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회 사 歷 史 의 과학적 인식을 위한 첫걸음이 되기를 한 역사철학자는 歷 史 는 오늘의 관심과 시각에서 지나간 사실을 재구성하여 놓은 것 이라 고 했습니다. 지나간 사실은 불변입니다. 그러나 관심과 시각은 계속 바뀝니다. 그래서 역사는 살아있는 것, 진화하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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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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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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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민락초신문4호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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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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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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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韓 日 國 際 學 術 會 議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日 時 : 2009 年 9 月 18 日 ( 金 ) - 20 日 ( 日 ) 場 所 : 麗 水 The Ocean Resort 主 催 : 韓 日 文 化 交 流 基 金 東 北 亞 歷 史 財 團

개 회 사 歷 史 의 과학적 인식을 위한 첫걸음이 되기를 한 역사철학자는 歷 史 는 오늘의 관심과 시각에서 지나간 사실을 재구성하여 놓은 것 이라 고 했습니다. 지나간 사실은 불변입니다. 그러나 관심과 시각은 계속 바뀝니다. 그래서 역사는 살아있는 것, 진화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100년 전에 인식했던 임진왜란 이라는 역사는 그래 서 지금 다시 해석하는 임진왜란 과 같을 수 없습니다. 문학으로서의 역사는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작가의 관심에서 보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을 작가의 상상력을 보태서 선명하게 들어내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像 을 독자들에게 각인 시켜 줄 수 있고 독자는 그 像 을 간직하고 거기서 감동도 얻고 배움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알고 싶어 합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 건을 그 사건에 영향을 미친 모든 변수를 동원하여 객관적으로, 그리고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보 려 합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 데는 엄청난 많은 변수가 작용합니다. 관련된 사람들 의 사상, 생각, 지식, 그리고 전쟁이라면 당사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실태가 모두 관련되고 나아 가서 당시의 국제정치도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과학기술 수준도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한일문화교류기금은 동북아역사재단과 공동으로 오늘 임진왜란과 동아시아 세계의 변동 이 라는 주제로 의미 있는 학술회의를 엽니다. 한국과 일본, 특히 한국에서는 수천번 되돌아보았던 임진왜란을 왜 다시 논의하는가라고 의문을 제시하는 분도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다루는 사건 은 같아도 다루려는 방법은 다릅니다. 한일양국의 전문가들이 모여 임진왜란 을 과학으로 재 분석해보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간과해 왔던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라는 맥락 속에서 임진왜란을 재조명해보고 일한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무기체계를 검토해 봄으로써 임진 왜란 을 객관화해보려는 시도입니다.

오늘 회의의 제3부에서는 여기에 덧붙여 한일양국 국민들이 기억하는 임진왜란을 비교해 보 려합니다. 한일양국의 임진왜란 인식의 차는 한일간의 상호이해를 깊이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 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회의는 비록 하루 동안 진행되는 작은 규모의 회의이지만 그 의미는 크다고 생각합 니다. 이 회의에는 양국의 전문학자들이 모두 모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北 島 万 次 교수, 堀 新 교수, 久 芳 崇 교수, 米 谷 均 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으며 한국측에서는 孫 承 喆 교수 등 10명의 전문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좋은 토론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저희 한일문화교류기금은 한국 국민과 일본 국민간의 상호 이해를 높여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깊게 하는 일을 목적으로 설립한 기관입니다. 그동안 한일관계는 역사 인식의 차이에서 생긴 오 해로 항상 긴장 속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기금에서는 앞으로도 과거 역사를 객관화하 여 양국 국민들이 공동의 역사 인식을 가지고 좀 더 상대를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이런 회의를 계속해 나가려 합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임진왜란의 주전장의 하나였던 이 아름다운 여수에서 사적지도 둘러보 고 맑은 한국의 남해안 바다도 감상하시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9월 19일 (재)한일문화교류기금 이사장 李 相 禹

환 영 사 안녕하십니까? 한국 동북아역사재단의 사무총장을 맡고있는 신연성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6년 9월 설립 이후 보편적 역사인식 구축과 한 중 일 공동의 역사인식을 지향하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왔습니다. 여러 방면의 연구 및 지원사업을 통해 한 중 일 등 동 아시아 지역의 상호이해와 협력, 그리고 공동번영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대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은 2007년부터 매년 한 차례씩 한일문화교류기금과 공동으로 한 일 양국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 이라는 의미있는 주제에 대한 심도있는 논 의가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임진왜란 이라고 부르는 한 일 간의 7년 전쟁은 당시 조선과 일본은 물론, 중국과 동아시아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국제전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오늘 임진왜란과 동아 시아세계의 변동 에 관한 활발한 발표와 토론을 통해 새로운 논의와 알찬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 아시겠습니다만 학술회의가 열리고 있는 이곳 여수는 한국의 명장 李 舜 臣 장군의 본거지 全 羅 左 水 營 이 있던 곳입니다. 학술회의를 전후하여 여수와 순천 일대 현장답사도 병행하면서 생 생한 역사의 숨결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기조강연을 해주시는 기타지마 만지( 北 島 萬 次 ) 교수님, 그리고 호리 신( 堀 新 ), 쿠바 다카 시( 久 芳 崇 ), 요네다니 히토시( 米 谷 均 )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귀중한 발표를 해주시는 한명기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석학과 참가자 여러분께 감사 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금번 학술회의를 준비하시느라고 애쓰신 이상우 한일문화교류기금 이사장님과 김수웅 사무국장님, 강원대 손승철 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9월 19일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 愼 年 晟

學術大會 日程 9月 18日(金) 12 : 30 金浦空港(國內線 Lobby) 集合 일본팀과 합류 麗水向發 15 : 00 麗水 鎭南館, 船所 見學 19 : 00 晩餐 (韓日文化交流基金) 9月 19日(土) 開會 및 基調講演 (09:30 10:30) 開 會 辭 : 李 相 禹(韓日文化交流基金 理事長) 歡 迎 辭 : 愼 年 晟(東北亞歷史財團 事務總長) 基調講演 : 乱中日記 의 世界와 李舜臣 附 : 壬辰倭亂硏究의 回顧와 展望 (文書 報告) 진행 : 李 薰(東北亞歷史財團) 北島万次(日本 共立女大) 主題發表 進行 : 鄭熙鐥(順天 청암대) 第1部 : 第1部 : 壬辰倭亂과 東아시아 國際關係 (10:40 12:00) 1. 東아시아國際關係에서 본 壬辰倭亂 2. 東아시아國際關係에서 본 壬辰倭亂 韓明基(明知大) 閔德基(淸州大) 堀 新 (共立女大) 申東珪(翰林大) 中 食 第2部 : 朝 日軍이 使用한 武器(船舶)의 科學性 (13:30 14:50) 1. 朝鮮軍의 軍船과 武器의 科學的 檢討 2. 日本軍의 船舶과 武器의 科學的 檢討 朴晢晄 (戰爭紀念館) 久芳崇(日本 西南學院大學) 李敏雄(海士) 邊東明(全南大) 第3部 : 兩國民의 戰爭認識과 記憶 (15:00-16:20) 1. 豊臣秀吉의 日本國王 冊封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米谷 均(日本 中央大) 2.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孫承喆(江原大) 金文子(祥明大) 盧永九(國防大學院)

綜 合 討 論 : 李 啓 煌 ( 仁 荷 大 ) (16:40-18:20) 閔 德 基 ( 淸 州 大 ) 申 東 珪 ( 翰 林 大 ) 李 敏 雄 ( 海 軍 士 官 學 校 ) 邊 東 明 ( 全 南 大 ) 金 文 子 ( 祥 明 大 ) 盧 永 九 ( 國 防 大 ) 踏 査 : 19 : 00 晩 餐 ( 東 北 亞 歷 史 財 團 ) 18 日 午 後 : 麗 水 鎭 南 館, 船 所 ( 可 能 한 분만) 20 日 午 前 : 順 天 倭 城 址

목 차 개 회 사 開 會 辭 2 환 영 사 歡 迎 辭 5 學 術 大 會 日 程 7 기조강연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기타지마 만지( 北 島 万 次 ) 13 히데요시( 秀 吉 )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기타지마 만지( 北 島 万 次 ) 35 발표문 東 아시아 國 際 關 係 에서 본 壬 辰 倭 亂 韓 明 基 55 -전쟁 이후 조선을 둘러싼 明 淸 日 關 係 를 중심으로- <토론> 민덕기 66 동아시아 국제관계로 본 임진왜란 호리 신( 堀 新 ) 71 <토론> 신동규 89 조선군의 군선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朴 晢 晄 95 <토론> 이민웅 111 일본군의 선박과 무기의 과학적 검토 久 芳 崇 113 <토론> 변동명 132 豊 臣 秀 吉 의 日 本 國 王 冊 封 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米 谷 均 135 <토론> 김문자 149 東 國 新 續 三 綱 行 實 圖 를 통해 본 임진왜란의 기억 孫 承 喆 153 <토론> 노영구 170

발표문 일본어 원문 亂 中 日 記 の 世 界 と 李 舜 臣 北 島 万 次 175 秀 吉 の 朝 鮮 侵 略 につ いて の 學 說 史 と 硏 究 課 題 北 島 万 次 197 東 アジ ア 國 際 關 係 に 見 る 壬 辰 倭 亂 堀 新 215 日 本 軍 の 船 舶 と 武 器 の 科 學 的 檢 討 久 芳 崇 231 豊 臣 秀 吉 の 日 本 國 王 冊 封 を めぐ る 認 識 の 格 差 米 谷 均 249

기조강연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13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기타지마 만지 ( 北 島 万 次 ) 들어가며 나는 지금까지의 壬 辰 倭 亂 연구에서 日 本 朝 鮮 明 각각의 사료를 취급해 왔다.조선 쪽 사료 로서는 朝 鮮 王 朝 實 錄 懲 毖 錄 亂 中 雑 錄 壬 辰 錄 그리고 亂 中 日 記 등의 사료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중에서 朝 鮮 王 朝 實 錄 懲 毖 錄 등은 朝 鮮 王 朝 상층부의 동향을 중심으로 한 편찬물 또는 覺 書 이다. 또 亂 中 雑 錄 壬 辰 錄 등은 중간층에서 일반서민에 이르는 광범위 한 계층의 움직임까지도 기술한 覺 書 이다. 이에 대하여 亂 中 日 記 는 리얼타임의 사료이다. 이 日 記 는 壬 辰 倭 亂 이 발발했던 해인 15 92년 정월부터 李 舜 臣 이 1598년 11월 19일 露 梁 海 戰 에서 戰 死 하기 전전날, 즉 11월 17일까지의 일기이다. 亂 中 日 記 는 朝 鮮 水 軍 전체를 지휘하는 입장에 있던 李 舜 臣 이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備 忘 記 이며, 水 軍 과 관련된 인물의 동향, 군사상의 정보, 海 戰 의 준비와 陣 立, 海 戰 의 경위 등 水 軍 을 지휘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사항을 메모한 것이다. 더욱이 亂 中 日 記 에는 水 軍 을 지휘하는 현장에서 보았던 중앙관료들에 대한 의견과 불만, 고생하면서 明 의 水 軍 과 협조했던 내력, 日 本 과 和 議 를 권유하려는 明 측 및 이를 시인하려는 朝 鮮 내부의 특정인물에 대한 분노, 明 册 封 使 에 수행하여 日 本 으로 향하는 黄 愼 의 通 信 使 에 대 한 선박 조달 양상, 水 軍 병사와 格 軍 ( 船 軍 )의 모습, 水 營 에서 水 軍 을 그늘에서 지원했던 목수 등 기술자들의 모습, 倭 亂 의 여파를 피해 이리 저리 떠돌거나 李 舜 臣 의 戰 果 에 기뻐서 덩실거리 는 민중, 전란으로 인한 생활고 때문에 倭 賊 으로 변장하고 약탈행위에 나선 민중, 降 倭 가 된 日 本 人 의 취급과 그 모습, 자기 가족에 대한 걱정 등 다양한 인간들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14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오늘의 이야기는 이상의 사실을 고려하면서, 亂 中 日 記 를 통하여 전란 속의 민중은 어떻게 살아갔는가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Ⅰ. 도적 절도에 나선 하층민 1. 倭 人 으로 변장하고 도적이 된 下 層 民 1593년( 宣 祖 26) 7월, 충청 경상 전라 3도의 하층민이 임진왜란의 혼란을 틈타 倭 人 으로 변 장하고 약탈행위를 감행했던 사건이 있다. 그것은 다음의 사례이다. *사례 1 1593년( 宣 祖 26) 7월 8일. 李 舜 臣 은 倭 賊 이 光 陽 縣 을 침범했고, 왜적은 이미 官 舎 와 창고를 불태웠다 는 소문을 들었다. 李 舜 臣 은 즉시 군사를 보내려고 했지만 소문을 그대로 믿을 수 없 어서 蛇 渡 鎭 의 軍 官 金 鵬 萬 을 탐색차 光 陽 에 파견했다( 사료 1). *사례 2 1593년( 宣 祖 26) 7월 9일. 南 海 縣 令 奇 孝 謹 이 李 舜 臣 에게 와서 光 陽 과 順 天 은 이미 불에 탔 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光 陽 縣 監 魚 泳 潭 順 天 府 使 權 俊 및 軍 官 宋 希 立 金 得 龍 鄭 思 立 일행을 현지로 출발시켰다. 그 뒤에 李 舜 臣 은 全 羅 右 水 使 李 億 祺 慶 尚 右 水 使 元 均 과 사건의 경위에 대 하여 논의하였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어 全 羅 左 水 營 의 探 候 船 이 돌아와서 光 陽 縣 을 침범했던 賊 은 왜적이 아니라 慶 尚 道 의 피난민이 왜적으로 변장하고 光 陽 에 돌입하여 마을을 불태웠다고 전 했다( 사료 2). *사례 3 1593년( 宣 祖 26) 7월 10일. 蛇 渡 鎭 의 軍 官 金 鵬 萬 이 돌아와서 광양사건은 사실이며, 倭 賊 100 여명이 陶 灘 (현재 全 羅 南 道 求 禮 郡 土 旨 面 把 道 里 )으로부터 침입하여 光 陽 을 침범했다고 李 舜 臣 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李 舜 臣 이 그 倭 賊 이라는 자들의 행위를 자세히 캐물었더니 총을 한 발 도 쏘지 않았다고 전했다. 李 舜 臣 은 倭 賊 이라면 절대로 총을 쏘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 사료 3). *사례 4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15 1593년( 宣 祖 26) 7월 10일. 蛇 渡 僉 使 金 浣 이 李 舜 臣 에게 돌아와서 광양사건은 光 陽 주민이 倭 服 으로 변장하고 일으킨 사건이며, 光 陽 뿐만 아니라 順 天 樂 安 도 이미 모두 불에 탔다 고 보 고했다. 또한 光 陽 에서 돌아온 呉 壽 成 은 光 陽 의 도적은 모두 晋 州 및 光 陽 縣 백성이며 그들이 이런 흉계를 꾸몄다. 관청의 창고는 텅 비었고, 마을도 모두 인적이 끊어졌다. 피해는 順 天 이 가 장 심하고 樂 安 이 그 다음으로 심했다 고 보고했다( 사료 4). 2. 倭 賊 습격의 헛소문을 퍼뜨리고 소를 훔친 鮑 作 人 1597년( 宣 祖 30) 8월. 全 羅 道 於 蘭 浦 에서 慶 尚 道 唐 浦 의 鮑 作 人 이 왜적이 쳐들어왔다고 헛소 문을 퍼뜨리고 소를 훔친 사건이 있었다. *사례 5 1597년 8월 25일. 李 舜 臣 이 全 羅 南 道 於 蘭 浦 에 주둔하고 있을 때, 唐 浦 의 鮑 作 人 이 방목 중 인 소를 훔쳐가면서 왜적이 쳐들어왔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李 舜 臣 이 그 흉계를 알고 헛소문 을 퍼뜨린 두 사람을 잡아서 斬 梟 했다( 사료 5) 사례1~5에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倭 亂 으로 생활난에 빠진 전라도 光 陽 경상도 晋 州 의 하층민들이 倭 人 으로 변장하고 약탈 행위를 하였다. 2그러나 이 무렵 光 陽 晋 州 지역뿐만 아니라 忠 清 慶 尚 全 羅 3도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하 층민들이 혼란을 틈타 약탈행위를 감행하기에 이른 상황이 확산되고 있었다( 사료 6). 3또한 (사례 5)는 丁 酉 倭 亂 때인데, 이때도 鮑 作 人 이 식량난으로 헛소문을 퍼뜨리고 소를 훔 쳤다. * 鮑 作 人 에 대하여는 나중에 설명한다. *다음으로, 생활고로 인하여 약탈행위를 감행했던 하층민 문제에서 벗어나 全 羅 左 水 營 의 기 술자( 職 人 )에게 눈길을 돌려보자.

1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Ⅱ. 水營 을 지탱했던 기술자 집단 1. 목수 a. 造船과 船材 운반 사례 6 1593년(宣祖 26) 6월 22일. 全羅左水營에서는 戰船을 建造하기 위하여 坐塊①을 시작했다. 耳匠②240명, 運搬役③으로 全羅左水營에서 72명, 防踏鎭에서 35명, 蛇渡鎭에서 25명, 鹿島鎭 에서 15명, 鉢浦鎭에서 12명, 呂島鎭에서 15명, 順天府에서 10명, 樂安郡에서 5명, 興陽縣과 寶 城郡은 각각 10이었다( 사료 7). (注) ①坐塊 ; 배를 만들 때 배 바닥의 판자 아래 굴림목으로서 둥근 통나무를 설치하는 일. ②耳匠 ; = 목수. 목수 역할과 토목공사를 하는 사람. 여기서는 船大工. ③운반역 ; 잡역부. 사례 7 1593년(宣祖 26) 6월 23일. 新船의 底板作業이 종료하였다( 사료 8). 사례 6~7을 통하여 다음 사실을 지적해 두고 싶다. 亂中日記 에는 船大工에 관한 것을 耳匠 으로 기록하고 있다. 耳匠 이란 목수 라고도 부르며, 선박 건조를 비롯하여 목수의 작업과 관련된 기술자이다. 日記 의 이 부분에 의할 때, 이 시점에서 全羅左水營(麗水)에 240명이나 되는 다수의 耳匠(船大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船大工이 造船의 첫 작업인 坐塊에 착수하였다. 그때 船大工의 작업을 보조하기 위하여 船材 를 운반하는 많은 잡역부( 運役 )가 左水營 및 左水營 관할하의 防踏鎭 蛇渡鎭 鹿島鎭 鉢浦鎭 呂島鎭 등 각 鎭營과 順天府 樂安郡 寶城郡 興陽縣에서 동원되었던 것이다. 船大工이라는 기술자 집단이 左水營에 있고, 그들의 전문작업 이외의 일을 잡역부가 담당하 는 구조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들 船大工은 어떻게 조직되어 있었는가? 이에 대하여 다시 사례를 들어보자.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17 b. 船 大 工 의 장악과 통제 *사례 8 1594년( 宣 祖 27) 1월 24일. 軍 船 의 재목 벌채를 위하여 宋 德 馹 1이 耳 匠 41명을 인솔하고 나 갔다( 사료 9). ( 注 ) 1 宋 德 馹 ; 壬 辰 倭 亂 발발 당시 國 王 을 호위하고 平 安 道 까지 扈 従 했다. 1594( 宣 祖 27)년 李 舜 臣 휘하에 가담했고, 耳 匠 (목수)를 이끌고 山 役 을 행했다. 丁 酉 倭 亂 때 珍 島 郡 守 가 되었고, 鳴 梁 海 戰 에서 활약했다( 朝 鮮 人 名 辞 書 ). *사례 9 1595년( 宣 祖 28) 11월 27일. 軍 官 金 應 謙 이 2년생 나무를 벌채하기 위하여 耳 匠 5명을 인솔 하고 산으로 갔다( 사료 10). *사례 10 1597년( 宣 祖 30) 10월 30일. 李 舜 臣 은 軍 官 黄 得 中 에게 명하여 耳 匠 을 이끌고 島 北 의 산기슭 에서 건설용 목재를 베도록 했다( 사료 11). 사례 8~10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례 8)에서는 船 大 工 이 軍 船 의 목재를 벌채하고, 그들을 통솔한 사람이 李 舜 臣 의 부장 宋 德 馹 이었으며, (사례 9)도 船 大 工 이 목재를 벌채하고, 그들을 李 舜 臣 의 軍 官 이 통솔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船 大 工 이 造 船 用 목재를 벌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앞에서 船 材 를 운 반하는 잡역부의 존재를 언급하였다. 造 船 用 목재도 이들 잡역부에게 맡겨도 좋을 듯하지만, 船 大 工 이 직접 목재를 벌채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하는 문제가 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造 船 用 목재의 선정이다. 船 材 에 적합한지 어떤지 여부는 船 大 工 이 판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수가 직접 船 材 를 탐색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사례 10)은 1597년 9월 17일 鳴 梁 海 戰 뒤의 사례이며, 이 무렵 李 舜 臣 은 全 羅 右 水 營 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그 청사 건설 때문이었는지 船 大 工 도 건설용 목재의 벌채에 동원되었다. 그

1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리고 (사례 10)에서 또 하나 지적할 것은 李 舜 臣 의 軍 官 黄 得 中 이 船 大 工 을 이끌고 작업에 임했 다는 사실이다. 亂 中 日 記 의 다른 부분을 보면 黄 得 中 은 船 舶 과 銃 筒 用 鐵 材 의 運 搬 등도 담당 하고 있으며( 亂 中 日 記 丙 申 2월 18일 19일), 아마도 철재 목재의 조달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휘하에 耳 匠 등의 기술자가 편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세 가지 사례에서 李 舜 臣 의 軍 官 이 이들 船 大 工 를 통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船 大 工 편성 구성은 李 舜 臣 軍 官 船 大 工 집단이며, 그 外 延 에 大 工 의 전문작업을 보조하는 잡역 부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c. 船 大 工 의 출장 작업 이어서 船 大 工 의 출장 작업에 대하여 다음의 사례를 들어보자. *사례 11 1596년( 宣 祖 29) 2월 6일. 李 舜 臣 은 耳 匠 ( 船 大 工 ) 10명을 巨 濟 島 로 보내 선박을 건조하도록 지시하였다( 사료 12). *이 사례에서 다음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즉 이 시기에 李 舜 臣 은 閑 山 島 로 본거지를 옮겼다. 日 記 에 따르면 船 大 工 도 李 舜 臣 을 따라 閑 山 島 에서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 船 大 工 중에서 10명이 造 船 작업을 위하여 巨 濟 島 로 출장을 갔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李 舜 臣 휘 하의 船 大 工 은 巨 濟 島 이외의 각 鎭 營 의 船 倉 에도 작업을 하러 출장하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石 工 亂 中 日 記 에는 石 工 ( 石 手 )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사례 12 1592년( 宣 祖 25) 1월 16일. 城 底 ( 城 부근)의 土 兵 (토착 병졸) 朴 夢 世 가 石 手 ( 石 工 )를 인솔하고 先 生 院 1의 鎖 石 採 石 場 에 갔다( 사료 13).

亂中日記 의 世界와 李舜臣 19 (注) ①先生院 ; 省生院 또는 成生院이라고도 한다. 駅院의 하나. 현재 全羅南道 麗川郡 栗村面 新豐里. 사례 13 1592년(宣祖 25) 2월 15일. 石手들이 새로 쌓은 포구의 塹壕가 많이 무너졌으므로 처벌하기 로 하고 다시 쌓도록 했다( 사료 14). (사례 12)는 全羅左水營 주변의 土兵(토착 병졸)이 석공을 인솔하고 돌을 캐러 나갔다는 것 이다. 이 경우 土兵과 石工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①石工도 李舜臣 휘하에 편성되어 있었 고, 그들을 李舜臣의 명령에 따라 土兵이 인솔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船大工을 인솔한 것은 李 舜臣의 軍官이었는데 이 경우는 왜 土兵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②석공은 그 지역 의 土兵 휘하에 배속되어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앞으로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 (사례 13)에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석공은 원래의 업무로서 참호공사(돌쌓기)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사례 12)에서 보았듯이 석공은 채석에서부터 돌쌓기까지 담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3. 弓匠 과 冶匠 弓匠이든 冶匠(제련기술자)이든 船大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출장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사례 를 다음에 들어보자. a. 弓匠의 출장 작업 사례 14 1596년(宣祖 29) 7월 7일. 弓匠 智伊와 춘도가 本營(全羅左水營)으로 돌아왔다( 사료 15). 이 사례에서 다음 사항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즉 이 시기에 李舜臣은 閑山島에 본거지 를 두고 있었다. 弓匠이 本營(全羅左水營)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그들 弓匠이 활 만드는 일 때문 에 全羅左水營에서 閑山島로 출장을 가 있었으며, 작업이 끝났으므로 全羅左水營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 사실은 船大工이 巨濟島로 출장을 갔던 것과 동일한 문제이며, 左水營의 弓匠職人은 李舜臣 관할하의 鎭營으로 출장 작업을 가기도 했던 것이다.

2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b. 冶匠의 출장 작업 冶匠(제련기술자)의 출장 작업에 관해서는 다음의 사례가 있다. 사례 15 1597년(宣祖 30) 10월 23일. 李舜臣은 冶匠 許莫同을 羅州로 보내려고 初更(오후 8시)이 끝 날 무렵 하인에게 부르러 보냈는데 복통 때문에 올 수 없었다고 한다( 사료 16). 이 사례의 마지막에 冶匠이 腹痛으로 李舜臣이 있는 곳으로 올 수 없었다고 하는데, 제련 기술자 역시 全羅左水營에 있으면서 船大工 弓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李舜臣이 관할하는 각 지역으로 출장 작업을 나가기도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4. 湖左水營誌 에 보이는 기술자 집단 亂中日記 를 통하여 船大工(耳匠) 石工(石手) 弓匠 冶匠의 사례를 든 것에 불과하지만, 163 1년(仁祖 9)에 저술된 湖左水營誌 에 의할 때 左水營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자가 편성되어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耳匠 46名 火砲匠 45名 沙工(船頭) 48名 弓矢人(造弓匠) 37名 漆匠 8名 銀匠(金 銀 銅細工製造) 2名 扇子匠 26名 木手(木工) 30名 驄匠(葬送具 祭器製造) 3名 環刀匠 4名 筒箇匠(竹筒細工) 24名 刀子匠(小刀製造) 3名 鍮器匠(眞鍮器具製造) 1名 朱錫匠(朱錫は眞鍮の一種) 1名 竹席匠(竹皮の敷物細工) 10名 笠子匠 6名 官木手 3名 水鐵匠(銑鐵匠 ) 37名 沙鐵吹錬匠 10名 皮鐵匠(皮細工職人 ) 3名 磨造匠(研ぎ師 ) 3名 螺鈿匠 2名 蓋匠(屋根葺き職人) 2名 瓦匠(瓦職人) 6名 湖左水營誌 가 저술된 시점의 左水營의 실태는 李舜臣이 水使가 되었던 당시와는 약간의

亂中日記 의 世界와 李舜臣 21 차이가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壬辰倭亂 시기에 있어서 船大工(耳匠) 石工(石 手) 弓匠 冶匠을 비롯한 다양한 기술자들이 水軍에게 필요한 군수물자를 중심으로 하는 각종 물 품의 제조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水使 직속의 軍官 아래 편성되어 水軍의 수요에 응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Ⅲ. 船軍 이 된 降倭 1. 투항하는 倭卒 과 그 이유 여기서는 투항했던 倭卒의 사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사례 16 1594년(宣祖 27) 10월 6일. 場門浦 永登浦海戰이 끝나고 李舜臣 휘하로 투항했던 倭卒 있음. 심문한 바 永登浦에 진을 친 시마즈(島津) 부대의 병졸이었다( 사료 17). 사례 17 1596년(宣祖 29) 1월 8일. 慶尚道 加德島 시마즈(島津) 부대의 병졸이 축성공사 등 혹독한 부 역을 견디지 못하고 閑山島의 李舜臣 휘하로 투항함. 李舜臣이 도망한 이유를 캐물었더니 그들 의 대장인 시마즈씨(島津氏)의 성격이 좋지 않다고 한다( 사료 18). 사례 18 1597년(宣祖 30) 7월 3일. 慶尚左兵使 成允文 휘하의 軍官이 降倭 2명을 데리고 왔다. 이들 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이끄는 병졸이라고 한다( 사료 19). 이들 사례의 降倭에 관하여 투항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시마즈(島津) 부대의 경우(사 례 16, 17) 1594년 10월의 場門浦 永登浦海戰 무렵에는 巨濟島 永登浦에 倭城을 쌓고 있었다. 그런데 히데요시(秀吉)를 日本國王에 封하는 明의 冊封使가 慶尚道로 갔을 때, 倭軍이 慶尚道 일대의 倭城을 파괴하고 朝鮮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시마즈 부대의 永登浦倭城도 파괴하게 되었고, 시마즈 부대는 加德島로 이동 했는데 이곳에서 다시 축성공사를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시마즈 부대의 대장인 시마즈 타다쯔

22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네(島津忠恒)는 永登浦倭城 안에 공을 차는 정원과 茶室을 만들고 여러 다이묘들과 교제하는 일 에 밤낮을 보내고 있었다. 加德島로 이동한 뒤에도 시마즈 타다쯔네는 그곳에서도 축성공사를 시작하고 다시 축구장과 茶室을 만들었다. 降倭가 大將의 성격이 좋지 못하다 고 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또 가토 기요마사의 병졸이 투항한 사례(사례 18)에 관하여 언급하자면, 기요마사 부대가 주 둔하고 있던 西生浦倭城도 시마즈 부대의 永登浦倭城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파괴했던 것이다. 그 러나 日明 강화교섭의 파탄에 따라 丁酉倭亂이 시작되자 기요마사는 다시 西生浦倭城의 수축에 착수하였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축성공사에 혹사당하던 병졸이 慶尚左兵使 成允文에게 투항했 던 것이다. 이들 사례에서 보이는 降倭의 특징은 도망이며, 慶尚道 友鹿洞의 투항장 沙也可(=金忠善)이 투항했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개별적으로 투항했던 것이며, 沙也可의 경우는 집단투항 이다. 다음으로 그 차이점에 관하여 지적해 두고자 한다. 2. 두 가지 유형의 투항 a. 降倭將 定住型 주지하다시피 沙也可는 加藤清正 부대의 선봉장이며, 1592년(宣祖 25) 4월 조선침입 직후에 휘하의 병졸을 이끌고 조선쪽에 항복한 인물이다. 沙也可는 朝鮮의 예의와 중화문물이 성행하는 모습을 흠모하여 휘하의 병졸을 이끌고 조선쪽에 투항하였다. 그리고 조선군에 종사하며 왜군과 싸워 공적을 올리고, 金忠善으로 개명하고 朝鮮에 뼈를 묻었으며, 자손은 友鹿洞에서 번영하였 던 것이다. 이 沙也可의 경우와 동일한 사례가 亂中雑錄 에도 보인다. 사례 19 경상도에 주둔 중이던 金向義 라는 이름의 倭將은 점점 심해지는 전투와 노역에 혐오감을 느끼고 慶尚右兵使 金應瑞에게 부하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그 후 조선 측에 종사하며 전공을 세 우고 通政大夫(정3품의 宗親 文武官 儀賓 등의 堂上官 위계) 嘉善大夫(종2품의 宗親 儀儐 文 武官 등의 堂上官 위계)에 올랐으며, 密陽에 거주하면서 농사와 누에치기에 종사하였고 자손도 번창하였다( 사료 20). 沙也可와 金向義의 경우는 부하를 이끌고 투항했으며, 상대방의 戰力이 되었고, 안주의 땅을 얻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戰國争亂에서도 볼 수 있는 반란이다. 일본 쪽의 입장에서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23 보자면 배신이다. 따라서 조선쪽도 그에 상당하는 대우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 유형의 降 倭 를 降 倭 將 定 住 型 이라고 부르겠다. 그런데 降 倭 가 모두 降 倭 將 定 住 型 은 아니다. 또 다른 유형의 降 倭 가 있었다. b. 兵 卒 勞 役 型 이 유형의 降 倭 는 앞에서 본 시마즈 타다쯔네와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서 도망한 경우이며, 이들은 部 將 에게 이끌려 투항했던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도망한 것이다. 그 사례로서 시마즈 부대에서 투항했던 병졸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사례 20 1598년( 宣 祖 31) 5월. 요에몽( 與 右 衛 門 또는 要 汝 文 )이라는 이름의 시마즈 부대의 병졸이 조 선쪽에 투항했다. 都 元 帥 權 慄 이 조사한 결과, 그 자의 공술에 의하면 1요에몽( 與 右 衛 門 )은 나 이가 30세이고 弓 矢 와 放 砲 기량을 가진 병졸이라는 점, 2양친은 이미 타계했고, 형제는 모두 왜란의 여파에 말려들어 고생 중이며 요에몽은 의지할 데 없는 고아의 몸이라는 점, 3그리고 요에몽은 끝없이 계속되는 축성공사에서 사역하였고, 4그러한 때 조선쪽이 降 倭 를 후대한다는 말을 듣고 시마즈 진영에서 도망했던 것이다( 사료 21). 요에몽의 투항은 명백하게 沙 也 可 와 金 向 義 의 경우처럼 반란 배반이 아니라 단순한 개 별적인 도망이다. 이들 降 倭 는 조선쪽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 이에 대하여 朝 鮮 王 朝 實 錄 에 다음의 사례가 있다. *사례 21 1594년( 宣 祖 27) 9월, 조선정부 수뇌는 降 倭 의 취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방침을 밝혔다. 즉 降 倭 중에서 才 技 가 있고, 더욱이 恭 順 하여 國 用 에 쓸모가 있는 자는 陣 中 에 머물도록 하고, 나 머지 降 倭 는 閑 山 島 의 水 軍 으로 보내서 船 軍 ( 格 軍 )으로 사역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료 22).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兵 卒 労 役 型 降 倭 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들 船 軍 ( 格 軍 )에게 주목 해 보자.

24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Ⅳ. 바다를 아는 鮑作人 1. 朝鮮 水軍 의 戰力 과 梢水軍 水軍 병력은 射手(弓手와 砲手)와 梢水軍(船頭와 格軍 船漕ぎ)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1595 년(宣祖 28) 朝鮮國王이 明에 회답했던 朝鮮 水軍의 실태를 도표로 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朝鮮 水軍의 戰力 -1595년(宣祖 28) 3월- 射手 (弓手 砲手) 統制使李舜臣配下 (含, 全羅左水營) 慶尚右水使裴楔配下 全羅右水使李億祺配下 慶尚左水使李守一配下 計 梢水軍 (船頭 格軍) 亀甲船 戰船 哨探船 717명 3072명 5척 26척 31척 55명 425명 31명 398명 2171명 240명 0척 0척 0척 10척 24척 3척 10척 24척 3척 1228명 5881명 5척 63척 68척 出典 : 萬曆 23년 3월 4일 朝鮮國王回咨( 事大文軌 12). 이 도표에서 다음 사항을 지적해 둔다. 제일 먼저 지적할 것은 射手에 비하여 梢水軍, 특히 格軍(船軍)의 인원수가 많다는 점이다. 射手 1228명에 대하여 梢水軍은 5881명이며, 梢水軍은 射手의 4.5배에 상당한다. 이것은 動力으 로 움직이는 현대의 선박과 달리 格軍(船軍)의 人力에 의존하는 선박의 경우 格軍(노젓는 병사) 의 숫자가 海戰에서 승패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두 번째 문제는 선박 1척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格軍이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이 도표에 올 린 軍船 전체의 수는 136척이며, 格軍은 5881명이다. 따라서 평균을 내면 軍船 136척=A 格軍 5881명=B, B/A=43명이 되는데, 軍船에는 亀甲船에서부터 哨探船 까지 크고 작은 선박이 있다. 이전에 내가 해군사관학교박물관의 鄭鎭述씨로부터 들은 설명에 의하면, 亀甲船의 경우 노(櫓)는 좌우에 8本씩 합계 16本이며, 櫓 1本당 4명의 格軍이 배치(그 중 2인은 교대요원)된다. 따라서 亀甲船 1척의 格軍은 64명이라고 한다. 이 도표에 표시한 亀甲船은 5척, 戰船은 63척, 합계 68척이 된다. 따라서 여기에 배치되는 格 軍(노젓는 병사)는 68척 64명 4352명이 된다. 그리고 5881명(格軍=노젓는 병사 전체수)-4352명(亀甲船 戰船에 배치되는 格軍) 1529명이 哨探船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25 등 소형 선박에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들 格 軍 (노젓는 병사)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을까? 이들은 앞에서 말한 降 倭 외에 奴 婢 土 兵 鮑 作 人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다음으로 鮑 作 人 에 대하여 서 술해 두고자 한다. 2. 鮑 作 人 이란 무엇인가? 鮑 作 人 이란 鮑 尺 人 이라고도 한다. 일찍이 朝 鮮 総 督 府 가 작성한 朝 鮮 語 辞 典 에 의하면 鮑 尺 이란 물속에 들어가서 전복( 鮑 )을 채취하는 자 라고 되어 있다. 亂 中 日 記 癸 巳 3월의 메모에 도 鮑 作 으로 기록된 부분에 沿 海 人 이라는 注 記 가 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鮑 作 人 이란 沿 海 를 생활터전으로 하는 海 民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朝 鮮 국가뿐만 아니라 육지의 일반인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소외되고 있었던 것 이다. 그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사례 22 15세기 중엽, 濟 州 島 의 鮑 作 人 이 全 羅 慶 尚 양도의 후미진 해안으로 잠입하여 빈번하게 절도 를 일삼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전라도 관찰사 柳 洵 은 그들을 濟 州 島 로 돌려보 내려고 해도 생업에 종사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앙정부가 취한 鮑 作 人 에 대한 대책은 1소 재지의 守 令 萬 戸 에게 명하여 鮑 作 人 의 선박에 字 號 를 붙이게 하고 全 羅 慶 尚 양도로 건너갈 때 路 引 ( 通 行 券 )을 발급하며, 만일 路 引 을 소지하지 않았거나 字 號 를 붙이지 않은 배를 타고 멋 대로 全 羅 慶 尚 양도를 출입하면 해적으로 간주하여 엄벌에 처할 것, 2아울러서 鮑 作 人 이 거주 하는 마을에 매년 그 인구를 등록하게 하고 전라도 관찰사에게 보고하며, 그 사항을 다시 조정에 轉 報 하도록 할 것, 3 守 令 萬 戸 는 鮑 作 人 을 存 撫 (단속을 완화하다)할 수 없으며, 鮑 作 人 을 流 亡 하게 하면 이 사실을 守 令 萬 戸 등 관리의 업적평가에 참고하기로 하였다(사료23). *사례 23 1589년 ( 宣 祖 22), 景 轍 玄 蘇 宗 義 智 일행이 히데요시의 일본 전국통일을 축하하는 通 信 使 파 견을 조선쪽에 요청했을 때, 조선은 全 羅 道 珍 島 의 반란민 沙 火 同 의 縛 送 을 通 信 使 파견의 조건 으로 삼은 일이 있었다. 沙 火 同 은 지난 해 11월, 일본 해적을 끌어들여서 全 羅 道 高 興 郡 損 竹 島

2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를 습격하고 邊將 李太源을 살해한 인물이며, 그 후 五島에 잠적해 있었던 것이다.(사료24). 문제는 沙火同의 출신 내력이다. 朝鮮王朝實錄 에는 沙火同이라는 자가 있다. 그는 우리 나라 珍島 사람이다 (사료24)라고 기록했는데, 李廷馣의 行年日記 에 따르면 寶城 鮑作人 沙 火同 (사료25)의 출신지는 全羅南道 寶城이며, 신분은 鮑作人으로 되어 있다. 沙火同은 鮑作人 이라는 사실이 주목되는 것이다. 바닷가를 왕래하며 사는 鮑作人이었던 만큼 사료에는 그의 거 소가 全羅南道 珍島라거나 寶城이었던 것이다. 沙火同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鮑作人은 全羅南道 해안지대의 몇몇 居所를 옮겨 다니면서 본업인 전복 채취 외에 절도행위를 감행하거나 해적행위에도 가담하였다. 이것도 鮑作人이 살아 가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그들은 국가와 일반인들로부터 아웃사이더와 유사한 존재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3. 格軍 의 도망을 방조하는 鮑作人 亂中日記 에는 格軍(船軍)에 관한 기술이 많이 보인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사례 24 1593년(宣祖 26) 2월 3일의 亂中日記 에 따르면, ①慶尚道에서 80명 정도의 格軍이 도망했다는 보고가 李舜臣에게 도착했다. ②도망자 중에는 向化人 金浩乞과 羅將(지방 관아의 하급관리) 金水男도 있었다. 이 경우 向 化人이란 倭軍에서 귀순한 자를 말하는데, 그런 이유로 인하여 向化人 金浩乞은 格軍이 되었다 고 생각되며, 또한 羅將 金水男도 어떤 이유 때문에 格軍에 배치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③慶尚右水營의 관리가 도망한 格軍의 捕捉에 나섰지만, 도망한 格軍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임무를 달성하지 않았다. ④이 보고를 받은 李舜臣은 配下의 軍官 李鳳壽 鄭思立 등을 파견하여 도망친 格軍 70명가 량을 붙잡아서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태우고, 이와 동시에 金浩乞과 金水男(이 들 두 명이 格軍 도주사건의 주동자라고 생각된다)을 처형했다(사료26). 이와 같은 格軍(노젓는 병졸) 도주에 鮑作人이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례 25 1594년(宣祖 27) 5월 13일의 亂中日記 에 따르면,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27 1 黔 毛 浦 萬 戸 가, 慶 尚 右 水 使 元 均 의 관할 아래 있는 鮑 作 들이 格 軍 을 태우고 도망했는데, 현지에서 鮑 作 을 체포한 바 鮑 作 들은 元 均 이 주둔하는 곳에 숨어 있었다. 그래서 司 僕 1들을 보 내어 그들을 체포하려고 했는데, 元 均 이 크게 화를 내며 司 僕 들을 결박했다 고 李 舜 臣 에게 통보 하였다. 2이 때문에 李 舜 臣 은 軍 官 廬 潤 發 을 보내 司 僕 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사료27). ( 注 ) 1 司 僕 ; 司 僕 은 司 僕 寺 의 약칭. 즉 宮 中 의 輿 馬 厩 牧 등의 사무를 관장하는 관아이다. 그러 나 여기서는 兼 司 僕 ( 禁 軍 의 하나)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서 다음 사례를 소개해 둔다. *사례 26 1594년( 宣 祖 27) 8월 26일의 亂 中 日 記 에 따르면, 1 興 陽 의 鮑 作 人 으로 莫 同 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長 興 의 軍 士 30명을 남몰래 자기 배에 태우고 도주시켰다. 2그 죄로 李 舜 臣 은 鮑 作 人 莫 同 을 처형하고 효수하였다(사료28). *이 사례에서 주목한 것은 鮑 作 人 이 格 軍 뿐만 아니라 일반 병사의 도주에도 도움을 주고 있는 점이다. 그러면 格 軍 은 왜 도주하는 것일까? 다음으로 이 문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4. 格 軍 이 도주하는 이유 李 舜 臣 은 1592년( 宣 祖 25) 7월 8일의 閑 山 島 海 戰 의 성과를 같은 달 15일자로 보고하였다( 李 舜 臣 壬 辰 状 草 萬 曆 20년 7월 15일). 그때 海 戰 으로 인한 사상자의 숫자도 보고하고 있다. 보 고에 따르면 사상자 전체는 132명이며, 그 내역은 格 軍 이 61명, 射 夫 7명, 기타가 15명이었다. 格 軍 사상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그 이유는 전투상태로 들어가도 格 軍 은 싸움에 참가하 지 않고 오로지 노를 저을 뿐이며 포격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海 戰 은 格 軍 을 피로하게 만 들 뿐만 아니라 극한의 공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도 水 軍 은 格 軍 이 없으면 싸울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李 舜 臣 의 고민이 있다.

2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5. 李 舜 臣 의 海 民 기용과 그 의미 지금까지 검토한 것처럼 格 軍 에 편성된 鮑 作 人 들은 스스로 도망을 치거나 다른 格 軍 의 도망 을 방조하는 등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鮑 作 人 을 水 軍 에 기용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즉 1592년( 宣 祖 25) 9월 1일의 釜 山 浦 海 戰 전황보고 속에서 전사자이기는 하지만 沙 工 鮑 作 金 叔 連 의 이름이 보이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壬 辰 狀 草 萬 曆 20년 9월 17일). 沙 工 이란 船 頭 를 말하며, 鮑 作 人 외에 沙 工 土 兵 水 軍 安 元 世 의 이름도 보인다. 土 兵 은 토착 병졸이며, 이들 역시 해안가 거주민이다. 그들은 자 신들의 생활체험에서 조류의 干 滿 이 심한 慶 尚 南 道 全 羅 南 道 해로와 암초의 소재를 잘 알고 있 었던 것이다. 李 舜 臣 으로서는 바다를 잘 알고 있는 이들 鮑 作 人 이 필요했으며, 그런 만큼 李 舜 臣 은 鮑 作 人 格 軍 들의 도주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맺는 말 지금까지 亂 中 日 記 를 통해서 도적 절도를 감행하는 하층민, 左 水 營 에서 일하는 기술자( 職 人 ), 格 軍 ( 船 軍 )으로 편성된 降 倭, 鮑 作 人 등 해안가 거주민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도적 절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악행 에 속한다. 도주하는 格 軍 역시 水 軍 의 입장에서 보자 면 범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들은 壬 辰 倭 亂 으로 인한 생활난과 공포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명 과 생활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전쟁에서 민중이 살아가는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민중 모두가 절도 도적 도주 등의 행위를 감행한 것은 아니다. 全 羅 左 水 營 의 船 大 工 을 비롯한 기술자 집단은 그 업무를 통해서 水 軍 을 지탱해 갔다. 아울러서 鮑 作 人 등의 해안가 주민은 도주 등으로 인하여 格 軍 으로 징발되는 것에 거역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노력과 바다를 잘 아는 생활체험은 李 舜 臣 의 水 軍 을 지탱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鮑 作 人 등 해안가 주민 들 없이 水 軍 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반발하지만 협력도 한다. 이 양면성을 가진 鮑 作 人 을 어떻게 편성할 것인가? 여기에 李 舜 臣 의 역량이 있었다. 降 倭 로 눈길을 돌리면, 그들도 역시 민중이다.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세계에서 군림하려는 야 망을 품고 壬 辰 倭 亂 을 일으켰지만, 降 倭 들은 그런 야망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앞에서 시마즈 부대의 병졸 요에몽의 경우에 관하여 언급했지만, 兵 卒 労 役 型 降 倭 가 그와 같은 경우이다. 장기 간에 걸친 전투와 끊임없이 계속되는 축성공사 노역으로부터 벗어나 조선쪽의 厚 待 를 기대했지

亂中日記 의 世界와 李舜臣 29 만, 그들 대부분은 格軍으로 편성되어 노 젓기를 강요당하게 되었으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노 력은 조선수군에 기여하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전쟁의 역사서에는 반드시 영웅 위인들에 관한 서술이 있다. 壬辰倭亂에 관한 역사서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 쪽 인물로는 官人인 柳成龍, 무인인 李舜臣과 權慄, 의병장 郭再 祐 高敬命, 승려 의병장 松雲大師 등이 있으며, 일본 쪽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가 토 기요마사(加藤清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대부분의 역사서에 등장한다. 그러나 전 쟁에 휘말린 이름도 없는 사람들, 전투를 그늘에서 지원해 준 사람들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민중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반드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제일로 삼았던 것 은 아니다. 먼저 자신의 생명과 생활을 우선시 한다. 민중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그 리하여 그들은 어떤 생활방식을 취했는가? 이번의 이야기는 이러한 시각에 관한 시도이다. 亂中日記 의 世界 와 李舜臣 關係史料 사료 1 八日庚申, 晴, 因南海往來人趙鵬, 聞賊犯光陽, 光陽之人, 已爲焚蕩官舎倉庫云, 不勝怪恠, 順天 光陽, 即欲發送, 路傳不可信, 停之, ( 細字双行 蛇渡軍官金鵬萬, 探知次送之) (李舜臣 亂 中日記 癸巳 7월 8일). 사료 2 九日辛酉, 晴, 南海又來傳云, 光陽 順天已爲焚蕩云, 故光陽 順天及宋希立 金得龍 鄭思 立等, 發送李渫, 昨日先送, 聞來痛入骨髄, 不能措語, 與右令公及慶尚令公論事, (中略) 三更末, 營探候船入來, 傳賊奇, 則非倭賊, 嶺南避亂之人, 假著倭形, 突入光陽, 閭閻焚蕩云, 則不勝喜幸, 晋陽之事亦虛云, 然晋陽事, 萬無是理( 亂中日記 癸巳 7월 9일). 사료 3 十日壬戌, 晴, 晩金鵬萬自豆恥來言, 光陽之事實矣, 而但賊倭百餘名, 自陶灘 越渡, 已犯 光陽云, 然就觀所爲, 則銃筒一無度放之云, 倭而萬無不放炮之理矣, (中略) 昏呉水自巨濟加参島(加助島)來告曰, 賊船内外不見云, 又曰, 被虜人逃還言内, 賊徒無数, 還

3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向昌原等地云, 然人言未可信矣 ( 亂中日記 癸巳 7월 11일). 사료 4 十一日癸亥, 晴, 蛇渡僉使(金浣)還來言内, 豆恥渡賊事虛傳, 而光陽之變著倭服, 自相作亂 云, 順天 樂安已盡焚蕩云, 不勝痛憤々, 夕呉壽成, 自光陽還來, 告曰, 光陽賊事, 皆晋州及縣人, 出此兇計, 官庫寂然, 閭里一空, 終日回觀, 無一人云, 順天尤甚, 而樂安次之云 ( 亂中日記 癸巳 7월 11일). 사료 5 廿五日癸酉, 晴, 因駐同處, 朝食時, 唐浦鮑作偸放牛牽去, 而虛警曰, 賊來々々, 餘已知其 誣, 拿虛警者二名, 即令斬梟, 軍中大定 ( 亂中日記 丁酉 8월 25일). 사료 6 全羅道觀察使李廷馣馳啓曰, 下道一帯不逞之徒, 乗時作亂打破官庫, 公然搶掠云 ( 朝鮮王 朝宣祖實錄 宣祖 26년 8월 己丑). 사료 7 六月二十二日乙巳, 晴, 戰船始坐塊, 耳匠二百十四名, 運役内營七十二名, 防踏三十五名, 蛇渡二十五名, 鹿島十五名, 鉢浦十二名, 呂島十五名, 順天十名, 樂安五名, 興陽 寶城各十名, 防 踏則初送十五名, 軍官色吏論罪, (이하, 略) ( 亂中日記 癸巳 6월 22일). 사료 8 二十三日丙午, 晴, 早朝點付耳匠等, 則無一名干云, 新船本板畢造 ( 亂中日記 癸巳 6월 23일). 사료 9 正月二十四日癸卯, 晴且暖, 朝山役事, 耳匠四十一名, 宋德馹領去 ( 亂中日記 甲午 1월 24일). 사료 10

亂 中 日 記 의 世 界 와 李 舜 臣 31 7일). 十 一 月 二 十 七 日 乙 未, 晴, 金 應 謙 以 二 年 木 斫 來 事, 耳 匠 五 名 率 去 ( 亂 中 日 記 乙 未 11월 2 *사료 11 十 月 三 十 日 丁 亥, 晴 而 東 風, 多 有 雨 態, ( 中 略 ) 早 使 黄 得 中, 率 耳 匠 往 于 島 北 峯 底, 造 家 材 木 斫 來 ( 亂 中 日 記 丁 酉 10월 30일). *사료 12 二 月 初 六 日 癸 卯, 陰, 暁 耳 匠 十 名, 送 于 巨 濟, 造 船 事 教 之 ( 亂 中 日 記 丙 申 2월 6일). *사료 13 正 月 十 六 日 丁 丑, 晴, ( 中 略 ) 城 底 土 兵 朴 夢 世, 以 石 手 往 先 生 院 鎖 石 浮 出 處 ( 亂 中 日 記 壬 辰 1월 16일). *사료 14 二 月 十 五 日 丙 午, 大 風 雨, ( 中 略 ) 石 手 等 以 新 築 浦 坑 多 致 頽 落 決 罪, 使 之 更 築 ( 亂 中 日 記 壬 辰 2월 15일). *사료 15 七 月 七 日 壬 申, 晴, ( 中 略 ) 夕, 弓 匠 智 伊 及 春 卜, 夕 歸 營 ( 亂 中 日 記 丙 申 7월 7일). *사료 16 十 月 二 十 三 日 庚 辰, 晴, ( 中 略 ) 冶 匠 許 莫 同 往 于 羅 州, 初 更 末 使 奴 招 之, 則 腹 痛 云 ( 亂 中 日 記 丁 酉 10월 23일). *사료 17 倭 奴 一 名, 來 到 漆 川 山 麓, 欲 爲 投 降, 故 昆 陽 郡 守 招 降 載 船, 問 之 則 乃 永 登 倭 也 ( 亂 中 日 記 甲 午 10월 6일). *사료 18

32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早降倭五名入來, 故問其來由, 則以①其將倭性悪, 役且煩重, 逃來投降云, 収其大小刀, 藏 之楼上, 實非釜山倭也, 乃加德沈安屯(島津殿)所率云 ( 亂中日記 丙申 1월 8일). 사료 19 左兵使, 使其軍官押降倭二名而來, 乃清正所率云 ( 亂中日記 丁酉 7월 3일). 사료 20 嶺南諸屯倭賊, 厭其久戍労役, 多有降附我國者, 金應瑞所招幾至百餘名, 其酋曰金向義, 向 義與其衆多立戰功, 官至通政嘉善, 其後, 二三年間, 降倭等屯居密陽之地, 務農桑長子孫, 名其里 降倭鎭 (趙慶男 亂中雑錄 甲午 6월). 사료 21 備辺司啓 曰, 都元帥權慄, 上送降倭要汝文称名者, 捧招入 啓, 此倭則付諸也汝文, 使之 同在何如, 其招曰, 年三十, 居博多州沈安頓吾軍, 壬辰, 過海出來, 住在釜山, 三年後還歸本土, 今正月間, 又爲出來, 來住釜山浦, 粗知發矢, 且解放砲, 行軍時負旗前導, 去月間, 朝鮮曾有相知人來言, 朝 鮮厚待降倭云, 故來降, 父母皆没, 只有三箇同生, 而一在釜山, 二在日本, 沈安頓吾所率軍兵, 元 是三萬餘名, 軍糧則藏置十倉, 而非俺所管, 不能詳知其数, 朝鮮男女時在釜山者, 各二千餘名, 而 糧食則大概計数摠給, 不知實数, 當初出來時, 大船三十餘隻, 各載軍糧八九十石出來, 其後, 間或 運到, 且於朝鮮地方, 搶得而食之, 朝鮮之人, 皆給腰牌, 出入陣中, 而雖有腰牌者, 若有罪, 即殺之, 釜山両處城子, 時方修築, 軍卒役事則所食, 一日三時, 尚未畢役, 頃日蔚山 天兵接戰時, 沈安頓 吾在釜山, 聞接戰之奇, 簡率精兵三百餘名, 向蔚山, 中路還來, 倭衆發動期則皆云, 當在八九月間, 而迷劣卒倭, 不能詳知, 傳曰, 依啓 ( 朝鮮王朝宣祖實錄 宣祖 31년 5월 己丑). 사료 22 備辺司啓曰, 降倭初欲入送于深僻處, 皆令上送京中, 仍送両界, 其数已多, 非徒道路傳送之 際, 貽弊多端, 両界郡邑, 一様残破, 許多降倭, 盡皆入送, 亦非物力之所堪, 今後來降, 而有其才技, 恭順可使者, 留置陣中, 其餘則収其刀釼, 入送于閑山島舟師所在, 分置諸船, 以爲格軍, 如有情状 可疑者, 令諸將登時善處, 上従之 ( 朝鮮王朝宣祖實錄 宣祖 27년 9월 己丑).

亂中日記 의 世界와 李舜臣 33 사료 23 兵曹據全羅道觀察使柳洵啓本啓, 鮑作人等自濟州而來, 散處全羅, 慶尚兩道海曲, 潛行剽 竊, 其漸可慮, 但時無顯然罪状, 治罪爲難, 且雖欲刷還本土, 必不安業, 請令所在官守令 萬戸, 於 船隻字號著標, 入海時, 給路引, 如無路引, 或騎無標船, 而任意出入, 則論以海賊, 置之重典, 令所 居邑, 毎歳抄錄人口, 報觀察使轉啓, 若守令 萬戸, 不能存撫, 致令流移, 請於殿最, 憑考施行, 從 之 ( 朝鮮王朝成宗實錄 成宗 14년 12월 乙丑). 사료 24 全羅道左水營鎭撫金介同 李彦世等, 於去年春損竹島之戰, 爲倭擄去, 轉賣南蕃國, 因逃入 中國地界, 盤問解送北京, 謝恩使柳典(土ヘン, 大漢和5165)等之還也, 順付以來, 介同等之言曰, 有 沙火同者, 我國珍島人也, 被擄而去, 因効忠於倭奴, 謂介同曰, 此地風俗人心甚好, 可居也, 汝可 無懼, 朝鮮則賦役甚苦, 大小全鰒, 無限徴出, 不勝支當, 因留居此, 前年初, 欲犯馬島 加里浦, 風 候不順, 泊于損竹島, 此乃我之所嚮導也云云, 其島名曰五島, 周回數日程, 人居稠密, 若一大州, 我國人被擄者居多, 有船五百餘艘, 全羅右道伏兵船, 全數虜去, 故弓箭 銃筒, 亦皆輸去, 而徒爲積 置, 不知試用, 只兒童爲戲具而已 ( 朝鮮王朝宣祖實錄 宣祖 21년 11월 丙寅). 사료 25 往在丁亥(1587년), 湖南之變, 寶城鮑作人沙火同者, 被擄入倭國, 向導作耗, 辺警不絶, 人心 痛憤, 朝議以爲, 若刷還此人, 則當使通信云 (李廷馣 行年日記 己丑 春, 四留斎集 8 所収). 사료 26 初三日戊子, 晴, 諸將准會, 而寶城(金得光)未及, 東上房出坐, 與順天 樂安 光陽(魚泳潭)論 約有時, 是日, 嶺南來向化金浩乞 羅將金水男等置簿格軍八十餘名, 告以逃去, 多受賂物不捉來, 故潛遣軍官李鳳壽 鄭思立等, 捜捉七十餘名分船, 浩乞 金水男等, 即日行刑, 自戌時, 風雨大作, 諸船艱難救護 ( 亂中日記 癸巳 2월 3일). 사료 27 十三日庚寅, 晴, 是日, 因黔毛浦萬戸報, 慶尚右水使所屬鮑作等格軍逃載, 現捉鮑作則隠在 於元水使所駐處云, 故送司僕等推捉之際, 元水使大怒, 司僕等結縛云, 故送廬潤發解之 ( 亂中日 記 甲午 5월 13일).

34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사료 28 廿六日辛未, 晴, 朝各官浦公事題送, 興陽鮑作莫同長興軍三十名潛載其船逃出之罪, 行刑梟 示 ( 亂中日記 甲午 8월 26일).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35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기타지마 만지 (北島万次) Ⅰ. 江戶時代 의 조선 인식 및 朝鮮征伐 사관 1. 江戶時代 전기, 17세기 a) 호리 세이이(堀正意)의 朝鮮征伐記 에도시대 전기에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한 저서를 정리한 것으로 호리 세이이(堀正意)의 朝鮮征伐記 가 있다. 堀正意는 주자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제자였다. 세이카는 정 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연행된 조선 주자학자 姜沆과 학문상 교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호리 세이이는 후지와라 세이카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호리 세이이의 저서 朝鮮征伐記 라는 표현은 당시 일본에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朝鮮 征伐 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그 내용은 ①히데요시의 조선 류큐 필리핀에 대한 入貢 요구 ②조선침략에 있어서 전쟁 국면의 추이 ③日明 강화교섭이 파탄에 이른 전말 등을 기 록 문서 등의 사료를 사용하여 서술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동아시아 정복 에 눈을 돌린 이유는 1590년 조선 국왕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히데요시가 자신의 이름을 삼국 (天竺 唐 本朝=日本)에 빛내고 싶다 고 기술한 공명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랑하는 아들 츠루 미츠(鶴松)의 갑작스런 죽음을 직접적인 계기로 명 정복을 결의했다고 한다.

36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b)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本朝通鑑 하야시 라잔도 역시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이다. 라잔은 本朝通鑑 을 저술하고, 호리 세이 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히데요시의 征明 결의의 직접적인 원인을 츠루마츠의 갑작스런 죽음에 있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히데요시의 부장 사이의 征明 계획에 대해서 의문이 있던 점을 지적하 고, 히데요시의 해외정복 계획을 비판하고 있다. c) 야마가 소코(山鹿素行)의 武家事紀 하야시 라잔은 나중에 에도바쿠후의 儒官이 된 린가(林家)의 시조가 되었으며, 히데요시 비판 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높이 평가하는 학자도 나왔다. 武家事紀 를 저술 한 야마가 소코는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고,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武威를 빛낸 것은 神功皇后(Ji nguu kougou) 때부터의 일이다 라고 하며 神功皇后의 三韓征伐 전설과 히데요시의 朝鮮征 伐 을 오버랩 시킨 노골적인 조선멸시관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에도시대 학자 사이에 있어서 조 선멸시관의 원류이다. d) 시마즈가(島津家) 편찬 征韓錄 시마즈가의 征韓録 은 조선침략에 참전했던 다이묘 가문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 책은 시 마즈 가문과 관계있는 기록과 문서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문헌적인 가치는 있지만, 그 편찬 의도가 우리 선조는 조선 정벌을 수행하고 武威를 빛냈다 는 조선침략에서 시마즈 가문의 공명 성을 과시한 것이었다. e) 카이바라 엣켄(貝原益軒), 柳成龍의 懲毖錄 서문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柳成龍의 懲毖録 이 일본에 소개되었다. 貝原益軒의 소개 서문에서 히데요시가 조선을 친 것은 5가지 용병법(義兵 応兵 貪兵 驕兵 忿兵) 중 貪兵이며 驕兵과 忿 兵도 겸한 것으로서 君子가 이용하는 義兵 応兵은 아니다 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상 17세기에 있어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한 인식을 열거하였는데, 히데요시를 높 게 평가한 것은 山鹿素行 뿐이었다. 그런데 江戸時代 후기에 이르면 그 인식이 크게 변화하는 것이다

히데요시( 秀 吉 )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37 2. 江 戶 時 代 중기, 18세기 a) 아라이 하쿠세키( 新 井 白 石 )의 朝 鮮 聘 使 後 議 조선통신사 접대를 간소화시킨 것으로 알려진 아라이 하쿠세키( 新 井 白 石 )는 조선은 再 造 之 恩 (히데요시 사망 후 일본이 조선에서 철병하고, 국교를 맺어 조선을 재생시킨 은혜)을 결코 잊 어서는 안 되며, 또한 오래도록 교린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나라는 아니라고 하며 노골적인 조선멸 시관을 드러냈다. b) 나카이 치쿠잔( 中 井 竹 山 ), 소보 키겐( 草 茅 危 言 ) 유학자 나카이 치쿠잔은 조선은 神 功 皇 后 의 신라원정 이후 일본의 속국으로서 조공하고 있 었는데, 히데요시가 조선에 이유 없이 병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후 조선은 일본에 조공하지 않 고 그에 대신하여 통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 만 국가의 재정을 기울여서까지 대접할 나라는 아니다 라고 하며 야마가 소코 및 아라이 하쿠세 키와 동일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c) 모토오리 노리나가( 本 居 宣 長 ), 카라오사메노 우레타미고토( 馭 戎 慨 言 )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皇 國 日 本 중심의 입장에 서서 馭 戎 慨 言 을 저술하였다. 그 속에 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히데요시가 偉 業 중도에 사망한 것은 유감 이 라고 하고, 더욱이 히데요시는 皇 國 日 本 의 광명을 조선 중국에까지 빛냈다 고 칭송하고 있다. d) 하야시 시헤이( 林 子 平 ), 三 國 通 覧 圖 說 海 國 兵 談 18세기 후반, 구미열강이 동아시아 각국으로 몰려 왔다. 여기서 海 防 問 題 가 발생한다. 海 防 과 文 武 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하야시 시헤이는 조선 문제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神 功 皇 后 의 삼 한정벌 과 히데요시의 조선정벌 을 神 武 一 統 이래의 武 徳 으로 평가하였다. e) 혼다 도시아키라( 本 多 利 明 ), 經 世 秘 策 혼다 도시아키라는 하야시 시헤이의 뒤를 이어 海 防 문제를 논하였다. 거기서 혼다 도시아키 라는 에조치( 蝦 夷 ) 사할린( 樺 太 ) 캄차카의 영유 통치를 주장하고,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해서 는 중국까지를 시야에 넣고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평가하였다.

38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f) 야마자키 히사나가( 山 崎 尙 長 ), 兩 國 壬 辰 實 記 야마자키 히사나가는 쓰시마번의 釜 山 鎭 代 官 이었다. 兩 國 壬 辰 實 記 는 조선침략의 발단에 서부터 에도바쿠후 성립기에 있어서 양국의 우호관계 성취까지의 과정을 朝 鮮 征 伐 記 朝 鮮 太 平 記 (일본 측의 기록), 柳 成 龍 著 懲 毖 録 (조선 측의 기록)을 이용하여 객관적으로 서술한 책이 며, 兩 國 壬 辰 實 記 성립 배경에는 쓰시마번의 儒 臣 朝 岡 一 學 ( 新 井 白 石 과 조선통신사 접대를 둘러싸고 논쟁했던 쓰시마번의 儒 臣 雨 森 芳 洲 의 제자)의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사에 관한 박학다 식함이 있다. 3. 江 戶 時 代 후기, 19세기 a) 라이 산요( 賴 山 陽 ), 日 本 外 史 라이 산요는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여러 다이묘들 사이에 공명을 바라는 마음과 전투할 힘이 남아 있었고, 그것을 밖으로 돌려서 다이묘 권력을 꺾은 것이 조선출병이다 라고 도요토미 정권의 본질에서부터 그 원인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 렵 조선을 침략의 대상으로 여기는 입장에서 히데요시의 침략을 朝 鮮 征 伐 로 높이 평가하는 학 자가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b) 사토 노부히로( 佐 藤 信 淵 ), 混 同 秘 策 사토 노부히로는 萬 國 은 황국 일본이 根 本 이다 라는 초국가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중국 조선 등 주변 각국을 정복대상으로 하는 논지를 전개하였다. c)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會 澤 正 志 齋 ), 退 食 間 話 新 論 水 戸 學 의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退 食 間 話 중에서 神 功 皇 后 가 三 韓 을 정벌하고 부터 조선이 복종하였고, (중략) 히데요시는 조선을 치고 해외에 武 威 를 떨쳤다 며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평 가하였다. 그리고 에도바쿠후가 異 國 船 打 拂 令 (외국배가 접근해 오면 전부 격퇴하라)을 계기로 저 술한 新 論 에서는 조선침략 때 수군이 패배했던 교훈을 중시하였다. 이것은 水 戸 學 에 있어서 히 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한 관심사가 개국 전야의 국방 및 군사적 요청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d) 요시다 쇼인( 吉 田 松 陰 ), 1855( 安 政 2)년 4월 24일, 兄 梅 太 郞 宛 書 翰 ( 吉 田 松 陰 全 集 第 7 卷 ) 이미 페리가 내항하여 일본이 개국한 이 시기에, 요시다 쇼인은 일본 국내에서 전쟁의 무의미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39 를 역설함과 동시에 러시아와의 교역에서 손해를 본 부분을 조선 만주를 손에 넣음으로써 보충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제안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를 돌아보고 히데요시의 동아시아 정복 계획의 좌절을 유감으로 여겼다. 4. 가와구치 쵸쥬( 川口長孺 )의 征韓偉略 征韓偉略 의 내용은 ①무로마치(室町) 시대의 조일관계 ②노부나가(信長)가 지배할 당시에 히데요시는 이미 명 조선정복의 의지가 있었던 점 ③히데요시가 쓰시마의 소오씨(宗氏)에게 조 선복속 교섭을 命한 경위 ④제1차 조선침략의 전말 ⑤일명강화교섭과 그 파탄 ⑥제2차 침략의 전말을 기술하고 있다. 그 특징은 ① 朝鮮征伐記 西征日記 宗氏家記 征韓録 懲毖録 明史 兩朝平攘録 등의 기록류를 기본사료로 하고 적절히 사료비판을 가한 실증적인 밀 도가 높다는 점 ②전체적인 논조는 히데요시의 征韓偉績 을 칭송한 책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 나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한 기본적인 줄거리를 정리한 책이며, 근대에서 히데요시의 조선침 략사 연구에 대한 영향이 크고, 근대의 역사학은 가와구치 쵸쥬가 기술했던 줄거리에 토대를 두 고, 여기에 새로운 시각을 추가한 征韓偉略 을 적극적 혹은 비판적으로 섭취한 것이다. Ⅱ. 근대역사학에서 朝鮮征伐 사관과 文祿慶長 の役 연구 1. 朝鮮征伐 사관과 국위선양 a) 木下眞弘著 豊太閤征外新史 (1893년 간행) 이 저서에서 木下真弘은 1592년 조선침략의 발단에서 다음해 1월 평양전투 직전까지를 사료 를 이용하여 서술하였다. b) 松本愛重編 豊太閤征韓秘録 (1894年刊) 松本愛重의 이 작업은 사료집으로 堀正意의 朝鮮征伐記, 松浦鎮信의 家臣 吉野甚五左衛 門의 吉野日記, 立花宗茂의 家臣 天野源右衛門의 南大門合戰記, 花園妙心寺의 승려 天荆 의 西征日記 를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그 편찬 의도이다. 즉 ①지금까 지 일본은 원정 병사를 출병시킨 것이 3회이다. 그것은 神功皇后의 삼한정벌, 斉明天皇 시기의

4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百済救援,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이다. ②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은 조선을 정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 니라 조선에게 길을 빌려서 중국을 침공하고, 나아가 유럽도 정복하여 해외에 武威를 빛내려던 것이라고 히데요시의 위업을 평가하였다. ③그리고 때는 마침 청일전쟁이 일어난 직후였고, 히데 요시의 위업을 소개하고 그것을 청일전쟁의 戰意 앙양에 기여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2. 官學 아카데미즘과 朝鮮征伐 사관 a) 東京帝國大學史學會編 弘安文祿征戰偉績 (1905년 간행) 이 책은 13세기의 몽골침략과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한 논문집이다. 편찬 의 의도는 러일 전쟁의 戰意 앙양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앞의 松本愛重의 작업은 개인작업이었지만 이것은 대학 역사학회의 작업이다. 史學會 회장 시게노 야스쯔구(重野安繹)의 머리말에 의하면 몽골침 략과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의 위업을 칭송하고, 이 논문집을 러일전쟁에서 싸우는 군대에 위문품 으로 보내며, 아울러서 역사교육의 소재로서도 기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의도에 적합한 것일까? 예를 들면 鈴木圓二의 논문 蔚山籠城状況 에서는 울산 농성에 관 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의 문서를 소개한 후 식량부족에 괴로 워하면서 농성전에서 승리했던 사실을 예로 들면서, 오늘날(1905년 당시) 일본군은 러시아군과 싸워 연전연승하고 있다. 기요마사 시대와 비교하면 오늘날의 일본군은 무기의 진보, 작전계획의 치밀함이 있지만 그 무용은 기요마사의 용맹함에 뒤지지 않는다 고 서술하였다. 또한 芝葛盛의 논문 文祿役に於ける占領地収税の一斑 에서는 함경남도에서 나베시마 나오 시게(鍋島直茂)가 조선 농민이 조세징수를 위하여 작성한 朝鮮國租税牒 을 소개하고, 朝鮮國 租税牒 의 작성은 나베시마 등 일본군의 恩威가 철저하고, 백성들이 잘 복종한 것을 말해준다 고 하였다. 아울러서 八代國治의 논문 文祿役に於ける俘虜の待遇 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잡은 조선왕 자의 대우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 후 일명강화교섭 때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왕자를 서울로 보냈는데, 그때 왕자는 기요마사 및 나오시게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은 것을 감사 하게 여겼다. 이에 대하여 八代는 가토 기요마사도 나베시마 나오시게도 인자한 인물이며, 그것 은 일본 국민의 천성이다. 러일전쟁에서 포로에게도 이러한 동정을 베풀 것 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각 논문의 결론부분에서 戰意 앙양에 기여하는 서술이 있지만, 각 논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새로운 특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료의 취급방법과 논점 제시이다. 사료의 취급방법에 대하여 서술하자면, 앞에서 예로 든 가와구치 쵸쥬의 征韓偉略 의 사료는 거의가 기록류이다.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41 이 기록류에는 쓰시마 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를 따라서 종군했던 天荆의 西征日記, 자신 의 체험을 기초로 정리한 조선 영의정 柳成龍의 懲毖録 등 리얼타임(실시간)으로 작성된 사료 도 있다면, 朝鮮征伐記 宗氏家記 征韓録 明史 兩朝平攘録 등 나중에 편찬된 사료도 많 이 포함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弘安文祿征戰偉績 의 각론에서는, 예를 들어 田中義成 豊太閤が外征の大目 的を示したる文書 에서는 1592년(天正 20)5월 18일 히데요시가 関白 도요토미 히데쯔구(豊臣秀 次)에게 보낸 대륙정복구상 25개조의 覺覚書(前田尊經閣文庫所蔵文書)를 이용하고 있다. 또한 岡田正之의 文祿役に於ける我戰闘力 은 毛利家文書 鍋島家文書 등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조선침입 경위 등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 고문서는 일기와 마찬가지로 리얼타임(실시간)의 사료 이며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바로 이 점에서 지금까지의 연구보다는 진보된 측면이 보인다. 다음으로 논점 제시에 대하여 언급하자면, 그 첫 번째는 히데요시의 대륙출병의 의도 목적에 관해서이다. 히데요시는 일본 조선 중국의 3국뿐만 아니라 天竺 南蛮까지 정복하려는 의도가 있었고(田中義成 前掲論文 三上参次 文祿役に於ける講和条件 ), 여기에서 히데요시의 대륙출 병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각이 나온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의도가 문 서상에 나타난 시기는 1586년(天正 14)이라는 설이 나왔다(岡田正之 전게 논문). 이것은 1960년 대에 岩澤愿彦이 伊予小松一柳文書 를 이용하여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의도가 문서상에 나타났 던 시기는 1585년(天正 13)이라는 설을 주장할 때까지 정설이 되었다. 두 번째는 히데요시의 군사정책과 일본군의 행동에 관한 문제이다. 히데요시는 쓰시마의 소 오씨를 매개로 하여 조선이 복속될지 여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윽고 조선의 태도 여하를 불 문하고 조선으로 출병한 경위를 지적하였다(岡田正之前掲論文). 여기에서 豊臣政権 宗氏, 그리 고 조선의 3자 관계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제시되었다. 또한 침략 당초에 일본군이 조선 농민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농경에 힘쓸 것을 명령한 목적은 조세와 병량 징수(三浦周行 豊太閤の軍律 芝葛盛 전게 논문)에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조선 측에 의병을 봉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전쟁 국면 전체와 관련된 문제로 발전해 갔다. 세 번째, 연행된 조선인 포로 문제이다. 조선 陶工의 일본 연행이 일본 도예공업의 발달을 초 래하였다고 하지만(平井鏗二郎 文祿役の我が工芸に及ぼせる影響 ), 그것은 침략에 의한 문화 의 약탈 전파였다. 이 포로에 대한 연구는 나중에 内藤雋輔가 규명하였다. 네 번째, 침략에서 禪僧에 관계된 문제이다. 小早川隆景에 종군한 安國寺 恵瓊은 통역자 육 성을 위하여 조선인에게 일본의 언어와 풍습을 강요하고 조선 명의 서적을 강탈하였다. 더욱이 히데요시의 막부 아래 西笑承兌 玄圃霊三 惟杏永哲 등 京都 五山의 高僧이 비서 겸 참모로 수

42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행했던 점을 지적하였다(辻善之助 安國寺恵瓊の書簡の一節 ). 따라서 조선침략에는 武家 뿐만 아니라 禪宗의 禪僧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문제가 나온다. 다섯 번째, 무기 선박 등 군사기술에 관한 문제이다(岡田正之 전게 논문). 이 논점에 관해서 는 나중에 有馬成甫의 朝鮮役水軍史 와 일본참모본부의 日本戰史 朝鮮役 등에서 군사적 관 심으로 계승되어 간다. 여섯 번째, 도요토미 정권의 외교문서에 관한 문제이다. 히데요시가 필리핀 高山國에게 복속 을 강요했던 문서가 있다는 사실은 도요토미 정권의 대외관계를 일본 조선 명의 3국뿐만 아니 라 동아시아 전역을 포착하는 관점으로서 제시하였다(村上直次郎 豊臣秀吉フィリッピン諸島并に 台湾の入貢を促す). 이런 시각은 나중에 池內宏이 더욱 깊이 있는 논점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일곱 번째, 조선침략에 참전했던 여러 다이묘의 戰功 과시에 관한 문제이다. 시마즈 가문이 세운 高野山朝鮮陣の供養碑 는 전사한 시마즈 가문의 가신 및 조선 명의 병사를 공양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것이지만, 이 비석에서 시마즈 가문의 전라도 남원과 경상도 사천에서 세운 전공 을 과시하고 있다(黒板勝美 高野山朝鮮陣の供養碑 ). 나중에 시마즈 가문은 征韓録 을 편찬 했고 다른 여러 다이묘 가문도 동일한 의도로 戰功記를 편찬하는데, 여기에서 여러 다이묘 가문 에게 있어서 조선침략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하는 논점이 제시되었다. b) 辻善之助 海外交通史話 (1917년 간행) 田中義成 豊臣時代史 (1925년 간행) 辻 田中 2명은 이 저서에서 히데요시의 해외파병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즉 히데 요시는 명과의 勘合貿易 활동을 희망하였고, 조선에게 그 알선을 요구하였는데 조선이 이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조선을 征伐 하였다. 이것이 역사학에서 朝鮮征伐 의 논리를 주장한 것이었 다. 이윽고 이 학설은 池內宏 田保橋潔 中村栄孝 등이 비판하게 되었다. c) 補論, 朝鮮征伐 과 文祿慶長の役 의 호칭에 대해서 石原道博 文祿慶長の役 (1963년 간행)은 朝鮮征伐 에서 文祿慶長の役 까지 호칭의 변화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04~05년의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의 한일합방이 실현되자 (중략) 지금까지 적으로 보았 던 조선인이 일본의 동포가 되었기 때문에 (중략) 조선정벌이라는 표현을 버리고 文祿慶長의 役 이 되었다 (p.21)고 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다름 아닌 창씨개명의 강요를 비롯한 이른바 内鮮一 体 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지만, 이 이후 文祿慶長の役 이라는 호칭이 정착하게 되었다.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43 3. 池內宏 文祿慶長の 役正編 第 1 (1914년 간행) 文祿慶長 の 役別編 第1 (1936년 간행) a) 池內宏의 연구 구상은 ①조선침략 전체의 통론을 正編, ②침략 개시 후 일본군의 상세한 행동을 別編, ③사실 에 대해서 논증을 요하는 사항을 付編 으로 하여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사를 通史로 파악하려고 하였다. 이 작업의 특징은 미완성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히데요시의 전체적인 조선침략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b) 文祿慶長の役正編 第1 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히데요시의 의식 속에서 동아시아 정복의 스케줄이 어 떻게 구체화되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이케우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①1585 년 일본 전국을 평정한 후, 명을 정복할 생각이 있다는 것을 히데요시는 예수회 선교사에게 이야 기했다. ②큐슈의 시마즈씨 토벌을 앞둔 1586년, 히데요시는 安國寺의 에케이(恵瓊)와 구로다 요 시다카(黒田孝高)에게 시마즈씨를 복속시킨 후 명을 정복할 계획이 있다고 하였다. ③큐슈 정복 과 하카다(博多) 부흥으로 히데요시는 동아시아 각국을 복속시키는 구상을 세우고 있다. ④1589 년,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아시나 요시히로(蘆名義広)의 領地인 아이즈(會津)를 빼앗은 일에 대하여, 이를 비난했던 히데요시는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명까지 히데요시의 승인에 따라 領地 를 주는 견해를 비치고, 일본 통일의 연장선상에서 명 정복을 계획하였다. ⑤1590년, 조선국왕 앞으로 보낸 서한에 명 정복의 의도를 나타내었고, 조선이 앞장설 것을 명령했다. 두 번째, 히데요시의 해외출병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이다. 그 동기에 대해서 이케우치는 지금 까지 ①사랑하는 아들 쯔루마쯔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기분전환을 외국정벌에서 구하고 국 내통일의 여세를 해외로 전가하려던 것이라는 설(堀正意 林羅山), ②쓸데없는 병사를 동원했던 貪兵 驕兵說(貝原益軒), ③조선을 매개로 명에게 勘合貿易 부활을 요구했고, 조선의 거절로 조 선정벌에 이르렀다는 설(辻善之助 田中義成)을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케우치는 히데요시의 동기에 대해서 佳名을 삼국(唐 南蛮 天竺)에 드날리고 후세에 남기려는 공명심에 있다고 주장하 였다. 그리고 이케우치는 히데요시의 당면한 목적은 명 정복이며, 조선국왕의 江戶 방문과 복속은 그 첫걸음이었고, 히데요시에게 朝鮮征伐 의 의지는 없었다고 朝鮮征伐 설을 부정하였다. 세 번째, 쓰시마 소오씨(宗氏)를 통한 대조선 복속 교섭과 조선출병 수행에 이르는 사정이다.

44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여기서 히데요시와 조선 사이에 끼어 고민하는 쓰시마의 실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상 서술한 내용에 대해서 이케우치는 일본 조선 쌍방의 사료뿐만 아니라 스페인 포르투갈 등 南蛮 사료도 이용하여 깊이 있는 논증을 하였다. c) 文祿慶長の役別編 第1 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까지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①1592년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의 제1군이 부산에 상 륙하여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5월 3일에 동대문을 거쳐 서울로 난입할 때까지의 과 정, ②고니시보다 늦은 4월 17일 김해에 상륙한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이 5월3 일 남대문을 통해서 서울로 난입할 때까지의 과정, ③이어서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일행이 서울로 난입할 때까지의 과정 등을 그 루트를 밟아가며 명백하게 밝혔다. 이렇게 해서 서울을 점령한 후 일본의 여러 다이묘들은 분담해서 조선 팔도의 지배를 담당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가 평안도 및 황해도를 지배했던 실상이다. 즉 1592년 5월 중순에 평안도 지배를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 소오 요시토시, 황해도 지배를 맡은 구로다 나가마사, 함경도 지배를 맡은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은 임진강 전투 후 개성을 점령하고 황해도 寶山驛에서 기요마사 등은 함경도로, 고니시 구로다 등은 평안도로 향 했다. 그리고 6월 중순에 조선 국왕은 의주로 피난 갔고, 고니시 구로다 등은 평양을 점령하였 다. 이에 따라 구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로 돌아갔지만 고니시의 평안도 지배는 쉽게 진전되지 않았다. 그것은 평양 주변의 조선 吏民이 의병을 일으킨 것, 게다가 명의 遼東 副総兵 祖承訓의 평양 습격(이것은 고니시부대가 격퇴하였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군의 신속한 조선 구원 에 대하여 조선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은 그 대책에 쫓기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구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에서 엄격한 군정을 강행했지만 의병의 반격을 받아 그 지배 는 진척되지 않았다고 한다. 세 번째는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함경도 지배의 실태이다. 황해도 보산역에서 함경도로 향한 기요마사 등은 6월 중순 함경도 안변에 도착하였다. 그 후 기요마사 등이 취한 행동은 다음의 내용이다. ①7월 후반에 기요마사는 함경도 會寧에서 조선 왕자 두 명을 붙잡았다. 이것은 조선 왕실에 반감을 품은 반란민이 왕자 일행을 잡아서 기요마사에게 인도한 것이라는 점. ②기요마사는 두만강을 넘어 오란카이를 침입하였다. 기요마사의 오란카이정벌 에 대해서는 그가 오란카이에서 명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으려고 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케우치는 기요마사가

히데요시( 秀 吉 )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45 오란카이의 여진에게 어느 정도 武 威 를 보여주려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나베시마 나오시게가 함경도 지배를 목적으로 朝 鮮 國 租 税 牒 를 작성한 것에 대하여 앞에 서 예로 든 芝 葛 盛 는 나베시마 등 일본군의 恩 威 가 철저하고, 백성이 잘 복종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케우치는 인정 풍속이 다른 조선 농민을 일본의 軍 政 에 따 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그 한계를 지적하고, 함경도에서 조선 의병의 반격과 일본군의 농 성, 아울러서 함경도에서의 철수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이상 이케우치 히로시의 작업은 일본 조선 양쪽의 사료를 이용하여 언제, 누가, 어디에서, 무 엇을 했는지 상세하게 서술한 것이다. 이 연구의 특징은 실증주의에 철저했다는 점에 있으며, 그 방법과 사료의 취급은 후학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中 村 栄 孝 의 작업 이 있다. 4. 中 村 榮 孝, 慕 夏 堂 金 忠 善 に 關 する 史 料 に 就 いて ( 靑 丘 學 叢 12, 1933년 5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군 장병이 조선 측에 투항한 것을 降 倭 로 부르고 있다. 降 倭 로 유명 한 인물이 경상북도 友 鹿 洞 의 金 忠 善 이다. 18세기 말, 金 忠 善 의 자손들이 金 忠 善 의 연보와 기록 을 慕 夏 堂 文 集 으로 정리하여 金 忠 善 을 顕 彰 했는데, 이에 따르면 金 忠 善 은 沙 也 可 (Sayka)로 되 어 있고, 沙 也 可 의 일본 이름은 특정할 수 없다. 1592년4월, 沙 也 可 는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조선침략에 종군했는데, 조선의 東 土 禮 意 의 풍속을 보고 中 華 文 物 이 번성한 것을 흠모하여 부하를 이끌고 조선에 투항했으며 임진왜란에 서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조선국왕으로부터 관직과 김해 김씨라는 성을 받았으며,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종결 후에도 조선을 섬기고 慕 夏 堂 이라는 호를 받았다. 그 후 자손도 번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1910년 한일합방 무렵, 幣 原 坦 内 藤 湖 南 青 柳 綱 太 郎 등 제국주의 어용학자들이 우리 황국 일본에서 그러한 배신자가 있을 리 없다. 慕 夏 堂 文 集 은 지어낸 것이며 金 忠 善 은 매국노 라고 단정해 버렸다. 이에 대하여 1933년 당시 조선총독부 朝 鮮 史 편수관이었던 中 村 栄 孝 는 그의 작업과정에서 1597년 11월에 慶 尚 右 兵 使 金 應 瑞 휘하에서 일본군과 싸운 沙 也 可 를 朝 鮮 王 朝 實 録 속에서 찾아내고 沙 也 可 의 존재를 증명했던 것이다( 朝 鮮 王 朝 宣 祖 實 録 宣 祖 30년 11월 기유). 降 倭 의 존재를 역사에서 말살한다는, 역사가에게 있어서는 안 될 幣 原 坦 의 행동에 대하여 확고한 실 증으로 반론을 가했던 中 村 栄 孝 의 연구자세와 용기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4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5. 參 謀 本 部 編 日 本 戰 史 朝 鮮 役 (1923년 간행) 이 戰 史 편찬의 의도는 文 祿 慶 長 의 役 은 神 功 皇 后 이래의 外 征 이며, 국가의 위업을 해외에 서 크게 떨친 것 이라고 평가하고, 그러한 군사적 관심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 戰 史 의 특징은 1전쟁의 실태를 일본 조선 명의 사료에 입각하여 정확하게 복원한 것, 2 전쟁 경과(군비계획 군사절충 각 전투의 내용)의 구체적인 서술 3병제 병기 축성 병량 병참 위생 운수 통신 선박 군기 민정 등에 대해서 일본 조선 명 3국의 실태를 조사한 것 4관계문서 를 연대별로 정리했다는 점이다. Ⅲ. 전후 및 현대 역사학에서 조선침략 연구와 문제의식 1. 鈴 木 良 一, 豊 臣 秀 吉 (1954년 간행) 예전에 東 京 大 學 에서 이케우치 히로시에게 배운 鈴 木 良 一 은 지금까지의 학설사를 회고하고, 文 祿 慶 長 의 役 에 대한 연구는 있지만 침략과 저항의 역사 연구는 없다 고 하며 학설사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한 조선 백성의 투쟁을 평가하고 이케우치 학설의 비판적인 섭취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 논점은 다음과 같다. 1유럽 상업자본에 대항하여, 동아시아세계에서 勘 合 貿 易 과 왜구의 무역을 상회하는 무역을 희망했던 일본 상업자본의 요구가 있었던 점. 2농민봉기 이래 농민의 힘을 따돌리고, 영토 확장을 희망하는 여러 다이묘들의 요구가 있었 던 점. 3이 12가 히데요시의 휘하로 통일되고, 히데요시는 전제군주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 리고 도요토미 정권은 유럽 상업자본에 의한 식민지화의 위기에 대하여 민족적인 대처를 하고, 명의 책봉체재에 대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 기초에는 일본 민중의 에너지가 있었다. 도요토 미 정권은 이 에너지를 흡수하고 권력의 집중 강화를 꾀하여 일본 전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그 연장이 조선침략이다. 이것은 민중의 에너지를 기초로 한 민족의 힘을 계급지배의 문제로 바꾼 것으로서 민족적인 의의를 가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 鈴 木 의 작업이 지금까지 히데요시의 朝 鮮 征 伐 文 祿 慶 長 의 役 이라고 부르던 것을 히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47 데요시의 조선침략 으로 규정지은 최초의 작업이다. 2. 中村榮孝, 日鮮關係史 の 硏究 (上 )(中 )(下 ) (1969년 간행) 일찍이 조선총독부에서 朝鮮史 편수에 관여하고 있던 中村栄孝는 그때 수집했던 일본 조 선 명 관계 사료를 많이 이용하여 13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일본 조선의 대외관계사를 정리 하였다. 그 中卷이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한 것이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해서 中村은 明帝國의 출현, 명의 책봉체제와 그 아래에 있는 일 본 조선의 관계와 책봉체제의 전개 실태를 서술하고, 그 후에 전개되는 동아시아 통상권의 변모 와 왜구에 대하여 언급하고,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일본의 체제변혁 전쟁 으로 규정하였다. 더욱이 中村은 명 조선의 외교문서인 事大文軌, 이순신의 乱中日記 壬辰状草, 柳成龍 의 懲毖録 등 조선 측 사료에 대해서 면밀한 고증과 해설을 행하고 있다. 3. 內藤雋輔, 文祿 慶長 の 役 における 被擄人 の 硏究 (1976년 간행)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정치 외교 군사에 관한 것이 주류였다. 그래 서 内藤은 조선침략이 일본 조선 양국의 민중생활을 파괴했던 역사적 사실을 체계적으로 규명하 는 일에 문제의식을 설정하였다. 内藤의 작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일본에 연행되었던 조선 被虜人의 실태연구이다. 조선 피로인 중에는 주자학자 도 공 농민 등이 있으며, 그들 각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 점을 극명하게 추구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豊後 臼杵의 다이묘 太田一吉에게 医僧으로 종군했던 安養寺의 승려 慶念의 朝 鮮日々記 의 소개와 승려 慶念의 戰爭觀에 대한 서술이다. 朝鮮日々記 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침략이 일본 조선 양국 민중에게 준 비참한 실태(예를 들면 蔚山 농성전에서 마치 지옥 같은 모습)를 사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内藤의 작업은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연구 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4. 岩澤愿彦, 秀吉の 唐入 りに 關 する 文書 ( 日本歷史 163. 1962년 1월) 히데요시가 関白이 된 1585년(天正 13), 히데요시는 가신 히도츠야나기 스에야스(一柳末安) 앞으로 편지를 보내 히데요시로서는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정복할 예정이다 라고 썼다. 岩

48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澤은 이 서신을 토대로 히데요시의 대륙정복 의도가 문서상에 보이는 것은 関白 취임 직후인 15 85년이라고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1586년(天正 14)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岡田正之 전게 논 문). 히데요시가 대륙정복의 의도를 품었던 것이 関白에 취임한 직후라면 도요토미 정권은 성립 당시부터 대륙정복을 노리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도요토미 정권의 성격에 관한 문제도 된다. 더군다나 이 서신은 히데요시의 가신들 사이에 영지확장을 바라는 움직임과, 이에 수반하 여 가신들 사이에 일어나려고 하는 대립을 회피하기 위해서도 대륙정복의 의도를 공표했다는 것 이다. 이 岩澤의 작업에서 히데요시는 왜 대륙정복을 노렸던 것일까 하는 원인론이 새롭게 문제 가 되었다. 5. 佐 々木潤之介, 幕藩制國家 の 成立 (北島正元編, 體系日本史叢書 2 政治史 Ⅱ 수록. 1965년 간행) 岩澤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여서 佐々木는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과정에 있어서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部將 사이의 대립에 주목하였다. 즉 ①이전부터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 있던 도쿠가와 이 에야스(徳川家康)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 일파 ②도요토미 정권 의 관료적 입장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일파 ③히데요시 에게 총애를 받았던 다이묘로서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일파, 이들의 대립이 있었던 점. 더욱이 히데요시와 결탁했던 특권상인들의 동아시아 무역 진출 제패 요구가 히데요시의 대 외정책 속으로 침투했다고 한다. 6. 山口啓二, 日本 の 鎖國 ( 岩波講座 世界歷史 16 1970년 간행) 왜 히데요시는 대륙정복을 노렸던 것일까 하는 원인론에 대하여 山口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동에서 설명하였다. 즉 ①16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은 산출 조선의 면포 생산 명의 생사산 업이 활발해졌고, 그 교환을 원하는 무역관계의 전개와 요구가 왜구의 밀무역과 그곳에서 접촉 한 포르투갈의 유럽 상업자본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휘하에 두고 각각의 국왕을 책봉하여 조공무역만을 허락하는 국제관계는 크게 후퇴했으며, 동아시아에 군림했던 명의 국제적 지위는 저하되었다. ②도요토미 정권은 극히 짧은 기간에 국가권력을 장 악했는데, 그 수단은 제한 없는 전쟁체제였고, 그것이 해외 제패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권력 과 결탁한 무역상인도 있어서 명 정복 구상을 내비쳤다는 것이다.

히데요시( 秀 吉 )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49 Ⅳ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연구의 과제 이상으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하여 일본에 있어서 학설사의 흐름을 개관하였다. 이와 같은 학설사를 토대로 앞으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연구에서 어떠한 관점을 생각할 수 있는지, 그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첫째는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관한 원인론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동도 시야에 넣고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둘째는 軍 事 萬 端 에 관한 문제이다. 군수물자로서의 무기 장비 兵 糧 연료, 아울러서 선박과 운송. 군사행동으로서는 각 전투의 경과, 축성, 군사조직의 작성 등. 또한 의료의 실태 등. 이것들 을 일본 조선 명 3국의 사례에 관하여 깊이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개개의 군사적인 상태는 각 사회와 국가의 특질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군정과 민중지배의 문제이다.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조선 농민을 생업에 종사시키 고 군량을 수탈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 민중이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학살을 감행하였고 게다 가 코까지 잘라 갔다. 일본에서도 検 地 의 강행으로 연공 수탈이 엄격해지고 농민은 도망갔다. 이 들의 실례를 더욱 검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네 번째로 전쟁과 민중의 문제가 있다. a) 의병. 일본군의 군정에 대하여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의병연구는 한국에서 상당히 진 전되어 있지만, 일본군의 움직임과 아울러서 다시 한 번 그 경위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함경북도의 경우에 관해서 제언하자면, 鄭 文 孚 의 農 圃 集 을 일본 측 사료인 九 鬼 文 書 등과 함께 검토하면 기요마사의 함경도 지배와 의병전투의 전개에 대해서 보다 풍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b) 조선군을 지탱했던 민중에 대하여. 임진왜란에서 싸운 名 將 은 의병장 郭 再 祐, 都 元 帥 権 慄, 水 軍 統 制 使 李 舜 臣 등이 유명한데, 이 들을 지탱했던 민중이 있었다. 李 舜 臣 의 乱 中 日 記 을 보면 그 휘하에 船 大 工 石 工 弓 匠 箭 匠 冶 匠 등 많은 職 人 이 있었고, 그들은 수군의 군수물자 제조와 보수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軍 船 의 노를 젓는 格 軍 ( 水 夫 )에 대하여 언급하자면, 1595년 3월의 시점에서 조선 수군 전체의 射 手 ( 弓 手 砲 手 )는 1,228명, 梢 水 軍 ( 船 頭 格 軍 )은 5,881명이며( 萬 曆 23년 3월 4일 朝 鮮

50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國王回咨 事大文軌 12), 梢水軍(船頭 格軍)의 인원수가 射手의 4.5배에 상당하였다. 즉 수군의 구성원 중에는 射手를 상회하는 다수의 格軍이 그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格軍 인원 수의 다소가 해전 승패의 열쇠를 쥐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 格軍은 어떠한 계층 신분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을까? 格軍은 鮑作人 노비 土兵 그리고 降倭로 구성되었다. 이 경우에 鮑作人을 주목하고 싶다. 鮑作이라는 것은 원래 바다에서 전복을 잡는 자를 말하지만, 亂中日記 계사3월의 메모에는 鮑作 이라고 기록한 부분에 말 소 도장이 있으며, 그 오른쪽에 沿海人 이라는 注記가 있다. 이 사실에서 연해를 생업의 터전으 로 삼는 해안가 거주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鮑作人은 원래부터 육지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조 선정부로부터는 무법자적인 존재로 취급당했던 것이다. 그런 鮑作人이 조선 수군의 格軍으로 편 성되었던 것이다. 이 경우 鮑作人은 단순한 格軍이 아니며, 1592년(宣祖 25) 9월 1일의 부산포해 전의 전황보고에는 全羅左水営 선박의 사상자에 沙工 鮑作 金叔連 의 이름이 있고(李舜臣 壬 辰状草 11), 鮑作人 중에는 沙工(船頭)을 담당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格軍으로 징발되었던 鮑作人은 전투의 공포와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도망을 시도하거나 일반 병사의 도망을 방조하는 등 성가신 존재였지만, 李舜臣은 조선 남해안의 수로를 잘 알고 있는 鮑作人을 기용하지 않고서 는 해전에서 승리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사례는 조선 민중이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인데, 다양한 계 층의 조선 민중들이 왜란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검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c) 被虜人과 降倭에 관하여 被擄人에 관하여는 앞에서 예로 든 内藤雋輔의 작업이 있다. 그에 따르면 기록을 남길 능력 을 가졌던 주자학자의 경우에는 명백히 밝힐 수 있지만 陶工과 농민에 관해서는 사료적으로 한 계가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서 포로로 잡힌 陶工과 농민의 실태를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降倭(조선 측에 투항한 일본 장병)의 사례로서 1598년 都元帥 権慄이 降倭 要汝文(与右衛門) 을 조사한 供述書가 있기 때문에 그 요점을 소개해 두겠다( 朝鮮王朝宣祖實録 선조 31년 5월 기축) ①要汝文(与右衛門)의 나이는 30세이고 弓矢와 放砲의 기량을 가진 島津씨의 병졸이었다. ②부모는 타계하였고, 형제는 모두 왜란에 연루되었으며, 要汝文(与右衛門)은 천애고아의 몸 이 되어 있었다. ③要汝文(与右衛門)은 혹독한 泗川의 축성공사에 동원되었는데, 그때 조선 측이 降倭를 후하

히데요시( 秀 吉 )의 조선침략에 대한 학설사와 연구과제 51 게 대우한다는 말을 듣고 투항했다고 한다. 혹심한 축성공사를 피하여 降 倭 가 된 사례는 그 밖에도 볼 수 있다. 1696년 1월, 加 徳 島 의 시마즈부대에서 병졸 5명이 李 舜 臣 밑으로 투항했는데, 그 이유는 島 津 忠 恒 의 성격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한다( 亂 中 日 記 丙 申 정월 8일). 이때 시마즈씨는 加 徳 島 에서 새롭게 倭 城 을 축조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개별적으로 도주하여 투항한 자들은 조선 수군에서 格 軍 등의 노역에 이용하였다. 이 것은 일본 민중이 왜란에 동원되었던 말로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에 비하여 金 忠 善 = 沙 也 可 처럼 부하를 인솔하고 적극적으로 집단 투항했던 자는 반란이며, 조선 측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전공을 올리고, 집단부락을 만들어서 정주했으며, 처자를 거느리 고 경지를 보유하여 그곳을 생활의 근거지로 삼았다. 降 倭 에는 이처럼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이 러한 관점에서 항왜의 실태를 규명하는 작업도 다음 과제의 하나일 것이다. 이처럼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은 일본 조선 쌍방의 민중에게 어떠한 것이었을까? 민중은 전란 속에서 어떻게 대처했던 것일까? 이와 같은 관점에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 을 것이다. 다섯 번째로 문화전파의 문제가 있다.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결과 조선의 도자기 제조기 술 인쇄기술이 일본에 전해졌다. 게다가 조선과 명의 서적이 대량으로 일본에 들어왔다. 예전에 일본 文 部 省 은 교과서 검정에서 히데요시가 조선을 공격했지만 그 결과 문화도 전했다는 점을 균형을 맞춰서 교과서를 집필하라고 지도했지만, 문화의 전파라는 것이 반드시 무력에 호소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문화의 전파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섯 번째로 역사인식의 문제이다. 이것은 첫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다시 몇 가지 관점을 추 가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의 관점을 연구한 다음에 결론적으로 정리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발표문

東 아시아 國 際 關 係 에서 본 壬 辰 倭 亂 55 東 아시아 國 際 關 係 에서 본 壬 辰 倭 亂 -전쟁 이후 조선을 둘러싼 明 淸 日 關 係 를 중심으로- 韓 明 基 (명지대 사학과) 머리말 1368년 明 이 건국된 이후 상당 기간 동안 동아시아 세계질서는 朝 貢 - 冊 封 체제 에 입각하여 전개되었다. 夷 狄 王 朝 인 元 을 몰아내고 漢 族 王 朝 를 부활시킨 明 은 전통적 中 華 思 想 에 기반을 두고 주변 諸 國 에 朝 貢 할 것을 종용했다. 그것은 자국 내부의 봉건적 신분관계인 君 臣 의 分 을 대외적으로 확대시켜 명 중심의 새로운 역내 질서를 형성하려는 시도였다. 그와 관련하여 명은 주변 제국의 주권자 명의로 파견된 조공 사절단의 무역만을 정상적인 무역으로 인정하고 그 밖 의 외국상선의 來 航 과 密 貿 易 을 금지하는 한편, 중국인의 해외도항과 해상무역도 금지하는 海 禁 政 策 을 시행했다. 명은 또한 주변 諸 國 이 자국에 반항하는 자세를 보일 경우, 朝 貢 을 거부하는 것을 보복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 조선은 명이 주도하고 있던 조공-책봉 체제 에 순응했다. 일본 또한 足 利 義 滿 이 1401년 명의 책봉을 통해 勘 合 을 받은 이후-다소의 우여곡절이 없지는 않았지만-1547년까지 모두 19차례 의 遣 明 船 을 파견하는 등 명 중심의 국제질서 속의 일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명은 자국의 안보를 가장 크게 위협하고 있던 몽골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조공-책봉 체제 를 활용하려 시도했다. 명은 몽골의 오이라트도 조공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무역 규모가 적은 것에 불만을 품은 오이라트의 에센은 1449년 명을 침공하기도 했다. 명은 또한 동북 지역 1) 佐 久 間 重 男, 1996, 明 淸 からみた 東 アジアの 華 夷 秩 序 思 想 796 ( 岩 波 書 店 ), 33쪽.

56 壬 辰 倭 亂 과 東 아시아 世 界 의 變 動 의 女 眞 을 초무하고 그들을 몽골을 견제하는데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여진족 의 首 長 들에게 벼슬 을 주어 衛 所 制 度 속으로 끌어안고, 勅 書 를 주어 조공을 하도록 조처했다. 2) 이렇게 명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었던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체제 속에서 조선은 명에 대 해 가장 忠 順 한 藩 國 으로 자임하고 있었다. 3) 나아가 조선은 명 중심의 조공-책봉 체제 속의 우등생 이라는 것을 주변 제국에 대한 우월의식의 근거로써 제시하기도 했다. 한 예로 黃 廷 彧 (1 532~1607)은 조선이 중국의 諸 侯 國 가운데 으뜸이며 중국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나라 라 며 일본도 조선을 본받으면 중국이 內 附 를 허용할 것 이라고 강조한 바 있었다. 4) 조선의 이 같 은 우월의식은 몽골과 여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통적인 華 夷 觀 을 토대로 그들을 오랑캐 로 여기면서 각각 胡 元, 奴 賊 등으로 지칭하면서 조선보다 한 단계 낮은 국가로 下 視 하고 있 었다. 5) 그렇다면 임진왜란은 명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나아가 명 중심의 조 공-책봉 체제 속의 충순한 번국을 자임했던 조선의 대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결과적으 로는 실패했지만 假 道 入 明 을 표방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 臣 秀 吉 )의 조선 침략은 동아시아 정세 전반에 전방위적으로 파장을 몰고 올 수밖에 없었다. 한 때 자신들의 朝 貢 國 이었던 일본의 도전에 의해 藩 國 조선은 물론 自 國 의 안위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 명은 조선에 군대를 보내 참 전했다. 조선을 돕는다 는 명목으로 대규모 명군의 조선 참전이 이루어지면서 朝 明, 朝 日, 明 日, 明 金 관계 등 동아시아 국제관계 전체가 연쇄적으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 었다. 이에 필자는 임진왜란을 통해 야기된 동아시아 국제관계 변화의 추이를-조선을 중심에 놓고-개관해 보고자 한다. 1. 임진왜란과 朝 日 關 係 조선왕조는 일본의 무고한 침략 때문에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것은 인적, 물적, 그리고 정 신적 차원에서 조선왕조의 기반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광범위한 것이었다. 6) 따라서 임진왜란 이 2) 岸 本 美 緖, 1998, 東 アジア 東 南 アジア 傳 統 社 會 の 形 成 岩 波 講 座 世 界 歷 史 13. 3) 당시 일본과 暹 羅, 占 城, 眞 臘 등은 명에 조공하려면 반드시 勘 合 을 소지해야 했지만 조선과 琉 球 는 국왕의 表 文 만 지참하면 가능했다.( 佐 久 間 重 男, 1996, 위의 글). 4) 黃 廷 彧, 芝 川 集 권3, 擬 與 日 本 關 白 書. 弊 邦 以 中 國 外 諸 侯 之 首 萬 邦 朝 會 之 列 無 有 居 弊 邦 之 先 者 以 禮 義 之 所 自 出 也 故 不 敢 卑 夷 之 冠 帶 之 賜 先 及 焉 貴 國 一 從 禮 義 悉 效 弊 邦 之 爲 則 天 朝 亦 必 許 款 塞 內 附 之 誠 矣 5) 한명기, 2009, 정묘 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365~375쪽.

다. 9) 조선은 이 같은 상황에서-명군 철수 이후 單 弱 해진 국세를 고려하여-명의 위세를 빌려 일 東 아시아 國 際 關 係 에서 본 壬 辰 倭 亂 57 후 조선이 일본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일본인들을 증오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란 당시, 서울을 점령했던 일본군이 宣 陵 과 靖 陵 을 파헤쳤던 것은 일본인들의 야만성과 무도함을 상징하 는 것이자 조선이 반드시 되갚아야 할 행위로 치부되었다. 이제 일본은 조선의 生 靈 을 함부로 죽이고 陵 寢 을 파헤친, 영원토록 복수해야 할 怨 讐 가 되었고, 조선 사람들은 그 일본에 복수하 기 위해 臥 薪 嘗 膽 할 것이 강조되고 있었다. 7)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對 馬 島 를 중심으로 일본 측이 국교와 무역 재개를 거듭 요청하는 와중 에 조선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왜란을 통해 생긴 원한이나 민족적 감정을 생각하면 일본 과의 국교 재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을 통해-일본에 대한 적개심 을 갖게 되었던 한편에서-일본이 군사적으로 매우 강하다는 사실도 절감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7년 동안 朝 明 聯 合 軍 이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내는 바다를 건너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고 비판했던 李 山 海 (1539~1609)는 일본을 가리켜 천하로서도 당 해내기 어려운 존재 라고 평가했다. 8) 일본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품었으되, 무력이 강한 그들의 再 侵 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쉽사리 교류를 끊을 수도 재개할 수도 없는 상황, 바로 거기에 조선의 고민이 존재했 다. 조선은 결국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한편에서 일본의 재침 위협을 늘 염 두에 두고, 그것을 방어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데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대일정책의 요체는 일본 사정을 정밀하게 살피면서 倭 館 에 恒 居 하는 일 본인들을 다독거려 사달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것, 조선 사정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 는 것,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여 영남 諸 屯 의 방어 태세와 水 軍 을 정비하는 것 등으로 집약되었 본측의 협박을 차단하려는 정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측이 협박을 일삼는 한편에서, 犯 陵 6)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은 조선의 피해 양상에 대한 최근의 구체적인 분석으로는 閔 德 基, 2005, 임진 왜란 중의 납치된 조선인 문제 ; 문숙자, 2005, 임진왜란으로 인한 생활상의 변화 ; 전경목, 2005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은 문화재 피해 상황 (모두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한일관계사연구논집 5 所 收, 景 仁 文 化 社 )가 대표적이다. 7) 宣 祖 實 錄 권212, 선조 40년 6월 辛 亥. 史 臣 曰 惟 彼 倭 奴 燒 夷 我 原 陵 魚 肉 我 生 靈 乃 九 世 必 報 之 讐 我 國 君 臣 所 當 臥 薪 嘗 膽 未 嘗 食 息 忘 此 讐 8) 李 山 海, 鵝 溪 遺 稿 권5, 陳 弊 箚. 然 以 臣 計 之 則 方 張 之 北 賊 恐 不 如 已 退 之 倭 寇 也 何 者 倭 奴 之 兇 鋒 天 下 之 所 難 當 也 安 有 八 年 屯 據 動 天 下 之 兵 而 猶 不 得 一 番 得 利 終 使 揚 揚 渡 海 者 乎 臣 嘗 中 夜 不 寐 憂 慮 萬 端 9) 浦 廉 一, 1934, 明 末 淸 初 の 滿 鮮 關 係 上 に 於 ける 日 本 の 地 位 ( 一 ) 史 林 제19권 제2호, 260~261쪽.

58 壬辰倭亂과 東아시아世界의 變動 賊을 송환하는 등 성의를 표시하자 조선은 결국 覊縻 차원에서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고 通信 使를 파견하기로 하는 등 기존의 관계를 회복하기로 결정했다.10) 이에 따라 1607년(선조 40) 回 答兼刷還使의 명목으로 呂祐吉, 慶暹, 丁好寬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파견했다. 통신사의 파견 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이 원한과 적개심을 억누르고 일본과의 우호 를 택한 것은 대륙 정세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부터 만주에서 崛起했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이끄는 建州女眞의 세력이 더욱 커지면서 조선의 관심은 서북방을 향해 집중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다. 1610년(光海君 2), 大北派의 영수 鄭仁弘이 누르하치와의 通好를 반대하는 箚子를 올렸을 때, 광해군은 일본과의 和議가 불가피했었던 사례를 들어 반박했다. 광해군은, 함께 하늘을 이 고 살 수 없는 원수 인 일본이지만 조선의 역량을 고려하면 통신사를 보내 교통하는 것은 불가피 했다고 지적했던 것이다.11) 조선은 통신사를 보내면서 被擄人 刷還 을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1643년까지 조선으로 송환된 피로인은 6천여 명에 불과했다. 그 와중에 일본의 德川幕府는 江戶時代를 통해 서 來日했던 조선 통신사를 宗主國에 대한 조공사절 로, 조선 국왕의 선물을 貢物로서 선전하면 서 막부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재료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일본에서는 조선을 朝貢 國 으로 치부하는 인식이 높아져 갔다.12)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품게 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접어야만 했던 상황은 이후에 도 이어졌다. 건주여진의 세력이 더욱 커지고 그와 맞물려 명의 쇠퇴가 현저해지고 있던 상황에 서 조선은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의 胡亂을 겪게 되었다. 조선이 두 차례의 호란을 통해 淸에 게 굴복하면서 조선의 대일인식과 정책은 또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대일 적개심은 상당 부분 수그러들었고, 일본을 友邦 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일본에 請援하여 청을 견제해야 한다는 以倭 制淸論 까지 대두되었다.13) 요컨대 後金의 굴기로 대표되는 임진왜란 이후 북방 정세의 격변을 통해 조선의 대일외교는 유화적인 기조로 흘러갔던 것이다. 10) 孫承喆, 1994, 朝鮮時代韓日關係史硏究 (지성의 샘), 119~145쪽. 11) 鄭仁弘, 來庵先生集 권7, 辭職箚. 答箚字曰 予雖昏病 豈不知大義乎 試以已往之事言之 倭奴掘 拔先陵 是不共戴天之深讐 而相勢量力 不得已遣使通信 至今賊徒恒留邊鎭 多至千餘 而秀吉非犯順 之賊乎 此豈樂爲 勢有不得已也 12) ロナルド トビ, 2008, 鎖國 という外交 (東京, 小學館), 50~51쪽. 13) 한명기, 앞의 책(2009), 352~3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