간한 일본어잡지로서 타이완 현지의 문단 에서는 타인완인 문학자가 중심이었던 < 臺 灣 文 學 >과 경쟁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양 잡지는 타이완 문단을 양분하는 중요한 미디어였음은 분명하지만 독자층에 대한 정확한 실태를 알 수는 없지만 잡지의 성격상 지식인 집단을 중심으로 수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 다. 타이완어도 아니고 일본어로 쓰여졌으며 일부 지식인 집단 사이에서 수용되었을 가능성 이 높은 道 의 비판성을 끌어내고, 당시 타이완 문학계를 리드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 40

진화천( 陳 火 泉 ) 道 와 문예대만( 文 藝 臺 灣 ) 던 陳 火 泉 를 친일문학라는 규정에서 '구제'하는 것의 의미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텍 스트의 의미를 일의적( 一 義 的 )으로 귀착시키는 것도 문제이지만, 소수의 지식인 사이에서 당시에는 인지되었을 여부도 불분명한 텍스트의 비판성을 언급하는 것의 의의는 무엇인가? * 우선 이상의 세 가지 질문을 드리며, 기타 세부적인 의문은 발표회 자리를 빌어 말씀드 리고자 합니다. 41

진화천( 陳 火 泉 ) 道 와 문예대만( 文 藝 臺 灣 ) 지정토론 1990 年 代 後 半 以 後 韓 国 も 植 民 地 時 期 ( 日 帝 强 占 期 )の 文 学 に 対 する 再 評 価 の 作 業 が 活 発 に 為 されている この 場 合 の 再 評 価 の 核 心 は 解 放 以 後 の 植 民 地 時 期 の 文 学 硏 究 で 公 式 談 論 の 役 割 をしてきた 所 謂 民 族 主 義 的 視 角 あるいは 民 族 解 放 的 視 角 に 対 する 問 題 提 起 だと 言 え る 即 ち 民 族 主 義 文 學 ( 抵 抗 文 學 )と 親 日 文 學 ( 協 力 の 文 學 )を 選 別 するのに 集 中 していた 旣 存 の 硏 究 態 度 を 相 對 化 し ひいてはより 広 い 意 味 で 親 日 ( 協 力 )と 反 日 ( 抵 抗 )の 二 分 法 という 植 民 地 時 期 を 読 み 取 る 固 着 化 された 視 角 をどのように 克 服 するのかという 問 題 が 重 要 な 課 題 として 浮 上 した このような 認 識 の 転 換 は 何 よりも 帝 国 日 本 の 全 體 主 義 的 支 配 の 中 で 実 際 に 協 力 と 抵 抗 がいかに 鮮 明 に 区 分 され 特 に1940 年 代 以 後 の 總 動 員 體 制 の 中 で 意 味 有 る 抵 抗 の 拠 点 が いったい どのくらい 存 在 していたのかという 問 題 意 識 に 触 発 されたところが 少 なくない し たがって 硏 究 の 論 点 も 協 力 と 抵 抗 を 区 分 するもので 帝 國 の 支 配 が 植 民 地 でどのように 観 察 さ れており 帝 国 はどのような 方 式 で 人 々を 支 配 体 制 の 中 で 包 攝 ( 動 員 )したのかという 支 配 の 問 題 として 転 換 された しかし この 場 合 にも 所 謂 文 学 テクストを 扱 う 方 式 はもう 少 し 細 心 の 注 意 を 要 求 する なぜ なら テクストを 貫 通 する 基 調 とされる 意 味 の 存 在 を 承 認 するとしても テクストは 同 時 代 の 関 連 した 談 論 と 表 象 そして 觀 念 体 系 と 多 様 な 交 涉 の 産 物 それがどのような 政 治 的 目 的 のた め 作 られた 場 合 にも というわけである そして これはテクストが 構 造 的 に 支 配 の 談 論 との 緊 張 関 係 の 中 に 置 かれていたことを 意 味 する 重 要 なことは この 緊 張 関 係 を 通 して 支 配 談 論 の 作 動 方 式 を 見 せてくれたと 同 時 に 時 折 それが 掌 握 できなかった 空 白 あるいは 隙 間 を 顕 にすることであり 一 方 で 抵 抗 の 談 論 までも 動 員 していく 支 配 の 狡 猾 さと 逆 動 性 を 捕 捉 す るのである このような 視 点 で 見 たとき 陳 火 泉 の 道 に 対 する 親 日 文 學 なのか 抵 抗 文 學 なのかという 既 存 の 讀 解 方 式 を 相 對 化 しながら 帝 國 の 支 配 のイデオロギーに 意 識 的 に 照 応 されながらもま さに 帝 國 のイデオロギーを 拒 逆 する 要 素 が 共 存 している 言 い 換 えると ある 矛 盾 のある 兩 面 性 を 構 造 化 したテクストという 新 しい 意 味 を 付 与 している 発 表 者 の 試 みは 現 在 の 硏 究 動 向 と 深 く 共 鳴 しているだけではなく その 後 植 民 地 朝 鮮 と 植 民 地 台 湾 で 特 に1940 年 代 の 王 民 化 時 期 の 文 学 の 存 在 樣 相 に 対 する 總 合 的 な 理 解 のための 貴 重 な 研 究 の 成 果 という 意 義 を 持 っていると 考 える 42

진화천( 陳 火 泉 ) 道 와 문예대만( 文 藝 臺 灣 ) ここでは 本 稿 が 持 つ 以 上 のような 学 問 的 顯 在 的 意 義 を 前 提 とした 上 で 次 の 質 問 を 提 起 し たいと 思 う 1. 1940 年 代 の 台 湾 の 日 本 語 文 學 を 再 照 明 する 作 業 で 陳 火 泉 という 作 家 そして 道 とい うテクストが 占 める 位 相 もしくは 意 味 はどんなことか 当 時 国 語 ( 日 本 語 )の 勸 獎 と 徵 兵 制 の 實 施 を 協 力 の 觀 點 から 主 題 化 したテクストは 道 だけではないだろう そのような 状 況 で 特 にこの 作 家 とテクストに 注 目 する 理 由 は 何 であるのか 言 い 換 えれば 道 というテクスト と 陳 火 泉 のような 作 家 が 王 民 化 時 期 の 台 湾 文 学 で 持 つ 固 有 の 意 味 は 何 なのか 2. 論 文 の 最 後 の 部 分 ( 四, テクストの 反 逆 )で 道 というテクストが 内 包 している 帝 國 に 向 かった 批 判 性 の 問 題 を 諸 論 拠 をあげ 論 證 している ここで 発 表 者 は 主 人 公 が 周 囲 の 日 本 人 か ら 帝 國 の 臣 民 として 認 定 できない 事 件 は 一 視 同 仁 を 主 唱 する 帝 國 の 背 信 を 意 味 し ここに 日 本 人 と 非 日 本 人 ( 台 湾 人 )に 対 する 帝 國 の 差 別 を 現 していると 主 張 している しかし むしろこの 事 件 は 臣 民 という 正 体 性 に 自 覺 できない 日 本 人 が 真 実 の 台 湾 人 の 臣 民 としての 変 身 を 妨 げる 現 實 を 告 發 してい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これは 一 見 帝 國 に 対 する 批 判 として 見 えるが 理 想 的 王 民 と 現 實 の 王 民 ( 小 說 の 中 の 日 本 人 )を 区 別 したために 結 局 理 想 の 実 現 を 妨 げ る 現 実 の 問 題 を 指 摘 しただけで 王 国 人 民 としての 道 という 理 想 を 否 認 してはいない 点 に おいて 帝 国 に 対 する 批 判 として 読 むことに 無 理 があるのではないかと 思 われる また 発 表 者 は 王 民 人 民 のイデオロギーによる 放 置 された 貧 困 でテクストの 支 配 に 対 する 反 逆 を 読 み 取 って いるが 実 際 に1940 年 代 の 植 民 地 で 生 産 された 多 数 の 日 本 語 文 學 作 品 は 植 民 地 の 貧 困 を 描 い ている ここで 貧 困 とは 道 と 同 じように 主 人 公 の 帝 國 の 中 心 に 向 かった 精 神 的 企 投 を 説 明 させるようにした 仕 掛 けとして 活 用 されている このような 事 情 は 貧 困 を 扱 うこと 自 体 が ま さに 支 配 に 対 する 批 判 として 連 結 されないかもしれないことを 見 せている 以 上 の 問 題 を 含 み このテクストの 批 判 性 に 関 する 説 明 がもう 少 し 必 要 だと 考 える 3. 一 方 道 が 持 つ 批 判 性 を 認 定 するとしても 次 のような 質 問 を 提 起 しないわけにはいかな い いったいこのテクストの 批 判 性 を 糾 明 することが 持 つ 意 味 は 何 なのか 道 が 掲 載 され た< 文 藝 臺 灣 >は 周 知 の 通 り 西 川 滿 が 創 刊 した 日 本 語 雜 誌 として 台 湾 現 地 の 文 壇 では 台 湾 人 の 文 学 者 が 中 心 であった< 臺 灣 文 學 >と 競 争 的 関 係 を 形 成 していた 両 雑 誌 は 台 湾 文 壇 を 両 分 する 重 要 なメディアであったのは 明 らかであるが 讀 者 層 に 対 する 正 確 な 実 体 がわからない が 雑 誌 の 性 格 上 知 識 人 の 集 団 を 中 心 として 受 容 されていたであろうと 推 測 される 台 湾 語 でもなく 日 本 語 で 書 かれており 一 部 の 知 識 人 の 集 団 の 間 で 受 容 されていた 可 能 性 が 高 い 道 の 批 判 性 を 導 きだし 当 時 の 台 湾 文 学 界 をリードする 位 置 にあったわけでもない 陳 火 泉 を 親 日 文 學 という 規 定 で 救 濟 することの 意 味 はいったいどこにあるのか テクストの 意 味 を 一 義 的 に 歸 着 させているのも 問 題 であるが 少 数 の 知 識 人 の 間 で 当 時 は 認 知 されていたかど うかも 不 明 なテクストの 批 判 性 を 言 及 することの 意 義 は 何 なのか * まず 以 上 の3つの 質 問 をし そのほか 細 かい 疑 問 は 発 表 会 の 席 を 借 りてしたいと 思 ってお ります 43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帝国日本の 文化外交 に関する小考 - 金弼東 (세명대 교수) 指定討論 - 南相虎 (경기대 교수) 프 로 필 김필동(金弼東, Kim Pil-Dong) 세명대학교 교수 일본사상/문화 주요저서 및 논문 일본 일본인론의 재발견 J&C, 2007.2 일본의 정체성 살림출판사, 2005.7 근대일본의 민중운동과 사상 J&C, 2005.6 戦後日本の対外経済協力構想に関する少考 일본학보 2009.5.31 日本の国際地位変化と欧米文化外交の推移 일본학연구 2009.5.31 戦後日本外交史における 文化外交 の推移と意味 일본학보 2008.5.31 戦後日本外交史における文化外交研究ー1960年代を中心に 일본학연구 2008.5.31 외 다수 44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제국 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김 필 동(세명대학교일본어학과 교수) 들어가며 인류사에 있어서 문화를 매개로 한 교류의 역사를 문화 교류 라고 이해할 경우, 교류의 형태는 이문화끼리의 자연발생적인 접촉에 의한 교류와 나라라든지 집단이 자신들이 의도하는 어떤 목적을 가지며 정책적으로 실시하는 교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근대 이후 국제사회에서의 문화 교류 라 고 하면, 주로 후자의 형태를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의 경우도 세계2차대전 전부터 후자에 중 점을 두고, 그것을 문화 사업 문화 공작( 文 化 工 作 ) 문화 외교 의 관점에서 교류 정책을 추진 했다. 즉, 문화 교류의 하나의 속성이기도 한 자연발생적인 측면에 나라가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체 계적으로 지도 관리 함으로써, 일본 문화의 목적 지향적 해외 전파와 일본의 국제적 지위 향상을 추구하는 정책을 끊임없이 추구했다. 필자는, 일본 사회의 일본 문화 를 둘러싼 통합적 가치의 형성과 그것을 활용한 외교 적 활동 의 역사를, 근현대의 일본식 가치 의 특징을 나타내는 하나의 유력한 사례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 의 문화 정책과 문화 교류의 외교적 효과의 극대화를 노리는 문화 외교의 실태를 분석해 보면 저절 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우선 일본의 문화 외교 를 분석하는 연구사적 의미를, 필 자의 종래의 일본 문화 연구 방법론과 관련지어 파악하는 시점을 제시함과 동시에, 문화 외교에 있 어서의 제국 일본의 일본 문화 의 이해, 문화 외교 의 개념, 그리고 문화 외교의 인식 배경과 체제 구축 과정 등을 분석했다. 1. 문화 외교 연구의 시점과 배경 1) 본 연구의 관점 필자는, 한국에서의 일본 문화 연구의 심화를 도모하기 위한 방향성으로 우선 일본 일본인 일본 사회가 체현하는 일반적 정서와 심리 및 전통적인 사유 양식이 반영된 문화 양태를, 통사적 관점 내 지는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포괄적으로 분석하는 연구를 일본 문화 연구 로 파악하고 나서, 그것 을 충족시키기 위해 두 개의 전제 조건(문제 의식과 연구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1). 45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하나는, 일본인의 의식 구조와 행동 양식, 전통 사상과 관행, 법과 제도(혹은 키 컨셉으로서 생각 할 수 있는 다른 논점) 등을 바탕으로 하는 일관된 논리로, 일본의 사회 문화의 제현상을 규정하는 내면적 특성을 분석하는 문제 의식, 예를 들면, 의식 구조와 행동 양식의 분석 그것을 잉태하는 사 회구조의 분석 일본 문화의 특징 해명 타문화와의 비교 시점의 확보이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일 본 문화 연구의 생육 기반의 강화를 위해서도 요구되어야 할 조건이다. 또 하나는, 문제의식을 객관적인 결과로 이끌어내기 위한 폭넓은 자료 수집과 과학적 연구 방법론 의 단련이 필요하다. 특히, 방법론으로는 예를 들면, 현실 생활에서의 일본인의 사유 양식의 독자성 의 분석, 사유 양식과 그 집합체인 문화 양태의 상관관계 분석, 그 결과로 규정된 제도와 관행 등 이, 또한 일본인의 의식 세계를 속박하는 형태를, 연속 순환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론의 단련이다. 따라서, 제국 일본의 문화 외교 의 전체상을 분석할 때,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기존의 국 제 정치 구조와의 관련성 안에서 파악하는 방법론이 아니라, 1) 일본인의 사유 양식과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등이 역사를 통해서 형성해 온 인식론적 실천론적 사유 양식의 특징, 2) 그것이 일본의 국제적 지위 변화를 반영한 외교 정책과 결부되어 가는 과정, 3) 그 결과적으로의 일본식 가치의 확대 재생산 새로운 국가 이미지 창출 세계의 생활 문화 의 일본화 촉진 메카니즘의 해명 등이 다. 요컨데, 일본의 문화 와 그 문화 가 발하는 제가치를 중시하는 일( 日 ) 2) 의 사유 양식이, 외교 를 매개로 해서 추구하려 한 목적 지향적 가치 및 그 결과와 의미를 실증 구체적으로 분석 하는 것이다. 2) 본 연구의 시대사적 배경-사상 문화적 관점에서의 역사성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힘의 원천의 변화(The changing sources of power)를 주창한 조셉 S 나 이는, 일본은 1930년대의 대동아공영권(Greater East Asian Co-Prosperity Sphere)을 창설하려고 한 군사 전략보다, 1945년 이후의 통상 국가(trading state)로서 사는 전략이 일본에 있어서 훨씬 더 좋 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상대를 따르게 하는 힘(command power)이라는 면에서는, 일본은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군사력도 상대적으로는 약하고, 특히, 상대를 끌어 들이는(co-optive) 중요한 힘인 문화면에서는, 일본은 지극히 고립하고 있다고 한다 3). 한마디로 하면, 경제성장 전략은 향후도 유효하겠지만, 문화적으로 고립(insular)하고 있으면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 확대는 어렵다고 하는 논리이다. 문화력이 발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포함하여, 종합적으로 세계적인 지지력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 면, 미국의 문화력이 일본을 이기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일본 문화가 고립하고 있기 때문 에, 영향력의 확대에 한계가 있다고 하는 논리는 편협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 발상이다. 포스트냉전 시대에 있어서의 문화적 파워는, 그 정치적 영향력보다는 생활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이 보다 더 주 목받고 있다. 특히, 경제대국이란 지위에 편승하여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일본의 서브 컬쳐의 영향력을 조 셉은 놓치고 있고, 그의 인식을 비웃 듯 쿨 재팬 의 세계화는 강해지고 있다. 그 지지가 지금은 일본의 문화 외교의 발상까지 바꿀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21 세기에 있어서 일 본의 문화 대국화라는 야망을 가능하게 하게 하는 소중한 자원 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지금 문화 외교 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그 영향력은, 국제사회를 지배한 20 세기 가치의 붕괴와 1) 拙 論 韓 国 における 日 本 文 化 論 展 開 に 関 する 一 考 察 日 本 学 報 第 58 楫 2004.3 参 照 2) 여기서 말하는 일 은 일본, 일본인, 일본사회의 총칭이다. 3) Joseph S.Nye,Jr: BOUND TO READ:the chandind nature of American power Basic Books 1990 29~33 頁 46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함께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 일본의 GNC 가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듯이, 이미 일본 사회는 근대의 부국 강병론이나 전후의 부국(=경제력) 논리를 넘어 또한, 아시아에 대한 문화 우월 의식이 나 서구 컴플렉스를 넘어 일본 문화의 재평가와 확대를 통한 문화 대국 일본의 구현에 박차를 가하 고 있다. 이 흐름은 문화 강국 을 꿈꾸고 있는 한국 사회에 많은 일을 생각하게 하고 있으며, 또 한 본 연구를 재촉하는 하나의 요인이기도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상 문화적으로 놓칠 수 없 는 역사성이 몇가지 있다. 첫째, 일본의 문화 외교의 생육 기반으로서 일본의 국제 문화 교류와 일본 문화 형성의 역사적 기 반( 국제 교류 를 통한 수용 과 발신 의 역사)을 중시해야 하고, 거기서부터 일본 문화의 아이 덴티티가 형성되었다고 하는 역사성이다. 즉, 끊임없이 나라의 문명 문화 진화의 원동력으로서 선진 문명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면서, 그것을 일본화 하는 창조적 수용 을 실천해 왔다. 둘째, 역발상에 의한 일본식 가치의 대외 지향성이다. 문화적 지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본은 확 실히 세계의 주연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일본은 한 번도 세계의 중심으로 서는 일 은 없었다. 그것을 밖에서는 일본 문화의 고립 이라는 시점에서 보려고 하지만, 일본은 그 한계를 반대로 민족 번영과 대외 팽창 을 위한 활로로 적극적으로 바꾸어 왔고, 그 과정에서 일본식 가 치 의 대외 확산이 대외 정책의 일환으로 확산되게 되었다고 하는 역사성이다. 셋째, 문화 에 의한 외교라고 하는 발상이, 이미 제국 일본의 대외 팽창 과정에서 구상되어 실 천되었다고 하는 역사성의 중시이다. 문화 외교에 관한 인식은, 1920년대를 지나면 구체성을 띠며 나타나게 된다. 杉 村 陽 太 郎 로의 경제 건국과 문화 정책 구상, 越 智 元 治 와 柳 沢 健 의 국제 문화 사업 구상, 三 枝 茂 智 의 문화 건국책 구상, 松 本 学 의 문화 국제연맹 구상 등이 대표적이다 4). 이러한 구상 속에서, 일본 문화의 해외 소개, 학술 문화 교류의 확충, 일본식 가치의 전파, 일본 문화의 학문적 연구 기반 구축과 대외 문화 정책과의 제휴, 문화 외교나 국민 외교론의 제창 등이 주창되어 오늘까 지 그 이념과 방향성이 계승되고 있다. 넷째, 문화 외교 는 21 세기의 일본 외교가 지향하는 국가 전략의 요체라고 하는 점이다. 조 셉 나이가 대외 정책에 있어서의 눈에 보이지 않는 힘(그 나라가 내면으로부터 자아내는 매력)으로 서 소프트 파워를 주창하고 있듯이 5), 오늘의 국력과 외교력에 있어서의 문화의 영향력은 더욱 더 강해지고 있어 정치 경제의 글로벌리제이션과 맞물린 글로벌한 문화 시스템 6) 의 성숙도 현저하 다. 그 때문에 일본은, 21 세기의 국력으로서 문화력(전통 문화+현대문화)의 중요성을 범국가적으로 재인식하여, 그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국민적인 에너지를 결집하고 있다. 다섯째, 일본의 국제적 지위 변화와 문화 외교와의 깊은 관련성이다. 예를 들면, 패전국 전후 부 흥 국제사회 복귀 평화 국가 고도 경제성장 경제 선진국 경제대국 국제 국가 문화 대국이라 고 하는, 말하자면 국제사회의 정세 변화나 그 안에서의 일본의 역할(국가 이미지의 변화 를 적절 히 반영)을 잘 판별하면서, 보다 국가화 전략화된 형태로 일본 문화 의 전략적 발신을 해 왔다. 4) 芝 崎 厚 土 近 代 日 本 と 国 際 文 化 交 流 ( 有 信 堂 高 文 社 1999), 第 三 章 誕 生 1 対 外 文 化 政 *の 構 想 参 照 5) Joseph S. Nye Jr SOFT POWER-The Means Success in World Politics Perseus Books Group, 2004 参 照.Joseph에 의하면 소프트파워 란 행동원리에서 보면 내 편으로 끄는 매력의 힘(power of attraction) 이며, 그 힘을 끌어내는 관련성 높은 것으로 제도, 가치관, 문화, 정책 등을 들고 있다. SOFT POWER 5~11 頁 6) Martin Show는, 개개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에 대한 고집과 같이 개개의 관념과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집도 있지만, 그래도 역시 보편적인 문화의 성장은 현저하다 고 하면서, q다 중요한 것은 경제, 정치의 글로벌리제이션과 맞물리면서 이들 과정 을 통해, 사람들이 공통의 기대와 가치관과 목표를 가지고 자기들의 생활을 보게 되고 있다. 이들 문화적 규범에는 생활수 준, 생활양식, 복지 권리, 시민권, 민주주의, 민족적, 언어적 권리, 독립국가로서의 지위, 성의 평등, 환경수준 등의 관념이 포함된다. 고 한다.그리고, 이들 관념의 대부분은 서구에 기원을 두나,각각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큰 해석의 차이를 동반하 면서도 세계속에서 더욱 생활양식과 정치이론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글로벌한 문화, 특히 글로벌한 정치문화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グローバル 社 会 と 国 際 政 治 高 屋 定 国 松 尾 眞 訳 ミネルヴァ 書 房 1997,29~30 頁 47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2. 문화 외교에 있어서의 일본 문화 의 이해와 문화 외교 의 개념 근대 이후 일본의 지식인 사회는, 문화 를 독일어의 문화 개념을 차용하여 고도의 정신적인 소산 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했다. 영어 용법이 섞인 독일어 용법에 있어서의 문화 의 개념은 품위가 있는 용어, 중량감이 있는 용어로서의 Kultur 이며, 이것은 18 세기 이래 게르만 국민 의 언어와 본질의 모든 차원에 있어서의 표현을 나타내는 것 이었다. 7) 당시 서구 사회에 있어서의 문화 는, 지식인들의 전유물과 같이 인식되어 있었고, 그 의미에서 18 세기의 학문, 예술 등 정신 분야에 있어서의 게르만 민족의 활약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시대 목표 인식이, 그대로 문화 개념으로 정착되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이 경우 문 화 는, 정신적 도덕적 향상을 도모하는 교양과 일체화되어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주체도 높은 수 양을 갖춘 엘리트 계급에 한정되어 버려, 대중은 배제된다고 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서양의 문화 발달 과정을 특징지운 이 귀족주의적 개념이, 근대 일본의 지식인 사회를 그대로 지 배했다. 메이지 초기 문명개화를 주도한 계몽적 지식인들의 우민관에 그 실체가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었으며 8), 전제 정부에 대항한 자유민권운동가들의 사유 양식에도, 민중들의 의식 세계와는 떨어진 차원에서 문화 가 주창되고 있었다 9).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는 지식인에 의한 비판적 고찰도 있지 만 10), 어쨌든 문화에 대한 협의적 이해와 문화 형태를 엘리트층의 독점적 전유물처럼 생각하는 발상 에 변함은 없었다. 하지만, 제국 일본의 본격적인 대외 침략과 그것과 맞물려 일본 문화의 대외 선양 의식이 고조 됨에 때라, 문화에 대한 인식도 서서히 탄력적으로 이해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요즘 제국 일 본의 대외 문화 사업을 주도한 三 枝 茂 智 였다. 三 枝 는, 문화와 문명을 동일 개념으로서 파악하고, 경제적 생활, 예술 활동, 정치생활, 종교 생활, 지적 생활의 진보 발달 로서, 즉, 사회 생활의 최 고 수준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의미 11) 한다고 정의했다. 이것을 문화의 가장 광의 적 해석이라고 하는 그는, 좀 더 협의 적으로 해석하면 순수의 가 치장 또한 정신적 문명이라고 하는 범위에 속하는 사항은 물론 그 외에도, 가치라고 하는 방면을 주 로 그 존재의 방면으로서 있는 사물 즉 주로 가치적 존재를 가지고 있는 사물도 우리의 목적 주관 을 가미해서, 이들 모두를 문화라고 하는 문자, 문화재라고 하는 문자 안에 넣을 수가 있으며, 문화 사업 담당자는 이러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12) 近 藤 春 雄 도 뒤를 이었다. 近 藤 는, 문화와 문명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전제에 서있지만, 문화라고 하는 개념의 다양성은 문화 활동의 다각성을 낳으므로, 문화 외교의 내용도 학술, 예술 등 의 정신적 노작( 勞 作 )에서 기술적 축적의 교환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범위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13). 近 藤 가 말하는 기술적 축적 의 내용은 분명하지 않지만, 현실 생활에 있어서의 일본의 선 진적 문화재 일반까지, 예를 들어 종래 직공의 생업으로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않았던 정원술이라 든지 염색방법까지 하나의 큰 일본 문화의 한 분야로서 다루어져 새로운 가치 14) 를 부여하려고 하 는 생각이다. 7) Mare Fumaroli 文 化 国 家 ー 近 代 の 宗 教 ( 天 野 恒 雄 訳 ) 山 陽 社 1993,188 頁 8) 拙 論 啓 蒙 思 想 に 関 する 少 考 日 本 学 報 第 71 緝 (2007.5.30) 参 照 9) 拙 論 自 由 民 権 運 動 の 在 地 化 過 程 に 関 する 研 究 日 本 学 報 第 61 緝 (2004.11.30) 参 照 10) 田 中 耕 太 郎 는 明 治 이래 일본의 문화는 항상 지배계급과 엘리트층이 지배해왔다고 하면서, 문화향유의 주체는 말할 필요없 이 국가가 아니라 민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国 際 文 化 運 動 の 理 念 改 造 1937 年 1 月 号 8~9 頁 11) 三 枝 茂 智 極 東 外 交 論 * 斯 文 書 院 1933 627 頁 12) 三 枝 茂 智 対 外 文 化 政 *に 就 て 支 那 (1931 年 8 月 号 ) 17 頁 13) 近 藤 春 雄 文 化 外 交 の 思 想 的 背 景 外 交 時 報 76 号 1934 参 照 14) 宮 城 望 文 化 宣 揚 と 文 化 宣 伝 国 際 文 化 第 5 号 国 際 文 化 振 興 会 1939 5 頁 48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이것은, 일본의 문화 선양 을 위한 일본 문화의 재구성 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에 따라 문 화 사업 의 대상까지도 정신적 문명과 학문의 대상이 되는 개념에서, 상품과 같은 문화 가치를 표 현하는 문화적 재화까지 확대해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문화적 재화에 둘러쌓인 생활 문화 의 중시라고 하는 발상, 즉, 문화를 일상적인 관점에서 다시 읽으려고 하는 의지 아래에서, 일본 문 화의 발신 능력을 강화한다고 하는 시도이다. 이 경위에 입각해서 정의해 보면, 우선 일본의 이데오로그측이 생각하고 있는 일본 문화 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적인 미와 정신이 녹아 있는 문화재적 유산으로부터, 일본인의 규범 의식이 나 제가치가 반영되고 있는 유 무형의 사회적 지적 자산, 그리고 현대의 생활 양식을 둘러싸는 다 양한 문화적 재화까지를 총칭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문화 외교 란, 이 유 무형의 문화적 소산을 일본 문화의 매력 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외교 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세계에 확산시키는 것이다. 요컨데, 고유의 정신적 물질적 기술적 소산으로서 폭넓은 범위에서 계승 창조되고 있는 제문화 가치를, 교류 교섭 정책의 일환으로 대외적으로 활용하여, 외교적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일본의 이미지 개선, 지위 향상, 국제 협력 등을 도모해 가는 전략적, 목적 지 향적 외교 활동의 총체가 문화 외교 이다. 3. 제국 일본의 문화 외교 의 인식과 체제 구축 1) 제국 일본의 대외 문화 사업 구상 근대 일본이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반영한 외교 원칙이라고 한 것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러일 전쟁 직후이다. 근대 이후 일본의 국제 문제는, 조약 개정, 군비의 충실, 한반도에 있어서의 지배권 의 확립 있어서의 지것에 집중되고 있었지만, 러일 전쟁 후 지나라의 독립과 사명이란 무엇인가, 일 본이 세계의 일국으로서 해낼 수 있는 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은 무엇인가, 국제 문제란 어떤지것 인가, 세계의 동향은 어떻게 변해가려 하고 있는지, 그 안에서 일본은 어떻게 나아가것인할지것인가, 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국제 15) 제1차 대전 후 일본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당시 국제 문화 교류 사상 특기해야 할 사건으로서 주목을 받은 지적 협력 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n Intellectual Cooperation) 에 적극적 으로 협력함과 동시에, 국책으로서의 문화 사업 추진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2 년 외무성에 대지문화 사업 특별 회계 를 설치(이듬해 문화 사업부 가 됨)하여, 예산 300만엔 규모로 대 支 那 문화 사업을 시작했다. 16) 이 즈음부터 일본의 식자층은, 국가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 처럼 해외와의 문화 교류 사업의 중요 성을 주창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須 磨 彌 吉 郎 와 柳 澤 健 이다. 스페인 특명 전권 공사를 역임한 須 磨 는 동양 문화 외교 시론 이라고 하는 논문을 통해, 일본의 국제적 지위 변화와 맞물 려, 문화를 외교의 핵심 영역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인식을 표명했다. 17) 柳 澤 健 은 국제 문화 사업 을 학술이라든지 교육이라든지 종교라든지 예술이라든지 내지는 스포츠라든지 하는 소위 문화적 방 면을 중심으로 하는 대외 활동 으로서 평가하여 문화 외교 를 정치 경제 외교와 함께 외교의 3 대축의 하나로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문화 외교는, 단순히 일국의 정치 경제적 방면의 활동 도상에 있어서 분쟁 방지라고 하는 15) 入 江 昭 日 本 の 外 交 中 公 新 書 1966 6~7 頁 16) 外 務 省 文 化 事 業 部 国 際 文 化 交 流 の 現 状 と 展 望 大 蔵 省 印 刷 局 1973 8 頁 17) 須 磨 彌 吉 郎 東 洋 文 化 外 交 試 論 外 交 時 報 490 号 1925, 49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소극적의 역할을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나아가 일국의 정치 경제 활동을 조장하고 강화하는 막대 한 힘 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 경제 문화라고 하는 삼면의 외교 활동 중에서도 가장 중 요하고 또한 근본적인 것 으로 봐야 하는 것이며, 그 의미에서 대외 문화 사업의 필요성과 효과를 강조하는 유럽 제국의 논자들의 주장은 올바르다고 역설했다. 18) 그 후, 체계적인 대외 문화 정책 구상이 연달아 제기되었다. 三 枝 茂 智 는, 유럽 제국이 대외 문화 사업을 통해서, 1) 자국의 국수주의 유지, 2) 자국 언어를 여러 나라에 소개, 3) 자국 문화를 여러 나라에 옮기게 하는, 4) 자국 가치의 세계적 인식을 촉진, 5) 외국인의 인심을 수람하는, 등의 목적 을 달성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였다. 19) 유럽 열강이 자기 나라의 영역을 외국인 의 관념계에 넓혀 감으로써 자국 민족의 존립 발전에 유리하게 되는 환경 을 만들어 가는 전략 을, 문화 사업을 통해서 실현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三 枝 에 의하면, 일본은 지역적 기반으로서 왜냐하면 국수문화 선전전에 있어서, 우리는 절호의 전 략 지점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문명적 관점으로부터도 일본주의, 인도 철학, 유교 정신 등을 집대 성 하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세계 문화의 반을 소유 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이 좋든싫든 가치의 세계 의 왕좌에 군림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으면 世 界 一 全 의 최고 문화를 산출 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20) 대외 문화 사업을 통해서 새로운 지도 정신 을 세계에 발신하려고 하는 의도는, 우선 대동아 로 향해졌다. 그 중에서도 주요한 공략 대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이었다. 당시 일본은, 満 州 国 을 育 成 하고 同 国 과의 特 殊 不 可 分 한 関 係 를 더욱 鞏 固 하게 하고, 世 界 的 見 地 에서 蘇 支 両 国 과의 関 係 를 自 主 的 으로 調 整 함과 동시에, 南 方 方 面 에 平 和 的 発 展 進 出 을 꾀하고 그럼으로써 東 亜 에 있어 서의 安 定 勢 力 을 확보하고, 그리고 제국의 존립 발전 을 도모하는 것을, 제국 외교의 중추 방 침 으로 정하고 있었다. 21) 제국 일본의 大 支 那 문화 정책의 중시를, 芝 崎 厚 史 는 대 중국 문화 사업을 통해 동방 문화의 선양에 노력하고 있는 것을 열강에 이해시키는 행위 22) 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냉정하게 생 각하면 대륙 제국 의 지위를 확보한 일본이, 그 다음 지도 정신 의 실천을 통해 문화제국주 의 의 실현에 나선 것을 의미한다. 제국주의 정책으로 가장 교묘한 것으로 말해지고 있는 문화제국주의 는, 영토의 정복이나 경제 생활의 통제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 목적은 양국간의 힘 관계를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고 제어하는 일에 있다. 23) 특히, 문화제국주의의 실현은 계량적으로는 헤아릴 수 없 는 큰 매력이 있기 때문에, 요즘 많은 식자층은, 일본의 아시아에 있어서의 근대 문명의 선구자로서 의 지위를 활용하여, 제국 일본의 문화적 리더쉽의 발휘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 역할을 강하 게 주장한 인물이 杉 村 陽 太 郎 였다. 그는 극동의 평화를 생각하여, 만주인, 조선인의 행복을 생각해서 독립 혹은 병합을 원조하여, 또 는 감행할 경우, 그 행동은 義 人 의 행위이며 仁 者 의 행위이다 24) 라고 하면서, 아시아의 평화를 어 지럽혀, 아시아인을 멸시하고, 노예시 하는 것은 모두 일본의 적 이라고 인식하여,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국 일본의 팽창주의가 아시아에 있어서의 문명 대국으로서의 사명을 다 18) 柳 澤 健 国 際 文 化 事 業 とは 何 ぞや 外 交 時 報 第 704 号 1934,71~74 頁 19) 三 枝 茂 智 対 外 文 化 政 *に 就 て ( 前 掲 論 文 )22~23 頁 20) 三 枝 茂 智 対 外 文 化 政 *に 就 て ( 前 掲 論 文 )25 頁 21) 山 田 明 編 外 交 資 料 近 代 日 本 の 膨 張 と 侵 略 新 日 本 出 版 社 1997 253 頁 22) 芝 崎 厚 史 近 代 日 本 と 国 際 文 化 交 流 有 信 堂 高 文 社 1999,65 頁 23) Hans J. Morgenthau POLITICS AMONG NATIONS ( 前 掲 書 ) 64 頁 24) 杉 村 陽 太 郎 国 際 外 交 録 ( 前 掲 書 ) 380 頁 50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하는 것에 살짝 변경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극동 평화의 옹호자 로서의 제국 일본의 존재감은 작다. 杉 村 는, 이미 고 대 로마, 근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역사가, 일본에 있어서 좋은 본보기 이듯이, 문화적 노 력 이 수반하지 않으면 진정한 국권의 신장은 없다고 단언했다. 杉 村 는 문화 정책 없이는 국세 의 신장 은 바랄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25) 우리 우수한 문명을 널리 세계에 이해하게 하여 국제상에 있어서 우리 품위를 높여 우리 국민성에 대한 각국민의 존경을 확보하고, 그럼으로써 국교의 기초를 단순한 권력 또는 재력에서 뿐만 아니 라, 한층 고상한 상호 이해 및 존신의 관념 위에서 쌓는 것이, 국세의 발전에 빠뜨릴 수 없는 요건 이며, 정치적으로 본 국권의 신장도, 경제적 견지에서 보는 상권의 신장도, 문화적 노력이 수반하지 않을 때, 그 바탕은 지극히 약한 것이 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문명 대국인 일본의 문화를 널리 세계에 보급하며, 그 과정에서 제국 일본이 동아의 지도자 임 을 세계에 각인시켜, 그 존경심에 근거하여 아시아의 문명화 를 선도해 나가는, 그 것을 위해 무 엇보다도 문화 정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경우, 문화 정책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종교, 과학, 예술 등의 형태로 행해지지만, 한편에서는 정치 도덕, 상업 도덕, 특히 국민 외교에 의한 국민 도덕 에 준거해 지극히 유효 하게 기능하므로, 그 중요성을 결코 놓쳐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적극적인 대외 문화 정책을 통해서, 제국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한 것으로 하려고 한 杉 村 는, 그 체제에 대해서도 외무성 뿐만 아니라 관민 일치 국민적 기초 위에서 행해지는 시대가 왔다 26) 라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문화 정책의 전면적인 변화를 재촉했다. 제국 일본의 문화 제국화에의 움 직임이 국민적 기초 위에서,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체제 정비에 들어갔던 것도 이 즈음부터 이다.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일본의 정치적 발언력의 강화와 거기에 걸 맞는 경제적 존재의 확대 27) 에 이어, 제국 일본이 추구해야 할 마지막 과제이기도 했다. 2) 제국 문화 의 해외 선양 체제의 구축 국세의 발전에 정치 경제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그것을 활용하는 정책의 중요성을 역설한 외무성 관료들의 일본 문화에 대한 프라이드는 매우 높았다. 그 만큼, 그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훌륭한 일본 문화를 지금부터 어떤 형태로 세계에 알릴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다음 스텝은 자연 스럽게 체제 정비에 집중되었다. 대외 문화 사업에 대한 지배층의 공감대 형성은, 외무성의 내국으로서의 국제 문화 사업국 설립 구상을 시작으로, 학예 협력 국내 위원회(1933년 1월 설립)에서의 국제 문화 사업 을 둘러싼 조직 만들기의 구체적인 논의, 등의 형태로 현실화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영국과 미국 등의 반관반민 의 시스템도 차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재단법인 국제 문화 진흥회 이다. 1934년 4월에 창단된 진흥회 는, 초년도는 약 40만엔의 예산으로 출발했지만, 그 다음은 민간 (재계)의 지원 하에 규모를 늘려 제국 문화를 해외에 선양 하는 중추적인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 당해 갔다. 운영은 국제파 화족과 국제연맹 관계자, 그리고 외무성의 관료가 주축이 되었다. 오늘의 올 재팬 체제의 개념과 같은 형태로 대외 문화 공작 을 추진하는 조직 기반을 확립했던 것이 25) 杉 村 陽 太 郎 国 際 外 交 録 ( 前 掲 書 ) 361 頁 26) 杉 村 陽 太 郎 国 際 外 交 録 ( 前 掲 書 ) 367 頁 27) 衛 藤 瀋 吉 近 代 東 ア 彌 ア 国 際 関 係 史 東 京 大 学 出 版 会 2004 206 頁 51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다. 설립 목적에 대해서는 本 会 는 国 際 間 文 化 의 交 換 특히 日 本 및 東 方 文 化 의 海 外 宣 揚 을 도모하고 世 界 文 化 의 伸 展 및 人 類 福 祉 의 増 進 에 貢 献 하는 것을 目 的 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일본 문화의 해 외 선양을 통해서, 세계 문화와 인류 복지의 증진에 공헌한다고 하는 등식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 지만, 설립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이념에 대해서는 설립 취의서 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8) 現 代 世 界 ノ 国 際 関 係 ガ 複 雑 ヲ 加 フルニ 従 ッテ 難 問 重 疊 スルト 共 ニ 其 ノ 間 ニ 微 妙 ニ 動 キアルコトハ 国 際 事 情 ヲ 知 ル 者 ノ 容 易 ニ 看 取 シ 得 ル 所 ナリ 即 チ 政 治 的 折 衝 又 ハ 経 済 的 交 渉 ノ 外 ニ 国 民 相 互 ノ 感 情 学 問 芸 術 上 ノ 連 絡 乃 至 映 画 スポーツノ 交 驩 等 カ 国 際 関 係 ヲ 左 右 スルヲ 見 ル サレハ 一 国 家 カ 其 国 際 的 地 位 ヲ 確 保 シ 伸 張 スルハ 富 強 ノ 実 力 ト 相 並 ヒテ 自 国 文 化 ノ 品 位 価 値 ヲ 発 揮 シ 他 国 民 ヲシテ 尊 敬 ト 共 ニ 親 愛 同 情 ノ 念 ヲ 催 サシムルヲ 要 スルコト 亦 多 言 ヲ 要 セス 文 化 ノ 発 揚 ハ 一 国 ノ 品 位 ヲ 世 界 ニ 宣 布 スル 為 ニ 必 要 ナルノミナラス 又 国 民 ノ 自 覚 ヲ 喚 起 シテ 自 信 自 重 ヲ 加 フル 所 以 ノ 力 トモナルヘシ 世 界 ノ 文 明 諸 国 カアラユル 方 面 ニ 亘 リテ 自 国 ノ 文 化 ヲ 内 外 ニ 顕 揚 シ 宣 布 スル 為 ニ 広 大 ノ 施 設 ヲ 整 ヘ 文 化 活 動 ニ 努 力 シ テ 互 ニ 後 レサラントスルコト 是 レ 亦 叙 説 ヲ 要 セサル 顕 著 ノ 事 実 ナリ 且 ツ 現 時 世 界 文 化 ノ 危 機 ニ 際 シ 西 洋 諸 国 ニ 於 テモ 識 者 カ 眼 ヲ 東 方 ニ 注 キ 人 類 ノ 将 来 ニ 対 シテ 東 方 文 化 ノ 貢 献 ヲ 望 ミ 其 ノ 為 メニ 一 層 深 ク 東 方 特 ニ 日 本 ヲ 研 究 セントスルノ 機 運 顕 著 ナルモノナリ 此 機 ニ 乗 シ 此 傾 向 ヲ 促 進 シテ 我 国 並 ニ 東 方 文 化 ノ 真 義 価 値 ヲ 世 界 ニ 顕 揚 スルハ 啻 ニ 我 国 ノ 為 メノミナラス 実 ニ 世 界 ノ 為 メニ 遂 行 スヘキ 日 本 国 民 ノ 重 要 任 務 タルヘシ 此 事 業 タルヤ 多 方 面 ニ 亘 リ 困 難 ナルヘキハ 勿 論 ノ 次 第 ニシテ 此 カ 為 メニハ 鞏 固 ナル 機 関 ヲ 組 織 シ 官 民 力 ヲ 協 セテ 事 ニ 当 ルヲ 要 ス 我 等 カ 茲 ニ 財 団 法 人 国 際 文 化 振 興 会 ヲ 組 織 セントスハ 即 チ 此 目 的 ニ 出 ツルモノトシテ 本 会 自 ラ 必 要 ノ 事 業 ヲ 遂 行 スルト 共 ニ 汎 ク 内 外 ノ 団 体 個 人 ト 連 絡 ヲ 保 チ 又 適 当 ノ 援 助 ナシ 以 テ 文 化 ノ 国 際 的 進 運 ニ 資 シ 特 ニ 我 カ 国 民 及 ヒ 東 方 文 化 ノ 顕 揚 ニ 力 ヲ 致 サンコトヲ 期 ス 일본 문화에 대한 자각 요구는, 서양 문화에 필적할 수 있는 일본의 문화를 당당하게 선양 하 고, 세계 인류의 문화 복지에 공헌 한다고 하는 목적이지만, 그 뒤에는 국민에 대한 사상적 배 경의 전선적( 全 線 的 ) 음미와 통제 의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1) 메이지 이래 서양 문 화 섭취에 분주해 온 결과, 자국 문화의 우수성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던 것에 대한 반성의 뜻과 2) 일본의 국제적 지위 변화에 걸맞는 문화 가치를 발신하는 것에 의해서, 국제사회에서의 제국 일 본 의 새로운 평가를 받고, 3) 국민의 여론을 집약하여, 관민 일체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사상 적 지도 원리를 국민에게 피로하는 전략으로 문화 정책 외교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논리 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문화 전선의 국내적 통일(관민 일체 29) )로 국민의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여, 그에 따라 국제 문화 사업을 체계적으로 실시하는 핵심적 기관으로 창설된 것이 진흥회 라고 하는 것이 다. 따라서, 진흥회 가 실시해야 하는 국제 문화 사업 도, 처음부터 일본 문화의 우수성을 일방 적으로 세계에 선양 하는 것에 집중되고 있었다. 진흥회 의 사업 내용(표 1, 참조)이 그것을 말 하고 있다. 28) 財 団 法 人 国 際 文 化 振 興 会 設 立 経 過 及 昭 和 九 年 度 事 業 報 告 書 ( 前 掲 書 ) 11~12 頁 29) 振 興 会 의 주요구성멤버를 보면, 우선 고문에는 총리를 비롯, 宮 内 外 務 文 部 大 臣 의 이름이 이어져 있고, 회장은 총 리를 역임한 近 衛 文 麿 가 취임했다. 그리고, 주요 이사와 평의원에는 대학 총장, 교수를 비롯 재계, 관료, 정치가 등 소위 政 官 財 学 을 총망라하고 있다. 52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이것을 보면, 마치 근대에 있어서의 서구와 동아시아의 관계를 상징한 서방동점 의 흐름을, 지금 부터는 일본이 선두에 서서 동방 서점 의 흐름으로 바꾸려고 하는 제국 일본의 의지가 담겨져 있 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진흥회 의 사업 내용이, 동방 문명 유일한 대표 내지 집적국 으로서 의 일본의 빛 을 세계에 알리려고 한 柳澤建과 三枝茂智 등의 문화 사업 구상 내용과 거의 일치하 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30)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모두 서구 제국의 문화 사업의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나서 나온 것으로, 그것이 최종적으로 진흥회 의 핵심적인 문화 사업으로 통합 된 것이다. * 柳澤建의 문화 사업 구상 내용 1) 외국의 여러 대학에 일본 문화 강좌를 설치할 것, 2) 일본어 학교 혹은 일본어 학과를 설치할 것, 3) 학자 그 외의 파견 초빙 및 교환을 할 것, 4) 학생의 교환 등을 할 것, 5) 출판물, 그 외 것으로 일본 문화를 해외에 소개할 것, 6) 미술품, 그 외 각종의 문화 자료의 기증 교환을 할 것, 7) 내외에 있는 국제 문화 단체에 대해 보조 조성을 할 것, 8) 전람회 음악회 등을 해외에서 개최할 것, 9) 연극 영화 등을 해외에 진출시킬 것, 10) 국제적 스포츠 및 국기의 해외 진출에 대해 장려할 것. 表1 振興会 의 事業内容(事業綱要) 1 著述, 編纂, 翻訳 및 出版 文化活動의 각 방면에 걸쳐 日本語 또는 外国語의 著述을 創作, 編纂, 刊行한다 日本人에 의한 東方文化에 관한 学術論文 등을 外国語로 翻訳, 刊行한다 日本文化에 대한 外国語의 良書를 翻訳한다 2 講座 設置, 講師 派遣 및 交換 外国의 주요대학에 日本文化에 관한 講座設置 外国 学校에 日本語講座 혹은 日本語学校設置 外国과의 講師 派遣 및 交換을 推進 3 講演会, 展覧会 및 演奏会 開催 名士의 派遣, 招請 外国에서 日本文化에 관한 展覧会開催 芸術文化 紹介 및 演奏会開催 4 文化資料寄贈 및 交換 日本과 東方文化에 관한 資料를 外国 大学図書館 등에 寄贈 文化資料를 海外 博物館 등에 寄贈, 交換한다. 5 知名外国人 招請 各分野의 著名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日本의 真価를 認識시킨다 30) 柳澤健 国際文化事業とは何ぞや 続 前掲論文 44 49頁 53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6 外国人의 東方文化研究에 대한 便宜提供 来日하는 日本文化研究者 등에게 研究上 便宜를 供与한다 外国의 日本文化研究者 등에 研究上 便宜를 供与한다 7 學生 派遣 및 交換 将来国際文化活動에 従事할 수 있는 優秀한 学生을 外国에 留学시킨다 優秀한 外国 学生을 초청하여 日本에서 留学시킨다 内外大学間에서 学生交換을 한다 8 文化活動에 関係하는 団体 혹은 個人과의 聯絡 外国의 日本文化 東方文化団体 등과 密接한 関係를 맺는다 国内의 文化事業団体 등에 원조를 한다 9 映画 作成 및 그 指導援助 外国에 宣揚해야할 日本文化関連映画를 制作한다 이 종류의 映画를 制作하는 団体 個人 등에게는 指導援助한다 外国에 輸出하는 日本映画에는 統制, 検閲에 協力한다 10 会館, 図書室, 研究室 設置経営 以上의 事業을 達成할 수 있는 施設을 日本과 主要外国에 설치하거나, 設置에 원조한다. 本事業의 중심지인 東京에 가능한 빨리 中央会館을 設置한다 資料出 財団法人国際文化振興会設立経過及昭和九年度事業報告書 (前掲書) 13 16頁 4. 전후로의 계승-맺으며 내우외환의 위기적인 상태에서 근대국가로 다시 태어난 일본은, 비서구 사회에서는 유일하게 근대 화에 성공한 나라이다. 그리고, 불과 수십년간에 5대강국의 1인 지위 를 획득했다. 이 과정에서 일 본의 지배계급은, 민족 문화에 대한 의식 고취와 민족정신의 함양을 계속 주장했다. 세계로부터의 관심과 민족 의식의 고양을 배경으로, 일본은 우수한 자국 문화를 발양 해, 세계로부터의 일본 발 견 이라고 일본에 대한 진정한 존경과 사랑을 세계 대중에게 야기시키는 것을 당면의 국가적 과 제로 이해하고 실천했다. 그 목적은 명쾌했다. 민족 문화의 정신적 기초를 기본으로 하여 그 자신의 민족적 이상이, 동 시에 세계 각국의 적어도 본보기가 되고, 모범이 되는, 리딩 파워가 되는 이상 31)을 구현하는 것 이었다. 일본의 대외 문화 진흥 정책에 대해서는, 일부의 식자 중에는 비판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진흥회 의 활동을 일본 문화의 침략성 의 관점에서 파악한 清澤洌은 비상시가 되고 나서, 일 본은 세계 제일이든지, 세계 제일이 가지는 예술과 문화는 역시 세계 제일이며, 고로 이 세계 제일 의 예술을 감탄하지 않을 리가 없다, 라고 하는 논리가 유행하게 되면서, 일본 문화는 국가적 원조 하에 힘차게 유출되고 있다 32)라고 논하면서, 이것은 나치스의 문화도 같다고 지적했다. 清澤의 문제 제기는, 일본의 국제 지위 변화에 수반한 논리의 왜곡 현상의 확산과 거기에 뭣 모르 고 따른 국가 정책의 무모함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시대적 인식은 일본 문화의 대외 침략에 대한 경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유럽 주의, 세계를 백인적 견지 에서만 생각하는 사상을 타파해 진정한 세계 통일을 실현해야 할 33)사상으로서 주장된 동아 협동 31) 姉崎正治 国際文化事業の真意義 財団法人国際文化振興会設立経過及昭和九年度事業報告書 (前掲書)所収 190頁 32) 清澤洌 日本文化の侵略性 改造 1935年12月号 292頁 33)三木清 東亜思想の根拠 (前掲論文) 12頁 三木는 이 논문에서 支那 의 근대화와 민족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 으며, 支那 의 근대화야말로 동양 통일의 전제라는 인식을 밝히고 있다.그런 의미에서는 東亜協同体論의 支配的인 地政学 的概念을 歴史哲学的概念으로 再定義하고 意味転換하고, 多様한 個性者가 対等하게 民族을 構成하고, 多様한 民族이 対等 54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체의 사상 이 각광을 받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세계사적인 사상으로서 논해져 온 동아 사상 의 허구는, 東 亜 에 있어서의 安 定 勢 力 임을 실적 을 올리는 것을 帝 国 外 交 의 中 枢 方 針 으로 함 34) 이라고 하는 제국 외교 방침 (1936.8. 7)에, 또한 挙 国 一 致 堅 忍 不 抜 의 精 神 으로 現 下 의 時 局 에 対 処 35) 하는 것을 명한 국민 정신 총동원 실시 요 강 (1937.8. 24)의 선포 등의 과정을 거치고, 한층 더 전체주의를 강화하는 자극이 되었고, 최종적 으로는 대동아 신질서의 건설 을 실현한다고 하는 태평양전쟁의 이데올로기로 귀결되어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신의 대외 침략성은, 우수한 일본 문화의 대외 선양으로 채식되거나 미국과 영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정당방위로 바뀌거나 나치스의 유럽 신질서 에 대응하는 대동아 신 질서 의 사상으로서 왜곡되거나 끊임없이 그 본질을 숨긴 채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갔다. 그 허구성이, 또한 일본 정신의 고취와 문화 정책 외교의 강화를 주창하는 식자층의 담론을 양산하면 서 36), 제국 일본의 문화 팽창주의를 더욱 자극했으며, 한편 전후의 문화 외교의 역사적 기반이 되기 도 하였다. 그리고, 전후 일본은 유럽의 복지국가나 미국의 군사 국가의 길과는 다른, 이른바 산업국가로서의 길을 걸어 초강대국 에 오른 후, 한층 더 문화국가로서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전후 일본의 국가 발전 모델은, 여러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혼미가 깊어질 때마다 주목을 받고 있다. 국제사 회에 떠돌고 있는 대일관에는, 일본 경제의 국제적 존재의 확대를 솔직하게 환영할 수 없는, 말하자 면 초조함에 자극받은 대일 비판 의 강화라고 하는 측면과 일본 문화에 대한 심정적 동의와 경제 발전을 지지하고 있는 일본식 가치의 재고 혹은 흡수라고 하는 측면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 전후 일본의 문화 외교는, 한편에서는 전자의 해소와 후자의 확대라고 하는 이념적 성향을 받으며 전개되어 왔다. 국제사회에 놓인 일본의 입장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대일관 이 점차 후자로 이동하고 있는 현실에 입각하여 일본의 문화 외교도 더욱 더 일본식 가치의 확산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방향성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 지 하는 것과는 별도로, 일 본의 정책 노선이 아이러니컬하게도 국제사회의 요망과 일치하는 데가 있다. 이 기묘한 일치 가, 이제까지의 아시아의 제국 일본에 의한 트라우마와 구미의 문명 우월 의식을 넘어 향후 일본의 국제 적 지위를 한층 더 높여 가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된다. 하게 하나의 世 界 를 構 成 한다고 하는 비젼아래 東 亜 協 同 体 를 構 想 했다고 하는 内 田 弘 의 평가는 일리가 있는지도 모 른다. 三 木 清 の 東 亜 協 同 体 論 専 修 大 学 社 会 科 学 研 究 所 月 報 (No.508. 2005.10.20)2 頁. 그러나. 일본의 支 那 에 대한 행 동을 기본적으로는 白 人 帝 国 主 義 으로부터 解 放 하는 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 의식은 번편을 통해 일관되고 있다.특히, 당시의 시대적 사상 상황을 생각하면, 三 木 의 논리가 日 本 帝 国 主 義 를 변호하는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34) 山 田 明 編 外 交 資 料 近 代 日 本 の 膨 張 と 侵 略 ( 前 掲 書 ) 253 頁 35) 山 田 明 編 外 交 資 料 近 代 日 本 の 膨 張 と 侵 略 ( 前 掲 書 ) 257 頁 36) 예를 들어, 田 中 耕 太 郎 国 際 文 化 運 動 の 理 念 ( 改 造 1937 年 1 月 号 ) 文 化 協 定 と 文 化 工 作 ( 改 造 1939 年 6 月 号 ) 三 木 清 文 化 の 力 ( 改 造 1940 年 1 月 号 ) 矢 野 仁 一 日 支 文 化 の 交 流 ( 文 芸 春 秋 1939 年 6 月 号 ) 高 田 正 治 日 支 文 化 政 *の 将 来 ( 文 芸 春 秋 1941 年 1 月 号 ),등이 있다. 55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帝国日本の 文化外交 に関する少考 金弼東 世明大学日本語学科教授 始めに 人類史において文化を媒介にした交流の歴史を 文化交流 と理解する場合 交流の形は異 文化同士の自然発生的な接触による交流と 国とか集団が自分達の意図する何かの目的を持っ て政策的に行う交流とに大きく分けられる 近代以後の国際社会における 文化交流 といえ ば 主に後者の形がいわれがちだが 日本の場合も戦前から後者に重点をおいて それを 文 化事業 文化工作 文化外交 の観点から交流政策を推進した 要するに 文化交流の一 つの属性でもある自然発生的な側面を国が積極的に関与し 体系的に 指導管理 することに よって 日本文化の目的指向的海外伝播と日本の国際的地位向上を追求する政策を絶えず追求 した 筆者は 日本社会の 日本文化 をめぐる統合的価値の形成と それを活用した 外交 的 活動の歴史を 近現代の 日本的価値 の特徴を表す一つの有力な事例として考えている 日 本の文化政策と文化交流の外交的効果の極大化を狙う文化外交の実態を分析してみると自ずと 確認できる 従って本稿では まず日本の 文化外交 を分析する研究史的意味を 筆者の従 来の日本文化研究方法論と関連づけてとらえる視点を提示すると共に 文化外交における帝国 日本の 日本文化 の理解 文化外交 の概念 そして文化外交の認識背景と体制構築過程 等を分析した 1 文化外交研究の視点と背景 1 本研究の視座 筆者は 韓国における日本文化研究の深化を図るための方向性として まず日本 日本人 日本社会が体現する一般的情緒や心理及び伝統的な思惟様式が反映された文化様態を 通史的 観点ないしは社会構造的な側面で包括的に分析する研究を 日本文化研究 としてとらえた 後 それを充足させるためにも二つの前提条件(問題意識と研究方法論)が必要だということを 指摘したことがある1) 一つは 日本人の意識構造と行動様式 伝統思想や慣行 法や制度(或はキー コンセプトと して考えられる他の論点)などに基づいた一貫した論理で 日本の社会文化の諸現象を規定する 1) 拙論 韓国における 日本文化論 展開に関する一考察 日本学報 第58楫 2004.3参照 56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内 面 的 特 性 を 分 析 する 問 題 意 識 例 えば 意 識 構 造 や 行 動 様 式 の 分 析 それを 孕 む 社 会 構 造 の 分 析 日 本 文 化 の 特 徴 解 明 他 文 化 との 比 較 視 点 の 確 保 である これは 韓 国 における 日 本 文 化 研 究 の 生 育 基 盤 の 強 化 のためにも 強 く 求 められるべき 条 件 である 二 つは 問 題 意 識 を 客 観 的 な 結 果 に 導 き 出 すための 幅 広 い 資 料 の 収 集 と 科 学 的 研 究 方 法 論 の 鍛 練 が 必 要 である 特 に 方 法 論 においては 例 えば 現 実 生 活 における 日 本 人 の 思 惟 様 式 の 独 自 性 の 分 析 思 惟 様 式 とその 集 合 体 である 文 化 様 態 の 相 関 関 係 分 析 その 結 果 として 規 定 され た 制 度 や 慣 行 などが また 日 本 人 の 意 識 世 界 を 束 縛 する 形 態 を 連 続 循 環 的 に 分 析 する 方 法 論 の 鍛 練 である したがって 帝 国 日 本 の 文 化 外 交 の 全 体 像 を 分 析 するさい 筆 者 が 注 目 したいのは 既 存 の 国 際 政 治 構 造 との 関 連 性 の 中 で 把 握 する 方 法 論 ではなく 1) 日 本 人 の 思 惟 様 式 と 支 配 階 級 のイデオロギー 等 が 歴 史 を 通 じて 形 作 ってきた 認 識 論 的 実 践 論 的 思 惟 様 式 の 特 徴 2)それが 日 本 の 国 際 的 地 位 変 化 を 反 映 した 外 交 政 策 と 結 び 付 いて 行 く 過 程 3)その 結 果 としての 日 本 的 価 値 の 拡 大 再 生 産 新 たな 国 家 イメージ 創 出 世 界 の 暮 らし 文 化 の 日 本 化 促 進 メカニ ズム 解 明 等 である 要 するに 日 本 の 文 化 とその 文 化 が 発 する 諸 価 値 を 重 視 する 日 2) の 思 惟 様 式 が 外 交 を 媒 介 にして 追 求 しようとした 目 的 指 向 的 価 値 及 びその 結 果 と 意 味 を 実 証 具 体 的 に 分 析 することである 2) 本 研 究 の 時 代 史 的 背 景 ー 思 想 文 化 的 観 点 からの 歴 史 性 国 際 社 会 における 力 の 源 泉 の 変 化 (The changing sources of power)を 唱 えたジョセフ S ナイは 日 本 は1930 年 代 の 大 東 亜 共 栄 圏 (Greater East Asian Co-Prosperity Sphere)を 創 設 し ようとした 軍 事 戦 略 よりも 1945 年 以 後 の 通 商 国 家 (trading state)として 生 きる 戦 略 が 日 本 に とって 遥 かによかったと 評 価 している しかしながら 相 手 を 従 わせる 力 (command power)の 面 では 日 本 は 天 然 資 源 に 乏 しく 軍 事 力 も 相 対 的 には 弱 いし 特 に 相 手 を 引 き 寄 せる (co-optive) 重 要 な 力 である 文 化 の 面 においては 日 本 は 極 めて 孤 立 しているという 3) 一 言 で いえば 経 済 成 長 戦 略 は 今 後 も 有 効 であろうが 文 化 的 に 孤 立 (insular)していては 国 際 社 会 で の 影 響 力 拡 大 は 難 しいという 論 理 である 文 化 力 が 発 する 政 治 的 影 響 力 を 含 め 総 合 的 に 世 界 的 な 支 持 力 という 観 点 からみると アメ リカの 文 化 力 は 日 本 に 勝 っていることは 間 違 いない だが 日 本 文 化 が 孤 立 しているがため 影 響 力 の 拡 大 に 限 界 があるという 論 理 は 偏 狭 的 で オリエンタリズム 的 発 想 である ポスト 冷 戦 時 代 における 文 化 的 パワーは それの 政 治 的 影 響 力 よりは 暮 しの 文 化 に 及 ぼす 影 響 力 がより 注 目 されている 特 に 経 済 大 国 の 地 位 に 便 乗 して 国 際 的 に 広 がっている 日 本 のサブ カルチャーの 影 響 力 を ジョセフは 見 逃 しているし 彼 の 認 識 をあざ 笑 うかのように クール ジャパン の 世 界 化 は 強 まっている その 支 持 が 今 は 日 本 の 文 化 外 交 の 発 想 まで 変 えられる 基 盤 になっており 究 極 的 には21 世 紀 における 日 本 の 文 化 大 国 化 の 野 望 を 可 能 にせしめる 大 事 な 資 源 として 脚 光 を 浴 びている 今 文 化 外 交 の 持 っている 意 味 とその 影 響 力 は 国 際 社 会 を 支 配 した20 世 紀 価 値 の 崩 壊 と 共 に 益 々 高 まっている 日 本 の GNC が 世 界 から 注 目 を 浴 びているように もはや 日 本 社 会 は 2) ここでいう 日 は 日 本 日 本 人 日 本 社 会 の 総 称 である. 3) Joseph S.Nye,Jr: BOUND TO READ:the chandind nature of American power Basic Books 1990 29~33 頁 57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近 代 の 富 国 強 兵 論 や 戦 後 の 富 国 (= 経 済 力 ) 論 理 を 越 え また アジアに 対 する 文 化 優 越 意 識 や 西 欧 コンプレックスを 越 え 日 本 文 化 の 再 評 価 と 広 がりを 通 じた 文 化 大 国 日 本 の 具 現 に 拍 車 を かけている この 流 れは 文 化 強 国 を 夢 見 ている 韓 国 社 会 に 多 くのことを 考 えさせており また 本 研 究 を 促 す 一 つの 要 因 でもあるが より 具 体 的 には 思 想 文 化 的 に 見 逃 せない 歴 史 性 が いくつかある 一 つ 目 は 日 本 の 文 化 外 交 の 生 育 基 盤 として 日 本 の 国 際 文 化 交 流 と 日 本 文 化 形 成 の 歴 史 的 基 盤 ( 国 際 交 流 を 通 じた 受 容 と 発 信 の 歴 史 )を 重 視 すべきであり そこから 日 本 文 化 のアイデンティティが 形 成 されたという 歴 史 性 である つまり 絶 えず 国 の 文 明 文 化 進 化 の 原 動 力 として 当 該 の 先 進 文 明 を 積 極 的 に 吸 収 しながら それを 日 本 化 する 創 造 的 受 容 を 実 践 してきた 二 つ 目 は 逆 発 想 による 日 本 的 価 値 の 対 外 指 向 性 である 文 化 的 地 理 的 な 観 点 からみる と 日 本 は 確 かに 世 界 の 周 縁 部 に 位 置 しているがため 文 化 的 に 日 本 は 一 度 も 世 界 の 中 心 に 立 つようなことはなかった それを 外 からは 日 本 文 化 の 孤 立 の 視 点 からみたがっているが 日 本 はその 限 界 を 逆 に 民 族 繁 栄 と 対 外 膨 張 のための 活 路 として 前 向 きに 変 えてきたし そ の 過 程 で 日 本 的 価 値 の 対 外 拡 散 が 対 外 政 策 の 一 環 として 広 が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 歴 史 性 である 三 つ 目 は 文 化 による 外 交 という 発 想 が すでに 帝 国 日 本 の 対 外 膨 脹 過 程 で 構 想 され 実 践 されたという 歴 史 性 の 重 視 である 文 化 外 交 に 関 する 認 識 は 1920 年 代 を 過 ぎると 具 体 性 を 浴 びて 現 れてくる 杉 村 陽 太 郎 の 経 済 立 国 と 文 化 政 策 構 想 越 智 元 治 や 柳 沢 健 の 国 際 文 化 事 業 構 想 三 枝 茂 智 の 文 化 立 国 策 構 想 松 本 学 の 文 化 国 際 連 盟 構 想 などが 代 表 的 である 4) これ らの 構 想 のなかで 日 本 文 化 の 海 外 紹 介 学 術 文 化 交 流 の 拡 充 日 本 的 価 値 の 伝 播 日 本 文 化 の 学 問 的 研 究 基 盤 構 築 と 対 外 文 化 政 策 との 連 携 文 化 外 交 や 国 民 外 交 論 の 提 唱 などが 唱 えら れ 今 日 までその 理 念 と 方 向 性 が 受 け 継 がれている 四 つ 目 は 文 化 外 交 は21 世 紀 の 日 本 外 交 が 指 向 する 国 家 戦 略 の 要 諦 だという 点 である ジョセフ ナイが 対 外 政 策 における 目 に 見 えない 力 (その 国 が 内 面 から 醸 し 出 す 魅 力 )としてソ フト パワーを 唱 えているように 5) 今 日 の 国 力 と 外 交 力 における 文 化 の 影 響 力 は 益 々 強 く なっており 政 治 経 済 の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とかみ 合 った グローバルな 文 化 システ ム 6) の 成 熟 も 著 しい そのため 日 本 は 21 世 紀 の 国 力 として 文 化 力 ( 伝 統 文 化 + 現 代 文 化 )の 重 要 性 を 汎 国 家 的 に 再 認 識 し その 価 値 を 極 大 化 するための 全 国 民 的 なエネルギーを 結 集 してい る 五 つ 目 は 日 本 の 国 際 的 地 位 変 化 と 文 化 外 交 との 深 い 関 連 性 である 例 えば 敗 戦 国 戦 後 復 興 国 際 社 会 復 帰 平 和 国 家 高 度 経 済 成 長 経 済 先 進 国 経 済 大 国 国 際 国 家 文 化 大 国 4) 芝 崎 厚 土 近 代 日 本 と 国 際 文 化 交 流 ( 有 信 堂 高 文 社 1999), 第 三 章 誕 生 1 対 外 文 化 政 策 の 構 想 参 照 5) Joseph S. Nye Jr SOFT POWER-The Means Success in World Politics Perseus Books Group, 2004 参 照.Josephによると ソフト パワー とは 行 動 原 理 からみれば 味 方 に 引 き 付 ける 魅 力 の 力 (power of attraction) であり その 力 を 引 き 出 す 関 連 性 の 高 い 厳 選 として 制 度 価 値 観 文 化, 政 策 などをとりあげている. SOFT POWER 5~11 頁 6) Martin Showは 個 々の 経 済 的 政 治 的 利 害 への 固 執 と 同 様 に 個 々の 観 念 やアイデンティティへの 固 執 もあるが それでもやは り 普 遍 的 な 文 化 の 成 長 は 著 しい と 指 摘 しながら より 重 要 なことは 経 済 政 治 の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とかみ 合 いながら これらの 過 程 を 通 して 人 々が 共 通 の 期 待 と 価 値 観 と 目 標 をもって 自 分 達 の 生 活 をみるようになりつつある.これらの 文 化 的 規 範 には 生 活 水 準 生 活 様 式 福 祉 の 権 利 市 民 権 民 主 主 義 民 族 的 言 語 的 権 利 独 立 国 家 としての 地 位 性 の 平 等 環 境 水 準 などの 観 念 が 含 まれる という.そして これらの 観 念 の 多 くは 西 欧 に 起 源 をもつが それぞれの 社 会 的 文 脈 の 中 で 大 きな 解 釈 の 違 いを 伴 いながらも 世 界 中 で 益 々 生 活 様 式 と 政 治 理 論 の 一 部 となりつつあるという.ここでグローバルな 文 化 とりわ けグローバルな 政 治 文 化 が 姿 を 現 してくると 指 摘 している. グローバル 社 会 と 国 際 政 治 高 屋 定 国 松 尾 眞 訳 ミネルヴァ 書 房 1997,29~30 頁 58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という いわば国際社会の情勢変化やその中での日本の役割 国家イメージの 変化 を適切 に反映 をうまく見極めながら より国家化 戦略化された形で 日本文化 の戦略的発信が 行われてきた 2 文化外交における 日本文化 の理解と 文化外交 の概念 近代以後日本の知識人社会は 文化 をドイツ語の文化概念を借用し 高度な精神的な所 産 としてとらえる傾向が強かった 英語用法が混じったドイツ語用法における 文化 の概 念は 品位のある用語 重みのある 用語としての Kultur であり これは 18世紀以来ゲ ルマン国民の言語と本質のあらゆる次元における表れを示すもの であった7) 当時西欧社会における 文化 は 知識人達の専有物のように認識されていたし その意味 では18世紀の学問 芸術などの精神分野におけるゲルマン民族の活躍ぶりを高く評価していた 時代的認識が そのまま 文化 の概念として定着されたとしてもおかしいことではなかっ た ただ この場合 文化 は 精神的 道徳的向上を図る教養と一体化され それを享有で きる主体も高い修養を備えたエリート階級に限られてしまい 大衆は排除されるという限界を 持っていた 西洋の文化発達過程を特徴づけたこの貴族主義的概念が 近代日本の知識人社会をそのまま 支配した 明治初期文明開化を主導した啓蒙的知識人達の愚民観にその実体が象徴的に表れて いたし8) 専制政府に対抗した自由民権運動家達の思惟様式においても 民衆達の意識世界と は離れた次元で 文化 が唱えられていた9) このような現実に対しては知識人による批判的 考察もあるが10) いずれにせよ文化に対する狭義的理解と 文化形態をエリート層の独占的専 有物のように思う発想に変りはなかった だが 帝国日本の本格的な対外侵略と それと相俟って日本文化の対外 宣揚 意識が高ま るにつれて 文化に対する認識も徐々に弾力的に理解されるようになった 代表的な人物が この頃帝国日本の対外文化事業を主導した三枝茂智であった 三枝は 文化と文明を同一概念 としてとらえた上 それは 経済的生活 芸術活動 政治生活 宗教生活 知的生活の進歩発 達 として いわば 社会生活の最高水準とせらるるものを意味 11)すると定義した これを文化の 最広義 的解釈であるといった彼は もう少し 狭義 的に解釈すれば 純 粋の価値将又精神的文明と云ふ範囲に属する事項は勿論夫れ以外に於きましても 価値と云ふ 方面を主として其存在の方面として居る事物即ち主として価値的存在を持って居る事物をも 我々の目的主観を加味いたしまして 此等一切を文化と云ふ文字 文化財と云ふ文字の中に入 れ ることができるし 文化事業の担当者はこのような考え方を持つべく必要があると主張し た12) 近藤春雄も後を次いだ 近藤は 文化と文明は区別されるべきものだという前提に立ってい るものの 文化という概念の多様性は文化活動の多角性を産み出すので 文化外交の内容も学 7) Mare Fumaroli 文化国家ー近代の宗教 (天野恒雄訳) 山陽社 1993 188頁 8) 拙論 啓蒙思想に関する少考 日本学報 第71緝(2007.5.30)参照 9) 拙論 自由民権運動の 在地化 過程に関する研究 日本学報 第61緝(2004.11.30)参照 10)田中耕太郎は 明治以来日本の文化は常に支配階級やエリート層が支配してきたといいながら 文化享有の主体はいうまでもな く国家ではなく民衆だということを主張している 国際文化運動の理念 改造 1937年1月号 8 9頁 11) 三枝茂智 極東外交論策 斯文書院 1933 627頁 12) 三枝茂智 対外文化政策に就て 支那 (1931年 8月号) 17頁 59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術 芸術などの精神的労作から技術的蓄積の交換に至るまで 幅広い範囲でとらえるべきだと 主張した13) 近藤がいう 技術的蓄積 の内容は明らかではないが 現実生活における日本の 先進的文化財一般まで たとえば 従来 職人 の生業としてさほど高く評価されなかった庭 園術とか染色術まで一つの大きい 日本文化 の一分野として取り上げられ新しい価値 14)を 付与しようとする考え方である これは 日本の 文化宣揚 のための日本文化の 再構成 を意味するものであり それに よって 文化事業 の対象をも精神的文明や学問の対象になるような概念から 商品のような 文化価値を表現する文化的財貨まで拡大して解釈できる余地が生まれる 文化的財貨に取り囲 まれた生活文化の重視という発想 つまり 文化を日常的な観点から読み直そうとする意志の もとで 日本文化の発信能力を強化するという試みである この経緯を踏まえて定義してみると まず日本のイデオログ側が考えている 日本文化 と いうものは 日本の伝統的な美や精神が溶かされている文化財的遺産から 日本人の規範意識 や諸価値が反映されている有 無形の社会的 知的資産 そして現代の生活様式を取り巻く多 様な文化的財貨までを総称する概念である そして 文化外交 とは この有 無形の文化的 所産を 日本文化の魅力 として看做し それを 外交 という手段を通じて世界に拡散させ ることである 要するに 固有の精神的 物質的 技術的所産として幅広い範囲で継承 創造 されている諸文化価値を 交流 交渉 政策の一環として対外的に活用し 外交的効果を極大 化することによって 国際社会における日本のイメージ改善 地位向上 国際協力等を図って いく戦略的 目的指向的外交活動の総体が 文化外交 である 3 帝国日本の 文化外交 の認識と体制構築 1 帝国日本の対外文化事業構想 近代日本が日本の国際的地位を反映した外交原則といったものを探求し始めたのは日露戦争 直後である 近代以後日本の国際問題は 条約改正 軍備の充実 朝鮮半島における支配権の 確立ということに集中されていたが 日露戦争後は国の独立や使命とは何か 日本が世界の一 国としてなしうること なさねばならぬことは何か そもそも国際問題とはどうあるべきもの なのか 世界の動向はどのように変っていこうとしているのか その中にあって日本はどう進 むべきか 等について真剣に考えるようになった15) 第一次大戦後日本は 国際連盟に加入し 当時国際文化交流史上特記すべき出来事として注 目を浴びた 知的協力委員会(International Committee on Intellectual Cooperation) に積 極的に協力すると共に 国策としての文化事業推進の必要性を認識し始めた そして 1922年 外務省に 対支文化事業特別会計 を設置(翌年 文化事業部 となる)し 予算300万円の規模 で対 支那 文化事業をスタートした16) この頃から日本の識者層は 国の政策を後押しするかのように広く海外との文化交流事業の 重要性を唱え始める その代表的な人物が須磨彌吉郎と柳澤健である スペイン特命全権公使 13) 14) 15) 16) 近藤春雄 文化外交の思想的背景 外交時報 76号 1934 参照 宮城望 文化宣揚と文化宣伝 国際文化 第5号 国際文化振興会 1939 5頁 入江昭 日本の外交 中公新書 1966 6 7頁 外務省文化事業部 国際文化交流の現状と展望 大蔵省印刷局 1973 8頁 60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を歴任した須磨は 東洋文化外交試論 という論文を通じて 日本の国際的地位変化と相俟っ て 文化を外交の核心領域としてとらえるべき認識を表明した17) 柳澤健は 国際文化事業 を 学術とか教育とか宗教とか芸術とか乃至はスポーツとかの所謂文化的方面をば中心とする 対外活動 として位置づけ 文化外交 を政治 経済外交と共に外交の三大軸の一つとして とらえるべきだといった 特に文化外交は 単に一国の政治 経済的方面の活動途上に於ける紛争防止というが如き 消極的の役割を果たすものである許りでなく 進んで一国の政治 経済の活動を助長し強化す る多大の力 を持っているがため 政治 経済 文化といった 三面の外交活動 の中でも 最も重要且つ根本的なもの として見なすべきであり その意味から対外文化事業の必要性 と効果を強調する欧州諸国の論者たちの主張は正しいと力説した18) その後 体系的な対外文化政策構想が相次いで提起された 三枝茂智は ヨーロッパの諸国 が対外文化事業を通じて 1 自国の国粋主義維持 2 自国言語の諸外国へ紹介 3 自国文化 を諸外国へ移させる 4 自国の価値の世界的認識を促進 5 外国人の人心を収攬する 等の 目的を達成しているという事実を冷静に受け止めた19) ヨーロッパの列強が 自分の国の領域 を外国人の観念界に広げ ることによって 自国民族の存立発展に有利になる環境 を作って いく戦略を 文化事業を通じて実現していると判断したのである 三枝によると 日本は地域的基盤として 何となれば国粋文化宣伝戦に於て 吾人は絶好の 戦略地点を占めて いたし 文明的観点からも 日本主義 印度哲学 儒教精神等を集大成し て いた 見方によっては 世界文化の半分を所有 しているがため 日本人が否応なしに 価値の世界 の王座に君臨しようとする意志さえあれば 世界一全の最高文化を産出 でき る能力は備えていたわけである20) 対外文化事業を通じて新しい 指導精神 を世界に発信しようとする意図は まず 大東 亜 に向けられた その中でも主要な攻略対象はいうまでもなく中国であった 当時日本は 満州国ヲ育成シ同国トノ特殊不可分関係ヲ益々鞏固ナラシメ 世界的見地ニ於テ蘇支両国ト ノ関係ヲ自主的ニ調整スルと共ニ 南方方面ニ平和的発展進出ヲ計リ 依テ東亜ニ於ケル安定 勢力 を確保し それから 帝国ノ存立発展 を図ることを 帝国外交の中枢方針 として 決めていた21) 帝国日本の 対支那 文化政策の重視を 芝崎厚史は 対支文化事業を通して東方文化の宣 揚に努力していることを列強に理解させる行為 22)の一環としてとらえているが 冷静に考え ると 大陸帝国 の地位を確保した日本が 次なる 指導精神 の実践を通して 文化帝国主 義 の実現に乗り出したことを意味する 帝国主義政策として最も巧妙なものとしていわれている 文化帝国主義 は 領土の征服や 経済生活の統制を目的としない その目的は 二国間の力関係を変えるための手段として 人 間の心を征服し制御する ことにある23) 特に 文化帝国主義の実現は計量的には計り知れな い大きな魅力があるがため この頃多くの識者層は 日本のアジアにおける近代文明の先駆者 としての地位を活用し 帝国日本の文化的リーダーシップの発揮を強く求めていた その役割 17) 須磨彌吉郎 東洋文化外交試論 外交時報 490号 1925 18) 柳澤健 国際文化事業とは何ぞや 外交時報 第704号 1934 71 74頁 19) 三枝茂智 対外文化政策に就て (前掲論文)22 23頁 20) 三枝茂智 対外文化政策に就て (前掲論文)25頁 21) 山田明編 外交資料 近代日本の膨張と侵略 新日本出版社 1997 253頁 22) 芝崎厚史 近代日本と国際文化交流 有信堂高文社 1999 65頁 23) Hans J. Morgenthau POLITICS AMONG NATIONS (前掲書) 64頁 61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を 強 く 主 張 した 人 物 が 杉 村 陽 太 郎 であった 彼 は 極 東 の 平 和 を 思 い 満 人 鮮 人 の 幸 福 を 念 とし 独 立 若 しくは 併 合 を 援 助 し 又 は 敢 行 したる 場 合 その 行 動 は 義 人 の 行 為 であり 仁 者 の 行 為 である 24) といいながら アジアの 平 和 を 乱 し アジア 人 を 蔑 視 し 奴 隷 視 するものはすべて 日 本 の 敵 と 見 なし 断 固 たる 処 置 を とるべきであると 主 張 した 帝 国 日 本 の 膨 張 主 義 がアジアにおける 文 明 大 国 としての 使 命 をは たすことにすり 替 えられている しかし これだけでは 極 東 平 和 の 擁 護 者 としての 帝 国 日 本 の 存 在 感 は 薄 い 杉 村 は す でに 古 代 のローマ 近 代 のイギリス フランス アメリカ 等 の 歴 史 が 日 本 にとって 善 き 手 本 であるように 文 化 的 努 力 が 伴 わなければ 真 の 国 権 の 伸 張 はないと 断 言 した 杉 浦 は 文 化 政 策 なしには 国 勢 の 伸 展 は 望 めないといいながら その 当 為 性 を 次 のように 強 調 した 25) 我 優 秀 なる 文 明 を 普 く 世 界 に 理 解 せしめ 国 際 上 に 於 ける 我 品 位 を 高 め 我 国 民 性 に 対 する 各 国 民 の 尊 敬 を 確 保 し 斯 くして 彼 我 国 交 の 基 礎 を 単 なる 権 力 又 は 財 力 の 上 のみならず 一 層 高 尚 なる 相 互 理 解 及 び 尊 信 の 観 念 の 上 に 築 くことが 国 勢 の 発 展 に 缺 くべからざる 要 件 であ り 政 治 的 に 見 た 国 権 の 伸 展 も 経 済 的 見 地 よりする 商 権 の 伸 展 も 文 化 的 努 力 の 伴 わざると き その 根 底 は 極 めてよわきものとなるべきを 知 らねばならぬ 文 明 大 国 である 日 本 の 文 化 を 広 く 世 界 に 普 及 し その 過 程 で 帝 国 日 本 が 東 亜 の 指 導 者 で あることを 世 界 に 刻 印 させ その 尊 敬 心 に 基 づいてアジアの 文 明 化 を 先 導 していく その ために 何 よりも 文 化 政 策 が 大 事 であるという この 場 合 文 化 政 策 とは いうまでもなく 宗 教 科 学 芸 術 等 の 形 で 行 われるが 一 方 では 政 治 道 徳 商 業 道 徳 殊 に 国 民 外 交 による 国 民 道 徳 に 遵 拠 して 極 めて 有 効 に 機 能 するので その 重 要 性 を 決 して 見 逃 してはいけないと 力 説 した 積 極 的 な 対 外 文 化 政 策 を 通 じて 帝 国 日 本 の 国 際 的 地 位 を 確 固 たるものにしようとした 杉 村 は その 体 制 についても 外 務 省 のみならず 官 民 一 致 国 民 的 基 礎 の 上 に 行 はれる 時 代 が 来 た 26) と 主 張 しながら 既 存 の 文 化 政 策 の 全 面 的 な 変 化 を 促 した 帝 国 日 本 の 文 化 帝 国 化 への 動 きが 国 民 的 基 礎 の 上 本 格 的 に 推 進 できる 体 制 整 備 に 入 ったのもこの 頃 からである こ れは 第 一 次 世 界 大 戦 の 後 国 際 社 会 における 日 本 の 政 治 的 発 言 力 の 強 化 とそれに 見 合 った 経 済 的 プレゼンスの 拡 大 27)に 続 き 帝 国 日 本 が 追 求 すべき 最 後 の 課 題 でもあった 2) 帝 国 文 化 の 海 外 宣 揚 体 制 の 構 築 国 勢 の 発 展 に 政 治 経 済 だけではなく 文 化 とそれを 活 用 する 政 策 の 重 要 性 を 力 説 した 外 務 省 官 僚 達 の 日 本 文 化 に 対 するプライドはとても 高 かった その 分 彼 等 にとって 残 された 課 題 は 立 派 な 日 本 文 化 をこれからどういう 形 で 世 界 に 知 らしめるかであった そのため 彼 等 の 次 なるステップは 自 然 に 体 制 の 整 備 に 集 中 した 24) 杉 村 陽 太 郎 国 際 外 交 録 ( 前 掲 書 ) 380 頁 25) 杉 村 陽 太 郎 国 際 外 交 録 ( 前 掲 書 ) 361 頁 26) 杉 村 陽 太 郎 国 際 外 交 録 ( 前 掲 書 ) 367 頁 27) 衛 藤 瀋 吉 近 代 東 アジア 国 際 関 係 史 東 京 大 学 出 版 会 2004 206 頁 62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対 外 文 化 事 業 に 対 する 支 配 層 の 共 感 帶 形 成 は 外 務 省 の 内 局 としての 国 際 文 化 事 業 局 設 立 構 想 をはじめ 学 芸 協 力 国 内 委 員 会 (1933 年 1 月 設 立 )での 国 際 文 化 事 業 をめぐる 組 織 づく りの 具 体 的 な 論 議 等 の 形 で 現 実 化 されていった この 過 程 で イギリスやアメリカ 等 の 半 官 半 民 のシステムも 借 用 された こうして 生 まれたのが 財 団 法 人 国 際 文 化 振 興 会 であ る 1934 年 4 月 に 旗 をあげた 振 興 会 は 初 年 度 は 約 40 万 円 の 予 算 で 出 発 したが その 後 は 民 間 ( 財 界 )の 支 援 のもとで 規 模 を 膨 らませ 帝 国 ノ 文 化 ヲ 海 外 ニ 宣 揚 する 中 枢 的 な 機 関 としての 役 割 を 担 っていった 運 営 は 国 際 派 華 族 と 国 際 連 盟 関 係 者 そして 外 務 省 の 官 僚 が 主 軸 になっ た 今 日 の オール ジャパン 体 制 の 概 念 と 同 じ 形 で 対 外 文 化 工 作 を 推 進 する 組 織 基 盤 を 確 立 したのである 設 立 の 目 的 については 本 会 ハ 国 際 間 文 化 ノ 交 換 殊 ニ 日 本 及 東 方 文 化 ノ 海 外 宣 揚 ヲ 図 リ 世 界 文 化 ノ 伸 展 及 人 類 福 祉 ノ 増 進 ニ 貢 献 スルヲ 以 テ 目 的 ト すると 記 している 日 本 文 化 の 海 外 宣 揚 を 通 じて 世 界 文 化 と 人 類 福 祉 の 増 進 に 貢 献 するという 等 式 を 明 確 に 提 示 しているが 設 立 にあたる 具 体 的 な 理 念 については 設 立 趣 意 書 の 中 で 次 のように 述 べている 28) 現 代 世 界 ノ 国 際 関 係 ガ 複 雑 ヲ 加 フルニ 従 ッテ 難 問 重 疊 スルト 共 ニ 其 ノ 間 ニ 微 妙 ニ 動 キアルコ トハ 国 際 事 情 ヲ 知 ル 者 ノ 容 易 ニ 看 取 シ 得 ル 所 ナリ 即 チ 政 治 的 折 衝 又 ハ 経 済 的 交 渉 ノ 外 ニ 国 民 相 互 ノ 感 情 学 問 芸 術 上 ノ 連 絡 乃 至 映 画 スポーツノ 交 驩 等 カ 国 際 関 係 ヲ 左 右 スルヲ 見 ル サレハ 一 国 家 カ 其 国 際 的 地 位 ヲ 確 保 シ 伸 張 スルハ 富 強 ノ 実 力 ト 相 並 ヒテ 自 国 文 化 ノ 品 位 価 値 ヲ 発 揮 シ 他 国 民 ヲシテ 尊 敬 ト 共 ニ 親 愛 同 情 ノ 念 ヲ 催 サシムルヲ 要 スルコト 亦 多 言 ヲ 要 セス 文 化 ノ 発 揚 ハ 一 国 ノ 品 位 ヲ 世 界 ニ 宣 布 スル 為 ニ 必 要 ナルノミナラス 又 国 民 ノ 自 覚 ヲ 喚 起 シテ 自 信 自 重 ヲ 加 フル 所 以 ノ 力 トモナルヘシ 世 界 ノ 文 明 諸 国 カアラユル 方 面 ニ 亘 リテ 自 国 ノ 文 化 ヲ 内 外 ニ 顕 揚 シ 宣 布 スル 為 ニ 広 大 ノ 施 設 ヲ 整 ヘ 文 化 活 動 ニ 努 力 シテ 互 ニ 後 レサラントスルコト 是 レ 亦 叙 説 ヲ 要 セサル 顕 著 ノ 事 実 ナリ 且 ツ 現 時 世 界 文 化 ノ 危 機 ニ 際 シ 西 洋 諸 国 ニ 於 テモ 識 者 カ 眼 ヲ 東 方 ニ 注 キ 人 類 ノ 将 来 ニ 対 シテ 東 方 文 化 ノ 貢 献 ヲ 望 ミ 其 ノ 為 メニ 一 層 深 ク 東 方 特 ニ 日 本 ヲ 研 究 セントスルノ 機 運 顕 著 ナル モノナリ 此 機 ニ 乗 シ 此 傾 向 ヲ 促 進 シテ 我 国 並 ニ 東 方 文 化 ノ 真 義 価 値 ヲ 世 界 ニ 顕 揚 スルハ 啻 ニ 我 国 ノ 為 メノミナラス 実 ニ 世 界 ノ 為 メニ 遂 行 スヘキ 日 本 国 民 ノ 重 要 任 務 タルヘシ 此 事 業 タルヤ 多 方 面 ニ 亘 リ 困 難 ナルヘキハ 勿 論 ノ 次 第 ニシテ 此 カ 為 メニハ 鞏 固 ナル 機 関 ヲ 組 織 シ 官 民 力 ヲ 協 セテ 事 ニ 当 ルヲ 要 ス 我 等 カ 茲 ニ 財 団 法 人 国 際 文 化 振 興 会 ヲ 組 織 セントスハ 即 チ 此 目 的 ニ 出 ツル モノトシテ 本 会 自 ラ 必 要 ノ 事 業 ヲ 遂 行 スルト 共 ニ 汎 ク 内 外 ノ 団 体 個 人 ト 連 絡 ヲ 保 チ 又 適 当 ノ 援 助 ナシ 以 テ 文 化 ノ 国 際 的 進 運 ニ 資 シ 特 ニ 我 カ 国 民 及 ヒ 東 方 文 化 ノ 顕 揚 ニ 力 ヲ 致 サンコトヲ 期 ス 日 本 文 化 に 対 する 自 覚 要 求 は 西 洋 文 化 に 匹 敵 できる 日 本 の 文 化 を 堂 々 宣 揚 し 世 界 人 類 ノ 文 化 福 祉 ニ 貢 献 するという 狙 いであるが その 裏 には 国 民 に 対 する 思 想 的 背 景 の 全 線 的 吟 味 と 統 制 の 目 的 が 隠 されていた 具 体 的 には 1) 明 治 以 来 西 洋 文 化 摂 取 に 奔 走 してき た 結 果 自 国 文 化 の 優 秀 性 に 対 する 自 覚 が 乏 しかったことに 対 する 反 省 の 念 と 2) 日 本 の 国 際 的 地 位 変 化 に 相 応 しい 文 化 価 値 を 発 信 することによって 国 際 社 会 における 帝 国 日 本 の 新 28) 財 団 法 人 国 際 文 化 振 興 会 設 立 経 過 及 昭 和 九 年 度 事 業 報 告 書 ( 前 掲 書 ) 11~12 頁 63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たな 位 置 づけ 3) 国 民 の 世 論 を 集 約 し 官 民 一 体 の 真 価 を 発 揮 できる 思 想 的 指 導 原 理 を 国 民 に 披 露 する 戦 略 として 文 化 政 策 外 交 が 重 視 せざるをえないという 論 理 である 一 言 で 云 えば 文 化 戦 線 の 国 内 的 統 一 ( 官 民 一 体 29))で 国 民 の 思 想 的 統 合 をはかり それに よって 国 際 文 化 事 業 を 体 系 的 に 行 う 中 核 的 機 関 として 創 設 されたのが 振 興 会 だということ である 従 って 振 興 会 が 行 うべき 国 際 文 化 事 業 も 最 初 から 日 本 文 化 の 優 秀 性 を 一 方 的 に 世 界 に 宣 揚 することに 集 中 していた 振 興 会 の 事 業 内 容 ( 表 1 参 照 )がそれを 物 語 っている これを 見 ると まるで 近 代 における 西 欧 と 東 アジアの 関 係 を 象 徴 した 西 方 東 漸 の 流 れ を これからは 日 本 が 先 頭 に 立 って 東 方 西 漸 の 流 れに 変 えようとする 帝 国 日 本 の 意 志 が 込 められているかに 見 える それは 振 興 会 の 事 業 内 容 が 東 方 文 明 唯 一 の 代 表 乃 至 集 積 国 としての 日 本 の 光 り を 世 界 に 知 らしめようとした 柳 澤 建 や 三 枝 茂 智 等 の 文 化 事 業 構 想 内 容 とほぼ 一 致 していることからも 確 認 できる 30) そして これらの 内 容 は いずれも 西 欧 諸 国 の 文 化 事 業 の 内 容 を 綿 密 に 検 討 してから 出 されたもので それが 最 終 的 に 振 興 会 の 核 心 的 な 文 化 事 業 として 纏 まったわである * 柳 澤 建 の 文 化 事 業 構 想 内 容 1) 外 国 の 諸 大 学 に 日 本 文 化 の 講 座 を 設 置 すること 2) 日 本 語 学 校 若 しくは 日 本 語 学 科 を 設 置 すること 3) 学 者 その 他 の 派 遣 招 聘 及 び 交 換 を 為 すこと 4) 学 生 の 交 換 等 を 為 すこと 5) 出 版 物 その 他 に 依 り 日 本 文 化 を 海 外 に 紹 介 すること 6) 美 術 品 その 他 各 種 の 文 化 資 料 の 寄 贈 交 換 をなすこと 7) 内 外 にある 国 際 文 化 団 体 に 対 し 補 助 助 成 をなすこと 8) 展 覧 会 音 楽 会 等 を 海 外 にて 開 催 すること 9) 演 劇 映 画 などを 海 外 に 進 出 せしむろこと 10) 国 際 的 スポーツ 並 びに 国 技 の 海 外 進 出 に 対 し 奨 励 の 途 を 與 ふること 29) 振 興 会 の 主 要 構 成 メンバーをみると まず 顧 問 には 総 理 大 臣 を 始 め 宮 内 外 務 文 部 大 臣 が 名 を 連 ねており 会 長 は 総 理 大 臣 を 歴 任 した 近 衛 文 麿 が 就 任 した.そして 主 要 理 事 と 評 議 員 には 大 学 の 総 長 や 教 授 を 始 め 財 界 の 親 と 官 僚 政 治 家 等 いわゆる 政 官 財 学 を 総 網 羅 している. 30) 柳 澤 健 国 際 文 化 事 業 とは 何 ぞや( 続 ) ( 前 掲 論 文 ) 44~49 頁 64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表 1. 振 興 会 の 事 業 内 容 ( 事 業 綱 要 ) 1) 著 述 編 纂 翻 訳 及 ヒ 出 版 文 化 活 動 の 各 方 面 に 亘 って 日 本 語 又 は 外 国 語 の 著 述 を 創 作 編 纂 刊 行 する 日 本 人 による 東 方 文 化 に 関 する 学 術 論 文 などを 外 国 語 で 翻 訳 刊 行 する 日 本 文 化 に 対 する 外 国 語 の 良 書 を 翻 訳 する 2) 講 座 ノ 設 置 講 師 ノ 派 遣 及 ヒ 交 換 外 国 の 主 要 大 学 に 日 本 文 化 に 関 する 講 座 設 置 外 国 の 学 校 に 日 本 語 講 座 或 は 日 本 語 学 校 設 置 外 国 との 講 師 の 派 遣 及 び 交 換 を 推 進 3) 講 演 会 展 覧 会 及 ヒ 演 奏 会 ノ 開 催 名 士 の 派 遣 招 請 外 国 における 日 本 文 化 に 関 する 展 覧 会 開 催 芸 術 文 化 の 紹 介 及 び 演 奏 会 開 催 4) 文 化 資 料 ノ 寄 贈 及 ヒ 交 換 日 本 と 東 方 文 化 の 関 する 資 料 を 外 国 の 大 学 図 書 館 などに 寄 贈 文 化 資 料 を 海 外 の 博 物 館 などに 寄 贈 交 換 する 5) 知 名 外 国 人 ノ 招 請 各 分 野 の 著 名 な 人 々を 招 いて 日 本 の 真 価 を 認 識 せしめる 6) 外 国 人 ノ 東 方 文 化 研 究 ニ 対 スル 便 宜 提 供 来 日 する 日 本 文 化 研 究 者 などに 研 究 上 の 便 宜 を 供 与 する 外 国 の 日 本 文 化 研 究 者 等 に 研 究 上 の 便 宜 を 供 与 する 7) 學 生 ノ 派 遣 及 ヒ 交 換 将 来 国 際 文 化 活 動 に 従 事 できる 優 秀 な 学 生 を 外 国 に 留 学 させる 優 秀 な 外 国 の 学 生 を 招 いて 日 本 で 留 学 させる 内 外 大 学 の 間 で 学 生 の 交 換 を 行 う 8) 文 化 活 動 ニ 関 係 アル 団 体 若 クハ 個 人 トノ 聯 絡 外 国 の 日 本 文 化 東 方 文 化 団 体 等 と 密 接 な 関 係 を 結 ぶ 国 内 の 文 化 事 業 団 体 等 に 援 助 を 図 る 9) 映 画 ノ 作 成 及 ヒ 其 ノ 指 導 援 助 外 国 に 宣 揚 すべき 日 本 文 化 関 連 映 画 を 制 作 する この 種 の 映 画 を 制 作 する 団 体 個 人 などには 指 導 援 助 をする 外 国 に 輸 出 する 日 本 映 画 には 統 制 検 閲 に 協 力 する 10) 会 館 図 書 室 研 究 室 ノ 設 置 経 営 以 上 の 事 業 を 達 成 できる 施 設 を 日 本 と 主 要 外 国 に 設 置 するか 設 置 に 援 助 をする 本 事 業 の 中 心 値 である 東 京 になるべく 早 く 中 央 会 館 を 設 置 する 資 料 出 : 財 団 法 人 国 際 文 化 振 興 会 設 立 経 過 及 昭 和 九 年 度 事 業 報 告 書 ( 前 掲 書 ) 13~16 頁 4. 戦 後 への 継 承 ー 結 びに 変 えて 内 憂 外 患 の 危 機 的 な 状 態 で 近 代 国 家 に 生 まれ 変 わった 日 本 は 非 西 欧 社 会 では 唯 一 に 近 代 化 に 成 功 した 国 である そして 僅 か 数 十 年 の 間 に 五 大 強 国 の 一 たる 地 位 を 獲 得 した この 過 程 で 日 本 の 支 配 階 級 は 民 族 文 化 への 意 識 鼓 吹 と 民 族 精 神 の 涵 養 を 叫 び 続 けた 世 界 からの 65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関 心 と 民 族 意 識 の 高 揚 を 背 景 に 日 本 は 優 れた 自 国 の 文 化 を 発 揚 し 世 界 からの 日 本 発 見 と 日 本 に 対 する 真 の 尊 敬 と 愛 とを 世 界 大 衆 に 惹 起 せしめ ることを 当 面 の 国 家 的 課 題 と して 受 け 止 め 実 践 に 踏 みきった その 目 的 は 明 快 だった 民 族 文 化 の 精 神 的 基 礎 を 基 に して その 自 分 の 民 族 的 理 想 が 同 時 に 世 界 各 国 の 少 なくとも 標 本 になる 示 しになる リーディング パワーになるような 理 想 31) を 具 現 することであった 日 本 の 対 外 文 化 振 興 政 策 については 一 部 の 識 者 の 中 では 批 判 的 な 動 きもあった 振 興 会 の 活 動 を 日 本 文 化 の 侵 略 性 の 観 点 からとらえた 清 澤 洌 は 非 常 時 になってから 日 本 は 世 界 一 なり 世 界 一 の 持 つ 芸 術 と 文 化 は 亦 世 界 一 なり 故 にこ の 世 界 一 の 芸 術 を 感 嘆 せざる 筈 なし といふやうな 論 理 が 流 行 するやうになってから 日 本 の 文 化 は 国 家 的 援 助 の 下 に 勢 いよく 流 出 している 32) と 論 じながら これはナチスの 文 化 も 同 じ であると 指 摘 した 清 澤 の 問 題 提 起 は 日 本 の 国 際 地 位 変 化 に 伴 った 論 理 の 歪 曲 現 象 の 拡 散 とそれに 乗 せられた 国 家 政 策 の 無 謀 さに 対 する 批 判 であった だが 時 代 的 認 識 は 日 本 文 化 の 対 外 侵 略 に 対 する 警 告 の 声 に 耳 を 傾 けるような 状 況 ではなかった それよりは ヨーロッパ 主 義 世 界 を 白 人 的 見 地 からのみ 考 へる 思 想 を 打 破 して 真 の 世 界 の 統 一 を 実 現 すべき 33) 思 想 として 叫 ばれた 東 亜 協 同 体 の 思 想 が 脚 光 を 浴 びる 方 向 へ 進 んでいた 世 界 史 的 な 思 想 として 論 じられた 東 亜 思 想 の 虚 構 は 東 亜 ニ 於 ケル 安 定 勢 力 タルノ 実 ヲ 挙 クルヲ 帝 国 外 交 ノ 中 枢 方 針 ト 為 ス 34) という 帝 国 外 交 方 針 (1936.8.7)に また 挙 国 一 致 堅 忍 不 抜 ノ 精 神 ヲ 以 テ 現 下 ノ 時 局 ニ 対 処 35) することを 命 じた 国 民 精 神 総 動 員 実 施 要 綱 (1937.8.24)の 宣 布 等 の 過 程 をへて さらに 全 体 主 義 を 強 化 する 刺 激 となったし 最 終 的 に は 大 東 亜 新 秩 序 の 建 設 を 実 現 するという 太 平 洋 戦 争 のイデオロギーとして 帰 結 され その 歴 史 的 使 命 をつくすことになる この 過 程 で 日 本 精 神 の 対 外 侵 略 性 は 優 れた 日 本 文 化 の 対 外 宣 揚 として 彩 飾 されたり 米 英 帝 国 主 義 侵 略 に 対 する 正 当 防 衛 として 変 えられたり ナチスの ヨーロッパ 新 秩 序 に 対 応 す る 大 東 亜 新 秩 序 の 思 想 として 歪 曲 されたり 絶 えずその 本 質 を 隠 したまま 日 本 人 の 精 神 世 界 を 支 配 していった その 虚 構 性 が また 日 本 精 神 の 鼓 吹 と 文 化 政 策 外 交 の 強 化 を 唱 える 識 者 層 の 談 論 を 量 産 しながら 36) 帝 国 日 本 の 文 化 膨 張 主 義 を 更 に 刺 激 したし 且 つ 戦 後 の 文 化 外 交 の 歴 史 的 基 盤 にもなった そして 戦 後 日 本 はヨーロッパの 福 祉 国 家 やアメリカの 軍 事 国 家 の 道 とは 異 なった いわゆ る 産 業 国 家 としての 道 を 歩 んで 超 大 国 にのし 上 がった 後 さらに 文 化 国 家 としての 道 を 模 索 し 始 めた 戦 後 日 本 の 国 家 発 展 モデルは 様 々な 非 難 にも 関 わらず 世 界 の 混 迷 が 深 まる 度 に 31) 姉 崎 正 治 国 際 文 化 事 業 の 真 意 義 財 団 法 人 国 際 文 化 振 興 会 設 立 経 過 及 昭 和 九 年 度 事 業 報 告 書 ( 前 掲 書 ) 所 収 190 頁 32) 清 澤 洌 日 本 文 化 の 侵 略 性 改 造 1935 年 12 月 号 292 頁 33) 三 木 清 東 亜 思 想 の 根 拠 ( 前 掲 論 文 ) 12 頁. 三 木 は この 論 文 で 支 那 の 近 代 化 と 民 族 主 義 を 肯 定 的 にとらえており 支 那 の 近 代 化 こそ 東 洋 の 統 一 の 前 提 であるという 認 識 を 明 らかにしている.そういう 意 味 では 東 亜 協 同 体 論 の 支 配 的 な 地 政 学 的 概 念 を 歴 史 哲 学 的 概 念 に 再 定 義 し= 意 味 転 換 し 多 様 な 個 性 者 が 対 等 に 民 族 を 構 成 し 多 様 な 民 族 が 対 等 に 一 つの 世 界 を 構 成 するというヴィジョンのもとに 東 亜 協 同 体 を 構 想 したという 内 田 弘 の 評 価 は 一 理 があるかもしれない. 三 木 清 の 東 亜 協 同 体 論 専 修 大 学 社 会 科 学 研 究 所 月 報 (No.508. 2005.10.20)2 頁. しかし 日 本 の 対 支 那 に 対 する 行 動 を 基 本 的 には 白 人 帝 国 主 義 からの 解 放 する こととしてとらえているし この 意 識 は 前 編 を 通 して 一 貫 している. 特 に 当 時 の 時 代 的 思 想 状 況 を 考 えると 三 木 の 論 理 が 日 本 帝 国 主 義 を 弁 護 する 役 割 を 果 たしたのは 否 めない. 34) 山 田 明 編 外 交 資 料 近 代 日 本 の 膨 張 と 侵 略 ( 前 掲 書 ) 253 頁 35) 山 田 明 編 外 交 資 料 近 代 日 本 の 膨 張 と 侵 略 ( 前 掲 書 ) 257 頁 36) 例 えば 田 中 耕 太 郎 国 際 文 化 運 動 の 理 念 ( 改 造 1937 年 1 月 号 ) 文 化 協 定 と 文 化 工 作 ( 改 造 1939 年 6 月 号 ) 三 木 清 文 化 の 力 ( 改 造 1940 年 1 月 号 ) 矢 野 仁 一 日 支 文 化 の 交 流 ( 文 芸 春 秋 1939 年 6 月 号 ) 高 田 正 治 日 支 文 化 政 策 の 将 来 ( 文 芸 春 秋 1941 年 1 月 号 ) 等 がある. 66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注 目 を 浴 びている 国 際 社 会 に 漂 っている 対 日 観 には 日 本 経 済 の 国 際 的 プレゼンスの 拡 大 を 素 直 に 歓 迎 できない いわば 焦 りに 刺 激 された 対 日 批 判 の 強 化 という 側 面 と 日 本 文 化 に 対 する 心 情 的 同 意 と 経 済 発 展 を 支 えている 日 本 的 価 値 の 再 考 或 は 吸 収 という 側 面 が 常 に 共 存 し ている 戦 後 日 本 の 文 化 外 交 は 一 方 では 前 者 の 解 消 と 後 者 の 拡 大 という 理 念 的 性 向 を 浴 びて 展 開 さ れてきた 国 際 社 会 におかれた 日 本 の 立 場 を 反 映 した 結 果 でもある だが 国 際 社 会 の 対 日 観 が 次 第 に 後 者 の 方 へ 移 動 している 現 実 を 踏 まえ 日 本 の 文 化 外 交 も 益 々 日 本 的 価 値 の 拡 散 に 重 点 をおく 方 向 へと 動 いている その 方 向 性 がいかなる 結 果 を 生 み 出 すかは 別 として 日 本 の 政 策 路 線 がアイロニカルにも 国 際 社 会 の 要 望 と 一 致 するところがある この 奇 妙 な 一 致 が 今 までのアジアの 帝 国 日 本 によるトラウマや 欧 米 の 文 明 優 越 意 識 をこえ 今 後 の 日 本 の 国 際 的 地 位 をさらに 高 めていくバネになると 思 われる 67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지정토론 배 개 화 김선생님 발표 내용의 의의 김선생님 발표는 첫째, 제국일본의 문화외교의 인식과 체제구축의 전모를 알기쉽게 설명해 주셨고, 그 이념과 방향성이 전후에도 계승 혹은 연속하고 있다는 귀중한 지적에 그 의의 가 있습니다. 둘째, 위와 같은 내용을 분석하기 위한 발표의 도입부분이 독창적이고 독특하다는 점입니 다. 즉 김선생님 일본문화연구방법론으로부터 본 발표의 연구사적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점 입니다. 질문 1. 제국일본에서는 문화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체제까지 구축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것을 통하여 알리고자 했던 (우수한)일본문화, 그 자체를 어떻게 설명했는가 하는점. 국제문화진흥회 설립목적에 일본 및 동방문화의 해외선양 의 의미. 2. 제국일본의 문화외교이기에 누구를 향한 일본문화 선전인가에 따라 일본문화 자체에 대 한 설명에 차이는 없었는가 하는 점. 서양제국에 향한 일본문화 선전, 대립하고 있는 중국, 식민지 한국, 장차 끌어들어야 할 대 동아공영권의 국가 등 3. 제국일본 문화외교의 전후의 계승과 관련하여 무엇이 전후에 계승되고 있다는 것인지. 일본문화의 침략성 말함인가. 4. 김선생님의 발표와 김선생님의 일본문화연구관과 관련하여 68

제국일본의 문화외교) 에 관한 소고 지정토론 배 개 화 金先生の発表内容の意義 金先生の発表は 第一に帝国日本の文化外交の認識と体制構築についてその全容をわかりやす く説明し また文化外交の理念と方向性が戦後にも継承あるいは連続しているという貴重な指 摘にその意義がある 第二に 上記のような内容を分析するための発表の導入部分が独創的であり 独特である す なわち 金先生の日本文化研究方法論から本発表の研究史的意味を位置付けているところであ る 知りたいところ 質問 1 帝国日本では時期によって 文化外交の重要性を認識し 体制を構築したということであ るが それによって知らせようとした日本文化 その自体についてはどのように説明なされた のかについて 関連して 国際文化振興会の設立の目的に 日本及東方文化ノ海外宣揚 となっている意味 について 2 帝国日本の文化外交であったために 文化外交の相手によって日本文化その自体に対する 説明には差がなかったのか 西洋諸国に向かって日本文化の宣伝 対立している中国 植民地の韓国など 将来 大東亜共 栄圏 に含めるべき地域 日本国内用 3 帝国日本の文化外交の戦後の継承と関連して 何が戦後に継承されると教えるのか 日 本文化の侵略性 4 金先生の発表と 金先生の日本文化研究方法論との関連について 69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 Carnegie재단주최동양시찰미국기자단 을 중심으로 - 小林聰明 (大阪市立大 硏究員) 指定討論 - 李利範 (강릉대 교수) 프 로 필 小林聰明(Kobayashi Somei) 大阪市立大 硏究員 동아시아 미디어사 주요저서 및 논문 재일 조선인의 미디어 공간: GHQ점령기에 있어서의 신문 발행과 그 다이나미즘 2007 문화냉전의 시대: 미국과 아시아 공저, 2009 자료로 본 세계의 8월15일 공저, 2008 동아시아의 종전기념일: 패배와 승리의 사이 공저, 2007 전쟁, 라디오, 기억 공저, 2006 외 다수 70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 카네기재단 주최 동양시찰 미국기자단을 중심으로 - 小 林 聡 明 고바야시 소메이 1. 들어가는 말 현재 문화외교(Cultural Diplomacy), 홍보외교(Public Diplomacy) 소프트 파워(Soft Power)라는 말들이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외교용어들은 외교에 있어 군사력뿐 만 비군사적 수단을 강조하는 것으로 외교상에 있어 새로운 힘의 원천으로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군사적 외교수단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 본은 19세기말 이후, 구미와 아시아지역에 있어 신문조종이라고 불리는 정보 통제를 통해 대외 선전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왔다. 일본은 19세기말 이후, 구미와 아시아지역에 대한 신문조종 이라고 말해지는 정보 통제를 통해 대외선전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왔다. 이러한 움직임은 세계 가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돌입한 20세기 전반기에 세계각지에서 자국을 홍보하는 선전활동이 본격화 되었으며, 그 결과 선전전과 사상전이 전개되었다. 현재 주목을 받고 있는 문화외교와 홍보외교는 국가에 의한 선전활동은 장기간의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본고는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에 대해 1929년 실시된 카네기재단 주최 동양시찰미국기자 단 에 초점을 맞추어 검토하려고 한다. 제국일본에 의한 대외선전에 관한 연구는 중일전쟁 이 후 전쟁시기와 메스미디어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1) 본고가 주목하고 있는 미 국기자단 동양시찰은 중일전쟁 이전 시기에 추진된 일본의 인물교류에 의한 대외선전활동이다. 따라서 본고는 제국일본이 추진한 대외선전을 다각적으로 검토한 후 일본의 홍보외교와 관련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본고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이 공개한 1) 주요 연구로는 다음을 참조. 조성운 1920년대 초 日 本 視 察 團 의파견과 성격(1920~1922) 韓 日 関 係 史 研 究 25 集 2007 年. 김영숙 태평양전쟁기 일본의 대외 선선-대외 선전 집지와 정보시스템을 중심으로 日 本 歴 史 研 究 第 24 集 2007 年. 朴 順 愛 戦 前 日 本 の 対 米 宣 伝 政 *と 写 真 報 道 日 本 学 報 第 60 号 2004 年 박 순애 일본의 대소 전파전과 조선의 라디오 日 本 研 究 論 叢 第 26 号 2008 年. 朴 順 愛 朝 鮮 総 督 府 の 情 報 宣 伝 政 * マス コミュニケーション 研 究 第 49 号 1996 年 朴 仁 植 日 本 の 植 民 地 朝 鮮 における 情 報 宣 伝 政 * 政 治 経 済 史 学 2007 年. 大 谷 正 近 代 日 本 の 対 外 宣 伝 研 文 出 版 1994 年 등 71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약860페이지에 달하는 외교문서 카네기재단 주최 동양시찰미국기자단 (제1권-3권)을 주요자 료로 활용한다. 2. 동양시찰 실시를 위해 (1)가와카미 키요시( 河 上 清 )와 카네기 재단 1929년 겨울, 요시다 시게루( 吉 田 茂 )외무차관과 야마모토 죠타로( 山 本 条 太 郎 ) 만주철도(만철) 총재는 미국에서 기자를 초청하는 극동관광 모색했다. 이러한 생각은 동경에 머물고 있던 미국주재 저널리스트 가와카미에게 전달되었다. 가와카미는 콜롬비아대학총장으로 카네기재단 사무국장인 버틀러(Nicholas Murray Butler) 2) 와 쇼트웰(James Thomson Shotwell)과 만나 일 본측이 미국기자로 구성되는 시찰단을 일본에 초정하고자 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버틀러는 만철 등이 추진하는 일본시찰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사를 보였고, 일본측 은 카네기재단 주최 시찰이라는 형식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점을 가와카미에게 전달했다. 버틀러와 가와카미의 만남에서 버틀러측은 시찰단의 규모와 경비부담에 관해 언급이 있었다. 카네기재단은 이미 4-50명으로 구성되는 구주시찰단을 조직하는 등, 해외시찰단 파견에 관한 경 험이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시찰단의 단원의 규모가 15명정도로 구성되는 것이 적절하다 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기자단 초빙에 소요되는 경비 중 10%정도를 재단 측이 부담할 수 있다 고 전했다. 그리고 가와카미는 버틀러측으로부터 필요경비에 관해서는 만철총재와 협의 후에 회 답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 점은 가와카미와 버틀러측이 이번 시찰이 만철이 사실상의 파트너라 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가와카미와 버틀러와의 회담내용은 1929년 1월 23일 데부치 가츠지( 出 淵 勝 次 )주미대사를 통 해서 다나카 기이치( 田 中 義 一 )외무대신에서 보고되었다. 3) 28일, 외무성은 버틀러가 제안한 대로 미국기자단의 동양시찰을 카네기재단이 주최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소요경비 지출 승인을 데부 치에게 전달했다. 4) 데부치를 통해서 외무성의 승인내용을 접한 가와카미는 버틀러와 쇼트웰을 접견, 카네기재단이 주최하는 것으로 미국기자단의 동양시찰을 실시에 승낙을 얻어냈다. 2월 15일, 가와카미는 카네기재단으로부터의 승낙을 요시다에게 보고했다. 5) 가와카미는 외무 성 핵심라인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루트를 가지고 있었으며, 미국기자단의 동양시찰 실시에 대 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가와카미는 버틀러에 대해 자신의 역할을 비밀 로 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기자단의 동양시찰에 가와카미가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쇼트웰, 데부치, 만철 뉴욕지점장 만이 알고 있었다. 6) 여기에는 동양시찰이 카네기재단 주최라는 형식으 로 추진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주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은닉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 다. 2) 1931년 노벨평화상 수상. 3) 電 報 22 号 :1929 年 1 月 23 日 カーネギー 財 団 主 催 東 洋 視 察 米 国 記 者 団 ( 以 下 省 略 ) 第 1 巻 No.003 4) 電 報 43 号 :1929 年 1 月 28 日 第 1 巻 No.004-005 田 中 外 務 大 臣 出 淵 大 使 5) 書 簡 :1929 年 2 月 15 日 第 1 巻 No.0006-0008 6) 書 簡 :1929 年 2 月 24 日 第 1 巻 No.0013-0014 72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2)민관협력과 리버럴 내셔널리스트 지식인 1929년2월말, 일본측과 카네기재단측과의 협의결과, 동양시찰에 필요한 경비는 1인당 8백 달 러(총12.800 달러), 파견자수는 재단측 인원을 포함해 16명으로 결정되었다. 경비는 기본적으로 만철, 일본 및 조선의 철도성, 일본유선( 日 本 郵 船 ), 다이렌기선( 大 連 汽 船 ) 등 일본측이 부담한다 는 것이 재단측과 합의 되었다. 필요경비 12,800달러는 만철로부터 뉴욕정금은행( 紐 育 正 金 銀 行 ) 으로 송금한 후, 카네기재단으로 입금하는 방식을 취했다. 7) 재단 측에 경비를 송금한 것은 미국 기자단의 동양시찰이 어디까지나 카네기재단의 계획에 의해 추진된 것이라는 것을 가장하기 위 함이었다. 가와카미는 뉴욕의 일본교통공사(Japan Travel Bureau: JTB)로부터 자료를 받아, 재차 필요 경비의 계산을 산출한 결과, 당초 예산의 3배인 1인당 2500의 경비가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나 데부치( 出 淵 )를 통해 도쿄 외무성에 보고되었다. 3월 13일, 데부치는 가와카미의 계산대로 경비를 지출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도쿄로부터 전문 ( 電 文 )이 전달되었다. 전문에는 초청 기자단수를 줄이는 방법, 기자단에게 일정액을 부담시키는 방법, 중국방문 일정을 제외시키는 방법이 제시되었으며, 가와카미에게 전달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8) 도쿄의 지시에 대해 데부치는 17일 교통비 할인, 혹은 무료로 하는 것으로 경비 삭감이 가능 하다는 답신을 보냈다. 또한 데부치는 이미 카네기재단은 주최자로서 초청장을 발송한 상태이므 로 시찰 중지가 불가능 하고, 중국방문을 중지한다면 동양시찰의 효과가 반감된다는 이유로 난 색을 표시하고 있던 외무성에 재고를 요구했다. 9) 데부치의 답신을 받은 외무성은 만철측과 협의에 들어가 동양척식( 東 洋 拓 殖 ). 도쿄전등( 東 京 電 燈 ), 후루가와전기( 古 河 電 気 ), 미쓰비기전기( 三 菱 電 機 ), 시바루제작소( 芝 浦 製 作 所 ), 일본전기( 日 本 電 気 ), 도쿄전기( 東 京 電 気 ) 등으로부터 협력을 얻어 기부를 받게 되었다. 외무성은 데부치에게 경비를 조달할 수 있다는 내용을 전달했으며, 10) 4월4일 필요한 경비가 만철로부터 뉴욕정금은 행에 송금되었다. 11) 각 기업으로부터의 기부금은 5월말에서 7월초까지 입금되었다. 12) 미국기자단의 동양시찰은 산업계로부터 협력을 얻음으로써 실현가능하게 되었다. 미국기자단 이 일본에 도착해 시찰이 시작된 후에도 외무성은 산업계에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다. 13) 산업계 는 미국신문기자단의 동양시찰이 궁극적으로 대미관계 안정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경제적 이익 확보와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시찰단의 경비를 부담하기로 결정하였 다고 볼 수 있다. 미국기자단의 동양시찰에 일본정부는 산업계를 필요로 했으며, 산업계도 이익을 확보하기 위 해 협력의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신문사 14) 와 대학, 각종단체 등도 동양시찰 실현에 협력을 했 7) 電 報 69-2 号 :1929 年 2 月 28 日 第 1 巻 No.0009-1 8) 電 報 91 号 :1929 年 3 月 13 日 第 1 巻 No.23-25 9) 電 報 92-1 号 :1929 年 3 月 17 日 第 1 巻 No.26-27 10) 電 報 92-2 号 :1929 年 3 月 17 日 第 1 巻 No.28-29 11) 電 報 122 号 :1929 年 4 月 4 日 第 1 巻 No.52 12) 第 2 巻 No.0406-0409 13) 5 月 27 日 : 電 報 第 3 巻 232-235 14) 彌 ャパン タイムス 社 新 聞 連 合 社 日 本 電 報 通 信 社 東 京 朝 日 新 聞 社 東 京 日 日 新 聞 社 時 事 新 報 社 報 知 新 73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다. 도쿄제국대교수와 태평양문제조사회( 日 本 IPR), 미일협회, 미일관계위원회 관계자 등 다 수의 지식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 일본계이민자 배척문제와 중 국과의 불평등조약문제 등을 둘러싸고 미국과 일본의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1925년 민간단체가 중심이 되어 학술 문화교 류를 통해 태평양지역 민족간 우호관계 촉진을 목적으로 태평양문제조사회(The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IPR)가 발족했다. IPR은 윌슨의 국제주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비당 파적연구단체 라는 점을 조직의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1926년에는 1915년 캘리포니아주에서 일본계 배척운동이 고양되는 것을 우려해 시부사와 에 이이치( 渋 沢 栄 一 )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미일위원회를 기반으로 한 IPR 일본지부인 일본태평양 문제조사회( 日 本 IPR)가 발족했다. 평의회 회장에 시부사와가, 이사장에 이노우에 준노스케( 井 上 準 之 助, 후에 니도베 이나조우 新 渡 戸 稲 造 )가 취임했다. 일본IPR은 미일관계 안정에 관심을 가 지고 있는 실업가와 지식인을 지도층으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이쇼( 大 正 ) 데모크라시를 지지 하고, 기독교적 인격주의와 윌슨의 국제주의에 공조하는 전전의 대표적 자유주의파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사연구가인 유이 다이사부로( 油 井 大 三 郎 )는 그들이 중국침략 등 제국일본의 확대에 반대하지 않고, 미일전쟁 만을 회피하려는 자유주의적 내셔널리스트 라는 점을 지적 한다. 15) 미국기자단의 동양시찰 실시에는 리버럴 내셔널리스트 라고 불러야할 다수의 지식인 이 협력하고 있었다. (3)카네기재단의 파견기자 선정 일본측과의 동양시찰 실시를 위해 합의 가 이루어 졌을 때, 카네기재단측은 파견기자 구 체적인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 1929년 2월 하순, 버틀러와 쿠퍼Kent Cooper)AP통신사장 (General Manager), 하워드(Roy W. Howard) 등에 시찰단 참가를 타진했다. 그리고 전미 신 문사와 통신사 앞으로 초대장이 발송되었다. 16) 신문사 통신사 선정은 버틀러를 중심으로 카 네기재단측이 담당했으며, 일본측은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17) 그러나 볼티모어 선 (The Baltimore Sun) 등 6개 신문사가 동양시찰에 참가를 사퇴했다. 시찰단 구성은 기자 15명과 재 단 담당자 1명 등 총16명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사퇴자로 인해 동양시찰은 미국각지 신문사에 聞 社 国 民 新 聞 社 やまと 新 聞 社 中 外 商 業 新 報 社 万 朝 報 読 売 新 聞 社 都 新 聞 社 中 央 新 聞 社 が 協 力 してい た 15) 油 井 大 三 郎 未 完 の 占 領 改 革 -アメリカ 知 識 人 と 捨 てられた 日 本 民 主 化 構 想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89 年 5-6 12-14 頁 16) 書 簡 :1929 年 2 月 23 日 第 1 巻 No.0021-0022. 電 報 69-1 号 :1929 年 2 月 28 日 第 1 巻 No.0009 招 待 状 は 次 の 通 信 社 新 聞 社 に 発 送 された Associated Press Atlanta Constitution, Baltimore Sun, Boston Transcript, Chicago Daily News, Cincinnati Times-Star, Detroit News, Houston Post, New York Herald-Tribune, New York Times, Omaha World-Herald, Portland Oregonian, St. Louis Post Dispatch, St.PaulPioneerPress,UnitedandScrippeHoward. 17) 電 報 69-2 号 :1929 年 2 月 28 日 第 1 巻 No.0009-1 74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서 선발된 11명의 기자와 재단 담당자 1명, 총 12명이 참가하게 되었다. 18) (참가자 이하 표참 조) 米 国 記 者 団 の 構 成 George S. Johns Editor in Chief, St. Louis Post Dispatch Gideon A. Lyon Associated Editor and Part Owner, The Washington Star Francis W. Clarke Managing Editor, The Atlanta Constitution William Philp Simms Washington Correspondent, Scripps-Howard Newspapers Harry B. Wakefield Editorial Writer, The Minneapolis Journal Wilbur Forrest Washington Correspondent, The New York Herald Tribune Herbert L. Matthews The New York Times Francis E. Rega The Springfield Republican, Massachusetts Fred Hogue Reporter, The Los Angeles Times. Paul W. Wright Staff Correspondent, The Chicago Daily News Judd M. Lewis The Houston Post, Texas George A. Finch Washington representative of the Endowment 일본 외교사료관의 문서를 통해서 참가 연령이 48세부터 71세까지로 유력 신문사 간부를 역임 하고 화려한 경력을 지닌 기자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 동양시 찰에 선발된 기자들은 모두 언론에서 일정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데부 치가 다나카 외무대신 앞으로 보낸 전보에는 카네기재단 측이 방문기자들이 각지방의 영향력 있는 인사로 유력한 기자 라는 점을 알려왔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20) 또한 카네기재단측 담당자로 워싱턴주재 대표 피치(George A. Finch)가 시찰단에 수행했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유력한 인사였으며, 미국국제법협회(American Association of International Law)이사와 미국국제법잡지(American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편집위원을 맡고 있었 다. (4) 합의된 전략 과 도달점으로서 미일우호 미국기자단 동양시찰 목적이 일본측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929년 3월 경이 었다. 1929년 3월 10일 데부치가 외무성 앞으로 보낸 전문에서 이번 시찰 목적이 동양의 실 황과 시찰연구에 중점을 둔다 고 밝히고 있으며, 연회와 연설은 시간을 줄이고, 경제적, 문화 적 발전과 일본 가정을 소개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데부치는 시찰 목적이 일본에 대한 호의적인 인상을 주는 것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21). 동양시찰 실치를 향한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찰을 위해 일본측뿐만 아니라 가 와카미와 버틀러가 주축이 되어 협의를 지속해 왔다. 그렇지만, 이점은 카네기재단이 아니라 어 디까지나 버틀러 개인 입장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어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4월 6일, 버틀러는 카네기재단 실행위원회에서 동양시찰 실시에 대한 승인을 요구,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위원 18) 東 京 日 日 新 聞 1929 年 4 月 10 日 付 ( 夕 刊 ) 19) 第 1 巻 No.285-288 20) 第 1 巻 No.0046 21) 機 密 電 報 187 号 :1929 年 3 月 10 日 第 1 巻 No.0010-0012 75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중에는 카네기재단 주최 시찰에 일본 측이 협력하고 있다는 점이 미일우호의 중요성을 이해하 는 일본인 실업가의 선견지명이 있다는 점을 들어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22) 이 점은 이미 카네기재단 측이 일본 산업계의 목적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4월 8일, 버틀러는 뉴욕에서 카네기재단이 주최한 자리에서 일본 철도성, 일본우선( 日 本 郵 船 ), 오사카상선( 大 阪 商 船 ), 만철( 満 鉄 ) 등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미국유수의 신문기자 11명이 일본, 조선, 만주, 지나 시찰여행을 위해 4월 24일 센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호로 출발한다 고 발표했 다. 버틀러는 시찰의 목적이 동양에 대한 미국의 이해를 환기시키는 것 이라고 밝혔다. 당초, 시찰 지역은 일본만을 예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측으로부터 요구가 있어 일본, 중국, 만주, 조선을 방문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일본의 요구는 두 가지로 첫째, 중국 지역을 방문함으로써 국정의 차이점을 미국 측에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일본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중국과 우 호관계 를 구축할 필수불가결하다는 일본 측의 생각을 미국에 전달하고자 하는 요망이 있었다. 이러한 일본 측의 요망을 재단 측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일본시찰은 동양시찰 로 확대되었다. 버틀러가 발표한 동양시찰 내용은 도쿄일일신문 ( 東 京 日 日 新 聞 ) 외,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와 허럴드 트리뷴(The Herald Tribune)등 미일 양국 미디어로 보도되었다. 23) 신 문들은 동양시찰이 일본 측 요망을 받아들였지만, 어디가지나 카네기재단이 주최하는 것이라는 원칙이 견지되고 있었다. 이 점은 동양시찰은 미국이 주체적으로 동양에 대해 이해 하는 시 도이고, 단순히 일본의 대미선전활동이라고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일본 측과 카네기재단 측이 합의한 전략 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외무차관 이었던 요시다 시게루의 발언에서 잘 나타 나고 있다. 4월 30일 동양시찰실시를 위해 자금협력 기업의 관계자가 참석한 차관다과회 가 열렸다. 요시다는 인사말에서 동양시찰의 실시배경과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24) 동양시찰은 표면상 카네 기재단이 주최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일본 측이 미국 신문을 통해 미국 국 민에게 일본사정과 일본과 경제적,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극동사정을 정확히 이해시키 려는 열망으로부터 카네기재단에 의뢰하고, 재단 측이 주최자가 되었다. 요시다는 카네기재단도 미일우호의 관점에서 일본 측 의뢰를 승낙 했다고 언급, 내부사정을 절대로 누설하지 말 것 을 출석자에게 요청했다. 미국신문기자의 동양시찰은 기자를 통해서 미국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전하고, 그것이 미 일 우호에 이바지하도록 하는 일본 측의 기대와 그에 대한 재단 측의 동의를 기반 으로 기획되었다. 미국인들이 동양시찰을 대미선전활동으로 모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미국 기 자단에 의한 동양 시찰이 일본 측의 요청인 것을 숨기고, 어디까지나 미국 측이 자주적 으로 실시하는 것으로서 위장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형식 자체가 일본과 재단 측이 합의돼 미 일 우호의 구축을 목적으로 한 전략 임에 다름없었다. 3.동양시찰 실시 22) 電 報 110 号 :1929 年 4 月 9 日 第 1 巻 No.46-47 23) "U.S. Newspaper Men to Tour Orient On Peace Mission", The Herald Tribune, April 9, 1929. "Newspaper Men to Go on Good-Will Tour", New York Times, April 9, 1929. 東 京 日 日 新 聞 1929 年 4 月 10 日 付 夕 刊 24) 第 3 巻 No.488-490 76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1)일본에서 조선, 만주, 중국으로 1929년 2월 24일 가와카미로부터 버틀러에게 시찰 일정이 전달되었다. 25) 계획에는 4월 24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5월 10일에 요코하마에 도착. 8월 1일에 요코하마 출발, 16일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4개월에 걸쳐, 일본, 조선, 만주, 중국을 일주하는 여행이었다. 일본 체재는 26일 간으로, 도쿄, 교토, 나라, 오사카, 미야지마 등을 방문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5일간, 만 주는 20일간, 중국은 20일간 체재가 계획되었다. 만주에서는 심양, 장춘, 길림, 대련 등, 중국에 서는 북경, 남경, 상해, 청도가 방문지로 결정되었다. 일본, 만주, 중국이 시찰 일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계획을 세운 일본 측이 미국기자단에 대해 이들 지역 상황을 선전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있었다. 반면에 조선 체제는 아주 짧았으며 대만 방문은 계획에서 빠져있었다. 이 점은 일본 측 입장에서 식민지 상황이 미국기자단에게 선전 대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1929년 5월 10일, 12명의 기자단이 요코하마에 도착, 이후 시찰일정을 바탕으로 방문지 추가 와 일정을 조정 하면서 약 4개월간의 동양시찰이 실시되었다. (2)미국기자의 눈빛 : 일본, 만주, 중국, 대만 미국기자들은 방문지에 대해 어떠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을까? 여기에서는 조선을 제외하고 일 본, 만주, 중국에 대한 기자의 인식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근대화 를 이 룩한 일본에 대해 친근감, 만주에 대해 혼란 과 정체 의 이미지, 중국에 대한 혐오감 이 여과 없이 나타나고 있다. 1 근대 국가로서 일본 - 문명, 부흥, 미일우호 문명 오늘의 일본은 서양 문명이 가지는 문명과 대부분 변화가 없 는 것을 보고 (5월 27일:연설회) 부흥 미일우호 부흥사업 결과, 도쿄시는 확실히 이전보다 한층 청결, 건강, 번영의 도시가 되었다. 재해는 일본국민의 불굴의 정신을 증명해 보이고, 대규모 사업에 있어 조직적의 능력을 보인다 (5월 12일:라이 언) 26) 미일친선의 일본 측의 성의 고도의 문명을 가지는 근대국 가인 현재의 일본에 우리는 존경과 호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6월 7일:클라크) 27) 25) 第 1 巻 No.0017 26) 第 3 巻 No.0228 27) 第 3 巻 No.0343 77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2시장으로서 만주 - 개발, 정체, 혼란 개발 일본에 호의와 개발 정체와 혼란 도시건설의 빠름, 근본적인 변화는 만주가 극동의 미국화 되고 있다 (6월 13일:심스) 28)* 都 市 建 設 の 敏 速 且 つ 根 本 的 なるは 米 国 の 其 れを 思 はせるか 此 の 点 よりして 満 洲 か 極 東 の 米 国 と 化 し つつあると 云 ひ 得 る ( 미국기자단은 만주에 대해 좋은 인상을 품고, 만주에 있어서 일 본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러나 기자단은 1928년 장작림 폭파 사건에 대해 일본 및 중국 측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설명을 들 었기 때문에 사건에 대해 새로운 의문점이 생겼다. 그들은 봉 천에서 철도를 이용, 이동했을 때 한층 더 만철을 정비할 필요 를 느꼈다. 7월2일:보고전보:만철본사 동경지사 사이토 외무성정보 국장) 29) 투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안전보장에 있다. 정부가 무능하고 불안정하고 재판소가 부패하고 불공평의 소 굴, 약탈이 정직한 노동보다 유리한 지역에서는 영구의 투자, 발전, 진보는 있을 수 없다. 만주의 대부분은 불리한 상태에 있고, 일본이 만주에서 철수X일본것은 평화보장 및 정의의 최 후 보루가 파괴되일본것이다. 최근 수 주간 만주 지역의 철도 를 타고 주요도시에 체재, 통치와 산업 설비를 연구해야 한다. 일본의 권력 을 확립시켜 남만주에 있어 진보와 평화 보장 및 정의를 위해 손을 끊고 전신함을 알아차려야 한다. (8월 7 일:호그) 30) 政 府 か 無 能 且 不 安 定 裁 判 所 か 腐 敗 と 不 公 平 の 巣 窟 略 奪 か 正 直 なる 労 働 より 有 利 なる 所 には 永 久 の 投 資 永 久 の 発 展 及 永 久 の 進 歩 はあり 得 へからす 満 洲 の 大 部 分 は 斯 る 不 利 なる 状 態 に 在 り/ 若 し 日 本 か 満 洲 より 撤 退 するとせは 平 和 保 証 及 正 義 の 最 後 の 堡 か 破 壊 せらるるに 等 に 余 は 最 近 数 週 間 満 洲 の 多 くの 鉄 道 に 乗 車 し 主 要 都 市 に 滞 在 し 統 治 及 産 業 の 諸 設 備 を 研 究 せり 日 本 の 権 力 の 確 立 せる 南 満 に 於 ては 進 歩 か 平 和 保 証 及 正 義 と 手 を たつさえて 前 身 しつつあるを 看 取 せり 嫌 悪 3항의하는 중국 혐악과 반감 북경에 있을 때 중국 측은 미국기자단의 대우가 통일되지 않 28) 第 2 巻 No.021-0022 29) 第 2 巻 No.002-004 30) 第 2 巻 No.0246 78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았고 일행들의 불만이 컸으며 연극 관람 중에도 심한 더위 로 졸도자가 나오는 등 인상이 나쁘다. 이에 반해 그들은 만 주에 있어서 일본의 대우를 칭찬하고 또한 일본의 투자와 사업 경영을 보고 일본정부의 동북삼성 치안유지와 관련한 성명은 일본의 이익방호를 내정간섭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에 반해, 그들은 만주 에 있어서 일본의 대우 모습을 칭 찬해, 차일본의 투자와 사업의 경영 모습을 보고, 일본 정부 의 동쪽 삼성 치안 유지에 관한 성명은, 일본의 이익 방호 처치로 해 지를 내정 간섭과 하고는 당등 여간내기와 이야 기주거지.(7월3일: 보고전문: 북경 만철동경지사 사이토 외 무성 정보국장) 31) 北 京 に 於 ける 支 那 側 の 米 記 者 団 待 遇 不 統 一 にして 余 りに 自 己 本 位 なるため 一 行 は 何 れも 不 平 を 漏 し 居 り 数 名 の 病 者 を 出 し 居 る 外 一 日 夜 観 劇 中 も 苦 熱 の 為 卒 倒 者 を 出 さんとせる 等 にて 印 象 悪 し 之 れに 反 し 彼 等 は 満 洲 に 於 ける 日 本 の 待 遇 振 りを 賞 賛 し 且 日 本 の 投 資 と 事 業 の 経 営 振 りを 見 て 日 本 政 府 の 東 三 省 治 安 維 持 に 関 する 声 明 は 日 本 の 利 益 防 護 処 置 にして 之 を 内 政 干 渉 と 為 すは 当 らさるものと 語 り 居 れり (7 月 3 日 : 報 告 電 報 : 北 京 満 鉄 東 京 支 社 斎 藤 外 務 省 情 報 局 長 ) 반감 反 感 제남에 있어 노골적인 선전으로 미국인 기자단은 반 감하고 기분을 헤친다 꼼꼼하게 준비된 기념품을 증정 받은 일행은... 열어보 지도 않고 포레스트 등 3명은 무거워서 어쩔 수 없다고 결 국 기차에 방치했다. (7 月 6일: 보고전문: 후지다 총령사 청 도 시데하라 외무대신) 32) 済 南 において 露 骨 な 宣 伝 に 米 国 人 記 者 団 反 感 を 抱 き 機 嫌 を 損 ねる 入 念 に 準 備 された スーベニア ( 済 南 事 件 当 時 の 惨 状 を 表 はし 英 文 の 説 明 を 附 せる 大 型 写 真 アルバム 一 冊 英 文 パン フレット 一 冊 自 著 せる 陳 調 元 の 大 型 写 真 一 葉 及 びソウジン 画 帳 一 冊 にて 一 組 )の 贈 呈 を 受 けた 一 行 は 開 こうともせず フォレストら 三 名 は 重 くて 仕 方 ないとして 遂 に 之 を 汽 車 に 遺 棄 し た (7 月 6 日 : 報 告 電 報 : 藤 田 総 領 事 @ 青 島 幣 原 外 務 大 臣 ) 항의 抗 議 기자단의 비용을 일본이 지출하고 있어 단원의 기사 31) 第 2 巻 No.0017-0019 32) 第 2 巻 No.0032 79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들은 모두 일본에 유리하다 이 단체는 국제친선을 목적이라고 하지만 결과는 이와 반해 중국인에게 의 혹을 야기시킨다. 화평단체의 기자단이 중국을 악평 하고 일본을 단아하다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8 월 7일: 국민일보 및 중앙일보) 33) 訪 日 米 国 記 者 団 は 日 本 の 宣 伝 計 画 なるかと 題 し 大 毎 英 文 版 の 満 鉄 か 米 国 に 於 て 大 借 款 を 起 こさんとしつつあり 記 者 団 の 費 用 は 日 本 の 支 弁 する 所 にして 団 員 の 言 論 皆 日 本 に 有 利 なり この 団 体 は 国 際 親 善 を 目 的 となすと 称 するも 結 果 は 之 に 反 し 支 那 人 方 面 に 鮮 からす 疑 惑 を 惹 起 せり 和 平 団 体 の 発 起 せる 記 者 団 か 支 那 を 悪 評 して 日 本 に 阿 欠 せるは 不 可 解 な りと 結 へり (8 月 7 日 : 民 国 日 報 および 中 央 日 報 ) 미국기자들은 동아시아에서 근대화 를 가장 먼저 성취한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친화적이 었다. 반면에 그 외 동아시아 지역은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뒤떨어져 있는 것 으로 보 고 있어 냉담했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혐오감마저 숨기지 않았다. 일본과 만주, 중국에 대한 미국 기자의 눈에는 근대 의 도달점을 하나의 심급( 審 級 )으로서 동아시아인들과 실상을 분리하려고 하는 권력이 구조화 되었다. 그러나 동양시찰 미국기자들의 이야기를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지속 고착화 시키려는 제국주의적인 언설의 생산과 불가분인 것으로 보는 것은 관란하다. 다음 장에 이 점에 대해서 미국 기자들의 경험 을 통해 구체적 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4.식민지조선에서의 경험 (1)시찰일정 조선방문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지만, 일정은 막연했다. 일정이 구체화된 것은 5월 중순이 지나서 였다. 5월 21일, 조선 총독부 총무과장은 도쿄의 총독부 출장 사무소를 통해 외무성 정 보부에 다음의 장소를 미국 기자단 시찰지로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34) 6월 10일 : 부산, 온양온천 6월 11일 : 대하저수지, 군산 후지이 농장 6월 12, 13일 : 경성,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복궁, 은사화학관, 수송동공립보통학교 33) 第 2 巻 No.0253 025 34) 1929 年 5 月 21 日 : 電 報 第 2 巻 No.195-196 80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조선신궁, 미국인경영학교, 조선가정, 조선총독부경학원, 경성제국대 학, 경성제국대학예과, 임업시험소, 창덕궁. 게다가 24일에는 도쿄의 총독부 사무소에서 외무성 정보부 앞으로 상세한 계획인 미국 신 문기자단 조선 시찰 일정안 이 통지되었다. 35)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 시찰은 일정안대로는 진 행되지 않았다. 미국 기자단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예정보다 하루 빠른 6월 9일이었다. 또, 경성 일보 (1929년 6월 11 일자)에 공표된 시찰 일정을 보면, 방문지도 크게 줄어들었던 것 을 알 수 있다. 기자단은 당초 예정되어 있던 온양온천이나 대하저수지 시찰을 실시하지 않은 채 부산에서 직접 경성으로 향했다. 도착 후, 조선 체재가 1일 연장되었지만, 36) 식민지 조선의 내정을 알기 위해서는 너무도 시간이 짧고, 충분하지 않은 일정이었다. (2) 경성일보 보도 1대미선전과 미일우호 9일 오전 8시 10분, 미국 기자단의 일행을 실은 부관연락선 쇼케이마루( 昌 慶 丸 )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두에는 타케우치 내무부장, 후지와라 고등 과장, 호시노 철도국 촉탁, 신문 간담회 를 대표해 경성 일보사 사장의 마쓰오카 요스케, 부산 거주 외국인 단체 등 100여명이 환영을 위해 모여 있었다. 일행은 쇼케이마루호로 마중나간 오가와 농무 과장, 오다 통역관과 함께 하 선해 시찰단의 안내자인 츠츠이 외무성 사무관과 악수를 주고 받았다. 그들은 자동차로 나누어 타고 용두산에 오르는 등 시내를 관광한 후, 휴식을 위해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는 일행을 환영하는 메시지가 게재된 경성 일보 (1929년 6월 9 일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기자들은 호텔 휴식중 경성 일보를 읽으며 희의에 감사를 표했다. 37) 광고에는 미쓰이물산( 三 井 物 産 ) 이외, 미국총령사관의 환영광고도 실려있었다. 주목되는 것은 경성일보 에 게재된 메시지("Welcome Ambassadors of Good-Will")라는 문구였다. 이 문구는 우선, 일본인과 미국인이 개인적인 수준에서 마음이 통할 수 있는 더할 수 없는 기회이 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 일 미 우호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그 중요성이 옮겨지고 있으며,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미 국의 이웃으로서 일본은 미국과 손을 잡아 세계평화에 공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양 시찰을 실시하는 미국 기자단에게 이와 같이 평화를 희구하는 일본의 모습을 미국인들에게 전달 할 역 할이 기대 되었다. 더불어 메세지는 이번 조선 방문이 조선에 대한 기자들의 흥미를 고양시킬 뿐만 아니라 교육적인(instructive)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일본 측의 요망이 명시되고 있었 다. 즉, 조선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미국 기자에게 이해시킨다는 의미는 그것이 교육적 이며, 미국 기자단에 의한 조선 시찰이 일본의 대외 선전 활동의 일환이었다. 10일, 일행은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미국기자단 환영만찬회 에 참석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방문했다. 마쓰테라( 松 寺 )법무국장이 조선총독부 대리로 환영사를 낭독했다. 당시 만찬장의 모습 35) 5 月 24 日 : 第 1 巻 No.204 36) 京 城 日 報 1929 年 6 月 13 日 付 37) 京 城 日 報 1929 年 6 月 10 日 付 81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을 경성일보 (1929년 6월 11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환영사는 전남산 종이에 영어와 일어로 인쇄해 기자단에게 건네졌으며, 기자단 측에서도 성 심성의를 다하는 총독부의 환영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의 종이에 일본어와 영어로 기록된 환영사가 인쇄된 것이다. 그것 은 미국 기자단에 대해 식민지 지배라고 하는 이름의 동화 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 을 어필하는 것이 었다. 경성 일보 가 굳이 전남산 인 것을 언급한 것은 미국 기자단 뿐 만 아니라 식민지 주민에 대해서도 동화 가 강력히 추진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려는 선전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성 일보 는 미국 기자단이 조선의 종이에 일본어와 영어로 기록된 환영사를 기뻐하며 받았다고 전했다. 이미 일본에 의한 조선 식민지 지배가 미국에 의해서 인정되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미국 기자단 환영에는 제국일본의 대외 선전 활동의 일환이었다는 점이 강하게 나 타나 있었다. 미국 기자단에 의한 조선 시찰은 그들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조선의 상황을 전하는 것인 것과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주민에 대한 선전으로서 그 자체가 활용되었다. 2대식민지선전과 근대국가 일본 미국 기자단의 조선방문에 맞춰 경성일보 는 6월 11일부터 4일간 연속으로 미국 기자 미국 기자단이 조선을 방문하는데 아울러, 경성 일보 는 6월 11일부터 4일간 연속으로, 米 国 記 者 の 見 たる 日 本 이라는 제목의 연재 기사를 게재했다. 미국 기자들이 일본의 훌륭함을 칭찬하는 말을 게재한 기사는 명확히 식민지 주민에 대한 선전이었다. 일본인에 대해 감탄과 존경의 마음을 받으며 용감한 일본인의 국민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도쿄, 요코하마의 부흥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깜짝 놀랄 따름이다 폴 W 라이트 경성 일보 1929년 6월 11 일자 활동과 진보로 충족된 이 대국가는 장래에 더욱더 위대하고 강대하게 될 것이다. 생각건대 이것이 일본을 방문해 얻은 처음의 인상이다. 일본과 미국은 무수한 공통점이 있다. 자발적이며, 활동적인 것은 그 일례일 것이다. 윌버 포레스트 경성 일보 1929년 6월 12 일자 과학 공업에, 근대국가에, 모든 문명의 정채를 발하는 장족의 진보를 이룬 일본을 본 우리의 일 본 여행은 실로 흥미롭고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죠지 존즈 경성 일보 1929년 6월 12 일자 일본 어디에 가도 그곳에는 근면과 절약, 그리고 따뜻한 우정이 있는 밤이되면 단란한 자족 의 점등이 밝게 빛나 보인다 쥬트 루이즈 경성 일보 1929년 6월 13 일자 일본국민이 과거 50년간 구축한 눈부신 진보의 자취는 외부인들에게 깊은 인상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상하를 불문하고 거국적으로 진보를 계속하고 있다. 자연에 축복을 받고, 진취 82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적인 국가가 장래에 세계에 있어 가장 진보된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프 랜시스 W 클럭 경성 일보 1929년 6월 13 일자 경성 일보 는 미국인 기자의 입 을 통해 일본의 우수함, 근면함 등을 강조함으로 서 식민지 주민에게 일본이 근대국가 이며, 문명국가 인 것을 인상지었다. 거기 에는 근대화 를 완수해 높은 문명 을 가진 일본이 뒤처진 조선을 발전 시키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미국 기자단은 이러한 일본측의 목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와주는 언설을 하고 있었다. (3)미국기자에 의한 언설생산과 식민지지배 정당화 아틀랜타 컨스티튜션지 편집장 클럭은 경성에서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그는 우 선 조선이 얼마나 뒤처져 있나 를 지적하고 일본이 뒤처진 조선을 근대화 시켰다는 점에서 칭찬하고 있다. 38) 1910년, 한일 양국 정부의 완전한 합의 양국의 병합 성립. 병합 당시 조선인은 과거 수백 년간의 불안정의 결과, 국민 대부분이 빈곤에 빠져 있었으며, 문명의 정도도 저급한 수준에 있 었다. 철도 없고, 관개 시설 없고, 도로 같은 것 없었다. 지금의 경성은 근대도시로 새롭게 건설 되어 확대되고 있다. 학교도 있고 적어도 천만엔 정도가 들었을 총독부건물도 있고... 수 백년 뒤떨어짐을 일본은 불과 19년 만에 근대화 시켰다. 일본국민의 불굴요 정신이 유감없이 나타나고 있는 곳이다 또한 클락은 일본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 가 조선인의 독립에 대한 염원보다 중요한 가치 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강경수단 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인이 정치적 발언권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의 일본화를 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백년간 외국의 억압에 의한 빈약한 조선이 영구 평화와 밝은 미래가 열려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독립을 상실했다고 분개하고 있지만 일본의 지도하에 빈곤과 고뇌를 구함에 그들이 잃어버린 것보다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크다는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 日 本 は 強 硬 手 段 を 執 るの 已 む 無 きことありたり 朝 鮮 人 か 政 治 上 の 発 言 権 を 殆 んと 有 せす 他 方 日 本 は 朝 鮮 の 日 本 化 を 図 りつつあるは 事 実 と 認 めらるるも 数 百 年 間 の 外 国 の 威 圧 に 依 り 貧 弱 となれる 朝 鮮 か 今 や 永 久 の 平 和 と 光 輝 ある 未 来 とを 楽 しむに 至 れるも 亦 事 実 なり 教 養 ある 朝 鮮 人 士 にして 独 立 の 失 はれたるを 嘆 くものあるも 時 と 共 に 日 本 の 指 導 下 に 其 貧 窮 と 苦 悩 とより 救 はるるに 従 ひ 朝 鮮 人 は 彼 等 の 失 へる 処 は 大 なるも 獲 たる 処 は 之 よりも 遙 かに 大 な りしを 悟 るに 至 るへし 38) 第 3 巻 No.0356 83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일본과 조선을 진보 와 정체 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논조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클락 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심스는 잘 수 있는 조선, 눈을 뜨다: 일본인의 자극 아래에서 라 는 제목의 기사를 집필했다. 39). 기사에는 우선 긴 세월에 걸쳐 변화가 없었던 조선(chageless Korea)이 일본의 강한 자극 아래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이 많은 면에 있어 근대화 시키고 있으며 그것은 노동과 교육 현장에서 표면화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 다. 기사는 조선에서의 일본의 입장에 대한 도덕성(morality)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지만, 일본 의 조선병합이 조선인의 생활을 향상시킨 것은 사실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존즈도 같은 논조의 기사를 쓰고 있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에 대해 융화적인 정책을 취 하고 있고 조선의 경제, 교육, 문화 등 제분야에 걸쳐 발전시키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40) 조 선인 중에는 조선 독립을 강하게 바라고 일본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건설적인 계획이나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no constructive plans or ideas)고 지적한다. 그리고 일본이 뒤처진 조선을 발전시키는데 얼마나 전력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미국 기자들은 일본에 의한 조선 지배를 정당화 시키는 언설을 하고 있다. 이러한 언설의 생 산을 둘러싸고 미국과 일본은 공범 관계에 있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이 염원인 미일 우호 가 식민지 지배의 시인( 是 認 )을 중요한 요소로서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4)조선인의 호소 조선 체재 중 미국기자들은 조선인이 품고 있는 독립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는지 느끼고 있었다. 만주철도의 미국인 고문이며 경성에서 기자단과 동행한 키니 (Hennry W. Kinney)는 미국 기자단의 모습을 쓴 비밀 보고서를 작성했다. 비밀 보고서에는 조선인이 미국 기자단에게 식민지 지배의 가혹함을 호소하려는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고 있다. 41) 대부분의 미 국 기자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으로 파악해 조선인의 독립 염원에 대해서 냉담했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조선인 및 중국인은 본 단체에 대해 일본에 대한 비방을 하고 있고, 일행이 경성에 다달했 을 때 조선인은 일본 때문에 언론의 자유를 침탈당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사설이 실린 신문을 기차에 배포했으며, 일행이 경성에 체재 중일 때 집요하게 비밀회견을 강요했다. 시찰단원들이 있는 방에 들어오는 등 온갖 수단을 통해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강압사정을 호소하는 행동도 있 었지만 일행의 대부분은 일본 측의 시정을 시인, 조선인 만으로는 도저히 오늘과 같은 발전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고 일본정부는 조선의 발전을 위해 필연적으로 지속되야 한다 朝 鮮 人 及 支 那 人 側 は 該 団 に 対 し 排 日 中 傷 を 吹 き 込 まんとして 先 つ 同 一 行 [が] 京 城 39) 7 月 5 日 付 新 聞 記 事 (Simms) 第 3 巻 No.0034 Dormant KoreaAwakes:Under Spur of Japanese 40) "Korea and Manchuria: A Close-Up" セントルイス ポスト ディスパッチ 8 月 7 日 付 第 3 巻 No.0061 41) 7 月 13 日 : 機 密 電 報 645 号 第 2 巻 No.0090および"Security Confidential: Vist of Party of American Journalist in Chosen and Manchuria, Dairen, July 1st, 1929" 第 2 巻 No.0095 84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に 近 つくや 鮮 人 は 日 本 当 局 のため[に] 言 論 の 自 由 を 束 縛 せられ 居 る 旨 を 暗 示 せる 社 説 を 掲 くる 新 聞 を 汽 車 内 に 於 て 配 布 し 或 は 同 一 行 京 城 滞 在 中 執 拗 に 付 ひて 秘 密 会 見 を 迫 り 甚 しき 至 りては 屋 根 伝 ひに 団 員 の 居 室 に 入 るむと 企 つる 等 種 々なる 手 段 に 依 り 日 本 の 鮮 人 圧 迫 事 情 を 誇 大 に 訴 へむと 策 動 せるものありたるも 一 行 の 大 部 分 は 何 れも 日 本 側 の 施 政 を 是 認 し 鮮 人 のみにては 到 底 今 日 の 如 き 向 上 発 展 を 見 る こと 不 可 能 なりしならむとて 将 来 共 日 本 側 権 政 は 鮮 人 発 展 のため 必 然 的 に 継 続 せらる へきものなりとの 観 察 を 下 し 미국 기자단에게 조선의 현상을 직접 알리려는 조선인의 움직임에 대해 키니는 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정부는 조선인이 기자단에게 접촉하려고 하는 것을 방해한 것은 없 었으며 접촉하려고 했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 접촉을 강행하 려고 한 것은 그들이 억압 (suppression)이 얼마나 과장된 이야기인지를 명확하게 나타내 보이는 증거이다. 이 설명에 대해 미국 기자단은 납득했다고 한다. 또한 보고서에는 대부분의 미국 기자가 억압을 호소하는 조선인의 주장에 전혀 감명을 받지 않았으며, 조선인은 사회를 발 전시키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米 国 記 者 団 に 朝 鮮 の 現 状 を 直 談 判 しようとする 朝 鮮 人 の 動 きについて キニーは 記 者 団 に こう 説 明 した 日 本 政 府 は 朝 鮮 人 が 記 者 団 に 接 触 しようとすることを 妨 げたことは 一 切 無 く そうしようとすれば 十 分 に 容 易 に 可 能 となったはずである にも 関 わらず 朝 鮮 人 は 接 触 を 強 行 しようとした そこまでしようとするのは 朝 鮮 人 に 対 する 抑 圧 (suppression)が いかにひどいものかを 示 す 彼 らのパフォーマンスであると 説 明 し た これに 対 して 米 国 記 者 団 は 完 全 に 納 得 したという さらに 報 告 書 には 大 部 分 の 米 国 記 者 が 抑 圧 を 訴 える 朝 鮮 人 の 主 張 にまったく 感 銘 を 受 けていない そして 朝 鮮 人 は 社 会 を 発 展 させる 能 力 に 欠 けていると 記 されていた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보고서에 언급된 동아일보 의 사설이다. 사설에는 조선의 현실 에 대해 정부당국으로부터 제공되는 자료가 아니라 기자단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보았으면 한다 는 호소가 주요 내용이었다. 한층 더 사설의 내용은 일본의 조선 정책이 조선인의 소원과는 일 치하고 있지 않다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비판이었다. 라이언도 동아일보 사설에 주목해 경성에서 라는 제목의 6월 13 일자 통신에서 당시 상황 을 언급하였다. 42) 라이언은 이 사설이 조선의 신문이 독립을 위한 정치 활동을 하기 시작하고 있으며, 일본의 조선 통치는 착취를 목적으로 조선인의 정치참가를 금지하고 그들의 국민적 정신 을 크고 퇴조 시키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라이언은 조선에서 활동하 는 선교사를 통해 국민적 정신 이 지혜 있는 사람과 무지한 사람을 불문하고 일본민중에 뿌 리 깊게 밖힌 것이며 지금까지 여행자들에게 간과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라 이언의 개인적인 감상이 기록되고 있다. 42) 第 3 巻 No.0239 85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나는 솔직히 조선의 경제 사정에 관해서 무엇을 믿어야 좋은지 모겠다. 과연 일본이 조선 의 나라와 인민을 착취하고 있다면 무고의 백성에 대해서 슬퍼해야 할 것이다 라이언의 조선에 대한 눈빛은 뒤처진 조선이 발전한 일본에 의해서 근대화 되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의 독립이 없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다른 미국 기 자들과는 달랐다. 그것은 경성일보 에 게재된 라이언의 코멘트에서 잘 나타나 있다. 조선에 와서 내지와는 어딘지 모르게 상당히 다르다고 느꼈지만, 비가 적고 경작이 약간 곤란하다는 점이 먼저 느껴졌다. 조선인의 생활은 완전히 일본 내지와는 달라 근면한 백성이다. 일정이 허락한다면, 좀 더 여기에 머물러 충분히 조선의 문제를 연구해 보고 싶다. 이리하여 경 제문제나 시정방침 등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바란다 경성일보 1929년 6월 14 일자 라이언 이외에도 조선인들에게 동정적인 인식을 가지는 기자도 있었다. 동아일보 (6월 11 일자)는 미국 기자단 입경-조선에 대한 감상의 담화를 멀리하고-3일간 체재할 예정 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센트루이스 디스팟치지의 주필인 죠지 존 기자가 부산에 마중나간 기자에 대 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보도했다. 모든 면에서 부자유스러운 조선에 있어 자신이 느끼는 것을 여실에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귀국인의 부자연스러운 현실 생활에 대해서 동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기사의 취급에 식민지 당국은 고민을 했다. 식민지 당국은 기사가 조선인을 자극하는 것 으로 차압 처분을 내려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발언한 기자의 배려 차원에서 강경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43) 키니의 보고서에 부각된 것처럼 너그러운 조치 는 조선인의 무능함 을 강조하고, 제국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시키는 증거 로 활용되었다. 즉, 피지배자의 저항적인 언설이 결과적으로는 지배자에 의해서 변용되어 지배 정당화의 논리로 이용된 것이다. (5)시찰 종료 후 대미선전활동 1929년 8월 1일, 3개월에 걸쳐 일본, 조선, 만주, 중국을 방문한 미국 기자단 일행은 요코하 마로에서 귀로에 올랐다. 그들의 미국 도착에 맞춰 외무성을 중심으로 동양 시찰에 참가한 미 국 기자의 인상기를 발행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부상했다. 가와카미를 중심으로 팜플렛 형식의 인상기 발행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효과를 생각해 삼가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어 팜플 렛 배포는 취소가 되었다. 44) 다른 방법으로서 검토된 것이 인상기를 카네기재단의 출판물로서 발행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카네기재단은 중국 측에 불이익한 기술을 이유로 인상기를 재단 출판물로 하는 것을 거부했다 45)* 가와카미 등은 재팬타임즈 (The Japane Times)에 인상기 43) 1929 年 6 月 17 日 付 報 告 ( 慶 尚 南 道 庁 高 等 外 事 係 の 大 平 から 筒 井 事 務 官 宛 ) 第 1 巻 No.392-396 44) 1929 年 11 月 7 日 第 2 巻 No.0341 45) 1929 年 11 月 8 日 第 2 巻 No.0343 86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게재 가부를 타진했다. 46) 결국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결정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재팬타임즈 에 인상기가 게재되 게 되었다. 47)* 10월30일에는, "The American Journalists in Japan", 31일에는 "The American Journalists in China", 11월13일에는 "The American Journalists in Korea", 14일 에는 "The American Journalists in Manchuria"를 제목으로 하는 인상기가 사토르 카토우의 이름으로 Japan Advertiser 에 발표되었다. 사토우 카도우는 가명으로 사실은 가와카미가 집필한 것이었다. 선전이라는 색체를 지우기위해 가명이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Japan Advertiser 에 연재된 인상기는 12월에 들어 "The Ameican Journalist in Far Eas"로 이름 붙여진 76 페이지 분량의 팜플렛으로 정리되어 발행 되었다. 외무대신 이하 외무 차관, 아시아 국장 등 외무성 본성 내에 24부가 배포 되었다. 도한 미국 및 중국에 있는 22개 일본 재외 공관에 58부가 송부 되었다. 이 점은 일본의 대외 홍보 활동이 얼마나 미국과 중국 을 중시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팜플렛에는 미국인 기자들이 동아일보 에 게재된 일본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기사를 통 해 조선인이 일본 지배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하지만 미국 기 자들은 조선인에게는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조선에 있어 일본의 정책은 조선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을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팜플렛에서는 발전하 고 있는 일본이 교육이나 농업 등 모든 면에 있어 뒤처진 을 근대화 시키고 있는 모 습이 반복적으로 언급, 강조 하고 있다. 소수의 미국인 기자가 가지고 있었던 조선인에 대한 동정적인 눈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제국 일본의 대외 선전 활동으로서의 동양 시찰은 뒤처진 조선에 근대화 를 가져오 는 일본의 정책이 얼마나 바람직 한 것인지를 선전하고 일본 제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승인을 얻어 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근대화 가 윌슨의 국제주의와 연결되는 민 족자결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이 미국과 일본 간에 공유되어 식민지 지배를 시인 하는 언설이 생산되어 유통되었다. 5.맺음말 미국 기자에 의한 동양 시찰은 명목상 카네기재단 주최였지만, 실제로는 일본 주도에 의해 행해진 대외 선전 활동의 일환이었다. 본고의 목적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다음의 3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 지식 생산, 보급과 관련된 것이다. 일본은 동양 시찰에 참가하는 미국 기자를 통해서 미국인들에게 제국의 실정을 전하려고 했다. 일본 자신이 만들어 낸 동양 에 대한 지식을 미 국 기자에게 각인시켜 미국인들에게 확산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 점이 일본 측이 동양 시찰의 가장 큰 목적이다. 동양 에 대한 지식의 생산과 보급이란 일본 측이 동양 의 인식을 미국 46) 1929 年 11 月 8 日 第 2 巻 0348 47) 재팬 어드버타이저( 彌 ャパン アドバタイザー) は 1890년에 미국인에 의해 요코하마에서 창간되었다. 그후 1940년에 1897년 창간된 재팬타임스 (The Japan Times)에 흡수되었다. 재팬타임스 는 전전기 부터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는 일본 유일의 영자지이다. 87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측이 받아들이게 하는 움직임을 의미하고 있다. 대외선전 활동이란 선전자가 가지는 견해-인식 의 틀-을 피선전자에게 동의 혹은 공유를 요구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 측으 로부터 동의나 공유의 대상이 되었던 미국 기자들은 어떻게 반응한 것일까. 둘째, 미국기자의 반응과, 동의 공유된 것의 실체와 관련해서 이다. 미국기자는 일본측의 움 직임을 승낙하고, 일본 측의 인식 틀을 답습하는 형태로 동양 을 파악했다. 그것은 미국 측 이 일본은 다른 동양의 국가와는 달리, 근대적이라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인과 다른 아시아인의 우열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미국기자는 일본인에 대해 친근한 태도를 보인 반면, 조 선인과 중국인에 대해서는 극히 냉담했다. 미국기자는 제국일본의 침략 행위에 고통 받는 그들 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근대화 를 성취한 문명 국가 일본이 뒤처진 아시아를 발전시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미국인에게 전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동의 공유된 동양 인식은 국가와 민족의 우열을 유지 고정화시킴으로써 지배를 확립하려 는 제국주의적 힘의 원천이 되었다. 48)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은 명백히 제국에 의한 지배 메 카니즘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더욱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동양시찰의 도달점으로서 설정된 미일우호 에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패권을 나누어 가지려는 미 일간 공통의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미일우호 가 민족적 우열을 인정하고 제국 일본에 의한 아시아전략을 근대화 라는 이름 하에 서양으로 부터 승인받음으로써 완수될 수 있다고 하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처럼 카네기재단 주 최 미국기자 동양시찰 은 단지 일본의 대외선전활동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공 범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국일본에 의한 대외선전 연구를 둘러싼 이후의 과제와 관련해서 이다. 지금까지 대외선전과 관련한 연구는 무엇이 말해졌는가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 왔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 이 대외선전의 목적으로서 설정된 미일우호 의 구축에는 아시아 침략과 민족적 우열의 인정 이 선해되었다. 제국일본에 의한 대외선전에는 무엇이 행해져왔는가 뿐만 아니라 무엇이 은폐되 었으며, 그것이 현대사회에 있어서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 혹은 지속되고 있지 않는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 이 점은 20 세기 전반의 제국주의의 시대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임 과 동시에 현대 사회의 구조를 역사적인 관점으로부터 파악하는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48) 츠지야( 土 屋 由 香 : 愛 媛 大 学 教 授 )교수는 인종적 우애(Fraternity) 라는 개념을 통해 전시기 맺어진 미일우호 에 인종주의적인 측면이 뭍혀 있으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 近 刊 親 米 日 本 の 構 築 米 国 の 対 日 情 報 教 育 政 * ミネルヴァ 書 房 ) 本 稿 の 議 論 は 土 屋 の 議 論 から 大 いに 示 唆 を 受 けている 88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帝国日本の対外宣伝活動と植民地朝鮮 カーネギー財団主催東洋視察米国記者団 をめぐって 小林 聡明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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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지정토론 李利範 江陵原州大) 帝国日本の対外宣伝活動と植民地朝鮮 - カーネギー財団主催東洋視察団米国記者団 をめぐって- 討論文 1. 논문의 요점과 강조점 본 논문은 1929년 카네기재단 주최 東洋視察美國記者團 의 활동 경위를 분석한 것으 로, 일본제국이 우호적인 미일관계를 구축하고, 동양 지역에 대한 지배 내지 식민지 경 영을 국내외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대외선전활동의 일환으로 조직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했 다는 것을 규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제국의 의도는 당시 동양 에 대해 우월의식 내지 지식을 갖고 있 었던 미국기자들에게 동의ㆍ공유되어, 근대화 에 성공한 일본제국이 뒤쳐진 조선 내 지 중국 을 지배하고 식민지화하는 것을 지지하고, 일본의 민족적 우월을 시인하는 결과 를 가져왔다고 주장된다. 즉 카네기재단이 주최한 미국기자단의 동양시찰단은, 결과적으로 미국에 친화적인 일본의 성공적인 근대화상을 국내외에 전달했고, 동시에 일본의 아시아침략과 민족적 우수성을 시 인해주어, 미일은 제국주의적 공범관계에 있었다고 주장된다. 따라서 카네기재단의 동양시찰미국기자단 활동은 미일우호 를 위해 제국일본의 대외 선전의 일환으로서 추진되었지만, 그 활동 내용에는 미일 양국의 아시아침략과 민족적 우열 의식이 구조적으로 공유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2. 논문에 대한 코멘트 (1) 먼저, 카네기재단의 동양시찰미국기자단 의 동양시찰 활동에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인 대외선전 의도와 함께, 미국기자단의 서구 제국주의의 동양 에 대한 우월적인 지식과 민족적인 우월의식이 공유되어 있었다는 연구자의 지적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주장이라 고 판단된다. 또한 당시 조선과 중국의 뒤쳐진 사회 및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제국일본의 대외선전 의도가 미국기자단에게 쉽게 수용되었을 것이라고 이해된다. 107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2) 그런데, 동양시찰미국기자단 의 동양시찰이 활동했던 1929년의 일본은, 경제적으로 는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하고, 외교적으로는 시데하라( 幣 原 )의 국제협조적인 외교노선의 끝무렵이었다. 제국일본의 대외선전정책은 이러한 1920년대와 그 이후 제국주의적인 팽창 정책을 적극 추진했던 1930년대 이후와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3) 또한, 카네기 재단은 연구자의 지적대로라면, 일본 외무성이 대외선전 정책의 일환으로 동양시찰미국기자단 의 동양시찰을 추진하려는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으면서도, 동조해 추진했던 가장 주요한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이다. 108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지정토론 李利範 江陵原州大) 帝国日本の対外宣伝活動と植民地朝鮮 - カーネギー財団主催東洋視察団米国記者団 をめぐって- 討論文 1. 論文の要点と強調する点 本稿は 1929年カーネギ-財団主催の 東洋視察美國記者團 の活動の経緯を分析したもの で 日本帝國が友好的な日米関係を構築し 東洋 地域に対する支配や植民地の経営を国 内 国内外的に正当化するため対外宣戰活動の一環として組織的に企画し 推進したことを糾 明している ところが このような日本帝國の意図は 当時の 東洋 に対し優越意識や知識を持ってい た米国記者に同意ㆍ共有され 近代化 に成功した日本帝國が遅れた 朝鮮 または 中 国 を支配し 植民地化することを指示し 日本の民族的優越を是認する結果をもたらしたと 主張する すなわち カーネギー財団が主催した米国記者団の東京視察団は 結果的に米国に神話的な日 本の成功的な近代化像を国内外に伝達し 同時に日本のアシア侵略と民族的優秀性を是認しす ることになり 日米は帝國主義的の共犯関係にあったと主張する したがって カーネギー財団の東洋視察米国記者団の活動は 日米友好 のため帝国日本の対 外宣戰の一環として推進されたが その活動の内容には 日米両国のアシア戦略と民族的優劣 意識が構造的に共有されていたというのである 2. 論文に対するコメント (1) まず カーネギー財団の 東洋視察米国記者団 の東京視察活動には 日本の帝国主義 的な対外宣戰の意図と共に 米国記者団の西欧帝国主義の 東洋 に対する優越的な知識と民 族的な優越意識が共有されていたという研究者の指摘は十分に納得できる主張だと判断でき る 当時 朝鮮と中国の遅れた社会 経済状況を考慮すると 帝国日本の対外宣戰の意図が米 国記者団に受容されやすかったであろうと考える (2) ところが 東洋視察米国記者団 の東洋視察が活動した1929年の日本は 経済的には資 本主義体制が発展し 外交的にはシデハラ(幣原 の國際協調的な外交路線の終わりであった 帝国日本の対外宣戰政*は このような1920年代とそれ以後の帝国主義的な膨脹政*を積極的 109

제국일본의 대외선전활동과 식민지조선 に 推 進 した1930 年 代 以 後 とどのような 相 違 点 があるのか 気 になるところである (3) また カーネギー 財 団 は 硏 究 者 の 指 摘 の 通 りであるなら 日 本 の 外 務 省 が 対 外 宣 戰 の 政 *の 一 環 として 東 洋 視 察 米 国 記 者 団 を 推 進 しようという 意 図 を 把 握 していたのにも 関 わら ず 同 調 し 推 進 した 一 番 の 主 な 理 由 は 何 であったのか 疑 問 である 110

종합토론 종합토론 司 會 - 李 相 薰 (한국외대 교수) 討 論 - 鄭 灐, 金 弼 東, 小 林 聰 明, 禹 政 權, 廖 秀 娟 13:30~14:1 南 相 虎, 李 利 範, 裵 開 花, 徐 東 周 13:30~14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