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25 輯 社 團 法 人 退 溪 學 釜 山 硏 究 院 201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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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25輯 퇴계학 退溪詩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李 貞 和 7 退溪 詩 <淨友塘>의 학문적 맥락 읽기 김 병 권 27 사상 先秦儒家美学的范畴体系 张 黔 51 试析孟子 民贵 说的 尊君 实质 刘 清 平 65 儒家儀禮의 方位 에 관한 文化解釋 趙 昌 奎 77 다산 정약용의 兒學編訓義 와 문자교육적 가치 金 景 善 99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슨테츠록(寸鐵錄) 과 명심보감 成 海 俊 121 문학 東還封事 에서 본 朝天日記 의 특성 연구 장 안 영 141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 華東吟 을 중심으로 송 기 섭 163 문화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최 재 목 안 선 희 189
命理學, 미신인가 학문인가? - 음양오행론과 관계하여 김 학 목 215 부록 彙 報 237 退溪學論叢 編輯委員會 運營規程 239 退溪學論叢 硏究倫理 및 運營規程 245 退溪學論叢 投稿規程 250 論文作成 要領 253
THE TOEGYE HAK NONCHONG Vol. ⅩⅩⅤ CONTENTS Toeryehak A Study on the Meaning of Mind in the poetry of Toegye Lee Hwang / Lee, Jeong-hwa 7 Reading scholastic contexts of Jeongwoodang / Kim, Byeong-Kweon 27 Thought Pre-Qin Confucian aesthetics category system / Zhang Qian 51 An Analysis of Mengzi s Idea of People as the Most Important Element / LIU Qing-ping 65 Research on point of the compass in Confucian ritual / Jo, Chang Gyu 77 AhHakPyeonHunEui of Dasan, Jeong Yak Yong, and literal educational value / Kim, kyung-sun 99 The study of Fujiwaraseika,s shunteturoku and Myongshimbogam / Sung HaeJun 121 Literature Donwhan-Bongsa seen through Jocheon-ilgi characteristics of the study / Jang, Anyoung 141
China-Korea Relations Represented in Poetry of Ui-am Yu In-seok - Focusing on Hwadonguem / Song Gi Soep 163 Culture The idea of music in Chosun with the name of gukak / Choi jae-mok An sun hee 189 Is the four pillars of destiny a superstition or a science? / Kim HakMok 215
退溪學論叢 第25輯(7 25쪽) 退溪詩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1)李 목 Ⅰ. 들어가는 말 Ⅱ. 퇴계의 심덕(心德)과 언행(言行) Ⅲ. 퇴계시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1. 관도(觀道) 貞 和* 차 2. 성오(醒悟) 3. 명념(銘念) Ⅳ. 맺는 말 論文 抄錄 퇴계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함으로써 부(富)나 벼슬을 얻기 위한 학 문이 아닌 자신의 심덕을 쌓는 수양의 대상으로 학문을 인식하였다. 퇴계의 심덕은 신독(愼獨) 을 통한 자기 수양과도 무관하지 않다. 퇴계의 심덕은 겸 손한 자질(資質)에 의해 더욱더 공고해졌으며, 수많은 후학들에 의해 유도(儒 道)로써 겨레의 등불을 밝혀준 스승으로 역사에 길이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퇴계시는 인욕이 배제된 성현의 심사(心事)를 우러르며 도(道)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 특징적이다. 퇴계의 시문에는 도심(道心)의 깨달음을 위해 항 상 수양하는 선비의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이를 통해 성오(醒悟)의 마음을 견지한 퇴계의 사유를 살펴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음시(吟詩)>에서 시가 사람을 그르치지 않고 사람이 스스로 그릇됨을 언표한 것은 시가 곧 그 사 람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퇴계는 영종(令終)할 무렵까지 일생을 면학(勉學)의 정신으로 살았으므로, 그의 한시를 통해 유자(儒者)의 계명(誡命)을 환기하는 설리시(說理詩)의 시 * 동양대학교 교수 논문투고일: 2015.06.15 / 심사개시일: 2015.06.17 / 게재확정일: 2015.06.27
8 退溪學論叢 第25輯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퇴계시에는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깊이 새겨 두는 마음, 즉 명념(銘念)의 의지가 투사되어 있으니, 독서(讀書)하 는 일상을 시화한 작품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계당우흥(溪堂偶興)> 시에 나타난 퇴계의 참 마음은 성현의 학문을 배 우고 이를 실천하는 삶에 의미를 둔 것이어서 부귀영화와는 상관없이 진정 한 선비로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계거잡흥(溪居雜興)> 시를 통해 퇴계의 마음속에는 항상 본말(本末) 의식이 분명히 자리하고 있음을 헤아릴 수 있으 니, 퇴계에게 있어 항상 본업(本業)은 성학(聖學)을 궁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청명(淸明) 계상서당(溪上書堂)> 시에는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본받아 성 학(聖學)을 마음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에 외물(外物)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 던 퇴계의 참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주제어: 선비, 聖學, 聖賢, 愼獨, 心德, 儒道. Ⅰ. 들어가는 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포괄하는 의 미로써 학문을 인식하였으니, 이치를 궁구하였어도 실천에서 그것을 체 험할 때에야 비로소 진실로 안다고 확신하였다.1) 퇴계는 배움과 실천에 힘쓰는 자기 수양2)의 공부를 중시하였던 선비였다. 그의 학문은 지행합 일(知行合一)을 실천하려는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사변적인 것 에 그치지 않았으며, 그의 언행(言行)은 유자(儒者)들의 본보기가 되었 다.3) 학퇴계(學退溪)의 정신을 실천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스승인 퇴계가 도(道)를 환하게 바라보면서도, 아직 도를 미처 1) 退溪先生文集內集, 卷1, 疏 <戊辰六條疏>. 學省也 習其事而眞踐履之謂 也 ; 退溪先生文集內集, 卷14, 書 <答李叔獻珥 戊午>. 窮理而驗於踐履 始爲眞知 2) 安炳周, 退溪의 學問觀-心經後論을 중심으로, 퇴계학 연구논총1, 경북대 학교 퇴계연구소, 1997, 213쪽. 3) 李貞和, 退溪詩 硏究,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61쪽.
退溪詩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9 못 본 듯이 갈구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점을 회억(回憶)하며 퇴계의 심덕 (心德)을 기린 바 있다.4) 퇴계가 마음 다스림 을 수양의 근본으로 삼고서 성학(聖學)을 생활 속 에 실천하며 살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로써 퇴계에게 성학은 항도(恒 道)를 제시하는 지표과도 같은 것이었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가운 데 청산(靑山) 엇뎨 야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 엇뎨 야 주야(晝夜)애 긋디 아니 고/ 우리도 그치디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 호리라. 의 시조에서 퇴계는 성학(聖學)을 통해 자기 마음을 수양하는 것 은 영원히 변함없는 항도(恒道)를 실천하는 것임을 일깨우고 있는데, 이 것이 바로 참다운 선비의 삶을 지향한 퇴계의 진심(眞心)이었다. 2000여 수를 상회하는 퇴계의 한시는 참다운 선비의 구도적(求道的) 시정신이 내 재된 작품들이 적지 않다.5) 이 작품들을 통해 시를 지으며 자신의 마음 을 수양하려 한 퇴계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에 본고 는 도학자(道學者)인 퇴계가 참 선비의 진심으로 살았다는 점에 착안하 여, 퇴계의 한시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작품에 형상화된 선비의 마음을 논의의 초점으로 두고 퇴계의 시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퇴계의 心德과 言行 유가(儒家)에서는 한 그루의 난초에 빗대어 자기 수양을 강조한 바 있 으니, 자기 자신의 수양을 위한 공부는 깊은 산의 무성한 숲 속에서 자 라난 난초가 하루 종일 향기를 뿜어내도 스스로 향기로움을 알지 못하 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인식하였던 옛 선비들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 기 자신의 수양을 위한 공부가 진정한 선비의 학문 자세라고 파악하였 었다.6) 퇴계는 이러한 위기지학의 자세와 실천적인 삶을 통해 마음의 덕 4) 李貞和, 柳成龍先生 詩文學硏究, 아세아문화사, 2007, 99쪽. 5) 李貞和, 退溪 李滉의 詩文學 硏究, 보고사, 2003, 106쪽.
10 退溪學論叢 第25輯 을 쌓았던 선비였다. 궁극적으로 퇴계는 위기지학에 전념함으로써 부 (富)나 벼슬을 얻기 위한 학문이 아닌 자신의 심덕을 쌓는 수양의 대상 으로 학문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다음의 글에는 퇴계의 심덕이 신독(愼 獨) 을 통한 자기 수양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선생은 천품(天品)이 고결하며 수양을 쌓음으로 도를 견지하였으며, 마음이 씻은 듯이 깨끗하며 운치(韻致)가 맑으며 그윽한데다 단정하며 성실해서 어두 운 곳에 혼자 있을 때라 하여 자신을 속이지 않았으며, 일상생활에 있어 몸가 짐이 바르고 엄숙하여, 그 의젓한 기색은 범접할 수 없을 듯하였다. 그러나 사 람을 대할 때에는 따뜻하고 공손하여 푸근하고 화락한 기운이 감돌았고, 마음 을 열어 남들과 대화할 때에는 자신의 속마음을 환히 드러내 보였다. 또 겸허 하게 남에게 묻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를 줄 알 았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선함이 있으면 자기의 것인 양 기뻐하고, 자기에게 조 그마한 잘못이 있으면 비록 하찮은 사람이 말해 주어도 고치기에 인색한 빛이 없었다.7) 대체로 옛 선비들은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 이니,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처럼 하며,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는 것처 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스스로 만족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는 데서 삼간다. 8)와 같은 대학(大學) 장구(章句)의 내 용에 근거하여 신독 을 이해하였다. 퇴계가 힘쓴 신독 의 의미 역시 남 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곳에 홀로 있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 6) 退溪先生言行錄, 卷1, <類編> 敎人章. 先生曰 君子之學 爲己而已 所謂爲 己者 卽張敬夫所謂無所爲而然也 如深山茂林之中 有蘭草 終日薰香而不自知 其爲香 正合於君子爲己之學 宜深體之 7) 退溪先生言行錄, 卷2, <類編> 資品章. 先生天品高 充養有道 襟懷洒落 韻 致淸遠 莊正誠實 不欺闇室 端居整肅 毅然之色 若不可犯 而至其待人之際 溫 恭謙遜 一團和氣 開懷與語 洞見心肝 又謙虛好問 捨己從人 人有一善 若出諸 己 己有小失 雖匹夫言之 改之無吝色 8) 大學, 傳之六章.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慊 故君子必愼其獨也
退溪詩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11 하며 언행(言行)을 삼가야 하는 실천 덕목이었다. 위의 글은 신독 을 실천한 퇴계의 심덕(心德)이 대인 관계에서 적지 않 은 효력으로 작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가 다른 사람의 선행(善 行)을 들으면 자기의 일처럼 기뻐하였던 점과, 자신의 과오를 하찮은 사 람에게 듣더라도 바로잡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즉시 시정했다는 점이 그러하다. 이 글은 퇴계의 심성이 깨끗하며 그 내면에 깃든 운치 또한 청아(淸雅)하였던 사실을 밝힘으로써 단정하고 성실한 그의 일거일동(一 擧一動)을 입증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다른 사람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생각한 뒤에 말하였고, 아무리 갑작스럽거 나 급할 때라도, 일찍이 한 번도 빨리 말하거나 조급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번화하거나 소란스럽고 난잡한 속에 있더라도 자기 몸을 더욱 엄하게 지 키고 단속하였으며, 어두운 방이나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자기 몸 처하기를 더욱 공손히 하고 삼갔다. 생각을 낼 때에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지극히 살피고, 사물에 응대할 때에는 아무리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반 드시 그 마땅함을 찾았다.9) 이 글 가운데 다른 사람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생각한 뒤에 말하였 고, 아무리 갑작스럽거나 급할 때라도, 일찍이 한 번도 빨리 말하거나 조급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고 한 대목에서는 매사(每事)에 심사숙고(深 思熟考)함으로써 사리판단을 분명히 한 퇴계의 마음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위에서 생각을 낼 때에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지극히 살피고, 사물에 응대할 때에는 아무리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반드시 그 마땅함을 찾았다. 고 한 대목 역시 이러한 퇴계의 마음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어지럽거나 시끄럽고 난잡한 속에 있더라도 자기 몸을 더욱 엄하게 지키고 단속하였다. 고 한 대목을 통해서는 신독 으로 확충된 퇴 9) 退溪先生言行錄, 卷6, <附錄> 言行通述章. 與人言 思而後發 雖在倉卒急遽 之際 未嘗有疾言遽色 雖在紛華波蕩之中 而所以自守者 愈嚴愈約 雖在暗 室屋漏之隱 而所以自處者 愈敬愈謹 思慮之發 雖少 必致其審 事物之應 雖細 必求其當
12 退溪學論叢 第25輯 계의 심덕이 외부로 발현된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이로써 그의 심덕은 신독 과 같은 선비의 마음가짐을 근간으로 형성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 다. 선생이 처음에는 자신의 재주와 덕을 깊이 감추어, 비록 학문에 정밀하였지 마는 말이나 문자에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그 친구까지도 그가 도학에 조예 깊 은 선비인 줄을 몰랐었다. 그러다가 나이가 더욱 많아지고 덕이 더욱 높아져서 덕을 기른 지 이미 오래되니, 그 정화(精華)는 저절로 빛나고 실상은 절로 가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학자들이 수없이 모여들어 그를 스승으로 높여 섬겼다. 바른 학문을 밝게 드러내고 후학에게 공부의 길을 열어주고 인 도하여,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도가 불꽃처럼 우리 동방을 밝히게 한 분은 오직 선생 한 분이 계실 따름이다.10) 이 글을 통해 퇴계의 심덕은 겸손한 자질(資質)에 의해 더욱더 공고해 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퇴계는 재주와 덕망을 깊이 간직한 채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았으므로 벗조차 그가 도학자였음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드러내지 않았어도 세월이 지날 수록 그의 덕업이 가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빛났으므로 이로 인해 그에게 모여든 수많은 후학들에 의해 그는 유도(儒道)로써 겨레의 등불 을 밝혀준 스승으로 역사에 길이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었다. 다음의 글 에서는 퇴계가 허언(虛言)을 용납지 않는 마음 자세를 견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생각해서 얻은 것은 한갓 빈말에만 붙여 두지 않고, 반드시 그것을 돌이 켜 몸소 행하였던 것이다. 곧 내 몸과 마음과 성정에다가 몸소 경험하는 실행 의 공을 더하여, 한 치를 얻으면 한 치를 지키고, 한 자를 얻으면 한 자를 지켰 다. 고요하게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는 것은 날로 더욱 치밀해지고, 움직 10) 退溪先生言行錄, 卷6, <附錄> 行略章. 初先生深自鞱晦 雖專精學問 而不發 於言語文字 至於朋友 亦未知爲道學之儒也 及其年益高 德益卲 充養旣久 精 華自炳 其實自有不可掩者 然後 學者翕然尊師之 其闡明正學 開導後生 使孔 孟程朱之道 煥然復明於吾東方者 惟先生一人而已
退溪詩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13 여 살피는 것은 날로 더욱 자세하였다.11) 퇴계는 항상 한 자를 배우면 한 자를 지킬 정도로 실행에 힘썼던 선 비였다. 위의 글에서는 배운 내용을 입으로만 암송할 수 있는 것으로 끝 나는 공부는 퇴계에게 무의미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입으로만 암송 하고 마는 공부를 흔히 구이지학(口耳之學) 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것이 진정한 선비의 학문 자세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선비의 학문은 하루아 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어서, 기초부터 공고하게 다져야 하는 것이었 다. 스승인 퇴계의 가르침은 후학들에게 증정한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 으니, 다음의 시가 그러하다. <贈李叔獻> 其四 이숙헌에게 주다(4) 別我雲中屋 구름 속에 살고 있는 나의 집을 떠나서 行穿海上山 바닷가의 산길을 뚫으며 가겠지. 忍心艱險際 어려움 겪으면서 인내심 기르고 諳俗旅遊間 여행길 다니면서 풍속도 배우리라. 本厚華應曄 뿌리가 튼튼하면 꽃이 빛나는 법 源深水自瀾 원류가 깊으면 물결은 자연적으로 생긴다네. 煩君時寄札 그대는 귀찮다 말고 때때로 편지 주어 千里慰慵閒12) 천 리 밖의 게으른 나를 위로해 주오. 위의 시에서 퇴계는 35세 연하의 젊은 후학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에게 학문의 기초부터 잘 다져가는 것이 중요함을 넌지시 일깨우고 있다. 이는 경련(頸聯)의 뿌리가 튼튼하면 꽃이 빛나는 법이며, 원류가 깊으면 물결은 자연적으로 생긴다네. 라고 한 구절에 잘 나타나 있으니, 본(本) 과 원(源) 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마음가짐임을 보 11) 退溪先生言行錄, 卷6, <附錄> 言行通述章. 其所思而得之者 不徒付之於空 言 要必反之於躬行 卽吾身心性情之中 益加體驗踐履之功 得寸守寸 得尺守尺 靜而存養者 日益密 動而省察者 日益審 12) 退溪先生文集外集, 卷1, 詩, <贈李叔獻 四首> 其四.
14 退溪學論叢 第25輯 인 것이기도 하다. 함련(頷聯)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심(忍心) 은 역경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선비의 강직한 시정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특히 위 의 인심(忍心) 에는 그 당시 귀향길에 올라야 하는 율곡의 고단한 여정 (旅程)이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율곡이 장차 직면하게 될 험 난한 인생 역정의 의미도 함께 내포된 시어라고 사료된다. 미련(尾聯)에 서 퇴계는 스스로를 천 리 밖에 사는 게으른 사람 이라고 고백하고 있 는데, 이를 통해 노대가(老大家)인 퇴계의 어진 마음에서 우러난 겸손한 언행(言行)을 짐작할 수 있다. Ⅲ. 퇴계시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1. 관도(觀道) 퇴계는 배우는 사람에게 늘 도(道)는 가까이 있는데 다만 사람들이 스 스로 살피지 못할 뿐이다. 어찌 일상생활 속의 사물을 떠나서 특별한 도 리(道理)가 있겠는가. 13)라고 일깨운 바 있다. 퇴계 당시의 유자(儒者)들 은 문학의 효용적 기능 중요시하였으므로 도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문장 을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퇴계 역시 문학의 효용적 기능을 중요하다고 여겨 문장으로 도를 밝게 드러내는 문이명도(文以明道) 에 충실하였다.14) 다음의 시에는 인욕이 배제된 성현의 심사(心事)를 우러 르며 도의 마음을 형상화한 그의 내면이 담겨 있다. 陶山書堂 도산서당 大舜親陶樂且安 순(舜)임금도 그릇 구어 안락(安樂)을 누렸고 淵明躬稼亦歡顔 도연명(陶淵明)도 농사 지어 얼굴이 흐뭇했네. 13) 退溪先生言行錄, 卷1, 類編 敎人章. 道在邇 而人自不察耳 豈日用事物之 外 別有一種他道理乎 14) 李貞和, 退溪 李滉의 詩文學 硏究, 보고사, 2003, 205쪽.
退溪詩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15 聖賢心事吾何得 성현(聖賢)의 심사(心事)를 내 어찌 체득하리 白首歸來試考槃15) 늘그막에 돌아와 고반(考槃) 의 시를 체험하리. 순제(舜帝),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삶과 정신을 매우 흠모한 퇴계 는 고전적(古典籍)을 통해 이러한 성현(聖賢)의 도심(道心)을 궁구하였으 리라 사료된다. 이 시는 질그릇을 구우며 살아도 안락한 마음으로 지낸 순제(舜帝)와, 전원에 은거하며 빈한하게 살았어도 자족(自足)한 마음으 로 지낸 도연명의 마음에 빗대어 성현의 도심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퇴계는 이 두 성현을 예로 들면서 도(道)의 마음은 고관대작(高官大爵) 의 위치에 있어야만 체득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퇴계는 시경 (詩經) 의 <고반(考槃)> 시를 전고로 하였는데, <고반(考槃)> 시는 은거 (隱居)의 즐거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도산서당을 짓고 도산에 은거한 퇴 계는 도(陶) 라는 지명과 관련된 고사(故事) 속의 두 성현을 우러르며 자 연과 합치하는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같은 경지가 되도록 수양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養心堂 양심당 美木齊山斧與羊 제산에 좋은 나무는 양과 도끼가 망치지만 人心何況日交戕 하물며 사람 마음이야 어찌 날마다 망치는가. 久知理欲相消長 천리와 인욕이 쇠했다 성하는 줄을 안 지는 오래 되었으니 莫遣微塵翳鏡光 조그만 티끌 날려 보내서 거울 빛을 가리지 마소. 이 시는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원인이 바로 인욕에 있음을 보여준 것 인데, 천리(天理)를 따르면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음에도 사람 들은 욕심 때문에 천리(天理)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 운 작품이다. 또한 인욕에 덮인 사람의 마음을 양과 도끼로 인해 훼손된 나무에 비유한 것이 특징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결구(結句)에서는 거울 처럼 맑게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마음 상태가 되려면 인욕이 조그만 티 15) 退溪先生文集內集, 卷3, 詩, <陶山雜詠 十八絶> 其一.
16 退溪學論叢 第25輯 끌만큼도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시는 명경(明鏡) 같은 마음일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고요히 진리의 오묘함을 관조할 수 있음 을 암시한 작품이라 하겠다. 後凋梅答 후조당의 매화가 답하다 騷情非淺後凋春 봄을 만난 후조당(後凋堂)의 시정(詩情) 얕지 않으니 苦節君休訝主人 주인의 굳은 절개 그대는 의심 마오. 與我已成心契密 나와 함께 긴밀히 심계(心契)를 맺었으니 不應桃李更交親16) 도리화(桃李花)와 다시 어울려 친하지 않을 걸세. 퇴계는 후조당의 주인인 김언우(金彦遇, 1516-1577)가 자신의 서실이 지나치게 크다고 여겨, 같은 공간에 있는 매화나무의 운치와 맞지 않을 까 걱정한다는 말을 듣고 이 시를 지어 김언우의 인격과 매화나무의 운 치가 서로 화응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고 한다.17) 퇴계는 후조당의 매 화나무를 의인화하였으니, 화자인 매화나무가 주인의 인품을 고절(苦 節) 이란 시어로 형상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계(心契) 란 시어를 통해 화자와 주인은 의기투합이 가능할 만큼 친밀한 사이임을 고백하고 있다. 후조당 주인인 김언우의 고결한 인품과 매화의 운치에 깃든 깊은 뜻을 되새기는 퇴계의 시정신을 통해 관도(觀道)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 음의 시 역시 진리의 오묘함을 관조하는 퇴계의 시정신을 읽을 수 있다. 詠懷 감회를 읊으며 獨愛林廬萬卷書 홀로 숲 속 오두막에서 만권서를 애독하며 一般心事十年餘 한결같은 뜻으로 십여 년을 살아왔네. 邇來似與源頭會 이제야 진리의 근원 깨달은 듯한데 都把吾心看太虛18) 내 마음으로 우주를 간파할 듯하네. 16) 退溪先生文集內集, 卷5, 詩, <後凋梅答>. 17) 退溪先生文集內集, 卷5, 詩, <後凋梅答>. 昨聞彦遇以堂制頗奢 恐不稱梅 韻爲病 故末絶云
退溪詩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17 기구(起句)에서는 번잡한 조시(朝市)를 벗어나 한적한 산수(山水)의 공 간에 은거하는 퇴계가 독서에 매진하며 진리 탐구에 몰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일반심사(一般心事) 란 유도(儒道)의 이치를 관조하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시화한 것이다. 퇴계는 이러한 마음을 십 여 년이나 변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곧 태허(太虛) 로 명명한 우주의 본 체까지 헤아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구(結句)에서는 태허(太虛) 를 간파하는 퇴계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으니, 이는 관도(觀道)의 마음과 도 무관하지 않다. 2. 성오(醒悟) 마음을 고요히 한 상태에서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고, 하나로 정진하 며 정제 엄숙하여 항상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정중지경(靜中持敬) 의 자세는 퇴계의 도학공부에 매우 중요하다.19) 퇴계는 이러한 정중지 경(靜中持敬) 의 자세를 바탕으로 도심(道心)의 깨달음에 이르는 공부에 몰두하였으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같은 오상(五常)을 실천하며 살 았던 선비였다. 퇴계의 시문에는 도심(道心)의 깨달음을 위해 항상 수양 하는 선비의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이를 통해 성오(醒悟)의 마음을 견지 한 퇴계의 사유를 살펴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다음의 시는 의(義)로운 인생행로를 향하는 첩경은 바로 몽매한 마음을 깨우치는 것에서 시작된 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明義齋 명의재 義路如砥坦且明 의의 길은 숯돌 같아 단연코 분명한데 一昏心燭故難行 마음의 등불 한번 어두워지면 그 길 걷기가 어렵네. 18) 退溪先生文集外集, 卷1, 詩, <詠懷>. 19) 김영숙, 退溪先生 卷17-퇴계 시 넓혀 읽고 깊은 맛보기, 영남퇴계학연구원, 2014, 176쪽.
18 退溪學論叢 第25輯 欲知大寐如醒處 몽매함 크게 깨우치는 곳을 알고자 하면 唯在硏精積久生 오래도록 마음을 갈고 닦는 것에 달려 있네. 위의 시는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일깨운 작품인데, 퇴 계는 마음을 수양하는 것을 심촉(心燭), 즉 마음의 등불 을 밝히는 것으 로 비유하고 있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를 통해, 퇴계는 사람들이 정 의로운 마음으로 힘쓴다면 도의 실현은 탄탄대로(坦坦大路)와 같음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한 세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몽매한 사람들이라 하더라 도 지금부터 마음을 갈고 닦는 일에 전념한다면 차후에 크게 깨우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음을 일깨운 것이 바로 전구(轉句)와 결구(結句)에 나 타난 의상(意想)의 핵심임을 알 수 있다. 吟詩 시를 읊으며 詩不誤人人自誤 시가 사람을 그르치지 아니하고 사람이 스스로 그릇되지 興來情適已難禁 흥(興)이 오고 정(情)이 가면 참기가 어려운 것을. 風雲動處有神助 풍운(風雲)이 이는 곳엔 신의 도움 있고 말고 葷血消時絶俗音 훈혈(葷血)이 녹아날 때 속된 소리 끊어지네. 栗里賦成眞樂志 율리의 도연명(陶淵明)은 짓고 나면 마음 진정 후련했고 草堂改罷自長吟 초당(草堂)의 두보(杜甫)는 고친 뒤면 으레 길게 읊었다오. 緣他未著明明眼 사람들 제각기 시에 대한 밝은 눈을 붙이지 못했어도 不是吾緘耿耿心20) 시를 생각하는 반짝이는 이 내 마음을 가두지 않으리. 이 시는 명문장가(名文章家)의 시정신을 형상화함으로써 그들의 인격 을 흠모한 작품인데,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 712-770)의 마음을 추 숭함으로써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이 두 시인의 작품에서 감흥과 정감 을 깊이 음미할 수는 있어도 속음(俗音) 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연유를 수련(首聯)의 상구(上句)에 밝혀두고 있다. 시가 사람을 그르치지 않고 사람이 스스로 그릇됨을 언표한 것은 시가 곧 그 사람의 마음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퇴계는 마음을 갈고 닦은 사람의 시일수 20) 退溪先生文集內集, 卷3, 詩, <和子中閒居 二十詠> 其四.
退溪詩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19 록 다른 사람들에게 감흥과 정감의 깊이를 배가시킬 수 있음을 넌지시 보여주었다. 미련(尾聯)의 하구(下句)는 이 두 시인의 시경(詩境)을 배우 며 바른 마음에서 우러난 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퇴계의 시정신을 유추할 수 있다. 贈李叔獻 其一 이숙헌에게 주다(1) 病我牢關不見春 병으로 들어앉아 봄을 보지 못했는데 公來披豁醒心神 그대 오니 가슴 트여 정신이 맑아졌네. 已知名下無虛士 명성 높은 사람은 실력도 있음을 알았어라 堪愧年前闕敬身 연전에 몸 공경 다 못한 게 매우 부끄럽네. 嘉穀莫容稊熟美 좋은 곡식은 돌피가 잘 익기를 허용치 않으니 纖塵猶害鏡磨新 조그만 먼지도 거울을 닦는 데는 해가 된다오. 過情詩語須刪去 사실에 지나친 말은 시에 쓰지를 말고 努力工夫各日親21) 노력하는 공부를 각자 가까이 하세. 이 시는 35세 연하인 후학(後學) 율곡(栗谷)의 마음에 서린 맑은 시정신 을 기뻐한 퇴계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퇴계는 스승의 권위를 앞세우 기 보다는 율곡을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인물로써 촉망받는 후학으로 인 정하고 나라를 위해 활약할 수 있는 큰 인물이 될 수 있도록 권면하고 당부하고 있다. 경련(頸聯)에 등장하는 돌피(稊) 와 조그만 먼지(纖塵) 는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잡념(雜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시는 이러한 잡 념을 없애는 것이 마음의 수양에 전념하는 것임을 일깨우고 있다. 3. 명념(銘念) 퇴계는 영종(令終)할 무렵까지 일생을 면학(勉學)의 정신으로 살았으 므로, 그의 한시를 통해 유자(儒者)의 계명(誡命)을 환기하는 설리시(說理 詩)의 시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퇴계시에는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21) 退溪先生文集外集, 卷1, 詩, <贈李叔獻 四首> 其一.
20 退溪學論叢 第25輯 잊지 않고 깊이 새겨 두는 마음, 즉 명념(銘念)의 의지가 투사되어 있으 니, 독서(讀書)하는 자신의 일상을 시화한 작품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 인할 수 있다. 溪堂偶興 계당에서 흥이 나서 已著游仙枕 유선(游仙)의 베개에 이미 잠이 붙었다가 還開讀易窓 다시 창을 열고 주역(周易) 을 읽네. 千鍾非手搏 천종(千鍾)의 녹(祿)을 손으로 챌 것이 아니고 六友是心降 여섯 벗(松竹梅菊蓮己)이 바로 내 심복이라오. 이 시에는 주역(周易) 공부에 잠심(潛心)하는 퇴계의 일상이 펼쳐져 있 다. 위의 시에서는 주역을 읽으며 성현(聖賢)의 가르침에 몰두하는 퇴계 의 시정신과 잘 부합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수많 은 녹봉으로 권세를 부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 화, 연꽃을 심고 가꾸면서 자연과의 합일을 이룸으로써 참 선비의 기상을 체득하며 사는 것이었다. 여가(餘暇)가 생기면 이러한 자연물을 완상(玩 賞)하며 시를 짓는 생활 역시 퇴계의 마음과 부합되는 것이다. 이로써 퇴 계의 참 마음은 성현의 학문을 배우고 이를 실천하는 삶에 의미를 둔 것 이어서 부귀영화와는 상관없이 진정한 선비로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溪居雜興 시냇가에서 이런저런 흥이 일어 買地靑霞外 파란 노을 밖에 땅을 사서 移居碧澗傍 해맑은 시내 곁에 옮겨 사네. 深耽惟水石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은 수석이며 大賞只松篁 보다 큰 구경거리는 송림과 죽림뿐이네. 靜裏看時興 고요 속에 사계절의 가흥(佳興)을 구경하고 閒中閱往芳 한가롭게 지나간 방향(芳香)을 살피네. 柴門宜逈處 사립문 외떨어져 좋으니 心事一書牀 내 할 일은 서상(書牀)뿐이네.
退溪詩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21 우주만물은 제각기 특장(特長)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산수자 연을 예로 들면 이를 완상하는 사람들이 청한(淸閑)의 아취(雅趣)를 감 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은거(隱居)의 시간일수록 퇴계 는 주위의 자연물을 관조하는 가운데 감흥을 읊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 데, 위의 작품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하지만 미련(尾聯)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산수에서 소요하며 시상을 가다듬는 것에만 전념하지는 않았으니, 퇴계의 마음속에 항상 본말(本末) 의식이 분명히 자리하고 있 었던 것이다. 퇴계에게 있어 항상 본업(本業)은 성학(聖學)을 궁구하는 것이었다. 淸明溪上書堂22) 二首 其二 청명일에 계상서당에서(2) 心通一語道猶東 마음이 통한다면 한 말로도 알지만 志異何殊聽借聾 뜻이 다르면 듣는 것 농자(聾者)에게 빌림과 어찌 다르리까? 利欲只今河決海 이욕(利慾)은 오늘에도 강이 바다로 쏟듯 功名從古鳥過空 공명(功名)은 예부터 새가 허공을 지나가는 듯하네. 年年民俗困無告 해마다 백성들의 삶은 호소할 데 없이 곤궁한데 箇箇人情嫌不同 인정(人情)이란 낱낱이 제 안 같지 않다 싫어하네. 有恨風光催嶺日 풍광(風光)은 한스럽게 지는 해를 재촉하고 無言春色滿溪楓 봄빛은 말도 없이 풍림(楓林)에 가득하네. 病來稍減書癡絶 병이 드니 차츰차츰 독서 시간만 줄고 愁處難禁酒聖中 시름이 복받칠 땐 술 안 마실 수 없네. 補過希前垂至戒 허물을 메꿔 가며 옛 어진이의 가르침 본받으니 令人長憶紫陽翁23) 사람으로 하여금 자양(紫陽)의 회옹(晦翁)을 길이 생각하게 하네. 이 시에서는 퇴계가 성학(聖學) 실천의 본보기로 삼은 스승이 바로 주 22) 退溪先生文集內集, 卷2, 詩, <淸明 溪上書堂 二首> 其二. 한서암을 철거 하고 작은 서당을 시내 북쪽에 옮겨 지은 뒤에 두보의 시를 차운하였다(撤寒 棲 移構小堂於溪北 次老杜韻). 23) 退溪先生文集內集, 卷2, 詩, <淸明 溪上書堂 二首> 其二.
22 退溪學論叢 第25輯 자(朱子)였음을 알 수 있다. 퇴계는 늘그막에 들수록 주자서(朱子書)에 온 힘을 기울였으니, 평생의 득력처(得力處)는 바로 주자서였다.24) 착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되기를 바랐던 퇴계는 착한 사람만이 하늘의 뜻 에 따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던 선비이기도 하였다.25) 하지만, 그가 목도한 마음 밖의 세상이란 항상 변화무쌍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 으니, 특히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쏠려있는 이욕(利慾) 이나, 공명(功名), 인정(人情) 과 같은 것들은 마음속의 시름만 야기하는 매개체에 불과한 것이었다. 위의 시에서는 주자의 가르침을 본받아 성학(聖學)을 마음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에 외물(外物)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퇴계의 참 마 음이 잘 나타나 있다. Ⅳ. 맺는 말 퇴계는 위기지학에 전념함으로써 부(富)나 벼슬을 얻기 위한 학문이 아닌 자신의 심덕을 쌓는 수양의 대상으로 학문을 인식하였다. 퇴계의 심덕은 신독(愼獨) 을 통한 자기 수양과도 무관하지 않다. 퇴계가 힘쓴 신독 의 의미 역시 남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곳에 홀로 있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언행(言行)을 삼가야 하는 실천 덕목이었다. 신독 을 실천한 퇴계의 심덕(心德)이 대인 관계에서 적지 않은 효력으 로 작용하였으니, 그가 다른 사람의 선행(善行)을 들으면 자기의 일처럼 기뻐하였던 점과, 자신의 과오를 하찮은 사람에게 듣더라도 바로잡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즉시 시정했다는 점이 그러하다. 퇴계의 심덕은 겸 손한 자질(資質)에 의해 더욱더 공고해졌으며, 수많은 후학들에 의해 그 는 유도(儒道)로써 겨레의 등불을 밝혀준 스승으로 역사에 길이 자리매 김하게 되었다. 24) 최영성, 한국유학통사 上, 2006, 심산, 710쪽. 25) 권오봉, 퇴계선생 일대기-가을하늘 밝은 달처럼, 교육과학사, 1997, 325쪽.
退溪詩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23 퇴계시는 인욕이 배제된 성현의 심사(心事)를 우러르며 도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 특징적이다. 퇴계의 시문에는 도심(道心)의 깨달음을 위 해 항상 수양하는 선비의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이를 통해 성오(醒悟)의 마음을 견지한 퇴계의 사유를 살펴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음시(吟詩)> 에서 시가 사람을 그르치지 않고 사람이 스스로 그릇됨을 언표한 것은 시가 곧 그 사람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퇴계는 영종(令終)할 무렵까지 일생을 면학(勉學)의 정신으로 살았으 므로, 그의 한시를 통해 유자(儒者)의 계명(誡命)을 환기하는 설리시(說 理詩)의 시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퇴계시에는 성현(聖賢)의 가르 침을 잊지 않고 깊이 새겨 두는 마음, 즉 명념(銘念)의 의지가 투사되어 있으니, 독서(讀書)하는 일상을 시화한 작품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계당우흥(溪堂偶興)> 시에 나타난 퇴계의 참 마음은 성현의 학문을 배우고 이를 실천하는 삶에 의미를 둔 것이어서 부귀영화와는 상관없이 진정한 선비로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계거잡흥(溪居雜興)> 시를 통 해 퇴계의 마음속에는 항상 본말(本末) 의식이 분명히 자리하고 있음을 헤아릴 수 있으니, 퇴계에게 있어 항상 본업(本業)은 성학(聖學)을 궁구 하는 것이었다. 또한, <청명(淸明) 계상서당(溪上書堂)> 시에는 주자(朱 子)의 가르침을 본받아 성학(聖學)을 마음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에 외물 (外物)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퇴계의 참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참고 문헌> 大學章句集註, 明文堂, 2010. 增補 退溪全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7. 退溪學叢書編刊委員會, 退溪全書, 사단법인 퇴계학연구원, 1991. 李滉(辛鎬烈 譯), 退溪詩,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24 退溪學論叢 第25輯 권오봉, 퇴계선생 일대기-가을하늘 밝은 달처럼, 교육과학사, 1997. 김영숙, 退溪先生 卷17, 퇴계시 넓혀 읽고 깊은 맛보기, 영남퇴계학연구 원, 2014. 安炳周, 退溪의 學問觀-心經後論을 중심으로, 퇴계학 연구논총 1, 경북 대학교 퇴계연연구소, 1997. 李貞和, 退溪詩 硏究, 숙명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李貞和, 退溪 李滉의 詩文學硏究, 보고사, 2003. 李貞和, 柳成龍先生 詩文學硏究, 아세아문화사, 2007. 최영성, 한국유학통사 上, 심산, 2006.
退 溪 詩 에 나타난 마음의 의미 25 Abstract A Study on the Meaning of Mind in the poetry of Toegye Lee Hwang / Lee, Jeong-hwa This research paper is an attempt to illustrate the meaning of mind in the poetry of Toegye Lee Hwang. Toegye Lee Hwang was a true scholar as study of human nature of the middle part of the Joseon dynasty period. This research paper is to discuss about the spirit of literature through Toegye Lee Hwang of the poetry and prose about spirit of Confucianism. The chinese prose written by Toegye Lee Hwang was tried to realized in the Confucian ideology and the right values. Toegye Lee Hwang was a symbol of scholar on related teacher of the Joseon dynasty. He was represented the right thinking and right action. According to him, the Confucian scholar's mind is associated with morality. Morality is intended to include the truth and goodness. Therefore, the poetry of Toegye Lee Hwang was expressed the true heart of a true scholar. His poetry is for the appearance of self-discipline. Key words: morality, scholar, self-discipline, spirit, truth.
退溪學論叢 第25輯(27 49쪽) 退溪 詩 <淨友塘>의 학문적 맥락 읽기* 1)김 목 Ⅰ. 서론 Ⅱ. 소재 淨友塘과 작품 <淨友塘> Ⅲ. 學問思辨의 작품 구성 병 권** 차 Ⅳ. 窮理의 인식과 盡性의 수양 Ⅴ. 결론 論文 抄錄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에서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 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은 배우고 익히는 공부의 기쁨을 강조한다. 배움이란 뒤에 깨닫는 자가 반드시 선각자의 하는 바를 본받아야 선(善)을 밝게 알아서 그 본초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익힘은 새가 자주 나는 것 이니 배우기를 그치지 않음을 마치 새 새끼가 자주 나는 것과 같이 한다는 뜻 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배움의 기쁨은 선의 본초를 회복하는 데에 있고, 익 힘의 기쁨은 배우기를 그치지 않는 데에 있음을 알게 된다. 퇴계(退溪)는 이(理)에 밝지 못하면, 글을 읽거나 혹 일을 당해서, 가는 곳마 다 걸리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주자전서(朱子全 書) 를 읽을 수 있으면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이미 그 방법을 알게 되면 반드시 느끼게 되어 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퇴계 는 학문하는 방법을 알고 이(理)를 탐구하는 기쁨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것 은 퇴계가 학문에서 이치를 탐구한 기쁨이다. * 이 논문은 2015년도 부산대학교 인문사회연구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 부산대학교 교수. 논문투고일: 2015.06.15 / 심사개시일: 2015.06.17 / 게재확정일: 2015.06.27
28 退溪學論叢 第25輯 그리고 퇴계는 도산서당 주변의 산림(山林) 사이에 즐거움이 있는 줄을 알 았으며, 그 즐거움이 모르는 사이에 앞에 닿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주변의 자연과 사물이 마음에 저절로 즐거움을 주는 것이 얕지 않아서 그 일을 적어 서 시를 창작하였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은 시들이 도산잡영(陶山雜 詠) 에 실려 있다. 시들의 내용은 대체로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이 하나 가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퇴계가 시를 창작한 연원이다. 퇴계에게 이(理)를 탐구하는 기쁨과 자연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둘이 아니 었던 것이다. 즉 학문과 문학은 융통하여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이다. 이런 시각은 퇴계의 시를 연구하는 데 필요하다. 이 글의 목적은 도산잡영(陶山雜 詠) 에 실려 있는 <정우당(淨友塘)>에서 표현한 즐거움을 학문적 맥락에서 이 해하는 데 있다. 주제어: 도산잡영, <정우당>, 학문의 기쁨, 산림의 즐거움, 천인합일, 문 학창작의 연원. Ⅰ. 서 론 문학은 작가가 정서를 표현한 글이다. 작가는 자신의 정서를 언어로 표현하며, 독자는 언어를 통해서 작가의 정서를 공유한다. 그래서 작품 의 이해는 작가와 독자가 정서를 공유하는 소통이다. 독자가 작가의 정 서를 공유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작가의 언어를 해석해야 하며, 이차적 으로 언어로 표현한 정서적 맥락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퇴계(退溪)의 문학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논의되었다. 퇴계가 창작한 시의 소재는 자연이 많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자연문학 또는 산수문학 이라 규정하였고, 작품의 내용은 주로 산수의 즐거움이라고 설명한다.1) 1) 김봉근, 퇴계시에 있어서 자연사상, 퇴계학논총 13, 퇴계학부산연구원, 2007, 156~187쪽. ; 손오규, 퇴계의 산수문학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 사학위논문, 1990. ; 손오규, 퇴계시가예술연구, 제주대학교출판부, 2002. ; 손 오규, 퇴계의 陶山雜詠에 나타난 山水之樂, 퇴계학논총 13, 퇴계학부산연
退溪 詩 <淨友塘>의 학문적 맥락 읽기 29 이러한 연구에서 문제가 되는 점은 그의 문학이 학문과 어떤 관련이 있 으며, 작품에서 표현한 즐거움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퇴계는 도산서당에서 생활하면서 산림의 즐거움이 기약하지 않아도 내 앞으로 다가왔다. 2)고 하였다. 그리고 도산잡영(陶山雜詠) 에 수록되 어 있는 시들을 지었던 계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마음에 저절로 즐거움을 주는 것이 얕지 않아, 비록 말을 하지 않고자 하였 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에 곳에 따라 각기 7언시 한 수를 가지고 그 일을 적 어 모두 18절구를 지었다. 중간 생략 또한 5언으로 여러 가지를 읊은 26절구 를 지었는데 앞의 시에서 다하지 못한 남은 뜻을 말한 것이었다. 3) 위의 글 내용을 통해서 퇴계는 즐거움을 마음이 스스로 찾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바깥의 사물이 스스로 주는 것이라고 인식하였으며, 퇴계는 이런 기쁨을 표현하여 도산잡영 에 실려 있는 시를 지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이렇게 지었던 작품들 가운데 <몽천(蒙泉)>, <열정(冽井)>, <유정문 (幽貞門)>, <완락재(玩樂齋)>, <천연대(天淵臺)>, 그리고 <천운대(天雲 臺)> 등의 연구에서 퇴계의 문학과 학문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 되고 있다.4) 그리고 퇴계가 즐거움을 표현한 작품 구성의 특징은 관찰 구원, 2007, 188~208쪽. ; 이정화, 퇴계 이황의 시문학연구, 보고사, 2003. 2) 퇴계, 도산잡영병기,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을유문화사, 2005, 64쪽. 3) 퇴계, 도산잡영병기,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63-64쪽. 4) 김병권, 퇴계의 몽괘 완상과 <몽천> 창작의 의미, 퇴계학논총 제12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06, 107~127쪽. ; 김병권, 퇴계의 <冽井> 창작 원리 연 구, 한국민족문화 제30집,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7, 161~179 쪽. ; 김병권, 퇴계의 <유정문> 창작 원리 연구, 퇴계학논총 제13집, 퇴 계학부산연구원, 2007, 209~230쪽. ; 김병권, 퇴계 문학의 易學思想的 淵源 연구, 퇴계학논총 제16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09, 5~30쪽. ; 김병권, <천 연대>에 표현한 퇴계의 즐거움 연구, 퇴계학논총 제19집, 퇴계학부산연구 원, 2012, 5~24쪽. ; 김병권, <천운대>에 표현한 窮理盡性의 즐거움, 퇴계
30 退溪學論叢 第25輯 의 대상, 본질의 인식, 인식의 실천이라는 단계 5)로 구성되거나, 또는 대 상의 실상을 통찰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의문, 의문에 대한 명상, 그리고 본성 깨달음과 실천 의지라는 단계 6)로 구성된 데 있다. 이런 구성은 학문은 이(理)를 탐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7)고 했던 퇴계가 그 이(理)를 배우고 익히는 기쁨을 표현한 시에서 읽을 수 있는 하나의 특징이다. 이 연구의 대상 작품은 도산잡영 에 실려 있는 시들 가운데 하나인 <정우당(淨友塘)>이다. <정우당>은 퇴계가 도산서당 앞에 작은 못을 파 고 연꽃을 심어서 이름을 붙인 정우당 이 준 기쁨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연구에서는 퇴계가 <정우당>에 표현했던 기쁨의 정서를 퇴계의 학 문적 맥락에서 밝히고자 한다. Ⅱ. 소재 淨友塘과 작품 <淨友塘> 1. 方塘과 淨友 퇴계는 도산서당을 완공한 뒤에 서당의 동쪽에다 작게 네모난 연못 을 파고 그 안에는 연꽃을 심었는데 정우당이라 하였다. 8)고 기록하였 다. 이 기록은 <정우당>을 분석하기에 앞서 해결해야 할 세 가지 의문 들이 일어나도록 한다. 첫째는 퇴계가 왜 서당에 네모난 못을 팠으며, 둘째는 왜 거기에 연꽃을 심었고, 셋째는 그 이름을 왜 정우당(淨友塘)이 라고 하였는가 등이다. 먼저 퇴계가 네모난 못[방당(方塘)]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 퇴계는 주 학논총 제22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13, 71~88쪽. ; 김병권, 퇴계 문학의 학 문적 지향 연구, 퇴계학논총 제24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14, 33~55쪽. 5) 김병권, 퇴계의 몽괘 완상과 <몽천> 창작의 의미, 116쪽. 6) 김병권, 퇴계 문학의 학문적 지향 연구, 51쪽. 7) 홍승균 이윤희 공역, 퇴계선생언행록, 퇴계학연구원, 2007, 49쪽. 8) 퇴계, 도산잡영병기,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61쪽.
退溪 詩 <淨友塘>의 학문적 맥락 읽기 31 희(朱熹)의 편지인 주자서(朱子書 를 읽었으며,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를 편찬하면서 주희의 성리학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퇴계는 <천운대>에 서 책보는 시의 심오한 비유는 네모반듯한 연못에 들어 있네(觀書深喩 在方塘) 9)라고 읊었다. 이 시에서 책보는 시 라고 한 것은 주희의 <관서 유감(觀書有感)>이다. 주희는 <관서유감>에서 반 이랑 네모반듯한 연 못에 거울 하나 열렸는데, 하늘빛 구름 그림자와 함께 떠돌아다니네(半 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10)라고 하였다. 네모반듯한 연못이 방당 (方塘)이다. <관서유감>의 이 구절에 대해 퇴계는 대개 방당은 한 거울 처럼 허명(虛明)하여 능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배회함에 응하여 만 상이 도피할 수 없음을 말한 것으로서 인심이 허령(虛靈)하고 어둡지 아 니하여 적연(寂然)함과 감통(感通)함이 끝이 없어서 응용이 다하지 않음 을 비유한 것 11)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처럼 퇴계는 주희의 독서와 학문 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주희가 방당에 비유하여 표현했던 허령하고 밝은 마음의 독서를 따르려는 의도에서 방당을 팠다고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연꽃을 심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퇴계는 <완락재>에서 꼭 태극이 염계의 오묘함에 도달한다면, 비로소 믿겠네 천년에 이 즐거움 똑같음을(恰臻太極濂溪妙 始信千年此樂同) 12)이라고 읊었다. 태극의 오 묘함은 염계(濂溪) 주돈이(朱敦頤)가 그린 태극도(太極圖) 와 이 그림을 설명한 태극도설(太極圖說) 이다. 그리고 퇴계는 주돈이의 태극도 를 성학십도(聖學十圖) 의 제1도에 배치하였다. 이러한 배치는 이(理)를 중 요하게 여겼던 퇴계의 학문에 태극도설 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도 록 한다. 퇴계의 학문에 영향을 주었던 주돈이는 <애련설(愛蓮說)>에서 연꽃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였다.13) 그리고 퇴계는 <계당우흥(溪堂偶興)> 9) 퇴계, <천운대>, 이장우ㆍ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87~88쪽. 10) 주희, <관서유감>, 이장우ㆍ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87쪽에서 재인용. 11) 퇴계, 김이정에게 답함, 퇴계학총서편찬위원회, 퇴계전서 7, 퇴계학연구 원, 1991, 335~336쪽. 12) 퇴계, <완락재>,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71~72쪽.
32 退溪學論叢 第25輯 에서 여섯 벗이 마음에 흐뭇하다오(六友是心降) 라고 읊었고, 이 시의 주(註)에서 솔, 대, 국화, 매화, 연과 내가 벗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14)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퇴계는 연꽃을 사랑했던 주돈이의 뜻에 공감하 였으며, 스스로 연꽃을 다섯 벗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고 흐뭇했기 때문에 네모반듯하게 판 못에 연꽃을 심었던 것이라고 이해된다. 다음으로 정우당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까닭은 무엇일까? 퇴계는 사물 에 이름을 붙이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이덕홍(李德弘)이 이름을 고 치려고 할 때, 퇴계는 이덕홍에게 옛사람은 이름을 지을 때에 반드시 그 사람을 따라서 지었던 것이다. 그대는 이 점을 깊이 인식하라. 15)고 하였다. 이 말은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에게 성격 또는 삶의 방향을 부 여했듯이, 사물의 이름은 그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하며, 아울러서 그 존재에 대한 의미와 본성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16)는 의미이다. 퇴계는 도산서당 앞에 연꽃을 심은 방당의 이름을 정우당이라고 하였 다. 이 이름에서 연못에 비유한 맑은 마음의 이치를 탐구하고 연꽃에 비 유한 아름다운 본성을 다하려는 퇴계의 학문적 의도를 읽을 수 있다. 2. <淨友塘> 창작 계기 퇴계가 정우당을 소재로 한 <정우당>을 지었던 동기는 무엇이었을 까?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던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幷記) 의 내용에 주 목할 필요가 있다. 퇴계는 도산서당과 그 주변의 자연이 마음에 저절로 즐거움을 주는 것이 얕지 않아, 비록 말을 하지 않고자 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라고 표현하였듯이, 도산잡영 에 실려 있는 시들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즐거운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13)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74쪽. 14) 퇴계, <계당우흥>, 신호열 역주, 국역 퇴계시 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178쪽. 15) 홍승균 이윤희 공역, 퇴계선생언행록, 62쪽. 16) 김병권, 퇴계의 <유정문> 창작 원리 연구, 213쪽.
退溪 詩 <淨友塘>의 학문적 맥락 읽기 33 <정우당>도 정우당이 퇴계에게 저절로 준 즐거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퇴계가 쓴 도산잡영병기 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읽을 수 있다. 나는 항상 오래된 병에 얽히어 괴로워하며 비록 산에 거처한다 해도 책을 읽는 데만 전적으로 뜻을 둘 수 없었다. 깊은 근심을 조식하고 나면 이따금 신 체가 가뿐해지고 편안해진다. 심신이 깨끗하게 깨어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보 면 감개가 그에 이어진다. 그러면 책을 물리치고 지팡이를 짚고 나가 헌함에 서서 연못을 완상한다.17) 위의 글에서 심신이 깨끗하게 깨어 라는 표현은 근심을 조식(調息) 으로써 없애고 몸이 가뿐하고 마음이 편안해진 상태를 뜻한다. 즉 근 심을 비워낸 깨끗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 러보면 은 우주의 이치와 유행을 관찰하고 탐구하였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연못을 완상한다 에서 연못은 정우당이며, 완상한다는 것 은 정우당이라는 이름에 부여한 본성을 사색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깨끗 한 마음으로 우주의 이치를 관찰하고 정우당의 의미를 사색하는 일이 퇴계에게 저절로 기쁨을 주었던 것이고, 이 기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 서 지었던 내용이 <정우당>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지었던 <정우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淨友塘> 物物皆含妙一天 온갖 사물 모두들 온 하늘의 오묘함 머금었는데 廉溪何事獨君憐 염계는 어쩐 일로 유독 그대만 어여삐 여겼던가 細思馨德眞難友 향기로운 덕 곰곰이 생각하니 실로 벗하기 어려운데 一淨稱呼恐亦偏18) 깨끗한 것 한 가지로만 칭찬한다면 또한 치우친 듯하네 위에서 인용했던 도산잡영병기 의 내용은 이 시의 내용과 일정한 관 계를 유지한다. 하늘의 오묘함 은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면 을 통해 17) 퇴계, 도산잡영병기,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62쪽. 18) 퇴계, <정우당>,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74~75쪽.
34 退溪學論叢 第25輯 서 얻은 하늘의 이치이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니 는 연못을 완상한다 와 짝을 이루고, 깨끗한 것 은 심신이 깨끗하여 와 대응한다. 이렇게 깨 끗한 마음으로 하늘의 이치를 관찰하고 정우당의 본성을 사색함으로써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이 일치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기쁨을 표 현했던 시가 <정우당>임을 알게 된다. 퇴계가 방당을 판 까닭은 주희의 독서와 학문을 본받으려는 뜻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방당에 연꽃을 심었던 까닭은 <애련설>을 썼던 주돈 이의 태극 묘리에 도달하려는 의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연못의 이름을 정우당이라고 붙인 까닭은 연꽃처럼 깨끗한 본성을 다하려는 의도가 있 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우당>은 정우당이 퇴계에게 준 기쁨을 표현 한 시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Ⅲ. 學問思辨의 작품 구성 1. 실상 탐구와 의문 제기 퇴계는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고 정우당의 본성을 사색함으로써 그 이 치와 본성이 준 즐거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쓴 시가 <정우당>이 다. <정우당>의 제1행은 온갖 사물 모두들 온 하늘의 오묘함 머금었는 데(物物皆含妙一天) 이다. 온 하늘의 오묘함 즉 묘일천(妙一天)과 비슷 한 표현은 퇴계의 다른 작품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예를 들면,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과 <천연대> 등이다. <독서여유산>에서는 이는 구름 바라보면 묘리를 알게 되고(坐看雲 起因知妙) 19)를 읽을 수 있고, <천연대>에서는 자연의 운행 활발하니 하늘과 연못 오묘하네(流行活潑妙天淵) 20)를 읽을 수 있다. 온 하늘의 오묘함, 이는 구름의 오묘한 이치, 그리고 하늘과 연못의 오묘한 이치 19) 퇴계, <독서여유산>, 신호열 역주, 국역 퇴계시 Ⅱ, 142쪽. 20) 퇴계, <천연대>,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86쪽.
退溪 詩 <淨友塘>의 학문적 맥락 읽기 35 는 어디에서 근원했을까? 이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는 <완락재>에 서 찾아진다. 퇴계는 꼭 태극이 염계의 오묘함에 도달한다면, 비로소 믿겠네 천년 에 이 즐거움 똑같음을(恰臻太極濂溪妙 始信千年此樂同) 21)이라고 <완 락재>에서 표현하였다. 이 작품에서 표현한 염계의 태극 은 중국 성리 학의 기초를 닦은 주돈이의 태극도 를 가리킨다. 퇴계가 편찬한 성학 십도 의 태극도 는 주돈이의 그림인 태극도 와 주희의 태극도해 를 발췌한 태극도설 과 퇴계의 해설 로 구성되어 있다. 태극도 는 무극 이태극(無極而太極), 음정양동(陰靜陽動), 오행(五行), 건곤남녀(乾坤男女), 만물화생(萬物化生)의 전개를 나타냄으로써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법칙과 질서를 설명하는 요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태극도설 은 우주의 생성 구조 원리 질서와 인간의 생성 구조 원리 질서가 정확히 일치 한다고 설명한다.22) 그리고 인간의 본질이 우주의 본질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우주와 인간의 본질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고 설명한다.23) 이런 관점에서 보면, 퇴계가 <완락재>에서 표현한 즐거 움은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이 일치하여 천인합일에 이르는 태극 묘리를 깨닫는 데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퇴계는 태극의 묘리에 관해 충 분히 그리고 넓게 공부하여 터득한 결과를 온갖 사물 모두들 온 하늘 의 오묘함 머금었는데(物物皆含妙一天) 라고 <정우당>의 제1행에 표현 한 것이다. 퇴계는 태극의 묘리를 터득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것은 제2행의 내용인 염계는 어쩐 일로 유독 그대만 어여삐 여겼던가(廉溪何 事獨君憐) 라는 의문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문형의 표현은 퇴계의 다른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천연대>와 <몽천> 등이다. 21) 퇴계, <완락재>,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72쪽. 22)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편, 역주와 해설 성학십도, 예문서 원, 2009, 147쪽. 23)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편, 역주와 해설 성학십도, 149쪽.
36 退溪學論叢 第25輯 <천연대>의 날개 솟구치고 지느러미 놀림 누가 그렇게 시켰던가(縱 翼揚鱗孰使然) 24)는 시경(詩經) 의 연비여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 于淵) 을 연상하게 한다. 이 내용에 대해 시경 의 주(註)에서 이연(怡 然)히 자득하여 그 소이연을 알 수 없는 것 25)이라고 설명하였듯이, 퇴 계는 새가 날고 고기가 뛰도록 한 이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26) <몽천>의 무엇으로 체득하리오 바르게 기르는 공을(何 以體之 養正之功) 27)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표현에서 바르게 기르는 공 은 주역(周易) 몽괘(蒙卦)의 단전(彖傳)에서 어릴 때 바름을 기름이 성인이 되는 공부이다(蒙以養正 聖功也) 28)를 줄여서 사용한 어휘이다. 그리고 퇴계는 몽괘의 단전에 근거하여 성인이 되는 공부인 바름을 기 르는 공을 무엇으로 체득하리오 라고 의문을 제시했던 것이다. 퇴계는 태극의 묘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널리 배우고 익히면서 습득 한 이치를 자연 또는 사물에서 확인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듯하다. 주돈 이는 태극도설 에서 구체적인 존재자는 태극으로서의 이(理)와 음양 및 오행의 기(氣)가 오묘하게 섞여 만들어지게 되며, 개별자들이 부여받 은 우주적 원리인 태극을 개별자의 입장에서 말할 때는 본성(本性)이라 고 불렀다는 것이다. 29) <정우당>에서 그대 는 연꽃을 가리키며, 연꽃은 태극의 이(理)로써 만들어진 구체적 존재자이지만, 본성을 부여받은 개 별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별자의 본성을 부여받은 연꽃을 어여삐 여겨 야 하듯이, 하늘의 오묘함을 머금고 있는 온갖 사물들도 모두 연꽃처럼 어여삐 여겨야 할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퇴계는 태극의 묘리를 깨쳤 던 주돈이가 어째서 연꽃만을 어여삐 여겼는지 의문을 일으킨 것이다. 24) 퇴계, <천연대>,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85~86쪽. 25) 성백효 역주, 현토완역 시경집전 하, 전통문화연구회, 1993, 216쪽. 26) 김병권, <천연대>에 표현한 퇴계의 즐거움 연구, 8~9쪽. 27) 퇴계, <몽천>,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97쪽. 28) 성백효 역주, 현토완역 주역전의 상, 전통문화연구회, 2001, 235쪽. 29)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편, 역주와 해설 성학십도, 153-154 쪽 참조.
退溪 詩 <淨友塘>의 학문적 맥락 읽기 37 이처럼 퇴계는 이미 널리 배워서 알고 있는 지식의 내용에 대해서 의 문을 살폈으며, 이렇게 마음에 일어났던 의문을 시에서 자주 표현하였던 것이다. 2. 이치 사색과 명확한 판단 퇴계는 <청명계상서당(淸明溪上書堂)>에서 한평생 한스런 일은 높은 학자 못 만나서, 이 마음에 쌓인 의문 물을 길이 없다네(恨未一生逢有道 此心無路訂千年) 30)라고 하였다. 이처럼 물을 길이 없는 의문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많은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사색이었 다. <정우당>의 제3행은 향기로운 덕 곰곰이 생각하니 실로 벗하기 어 려운데(細思馨德眞難友) 이다. 앞에서 이미 제시하였듯이, 퇴계는 도산서 당의 난간에서 연못을 완상한다고 하였다. 이 완상한 행위를 작품에서 곰곰이 생각하니 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사색은 퇴계의 다른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천연대>에서 표현한 강가 높은 곳에서 하루 종일 마음의 눈 열 려(江臺盡日開心眼) 는 날개 솟구치고 지느러미 놀림 누가 그렇게 시켰 던가 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사색했음을 암시한다. <몽천>에서 표현한 산 아래 샘이 있는 괘상이 몽이니, 그 괘상을 내 따른다네(山泉卦爲蒙 厥象吾所服) 는 사색의 구체적인 행위를 생략했지만, 무엇으로 체득하 리오 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몽괘를 사색한 결과이다. 그리고 <천운대> 의 내 이제 뜻 얻었네 맑은 못가에서(我今得意淸潭上) 는 주희의 <관서 유감>에서 표현한 네모반듯한 못이 고요하고 감통함이 끝이 없어서 응 용함이 다함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비유한 것 31)임을 못가에서 알았다 는 뜻이다. 이 작품에서도 의문과 사색이 생략되어 있지만. 사색한 결과 30) 퇴계, <淸明溪上書堂>, 금장태, 퇴계의 삶과 철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18쪽에서 재인용. 31) 김병권, <天雲臺>에 표현한 窮理盡性의 즐거움, 80~81쪽.
38 退溪學論叢 第25輯 를 표현한 것이다. <정우당>의 제3행에서 표현한 곰곰이 생각하니 는 제2행에서 어쩐 일로 그대만 어여삐 여겼던가 라고 제기했던 의문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연꽃의 향기로운 덕 을 사색한 행위이다. 제1행에서 표현했던 온 하늘의 오묘함 은 구체적 존재자로서 태극이라고 한다면, 향기로운 덕 은 개별자로서 연꽃의 본성이다. 그래서 퇴계는 태극과 본성이 일치한다 고 생각했기 때문에 향기로운 덕을 지닌 연꽃을 벗하기 어렵다고 표현 한 것이라고 보아진다. 이러한 표현은 사람도 연꽃처럼 태극과 본성이 일치하는 천인합일에 이르러야 함을 강조한 의미가 있다. 정우당을 소재로 지은 <정우당>의 제4행은 깨끗한 것 한 가지로만 칭찬한다면 또한 치우친 듯하네(一淨稱呼恐亦偏) 이다. 이 구절은 제3행 에서 표현했던 사색을 통해서 판단한 내용이다. 이처럼 사색한 판단은 퇴계의 다른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몽천>에서 표현한 어찌 감히 잊으리오 시의에 알맞음, 더욱이 과단 성 있는 행동으로 덕을 기름 생각해야 하리(豈敢忘時中 尤當思果育) 32), <열정>에서 표현한 표주박 하나 실로 알맞네(一瓢眞相得) 33), 그리고 <천운대>에서 표현한 밝음과 정성의 이치 세 번이나 반복하여 읊조렸 다네(三復明誠一巨編) 34) 등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대체로 자연의 이치 에 따라서 사색한 결과 자신의 본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정우당>에서 표현한 깨끗한 것 한 가지로만 칭찬한다면 또한 치우 친 듯하네 의 언어적 의미에 대하여 오직 깨끗하다는 점 한 가지만 가지 고 염계 주돈이가 칭찬을 하였으니, 내 생각에는 이것은 정말 다른 좋은 점은 다 제쳐 두고서 한쪽 면만을 너무 치우치게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도 든다. 35)라고 해설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퇴계는 연꽃의 향기로 32) 퇴계, <몽천>,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97~98쪽. 33) 퇴계, <열정>,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99쪽. 34) 퇴계, <천연대>,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86쪽. 35)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75쪽.
退溪 詩 <淨友塘>의 학문적 맥락 읽기 39 운 덕이 깨끗한 것 이외에도 다른 좋은 점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깨 끗한 것만으로 칭찬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런 의 미는 제2행에서 염계가 연꽃만을 어여삐 여긴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정우당>은 실상을 인식하고 의문을 제기하 며, 사색하고 판단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의 연원은 어디에 있을까? 성실한 자는 하늘의 도(道)요, 성실히 하려는 자는 사람의 도(道)이니, 성실한 자는 힘쓰지 않고도 도(道)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고도 알아서 종용(從容)히 도 (道)에 맞으니, 성인(聖人)이요, 성실히 하려는 자는 선(善)을 택하여 굳게 잡는 자이다. 이것을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히 행하여야 한다.36) 위의 글 주(註)에 보면, 정자(程子)는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그리고 독행(篤行) 가운데 어느 하나만 폐하여도 학문(學問) 이 아니라고 말했다.37) 박학, 심문, 신사, 명변을 학문사변(學問思辨)이라 고 줄여서 쓰기도 한다. 퇴계는 선조 임금에게 지경(持敬)을 실천하는 방법은 반드시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장엄하며 고요하고 전일한 가운데 서 보존하고 이(理)를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하는 사이에 궁구하여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때에도 경계하고 두려워함을 더욱 엄하고 조심 스럽게 하며 은미하여 혼자만 아는 마음의 기미에서도 성찰하는 것을 더욱 정밀하게 하는 것 38)이라고 하였다. 퇴계가 지경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학문사변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던 것 은 사실이다. 따라서 퇴계는 시를 짓는 데에도 학문에서 어느 하나도 폐할 36) 성백효 역주, 중용, 현토완역 대학 중용집주, 전통문화연구회, 2001, 93 ~94쪽. 37) 성백효 역주, 중용, 현토완역 대학 중용집주, 94쪽. 38) 퇴계, 진성학십도차병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편, 역 주와 해설 성학십도, 40쪽.
40 退溪學論叢 第25輯 수 없는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의 학문사변을 활용 한 의미가 있다. Ⅳ. 窮理의 인식과 盡性의 수양 1. 인식론적 窮理의 기쁨 퇴계의 학문 방법은 이기설의 존재론적 방법, 격물 내지 궁리의 인식 론적 방법, 그리고 거경의 수양론적 방법 세 가지이다.39) 이 가운데 궁리 의 인식론적 방법에서 궁리의 지적 탐구과정은 모든 사물이나 일에서 이(理)를 인식하는 것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그 사물에 내재한 법칙 원리 로서 이(理)를 깨닫는 것 40)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정우당>에 표현한 기쁨을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인식론적 방법으로써 살펴보기로 한다. 퇴계는 학문에서 이(理)를 궁구함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理)를 중 요하게 여겨야 하는 까닭에 대해 이(理)에 밝으면, 글을 읽든, 일을 만나 든, 어디를 가나 걸리는 곳이 없다고 설명하였다.41) 이처럼 퇴계는 이 (理)를 탐구함을 중요하게 여기고 공부한 기쁨은 적지 않았음을 아래의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열아홉 살 때에 처음으로 성리대전(性理大典) 의 첫 권과 끝 권을 얻어서 읽어보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제 마음이 즐겁고 눈이 열리어서, 오래 읽을수록 점점 의미를 깨닫게 되어, 마치 학문에 들어가는 길을 터득한 것 같았다.42) 이 책[ 주자전서(朱子全書) ]을 읽으면 문득 가슴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일 어나서 저절로 더위를 알지 못하는데, 무슨 병이 나겠는가.43) 39) 금장태, 퇴계의 삶과 철학, 69쪽. 40) 금장태, 퇴계의 삶과 철학, 71쪽. 41) 홍승균 이윤희 공역, 퇴계선생언행록, 49쪽. 42) 홍승균 이윤희 공역, 퇴계선생언행록, 10쪽. 43) 홍승균 이윤희 공역, 퇴계선생언행록, 17쪽.
退溪 詩 <淨友塘>의 학문적 맥락 읽기 41 책상을 마주하고 잠자코 앉아 조심스레 마음을 가다듬고 연구 사색하여 왕 왕 마음에 깨달음이 있기만 하면 다시 기뻐서 밥을 먹는 것도 잊었다.44) 퇴계는 처음으로 성리대전 을 읽고 마음에 즐거움을 느꼈고, 주자 전서 를 읽으면 여름에도 가슴 속에 생기는 서늘한 기운을 깨달았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연구 사색하여 깨달음을 얻는 기쁨을 언급하였다. 이러 한 즐거움 또는 기쁨은 모두 이치를 깨닫는 학문의 공부가 주는 기쁨이 었던 것이다. <정우당>의 제1행에서 표현한 온갖 사물들 모두 온 하늘의 오묘함 머금었는데 는 퇴계의 학문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온 하늘의 오묘함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주돈이의 태극 묘리와 같은 맥락이다. 주돈이의 태극 묘리는 태극도설 에서 설명한 태극의 이치이다. 퇴계는 성리대전 중에 있는 태극도설 은 나를 계발(啓發)시켜서 학문의 길 로 들어가게 한 곳이다. 45)라고 말하였다. 태극도설 은 무극이면서 태 극이다.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고, 그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다시 고요 해진다. 고요해지면 음을 낳고, 그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인 다. 46)라고 설명하였다. 태극은 성리학자가 존재하는 모든 현상이나 존 재자에게는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 원리 원칙이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 을 이(理)라고 했다. 47)는 해석이 있다. 퇴계는 평소에 이(理)자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이 이(理)를 깨닫기 위해 조심스레 마음을 가다듬고 연 구하여 사색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공부한 결과 이(理)는 형체가 없지 만 지극히 허(虛)한 가운데 지극히 진실한 본체가 들어 있는 것 48)이라 44) 퇴계, 도산잡영병기,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63쪽. 45) 홍승균 이윤희 공역, 퇴계선생언행록, 47쪽. 46)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편, 태극도, 역주와 해설 성학십 도, 48~49쪽. 47)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편, 태극도, 유가의 세계관과 인간 관, 역주와 해설 성학십도, 152쪽. 48) 홍승균 이윤희 공역, 퇴계선생언행록, 49쪽.
42 退溪學論叢 第25輯 고 깨달았던 것이다. <정우당> 제3행에서 표현한 사색의 내용인 향기로운 덕 곰곰이 생 각하니 실로 벗하기 어려운데 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퇴계가 사색했던 향기로운 덕 은 연꽃의 향기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히 연꽃의 향기 라는 언어적 뜻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향기로운 의 수식을 받는 덕 에 중심이 있기 때문이다. 퇴계는 <천연대>에서 마음의 눈이 열려 대학 과 중용 을 세 번 읊 조린다고 하였다. 이 가운데 대학 은 이른바 삼강령(三綱領)을 제시하 는 것으로 시작한다. 삼강령 가운데 하나가 밝은 덕을 밝힌다는 명명덕 (明明德)이다. 명명덕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명(明)은 밝힘이다. 명덕(明德)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중리(衆理)를 갖추어 있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에 구애된 바와 인욕에 가린 바가 되면 때로 어두울 적이 있으나, 그 본체의 밝음은 일찍 이 쉬지 않는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가 마땅히 그 발하는 바를 인하여 마침내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하여야 한다.49) 명덕은 하늘에서 얻은 것이고 여러 이치를 갖추고 있어서 모든 일에 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덕이 기품에 구애되거나 인욕에 가리게 되면 어두울 때가 있지만 그 본체의 밝음은 쉬지 않으므로 배우는 자가 하늘 에서 얻은 그 처음의 밝은 덕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밝은 덕을 밝히 는 명명덕이다.50)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연꽃은 구체적 존재자로서 태극 의 오묘한 이치를 머금고 있으며, 연꽃의 향기로움은 개별자로서 하늘에 서 얻은 그 본체의 밝음을 쉬지 않는 본성이다. <정우당>에서 표현한 연꽃의 향기로운 덕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연 꽃의 향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향기는 구체적 존재자로서 하늘의 49) 성백효 역주, 현토완역 대학 중용집주, 23쪽. 50) 김병권, 허생전의 목적 합리적 담론 분석, 퇴계학논총 제21집, 퇴계학분 산연구원, 2013, 168쪽.
退溪 詩 <淨友塘>의 학문적 맥락 읽기 43 오묘한 이치를 머금고 개별자로서의 그 밝음을 쉬지 않는 본성을 의 미한다. 그래서 <정우당>에 표현한 기쁨은 연꽃이 구체적 존재자의 이(理) 또는 개별자의 본성을 탐구한 퇴계에게 저절로 주었던 기쁨이라 고 하겠다. 2. 수양론적 盡性의 기쁨 앞에서 제시했듯이, 퇴계의 학문 방법 가운데 하나가 거경의 수양론적 방법이다. 퇴계는 선조 임금에게 지경(持敬)에 대해 생각과 배움을 합하 고 드러난 것과 은미한 것을 하나로 하는 방법 51)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설명은 서로 대립되는 생각과 배움, 드러남과 은미함이 둘이 아니라는 인 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태극이 음양으로 나누어지고, 음양이 다시 하나인 태극으로 통합되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금장태는 경(敬)에 대 해서 흩어지기 쉬운 마음이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고 수렴하는 중심이 며, 인간의 마음이 일치되어 분산되지 않게 하는 것 52)이라고 설명하였 다. 이러한 내용은 지경과 진성의 수양을 설명한 견해이다. 여기서는 <정 우당>에 표현한 수양의 기쁨을 살펴보기로 한다. 퇴계는 <서당 지을 땅을 가리다가 도산 남쪽에서 얻었으므로 느낌이 있어 두 수를 짓다(尋改卜書堂地 得於陶山之南 有感而作二首)>라는 시 에서 늘거막에 수양하기 참으로 적합한 걸(眞愜般桓暮境心) 53)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표현에서 퇴계는 도산이 수양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인 식하고 선택하여 도산서당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양하기 적 합한 곳을 선택하려 했던 퇴계는 수양에 대해 <천연완월(天淵翫月)>에 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51) 퇴계, 진성학십도차병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편, 역 주와 해설 성학십도, 40쪽. 52) 금장태, 퇴계의 삶과 철학, 74쪽. 53) 퇴계, <尋改卜書堂地 得於陶山之南 有感而作二首>, 신호열 역주, 국역 퇴계 시 Ⅰ, 271쪽.
44 退溪學論叢 第25輯 如覺襟懷累一塵 한 점 먼지라도 가슴 속에 끼었다면 此臺看月夜來新 밤마다 새로워지는 이 대의 달을 보소 都將灑落淸眞境 쇄락하고 청진한 저 경지를 모두 잡아 分付幽人絶俗因54) 속된 인연 끊어버린 유인에게 맡겼다네 이 시는 먼지가 낀 마음과 쇄락하고 청진(淸眞)한 달을 대조함으로써 유인(幽人)을 자처한 퇴계가 지향했던 거경의 수양을 잘 표현하고 있다. 퇴계는 밤마다 새로워지는 이 대(臺)의 달을 보소. 에서 달의 이치를 있 는 그대로 인식하고, 이러한 인식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달의 유행을 닮 아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사물의 이치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가슴 속에 끼어 있는 한 점의 먼지 와 속된 인연 을 털어내 야 하며, 달의 이치를 깨달아서 쇄락하고 청진한 경지 로 나아가야 한 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퇴계는 수양하기에 참으로 적합한 곳에서 경(敬)을 통해 흩어지기 쉬운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쇄락하고 청진하도 록 통제하는 유인(幽人)을 지향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정우당>에 표현한 수양의 기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퇴계가 <정우당> 제2행에서 표현한 의문의 내용인 염계는 어쩐 일 로 그대[연꽃]만을 어여삐 여겼던가 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내용 은 주돈이가 연꽃만을 어여삐 여겼던 인식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뜻을 표면에 드러내고 있다. 퇴계가 주돈이의 인식에 공감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퇴계는 경(敬)을 유지하면 욕심은 줄어들고 이치는 맑아진다. 욕심을 적게 하고 또 적게 해서 욕심이 없어지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 면, 고요할 때는 텅 비어 있고 움직일 때는 곧게 되어 성인의 경지를 배 울 수 있을 것이다. 55)라고 하였다. 이 말은 성인의 경지를 배우려면 욕 심을 버리고 버려서 마음을 비워야 함을 강조한 내용이다. 이 욕심은 54) 신호열 역주, 국역 퇴계시 Ⅱ, 146쪽. 55) 퇴계, 태극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편, 역주와 해설 성 학십도, 53쪽.
退溪 詩 <淨友塘>의 학문적 맥락 읽기 45 마음에 낀 먼지이고 속된 인연이다. 이런 시각에서 <정우당>을 보게 되면, 제2행에서 표현한 의문은 주돈 이가 연꽃만을 어여삐 여긴 것은 욕심이 없어지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는 뜻이 아니다. 그 의문은 자신의 내면적 성찰을 설의법으로 표한한 것 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자기 성찰은 혹시나 흩어지기 쉬 운 자기의 마음에 있을 있을지도 모를 욕심과 속된 인연을 의심하고 그 것을 없애야 한다는 수양의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정우당>의 제4행에서 표현한 판단의 내용인 깨끗한 것 하나만으로 칭찬한다면 치우친 듯하네 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표 현의 의미는 연꽃의 향기로운 덕이 깨끗하다는 하나만이 아니라는 뜻 이다. 다시 말하면 연꽃의 깨끗함은 향기로운 덕 가운데 하나일 뿐이 라는 의미이다. 퇴계는 율곡에게 허심하게 이치를 살피고, 자신의 견해를 미리 정 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했다.56) 이 말은 자신의 정해진 견해에 따라서 이치를 관찰하게 되면 사물의 이치를 있는 대로 관찰하지 못하게 된다 는 뜻이다. 그리고 이미 정해진 견해로 보게 되면 사물의 이치를 있는 대로 관찰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번잡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 성일(金誠一)은 퇴계의 학문이 사욕(私欲)이 깨끗이 없어지고 천리(天 理)가 날로 밝아져서 나와 사물 사이에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는 경계 (境界)를 볼 수 없었다. 57)고 하였다. 여기서 천리에 밝아서 경계가 없 다는 말은 미리 정해진 견해에 따라서 나와 너, 드러남과 은미함, 있음 과 없음, 깨끗함과 더러움,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또는 옳음과 그름을 대립적으로 분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분별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이치를 궁구하여 인식한 천리에 따라서 본성을 다한다는 진 성(盡性)의 뜻이다. 그래서 <정우당>에서 깨끗한 한가지만으로 칭찬한다 는 것은 연꽃 56) 퇴계, 이숙헌에게 답함[답이숙헌], 장기근 역저, 퇴계집, 명문당, 2003, 321쪽. 57) 홍승균 이윤희 공역, 퇴계선생언행록, 44쪽.
46 退溪學論叢 第25輯 이 깨끗하다는 견해를 미리 정해놓고 연꽃의 본성을 관찰했다는 것을 전제한 표현이라고 보아진다. 연꽃이 깨끗하다고 정해놓은 견해는 마음 의 욕심, 마음에 낀 먼지, 또는 속된 인연에 해당한다. 그리고 치우치 네 라는 표현은 나와 너, 드러남과 은미함, 깨끗함과 더러움을 분별하여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도록 천리를 허심(虛心)하게 관찰하여야 한다는 뜻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천리(天理)를 있는 대로 인식하 기 위해서는 깨끗한 마음 또는 본성을 다하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수양 의 기쁨을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에서 허심하게 이치를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다. 허심은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사욕과 속된 인연과 정해진 견해 를 비움으로써 천리(天理)에 밝은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알기 위해서 본 성을 다하는 수양이 필요하다. 정우당은 거경 또는 진성의 수양을 지향 했던 퇴계에게 기쁨을 주었으며, <정우당>은 허심(虛心)한 수양의 기쁨 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Ⅴ. 결 론 퇴계는 산림의 즐거움이 기약하지 않아도 내 앞으로 다가왔다고 하였 다. 그리고 퇴계에게 이(理)를 탐구하는 기쁨과 자연에서 느끼는 즐거움 은 둘이 아니었다. 즉 학문과 문학은 융통하여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 이다, 이 연구의 목적은 이런 시각에서 도산잡영 에 실려 있는 <정우 당>에서 표현한 즐거움의 연원을 학문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데 있다. 퇴계가 작은 못을 파고 거기에 연꽃을 심어 이름을 정우당이라고 이 름을 붙였으며, 때때로 정우당을 완상하였다. 그리고 그 정우당이 저절 로 주는 기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지었던 시가 <정우당>이다. <정우당>은 사물의 이치를 인식하고, 의문을 제기하며, 사색하고, 판 단하는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성은 학문에서 어느 하나도 폐할
退溪 詩 <淨友塘>의 학문적 맥락 읽기 47 수 없는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을 시 창작에 활용 한 의미가 있다. 퇴계는 온갖 사물들이 구체적 존재자로서 태극인 이(理)와 개별자로서 이(理)에 해당하는 본성을 머금고 있는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였다. 이처 럼 이치를 탐구하는 궁리(窮理)의 인식 방법에 따라서 연꽃의 이치와 본 성을 인식하고 <정우당>에 표현하였다. 그리고 퇴계는 온갖 사물들이 이치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지경(持敬)해야 한다고 했다. 경(敬)은 흩어지기 쉬운 자기의 마음에 있 을지도 모를 욕심을 없애야 하고, 마음을 비우고 깨끗하게 하도록 한다 고 했다. 이처럼 지경(持敬)을 통해서 정해진 견해를 버리고 분별하지 않 는 본성을 다하는 진성(盡性)의 수양의 방법을 <정우당>에 표현하였다. 마지막으로 <정우당>은 궁리의 인식과 진성의 수양을 지향하여 허심 (虛心)하게 완상한 연꽃이 퇴계에게 저절로 준 기쁨을 표현한 작품이라 고 하겠다. 퇴계가 시에서 표현한 기쁨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정서이지만, 제자 또는 독자를 향한 가르침일 수 있다. 그래서 퇴계의 시에서 표현한 기쁨 은 퇴계의 교육과 관련하여 계속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 문헌>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편, 역주와 해설 성학십도, 예문 서원, 2009. 금장태, 퇴계의 삶과 철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김봉근, 퇴계시에 있어서 자연사상, 퇴계학논총 13, 퇴계학부산연구원, 2007, 156~187쪽. 김병권, 퇴계의 蒙卦 琓賞과 蒙泉 창작의 의미, 퇴계학논총 제12집, 퇴 계학부산연구원, 2006, 107~127쪽.
48 退溪學論叢 第25輯 김병권, 퇴계의 <冽井> 창작 원리 연구, 한국민족문화 제30집, 부산대 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7, 161~179쪽. 김병권, 퇴계의 <幽貞門> 창작 원리 연구, 퇴계학논총 제13집, 퇴계학 부산연구원, 2007, 209~230쪽. 김병권, 퇴계 문학의 易學思想的 淵源 연구, 퇴계학논총 제16집, 퇴계학 부산연구원, 2009, 5~30쪽. 김병권, <天淵臺>에 표현한 退溪의 즐거움 硏究, 퇴계학논총 제19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12, 5~24쪽. 김병권, 허생전의 목적 합리적 담론 분석, 퇴계학논총 제21집, 퇴계학부 산연구원, 2013, 5~25쪽. 김병권, <天雲臺>에 표현한 窮理盡性의 즐거움, 퇴계학논총 제22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13, 71~88쪽. 김병권, 退溪 文學의 學問的 志向 硏究, 퇴계학논총 제24집, 퇴계학부산 연구원, 2014, 33~55쪽. 성백효 역주, 현토완역 대학 중용집주, 전통문화연구회, 2001. 성백효 역주, 현토완역 시경집전 상 하, 전통문화연구회, 1993. 성백효 역주, 현토완역 주역전의 상 하, 전통문화연구회, 2001. 손오규, 퇴계의 산수문학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손오규, 퇴계시가예술연구, 제주대학교출판부, 2002. 손오규, 퇴계의 陶山雜詠에 나타난 山水之樂, 퇴계학논총 13, 퇴계학부 산연구원, 2007, 188~208쪽. 신호열 역주, 국역 퇴계시 Ⅰ 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이정화, 퇴계 이황의 시문학연구, 보고사, 2003. 장기근 역저, 퇴계집, 명문당, 2003, 퇴계 저, 이장우 장세후 옮김, 도산잡영, 을유문화사, 2005. 퇴계학총서편간위원회, 퇴계전서, 퇴계학연구원, 1991. 홍승균 이윤희 공역, 퇴계선생언행록, 퇴계학연구원, 2007.
退 溪 詩 < 淨 友 塘 >의 학문적 맥락 읽기 49 Abstract Reading scholastic contexts of Jeongwoodang / Kim, Byeong-Kweon Toegye( 退 溪 ) argued that if being not versed in Li ( 理 ), a person will confront many obstacles in reading books or going somewhere. He further asserted that if being able to read Jujajeonseo( 朱 子 全 書 ), a person will gain an understanding of how to study, essentially leading to a feeling of excitement. In this respect, Toegye was aware of the delights of mastering how to study and exploring Li. Toegye found a pleasure in the woods near Doosanseodang( 陶 山 書 堂 ), which unwittingly appeared in his mind. He created poems based on the sheer delights that he gained in staring at nature and things surrounding him. These poems, which were included in Dosanjobyoung( 陶 山 雜 詠 ), expressed the delights of unifying the law of nature and the nature of human being. Toegye considered the delights of exploring Li and communing with nature as not separate but integrated. That is, he conceived of studying and literature as uniting into one. This perspective is essential in researching on Togye s poems. The purpose of the current study is to gain an in-depth understanding of the origin of the delights expressed in Jeongwoodang, one of the poems in Dosanjobyoung, from scholastic/academic/scientific perspectives. Key words: Dosanjobyoung, Jeongwoodang, Delight of studying, Pleasure in forests, Unifying the natural law and the human nature, Origin of creating literature.
退溪學論叢 第25輯(51 64쪽) 先秦儒家美学的范畴体系 1)张 目 一 审美心态 诚 二 审美关系 和 三 审美效应 乐(le) 黔* 次 四 广义的审美对象 文 五 艺术 乐(yue) 論文 抄錄 先秦儒家美学已经构成了一个美学体系, 这个体系由五个范畴组成 诚, 指 审美心态, 探讨的是审美主体是如何可能的 和, 指审美关系, 探讨的是审美主 客体关系是如何相互作用的 乐(le), 指审美效应, 探讨的是审美主体在审美实 现之后的心理反应 文, 指审美对象, 探讨的是审美对象与一般对象相比的独特 性 乐(yue), 指艺术, 探讨的是艺术的本质及其作用 关键词: 先秦儒家美学 体系 诚 和 乐(le) 文 乐(yue) 先秦儒家有没有美学思想? 如果只是从狭义角度来理解美学的话, 这一问 题的答案当然是否定的 但是狭义意义上的 先秦儒家美学 不成立并不意味 着广义意义上的 先秦儒家美学 也不成立 先秦儒家的著作中已经包含着对 * 哲学博士, 武汉理工大学艺术与设计学院教授, 博士生导师, 主要从事美学和艺术 学研究 논문투고일: 2015.06.12 / 심사개시일: 2015.06.17 / 게재확정일: 2015.06.27
52 退溪學論叢 第25輯 审美现象的大量描述和对这些现象背后的本质和规律的自觉探讨, 后世美学 的一些关键问题如美的本质 审美主客体关系及心理反应 审美对象的不 同于一般对象的特殊规定性 艺术本质等问题都已经进入了他们的视野, 并 取得了可观的实绩, 有些见解甚至成为后世难以逾越的高峰 由此我们也就 可以认为, 广义上的 先秦儒家美学 的提法是可以成立的 先秦儒家不仅有美学, 而且是中国历史上最早的成体系的美学, 之所以如 此, 原因之一在于先秦儒家因与礼乐打交道的而使得其中不少人成为专门的艺 术工作者 原因之二则在于他们的教育者与思想者的双重角色使得他们成 为中国历史上最早的理性主义者, 前者使先秦儒家成为最早注意审美和艺术 现象的一个群体, 而后者则使它成为最早理性地解释这些审美现象的群体 先秦儒家美学的体系由五个关键概念构成 诚 和 乐(le) 文 乐(yue) 一 审美心态 诚 诚在先秦儒家思想中有双重含义 本体之诚和心态之诚 诚者, 天之道 也 诚之者, 人之道也 ( 中庸 ) 天之道是本体之诚, 而人之道则指心态 之诚 本体之诚既是心态之诚的诞生地, 也是心态之诚的最终归宿 本体之 诚反映出原始巫术和宗教中将获得与神沟通的心理条件 诚绝对化这一 事实, 只有心态之诚才能与神沟通, 于是神的本质就被认为是诚, 因为只有 性质相同的两者之间才可以进行交流 在神的人格化色彩淡化之后, 非人格 化的本体仍然保持了这一本质 心态之诚有多种, 如事神之诚 事人之诚 审美之诚等 它们分别具有信 仰 伦理 审美等意义 审美之诚由事神之诚 事人之诚发展而来, 兼具有 二者的特性 这表现在与事神之诚相关的是审美之诚是有终极追求的, 它虽 然不直接指向一个终极性存在, 但它所引导的审美被认为是实现终极追求的 中介 同时在审美之诚和事神之诚中都有一种将对象信以为真的心态, 不过 在审美中我们明知这是一种虚幻的真实, 而在事神中我们是绝对不会也不敢
先 秦 儒 家 美 学 的 范 畴 体 系 53 怀 疑 这 种 真 实 性 的, 这 种 信 要 求 事 神 者 不 能 对 神 抱 任 何 欲 望 : 民 不 求 其 所 欲 而 得 之, 谓 之 信 ( 礼 记 经 解 ) 有 求 于 神 才 去 信 神 者 的 心 态 是 不 信 不 诚 的, 其 行 为 注 定 不 能 取 信 于 神 这 一 点 对 于 以 后 的 审 美 心 态 的 形 成 有 着 重 要 影 响, 审 美 心 态 的 突 出 特 点 也 是 无 欲 的 审 美 之 诚 对 事 人 之 诚 的 继 承 性 表 现 在 它 将 事 人 心 态 中 对 象 与 自 我 之 间 的 亲 近 感 移 入 到 了 审 美 心 态 中, 从 而 使 得 事 神 之 诚 的 神 秘 和 恐 惧 不 再 存 在 诚 是 审 美 的 必 要 条 件 中 庸 有 不 诚 无 物 之 说, 不 诚 无 物 除 了 将 物 归 因 于 诚 这 一 理 解 外, 我 们 还 可 以 从 美 学 角 度 来 理 解 它 : 诚 是 使 物 成 为 如 呈 现 在 我 们 面 前 之 物 的 原 因, 也 就 是 说, 诚 是 使 我 们 发 现 物 的 意 义 的 原 因, 我 们 虽 然 不 是 物 的 创 造 者, 但 却 是 物 的 意 义 的 赋 予 者, 我 们 即 使 不 排 除 有 造 物 者 在 创 造 物 的 质 料 这 一 可 能 性, 但 这 丝 毫 不 影 响 我 们 是 这 一 对 象 的 意 义 的 发 现 者 这 一 点 对 于 人 来 说, 诚 是 成 己 与 成 物 的 条 件, 以 诚 为 条 件, 人 不 仅 是 可 以 成 物 的, 而 且 他 必 须 成 物, 并 通 过 成 己 来 成 物, 诚 者 非 自 成 己 而 已 也, 所 以 成 物 也 ( 中 庸 ) 成 物 是 成 己 的 归 宿 这 意 味 着, 不 是 谁 都 可 以 成 物 的, 即 不 是 谁 都 可 以 发 现 对 象 的 意 义 或 赋 予 对 象 以 意 义 的, 只 有 成 己 者 才 能 成 物, 所 谓 成 己, 就 是 人 格 修 养 的 完 善, 也 就 是 心 态 之 诚 在 自 身 的 生 成 这 种 成 己 与 成 物 的 统 一, 就 包 含 着 审 美, 因 为 它 有 一 个 在 对 象 身 上 完 善 自 我 发 现 自 我 的 过 程 审 美 之 诚 的 最 突 出 特 点 是 虚 静, 这 是 从 荀 子 的 虚 一 而 静 ( 荀 子 解 蔽 ) 这 一 命 题 中 引 伸 而 来 的 虚 静, 所 反 对 的 是 欲 动, 欲 望 充 实 于 心 中 则 不 虚, 充 实 之 欲 望 决 不 甘 于 寂 寞, 故 在 内 心 运 动 不 止 欲 望 的 炽 盛 与 审 美 心 态 是 一 种 反 对 关 系, 有 欲 望 则 无 审 美, 有 审 美 则 无 欲 望 审 美 是 和 君 子 联 系 在 一 起 的, 而 君 子 之 所 以 能 审 美, 与 他 的 成 就 自 我 有 关, 不 是 所 有 的 人 都 能 达 到 修 养 的 完 善, 而 能 够 达 到 这 一 境 界 的 才 能 被 称 为 君 子 君 子 的 标 志 就 是 无 欲 或 忘 欲 颜 回 一 箪 食 一 瓢 饮, 乐 在 其 中, 孔 子 饭 疏 食 饮 水, 乐 亦 在 其 中, 都 与 无 欲 或 忘 欲 联 系 在 一 起 只 有 忘 掉 欲 望, 心 志 才 能 专 一, 心 志 专 一 才 能 产 生 想 象 对 于 一 个 欲 望 主 体 而 言, 是 不 可 能 产 生 审 美 想 象 的
54 退溪學論叢 第25輯 二 审美关系 和1) 和 可以分为两个层次, 较低层次的 和 指两个不同的事物之间的相互作 用, 这在先秦儒家被称为 感, 对完全相同的两个事物而言是没有 感 的 咸, 感也 柔上而刚下, 二气感应以相与 ( 周易 咸卦 彖传 ) 感 指 两种不同的气之间的相互作用, 因此 感 只有在一元之气分化为两元或多元 之气之后才有可能 但这还只是 和 的较低层次, 根源于一元之气的两个不 同的事物要达到较高层次的 和, 还需要将这两种不同的事物向对立面转化, 互相靠近对方, 使这两种不同的事物互相认同这种彼此间存在着的同一性, 在 两者的差异中看出向一元回归趋势 与此相应, 作为审美关系的 和 也分为两个层次, 较低层次的审美之和指 主客体之间的感知关系的建立, 主体获得一个对象, 这既是认识的基础, 也 是审美的基础 在 诚 这一心态获得之后, 一个重要的审美步骤就是主体有 感于对象, 乐者, 音之所由生也, 其本在人心之感于物也 ( 礼记 乐记 ), 否则 诚 对审美就还只有潜在意义, 还不能称为审美之诚 诚 的心态与感 知的结合, 通常被称为 兴, 兴是由静态向动态的突破, 是感知 想象 情 感等因素的综合, 这实际上就已经是审美的初级形态了 较高层次的审美之 和 则指主客体之间的相互贯通和相互转化, 它又可以进一步分为两个不同 的层次 天人同构与天人相和 天人同构指在主体与客体之间找到相同的 结构或相同的元素, 它侧重于静态 天人相和则指气在主体与客体之间的运 化, 通过这种运化使主体体验到自己与对象都来源于一个本体, 并充当了向 此本体回归的中介, 它侧重于动态 审美之和更多地是一种动态关系, 这与先秦儒家对这个世界的最根本特征的 把握有关 天地之大德曰生 ( 周易 系辞下传 ) 生生之谓易 ( 周 易 系辞上传 ) 生 和 易 是这个世界的最根本的规定性, 生生不息 变 1) 本小节内容更详细的论述请参见拙作 先秦儒家审美之 和 的三个层次, 宁 夏社会科学, 2004年第6期
先 秦 儒 家 美 学 的 范 畴 体 系 55 化 不 已 就 是 作 为 大 道 的 易 的 唯 一 特 征 作 为 审 美 关 系 的 较 高 层 次 的 和 就 是 变 易 在 审 美 活 动 中, 主 体 在 不 断 变 化, 对 象 也 在 不 断 变 化, 而 主 客 体 关 系 也 处 于 不 断 变 化 之 中 正 是 这 些 变 化 使 得 主 客 体 关 系 最 终 获 得 审 美 特 性 找 到 了 一 致 性 的 两 个 事 物 之 间 的 关 系 是 和 谐 的, 人 与 对 象 关 系 之 间 如 果 找 到 了 这 种 相 通 点 也 是 和 谐 的 作 为 审 美 关 系 属 性 的 和, 它 除 了 动 态 性 和 相 通 性 这 两 个 特 点 之 外, 还 有 一 个 根 本 性 的 特 点 : 非 功 利 性 夫 子 是 罕 言 利 的, 而 先 秦 儒 家 在 处 理 与 自 然 关 系 之 时, 既 不 是 站 在 征 服 自 然 这 一 立 场, 也 没 有 如 道 家 那 样 将 自 身 降 格 为 一 种 纯 粹 的 自 然 存 在, 相 反, 它 认 为 和 作 为 对 天 人 间 良 性 关 系 的 概 括, 意 味 着 天 人 双 方 的 互 相 肯 定, 这 种 肯 定 不 是 以 利 益 为 基 础, 而 是 以 共 同 根 源 为 基 础, 而 对 这 种 共 同 根 源 的 认 同, 又 必 然 导 致 一 种 积 极 的 情 感 反 应 对 于 每 个 个 体 而 言, 和 并 不 是 一 种 学 理 探 讨 的 结 果, 它 就 是 活 生 生 的 当 下 性 的 情 感 显 现 从 具 体 的 人 与 对 象 之 和 上 升 到 人 与 天 ( 道 ) 之 和, 对 主 体 的 本 质 力 量 的 自 我 确 证 在 不 断 扩 散 不 断 升 华 天 人 之 和 中 人 与 天 的 相 互 确 证, 使 得 人 的 本 质 力 量 就 是 天 的 本 质 力 量, 这 就 使 得 人 成 为 天 地 之 心 而 天 地 之 心 并 不 是 在 任 何 个 体 都 能 见 出 的, 只 有 完 善 的 人 格 才 能 担 当 这 一 盛 誉 完 善 人 格 的 外 放 光 辉 是 先 秦 儒 家 美 学 最 重 要 的 审 美 原 型, 充 实 而 有 光 辉 之 谓 大 ( 孟 子 尽 心 下 ) 既 是 一 种 道 德 的 理 想 境 界, 也 是 审 美 的 理 想 境 界 能 达 到 此 境 界 的 人 已 经 微 乎 其 微, 而 一 个 人 能 够 由 此 再 上 升 到 化 而 不 可 知 的 境 界, 就 完 全 与 天 地 同 体, 与 道 合 一 了, 这 当 然 也 就 是 人 所 能 达 到 的 和 的 最 高 境 界 了 和 的 最 高 境 界 神 虽 然 不 再 是 一 种 审 美 境 界, 但 其 发 展 却 必 须 经 过 审 美 境 界, 这 是 由 审 美 之 和 的 创 新 与 发 现 因 素 所 决 定 的, 正 是 在 创 新 和 发 现 中, 审 美 之 和 在 圣 的 境 界 之 后 又 发 展 为 神 的 境 界 三 审 美 效 应 : 乐 (le) 审 美 的 现 实 表 现 是 主 体 之 乐 的 出 现 先 秦 儒 家 美 学 并 不 否 认 审 美 之 乐 包 含
56 退溪學論叢 第25輯 着快乐因素, 欣喜欢爱, 乐之官也 ( 礼记 乐记 ) 夫乐者, 乐也, 人情 之所不能免也 ( 礼记 乐记 ) 认为乐是人的本性使之然, 是人道, 这与 将乐视为神之专利相比是一大进步 在认可人有乐的权力这一事实的基础上, 先秦儒家美学对 乐 作了清楚的 辨析 从乐的根源和内容的区别入手, 乐 有感官之乐与精神之乐之分, 先 秦儒家美学全力抨击的对象, 是感官之乐, 乐者, 乐也 君子乐得其道, 小 人乐得其欲 ( 礼记 乐记 ) 感官之乐被认为是小人之乐, 其目的是欲望 的满足 精神之乐则是君子之乐, 其目的是对道的领悟 对感官之乐与精神 之乐的区分, 是先秦儒家对整个中华美学的一大贡献, 这使得中华美学很早 就涉及到了审美的最内核内容, 并使得对精神之乐的追求成为中华文明一 个长盛不衰的主题 感官之乐与精神之乐是两个完全不同的层次, 先秦儒家美学对此所作区分 是非常成功的, 相比之下, 精神之乐中的道德之乐与审美之乐的区分就复杂得 多 子在齐闻 韶, 三月不知肉味, 曰 不图为乐至于斯也 ( 论语 述 而 ) 这肯定是审美之乐, 但 乐天知命, 故不忧 ( 周易 系辞上传 ) 则 很难说是道德之乐还是审美之乐了 可以说先秦儒家美学已经对相对独立 的审美现象已经有所注意, 如在对美善关系的分析中已经明确意识到美不 是善, 但是对道德之乐与审美之乐到底作何区别, 它并没有为我们提供一个 满意的答案 而这正是先秦儒家美学的一个基本特色 审美之乐和道德之乐 交织在一起 在道德之乐与审美之乐交织在一起的时候, 我们还是可以分析出, 在先秦 儒家美学中道德之乐与审美之乐是两个不同的层次 首先, 先秦儒家美学的 一个基本观点, 是道德之乐有待于发展为审美之乐, 审美之乐由道德之乐发 展而来, 但道德之乐可以单独存在 兴于诗, 立于礼, 成于乐 ( 论语 泰 伯 ), 当行为主体意识到自己已经 立于礼 之时, 他就已经产生了道德之 乐, 但这种道德之乐还要继续发展为审美之乐, 只有在对 乐(yue) 的审美 状态中主体才能全面成就自我 其次, 审美之乐虽然以道德之乐为前提, 但 在对审美之乐的论述中, 可以将道德之乐 括起来 先秦儒家美学在谈到 乐
先 秦 儒 家 美 学 的 范 畴 体 系 57 yue) 的 根 源 时, 认 为 乐 之 本 在 于 人 心 之 感 于 物 之 时, 就 没 有 将 道 德 之 乐 考 虑 在 内 再 次, 道 德 之 乐 在 通 达 与 道 同 一 之 乐 之 时, 必 须 以 审 美 之 乐 为 中 介, 它 不 可 能 绕 过 审 美 之 乐 就 到 达 与 道 同 一 之 乐 当 孔 子 在 发 现 知 者 乐 水, 仁 者 乐 山 ( 论 语 雍 也 ) 现 象 的 存 在 之 时, 当 曾 点 言 其 风 乎 舞 雩, 詠 而 归 ( 论 语 先 进 ) 之 志 时, 我 们 不 难 看 出 天 人 合 一 的 理 想 是 由 审 美 之 乐 所 导 出 的 在 先 秦 儒 家 美 学 甚 至 整 个 哲 学 中, 它 的 最 高 理 想 是 与 天 ( 道 ) 同 一 之 乐, 而 这 种 乐 是 由 现 实 的 道 德 之 乐 与 审 美 之 乐 所 引 发 的 : 易 直 子 谅 之 心 生 则 乐, 乐 则 安, 安 则 久, 久 则 天, 天 则 神 ( 礼 记 乐 记 ) 道 德 之 乐 充 当 了 向 天 人 合 一 境 界 进 发 的 动 力, 而 这 种 道 德 之 乐 与 审 美 之 乐 与 天 同 一 之 乐 是 难 以 区 分 开 来 的, 万 物 皆 备 于 我 矣 反 身 而 诚, 乐 莫 大 焉 ( 孟 子 尽 心 上 ) 物 打 上 自 我 的 烙 印, 是 一 审 美 过 程, 而 这 种 自 我 不 是 别 的, 就 是 以 诚 为 其 本 质 的 自 我, 因 而 此 乐 又 是 道 德 之 乐, 而 此 诚 不 仅 是 自 我 的 规 定 性, 又 是 天 ( 道 ) 的 规 定 性, 故 此 乐 又 是 与 天 同 一 之 乐 由 于 与 道 德 之 乐 的 紧 密 联 系, 故 衡 量 道 德 的 标 准 也 被 用 来 衡 量 审 美 之 乐, 喜 怒 哀 乐 之 未 发, 谓 之 中 ; 发 而 皆 中 节, 谓 之 和 ( 礼 记 乐 记 ) 中 与 和 都 是 道 德 标 准, 强 调 行 为 要 合 度, 不 能 超 出 度 的 规 定 性, 要 恰 到 好 处 有 喜 怒 哀 乐 于 心 中, 但 尽 量 不 要 发 作 出 来, 这 就 是 中 的 要 求 ; 而 一 旦 要 发 作, 也 是 可 以 的, 只 是 要 有 节 制, 这 就 是 和 的 要 求 2) 因 此 审 美 之 乐 在 先 秦 儒 家 美 学 就 不 是 一 种 尽 情 之 乐, 而 是 一 种 追 求 深 度 内 涵 有 所 节 制 之 乐 这 个 原 则, 就 是 中 庸 具 体 而 言, 就 是 乐 而 不 淫, 哀 而 不 伤 ( 论 语 八 佾 ), 不 过 分 不 走 极 端, 既 不 过 分 压 抑 自 己, 又 不 过 分 放 纵 自 己, 情 感 得 到 抒 发, 但 只 是 温 和 地 抒 发 而 不 是 狂 热 地 宣 泄 孔 子 说 : 益 者 三 乐, 损 者 三 乐 乐 节 礼 乐, 乐 道 人 之 善, 乐 多 贤 友, 益 矣 ; 乐 骄 乐, 乐 佚 游, 乐 宴 乐, 损 矣 ( 论 语 季 氏 ) 有 益 的 乐 也 就 是 符 合 道 德 内 容 的 乐, 反 之 违 反 道 德 原 则 2) 这 里 作 为 道 德 标 准 的 和 与 上 文 作 为 关 系 属 性 的 和 不 是 同 一 个 概 念, 这 里 的 和 是 一 个 静 态 概 念, 以 合 度 为 准 则, 而 关 系 性 的 和 则 是 一 个 动 态 概 念, 是 由 矛 盾 运 动 而 获 得 的 有 差 异 的 双 方 的 互 相 认 同
58 退溪學論叢 第25輯 的乐则是有害的 强调乐的有节制, 一直被认为是先秦儒家美学的保守性 的体现, 但从另一方面来考虑, 有节制之乐与无节制之乐相比, 可能对身心 更有益处 实现乐的重要手段, 先秦儒家美学认为是 忘 虽然它没有象庄子那样 要 忘身, 忘掉自身的存在, 但对 忘 也是很强调的 孔子在总结自己的人 生之途时说 其为人也, 发愤忘食, 乐以忘忧, 不知老之将至 ( 论语 述 而 ), 食 被忘掉了, 忧 也被忘掉了, 甚至连生命的自然进程也被忘掉了, 这样才能超越肉体的存在达到精神的快乐, 忘老 的一个潜台词就是 忘死, 这一人格形象与后来孟子所说的 大丈夫 是完全一致的 这种理想人格的 极端代表是 舜视弃天下犹弃敝踪也 窃负而逃, 遵海滨而处, 终身訢然, 乐而忘天下 ( 孟子 尽心上 ) 连最有诱惑力的一国之君的权位也可以 忘掉, 还有什么不可忘掉的呢? 忘就是乐, 它可以卸下包袱, 轻松前进, 与周 围世界的功利关系不再存在, 从而实现了与周围世界的和谐统一, 而这个周 围世界的总和就是 天, 这意味着, 忘掉利欲的诱惑, 就能通达 天人合一 之境界 这也就是 和 的境界 处于这一境界中的主体, 他拥有整个意义世界, 而这个意义世界是以他为 中心的, 他是意义世界的立法者 但另一方面, 他与这个意义世界之间又没 有界限, 在这个意义世界内部随处可见到自我的存在, 自我在这个意义世 界中居无定所, 人与意义世界的这层关系被称为 游 孔子说 游于艺 ( 论 语 述而 ), 强调审美欣赏和审美创造的高度统一, 只有处于这种统一中的 主体, 才能达到 游 的状态 游意味着主体脱离了对象世界的束缚, 对象世 界对自我的不透明性消失了 游同时意味着 主体 的自我消解, 自我被融入 到整个意义世界之中 游是自我与对象之间对立关系的彻底打破, 自我与对 象达到了浑然一体的程度, 在游中, 自我不存在了, 但周围世界随处都有自 我的存在, 对象也不存在了, 对象化为了自我, 整个世界被虚化了, 自我也化 为了大我 在 游 这一乐的最高层面, 原来一般审美之乐所达到的小我实现 之乐被大我实现之乐所取代了
先 秦 儒 家 美 学 的 范 畴 体 系 59 四 广 义 的 审 美 对 象 : 文 文 这 个 概 念 体 现 出 先 秦 儒 家 美 学 是 一 种 以 主 体 为 主 导 的 关 系 论 美 学 先 秦 儒 家 美 学 对 人 文 的 理 解 重 点 不 是 放 在 客 观 性 的 文 本 身 的 组 合 规 律 上, 而 是 放 在 文 的 根 源 人 身 上, 人 与 文 的 关 系 成 为 研 究 文 的 重 点 先 秦 儒 家 美 学 不 是 从 客 观 属 性 来 分 析 文 的 审 美 特 点, 而 是 从 文 的 形 成 角 度 解 决 了 审 美 对 象 是 如 何 可 能 的 这 一 问 题 作 为 审 美 对 象 的 文, 包 括 礼 和 乐 这 些 社 会 现 象, 也 包 括 人 打 上 了 烙 印 的 自 然 对 象, 它 们 或 者 体 现 出 人 的 创 造 能 力 伪, 或 者 体 现 出 人 的 发 现 能 力 观 伪 指 人 为, 与 自 然 状 态 相 对, 陶 人 埏 埴 而 为 器, 工 人 斲 木 而 成 器, 生 于 人 工 之 伪 ( 荀 子 性 恶 ) 伪 指 人 的 创 造 性 的 外 化 过 程 及 其 结 果, 是 人 与 动 物 相 区 别 的 根 本 标 志, 可 学 而 能, 可 事 而 成 之 在 人 者, 谓 之 伪 ( 荀 子 性 恶 ) 从 人 性 的 自 我 创 造 与 自 我 完 善 角 度, 伪 就 是 文, 或 者 说 伪 必 然 导 致 文 性 者, 本 始 材 朴 也 ; 伪 者, 文 理 隆 盛 也 无 性 则 伪 之 无 所 加, 无 伪 则 性 不 能 自 美 ( 荀 子 礼 论 ) 无 伪 则 性 不 能 自 美 这 一 命 题 有 伦 理 学 的 意 义, 意 谓 人 性 在 伪 的 过 程 中 获 得 了 道 德 本 质, 但 它 又 远 远 超 出 了 伦 理 学 的 范 围, 它 所 指 的 自 美 是 一 种 人 性 的 全 面 完 善, 既 包 含 道 德 人 格, 也 包 含 审 美 人 格 伪 既 指 人 性 之 生 成, 也 指 对 象 带 上 人 的 烙 印, 而 这 两 方 面 的 成 果 都 可 以 称 为 文 但 是 光 有 伪 还 不 能 使 文 具 有 审 美 的 必 然 性, 伪 还 只 解 释 了 文 的 根 源 的 一 个 方 面, 它 为 审 美 之 文 的 产 生 提 供 了 一 种 可 能 性, 而 不 是 现 实 性, 文 只 对 它 的 观 察 主 体 才 有 意 义, 没 有 对 文 的 观 察 其 意 义 就 无 以 凸 显, 故 观 在 文 的 生 成 中 有 着 不 可 忽 视 的 地 位 天 地 之 道, 贞 观 者 也 ( 周 易 系 辞 下 传 ), 天 地 之 道 都 是 贞 人 观 察 和 解 释 的 结 果, 更 何 况 文 的 意 义 呢? 观 发 展 成 为 一 种 审 美 直 观 大 约 经 过 了 以 下 三 个 层 次 : 第 一, 由 感 性 认 识 上 升 到 理 性 判 断 观 其 所 感, 而 天 地 万 物 之 情 可 见 矣 ( 周 易 咸 卦 彖 传 ), 显 然 观 是 感 的 深 化, 其 理 性 色 彩 是 很 明 显 的 审 美 之 观 继 承 了
60 退溪學論叢 第25輯 这种理性特点, 但它并不是一种认识, 而是由理性认识发展出的一种特殊的 理性判断, 这种判断不是在两个概念之间, 而是在两个表象之间或主体与表 象之间 第二, 由对象中心发展为自我中心 观我生, 君子无咎 ( 周易 观 卦 ), 君子 反观 反思 自己的一生, 所以就没有灾难 审美之观所实现 的理性判断亦是以反观自我为中心的, 它虽然根基于道德修养中的自我 反思, 但是这种自我反思还应实现两个转变, 一是将这种理性的反思时 间缩短, 使理性积淀为感性, 使反思成为一种直观和体验 二是将道德的他 律性淡化, 而强化道德的自律性, 使主体在道德层面上获得一种自由 第 三, 由被动的认知走向积极的创造和发现 在这种创造性发现中, 对象的 意义不是纯客观的, 它势必要打上主体自己的烙印, 而这种主观性正是主体 在发现对象中发现自我的重要体现 仁者见之谓仁, 知者见之谓知 ( 周 易 系辞上传 ) 对对象的意义的发现其实就是对主体自己意义的发现, 对 象之文在不同的主体面前呈现出不同的意义, 而在主体体验到对象之文与 自己的一致性 同源性之时, 也就是文由潜在的审美对象转化为现实的审美 对象之时 文 在 伪 这一过程中获得了一个规定性 人为性 在 观 中又获得了 一个规定性 为人性 只有这两个内涵都具备, 文才具有审美意义 审美之 文不仅是人创造出来的, 还是人发现出来的, 这种发现虽然在表面上类似于 一种面向对象的感性认识, 但实际上却是一种以自我为中心的价值判断 五 艺术 乐(yue) 先秦儒家美学的艺术观集中体现在对乐的论述中 乐在先秦儒家美学中有 着特别重要的地位, 先秦儒家美学的许多命题都出自与乐有关的论述中, 在一 定程度上可以说, 先秦儒家美学是以乐为核心的美学 与后世的音乐美学的显著不同在于, 先秦儒家美学是在一个本体论的框 架之内来谈乐的, 乐具有一种沟通天人的神秘力量, 它 极乎天而蟠乎地, 行
先 秦 儒 家 美 学 的 范 畴 体 系 61 乎 阴 阳 而 通 乎 鬼 神, 穷 高 极 远 而 测 深 厚 ( 礼 记 乐 记 ), 甚 至 具 有 化 生 万 物 的 巨 大 能 力, 这 些 都 可 与 巫 术 中 的 乐 的 神 奇 力 量 联 系 起 来 乐 的 根 源 是 神 秘 的 天, 乐 由 天 作, 乐 反 过 来 又 能 使 这 一 根 源 彰 显, 故 乐 著 大 始 正 由 于 乐 以 天 为 其 根 源, 乐 的 特 征 体 现 出 天 的 特 征 : 乐 者, 天 地 之 和 也 而 乐 所 产 生 的 根 源 同 时 也 就 是 乐 所 引 起 快 乐 的 原 因 : 乐, 乐 其 所 自 生 ( 礼 记 乐 记 ) 但 同 时 先 秦 儒 家 美 学 也 认 为 乐 根 源 于 情 乐 也 者, 情 之 不 可 变 者 也, 乐 的 出 现 是 因 为 要 满 足 情 感 的 需 要, 乐 者, 心 之 动 也 ; 声 者, 乐 之 象 也 文 采 节 奏, 声 之 饰 也, 光 有 情 动 还 不 行, 因 为 情 感 还 需 要 传 达 才 能 被 他 人 所 接 受, 故 要 使 情 感 获 得 形 式, 情 只 有 和 形 式 结 合 才 能 成 为 情 感 的 对 象 今 天 被 我 们 称 之 为 乐 的 审 美 对 象 在 先 秦 儒 家 美 学 被 分 为 两 个 不 同 的 层 次 : 较 低 的 是 音, 较 高 的 是 乐 音 是 情 动 于 中 而 形 之 于 外 的 声 之 文, 是 情 感 和 形 式 的 结 合, 但 没 有 对 道 德 内 容 的 特 殊 要 求 乐 则 在 音 的 基 础 上 增 加 了 道 德 内 容 这 一 要 求, 德 音 之 谓 乐 在 音 的 范 围 之 内 乐 的 范 围 之 外 还 有 另 一 种 音 与 乐 相 对, 这 种 非 乐 之 音 又 可 分 为 两 类, 一 类 是 没 有 道 德 内 容 的, 而 另 一 类 则 是 违 反 道 德 规 定 的 对 于 前 者 先 秦 儒 家 美 学 一 般 还 是 给 了 它 一 定 的 生 存 空 间 先 秦 儒 家 美 学 真 正 极 力 反 对 的 是 后 者 以 感 官 之 欲 为 内 容 的 反 道 德 的 溺 音, 它 淫 于 色 而 害 于 德 ( 礼 记 乐 记 ), 不 仅 对 个 体 身 心 有 害, 也 无 益 于 社 会 被 称 为 溺 音 之 极 的 是 郑 卫 之 音, 它 在 几 乎 所 有 的 先 秦 儒 家 著 作 中 都 遭 到 了 激 烈 的 抨 击 乐 的 功 能, 从 总 体 上 看, 是 与 礼 所 造 成 的 分 相 对 的 和 具 体 又 可 以 细 分 为 以 下 几 个 方 面 : 一 是 充 当 了 情 感 的 对 应 物, 在 它 上 面 情 感 得 到 了 宣 泄, 从 而 使 主 体 获 得 心 灵 的 平 衡 与 宁 静, 先 秦 儒 家 美 学 很 早 就 意 识 到 诗 可 以 怨 ( 论 语 阳 货 ), 它 可 以 发 泄 人 的 心 中 不 平 之 气, 无 损 于 统 治 秩 序 而 又 能 有 助 于 统 治 者 观 民 风 以 改 进 统 治 方 法, 有 利 于 社 会 的 稳 定, 也 有 利 于 个 体 的 和 谐 发 展 二 是 充 当 了 道 德 教 化 的 工 具, 这 在 先 秦 儒 家 美 学 是 一 个 非 常 突 出 的 特 征, 也 是 后 人 将 先 秦 儒 家 美 学 视 为 伦 理 美 学 的 一 个 重 要 方 面 乐 作 为 情 礼 统 一 美 善 结 合 的 产 物, 体 现 出 个 体 自 身 的 和 谐 三 是 以 情 感 的 兴 发
62 退溪學論叢 第25輯 为契机, 在发现共通感的过程中达到增强社会的凝聚力的目的, 孔子所说的 诗 可以群 ( 论语 阳货 ) 就是这个意思 群 这一概念提出的深 刻意义在于 先秦儒家美学不是以空洞的道德说教来达到这一目的, 而是 在情感的相似体验中获得一种相互认同, 这就促进了各主体之间的亲近, 有 助于人际之和的实现 四是以情感为动力, 在想象和发现中主体不断扩张自 己的意义世界, 从而由个体的小我通达世界终极和世界根源, 在自我与终极 性本体的交汇处形成 大我, 天人之和在此得到了实现, 从而通达了人生的 最高境界 先秦儒家美学对乐与道德关系的论述, 既是其保守的一面, 也是其先 进的一面 将道德作为乐的内容和前提, 无疑是保守的, 这对乐的发展 是不利的 而另一方面, 将 乐 作为道德发展的归宿, 强调道德人格还有 待于发展到审美人格, 立于礼 之后还要发展到 成于乐, 则又是极先进 的观点 以上五个范畴, 构成了一个相当完善的美学体系 由于先秦儒家美学是 以主体为主导的关系论美学, 故这五个范畴的区分只是相对的区分, 它们之 间或者是互为因果的, 如 和 与 乐 (le) 或者是互相包含的, 如 文 与 乐 (yue) 在这五个范畴中, 诚 无疑是一个非常重要的概念, 它在审美心 态层面上使审美成为可能 和 则使这种审美由可能变成现实 而这种现 实的标志在主体身上就表现为 乐 (le), 在对象身上则表现为 文 如果这种 文 的目的是以 乐 (le)为核心的, 那么这种 文 就是 乐 (yue) 这五个范畴 都是非常重要的, 而如果硬要对这些概念的重要性作一个比较的话, 可能最 重要的概念是 诚 与 和, 因为由这两个概念可以派生出其他三个概念 <参考 文献> 周易正义 王弼 韩康伯注 孔颖达正义 阮元校刻 十三经注疏 中 华书局 1980年
先秦儒家美学的范畴体系 63 尚书正义, 孔安国传, 孔颖达正义 阮元校刻 十三经注疏, 中华书局, 1980年 毛诗正义, 毛亨传, 郑玄笺, 孔颖达正义 阮元校刻 十三经注疏, 中华 书局, 1980年 礼记正义, 郑玄注, 孔颖达正义 阮元校刻 十三经注疏, 中华书局, 1980年 孟子正义, 焦循正义 诸子集成, 岳麓书社, 1996年 荀子集解, 王先谦撰 诸子集成, 岳麓书社, 1996年 朱熹 四书集注, 中华书局, 1983年 孔鲋 汪晫等 孔丛子 曾子全书 子思子全书, 上海古籍出版社, 1990年 杨伯峻编著 论语译注, 中华书局, 1958年 李零 郭店楚简校读记 道家文化研究 第十七辑, 生活 读书 新知三 联书店, 1999年, 第455 540页 蒋孔阳 先秦音乐美学思想论稿 蒋孔阳全集 第一卷, 安徽教育出版社, 1999年 徐复观 中国艺术精神, 春风文艺出版社, 1987年 李泽厚 美的历程 美学三书, 安徽文艺出版社, 1999年 李泽厚 刘纲纪主编 中国美学史 第一卷, 中国社会科学出版社, 1984年 叶朗 中国美学史大纲, 上海人民出版社, 1985年 郁沅 中国古典美学初编, 长江文艺出版社, 1986年
64 退溪學論叢 第25輯 <국문 초록> 선진 유가미학의 범주체계 / 장검(장첸) 선진 유가미학(先秦儒家美学)은 이미 하나의 미학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 체계는 다섯개의 범주로 구성되어 있다. 성(诚)은 심미심태를 가리키 는데, 여기서 담론하는 것은 심미 주체가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조화(和) 는 심미 관계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담론하는 것은 심미 주객체 관계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이다. 락(乐, 즐거움)은 심미효응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담론하는 것은 심미 주체가 심미 실현 이후의 심리적 반응에 있 다. 문(文)은 심미대상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담론하는 것은 심미 대상과 일반 대상을 비교하는 독특성이다. 악(乐)은 예술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담론하는 것은 예술의 본질 및 그 작용이다. 주제어: 선진유가미학, 체계, 성, 조화(和), 락, 문, 악. Abstrac Pre-Qin Confucian aesthetics category system / Zhang Qian Confucian Aesthetics has formed an aesthetic system, which consists of five categories: Honesty, meaning aesthetic attitude, investigated how aesthetic subject is possible; Harmony, referring to the aesthetic relation, explored how the aesthetic relationship between subject and object interacts; Happy(le), referring to the aesthetic effect, explored the psychological reactions after the completion of aesthetic subject s aesthetic process; Text, referring to the aesthetic object, explored the uniqueness of aesthetic object compared with the general ones; Music(yue), referring to the arts, explored the nature and function of art. Key words: Confucian aesthetics; System; Honesty; Harmony; Music (le); Text; Music (yue).
退溪學論叢 第25輯(65 76쪽) 试析孟子 民贵 说的 尊君 实质 1)刘 目 清 平* 次 一 问题的缘起 三 无父无君是禽兽也 二 得乎丘民而为天子 四 诛一夫纣 論文 抄錄 孟子的 民贵 观念历来受到高度推崇, 一些现代学者甚至认为它包含了 民主 性精华 然而, 一旦将其置于具体语境的文本关联尤其是孟子思想的整体架构 中, 我们就可以看出, 这一观念正像传统儒家所坚持的 民本 观念一样, 也主要 是把民众当成了巩固君主统治的工具性之本 而不是自身具有尊严价值的目的 性之本, 因此就其精神实质而言依然在于 尊君 关键词: 孟子 民贵 儒家 民本 尊君 一 问题的缘起 众所周知, 孟子明确主张 民为贵, 社稷次之, 君为轻 ( 孟子 尽心下 ) 这个命题虽然曾经让某些古代的帝王感到愤怒(如明朝开国皇帝朱元璋据说 就因为孟子 对君不逊 下令罢其配祀孔庙, 删节 孟子 ), 但同时又在现代 * 复旦大学 社会科学高等研究院 教授. 논문투고일: 2015.06.12 / 심사개시일: 2015.06.17 / 게재확정일: 2015.06.27
66 退溪學論叢 第25輯 受到了一些学者的高度肯定 例如, 胡适就交口称赞孟子在 重君权的儒家 中 鼓吹民权 尊重百姓过于君主, 甚至依据 孟子 离娄下 的另一句 名言 君之视臣如手足, 则臣视君如腹心 君之视臣如犬马, 则臣视君如国人 君之视臣如土芥, 则臣视君如寇雠, 宣布 孟子成为人类历史上民主政治的 最早也许是最大的哲学家 1) 在某种意义上说, 胡适的这种高度称赞似乎有一定的道理 一方面, 在孟 子之前, 孔子虽然也主张 博施于民而能济众 ( 论语 雍也 ), 但同时又 认为 天下有道, 则礼乐征伐自天子出 天下有道, 则庶人不议 ( 论 语 季氏 ), 在充分肯定天子统辖民众的主导权威的同时, 把 民 置于了只 能消极等待君主对于自己普降甘霖 实施仁政的被动地位, 以致连评议 仁 政 的资格都被取消了 此外, 尽管当前一些儒者努力想在现代历史氛围下做 出某种匪夷所思的 亲民 解释, 孔子宣称的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 论 语 泰伯 ), 还是在给定的文本关联中流露出轻视民众的鲜明意向 另一 方面, 在孟子之后, 不但荀子特别强调 辨莫大于分, 分莫大于礼, 礼莫大于 圣王 ( 荀子 非相 ), 充分彰显了君主在儒家礼制架构中至高无上的神圣 地位, 而且鼓吹 独尊儒术 的董仲舒更是清晰地将孔子确立的 春秋之大义 概括成了 屈民而伸君 ( 春秋繁露 玉杯 ), 明显是把 尊君 的理念凌驾 于 亲民 的规范之上, 并且成为后世主流儒家始终维系的一个基本共识 因此, 倘若单从儒家纵向发展的角度看, 孟子主张 民贵君轻, 至少在字 面上呈现出了将民众置于君主之上的清晰意图, 之后的整个主流儒家, 从而不但远远超越了在他 而且还在很大程度上超越了在他之前的儒家鼻祖孔 子本人, 以致的确可以说在 重君权的儒家 中独树一帜 鹤立鸡群 然而, 一旦考虑到了后世主流儒家特别赋予了孟子(而非颜渊 有若 曾 1) 参见胡适 胡适学术文集 中国哲学史 上册, 姜义华主编, 北京 中华书 局1991年版, 第191 204 516页 相比之下, 倒是同时代的陈独秀敏锐地指出, 在西方的现代民主观念与传统儒家的民本观念乃至孟子的民贵观念之间存在着 深度的差异 夫西洋之民主主义乃以人民为主体 所谓民视民听 民贵君 轻, 所谓民为邦本, 皆以君主之社稷 即君主祖遗之家产为本位 ( 再质问东 方杂志记者 )
试 析 孟 子 民 贵 说 的 尊 君 实 质 67 参 以 及 子 思 等 其 他 儒 者 ) 以 亚 圣 地 位 的 历 史 事 实, 我 们 对 于 他 这 种 空 前 绝 后 的 反 潮 流 精 神 可 能 就 要 打 上 一 个 问 号 了 : 如 果 孟 子 真 的 是 在 重 君 权 的 儒 家 中 前 无 古 人 后 无 来 者 地 鼓 吹 民 权, 乃 至 与 孔 子 确 立 的 屈 民 而 伸 君 的 春 秋 之 大 义 唱 开 了 对 台 戏, 他 怎 么 还 会 成 为 儒 家 行 列 中 一 人 之 下 万 人 之 上 的 二 号 圣 贤 呢? 难 道 韩 愈 之 后 历 代 儒 者 精 心 构 建 的 儒 家 道 统 居 然 如 此 地 漫 不 经 心, 以 致 没 有 看 出 这 位 人 类 历 史 上 民 主 政 治 的 最 早 也 许 是 最 大 的 哲 学 家 对 于 儒 家 来 说 实 际 上 属 于 别 有 用 心 的 另 类 人 物 乃 至 异 议 分 子 吗? 其 实, 只 要 将 孟 子 的 上 述 见 解 置 于 具 体 的 语 境 关 联 中 细 加 分 析, 我 们 就 会 清 楚 地 看 出 : 它 们 根 本 就 不 包 含 任 何 民 主 精 神, 而 是 依 然 充 满 了 传 统 儒 家 诱 导 训 练 和 调 教 广 大 民 众 归 服 统 治 君 主 的 工 具 性 民 本 意 识, 因 此 与 始 终 重 君 权 的 儒 家 在 精 神 实 质 上 如 出 一 辙 完 全 一 致 2) 二 得 乎 丘 民 而 为 天 子 本 来, 只 要 我 们 不 是 戴 着 玫 瑰 色 的 眼 镜 孤 立 抽 象 地 理 解 民 为 贵, 社 稷 次 之, 君 为 轻 这 句 话, 而 是 如 其 本 义 地 将 它 还 原 到 上 下 文 的 语 境 关 联 中, 我 们 立 刻 会 发 现, 它 所 映 射 的 正 是 儒 家 一 以 贯 之 的 工 具 性 民 本 意 识, 因 为 紧 接 其 后 的 恰 恰 是 是 故 得 乎 丘 民 而 为 天 子, 得 乎 天 子 为 诸 侯, 得 乎 诸 侯 为 大 夫 这 种 充 满 了 从 统 治 者 的 视 角 出 发 打 量 被 统 治 民 众 的 意 义 轻 重 的 目 的 性 君 本 精 神 众 所 周 知, 以 周 公 为 主 要 代 表 的 周 朝 统 治 集 团 一 直 强 调 若 保 赤 子 ( 尚 书 康 诰 ) 怀 保 小 民 ( 尚 书 无 逸 ) 的 观 念, 构 成 了 西 周 仁 政 的 重 要 内 容 ; 然 而, 人 们 往 往 忽 视 的 一 点 是 : 他 们 倡 导 仁 政 的 根 本 目 的 与 其 说 是 为 了 亲 民, 毋 宁 说 是 为 了 重 王 维 系 周 王 统 治 的 长 治 久 安, 也 就 是 周 公 自 己 所 说 的 予 小 子 新 命 于 三 王, 惟 永 终 是 图 ( 尚 书 金 縢 ) 惟 王 2) 参 见 刘 清 平 : 儒 家 民 本 思 想 : 工 具 性 之 本, 还 是 目 的 性 之 本, 学 术 月 刊 2009 第 8 期
68 退溪學論叢 第25輯 子子孙孙永保民 ( 尚书 梓材 ) 晚出的 尚书 五子之歌 进一步将这 种 保民 的观念概括为 民惟邦本, 本固邦宁, 更清晰地指出了 民 作为 本 的工具性价值 民众是维持邦国统治的基础 只有首先稳固了他们, 邦国才 能可持续性地保持安定 用今天的流行语言说其实就是 维稳 就此而言, 孟子在主张 民贵君轻 之后紧接着强调 是故得乎丘民而为天 子, 以及他在 孟子 离娄上 中所说的 得天下有道 得其民, 斯得天下 矣 得其民有道 得其心, 斯得民矣, 实际上也是从天子只有 得乎丘民 才能 王天下 的角度出发, 看重 民 的工具性 本位 角色 只有诱导了 民心, 保 证了 庶民子来, 君主才能 王天下, 所谓 保民而王 ( 孟子 梁惠王上 ) 保民 只是手段, 而王 才是目的 朱熹对此把握得很到位, 所以在诠 释 民贵君轻 的时候精辟地指出 盖国以民为本, 社稷亦为民而立, 而君 之尊又系于二者之存亡, 故其轻重如此 丘民, 田野之民, 至微贱也 然得其心, 则天下归之 ( 孟子集注 尽心下注 ) 换言之, 孟子之所以主 张 民贵君轻, 并不是因为他 尊重百姓过于君主, 而只是因为在他看来, 君之尊 最终也要依赖于民和社稷的存亡 毕竟, 那些失去了民心的亡国 之君, 根本就谈不上还有什么 尊 了 在这个意义上说, 民贵君轻 的观念 依然是从维护 君之尊 的视角肯定 民之贵, 借此告诫君主官员应该重视百 姓生活 关注民心向背, 才能确保自己的统治权威传至万万世 至于孟子有关 君之视臣如X, 则臣视君如Y 的著名排比, 虽然受到了现代 儒者的赞赏, 被认为充满了 君臣平等 的意蕴, 但只要仔细解读一下 手足 腹心 犬马 国人 土芥 寇雠 的 对等性, 我们也能清晰地发现, 就 像他对 丘民 这个词的精心选择一样(朱熹解释为 田野之民, 至微贱也 ), 其 中依然潜藏着君主远比臣民尊贵的 差等 奥秘 君主即便把臣民当成了 犬 马 来对待, 臣民还是应当高看君主一等 将其视为 国人, 以致二者之间的 差距可以说成是 人兽之别 所以, 现代新儒家的头号代表人物熊十力才会 这样一针见血地指出了孔孟荀三位儒家大师在 屈民而伸君 方面的一贯道 立场 至于君臣之义, 为小康礼教重心所在 孔子早年未尝不以此教学者 孝治论正是小康礼教, 以尊君大义为其重心 孟子荀卿同是小康礼教
试 析 孟 子 民 贵 说 的 尊 君 实 质 69 ( 六 经 是 孔 子 晚 年 定 论 ); 君 尊 臣 卑, 庶 民 则 卑 极 矣 君 贵 臣 贱, 庶 民 更 贱 极 矣 上 下 尊 卑 贵 贱 之 分, 正 定 而 不 可 移 ( 乾 坤 衍 辨 伪 ) 应 该 承 认, 在 先 秦 三 位 儒 家 大 师 中, 孟 子 的 民 贵 君 轻 观 念 也 有 一 些 独 到 之 处 : 与 孔 子 主 张 君 主 养 民 也 惠 ( 论 语 公 冶 长 ) 荀 子 鼓 吹 君 者 已 能 食 之 都 认 为 是 朝 廷 养 活 了 老 百 姓 有 所 不 同, 他 明 白 强 调 了 民 之 养 对 于 君 之 尊 的 本 位 效 应 所 谓 无 野 人 莫 养 君 子 治 于 人 者 食 人 ( 孟 子 滕 文 公 上 ) 的 名 言, 便 坦 承 了 民 众 能 够 提 供 生 活 资 料 养 活 君 子 尤 其 君 主 的 宝 贵 意 义 : 如 果 没 有 了 治 于 人 的 野 人, 治 人 者 又 到 哪 里 才 能 找 到 充 足 的 食? 正 是 基 于 这 一 认 识, 孟 子 精 辟 地 指 出 : 诸 侯 之 宝 三 : 土 地, 人 民, 政 事 ( 孟 子 尽 心 下 ) 换 言 之, 对 于 统 治 者 来 说 最 贵 的 三 大 宝, 首 先 是 土 地, 其 次 是 人 民, 因 为 它 们 构 成 了 诸 侯 们 能 够 充 分 被 养 的 两 大 前 提, 以 致 地 大 物 博, 人 口 众 多 总 是 让 王 者 们 感 到 无 比 骄 傲 的 头 号 资 本 ; 至 于 第 三 位 的 政 事, 不 仅 构 成 了 当 权 者 的 身 份 标 志, 而 且 还 是 迫 使 野 人 养 君 子 的 必 要 手 段 所 以, 在 孟 子 眼 中, 这 三 大 宝 之 贵, 归 根 结 底 都 是 工 具 性 之 贵, 不 是 目 的 性 之 贵 ; 真 正 构 成 目 的 性 之 贵 的, 还 是 那 些 据 孟 子 说 比 较 轻 但 手 中 却 握 有 政 事 的 大 权, 掌 管 着 土 地 和 人 民 的 诸 侯 们 从 这 个 角 度 看, 孟 子 的 民 贵 君 轻 说 虽 然 在 儒 家 中 的 确 是 独 树 一 帜, 但 并 没 有 多 少 原 创 性 的 新 意, 尤 其 与 强 调 民 众 在 政 事 治 理 中 自 己 作 主 的 民 主 观 念 风 马 牛 不 相 及 诚 然, 我 们 不 必 苛 求 孟 子 在 当 时 就 具 有 现 代 民 主 精 神, 但 我 们 也 不 能 把 民 贵 观 念 随 意 忽 悠 成 民 主 精 华, 因 为 二 者 之 间 存 在 着 根 本 的 差 异 : 前 者 属 于 工 具 性 的 民 本 意 识, 后 者 才 是 目 的 性 的 民 本 意 识 三 无 父 无 君 是 禽 兽 也 进 一 步 看, 孟 子 依 据 周 朝 若 保 赤 子 的 官 方 意 识 形 态 一 脉 相 承 地 提 出 的 为 民 父 母 主 张 ( 孟 子 梁 惠 王 上 ), 虽 然 也 受 到 了 儒 者 们 的 高 度 推 崇, 被 认 为 是 凸 显 了 君 主 官 员 与 百 姓 民 众 之 间 仿 佛 用 鲜 血 凝 聚 而 成 的 深 情 厚 意,
70 退溪學論叢 第25輯 但一旦嵌入到了孟子整体思想的文本关联中, 同样清晰地暴露出他的 民贵 君轻 说归根结底还是 尊君 并非 贵民 的精神实质 问题的关键在于, 父母官 慈爱 子女民, 原本是依据儒家的血亲情理精 神处理君民官民关系的题中应有之义, 要求君主官员像慈爱自己的亲生子女 一样慈爱所管辖的普通百姓, 从而似乎再清晰不过地体现了孟子的 民贵 意 向 所以, 它后来成了古代中国政治话语中一个很有儒家特色的著名概念, 以 致到了21世纪的今天还能不时发现类似说法的绵延遗绪 然而, 倘若将其还 原到整个儒家包括孟子哲学特别强调的血亲等级结构之中, 我们便会发现 它恰恰显摆了君主官员的 至尊 地位, 而非百姓民众的 贵重 效应, 尤其是 偏重于要求 子女民 对于 万岁爷 和 父母官 履行 孝敬 的义务 众所周知, 儒家的血亲情理精神强调子对父之 孝, 远远超过了强调父对 子之 慈 理由很简单 第一, 在儒家看来, 只有父母才能构成子女存在的 惟一本根, 也就是孔子说的 子生三年, 然后免于父母之怀 ( 论语 阳货 ), 以及孟子说的 天之生物也, 使之一本 ( 孟子 滕文公上 ) 相比之下, 子 女对于父母根本就不可能具有类似的 本根 意义 毕竟, 按照孟子的 一本 观念, 作为 枝叶 的子女再 贵, 也 贵 不过自己的 本根 父母去 第 二, 由于这一缘故, 儒家总是强调孝敬父母构成了子女为人的本质, 却不认 为慈爱子女构成了父母为人的本质 仅此一点, 就使父母具有了无限高于 子女的 贵重 意义 事实上, 正是在确立这种血亲等级架构的方面, 孟子大 大超过了孔子, 十分清晰地把 孝 视为人之为人的本质特征 不得乎亲, 不 可以为人 ( 孟子 离娄上 ), 并且还以大舜圣王在 父顽母嚚 的情况下依 然能够做到 大孝 为榜样, 特别强调了 哪怕父母对子女不慈, 子女也得对 父母尽孝 的绝对命令 这样一来, 儒家尤其是孟子倡导的 为民父母, 一旦落脚到现实生活中, 势必产生某种极度反讽的扭曲效应 与其说它是号召父母官慈爱子女民, 不如说它是要求子女民孝敬父母官 与其说它是肯定 民贵, 不如说它是凸 显 君尊 其实, 儒家大师们之所以总是把 君 与 父 相提并论 一同视为 人之为人的根本所在, 像孔子在 人道之大经, 政事之根本 的意义上强调
试 析 孟 子 民 贵 说 的 尊 君 实 质 71 君 君 臣 臣, 父 父 子 子 ( 论 语 颜 渊 ) 主 张 弒 父 与 君, 亦 不 从 也 ( 论 语 先 进 ), 孟 子 宣 布 无 父 无 君, 是 禽 兽 也 ( 孟 子 滕 文 公 下 ) 天 无 二 日, 民 无 二 王 ( 孟 子 万 章 上 ), 荀 子 认 为 先 祖 者, 类 之 本 也 ; 君 师 者, 治 之 本 也 ( 荀 子 礼 论 ) 等 等, 正 是 力 图 凭 借 血 亲 比 附 的 机 制, 通 过 肯 定 父 母 在 家 庭 生 活 中 作 为 根 源 性 和 目 的 性 之 本 的 终 极 意 义, 肯 定 君 主 官 员 在 社 会 生 活 中 作 为 根 源 性 和 目 的 性 之 本 的 终 极 意 义, 由 此 要 求 民 众 像 子 女 心 甘 情 愿 地 服 从 和 辞 让 生 身 父 母 一 样, 富 于 羞 耻 感 地 履 行 服 从 和 辞 让 君 主 官 员 的 绝 对 义 务, 杜 绝 犯 上 作 乱 的 不 轨 念 头, 也 就 是 有 若 所 说 的 其 为 人 也 孝 弟, 而 好 犯 上 者, 鲜 矣 ( 论 语 学 而 ), 特 别 是 孟 子 自 己 所 说 的 孔 子 成 春 秋 而 乱 臣 贼 子 惧 ( 孟 子 滕 文 公 下 ) 熊 十 力 正 是 在 这 个 意 义 上, 深 刻 揭 露 了 小 康 礼 教 把 乱 臣 贼 子 必 诛 绝 视 为 维 持 君 道 之 德 律 的 本 质 特 征 ( 见 六 经 是 孔 子 晚 年 定 论 ) 进 一 步 看, 这 一 点 实 际 上 也 是 周 朝 统 治 者 主 张 岂 弟 君 子, 民 之 父 母 ( 诗 经 泂 酌 ) 的 深 层 动 机 所 在 左 传 襄 公 十 四 年 记 述 的 君 养 民 如 子, 盖 之 如 天, 容 之 如 地 ; 民 奉 其 君, 爱 之 如 父 母, 仰 之 如 日 月, 敬 之 如 神 明, 便 点 出 了 这 种 让 原 本 没 有 血 缘 关 联 的 君 主 与 百 姓 保 持 类 血 亲 情 感 的 真 正 目 的 : 君 固 然 要 养 民 如 子, 但 民 在 奉 其 君 的 时 候 更 应 该 做 到 爱 之 如 父 母, 仰 之 如 日 月, 敬 之 如 神 明, 心 悦 诚 服 地 归 服 父 王 的 统 治, 所 谓 四 方 之 民 襁 负 其 子 而 至 ( 论 语 子 路 ) 因 此, 诗 经 灵 台 便 歌 颂 广 大 民 众 踊 跃 前 来 为 周 文 王 建 造 宫 殿, 就 像 子 女 为 父 亲 做 事 一 样 欢 天 喜 地, 所 谓 庶 民 子 来 ( 参 见 孟 子 梁 惠 王 上 ), 仿 佛 他 们 已 经 体 认 到 了 天 大 地 大 不 如 朝 廷 的 恩 情 大, 爹 亲 娘 亲 不 如 文 王 他 老 人 家 亲 的 血 亲 比 附 道 理 从 这 个 角 度 看, 尚 书 洪 范 说 的 天 子 作 民 父 母, 以 为 天 下 王 确 实 是 十 分 精 辟 的, 因 为 它 一 针 见 血 地 指 出 了 天 子 作 民 父 母 的 根 本 目 的, 就 是 为 了 使 自 己 成 为 天 下 王 因 此, 孟 子 在 血 亲 比 附 中 倡 导 的 为 民 父 母, 最 终 必 然 会 在 无 父 无 君 是 禽 兽 也 的 血 亲 等 级 架 构 中 陷 入 无 法 自 拔 的 深 度 悖 论 : 一 旦 这 样 在 人 兽 之 辨 的 层 面 上 将 无 父 与 无 君 并 列, 只 能 是 极 大 地 凸 显 尊 君 在 人 之 为 人 的
72 退溪學論叢 第25輯 本质存在中最 可贵 的终极意义, 从而导致那些 民本 民贵 的美妙言论化 为泡影 毕竟, 倘若 无君 就是 禽兽, 那么, 对于广大民众来说, 这个 君 肯 定不可能很 轻, 倒不如说就像父母一样属于最 贵 的目的性之 本 正是 由于领悟到了个中奥秘, 独尊儒术 之后的统治阶层总是极力附和孟子的这 种 亲民 口吻, 纷纷表白自己管治民众的目的就是 为民父母, 因为他们知 道, 这样一来, 在儒家血亲情理精神的诱导 训练和调教下, 民众就会有 羞 耻感, 满腔子都是 返本报恩 之心, 以致对他们的 孝敬 将远远超出他们对 民众的 慈爱 甚至, 即便他们对民众 不慈, 民众也还是会对他们 尽孝 至于今天中国社会里的许多人在送礼行贿时爱说的口头禅 孝敬领导, 也从 一个侧面透露出了孟子倡导 为民父母 观念的黑色幽默意味 四 诛一夫纣 众所周知, 当齐宣王凭借 汤放桀, 武王伐纣 的案例询问孟子 臣弒其君 可乎 的时候, 他明白回答说 贼仁者谓之贼, 贼义者谓之残, 残贼之人谓 之一夫 闻诛一夫纣矣, 未闻弒君也 ( 孟子 梁惠王下 ), 认为臣民诛杀 暴君并非 犯上作乱, 而是 革命行为 一些现代儒者因此赞美道, 孟子的 这种见解与 民贵君轻 的观念是根本一致的, 在两千多年前, 已正式宣布 人民的革命权利 3), 属于 可贵的民主性精华 成为中国乃至东亚重要的 政治资源 4) 然而, 倘若回归到原初文本的具体语境中, 我们还是可以清晰 地看出 这种高度赞美也是一种扭曲性的误读 本来, 从上述对话中很容易发现, 齐宣王实际上是打算诉诸 汤武革命 的 既成史实, 引导孟子承认儒家也有赞成 臣可弒君 的犯上倾向, 以致与 无 父无君是禽兽也 的信条形成了自相矛盾 孟子看破了齐宣王的这种动机, 因 此为了不让儒家推崇的汤武圣王也沦为 无君 的 禽兽, 才通过贬斥桀纣为 3) 徐复观 中国孝道思想的形成 演变及其在历史中的诸问题, 载 徐复观文集 第一卷 文化与人生, 李维武编, 武汉 湖北人民出版社2002年版, 第65页 4) 郭齐勇 中国哲学史, 北京 高等教育出版社2006年版, 第77页
试 析 孟 子 民 贵 说 的 尊 君 实 质 73 独 夫 的 途 径, 宣 布 汤 武 革 命 不 是 大 逆 不 道 的 弒 君, 而 是 名 正 言 顺 的 诛 一 夫 就 此 而 言, 孟 子 的 上 述 话 语 与 其 说 是 正 式 宣 布 人 民 的 革 命 权 利, 不 如 说 是 为 了 避 免 突 破 弒 君 的 儒 家 底 线, 对 汤 武 革 命 的 既 成 史 实 做 出 的 权 宜 解 释, 以 防 儒 家 陷 入 乱 臣 的 禽 兽 境 地 事 实 上, 主 张 礼 莫 大 于 圣 王 的 荀 子 也 曾 指 出 : 桀 纣 无 天 下, 而 汤 武 不 弑 君 ( 荀 子 正 论 ); 正 像 孟 子 的 上 述 宣 言 一 样, 这 种 见 解 同 样 不 包 含 任 何 民 主 性 精 华, 也 根 本 没 有 肯 定 人 民 的 革 命 权 利, 而 只 是 体 现 了 弒 父 与 君, 亦 不 从 也 的 尊 君 原 则 对 于 儒 家 来 说 有 多 么 神 圣, 以 致 面 对 汤 放 桀, 武 王 伐 纣 的 既 成 事 实 也 不 能 放 弃 也 正 是 因 为 恪 守 这 一 原 则 的 缘 故, 两 千 多 年 来, 除 了 汤 武 革 命 的 仅 存 硕 果 外, 儒 家 大 师 们 几 乎 没 有 承 认 过 历 史 上 的 任 何 一 次 人 民 革 命 属 于 诛 一 夫 的 范 畴, 而 总 是 把 它 们 视 为 犯 上 作 乱 进 一 步 看, 在 上 述 对 话 中, 孟 子 还 潜 在 设 置 了 诛 一 夫 的 一 个 不 可 或 缺 的 先 决 条 件 : 它 的 主 体 只 能 是 像 商 汤 周 武 这 样 的 贤 王, 至 少 也 是 地 位 很 高 的 大 人, 而 不 能 是 草 根 阶 层 的 小 民 事 实 上, 孟 子 关 于 惟 大 人 为 能 格 君 心 之 非 ( 孟 子 离 娄 上 ) 的 命 题, 已 经 明 确 排 除 了 小 民 在 这 方 面 的 任 何 正 当 资 格 在 另 一 次 与 齐 宣 王 的 对 话 中, 孟 子 甚 至 还 依 据 血 亲 情 理 的 差 等 原 则, 在 大 人 中 把 贵 戚 之 卿 与 异 姓 之 卿 也 区 分 开 来, 一 方 面 认 为 只 有 贵 戚 之 卿 这 类 血 亲 性 的 大 人 才 能 在 君 有 大 过 则 谏, 反 復 之 而 不 听 的 前 提 下 采 取 易 位 的 革 命 行 动, 另 一 方 面 又 剥 夺 了 异 姓 之 卿 这 类 非 血 亲 性 的 大 人 推 翻 昏 君 拥 立 明 君 的 政 治 权 利, 指 出 他 们 在 君 有 过 则 谏, 反 復 之 而 不 听 的 情 况 下, 只 能 远 走 高 飞 地 则 去 ( 孟 子 万 章 下 ) 既 然 异 姓 之 卿 尚 且 没 有 资 格 采 取 易 位 的 行 动, 倘 若 遭 遇 了 暴 君 的 苛 政, 草 根 小 民 除 了 耐 心 等 待 青 天 明 君 的 降 临, 又 怎 敢 随 便 萌 生 揭 竿 而 起 反 抗 暴 政 的 非 分 之 想 呢? 换 言 之, 孟 子 在 此 宣 布 的 根 本 不 是 广 大 人 民 追 求 民 主 的 革 命 权 利, 而 仅 仅 是 少 数 大 人 或 贤 王 改 朝 换 代 的 造 反 资 格 5) 所 以, 在 诠 释 孟 子 的 上 述 名 言 时, 宋 代 儒 者 便 明 确 宣 布 : 斯 言 也, 惟 在 下 者 有 汤 武 之 仁, 而 在 上 者 5) See Justin Tiwald: A Right of Rebellion in the Mengzi?, Dao: A Journal of Comparative Philosophy 7:3, 269 282
74 退溪學論叢 第25輯 有桀纣之暴则可 不然, 是未免于篡弑之罪也 (转引自朱熹 孟子集注 梁 惠王下注 ) 再就 汤放桀, 武王伐纣 的史实本身来看 尽管儒家把这两位圣王都嵌入 到道统之中而赋予了他们神圣的光环, 但只要放弃了这种先入之见我们便 会发现 所谓的 汤武革命 其实也不过是一些小邦国主 地方诸侯自诩德 行高尚替天行道, 率众讨伐据说 不敬厥德, 乃早坠厥命 的当今君王, 以求 取而代之的改朝换代举动 熊十力就此指出 历代知识分子, 无有以民主 思想领导群众 小康派以去暴君为革命, 实则伯夷所谓以暴易暴耳 ( 六 经是孔子晚年定论 ) 迄周之文王 武王 成王 周公灭殷帝纣, 而復以 天下为周家私有之物 武周厉行王朝集权之制, 专制日甚 ( 乾坤衍 辨 伪 ) 从这个角度看, 将孟子肯定 汤武革命 的见解说成是 民主性精华, 只能表明儒家至今还是怎样深度地严重缺失本真性的 民主 观念 综上所述, 一旦置入到了有关文本的具体语境以及儒家思潮的整体架构 之中, 孟子倡导的 民贵君轻 诛一夫纣 这些貌似新颖激进的见解, 就像 他自己同时倡导的 仁民保民 为民父母 这些与儒家主流一脉相承的见 解一样, 根本不包含任何 鼓吹民权 民主性精华 的因素, 相反倒是一些 在历史实践中被充分证明了最适合于宗法血亲等级架构的 尊君 观念, 十分 符合中国历史上绵延了几千年的权贵礼制主义的专制制度 否认了这一点, 我们就很难令人信服地解释下面的问题 为什么后世主流儒家偏偏会选中 孟子作为整个儒家道统中仅次于孔子的 亚圣? 为什么汉代以后的专制朝 廷总是立场坚定地 独尊儒术 復兴儒家, 旗帜鲜明地把儒家的 民本 观 念包括孟子的 民贵 观念钦定为官方意识形态的 大统, 甚至将 孟子 文 本指定为国家级的教科书, 作为政府开科取士选拔官吏的根本标准? 无论如 何, 这肯定不意味着这些专制朝廷在孟子 民贵君轻 观念的熏陶教化下, 也 开始 鼓吹民权 宣布人民的革命权利 具有 可贵的民主性精华 了 诚 然, 依据历史性的视界, 我们不必苛求像孟子这样的先秦古人具有现代的民 主观念 不过, 依据同样的历史性视界, 我们显然也不能随意赞美像孟子这 样的先秦古人的思想就已经超前性地包含着现代的民主精华 尤其当像孟
试 析 孟 子 民 贵 说 的 尊 君 实 质 75 子 这 样 的 先 秦 古 人 只 是 把 民 众 视 为 少 数 贤 王 实 现 政 权 更 替 ( 所 谓 打 天 下 ) 的 工 具 性 之 本 的 时 候, 情 况 更 是 如 此 < 参 考 文 献 > 郭 齐 勇 : 中 国 哲 学 史, 北 京 : 高 等 教 育 出 版 社, 2006 胡 适 : 胡 适 学 术 文 集 中 国 哲 学 史 上 册, 姜 义 华 主 编, 北 京 : 中 华 书 局, 1991 刘 清 平 : 儒 家 民 本 思 想 : 工 具 性 之 本, 还 是 目 的 性 之 本, 学 术 月 刊 2009 第 8 期 Tiwald, Justin: A Right of Rebellion in the Mengzi?, Dao: A Journal of Comparative Philosophy 7:3 (2008). 徐 復 观 : 徐 復 观 文 集 第 一 卷 文 化 与 人 生, 李 维 武 编., 武 汉 : 湖 北 人 民 出 版 社, 2002 朱 熹 : 四 书 章 句 集 注, 北 京 : 中 华 书 局, 1983
76 退溪學論叢 第25輯 <국문 초록> 맹자 민귀 (民贵)설에 있어서 존군 (尊君)의 실질 / 류 청 평 맹자의 민귀 관념은 역대로 매우 높게 추종되어 왔다. 일부 현대학 자들은 이것이 민주성의 정화 를 포함하고 있다고까지 하였다. 그런데, 일단 그 구체적인 언어적 표현의 관련성에서 특히 맹자 사상의 전체 구 조에서 놓고 볼 때, 이 관념은 전통 유가에서 견지해온 민본 관념과 같 다. 또한 이는 민중을 군주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도구적 근본이지 스스로가 존엄한 가치를 지닌 목적적 근본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정신 적 실질에서 보면, 이는 존군 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제어: 맹자, 민귀, 유가, 민본, 존군. Abstract An Analysis of Mengzi s Idea of People as the Most Important Element / LIU Qing ping 6) Mengzi s idea of people as the most important element (mingui) does not contain any cream of democratic values as some modern scholars have declared. Just like the traditional Confucian ides of people as roots (minben), it does not regard people as the ultimate end that should be respected by the ruler and officials, but mainly as the necessary means whose minimum interests should be concerned in order to secure their autocratic monarchy. In this sense, the essence of this idea is still to honor the supreme position of the ruler. Key words: Mengzi; people as the most important element; Confucianism; people as roots; honoring the ruler. * National Institute of Advanced Study in Social Sciences, Fudan University, Shanghai 200433, China.
退溪學論叢 第25輯(77 98쪽) 儒家儀禮의 方位 에 관한 文化解釋 1)趙 목 Ⅰ. Ⅱ. Ⅲ. Ⅳ. 들어가는 말 時空間의 意味 古代 中國의 方位 槪念 남녀의 질서를 표현한다. 昌 奎* 차 Ⅴ. 上下의 질서를 표현한다. Ⅵ. 主客의 지위를 확정한다. Ⅶ. 나가는 말 論文 抄錄 동북아의 방위 개념은 매우 독특한 문화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유 가의례의 시행에 있어 東西南北은 방위는 그 속에 담긴 陰陽哲學이 독특한 禮의 문화와 연결되어 다양한 기능을 하고 있다. 첫째는 음양의 철학을 방 위의 개념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남녀의 구별과 질서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 는 男左女右라는 예의 규정으로 확립되었다. 둘째는 방위의 개념을 통해 상 하존비의 질서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以西爲上과 以南爲上의 규정으로 확립되었다. 셋째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 즉 주객의 지위를 방위의 개념을 통해 확정하고 있는데 주인은 동쪽, 손님은 서쪽에 위치하는 규정으로 확립 되었다. 이러한 예의 규정들은 모두 人情과 事理에 합당한 자리의 배치를 통하여 상호간의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여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제어: 禮, 方位, 東西南北, 以西爲上, 以南爲上, 男左女右, 儒家儀禮. * 경성대학교 인문문화학부 인문고전학전공 조교수. 논문투고일: 2015.06.02 / 심사개시일: 2015.06.17 / 게재확정일: 2015.06.27
78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Ⅰ. 들어가는 말 禮 의 여러 기능 가운데는 인간의 다양한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 을 사전에 조율하는 기능이 있다. 예컨대, 上 下 尊 卑 의 불확정, 혹은 미확 정은 집단 내의 갈등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더 욱이 상하존비가 확정되지 않은 집단이 동일한 공간에 자리하게 될 때 발생하게 될 문제는 별도로 거론하지 않더라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상하존비의 명확한 확정이 필요 하고, 다음으로 확정된 질서의 지속을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이 논문에 서 거론될 以 西 爲 上 이나 以 南 爲 上 의 禮 制 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원칙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칙 속에 담겨 있는 근원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하 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은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된 것이지만, 유 가의례에서 중시되는 방위의 배치 문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 심 층적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숙하게 자 리 잡고 있는 방위 배치의 문화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그 현재적 가치 를 인식함으로써 전통문화를 바라보는 긍정적 시각의 확립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Ⅱ. 時 空 間 의 意 味 인간은 세계를 특정한 체계로 구조화하여 내면화 하려는 본성을 지니 고 있는 듯 보인다. 고대 동아시아인들이 사물의 존재 법칙으로 太 極 을 상정하고, 사물의 운행 법칙으로 陰 陽 과 理 氣 를 상정하였으며 1), 세계를 1) 물론 性 理 學 의 구체적인 개념들은 北 宋 이후에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
儒家儀禮의 方位 에 관한 文化解釋 79 구성하는 다섯 가지 기본 물질을 木 火 土 金 水의 五行으로 제시한 것 등은 모두 세계를 질서 정연한 무엇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의 결과였 을 것이다. 세계의 창조 신화에는 보편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바로잡는 질 서생성의 모티브를 내포하고 있다. 오랜 옛날의 시초에 누가 도를 전해 주었나? 上下가 형성되기 전은 무엇으 로 이를 상고하랴? 음양의 명암, 이것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음과 양, 그 리고 천이 셋이 화합해서 그 바탕은 어떠하고 그 변화는 어떠했는가?2) 이상은 중국 고대 신화의 시대를 간직한 굴원의 楚辭, 天問 의 첫 부분이다. 굴원의 질문은 전 세계 창조신화의 핵심적인 신화소를 담고 있는데, 바로 우주는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하는 점이다.3) 이는 인간이 자연을 객관화할 정도의 지적능력을 소유하게 될 때 발생하는 가장 기 본적인 의구심이 아니었을까?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질문 속에 창조 후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창조된 세계를 관통하는 질서, 곧 上下와 陰陽을 말하고 있다. 초사 가 비록 儒家類로 분류될 수 없고 오히려 유가와는 대척점에 있는 道家類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유가의 太極과 陰陽二氣, 그리고 五行의 이론도 기본적으로는 도가의 음양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儒家는 전통적으로 신화적 미신을 거부하고 인문정신을 강조 해 왔기 때문에 창조신화가 없다는 점에서는 시경 과 더불어 중국 고 대 문학의 양대 축을 이루는 초사 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창조신화 와 그 안에 담겨 있는 음양과 상하, 즉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색을 살펴 한 개념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고대의 토양이 있었기 때문임에 분명해 보인다. 2) 楚辭, 天問. 遂古之初, 誰傳道之? 上下未形, 何由考之? 明明闇闇, 惟時 何爲? 陰陽三合, 何本何化? 3) 김현선, 창조신화연구서설, 세계의 창조신화, 동방미디어, 2001. 18쪽.
80 退溪學論叢 第25輯 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된다. 옛날, 하늘도 땅도 없었을 때, 다만 무형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어서, 어둡고 깊으며, 아득하고 혼돈된 氣가 어디선가 용솟음쳐 나와서 끝없이 이어졌다. 두 神이 혼연히 생겨나 천지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깊숙하여 그 끝나는 곳을 알지 못하고, 매우 커서 그 멈추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나뉘어 陰陽이 되 고, 또 나뉘어 八極이 되었다.4) 淮南子, 精神訓 에 기록된 천지창조의 순간이다. 역시 창조된 이후 의 세상을 관통하는 질서를 음양과 八極[八方]으로 설명하고 있다. 상하 가 형성되기 전은 무엇으로 이를 상고하랴? 는 굴원의 질문과 이에 나 뉘어 음양이 되고, 또 나뉘어 八極이 되었다 는 淮南子 의 기록은 인간 이 최초로 자연을 인식하는 방법을 짐작케 한다. 음양은 시간의 다른 이 름이며, 상하와 팔극은 공간의 다른 이름이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사 물을 인식하는 요소이기 때문일까? 두 기록을 관통하는 인간의 세계 인식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으 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 으로서의 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유가의례에 있어서 공간, 즉 방위가 지 니는 원형적 의미를 고찰하고, 그 문화적 함의를 밝히고자 한다. Ⅲ. 古代 中國의 方位 槪念 儒家儀禮의 方位에 관한 文化를 解釋하기에 앞서 또 하나 먼저 살펴 야 할 것은 고대 중국의 방위개념이다. 고대 중국의 방위개념은 서양의 방위개념과 달랐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만 고대 중국의 방위 개념에 근본을 두고 있는 우리의 전통의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 4) 淮南子, 精神訓. 古未有天地之時, 惟像無形. 窈窈冥冥, 芒芠漠閔, 澒濛澒 洞, 莫知其門. 有二神混生, 經天營地. 孔乎莫知其所終極, 滔乎莫知其所止息, 於是乃別爲陰陽, 離爲八極.
儒家儀禮의 方位 에 관한 文化解釋 81 기 때문이다. 방위 개념의 의미 원형을 간직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바로 갑골문이 다. 그러므로 네 방위를 표시하는 한자인 東 西 南 北의 문자적 의미를 살피는 것으로 논의의 출발을 삼고자 한다. 다음을 보자. 차례로 東 西 南 北의 갑골문이다. 東은 흔히 木과 日의 會意로 보 아 해가 나무에 걸리는 곳 이므로 동쪽이라고 오해되고 있지만 사실 곡 식 따위를 담은 자루를 끈으로 묶어 놓은 모습을 象形한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동쪽이라는 뜻으로 의미가 전성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사실 동서남북이라는 추상적 방위를 象形이나 指事로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 가능해 보인다. 그러므로 東의 모양은 상형이지만 그 의미는 가차된 것 이 분명하다.5) 다음은 西이다. 대개 西의 갑골문은 새의 둥지를 상형한 것이라고도 하고6), 대나무로 엮은 그릇을 상형한 것이라고도 한다.7) 허신의 說文解 字 에는 西, 鳥在巢上[서는 새가 둥지 위에 있는 것이다] 이라 하였으 니, 전자를 근거가 되겠다. 전자에 근거한다면 해가 서쪽으로 질 때, 새 가 둥지로 돌아온다는 의미에서 전성되어 서쪽이라는 뜻으로 전성되었 을 법도 하다. 하지만 假借字일 가능성이 더욱 크다. 다음은 南이다. 南은 종 따위의 악기를 걸어둔 象形으로 보는 것에 의 견이 일치된 듯 보인다. 이것이 남쪽으로 전성된 것은 南이라는 악기는 남쪽의 부족[南夷]들이 춤을 출 때 사용하던 악기였다는 점에서 어느 정 5) 한자의 六書 가운데 假借는 주로 대명사나 형용사 등 상형이나 지사로는 도 저히 표현할 수 없을 경우 발생하게 된다. 주로 유사한 발음의 한자를 채택 하여 사용한다. 6) 이락의 저, 박기봉 역, 한자정해, 비봉출판사, 1996. 281쪽. 7) 谷衍奎 編, 한자원류자전, 화하출판사, 2004. 167쪽.
82 退溪學論叢 第25輯 도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北이다. 北은 두 사람이 등을 돌린 모습의 상형한 것이다. 등을 돌리고 있기에 달아나다, 배반하다 의 의미가 파생되는 것이다. 敗北 를 패북 으로 읽지 않고, 패배 로 읽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北의 부수자인 匕 자를 우리는 대개 비수, 혹은 숟가락 등의 의미로 알고 있지만 실은 사람의 옆모습을 상형한 것이다. 다음을 보자. 앞에서부터 从(從의 簡體字), 比, 化이다. 从 은 앞서 가는 사람을 따라 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比 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서로를 비교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化 는 바로 선 사람과 거꾸로 된 사람, 즉 산 자와 죽은 자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하튼 北 자에 대해 스 웨덴의 중국학자 세실리아 링크비스트Cecilia Lindqvist는 다음과 같이 근 사한 해석을 제시하였다. 이는 중국인들의 거주지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과 관련 이 있다. 이런 전통은 문명의 초기단계까지 추적이 가능하며, 지리적 조건 속에 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즉 중국인들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시베리아의 찬바람과 몽골고원의 황사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북쪽을 등져야 했을 것이다. 결국 암흑과 추위를 뜻하는 북쪽은 뒤쪽, 등 뒤가 됐다.8) 이러한 해석은 北의 의미가 등 돌리다, 배반하다, 달아나다 등에서 북쪽이라는 의미로 전성된 사실을 납득하기에 충분한 논리를 제공하는 듯 보인다. 北 이 점차 등뒤 혹은 배신하다 는 의미를 잃고 북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자 부득이 [육달월] 을 더하여 會意字이자 形聲字인 背 를 추가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背 자에는 이미 우리의 등 뒤가 북쪽 이 라는 동아시아 고대 방위의 원형개념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하겠다. 8) 세실리아 링크비스트 저, 김하림외 역, 한자왕국, 청년사, 2002. 26쪽.
儒家儀禮의 方位 에 관한 文化解釋 83 만일 등 뒤가 북쪽이라면, 우리가 바라보는 곳은 바로 남쪽이 된다. 이러한 방위에 대한 인식은 고대에 방위를 표시하던 다양한 방위표들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火(南) 木(東) 離(南) 巽 土(中) 金(西) 兌(西) 震(東) 水(北) 艮 巳 午(南) 坎(北) 申 卯(東) 酉(西) 寅 戌 子(北) 乾 未 辰 丑 坤 亥 왼쪽으로부터 차례로 五行方位圖, 文王八卦方位圖, 十二支方位 圖 이다. 모두 북쪽이 아래에, 남쪽이 위에 배치되어 있다. 자연히 왼편 에 동쪽이, 오른편에 서쪽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위 표시 의 문화적 관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동아시아 문화의 많은 부 분을 해석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군말 몇 마디 덧붙이자면, 이러한 동아시아의 공간 인식은 서양의 그 것과 완전히 상반되어 있다. 남쪽을 등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서구인의 사고에 의하면 왼쪽이 서쪽, 오른쪽이 동쪽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 리 역시 이러한 서구의 공간 인식에 익숙해 있으니, 당연히 전통적 방위 인식과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사실 공간의 인식뿐만 아니라 시간
84 退溪學論叢 第25輯 의 인식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동양의 시간관념은 대개 十干과 十 二支를 순차적으로 조합한 六十甲子의 순환구조를 지니는 반면 서구의 제국의 기본적 시간관념은 히브리-기독교 신앙의 영향으로 직선적 시간 관념을 지니고 있다. Ⅳ. 남녀의 질서를 표현한다. 유가의례에 있어 이상과 같은 동서남북의 방위개념은 매우 독특한 문 화를 만들어내게 된다. 서양의 방위관념에 익숙한 오늘날 사람들에게 왼 쪽의 방위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서쪽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유가의례에 있어 왼쪽과 오른쪽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듯이 북쪽을 등 지고 있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유가의례에서 왼쪽이라고 말하면 곧 동쪽에 해당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산은 지도상 동쪽에 있 고 통영은 서쪽에 있지만 부산에 위치한 水營은 左水營이고, 통영에 위 치한 水營은 右水營인 것이다. 이러한 방위 관념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것 이 바로 남녀의 자리배치이다. 남녀의 관계는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다. 禮記, 郊特牲 에 남녀의 분별[男女有別]이 있은 다음에야 부자의 친함이 있고, 부자가 친한 다음 에야 의리가 생가며, 의리가 생겨나야 禮가 만들어지고, 예가 만들어져 야 만물이 편안하다. 분별이 없고 의리가 없으면 금수의 도리이다9) 고 하였다. 남녀가 음란하여 일부일처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부자의 관 계가 확정될 리 만무하고, 부자의 관계가 확정되지 않는다면 가족과 사 회가 형성될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모든 인륜의 시작은 남녀의 분별로 부터 출발한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남녀를 구별하는 것은 남녀를 차별하여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다. 남 9) 禮記, 郊特牲. 男女有別, 然後父子親. 父子親, 然後義生. 義生然後禮作. 禮作然後萬物安, 無別無義, 禽獸之道也.
儒家儀禮의 方位 에 관한 文化解釋 85 녀의 절도가 없는 것은 금수의 도리이다. 인간은 짐승 중에서도 남녀와 부부의 도리를 지키는 짐승은 특별히 상징화하고 존중해 왔다. 예컨대, 고례의 혼례에 기러기를 폐백으로 사용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 다. 다시 말하지만 남녀의 절도가 없이는 부부의 관계도 이루어질 수 없 으며, 부부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면,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탄생할 수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예의 규정이 생길 수 있다. 남녀가 한 곳에 모일 적에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으로 나누어 앉는다.10) 성숙한 이성간의 접촉은 단순한 친밀감을 넘어서 성적 친밀감으로 전 환될 가능성이 높고, 결국 인륜의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양한 학문에서 증명된 바 있다. 영국의 동물행학자 데즈먼드 모리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성적 성숙에 동반하여 인간이라는 동물은 터치 신호를 전혀 새로운 국면으 로 끌고 간다. 섹스어필의 신호가 그것인데, 이를 통해 남자와 여자는 마음에 단순한 우정 이상의 것을 품고 서로를 터치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11) 사회적으로 용인된-약혼이나 결혼 등을 통한 성적 접촉은 장기적 결 합12)을 통해 그 행위의 결과를 책임질 수 있으나, 그 밖의 자유로운 성 적 접촉은 사회적 문제를 유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적응 문제를 제기하기 도 한다. 단기적 짝짓기 전략을 구사할 때 이런 차이는 두드러진다. 이 전략은 남성과 여성이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똑같은 방식을 택하지는 않는다. 남성에 게 이상적인 단기적 짝짓기 전략이란 한 여자와 성관계를 한 후에 그로부터 생 10) 禮記, 曲禮. 11) 데스몬드 모리스 저, 박성규 역, 접촉, 지성사, 1994. 46쪽. 12) 사회생물학에서는 이러한 장기적 결합을 장기적 짝짓기 전략이라고 부른다. 그 반대는 단기적 짝짓기 전략이라고 부른다.
86 退溪學論叢 第25輯 겨난 아이에 대해서는 양육투자를 될 수 있는 한 회피하는 것인데, 임신을 하 는 쪽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은 자신이 치러야 하는 최소한의 양육 투자를 헛 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이런 상황을 미리 방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13) 고대와 중세의 사람들이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최소한의 문화적 창치는 바로 男女를 분리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것 을 조문화하고 거기에 철학적 옷을 입히면 그 당위성은 倍加될 것이다. 고대 동아시인이 입힌 옷은 바로 陰陽論이었다. 무릇 여자는 절을 할 때 오른손을 위로 한다.14) 男左女右. 예학의 절대명제와 같이 여겨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의 四 方은 북쪽을 등진 방위의 개념임은 앞서 말한 바이다. 그러므로 男左女 右는 곧 남자는 동쪽, 여자는 서쪽 이라는 의미가 된다. 陽인 남자가 동 쪽, 陰인 여자는 서쪽. 음양에 따른 매우 합리적인 배치가 아닐 수 없다. 위 인용문은 모든 의례의 기본이 되는 拜禮에도 남좌여우의 음양론이 투영된 방위개념이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출생의 의례나 관혼상제의 통과의례에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몇 개의 사례를 더 살펴보도록 하자. 태어난 지 3개월째 되는 달의 하순에 날을 가려 머리털을 잘라 鬌髮을 만들 되, 남자는 角하고, 여자는 羈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는 왼쪽으로 묶고, 여자 는 오른쪽으로 묶는다. 이 날에 처는 자식을 아버지에게 보인다. 남편이 동쪽 계단으로부터 올라가 서향하여 서면, 처는 자식을 안고 房으로부터 나와 門楣 에서 동면하여 선다. 아버지가 자식의 오른손을 잡고 웃음소리를 내고서 이름 을 불러준다.15) 13) 최재천 외, 살인의 진화심리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31-32쪽. 14) 禮記, 內則. 凡女拜, 尙右手. 15) 禮記, 內則. 三月之末, 擇日翦髮爲鬌, 男角, 女羈. 否則男左女右. 是日也, 妻以子見於父. 夫升自阼階, 立西鄕, 妻抱子出自房, 當楣立東面. 父執子之右手, 咳而名之.
儒家儀禮의 方位 에 관한 文化解釋 87 禮記, 內則 에 나오는 嬰兒 鬌髮 및 命名의 풍속을 기록한 내용이 다. 타발이란 머리카락의 일부분만 남기고 자르는 것을 말하는데16) 남자 아이의 경우는 정수리 양쪽에 튀어나온 부분만 남겨 뿔처럼 만들고 나 머지는 다 자르기 때문에 角(뿔)이라고 하고, 여자아이의 경우는 정수리 위에 가로와 세로로 각기 한 곳에 머리카락을 남겨 서로 교통하게 하여 고삐처럼 만들기 때문에 羈(고삐)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발을 만들 지 않을 경우는 남좌여우의 원칙에 따라 머리를 묶어서 그 성별이 표시 가 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날 아버지는 드디어 자식의 이름을 지어주는 命名의 의식을 사당 에서 행하게 되는데 이 때 남편이 사당의 동쪽 계단을 올라 서향하고, 주부가 房에서 나와 門楣에서 동면하는 것 역시 남좌여우의 원칙을 그 대로 준용한 것이다. 오늘날 방은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을 지칭하는 보 통명사이지만 고대에는 서쪽에 있는 것을 房, 동쪽에 있는 것을 室 이 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방은 서쪽에 있는 것이고 결국 주부는 북쪽을 등 지고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부의 종자는 동쪽에 신랑의 자리를 펴고, 신랑의 종자는 서쪽에 신부의 자 리를 편다. 신랑이 남쪽에서 손을 씻으면, 신부의 종자가 물을 붓고 수건을 드리 며, 신부가 북쪽에서 손을 씻으면, 신랑의 종자가 물을 붓고 수건을 드린다.17) 혼례에서 기러기를 바치는 奠雁禮를 마치고 나면 신랑은 신부를 가마 에 태워 초례청으로 나와 혼례의 본행사라고 할 수 있는 交拜禮와 合巹 禮를 거행하게 된다. 이 때 교배례를 위한 자리의 배치가 위의 규정이다. 여기서 신부의 자리를 신랑의 종자가 깔거나 신랑의 자리를 신부의 종 자가 까는 것은 음양의 조화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 가 각기 동쪽과 서쪽에 배치되는 것은 역시 남좌여우의 원칙이라고 할 16) 우리나라에서 100일에 배냇머리를 자르는 풍속과 친연성이 있어 보인다. 하 지만 억측할 수 없다. 17) 주희 저, 임민혁 역, 주자가례, 예문서원, 1999. 180쪽.
88 退溪學論叢 第25輯 수 있다. 한 걸음 나아가 신부가 북쪽, 신랑이 남쪽에서 손을 씻는 것 역 시 음양의 방위관념이 그대로 투영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주인은 서향하여 시신에 기대어 곡을 하며 가슴을 두드리고, 주부는 동향하 여 역시 그와 같이 한다.18) 이 조문은 망자의 體魄을 입관하기 전 체백이 손상되지 않도록 斂衾 으로 싸서 보호하는 절차 중 하나인 小斂에 상주와 주부가 시신에 기대 어 곡하며 가슴을 두드리는, 즉 哭擗하는 방법을 규정한 것이다. 여기서 주인이 서향한다는 것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뜻이며, 주부가 동향하 고 있다는 것은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역시 남좌여우의 원 칙이 상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것이다.19) Ⅴ. 上下의 질서를 표현한다. 남녀의 관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간의 관계가 바로 上下의 관계 이다. 상하의 관계는 그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간에 따라 기준이 다를 수 있지만 上下의 질서가 확정되지 않는다면 사회적 문제의 발생은 明若觀 火라 할 것이다. 인간관계에는 일정한 질서가 있다. 親疎와 尊卑와 長幼와 賢愚의 네 가지가 그것이다. 친소의 질서는 夫婦와 父子의 혈연관계에서 파생되는 것이기에 宗法 으로 살필 수 있다. 혈연관계를 떠나 맺게 되는 다른 세 가지 관계에 있어서도 일정한 질서의 규칙을 정해야 혼란을 피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관계의 질서규 범이 맹자가 이른바 三達尊이다.20) 18) 家禮. 主人西向, 憑尸哭擗, 主婦東向, 亦如之. 19) 다만 상례의 몇몇 조항에는 地道尙右, 즉 땅의 도리는 오른쪽을 숭상한다는 법칙에 따라 남좌여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음을 밝혀 둔 다. 20) 정경주, 한문고전학 개설, 신지서원, 2002. 206쪽.
儒家儀禮의 方位 에 관한 文化解釋 89 三達尊이란 孟子, 公孫丑 下에 기록된 것으로 上下의 질서를 규정 짓는 세 가지 기준을 말하는 것인데, 조정에서는 작위의 高下로, 향당에 서는 나이의 高下로, 輔世長民(세상을 유지하고 백성을 키우는 것)에서 는 德性의 高下로 上下를 규정해야한다는 예학이론이다. 상하존비의 확정은 집단에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갈등을 미연에 방 지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문화적인 장치이다. 한 번 정해진 상하존비의 위치가 흔들리기 전까지는 집단내의 평화는 일정한 수준에서 유지된다. 다음을 보자. 연구자들은 지배 서열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진화된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유는 각각의 동물이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위치에서 충실하면, 먹이와 짝을 두고 덜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야생에서 일단 지배 서열이 확립되 면 대개는 안정적이다.21) 여기서 동물행동학의 이론을 거론한 것은 예에 관한 하나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의규범이 존재하기 때문 에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여긴다. 물론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 나 예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예의규범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보편성에서 생성된다는 사실이다. 즉 시대와 지역, 혹은 문명 에 따라 그 형식적 예절이 다를지라도 반드시 상하존비의 자리를 결정 하는 예의 형식, 즉 예의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상하존비의 예의규 범이 실천될 때 상하존비의 갈등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 공간 내에서 상하존비의 질서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다음을 보자. 자리가 남향이나 북향이면 서방을 상석으로 삼고, 동향이나 서향이면 남방 을 상석으로 삼는다.22) 禮記, 曲禮 에 기록된 일상적 자리 배치이다. 자리가 남향이라는 21) 템플 그랜딘 외, 권도승 역, 동물과의 대화, 샘터, 2006. 244쪽. 22) 禮記, 曲禮. 席南鄕北鄕, 以西方爲上, 東鄕西鄕, 以南方爲上.
90 退溪學論叢 第25輯 말은 북쪽에 자리를 깔고 남향하여 앉음이요, 북향이라는 것은 남쪽에 자리를 깔고 북향하여 앉았다는 말이다. 자리가 동향이라는 것은 서쪽에 자리를 깔고 동향하여 앉음이요, 서향이라는 것은 동쪽에 자리를 깔고 서향하여 앉음이다. 이러한 좌석 배치에 담겨 있는 문화적 함의는 무엇 일까? 위 구절을 해설한 鄭玄의 註를 보면, 무릇 앉을 때는 음양을 따르는데, 만일 양의 방위에 앉을 경우는 왼쪽을 귀 하게 여기며, 음의 방위에 앉을 때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23) 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이러한 上下坐席의 배치에도 음양의 방위개념이 투영되어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그렇다면 양의 방 위에서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음의 방위에서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기 는 이유는 무엇인가? 양의 방위는 南과 東이므로 남쪽에서 북향하여 앉을 때와 동쪽에서 서향하여 앉을 때를 말한다. 이렇게 앉을 경우 왼쪽은 각기 西와 南이 된다. 또 음의 방위는 北과 西이므로 북쪽에서 남향하여 앉을 때와 서쪽 에서 동향하여 앉을 때를 말한다. 이렇게 앉을 경우 오른쪽은 각기 서쪽 과 남쪽이 된다. 결국 남향이나 북향인 경우에는 以西爲上 이 되고, 동 향이나 서향인 경우는 以南爲上 이 되는 것이다. 이를 시각화해 보면 아 래와과 같이 그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양의 방위에 앉을 때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음의 방위 에 앉을 때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를 밝혀야 한다. 답은 의외로 간단해 보인다. 이는 以西爲上, 以南爲上의 방위개념에 男左女右의 음양 개념이 착종된 결과로 볼 수 있다. 陽의 위치에서 陽을 위주로 하고 陰 의 위치에서 陰을 위주로 하는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다. 그러므로 양의 방위에서는 양을 상징하는 왼쪽을 상석으로 삼고, 음의 방위에서는 음을 상징하는 오른쪽을 상석으로 삼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서구의 방위개념 23) 禮記正義, 曲禮, 鄭玄 註. 南坐是陽, 其左在西, 北坐是陰, 其右在西.
儒家儀禮의 方位 에 관한 文化解釋 91 에 따라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했다면 우리는 절대 이러한 문화를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北 下 西 上 남향으로 깐 자리 下 下 동 향 으 로 서 향 으 로 깐 깐 자 리 자 리 上 上 북향으로 깐 자리 下 東 上 南 원칙: 양의 방위[동 남]에 앉을 때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음의 방위[서 북]에 앉을 때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Ⅵ. 主客의 지위를 확정한다. 내 코에서 30인치쯤 떨어져 나 개인의 경계선을 두르니/ 그 사이의 경작하 지 않은 공기는 온전히 은밀한 영역/ 낮선 자여, 침실의 눈으로 내가 그대를 벗하고자 손짓하여/ 부르지 않는 한 무례히 침범치 않도록 경계할지니/ 내게 총은 없으나 침은 뱉을 수 있다.(W.H. 오든의 프롤로그:건축의 탄생 )24) 동물 행동학에서 한 생명체가 특징적으로 한 영역을 설정하여 동일 종의 다른 구성원으로부터 그것을 방어하는 행동을 영토권 이라고 부른 다. 다음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의 말이다. 24) 에드워드 홀 저, 최효선 역, 숨겨진 차원, 한길사, 2005. 195쪽. 재인용.
92 退溪學論叢 第25輯 대개 모든 생명체는 영토권을 가지며, 인간 역시 자신의 땅, 영역, 터전으로 여기는 것을 방어하는 다양한 방식을 고안해 왔다.25) 영토는 어떤 의미에서건 시각적 음성적 후각적 신호로 표시되는 유기체의 연장물이다.26) 위 인용문에서 말한 영토의 개념은 오늘날 개인이 소유하고 있거나 장기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가옥 및 그 부속 토지의 개념과 유사해 보인 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옥 및 그 부속 토지를 사유 재산 혹은 사유 공간 의 개념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은 모든 문화에 서 발견되는 사유 재산과 사유 공간의 보호의 행동을 연구하면서, 사회 학자 피에르 반 덴 베르거Pierre van den Berghe의 연구를 다음과 같이 인 용하였다. 손님과 방문객들, 특히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은 주인 가족의 영토로 들어오 기 전에 확인 의식, 주의 사항 환기, 인사,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는 사과 등을 차례차례 거쳐야 한다. 중략 집 안에서도 손님이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단지 응접실뿐이며, 욕실이나 침실 등의 집의 다른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 서는 대개 별도로 요청을 해야 한다.27) 우리는 흔히 특정 공간을 사유하고 있는 사람을 主人이라 부르고, 타 인의 사유 공간에 초대 되어 들어가는 사람을 客 혹은 손님이라고 부른 다. 이 때 주인은 공간 내에서 발생하는 행동의 주체가 되고, 손님은 객 체가 된다. 객체는 항상 주체가 정한 공간의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만 일 객체인 손님이 행동의 주체가 되려하면, 이는 곧 침입과 침범의 의미 가 되는 것이다. 다음을 보자. 손님을 모시고 들어가는 자는 문마다 손님에게 양보한다. 손님이 寢門에 이 25) 에드워드 홀, 같은 책, 51쪽. 26) 에드워드 홀, 같은 책, 181쪽. 27) 에드워드 윌슨 저, 이한음 역, 인간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북스, 2005. 158쪽.
儒家儀禮의 方位 에 관한 文化解釋 93 르면, 주인이 먼저 들어가 자리를 정돈하겠다고 청한 뒤에 나와서 손님을 맞이 한다. 손님이 固辭하면 주인이 인도하여 들어간다. 주인은 문으로 들어가 오른 쪽으로 가고 손님은 문에 들어가 왼쪽으로 가서, 주인은 동쪽 계단으로 나아가 고 손님은 서쪽 계단으로 나아간다. 손님이 주인보다 지위가 낮으면 주인의 계 단으로 나아가는데, 주인이 固辭한 뒤에 손님이 서쪽 계단으로 나아간다. 객이 만약 차등이 지면 주인의 계단으로 뒤따라간다. 주인이 고사한 다음에 다시 서 쪽 계단으로 나아간다. 주인이 객과 서로 사양하고서 주인이 먼저 오르면 객이 따른다.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두 발을 모아가면서 걸음을 이어 올라간다. 동 쪽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오른쪽 발을 먼저 떼고, 서쪽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왼쪽 발걸음을 먼저 뗀다.28) 예기, 곡례 에 기록된 방문의 예절이다. 주인과 손님의 행동을 상 세히 기록했고 있는데, 주인과 손님이 공간을 이동하고 점유하는 방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위 내용을 해설해 본다. 손님을 모시고 들어가는 자는 문마다 손님에게 양보 한다. 담[墻]은 內外의 영역을 구분하고, 門은 內外의 영역이 소통하는 통로 이다. 문을 통하지 않은 일방적 소통은 곧 침범에 해당한다. 사유 공간 을 출입하는 객은 이러한 오해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문을 거쳐야 한다. 주인이 손님에게 문마다 양보하는 것은 사유 공간을 손님이 점유해도 좋다는 양해의 표현이다. 이러한 주인의 양해가 침입자 를 손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손님이 寢門에 이르면, 주인이 먼저 들어가 자리를 정돈하겠다고 청한 뒤에 나와서 손님을 맞이한다. 28) 禮記, 曲禮. 凡與客入者, 每門讓於客. 客至於寢門, 則主人請入爲席. 然 後出迎客, 客固辭, 主人肅客而入. 主人入門而右, 客入門而左. 主人就東階, 客就西階. 客若降等, 則就主人之階. 主人固辭, 然後客復就西階. 主人與客讓 登, 主人先登, 客從之, 拾級聚足, 連步以上. 上於東階, 則先右足. 上於西階, 則先左足.
94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침문은 오늘날 침실의 문에 해당한다. 침실은 매우 사적인 공간으로 가장 은밀한 사생활이 진행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손님에게 노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정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다음에야 손님에게 들 어올 것을 청하는 것이다. 손님이 固 辭 하면 주인이 인도하여 들어간다. 예에는 三 辭 가 있다. 처음 사양하는 것을 禮 辭, 거듭 사양하는 것을 固 辭, 끝내 사양하는 것을 終 辭 라고 한다. 먼저 들어가라는 주인의 요청 에 손님은 거듭 사양함으로써 주인의 공간을 침범할 의향이 없음을 보 인다. 그러면 주인이 먼저 들어가 인도하는 것이다. 주인은 문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가고 손님은 문에 들어가 왼쪽으로 가서, 주인은 동쪽 계단으로 나아가고 손님은 서쪽 계단으로 나아간다. 사실 이 대목부터는 앞의 내용과 내용상 구분이 된다. 앞의 내용은 문 과 방을 출입하는 예절이며, 이 이하는 사유 공간을 이동하는 예절을 설 명하고 있다. 주인은 오른쪽으로 가고, 손님은 왼쪽으로 간다는 것은 主 客 의 지위를 陰 陽 의 관계로 변환시켜 주체와 객체의 지위를 확정짓는다 는 문화적 상징으로 보인다. 동북아에서 왼쪽은 동쪽이며, 오른쪽은 서 쪽임은 앞서 밝힌 바이다. 즉 사유 공간 내 행동의 주체인 주인을 양으 로 상정하고, 객체인 손님을 음으로 상정함으로써 두 관계의 위치를 확 정짓는 것이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이 규정에서 오른쪽은 북쪽을 바라보 고 오른쪽이라는 점이다. 고대 유가 경전에서 오른쪽과 왼쪽은 때에 따 라 북쪽을 바라보는 경우도 드물게 보인다. 예컨대 제사상 차림에 있어 오른쪽과 왼쪽은 신주를 중심으로 북쪽을 등지고 설명된 경우도 있고, 차리는 사람을 중심으로 북쪽을 바라보고 설명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북쪽을 등지고 좌우를 구분한다.
儒家儀禮의 方位 에 관한 文化解釋 95 객이 만약 차등이 지면 주인의 계단으로 뒤 따라 간다. 주인이 고사한 다음 에 다시 서쪽 계단으로 나아간다. 손님이 주인보다 신분이 낮은 경우에는 주인과 손님이라는 관계 이외 에도 上下尊卑의 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낮은 신분은 높은 신분에 통솔되어 손님이지만 주인의 계단을 뒤 따라 가니 이는 손님의 지위를 감당하지 못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인이 거듭 손님의 지위 를 부여할 경우 공간의 주체자의 의견을 존중하여 서쪽 계단으로 가는 것이다. 주인이 객과 서로 사양하고서 주인이 먼저 오르면 객이 따른다.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두 발을 모아가면서 걸음을 이어 올라간다. 동쪽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오른쪽 발을 먼저 떼고, 서쪽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왼쪽 발걸음을 먼 저 뗀다. 서로 사양함은 서로의 입장을 존중함이다. 그럼에도 주인이 먼저 오 르는 것은 공간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두 발을 모으 는 것에 관해서는 禮記正義 의 孔穎達의 疎에도 단지 계단을 오르는 방법[上階法也] 이라 하였고, 禮記大全 張子의 註에도 공경하여 저절 로 그렇게 된 것[但敬事自至如此] 이라 하여, 명확히 납득할만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동쪽 계단을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올리고, 서쪽 계단을 오를 때는 왼발을 먼저 올린다는 것은 역시 음양의 방위와 주객의 위치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기정의 의 註에 는 이렇게 할 경우 서로 향하여 공경함에 가깝기 때문[近於相鄕敬] 이라 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계단을 오른다고 가정할 때, 매 계단을 오를 때 마다 서로를 향하는 모양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이상으로 예기, 곡례 에 기록된 방문의 예절을 나름대로 해설해 보았다. 사실 중요한 것은 주객의 위치를 방위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동서의 방위와 음양의 상징을 통해 주객을 구분하는 것
96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은 거의 모든 의례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것이다. Ⅶ. 나가는 말 예라는 것은 강제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제로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예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 야 자연스럽게 예를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을까? 예의 원칙은 人 情 과 事 理 에 합당해야 한다. 사람의 보편적 성품에 호소할 수 없다면 그것은 번 거로운 절차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합당한 논리를 갖출 수 없다면 품위 를 잃은 사이비 예학이 되고 말 것이다. 유가의례에 있어 東 西 南 北 의 方 位 는 음양의 철학과 결합하여 유가의 례의 강력한 논리를 제공한다. 男 左 女 右, 以 西 爲 上 ( 以 南 爲 上 ), 主 人 阼 階 의 禮 制 들은 남자와 여자가 음란하게 뒤섞이지 않기를 바라고, 상하존비 가 평화롭게 구분되기를 바라며, 주인과 손님이 서로의 역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라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가 구체적인 행위로 실현될 수 있도 록 한 예의 조문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본 논문에서 문자학, 사회생물학, 동물행동학, 진화심리학, 문 화인류학 등의 자료를 어설프나마 인용한 것은 禮 의 문명이 지니는 보 편성을 명징하게 드러내 보이고자하는 의도에서임을 밝혀둔다. 예의 형 식은 시대와 문명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탄생시키는 인간 의 정신과 정서적 보편성은 다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연구는 이 러한 예의 형식의 특수성과 예의 정신에 담겨있는 보편성을 함께 다루 어 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儒家儀禮의 方位 에 관한 文化解釋 97 <참고 문헌> 禮記, 楚辭, 淮南子 谷衍奎 編, 한자원류자전, 화하출판사, 2004. 김현선, 창조신화연구서설, 세계의 창조신화, 동방미디어, 2001. 데스몬드 모리스 저, 박성규 역, 접촉, 지성사, 1994. 세실리아 링크비스트 저, 김하림외 역, 한자왕국, 청년사, 2002. 에드워드 윌슨 저, 이한음 역, 인간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북스, 2005. 에드워드 홀 저, 최효선 역, 숨겨진 차원, 한길사, 2005. 이락의 저, 박기봉 역, 한자정해, 비봉출판사, 1996. 정경주, 한문고전학 개설, 신지서원, 2002. 주희 저, 임민혁 역, 주자가례, 예문서원, 1999. 최재천 외, 살인의 진화심리학,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템플 그랜딘 외, 권도승 역, 동물과의 대화, 샘터, 2006.
98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Abstract Research on point of the compass in Confucian ritual / Jo, Chang Gyu* 29)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1. North, South, East and West in the Confucian rites are the principle of separating men and women. Man is located in the east, women are placed in the west. 2. The principle that separates the high status and low status. High status sits on the west, low status sits on the east side when you sit in the north, or in the south. High status sits on the south, low status sits on the north side when you sit in the east, or in the west. 3. The principle that separates owners and guests. The owner walking the way of the east, and Guests walking the way of the West In the garden of the owner. Key words: point of the compass, cardinal points, ceremony, Confucianism, host and guest, the high and the low, Both men and women. * assistant professor of Kyungsung University.
退溪學論叢 第25輯(99 119쪽) 다산 정약용의 兒學編訓義 와 문자교육적 가치 1)金 목 Ⅰ. 머리말 Ⅱ. 兒學編訓義 의 저작 동기와 텍스트 선정의 문제 景 善* 차 Ⅲ. 兒學編訓義 에 반영된 다산의 문자교육관 Ⅳ. 맺음말 論文 抄錄 이 논문은 다산 정약용이 편찬한 한자교재 아학편 을 필사본별로 비교 하고 그것의 문자교육적 가치를 검토한 논문이다. 논의을 통해 필사본들의 선후와 한자어의 변형과 우리말의 뜻의 변화 및 음운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간의 논문은 강경훈본, 규장각본, 한중연본 의 한정된 필사 본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필자는 논의의 대상을 10개의 필사본으로 확대하여 살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흔히 8종성법이 당시의 보편적인 종성표기법으로 학계에 알려져 있었 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확인해 본 결과 받침표기가 7종성법이 쓰였으며, 어간과 어미를 밝혀 적는 분철경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두음법칙을 따르지 않고 원음에 따른 원칙 표기를 하 였음도 당시의 두드러진 음운현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음에서는 ㆍ 아래아 표기가 규범 한자음의 표기에만 쓰이고 있으며 ㅢ 는 /ㅅ/ 아 래에서는/ㅣ/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고 구개음화가 설두음이 실린 규범의 * 선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논문투고일: 2015.05.30 / 심사개시일: 2015.06.17 / 게재확정일: 2015.06.27
100 退溪學論叢 第25輯 한자음(天: 하날 텬, 帝: 황제 뎨)을 빼고는 모두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간 遺傳되어 온 필사본들 중 강경훈본 이 가장 오래된 先本으로 알려 져 왔다. 그런데 필사자인 芸堂居士가 정학연이 아니라 정학유의 둘째 아들 인 정대번인 것으로 이번 논문을 통하여 밝혀짐으로서 강경훈본 의 필사 연대는 1813년에서 60년 후대시기인 1873년 이후로 필사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행 연구자마다 서로 견해가 달랐던 철마산의 위치도 확실한 위치를 실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비록 자잘한 것에 불과하 지만 이번 연구에 있어 나름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다산은 아학편훈의 二千字를 편찬하면서 일관되게 인간중심의 존재론 적 세계관을 전개해 가고 있으며 형이상학뿐만 아니라 문자 학습 교재를 만 드는 실생활에 까지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일관된 그의 철학 이 학동들을 지도하는 문자교육관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향후 실학사상과 경험론적인 교육철학으로 확대됨으로써 탄탄한 토대를 쌓아 조 선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주제어: 아학편, 천자문, 7종성법, 정대번, 철마산, 아학편, 문자교육, 주역. Ⅰ. 머리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 ~1836)은 1801년 11월 유배지 강진현에 도착하여 동문 매반가 주막의 허름한 방을 빌려 머물렀다. 그는 아이들 을 가르치기 위해 1804년 봄에 한자(漢字) 교육용(敎育用) 교재 2000자로 짜여진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을 편찬하였는데1) 필자는 이 교재에 주목하고자 한다. 다산은 평생을 통하여 약 503여권2)(經集88책 250권, 文集30책 87권, 雜 1) 다산정약용의 현손(玄孫) 丁奎英이 1920년(庚申)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1921년 (辛酉) 12월 하순에 완성한 필사본 俟菴先生年譜 에 純祖4年 甲子(1804년) 公四十三歲 春 兒學編訓義 成(凡二千文) 이라고 밝히고 있다. 2) 다산은 1822년 자신의 회갑을 맞이하여 저술활동을 마감하고 저작을 <여유
다산 정약용의 兒學編訓義 와 문자교육적 가치 101 纂64책 166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주요저서들이 강진 유배기 간 18년 동안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저술 작업은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 이다. 특히 학문의 불모지였던 강진(康津) 지역에서는 더욱 놀라운 일이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놀라운 학문적 성과를 일궈낸 바탕의 근원적인 힘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늘 필자는 궁금하게 생각해 왔 다. 다산은 강진 유배 18년 동안 글공부를 위해 찾아온 제자들을 대상으 로 다양한 방식과 효율적인 프로그램으로 제자들을 훈련 시켰는데 무엇 보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학문에 가장 근본이 되는 문자교육(文字敎育)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다산은 유배지 강진현(康津縣)에 도 착한 지 2년 만에 그간의 여러 경험과 사례를 참고하여 1804년 봄에 2000자로 구성된 한자(漢字) 학습용(學習用) 교재(敎材)로 아학편훈의 (兒學編訓義) 를 완성 3)하여 내어 놓았다. 다산이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을 저술한 지 210년이란 시간이 흘렀 다. 아직도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는 한자교육(漢字敎育)을 위한 교재 로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한자(漢字敎育)을 담당하는 주체와 교육을 받는 대상에 따라 한자(漢字)의 숫자를 선별하여 줄이기도 하였 지만 현행 초 중 고등학교의 교육과정(敎育課程)의 한문 교과서에 편 재되어 있어 원형의 형태가 없어지지는 않았다.4) 이러한 오랜 시간의 흐 름 속에서 면면이 이어져오는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는 여러 이본(異 本)들이 필사본의 형태로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아학편(兒 學編) 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유전(遺傳)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이본 (異本)들을 바탕으로 나타난 텍스트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1908 당집>으로 정리한다. 자찬 묘지명 이라는 글을 통하여 자신의 저작을 經集 88책 250권, 文集30책 87권, 雜纂64책 166권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1833년경에 朝廷에서 高宗의 왕명으로 추진된 여유당집 필사 열수전서 총목록 에 이와 같이 분류하고 있다. 3) 茶山의 玄孫인 丁奎英, 俟菴先生年譜, 1921.12. 1801년 條. 4) 전숙현, <다산의 아학편 에 의한 기초한자의 선정과 재구성>, 충남대 교육 대학원 석사논문, 2003.
102 退溪學論叢 第25輯 년 지석영의 석판본과 2008년 양광식의 활자 인쇄본까지 약 200여년의 기간 동안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가 하나의 한자교재로서 지닌 그 가 치와 변천과정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이전의 한자교육용 교재들 은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지 천자문(千字文) 을 비롯하여 유합(類合), 훈몽자회(訓蒙字會), 신증유합(新增類合), 정몽유어(正蒙類語)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역사적으로 필요에 따라 제작되어 한자교육에 사용된 자료들을 두루 살펴보고 다양한 한자 학습 교재들 사이에서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가 갖는 위치와 역할을 탐구해 보고 자 한다. Ⅱ. 兒學編訓義 의 저작 동기와 텍스트 선정의 문제 1. 저작 동기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을 통하여 4세에 직접 천자문(千字文) 을 배웠고, 7세에 한시(漢詩)를 지어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을 크게 놀라 게 하였으며, 10세에는 삼미자집(三眉子集) 5)이라는 시집(詩集)을 펴낸 천재소년이었다. 이렇게 어린 시절 천자문(千字文) 을 통하여 한자를 배웠던 다산이 어른이 되어 유배지 강진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는 훈장 (訓長)이 되었을 때 그는 과거 천자문(千字文) 을 통하여 한자를 배웠던 자신을 답습하지 않았다. 그는 몇 가지 근거에 입각하여 천자문 불가독 설(千字文不可讀說) 6)을 주장하며 새로운 한자 교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새롭게 교재를 편찬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가 가장 역점을 두 었던 것은 한자어의 올바른 뜻의 전달 곧 훈의(訓義) 였다. 그래서 그는 5) 丁奎英, 俟菴先生年譜, 1921.12. 1765년(英祖41년, 乙酉)~1768년(英祖44년, 戊 子) 條. 6) 千字不可讀說, 與猶堂全書補遺, 경인문화사 영인본 1989. 제2책, 289~340면.
다산 정약용의 兒學編訓義 와 문자교육적 가치 103 한자교재를 만든 뒤 책의 명칭을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라고 붙였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를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자서(自序) 를 통하여 한자교육에 있어 훈의(訓義) 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특히 중국의 한자(漢字)를 빌어다가 우리들의 삶을 한자어(漢字語)라 는 기호(記號)를 사용하여 구체화 할 경우 한자(漢字)의 음(音)과 훈(訓) 을 정확하게 알아야 우리들의 생각과 느낌을 온전히 한자어(漢字語)를 통하여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다. 이 때 각각의 한자어(漢字語)가 갖는 의미 곧 뜻(새김글, 訓義)은 매우 중요하다. 다산은 천문평(千文評) 이라는 글을 통하여 한자 학습 교본으로 널리 쓰이는 천자문 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른바 주흥사의 천자문(千字文) 을 얻어 아이들을 가 르치는데, 문제는 천자문이 문자 교육용 책이 아니라는 데 있다. 天자와 地자를 배우고 일월(日月) 성신(星辰) 산천(山川) 구릉(丘陵) 등 아직 그 범주에 속하는 요소들을 다 배우지 않았는데 갑자기 중단하고 말하기를 잠깐 배운 바를 중단 하고 5색을 배우라 고 한다. 또 현(玄)자와 황(黃)자를 배우고 청(靑) 적(赤) 흑 (黑) 백(白) 홍(紅) 자(紫) 치(淄) 록(綠) 등의 차이를 아직 구별하지 못하는 데 갑 자기 중단하고 말하기를 잠깐 네가 배운 바를 중단하고 우주(宇宙)를 배우라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이런 방법이 있는가? 구름운(雲)과 비우(雨) 사이에 등(騰)과 치(致)자가 끼어드니 능히 그 족(族)을 다 알 수 있겠는가? 서리상(霜)과 이슬로 (露) 사이에 결(結)과 위(爲)자가 막아서니 능히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기 때문에 아이들은 헷갈리고 혼란스러워서 핵심적인 뜻을 파악하지 못해 현(玄)을 감을전(纏)으로 이해하며 황(黃)을 누를 압(壓)의 의미로 짐작해 버린다. 이것은 아동이 못나서가 아니라 비슷한 것끼리 묶어서 이해할 수가 없 었던 탓이다. 7) 다산의 견해는 유형의 사물이든 무형의 성질이든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든 같은 부류의 글자끼리 묶어서 제시해야 학동들의 이해를 혼란시 키지 않는 합리적인 제시 방법이라는 것이다. 7) 천문평, 여유당전서보유 2
104 退溪學論叢 第25輯 千字文 의 제1구와 2구인 天地玄黃 宇宙洪荒 과 제9구와 10구인 雲騰致雨 露結爲霜 과 관련해 잘 알려진 학동들의 오해가 바로 그 원 칙에 위배된 제시 방식에서 비롯한 것임을 다산은 지적하고 있다. 다산의 또 다른 지적은 청(淸)-탁(濁), 근(近)-원(遠), 경(輕)-중(重), 천 (淺)-심(深)처럼 같은 종류이면서 동시에 짝을 이루는 말을 대비시켜 제 시함으로써 아동들에게 글자의 정확한 의미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산은 천자문(千字文) 의 제3구와 4구인 日月盈仄 辰宿列張 과 제7 구와 제8구인 閏餘成歲 律呂調陽 을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영(盈)의 반대는 허(虛)이고 측(仄)의 반대는 평(平)이다. 영(盈)과 측(仄)을 대 비시키는 것은 세로로 말하고 가로로 깨우침이니 같은 종류가 아니다. 해세(歲) 자와 같은 족속은 때시(時)자이며 볕양(陽)자의 짝이 되는 것은 그늘 음(陰)자니 세(歲)를 말한 뒤에 양(陽)을 말하는 것은 홀로 외로이 가는 것이며 짝 없이 과 부로 사는 격이니 유형화가 안 된다. 대체로 문자학은 청(淸)으로써 탁(濁)을 깨 우치며 근(近)으로써 원(遠)을 깨우치며 경(輕)으로써 중(重)을 깨우치며 천(淺) 으로써 심(深)을 깨우쳐서 짝이 되는 글자를 들어 서로를 밝히게 하면 두 가지 뜻이 함께 통한다. 그러나 단설(單設)하고 편언(偏言)해서는 두 가지 뜻이 함께 막히니 지능이 우수한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능히 깨우치겠는가? 8) 다산의 위와 같은 천자문에 대한 비판은 굳이 현대 교육학 이론을 들 먹이지 않더라도 누구나 납득하고 동의할 수 있는 온당한 지적이자 비 판이었다. 다산은 이런 점에서 기존의 천자문(千字文) 이 한자교재로써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고, 그에 따른 대안으로 새로운 한자교본(漢字敎 本)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고민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 먼저 각각의 한자에 주어지는 뜻(義)과 음(訓)을 올바르게 가르 쳐야 한다는 데 역점을 두었고 그러한 효율적인 방안으로 유별분류체 계(類別分類體系)를 활용(活用)하여 한자교본(漢字敎本) 아학편훈의(兒 8) 천문평, 여유당전서보유 2.
다산 정약용의 兒學編訓義 와 문자교육적 가치 105 學編訓義) 를 편찬 9)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책의 명칭을 아 학편훈의(兒學編訓義) 라고 명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자서(自序) 10)라는 글을 통하여 이 책을 편찬하게 된 동기와 책의 내용과 체재를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다산은 무엇보다 먼저 문자가 만들어진 이유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 물의 뜻과 소리를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분류하여 서로 다름을 인 지함으로써 인간의 지혜를 발휘하고자 한 것(文字之興 所以類萬物也 觸 類而旁通之 文心慧竇)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다산은 문자를 처음 배우는 학동들에게 문자의 訓義 곧 중국에서 만들어진 한자어가 지닌 뜻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우리말로 가르쳐서 알기 쉽게 인지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교육의 내용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특히 다산은 당 시 널리 통용되었던 천자문(千字文) 의 체제와 구성이 한자의 訓義 곧 뜻을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엉터리 한 자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 11)고 천자문(千字文) 불가독설(不可讀說)을 주 장하며 크게 개탄하고 있다. 바로 이것은 천자문(千字文) 이 애초에 중국인의 역사와 문화 및 언 어체계에 맞게 만들어진 한자교본이기 때문에 우리가 중국인이 아닌 이 상 필연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산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산은 한자교재를 편찬함에 있어 가 장 우선시했던 것이 한자에 대한 訓義 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다산이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자서(自序) 를 통하여 밝히고 있는 내용 을 검토해 볼 때 訓義 가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을 편찬하게 된 가 장 중요한 동기와 이유가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9) 황병기, 다산 정약용의 문자 분류학과 존재론적 세계구도, 동양철학의 세 계, 2005, 336~338면. 10) 自序, 아학편, 강경훈 소장본. 11) 千文卽一時戱作,非以族聚, 不可訓蒙者也, 敎穉說, 여유당전서보유 2, 266면.
106 退溪學論叢 第25輯 2. 텍스트 선정의 문제 1804년 다산이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를 손수 편찬한 이후로 이 책 은 아학편(兒學編) 이라는 권두명(卷頭名)으로 필사(筆寫)되어 제법 널 리 유전(遺傳)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까지도 필사본(筆寫本)이 발굴되고 있으며, 2012년 강진군청 다산유물전시관 다산탄신 250주년 기념특별 전 에서는 다산의 외손자 방산(舫山) 윤정기(尹廷琦)와 집안간인 군보 (群甫) 윤시유(尹詩有)의 후손인 윤동옥(尹桐鈺)이 소장(所藏)한 아학편 (兒學編) 초기 필사본(筆寫本)이 공개되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 학중앙연구원 장서각(藏書閣)과 서울대 규장각(奎章閣), 연세대 국학자료 원, 성균관대 존경각, 단국대, 한양대,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강경훈 개 인 소장본(所藏本) 등을 비롯한 각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 (筆寫本)은 모두 10종의 이본(異本)들이 있다.12) 이러한 이본(異本)들이 한자교본으로 필사(筆寫)되어 사용되어 오는 과정에서 아학편(兒學編) 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이가 있었는데 그 가 바로 한계(韓溪, 大溪) 이승희(李勝熙)이다.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가 세상에 나온 지 84년이 지난 1888년에 이승희(李勝熙)는 아학편(兒學 編) 의 유별(類別) 분류(分類) 방법(方法)을 차용(借用)하여 정몽유어(正 蒙類語) 를 간행하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을 통하여 아학편훈의(兒學 編訓義) 를 하나의 모형으로 삼고 2000자의 한자들 중에서 1008字를 뽑 아 분류하고 입목(立目)하였다 13)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뒤 1908년에 당시 대한의학교(현 서울대학교 의 과대학) 교장이던 송촌(松村) 지석영(池錫英)에 의해 아학편(兒學編) 은 일어, 영어, 중국어의 글새김과 설명을 곁들인 형태로 석판본(石版本)으 12) 이 중 성균관대 존경각에 소장된 아학편(兒學編) 은 각각의 한자에 음과 훈 을 달지 않은 채로 한자의 서체만 적시되어 있는 관계로 이번 연구에서 제 외하였다. 13) 正蒙類語序, 韓溪遺稿, 권6
다산 정약용의 兒學編訓義 와 문자교육적 가치 107 로 간행되어 당시 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에게 교재로 활용되었다. 그 이후 아학편(兒學編) 은 강진의 향토 사학자 청광(靑光) 양광식(梁光植) 에 의해 강진지역에서 한문공부를 위한 교재로 사용되어 왔다. 청광(靑 光)은 2009년에 다산 이천자(二千字) 아학편(兒學編) 上, 下 2권14)의 활 자본으로 인쇄하여 한자학습용 교재로 자신이 운영하는 한문교습소에서 교재로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청광이 재편찬한 아학편(兒學編)의 서 문을 통하여 확인해 보면 1973년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 앞 귤동 마을 에 거주한 낙천(樂泉) 윤재찬(尹在瓚) 선생님을 통하여 아학편(兒學編) 을 처음 알게 되었고, 소헌(笑軒) 정양모(鄭良謨) 선생님의 소개로 세종 기념관의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개설한 신호열(辛鎬烈) 선생님의 한 문강의를 수강하면서 아학편 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1986년6월부터 18년간 아학편 을 교재로 한문학원을 운영하 면서 얻은 것은 사람마다 재능과 노력이 다름은 있지만 오래하되 바르 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제시된 글자 하나하나에 다산의 사상이 깊이 간 직되어 있으니 힘들고 어렵더라도 전문인을 양성하는데 꼭 사용되었으 면 한다 15)고 밝히고 있다. 청광의 아학편 내용은 책의 한 면에 4자씩 가로로 배치하고 큰 漢 字 아래에 훈과 음을 적었다. 그리고 이어서 각각의 뜻으로 사용되는 예 를 최대한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天 자 아래에 하날텬 이라는 대표 훈의(訓義)를 제시하고 이어서 하늘천 : (조물주천, 하느님 천, 운명천, 지아비천, 임금천, 진리천, 중요한 것 천, 절후천, 천성천, 천 연천, 이마천, 묵형천, 천체천)을 다양하게 열거하고 天 : 一大顚 至高無 上 처럼 字說 과 說解文字 에 근거하여 한자의 구성과 의미를 풀이하 고 있다. 또한 아학편(兒學編) 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전되어 오고 14) 원저 정약용 편저 양광식, 펴낸곳 문사고전연구소, 금성정보출판사, 2008. 15) 다산 二千字 아학편(상), 序文, 정약용 저, 양광식 편, 錦星情報出版社, 文思古 典硏究所, 2009.
108 退溪學論叢 第25輯 있다. 일본의 천리대학 도서관에도 아학편(兒學編)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16) 또한 아학편(兒學編) 은 한자 쓰기 교본으로 출판되었는데 1997년에 김대현이 정약용의 2000자 아학편 에서 뽑은 다산 千字文 17)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여 시중에 판매되었으나 그다지 크게 호응을 얻지 못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 이후 지난 2012년 박연호가 다산 정약용의 아학 편 쓰기 라는 이름으로 초판 발행하여 시중의 서점에 판매되고 있다. 필자가 이번 연구를 위하여 검토할 수 있는 아학편 은 모두 필사본 10종, 석판본 1종, 인쇄활자본 1종이다. 그리고 쓰기 교본으로 발행된 2 편이다. 아학편훈의 가 편찬된 지 약 210년이 흐른 지금 그동안 간행 된 아학편 들을 비교해 볼 때, 필사자, 필사지역, 필사 시기에 다라 다 소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Ⅲ. 兒學編訓義 에 반영된 다산의 문자교육관 1. 다산의 문자교육관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생각의 정리는 말과 글을 통하여 한다. 만 약 말과 글이 없다면 인간의 생각과 상상을 정리하여 갈무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서관에는 수 백 만 권의 책들이 있다. 그 책들이야말로 인간의 생각과 상상력이 빚어낸 결정체들이다. 그러한 결과물들은 하나 도 빠짐없이 일정한 분류체계를 통하여 저장하고 관리된다. 그리고 바로 근저에는 기호 곧 언어가 사용된다. 수 천 년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인 간은 다양한 많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10萬 字에 해당하는 漢字들 중 에서 2千 字를 뽑아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가르칠 목적 16) 노경희, 일본소재 정약용 필사본의 소장현황과 서지적 특징, 다산학 9, 2006. 17) 원저 정약용, 편저 김대현, 다섯수레 출판, 1997.
다산 정약용의 兒學編訓義 와 문자교육적 가치 109 으로 엮는 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은 사물을 분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나와 너, 이것과 저것, 자와 타, 등 등 그 분별의 내용이 곧 생각의 내용이다. 인간의 사유는 크게 이분법적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분별력에 기초하여 인간은 세계를 파악한다. 이 분별의 행위가 조화의 방향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분열의 방향을 추구하는가에 따라서 사유구조가 결정되고 이 렇게 결정된 사유구조는 곧 철학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 곧 세계관이 된다. 이미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는 10만 개의 글자들을 놓고 어떤 기 준을 가지고 選字할 것이며, 선자한 글자를 놓고 어떻게 배열하는 것 이 가장 좋은지를 놓고 따져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을 것이다. 이 때 다산은 나름의 주체적인 문자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다산은 漢字에 대한 정확한 학습을 거치지 않고 文章을 짓는 것부터 배우는 세태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다. 무엇보다 글자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학문 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8) 다산이 아언각비, 소학주관, 교치설, 천문평 등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다산의 견해는 아학편훈의 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다 산은 아학편훈의 를 단순한 글자의 뜻풀이를 소개하는 字學書를 목적 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학편훈의 全篇에 흐르고 있는 내 용을 꼼꼼히 뜯어 읽어 내려가 보면 편찬자의 깊은 뜻이 곳곳에 글자로 배열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바른 삶의 모습과 학문의 기초를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을 글자들로 배치하여 편찬과정에서부터 도 덕교육을 치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산은 경세유표 에서 학 습순서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德行을 根本으로 하고 經術 18) 古者 小學專習字書 字字講究 象形會意諧聲之所以然, 無不瞭然於心目. 方屬 文而爲篇章也, 字字鳩合 用適其宜 字說, 與猶堂全書 補遺, p.207
110 退溪學論叢 第25輯 이 다음이고 文藝가 끝이다 19)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 말은 곧 학문의 방법에는 人性敎育이 우선이고 다음이 知識이며 지식이 습득된 이후에 야 文藝로써 創造나 應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다 산의 견해가 아학편훈의 내용에 잘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아학편훈의 마지막 끝 구절을 堯舜禹湯과 孔孟諺曾 로 중국의 고대국가를 가장 이상적으로 다스린 堯舜임금 시대와 孔子 孟子 顔回 曾參 을 아동들이 모범으로 삼아야할 최고의 理想的 인물로 여겼 으며 이에 따라 이들 聖賢을 모두 포함하여 강조했던 것이다. 이에 비하 여 千字文 은 乎哉焉也 등의 어조사로 마무리하고 있는 천자문 과 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아학편훈의 上卷은 天地父母 人倫으로부터 시작하여 簫笛琴瑟 이라는 音樂으로 끝나며 下卷은 仁義禮智 孝悌忠信 라는 人道로 시작해 서 여러 堯舜禹湯 孔孟顔曾 聖賢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이것은 다산이 도덕적 실천덕목을 구체적 삶으로 실현 시킨 인물들을 글자를 통하여 소 개함으로써 인간사회의 질서와 禮樂, 사람이 마땅히 걸어 가야만할 길(人 倫)과 성현의 상호관계에 대한 다산의 인식체계를 문자교육관으로 반영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학편훈의 는 단순한 한자 학습서가 아니라 입문과정에서부터 아동들에게 정신적 구심점을 갖도록 용의주도 한 기획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산의 교재 편찬 자세를 통해 우리 는 진정한 다산의 진정한 교육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다산의 아학편훈의 에는 아동의 인지발달과정에 따른 自得的 이 해와 지적능력의 단계적 확대론에 입각한 문자교육관이 반영되어 있다. 아동은 대부분 직접적인 경험에서 언어 개념을 배우기 때문에 만약 아 동이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이 없다면 그 아동은 인지발달에 곤란을 겪는다. 언어 역시 생득적인 것이 아니며 경험에 의해 학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나 제일 먼저 배우게 되는 말이 엄마, 쭈쭈, 아빠 등인 것처럼 父母나 自己, 身體, 飮食, 動物의 이름을 가장 빨리 배우게 19) 總以德行爲本 經術爲次, 文藝爲末. 경세유표, 與猶堂全書 권5집,
다산 정약용의 兒學編訓義 와 문자교육적 가치 111 되는데 다산은 아학편훈의 에서 이러한 아동의 인지발달과정을 고려하 여 글자를 가르치는 학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동양사상의 天 地 人 三 才를 배열함에 있어서 기존의 다른 한자 학습서들과는 달리 사람과 직접 관련된 항목을 상권의 도입부에 우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父母와 直系 家族을 앞세우고 그 다음에 親族關係를 배열한 후 族戚이라는 단어로 그 것들을 마무리하면서 他人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옮겨간다. 이처럼 人倫의 항목을 첫머리에 배열함으로써 인간에서 지상세계 여 러 사물로 그리고 다시 지상세계에서 천체와 우주로 확대되어가는 사유 체계를 학습과정에서 단계적으로 배우게 함으로써 다산의 문자교육관을 실행해 보인 것이다. 끝으로 다산의 문자 교육관에는 종래의 규범적이고 체제유지적인 성 리학자들과 달리 개개인을 독립된 개체, 평등한 개체, 자율적인 개체로 파악함으로써 교육인간학적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이다. 다산은 千文評 에서 문자가 생겨난 것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문자가 발흥한 것은 만물을 분류하기 위해서이다. 혹은 그 형(形)으로, 혹은 그 뜻(情)으로 혹은 그 일(事)로써 하되 반드시 글자의 유(類)에 접촉하여 널리 통함으로써 그 부류(族)을 다 알아 그 다름을 구별한 후에야 그 뜻과 이치가 분 명하게 드러나고 문리가 터지고 지혜가 생기는(文心慧竇) 것도 이런 것에서 개 발되는 것이다. 20) 다산의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다산이 추구하는 문자 교육관은 다름 아닌 인간의 경험과 감각으로 萬物之情을 분류하여 체계적으로 인식하 도록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감각기관을 통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무리의 類를 접촉하여 그 族을 다 알게 한 다음 그 다름을 구별하여 文 20) 文字之興所以類萬物也 或以其形 惑以其情 或以其事 必觸類而旁通之 竭其族 別其異 而後其情理燦然而文心慧竇於是乎開發也 천문평, 與猶堂全書 補 遺
112 退溪學論叢 第25輯 理가 터지고 智慧가 솟구치게 하는 것이 文字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 럼 다산은 문자를 배우는 과정에서 전체의 類과 族의 관계를 밝혀 形(생 김새)과 情(정황과 상태)과 事(움직임으로 이루어지는 일)의 의미를 스스 로 알아가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로 파악하여 합리적 사고를 하게 하고 구체적 사례들에 대한 실증을 통해 보편적 원리를 추출해 내는 귀 납적 사고를 가질 수 있게 하는 학습방법을 모색하는 문자교육관을 아 학편훈의 全篇을 통하여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다산은 아학편훈의 二千字를 편찬하면서 일관되게 인 간중심의 존재론적 세계관을 전개해 가고 있으며 형이상학뿐만 아니라 문자 학습 교재를 만드는 실생활에 까지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러한 일관된 그의 철학이 학동들을 지도하는 문자교육관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향후 실학사상과 경험론적인 교육철학으로 확대됨 으로써 탄탄한 토대를 쌓아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2. 교육적 가치 아학편훈의 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체제와 구성이 事前에 치밀한 준비와 기획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다산은 여러 차례 천문평, 천자불가독설, 교치설 등을 통하여 기존 한자 학습서인 천자문을 부 적절한 한자교재라고 비판해 왔던 당사자로서 나름의 책임과 사명을 가 지고 아학편훈의 를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10만자가 넘는 한자들 가 운데에서 2천자를 골라 8자씩 배열하고 여덟째 글자마다 압운을 맞추어 구성하였는데 그 全體制가 매우 정교하고 주도면밀하여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21) 입각하여 짜여 진 아학편훈의 는 아이들의 초기 문자 학습을 통하여 인격형성에 크게 21) 고래억, <茶山의 兒學編 에 대한 교육 인간학적 고찰>, 연세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1. 64쪽
다산 정약용의 兒學編訓義 와 문자교육적 가치 113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편찬되었다는 점이다. 다산이 문자를 분류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는 유(類)와 족(族)의 개념은 단순한 개념 제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자 배열을 함에 있어 우선적 으로 감각을 통한 경험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하여 동일한 類의 사물들 의 공통점과 다른 점을 인식하여 한자의 올바른 뜻을 익히게 하였다는 점이다.22) 그래서 다산은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을 形(생김새)과 情(정황과 상태) 그리고 事(움직임으로 이루어지는 일)로 구분하고 있다. 이제 막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반드시 감각을 통하여 느끼게 함으 로써 사물과 정황을 인식하고 이해하게 하여 분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다산의 기획된 의도는 아학편훈의 全篇에 걸쳐 나타나 있다. 다산의 이러한 의도가 반영된 아학편훈의 는 기존의 한자 학습서들 천자문, 훈몽자회, 유합, 신증유합 등과는 달리 有形字와 無形 字의 구분을 분명히 함으로써 큰 차별화를 꾀하여 한자 학습교재로서 가치를 높이 평가받을 수 있게 하였다는 점이다. 다산의 아학편훈의 에서 유형자와 무형자로 구분하여 배열한 것은 아 동들로 하여금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 관찰할 수 있는 유형적 개념을 먼저 학습하게 한 다음 학습자의 주관적 판단과 이해가 요구되는 개념을 점진 적이고 단계적으로 학습시키고자 하는 주도면밀함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兒學編 上卷에서 父母 君臣 夫婦 兄弟 등 일상생활에 서 접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단어를 먼저 배우게 한 후에 下卷에서는 姓氏 名號 倫序 등 명분과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 고 있다. 또한 上卷에서 耳目 口鼻 手足 등 신체 부위에 관한 학습을 통해 육신의 감각 기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들을 먼저 깨 닫게 한 뒤에 下卷에서는 仁義 禮智 孝悌 忠信 堯舜 禹湯 孔孟 顔曾 등의 정신적인 덕목과 개념을 배울 수 있도록 한자를 배열하고 있다. 이 것은 앎이 실제와 명목이 합일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는 知行一致의 다 22) 황병기, 다산 정약용의 문자 분류학과 존재론적 세계구도, 동양철학의 세 계, 2005, 239쪽
114 退溪學論叢 第25輯 산의 경험론적 교육철학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학편훈의 의 원문 한자 편성에서 각 族類 안에서는 한자들을 서로 대립하거나 관련성이 있는 것끼리 짝을 지어 제시하고 또 같은 유별 분 류 안에서는 한자의 造字原理를 고려하여 한자를 체계적으로 익힐 수 있도록 편집하고 있다. 예를 들면 喜怒悲歡 愛憎恃懼 尊卑貴賤 壽夭貧富 등에서 감정과 사 정의 상태를 상호 대립된 짝을 제시하여 이해를 도왔으며 한자의 조자 통해 부모-나-자녀라는 계승 관계로 원리를 터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산의 이러한 편집 기획은 맹목적인 口誦에 의한 한문학습 방법을 止揚하고 학동들로 하여금 감각 경험을 통하여 그들의 배움과 현상세계 가 분리되지 않고 일치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다음으로 아학편훈의 에 수록된 한자들의 배열순서가 인간중심적이 고 실생활과 관련된 것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天 地 人 三才의 배열 순서에 있어 다른 한자 학습서들과는 달리 인간과 관련된 한자들을 가 장 먼저 배열하고 있다. 상권의 첫 구는 天地父母 君臣夫婦 兄弟男女 姊妹娣㛮 하늘은 곧 아버지와 같고 땅은 어머니와 같으며 가정의 남편은 나라의 임금과 같 고 아내는 신하와 같다고 하며 가족 구성원을 형제남여 자매제수를 한 자어로 소개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이해를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 부터 사람을 중심에 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산의 인본주의 사 상이 아학편훈의 글자배열에 반영된 것이다. 아학편훈의 전편에 다 산의 실학교육사상과 구체적 방법론이 일관되게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아학편훈의 가 지니고 있는 미래의 교육적 가치는 향후 도래할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한자사용이 빈번해질 것을 고려하면 매우 중 요한 한자교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중국에서 만들어진 한자어가 보다 간략하게 변형되어 아학편훈의 에 적시된 한 자와는 달라진 간체자 형식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변형된 간체자에 맞추 어 새롭게 활용할 수 있는 좋은 한자교재라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兒學編訓義 와 문자교육적 가치 115 중국, 일본, 베트남, 한국, 북한, 대만, 홍콩 등 한자문화권으로써 동아 시아라는 공통된 지리적 위치에서 다양한 문화교류와 물물거래가 일상 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상호소통 할 공통문자를 제정하고 공식화하는데 있어 아학편훈의 를 공통기본 교재로 활용될 수 있는 기 회를 열어 놓고 미래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맞게 대응하며 변화시켜 나 아간다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약 100년 전 홍수처럼 밀려드는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과 정에서 언어의 소통문제로 크게 고민에 빠졌던 송촌 지석영23)은 당시로 서는 최초로 석판본 아학편 을 기본교재로 삼아 글자의 음과 훈을 영 어, 중국어, 일어로 추가 확대하여 당시 대한의전24) 학생들의 학습교재 로 활용함으로써 개화기 지식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찾아온 외국인들 의 눈과 입을 열어주고 귀를 통하게 하였다는 사실은 아학편훈의 가 가진 미래적 가치를 보다 확실히 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이미 우리는 동아시아 국가의 다양한 사람들이 한 이웃 한 가족처럼 살아가는 100만 다문화 가정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관광 객 연간 일천만 명이 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학편 훈의 가 지니고 있는 탁월한 한자교재로서의 가치인 문자배열과 체계 를 잘 활용하고 동시에 인간 중심 세계관에 입각한 문자교육을 실현하 기 위하여 아학편훈의 를 새롭게 변용하여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 다. 이제 새로운 21세기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동아시 아의 여러 나라들과 가까운 이웃처럼 다문화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이 현실이다. 23) 1855년(철종 6)~1935)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서 울 낙원동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학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으나 일찍부 터 서학(西學)을 동경하여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책을 탐독하였는데, 특 히 관심을 둔 것은 영국인 제너(Jenner,E.)의 종두법(種痘法 천연두 예방법) 에 관한 것이었다. 의사, 국어학자, 동래부사,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學 部) 학감, 국문연구소 위원, 우두신설, 자전석요 24)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116 退溪學論叢 第25輯 Ⅳ. 맺음말 이 논문은 다산 정약용이 200여 년 전에 편찬한 한자교재 아학편 을 필사본별로 비교하고 그것의 문자교육적 가치를 검토한 논문이다. 논의 을 통해 필사본들의 선후와 한자어의 변형과 우리말의 뜻의 변화 및 음 운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간의 논문은 강경훈본, 규장각본, 한중연본 의 한정된 필사본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필자는 논의의 대상 을 10개의 필사본으로 확대하여 살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흔히 8종성법이 당시의 보편적인 종성표기법으로 학계에 알려져 있었 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확인해 본 결과 받침표기가 7종성법이 쓰였으며, 어간과 어미를 밝혀 적는 분철경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 인할 수 있었다. 또한 두음법칙을 따르지 않고 원음에 따른 원칙 표기를 하였음도 당시의 두드러진 음운현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음에 서는 ㆍ 아래아 표기가 규범 한자음의 표기에만 쓰이고 있으며 ㅢ 는 / ㅅ/ 아래에서는/ㅣ/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고 구개음화가 설두음이 실린 규범의 한자음(天: 하날 텬, 帝: 황제 뎨)을 빼고는 모두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간 遺傳되어 온 필사본들 중 강경훈본 이 가장 오래된 先本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필사자인 芸堂居士가 정학연이 아니라 정학유의 둘 째 아들인 정대번인 것으로 이번 논문을 통하여 밝힘으로써 강경훈본 의 필사 연대는 1813년에서 60년 후대시기인 1873년 이후 필사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행 연구자마다 서로 견해가 달랐던 철마산 의 위치도 확실한 위치를 실증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비록 자잘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번 연구에 있어 나름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다산은 아학편훈의 二千字를 편찬하면서 일관되게 인간중심의 존 재론적 세계관을 글자 하나하나의 배열과 전개를 통해 구현해 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문자 학습 교재를 만드는 실생활에 까지 적용하고
다산 정약용의 兒學編訓義 와 문자교육적 가치 117 있다. 바로 이러한 일관된 그의 철학은 학동들에게 온전히 전달됨으 로써 향후 실학사상과 경험론적인 교육철학으로 자리매김 되어 탄탄 한 토대를 쌓아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참고 문헌> 가. 자료편 천문평, 字說, 與猶堂全書補遺, 경인문화사 영인본 1989. 千字不可讀說, 與猶堂全書補遺, 경인문화사 영인본 1989. 아학편, 與猶堂全書 補遺,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본 아학편, 단국대 도서관 고-357656, 고-357657. 아학편,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아학편, 서울대 규장각, 고-2410-18, 고3820-14. 아학편, 성균관대 존경각. 아학편, 연세대 국학자료원. 아학편, 한양대 도서관. 韓溪遺稿 영인본 아학편 (강경훈 소장본) 丁奎英, 俟菴先生年譜, 1921.12. 나. 편저서 김대현, 다산 천자문, 다섯수레 출판, 1997. 정재영, 다산 정약용의 아학편, 태학사, 2002. 최세진, 訓蒙字會, 동양학연구소 단국대학교 출판부, 1971. 정약용(양광식 편), 다산 이천자 아학편 상 하, 문사고전연구소, 금성정보 출판사, 2008.
118 退溪學論叢 第25輯 다. 논문 고래억, <茶山의 兒學編 에 대한 교육 인간학적 고찰>, 연세대 교육대학 원, 석사논문, 2001. 김영진, 유산 정학연의 생애와 저작에 관한 一考, 다산학 12호, 2008. 김정자, <다산의 아학편 연구>, 한국교원대, 석사논문, 1999. 김진희, < 아학편 연구>, 영남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0. 박영숙, <초학교재로서의 아학편 연구>, 성균관대, 석사논문 1998. 이준환, <지석영 아학편 의 표기 및 음운론적 특징>, 대동문화연구 제83 집, 2013. 전숙현, <다산의 아학편 에 의한 기초한자의 선정과 재구성, 충남대, 석사 논문, 2003. 정순우, <다산 아학편 연구>, 윤사순편, 정약용, 고려대학교출판부, 1990. 정순우, <정약용 교육이론의 경험론적 성격>,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논 문, 1981. 정혜주, <정약용의 아학편 연구>, 부산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6. 황병기, 제경(弟經) 의 체제 분석과 저작자 연구, 다산과 현대, 창간호, 2008. 황병기, 다산 정약용의 문자 분류학과 존재론적 세계구도, 동양철학의 세계, 2005.
다산 정약용의 兒學編訓義 와 문자교육적 가치 119 Abstract AhHakPyeonHunEui of Dasan, Jeong Yak Yong, and literal educational value / Kim, kyung-sun(sunmoon univ)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mpare each manuscript of AhHakPyeon which is a Chinese character textbook published by Dasan, Jeong Yak Yong, and to review its literal educational value. Through discussions of this paper, we find the edition of each manuscript, changes of Chinese characters, changes of meaning of Korean words and phonological variations. It has been known that an 8-final spelling rule was used as the general final spelling rule. However, according to our results, the 7-final spelling rule was used and the syllabication in which stem and ending were clearly used was predominant. In addition, although it did not follow the initial law and the words were written on the basis of original sounds, we found prominent phonological phenomena. Dasan continued to develop the human-centered ontological world view and applied it to a real life of creating a Chinese character textbook as well as metaphysics while he published two thousands letters of AhHakPyeon HunEui. His consistent philosophy was reflected in the view of literal education for children. It built the solid foundation and could provide a framework for compilation of the silhak thought in the late Joseon dynasty by expanding it to silhak thought and empirical educational philosophy. Key words: AhHakPyeon, thousand character classic, 7 final spelling rule, Jeongdaebeon, Cheolmasan, AhHakPyeon, literal education, Zhouyi (The Book of Changes).
退溪學論叢 第25輯(121 139쪽)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슨테츠록(寸鐵錄) 과 명심보감 1)成 목 Ⅰ. 머리말 Ⅱ. 불자에서 주자학자로 변모 海 俊* 차 Ⅲ. 슨테츠록(寸鐵錄) 속의 명심보감 Ⅳ. 맺음말 論文 抄錄 일본인의 사고양식의 여러 요소를 역사적으로 더듬어 보면 고대는 샤머 니즘 등의 문명화 이전의 종교, 중세는 불교, 근세는 유교, 근대는 서구사상 이 주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근세의 주요 사상으로서 주자학을 강조하였 을 경우, 다른 여러 사상은 결락한 구조가 된다. 원래 일본사상의 구조는 유 불도 사상이 조화를 이루면서 수용되었는데, 이들 사상이 통합적으로 고찰 되지 않았던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유불도의 사상이 혼합되어 다양 한 사상문화를 창출한 결정체가 전란을 종식시켜 정치적 경제적 안정기에 들어선 에도시대의 사상이다. 에도시대는 문화예술이 풍부한 시기로 그 문 화예술적 저력은 근 현대의 일본문학예술에 까지 이어졌다. 그 예로서 에 도시대의 유학자 국학자 난학자들은 왕성한 학문적 논의를 하고 합리적인 서양의 근대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당시의 유학은 대표적인 학문이 었고, 지식인들은 주자의 사서학이나 理氣 심성의 철학연구에 이르기까지 * 동명대학교 교수. 논문투고일: 2015.05.25 / 심사개시일: 2015.06.17 / 게재확정일: 2015.06.27
122 退溪學論叢 第25輯 유학학습을 통한 지적문화를 이해 향유했다. 특히 고잔 승려출신의 후지와 라 세이카와 그 제자 하야시 라잔에 의해 근세 일본 주자학의 기초가 만들 어져 막부 관학으로서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는 가운데 주자학의 원조로 불리는 후지와라 세이카와 그 제자 하야 시 라잔, 또 양명학자 국학자 신도가 희곡작가 등이 권선징악의 도리를 논 한 명심보감 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와 같은 점을 중시하여 본 논문에 서는 후지와라 세이카의 슨테츠록 과 명심보감 을 중심으로 한 세이카의 권선서 수용의 특징을 밝혔다. 주제어: 후지와라세이카, 명심보감, 슨테츠록, 유교, 불교, 고잔승려. Ⅰ. 머리말 이 논문은 후지와라 세이카1)의 저작으로 알려진 슨테츠록(寸鐵錄) 과 명심보감 과의 관련성을 고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세 이카의 유학사상에 명심보감 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명심보감 이 슨테츠록 의 내용 속에 녹아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슨테츠록 은 후지와라 세이카집(藤原惺窩集) (上卷)2)에 세이카가 편 찬한 저서 (寬永 5년 간행)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명심보감 은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의 양명학자 국학자 신도가 게사큐샤(희곡작 가) 등에 의해 권선서로서 수용되었다.3) 이 사상가들 중에는 세이카도 포함되는데, 세이카는 일본 주자학의 원조로 불리며, 승려에서 유학자로 사상적 변모를 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세이카의 저서인 슨 테츠록 을 통해 명심보감 이 세이카의 저술과 사상에 미친 영향을 보 다 미시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세이카는 자신이 믿고 몰두한 학문으로 계몽적인 사명을 다한 근세 주 1) 이후 세이카로 약칭한다. 2) 昭和16년, 昭和53년 復刊 思文閣出版. 3) 이에 대해서는 성해준, 동아시아 명심보감 연구 (도서출판문, 2011)를 참조.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슨테츠록(寸鐵錄) 과 명심보감 123 자학의 선구적 역할로 명성이 높았다. 즉 주자를 존숭하는 동시에 육상산 의 학문에도 정통하여 주자의 신주(新注)에 근거하여 처음으로 사서오경 에 훈점을 달아 근세유학의 창시 혹은 일본주자학의 개조로 불리었다. 그 러나 아쉽게도 세이카 자신의 학설을 논한 저술은 별로 없는 편이다. 이 른바 아즈치 모모야마시대 말기에서 에도시대 초기라는 계몽기의 시대상 황 때문인지 단지 슨테츠록 치요모토 쿠사(千代もと草) 문장달덕 강령(文章達徳綱領) 등이 있을 뿐이다. 1593(文禄 2)년에 이에야스(家康)에게 초대되어 에도에서 대학 정 관정요(貞觀政要) 등을 강의하였지만 교토로 돌아간 후에는 오직 사서 주주(四書朱註) 만을 강의했다. 세이카 만년의 유학에 대한 생각을 정리 한 저작으로 자신의 사상적 도달점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되고, 그의 윤리적 실천적 입장을 가장 강하고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는 대학 을 적출(摘出)하여 일본어[和文] 해석을 단 다이가쿠 요랴쿠(大学 要略) 4)가 있다. 그의 문장을 모은 것으로는 세이카선생문집(惺窩先生 文集) 18권이 있다. 그의 저서 슨테츠록 과 다이가쿠 요랴쿠 도 이런 의도로 쓴 저술이다. Ⅱ. 불자에서 주자학자로 변모 1. 세이카의 생애 먼저 불교 승려에서 유학자로 변모한 세이카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간략하게 그의 생애를 밝힌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의 이름은 숙(肅), 자(字)는 염부 (斂夫)이고 세이카(惺窩)는 호이다. 그 외에도 시립자(柴立子), 북육산인 (北肉山人)5), 작목산인(昨木山人), 동해광파자(東海狂波子), 성성자(惺惺 4) 별명은 逐鹿評 이다. 여기에서 록(鹿) 은 유교를 뜻한다. 2권.
124 退溪學論叢 第25輯 子), 묘수(妙壽)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1561(永錄 4)년 현재의 효고현 미키시(兵庫県 三木市 細川町 桃津)인 하리마국 미키군 호소카와무라(播 磨國 三木郡 細河村)에서 시모 레이제이가(下冷泉家)6)에 속하는 쿠게(公 家) 출신, 레이제이 타메즈미(冷泉爲純, 1530-1578)의 3째 아들로 태어났 다. 레이제이가(冷泉家)는 일본 중세 가학(歌學)의 태두 명문으로 후지와 라 사다이에(藤原定家, 1162-1241)의 손자 후지와라 다메스케(藤原爲相, 1263-1328)를 조상으로 하는 가문이다. 가문의 영향으로 세이카는 성장하 면서 국학과 와카(和歌)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게 된다.7) 세이카는 7세 때 입산하여 18세 때 교토 고잔의 소코쿠지(相國寺)로 옮 겨 승려가 된 후 주자학을 공부하여 처음으로 유학자로서 독립하였다. 그 러나 그는 주자학을 기조로 하면서도 육상산(陸象山) 왕양명(王陽明)의 학문도 수용하였다. 또한 한시를 즐겨 읊었고 와카를 즐겼다. 이를 보면, 세이카는 고루일편(固陋一扁)한 주자학자가 아니라 유학 외에 선(禪)과 일본 고전 및 시문도 두루 갖춘 폭넓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모친 사후에 교토에서 성현성리(聖賢性理)의 책에 전념하며 당대 에 선사가 없음을 걱정하여 명나라로 건너갈 뜻을 세운다. 1596(세이카 36세)년 6월 28일 마침내 명나라 행을 결심하고 교토를 출발하여 동큐수 (東九州)를 회항하여 카고시마에 도착하여 야마카와즈(山川津)에서 명나 라로 가는 배를 기다린다. 겨울이 되어 배편을 구하여 출항하였으나 불 행하게도 폭풍으로 큐수 아마미 군도(奄美群島)의 북동부에 위치한 섬인 귀계도(鬼界島)에 표류하였다. 귀계도에 머물면서 도항을 기다렸지만, 도 항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교토로 돌아가게 된다. 교토로 돌아간 뒤에는 5) 현재의 교토시(左京区 静市市原)에 암자를 세우고 스스로 북육산인(北肉山人) 이라는 호를 지었다. 북육(北肉) 은 배자(背) 자를 두개 나눈 것으로 주역 8괘의 간(艮)에서 취하였다. 6) 레이제이가(冷泉家)는 중세 가학(歌學)의 봉두 후지와라 테이까(藤原定家)의 손자 타메아이(爲相)를 개조(開祖)로 하는 저명한 와카의 집안이다. 7) 이하 세이카 관련은 冷泉府書 寸鐵錄, 藤原惺窩集 上卷, 思文閣出版 1951 년 p.359 참조.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슨테츠록(寸鐵錄) 과 명심보감 125 스승이 될 수 있는 성인(聖人)이 없음을 깨닫고 이를 오직 육경(六經)에 서 구하고자 하였다. 세이카가 선원을 나와 유학자 복장을 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 康) 앞에서 신유학을 제창하며 본격적으로 주자학을 지향하게 된 것은 세키가하라(關が原) 전투가 끝난 뒤의 일이다. 세이카의 유학자서로의 인격을 잠시 살펴보면, 조선의 유학자인 강항은 세이카를 고고한 기품과 올곧은 성품을 가진 솔직담백한 은둔 군자와 같은 품격을 가진 학자라 고 표현하였다. 한편 세이카는 코바와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豊臣金 吾, 1582-1602)8)의 난폭함을 꾸중한 적이 있는데, 이는 세이카의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을 나타낸 것으로 위무(威武)에 굴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굳건한 성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유학을 강의는 하였지만 이에야스가 내린 벼슬을 사퇴하고 수제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을 천거 한 것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세이카는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도리로서 임무를 다하고 어두운 난세의 공자 맹자 와 같은 호연지기9)의 기백을 지닌 학자였다. 또한 그는 창문에 붙은 벌 도 죽이지 않았던 불선불인(不善不仁)을 싫어하는 결벽성을 가진 사람이 8)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의 다이묘(大名), 단바카메야마 성주(丹波亀山 城主)로 치쿠젠 나시마(筑前名島) 성주(城主)를 거쳐 히젠 오카야마번주(備前 岡山藩主)가 되었다. 이름은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후에 히데아키 (秀詮)로 개명했다. 어릴 때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가로서 중요시 되었 는데 세키가하라 전투 중에 동군(東軍)으로 변심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게 승리를 안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9) 일찍이 맹자는 어떠한 유혹에도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결연한 의지로 내 가 스스로 돌이켜 보아 옳지 않으면 신분과 나이에 상관없이 고개를 숙이며 상대방이 헐렁한 옷을 입은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두려워할 것이지만, 내가 스스로 돌아보아 옳다면 비록 천만군이 와도 두려움 없이 다가가서 해낼 것 이다.(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不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 孟子 公孫丑 ) 라고 하였다. 이는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올곧은 자 세로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곳에 참다운 용기가 생기고, 이러한 용기가 부동 심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으로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당당함을 강조한 것이다.
126 退溪學論叢 第25輯 기도 하였다. 친구와 사귐에 있어서도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손 쉽게 교제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또 1651(慶安4)년 후 코메이(光明) 천황이 내린 어제성와선생문집서 (御製惺窩先生文集序) 의 근세 북육산인 세이카 선생은 너그러운 인품 과 큰 도량을 지닌 군자이다.(近世有北肉山人惺窩先生者, 寬仁大度之君 子也) 라는 말처럼 세이카는 진정한 학자이자, 독실한 교육자이고, 고고 한 성품을 가진 시인이었다. 또한 도연명과 같이 천진(天眞)과 절개 지 조를 중시하며 술을 즐겨 마셨지만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2. 조선 사절단과의 만남 세이카가 오산 승려에서 불교의 가르침이 인륜을 도외시한다며 불교 를 부정하고 유학자로 변모한 이유는, 먼저 전국무장(戦国武将)과의 정 신적 교류를 들 수 있다. 무장들은 단순한 전사를 넘어 위정자로서의 자 질과 정치적 필요성에 부응하는 사상이 필요했고, 세이카는 이들과의 교 류를 통해 유학사상이 세속 정치에 적합하다는 점을 간파했다. 특히 세 이카의 고향인 하리마국(播磨國)의 성주 아카마츠 히로미치(赤松広通, 1562-1600)10)와의 교제는 각별했다. 세이카보다 4년 아래인 아카마츠는 세이카의 진정한 추종자이자 후원자였고, 세이카는 아카마츠를 통해 무 장들의 정치적 요구를 이해하면서 자신이 이해한 유학사상을 제공하고 자 했다. 이후 세이카는 교토로 돌아와 후시미(伏見)를 틈틈이 찾았는데, 이때 부터 불선(佛善)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유학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그가 주자학으로 전향한 계기는 조선 사상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 10)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으로 에이로쿠(永禄) 5년 생으로 하리마 타츠노 (播磨, 兵庫県 竜野) 성주로 히데요시를 따라 텐쇼(天正) 13년에 타지마(但馬, 兵庫県) 타케성(竹田城) 성주가 된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에게 감복하 여 원조를 하다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온 조선의 유학자 강항(姜沆)을 귀국시켰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슨테츠록(寸鐵錄) 과 명심보감 127 사상계의 영향11)이란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風 臣秀吉)의 명령으로 조선 사절단으로 일본에 온 서장관 허성(許筬 山田, 1548-1612)과의 만남이다. 허성은 퇴계 이황 문하 3걸 중의 한 사람인 유 희춘(柳希春)의 제자이다. 또 같은 해에 퇴계의 문인이기도 한 조선국사 김성일(金誠一, 1538-1593)과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유학, 특히 주자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12) 당시 세이카는 종종 김성일의 숙소인 다이도쿠지 (大德寺)에 가서 필담을 나누고, 시를 주고받았다.13) 이들 조선 사절단과의 만남이 세이카로 하여금 불자에서 주자학자로 변모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이후 주자학자로 변모한 세이카는 1593(세이카 33세)년 에도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위해 제왕의 도리(帝王之道)의 기본서적이라고 하는 정관정요(貞觀政要) 를 강의했다. 또한 빠뜨릴 수없는 것은 세이카가 선승으로서는 처음으로 고잔에 전 해진 유학 불교학을 전수 받았으나 그가 사상적으로 불교나 하카세게 (博士家)와 대립하게 되는 요인은 송 원 및 조선에서 출판된 서적들의 영향이다. 이들 서적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가져간 것이다. 고 잔(五山) 승려가 유학서적을 즐겨 읽고 고잔의 학술에 이미 주자학의 일 면이 존재한 것은 명료한 사실이다.14) 3. 정유재란의 포로 강항과의 만남 임진왜란과 관련한 조선 사절단 허성과 김성일 등과의 만남이 세이카 사상에 변화를 주고, 주자학을 수용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11)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일본 주자학에 끼친 조선 주자학과 사상을 경시하면서 중국에서 직수입한 것으로 보고 중국에 주요한 관심을 기울여 온 경향이 있 다. 이는 일본 유학자의 주체성 문제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12) 藤原惺窩集 上卷 (思文閣出版, 1941년 출판, 1978년 復刊). 13) 김성일로부터 칠언절구 2수와 칠언율시 1수의 응수를 받았다 14) 阿部吉雄 日本朱子學と朝鮮, 東京大學出版會, 1965.
128 退溪學論叢 第25輯 한다면 정유재란의 포로로 일본에 연행된 강항(姜沆, 1567-1618)15)과의 만남은 주자학의 성리설(性理說)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중요한 요 인이 된다. 마침 스승과 벗이 없던 세이카에게 강항과의 만남은 특별하 고 각별한 인연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일본 주자학과 관련하여 강항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세이카와 강항과의 교류는 주고받은 문 서16)에서 확인 할 수가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강항은 세이카를 두고 일본의 유학자 염부(日東儒者斂夫) 로 칭하거나 은거교수(隱居敎授) 라고 칭하면서 일본의 주자학 주창자로 그 공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앞 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유학을 배우기 위해 명나라로 가려고 한 세이 카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세이카는 조선의 주자학자 강항과의 교 유를 통해 그때까지 고잔 승려(五山僧)들 사이에서 교양의 일부였던 유 학을 체계화시켜 경학파(京学派)로서 독립하게 된다.17) 세이카와 강항과의 구체적인 만남은, 1598(慶長3)년 세이카 나이 38세 의 가을이다. 1597년 정유재란의 포로로 일본에 연행되었던 강항을 아카 마츠 히로미치(赤松廣通)의 집에서 만나 교류하게 된다. 당시 강항은 32 세였다. 강항은 세이카를 보고, 일본에 이런 사람이 있음을 기뻐하며 하 루 종일 함께 담론하였다고 하며, 조선은 3백년이래, 세이카와 같은 사 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나는 불행하게 일본에 왔지만, 세이카와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은 다행이다. 라고 말하며 세이카가 거처 하는 곳을 광반와(広胖窩)라고 칭하였다. 또 강항은 일본 사람들은 송 현(宋賢)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는데 염부(斂父, 세이카의 자)가 처음 으로 그 사실을 밝혔으니, 염부가 아니었다면 곧 송현도 없었을 것 이라 15) 惺窩先生行狀 羅山先生文集 ; 藤原惺窩 林羅山 日本思想史大系 28, 岩 波書店, p.190. 강항의 호는 수은(睡隠). 퇴계학파의 주자학자. 정유재란 때 일 족 수십 명과 함께, 도우도우 다카토라(藤堂高虎)의 포로가 되어 후시미(伏 見)에 머물렀다. 마침 아카마츠 히로미치(赤松広通)의 저택이 후시미에 있어 서, 거기에서 세이카는 강항을 만났다.( 藤原惺窩 林羅山, p.378.) 16) 강항이 세이카를 위해 쓴 是尙窩記, 惺齊記 가 있다. 17) 阿部吉雄 日本朱子學と朝鮮, 東京大學出版會, 1965.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슨테츠록(寸鐵錄) 과 명심보감 129 고 했다.18) 오오타 헤이자부로(太田兵三郞)는 강항의 출현은 천래(天來)의 복음 으로 평가했다. 사서오경에 왜훈을 더하고, 문장달덕강령(文章達德綱領) 을 편찬하고자 한 것은 강항의 도움과 격려에 크게 고무된 결과였다. 그 래서 세이카는 강항보다 6세나 연상이었지만, 강항의 시(詩)에 화답하면 서 나의 스승(吾師) 이라고까지 칭했다.19) 이는 세이카가 강항과의 만 남을 계기로 주자학에 경도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며, 강항이 세이카와 아카마츠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는 1600(慶長 5)년 봄까지 약 1년 6개월간 흉금을 터놓는 사이가 된다. 이즈음 세이카의 문도이자 동 조자였던 아카마츠 히로미츠(赤松廣通)는 정유재란 때 연행된 강항을 비 롯한 조선의 포로 10여명에게 사서오경을 정서시키고 세이카에게 청해 서 송유(宋儒)의 뜻에 따라 훈점을 붙였다. 강항은 그 업무를 마무리 지 으면서 세이카의 요청에 따라 케이초(慶長, 1509년) 4년 2월 오경발(五 經跋) 을 작성했다.20) 이와 같이 조선주자학과도 관련을 가지고 많은 수제자를 배출한 세이 카의 얼마 되지 않은 저서 중에 명심보감 이 인용되어 있다. Ⅲ. 슨테츠록(寸鐵錄) 속의 명심보감 1. 2종류의 슨테츠록 이 장에서는 세이카의 저서 슨테츠록 과 명심보감 과의 관련성을 밝히고자 한다. 슨테츠록 과 명심보감 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아직 선행연구에서 언급된 바가 없다. 18) 五經跋, 惺窩藁 續卷3, 惺窩文集. 19) 신현승, 17세기 한 조선 지식인의 일본 인식 : 강항의 간양록 을 중심으로, 일본사상 17,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09. 20) 藤原惺窩集 上卷, 思文閣出版, 1941년 출판, 1978년 復刊.
130 退溪學論叢 第25輯 세이카가 이 책에서 명심보감 이라는 출전을 분명히 한 것도 있지 만, 대부분은 출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명심보감 의 내용이 분명한 문구와 문장 등을 추출하여 슨테츠록 에 명심보감 의 내용이 적지 않게 인용되어 있다는 점을 밝히고, 동시에 세이카 사상의 근저에는 명심보감 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규명하고자 한다. 슨테츠록 은 오랫동안 편찬자가 미상이었으나 후에 제자들의 기록 에 근거하여 세이카의 저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지와라 세이카집 (藤原惺窩集) 상권에 의하면, 세이카가 편찬한 저서 중에 슨테츠록 (寬 永 5년 간행)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먼저 이 책에는 세이카의 수제자 칸 도쿠안(菅得庵, 1581-1628)의 속 세이카 문집서(續惺窩文集序) 에 슨테 츠록 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곧 다음의 내용이다. 슨테츠록은 약간의 종이에 초략해서 초학자의 몽매를 깨우치기 위해 발휘되 어 따로 민간에 유행시켰다.( 顧寸鐵錄, 逐鹿抄若干紙, 爲初學蒙味, 以發揮, 別 行于俗間 )21) 또 세이카의 수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저서로 전해지는 바이손 사이히츠(梅村載筆, 人卷)의 세이카 경서(惺窩經書) 어구를 30여 조를 발췌하여 가나 주를 붙여 작은 책으로 만들어 슨테츠록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현재 슨테츠록 은 2종류가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는 ①1628(寬永 5) 년 간행본 슨테츠록 (상하 2권)이고, 다른 하나는 ②레이제이 자작 집 안 소장(冷泉子爵家所藏)의 슨테츠록 (사본 1권)이다. 먼저, ①관영(寬永) 5년 간행본은 논어 맹자 를 중심으로 사서오경 의 주요 어구 32조(상 13조, 하 9조)를 인용하여 여기에 가나 주 해설을 붙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세이카 자신이나 세이카 문인들의 언급은 없 다. 그러나 하야시 라잔의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21)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集) 上卷 昭和 16년, 昭和53년 復刊 思文閣出版..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슨테츠록(寸鐵錄) 과 명심보감 131 이 해에 선생이 남기(南記)에 가셨는데 태수 아사노 유키나가(淺野幸長)의 초 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함이 더욱 삼가 했고 (중략) 태수를 위해 경서의 중요한 말씀 30조목을 초략하여 현재 사용하는 일본어로 주해를 달아 1권의 작 은 책을 만들었다. 사용하기 편리한 곳에 두고 찾아보게 하였는데, 이는 정치에 마음을 두고, 다스림을 잘 요약하였기 때문에 태수는 매우 기뻐하였다.( 惺窩先 生行狀. 此歲 (慶長 11년) 先生赴南記, 蓋太守淺野幸長招之也, 其所待尤謹 (中 略) 爲太守抄經書要語三十件許, 添倭字之註解, 爲一小冊, 便于寘禇, 備於顧諟, 是爲政之存心, 資治之守約也, 太守甚喜.) 위의 작은 책 한권(爲一小冊) 이라는 말이 바로 슨테츠록 을 가리킨 다고 한다.22) 이 슨테츠록 은 자신을 다스리는 수기부터 사람을 다스리 는 치인에 이르기까지 유교일반적인 것이지만, 치인 쪽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과 같이 행장에 소위 정치에 마음을 두고 다스림에 도움이 되 는 것을 요약하였다(爲政之存心, 資治之守約) 라는 말에 예외는 없다. 그 리하여 행장의 기사를 신빙(信憑)하면 슨테츠록 은 세이카가 1606(慶長 11)년 겨울 키슈 와카야마 번의 태수(紀州太守) 아사노 유키나가(淺野幸 長, 1576-1613)23)의 초빙을 받고 와카야마(和歌山)에 갔을 때 태수(太守)를 위하여 쓴 책이다. 이 슨테츠록 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도 바이손 사 이히츠(梅村載筆)가 언급한 것처럼 선가(禪家)에서 간단한 경구로 사람 의 급소를 찔러 감동시킴의 비유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것을 증자 (曾子)의 수약(守約)을 비유한 학림옥로(鶴林玉露) 24)에 보이는 것이다. 경서(經書)의 주요어구 30조를 발췌하여 소위 촌철살인이라는 주요 의미 로 그 이름에 어울리게 간단명료한 유교의 핵심을 나타내면서 가나 주 22)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集) 上卷 昭和 16년, 昭和53년 復刊 思文閣出版. P.80. 23)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時代)에서 에도시대 초기에 활약한 무장으로 키슈 와카야마번(紀伊国和歌山藩) 즉 키슈번(紀州藩)의 초대 번주. 24) 송나라 나대경(羅大經) 저작의 시화(詩話) 어록(語錄) 소설의 문체로 문인 도학자 산인(山人)의 말을 실어, 주자 장재(張載) 등의 말을 인용하고, 구양 수(歐陽修) 소동파(蘇東坡)의 글을 찬양한 책으로 천 지 ㆍ인의 세 부로 분 류되어 있다.
132 退溪學論叢 第25輯 해설은 주자학에 의거한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려고 한 것이기도 하다. ②또 다른 슨테츠록 (사본1권)으로 레이제이자작 소장(冷泉子爵家所 藏) 승형(枡型)의 소책자로 편자명은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레이제이가 (冷泉家)에서 세이카의 것으로 전해오는 것이다. 그 내용은 경서를 비롯 하여 광범위하게 노자 장자 불교사상에 걸쳐 있는 점으로부터 세 이카의 학식 상식과도 통한다. 구체적으로는 사서오경으로부터 주요 어 구 약 220조(O표시38조)를 발췌하여 훈독을 달았지만 특별한 규칙이나 순서 없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수기에서 치인에 이르는 유교일반의 주요어구를 교훈적으로 기록하였다. 명기한 인용서적 혹은 문장으로 맹자 중용 사기 감철론(監 鐵論) 문선(文選) 고문진보(古文眞寶) 한서(漢書) 제범(帝範) 명심보감 포박자 황산곡(黃山谷)의 시 좌전(左傳) 공자가어 백씨문집(白氏文集), 효경주(孝經註) 상서(尙書) 학림옥로(鶴林玉 露) 한퇴지(韓退之)의 문 장자 몽창국사(夢窓國師)의 시가 대은장산 (大隱藏山) 등 다수가 있다. 이로 인하여 슨테츠록 은 경서를 주로 인용 하고 있으나, 그 중심은 유교사상의 고취가 주요목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2종류의 슨테츠록 에는 명심보감 과 관련한 내용이 다수 포함 되어 있다. 먼저 관영(寬永) 5년 간행본 슨테츠록 (상하 2권) 속에 담긴 명심보감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관영(寬永) 5년 간행 슨테츠록 (상하 2권) ①공자가 말하길,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 그 선한 것을 택하여 따르고, 그 불선한 것은 고친다.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정기편 23조의 내용과 같다. ②공자가 말하길, 자신의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하고, 그 몸이 바 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을 하여도 따르지 않는다. (子曰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슨테츠록(寸鐵錄) 과 명심보감 133 正, 雖令不從.)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치정편 14조의 내용과 같다. ③공자가 말하길, 군자는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으며, 수고하되 원망하 지 않으며, 하고자 하면서도 욕심내지 않으며, 태연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느니라.(子曰君子惠而不費, 勞而不怨, 欲而不貪, 泰 而不驕, 威而不猛.)25)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치정편 19조의 내용과 같다.26) 먼저 논어 술이편(述而第七) 의 이야기로 세 사람이 함께 하여 스 승이 될 만한 사람은 택하여 따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것을 고친다는 이야기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스승이 될 수 있고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논하고 있다. 한편 학이편(學而第一) 에서는 자신보 다 못한 자를 친구로 사귀지 말라는 글귀도 있다.(無友不如己者) 이는 나 쁜 사람과 친구로 하지 말고 좋은 사람을 골라서 친구로 삼아라는 의미 로 누구와도 사귀되 착한 사람을 본보기로 하며 따라 배우고 나쁜 사람 은 따라 배우지 말고 고쳐 라는 현실적인 의미이기도하다.27) 여기에서는 모두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군자는 은혜를 베풀되 낭비 하지 않고, 힘들어 수고로워도 원망을 하지 않으며, 태연히 하되 교만하 지 않으며, 위엄 있게 하되 사납게 하지는 않는다. 는 말처럼 스스로 선 을 택하여 따르고 불선을 고쳐나가는 난초의 향기와 같은 은은한 군자 25) 인용문 ①②③은 冷泉府書 寸鉄錄, 藤原惺窩集 上巻 思文閣出版, 1951) p.377, p.340에 나오는 내용이다. 26) 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子張曰, 何謂惠而不費? 子曰, 因民之所利而利 之, 斯不亦惠而不費乎? 擇可勞而勞之, 又誰怨? 欲仁而得仁, 又焉貪? 君子無衆 寡, 無小大, 無敢慢, 斯不亦泰而不驕乎? 君子正其衣冠, 尊其瞻視, 儼然人望而 畏之, 斯不亦威而不猛乎? 子張曰, 何謂四惡? 子曰, 不敎而殺謂之虐, 不戒 視成謂之暴, 慢令致期謂之賊, 猶之與人也, 出納之吝謂之有司. (堯曰第二十). 27) 친구를 사귐에는 모름지기 자신보다 나은 자를 하고. 자신과 비슷한 자는 없 느니만 못하다는 관련 의미는 다른 서적에서도 많이 보인다. 結朋須勝己, 似 己不如無.( 事林廣記 前集 9). 結朋須勝己, 似我不如無.(休靜, 儒家龜鑑 ).
134 退溪學論叢 第25輯 의 도를 논하고 있다. 즉 자신의 올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으로 겸손 근 검한 생활 속에서 타인을 위하여 은혜를 베푸는 모범을 보이는 지도자 는 비록 명령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항상 교만 원망 탐욕 사나운 마음을 경계하며 자신을 바르게 하는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명심보감 본문의 자기를 바로 잡는 길을 지시한 정기편 관 련 내용과 정치자세에 관한 치정편 관련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다음은 ②레이제이 자작 집안 소장(冷泉子爵家所藏)의 슨테츠록 (사 본 1권)의 명심보감 관련이다. 3. 레이제이 자작 집안 소장(冷泉子爵家所藏)의 슨테츠록 (사본 1권)28) 레이제이 자작 집안 소장(冷泉子爵家所藏)의 슨테츠록 에는 다음과 같은 명심보감 인용 내용이 있다. 언행의 책임성과 신의의 중요성 ①공자가 말하기를, 공교로운 말은 덕을 어지럽히고,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어지럽힌다. (子曰巧言亂德. 小不忍, 則亂大謀.)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존심편 69조의 내용과 같다. ②공자가 말하길,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더라도 반드시 살펴야 하며, 많은 사 람들이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야 한다.(子曰衆惡之必察焉. 衆好之必察焉.)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정기편 66조의 내용과 같다. ③범을 그리되 가죽은 그릴 수 있으나 뼈는 그리기 어렵고, 사람을 알되 얼 굴은 알 수 있으나 그 속마음은 알기 어렵다. 이것은 명심보감 의 내용이다. (畵虎畵皮難畵骨. 知人知面不知心. 明心寶鑑)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성심편 39조의 내용과 같다. 특히 여기에는 명심보감 의 서적명을 명시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28) 冷泉府書 寸鉄錄, 藤原惺窩集 上巻, 思文閣出版, 1951. p.81.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슨테츠록(寸鐵錄) 과 명심보감 135 ④노자가 말했다.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 것은, 수레에 바퀴가 있는 것과 같다. (老子曰, 人之有信, 如車有輪.)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존심편 2조의 내용과 같다. ⑤말이 진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행실이 독실하고 공손하면 비록 오랑캐의 나라에 가더라도 행세할 수 있으나 말이 진실하지 못하고 신의가 없으며, 행실 이 독실하지 못하고 공손하지 못하다면 자신이 사는 고을이나 고향에서라도 어찌 행세할 수가 없다.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行乎哉.)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치정편 15조의 내용과 같다. ⑥시비가 종일토록 있을지라도 듣지 않으면 저절로 없어지느니라.(是非終日 有, 不聽自然無.)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성심편 65조의 내용과 같다. 여기서는 불필요한 언행으로 덕을 어지럽히며(巧言令色, 鮮矣仁) 믿음 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역설하고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 더라도 반드시 살펴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 (衆惡之, 必察焉, 衆好之, 必察焉)타인의 미사여구(美辭麗句)에 부화뇌동 (附和雷同)하여 시비의 번뇌를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논하고 있다. 특히 공자의 군자는 말로만 사람을 천거하지도 않고 폐하지도 않는다 (君子不以言擧人, 不以人廢言. 衛靈公第十五 )는 말처럼 사람의 말만 듣 고 좋고 괜찮다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겉을 장식하는 일은 예나 지 금이나 변함없이 존재하므로 군자는 모름지기 그 더불어 처하는 바를 삼가(君子必愼其所與處者焉)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 것과 같이 생활상의 언행의 조심과 인내, 신실한 행실, 신의 생활의 중요성을 역설 하고 있다. 선행의 정의와 효행 ⑦공자가 말하길, 부유함과 존귀함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하 지 않은 수단으로 얻은 부유함과 존귀함은 받아들여선 안 된다. 가난함과 비천 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다. 그러나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는 이를 벗어
136 退溪學論叢 第25輯 날 수 없다.(子曰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是人之所 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29)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안분편 8조의 내용과 같다. ⑧공자가 말하길, 나무가 먹줄을 받으면 곧아지고, 사람이 간언을 받아들이 면 성인과 가까워진다.(子曰木受繩則直, 人受諫則聖.)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성심편 189조의 내용과 같다. ⑨공자가 말하길, 사람에게 먼 걱정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 (子曰人無遠慮, 必有近憂.)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성심편 169조의 내용과 같다. ⑩공자가 말하길,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 손하며, 신중히 행동하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 까이 해야 한다. 이렇게 행하고도 남는 힘이 있으면 곧 글을 배워라. (子曰弟子 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근학편 21조의 내용과 같다. ⑪태공이 말하기를, 선을 보면 목마른 듯이하고, 악을 들으면 귀머거리 같이 해라. (太公曰見善如渴. 聞惡如聾.)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계선편 18조의 내용과 같다. ⑫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고,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 (貧而無怨難, 富而無驕易.)30) 이 내용은 명심보감 의 존심편 13조의 내용과 같다. 부유와 존귀는 누구나가 바라는 바이지만 정당한 수단으로 취하고, 가난은 누구나가 싫어하지만 정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벗어나려고 하지 29) 이미 공자는 일찍이 윤리와 도덕에 맞지 않는 방법으로 돈을 벌고 사치하는 생활은 뜬 구름과 같다.(子曰,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述而第七 )고 하며 도리에 어긋나는 재물을 부정적으로 간주하였다. 30) 인용문 ①에서 ⑫는 冷泉府書 寸鉄錄, 藤原惺窩集 上巻 思文閣出版, 1951) pp.355-376에 나오는 내용이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슨테츠록(寸鐵錄) 과 명심보감 137 마라 는 것처럼 여기서는 부정한 방법의 부귀와 탐욕을 경계하며 항상 먼 미래를 생각하며 현 생활의 계획을 설계하며 안에서는 효도와 밖에 서는 공손으로 대하여야 하는 인생의 깊은 안목과 효행 선행이 동반된 인의(仁義)를 역설하고 있다. 레이제이 자작 집안 소장(冷泉子爵家所藏) 슨테츠록(寸鐵錄), (寫本 1卷) 에서는 유학의 기본적인 도리를 논한 것으로 믿음과 신의, 신중, 인 내, 정직과 정의의 선 추구를 권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군자의 도리로 말조심과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화내지 말고 인내하며 알기 어려운 타인의 속마음을 찰지하면서 덕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신중하고 조심스 럽게, 시비에 연류 되지 말 것을 논하고 있다. 특히 믿음은 수레바퀴와 같으므로 언행이 신의가 있고 독실해야 하며 믿음과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 오랑캐의 나라에서라 할지라도 타인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고 먼 미래를 생각하면서 교만과 악을 경계하며 항상 공손하고 효 도하는 마음으로 선행을 실천할 것을 논하고 있다. Ⅳ 맺음말 다소의 논란과 작자 미상이던 슨테츠록 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저 술로 굳혀졌다. 이 슨테츠록 은 자신을 다스리는 수기에서 다른 사람 을 다스리는 치인에 이르기까지 유교 일반을 논하는 내용으로 다채롭 다. 인용문 중에는 명심보감 에서 가져왔다는 점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또한 세이카가 직접 출전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 만, 본고를 통해 밝혀진 많은 명심보감 내용의 인용은 슨테츠록 이 유교사상, 그 중에서도 생활 실천적 사상 고취가 목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본고에서 규명하고자 했던 세이카의 저서 슨테츠록 에 명심보감 의 사상이 다양하게 퍼져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이카는 일본 에도시대 전기 유학의 창시 혹은 주자학의 개조(開祖)
138 退溪學論叢 第25輯 로 불리었는데 그의 저술인 슨테츠록 에 명심보감 의 내용이 언급되 었다는 것은 세이카의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이른바 유학에 관 심을 둔 학자들에게도 명심보감 이 중요한 서적으로 널리 읽혀진 단서 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저술은 실제 그 후, 에도시대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주요 지식인들에게 읽혀져 지식인들이 편찬 한 서적에 명심보감 의 조문이 인용되어 있다. 그러한 점에서도 슨테 츠록 과 명심보감 과의 관계는 에도시대의 정치사회 및 민중 교육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이후의 인용 서적의 사상을 이해 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参考 文獻> 신현승, 17세기 한 조선 지식인의 일본 인식 ( 일본사상 17, 한국일본사상 사학회, 2009) 성해준, 동아시아 명심보감 연구 (도서출판문, 2011) 冷泉府書 寸鉄録 藤原惺窩集 上巻(思文閣出版 1951) 阿部吉雄 日本朱子学と朝鮮 (東京大学出版会 1964) 前田金五郎 浮世物語 雑考 ( 国語国文 34 1965) 石田一良 金谷治編 藤原惺窩 林羅山 (日本思想大系28 1975) 西尾賢隆 室町幕府外交における五山僧 ( 日本歴史 吉川弘文館 1993) 成海俊 明心宝鑑 が日本文学に与えた影響( 日本思想史研究, 27号 1995) 前田勉 近世日本の儒学と兵学 (ぺりかん社 1996) 佐藤弘夫 死者のゆくえ (岩田書店 2008) 疋田 啓佑 儒者 日本人を啓蒙した知の巨人たち (致知出版者 2013)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의 슨테츠록(寸鐵錄) 과 명심보감 139 <日文 摘要> 藤原惺窩の 寸鐵錄 と 明心寶鑑 / 成 海 俊 日本人の思考樣式の諸要素を歷史的に遡っていくと 古代はシャマニズムなど の文明化の以前の宗敎 中世は佛敎 近世は儒敎 近代は西歐思想が主を なした その中で 近世の主な思想として朱子學を强調した場合 他のいろいろ な思想は欠けた構圖になる 元來 日本の思想の構図は 儒彿道などが調和を なしながら受容されたが これらの思想が統合的に考察されなかった事も大きい理 由の一つである 儒佛神が入り混ぜ 多樣な思想文化を創出した結晶體が 戰亂を終熄さ せ 政治的 經濟的安定期に入った江戸時代の思想である 江戸時代は 文 化芸術が豊かな時期として その文化藝術的の底力は 近 現代の日本文學 藝術にまで続いた その例として 江戸時代の儒學者 國學者 蘭學者たちは 旺盛な學問的議論をし 合理的な西洋の近代科學を積極的に受容した 當時 の儒學は 代表的な思想學問となったが 知識人は朱子の四書學や理氣心性 の哲学研究に至るまで儒学学習を通した知的文化を理解し 享受した 特に 五山出身の藤原惺窩とその弟子である林羅山により 近世日本朱子學の基礎が 作られ 幕府の官学として 絶頂期を迎えるようになる このような多様な思想を受 容する中で 朱子學の祖と呼ばれる藤原惺窩とその弟子林羅山 また陽明學者 國學者 神道家 戱曲作家などが勸善懲惡の道理を論じた 明心寶鑑 を積 極的に受容した このような点を重視し ここでは藤原惺窩の 寸鐵錄 と 明心寶 鑑 を中心とした惺窩の勸善書受容を特徴を明らかいしようとした 主題語: 藤原惺窩, 明心宝鑑, 寸鐵錄, 儒教 仏教 五山僧.
退溪學論叢 第25輯(141 162쪽) 東還封事 에서 본 朝天日記 의 특성 연구 1)장 목 Ⅰ. 머리말 Ⅱ. 조헌의 사행 전후 의식 변화 Ⅲ. 조천일기 와 선조 7년 조헌의 중국 체험 안 영* 차 1. 성리학 정통성 확보 2. 유교의식의 생활화 3. 체계적인 문물제도 Ⅳ. 맺음말 論文 抄錄 본고는 조헌이 어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행에 참여했는지 알아보고, 아울러 동환봉사 에서 본 조천일기 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조헌은 1574년(선조7)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 서장관 허봉(許篈) 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파견된다. 선조 7년 5월11일부터 11월3일까 지 약 5개월간의 사행으로,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러나 조천일기 는 9월 14일 영평부에서 기록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조헌은 5월부터 9월까지의 일 기를 바탕으로 노정 속에서 본 견문 대신 선조에게 올릴 동환봉사 의 8조 소인 질정관회환선상팔조소(質正官回還後先上八條疏) 를 작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헌이 사행에서 맡게 된 질정관의 임무는 승문원에서 중국 문서에 쓰인 불명확한 한자를 초록하여 주면 정훈(正訓)과 정음(正音)을 파악해 오는 것 이었다. 조헌 역시 사행 전 조정으로부터 질정할 사항들을 부여받았다. 그는 * 선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논문투고일: 2015.06.10 / 심사개시일: 2015.06.17 / 게재확정일: 2015.06.27
142 退溪學論叢 第25輯 질정할 사목 20조의 뜻이 사성통해(四聲通解) 범위를 벗어나지 못해, 사행 전 그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임무는 여기에 그치 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로 인해 명나라에 가 서 조선과 관련된 정치 현실을 파악하여 최대한 확보하려는 마음가짐을 가 진다. 특히 조선에서 불교와 유교간의 불안정한 모습을 보고 성리학의 근본 인 명나라에 가서 직접 관찰하며 근거를 제시하는 실천 방안을 강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실제로 유교 의식이 보이는 명나라의 문묘 배향이나 예의와 풍습, 체계적인 제도에 관심을 두어 관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조천일기 의 내용 안에는 동환봉사 에 수록된 개혁안과 직간접 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헌의 중국 체험은 이러한 목적의 식으로 시작하여 조천일기 에서 구현되었고, 결국 동환봉사 의 결과물로 써 나타나게 된 것이다. 주제어: 중봉, 조헌, 질정관, 동환봉사, 조천일기, 성리학. Ⅰ. 머리말 근래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조선시대의 사행기록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진행된 연구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18세기 전후에 쓰여진 작품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6세기와 그 이전시기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연행록에 비해 소략하다. 16세기 사행기록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 있는데, 그것은 조헌(趙憲, 1544-1592)의 조천일기(朝天日記) 이다. 조천일기 는 1574년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 서장관 허봉(許 篈)의 질정관(質正官)으로 파견된 조헌의 기행문이다. 그러나 조헌의 조 천일기 보다 먼저 간행된 것은 명나라를 다녀온 후에 기록한 동환봉 사(東還封事) 이다. 동환봉사 는 같은 해에 작성한 문집으로, 명의 여러 문물제도를 본받아 조선의 국정을 개혁하자는 취지의 상소문이다. 동 환봉사 를 보면 두 부분의 상소로 나뉘어 있는데, 하나는 사행에서 돌아
東還封事 에서 본 朝天日記 의 특성 연구 143 오자마자 먼저 올린 8조의 소(疏)인 질정관회환후선상팔조소(質正官回 還後先上八條疏) 이다. 이 8조 소는 선조께 올려졌으나 풍기와 습속이 다른 점을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행하려 한다면 해괴한 습속이 되고 말 것 이라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 하나는 준비해 두었던 의상십 육조소(擬上十六條疏) 인데, 다듬어지기는 같은 해 11월이었으나 위와 같은 사정 때문에 미처 올리지는 못했다. 이와 같이 동환봉사 는 조헌이 당시 국정 개혁안을 제시한 선구자이 면서 그의 사상이 담긴 중요한 상소문으로 존재되어 현재까지도 많은 연구가 되어왔다.1) 반면에 조천일기 는 조광한(趙匡漢, 1646-?), 민진원 (閔鎭遠, 1664-1736) 등이 몇 번 간행하고자 하였지만 이뤄지지 못하다가, 100여 년이 지난 영조 24년(1748)에 간행되었다. 조천일기 가 뒤늦게 세 상에 알려졌지만 현재까지 많은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 지금까지의 조천일기 에 대한 연구는 김지현, 조헌(趙憲)의 조천 일기(朝天日記) 에 대한 소고, 온지논총 40집, 온지학회, 2014 로 한편 에 지나지 않는다. 이 연구에서는 조천일기 의 체제와 조헌이 명나라를 바라보는 시선에 중심을 두어 서술되었는데, 본고에서는 동환봉사 와 조천일기 를 표리관계에 놓고 살펴보고자 한다. 동환봉사 가 목적을 가진 공식적 보고서였다면, 조천일기 는 동환봉사 를 쓰기까지의 과 정 기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환봉사 를 작성하기 전 단계였던 조천일기 에는 조헌의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이 남아있는 것이다. 실제로 조천일기 의 내용 안에는 동환봉사 의 질정관회환후선상팔 조소 에 수록된 개혁안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보인다. 동환봉사 가 중요한 상소문이 된 만큼, 조헌이 동환봉사 를 기록하 1) 동환봉사 에 대한 논의는 이상익, 동환봉사(東還封事) 를 통해 본 중봉조 헌(重峯趙憲)의 개혁사상(改革思想), 동양문화연구 10집, 영산대학교 동양 문화연구원, 2012 ; 김인규, 重峰 趙憲 改革思想의 실학적 특성, 동양철학 연구 41집, 동양철학연구회, 2005 ; 주용성, 栗谷 李珥와 重峯 趙憲의 改革 論 比較: 萬言封事 와 東還封事 를 중심으로, 간재학논총 13집, 간재학 회, 2012 등 연구되었다.
144 退溪學論叢 第25輯 기 전에 어떠한 체험과 목적이 있었는지 조천일기 를 통해 알 수 있 을 것이다. Ⅱ. 조헌의 사행 전후 의식 변화 조헌은 1574년(선조7)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 서장관 허봉(許 篈)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파견된다. 선조 7년 5월11일부터 11 월3일까지 약 5개월간의 사행으로, 그의 나이 31세였다. 이 사절(使節)은 당시 12세에 달한 만력제(萬曆帝)의 탄생 축하를 위해 조선국왕이 파견 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명나라 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성절사를 파견하는 것이 매년 통례였기 때문이다. 조헌은 1574년(선조7) 11월에 귀국하자마자 8조 소인 질정관회환후선 상팔조소 를 선조께 바쳤다. 그 조항은 성묘의 배향(聖廟配享)ㆍ내외의 서관(內外庶官)ㆍ귀천의 의관(貴賤衣冠)ㆍ식품과 연음(食品宴飮)ㆍ사부의 읍양(士夫揖讓)ㆍ사생의 접례(師生接禮)ㆍ향려의 습속(鄕閭習俗)ㆍ군사의 기율(軍師紀律) 이다. 이러한 조헌의 의식을 담은 조목은 언제부터 비롯 된 것일까. 먼저 조헌이 질정관으로써 선발되었던 배경을 간략히 알아보 도록 하겠다. 질정관 선발에 대해 새로운 제안은 중국어와 이문(吏文)에서 당대의 제1인자였던 이창신(李昌臣, 1449-?)에게서 비롯된 듯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강관(侍講官) 이창신(李昌臣)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갔다 가 들으니, 전 진사(進士) 소규(邵奎)는 어버이가 늙어서 요동(遼東)에 산다 하여 돌아올 때에 방문하였는데,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자훈(字訓)에 정밀하였습니 다. 세종조(世宗朝)에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등을 보내어 요동에 가서 황찬(黃瓚)에게 어음(語音)과 자훈(字訓)을 질정(質正)하게 하여 홍무정운(洪武正 韻) 과 사성통고(四聲通考) 등의 책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에 힘입어서 한훈(漢訓)을 대강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름지기 나이가 젊고 글
東還封事 에서 본 朝天日記 의 특성 연구 145 에 능한 신종호(申從濩)와 같은 무리를 택하여 소규(邵奎)에게 가서 자훈(字訓)의 서적을 질정(質正)하게 하면 이로움이 있을 듯합니다. 다만 정조(正朝)와 명절(名 節)의 행차 때에는 사람과 말의 수가 많아서 오래 머무를 수 없으나, 중국 사람 을 풀어서 보낼 때에 들여보내면 오래 머물면서 질정할 수 있습니다. 하므로, 임 금이 좌우(左右)에게 물으니, 모두 아뢰기를, 문신(文臣)을 보내어 질정하는 것은 조종조(祖宗朝)의 옛일이므로 지금 행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다.2) 전대부터 지속되어 온 정음(正音) 의 작업이 이와 같은 질정의 제도를 통해 가능했으며 질정관의 임무를 수행할 사람으로 젊고 글에 능한 사 람을 선발해야 한다고 주청하고 있다. 1574년 조헌이 사행을 다녀온 같은 해 선조실록(宣祖實錄) 의 기록에 는 질정관을 선발했던 내용이 보인다. 그 내용은 국조(國朝)에서 연경 (燕京)에 가는 사행(使行)에 으레 질정관(質正官)을 보내어 중조(中朝)에 화훈(華訓)을 질문하였는데, 그 사람은 반드시 박문(博文) 상아(詳雅)한 선비로 충원하였다 라고 했다.3) 또한 1574년 유희춘(柳希春, 1513-1577) 이 석강(夕講)에서 당시 교서관 중에 오직 조헌만이 강목(綱目) 을 교 정할 수 있다 고 말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조헌의 학문적 수준을 짐작할 수가 있다.4) 통문관지 에는 질정관에 대해 홍문관 사헌부 의 정부 6조 등의 재능 있는 당하관이 선발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조정에 2) 성종실록 18년(1487) 2월 2일. 御經筵. 講訖, 侍講官李昌臣啓曰, 臣曾以聖節 使質正官赴京, 聞前進士邵奎以親老居遼東, 回來時尋問之, 該通經史, 精審字 訓矣. 世宗朝遣申叔舟, 成三問等到遼東, 就黃瓚質正語音字訓, 成 洪武正韻 及 四聲通考 等書. 故我國之人, 賴之粗知漢訓矣. 今須擇年少能文如申從濩輩, 往就邵奎質正字訓書籍, 則似有利益. 但正朝節日之行, 人馬數多, 不可久留; 如 唐人解送時入送, 則可以久留質正矣. 上問左右, 僉啓曰: 遣文臣質正, 祖宗朝 古事, 今可行也. 3) 선조실록 7년(1574) 11월 1일. 國朝於朝燕使行, 例送質正官, 質問華訓于中 朝, 必以博文詳雅之士充之. 4) 선조실록 7년(1574) 12월 1일. 校書館員, 學識淺短, 文籍亦少, 不足以校正. 請令玉堂入番官員, 據 訓義綱目 爲校正焉, 臣及校書館著作趙憲, 俟 朱子大全 畢校後, 明年間, 亦得校正 綱目, 校書館中唯趙憲可校書.
146 退溪學論叢 第25輯 서는 젊으면서 학문적 재능에 뛰어난 인물로서 조헌을 질정관의 역임자 로 선발했던 것이다. 조헌이 사행에서 맡게 된 질정관의 임무는 승문원에서 중국 문서에 쓰인 불명확한 한자를 초록하여 주면 정훈(正訓)과 정음(正音)을 파악해 오는 것이었다.5) 실제로 성종 즉위 초반기(1477) 성종실록(成宗實錄) 에 세종의 명을 받아 신숙주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이 요동에 와 있던 중 국 음운학자 황찬(黃粲)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다.6) 이 때 요동 에 간 학사들은 신숙주를 포함하여 모두 네 명이다. 이들이 찾아 간 목 적은 정음(正音)의 탐구 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조헌 역시 사행 전 조정으로부터 질정할 사항들을 부여받았다.7) 동 환봉사 의 서문에 보면, 조헌이 상소문을 작성한 동기가 보인다. 그는 사행 전 황주(黃州) 역관에게 사성통해(四聲通解) 책을 빌려 보았다. 살펴보니, 질정할 사목 20조의 뜻이 사성통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해, 사행 전에 그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조헌은 조정에서 부여받은 질정 사목을 길에서 만난 왕지부(王之符)에게 물어보지만 질정하러 온 일이 고작 이 일 때문이오? 이 같은 일들은 방술지사(方術之士)가 아니 라도 알 수가 있는 것이오. 굳이 꼭 듣고 싶어 한다면 성문(聖門)에 있어 서는 완물상지(玩物喪志)가 되고 우리 유자(儒者)에게 있어서는 많이 아 는 소인[博學小人]이 되오. 라는 대답을 듣고서, 질정관의 임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랜 치안의 법술을 상세히 궁 5) 국역 통문관지 권3 에도 질정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승문원에 명하여 이어(吏語)와 방언(方言) 중 해독할 수 없는 것을 베껴주어 서반(序班)에게 물 어 주석(註釋)을 받아가지고 오게 하였다. 6) 세종실록 27년(1445) 1월 7일. 집현전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와 성 균관 주부(注簿) 성삼문(成三問)과 행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遣集賢殿副修撰申叔舟, 成均注簿 成三問, 行司勇孫壽山于遼東, 質問韻書.) 7) 조헌, 중봉집(重峯集) 권12, 조천일기 에 부여받은 질정 사항인 質正錄 이 있다.
東還封事 에서 본 朝天日記 의 특성 연구 147 구하여, 이 땅의 백성을 태평하게 하고자 동환봉사 를 작성하였다고 한 다.8) 조헌이 부여받은 질정관의 임무는 중국에 가서 질정 사목을 파악해 오는 것이었지만, 그는 사행 전 이미 그 뜻을 알아버렸다. 이로 인해, 자 신의 임무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 졌다. 1565년 그의 나이 22세에 성균관을 진학했다. 당시 문정왕후(文定王后) 는 불교에 심취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동안 승려 보우(普雨)를 봉은사(奉恩寺)에 두면서 친 불교정책을 펴 나아갔다. 이에 성균관 유생 들이 보우의 불교 진흥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리자 조헌도 이에 참 가함으로써 정치적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건국 초기에는 불교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세종과 성종을 거치면서 성리학이 뿌리를 내리고 있 었던 것이다. 이러한 풍토에서 친 불교정책은 유생들에게 반감을 살 수 밖에 없었다. 1572년 29세가 되던 해, 그는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子)에 임명되어 옛 관례에 따라 궁중 향실(香室)의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아직 고려의 불교 식 사상이 남아 있어서 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하더라도 성리학이 곧바로 정치이념으로 작동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9) 그 해 6월 교서관(校 書館)에서는 궁중의 불공(佛供)을 드리기 위한 향과 자수궁(慈壽宮) 성숙 청(星宿廳)에 바칠 향을 조헌에게 친히 봉하게 하는 일을 맡겼다. 이 모 8) 조헌, 東還封事序, 臣憲謹再拜上言, 臣頃於西行之時, 借得四聲通解於黃州 譯官, 已知質正事二十條之意, 至玉河館, 不能出入, 只令通事因人請質, 則所釋 之言, 不外乎四聲通解, 臣竊愧素餐而無補於國家, 方以爲懼. 道遇士人王之符, 擧以質之, 則略設三事而哂之曰, 質正之來, 只爲此事乎, 若此數物, 除是方術之 士, 乃能盡知, 而必欲强聞, 則在聖門爲玩物喪志, 於吾儒爲慱學小人. 臣切愧斯 言, 因思祖宗之朝所以必遣質正而不已者, 豈非以華人之指爲小中華者, 實以能 明禮義, 而國家之名館以慕華, 太平者, 必欲詳究夫明王聖帝大公至正之制, 長 治久安之術, 以措一區之民於大平之域也, 非爲外誇乎華人之譫視而設也. 故寧 勞馹路之殘卒, 而冀聞斯今之善政, 將大爲祛弊興化之本乎. 9) 구지현, 對明使行과 對日使行에 보이는 異端 論爭의 樣相, 南冥學硏究 제 43집,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2014, 232쪽 참조
148 退溪學論叢 第25輯 습을 보고 조헌은 궁중의 향실(香室)에서 봉향(封香)하는 관행을 폐지해 야 된다고 생각하다가 임금께 논향축소(論香祝疏) 를 올렸다. 입으로 는 성현의 저서를 읽고, 몸으로는 부처에게 불공드리는 일을 행한다면 신(臣)은 차마하지 못하겠습니다(而口讀聖賢之書, 手封供佛之香, 臣之所 不忍也.) 라고까지 했지만 조정을 경멸하고 폄하(貶下)했다며 조헌의 상 소는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학생 때나 지금이나 조선의 불교에 대해 탄압하는 모습에서 보이듯 이, 조헌은 명나라에 가서도 조선과 관련된 정치 현실을 파악하여 최대 한 확보하려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특히 당시 조선에서 유교를 숭상하면 서도 몸으로는 불공드리는 모습을 보고, 성리학의 근본인 명나라에 가서 직접 관찰하며 입지를 세울만한 실천 방안을 강구하고자 했다. 동환봉사 의 발문을 작성한 안방준(安邦俊)의 기록에도 조헌의 뜻은 명조의 제도를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소급시켜 하은주(夏 殷周) 3대의 치(治)를 회복하는 것에 있었다 10) 라고 말했다. 조헌의 뜻은 단지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은주(夏殷周) 시대와 같 은 유교적 이념 아래 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명나라가 결코 완전체 가 아니라는 사실이 간파되고 있다. 이처럼 조헌의 중국 사행은 중요한 정치적 현안을 가지고 시작한 공적인 여정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성리학 의 본고장인 명나라의 문화를 체험하는 기회였다. 이상향으로서의 중국 과 현실의 중국에 대한 치열한 모색은 조헌을 통해 조천일기 로 구체 화된 것으로 보인다. Ⅲ. 조천일기 와 선조 7년 조헌의 중국 체험 조헌의 사행은 5월 11일부터 11월 3일까지였다. 그러나 조천일기 는 10) 조헌, 東還封事跋, 竊觀先生之志, 不上於效行明制, 將欲因此推而上之, 挽回 三代之治.
東還封事 에서 본 朝天日記 의 특성 연구 149 9월 14일 영평부에서 기록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조헌은 5월부터 9월까 지의 일기를 바탕으로 노정 속에서 본 견문 대신 선조에게 올릴 질정 관회환선상팔조소 를 작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천일기 의 내용 중에는 동환봉사 에 수록된 개혁안과 직간접적 으로 연결된 기록이 보인다. 이것으로 보면, 조헌은 질정관의 임무를 넘 어서 어떠한 개인적인 포부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행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성리학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여 본고장인 명나 라에 가서 직접 체험하며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는 사행 전부터 동환봉사 를 작성할 목적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동환봉사 의 내용이 조천일기 에서 어떻게 구 현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성리학 정통성 확보 조천일기 에는 문묘 종사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 시 조선은 성리학이 국가 이념으로 된 만큼 숭상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에서는 성리학의 반동인 양명학(陽明學)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조헌이 사행을 떠나기 전해인 1573년 1월에는 하등극사(賀登極使) 박순(朴淳)을 통해 왕수인(王守仁)을 문묘에 종사한다는 명나라의 소식이 전해졌다.11) 문묘에 대해 논의가 끊임없이 상소되어 가는 분위기에 조헌 또한 관심 을 갖게 된다. 조헌과 함께 했던 서장관 허봉도 마찬가지로 명에 가기 전에 이미 양명학이 흥기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만나 는 사람마다 직접 왕양명(王陽明)에 대해 담화하기를 시도했다. 양명학 논의가 처음 이루어진 것은 요동의 정학서원(正學書院)이다. 서원에 거 주하는 학생을 초대해 함께 대화를 나눴다. 11) 선조실록 6년(1573) 1월 17일. 浙江巡撫謝廷傑, 請以原任尙書王守仁配(亨) [享]文廟. 大槪, 以爲尊德性, 道問學, 非兩事也.
150 退溪學論叢 第25輯 최근 왕양명이라는 자가 정통 유학에 대해서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데 어째 서 왕양명을 종사하자는 논의가 생긴 것입니까? 라고 물었다. 위자강과 하성 시가 말하길, 양명의 학문은 공자와 맹자를 존숭하니 간사한 말로 도를 어지 럽히는 자에 견줄 바는 아닙니다. 또한 문장(文章)과 공업(功業)이 모두 갖추어 져 있어 볼 만합니다. 이에 근래 사람들이 숭상하는 바가 되었으며 이미 공묘 (孔廟)에 종사되었습니다. 공(公)께서 들으신 바는 생각건대 위학(僞學)의 말에 의해 잘못 전해진 것 같습니다. 12) 막상 중국에 가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양명학의 성행이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조헌이 직접 물어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허봉의 문 답을 상세히 적은 것으로 보아 조헌도 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문묘 는 문선왕(文宣王), 즉 공자(孔子)를 제사하는 묘당(廟堂)을 말한다. 이 문 묘에는 공자 이외에도 우리나라와 중국의 선현들을 함께 제사하고 있다. 그 제사의 주체가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자이고, 다른 선현들은 공자 에 곁들여 제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문묘를 세우고 거기에 강당(講堂) 을 마련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학덕을 기리면서 연학(硏學)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유학의 본원지인 중국에 있어서 도 그러하였던 것이다. 학생들은 왕수인이 공자ㆍ맹자(孟子)를 종주(宗 主)로 하며 문장과 공업이 볼만한 유학의 종주라고 칭했다. 오히려 왕수 인을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위학(僞學)의 오류를 범하고 있 을 것이라는 주장을 피력하며 왕수인의 학문에 대한 옹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8월 3일의 기록에도 길에서 만난 선비에게 양명학의 문묘종사에 대해 질문하고 또 확인하는 모습이 보인다. 차를 마신 뒤 허봉이 왕지부(王之符)에게 왕양명은 무슨 일로 인해 문묘 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있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양명은 육상산(陸象 12) 조헌, 조천일기, 6월 26일, 近日如王陽明者. 多(按)多. 恐得之誤. 罪聖門. 而 爲甚事有從祀之議乎. 魏賀曰. 陽明學尊孔孟. 非邪說亂道者比. 且文章功業. 俱 有可觀. 爲近世所宗. 己從祀孔廟矣. 公之所聞. 意爲僞學之說所誤也.
東還封事 에서 본 朝天日記 의 특성 연구 151 山)의 선학(禪學)을 본받은 위선자입니다. 그가 집에서 생도들을 가르치던 때 에 그의 아내가 밖으로 나가 문도들을 꾸짖으며, 이 학문은 위학(僞學)이니 그것을 배워 무엇하겠는가! 라고 말하니 문도들이 그날로 흩어져 가버렸습 니다. 13) 허봉은 왕수인의 문묘종사 여부와 그 경위에 대해 물어본다. 이 전에 만났던 몇몇의 명나라 사람들은 대부분이 양명학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만난 왕지부는 이전에 만났던 사람과 는 달리 양명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의 대화에서 는 양명학에 대한 언급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명나라에서 직접 확인한 양명학의 영향력이 조헌에게 어느 정도의 큰 충격으로 다가왔 을 것이라 짐작된다. 8월 20일 조헌은 북경에서 국자감을 구경하게 된다. 문묘에 참배했다. 뜰에서 사배하고 동쪽 모퉁이 작은 계단으로 올라가서 동 편 소문으로 들어가 위판을 우러러 보니, 궤는 없었고 오층으로 조각된 대가 있었다. 위판의 높이는 1척 2촌가량 되었으며, 너비는 겨우 2촌 남짓이었다. 공 자의 위판은 붉은색으로 칠했고 금색으로 지성선사공자위(至聖先師孔子位) 라 고 쓰여 있었다. 신위 앞에는 각각 향로 하나씩을 두었으며, 모든 위판마 다 소각을 만들어서 봉안했다.14) 국자감은 원 명 청 3대의 국가 최고 학부이다. 국자감 안에 공자를 모시는 문묘가 있어 지난 천여 년의 긴 역사에 유교의 창립과 발전에 기여한 바 있는 수많은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15) 그만큼 위 상과 역사적인 모습이 담겨있는 곳이기에 자연히 그 순간을 상세히 기 13) 조헌, 조천일기, 8월 3일, 飮茶畢, 美叔問王陽明以何事有從祀文廟之議乎. 曰陽明是效象山之禪學而僞者也. 當其在家敎授生徒之時, 其妻出外, 口罵門徒 曰, 此是僞學, 效他甚麼, 門徒卽日散去. 14) 조헌, 조천일기, 8월 20일, 拜聖, 拜于庭中, 自東隅小階, 東偏小門, 覩位版, 櫝而有臺刻五層也. 長可尺 位前各置一爐, 位各爲小閣以安之. 15) 한매, 허봉 <朝天記>의 硏究 성균관대 석사학위논문, 1999, 48쪽
152 退溪學論叢 第25輯 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헌은 국자감에서 본 종사된 선현의 이름, 위치를 하나도 빠짐없이 순서대로 기록하고 위패의 재료, 색깔도 자세히 묘사했다. 국자감의 이륜당(彛倫堂), 계성묘(啓聖廟) 등 건물의 외부와 내 부 모습을 살펴보면서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공자의 호인 문선왕(文宣王) 을 고쳐 지성선사(至 聖先師) 라 하였고, 왕양명의 문묘 종사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논의되 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조류가 조선에 전파되면서 조헌은 명나라 문묘 제도의 동향을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8월 30일 회동관에서 조헌은 통 사를 보내 문묘종사에 관해 의문 나는 부분을 기록하여 올렸다는 내용 도 보이고 있다.16) 조선시대 최초로 문묘에 배향된 공신은 정몽주(鄭夢周)이다. 그는 일 찍이 도학(道學)에 뜻을 두었고 성리학에 대한 견해가 중국과 일치할 정 도로 올바른 학문적 지향을 가졌다고 평가되었다. 그러한 점으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그를 높여 학문의 종장으로 삼았다. 문묘 종사를 건의하 는 주요 목적은 바로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함으로써 중종대의 학문적 경향을 그러한 방향으로 이끌고자 한 것이었다.17) 조광조(趙光祖)를 비 롯한 도학파들이 정몽주의 문묘를 주도하면서 마침내 중종 12년(1506)에 배향이 결정된다. 정몽주가 문묘에 배향됨으로써 조선에서는 도학과 의 리를 중요시하는 유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정몽주의 학문적 사상을 이어나갈 사람으로 문묘배향에 대한 끊임없는 논의가 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 인물로 1568년 전후로 성균관 유생들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 적(李彦迪)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從祀)에 대해 상소되고 있었던 것 이다. 문묘 종사 문제는 문묘에 1인을 배향한다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 16) 조헌, 조천일기, 8월 30일, 記文廟從祀可疑處, 質于提督, 令白元凱呈之, 提 督受去. 17) 김영두, 중종대 문묘종사 논의와 조선 도통의 형성, 사학연구 85집, 한국 사학회, 2007, 46쪽
東還封事 에서 본 朝天日記 의 특성 연구 153 라, 유교를 국가통치이념으로 하는 조선사회에 있어서 유학의 적통자 를 밝히는 문제이다. 그들의 학문적 정통성을 부여받는 한 방법이 되 며 더 나아가 그들의 정치적 입장과 집권의 명분 강화와도 관련되었던 것이다.18) 이처럼 조헌은 당시 조선에서 논의되고 있는 문묘배향과 관련해 관찰 대상으로 삼았던 듯하다. 이러한 관심은 조헌이 양명학의 문묘종사에 대 해 질문하고 국자감을 관찰하며 문묘(文廟)와 관련된 국가적 사항에 대 해 상세히 알아보기 시작하는 데에서 비춰진 것이다. 조천일기 에서 기 록된 문묘 종사의 상세한 관찰은 동환봉사 의 성묘의 배향(聖廟配享) 이라는 첫 번째 항으로 작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8조 소의 첫 항 에 적을 만큼 조선에게 있어 시급하고 중요했던 명나라에서의 문묘 종 사 모습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2. 유교의식의 생활화 조헌은 지나가면서 보게 되는 명나라의 생활 속 유교의식을 놓치지 않고 상세히 관찰했다. 조헌의 동환봉사 서문에서 보이 듯, 왕지부의 만남에 자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깨달음을 얻고 명나라 를 관찰했던 것은 아니다. 왕지부를 만나기 전에도 조헌은 명나라의 문 물과 풍속에 관심을 보였다. 통원보(通遠堡) 남쪽에 이르렀는데, 강 근처에 집이 세 채 있었다. 집이 몹시 좁 고 누추해 그냥 시냇가에 앉았다. 그물로 물고기를 잡아 저녁 국거리로 삼았다. 저녁에 인가에 유숙하면서 주인에게, 북쪽 인가에서는 밭 가운데에 관을 덮지 않 고 두던데 이는 무슨 까닭인가? 라고 물으니, 죽은 사람의 자손들이 모두 길일 을 맞은 연후에야 장례를 마칠 수 있기에 이와 같이 합니다 라고 했다.19) 18) 이수환, 16세기전반 영남사림파의 동향과 東方五賢 문묘종사, 한국학논집 45집, 계명대 한국학연구소, 67쪽 19) 조헌, 조천일기, 6월 19일, 至通遠堡南, 臨河有三家, 家甚隘陋, 仍坐溪邊,
154 退溪學論叢 第25輯 조천일기 6월 19일의 일기 내용이다. 왕지부의 이야기를 들었던 때 는 8월 3일로, 왕지부를 만나기 전의 기록이다. 6월 19일 일기 내용은 조 헌이 통원보 남쪽 인가에 유숙하면서 주인에게 장례식 풍습에 대해 묻 는 장면이다. 무덤을 쓰지 않은 채, 관을 그대로 둔 것을 보고 명나라에 서는 길일이 되어야 장례를 치른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또 8월 2일 일기에는 순천부에 도착해서 고을 사람에게 산해관(山海 關) 서쪽인 삼하현의 향약례에 대해 물어본다. 삼하현에서 향약례(鄕約禮)를 행한다고 들었다. 관소의 일꾼이 말하길, 매월 삭일과 보름에 현의 장로들이 다함께 지현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읍을 하면, 지현이 읍으로 답한 뒤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이웃과 화목 을 지내고, 의롭지 않은 것을 하지 않는다 는 향약 규정을 함께 제창합니다. 약 정 등이 처마 아래에서 일제히 읍을 하면 지현이 읍합니다 라고 했다.20) 실제로 7월 20일 산해관을 넘은 부근에서 향약소를 목격한 기록이 있 다. 또 이 날 여씨향약(呂氏鄕約)이 작년 가을에 순안(巡按)의 명령으로 실시되고 있다고 들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조헌은 향약례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보며 자세히 기록한다. 이러한 생활속의 예와 풍속에 관한 조헌의 관심은 북경에 도착해서도 변함없었다. 조사(朝士)들이 서로 읍하는 의례와 문에서 양보하는 의례를 보았다. 서로 읍하는 의례는 다음과 같다. 나라의 풍습이 왼쪽을 숭상했기 때문에 서로 읍할 때에는 반드시 남에게 왼쪽을 양보했다. 만약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채찍 을 들어 읍을 하지만 몸을 굽히지는 않는다.21) 施網得魚, 以爲夕羹. 夕宿人家, 問其主人曰, 北家田中, 露置棺材, 是何故也, 曰 死者子孫男女之衆, 遇吉日, 後乃克葬, 如此. 20) 조헌, 조천일기, 8월 2일, 聞縣行鄕約之禮, 館夫云, 每月朔望, 縣中長老, 咸 詣知縣前跪揖, 知縣答揖後, 共申鄕約之令, 孝順父母, 尊敬長上, 和睦隣里, 不 爲非義, 約正等齊揖于簷下, 知縣.
東還封事 에서 본 朝天日記 의 특성 연구 155 예부에서 연회를 다시 베풀어 준다하여 조헌 일행이 오문 밖에서 사 은하고 난 후의 의례 의식을 보게 된다. 여기서 조헌은 조사들이 서로 읍하는 의례에 대해 자세히 관찰하여 기록했다. 실생활에서도 유교의식 이 실현되고 있는 모습을 통해 조선에도 실천되었으면 하는 의식이 있 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9월 3일에는 예부에서 보았던 환관의 복식에 대해 기록한 내용이 있다. 환관의 복식을 보았다. 환관 중 관품이 높은 환관의 관은 대나무로 얽어 모 자를 만들고 포로 그것을 감싼다. 모자의 뒤쪽에 첨(簷)이 있었는데 양쪽 귀 뒤 쪽을 따라서 위를 향해 서 있다. 그들의 복장은 모두 철릭(帖裏)이었으며 그 길 이는 복숭아 뼈까지 내려왔다. 22) 여기서는 의관 제도가 위계와 예법에도 잘 부합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둔 명나라의 모습인 복식에 대해서도 권위와 체면, 격식을 중요시 생각했던 것이다. 9월 5일에서는 당상관들의 앉고 일어서는 의식 등을 세심하게 고찰하고 구체적으로 적었다. 이와 같이 조천일기 에는 명나라의 생활 속에 담긴 유교의식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많다. 주로 의관 제도, 읍하는 의식, 제사 풍습, 향약 실태 등에 대해 세밀히 관찰 기록한다. 조천일기 에서의 예의와 풍습에 관한 세밀한 관찰은 동환봉사 8조 소의 귀천의 의관(貴賤衣冠), 식품의 연 음(食品宴飮), 사부의 읍양(士夫揖讓), 사생의 접례(師生接禮), 향려의 습 속(鄕閭習俗) 의 제목으로 이어져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조헌은 동환 봉사 를 작성할 목적을 담아 관찰할 모습을 그려놓고 직접 체험하면서 21) 조헌, 조천일기, 8월29일, 見朝士相揖儀, 國風尙左, 故相揖之際, 必讓左于 人, 先就其人之右, 竝立而揖, 搖手則立于左者, 又就其右而揖, 見讓門之儀, 同 行遇門, 則必擧手讓其先入, 然後乃入, 若遇於道, 則必擧鞭以揖, 而不鞠身. 22) 조헌, 조천일기, 9월 3일, 見宦者之服, 品高之冠, 竹結爲帽子, 而以布裹之, 后有簷, 向上從兩耳后起, 其服皆是帖裏, 而其長及踝.
156 退溪學論叢 第25輯 관심을 드러냈다. 3. 체계적인 문물제도 조헌은 유교의식에 이어서 사행 과정에서 목격한 군사의 기율ㆍ조련 상황 등에 대한 관심의 기록이 곳곳에 보인다. 백간포 남촌에서 쉬었다. 군사용 수레 수십 대를 보았다. 수레 위에 누(樓)가 있어 네 명이 탈 수 있는 것이 두 대, 누에 북을 건 것이 두 대 있었으며, 한 면 의 판이 방패와 같이 이격(離隔)되어 있는 것이 수십 개였다. 대개 물길의 입구 와 성벽이 끊긴 곳에 배치해 오랑캐를 방비하려는 것이었다. 나귀 혹은 노사에 게 끌게 했고, 보병 수천은 군기를 지고 가고 있었다. 물어보니, 달자 40만이 장성 밖 석문채(石門寨)에 엄청나게 모여 있기 때문에 척(戚) 총관 척계광과 중 군장 예선이 2만을 이끌고 그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군인들은 지 나가는 사람을 약탈하지 않았으며 나귀들에게 밭의 곡식을 먹이지 않으니, 중 국의 정령이 엄격하지 않다면 어찌 이렇겠는가!23) 북경에서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의 일이다. 조헌은 길에서 우연히 본 명나라 보병들을 보면서 군사의 위엄을 느꼈다. 주장(主將)의 위신이 평소부터 잘 알려졌기 때문에 군사들이 그 영을 두려워하여 감히 백성 을 괴롭히지 못한다고 한다. 백성은 국가의 기반이다 라는 말이 나오듯 이, 나라의 관심 대상에는 언제나 백성이 중심이었다. 조헌 이외에도 많 은 관료들이 백성을 근본으로 하여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지배층의 강탈과 노략질이 더욱 심해져 문제가 커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조헌은 국가의 기강이 확립되 어야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23) 조헌, 조천일기, 9월 9일, 憩于白澗鋪南村, 見兵車數十, 車上有樓可容四人 者二, 有數而懸鼓者二, 一面板隔如防牌者數十, 蓋將例于水口城絶之處, 以防 胡也, 俱駕于驢或騾也. 步卒數千, 擔荷軍器以行, 問之則曰, 達子四十萬, 彌漫 于石門寨長城之外, 故戚摠兵 中軍將倪善, 將二萬衆以赴之, 軍不掠途人, 驢 不飼田禾, 非中國政令之嚴, 曷臻是哉.
東還封事 에서 본 朝天日記 의 특성 연구 157 매일 아침 대포를 쏘는 소리를 들었다. 덕승문(德勝門) 북쪽 외곽의 사격장 에서 날마다 이와 같이 사졸들을 조련하는데, 가끔이라도 쉬지 않는 것은 전쟁 을 잊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다.24) 조정에서 항상 체계적으로 사졸들을 훈련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서 조헌은 이 기록에 이어서 현재 시행되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에서의 훈련과 비교하며 한탄을 금하지 않았다. 조헌의 조천일기 에서는 명나 라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더불어 조선의 현실과 비교하면 서 기록한 내용이 많다. 예컨대, 달자의 위협 속에 놓여 있는 변방 백성 들의 모습 등을 목도하면서 조선의 변방 지역을 떠올렸다. 이러한 백성 의 생활상에 대한 관심과 명나라 각지의 풍속, 문물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에는 조선의 성리학적 이념을 확립시키기 위한 조헌의 의지가 녹아 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백성을 위한 제도, 특히 경제적인 부분인 세금과 부역에 대 해 실제로 물어 보면서 기록된 것이 곳곳에 발견된다. 북경에 도착해서 는 황제의 모습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그의 위엄과 국법의 엄격함을 느 낀다. 또한 항상 충신들과 국정에 대해 의논하고 경연에서의 강학(講學) 을 하는 등 군신(君臣)간의 신의를 다진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체계 적인 관료를 관찰하고 체험했던 모습은 동환봉사 8조 소 중 마지막 항인 군사의 기율 에서 보여지고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실제 조천일기 의 내용 중에는 동환봉사 에 수록된 개혁안의 내용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환봉사 가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결과 보고서였다면, 조천일기 는 동환봉사 가 작성되기까지 어떠한 체험을 통해 기록되었는지 보여주는 과정 기록물이다. 그만큼 조천일기 와 동환봉사 는 불가분 관계에 놓 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24) 조헌, 조천일기, 8월 29일, 每朝聞放砲聲. 蓋操練士卒于德勝門 北 外射場. 日日如是. 無時或廢. 欲其不忘戰也.
158 退溪學論叢 第25輯 함께 사행을 갔던 서장관 허봉과 조헌의 일기 비교 논의에서 보면, 대 부분 조헌은 주위의 경치가 어떤지, 자신의 느낌이 어떤지 감정적 묘사 가 없다고 서술되었다.25) 조헌은 사행 전부터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조선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삼았던 만큼 현실성 있고 실천 할 수 있는 명분을 세워야만 했다. 이러한 의식은 명나라를 통해 직접 체험하게 되면서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던 것이다. 결국 조헌은 조선 에 대한 목적의식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주위의 경치를 술회하 기 보다는 자연스레 관찰할 대상에 눈을 돌린 것이다. 그러나 조천일기 의 기록에는 명나라의 좋은 모습만 담겨있지 않았 다. 조헌은 명나라의 폐단과 병폐의 실상들도 낱낱이 기록했다. 사행에 서 돌아와 상소한 동환봉사 에는 명나라에서 봤던 폐단과 좋지 않은 모습들은 기록하지 않고 있다. 명나라의 체계적인 관료기구, 장엄한 궁 정 내부 등 선진적인 모습은 이상향으로서 조선에 시행해야 할 제도적 사항이었다. 조천일기 에서 보여진 여러 가지 폐단과 병폐들은 명나라 의 제도적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이 사적인 인성(人性) 에 대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조천일기 에서의 폐단과 병폐의 체험을 그대로 보고할 필요 가 없어 공적인 모습들만 뽑아내어 동환봉사 를 작성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조헌은 당시 성리학의 본고장인 명나라 정치 현실과 그 제도 에 대해서 무엇보다 크게 관심을 두고 있었으므로 사적인 인상에 대해 서는 중요한 사안으로 느끼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동환봉사 의 발문을 작성한 안방준(安邦俊)의 기록에 도 조헌의 뜻은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데에 그치지 않는다고 하며 명나라가 결코 완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이 간파되고 있다. 무조건적으로 명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뜻이 아니라, 성리학의 뿌리를 둔 명나라 의 유교 제도를 본보기로 삼아, 당시 조선의 불교와 유교간의 불안정한 시기에 실천 방안으로 강구하고자 한 것이다. 조헌의 중국 체험은 이러 한 목적의식으로 시작하여 조천일기 에서 구현되었고, 결국 동환봉사 25) 한매, 위의 논문; 최진경, 허봉의 <조천기>연구, 동국대 석사학위논문, 2012 등
東還封事 에서 본 朝天日記 의 특성 연구 159 의 결과물로써 나타나게 된 것이다. 조천일기 는 동환봉사 와는 달리, 사적으로 간직할 뿐이지 공표할 계 획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오늘날 동환봉사 가 중요한 상소문으로 여 겨진 만큼, 조헌이 어떠한 체험과 과정들로 인해 작성하게 되었는지 조 천일기 를 통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이로써 보면, 동환봉사 와 조천일기 는 표리관계에 놓고 보아야 할 작품으로 여겨진다. Ⅳ. 맺음말 본고는 조헌이 어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행에 참여했는지 알아보 고, 아울러 동환봉사 에서 본 조천일기 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조천일기 는 1574년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 서장관 허봉(許 篈)의 질정관(質正官)으로 파견된 조헌의 기행문이다. 조헌은 질정관으로 서 사행에 임명되어 질정할 사목을 조정에서 부여받았지만, 사성통해 의 책을 통해 이미 그 뜻을 알고 있었다. 이로 인해 질정관의 임무에서 더 나아가기를 원하여 어떠한 목적의식을 찾고 있었다. 조헌은 당시 조 선에서 불교와 유교간의 불안정한 모습을 보고 성리학의 근본인 명나라 에 가서 직접 관찰하며 근거를 제시하는 실천 방안을 강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실제로 유교 의식이 보이는 명나라의 문묘 배향이나 예의와 풍 습, 체계적인 제도에 관심을 두어 관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조 천일기 의 내용 안에는 동환봉사 에 수록된 개혁안과 직간접적으로 연 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환봉사 는 조헌이 당시 국정 개혁안을 제시한 선구자이면서 그의 사상이 담긴 중요한 상소문으로 존재되어 현재까지도 많은 연구가 되어 왔다. 비록 조천일기 는 100여 년이 지난 후에 간행되었지만, 조헌에게 있어 동환봉사 가 중요한 상소문이 된 만큼 전 단계인 조천일기 와 더불어 연속선상에서 보고 연구해야 할 것을 알게 해준다.
160 退溪學論叢 第25輯 <참고 문헌> 김지남, 국역 통문관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집부, 민창문화사, 1998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연행록 선집 Ⅰ,Ⅱ, 경인문화사, 1976 한국문집총간 권54, 중봉집, 조천일기 구지현, 對明使行과 對日使行에 보이는 異端 論爭의 樣相, 南冥學硏究 제43집,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2014 이수환, 16세기전반 영남사림파의 동향과 東方五賢 문묘종사, 한국학논 집 45집, 계명대 한국학연구소, 2011 김영두, 중종대 문묘종사 논의와 조선 도통의 형성, 사학연구 85집, 한 국사학회, 2007 김인규, 重峰 趙憲 改革思想의 실학적 특성, 동양철학연구 제41집, 동양 철학연구회, 2005 김지현, 趙憲의 朝天日記 에 대한 소고, 온지논총 제40집, 온지학회, 2014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조천일기, 서해문집, 2014 이동준, 重峯 趙憲의 歷史意識과 國難對策, 동대논총 제6집, 동덕여자대 학교, 1976 이상익, 東還封事 를 통해 본 重峯趙憲의 改革思想, 동양문화연구 제 10집, 동양문화연구원, 2012 주용성, 栗谷 李珥와 重峯 趙憲의 改革論 比較: 萬言封事 와 東還封事 를 중심으로, 간재학논총 13집, 간재학회, 2012 한매, 허봉 <朝天記>의 硏究 성균관대 석사학위 논문, 1999
東還封事 에서 본 朝天日記 의 특성 연구 161 Abstract Donwhan-Bongsa seen through Jocheon-ilgi characteristics of the study / Jang, Anyoung (Sunmoon university) This paper will study whether participating in the meandering Choheon have any sense of purpose, and also looked at the characteristics of a Jocheon-ilgi from the Donwhan-Bongsa. The Cho heon will be sent to the Ming Dynasty as the Articles of Jiljeonggwan of 1574 Last truncation Bak Huirip, seojanggwan Heo Bong. Filigree seven years from May 11 to May meandering about 5 months to 03, 11, his age was 31 years. But Jocheon-ilgi is finally left a record in Part 9 youngpyeong 14th. Cho heon is believed to create a Jiljeonggwan-hoehwansunsang-8joso stamp of Article 8 Donwhan-Bongsa instead of ancestral knowledge to raise this in the exposed based on the diary of May to September. Cho heon was the mission of the Articles of Association are to be in charge in the coming grasp Jung and quie to give the green indefinite written in Chinese in a Chinese document seungmunwon meandering. Cho heon were also granted a meandering things to jiljeong from the former adjustment. Article 20 The Ministry, he will be unable jiljeong outside the scope Sasungtonghae meandering around it already knew its meaning. But their mission had the idea further, not stopping to be here. This went to the Ming Dynasty to grasp the political realities associated with shipbuilding have a mindset that you want to secure as much as possible. Particularly in the shipbuilding report in an unstable state between the Buddhist and Confucian went to the root of the Ming Dynasty of Confucianism and directly observed sought to devise an action plan to present the evidence. And indeed, customs and manners of the Ming Dynasty Confucian orientation or Confucian ritual is seen, appearance
162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seemed to put the attention on systematic observation systems. Thus you can see that you are connected inside the contents of Jocheon-ilgi to reform and, directly or indirectly contained in the Donwhan-Bongsa. China's experience has been implemented in Choheon Jocheon-ilgi for these purposes by the start ceremony, which will eventually appear as a result of the Donwhan-Bongsa. Key words: Cho Hun, Heo Bong, Jiljeonggwan, Donwhan-Bongsa, Jocheonilgi, Neo-Confucianism.
退溪學論叢 第25輯(163 188쪽)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華東吟 을 중심으로 1)송 목 Ⅰ. 서 론 Ⅱ. 역사 속의 중국과 우리의 관계 Ⅲ. 華東吟 에 비춰진 중국과 우리의 관계 기 섭* 차 1. 중국과 우리의 관계 2. 역사로 본 중화와 소중화 Ⅳ. 결 론 論文 抄錄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대륙에 접해있는 반도국가로 삼면이 바다 이다. 그래서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말까지는 중국으로 주로 진출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의 역사가 태동하면서부터 중 국과의 관계가 밀접하여 중화를 받아들이는 역사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우 리에 비해 중국의 역사가 앞서 있음은 물론 문명에 있어서도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조선 때에 중화가 도입되어 삼국시대, 고려, 조선으로 내려오면서 儒道가 우리 삶의 잣대가 되었고, 중화제도가 우리 생활에 중심 에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의암 유인석(1842 1915)은 그의 시 華東吟 25수와 毅菴集 속의 宇宙問答, 道冒篇 등에서 언급하고 있다. 시 華東吟 25 중 중국과 우리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시 11수와 이 * 남서울대학교 강사. 논문투고일: 2015.06.08 / 심사개시일: 2015.06.17 / 게재확정일: 2015.06.27
164 退溪學論叢 第25輯 시의 내용과 밀접한 문장을 宇宙問答, 道冒篇 에서 발췌하여 華東의 관 계를 相補하였는데,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암은 중국과 우리나라를 宗 支家 와 人種一 의 관계로 인식하고 이 관계를 춘추의리의 명분에서 찾고 있다. 나아가 당시 이를 실천하는 것 이 尊明 이고 명나라가 멸망했음에도 中華의 명맥을 보전하고 있다는 자긍 심이 小中華정신이다. 따라서 명의 국권을 회복하여 대중화정신으로 세계가 大一統 이 될 때, 태평성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둘째, 역사로 본 중화와 소중화는 중국과 조선이 主從이나 命伏의 관계가 아닌 兄弟 또는 父子의 관계임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관계이기 때 문에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그 의리를 지켜 崇明하였고, 華脈이 조선에서 보전됨으로써 이곳이 곧 중화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으로 본다면 중국과 우리의 관계에서 그가 말하는 小中華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주제어: 중국과 우리의 관계, 고려와 송나라, 조선과 明나라, 小中華, 大 一統 Ⅰ. 서 론 단군이 조선을 건국할 당시 중국은 역사적으로도 由緖가 깊었고 세계 를 선도할 수 있을 만큼 높은 문명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단 군조선부터 우리의 삶 속에 중화가 자연스럽게 유입됨으로써 삼국시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서는 실질적으로 儒道가 우리 삶의 잣대가 되었고, 중화제도가 생활의 중심에 있었다. 이러한 중국과 우리의 관계를 의암 유인석(1842 1915)은 그의 저서 毅 菴集 에 기록하여 전하고 있는데, 毅菴集 속의 宇宙問答 과 道冒編 에 역사적, 지리적, 사상적 측면에서 그 논지를 펼쳤고, 이것을 시 華東 吟 25수를 지어 노래하고 있다. 특히 宇宙問答 에서 의암은 唐堯시대 와 단군의 건국, 우왕과 부루, 주무왕과 기자, 송나라와 고려, 명나라와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165 조선의 관계를 피력하면서 비록 군신지간이지만 그간 중국이 베푼 은혜 를 살펴보면 실상은 부자지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과 우리의 관계가 경직된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혈육의 관계, 또는 宗家와 支家의 관계로 설정한 것이다. 여기에서 의암이 우리와 중국과의 관계를 혈육의 관계, 또는 宗家와 支家의 관계로 설정하는 이유와 중화에 대한 소중화가 주는 의미가 무 엇이며,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의 어떤 작용으로 이루 어졌는지가 궁금해진다. 이러한 궁금증은 그의 시 華東吟 을 중심으로 하고 宇宙問答 과 道冒編 을 참고한다면 풀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華東吟 총 25수 중 중국과 우리의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역사 적 본 大中華와 小中華 관계를 말한 시 11수에 崇明三義 를 합쳐 12수 의 시와 이와 관련되는 문장을 宇宙問答 과 道冒編 에서 抄寫해서 이 를 相補하고 분석하여 중국과 우리의 관계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Ⅱ. 역사 속의 중국과 우리의 관계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보면 중국대륙에 연결되어 있는 반도 국가로서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어, 현재는 교통의 발달로 해외로 진출 할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조선말까지는 중국으로 주로 진출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와 중국의 관 계는 중화를 받아들여 생활화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에 고조선 때 중화가 이입된 후 삼국시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서 는 儒道가 우리 삶의 잣대가 되었고, 중화제도가 우리 생활의 중심에 있 었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과 우리와의 관계가 역사의 기록으로 여러 곳에 남아 있는 데, 이를 살펴보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공빈의 後漢書, 東夷列傳 에 보면 우리의 건국 시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66 退溪學論叢 第25輯 동쪽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東夷라 한다. 방위는 二十八宿의 기성과 미성 의 방향이고, 지역은 선비에 접해 있다. 처음에 神人인 단군이 계셨는데 九夷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다. 요 임금 때의 일이다.1) 또 삼국유사 에서도 같은 내용의 기록이 보인다. 단군왕검은 唐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庚寅年에 平壤城에 도읍하여 비로소 朝鮮이라고 불렀 다. 2) 라고 하여 위의 기록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와 같이 조선의 건국 이 요임금이 제위하고 있는 시기라는 데에서 매우 상징성이 강하다. 다시 말해서 요임금은 태평성대를 이끌었을 정도로 성군의 반열에 오른 사람 이다. 그 만큼 정치를 잘한 사람이고 그래서 백성들의 존경은 한 몸에 받 고 있다. 따라서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고 난 후 그가 통치를 함에 요임금 의 영향이 많았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단군의 조선건국은 단 군을 요임금과 같은 반열에 올리는 효과가 있다. 왜냐하면 九夷의 추대로 보위에 오른 것은 차치해 두고서라도 당시 요임금의 제도를 많이 받아들 여 治民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이지만 단군 의 아들 부루와 순임금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은 우왕과의 관계에 대한 기 록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즉 도산회의에서의 만남이다.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의에 東夷의 夫婁께서 친히 와 주셔서 나라의 경계 가 정해졌다.3) 桓檀古記, 檀君世紀 편에도 위의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내용이 실 려 있다. 왕검께서 태자 扶婁를 보내어 虞舜이 보낸 司空(禹)과 塗山에서 만나게 하셨 1) 孔斌, 후한서, 동이열전 권75.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幷立 2) 일연, 삼국유사 권1, 古朝鮮王儉朝鮮 編. 以唐堯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 城 始稱朝鮮 3) 孔斌, 후한서, 동이열전 권75. 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167 다. 태자께서 五行治水之法 을 전하시고, 나라의 경계를 살펴 정하시니 幽州 營 州 두 주가 우리 영토에 귀속되고, 회수와 태산 지역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分 朝를 두어 다스리실 때 우순을 시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셨다.4) 위의 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夫婁親臨 과 定國界 라는 대목이다. 왜냐 하면 이는 곧 우왕과 부루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암은 宇宙問答 에서 우왕 때 塗山에서 玉帛을 가지고 모였는데, 아 들 부루를 보냈으니 중국과 동방이 감응한 시초가 매우 깊다. 5)라고 하 여 夫婁의 신분이 孔斌과 毅菴의 주장에서 상반됨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하여는 좀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어 앞으로의 연구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이때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 지를 떠나서 두 나라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주나라 무왕과 기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삼국유사 에 이렇게 전하 고 있다. 唐의 裴矩傳에 말하기를 高麗는 원래 孤竹國(지금의 해주海州)이었다. 周나 라에서 箕子를 봉해 줌으로 해서 朝鮮이라 했다.6) 이 기록에서 기자조선을 한낮 주나라에 대한 제후국으로 말하고 있는 데 비해 後漢書, 東夷列傳 에 보면 周武王과 箕子와의 관계에 대하여 더없는 우방으로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4) 桓檀古記 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가 1911년에 三聖紀 檀君世紀 北夫餘紀 太白逸史 등 각기 다른 4권의 책을 하나로 묶은 책이다. 그 런데 이 책이 진서냐, 위서냐에 대하여 논란이 많다. 하지만 孔斌의 주장을 구체화하고 있고 이 부분에 대하여는 진위의 논란에서 벗어나 있다고 판단 되어 인용하였다. 5)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p.590. 及禹塗山玉帛之會 送子 扶婁 中東之相感應 肇而有深矣.(柳麟錫, 宇宙問答 의암집, 권51.) 6) 일연. 삼국유사,권1. 古朝鮮王儉朝鮮.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 (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168 退溪學論叢 第25輯 풍속이 淳厚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양보하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함부로 섞이지 않으니, 가히 동쪽에 사는 예의 바른 군자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殷나라 太師 箕子 가 周나라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 땅으로 갔고 나의 할아버지 孔子께서 동이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나의 벗 魯仲連 역시 東夷로 가고 싶어 한다. 나도 역 시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 예전에 동이의 사절단이 온 것을 보니 큰 나라 사람 들다운 모습이었다. 東夷는 대강 천년 이상 전부터 중국과 우방이었다.7) 孔斌이 東夷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는 것은 군자의 나라 이며 그래서 조부 공자도, 친구 노중련도, 본인도 동이에 와서 살고 싶었다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곧 당시 조선이 삶의 수준이나 문화 등이 높은 수준 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기자가 東來하여 나라를 세웠을 때 주 나라와 대등하고 밀접한 관계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의암은 삼국유 사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기자가 동래한 후 임금이 되어 九疇를 펴 보 였고, 八條의 가르침을 베풀어서 소중화가 되었다. 8)라고 말하고 있어 중국과 우리의 관계를 대중화와 소중화라는 事大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이것은 의암이 소중화에 대한 인식에서 본다면 두 나라의 밀접한 관계 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여겨진다. 宋나라와 고려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宋나라는 북송(960 1126)에서 남송(1127 1279)으로 이어지는데, 건국 때부터 멸망할 때까 지 고려(918 1392)와 함께 존속하였다. 이로써 宋과 高麗는 정치적 군사 적으로 밀접하였고 경제적으로 교류가 활발하였다. 그러나 金의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遼나라가 멸망하였고, 그 여세로 7) 孔斌, 東夷列傳, 後漢書,권75.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 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 於東夷地 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 吾友魯仲連亦有欲踏東海之志 余亦 欲居東夷之意 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有大國人之衿度也, 東夷蓋自千 有餘年以來 8)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p.591. 及箕子來君, 則以叙九疇 之見, 有設八條之敎, 爲闢小中華. (柳麟錫, 宇宙問答 의암집, 권51.)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169 宋의 수도 開封이 함락됨으로써 北宋도 멸망했는데, 이를 靖康의 變9)이 라고 한다. 이에 宋나라는 수도를 南京으로 옮기고 南宋을 건국하였으나 南宋도 원나라의 쿠빌라이칸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곡절 을 겪으면서도 상황에 따라 고려와 단절된 경우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교류가 활발하였다. 고려는 특산품을 송에 수출하여 고려의 문물을 접촉 케 하고, 동시에 송에서 다양한 서적과 상품 등 선진 문화의 수입을 통 해 사회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이다.10) 그러나 宋은 高麗와 事大關係를 맺어 전통적인 中華主義를 실현시켜 감과 현실적으로는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얻어 자국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 대륙북방의 요와 금을 견제하려는데11) 그 목적이 있었다. 이로써 고려는 금이나 원나라와의 교류에 대하여 배척하는 경향으로 인하여 금, 원나라와의 충돌이 잦았다. 이러한 상황을 의암은 고려에 이르러서는 송나라와 친근한 정이 있었으며 주자에게 좋은 풍속을 얻었다. 12)라고 하여 송나라를 事大할 만한 나라로 인정하고 있다.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있어서는 더욱 특별하다. 그 까닭은 조선건국 에 친명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이 주축이었고,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건 국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의 관계 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는데, 명군이 조선에 직접 참전했기 때문 이다. 조선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조공 - 책봉체제적 관 점에서 보면 내국 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온다는 사실 자체가 상상하기 어렵다.13) 이런 까닭으로 의암도 명나라를 섬겨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9) 1126년 송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 패하고, 중국 사상 정치적 중심지였던 화북을 잃어버리고, 황제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에 사로잡힌 사건을 말한다. 10) 백승호, 고려의 대 송 민간무역, 중국과 중국학 제6권, 영남대학교중국연 구센터, 2003, p.14 11) 박지훈, 宋代 士大夫의 高麗觀, 이화사학연구 30, 이화여대, 2003, p.562. 12)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p.590. 至高麗致款於宋室 而亦 得風俗好之 褒於朱子.(柳麟錫, 宇宙問答 의암집, 권51.) 13) 한명기, 조선과 명의 사대관계, 역사비평 권50호, 역사비평사, 2000, p.307.
170 退溪學論叢 第25輯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에 이르러서는 명나라를 섬겨 중화의 제도에 따라 명나라가 동일시하였으며, 또 再造之恩을 입어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사대의 정성이 지극했다.14) 이 인용문에서 조선 건국과 그 이후 중화의 제도를 같이 행했고, 임진 왜란 때 明에게 입은 再造之恩 과 明亡하기까지의 조선에 대한 字小之 心 에 조선은 事大의 정성으로 답했다고 말한 것으로 볼 때 조선과 명나 라 간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관계로 명나라가 멸망당한 이후 1910년 경술국치까지 근300년 동안 조선은 明나라를 이은 소중화의 나 라였기에 대중화인 망해 없어진 명나라를 받들어 온 것이다. 이것을 계 승범은 조선 안에 살아남은 명나라의 영향력은 비단 문화적인 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실정치 무대에서도 권위의 원천으로 기능한 점에서 보 편적이라기보다는 특수한 경우에 가까웠다. 어떤 다른 문명보다도 儀禮 를중시한 유교국가 조선에서 외국인 명나라의 황제들을 제사하는 규례 를 정하고 18 19세기 근200년에 걸쳐 정치현장에서 그대로 준수한 것 은 한 좋은 예이다. 15)라고 하여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명나라가 조선에 대한 영향력 지대했음을 말하고 있다. Ⅲ. 華東吟 에 비춰진 중국과 우리의 관계 1. 중국과 우리의 관계 의암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를 대중화와 소중화의 관계로 설정하 고 있다. 이는 곧 도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이 사는 환경, 그리고 국가가 14)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p.590. 至國朝服事大明, 悉遵中 華制度, 而皇明視同內服. 又有再造之恩字小之心, 事大之誠.(柳麟錫, 宇宙問 答 의암집, 권51.) 15) 桂勝範, 조선 속의 명나라 明淸史硏究 第35輯, 2011, p.153.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171 추구하는 지향점이 같은 나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시 華東吟 其一에 보면 잘 나타난다. 美哉赤縣靑邱色 아름답구나! 중국과 우리나라의 빛이 天地中間大小華 천지 중간에 대중화와 소중화로다. 分義有之形勢以 분수와 의리를 형세로써 말한다면 親依卽似宗支家16) 친하고 의지함이 큰집과 작은 집 같구나. 이 시에서처럼 國名을 중국과 조선이 아닌 赤縣 과 靑邱 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赤 과 靑 의 대비되는 색으로 배치하여 색을 조화롭게 하고 두 나라를 비 교함으로써 나라의 환경과 민족적 관계를 美哉 로 표현하려 함이다. 이 러한 가운데에서 두 나라가 大 小華 의 관계를 유지하니 얼마나 아름다 운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분수와 춘추의리를 함께 추구하고 있 는 점을 들면서 두 나라의 관계를 宗 支家 로 말하고 있다. 赤縣-宗家, 靑丘-支家라고 설정함은 곧 그의 事大적 사고가 주종관계가 아닌 天倫 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와 같은 관계를 華東吟 其 二에서도 표현하고 있는데, 내용이 좀 더 구체적이다. 文明氣發闢鴻濛 문명의 기운이 일어나 천지의 원기를 열어 先後國先寰宇中 앞뒤로 세운 나라 천지간에 먼저 섰네. 疆脉星分人種一 강토는 다르지만 사람의 종족은 같고 倫常禮樂乃相同17) 윤리와 예의도 서로 같았네. 우선 人種一 에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즉 같은 민족이고 윤리의식과 禮義廉恥마저 같음을 轉句와 結句 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宇宙問答 에서 事大에 대하여 중국과 조선의 16) 柳麟錫, 국역의암집 天, 제천문화원, 2009, pp.266 267. ( 華東吟 其一, 毅 菴集 卷3) 17) 前揭書, p.267. ( 華東吟 其二, 毅菴集 卷3)
172 退溪學論叢 第25輯 나라 됨은 별자리가 같고 국토의 맥이 같으며, 인종이 같고 倫常의 제 도와 문물 학술이 같으며, 고금을 통해 함께 기뻐하고 슬퍼했으며, 함께 조심하고 즐김이 기록과 견문에 뚜렷하다. 18)고 하여 지맥, 인종, 제도, 문물, 학술을 공유하고 있는 관계여서 나라의 구분은 형식적일 뿐이지 굳이 중국과 조선을 나눌 필요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혼돈(홍 몽)의 세계에서 문명의 기운을 얻어 선후로 세운 나라가 중국과 조선이 기 때문에 비록 건국시기와 강토가 다를지라도 한 집안임을 말하고 싶 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에서 명나라와의 관계는 더욱 특별하다. 왜냐하면 불교의 국가인 고려를 무너뜨린 세력이 성리학을 공부한 친명세력이었 던 것이다. 그들은 조선건국과 더불어 억불숭유 정책을 표방하였고 명나 라를 중화문명의 정통계승자로 인식하여 대중화와 소중화의 관계를 유 지하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1644년 의종(숭정제) 때 멸망했지만 조선의 명나라 는 그 이후에도 건재하였음에 명맥이 조선왕조를 통해 끈질기게 살아남았는데,19) 이와 같은 사실을 다음 시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大報萬東大統亭 대보단, 만동묘, 대통단의 제향은 貫三百歲一精誠 삼백년을 일관하여 정성으로 지냈네. 誰聞振古吾邦似 예부터 우리와 같이 함을 누가 들었나 這義爭多日月明20) 그 의리는 해와 달보다 더 밝도다. 조선의 국왕과 문무백관의 극진한 제사를 정기적으로 받은 자들은 명 나라의 세 황제였다. 명을 건국한 태조(홍무제, 1368 1398), 임진왜란 때 조선의 군대를 보내 再造之恩 을 베풀었다는 신종(만력제, 1572 1620), 18)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p.590. 中國朝鮮之爲國星分 同 疆脉同人種 同倫常制度文物學術 同古今同休戚同患樂 歷歷於載籍耳目矣. (柳麟錫, 宇宙問答 의암집, 권51.) 19) 桂勝範, 조선 속의 명나라 明淸史硏究 第三十五輯, 2011, p.153. 20) 柳麟錫, 국역의암집 天, 제천문화원, 2009, pp.265. (柳麟錫, 崇明三義, 의 암집, 권3.)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173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숭정제 1627 1644)이었다.21) 이들을 위해 유 림들이 壇廟를 조성하고 祭享하였는데, 이곳이 起句의 大報萬東大統 亭 이다. 御苑의 大報壇에는 신종(만력제)황제를 흠향하고 화양의 萬東 廟에는 신종, 의종 두 황제를 흠향하고, 朝宗巖 절벽의 大統壇에는 高 皇帝(홍무제)를 흠향하였다. 皇朝의 유민으로서 동쪽으로 오는 자들에 게 정성을 펴게 하기 위하여 베푼 것이며 사림들이 함께 하고 있다. 22) 이처럼 조선 속의 명나라 로 자리하고 있었고, 300년이 지난 의암의 시 대에 와서도 尊明사상이 일관됨은 중화가 이 땅에 보존되어 있음을 의 미하는 동시에 대명의리를 지킴으로써 중화문명의 계승국이라는 자부 심을 갖게 된다. 따라서 중국과 조선은 비록 군신지간이지만 은혜에 있어 실상은 부자지간23)으로서의 宗 支家 또는 人種一 의 관계가 되 는 것이다. 華東吟 其二十에서도 대중화와 소중화의 관계가 脣亡齒寒 의 관계 임을 말하고 두 나라가 몹시 어려운 상황임에 가슴을 아파하고 있다. 有華運否雪加霜 중화의 비운은 설상가상 되었으니 東浪西瀾極浩洋 동서의 물결 속에 넓은 바다 되었네. 大小元同休戚義 대소중화는 원래 喜悲를 같이 할 의리 輔車唇齒念興傷24) 輔車脣齒25)와 같아 가슴 아프네. 21) 桂勝範, 조선 속의 명나라, 明淸史硏究 第35輯, 2011, pp.153 154. 22)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p.714. 御苑大報壇, 享神宗皇帝, 華陽萬東廟, 享神宗毅宗兩皇帝, 朝宗大統壇, 享高皇帝, 皇朝遺民東來者, 爲伸 誠而設, 而士林共之. (柳麟錫, 道冒編 下, 의암집, 권54.) 대보단(大報壇)은 그 위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동궐도>에서 보면 창덕궁 서북쪽 후원 옛 별대영(別隊營) 자리에 있고, 만동묘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華陽 里)에 세운 사당이며, 대통단은 경기도 가평의 조종암 동쪽 벼랑에 제단을 설치하였다. 23)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p.592. 雖君臣 恩實父子 (柳麟錫, 宇宙問答, 의암집, 권51.) 24) 上揭書, p.270. ( 華東吟 其二十, 毅菴集 卷3) 25) 輔車相依, 脣亡齒寒의 준말. 輔車相依는 수레에서 덧방나무와 바퀴처럼 뗄
174 退溪學論叢 第25輯 중국의 명나라가 망한지 300년이 지난 시기, 조선도 매우 어려운 지 경에 빠졌다. 이는 서구열강들의 침입에 따른 혼란으로 시작되어 마침 내는 일본의 강력한 식민정책으로 인하여 중화를 보전하기 어려운 입 장이 되었다. 중화의 보전이란 곧 나라의 수호이다. 그러나 중화의 비운 이 雪加霜 인 상황으로 보아 傾國의 정도가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대중화와 소중화의 관계를 同休戚義 한 관계로 명나라가 위태 로운 상황이면 조선도 역시 좋은 상황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결구에서 輔車唇齒 로 표현하고 있다. 즉 同休戚義 = 輔車唇齒이다. 여 기에서 輔車唇齒는 輔車相依와 脣亡齒寒을 합친 성어로 같은 의미이긴 하나 상황적으로 전개되는 시의 내용이 하나가 망하면 다른 하나도 온 전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어서 輔車相依 보다는 脣亡齒寒 의 의미로 해 석되어 진다. 굳이 이것을 구분하는 이유는 華東吟 其二十二의 내용 때문이다. 有定神州化漸東 중국이 안정되면 동쪽도 교화되니 推求往蹟理今同 지난 자취 구해보면 지금도 이치는 같네. 元無不復循環運 순환의 운세는 회복되지 않음이 없으니 龍虎風雲想望中26) 운룡풍호를 생각하며 기다리는 중이네. 起句의 定神州 하면 化漸東 이므로 대중화와 소중화의 관계를 輔車 相依 로 해석할 수 있다. 위의 두 시의 구도가 결과상 같은 뜻이지만 전 개되는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비운 대 안정, 현실상황 대 미래희망으로 비교할 수 있다. 즉 위의 시가 중화의 보전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절망 수 없다는 뜻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서로 돕고 의지함을 이르는 말 이며, 脣亡齒寒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가까운 사이에 있는 하나가 망하면 다른 하나도 그 영향을 받아 온전하기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두 성어는 같은 의미로 쓰인다. 26) 上揭書, pp. 270 271. ( 華東吟 其二十二, 毅菴集 卷3)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175 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이 시에서는 承句와 轉句에서처럼 과거의 역 사를 통해서 해답을 찾고, 이를 통해서 현실상황을 극복해보려는 의지 가 느껴진다. 또한 머지않아서 우주의 순환이치에 따라 중화가 바로서 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중국이 안정되고 조 선이 교화되는 날(起句)을 실현하기 위해서 龍虎風雲 을 기다린다(結句) 는 것이다. 이는 곧 의암이 의병장으로서 재기를 다짐하는 의지의 표현 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현실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늘 부심하는 모습을 느끼면서, 그렇다면 의암이 꿈꾸는 세계가 무엇인지 가 매우 궁금해진다. 그 궁금 증을 풀어주는 시가 바로 華東吟 其二十五이다. 春秋一統素王功 춘추 대일통은 공자[素王]의 공으로 大義明如日揭空 대의를 밝힘이 하늘에 걸린 해와 같구나. 安見世爲天下道 언제 도가 행하는 천하가 되어 華東永在泰平中27) 중국과 우리가 태평한 가운데 영원할까. 그가 일생을 살면서 이루고 싶었던 바람은 大一統 이 되는 세상이 다. 의암이 천지 가운데 문명을 열어 中으로서 밖으로 가서 大一統을 얻고, 윤리 도덕과 예악 법도를 외국과 더불어 같이 행한다면 본성과 진리가 같기 때문에 大一統한 중국을 경모하고 귀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략> 이로 인해 각기 그 머무를 바를 얻고 그 선을 얻게 되 면 하늘과 땅이 정돈되고 일월이 밝게 될 것이니 그 좋은 모습이 어떻 게 되겠는가? 28)라고 하여 왜 大一統되는 세상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 게 해준다. 그렇게 되면 온 천하에 도가 행해지고 태평한 세상이 된다 27) 上揭書, p, 271. ( 華東吟 其二十五, 毅菴集 卷3) 28)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p.599. 闢文明於天地之中 中以臨 外 立得大一統 倫理道德 禮樂法度 與外國而共之 其性天所同 莫不傾慕歸向 於大一統之中矣. <중략> 由是而各得其止 各得其善 乾坤整頓 日月光明好况 正如何哉.(柳麟錫, 宇宙問答 의암집, 권51.)
176 退溪學論叢 第25輯 는 것이다. 그러나 轉句로 보아 大一統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 때문에 더욱 大一統으로 영원히 道가 행해지는 태평한 세상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그의 마음이 느 껴지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의암이 생각하고 있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 를 宗 支家, 人種一 로 인식하고 있다. 즉 두 나라 간 경계를 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의암의 이러한 인식은 춘추대의에서 그 명분에서 찾고 있 다. 나아가 이를 실천하는 것이 尊明 이었고 명나라가 멸망했음에도 조 선이 中華의 명맥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는 자긍심에서 小中華라고 명 명한 것이다. 이러한 소중화정신을 가지고 중화를 회복하고 나아가서 大一統 을 이룰 때, 태평성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2. 역사로 본 중화와 소중화 의암은 그의 시 華東吟 에서 조선의 땅이 왜 小中華라고 말할 수 있 는지를 역사적 요소를 가미하여 시대별로 노래하고 있다. 小中華사상은 중국의 중화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 문명을 누리고 실천하려는 사상 을 말한다.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조선은 유교의 도맥을 보전하고 中華의 전통을 계승하여 실천한다는 朝鮮中華意識에서 小中華 라고 하였는데. 작은 중국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조선이 소중화로 서 중화와는 동열에 선다는 우월의식29)이 자리하고 있다. 의암의 華東吟 其三에서 중화와 소중화의 관계를 유구한 역사 속에 조화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와 중국과의 관계가 떼려 야 뗄 수 없을 만큼 밀접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이다. 그래서 이 시 에서도 요임금과 단군의 관계를 蓂莢 잎을 나누는 사이이고, 또한 한 낮 의 햇빛과 아침 해로 비교하고 있다. 29) 조영록, 朝鮮의 小中華觀 : 明淸交替期 東亞三國의 天下觀의 變化를 中心으 로, 역사학보 149호, 역사학회, 1996, p.115.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177 作堯之世立檀君 요임금 세상이 되자 단군도 왕이 되니 蓂葉敷春色遠分 명협30)잎 봄빛 띠어 멀리 나누었네. 明赫午暉鮮出日 한 낮의 햇빛은 밝고 아침 해도 고와 中東造化起如雲31) 중국 동국 조화는 구름처럼 일어났네. 단군이 조선을 건국한 때는 BC 24세기경으로 중국의 요임금이 집권 하고 있을 때이며 태평성대의 시대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단군을 聖君 요임금의 반열로 그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는 단군 역시 조선을 태평 성대로 나라를 이끌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고, 당시 중국과 조선의 관계가 밀접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孔斌의 東夷列傳 에 보면 중국과 우리의 관계를 동이는 대 개 천여 년 이래로부터 우리 중화와 서로 우방의 관계에 있어서 나라사 람들이 서로 와서 거처하고 가서 사는 경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32)고 하여 우리의 역사를 열었던 단군시대부터 나라 간에 격이 없음을 말 하고 있다. 여기에 蓂葉을 공유하는 사이로 설정하고 있다. 蓂葉 은 蓂 莢의 잎으로 이 풀이 돋아나고 떨어지는 잎사귀 수를 이용하여 曆法을 만들었는데, 이 책력이 바로 堯曆이다. 堯曆은 閏曆으로 시기에 맞추어 씨 뿌리고 거둘 수 있게 만들어진 농사력이다. 이는 요임금과 단군이 문물을 공유하여 다스림으로써 中東造化 가 일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곧 요임금과 단군의 관계로서 당시의 중화, 소중화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華東吟 其四에서는 순임금에게 자리를 물려받은 우왕과 단군의 아 들 부루의 관계를 알 수 있게 해준다. 30) 명협은 요임금 때의 풀로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하루에 한 잎씩 피다가, 열 엿새부터 그믐까지는 하루에 한 잎씩 떨어지고, 작은달에는 마지막 한 잎이 시들기만 하고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曆草라고도 한다. 31) 上揭書, p.267. ( 華東吟 其三, 毅菴集 卷3) 32) 孔斌, 후한서, 동이열전 권75. 東夷蓋自千有餘年以來 與吾中華 相有友 邦之義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
178 退溪學論叢 第25輯 禹年萬國會塗山 우왕이 도산에서 만국을 모을 때 表表扶婁玉帛間 특별히 부루도 옥백을 바치는 제후였네. 海左文兆知肇此 우리나라 문명이 이에서 비롯되니 慕華崇禮透誠關33) 중화를 높이고 예의를 숭상하는 정성이 지극했네. 우왕이 도산에서 부루를 만났다는 기록이 東夷列傳 에 나온다. 하 나라 우왕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도산에서 회맹할 때, 부루가 친히 임하 여 나라의 경계를 정하였다, 34)라고 하여 우왕과 부루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夫婁親臨 이라 하여 부루가 우왕의 상전으로 설정하였 다. 또한 塗山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우왕과 부루 의 관계를 表表扶婁玉帛間 이라 하여 임금과 제후의 관계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의암 이 중화와 소중화의 관계로 설정하기 위한 의도와 尊華主義的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어떻든 우리나라의 문명도 중화에서 비롯되었 고, 慕華崇禮 를 함으로써 나라가 안정되고 인심이 바르게 되었다는 것 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의암이 道冒編 下에서 천하의 큰 재앙은 중화가 높여지지 않는 것 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중략> 중화가 높여지지 않으면 이적에 혼란 되어 침몰하고 천리는 이로부터 밝혀지지 않고 人心은 이로부터 바르지 않을 것이다. 35)라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어 華東吟 其五에서 기자가 은나라의 주왕에게서 떠나 동쪽으로 와 서 나라를 세웠는데, 중화의 문명을 도입하여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諸 夏文明 과의 一色 임을 강조하고 있다. 誰送殷師白馬來 누가 은사(기자)를 백마 태워 보내왔나 33) 上揭書, p.267. ( 華東吟 其四, 毅菴集 卷3) 34) 上揭書. 공빈은 공자의 7대손이다. 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 35)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p.709. 天下大禍, 莫甚於中華之 不尊. 中華不尊, 混於夷狄而沉沒, 天理自此而不明, 人心自此而不正矣. (柳麟錫, 道冒編 下, 의암집, 권54.)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179 九疇手法八條恢 구주의 방법으로 팔조를 넓혔네. 佳山麗水三千里 아름다운 강산 삼천리에 諸夏文明一色開36) 중국의 문명이 한 빛으로 열렸네. 箕子는 은나라 紂王에게 간언했다가 온갖 수모를 겪었으며, 너무나 두 려운 나머지 미친 척해 남의 노비가 되고자 했지만 紂가 그를 잡아 가두 었을 정도37)로 폭정을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주나라 무왕에게 은나라가 멸망을 당하자 기자는 東來하여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주나라는 공 자께서 尊周論 을 내세울 만큼 문왕, 무왕, 주공의 정치와 문명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그 만큼 중화의 제도를 잘 정비한 나라이다. 주나라 무왕은 기자에게 천지의 대법을 물으니 그는 洪範九疇를 진술 하였고, 조선에 백마를 타고 들어와 八條의 법을 다스렸다고 한다. 기록 에 의하면 史記 에 적기를 箕子가 洪範을 말한 뒤에 武王이 朝鮮에 封 해주고 臣下로 삼지 않았다. 라고 하였으니, 箕子는 臣下가 될 수 없다. 武王이 또한 그 뜻을 이루어 臣下로 삼지 않은 것이다. 38)라고 하여 주 나라와 기자가 세운 조선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음은 물론 結句에서 언 급하고 있듯이 中華에 의한 제도가 같았다는 데에서 중국과 조선의 중 화와 소중화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華東吟 其八에서는 송나라와 고려의 학문적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고려 말기 송나라의 유학이 들어옴으로써 우리나라가 불교국가에서 유 교 중심의 국가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麗朝不免事胡元 고려는 부득이 오랑캐 원나라를 섬겼지만 箇裏慇懃有正論 그 속에서 은근히 정론이 있었네. 圃隱先生終特立 포은 선생은 끝내 우뚝 서서 36) 上揭書, p.267. ( 華東吟 其五, 毅菴集 卷3) 37) 司馬遷, 史記 권3 殷本紀. 箕子懼, 乃詳狂爲奴, 紂又囚之. 38) 書經, 周書-洪範篇. 史記亦載, 箕子陳洪範之後, 武王封于朝鮮而不臣也. 蓋 箕子不可臣, 武王亦遂其志而不臣之也.
180 退溪學論叢 第25輯 尊攘義理極明言39) 존화양이의 의리를 지극히 말하였네. 당시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고의 쿠빌라이칸이 국호를 원나라로 개명 하고 남송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 宋과의 우호관계에 있던 高麗가 뒤에 서 교란할 것을 우려해서 먼저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 후 30년 동안 7차 례나 막아냈던 고려는 강화도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결국 25대 충열왕 때 복속관계를 맺고 34대 공민왕 때까지 140여 년간 이러한 관계 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공민왕 대에 와서 원나라의 세가 꺾였을 때 조선 개국의 주역인 신진 사대부가 급성장하였는데, 이는 공민왕이 성균관을 중시여가고 유학교육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송나라 때 학자인 정자와 주자의 학문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起句와 承句는 당시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正論이 있었기 때문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의암은 正論에 대하여 말하기를 학문이란 무릇 도이다. 그렇다면 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고금의 天下人들이 다함께 따르는 길이다. 40)라 고 정의하고 대체로 道는 하늘에서 나왔고 요순 두 임금이 그것으로 써 행하시고 공자와 맹자 두 성인이 그것으로써 가르쳤으며 정자와 주 자 같은 후성이 그것을 계승하여 일관했다. 무릇 공맹과 정주에 의해 계승된 도학의 술이 천지 사이에 바른 것이 되었다. 41)라고 정학의 맥 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 시 轉句에서 포은 정몽주 선생을 摘示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유학의 태조로 포은 선생을 삼고 있기 때문이다. 우암선생이 그 묘에 제하기를 <선생의 학문은 반드시 주자를 宗으로 삼아서 후대의 39) 上揭書, p.268. ( 華東吟 其八, 毅菴集 卷3) 40)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p.571. 學夫道也, 夫道何也. 天下 古今人所共由之. (柳麟錫, 宇宙問答, 의암집, 권51.) 41) 前揭書. p.571. 盖道出於天, 而堯舜二王以之行, 孔孟以之學, 而程朱以之後, 有 貫乎一者也. 夫孔孟程朱道學之爲術, 在天地間, 爲其正者也.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181 학자들로 하여금 모두 敬을 주로 하여 그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 여 그 앎을 이루고 자신을 돌이켜 그 실체를 실천할 줄 알게 했다.>라고 하였으니 세 가지는 성학의 체이고 요점이다. 42)라고 하여 포은이 성리 학을 받아들인 후 그 요점을 후학들에게 전함으로써 큰 영향을 끼쳤음 을 알게 해준다. 의암은 華東吟 其九에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도 춘 추대의에 따른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공맹정주의 正學이 정치적 명분의 중심이 되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乾坤起立我明皇 천지가 명나라 황실을 세워 일으키니 大義風從康獻王 대의의 풍속을 강헌왕이 따른 것이라. 君臣際會邁千古 군신이 서로 만나 오래 전 힘을 합쳤으니 更服華䂓極燦光43) 다시 중화의 법을 따름에 매우 빛이 찬란하구나. 1279년 원나라에 의해 남송이 멸망하고 1368년 송나라를 잇는 명나라 가 건국되었다. 이 때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중심의 친명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건국하면서 명나라를 조선이 섬기는 상황이었다. 조선은 중화의 맥을 정통으로 이은 명나라를 宗家로 삼아 崇儒정책을 펼침으로 써 명의 문물과 제도를 중화로 삼고 이를 보전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이 명나라가 망하고 약 300년이 지난 의암이 살던 시대에 이르러서도 명나 라를 섬기는 풍토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중국의 정통을 이어받은 명나라에 대하여 춘추대의에 따른 예법을 실행하는 것이다. 즉 중국대륙 에서 사라진 중화의 정통을 이 땅에서 지키면서 그 제도와 문물을 잃지 않고 유지한다는 자긍심도 있었고, 임진왜란 시 조건 없이 형제처럼 원 조해 준 고마움에 대해 잊지 않는다는 再造之恩 의 의리정신도 작용하 42)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p.614. 尤庵先生題其墓曰先生之 學, 必以朱子爲宗, 使後之學者, 皆知主敬以立其本, 窮理以致其知, 反躬以踐其 實, 三者爲聖學之軆要. (柳麟錫, 道冒編 上, 의암집, 권52.) 43) 上揭書, p.268. ( 華東吟 其九, 毅菴集 卷3)
182 退溪學論叢 第25輯 였다. 이렇게 중화와 소중화의 관계를 유지함은 중화의 정통성을 지키는 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화서도 주자의 자치통감 강목 을 잇는 송원화 동사합편강목 중암과 성재에게 지을 것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華東吟 其二十四에 宋元華東史合編綱目 을 지은 목적, 저술방법 이 나오는데, 만대의 법칙과 주자 綱目 의 저술방식을 따랐음을 말하 고 있다. 我帥華重省三翁 나의 스승 화서, 중암, 성재 세 노인은 到底尊攘苦血衷 존화양이 고충을 끝까지 이르렀네. 爲整二儀䂓萬世 천지를 정돈하고 만대의 법이 되도록 續朱靑史述華東44) 주자의 강목에 이어 화동사를 지었네. 화서의 宋元華東史合編綱目 은 공자의 春秋 45), 주자의 資治通鑑 綱目 46)에 이어 송 원대의 강목을 續綱目으로 삼아서 편찬하되 강목의 정신인 대의명분을 밝히고, 당시 고려의 사정까지도 함께 기록하여 이민 족에게 짓밟혔던 중국과 한국의 동시적 운명을 명분론 정통론에 의해 서 서술하자는 데에 있었다.47) 이 시에서 宋元華東史合編綱目 를 지은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결구의 靑史 는 資治通鑑綱目 을, 華東 은 宋元華東史合編綱目 을 가 리키고, 승구의 尊攘 에서 이 책이 춘추필법에 의한 책임을 짐작하게 하 여 무너진 대중화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44) 上揭書, p.271. ( 華東吟 其二十四, 毅菴集 卷3) 45) 공자가 노나라 사관이 隱公 원년 元年 (BC 722년)부터 哀公 14년(BC 481년)까 지의 사적을 지은 宮廷年代記를 독자적 역사인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편찬한 책으로 유학자들의 정신과 행동양식을 제시하는 경서로 여기고 있다. 46) 주자가 사마광이 춘추시대의 대국인 진나라가 韓, 魏, 趙의 세 나라로 분열된 위열왕 23년(BC 403)부터 後周의 世宗 顯德 6년(959)까지 의 역사를 기술한 資治通鑑 을 춘추필법으로 史實에 대하여 큰 제목으로 綱을 따로 세우고, 史實의 기사는 目으로 구별하여 편찬한 책이다. 4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신문화연구원, 199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 /Index.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183 이처럼 두 나라의 관계를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여 말하고 있다. 중 국 요임금 때 조선은 단군에 의해 건국되어 함께 나라가 섰고, 우왕 때 도산에서 옥백을 가지고 모였는데 아들 부루를 파견했으니 중국과 동 방이 서로 감응한 시초가 되었다. 기자가 와서 동방의 임금이 되어 곧 나라가 다시 섰고, 고려에 이르러서는 송나라와 친근한 정이 있었으며 주자로부터 좋은 풍속을 얻었다. 조선에 이르러서는 명나라를 섬김이 중화의 제도에 따라 명나라와 동일시하였으며, 또 再造의 은혜를 입어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사대의 정성이 지극했다, 명나라가 망했 어도 萬折必東의 의리를 폐하지 않았으니 중국의 시작과 끝이 같다. 그 의리는 진실로 서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48)라고 하여 요임금과 단군, 우왕과 부루, 주나라 무왕과 기자, 송나라의 정 주자와 고려 정 몽주,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나열하여 말하고 있으며 성현의 요법이 있으니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침은 천지의 떳떳한 법도를 다하는 것이다. 서로 전수하고 또 남명의 세 황제(桂王 福王 魯 王)를 받들어 정통으로 하고 영력 연호를 썼다. 이에 중국이 망한 후에 사천 년의 華夏一脈이 조선에 있게 되고, 이천 년의 공맹이 남긴 법도 가 조선에 있지 않음이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소중화의 실상이 확 연하다는 것이다. 49)라고 하여 오랜 세월 중국과 조선의 중화 소중화 의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이렇게 두 나라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은 중화와 소 48)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p.590. 中國大堯之世 朝鮮檀君作 而幷立 及禹塗山玉帛之會 送子扶婁 中東之相感應 肇而有深矣 及箕子來君于 東 則便卽一國矣. 至高麗致款於宋室 而亦得風俗好之 褒於朱子. 至國朝服事 大明 悉遵中華制度 而皇明視同內服 又有再造之恩字小之心 事大之誠 靡不用 極 及明屋社 猶不忘萬折必東之義 三百年不廢 中東始終有如是矣 義固不可不 相依也. (柳麟錫, 宇宙問答, 의암집, 권51.) 49) 上揭書, p.592. 有聖贒之要法 尊中華攘夷狄 窮天地之常經 爲相傳授 又崇南明 三皇以正統 用永曆年號矣 爰自中國陸沉以後 四千年華夏一脉 未嘗不寄寓在 朝鮮 二千年魯鄒遺緖 未嘗不寄寓在朝鮮矣 此其小中華之實有的然也.
184 退溪學論叢 第25輯 중화의 관계에서 중국과 조선이 主從이나 命伏의 관계가 아닌 兄弟 또 는 父子의 관계임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관계이기 때문에 명나 라가 망한 후에도 그 의리를 지켜 崇明하였고, 중국에는 보전되고 있지 않은 華脈이 조선에서 보전되고 있음으로써 이 땅이 곧 중화임을 말하 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으로 본다면 그가 말하는 小中華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Ⅳ. 결 론 의암의 시 華東吟 二十五首는 중국의 요임금 시대부터 명나라가 멸 망할 때까지 역사적으로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의암이 春秋大義적인 입장에서 단군시대부터 조선말까지 華東관계를 역 사를 통하여 읊고 있어, 이를 토대로 우리와 중국의 관계를 여러 각도로 바라보았다. 즉 의암이 중국과 우리의 관계를 어떤 관계로 인식하고 있 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역사로 본 대중화와 소 중화로 구분하고 여기에 宇宙問答 과 道冒編 의 관련 문장을 참고하 여 알아본 결과 다음과 같았다. 첫째, 의암이 생각하고 있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를 宗 支家, 人 種一 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와 중국을 宗 支家 로 인식함은 그가 비록 군신지간이지만 은혜는 실상 부자지간이라고 말했듯이 나라와 나라 간 의 경계를 두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人種一 의 관계라고 말하고 있다. 인류적 입장에서 같은 민족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인식 은 춘추의리의 명분으로 儒道 中華제도를 함께 공유하고 보전한다는 차원에서 우리와 중국의 관계가 둘이 아닌 하나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것이 나아가 大一統 이 되었을 때 태평성대가 이 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둘째, 두 나라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는 역사를 통하 여 우리와 중국을 대중화와 소중화의 관계로 말하고 있다. 이것 또한 主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185 從이나 命伏의 관계가 아니라 兄弟 또는 父子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대중화, 소중화의 관계이고, 이러한 관계이기 때문에 명나라가 멸망했음에도 華脈이 조선에 보전됨으로써 이곳을 小中華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小中華 는 그에게 있어 하 나의 자긍심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렇게 우리와 중국 간의 관계에서 어떤 조건과 有 不利를 따지지 않고, 그 관계를 유지했거나 하려고 했었던 것은 중국과 우리의 역사 속 에서 춘추의리의 명분을 가지고 儒道 中華제도를 함께 공유하고 보전 했다는 차원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차원이 단군시대부터 조선말까지 중 국과의 관계가 이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명나라 멸망 후의 우리 의 소중화 사상이다. 왜냐하면 만약 중국과 우리의 관계가 군신이라는 상명하복의 경직된 관계였다면 명나라의 멸망으로 대보단, 만동묘, 대통 단 등 제단을 설치하고 명의 황제에게 제사할 필요가 없었음은 물론 중 화제도를 보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중화란 우리가 儒 道 中華제도를 보전해야 된다는 의무감이었으며, 儒道 中華제도를 보전 하고 있다는 자긍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참고 문헌> 1. 원전 및 자료 孔 斌, 후한서, 동이열전 일 연, 古朝鮮王儉朝鮮. 삼국유사 계연수, 桓檀古記, 檀君世紀. 司馬遷, 史記 권3 殷本紀 書經, 周書-洪範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신문화연구원, 199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186 退溪學論叢 第25輯 柳麟錫, 국역의암집 人, 제천문화원, 2009. 2. 논문 박지훈, 宋代 士大夫의 高麗觀, 이화사학연구 30, 이화여대, 2003. 桂勝範, 조선 속의 명나라 明淸史硏究 第35輯, 2011. 백승호, 고려의 대 송 민간무역, 중국과 중국학 제6권, 영남대학교중국 연구센터, 2003. 한명기, 조선과 명의 사대관계, 역사비평 권50호, 역사비평사, 2000. 조영록, 朝鮮의 小中華觀 : 明淸交替期 東亞三國의 天下觀의 變化를 中心 으로, 역사학보 149호, 역사학회, 1996.
의암 유인석의 시에 나타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연구 187 Abstract China-Korea Relations Represented in Poetry of Ui-am Yu In-seok - Focusing on Hwadonguem / Song Gi Soep Geopolitically, Korea is a state surrounded on three sides by water and peninsula adjacent to the Chinese continent. The undeveloped transport forced Korea to enter into China until the late Joseon. Therefore, Korea was closely related to China and accepted Sinocentrism from the beginning of its history because China had much higher level of culture and civilization than Korea. Thus, Sinocentrism was introduced to Korea during the Gojoseon and Confucianism became the standard in daily life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and Goryeo period. These are found in Ui-am Yu In-seok(1842 1915) s works such as 25 poems in Hwadongeum and Ujumundap and Domopyeon in Ui-am jip. This study examined the relations with Hwadong in detail by extracting the content of Ujumundap and Domopyeon closely related to 11 out 25 poems in Hwadongeum. The results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Ui-am regarded China-Korea relations as main-branch families and conspecific looked for these relations from the cause of loyalty of the Chunchu period. Furthermore, he described that the respect for Ming dynasty (Jonmyong) was to practice them and the intention to conserve the cultural context of China was Sojunghwa even after the Ming dynasty collapsed. Therefore, he thought that the peaceful reign would be achieved when China was unified with such a Sojunghwa spirit. Second, he tried to describe that China-Joseon relations were not master-servant relationship but sibling or father-son relationships Sinocentrism and Sojunghwa from a historical perspective. He also tried to emphasize that
188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Joseon kept loyal to Ming by expressing the respect for Ming even after the Ming dynasty collapsed and Joseon was the place representing the center of the world by conserving the cultural context of China. Such a perspective enables us to guess what Sojunghwa mentioned by him means in China-Korea relations. Key words: China-South Korea relations, Goryeo and Song, Joseon and Ming, Sojunghwa, Unification of China.
退溪學論叢 第25輯(189 214쪽)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1)최 목 Ⅰ. 서 론 Ⅱ. 국악의 의미 재 목 안 선 희** 차 Ⅲ. 조선시대 국악명칭과 음악사상 Ⅳ. 결 론 論文 抄錄 이 연구는 국악이라는 명칭이 성립되기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 지 국악에 대한 명칭과 통감부기 국악의 명칭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고, 국악이라는 명칭을 통해 조선시대 음악사상을 살펴보았다. 국악이라는 명칭의 근원이 된 향악은 신라에서 가장 먼저 사용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에서 사용된 향악은 신라에서 창작되거나 일반적으로 알려 진 음악을 뜻하며,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향악의 의미는 여러 지방에서 전 승되고 있던 향토음악과 삼국이전 유입된 음악 중 향악화 된 음악을 포함하 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 전승된 향악은 당악보다도 보다 더 활발하게 고려에 전승되었다. 고려는 이전시대에 사용되던 향악(속악) 당 악 이외에 아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후기까지 지속적 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들은 음악의 유래와 관련이 깊으며, 각각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이 용어들은 국악의 일부분을 뜻하 * 이 논문은 영남대학교 연구조교활용과제 (과제번호:213A251107)에 의해 연구 되었음. ** 최재목 : 영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안선희 : 영남대학교 한국학과 박사과정 수료 논문투고일: 2015.05.27 / 심사개시일: 2015.06.17 / 게재확정일: 2015.06.27
190 退溪學論叢 第25輯 는 용어로 사용되며, 국악이라는 용어가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국악이라는 용어는 흔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통감부기의 국악 용어는 1906년부터 1910 년 통감부의 관제개편으로 인해 재등장하였으며, 해외에서도 사용되어 우리 나라의 전통음악을 뜻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에는 향악 당악 아악이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국악 이 라는 명칭이 쓰인 사례는 많지 않지만 16세기에서 18세기에 사용된 사례를 찾 아 볼 수 있다. 중종실록 과 선조수정실록 황단증수의 청음집 농포 문답 에 국악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어 실록과 의궤, 문집에서 모두 사용 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시대 국악이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사용되 던 용어는 아니지만, 실록과 의궤 문집과 같이 다양한 문헌에 등장하고 있어 당시 우리나라의 궁중에서 연행된 음악을 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비추어 볼 때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나라의 음 악 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당시의 화이사상이나 실학사상이 근간이 되어 현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국악, 향악, 당악, 아악, 음악사상, 국악의 의미. Ⅰ. 서 론 국악(國樂)은 서양음악을 지칭하는 음악(音樂) 이라는 용어에 상반되는 우리나라의 고유 음악으로 한국음악(韓國音樂)의 줄임말로 해석되어 우 리나라 전통음악(傳統音樂)을 뜻한다. 여기서 전통음악이란 궁중음악 민 속음악 의식음악 창작음악 등을 포함하고 있어, 현재 우리나라의 전통 음악과 관련한 곳이면 어디든지 국악이라 사용하고 있다. 또, 국악과 비 슷하거나 동일한 의미로 전통음악(傳統音樂) 한국음악(韓國音樂) 한민 족음악(韓民族音樂)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국악이라는 용어는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이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악(雅樂) 당악(唐樂)과 같이 외래음악에 대칭어로 사용되던 명칭이 향악(鄕樂)과 합쳐지면서 형성된 용어임을 알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191 수 있다. 국악의 의미에 대해 국악대사전(國樂大事典) 에서는 국악 을 한국음 악의 준말로 나라음악을 뜻하고, 1907년 국악사장(國樂師長: 金宗南) 국 악사(國樂師)의 직제(職制)를 둠으로서 국악 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 였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국악 에는 아악(또는 정악) 가곡 가사 시조 판소리 민요 범패 등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음악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신국악(新國樂)까지 포함시킨 것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작곡가에 의 한 작품이나 한국말로 된 음악이라 할지라도 서양식 작곡법에 의해 작곡 된 관현악 오페라 또는 현대 가곡 등은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통 례로 되어 있음1)을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그 의미를 규정하였다. 과거 국악은 악(樂) 고악(古樂) 조선음악(朝鮮音樂) 아악(雅樂) 등으로 사용되었으나, 광복이후 국악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어 현재는 우리나라 의 전통음악을 지칭하는 공식적인 용어로 자리잡았다. 이에 대해 1980년대 중반 이후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국악용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연구들에서는 서양음악의 준말인 양악(洋樂)의 대칭어로 1907년 등장하여 4년간 사용된 용어2)로 본 관점과 통감부기의 메가타 타네타로오(目賀田種太郞, 1853-1912)와 이자와 슈우지(伊澤修二, 1851-1917)에 의해 주창된 국악창성론(國樂創成論)과 관련하여 국악 의 개념을 밝힌 연구3)가 있었다. 이외에도 많은 단행본이나 연구에서 국악 에 대해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다. 1) 장사훈, 國樂大辭典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4), 140쪽. 2) 송방송, 한국음악통사, 서울: 일조각, 1984; 손태룡, 음악이란무엇인가, 경 산: 영남대학교출판부, 2006. 3) 노동은, 음악, 한반도에서 그 갈등의 언어성 한국음악사학회, 경산: 한국 음악사학회, 1993; 김수현, 일본의 國樂創成論'과 한국의 國樂 이라는 신조 용어의 관계성 고찰 안성: 중앙대학교 대학원 음악학과 국악전공, 1997; 노 동은, 국악 이라는 용어, 일본용어인가, 한국용어인가? 노동은의 두 번째 음악상자, 서울: 한국학술정보(주), 2001; 장혜숙, 노동은의 한국음악 용어 해석론 노동은과 민족음악, 그 길 함께 걷다 (서울: 민속원, 2006), 61~74쪽.
192 退溪學論叢 第25輯 이 연구들을 종합해보면, 국악 이라는 용어는 1907년에 가장 먼저 사 용되었으며 1910년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다가 1950년 국립국악원이 설 립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국악이 라는 용어에 대해 일본에서 유입된 국악이라는 의미로만 단정 짓고 있 어 현재 사용되고 있는 국악이라는 용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에 대한 결 론을 찾기 힘들다. 1907년 가장 먼저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국악이라는 용어는 과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문헌에 등장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에도 사용된 기록이 있어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들을 살펴보면 국악이라 는 명칭이 각 시대별로 규정하고 의미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단순히 일본의 영향을 받은 명칭이 아니라는 점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 지만, 이와 관련하여 일제강점기 이전의 국악용어에 대해 연구한 사례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국악이라는 명칭이 자리잡기까지는 많은 문화와 사상의 영향을 받았 을 것이며, 그 의미가 다름은 당시의 음악관이나 음악에 대한 시각이 내 포되어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국악이라는 명칭이 성립되기 이전인 삼국시대 부터 고려시대까지 국악에 대한 명칭과 통감부기 국악의 명칭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고, 조선시대 국악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사례를 찾아 당 시의 음악사상과 관련하여 살펴보겠다. Ⅱ. 국악의 의미 음악과 관련하여 역사적 명칭이 생겨난 것은 삼국시대(三國時代)로 볼 수 있으며, 향악(鄕樂) 아악(雅樂) 당악(唐樂) 속악(俗樂) 등의 명칭으로 분류되었다. 향악과 당악은 신라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통용되던 명칭 으로 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아악 당악 속악으로 분류되었다. 이 중 향악은 국악이라는 명칭의 근원(根源)으로 추측할 수 있다.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193 신라에서 국악의 의미로 사용된 용어로는 향악이 있다.4) 삼국시대 이 전의 상고사회에는 제천의식과 관련한 가무(歌舞)가 그 당시 음악활동 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변진의 현악기와 삼한의 가무는 향악의 근원5)이 되었다. 신라시대의 향악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당시 신라에서 전해지던 토속적 음악이라는 의미의 향악 즉, 외래음악 대한 우리음악을 뜻하며, 두 번째는 외래에서 유입되었으나 향악화 된 음악을 뜻하는 말로 볼 수 있다. 이는 삼국의 신라와 통일신라에서 차이를 보이 는 것으로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졌다. 박제상(혹은 모말) 이전에 미사흔이 돌아올 때 [왕은] 6부(六部)에 명하 여 멀리까지 나가 맞이하게 하였고, 만나게 되자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마침 형제들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껏 즐길 때 왕은 노래와 춤을 스스로 지어 자 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지금 향악의 우식곡(憂息曲)이 그것이다.6) 삼국사기 는 향악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전하는 문헌이다. 박제상(朴 堤上)이 미사흔(未斯欣)을 일본에서 신라로 무사히 귀환(歸還)시켰는데, 이때 눌지왕(訥祗王, 417~457)이 보인 노래와 춤을 향악의 우식곡(憂息 曲)으로 부른다는 내용이다. 우식곡의 의미는 우식(憂息)'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와 일 본에 볼모로 잡혀간 자신의 두 아우가 모두 신라로 돌아옴으로써 눌지 왕 자신의 근심이 사라졌다는 내용의 노래와 춤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볼 때 자신의 뜻을 나타내는데 노래와 춤으로 표현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7) 즉, 우식곡과 같이 신라시대에 창작된 음악도 4) 신라시대 사용된 용어 중 당악(唐樂)이라는 용어도 있었으나 통일신라시기 만 하더라도 외래 즉, 당나라에서 유입된 음악을 뜻하였다. 따라서 당악은 이 후 고려시대에서 언급하기로 하겠다. 5) 송방송, 한국음악의 원류 한국음악학서설 (민속원, 2001), 196쪽. 6) 三國史記, 卷32. 10a4. 朴堤上(或云毛末) 初 未斯欣之來也 命六部遠迎 之 及見握手相泣 會兄弟置酒極娛 王自作歌舞 以宣其意 今鄕樂憂息曲 是也.
194 退溪學論叢 第25輯 향악의 범주에 포함시켰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래와 같이 5세기 무렵 음악을 일컫는 일반적인 의미로 도 사용되었다. 김인문 또한 예서(隷書)와 활쏘기 말타기 향악(鄕樂)을 잘 하였는데, 행동의 법도가 수수하고 세련되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추 앙하였다.8) 신라의 각 지역에서 연주된 향토색 짙은 음악을 향악이라 불렀으며, 이 러한 개념의 향악이라는 용어는 삼국통일 이전부터 신라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통일신라(780~935)에 이르면서 향악이라는 명칭은 변천을 거치 게 된다. 삼국사기 에 전하는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 五首) 는 향악의 의미가 이전의 의미와 달라졌음을 나타내준다. 최치원(崔致遠)의 시(詩)에 향악잡영(鄕樂雜詠) 다섯 수(首)가 있으므로 지금 여기에 기록한다. <금환> 온 몸을 휘두르고 두 팔을 내저어 금환을 떼굴떼굴 힘차게 굴리니 명월이 굴러가고 별도 반짝반짝 명월이 굴러가고 별도 반짝반 짝 고요한 바다 물결엔 고래도 춤을 춘다. <월전> 올라간 두 어깨에 목조차 들 어가고 머리 위의 상투는 뾰족하게 나왔어라 노랫소리 들리라 웃음소리 요란 하며 저녁에 매단 깃발 밤새도록 휘날린다. <대면> 황금 탈 쓴 사람 누구인지 모를 네라 구슬채찍 휘두르며 귀신을 쫓아낸다. 달아나며 춤추다가 으쓱으쓱 늦은 걸음 너울너울 춤을 추는 봉황새와 같아라. <속독> 고수머리 남빛 얼굴 못 보던 사람들이 때지어 뜰에 와서 난 새처럼 춤춘다. 북소리 둥당둥당 바람 소리 살랑살랑 남북으로 뛰어다니며 끝없이도 춤춘다. <산예> 서역에서 유사 (流沙) 건너 만 리 길 오느라고 털이 모두 떨어지고 먼지조차 묻었구나. 머리를 흔들면서 꼬리마저 휘두르니 온갖 짐승 어른 되는 네가 바로 사자던가.9) 7) 김성혜, 신라음악사 연구 (서울: 민속원, 2006), 113쪽. 8) 三國史記. 卷44, 5a7-8. 金仁問 又善隸書射御鄕樂 行藝純熟 識量宏弘 時人推許. 9) 三國史記, 崔致遠詩 有鄕樂雜詠五首 今錄于此 金丸 廻身掉臂弄金丸 月轉 星浮滿眼看 縱有宜僚那勝此 定知鯨海息波瀾 月顚 肩高項縮髮崔嵬 攘臂群儒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195 이 향악잡영오수 는 최치원이 당에서 돌아 온 이후인 88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 오수 (五首)는 각각 (金丸), 월전(月顚), 대면 (大面), 속독 (束 毒), 산예(狻猊)이며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그 대상이 잡희 (雜戱)를 수반 하는 일종의 잡기 가면춤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당시 행해지던 놀이형태의 가면무희를 시의 형식으로 나타낸 향악잡영오수 에는 한(漢)나라의 기악(妓樂)의 일종인 금환(金丸), 고구 려악으로 추정되는 속독(束毒), 서역계 기악(伎樂)인 산예(狻猊)10) 등과 같이 신라 고유의 것이 아니고, 대부분 중서남아시아, 즉 서역 계통 무 악의 영향을 입은 기악으로 향악의 본래의 뜻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 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외래의 놀이를 주제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를 향악 이라 지칭하고 있다. 이를 향악이라고 한 이유는 오기(五伎)가 이미 신라시대에 민속화 향 악화되어 널리 연희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신라에 당악 이 수용되면서 전래된 향악은 물론 그 이전에 들어와 있던 외래 음악까 지를 아울러 향악이라11) 지칭하였던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악지 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신라의 음악은 삼죽 삼현 박판 대고 가무로 되었다. 춤을 추는 두 사람은 뿔처럼 튀어나온 복두를 쓰고 자색의 큰 소매가 달린 공란을 입었고 붉은 가죽 에 도금한 허리띠를 띠었고 검은 가죽신을 신었다. 삼현은 첫째 현금, 둘째 가 야금, 셋째 비파이고 삼죽은 첫째 대금, 둘째 중금, 셋째 소금이다.12) 鬪酒盃 聽得歌聲人盡笑 夜頭旗幟曉頭催 大面 黃金面色是其人 手抱珠鞭役鬼 神 疾步徐추呈雅舞 宛如丹鳳舞堯春 束毒 蓬頭藍面異人間 押隊來庭學舞鸞 打鼓冬冬風瑟瑟 南奔北躍也無端 狻猊 遠涉流沙萬里來 毛衣破盡着塵埃 搖頭 掉尾馴仁德 雄氣寧同百獸才. 10) 이혜구, 雅樂小考 韓國音樂硏究 (國民音樂硏究會, 1957), 87쪽. 11) 권오성, 한민족음악론 (학문사, 1999), 63쪽. 12) 新羅樂 三絃 三竹 拍板 大鼓 歌舞 舞二人 放角幞頭 紫大袖 公襴紅鞓 鍍金銙 腰帶 烏皮靴 三絃 一玄琴 二加耶琴 三琵琶 三竹 一大笒 二中笒 三小笒. 三 國史記 樂志
196 退溪學論叢 第25輯 신라의 음악은 삼죽과 삼현 박판 대고 가무로 이루어 졌다고 전한 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삼현이다. 삼죽은 신라에서 만들어진 악기이 나 삼현 중 현금 거문고 는 삼국시대에 진나라의 칠현금을 본떠 만든 고구려의 악기이며, 가야금은 가야에서 만들어졌다. 향비파는 고구려의 오현(五絃)비파를 수용한 현악기이며, 삼죽은 고구려의 횡적이나 백제의 적을 수용하여 발전시킨 세관악기이다.13) 이 악기들은 고구려와 가야에 서 만들어져 신라에 수용되어 향악기로 전해진 것이다. 즉, 통일신라가 거문고와 가야금을 수용하여 향악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국악이라는 명칭의 근원이 된 향악은 신라에서 가장 먼저 사용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에서 사용된 향악은 신라에서 창작되거 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음악을 뜻하였다. 하지만,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향악의 의미는 여러 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던 향토음악과 삼국이 전 유입된 음악 중 향악화 된 음악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멸망 이후 고려에 전승된 신라의 음악문화는 향악과 당악 으로 볼 수 있다. 통일 신라음악 중 향악은 당악보다도 보다 더 활발하 게 고려에 전승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는 중국음악의 유입과 함께 통일 신라의 음악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음악을 뜻하는 용어는 이전시대에 사용되던 향악(속악) 당 악 이외에 아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후기까지 지 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들은 음악의 유래와 관련이 깊으며, 각각 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의 향악은 통일신라시대보다 그 폭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 다. 통일신라 향악의 뼈대인 삼현 삼죽과 함께 신라 향악이 고려사회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할지라도 고려시대의 향악은 신라 향악의 전승으로 만 그칠 수 없었다. 고려에 알맞은 새로운 음악문화가 필수적으로 요구 13) 송방송, 증보 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107쪽.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197 되었고, 그 결과로 고려의 향악은 신라의 향악을 바탕으로 새로운 양상 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고려는 통일신라에서 전해진 향악 뿐 아니라 고려에서 창제된 것들도 함께 향악으로 발전시켰다.14) 고려시대에 향악이라는 용어는 가장 먼저 고려도경(高麗圖經) 동 문(同文) 에서 찾을 수 있다. 우부는 향악(鄕樂)이니 이(夷)의 음악이다. 15) 우부는 향악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부(右部)는 당시 관현방과 대 악서에서 양부(兩部) 중 우부를 뜻한다. 고려시대 궁중에서 일컫던 향악 은 이(夷)라고 일컬어지던 동이족(東夷族)인 고려의 음악을 뜻함을 알 수 있다.16)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房)은 신라시대의 음성서의 뒤를 이은 것이다. 즉, 고려시대의 향악은 통일신라에서 향악으로 연주된 음 악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이 향악은 고려의 음악을 뜻하기도 하는데 고려사절요(高麗史節 要) 에도 잘 나타나 있다. 왕의 측근 신하 가운데 향악(鄕樂)을 원 나라에 바치자고 논의하는 자가 있 었다.17) 고려는 1357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을 받고 있던 시기로 신하들이 고 려의 음악인 향악을 원나라에 바치자고 청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향악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려의 음악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향악은 불교음악에서도 사용된다. 그 예로 14) 송방송, 高麗의 鄕樂과 鄕樂器 高麗音樂史硏究 (一志社, 1988), 202쪽. 15) 右曰鄕樂. 蓋夷音也. 高麗圖經 卷40. 9a3. 16) 고려도경 에 전하는 이(夷)는 1123년(인종1) 서긍(徐兢)이 지은 책으로 송나 라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고려를 동이족이라 하였는데, 서긍은 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7) 近臣 又有議進鄕樂于元. 高麗史節要 卷26.
198 退溪學論叢 第25輯 고려사 악지 에 전하는 향악정재를 들 수 있다. 고려사 악지 에 전하는 향악정재 3종은 무고 무애 동동이다. 이 중 무고와 동동은 고려 시대에 새롭게 창제된 것이고, 무애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지은 무애 라는 신라가무를 향악정재로 새롭게 발전시켰다. 한편, 고려시대의 당악은 향악과 대칭되는 의미로 사용된다. 고려에 유입된 당악은 송나라의 사악과 교방악으로 그 유래에 대해 태종실록 에 전하고 있다. 예조에서 아뢰였다. 전조(前朝) 광왕(光王)이 사신을 보내어 당(唐)나라 악기 (樂器)와 악공(樂工)을 청하여 그 자손이 대대로 그 업을 지키게 하였는데18) 고려광종이 당나라 악기와 악공을 청한다는 내용의 인용문에서 당나 라는 907년에 멸망한 당나라가 아니다. 시기적으로 보아 960년 건국한 송나라다.19) 곧 송나라의 음악이 고려로 유입되었음을 뜻한다. 또 당나 라에서 유입된 음악도 고려로 유입되어 궁중에서 연주된다. 여기서 당악은 중국에서 유입된 음악으로 대악서와 관현방에서 좌방 악으로 연주된 음악이다. 이는 당악이 중국에서 유래되어 고려로 유입되 었지만, 고려의 음악으로 정착되어 연주되었음을 뜻한다. 이처럼 고려시대는 통일신라의 멸망 이후 고려에 전승된 신라의 음악 문화는 향악과 당악으로 볼 수 있다. 통일 신라음악 중 향악은 당악보다 도 보다 더 활발하게 고려에 전승되었음을 문헌사료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는 중국음악의 유입과 함께 통일신라의 음악을 계 승하여 발전시킨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음악을 뜻하는 용어는 이전시대에 사용되던 향악(속악) 당악 이외에 아악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후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18) 禮曹上言 前朝光王 遣使請唐樂器及工 其子孫世守其業 太宗實錄 卷22.47a15. 19)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169쪽.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199 이 후 조선시대에 들어서 이 용어들은 국악의 일부분을 뜻하는 용어 로 사용되며, 국악이라는 용어가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국악이라는 용 어는 흔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국악이라는 용어는 1906년부터 1910년까지 통감부(統監府)로 인해 관 제개편이 시작되면서 재등장한다. 또 그 의미도 변화되어 사용되었다. 통감부가 조선을 식민지 기반으로 구축하려고 직제를 일본식으로 개편 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 나라의 음악 이라는 뜻의 국악 을 가리키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선음악을 약체화 시키려는 뜻에서 의 도적으로 일본식 용어를 적용20)하였다. 일본식 용어인 국악을 적용하는데, 영향을 준 인물로 메가타 타네타 로오(目賀田種太郞, 1853-1912)와 이자와 슈우지(伊澤修二, 1851-1917)가 있다. 메가타 타네타로오(目賀田種太郞)는 1904년에 와서 1907년 11월 9일까 지 조선에 재정고문으로 머물면서 통감부의 중심부에 있었으며, 이자와 슈우지는 당시 일본 근대음악 교육에 있어 주축이 되던 인물이다. 이들 은 1876년 만남 이후, 일본 근대음악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메가타는 일본에서 국악창성론 주장하였는데, 이는 미국의 음악 교육가 L. W. 메이슨의 민족음악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국악을 National music 이라고 규정하였다. 국악(National music)이란 우리나라 고금(古今)고유(固有)의 사(詞)가(歌)곡조 (曲調)의 좋은 것을 항상 연구하고 그 부족함은 서양에서 취해서 마침내 귀천 에 관계없이 아(雅) 속(俗)의 구별이 없이 누구라도 언제나 일본국민으로 부를 만한 국가(國歌), 연주할 만한 국조(國調)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국악 (國樂)이다. 1878년 4월 20일 메가타 타네타로오가 타나카 후지마로오에게 올린 우 리 공학에서 창가과를 둘 방법에 대한 나의 의견 으로 국악에 대해 정 20) 노동은, 한국근대음악사(1) (서울: 한길사, 1995), 531쪽.
200 退溪學論叢 第25輯 의하고 있다. 메카타는 국악이라는 글자위에 내셔널뮤직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메카타는 국악을 국민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고, 아(雅) 속(俗)의 구별없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있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렇게 메가타 가 생각한 국악은 이자와에 의해 받아들여져 음악취조괘의 사업으로 구 체화시켜 나갔다.21) 일본음악과 서양음악을 절충하여 일본 국민들이 새롭게 부르는 음악 으로 발전하자는 일본민족음악 구체적으로 日本國民音樂 의 약자가 바 로 국악이었다. 국악창성론은 일본국민음악을 일으키자는 부국강병식 음악교육론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일본 전통음악을 고려하면서 서양음 악의 장점을 선택하여 적용하고, 새로운 국민음악으로 발전시켰으며, 서 양음악을 현지에서 익혀가면서 적용하였다. 또 세계문명으로 일본문화 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본 근대사상적 맥과 뿌리를 같이하 고 있었다.22) 일본 문부성은 메가타와 이자와가 건의한 국악창성론을 받아들여 지 속적으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1879년에 음악감독기관이인 음악취조괘(音 樂取調掛)23)를 설치하였으며, 이후 음악감독기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통감부는 1907년(융희1)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순조가 등극하자 당시의 음악기관이었던 교방사(敎坊師)를 장악과(掌樂課)로 개칭하였고, 예전 장악원에 두었던 전악이나 악사의 직명을 국악사와 국악사장으로 바꾸었다.24) 1907년 10월 25일 일성록 의 기록은 당시 국악이라는 관제개편으로 인하여 국악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 21) 김수현, 일본의 國樂創成論 과 한국의 國樂 이란 신조용어의 관계성 고찰 (안성: 중앙대학교대학원, 1997), 33쪽; 56쪽. 22) 노동은, 한국근대음악사(1) (서울: 한길사, 1995), 596~597쪽. 23) 음악취조괘는 이후 동경음악학교로 발전하였으며, 1949년 동경미술대학과 합 병으로 현재 동경예술대학(東京藝術大学)에 해당한다. 24) 전인평, 새로운 한국음악사 (서울: 현대음악출판사, 2000), 380쪽.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201 依宮內府敍任奏 李南熙爲掌禮院國樂師長 白禹鏞爲掌禮院樂師長 25) 당시 통감부는 교방사를 장악과로 개칭하였고, 이 장악과를 궁내부의 예식과에 두었다. 또 관직명도 국악사장(國樂師長) 국악사(國樂師)와 같 이 일본식으로 바꾸었다.26) 이는 다음의 순종실록 과 관보 황성신 문 신한국보 에서도 찾을 수 있다. 포달(布達) 제161호, <궁내부 관제(宮內府官制)>를 개정하여 반포하였다. 궁 내부는 황실에 관한 일체 사무를 총리한다. 장례원(掌禮院) [제사 의식 전 례(典禮) 및 음악을 맡아본다. 경이 1인인데 칙임관, 이사(理事)가 2인, 예식관 (禮式官)이 10인, 장전관(掌典官)이 5인인데 주임관 혹은 칙임관, 주사가 16인인 데 판임관, 국악사장(國樂師長)이 1인인데 주임관, 악사가 2인인데 판임관, 전사 장(典祀長)이 1인인데 칙임관, 전사(典祀)가 20인 이내인데 칙임관 혹은 주임관, 전사보(典祀補)가 25인인데 판임관이다.27) 1907년 11월 27일 궁내부의 관제개혁에 따라 악사장은 장례원의 소속 으로 1인, 악사가 2인 발탁되었다. 이는 1907년 11월 30일 황성신문 의 내용과 일치한다. 掌禮院에 左갓치 職員을 寘 야 祭儀,典禮及樂事를 管理 니 卿 一人은 勅 任, 理事 二人은 勅任 或 奏任, 禮官專任 十人은 奏任이니 內 一人은 勅任으로 四人은 名譽오 掌典官專任 五人은 奏任이니 內 一人은 勅任이오 主事專任 十 六人이니 判任이오 國樂師長 一人이니 奏任이오 國樂師 二人이니 判任이오 樂 25) 일성록 1907년 10월 25일. 26) 조선의 궁중음악을 담당하던 장악원은 교방사(1897) - 장악과(1907) - 아악대 (1911) - 이왕직아악부(1925) - 구왕궁아악보(1945)을 거쳐 오늘날의 국립국악 원(1950)의 모습을 갖추었다. 27) 純宗實錄 卷1, 33a8-13. 布達第一百六十一號, 宮內府官制改正. 頒布. 宮內府 帝室에 關 一切事務를 總理홈. 掌禮院. 祭儀典禮及樂事를 掌홈. 卿一人, 勅任; 理事二人, 禮式官十人, 掌典官五人, 奏任或勅任; 主事十六人, 判 任; 國樂師長一人, 奏任; 樂師二人, 判任; 典祀長一人, 勅任; 典祀三十人以內, 勅任或奏任; 典祀補二十五人, 判任.
202 退溪學論叢 第25輯 師長 一人이니 奏任이오 樂師 二人이니 判任이오 典祀長이 一人이니 勅任 或 奏任이오 典祀가 三十人以內에 勅任 或 奏任이니 名譽官이오 典祀補가 二十五 人이니 判任인 內 十五人은 名譽官이더라28) 또, 관제개편과 관련한 자료에 국악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장례원 국악사장 서 주임 관삼등 종이품29) 궁내부임용령(宮內府任用令)을 좌(左)갓치 정(定) 이라 융희 3년 3월 10일(隆 熙三年三月三十一) 일봉(日奉) 칙(勅)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민병석(閔丙奭) 포 달(布達) 제1호(第一號) 궁내부임용령(宮內官任用令) 제1조(第一條) 궁내부칙임 관(宮內勅任官)은 본령(本令) 기타법령(其他法令)에 특별(特別) 규정(規定)이 유(有) 자(者) 외(外)에 좌(左)의 자격(資格)의 一을有 者 中으로 此 任用 홈 좌(左)에 게(揭) 궁내관(宮內官)은 궁내관전형위원(宮內官銓衡委員)의 전형(銓衡)을 경(經) 야 차(此) 임용(任用) 을 득(得) 홈 궁내부. 차마감. 조마 사. 어자 시종원. 시종. 시종보. 전의장. 전의 제약사. 의원 장례원. 예식관. 장전 관. 국악사장. 국악사. 악사장. 악사. 전사. 전사보.30) 掌禮院國樂師31) 布達 布達第一號 (續) 國樂師長國樂師, 樂師長, 樂師32) 여기서 국악사장은 국악사 중 우두머리의 관직명이며, 국악사는 장악 28) 1907년 11월 30일. 황성신문 29) 附錄 隆熙元年十二月二日 敍任及辭令, 掌禮院國樂師長敍奏任官三等 從 二品. 30) 관보 부칙 제4345호(內閣法制局官報課, 1909(隆熙 3年 4月8日)), 164a面. 宮內府任用令을左갓치定 이라 隆熙三年三月三十一日奉 勅 宮內府大臣 閔丙奭布達第一號 宮內官任用令第一條 宮內勅任官은本令其他法令에特別 規定이有 者 外에 左의資格의一을有 者中으로此 任用홈 宮內府. 車馬監. 調馬師. 御者 侍從院. 侍從. 侍從補. 典醫長. 典醫 製藥師. 醫員掌禮院. 禮式官. 掌典官. 國樂師長. 國樂師. 樂師長. 樂師. 典祀. 典祀補. 31) 官報 제4419호(內閣法制局官報課, (隆熙 3年 7月 3日)), 176a面. 1909. 掌禮 院國樂師. 32) 皇城新聞, 1909년 04월 10일 (大韓隆煕三年 四月 十日 土曜), 4면.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203 원의 원로 악사들의 관직명이다. 이와 같이 통감부기에 국악이라는 명칭 은 전통음악을 뜻하는 공식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또, 국외에서도 사용되었음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1908년 2 월 15일 하와이 호놀룰루 국민회에서 창간된 한인사회의 대표신문인 신한국보(新韓國報)를 들 수 있다. 아래의 기사는 1910년 4월 19일의 기 사로 이미 조선에서는 통감부의 영향으로 국악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 로 사용되고 있었던 시기이다. 청국황족 재도 패륙전하가 각국 군사시찰을 위하여 출양하는 길에 본항에 하륙한다는 말은 전보에 기재하였거니와 지난 十五日 오후 八시에 지양환을 탑승하고 본항에 도착하였는데 본현 정부에서는 서기관 멋스미드 씨가 본현을 대표하여 출영하였고 익일 오전 九시에는 본현 정부에서 파견한 국악대 가 유양한 곡조를 아뢰면서 선도하고 제五기병 일소대와 합중국(미국) 보병 二 소대와 하와이 국민국 一소대가 의장병으로 전도하고33) 본현정부에서 파견한 국악대라는 명칭으로 보아 당시 미국에서도 국 악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으며, 이미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을 뜻하는 용 어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통감부기의 국악 용어는 1906년부터 1910년 통감부로 인해 관 제개편으로 인해 재등장하였으며, 해외에서도 사용되어 우리나라의 전 통음악을 뜻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Ⅲ. 조선시대 국악명칭과 음악사상 조선시대에는 향악 당악 아악이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국 악 이라는 명칭이 쓰인 사례는 많지 않지만 16세기에서 18세기에 사용된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33) 1910-04-19 신한국보 패륙도항.
204 退溪學論叢 第25輯 조선시대 국악이라는 명칭은 중종실록(中宗實錄) 에 가장 먼저 전한다. 특진관 이장곤은 아뢰기를 국악(國樂)이 상국에 전해졌다지만 종(鐘) 석 경(石磬)의 청탁이 착란하였고, 그 악기의 파손 된 덧은 주관하는 자가 고쳤으 나 더욱 잘못되어 신과 정자지(鄭子芝)가 더욱 교정하였지만 어찌 모두 적의하 다 하겠습니까? 하고 이청(李淸)은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악 我國之樂 은 음 성이 심히 어그러져 세쇄한 말절(末節)도 오히려 바루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그 기본을 일으키겠습니까?34) 중종 14년(1519) 석강(夕講)에서 우리나라의 정악과 아악을 바르게 잡 는 문제와 여악을 없애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기록한 내용이다. 국악은 당시 조선(朝鮮)의 상국(上國)인 중국에 전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 서 종이나 석경과 같은 아악기(雅樂器)가 사용된 점으로 보아 나라의 음 악 즉, 당시 궁중에서 연주되던 궁중악인 아악계통의 음악을 뜻한다. 다 시말해 궁중음악을 총칭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또 우리나라의 악에서 라는 문장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중종실록 에서 국악의 의미는 우리 나라 음악의 줄임말이라 할 수 있다. 새 왕조의 출범과 더불어 유교의 정치이념을 실현하려는 개국공신들 은 건국초기의 정치적 소용돌이가 안정되자 새 문화창조에 앞섰다. 그들 은 유가(儒家)의 정치적 이념을 국가의례에서 악(樂)으로 반영하였다. 그 러므로 궁중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내용과 형식이 모두 철두철미하게 예 악사상으로 점철된 의례적(儀禮的)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음악은 조선의 음악을 기본으로 삼지않고 중국의 음악문화를 모 범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화이사상(華夷思想) 으로 대표되었다.35) 이 화 34) 中宗實錄 卷35, 23a11-14. 特進官李長坤曰 (中略) 國樂雖傳於上國, 如鍾, 石磬, 淸濁錯亂, 其器之破失者, 徵典守者而改之, 益致差訛. 臣與鄭子芝頗加校 正, 然豈能盡宜乎? 李淸曰: 我國之樂, 音聲甚訛. 末節猶未能正, 何暇於興其 本乎? 35) 조유회, 홍대용과 이규경의 자주적 음악사상 국악과 교육 제30집(한국국 악교육학회, 2010), 133쪽.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205 이사상은 상국 이라 표현한 점과 중국에서 전해진 아악 을 바르게 잡는 데 논의가 되었다는 점으로 보아 중국중심의 세계관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1591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에서도 국악이라는 용어는 중 종실록 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아, 육가(陸賈)가 정색(正色)하고서 거만스럽게 걸터앉았던 위타(尉佗)를 굴복 시켰고 범중엄(范仲淹)은 글을 불태워 조원호(趙元昊)의 패만스러운 마음을 꺾 었는데 이들은 모두 수행원이 없이 혼자서 자신들의 왕기(王氣)를 장엄하게 한 사람들이고, 의리가 담긴 말 한 마디로 흉봉(凶鋒)을 꺾은 사람들입니다. 이들 이 어찌 김성일(金誠一)의 무리가 1천 석의 곡식을 적재하고 국악(國樂)을 가지 고 가서 적을 즐겁게 하면서 헌원씨(軒轅氏)가 치우(蚩尤)를 격파한 도구를 모 두 오랑캐들의 소득이 되게 한 것과 같은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36) 1591년(선조 24) 3월 1일 조헌(趙憲, 1544~1592)이 일본의 침략을 대비 할 것을 아뢴 소장과 첩황(貼黃)이다. 문신(文臣)이었던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국악을 가지고 가서 적을 즐겁게 한다고 되어 있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를 도모하자고 하며 대마도주를 중간에 내세워 심 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다. 이에 일본의 활동을 탐지하기 위해 1590년 3 월 조정에서는 마침내 통신사를 파견하고 이들은 1591년 3월에 이들이 돌아왔다. 정사인 황윤길은 틀림없이 병선을 많이 준비하는 걸로 보아, 왜병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했으나, 부사인 퇴계 이황의 직계 제자 김성일은 풍신수길의 풍채가 쥐새끼처럼 생겼다느니, 전쟁 준비한 흔적 이 전혀 보이지 않느니, 하면서 전혀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황윤길은 김성일의 이러한 주장을 비판하면서 과거 헌원씨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도 국악은 나라의 음악으로 볼 수 있다. 36) 宣祖修正實錄 卷25, 7b8-11. 陸賈正色, 而屈尉佗之箕倨; 范仲淹焚書, 而折元 昊之悖慢. 彼皆單車屛從, 而壯我王氣者也; 片言據理, 而挫彼凶鋒者也. 曷嘗如 誠一之輩, 載糧千石, 持國樂娛賊, 而竝使軒轅破蚩尤之具, 悉爲虜人之所得乎?
206 退溪學論叢 第25輯 이처럼 국악이라는 용어는 선조조와 중중조인 16세기에 등장하고 있으 며, 나라의 음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선 중기 이미 궁중에서 국악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중종 실록 과 선조수정실록 에 나타난 국악 이란 용어는 모두 외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음악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국악이란 말은 그것 이 사용된 초기의 의미도 오늘날과 같이 외래음악 또는 외국의 음악에 대한 상대적인 의미로 우리나라의 음악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후, 국악이라는 명칭은 실록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있으며, 의 궤(儀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 황단증수의(皇壇增修儀) 는 1747년(영조 23)에 대보단(大報壇) 의 의례 절차를 정리한 황단의(皇壇儀) 를 명찬(命撰)한 뒤 명나라 의종 (毅宗)을 대보단(大報壇)에 함께 제사하게 된 것으로 인해 1749년(英祖 25) 4월에 김상로(金尙魯) 조명이(趙明履) 윤광소(尹光紹)등이 왕명(王命) 으로 고쳐 늘린 대보단(大報壇) 제사(祭祀)에 관한 의절(儀節)을 기록한 의궤이다. 인조(仁祖)가 참석하는 국조향의에는 국악(國樂)과 무용[舞]은 팔일무를 사용 하고, 이후 대부(大夫)의 제사에서는 군자와 선비처럼 육일무를 사용한다.37) 국악, 팔일무(八佾舞), 육일무(六佾舞)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일무(佾舞) 는 제례에서 추는 춤으로서 아악(雅樂)계통에 속한다. 여기서 국악은 국 악과 무용 은 이라는 점으로 보았을 때 음악만을 뜻하며 아악을 말한다. 즉, 나라의 음악 나라에서 행해지는 음악으로 볼 수 있으며, 국악이라는 범주에 아악이 속함을 알 수 있다. 또 아악 즉 제례의식에서 추는 팔일무와 육일무가 사용되었다. 전통 적으로 천자(天子)의 제향에서는 팔일무(八佾舞)가 공연됐고, 왕(王)이나 제후(諸侯)를 위한 제사 때에는 육일무(六佾舞), 사대부(士大夫) 제향 때 37) 皇壇增修儀, 英祖25年(1749) 序, 仁祖儀而參用國朝享儀樂用國樂舞始用八佾 後倣葬以大夫祭以士之禮用六佾.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207 에는 사일무(四佾舞), 선비의 제사 때에는 이일무(二佾舞)가 공연됐다. 과 거 중국의 천자만 8일무를 추고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라는 이유로 6 일무를 추었다. 하지만 8일무를 추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화이사상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나라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어 자주적인 시각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궁중의 기록물 외에 문집에서도 국악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국악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문집으로 청음집 과 농포문답 이 있다. 청음집(淸陰集) 은 조선후기 학자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1)의 시 문집으로 시와 가곡(歌曲)등이 수록되어 있다. 옛날 사람 중에 육가(陸賈)는 얼굴빛을 바르게 함으로써 두 다리를 뻗고 기 대어 앉아 있는 위타(尉陀)의 거만한 태도를 굴복시켰고, 범중엄(范仲淹)은 국서 (國書)를 불사름으로써 패만스러운 이원호(李元昊)의 거만함을 꺾었습니다. 그 런데 어찌 저 김성일(金誠一)의 무리들은 양곡(糧穀) 1000석(石)을 싣고 국악(國 樂)을 갖추어 가지고 가서 왜적들을 즐겁게 하며, 겸하여 옛날에 헌원씨(軒轅 氏)가 치우(蚩尤)를 격파할 때 쓰던 기구까지 모두 왜놈들에게 넘겨주었단 말입 니까. 이들은 공의(公議)가 혹 격심해질까 두려워 이에 풍신수길이 진짜 반역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한착(寒浞)도 과연 순신(純臣)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38) 위의 글은 청음집 권28의 비명에 기록된 글로 중종실록 의 내용과 일치한다. 따라서 여기서 국악은 나라의 음악 으로 해석될 수 있다. 김 상헌은 청서파(淸西派)로 척화사상(斥和思想)을 주장한 서인이다. 조선조 전반기에 주자학(朱子學)을 수용한 조선은 이기론(理氣論)의 이론 전개에 있어 철학적 우주론보다는 윤리적인 심성론(心性論), 즉 사 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더욱 관심을 보이면서 이를 의리(義理) 사상으 38) 청음집 28권, 비명(碑銘) 4수(四首)고(故) 의병장(義兵將) 증(贈) 이조 판서 중봉(重峯) 조 선생 헌(趙先生憲)의 신도비명 1861.
208 退溪學論叢 第25輯 로 발전시켜 한국 성리학의 또 하나의 특징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17세 기에 이르러 양란(兩亂)을 거치는 동안에 구체적으로 발현되었다. 도학 (道學)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의리 정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 조선 중기 사림(士林)의 맥을 이어간 청음의 의리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청음의 주체적인 의리 사상은 이전의 의리 사상이 윤리 문제나 사화 등 대내적인 면에서 비롯된 것인데 비하여, 임진왜란 당시 조헌(趙憲)의 의병 정신과 아울러 외세의 침략에 저항해 나가는 민족적 자주 정신을 드러낸 것이었다. 또한 이 의리 사상은 이후 송시열 등을 중심으로 하여 민족과 국가의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한 북벌 사상의 근간이 되었다.39)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국악을 자주적인 음악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농포문답(農圃問答) 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파 정상기(鄭尙驥, 1678~ 1752)가 국정에 관한 포부를 문답식으로 기술한 책으로 국악과 관련된 내용은 아악(雅樂) 부분에 등장한다. 지금이라도 서울과 외방 장님으로 총명이 남보다 뛰어난 자를 택하고 장악 원에 모아서 급료를 많이 주면서 국악을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다. 장악원은 조선후기 음악기관으로 대한제국 이전까지 궁중의 음악을 연주하던 궁중음악 기관이다. 여기서 장님, 즉 맹인들에게 음악을 가리킨 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현맹인으로 불린 장악원 소속의 맹인은 양인이나 천인 출신으로 여기(女妓) 무동(舞童) 함께 연례의식 중 내연의 공연에서 연주를 담당하였다. 특히 내연에서 정재의 반주음악을 연주하였는데, 조 선시대에는 정재의 반주음악으로는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이 주로 사용 되었다. 여기서 맹인을 교육시킨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의 국악은 내연 에서의 연주된 음악인 향악과 당악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가 비록 궁정음악만을 역사화 시켰을지라도 향악 외에 외래음악인 당악이나 송나라에서 수용한 아악을 장악원의 국악이라고 갈 39) 한국고전번역원, 청음집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209 래화 한 것은 조선에서 나는 모든 음악40)을 다루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 다. 위의 글을 쓴 정상기는 실학파로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하였다. 실학의 연구대상은 정치 경제 사회 경학 문학 지리학 자연과학 농학 등 모든 문야를 망라하고 있었다. 실학자들은 이러한 학문적 연구 를 토대로 역사와 현실을 밝히는데 주력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이상사회 를 실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실학의 학문적 성격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실증적이라 할 수 있 다. 그들이 관심을 가진 현실이 조선의 현실이었기 때문에 민족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었고, 더 나은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개혁을 목표로 하였 기 때문에 근대지향적인 성격을 내포하였다.41) 농포문답 에서도 민족 적, 근대지향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관현맹인의 음악 교육과 복 지를 통해 그들이 실질적으로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 였다. 즉, 실제적인 음악사상이 반영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사용된 국악의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문헌 편찬년도 의미 중종실록 1519 나라의 음악 선조수정실록 1591 나라의 음악 황단증수의 1644 아악(나라 음악) 청음집 1671 나라의 음악 농포문답 1750 장악원 음악(향악 당악) 실록 의궤 문집 이처럼 조선시대 국악이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용어는 아 40) 장혜숙, 노동은의 한국음악 용어해설론 노동은과 민족음악, 그길 함께 걷 다 (서울: 민속원, 2006), 61~62쪽. 41) 韓國傳統音樂情神世界와 樂論의 生成에 관한 硏究 國樂論集 (부산: 김길 운교수 유고 논문집간행위원회, 2006), 494-495쪽.
210 退溪學論叢 第25輯 니지만, 실록과 의궤 문집과 같이 다양한 문헌에 등장하고 있어 당시 우 리나라의 궁중에서 연행된 음악을 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에서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사용된 국악용어의 의미는 조선의 나라음악 아악 향악 당악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음악 은 현재 정악으로 분류되어 연주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국악이라는 용어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나라의 음악 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당시의 화이사상이나 실학사상이 근간이 되어 현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Ⅳ. 결 론 이 연구는 국악이라는 명칭이 성립되기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고려시 대까지 국악에 대한 명칭과 통감부기 국악의 명칭에 대해 간략하게 정 리하고, 국악이라는 명칭을 통해 조선시대 음악사상을 살펴보았다. 국악이라는 명칭의 근원이 된 향악은 신라에서 가장 먼저 사용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에서 사용된 향악은 신라에서 창작되거나 일 반적으로 알려진 음악을 뜻하였다. 하지만,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사용 된 향악의 의미는 여러 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던 향토음악과 삼국이전 유입된 음악 중 향악화 된 음악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멸망 이후 고려에 전승된 신라의 음악문화는 향악과 당악 으로 볼 수 있다. 통일 신라음악 중 향악은 당악보다도 보다 더 활발하 게 고려에 전승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는 중국음악의 유입과 함께 통일 신라의 음악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음악을 뜻하는 용어는 이전시대에 사용되던 향악(속악) 당악 이외에 아악이라 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211 다. 이 용어들은 음악의 유래와 관련이 깊으며, 각각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이 용어들은 국악의 일부분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 되며, 국악이라는 용어가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국악이라는 용어는 흔 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통감부기의 국악 용어는 1906년부터 1910년 통감부로 인해 관제개편 으로 인해 재등장하였으며, 해외에서도 사용되어 우리나라의 전통음악 을 뜻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조선시대에는 향악 당악 아악이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국 악 이라는 명칭이 쓰인 사례는 많지 않지만 16세기에서 18세기에 사용된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중종실록 과 선조수정실록 황단증수의 청음집 농포문답 에 국악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어 실록과 의궤, 문집에서 모두 사용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국악이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용어는 아 니지만 실록과 의궤 문집과 같이 다양한 문헌에 등장하고 있어 당시 우 리나라의 궁중에서 연행된 음악을 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사용된 국악은 조선의 나라음악 아악 향악 당악 등의 의미로 해석된 다. 이러한 음악은 현재 정악으로 분류되어 연주되고 있다. 이러한 점으 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국악이라는 용어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나라의 음악 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당시의 화이사상이나 실학사상이 근간이 되어 현재와 같은 의미 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高麗圖經, 高麗史節要, 官報, 附錄, 三國史記, 宣祖修正實錄 純宗實錄, 신한국보, 日省錄, 中宗實錄, 淸陰集, 太宗實錄
212 退溪學論叢 第25輯 皇壇增修儀, 皇城新聞 韓國傳統音樂情神世界와 樂論의 生成에 관한 硏究 國樂論集, 부산: 김 길운교수 유고 논문집간행위원회, 2006. 권오성, 한민족음악론, 학문사, 1999. 김성혜, 신라음악사 연구, 서울: 민속원, 2006. 김수현, 일본의 國樂創成論 과 한국의 國樂 이라는 신조용어의 관계성 고 찰 안성: 중앙대학교 대학원 음악학과 국악전공, 1997. 노동은, 국악 이라는 용어, 일본용어인가, 한국용어인가? 노동은의 두 번 째 음악상자, 서울: 한국학술정보(주), 2001. 노동은, 음악, 한반도에서 그 갈등의 언어성 한국음악사학회, 경산: 한 국음악사학회, 1993. 노동은, 한국근대음악사(1), 서울: 한길사, 1995. 장사훈, 國樂大辭典,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4. 손태룡, 음악이란무엇인가, 경산: 영남대학교출판부, 2006. 송방송, 高麗의 鄕樂과 鄕樂器 高麗音樂史硏究, 一志社, 1988. 송방송, 한국음악의 원류 한국음악학서설, 민속원, 2001. 송방송, 증보 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송방송, 한국음악통사, 서울: 일조각, 1984. 이혜구, 雅樂小考 韓國音樂硏究, 國民音樂硏究會, 1957. 장혜숙, 노동은의 한국음악 용어해설론 노동은과 민족음악, 그길 함께 걷다, 서울: 민속원, 2006. 전인평, 새로운 한국음악사, 서울: 현대음악출판사, 2000. 조유회, 홍대용과 이규경의 자주적 음악사상 국악과 교육 제30집, 한국 국악교육학회, 2010.
國樂 명칭을 통해 살펴 본 조선시대 음악사상 213 Abstract The idea of music in Chosun with the name of gukak / Choi jae-mok An sun he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rrange how gukak (Korean classical music) was called before the name was established in the period of the Three States to Goryeo and also during the period of the Residency-General briefly and examine the idea of music in Chosun with the name of gukak. Hyangak which laid the ground for the name of gukak was first used during Shilla. Hyangak used in Shilla refers to the music that was created or generally known in Shilla. Hyangak used during the Unified Shilla implied the folk music that was transmitted in several regions of it and also the music that had become hyangak among the kinds of music that had flowed in before the period of the Three States. Hyangak passed down to Goryeo was even more actively transmitted to Goryeo than dangak. In Goryeo, they started used the term of aak other than hyangak (sokak) or dangak that had been used previously, and they continued to be used up to late Chosun. These terms are deeply associated with the origin of music, and each implied different things. From the period of Chosun, these were used as the terms meaning a part of gukak, and they changed to the term of gukak then. But during Chosun, the term of gukak was not very often used. In the period of the Residency-General, the term of gukak reappeared from 1906 until 1910 when the Residency-General performed the reform of government organization, and it was used outside Korea, too, so it came to be positioned as a term referring to Korean traditional music. During Chosun, such terms as hyangak, dangak, and aak were often used, and the term of gukak was not very often found; however, it was used
214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every now and tern from the 16th until 18th century. From Jungjongsilrok, Seonjosujeongsilrok, Hwangdanjeungsuui, Cheongeumjip, and Nongpomundap, we can find the term of gukak, so we can see that it was a term used in silrok, uigue, and collections of works all. In other words, gukak was not a term generally used during Chosun, but we can see that it meant music played at Court in Chosun as it appears in various literatures such as silrok, uigue, and collections of works. Based on the historical materials, we can see that it was used as a term referring to national music in Chosun and laid the ground for the thought of Huayi or Silhak then. This is how it has come to be used as a term with the meaning it has now. Key words: gukak, hyangak, dangak, aak, music idea, meaning of gukak.
退溪學論叢 第25輯(215 236쪽) 命理學, 미신인가 학문인가? - 음양오행론과 관계하여 - 1)김 목 Ⅰ. Ⅱ. 1. 2. 서론 陰陽五行과 干支 천지의 흐름과 五行의 相生 相剋 10天干 12地支와 陰陽五行 학 목* 차 Ⅲ. 四柱와 六親 Ⅳ. 運과 干支의 生長 消滅 Ⅴ. 결 론 論文 抄錄 하늘과 땅이 일정하게 반복하며 생장하고 소멸하는 흐름(行)을 木 火 土 金 水라는 다섯 가지의 상징적인 부호로 나타낸 것이 五行이다. 하늘 의 흐름은 氣의 변화이고, 땅의 흐름은 質의 변화인데, 그 하나하나의 흐름 을 陽과 陰으로 더 兩分하여 나타낸 것이 10天干과 12地支이다. 天의 흐름 을 양과 음으로 양분할 경우 木은 甲과 乙로, 火는 丙과 丁으로, 土는 戊와 己로, 金은 庚과 辛으로, 水는 壬과 癸로 되니, 이것이 10천간이다. 그런데 地의 흐름은 土가 木 火 金 水가 양분된 끝에 하나씩 들어감으로써 木 은 寅 卯와 辰으로, 火는 巳 午와 未로, 金은 申 酉와 戌로, 水는 亥 子 와 丑으로 되니, 이것이 12지지이다. 氣의 흐름은 맑고 가벼워 분출하는 木과 확산하는 火의 陽運動에서 수 렴하는 金과 응축하는 水의 陰運動으로 바뀔 때 戊 己라는 土가 한 번만 * 성균관대학교 연구원 논문투고일: 2015.05.20 / 심사개시일: 2015.06.17 / 게재확정일: 2015.06.27
216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중계하여 전환하면 된다. 그러나 質 의 흐름은 탁하고 무거워 木 火 金 水 의 각 흐름마다 매번 중계하여 전환시켜 주어야 한다. 천간이 10개이고 지지가 12개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천간은 氣 의 흐름으로 변화가 쉬워 분출하고 확산하는 목과 화의 양운동에서 수렴하고 응축하는 금과 수의 음운동으로 바뀔 때만 중계 전환하면 되는데, 지지는 質 의 흐 름으로 변화가 어려워 각 계절마다 다음 계절이 이어지도록 중계 전환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10천간과 12지지는 음양오행으로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나타낼 뿐만 아니 라 공간 속의 氣 와 質 의 변화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인 기호이다. 명리학 은 바로 이와 같은 음양오행론을 토대로 성립한다. 四 柱 는 사람이 태어난 연 월 일 시를 기와 질의 흐름인 천간과 지지로 치환하여 일간을 중심으 로 음양오행의 生 剋 관계를 따져 그 사람의 성격 부귀 건강 배우자 자식 등을 추론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사주에서 日 干 이 戊 土 일 경우, 甲 乙 寅 卯 와 같은 木 은 土 를 剋 하는 官 星 으로 명예나 직장 등을 상징하니, 木 의 흐름이 그 사람의 운 곧 대운과 세운에서 어떤지를 살펴 그 사람의 관운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다. 사주는 태어난 연 월 일 시를 여덟 자의 간지로 나타낸 것으로 그 하 나하나의 글자가 그 사람의 기와 질의 흐름을 나타내는데, 본인을 상징하는 일간을 중심으로 나머지 간지들과 생극을 따져 그 관계를 규정할 수 있다. 일간과 오행이 같은 간지는 比 劫 으로 형제 친구 동료 연적 등을, 일간을 생하는 간지는 인성으로 모친 학문 종교 수행 자격 문서 도장 등을, 일 간이 생하는 간지는 식상으로 재주 기술 생식기 논밭이나 공장과 같은 일터 여자에게는 자식 등을, 일간이 극하는 간지는 재성으로 재물 시장 부친 남자에게는 여자 등을, 일간을 극하는 간지는 관성으로 명예 직장 남자에게는 자식 여자에게는 남자 등을 상징한다. 일간에 비겁 식상 재성 관성 인성 다섯을 합한 것을 육친이라고 하는 데, 이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성격 부귀 가족관계 등 모든 것을 추측한다. 남자의 사주에서 배우자의 운을 알고자 하면 여자를 상징하는 재성에서 처 에 해당하는 간지를 찾아 그 운을 살피면 되고, 자식의 운을 알고자 하면 자 식을 상징하는 관성에서 자식에 해당하는 간지를 찾아 그 운을 살피면 된다. 나머지 부모 형제 재물 건강 등도 동일한 방법으로 살피면 된다. 물론 해
命 理 學, 미신인가 학문인가? 217 당 간지가 사주 속의 다른 간지와 어떻게 부딪히고 합하는지 또 운에서 어 떻게 작용하는지 그 관계를 함께 살펴야 하니, 이것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 구 정리하는 것이 바로 명리학이다. 사주에서 일간을 사주 당사자로 보는 이유는, 시진이 모여 일이 되고 일 이 모여 월이 되며 월이 모여 연이 되니, 연주를 수많은 조상으로 월주를 부 모로 일지를 배우자로 시주를 자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곧 수많은 조상님들 이 계셔 결국 나의 부모를 낳게 되었고, 부모가 나를 낳으시니, 내가 배우자 를 만나 자식을 낳으며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또 음양 오행의 생극관계로 육친을 나누는 것은 일간 곧 사주 당사자를 둘러싼 간지 들이 그 사람의 특성 및 환경임을 쉽게 알기 위함이다. 곧 그 사람이 사주에 있는 기질의 특성과 환경을 가지고 운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10천간과 12지지는 천지가 기와 질로 일정하게 생장하고 소멸하며 반복 하는 것을 음양오행의 기호로 상징해서 나타낸 것이다. 천지의 변화를 오행 으로 나타낸 이유는 오행의 하나하나의 흐름이 상생하고 상극하는 것이 끝 없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 상생 상극의 법칙 아래 일정하 게 순환 반복하며 끝없이 생장 소멸하니, 10천간과 12지지는 그 부호의 시 간에는 사물이 그런 영향을 받는다는 상징적인 부호이다. 명리학은 이상의 언급처럼 음양오행의 기호로 사람의 운명을 판단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그 러니 명리학은 근거 없는 미신이 아니라 음양오행의 논리적 틀을 갖춘 학문 이라는 것이 이 논문의 주제이다. 주제어: 陰 陽 五 行, 相 生, 相 剋, 10 天 干, 12 地 支, 命 理 學. Ⅰ. 서 론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특히 기독교가 우리의 심성에 크게 영향을 끼 치면서 동양의 전통과학들은 대부분 미신으로 배척되어 한의학 외에 풍 수 명리 같은 술수는 아직껏 일반 학문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사 실 서구문명의 영향을 받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운명을 점
218 退溪學論叢 第25輯 칠 수 있는 학문이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 어렵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 서는 옛날부터 陰陽五行論을 기초로 한 命理學이 사람의 성격 부귀 등 의 제반 운명을 파악하는 학문으로 활용되었다. 지금도 세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것을 믿고 집안의 대소사에 참고하고 활용하기 위해 철학관을 찾는 경우가 흔하다.1) 논자가 명리학을 검토한 결과,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음양오 행으로 체계화해서 인간의 운명을 검토하는 하나의 학문이다. 그런데 그 것이 서구문명 탓인지 학자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아직까지 그 학문 체계가 거의 정리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논자가 명리학에 대해 오래 동안 연구하면서 정리한 결과를 체계적인 학문이 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그 방법은 고전이나 기존의 논문을 통한 논증이 아니라 논자 나름대로 정리한 음양오행론을 토대로 어떻게 인간 의 운명을 점칠 수 있는 학문이 성립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되도록 간단하게 정리해 보는 것이다. 명리학은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신비한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학문 적 체계는 아주 단순하여 음양오행론의 상생과 상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본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무엇보다 먼저 간단하게 음양오행이 무 엇인지 알아보고, 이어 음양오행의 상생과 상극이 명리학과 어떻게 연결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10천간과 12지지가 무엇인지 그것부터 밝히겠다. 이어 10천간과 10천간 또는 10천간과 12지지 또는 12지지와 12지지 상호 간의 生剋 관계 곧 六親을 밝히는 동시에 사주가 어떤 원리로 구성되는 지 설명하겠다. 다음에는 사주를 가지고 어떻게 인간의 모든 운명을 판 단할 수 있는지 언급하겠다. 인간의 운명을 점치기 위해서는 10천간과 12지지 하나하나의 특성을 정확히 알고, 사주에서 간지가 어떻게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지 예리하게 1) 2006년 1월 16일에 발간된 한국경제신문 한경비즈니스 17쪽-37쪽에 따르면 점술 산업의 규모가 무려 4조에 이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흔히 점집을 찾는지 알 수 있다.
命理學, 미신인가 학문인가? 219 살피는 동시에 대운과 세운의 흐름에 사주의 인자를 대입해서 어떻게 생멸하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운명을 점친다는 것은 사주 의 간지 하나하나가 상호 어떤 관계 속에서 운의 흐름에 따라 생멸하는 지를 해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명리학이 어떻게 성립 할 수 있는지 그 기본원리만 설명하겠다. 곧 사주 전체에 대한 해석은 간지의 합 형 충 파 해와 같은 전개 법칙까지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그 기초 원리만을 다루겠다는 것이다. Ⅱ. 陰陽五行과 干支 1. 천지의 흐름과 五行의 相生 相剋 동양의 옛 현자들은 사물이 무질서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일정한 규칙에 따라 순환하면서 변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사 물이 변화하며 흐르는 법칙을 아주 간단하면서도 정교하게 표현하기 위 해 木 火 土 金 水라는 다섯 단계의 기운 변화로 상징화시켜 표현했 으니, 그것이 바로 五行이다.2) 천지의 일정한 순환을 굳이 다섯 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까닭은 바로 오행의 각 기운이 이어지는 다음 기운을 무 한히 생성하는 동시에 한 칸 건너의 기운을 무한히 소멸하는 규칙 곧 상생과 상극의 법칙을 끌어내어 사물의 변화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 다.3) 명리학은 바로 상생과 상극의 응용이다. 2) 春秋繁露 五行對 第三十八, 하늘에는 五行이 있으니 木 火 土 金 水가 그것들이다. 木에서 火가 나오고, 火에서 土가 나오며, 土에서 金이 나오고, 金에서 水가 나온다. 水는 겨울이 되고, 金은 가을이 되며, 土는 季夏가 되고, 火는 여름이 되며, 木은 봄이 된다.(天有五行, 木火土金水是也. 木生火, 火生 土, 土生金, 金生水. 水為冬, 金為秋, 土為季夏, 火為夏, 木為春.) 3) 김상일은 五行 에서 行 을 물질이 아니라 다섯 가지의 흐름이나 과정으로 보 아야 한다고 하고, 이어 상생 상극의 무한 순환 때문에 五行 이어야 한다고 한다. 음양오행론과 러셀의 역설( 과학사상 28호), 1999년, 201~207쪽.
220 退溪學論叢 第25輯 火 木 土 水 金 앞의 그림에서 각 기운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다음 기운을 무한히 생 성하고 있는 것은 오행의 상생이고, 직선으로 별을 그리며 한 기운을 뛰 어 넘어 이어지는 다음 기운을 끝없이 소멸시키는 것이 오행의 상극이 다. 주기적으로 변화하며 끝없이 반복 순환하는 천지의 변화를 다섯 단 계로 나누어서 볼 경우,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상생과 상극의 법칙 아 래 만물이 생장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오행의 상생상극이 명리학과 관계가 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사주팔 자를 나타내는 10天干과 12地支가 오행을 음과 양으로 나누어 더 자세 히 표시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 10天干 12地支와 陰陽五行 하늘은 앞의 그림처럼 각각의 흐름(行)이 木 火 土 金 水 로 변하며 반복 순환한다.4) 그 각 흐름을 陽 陰으로 나누어 木을 甲 乙로, 火를 丙 丁으로, 土를 戊 己로, 金을 庚 辛으로, 水를 壬 癸로 부호화시킨 것이 10천간이다. 땅은 천간과 다소 다르게 각각의 흐름이 木 火 金 水로 변하며 반복 순환하는데, 그것들을 陽 陰으로 4) 春秋繁露 五行對 第三十八, 하늘에는 오행이 있으니, 목 화 토 금 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목은 화를 낳고 화는 토를 낳으며, 토는 금을 낳고 금은 수를 낳는다. 수는 겨울이고 금은 가을이며 토는 계하이고 화는 여름이며 목은 봄이 다(天有五行, 木火土金水是也.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為冬, 金為秋, 土為季夏, 火為夏, 木為春.)
命理學, 미신인가 학문인가? 221 나누고 그 뒤에 土를 하나씩 더해, 木을 寅 卯 辰으로, 火를 巳 午 未 로, 金을 申 酉 戌로, 水를 亥 子 丑으로 부호화시킨 것이 12지지이 다. 천간에서 土가 하나의 흐름으로 독립된 것과 달리 지지의 土 곧 辰 未 戌 丑은 다른 흐름에 종속되어 있다.5) 오행을 천간과 지지 곧 하늘과 땅의 변화로 구분하여 표시할 때, 그 흐름이 달라지는 이유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서 별자리와 태양의 영향 이 氣와 質의 변화로 나타나기 때문이다.6) 그래서 별자리가 하늘에서 각기 다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氣의 변화 곧 10천간으로 기호화해서 표시하고, 태양이 지구에 각기 다르게 미치는 것은 質의 변화 곧 12지 지로 상징해서 나타낸다. 곧 별자리와 태양의 영향이 氣와 質의 변화로 다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천간은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라는 상징적인 부호로, 지지는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라는 상징적인 부호로 표시했다는 말이다. 土를 제외하고 五行의 변화를 식물로 간단히 설명하면, 봄에 씨앗에 서 싹이 터져 나오는 것을 木으로, 여름에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火로, 가을에 씨앗으로 모든 영양을 모으는 것을 金으로, 겨울에 씨앗이 떨어 져 눈이나 얼음 속에 숨겨지는 것을 水로 표시할 수 있다. 그런데 논의 의 전개에 편리하도록 木을 사물이 솟아오르는 분출( )로, 火를 무성하 게 번지는 확산( )으로, 金을 정리하여 거둬들이는 수렴( )으로, 水를 거둬들인 것을 한곳에 모아두는 응축( )으로 표현하겠다. 이렇게 할 때 5) 太極解義 太極圖解, 五行이 순리에 따라 펼쳐져 사계절이 운행되니, 金 木 水 火가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속하고, 土는 사계절에 붙어 서 그것을 왕성하게 한다.(五行順布, 四時行焉, 金木水火, 分屬春夏秋冬, 土 則寄旺四季.) 6) 淵海子平 論五行所生之始, 삼원이 극진하게 되고 나면, 혼돈이 한 번 갈 라지고 배운이 나눠지니, 가볍고 맑은 것은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은 땅이 된다.(迨夫三元旣極. 混沌一判, 胚腪乃分, 輕淸爲天, 重濁爲地.) ; 太極 解義 太極圖說解, 그러나 오행이란 質이 땅에 구비되고 氣가 하늘에 유 행하는 것이다.(然五行者, 質具於地而氣行於天者也.)
222 退溪學論叢 第25輯 土는 중계 전환( )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7) 이것에 대한 설명은 아래의 그림을 참고하면 이해가 쉽다. 확산 火 중계 전환 土 陽 분출 木 金 수렴 陰 응축 水 천간의 변화는 木 火 土 金 水의 흐름으로 변하면서 반복 순환하 는데, 이것을 크게 陽과 陰으로 나누면, 木의 분출과 火의 확산을 陽으 로, 金의 수렴과 水의 응축을 陰으로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土는 여기서 木 火의 양운동을 金 水의 음운동으로 중계하여 전환시키기 때문에 중 계 전환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金 水의 음운동에서 木 火의 양운 동으로 바뀔 때, 土의 중계 전환이 없는 것은 水의 응축에서 양운동이 저절로 생기기 때문이다. 겨울에 물이 얼어 수도관이 터지는 것이나 사 람이 극단적인 궁지에 몰리면 처음에 몸이 얼어붙다가 나중에 덤벼드는 것을 저절로 생기는 양운동으로 보면 될 것이다. 천간은 氣의 변화이기 때문에 木 火의 양운동에서 金 水의 음운동 으로 전환할 때만 土의 중계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지는 質의 변 7) 太極解義 太極圖解, 仁과 義로만 설명하면, 봄에 나고 여름에 장성하는 것은 仁이며,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저장하는 것은 義이다.(只將仁義說, 則春 作夏長, 仁也, 秋歛冬藏, 義也.) ; 春秋繁露 五行對 第三十八, 봄은 낳음 (生) 을 주로 하고, 여름은 장성(長) 을 주로 하며, 季夏는 회유(養) 를 주로 하 고, 가을은 수확(收) 을 주로 하며, 겨울은 저장(藏) 을 주로 한다.(春主生, 夏 主長, 季夏主養, 秋主収, 冬主藏.) * 中文大辭典 이나 한어대사전 을 참고 할 때, 養 이라는 글자에는 회유 나 숨김 의 의미가 있다.
命 理 學, 미신인가 학문인가? 223 화이기 때문에 각 단계마다 토의 중계 전환이 필요하다. 여름날 세상이 뜨겁게 달아올라 집안에 열기가 가득할 때, 에어컨을 켜면 氣 로 이루어 진 공기는 금방 시원하게 변하지만 形 質 로 이루어진 벽의 열기는 좀체 식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곧 정리하자면, 氣 는 변화가 쉬워 木 火 의 양운동에서 金 水 의 음운동으로 변할 때 한 번만 土 의 중계 전환이 있으면 되고, 質 은 변화가 쉽지 않아 다음의 흐름으로 변하는 단 계마다 土 의 중계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늘의 氣 와 땅의 質 의 변화를 하나로 묶어 간지로 표시한 것이 60 甲 子 이다. 곧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별자리와 태양의 영향이 일정하게 계속 변하니,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자세하게 음양오행으로 표 시한 것이 바로 60갑자이다. 간지의 변화는 천문관측을 통해 곧 천간의 흐름은 별자리가 옮겨가는 변화를, 지지의 흐름은 태양이 운행되는 변 화를 관측함으로써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60 甲 子 는 단순한 부호가 아니라 氣 와 質 의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상징적인 부호이다. 명리학은 이와 같은 음양오행의 상징적인 부호를 통해 인간 의 운명을 유추하여 점치는 학문이다. 지구의 태양 공전과 자전을 12지지로 나눠 하루를 12시진 한해를 12 달로 한 까닭은 그 어떤 것보다 質 의 변화를 알기 위한 것 곧 농경과 일 상에서 태양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지지를 통해 앎으로써 생활에 보 다 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24절기는 1년을 12지지로 나눈 것을 더 자세히 하여 태양의 빛과 열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15일 정도의 단위 로 알기 위한 것이다. 물론 지지에 천간을 함께 표시할 때, 별자리의 영 향까지 알 수 있어 氣 와 質 의 변화를 모두 알 수 있지만 예로부터 대부 분의 일상생활에서는 그럴 필요가 별로 없어 일상적으로 시간과 달의 표시로 지지만을 흔히 사용했던 것이다. 태양력이나 태음력이 아닌 간지력에서 時 는 지구의 태양 자전을 12구 간으로, 月 은 지구의 태양 공전을 12구간으로 나눠 표시한 것이다. 지구 의 자전을 12시진을 중심으로 천간을 함께 표시하면 그것이 時 의 간지
224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이고, 또한 12시진이 쌓인 하루를 간지로 표시하면 그것이 日 의 간지이 다. 지구가 자전과 함께 조금씩 태양을 공전하여 쌓인 한 해를 12로 나 눠 간지로 표시하면 그것이 月 의 간지이고, 또한 12월이 쌓인 해와 해를 간지로 표시하면 그것이 年 의 간지이다. 이렇게 연 월 일 시를 간지 로 표현해 놓을 때, 이것을 통해 氣 와 質 의 변화를 알 수 있고 더하여 인간의 운명까지도 추측하여 점칠 수 있다. Ⅲ. 四 柱 와 六 親 사람이 태어난 연 월 일 시의 간지를 알면 그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있는 까닭은 시간이 변화하는 단위를 통해 공간과 그 속에 있는 사물의 氣 와 質 의 변화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태어난 시간을 간지로 표시할 때, 그 사람은 그 연 월 일 시의 간지가 상징하는 氣 와 質 로 이루어져서 상생 상극하는 운의 변화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사람의 사주는 단순한 부호가 아니라 그 사람의 모든 기질을 나 타내는 상징적인 부호이다. 그러면 남은 과제는 이와 같은 상징적인 부 호를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데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이다. 명리학 또는 사주학이 바로 그 방법을 다룬다. 명리학은 사주의 여덟 글자가 운에 따라 어떻게 상생하고 상극하며 흘러가는지를 해석함으로써 사주 당사자의 운명을 유추하여 추측하는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명리학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日 干 이나 六 親 과 같은 그 기본 용어를 알아야 한다. 四 柱 곧 네 기둥에 서 각 기둥과 관계된 용어로서 年 의 干 支 를 年 柱, 月 의 干 支 를 月 柱, 日 의 干 支 를 日 柱, 時 의 干 支 를 時 柱 라고 한다. 그리고 天 干 과 地 支 를 따 로 나눠 年 柱 를 年 干 과 年 支 로, 月 柱 를 月 干 과 月 支 로, 日 柱 를 日 干 과 日 支 로, 時 柱 를 時 干 과 時 支 로 부른다. 이런 용어는 명리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익혀야 할 것들이다.
命 理 學, 미신인가 학문인가? 225 앞에서는 음양오행의 상생과 상극을 주로 시간적인 순서로 언급했는 데, 사람이 태어난 연 월 일 시를 간지로 적는 순간 사주팔자가 한 평 면에 펼쳐지니, 일주의 천간 곧 일간을 중심으로 음양오행의 상생 상극 관계를 따지면 그것이 육친이다. 8) 오행으로 일간을 낳아주며 음양이 같 으면 偏 印 다르면 正 印, 일간이 낳아주며 음양이 같으면 食 神 다르면 傷 官, 일간이 극하며 음양이 같으면 偏 財 다르면 正 財, 일간을 극하며 음 양이 같으면 偏 官 다르면 正 官, 일간과 같은 오행으로 음양이 같으면 比 肩 다르면 劫 財 라고 한다. 9) 육친을 운과 함께 해석하면 그 사람의 가족 8) 六 親 은 기본적으로 五 行 의 相 生 相 剋 으로만 볼 때, 比 劫 食 傷 財 星 官 星 印 星 에다가 日 干 자신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음양을 넣어 더 자세히 나눌 때, 比 劫 은 比 肩 과 劫 財 로, 食 傷 은 食 神 과 傷 官 으로, 財 星 은 偏 財 와 正 財 로, 官 星 은 偏 官 과 正 官 으로, 印 星 은 偏 印 과 正 印 으로 다시 나누어 진다. 財 星 官 星 印 星 은 正 과 偏 으로 나눠지는 데 비해 나머지 둘이 비겁 과 식상으로 나눠지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正 과 偏 은 日 干 이 다른 육친과 음양의 조화를 이루면 대부분 안정되고 편하게 작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정되지 않고 불편하게 작용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곧 財 星 官 星 印 星 에서는 正 이 안정되어 편하고 偏 이 안정되지 못해 불편하며, 比 劫 과 食 傷 에서는 이와 다르게 작용하는 것을 바로 명칭을 통해 알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戊 土 일간일 경우 水 가 재성인데, 陰 水 인 癸 와 子 는 陽 土 인 戊 土 와 음양의 조화를 이뤄 정재라고 하고, 陽 水 인 壬 과 亥 는 음양의 조화를 이 루지 못해 편재라고 한다. 그런데 비겁과 식상에서는 이와 다르게 나와 음양 의 조화가 맞는 겁재와 상관이 나의 정재와 정관을 심하게 剋 하여 나의 안 정된 삶을 불안정하게 하고, 나와 음양의 조화가 맞지 않는 비견과 식신이 나를 불안정하게 하는 편재와 편관을 극하여 나의 삶을 안정시키기 때문에, 이런 점을 명칭으로 나타내 바로 알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명칭을 붙인 것 이다. 9) 천간 甲 乙 木, 丙 丁 火, 戊 己 土, 庚 辛 金, 壬 癸 水 에서 각 오행의 앞에 있는 甲 丙 戊 庚 壬 은 陽 이고, 뒤에 있는 乙 丁 己 辛 癸 는 陰 이다. 지지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子 丑 에서 앞에 있는 寅 巳 申 亥 는 陽 이고, 중간에 있는 卯 午 酉 子 는 陰 이며, 끝에 있는 辰 未 戌 丑 에서 辰 戌 은 陽 이고 丑 未 는 陰 이다. 일반적으로 천간이나 지지나 모두 양 음 양 음의 순으로 음 양이 결정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 천간에서는 문제가 없 지만 지지에서는 하나의 오행이 시작되는 巳 와 亥 를 陰 으로 이어지는 午 와 子 를 陽 으로 봐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앞에 있는 것을 양으로 중
226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관계와 부귀 등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 日 干 : 自 身 比 劫 比 肩 劫 財 印 星 偏 印 正 印 食 傷 食 神 傷 官 官 星 偏 官 正 官 財 星 偏 財 正 財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子 癸 정인 편인 정관 편관 정재 편재 상관 식신 겁재 비견 丑 己 정재 편재 상관 식신 겁재 비견 정인 편인 정관 편관 寅 甲 비견 겁재 편인 정인 편관 정관 편재 정재 식신 상관 卯 乙 겁재 비견 정인 편인 정관 편관 정재 편재 상관 식신 辰 戊 편재 정재 식신 상관 비견 겁재 편인 정인 편관 정관 巳 丙 식신 상관 비견 겁재 편인 정인 편관 정관 편재 정재 午 丁 상관 식신 겁재 비견 정인 편인 정관 편관 정재 편재 未 己 정재 편재 상관 식신 겁재 비견 정인 편인 정관 편관 申 庚 편관 정관 편재 정재 식신 상관 비견 겁재 편인 정인 酉 辛 정관 편관 정재 편재 상관 식신 겁재 비견 정인 편인 戌 戊 편재 정재 식신 상관 비견 겁재 편인 정인 편관 정관 亥 壬 편인 정인 편관 정관 편재 정재 식신 상관 비견 겁재 간에 있는 것을 음으로 보았다. 土 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장간의 본기를 기준으로 陽 土 와 陰 土 를 나누었다.
命理學, 미신인가 학문인가? 227 사주의 해석에서 일간을 사주 당사자로 보니, 그것은 연주 월주 일 주 시주의 등급이 연 월 일 시로 한 계단씩 내려오기 때문이다. 시가 모여 일이 되고, 일이 모여 월이 되며, 월이 모여 연이 되니, 사주의 위 치 배열에서 일간을 중심으로 연주를 조상, 월주를 부모, 일지를 배우자, 시주를 자식으로 보면 가족 서열 구조에 합당하게 된다. 시대적인 상황 에 따라 조상의 환경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할 때는 곧 어느 특정 한 시기에는 연간을 사주 당사자로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각 개인의 능 력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면서부터는 일간을 사주 당 사자로 보았고, 지금까지 그것은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사주의 위치로도 운명을 판단하지만 대부분 육친으로 해석하니, 각 육친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고 기억해야 한다. 인성은 나를 낳는다는 의미에서 어머니 학문 종교 수행10) 등 이며, 학문의 파생적인 의미에 서 도장 문서 자격이다. 식상은 내가 내놓는다는 의미에서 재주 손발 생식기 목숨 음식11) 일터 등이며, 여자에게는 자식까지 해당한다. 재성은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 곧 내가 극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재물 시장 등이며, 남자에게는 여자까지 해당한다. 관성은 나를 극하는 의미 에서 명예 직장 등이며, 여자에게는 남자, 남자에게는 자식까지 해당한 다. 비겁은 나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형제 친구 동료 연적이다.12) 사주의 해석은 사주의 위치로도 보지만 그보다는 대부분 육친의 구조 와 그것들의 운을 가지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는 명리학이 학문으로 성 립할 수 있는지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주를 해석하는 방법 전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곧 사주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 해서는 간지들끼리 서로 만날 때 생기는 조화나 부조화에 대한 合 刑 10) 육체적으로 나를 낳는 것은 어머니이고, 정신적으로 나를 낳는 것은 수행 종교 공부 등이다. 11) 목숨과 음식을 식상으로 보는 것은 손발을 통해 활동하는 것이 나의 생명활 동이고, 생명활동은 음식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12) 육친의 상징에 대한 더욱 자세한 설명은 曺圭文의 天綱 袁守成의 命理思 想에 관한 연구(대전대학교, 2009년) 44-48쪽을 참고하기 바란다.
228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冲 破 害 등을 비롯하여 천간이 지지에 숨어 있는 지장간 등에 대해서 도 알아야 하지만 여기서는 굳이 그런 것들까지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주의 인자들이 평이하게 있는 구조 속에서 그 사람의 운명을 보는 방법만 장을 바꿔 간단히 설명하겠다. Ⅳ. 運 과 干 支 의 生 長 消 滅 간지는 오행으로 시간의 표시 부호일 뿐만 아니라 그 때에 그런 영향 을 공간과 그 속에 있는 사물에 미치며 흘러가는 힘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시점에 태어날 경우, 그 사주의 간지 하나하나는 그 사람의 선천적 특성을 말하는데, 누구든지 운에 따라 좋게 흐르는 간지가 있는 반면에 나쁘게 흐르는 간지가 있다. 다만 좋은 사주는 인생의 각 시기마다 그 때 필요한 간지가 좋게 흘러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공부가 필요한 유년 기에는 공부에 필요한 간지 곧 인성이 활발하게 흐르는 운으로, 취직이 필요한 청년기에는 관이 힘차게 흐르는 운으로 흘러가는 것이 좋다. 사 주에서 운의 흐름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運 은 大 運 과 歲 運 으로 나누는데, 세운은 2015년 乙 未 年 처럼 해마다 흐르는 것이고, 大 運 은 月 柱 를 기준으로 10년씩 차례로 順 行 이나 逆 行 하 는 것이다. 남자 사주에서 연간이 양간이면 甲 子 乙 丑 丙 寅 의 차례로 순행하고, 음간이면 丙 寅 乙 丑 甲 子 처럼 역행한다. 여자 사주에 연간이 양간이면 역행하고 음간이면 순행한다. 年 干 에 따라 순행과 역행이 결정 되는 것은 힘이 가장 센 연주의 천간이 그 사주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곧 연주의 힘은 사주에서 월주의 12배 또는 일주의 365배 이상이어서 그 사주를 대표할 수 있는데, 그 천간이 사주 본인과 음양이 일치하면 월주 에서 순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긋나서 역행한다. 대운을 좀 더 설명하면, 四 柱 에서 육친이 운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 지 보면 운명을 알 수 있다는 것인데, 대운은 10년씩 흐르며 사주 당사 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곧 일반적으로 戊 土 일간일
命 理 學, 미신인가 학문인가? 229 경우 丙 丁 巳 午 곧 火 가 인성이니, 오래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시기에는 火 대운이, 취직해야 할 시기에는 관성 甲 乙 寅 卯 木 대운이, 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식상관 庚 辛 申 酉 金 이나 재성 壬 癸 亥 子 水 대운이 오는 것이 좋다. 물론 사주에서도 필요한 간지가 뚜렷이 자리 잡고 있어야 더욱 좋다. 일반적으로 관성과 인성 운은 청년 기 전후로, 재와 식상 운은 40대 이후로 많이 사용된다. 月 柱 에서 大 運 이 흐르고 10년을 주기로 변하는 것은 日 干 이 月 柱 인 부모에서 태어나 최대 120년 정도 살다가 생을 마감하기 때문이다. 육체 는 氣 가 아닌 質 로 이루어졌고 그 수명이 최대 120년이니, 이 기간을 음 양오행에서 質 의 생장소멸 곧 12 地 支 로 나누면 대운은 월주에서 10년을 단위로 순행이나 역행으로 흘러가면서 변화하게 된다. 대운은 10년이라 는 기간 동안 그 사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세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대운이 인생의 각 시기에 맞게 흘러가면 그 사람 인생 이 각 시기마다 활짝 꽃 피고, 그렇지 않으면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조금 더 언급해야 할 것이 있으니, 양의 간지는 순 행으로 음의 간지는 역행으로 그 기운의 크기를 달리하며 흘러간다는 것이다. 13) 이를테면 甲 寅 木 은 亥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의 순서대로 힘이 커졌다가 약해지니, 亥 에 크게 힘을 받아 卯 에 그 힘을 가장 크게 떨치다가 이후부터 쇠약해져 申 酉 戌 金 이 오기 전에 未 土 속으로 숨는 것이고, 乙 卯 木 은 午 巳 辰 卯 寅 丑 子 亥 戌 酉 申 未 로 순서를 거꾸로 힘이 커졌다가 약해지니, 午 에서 힘 을 크게 받아 寅 에서 그 힘을 가장 크게 떨치다가 이후부터 쇠약해져 戌 酉 申 金 이 오면 바로 戌 土 속으로 들어가 숨는 것이다. 甲 寅 乙 卯 丙 巳 丁 午 戊 己 庚 申 辛 酉 壬 亥 癸 子 장생 亥 午 寅 酉 寅 酉 巳 子 申 卯
230 退溪學論叢 第25輯 목욕 子 巳 卯 申 卯 申 午 亥 酉 寅 관대 丑 辰 辰 未 辰 未 未 戌 戌 丑 건록 寅 卯 巳 午 巳 午 申 酉 亥 子 제왕 卯 寅 午 巳 午 巳 酉 申 子 亥 쇠 辰 丑 未 辰 未 辰 戌 未 丑 戌 병 巳 子 申 卯 申 卯 亥 午 寅 酉 사 午 亥 酉 寅 酉 寅 子 巳 卯 申 묘 未 戌 戌 丑 戌 丑 丑 辰 辰 未 절 申 酉 亥 子 亥 子 寅 卯 巳 午 태 酉 申 子 亥 子 亥 卯 寅 午 巳 양 戌 未 丑 戌 丑 戌 辰 丑 未 辰 13) 子平真詮評注, 論陰陽生死, 원문: 陽은 모아들이는 것을 근본으로 해 서 나아감으로 나아감을 삼으므로 순행을 근본으로 한다. 陰은 흩어짐을 근 본으로 해서 물러남으로 물러남을 삼으므로 역행을 근본으로 한다. 그 때문 에 生 沐浴 등의 항목에서 陽幹이 순행하고 陰幹이 역행하는 차이가 있다. 四時의 운행에서 공을 이룬 것은 물러나고 쓰임을 기다리는 것은 나아간다. 그러므로 각 천간이 12지지라는 月을 유행하지만 生 旺 墓 絶에 또한 일 정함이 있다. 陽이 生하는 때가 바로 陰이 死하는 때이니, 저기에서 여기로 서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운행이다. 甲과 乙을 예로 논한다면, 甲은 陽木으로 木의 枝葉들이 하늘의 생기를 받아 이미 收藏한 것이 충분해지면 다가오는 봄에 분출할 기틀이 되기 때문에 亥에서 생하는 것이다. 木은 午월 이 되면 바로 枝葉이 번성한 때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甲이 死하는 것인 가? 겉으로는 비록 번성할지라도 속의 생기가 분출되어 이미 다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午에서 죽는 것이다. 乙木은 이와 반대이니, 午월은 枝葉이 번성해서 바로 生이 되고, 亥월은 지엽이 떨어져서 바로 死가 된다. 質을 기준으로 논해 氣를 기준으로 한 것과 저절로 달라진다. 甲과 乙로 예 를 들었으니 나머지는 (동일하게 추론하면) 알 수 있다.(陽主聚, 以進爲進, 故 主順. 陰主散, 以退爲退, 故主逆. 此生沐浴等項, 所以有陽順陰逆之殊也. 四時 之運, 功成者去, 等用者進. 故每幹流行於十二支之月, 而生旺墓絕, 又有一定. 陽之所生, 即陰之所死, 彼此互換, 自然之運也. 即以甲乙論, 甲爲木之陽, 木之 枝枝葉葉, 受天生氣, 已收藏飽足, 可以爲來春發泄之機, 此其所以生於亥也. 木 當午月, 正枝葉繁盛之候. 而甲何以死. 卻不是外雖繁盛, 而內之生氣發泄已盡,
命 理 學, 미신인가 학문인가? 231 앞의 표는 간지의 힘이 생장하고 소멸하는 것 14) 에 대한 것으로 바로 앞에서 양의 간지 甲 寅 木 과 乙 卯 木 에 대해 설명한 것과 같이 나머 지 火 金 水 도 동일하게 흘러간다. 15) 다만 土 는 천간의 戊 己 와 지지 의 辰 戌 丑 未 가 다르게 흘러가 戊 土 와 己 土 옆에 지지를 함께 표시 하지 않았다. 辰 戌 丑 未 는 자신이 속한 기운의 흐름을 다음 기운으 로 연결시켜 주려고 곧 자신의 중계 전환 역할을 담당하려고 다음 계 절에 반대되는 기운을 숨기니, 이때에는 土 가 되고, 그 이후의 계절에서 는 申 子 辰 寅 午 戌 巳 酉 丑 亥 卯 未 라는 삼합의 역할을 뒤에서 추진하다 가 자신의 계절이 돌아오면 자신의 기운으로 돌아간다. 辰 은 木 을 火 로 바꾸려고 巳 午 未 에서 水 를 숨겨 土 역할을 하고는 申 부터 丑 까지는 申 子 辰 의 水 운동을 돕기 위해 水 로 변했다가 이후 辰 의 중반까지 木 으로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戌 은 亥 子 丑 에서는 火 를 숨겨 土 의 역할을 하고, 寅 부터 未 까지는 寅 午 戌 火 운동을 돕기 위해 火 로 변 此 其 所 以 死 於 午 也. 乙 木 反 是, 午 月 枝 葉 繁 盛, 即 爲 之 生, 亥 月 枝 葉 剝 落, 即 爲 之 死. 以 質 而 論, 自 與 氣 殊 也. 以 甲 乙 爲 例, 餘 可 知 矣.) 14) 장생은 내면에서 무르익은 힘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목욕은 상승세에 있지만 사춘기처럼 불물을 가리지 못하는 것으로 일반인들은 일을 아주 신 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시기이고, 연예인들은 인기가 폭발할 수 있는 시기이 다. 관대는 어느 정도 성장하여 의복을 말끔히 입고 밖에 나가 일할 수 있는 시기이고, 건록은 사회에서 늠름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기이며, 제왕은 말 그대로 최고의 힘을 가지게 되는 시기이다. 쇠 병 사 묘 절은 힘이 약해 지기 시작해 병들고 죽으며 묘지에 묻혀 그 힘이 완전히 끊어지는 시기인데, 병지까지는 그래도 그 활동에 크게 약하지 않다. 태 양은 태기가 도는 듯이 힘이 다시 생기고 자라나는 시기이다. 15) 寅 巳 申 亥 는 이상에서 말한 것처럼 甲 丙 庚 壬 과 동일하게 흘러가면 서도 각기 자신의 삼합과 관련하여 다소 다르게 흘러감을 염두에 두어야 한 다. 寅 은 寅 午 戌 丙 火 삼합과 관련하여 寅 부터 타오르기 시작하여 午 에서 완 전히 火 로 바뀌고, 巳 는 巳 酉 丑 庚 金 삼합과 관련하여 巳 부터 씨앗을 맺기 시작하여 酉 에서 익은 열매로 변하며, 申 은 申 子 辰 壬 水 삼합과 관련하여 申 부터 물이 맺히기 시작하여 子 에서 흥건한 물로 되고, 亥 는 亥 卯 未 甲 木 삼 합과 관련하여 亥 부터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여 卯 에서 튼튼한 나무가 되니, 지지는 천간과 완전히 동일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232 退溪學論叢 第25輯 했다가 이후 戌의 중반까지 金으로 돌아간다. 丑은 寅卯辰에서 金을 숨 겨 土의 역할을 하고, 이후 戌의 중반까지 巳酉丑 金운동을 돕기 위해 金으로 변했다가 亥부터 丑의 중반까지는 水로 변한다. 未는 申酉戌에 서는 土, 亥에서 辰까지는 亥卯未 木 운동을 돕기 위해 木으로 변했다가 이후 未의 중반까지 火로 돌아간다. 이와 같은 것들이 사주의 해석에서 다음처럼 응용된다. 1952년 壬辰생 어느 부인이 癸水 일간으로 대운이 辰으로 시작되어 어렸을 적에 죽은 형제가 많냐 고 물었더니, 일곱 여덟의 형제가 어렸을 때 모두 죽고 자 신만 살았다 고 하였다.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癸水와 壬水는 오행이 같아 형제인데, 壬水의 묘지 辰이 사주 年支에 있는데다가16) 또 대운이 辰으로 시작되니, 어렸을 때 많은 형제들 특히 음양이 다른 남자 형제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 1953년 癸巳생 어느 의사의 부인은 庚辰일 주로 43세부터의 甲辰 대운에 둘째 아들을 잃었으니, 壬水가 庚金의 식 신으로 자식에 해당하기 때문이다.17) 이렇듯 간지는 천지가 그 부호 그대로 사물에 영향을 미치며 흘러가 는 것을 상징한다. 사람이 어느 때에 태어나면 그때의 연 월 일 시의 간지가 그 사람의 氣와 質을 형성하여 운과 함께 흘러가며 그 사람의 운명을 요동치게 한다. 그러나 사주로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없으니, 극소수의 사람들은 수행을 통해 氣와 質의 영향을 벗어나 기 때문이고, 또 음양오행의 영향은 틀림없기 작용하지만 그것을 일률적 으로 고정시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일반적으로 음양오행의 큰 방향은 정해졌지만 그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에는 각자의 상황 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지의 영향에 휩쓸려 그 모양대로 살아 16) 사주의 연 월 일 시를 사람의 일생으로 보니, 생활이 풍부해지기 얼마 전 까지는 일반적인 사람의 한평생을 60년으로 보고 각 주를 15년씩, 요즘은 80 년으로 보고 각 주를 20년씩 나눠 대입한다. 17) 김학목, 陰陽五行과 干支의 象徵, 동양고전연구 42집, 2011년, 315쪽.
命 理 學, 미신인가 학문인가? 233 가기 때문에 일반적인 삶의 형태를 적용하여 평이하게 해석할 경우 대 부분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게 된다. 흔히 사업이나 배우자 문제 또는 자 식의 진학 문제로 답답한 마음에 철학관을 찾는데, 이것보다는 인생 전 체의 바람직한 삶을 위해 사주를 참고해야 한다. 사주를 제대로 알면 자 신의 특성을 앎으로써 삶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알게 되니, 자신의 능 력을 개발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 사회에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 운이 어긋나 공부하지 않는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기보다는 그때에 맞춰 그 자신의 타고난 적성을 기르게 해야 할 것이다. Ⅴ. 결 론 천지의 반복 순환하는 흐름을 氣 와 質 의 다섯 단계 곧 五 行 으로 나 누고 각 단계를 둘 또는 넷 곧 陰 陽 으로 세분해 그 각각에 상징적인 부 호를 붙인 것이 10 干 12 支 인데, 여기에는 오행의 상생 상극이 끝없이 반복되며 이어진다. 하나의 흐름은 이어지는 흐름을 낳으며 힘이 약해져 그 다음의 반대 흐름에서는 사라지니, 이것을 하나의 법칙으로 도식화시 킨 것이 음양오행의 상생 상극이다. 명리학은 이와 같은 음양오행론을 인간의 운명해석에 응용한 것이다. 그런데 서양 문물의 탓도 있지만 그 보다는 아직까지 그 학문적 기반을 제대로 알지 못해 명리학을 옹호하 고 연구해야 할 동양학 학자들마저 미신으로 취급하고 있다. 논자가 지금까지 오랜 시간 검토한 바로 명리학은 미신 취급당해야 할 하찮은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보다 알차고 행복하게 살 수 있 도록 고대의 현성들께서 우리에게 선사한 귀중한 수행의 학문 곧 자신 의 역량과 특성을 알고 천지의 흐름과 함께 하도록 인도하는 나침판이 다. 이런 점에서 명리학은 동양학이 외면당하고 있는 이때 동양학 부흥 을 일으키는 데에 그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다고 본다. 곧 세상 어디에 도 인간의 운명을 점칠 수 있도록 이토록 체계화된 학문은 없으니, 이것
234 退溪學論叢 第25輯 을 발판으로 동양학의 우수성을 세상에 알리고, 이어 대학에서 명맥이 끊어지고 있는 동양학에 새로운 부흥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이상은 명리학이 학문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필 자가 10년 이상 공부하며 나름대로 체계화시킨 것이다. 명리학은 아직 미지의 황무지나 다름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연구자에 따라 얼마든지 다 른 체계로도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 재야에서 다른 시각을 가진 선배들께서는 논자의 천견에 대해 너무 허물하지 않으시기를 간곡히 바 란다. 그리고 이처럼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분야에 대해 논문을 쓰면서 그 기초적인 골격만을 골라 글을 쓴 까닭은 그 학문적 기반을 보다 쉽고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니, 고전이나 기존 논문을 별로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참고 문헌> 春秋繁露 太極解義 淵海子平 子平真詮評注 김상일, 음양오행론과 러셀의 역설, 과학사상 28호, 1999. 김학목, 陰陽五行과 干支의 象徵, 동양고전연구 42집, 2011. 曺圭文, 天綱 袁守成의 命理思想에 관한 연구, 大田大學校 大學院 博士學 位論文, 2009. 朱熹, 곽신환 윤원현 추기현 옮김, 太極解義, 소명출판, 2009. 한국경제신문, 한경비즈니스, 2006. 1. 16.
命理學, 미신인가 학문인가? 235 <论文 概要> 命理学, 是迷信还是学问 / 金 學 睦 五行用木 火 土 金 水五种象征性符号来表达天地一定反复地生长和消 灭的运行 天的运行为气的变化, 而用阳和阴来二分其运行的就是十天干 地的运行为质的变化, 而用阳和阴来二分其运行的就是十二地支 把天的运 行用阳和阴来分的话, 木分成为甲与乙, 火分成为丙与丁, 土分成为戊与己, 金分成为庚与辛, 水分成为壬与癸, 这就称谓十天干 然把地的运行用阳和 阴来分的话, 土在木 火 金 水后跟随着, 所以木分成为寅 卯与辰, 火分 成为巳 午与未, 金分成为申 酉与戍, 水分成为亥 子与丑, 这就称谓十二 地支 气的运行又清又轻, 从喷出的木和扩散的火到收敛的金和凝缩的水, 就 是从阳运动到阴运动的变换时, 拥有戊和己的土来一次中继而转换就行 但 质的运行又浊又重, 给木 火 金 水个个运行中继而转换才行 天干有十个 而地支有十二个的道理就在这里 把五行跟季节变化连接来看, 把春(木)夏(火)中继而转换为秋(金)冬(水)的 就是长夏(土) 然秋和冬不用土的中继和转换而变成春夏, 因为好像水冻结 成冰块时其体积膨胀起来的一样, 凝缩力强了就自然引起阳运动的 从这点 看, 十天干和十二地支不仅仅是表达时间流动的而且也是一种表达气和质在 空间中变化的象征性旗号 命理学以阴阳五行论为基础而成立的 所谓四柱就是先把某人出生年 月 日 时置换成气和质运行的干支后, 以日干为中心分析阴阳五行的生克关系, 而推论其人性格 富贵 健康 配偶和子女等等的 假如某人四柱中日干为戊 土时, 因为甲 乙 寅 卯等木为克土的官星, 就象征着名誉 职业等, 所以用 木的运行来分析其人大运和岁运而判断其人官运如何的 四柱为把出生年 月 日 时用八个字的干支来表示的, 而其一个字一个字 都是表达其人气和质的运行的, 因而以象征其本人的日干为中心可以分析其 干支之间的生克关系 其阴阳五行同日干一样的干支称谓比劫, 象征着兄弟 朋友 同事 恋爱
236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上 敌 人 等 等 与 日 干 相 生 的, 干 支 为 印 星, 象 征 着 母 亲 学 问 宗 教 修 行 资 格 文 书 印 章 等 等 日 干 相 生 的 干 支 为 食 伤, 象 征 着 才 能 技 术 生 殖 器 田 地 或 工 厂 等 工 作 场 所 对 女 人 来 说 是 子 女 等 等 日 干 相 克 的 干 支 为 财 星, 象 征 着 财 物 市 场 父 亲 对 男 人 来 说 是 女 人 等 等 与 日 干 相 克 的 干 支 为 官 星, 象 征 着 名 誉 职 业 对 男 人 来 说 是 子 女 对 女 人 来 说 是 男 人 等 等 在 日 干 加 比 劫 食 伤 财 星 官 星 印 星 五 种 合 起 来 叫 做 六 亲, 而 分 析 六 亲 来 推 测 其 人 性 格 富 贵 家 族 关 系 等 在 某 个 男 人 四 柱 里 要 查 看 配 偶 的 运 就 在 象 征 着 女 人 的 财 星 上 找 属 于 妻 子 的 干 支 来 分 析 才 对 要 观 察 子 女 的 运 就 在 象 征 着 子 女 的 官 星 上 找 属 于 子 女 的 干 支 来 分 析 就 行 其 他 父 母 兄 弟 财 物 健 康 等 也 可 以 用 同 样 的 方 法 来 查 看 当 然 要 观 察 某 干 支 和 别 的 干 支 怎 么 冲 合? 在 命 运 上 有 什 么 作 用? 等 等, 一 定 要 跟 其 关 系 一 块 儿 分 析 对 于 这 些, 有 系 统 地 研 究 整 理 的 叫 做 命 理 学 把 日 干 当 作 本 人 的 理 由 是, 累 积 时 辰 为 日, 累 积 日 为 月, 累 积 月 为 年, 所 以 年 柱 象 征 无 数 祖 先, 月 柱 象 征 父 母, 日 柱 象 征 配 偶, 时 柱 象 征 子 女 因 为 存 在 了 无 数 祖 先 才 有 了 父 母, 父 母 生 我, 我 才 遇 到 配 偶 而 生 子 女 维 持 生 命, 这 才 是 人 生 的 用 阴 阳 五 行 的 生 克 关 系 来 分 别 六 亲 的 原 因 就 是 围 绕 本 人 干 支 的 日 干 可 以 表 达 其 人 特 性 及 环 境 的 就 是 说, 其 人 带 着 其 四 柱 里 的 其 气 质 特 性 和 其 环 境 碰 着 运 气 而 生 活 的, 这 就 是 其 人 活 自 己 人 生 的 干 支 就 是 把 天 地 的 气 和 质 一 定 反 复 地 生 长 和 消 灭 的 运 行 用 阴 阳 五 行 的 旗 号 来 表 达 的 五 行 的 个 个 运 行 以 相 生 相 克 来 永 远 进 行, 所 以 把 天 地 的 变 化 用 五 行 来 表 达 五 行 表 达 天 地 在 相 生 相 克 的 规 律 下 一 定 地 循 环 反 复 着 永 远 生 长 和 消 灭 的, 那 么, 十 天 干 和 十 二 地 支 就 是 说 明 着 其 符 号 上 的 时 间 里 事 物 必 须 受 到 那 样 影 响 的 象 征 性 符 号 命 理 学 就 是 以 阴 阳 五 行 的 旗 号 来 要 判 断 人 的 命 运 的 学 问 所 以 命 理 学 并 不 是 没 有 根 据 的 迷 信 而 是 具 有 阴 阳 五 行 论 理 体 系 的 有 系 统 的 学 问 这 就 是 本 论 文 的 主 旨 关 键 词 : 阴 阳 五 行, 相 声, 相 克, 十 天 干, 十 二 地 支, 命 理 学
휘보 237 彙 報 2015.01.01 2015.06.30 1. 2014년도 시민문화강좌 ① 3월 13일 이원균 (본원 원장) : 壬辰亂 때 殉國한 東萊府使 宋象賢의 忠節 ② 3월 20일 허종렬 (전 연산중 교장) : 老年을 위한 마음 다스리기 ③ 3월 27일 장선덕 (전 부경대 총장) : 비전통 에너지 개발 ④ 4월 3일 강명관 (부산대 교수) : 1766년 북경에서의 洪大容 ⑤ 4월 10일 이상열 (전 대구가톨릭대 교수) : 新自由主義 經濟의 倫理的 考察 ⑥ 4월 17일 허 은 (경성대 교수) : 俳優와 演技의 逆說 ⑦ 4월 24일 이종영 (본원 이사) : 唐宋 八大家의 面面들 ⑧ 5월 1일 이 욱 (부경대 교수) : 性理學-格物-의 과학적 이해 ⑨ 5월 8일 강대민 (경성대 교수) : 朝鮮通信使의 현대적 의미 ⑩ 5월 15일 김시황 (경북대 명예교수) : 人間의 本性과 道理 ⑪ 5월 22일
238 退溪學論叢 第25輯 이양자 (동의대 명예교수) : 宋家皇朝 (영화감상) ⑫ 5월 29일 이양자 (동의대 명예교수) : 주은래(周恩來)와 등영초(鄧潁超) ⑬ 6월 5일 손오규 (제주대 교수) : 孫季暾의 太極西銘合一之圖 에 대하여 ⑭ 6월 12일 한경동 (전 동래고 교장) : 朝鮮時代의 선비문화 ⑮ 6월 19일 권봉숙 (대동대 교수) : 창작활동에 나타난 退溪의 內面읽기 ⑯ 6월 26일 조병오 (인제대 연구교수) : 燕巖 朴趾源의 생애와 문학 2. 편집회의 개최 <심사위원 선정건> 일 시 : 2015년 6월 17일 (수), 17:00 18:00 장 소 : 본원 회의실 안 건 : 퇴계학논총 제25집 투고논문 검토 및 심사위원 선정 심의 결과 : 투고 논문 14편에 대한 심사위원 선정 <게재논문 확정건> 일 시 : 2016년 06월 27일 (토), 13:00 14:00 장 소 : 본원 회의실 안 건 : 논문 수정 확인 및 게재 논문 확정
편집위원회 운영규정 239 退 溪 學 論 叢 編 輯 委 員 會 運 營 規 程 제 1장 총 칙 제 1조 (목적) 이 규정은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이하 법인 이라 한 다)정관 제18조의 2에 의하여 이 법인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退 溪 學 論 叢 (이하 학술지 라 한다) 편집위원회 (이하 위원회 라 한다) 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 2조 (임무) 1. 본 위원회의 주임무는 학술지의 발간과 관련하여 논문의 기획, 관 리, 접수 심사 편집 등을 주관한다. 2. 기획 논문집, 자료의 발굴, 고전의 번역 등 법인에서 발간하는 도서 의 기획 및 편집 등을 주관한다. 3. 학술지 발간과 관련된 시행세칙을 세운다. 제 2장 편집위원회의 구성 제 3조 (위원회의 구성) 위원회의 위원은 10명 내외로 한다. 제 4조 (위원의 선임) 1. 위원은 지역과 전공 등을 고려하여 학술연구위원회의 추천으로 원 장이 위촉한다. 2. 위원이 개인사정으로 인하여 사임하는 경우, 그 후임자를 즉시 새로 위촉한다. 제 5조 (위원의 임기)
240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1. 위원의 임기는 3년으로 한다. 2. 위원의 사임으로 인하여 새로 보임된 자의 임기는 전임자의 잔여임 기로 한다. 3. 위원은 필요한 경우에는 연임할 수 있다. 제 6조 (위원의 자격) 1. 위원은 퇴계학 및 그 인접학문과 관련된 제 분야의 전공자 가운데 선정 당시를 기준으로 최근 5년 동안 연구실적이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후보)학술지, 정기 발행 학술지 또는 국제전문학술지에 발표된 논문 그리고 저서를 포함하여 500%이상인 전문학자로 한다. 2. 위원은 학술지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소속기관이 전국 또 는 해외에 분포되도록 선정한다. 제 7조 (위원의 의무) 1. 위원은 위원회 개최시에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출석하여야 한다. 2. 위원은 공정해야 하고, 위원으로 활동 중에 취득한 정보를 타인에게 누설하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 제 8조 (위원장의 선임) 1. 위원회의 위원장은 법인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 원장이 임명하거나, 필요한 경우에 위원 중에서 호선한다. 2. 위원장은 위원회를 소집하고, 그 의장이 된다. 3. 위원장의 임기는 3년으로 한다. 제 9조 (회의 소집) 1. 회의 소집은 개최일 1주일 이전에 전화나 전자우편으로 위원장이 행한다. 2. 위원장이 임무를 수행하기 곤란할 때는 회장이 소집한다. 제10조 (의결)
편집위원회 운영규정 241 1. 위원회는 재적위원 과반수 출석으로 성립하고, 출석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결정한다. 2. 출석하지 못한 위원이 위임장을 제출한 경우, 출석인원에는 산입하 되, 의결시에는 산입하지 않는다. 3. 시간이 촉박한 중대한 사항에 대하여는 위원장이 직접 전화나 전자 우편 등으로 위원의 의견을 들어 결정할 수 있다. 4. 특정 사안에 대하여 위원장이 위원회의 위임을 받은 경우 위원장이 처리할 수 있다. 제11조 (결과보고) 위원회의 회의 결과는 원장에게 반드시 보고한다. 제12조 (여비) 위원이 위원회에 참석하는 경우 여비를 지급할 수 있다. 제13조 (문서 관리) 1. 위원회의 회의록은 반드시 작성하고, 작성일로부터 3년간 보관한다. 2. 위원회의 원고 접수, 관리, 심사위원 위촉, 심사결과 보고서 취합, 심 사결과통보 등은 모두 문서로 하며, 그 문서는 3년간 보관한다. 제 3장 학술지 退溪學論叢 발간 제14조 (발행 횟수) 학회지는 년 2회 발행한다. 제15조 (발행일) 발행일은 매년 6월 30일과 12월 31일로 한다. 제16조 (발행 부수) 현재 회원수와 보관용 등을 감안하여 위원회에서 정한 다. 제17조 (학회지의 판형) 판형은 신국판(154x223mm)으로 정한다. 제18조 (편집 체제) 1. 학술논문의 편집 순서는 논문제목, 목차, 국문요약, 주제어, 본문, 참 고문헌, 외국어 초록, 외국어로 된 주제어의 순으로 하는 것을 원칙
242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으로 한다. 2. 학술논문의 영문 제목과 필자명은 반드시 게재한다. 3. 학술 논문이외의 원고 및 정관, 휘보, 임원, 학술연구위원 명단 등의 수록여부는 위원회의 결의로 정한다. 제19조 (학회지 배포) 1. 회비를 납부한 회원에게 발행일로부터 15일 이내에 학회지를 우송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2. 발행일 이후에 회비를 납부한 회원에게는 당해 연도 발행분을 일괄 우송한다. 3. 학술대회 등 다수 회원이 참석하는 회의 일정이 30일 이내에 계획 되어 있는 경우, 우송을 연기할 수 있다. 4. 외국에 거주하는 회원의 우송료는 별도로 징수할 수도 있다. 제 4장 투고 논문의 관리 제20조 (논문 접수) 논문은 연중 수시로 접수한다. 제21조 (투고 논문의 관리) 1. 투고논문은 반드시 접수 대장을 작성하여 관리한다. 2. 투고논문은 접수 즉시 파일명을 바꾸고, 투고자의 이름 등을 익명처 리하고 투고자의 인적사항을 알 수 없도록 하여 공정한 심사에 대 비한다. 3. 접수된 논문은 일체 반환하지 않는다. 제 5장 투고 논문의 심사 제22조 (심사 의무) 1. 학술지에 게재할 논문은 반드시 심사를 거쳐야 한다. 2. 기획 논문 및 특별히 청탁한 원고나 외국인의 원고와 학술대회 발
편집위원회 운영규정 243 표논문 등은 위원회의 결의로 심사를 면제 할 수 있다. 제23조 (심사위원 위촉) 1. 심사위원의 위촉은 위원회의 결의로 편집위원장이 행한다. 2. 심사위원은 논문 1편 당 3인을 위촉한다. 3. 심사위원의 위촉은 가급적 전공, 연령, 지역 등이 편중되지 않도록 위촉한다. 4. 논문 투고자와 근무지가 같거나 학연 등 특별한 관계가 있는 자를 심사위원으로 선정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5. 심사위원에게는 소정의 심사료를 지불한다. 6. 심사위원의 위촉에 관한 사항은 공개하지 않는다. 제24조 (심사위원 수칙) 1. 공평한 기준을 정하여 공정하게 평가하여야 한다. 2. 심사의뢰를 받은 논문의 투고자를 알고자 하여서는 안 된다. 3. 논문 심사결과 등을 타인에게 발설하여서는 안 된다. 제25조 (심사기준) 1. 논문 심사의 기준은 창의성(30%), 체계성(30%), 완성도 (20%), 시의성 (20%)을 종합적으로 심사한다. 2. 심사결과는 게재 가, 수정후 게재, 수정후 재심, 게재 불가 의 4등 급으로 분류한다. 3. 수정 후 게재 등급을 받은 경우, 논문의 수정보완 기간 내에 수정 을 완료 하여야 하며, 그 기일을 지키지 못할 때는 다음 호에 게재 한다. 4. 수정 후 재심 등급을 받은 경우, 다음 호 발간시에 심사하여 게재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26조 (심사결과 보고) 심사위원은 심사 대상 논문을 접수한 날로부터 10 일 이내에 소정의 심사결과 보고서를 위원회에 제출하여야 한다.
244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제27조 (심사결과 통보) 심사위원이 심사결과 보고서를 제출하면, 위원회 는 심사위원의 성명이나 소속 등을 삭제하고, 즉시 그 결과를 투 고자에게 전자우편으로 통보한다. 제28조 (수정보완) 1. 심사결과 통보를 받은 투고자는 심사위원의 수정의견을 최대한 반 영하여 논문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여야 한다. 2. 심사의 종합결과 게재 가 혹은 수정 후 게재 등급을 받은 투고자 는 학회에서 정한 기일 내에 수정논문을 학회에 제출해야 한다. 3. 심사의 종합결과 수정 후 재심 등급을 받은 논문 투고자는 충분히 연구보완 수정 후에 다음 호에 게재 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수정한 논문을 학회에 제출해야 한다. 제 6장 규정의 개정 제29조 (개정절차) 이 규정의 개정은 본 법인 이사회, 위원회의 합동회의 에서 행하며, 그 재적인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인원 3분의 2 이상 의 찬성으로 개정한다. 부 칙 제30조 (개정발표) 개정된 편집규정은 다음 호의 학술지에 게재하여 발 표한다. 1. (효력발생) 이 규정은 2008년 2월 26일부터 시행한다. 2. (시행규칙) 이 규정의 시행에 필요한 세부 사항은 위원회에서 별도 로 정한다.
연구윤리 및 운영규정 245 退 溪 學 論 叢 硏 究 倫 理 및 運 營 規 程 제 1조(목적) 이 지침은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이하 법인 이라 한다.) 정관 제18조의 2 및 편집위원회 운영 규정 제6조에 따라 이 법인에서 발행 하는 퇴계학논총 (이하 학술지 라 한다.)에 게재되는 연구 성과물의 연구진실성을 확보하려는데 목적을 둔다. 제 2조(법인의 책임과 의무) 1 이 법인은 학술지에 투고하는 연구자에게 이 규정을 주지시켜야 한다. 2 이 법인은 학술지에 게재된 연구 성과물의 연구진실성에 대한 검 증을 이 규정에 따라 수행한다. 제 3조(연구자의 책임과 의무) 1 학술지에 투고하는 연구자는 학술 연구 활동과 관련된 연구를 수 행함에 있어서 이 규정을 주지하고 연구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연구 성과물만 투고해야 한다. 2 연구자는 연구 성과물의 연구진실성에 대한 검증을 위해 필요한 절차 및 요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정당한 이의가 없을 경우에 는 그 결과에 따라야 한다. 3 연구자는 논문 제출시 저작권 위임 및 연구윤리규정 서약서 를 함 께 제출해야 한다. 제 4조(연구부정행위의 내용) 아래의 각 항에 해당하는 행위는 연구의 진실성을 해치는 연구부정 행위(이하 부정행위 라 한다.)이다. 1 위조: 존재하지 않는 연구 자료나 결과를 허위로 만들고 이를 논
246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문으로 발표하거나 학술지에 게재하는 행위를 말한다. 2 변조: 연구 자료, 연구 수행 과정 등을 사실과 다르게 조작하거나 누락시켜 연구 내용 및 결과를 왜곡하는 행위를 말한다. 3 표절: 타인의 아이디어, 연구 과정, 연구 결과 등을 정당한 승인이 나 인용 표시 없이 자신의 연구에 포함시키거나, 자신이 이미 발 표한 연구 결과를 적절한 인용 표시 없이 새로운 논문에 포함시키 는 행위를 말한다. 4 부당한 저자 표시: 연구 과정에 기여한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저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거나, 연구 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에 게 부당하게 저자의 자격을 부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5 기타: 학계에서 통상적으로 용인되는 범위를 심각하게 벗어난 행 위, 부정행위를 제보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부정행위조사를 방해하는 행위 등도 부정행위의 내용에 포함된다. 제 5조(연구진실성 검증 조사위원회) 이 법인은 연구진실성을 검증하기 위한 조사위원회(이하 위원회 라 한다)를 다음과 같이 구성하여 상설 운용한다. 1 원장을 위원장으로 한다. 2 편집위원을 위원으로 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관련 분야 전문 학자 를 특별 조사위원으로 위촉할 수 있다. 3 이 법인의 사무국장을 위원회의 간사로 한다. 제 6조(연구진실성 검증 절차) 논문 투고자의 연구 윤리 위반 사항에 대한 검증은 조사를 시작한 날 로부터 60일 이내에 완료되도록 하며, 검증 절차는 다음과 같이 정한다. 1 연구 윤리 위반 제소 (1) 제소의 대상은 이 규정 4조에서 정한 부정행위에 해당하는 것 으로 의심되는 논문이 된다.
연구윤리 및 운영규정 247 (2) 제소는 위원회 위원 또는 부정행위 제보자가 위원장에게 부정 행위를 구체적으로 밝힌 증거 자료를 제출함으로써 성립된다. 2 예비조사 (1) 위원장은 제소된 논문의 연구자에게 제보 내용을 통보하고 소 명 자료를 10일 이내에 제출하도록 한다. (2) 연구자가 소명 자료를 10일 이내에 제출하지 않을 경우 부정행 위를 인정한 것으로 추정한다. (3) 연구자가 부정행위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위원회는 본조사의 절차를 진행한다. 3 본조사 (1) 제소된 논문의 연구자가 부정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소명 자료 를 제출할 경우, 위원회는 부정행위의 사실 여부를 입증하기 위 한 조사를 진행한다. (2) 위원장은 제소된 논문의 연구진실성에 대한 검증을 위하여 위 원회를 소집한다. (3) 위원회는 해당 연구 분야의 외부 전문가 3인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하고 제소된 논문의 심사를 의뢰한다. (4) 위원회는 심사위원의 심사의견서를 해당 연구자와 제보자에게 보 내어 이의를 제기하는 문서를 10일 이내에 제출하도록 하며, 이의 를 문서로 제출하지 않을 경우 이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5) 위원장은 위원들이 심사의견서, 이의 제기 등 문서를 검토하도 록 한 후, 위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부정행위 여부를 판정한다. 4 통보와 이의 신청 (1) 위원장은 판정 내용을 제보자와 해당 연구자에게 문서로 통보한다. (2) 제보자와 해당 연구자 자는 판정 내용에 대해 이의가 있을 경우 위원회에 문서로 이의 신청을 할 수 있다. (3) 위원회는 제보자와 해당 연구자의 이의 신청이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판단될 경우 위원회를 소집하여 직접 재조사하고 최종 판정을 한다.
248 退 溪 學 論 叢 第 25 輯 제 7조(조사 결과에 따른 조치) 제보된 부정행위가 위원회의 조사 결과 사실로 판정되면, 해당 연구 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한다. 1 한국학술진흥재단 및 해당 연구자의 소속 기관에 연구 윤리를 위 반한 사실을 통보한다. 2 위반 사실 내용과 논문 삭제 사실을 학술지에 공시한다. 3 해당 연구자는 본 연구원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및 각종 저서에 최 고 10년까지 투고할 수 없도록 한다. 제 8조(제보자와 해당 연구자의 권리 보호) 위원회는 제소된 부정행위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제보자와 해당 연 구자의 권리를 보호하여야 한다. 1 제보자와 해당 연구자의 신원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한다. 2 부정행위에 대한 제보 내용은 최종 판정이 날 때까지 외부에 공개 되지 않도록 한다. 3 제보자와 해당 연구자가 부당한 피해를 입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 을 한다. 4 제보자 또는 해당 연구자의 정당한 요구가 있을 경우 그 요구에 성실하게 응한다. 제9조(기타 행정 사항) 1 간사는 위원회의 회의 내용을 반드시 문서로 작성하여 이사회에 보고한다. 2 법인은 위원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한다. 3 이 규정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은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시행한다. 4 이 규정의 제정과 수정은 위원회에서 발의하여 이사회에서 정한다. 부 칙 제1조 이 규정은 2008년 2월 26일부터 시행한다.
연구윤리 및 운영규정 249 저작권 위임 및 연구윤리규정 서약서 논문 제목 (국문) (영문) 상기 논문을 퇴계학논총 에 게재 요청함에 있어 아래의 사항에 대 하여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였으며, 이에 서명으로서 동의합니다. 1. 본 논문은 창의적이며, 다른 논문의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았음을 확인합니다. 2. 저자는 본 논문에 실제적이고 지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논문 내용 에 대하여 책임을 함께 합니다. 3. 본 논문은 과거에 출판된 적이 없으며, 현재 다른 학술지 등에 게 재를 목적으로 제출하였거나 제출할 계획이 없습니다. 4. 저자는 <퇴계학부사연구원 연구윤리규정>을 준수하고, 본 논문과 관련하여 발생된 학회의 불이익에 대해 책임질 것을 서약합니다. 5. 본 학회지의 발행인은 저자나 학회의 허락없이 타인에 의해 이루 어지는 저작권 침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있습니다. 6. 본 논문이 퇴계학논총 에 게재될 경우, 본 논문에 따른 저작권 및 디지털 저작권에 대한 권한 행사(복사 전송권 포함) 등을 퇴 계학부산연구원에 위임합니다. 7. 공동 저자 또한 상기 내용을 숙지하였고, 동의함을 확인합니다. 년 월 일 대표 저자 : 성명 (인) 사단법인 퇴계학부산연구원 귀중
250 退溪學論叢 第25輯 退溪學論叢 投稿規程 本院은 退溪學 및 韓國儒學을 위시한 儒學一般에 관한 연구를 진작시키 기 위하여 學術誌 退溪學論叢 을 간행한다. 論叢 編輯委員會는 다음과 같 이 編輯 방침을 정하고, 국내외 학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한다. 1. 揭載 範圍 1) 退溪 및 退溪學 전반에 관한 연구 논문. 退溪學派 學者들에 관한 연구 논문. 退溪學과 外國學界와의 관련된 연구 논문. 2) 韓國儒學을 위시한 儒學 중심의 東洋哲學 전반에 관한 연구논문, 儒 學 중심의 한국 및 東洋 文學 史學 社會科學 전반에 관한 연구 논 문. 2. 論文 公募 투고된 논문으로서 게재가 결정된 논문에 대해서는 소정의 고료를 지급하고, 매 집마다 게재되는 논문 가운데 우수하다고 인정되는 논문 약간 편에 대해서는 격려금(1편당 일정금액)을 지급한다. 3. 論文 作成要領 1) 논문의 英文 제목을 英文 抄錄의 앞부분에 明示한다. 2) 공동집필인 경우, 제1집필자와 공동집필자의 구분을 明示한다. 3) 집필자 및 공동집필자의 소속, 직위를 구체적으로 明示하고 그를 증 명할 수 있는 재직증명서 사본 또는 Home Page 복사물을 논문과 함
투고규정 251 께 提 出 한다. 4) 목차를 논문의 앞부분에 一 括 提 示 하고, 논문의 主 題 語 (Key Word)들 을 抄 錄 의 뒤, 본문의 앞부분에 摘 示 한다. 5) 本 文 과 같은 言 語 로 論 文 抄 錄 을 작성하여 本 文 앞부분에 倂 載 한다. 6) 本 文 이 영문이 아닌 경우, 英 文 抄 錄 은 본문의 뒷부분에 첨부한다. 7) 參 考 文 獻 의 완벽한 書 誌 的 情 報 를 明 示 한다. 8) 原 稿 의 分 量 은 200 字 원고지 기준 100매 내지 150매로 한다. * 별첨 <논문 집필요령 투고 접수의 요건임> 참조. 4. 投 稿 方 法 * 原 稿 와 함께 해당 문서가 담긴 Diskette 또는 E-mail을 本 院 에 提 出 * 投 稿 者 의 인적사항, 구체적 所 屬, 住 所, 전화번호 明 記 (증빙이 되는 재직증명서 사본 또는 Home Page 복사물을 논문과 동봉 함) 5. 接 受 處 614-743 부산시 부산진구 전포2동 608-1, 신우빌딩 315호 社 ) 退 溪 學 釜 山 硏 究 院 E-mail : toegyehbs@korea.com URL : http://www.toegyehbs.or.kr 退 溪 學 論 叢 編 輯 委 員 會 (전화:051-819-8587, 807-4989)
252 退溪學論叢 第25輯 <논문 작성 순서> 논문제목 집필자1) (공동집필인 경우, 제1집필자와 공동집필자 구분 明示) 目次 論文 抄錄(논문본문과 같은 언어) 主題語: 5-7 단어 本 文 (*집필요령 참조) 參考文獻 外國語 抄錄 外國語 論文題目 / 姓名(초록과 같은 언어) 外國語키워드 英文題目 / 英文姓名 1) 집필자 및 공동 집필자의 소속, 직위를 구체적으로 明示하고 재직증명서 사본 또는 Home Page 복사물을 논문과 동봉할 것. 2) 參考文獻의 완벽한 書誌的 情報 明示 저자명, 논문명 문헌명 (발행지: 출판사, 발행 연도), 해당 권호, 해당 page.
논문작성 요령 253 論文作成 要領 1. 원고는 自國語와 漢字를 혼용할 수 있다. 다만 본문에 인용된 원전자 료는 自國語로 번역함을 원칙으로 한다. 2. 원고는 개인용 Computer에서 아래아 한글(*.hwp) 문서로 작성함을 원 칙으로 한다. (글자체는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명조체, 신명조체, Times New Roman 등 - 으로 하되 글자 크기는 10p로 한다. 문단 모양은 들여쓰기 2칸, 행간1.8, 혼합정렬 - 歐美言語일 경우에는 왼쪽정렬 - 로 하되 자간, 장평 조정이나 진하게 등은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제목, 소제목 등은 글자크기를 조정할 수 있다.) 3. 註釋은 脚註로 처리함을 원칙으로 한다. 주석문의 글자체는 본문과 같으며 글자크기는 9 point, 문단모양은 내어쓰기 2칸, 행간 1.5, 혼합 정렬 - 歐美言語일 경우에는 왼쪽정렬 - 로 하되 자간, 장평 조정이나 진하게 등은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4. 姓名은 붙여 쓰고, 字 號 등은 성명 앞에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예) 李滉, 退溪 李滉 5. 생몰연대는 姓名 다음에 괄호로써 표시한다. 예) 李滉(1501-1570) 6. 漢詩의 경우 번역문 밑에 原文을 표기하되 2글자 들여쓰기 한다. 예) 身退安愚分 벼슬에서 물러오니 본 분수에 편안하건만 學退憂暮境 학문이 물러서니 늘그막이 걱정되네. 7. 주석은 다음 예와 같은 형태로 작성한다. 예) 1) 金泰永, 退溪의 個別 人間 自我論, 退溪學報 (서울: 퇴계학 연구원, 2001) 제109집, pp.14-15. 2) Michael C. Kalton, To Become A Sage(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 pp.86-87.
254 退溪學論叢 第25輯 原典資料引用 예) 李彦迪, 晦齋全書, 권5,6-a(6장 앞면이라는 뜻), 書忘齋忘機堂 無極太極說後 (서울: 대동문화연구원 1980, 영인본), p.** 夫所謂 無極 而太極云者, 所以形容此道之未始有物, 而實爲萬物之根柢 也. (* 原文中에 적절한 句讀 標示를 한다.) 8. 參考文獻은 논문 끝에 제시하되 다음과 같이 표기한다. 논문: 金泰永, 退溪의 個別 人間 自我論, 退溪學報 (서울: 퇴계 학연구원, 2001) 제109집 저서, 단행본: 琴章泰, 退溪學派의 思想2 (서울: 集文堂, 2001) 9. 漢字는 발음을 병기함이 없이 직접 노출시켜 표기한다. 다만, 의 역 을 한 경우의 原文이나 발음이 다른 原文일 때에는 안에 한자 를 표기한다. 스스로 虛靈한 心體가 맑게 벽을 향해 앉아서 마음을 관조하며 向壁觀心 10. 章節 표시는 다음과 같이 한다. 예) 1. 1) (1) ① 11. 부호 사용은 다음과 같이 한다. : 단행본, 문집 등 (단, 英文일 경우는 이태릭체) : 작품, 논문 편 등 (단, 英文일 경우는 : 강조, 요약 또는 발췌 인용 : 대화, 원문 인용 : 보층역, 의역이거나 발음이 다른 원문 표기 ) 기타 쉼표, 마침표, 느낌표, 물음표는 일반용례에 따름. * 논문 작성 시 위 부호는 반드시 준수한다. ** 이 논문 집필요령 의 준수를 투고논문 접수의 요건으로 한다.
위원 명단 255 <학술연구위원회> 姜 大 敏 (경성대) 姜 明 官 (부산대) 權 奉 淑 (대동대) 權 鎭 浩 (경성대) 金 康 植 (동명대) 金 東 哲 (부산대) 金 秉 權 (부산대) 金 奉 建 (동의대) 金 成 潤 (경북대) 金 喆 凡 (경성대) 柳 瑩 杓 (경성대) 睦 暎 海 (신라대) 朴 晙 遠 (경성대) 成 昊 俊 (영산대) 孫 五 圭 (제주대) 宋 靜 淑 (부산대) 申 承 勳 (경성대) 吳 仁 澤 (부산교대) 兪 英 玉 (부산대) 李 秉 直 (금성고) 李 相 弼 (경상대) 李 相 夏 (고전번역원) 李 聖 惠 (경성대) 李 宗 峰 (부산대) 李 鍾 虎 (안동대) 林 亨 錫 (경성대) 張 東 杓 (부산대) 張 炳 漢 (영산대) 張 世 浩 (경성대) 張 源 哲 (경상대) 鄭 景 柱 (경성대) 鄭 聖 植 (영산대) 鄭 羽 洛 (경북대) 鄭 在 權 (동의대) 鄭 震 英 (안동대) 趙 南 旭 (부산대) 趙 柄 悟 (동아대) 崔 錫 起 (경상대) 崔 載 南 (이화여대) 河 岡 震 (동서대) 韓 相 奎 (동주대) 許 捲 洙 (경상대) 黃 渭 周 (경북대) (명단은 가나다 순) <퇴계학논총 편집위원회> 위원장 : 조남욱(부산대) 위 원 : 박문현(동의대) 손오규(제주대) 김동민(성균관대) 정경주(경성대) 김병권(부산대) 조원일(전남대) 김일환(공주대) 難 波 征 男 ( 福 岡 女 學 院 大 ) <퇴계학논총 윤리위원회> 위원장 : 성해준(동명대) 위 원 : 김인규(영산대) 도민재(청주대) 이형성(전주대) 지준호(서울교대) 정성식(영산대) 최영성(한국전통문화대)
THE TOEGYE HAK NONCHONG 第 25 輯 VOL. 25 發 行 人 (Publisher) 編 輯 人 (Supervising Editor) 印 刷 日 (Date of Print) 發 行 日 (Date of Publishing) 發 行 處 (Owner of Copyright) 李 圭 衡 (Lee, Kyu-Hyung) 李 源 鈞 (Lee, Won-Kyun) 2015년 6월 27일 2015년 6월 30일 社 團 法 人 退 溪 學 釜 山 硏 究 院 (Busan Toegye Studies Institute) 住 所 614-743 (Address of Publishing) 부산시 부산진구 전포2동 608-1 2nd Street, Jeonpo-Dong, Busanjin-Gu, Busan, 614-743 Korea) 電 話 (Tel.) 051) 819-8587, 807-4989 팩 스(Fax.) 051) 817-4013 E-mail toegyehbs@korea.com URL http://www,toegyehbs.or.kr 印 刷 人 (Printer) 세종출판사 ISSN 1738-3994 비매품 < 年 二 回 刊 > (Published 2 time in a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