星州 漢文學의 歷史的 展開樣相 황 위 주* Ⅰ. 머리말 Ⅱ. 高麗末 以前의 狀況 Ⅲ. 朝鮮前期 官人과 士林 Ⅳ. 朝鮮後期 道學派의 活動 Ⅴ. 19世紀 以後의 狀況 Ⅵ. 마무리 국문초록 본고는 성주라는 특정 지역의 한문학을 집중적 검토 대상으로 삼아 이 곳에서 수행된 창작 활동의 역사적 전개 양상을 보다 정밀하게 파악하고 자 하였다. 성주지역 한문학은 신라 말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고려전기 지 방교육이 활성화되면서 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려 무신 란 이후 많은 문인들이 여행 관료 등의 목적으로 이곳을 방문하고, 또 성주 출신 문인이 직접 창작에 가담하면서 뿌리를 내렸는데, 특히 전 국적 문벌로 부각된 이조년 가문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조선전기가 되자 성주지역 한문학은 이직과 그 후손을 필두로 한 고위 관료문인 계열, 김 종직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출신 사림파 문인계열 등 2계열 인물 들이 큰 흐름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에는 이황과 조식의 학통 을 계승한 성주 출신 도학파 문인들, 특히 정구와 그 제자들이 한문학은 물론 지성계 전체를 주도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수륜면 *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전자우편 wzhwang@knu.ac.kr 7
의 정구와 그 후손들, 월항면의 이주와 그 후손들, 칠곡군 이윤우와 그 후 손들, 가천면 최항경과 그 후손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19세기 이후 성 주지역의 한문학은 이원조 이진상 장복추 이종기 등이 대미를 장식하였다. 그러나 갑오경장과 함께 과거시험을 폐지하고 公文式을 반포하여 국문 사 용을 천명함으로써 마침내 한문학이 더 이상 존립할 근거를 상실하였으며,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속에서 이 지역 한문학 또한 근대의 뒤안길로 사라 졌다. 주제어 -------------------------------------------------------------------------------성주(星州), 한문학(漢文學), 관료문인(官僚文人), 사림파(士林派), 도학파(道學派) 8
Ⅰ. 머리말 성주 한문학이란 대략 세 가지 다른 측면에서 성주와 관련된 한문학을 가리킨다. 첫째는 작가적 관련성으로, 성주 출신 인물이 창작한 한문학이 란 뜻이고, 둘째는 작품적 관련성으로, 성주 지역을 대상으로 창작한 작품 이란 뜻이며, 셋째는 독자적 관련성으로, 성주 사람들이 읽고 향유한 한문 학이란 뜻이다. 따라서 성주 한문학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세 가지 조건을 두루 만족시키는 작품, 즉 성주 출신 인물이 성주 지역을 대상으로 창작 하여 성주 사람들이 주로 향유한 한문학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주 인물이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며 지은 작품은 성주 한문 학이 아닌가? 다른 지역 인물이 관료 여행 유배 寓居 등을 계기로 성주에 와서 지은 작품은 성주 한문학이 아닌가? 성주 사람이 성주와 상관없이 즐겨 읽고 향유한 작품은 또 어떤가?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이 런 작품들 또한 성주와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성주 한문학의 外延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할 때 성주 한문 학의 內包와 外延이 조화롭게 파악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본고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성주 출신이 성주 지역을 대상으로 창작하 여 성주 사람들이 즐겨 읽고 향유한 작품을 일차적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작가 작품 독자 중 두 가지 측면에서 관련된 작품, 특히 성주 출 신이 아닐지라도 성주에 와서 창작활동을 하여 성주 사람들이 많이 읽고 향유한 작품을 주요 고려 대상에 포괄시켰으며, 어느 한 측면에서 부분적 으로만 관련된 작품은 참고사항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연구는 성주라는 특정 지역의 한문학을 집중적 검토 대상으 로 삼음으로써 이곳에서 수행된 한문학 창작 활동의 실체적 진실을 보다 정밀하게 파악하는데도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중앙 중 심의 거대 담론에 휩쓸려 언제나 가려지고 주변인 것으로 밀려나기 일쑤 인 지역의 문학 활동 실상을 지역 내부의 현장성을 중심으로 새롭게 파악 9
하고자 하는 방법적 반성의 의미를 담았다. Ⅱ. 高麗末 以前의 狀況 성주 지역 한문학이 언제 개시되었는지는 분명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 다. 가야의 일부로 있던 6세기까지는 이렇다 할 작품이 없고, 신라가 이곳 을 병합한 7세기 이후에도 문헌에서 성주와 관련된 글을 확인하기 어렵 다. 다만 초전면 자양동 옛 黔丹村 뒷산에 최치원이 黔丹禪師와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판과 약을 찧을 때 사용하였다는 돌절구가 있고1), 비슷한 시기 이웃 합천에 王巨仁이 지었다는 <憤怨詩>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 아 대략 신라 말경에는 일정한 작품 활동이 개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지방 한문학이 활성화될 수 있는 몇 가지 새로 운 여건이 조성되었다. 광종9년(958)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전국에 걸쳐 인재를 선발함으로써 지방 인재가 한문학을 공부할 계기를 제공하였고, 성종2년(987)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고 經學博士 醫學博士 등을 파견 하여 지방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예종 때는 문과출신 지방관들 이 그 지역 교육을 관장하도록 하였고, 인종 때는 각 주에 州學을 세워 學田을 두고 교육재정을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런 변화와 함께 성주지역에도 지방관 주도 하에 보다 광범한 한문학 교육과 창작활동이 있었을 듯하다. 고려전기 대표적 문인 金黃元(1045-1127)이 성주군수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약 2년간 활동한 사실2), 김황원과 같은 시기에 지역 名士로 알려진 李思絳 1) 星山誌 권1, 面洞, 草田面 紫陽洞條, 舊黔丹村後 有城山書堂遺址 山頂有石 臼 容數升 諺傳 文昌侯崔致遠搗藥之臼 傍有石方平 文昌侯與黔丹禪師圍碁之局 云. 기타 星山誌에는 舊大夜村 有文昌侯影閣 後孫錫浩章浩刱建 (권1 碧津面 鳳鶴洞), 舊寬洞崔天綱 文昌侯致遠後 後孫貴一 號林陗 以德行著 其子孫居焉 (권1 月恒面 大山洞) 등 최치원과 그 후손에 관련된 기사가 적지 않다. 10
이 성주 判官으로 근무한 사실3),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寶文閣 學士를 역임한 李永이 知京山府事로 부임한 사실4), 예부시랑을 지 낸 崔陟卿이 과거에 급제한 직후 이곳 判官으로 부임하여 활동한 사실5) 등이 다 이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래서 이런 문인 들이 성주에 부임하여 활동한 고려전기부터는 한문학이 제 궤도에 올라섰을 법한데, 전해오는 문집이 없어서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상황은 武臣亂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관리 혹은 여행 등의 목적으로 성주를 찾는 문인의 수가 증가할 뿐만 아니라, 이곳 출신으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전개한 문인 또한 적지 않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고려후기에 이곳을 찾은 문인은 林椿(명종연간) 安珦(1243-1306) 李穀(1298-1351) 朴孝 修(?-1377) 王康(?-1394) 李詹(1345-1405) 같은 사람이 있다. 이 중 임춘 안향 박효수는 성주 읍성 동문 안쪽에 있던 靑雲樓 를6) 대상으로 칠언율시 1수씩을 지은 바 있고7), 이곡과 왕강은 성주관아 객관인 百花軒을 대상으로 칠언절구 1수씩을 지은 바 있 으며8), 이첨은 <大平村>이란 칠언절구 1수를9), 이곡은 다시 성주 읍성 남쪽 누각을 대상으로 <次京山府南樓韻>이란 칠언율시 1수를 지 은 사실이 문집에서 확인 된다10). 2) 星山誌 권2, 官案, 高麗, 金黃元... 未幾出守京山府... 在京山二年 多惠政 以貢銀品不中罷 3) 星山誌 권2, 官案, 高麗, 李思絳 宣宗朝爲判官 判官李思絳 亦名士 4) 星山誌 권2, 官案, 高麗, 李永 安城郡人也 肅宗朝登第 嘗知京山府事 以廉謹 聞 5) 星山誌 권2, 官案, 高麗, 崔陟卿 完山吏 登第毅宗朝 初補京山府判官 6) 星山誌 권1, 樓亭, 靑雲樓 在東門內 有文成公安裕詩 7) 星山誌 권1, 題詠, 靑雲樓 8) 稼亭集 권20, 律詩, <次京山府百花軒詩韻>. 星山誌 권1 題詠에는 王康의 又二首 중 제2수로 수록 9) 東國輿地勝覽 慶尙道, 星州, 山川, 大平村 11
그리고 희종2년(1206) 京山府副使로 부임한 白賁華( 1180-1224), 충 열왕29년(1303) 興安都護府副使로 부임한 金瑞芝, 충숙왕4년(1317) 과거 에 급제한 뒤 京山史錄으로 부임한 尹澤, 우왕10년(1384) 京山府使로 부 임한 河有宗11) 같은 사람도 작품은 확인되지 않지만 성주에서 창작활동 을 했을 개연성이 높다. 이곡의 시에 경산부 백화헌시에 차운한다 12)라 고 한 언급이나 박효수가 <靑雲樓>란 시에서 용사비등하듯 취한 글씨가 청운루 벽에 가득하다 13)라고 한 데서 이곳을 오간 많은 사람들이 백화 헌이나 청운루에 올라 시를 지었던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 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성주 출신 인물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李承休(1224-1300) 李兆年(1269-1343) 李 崇仁(1347-1392)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다. 이승휴는 성주 加 利縣 출신으로14) 動安居士集 과 帝王韻記 를 남긴 고려후기 문단의 대 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12살에 공부를 위해 성주를 떠났고,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몽고 난을 만나 강원도 삼척 頭陀山에서 홀어머니를 봉양 하며 생활했으며, 이후 약 30여 년 동안 관직에 종사하고 물러난 뒤 다시 두타산으로 돌아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15) 그래서 성주 출신임에도 불 구하고 성주에서 활동한 적이 거의 없었고, 성주 관련 작품을 남기지도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이조년은 성주읍 경산동 출신이다.16) 아버지 李長庚은 隴西郡公에 봉해 10) 稼亭集 권20, 律詩, <次京山府南樓韻> 11) 白賁華 金瑞芝 尹澤 河有宗 등의 성주 부임 사실은 星山誌 권2 官案 참조. 12) 稼亭集 권20, 律詩, <次京山府百花軒詩韻> 13) 星山誌 권1, 題詠, <靑雲樓>(朴孝修), 滿壁龍騰醉筆斜 14) 星山誌 권3, 人物, 李承休, 李承休 字休休 加利縣人 15) 이승휴의 행적은 韓國古典飜譯院 動安居士集 해제의 행력 과 星山誌 권 3 高麗人物 조항 참고. 16) 星山誌 권1, 星州面 京山洞 조항에 鳳頭山 舊爲官家果園... 山前卽隴西郡 公李長庚故宅 有遺墟碑 後孫建齋舍 名曰鳳山齋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읍내에 12
진 인물이고, 밀직사사 李百年, 참지정사 李千年, 중군지후 李萬年, 문과 출신 李億年 등이 다 친형제들이니, 성주에서 새롭게 부각된 큰 집안 출 신이었던 셈이다. 그는 충렬왕20년(1294) 향공진사로 문과에 급제한 뒤 禮賓內給事 知陜州事 祕書郞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306년 무렵 충선 왕의 왕위계승 문제에 연루되어 유배를 갔다 온 다음 성주로 낙향하여 약 13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는데17), 이 때 성주를 대상으로 많은 창작 활동 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문집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알기 어렵다. 이조년은 충숙왕 말년부터 다시 관직에 나가 여러 차례 원나라를 왕래 하고, 군부판서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 같은 요직을 두루 거치며 고려후 기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부상하였으며, 충혜왕복위1년(1340) 星山君에 봉 해지고, 공민왕 때 다시 星山侯에 추증되었다. 이후 이조년 집안은 후손들 이 대거 관직에 진출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한 권문세족이 되었다. 아들 李 褒는 검교시중을 역임한 뒤 星山君에 봉해졌고, 이포의 아들 李仁復은 원 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文忠이란 시호를 받고 樵隱集 이란 문집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인복의 동생 李仁任은 수 문하시중을 역임하고 廣平府院君에 봉해진 당대 최고의 權臣이었고, 이인 임의 동생 李仁敏 또한 문하평리 겸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그 아들 李 稷이 조선 개국공신에 책봉되자 星山府院君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야말 로 성주에서 가장 번창한 가문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문학으로 특히 주목할 인물은 李仁復이다. 그는 고려 말 白頤正을 통해 성리학을 수학한 몇 안 되는 학자 중 한 사람이다.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征東行省 都事로 임명된 바 있고, 밀직제학으로 書筵에 서 강의를 하였으며, 編年綱目 을 편수하고, 金鏡錄 을 중수하는 등 편 찬사업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이제현 안축 백문보 이곡 서 출생한 듯하다. 17) 星山誌 권3, 人物, 李兆年, 三十二年(1306)從王朝元 王惟紹宋邦英離間王父 子 諸從臣皆懷疑 縮縮走匿 曺頔最先去 惟兆年 恃無他 進退惟謹 例遠竄 歸而 居鄕者十三年 未嘗出一言訟其罪 13
이색 이달충 등 고려후기 문단의 대표적 인물들과 어울려 활동하고, <及 菴詩集跋>18)과 같은 많은 시문을 창작하기도 하였는데, 樵隱集 은 바로 이런 결과물을 정리한 문집이었다. 이처럼 이인복은 고려 말 성주 출신의 대표적 문인이라 할 만한데, 문집이 실전되어 성주와 관련된 구체적 활동 상을 파악할 수 없다. 당시 성주 출신 중 성주 관련 작품을 가장 많이 남긴 사람은 李崇仁 (1347-1392)이다. 이숭인은 성주 청파면 신파동 사람이다.19) 아버지는 李元具이고, 조부는 李麟起이며, 증조부는 이조년의 맏형 이백년이다.20) 그러니까 그는 이조년에게는 종증손자, 이인복과 이인임에게는 재종손자 가 되니, 당대의 학자요 권신인 성주이씨 집안 인물이 모두 가까운 친척 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삶은 이들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공민왕 때 과거 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지만, 北元에서 온 사신을 돌려보내라는 상 소를 했다가 유배를 당하였고, 이후 다시 永興君의 진위를 변론하다가 권 신 이인임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성주로 귀양을 왔으며21), 마지막에는 정 몽주 당으로 몰려 또 다시 귀양을 갔다가, 조선 개국 직후 정도전이 보낸 자객 黃居正에 의해 귀양지에서 杖殺되었다. 이숭인은 벼슬살이가 순탄하지 못했던 만큼 귀양살이 등으로 고향 성주 에 와서 활동한 시간이 많았다. 청파면 신파동에 그의 옛집 晴暉堂22)이 있고, 성주읍 경산동 南訛觀 옛 터 앞에 별장 이 있었던 것이23) 이런 사 18) 韓國文集叢刊, 제3책, 及菴詩集 에 이 글이 수록되어 있다. 19) 星山誌 권1, 面洞, 靑坡面, 新坡洞, 舊新堂村川上 有晴暉堂 卽李崇仁故宅 20) 星山誌 권3, 人物, 李元具, 麟起之子 百年之孫 娶少尹彦陽金敬德女 李崇仁 卽其子也 21) 星山誌 권3, 人物,, 李崇仁, 字子安 恭愍朝登第...辛禑時 除典理摠郞 與金九 容鄭道傳 請却北元使 坐流削職 尋釋之起拜成均司成... 與政堂文學鄭夢周 纂 實錄 轉同知司事 以仁任姻族 杖流通州 辛昌時 與朴天祥河崙等 辨永興君環眞 僞 坐誣憲司請置極刑 崇仁逃獄...憲司使臺卒守崇仁家 崇仁穴墻逃 獲之流京山 府 22) 星山誌 권1, 面洞, 靑坡面, 新坡洞, 舊新堂村川上 有晴暉堂 卽李崇仁故宅 23) 星山誌 권1, 面洞, 星州面, 京山洞, 舊城南岑頭 有南亭遺址 今築神社 有南 14
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는 문학적 능력이 대단히 탁월하였다. 조정에서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文士를 선발할 때 수석 합격한 바 있고, 이색 같은 학자가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할지라도 많이 얻지 못할 것이다 라고 극찬하였으며, 중국 사대부들도 그의 저술에 탄복하지 않은 이가 없 었다.24) 정도전이 그를 杖殺한 이면에 이런 문학적 능력에 대한 시기심이 작용했다는 일화는 그가 고려말기를 대표하는 탁월한 문인이었음을 역으 로 증명한다 하겠다.25) 이숭인은 이런 연유로 성주에서 활동하면서 성주와 관련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자신의 거주지였던 晴暉堂을 두고 <晴暉堂感興>이란 4수 연작시 로 지었고26), 별업을 대상으로 <星山別業>이란 절구를 짓기도 하였으며, 특히 가야산과 일대 사찰을 오가며 <倻山行寄息谷上人><登伽倻山><游倻 山> 등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다27). 그리고 우왕1년(1375)에는 29세의 젊 은 나이로 군수 丁令孫의 명을 받아 <夢松樓記>를 짓기도 하였는데28), 이것은 성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누정기이기도 하다. 성주 한문학은 이처럼 신라 말 싹트기 시작하여, 고려전기 지방교육이 활성화되면서 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무신란 이후 임춘 백 訛觀遺址 其前卽李崇仁別庄 24) 星山誌 권3, 人物, 李崇仁, 本國選文士 應擧京師 崇仁爲首選 以年未二十 五不遣...穡每歎賞曰 此子文章 求之中國 世不多得...中原士大夫 觀其著述 亦莫 不 歎服 25) 星山誌 권3, 人物, 李崇仁, 李穡見陶隱嗚呼島詩 極口稱譽 間數日 鄭道傳 亦作嗚呼島詩 謁牧老曰 偶得此詩於古人詩稿中 牧隱曰 此眞佳作 君輩亦裕爲之 至於陶隱詩 不多得也 後道傳當國 牧隱屢遭顚躓 僅免於死 陶隱終蹈其禍 論者 以爲未必非嗚呼島詩爲之祟也(徐居正 東人詩話) 26) 陶隱集 권3에 수록되어 있다. 星山誌 題詠에는 제목을 <晴暉堂>이라고 만 하였다. 27) 陶隱集 권1에 倻山行寄息谷上人, 권2에 <登伽倻山>과 <游倻山>, 권3에 <望倻山戱賦><代書寄法水長老><寄深源長老><冒雨過東安江書所見><星山別 業><游倻山呈息谷>이 수록되어 있다. 28) 星山誌 권1, 題詠, <夢松樓記>, 洪武紀元之八年 義城丁侯 以選治京山 旣 下車 政通歲熟 民以樂事 乃於城治之北起樓焉...顧謂余曰諸先生名樓竟 子其記 15
분화 안향 이곡 이첨 같은 문인들이 여행 사환 등의 목적으로 이 곳을 방문하여 활동하고, 또 이조년 이인복 이숭인 같은 성주 출신 문 인이 직접 창작에 가담하면서 뿌리를 내렸는데, 특히 당시 전국적 문벌로 부각되었던 이조년 일문의 활동이 주목할 만하였다. Ⅲ. 朝鮮前期 官人과 士林 조선이 개국한 이후 성주지역 한문학의 터전을 더욱 공고하게 닦은 사 람은 바로 李稷( 1362-1431)이다. 이직은 금수면 漁隱洞 출신이다29). 아 버지는 대제학 李仁敏이고, 조부는 星山君 李褒이며, 증조부가 바로 예문 관대제학으로 星山侯에 봉해진 이조년이니, 고려 말부터 성주의 대표적 문벌로 부상한 성주이씨 집안이 조선 개국 직후에도 여전히 이 지역에 세 력기반을 유지하며 한문학을 주도한 셈이다. 이직은 우왕3년(1377) 16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이 개국할 때는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에 책봉되었고, 정종2년(1400)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에게 협력한 공으로 佐命功臣에 책봉되었으 며, 이후 대제학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며 조선 초기 대표적 관료 정치가가 되었다. 다만 태종15년(1415) 忠寧大君(세종)의 세자 책봉을 반 대하다가 고향 성주로 유배되었는데, 이 시절 고향에서 약 6년간 생활하 였다.30) 그리고 세종4년(1422) 유배에서 풀려 다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세종9년(1427) 66세의 나이로 퇴직한 뒤 성주로 돌아와 선 남면 砧谷村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여 觀稼亭을 짓고 생활하다가 이곳에 서 세상을 떠났다.31) 29) 星山誌 권1, 面洞, 金水面 漁隱洞, 積山寺 卽李稷故宅 後爲寺 名僧學祖 嘗 居之 有遺墟 30) 星山誌 권4, 朝鮮人物 李稷 조항 및 韓國古典飜譯院 亨齋集 해제 행력 조항 참고. 16
이직이 성주에서 생활한 것은 61세 때 유배를 와서 약 6년, 66세 때 관직에서 은퇴한 이후 약 4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사 람보다도 성주 관련 작품을 많이 남겼다. 星山誌 에는 그가 유배와 있던 시절 지은 <大王寺> 2수를 비롯하여32) <法水寺><星山><砧村><觀稼亭> 등33) 6수의 작품을 수록해 놓았다. 그러나 亨齋集 을 보면 성주 관련 작 품이 훨씬 다양함을 알 수 있다. 만년의 생활터전이었던 砧村을 대상으로 <砧村四時><砧村><砧村四詠><砧村卽事>34) 같은 시를 지었고, 성주지역 을 두루 다니며 <登星山感古><東安江> 같은 작품을 짓기도 하였으며35), 裵仲孚 李崇仁 등과 어울려 <次裵錦山詩>36)<九日鄕中諸公...>37) 같은 시 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이직의 후손들 또한 관료계층의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맏아들 李師厚는 한성부윤을 지냈고, 둘째아들 李師元은 중추원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셋째 아들 李師純 또한 벼슬이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이직의 손자요 이사후의 아들인 李咸寧은 문과에 장원하여 집현전교리를 지냈고, 그 동생 李正寧 은 태종의 부마로 章節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직의 동생 李穗는 총제, 그 동생 李移는 승지, 그 동생 李濟는 태조 부마로 개국공신과 좌명공신, 그 31) 星山誌 권1, 面洞, 船南面 翠谷洞, 舊砧谷村 李稷晩卜居之 有觀稼亭遺址 32) 亨齋集 권2에는 <大王寺>(5언율시) 2수를 <題天王寺西樓>란 제목으로 수 록하고, 그 뒤에 乙未年謫星山 寓此寺過)라고 하여 태종15년(1415)에 지었 음을 명시하였다. 33) <法水寺>는 亨齋集 권2에 <登法水寺南樓次韻贈堂頭>이란 제목으로, <星 山>은 亨齋集 권4에 <登星山感古> 2수 중 제2수로, <砧村>과 <觀稼亭>은 亨齋集 권2에 각각 수록하였다. 34) 亨齋集 권2에 <砧村四時>와 <砧村>, 亨齋集 권4에 <砧村四詠>과 <砧村 卽事>를 수록하였다. 35) 亨齋集 권4에 이 두 작품을 수록하였다. 36) 星山誌 권4, 人物, 李朝 조에 裵仲孚 號 訥村先生 與亨齋李稷同居山南之砧 村 寄亨齋詩云...李崇仁李稷 皆有呈訥村之詩 多見於集中 又有次裵錦山詩四首 見亨齋集 37) <九日鄕中諸公 邀李陶隱登高 陶隱有詩 奉次韻>은 亨齋集 권3에 수록되어 있다. 17
동생 李潑은 병조판서, 李穗의 아들 李堅基는 호조판서, 그 아우 李啓基는 공조참의, 이발의 아들 李洧는 감찰, 그 손자 自堅은 지중추부사, 자건은 형조판서, 自華는 관찰사를 역임하는 등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환이 화려하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벼슬하여 후대에는 사실상 근기지역 가문으로 변해간 듯하다. 그러나 이직이 성주에 있을 때 관련 인물들이 다수 성주를 왕래하였고, 이들이 관료계층 내부에서 성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성주 한문학을 후원하는데 적지 않게 기여했을 법하다. 그래서 인지 조선초기에는 주요 관료문인들이 성주와 관련된 글을 많이 남겼고, 이것이 성주 한문학의 주요한 한 영역을 차지하였다. 南在 鄭麟趾 申叔舟 姜希孟 등의 글이 바로 그런 것이다. 南在(1351-1419)는 경상도 의령 사람이다. 아우 南誾과 함께 위화도회 군을 지지하여 조선 개국 이후 개국일등공신에 책봉되었고, 태조2년 (1393)에는 이직과 함께 奏聞使로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직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면서 함께 활동한 인연이 깊은 인물인데, 그가 태 종3년(1403)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도내 각지를 다닐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百花軒> 시 한 편이 전하고 있다.38) 鄭麟趾(1396-1478)는 경상도 하동 사람이다. 태종14년(1414)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1424) 예문관대제학(1442) 등을 역임하였고, 계유정 란 때 세조를 도운 공으로 죄익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이후 翊戴功臣 佐理 功臣 등에 거듭 책봉되어 대표적 관료문인으로 입지를 굳혔다. 그는 벼슬 살이 도중 성주 지역을 두 세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39). 그래서 이런 인 연으로 세조 즉위년(1455) 성주목사 李重이 객관 북쪽에 臨風樓를 짓고 38) 星山誌 권1 題詠條에 李兆年과 王康의 百花軒詩 뒤에 작자를 밝히지 않은 시 2수를 더 수록하였는데, 앞의 시는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8, 星州 宮室 百花軒 조항에 南在의 시임을 밝혀 놓았고, 뒤의 시는 李穀의 稼亭集 권20 에 수록된 <次京山府百花軒詩韻>임을 확인하였다. 39) 星山誌 권2, 題詠, <臨風樓記>, 星之爲州 山川秀異 人物繁華 與尙晉慶福 相頡頏於南方 所以雖不爲界首 而特稱牧也 予昔宦遊至止再三 滔滔風景 信乎佳 麗之地也 18
기문을 부탁하자 흔쾌하게 응하였는데40), 이후 임풍루가 성주의 중요한 문학창작 공간이 되어41) 지역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진 대표적인 글이 되 었다. 申叔舟(1417-1474)는 이웃 고령군 사람이다. 세종21년((1439) 문과에 급제한 다음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하였고, 문종2년(1452) 수양대군이 사은 사로 중국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여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수양대군 즉위 이후 정난공신 좌익공신 등에 책봉되었고, 도승지 병조판 서 삼정승 등을 역임하며 대표적 훈구관료가 되었다. 신숙주는 고향 고령 을 출입할 때 성주를 드나든 적이 있는데, 내 고향이 성주와 접경이니 만약 성주 고을 손님 자리에 한 번 참여하면 장차 그대(성주목사)를 위하 여 百花軒의 훌륭한 풍광을 노래할 것이다. 42) 라고 하여 이를 암시하기 도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성주의 백화헌 기문을 지었는데, 백화헌이 곧 성주관아의 동헌이어서 이곳을 오간 수많은 관료 학자들이 보고 듣는 유명한 글이 되었다. 姜希孟(1424-1483)은 진주 사람이다. 세종대왕의 이질로, 세종29년 (1447) 문과에 장원한 다음, 종부시주부 예조정랑 등을 역임하였고, 세조 의 즉위를 도와 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신숙주와 마찬가지로 익대공신 과 좌리공신에 책봉되고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두루 역임하여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관료 문신이 되었다. 그는 성종 즉위년(1469) 세조실록을 봉안 할 때 실록봉안사로 성주를 방문 한 바 있다. 성주지역에는 세종21년 (1439) 실록 봉안을 위해 객관 동북쪽에 史庫를 설치하였는데, 세조실록 의 봉안을 위해 이곳을 방문하였으며, 이 때 <奉安世祖實錄詩>라는 시를 40) 星山誌 권1, 樓亭, 臨風樓 在客館北 有鄭麟趾記, 星山誌 권2, 題詠, <臨風樓記>, 景泰二年辛未 李侯重牧于玆 有割鷄之能... 乙亥春 侯奉箋來京 師 具言本末 且問名與記 41) 星山誌 권2, 題詠, <臨風樓記>, 主人鞅掌 暢堙鬱 爽精神 發詠歸之興者 必於此而得之 墨客吟哦 弄花月 舒情懷 寓浩蕩之氣者 亦於此而有樂 42) 星山誌 권2, <百花軒記>, 吾有鄕 與州接境 如得一參賓席 軒之勝槩 將欲爲 君賦之 19
남겼다.43) 이처럼 조선전기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이직 남재 정인지 신숙주 강희맹 같은 고위 관료가 성주와 관련된 시문을 창작함으로써 성주 한문학의 중 요한 한 축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臨風樓 百花軒 史庫 砧村 등 중요한 관 아 건물과 유적지를 대상으로 글을 짓고, 이렇게 지은 글이 동국여지승 람 이나 성산지 같은 문헌에 수록되어 널리 읽혀짐으로써 성주에서 유 명한 시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관료문인들과 함께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사림파 인물들이다. 사림파란 성종조 이후 김종직과 그 제자 계열이 중심이 되어 훈구 관료 집단에 대한 비판적 대안 세력으로 등장한 일련의 인물을 지칭하는 말이 다. 金宗直 金孟性을 비롯하여, 김종직의 제자인 성주의 李鐵均, 달성의 金宏弼, 고령의 兪好仁, 함양의 鄭汝昌, 김천의 曹偉와 曹伸 형제, 청도의 金驥孫과 金馹孫 형제, 예천의 權五福, 경주의 孫仲暾, 선산의 黃㻶, 기타 김종직의 생질 康伯珍과 姜仲珍 형제 등이 다 그런 사람들이다. 김종직(1431-1492)은 본래 밀양 출신이지만 성주와 특별한 인연이 있 었다. 아버지 金淑滋(1389-1456)가 고령현감(1443) 개령현감(1449) 등으 로 부임했을 때 성주를 자주 출입하였고, 김맹성과 어울려 개령 김천 등 지를 오가며 함께 공부하였으며, 단종2년(1454) 김숙자가 성주교수로 부 임했을 때는 진사에 급제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주로 내려와 향교 에 머물면서 공부하였다. 그래서 이 때 <謁夫子廟賦>란 유명한 글을 지었 고, 김맹성의 집을 왕래하며 많은 시를 짓기기도 하였다. ① 경태 갑술년(1454) 가을 아버지께서 성균관 사예로 있다가 성주교수로 나가셨다. 을해년(1455) 봄 나는 둘째 형님과 함께 아버지를 뵈러 갔다가 그 대로 그 곳 향교에 머물며 글을 읽었다. 여러 학생들을 데리고 공자 사당에 들어가 배례를 하고 보니, 공자 이하 四聖과 十哲을 모두 흙으로 소상을 만들 43) 姜希孟의 <奉安世祖實錄詩>는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8, 星州 宮室 實錄閣 조항에 수록되어 있다. 20
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칙칙한 것이 마치 낡은 절에 들어가 천 년 묵은 불 상을 보는 듯하였다. 내가 깜짝 놀라 감히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지는 못하고, 대성과 대현의 영혼이 있다면 기꺼이 이런데 의탁해서 향사를 받으시랴 라 고 생각하였다. 이에 처음 만든 자의 근거 없음을 탓하며 이 賦를 적어 여러 학생들에게 주고 나무 신주로 바꾸게 하였다.44) ② 지사면 마산촌에 있는 김맹성의 고택 門楣에 선배들의 詩板을 걸어두 었는데, 김종직의 시가 많았다. 김맹성이 죽은 뒤 그 첩의 꿈에 현몽하여, 빨 리 문미의 현판을 걷어치우라 고 하였다. 첩이 꿈에서 깨어나 이상하게 여겨 현판을 모두 걷어 숨겼는데, 며칠 뒤 금부도사가 갑자기 와서 김종직의 시판 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대개 간신 유자광이 사화를 얽어 일으키 고는 관청과 私家의 김종직 시판을 다 거두어서 불태우도록 했기 때문이었 다. 45) ①은 <謁夫子廟賦> 서문인데, 김종직이 글을 짓게 된 연유를 소상하게 설명하였다. 성주향교에서 공부할 때 공자 사당에 들어가 보았더니, 공자 와 四聖 十哲을 모두 塑像으로 모셔놓았다. 이것은 성주향교 노복이 개성 文廟를 가보고 와서 본떠 만들었다는 것인데46),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세월이 오래 지나 훼손이 심각하였다. 그래서 이를 개탄하여 글을 지었으 며, 소상을 나무 신주로 대치하도록 했다고 하였다. <謁夫子廟賦>는 김종 직의 이런 마음을 그대로 읊은 작품이다. 그래서 공자 사당에 소상을 모 44) 佔畢齋集 文集 권1, <謁夫子廟賦>, 景泰甲戌 嚴君自成均司藝 出爲星州敎 授 乙亥春 余及仲氏往省焉 因留黌序讀書 携諸子 入禮夫子廟 見大聖以下四聖 十哲 皆塑以土 歲月已遠 黯黲如入古寺見千歲偶人 予愕然 不敢指視 以爲大聖 大賢如有靈 其肯依此而受享乎 於是咎始作者之無稽 書此賦遺諸子 俾改以木主 云 45) 星山誌 권2, 叢談, 志士面 馬山村 金孟性故宅 楣間掛先輩詩板 金宗直之詩 居多 孟性沒後 夢于其妾曰 亟撤楣間懸板 妾覺而異之 盡撤匿之 居數日 金吾郞 猝至 索金宗直詩板 不得而還 盖姦臣柳子光 構起士禍 凡公私家宗直詩板 盡令 撤而焚之 46) 星山誌 권1, 校院, 鄕校, 古設塑像 傳言 校奴往開城 聖殿一見而還 逐塑之 甚肖云 21
심은 절간에 부처를 모시는 행태와 같다 변색과 훼손이 심각하여 너무나 흉물스럽다. 문명국에서 이를 방치할 수 없으니 나무 신주로 바꾸어야 마땅하다 는 논조로 일관하였다. 이 글은 곧 바로 조정에 보고되었고, 제 자이자 생질이기도 한 姜仲珍이 성주목사로 와서 이를 실천에 옮겼는 데47), 이렇게 함으로써 성주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②는 김종직이 성주에 있을 때 김맹성의 집을 자주 방문하여 시를 많이 창작했음을 알려주는 글이다. 김맹성의 집에는 선배들의 시를 새긴 현판 을 많이 걸어두었는데, 그 가운데 김종직의 시가 단연 많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오사화 직후 유자광이 김종직 詩板을 모두 걷어 불태우게 하였 는데, 이 일로 금부도사가 김맹성의 집을 찾아왔을 때, 죽은 김맹성이 그 첩의 꿈에 나타나 이 일을 미리 알려주고 시판을 철거하도록 해서 화를 면했다는 내용이다. 사실 여부야 알 수 없지만, 김종직이 그만큼 김맹성의 집을 자주 방문하였고 함께 많은 시를 지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인데, 실재 佔畢齋集 에는 김맹성에게 보낸 시가 20여 수 이상 수록되어 있으며48), 두 분이 주고받은 시는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라고도 하였다.49) 金孟性(1437-1487)은 성주 출신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성 주 가천에서 태어났다. 문종2년(1452) 16세 때 6세 연상의 김종직을 따 라 개령 甘文山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그 뒤 다시 김종직을 따라 김천 직 지사에 가서 공부하였으며, 과거시험에 연이어 몇 차례 실패한 다음에는 가천에 止止堂을 짓고 詩酒로 소일하였다. 성종7년(1476) 40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비로소 제대로 벼슬살이에 입문하였지만, 2년 뒤인 성종9년 (1478) 任士洪이 玄碩圭를 탄핵한 일에 연루되어 다시 고향 가천에서 10 여리 떨어진 고령으로 돌아와 3년간 유배생활을 하였고, 성종13년(1482) 47) 星山誌 권1, 校院, 鄕校, 牧使康仲珍 撤塑像 改位版 48) 金孟性의 止止堂先生詩集 권2 부록에 전체가 정리되어 있다. 49) 佔畢齋集, 附錄, 門人錄, 金孟性, 與先生契誼最厚 互相往來 講論經學 相酬 唱詩帖 不可勝記 佔畢先生子緄 端飭志學 先生愛之 遂以女歸 22
46세 때 직첩을 돌려받고 서울로 올라가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으나, 4 년 만인 성종18년(1487)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50). 그러니까 그가 벼슬에 나가 있었던 것은 실재 10년이 되지 않으며, 나머지는 모두 가천 의 지지당을 중심으로 한 고향 주변에서 활동하였던 셈이다. 그는 가천에서 생활하면서 지지당을 두고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止 止堂閒詠><題止止堂><止止堂卽事> 등이 다 그런 것이다.51). 특히 그가 가천을 대상으로 지은 <伽川竹枝曲> 9수 연작시는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죽지곡이란 본래 당나라 劉禹錫의 竹枝詞 9수 연작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특정 지역 민풍습속과 토속쇄사를 읊은 것이란 점에 핵심적 특징 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현과 민사평이 처음 이를 응용하여 <小樂 府>를 지은 바 있는데, 이후 문단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다가 조선 성종 때 사림파 인물들이 지방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면서 다시 주목하기 시 작하였다. 김종직이 밀양 지역을 대상으로 <凝川竹枝曲> 9수 연작시를 짓 고, 그 제자 유호인이 함양지역을 대상으로 <咸陽灆雷竹枝曲>10수 연작 시를 지은 것이 바로 그런 예이며, 김맹성의 <伽川竹枝曲> 또한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창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52) 따라서 이 작품은 성주 가천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작시라는 점에서는 물론, 조선후기에 널리 창 작된 竹枝曲 혹은 竹枝詞라 불리는 작품계열의 선편을 보인 작품이란 점 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 김종직의 문인 중 성주를 대상으로 창작활동을 한 사람은 김맹성 외에 도 대단히 많았다. 이웃 달성의 金宏弼(1454-1504)은 김종직 김맹성과 남다른 친분을 유지하며 <上止止堂>(7율) <述懷二絶上止止堂>(7절2수) <伏呈止止堂>(7절2수) <奉和止止堂>(7절)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고, 김 천의 曺偉(1454-1503)는 <過星州有懷止止堂>이란 시를 남겼으며53), 姜 50) 金孟性의 이력은 金洪永의 國譯止止堂集 (學民文化社, 2002) 解題 生涯부 분 참고. 51) 이런 작품은 모두 金孟性의 止止堂詩集 권1에 수록되어 있다. 52) 金孟性, 止止堂詩集 권1, <伽川竹枝曲> 23
渾(1464-1519)은 臨風樓를 대상으로 칠언율시 4수를 지었고54), 선산의 黃㻶(1464-1526)은 읍성 남쪽에 있던 남정(南亭)의 기문을 지었다.55) 기타 작품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김종직의 제자이자 생질이기도 한 康仲 珍은 성주향교 塑像을 位版으로 바꾼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성주향교 자 리에 萬化樓를 세운 인물이었다.56) 그리고 초전면 월곡동 출신의 李鐵均 (1450-1514)은 文安公 李堅幹부터 조선 태종 때의 증조부 이조판서 李健 之와 조부 영산현감 李厚로 이어지는 집안의 문한을 계승한 인물로, 연산 군2년(1496)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역임하였고, 무오사화 이후 성주 로 낙향하여 15년 이상 고향에서 활동하여57) 성주 관련 작품을 많이 남 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조선전기 성주지역 한문학은 대략 두 흐름 속에서 전개되었다. 성주 출신 이직과 그 후손을 필두로 한 남재 정인지 신숙주 강희맹 같은 고위 관료문인들이 성주와 관련된 중요 시문을 다수 창작하여 한 축을 형 성하였고, 성주와 특별한 인연이 있던 김종직과 성주 출신 제자 김맹성 이철균 및 김굉필 조위 강혼 황필 강중진 같은 사림파 인물들이 성주와 관련된 시문의 창작에 참여하여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하였다. 조선전기 성주 한문학은 바로 이 두 계열의 흐름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53) 金宏弼과 曺偉의 시는 金孟性의 止止堂詩集 권2, 附錄에 수록되어 있다. 54) 星山誌 권2에 수록된 <臨風樓> 칠언율시 4수이다. 성산지에는 이 작품의 작자를 밝히지 않았으나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8, 星州牧 樓亭 臨風樓 조항 에 그 작자가 姜渾임을 명시하였다. 55) 黃㻶의 <南亭記>는 星山誌 권2에 원문, 國譯星山誌 (pp.126-128)에 번역 문이 수록되어 있다. 56) 星山誌 권2, 官案, 朝鮮, 康仲珍, 康仲珍 改鄕校塑像爲位版 建萬化樓 57) 星山誌 권4, 人物, 李朝, 李鐵均, 號月塢 建之曾孫 成化乙酉進士 丙辰文科 官至大司成 遊金宗直門 嘗赴京試 宗直贈詩曰 平生堯舜君民志 不在車輕馬亦肥 師門見詡蓋如此 戊午士禍 棄官歸京山. 기타 星山誌 권4, 人物, 李朝, 李建 之 조항 등 참고. 24
Ⅳ. 朝鮮後期 道學派의 活動 조선후기 성주지역 한문학의 저변에는 전기와 마찬가지로 성주를 찾은 여타 지역 문인들의 활동이 내재하고 있었다. 관료로는 선조37년(1604) 부임한 洪瑞鳳을 비롯하여, 蔡裕後(1633) 尹善道(1634) 李衡祥(1689) 李 晩成(1698) 李誠躋(1734) 韓德弼(1738)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재임 중 성주지역 학인들과 글을 주고받거나 四時軒 같은 누정을 복원하 여 성주 한문학을 진작시키는데 직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58). 그리고 洪 良浩는 <仁平府院君戊申紀功碑>를, 徐有隣은 <諸沫雙忠碑>를, 李最源과 趙榮慶은 <四時軒> 시를, 張錫胤은 <關王廟> 시를 짓는 등59) 다양한 계 기로 성주와 인연을 맺고 주요 시문을 창작함으로써 후대에까지 널리 읽 혀진 예가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성주 출신 도학파 인물들이 큰 흐름을 새롭게 주 도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퇴계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들이 지방관 으로 부임하거나 지역 곳곳에 자리를 잡고 성주 한문학은 물론 이 지역 지성계 전체를 선도해 나갔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이미 명종 선조 연 간부터 부분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명종13년(1558) 盧慶麟이 성주 목사로 부임하여 迎鳳書院을 창건하고 퇴계가 직접 <迎鳳書院記>를 지은 것60), 곧 이어 퇴계 제자 黃俊良이 성주목사로 부임하여 孔谷書堂과 鹿峯 書齋를 창건하고 문묘를 중수한 것61), 남명 제자로 대가면 沙月谷村에 들 어와 살던 吳健이 성주교수를 맡아 鄭逑 李忱 같은 학자를 양성한 것, 퇴 계와 남명의 제자 金宇宏 金宇顒 형제는 대가면 柳村, 李承은 청파면 신 58) 59) 60) 61) 星山誌 권2, 官案, 朝鮮 조항 참고. 星山誌 권2, 題詠 조항에 이런 글의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退溪集 권42, 記, <迎鳳書院記> 星山誌 권2, 官案, 朝鮮, 黃俊良, 平海人 號錦溪 中宗更子文科 爲本州敎授 明宗庚申 由兵曹正郞 又爲牧使 迎鳳書院 因盧慶麟所創 增飾致美 又重修文廟 恢拓舊規...刱孔谷鹿峰書齋 訓迪多方 25
파동, 朴澯은 대가면 칠봉동에 자리 잡고 활동한 것 등이 모두 이런 징후 들이며, 이들의 제자가 다시 성주 각지에 터전을 잡고 활약하였다. 이와 같은 도학파 한문학의 중심에 鄭逑(1543-1620)가 있었다. 정구는 대가면 沙月里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외가 마을에 살던 吳健 을 따라 공부하였고, 21세(1563) 때는 퇴계를, 23세(1565) 때는 남명을 배알하고 학연을 맺었으며, 이후 명실상부하게 경상좌우도 영남학맥을 두 루 계승한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정구는 벼슬에 나가 있던 얼마간의 세 월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주와 그 주변지역에서 활동하였다. 31세(1573) 때는 수륜면 창평산 아래 寒岡精舍를 짓고 주로 그곳에서 활동하였고, 41 세(1583) 때는 대가천 건너편 檜淵草堂으로 옮겨갔으며, 62세(1604) 때 는 수도산 기슭 武屹精舍에서 학문에 침잠하였고, 63세(1605) 때는 檜淵 草堂을 복원하여 왕래하였다. 70세(1612) 때는 정인홍을 피하여 칠곡 蘆 谷精舍로 이사하였는데, 그곳에 화재가 발생하자 72세(1614) 때 다시 달 성의 泗陽精舍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구는 문인이라기보다 전형적인 학자였다. 그래서 주요 업적도 학문적 성과에 있었으며, 특히 예학에 탁월한 성취를 하였다. 31세 때 家禮集覽 補註 를 편찬한 이래, 昏儀 (37세), 冠儀 (40세), 五先生禮說分類 와 心經發揮 (61세), 景賢續錄 (62세) 등을 저술한 것이 그런 예이며, 창녕 현감 시절에 昌山誌 (38세), 동복현감 시절에 同福誌 (42세), 함안군수 시절에 咸州誌 (44세), 통천군수 시절에 通川誌 (49세), 강원도관찰사 시절에 關東誌 (54세), 무흘정사에서 臥龍巖誌 와 谷山洞庵誌 (62세), 안동부사 시절에 福州誌 를 편찬하는 등 지방지 편찬에도 특별한 공을 남겼다.62) 이런 그에게 있어서 문학 활동은 학문 탐색의 여기에 불과하였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활공간과 성주 지역 일대를 대상으로 <寒岡 臺>63)<檜淵書堂>3수64)<武屹夜詠><題晴暉堂><晴暉堂偶吟><戱題晴暉 62) 鄭逑의 행적과 저술은 韓國古典飜譯院 寒岡集 解題 行歷 조항 참고. 26
堂><題川谷書院誠正堂> 같은 주요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65), 주자의 <武 夷櫂歌>를 본뜬 <仰朱夫子武夷九曲詩韻>10수와 가야산 여행 기록인 <遊 伽倻山錄>이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武屹九曲으로 일컬어지는 <仰 朱夫子武夷九曲詩韻 66)10수는 성주 지역 도학파 한문학의 정수를 보여주 는 것으로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작품은 정구의 생활근거지였던 회연초당 뒤편 제1곡 鳳飛巖부터 제9곡 龍湫에 이르기까지 대가천을 거슬 러 올라가며 전개되는 명승지 9곳을 칠언절구 10수 연작시로 읊은 것인 데, 작품 내용이 성리학적 수양의 경지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가천 주변의 주요 명승지나 자신의 유적지와 함께 연계되어 있 어서 후대 성주지역 학자들이 가장 널리 읽고 주목한 대표적인 작품이 되 었다. 정구는 문인록에 300여명의 명단을 등재할 정도로 많은 제자를 길렀다. 이들 중 절대다수는 물론 성주와 그 인근 지역에 거주하였다. 대가면 김 우옹의 아들 金孝可와 도남동의 裵尙龍 裵尙虎 형제, 청파면 이숭인의 후 손 李堉 李埱 李壆 李坰 형제, 수륜면 법산의 崔恒慶과 그 아들 崔𨏈 崔 轔 형제, 초전면 고산동 宋希奎의 후손 宋遠器와 宋光廷 宋光啓 형제, 초 전면 월곡동 李堅幹의 후손 李彦英, 선남면 동암동 李淳의 아들 李楷 李 檥 형제, 성원동 李汝良의 후손 李廷賢, 월항면 암포리 李天培 李天封 형 제와 조카 李𦁖, 가천면 법전동 金天澤과 그 아들 金檝, 벽진면 呂希臨의 후손 呂煜 呂燦 呂焯, 봉계동 李堅守의 후손 李琢과 張鳳翰, 한강 자신의 처남 李弘基 李弘量의 자손 李簬 李簹 李𥳕 李蘭貴 李蘭美 李命夔67) 등 63) 星山誌 권2, 題詠. 寒岡集 권1에는 이 작품을 <曉起偶吟>이란 제목으로 수록. 64) 星山誌 권2, 題詠. 寒岡集 권1에는 3수 중 제1수는 <題檜淵草堂> 제2수 는 <題社倉新構>, 제3수는 <檜淵偶吟>이란 제목으로 수록하였다. 65) <武屹夜詠><題晴暉堂><晴暉堂偶吟><題川谷書院誠正堂>은 寒岡集 권1, 戱題晴暉堂 은 別集 권2에 수록. 66) 鄭逑, 寒岡集 권1, <和朱夫子武夷九曲詩韻> 67) 이들의 거주지와 師承關係는 모두 星山誌 人物 조항을 조사해서 확인하였다. 27
수많은 인물이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들의 후손들이 다시 각각의 터 전을 중심으로 대를 이어가며 성주 한문학을 주도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은 월항면 암포동의 李天 培 李天封 형제와 그 조카 李𦁖 이다. 李天培(1558-1604)는 정구와 동문 수학한 李忱의 아들로, 인동의 張顯光 대구의 徐思遠 성주의 呂大老 등 여러 학자와 교류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川谷書院을 중창하여 지역 학 문을 진작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68). 그리고 친동생 白川 李天封 (1567-1634)은 인접 葆洞의 10개 명승을 지정하여 <葆洞十詠>이란 연작 시를 창작하였는데, 당시 성주목사 洪瑞鳳이 이 작품을 보고 그대로 본떠 차운시를 창작함으로써69) 일약 성주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작품이 되었 다. 이들의 조카 李𦁖 는 정구와 장현광을 통해 도학을 전수한 인물이었음에 도 불구하고 문학 방면에 특히 뛰어났다. 그래서 문집 6권 가운데 3권을 모두 시로 채웠고, 도학자들이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首尾吟體><回文卽 事><三禽言> 같은 잡체시를 창작하였으며, 李潤雨의 鑑湖堂을 두고 <鑑 湖堂八詠幷起結>10수, 이천봉의 아들 李綸의 沙月亭을 두고 <沙月亭次柏 浦十詠韻>10수, <題沙月亭三疊>3수, <避暑沙月亭>10수, 이륜의 재사가 있는 椹村을 두고 <椹村八景>8수, 金聃壽의 아들 金廷堅의 洛巖精舍를 두 고 <洛巖>7수 등 수많은 연작시를 창작하였다.70) 그는 이런 능력을 성주 관련 작품 창작에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스승 정구의 유적지와 관련된 <登鳳飛巖><過立巖><武屹><遊立巖>(연작8수) 등을 지었음은 물론, 성주 의 명승고적을 대상으로 <次崔孤雲韻><過胎室><遊禪石山次同行韻>(연작6 수)<與蔡子後鄭季膺共遊禪石>3수 같은 시를 짓고, 초전면 야성송씨 宋世 68) 星山誌 권4, 人物, 李朝, 李天培 忱之子 號三益齋...與 張顯光 徐思遠 呂 大老諸賢 爲道義交 壬辰後 重刱川谷 改建廟宇 69) 李天封, 白川集 권1, <葆洞十詠>에 두 사람의 시가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 70) 여기에 거론한 작품은 學稼齋集 권1에 수록되어 있고, <椹村八景> 8수만 권2에 수록되어 있다. 28
彬의 晩悔亭을 두고 <晩悔亭八詠幷起結>10수, 초전면 명곡동 봉곡서당을 두고 <鳳谷書堂>6수, 경산이씨 시조사당인 백인당을 두고 <百忍堂八詠>8 수, 자신이 거주하는 집을 대상으로 <仙鄕八詠>8수를 짓는 등 성주 관련 팔영 팔경류 작품을 대량으로 창작했던 것이다.71) 李潤雨와 李道長 또한 이들과 함께 거론할 필요가 있는 정구의 대표적 인 문인이다. 이윤우는 오늘날 칠곡으로 편입된 上枝里에서 출생하였고, 20여세까지 鹿峰書齋에서 공부하다가, 21세 때 비로소 정구를 찾아 문하 에 입문하였다. 그는 38세(1606)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종성판 관 공조참의 등을 엮임하며 관직에 종사한 기간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틈틈이 성주를 찾아 스승을 문안하였고, 정구가 세상을 떠난 후 言行錄 을 찬술하고 사당 건립을 주도하였으며, 五服沿革圖 五先生禮說 등의 발문을 지어 간행하고, 스승의 문집 교정을 담당하는 등 정구와 관련된 일을 많이 하였다.72) 그는 58세 때(1623) 칠곡 매원에 鑑湖精舍를 건립 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鑑湖堂春詠>73) 같은 작품을 남겼고 동시에 성주를 오가며 <晴暉堂分韻><次東軒板上韻><與從叔孤村及舍弟茂 甫同向立巖> 74)같은 성주 관련 작품을 적지 않게 창작하였다. 이윤우의 아들 李道長(1603-1644)은 정구가 만년에 泗陽精舍에서 강 학할 때 입문하였다. 28세(1631)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홍문관부 응교 등을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성주 경산동 옛 서문 밖에 우거하다가 42세(1644) 때 고향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다.75) 그 역시 성주를 왕래 하고 또 읍내에 와서 생활하면서 성주 관련 작품을 많이 지은 듯한데, 71) 여기에 거론한 작품은 대부분 學稼齋集 권1에 수록되어 있고, <武屹><遊 立巖>연작8수 <百忍堂八詠>연작8수 등 3편은 권2에 수록되어 있다. 72) 李潤雨의 행적은 石潭先生文集年譜 와 韓國古典飜譯院 石潭集 解題 行歷 조항 참고. 73) 李潤雨, 石潭集 권1, <鑑湖堂春詠> 2수. 星山誌 권2 題詠에는 이 작품을 <鑑湖堂>이란 제목으로 수록. 74) 여기에 거론한 작품은 모두 石潭集 권1에 수록되어 있다. 75) 李道長의 행적은 洛村集 권3 附錄에 수록된 家狀 (李元禎撰) 참고. 29
<四時軒記> 한 편이 특별히 주목된다. 사시헌은 선조40년(1607) 성주목 사 宋英耈가 관아 동쪽에 지은 건물인데, 인조20년(1642) 그의 조카 宋興 周가 성주목사로 부임하여 愛蓮堂 북쪽으로 이건하였고, 효종8년(1657) 목사 崔繼勳이 다시 한 차례 이건하였으며, 영조12년(1736) 목사 李誠躋 가 다시 중수하여 후대에는 군수 관아로 사용하였다.76) 사시헌은 이처럼 수차례 이건과 중수를 거치며 근래에까지 전해온 성주의 유서 깊은 건물 로, 李之翼 兪㻛 趙榮慶 같은 후임 목사들이 두루 <四時軒>이란 시를 남 길 정도로77) 중요한 창작 공간이었다. 이도장의 <四時軒記>는 인조21년 (1643) 이 건물을 愛蓮堂 북쪽으로 이건한 직후 지은 것으로78), 사시헌 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문일 뿐만 아니라 후임 목사들이 두루 주목하여 성주에서 널리 알려진 글이라는 점에 가치가 있다. 정구의 문인 가운데 수륜면 法山에 정착한 崔恒慶과 그 후손들 또한 주 목할 필요가 있다. 崔恒慶(1560-1638)은 본래 경기도 고양의 元塘에서 출생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선조8년(1575) 16세 때 부친 崔淨이 성주에 성묘를 왔다가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와서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이 때 정구의 보살핌을 받고 문하에 입문한 다음 법산에 터전을 잡고 정착하였 다. 그는 檜淵書院 초대 원장을 지낼 정도로 정구의 핵심적인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선조38년(1605) 46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잠시 제 용감정에 임명된 것을 제외하고는 관직에 나간 적이 없으며, 대부분의 시 간을 법산 鰲巖精舍와 정구의 강학처를 오가며 보냈다.79) 그래서 오암정 76) 星山誌 권1, 公廨, 四時軒 萬曆丁未 牧使宋英耈 刱於舊衙之東 孝宗丁酉 牧 使崔繼勳移建 今爲郡守官邸. 星山誌 권2, 官案, 李誠躋 甲寅(1734)到 四 時軒重修 公廨建築. 洛村集 권2, 記, 四時軒記, 大明萬曆年間 暮歸老先 生 出牧于玆邑...先生之去玆土 今三十七年...今牧使宋侯 卽先生之堂侄...又 移四時軒於愛蓮堂之北 屬余爲記 77) 李之翼 兪㻛 趙榮慶의 시는 모두 칠언율시로, 星山誌 권2 題詠에 수록되어 있다. 星山誌 에는 이 외에도 李最源 李壽曼 安廷善 등의 <四時軒> 시를 수 록해 놓았다. 78) 洛村集 권2, 記, <四時軒記>, 衙旣成 又移四時軒於愛蓮堂之北 屬余爲記... 感侯之囑甚勤 忘拙而爲之記 30
사와 정구의 강학처인 百梅園, 기타 자주 출입한 川谷書院에 관련된 작품 을 다수 남겼다.80) 최항경의 아들 崔𨏈 과 崔轔 형제도 모두 정구의 제자로, 생활 근거지와 강학처 관련 시를 많이 남겼는데, 두 사람 문집 鸛峯集 과 梅窩集 에 이런 작품들이 다수 있다. 특히 최린은 해인사에서 공부하며 <海寺月夜懷 仙><向海印寺過李判事墓感吟><海寺逢臘月二十五日感懷> 등 해인사 관련 작품을 다수 남겼고, 정구와 관련해서도 <武屹精舍八詠>8수 <檜淵與李明 府酬唱>6수 같은 중요한 작품을 창작하였는데81), 특히 <武屹精舍八詠> 은82) 棲雲庵 飛雪橋 滿月潭 自怡軒 등 무흘정사 주변 경관을 8수 연작시 로 낱낱이 묘사한 거의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성주 한문학과 관련하여 이 집안에서 가장 주목할 인물은 최항 경의 6세손 崔益重(1717-1788)이다. 그는 입향조 崔恒慶을 비롯하여 崔 𨏈 崔震華 崔后大 등의 문집을 모두 직접 편찬하였고, 자신의 負暄齋集 에 <四時軒記><布川記>83) 등 성주 관련 글을 많이 남겼으며, <遊伽倻途 中偶吟>5수, <卽事雜詠>6수, <梨峴雜詠>12수, <竹林書堂八詠>8수, <次聚 辨齋八景韻>8수 등 숱한 연작시를 창작하여84) 문학적 역량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특히 <內洞八詠>은 성주지역 8곳의 명승을 선정하여 읊은 것 이고85), <次鄭戚光遠雙溪九曲十二韻>은 鄭光遠의 <雙溪九曲十二韻>에 차 운하여 <武屹九曲>을 11曲 12수로 확대 변형하여 창작한 것으로 대단히 79) 崔恒慶의 행적은 竹軒集 권4 遺事 와 星山誌 권4 人物 李朝 崔恒慶 조 항 참고. 80) 竹軒集 권1의 <竹軒>(5절) <川谷偶吟>(7절) <田園雜興>연작15수 <次百梅 園梅花韻><川谷和友>, 권2의 <竹軒>(7절) <川谷偶吟>(7율) <鰲巖> <鰲巖溪 亭> <幽居謾詠>연작5수 <射亭次韻> 등이 그런 것이다. 81) 여기에 거론한 작품은 모두 梅窩集 권1 詩에 수록되어 있다. 82) 崔轔, 梅窩集 권1, <武屹精舍八詠> 83) <四時軒記><布川記>는 負暄齋集 권5에 수록되어 있다. 84) 여기에 거론한 八景 八詠類 작품은 모두 負暄齋集 권1, 詩에 수록되어 있다. 85) 崔益重, 負暄齋集 권1, <內洞八景>, 紺峯宿霧 星山霽月 遠浦漁燈 鰲巖暮烟 東郊嘉禾 法山翠松 柳堤夜雨 倻山落照 등 8수이다. 31
흥미롭다.86) 이처럼 조선후기 성주지역의 한문학은 퇴계와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성 주 출신 도학파 문인, 특히 정구와 그 제자들이 새롭게 주도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수륜면 갓말 청주정씨 집안의 정구와 그 후 손, 월항면 암포 경산이씨 집안의 이주와 그 후손, 지금은 칠곡으로 편입 된 광주이씨 집안의 이윤우와 그 후손, 가천면 법산에 새로 입향한 최항 경과 그 후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Ⅴ. 19世紀 以後의 狀況 성주지역의 한문학은 19세기에 들어와 월항면 한개의 李源祚와 李震相, 금수면 墨坊에 우거한 張福樞, 다산면 上谷里 출신 李種杞 등이 대미를 장식하였다. 李源祚(1792-1872)는 순조9년(1809) 18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다음, 영남 학자로는 보기 드물게 경주부윤 대사간 공조판 서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고, 20대 초반부터 고종8년(1871) 세상을 떠 날 때까지 약 60여 년이나 관직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주요 생활근거지가 성주였기 때문에 부단히 고향을 왕래하였고, 철종원년(1850) 경주부윤에 서 물러난 이후부터는 고향에 머문 시간이 비교적 많았으며, 이 때 가천 면 新界洞 가야산 자락에 晩歸亭을 건립하여 강학과 창작활동에서 큰 성 과를 거두기도 하였다.87) 이원조는 오래 동안 관직에 종사한 관료였고, 山房寓物錄 復性圖說 86) 崔益重, 負暄齋集 권1, <次鄭戚光遠雙溪九曲韻十二首>, 정구의 무흘구곡 중 제4곡 立巖을 빼고 喚仙島를 넣고, 제9곡 龍湫를 빼고 玩瀑亭 養閒亭 月 淵洞을 추가하였다. 87) 李源祚의 행적은 응와 이원조의 삶과 학문 (경북대 퇴계연구소. 2006)에 수 록된 凝窩 李源祚先生의 삶과 사람됨 (李世東), 家狀(李震相 지음, 김홍영 옮김) 年譜(李基元 지음, 김홍영 옮김) 참고. 32
性經 같은 글을 저술한 학자였지만, 동시에 수많은 작품을 창작한 문인 이기도 하였다. 凝窩集 을 보면 본집 권1-3에 650여 수, 속집 권1-6에 1200여수, 전체 9권에 걸쳐 약 1800여수의 한시를 수록해 놓았다. 그리 고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은 각종 輓詩와 布川誌 등 여타 저술에 있는 작품을 감안하면 전체가 2천수를 상회하는데, 이처럼 많은 작품은 당시 영남 학자에게서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유례가 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 보통 학자들이 흉내 내기 어려운 작품이 특별히 많이 들어 있 는 점이다. ①<玉連環和金宗得>(원집 권1), <雨後卽事戱述雜體詩>:回文錦體 玉連環 體 藥名體 玉葫蘆體 <玉連環奉呈><回文體要和><自一至十...><更用人名體 各賦五七律><重用一句二名之令咏雨><詠唐詩品彙各賦二律用國名體><八卦 體><八音體><建除體><數詩體><天干體><十二辰體><字傍用十二辰戱成一 絶><八道名體>(이상 속집 권2), <和金戚兄宗得雜體詩>:回文 雜佩圖永梅 飛 雁體(속집 권3) // ②<騈對合用音釋戱作聯句><啖苽聯句>(이상 속집 권2), <賞朴園盤松聯句><排悶聯句><賞春興德洞聯句(이상 속집 권3) // ③<臨江 仙二闋><長相思五闋><卽賦憶秦娥三闋><滿庭芳一闋(이상 속집 권2) // ④ <山居雜興>연작30수(속집 권1), <次鳳棲十六京韻>연작16수 <又次十二瀑 韻>연작12수 <八景韻>연작8수(이상 속집 권2), <伊洛書堂十六景>연작10수 (속집 권3), <次慕構亭原韻兼和諸咏>연작10수(속집 권5), <龍巖祠八景韻> 연작8수 <次林居十三詠>연작13수 <次山居四時吟十六絶>연작16수 <次鄭子 中閑居二十詠>연작20수 <臨淵堂十題>연작10수(이상 속집 권6) // ⑤<高山 水月歌><煮松皮歌><蓮葉扇歌><萬木園歌>(이상 속집 권6). 위는 凝窩集 에서 보통 학자들의 문집에 흔치 않은 작품 일부를 제시 해 본 것이다. 이를 보면 우선 그가 玉連環體 回文詩 自一至十 飛雁體 數 詩體 같은 각종 잡체시는 물론, 藥名 人名 國名 八卦 八音 建除 天干 十 二辰 八道名 등 참으로 다양한 雜名詩를 창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②는 두 사람 이상이 시구 이어가기 방식으로 창작한 聯句詩이고, ③은 33
한문자의 성조와 중국 음률까지 정통해야 지을 수 있다는 詞인데, 이런 작품은 전문 문인일 경우에도 국내에서는 창작한 예가 극히 드물며, ④처 럼 적게는 8수에서 많게는 30수까지 연이어 짓는 연작시나 ⑤처럼 음악 과의 관련성이 높은 歌行體 또한 문예 취향이 강한 사람이 아니고는 이렇 게 다양하게 창작하기 어렵다. 이원조는 이런 문예취향과 창작능력을 성주 관련 작품 창작에 십분 발 휘하여 중요한 글을 대단히 많이 남겼다. 가야산을 유람하고 나서 지은 <遊伽倻山記>를 비롯하여, 李能一의 유적지 李公神井의 <司空井銘>, 呂希 臨의 후손 德隱 呂大驃의 <德隱齋記>, 李𦁖 의 후손 李秉瑩의 <川觀集序>, 崔恒慶 崔𨏈 부자의 <竹軒集序>와 <鸛峰集序>, 기타 張以兪 李命夔 李命 龍 李源祜 등의 行狀, 李驎 李簬 李鍾英 呂孝思 등의 墓碣이 그런 것이 다.88) 그리고 權應仁의 <松溪春興>에 차운한 <山居雜興>연작30수, 해인사 유람 시첩인 <海印寺詩帖>89), 기타 성주의 여러 명승고적을 대상으로 <關 王廟><太子巖><城山><龍起山><遊感應庵 등 중요한 시를 다수 창작하였다. 특히 그가 철종1년(1850) 경주부윤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이후 지 은 글들은 성주 한문학의 정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때 그는 당시 감회를 담아 <歸去來賦>를 짓고, 포천계곡을 돌아본 다 음 <布川山水記>를 지었으며, 그 상류에 만귀정을 건립하고 <晩歸亭記> 와 <晩歸亭雜詠> 연작 21수90)를 짓기도 하였다.91) 그리고 法林橋 槽淵 九老洞 등 포천구곡을 선정하고,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布川九曲 88) <遊伽倻山記>는 凝窩集 속집 권17, <司空井銘>은 문집 권4, <德隱齋記>는 속집 권17, <川觀集序><竹軒集序><鸛峰集序>는 문집 권13에 수록되어 있다. 기타 <星山世稿序><星山學契案序><凝窩記><隴西郡公碑閣重修記><海印寺詩帖 跋><文昌侯崔先生讀書堂遺墟碑> 등 성주 관련 중요한 글이 다수 있다. 89) 凝窩集 卷16에 海印寺詩帖跋 이 수록되어 있는데, 시첩 내용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90) 晩歸亭雜詠 21수는 凝窩集 속집 권4에 수록되었다. 91) 歸去來賦 는 凝窩集 권4, 布川山水記 晩歸亭記 는 권15, 晩歸亭雜詠 은 속집 권4에 5수, 布川誌 에 21수 전체가 수록되어 있다. 34
次武夷櫂歌>를 지었는데, 이것은 정구의 <武屹九曲>과 함께 성주를 대표 하는 구곡시였다.92) 뿐만 아니라 포천구곡을 그림으로 그린 布川圖誌 를 저술하고, 만귀정에서 활동할 때 주고받은 작품을 기록한 布川誌 3권을 남기도 하였는데93), 특정 지역 산수를 대상으로 이렇게 다양한 글을 남긴 것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李震相(1818-1886)은 이원조의 조카로 같은 마을에서 자라고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본래 과거에 뜻을 두고 科文을 공부하였고, 특히 策文을 잘 지어 국내에서 손꼽히는 策文家로 명성이 높았는데, 이원조가 선비가 의리의 본령을 모르면 선비라는 이름을 저버리는 것이다. 어찌 성리의 학 문에 힘을 쏟지 않는가? 라는 충고를 하자 깨달은 바 있어 성리대전 공 부에 몰두하였다고 한다.94) 그래서 헌종15년(1849) 생원시에 합격한 이 후 과거를 포기하고 도학에 몰두하였고,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하였으나 일체 나가지 않았으며, 마침내 理學綜要 四禮輯要 春秋集傳 易學 管窺 千古心衡 求志錄 辨志錄 등 수많은 저술을 하여 한말 성리학 계의 대표적 학자가 되었다.95) 이진상은 이처럼 20대 이후 자신의 역량 대부분을 성리학 공부에 집중 하였다. 그래서 시를 창작하는데 특별히 힘을 들이지 않았고, 그마저도 학 문 탐색이나 여행 등과 연관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96) 그러나 대부분의 92) 李源祚, 凝窩集 권2, 詩, 布川九曲次武夷櫂歌, 序詩 法林橋 槽淵 九老洞 布川 堂瀑 沙淵 石塔洞 盤旋坮 洪開洞 등 10로 구성되었다. 93) 布川誌 와 布川圖誌 는 凝窩全書 (驪江出版社, 1986) 3책에 수록되어 있 다. 94) 星山誌 권4, 人物, 李朝, 李震相, 仲父源祚嘗誨之曰 爲士而不識義理本領 負士之名矣 汝才長於窮究 盍專力於性理之學 乃惕然警悟發憤 取 性理大全 蚤 夜反覆 軆認不厭也 95) 李震相의 이력은 조선 유학의 마지막봉우리 한주 이진상 (경북대 퇴계연구 소, 2006)에 수록된 寒洲의 삶과 그 의미 (이세동) 寒洲言行錄 (李承熙撰 이상하譯) 및 韓國古典飜譯院 寒洲集解題 행력 조항 참고. 96) 寒洲集 권1, 詩에 수록된 次朱子雲谷雜詩 次朱子克己韻 次李子林居詠 次李子閒居詠 次李子溪居雜興 述學自警二十六絶 嘐古二十二絶 등 이 그런 것이다. 35
시간을 성주에서 강학을 하며 보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주 관련 작품 도 적지 않게 남겼다. 시의 경우 이원조의 <晩歸亭雜詠>21수를 차운하여 지은 <晩歸亭次軸中韻>22수97), 자신의 생활터전을 중심으로 약 21곳의 경관을 읊은 <山居寫景二十一首>98) 등이 대표적이고, 자신이 생각나는 인물 19명을 읊은 <山齋感懷十九絶>, 기타 <讀書感應庵><鳳岡齋與諸友避 暑><神光寺待甪里諸友><次考槃洞修契韻><聞考槃洞將構書堂喜而賦之> 등 도99) 성주 고적지와 관련이 있어서 참고할 만하다. 문장은 <考槃洞契案 序><武屹書堂契案序><遯齋義契案序><續九老案序><石洞義契案序><宗中養 老案序> 같은 서문에서 성주 관련 글이 많았고, <感應庵詩軸跋>은 감응암 이 성주의 중요 창작 공간이었음을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글이다.100) 이진상과 함께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인물은 張福樞(1815-1900)이다. 장 복추는 이진상보다 3살 연상으로, 본래 이웃 칠곡 角山 출신이지만 성주 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헌종4년(1838) 24세 때 이원조의 아들 李鼎相 조카 李震相 등과 함께 월항면 感應庵에서 공부한 이래, 30세(1844) 때는 처족 黃蘭善과 함께 神光寺에서 공부하였고, 42세(1856) 때는 가야산 유 람 길에 수륜면 柳里의 鄭墧를 방문하였으며, 64세(1878) 때 이진상과 신 광사에서 중용 강론, 67세(1881) 때 이원조의 延諡宴 참석, 68세(1882) 때 선석사 續九契會 참석, 72세(1886) 때 晴川書堂 강학 주관 등 이런저 런 사연으로 무수히 성주를 왕래한 것이 바로 그런 예이며101), 80세 (1894) 때는 동학란을 피해 아예 성주댐 상류 금수면 墨坊으로 들어가 한 동안 그곳에 寓居하기도 하였던 것이다.102) 97) 이원조의 작품 21수 중 제일 앞 新村 을 山棲 2수로 고쳐 전체 22수가 되 었다. 98) 李震相, 寒洲集 권1, 詩, 山居寫景二十一首 99) 李震相, 寒洲集 권3, 詩에 수록되어 있다. 100) 여기에 거론한 글은 모두 寒洲集 권29에, <感應庵詩軸跋>은 권30에 수록 되어 있다. 101) 여기에 기록한 사실은 모두 四未軒全書 2책에 수록된 四未軒先生年譜 참고. 36
장복추 역시 문인이라기보다 전형적인 학자형 인물이다. 그래서 夙興 夜寐箴集說 問辨至論 四書啓蒙 易學啓蒙 家禮補疑 등 중요한 저 술을 많이 남겼지만 문학작품 창작에는 큰 힘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래 서 남긴 작품의 절대 수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주와 관련된 중요한 글이 있는데, 금수면 묵방과 관련된 <墨坊有感><墨坊十詠><墨坊 講義>, 선석사와 관련된 <禪石途中口號><和黃同輔蘭善禪庵留贈韻><禪石 錄>, 감응암과 관련된 <...讀書感應庵...><感應庵詩軸序> 등이 주목할 만 하며, 기타 <考槃精舍重建記>와 <次考槃精舍重建韻><孔巖書堂重修契帖 序><山花齋記><冶城世稿序><九老齋記> 등이 성주와 관련하여 비교적 널 리 읽혔다.103) 특히 묵방에 우거할 때 지은 <墨坊十詠>104)은 성주댐 상 류 묵방과 관련된 유일한 십영시란 점에 가치가 있다. 성주 한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거론해야 할 인물은 李種杞(1837-1902) 다. 이종기는 다산면 上谷里 출신으로, 어린 시절에는 주로 가학을 전수하 였고, 나중에는 안동의 柳致明을 사사하였지만, 고향 선배인 장복추 이진 상은 물론 안동 지역 여러 학자들과 널리 교유하며 25권에 달하는 방대한 문집을 남겼다. 이종기 또한 문학보다는 학문 탐색을 우선한 학자형 인물 이었다. 그래서 문집 25권 가운데 절반 이상이 편지와 잡저였고, 나머지 는 序 記 墓碣 行狀 같은 문장을 많이 지었으며, 시는 원집에 1권, 속집에 1권, 도합 2권을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105) 그래서 그가 남긴 성 주관련 글 또한 문장이 대부분인데, 晩歸亭 講會와 관련된 <晩歸亭講會錄 序>(권9), 선석사 유람 관련 기록인 <遊禪石錄>(권8), 鄭來錫의 문집 <顧 軒集序>(권8), 李涑의 문집 <寒泉李公文集跋>(권11)106), 宋寅和 宋寅濩 102) 고종31년(1894) 80세 되던 4월 墨坊의 松壇에서 강학을 하였고, 9월 동학 란을 피하여 墨坊山房에 그대로 우거하다가 이듬해 봄 자손들의 피난처인 거창 娥林의 唐洞으로 옮겨갔다. 103) 이런 작품은 四未軒集 권1, 권7, 속집 권1에 수록되어 있다. 104) 張福樞, 四未軒集 권1, 詩, <墨坊十詠> 105) 李種杞의 행적은 韓國古典飜譯院 晩求集 解題 참고. 106) <遊禪石錄><顧軒集序>은 晩求集 권8, <晩歸亭講會錄序>는 권9, <寒泉李 37
宋惟敬 宋能謙 李宗熙 등의 행장, 최항경의 鰲巖書堂이나 呂軫奎의 考槃 亭, 이주의 學稼亭 등에 대한 상량문을 지은 것이 그런 예이다. 시는 만년 에 자신의 생활 근거지 주변 경물을 읊은 <居家雜詠>연작10수가107) 대 표적이며, <遊伽倻山上峯><晩歸亭次板上韻><遊龍起寺><禪庵見僧徒誦經> 같은 단편적인 작품이 일부 있었다.108) 이후 성주의 한문학은 이원조 이진상 장복추 이종기 등의 문인계열이 일정 기간 담당하였다. 월항면 한개의 李承熙(1847-1916)와 암포의 張錫 英(1851-1926), 초전면 고산동의 宋浚弼(1869-1943), 대가면 칠봉의 金 昌淑(1879-1962) 등이 그런 인물이며, 이 밖에도 지역 곳곳에 자리 잡고 강학활동을 하며 성주 관련 글을 남긴 사람이 적지 않았다.109) 그러나 고 종31년(1894) 갑오경장을 단행함에 따라 한문학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할 터전을 잃었다. 국가의 핵심적 인재선발 수단이었던 과거시험을 폐지하여 젊은이들이 한문학을 공부해야 할 동기를 상실하였고, 모든 공문 작성에 국문 사용을 원칙으로 한다는 公文式을 반포함으로써 한문에 매달릴 이유 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19세기말 20세기 초에 밀어닥친 도도한 西勢東漸 의 세계사적 변화 속에서, 동아시아 전체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몸살 을 앓는 격동의 변화를 겪으면서, 성주지역의 한문학 또한 왕조체제의 붕 괴와 함께 장구한 역사를 마감하고 식민지적 근대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것이다. 公文集跋>은 권11에 수록. 107) 李種杞, 晩求集 권2, 시, <居家雜詠>. 108) 이런 작품은 晩求集 권1 권2 및 속집 권1에 수록되어 있다. 109) 성산지 에 李注相 白鑾洙 石燦求 金寅吉 姜漢廈 張基英 李德厚 李祚鉉 李 志薰 李九相 李志泰 李基容 元悳常 李利永 呂英會 呂軫奎 都源黙 李萬相 都元相 都漢孝 郭昌燮 李文杰 呂大會 元悳常 등 많은 사람을 이들 문인으 로 소개해 놓았고, 京山李氏 집안 자료를 통해 星巖遺稿 浦上世稿 南 旅集 品山集 篤山集 苦菴遺稿 浦上世稿 歸田集 등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식민지적 근대 이후에도 성주 지역의 한문 창작활동이 비교적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38
6. 마무리 본고는 성주라는 특정 지역의 한문학을 집중적 검토 대상으로 삼음으로 써 이곳에서 수행된 창작 활동의 실체적 진실을 보다 정밀하게 파악하는 한편, 그 동안 중앙 중심의 거대 담론에 휩쓸려 언제나 주변인 것으로 밀 려났던 지역의 문학 활동 실상을 지역 내부의 현장성을 중심으로 새롭게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결과 성주지역 한문학이 신라 말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고려전기 지방 교육이 활성화되면서 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신란 이후 임춘 안향 백분화 이곡 같은 문인들이 여행 관 료 등으로 이곳을 방문하고, 또 이조년 이인복 이숭인 같은 성주 출신 문인이 직접 창작에 가담하면서 뿌리를 내렸는데, 특히 당시 전국적 문벌 로 부각된 이조년 가문의 활동이 주목할 만하였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성주지역 한문학은 대략 두 흐름 속에서 전개되 었다. 성주 출신 이직과 그 후손을 필두로 한 고위 관료문인들이 성주와 관련된 중요 시문을 창작하여 한 축을 형성하였고, 성주와 인연이 깊은 김종직과 성주 출신 제자들이 사림파의 일원으로 지역 관련 시문의 창작 에 참여하여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하였다. 조선전기 성주 한문학은 이 두 계열 인물들이 주요 담당층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계 승한 성주 출신 도학파 문인들, 특히 정구와 그 제자들이 성주의 한문학 은 물론 지성계 전체를 주도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수 륜면 청주정씨 집안의 정구와 그 후손들, 월항면 경산이씨 집안의 이주와 그 후손들, 칠곡군 광주이씨 집안의 이윤우와 그 후손들, 가천면에 입향한 최항경과 그 후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와 같은 성주지역의 한문학은 19세기 이후 월항면 출신 이원조와 이 진상, 금수면에 들어와 살던 장복추, 다산면 출신 이종기 등이 대미를 장 39
식하였다. 그러나 갑오경장 이후 국가의 핵심적 인재선발 수단이었던 과 거시험을 폐지하고 모든 공문 작성에 국문 사용을 원칙으로 하는 公文式 을 반포함으로써 한문은 더 이상 존립할 근거를 상실하였다. 동아시아 전 체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 미증유의 변화를 겪으면서, 성주지역 한문 학 또한 장구한 역사를 마감하고 근대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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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Chinese Literature in Seongju(星州) Area Hwang, Wee-Zoo This article aimed to understand more precisely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Chinese literature in Seongju (星州) area. Seongju (星州)'s Chinese literature sprang up in the end of Silla and became stabilized thanks to the activated local education in the early Goryeo. After the military subjects' rebellion of Goryeo, as many literary persons had visited the area and those persons from the area participated in writing directly, Chinese literature took roots in Seongju area. In the early Joseon, two groups, high-ranking bureaucrat group including Lee Jik and native Sarim party members group, led the Chinese literature of the area, while, in the latter part of Joseon, the members of Confucian ethic school, especially Jeong Gu(鄭逑) and his students, had led it. In the 20th century, as the traditional state examination was abolished by Gap o gyeong jang (甲午更張) and government clarified officially the use of Hangeul, the Chinese literature of Seongju lost its ground and passed away into the mists of history under the cruel pillage of Imperialism.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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