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에 있어서 농촌진흥운동기의 경신숭조( 敬 神 崇 祖 ) -조선총독부의 신사정책과 관련하여- 아오노 마사아키( 青 野 正 明 ) 모모야마가쿠인대학( 桃 山 学 院 大 学 ) 번역:이화진 들어가는 말 본고에서는 주로 1930 년대 전반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실시된 농촌진흥운동 1 에 있어서, 신사정책( 神 社 政 策 )과 관계가 있다고 예상되는 농본주의( 農 本 主 義 )적인 경신숭조( 敬 神 崇 祖 ) 를 찾아내어 분석한다. 즉, 농촌에 창출된 관제( 官 製 )의 촌락제사 및 중견인물( 中 堅 人 物 ) 양성시설에서의 정신주의를 찾아내어, 그것의 실태를 밝히면서 경신숭조 의 개념을 풀어간다. 이 작업은 이 시기의 신사정책을 해명함에 있어서는 중요한 전제적 연구라고 생각된다. 먼저 신사정책 연구사 속에서 본고의 자리매김을 해 보겠다. 1936 년에 일련의 신사관계법령이 제정 개정되고, 그 법의 정비에 의해 신사제도가 개편되었다. 신사증설에 맞춘 이 개편으로 인해 신사의 계층제도가 법적으로 정비되고, 신사의 관리 통제를 강화하면서 대중 동원을 위한 기반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신사를 국폐소사( 国 幣 小 社 )로 열격( 列 格 )하는 것도 법적 준비가 정비되게 되었다. 이 신사제도 개편에서는 그와 함께 열격되어 가는 국폐소사에 천조대신( 天 照 大 神 ) 과 함께 국혼대신( 国 魂 大 神 ) 이 합사( 合 祀 )된 점도 중요한 포인트의 하나가 된다. 국혼대신 이라는 명칭으로 조선의 토착신이 모셔져 있는데, 그 정책 결정과정과 봉재( 奉 斎 )된 이유, 목적, 논리 등을 밝히는 것이 연구사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2. 1)농촌진흥운동은 농산어촌의 자력갱생 을 슬로건으로 세운 정책으로, 1932 년 9 월에 총독부에 위원회가 설치된 다음 해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갱생지도부락 을 선정하고, 그 부락 의 각 농가마다 영농개선( 営 農 改 善 ) 과 생활개선 을 위한 농가갱생 5 개년 계획을 세워서 실시시킨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근대주의적인 정책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수탈체계의 합리화를 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근대주의와 함께 일본화를 밀고 나갔던 것도 특징이 될 것이다. 즉, 계획의 실시를 통해서 촌락에 행정력이 침투되거나, 황국농민( 皇 国 農 民 ) 이나 경신숭조 등의 정신주의에도 중점을 두게 하거나 하는, 이른바 <일본적인 근대화>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 문제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농촌진흥운동에 접근한다. 농촌진흥운동에서의 농본주의적 정신주의는 신사정책으로 전개해 간다는 상정하에, 촌락재건( 村 落 再 建 ) 이라는 근대주의의 정신적 부분을 짊어지는 형태로 유사일본적 전통 이 만들어져 가는 단서이기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농촌진흥운동은 1937 년의 중일전쟁 발기 후인 전시( 戦 時 )체제하에서 재편되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대상시기를 그 이전까지로 하겠다. 더욱이, 농촌진흥운동의 연구사나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타가키 류타( 板 垣 竜 太 ) 解 説 (이타가키 류타 監 修 解 説 自 力 更 生 彙 報 朝 鮮 総 督 府 農 業 政 策 史 料 ゆまに 書 房,2006 年 의 제6권에 수록)이 참고가 된다. 2)예를 들면, 졸고 朝 鮮 総 督 府 の 神 社 政 策 1930 年 代 を 中 心 に ( 朝 鮮 学 報 第 160 輯,1996 年 7 月 )는 신사제도 개편의 정책 결정과정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국혼대신 봉재를 이른바 쿠니유즈리( 国 譲 り)신화의 논리로 설명하고, 부락제( 部 落 祭 ) 이용에도 필드워크까지 해서 언급했지만, 실증성이 결여된 것이였다. 선행연구의 이러한 문제는 나중에 나오는 연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가 코우지( 菅 浩 二 ) 日 本 統 治 下 の 海 外 神 社 - 朝 鮮 神 宮 台 湾 神 社 と 祭 神 ( 弘 文 堂,2004 年 )에는, 1930 년대의 조선을 제국 의 한 지방으로 간주하는 구조로 여겨, 국폐소사의 제신( 祭 神 )에 관해서 천조대신 을 국가성( 國 家 性 ), 국혼대신 을 토착성이 결여된 지방 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그 자리매김의 옳고 그름은 별개로 하고, 1930 년대 전반의 통치정책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는 난점이 있다. 조선신궁( 朝 鮮 神 宮 )의 제신논쟁에 이르는 과정에서,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서 일선동조론( 日 鮮 同 祖 論 ) 의 논리를 1
본고에서 분석하는 농촌진흥운동에 있어서의 경신숭조 와 그 실천으로서의 이른바 <관제( 官 製 )> 촌락제사를 전제로 해서, 본고와 같은 시기에 발표한 졸고 3 에서는 당초는 농촌진흥운동의 타개책으로서 입안( 立 案 )작업이 시작된 심전개발운동( 心 田 開 発 運 動 ) 의 정책 결정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이 분석 속에서 심전개발운동 의 일환으로서 신사참배와 신사제도개편의 입안이 급격하게 시작된 것을 입증했다. 따라서 신사정책 연구사에 있어서, 본고는 이 졸고의 전제적 부분을 고찰한 연구가 된다. 본고의 제목으로 내건 경신숭조 4 에 대해 설명하겠다. 신사비종교론( 神 社 非 宗 教 論 ) 을 원칙으로 하는 조선총독부가 신사정책에서 이용한 경신숭조 보다도 그 전에, 농촌진흥운동의 개시와 함께 일본 내지( 内 地 ) 로부터 도입된 농본주의 속에 경신숭조 가 이용되고 있었다. 그것이 1935 년의 국체명징성명( 国 体 明 徴 声 明 )에 대응하여 심전개발 정책의 경신숭조 로 흡수됨에 따라, 신사정책의 이데올로기로서 이어져가는 것을 앞서 소개한 졸고에서 논하고 있다. 1936 년 1 월에 총독부에서 개최된 심전개발위원회에서의 협의 내용은 심전개발시설에 관한 건 5 으로 정리되었다. 그것에 게재된 심전개발운동 의 목표는 다음과 같으며, 국체관념 다음으로 경신숭조 를 내걸고 있다. 하나. 국체관념을 명징( 明 徴 )한다. 둘. 경신숭조의 사상 및 신앙심을 함양한다. 셋. 보은, 감사, 자립의 정신을 양성한다. 위의 두번째 경신숭조의 사상 바로 뒤에 있는 신앙심 이란 공인종교와 이용 가능한 여러 신앙 들을 가리키고, 이 양자를 국체관념 에 따른 형태로 함양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필자는 통치정책에 있어서의 심전개발 정책의 자리매김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즉, 농촌진흥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국민통합을 위해서 조선 민중의 심의( 心 意 )세계의 재편성을 구상한 총독부가 경신숭조 를 기반으로 하여 신사에 대중 동원을 꾀하는 한편, 찾아낸 점을 비롯해, 이 책은 많은 성과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방법론의 모더니즘 론으로 환원된 제신론은 제신에 관한 정책의 경향성을 설명하기에는 유효하지만, 그 정책의 내재적인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총독부의 정책적 의도를 검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위태로움을 느낀다. 또, 천조대신 이나 국혼대신 에 관해서는 별고에서 논하려고 생각한다. 한편, 야마구치 코이치( 山 口 公 一 ) 植 民 地 期 朝 鮮 に お け る 神 社 政 策 と 朝 鮮 社 会 ( 一 橋 大 学 博 士 学 位 論 文,2006 年 3 月 )는, 1920 년대에 등장한 신사비종교론 에 근거하여, 신사의 국민의례 가 1930 년대 이후는 부상( 浮 上 ) (1931~1936), 강요 (1937~1945)로서 전개된다는 구조로 많은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이 구조를 이용하여 만주사변에 잇달아 제국 내의 국민적 일체성 의 필요성을 깊게 했다는 것도 한 요인이고, 총독부는 신사제도를 개편해서 국민통합 을 이루어내는 기반을 제도적으로 완성시켰다고 상황분석적인 설명을 한다. 이 시기의 신사정책에 제한한다면, 역시 야마구치도 통치정책에 대해서 충분히 파헤치지는 못하고, 국민의례 를 강조하는 피상적인 결론이 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3)졸고 朝 鮮 総 督 府 の 農 村 振 興 運 動 期 における 神 社 政 策 心 田 開 発 政 策 に 関 連 して ( 国 際 文 化 論 集, 桃 山 学 院 大 学, 第 37 号,2007 年 11 月 발행예정) 4)소노다 미노루( 薗 田 稔 ) 하시모토 마사노부( 橋 本 政 宣 ) 編 神 社 史 大 辞 典 ( 吉 川 弘 文 館,2004 年 )의 경신숭조 에 의하면, 두가지 견해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나라의 신화이래의 신들에 대한 경신과 조상신에 대한 숭배를 의미하고 일본 및 신도의 본래 고유의 신앙사상의 표현이라고 한다 는 견해이다. 또 하나는 경신과 숭조와는 원래 다른 것이고, 경신은 신도의 고유이지만, 숭조는 유교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에 유래하는 것으로, 그 가조숭배( 家 祖 崇 拝 )와 조령조제( 祖 霊 弔 祭 )에 근거를 두는 것. 이것은 중 근세의 신불습합, 신유일치( 神 儒 一 致 ), 신유불삼교조화 등의 사상이 일반에 보급 침투됨에 따라서 경신과 숭조 양자는 구별없이 수용되게 되었다는 견해 이다. 또 전쟁 중의 일본정신 고취 속에서 다시 경신과 숭조의 차이/동일을 일부에서 문제삼아 양자의 일체관이 설명되었다 고 한다. 이 양자의 일체관 의 내용은 마츠나가 모토키( 松 永 材 ) 敬 神 崇 祖 一 体 論 ( 平 凡 社,1941 年 )에서 알 수 있다. 이 책은 현재는 경신숭조가 많이 분리되어. 경신은 신도에 관계된 것이고, 숭조는 대부분의 경우는 불교(다른 종교는 생략)에 관계된 것을 일체화하려는 것이다 라고 설명한다.(109 페이지). 숭조 는 원래 신도 고유의 것이라는 입장(전술한 두가지 견해 중에서 전자의 경우)에서 경신숭조의 분리 가 국체관념을 교란 혹은 희약화시킨다 (같은 페이지)고 하기 때문에 양자의 일체화 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국체관념 을 강조하는 것이 경신 과 숭조 를 일체화 하는 논리를 낳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일체화 의 논리에 착안해서 경신숭조 에 있어서의 숭조 의 내실을 물어가고 싶다. 5) 朝 鮮 제 249 호의 彙 報 欄 (1936 년 2 월)에 게재. 2
공인종교(교파신도를 제외)와 이용 가능한 모든 신앙 교화단체의 협력을 끌어내어, 지배에 장해가 되는 유사종교 와 미신 등은 제외하려고 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6 다음은 본고의 과제와 구성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본고에서는 전술한 신사정책 연구에서의 과제를 염두에 두고, 농촌진흥운동에 있어서 신사정책과 관계되는 요소를 추출해서 그것을 분석한다. 즉, 관제의 촌락제사가 창출된 것 및 중견인물 양성시설에서의 정신주의를 경신숭조 의 개념으로 밝히면서 분석함에 따라, 그것이 이 시기의 신사정책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검증하는 것이 본고의 과제이다. 필자는 예전에, 이 농촌진흥운동기에 있어서 신사와 유사점이 많다는 인식하에 조선의 촌락제사의 이용이 시도되고 있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 실증을 시도한 일이 있으나 7, 그 실증 작업의 일환으로서의 과제라고도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우선 제 1 절에서 농촌진흥운동에서 보이는 농본주의의 영향을 검증한다. 제 2 절에서 그 영향의 실태로서 갱생지도부락( 更 生 指 導 部 落 )에서 창출된 관제의 촌락제사를 분석한다. 제 3 절에서는 중견인물 양성시설에서의 훈련 속에서 실시된 정신주의를 분석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신사정책과의 관계를 본다는 관점에서 경신숭조 가 가지는 논리를 밝혀가겠다. 1. 농촌진흥운동과 야마자키 노부요시( 山 崎 延 吉 ) 1932 년 가을에 야마자키 노부요시 8 는 총독부에 촉탁( 嘱 託 )으로서 맞아졌다 (총독부농림국임정과촉탁 ( 総 督 府 農 林 局 林 政 課 嘱 託 )), 연수당 5000 엔, 1941 년 3 월말에 사임). 우가키 카즈시게( 宇 垣 一 成 )총독 (1931 년 6 월~1936 년 8 월 재임)의 청원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촉탁이 된 야마자키는 9 월 27 일에 총독부에서 농산어촌의 진흥에 대해서 강연을 하고, 그 강연 중에 위원회 설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위원회는 시의에 맞는 기획으로서 관계자측이 주목하게 된 것 같다 9. 급템포로 일은 진행되어 30 일부로 조선총독부농촌진흥위원회규정 (총독부훈령 제 62 호)이 제정되고 10, 당일 오후에는 제 1 회 위원회가 개최될 정도로 빨랐다(위원장은 정무총감, 야마자키도 위원 11 ). 이 농촌진흥위원회가 중심 조직이 되어, 다음 해인 1933 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농촌진흥운동에서는 농민의 자각에 기반을 둔 자력갱생 이 슬로건으로 외쳐졌지만, 농촌자치 론과 농민도( 農 民 道 ) 라는 정신주의에 그 특징을 가지는 야마자키의 농본주의가 6)전게한 졸고 朝 鮮 総 督 府 の 農 村 振 興 運 動 期 における 神 社 政 策 에서의 자리매김에 의한 것이다. 7)전술한 졸고 朝 鮮 総 督 府 の 神 社 政 策 에 있어서이다. 이 졸고는 농총진흥운동에 있어서, 관제 자치 중심에 신사(실제는 神 祠 )를 설치하고, 그것을 새로운 결집력으로 하려한 총독부의 신사정책을 논했다. 그 정책 과정에서 촌락제사의 이용이 시도되었다는 가설을 세웠지만, 아직 실증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본고 및 전게한 졸고 朝 鮮 総 督 府 の 農 村 振 興 運 動 期 における 神 社 政 策 은 이 가설을 실증해 가는 작업의 일환이 된다. 8)야마자키 노부요시(1873~1954)는 이시카와현( 石 川 県 ) 카나자와( 金 沢 ) 출신으로, 1897 년에 동경제국대 농과대학을 졸업, 1901 년에 아이치현립안죠( 愛 知 県 立 安 城 )농림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후, 아이치현의 농업과 산업조합의 진흥에 힘썼는데, 야마자키가 지도한 같은 현의 헤키카이군( 碧 海 郡 )은 모범 농촌으로서 전국에 알려져서 일본덴마크 로 불려졌다. 또 1908 년에 출판한 農 村 自 治 の 研 究 는 십수번의 간행을 거듭했다고 한다. 1929 년에는 신풍의숙( 神 風 義 塾 )을 세워, 농촌 청년에게 고신도( 古 神 道 ) 에 근거한 농민도( 農 民 道 ) 교육을 실천했다. 쇼와( 昭 和 )의 농업공황 때, 중견인물의 양성시설인 농민도장 의 지도자의 한명으로서 농촌의 경제갱생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야마자키의 생애는 아다치 이쿠츠네( 安 達 生 恒 ) 山 崎 延 吉 農 本 思 想 を 問 い 直 す (リプロポ-ト,1992 年 )을, 그의 농본주의는 츠나자와 미츠아키( 綱 沢 満 昭 ) 日 本 の 農 本 主 義 ( 紀 伊 國 屋 書 店,1980 年 ) 제 7 장 山 崎 延 吉 論 을 참조로 했다. 츠나자와는 야마자키의 사상을 ある 意 味 で 現 実 に 根 ざしたいわゆる 土 着 の 思 想 ではなかったか(어떤 의미로는 현실에 뿌리박힌 소위 토착의 사상이지 않았나) 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만주사변 이후의 소위 파시즘 체제하에 있어서, 야마자키의 농업경영 농촌경영에서의 합리성 이 쇠약되고, 고신도 의 정신주의로 중점이 이동해 버려서, 국체명징( 国 体 明 徴 ) 이나 핫코이치우( 八 紘 一 宇 ) 의 사상에 가볍게 이용되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야마자키의 농본주의가 조선통치에 사용되었다는 것에 관해서, 예전의 졸고 朝 鮮 農 村 の 中 堅 人 物 京 畿 道 驪 州 郡 の 場 合 ( 朝 鮮 学 報 第 141 輯,1991 年 10 月 )에서 조금 논한 적이 있다. 그 기술을 폭넓게 가필 수정하면서 농총진흥운동에 있어서 야마자키의 농본주의의 영향을 분석하고 싶다. 9) 山 崎 氏 中 心 으로/ 農 村 振 興 의/ 委 員 会 設 置 台 頭 東 亜 日 報 (1932 년 9 월 29 일부, 8 면) 10) 朝 鮮 総 督 府 官 報 제 1721 호 (1932 년 9 월 30 일)에 의한다. 11) 朝 鮮 農 魚 村 의/ 統 制 振 興 会 組 織 / 三 十 日 午 後 委 員 会 를 開 催 / 総 督 府 中 心 으로 東 亜 日 報 (1932 년 10 월 1 일부, 8 면) 3
농촌진흥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12. 야마자키가 말하는 농촌자치 의 궁극적인 목적은 촌격( 村 格 ) 의 향상에 있다. 즉, 촌격 의 요소로서 촌락의 분위기(자치체( 自 治 体 )의 정신), 촌락민의 행동(자치체의 태도), 촌락내의 질서(자치체의 모습)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의 향상을 농촌자치 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주의에 중점을 두는 관념적인 목적을 내세워, 전통적 공동체와 그것에 엉켜 있는 오래된 것 을 살리면서 산업조합의 조직화를 통해서 새로운 마을 만들기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3. 하지만, 야마자키의 정신주의는 농민도 의 확립을 목표로 하게 되어 (신풍의숙( 神 風 義 塾 )을 개설한 때부터), 경제적인 합리성보다도 그 비중이 커진다. 그의 농민도 는 카케이 카츠히코( 筧 克 彦 )의 고신도( 古 神 道 ) 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고신도 는 유신도( 惟 神 道 )를 가리키고, 제 1 종 신( 神 )인 천지어중주신( 天 之 御 中 主 神 ) 에게 제 2 종의 팔백만신( 八 百 万 神 ) 이라는 신들이 귀일( 帰 一 )한다는 내용이다. 이 고신도 를 기반으로 야마자키는 천황귀일( 天 皇 帰 一 )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국민은 자신의 분담( 分 担 )을 이해하고 그 분담을 통해서 국가에 귀일하고 거듭 천황에 귀일하는데, 그것이 진짜 일본인이다라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농민에 대한 천황귀일 사상이 농민도 가 되고, 농업을 일본적 실천( 行 ) 의 하나로서 취급하여 농민은 농업이라는 분담을 통해서 천황에 귀일한다는 것이 황국( 皇 国 )의 농민 이 되는 길이라고 한다. 이상에서, 야마자키가 농촌진흥운동에 미친 영향을 분석함에 있어서 1 농촌자치 의 장은 어떠한 것으로 상정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과, 2 고신도 에 기반을 둔 천황귀일 사상= 황국의 농민 이라는 정신주의가 이식되어 가는 실태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1의 농촌자치 의 장을 고찰함에 있어서 갱생지도부락을 지도한다는 농촌진흥운동의 실시 형태를 참조하면, 촌락자치 로의 행정력 침투 즉, 촌락자치 재편 14 에 초점을 맞춰 분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것을 염두에 두면서 제 1 절에서는 우선 야마자키가 조선에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가에 대해 대략 기술하고, 그 전제를 근거로 해서 전술한 1에 관해서 자료를 통해 대강의 틀을 정리해 보겠다. 그리고, 2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관제의 촌락제사를 분석하는 가운데, 동시에 정신주의가 이식되는 실태를 다소라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총독부의 촉탁이 된 야마자키는 조선을 빈번이 방문해서는 각지에서 강연과 지도를 했다. 농촌진흥운동의 주관 부서인 농림국농정과( 農 林 局 農 政 課 )가 편집(1936 년에 주관 부서로서 농림국농촌진흥과가 신설되고나서는 여기로 이관( 移 管 ))한 월간지 12)다른 각도에서의 영향을 고찰한 연구로, 요시자와 카요코( 吉 沢 佳 世 子 ) 日 本 の 植 民 地 朝 鮮 支 配 と 農 業 教 育 農 民 教 育 ( 年 報 日 本 現 代 史 第 10 号,2005 年 )이 있다. 이 논고는, 야마자키의 영향하에 있었던 안성농림학교와 신풍의숙( 神 風 義 塾 )에서 수학한 청년 중에서, 특히 조선에 취직한 일본인 청년 및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 온 청년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졸업생의 진로 분석도, 야마자키와 조선통치와의 관계를 볼 때에 참고가 된다. 13)전게한 츠나자와 日 本 の 農 本 主 義 제 7 장을 참고하면서, 필자가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이하의 농민도 의 설명도 동일하다. 14)1914 년의 면( 面 ) 동리( 洞 里 )(면은 내지( 内 地 ) 의 村 에, 동과 리는 部 落 에 해당한다)의 통폐합(동리의 통폐합은 1912 년부터 진행되었다) 및 1917 년에 실시된 面 制 에 의해, 식민지기 이전의 촌락의 자치는 행정상, 면행정에 흡수되게 되었다. 그 결과, 종래의 도-군-면-동리와 같은 지방 행정단위에, 식민지 지배하에서 행정말단기관으로서 면이 재설치되게 되었다. 그리고 촌락자치 가 부정되었던 동리(본고에서는 구동리( 旧 洞 里 )라고 부른다)도, 통폐합으로 재편성하게 되어서 새로운 동리를 낳았다(이 새로운 동리를 본고에서는 신동리( 新 洞 里 )라고 부른다). 여기서, 통폐합 전후의 부( 府 ) 군( 郡 ) 도( 島 )에 있어서의 新 旧 의 면 및 동리 수(부는 내지( 内 地 ) 의 시( 市 )에 해당되고, 면은 군 도 아래에 있다. 동리 수에는 부에 있는 정( 町 )도 포함되었다)의 변화를 보면, 면은 전체의 4,351 에서 2,508 로 줄고, 동리는 62,532 에서 28,271 로 감소하고 있다( 旧 는 1912 년 1 월 1 일 현재, 新 은 1918 년 3 월 31 일 현재). 상세한 것은 졸저 朝 鮮 農 村 の 民 族 宗 教 植 民 地 期 の 天 道 教 金 剛 大 道 を 中 心 に ( 社 会 評 論 社,2001 年 ) 제 1 장 제 1 절을 참조바람. 또, 촌락자치 의 신동리 질서에 대한 재편의 관점에서 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을 검토한 논고로, 졸고 植 民 地 期 朝 鮮 に お け る 農 村 再 編 成 政 策 の 位 置 づ け 農 村 振 興 運 動 期 を 中 心 に ( 朝 鮮 学 報 第 136 輯,1990년7월)가 있다. 단, 나중에 신동리 질서만이 재편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면서 본고에서는 촌락자치 재편의 문제도 정리해 보고 싶다. 4
자력갱생휘보( 自 力 更 生 彙 報 ) 15 ( 全 88 호)는 간단하지만 그가 조선에서 했던 활동을 보고하고 있으므로 참고가 된다. 순서대로 개략적인 내용을 명시하겠다. 1933 년은 우선 1 월 27 일에 조선을 방문해서 다음날에 총독부의 농촌진흥위원회에 출석하고, 그 후 경상남도를 시작으로 전후 50 일간에 걸쳐 각 도 주최의 지도자 계급에게 농산어촌진흥에 관한 강습회를 개최 했다. 수강 인원 약 9 천명의 다수에 달 했다고 한다 16. 다음은 4 월말경에 방문하여 충청남북도를 시작으로 함경남북도에서 간도방면까지 가고, 경기도 각지를 지도 하고, 강원도의 각 군을 구석까지 순강( 巡 講 ) 했다. 지도자 계급, 지방 중견인물, 청년 등 을 대상으로 농촌진흥의 요점을 외치 고, 지방 중견청년의 양성 에 힘썼다. 이 해를 통산하여 강습, 강연 횟수 는 40 회, 수강 인원 은 2 만명정도에 달했다고 한다 17. 1933 년의 나머지 기간은 보고가 없으므로 알 수 없다. 1934 년에는 3 번 조선을 방문하고 있다. 처음은 1 월 27 일부터 3 월 9 일까지 체재하여, 경상남도, 황해도, 전라남도, 경기도의 지방 각지를 순회 지도 했다 18. 그 다음은 4 월 28 일부터 19 6 월 16 일까지 체재하여, 전라북도, 함경북도, 평안북도에서 강습을 하고, 총독부 주최의 중견청년 강습회와 경성제국대학, 중추원( 中 枢 院 ), 조선군사령부( 朝 鮮 軍 司 令 部 ) 등의 강연회 에 임했다 20. 그 다음은 9 월 21 일부터 11 월 10 일까지 체재하여 개행사( 階 行 社 ) 주최 全 鮮 在 郷 軍 人 幹 部 講 習 会 와 총독부 주최의 지방 중견청년 강습회에 임하고, 경기도, 충청남도, 강원도, 충청북도, 평안남도에서 농촌진흥강연회 및 실지( 実 地 ) 지도 등에 임했다고 한다 21. 1935 년에 조선을 3 번 방문한 후, 병 요양( 療 養 )을 위해서 당분간 올 수가 없었다. 처음은 임시도지사회의에 출석하기 위해서 1 월 7 일~16 일까지의 짧은 기간동안 체재하고, 임시도지사회의( 臨 時 道 知 事 会 議, 1 월 11 일~12 일) 및 참여관회의( 参 与 官 会 議, 각 도의 참여관 상의회, 1 월 16 일~18 일)의 첫날에 출석했다 22. 그리고, 다음 체재는 2 월 16 일부터 3 월 15 일까지로 경상남도에서 10 일간, 경상북도에서 13 일간 지도 하고 있다 23. 그리고, 3 번째는 4 월 16 일에 와서 도지사회의에 출석하고, 全 鮮 農 山 漁 村 振 興 関 係 官 大 会 同 에서 강연을 하고, 총독부 주최 중견청년강습회 등에 임했다. 하지만, 점차 건강을 해 쳐서 어쩔수 없이 5 월 14 일부터 절대적으로 정양( 静 養 ) 해야하는 상태가 되어, 6 월 1 일에는 조선을 떠나, 아이치현( 愛 知 県 ) 헤키카이군( 碧 海 郡 ) 안죠쵸( 安 城 町 )의 자택에서 정양을 하게 되었다 24. 7 월17 일부터 하코네 고라( 箱 根 強 羅 )에서 전지요양( 転 地 療 養 ), 8월 16 일부터는 안죠쵸 자택에서 눈과 귀의 치료중 으로, 올 여름동안에는 정양하실 예정 이다 25. 과로로 인한 쇠약 과 류마치스, 중이염, 양쪽 눈에 홍채염을 앓고 있었다 26. 그 후는 병의 차도가 보이고, 1936 년 4 월 17 일에는 경성을 방문했다 27. 그리고, 5 월 6 일부터 6 월 18 일까지 13 도의 각 도청을 방문 하고 청년훈련소의 시찰 을 했다. 총독부 주최의 지방 및 도시청년 강습회, 전매국행정( 専 売 局 行 政 ) 강습회, 경성부 부인강연회 등 에도 임하고, 6 월 23 일부터의 도지사회의에 참석하고 25 일경에 조선을 떠났다. 그 다음은 9 월하순에 올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28. 15)이타가키 류타( 板 垣 竜 太 )[ 監 修 / 解 説 ] 自 力 更 生 彙 報 朝 鮮 総 督 府 農 業 政 策 史 料 제 1~6 권(ゆまに 書 房,2006 年 )는 自 力 更 生 彙 報 를 복각출판한 것이다. 본고가 사용한 自 力 更 生 彙 報 기제의 자료는 같은 책에 의한 것이다. 16)전게한 自 力 更 生 彙 報 제 2 호의 雑 報 欄 (1933 년 4 월 20 일, 20 쪽). 17)상동지, 제 3 호의 雑 報 欄 (1933년6월30일, 17쪽) 18)상동지, 제 7 호의 雑 報 欄 (1934 년 3 월 7 일, 24 쪽) 19)상동지, 제 8 호의 雑 報 欄 (1933년4월30일, 15쪽) 20)상동지, 제 11 호의 雑 報 欄 (1934년7월20일, 15쪽) 21)상동지, 제 15 호의 雑 報 欄 (1934 년 11 월 20 일, 15 쪽) 22)상동지, 제 17 호의 雑 報 欄 (1935년1월20일, 15쪽) 23)상동지, 제 18 호의 雑 報 欄 (1935년2월20일, 15쪽) 24)상동지, 제 22 호의 時 報 欄 (1935년6월20일, 18쪽) 25)상동지, 제 24 호의 山 崎 先 生 の 近 況 欄 (1935년8월20일,11쪽) 26)상동지, 제 27 호의 時 報 欄 (1935년11월20일, 15쪽) 27)상동지, 제 33 호의 時 報 欄 (1936년5월20일, 11쪽) 28)상동지, 제 34 호의 時 報 欄 (1936년6월20일, 15쪽) 5
그러나, 그 후 건강은 거의 회복 되었지만, 그 해의 조선방문은 형편상 다음 해 봄으로 연기 되게 되었다 29. 아마 이 해 8 월에 총독이 우가키( 宇 垣 )에서 미나미 지로우( 南 次 郎 )로 교차된 것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에 조선을 방문한 것은 다음 해 1937 년 5 월 13 일로, 수원에서의 총독부 주최 중견청년 강습회를 비롯해서, 황해도, 평안남도, 강원도, 경상북도, 충청북도 관내의 시찰, 강습 을 마치고 6 월 3 일에 조선을 떠났다. 이상과 같이, 중일전쟁 발발까지의 시기에 야마자키가 조선에서 했던 활동을 개관한 결과, 야마자키가 농촌진흥운동에 미친 영향자체를 직접 찾아내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시기적으로는 병 요양으로 당분간 방문하지 못하게 되기 전인 1933년과 1934년이 가장 활발하다는 것은 명확하고, 이 시기에 각지에서 농촌진흥운동을 짊어지는 지도자계급, 지방중견인물, 청년 등 다수를 대상으로 강습, 강연 을 하고 있다. 따라서, 1933 년부터 1934 년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적어도 농촌자치 와 농민도 라는 개념은 슬로건으로 각지에 뿌려졌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은 1 촌락자치 로의 행정력의 침투 문제를 정리해 보겠다. 촌락자치 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면, 거시적으로는 만주사변 후의 시국적 이유에서 농촌에 총동원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바탕준비 땅 고르기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장의 상황으로는 농촌진흥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의 미봉책적인 이유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즉, 선정된 갱생지도부락에서 5 개년 계획의 실시를 관철하고, 그 후에도 갱생 상태를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행정의 지도를 받아들여 그에 따르는 관제의 자치 를 갱생지도부락에 창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우선, 여기서 촌락자치 로의 행정력의 침투 문제와 관련해서, 우가키총독의 통치구상을 소개하겠다. 그것은 1935년 1월 임시도지사회의에서의 훈시에서 발표되었다( 농촌진흥 의 항목). 그 통치구상은 약 10 년(막연한 기준으로서)마다로 3 단계로 나눈 것이다. 첫 단계로 농촌진흥운동으로 소위 물심양면( 物 心 両 面 )의 생활 안정( 安 定 ) 을 꾀한다. 제 2 단계에서는 그것의 진전 충실( 進 展 充 実 ) 을 기대한다. 그리고 제 3 단계에서는 의무와 권리의 관계 가 정비되어, 자치확립을 기대하고, 통치의 대업( 大 業 )을 완성 한다는 내용이다 30. 즉, 우가키는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삼아, 전쟁시에 총동원 체제까지 가능한 자치확립 을 낳는다고 하는 그의 농촌진흥 구상을 세우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이른바 <관제>자치의 창출을 철저하게 하여 촌락에 행정력을 침투시킴으로써 전 인구의 약 80%를 차지한 농민 개개인을 장악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덧붙여, 농촌진흥운동에 있어서 1935 년 4 월 현재, 기설된 갱생지도촌락의 수는 5,110 이다. 읍( 내지 의 정( 町 )에 상당) 면의 총수가 2,393 이기 때문에, 단순히 계산해서 하나의 읍 면당 평균 2~3 개소가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설의 갱생지도촌락의 범위는 구동리( 旧 洞 里 )인지 신동리( 新 洞 里 )인지 애매하지만, 신동리의 총수가 74,864(구동리는 보다 더 많아진다)이기 때문에, 아직 일부의 선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1. 따라서, 우가키는 전술한 훈시 속에서 통치구상에 이어서 갱생지도부락의 전 부락 으로의 확충에 관해서 각 도지사에게 자문을 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다음과 같이 지도망의 확충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특히 장래 이( 중견자 를 가리킴=인용자)를 중심으로 부락민의 공려( 共 励 )조직을 구체화하고, 이것을 촉진시키고, 나아가서는 하루라도 빨리 지도기관의 손을 떠나 부락을 한 단위로 하는 자율자치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하물며 금후의 갱생부락을 급속히 확충시켜나가야 할 그 때에는 지도상의 보좌로서 또 부락의 중심으로서 한층 더 29)상동지, 제 24 호의 山 崎 先 生 の 動 静 欄 (1936 년 12 월 20 일,15 쪽) 30)우가키 카즈시게( 宇 垣 一 成 ) 道 知 事 会 議 に 於 ける 総 督 訓 示 1935 년 1 월 11 일. 미즈노 나오키( 水 野 直 樹 )[ 編 集 解 説 ] 朝 鮮 総 督 諭 告 訓 示 集 成 전 6 권 별권( 緑 蔭 書 房,2001 年 )의 제 4 권에 수록. 31)이러한 숫자는 朝 鮮 総 督 府 農 林 局 編 朝 鮮 に 於 ける 農 村 振 興 運 動 の 実 施 概 況 と 其 の 実 績 (1940 年 )에 수록되어 있는 농가갱생지도부락 확충연차계획 표(5 쪽)에 의한 것이다. 6
중요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 농촌진흥운동기의 경신숭조( 敬 神 崇 祖 ) (Ver. 1.0) 부락을 한 단위로 하는 자율자치 공동체 의 건설 이란, 진흥회 등 이른바 <관제>자치단체를 통해서 <관제>자치의 확립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 주장의 논리는 재촌( 在 村 )의 기구( 機 構 )를 운용하면서 촌격 의 향상(= 자치체 의 정신 태도 모습의 향상)을 꾀하는 야마자키의 농촌자치 론을 통치를 위해서 응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2. 또, <관제>자치의 엘리트로서 갱생지도부락이 선정 지도되고, 그 확대방침에 동반하여 부락의 중심으로서 의 중견자 (= 중견인물 )의 중요성도 높아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임시도지사회의에서는, 갱생지도부락 확충 10 년 계획(약 10 년간에 갱생지도계획을 조선의 전 부락 에 확충 실시 한다는 계획)이 결정되어, 그 수행을 위해서 지도망의 확대 강화를 꾀 하고, 동시에 중견인물 의 양성에도 특별한 노력 을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33. 중견인물 은 계획 실시를 위해서 촌락에서 실무를 담당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양성하는 시설을 확충해 가는 것이 다음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 양성시설에서는 연습생들이 체험하는 유사적인 농촌자치 에서 야마자키의 영향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다 34.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 3 절에서 검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어서 <관제>자치의 문제를 추궁해 가겠다. 이 임시 도지사회의의 갱생지도부락의 확대 결정에 따라서, 갱생지도부락에서 농가갱생 5 개년 계획(당시는 실시 도중)이 끝난 후의 지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과제가 새롭게 급부상했다. 그로부터 2 년 정도 후, 1937 년 5 월에 황해도의 농촌진흥주사( 農 村 振 興 主 事 )에 의한 부문위원제도 를 설명한 논설이 전게한 자력갱생휘보 에 게재되어 있다 35. 그것에 의하면, 부문위원제도는 황해도에서 가장 먼저 1935 년부터 도의 자치공려방책 으로서 기획되어져 온 것이다. 2 년후에 이 제도에 대해서 각 방면에서 각종의 조회와 시찰이 빈번해져 왔 기 때문에, 조회 와 시찰 의 보조 로서 이 논설이 쓰여졌다고 한다(말미에 1937 년의 천장절( 天 長 節 ) 이라고 쓰여져 있기 때문에, 4 월말에 집필을 마쳤을 것이다.) 부문위원제도에서는 위원장 아래에 강화위원, 기장( 記 帳 )위원, 색의( 色 衣 )장려위원, 위생위원, 도작( 稲 作 )위원, 임업위원 등, 자치 와 농사일과 관련된 20 명의 위원이 설정되어져 있다(실제로는 20 명 모두가 설정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위원의 분담사항도 정해져 있어, 예를 들면 강화위원의 경우는 국기의 게양 및 관리, 심전개발, 사상선도, 문맹퇴치, 미신타파, 혼장제( 婚 葬 祭 )의 거식 및 경비의 절약, 그 외 생활개선, 노동촉진 으로 되어있다 36. 이러한 위원을 기설의 갱생지도부락의 촌락민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부문위원제도는 행정에 따른 32)본문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내지 에 있었던 야마자키 노부요시는, 이 훈시가 있었던 임시도지사회의에 출석하기 위해서 일부러 조선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우가키의 구상에 대해서, 정책의 실태 중에서 검증을 시도한 적이 있기 때문에 보충하겠다. 전술한 졸고 植 民 地 期 朝 鮮 における 農 村 再 編 成 政 策 の 位 置 付 け 에서는, 농촌진흥운동기의 <관제>자치는 1920 년대 이후의 신동리 질서로의 재편으로서 취급했지만, 오류였기 때문에 나중에 이것을 수정해서 전게한 졸저 속에서 정리했다. 그것에 의하면, 계의 조합조직으로의 개편책은, 실제는 종래의 상호부조조직이였던 계를 조합조직으로 편성해서 바꾼 상황(1920 년대에서 30 년대에 걸쳐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행하고 있었다) 및 그 편성을 바꿔서 이용한 주체적인 자치 재편의 기복을, 농촌진흥운동이 탄압하고 흡수 이용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농촌진흥운동의 전개 속에서, 총독부가 1937 년에 계를 조사한 시점에서는, 계를 기반으로 한 농민들의 주체적인 조합은 총독부에 의해 농가소조합 으로 인정되어, 진흥회 등 (그 외 부락진흥회, 공려조합 등)의 <관제>자치단체에 의한 부문으로서, 편성을 바꾸는 것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상세한 것은 전게의 졸저(제 1 장과 제 3 장)를 참조. 33)전게한 自 力 更 生 彙 報 제 17 호의 道 知 事 会 議 状 況 (1935 년 1 월 20 일, 4 쪽)에 의한 것이다. 34)전게의 졸고 朝 鮮 農 村 の 中 堅 人 物 에서는 경기도 여주군의 중견인물 양성시설(여주군 농도강습소)에서의 훈련방침과 일과 등 내용에 있어서의 야마자키의 영향을 지적했다. 35)전게한 自 力 更 生 彙 報 제 45 호의 노구치 이헤이( 野 口 伊 平 ) 農 村 振 興 運 動 を 部 落 に 移 さ ん と す る 部 門 委 員 制 度 (1937 년 5 월 20 일, 9~11 쪽), 제 46 호의 노구치 이헤이( 野 口 伊 平 ) 農 村 振 興 運 動 を 部 落 自 治 に 移 さん とする 部 門 委 員 制 度 ( 完 ) (1937 년 6 월 20 일, 7~13 쪽) 36)전게한 논설, 후자의 8 쪽에 게재한 부문위원의 분담사항 일람표 에 의한 것이다. 이 표에서는 18 명의 위원으로 나눠져 있으나, 12~13 쪽의 기존설치 갱생지도부락에 있어서의 부문위원수조( 数 調 ) 의 표에는 20 명의 위원명이 실려져 있다. 7
지도와 중견인물 이 짊어져야 할 역할을 보다 많이 촌락민이 분담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논설의 표제가 나타내는 농촌진흥운동을 부락자치로 이동시키려고 하 는 의도는 전술한 임시 도지사회의에서 우가키가 말한 구상과 결정내용의 계속성을 명시한 것이며, 본문에서는 부락의 자치공려방책으로서의 부문위원제도 라는 항목을 마련해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것에 바탕을 두면서, 이 논설에서는 부문위원제도를 설치한 직접적인 이유를 지도력의 보강공작으로서, 그리고 중견인물 의 과로, 몰락을 방지하려고 하 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역시, 갱생지도부락에서 5 개년 계획이 끝난 후의 지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지도망의 확대강화 와 중견인물 의 양성만으로는 모두 해결할 수 없다는 현장에서의 선택으로서, 부락민분담제라고도 할만 한 부문위원제도가 설치되었다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한 도( 道 )의 예라고 해도, 부락의 자치공려방책 확립이 보다 중요성을 더한 과제라는 것을 나타내는 자료이며, 이 제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황해도가 투자한 희생은 그 정신적 노력에 있어서 정력과 기력을 다했다고 할 만하 다고까지 기술되어져 있는 것이다. 예산면에서 말하면, 황해도에서는 이 제도를 위해서 1936 년도에만 25,080 엔을 투자하고, 읍면비에 속하는 숫자도 산입한다면 정말로 막대한 금액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고 한다. 그러므로, 총독부 당국에서도 갱생지도부락의 자치공려방책 확립의 중요성은 당연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나온 각 도지사 앞으로 보낸 정무총감통첩( 政 務 総 監 通 牒 ) 37 에 의하면, 그러나 갱생지도부락의 확충에 따라 각 지도기관의 지도력을 증대시키는 일이 용이하지 않는 실정에 있기 때문에, 이 때 본 운동(농총진흥운동을 말함=인용자) 본래의 취지를 감안하여 사업의 중점을 관변( 官 辺 )의 지도로부터 점차 부락민의 자치공려로 이동시키고, 나아가서는 공동조합 정신의 계배( 啓 培 )에 노력해야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총독부 당국이 갱생지도부락의 자치공려방책 확립을 중요과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각 도에 지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에서, 1 촌락자치 로의 행정력의 침투 문제를 정리한다면, 야마자키의 농촌자치 론의 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관제>자치를 확립하는 의도, 구체적으로는 농촌진흥운동을 부락자치로 이동시키자 는 의도하에 총독부 당국의 입장에서 갱생지도부락의 자치공려방책 확립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단, 전시체제이전의 시기이지만). 2. 농촌자치( 農 村 自 治 ) 장( 場 )에서의 경신숭조( 敬 神 崇 祖 ) (1) 야마자키 노부요시의 경신숭조 관과 <관제> 촌락제사 우선, 야마자키의 농본주의에 있어서의 2 고신도 에 기반을 두는 천황귀일( 天 皇 帰 一 ) 사상 = 황국의 농민 이라는 정신주의가, 농촌진흥운동의 전개 속에서 농촌의 장으로 이식되어 가는 실태를 가능한 한 밝혀보겠다. 전술한 자력갱생휘보 에서는 지면상 여백을 조절하기 위함인지, 명치천황작 단가( 短 歌 )와 농민관계의 삽화, 표어와 같은 어구 등이 논설 기사 등의 중간에 그 문맥과 관계없는 틀로 삽입되어져 있다. 그 중에 농가훈( 農 家 訓 ) 38 이라는 것이 있어, 첫번째는 敬 親 崇 祖 ( 敬 神 崇 祖 의 37)각 도지사 앞의 정무총감통첩(1937 년 6 월 12 일부). 농회, 산업조합, 금융조합 및 식산계에 관한 사무의 주관에 관한 정무총감통첩 으로서, 전게한 自 力 更 生 彙 報 제 47 호(1937 년 7 월 20 일,1 쪽)에 수록. 이 통첩은 표제에 있는 각 단체의 사무 를 농림국농촌진흥과에서 주관한다는 것을 지시하는 내용으로, 인용한 곳은 그 배경을 설명한 부분이다. 그리고, 주관이행의 직접적인 요인은, 농촌진흥운동의 조합속에서 농회, 산업조합, 금융조합의 3 자가 각각의 판매구매사업을 전개해서, 단체간에 사업을 둘러싼 대립, 마찰이 생겼다는 것에 의한다. 그 사업의 조정을 둘러싼 경위에 관해서는, 도이 히로츠구( 土 井 浩 嗣 ) 朝 鮮 農 会 の 組 織 と 事 業 系 統 農 会 制 成 立 か ら 戦 時 体 制 期 を 中 心 に ( 神 戸 大 学 史 学 年 報 第 22 号,2007 年 6 月 )을 참조. 38)전게한 自 力 更 生 彙 報 제 3 호(1933 년 6 월 30 일, 3 쪽)에 삽입. 10 번째까지 있고, 예를 들면 2, 근검저축은 우리 국제( 我 国 是 ) 4, 가업( 家 業 )에 힘쓰고 투기는 금물 6,유쾌하게 일해라. 아침부터 밤까지 와 같이, 8
오류=인용자)는 사람의 길 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篤 農 家 의 목표 39 의 여덟번째는 신에게 조상에게 아침 저녁예배, 아홉번째는 조상숭배는 집의 부( 富 ) 이다.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경신숭조 와 조상숭배 에 있어서, 경신 및 숭조 조상숭배 라는 양자의 의미 관계는 어떻게 인식되어져 있었던 것인가. 1935 년의 국체명징성명( 国 体 明 徴 声 明 ) 이전이기 때문에, 그렇게 양자의 차이가 인식되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어쨋든 야마자키가 조선에서 남긴 언설을 단서로 고찰해 보겠다. 야마자키가 1935 년 4 월에 斉 家 의 要 道 라는 제목으로 한 강연 40 에서는, 제 1 장의 가계( 家 系 ) 에서 집을 斉 하는 근본 의의( 家 を 斉 へる 第 一 義 ) 로서 영원한 생명의 흐름 인 가계 를 설명하고 있다. 그 속에서 가족이 반드시 매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규칙 인 가헌( 家 憲 ) 의 해설에 주목하겠다. 즉, 斉 한 집( 斉 つた 家 ) 에 있는 가헌 은 매일 우리가 황조황종( 皇 祖 皇 宗 )을 예배하는 일, 그 다음에 반드시 그 집의 조상에게 예배하는 일, 그리고 자손은 반드시 부모에게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하는 일 이라고 적혀 있다. 야마자키의 천황귀일 사상은 가계 라는 영원한 생명의 흐름 은 아이부터 부모,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천황에 귀일해 간다. 여기서의 경신 및 숭조 의 의미 관계는, 우리가 황조황종( 皇 祖 皇 宗 )을 예배하는 일 (= 경신 )과, 그 집의 조상에게 예배하는 일 (= 숭조 )의 조합으로서 표현되어, 가계 는 숭조 를 매개로 해서 천황에 귀일해 간다. 바꿔 말하면, 황실을 국민의 본가로 자리매기는 가족국가관을 천황귀일 의 개념으로 표현한 경신숭조 관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면, 숭조 를 매개로 해서 천황에 귀일해 가는 가계 라는 포인트를 염두에 두고, 농촌진흥운동 속에서 창출되어 가는 농촌자치 의 장에서의 경신숭조 를 검토해 보겠다. 전라북도 장수군( 長 水 郡 )은, 신궁대마( 神 宮 大 麻 :이세신궁에서 배포되는 부적)를 모셨다고 여겨지는 대마전( 大 麻 殿 ) 에 힘을 기울였던 지역인 것 같다. 갱생지도부락의 지도도 열심히 담당하고 있는 장수경찰서는 구내에서 대마전 이 봉제되고 41, 또 장수군 농회( 農 会 )가 경영하는 장수농사훈련소 ( 중견인물 의 양성시설)에도 장의 중심으로서 대마전은 대단히 청정하게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42. 관내의 산서면( 山 西 面 )에 있는 산서주재소는, 마츠모토 타케키치( 松 本 猛 吉 )부장과 카와카미( 川 上 )순사, 김순사에 의해 2 개의 갱생지도부락의 지도를 담당하고 있었다. 산서청년단의 지도에도 열심인 마츠모토는 그들과 마을 사람의 협력을 얻어, 아마 어느 쪽인가의 갱생지도부락이라고 생각되어지는데 대마전 을 세웠다. 이유는 부락민의 경신숭조 정신의 함양 43 을 갈망한 나머지 라고 한다. 사재( 私 財 )를 투자해서 신역( 神 域 ) 약 1 단을 사서, 사당을 조영( 造 営 )하고, 청년들 마을 사람들과 땅을 쌓고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고 모래를 뿌리고 봉제했다고 한다. 그 이래, 부락사람들이 자주 참배하게 되고, 특히 부인들의 참배가 많 다고 해서 새전함에 동전 수백개와 함께 백미 세말 정도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 쌀은 아마도 부인들이 종이에 한 뭉치씩 싸서 봉헌한 것을 모은 것이었다 고 전해지고 있다 44. 농본주의를 반영한 표어로 되어있다. 39)전게지, 제 11 호(1934 년 7 월 20 일, 9 쪽)에 삽입. 9 번째까지 있고, 역시 농본주의를 반영한 표어이다. 40) 全 鮮 農 山 漁 村 振 興 関 係 官 大 会 同 (1935 년 4 월 30 일~5 월 2 일)에서의 야마자키 노부요시의 강연. 그 速 記 録 이 斉 家 の 要 道 로서 전게 自 力 更 生 彙 報 제 22 호, 23 호, 24 호, 25 호, 26 호(1935 년 6 월 20 일, 7 월 20 일, 8 월 20 일, 9 월 20 일, 10 월 20 일)에 연재되어 있다. 제 1 장 家 系 는 제 22 호에 게재. 종래의 家 관을 기술한 내용이지만, 본고에서는 경신숭조 에 주목해서 분석한다. 그리고, 야마자기의 家 관에 대해서는 전게한 아다치 山 崎 延 吉 제 7 장에서 정리하고 있다. 41) 自 力 更 生 彙 報 제 31 호의 야히로 이쿠오( 八 尋 生 男 ) 全 北 に 於 ける 農 民 訓 練 所 その 他 (2) (1936 년 3 월 20 일, 9 쪽). 42)상동 기사, 8 쪽. 43)여기서의 경신숭조 는 심전개발운동 의 목표에 입각한 말일 것이다. 심전개발운동 의 목표는 본고의 들어가는 말 을 참조. 44) 自 力 更 生 彙 報 제 30 호의 야히로 이쿠오( 八 尋 生 男 ) 全 北 に 於 ける 農 民 訓 練 所 その 他 (1) (1936 년 3 월 20 일, 11 쪽). 또 이 대마전 은 법적인 神 祠 가 아니다. 덧붙이면, 이 시기의 장수군에 설립이 허가된 神 祠 는 없고, 나중에 1939 년 4 월 20 일자로 장수면으로의 神 明 神 祠 의 설립이 인가되었다 ( 朝 鮮 総 督 府 官 報 제 3678 호 1939 년 4 월 27 일에 의한다.) 9
이 문면에 과장된 면도 있겠지만, 신사와 유사한 대마전( 大 麻 殿 ) 이 배척되지 않고, 오히려 신앙 현상을 낳게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황조신( 皇 祖 神 )과 연결하는데 매개가 되어야 할 숭조 의 요소는 찾아낼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관제의 촌락제사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고, 게다가 법령에 의해 관리 통제하고 있는 신사 神 祠 45 의 틀에서 벗어나서 만들어진 小 祠 가, 농촌진흥운동의 전개 속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례를 야마자키의 경신숭조 관의 영향이라고 인정하기에는 논거가 부족하다. 다음에 신사 神 祠 의 틀에서 벗어난 <관제> 촌락제사의 다른 사례를 살펴보겠다. (2) <관제> 촌락제사의 사례 46 충청북도 영동군( 永 同 郡 ) 영동면의 면장 홍명희( 洪 明 熹 )는 면내의 촌락 에 천지신단( 天 地 神 壇 ) 이라는 小 祠 를 만들어, 거기에 천지대신( 天 地 大 神 ) 을 모시고 부락사( 部 落 社 ) 로 하고 있다. 전게한 자력갱생휘보 에 게재된 기사 47 를 소개하겠다. 그것은 이전부터 농촌의 진흥에 농인도념( 農 人 道 念 )의 진작( 振 作 ), 촌락민의 화충협동( 和 衷 協 同 )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신앙으로 이것을 달성하자는 것에 착안 한 것이었다. 천지신단 의 효과로써, 부락내의 화합, 내선인( 内 鮮 人 )의 융화협조, 농민정신의 작흥훈련( 作 興 訓 練 ), 생산의 개량증진 등에 이바지 하고 있다고 한다. 농촌진흥운동이 시작되기 직전인 1932 년 8 월에, 영동면의 회동리( 会 洞 里 )에 설치된 천지신단 도 그 중 하나이다. 회동리는 회동부락 을 중심으로 한 4 개의 구동리 48 로부터 만들어진 신동리로, 호( 戸 )수가 101 호가 된다. 이 신동리인 회동리의 자치 의 중심적 존재가 되는 것이, 회동리 천지신단 이다. 회동리의 지도자는 구장인 정철영( 鄭 哲 永 )과 일본인인 스미야 카메조( 角 谷 亀 蔵 )로, 이 두사람이 천지신단을 중심으로 대단히 열심히 마을 사람들을 지도하고 있다 고 한다. 이 천지신단 이 1932 년 8 월에 설치되고 나서, 두사람이 회동리에서 실시한 지도 모습은 다음과 같다. 경내에는 벚꽃나무를 심고, 소나무를 키우고, 돌단을 만들어, 마을내의 소년들에게 매달 2 번 청소의 봉사를 하게 하고, 신역( 神 域 )의 신성( 神 聖 )에 힘쓰고, 또 참배하기 쉽게 마음을 닿고, 부락의 회합모임 등도 신단 앞에서 하고, 이 예제( 例 祭 )로서 매년 음력 3 월 3 일에는 기년제( 祈 年 祭 )를 하고, 마을 사람 일동의 올해 부양( 豊 穣 )을 기원하면서 영농에 정려해서 천지의 가호에 응할 것을 가르치고, 근면역행( 勤 勉 力 行 )을 고무격려( 鼓 舞 激 励 )하고, 10 월 3 일에는 추성감사제( 秋 成 感 謝 祭 )를 행하고, 일년동안의 농작물, 농산가공품, 부인의 가정공작품 등을 신전에 바치고, 천은지덕( 天 恩 地 徳 )에 감사하고, 농산품 전람회를 개최하고, 학동의 학예회를 열어, 농악을 연주해서 신의( 神 意 )를 위로하고, 마을 사람들 빠짐없이 하루의 행락을 같이하고, 공양을 모아서 부락공조의 비황저축으로 하는 등, 신단을 중심으로 물심양면에 걸친 계발지도에 여념이 없다 49. 45) 신사 및 내지불교 의 사원 에 관해서, 주로 창립의 수속을 규정한 법령은 신사사원규칙 (총독부령 제 82 호, 1915 년)이다 (1936 년 8 월에 신사규칙 과 사원규칙 으로 분리). 신사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이 어려울 경우에 인정하는 시설이 神 祠 로, 그것을 정한 법령이 神 祠 에 관한 건 (총독부령 제 21 호, 1917 년)이다. 46)농촌진흥운동기의 영동군에 관해서 매일신문 에 기사가 몇개 있으므로, 이 지역의 농촌진흥운동의 전개로서 분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47)이하, 영동면의 천지신단 에 관한 기술은 전게한 自 力 更 生 彙 報 제 9 호의 마스다 슈사쿠( 増 田 収 作 ) 충북, 영동의 천지신단 을 소개한다 (1934 년5 월20 일,14 쪽)에서 요약 인용한 것이다. 마스다는 총독부 농림국 농정과의 촉탁. 천지신단 을 정면에서 찍은 사진도 같은 기사에 게재되어 있고, 목조 기와지붕의 작은 사당으로 보인다. 48)재궁동, 장평동, 장내동 및 회동의 일부이다. 회동의 남은 부분은 주곡리에 통합되어 있다. 오치 타다시치( 越 智 唯 七 ) 新 旧 対 照 朝 鮮 全 土 道 府 郡 面 里 洞 名 称 一 覧 ( 中 央 市 場,1917)에 의한다. 49)제사 행사에 대해서는, 이 정도밖에 알 수 없지만, 小 祠 의 명칭을 비롯해서 농악을 연주하거나 豊 穣 을 기원 하는 마츠리(명칭을 기년제 로 했는지 어떤지는 의문)를 하거나 조선재래의 요소도 인정하고 있다. 한편으로 가을마츠리를 추가하고 있는 점, 농촌진흥운동에 연결시키는 역할도 가미하고 있는 점등, 일본 적 혹은 행정적인 10
이와 같은 지도의 결과, 회동리는 항상 융화일치해서 모든 행사는 원활하게 진척되고, 미신은 타파되어, (이 마을에 있던 무자( 巫 子 )는 전부 퇴거) 50 나쁜 습관은 교정하는 현상태가 되었다 고 한다. 이것은 회동리에 창출된 <관제>자치의 진척도를 알기 위해서는 참고가 되는 기술이지만, 과장도 있고 그대로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다음과 같은 사실도 생각해 본다면, 어느 정도의 <관제>자치의 형성을 인정해도 괜찮지 않을까. 면장인 홍명희에 의하면, 영동면에서 1933 년 갱생지도부락을 정할 때에, 구동리의 회동부락 을 제 1 로 지정했지만, 마을 사람들 은 단순히 회동부락만 지정한 것은 모처럼 101 호( 戸 )의 마을 사람이 평화롭게 강력하게 협조하고 있는 때라 흥미없기 때문에, 회동리 101 호 모두를 지도받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였다 고 한다(결과, 갱생지도부락은 다른 촌락으로 정해졌다). 이상과 같이 영동면의 부락사 인 천지신단 에 대해서, 기사를 쓴 총독부 촉탁 마스다 슈사쿠( 増 田 収 作 )는 영동의 천지신단 은 농촌지도에 아주 적절하고, 참고가 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고, 농촌진흥운동 지도층의 입장에서 절찬하고 있다. 그 외에도 자력갱생휘보 에는, 사당과 같은 건물은 없지만, 새롭게 만들어진 마츠리로서 농민제( 農 民 祭 ) 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51. 전라남도 보성군( 宝 城 郡 ) 득양면( 得 粮 面 )에 있는 모 부락 은 예전에 부유 했던 동성세습( 同 姓 世 襲 ) 의 양반부락 이지만, 몰락 하고 피폐가 극에 달아 비참한 지경 이었다. 농촌진흥운동에 있어서, 기자는 진흥회와 동일한 조직인 농민진흥실행조합 을 조직하고, 갱생지도부락으로 지정된 이 부락 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 조합의 실행요목( 実 行 要 目 ) 속의 방침 은 정신 과 사업 으로 나눠져 있고, 정신 은 황실존숭( 皇 室 尊 崇 ) 과 상애봉조( 相 愛 幇 助 ) 로 되어 있다. 주목되는 것은 황실존숭 의 구체적인 요목으로서 조상숭배 와 감은봉사( 感 恩 奉 仕 ) 를 들고 있는 점이다. 조상숭배 가 황실존숭 으로 이어지는 것은 야마자키의 경신숭조 관과 공통된다. 그러면 경신 의 측면은 어떤가. 농민제 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부락민에게 각각의 직업에 대해서 어떠한 신앙을 가지게 하는 필요와 또 감사의 마음을 바치고, 정신의 정화를 꾀하기 위해 매년 추계에는 날을 정해 전 부락이 재계목욕하고, 각 가정마다 요리 하나씩을 내어 모아서 농민제를 거행하고, 아주 엄숙하게 제사를 지낸 후 여흥을 즐기며, 일년 중의 슬픈 일을 떨쳐버리고 만족감을 느끼면서 내년을 즐기도록 했다. 이 부락 이 양반부락 이므로, 재래의 촌락제사적인 요소를 전하는 기술도 없다. 농민제 는 내지( 内 地 ) 에서의 가을 마츠리를 상정한 듯한 내용일지 모른다. 하지만, 경비부담의 문제도 있을 것이고, 이 부락 의 특징으로 봐도 경신 을 이용한 측면도 약하고, 小 祠 를 세우는 것에까지 이르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은 농신단( 農 神 壇 ) 의 사례를 보겠다 52. 평안북도 초산군( 楚 山 郡 ) 성서면( 城 西 面 ) 옹암동( 甕 岩 洞 )은 1933 년에 갱생지도부락으로 선정되었다. 옹암동은 합병 후의 통폐합에 의한 요소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사신도의 천신지기( 天 神 地 祇 )에 유의하는 천지대신을 모신 신동리에 있어서의 부락사 이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통치정책의 시점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 전제에서 신사신앙의 토착화의 관점에서도 고찰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50)무속의례의 담당자인 巫 覡 들이 전부퇴거 했다면, 기복과 치병행위 등의 문제를 그 후의 천지신단 이 어떻게 해소되어 갔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부상한다. 51)전게서 自 力 更 生 彙 報 제 53 호의 정태준( 鄭 台 俊 ) 農 産 漁 村 指 導 の 体 験 を 語 る (1938년2월20일, 32~39쪽). 이 기사는 農 山 漁 村 振 興 に 関 する 懸 賞 記 事 로 3 등 입선하고 있다. 기사 중에 등장한 모 부락 은 갱생지도부락이고, 전라남도 보성군 득양보통학교훈도의 정대준이 그 지도를 담당하고 있었다. 52)전게서 自 力 更 生 彙 報 제 56 호의 이복중( 李 福 仲 ) 我 が 村 の 振 興 (1938 년 5 월 20 일, 32~39 쪽). 이 기사도 農 山 漁 村 振 興 に 関 する 懸 賞 記 事 로 3 등 입선하고 있다. 기자인 이복중은 평안북도 초산군 성서면 옹암주재소의 순사로, 기사중에 등장하는 옹암동은 기자가 우리마을 로 부르는 갱생지도부락이다. 단, 이 지역은 국경에 가깝기 때문에, 무장투쟁 세력에 의해 옹암주재소가 습격당한 적이 있다( 東 亞 日 報 의 1928 년 8 월 26 일부 및 1937 년 6 월 11 일부의 기사에 의한다). 11
변경은 없었다 53. 성황당제( 城 隍 堂 祭 )의 폐지 라는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일반적으로 성황당=서낭당에는 동리의 수호신이 모셔져 있다). 성황당제는 우리 마을의 연중행사의 하나였다. 이를 위해서 매년 한 집당 1 엔 50~60 전씩을 지출하게 해서 가난한 마을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농신단이 설치되어 이 폐해는 타파되었다. 여기서는 옹암동의 성황당 이 폐지 되고 새롭게 농신단 이 설치 된 사실을 알 수 있다. 1933 년에 시작된 5 개년 계획의 실시과정에서, 근검 절약의 이유에 덧붙여 결속력을 낳기 위해 새로운 정신적 중심을 만들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농신단 명칭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신단( 神 壇 ) 이라는 재래의 명칭에 농( 農 ) 농신( 農 神 ) 이라는 농본주의를 가미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게다가 미신타파 로서 巫 覡 의 기도 도 폐지 되고 있으므로, 옹암동에 있어서의 농신단 의 수용여가가 주목되지만, 당장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상을 정리하면, <관제> 촌락제사는 사례에서만 본다면 숭조 적인 요소는 찾아낼 수 없지만, 대체로 마을 사람의 정신세계를 경신 적 질서로 재편하려고 모색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있다. 게다가, 법령으로 정해진 신사 神 祠 의 틀에서 벗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면, 천지신단 을 총독부의 지도층이 절찬하는 등, 농촌진흥운동 속에서 그것을 만드는 기운이 양성( 醸 成 )되어 있다. 천지신단 에 대해서 적어도 이 시기의 총독부 당국은 통제를 하지 았았다. 한편, 숭조 의 측면은 전라남도 보성군 득양면의 모 부락 과 같이 황실존숭 과 결합된 형태로 조상숭배 가 설명되어지는 사례도 보였지만, 아마도 막연히 조상의 제사를 장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추측된다. 단, 다음과 같은 사례도 있다. 전라남도 순천군( 順 天 郡 ) 외서면( 外 西 面 ) 금성리( 錦 城 里 )에서는 동리에 동사( 洞 祠 ) 를 설치해서 마을 사람의 각 씨족 시조의 위패를 모시고, 이것으로 동리의 정신통일안 으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54. 그렇다고 해도 동사 는 관제가 아니고, 금성리의 중심인물 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이다. 조상숭배로 <관제> 자치의 결집력을 낳는다는 것을 발상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하지만, 시조의 제사는 종족( 宗 族 )집단의 결집력이기도 하기 때문에, 총독부 당국은 그 이용에 대해서 신중한 태도를 계속 취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55. 3. 중견인물 양성시설에서의 경신숭조 야마자키 노부요시와는 옛날부터 지인인 와타나베 토요히코( 渡 辺 豊 日 子, 경상남도지사, 나중에 총독부 학무국장)은, 전게한 자력갱생휘보 에 도지사로서 최초로 기고하고 있다 56. 그것에 53)전게한 오치 타다시치( 越 智 唯 七 ) 新 旧 対 照 朝 鮮 全 土 道 府 郡 面 里 洞 名 称 一 覧 에 의한다. 54) 洞 里 뒤에 洞 祠 / 始 祖 位 牌 를 企 祭 / 生 死 가 連 綿 하야 洞 里 를 為 하는/ 錦 城 里 의 精 神 統 一 案 ( 매일신보 1934 년 12 월 9 일 부, 1 면)에 의한다. 동리 의 조금 높은 언덕에 洞 祠 를 세우고, 가운데에 이 동리를 연 박씨의 위패를, 그 옆에 마을 사람의 각 씨족 각각 시조의 위패를 세우는 등, 봄과 가을에 전 마을 사람이 공동제사 를 지낸다는 정신통일 의 방법이다. 동리를 연 인물의 位 牌 云 々은 신사신앙에 의거한 우지가미( 氏 神 )적인 발상이 아니라, 조상에서 자신에 이르는 종적 인 연원 과 동리와의 횡적 인 관계 를 정신통일 하기 위한 발안이고, 어디까지나 유교적인 제사의 응용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금성리진흥회는 1933 년 2 월에, 전라남도의 모범농촌 으로서 총독부에서 210 엔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 三 模 範 村 에/보조금전달 ( 東 亜 日 報 1933 년 2 월 5 일부, 3 면)에 의한다. 55) 朝 鮮 総 督 府 総 督 官 房 문서과촉탁인 젠쇼 에이스케( 善 生 永 助 )는 일련의 동족부락 조사를 통해, 농촌진흥운동에서 그 이용을 의도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제 41 집 朝 鮮 の 聚 落 後 篇 (1935 년)의 서문 ), 총독부 당국은 그 안을 채용하지 않았다. 종족집단의 결집력은 통치의 방해가 되고, 유교적인 조상숭배는 국체관념 에 의거해서 황조신( 皇 祖 神 )숭배에 이르는 숭조 와는 양립하지 않는다. 덧붙여, 조선의 관습 에 의한 가족법을 개정해 가는 과정( 조선민사령 의 개정)과도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총독부에 의한 가족법 개정작업은 본국 정부에 의한 내지 의 제도도입 방침과 조선의 관습 과의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진행되어 갔기 때문이다. 56)전게한 自 力 更 生 彙 報 제 3 호의 와타나베 토요히코( 渡 辺 豊 日 子 ) 我 が 道 の 農 村 振 興 (1933 년 6 월 30 일, 4~7 쪽). 또 야마자키는 우가키가 총독으로 취임(1931 년 6 월)한 직후인 1931 년 10 월, 경상남도주최의 농촌진흥강연 을 3 일간 12
의하면, 도내에 있는 농업관계 학교의 개선 을 위해서 야마자키와, 그의 제자이면서 동일하게 고신도 를 받아들인 농본주의자이기도 한 카토 칸지( 加 藤 寛 治 ) 57 의 힘을 빌리고 있다. 즉, 와타나베는 경상남도 남해군의 농업실습학교( 補 習 的 인 농업학교)의 전임교장(종래는 보통학교의 교장이 겸임)으로, 카토로부터의 추천을 받아 토야마( 遠 山 ) 라는 인물을 채용했다. 그리고, 밀양농잠학교(도립의 농업학교)의 교육주임으로는 야마자키의 추천으로 쿠스노키 로쿠시로( 楠 碌 四 郎 ) (야마자키 경영의 신풍의숙장)를 채용했다고 한다. 쿠스노키 로쿠시로는 나중에 황해도 지방개량주사( 地 方 改 良 主 事 )로서, 1936 년 6 월에 설립된 황해도 농민훈련소(황해도립의 중견인물 양성시설)의 소장도 된다. 그리고 카토의 일본국민고등학교 졸업생(김상린[ 金 尚 麟 ],1935 년 1 월 졸업)도, 평북고등농민강습소(백세명[ 白 世 明 ]이 경영하는 중견인물 양성시설, 1935 년 12 월 설립)의 강사를 맡고 있다. 이 강습소는 일본국민고등학교와 동일한 훈육( 訓 育 )을 한다 고 한다 58. 여기서, 농민교육의 장에서는 빠른 시기부터 야마자키와 카토의 영향이 침투되어 갔다는 것이 예상된다. 그것이 응축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1935 년 1 월의 임시도지사회의 결정에 따라 확충이 시도되는 중견인물 양성시설이다. 이 설치 경영 등에 관해서는 3 월에 각 도지사앞으로 정무총감통첩 59 을 보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다음 해 2 월에도 동일하게 각 도지사앞으로 정무총감통첩 60 을 보내 양성시설의 교육방침에 관해서 보충의 지시를 내리고 있다. 그것에 의하면, 이 경영에 대해서는 반드시 획일된 주의방침을 취할 필요 는 없다. 농민훈련소 등의 소장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전무자( 専 務 者 )를 배치 하고, 교육훈련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유재량에 맡기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사료( 思 料 )된다 고 하고 있다. 확실히 1936 년 12 월에 출판된 조선총독부편 농산어촌에 있어서의 중견인물 양성시설의 개요 (이하, 개요로 약칭)를 보는 한, 게재된 40 곳의 시설이 획일적 주의방침 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육훈련 도 세부적으로는 소장 등이 가꾸어 온 농본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자유재량 이 인정되어져 있는 듯 하다. 그렇다고 해도, 대략적으로는 야마자키와 카토의 영향이 있다고 예상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일정한 획일적 주의방침 을 찾아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다음은 그것에 대해서 고찰하겠다. 경기도에는 양성시설이 5 곳에 있다. 그것의 훈련방침 에 한하면, 실습을 주로 하고 농업노동과 실습체험을 통해 황국농민( 皇 国 農 民 )다운 정신을 도야( 陶 冶 )하고 신념의 배양에 힘씀과 함께 농업경영의 진수를 체득한다 는 문장으로 통일되어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황국농민 이란, 야마자키의 농민도 에서 말하는 천황에 귀일하는 신념의 사람 으로서의 황국의 농민 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황국농민 이라는 정신주의 실천적 훈련은 훈련실시상황 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예를 들면, 연습생 그룹을 가족에 유사시켜 자치협동의 정신 을 순치( 馴 致 ) 함양한다는 내용과 정신의 단련도야 에 가장 중점을 둔다는 점이고, 이것도 5 곳 시설에 공통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다른 양성시설에서는 표현이 다르거나 농담이 있거나, 또 그와 같은 표현이 쓰여져 있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양성시설의 특징으로 본다면 최대공약수적인 요소로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이 짙은 곳으로 표적을 줄여가면, 야마자키의 경신숭조 관의 하고 있었다(동래, 마산, 진주에서). 농촌진흥강연/경남도주최로 동아일보 (1931 년 10 월 4 일부, 6 면)에 의한다. 당시의 경상남도지사는 와타나베이다(1933 년부터 총독부학무국장). 와타나베는 아이치현의 이사관이었던 시기에 (1918 년~1919 년 12 월), 야마자키 노부요시의 지도로 농사개량 등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한국국사편찬위원회 HP 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에 의한다. 57)카토 칸지( 加 藤 寛 治,1884~1967)는 농민교육(일본국민고등학교)과 만몽( 満 蒙 )개척을 선도한 인물로써 알려져 있다. 그 신도농본주의( 神 道 農 本 主 義 )는 카케이 카츠히코( 筧 克 彦 )의 고신도( 古 神 道 ) 입장에서 농민도와 무사도를 융합한 것이라고 한다. 타케다 교지( 武 田 共 治 ) 日 本 農 本 主 義 の 構 造 ( 創 風 社,1999 年 ) 제 5 장을 참조. 또 카토와 카케이와의 관계를 알기에는, 사가이 타츠루( 嵯 峨 井 建 ) 満 洲 の 神 社 興 亡 史 ( 芙 蓉 書 房 出 版, 1998 年 ) 제 4 장이 참고가 된다. 58)조선총독부편 農 村 漁 村 に 於 ける 中 堅 人 物 養 成 施 設 の 概 要 (1936 年 12 月 )에 의한다. 59)각 도지사앞으로 보낸 정무총감통첩(1935 년 3 월 16 일부)은 農 山 漁 村 振 興 上 留 意 すべき 要 項 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총독부편 朝 鮮 施 政 に 関 する 諭 告, 訓 示 並 に 演 述 集 (1937 년)에 수록. 60)각도지사 앞으로 보낸 정무총감통첩(1936 년 2 월 14 일부)는 農 山 漁 村 の 振 興 に 付 職 員 視 察 の 結 果 に 徴 し 改 善 刷 新 を 要 す と 認 むる 事 項 이라는 제목으로, 전게한 自 力 更 生 彙 報 제30호 (1936년2월20일, 4~5쪽)에 수록. 13
반영여하가 조금씩 보여진다. 경기도의 양성시설의 하나는 여주군 농도( 農 道 )강습소이다. 그곳에서의 훈련시설상황 의 정신 단련도야 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정신의 단련도야와 敬 信 ( 敬 神 의 오류=인용자)숭조 관념의 함양에 가장 힘을 쏟고 매달 1 일 및 15 일에는 여주 神 社 ( 神 祠 의 오류=인용자)에 매일 조회할 때에는 문묘( 文 廟 )에 참배시키고 그외에 조상의 제사날 및 춘추 2 회의 절사( 節 祀 ) 에는 귀가해서 제사에 참석하게 한다 여주군 농도강습소에는 경신숭조의 관념 이란 말이 덧붙여져 있다. 매일 조회 때에는 문묘에 참배 시킨다란, 문묘의 건물을 이용해서 설치된 이 시설 특유의 방법이다 61. 조상의 제삿날 및 춘추 2 회의 절사 에는 귀가해서 제사에 참석하게 한다 고 쓰여져 있는 것은, 막연하게 종래의 조상숭배를 장려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만 보면, 조상숭배를 천황에 귀일시키려는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다른 양성시설 중에서 조상숭배를 훈련 속에 도입하고 있는 사례를 이어서 개요에서 보겠다. 충청남도 농촌여자강습소는 도립의 중견인물 양성시설이다. 1934 년 4 월에 설립되어, 소장은 유천( 柳 川 )보통학교의 훈도 카기모토 스에카즈( 鍵 本 末 一 )가 겸임하고 있다. 정원 30 명, 현인원 30 명으로 훈련기간은 3 월부터 다음 해 1 월까지의 11 개월이다. 훈련방침 5 항목의 처음은 국체관념을 명징하고 경신숭조의 관념을 함양하고 감사보은의 생활을 하는 것 이다. 이것은 1936 년 1 월에 공표된 심전개발운동 의 목표에 입각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훈련방침 의 표현이 심전개발 에 맞춰서 고쳐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면, 경신숭조 의 실천에 관한 부분을 보겠다. 매일 행사표 라는 일과에는, 기상 후와 취침 전에 카미다나( 神 棚 )예배 가 있고, 조례 때에는 동방요배( 東 方 遙 拝 ) 와 부모경례 가 행해지고 있다. 카미다나에는 신궁대마( 神 宮 大 麻 )가 모셔져 있다고 생각된다. 동방요배 는 황실요배이기 때문에, 부모경례 와의 조합을 위해서 야마자키의 경신숭조 관의 반영이라고 이해된다. 다음은 황해도립의 양성시설인 황해도농민훈련소에 관해서이다. 1936 년 6 월에 설립된 이 시설의 소장은 야마자키가 경영하는 신풍의숙 숙장( 神 風 義 塾 塾 長 )이었던 쿠스노키 로쿠시로( 楠 碌 四 郎 )이기 때문에(당시는 황해도 지방개량주사), 신풍의숙적인 교육이 예상된다. 정원 30 명, 현인원 34 명(1 군에 2 명씩으로 했기 때문), 훈련기간은 3 월부터 다음 해 2 월까지로 12 개월이다. 훈련방침 의 제 1 에는 신념있는 황국의 농민 또는 참다운 농촌지도자 및 황국의 농민 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이하에 특수훈련행사 부터 인용하겠다. 가. 국기게양 및 강납( 降 納 )의 식 (생략) 나. 황거 및 신궁(이세( 伊 勢 )) 요배 기상해서 세면 후 및 밤에 취침 전에 행한다. 전원 열립( 列 立 ), 소장 절 2 번, 박수 2 번, 요배의 시( 遙 拝 の 詞 )를 올리고 박수 2 번, 절 1 번 전원 마지막으로 함께 절 1 번 다. 부조( 父 祖 )에게 요례( 遙 礼 ) 밤의 요배 후에 부조(혹은 그 묘지)가 있는 방향을 향해 각자 감사의 마음으로 경례 라. 아침저녁의 회례( 会 礼 ) 아침은 신궁요배 후에, 밤은 부조의 영에게 경례한 후에 풍기당번의 발성하에 연장자인 지도자와 인사를 나눈다. 마. 정좌( 静 座 ) (생략) 61)전게한 졸고 朝 鮮 農 村 の 中 堅 人 物 에서는 여주군의 중견인물 양성에 유림( 儒 林 )의 이미지를 부여시킨 의도가 있었던 것과, 여주군행정과 농도강습소와의 관계 등에 관해서 고찰했다. 14
바. 점호 (생략)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 농촌진흥운동기의 경신숭조( 敬 神 崇 祖 ) (Ver. 1.0) 나. 황거 및 신궁(이세( 伊 勢 )) 요배 는, 경신 을 내용으로 하는 부분이다. 다. 부조( 父 祖 )에게 요배 는 숭조 에 상당하는 부분으로, 이미 돌아가신 부조 의 경우는 묘지 를 향해서 경례 하도록 되어 있다. 라. 에서는 부조의 영에게 경례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신 과 숭조 와의 조합은 가계 가 숭조 를 매개로 해서 천황에 귀일해 간다는 야마자키의 경신숭조 관 그 자체이다. 동일한 사례가 되는 것이 함경북도 농사수련장( 農 事 修 練 場 )이다. 1935 년 10 월에 설립된 도립의 양성시설로, 소장은 지방사회주사의 혼마 아키후사( 本 間 明 房 )이다. 정원 20 명, 현인원 20 명과 청강생 1 명, 훈련기간 3 월부터 12 월까지 10 개월이다. 훈련방침 7 항목의 필두에 신앙생활을 훈련의 중심으로 한다 가 있고, 지도에 있어서는 신의 인식을 깊게 하라 라고 경신 의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두번째 항목은 국체관념의 양성과 조상숭배 라는 것으로, 숭조 를 심전개발운동 의 목표에 입각한 표현으로 하고 있다. 그 내용도 예배할 때,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물론 황령( 皇 霊 ) 및 조상 및 부모에 대해서 예배드리는 것과 함께 생활의 모든 면을 통해 국체관념의 양성과 조상숭배의 정신의 함양에 노력한다 고 되어 있었다. 여기서 야마자키의 경신숭조 관을 볼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예배 를 보겠다. 예배 는 하루의 일과 중에서 아침 저녁에 행해지고 있었다. 묵도 후에 이세( 伊 勢 )의 황대신궁( 皇 大 神 宮 ), 명치신궁( 明 治 神 宮 ), 천황황후양폐하, 오오야가미사마( 大 親 神 様 ), 조상의 영, 부모 에 대해서 예배 하는 것이다. 게다가 오오야가미사마 란, 조신( 祖 神 ), 즉 씨족의 시조적인 신을 말한다. 다음도 오오야가미사마, 조상의 영 이라는 숭조 에서의 숭배대상을 명시하고 있는 사례를 보겠다. 함경남도 농민도장( 農 民 道 場 )은 도립의 양성시설이다. 1936 년 4 월에 설립되어, 소장은 함흥 제 1 보통학교의 훈도와 도의 속( 属 )을 겸무하는 츠카모토 타다노부( 塚 本 忠 信 )가 겸임하고 있다. 정원 60 명, 현인원 40 명(1936 년도는 정원이 40 명이었기 때문에)으로, 훈련기간은 3 월부터 11 월까지 9 개월이다 (1936 년도는 4 월부터 11 월까지). 훈련방침 은 7 개 항목이 있는데, 1.국체관념의 명징 2.경신숭조의 사상 및 신앙심의 함양 이라는 2 개 항목은 심전개발운동 의 목표를 그대로 내걸었던 것이다. 이 목표의 공표 후에 설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 2 항목의 설명에서는 경신숭조 에 있어서의 숭조 의 진의가 기술되어 있으므로 이하에 명시하겠다. 2.경신숭조의 사상 및 신앙심의 함양 神 祠 를 중심으로 경신숭조의 관념을 양육한다. 즉, 조상숭배는 실로 조선의 현저한 미덕이고, 서로 조상의 위업위훈( 遺 業 遺 訓 )을 지키고 가명( 家 名 )을 중요시 하여 도의( 道 義 )를 연마해서 세상의 문화 진전에 기여해 나간다. 조상이 신격화되어 가면서 신이 되고 게다가 통일되어 가면서 일본의 건국신을 최고의 신으로 숭경하게 된다. 여기에 경신숭조는 국체관념과 합치되겠다는 것을 감득( 感 得 )시킨다. 처음에 神 祠 라는 것은, 시설의 대지 내에 세워진 神 祠 한 동을 가리킨다. 단 법으로 정해진 神 祠 는 아니다. 인용한 경신숭조 에 관한 설명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인의 조상숭배 를 유도하면서 국체관념 에 합치 된 숭조 로 인도하려는 의도가 쓰여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내용도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상이 신격화되어 가면서 신 이 되고, 게다가 일본의 건국신을 최고의 신으로 숭경하 는 것으로 통일 된다고 한다. 종래까지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경향이었던 조상숭배 였지만, 여기서의 조상은 유교식과는 다른 신격화 된 신 으로 명기되어 있다. 그리고, 황조신으로 통일 (야마자키의 말을 15
빌린다면 귀일 이 될 것이다)되어 가는 숭경 의 과정을 감득 하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이 경신숭조 에 관한 설명은, 야마자키의 경신숭조 관의 영향도 엿보이지만, 국체관념 에 따르도록 한 정합성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심전개발운동 의 목표가 된 경신숭조 를 해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62. 맺는 말 본고의 과제는 들어가는 말 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관제의 촌락제사가 창출된 것, 그리고 중견인물 양성시설에서의 정신주의를 경신숭조 개념으로 풀어가면서 분석함에 따라, 그것이 이 시기의 신사정책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검토하는 일이었다. 이 과제에 대해서 본고에서 얻을 수 있었던 성과를 이하에 정리해 보겠다. 조선총독부가 1930 년 전반을 중심으로 실시한 농촌진흥운동에 있어서, 총독부 촉탁이 된 야마자키 노부요시의 농본주의에 있어서의 정신주의가 영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그가 했던 조선에서의 활동 개략을 명시하고, 1 농촌자치 의 장이 어떠한 것으로 상정되어 있었는가, 즉 촌락자치 에 대한 행정력의 침투 문제에 대해서 대강 정리했다. 그리고 2 고신도 에 기반을 두고 천황귀일 사상 = 황국의 농민 이라는 정신주의가 이식되어 가는 실태도 다소 명시할 수 있었다. 2에 대해서 조금 더 보충하자면, 야마자키의 경신숭조 관은 황실을 국민의 본가로 자리매기는 가족국가관을 천황귀일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포인트는 경신 과 숭조 의 조합에 있으며, 숭조 를 매개로 해서 천황에 귀일해 간다고 하는 그의 가계 에 대한 파악방법에 있었다. 이와 같은 경신숭조 관이 영향을 미친 실태로서, 농촌진흥운동의 지도가 실시되는 갱생지도부락에 <관제> 촌락제사를 창출해 내는 기운이 양성( 醸 成 )되었다는 것과, 중견인물 양성시설에서의 경신숭조 관이 반영된 훈련 의 사례도 제시했다. <관제> 촌락제사에 관해 부언하자면, 숭조 적인 요소는 찾아낼 수 없지만, 대략 마을 사람의 정신세계를 경신 적 질서로 재편하려고 모색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있다. 게다가, 법령으로 정해진 신사 神 祠 의 틀에서 벗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진흥운동 속에서 그것을 만드는 기운이 양성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농촌진흥운동기에서의 신사정책 일환으로 자리매길 수 있지만, 신사정책의 큰 틀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는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관제> 촌락제사가 신사정책에서 촌락제사 이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문제와 야마자키의 경신숭조 관과 심전개발운동 의 목표로 내세운 경신숭조 사상 과의 관계가 큰 과제로 남는다. 그 위에 1936 년 8 월의 신사제도개편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가도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과제에 대해서는 본고와 같은 시기에 발표한 졸고( 들어가는 말 에서 기술했다)에서 가능한한 검토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본고의 이른바 속편이라고 하고 싶다. 또, 본고에서 문제삼은 <관제> 촌락제사 등 개개의 사례도, 각각을 파헤져 분석하지는 못했다. 자료에 제약이 있기 때문에 곤란하긴 하지만 금후의 과제로 삼고 싶다. 62)이 이해도 포함해서 심전개발운동 의 목표인 경신숭조 에 관해서는 전게한 졸고 朝 鮮 総 督 府 の 農 村 振 興 運 動 期 における 神 社 政 策 에서 고찰하고 있다.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