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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장 원 철 * Ⅰ. 머리말 Ⅱ. 정기룡 장군의 역사적 행적 Ⅲ. 역사와 문학에 나타난 인물 형상화 Ⅳ. 마무리 머리말 하동이 배출한 역사적 위인의 한 사람인 매헌( 梅 軒 ) 정기룡( 鄭 起 龍 ) 장군은 1562년 당시의 곤양현( 昆 陽 縣 ) 중평( 仲 坪 ), 곧 지금의 하동군 금남면( 金 南 面 ) 중평리( 仲 坪 里 )에서 태어나 1622년 삼군통제사로서 통영의 진중에서 죽었다. 정기룡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에 세운 전공에 대해서는 흔히 해전의 이순신 장 군에 견주어 육상의 이순신 이었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아 왔 다. 1) 18세기를 대표하는 학자인 홍량호( 洪 良 浩 )가 말하듯이 정기룡 장군은 크 고 작은 60여회의 전투에서 언제나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무찔러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2) 고 할 만큼 탁월한 무장이었던 동시에 정기룡 장군이 가는 곳에는 백성이 한 명의 사상자도 없어 고을이 편안했으므로 백성들이 그 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3) 라고 평하듯이 전란의 시기에 목민관으로서도 뛰어 난 행적을 보였던 것이다. 이상의 인물평에서 보듯이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전란을 맞 *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1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이하여 탁월한 전술과 뛰어난 용맹으로 왜적을 물리친 명장인 동시에 백성에 게는 자애로운 목민관이었던 영웅적 인물로 인식 평가되어 왔다. 요컨대 나라 와 백성을 전란의 위기에서 구해낸 전쟁 영웅으로서 정기룡 장군은 이순신이 나 곽재우 장군과 달리 당시 지배 세력의 핍박과 질시를 받지 않았던 비교적 순탄한 생을 살았던 성공한 무장이었다. 동시에 지배층의 무능을 비판하던 기 층 백성들의 시각에서 정기룡 장군은 자신들의 편에 서서 백성을 진정으로 아 끼고 보살피는, 따라서 자신들의 소망과 기대를 한껏 충족하는 성공한 민중적 영웅으로 회자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쳤던 뛰어난 명장으로서 당 시의 지배 세력에게 일정하게 평가를 받았던 동시에 기층의 백성들에게까지도 칭송을 받았던 민중적 영웅의 형상을 지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장군의 행적이나 그와 관련된 다양한 사실들이 실록( 實 錄 )이나 실기( 實 記 )와 같은 역사적 문헌은 물론이거니와 문학 작품 내지 문헌설화나 구 비설화 등에 걸쳐 두루 등장하는 것은 사태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따라 서 정기룡 장군과 관련된 직접적 기록이나 문헌이 별달리 전하지 않는 현금의 상황에서 장군의 역사적 행적이나 인물됨의 실체를 파악하는 유효한 하나의 방법은 이들 제 문헌에 나타나는 인물 형상화의 양상 내지 특성을 통해 간접 적으로 그 실상을 유추하는 방법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상층의 지배층에서부터 하층의 민중에 이르기까지 성공한 영웅으로 서 폭넓게 수용되었던 정기룡 장군과 같은 인물의 경우 그 인물 형상화의 방 향은 대체로 두 가지로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 4) 우선 실록이나 실기와 같은 역사적 기록이나 문헌에서는 대체로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연대기적 구성을 통해, 지배층의 통치 이념에 부합되는 형태로 그 영웅적 면모가 부각된다고 하 겠다. 다음으로 그러한 영웅적 면모에 못지않게 문학 작품이나 설화 등에서는 정기룡 장군이 지녔던 이인적( 異 人 的 ) 면모, 곧 민중의 소망과 기대가 투영되 는 인물 형상화의 방향에서 당대의 역사적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던 한 위 대한 인물의 다양한 인간상을 효과적으로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보고에서는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역사와 문학의 범위에 걸 쳐서 제 문헌에 등장하는 정기룡 장군의 실상과 실체를 그 인물 형상화의 측 - 2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면에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실록 등과 같은 역사 문 헌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의 역사적 행적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장군의 사후에 사적을 위주로 편찬된 실기류와 문학성을 기반으로 한 전기류의 작품에 나타 난 인물 형상화 양상의 비교 분석을 통해 한 인물의 역사적 행위에 대한 역 사적 인식과 문학적 인식의 거리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문헌설화와 구비설 화 등에 나타나는 이인적 면모를 지니는 민중적 영웅으로서의 인물 형상화 양 상을 살펴봄으로써 정기룡 장군이라는 한 인물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다양한 인간상의 실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렇듯 제 문헌에 나타나는 인물화 양상 에 대한 종합 체계적인 분석과 고찰이 이루어져야만 정기룡 장군과 같은 복 합 중층적 성격을 지니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본격적 인물론이 비로소 전개 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된다고 하겠다. 정기룡 장군의 역사적 행적 앞서 언급했듯이 임진왜란 시기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평가 받는 정기룡 장 군의 행적에 대해서는 우선 그 자신이 남긴 직접적 기술이나 자료가 거의 없 다는 점에서 실존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실체를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은 형편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의 행적을 중심으로 장군에 관 련된 사적과 그 일생을 다루는 연보의 정리가 장군이 죽은 뒤 한 세기가 지난 174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후손들에 의해 매헌실기( 梅 軒 實 記 ) 라는 문헌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장군에 관한 역사적 행적의 파악이 매우 지난한 일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정기룡 장군에 대해 간접적인 사실이나 기술들을 토대 로 한 후대의 역사적 기술 가운데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초기의 대표적 문헌 을 꼽으라 하면 1700년 우암( 尤 庵 ) 송시열( 宋 時 烈 )이 지은 신도비명( 神 道 碑 銘 ) 5) 을 우선 들어야 할 것이다. 송시열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노론 계열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다는 사실에 서 그가 찬한 신도비에 기술된 역사적 사실은 정기룡 장군에 관련되어 전해지 - 3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던 무수한 역사적 행적 가운데에서 당시의 지배 계급의 관점에서 그 객관성 내지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사실들을 기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송시열의 신도비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정기룡 장군에 대해 당시에 공식적으로 인정 되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대강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6) 정기룡 장군의 초명은 무수( 茂 樹 ), 자는 경운( 景 雲 ), 호를 매헌( 梅 軒 )이라 하 였는데, 1562년(명종17)에 좌찬성 정활( 鄭 活 )의 셋째 아들로 곤양에서 태어났 다. 1580년(선조13)에 향시에 합격하고, 그 다음해에 진주 강씨 세정의 딸과 혼인하였다. 1586년(선조19)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 때 선조의 명으로 기룡 ( 起 龍 )으로 개명하였다. 1590년(선조23)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다음해에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이윽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으로 승진하여 경상우 도방어사 조경( 趙 儆 )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였다. 이 때 거창에서 왜군을 격 파한 뒤에 금산 전투에서 왜군에게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하고, 이어 곤양 수 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하였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그 해에 유병별장을 거쳐 상주판관( 尙 州 判 官 )이 되어 왜군과 대치하여 격전을 벌인 끝 에 상주 성을 탈환하였다. 1593년에 회령부사로 승진하였는데, 이 해에 진주 강씨 부인이 죽었으며, 이 듬해에 예천 권씨 홍계의 딸과 재혼하였다. 같은 해인 1594년에 상주목사로 통 정대부에 올랐다. 1597년(선조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 討 倭 大 將 )이 되어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생포하는 등의 대 전과를 거두었다. 이 어서 성주 합천 초계 의령 고령 등의 여러 성을 탈환하여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에 승진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경주와 울산 전투 등에도 참가하였다. 1598년 명나라 장수 이절과 함께 왜군을 공격하다 이절이 전사하자 명나라 군사들이 장군의 휘하에 소속되기를 원하니 명나라 신종이 이를 허락하여 명 나라 총병( 總 兵 ) 직을 제수 받았다. 이렇듯 명나라 군대의 총병직을 대행하면 서 경상도에 있던 왜군의 잔적을 소탕하며 용양위부호군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다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01년에 경상도 방어사, 이듬해에 김해 부사, 밀양부사를 거쳐 중도방어사에 오르고, 뒤에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도총 부 총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가 되었다. 1617년에는 삼도통제사 - 4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올랐다가 1622년 통영의 진중에서 죽었다. 이상에서 기술된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정기룡 장군의 생애는 무장이라는 신 분으로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였으며, 그 일생을 통해 주변의 세 계와의 갈등도 별달리 겪지 않았던 매우 성공적인 경우였다고 하겠다. 아울러 사후에 상주의 충렬사( 忠 烈 祠 )에 제향 되었고, 1773년(영조49)에 충의공( 忠 毅 公 )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기룡 장군의 경우는 그 자신이 세웠던 공적에 대해서 후세에 이르러 그에 대한 평가와 대가도 충 분히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의병장으로서 정기룡과 비슷한 행적을 보이면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역사적 대우나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곽재우( 郭 再 祐 )나 김덕령( 金 德 齡 ) 등 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하다고 하겠다. 곧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그에 못잖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지배 세력과 대립하고 이후 선술( 仙 術 )에 심취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부침을 거듭했던 곽재우의 경우나 한편으로 의병을 일으켰지만 관군의 견제로 제대로 전공 한 번 세우지 못하고 급기야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던 김덕 령의 경우와는 분명히 다른 비교적 순탄한 삶의 궤적을 살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기룡 장군은 역사 현장에서 지배 계층에 속했던 무장 으로서 가장 평범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기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충 분히 획득할 수 있었으며, 여타의 무장이나 장수들처럼 그를 질시하는 주변 관 료들의 모함에 별달리 휘말리지도 않았고, 그 결과 비교적 순조롭게 자신의 전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정기룡 장군의 그러한 역사적 면모는 예를 들면 실록( 實 錄 )에 나타나는 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사들을 살펴보면 분명히 드러 난다고 하겠다. 박진이 아뢰기를 정기룡은 접전할 때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는 말을 탔는 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조경( 趙 儆 )이 적에게 살해될 뻔했다가 기룡 때 문에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적에는 항오( 行 伍 ) 가운데 - 5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에서 발탁하여 등용하기도 했었다. 정기룡과 같은 사람을 판관( 判 官 )에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라고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기룡은 젊고 재략( 才 略 ) 이 있는가 하면 또 목민( 牧 民 )에도 능합니다. 중국 장수를 접대할 적에도 성의 를 다하여 친히 풀을 베어 오기까지 했습니다. 상주( 尙 州 ) 사람들이 모두 하는 말이 판관( 判 官 )을 목사( 牧 使 )로 올리면 다시 판관은 낼 필요가 없다고 했으니, 이만한 사람은 요사이 보기 드뭅니다. 라고 하였다. 7)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장수를 얻은 후에 할 수 있는데 왜 장수가 없는가? 백 번 싸운 후에는 반드시 장수가 있는 법이다. 무장( 武 將 )이 없으면 유장( 儒 將 )이라도 얻을 수 없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유장은 더욱 얻을 수 없 습니다. 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든 일에 착실한 데가 없다. 고 하니, 유 성룡이 아뢰기를 상주 목사 정기룡은 인심을 얻었고 또 싸움도 잘하니 이제 당상( 堂 上 )에 올리어 토포사( 討 捕 使 )로 삼아 적이 만약 다시 움직이면 상주 낙 동강을 막아 지키거나 혹은 물러나 토기( 兎 機 )를 지키게 해야 할 것이며, 왜적 이 움직이기 전에 도내에 있는 토적을 잡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고 하였 다. 8) 비변사에서 정기룡을 토포사로 삼아서 경상도의 토적을 소탕할 것을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도의 밀양 이북은 온통 텅 비고 기찰하는 곳이 없어 토적( 土 賊 )이 성행하고 사람들이 통행할 수 없는데 토포( 討 捕 )하는 사람조차 없 습니다. 상주 목사( 尙 州 牧 使 ) 정기룡은 나이는 젊으나 무재가 있고 전부터 많 은 군공이 있었으며 또 고을 일을 잘 처리하여 아전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 습니다. 정기룡을 당상관에 올려 토포사( 討 捕 使 )란 칭호를 주어서 평시에는 토 적을 잡고 왜변이 있을 때는 즉시 이 군사로써 적병의 길을 끊게 하소서. 고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9) 명나라의 제독 마귀( 麻 貴 )가 말하기를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 李 舜 臣 )이 아 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국 - 6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 良 將 )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 李 舜 臣 ) 정기룡 한명련( 韓 明 璉 ) 권율( 權 慄 )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저 번에 군문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군문이 상품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마음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10) 공신도감에서 공신 등급을 정한 일에 대해 아뢰다. 공신도감( 功 臣 都 監 )이 당상( 堂 上 )은 이항복( 李 恒 福 ) 이호민( 李 好 閔 ) 황진( 黃 璡 ) 홍가신( 洪 可 臣 ) 박명 현( 朴 名 賢 )이다 아뢰기를 전후의 왜적을 정벌할 때에 공로가 있는 사람을 의의( 擬 議 )하여 취품( 取 稟 )한 것은, 이원익( 李 元 翼 ) 이순신( 李 舜 臣 ) 권율( 權 慄 ) 원 균( 元 均 ) 권응수( 權 應 銖 ) 김시민( 金 時 敏 ) 이정암( 李 廷 馣 ) 곽재우( 郭 再 祐 ) 이억기( 李 億 祺 ) 권준( 權 俊 ) 이순신( 李 純 信 ) 이운룡( 李 雲 龍 ) 우치적( 禹 致 績 ) 배흥립( 裵 興 立 ) 박 진( 朴 晉 ) 고언백( 高 彦 伯 ) 김응서( 金 應 瑞 ) 이광악( 李 光 岳 ) 조경( 趙 儆 ) 정기룡 한명련 ( 韓 明 璉 ) 안위( 安 衛 ) 이수일( 李 守 一 ) 김태허( 金 太 虛 ) 김응함( 金 應 緘 ) 이시언( 李 時 言 ) 등 26인이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11) 김해 부사( 金 海 府 使 ) 정기룡은 무비( 武 備 )를 정비하고 잔약한 백성을 무휼하 였으며 청빈하게 살아가면서도 신산( 辛 酸 )한 고통을 달게 여겼습니다. 12) 또 임진년 의병장 정기룡에게 시호를 내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대 개 정기룡은 임진왜란에 전공( 戰 功 )이 많아서 그때 명( 明 )나라에서 그의 이름을 듣고 총병관( 摠 兵 官 )을 명하였다. 13) 정기룡 장군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이상의 기록들을 근 거로 살펴보면 그는 적어도 조선조 당시의 지배 계층의 시각에서는 상당히 긍 정적으로 평가 받았던 전쟁 영웅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울러 제독 마 귀( 麻 貴 )의 발언에서 나타나듯이 명나라 장수들의 그에 대한 찬양 14) 과 아울러 정기룡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수 중에서 유일하게 명나라 관직을 제 수 받고 명나라 군사의 지휘권을 행사했던 무장이었다는 사실 등이 그에 대한 기존의 긍정적 평가를 더욱 강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임진왜란 시기에 - 7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여 나라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른바 재조번방( 再 造 藩 邦 ) 의식 그러한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송시열이었다 과 같은 시각에서 볼 때 정기룡 장군의 경우야말로 그러한 의식의 정당성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상징적 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실록( 實 錄 )과 같은 정사의 기록에서 정기룡 장군에 대한 긍 정적인 평가 이외에도 부정적인 평가가 존재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하겠 다. 예를 들어 인조 반정 이후에 편찬된 실록인 광해군일기 에 실려 있는 장 군의 졸기( 卒 記 )에 해당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는 매우 간략한 내용이기는 하지 만 장군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고 하겠다. 통제사 정기룡이 임소( 任 所 )에서 죽었다. 전교하기를 또 어진 장수를 잃으 니, 매우 놀랍고 측은하다. 주사( 舟 師 )에 대해 잘 알고 익숙한 사람을 빨리 골 라 보내고, 해조와 해도에 명하여 관곽( 棺 槨 )을 내려주도록 하고 일로에서 호 송해 주도록 하라. 고 하였다. 정기룡은 선조( 先 朝 )의 숙장( 宿 將 )으로 누차 전공을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궁첩과 결탁하여 뇌물을 바치고 잘 섬긴 결과로 임금의 총애를 받았는데 진지에서 죽었다. 정기룡은 용감한 장수였다. 임진왜란에 힘써 싸워 공로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내간( 內 間 )과 결탁하여 사사로이 바치기를 끊임없이 하여 심지어 나전팔첩대병( 螺 鈿 八 貼 大 屛 )을 만들 어 올리기까지 하였으니, 죽어서도 남는 죄가 있었다. 15) 그러나 이상과 같은 기사의 내용은 정기룡 장군이 실제로는 선조로부터 광 해군 대에 이르러 지배 세력과 별다른 갈등을 겪지 않고서 순탄한 환로( 宦 路 ) 를 밟았으며, 한편으로 인조반정 이후 조정의 지배 세력의 교체에 따른 실록 내용 등의 개찬이 이루어진다는 역사적 정황 등을 감안해 보면 그러한 평가의 정당성을 액면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부분적으로 존재하 는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이 이후에 정기룡 장군을 영웅시하려는 대체적인 인 식의 흐름을 방해하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역사적 행적으로 살펴 본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이 - 8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라는 국가적 전란을 맞이하여 탁월한 전술과 뛰어난 용맹으로 왜적을 물리쳐 세상을 놀라게 한 명장이면서 동시에 전란이 끝난 뒤에는 백성에게는 자애로 운 목민관이었던 영웅적 인물로 서 인식 평가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장군의 실제적 모습은 이후 실기( 實 記 )와 전기( 傳 記 ) 속에 서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기도 하고, 한편으로 민간에서 구전되는 이야기 속에서 민중의 영웅으로 형상화되어 여러 문헌 설화와 구비 설화에 걸쳐 두루 등장하 게끔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역사와 문학에 나타난 인물 형상화 앞에서 보았듯이 정기룡 장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실록( 實 錄 ) 등에 단편적 인 기사로만 실려 전하다가 그의 사후에 뜻있는 인사나 후손들의 노력에 의해 비로소 집적되고 체계화되기에 이른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우선 장군의 사 후 24년이 되던 1646년에 상주군수를 역임한 적이 있는 조정융( 曺 挺 融 )이 장군 의 전란기의 활동상을 중심으로 역사적 행적을 간략히 정리한 사적( 事 蹟 ) 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 은 빠진 내용이 많고, 관작에 이르러서는 연월조차 밝히지 않는 등 많은 점에 있어 장군의 역사적 실상을 전해 주기에 부족하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어 왔다. 그리하여 다시금 장군의 사후 96년이 되던 1718년에 증손인 정륜( 鄭 綸 )의 요 청으로 채휴징( 蔡 休 徵 )이 연보( 年 譜 ) 를 편찬하게 된다. 채휴징은 연보를 찬 함에 있어 기존에 누락되었던 제현( 諸 賢 )의 집록( 集 錄 )이나 사림( 士 林 )의 대소 기록을 널리 취하는 한편으로 민간에 전송하는 설화까지도 채집하여 보충하기 도 하였다. 이렇게 연보 가 완성되고 나서 앞의 조정융에 의한 사적 및 장 군의 집안에 전해져 온 전후 문적( 文 籍 )을 한데 묶어 1746년(영조 22)에 총 2 권으로 된 매헌실기( 梅 軒 實 記 ) 가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정기룡 장군에 관련된 전기 문자의 집성이라고 할 매헌실기( 梅 軒 實 記 ) 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우선 권두에 채휴징의 1718년 찬 매헌실기서, 인 명 미상의 1746년 찬 매헌사적서 가 실려 있다. 본문은 권1에 세계도( 世 系 - 9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圖 ) 총서대략( 總 敍 大 略 ), 그리고 채휴징에 의한 연보( 年 譜 ) 가 수록되어 있 다. 다음으로 권2에는 조정융에 의한 사적( 事 蹟 ) 및 김태일( 金 兌 一 )의 발문, 송시열의 신도비, 이만부( 李 萬 敷 )의 묘갈명( 墓 碣 銘 ), 어제문( 御 製 文 ) 제문 만 사 교유서( 敎 踰 書 ), 황조사감군증( 皇 朝 史 監 軍 譄 ) 증시( 譄 詩 ) 잡부( 雜 附 ) 등의 각종 관련 문장이 실려 있다. 이 시기에 정기룡 장군의 역사적 행적을 기록한 문헌으로 이상에서 보듯 전 기 집성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매헌실기 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것은 1794 년에 편찬된 홍량호( 洪 良 浩 )의 해동명장전( 海 東 名 將 傳 ) 에 수록된 정기룡 전 을 꼽아야 할 것이다. 18세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장가인 홍량호는 해 동명장전 의 서문에서 나려( 羅 麗 )시대에는 능히 무력으로 나라를 보전하였던 것에 반하여 조선 시대에 와서는 한번 임진왜란을 당하자 온 국토가 와해되고, 특히 병자호란 때에는 오랑캐의 말굽 아래 강토가 유린되었던 사실을 상기하 면서 역사에 있어서 나라를 수호한 양장( 良 將 )과 용졸( 勇 卒 )의 분전했던 기록을 후세에 남기고자 책을 편찬하다고 하면서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조의 인조 대에 이르는 역대 명장( 名 將 )의 전기를 가려 뽑고 있다. 이 두 가지 문헌의 차이를 우선 살펴보면 매헌실기 의 경우는 한 인물의 행적을 역사적 관점에서 후대인이 기록한 간접체험의 기록에 해당하는 실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해동명장전 정기룡전 은 조선조의 숭문천무 ( 崇 文 賤 武 ) 사상이 초래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전란의 패배를 다시 는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 아래 상무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정기룡이라 는 입전( 入 傳 ) 인물의 생애를 작전자( 作 傳 者 )의 의도에 근거하여 생애에 관련된 여러 사실을 취사선택함으로써 문학성을 보다 부각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해동명장전 정기룡전 은 매헌실기 의 사적( 事 蹟 )을 근간으로 저술된 것으로 보이므로 매헌실기 에 나타난 정기룡의 행적과 해동명장 전 정기룡전 의 내용은 동질성을 보이는 부분이 매우 많은 편이라고 하겠 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두 문헌의 내용을 단락으로 나누어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16) 이상의 비교에서 보듯이 매헌실기 사적의 기술 내용은 뛰어난 역사적 인 물의 행적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기술 - 10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구성 매헌실기 정기룡전 도입부 서두부 전개부 1) 역사의 인멸을 우려하는 상주 목사 박장 원( 朴 長 遠 )의 권유로 집필 2) 이름 기룡( 起 龍 ), 자 경운( 景 雲 ), 호 매헌 ( 梅 軒 ) 3) 선조 가운데 관록자 성찬( 成 贊 ), 방의( 方 義 ), 가원( 可 願 ) 소개 4) 어린 시절 순종치 않는 동료들을 돌무더 기에 가두어 위협함 5) 13세에 부상( 父 喪 ) 시에 3년 동안 여묘 살이를 함 6) 독서보다 무예를 원했으나 형이 불허함 7) 19세에 고성( 固 城 ) 무과에 응했으나 형의 병사( 病 死 )로 귀가하여 3년 동안 소식( 素 食 )함 8)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북변( 北 邊 ) 근무 를 마치고 봉사( 奉 事 )가 됨 9)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방어사 조경( 趙 儆 )에게 유격전을 건의하고 막하 돌격장 이 됨 10) 신창( 新 昌 )에서 적 5백을 만나 기습하여 격파함 11) 금산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 함 12) 김성일의 추천으로 상주 가판관( 假 判 官 ) 이 됨 13) 화공( 火 攻 )으로 상주성을 탈환한 뒤 상 주판관이 됨 14) 감사의 명에 의거해 선현산( 扇 峴 山 )의 토적( 土 賊 )을 평정함 15) 상주목사 겸 감사( 敢 死 ) 대장이 되어 둔 전을 개척하고 기민을 구휼함 16) 금오( 金 烏 ) 수성장이 되어 용담산( 龍 膽 山 )의 적 수만 명을 격파함 1) 자 경운, 초명 무수( 茂 樹 ) 2) 무과 급제일에 몽사( 夢 事 ) 로 선 조( 宣 祖 )가 기룡( 起 龍 )이라는 이 름을 내림 3) 어린 시절 위엄으로 동료들을 굴 복시킴 4) 청렴결백, 정의감, 협사의 기질이 있음 5) 좌동 6) 10기( 騎 )의 병사로 신창에서 적 선봉 5백 명을 격 파함 7) 추풍역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단 기( 單 騎 )로 구출함 8) 정기룡의 용맹성과 신마( 神 馬 ) ( 실기 34) 9) 거창 객사 포위 탈출담( 실기 35) 10) 좌동 11) 용화동에서 적을 유인하여 격멸 함 13) 대승산에서 적을 섬멸함 14) 기민 구제 및 둔전을 개척함 ( 실기 15) 15) 좌동 16) 토왜( 討 倭 ) 대장으로 이동현에서 적을 크게 섬멸함 17) 고령현에서 병사들에게 위로연을 베품 - 11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관련일화) 결말부 (관련일화) 17) 충청병사 이시언이 왜병의 수급을 도적 18) 좌동 한 일을 질책함 18) 보은에서 가토 기요마사( 加 藤 淸 正 ) 군의 19) 좌동 남하를 지연시키고 피난민을 대피시킴 19)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울산에서 가토 20) 좌동 기요마사 군을 대파함 20) 군량미가 떨어지자 군수를 포박하고 합 천군의 순영미( 巡 營 米 )로 병사들을 호궤 ( 犒 饋 )함 21) 함양 전투에서 명군의 부총병 이절( 李 21) 좌동 梲 )이 전사하자 명부총병으로 임명됨 22) 화녕( 化 寧 )에서 석거( 石 車 )로 왜군을 격 멸함 23) 사천( 泗 川 ) 전투에서 명나라 장수가 전 사하였으나 정기룡의 군대는 탁월한 지 휘로 손실을 입지 않음 24) 영천( 營 川 ) 관곡으로 파종하고, 산읍( 山 邑 )에서 마자( 麻 子 )를 가져와서 군민( 軍 民 )의 의식을 해결함 25) 천병( 天 兵 )이 상주에 들어오자 고기를 잡아 바치고, 꼴을 베어서 말에게 먹임 26) 병력이 4백 명에 불과했으나 추종자들 22) 좌동 의 충성으로 한 차례의 패전도 없었음 23)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를 도모하 자 이에 강력히 반대함 24) 고령에서 왜군의 정예인 시마즈 요시히로( 島 津 義 弘 ) 군을 격퇴함 27) 8년간의 전쟁 중에 한 차례도 패하지 25) 백전백승의 전술과 전투에서 불 않고 부상도 당한 일이 없어 모두가 신 사신과 같이 진두 지휘함 이라고 일컬음 28) 양경리( 揚 經 理 )가 보내준 표패( 票 牌 )를 가장( 家 藏 )함 29) 전쟁 중에 기갈( 飢 渴 ) 시에 적의 간을 꺼내 씹음 30) 백의종군하는 명의 총병 조승훈에게 적 의 수급을 주었으나 받지 않음 31) 통제사 시절에 중국 표상( 漂 商 )을 극진 히 대접하여 명나라 천자에게서 백금 ( 白 金 )과 금기( 錦 綺 )를 하사 받음 26) 왜군의 최정예 병력을 격파함으 로써 왜동( 倭 童 )도 정기룡을 무 서워함 27) 재혼 초야에 출전하여 왜적의 수 급을 가지고 귀가함 32) 61세에 통영에서 사망하자 보국숭록관 ( 報 國 崇 祿 官 )을 제수하고, 3대를 추봉 ( 追 封 )함 33) 조카 정상린이 왜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백방으로 노력하여 귀환시킴 - 12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34) 정기룡이 탔던 말의 신준( 神 駿 )함 35) 거창 객사의 포위 탈출담 36) 전처인 강씨의 순절담 28) 전처인 강씨가 진주성이 함락될 적에 혈서를 쓰고서 순절 37) 처자손록 하고 있는 반면에 정기룡전 은 시간적 순서에 따른 논리성에 유의하면서도 작전자의 입전 의도를 강조함으로써 문학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기룡전 은 매헌실기 사적이 중시하는 가문의 현창이나 기 록성보다는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서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면서 정기룡 장군의 장수로서의 자질, 주체적 사고, 장수로서의 용맹성, 전투 지휘의 탁월성 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렇듯 상이한 성격을 나타내는 두 문헌을 비교하여 그 생략된 부 분, 추가된 부분, 이동된 부분을 검토하여 정기룡전 에 나타난 홍량호의 작 자 의식과 그에 근거한 문학성을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보기 보기로 하자. 우선 매헌실기 의 사적에는 있으나 정기룡전 에서는 생략된 부분으로는 1) 찬 술 동기, 3) 선조 소개, 5) 효심, 6) 7) 8) 무과 급제 과정 및 출사, 20) 순영 미를 군량미로 전용한 고사, 22) 석거( 石 車 )로 왜군을 섬멸한 일, 23) 사천 전 투, 24) 지방민의 의식 문제 해결, 25) 명나라 군대를 후하게 대접한 일, 28) 표패의 가장, 31) 명나라 천자가 백금 등을 하사한 일, 32) 사망 기록, 33) 포 로가 된 조카의 귀환, 37) 처자손록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렇듯 생략된 부분에 대해서는 우선 정기룡전 은 해동명장전 중의 한 작품이고 편찬 동기를 서술한 서문이 있으므로 구태여 사적과 같이 서두에 1) 찬술동기를 설정할 필요는 없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3) 32) 34)는 인물전 을 쓸 적에는 대체로 포함되는 부분이지만 정기룡전 의 경우는 그의 가문 을 현창하기 보다는 정기룡이라는 인물과 그가 세운 공적 자체에 관심이 있었 기 때문에 생략한 듯하다. 그리고 5) 6) 7) 8) 23) 33)과 같은 부분은 장 수로서의 정기룡의 탁월성과는 별 관련이 없고, 20)은 임시변통의 조치라지만 법을 무시한 처사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효과를 고려해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22) 23)은 모든 전투를 소개할 수 없으므로 우선 순위를 고려하여 제 외시킨 것 같으며, 특히 25) 28) 31)은 명나라와 관련하여 정기룡 장군의 사 - 13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대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주체적 시각에서 작자가 이를 제외시킨 것으 로 생각된다. 한편으로 사적에는 없으나 정기룡전 에 추가된 부분으로는 2) 사명( 賜 名 ), 4) 의협심, 11) 용화동 전투, 13) 대승산 전투에서의 왜군 섬멸, 17) 병사들을 위로함, 23) 왜군과의 강화 반대, 24) 왜군의 정예 부대 격파 등을 들 수 있다. 2)는 선조가 기룡( 起 龍 )이란 이름을 사명( 賜 名 )했음을 밝힘으로써 정기룡 장군 의 영웅적 면모를 예고하고 있으며, 4) 역시 정기룡에게 일찍부터 위엄과 협사 의 기질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그가 본래 장수로서 자질이 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11) 13)은 정유재란 시기의 전투에 비해 임진왜란 시기의 전투 사례가 별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관계로 양 시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17) 23) 24)는 장수로서의 통솔법, 애국심, 전승 등을 잘 나 타내 주는 부분으로 판단하여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보강한 것으로 볼 수 있 다. 마지막으로 위치가 이동된 부분을 꼽으라면 8) 9) 14) 등을 들 수 있다. 정기룡의 용맹성과 신마( 神 馬 ), 그리고 거창 객사에서의 탈출담을 매헌실기 사적에서는 장군의 사후( 死 後 )에 관련 일화를 제시하는 부분에 포함시키고 있 다. 반면에 정기룡전 에서는 초기의 활약 시기에 이들 일화를 삽입함으로써 서사적 일관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정기룡 장군의 영웅성을 부각시키려는 문학 적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곧 정기룡전 은 기존 사료를 시간 적으로 배열하면서도 이를 논리적으로 구조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를 근거로 하여 양자의 차이점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형식면에서 매헌실기 사적은 도입부 서두부 전개부 결말부 라는 전통적 형식을 보여주는 데에 반하여 정기룡전 은 간략한 서두와 전개 부만을 설정하고 있다. 이는 사적의 경우는 한 인물의 일생에 대한 충실한 기 록이기에 일대기적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에 반하여 정기룡전 의 경우는 정기룡의 영웅성과 업적만을 제시하는 등, 사전에 비해서는 더욱 개방적인 양 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내용면에 있어서도 매헌실기 사적에 비 해 정기룡전 은 그 내용이 더욱 축소 구조화되어 있고, 내용의 기술에 있어 - 14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서도 전자가 전반적으로 구체적 기술을 지향하는 데에 반하여 정기룡전 은 필요한 부분에 한해서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술 태도에 있어서도 매헌실기 사적은 사실의 충실한 기록에 치 중하였지만 정기룡전 은 우선 인물에 관련된 사실과 설화 등을 총망라한 뒤 에 작자 자신이 조형하고자 하는 인간상에 적합한 제제만을 취사선택하고 경 우에 따라서는 허구적 해석을 덧보태어 한 인물의 영웅적 성격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다. 정기룡의 장수로서의 탁월성을 나타내기 위해 그가 전투를 지휘 하는 불사신과 같은 모습과 그가 타는 신마( 神 馬 )의 신이성을 묘사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정기룡은 담력과 용력이 뛰어나고 두 눈이 횃불처럼 빛났다. 그가 적지에 뛰어들어 적을 무찌를 적에는 마치 평지를 달리는 것 같았으며, 왜적이 총들을 한쪽으로 모아 일제히 쏘아도 그를 명중시키지를 못했다. 그는 전투를 벌이다 가 목이 마르면 왜적의 배를 가르고 그 간을 씹었다. 용기가 북받쳐 오를 적에 는 그가 탄 신마( 神 馬 )가 여섯 길이나 되는 참호를 능히 뛰어 넘고, 가파른 절 벽이나 위험한 언덕길도 매나 소리개처럼 날아올랐다. 17) 한편으로 정기룡전 에서는 영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위적인 재단을 한 부분이 적지 않은데 정기룡이 전투에서 보여준 담력과 탁월한 판단력을 보여 주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그러한 작자의 창의적 시도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정기룡은 일찍이 기병 8명과 함께 거창 객사에 머물러 있었다. 밤중에 왜적 이 대량으로 들이닥쳐 정기룡 일행을 포위하였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나 정기룡만은 가만히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았 다. 날이 밝은 뒤에 기병들을 이끌고서 말을 몰아 담장을 뛰어 넘어 적의 포위 를 돌파하였다. 18) 이밖에도 매헌실기 사적이 시간적 순서만을 중시하여 내용의 연관성을 소 홀히 한 반면에 정기룡전 은 내용의 연관성을 중시하여 관련 일화를 시간적 - 15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순서에 자유롭게 적절한 곳에 배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관련 일화 를 제시하는 경우에도 정기룡 장군의 영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과감하게 축 소하거나 삭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적에 나타나는 수학기의 다양한 행적을 위엄과 의협심만으로 대신하거나, 20) 순영미의 무단 사용과 25) 명나라 군사 에 대한 굴욕적 태도와 같이 주체적 영웅상의 창조에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과감히 삭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매헌실기 사적은 가문을 빛낸 선조를 현창하 려는 의도 아래 이루어진 연대기적 사실의 기록성을 중시한 사료의 성격을 지 니는 반면에 정기룡전 의 경우는 역사적 영웅을 창조하려는 작자의 의도 아 래 역사문학성이 강조된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설화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정기룡 장군과 같이 역사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가 전설과 같은 설 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형상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여러 허구적인 요소가 필요 하다고 하겠다. 하나의 역사적 인물에 관련된 사실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게 되면 결과적으로 사실로서의 비중은 약화되는 반면에 역사의 이면이 새롭게 형상화됨으로써 설화로서의 흥미를 갖추게 된다. 요컨대 허구적인 요소가 대량 으로 수용됨으로써 문학적 흥미를 부각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매헌실 기 와 같은 역사적 기록은 지배 계층의 관념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 에 비해 전설과 같은 설화에는 그 전승 과정 속에서 민중들의 의식을 두드러 지게 투영되게끔 되는 것이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영웅 이야기가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다양 성을 확보한 시기는 조선 시대에 접어들고서 부터라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고 난 이후에는 기존의 영웅과는 전혀 다른 영웅 이야기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19) 요컨대 전쟁과 같은 위기의 과 정을 거치면서 민중들은 자신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영웅상을 만들어 내었 고, 그러한 영웅을 둘러싸고 전승되는 설화 속에 지배층의 역사의식과는 다른 - 16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인식을 반영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기룡 장군과 관련된 설화 속에도 기존의 사적이나 전기 문학과 같 은 문헌에 나타나는 것과는 다른, 그러한 민중 의식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사태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정기룡 장군에 관한 이 야기의 전승 속에서 어떠한 설화적 변이가 일어났으며, 그로 말미암은 인식의 전환 양상이 어떠한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전설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의 모 습을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20) 조부가 명당자리를 얻어 죽은 어머니에게서, 혹은 열두 달 만에 태어났다. 수련 과정에서 신검( 神 劍 )과 용마( 龍 馬 )를 얻어 신이성( 神 異 性 )을 획득하 였다. 산신령의 도움으로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다. 선조의 명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진주성 싸움에서 첫째 부인이 죽은 뒤에 예지력이 있는 둘째 부인을 아 내로 맞이했다. 횃불과 불붙은 소를 이용하여 전투에서 승리했다. 상주성 전투에서 왜군의 칼에 부자가 함께 전사하였다. 정기룡 장군에 관한 역사적 사실과 전설과 같은 설화 속에 형상화된 모습은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부분도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전설 속에 형상화되는 모습도 문헌설화와 구비설화에서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 만 이를 포괄하여 하나의 전설 양상으로 보면 역사적 사실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의 모습과 전설 속의 그것은 다음과 같이 비교해 볼 수 있다. 이상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정기룡 장군의 행적이나 왜적과의 싸움 에서 뛰어난 공적을 거두었다는 점,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혼인을 하였다는 사실 등은 역사적 사실과 설화 속에서의 전승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 다. 반면에 역사적 행적에 비교하여 전설 속에서 가장 커다란 변이를 보이는 항목을 들자면 정기룡 장군의 신분, 혼인과 관련하여 둘째 부인의 이야기, 죽 음과 관련된 전승 등을 꼽아야 할 것이다. - 17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사실에 나타난 정기룡 전설 속에 나타난 정기룡 신분 좌찬성 정호의 아들 관노, 하인 출생 성장 혼인 행적 전쟁놀이를 좋아하고 무예에 힘씀 열세 살에 아버지가 죽자 형과 같이 삼년상을 치름 첫째 부인 진주 강씨가 죽자 둘째 부인 예천 권씨와 혼인함 선조의 명으로 이름을 개명함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고 큰 공 을 세움 명나라 총병 직을 제수 받음 백성을 잘 다스림 함 죽은 어머니에게서, 혹은 열두 달 만 에 태어남 소나기를 피하려다 죽을 뻔했는데 산신령이 나타나 목숨을 구해줌 첫째 부인의 죽음으로 예지력을 지닌 둘째 부인과 혼인해 많은 전공을 세 움 선조의 명으로 이름을 개명함 횃불과 소를 이용해 전투에서 승리 신검과 용마를 획득해 신이성을 발휘 함 죽음 임진왜란이 끝나고 통제사로 있던 통영의 진중에서 죽음 함 상주성 전투에서 부자가 함께 전사 우선 전설과 같은 설화적 전승 속에서 역사적 사실과 가장 다르게 형상화되 어 있는 부분으로서 주목되는 것은 정기룡 장군의 신분과 관련된 문제라고 하 겠다. 곧 역사적으로 정기룡 장군은 좌찬성 정호( 鄭 浩 )의 아들로 25세 때에 무 과에 급제한 어엿한 양반에 속하는 신분이었음에 반하여 전설 속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은 대체로 관노나 하인과 같은 미천한 신분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 이다. 이는 장군의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써 일찍이 가난한 생활을 하였 으며 그로 인해 진주 아전의 딸인 진주 강씨를 아내로 맞이했던 사정과도 관 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결과 뒤에서 보겠지만 동야휘집( 東 野 彙 集 ) 이나 동패락송( 東 稗 洛 誦 ) 에 실려 있는 설화에서는 미천한 신분의 정기룡 장 군이 자신의 신분적 한계로 인하여 큰 뜻을 품고서도 그것을 펴지 못하는 울 분이 매우 강하게 표출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21) 정기룡 장군의 신분에 대한 이러한 설화적 설정은 실제로 고착화되었던 신 분 제도가 붕괴되었던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정기룡 장군을 하 층민으로부터 출세시킴으로써 후일 그의 행적을 더욱 영웅적으로 부각시키려 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신분을 하층민으 로 설정함으로써 자신들과의 동질성을 강화하려는 민중 의식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하겠다. 곧 이러한 설화를 전승하는 민중들은 정기룡 장군을 지 - 18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배 계급인 양반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하층민 출신으로 봄으로써 그에 대한 친근감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그러한 설화적 설정을 통하여 임진왜란을 극복한 주체가 양반 지배층이 아닌 민중들 자신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설화 속에 나타나는 정기룡 장군에 대한 그러한 영웅화는 죽을 운명의 어린 정기룡을 호랑이가 살려 주었다는 이야기 22) 와 같은 민간적 발상으로 나타나기 도 하는데 그와 같은 전설적 발상 내지 변이가 가장 두드러진 예는 다름 아닌 혼인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기룡 장군은 실제로 첫째 부인 진주 강씨와는 진주성 전투에서 사별하고서 둘째 부인인 예천 권씨와 혼인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 속에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진주 강씨 부인이 정절을 지키기 위 해 남강에 투신한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고 둘째 부인에 관한 기술은 별달리 등장하지 않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설화를 전승하는 민중 의식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나 약한 첫째 부인 대신에 둘째 부인에게 예지력을 부여해 이인( 異 人 )으로 형상화 하는 방향을 선택하였다. 곧 동야휘집( 東 野 彙 集 ) 에 실린 다음과 같은 문헌 설화에서 보듯이 정기룡 장군의 부인은 선견지명이 있는 여인으로 부유한 집 안의 재력을 통해 장군의 전승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이인의 모습으로 묘사되 어 있는 것이다. 정기룡은 곤양 사람으로 자는 경운이고 초명이 무수로 무과에 급제했다. 어 려서부터 탁월하여 전쟁놀이를 할 적에도 아이들이 다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집안이 가난하여 생활하기 어려워 편모를 모시고 진주로 가서 소금장수로 생 활하다가 병영의 노안에 예속되었다. 하루는 낮잠을 자다가 소리를 질렀는데, 병사가 듣고서 이상히 여겨 이유를 묻자, 정기룡은 장부로 태어나 큰 뜻을 펴 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소리가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병사가 정기룡의 인물됨을 짐작하고 속량시켜 주었다. 그 때 진 주 이방의 혼사일로 정기룡이 전주 이방 권모의 집으로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전주 이방은 집안이 무척 부유하였으나 아들은 없고 시집갈 나이의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선견지명과 지인지감이 있어 자기의 일생이 좌우되는 배필은 스스로 선택하겠다고 하며 부모가 선택해주는 혼처를 거부하였다. 하루 - 19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는 친척집에 일이 있어 부모가 출타한 사이에 정기룡이 심부름을 왔는데, 문틈 으로 내다보니 비록 의복은 남루하나 대장부의 기상이 있어, 권모의 딸이 자신 의 배필감을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안채로 인도하여 대접하였다. 조금 후에 부 모가 돌아와 외간 남자를 내당으로 들인 딸의 행위를 질책하자, 딸이 자기의 배필로 선택한 자라고 소개하며 중매를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권모의 부부가 딸을 질책하고 딸의 요구대로 정기룡을 만나보니 기상이 남달라 정기룡에게 청혼하였다. 권모가 서면으로 모친에게 알리고 혼인하자고 하는 것을, 정기룡 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며 직접 가서 모친에게 알리고 하겠다고 하자 권모가 칭 찬하며 자기의 말을 타고 가겠다고 하였다. 이에 정기룡이 자신은 걷는 데 익 숙해 있다고 하며 걸어가겠다고 하자 권모가 말의 내력을 설명해 주며 말을 타고 가게 하였다. 그 말은 어느 상인이 끌고 다니던 말이었는데, 딸이 보고서 부친에게 훗날 소용될 곳이 있을 것이라고 하며 사달라고 졸라서 권모가 사놓 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은 워낙 사나워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서 멀리 서 먹이만 주며 기른 것이었다. 정기룡이 이 말을 듣고서 가까이 가자 말이 갑 자기 온순해졌으므로 모두들 정기룡이 말의 임자라고 하면서 정기룡의 능력에 감탄하였다. 정기룡이 그 말을 타고 진주를 다녀와 혼인한 다음에 권모가 정기 룡의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편모를 모시고 와서 처가에서 같이 살자고 하였 으나, 권모의 딸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재산을 나누어 주면 진주로 가서 살 겠다고 하였다. 이에 권모가 재산을 진주로 보내 주자, 정기룡의 부인이 철물 ( 鐵 物 )을 많이 사서 모으며 훗날 소용될 곳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얼마 후 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기룡의 부인은 그 동안 사 모은 쇠로 병장기를 만 들어 말과 함께 정기룡에게 주며 거병하게 하였다. 정기룡이 전장으로 나가면 서 노모를 근심하자 부인은 이미 노모를 모시고 피난할 곳을 마련해 두었다고 하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정기룡은 전장으로 나가서 여러 차례에 걸쳐 승리하여 벼슬이 높아져 병사에 이르렀다. 23) 위에 인용된 설화에서 보듯이 정기룡 장군은 원래 관노의 신분에서 속량되 었으며, 이윽고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있는 이방의 딸에 의해 결혼상대로 선 택이 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선견지명을 지닌 부인은 정기룡 장군을 도와주는 - 20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원조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장군의 부인은 미리 좋은 말을 사다 길러 후 에 정기룡 장군이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해주고, 집안의 재산으 로 병장기를 준비해 전란이 일어나자 정기룡 장군이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다. 한편으로 늙은 노모를 염려하여 전투에 참여하기를 망설이는 남 편을 설득하여 전투에 참여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헌설화집인 동야휘집( 東 野 彙 集 ) 과 동패락송( 東 稗 洛 誦 ) 에 실린 정기룡 장군의 이야기 역시 대체로 정기룡 장군의 행적 뒤에 이인적인 선견지명을 지닌 부인을 설정하여 역사 현장에서 일어났던 정기룡 장군의 공적을 부인에 의한 것으로 돌리고 있다. 문헌설화로 전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이상의 문헌설화의 비교에서 위기나 전란의 시기에 자신들의 존재를 적극적 으로 드러내는 여성적 이인으로서의 부인의 존재 이외에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정기룡 장군의 말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구비 설화에서도 으레 등장하는 정기룡 장군과 그 말에 관련된 이러한 유형의 이야 기 24) 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부인의 선견지명과 이인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강 조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고 하겠다. 유명한 온달 이야기로부터 일정하게 영 향을 받았고, 정기룡 장군 뿐만 아니라 곽재우 장군과 관련된 설화에서도 보이 는 이러한 유형의 설화는 남성 우위에서 여성들의 비범한 능력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색이 있다고 하겠다. 이렇듯 정기룡 장군의 부인은 미리 전란을 예견해 남성들보다 이에 먼저 대비하고, 전란에 직접 참여하는 남성들 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새로운 여성상의 출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컨 대 이 시기에 이르러 여성도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과 의지에 근거해 남성에 못지않은 사고와 행동력을 보여주게 되었다는 새로운 변화 양상에 대해서 설 화의 결론 부분도 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외사씨는 말한다. 하늘이 두세 명의 호준( 豪 俊 )한 사람을 낳아 때를 위해 쓰이게 할 적에는 반드시 신물( 神 物 )을 아울러 낳아 그들에게 부림을 당하도록 하는 법이다. 용마( 龍 馬 )가 임금의 꿈에 나타나서 기룡( 起 龍 ) 이란 이름을 하사 받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하겠다. 그리고 마침내 신험( 神 驗 )함을 얻어 - 21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동야휘집( 東 野 彙 集 ) 동패락송( 東 稗 洛 誦 ) 1) 병사 정기룡은 곤양 사람으로 무과에 급 제하여 이름을 날렸다. 2) 어려서부터 여러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 였는데 그 성품이 강개하였다. 3) 진주에서 절도사의 군관으로 있었는데, 어 느 날 낮잠을 자다 큰 소리를 지르기에 절도사가 이유를 물으니 대장부로서 용감 하게 싸우고 싶은 뜻이 무의식중에 나온 것이라 하므로 절도사가 장하게 여겼다. 4) 일이 있어 전주에 갔는데 이웃사람 중 전 주현감 권모와 청혼한 자가 서찰을 부탁 하기에 그 집으로 갔다. 5) 권모의 집에 선견지명의 딸이 있어 스스 로 배필을 구하겠다고 했는데 심부름 온 정기룡을 자기 남편으로 택하니 부모가 할 수 없이 허락하였다. 6) 여자가 비루 먹은 말을 사 길러 훌륭하게 만드니 그 말이 정기룡에게만 복종하였다. 7) 여자가 시집을 갈 적에 철물( 鐵 物 )을 사서 가지고 갔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철물로 병기를 만들어 의병을 일으켜 싸 우게 하였다. 8) 정기룡이 조경( 趙 儆 )의 부하가 되어 선봉 에 서서 싸웠는데 조경이 왜적에게 잡히 자 구출해 냈다. 9) 어느 날 시골집에서 잠을 자다가 왜적에 게 포위되어 단신으로 탈주했는데 산에 올라 휘파람을 부니 말이 듣고 달려 왔다. 10) 정기룡이 공을 세우니 영우절도사( 嶺 右 節 度 使 )에 이르렀다. 11) 논찬부 1) 정기룡은 상주 사람으로 진주의 병영에 관노로 있었다. 2) 병영에서 낮잠을 자다가 소리를 질러 병 사에게 꾸지람을 듣자 대장부로서 전쟁터 에 나아가 당당히 싸우고자 하는 뜻을 밝 히자 이를 가상하게 여긴 병사가 관노의 신분을 풀어 양민이 되게 해주었다. 3) 진주 감영 이방의 편지를 전하러 전주 감 영의 이방 집에 갔다가 그를 눈여겨 본 이방 집의 딸이 정기룡을 남편으로 택하 니 부모가 허락하였다. 4) 전주 감영 이방 집에 좀처럼 다루기 힘든 못된 말이 있었는데 정기룡은 그 말을 능 숙하게 다루면서 타고서 진주의 집으로 갔다. 5) 다시 전주로 돌아와 초례를 치르고 나서 처가살이를 권유하는 것을 물리치고서 진 주로 돌아갔다. 6)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기룡은 어머니와 아내를 피신시킨 뒤에 전주에서 데려 온 준마를 타고서 임금을 구하러 한양으로 갔다. 7) 한강에 이르러 초토사를 만나 동행하여 영남에 이르렀다가 왜군의 진영으로 쳐들 어 가 왜군의 포로가 된 초토사를 구하였 다. 8) 진주목사에게 왕을 호위할 것을 권하였으 나 듣지 않자 그의 목을 베고서 병사들을 거느리고서 왜군을 여러 차례 무찔렀다. 9) 아내의 요청대로 어머니와 아내를 금산으 로 옮겨주고서 다시 전쟁터로 갔다. 10) 전쟁에서 거둔 공적을 조정이 인정하여 벼슬을 내렸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벼 슬이 북병사에 이르렀다. 강대한 적군의 진영에 돌격하여 높은 공훈을 세우고 크게 이름을 떨쳤던 것은 모두 용마( 龍 馬 )의 효험이니 어찌 기이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 부인의 지식이 세상에 드물게 보는 바이니 가히 그 지아비에 그 지어미라고 할 만하다. 아마 도 사희맹( 謝 希 孟 )이 말한 바 광명한 기운이 뇌락( 磊 落 )하니 영특하고 위대한 - 22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기가 남자에게 뿐만 아니라 그 부인에게도 모였던 것이리라! 25) 마지막으로 정기룡 장군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역사적 사실과 설화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사 속의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통영의 진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전설과 같은 구비설화에서는 정기룡 장군 이 실제로는 승리를 거두었던 상주성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왜적의 칼에 죽임 을 당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매헌의 정려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상주 북문에 있고 하나는 고향인 진양 에 있다. 정기룡이 임진왜란 때에 급제하여 상주성에서 싸우는데 그의 아들이 따라왔다. 정기룡은 아들을 불러 자기는 상주성을 사수할 것이라고 하며 집에 가서 가솔을 돌보라 하였으나, 아들은 아버지가 죽는데 갈 수 없다고 하며 거 절하였다. 성이 함락되고 정기룡이 죽게 되자 아들이 정기룡의 앞을 가로 막아 두 팔이 잘려도 굴하지 않고 결국 같이 죽었다. 왜병들이 아들의 효성에 감탄 하여 묘를 써주었는데, 아들은 효에 죽었고 정기룡은 충에 죽었다. 26) 이상에서 보듯이 정기룡 장군의 죽음을 둘러싸고 역사적 실제와는 달리 설 화상의 변이가 나타나는 주된 원인은 민중 의식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민중 의식은 정기룡 장군이 역사에서처럼 평범한 죽음을 맞 이하는 식으로 전승하기보다는 그가 전장에서 비극적이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 하게 함으로써 무인으로서의 정기룡 장군을 더욱 영웅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하 였던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정기룡 장군은 비범한 출생과 수련 과정을 거쳐 신이성을 획득했던 인물로 이인으로서의 선견지명을 지녔던 부인의 도움을 받 아 탁월한 공적을 이룬 전쟁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를 더욱 영웅화시키기 위해서는 진중에서 평안히 죽었다거나 또는 죽어서 신선이 되었 다는 식의 신이한 죽음의 방식은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졌을는지 모른다. 한편 으로 전쟁 영웅으로서의 정기룡 장군의 역사적 행적을 신빙성 있게 증명할 장 치가 필요하였던 바 상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다는 식의 설화 적 변이와 전승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역사적 실존 인물인 정기룡 장군과 관련하여 설화에 - 23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나타나는 가장 커다란 변이는 정기룡 장군의 신분과 이인의 능력을 지닌 후원 자로서의 부인 이야기, 그리고 비극적이고 장렬한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 등을 들 수 있겠다. 우선 신분과 관련된 변이 양상은 본래는 양반층에 속하는 정기 룡 장군을 관노나 하인 등의 미천한 신분으로 설정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보다 친근한 존재 또는 영웅으로 형상화하려는 민중 의식의 발로로 보아야 할 것이 다. 다음으로 예지력을 지닌 이인으로서의 부인 이야기나 상주성 전투에서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죽음의 이야기 등은 임진왜란과 같은 현실의 위기를 겪으면서 자신들을 구원할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던 당시의 민중 의식 이 투영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무리 임진왜란 시기 왜적을 물리치고서 나라와 백성을 전란의 위기에서 구해낸 전쟁의 영웅이자 대표적 명장의 한 사람으로 평가 받는 정기룡 장군에 대해서 는 비록 그 자신의 직접적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실록( 實 錄 )이나 사후에 편찬 된 매헌실기 같은 실기류의 역사 기록, 홍량호의 해동명장전 정기룡전 과 같은 전기류의 문학 작품 및 동야휘집 과 동패락송 같은 문헌설화집에 실린 설화 및 관련 전설 등 다양한 간접적 기록이나 문헌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문헌 속에서 정기룡 장군과 관련하여 기술된 내용을 인물 형 상화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선 역사 기록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 이라는 국가적 전란을 맞이하여 탁월한 전술과 뛰어난 용맹으로 왜적을 물리 친 명장인 동시에 백성에게는 자애로운 목민관이었던 영웅적 인물로서 묘사되 어 있다. 그 결과 매헌실기 나 신도비 등의 역사 기록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의 역사적 행적과 그 인물화 형상은 조선 시대의 지배 이념인 유교 사상을 대 표하는 충( 忠 ) 효( 孝 ) 열( 烈 ) 등의 통치 이념을 강조하는 형태로 기술되어 있 다고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정기룡 장군은 임금이 직접 지어준 이름을 받아 개명할 만큼 임금의 총애를 받았고, 여타의 인물들처럼 지배층의 반대 세력의 모함에 빠져 - 24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억울하게 실패하지도 않았던 성공한 영웅이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한 차례도 패배하지 않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임금 과 나라에 충성을 다했던 민족의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 첫째 부인 역시 진주성이 함락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였던 열부( 烈 婦 )였다는 사 실은 한층 더 정기룡 장군이 충과 효를 갖춘 유교적 도덕인이자 전쟁을 승리 로 이끈 명장으로 인식 평가되고 형상화되게끔 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조의 유교적 통치 이념을 충실히 구현하는 국가적 영웅으로서 지배 계급에 의해 묘사되었던 정기룡 장군의 역사적 행적은 이후 해동명장 전 정기룡전 과 같은 문학성이 강조된 작품에서는 작자가 지어 낸 창의적 이고 허구적인 요소가 더하여져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역사적 영웅으 로 형상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기룡 장군의 역사적 행적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부각시키고 그에 따른 인물 형상화를 행하는 경향은 이후의 문헌설 화나 구비설화 등에서도 대체로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설화문학에 나타나는 정기룡 장군의 인물 형상은 지배 계 급의 충효 이념을 따르면서도 임진왜란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새로운 민 중 의식을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한 민중 의식이 투영된 결 과로 설화에 나타나는 특징적 변이는 정기룡 장군의 신분 및 이인의 능력을 지닌 후원자로서의 부인 이야기, 그리고 비극적이고 장렬한 죽음과 관련된 이 야기 등을 들 수 있다. 신분과 관련된 변이 양상은 본래는 양반층에 속하는 정 기룡 장군을 관노나 하인 등의 미천한 신분으로 설정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보 다 친근한 존재 또는 영웅으로 형상화하려는 민중 의식의 발로로 볼 수 있으 며, 아울러 선견지명을 지닌 이인으로서의 부인 이야기나 상주성 전투에서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죽음의 이야기 등은 전쟁과 같은 현실의 위기를 겪으 면서 자신들을 구원할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던 당시의 민중 의식이 투 영된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정기룡 장군은 역사의 현장에서 개인으로서 세 계와의 갈등을 전혀 겪지 않았으며, 그를 둘러 싼 세계 역시 그가 개인적인 능 력을 충분히 발휘하며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던 매우 드문 경우 에 속하는 역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정기룡 장군은 지배 계급에 - 25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의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동시에 지배 계급의 통치 이념을 구현하는 전 쟁 영웅으로 인식 평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성공한 영웅으로서의 정기룡 장군의 인물 형상은 이후 민중에게도 그대로 수용되는 한편으로 새롭 게 변화하는 민중의 소망과 기대를 반영하고 충족하는, 신이하고도 친근한 민 중적 영웅의 모습으로 재창조되고 형상화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註 1) 엄기표, 임진란의 맹호, 교학사, 1970. 2) 홍량호, 정기룡전( 鄭 起 龍 傳 ), 해동명장전, 이계집( 耳 溪 集 ) 大 小 六 十 餘 戰 嘗 以 少 擊 衆 未 嘗 挫 衄 3) 홍량호, 같은 책, 같은 곳. 起 龍 所 至 人 民 無 一 死 傷 市 里 晏 如 人 甚 畏 而 愛 之 4) 임철호, 설화와 민중의 역사의식, 집문당, 1989. 5) 統 制 使 鄭 公 起 龍 昆 陽 人 也 初 名 茂 壽 或 云 公 捷 武 科 當 唱 名 宣 祖 大 王 夢 龍 起 於 鐘 樓 街 飛 上 天 衢 旣 覺 物 色 得 公 而 異 之 賜 以 今 名 云 公 自 幼 有 食 牛 氣 射 桑 弧 時 略 作 官 人 樣 威 伏 群 兒 群 兒 莫 敢 違 十 三 喪 其 父 廬 墓 哭 泣 喪 畢 不 肯 學 書 請 學 射 其 兄 仁 龍 止 之 不 能 得 嘗 偕 之 試 所 仁 龍 以 病 輿 歸 而 死 公 大 痛 遂 棄 其 業 爲 之 食 素 三 年 後 族 人 勸 其 母 勉 卒 其 業 旣 及 第 戍 北 則 北 帥 憐 其 陟 岵 之 情 先 期 許 歸 壬 辰 倭 變 從 防 禦 使 趙 儆 南 下 說 儆 以 禦 賊 之 略 儆 喜 以 爲 別 將 大 敗 賊 五 百 于 居 昌 又 從 擊 金 山 賊 方 戰 酣 儆 爲 賊 所 獲 公 奮 劒 入 中 堅 奪 儆 以 歸 仍 請 於 儆 尋 母 所 在 遂 自 智 異 山 往 見 昆 陽 守 李 光 岳 方 赴 戰 晉 州 以 公 爲 假 守 時 金 公 誠 一 爲 嶺 南 兵 使 檄 召 公 使 將 游 兵 捍 後 俄 以 爲 尙 州 判 官 牧 使 金 澥 素 聞 公 能 每 事 咨 焉 賊 方 據 州 城 公 旣 擊 殺 分 抄 賊 四 百 餘 上 級 于 巡 營 又 夜 以 火 攻 城 大 鏖 之 事 聞 拜 眞 判 官 承 旨 尹 承 訓 使 嶺 南 還 言 公 討 賊 狀 上 使 權 牧 于 尙 俄 卽 眞 兼 敢 死 軍 大 將 先 時 公 平 土 人 爲 亂 者 開 屯 田 給 餽 餉 以 其 餘 賑 活 飢 民 仍 調 其 驍 健 者 爲 兵 無 不 感 戴 遇 賊 輒 爭 死 故 號 其 軍 爲 敢 死 丁 酉 倭 奴 再 逞 與 九 邑 官 率 家 屬 守 金 烏 城 體 使 李 公 元 翼 召 公 爲 將 大 戰 於 高 靈 公 躍 馬 八 萬 人 中 取 紅 衣 賊 將 而 歸 捷 奏 陞 折 衝 拜 慶 尙 右 兵 使 開 營 于 星 州 俄 而 由 尙 州 逾 嶺 進 討 湖 西 永 同 屯 賊 賊 將 淸 正 以 大 兵 將 西 犯 京 師 爲 天 兵 所 敗 走 公 遇 於 報 恩 赤 巖 當 前 立 馬 射 倒 數 十 賊 意 甚 整 暇 賊 疑 有 備 良 久 不 敢 動 以 故 湖 嶺 避 亂 人 獲 免 者 數 十 萬 人 淸 正 旣 過 尙 州 公 追 躡 之 殺 零 賊 又 與 天 兵 擊 破 慶 州 賊 天 將 楊 經 理 鎬 戰 于 島 山 公 爲 前 鋒 旣 先 登 而 天 兵 左 次 公 遂 揮 刀 馳 還 賊 不 敢 追 自 是 連 殺 居 昌 咸 陽 安 陰 金 山 尙 州 星 州 泗 川 賊 其 攻 咸 陽 天 將 李 梲 戰 敗 而 死 其 餘 兵 願 屬 公 事 聞 皇 上 許 之 仍 以 爲 天 朝 摠 兵 官 公 大 小 六 十 餘 戰 皆 以 小 擊 衆 未 嘗 挫 衂 楊 經 理 麻 提 督 貴 皆 甚 獎 賞 遺 以 標 牌 及 史 世 用 贈 詩 二 章 以 美 之 公 儀 觀 雄 偉 眼 光 如 炬 淸 白 無 點 常 急 人 之 困 不 顧 已 私 嘗 以 首 級 與 天 將 祖 承 訓 以 贖 罪 祖 雖 不 受 義 聲 則 著 矣 朝 廷 爲 李 舜 臣 置 三 道 統 制 使 以 領 水 軍 後 公 以 輔 國 崇 祿 大 夫 居 其 職 天 啓 壬 戌 二 月 二 十 八 日 卒 于 營 年 六 十 一 公 字 景 雲 公 內 行 亦 備 少 貧 賤 旣 貴 贈 其 父 浩 左 贊 成 祖 義 傑 戶 曹 判 書 曾 祖 哲 碩 戶 曹 參 判 夫 人 姜 氏 考 諱 世 鼎 系 出 晉 陽 姜 氏 避 賊 入 晉 州 城 城 陷 血 指 書 衫 告 公 以 死 遂 與 其 母 及 小 姑 投 于 矗 石 樓 下 大 江 之 水 公 葬 其 衫 于 昆 陽 先 兆 公 所 用 有 兄 子 壽 麟 李 希 春 金 天 男 金 世 賓 黃 致 遠 金 士 宗 鄭 範 禮 盧 涵 崔 胤 尹 業 等 皆 壯 猛 殺 賊 無 算 所 騎 有 神 馬 能 平 超 六 丈 壕 能 緣 絶 度 險 如 利 爪 快 翮 者 公 制 勝 脫 危 多 得 其 力 嘗 與 公 相 失 爲 賊 所 得 忽 應 公 聲 嚼 仆 執 鞚 賊 走 赴 公 峻 坂 上 後 病 死 公 爲 文 以 祭 之 盖 當 時 應 公 而 出 者 皆 如 是 公 之 應 時 而 出 可 知 也 公 嘗 殺 降 倭 數 十 終 身 恨 之 然 公 位 隮 崇 斑 子 姓 蕃 衍 豈 公 活 人 甚 多 故 其 所 恨 不 足 以 傷 其 慶 報 耶 後 娶 醴 泉 權 氏 宣 傳 官 弘 啓 女 也 女 適 生 員 金 是 梲 男 長 曰 翼 麟 武 科 僉 知 中 樞 次 得 麟 亦 武 科 요 次 德 麟 時 麟 末 女 爲 僉 使 朴 彦 枏 妻 夏 韺 元 韺 舜 韺 美 韺 禹 韺 翼 麟 出 斗 韺 震 韺 得 麟 出 是 韺 燦 韺 殷 韺 世 韺 德 麟 出 時 麟 出 者 善 韺 也 盖 公 起 自 褊 裨 奮 不 頋 身 以 徇 國 家 之 急 勇 以 殺 賊 惠 以 活 民 使 全 嶺 甦 息 遂 得 建 旄 秉 鉞 略 苞 山 河 至 乃 聖 天 子 聞 其 名 姓 俾 作 百 夫 之 將 此 古 今 之 所 未 有 是 宜 刻 之 金 石 傳 之 無 窮 並 以 著 國 家 之 耿 光 也 銘 曰 在 宣 廟 世 島 夷 搆 兵 銛 牙 利 爪 血 我 生 - 26 -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 장군 靈 公 在 褊 裨 未 甚 知 名 爰 告 主 將 可 破 之 策 遂 任 以 事 遂 奮 其 力 見 賊 愈 多 賊 愈 死 咋 主 將 蹉 跌 虎 口 之 委 躍 馬 奔 之 萬 刃 披 靡 奪 之 中 堅 旋 若 電 馳 漢 之 飛 將 名 豈 獨 專 子 龍 昨 戰 其 膽 可 見 不 寧 其 勇 義 孰 與 先 東 蹂 西 踏 凶 醜 戢 乍 卹 焉 周 餘 啄 息 林 野 摩 手 附 瘡 剖 鎖 哺 餓 稚 耋 聚 門 曰 公 生 我 維 時 天 將 文 武 洋 洋 爭 遺 標 牌 有 爛 其 光 詞 人 有 贈 穆 如 之 章 帝 聞 其 名 曰 予 將 梲 戰 敗 而 死 餘 卒 七 百 慕 義 願 屬 汝 其 將 之 綸 音 自 天 獠 漢 愕 眙 咸 曰 天 子 萬 里 明 見 皇 鑒 如 斯 矧 我 主 眷 戟 纛 弓 鉞 旌 卩 有 絢 皇 威 旣 仗 勢 如 陰 建 難 去 國 平 功 賞 斯 論 將 其 帶 礪 與 國 永 存 公 常 退 坐 大 樹 之 根 卒 乃 稽 馘 序 之 從 勳 推 榮 燀 爀 于 考 祖 曾 匪 公 忠 勇 孰 其 承 膺 冢 宜 象 山 以 顯 其 能 今 雖 四 尺 永 世 不 崩 6) 정기룡 장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이러한 관점에서 정리한 업적으로는 엄기표, 임진왜 란의 맹호, 정기룡 장군 실기, 장문사, 1966 등을 들 수 있다. 7) 선조실록 44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 萬 曆 ) 21년) 11월 5일(을묘) 기사 晋 曰 鄭 起 龍 接 戰 時 下 馬 斬 賊 旋 卽 上 馬 此 事 甚 難 趙 儆 幾 爲 賊 所 殺 賴 起 龍 得 免 上 曰 古 者 或 拔 用 於 行 伍 之 中 如 起 龍 者 不 當 置 於 判 官 成 龍 曰 起 龍 年 少 有 才 略 且 長 於 牧 民 接 待 天 將 極 盡 其 誠 至 親 自 刈 草 尙 州 人 皆 曰 判 官 可 陞 牧 使 而 判 官 不 必 出 也 如 此 之 人 今 所 罕 見 8) 선조실록 54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 萬 曆 ) 22년) 8월 21일(병인) 기사 上 曰 必 得 將 然 後 可 爲 而 何 無 將 帥 耶 百 戰 之 後 必 有 將 帥 雖 無 武 將 儒 將 亦 不 可 得 耶 成 龍 曰 儒 將 尤 不 可 得 矣 上 曰 我 國 之 人 凡 事 無 着 實 處 矣 成 龍 曰 尙 州 牧 使 鄭 起 龍 能 得 人 心 且 能 力 戰 今 宜 陞 堂 上 爲 討 捕 使 賊 若 再 動 把 截 尙 州 洛 東 江 或 退 守 兎 機 倭 賊 未 動 之 前 緝 捕 道 內 土 賊 似 爲 便 益 矣 9) 선조실록 54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 萬 曆 ) 22년) 8월 22일(정묘) 기사 備 邊 司 啓 曰 慶 尙 道 中 央 自 密 陽 以 北 蕩 然 空 虛 無 復 譏 察 之 處 土 賊 興 行 人 跡 不 通 更 無 討 捕 之 人 尙 州 牧 使 鄭 起 龍 年 少 有 武 才 自 前 多 有 軍 功 且 善 於 居 官 得 吏 民 心 請 鄭 起 龍 陞 堂 上 討 捕 使 稱 號 平 時 則 討 捕 土 賊 有 變 則 卽 以 此 軍 把 截 直 路 答 曰 依 啓 10) 선조실록 103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 萬 曆 ) 26년) 8월 15일(무진) 기사 提 督 曰 吾 亦 聞 之 天 兵 非 李 舜 臣 則 小 捷 亦 難 云 國 王 以 朝 鮮 諸 將 中 誰 爲 良 將 俺 則 以 李 舜 臣 鄭 起 龍 韓 明 璉 權 慄 等 爲 最 頃 日 言 于 軍 門 軍 門 分 送 賞 物 以 勸 其 心 云 上 呈 禮 單 不 受 上 辭 出 11) 선조실록 161권, 36년(1603 계묘 / 명 만력( 萬 曆 ) 31년) 4월 28일(갑인) 기사 功 臣 都 監 堂 上 李 恒 福 李 好 閔 黃 璡 洪 可 臣 朴 名 資 啓 曰 前 後 征 倭 有 勞 人 擬 議 取 稟 者 李 元 翼 李 舜 臣 權 慄 元 均 權 應 銖 金 時 敏 李 廷 馣 郭 再 祐 李 億 祺 權 俊 李 純 信 李 雲 龍 禹 致 績 裵 興 立 朴 晋 高 彦 伯 金 應 瑞 李 光 岳 趙 儆 鄭 起 龍 韓 明 璉 安 衛 李 守 一 金 太 虛 全 應 緘 李 時 言 二 十 六 人 12) 선조실록 172권, 37년(1604 갑진 / 명 만력( 萬 曆 ) 32년) 3월 29일(기묘) 기사 金 海 府 使 鄭 起 龍 修 整 武 備 撫 恤 殘 民 氷 蘗 自 將 甘 處 酸 苦 13) 영조실록 119권, 48년(1772 임진 / 청 건륭( 乾 隆 ) 37년) 12월 14일(갑술) 기사 又 請 壬 辰 義 兵 將 鄭 起 龍 賜 謚 上 從 之 蓋 起 龍 壬 辰 多 有 戰 功 其 時 天 朝 聞 其 名 制 命 爲 摠 兵 官 也 14) 명나라 유격장( 遊 擊 將 ) 모국기( 茅 國 器 )는 조선의 육로총병( 陸 路 總 兵 ) 정기룡과 수로총병 ( 水 路 總 兵 ) 이운룡( 李 雲 龍 )은 훌륭한 장수로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서 선두에 나아 가 싸우는 것은 두 사람이 제일이었다고 찬양하고 있다. 15) 광해군일기 175권, 14년(1622 임술 / 명 천계( 天 啓 ) 2년) 3월 7일(계묘) 기사 壬 戌 三 月 初 七 日 癸 卯 統 制 使 鄭 起 龍 卒 死 于 任 所 傳 曰 又 失 良 將 極 爲 驚 惻 以 舟 師 諳 鍊 人 急 急 擇 送 ( 又 命 ) 令 該 曹 該 道 棺 槨 賜 給 一 路 護 送 ( 起 龍 先 朝 宿 將 累 著 戰 功 至 是 以 交 結 宮 妾 賄 賂 善 事 特 蒙 眷 遇 在 鎭 死 ) 起 龍 驍 將 也 壬 辰 之 亂 力 戰 有 功 至 是 結 托 內 間 私 獻 絡 繹 至 作 螺 鈿 八 貼 大 屛 以 進 之 死 而 有 遺 罪 焉 16) 이하의 논의는 대체로 다음의 논저를 참고하였다. 이동근, 조선후기 전( 傳 ) 문학 연구, 태학사, 1991. 17) 홍량호, 해동명장전, 이계집( 耳 溪 集 ) 起 龍 膽 勇 絶 人 日 光 如 炬 跳 蕩 賊 陣 若 履 平 地 賊 束 銃 齊 放 而 從 不 中 方 酣 戰 飢 渴 則 剖 倭 抽 肝 大 嚼 而 出 勇 氣 彌 厲 所 騎 神 馬 能 超 地 大 壕 騰 其 絶 石 登 危 岸 如 鷹 鸇 - 27 -

정기룡 장군의 인물과 활약상 18) 홍량호, 해동명장전, 이계집( 耳 溪 集 ) 嘗 從 八 騎 宿 居 昌 客 舍 夜 半 賊 大 至 圍 抱 衆 騎 驚 恐 無 人 色 起 龍 安 坐 不 動 天 明 乃 率 騎 躍 馬 越 壇 蕩 決 重 圍 19) 오세길, 한국 장군설화 연구, 동아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8. 20) 윤정훈, 정기룡 전설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4. 21) 이하의 논의는 대체로 다음의 논저를 참고로 하였다. 이병찬, 동야휘집 연구, 보고사, 2005. 김동석, 동패낙송 연구, 성균관대 석사논문, 1991. 김동욱 역, 국역 동패낙송, 아세아문화사, 1996. 22) 한국구비문학대계, 7-8, 531쪽. 정기룡 장군의 임란 전투 일화, 정신문화연구원, 1988. 정기룡은 원래 진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비범하여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할 적에 항상 장수노릇을 하였다. 하루는 산에서 놀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 바위 밑으로 피하게 되었 는데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옷을 벗 어던져 호랑이가 무는 옷의 임자가 먹히기로 약속을 하고 모두들 옷을 벗어던지자, 호 랑이가 정기룡의 옷을 물었다. 정기룡은 호환을 만날 팔자라고 하며 나가서 호랑이와 싸우는데, 그때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며 바위가 무너져 굴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 죽고 호랑이마저 사라져 정기룡만 살아났다. 23) 소재영 장경남 공편, 東 野 彙 集 ( 임진왜란 사료총서 8권 문학), 국립진주박물관, 2000. 24) 한국구비문학대계, 7-8, 534쪽. 정기룡 장군과 권씨 부인, 정신문화연구원, 1988. 정기룡은 무관으로 상관의 부탁을 받고 무관인 금씨 집으로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그 집에는 사나운 말이 있었는데, 얼마나 사나운지 무관인 금씨도 타지 못하고 그냥 매어 놓고 있었다. 정기룡이 편지를 전하러 그 집에 갔다가 말을 보고, 그 말을 길들이자 말 이 온순해졌다. 이로 정기룡이 그 집 사위가 되어 말을 가지게 되었다. 25) 소재영 장경남 공편, 東 野 彙 集 ( 임진왜란 사료총서 8권 문학), 국립진주박물관, 2000. 外 史 氏 曰 天 生 二 三 豪 俊 之 爲 時 出 也 必 竝 生 神 物 以 爲 其 用 龍 馬 之 現 宸 夢 而 錫 嘉 名 已 非 偶 然 而 竟 得 神 駿 以 至 馳 突 勍 敵 之 中 建 嵬 勳 而 垂 大 名 皆 龍 馬 之 效 也 其 不 奇 且 異 哉 又 其 婦 之 智 識 世 所 罕 有 可 謂 是 夫 是 妻 豈 謝 希 孟 所 云 光 岳 氣 分 磊 落 英 偉 不 獨 鍾 於 男 子 而 亦 鍾 於 婦 人 者 耶 26) 한국구비문학대계, 8-3, 209쪽. 매헌 선생의 효행, 정신문화연구원, 1988. - 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