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간 등 록 번 호 11-1550110-000022-01 제6회 고대옹관 국제학술심포지엄 대형옹관생산과유통연구의현황과과제 Na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제 6 회 고 대 옹 관 국 세 학 술 심 포 지 엄 대 형 옹 관 생 산 과 유 통 연 구 의 현 황 과 과 제 2 0 1 3 520-230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포로 263-23 Tel. 061.339.1134 / Fax. 061.339.1139 http://www.ncp.go.kr ISBN 978-89-299-0222-3 93910 제6회 고대옹관 국제학술심포지엄 대형옹관생산과유통연구의현황과과제 -발표논문집-
대형옹관 생산과 유통 연구의 현황과 과제 바탕으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발표자의 능력부족으로 인해 신라 가야토기를 모두 관찰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산과 유통을 언급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발표는 먼저 고식도질토기시기의 가마유적을 살펴보고, 함안지역 고식도질토기시기의 가마유적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토기의 제작기술을 잘 보여주는 우거리 토기가마 출토품을 중심으 로 함안지역 고식도질토기 생산기종과 생산량, 토기 제작방법과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함안지역에서 생산된 토기의 특징과 타지역에서 확인되는 토기가 함안지역 생산품인지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고식도질토기시기는 연구자에 따라 4~5기로 나누기도 하지만 본 발표에 서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고자 한다. 이는 토기의 형식분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토기생산과 유통의 변화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다2). Ⅱ. 고식도질토기 생산가마 현재까지 영남지방에서 조사된 주요 토기가마는 <표 1>과 같다. 특정 가마의 조업시기와 관련하여 연구자간 편년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고서에 제시된 조업시기를 기준으로 하였다. 이 중 고식도질토기 생산가마는 함안, 창녕, 김해, 의령, 경산, 경주, 양산지역에서 확인되었다. <표1> 영남지방 주요 토기가마 길이(m) 연 번 유적 유구 번호 벽체 길이 연 소 부 소 성 부 너비(m) 연소 부 비율 굴 착 면 장 연소 소성 단 부 부 비 내부 내부 장타원 - 고식도질토기시기 (4.9) 33%± (1.8) 2 함안 우거리 2 6.6 2.0 4.6 1.9 1.4 1.0 3.5 0.9 15, 25 장타원 - 고식도질토기시기 3 함안 우거리 3 (5.8) 1.6 3.2 28% 1.6 1.1 1.1 3.6 0.5 12, 21 장타원 - 고식도질토기시기 4 함안 묘사리 1 (3.6) - (3.6) - 1.7-1.2-0.9 19? - 고식도질토기시기 5 함안 묘사리 2 (6.5) - (6.5) - - - 1.6-0.3 15? - 고식도질토기시기 6 창녕 여초리 A (13) 3.4 8.5 26% 1.6 1.3 1.6 8 1.2 18 초세장 - 고식도질토기시기 7 창녕 여초리 B 11 3.0 9.2 1.9 1.8 5.7 1.2 11 초세장 - 고식도질토기시기 8 김해 구산동 1895 7.18 1.6? - 조업시기 기타 (2.4) 1.9 4.0 아궁 이시 설 (7.3) 27% - 평면 형태 1 함안 우거리 1 30% - 최 대 요상 깊 이 경사 (m) - 4.1? 22.3% 1.7 1.24 1.26 4.2 0.48 15 세장 적석? 고식도질토기시기 2) 정주희의 편년(2009)을 기준으로 전기는 Ⅰ단계와 Ⅱ단계, 중기는 Ⅲ단계에서 Ⅴ단계, 후기는 Ⅵ단계에 대응한다. 26
함안지역 고식도질토기의 제작기술과 유통 _ 이정근 수 있다. 동중위에서 저부를 향한 종방향의 저부타날은 우측이 볼록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볼때 동체부 타날과 마찬가지로 저부가 오른쪽에 위치한 상태에서 오른손에 타날구를 들고 타날하였 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 1. 황사리 44호 승석 2. 구지로 6호 승석 3. 구지로 6호 의사승석 도면 3. 함안지역과 김해지역 승석문타날 단경호의 저부타날비교 ⑥ 기호 새김 모든 단경호에 기호가 새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단경호에 기호가 새겨진다. 기호는 저부타날과 동체부타날이 만나는 부위에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순서상 저부타날 후에 해당한다. 종방향의 선일 경우 저부에서 구연을 향해 기호를 새겼는데, 횡치상태에서 기호를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부는 가장 마지막에 형태를 잡는 부위이기 때문에 횡치 또는 도치상태로 건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승문타날단경호는 동체부의 중하위에만 승문이 타날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구연 바로 아래 까지 승문타날을 하는 경우도 있다. 前者의 경우는 ① ④ ⑤ ⑥의 과정을 거쳐 성형하고, 後者의 경우 ① ② ④ ⑤ ⑥의 과정으로 성형하게 된다. 그리고 승석문타날양이부단경호의 경우 耳는 ③~⑤과정 사이에 부착한다. 10) 도치상태에서 타날을 하였을 경우에는 곡선의 볼록한 부분이 횡치상태와 다른 방향이 된다. 41
함안지역 고식도질토기의 제작기술과 유통 _ 이정근 <표 3> 우거리 토기가마유적에서 확인되는 기호의 종류 신라 가야토기 분화 이후에는 영남 각지에서 많이 확인되는데, 경산 임당유적의 경우 82%가 고배 와 개에 새겨져 있다(굃政根 2006). 고식도질토기에 보이는 도부호와 동일한 형태(A1~A9, B2 등)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고 직선을 이용하였다. 이에 비해 고식도질토기 도부호는 곡선을 이용한 것도 많이 확인된다. 가장 많이 확인되는 기호는 A3, A1, A8와 같이 간단한 직선을 이용 하여 1획 또는 3획을 그은 것으로 고식도질토기 뿐 아니라 신라가야토기 분화 이후에도 가장 많이 확 인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B1, B3~8, C1~8 등은 함안지역 고식도질토기 단경호에만 보이는 특징적인 기호로 판단된다. 이러한 도부호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12), 현재로선 하나의 가마에 여러 도공이 만든 토기를 함께 소성할 때 각기 만든 토기를 소성 후에 구별하기 위해 새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陶邑窯址群의 TK321호 요지가 천장 붕괴로 소성 중이던 450여점의 토기가 재여진 채 확인 되었는데, 조사결과 다른 공인이 만든 토기와 구별하기 위해 일정 블록마다 토기를 확인할 수 있도록 기호를 새긴 토기를 배열했으며, 동일기종 중 다른 것과 구별하기 어려운 蓋杯에 압도적으로 많은 기 호를 새겼다는 것(宋桂鉉 2001에서 재인용)도 그러한 의미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일본의 사 례와 시기적인 차이가 있지만 영남지방의 5세기 이후 확인되는 도부호도 고배와 개에 압도적으로 많 다는 것은 공인 간 구별을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 고식도질토기 단경호에 많이 보이는 12) ① 발주자처(수요자)의 구분, ② 窯의 구별, ③ 생산한 토기의 수량 파악, ④ 각 공인들이 만든 토기의 소성 후 구별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43
高麗 靑瓷의 生産과 괥通 _ 韓盛旭 와 유색, 번법 등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12). 따라서 이들은 중국의 서로 다른 제작기술을 수용 하여 자기를 제작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제자기술은 오랜 시기 각 지역별로 다종 다양한 기형 과 유색, 태토, 문양, 번법이 발전하고 있어 중국과의 관련성도 보다 면밀하게 분석하여야 그 영향 관 계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중국 가마 축조술은 전축요 뿐만 아니라 토축요도 존재하고 있어 이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어야 하겠다. 따라서 한반도 製瓷技術의 다양한 차이는 기술을 받아들였던 중국의 도입 지가 달라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중서부지역 가마들이 중국 越州窯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 강진을 비롯한 전라도지역 가마는 월주요 이외의 지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Ⅲ. 高麗靑瓷의 生産體制 고려는 재정확보와 각종 물품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특정 鑛産物과 農水産物, 手工業品을 생산하는 다양한 所 를 운영하였다. 이들은 專業的으로 생산한 물품을 常貢과 함께 중앙 各司가 요구하는 別貢 을 통해 貢納하면서 국가재정의 일부분을 담당하였다13). 이들 所는 新갥의 곉金成 濯錦成 寶劍成 등 수공업품 제작의 成 제도를 계승하여 太祖 23년(940) 무렵 성립되었으며 成宗代(981 997년)에 실 사진 1. 淳化四年 銘壺(보물 제237호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사진 2. 針刻 尙藥局 銘靑瓷(開成 滿月臺 출토) 12) 굃鍾玟, 韓國의 初期靑磁 硏究, 弘益大學校大學院 博士學位論文, 2003. 13) 갏炫榮, 高麗時期의 所에 對한 再檢討, 韓國史걩 15, 서울大學校國史學科, 1986, p.117. 61
高麗 靑瓷의 生産과 괥通 _ 韓盛旭 사진 3. 尙藥局 銘靑瓷盒(강진 생산) 사진 4. 義藏 照淸 孝文 銘靑瓷(부안 생산) 伊의 亂25)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청자 생산의 중심지인 大口所는 행정영역이 괈巖 郡에서 長興府로 바뀌며 全盛期 翡色靑瓷를 생산하던 시기로 製瓷 기술이 더욱 발전하고 있어 대조적 이다. 특히, 이 시기는 大口所가 왕실을 비롯한 官司에 필요에 청자를 대부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 된다. 현재까지 고려 말기에 제작된 寶源庫와 德泉庫 등을 제외한 尙藥局(사진 3) 등 대부분의 官司銘 청자가 대구소 가마터에서 확인되고 있으나26), 이 시기 대구소와 비교되는 부안 가마터에서는 義藏 照淸 孝文 (사진 4) 등 개인적인 이름이 주로 확인되어27) 대구소와는 성격이 상이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12세기 이후 所民들에 대한 과중한 貢役 부담과 권력층의 所地域 占奪 등 여러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貢物을 전담하던 所制度가 붕괴되고28), 對蒙抗爭(1231 1273년) 이후 元의 일본 침공준비와 과다한 공 물 요구로 貢役 부담이 더욱 가중되면서 所民의 괥離를 재촉하였다29). 所民의 괥亡은 瓷器所도 예외일 수 없는데, 이는 도자 생산의 확산을 가져왔지만 반대로 소규모 집단에 의한 분업화, 전문화되지 못한 도자생산과 직결되어 질적 하락을 재촉하였다30). 그러나 窯場 확산이 대량생산으로 연결되어 수요층 의 폭 넓은 확대를 가져와 도자상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충정왕 2년(1350)부터 시작된 왜구의 본 격적 침입은 해상 교통이 발달되어 있으며 곡창의 중심지인 남해 연안의 전라도 지역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러한 왜구의 잦은 침략은 남해안에 위치한 大口所에도 큰 타격을 주어 도자 생산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으며 匠人의 괥離를 더욱 재촉하여 대구소 생산 청자의 품질을 더욱 하락시키는 결정적 계 기가 되었다. 이는 왕실용 청자인 正겓 銘靑瓷의 질적 하락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31). 25) 굃貞信, 高麗時代 公州 鳴鶴所民의 蜂起에 對한 一硏究, 韓國史硏究 61 62, 韓國史硏究會, 1988. 26) 國立中央博物館 高麗陶磁銘文 1992. 27) 굆花女子大學校博物館 扶安 괤川里窯 高麗陶瓷 1983. 28) 高麗史 84卷, 志 38, 刑法 1, 職制, 忠烈王 22年(1296) 5月條; 中贊洪子藩 條上궄民事 一諸州縣及鄕所部曲 人吏無 一戶者多矣. 外吏依勢 避役者悉令歸鄕 丁吏亦令 겤歸還. 29) 굃貞熙, 高麗時代 뮽役의 運營과 그 實態, 釜大史學 8, 釜山大學校史學會, 1984, p.64. 30) 도자는 대체로 대외적 군사적 혼란기에 유입과 확산이 이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고려 청자의 발생은 中國 五代에 이 루어졌으며, 고려 후기는 對中 對日 관계의 혼란으로 급속한 확산과 변화를 갖는다. 또한 壬굪倭갺의 경우 日本은 도 자생산 기술이 유입되었으며, 조선은 이전에 통제되던 백자가 널리 확산되었다. 31) 韓盛旭, 高麗後期 正겓 銘象嵌靑瓷의 性格, 東岳美術史學 6, 東岳美術史學會, 2005. 63
高麗 靑瓷의 生産과 괥通 _ 韓盛旭 90牛에 이르며 전국에서 광범위하게 도자를 생산하였는데43) 이는 匠人 분포의 다양성을 내포하며, 貢 物用 자기를 사사로이 처분할 수 있는 시장성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반영하듯 고려후기 가 되면 도자 보급이 확대되면서 이전 시기에 비해 실용성과 기능성이 강조되는 각종 생활용 도자의 비율이 높아진다44). 그리고 貢納 도자의 생산지가 확산된 것은 1350년 이후 倭寇의 침략에 따라 남해안 에 위치한 大口所 지역의 청자생산과 貢納에 어려움이 있었음도 하나의 원인이다. 따라서 14세기가 되 면 大口所를 비롯한 각지에서 청자를 생산하여 官營과 私營으로 도자 생산체제가 이원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司膳 銘과 德泉 銘, 寶源 銘靑瓷 등 공납용 청자가 大口所 이외의 곳에서 생산되고 있음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사진 5 6)45). 이 시기 확산된 窯場은 世宗實걧地理志 에 기록된 324개소 의 磁器所 陶器所와 經國大典 公典 工匠條의 도자 장인에 기록된 101인의 外工匠 분포에서도 유추 할 수 있다(表 1 3). 表 1. 世宗實걧地理志 全國 磁器所 陶器所 現況 地域 京畿道 磁器所 上品 中品 1 下品 陶器所 未詳 小計 上品 中品 下品 未詳 小計 合計 13 14 6 12 2 20 34 12 11 23 6 31 1 38 61 8 26 37 6 28 34 71 全갥道 15 12 31 8 23 39 70 江原道 2 2 4 10 10 14 黃海道 6 6 12 6 11 17 29 平安道 2 11 13 1 10 1 12 25 5 5 6 9 15 20 131 21 185 324 忠淸道 慶尙道 3 咸吉道 合計 4 45 86 4 4 139 33 8 43) 高麗史 118卷, 列傳 31, 趙浚條; 司饔每歲 遣人於諸道 監造內用瓷器 一年爲次 憑公營私 侵漁萬端 而一道 쪚載至八九 十牛 所過騷然 及至京都 進獻者 皆百分之一餘 皆私之弊莫甚焉. 44) 김영진, 조선도자사연구 삼국-고려, 사회과학출판사, 1995, pp.88 89. 45) 朴敬子, 14世紀 康津 磁器所의 解體와 窯業體制의 二元化, 美術史學硏究 238 239, 韓國美術史學會, 2003.
대형옹관 생산과 유통 연구의 현황과 과제 출항하여 운반선이 난파되었을 경우는 인솔관인 판관과 지방관인 鄕吏와 뱃사공인 水手가 공동 책임 을 지고 변상하여야 했다. 그러나 기한 내에 출발하였으나 바람 등 운항조건이 순조롭지 못해 침몰한 경우는 책임을 면제하였다67). 靖宗代(1035 1046年)에 開京까지 운반하는 漕運船의 비용을 제정하였는 데, 石頭 通陽 河陽 永豊 鎭城 芙蓉 長興 海龍 海겓 安興은 각각 船舶 6隻인데 모두 哨馬 船으로68) 1隻에 1千石을 선적하도록 하였다. 德興倉은 20隻, 興元倉은 21隻인데 모두 平底船으로69) 1隻 에 2百石을 船積하도록 하였다70). 한편 최근 조사된 태안 죽도 출토 목간에서도 운반을 책임졌던 선장 의 서명으로 판단되는 명문이 鄭 으로 추정되고 있음에서도 향리들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즉, 鄭氏는 탐진현의 토착 성씨 가운데 하나로 이들에 의해 청자 운반이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71). 표 4. 高麗時代 漕倉 現況 漕倉名 位 置(現 位 置) 移動걟 安瀾倉 西海道 長淵(黃海道 長淵) 海岸으로 海걟 이용 興元倉 楊廣道 原州(江原道 原州) 內陸으로 漢江 이용 德興倉 楊廣道 忠州(忠淸겗道 忠州) 永豊倉 楊廣道 富城(忠淸南道 瑞山) 海岸으로 海걟 이용 河陽倉 楊廣道 牙州(忠淸南道 牙山) 鎭城倉 全갥道 굢陂(全갥겗道 群山) 安興倉 全갥道 保安(全갥겗道 扶安) 芙蓉倉 全갥道 괈光(全갥南道 괈光) 海陵倉 全갥道 羅州(全갥南道 羅州) 長興倉 全갥道 괈巖(全갥南道 長興) 海괟倉 全갥道 昇州(全갥南道 順天) 通陽倉 慶尙道 泗川(慶尙南道 泗川) 石頭倉 慶尙道 合浦(慶尙南道 昌原) 計 7道 13倉 67) 高麗史 79卷, 志 33, 食貨 2, 漕運條; 倉置判官 州郡租稅 各以附近輸諸倉 翌年二月漕運 近地限四月 遠地限五月 畢輸 京倉. 限內發舡 因風失利 梢工三人以上 水手雜人五人以上 幷米穀漂沒者 勿徵 限外發舡 梢工水手三分之一敗沒者 其官 色典梢工水手等 平均徵納. 68) 哨馬船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漕運船이다. 69) 船底가 편평한 고려시대의 대표적 선박으로 현재까지 해저유적에서 확인되는 고려 선박은 모두 이 유형이다. 70) 高麗史 79卷, 志 33, 食貨 2, 漕運條; 靖宗朝 定十二倉漕船之겤 石頭通陽河陽永찖鎭城芙蓉長興海龍海겓安興 各船괯 렕 뗋哨馬船 一船載一千石 德興二十렕 興元二十一렕 뗋平底船 一船載二百石. 71) 新增東國輿地勝覽 37卷, 康津縣 姓氏條; 耽津 崔 曺 兪 安 鄭 河, 康 朴 모두 來姓이다. 大口 徐. 七陽 白. 世宗實걧地理志 康津縣條; 耽津姓六, 崔 曺 兪 安 鄭 河; 걐接姓二, 康[幸州걐] 朴[靈岩걐]. 大口所續姓一, 徐. 七良所續姓一, 白. 72
대형옹관 생산과 유통 연구의 현황과 과제 高麗時代 13개소의 漕倉은 그 위치는 파악되었으나 所管地域에 대한 정확한 구역은 현재까지 구체 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13개창 가운데 興元倉과 德興倉을 제외한 11개 지역이 海걟를 이용하여 漕運 을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漕倉 設置地域도 三南地方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穀倉地帶를 중 심으로 稅穀을 운반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漕運倉의 위치를 중심으로 청자 생산의 핵심지인 강 진에서 생산된 청자의 유통 구조를 고찰해 보면 다음 과 같이 추정된다. 해안을 끼고 있어 조운로를 쉽게 이 용할 수 있었던 강진 생산의 청자는 현재 해저유적에 서 확인되는 선박의 크기로 보아 長興倉의 책임하에 인근의 尾山浦에서 선적되어(사진 7)72) 괈巖 海南 사진 7. 康津 尾山浦와 沙堂里 전경 務安 扶安 長津浦 元山鎭(洪城) 安興鎭(泰安) 昇天浦(江華) 碧瀾渡(開京) 등의 서해 연안항로를 따 라 수도인 開京으로 출항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항로는 선사시대부터 중국 일본과의 公的關係 는 물론 私貿易에도 이용되었던 항로이다. 한편, 강진 청자는 전국의 大刹과 官衙 등에서도 많이 확인 되고 있어 開京으로의 유통 과정뿐만 아니라 지방으로의 유통 구조도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강진을 출발한 청자 운반선은 대부분 개경이 목적지였지만 일부는 조정의 통제하에 지방의 거점 포구로 운송 되어 지역의 최상류층의 수요에 부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부 고품격의 최상품은 일단 개 경의 京倉으로 운반된 후 賜與의 형식으로 지방에 유통되었을 가능성도 있다73). 당시의 항해법은 대부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해안과 가까운 항로를 이용하는 원시적인 肉眼近 接航걟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漕運船은 이동과정 중에 해난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해난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仁宗代(1122 1146년)와74) 恭讓王代(1389 1392년)에75) 沿海航걟 중 가장 위험한 충청도 瑞山 安興梁에서 발생하는 사고를 원천적으로 방지하기 위해 泰安半島를 남북으 로 종단하는 運河 굴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76). 1270년(元宗 11) 三別抄가 봉기하여 珍島를 근거지로 활약하자 고려의 조운체계는 한동안 마비되어 극심한 재정난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 말인 14세기 후반부터 조선 초에는 倭寇의 猖獗로77) 漕運船 74) 高麗史 16卷, 世家 16, 仁宗 12年(1134) 秋7月條; 是月遣內侍鄭襲明 鑿河于洪州蘇大縣 以安興亭下 海道爲衆流所激 又有岩石之險 往往覆舟 或有獻議 由蘇大縣境 鑿河道之 則船궋捷利. 遣襲明發 旁郡卒겤千人 鑿之竟未就. 75) 高麗史 116卷, 列傳 29, 王康條; 康獻議曰 楊廣道 泰安瑞州之境有 炭浦從南流 至興仁橋百八十餘里 倉浦自겗流至 蓴 堤城下七十里. 二浦閒古有浚渠處 深鑿者十餘里 其未鑿者겘過七里 겭畢鑿使 海水流通 則每歲漕運 겘涉安興梁四百餘里 之險 請始役於七月終於八月. 於是發丁夫浚之. 石在水底 且海潮往걐隨 鑿隨塞未易 施功事竟無成. 康嘗擧前牧使呂稱 爲 副使將代己任 人以劉晏之徒目之. 76) 孫兌鉉, 韓國海運史, 曉星出版社, 1997, p.85. 77) 高麗史 133卷, 列傳 46, 辛禑 3年(1377) 6月 乙卯條; 遣判典客寺事 安吉祥于日本 請禁賊書曰 歲自庚寅(1350年)海 盜始發擾 我島民各有損傷甚可憐愍.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