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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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체 기도 하느님 아버지, 저희를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저희가 모였사오니 여기 모인 이들과 이 가정에 축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희는 오늘 소공동체 모임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부지런히 공부 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 합니다. 주님께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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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발 간 사 먼저 경기향토사학 제16집이 발간되기까지 집필에 수고하신 경기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경기도의 각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신 김문수 경기도지사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기도는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늘 중심적인 고장으로 기능을 해 왔습니다. 한반도의 중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다양한 지역의 문화가 영입되고, 주변국들의 문화가 유입되는 창구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수많은 유물, 유적들이 산재하고 있으며, 역사의 다양한 경향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경기향토사학 제16집>은 연구위원들이 쓴 각 논문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왕실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경향뿐만 아니라 인물, 신앙, 생활사 등을 연구한 다양한 연구결과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만큼 다양한 문화적 경향이 한 데 어우러져 있고, 그것이 나름대로의 경기도적 문화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역사적 맥락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경기향토사학>은 매년 경기도 31개 시, 군문화원의 추천으로 위촉된 연구위원들이 1년간 조사, 발굴, 연구한 결과물을 발표하는 논문집입니다. 그래서 각 지역의 세세한 역사적 기초자료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각 위원들의 맺음말 가장 끝에 꼭 기재되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 관심 있는 젊은 후배들의 연구를 기대해 본다. 오랜 세월의 애환을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어 안타깝다. 최근 급격한 도시화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귀중한 역사유적, 유물들이 제자리를 잃거나 사라지고 있고, 더욱이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도 함께 하릴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지금 연구하고 있는 것이 후학들의 연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순수한 열정이 곳곳에 느껴집니다.

각 논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하나로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경기향토사학>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 발굴하는 용기와 도전정신이 느껴지는 논문집입니다. 한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보존을 통해 애향 심을 고취하고 나아가 경기도민의 화합과 단결에 기여하고자 앞으로도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며, 언제나 앞장설 것입니다. 경기향토문화연구소의 열정과 소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한 번 <경기향토사학 제16집>이 발간되기까지 열정적으로 조사, 발굴해 주신 연구위원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한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장 오 용 원

목 차 1.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남한산성의 재조명 7 2.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41 3. 소요사 연구 77 4.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21 5.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49 6.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77 7.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15 8.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59 9.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03 10.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33 11. 地 名 由 來 에 대하여( 高 陽 배다리 中 心 ) 369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한 동 억 (경기향토문화연구소장) 目 次 I. 서론( 序 論 ) II. 본문 1. 사기( 三 國 史 記 ) 2. 전설( 傳 說 )과 설화( 說 話 ) 3. 지명( 地 名 ) 4. 유적( 遺 跡 ), 유물( 遺 物 ) Ⅲ. 결론 집필자 : 한동억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장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7

Ⅰ. 서론( 序 論 )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의 역사적( 歷 史 的 ) 사실( 事 實 )과 전래문화의 재조명( 再 照 明 )이 꼭 유네스코 문화유산( 文 化 遺 産 ) 등록( 登 錄 )이전에 재조명 되어야 하는 것은 백제시대( 百 濟 時 代 )의 찬란( 燦 爛 )하였던 군사문화( 軍 事 文 化 )를 중심으로 한 다방면( 多 方 面 )의 예술( 藝 術 )과 문화가 삼국( 三 國 )중 가장 우수( 優 秀 )하고 화려( 華 麗 )하면서도 지적( 知 的 )인 사실 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남한산성의 위상( 位 相 )이 흠결( 欠 缺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같 이 왜곡( 歪 曲 )된 남한산성의 실상( 實 相 )을 재조명( 再 照 明 )하여야 한다. 백제건국( 百 濟 建 國 ) 상황( 狀 況 )을 전( 傳 )하는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의 기록( 記 錄 )을 보면, 온조왕( 溫 祖 王 ) 이 한산( 漢 山 )에 와서 부아악( 負 兒 岳 )에 올라 두루 살펴보고는 한수( 漢 水 ) 남쪽( 河 南 )의 위례성( 慰 禮 城 )에 도읍( 都 邑 )을 정( 定 )하고 열 명의 신하( 臣 下 )를 보좌( 輔 佐 )로 삼아 국 호( 國 號 )를 십제( 十 濟 )로 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이 때가 전한( 前 漢 ) 성제( 成 帝 ) 홍가( 鴻 嘉 ) 3년(서기전 18)이었다. 이와 같은 기록에 대하여, 한산( 漢 山 )의 위치비정( 位 置 比 定 ) 에 대한 삼국사기의 해설( 解 說 )은 한산의 위치( 位 置 )는 백제( 百 濟 )의 최초( 最 初 )의 도읍 지( 都 邑 地 )를 어디로 볼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최초의 도읍지를 하북위례성( 河 北 慰 禮 城 )으로 볼 경우( 境 遇 ) 북한산( 北 漢 山 )에 비정( 比 定 )할 수 있다. 1) 그러나 하남위례성( 河 南 慰 禮 城 )으로 볼 경우 남한산( 南 漢 山 )에 해당( 該 當 )시킬 수 있다. 2) 그런데 위에 나오는 부아악( 負 兒 岳 )을 삼각산( 三 角 山 )에 비정( 比 定 )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 이때의 한산은 북 한산( 北 漢 山 )으로 보는 것이 타당( 妥 當 )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수( 漢 水 ) 남쪽( 河 南 )에 위례성( 慰 禮 城 )에 도읍( 都 邑 )을 정( 定 )하였다는 기록에 의하면 상황은 또 달라진다. 한산이 백제 건국( 百 濟 建 國 ) 초기( 初 期 )에는 백제( 百 濟 )의 궁성( 宮 城 ) 보위 산성( 保 衛 山 城 )으로서의 다양( 多 樣 )하고 구심적( 求 心 點 )적인 역할( 役 割 )을 한 사실과 근 초고왕( 近 肖 古 王 ) 26년 가을 고구려( 高 句 麗 )의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을 평양( 平 壤 )전투에 서 죽이고 돌아온 뒤 서울인 궁성( 宮 城 )을 남한산성으로 옮긴 이후 백제수도( 百 濟 首 都 ) 1) 정약용( 丁 若 鏞 )의 아방강역고( 我 邦 疆 域 考 ), 이병수( 李 炳 壽 )의 한국고대사연구( 韓 國 古 代 史 硏 究, 박영 사 1972년 491-487쪽) 2) 이홍식( 李 弘 植 )의 한국고대사연구( 韓 國 古 代 史 硏 究, 신구문화사 1971년 321-327쪽) 8 한동억

로서의 역할( 役 割 )을 정밀분석( 精 密 分 析 )하고 심도( 深 度 )있게 연구( 硏 究 )분석하여 남한산 성의 역사적( 歷 史 的 ) 사실( 史 實 )을 확인( 確 認 )하고, 확실한 기록( 記 錄 )으로 정리( 整 理 )하 여 후세( 後 世 )에 전하여야 하는 일은 역사적( 歷 史 的 ) 소명( 召 命 )이요, 시대적( 時 代 的 ) 사 명( 使 命 )이라 기필코 완수( 完 遂 )하여야 한다. Ⅱ. 본문 1. 사기( 三 國 史 記 ) 경기( 京 畿 ) 지역은 마한( 馬 韓. 三 國 志 魏 志 東 夷 傳 準 王 便 에는 辰 韓 으로 記 錄 ) 3) )의 시조( 始 祖 )이며 고조선( 古 朝 鮮. 箕 子 朝 鮮 으로도 標 記 함)의 마지막 황제( 皇 帝 )인 준왕( 準 王 )이후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이후 지금까지 2,200여 년간의 수도권( 首 都 圈 )이었다. 준왕 은 위만( 衛 滿 )에게 밀려나 내쫒기고 나라를 빼앗기자 남하( 南 下 )하여 한강유역( 漢 江 流 域 )인 회안( 淮 安. 현재의 廣 州 市 廣 州 邑 慶 安 洞 一 帶 )에 수도( 首 都 )를 정( 定 )하고 나라를 세웠다. 그 사연은 준왕은 서기전( 西 紀 前 ) 195년에 연( 延 )나라로부터 유( 流 )이민( 移 民 ) 천 여명을 이끌고 귀순( 歸 順 )하여 온 위만( 衛 滿 )을 지극( 至 極 )히 총애( 寵 愛 )하여 박사( 博 士 )라는 높은 직책( 職 責 )을 주어 요서( 遼 西 )일대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다음 해인 서기 전 194년에 외침( 外 侵 )이 있을 것이라며, 준왕을 측근( 側 近 )에서 호위( 護 衛 )하여야 한다 는 구실( 口 實 )로 군사( 軍 士 )를 이끌고 도성( 都 城 )에 들어와 준왕( 準 王 )을 내몰고 스스로 를 왕( 王 )이라 칭( 稱 )하고 국호( 國 號 )를 위만조선( 衛 滿 朝 鮮 )이라고 하였다. 준왕은 조선( 朝 鮮 )이라는 국호( 國 號 )조차 빼앗겼으므로 진국( 辰 國 ), 진한( 辰 韓 ) 또는 준한( 準 韓 )이라는 새로운 국호( 國 號 )를 제정( 制 定 )하여 사용( 使 用 )하였다는 기록과 한후 ( 韓 候 )가 위만에게 밀려나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국 또는 진 한( 辰 韓 ), 준한( 準 韓 )으로 불렀다. 라는 것이 삼국지( 三 國 志 ) 위지( 魏 志 ) 동이전( 東 夷 傳 ) 3) 三 國 志 중 魏 志 東 夷 傳 에 準 王 扁 의 記 錄 은 廣 州 郡 誌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9

준왕( 準 王 )조( 條 )에 기록( 記 錄 )되어 전( 傳 )하여 온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각종문헌상에 나와 있는데도 정확히 알리지 못하는 상황은 무 슨 연유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선은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백제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자. 후한서( 後 漢 書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4) 삼한( 三 韓 )은 무릇 78국 이었는데, 백제는 그 중 한나라였다. 북사( 北 史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의 동쪽 끝은 신라이고,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를 한계로 하였으며 북쪽은 한 강( 漢 江 )에 닿았다. 그 서울은 거발성( 居 拔 城 )이라 하고 또는 고마성( 固 麻 城 )이라고도 하 며, 그 밖에 다시 오방성( 五 方 城. 東 ( 右 ), 西 ( 左 ), 南 ( 後 ), 北 ( 前 ), 中 ) 있었다. 통전( 通 典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남쪽으로는 신라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 高 麗 )와 떨어져 있으며, 서쪽 은 큰 바다를 한계로 하였다. 구당서( 舊 唐 書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부여( 扶 餘 )의 별종( 別 種 )으로서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 ( 越 州. 折 江 省 )에 이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 倭 )에 이르며, 북쪽은 고구려( 高 句 麗 )였 다. 그 왕이 거처( 居 處 )하는 곳에는 동, 서의 두성이 있었다. 신당서( 新 唐 書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의 서쪽 경계( 境 界 )는 월주( 越 州. 絶 江 省 )이고 남쪽은 왜( 倭 )인데 모두 바다를 건 너 있으며 북쪽은 고구려( 高 句 麗 )였다.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CD-ROM 譯 註 國 史 記. 三 國 史 記 券 제37 雜 誌 제6 地 理 4 高 句 麗, 百 濟. 10 한동억

고전기( 古 典 記 )를 살펴보니, 동명왕( 東 明 王. 주몽의 셋째아들 온조( 溫 祖 )가 전한( 前 漢 )홍가( 鴻 嘉 )3년 계묘(서기전 18)에 졸본부여( 卒 本 扶 餘 )로부터 위례성( 慰 禮 城 )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왕을 일컫고 389 년을 지냈다. 13세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 南 )평양성( 平 壤 城 )을 빼앗 아 한성( 漢 城. 南 漢 山 城 )에 도읍하고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 文 周 王 )에 이르러 서 울을 웅천( 熊 川. 公 州 )으로 옮기고 63년을 지냈다. 26세 성왕( 聖 王 )에 이르러 서울을 소 부리( 所 夫 里. 扶 餘 )로 옮기고 나라이름을 남부여( 南 扶 餘 )라고 하였으며, 31세 의자왕( 義 慈 王 )에 이르기 까지 지낸 햇수가 122년이었다. 당나라 현경( 顯 慶 ) 5년 곧 의자왕( 義 慈 王 )재위 20년(서기660)에 이르러, 신라의 유신( 庾 信 )이 당나라장수 소정방( 蘇 定 方 )과 함 께 이를 쳐서 평정( 平 正 )하였다. 옛날에는 5부( 五 部 ) 5) 가 있어서 37군( 郡 ), 200성( 城 ), 76만호( 戶 )를 나누어 통할하였는데, 당나라가 그 땅에 웅진( 熊 津 ), 마한( 馬 韓 ), 동명( 東 明 )등 다섯 도독부 6) 를 나누어 설치( 設 置 )하고 나서, 그 우두머리( 酋 長 )를 도독부( 都 督 部 ) 자사( 刺 史 )로 삼았다. 얼마 안지나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아울러서 웅주( 熊 州. 공주( 公 州 ), 전주( 全 州 ), 무주( 武 州 ))의 3주와 여러 군현을 설치하고, 고구려의 남쪽 경역 및 신 라의 옛 땅과 함께 구주( 九 州 )로 삼았다. 라는 이 기록은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이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이후 백제의 수도로서 105년 (서기 371-475)이라는 기간 동안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이 사살( 射 殺 )된 후 고구려는 원한( 怨 恨 ) 맺힌 세월을 보냈을 것이고, 광개토대왕( 廣 開 土 大 王 )조차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백제의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다는 방증( 傍 證 )이기도 한 것이다. 5) 백제가 泗 歷 時 代 에 都 城 畿 內 를 地 域 區 分 하여 設 置 한 다섯 部. 五 部 制 에 대한 기록은 周 書 에 처음보 이며, 隋 書 에서는 더욱 體 系 化 된 狀 態 를 보여주고 있다. 都 下 즉 畿 內 에는 萬 家 가 있어서 이를 上 部, 前 部, 中 部, 下 部, 後 部 의 五 部 로 나누었다 五 部 는 500인의 兵 士 를 統 括 하였으며, 各 部 에는 5 巷 이 있어서 士 人 이 居 住 하였다. 6) 唐 나라가 西 紀 660년에 백제를 滅 한 直 後 에 設 置 한 다섯 都 督 部. 그러나 이 記 事 의 原 典 인 舊 唐 書 권 199 上 百 濟 傳 에 右 衛 郎 將 王 文 度 를 熊 津 都 督 으로 任 命 하고 兵 力 을 總 括 하여 지키게 하였다는 記 事 만 보이는 것으로 보아 實 際 로는 熊 津 都 督 部 만 設 置 하였던 듯하다. 라고 記 述 되어 있다. 新 唐 書 권 220 百 濟 傳 에는 熊 津, 馬 韓, 東 明 外 에 金 璉, 德 安 都 督 部 의 이름이 나온다. 熊 津 都 督 部 가 현 재의 公 州 市 라는 것과 德 安 都 督 部 가 五 方 城 중의 하나인 東 方 得 安 城 ( 論 山 市 加 也 谷 面 )이라는 외에 는 다른 都 督 部 의 位 置 는 알 수 없다. 五 都 督 部 는 熊 津 都 督 部 외에는 計 劃 上 으로만 設 置 되었던 듯하 며, 얼마 안 있어 本 書 37 地 理 志 末 尾 에 姓 名 未 詳 의 都 督 部 및 東 明 州 등 七 州 體 制 로 轉 換 하려한듯 하나 그 또한 實 行 에 옮기지는 못한듯하다. 라고 기술( 記 述 )되어있다.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11

온조대왕( 溫 祖 大 王 )이 서기전 18년에 백제( 百 濟 )를 건국( 建 國 )하고 수도( 首 都 )를 하북( 河 北 )위례성( 慰 禮 城 )으로 정하였다가 온조12년(서기전 6년)에 하남( 河 南 )위례성( 慰 禮 城 )으 로 이도( 移 都 )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은 온조왕( 溫 祖 王 )13년(서 기전 5)가을 7월에 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 木 柵 )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 다. 7) 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침내 강역( 疆 域 )을 정 하였는데, 북은 패하( 浿 河. 禮 成 江 ) 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 熊 川. 公 州 )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은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 走 壤. 春 川 )에 이르렀다. 구월( 九 月 )에 궁성( 宮 城 )과 대궐( 大 闕 )을 세웠 다. 라고 기록( 記 錄 )되어있다. 이때부터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에 기록되어 있는 한산( 漢 山 ) 이나 한성( 漢 城 )을 포함( 包 含 )한 이 지역( 地 域 )과 관계( 關 係 )되는 기록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온조왕( 溫 祖 王 )14년(서기전 5) 봄 정월에 도읍( 都 邑 )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 部 落 ) 을 순행( 巡 行 )하며 위무( 慰 撫 )하고 농사( 農 事 )를 힘써 장려( 獎 勵 )하였다. 가을 7월에 서 북쪽에 성( 城 )을 쌓고 한성( 漢 城 )의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 김정호( 金 正 浩 )는 대동지지( 大 東 地 志 )권3 경기도 양주( 楊 州 ) 성지 조( 城 地 條 )에서 이때에 쌓은 성을 양주 성( 楊 州 城 )으로 보고 있다. 온조왕 25년(서기 7)봄 2월에 왕궁( 王 宮 )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 漢 城 )의 민 가( 民 家 )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馬 生 牛 ), 머리하나( 頭 一 )에 몸이 둘( 身 二 )이었다. 일관 ( 日 官 )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 徵 兆 )요, 소가 머리가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 竝 合 )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 하며 드디어 진한( 辰 韓 )과 마한( 馬 韓 )을 병합( 竝 合 )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9) 온조왕( 溫 祖 王 )27년(서기 9)여름 4월에 두 성( 城 ) 10) 이 항복( 降 伏 )하자 그 백성( 百 姓 )들 7) 三 國 史 記 券 第 23 百 濟 本 紀 第 1 溫 祖 王 13 年 8)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권 제 23 백제본기( 百 濟 本 紀 ) 제 1 온조왕( 溫 祖 王 ) 14년. 9)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권 제 23 백제본기( 百 濟 本 紀 ) 제 1 온조왕( 溫 祖 王 ) 25년. 10) 馬 韓 의 두 城 이 圓 山 城 과 錦 峴 城 이라고 하는데 두성에 대한 確 實 한 比 定 이 없다. 圓 山 城 에 대하여 近 肖 古 王 24년(서기190) 新 羅 伐 休 尼 師 今 에 보이는 新 羅 西 境 圓 山 鄕 과 同 一 한 곳이라 면 慶 北 醴 泉 郡 龍 宮 面 에 比 定 할 수 있다.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권 제 25 慶 尙 道 龍 宮 縣 沿 革 條 에 本 新 羅 竺 山 ( 一 云 圓 山 )이 나오는데 圓 山 = 龍 宮 縣 은 現 在 醴 泉 郡 龍 宮 面 이다. 그러나 龍 宮 面 은 馬 韓 의 中 心 地 가 稷 山 일 境 遇 地 理 的 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권 제 33 全 羅 道 珍 山 縣 古 蹟 條 에 나오는 猿 山 鄕 ( 在 縣 東 三 十 里 )이라는 記 事 에 依 據 하여 忠 南 珍 山 으로 보 려는 見 解 도 있다.( 千 寬 宇 三 韓 의 國 家 形 成 下 韓 國 學 報 3 일지사 1976년. 128쪽) 12 한동억

을 한산( 漢 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 馬 韓 )은 드디어 멸망( 滅 亡 )하였다. 11) 온조왕( 溫 祖 王 )28년 아들 다루( 多 婁 )를 태자( 太 子 )에 봉( 封 )하고 중앙( 中 央 )과 지방( 地 方 )의 병권( 兵 權 )을 모두 태자( 太 子 )에게 맡긴 12) 후 부터는 전통적( 傳 統 的 )으로 백제( 百 濟 )는 495년간 태자( 太 子 )에게 병권( 兵 權 )을 맡기는 것이 관례( 慣 例 )가 되었고, 그로인 ( 因 )하여 태자( 太 子 )를 중심( 中 心 )으로 한 군사력( 軍 事 力 )은 삼국( 三 國 )중 고구려( 高 句 麗 ), 신라( 新 羅 ). 어느 나라와 비교( 比 較 )할 수 없을 만큼 막강( 莫 强 )하였다. 특히 창곡동( 倉 谷 洞 )에 태자궁( 太 子 宮 )을 세우고 백제( 百 濟 )의 군사요충지( 軍 事 要 衝 地 ) 를 만들고 지금의 송파( 松 坡 )와 성남일대( 城 南 一 帶 )에서 훈련( 訓 練 )을 시킨 것은 백제융 성( 百 濟 隆 盛 )의 근간( 根 幹 )을 이루었다. 온조왕( 溫 祖 王 )43년(서기25)겨울 10월에 남옥저( 南 沃 沮 )의 구파해( 仇 頗 解 )등 20여가 ( 家 )가 부양( 斧 壤 )에 귀순( 歸 順 )하니 왕( 王 )이 이를 받아들여 한산( 漢 山 ) 서쪽에 안치( 安 置 )하였다. 기루왕( 己 婁 王 )27년(서기103) 13) 왕이 한산( 漢 山 )에서 사냥( 山 行, 打 圍 (몰이)를 하여 軍 士 나 짐승( 獸 )을 한곳으로 몰아 놓고 사살( 射 殺 )하거나 생포( 生 捕 )하는 戰 術 )로 軍 事 訓 鍊 의 一 種 )하다가 신비( 神 秘 )로운 사슴( 神 鹿 )을 잡았다. 개루왕( 蓋 婁 王 )4년(서기131)여름 4월에 왕이 한산( 漢 山 )에서 사냥하였다. 개루왕5년(서기132)봄 2월에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을 쌓았다. 14)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 24년(서기 369) 가을 9월에 고구려( 高 句 麗 )의 사유( 斯 由 )가 보병 ( 步 兵 )과 기병( 騎 兵 )2만( 萬 )명을 거느리고 치양( 雉 壤 )에 와서 진( 陣 )을 치고 군사( 軍 士 ) 한편 全 北 全 州 市 에 比 定 하는 見 解 도 있다( 全 榮 來 完 山 과 比 斯 伐 論, 馬 韓 百 濟 文 化 創 刊 號 圓 光 大 學 校 1975). 錦 峴 城 에 대하여 丁 若 鏞 은 錦 峴 者 譯 故 與 古 沙 夫 里 幷 擧 也 라 하여 羅 州 로 比 定 하고 있으나( 丁 若 鏞 疆 域 考 券 1 馬 韓 考 ) 取 信 하기 어렵고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권 39 鎭 安 縣 山 川 條 에 熊 嶺 縣 의 異 寫 로 보고 그 位 置 를 지금의 鎭 安 郡 富 貴 面 곰치리에 比 定 하는 見 解 도 있다. ( 全 榮 來 完 山 과 比 斯 伐 論 ) 11) 三 國 史 記 권 제 23 百 濟 本 紀 제 1 溫 祖 王 27년. 12) 三 國 史 記 권 제 23 百 濟 本 紀 제 1 溫 祖 王 28년. 13) 三 國 史 記 권 제 23 百 濟 本 紀 제 1 己 婁 王 27년. 14) 三 國 史 記 권 제 23 百 濟 本 紀 제 1 蓋 婁 王 4년, 5년. 北 漢 山 城 을 이때에 쌓았다는 記 錄 에 注 目 하 여야 한다. 北 漢 山 城 을 쌓았다면 慰 禮 城 의 背 後 山 城 인 南 漢 山 城 은 以 前 이나 最 小 限 이 무렵에 쌓았다고 하여 야 맞는 것이다. 平 地 에 都 邑 한 慰 禮 城 의 背 後 山 城 이 없다는 것은 敵 의 侵 攻 에 對 備 하지 못하였 다는 事 實 이 立 證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13

를 나누어 민가( 民 家 )를 약탈( 掠 奪 )하였다. 왕이 태자( 太 子 )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 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트리고 5천( 千 )여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는데, 사로잡은 적( 敵 )들을 장수( 將 帥 )와 군사( 軍 士 )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5) 겨울 11월에 한수( 漢 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 査 閱. 將 兵 들의 指 揮 能 力 과 訓 練 狀 態 를 點 檢 하여 戰 鬪 力 을 가늠하는 大 規 模 의 軍 事 訓 鍊 과 點 檢 )하였는데, 깃발은 모두 누른색을 사용( 使 用 )하였다.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26년(서기371)에 태자( 太 子 )를 선봉( 先 鋒 )으로 삼고 삼만( 三 萬 )의 군사( 軍 士 )로 고구려( 高 句 麗 )를 침공( 侵 攻 )하여 화살에 맞은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을 죽이 고 퇴각( 退 却 )한 후( 後 )에 고구려( 高 句 麗 )의 보복침공( 報 復 侵 攻 )에 대비( 對 備 )하여 겨울 에 궁성( 宮 城 )을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으로 옮기고, 16) 개로왕( 蓋 鹵 王 )21년(서기475)까지 105년간은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에서 꽃피운 찬란( 燦 爛 )한 문화( 文 化 )와 막강( 莫 强 )한 군 사력( 軍 事 力 )은 고구려( 高 句 麗 )와 신라( 新 羅 ), 백제( 百 濟 ), 삼국( 三 國 )중 제일무적( 第 一 無 敵 )의 군대( 軍 隊 )라 할 수 있다. 근구수왕( 近 仇 首 王 )3년(서기 377)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軍 士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 ( 高 句 麗 )의 평양성( 平 壤 城 )을 쳤다. 17) 침류왕( 沈 柳 王 )2년(서기 385)봄 2월에 한산( 漢 山 )에 절( 寺 )을 세우고 열사람의 승려 ( 僧 侶 )가 되는 것을 허가( 許 可 )하였다. 18) 15) 三 國 史 記 권 제 23 百 濟 本 紀 제 1 近 肖 古 王 24년, 高 句 麗 王 斯 由 ( 故 國 原 王 )과 熾 烈 한 戰 爭 을 하 였던 雉 壤 의 현재의 위치는 黃 海 道 延 白 郡 銀 川 面 ( 北 韓 黃 海 南 道 白 川 郡 白 川 邑 )에 比 定 된다.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권 43 黃 海 道 白 川 郡 條 에 白 川 郡 高 句 麗 刀 朧 縣 一 云 雉 嶽 城 이라 한 기사 參 照 로 位 置 比 定 란에 記 述 하고 있다. 14) 三 國 史 記 권 제 24 百 濟 本 紀 제 2 近 肖 古 王 26년. 高 句 麗 의 平 壤 城 을 쳐서 故 國 原 王 을 죽이고 돌 아온 近 肖 古 王 은 當 時 의 高 句 麗 가 延 나라와 戰 爭 으로 兩 分 되었던 軍 士 를 몰아칠 경우 힘든 싸움이 豫 想 되어 歸 還 하자 곧 바로 都 邑 을 南 漢 山 城 으로 옮긴 것이다. 이 같은 史 實 은 三 國 史 記 권 제 37 雜 誌 제6 地 理 4 高 句 麗, 百 濟 條 에 近 肖 古 王 26년(서기 371)부터 蓋 鹵 王 21년(서기 475)까지 105 年 을 南 漢 山 城 이 百 濟 의 서울로 銘 記 되어있어서 確 實 F한 記 錄 이다. 17) 三 國 史 記 권 제 24 百 濟 本 紀 제 2 近 仇 首 王 3년. 高 句 麗 를 친 記 錄 만있다. 18) 三 國 史 記 권 제 24 百 濟 本 紀 제 2 沈 柳 王 2년. 沈 柳 王 元 年 에 摩 羅 難 陀 尊 者 에 의하여 佛 敎 가 傳 來 되었고 百 濟 最 初 로 漢 山 에 절을 세웠다는 곳이 城 南 市 盆 唐 區 栗 洞 의 靈 長 山 金 剛 寺 라고 전해 오고 있다. 傍 證 할만한 地 名 說 이 栗 洞 의 옛날 이름이 石 人 里 라고 하는데, 이는 揷 天 彌 勒 (하늘로부 터 미륵이 내려와 꼽혀 있는 모양)이 映 世 踈 立 (사람이 드문드문 서 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부쳐진 이름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2004년 9월 21일 城 南 文 化 院 ( 附 設 ) 鄕 土 文 化 硏 究 所 發 行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1 號 에 栗 里 마을 口 碑 文 化 硏 究 參 照. 14 한동억

진사왕( 辰 斯 王 )6년(서기390)겨울 10월에 구원( 狗 原. 丘 原 이라고도 하였다고 전하며 현 재의 낙생( 樂 生 )이었다고 함) 19) 에서 사냥하다가 7일 만에 돌아왔다. 진사왕 7년(391)봄 정월( 正 月 )에 궁실( 宮 室 )을 고치고 수리( 修 理 )하였으며 못( 淵 )을 파 고 산( 山 )을 만들어 기이( 奇 異 )한 새와 특이( 特 異 )한 화초( 花 草 )를 길렀다. 진사왕8년(서기 392)왕이 구원( 狗 原.)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 았다. 11월에 왕이 죽었다. 아신왕( 阿 莘 王 )은 처음 한성( 漢 城 )의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 光 彩 )가 방 에 비치었다. 장성( 將 盛 )함에 뜻과 기개( 氣 槪 )가 빼어났으며, 매사냥( 放 鷹 )과 말 타기를 좋아했다. 선왕( 先 王 )이 죽었을 때 어렸기 때문에 숙부( 叔 父 )진사( 辰 斯 )가 왕위( 王 位 )를 이었는데, 8년에 왕이 죽자 즉위( 卽 位 )하였다. 아신왕4년(서기 395)겨울 11월에 왕은 패수( 浿 水 )싸움을 보복( 報 復 )하려고 친히 군사 ( 軍 士 )7천명을 거느리고 한수( 漢 水 )를 건너 청목령( 靑 木 嶺, 開 城 松 岳 山 )밑에서 머물렀 다. 그러나 큰 눈을 만나 병사( 兵 士 )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 軍 )을 돌려 한산성( 漢 山 城 ) 20) 에 이르러 군사( 軍 士 )들을 위로( 慰 勞 )하였다. 한수( 漢 水 )를 건넜다는 기록은 남한 산성( 南 漢 山 城 )에서 출병( 出 兵 )하였다는 증거( 證 據 )가 된다. 아신왕7년(398)가을 8월에 왕이 장차( 張 次 )고구려( 高 句 麗 )를 치려고 군사( 軍 士 )를 내 어 한산( 漢 山 )북쪽에 목책( 木 柵. 木 城 )에 이르렀다. 그날 밤 큰 별이 병영( 兵 營 )안에 떨 어져 소리가 났다. 왕은 이를 심( 甚 )히 꺼리어 정벌( 征 伐 )을 곧 중지( 中 止 )하였다. 전지왕(전지왕)2년(서기 406)가을 9월에 해충( 海 忠 )을 달솔로 삼고 한성( 漢 城 )의 조 ( 租. 稅 金 )천섬을 주었다. 비유왕( 毗 有 王 )29년(서기 455)봄 3월에 한산( 漢 山 )에서 사냥하였다. 비유왕 29년 11월에 지진( 地 震 )이 일어났고, 큰 바람이 불어 기와를 날렸다. 개로왕( 蓋 鹵 王 )15년(서기469)가을 8월에 장수( 將 帥 )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변방( 邊 方 ) 19) 三 國 史 記 권 제 25 百 濟 本 紀 제 3 辰 斯 王 6년. 狗 原 ( 丘 原 ) 行 宮 에 地 域 에 대하여서는 現 在 의 樂 生 이라고 전해온다. 西 紀 551년 眞 興 王 이 聖 王 과 百 濟 의 故 土 를 되찾아주었다가 서기 553년에 新 羅 의 領 土 로 宣 布 하고 巡 訪 한후에 이 地 域 은 永 樂 長 生 之 地 라 하여 樂 生 이라고 地 名 을 바꾸어 주었 다는 傳 說 때문이다. 20) 三 國 史 記 권 제 25 百 濟 本 紀 제 3 阿 莘 王 4년. 高 句 麗 를 侵 攻 하려고 開 城 까지 進 軍 하였으나 寒 波 를 만나 되돌아 왔는데 여기에서 漢 山 城 이라는 곳이 北 漢 山 城 인지 南 漢 山 城 인지 不 明 確 하다.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15

을 쳤다. 21) 겨울 10월에 쌍현성( 雙 峴 城 )을 수리( 修 理 )하였고, 청목령( 靑 木 嶺 )에 큰 목책 ( 木 柵 )을 설치( 設 置 )하여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의 군사( 軍 士 )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개로왕( 蓋 鹵 王 )21년(서기 475)에 고구려( 高 句 麗 )의 장수왕( 長 壽 王 )이 보낸 간자( 間 者 ) 도림( 道 林 )이라는 중( 僧 )의 계교( 計 巧 )에 속아 궁성( 宮 城 )과 궁궐( 宮 闕 )을 재건축( 再 建 築 ) 하고 고다지추( 高 多 只 樞 )라는 높고 긴 제방( 堤 防 )을 몽촌토성( 夢 村 土 城 )에서 검단산( 黔 丹 山 )아래 까지 축조( 築 造 )하면서 막대( 莫 大 )한 자금( 資 金 )을 사용( 使 用 )하여 국고( 國 庫 ) 를 탕진( 蕩 盡 )하고 소비( 消 費 )하여 마침내 국력( 國 力 )이 쇠진( 衰 盡 )하게 되었다. 이때 삼 국사기( 三 國 史 記 )의 기록( 記 錄 )은 이에 나라사람들을 징발( 徵 發 )하여 흙을 쪄서( 蒸 土 )성 ( 城 )을 쌓고 안에는 궁실( 宮 室 )과 누각( 樓 閣 )과 대사( 臺 榭 )등을 지었는데 웅장( 雄 壯 )하고 화려( 華 麗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욱리하( 郁 利 河. 漢 江 )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 ( 槨 )을 만들어 부왕( 父 王 )의 뼈를 장사( 葬 事 )하고, 강을 따라 둑( 㪲 )을 쌓았는데 사성( 夢 村 土 城 )에서 숭산( 崇 山. 黔 丹 山 )북쪽에 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국고( 國 庫 )가 텅 비고 백성( 百 姓 )들이나 나라의 위태( 危 殆 )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 甚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개로왕( 蓋 鹵 王 )은 고구려( 高 句 麗 )의 장수왕( 長 壽 王 )이 삼만( 三 萬 )의 군사( 軍 士 )로 쳐들 어오자 태자( 太 子 )인 문주( 文 周 )에게 신라( 新 羅 )에 가서 구원병( 救 援 兵 )을 청하게 하였 고, 문주가 일만( 一 萬 )의 구원병을 이끌고 왔지만 구원군( 救 援 軍 )이 왔을 때는 이미 개 로왕은 처참( 悽 慘 )한 최후( 最 後 )를 맞이한 후였기에 문주는 등극( 登 極 )도 못한 채, 웅진 ( 熊 津 )으로 내려가 도읍( 都 邑 )을 정하여 등극( 登 極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고구려본기( 高 句 麗 本 紀 )장수왕( 長 壽 王 )조에는 왕 63 년(서기475)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 ( 漢 城 )을 함락시키고 그 왕( 王 )부여경( 扶 餘 慶 )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사로잡아서 돌아 왔다. 22) 라고 기록되어 있다. 21) 三 國 史 記 권 제 25 百 濟 本 紀 제 3 蓋 鹵 王 15년. 蓋 鹵 王 이 高 句 麗 를 先 攻 으로 칠정도로 百 濟 의 軍 事 力 은 莫 强 하였다는 事 實 이 立 證 되는 記 錄 이다. 그러므로 長 壽 王 은 間 者 를 보낼 計 策 을 써서 結 局 에는 百 濟 를 侵 攻 하여 蓋 鹵 王 을 잡아 죽이는데 成 功 하였고 漢 江 流 域 一 帶 를 占 領 하여 76년간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22) 三 國 史 記 권 제 高 句 麗 本 紀 제 6 長 壽 王 編. 蓋 鹵 王 15년(서기 469)에 高 句 麗 의 便 房 을 百 濟 가 쳐 들어 왔어도 勝 利 하지 못한 恨 이 맺혀있던 長 壽 王 이었다. 6 年 間 臥 薪 嘗 膽 하며, 間 者 인 중 道 林 을 시켜 百 濟 의 經 濟 를 망치게 하고 侵 攻 하여 最 後 의 勝 利 를 거둔 것이다. 16 한동억

고구려가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에게 침략( 侵 略 )을 당하고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이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임을 당한 이후에 고구려의 명예회복( 名 譽 回 復 )을 위한 상심( 傷 心 )의 감 정( 感 情 )과 백제에 대한 보복감정( 報 復 感 情 )이 얼마나 팽배( 澎 湃 )하였었는가? 왕( 王 )의 전사( 戰 死 )라는 역사적( 歷 史 的 )치욕( 恥 辱 )을 씻기 위하여 얼마나 절치부심( 切 齒 腐 心 )하였 는가에 대하여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의 기록( 記 錄 )을 상고( 詳 考 )하여보자.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의 아들인 소수림왕( 小 獸 林 王 )이 등극( 登 極 )하고 위상회복( 位 相 回 復 )을 위하여 절치부심하다가 소수림왕 6년(480)겨울 11월에 백제의 북쪽 변경( 邊 境 )을 침략( 侵 略 )하였다. 이때가 백제의 근구수왕( 近 仇 首 王 )2년(480)이던 때이다. 고국양왕( 故 國 壤 王 )3년 가을 8월에 군대( 軍 隊 )를 내어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 征 伐 )하 였다. 라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 正 確 )한 지명( 地 名 )이나 성곽( 城 郭 )의 이름은 없다. 고 국양왕( 故 國 壤 王 )6년 가을 9월에 백제를 침입( 侵 入 )하여서 남쪽 변경부락( 邊 境 部 落 )을 약탈( 掠 奪 )하고 돌아갔다. 고 하였으나 역시 성이나 지명이 없다. 고국양왕 7년 가을 9월에 백제가 달솔 진가모( 眞 家 牟 )를 보내 도압성( 都 押 城. 位 置 未 詳 )을 쳐부수고 200명을 사로 잡아갔다. 광개토왕( 廣 開 土 王 )2년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 邊 境 )을 침략( 侵 略 )하여 왔으므 로 장수( 將 帥 )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광개토왕 3년 가을 7월에 백제가 침략하여 왔는데 왕은 정예기병( 精 銳 騎 兵 )5천을 거 느리고 맞아 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 敵 )들은 밤에 도주( 逃 走 )하였다.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 侵 略 )에 대비( 對 備 )하였다. 고 하였는데 일곱 성의 위치( 位 置 )나 성의 이름은 없다. 광개토왕 4년 가을 9월에 왕은 패수( 浿 水 )가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8,000명을 사로잡았다. 동왕( 同 王 )9년 2월에 연나라 모용성( 毛 用 晟 )이 고구려가 예의( 禮 儀 )가 없다고 3만을 이끌고 고구려를 습격( 襲 擊 )하여 신성( 新 城 ), 남소성( 南 小 城 )을 함락시키고 700여리의 땅에 오천호( 五 千 戶 )를 옮겨 놓고 돌아갔다. 동왕( 同 王 )11년 고구려가 연( 燕 )나라의 숙군성( 肅 軍 城 )을 공격( 攻 擊 )하니 연나라 평주 자사( 平 州 刺 使 ) 모용귀( 毛 用 歸 )가 성( 城 )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다가 동왕 13년 연( 燕 )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17

나라가 고구려를 침공( 侵 攻 )하였고 다음해인 동왕( 同 王 )14년에 또다시 연나라가 쳐들어 왔다가 되돌아갔다. 고구려는 연나라와의 전쟁( 戰 爭 )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서 백 제와의 전쟁은 염두( 念 頭 )에 두지 못한 듯하다. 그러다가 장수왕( 長 壽 王 )이 등극( 登 極 )하고 나서 연나라와의 쟁송( 爭 訟 )이 사라지고 등극 60여년이 흐른 후부터 백제를 도모( 圖 謀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 다. 그래서 간첩( 間 諜 )인 중 도림( 道 林 )을 백제에 보내어 개로왕( 蓋 鹵 王 )의 총명( 聰 明 )을 흐리게 하고 새로운 사업( 事 業 )을 시행( 施 行 )함으로서 탄탄하고 막강( 莫 强 )한 백제의 국 고( 國 庫 )를 탕진( 蕩 盡 )하게 하여 혼란( 混 亂 )을 유발( 誘 發 )하게 한 후 백제를 침공( 侵 攻 ) 하여 개로왕( 蓋 鹵 王 )을 잡아 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도 만만하거나 약( 弱 )한 상대( 相 對 )는 아니었다는 사실( 事 實 )들이 삼국사 기( 三 國 史 記 )기록( 記 錄 )에 나타난다.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은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국원왕 ( 故 國 原 王 )을 죽이고 환도( 還 都 )하여 고구려의 보복( 報 復 )대( 大 )공략( 攻 略 )이 두려워서 도성( 都 城 )을 위례성( 慰 禮 城 )에서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으로 옮긴 후인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28년(373)에도 청목령( 靑 木 嶺.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제4 개성부 상 산천( 山 川 )중 송 악( 松 嶽 )조에는 개성( 開 城 )송악산( 松 嶽 山 )으로 표기 되어 있으나 순암( 巡 巖 )안정복( 安 鼎 福 )의 동사강목( 東 史 綱 目 ) 제1 임자( 壬 子 )마한( 馬 韓 )시조( 始 祖 ) 십년( 十 年 )조에는 개성( 開 城 ). 금천( 金 天 )경계( 境 界 )의 청석동( 靑 石 洞 )으로 표기하였다 )에 성( 城 )을 쌓았다. 근초 고왕 30년(375) 가을 7월에 고구려( 高 句 麗 )가 북쪽변경( 邊 境. 漢 水 以 北 의 百 濟 領 土 )의 수곡성( 水 谷 城 )을 공격( 攻 擊 )해 와서 함락( 陷 落 )시켰다. 왕( 王. 근초고왕)이 장수( 將 帥 ) 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이 다시 군사( 軍 事 )를 일으 켜 보복( 報 復 )하려 하였으나 흉년( 凶 年 )이 들어 실행( 實 行 )하지 못하였다. 이 해에 근초 고왕( 近 肖 古 王 )이 돌아갔다. 근구수왕( 近 仇 首 王 )2년 겨울 11월에 고구려가 북방( 北 方 )에 쳐들어 왔다. 근구수왕 3년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평양성( 平 壤 城 ) 을 쳤다. 11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앙갚음 을 하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 침공( 侵 攻 )하여 전쟁( 戰 爭 )을 하였다는 증거( 證 據 ) 의 기록( 記 錄 )이라고 생각한다. 근구수왕( 近 仇 首 王 )은 재위( 在 位 )10년에 돌아갔다. 침류왕( 枕 柳 王 )2년(386)가을 8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이에 침류왕 5년(389) 가 18 한동억

을 9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변경( 邊 境 )을 침략( 侵 略 )하여 약탈( 掠 奪 )하였 다. 침류왕 6년(390)가을 9월에는 왕이 달솔 진가( 眞 家 )모( 牟 )에게 명령( 命 令 )하여 고구 려( 高 句 麗 )를 쳐서 도곤성( 都 坤 城. 位 置 未 詳 )을 함락( 陷 落 )시키고 200명을 사로잡아왔 다. 진사왕( 辰 斯 王 )8년(392)가을 7월에 고구려왕 담덕( 談 德. 廣 開 土 王 )이 군사( 軍 士 )4만 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 邊 境 )을 침공( 侵 攻 )해 와서 석현성( 石 峴 城. 金 正 浩 의 大 東 地 志 권 18에는 石 峴 城 을 黃 海 道 谷 山 西 南 20리 地 點 으로 보고 있다)등 10여 성( 城 )을 함락 ( 陷 落 )시켰다. 왕( 王. 辰 斯 王 )은 담덕( 談 德. 廣 開 土 王 )이 군사( 軍 士 )를 부리는데 능( 能 )하 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 漢 水 )북쪽의 여러 부락( 部 落 )들이 다수( 多 數 )함 락( 陷 落 )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 關 彌 城. 金 正 浩 의 大 東 地 志 권 3 交 河 성 지조( 城 池 條 )에는 烏 頭 城 ) 臨 津, 漢 水 會 合 處, 本 百 濟 關 彌 城 周 二 千 七 十 二 尺 四 面 舜 絶 唯 東 連 山 麓. 三 面 以 海 水 라 하여 京 畿 道 交 河 烏 頭 城 에 비정하고 있다. 이외 에 江 華 喬 洞 島 로 推 論 하는 見 解 ( 李 炳 壽 國 譯 三 國 史 記 380쪽)과 예성강( 禮 成 江 ) 中 流 南 岸 으로 추정 되는 관미령( 關 彌 嶺 )에 築 造 된 성으로 보는 견해( 李 道 學. 百 濟 關 彌 城 에 관한 一 考 察 通 信 19, 20 合 集 1990)이 있다. 아신왕(아신 王 )2년(393)가을 8월에 왕( 王 )의 외삼촌( 外 三 寸 )인 좌장( 左 將 )진무( 眞 武 )에 게 군사 일만( 一 萬 )을 주어 고구려의 석현성( 石 峴 城 )등 다섯 성( 城 )을 회복( 回 復 )하려고 쳐들어가서 관미성( 關 彌 城 )을 포위( 包 圍 )하였으나 고구려가 응전( 應 戰 )을 하지 않고 군 량수송( 軍 糧 輸 送 )등의 보급( 補 給 )이 잘 안되어 되돌아 왔으며, 다음 해인 아신왕 3년 (394) 가을 7월에 고구려와 부곡성( 釜 谷 城 )에서 싸웠으나 패배( 敗 北 )하였다. 아신왕(아 신 王 ) 4년 가을 8월에 왕이 좌장( 左 將 )진무( 眞 武 )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고구려의 광개토왕( 廣 開 土 王 )의 칠천기병( 七 千 騎 兵 )에게 패수( 浿 水 )에서 크게 패퇴( 敗 頹 ) 하여 팔천( 八 千 )명이 사로잡히고 패주( 敗 走 )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패수( 浿 水 )의 싸 움을 보복( 報 復 )하려고 친( 親 )히 군사( 軍 士 )칠천( 七 千 )명을 거느리고 한수( 漢 水 )를 건너 청목령( 靑 木 嶺 )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큰 눈을 만나 병사( 兵 士 )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 軍 )을 돌려 한산성( 漢 山 城 )에 이르러 군사( 軍 士 )들을 위로( 慰 勞 )하였다. 위에서 나열 ( 羅 列 )한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이후 개로왕( 蓋 鹵 王 )까지의 기록( 記 錄 )을 상고( 詳 考 )하여보 면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이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을 죽이고 돌아와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으로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19

이도( 移 都 )한 이후 고구려( 高 句 麗 )와 백제( 百 濟 )는 105년간의 기나긴 세월동안 명예( 名 譽 )를 건 싸움 끝에 장수왕( 長 壽 王 )의 계교( 計 巧 )에 개로왕( 蓋 鹵 王 )이 당하여 성남시( 城 南 市 )복정동( 福 井 洞 )산 53번지, 산 54-1번지, 산 55-1번지 일대( 一 帶 )인 군주( 君 呪 )터 에서 사로잡혀 왕( 王 )으로서 견디기 힘든 온갖 치욕( 恥 辱 )의 저주( 咀 呪 )를 받고 아차산 아래로 압송( 押 送 )되어 목 베임을 당하는 참극( 慘 劇 )을 당하였다. 이 같은 기록은 어느 시대( 時 代 )를 막론( 莫 論 )하고 전쟁의 패전국( 敗 戰 國 )이나 약소국( 弱 小 國 )의 나약( 懦 弱 )한 지도자( 指 導 者 )들의 최후( 最 後 )가 결국( 結 局 )에는 참담( 慘 憺 )한 현실( 現 實 )로 나타난다는 역사( 歷 史 )의 교훈( 敎 訓 )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신왕 8년(399)가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 軍 士 )와 말들을 크게 징발( 徵 發 )하였다. 그러자 백성( 百 姓 )들은 전역( 戰 役 )에 시달리다 못해 신라( 新 羅 )로 많이 도망 ( 逃 亡 )하니 호구( 戶 口 )가 줄었다. 이 해에 아신왕이 돌아갔다. 이어서 왕위( 王 位 )에 오른 전지왕( 奠 支 王 )은 재위( 在 位 )16년간을 왜( 倭 )와의 친교( 親 交 )에 힘썼고, 구이신왕( 久 爾 辛 王 )은 재위( 在 位 )8년간 고구려( 高 句 麗 )와의 전쟁( 戰 爭 )이 없었으며, 비유왕( 毗 有 王 )도 재위( 在 位 )29년간 고구려( 高 句 麗 )와의 전쟁( 戰 爭 )없이 무탈 ( 無 奪 )하게 잘 지내왔다. 그러다가 개로왕( 蓋 鹵 王 )이 등극( 登 極 )하고 고구려( 高 句 麗 )와의 힘겨루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동왕( 同 王 )15년(469)가을 8월에 장수( 將 帥 )를 보내 고구려 의 남쪽 변경( 邊 境 )을 쳤으며, 겨울 10월에 쌍현성( 雙 峴 城 )을 수리( 修 理 )하였고, 청목령 ( 靑 木 嶺 )에 큰 목책( 木 柵. 나무로 만든 城 )을 설치( 設 置 )하여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의 군사 ( 軍 士 )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는 등 국방업무( 國 防 業 務 )에 상당한 노력( 努 力 )을 하여 내 실( 內 實 )을 다져 군( 軍 )체제( 體 制 )를 공고( 鞏 固 )히 함으로서 고구려의 장수왕( 長 壽 王 )이 넘볼 기회( 機 會 )나 틈새조차 보이지 않게 만반( 萬 般 )의 방어태세( 防 禦 態 勢 )를 완벽( 完 璧 ) 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제의 침공( 侵 攻 )을 엄두도 못 내던 장수왕( 長 壽 王 )이 마침내 간자( 間 者 )의 투입( 投 入 )이라는 계교( 計 巧 )로서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던 것 이다. 결국( 結 局 )에는 백제가 고구려에게 패( 敗 )하고 개로왕( 蓋 鹵 王 )이 사로잡혀 죽임을 당 하는 수모( 受 侮 )를 겪었지만 장수왕이 등극( 登 極 )한 이후 63년만에야 도림( 道 林 )이라는 간자( 間 者 )를 숨겨 보내어 백제의 강병부국( 强 兵 富 國 )의 틀을 일순( 一 瞬 )에 부수고 백제 20 한동억

의 서울인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을 점령( 占 領 )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대목이다. 이때까지 초기백제( 初 期 百 濟 )의 찬란( 燦 爛 )한 문화( 文 化 )와 막강( 莫 强 )하였던 군사력 ( 軍 事 力 )을 비롯한 제반( 諸 般 )산업( 産 業 )에 대한 재조명( 再 照 明 )이 이루어져야 할 것 이다.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에 전하여오는 도림( 道 林 )이 말한 백제( 百 濟 )의 도성( 都 城 )은 천험 ( 天 險 )의 요새( 要 塞 ) 라는 기록을 살펴 볼 필요( 必 要 )가 있다. 누가 풍납토성( 風 納 土 城 ) 이나 몽촌토성( 夢 村 土 城 )을 가리켜 천험( 天 險 )의 요새( 要 塞 )라고 말 할 수 있는가? 특히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는 발굴조사( 發 掘 調 査 )때에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의 기록( 記 錄 ) 속에 나오는 증토( 蒸 土 )의 흔적( 痕 迹 )이 한조각도 나오지 않았다.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이 야 말로 천험( 天 險 )의 요새( 要 塞 )이다. 서( 西 ), 북( 北 ), 남( 南 )이 모두 가파를 절벽이고 동쪽만이 가파르지 않으나 이곳은 계곡( 溪 谷 )의 길이가 십 여리가 넘는 곳이어서 복병 ( 伏 兵 )이 두려워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명실상부( 名 實 相 符 )한 천험( 天 險 )의 요새 ( 要 塞 )이기에 도림( 道 林 )이 말한 천험( 天 險 )의 요새( 要 塞 )라는 곳이 바로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이라는 것이다. 또 개로왕( 蓋 鹵 王 )이 고구려( 高 句 麗 )의 포위망( 包 圍 網 )을 뚫고 몰래 빠져나간 곳이 남문( 南 門 )으로 나와 서쪽으로 가다 잡혔다. 라고 되어 있다. 풍납토성 ( 豊 納 土 城 )이나 몽촌토성( 夢 村 土 城 )에서 남문( 南 門 )에서 나와 서쪽으로 간다면 한강( 漢 江 )인데 논리( 論 理 )상 도주로( 逃 走 路 )로는 인정( 認 定 )할 수 없는 동선( 動 線 )이다. 강으로 가서 투신할 생각이었다면 모르되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의 남문( 南 門 )으로 나와 서쪽으로 가면 군사요충지( 軍 事 要 衝 地 )인 태자궁( 太 子 宮 )이 있는 지금의 창곡동( 倉 谷 洞 )이다. 개로왕은 태자궁은 안전( 安 全 )하리라고 믿고 달 려가려다 태자궁( 太 子 宮 )조차 적군( 敵 軍 )에게 점령( 占 領 )당하여진 것을 알게 되었고, 순 간 개로왕( 蓋 鹵 王 )은 태자궁( 太 子 宮 )을 포기( 抛 棄 )하고 성부산( 星 浮 山 )능선( 稜 線 )을 타고 도망( 逃 亡 )치다가 고구려( 高 句 麗 )의 장수 재증걸루( 再 曾 桀 婁 )에게 군주( 君 呪 )터라는 곳 에서 잡혀 온갖 수모( 受 侮 )를 겪은 후 아차산( 阿 差 山 )으로 송환( 送 還 )되어 죽임을 당하 였다. 이날 그 상황( 狀 況 )을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의 기록은 걸루( 桀 婁 )가 말에서 내려 왕에 게 절을 한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 罪 )를 꾸짖었다. 그러고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21

는 왕을 포박( 捕 縛 )하여 아차성( 阿 差 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라고 기록( 記 錄 )되여 전하 고 있다. 개로왕( 蓋 鹵 王 )이 걸루( 桀 婁 )의 저주( 詛 呪 )를 받고 잡혀간 군주( 君 呪 )터라는 지 명( 地 名 )이 지금도 망경암( 望 京 庵 )아래 복정동( 福 井 洞 ) 산 53번지에서 산 54-1번지와 산 55-1번지 일대( 一 帶 )이다. 23) 많은 학자( 學 者 )들이 북성( 北 城 )은 풍납토성( 風 納 土 城 ) 이고 남성( 南 城 )은 몽촌토성( 夢 村 土 城 )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잘 못 생각하는 것이 다. 고구려( 高 句 麗 )의 장수왕( 長 壽 王 )이 삼만( 三 萬 )의 군사( 軍 士 )를 이끌고 침략( 侵 略 )하 였는데 조그만 두 성( 城 )을 쳐부수는데 20여일이라는 시일( 時 日 )이 걸릴 이유( 理 由 )가 없다. 더욱이 백제( 百 濟 )는 대역사( 大 役 事 )로 인하여 백성들의 민심( 民 心 )이 이완( 離 緩 ) 되어 있었고 군사( 軍 士 )들은 싸울 힘도 의욕( 意 慾 )도 없는 자포자기( 自 暴 自 棄 )상태( 狀 態 ) 였고 솔종( 率 從 )이라는 노무부대( 勞 務 部 隊 )인원까지 합치면 최소( 最 小 )십수만( 十 數 萬 )의 인마( 人 馬 )가 날뛰는데 평지( 平 地 )의 조그만 두 성( 城 )을 함락( 陷 落 )시키는데 무슨 이십 여일씩이나 걸리겠는가? 향토사학자( 鄕 土 史 學 者 )들이 전설로 들어온 선인들의 말씀이나 상당수( 相 當 數 )의 학자 ( 學 者 )들이 주장( 主 張 )하는 북성( 北 城 )은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이요 남성( 南 城 )은 남한산성 ( 南 漢 山 城 )이라고 보는 견해( 見 解 )가 당시( 當 時 )의 상황( 狀 況 )을 판단( 判 斷 )하는데 가장 근접( 根 接 )하는 논지( 論 旨 )이다. 장수왕이 강점( 强 占 )하면서 백제( 百 濟 )의 흔적( 痕 迹 )을 송두리째 뽑아내고 말살( 抹 殺 )시켜 버렸다지만 백제( 百 濟 )혼( 魂 )은 살아 전해오고 있다. 2. 전설( 傳 說 )과 설화( 說 話 ) 1) 온조왕( 溫 祖 王 )과 산신제( 山 神 祭 ) 온조왕이 하북( 河 北 )위례성( 慰 禮 城 )에 도읍( 都 邑 )을 정하고 국호( 國 號 )를 십제( 十 濟 )라 고 하여 개국( 開 國 )한 이후에 인근( 隣 近 )을 두루 순방( 巡 訪 )하며 지리적( 地 理 的 )인 이해 정황( 利 害 情 況 )을 살피었는데, 하루는 남한산에서 상서( 祥 瑞 )로운 서기( 瑞 氣 )가 뻗쳐 올 라가므로 남한산에 와서 주변을 두루 살펴보니 가히 천하의 명당( 明 堂 )이고 천험( 天 險 ) 의 요새( 要 塞 )를 구축( 構 築 )하기에 적당하다고 판단( 判 斷 )되어 이도( 移 都 )할 마음을 굳히 23)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5 福 井, 太 平 洞 마을지47쪽 參 照.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22 한동억

고 있을 즈음에 하루는 꿈에 산신령( 山 神 靈 )이 나타나서 내가 한산( 漢 山 )의 일장산( 日 長 山 )산신인데 내말을 잘 들으라 하면서 한수( 漢 水 )이북에 도읍을 정하면 고구려나 말갈 ( 靺 鞨 )이 쳐들어 왔을 때 힘에 밀리면 배수진( 背 水 陣 )을 칠 수밖에 없는 절박( 切 迫 )한 상황( 狀 況 )이 되는데 후퇴( 後 退 )할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도와 줄 터이니 한산 아래에 도읍을 정하면 어떻겠느냐? 하고는 사라져버렸다. 온조왕은 깨어보니 남가일몽 ( 南 柯 一 夢 )이나 의아한 마음으로 남한산 일대( 一 帶 )를 두루 살펴보고 하남위례성( 河 南 慰 禮 城 )으로 이도를 결심( 決 心 )하였다. 온조 13년 목책( 木 柵 )을 세우고 하남위례성으로 이 도한 후에 국력( 國 力 )이 날로 융성( 隆 盛 )하여지자 일장산 산신령에게 제사( 祭 祀 )를 지내 기 시작하였다. 온조왕에 꿈에 다시 나타난 산신령이 언젠가는 너의 후손( 後 孫 )중에 일 장산으로 이도( 移 都 )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그 때에도 내가 보살펴주겠노라 하고는 사 라졌다. 그 후로는 온조왕은 거의 매년( 每 年 )산신제( 山 神 祭 )를 지냈다고 전해온다. 과연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이 남한산성으로 서울을 옮기여 105년간을 백제의 서울이 되었고 일 장산은 신앙( 信 仰 )의 요람( 搖 籃 )이 되었으나 서기 475년 장수왕에게 개로왕이 잡혀죽고 난 후에 남한산성은 장수왕에 의하여 비참( 悲 慘 )할 정도로 그 흔적( 痕 迹 )조차 찾을 수 없을 만치 황폐( 荒 廢 )하여 졌다가 신라의 진흥왕( 眞 興 王 )이 서기 553년 신라의 영토( 領 土 )를 주장( 主 張 )하고 일장산에 주장성( 晝 長 城 )을 설치( 設 置 )하고 김무력( 金 武 力. 金 庾 信 의 할아버지)를 군주( 軍 主 )로 임명( 任 命 )하여 막강( 莫 强 )한 전성기( 全 盛 期 )를 구가( 謳 歌 ) 하여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의 명성( 名 聲 )을 되찾았다. 2) 태자궁( 太 子 宮 )과 세자동( 世 子 洞 )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281번지에서 창곡동295번지 일대와 인근 야산을 포함하여 세자 동( 世 子 洞 ) 24) 이라는 넓은 골짜기가 있다. 온조왕28년(서기 10)에 아들 다루( 多 婁 )를 태자( 太 子 )로 봉( 封 )하고 중앙( 中 央 )과 지방 ( 地 方 )의 병권( 兵 權 )을 맡기고는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 倉 谷 洞 )에 태자궁( 太 子 宮 ) 을 짓게 하고 남한산( 南 漢 山 ), 청계산( 淸 溪 山 ), 영장산( 靈 長 山 ), 성덕산( 聖 德 山.), 문현산 ( 門 懸 山 )과 하남시( 河 南 市 )의 검단산( 黔 丹 山 ), 관악산( 冠 岳 山 )일대와 송파구 잠실동에서 24)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5 福 井 太 平 洞 마을지52쪽, 54쪽 參 照.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23

분당구 궁내동까지의 구릉( 丘 陵 )지대와 넓은 들녘에서 군사들을 훈련( 訓 練 )시켜 막강( 莫 强 )한 백제의 군사력( 軍 事 力 )을 키웠다고 한다. 특히 기마병( 騎 馬 兵 )들은 산세( 山 勢 )가 험준( 險 峻 )한 남한산( 南 漢 山 )을 중심( 中 心 )으로 강력( 强 力 )한 훈련을 시켜 삼국( 三 國 )중 제일막강( 莫 强 )하였었다고 전해온다. 고등동( 高 登 洞 )산41번지와 산42번지에도 세자( 世 子 )골이 있는데, 아마도 문주( 文 周 )가 신라( 新 羅 )로 구원병( 救 援 兵 )을 청( 請 )하러 갈 때 에 이곳으로 넘어갔다고 하는 골짜기의 지명( 地 名 )이다. 3) 수(숙)기실( 宿 騎 室 )과 삼천병마( 三 千 兵 馬 )골 성남시(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이매동( 二 梅 洞 )산 60번지와 397, 402번지 일대( 一 帶 ) 의 지명( 地 名 )이 수기실( 宿 騎 室 )이고, 그 아래쪽인 산 62-2번지와 404번지에서 406번 지 일대를 삼천병마( 三 千 兵 馬 )골 25) 이라 불려오는데, 백제의 온조왕( 溫 祖 王 )의 아들인 다루( 多 婁 )가 태자궁( 太 子 宮 )을 창곡동( 倉 谷 洞 )에 짓고 전국( 全 國 )의 군사( 軍 士 )들을 불 러 모아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시킬 때 기마병( 騎 馬 兵 )들이 쉬어가던 곳이라고 한다. 수 기실( 宿 騎 室 )은 기마병들을 지휘( 指 揮 )하는 장수( 將 帥 )와 수하( 手 下 )고급장교( 高 級 將 校 ) 들이 머물러 쉬던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등성이에는 백제주거지 ( 百 濟 住 居 地 )라고 발표( 發 表 )된 백제유적( 百 濟 遺 跡 )이 있는 곳이 있다. 그러나 주거지( 住 居 地 )라는 것은 백제시대( 百 濟 時 代 )에 군사( 軍 士 )들의 훈련( 訓 練 )모습과 전술적( 戰 術 的 ) 인 상황( 狀 況 )을 점검( 點 檢 )하고 전투력( 戰 鬪 力 )을 심사( 審 査 )하고 관망( 觀 望 )하는 전망 대( 展 望 臺 )엿을 것이라고 추정( 推 定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점( 點 )을 감안( 勘 案 )하여 재정리( 再 整 理 )하여야 할 것이다.삼천병마( 三 千 兵 馬 )골은 기마병( 騎 馬 兵 )들이 쉬던 곳이 다. 삼천병마( 三 千 兵 馬 )라는 용어( 用 語 )는 헤아릴 수 없는 무수( 無 數 )한 기마병이라는 뜻이다. 즉 셀 수 없이 많다는 무량지수( 無 量 指 數 )요 무지수( 無 知 數 )이다. 지명( 地 名 )속 에 얽힌 지극( 至 極 )하고, 찬란( 燦 爛 )하며, 명분( 名 分 )이 뚜렷한 전설( 傳 說 )은 분명( 分 明 ) 하게 역사 ( 歷 史 )속에 채워져야 한다. 다루왕( 多 婁 王 )이 태자시절( 太 子 時 節 )부터 전국( 全 國 )의 장병( 將 兵 )들을 모아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한 역사적( 歷 史 的 )사실( 事 實 )이 증명 ( 證 明 )된 지역( 地 域 )의 특수성( 特 殊 性 )에 비춰보면 한성백제문화( 漢 城 百 濟 軍 事 文 化 )의 산 25)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7 124쪽 126쪽 參 照. 2007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24 한동억

실( 産 室 )이었으며, 장수왕( 長 壽 王 )의 계교( 計 巧 )에 속아 국고( 國 庫 )를 탕진( 蕩 盡 )하고 결 국( 結 局 )장수왕( 長 壽 王 )에게 패하여 복정동( 福 井 洞 )군주( 君 呪 )터에서 잡혀 아차산 아래서 참수( 斬 首 )를 당한 개로왕( 蓋 鹵 王 )까지 490여 년간의 찬란( 燦 爛 )하였던 백제( 百 濟 )의 군 사문화( 軍 事 文 化 )가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4) 숯내 탄천( 炭 川 ) 성남시의 한 가운데를 남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가로 질러 한강( 漢 江 )으로 나가는 물줄기의 이름이 숯내( 炭 川 )이다. 다루왕( 多 婁 王 )이 창곡동에 태자시절에 태자궁( 太 子 宮 )을 짓고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 에 숯 냇가에서 밥을 지어 먹이였는데 수만( 數 萬 )명의 군사들에게 밥을 지어 먹이고 우 마( 牛 馬 )에게 죽( 粥 )을 쑤어 먹이는데 필요한 연료( 燃 料 )가 당시에는 장작밖에 없으므로 하루에 수십여 마차( 馬 車 )의 장작을 사용하였다. 장작불을 때고 나면 숯이 남았는데 이 숯은 물에 버리었다. 이것은 숯이 물의 자정능력( 自 精 能 力 )에 최고( 最 高 )이고 더욱이 살 균( 殺 菌 )까지 시키어서 다음날 맑은 물을 군사와 우마에게 먹일 수 있어서 계속 숯을 냇물에 버리었는데 숯이 바닥에 두껍게 깔린 모습을 보고 숯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 나 한문표기( 漢 文 表 記 )로 탄천( 炭 川 ) 26) 으로 표기 하고 지금은 탄천이라고 부른다. 삼국 사기 백제본기의 의하면 백제군사가 외국에 출병을 한 기록을 보면 삼 만여 명이 출병 한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기록에 나오는 군사의 수효는 정병의 숫자이고 그들이 전 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보급부대원들인 솔종( 率 從 )들의 수효는 삼배 이상이라는 사실 이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면 삼만 명이 출병을 하면 솔종까지 의 인원을 포함하면 약 십이만 정도의 대규모 인력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훈련소였다고 치더라도 솔종을 포함하여 이천 명이 매일 훈련을 받는다고 계산하여 보 자. 쌀 한가마니면 300명이 먹을 수 있으니까 2000 300=약7가마의 쌀을 한 끼에 먹 는다. 하루에 세 번을 먹어야 하니까 7X3=21가마를 매일 밥을 지어야 한다. 장작 한 짐으로 쌀 한가마를 할 수 있다고 본다면 매일 밥 짓는 데에만 21짐의 장작이 필요로 26)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0 號 城 南 地 域 王 室 文 化 의 硏 究 177쪽 參 照. 2003 年 9 月 21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2 號 城 南 地 域 의 王 室 文 化 의 硏 究 Ⅱ176쪽 參 照. 2005 年 9 月 2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25

하는데 밥만 짓는 게 아니라 국도 끓여주어야 하고 우마의 죽도 쑤어 주어야 하기 때문 에 그의 세배는 때어야 한다. 그렇다면 매일 60여 짐의 장작을 때어대는데 60X30일 =1,800짐이다. 마차한대에 실을 수 있는 장작은 장정의 지게로 여섯 짐을 실을 수 있었 으니까 1,800 6=300마차 분이된다. 그러니 1년 간 1,800짐 12=21,600, 21,600 6 =3,600마차의 장작불을 때고 나면 엄청난 양의 숯이 남았는데 이 숯은 물에 버리었다. 이것은 숯이 물의 자정능력( 自 精 能 力 )이 최고( 最 高 )이고 더욱이 살균( 殺 菌 )까지 시켜 주 어서 다음날 깨끗하고 맑은 물을 군사( 軍 士 )와 우마( 牛 馬 )에게 먹일 수 있었기에 계속 숯을 냇물에 버리었는데 숯이 바닥에 두껍게 깔린 모습을 보고 숯이 시내에 가득하다고 하여 숯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한문표기( 漢 文 表 記 )로 탄천( 炭 川 ) 27) 으로 표기 하고 지금은 탄천이라고 부른다. 특히 조선개국초기( 朝 鮮 開 國 初 期 )에는 태종대왕( 太 宗 大 王 )이 대열( 大 閱 )이라는 이름으로 강력( 强 力 )한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시작한 후부터 연산군 ( 燕 山 君 )때까지 수십( 數 十 )여회에 걸쳐서 전국( 全 國 )에서 군사( 軍 士 )들을 징발( 徵 發 )하고 동원( 動 員 )하여 십이( 十 二 )삼만( 三 萬 )여명을 십여 일간( 十 餘 日 間 )에 걸쳐 강력( 强 力 )한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한 기록( 記 錄 )이 조선왕조실록( 朝 鮮 王 朝 實 錄 )에 상세( 詳 細 )하게 수 록( 收 錄 )되어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증빙기록( 證 憑 記 錄 )들에 의하여 숯내( 炭 川 )의 유구 ( 悠 久 )한 역사( 歷 史 )와 이곳에서 행( 行 )하여진 무수( 無 數 )한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과 그로 인하여 부침( 浮 沈 )되었던 국가( 國 家 )의 흥망성쇠( 興 亡 盛 衰 )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성남시사에 실려 있는 삼천갑자동방삭이가 숯을 빨다가 저승사자에게 잡혀 가서 탄 천이 되었다는 근거( 根 據 )없는 엉터리 기사( 記 事 )는 하루 빨리 삭제( 削 除 )하여 버려야 한다. 5) 영장산( 靈 長 山 )금강사( 金 剛 寺 ) 정확( 正 確 )한 기록( 記 錄 )이나 증빙자료( 證 憑 資 料 )는 없다지만 성남시 분당구 율동( 栗 洞 )에 전해오는 전설설화( 傳 說 說 話 )에 따르면 침류왕( 沈 柳 王 )원년(서기 384)에 마라나타 존자( 摩 羅 難 陀 尊 者 )에 의하여 불교가 전래된 다음해인 침류왕2년(서기 385)에 한산( 漢 27)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0 號 城 南 地 域 王 室 文 化 의 硏 究 177쪽 參 照. 2003 年 9 月 21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2 號 城 南 地 域 의 王 室 文 化 의 硏 究 Ⅱ176쪽 參 照. 2005 年 9 月 2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26 한동억

山 )에 절을 지었는데, 영장산금강사( 靈 長 山 金 剛 寺 )가 백제( 百 濟 )최초( 最 初 )의 절이었으며 미륵( 彌 勒 )부처님을 얼마나 많이 모셨으면 삽천미륵( 揷 天 彌 勒 )이 영세소립( 映 世 踈 立 )하 였다고 전해오고 있는 사실( 事 實 ) 28) 이 아름답게 전해오고 있다. 백제 최초의 절인 금강 사( 金 剛 寺 )는 법문( 法 文 )에 매료( 魅 了 )되어 전국각처( 全 國 各 處 )에서 수많은 불자( 佛 子 )들 이 모여들어 절이 융성( 隆 盛 )하기기 이를 데 없었는데, 어느 때 부터인가 흉년( 凶 年 )이 계속( 繼 續 )되어 절의 살림이 궁핍( 窮 乏 )하여지게 되자 절의 주지( 住 持 )스님이 구황과실 ( 救 荒 果 實 )중에 하나인 밤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더니 몇 해가 지나고부터 밤의 수확으 로 모든 궁핍함이 사라지고 다시 부유( 富 裕 )한 절로 바뀌어 율동( 栗 洞 )에서부터 창곡동 ( 倉 谷 洞 )까지 남향( 南 向 )인 마을들이 전부 밤나무 단지( 團 地 )가 되었다. 그로 인하여 밤 나무 그늘진 마을이라는 뜻의 율목( 栗 木 )음촌( 陰 村 )이라는 지명( 地 名 )이 생겨나게 되었 고 태자궁( 太 子 宮 )이 있던 창곡동( 倉 谷 洞 )의 옛 이름이 율목( 栗 木. 밤나무)리이고, 단대 동( 丹 垈 洞 )과 금광동( 金 光 洞 )일대는 음촌( 陰 村. 그늘진 마을)이라 불려왔다. 율동에서 시작된 불당( 佛 堂 )골은 야탑동( 野 塔 洞 )과 연결( 連 結 )되었고, 여수동( 麗 水 洞 ), 도촌동( 島 村 洞 )일대까지의 마을이름이 가차곡율리( 加 次 谷 栗 里 )였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율동에는 절골 외에 진신사리( 眞 身 舍 利 )골, 자빠진골, 거북( 龜 )산, 천세중( 千 世 衆 )골, 부 처중골, 주지( 住 持 )골, 비득( 飛 得 )재, 마의( 麻 衣 )들, 보리터, 불탑산( 佛 塔 山 ), 장주( 長 珠 ) 리, 대반대리, 일곱삼거리, 불당( 佛 堂 )골, 천조산( 天 鳥 山. 金 烏 ), 안불대( 佛 臺 ), 말바위 ( 馬 巖 ), 아리랑고개 등의 불교용어( 佛 敎 用 語 )의 골짜기와 산 이름이 널부러져 있다. 6) 군주( 君 呪 )터 성남시( 城 南 市 )수정구( 壽 井 區 )복정동( 福 井 洞 )산 53번지, 산54-1, 산55-1번지 일대( 一 帶 )의 지명( 地 名 )이 군주( 君 呪 ) 29) 터이다. 개로왕( 蓋 鹵 王 )21년(서기 475)고구려 장수왕 ( 長 壽 王 )의 침공( 侵 攻 )을 받은 백제는 북성( 北 城 )인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은 일주일( 一 週 日. 七 日 ) 30) 만에 함락( 陷 落 )되고, 남성( 南 城 )인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에서 보름여를 버티 28)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8 突 馬 마을지( 下 ) 78쪽 參 照. 2008 年 11 月 28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1 號 栗 里 마을의 口 碑 文 化 硏 究 125쪽 參 照. 2004 年 9 月 21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29)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5 福 井, 太 平 洞 마을지. 마을의 歷 史 47쪽 參 照.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0) 三 國 史 記 券 第 25 百 濟 本 紀 第 3 蓋 鹵 王 21 年.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27

던 개로왕( 蓋 鹵 王 )이 남문( 南 門 )으로 몰래 도망( 逃 亡 )나와 서쪽인 창곡동( 倉 谷 洞 )에 있던 태자궁( 太 子 宮 )을 향( 向 )하여 가다보니 태자궁( 太 子 宮 )은 이미 고구려( 高 句 麗 )군( 軍 )에게 함락( 陷 落 )되어 있었으므로 부득이 성부산( 星 浮 山 )능선( 稜 線 )을 타고 내려가다가 망경암 ( 望 京 庵 )아래 복정동( 福 井 洞 ) 산53, 산54-1, 산55-1번지 일대( 一 帶 )에서 사로잡히게 되 었다. 이때 재증걸루( 再 曾 桀 婁 )라는 고구려( 高 句 麗 )장수( 將 帥 )가 왕( 王 )을 꿇어앉히고 말 에서 내려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고는 개로왕( 蓋 鹵 王 )을 꾸짖고 포박( 捕 縛 )하여 아 차 산으로 끌고 간 곳이라 하여 군주( 君 呪 )터라는 지명( 地 名 )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7) 성덕산( 聖 德 山 )유래( 由 來 ) 성덕산( 聖 德 山 )은 온조왕( 溫 祖 王 )이 이곳에서 사냥( 山 行. 군사훈련의 일종으로 짐승을 한곳으로 몰아서 쏘아 잡는 사냥방법의 하나)을 하였다는 전설( 傳 說 )도 있고, 다루왕( 多 婁 王 )이후( 以 後 )에도 많은 왕( 王 )들이 자주 사냥을 하면서 지역( 地 域 )에서 동원( 動 員 )되 는 전문( 專 門 )몰이꾼인 백성( 百 姓 )들에게 사례( 謝 禮 )를 후( 厚 )하게 하여 임금의 성덕( 聖 德 )이 만세( 萬 世 )에 이르게 하여 달라는 주문성( 呪 文 性 )의 산말을 가지고 있다. 8) 온조왕( 溫 祖 王 )과 인조대왕( 仁 祖 大 王 ) 인조대왕( 仁 祖 大 王 )이 병자호란( 丙 子 胡 亂 )을 만나 남한산성에 피난( 避 亂 )하여 있을 때 에 하루는 피곤( 疲 困 )함을 이기지 못하여 비몽사몽( 非 夢 似 夢 )간에 꿈을 꾸는데 온조왕 ( 溫 祖 王 )이 나타나서 오랑캐들이 운제( 雲 梯. 城 壁 보다 높게 만든 사다리)를 만들어 타 고 북성( 北 城 )의 성벽( 城 壁 )을 넘으려고 하는데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면 되겠느냐? 하 고 소리치기에 인조( 仁 祖 )가 깜짝 놀라서 누구시기에 이리 호통( 號 筒 )을 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는 이성( 城 )의 옛 주인( 主 人 )인 온조왕( 溫 祖 王 )이다. 31) 하고는 유유 ( 愉 愉 )히 사라졌다. 인조( 仁 祖 )가 깜짝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기에 북성( 北 城 )주위에 포진( 鋪 陳 )한 장수( 將 帥 )들에게 명( 命 )하여 주변상황( 周 邊 狀 況 )을 점검( 點 檢 )하여보니 과 연 청나라 병사( 兵 士 )들이 운제( 雲 梯 )를 만들어 타고 성벽을 넘어오려고 하고 있어서 이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7 號 城 南 地 域 의 歷 史 와 忠 節. 31쪽 參 照. 2010 年 9 月 21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1) 城 南 옛 이야기 韓 春 燮, 윤종준 編 著 95쪽 參 照. 2010 年 11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28 한동억

들에게 불화살( 火 箭 )을 쏘아대고 끓는 물과 기름을 부어가며 맞받아쳐 청병( 淸 兵 )을 물 리쳤다. 그로 인하여 온조왕( 溫 祖 王 )의 사당( 祠 堂 )을 다시 짓고 온조왕( 溫 祖 王 )의 위패 ( 位 牌 )를 모시었는데, 하루는 온조왕( 溫 祖 王 )이 다시 꿈에 나타나 내가 혼자 있다 보니 말동무 할 사람도 없어 몹시 외로우니 누구라도 하나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고는 사라졌 다. 그런 꿈을 꾸고 난 후 수어사( 守 禦 使 )이서( 李 曙 )가 죽었다는 보고( 報 告 )가 왔으므로 이서( 李 曙 )의 위패( 位 牌 )를 온조왕( 溫 祖 王 )사당( 祠 堂 )인 숭열전( 崇 列 殿 )에 모시게 하였다 고 전해온다. 3. 지명( 地 名 ) 1) 남한산( 南 漢 山 ) 지금은 청량산( 淸 凉 山 )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옛 이름은 일장산( 日 長 山 )이었다. 일장산 ( 日 長 山 )은 성일장여( 聖 日 長 如. 해가 온 누리를 비추이듯이 임금의 위명이 골고루 이어 지게 하라는 뜻)라는 산말을 지니고 있는 산이다. 일장산( 日 長 山 )을 청량산( 淸 凉 山 )으로 바꾸고 많은 사람들이 청( 淸 )나라의 침략( 侵 略 )으로 고통( 苦 痛 )을 받게 되리라는 예언 ( 豫 言 )이 있었다고 전( 傳 )해온다. 이 같은 사실( 史 實 )은 정조( 正 祖 )가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 행궁( 行 宮 )에서 남한산( 南 漢 山 )은 본디 이름이 일장산( 日 長 山 )이었으나 국조( 國 朝 )중 엽( 中 葉 )이후에 비로소 청량산( 淸 凉 山 )이라 칭( 稱 )하였는데, 사람들이 청( 淸 )나라 군사 ( 軍 士 )가 와서 침범( 侵 犯 )할 조짐이라 하였다. 이런 말이 과연 있는가? 하매, 수어사( 守 禦 使 )서명응( 徐 命 膺 )이 말하기를 그것은 고로( 古 老 )가 서로 전하는 말입니다. 하였다. 라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朝 鮮 王 朝 實 錄 ) 32) 에 전해온다. 2) 세자동( 世 子 洞 ). 성남시( 城 南 市 ) 수정구( 壽 井 區 ) 창곡동( 倉 谷 洞 )281-295번지 일대( 一 帶 )의 넓은 골짜기 의 지명( 地 名 )이 세자동( 世 子 洞 )이다. 원래( 原 來 )는 백제( 百 濟 )의 온조왕( 溫 祖 王 )의 장남 ( 長 男 )인 다루( 多 婁 )가 태자( 太 子 )가 되면서 중앙( 中 央 )과 지방( 地 方 )의 병권( 兵 權 )을 온 32) 太 白 山 史 庫 本 朝 鮮 王 朝 實 錄 影 印 45 冊 116 面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29

조왕( 溫 祖 王 )으로부터 물려받아 태자궁( 太 子 宮 )을 짓고 전국( 全 國 )의 장병( 將 兵 )들을 불 러 모아 강력( 强 力 )한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시키던 군사요람( 軍 事 搖 籃 )이어서 태자동 ( 太 子 洞 )으로 불리다가 백제( 百 濟 )의 개로왕( 蓋 鹵 王 )이 고구려( 高 句 麗 )의 장수왕( 長 壽 王 ) 의 계교( 計 巧 )에 속아 국고( 國 庫 )를 탕진( 蕩 盡 )하고 민심( 民 心 )이 이반( 離 反 )되어 결국 ( 結 局 )은 장수왕( 長 壽 王 )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고 한성일대( 漢 城 一 帶 )를 고구려( 高 句 麗 ) 에게 빼앗기자 아들인 문주왕( 文 周 王 )이 서울을 웅진( 熊 津. 公 州 )으로 천도( 遷 都 )한 이 후 세월( 歲 月 )이 지나고 고려후기( 高 麗 後 期 )이후( 以 後 )에 태자( 太 子 )의 명칭( 名 稱 )이 세 자( 世 子 )로 변경( 變 更 )되면서 세자동( 世 子 洞 ) 33) 으로 바뀌었다는 한성백제( 漢 城 百 濟 )의 전설( 傳 說 )이 있는 지명( 地 名 )이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곡탄( 穀 炭 )이 출토( 出 土 )되는 곳 이며,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가래질이나 논갈이 할 때에 기와파편( 器 瓦 破 片 )이 출토( 出 土 )된 곳이다. 3) 돌 자개. 남한산 자락에 있는 백제의 어느 왕의 돌무덤이라고도 하는데 학암리( 鶴 巖 里 )일대에 서 전해오는 지명인데, 지금도 돌 더미가 남아있다. 4) 창( 倉 )말(마을)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 倉 谷 洞 )137번지에서 270번지까지의 동, 서로 길게 자리한 마을 이름 34) 인데, 백제 다루왕( 多 婁 王 )때부터 군사전용( 軍 事 專 用 ) 창고( 倉 庫 )가 있었던 곳이 다. 5) 진( 陣 )터 벌 지금의 육군( 陸 軍 )종합행정학교( 綜 合 行 政 學 校 )와 상무체육관( 尙 武 體 育 館 )이 자리 잡고 있는 야트막한 언덕진 곳의 지명( 地 名 )이다. 백제 다루왕( 多 婁 王 )이 태자( 太 子 )로 봉( 封 ) 해지면서 중앙( 中 央 )과 지방( 地 方 )의 병권( 兵 權 )을 온조왕( 溫 祖 王 )으로부터 물려받아 장 33) 註 釋 22 番 參 照. 34) 城 南 文 化 叢 書 5 福 井, 太 平 마을지 50쪽 參 照.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0 한동억

병( 將 兵 )들의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총괄( 總 括 )하게 되면서 군사훈련장( 軍 事 訓 練 場 )의 지 휘부서( 指 揮 部 署 )중 중추( 中 樞 )인 태자궁( 太 子 宮 )을 지은 후부터 백제군( 百 濟 軍 )의 전략 적( 戰 略 的 )인 최고( 最 高 )의 진지( 陣 地 )였으며 고려시대( 高 麗 時 代 )에는 광주( 廣 州 )군용목 장진지( 軍 用 牧 場 陣 地 )였고, 조선시대( 朝 鮮 時 代 )에 와서도 대열( 大 閱 ) 35) 을 하던 진지( 陣 地 )가 있던 곳이다. 6) 창( 倉 )모루 하남시 창우동( 倉 隅 洞 )의 옛 이름이다. 하남시에는 이성산성이 백제 때부터 있었기에 고골이라는 골짜기를 올라가면서 상사창동과 하사창동으로 나뉠 만큼 넓은 지역의 관아 와 창고가 많이 있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7) 상( 上 ), 하( 下 )사창동( 司 倉 洞 ) 백제 때부터 하남시 상사창동과 하사창동으로 나뉘어 있는 마을이다. 이성 산성( 山 城 ) 주변에 관아와 창고가 어우러져 있었다는 곳이다. 8) 영장산( 靈 長 山 ) 금강사( 金 剛 寺 ) 터 성남시(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율동( 栗 洞 ) 산 50번지와 야탑동( 野 塔 洞 ) 산71-1번지 그리고 광주시( 廣 州 市 ) 직동( 直 洞 ) 산27번지에 걸쳐있는 높이 413.2M의 산의 이름이 영장산( 靈 長 産 )이다. 성령장천( 聖 靈 長 千. 임금의 착한 善 政 이 永 遠 하게 하여 달라는 祈 願 임)이라는 산말을 지니고 있다. 그 산 남쪽자락에 백제최초( 百 濟 最 初 )의 절이라는 금 강사( 金 剛 寺 )터가 있다. 백제( 百 濟 )는 침류왕( 枕 柳 王 )원년( 元 年. 서기384)에 마라난타존 자( 摩 羅 難 陀 尊 者 )에 의( 依 )하여 전라남도( 全 羅 南 道 )영광( 靈 光 )을 통하여 불교( 佛 敎 )가 전 ( 傳 )해졌으며 침류왕( 枕 柳 王 )1년(385)에 한산( 漢 山 )에 절을 지었고 열사람의 스님을 허 가( 許 可 )하였다는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백제본기( 百 濟 本 紀 ) 침류왕( 枕 柳 王 )때의 기록( 記 錄 )이 있는데 그때 한산( 漢 山 )에 백제최초( 百 濟 最 初 )로 지은 절이 영장산( 靈 長 産 )금강사 35) 城 南 文 化 叢 書 5 福 井, 太 平 마을지 55쪽 參 照.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高 麗 史 誌 36 兵 馬 政. 太 白 山 史 庫 本 朝 鮮 王 朝 實 錄 影 印 冊 에서 大 閱 部 文 參 照.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31

( 金 剛 寺 )라고 전해오고 있다. 절을 짓고 얼마나 많은 미륵( 彌 勒 )부처님을 모셨으면 삽천 미륵( 揷 天 彌 勒 ) 하늘에서 미륵이 내려와 꼽혀있는 모습)이 영세소립( 映 世 踈 立. 사람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것과 같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율동( 栗 洞 )의 옛 이름이 석인리( 石 人 里 )라고도 불렸다는 것이 이 마을에 전설( 傳 說 )처럼 전해오고 있다. 금강사( 金 剛 寺 )절 터는 율동( 栗 洞 ) 165번지 36) 일대( 一 帶 )이다. 9) 일곱 삼거리 하늘로 올라가는 한 개의 길과 육간지옥( 六 間 地 獄 )으로 가는 여섯 개의 길이 있다는 산고개의 이름이다. 성남시( 城 南 市 )분당구( 盆 唐 區 )율동( 栗 洞 )산76번지와 광주시( 廣 州 市 ) 오포읍( 五 浦 邑 )신현리( 新 峴 里 )산92번지와 광주시( 廣 州 市 )목동( 木 洞 )72번지 능선일대( 稜 線 一 帶 )에 걸쳐있는 고개의 지명( 地 名 ) 37) 이다. 이곳에서 간구득도( 懇 求 得 道. 至 誠 으로 祈 禱 하며, 懇 求 하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라는 산말 이 전해온다. 이곳에서 길을 얻으면 천문현달( 天 門 懸 達 )이라는 산말을 지니고 있는 문 현산( 門 懸 山.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달려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文 衡 山.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 책으로 이 산자락에 세 사람의 대제학을 지낸 분들의 묘소가 있 는데 대제학을 별칭으로 문형이라 하였기에 문형산으로 바꾸어 버린 산 이름이다.)에 있는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문( 門 )을 통( 通 )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 傳 說 )이 있는 고개이다. 10) 문현산( 門 懸 山. 現 文 衡 山 ). 광주시( 廣 州 市 ) 목동( 木 洞 ) 산1번지와 고산리( 高 山 里 )산 55번지, 문형리( 文 衡 里 ) 산 28-1번지, 신현리( 新 峴 里 ) 산40-2번지 상단( 上 端 )에 걸쳐있는 산이다. 원래 천문현달 ( 天 門 懸 達 )이라는 산말이 있어 명산( 名 山 )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산인데 일제( 日 帝 )가 1914년 대한( 大 韓 ) 행정구역개편( 行 政 區 域 改 編 ) 때에 문형산( 文 衡 山 )으로 이름을 바꾼 산( 山 )이다. 36) 城 南 文 化 遺 跡 118쪽.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1 號 栗 里 마을의 口 碑 文 化 硏 究 136쪽 參 照. 2004 年 9 月 21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7)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1 號 栗 里 마을의 口 碑 文 化 硏 究 136쪽 參 照. 2004 年 9 月 21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2 한동억

일곱 삼거리( 三 車 里 )에서 간구득도( 懇 求 得 道 )하여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 機 會 ) 를 얻은 사람들이 문현산( 門 懸 山 )에 있는 하늘 문( 門 )을 통( 通 )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 傳 說 )의 산이다. 이 산에 통전( 通 箭 )골이라는 군사전용( 軍 事 專 用 )의 사장( 射 場. 활터)이 있어서 조선( 朝 鮮 )초( 初 )수많은 왕( 王 )들이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하며 짐승을 한곳에 몰아놓고 사냥( 山 行. 一 種 의 軍 事 訓 練 )을 하였다는 기록( 記 錄 )이 많이 남아 있다. 11) 수기실( 宿 騎 室 )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二 梅 洞 )산60번지와 397-402번지 일대의 지명( 地 名 ) 38) 이다. 백 제( 百 濟 )때부터 이곳에서 훈련( 訓 練 )하던 기마병( 騎 馬 兵 )들 중 수뇌부( 首 腦 部 )인 장수( 將 帥 )들이 쉬던 곳이다. 12) 삼천병마( 三 千 兵 馬 )골 성남시(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이매동( 二 梅 洞 ) 산62-2번지 아래 404번지에서 406번 지 일대 39) 이다. 삼천병마( 三 千 兵 馬 )에서 삼천( 三 千 )이라는 숫자는 무량수( 無 量 數 )이고 무지수( 無 止 ( 指 ) 數 )이기 때문에 그 뜻은 기마병( 騎 馬 兵 )들이 얼마나 많던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의 지명( 地 名 )이다. 13) 숯내( 炭 川 ) 용인( 龍 仁 )에서 발원( 發 源 )하여 성남시(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구미동( 九 美 洞. 옛 이 름은 龜 尾 洞 )을 경유( 經 遊 )하여 창곡동( 倉 谷 洞 )을 지나 한강( 漢 江 )으로 연결( 連 結 )된 하 천( 河 川 )이다. 백제( 百 濟 )때부터 군사( 軍 士 )들을 훈련( 訓 練 )시키며 식사( 食 事 )를 제공( 提 供 )하려면 수백마차( 數 百 馬 車 )의 장작을 때고 난 후 숯을 물에 버리어 바닥에 숯이 깔 려 있어서 숯이 내를 이루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 숯내이다. 38) 城 南 文 化 叢 書 7 突 馬 마을지 128쪽 參 照. 2007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9) 城 南 文 化 叢 書 7 突 馬 마을지 124쪽 參 照. 2007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33

14) 궁( 宮 )골 백제시대( 百 濟 時 代 )에 행궁( 行 宮 )이 있었다고 전( 傳 )해오는 골짜기 인데, 성남시( 城 南 市 )분당구( 盆 唐 區 )삼평동( 三 坪 洞 )산10번지와 226번지 일대이다. 40) 판교( 板 橋 )신도시( 新 都 市 )개발( 開 發 )때에 백제유물( 百 濟 遺 物 )이 많이 나온 곳이다. 15) 궁( 宮 )안마을 백제( 百 濟 )의 행궁( 行 宮 )안쪽의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있는 마을인데, 성남시 (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궁내동( 宮 內 洞 ) 252번지에서 360-13번지 일대( 一 帶 )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41) 16) 정자( 亭 子 )터 백제( 百 濟 )부터 왕실전용( 王 室 專 用 )의 정자( 亭 子 )가 있었다고 하는데, 성남시(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정자동( 亭 子 洞 ) 478번지에서 480번지 일대( 一 帶 )의 지명( 地 名 )이다. 42) 조선시대( 朝 鮮 時 代 )에는 광주동정( 廣 州 東 亭 )이라고 불렸는데, 태종( 太 宗 )이 두 번 납시 었는데 태종( 太 宗 )13년 10월 10일의 기록은 사슴 두 마리를 쏘아 잡아서 대언( 代 言 ) 조 말생에게 명하여 말을 달려 종묘에 천신( 薦 新. 새로운 음식의 맛을 보십시오. 하는 권 하는 음식이나 짐승의 고기를 말함)하게 하였는데, 임금이 일찍이 이렇게 말하였었다. 전라도에 있으므로 비록 잡은 짐승을 천신하려고 하더라도 길이 멀어서 고기의 맛이 모 두 변할 것이다. 광주( 廣 州 )에서 몰이하여 다시 천신하고자 한다. 라는 기록이 있고, 태 종( 太 宗 )14년 윤 9월 18일의 기록은 어가가 광주 동정에 머물렀는데 왕세자가 행궁에 나아왔다. 라는 기록이다 이때에 태종은 왕세자인 양녕대군이 이곳에 나왔으므로 태종 과 국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태종의 미움을 살만한 이야기를 하여 태종이 세자를 바꾸 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세종( 世 宗 )께서도 태종을 모시고 한번 납시어 금탄(탄천)에 서 천렵을 하신 기록( 記 錄 )이 있다. 또 세종2년 3월 13일 기록에는 두 임금이 영장산 ( 靈 長 山. 실록에는 연장산으로 오기 되었음)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동정 앞에서 40)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9 樂 生 마을지 189쪽 參 照. 2009 年 11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41)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9 樂 生 마을지 128쪽 參 照. 2009 年 11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42)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8 突 馬 마을지( 下 ) 114쪽 參 照. 2008 年 11 月 28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4 한동억

연(잔치)을 벌이다. 라는 기록과 이튿날인 3월 14일의 기록은 두 임금이 동정 앞에서 매사냥을 구경하고 또 금탄 에서 고기잡이를 구경하고 인하여 낮참에 머물러 술을 차리 고 풍류를 벌이니 모시고 따라갔던 재상들이 모두 입시하였다. 이하생략... 세종3년 2 월4일 기록은 임금이 낙천정에 나아가려 하였다가 동교에서 상왕을 만나 금탄에서 고기 잡이를 구경하고 상왕은 낙천정으로 돌아가고 임금은 궁으로 돌아왔다. 는 기록이 있 다. 이렇듯이 광주( 廣 州 )동정( 東 亭 )이라는 정자는 유명한 전설이 있는데 일제에 의하여 그토록 많은 전설이 왜곡되거나 아예 없어진 경우가 많이 있다. 17) 낙생역( 樂 生 驛 ) 백제시대( 百 濟 時 代 )부터 안박( 安 孀. 寡 婦 孀 자이나 寡 婦 박 자로도 쓰였다. 寡 婦 조차 便 安 하게 살 수 있는 땅이라는 뜻)이라는 역( 驛 )이 있었다. 이 같은 사실( 史 實 )은 세종 실록( 世 宗 實 錄 )지리지( 地 理 誌 )광주( 廣 州 )목( 牧 )역( 驛 )조 편에 상세( 詳 細 ) 43) 하게 기록( 記 錄 )되어 있다. 18) 낙생행궁( 樂 生 行 宮 ) 백제( 百 濟 )때에는 구원( 狗 原 )행궁이라고 기록( 記 錄 )되어 있고, 진사왕( 辰 斯 王 )이 행궁 ( 行 宮 )에 자주 나와서 사냥( 山 行. 軍 事 訓 鍊 의 一 種 )을 하였다는 기록( 記 錄 )이 있고 행궁 ( 行 宮 )에서 죽었다고 기록( 記 錄 )되어 있다. 백제의 왕들은 태자궁( 太 子 宮 )이 있던 이 지역( 地 域 )에 자주 나와서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참관( 參 觀 )하고 군사( 軍 士 )들의 사기( 士 氣 )를 높여주기 위하여 군사장병( 將 兵 )들과 사냥산행( 山 行 )을 하고 행궁( 行 宮 )에서 머물었던 곳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진흥왕( 眞 興 王 )이 553년에 이 지역을 차지하고 순행( 巡 行 )할 때에 행궁주변( 行 宮 周 邊 )지역( 地 域 )을 둘러보고 가히 영락장생지지( 永 樂 長 生 之 地 )라고 하면서 지명( 地 名 ) 을 낙생( 樂 生 ) 44) 이라고 바꾸었다. 43) 城 南 文 化 遺 跡 58쪽 參 照.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朝 鮮 時 代 後 期 에 製 作 廣 州 府 地 圖 에 突 馬 面 內 에 있었다는 表 記 와 記 錄 이 多 數 있다. 44) 城 南 文 化 遺 跡 47쪽.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太 白 山 史 庫 本 朝 鮮 王 朝 實 錄 影 印 9 冊 515 面, 516 面. 口 傳 에 의하면 眞 興 王 이 지금의 松 坡 區 에서 城 南 一 圓 을 둘러보고 興 에 겨워 춤을 추면서 가히 永 樂 長 生 之 地 라고 말하고 樂 生 으로 바꾸어 부르게 하였다는 傳 함이 있다. 이 行 宮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35

4. 유적( 遺 跡 ), 유물( 遺 物 ) 1) 연무관( 演 武 館 ) 남한산성내의 연무관( 鍊 武 館 )이 있다. 이것은 백제시대( 百 濟 時 代 )에 지어진 것이라고 전( 傳 )하고 있다. 연무대( 鍊 武 臺 )는 글자 그대로 군사( 軍 士 )들의 개인적( 個 人 的 )인 기예 ( 技 藝 )와 무예( 武 藝 )를 가르치고 부대전술( 部 隊 戰 術 )을 익혀 실전( 實 戰 )에서 승리( 勝 利 ) 할 수 있는 부대전투력( 部 隊 戰 鬪 力 )을 높이는 훈련( 訓 練 )을 하던 곳이다. 또 그들의 무 예( 武 藝 )와 기예( 技 藝 )를 시험( 試 驗 )하여 능력( 能 力 )이 출중( 出 衆 )한자들을 등용( 登 用 )하 는 등용문( 登 龍 門 )의 역할( 役 割 )과 군사( 軍 士 )들의 사기진작( 士 氣 進 爵 )을 위한 무예대결 ( 武 藝 對 決 )의 장소( 場 所 )로서 유익( 有 益 )하게 쓰이기도 한 유서( 遺 緖 )깊은 곳이다. 그러 나 요즈음에는 무슨 연유( 緣 由 )인지 인조( 仁 祖 )가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을 개축( 改 築 )할 때 에 지은 것이라고도 한다. 더욱이 지금은 다시 재건축( 再 建 築 )을 하고 있어서 모습이 사라진 사태( 事 態 )이나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내에 왜 백제시대에 연무대( 鍊 武 臺 )가 세워졌 었겠느냐? 하는 의구심( 疑 懼 心 )을 가지고 정밀( 情 密 )하게 연구( 硏 究 )분석( 分 析 )하여야 한다. 2) 백제 주거지( 住 居 地 ). 분당( 盆 唐 ) 신도시개발( 新 都 市 開 發 )때에 성남시(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서현동( 書 峴 洞 )산 6번지 정상부( 頂 上 部 )에 백제( 百 濟 ) 주거지( 住 居 地 )가 발굴( 發 掘 )되어 보존( 保 存 ) 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이 주거지라는 말은 잘 못 판단한 것이다. 오히려 사실상( 事 實 上 )의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관리( 管 理 )하던 관망대( 觀 望 臺 )나 전망대( 展 望 臺 )일 것이라 는 생각들이 많다. 또 전해오는 전설( 傳 說 )로는 관망대( 觀 望 臺 )라는 설이 전해오고 있 다. 그 방증( 傍 證 )의 자료( 資 料 )로는 삼천( 三 千 )병마( 兵 馬 )골과 수기 실( 宿 騎 室 )에서 불 과 200-300m 정도의 거리이고 이곳에 올라서 보면 성남일대( 城 南 一 帶 )가 거의 다 내 려다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산( 山 )정상( 頂 上 )에 위치( 位 置 )한 주거지( 住 居 地 )는 거의 은 朝 鮮 時 代 까지 傳 해왔으나 어느 때 없어졌는지는 正 確 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壬 辰 倭 亂 때 에 燒 失 되었을 것이라고 傳 해온다. 36 한동억

찾아보기 힘든 상황( 商 況 )이기 때문에 훈련( 訓 練 )을 관망( 觀 望 )하는 고위( 高 位 ) 지휘관 ( 指 揮 官 )들이 이곳에서 훈련( 訓 練 )상황( 商 況 )을 점검( 點 檢 )하던 관망대( 觀 望 臺 )일 것이라 는 설이 전해져 왔고 또 이 지역을 알고 있는 다수( 多 數 )의 생각이다. Ⅲ. 결론 온조대왕( 溫 祖 大 王 )이 서기전 18년에 백제( 百 濟 )를 건국( 建 國 )하고 수도를 하북( 河 北 ) 위례성( 慰 禮 城 )으로 정하였다가 온조 12년(서기전 6년)에 하남 위례성으로 이도한 이후 부터는 백제는 495년간 태자( 太 子 )를 중심으로 한 군사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 하였다. 특히 근초고왕 26년(서기371)에 고구려( 高 句 麗 )를 침공하여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 을 죽이고 퇴각한 후에 고구려의 보복침공에 대비하여 궁성을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개 로왕 21년(서기 475)까지 105년간은 남한산성에서 꽃피운 문화와 막강한 군사력은 삼국 중 제일이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 전당서( 前 唐 書 )와 후당서( 後 唐 書 )에 모두 백제의 영토가 서쪽으로는 중국 상해 남쪽 인 절강성( 折 江 省 )에서부터 북은 고구려와 경계하고 있는 요서까지였으며, 동쪽으로는 왜( 倭 )가 모두 백제의 영토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한 중국과 일본땅에 각각 8국의 담로 ( 自 治 國 )가 있었다는 가르침을 후대에 전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생각이다. 이 같은 사실은 삼국사기중 고전에 의하면 백제의 역사는 위례성에서 389년이요 한 산성에서 105년이고 웅진에서 76년, 사비에서 122년이라고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이 지역의 전하여오는 북성( 北 城 )은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이요, 남성( 南 城 )은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이라고 보는 견해가 당시의 상황을 판단하는데 근접하는 논지이다. 서기 476년 장수 왕이 강점( 强 占 )하면서 백제의 흔적을 송두리째 뽑아낸 버렸다지만 백제혼은 살아 있었 다고 한다. 또한 장수왕이 강점하였던 476년부터 551년까지 76년간 고구려 문화의 도 래( 到 來 )시래의 역사도 재조명하여야한다. 백제의 문화가 꽃피워졌던 그곳에 고구려의 문물이 밀물처럼 들어와 새로운 문화를 접복하였으리라. 백제 초창기 350년간 궁성보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37

위산성( 宮 城 保 衛 山 城 )으로서 역할과 실상을 확정하고 근초고왕이후에 105년간 백제의 마지막 궁성으로서의 남한산성에 대한 기록들을 중국, 일본과 동북아에 전하여오는 모 든 역사기록에서 채집하여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창출된 백제문화를 재현하고 역사를 바 로잡아야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에 많은 세계인들이 남한산성의 장구한 역사 와 찬란하였던 백제문화에 깊이 매료되어 수없이 찾아보게 될 것이다. 백제시대의 남한 산성의 역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막강하고 찬란한 군사문화와 예술을 창출한 백 제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었으며, 동경( 憧 憬 )의 대상지였던 것임을 세계만방에 알려주 어야 하는 것이다. 온조왕( 溫 祚 王 )의 사당이 있는 유일한 곳이 남한산성임을 알아야한다. 그것은 근초고 왕이 궁성을 남한산성으로 옮길 때, 온조왕의 사당을 새로 세우고 그 정신을 기려 백제 의 영원한 영혼이요, 정신적 지주로 각인( 刻 印 )하였기 때문에 후대에 와서도 온조왕의 사당을 남한산성에 세우게 된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청나라에 항복한 인 조시대만을 열거하면서, 백제의 495년간의 찬란한 역사를 알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남 한산성이 지닌 역사성과 찬란한 백제문화의 발상지등식이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은 백제개국에서 고려( 高 麗 ), 조선에 이르는 남한산성의 문화와 역사를 재조명하여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학자 ( 學 者 )와 국민 모두가 지혜( 智 慧 )를 모아 남한산성의 옛 위상 재정립 이라는 역사의 소 명을 받들어야 하는 것이다. 38 한동억

<참고문헌> 1. 정약용, 아방강역고( 我 邦 疆 域 考 ) 2. 이병수, 한국고대사연구( 韓 國 古 代 史 硏 究 ), 박영사, 1972 年 3. 이홍식, 한국고대사연구( 韓 國 古 代 史 硏 究 ), 신구문화사, 1971 年 4. 三 國 史 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CD-ROM 譯 註 5. 千 寬 宇 三 韓 의 國 家 形 成 下 韓 國 學 報 3, 일지사, 1976 年 6. 全 榮 來, 完 山 과 比 斯 伐 論,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75 年 7. 高 麗 史 誌 36 兵 馬 政 8. 太 白 山 史 庫 本 朝 鮮 王 朝 實 錄 影 印 冊 9.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0 號 城 南 地 域 王 室 文 化 의 硏 究, 城 南 文 化 院, 2003 年 10.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1 號 栗 里 마을의 口 碑 文 化 硏 究, 城 南 文 化 院 2004 年 11.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2 號 城 南 地 域 의 王 室 文 化 의 硏 究 Ⅱ, 城 南 文 化 院, 2005 年 12.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7 號 城 南 地 域 의 歷 史 와 忠 節, 城 南 文 化 院, 2010 年 13. 城 南 文 化 叢 書 5 福 井, 太 平 마을지, 城 南 文 化 院, 2005 年 14.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7, 城 南 文 化 院, 2007 年 15.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8 突 馬 마을지( 下 ), 城 南 文 化 院, 2008 年 16.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9, 城 南 文 化 院, 2009 年 17. 城 南 文 化 遺 跡, 城 南 文 化 院, 2005 年 18. 윤종준 編 著, 城 南 옛 이야기 韓 春 燮, 城 南 文 化 院, 2010 年 19. 城 南 文 化 遺 跡, 城 南 文 化 院, 2005 年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39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최 영 희 (의정부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目 次 I. 머리말 II. 수락산 석림사 조성배경 1. 석림사 창건설화 2. 수락산과 서계 박세당 3. 석림사 중건 III.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1. 지장( 地 藏 )신앙 1) 대원본존 지장보살( 大 願 本 尊 地 藏 菩 薩 ) 2) 불교미술에 표현된 지장보살과 시왕 3) 불화에 표현된 지장변상( 地 藏 變 相 ) (1) 중음신( 中 陰 身 ) (2) 육도윤회( 六 道 輪 廻 ) 2. 명부전과 시왕 1) 명부전(지장전) 2) 시왕( 十 王 ) 3) 석림사 석조지장보살상 IV. 맺음말 집필자 : 최영희 의정부시 시정 40년사 편집위원, 의정부 문화원 이사, 국립중앙박 물관 전시유물 해설(도슨트) 자원봉사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41

Ⅰ. 머리말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매우 평범한 사실이지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죽은 이 에 대하여 될 수 있으면 예의를 다하고자 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 이유는 누구 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극복하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의 삶속에 서 매우 고통스러움을 느낄 때마다 지옥같다 는 말을 자주한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겪 는 교통지옥이나, 입시생들이 겪는 불안과 초조함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고통에서 입시 지옥이란 말이 생기도 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지옥의 모습은 사람이나 어떤 사회의 문화 전통에 따라서 갖가지 다 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지닌 앎의 내용과 정도에 따라서도 그 모습을 달리한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지난날의 지 옥모습은 황당무계하게 보일 때도 있고 유치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겉 으로 드러난 지옥의 모습에 담겨 있는 옛사람의 속뜻(상징성)을 헤아려야만 지옥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 지옥이란 말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쓰이지 않았으며, 황천( 黃 泉 ) 이란 고유한 말이 널리 쓰였다고 한다. 이 황천이란 개념은 황하의 황토층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두컴컴하고 쓸쓸한 곳을 의미하며,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이지 특별하게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아서 가는 곳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 지옥이란 어떤 곳인가. 사람 이 죽어서 가는 저승세계 중 가장 고통을 받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옥이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중생의 악한 마음, 지극한 이기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가 지 옥이라는 곳이다. 쉽게 말하면 자유로운 하늘의 세계와는 달리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의 무거운 업보가 땅 속 감옥인 지옥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관( 緣 起 觀 )에 의하면, 현재 우리들의 삶이란 무명( 無 明 )에서 비롯된 육도 ( 六 道, 혹은 육취라고도 한다), 즉 유정자( 有 情 者 )가 갖는 여섯 가지 삶의 형태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인간 세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분 명 이 세계에는 여섯 가지의 삶의 형태가 존재한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성 변 42 최영희

천 소멸의 과정을 겪듯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계( 天 界 ) 등 육도의 삶도 마치 수레바퀴 돌아가듯 서로 다양한 육신을 거쳐가는 윤회( 輪 廻 )를 되풀이한다. 마치 매트릭스의 세계처럼, 우리가 매일 부딪치며 지각하는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현실세계 를 인지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와 같은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는데 있다. 즉 현실처럼 보 이는 허상의 현실을 인식하고 진정한 현실을 자각( 自 覺 )하는 것이다. 윤회의 현실을 벗 어나는 지점, 그리고 시작되는 곳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그러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한 육도의 삶처럼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면 어떻게 전개되는 것일까 매우 궁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불교의 윤회관( 輪 廻 觀 )에 따른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아보고, 사찰 명부전(지 장전)의 불교미술품을 통해 지장보살과 명부시왕의 상징성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수락산 석림사 조성배경 1. 석림사 창건설화 석림사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수락산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계곡의 하단부 로 계곡의 북쪽 경사면에 접하여 동서방향으로 길게 석축을 만든 대지위에 도량이 조성 되었다. 사찰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봉선사본말사약지 에 조선중기 박세당 1) 이 매월당 김시 습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창건하였으며, 몇 년 후인 1676년(병진년) 7월에 유담화상이 화주가 되어 삼소각( 三 笑 閣 )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경기도불적자료집 1) 박세당( 朴 世 堂, 1629 1703) : 호는 서계( 西 溪 ). 조선조 실학파 학자.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 ( 博 物 學 )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 색경 이라는 농사서적을 저술하였음. 유교경전 중 대학, 중용, 논 어, 맹자, 서경에 대한 주해서를 집필한 사변록 을 저술, 주자의 사상과 대립하여 사문난적( 斯 文 亂 賊 )으로 낙인찍혀 삭직, 유배도중 사망했음. 저서로는 사변록( 思 辨 錄 ), 색경( 穡 經 ), 서계집 ( 西 溪 集 ) 등이 있음.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