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제 묘 출토 사초 사진 정태제 묘 출토 사초 상권 정태제 묘 출토 사초 상권 45
정태제 묘 출토 사초 하권(표지) 정태제 묘 출토 사초 하권 46
2 중기( 重 記 ) 중기( 重 記 )란 호조에서 각 관청의 회계를 감독하거나 경외( 京 外 )의 각 관청이 보유하고 있 는 국가 재산의 누수를 막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작성하도록 규정한 회계장부나 물품조사서 및 해유( 解 由 할 때 작성하는 이관( 移 管 ) 물품명세서이다. 정태제( 鄭 泰 齊 ) 묘 출토유물 중의 이 중기 는 1644년(인조 22, 갑신) 정월 모일자로 작성된 강원도 홍천현( 洪 川 縣 )의 비품 출납 중기( 備 品 出 納 重 記 )로서, 보존상태는 양호한 형태이다. 이 중기에서 특기할 점은 하부 분류로 질( 秩 )이라는 단위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질이란 동 일 또는 동종의 기능이나 행위 또는 물품을 낱낱이 한 곳에 묶어서 표현하는 말로, 기록 및 회계의 구분 단위인 계정( 計 定 )을 뜻하는 회계 특수용어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이와 같이 질을 단위로 한 것만은 아니다.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임의의 분류 방식을 쓰기도 하였음. 물품의 비치를 표시하는 소재 위치나 소장 내력을 표시하기 위하여 긴 선을 이어 잇대어 범 주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이 중기는 홍천 관아의 비품 출납을 명기한 것으로, 창곡질( 倉 穀 秩 ), 사관거봉상유고영치 부질( 使 關 據 捧 上 留 庫 營 置 簿 秩 ), 군기잡물질( 軍 器 雜 物 秩 ), 중영진래상( 中 營 陣 來 上 ), 경진월 과질( 庚 辰 月 課 秩 ), 회불부질( 會 不 付 秩 ), 전등조비질( 前 等 措 備 秩 ), 등내조비질( 等 內 措 備 秩 ), 갑신월과질( 甲 申 月 課 秩 ), 공방색잡물질( 工 房 色 雜 物 秩 ), 전등조비질( 前 等 措 備 秩 ), 역적김개 가잡물호조치부( 逆 賊 金 介 家 雜 物 戶 曹 置 簿 ), 등내조비질( 等 內 措 備 秩 ), 공색( 貢 色 ), 예방색 ( 禮 房 色 ), 관청( 官 廳 ), 천고류( 天 庫 留 ), 지고류( 地 庫 留 ), 누상고류( 樓 上 庫 留 ), 장고( 醬 庫 ), 창곡미봉질( 倉 穀 未 捧 秩 ), 관청미수질( 官 廳 未 收 秩 ), 차비전미( 差 備 田 米 ) 등으로 분류하여 각 종 창곡의 수입과 지출, 이관과 비품의 재고와 유실, 파손 경위 등 전곡과 무기류, 재물류 등에 대한 관청 재고와 흠결, 차액 등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가 어떻게 하여 정태제의 일괄자료 중에 들어가 전해지게 되었는가는 분명하지 않 다. 그러나 그의 연보에 따르면 중기가 작성된 1644년(갑신) 정월 경에는 정태제가 우부승 지를 역임하고 있었고, 같은 해 5월에는 동부승지를 역하였는데, 이와 관련성이 있었던 것으 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의 실록을 보면, 도승지는 6승지의 장으로서 이조뿐 아니라 병조 형 조 등 다른 조의 일을 맡아본 기록이 있고, 동부승지도 형조뿐 아니라 호조 등 여러 조의 일 을 자문하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승지는 왕의 근시로서 왕명 출납을 맡고 있었던 중 요한 관서였기 때문에 담당 조처( 曹 處 )의 자문 이외에도 겸무가 많았는데, 정태제가 승지로 있으면서 지방 관아의 재무현황과 관련하여 보고 받은 문서일 것으로 추측된다. 47
정태제 묘 출토 중기 사진 정태제 묘 출토 중기 표지 정태제 묘 출토 중기 48
정태제 묘 출토 중기 표지 정태제 묘 출토 중기 표지 49
3 역일 ❶ 계미갑신을유역일( 癸 未 甲 申 乙 酉 曆 日 ) 계미년(1643), 갑신년(1644), 을유년(1645) 등 3년간의 대통력 묶음이다. 대통력의 대체 적인 순서는 권두서명, 12달의 대소, 24기의 입기시각, 가취주당도( 嫁 娶 周 堂 圖 ), 참여 관상 관원, 연신방위지도( 年 神 方 位 之 圖 )에 이어 일력이 시작된다. 일력은 날짜의 윗간에는 달의 삭망( 上 弦, 下 弦 ), 아랫간에는 그 날의 의( 宜 ), 불의( 不 宜 )가 있다. 계미갑신을유역일 은 오침의 흔적은 남아 있으나 장정할 때의 끈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른 해의 일력으로 보이는 한 장이 마지막 장에 붙어있음. 현전하는 조선 양반가문들의 역서( 曆 書 )들을 보면, 여러 해의 역서를 묶어 일기 등을 적는 등 수첩같이 사용하였는데 정태제 소 장이었던 이 역서도 그렇게 사용되었음. 더욱이 3년과 2년간의 역서를 묶어 癸 未 甲 申 乙 酉 曆 日, 丙 丁 曆 日 이라고 제첨에 적어 표지에 붙여 놓았다. 대통력은 관상감 서운관에서 철활자인 인력자( 印 曆 字, 관상감 활자로도 일컬음)로 간행하였 는데 이 책도 동일하다. 현전하는 대통력 중에서 유성룡 종가 문적( 柳 成 龍 宗 家 文 籍 ) 중 의 갑오년(1594)대통력 만 목판본이다. 5년간의 대통력은 형식이 동일하나 현전하는 상태 가 차이가 있고, 또 서미( 書 眉 )와 여백에 소장자의 묵서도 있다. 계미년(1643) 대통력 의 간행 참여자는 절충장군 이장운( 李 長 雲 ) 등 5인이다. 가취주당도, 참여 관상관원 등(제 1장), 연신방위지도(제 2장)에 이어 제 3장부터 일력이 시작된다. 서 미에는 명심해야할 도( 道 ) 에 대한 구절( 句 節 ) 등, 하단이나 여백에는 그 날의 일기( 日 氣 ) 나 자신에 관련된 일들을 적어 놓았다. 갑신년(1644) 대통력 의 간행 참여자는 절충장군 윤소( 尹 熽 ) 등 5인임. 계미년 일력과 거 의 동일하게 남아있으며, 서미에는 지역명 아래 그 지역의 특산물과 수량에 대해 적어 놓았 다. 을유년(1645) 대통력 의 간행 참여자는 절충장군 이필( 李 泌 ) 등 5인이다. 계미년 일력과 거의 동일하게 남아있다. 서미에는 시문들을 적어 놓았고, 일력 속에는 보음사화탕( 補 陰 瀉 火 湯 ), 천금강화탕( 千 金 降 火 湯 )의 처방을 위한 약재와 수량을 적은 부전지( 附 箋 紙 )와 화담 ( 火 痰 ), 풍담( 風 痰 ), 습담( 濕 痰 )의 처방을 위한 약재를 적은 부전 등이 붙어 있음. 이 처방 법은 동의보감에 수록된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므로 연구할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 다. 12월이 끝난 뒤에 있는 여분의 장(6월 1-12일의 반엽분량의 일력)은 다른 책력의 것 이다. ❷ 병정역일( 丙 丁 曆 日 ) 병술년(1646), 정해년(1647) 등 2년간의 대통력 묶음이다. 병정역일 중의 병술년대통력 은 일력만 남아있고, 정해년대통력 은 연신방위지도( 年 神 方 位 之 圖 )가 결락되어 있다. 두 책 모두 원래 5침으로 장정되었던 끈은 없다. 50
처음 丙 丁 曆 日 이라고 쓴 제첨이 붙은 얇은 표지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음.(발견이후 훈증 및 보관과정에서 결락되었다고 하며, 이전의 사진을 통해 이 표지는 확인할 수 있음) 두 해 의 대통력 역시 형식이 동일하나 현전하는 상태가 차이가 있고, 또 서미( 書 眉 )와 여백에 소 장자의 묵서도 있다. 일력( 日 曆 )만 남아있는 병술년(1646) 대통력 은 여백이나 하단에 일기( 日 氣 )와 개인적인 일상사들을 적어 놓았다. 맨 뒷장에 가취주당도과 절충장군 윤소( 尹 熽 ) 등 5인의 간행 참여 자 명단이 남아있는 정해년(1647) 대통력 의 서미에는 인명과 물품 수량을, 여백이나 하단 에는 개인적인 일상사들을 적어 놓았다. 계미갑신을유역일, 병정역일 등 2책의 대통력은 해당연도의 대통력으로는 유일하며, 1654년에 시헌력으로 교체되기 수년 전의 대통력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또 일력에 적어 놓은 정태제의 일상사를 통해 1643-1647년 사이의 개인사를 살필 수 있고, 나아가 당시 양반들의 생활상과 사회사도 엿볼 수 있음. 부가적인 가치는 기운을 회복하기 위한 처방법 등이 기록된 부전지이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의 한방치료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음. 그러므로 함께 발굴된 사초, 문서류와 함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51
정태제 묘 출토 책력(병정역일) 사진 정태제 묘 출토 책력(병정역일) 정태제 묘 출토 책력(병정역일) 52
책력(계미갑신을유역일) 사진 정태제 묘 출토 책력(계미갑신을유역일) 표지 정태제 묘 출토 책력(계미갑신을유역일) 53
정태제 묘 출토 책력(계미갑신을유역일) 정태제 묘 출토 책력(계미갑신을유역일) 54
3 한글문서류 12건 - 정태제( 鄭 泰 齊, 1612~1669)의 묘에서 출토된 한글문서류는 치부책( 置 簿 冊 ) 2책, 한 글 간찰 2통, 기타 한글 문서 8종으로 이루어짐 ❶ 치부책 2책(1659~1664년 경) - 치부책 1 : 앞, 뒤 표지에 한문으로 시문( 詩 文 ) 등을 연습한 종이를 재활용하여 묶 은 책(19장)으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쳔 짐[ 卜 ] 공션( 貢 膳 ) 티부( 置 簿 )>: 마름이었던 쳔 (비( 婢 ) 쳔?)가 정태제 소유 노비들의 소작료(짐= 卜 )와 노비 신공( 身 貢 ) 및 선물( 膳 物 )을 기록한 치부. 경 (1660), 신튝(1661), 임인(1662), 계묘(1663), 갑진(1664) 등의 간 지 사용. <필것[ 布 ] 티부( 置 簿 )>: 금전으로 사용하던 베의 종류와 수량을 기록한 치부. 신 튝(1661) 등의 간지 사용. <기타 잡치부> - 치부책 2 : 책력( 冊 曆 ) 등의 뒷면을 재활용하여 묶은 책(18장)으로 표제에 <무명 [ 木 棉 ] 기리 준 티부> 즉, 기리( 奴 名?) 가 무명을 입출입한 치부로 쓰 여 있다. 긔 (1659), 경 (1660), 신튝(1661), 임인(1662), 계묘 (1663) 등 간지가 보이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긔 츈미슈티부( 己 亥 春 未 收 置 簿 ) 가포( 價 布 ) 준 수( 數 ): 기해년(1659) 봄 미수금 치부, 가포( 身 役 대신 목면 등을 대신 내는 포목)로 빚을 내준 숫자 긔 츈 기리 준 티부 가포 신튝윤칠월티부( 辛 丑 閏 七 月 置 簿 ) 바틸 수( 數 ) 가포( 價 布 ) 기타 농작( 農 作 ) 관련 치부 기록 ❷ 한글 간찰 2통(1647년 1통, 미상 1통) - 한글간찰 1 : 뒷면 표제에 실 젼( 室 內 前 ) 샹장( 上 狀 ) 으로 되어 있고, 본문 말미 에 뎡 팔월초이일 家 長 (수결) 으로 쓰여진 점으로 보아 정태제가 1647년에 부인에게 보낸 편지임이 분명하다. 드물게 기년이 분명한 양반 가문의 한글 편지라는 의의를 지닌다. 대체로 유배지를 찾아오 는 아내에게 따뜻하게 하고 올 것에 대한 당부, 종들에 대한 야속한 감정, 곧 다시 서울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마음과 아내에게 굳게 마음먹을 것을 독려하는 내용이다. 이는 귀향간 지 2년째 되는 여름 에 정태제가 아내에게 보낸 안부 편지에 해당된다. - 한글간찰 2 : 뒷면 표제에 구성녀우소 아의 어마님젼 답샹장 으로 되어 있으나, 말 미에 쓴 때에 대한 기록이 없어 언제 쓴 편지인 지가 분명치 않으나 내용상 역시 정태제가 귀향지 구성( 龜 城 )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로 55
보인다. 대체로 귀향지에서 고향의 가족에 대한 여러 가지 근심, 걱정 등을 토로한 내용이다. ❸ 기타 한글 문서 8점(1650년 경) - 病 錄 : 의료 진단을 위하여 한문과 한글로 자신의 병증을 기록한 것에 대하여 의원이 이필( 異 筆 ) 초서로 처방을 내린 문서. 1장 - 경인구월열사읃날 냥생원집/녕월집 : 1650년 9월 13일에 기록한 양생원 집/영월 집 등의 소출 관련 기록 2장 - 냥생원집 : 노비안 4장 - 기타 : 내용 미상 1장 - 이상에서 조사된 한글 문서류는 17세기(1650~1664년 경) 당시의 재화와 물목에 대 한 가격을 알 수 있으므로 경제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한글 물록에 대한 다양한 표기들을 통하여 17세기 국어사 특히, 어휘사 방면의 가치를 지니며, 17세기 자료 중 에 드물게 양반 남성이 아내에게 직접 쓴 편지로 국어생활사적 측면에서도 연구될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또한 한문과 한글을 병행해서 쓴 病 錄 문서도 당시 국어생활 사의 한 측면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함. 따라서 함께 발굴된 사초, 문 서류와 함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56
정태제묘 출토 전적류 일괄 (한글문서) 목록 연번 구분 수량 및 크기 사 진 1 치부책 19.2cm 18.8cm 2 치부책 <무명[ 木 棉 ] 기리 준 티부> 19.2cm 24.8cm 3 한글간찰 (정태제가 1647년에 부인에게 보낸 편지) 36cm 26.5cm 4 한글간찰 (정태제가 귀향지 구성( 龜 城 )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48cm 26.4cm 5 기타 ( 病 錄 ) 51.5cm 24cm 57
연번 구분 수량 및 크기 사 진 6 기타 (소출관련 기록) 47.7cm 27.2cm 7 기타 (소출관련 기록) 41.3cm 27.4cm 8 기타(노비안) 37.4cm 18.3cm 9 기타(노비안) 25.7cm 21.3cm 10 기타(노비안) 47cm 21.3cm 58
연번 구분 수량 및 크기 사 진 11 기타(노비안) 47cm 21.3cm 12 기타(내용 미상) 44.5cm 19.5cm 4 한문문서류 22건 - [1] 문서 1 試 券 : 金 花 揷 頭 賦 - 次 下 를 받은 시험지. 누구의 것인지는 불분명함. - [2] 문서 2 和 劑 : 旣 濟 淸 新 散 - 처방전으로 甲 戌 (1694)년 3월 11일에 작성된 것. - [3] 문서 3 和 劑 : 加 味 八 物 湯 - 처방전. - [4] 문서 4 寫 本 : 松 月 軒 記 - 송월헌은 南 尙 文 (1520~1602)의 亭 子 이다. 이 기문은 李 山 海 (1539-1609)가 지은 것으로 << 鵝 溪 遺 稿 >>에 수록되어 있다. 문집본과 비교 하면 끝부분이 조금 손상되었으며, 따라서 일부 내용이 누락되어있다. - [5] 문서 5 簡 札 : 정태제의 아버지 鄭 良 佑 (1574~1647)가 그의 동생인 鄭 良 弼 (1593~1661)에 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정양필은 충청도관찰사로 재직 중이었으므로 표제는 忠 淸 監 營 令 前 拜 狀 으로 되어있다. 1642년 8월 10일에 작성된 이 편지의 주된 내용은 그들 59
의 증조부인 鄭 大 年 의 신도비의 건립, 석물의 조성, 奉 祀 등에 대한 것이다. 정대년 (1503~1578)의 신도비는 1640년에 건립되었으며, 현재 여주시 점동면 원부리에 남 아있다. - [6] 문서 6 簡 札 : 이 역시 정태제의 아버지 鄭 良 佑 가 1642년 11월 5일에 동생인 鄭 良 弼 에게 보 낸 편지이다. 주된 내용은 宋 直 七 의 부음과 관련 사항을 알리는 것이다. - [7] 문서 7 簡 札 : 이 또한 鄭 良 佑 가 1642년 11월 13일에 동생인 鄭 良 弼 에게 보낸 편지이다. 주 된 내용은 鄭 大 年 의 諡 號 를 정해짐에 따라 시호를 받는 행사준비를 상의한 것이다. - [8] 문서 8 詩 卷 : 시의 제목은 옥당에 누워 곽희의 그림을 보다.( 玉 堂 臥 對 郭 凞 畵 ) 이다. 七 言 長 篇 으로 아마도 정태제가 홍문관에 재직 시에 곽희의 그림을 보고 지은 것으로 보이나 분명하지 않다. 곽희는 송나라 때 화가로서 산수화에 능하였다. - [9] 문서 9 簡 札 : 이 역시 鄭 良 佑 가 1640년 11월 28일에 동생인 鄭 良 弼 에게 보낸 편지이다. 주 된 내용은 동생이 보내준 문어, 전복, 종이 등을 잘 받았다고 전하며, 자신의 병을 치 료하기 위하여 << 東 醫 寶 鑑 >>을 한질 구해달라는 요청이다. - [10] 문서 10 簡 札 : 이 편지는 아버지 鄭 良 佑 가 아들인 鄭 泰 濟 에게 보낸 편지이다. 1647년 8월 28 일에 작성된 것으로 寧 邊 에 유배 중인 아들에 대한 안부 편지이다. - [11] 문서 11 簡 札 : 이 편지 역시 아버지 鄭 良 佑 가 영변에 유배중인 鄭 泰 濟 에게 보낸 편지이다. 연 도표기는 되어 있지 않으나 내용으로 보아 1647년에 작성된 것이며 그 날짜는 4월 7 일이다. 내용은 유배중인 아들을 보기위해 자신의 부인만 보내고 자신은 찾아가지 못 한다는 것과 변란이 있을지 모르니 준비를 하라는 당부이다. - [12] 문서 12 簡 札 : 이 편지도 鄭 良 佑 가 유배중인 鄭 泰 濟 에게 보낸 편지이다. 시기는 1647년 10 월 6일 작성된 것이다. 내용은 정태제의 어머니가 다행히 잘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유배 중 건강에 유의하기를 당부하고 있다. - [13] 문서 13 物 目 : 送 京 物 件 서울로 보내는 물건의 목록이다. 대략 물건을 보면 분홍비단, 남색비 60
단, 초록화문명주, 초록대단저고리, 백모시, 모시저고리, 은비녀, 은수저, 목화, 포목 등등이다. - [14] 문서 14 簡 札 : 이 편지도 鄭 良 佑 가 유배중인 鄭 泰 齊 에게 보낸 편지이다. 1647년 11월 1일에 작성된 이 편지는 배소에서 추위에 건강이 상한 것에 대한 걱정과 안부를 묻는 내용 이다. - [15] 문서 15 文 記 : 貸 金 과 그 利 息 에 대한 내용이나, 그 문서 작성의 경위는 분명하지 않다. - [16] 문서 16 未 詳 : 四 柱 를 써놓은 듯 하나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 [17] 문서 17 簡 札 : 이 역시 鄭 良 佑 가 유배중인 鄭 泰 濟 에게 보낸 편지이다. 1647년 6월 그믐에 작 성된 것으로 정태제의 편지를 받고 보낸 답서이다. 정태제의 질병을 치료하도록 좋은 약물을 보낸다는 것과 복용 및 치유에 대한 당부를 적고 있다. - [18] 문서 18 和 劑 : 五 淋 散 - 처방전, 그 내용으로 보아 (문서 30)에 딸린 문건으로 보인다. 약물 의 종류 및 분량이 기재되어 있고, 마지막에는 먹는 방법과 그리고 이 병이 간단한 것 이 아니니 조심하라는 당부의 말이 있다. - [19] 문서 19 簡 札 : 鄭 良 佑 가 유배중인 鄭 泰 齊 에게 보낸 편지이다. 1647년 5월 16일에 작성된 것 으로서, 조정에서 국청이 있는 가운데 가벼운 죄수는 석방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아들 이 사면되어 돌아오기를 기대를 하는 내용이다. - [20] 문서 20 簡 札 : 역시 鄭 良 佑 가 유배중인 鄭 泰 齊 에게 보낸 편지이다. 1647년 11월 2일에 작성 된 이 편지는 위 <문서25>의 바로 다음날에 보낸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이날 배소 에서 아들의 편지가 도착했으므로 반가움에 또 보낸 것이다. 건강을 유의하라는 당부 와 함께 사면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 [21] 문서 21 簡 札 : 이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그 내용은 婢 僕 의 처리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61
- [22] 문서 22 簡 札 : 역시 鄭 良 佑 가 유배중인 鄭 泰 齊 에게 보낸 편지이다. 1647년 10월 22일에 작 성된 것이다. 겨울철이 시작되니 건강에 유의하라는 당부와 자식을 유배 보낸 아버지 의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본 문건의 대부분은 정태제의 아버지 정양우가 배소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모두 정 태제가 유배 중이었던 1647년에 작성된 것이다. 아마도 정태제가 생전에 간직했던 것으로 서, 그가 죽자 유족들에 의하여 부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부자간에 주 고받은 것으로서 자식에 대한 걱정과 안부를 묻는 것이다. 그 밖에 송월헌기 는 내용이 정 태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데, 아마도 부친의 친필이기 때문에 정태제가 소장했고, 따라서 함께 부장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여타의 문건도 그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으니 대략 이 와 같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한문문서는 특별한 내용이나 가치를 가진 것은 없으므 로 문화재적 가치는 부족하나 유물 전체를 일괄한다면 서울시 유형문화재 지정이 가능하다 고 판단된다. 62
정태제묘 출토 전적 일괄 (한문문서) 목록 연번 구분 수량 및 크기 사진 1 試 券 : 金 花 揷 頭 賦 66cm 78.3cm 2 和 劑 : 旣 濟 淸 新 散 8.4cm 18.3cm 3 和 劑 : 加 味 八 物 湯 32.3cm 11.8cm 4 寫 本 : 松 月 軒 記 57.9cm 24.4cm 5 簡 札 53.7cm 27cm 6 簡 札 39cm 24.4cm 63
연번 구분 수량 및 크기 사진 7 簡 札 39.7cm 25.2cm 8 詩 卷 31.5cm 25.3cm 9 簡 札 27.7cm 26.2cm 10 簡 札 23cm 21cm 11 簡 札 27cm 18cm 12 簡 札 30.7cm 21cm 64
연번 구분 수량 및 크기 사진 13 物 目 81cm 18.2cm 14 簡 札 36.3cm 21.6cm 15 文 記 19.5cm 13.5cm 16 未 詳 39.6cm 14.9cm 17 簡 札 26.5cm 18cm 18 和 劑 21cm 15cm 65
연번 구분 수량 및 크기 사진 19 簡 札 30.7cm 24.2cm 20 簡 札 30.8cm 21cm 21 簡 札 31.6cm 21.6cm 22 簡 札 31.8cm 21cm 미타사 아미타후불도 대웅전에 봉안된 이 불화는 1873년에 신중도 및 지장시왕도와 동시에 한 조로 조성된 상단 탱화로, 화기에 제작년대와 봉안장소, 발원내용은 없으나, 신중도를 보면 1873년 4월 삼각 산 미타사에서 함께 제작, 봉안되었으며 지장시왕도에는 시주자가 자신의 부모인 亡 者 의 극 락왕생을 원해 불화를 그려 모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미타후불도는 극락보전, 아미타전, 무량수전에 봉안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불화는 대웅 66
전에 후불도로 모셔져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불화는 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8대보살, 10 대제자, 사천왕, 금강역사 등이 배치된 아미타불의 법회모임(아미타극락회상도)을 표현하고 있음. 화면 중앙의 아미타삼존좌상(아미타불ㆍ관음보살ㆍ대세지보살)이 낮은 불단에 마련 된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이 주위로 6대보살, 10대제자, 금강역사 등이 본존을 에워싸고 있다. 특히 화면 하단에 배열된 사천왕은 평상에 앉은 모습이다. 이와 같이 폭이 넓은 액자형의 화면 크기나 낮은 불단의 연화대좌에 앉은 삼존좌상의 모습, 평상에 앉은 사천왕상의 등장은 경북 예천군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신중도, 지장보살도와 일습으로 상단탱화로 조성된 이 아미타후불도 중 평상에 앉은 사천왕 상의 등장은 경북 예천군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그 예 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데 큰 의미가 있으므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함이 타 당하다고 판단된다. 67
<미타사 아미타후불도> 사진 미타사 지장시왕도 이 불화는 미타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시왕도로, 시주자인 癸 酉 生 李 氏 부인이 아 버지 全 州 李 氏, 어머니 文 義 李 氏, 남편인 丁 丑 生 南 氏 의 極 樂 往 生 을 기원하며 발원한 것이 다. 화기에는 제작년대와 봉안장소가 적혀있지 않지만 1873년에 조성된 미타사 신중도와 동일한 중명비구( 布 和 堂 定 修 ) 및 별좌비구( 秀 山 堂 冨 潤 )가 緣 化 秩 로 참여하였으며 신중도와 양식, 화풍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신중도와 같은 해인 1873년 4월에 삼각산 미타사에서 함 께 제작,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은 향좌측부터 14.5cm, 36cm, 36.2cm, 35.8cm, 36cm, 35.5cm의 비단을 이어 만들었는데, 여러 군데에 찢어지고 박락된 부분이 보이는 등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화면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좌우에는 시왕을 비롯하여 判 官 과 使 者, 獄 卒, 天 女, 童 子, 馬 頭 虎 頭 獄 卒 등의 권속들이 배치되었고, 지장보살 아래에는 2명의 동자상이 표현되었다. 지장보살은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지니고 연화대좌 위에 편안한 모습 으로 앉아 있다. 68
69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화면 중앙 하단에 배치된 2명의 동자상으로, 이들은 인간의 선악을 대변하는 동자인 善 惡 童 子 로, 하얀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裸 形 의 상체에 치마를 두르고 휘날리는 천의로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조색으로 사용되었으며, 인물의 얼굴에는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밝은 느낌이 들며 지장보살의 신광은 금색으로 채색.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 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화기에 화승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신중도와 같이 慶 船 堂 應 釋 이 出 草 하고 龍 溪 堂 瑞 翊, 東 化 堂, 斗 欽, 萬 波 堂 頓 照, 奉 洽 등이 함께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장시왕도는 19세기에 서울 경기지역과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성행한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인 지장보 살 아래에 선악동자를 큼직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처럼 하얀꽃으로 머리를 장식 한 동자의 도상은 경기도 화승들에 의해 즐겨 그려졌던 형식이며 이 불화 역시 서울 경기지 역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섬세한 필선과 탄탄한 구성 등 경선당 응석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함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70
<미타사 지장시왕도> 사진 71
72
미타사 신중도 미타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신중도로, 유물의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며, 1873년 4월에 삼각산 미타사 신중도로 제작되었다. 布 和 定 修 를 증명으로 하여 慶 船 堂 應 釋 이 出 草 하고, 龍 溪 堂 瑞 翊, 東 化 堂, 斗 欽, 萬 波 堂 頓 照, 奉 洽 등이 함께 조성하였으며, 화면은 향좌측부터 34cm, 39.3cm, 39.5cm, 39cm, 44.5cm의 비단을 이어 제작하였다. 가로로 긴 화면은 2단으로 나뉘어져 상단에는 梵 天 과 帝 釋 天 및 天 部 衆, 하단에는 韋 駄 天 과 天 龍 八 部 가 배치되었고, 하단의 중앙부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창과 칼 등으로 무장한 天 部 八 部 衆 무리가 자리하고 있다. 전체화면은 많은 등장인물들로 꽉 차 보이지만 상단부 맨 위쪽으로 하늘 공간을 두고 구름 처리를 하여 공간감이 느껴지며, 인물들은 대부분 둥근 얼굴에 원만상이며 채색은 다홍 계 통의 적색과 녹색, 청색을 사용함으로써 차분한 느낌이다. 이 유물은 19세기 후반에 서울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대표적 화승인 慶 船 堂 應 釋 이 출초하였는데, 서울 경기지역에서는 19세기후반 ~ 20세기 초에 이 초본을 바탕으로 한 신중 도가 크게 유행하여 현재 여러 점의 작품이 남아 있다. 섬세한 필치와 원만한 인물형태, 안정적인 색채 등에서 19세기 말 서울 경기지역 신중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73
<미타사 신중도> 사진 74
미타사 칠성도 화면 중앙에 그려진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좌우 로 七 佛 과 七 元 星 君, 28 宿 의 크기를 달리하여, 그림으로서 위계를 지키고 있다. 화면 하단 화기 부분 일부에 박락이 엿보일 뿐 원형은 잘 유지되어 있다. 치성광여래는 머리에 뿔이 달린 소가 이끄는 수레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으며, 무릎 아 래 좌우로는 과일을 받쳐 든 동자가 몸은 본존을 향해 있으면서 얼굴은 정면을 향함. 본존 광배 주위를 에워싼 28수는 좌우로 대칭하여 14수씩 그려져 있으며, 그 옆으로는 정수리가 봉긋 솟은 太 上 老 君 과 左 右 弼 星 이 자리하고 있고 화면 상단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三 台 와 六 星 이 배치됨. 화면 하단 바깥쪽으로는 동자상 4위가 배치되어 있다. 이 칠성도는 강화 정수사 법당 칠성도(1878년), 서울 봉은사 북극보전 칠성도(1886년), 의 성 고운사 쌍수암 칠성도(1892년) 등과 동일한 형식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걸쳐 서 울 경기지역과 경상도지역에서 활동한 慶 船 堂 應 釋 을 위시하여 龍 溪 瑞 翊, 奉 侃, 現 照 가 참여 하여 조성되었음이 확인된다. 19~20세기 서울, 경기지역의 대표화승 경선당응석이 주도하여 조성된 불화로서 서울, 경 기, 경상도지역의 칠성도 형식을 선도하고 있으며,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서울시 유형문화재 로 지정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75
<미타사 칠성도> 사진 76
미타사 백의관음도 광무10년(1906)에 삼각산 미타사 향로전 불화로 조성된 백의관음도로서, 石 翁 喆 侑 가 단독 으로 조성하였다. 현재 액자상태로 장황되었으며, 화면 아래부분에 보채 및 수리의 흔적이 보인다. 가로로 긴 화면의 중앙에는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 위에 백의를 입은 관음보살이 파 도 위 연잎에 서서 오른손에 버들가지, 왼손에 끈에 묶인 정병을 들고 오른쪽을 향해 서 있 으며, 그 주위로 용왕과 천녀, 동자가 배치. 화면 좌우에는 대나무와 파초 등이 무성하게 배 치되었고, 상단에는 구름과 두 마리의 새가 그려져 있다. 관음보살은 머리는 높이 올려 묶은 후 머리에서부터 무릎 부근까지 흰 天 衣 를 뒤집어 쓰고 있으며, 몸에도 白 衣 를 걸쳤음. 백색의 천의 자락은 좌우로 넓게 휘날리고 있는데, 옷자락의 움직임이 다소 경직되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관음보살은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의 파도 위 붉은 연잎에 맨발로 서 있는데, 파도의 흰 포말은 매우 도식화되었음. 관음의 건너편 뭍에는 녹색의 두광을 지닌 龍 王 이 갑옷 위에 붉은 옷을 입고 어깨와 머리에 비늘모양의 견갑과 투 구 같은 것을 걸치고 상체를 구부린 채 관음을 향해 합장한 모습으로 서 있음. 이러한 모습 의 용왕은 중국 청대의 판화도상에서 차용한 것으로, 근대불화적인 요소를 잘 보여주고 있 다. 채색은 청색과 백색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흰색 위에 갈색으로 윤곽선을 칠하여 음영을 표 현하는 등 새로운 기법이 돋보인다. 이 불화는 조선말기의 화승으로 금강산에서 활동한 석옹 철유가 단독으로 제작하여였음, 철 유(1851~1917)는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18세 때(1868년) 함경남도 연변 釋 王 寺 에서 출가하였고, 건봉사의 화승 中 峰 慧 皓 를 스승으로 불화수업을 받았음. 그는 주로 금강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축연과 함께 金 剛 山 畵 門 으로 알려져 있음. 철유는 불화 뿐 아 니라 산수화에서도 이름이 있었으며 眞 彩 佛 畵 뿐 아니라 水 墨 淡 彩 畵 및 水 墨 達 磨 圖 를 잘 그렸다고 한다. 이 관음보살도는 바다 위 파도 위에 서있는 관음보살과 용왕 및 동자, 공양천녀 등을 그린 白 衣 觀 音 圖 로서, 분출하는 물줄기, 선재동자의 모습 등에서 전통적인 관음보살도의 도상과 다른 근대기 불화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 줌. 특히 관음을 향해 예배하는 용왕의 모습은 중국 청대의 판화에 등장하는 도상을 응용한 것으로, 중국 판화 및 서양화법을 수용했던 20세기 초 서울 경기지역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이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77
<미타사 백의관음도> 사진 78
미타사 감로도 대웅전에 봉안된 감로도는 금어인 고산 축연, 초암 세복에 의해 제작되어 1918년 7월 24일 미타사에 봉안되었다. 화면을 상ㆍ중ㆍ하단으로 구분하면 상단에는 칠여래 좌우로 관음보살, 인로왕보살ㆍ지장보 살이 있으며, 중단인 의식단이 강조되었고 하단의 아귀는 매우 작게 묘사되어있다. 또한 이 화면을 대각선( )으로 나눈다면 향 왼쪽은 불, 보살상의 내영장면과 재의식 광경이 주로 그려지고 향 오른쪽은 아귀를 중심으로 한 지옥과 세속장면이 나타나 있다. 정면향으로 늘어선 7불입상 등 각 형태는 도안화됨. 성반에는 번에 쓰여진 삼신불의 명칭이 돋보임. 한 옆에 차일을 친 장소에서 우란분재를 올리는 승려들의 모습 등 재의식장면이 부 각되어 있음. 즉 행사를 기록화처럼 묘사하기 위해서 전대보다 더 많은 인물과 장면들로 화 면을 채웠다. 전체적으로 갈색조이고 밝은 주홍색이 선명한 것은 질이 떨어지는 합성안료의 영향이다. 명 암법의 일종인 넓게 칠해진 독특한 요철법은 조선조 말( 末 ) 중국에서 서양화법이 전래된 당 시 화단의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유형은 19세기 서울ㆍ경기지역에서 성행하던 감로왕도의 도상을 계승한 것으로, 특히 서울지역인 청룡사(1868), 개운사(1883), 미타사(옥수동, 1887), 지장사(1893), 봉 원사(1905) 감로도와 비교할만 함.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로, 한 쌍의 아귀 규모가 줄 어든 것은 1918년 당시 감로도의 경향을 나타낸 것임. 망자를 극락으로 천도하기 위한 재의식( 齋 儀 式 )인 반승( 飯 僧 ) 등이 부각된 감로도는 조선 조에 대두된 불화로서 불전( 佛 殿 )의 下 壇 인 靈 壇 에 모셔짐. 화기에 의하면 당시 미타사 주 지인 승려 비구니 등에 의해 발원, 제작되었으며 당시 저명한 수화승인 고산 축연, 초암 세 복이 참가했음을 알 수 있음. 저명한 수화승인 고산 축연 등이 조성한 이 불화는 잘 짜여진 구성 및 세부 묘사 등이 정교 한 편이므로, 서울시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호함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