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Similar documents
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177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6±Ç¸ñÂ÷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0429bodo.hwp

최우석.hwp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 C3D6C1BEBABB292E687770>

E1-정답및풀이(1~24)ok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 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 D2E687770>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untitled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cls46-06(심우영).hwp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01Report_210-4.hwp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 D352D32315FC5E4292E687770>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상품 전단지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2

DBPIA-NURIMEDIA

화이련(華以戀) hwp

ÆòÈ�´©¸® 94È£ ³»Áö_ÃÖÁ¾

歯1##01.PDF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120229(00)(1~3).indd

< B5BFBEC6BDC3BEC6BBE E687770>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11민락초신문4호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

652

歯 조선일보.PDF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 E687770>

<C1DFB1DE2842C7FC292E687770>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 1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34B1C720C0CEB1C7C4A7C7D828C3D6C1BEC6EDC1FD D28BCF6C1A4292E687770>

160215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hwp

<C1DFB0B3BBE7B9FD3128B9FDB7C92C20B0B3C1A4B9DDBFB5292E687770>

ad hwp

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공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교육실습 소감문

1

¼þ·Ê¹®-5Àå¼öÁ¤

109

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歯 동아일보(2-1).PDF

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33352D2D31342DC0CCB0E6C0DA2E687770>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DBPIA-NURIMEDIA

내지4월최종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15강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106월 평가원] 1)심청이 수궁에 머물 적에 옥황상제의 명이니 거행이 오죽 하랴. 2) 사해 용왕이 다 각기 시녀를 보내어 아침저녁으로 문 안하고, 번갈아 당번을 서서 문안하고 호위하며, 금수능라 비

2 국어 영역(A 형). 다음 대화에서 석기 에게 해 줄 말로 적절한 것은? 세워 역도 꿈나무들을 체계적으로 키우는 일을 할 예정 입니다. 주석 : 석기야, 너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 무슨 좋은 일 있니? 석기 : 응, 드디어 내일 어머니께서 스마트폰 사라고 돈

Microsoft Word - 青野論文_李_.doc

<B3EBB5BFB0FCB0E8B9FD20B1B9C8B820B0E8B7F920C0C7BEC828C3D6C1BE29A4BB2E687770>

<B5B6BCADC7C1B7CEB1D7B7A52DC0DBBEF7C1DF E687770>

부벽루 이색 핵심정리+핵심문제.hwp

입장

PSAT¿¹Á¦Áý ȨÆäÀÌÁö °Ô½Ã (¼öÁ¤_200210) .hwp

<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2힉년미술

<B0ADC8ADC7D0C6C428C3D6C1BE292E687770>

PDF

2월 강습회원의 수영장 이용기간은 매월 1일부터 말일까지로 한다.다만,월 자유수영회 원,자유수영 후 강습회원은 접수일 다음달 전일에 유효기간이 종료된다.<개정 , > 제10조(회원증 재발급)1회원증을 교부받은 자가 분실,망실,훼손 및


인 사 청 문 요 청 사 유 서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넓은 들을 배경으로, 낙동강의 풍부한 수자원은 예로부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운 상주의 원동력이다. 강은 단순 히 물은 담아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사 문화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또한 강은 크고 작은 여러 하천들이 모여 큰 물줄기를 이룬다. 낙동강 역시 상

기사스크랩 (160504).hwp

(095-99)미디어포럼4(법을 알고).indd

소공동체 기도 하느님 아버지, 저희를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저희가 모였사오니 여기 모인 이들과 이 가정에 축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희는 오늘 소공동체 모임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부지런히 공부 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 합니다. 주님께 청

Transcription:

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발 간 사 먼저 경기향토사학 제16집이 발간되기까지 집필에 수고하신 경기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경기도의 각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신 김문수 경기도지사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기도는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늘 중심적인 고장으로 기능을 해 왔습니다. 한반도의 중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다양한 지역의 문화가 영입되고, 주변국들의 문화가 유입되는 창구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수많은 유물, 유적들이 산재하고 있으며, 역사의 다양한 경향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경기향토사학 제16집>은 연구위원들이 쓴 각 논문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왕실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경향뿐만 아니라 인물, 신앙, 생활사 등을 연구한 다양한 연구결과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만큼 다양한 문화적 경향이 한 데 어우러져 있고, 그것이 나름대로의 경기도적 문화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역사적 맥락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경기향토사학>은 매년 경기도 31개 시, 군문화원의 추천으로 위촉된 연구위원들이 1년간 조사, 발굴, 연구한 결과물을 발표하는 논문집입니다. 그래서 각 지역의 세세한 역사적 기초자료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각 위원들의 맺음말 가장 끝에 꼭 기재되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 관심 있는 젊은 후배들의 연구를 기대해 본다. 오랜 세월의 애환을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어 안타깝다. 최근 급격한 도시화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귀중한 역사유적, 유물들이 제자리를 잃거나 사라지고 있고, 더욱이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도 함께 하릴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지금 연구하고 있는 것이 후학들의 연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순수한 열정이 곳곳에 느껴집니다.

각 논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하나로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경기향토사학>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 발굴하는 용기와 도전정신이 느껴지는 논문집입니다. 한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보존을 통해 애향 심을 고취하고 나아가 경기도민의 화합과 단결에 기여하고자 앞으로도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며, 언제나 앞장설 것입니다. 경기향토문화연구소의 열정과 소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한 번 <경기향토사학 제16집>이 발간되기까지 열정적으로 조사, 발굴해 주신 연구위원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한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장 오 용 원

목 차 1.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남한산성의 재조명 7 2.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41 3. 소요사 연구 77 4.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21 5.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49 6.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77 7.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15 8.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59 9.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03 10.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33 11. 地 名 由 來 에 대하여( 高 陽 배다리 中 心 ) 369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한 동 억 (경기향토문화연구소장) 目 次 I. 서론( 序 論 ) II. 본문 1. 사기( 三 國 史 記 ) 2. 전설( 傳 說 )과 설화( 說 話 ) 3. 지명( 地 名 ) 4. 유적( 遺 跡 ), 유물( 遺 物 ) Ⅲ. 결론 집필자 : 한동억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장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7

Ⅰ. 서론( 序 論 )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의 역사적( 歷 史 的 ) 사실( 事 實 )과 전래문화의 재조명( 再 照 明 )이 꼭 유네스코 문화유산( 文 化 遺 産 ) 등록( 登 錄 )이전에 재조명 되어야 하는 것은 백제시대( 百 濟 時 代 )의 찬란( 燦 爛 )하였던 군사문화( 軍 事 文 化 )를 중심으로 한 다방면( 多 方 面 )의 예술( 藝 術 )과 문화가 삼국( 三 國 )중 가장 우수( 優 秀 )하고 화려( 華 麗 )하면서도 지적( 知 的 )인 사실 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남한산성의 위상( 位 相 )이 흠결( 欠 缺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같 이 왜곡( 歪 曲 )된 남한산성의 실상( 實 相 )을 재조명( 再 照 明 )하여야 한다. 백제건국( 百 濟 建 國 ) 상황( 狀 況 )을 전( 傳 )하는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의 기록( 記 錄 )을 보면, 온조왕( 溫 祖 王 ) 이 한산( 漢 山 )에 와서 부아악( 負 兒 岳 )에 올라 두루 살펴보고는 한수( 漢 水 ) 남쪽( 河 南 )의 위례성( 慰 禮 城 )에 도읍( 都 邑 )을 정( 定 )하고 열 명의 신하( 臣 下 )를 보좌( 輔 佐 )로 삼아 국 호( 國 號 )를 십제( 十 濟 )로 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이 때가 전한( 前 漢 ) 성제( 成 帝 ) 홍가( 鴻 嘉 ) 3년(서기전 18)이었다. 이와 같은 기록에 대하여, 한산( 漢 山 )의 위치비정( 位 置 比 定 ) 에 대한 삼국사기의 해설( 解 說 )은 한산의 위치( 位 置 )는 백제( 百 濟 )의 최초( 最 初 )의 도읍 지( 都 邑 地 )를 어디로 볼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최초의 도읍지를 하북위례성( 河 北 慰 禮 城 )으로 볼 경우( 境 遇 ) 북한산( 北 漢 山 )에 비정( 比 定 )할 수 있다. 1) 그러나 하남위례성( 河 南 慰 禮 城 )으로 볼 경우 남한산( 南 漢 山 )에 해당( 該 當 )시킬 수 있다. 2) 그런데 위에 나오는 부아악( 負 兒 岳 )을 삼각산( 三 角 山 )에 비정( 比 定 )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 이때의 한산은 북 한산( 北 漢 山 )으로 보는 것이 타당( 妥 當 )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수( 漢 水 ) 남쪽( 河 南 )에 위례성( 慰 禮 城 )에 도읍( 都 邑 )을 정( 定 )하였다는 기록에 의하면 상황은 또 달라진다. 한산이 백제 건국( 百 濟 建 國 ) 초기( 初 期 )에는 백제( 百 濟 )의 궁성( 宮 城 ) 보위 산성( 保 衛 山 城 )으로서의 다양( 多 樣 )하고 구심적( 求 心 點 )적인 역할( 役 割 )을 한 사실과 근 초고왕( 近 肖 古 王 ) 26년 가을 고구려( 高 句 麗 )의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을 평양( 平 壤 )전투에 서 죽이고 돌아온 뒤 서울인 궁성( 宮 城 )을 남한산성으로 옮긴 이후 백제수도( 百 濟 首 都 ) 1) 정약용( 丁 若 鏞 )의 아방강역고( 我 邦 疆 域 考 ), 이병수( 李 炳 壽 )의 한국고대사연구( 韓 國 古 代 史 硏 究, 박영 사 1972년 491-487쪽) 2) 이홍식( 李 弘 植 )의 한국고대사연구( 韓 國 古 代 史 硏 究, 신구문화사 1971년 321-327쪽) 8 한동억

로서의 역할( 役 割 )을 정밀분석( 精 密 分 析 )하고 심도( 深 度 )있게 연구( 硏 究 )분석하여 남한산 성의 역사적( 歷 史 的 ) 사실( 史 實 )을 확인( 確 認 )하고, 확실한 기록( 記 錄 )으로 정리( 整 理 )하 여 후세( 後 世 )에 전하여야 하는 일은 역사적( 歷 史 的 ) 소명( 召 命 )이요, 시대적( 時 代 的 ) 사 명( 使 命 )이라 기필코 완수( 完 遂 )하여야 한다. Ⅱ. 본문 1. 사기( 三 國 史 記 ) 경기( 京 畿 ) 지역은 마한( 馬 韓. 三 國 志 魏 志 東 夷 傳 準 王 便 에는 辰 韓 으로 記 錄 ) 3) )의 시조( 始 祖 )이며 고조선( 古 朝 鮮. 箕 子 朝 鮮 으로도 標 記 함)의 마지막 황제( 皇 帝 )인 준왕( 準 王 )이후 조선왕조( 朝 鮮 王 朝 )이후 지금까지 2,200여 년간의 수도권( 首 都 圈 )이었다. 준왕 은 위만( 衛 滿 )에게 밀려나 내쫒기고 나라를 빼앗기자 남하( 南 下 )하여 한강유역( 漢 江 流 域 )인 회안( 淮 安. 현재의 廣 州 市 廣 州 邑 慶 安 洞 一 帶 )에 수도( 首 都 )를 정( 定 )하고 나라를 세웠다. 그 사연은 준왕은 서기전( 西 紀 前 ) 195년에 연( 延 )나라로부터 유( 流 )이민( 移 民 ) 천 여명을 이끌고 귀순( 歸 順 )하여 온 위만( 衛 滿 )을 지극( 至 極 )히 총애( 寵 愛 )하여 박사( 博 士 )라는 높은 직책( 職 責 )을 주어 요서( 遼 西 )일대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다음 해인 서기 전 194년에 외침( 外 侵 )이 있을 것이라며, 준왕을 측근( 側 近 )에서 호위( 護 衛 )하여야 한다 는 구실( 口 實 )로 군사( 軍 士 )를 이끌고 도성( 都 城 )에 들어와 준왕( 準 王 )을 내몰고 스스로 를 왕( 王 )이라 칭( 稱 )하고 국호( 國 號 )를 위만조선( 衛 滿 朝 鮮 )이라고 하였다. 준왕은 조선( 朝 鮮 )이라는 국호( 國 號 )조차 빼앗겼으므로 진국( 辰 國 ), 진한( 辰 韓 ) 또는 준한( 準 韓 )이라는 새로운 국호( 國 號 )를 제정( 制 定 )하여 사용( 使 用 )하였다는 기록과 한후 ( 韓 候 )가 위만에게 밀려나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진국 또는 진 한( 辰 韓 ), 준한( 準 韓 )으로 불렀다. 라는 것이 삼국지( 三 國 志 ) 위지( 魏 志 ) 동이전( 東 夷 傳 ) 3) 三 國 志 중 魏 志 東 夷 傳 에 準 王 扁 의 記 錄 은 廣 州 郡 誌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9

준왕( 準 王 )조( 條 )에 기록( 記 錄 )되어 전( 傳 )하여 온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각종문헌상에 나와 있는데도 정확히 알리지 못하는 상황은 무 슨 연유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선은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백제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자. 후한서( 後 漢 書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4) 삼한( 三 韓 )은 무릇 78국 이었는데, 백제는 그 중 한나라였다. 북사( 北 史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의 동쪽 끝은 신라이고,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를 한계로 하였으며 북쪽은 한 강( 漢 江 )에 닿았다. 그 서울은 거발성( 居 拔 城 )이라 하고 또는 고마성( 固 麻 城 )이라고도 하 며, 그 밖에 다시 오방성( 五 方 城. 東 ( 右 ), 西 ( 左 ), 南 ( 後 ), 北 ( 前 ), 中 ) 있었다. 통전( 通 典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남쪽으로는 신라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 高 麗 )와 떨어져 있으며, 서쪽 은 큰 바다를 한계로 하였다. 구당서( 舊 唐 書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부여( 扶 餘 )의 별종( 別 種 )으로서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 ( 越 州. 折 江 省 )에 이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 倭 )에 이르며, 북쪽은 고구려( 高 句 麗 )였 다. 그 왕이 거처( 居 處 )하는 곳에는 동, 서의 두성이 있었다. 신당서( 新 唐 書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의 서쪽 경계( 境 界 )는 월주( 越 州. 絶 江 省 )이고 남쪽은 왜( 倭 )인데 모두 바다를 건 너 있으며 북쪽은 고구려( 高 句 麗 )였다. 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CD-ROM 譯 註 國 史 記. 三 國 史 記 券 제37 雜 誌 제6 地 理 4 高 句 麗, 百 濟. 10 한동억

고전기( 古 典 記 )를 살펴보니, 동명왕( 東 明 王. 주몽의 셋째아들 온조( 溫 祖 )가 전한( 前 漢 )홍가( 鴻 嘉 )3년 계묘(서기전 18)에 졸본부여( 卒 本 扶 餘 )로부터 위례성( 慰 禮 城 )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왕을 일컫고 389 년을 지냈다. 13세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 南 )평양성( 平 壤 城 )을 빼앗 아 한성( 漢 城. 南 漢 山 城 )에 도읍하고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 文 周 王 )에 이르러 서 울을 웅천( 熊 川. 公 州 )으로 옮기고 63년을 지냈다. 26세 성왕( 聖 王 )에 이르러 서울을 소 부리( 所 夫 里. 扶 餘 )로 옮기고 나라이름을 남부여( 南 扶 餘 )라고 하였으며, 31세 의자왕( 義 慈 王 )에 이르기 까지 지낸 햇수가 122년이었다. 당나라 현경( 顯 慶 ) 5년 곧 의자왕( 義 慈 王 )재위 20년(서기660)에 이르러, 신라의 유신( 庾 信 )이 당나라장수 소정방( 蘇 定 方 )과 함 께 이를 쳐서 평정( 平 正 )하였다. 옛날에는 5부( 五 部 ) 5) 가 있어서 37군( 郡 ), 200성( 城 ), 76만호( 戶 )를 나누어 통할하였는데, 당나라가 그 땅에 웅진( 熊 津 ), 마한( 馬 韓 ), 동명( 東 明 )등 다섯 도독부 6) 를 나누어 설치( 設 置 )하고 나서, 그 우두머리( 酋 長 )를 도독부( 都 督 部 ) 자사( 刺 史 )로 삼았다. 얼마 안지나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아울러서 웅주( 熊 州. 공주( 公 州 ), 전주( 全 州 ), 무주( 武 州 ))의 3주와 여러 군현을 설치하고, 고구려의 남쪽 경역 및 신 라의 옛 땅과 함께 구주( 九 州 )로 삼았다. 라는 이 기록은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이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이후 백제의 수도로서 105년 (서기 371-475)이라는 기간 동안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이 사살( 射 殺 )된 후 고구려는 원한( 怨 恨 ) 맺힌 세월을 보냈을 것이고, 광개토대왕( 廣 開 土 大 王 )조차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백제의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다는 방증( 傍 證 )이기도 한 것이다. 5) 백제가 泗 歷 時 代 에 都 城 畿 內 를 地 域 區 分 하여 設 置 한 다섯 部. 五 部 制 에 대한 기록은 周 書 에 처음보 이며, 隋 書 에서는 더욱 體 系 化 된 狀 態 를 보여주고 있다. 都 下 즉 畿 內 에는 萬 家 가 있어서 이를 上 部, 前 部, 中 部, 下 部, 後 部 의 五 部 로 나누었다 五 部 는 500인의 兵 士 를 統 括 하였으며, 各 部 에는 5 巷 이 있어서 士 人 이 居 住 하였다. 6) 唐 나라가 西 紀 660년에 백제를 滅 한 直 後 에 設 置 한 다섯 都 督 部. 그러나 이 記 事 의 原 典 인 舊 唐 書 권 199 上 百 濟 傳 에 右 衛 郎 將 王 文 度 를 熊 津 都 督 으로 任 命 하고 兵 力 을 總 括 하여 지키게 하였다는 記 事 만 보이는 것으로 보아 實 際 로는 熊 津 都 督 部 만 設 置 하였던 듯하다. 라고 記 述 되어 있다. 新 唐 書 권 220 百 濟 傳 에는 熊 津, 馬 韓, 東 明 外 에 金 璉, 德 安 都 督 部 의 이름이 나온다. 熊 津 都 督 部 가 현 재의 公 州 市 라는 것과 德 安 都 督 部 가 五 方 城 중의 하나인 東 方 得 安 城 ( 論 山 市 加 也 谷 面 )이라는 외에 는 다른 都 督 部 의 位 置 는 알 수 없다. 五 都 督 部 는 熊 津 都 督 部 외에는 計 劃 上 으로만 設 置 되었던 듯하 며, 얼마 안 있어 本 書 37 地 理 志 末 尾 에 姓 名 未 詳 의 都 督 部 및 東 明 州 등 七 州 體 制 로 轉 換 하려한듯 하나 그 또한 實 行 에 옮기지는 못한듯하다. 라고 기술( 記 述 )되어있다.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11

온조대왕( 溫 祖 大 王 )이 서기전 18년에 백제( 百 濟 )를 건국( 建 國 )하고 수도( 首 都 )를 하북( 河 北 )위례성( 慰 禮 城 )으로 정하였다가 온조12년(서기전 6년)에 하남( 河 南 )위례성( 慰 禮 城 )으 로 이도( 移 都 )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은 온조왕( 溫 祖 王 )13년(서 기전 5)가을 7월에 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 木 柵 )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 다. 7) 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침내 강역( 疆 域 )을 정 하였는데, 북은 패하( 浿 河. 禮 成 江 ) 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 熊 川. 公 州 )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은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 走 壤. 春 川 )에 이르렀다. 구월( 九 月 )에 궁성( 宮 城 )과 대궐( 大 闕 )을 세웠 다. 라고 기록( 記 錄 )되어있다. 이때부터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에 기록되어 있는 한산( 漢 山 ) 이나 한성( 漢 城 )을 포함( 包 含 )한 이 지역( 地 域 )과 관계( 關 係 )되는 기록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온조왕( 溫 祖 王 )14년(서기전 5) 봄 정월에 도읍( 都 邑 )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 部 落 ) 을 순행( 巡 行 )하며 위무( 慰 撫 )하고 농사( 農 事 )를 힘써 장려( 獎 勵 )하였다. 가을 7월에 서 북쪽에 성( 城 )을 쌓고 한성( 漢 城 )의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 김정호( 金 正 浩 )는 대동지지( 大 東 地 志 )권3 경기도 양주( 楊 州 ) 성지 조( 城 地 條 )에서 이때에 쌓은 성을 양주 성( 楊 州 城 )으로 보고 있다. 온조왕 25년(서기 7)봄 2월에 왕궁( 王 宮 )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 漢 城 )의 민 가( 民 家 )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馬 生 牛 ), 머리하나( 頭 一 )에 몸이 둘( 身 二 )이었다. 일관 ( 日 官 )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 徵 兆 )요, 소가 머리가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 竝 合 )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 하며 드디어 진한( 辰 韓 )과 마한( 馬 韓 )을 병합( 竝 合 )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9) 온조왕( 溫 祖 王 )27년(서기 9)여름 4월에 두 성( 城 ) 10) 이 항복( 降 伏 )하자 그 백성( 百 姓 )들 7) 三 國 史 記 券 第 23 百 濟 本 紀 第 1 溫 祖 王 13 年 8)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권 제 23 백제본기( 百 濟 本 紀 ) 제 1 온조왕( 溫 祖 王 ) 14년. 9)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권 제 23 백제본기( 百 濟 本 紀 ) 제 1 온조왕( 溫 祖 王 ) 25년. 10) 馬 韓 의 두 城 이 圓 山 城 과 錦 峴 城 이라고 하는데 두성에 대한 確 實 한 比 定 이 없다. 圓 山 城 에 대하여 近 肖 古 王 24년(서기190) 新 羅 伐 休 尼 師 今 에 보이는 新 羅 西 境 圓 山 鄕 과 同 一 한 곳이라 면 慶 北 醴 泉 郡 龍 宮 面 에 比 定 할 수 있다.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권 제 25 慶 尙 道 龍 宮 縣 沿 革 條 에 本 新 羅 竺 山 ( 一 云 圓 山 )이 나오는데 圓 山 = 龍 宮 縣 은 現 在 醴 泉 郡 龍 宮 面 이다. 그러나 龍 宮 面 은 馬 韓 의 中 心 地 가 稷 山 일 境 遇 地 理 的 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권 제 33 全 羅 道 珍 山 縣 古 蹟 條 에 나오는 猿 山 鄕 ( 在 縣 東 三 十 里 )이라는 記 事 에 依 據 하여 忠 南 珍 山 으로 보 려는 見 解 도 있다.( 千 寬 宇 三 韓 의 國 家 形 成 下 韓 國 學 報 3 일지사 1976년. 128쪽) 12 한동억

을 한산( 漢 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 馬 韓 )은 드디어 멸망( 滅 亡 )하였다. 11) 온조왕( 溫 祖 王 )28년 아들 다루( 多 婁 )를 태자( 太 子 )에 봉( 封 )하고 중앙( 中 央 )과 지방( 地 方 )의 병권( 兵 權 )을 모두 태자( 太 子 )에게 맡긴 12) 후 부터는 전통적( 傳 統 的 )으로 백제( 百 濟 )는 495년간 태자( 太 子 )에게 병권( 兵 權 )을 맡기는 것이 관례( 慣 例 )가 되었고, 그로인 ( 因 )하여 태자( 太 子 )를 중심( 中 心 )으로 한 군사력( 軍 事 力 )은 삼국( 三 國 )중 고구려( 高 句 麗 ), 신라( 新 羅 ). 어느 나라와 비교( 比 較 )할 수 없을 만큼 막강( 莫 强 )하였다. 특히 창곡동( 倉 谷 洞 )에 태자궁( 太 子 宮 )을 세우고 백제( 百 濟 )의 군사요충지( 軍 事 要 衝 地 ) 를 만들고 지금의 송파( 松 坡 )와 성남일대( 城 南 一 帶 )에서 훈련( 訓 練 )을 시킨 것은 백제융 성( 百 濟 隆 盛 )의 근간( 根 幹 )을 이루었다. 온조왕( 溫 祖 王 )43년(서기25)겨울 10월에 남옥저( 南 沃 沮 )의 구파해( 仇 頗 解 )등 20여가 ( 家 )가 부양( 斧 壤 )에 귀순( 歸 順 )하니 왕( 王 )이 이를 받아들여 한산( 漢 山 ) 서쪽에 안치( 安 置 )하였다. 기루왕( 己 婁 王 )27년(서기103) 13) 왕이 한산( 漢 山 )에서 사냥( 山 行, 打 圍 (몰이)를 하여 軍 士 나 짐승( 獸 )을 한곳으로 몰아 놓고 사살( 射 殺 )하거나 생포( 生 捕 )하는 戰 術 )로 軍 事 訓 鍊 의 一 種 )하다가 신비( 神 秘 )로운 사슴( 神 鹿 )을 잡았다. 개루왕( 蓋 婁 王 )4년(서기131)여름 4월에 왕이 한산( 漢 山 )에서 사냥하였다. 개루왕5년(서기132)봄 2월에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을 쌓았다. 14)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 24년(서기 369) 가을 9월에 고구려( 高 句 麗 )의 사유( 斯 由 )가 보병 ( 步 兵 )과 기병( 騎 兵 )2만( 萬 )명을 거느리고 치양( 雉 壤 )에 와서 진( 陣 )을 치고 군사( 軍 士 ) 한편 全 北 全 州 市 에 比 定 하는 見 解 도 있다( 全 榮 來 完 山 과 比 斯 伐 論, 馬 韓 百 濟 文 化 創 刊 號 圓 光 大 學 校 1975). 錦 峴 城 에 대하여 丁 若 鏞 은 錦 峴 者 譯 故 與 古 沙 夫 里 幷 擧 也 라 하여 羅 州 로 比 定 하고 있으나( 丁 若 鏞 疆 域 考 券 1 馬 韓 考 ) 取 信 하기 어렵고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권 39 鎭 安 縣 山 川 條 에 熊 嶺 縣 의 異 寫 로 보고 그 位 置 를 지금의 鎭 安 郡 富 貴 面 곰치리에 比 定 하는 見 解 도 있다. ( 全 榮 來 完 山 과 比 斯 伐 論 ) 11) 三 國 史 記 권 제 23 百 濟 本 紀 제 1 溫 祖 王 27년. 12) 三 國 史 記 권 제 23 百 濟 本 紀 제 1 溫 祖 王 28년. 13) 三 國 史 記 권 제 23 百 濟 本 紀 제 1 己 婁 王 27년. 14) 三 國 史 記 권 제 23 百 濟 本 紀 제 1 蓋 婁 王 4년, 5년. 北 漢 山 城 을 이때에 쌓았다는 記 錄 에 注 目 하 여야 한다. 北 漢 山 城 을 쌓았다면 慰 禮 城 의 背 後 山 城 인 南 漢 山 城 은 以 前 이나 最 小 限 이 무렵에 쌓았다고 하여 야 맞는 것이다. 平 地 에 都 邑 한 慰 禮 城 의 背 後 山 城 이 없다는 것은 敵 의 侵 攻 에 對 備 하지 못하였 다는 事 實 이 立 證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13

를 나누어 민가( 民 家 )를 약탈( 掠 奪 )하였다. 왕이 태자( 太 子 )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 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트리고 5천( 千 )여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는데, 사로잡은 적( 敵 )들을 장수( 將 帥 )와 군사( 軍 士 )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5) 겨울 11월에 한수( 漢 水 )남쪽에서 크게 사열( 査 閱. 將 兵 들의 指 揮 能 力 과 訓 練 狀 態 를 點 檢 하여 戰 鬪 力 을 가늠하는 大 規 模 의 軍 事 訓 鍊 과 點 檢 )하였는데, 깃발은 모두 누른색을 사용( 使 用 )하였다.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26년(서기371)에 태자( 太 子 )를 선봉( 先 鋒 )으로 삼고 삼만( 三 萬 )의 군사( 軍 士 )로 고구려( 高 句 麗 )를 침공( 侵 攻 )하여 화살에 맞은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을 죽이 고 퇴각( 退 却 )한 후( 後 )에 고구려( 高 句 麗 )의 보복침공( 報 復 侵 攻 )에 대비( 對 備 )하여 겨울 에 궁성( 宮 城 )을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으로 옮기고, 16) 개로왕( 蓋 鹵 王 )21년(서기475)까지 105년간은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에서 꽃피운 찬란( 燦 爛 )한 문화( 文 化 )와 막강( 莫 强 )한 군 사력( 軍 事 力 )은 고구려( 高 句 麗 )와 신라( 新 羅 ), 백제( 百 濟 ), 삼국( 三 國 )중 제일무적( 第 一 無 敵 )의 군대( 軍 隊 )라 할 수 있다. 근구수왕( 近 仇 首 王 )3년(서기 377)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軍 士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 ( 高 句 麗 )의 평양성( 平 壤 城 )을 쳤다. 17) 침류왕( 沈 柳 王 )2년(서기 385)봄 2월에 한산( 漢 山 )에 절( 寺 )을 세우고 열사람의 승려 ( 僧 侶 )가 되는 것을 허가( 許 可 )하였다. 18) 15) 三 國 史 記 권 제 23 百 濟 本 紀 제 1 近 肖 古 王 24년, 高 句 麗 王 斯 由 ( 故 國 原 王 )과 熾 烈 한 戰 爭 을 하 였던 雉 壤 의 현재의 위치는 黃 海 道 延 白 郡 銀 川 面 ( 北 韓 黃 海 南 道 白 川 郡 白 川 邑 )에 比 定 된다.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권 43 黃 海 道 白 川 郡 條 에 白 川 郡 高 句 麗 刀 朧 縣 一 云 雉 嶽 城 이라 한 기사 參 照 로 位 置 比 定 란에 記 述 하고 있다. 14) 三 國 史 記 권 제 24 百 濟 本 紀 제 2 近 肖 古 王 26년. 高 句 麗 의 平 壤 城 을 쳐서 故 國 原 王 을 죽이고 돌 아온 近 肖 古 王 은 當 時 의 高 句 麗 가 延 나라와 戰 爭 으로 兩 分 되었던 軍 士 를 몰아칠 경우 힘든 싸움이 豫 想 되어 歸 還 하자 곧 바로 都 邑 을 南 漢 山 城 으로 옮긴 것이다. 이 같은 史 實 은 三 國 史 記 권 제 37 雜 誌 제6 地 理 4 高 句 麗, 百 濟 條 에 近 肖 古 王 26년(서기 371)부터 蓋 鹵 王 21년(서기 475)까지 105 年 을 南 漢 山 城 이 百 濟 의 서울로 銘 記 되어있어서 確 實 F한 記 錄 이다. 17) 三 國 史 記 권 제 24 百 濟 本 紀 제 2 近 仇 首 王 3년. 高 句 麗 를 친 記 錄 만있다. 18) 三 國 史 記 권 제 24 百 濟 本 紀 제 2 沈 柳 王 2년. 沈 柳 王 元 年 에 摩 羅 難 陀 尊 者 에 의하여 佛 敎 가 傳 來 되었고 百 濟 最 初 로 漢 山 에 절을 세웠다는 곳이 城 南 市 盆 唐 區 栗 洞 의 靈 長 山 金 剛 寺 라고 전해 오고 있다. 傍 證 할만한 地 名 說 이 栗 洞 의 옛날 이름이 石 人 里 라고 하는데, 이는 揷 天 彌 勒 (하늘로부 터 미륵이 내려와 꼽혀 있는 모양)이 映 世 踈 立 (사람이 드문드문 서 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부쳐진 이름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2004년 9월 21일 城 南 文 化 院 ( 附 設 ) 鄕 土 文 化 硏 究 所 發 行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1 號 에 栗 里 마을 口 碑 文 化 硏 究 參 照. 14 한동억

진사왕( 辰 斯 王 )6년(서기390)겨울 10월에 구원( 狗 原. 丘 原 이라고도 하였다고 전하며 현 재의 낙생( 樂 生 )이었다고 함) 19) 에서 사냥하다가 7일 만에 돌아왔다. 진사왕 7년(391)봄 정월( 正 月 )에 궁실( 宮 室 )을 고치고 수리( 修 理 )하였으며 못( 淵 )을 파 고 산( 山 )을 만들어 기이( 奇 異 )한 새와 특이( 特 異 )한 화초( 花 草 )를 길렀다. 진사왕8년(서기 392)왕이 구원( 狗 原.)에서 사냥하였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 았다. 11월에 왕이 죽었다. 아신왕( 阿 莘 王 )은 처음 한성( 漢 城 )의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 光 彩 )가 방 에 비치었다. 장성( 將 盛 )함에 뜻과 기개( 氣 槪 )가 빼어났으며, 매사냥( 放 鷹 )과 말 타기를 좋아했다. 선왕( 先 王 )이 죽었을 때 어렸기 때문에 숙부( 叔 父 )진사( 辰 斯 )가 왕위( 王 位 )를 이었는데, 8년에 왕이 죽자 즉위( 卽 位 )하였다. 아신왕4년(서기 395)겨울 11월에 왕은 패수( 浿 水 )싸움을 보복( 報 復 )하려고 친히 군사 ( 軍 士 )7천명을 거느리고 한수( 漢 水 )를 건너 청목령( 靑 木 嶺, 開 城 松 岳 山 )밑에서 머물렀 다. 그러나 큰 눈을 만나 병사( 兵 士 )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 軍 )을 돌려 한산성( 漢 山 城 ) 20) 에 이르러 군사( 軍 士 )들을 위로( 慰 勞 )하였다. 한수( 漢 水 )를 건넜다는 기록은 남한 산성( 南 漢 山 城 )에서 출병( 出 兵 )하였다는 증거( 證 據 )가 된다. 아신왕7년(398)가을 8월에 왕이 장차( 張 次 )고구려( 高 句 麗 )를 치려고 군사( 軍 士 )를 내 어 한산( 漢 山 )북쪽에 목책( 木 柵. 木 城 )에 이르렀다. 그날 밤 큰 별이 병영( 兵 營 )안에 떨 어져 소리가 났다. 왕은 이를 심( 甚 )히 꺼리어 정벌( 征 伐 )을 곧 중지( 中 止 )하였다. 전지왕(전지왕)2년(서기 406)가을 9월에 해충( 海 忠 )을 달솔로 삼고 한성( 漢 城 )의 조 ( 租. 稅 金 )천섬을 주었다. 비유왕( 毗 有 王 )29년(서기 455)봄 3월에 한산( 漢 山 )에서 사냥하였다. 비유왕 29년 11월에 지진( 地 震 )이 일어났고, 큰 바람이 불어 기와를 날렸다. 개로왕( 蓋 鹵 王 )15년(서기469)가을 8월에 장수( 將 帥 )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변방( 邊 方 ) 19) 三 國 史 記 권 제 25 百 濟 本 紀 제 3 辰 斯 王 6년. 狗 原 ( 丘 原 ) 行 宮 에 地 域 에 대하여서는 現 在 의 樂 生 이라고 전해온다. 西 紀 551년 眞 興 王 이 聖 王 과 百 濟 의 故 土 를 되찾아주었다가 서기 553년에 新 羅 의 領 土 로 宣 布 하고 巡 訪 한후에 이 地 域 은 永 樂 長 生 之 地 라 하여 樂 生 이라고 地 名 을 바꾸어 주었 다는 傳 說 때문이다. 20) 三 國 史 記 권 제 25 百 濟 本 紀 제 3 阿 莘 王 4년. 高 句 麗 를 侵 攻 하려고 開 城 까지 進 軍 하였으나 寒 波 를 만나 되돌아 왔는데 여기에서 漢 山 城 이라는 곳이 北 漢 山 城 인지 南 漢 山 城 인지 不 明 確 하다.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15

을 쳤다. 21) 겨울 10월에 쌍현성( 雙 峴 城 )을 수리( 修 理 )하였고, 청목령( 靑 木 嶺 )에 큰 목책 ( 木 柵 )을 설치( 設 置 )하여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의 군사( 軍 士 )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개로왕( 蓋 鹵 王 )21년(서기 475)에 고구려( 高 句 麗 )의 장수왕( 長 壽 王 )이 보낸 간자( 間 者 ) 도림( 道 林 )이라는 중( 僧 )의 계교( 計 巧 )에 속아 궁성( 宮 城 )과 궁궐( 宮 闕 )을 재건축( 再 建 築 ) 하고 고다지추( 高 多 只 樞 )라는 높고 긴 제방( 堤 防 )을 몽촌토성( 夢 村 土 城 )에서 검단산( 黔 丹 山 )아래 까지 축조( 築 造 )하면서 막대( 莫 大 )한 자금( 資 金 )을 사용( 使 用 )하여 국고( 國 庫 ) 를 탕진( 蕩 盡 )하고 소비( 消 費 )하여 마침내 국력( 國 力 )이 쇠진( 衰 盡 )하게 되었다. 이때 삼 국사기( 三 國 史 記 )의 기록( 記 錄 )은 이에 나라사람들을 징발( 徵 發 )하여 흙을 쪄서( 蒸 土 )성 ( 城 )을 쌓고 안에는 궁실( 宮 室 )과 누각( 樓 閣 )과 대사( 臺 榭 )등을 지었는데 웅장( 雄 壯 )하고 화려( 華 麗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욱리하( 郁 利 河. 漢 江 )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 ( 槨 )을 만들어 부왕( 父 王 )의 뼈를 장사( 葬 事 )하고, 강을 따라 둑( 㪲 )을 쌓았는데 사성( 夢 村 土 城 )에서 숭산( 崇 山. 黔 丹 山 )북쪽에 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국고( 國 庫 )가 텅 비고 백성( 百 姓 )들이나 나라의 위태( 危 殆 )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 甚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개로왕( 蓋 鹵 王 )은 고구려( 高 句 麗 )의 장수왕( 長 壽 王 )이 삼만( 三 萬 )의 군사( 軍 士 )로 쳐들 어오자 태자( 太 子 )인 문주( 文 周 )에게 신라( 新 羅 )에 가서 구원병( 救 援 兵 )을 청하게 하였 고, 문주가 일만( 一 萬 )의 구원병을 이끌고 왔지만 구원군( 救 援 軍 )이 왔을 때는 이미 개 로왕은 처참( 悽 慘 )한 최후( 最 後 )를 맞이한 후였기에 문주는 등극( 登 極 )도 못한 채, 웅진 ( 熊 津 )으로 내려가 도읍( 都 邑 )을 정하여 등극( 登 極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고구려본기( 高 句 麗 本 紀 )장수왕( 長 壽 王 )조에는 왕 63 년(서기475)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 ( 漢 城 )을 함락시키고 그 왕( 王 )부여경( 扶 餘 慶 )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사로잡아서 돌아 왔다. 22) 라고 기록되어 있다. 21) 三 國 史 記 권 제 25 百 濟 本 紀 제 3 蓋 鹵 王 15년. 蓋 鹵 王 이 高 句 麗 를 先 攻 으로 칠정도로 百 濟 의 軍 事 力 은 莫 强 하였다는 事 實 이 立 證 되는 記 錄 이다. 그러므로 長 壽 王 은 間 者 를 보낼 計 策 을 써서 結 局 에는 百 濟 를 侵 攻 하여 蓋 鹵 王 을 잡아 죽이는데 成 功 하였고 漢 江 流 域 一 帶 를 占 領 하여 76년간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22) 三 國 史 記 권 제 高 句 麗 本 紀 제 6 長 壽 王 編. 蓋 鹵 王 15년(서기 469)에 高 句 麗 의 便 房 을 百 濟 가 쳐 들어 왔어도 勝 利 하지 못한 恨 이 맺혀있던 長 壽 王 이었다. 6 年 間 臥 薪 嘗 膽 하며, 間 者 인 중 道 林 을 시켜 百 濟 의 經 濟 를 망치게 하고 侵 攻 하여 最 後 의 勝 利 를 거둔 것이다. 16 한동억

고구려가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에게 침략( 侵 略 )을 당하고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이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임을 당한 이후에 고구려의 명예회복( 名 譽 回 復 )을 위한 상심( 傷 心 )의 감 정( 感 情 )과 백제에 대한 보복감정( 報 復 感 情 )이 얼마나 팽배( 澎 湃 )하였었는가? 왕( 王 )의 전사( 戰 死 )라는 역사적( 歷 史 的 )치욕( 恥 辱 )을 씻기 위하여 얼마나 절치부심( 切 齒 腐 心 )하였 는가에 대하여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의 기록( 記 錄 )을 상고( 詳 考 )하여보자.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의 아들인 소수림왕( 小 獸 林 王 )이 등극( 登 極 )하고 위상회복( 位 相 回 復 )을 위하여 절치부심하다가 소수림왕 6년(480)겨울 11월에 백제의 북쪽 변경( 邊 境 )을 침략( 侵 略 )하였다. 이때가 백제의 근구수왕( 近 仇 首 王 )2년(480)이던 때이다. 고국양왕( 故 國 壤 王 )3년 가을 8월에 군대( 軍 隊 )를 내어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 征 伐 )하 였다. 라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 正 確 )한 지명( 地 名 )이나 성곽( 城 郭 )의 이름은 없다. 고 국양왕( 故 國 壤 王 )6년 가을 9월에 백제를 침입( 侵 入 )하여서 남쪽 변경부락( 邊 境 部 落 )을 약탈( 掠 奪 )하고 돌아갔다. 고 하였으나 역시 성이나 지명이 없다. 고국양왕 7년 가을 9월에 백제가 달솔 진가모( 眞 家 牟 )를 보내 도압성( 都 押 城. 位 置 未 詳 )을 쳐부수고 200명을 사로 잡아갔다. 광개토왕( 廣 開 土 王 )2년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 邊 境 )을 침략( 侵 略 )하여 왔으므 로 장수( 將 帥 )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광개토왕 3년 가을 7월에 백제가 침략하여 왔는데 왕은 정예기병( 精 銳 騎 兵 )5천을 거 느리고 맞아 쳐서 이겼다. 나머지 적( 敵 )들은 밤에 도주( 逃 走 )하였다.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 侵 略 )에 대비( 對 備 )하였다. 고 하였는데 일곱 성의 위치( 位 置 )나 성의 이름은 없다. 광개토왕 4년 가을 9월에 왕은 패수( 浿 水 )가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8,000명을 사로잡았다. 동왕( 同 王 )9년 2월에 연나라 모용성( 毛 用 晟 )이 고구려가 예의( 禮 儀 )가 없다고 3만을 이끌고 고구려를 습격( 襲 擊 )하여 신성( 新 城 ), 남소성( 南 小 城 )을 함락시키고 700여리의 땅에 오천호( 五 千 戶 )를 옮겨 놓고 돌아갔다. 동왕( 同 王 )11년 고구려가 연( 燕 )나라의 숙군성( 肅 軍 城 )을 공격( 攻 擊 )하니 연나라 평주 자사( 平 州 刺 使 ) 모용귀( 毛 用 歸 )가 성( 城 )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다가 동왕 13년 연( 燕 )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17

나라가 고구려를 침공( 侵 攻 )하였고 다음해인 동왕( 同 王 )14년에 또다시 연나라가 쳐들어 왔다가 되돌아갔다. 고구려는 연나라와의 전쟁( 戰 爭 )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서 백 제와의 전쟁은 염두( 念 頭 )에 두지 못한 듯하다. 그러다가 장수왕( 長 壽 王 )이 등극( 登 極 )하고 나서 연나라와의 쟁송( 爭 訟 )이 사라지고 등극 60여년이 흐른 후부터 백제를 도모( 圖 謀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 다. 그래서 간첩( 間 諜 )인 중 도림( 道 林 )을 백제에 보내어 개로왕( 蓋 鹵 王 )의 총명( 聰 明 )을 흐리게 하고 새로운 사업( 事 業 )을 시행( 施 行 )함으로서 탄탄하고 막강( 莫 强 )한 백제의 국 고( 國 庫 )를 탕진( 蕩 盡 )하게 하여 혼란( 混 亂 )을 유발( 誘 發 )하게 한 후 백제를 침공( 侵 攻 ) 하여 개로왕( 蓋 鹵 王 )을 잡아 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도 만만하거나 약( 弱 )한 상대( 相 對 )는 아니었다는 사실( 事 實 )들이 삼국사 기( 三 國 史 記 )기록( 記 錄 )에 나타난다.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은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국원왕 ( 故 國 原 王 )을 죽이고 환도( 還 都 )하여 고구려의 보복( 報 復 )대( 大 )공략( 攻 略 )이 두려워서 도성( 都 城 )을 위례성( 慰 禮 城 )에서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으로 옮긴 후인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28년(373)에도 청목령( 靑 木 嶺.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제4 개성부 상 산천( 山 川 )중 송 악( 松 嶽 )조에는 개성( 開 城 )송악산( 松 嶽 山 )으로 표기 되어 있으나 순암( 巡 巖 )안정복( 安 鼎 福 )의 동사강목( 東 史 綱 目 ) 제1 임자( 壬 子 )마한( 馬 韓 )시조( 始 祖 ) 십년( 十 年 )조에는 개성( 開 城 ). 금천( 金 天 )경계( 境 界 )의 청석동( 靑 石 洞 )으로 표기하였다 )에 성( 城 )을 쌓았다. 근초 고왕 30년(375) 가을 7월에 고구려( 高 句 麗 )가 북쪽변경( 邊 境. 漢 水 以 北 의 百 濟 領 土 )의 수곡성( 水 谷 城 )을 공격( 攻 擊 )해 와서 함락( 陷 落 )시켰다. 왕( 王. 근초고왕)이 장수( 將 帥 ) 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이 다시 군사( 軍 事 )를 일으 켜 보복( 報 復 )하려 하였으나 흉년( 凶 年 )이 들어 실행( 實 行 )하지 못하였다. 이 해에 근초 고왕( 近 肖 古 王 )이 돌아갔다. 근구수왕( 近 仇 首 王 )2년 겨울 11월에 고구려가 북방( 北 方 )에 쳐들어 왔다. 근구수왕 3년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평양성( 平 壤 城 ) 을 쳤다. 11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앙갚음 을 하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 침공( 侵 攻 )하여 전쟁( 戰 爭 )을 하였다는 증거( 證 據 ) 의 기록( 記 錄 )이라고 생각한다. 근구수왕( 近 仇 首 王 )은 재위( 在 位 )10년에 돌아갔다. 침류왕( 枕 柳 王 )2년(386)가을 8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이에 침류왕 5년(389) 가 18 한동억

을 9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변경( 邊 境 )을 침략( 侵 略 )하여 약탈( 掠 奪 )하였 다. 침류왕 6년(390)가을 9월에는 왕이 달솔 진가( 眞 家 )모( 牟 )에게 명령( 命 令 )하여 고구 려( 高 句 麗 )를 쳐서 도곤성( 都 坤 城. 位 置 未 詳 )을 함락( 陷 落 )시키고 200명을 사로잡아왔 다. 진사왕( 辰 斯 王 )8년(392)가을 7월에 고구려왕 담덕( 談 德. 廣 開 土 王 )이 군사( 軍 士 )4만 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 邊 境 )을 침공( 侵 攻 )해 와서 석현성( 石 峴 城. 金 正 浩 의 大 東 地 志 권 18에는 石 峴 城 을 黃 海 道 谷 山 西 南 20리 地 點 으로 보고 있다)등 10여 성( 城 )을 함락 ( 陷 落 )시켰다. 왕( 王. 辰 斯 王 )은 담덕( 談 德. 廣 開 土 王 )이 군사( 軍 士 )를 부리는데 능( 能 )하 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 漢 水 )북쪽의 여러 부락( 部 落 )들이 다수( 多 數 )함 락( 陷 落 )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 關 彌 城. 金 正 浩 의 大 東 地 志 권 3 交 河 성 지조( 城 池 條 )에는 烏 頭 城 ) 臨 津, 漢 水 會 合 處, 本 百 濟 關 彌 城 周 二 千 七 十 二 尺 四 面 舜 絶 唯 東 連 山 麓. 三 面 以 海 水 라 하여 京 畿 道 交 河 烏 頭 城 에 비정하고 있다. 이외 에 江 華 喬 洞 島 로 推 論 하는 見 解 ( 李 炳 壽 國 譯 三 國 史 記 380쪽)과 예성강( 禮 成 江 ) 中 流 南 岸 으로 추정 되는 관미령( 關 彌 嶺 )에 築 造 된 성으로 보는 견해( 李 道 學. 百 濟 關 彌 城 에 관한 一 考 察 通 信 19, 20 合 集 1990)이 있다. 아신왕(아신 王 )2년(393)가을 8월에 왕( 王 )의 외삼촌( 外 三 寸 )인 좌장( 左 將 )진무( 眞 武 )에 게 군사 일만( 一 萬 )을 주어 고구려의 석현성( 石 峴 城 )등 다섯 성( 城 )을 회복( 回 復 )하려고 쳐들어가서 관미성( 關 彌 城 )을 포위( 包 圍 )하였으나 고구려가 응전( 應 戰 )을 하지 않고 군 량수송( 軍 糧 輸 送 )등의 보급( 補 給 )이 잘 안되어 되돌아 왔으며, 다음 해인 아신왕 3년 (394) 가을 7월에 고구려와 부곡성( 釜 谷 城 )에서 싸웠으나 패배( 敗 北 )하였다. 아신왕(아 신 王 ) 4년 가을 8월에 왕이 좌장( 左 將 )진무( 眞 武 )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고구려의 광개토왕( 廣 開 土 王 )의 칠천기병( 七 千 騎 兵 )에게 패수( 浿 水 )에서 크게 패퇴( 敗 頹 ) 하여 팔천( 八 千 )명이 사로잡히고 패주( 敗 走 )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패수( 浿 水 )의 싸 움을 보복( 報 復 )하려고 친( 親 )히 군사( 軍 士 )칠천( 七 千 )명을 거느리고 한수( 漢 水 )를 건너 청목령( 靑 木 嶺 )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큰 눈을 만나 병사( 兵 士 )들이 많이 얼어 죽자 군( 軍 )을 돌려 한산성( 漢 山 城 )에 이르러 군사( 軍 士 )들을 위로( 慰 勞 )하였다. 위에서 나열 ( 羅 列 )한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이후 개로왕( 蓋 鹵 王 )까지의 기록( 記 錄 )을 상고( 詳 考 )하여보 면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이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을 죽이고 돌아와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으로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19

이도( 移 都 )한 이후 고구려( 高 句 麗 )와 백제( 百 濟 )는 105년간의 기나긴 세월동안 명예( 名 譽 )를 건 싸움 끝에 장수왕( 長 壽 王 )의 계교( 計 巧 )에 개로왕( 蓋 鹵 王 )이 당하여 성남시( 城 南 市 )복정동( 福 井 洞 )산 53번지, 산 54-1번지, 산 55-1번지 일대( 一 帶 )인 군주( 君 呪 )터 에서 사로잡혀 왕( 王 )으로서 견디기 힘든 온갖 치욕( 恥 辱 )의 저주( 咀 呪 )를 받고 아차산 아래로 압송( 押 送 )되어 목 베임을 당하는 참극( 慘 劇 )을 당하였다. 이 같은 기록은 어느 시대( 時 代 )를 막론( 莫 論 )하고 전쟁의 패전국( 敗 戰 國 )이나 약소국( 弱 小 國 )의 나약( 懦 弱 )한 지도자( 指 導 者 )들의 최후( 最 後 )가 결국( 結 局 )에는 참담( 慘 憺 )한 현실( 現 實 )로 나타난다는 역사( 歷 史 )의 교훈( 敎 訓 )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신왕 8년(399)가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 軍 士 )와 말들을 크게 징발( 徵 發 )하였다. 그러자 백성( 百 姓 )들은 전역( 戰 役 )에 시달리다 못해 신라( 新 羅 )로 많이 도망 ( 逃 亡 )하니 호구( 戶 口 )가 줄었다. 이 해에 아신왕이 돌아갔다. 이어서 왕위( 王 位 )에 오른 전지왕( 奠 支 王 )은 재위( 在 位 )16년간을 왜( 倭 )와의 친교( 親 交 )에 힘썼고, 구이신왕( 久 爾 辛 王 )은 재위( 在 位 )8년간 고구려( 高 句 麗 )와의 전쟁( 戰 爭 )이 없었으며, 비유왕( 毗 有 王 )도 재위( 在 位 )29년간 고구려( 高 句 麗 )와의 전쟁( 戰 爭 )없이 무탈 ( 無 奪 )하게 잘 지내왔다. 그러다가 개로왕( 蓋 鹵 王 )이 등극( 登 極 )하고 고구려( 高 句 麗 )와의 힘겨루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동왕( 同 王 )15년(469)가을 8월에 장수( 將 帥 )를 보내 고구려 의 남쪽 변경( 邊 境 )을 쳤으며, 겨울 10월에 쌍현성( 雙 峴 城 )을 수리( 修 理 )하였고, 청목령 ( 靑 木 嶺 )에 큰 목책( 木 柵. 나무로 만든 城 )을 설치( 設 置 )하여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의 군사 ( 軍 士 )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는 등 국방업무( 國 防 業 務 )에 상당한 노력( 努 力 )을 하여 내 실( 內 實 )을 다져 군( 軍 )체제( 體 制 )를 공고( 鞏 固 )히 함으로서 고구려의 장수왕( 長 壽 王 )이 넘볼 기회( 機 會 )나 틈새조차 보이지 않게 만반( 萬 般 )의 방어태세( 防 禦 態 勢 )를 완벽( 完 璧 ) 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제의 침공( 侵 攻 )을 엄두도 못 내던 장수왕( 長 壽 王 )이 마침내 간자( 間 者 )의 투입( 投 入 )이라는 계교( 計 巧 )로서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던 것 이다. 결국( 結 局 )에는 백제가 고구려에게 패( 敗 )하고 개로왕( 蓋 鹵 王 )이 사로잡혀 죽임을 당 하는 수모( 受 侮 )를 겪었지만 장수왕이 등극( 登 極 )한 이후 63년만에야 도림( 道 林 )이라는 간자( 間 者 )를 숨겨 보내어 백제의 강병부국( 强 兵 富 國 )의 틀을 일순( 一 瞬 )에 부수고 백제 20 한동억

의 서울인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을 점령( 占 領 )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대목이다. 이때까지 초기백제( 初 期 百 濟 )의 찬란( 燦 爛 )한 문화( 文 化 )와 막강( 莫 强 )하였던 군사력 ( 軍 事 力 )을 비롯한 제반( 諸 般 )산업( 産 業 )에 대한 재조명( 再 照 明 )이 이루어져야 할 것 이다.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에 전하여오는 도림( 道 林 )이 말한 백제( 百 濟 )의 도성( 都 城 )은 천험 ( 天 險 )의 요새( 要 塞 ) 라는 기록을 살펴 볼 필요( 必 要 )가 있다. 누가 풍납토성( 風 納 土 城 ) 이나 몽촌토성( 夢 村 土 城 )을 가리켜 천험( 天 險 )의 요새( 要 塞 )라고 말 할 수 있는가? 특히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는 발굴조사( 發 掘 調 査 )때에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의 기록( 記 錄 ) 속에 나오는 증토( 蒸 土 )의 흔적( 痕 迹 )이 한조각도 나오지 않았다.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이 야 말로 천험( 天 險 )의 요새( 要 塞 )이다. 서( 西 ), 북( 北 ), 남( 南 )이 모두 가파를 절벽이고 동쪽만이 가파르지 않으나 이곳은 계곡( 溪 谷 )의 길이가 십 여리가 넘는 곳이어서 복병 ( 伏 兵 )이 두려워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명실상부( 名 實 相 符 )한 천험( 天 險 )의 요새 ( 要 塞 )이기에 도림( 道 林 )이 말한 천험( 天 險 )의 요새( 要 塞 )라는 곳이 바로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이라는 것이다. 또 개로왕( 蓋 鹵 王 )이 고구려( 高 句 麗 )의 포위망( 包 圍 網 )을 뚫고 몰래 빠져나간 곳이 남문( 南 門 )으로 나와 서쪽으로 가다 잡혔다. 라고 되어 있다. 풍납토성 ( 豊 納 土 城 )이나 몽촌토성( 夢 村 土 城 )에서 남문( 南 門 )에서 나와 서쪽으로 간다면 한강( 漢 江 )인데 논리( 論 理 )상 도주로( 逃 走 路 )로는 인정( 認 定 )할 수 없는 동선( 動 線 )이다. 강으로 가서 투신할 생각이었다면 모르되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의 남문( 南 門 )으로 나와 서쪽으로 가면 군사요충지( 軍 事 要 衝 地 )인 태자궁( 太 子 宮 )이 있는 지금의 창곡동( 倉 谷 洞 )이다. 개로왕은 태자궁은 안전( 安 全 )하리라고 믿고 달 려가려다 태자궁( 太 子 宮 )조차 적군( 敵 軍 )에게 점령( 占 領 )당하여진 것을 알게 되었고, 순 간 개로왕( 蓋 鹵 王 )은 태자궁( 太 子 宮 )을 포기( 抛 棄 )하고 성부산( 星 浮 山 )능선( 稜 線 )을 타고 도망( 逃 亡 )치다가 고구려( 高 句 麗 )의 장수 재증걸루( 再 曾 桀 婁 )에게 군주( 君 呪 )터라는 곳 에서 잡혀 온갖 수모( 受 侮 )를 겪은 후 아차산( 阿 差 山 )으로 송환( 送 還 )되어 죽임을 당하 였다. 이날 그 상황( 狀 況 )을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의 기록은 걸루( 桀 婁 )가 말에서 내려 왕에 게 절을 한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 罪 )를 꾸짖었다. 그러고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21

는 왕을 포박( 捕 縛 )하여 아차성( 阿 差 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라고 기록( 記 錄 )되여 전하 고 있다. 개로왕( 蓋 鹵 王 )이 걸루( 桀 婁 )의 저주( 詛 呪 )를 받고 잡혀간 군주( 君 呪 )터라는 지 명( 地 名 )이 지금도 망경암( 望 京 庵 )아래 복정동( 福 井 洞 ) 산 53번지에서 산 54-1번지와 산 55-1번지 일대( 一 帶 )이다. 23) 많은 학자( 學 者 )들이 북성( 北 城 )은 풍납토성( 風 納 土 城 ) 이고 남성( 南 城 )은 몽촌토성( 夢 村 土 城 )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잘 못 생각하는 것이 다. 고구려( 高 句 麗 )의 장수왕( 長 壽 王 )이 삼만( 三 萬 )의 군사( 軍 士 )를 이끌고 침략( 侵 略 )하 였는데 조그만 두 성( 城 )을 쳐부수는데 20여일이라는 시일( 時 日 )이 걸릴 이유( 理 由 )가 없다. 더욱이 백제( 百 濟 )는 대역사( 大 役 事 )로 인하여 백성들의 민심( 民 心 )이 이완( 離 緩 ) 되어 있었고 군사( 軍 士 )들은 싸울 힘도 의욕( 意 慾 )도 없는 자포자기( 自 暴 自 棄 )상태( 狀 態 ) 였고 솔종( 率 從 )이라는 노무부대( 勞 務 部 隊 )인원까지 합치면 최소( 最 小 )십수만( 十 數 萬 )의 인마( 人 馬 )가 날뛰는데 평지( 平 地 )의 조그만 두 성( 城 )을 함락( 陷 落 )시키는데 무슨 이십 여일씩이나 걸리겠는가? 향토사학자( 鄕 土 史 學 者 )들이 전설로 들어온 선인들의 말씀이나 상당수( 相 當 數 )의 학자 ( 學 者 )들이 주장( 主 張 )하는 북성( 北 城 )은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이요 남성( 南 城 )은 남한산성 ( 南 漢 山 城 )이라고 보는 견해( 見 解 )가 당시( 當 時 )의 상황( 狀 況 )을 판단( 判 斷 )하는데 가장 근접( 根 接 )하는 논지( 論 旨 )이다. 장수왕이 강점( 强 占 )하면서 백제( 百 濟 )의 흔적( 痕 迹 )을 송두리째 뽑아내고 말살( 抹 殺 )시켜 버렸다지만 백제( 百 濟 )혼( 魂 )은 살아 전해오고 있다. 2. 전설( 傳 說 )과 설화( 說 話 ) 1) 온조왕( 溫 祖 王 )과 산신제( 山 神 祭 ) 온조왕이 하북( 河 北 )위례성( 慰 禮 城 )에 도읍( 都 邑 )을 정하고 국호( 國 號 )를 십제( 十 濟 )라 고 하여 개국( 開 國 )한 이후에 인근( 隣 近 )을 두루 순방( 巡 訪 )하며 지리적( 地 理 的 )인 이해 정황( 利 害 情 況 )을 살피었는데, 하루는 남한산에서 상서( 祥 瑞 )로운 서기( 瑞 氣 )가 뻗쳐 올 라가므로 남한산에 와서 주변을 두루 살펴보니 가히 천하의 명당( 明 堂 )이고 천험( 天 險 ) 의 요새( 要 塞 )를 구축( 構 築 )하기에 적당하다고 판단( 判 斷 )되어 이도( 移 都 )할 마음을 굳히 23)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5 福 井, 太 平 洞 마을지47쪽 參 照.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22 한동억

고 있을 즈음에 하루는 꿈에 산신령( 山 神 靈 )이 나타나서 내가 한산( 漢 山 )의 일장산( 日 長 山 )산신인데 내말을 잘 들으라 하면서 한수( 漢 水 )이북에 도읍을 정하면 고구려나 말갈 ( 靺 鞨 )이 쳐들어 왔을 때 힘에 밀리면 배수진( 背 水 陣 )을 칠 수밖에 없는 절박( 切 迫 )한 상황( 狀 況 )이 되는데 후퇴( 後 退 )할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도와 줄 터이니 한산 아래에 도읍을 정하면 어떻겠느냐? 하고는 사라져버렸다. 온조왕은 깨어보니 남가일몽 ( 南 柯 一 夢 )이나 의아한 마음으로 남한산 일대( 一 帶 )를 두루 살펴보고 하남위례성( 河 南 慰 禮 城 )으로 이도를 결심( 決 心 )하였다. 온조 13년 목책( 木 柵 )을 세우고 하남위례성으로 이 도한 후에 국력( 國 力 )이 날로 융성( 隆 盛 )하여지자 일장산 산신령에게 제사( 祭 祀 )를 지내 기 시작하였다. 온조왕에 꿈에 다시 나타난 산신령이 언젠가는 너의 후손( 後 孫 )중에 일 장산으로 이도( 移 都 )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그 때에도 내가 보살펴주겠노라 하고는 사 라졌다. 그 후로는 온조왕은 거의 매년( 每 年 )산신제( 山 神 祭 )를 지냈다고 전해온다. 과연 근초고왕( 近 肖 古 王 )이 남한산성으로 서울을 옮기여 105년간을 백제의 서울이 되었고 일 장산은 신앙( 信 仰 )의 요람( 搖 籃 )이 되었으나 서기 475년 장수왕에게 개로왕이 잡혀죽고 난 후에 남한산성은 장수왕에 의하여 비참( 悲 慘 )할 정도로 그 흔적( 痕 迹 )조차 찾을 수 없을 만치 황폐( 荒 廢 )하여 졌다가 신라의 진흥왕( 眞 興 王 )이 서기 553년 신라의 영토( 領 土 )를 주장( 主 張 )하고 일장산에 주장성( 晝 長 城 )을 설치( 設 置 )하고 김무력( 金 武 力. 金 庾 信 의 할아버지)를 군주( 軍 主 )로 임명( 任 命 )하여 막강( 莫 强 )한 전성기( 全 盛 期 )를 구가( 謳 歌 ) 하여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의 명성( 名 聲 )을 되찾았다. 2) 태자궁( 太 子 宮 )과 세자동( 世 子 洞 )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281번지에서 창곡동295번지 일대와 인근 야산을 포함하여 세자 동( 世 子 洞 ) 24) 이라는 넓은 골짜기가 있다. 온조왕28년(서기 10)에 아들 다루( 多 婁 )를 태자( 太 子 )로 봉( 封 )하고 중앙( 中 央 )과 지방 ( 地 方 )의 병권( 兵 權 )을 맡기고는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 倉 谷 洞 )에 태자궁( 太 子 宮 ) 을 짓게 하고 남한산( 南 漢 山 ), 청계산( 淸 溪 山 ), 영장산( 靈 長 山 ), 성덕산( 聖 德 山.), 문현산 ( 門 懸 山 )과 하남시( 河 南 市 )의 검단산( 黔 丹 山 ), 관악산( 冠 岳 山 )일대와 송파구 잠실동에서 24)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5 福 井 太 平 洞 마을지52쪽, 54쪽 參 照.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23

분당구 궁내동까지의 구릉( 丘 陵 )지대와 넓은 들녘에서 군사들을 훈련( 訓 練 )시켜 막강( 莫 强 )한 백제의 군사력( 軍 事 力 )을 키웠다고 한다. 특히 기마병( 騎 馬 兵 )들은 산세( 山 勢 )가 험준( 險 峻 )한 남한산( 南 漢 山 )을 중심( 中 心 )으로 강력( 强 力 )한 훈련을 시켜 삼국( 三 國 )중 제일막강( 莫 强 )하였었다고 전해온다. 고등동( 高 登 洞 )산41번지와 산42번지에도 세자( 世 子 )골이 있는데, 아마도 문주( 文 周 )가 신라( 新 羅 )로 구원병( 救 援 兵 )을 청( 請 )하러 갈 때 에 이곳으로 넘어갔다고 하는 골짜기의 지명( 地 名 )이다. 3) 수(숙)기실( 宿 騎 室 )과 삼천병마( 三 千 兵 馬 )골 성남시(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이매동( 二 梅 洞 )산 60번지와 397, 402번지 일대( 一 帶 ) 의 지명( 地 名 )이 수기실( 宿 騎 室 )이고, 그 아래쪽인 산 62-2번지와 404번지에서 406번 지 일대를 삼천병마( 三 千 兵 馬 )골 25) 이라 불려오는데, 백제의 온조왕( 溫 祖 王 )의 아들인 다루( 多 婁 )가 태자궁( 太 子 宮 )을 창곡동( 倉 谷 洞 )에 짓고 전국( 全 國 )의 군사( 軍 士 )들을 불 러 모아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시킬 때 기마병( 騎 馬 兵 )들이 쉬어가던 곳이라고 한다. 수 기실( 宿 騎 室 )은 기마병들을 지휘( 指 揮 )하는 장수( 將 帥 )와 수하( 手 下 )고급장교( 高 級 將 校 ) 들이 머물러 쉬던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등성이에는 백제주거지 ( 百 濟 住 居 地 )라고 발표( 發 表 )된 백제유적( 百 濟 遺 跡 )이 있는 곳이 있다. 그러나 주거지( 住 居 地 )라는 것은 백제시대( 百 濟 時 代 )에 군사( 軍 士 )들의 훈련( 訓 練 )모습과 전술적( 戰 術 的 ) 인 상황( 狀 況 )을 점검( 點 檢 )하고 전투력( 戰 鬪 力 )을 심사( 審 査 )하고 관망( 觀 望 )하는 전망 대( 展 望 臺 )엿을 것이라고 추정( 推 定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점( 點 )을 감안( 勘 案 )하여 재정리( 再 整 理 )하여야 할 것이다.삼천병마( 三 千 兵 馬 )골은 기마병( 騎 馬 兵 )들이 쉬던 곳이 다. 삼천병마( 三 千 兵 馬 )라는 용어( 用 語 )는 헤아릴 수 없는 무수( 無 數 )한 기마병이라는 뜻이다. 즉 셀 수 없이 많다는 무량지수( 無 量 指 數 )요 무지수( 無 知 數 )이다. 지명( 地 名 )속 에 얽힌 지극( 至 極 )하고, 찬란( 燦 爛 )하며, 명분( 名 分 )이 뚜렷한 전설( 傳 說 )은 분명( 分 明 ) 하게 역사 ( 歷 史 )속에 채워져야 한다. 다루왕( 多 婁 王 )이 태자시절( 太 子 時 節 )부터 전국( 全 國 )의 장병( 將 兵 )들을 모아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한 역사적( 歷 史 的 )사실( 事 實 )이 증명 ( 證 明 )된 지역( 地 域 )의 특수성( 特 殊 性 )에 비춰보면 한성백제문화( 漢 城 百 濟 軍 事 文 化 )의 산 25)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7 124쪽 126쪽 參 照. 2007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24 한동억

실( 産 室 )이었으며, 장수왕( 長 壽 王 )의 계교( 計 巧 )에 속아 국고( 國 庫 )를 탕진( 蕩 盡 )하고 결 국( 結 局 )장수왕( 長 壽 王 )에게 패하여 복정동( 福 井 洞 )군주( 君 呪 )터에서 잡혀 아차산 아래서 참수( 斬 首 )를 당한 개로왕( 蓋 鹵 王 )까지 490여 년간의 찬란( 燦 爛 )하였던 백제( 百 濟 )의 군 사문화( 軍 事 文 化 )가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4) 숯내 탄천( 炭 川 ) 성남시의 한 가운데를 남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가로 질러 한강( 漢 江 )으로 나가는 물줄기의 이름이 숯내( 炭 川 )이다. 다루왕( 多 婁 王 )이 창곡동에 태자시절에 태자궁( 太 子 宮 )을 짓고 군사들을 훈련시킬 때 에 숯 냇가에서 밥을 지어 먹이였는데 수만( 數 萬 )명의 군사들에게 밥을 지어 먹이고 우 마( 牛 馬 )에게 죽( 粥 )을 쑤어 먹이는데 필요한 연료( 燃 料 )가 당시에는 장작밖에 없으므로 하루에 수십여 마차( 馬 車 )의 장작을 사용하였다. 장작불을 때고 나면 숯이 남았는데 이 숯은 물에 버리었다. 이것은 숯이 물의 자정능력( 自 精 能 力 )에 최고( 最 高 )이고 더욱이 살 균( 殺 菌 )까지 시키어서 다음날 맑은 물을 군사와 우마에게 먹일 수 있어서 계속 숯을 냇물에 버리었는데 숯이 바닥에 두껍게 깔린 모습을 보고 숯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 나 한문표기( 漢 文 表 記 )로 탄천( 炭 川 ) 26) 으로 표기 하고 지금은 탄천이라고 부른다. 삼국 사기 백제본기의 의하면 백제군사가 외국에 출병을 한 기록을 보면 삼 만여 명이 출병 한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기록에 나오는 군사의 수효는 정병의 숫자이고 그들이 전 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보급부대원들인 솔종( 率 從 )들의 수효는 삼배 이상이라는 사실 이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면 삼만 명이 출병을 하면 솔종까지 의 인원을 포함하면 약 십이만 정도의 대규모 인력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훈련소였다고 치더라도 솔종을 포함하여 이천 명이 매일 훈련을 받는다고 계산하여 보 자. 쌀 한가마니면 300명이 먹을 수 있으니까 2000 300=약7가마의 쌀을 한 끼에 먹 는다. 하루에 세 번을 먹어야 하니까 7X3=21가마를 매일 밥을 지어야 한다. 장작 한 짐으로 쌀 한가마를 할 수 있다고 본다면 매일 밥 짓는 데에만 21짐의 장작이 필요로 26)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0 號 城 南 地 域 王 室 文 化 의 硏 究 177쪽 參 照. 2003 年 9 月 21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2 號 城 南 地 域 의 王 室 文 化 의 硏 究 Ⅱ176쪽 參 照. 2005 年 9 月 2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25

하는데 밥만 짓는 게 아니라 국도 끓여주어야 하고 우마의 죽도 쑤어 주어야 하기 때문 에 그의 세배는 때어야 한다. 그렇다면 매일 60여 짐의 장작을 때어대는데 60X30일 =1,800짐이다. 마차한대에 실을 수 있는 장작은 장정의 지게로 여섯 짐을 실을 수 있었 으니까 1,800 6=300마차 분이된다. 그러니 1년 간 1,800짐 12=21,600, 21,600 6 =3,600마차의 장작불을 때고 나면 엄청난 양의 숯이 남았는데 이 숯은 물에 버리었다. 이것은 숯이 물의 자정능력( 自 精 能 力 )이 최고( 最 高 )이고 더욱이 살균( 殺 菌 )까지 시켜 주 어서 다음날 깨끗하고 맑은 물을 군사( 軍 士 )와 우마( 牛 馬 )에게 먹일 수 있었기에 계속 숯을 냇물에 버리었는데 숯이 바닥에 두껍게 깔린 모습을 보고 숯이 시내에 가득하다고 하여 숯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한문표기( 漢 文 表 記 )로 탄천( 炭 川 ) 27) 으로 표기 하고 지금은 탄천이라고 부른다. 특히 조선개국초기( 朝 鮮 開 國 初 期 )에는 태종대왕( 太 宗 大 王 )이 대열( 大 閱 )이라는 이름으로 강력( 强 力 )한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시작한 후부터 연산군 ( 燕 山 君 )때까지 수십( 數 十 )여회에 걸쳐서 전국( 全 國 )에서 군사( 軍 士 )들을 징발( 徵 發 )하고 동원( 動 員 )하여 십이( 十 二 )삼만( 三 萬 )여명을 십여 일간( 十 餘 日 間 )에 걸쳐 강력( 强 力 )한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한 기록( 記 錄 )이 조선왕조실록( 朝 鮮 王 朝 實 錄 )에 상세( 詳 細 )하게 수 록( 收 錄 )되어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증빙기록( 證 憑 記 錄 )들에 의하여 숯내( 炭 川 )의 유구 ( 悠 久 )한 역사( 歷 史 )와 이곳에서 행( 行 )하여진 무수( 無 數 )한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과 그로 인하여 부침( 浮 沈 )되었던 국가( 國 家 )의 흥망성쇠( 興 亡 盛 衰 )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성남시사에 실려 있는 삼천갑자동방삭이가 숯을 빨다가 저승사자에게 잡혀 가서 탄 천이 되었다는 근거( 根 據 )없는 엉터리 기사( 記 事 )는 하루 빨리 삭제( 削 除 )하여 버려야 한다. 5) 영장산( 靈 長 山 )금강사( 金 剛 寺 ) 정확( 正 確 )한 기록( 記 錄 )이나 증빙자료( 證 憑 資 料 )는 없다지만 성남시 분당구 율동( 栗 洞 )에 전해오는 전설설화( 傳 說 說 話 )에 따르면 침류왕( 沈 柳 王 )원년(서기 384)에 마라나타 존자( 摩 羅 難 陀 尊 者 )에 의하여 불교가 전래된 다음해인 침류왕2년(서기 385)에 한산( 漢 27)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0 號 城 南 地 域 王 室 文 化 의 硏 究 177쪽 參 照. 2003 年 9 月 21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2 號 城 南 地 域 의 王 室 文 化 의 硏 究 Ⅱ176쪽 參 照. 2005 年 9 月 2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26 한동억

山 )에 절을 지었는데, 영장산금강사( 靈 長 山 金 剛 寺 )가 백제( 百 濟 )최초( 最 初 )의 절이었으며 미륵( 彌 勒 )부처님을 얼마나 많이 모셨으면 삽천미륵( 揷 天 彌 勒 )이 영세소립( 映 世 踈 立 )하 였다고 전해오고 있는 사실( 事 實 ) 28) 이 아름답게 전해오고 있다. 백제 최초의 절인 금강 사( 金 剛 寺 )는 법문( 法 文 )에 매료( 魅 了 )되어 전국각처( 全 國 各 處 )에서 수많은 불자( 佛 子 )들 이 모여들어 절이 융성( 隆 盛 )하기기 이를 데 없었는데, 어느 때 부터인가 흉년( 凶 年 )이 계속( 繼 續 )되어 절의 살림이 궁핍( 窮 乏 )하여지게 되자 절의 주지( 住 持 )스님이 구황과실 ( 救 荒 果 實 )중에 하나인 밤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더니 몇 해가 지나고부터 밤의 수확으 로 모든 궁핍함이 사라지고 다시 부유( 富 裕 )한 절로 바뀌어 율동( 栗 洞 )에서부터 창곡동 ( 倉 谷 洞 )까지 남향( 南 向 )인 마을들이 전부 밤나무 단지( 團 地 )가 되었다. 그로 인하여 밤 나무 그늘진 마을이라는 뜻의 율목( 栗 木 )음촌( 陰 村 )이라는 지명( 地 名 )이 생겨나게 되었 고 태자궁( 太 子 宮 )이 있던 창곡동( 倉 谷 洞 )의 옛 이름이 율목( 栗 木. 밤나무)리이고, 단대 동( 丹 垈 洞 )과 금광동( 金 光 洞 )일대는 음촌( 陰 村. 그늘진 마을)이라 불려왔다. 율동에서 시작된 불당( 佛 堂 )골은 야탑동( 野 塔 洞 )과 연결( 連 結 )되었고, 여수동( 麗 水 洞 ), 도촌동( 島 村 洞 )일대까지의 마을이름이 가차곡율리( 加 次 谷 栗 里 )였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율동에는 절골 외에 진신사리( 眞 身 舍 利 )골, 자빠진골, 거북( 龜 )산, 천세중( 千 世 衆 )골, 부 처중골, 주지( 住 持 )골, 비득( 飛 得 )재, 마의( 麻 衣 )들, 보리터, 불탑산( 佛 塔 山 ), 장주( 長 珠 ) 리, 대반대리, 일곱삼거리, 불당( 佛 堂 )골, 천조산( 天 鳥 山. 金 烏 ), 안불대( 佛 臺 ), 말바위 ( 馬 巖 ), 아리랑고개 등의 불교용어( 佛 敎 用 語 )의 골짜기와 산 이름이 널부러져 있다. 6) 군주( 君 呪 )터 성남시( 城 南 市 )수정구( 壽 井 區 )복정동( 福 井 洞 )산 53번지, 산54-1, 산55-1번지 일대( 一 帶 )의 지명( 地 名 )이 군주( 君 呪 ) 29) 터이다. 개로왕( 蓋 鹵 王 )21년(서기 475)고구려 장수왕 ( 長 壽 王 )의 침공( 侵 攻 )을 받은 백제는 북성( 北 城 )인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은 일주일( 一 週 日. 七 日 ) 30) 만에 함락( 陷 落 )되고, 남성( 南 城 )인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에서 보름여를 버티 28)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8 突 馬 마을지( 下 ) 78쪽 參 照. 2008 年 11 月 28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1 號 栗 里 마을의 口 碑 文 化 硏 究 125쪽 參 照. 2004 年 9 月 21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29)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5 福 井, 太 平 洞 마을지. 마을의 歷 史 47쪽 參 照.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0) 三 國 史 記 券 第 25 百 濟 本 紀 第 3 蓋 鹵 王 21 年.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27

던 개로왕( 蓋 鹵 王 )이 남문( 南 門 )으로 몰래 도망( 逃 亡 )나와 서쪽인 창곡동( 倉 谷 洞 )에 있던 태자궁( 太 子 宮 )을 향( 向 )하여 가다보니 태자궁( 太 子 宮 )은 이미 고구려( 高 句 麗 )군( 軍 )에게 함락( 陷 落 )되어 있었으므로 부득이 성부산( 星 浮 山 )능선( 稜 線 )을 타고 내려가다가 망경암 ( 望 京 庵 )아래 복정동( 福 井 洞 ) 산53, 산54-1, 산55-1번지 일대( 一 帶 )에서 사로잡히게 되 었다. 이때 재증걸루( 再 曾 桀 婁 )라는 고구려( 高 句 麗 )장수( 將 帥 )가 왕( 王 )을 꿇어앉히고 말 에서 내려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고는 개로왕( 蓋 鹵 王 )을 꾸짖고 포박( 捕 縛 )하여 아 차 산으로 끌고 간 곳이라 하여 군주( 君 呪 )터라는 지명( 地 名 )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7) 성덕산( 聖 德 山 )유래( 由 來 ) 성덕산( 聖 德 山 )은 온조왕( 溫 祖 王 )이 이곳에서 사냥( 山 行. 군사훈련의 일종으로 짐승을 한곳으로 몰아서 쏘아 잡는 사냥방법의 하나)을 하였다는 전설( 傳 說 )도 있고, 다루왕( 多 婁 王 )이후( 以 後 )에도 많은 왕( 王 )들이 자주 사냥을 하면서 지역( 地 域 )에서 동원( 動 員 )되 는 전문( 專 門 )몰이꾼인 백성( 百 姓 )들에게 사례( 謝 禮 )를 후( 厚 )하게 하여 임금의 성덕( 聖 德 )이 만세( 萬 世 )에 이르게 하여 달라는 주문성( 呪 文 性 )의 산말을 가지고 있다. 8) 온조왕( 溫 祖 王 )과 인조대왕( 仁 祖 大 王 ) 인조대왕( 仁 祖 大 王 )이 병자호란( 丙 子 胡 亂 )을 만나 남한산성에 피난( 避 亂 )하여 있을 때 에 하루는 피곤( 疲 困 )함을 이기지 못하여 비몽사몽( 非 夢 似 夢 )간에 꿈을 꾸는데 온조왕 ( 溫 祖 王 )이 나타나서 오랑캐들이 운제( 雲 梯. 城 壁 보다 높게 만든 사다리)를 만들어 타 고 북성( 北 城 )의 성벽( 城 壁 )을 넘으려고 하는데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면 되겠느냐? 하 고 소리치기에 인조( 仁 祖 )가 깜짝 놀라서 누구시기에 이리 호통( 號 筒 )을 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는 이성( 城 )의 옛 주인( 主 人 )인 온조왕( 溫 祖 王 )이다. 31) 하고는 유유 ( 愉 愉 )히 사라졌다. 인조( 仁 祖 )가 깜짝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기에 북성( 北 城 )주위에 포진( 鋪 陳 )한 장수( 將 帥 )들에게 명( 命 )하여 주변상황( 周 邊 狀 況 )을 점검( 點 檢 )하여보니 과 연 청나라 병사( 兵 士 )들이 운제( 雲 梯 )를 만들어 타고 성벽을 넘어오려고 하고 있어서 이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7 號 城 南 地 域 의 歷 史 와 忠 節. 31쪽 參 照. 2010 年 9 月 21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1) 城 南 옛 이야기 韓 春 燮, 윤종준 編 著 95쪽 參 照. 2010 年 11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28 한동억

들에게 불화살( 火 箭 )을 쏘아대고 끓는 물과 기름을 부어가며 맞받아쳐 청병( 淸 兵 )을 물 리쳤다. 그로 인하여 온조왕( 溫 祖 王 )의 사당( 祠 堂 )을 다시 짓고 온조왕( 溫 祖 王 )의 위패 ( 位 牌 )를 모시었는데, 하루는 온조왕( 溫 祖 王 )이 다시 꿈에 나타나 내가 혼자 있다 보니 말동무 할 사람도 없어 몹시 외로우니 누구라도 하나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고는 사라졌 다. 그런 꿈을 꾸고 난 후 수어사( 守 禦 使 )이서( 李 曙 )가 죽었다는 보고( 報 告 )가 왔으므로 이서( 李 曙 )의 위패( 位 牌 )를 온조왕( 溫 祖 王 )사당( 祠 堂 )인 숭열전( 崇 列 殿 )에 모시게 하였다 고 전해온다. 3. 지명( 地 名 ) 1) 남한산( 南 漢 山 ) 지금은 청량산( 淸 凉 山 )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옛 이름은 일장산( 日 長 山 )이었다. 일장산 ( 日 長 山 )은 성일장여( 聖 日 長 如. 해가 온 누리를 비추이듯이 임금의 위명이 골고루 이어 지게 하라는 뜻)라는 산말을 지니고 있는 산이다. 일장산( 日 長 山 )을 청량산( 淸 凉 山 )으로 바꾸고 많은 사람들이 청( 淸 )나라의 침략( 侵 略 )으로 고통( 苦 痛 )을 받게 되리라는 예언 ( 豫 言 )이 있었다고 전( 傳 )해온다. 이 같은 사실( 史 實 )은 정조( 正 祖 )가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 행궁( 行 宮 )에서 남한산( 南 漢 山 )은 본디 이름이 일장산( 日 長 山 )이었으나 국조( 國 朝 )중 엽( 中 葉 )이후에 비로소 청량산( 淸 凉 山 )이라 칭( 稱 )하였는데, 사람들이 청( 淸 )나라 군사 ( 軍 士 )가 와서 침범( 侵 犯 )할 조짐이라 하였다. 이런 말이 과연 있는가? 하매, 수어사( 守 禦 使 )서명응( 徐 命 膺 )이 말하기를 그것은 고로( 古 老 )가 서로 전하는 말입니다. 하였다. 라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朝 鮮 王 朝 實 錄 ) 32) 에 전해온다. 2) 세자동( 世 子 洞 ). 성남시( 城 南 市 ) 수정구( 壽 井 區 ) 창곡동( 倉 谷 洞 )281-295번지 일대( 一 帶 )의 넓은 골짜기 의 지명( 地 名 )이 세자동( 世 子 洞 )이다. 원래( 原 來 )는 백제( 百 濟 )의 온조왕( 溫 祖 王 )의 장남 ( 長 男 )인 다루( 多 婁 )가 태자( 太 子 )가 되면서 중앙( 中 央 )과 지방( 地 方 )의 병권( 兵 權 )을 온 32) 太 白 山 史 庫 本 朝 鮮 王 朝 實 錄 影 印 45 冊 116 面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29

조왕( 溫 祖 王 )으로부터 물려받아 태자궁( 太 子 宮 )을 짓고 전국( 全 國 )의 장병( 將 兵 )들을 불 러 모아 강력( 强 力 )한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시키던 군사요람( 軍 事 搖 籃 )이어서 태자동 ( 太 子 洞 )으로 불리다가 백제( 百 濟 )의 개로왕( 蓋 鹵 王 )이 고구려( 高 句 麗 )의 장수왕( 長 壽 王 ) 의 계교( 計 巧 )에 속아 국고( 國 庫 )를 탕진( 蕩 盡 )하고 민심( 民 心 )이 이반( 離 反 )되어 결국 ( 結 局 )은 장수왕( 長 壽 王 )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고 한성일대( 漢 城 一 帶 )를 고구려( 高 句 麗 ) 에게 빼앗기자 아들인 문주왕( 文 周 王 )이 서울을 웅진( 熊 津. 公 州 )으로 천도( 遷 都 )한 이 후 세월( 歲 月 )이 지나고 고려후기( 高 麗 後 期 )이후( 以 後 )에 태자( 太 子 )의 명칭( 名 稱 )이 세 자( 世 子 )로 변경( 變 更 )되면서 세자동( 世 子 洞 ) 33) 으로 바뀌었다는 한성백제( 漢 城 百 濟 )의 전설( 傳 說 )이 있는 지명( 地 名 )이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곡탄( 穀 炭 )이 출토( 出 土 )되는 곳 이며,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가래질이나 논갈이 할 때에 기와파편( 器 瓦 破 片 )이 출토( 出 土 )된 곳이다. 3) 돌 자개. 남한산 자락에 있는 백제의 어느 왕의 돌무덤이라고도 하는데 학암리( 鶴 巖 里 )일대에 서 전해오는 지명인데, 지금도 돌 더미가 남아있다. 4) 창( 倉 )말(마을)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 倉 谷 洞 )137번지에서 270번지까지의 동, 서로 길게 자리한 마을 이름 34) 인데, 백제 다루왕( 多 婁 王 )때부터 군사전용( 軍 事 專 用 ) 창고( 倉 庫 )가 있었던 곳이 다. 5) 진( 陣 )터 벌 지금의 육군( 陸 軍 )종합행정학교( 綜 合 行 政 學 校 )와 상무체육관( 尙 武 體 育 館 )이 자리 잡고 있는 야트막한 언덕진 곳의 지명( 地 名 )이다. 백제 다루왕( 多 婁 王 )이 태자( 太 子 )로 봉( 封 ) 해지면서 중앙( 中 央 )과 지방( 地 方 )의 병권( 兵 權 )을 온조왕( 溫 祖 王 )으로부터 물려받아 장 33) 註 釋 22 番 參 照. 34) 城 南 文 化 叢 書 5 福 井, 太 平 마을지 50쪽 參 照.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0 한동억

병( 將 兵 )들의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총괄( 總 括 )하게 되면서 군사훈련장( 軍 事 訓 練 場 )의 지 휘부서( 指 揮 部 署 )중 중추( 中 樞 )인 태자궁( 太 子 宮 )을 지은 후부터 백제군( 百 濟 軍 )의 전략 적( 戰 略 的 )인 최고( 最 高 )의 진지( 陣 地 )였으며 고려시대( 高 麗 時 代 )에는 광주( 廣 州 )군용목 장진지( 軍 用 牧 場 陣 地 )였고, 조선시대( 朝 鮮 時 代 )에 와서도 대열( 大 閱 ) 35) 을 하던 진지( 陣 地 )가 있던 곳이다. 6) 창( 倉 )모루 하남시 창우동( 倉 隅 洞 )의 옛 이름이다. 하남시에는 이성산성이 백제 때부터 있었기에 고골이라는 골짜기를 올라가면서 상사창동과 하사창동으로 나뉠 만큼 넓은 지역의 관아 와 창고가 많이 있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7) 상( 上 ), 하( 下 )사창동( 司 倉 洞 ) 백제 때부터 하남시 상사창동과 하사창동으로 나뉘어 있는 마을이다. 이성 산성( 山 城 ) 주변에 관아와 창고가 어우러져 있었다는 곳이다. 8) 영장산( 靈 長 山 ) 금강사( 金 剛 寺 ) 터 성남시(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율동( 栗 洞 ) 산 50번지와 야탑동( 野 塔 洞 ) 산71-1번지 그리고 광주시( 廣 州 市 ) 직동( 直 洞 ) 산27번지에 걸쳐있는 높이 413.2M의 산의 이름이 영장산( 靈 長 産 )이다. 성령장천( 聖 靈 長 千. 임금의 착한 善 政 이 永 遠 하게 하여 달라는 祈 願 임)이라는 산말을 지니고 있다. 그 산 남쪽자락에 백제최초( 百 濟 最 初 )의 절이라는 금 강사( 金 剛 寺 )터가 있다. 백제( 百 濟 )는 침류왕( 枕 柳 王 )원년( 元 年. 서기384)에 마라난타존 자( 摩 羅 難 陀 尊 者 )에 의( 依 )하여 전라남도( 全 羅 南 道 )영광( 靈 光 )을 통하여 불교( 佛 敎 )가 전 ( 傳 )해졌으며 침류왕( 枕 柳 王 )1년(385)에 한산( 漢 山 )에 절을 지었고 열사람의 스님을 허 가( 許 可 )하였다는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백제본기( 百 濟 本 紀 ) 침류왕( 枕 柳 王 )때의 기록( 記 錄 )이 있는데 그때 한산( 漢 山 )에 백제최초( 百 濟 最 初 )로 지은 절이 영장산( 靈 長 産 )금강사 35) 城 南 文 化 叢 書 5 福 井, 太 平 마을지 55쪽 參 照.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高 麗 史 誌 36 兵 馬 政. 太 白 山 史 庫 本 朝 鮮 王 朝 實 錄 影 印 冊 에서 大 閱 部 文 參 照.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31

( 金 剛 寺 )라고 전해오고 있다. 절을 짓고 얼마나 많은 미륵( 彌 勒 )부처님을 모셨으면 삽천 미륵( 揷 天 彌 勒 ) 하늘에서 미륵이 내려와 꼽혀있는 모습)이 영세소립( 映 世 踈 立. 사람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것과 같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율동( 栗 洞 )의 옛 이름이 석인리( 石 人 里 )라고도 불렸다는 것이 이 마을에 전설( 傳 說 )처럼 전해오고 있다. 금강사( 金 剛 寺 )절 터는 율동( 栗 洞 ) 165번지 36) 일대( 一 帶 )이다. 9) 일곱 삼거리 하늘로 올라가는 한 개의 길과 육간지옥( 六 間 地 獄 )으로 가는 여섯 개의 길이 있다는 산고개의 이름이다. 성남시( 城 南 市 )분당구( 盆 唐 區 )율동( 栗 洞 )산76번지와 광주시( 廣 州 市 ) 오포읍( 五 浦 邑 )신현리( 新 峴 里 )산92번지와 광주시( 廣 州 市 )목동( 木 洞 )72번지 능선일대( 稜 線 一 帶 )에 걸쳐있는 고개의 지명( 地 名 ) 37) 이다. 이곳에서 간구득도( 懇 求 得 道. 至 誠 으로 祈 禱 하며, 懇 求 하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라는 산말 이 전해온다. 이곳에서 길을 얻으면 천문현달( 天 門 懸 達 )이라는 산말을 지니고 있는 문 현산( 門 懸 山.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달려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文 衡 山.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 책으로 이 산자락에 세 사람의 대제학을 지낸 분들의 묘소가 있 는데 대제학을 별칭으로 문형이라 하였기에 문형산으로 바꾸어 버린 산 이름이다.)에 있는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문( 門 )을 통( 通 )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 傳 說 )이 있는 고개이다. 10) 문현산( 門 懸 山. 現 文 衡 山 ). 광주시( 廣 州 市 ) 목동( 木 洞 ) 산1번지와 고산리( 高 山 里 )산 55번지, 문형리( 文 衡 里 ) 산 28-1번지, 신현리( 新 峴 里 ) 산40-2번지 상단( 上 端 )에 걸쳐있는 산이다. 원래 천문현달 ( 天 門 懸 達 )이라는 산말이 있어 명산( 名 山 )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산인데 일제( 日 帝 )가 1914년 대한( 大 韓 ) 행정구역개편( 行 政 區 域 改 編 ) 때에 문형산( 文 衡 山 )으로 이름을 바꾼 산( 山 )이다. 36) 城 南 文 化 遺 跡 118쪽.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1 號 栗 里 마을의 口 碑 文 化 硏 究 136쪽 參 照. 2004 年 9 月 21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7)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1 號 栗 里 마을의 口 碑 文 化 硏 究 136쪽 參 照. 2004 年 9 月 21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2 한동억

일곱 삼거리( 三 車 里 )에서 간구득도( 懇 求 得 道 )하여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 機 會 ) 를 얻은 사람들이 문현산( 門 懸 山 )에 있는 하늘 문( 門 )을 통( 通 )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 傳 說 )의 산이다. 이 산에 통전( 通 箭 )골이라는 군사전용( 軍 事 專 用 )의 사장( 射 場. 활터)이 있어서 조선( 朝 鮮 )초( 初 )수많은 왕( 王 )들이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하며 짐승을 한곳에 몰아놓고 사냥( 山 行. 一 種 의 軍 事 訓 練 )을 하였다는 기록( 記 錄 )이 많이 남아 있다. 11) 수기실( 宿 騎 室 )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二 梅 洞 )산60번지와 397-402번지 일대의 지명( 地 名 ) 38) 이다. 백 제( 百 濟 )때부터 이곳에서 훈련( 訓 練 )하던 기마병( 騎 馬 兵 )들 중 수뇌부( 首 腦 部 )인 장수( 將 帥 )들이 쉬던 곳이다. 12) 삼천병마( 三 千 兵 馬 )골 성남시(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이매동( 二 梅 洞 ) 산62-2번지 아래 404번지에서 406번 지 일대 39) 이다. 삼천병마( 三 千 兵 馬 )에서 삼천( 三 千 )이라는 숫자는 무량수( 無 量 數 )이고 무지수( 無 止 ( 指 ) 數 )이기 때문에 그 뜻은 기마병( 騎 馬 兵 )들이 얼마나 많던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의 지명( 地 名 )이다. 13) 숯내( 炭 川 ) 용인( 龍 仁 )에서 발원( 發 源 )하여 성남시(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구미동( 九 美 洞. 옛 이 름은 龜 尾 洞 )을 경유( 經 遊 )하여 창곡동( 倉 谷 洞 )을 지나 한강( 漢 江 )으로 연결( 連 結 )된 하 천( 河 川 )이다. 백제( 百 濟 )때부터 군사( 軍 士 )들을 훈련( 訓 練 )시키며 식사( 食 事 )를 제공( 提 供 )하려면 수백마차( 數 百 馬 車 )의 장작을 때고 난 후 숯을 물에 버리어 바닥에 숯이 깔 려 있어서 숯이 내를 이루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 숯내이다. 38) 城 南 文 化 叢 書 7 突 馬 마을지 128쪽 參 照. 2007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9) 城 南 文 化 叢 書 7 突 馬 마을지 124쪽 參 照. 2007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33

14) 궁( 宮 )골 백제시대( 百 濟 時 代 )에 행궁( 行 宮 )이 있었다고 전( 傳 )해오는 골짜기 인데, 성남시( 城 南 市 )분당구( 盆 唐 區 )삼평동( 三 坪 洞 )산10번지와 226번지 일대이다. 40) 판교( 板 橋 )신도시( 新 都 市 )개발( 開 發 )때에 백제유물( 百 濟 遺 物 )이 많이 나온 곳이다. 15) 궁( 宮 )안마을 백제( 百 濟 )의 행궁( 行 宮 )안쪽의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있는 마을인데, 성남시 (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궁내동( 宮 內 洞 ) 252번지에서 360-13번지 일대( 一 帶 )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41) 16) 정자( 亭 子 )터 백제( 百 濟 )부터 왕실전용( 王 室 專 用 )의 정자( 亭 子 )가 있었다고 하는데, 성남시(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정자동( 亭 子 洞 ) 478번지에서 480번지 일대( 一 帶 )의 지명( 地 名 )이다. 42) 조선시대( 朝 鮮 時 代 )에는 광주동정( 廣 州 東 亭 )이라고 불렸는데, 태종( 太 宗 )이 두 번 납시 었는데 태종( 太 宗 )13년 10월 10일의 기록은 사슴 두 마리를 쏘아 잡아서 대언( 代 言 ) 조 말생에게 명하여 말을 달려 종묘에 천신( 薦 新. 새로운 음식의 맛을 보십시오. 하는 권 하는 음식이나 짐승의 고기를 말함)하게 하였는데, 임금이 일찍이 이렇게 말하였었다. 전라도에 있으므로 비록 잡은 짐승을 천신하려고 하더라도 길이 멀어서 고기의 맛이 모 두 변할 것이다. 광주( 廣 州 )에서 몰이하여 다시 천신하고자 한다. 라는 기록이 있고, 태 종( 太 宗 )14년 윤 9월 18일의 기록은 어가가 광주 동정에 머물렀는데 왕세자가 행궁에 나아왔다. 라는 기록이다 이때에 태종은 왕세자인 양녕대군이 이곳에 나왔으므로 태종 과 국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태종의 미움을 살만한 이야기를 하여 태종이 세자를 바꾸 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세종( 世 宗 )께서도 태종을 모시고 한번 납시어 금탄(탄천)에 서 천렵을 하신 기록( 記 錄 )이 있다. 또 세종2년 3월 13일 기록에는 두 임금이 영장산 ( 靈 長 山. 실록에는 연장산으로 오기 되었음)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동정 앞에서 40)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9 樂 生 마을지 189쪽 參 照. 2009 年 11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41)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9 樂 生 마을지 128쪽 參 照. 2009 年 11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42)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8 突 馬 마을지( 下 ) 114쪽 參 照. 2008 年 11 月 28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34 한동억

연(잔치)을 벌이다. 라는 기록과 이튿날인 3월 14일의 기록은 두 임금이 동정 앞에서 매사냥을 구경하고 또 금탄 에서 고기잡이를 구경하고 인하여 낮참에 머물러 술을 차리 고 풍류를 벌이니 모시고 따라갔던 재상들이 모두 입시하였다. 이하생략... 세종3년 2 월4일 기록은 임금이 낙천정에 나아가려 하였다가 동교에서 상왕을 만나 금탄에서 고기 잡이를 구경하고 상왕은 낙천정으로 돌아가고 임금은 궁으로 돌아왔다. 는 기록이 있 다. 이렇듯이 광주( 廣 州 )동정( 東 亭 )이라는 정자는 유명한 전설이 있는데 일제에 의하여 그토록 많은 전설이 왜곡되거나 아예 없어진 경우가 많이 있다. 17) 낙생역( 樂 生 驛 ) 백제시대( 百 濟 時 代 )부터 안박( 安 孀. 寡 婦 孀 자이나 寡 婦 박 자로도 쓰였다. 寡 婦 조차 便 安 하게 살 수 있는 땅이라는 뜻)이라는 역( 驛 )이 있었다. 이 같은 사실( 史 實 )은 세종 실록( 世 宗 實 錄 )지리지( 地 理 誌 )광주( 廣 州 )목( 牧 )역( 驛 )조 편에 상세( 詳 細 ) 43) 하게 기록( 記 錄 )되어 있다. 18) 낙생행궁( 樂 生 行 宮 ) 백제( 百 濟 )때에는 구원( 狗 原 )행궁이라고 기록( 記 錄 )되어 있고, 진사왕( 辰 斯 王 )이 행궁 ( 行 宮 )에 자주 나와서 사냥( 山 行. 軍 事 訓 鍊 의 一 種 )을 하였다는 기록( 記 錄 )이 있고 행궁 ( 行 宮 )에서 죽었다고 기록( 記 錄 )되어 있다. 백제의 왕들은 태자궁( 太 子 宮 )이 있던 이 지역( 地 域 )에 자주 나와서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참관( 參 觀 )하고 군사( 軍 士 )들의 사기( 士 氣 )를 높여주기 위하여 군사장병( 將 兵 )들과 사냥산행( 山 行 )을 하고 행궁( 行 宮 )에서 머물었던 곳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진흥왕( 眞 興 王 )이 553년에 이 지역을 차지하고 순행( 巡 行 )할 때에 행궁주변( 行 宮 周 邊 )지역( 地 域 )을 둘러보고 가히 영락장생지지( 永 樂 長 生 之 地 )라고 하면서 지명( 地 名 ) 을 낙생( 樂 生 ) 44) 이라고 바꾸었다. 43) 城 南 文 化 遺 跡 58쪽 參 照.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朝 鮮 時 代 後 期 에 製 作 廣 州 府 地 圖 에 突 馬 面 內 에 있었다는 表 記 와 記 錄 이 多 數 있다. 44) 城 南 文 化 遺 跡 47쪽. 2005 年 12 月 30 日 城 南 文 化 院 發 行. 太 白 山 史 庫 本 朝 鮮 王 朝 實 錄 影 印 9 冊 515 面, 516 面. 口 傳 에 의하면 眞 興 王 이 지금의 松 坡 區 에서 城 南 一 圓 을 둘러보고 興 에 겨워 춤을 추면서 가히 永 樂 長 生 之 地 라고 말하고 樂 生 으로 바꾸어 부르게 하였다는 傳 함이 있다. 이 行 宮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35

4. 유적( 遺 跡 ), 유물( 遺 物 ) 1) 연무관( 演 武 館 ) 남한산성내의 연무관( 鍊 武 館 )이 있다. 이것은 백제시대( 百 濟 時 代 )에 지어진 것이라고 전( 傳 )하고 있다. 연무대( 鍊 武 臺 )는 글자 그대로 군사( 軍 士 )들의 개인적( 個 人 的 )인 기예 ( 技 藝 )와 무예( 武 藝 )를 가르치고 부대전술( 部 隊 戰 術 )을 익혀 실전( 實 戰 )에서 승리( 勝 利 ) 할 수 있는 부대전투력( 部 隊 戰 鬪 力 )을 높이는 훈련( 訓 練 )을 하던 곳이다. 또 그들의 무 예( 武 藝 )와 기예( 技 藝 )를 시험( 試 驗 )하여 능력( 能 力 )이 출중( 出 衆 )한자들을 등용( 登 用 )하 는 등용문( 登 龍 門 )의 역할( 役 割 )과 군사( 軍 士 )들의 사기진작( 士 氣 進 爵 )을 위한 무예대결 ( 武 藝 對 決 )의 장소( 場 所 )로서 유익( 有 益 )하게 쓰이기도 한 유서( 遺 緖 )깊은 곳이다. 그러 나 요즈음에는 무슨 연유( 緣 由 )인지 인조( 仁 祖 )가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을 개축( 改 築 )할 때 에 지은 것이라고도 한다. 더욱이 지금은 다시 재건축( 再 建 築 )을 하고 있어서 모습이 사라진 사태( 事 態 )이나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내에 왜 백제시대에 연무대( 鍊 武 臺 )가 세워졌 었겠느냐? 하는 의구심( 疑 懼 心 )을 가지고 정밀( 情 密 )하게 연구( 硏 究 )분석( 分 析 )하여야 한다. 2) 백제 주거지( 住 居 地 ). 분당( 盆 唐 ) 신도시개발( 新 都 市 開 發 )때에 성남시( 城 南 市 ) 분당구( 盆 唐 區 ) 서현동( 書 峴 洞 )산 6번지 정상부( 頂 上 部 )에 백제( 百 濟 ) 주거지( 住 居 地 )가 발굴( 發 掘 )되어 보존( 保 存 ) 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이 주거지라는 말은 잘 못 판단한 것이다. 오히려 사실상( 事 實 上 )의 군사훈련( 軍 事 訓 練 )을 관리( 管 理 )하던 관망대( 觀 望 臺 )나 전망대( 展 望 臺 )일 것이라 는 생각들이 많다. 또 전해오는 전설( 傳 說 )로는 관망대( 觀 望 臺 )라는 설이 전해오고 있 다. 그 방증( 傍 證 )의 자료( 資 料 )로는 삼천( 三 千 )병마( 兵 馬 )골과 수기 실( 宿 騎 室 )에서 불 과 200-300m 정도의 거리이고 이곳에 올라서 보면 성남일대( 城 南 一 帶 )가 거의 다 내 려다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산( 山 )정상( 頂 上 )에 위치( 位 置 )한 주거지( 住 居 地 )는 거의 은 朝 鮮 時 代 까지 傳 해왔으나 어느 때 없어졌는지는 正 確 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壬 辰 倭 亂 때 에 燒 失 되었을 것이라고 傳 해온다. 36 한동억

찾아보기 힘든 상황( 商 況 )이기 때문에 훈련( 訓 練 )을 관망( 觀 望 )하는 고위( 高 位 ) 지휘관 ( 指 揮 官 )들이 이곳에서 훈련( 訓 練 )상황( 商 況 )을 점검( 點 檢 )하던 관망대( 觀 望 臺 )일 것이라 는 설이 전해져 왔고 또 이 지역을 알고 있는 다수( 多 數 )의 생각이다. Ⅲ. 결론 온조대왕( 溫 祖 大 王 )이 서기전 18년에 백제( 百 濟 )를 건국( 建 國 )하고 수도를 하북( 河 北 ) 위례성( 慰 禮 城 )으로 정하였다가 온조 12년(서기전 6년)에 하남 위례성으로 이도한 이후 부터는 백제는 495년간 태자( 太 子 )를 중심으로 한 군사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 하였다. 특히 근초고왕 26년(서기371)에 고구려( 高 句 麗 )를 침공하여 고국원왕( 故 國 原 王 ) 을 죽이고 퇴각한 후에 고구려의 보복침공에 대비하여 궁성을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개 로왕 21년(서기 475)까지 105년간은 남한산성에서 꽃피운 문화와 막강한 군사력은 삼국 중 제일이라고 전하여 오고 있다. 전당서( 前 唐 書 )와 후당서( 後 唐 書 )에 모두 백제의 영토가 서쪽으로는 중국 상해 남쪽 인 절강성( 折 江 省 )에서부터 북은 고구려와 경계하고 있는 요서까지였으며, 동쪽으로는 왜( 倭 )가 모두 백제의 영토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한 중국과 일본땅에 각각 8국의 담로 ( 自 治 國 )가 있었다는 가르침을 후대에 전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생각이다. 이 같은 사실은 삼국사기중 고전에 의하면 백제의 역사는 위례성에서 389년이요 한 산성에서 105년이고 웅진에서 76년, 사비에서 122년이라고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 이 지역의 전하여오는 북성( 北 城 )은 북한산성( 北 漢 山 城 )이요, 남성( 南 城 )은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이라고 보는 견해가 당시의 상황을 판단하는데 근접하는 논지이다. 서기 476년 장수 왕이 강점( 强 占 )하면서 백제의 흔적을 송두리째 뽑아낸 버렸다지만 백제혼은 살아 있었 다고 한다. 또한 장수왕이 강점하였던 476년부터 551년까지 76년간 고구려 문화의 도 래( 到 來 )시래의 역사도 재조명하여야한다. 백제의 문화가 꽃피워졌던 그곳에 고구려의 문물이 밀물처럼 들어와 새로운 문화를 접복하였으리라. 백제 초창기 350년간 궁성보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37

위산성( 宮 城 保 衛 山 城 )으로서 역할과 실상을 확정하고 근초고왕이후에 105년간 백제의 마지막 궁성으로서의 남한산성에 대한 기록들을 중국, 일본과 동북아에 전하여오는 모 든 역사기록에서 채집하여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창출된 백제문화를 재현하고 역사를 바 로잡아야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에 많은 세계인들이 남한산성의 장구한 역사 와 찬란하였던 백제문화에 깊이 매료되어 수없이 찾아보게 될 것이다. 백제시대의 남한 산성의 역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막강하고 찬란한 군사문화와 예술을 창출한 백 제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었으며, 동경( 憧 憬 )의 대상지였던 것임을 세계만방에 알려주 어야 하는 것이다. 온조왕( 溫 祚 王 )의 사당이 있는 유일한 곳이 남한산성임을 알아야한다. 그것은 근초고 왕이 궁성을 남한산성으로 옮길 때, 온조왕의 사당을 새로 세우고 그 정신을 기려 백제 의 영원한 영혼이요, 정신적 지주로 각인( 刻 印 )하였기 때문에 후대에 와서도 온조왕의 사당을 남한산성에 세우게 된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청나라에 항복한 인 조시대만을 열거하면서, 백제의 495년간의 찬란한 역사를 알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남 한산성이 지닌 역사성과 찬란한 백제문화의 발상지등식이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은 백제개국에서 고려( 高 麗 ), 조선에 이르는 남한산성의 문화와 역사를 재조명하여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학자 ( 學 者 )와 국민 모두가 지혜( 智 慧 )를 모아 남한산성의 옛 위상 재정립 이라는 역사의 소 명을 받들어야 하는 것이다. 38 한동억

<참고문헌> 1. 정약용, 아방강역고( 我 邦 疆 域 考 ) 2. 이병수, 한국고대사연구( 韓 國 古 代 史 硏 究 ), 박영사, 1972 年 3. 이홍식, 한국고대사연구( 韓 國 古 代 史 硏 究 ), 신구문화사, 1971 年 4. 三 國 史 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CD-ROM 譯 註 5. 千 寬 宇 三 韓 의 國 家 形 成 下 韓 國 學 報 3, 일지사, 1976 年 6. 全 榮 來, 完 山 과 比 斯 伐 論,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75 年 7. 高 麗 史 誌 36 兵 馬 政 8. 太 白 山 史 庫 本 朝 鮮 王 朝 實 錄 影 印 冊 9.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0 號 城 南 地 域 王 室 文 化 의 硏 究, 城 南 文 化 院, 2003 年 10.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1 號 栗 里 마을의 口 碑 文 化 硏 究, 城 南 文 化 院 2004 年 11.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2 號 城 南 地 域 의 王 室 文 化 의 硏 究 Ⅱ, 城 南 文 化 院, 2005 年 12. 城 南 文 化 硏 究 第 17 號 城 南 地 域 의 歷 史 와 忠 節, 城 南 文 化 院, 2010 年 13. 城 南 文 化 叢 書 5 福 井, 太 平 마을지, 城 南 文 化 院, 2005 年 14.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7, 城 南 文 化 院, 2007 年 15.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8 突 馬 마을지( 下 ), 城 南 文 化 院, 2008 年 16. 城 南 鄕 土 文 化 叢 書 9, 城 南 文 化 院, 2009 年 17. 城 南 文 化 遺 跡, 城 南 文 化 院, 2005 年 18. 윤종준 編 著, 城 南 옛 이야기 韓 春 燮, 城 南 文 化 院, 2010 年 19. 城 南 文 化 遺 跡, 城 南 文 化 院, 2005 年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 39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최 영 희 (의정부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目 次 I. 머리말 II. 수락산 석림사 조성배경 1. 석림사 창건설화 2. 수락산과 서계 박세당 3. 석림사 중건 III.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1. 지장( 地 藏 )신앙 1) 대원본존 지장보살( 大 願 本 尊 地 藏 菩 薩 ) 2) 불교미술에 표현된 지장보살과 시왕 3) 불화에 표현된 지장변상( 地 藏 變 相 ) (1) 중음신( 中 陰 身 ) (2) 육도윤회( 六 道 輪 廻 ) 2. 명부전과 시왕 1) 명부전(지장전) 2) 시왕( 十 王 ) 3) 석림사 석조지장보살상 IV. 맺음말 집필자 : 최영희 의정부시 시정 40년사 편집위원, 의정부 문화원 이사, 국립중앙박 물관 전시유물 해설(도슨트) 자원봉사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41

Ⅰ. 머리말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매우 평범한 사실이지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죽은 이 에 대하여 될 수 있으면 예의를 다하고자 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 이유는 누구 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극복하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의 삶속에 서 매우 고통스러움을 느낄 때마다 지옥같다 는 말을 자주한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겪 는 교통지옥이나, 입시생들이 겪는 불안과 초조함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고통에서 입시 지옥이란 말이 생기도 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지옥의 모습은 사람이나 어떤 사회의 문화 전통에 따라서 갖가지 다 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지닌 앎의 내용과 정도에 따라서도 그 모습을 달리한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지난날의 지 옥모습은 황당무계하게 보일 때도 있고 유치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겉 으로 드러난 지옥의 모습에 담겨 있는 옛사람의 속뜻(상징성)을 헤아려야만 지옥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 지옥이란 말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쓰이지 않았으며, 황천( 黃 泉 ) 이란 고유한 말이 널리 쓰였다고 한다. 이 황천이란 개념은 황하의 황토층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두컴컴하고 쓸쓸한 곳을 의미하며,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이지 특별하게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아서 가는 곳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 지옥이란 어떤 곳인가. 사람 이 죽어서 가는 저승세계 중 가장 고통을 받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옥이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중생의 악한 마음, 지극한 이기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가 지 옥이라는 곳이다. 쉽게 말하면 자유로운 하늘의 세계와는 달리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의 무거운 업보가 땅 속 감옥인 지옥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관( 緣 起 觀 )에 의하면, 현재 우리들의 삶이란 무명( 無 明 )에서 비롯된 육도 ( 六 道, 혹은 육취라고도 한다), 즉 유정자( 有 情 者 )가 갖는 여섯 가지 삶의 형태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인간 세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분 명 이 세계에는 여섯 가지의 삶의 형태가 존재한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성 변 42 최영희

천 소멸의 과정을 겪듯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계( 天 界 ) 등 육도의 삶도 마치 수레바퀴 돌아가듯 서로 다양한 육신을 거쳐가는 윤회( 輪 廻 )를 되풀이한다. 마치 매트릭스의 세계처럼, 우리가 매일 부딪치며 지각하는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현실세계 를 인지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와 같은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는데 있다. 즉 현실처럼 보 이는 허상의 현실을 인식하고 진정한 현실을 자각( 自 覺 )하는 것이다. 윤회의 현실을 벗 어나는 지점, 그리고 시작되는 곳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그러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한 육도의 삶처럼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면 어떻게 전개되는 것일까 매우 궁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불교의 윤회관( 輪 廻 觀 )에 따른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아보고, 사찰 명부전(지 장전)의 불교미술품을 통해 지장보살과 명부시왕의 상징성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수락산 석림사 조성배경 1. 석림사 창건설화 석림사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수락산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계곡의 하단부 로 계곡의 북쪽 경사면에 접하여 동서방향으로 길게 석축을 만든 대지위에 도량이 조성 되었다. 사찰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봉선사본말사약지 에 조선중기 박세당 1) 이 매월당 김시 습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창건하였으며, 몇 년 후인 1676년(병진년) 7월에 유담화상이 화주가 되어 삼소각( 三 笑 閣 )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경기도불적자료집 1) 박세당( 朴 世 堂, 1629 1703) : 호는 서계( 西 溪 ). 조선조 실학파 학자.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 ( 博 物 學 )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 색경 이라는 농사서적을 저술하였음. 유교경전 중 대학, 중용, 논 어, 맹자, 서경에 대한 주해서를 집필한 사변록 을 저술, 주자의 사상과 대립하여 사문난적( 斯 文 亂 賊 )으로 낙인찍혀 삭직, 유배도중 사망했음. 저서로는 사변록( 思 辨 錄 ), 색경( 穡 經 ), 서계집 ( 西 溪 集 ) 등이 있음.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43

에 의하면 1671년(현종 12) 석현화상( 錫 賢 和 尙 )과 그의 제자 치흠( 致 欽 )이 석림암을 창 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1698년(숙종 24)에 대홍수로 유실된 절터에다 조정에 서 매월당 김시습을 모시는 사당으로 청절사를 세우고, 축원당으로 석림암을 복원하였 으며 1745년(영조 21)에 석림사로 개칭하였다. 박세당의 문집인 서계집 제8권 석림암기( 石 林 庵 記 )에는 창건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 게 서술되어 있어 소개한다. 수락산 석림암( 石 林 庵 )은 승려 석현( 錫 賢 )과 그 문도 치흠( 致 欽 )이 세운 암자로, 이 름은 내가 지었다. 수락산은 경성( 京 城 )에서 30리 동쪽에 자리하여 삼각산( 三 角 山 ), 도 봉산( 道 峯 山 )과 더불어 솥[ 鼎 ]발처럼 솟아 있다. 비록 깎아지른 형세는 두 산보다 조금 못하지만 수석( 水 石 )의 경치는 수락산이 으뜸이니, 이 산의 명칭은 이 때문에 얻어진 듯하다. 그러나 이름이 도리어 두 산에 가려져 세상에서 이 산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또한 이 산에 유람하러 오지 않는다. 수락산 동쪽에는 예전에 매월당( 梅 月 堂 )과 흥국사( 興 國 寺 ), 은선암( 隱 仙 庵 ) 등 몇 개 의 절이 있었다. 매월당은 곧 김열경( 金 悅 卿, 김시습)이 거처하던 곳인데, 세월이 오래 되어 이미 없어졌다. 열경은 이 산을 매우 좋아하여 동봉( 東 峯 ) 이라 자호( 自 號 )하였을 정도이다. 흥국사가 아주 컸으나 지금은 역시 없어지고, 단지 성전( 聖 殿 ) 이란 곳만 무 너지지 아니하여 승려 두셋이 살고 있을 뿐이다. 은선암은 후대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 런대로 온전하여 지금 16-17명의 승려가 살고 있다. 그러나 산 서쪽에는 유독 하나의 절도 없다. 서북쪽 봉우리 아래에 절터가 남아 있기는 하나 또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르 며 지금은 절이 없다. 내가 석천( 石 泉 )에 거처를 잡고 보니, 산 서쪽에 해당된다. 바위와 골짝이 그윽하고 시내와 폭포가 기이하여 경성으로부터 3-4십 리 사이 삼각산과 도봉산 안팎에 있으면 서, 세상에 명성을 독차지하여 사람들이 사모하고 구경하는 여러 샘[ 泉 ]과 골짝도 이곳 에는 견줄 수 없으니, 이는 수락산만의 가장 빼어난 경치가 될 뿐만이 아니다. 내가 홀 로 이곳의 경치가 몹시 빼어나다고 여겨 왔지만, 아쉽게도 아직까지 산을 빛내는 이름 나고 아름다운 가람이 없다. 그리하여 일찍이 은선암에 이르러 노승( 老 僧 )들과 얘기를 나누며 이를 매우 한스럽게 여겼는데, 그때 마침 석현이 곁에 있다가 묵묵히 생각하는 44 최영희

바가 있는 듯하였으니, 이미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듯하다. 오래 뒤에 그 문도(門徒) 치흠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지난날 선생의 말씀에서 석 현 스님도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병이 많아 몸소 할 수 없어서 저로 하 여금 절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단지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지 못했을 따름입니 다. 하였다. 몇 달 뒤 치흠이 또 와서 말하기를, 절터를 찾았습니다. 채운봉(彩雲峯) 서남쪽 산속으로, 직소봉(直小峯)과 향로봉(香爐峯)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명년 에 재목(材木)을 모아 일을 시작할 터이니, 선생께서는 기다려 주십시오. 하였다. 그해 가을 내가 통진 현감(通津 縣監)을 사직하고 떠날 때 남은 녹봉으로 그 비용을 조금 보태 주었는데, 한 해 뒤에 돌아오니 암자가 완성되었다. 두세 칸 띳집이 바위를 등지고 골짝을 향해 있어 한적하게 진속(塵俗)을 벗어난 정취를 자아내니, 참으로 아름 다운 곳이다. 그리하여 즉시 이름 하기를 석림암 이라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2. 수락산과 서계 박세당 서계 박세당이 석림사와 관계된 글을 그의 문집인 서계집 제7권에 남기고 있어 한 국고전종합DB에서 인용해 아래에 소개한다. 삼각산과 도봉산은 도성 근교의 우뚝한 산으로 수락산과 더불어 솥[鼎]발처럼 높이 솟아 있다. 그리하여 사방의 여러 산이 옷깃을 여미고 빙 둘러 향하고 있으니, 크고 작 은 산들이 모인 형상이 마치 아들 손자들이 모여 있는 것과 같다. 우뚝 솟은 형세로는 삼각산과 도봉산이 갑을(甲乙)을 다투고 유심(幽深)하고 기이(奇異)함으로는 동봉(東峯) 이 으뜸이다. 비록 함양(咸陽)을 누르고 있는 저 종남산(終南山)과 태화산(太華山)이나 낙양(洛陽)에 짝하고 있는 숭산(嵩山)과 소실산(少室山)인들 그 장엄하고 수려함으로 말 하면 수락산만 못할 것이다. 일찍이 몇몇 사람들과 수락산 정상에 올랐었는데, 초입에서는 구불구불 깊숙이 들어 가 마치 우물 속에 앉아 있거나 무덤 속에 떨어진 듯하고, 정상에 오르자 온 사방이 훤 하게 트여 마치 바람을 타고 신선이 된 듯 하였으니, 그야말로 인간사 또 하나의 즐거 움이었다. 성곽은 아련하고 집집마다 저녁연기 피어나며 강물은 구불구불 천 리를 달려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45

바다로 흐르며, 서남쪽으로는 운해가 자욱하고 동북쪽으로는 이내가 아득하여, 눈앞에 펼쳐지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경광이 발길을 따라 다른 것으로 말하면, 심목( 心 目 )으로 그 요체를 잡을 수 없고 그림으로 그 절경을 그려 낼 수 없으니, 또 어찌 우내( 宇 內 )의 아름다운 볼거리가 아니겠는가. 때는 마침 가을 경치가 저물어 강산이 맑고 쓸쓸한데 벼랑에는 붉은 단풍 시들고 연 못에는 누런 국화 떨어지니, 오싹하여 감회를 자아내고 처량하여 감상에 젖어든다. 더 구나 청한자[ 淸 寒 子, 김시습]의 구서( 舊 棲 )에는 등나무가 늙고 수목이 시들며 사람은 가 서 자취가 없는데, 서글프게 홀로 와 만 길 푸른 절벽을 마주하고 천고( 千 古 )에 남긴 자 취를 생각하노라니,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개연히 서글픈 감회에 젖어들게 한다. 밤에 선원( 禪 院 )에서 묵은 다음 아침에 부지( 鳧 池 )에서 물을 마시고 아쉬운 마음에 서성이며 차마 떠나지 못하는 듯이 하는 것은 인정이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산천이 그렇게 만드 는 것인가. 하산하여 시 약간 수를 지었다. 정사년(1677년, 숙종 3) 9월 그믐에 후서( 後 序 )를 쓰노라. 또한 서계집 제8권, 석림암( 石 林 庵 ) 상량문( 上 梁 文 ) 에는 누대가 신선의 거처와 비슷하니, 화려한 것은 한갓 업( 業 )만 지을 뿐이다. 쑥대가 족 제비의 길을 막고 서 있으니 2), 고고( 枯 槁 )함은 의당 인연을 따르기 마련이다. 한 줌의 띠풀을 덮는 것으로도 이미 충분하니, 오장기( 五 丈 旗 ) 3) 를 세울 일이 뭐가 있으리오. 이 에 암자를 짓기를 도모하니, 애오라지 여기에서 편히 쉬려 하노라. 여러 도인( 道 人 )들은 인세( 人 世 )를 떠나 물외( 物 外 )에 노닐도다. 청산( 靑 山 )과 녹수( 綠 水 )는 가는 곳마다 고향 아님이 없고, 곡방( 曲 房 )과 동궁( 洞 宮 )은 일평생 꿈속에서도 생각한 적이 없어라. 우연히 석천( 石 泉 )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노니, 금사( 金 沙 ) 4) 의 기이한 경치보다 못하지 않도 2) 쑥대가 있으니 : 장자 서무귀( 徐 无 鬼 )에 더구나 인적도 없이 명아주 잎이나 콩잎이 족제 비의 길을 막고 있는 먼 골짜기로 도망가 있는 사람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뻐할 것이 다. 라고 한 말이 보인다. 재인용 3) 오장기( 五 丈 旗 ) : 진( 秦 )나라의 아방궁( 阿 房 宮 )은 크기가 동서는 500보나 되고 남북은 50장이나 되 어서 위로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로는 5장( 丈 )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재 인용 4) 금사( 金 沙 ) : 금사는 인도( 印 度 )에 있는 아뇩달지( 阿 耨 達 池 )를 가리키는데, 금빛 모래가 가득하다고 한다. 46 최영희

다. 세계는 무궁한데 서천( 西 天 )의 영취산( 靈 鷲 山 ) 5) 을 늘 제일로 꼽고, 방역( 方 域 )은 구 별이 있는데 동토( 東 土 )의 선부봉( 仙 鳧 峯 ) 6) 은 지금 짝을 찾기 드물도다. 비록 탁석( 卓 錫 )의 옛 자취 7) 에 부끄럽긴 하지만 결사( 結 社 )의 고사 8) 를 따를 만하도다. 300척이나 높게 세운 징관( 澄 觀 )의 경영이 참으로 우습고 9), 어이하면 천만 칸을 얻을까 한 자미 ( 子 美 )의 돌올( 突 兀 )이 부러울 것 없도다 10). 시내의 구름은 방문으로 들어가고 산속의 아지랑이는 뜰에 가득하도다. 선지( 禪 枝 ) 11) 에는 뱁새가 잠시 편안히 깃듦을 기뻐하고, 기수( 祗 樹 )에는 녹원( 鹿 苑 )의 법륜( 法 輪 )을 빨리 굴림에 놀라도다. 12) 문득 파인( 巴 人 )의 속된 노래에도 불구하고 13) 부지런히 일하는 영장( 郢 匠 ) 14) 을 돕노라. 5) 영취산( 靈 鷲 山 ) : 불교의 성지( 聖 地 )로 불리는 인도에 있는 산인데, 부처가 이곳에서 다년간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6) 선부봉( 仙 鳧 峯 ) : 수락산에 있는 봉우리 이름이다. 7) 탁석( 卓 錫 )의 옛 자취 : 탁석은 석장( 錫 杖 )을 꽂는다는 뜻으로, 곧 석장을 날려 터를 잡은 양( 梁 )나 라 보지선사( 寶 志 禪 師 )의 고사를 가리킨다. 서주( 舒 州 )에 있는 잠산( 潛 山 )은 풍광이 매우 뛰어난 곳 이다. 보지선사와 백학도사( 白 鶴 道 士 )가 잠산의 가장 빼어난 산기슭에 서로 터를 잡으려고 다투다 가, 양 무제( 梁 武 帝 )의 주선으로 백학도사는 학( 鶴 )을 날려 그 자리로 보내고, 보지선사는 석장을 날려 보내어 먼저 그 자리에 도착시키는 자가 터를 차지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결과 보지선사의 석 장이 백학도사의 학보다 먼저 산기슭에 날아가 꽂혔다고 한다. 神 僧 傳. 재인용 8) 결사( 結 社 )의 고사 : 결사는 원래 승려들이 단체로 모여서 수행하는 것이다. 혜원법사는 동진( 東 晉 ) 의 명승( 名 僧 )이다. 혜원이 여산( 廬 山 ) 동림사( 東 林 寺 )에 흰 연꽃을 심고 혜영( 慧 永 ) 유유민( 劉 遺 民 ) 뇌차종( 雷 次 宗 ) 등 18명과 백련사( 白 蓮 社 )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사영운( 謝 靈 運 ) 도잠( 陶 潛 ) 육수정( 陸 修 靜 ) 등도 참여하였다. 호계( 虎 溪 )는 동림사 앞에 있는 시내로, 혜원법사가 손님을 전송할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호랑이가 울었다 한다. 하루는 도잠 육수정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지나 호랑이가 울자,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고사가 있다. 9) 300척이나 우습고 : 한유( 韓 愈 )의 송승징관( 送 僧 澄 觀 ) 시에 불에 타고 물에 휩쓸려 아무것 도 없는 터에 우뚝이 삼백 척이나 높게 솟았도다. 火 燒 水 轉 掃 地 空 突 兀 便 高 三 百 尺 라고 한 구 절이 보인다. 韓 昌 黎 集 卷 7 10) 어이하면 없도다 : 자미는 두보( 杜 甫 )의 자( 字 )이다. 두보의 모옥위추풍소파가( 茅 屋 爲 秋 風 所 破 歌 ) 시에 어이하면 너른 집 천만 칸을 얻어 천하에 가난한 선비들 크게 비호하여 모두 즐거운 얼굴로 풍우에도 움직이지 않고 산처럼 편안히 있을런가. 安 得 廣 厦 千 萬 間 大 庇 天 下 寒 士 俱 歡 顔 風 雨 不 動 安 如 山 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杜 少 陵 詩 集 卷 10 11) 선지( 禪 枝 )에는 기뻐하고 : 선지는 절에 있는 나뭇가지라는 뜻이다. 장자 소요유( 逍 遙 遊 ) 에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나무 한 가지에 불과하다. 鷦 鷯 巢 於 深 林 不 過 一 枝 라고 한 말이 보이는데, 이는 곧 석림암이 승려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12) 기수( 祗 樹 )에는 놀라도다 : 기수는 기원정사( 祇 園 精 舍 )를 말하는데, 인도 중부 마가다국 사위 성( 舍 衛 城 ) 남쪽의 기수급고독원( 祇 樹 給 孤 獨 園 )에 있는 절로, 부처와 그 제자들이 설법하고 수도 할 수 있도록 수달장자( 須 達 長 者 )가 세웠다고 한다. 녹원( 鹿 苑 )은 녹야원( 鹿 野 苑 )을 말하는데, 석 가가 성도한 지 삼칠일( 三 七 日 ) 만에 처음으로 법륜( 法 輪 )을 굴려 아야교진여( 阿 若 憍 陳 如 ) 등 다섯 비구( 比 丘 )를 제도한 곳이라고 한다. 이는 석림암이 설법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13) 파인( 巴 人 )의 불구하고 : 파인은 수준이 낮은 시를 가리킨다. 송옥( 宋 玉 )의 대초왕문( 對 楚 王 問 )이란 글에 고사가 보이는데, 어떤 사람이 영중( 郢 中 )에서 처음에 하리파인( 下 里 巴 人 )이란 노래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47

삼가 바라건대, 상량(上梁)한 뒤에 산 빛은 더욱 푸르고 물빛은 더욱 맑으리라. 소나 무 사립문이 늘 닫혀 있으매 곧 상천축(上天竺) 하천축(下天竺)으로 옮겨 가고, 초동의 노래가 서로 화답하매 문득 대승경(大乘經) 소승경(小乘經)을 읽으리라. 맹수와 독충은 모두 멀리 사라지고, 백족(白足)과 적자(赤髭)15) 는 늘 탈이 없으리라. 두 재(齋)만으로도 거처하기 넉넉하리니, 천불(千佛)이 이곳을 보호하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3. 석림사 중건 1950년 6 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의정부 지역 일대 모든 목조건물이 대부분 전소(全 燒)되었는데 석림사 또한 마찬가지다. 1960 년이 되어서야 허허로운 빈터를 찾아낸 비 구니 상인(相仁)과 상좌 보각(寶覺)이 인연 이 된 이곳에 중창의 원을 세우고 수년간 근고(勤苦)한 끝에, 극락보전 38평과 칠성 그림 1. 수락산 석림사 큰법당 각 4평, 독성각 3평. 요사 2동 창고 등을 신축하고 법당 앞에는 오층석탑을 건립하였다. 그 후 비구니 상인은 1973년에 법랍(法 를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는데, 양아해로(陽阿薤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으며, 양춘백설가(陽春百雪歌)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다. 이와 같이 곡조가 높을수록 그에 화답하는 사람이 더욱 적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서계가 하찮은 재주에도 불구하고 상량문을 지음을 말한다. 文選 卷45 14) 영장(郢匠) : 영장은 기량이 훌륭한 목공을 가리킨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영(郢) 땅의 사 람이 코끝에 백토(白土)를 파리 날개처럼 묻혀 놓고 장석(匠石)을 시켜 깎아 내게 하였다. 장석이 바람을 일으키며 도끼를 휘둘러 마음대로 깎아 냈는데도 코를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영 땅의 사 람도 전혀 동요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라고 하였다. 15) 백족(白足)과 적자(赤髭) : 모두 고승(高僧)을 가리키는 말이다. 백족은 위(魏)나라의 승려 담시(曇 始)로, 발이 얼굴보다 깨끗하였다고 한다. 비록 흙탕물 속에 맨발로 다녀도 발이 전혀 더러워지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백족화상(白足和尙) 이라고 불렀다. 神異下 釋曇始 적자 는 천축(天竺)의 불타야사(佛陀耶舍)로 수염이 붉었다고 한다. 비파사(毗婆沙) 를 잘 해설하였 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적자비파사(赤髭毗婆沙) 라고 불렀다. 高僧傳 譯經中 佛陀 耶舍 48 최영희

臘 ) 39세, 세수 78세로 세연( 世 緣 )을 다하고, 뒤를 이어 주지가 된 비구니 보각은 1979 년 봄부터 이듬해 10월까지 퇴락한 요사 등 건물을 폐합하고 35평의 적묵당( 寂 默 堂 )을 신축하였으며, 전기와 전화를 가설하고 협소했던 진입로를 확장하여 포장하는 한편, 계 곡의 호안축대를 축성하여 석림사 도량을 확장하여 정리하고 미화하는 등 불사에 전념 하였다. 근래에는 큰 법당 중창불사도 완공하였으며, 그 뒤쪽에 야외 지장전을 조성하 고 거대한 석조지장보살상( 石 造 地 藏 菩 薩 像 )을 조성하였다. 야외 지장전은 산록에 기대어 석담을 쌓고, 석담벽면에는 천녀들과 구름을 부조하였 다. 그리고 석담 앞 단에는 지장보살 양옆에 깜찍한 동자상, 지장삼존인 도명존자와 무 독귀왕을 비롯하여 명부시왕( 冥 府 十 王 ), 인왕상을 삥 둘러 안치하여 완벽하게 지장전(명 부전)을 조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수도권 전철 7호선 종착역인 장암역 1번 출구를 빠져나와 주차장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서계고택 안내 팻말이 보인다. 이곳을 지나 계곡을 따라 쭉 오르다보면 왼편으 로 노강서원( 鷺 江 書 院 ) 16) 이 있고, 조금 더 오르면 석림사 일주문이 눈에 띤다. 일주문 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작은 규모의 주차장이 있으며 오른편으로 수락산 등산로와 갈 라진다. 그 주차장 위편에 있는 범종각에는 범음 ( 梵 音 )을 전하는 불전사물( 佛 殿 四 物 )이 보인다. 불전사물이란 우리나라 사찰에서 아침저녁 예불 ( 禮 佛 ) 할 때에 사용하는 네 가지 기본 악기인 의식구를 말한다. 범종( 梵 鐘 )은 본래는 대중에게 시간을 알리는 그림 2. 석림사 범종각 도구로 사용하여 왔으나 예불할 때에 범종을 치 면서 모든 지옥중생이 이 종소리를 듣고 깨우침 을 얻도록 원하게 된 것이다. 범이란 바로 우주만물이며 진리이고 맑고 깨끗함이며 한 없이 넓고 크고 좋다는 뜻이다. 종송( 鐘 誦 )을 하는 이유는 미몽에 빠진 중생의 깊은 잠 16) 노강서원( 鷺 江 書 院 ) : 조선 숙종 때 문신인 박태보(1654 168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 박태보는 박세당의 차남으로 호남 암행어사, 파주 목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인현왕후의 폐위 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는 도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학문에 도 깊고 성품도 강직한 분으로 알려졌으며 죽은 뒤에 영의정에 임명 되었으며, 시호는 문열이다.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49

을 깨워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극락세계의 장엄을 일러주고 귀의 발원하도 록 하는 것이다. 법고( 法 鼓 )는 불법을 북에 비유하여 법을 설하는 것을 북을 울린다고 한다. 이 말은 부처님의 교법이 널리 세간에 전하는 것을 북소리가 널리 퍼지는데 비유한 것이며, 교 법이 중생의 번뇌를 없애는 것이 마치 진치고 있던 군대들이 전진하라는 북소리가 울리 면 적군을 무찌르는데 비유한 것이다. 또 북을 치는 뜻은 축생들의 영혼을 위하여 법고 를 친다고 한다. 목어( 木 漁 )는 나무를 깎아서 물고기 생긴 모양을 새겨 그 속을 비게 만들어서 송경할 때와 그 밖의 불사( 佛 事 )에 치는 것이다. 목어는 나무로 만든 일종의 타악기로서 목탁 의 원형이며, 물고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물고 기와 같이 항상 정진하라는 의미와 함께 물속에 사는 중생들의 제도를 기원하는 것이 다. 운판( 雲 版 )은 평평한 금속판을 말하는데, 그 모양이 뭉게구름 같아 구름의 판 이란 뜻의 운판이 되었다. 운판은 선종에서 제당이나 부엌에 달고 대중에게 공양시간을 알리 던 기구이다. 운판을 치는 뜻은 공중에 있는 고혼과 날아다니는 조류계( 鳥 類 界 ) 중생의 이고득락과 해탈을 위하여 친다고 전해오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 네 가지 악기를 한 묶음으로 하여 불전사물이라 전해져 오고 있다. 한편, 석림사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의 현판이 큰법당 이라고 한글로 되어 있다. 이곳은 예전 극락전 자리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 지붕의 목조건물이다. 주지인 비구니 보각스님이 수년전에 콩 50가마씩 삶아 메주를 만 들어서, 신도들에게 팔아 법당을 지을 종잣돈을 만들고, 거기에다 십시일반으로 모은 보시금으로 큰 법당을 중측하였다고 한다. 큰 법당의 아래층은 시멘트 골조이고 위층은 목조건물로 화려하고 장엄하다. 일반적으로 법당의 출입문의 향이 남향인데 비해 이곳 은 드물게 서향이며, 법당의 본존불도 서향으로 되어있는 것은 배산임수의 산세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큰 법당안의 후불탱화는 모두 목각탱으로 조성되어있다. 일반 적으로 후불탱화는 한지( 韓 紙 )나 헝겊(마, 견)인데 비해 석림사는 드물게 모두 나무로 조각되어 새로운 다른 느낌을 준다. 50 최영희

큰 법당 서쪽에 적묵당( 寂 默 堂 )이 있고, 동쪽으로 잘 다듬어진 돌계단 을 오르면 석조지장보살과 명부시 왕을 모신 야외 지장전이 조성되어 있어 눈에 확 들어온다. 지장전 가 운데는 팔각형의 단상위에 수백명 의 합장한 비구상( 比 丘 像 )들이 조성 되어있어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야외지장전 옆에는 오층석탑이 그림 3. 석림사 지장전 조성되어 있으며 그 옆에 맞배지붕의 단촐한 진영각( 眞 影 閣 ) 17) 이 보이고, 그 위쪽으로 는 우리나라 전통신앙이 불교에 습합되어 사찰에서 가장 위쪽에 조성되는 칠성각( 七 星 閣 ) 18) 과 산령각( 山 靈 閣 ) 19) 이 한 전각 안에 나란히 조성되어 있어 아늑한 기분이다. Ⅲ.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1. 지장( 地 藏 )신앙 신앙이란 종교적인 것에 관한 신념을 말한다. 즉, 종교적인 이상에 자기 자신을 바치 는 실천적 태도, 또는 신 불적( 神 佛 的 )인 것에 대한 안심( 安 心 )과 신뢰의 심정을 말한 다. 또한 신앙은 삶과 죽음의 벼랑 끝에 선 인간이 생사를 초월해서 영원한 것에 몸을 17) 진영각( 眞 影 閣 ) : 사찰의 역사 등과 관련하여 커다란 업적을 남긴 역대의 스님들의 영정이나 존상 을 모시는 곳. 18) 칠성각( 七 星 閣 ) : 칠성 이란 북두칠성을 일컫는 것으로, 사찰에 칠성을 모시게 된 것은 중국의 도 교사상이 불교와 융합되어 나타난 현상 때문이다. 도교에서는 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맡고 있 다고 하여 칠원성군 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칠성여래 로 모시고 있다. 19) 산령각( 山 靈 閣 ) : 산령 은 산신 과 같은 말로 우리나라 사찰에서 산신을 모시는 것은 민간의 토속 신앙이 불교에 융합되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찰이 산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 아 일종의 외호신중으로 산신령을 모시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 민간에서는 산에 사는 영물로 호랑 이를 산군으로 모시기 때문에 산신은 언제나 호랑이를 거느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51

맡기는 근거가 되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극히 주체적이며 과학적인 비판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 있다. 때문에, 적어도 신앙에 있어서는 미신( 迷 信 )과 정신( 正 信 )의 개념 규정이 곤란하다. 이를테면, 원시종교의 토템신앙 등을 과학적인 입장에서 비판한 다면 미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단순히 미신이라고 일 축해 버릴 수만은 없는 그 어떤 근원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신앙이란 삶과 죽음을 넘어 저 영원한 것에 관계된 심정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신앙이란 말 대신 신심( 信 心 )이라는 말을 쓴다. 즉 신심이란 부처의 가르 침을 믿는 마음 을 뜻한다. 그래서 불교신앙의 특성은 신앙의 대상인 한 부처(=석가모 니)를 놓고 그 기능에 따라 다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원시 근본불교 시 대에는 단순히 명상의 지도자였던 부처가 대승불교 시대로 접어들면서 다음의 네 가지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다. 1 구제성자의 형식을 빌어 관세음보살로, 2 내세 인도자의 형식을 빌어 아미타불로, 3 재림자 메시아의 형식을 빌어 미륵불로, 4 인간 성자의 형식을 빌어 지장보살로. 이 네 가지 신앙은 상호 충돌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 상호보충적이며 상호관통적인 성질의 것이다. 즉, 석가모니부처 라는 하나의 절대적 대상을 네 가지 입장에서 조명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 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신앙만 갖게 되면 나머 지 세 개의 신앙을 동시에 갖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지장신앙이란, 첫째로 지장보살을 믿고 따르는 신앙을 말하며, 둘째는 망자( 亡 者 )의 천도를 위해 저승의 주재자인 지장보 살에게 기원을 드리는 신앙을 말한다. 결국 지장보살이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 생들을 구제해 주는 성자인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지장신앙은 원래 힌두교의 지신( 地 神 ) 신앙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힌두교의 지신신앙( 地 神 信 仰 )이 불교에 들어와 대승불교 시대가 되면서 지장보살이라는 고뇌하는 인간성자의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지장신앙은 일찍이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 眞 表 律 師 )의 신앙에 의한 기록 을 살필 수 있고, 고려시대 이후에는 명부시왕신앙( 冥 府 十 王 信 仰 )과 더불어 크게 성행 52 최영희

하여 많은 조상의 예를 남기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불화, 조각 등이 풍성하게 만들어져 오늘에 지장화( 地 藏 畵 )나 지장상( 地 藏 像 )이 상당수 전해지고 있으며, 주로 명부시왕신앙 과 관련하여 지장신앙이 전개되었다. 일반적으로 지장신앙은 아미타신앙에 비하여 더욱 민주적이고 서민신앙으로서의 특징 을 지닌다. 즉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에 대한 구제자이며 인간의 관심을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시킬 뿐 아니라 슬픔에서 기쁨으로 전환시키는 보살로 신앙되어졌다. 거기에다 지 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 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오늘도 중생을 위해 헌신하는 보살이다. 다시 말해서, 지장보살 은 석가모니부처가 열반한 후 미래불인 미륵불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육도( 六 道 )를 윤 회하면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해준다는 대원력의 보살인 것이다. 따라서 지장보살은 사람들이 죽은 후 지옥의 시련에서 구해주는 것으로 신앙되 어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 일본 등에서 특히 민간인들의 깊은 믿음으로 신앙되어졌 다. 이러한 지장보살은 흔히 삭발을 한 채 지팡이나 지혜를 상징하는 보배구슬을 든 형 상을 한 경우가 많은데, 특히 지옥중생들의 제도와 관련하여 명부전( 冥 府 殿 )이나 지장 전( 地 藏 殿 )의 본존으로 모셔지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세음보살과 함께 아미타부 처의 옆에 모셔지기도 한다. 사후의 세계는 인과응보( 因 果 應 報 )의 세계이다. 고뇌를 안고 죽어간 사람들은 죽은 후에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고통인 것이요, 여 기에 산 자에 의한 죽은 자의 신앙이 있게 된다. 지장보살은 이렇게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고통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지장신앙의 한 형태인 것이다. 1) 대원본존 지장보살( 大 願 本 尊 地 藏 菩 薩 ) 지장보살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성불을 포기한 대원의 본존이다. 모든 보살들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 생( 上 求 菩 提 下 化 衆 生 )을 추구하지만 지장보살만은 상구보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누구보다 빼어난 자비의 힘과 지혜를 갖추었지만, 결코 부처가 되는 데 연연해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53

하지 않는다. 지장보살의 관심은 중생의 해탈에만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지장보살의 근본 서원( 誓 願 ) 20) 에는 그 어떤 보살의 서원도 따르지 못한다. 서원중의 서원, 가장 근 본이 되는 원( 願 ), 모든 보살과 부처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본원( 本 願 ) 으로 가 득 차 있는 분이 지장보살이다. 대승의 보살이 소승의 수행자와 다른 점은 하화중생( 下 化 衆 生 )에 있다. 나보다 못한 중생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대승보살의 특징이요, 이 하화중생( 下 化 衆 生 ) 이야 말로 보살을 있게끔 하는 근본인 것이다. 만약 보살이 하화중생을 버리고 상구보리만 추구한다 면, 그들에게는 이미 보살이라는 칭호가 붙을 수 없다. 그리고 하화중생을 도외시하는 소승의 수행자라면 아라한( 阿 羅 漢 )이나 벽지불( 壁 支 佛 ) 21) 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뿐, 부처 의 경지 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신의 성불을 포기하고 하화 중생, 중생의 성불만을 고집하는 지장보살이야 말로 대원의 근본스승, 대원본존 이라고 칭하지 그림 4. 석림사 석조지장보살상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보살이다. 지장보살본원경 촉루인천품( 囑 累 人 天 品 )에서 석가모니불은 지장보살이 갖고 있는 불가사의한 공덕( 功 德 )에 대해 찬탄한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지장 보살의 위대한 공덕은 모두가 사바세계의 중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삶 은 어떠한가? 우리의 인생은 인과응보( 因 果 應 報 )의 굴레에 얽매어 있다. 악한 씨를 심 으면 고( 苦 )의 과보를 받고, 선한 씨를 심으면 낙( 樂 )의 열매를 거둔다. 한량없는 과거 의 생애를 살아오면서 몸[ 身 ]과 말[ 語 ]과 뜻[ 意 ]으로 지어온 바에 따라 순간순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 業 )이라고 한다. 업에 따라 20) 서원( 誓 願 ) : 보살이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원망( 願 望 )의 성취를 맹세하는 일을 말한다. 21) 벽지불( 壁 支 佛 ) : 부처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도를 깨달아 성불한 소승의 부처를 말한 다. 54 최영희

중생은 윤회하고, 지은바 업( 業 )이 행복과 불행을 좌우한다고 한다. 중생은 결코 인과응보의 현실, 정해진 업을 면하기 어렵다는 정업난면( 定 業 難 免 ) 의 영역을 뛰어넘지 못하는 업덩이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지장보살의 이름 아래에 서는 정업난면의 업설( 業 說 )이 적용되지 않는다. 중생의 가장 무거운 죄업이 만들어낸 지옥조차 지장보살의 자비 앞에서는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지장 보살을 향하면 지장보살과 하나가 되고, 모든 업은 지장보살의 크나큰 본원력에 의해 녹아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장보살의 본원력이 끝없는 용서요, 사랑이기 때문이다. 셋째, 말세중생의 행복과 파지옥( 破 地 獄 )을 행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로부터 부촉( 付 囑 )을 받았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부터 미 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수많은 분신을 육도에 나타내어 일체중생을 교화해 줄 것을 당부 받은 것이다. 지장보살은 매일 아침 선정( 禪 定 )에 들어 중생들의 요구를 살피고 구원의 손길을 뻗 친다. 이제 남은 것은 중생의 참회뿐이다. 그래서 지장신앙에는 지심참회( 至 心 懺 悔 )가 뒤따른다. 지심참회란 우리가 다생( 多 生 )에 지은 죄업을 무조건 참회하는 것으로, 보통 의 기도는 자신이나 가족의 행복 등 그 어떤 목적을 염원하며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 나 지심참회는 그 어떤 자비에 연연해하지 말고,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다. 이것이 참다운 참회이다. 모든 업장( 業 障 ), 모든 이기심, 그 어떤 모순도 녹아내린 다. 비록 죄업이 가득 찬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장보살의 원력과 자비를 생각하며 지심 참회하면 그 사람은 곧 지장보살의 분신 중 하나가 되며, 그들이 바라는 모든 소원 또 한 지장보살의 원력 속에서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지장보살의 파지옥( 破 地 獄 )을 생각해보자. 원래 지옥이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중생의 악한 마음, 지극한 이기주의가 만들 어낸 새로운 세계가 지옥이다. 자유로운 하늘의 세계와는 달리 인간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무거운 업보가 땅 속 감옥인 지옥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옥은 한없는 고통 의 세계이다. 그 고통은 평범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아니,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불행의 양상을 모아놓은 곳이 지옥일 수도 있다. 그 지옥 속으로 기꺼이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55

뛰어들어 고통 받는 지옥 중생을 남김없이 구하고자 하는 분이 바로 지장보살인 것이다. 지장보살은 지옥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그곳으로 들어가는 중생을 못 들어가도록 막는 다. 때로는 염라대왕의 몸으로, 때로는 지옥졸( 地 獄 卒 )의 모습을 나타내어 고통 받는 지 옥중생에게 설법한다. 때로는 지옥 그 자체를 부수어서 모든 지옥가족을 천상이나 극락 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탐욕과 분노의 어리석음이 중생과 함께 하는 한, 지옥은 계속 생겨난다. 그리 고 지옥이 있는 이상 지장보살은 지옥을 떠나지 않는다. 지장보살은 수많은 분신들을 지옥의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고통 받는 중생의 해탈은 물론, 그릇된 마음의 중생을 교 화하고 영원히 지옥을 없애고자 잠시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지장보살의 자비와 원력은 파지옥 에만 이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장보살은 현세의 행복과 내세의 안락을 함께 보장하며, 나아가 뭇 생명 있는 자들을 성불토록 하여 윤회하는 세계자체를 없애고자 하는 파사바의 보살 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원력과 자비를 담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윤회를 벗어나 적멸위락( 寂 滅 爲 樂 )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 장신앙의 참뜻이며, 지장보살이 존재하는 진정한 까닭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불교미술에 표현된 지장보살과 시왕 지장보살의 원어는 끄시티가르바Ksitigarbha 이다. 이 가운데 끄시티Ksiti 는 땅에 머물다 는 뜻이며 가르바garbha 는 내포, 또는 함장( 含 藏 )의 뜻으로서 저장고 또는 창 고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 두 단어를 합치면 다음의 뜻이 된다. 땅속에 감춰져 있 는 것 이란 뜻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이 육체의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불변성( 不 變 性 )인 여래장( 如 來 藏 )을 일컫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 如 來 藏 ]은 아무리 번뇌 망상의 시궁창에 묻혀 있다 해도 결코 더럽혀지거나 변질 되지 않는다. 우리의 이 불변성으로서의 여래장을 의인화한 것이 바로 지장보살인 것이 다. 지장보살의 모습은 대개 머리를 깎은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아직 개 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우리 자신의 여래장을 상징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지 56 최영희

장보살은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부처의 속성[ 佛 性 ] 그 자체의 내적 활동을 객관화시킨 것이다. 동시에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의 인간적 채취를, 고뇌하는 인간성자의 형식 을 빌어서 구체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지장신앙은 원래 힌두교의 지신신앙( 地 神 信 仰 )에서 유래되었 다고도 한다. 힌두교의 이 지신신앙이 불교에 들어와 대승불교시대가 되면서 지장보살 이라는 고뇌하는 인간성자의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지장보살은 관세음 보살의 대비력( 大 悲 力 )을 한층 심화시켜 인간의 차원으로까지 끌어내린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지장보살은 명부( 冥 府 )의 주불로서 존재하지만, 때로는 염라대왕의 모습으로 화현( 化 現 )되어 변신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지장보살은 대부분 불화( 佛 畵 )에서 살펴볼 수 있으나 간혹 이곳처럼 불교조각품으 로 표현되기도 한다. 보살( 菩 薩 )은 일반적으로 화려한 보관을 쓰고 몸에는 화려한 영락( 瓔 珞 )으로 장식하지만, 지장보살은 중생제도의 서원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 해 중생과 친근한 모습인데, 이는 안으로 보살의 행을 숨기고 밖으로는 성문의 모습 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불 화에서 보는 지장보살은 한 손에는 석장( 錫 杖 ) 22) 을 다 른 한 손에는 보주( 寶 珠 )를 든 성문비구( 聲 聞 比 丘 )와 같 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때로는 두건을 쓴 경우도 있는 데,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천을 두르고 귀 뒤로 하여 어깨까지 내리거나,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이마 부근 에서 끈 모양의 천으로 양쪽 귀 앞에서 묶어 두 가닥을 앞으로 내린 모습이다. 특히 이러한 두건을 쓴 지장보 그림 5. 두건형 지장보살도, 일본 네즈미술관소장 22) 석장( 錫 杖 )은 원래 불상( 佛 像 )에서 행도걸식( 行 道 乞 食 )을 위하여 혹은 보행( 步 行 ) 할 때 땅위의 미 물( 微 物 )들이 밟히지 않도록 소리를 내어 일깨우는 데 사용하던 것으로, 지장( 智 杖 ) 또는 덕장( 德 杖 )이라고도 부른다. 형태는 윗부분이 금속으로 된 육각형의 나무지팡이로서, 윗부분에 고리가 달 려 있어 흔들면 이 고리들이 서로 부딪혀 주석( 朱 錫 )같은 소리를 내기 때문에 석장( 錫 杖 )이라고 한다. 석장은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신분에 따라 고리의 수가 다른데, 탁발승( 托 鉢 僧 )은 사제( 四 諦 )를 상징하는 사환장( 四 環 杖 )을, 보살은 육바라밀을 상징하는 육환장을, 그리고 부처는 12연기 를 상징하는 12환장을 드는 것이 상례이다.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57

살은 중국 본토나 일본에서는 그 예가 없고, 둔황이 나 투루판 등 중앙아시아 지역에 일부 보이나 우리나 라의 두건형 지장보살도와는 그 모습이 다르다. 또한 우리나라의 지장보살상중에는 지장보살의 보편적 지 물인 석장과 여의주 대신 법륜을 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불교미술품으로 표현되는 지장보살의 상형( 像 形 )은 보살이면서 성문비구형( 聲 聞 比 丘 形 )을 지닌다는 특징 이 있다. 즉 일반 보살상이 갖는 보관과 영락 등을 지니지 않는다. 아무런 장식이 없고 오직 가사만 착 용할 따름이다. 때로는 왼쪽 손에 보주( 寶 珠 )를 들고 오른쪽 손은 여원인( 與 願 印 )을 한다. 입상( 立 像 )의 경 우에는 석장( 錫 杖 )을 들고 있기도 한다. 지장보살의 상형에 대해 우리들이 친근감을 갖게 되는 것은, 그 너무나 인간적인 비구형의 모습에서 친근한 매력을 그림 6.성문비구형 지장보살도, 미국매트로폴리탄 박물관소장 느끼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도 민중의 고통 슬픔 절망에 기쁨과 희 망을 안겨주는 감정을 갖게 하는 보살이지만, 지장보살은 보다 더 민중의 곁에 있어 친 근감을 불러일으킨다. 즉 육도중생이 있는 곳마다 그 모습을 나타내고 어디든지 거리낌 없이 가서 민중의 아픔[ 苦 ]을 구하고 행복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모습을 여래형보다는 보살형, 보살형 보다는 성문비구형으로 점차 스스로를 낮추면서 자비행을 다하는 모습으로 조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지장보살도나 지장시왕도에는 두건( 頭 巾 )을 쓴 지장보살의 형상 이 많이 나타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주로 맨머리 삭발비구형의 지장보살상이 일 반적이다. 지장보살이 손에 들고 있는 지물( 持 物 )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에서 그 의미와 신통력에 대해 설하고 있다. 지장의궤( 地 藏 儀 軌 ) 에 따르면 왼손에는 보주( 寶 珠 )를 지 니고 오른손은 석장을 짚고 천엽( 千 葉 )의 청련화( 靑 蓮 花 )에 안주( 安 住 )한다고 하며, 이 58 최영희

러한 의궤에 따라 단독의 지장보살상 그림이나 지장시왕도, 그리고 시왕탱화 속에서 그 도상적인 특징이 대체로 지켜지고 있는 편이다. 물론 선운사의 금동지장보살상과 같이 법륜( 法 輪 )을 들고 있거나 또는 아무런 지물( 持 物 )도 지니지 않은 채 수인( 手 印 ) 짓고 있거나 혹은 두 가지 지물 중 한 가지만 지니고 있는 경우, 또 왼손 오른손의 지물이 바뀌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한손에는 석장을, 다른 한 손에는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형 상이 일반적이다. 특히 명부전의 조각상이나 불화상의 경우에는 지장보살의 협시로 알 려져 있는 도명존자가 석장을 대신 들고 있는 그림도 많이 발견된다. 석장 중에서도 지 장보살은 특히 육환장( 六 環 杖 )을 들고 있는 것이 상례인데, 이 육환장은 여러 가지 기 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는, 육바라밀( 六 波 羅 蜜 )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사의 고해를 건너 이상적인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여섯 가지 방편 23) 을 이른다. 둘째로, 이러한 육환장의 땅을 치는 소리는 주술적인 기능도 갖고 있어서 사악한 요 소를 물리치며 법의 수호자적인 역할 24) 을 한다고 한다. 보주( 寶 珠 )는 보통 구슬모양으로 되어 있고 여의보주(Cintamani)라고도 하는데, 뜻하 는 대로 여러 가지 욕구가 충족되게 하는 기능을 지닌다. 이 보주를 지니면 한빙지옥 ( 寒 氷 地 獄 )에서는 맹화( 猛 火 )를 뿜어내 한기를 상쇄시키고, 확탕( 鑊 湯 )지옥에서는 찬 기 운을 내뿜어 뜨거운 것을 차게 하는가 하면, 어둠 속에서는 광명을 내어 시방세계를 두 루 볼 수 있도록 한다고 한다. 보통 진주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보주는 그 찬란함과 화려함으로 인해 부처의 진리와 법( 法 )의 진실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대지도론( 大 智 度 論 ) 에서는 보주는 용왕(Naga)의 뇌( 腦 )에서 나온 것으로 그것을 지니면 모든 악과 독 23) 1 단나바라밀 : 자비로 널리 사랑하는 행위(보시) 2 시라바라빌 : 불교도덕에 계합하는 행위(지 계) 3 찬뎨바라밀 : 여러 가지로 참는 것(인욕) 4 비리야마라밀 : 항상 수양에 힘쓰고 게으르지 않는 것(정진) 5 선나바라밀 : 마음을 고요하게 통일하는 것(선정) 6 반야바라밀 : 삿된 지혜와 나쁜 소견을 버리고 참 지혜를 얻는 것(지혜) 등 이러한 육바라밀은 불가에서 일반 중생의 수행을 위한 6종의 바라밀법으로도 달려져 있다. 24) 이러한 역할은 특히 티베트 밀교( 密 敎 )에서 강조되어 있어 티베트 불교미술 도상에서는 중요한 상 징적 지물의 하나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석장의 형태가 주로 인두장( 人 頭 杖 )으로 되어 있어 특 기할 만한 데, 때로는 해골을 여러 개 꿴 듯한 형상의 석장이 등장하는가하면 상단에 하나의 인 두상( 人 頭 像 )을 표현한 석장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의 기능은 마치 염라왕청의 업경대와 같이 죄인의 생전 선악업을 그대로 비추어 선인을 표시하는 경우에는 백련화( 白 蓮 花 )로, 악인을 표시하 는 경우에는 화염( 火 炎 )을 내뿜는 식으로 변한다고 한다.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59

으로부터 보호받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모든 지상에서의 소원이 이루어진다. 라 고 보주의 덕( 德 )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편, 불화에 표현된 시왕( 十 王 )은 중국의 전통적인 관료체계를 지하 명부세계에 그 대로 적용하여 지옥세계에도 지상세계와 동일한 지배체계를 부여함으로써 최고의 권위 를 상징하는 왕의 칭호를 빌어 재판의 권위를 나타내며, 그 권속들도 일정한 위계질서 를 지닌 것으로 설정된다. 판관은 시왕의 재판을 보조하는 인물로서 보통 검은 복두( 幞 頭 ) 25) 를 쓴 하급관리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손에 명부나 두루마리를 들고 서 있거나 혹 은 두루마리를 펴들고 읽는 모습, 또 때로는 망자의 유족이 추복( 追 福 )의 공덕을 쌓는 것을 왕에게 상봉( 上 奉 )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들은 시왕 좌우에 일반 권속 들과 함께 묘사되는가 하면, 탱화의 하단 지옥장면에도 빠짐없이 등장하여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붓으로 죄인의 행위에 따른 시왕의 판결내용을 적거나 그것을 낭독하는 모습 으로 표현되곤 한다. 뿐만 아니라 시왕탱화의 명부사자( 冥 府 使 者 )의 위목( 位 目 )에는 생 년, 월, 일, 시를 주관하는 사직사자( 四 直 使 者 ) 26) 들이 시왕 모두의 관청에 똑같이 등장 하는데, 이는 불교 이전에도 우주운행과 인간의 수명에 관련하여 민간에 신앙되었던 신 상( 神 像 )의 하나였음은 익히 알려진 터이다. 27) 사자상( 使 者 像 )중 일직 월직사자( 日 直 月 直 使 者 )는 머리위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표지를 얹고 시왕 옆에 배치되는 것이 상례 이다. 한편 직부사자와 감제사자 28) 는 말을 탄 모습으로 시왕의 하단 지옥장면에 등장 하는데, 말을 묘사한 것은 사자가 말을 타고 달려가 염라대왕의 명령을 수행한다는 의 미이며, 직부사자가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것은 바로 죄인의 전생 죄업을 기록한 명부 25) 복두( 幞 頭 ) : 복두는 공복의 관( 冠 )으로 문무백관( 文 武 百 官 ) 1품에서 9품까지와 향리, 별감, 차비 인 등이 착용하는 것이다. 26) 사직사자( 四 直 使 者 ) : 시직( 時 直 ), 일직( 日 直 ), 월직( 月 直 ). 연직( 年 直 )을 각각 맡은 사자를 일컫는 다. 우리네 전통 속에서는 인간의 수명을 지탱하는 것으로 사주( 四 柱 )를 꼽는바 이 사직사자는 우 리의 수명을 상징하고 있다. 27) 우리나라 무속( 巫 俗 )에서는 흘러가는 세월을 주관하는 일월선녀상이나 일월성신상( 日 月 星 辰 像 ), 혹은 칠성상으로 표상되어온 것이 일반적이며 불교에 흡수된 형태로 칠성신앙(칠성각) 이외에도 이미 외호신상의 하나로 104위 신중단의 하단위목에 년, 월, 일, 시에 관련된 신의 명호가 등장 한다. 28) 직부사자는 감제사자와 더불어 한 쌍을 이룬다. 염라대왕의 명을 받아 사람에게 목숨이 다했음을 알리고 죽은 이를 지옥으로 끌고 오는 역할을 맡는다. 말과 함께 그려지는 까닭은 세월의 빠름을 상징하거나 또는 죽은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이끄는 오랜 전통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사자의 손 에 든 두루마리는 염라대왕의 부명( 符 命 )으로 생각된다. 60 최영희

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자( 使 者 )는 보통 전령( 傳 令 )의 모습으로 머리에는 머리뒤쪽에 양 각이 높게 꽂힌 익선관( 翼 善 冠 )같은 것을 쓰고 손에는 두루마리나 칼 삼지창을 들고 있 다 29). 3) 불화에 표현된 지장변상( 地 藏 變 相 ) (1) 중음신( 中 陰 身 ) 사후 심판을 받는 망인( 亡 人 )의 존재를 불교에서는 중음신 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호칭은 인간을 윤회하는 존재로 전제한데서 나온 것인데, 숨이 끊어지고 육신을 여윈다 하더라도 무( 無 )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다음 생( 生 )을 받을 엄연한 존재로 인 식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윤회하는 존재를 유( 有 ) 라고 하며 태어나는 것을 생유( 生 有 ), 죽음을 사유( 死 有 )라고 한다. 한 번의 생유에서 사유를 거쳐 다음 생유로 전생( 轉 生 )하 는 사이의 의식원리[영혼]가 육체의 모습으로 형체를 얻게 되지 못한 중간상태를 중유, 중음, 또는 중온( 中 蘊 )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유 는 윤회 과정상의 각 존재방식을 일컫 는 명칭이다. 이 중유는 전통적으로 귀신이나 넋으로 이해되어 왔다. 귀신이란 원래 존 재가 죽으면 본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 歸 ] 신령한 것[ 神 ]이라는 의미이다. 고로 귀 신( 鬼 神 )은 중유 혹은 중음( 中 陰 )이란 개념과 함께 현세와 연계된 사후 문제의 핵심을 이룬다. 중유에서 생유로 가야할 곳[ 所 住 ]이 바로 취( 趣 )이다. 이는 모든 유정( 有 情 )들 이 마땅히 가야할 곳이고, 마땅히 태어나야할 곳으로서 생을 맺을 처소( 處 所 )이기 때문 에 취라고 한다는 것이다. 귀취( 鬼 趣 )로서 생유에 대하여 비바사론( 毘 婆 沙 論 ) 에서는 몹시 인색하고 탐하는[간 탐( 慳 貪 )] 몸과 말과 뜻의 악행을 짓고 더욱 자라게 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가고 거기 에 태어나서 거기의 생으로 하여금 상속되게 하기 때문에 귀취( 鬼 趣 )라고 한다 라는 것 이다. 상속은 실체적인 존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속은 존재가 죽어도 끊이지 않 고 계속된다고 한다. 영혼의 시선은 중유의 상태인 중음신( 中 陰 身 ), 즉 귀신의 존재를 29) 익선관( 翼 善 冠 )은 곤룡포와 더불어 국왕의 시사복으로서 관의 모습은 사모( 紗 帽 )와 비슷하면서도 모라( 帽 羅 )로 관을 싸고 후두엔 양각이 곧게 꽂혀 있다. 그런데, 보통 사자가 쓰고 있는 관모는 익선관과 거의 비슷하면서도 뒤에 뾰족한 양각이 솟아있는 특이한 것이다.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61

인정하자는 것이다. 현실의 범위가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에 한정되지 않는다면, 중유의 상태나 귀신 따위의 존재를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귀신에게 음식을 바치기 도 하고, 귀신을 위해 복을 빌기도 했다.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의 모습은 단지 공포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들이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겪 고 있는 삶의 모습일 뿐이다. 그들은 조상들의 모습이기도 하고, 우리의 미래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 지은 업장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존재 상태에서 상속되고 윤회되는 것이다. 윤회의 존재 상태인 중유, 즉 영혼과 함께 떠날 마음가짐을 준비한다면, 죽음은 생소하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있 으며, 우리들의 삶과 함께하는 것이다. 다음 생을 받지 못한 영혼은 무주고혼( 無 主 孤 魂 )이 되어 넓은 우주 공간을 배회한다 고 한다. 이른바 귀신이라고도 하는 그들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면서 인간사에 개입하게 되는데, 세상사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끊임없는 충돌 속에 이루어진다. 정착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떠돌아다니는 영혼들에게 다음 생으로의 안착( 安 着 )을 기원하는 것이 불교에서 행하는 천도재( 薦 度 齋 )이다. 사십구재는 대표적인 천도재로서 중유의 기간이 완료되는 49일째 30) 되는 날 지내는 의식이다. 이때의 중음 신들은 향( 香 )을 먹는 식향신( 食 香 身 )으로서 유비적으로 몸체가 표현되기는 하지만, 살 아생전의 육체에서 기능했던 생령의 의식원리나 시 공간 구조와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사령( 死 靈 )들이다.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해 불단에 향을 끊임없이 피워야 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이것은 향( 香 )만이 오로지 죽은 사람의 중요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중음 의 기간에 죽은 사람의 몸은 극히 미세하다. 이 기간의 모습은 모습 없는 모습 이라고 불리워진다. 의식만이 있는 점에서 의생신( 意 生 身 ) 이라고도 부른다. 그 모습은 사바세 30) 사후 49일간을 중음기간으로 잡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관념의 표상으로서, 불교의 발생 전래지 였던 인도나 티베트에서는 천체( 天 體 )가 일곱 혹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이 세계에서 칠계( 七 界 ) 또는 일곱 단계의 마야(Maya)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각 세계에는 또 일곱 차례의 진 화가 있다고 봄으로써 7의 제곱에서 49일을 산출해 낸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고대 중국에도 존 재하는데, 6세기경에 성립된 도교 경전인 태상동현영보업보인연경( 太 上 同 玄 靈 寶 業 報 因 緣 經 ) 에 도 사후 칠칠일기공양( 七 七 日 忌 供 養 )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시왕생 칠경 의 성립을 통한 3년까지의 명부( 冥 府 ) 심판 설정은 민간전통의 장송습속( 葬 送 ) 俗 )을 그대로 수용하여 번안해 낸 결과라고 한다. 62 최영희

계의 인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향을 먹는다 해도 극히 적은 양이므로 정성어린 마음 으로 단 하나의 향이면 충분하다. 이들을 불가에서는 영가( 靈 駕 )라고도 하는데, 민간에 전하는 장송습속( 葬 送 習 俗 )이나 사자( 死 者 )의례, 초혼의례( 招 魂 儀 禮 )등과 습합( 習 合 )된 불교 특유의 영가천도( 靈 駕 遷 度 ) 의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2) 육도윤회( 六 道 輪 廻 ) 우리들의 사후는 육도의 세계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 죽을 때마다 유전하여 전생하는 것이 불교의 사고방식이다. 위로는 천인( 天 人 )으로부터 아래는 지옥의 죄인( 罪 人 )에 이 르기까지 목숨을 가지고 사는 것, 즉 유정( 有 情 )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에서 죽은 다음, 다시 여섯 세계 어느 곳에선가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다시 인 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으며, 천( 天 )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계 어딘가에 다시 태어 날 수도 있다. 그것은 천인이거나 인간이거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 세계에서 살아가 고 있는 동안 어떤 일을 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인간의 경우는 정평이 나있는 선인 이거나 악인이 아닌 이상, 보통인 사람은 명도( 冥 途 )의 일곱 재판관에 의해 그 행선처 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윤회( 輪 廻 )는 글자 그대로 선회( 旋 廻 ) 또는 회전( 廻 轉 ) 을 의미하는데, 이른바 순환 이라고 해도 좋겠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은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그들의 업( 業 )이 완전히 다할 때까지 여섯 가지의 존재 영역을 통하여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떠돌아다 닌다. 윤회를 벗어나거나 시작하는 시점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죽음 이후에 윤회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즉 만일 내가 없다면 아( 我 )가 없는 업( 業 )을 지을 것인데, 미래 세 상에 누가 그 갚음을 받을 것인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무아윤회설( 無 我 輪 廻 說 )이다. 무아윤회설은 단순히 내가 없다는 무아설( 無 我 說 )에 기본한 것이 아니라, 연기에 입각 한 연기무아설( 緣 起 無 我 說 )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무아설에서도 나 는 부정되지만, 그 러나 절대적으로 없다는 말은 아니니, 절대적으로는 없지 않은 이 나 가 업보 윤회의 주체가 된다. 업보 윤회의 주체인 나 는 어떻게 과보를 받으며 어떻게 윤회하는가? 한편 시왕과 지장보살, 육도도상의 상호인연관계는 둔황에서 발견된 지장시왕도의 도 상내용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화면의 중앙 상단에 지장보살을 그리고, 좌우로 빙둘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63

러서 시왕의 심판광경을 그리고, 하단에는 업경대에 생전의 죄를 비춰보고 있는 망인과 옥졸을 그려놓고 있다. 또한 화면의 양 옆으로 시왕을 배치하고 중앙의 지장보살상 좌 우로 육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상례로서 육도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항상 여러 지옥 사이를 돌아다닌다는 육도능화( 六 道 能 化 ) 보살의 성격을 표상하는 것이기도 한다. 그러 므로 시왕 심판의 마지막 귀결로서 표상되는 제10왕청의 육도윤회 내용과 지장보살 화 신의 도상은 지장보살신앙과 시왕신앙의 밀접한 교합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이 시왕탱화의 뒷면에는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주( 六 字 大 明 呪 )인 옴마니반메훔 을 적어 육도 생상의 문을 닫게 되기를 염원 31) 하는 가운데 불교의 이상경의 하나로 상정된 극락정토 에 왕생하기를 희구하고 있는 것은 명부신앙과 정토신앙의 연관관계를 살피게 되는 것 이다. 또한 귀왕이 앉아있는 법륜대( 法 輪 臺 ) 도상은 육도윤회의 표상과 연관하여 여러 곳에 서 그 전거를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중국의 대족석굴( 大 足 石 屈 )에 새겨진 육취유심도( 六 趣 唯 心 圖 )에는, 지장보살의 화신인 거인( 巨 人 ) 가슴에 안고 있는 거대한 법륜의 한가운 데 다시 지장보살을 묘사하고, 그 심부에서 여섯 갈래의 길이 갈라져 나오고 있음을 형 상화하고 있다. 티베트의 육도윤회( 六 道 輪 廻 )그림에도 중국의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모든 존재를 삼키는 무상( 無 常 )을 인격화한 반인반수( 半 人 半 獸 )의 거대한 괴물 아니야타 Anityata가 법륜을 들고 있으며, 중앙에는 탐진치( 貪 瞋 癡 ) 삼독( 三 毒 )을 상징하는 달과 뱀, 그리고 돼지가 표현되고, 중앙 원 밖으로 6등분하여 천 아수라 축생 지옥 아 귀 인간계 순서로 그려 넣고, 원의 가장자리는 다시 12등분하여 12인연을 묘사하고 있 다. 우리나라 지장보살상중에는 지장보살의 보편적 지물인 석장과 여의주 대신 법륜을 들고 있는 모습도 보이는데, 시왕탱화의 제10왕청에 묘사하고 있는 법륜대( 法 輪 臺 )와 육도( 六 道 ) 도상관계는 위와 같은 내용과 맥을 같이하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 다. 31) 옴은 제천, 마는 아수라, 니는 인간, 반은 축생, 메는 아귀, 훔은 지옥의 문을 닫는 것으로 옴마 니반메훔 육자( 六 字 ) 진언에 의해 육도가 비게 되며 모두 극락왕생한다고 전해진다. 64 최영희

2. 명부전과 시왕 1) 명부전(지장전) 관세음보살과 함께 중생구제의 큰 원력으로 많은 대중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는 지장 보살을 모신 전각을 명부전 혹은 지장전이라고 한다. 이 명부전에서 망자의 영혼은 생 전의 업보에 따라 지옥이나 극락에 태어나기도 하고, 혹은 여타의 다음 생을 받기도 한 다. 영혼이 극락으로 왕생할 수 있는 대기소와 같은 이곳은 천도재가 끊임없이 베풀어 지는 곳이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시왕, 그리고 망자( 亡 者 )의 영혼을 모셔오는 저승사자가 있다. 이 세 가지 요소의 결합이 명부전의 주요도상이다. 이 전각의 중심에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기까지 자신의 깨달음을 뒤로 미룬 자비로운 지장보살이 모셔지고, 그 좌우에 열 명의 왕들이 혼령의 생전 죄업( 罪 業 )을 심판한다. 망자의 혼령은 죽은 뒤 49일째까지 7일마다 7번, 그 뒤에는 100일, 일주기와 삼주기가 되기까지 열 번에 걸쳐 각왕에게 살았을 때 지은 선악의 업을 심판받는다. 열 명의 시 왕 중에서 다섯 번째 염라대왕 앞에는 업경대( 業 鏡 臺 )라는 숙세( 宿 世 )의 행위를 비추는 거울이 있다. 숙세의 모든 행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속의 모든 행위는 반드시 업 경대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지옥에서 태어난 중생이 거울에 비춰진 그들 자신의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 비춰진 영상이 현실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지옥상은 더 이상 관념 속에 서 만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의 행동을 규율하기까지 한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이 렇게 불교의 지옥세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 幽 冥 界 )를 사찰속으로 옮겨놓은 전각으로, 다른 전각에 비해 그 안에 모셔진 존상과 그림들 이 많아 언뜻 복잡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전각이 지닌 종교적 기능 곧 죽은 이의 넋을 천도하기 위한 의식이 행하여지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이러한 도상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장신앙은 그 뿌리가 매우 깊다. 살펴보자면, 신라의 원광( 圓 光 )법사는 지장보살의 자비와 원력에 귀의하는 참회불교를 유포시켰고, 신라 진평왕대의 비구니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65

지혜( 智 惠 )는 신라땅을 지키는 선도산 성모( 仙 桃 山 聖 母 )의 지시로 지장보살 앞에서 참회 하는 점찰법회( 占 察 法 會 )의 개최를 항규( 恒 規 )로 삼았다. 경덕왕 때의 고승 진표율사( 眞 表 律 師 ) 또한 지장보살에게 몸이 부서지도록 참회하여 지장과 미륵보살의 가피를 입었 고, 그 뒤 망신참( 亡 身 懺 )의 전통을 이 땅에 정착시켰다 한다. 또한 삼국유사 의 대산 오만진신( 臺 山 五 萬 眞 身 ) 에 관한 글을 보면, 700년대에 보천( 寶 川 )이 오대산 신앙을 정 착시킬 때 남대( 南 臺 )에 지장방( 地 藏 房 )을 두었는데, 그 곳에 원상지장( 圓 像 地 藏 )과 팔 대보살을 수반으로 하여 1만의 지장상을 그려 봉안하고, 낮에는 지장경 과 금강경 을, 밤에는 점찰예참( 占 察 禮 懺 )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신라의 지장신앙에 관한 자료에서는 시왕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 고려 말 이전까지의 자료에서 도 시왕에 대한 신앙이 발달하였다는 전거( 典 據 )를 발견할 수 없다. 고려사 에 나타 나는 수많은 불교 도량의식( 道 場 儀 式 ) 속에서도 지장경도량이나 지장연명경도량의 잦은 개최와 염라대왕에 대한 의식은 언급되고 있으나, 시왕과 관련되는 의식은 보이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시왕신앙은 예수시왕생칠경 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 경은 당나라 말 년에 장천( 藏 天 )이 편찬한 것이다. 도교의 신( 神 )인 시왕( 十 王 )을 불교에서 수용한 다음, 시왕에게 공양하고 죄업을 참회하는 칠재의( 七 齋 儀 )를 행함으로써 죽은 뒤 좋은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경전이다. 이 경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려 초기이지 만 널리 유포되지 못하다가, 원나라가 이 땅을 강점한 고려 말부터 널리 유포되어짐에 따라, 차츰 내세의 심판자인 시왕에 대한 신앙이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 이전까지는 지장전과 시왕전이 독립된 전각을 각각 분리 독립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연유로 지장보살과 시왕을 함께 모신 명부전이 생겨나게 되었으 며, 언제부터 명부전이 사찰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일까? 그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의 신앙형태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시대적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 불교 자체를 말살시키려 했던 조선왕조의 억불정책 속에서도 불교가 인정받을 수 있 었던 것은 조선왕조가 숭상했던 효( 孝 )에 관한 불교의식이었다. 비록 조선왕조가 불교 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부모에게 효도하고 죽은 부모를 좋은 세상으로 보내게 하기 위한 불교신앙과 의식만은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그 어떤 의 66 최영희

식보다 망인천도( 亡 人 薦 度 )의 재의식( 齋 儀 式 )이 발달하였고, 지장보살 또한 모든 중생을 성불시킨다는 맹세보다 명부시왕의 무서운 심판에서 망인을 구하여 주는 유명( 幽 冥 )계 의 교주 역할만이 크게 강조되었다. 그 결과 망인의 형벌 및 새로 태어날 세계를 결정 하는 심판관인 시왕과 망인( 亡 人 )을 자비로써 인도하는 지장보살과의 결합은 쉽게 이루 어질 수 있었고, 마침내 독립되어 있었던 지장전과 시왕전을 명부전이라는 이름으로 결 합하여 탄생시키게 된 연유인 것이다. 이것이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이루어졌으나, 임진 왜란 이전의 조선시대 불교는 철저한 억압으로 인한 재정적 빈곤 때문에 새로운 전각인 명부전의 건립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다행히 임진왜란 때의 승병 활동으로 나라에 서 다소나마 억압의 고비를 늦추게 되었으며, 불교계에서는 이 시기를 맞아 유교의 이 념에도 맞는 명부전을 많이 건립하였던 것이며, 오늘날 오래된 대부분의 사찰에 명부전 이 있는 까닭도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명부전에는 보통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 道 明 尊 者 ) 32) 와 무독귀왕( 無 毒 鬼 王 ) 33) 을 협시로 봉안한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 시왕상( 十 王 像 )을 안치하며, 시왕 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을 안치한다. 이밖에도 대왕을 대신하여 심판을 하는 판 관( 判 官 ) 2구, 기록과 문서를 담당하는 녹사( 錄 事 ) 2구, 문 입구를 지키는 장군( 將 軍 ) 2 구등을 마주보게 배치하여 모두 29개의 존상을 갖추게 된다. 또한 지장보살의 뒤편으로 명부시왕탱화를 봉안하게 된다. 2) 시왕( 十 王 ) 명도( 冥 途 )에는 열 명의 재판관이 있다. 그런데 49일 동안에 만나는 재판관은 일곱 명이므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설명해야겠다. 먼저 사후 7일째 되는 날 망자를 심판하는 재판관은 진광대왕( 秦 廣 大 王 )이다. 진광대 32) 도명존자( 道 明 尊 者 ) : 환혼기( 還 魂 記 ) 라는 중국의 인연설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설화는 도명존자는 본디 중국 양주에 있는 개원사의 승려로서 대력 13년(778년) 2월 8일 누런 옷을 입 은 저승사자 2인에 의해 염라대왕에게 끌려갔다가, 용흥사의 승려 도명인줄 착각한 것임이 밝혀 져서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왔다 는 줄거리이다. 그런데 이 영험이 전해진 뒤로 무슨 연유에선지 도 명존자는 지장보살의 왼쪽 보처존자로 발탁되어 지옥 중생의 구제활동을 도와주는 보처로 모셔지 게 되었다고 한다. 33) 무독귀왕( 無 毒 鬼 王 ) : 무독귀왕은 지장보살의 전생 이야기속에서 지옥을 안내했던 지옥의 왕이었 기에 협시하는 것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67

왕은 중생들로 하여금 악을 폐하고 선을 닦게 하는 일을 맡고 있다. 심사를 끝낸 망자 는 삼도천( 三 途 川 ) 34) 을 건너야 한다. 삼도천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세 가지 방법으로 건 너는 길[ 途 ]이 있다는 데서 왔다. 삼도천은 한 번 건너간 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 하는 강이다. 그리고 삼도천을 건너는 배 삯이 6푼이라고 한다. 35) 사자( 死 者 )를 염할 때 관속에 1푼짜리 동전 여섯 닢을 넣어주는 풍습이 여기서 나왔다고한다. 장의사들이 망자에게 노비를 주어라 고 말하는데, 이 노비가 바로 삼도천을 건너는 배 삯을 말하는 것이다. 삼도천을 건너고 난 다음 제2 7일인 14일의 재판관인 초강대왕( 初 江 大 王 )의 심사가 있게 된다. 초강대왕의 관청은 삼도천을 건넌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생전의 살생유무를 가리는 재판을 받게 된다. 제3 7일 되는 날인 21일에 제3차 심사를 맡은 재판관인 송제대왕( 宋 帝 大 王 )은 고양 이와 뱀을 사용해 망자를 조사한다. 송제대왕이 주로 조사하는 것은 사음( 邪 淫 )의 죄이 다. 그리고 제4 7칠일인 28일에는 오관대왕( 五 大 官 王 )의 심사가 있다. 그곳에는 저울이 있는데, 그 저울은 망자 생전의 신체적 행동과 언어 행동의 바로미터인 무게를 표시한 다. 거짓말을 했는지의 여부는 이 저울에 올려보면 단번에 나타나게 된다. 이제 제5 7일인 35일째에는 그 유명한 염라대왕( 閻 羅 大 王 )의 재판이 있는 날이다. 여기에는 정파리( 淨 玻 璃 )라고 하는 수정으로 된 거울이 놓여있는데, 이 거울에는 망자 가 생전에 저지른 크고 작은 악업이 빠짐없이 모두 비쳐지게 된다. 다음 6 7일인 42일 째에는 변성대왕( 變 成 大 王 )의 재판을 받는다. 변성대왕은 저울을 사용하여 재판을 한 오관대왕과 거울을 사용하여 재판을 한 염라대왕의 보고에 바탕을 두고 심사를 한다. 신중에 신중을 기울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드디어 제7 7일 마지막 날인 49일이 되었다. 이 날은 태산대왕( 泰 山 大 王 )에 의한 최종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다. 태산대왕은 원래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던 도교의 신 태산부군에서 유래한 것이며, 염라대왕의 서기로서 인간의 선악을 기록하여 죄인이 34) 삼도천( 三 途 川 ) : 현세와 내세와의 경계에 강이 흐르고 있다는 전설은 세계 여러 곳에 전해져 내 려오고 있다. 35) 요금기준은 불교의 육도윤회( 六 道 輪 廻 )와 연관된 것 같다. 사후의 여섯 세계가 있다는 사상이다. 68 최영희

태어날 곳을 정한다. 그러나 최종판결이라 하지만 사실은 좀 색다른 방법이다. 태산왕은 망자에게 스스로 자기운명의 문을 선택하게 하는데, 이 여섯 개의 문이란 여섯 세계, 즉 1지옥계, 2아 귀계 3축생계 4아수라계 5인간계 6천상계의 여섯 세계의 입구인 것이다. 이곳은 명 도( 冥 途 )이며 명도는 최종의 땅이 아니고 다만, 통과하기만 하는 땅이다. 망자는 이곳을 통과하여 다음세계, 즉 내세로 가야한다. 이 여섯 문을 통과하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내세의 세계이다. 아무튼 여기서 중음( 中 陰 )의 상태가 끝나기 때문에 49일은 만중 음( 滿 中 陰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명도에는 열 명의 재판관이 있다. 그러나 7 7일인 49일에 재판이 끝났으므로 일곱 재판관 밖에 필요가 없다. 나머지 세 명은 무엇을 하는 재판관인지 궁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들은 재심( 再 審 )을 하는 재판관들이다. 천상계나 인간계 로 태어난 자는 별로 불만이 없겠지만, 불행하게도 지옥이나 아귀계에 떨어진 자는 이 만 저만 불평이 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망자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고 싶은 것이 부처의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추선공양( 追 善 供 養 ) 36) 의 기회를 세 번 주는 것이다. 100일째 되는 날에는 거 해지옥을 주재하는 제8 평등대왕( 平 等 大 王 )이 공평하게 죄복의 업장을 다스린다는 의미 이며, 평정왕이라고 부른다. 사후 1주기의 일을 관장하는 제9 도시대왕( 都 市 大 王 )이, 사 후 3년째 되는 해에 망자를 심판하는 제10 오도전륜대왕( 五 道 轉 輪 大 王 )이 재심을 한다. 죽은 자들이 아홉 명의 왕에게 차례차례 심판을 받은 다음 마지막으로 제10 오도전륜대 왕에게 심판을 받고나면 누구나 태어날 곳이 결정된다. 이 때 자손들의 추선공양이 있 었으면 지옥이나 아귀의 세계에서 구출해 준다는 것이다. 3) 석림사 석조지장보살상 지장삼륜경 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부처가 입멸한 후 미륵부처가 출현할 때 까지 육도윤회의 현실세계에 몸을 나투어 중생들을 구제하도록 석가모니부처로부터 수 기 받은 분이라고 한다. 흔히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알려진 36) 추선공양( 追 善 供 養 ) : 망자의 명복( 冥 福 )을 빌기 위하여 유족이 기일 같은 때에 불사( 佛 事 )를 하거 나 착한 일을 하는 것을 말함.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69

이 지장보살에게는 따라서 대원본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말하자면 중생을 제 도하겠다는 맹세가 누구보다도 크고 위대한 분으로, 그 원력의 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안락은 뒷전으로 돌리고 지옥이든 천상이든 고통 받는 중생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 아가서 구원한다는 분이다. 한편 지장보살의 형상은 본래는 보살형으로 보관과 영락으로 장엄한 모습이었지만 지장삼륜경 에 의해 차츰 삭발을 한 사문의 모습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사문형의 지장 보살은 지옥문을 깨뜨린다는 육환장( 六 環 杖, 석장)과 장상명주 라는 어둠을 밝히는 보 주를 들고 있는데, 석장의 여섯고리는 육바라밀을 상징한다. 육환장의 윗부분에는 화불 을 모시기도 하는데, 그 부처는 지장원찬 23불의 첫 번째인 각화정자재왕여래 라고 한다. 수락산 석림사는 불설예수시왕생칠경 에 따라 야외 지장전을 조성하고, 석벽면( 石 壁 面 )에는 구름과 천녀( 天 女 )를 부조하여 주위 배경에서 이승이 아님을 표현하였고, 앞 의 석단( 石 壇 )에는 석조( 石 造 )로 명부세계 등장인물들을 조성하였다. 후미진 벽쪽에 조 성한 석단에는 비구형 지장보살좌상을 조성하고, 협시( 挾 侍 )로 도명존자( 道 明 尊 者 )와 무 독귀왕( 無 毒 鬼 王 )을 조성하였다. 도명존자는 환혼기( 還 魂 記 ) 라는 중국의 영험설화에 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설화에 등장하는 도명존자는 중국 양주에 있는 개원사의 승려로 서 대력 13년(778년) 2월 8일 누런 옷을 입은 저승사자 2인에 의해 염라대왕에게 끌려 갔다가, 용흥사의 승려 도명인줄 착각한 것임이 밝혀져서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왔다는 줄거리이다. 그렇게 우연히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도명존자는 그 이후 지장보살 의 협시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무독귀왕은 지장보살의 전생이야기 속에서 지장보살이 무간지옥( 無 間 地 獄 )에 빠진 어머니를 만나러 지옥을 방문했을 때 지옥의 안내자로 등장 하였기 때문에 지장보살 옆의 보처( 補 處 )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석담 앞 석단 ( 石 壇 )에는 지장보살좌상, 도명존자, 무독귀 그림 7. 지장삼존상 (왼쪽부터 무독귀왕, 지장보살, 도명존자) 왕을 조성하였다. 70 최영희

그림 8. 짝수 제2 4 6 8 10왕상 그림 9. 홀수 제1 3 5 7 9왕상 그리고 그 양옆으로 명부시왕( 冥 府 十 王 )상이 석조( 石 造 )로 조성되었는데, 시왕중 홀수 대왕인 제1진관대왕, 제3송제대왕, 제5염라대왕, 제7태관대왕, 제9도시대왕은 지장보살 왼쪽에 조성하였고, 그 반대편엔 짝수대왕인 제2초강대왕, 제4오관대왕, 제6변성대왕, 제8평등대왕, 제10전륜대왕상은 오른쪽에 조성하였으며 양쪽 입구에 인왕상 2구를 조성 하였다. 명부시왕은 인도 고대신화에 나오는 사후세계의 지배자인 야마왕이 불교에 들어와 지 옥을 다스리는 염마왕이 되었다. 그것이 중국에 와서는 도교의 영향을 받아 10가지 지 옥과 그곳의 왕을 설하는 시왕사상으로 발전하면서 시왕 중에 한분인 제5 염라대왕으로 변모하였다. 특히 불설예수시왕생칠경 이 엮어지면서 지장보살과 시왕은 한 몸이라 하여, 지장사 상이 종래의 현세이익에서 내세구원적 신앙으로 바뀌게 되었고 시왕상이 지장보살과 함 께 모셔지게 된 것이다. 석림사 야외지장전 가운데 중앙에는 팔각형단을 만들고 기단부 여덟 면에는 각각 팔 부중상( 八 部 衆 像 )을 부조( 浮 彫 )하였다. 이 팔각형 석단면( 石 壇 面 )에 부조한 팔부중상( 八 部 衆 像 )은 천신( 天 神 ) 용신( 龍 神 ) 야차( 夜 叉 ) 37) 건달바( 乾 達 婆 ) 38) 아수라( 阿 修 羅 37) 야차( 夜 叉 ) : 고대 인도에서는 악신으로 생각되었으나, 불교에서는 사람을 도와 이익을 주며 불법 을 수호하는 신이 되었다. 38) 건달바( 乾 達 婆 ) : 인도신화에서는 천상의 신성한 물 소마(Soma)를 지키는 신이다. 그 소마는 신 령스런 약으로 알려져 왔으므로 건달바는 훌륭한 의사이기도 하며, 향( 香 )만 먹으므로 식향( 食 香 )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71

) 39) 가루라( 迦 樓 羅 ) 40) 긴나라( 緊 那 羅 ) 41) 마후라가( 摩 羅 迦 ) 42) 상이다. 이러한 천룡팔부중 에 관한 기록은 법화경( 法 華 經 ) 등의 대승불교 경전에 보이며, 보통 팔부중( 八 部 衆 )은 사천왕( 四 天 王 ) 43) 에 딸려 있는 8가지 종류의 신중( 神 衆 )을 말한다. 그 위쪽 단상에는 합장한 비구 승려상이14단으로 질서 정연하게 조각되어 서있으며, 그 한층 위 앙련( 仰 蓮 )대 좌 위에는 합장한 비구 승려상이 빙둘러 서있고, 연화좌 가운데에는 왼손에 법륜( 法 輪 ) 44) 과 오른손에 육환장을 들고 사찰 아래 마을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서있는 두건 형지장보살상을 조성하여 이곳이 지장도량임을 확인시키 10. 석림사 지장보살상 고 있다. 이렇게 석림사 야외 지장전은 수락산 등산을 즐기는 등산객들은 물론, 종교를 초월한 일반 참배객들로 하여금 불교조각품을 감상하면서, 각자 나름대로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라고도 한다. 39) 아수라( 阿 修 羅 ) : 인도신화에서는 다면( 多 面 ) 다비( 多 臂 ), 즉 얼굴도 많고 팔도 많은 악신으로 간 주되었으나, 불교에 서는 조복( 調 伏 )을 받아 선신의 역할을 한다. 40) 가루라(( 迦 樓 羅 )) : 새벽 또는 태양을 인격화한 신화적인 새로서 금시조( 金 翅 鳥 )라고도 한다. 불교 수호신이 되었다. 41) 긴나라( 緊 那 羅 ) : 인간은 아니나 부처를 만날 때 사람의 모습을 취한다. 때로는 말의 머리로 표현 되기도 하며, 가무 의 신이다. 42) 마후라가( 摩 羅 迦 ) : 사람의 몸에 뱀의 머리를 가진 음악의 신. 땅속의 모든 요귀를 쫓아내는 임무 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3) 사천왕( 四 天 王 ) :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을 섬기며, 불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 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동쪽의 지국천왕( 持 國 天 王 ), 남쪽의 증장천왕( 增 長 天 王 ), 서쪽 의 광목천왕( 廣 目 天 王 ), 북쪽의 다문천왕( 多 聞 天 王 : 毘 沙 門 天 王 )을 말한다. 44) 법륜( 法 輪 ) : 법륜은 교법을 말한다. 부처의 교법이 중생의 번뇌망상을 없애는 것이 마치 전륜성 왕의 윤보( 輪 寶 )가 산과 바위를 부수는 것과 같으므로 법륜이라 한다. 또 교법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늘 굴러서 여러 사람에게 이르는 것이 마치 수레바퀴와 같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부처께서 입멸후 존상을 대신하여 그 상징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72 최영희

Ⅳ. 맺음말 사람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며, 죽음은 어느 누구도 실제로 체 험할 수 없는 두려운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경험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느 껴왔으며, 여러 방법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면 서 삶의 문제만큼이나 죽음에 대한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결국 이러한 죽음의 두려 움으로부터 종교가 생겨났으며, 궁극적인 목적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데 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에서 죽음이란 생( 生 )의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이승에서 생을 마감하고 저승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 믿었다. 이것을 윤회( 輪 廻 )라고 하는데, 이승에서 지은 업( 業, 善 業 혹은 惡 業 )에 따라 극락에서부터 지옥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여섯 갈래로 나뉘어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세계로 가는 뒤안길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그에게 죽음을 알 리고, 저승세계로 인도하는 저승사자다. 저승사자는 직부사자와 감재사자가 있는데, 직 부사자는 죽은 이에게 죽음을 알리고, 그의 죄가 적힌 장부를 저승세계의 왕에게 전달 하는 역할을 한다. 감재사자는 죽은 이의 집에 파견돼 그가 명부로 가는 길을 피해 달 아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의 사후세계는 저승사자와의 만남에서 시작하여 길고 지루한 3년여에 걸친 시왕 의 심판이 차례대로 이루어진다. 이때 지장보살은 지옥을 직접 탐방하면서 지옥 중생의 구제를 위해 사력을 다한다.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특성이라 할 지장보살은 열반을 앞에 두고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내고자 윤회의 세계로, 명부의 세계로 되돌아 온 것이다. 지 장보살이 안내하는 마지막 종착점은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극락이 될 것이다. 공포로만 가득한 명부전에 불교의 이상처인 극락을 향해,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구제할 지장보살 이 자리하는 것이다. 또한 재래의 토속신들로 형상화된 시왕신앙 자체는 불교가 아니라 고 해도, 시왕신앙은 지장신앙과 결합되고 나서야 비로소 불교화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데, 위로는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보살행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대승불교의 이념 에서 지장보살을 지옥의 구제자로 명부에 설정함에 따라 시왕신앙은 불교의 큰 테두리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73

사후 명부세계에서 시왕의 심판을 받고 다시 태어나는 여섯 세계의 중생들의 모습은 제각기 달라도,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미혹의 세계이며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중생의 육도윤회에서 지옥계는 문자 그대로 지하에 있 는 감옥 으로 고통이 가장 많은 세계이다. 아귀계는 항상 기아의 고통을 받는 세계이다. 축생계는 무지하고 우둔해서 서로가 죽이고 죽고 고통이 많아 즐거움이 없는 세계이다. 아수라계는 질투심과 투쟁심이 강한 생물류이며 역시 고통이 많은 세계이다. 인간계의 사람은 고락( 苦 樂 )을 반반씩 누리는 세계이며, 천계( 天 界 )의 천인은 우수하여 즐거움을 향수할 수 있는 세계이기는 하나, 그 쾌락에도 언젠가는 종말이 와서 고통을 면치 못하 는 세계이다. 더불어 이 여섯 세계가 하나의 길로 이어져 있다는 것도 알아두었으면 한 다. 우리들은 사후,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여섯 세계를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으며 윤회한다. 이것이 내세 세계의 구도이다. 사후에 고통이 많은 세계에 재생 하느냐, 아니면 고통이 적은 세계에 재생하느냐 하는 것은 어느 것이나 그 사람 생전의 행위, 즉 업( 業, 선업 혹은 악업)보에 의한 것이다. 어느 세계로 태어날 것인가는 사바 세계와 같이 편차치( 偏 差 値 ) 중시가 아닌 인과응보라고 하는 공명정대한 원칙에 의한다 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명부전(지장전)은 죽은 자의 천도( 遷 度 )를 위해 불교 교단이 마련한 특별한 공간이다. 천도될 대상은 지옥에 빠진 중생이고, 그 미래의 중생은 바로 그 지옥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이 된다. 지옥도( 地 獄 圖 )는 단지 지옥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선 관객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스스로 부여할 수 있게 한다. 아니러니하게도 잔혹한 지 옥의 장면을 바라보며 그 대극적 위치에 존재하는 극락을, 나아가 현실을 되새기는 것 이다. 곧 지옥을 통한 사후세계에 대한 해석은 곧 현실의 삶에 대한 해석이며 지상의 삶을 고양시키기 위한 방편임은 말할 것도 없다.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진치( 貪 瞋 癡 )를 자각( 自 覺 )하고 동시에 타인도 그렇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우리들은 타인에 대해 크고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끝으로 저승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찾아온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저승사자를 맞이하게 될지 궁금하다. 또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처럼, 행복한 삶을 산 사람들, 혹은 원하는 바를 이룬 사람들은 과연 웃으면서 이들을 맞이하게 될런지 이 또한 매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74 최영희

<참고문헌> 1. 김현준, 사찰, 그속에 깃든 의미, 2003, 도서출판 효림 2. 동국불교인회 엮음, 알기쉬운 불교미술, 1998 3. 석지현, 불교를 찾아서, 1991, 일지사 4. 이기선, 빛깔있는 책들 중 지옥도, 1993, 대원사 5. 장미진, 지옥도의 도상해석학적 접근 홍익대학 박사논문, 1993 6. 혜자, 절에서 배우는 불교, 1998, 우리출판사 7. 홍윤식, 한국의 불교미술 개정증보판, 1997, 대원정사 8. 히로사치야, 편역 전진묵, 저승관광, 1992, 금하출판 9. 국립중앙박물관, 영혼의 여정, 2003 10.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불화대전, 2010 11. 한국고전 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자료 참조 12. 규장각한국학 연구원 인터넷 자료 인용 수락산 석림사 지장신앙 연구 75

소요사 연구 홍 정 덕 (한북대 평생교육원 교무부장) 目 次 I. 서론 II. 본론 1. 자재암의 연혁 2. 조선 태조의 소요산 주필과 소요사 3. 조선의 불교탄압과 소요사 1) 조선의 건국과 불교 탄압 2) 소요사의 존립 3) 소요사 존립의 전말 4) 소요사의 변천과 쇠락 III. 결론 집필자 : 홍정덕 양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국사편찬위사료조사위원, 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소요사 연구 77

Ⅰ. 서론 소요사는 동두천 소요산에 위치하였던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그러나 조선 태조가 이 절 아래에 행궁을 짓고 주필하였던 인연으로 조선 세종대에 전국의 사찰을 선교 양종 각 18사씩 36개 처만 남기고 모두 폐치하는 혹독한 불교탄압 과정에서 잔존하여 사찰의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소요사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명과 사적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현재 소요사 라는 사찰은 현존하지 않는다. 본고는 문헌에 나타나는 소요사를 추적하여 소요사의 성쇠와 소멸과정을 알아보고 이 를 통하여 경기 북부 동두천 지역 향토사의 일단을 이해하려 한다. Ⅱ. 본론 1. 자재암의 연혁 현재 동두천 소요산에는 자재암이라는 전통사찰이 있어 다음과 같은 연혁을 지니고 있다. 자재암( 自 在 庵 )은 봉선본말사지( 奉 先 本 末 寺 誌 ) 자재암( 自 在 庵 ) 조에 의하면 654년(신라 무열왕 1년) 원효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의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974년(광종 25년) 각규대사( 覺 圭 大 師 )가 태조의 명으로 중창하고 소요사라 했다. 그리고 1153년(의종 7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각령( 覺 玲 )이 대웅전과 요사 78 홍정덕

만을 복구하여 명맥만 이어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사찰에 대한 구체적인 연혁이 전하지는 않으나 세종실록( 世 宗 實 錄 ) 지리지 경기 양주도호부 소요사( 逍 遙 寺 ) 조에 태조의 원당으로 하고 밭 1백 50결을 하사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범우고( 梵 宇 攷 )에 있는 매월당( 梅 月 堂 ) 김시습( 金 時 習, 1435~1493년)의 시에 소요사가 언급되고 있으나 페허가 되었다고 했다. 이로보 아 조선 초까지만 해도 자재암은 태조의 원당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아오다가 어느 시기 엔가 폐허가 되다시피 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후기 들어서는 1872년(고종 9년) 원공( 元 空 )과 제암( 濟 庵 ) 스님이 퇴락한 자 재암을 중창하고 영원사( 靈 源 寺 )라 하였다. 이때의 일은 설화같이 소요산영원사중건기 ( 逍 遙 山 靈 源 寺 重 建 記 ) 에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원공( 元 空 )과 제암( 濟 庵 ) 스님은 같 은 꿈을 꾸고 만나 영산전 만월보전 독성각 산신각 별원( 別 院 ) 등 모두 44칸을 중 창 하였다고 한다. 1907년에는 화재로 만월보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909년 성파( 性 坡 ) 스님과 제암 스님이 다시 중창하고 절 이름을 자재암으로 고쳤다. 이러한 내용은 자재 암재차중건기( 自 在 庵 再 次 重 建 記 ) 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근세에 들어 한국전쟁 당시 다시 소실된 것을 1961년 진정( 眞 精 ) 스님이 대웅전을, 1968년 성각( 性 覺 ) 스님이 요사채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1982년에는 일주문을 각각 지었다. 이어 1984년에는 동두천 시내에 부설 연화유치원(현)이 개원하였고, 1983~1985년에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운 중창을 하여 지금의 사격을 갖추었다. 1) 여기에 인용한 자재암의 연혁에 따르면 소요사는 자재암을 이르는 것으로 되어있다. 즉 원효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나 그 후 폐사되었고 고려 광종 연간에 중창되면서 절의 1) <자재암의 역사> 자재암 홈페이지 소요사 연구 79

이름을 소요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다시 황폐해진 사찰이 재창된 것은 고종 연간인 1972년의 일인 것으로 기록되 어 있고, 한 때 조선 태조의 원당으로 번영하던 소요사가 황폐해 진 이유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후 다시 2번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결국 자재암 은 고종 연간 이후에야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조선 태조의 소요산 주필과 소요사 사찰 연혁에는 고려 시대 광종 대에 원효에 의하여 초창된 절을 중창하고 그 이름을 소요사라 하였다고 하나 고려시대 소요사의 면모를 짐작하게 하는 기록은 현재 나타나 지 않는다. 단지 현재 자재암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산 이름이 소요산인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산의 이름이 소요산이었고 사찰의 이름은 이 산의 이름에서부터 비롯되었 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흔히 소요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옛날 서화담 양봉래와 매월당이 자주 소요하였다 하여 소요산이라는 붙여졌다. 2) 는 설명은 누군가 근거없이 유추하여 만든 오류임이 분명하다. 서화담과 매월당이 소요산을 찾은 적이 있으나 그들로 인하여 산명( 山 名 )이 유래되지 도 않았을 뿐더러 그들은 조선 전기 이후의 사람들이므로 이미 고려 전기부터 불려온 소요산이라는 산명의 유래를 그들의 행적에 연관하는 것은 시대의 설정 자체에 큰 문제 가 있는 것이다. 서화담, 매월당과 소요산과의 관계는 후술하려 한다. 2) <동두천시 홈페이지> 소요산 80 홍정덕

3. 조선의 불교탄압과 소요사 1) 조선의 건국과 불교 탄압 고려시대부터 소요산에 위치하였던 소요사가 갑자기 두각을 나타나게 된 것은 아이러 니칼 하게도 조선의 불교 탄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급진파 사대부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새로운 왕조 조선을 개창한 조선 태조는 자신을 추대한 사대부 세력과 자신과의 통치 역학을 신권정치( 臣 權 政 治 )라는 제도로 정 립한다. 즉, 국왕은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나 정치의 실제는 통치시스템을 통한 제도적 운영에 일임하는 방식이다. 이는 이후 개국의 또 다른 축이었던 이성계 직속 군벌세력의 반발 을 불러와 왕자의 난이라는 혼란상황을 야기하고 이후 조선 전기의 정치 역학의 한 패 러다임으로 자리잡게 되지만 신권적 이상을 추구하는 세력이거나, 왕권적 리더십을 추 구하는 세력이거나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성리학적 이념의 정치적 구현이라는 목표의 추구에 경쟁적으로 몰입하면서 삼국 이래의 불교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탄압을 일으키게 된다. 조선 개국 초기의 여러 왕들 즉, 태조, 세종, 세조 들 이 개인적으로는 혹신( 酷 信 )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불교를 신봉하는 불교신자였음에 도 그들의 국가 정책은 불교를 탄압하는 모양새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정치 상황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조선 개국 이후 집권 세력의 불교 탄압은 주로 승려의 출가 제한, 사찰 재산의 압류, 사찰의 혁거( 革 去 )라는 3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개국 이후 태조는 성리학을 조선의 정치 이념으로 확립하고 우선 승려의 출가를 제한 하는 도첩제( 度 牒 制 )를 시행한다. 물론 도첩제 자체는 무분별한 출가를 막기 위하여 고려 충숙왕대부터 이미 시행되고 는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1392년(태조 1) 사찰과 승려의 정리와 함께 국가의 재 소요사 연구 81

정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승려가 되려는 자가 양반 자제인 경우는 포 100필, 서 인( 庶 人 )이면 포 150필, 천인( 賤 人 )이면 포 200필을 관에 납부하여 도첩을 받도록 했 다. 이는 세조의 호불책으로 정포 20필로 줄어들기도 했지만 다시 성종연간 군액의 증 가를 위해 도첩 발행을 일시 중단함으로써 승려가 되는 길은 거의 단절되었다. 즉 조선의 도첩제는 승려로 출가하는 방법 자체를 폐지하는 불교 탄압의 한 방편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사찰 재산의 압류 역시 조선 초기 태종 연간에 집중적이고도 강력하게 추진된다. 일부 사찰에서 나타난 승려들의 비행( 非 行 )을 꼬투리잡아 태종은 아예 사찰이 소유한 남녀 노비( 奴 婢 ) 전체를 혁파( 革 罷 ), 압류한 이후 사찰의 재산 역시 이를 강력히 압류하 고 있는 것이다. (전략)... 회암사와 진관사는 이름난 절이라고 부르는데, 이제 사익과 성주( 省 珠 )는 그 절의 비자와 간음하다가 일이 발각되어서 도망하였고, 정후( 正 厚 )와 신각( 信 覺 ) 가휴( 可 休 )도 또한 비자를 간음하였으니, 그 음욕을 자행한 것은 도징과 설연보다 심한 것입니다. 회암사와 진관사에 있는 자가 이러할진댄, 하 물며 다른 절 중이겠습니까. 또 중은 이미 어버이[ 親 ]를 이별하고 애정을 끊었 으니, 비록 부모의 노비라 할지라도, 부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절의 노비는 혁파하고, 중들의 노비도 본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그 스승의 청정한 가 르침에 부응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3의정 및 대사헌을 불러서 명하기를, 서울과 지방의 사찰 노비를 혁파함이 가하다. 개경( 開 慶 ) 연경( 衍 慶 ) 대자암 ( 大 慈 菴 )의 노비도 또한 혁파할 것이나, 오직 정업원( 淨 業 院 )은 과부( 寡 婦 )들이 모인 곳이고, 또 노자( 奴 子 )가 가까이 하는 곳이 아니니 면하라. 하고, 3) 3) 세종실록, 세종 1년(1419) 11월 28일(무진) 82 홍정덕

또 서울과 지방에 사사( 寺 社 )를 세워, 각 종( 宗 )에 분속( 分 屬 )시켰는데, 그 수효 가 엄청나게 많으나, 중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절을 비워두고 거처하는 자가 없으며, 계속하여 수즙( 修 葺 )하지 않으므로 점점 무너지고 허물어지게 되었습니 다. 그러므로 조계( 曹 溪 ) 천태( 天 台 ) 총남( 摠 南 ) 3종을 합쳐서 선종( 禪 宗 )으 로, 화엄( 華 嚴 ) 자은( 慈 恩 ) 중신( 中 神 ) 시흥( 始 興 ) 4종을 합쳐서 교종( 敎 宗 )으 로 하며, 서울과 지방에 중들이 우거할 만한 곳을 가려서 36개소의 절만을 두 어, 양종에 분속시킬 것입니다. 4) 위의 두 기사는 세종 연대에 들어와서 보다 구체화되는 불교 재산의 압류에 관한 내 용이다. 즉 사찰이 소유한 사노비( 寺 奴 婢 )를 몰수하고 이어 사찰이 소유한 토지를 제한함은 물론 사찰 자체를 혁파하는 심각한 조치가 강력히 취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조선의 집권층은 불교 행사에 대한 집요한 시비( 是 非 )를 제기하며 이의 규제를 강력히 요구하게 되는데 이는 불교 탄압을 넘어 말살정책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전략)...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이 오랑캐의 법을 탕척( 盪 滌 )하여 없애버리 고, 크게 풍속을 변하시어 탑묘( 塔 廟 )를 훼철하시고 경률( 經 律 )을 불사르고, 경 내( 境 內 )에 있는 승려들은 다 속가( 俗 家 )로 돌아가게 하고, 예관( 禮 官 )에 명하여 문공가례( 文 公 家 禮 ) 에 의하여 경사( 卿 士 )와 서민( 庶 民 )의 상제( 喪 祭 )에 관한 예를 정하여 품위와 등급에 차이가 있게 하고, 의금( 衣 衾 )과 기명( 器 皿 )도 품수 가 있게 하여 도식( 圖 式 )을 진열해서 간이하고 명백하게 하여, 아래로 우매한 백성들도 다 알기 쉽고 행할 수 있게 하면, 지난날 놀고 앉아서 먹던 무리들이 지금에는 다 호미를 들고 밭이랑에 나가는 백성이 될 것이며, 부처를 섬겨 앞 날에 복을 빌던 무리들은 지금은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사람으 로 전환하여, 도( 道 )는 두 가지가 없고, 나라에는 다른 풍속이 없게 되며, 인심 이 바르게 되고, 도학이 더욱 밝아, 세도( 世 道 )가 순화할 것이니, 5) 4)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4월 5일(경술) 소요사 연구 83

저번에 미친 중[ 狂 僧 ]이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꾀어서 백성의 고혈을 짜 내어 가지고 떼를 지어 한강에 모여 수륙재의 모임을 베풀었사온바, 이에 위로는 거 가( 巨 家 ) 대족( 大 族 )으로부터 여항( 閭 巷 )의 부녀( 婦 女 )에 이르기까지 우러러 받 들고 시주( 施 主 )하기를, 오직 남에게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재물을 소모하 고, 풍속을 무너뜨림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었으되, 유사( 有 司 )가 감히 말을 하 지 못하고, 국가에서 이를 금하지 아니하매, 점차 퍼져 나가서 서로 만연( 蔓 延 ) 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더욱 거리낌이 없게 되었나이다. 귀하고 이름난 사람 을 인연하여 앞으로 회암사( 檜 巖 寺 )를 다시 세우려 함에 그 비용으로 드는 전곡 ( 錢 穀 )과 화폐( 貨 幣 )가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되오니, 그 폐단이 지난날보다 더 욱 심하고 많으옵니다. 6) 남양덕이 아뢰기를, 듣자오니 부녀가 절에 올라가 유숙하였으므로 추국한다고 하옵니다. 대부인( 大 夫 人 )과 돈녕( 敦 寧 ) 안수산( 安 壽 山 )의 첩( 妾 ) 등이 절에 가서 여러 날 머물었다 하옵고, 그 나머지 15, 6명이나 되는 부녀는 그 성씨( 姓 氏 )는 모르오나 이문( 移 文 )하여 추국한다고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이 일을 듣고 마음으로 실로 놀랐었다. 부녀로 말하면 사리( 事 理 )를 모르고 그랬다고 할 수도 있으나, 안수산은 이미 통절( 痛 切 )하게 책( 責 )하였도다. 또 이 일에 비록 죄명을 붙이기는 하나, 위령률( 違 令 律 )에 불과하고, 더군다나, 대 부인은 명의에 있어서 죄를 가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반드시 그 죄명을 붙여야 하겠느냐. 아직은 그냥 내버려 두고 추국하지 아니함이 옳겠다. 하니, 남양덕이 아뢰기를, 대부인은 추국하지 마는 것이 마땅하옵거니와, 기타의 부녀도 역시 많이 절에 올라가서 여러 날 유숙한 것은, 비록 법을 세운 것은 없사오나, 부녀자가 절에 올라가는 것은 행실에 있어 부당하옵고, 더군다나, 부녀가 중과 같이 절에 올 5) 세종실록, 세종 6년(1424) 3월 8일(갑신) 6) 세종실록, 세종16년(1434년) 4월 12일(기미) 84 홍정덕

라가면 실절( 失 節 )한 것으로 논죄한다는 것이 육전( 六 典 ) 에 실려 있사오니, 그 부녀들은 본래 사리를 알지 못하고 그리하였다 하옵더라도, 이들로 하여금 절에 올라가게 한 가장의 죄는 용서할 수 없사오니, 마땅히 추국하고 징계하여 야 할 것이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내 마음으로는 따라간 여종이 많았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만일 가정의 부녀라 면 진실로 타당치 못하니, 아울러 추핵( 推 劾 )하여 아뢰라. 7) 예시한 3건의 자료는 전제하였던 것처럼 조선 초기 집권층에 의한 불교 탄압의 내용 과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즉 사노비의 압류와 사찰의 혁파, 그리고 혁파 과정에서 살 아남은 극소수 사찰에 조차 불교 행사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여 불교의 존재를 압살하 려는 의도를 적극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종대를 지나면서 성리학적이 정치와 학문의 주도 이념으로 확립되고 사림세력의 정 계진출이 확대되면서 적어도 정책적으로는 불교탄압의 단계를 넘어 말살단계로 접어들 게 되는 것이다. 2) 소요사의 존립 (1) 태조의 소요산 주필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조는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게 된다. 왕자의 난을 주도한 이방원 세력은 왕실 내부의 경쟁자를 제거하고 정조전 등 신권파 관료를 숙청해 낸 후 개성으로의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이는 태조의 측근 정치세력을 말살한 것은 물론 태조가 추구하였던 정책까지도 전면적으로 철회한 것으로 태조의 입 장에서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조치였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태조는 후일을 도모하며 8) 우선 지방 각지를 떠돌게 된다. 7) 세종실록, 세종16년(1434년) 5월 1일(정축) 소요사 연구 85

다음의 표는 개성으로의 환도 이후에 자료에 나타나는 이성계의 지방 편력이다. 일시 상황 정종 1년 3월 9일 개경으로 환도, 이성계는 궁에 머무르지 않고 변안렬의 옛집에 나감 정종 1년 3월 13일 다시 윤환의 옛집으로 옮김 정종 1년 3월 13일 관음굴에 감, 능엄 법석을 베풂 정종 1년 4월 1일 평주 온천에 감, 16일에 돌아 옴 정종 1년 8월 26일 낙산사에서 능엄 법회를 베풂 정종 1년 10월 19일 한양에 감 정종 1년 11월 22일 한양에서 개경으로 돌아옴 정종 1년 12월 1일 성거산 관음굴에 감 정종 2년 4월 18일 정릉사 탑전에서 불사를 베풂 정종 2년 10월 15일 한양에 감 정종 2년 10월 26일 한양에서 오대산 낙산사로 떠남 정종 2년 11월 13일 오대산에서 개경으로 돌아 옴 태종 1년 3월 11일 보개산에 감 태종 1년 3월 22일 보개산에서 개경에 돌아 옴 태종 1년 윤 3월 1일 한양에 감 태종 1년 윤 3월 11일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떠남, 이후 안변 석왕사에 머뭄 태종 1년 4월 28일 안변에서 돌아 옴 태종 1년 9월 27일 평주 온천에 감 태종 1년 10월 17일 평주 온천에서 개경에 돌아 옴 태종 1년 11월 26일 소요산에 감 소요사에 머뭄 태종 2년 3월 9일 소요사 아래에 별전을 짓고 계속 머뭄 태종 2년 4월 28일 소요산에서 한양으로 감 태종 2년 5월 1일 한양에서 다시 소요산으로 감 태종 2년 6월 9일 소요산에서 양주 회암사로 감 태종 2년 11월 1일 회암사에서 동북면으로 떠남, 조사의의 난 시작 표 1. 왕자의 난 이후 태조의 전국 순력상황 8) 이는 후일 태종이 즉위한 이후에 조사의의 난이라는 정변으로 나타난다. 태조는 자신의 측근인 조 사의가 함경도로 부임하는 것을 계기로 함경도의 측근세력을 모아 군사정변을 진행하고 이를 통하 여 다시 왕위에 복위하려하여 하였다. 86 홍정덕

자료에 나타나는 것처럼 태조가 지방 편력 중에 소요산으로 온 것은 태종 1년 11월 26일로서 이는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은 태종 이방원 세력이 다시 개경으로 환도한 지 2년 8개월이 지난 시점이었고 실제로는 태조의 정권 탈취를 위한 정변이었던 조사 의의 난이 일어나기 1년 전이었다. 그리고 소요산에 6개월여 머물며 행궁을 짓고 소요 사를 수리하는 일이 있었다. 전술하였거니와 태조 전국 주유는 산천의 경개를 즐기며 한가로이 유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 속내가 대단히 복잡하였다, 태조는 자신을 왕위에서 몰아내 고 동생들을 죽인 왕자의 난 당사자들을 향한 노골적인 증오와 미움을 숨기려 하지 않 았다. 따라서 자신의 주필지에 찾아오는 국왕 태종을 포함한 새 집권층의 인사들에게 너그 럽게 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에 주저함이 없 었다. 백운사( 白 雲 社 )의 늙은 중 신강( 信 剛 )이 태상왕을 알현하니, 태상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방번( 李 芳 蕃 ) 이방석( 李 芳 碩 )이 다 죽었다. 내가 비록 잊고자 하나 잊을 수 가 없구나! 하니, 9) 임금이 태상왕을 소요산에 가서 뵈었다. 임금이 조용히 헌수( 獻 壽 )하였다. 태상 왕과 임금은 술이 거나하자 시( 詩 )를 읊고 화답하였다. 시연( 侍 宴 )하였던 종친 ( 宗 親 )과 성석린( 成 石 璘 ) 등이 태상왕의 환가( 還 駕 )를 극력 청하였다. 또 사뢰기를, 염불하고 불경을 읽음에 어찌 꼭 소요산이라야만 되겠습니까? 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9) 정종 1년 3월 13일 (갑신) 소요사 연구 87

그대들의 뜻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 하고, 공중에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들도 이미 서방 정토( 西 方 淨 土 )로 향하여 있다. 고 하였다. 태상왕은 무인년에 병이 든 뒤로부터 마음이 항상 답답하여 즐겁지 아니하기 때문에, 놀기 위한 행사가 점점 잦아졌다. 10) 위의 자료들은 태조가 공공연히 심지어는 왕자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인 태종을 면전 에 두고 토로한 일종의 원망이며 증오심이었다. 더욱이 태종과 그를 시위하여 온 정권 탈취자들이 모두 함께 있는 자리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은 우리들도 이미 서방 정토( 西 方 淨 土 )로 향하여 있다. 라는 말은 네가 비록 지금 권력을 가졌으나 너도 언젠가는 죽을 날이 있을 것이다 라는 의미의 일종의 저주에 가까운 절규였다. 아울러 그는 아들 태종에게 강권하다시피 사찰에 전지를 내려줄 것을 요구한다. 이는 자신이 창업한 왕조 조선의 건국이념인 숭유억불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종의 정치적 시위였다. 회암사( 檜 巖 寺 )에 전지 3백결을 주었다. 처음에 사전( 寺 田 )이 5백결이었으나, 무인년에 3백결을 제( 除 )하여 공신( 功 臣 )에게 주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환속( 還 屬 )시키고 또 60결을 더 주었으니 태상왕의 뜻을 좇은 것이었다. 11) 밭 74결을 회암사( 檜 巖 寺 )에 내려 주었으니, 태상왕의 청( 請 )에 따른 것이었다. 12) 태상왕이 소요산에서 회암사( 檜 巖 寺 )로 행차하였다. 태상왕이 회암사를 중수( 重 修 )하고, 또 궁실( 宮 室 )을 지어 머물러 살려고 하니, 임금이 그 뜻을 어기기가 10) 태종 2년 1월 28일 (신해) 11) 태종 2년 5월 22일 (갑진) 12) 태종 2년 6월 6일 (무오) 88 홍정덕

어려워서 대부( 隊 副 ) 1백 50명을 보내어 부역( 赴 役 )하게 하였다. 어느 한 사람 이 망명( 亡 命 )하였으므로, 태상왕이 체포하여 죽이라 명하였다. 13) 회암사( 檜 巖 寺 )에 밭 1백 20결( 結 )을 주었으니, 태상왕의 뜻을 따른 것이었 다. 14) (2) 소요산 행궁 태조가 처음 동두천 소요산을 찾은 것은 태종 1(1401)년 11월 26일 혹한의 겨울이었다. 금강산을 유람하고 안변 석왕사에서 약 한 달간 머물던 그는 이후 황해도 평산의 평 주 온천에 다녀오고 난 후 개경에서 지내던 참이었다. 하필 혹한기의 겨울에 거처도 마 땅치 않은 소요산으로 들어 온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단지 다음의 기록에서 그 이유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신 등이 오래 머물면서 영선( 營 繕 )하는 폐단을 자세히 진달하였더니, 태상왕께 서 말씀하시기를, 그렇지만 장차 나의 후사( 後 事 )를 닦으려는 것이다. 경들은 돌아가라. 내가 치재( 致 齋 )하겠다. 15) 이 절에 명사( 名 師 )가 있으니, 절 아래에다 집을 짓고 거처하고자 한다. 16) 즉 태조가 소요산에 머물려는 이유는 자신의 주장대로라면 전혀 종교적인 것이었다. 즉 좋은 스승(승려)를 찾았으니 여기에서 불도에 전념하려 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그러나 태조가 내세운 소요산 주필의 이유는 이와 같은 종교적인 것 외에 또 다른 실질적 이유가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태조는 이미 골육상쟁을 통하여 집권하며 자신을 권좌에서 몰아낸 아들 태종을 향한 반정( 反 正 )을 준비하고 있었다. 13) 태종 2년 6월 9일 (신유) 14) 태종 2년 8월 8일 (기미) 15) 태종 1년 12월 17일 (신사) 16) 태종 2년 1월 8일 (임오) 소요사 연구 89

한편 갑작스런 태조의 소요산 주필은 당장 필요한 거처 마련에서부터 심한 어려움을 동반했다. 한 겨울에 행궁을 수축하는 어려운 공사를 감행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태상왕이 소요산에 이르러 근처의 본궁( 本 宮 ) 노예( 奴 隷 )와 좌도( 左 道 ) 강원 도 충청도의 가까운 고을의 사람들을 징발하였는데, 날은 차고 얼음이 얼어 섶을 불 피워 가며 땅을 파서 터를 쌓고 대궐을 경영하여 연말( 年 末 )에 이르니, 백성들이 몹시 괴롭게 여기었다. 17) 때가 몹시 춥사온데, 태상왕께서 소요산에 계시는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습 니다. 모시는 사람들은 한데서 자고, 나무와 돌을 다듬는 사람은 모두 동상에 걸려서 살가죽이 얼어 터졌습니다. 또 경기( 京 畿 )에서 공억( 供 億 )으로 왕래가 번거로워 폐단이 되오니, 나이 많고 덕이 높으신 대신에게 명하여 간절히 청하 여 모시고 돌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18) 태상왕이 소요산 아래에다 별전( 別 殿 )을 지었다. 태상왕이 경기우도 도사( 京 畿 右 道 都 事 ) 이명덕( 李 明 德 )에게 말하기를, 전( 殿 )을 하나 지어 손님을 대접하려 고 한다. 하니, 이명덕이 의정부에 고하고, 의정부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바로 경기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역사에 나가게 하였다. 19) 결국 행궁 조성공사는 강추위가 몰아치는 가운데 짚불을 놓아가며 얼어붙은 땅을 녹 이는 난공사로 진행되었고 동원된 백성들의 고초가 말이 아니었다. 아울러 태조의 수행 원의 숙소도 마련되지 않아 노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태조를 포함한 관계 인원의 수발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자료에 나와 있는 것처럼 경기지역의 고을이 이를 부담하 여 그 왕래에 드는 공력이 만만치 않았다. 태조 역시 이 문제, 특히 부족한 숙소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요산 행궁을 증축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역시 문제를 해결하기에 17) 태종 1년 12월 17일 (신미) 18) 태종 2년 1월 12일 (을미) 19) 태종 2년 3월 9일 (임진) 90 홍정덕

는 모자랐으므로 이윽고 태조는 행궁을 회암사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당시의 행궁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그리고 태종 9년 즉 행궁의 증축이 완료되고 나서 불과 7년 만에 행궁이 불타버렸으므로, 500여년의 세월 이 지난 지금 그 흔적을 요연하게 확인할 수도 없다. 단지 일부 기록을 통하여 행궁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절 아래에다 집을 짓고 거처하고자 한다. 20) 소요산 양주의 치소에서 북으로 40리에 있다. 대탄까지는 20리를 더 가야하는데 왕방 산의 서쪽 기슭으로 또 다른 별개의 산을 이룬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전하 는 말에 의하면 골짜기의 초입에 왕궁의 유적이 두 군데 있다한다. 풀이 우거 진 속에 여러 줄의 주춧돌이 남아있는데 이곳이 바로 영락 연간 태상왕의 행궁 이 있던 곳이라 한다. 서울에서 백리 떨어져 있고, 풍양궁에서도 백리 떨어져 있는데, 골짜기 입구에 이제는 쓰지 않는 옛 우물의 돌난간이 있다. ( 逍 遙 山 楊 州 治 北 四 十 里 不 及 大 灘 津 二 十 里 爲 王 方 西 麓 別 山 谷 口 內 外 山 下 人 相 傳 王 宮 遺 墟 二 處 荒 草 中 有 石 砌 數 重 而 已 此 永 樂 間 太 上 行 宮 云 去 京 城 百 里 豐 壤 宮 又 百 里 谷 口 有 廢 井 石 欄 ) 21) 이 자료들을 검토하면 먼저 제시한 실록의 기록과 상당 부분 부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용한 미수 허목의 소요산 기행문을 실록의 기록과 대조하면 실록에는 태종 1년 12월에 행궁을 초축하고 이어 태종 2년 3월 9일에 별전을 증축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허목의 기행문에는 건물의 유적이 2군데에 있다고 기록하여 이 두 개의 기록이 맞아 떨 어진다. 그리고 실록에는 절 아래에 머물 곳을 마련하겠다고 하였는데 허목의 기록에는 골짜기의 입구에 주춧돌이 남아있다고 하여 역시 두 기록이 모두 부합한다. 20) 태종 2년 1월 8일 (임오) 21) 허목( 許 穆 ) 미수기언( 眉 叟 記 言 ) 소요산기( 逍 遙 山 記 ) 중 소요사 연구 91

단지 소요산 행궁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골짜기의 입구( 谷 口 )라는 표현뿐인데 현재의 상황에서 이 골짜기 입구를 어디로 보아야하는 지는 상당히 어려운 난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백 명이 넘는 수행원이 태조와 동거하였고, 태종이 소요산에 찾아와 헌수 하였다면 태종의 수행원까지 수백 명이 함께 머무를 정도의 공간이 필요하 고 이를 충족하려면 현재의 소요산 입구 평지에서 많이 올라간 지점은 아니었을 듯하 다. 입구의 골짜기가 복개되지 않고 원형대로 남아있었다면 행궁의 유지를 찾는 데 많 은 도움이 되었을 듯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3) 태종과 여러 차사의 소요산 방문 태종이 동두천 소요산에 머문 기간은 모두 약 7개월간이었다. 이 기간 소요산에 머문 태조를 찾아 두 번 행행( 行 幸 )하였고 행행 때마다 연회( 宴 會 ) 를 차려 헌수( 獻 壽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찾지 못할 경우에는 신하를 보내어 여 러 차례 문안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자료로 정리해 보자. 1 태종의 소요산 행행 일시 목적 내용 비고 태종 2년 1월 16일 문안 헌수( 獻 壽 ), 시회( 詩 會 ) 환가( 還 駕 ) 요청 불응 태종 2년 3월 19일 외교 협의 명과의 말( 馬 ) 무역 현안 논의 사냥 겸행 표 2. 태종의 소요산 행행 2 태종의 소요산 행행 불발 일시 목적 불발 사유 태종 1년 12월 17일 문안 태조가 설 후에 오라고 지시 태종 2년 2월 8일 조회 태종의 신병( 身 病 ) 태종 2년 5월 3일 문안 폭우로 길이 막힘 태종 2년 5월 8일 헌수 태조가 능엄법회( 愣 嚴 法 會 )를 이유로 왕래를 금함 태종 2년 6월 1일 헌수 간관이 농사철을 이유로 행행( 行 幸 )을 반대 표 3. 태종의 소요산 행행 불발 92 홍정덕

3 차사의 소요산 방문 일시 차사 명 내용 비고 태종1년 12월 17일 판승녕부사 정용수 승녕부윤 유창 문안 태종1년 12월 21일 좌정승 김사형 문안 태종의 문안을 막음 태종2년 1월 8일 지신사 박석명 문안 태종이 아파 대신감 태종2년 1월 16일 판서운관사 황하준 재해 위문 소요산에 큰돌이 무너짐 표 4. 태종차사의 소요산 방문 4 기타 개인적인 소요산 방문 일시 방문자 목적 내용 태종 2년 4월 21일 박만 부임 인사 동북면 인민에 대한 선정 부탁 표 5. 관리의 개인 방문 이처럼 태조의 소요산 행궁에는 실록에만 태종의 친행( 親 行 ) 2회와 차사의 사행( 使 行 )4회, 그리고 지방으로 떠나는 박만의 고별 방문까지 모두 합하여 7회의 방문 기록이 나타나는데 대부분은 문안( 問 安 )과 헌수( 獻 壽 )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태조는 이후 비좁은 소요산을 떠나 보다 넓은 회암사에 새로이 행궁을 짓고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회암사에 행궁을 건설하는 일 역시 급작스러운 공역으로 여기에 동원된 군인이 힘든 노역을 이기지 못하여 이탈하자 태조는 그를 잡아 사형에 처하기까지 하였 다. 왕위에서 물러난 자신을 업신여기는 일로 간주하였던 것으로 추론되지만 이는 당시 태조의 심중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임금이었던 태종이 태조의 뜻을 어기 기 어려워 노역군을 동원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서울(당시에는 개경)에 머물지 않고 지방을 떠돌며 머무는 곳마다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자 토목사업을 요구하는 아버지 태조의 요구에 태종도 어느 정도는 지쳐있음을 이 기록은 암시한다. 태상왕이 소요산에서 회암사( 檜 巖 寺 )로 행차하였다. 태상왕이 회암사를 중수( 重 소요사 연구 93

修 )하고, 또 궁실( 宮 室 )을 지어 머물러 살려고 하니, 임금이 그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대부( 隊 副 ) 1백 50명을 보내어 부역( 赴 役 )하게 하였다. 어느 한 사람 이 망명( 亡 命 )하였으므로, 태상왕이 체포하여 죽이라 명하였다. 22) 오늘 우리가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회암사 유적은 거의 왕궁에 버금가는 제도와 규모를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태조 당시의 중수( 重 修 ) 결과는 아니겠지만 23), 그 기본은 아마도 태조의 주필 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태조가 회암사로 떠나간 후 소요산 행궁은 비어있었다. 그리고 의문의 화재로 불타버 리게 된다. 기록은 이를 아주 간단히 산불이 옮겨 붙어 소실( 燒 失 )되었다고 전하지만 그 위치가 소요산 골짜기의 입구였다는 여러 기록으로 보아 이는 쉽게 수긍하기 어렵 다. 아마도 실화였거나, 방화의 혐의도 아주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산불이 옮겨붙어 행궁이 소실되었다는데, 정작 보다 산림에 접근하여 있는 소요사는 불에 탔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세종 초년에 전국의 사찰을 훼파할 때 소요사는 살아남고 그 당시에 이미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태종 조에 소실되었다면 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소요산( 逍 遙 山 )의 이궁( 離 宮 )에 불이 났으니, 산불이 연소( 延 燒 )된 것이었다. 24) 그리고 당시의 화재로 피해를 입기는 하였겠지만, 소요산 행궁이 완전 소실된 것은 아니고 일부 건물은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 이다. 보장산( 寶 藏 山 )에서 몰이하고, 저녁에 사천현( 沙 川 縣 )의 소요산( 逍 遙 山 ) 아래에 머물렀다. 대가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숙소에 이르러 독초( 毒 草 )를 잘못 먹고 갑 자기 죽은 사람이 6인이었는데, 약을 복용하여 살아난 사람이 2인이었다. 25) 22) 태종 2년 6월 9일 (신유) 23) 회암사는 태조 이후에도 태종, 세종 조에 걸쳐 왕실 사찰로 번성하였고, 특히 명종 조에 이르러 문전왕후의 적극적인 비호 아래 크게 융성하였다. 24) 태종 5년 3월 19일 (갑인) 25) 태종 16년 3월 5일 (정유) 94 홍정덕

위의 자료는 소요산 행궁이 화재를 당한 후 11년이 지나고 작성된 것이다. 즉 태종이 모처럼 강무( 講 武 )에 나서 영평현 보장산(지금은 포천시 창수면)에서 사냥한 후 한탄 나루를 거쳐 소요산에 이르러 숙박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정황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강무는 사냥의 형식을 띈 군사훈련이므로 수많은 군사가 동원된다. 따라서 강무 장은 국가에서 지정하여 관리하는 데 특히 평상 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여 사냥의 대 상이 되는 짐승을 보호하고 강무장이 경작지로 변환되는 일을 엄격히 방지하였다. 영평 은 왕방산이 강무장으로 지정되어 있어 이에 따른 관리가 부수되었지만 소요산은 강무 장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강무와 관련된 왕의 행행이 소요산에서 이루어지 는 것은 이것이 유일한 예이며 동시에 아주 특별한 사건이기도 하다. 문제는 강무를 행 할 때에 당일이 아닌 여러 날이 걸릴 경우 왕의 숙소가 문제가 된다. 일반 수행원과 달 리 왕이 막차( 幕 次 )에 유하는 것은 아주 번거롭고 위험한 일이기에 가능한 피하여야 하 기 때문이다. 위의 사실과 정황을 감안하면 당시 강무를 진행하며 숙소를 소요산 아래 로 잡은 것 은 여기에 부응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왕이 묵을 숙소가 있었기 때문이라 는 추론이 가능해 진다. 그렇다면 소요산 아래 즉 소요산 행궁 자리에 아직 소실되지 않은 일부 건물이 잔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4) 사찰 혁파와 소요사의 존립 전술한 것처럼 세종은 사찰의 난립으로 인한 사찰 관리 부실을 이유로 전국의 사찰을 36개소만 남기고 모조리 혁파하여 버린다. 전국의 사찰을 혁파한 것은 본격적인 불교탄 압의 국면에 들어선 것을 의미하는 데 이때 선( 禪 ), 교( 敎 ) 양종 각각 18개 사( 寺 )가 살 아남게 된다. 이 대 존립한 36개의 사찰 가운데 소요사가 포함된다. 또 서울과 지방에 사사( 寺 社 )를 세워, 각 종( 宗 )에 분속( 分 屬 )시켰는데, 그 수효가 엄청나게 많으나, 중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절을 비워두고 거처하는 자가 없으며, 계속하여 수즙( 修 葺 )하지 않으므로 점점 무너지고 허물어지게 되 소요사 연구 95

었습니다. 그러므로 조계( 曹 溪 ) 천태( 天 台 ) 총남( 摠 南 ) 3종을 합쳐서 선종( 禪 宗 )으로, 화엄( 華 嚴 ) 자은( 慈 恩 ) 중신( 中 神 ) 시흥( 始 興 ) 4종을 합쳐서 교종( 敎 宗 )으로 하며, 서울과 지방에 중들이 우거할 만한 곳을 가려서 36개소의 절만 을 두어, 양종에 분속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전지를 넉넉하게 급여하고 우거하 는 중의 인원을 작정하며 무리지어 사는 규칙을 작성하여, 불도( 佛 道 )를 정하게 닦도록 할 것입니다. 이어 승록사( 僧 錄 司 )를 혁파하고, 서울에 있는 흥천사( 興 天 寺 )를 선종 도회소( 禪 宗 都 會 所 )로, 흥덕사( 興 德 寺 )를 교종 도회소( 敎 宗 都 會 所 ) 로 하며, 나이와 행동이 아울러 높은 자를 가려 뽑아 양종의 행수 장무( 行 首 掌 務 )를 삼아서 중들의 일을 살피게 하기를 청합니다. 이제 분속하려는 서울과 지방의 사사( 寺 社 )와 우거하는 중의 정원과 급여할 전지의 결수( 結 數 )를 가지고 낱낱이 아룁니다. 선종에 예속된 것으로는 절이 18개소, 전지( 田 地 )가 4천 2백 50결입니다...회 암사( 檜 巖 寺 )는 원속전이 5백결이고, 항거승이 2백 50명이며, 진관사( 津 寬 寺 )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과 수륙위전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 며, 고양( 高 陽 ) 대자암( 大 慈 菴 )은 원속전이 1백 52결 96복( 卜 )인데, 이번에 97 결 4복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입니다. 교종( 敎 宗 )에 소속된 것으로는 절이 18개소, 전지가 3천 7백 결입니다. 소요사 ( 逍 遙 寺 )는 이번에 속전이 1백 50결이고, 거승은 70명입니다. 26) 물론 세종 자신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반 불교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아버지 태 종의 죽음 후에 그의 명복을 비는 수륙제( 水 陸 齊 )를 진관사에서 성대하게 지냈음은 물 론 자신은 후에 경복궁 안에 내불당을 두고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왕 개인의 사적인 신앙이었고 불교를 억압하는 것은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의 확산과 보급과 맞물려 국가적인 정체성 구현 차원에서 진행해야 할 공적인 국 왕의 임무였다. 따라서 불교는 승려의 출가를 제한하는 도첩제( 度 牒 制 )의 시행과, 사찰 소속 노비( 奴 26) 세종 6년 4월 5일 (경술) 96 홍정덕

婢 )의 혁거, 나아가서는 불교 사찰의 혁파라는 존망의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세종의 사찰 혁파 와중에서 살아남은 사찰은 그 상당수가 왕실과 인연을 가진 사찰이 라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 36개의 생존 사찰 중에 동두천 소요산의 소요사가 있었 다. 소요사 역시 태조가 1년 가까이 주필하였다는 인연이 아마도 존립의 가장 큰 이유 였던 것으로 보인다. 3) 소요사 존립의 전말 전국의 사찰을 36개소만 남기고 혁파하라는 세종의 불교 억압 조치 가운데에도 소요 사는 그대로 존치되었는데 허락된 소요사의 규모는 소속 토지 150결에 항거승 70명이 었다. 토지 1결( 結 )의 넓이는 토지의 등품에 따라 다르나 가장 좋은 1등품 토지의 경우 2,760평, 가장 낮은 6등품 토지가 11,030평이었으므로 소요사가 받은 토지를 환산하면 대략 412,500평에서 1,654,500평에 이르는 규모가 된다. 그리고 항거승은 절에 머물 수 있는 승려의 정원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수가 70명이니 작다고 할 수는 없는 규모 였다. 법보 종찰인 해인사와 대찰인 속리산 법주사의 항거승이 각각 100명 수준이었다. 소요사가 가혹한 불교 탄압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인은 아무래도 사찰의 유 래나 규모에 기인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전의 불교 사찰 관련 자료에 소요사가 규모나 법연( 法 緣 )의 모든 면에서 뚜렷한 모습을 보여고 있지 않은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요사의 생존은 아무래도 특별한 경우로 보아야겠고 그 특별한 사연은 왕 실, 즉 태조와의 인연 외에는 달리 찾을 수가 없다. 즉 태조의 소요사 주필과 이에 관 련한 태종의 소요사 행행이 바로 소요사 생존의 이유가 된디고 보아야 한다. 이는 전국 사찰이 36개로 제한되면서 각도의 유수한 사찰이 모두 혁파의 비운을 맞아 심지어 2-3개 정도의 사찰만이 살아남고 심지어 함경도와 평안도는 도 전체에 단 1개 소요사 연구 97

소의 사찰만이 잔류하게 되는 상황에서 유독 경기의 지역의 흥천사, 관음굴, 진관사, 승가사, 회암사, 대자암, 그리고 함경도의 석왕사 등 특히 태조와 관련이 깊은 사찰들 이 살아남는 정황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조사의의 난이라는 반정의 기지로 활용되었다하더라도 소요사의 입장에 서는 태조와의 인연이 대단히 소중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세종실록지리지( 世 宗 實 錄 地 理 志 )>의 다음 기사는 상당히 주목할 만 하다. 소요사 소요산 허리에 있다. 태종 3년 임오에 태조가 절 남쪽 행전에 머물러, 여러 달을 두고 절의 온갖 그림을 새롭게 하였으며, 금상 6년 갑진에 태조 의 원당으로 하여 교종에 붙이고, 밭 1백 50결을 주었다. 27) 즉, 소요사를 태조의 원당( 願 堂 )으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본래 원당( 願 堂 )은 능의 근 처에 위치하여 죽은 왕의 명복( 冥 福 )을 비는 사찰을 의미하는데, 태조의 건원릉에 마땅 한 원찰이 없었으므로 소요사를 태조의 원찰( 願 刹 )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불교 탄압에서 살아남은 소요사가 이후 교세( 敎 勢 )가 크게 진작되었다든지, 선풍( 禪 風 )이 크게 떨쳤다는 지 한 것 같지는 않다. 소요사는 이후 조용하고 한적하며 산수( 山 水 ), 특히 단풍이 미려( 美 麗 )한 소요산의 작은 사찰로 풍류( 風 流 )의 탐방 대상으 로 나타나지 불교신앙의 중심지나 선승( 禪 僧 )의 주류지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따라서 소요사라는 이름은 불교 관련 기사보다는 오히려 유사( 儒 士 )들의 원족( 遠 足 )이나 답산 ( 踏 山 ) 기록에 주로 나타나다가 이윽고는 소요사라는 이름마저 소멸되고 자재암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27) 세종실록지리지 <양주> 조 98 홍정덕

(4) 소요사의 변천과 쇠락 1) 허목( 許 穆 )의 방문 조선시대에 소요사를 찾은 많은 문사( 文 士 )가 시문을 남겼지만 당시의 소요사를 짐작 할 수 있는 기행문을 남긴 사람은 아마도 미수( 眉 叟 ) 허목( 許 穆 )이 거의 유일하다고 생 각된다. 허목은 서울을 떠나 자신의 거주지인 연천으로 북행하는 노정( 路 程 ) 가운데 소요사를 찾았고, 그 내용을 기행문으로 작성하여 자신의 문집인 미수기언( 眉 叟 記 言 ) 에 남겼다. 미수 허목의 이 기행문 逍 遙 山 記 는 조선 후기의 소요사를 대략이나마 개관할 수 있 는 기록이기에 해당 전문을 여기에 인용하기로 한다. 산중에 들어서면 산이 모두 돌이어서 봉우리와 동굴, 장명등( 長 明 燈 )과 다리도 다 돌로 되었으며, 산의 나무는 소나무ㆍ단풍나무ㆍ철쭉나무가 많다. 궁터가 있 는 남산( 南 山 )에는 돌이 뾰족하게 솟았으니, 가장 높은 곳에 백운대( 白 雲 臺 )가 있고 조금 아래 중백운( 中 白 雲 )이 있고 또 조금 아래 동북으로 하백운( 下 白 雲 ) 이 중대( 中 臺 ) 위에 있다. 궁터 위에 폭포가 있는데 높이는 8, 9인( 仞 1인은 8 척)이 되고, 그 밑으로 계곡을 따라 중대로 올라가면 큰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빈터만 남았다. 폭포 옆 높이 10여 인이나 되는 절벽에 비스듬히 걸쳐 있 는 나무사다리를 올라가면 원효대( 元 曉 臺 )이고 원효대를 지나면 소요사( 逍 遙 寺 ) 가 있다. 소요사 벽기( 壁 記 )에, 신라의 중 원효가 이 산에 머물러 있었고, 그 뒤 3백 년 갑술년에 고려( 高 麗 ) 의 중 각규( 覺 圭 )가 태상왕( 太 上 王 )의 명을 받들어 정사( 精 舍 )를 지었고, 그 뒤 2백 년 계유년에 이 정사가 불에 탔고 그 이듬해 갑술년에 관동( 關 東 )의 중 각 령( 覺 玲 )이 불전( 佛 殿 )과 법당을 중건했다. 하였는데, 소요사 연구 99

목암( 牧 庵 )의 기( 記 )에는, 원효는 신라의 태종( 太 宗 )과 문무( 文 武 ) 때의 중이니, 그 연대를 따져 보면 신 라의 태종 때부터 우리 강헌대왕( 康 獻 大 王 ) 갑술년까지는 767년이 되고, 또 만 력( 萬 曆 ) 갑술년까지는 180년이나 되는데, 벽기에 3백 년 이라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였다. 동쪽 모퉁이에서 폭포 구경을 하는데, 그 위에 5, 6장이나 되는 큰 돌이 절벽 위에 서있다. 암벽 사이의 돌구멍에서는 샘물이 졸졸 흐르는데 이것이 원효정 ( 元 曉 井 )이다. 이규보( 李 奎 報 )는 다음과 같은 시( 詩 )를 지었다. 산 따라 위험한 다리 건너 ( 循 山 渡 危 橋 ) 발을 포개며 좁은 길 걷네 ( 疊 足 行 線 路 ) 백 길이나 높은 산마루에 ( 上 有 百 仞 巓 ) 원효가 일찍이 절을 지었네 ( 曉 聖 曾 結 宇 ) 신령한 자취는 사라지고 ( 靈 蹤 渺 何 處 ) 초상만이 흰 비단폭에 남았구나 ( 遺 影 留 鵝 素 ) 차 끓이던 샘에 찬물이 고여 ( 茶 泉 貯 寒 玉 ) 마셔보니 젖같이 맛있네 ( 酌 飮 味 如 乳 ) 이곳에 예전에 물이 없었기에 ( 此 地 舊 無 水 ) 중들이 머물러 살 수 없었는데 ( 釋 子 難 棲 住 ) 원효가 와서 거처하매 ( 曉 公 一 來 寄 ) 단물이 돌구멍에서 솟았네 ( 甘 液 湧 碞 竇 ) 암벽을 오르고 깊고 험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구봉( 九 峯 )을 바라보니, 산의 돌이 모두 기이하게 생겼다. 중봉( 中 峯 )의 바위굴을 지나 현암( 懸 庵 )의 동남쪽 으로 나와서 의상대( 義 相 臺 )에 오르니, 여기가 최고의 정상이요, 그 북쪽은 사 자암( 獅 子 庵 )이다. 골짜기 입구에서 폭포를 지나 층벽을 따라 의상대에 오르기 100 홍정덕

까지의 높이가 9천 장( 丈 )이다. 10월이어서 산은 깊고 골짜기는 음산한데, 아침 비가 지나간 뒤에 시냇가 돌에 낀 푸른 이끼는 봄철같고, 단풍잎은 마르지 않 았다. - 4년 계묘 10월 기해에 공암 미수는 기( 記 )한다. 4년 계묘 맹동( 孟 冬 ) 무술에 목( 穆 )은 완산( 完 山 ) 이진무( 李 晉 茂 ), 상당( 上 黨 ) 한균오( 韓 均 吾 ), 외생( 外 甥 ) 이구( 李 絿 )와 이무경( 李 茂 卿 )의 세 아들 원기( 遠 紀 ) 정기( 鼎 紀 ) 현기( 玄 紀 )와 함께 소요사에서 자고, 그 이튿날 같이 의상 대 아래서 논 뒤에 제명( 題 名 명승지( 名 勝 地 )에 등람( 登 覽 )한 날짜와 등람자 의 이름을 적는 것) 하였다. 공암 허목은 쓴다. - 원효대 아래 폭포 옆 바위굴에 또 제명하고, 저녁에 무경( 茂 卿 )의 청초별업 ( 靑 草 別 業 )에서 잤다. 그 이튿날 대탄진( 大 灘 津 )을 건너 10리를 가서 구절탄 ( 九 折 灘 )에 있는 이생( 李 甥 )의 계장( 溪 莊 )에 당도하니, 옛날 화암( 花 巖 최유 원( 崔 有 源 ))의 별업으로 산수가 가장 아름다웠다. 미수는 기록한다. 28) 이 기행문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절 주위의 경치를 묘사한 부분인데 얼핏 보아도 현재 의 자재암에서 바라보는 주변 산 경치를 마치 오늘에 보는 것처럼 그대로 묘사하였다. 따라서 현재의 자재암이 소요사였다는 사실을 이 기록으로 미루어 확연히 알 수 있게 된다. 또 하나는 이 허목의 소요산기에 산경( 山 景 )은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만 정작 소요사 절집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산 입구의 태조 행궁을 묘사하고 역내의 광 경을 고사( 故 事 )를 인용하여 자세히 기록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산행의 주 목적지였던 소요사의 절집을 단 한 줄도 묘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의문이다. 미수의 기행문에 절집에 관련된 내용은 소요사의 연혁을 소요사 벽기( 壁 記 ), 즉 건물 28) 기언 별집 제9권 기( 記 ) - 소요산기( 逍 遙 山 記 소요사 연구 101

외벽에 써놓은 기록에서 인용하는 부분이 유일한데 이 미수의 기행문에 나오는 벽기가 실제로 건물 벽에 기록한 내용인지, 단지 이전에 즉 절집이 있었을 때의 벽기를 기행문 에 인용하였는지는 추후 검토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미수가 실제로 건물의 벽에 쓰 여진 내용을 보고 그 내용을 옮겼다면 벽기 이외에도 건물 자체에 대한 별도의 묘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수의 기행문에 절집에 관한 묘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해서 당시에 이미 절집 없는 폐허상태였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미수의 기행문에는 분명히 소요사에서 1박 한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하여 당시는 10월 맹동( 孟 冬 ), 즉 추위가 심한 겨울이었으므로 노숙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미수 일행이 찾았던 당시에는 어떤 형태 로든 사사( 寺 舍 )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4년 계묘 맹동( 孟 冬 ) 무술에 목( 穆 )은 완산( 完 山 ) 이진무( 李 晉 茂 ), 상당( 上 黨 ) 한 균오( 韓 均 吾 ), 외생( 外 甥 ) 이구( 李 絿 )와 이무경( 李 茂 卿 )의 세 아들 원기( 遠 紀 )ㆍ 정기( 鼎 紀 ) 현기( 玄 紀 )와 함께 소요사에서 자고, 29) 이 기록에 따르면 소요사에서 묵은 일행이 7명인데 수행원 30) 을 포함하면 적어도 10 여명에 이르는 일단( 一 團 )이므로 이들이 묵기 위한 절집 역시 어느 정도의 규모는 갖추 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미수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계곡( 谿 谷 ) 장유( 張 維 )의 시문에도 소요사의 절 집을 노래하면서 둥긋둥긋 뾰족뾰족 푸르른 산봉우리 금빛 은빛 치장한 벽옥( 碧 玉 ) 빛 절집 / 靑 山 上 琬 琰 / 碧 殿 煥 金 銀 29) 미수기언 소요산기 30) 위 기록에는 소요산 기행 중에 바위에 소회( 所 懷 )와 기행 사실을 암각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 로 보아 각공( 刻 工 )을 포함하여 다수의 수행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02 홍정덕

비로소 속세 떠났음을 깨닫고 나니 / 忽 覺 塵 喧 隔 보이는 만상이 문득 새롭네 / 因 瞻 像 設 新 31) 라고 읊어 소요사 절집 건물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어 위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바로 이 기록이 태종 3년 임오에 태조가 절 남쪽 행전에 머물러, 여러 달을 두고 절의 온 갖 그림을 새롭게 하였으며... 32) 라고 한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부합된다. 아울러 이 기록에는 고려시대의 문인인 이규보가 소요사를 방문하고 소회를 읊은 시 문이 인용되어 있어 조선 세종 조 태조의 원찰로 지정되기 이전 소요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데, 인용 된 시귀 중에 나타나는 백 길이나 높은 산마루에 ( 上 有 百 仞 巓 ) 원효가 일찍이 절을 지었네 ( 曉 聖 曾 結 宇 ) 신령한 자취는 사라지고 ( 靈 蹤 渺 何 處 ) 초상만이 흰 비단 폭에 남았구나 ( 遺 影 留 鵝 素 ) 와 이곳에 예전에 물이 없었기에 ( 此 地 舊 無 水 ) 중들이 머물러 살 수 없었는데 ( 釋 子 難 棲 住 ) 원효가 와서 거처하매 ( 曉 公 一 來 寄 ) 단물이 돌구멍에서 솟았네 ( 甘 液 湧 碞 竇 ) 라는 두 부분이다. 31) 谿 谷 先 生 集 卷 之 二 十 七 五 言 律 詩 一 百 五 十 首 < 逍 遙 寺 > 32) 세종실록지리지 경기 양주 조 소요사 연구 103

즉, 이규보가 소요사를 찾았던 고려 후기에는 원효의 초상화를 모신 절집이 있었다는 것이고 단물이 솟아, 즉 식수가 되었던 차수( 茶 水 )가 되었던 절 경내에 음용이 가능한 우물이 있다는 것은 당시의 소요사에 그 규모를 알 수는 없으나 승려들이 거주하고 있 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2) 여러 문사들의 소요산 방문과 소요사 소요사는 일찍이 산세의 장려함과 특히 가을철 단풍의 미려함에 이끌려 많은 문사들 이 찾아 유람하며 경치를 즐겼기에 소요사를 노래한 많은 시문이 현재도 남아있다. 이 시문을 검토하면 소요사의 쇠락 과정을 편린이나마 찾을 수 있다. 먼저 검토할 자료는 고려 말 소요사의 인근 회암사에 주석하였던 보우( 普 雨 ) 선사의 시문이다. 보우( 普 雨 )의 시문은 조선 개국 직전 소요사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소요산 위로 흰 구름 둥실 떠 산 위의 뜬 달과 더불어 맴도네 한 줄기 불어오는 맑은 바람이 산중에 으뜸이라 일러 주노니 逍 遙 山 上 多 白 雲 長 伴 逍 遙 山 上 月 有 時 淸 風 多 好 事 來 報 他 山 更 寄 絶 하늘 모퉁이의 무심한 저 흰 구름 붉게 단 화로의 한 점 눈 같구나 어느 곳 가림 없이 비를 뿌리니 비 맞는 곳곳마다 기꺼워하네 白 雲 無 心 編 太 虛 其 如 紅 爐 一 點 雪 行 雨 四 方 無 彼 此 是 處 是 物 皆 欣 悅 그리곤 문득 다시 돌아와 산 빛을 물색으로 물들게 하네 낡은 암자 하나 그 안개에 싸여 구름에 숨은 길 이끼 푸르네 刹 那 歸 來 此 山 裏 山 光 着 色 水 咽 侍 古 庵 依 稀 非 霧 間 連 雲 畏 道 蒼 苔 滑 104 홍정덕

산 비탈길 이리저리 따라 오르면 누구라 이곳에 터를 닦았나 길이 다하는 곳에 암자가 있어 주객이 마주 앉아 말이 없구나 둘러선 산 아래엔 물이 흐르고 돌과 나무가 한데 마구 얽혔는데 멀리 서녘에서 찾아온 달마 이 뜻을 알리려 부처를 묻었는가 左 更 右 傾 往 復 行 誰 基 傳 者 性 櫛 栗 路 窮 庵 門 向 東 開 貧 主 同 會 無 言 說 山 點 黙 黙 水 榍 潺 石 女 喧 嘩 木 人 出 汲 汲 西 來 碧 眼 胡 漏 洩 此 意 埋 佛 日 조계에 전한 법을 혜능이 받아 한 물건도 없는 것이 도( 道 )라 이르고 천하의 모든 이를 가소롭게 여겨 눈썹 털 밀고 방할( 棒 喝 )을 퍼부었네 傳 至 曹 溪 盧 盧 手 又 道 本 來 無 一 物 可 笑 古 今 天 下 人 不 惜 眉 毛 行 棒 喝 나는 이제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꼬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좋은 시절 더위도 추위도 잊고 지내니 성글게 꿰맨 옷도 넉넉하여라 지친 몸 백운루에 함부로 누우니 솔숲에 부는 바람 소소하여라 그대여 남은 생은 여기와 살게 我 今 將 荷 爲 今 人 春 秋 冬 夏 好 時 節 熱 向 溪 邊 寒 向 火 間 設 白 雲 衣 半 結 困 來 閥 臥 白 雲 樓 松 風 蕭 蕭 聲 浙 浙 請 君 來 此 保 餘 年 배고프면 나물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飢 有 蔬 兮 渴 有 泉 33) 태고 보우선사의 시에 나타나는 소요사는 안개 자욱하여 마치 비가 오는 듯한 깊은 산길을 걸어올라 만나는 작은 암자이다. 단, 시문 안에 <백운루( 白 雲 樓 )>라는 누명( 樓 名 )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작으나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춘 절집의 모습이 보인다. 33) 태고( 太 古 ) 보우( 普 雨 ) <백운암의 노래> 소요사 연구 105

한편 보우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나옹( 懶 翁 )의 시문에도 고려 말 소요사의 모습 이 거의 같은 뉘앙스로 나타나는 데, 보우의 시문과는 달리 나옹의 시문에는 소요사에 항거( 恒 居 )하는 승려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재암에 머물러 몇 해이던고 깊은 산 석굴에서 참선하기 즐겼네 권하노니 그대여 가는 길을 돌이키게 自 在 逍 遙 經 幾 劫 深 山 石 窟 愛 觀 空 勸 君 早 早 回 頭 去 가장 높은 진리를 깨닫기 원하거든 最 上 門 中 慕 得 通 34) 자재암에 머물러 몇해 이던고 라는 표현은 나옹을 비롯한 항거 선승의 존재를 강력 히 암시하고 있다. 아을러 실록에 나타나는 이절에 유명한 스승이 있어 라는 표현도 역시 이에 부합 된다. 이어 소요산에 주필하며 소요사의 면모를 새롭게 한 태조 이성계의 시문이다 전문이 다음과 같다. 넝쿨을 휘어 잡으며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절집 하나가 흰 구름에 쌓여 있네 보이는 곳 모두가 내 땅이 된다하면 引 手 攀 蘿 上 碧 峰 一 庵 高 臥 白 雲 中 若 將 眼 界 爲 吾 土 초, 월 강남인들 마다 하리오 楚 越 江 南 豈 不 容 35) 자신이 인연을 맺은 소요사의 모습을 一 庵 高 臥 白 雲 中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세조, 성종 대에 나타나는 자료에는 이미 소요사가 쇠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4) 나옹 혜근( 懶 翁 慧 勤 ) <소요굴의 천생( 天 生 ) 나한석( 羅 漢 石 )> 35) 이성계( 李 成 桂 ) 백운봉에 올라 ( 登 白 雲 峰 ) 106 홍정덕

소요사가 쇠락하게 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무렵 이절을 찾은 선승들은 마치 폐허된 자리를 찾은 듯한 심회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생육신 중의 한 명인 추강( 秋 江 ) 남효온( 南 孝 溫 )의 소요산 기행시를 보자. 그 옛날 신라 시대의 고승 원효 살던 이곳 청산은 본래 속되지 않은데 비 온 뒤 푸른 빛 더욱 펼쳤네 아득한 천만고의 옛일이건만 한번 담론에 시대를 뛰어넘네 신통은 본래 생멸하지 않으니 법상이 응당 처음과 같으리라 배도 화상은 어디로 가셨는가 兮 昔 新 羅 代 高 僧 元 曉 居 靑 山 元 不 俗 雨 後 靑 更 舒 茫 茫 千 萬 古 代 序 一 談 餘 神 通 不 生 滅 法 象 應 如 初 桮 渡 向 何 處 마치 목어 소리 들리는 듯 하네 如 聞 響 木 魚 36) 다음은 역시 생육신 중의 한 분이며 남효온과 동시대를 살았던 매월당( 梅 月 堂 ) 김시 습( 金 時 習 )의 소요산 시( 詩 )이다. 37) 길 따라 찬 계곡에 드니 路 入 寒 溪 洞 천개의 봉우리 모두 노을에 물들었네 千 峯 落 照 明 산은 모두 가파르고 높은데 四 山 皆 崒 嵂 한 줄기 계곡물이 차고 맑아라 一 澗 正 淸 泠 절집에는 빛나는 부처 남았어도 殿 有 金 銀 像 중들은 모두 다 흩어졌구나 僧 多 雲 水 情 36) 추강집 2권 시( 詩 ) 오언고시( 五 言 古 詩 ) <소요산( 逍 遙 山 )에서 원효( 元 曉 )의 옛터를 지나며 나무를 깎아 시를 적다> 37) 梅 月 堂 詩 集 卷 之 十 詩 遊 關 東 錄 < 逍 遙 寺 > 소요사 연구 107

일찍이 태조께서 머무시던 곳이언만 上 王 曾 駐 輦 길을 묻히고 찾는 사람 없어라 徑 廢 少 人 行 제시한 두 편의 자료에 나타나는 소요사는 절집은 있으나 이미 인적이 드믄 폐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특히 이 부분은 매월당의 시에서 명확히 두드러진다. 上 王 曾 駐 輦 徑 廢 少 人 行 은 태조 당시의 소요사와 매월당이 찾은 당시의 소요사를 극단적으로 대비하고 있어 쇠락하는 소요사의 모습을 단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한편 이율곡 선생은 학문의 벗 우계( 牛 溪 ) 성혼( 成 渾 )과 함께 소요산을 찾아 친히 함 께 온 성혼에게 시 한수를 헌정하였다 1500년대 이이( 李 珥 )의 이 기행시에서는 절집에 관한 표현이 더욱 드물어 소요사의 쇠락이 한층 더 심하게 진행 된 것으로 보인다. 잡초 우거진 계곡에 비 넘쳐 다리가 무너졌으니 草 合 山 溪 雨 壞 橋 어디로 향하여야 소요산에 이르는고 不 知 何 處 向 消 遙 우연히 만난 사람 어디선가 본 듯도 한데 相 逢 似 是 曾 相 識 우거진 숲으로 이끌어 함께 달 보자 하네 引 入 煙 蘿 共 月 宵 38) 그러나 여전히 절의 규모는 작아지고 항거승의 수는 줄었어도 절집의 자취는 남아있 었던 것 같다 이는 다음에 제시하는 조선 후기의 소요산 기행시들에 나타난다. 먼저 조선 후기의 대문호 계곡 장유선생의 소요산 시이다. 푸른 산은 구슬인양 영롱하고 절집은 금은으로 아로새겼네 문득 속세를 떠났음이 새삼스럽고 바라보는 모습들이 더욱 새롭네 靑 山 上 琬 琰 碧 殿 煥 金 銀 忽 覺 塵 喧 隔 因 瞻 像 設 新 38) 栗 谷 先 生 全 書 拾 遺 卷 之 一 詩 < 與 牛 溪 共 尋 逍 遙 山 > 108 홍정덕

봉우리들 위태롭게 둘러 섰는데 떨어지는 폭포 물에 옷 다 젖는다 갈림길은 아득히 뻗어 있는데 亂 峰 當 戶 閮 飛 瀑 晒 衣 巾 岐 路 長 形 役 어찌하면 좋은 인연 맺어 갈거나 從 今 結 勝 因 39) 다음은 소요산에 주석( 駐 錫 )하였던 승려 편양( 鞭 羊 )의 선시이다. 늦은 저녁 소요동에 오르니 晩 陟 逍 遙 洞 이 아름다운 경치를 어디 비길꼬? 奇 觀 自 異 同 산의 크기야 비록 작아도 굽이 굽이 계곡은 길고 길구나 대나무 우거진 바위길 위로 안개는 먼 산까지 피어 가는데 가슴속 시흥은 도도하여도 地 偏 天 若 少 川 遠 曲 迷 重 亂 竹 岩 前 徑 輕 霞 霽 後 峰 高 吟 徒 遣 興 정작 묘사할 필재는 없네 揮 筆 句 難 工 40) 팔월의 소요사를 찾으니 서리 맞은 숲은 누렇게 물이 들어 푸른 계곡은 돌길에 이어지고 폭포는 언덕에서 날아 떨어진다 절벽의 이끼는 푸른빛을 머금고 무리 무리 국화는 향기롭구나 술 가지고 찾아 온 나그네 있어 八 月 逍 遙 寺 千 林 霜 半 黃 淸 溪 連 石 逕 飛 瀑 落 高 罔 高 壁 苔 含 碧 層 階 菊 自 香 晩 來 攜 酒 客 나와 선방에서 함께 묵자네 同 我 息 禪 房 41) 39) 장유( 張 維 ) <계곡집( 谿 谷 集 )> 40) 遊 逍 遙 山 鞭 羊 堂 集 41) 정현원( 鄭 玄 源 ) <소요산 시( 逍 遙 山 詩 )> 소요사 연구 109

구름 걸린 험한 바위 푸르러 아득하고 눈처럼 떨어지는 폭포물은 허공에 걸리었네 우줄거리는 바위 틈에 굴이 하나 열려 영롱한 절집이 연못을 베고 누웠네 바람은 소나무를 흔들어 흰 학을 날리고 달은 골짜기를 비춰 이무기가 보이겠네 왕교는 모든 것이 쇠한다 하였으나 石 角 梢 雲 翠 壁 危 飛 湍 若 雪 半 天 重 山 門 突 屼 開 仙 窟 金 刹 玲 瓏 枕 壁 池 風 桭 古 松 翻 晧 鶴 月 臨 幽 壑 見 靑 螭 王 喬 欲 得 論 衰 朽 물외의 맑은 티끌을 어찌 따를꼬 象 外 淸 塵 杳 莫 追 42) 소요산과 금강산은 모두가 명산이라 어느 쪽이 더 좋다곤 말 못하겠네 맏이를 보려하나 못 보았다면 逍 遙 楓 岳 俱 名 山 題 品 傳 稱 伯 仲 間 願 見 高 人 如 未 見 볼 수 있는 아우를 먼저 보게나 猶 宜 先 識 季 方 顔 43) 중들과 함께 선방에서 잠들려니 촛불의 남은 향이베개 머리에 차다 절벽에 구름걸려 머리 위에 가파른데 폭포의 물보라가 빗소리 같구나 너무 일러 단풍을 못 본 것이 한이 되더니 새벽 흰 이슬에 단풍이 곱다 할아버지 언젠가 이곳을 찾아 緇 徒 觝 頂 宿 禪 堂 孤 燭 殘 香 枕 簟 凉 老 石 含 雲 頭 上 逼 飛 泉 送 雨 夢 中 長 昨 來 尙 恨 丹 楓 早 曉 去 加 添 白 露 黃 吾 祖 當 年 遊 此 地 국화꽃 만발한 제 술 드셨다지 黃 花 明 日 侑 初 觴 44) 바야흐로 봄이 다가와 햇빛 아래 금모래 빛 선명하구나 三 月 招 提 境 金 沙 白 日 鮮 42) 정현원( 鄭 玄 源 ) <소요산사에 놀러가서( 遊 逍 遙 山 寺 )> 43) 최일관( 崔 日 觀 ) <소요산사에 놀러가서( 遊 逍 遙 山 寺 ) 1> 44) 최일관( 崔 日 觀 ) <소요산사에 놀러가서 ( 遊 逍 遙 山 寺 ) 2> 110 홍정덕

계곡 아래로 봄기운 완연하여 주렴을 걷고 절벽을 보네 중은 염불을 끝내었어도 시객은 여전히 시 짓기에 골몰하네 노래는 쓸쓸히 계곡에 퍼져가고 해는 떠올라 하늘을 연다 안개는 푸른 담쟁이 넝쿨에 스미고 籤 飛 丹 谷 底 簾 卷 壁 岩 邊 念 誦 僧 擺 錫 題 詩 客 把 壑 揚 歌 寂 萬 壑 遊 日 開 諸 天 煙 幕 靑 蘿 展 늙은 소나무 가지 무성도 하이 松 蟠 翠 盖 圓 45) 날카로운 봉우리는 칼로 각은 듯하고 신령한 울림은 옥 거문고 소릴세 폭포는 뜰 한가운데 있어 우담바라 꽃인 양 높이 걸렸네 벼락 치듯 우렁찬 폭포 소리여 서리 내리듯 계곡으로 흐른다 가도 가도 끝없는 신선 세계에 세상의 속된 인연 모두 잊었네 이 땅의 소요를 모두 끝내고 危 峰 鐵 劍 削 靈 籟 玉 琴 傳 銀 樹 庭 中 亞 曇 花 架 上 連 晴 雷 噴 壑 瀑 霜 鏡 挾 溪 泉 不 盡 仙 區 趣 都 亡 人 世 緣 逍 遙 天 地 外 부처님 뜰에서 편히 쉬리라 歸 息 梵 筵 前 46) 단풍 숲에 가을 깊어 붉은 잎새 고운데 쓸쓸히 부는 바람 소나무를 흔든다 정자에 기대 앉아 한 잔 술에 취하면 楓 林 秋 晩 葉 翻 紅 蕭 瑟 寒 松 響 夕 風 閑 倚 小 樓 傾 白 酒 어느새 먼 하늘엔 달 떠 오르네 一 輪 新 月 上 層 空 47) 45) 율탄( 栗 灘 ) 정전창( 鄭 展 昌 ) <춘삼월 소요산 절에 놀러가서( 春 日 遊 逍 遙 山 寺 )1> 46) 율탄( 栗 灘 ) 정전창( 鄭 展 昌 ) <춘삼월 소요산 절에 놀러가서( 春 日 遊 逍 遙 山 寺 )2> 47) 율탄( 栗 灘 ) 정전창( 鄭 展 昌 ) <소요사 스님과 이야기하며( 逍 遙 寺 應 僧 人 呼 韻 )> 소요사 연구 111

산봉우리 서로 겹쳐 가려진 곳에 문득 달 하나가 솟아오르네. 천하가 한 빛으로 물이 드는데 依 徾 峰 半 破 俄 見 湧 銀 輪 一 色 共 天 下 나 또한 어디 있는고 의아하여라 祇 疑 私 我 身 48) 가을 소요사에서 물을 마시니 속세의 잡된 생각이 모두 씻긴다 늙은 중을 만나려 하나 쓸쓸한 빈 암자만 여기 남았네 해가 지고 나면 돌아오려나 먼 산 머리에 초생달 뜨네 여기에 의당 있을 줄 알고 九 月 逍 遙 飮 悠 然 塵 慮 疏 提 携 老 釋 在 寥 落 古 菴 餘 隱 約 斜 陽 後 依 微 山 月 初 東 林 宜 結 社 지팡이 짚으며 찾아왔거늘 何 必 曳 長 椐 49) 위에 이용된 자료 중 의미있는 것은 동두천 안흥리에 세거하고 있는 광주 정씨 일문 의 기행시들이다. 이들은 모두 화곡( 禾 谷 ) 정사호( 鄭 賜 湖 )의 후손들로서 이들의 가계를 정리하면 정사호( 鄭 賜 湖 ) 정현원( 鄭 玄 源 ) 정전창( 鄭 展 昌 ) 정치상( 鄭 致 相 ) 으로 이어지며 대략 1600-1700년대에 동두천에 실제 거주하였던 문인들이다. 이들은 안흥리의 농장( 農 莊 )을 경영하며 세거( 世 居 ) 문중( 門 中 )을 형성하였고 여가를 틈내어 자주 소요산을 찾아 그 소회를 시문에 남겼다. 따라서 이들의 시문에 나타나는 보다 소요사는 구체적이고 실증적일 수 밖에 없다. 위에 제시된 것처럼 이들 정씨 일문의 기행시에 나타나는 소요사는 비록 쇠락하였으 나 아직 폐사에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48) 정치상( 鄭 致 相 ) <소요산의 초생달 ( 逍 遙 初 月 )> 49) 정치상( 鄭 致 相 ) <소요사 벽에 쓰인 시를 차운하여( 逍 遙 寺 次 壁 上 韻 )> 112 홍정덕

(3) 소요사의 폐사 조선 후기에 이르도록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소요사는 그러나 1700년대 후반의 어 느 시기에 이르러 폐사되고 만다. 이는 소요사, 즉 자재암의 사기( 史 記 )에 조선 고종 9년(1872년)임신 원공대사와 제암화상이 전부 재창하고 영원사라 이름을 고쳤다. 50) 라고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소요사를 찾아 기행시를 남긴 정치상의 생몰연대인 1658년 - 1772년과 1872년 재창 기록을 검토하면 소요사의 페사는 1750년에서 1872년 사이라 는 대략의 시기가 설정된다. 한편 소요사의 폐사와 관련하여 정치상의 생몰 하한인 1772와 재창 시기인 1872 사이에 다시 이를 조율할 수 있는 다른 자료가 있다. 이 자료는 1812년 경 학산( 鶴 山 ) 윤제홍( 尹 濟 弘 )에 의하여 제본된 <학산묵희첩( 鶴 山 墨 戱 帖 )>에 실려있는 <소요산 방화굴( 逍 遙 山 方 化 窟 )>이라는 그림이다. 보이는 것처럼 이 그림에는 현재 자재암의 전면에 위치하고 있는 석굴과 원효샘, 그 리고 폭포가 나타난다, 이 그림을 예시한 현재의 사진과 비교하면 동일 위치, 동일 시 각에 여전히 나한굴과 폭포가 나타나고 있어 이 그림이 자재암을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소요사의 건물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적어도 <학산묵희첩( 鶴 山 墨 戱 帖 )>이 제본 된 1812년 이전에 이미 소요사는 폐사되고 없는 것이다. 이 그림에는 방화굴 안에 비록 부처가 봉안되어 있기는 하나 굴 안에서 사동 아이는 차를 달이고 있 고 산을 찾은 유람객으로 보이는 3인이 폭포를 완상하고 있을 뿐 절집도 승려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50) 봉선사본말사지 소요사 연구 113

그림 1. 윤제홍의 소요산 방화굴 1812년 <학산묵희첩> 중 절이 폐사되어 굴이 남아있을 뿐 절집은 모두 사라졌다. 그림 2. 현재의 원효굴 (나한전) 굴의 모양과 우측의 폭포가 윤제홍의 방화굴에 나타난 모습과 동일하여 같은 위치에서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114 홍정덕

소요사의 폐사 시기를 추적할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는 양주 지역 지리지의 검토이다. 소요사가 나타나는 최초의 지리지는 <세종실록 지리지>이다. 본 지리지 양주조에는 회암사, 진관사, 중흥사와 함께 소요사를 게재하고 소요산 허리에 있다. 태종 3년 임오에 태조가 이 절의 남쪽 행전에 여러 달 머 물며 절을 새롭개 하였다 지금 임금 (세종) 6년 갑진에 태조의 원당으로 삼아 교종에 속하게 하고 토지 150결을 주었다. 51) 라고 기록하였다. 이어 <신증동국여지승람(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에는 중대암( 中 臺 菴 ), 백운암( 白 雲 菴 ), 소요사( 逍 遙 寺 ), 소운암( 小 雲 菴 )이 모두 소요산 에 있다. 52) 라고 하였고, 165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지( 東 國 輿 地 志 )에는 소요사가 소요산에 있는데 절은 모두 층석( 層 石 )과 기이한 바위( 恠 岩 )로 둘러싸 였고, 그 중에 폭포가 있다. 절의 서쪽으로 수백보를 가면 다시 폭포가 있는데, 경치가 수려하며 바위가 높고 길이 없어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53) 라고 하였다. 51) <세종실록 지리지> 양주 조, 소요사 52) <신증동국여지승람(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 양주 조 불우( 佛 宇 ) 53) <동국여지지( 東 國 輿 地 志 > 양주 조 소요사 연구 115

그러나 1757-1764년에 발간된 여지도서( 輿 地 圖 書 ) 에는 소요사가 나타나지 않다가 1842년-1843년 발간 양주목읍지( 楊 州 牧 邑 志 )에 중대암( 中 臺 菴 ), 소요암( 逍 遙 菴 ), 소운암( 小 雲 菴 )이 모두 소요산에 있었으나 지 금은 폐사되었다. 54) 라고 기록되어 1700년대 후반 소요사의 폐사를 확인하고 있다. (4) 소요사의 재건 자재암 사기에 따르면 조선 고종 9년(1872년)임신 원공대사와 제암화상이 전부 재창하고 영원사라 이 름을 고쳤다. 광무 11년(1907) 정미 병화로 전부 타버리고 오직 만월전만 화를 면하였다. 다음해인 1908년 기유 성파와 제암 두 스님이 다시 중창하고 자재암 이라 했다. 55) 고 되어 있어 조선 말기에 일단 폐사된 절이 복설되었으나 이때는 이미 이름을 <영원 사>라고 고쳤고 동두천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던 김연성 의병군과 일본군과의 전 투과정에서 이 영원사가 소실( 燒 失 )되자 1908년 영원사를 재건하면서 사명( 寺 名 )을 <자 재암>이라 제정하여 현재에 이른다. 즉 고려 이래의 유구한 사명 <소요사>는 결국 재건 과정에서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조선 세종 당시 소요사에 지급한 150결의 토지는 현재도 자재암의 사재( 寺 財 ) 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54) <양주목읍지( 楊 州 牧 邑 志 )> 사창 55) <봉선사 본말사지> 116 홍정덕

다음의 자료는 자재암 소유 임야의 벌채( 伐 採 )와 관련한 자료이다. 총독부 관보에는 관련 자료가 여러 건 나오는 데 자재암에서 임야를 벌채하는 이유와 목적은 알 수 없 다. 사찰의 중수나 운영을 위한 자금 마련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동시에 우리는 이 자 료를 통하여 당시 자재암이 소유한 임야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자재암 소유 임야는 모두 227정보( 町 步 ) 2단보( 段 步 ), 6무보( 畝 步 )로서 현재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210만m2 (70만 평( 坪 ))에 이른다. 이 임야는 현재도 자재암의 소유로 되어 있다. 허가일시 56) 소화( 昭 和 ) 6년(1933년) 10월 9일 벌채구역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상봉암리 산 1번지 자재암 소유 임야 227 정( 町 ) 2단( 段 ) 6무보( 畝 步 ) 중 105정( 町 ) 8단( 段 ) 7무보( 畝 步 ) 벌채방법 택벌( 擇 伐 ) 벌채 수종 및 수량 7년 내지 20년 생 잡목 2만 그루 벌채기간 허가일로부터 1년 반 출원인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자재암 주지 김덕조 표 6. 자재암 사유림( 寺 有 林 ) 벌채( 伐 採 ) 허가( 許 可 ) 56) 자재암에서는 이후 1940년과 1943년에도 각각 당시 주지 서상인과 하세가와의 이름 으로 각각 2,000그루와 6,500 그루의 나무를 베어내도록 허가 받고 있다. 이 시기는 이미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고 전선이 태평양으로 확대되면서 민족 말살정책과 함께 각종 전쟁 물자의 무조건적인 수탈이 본격화하던 시기하는 점을 감안하면 혹시 자 재암 임야의 벌채도 이와 관련된 사항은 아닌가 추론하여 본다. Ⅲ. 결론 소요사는 고려시대에 초창되어 비록 사명( 寺 名 )은 계승되지 못하였으나 자재암이라는 56) 조선총독부 관보에서 소요사 연구 117

이름으로 현재까지 전통을 계승하는 유구한 사찰이다. 고려시대 절의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지만 나옹( 懶 翁 ), 보우( 普 雨 ) 등 선지 식이 주석하였고,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주필하며 행궁을 경영하여 결국은 태조의 원찰 로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혹심한 불교 탄압 과정에서도 살아남았고 적어도 조선 후기 1700년데 후반까지는 사력( 寺 歷 )을 이었던 걍기 북부의 중요사찰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시대 전기부터 이미 쇠락하기 시작하여 1970년대 후반에는 절 자체가 폐사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다. 본고는 소요사의 쇠락과정을 검토하여 자료에 나타나는 소요사의 모습을 추적하고 이로서 경기북부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자료가 시문 등 간접자료에 국한되고 있어 전체적인 추적 의도가 완전히 충족되지 못 한 아쉬움이 있으나 우선 시론으로 제시하고자 하며 이후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는 대로 내용을 보충하고자 한다. 118 홍정덕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 태조실록 - 태종실록 - 세종실록 2. 신증동국여지승람 3. 동국여지지 4. 여지도서 5. 양주목읍지 6. 여도비지 7. 대동지지 8. 봉선사본말사지 9. 동두천시 <동두천시지> 1998 10. 양주군지편찬위원회 <양주군지> 1978 11. 양주군지편찬위원회 <양주군지> 1998 12. 의정부문화원 <의정부시정40년사> 2004 13. 홍정덕 <태상왕 이성계 연구> (회룡문화 제5집) 14. 홍정덕 <조견 충절론의 재검토> (경기향토사학 제7집) 15. 홍정덕 <조사의의 난 연구 - 함흥차사 사건의 전말> (경기향토사학 제11집) 16. 홍정덕 <양주지리지의 건치연혁 연구> (경기향토사학 제12집) 17. 홍정덕 <소요사 고찰> (소요의 맥) 소요사 연구 119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윤 종 준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상임연구위원) 目 次 I. 머리말 II. 구제역과 우역( 牛 疫 )의 비교 1. 연구의 범위와 용어의 문제 2. 전염경로에 대하여 3. 증상에 대하여 III. 조선시대 우역 발생 기록 1. 조선시대 우역 발생사건 2. 우역에 대한 백성들과 조정의 대응 3. 우역이 끼친 다른 피해와 우역에 대한 옛 사람들의 생각 4. 우역에 대한 치료법 IV. 맺음말 집필자 : 윤종준 세종대학교 역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성남 서현문화의집 관장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21

Ⅰ. 머리말 지난 겨울(2010~2011) 사이에 구제역이라고 하는 가축 전염병 발생으로 막대한 경제 적 손실을 입게 되었고, 더하여 축산농가에 큰 충격과 시름을 남겼다. 2010년 11월 28 일 안동지역에서 발생한 구제역은 12월 2일까지 경북지역으로 번져갔고, 12월에는 경기 도 파주, 양주 일대로 전파되어 12월 15일에는 경기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2월 22일 에는 강원도 화천, 춘천으로 번지고 계속하여 원주, 횡성 지역으로 퍼진 것으로 확인되 었다. 지난 4월 20일 현재 205건의 구제역 신고 중 양성 152건, 음성 53건의 피해 사례가 집계되었다. 구제역이란 소, 돼지, 양, 염소, 사슴 등 발굽이 둘로 갈라진 동물(우제류) 에 감염되는 질병으로 전염성이 매우 강하며 입술, 혀, 잇몸, 코, 발굽 사이 등에 물집 (수포)이 생기며 체온이 급격히 상승되고 식욕이 저하되어 심하게 앓거나 죽게 되는 질 병으로 국제수역사무국(OIE)에서 A급질병(전파력이 빠르고 국제교역상 경제피해가 매 우 큰 질병)으로 분류하며 우리나라 제1종 가축전염병으로 지정되어 있다. 1)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는 우역( 牛 疫 )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대체로 가축 질병에 대하여 세부적인 병명을 묘사한 경우는 흔하지 않으며 특히 우역( 牛 疫 )에 대한 기록을 볼 때, 전염성이 강하고 특별한 치료 대책 없이 대규모의 치사율을 보이고 있어서 구제 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제역 가축질병 사건은 비단 최근에 와서 갑자기 발생한 것은 아니고, 이미 오래전 역사 속에서도 유사한 사건을 여러 차례 겪었다. 문헌기록상으로 보면 고려 말 충렬왕 5년(1279년) 12월(음력), 경상도에 소 전염병이 돌았는데 죽은 소를 도살한 사람은 손이 문드러져 죽었다. 2) 고 한 것에서부터 근현대사 에서는 순종황제 2년(1908)에 일본에서 크게 우역이 번진 것을 비롯해 순종황제 3년 (1909)에는 함경북도에서, 다음해에는 다시 일본에서 우역이 발생하는 등 역사 속에서 1) 구제역 http://fmd.go.kr/ 2) 고려사 忠 烈 王 五 年 十 二 月, 慶 南 道 牛 疫, 屠 者 爛 手 而 死. 122 윤종준

여러 차례의 가축 질병이 발생하였다. 순종 황제 2년(1908)에 일본 마관( 馬 關 )지방에서 우역이 크게 발생하여 하루 만에 소 54마리가 죽고 이틀만에 234마리가 죽었다. 3) 그리고 고종 임금 재임 중에도 구제역으 로 보이는 우역( 牛 疫 )이 발생하였다. 가장 최근의 구제역 피해 상황은 2000년 3월 24일~4월 15일 까지(22일) 3개도 6개 시군에서 3006억원(2216마리), 2002년에는 5월 2일부터 6월 23일 까지(52일) 2개도 4 개 시군에서 1434억원(16만155마리), 그리고 2010년 4월 8일~ 5월 6일 까지(29일) 4 개도 4개 시군에서 1242억원(4만9874마리), 2010년 1월 2일~29일(28일간) 288억원 (5956마리)에 이어 2010년 11월 29일부터 2011년 3월 6일 현재까지 98일 동안 11개시 도 75개 시군구에서 3조원으로 추산되는 피해를 입었고 살처분된 가축 수는 346만 6173마리에 달한다. 4) 이처럼 구제역은 매우 전염성이 빠르고 일단 걸리면 대부분이 폐사 하기 때문에 현대 의학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가축 질병이다. 이러한 가축 질병에 대하여 우리 역사 속에서는 어떻게 인식하였고, 어떻게 대응하였 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구제역과 우역( 牛 疫 )의 비교 1. 연구의 범위와 용어의 문제 본고에서는 옛날 가축 질병 가운데 조선시대의 우역( 牛 疫 )에 대한 기록을 통해 당시 의 가축 전염병 관리에 대한 실태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조선 시대에는 어느 시기에 구제역과 같은 가축 전염병이 유행하였는지, 그리고 피해 상황은 어느 정도 규모인지, 또한 가축 전염병이 확산 될 때에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정부 당국자들은 어떻 3) 황현, 매천야록 제6권 4) 동아일보 2011년 3월 7일, 역대구제역 피해현황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23

게 대응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조사 연구를 통해 우역이라는 전염병이 현재 의 구제역 질병과 관련이 있음을 밝혀 보고자 한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구제역( 口 蹄 疫 )이라고 질병이 표기된 사례는 없다. 구제 역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발굽이 둘로 갈라진 동물에게 전염되는 병이다. 실록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우역( 牛 疫 )은 구제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말에 대해서 마역( 馬 疫 )이라고 지칭한 경우조차 거의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고, 어떤 경우는 말의 질병을 고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마역( 馬 疫 )을 치료하는 방법은, 우역( 牛 疫 ) 아래에 보인다. 5) 고 한 것이나, 현종 9년(1668) 5월 8일, 함경도에 우역( 牛 疫 )과 마역( 馬 疫 )이 크게 퍼져 전후로 죽은 것이 1만 8천 1백여 마리였다. 6) 고 한 것이 소와 말의 질병을 따로 설명한 정도에 불과하다. 2. 전염경로에 대하여 구제역의 감염 경로는 (1) 감염동물의 수포(물집)액이나 침, 유즙, 정액, 호흡공기 및 분변 등과의 접촉이나 감염 동물유래의 오염축산물 및 이를 함유한 식품 등에 의한 직접전파가 있고 (2) 감염지역 내 사람(목부, 의사, 인공수정사 등), 차량, 의복, 물, 사료, 기구 및 동 물 등에 의한 간접접촉전파, (3) 공기를 통한 전파(공기전파)이며 공기는 육지에서는 50km, 바다를 통해서는 250km 이상까지 전파될 수 있다. 7) 조선 시대 기록에서 우역( 牛 疫 )의 전파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한 것은 없다. 다만, 여 러 가지 정황 기록으로 볼때 어느 한 지역에서 발생하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 이는 시차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역사기록을 검토하면서 확인해 볼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해 볼 수 있는 기록 하나를 본다면, 5) 산림경제 제2권 목양( 牧 養 ) <말 기르기[ 養 馬 ]> 6) 현종실록 및 현종개수실록 9년 5월 8일 7) 구제역 http://fmd.go.kr/ 124 윤종준

당초에 적의 군사가 안주( 安 州 )에 당도하여 수천의 병력을 나누어 보내서 양덕 ( 陽 德 ) 맹산( 孟 山 )으로 들어가 두모곡산( 豆 毛 谷 山 )을 거쳐 함경도( 咸 鏡 道 ) 영흥 ( 永 興 )으로 나가 고원( 高 原 ) 문천( 文 川 ) 덕원( 德 原 ) 안변( 安 邊 )을 침략하여 북병( 北 兵 )의 지원을 단절시키고, 이어 철령( 鐵 嶺 )을 넘어서 강원도( 江 原 道 ) 회 양( 淮 陽 ) 금성( 金 城 ) 원주( 原 州 ) 춘천( 春 川 ) 등지로 들어갔는데, 그 사이에 죽이고 약탈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지나간 한 도에서 사로잡힌 사람 과 가축이 마치 양떼를 몰아가는 것같이 몰려가는데 5 60리를 잇달았다. 적병 이 지나간 지대는 모두 지난해 우역( 牛 疫 )이 돌았던 곳이었다. 8) 위 기록을 통해서 보면 청나라 군사가 병자호란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침략해 오던 고 을의 순서를 나열하면서, 그 지역 일대가 우역이 돌았던 지역이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하 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본다면 <구제역>홈페이지에서 게시한 위 (2)항의 전파 요인 에 의한 우역의 전파가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1)번과 (3)번 항목에서와 같은 전염우려에 대하여 혹 우역( 牛 疫 )이 유행할 때 흔히 훈김이 서로 전 염되어서 그런 것이니, 다른 소가 있는 곳에 가는 것을 피하고 나쁜 기운을 제거하면서 약을 쓰면 혹 살릴 수도 있다. 고 하여 소를 격리하여 치료할 것을 주장한 글도 있다. 9) 3. 증상에 대하여 구제역 바이러스는 잠복기간이 2일에서 14일 정도로 매우 짧다. 소의 특징적 증상을 보면, 구제역 바이러스에 감염된 소에서는 체온상승, 식욕부진, 침울, 우유생산량의 급 격한 감소 등이 나타나고, 발병 후 24시간 이내에 침을 심하게 흘리고, 혀와 잇몸 등에 물집이 생긴 것을 관찰할 수 있으며,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물집은 발굽의 사이와 제관부, 젖꼭지 등에서도 관찰된다. 물집은 곧 터져서 피부가 드러나고 짓무르고 헐게 된다. 구제역 바이러스에 감염된 6개월 미만의 송아지에서는 심근염에 의해 죽는 8) 조경, 속잡록 4( 續 雜 錄 四 ), 정축년, 인조 15년(1637년) 1월 17일 9) 허균, 성소부부고( 惺 所 覆 瓿 藁 ), 한정록 제16권 <소를 기름[ 養 牛 ]>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25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심근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병변을 호반심(tiger heart)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환율은 높고 폐사율은 낮은 편이나 어린 송아지의 경우 성우( 成 牛 ) 에 비하여 폐사율이 높으며 임신우에서는 유산을 초래하기도 한다. 감염된 소들은 1주 이상 거의 먹지 못하며, 절뚝거리며 유방염, 산유량 격감 등의 경제적 피해가 발생한다. 돼지의 특징적 증상은 구제역 바이러스에 감염된 돼지는 절뚝거림, 발굽의 심한 병변 과 고통으로 인해 제대로 서거나 걷지 못하고 절뚝거리거나 무릎으로 기어 다니게 된 다. 발굽의 물집이 터져 피부가 벗겨진 자리에 세균에 의한 2차 감염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발톱이 탈락되기도 하며, 입주변의 물집 형성은 소의 경우처럼 전형적이지는 않으 나, 콧잔등에는 큰 물집이 형성되며 쉽게 터지는 경우가 많다. 10) 현대 수의학에서의 구제역에 대한 증상 설명은 위와 같고, 옛 기록 속에서 보이는 <소의 질병 치료하는 데 있어 급히 쓰는 단방약[ 醫 治 急 用 單 方 ]>을 보면 이 중에는 구제 역에 대한 처방으로 보이는 것도 있는데 몇 가지를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우장( 牛 瘴 ) - 안식향( 安 息 香 )을 외양간에 태워준다. (2) 개라( 疥 癩 = 피부명, 옴의 일종) - 교맥( 蕎 麥 ) 짚[ 穰 ]을 태운 잿물로 씻어준다. 말[ 馬 ]도 이와 같이 한다. (3) 난견( 爛 肩 어깨가 문드러짐) - 묵은 솜[ 舊 絮 ] 3냥( 兩 )을 적당히 태워서 거기에 참 기름을 타서 발라주면 3일 만에 곧 낫는다. (4) 누제( 漏 蹄 쇠발굽 사이가 무는 것) - 붉은 광석( 礦 石 ) 가루를 돼지기름에 섞어서 무른 발굽 사이에 메꾸고 따라서 쇠에 불을 달구어 지진다. (5) 상열( 傷 熱 ) - 참깨 잎을 찧어서 즙( 汁 )을 내어 먹이면 당장에 낫는다. (6) 소가 갑자기 배[ 腹 ]가 창만( 脹 滿 )하여 미친 듯이 날뛰면서 사람을 들이받을 때 - 대황( 大 黃 ) 황련( 黃 連 ) 각 5전( 錢 )을 계란 한 개의 흰자위와 술 한 주발에 골고루 타 서 먹인다. 11) 10) 구제역 11) 허균, 성소부부고( 惺 所 覆 瓿 藁 ), 한정록 제16권 <소를 기름[ 養 牛 ]> 126 윤종준

허균의 기록을 볼 때 위 2항이나 3항 특히 3항의 경우는 구제역의 증상과 거의 틀림 이 없다고 판단된다. 허균이 제시한 치료법이 실제로 어느 정도로 강력한 효험을 가진 것인지는 수의학 전문가로부터 별도의 자문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이 연구의 한계이다. Ⅲ. 조선시대 우역 발생 기록 1. 조선시대 우역 발생사건 조선시대의 역사서 중에서 정부 측에서 기록한 이른바 정사( 正 史 ) 기록으로 으뜸가는 것이 조선왕조실록 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시대에 따라서 혹은 편찬자의 시각에 따라 서 문제를 제기할 만한 소지는 있으나, 다른 역사책들과 달리 시대별로 꼼꼼하게 기록 해온 일관성은 어느 사서도 따라올 수 없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실록의 기록에서 우역( 牛 疫 )을 처음 언급한 것은 중종 36년(1541) 2월 1일의 기록이 다. 물론 고려말 충렬왕 때의 발생 기록이 고려사 기록에 있는 것처럼 중종 이전에도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종 때의 우역은 이전보다 자못 피해가 컸던 것으로 보인 다. 또한 가축 전염병은 시대별로 크게 유행하는 시기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중종 명종 때의 우역발생 삼공이 아뢰기를, 평안도 소들이 거의 대부분 병으로 죽었고 황해도 역시 마찬가지 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호조로 하여금 공사( 公 事 )를 만들어 소를 사들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들으니, 평안도의 농사일은 다른 도와 달라서 이곳의 소를 보내 주더라도 2 3년 안에 그곳의 밭갈이에 익숙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또 본도의 사람에게 들으니 소의 병 은 집집이 다 그러한 것이 아니고, 열 마리의 소를 키웠는데 모두 병들어 죽은 집도 있 고 또는 한 마리도 병으로 죽지 않은 집도 있다. 고 합니다. 그 도의 감사로 하여금 소 를 서로 변통하여 농사를 짓게 하여 생업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27

답하였다. 아뢴 뜻이 지당하다. 속이 이러한 뜻을 써서 내려 보내라. 단, 우역( 牛 疫 )이 멈추지 않고 있으니 비록 소가 죽지 않은 집이 있다고 해도 전염될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다. 호조로 하여금 미리 조치하게 하라. 12) 하였다. 곧 이어 같은 해인 중종 36년(1541) 11월 2일에는 제물로 쓸 돼지들이 무더기로 죽으 니 관료들이 중대한 제물( 祭 物 )로 쓸 희생이 이처럼 많이 죽으니, 이는 막대한 재앙이 라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소의 전염병[ 牛 疫 ]은 치료할 방법이라도 있지만 돼지는 치료 할 방법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 할 정도였다. 13) 이처럼 소의 전염병과 돼지의 전염병이 동시에 전파되고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계속해서 다음해인 중종 37년(1542)에는 함경도 회령부와 덕원 함흥 홍원 등의 사 람과 소가 죽었는데, 죽은 남녀 노소가 2백여 명이고, 덕원( 德 源 ) 함흥( 咸 興 ) 홍원( 洪 源 ) 등의 고을에는 우역( 牛 疫 )이 크게 번져 소가 매우 많이 죽었다. 14) 16년만에 우역은 또 발생하였다. 명종 12년(1557) 3월에 함경도 경흥( 慶 興 ) 경원( 慶 源 ) 온성( 穩 城 ) 종성( 鍾 城 )에 우역( 牛 疫 )이 치성하여 수개월 사이에 많이 폐사( 斃 死 )하 였다. 15) 2) 병자호란 전후의 우역발생 정묘, 병자호란은 우리 나라에 전쟁으로서만 피해를 끼친 게 아니었다. 전쟁은 인명 피해와 더불어 다양한 경제적 피해를 수반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최대의 경제적, 문 화적 피해는 도자공들의 납치였을 것이다. 호란 때에는 축산에 대한 피해를 남기게 되 12) 중종실록 36년(1541) 2월 1일 13) 중종실록 36년(1541) 11월 2일 14) 중종실록 37년(1542) 2월 19일 15) 명종 12년(1557) 3월 25일 128 윤종준

었다. 호란 이후로 우리 나라에는 천연두의 창궐과 우역의 창궐로 인하여 사람과 소와 돼지 등의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였다. 병자호란이 터지기 직전, 인조 14년 병자(1636) 8월에는 평안도에 우역( 牛 疫 )이 크게 번져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었고, 16) 이것이 점차 치성하여 서쪽에서 남쪽으로 번 지고 경성에도 죽는 소가 줄을 이으니 소 값이 갑자기 떨어지고 살아 있는 것은 도살하 였다. 17) 같은 해 10월에는 이미 서로( 西 路 )의 열 고을에 한 마리의 소도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18) 인조 15년(1637년) 6월에는 비가 연이어 내리고, 삼남 지방에는 우역( 牛 疫 )이 크게 퍼 져서 거의 씨도 남지 않을 정도로 소들이 죽었다. 영남 지방에서는 말이 절로 죽는 것 이 많았다. 이 병이 61년 만에 다시 일어났으니, 괴상한 일이다. 19) 3) 현종 때의 우역 발생 조선 제18대 현종 임금과 제19대 숙종 임금 시절은 사회적으로 최악의 시대였다. 현종 임금은 즉위하던 해인 1660년 7월 28일 함경북도 경흥부에 우역이 크게 번졌 고, 그 이후로 엄청난 피해 규모의 우역이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연두가 창궐하여 인명 피해 또한 크게 발생되었다. 우역에 대해서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발생시기 발생지역 피해규모 조치사항 비고 현종 1년 (1660. 7. 28) 함경도 경흥 크게 번짐 현종 4년 (1663. 9. 15) 밀도살자 살인죄 적용 지평 윤우정의 주장으로 현종 4년 (1663. 9. 20) 강원도, 충청도 매우 많음 16) 인조 14년 병자(1636) 8월 15일 17) 인조 14년 병자(1636) 9월 21일 18) 인조 14년 병자(1636) 10월 12일 19) 조경, 속잡록 4( 續 雜 錄 四 )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29

발생시기 발생지역 피해규모 조치사항 비고 현종 4년 (1663, 10. 12) 황해도 해주, 곡산 소1천두 돼지도 많이 죽음 1663. 12. 10 윤우정 인피 1663. 12. 13 강원도 1770 여 두 현종6년 (1665, 8. 28) 충청도 극성 1665. 9. 23 전라도 매우 많음 1665. 11. 5 경상도 선산, 영 천 등 30여고을 6,400여두 1665, 11. 21 전라도 1,300여마리 1665. 12. 25 전국 8도 전생서 소 14두 제사용 희생을 충청도에서 기르던 소 제공할 수 없을 2두, 피해 극심, 특히 정도 제주도 피해 큼 현종8년 수없이 많은 소가 함경도 (1667. 2. 6) 죽음 우역, 마역 창궐 현종 9년 평안도에 거위알 함경도 18,100마리 (1668. 5. 8) 만한 우박, 강 풍, 인명피해 1668. 8. 3 경기도 100여마리 현종 10년 (1669. 8. 2) 황해도 신계, 평 산, 금천, 토산 현종11년 도살장 혁파 (1670. 10. 19) 처벌강화 (1670. 10. 24) 현종12년 (1671. 1. 2) 황해도 1671. 3. 24 함경도 10여마리 1671. 7. 5 좌도 각 고을 치열 1671. 7. 25 전라도 함평 등 147마리 각 도 우역 극성 7월 21일 강풍 익사자4명 여역과 우역( 牛 疫 )이 함께 발생 염병사망자 3,534명 굶어죽은자 725명 서울 염병 사망 1671, 10. 29 특히 양남과 강 10여인 각지방 원도 540인 130 윤종준

4) 숙종 때의 우역 발생 현종 임금 때의 기근과 천재지변과 전염병의 유행은 그 다음 임금인 숙종 때에도 크 게 달라지지 않았다. 숙종 2년(1676) 8월에 함경 강원 평안 충청도에 비 서리 우 박 등의 재해가 있었고 전라도는 우역이 극성을 부렸고, 20) 숙종 6년(1680) 전라도에서 우역으로 소 435마리가 죽었으며, 21) 충청도에서는 소 220여 마리가 죽는가 하면 22) 여 러 도에서 우역이 극성하여 죽은 소가 매우 많았다고 각도의 감사들이 서로 잇달아 장 계하였다. 23) 숙종 6년(1680) 전라도에서 우역으로 4천 1백여 마리의 소가 죽었다. 24) 경기( 京 畿 )의 광주( 廣 州 ) 등 13고을에서 전염병[ 牛 疫 ]으로 죽은 소가 2백여 두 ( 頭 )나 되었다. 25) 숙종 7년(1681) 9월 14일, 전염병으로 경기도에서 소 2천 3백 78두( 頭 )가 죽었 는데, 다른 도( 道 )에서도 대략 그와 같았다. 숙종 9년(1683) 윤 6월10일, 함경북도에서 역질로 백성들이 많이 죽고, 제주에 서 우역으로 소가 수만 두가 죽다 숙종 10년 (1684), 4월 10일, 평안도 박천( 博 川 ) 등의 고을에서 3월 19일에 우 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비둘기 알만하였고, 태천( 泰 川 ) 등 24고을에서 우역( 牛 疫 )이 크게 성하여 전후에 죽은 것이 1천 9백 50여 마리이었고, 강서( 江 西 ) 등 여덟 고을에서 돌림병이 걸려 바야흐로 앓는 자가 1백 69인이었다. 숙종 10년(1684) 5월 11일, 평안도에 우역이 크게 성하여 1천 6백여 마리가 죽다. 숙종 10년(1684) 6월 29일, 충청도 홍주( 洪 州 ) 등 14읍( 邑 )에 벌레가 화곡( 禾 穀 )을 손상( 損 傷 )시켰고, 함경도 홍원( 洪 原 ) 등의 고을은 충재( 蟲 災 )가 남관( 南 20) 숙종 2년(1676) 8월 22일 21) 숙종 6년(1680) 8월 2일 22) 숙종 6년(1680) 8월 4일 23) 숙종 6년 경신(1680) 윤 8월 1일 24) 숙종 6년(1680) 10월 6일 25) 숙종 7년 (1681) 8월 4일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31

關 =함경남도)과 마찬가지이고 우역( 牛 疫 )으로 죽은 소가 또한 4백여 마리에 이 르렀으며, 전라도( 全 羅 道 )는 충재가 매우 치성( 熾 盛 )하고, 염병( 染 病 )에 걸린 자 가 또한 6백여 명의 많은 숫자에 이르렀다. 숙종 10년(1684) 7월 25일, 함경도에 염병이 돌아서 1백 40명이 앓고, 우역으 로 4백여 마리가 죽다 숙종 10년(1684) 8월 25일, 경기 장단( 長 湍 ) 등 일곱 고을에 우역( 牛 疫 )으로 7 백여 마리가 죽었다. 숙종 11년(1685) 1월 17일, 황해도 문화( 文 化 )와 안악( 安 岳 ) 등의 읍( 邑 )에 염병 과 우역( 牛 疫 )이 치성( 熾 盛 )하여 번지는 일로 계문( 啓 聞 )하였다. 숙종 12년(1686) 11월 29일, 우의정 이단하가 흉작으로 백성의 기근 각종 제 향의 절감을 상소하기를, 지방 향교에 쓰는 우포( 牛 脯 )를 무인년에는 장포( 獐 脯 )로 대신 썼습니다. 예문( 禮 文 )에는 본래 우포( 牛 脯 )가 없었고 녹포를 갖추기 가 어렵기 때문에 우포로 대신했었는데, 무인년에는 우역( 牛 疫 )으로 인하여 우 포를 갖출 수 없었으므로 장포로 대신했던 것입니다. 장( 獐 )과 녹( 鹿 )은 같은 품종이므로 대신 쓰기에 아주 알맞습니다. 또 지방 향교에도 본래 우생( 牛 牲 )을 쓰라는 조문은 없었으나, 다만 포( 脯 )를 만들기 위하여 반드시 소를 잡게 되므 로, 선혜청( 宣 惠 廳 )에서 춘추로 그 대가( 代 價 )를 지급하는데, 소읍( 小 邑 )에는 8 석( 石 )이고, 대읍( 大 邑 )에는 20석에 이르렀으니, 그것을 적절하게 변통하면 저 치미 지급을 크게 감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26) 숙종 27년 (1701) 12월 25일, 평안도에 염병과 우역이 치성( 熾 盛 )하여, 죽는 자 가 서로 뒤를 이었다. 숙종 43년 (1717) 2월 25일, 경상 충청도 경상도 각 고을의 백성으로 염병( 染 病 )을 앓고 있는 자가 9백 30여 명이고 죽은 자가 1백 50여 명이고, 우역( 牛 疫 ) 으로 죽은 것이 3천 7백여 두( 頭 )이며, 충청도에서 염병을 앓고 있는 자가 3백 60명이고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다. 26) 숙종 12년(1686) 11월 29일 132 윤종준

이상으로 숙종 때에 크게 번진 우역으로 인한 피해는 정확한 숫자가 명시된 경우만 하더라도 3만 1,700마리에 이른다. 제주도에서 수만 마리가 죽었다고 한 것을 빼고도 그렇다. 숙종 12년 11월 29일에는 향교의 제사에 우포를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장포 로 대시한 정도였다. 5) 영조 때의 우역발생 각종 전염병과 자연재해는 끊이지 아니하고 영조 임금 때에도 기승을 부렸다. 하필 이 때는 청나라의 길목에서 발생하여 외교적인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 영조14년(1738) 2월 북관( 北 關 )에 우역( 牛 疫 )이 크게 번져서 청나라 차원( 差 員 )과 교시( 交 市 )하는데 쓸 소 6백 마리 중에 죽은 것이 5백 50여 마리나 되었다. 송인명( 宋 寅 明 )이 남관( 南 關 )의 소를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른 소를 들여보내도 반드시 병들어 죽게 될 것이니, 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우역이 없어지기를 기다려서 무역하도록 하 라. 하였다. 27) 영조23년(1747)에는 서해안 일대에 해일이 크게 일어 여산( 礪 山 )에서부터 순천( 順 天 ) 등에 이르기까지 25읍( 邑 )이 일시에 씻겨져 거의 6, 7백 리가 피해를 입었는데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우역이 크게 극성하여 농우( 農 牛 ) 십중팔구가 다 죽어서 사람들이 봄에 장차 경작할 희망조차 없는 상황이 되었다. 28) 영조 25년에는 강화에서 소 1천여두가 죽으므로 유수 원경하가 제사를 지낼 것을 건 의했으나 전례가 없다하여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 29) 하지만 9월에는 재앙을 물리치 기 위한 제사를 허락하였다. 30) 영조 39년 (1763) 5월에는 여름인데 함경도에 우박이 내려서 보리와 조를 손상시켰고 우역( 牛 疫 )이 크게 번졌으며, 그해 12월에는 호남( 湖 南 )에 우역( 牛 疫 )이 발생하여 죽은 소가 1만 마리나 되므로 모든 도( 道 )에 명하여 소 잡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31) 27) 영조 14년(1738) 2월 7일 28) 영조 23년(1747) 10월 18일 및 12월 22일 29) 영조 25년(1749) 8월 23일 30) 영조 25년(1749) 9월 12일 31) 영조 39년(1763) 12월 2일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33

2. 우역에 대한 백성들과 조정의 대응 1) 밀도살 하거나 죽은 고기를 먹는 사람들 우역이 번져나가자 사람들은 소가 죽기 전에 잡아먹거나, 죽은 소를 먹었다가 병이 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왕실의 측근들까지도 밀도살을 저질러 처벌을 받게 되는 사례 도 발생하였다. 인평대군과 능원대군의 가노( 家 奴 ) 김철( 金 鐵 ) 등 7인을 전가 사변( 全 家 徙 邊 )시키라 명하였다. 병자년에 우역( 牛 疫 )이 전국에 널리 퍼져 소가 거의 멸종되기에 이르렀을 때 조정에서 도살을 엄금하여 살인한 것과 같은 죄를 적용하도록 하니 축산이 차차 번성하 게 되었는데, 소를 도살하여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궁가( 宮 家 )에 투속하여 제멋대로들 도살하였다. 형조 한성부 사헌부의 금리( 禁 吏 )들이 체포하여 고발하면 궁가에서는 그 때마다 그 금리의 처자들을 구타하므로 금리들은 금패( 禁 牌 )를 수령하지 않고 서로 피 하기에만 급급했다. 민성휘( 閔 聖 徽 )가 형조 판서가 되어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여 소 도살자의 숫자를 한성부에 물으니, 인평 대군( 麟 坪 大 君 ) 32) 집 소속이 42인, 능원 대군 ( 綾 原 大 君 ) 33) 집 소속이 38인이었다. 성휘가 이에 두 궁의 18인씩을 뽑아서 아뢰고 한 성부로 하여금 조사해서 전가 사변시키도록 청하니, 임금이 할 수 없이 따랐다. 34) 전가사변의 처벌은 곧, 가족 모두를 국경선 부근으로 강제 이주시켜서 살게 하는 처 벌이었다. 현종 임금 때가 되면 극심한 가뭄과 천재지변이 해마다 발생하였고, 천연두가 크게 32) 인평대군 [ 麟 坪 大 君, 1622~1658] :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셋째 아들. 1650년 이후 4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제자백가에 정통했으며, 병자호란의 국치를 읊은 시가 전해진다. 또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송계집, 산행록 등이 있다. 1636년의 병자호란 때에는 부왕( 父 王 )을 남한산성( 南 漢 山 城 )에 호종했다. 1640년 볼모로 선양[ 瀋 陽 ]에 갔다가 이듬해 풀려 귀국하였다. [출처] 인평대군 [ 麟 坪 大 君 ] 네이버 백과사전 33) 능원대군 [ 綾 原 大 君, 1598~1656] : 조선시대 선조( 宣 祖 )의 제5남인 정원군( 定 遠 君 )의 아들. 인조 ( 仁 祖 )의 동생. 의안군에게 입양되어 능원군에 봉해졌으며 후에 대군으로 진호되었다. 인조의 묘 정에 배향되었다. [출처] 능원대군 [ 綾 原 大 君 ] 네이버 백과사전 34) 인조 25년 정해(1647) 2월 2일 134 윤종준

번져 심지어는 현종14년(1673)에는 임금의 작은 딸 명혜공주(1665~1673)와 큰 딸 명선 공주(1660~1673)가 불과 3개월 사이에 각각 9살과 13살의 나이로 요절하는 비운을 겪 기도 하였다. 현종 시절, 백성들이 겪는 고초를 낱낱이 보여주는 보고서가 있다. 경상 감사 민시중( 閔 蓍 重 )이 치계하기를, 우도( 右 道 )의 각 고을은 기근이 더욱 심하여 닭 개를 죄다 잡아먹고 나자 또 마소 까지 잡아먹고 있는데 사람마다 도살장이 필요 없이 직접 도살하고 있습니다. 형세의 급함이 서로 잡아먹기 직전이고 심지어는 굶주린 창자에 고기를 먹자 설사병이 갑자기 일어나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으며 애초에 마소가 없는 자는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시장의 가격은 겉보리 한 말로 거친 무명 너 댓 단( 端 )과 바꾸기까지 합니다만, 보리를 가진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좌도( 左 道 )의 각 고을은 우역( 牛 疫 )이 크 게 치열한데 저절로 죽은 것의 고기는 혹 사람에게 해로울까 염려하여 파묻게 하고 있 습니다. 그러면 굶주린 백성들이 밤을 틈타 파내어 먹고는 죽은 자가 매우 많습니다. 또 각 고을의 굶주린 백성이 날마다 구름처럼 모이고 있으나 진휼할 밑거리가 이미 떨 어져서 보리죽을 먹이고 있으므로 구제되기를 바라기 어려운데 여역 이질이 전염되면 즉시 죽습니다. 게다가 한재와 황재( 蝗 災 )가 매우 참혹하니, 앞날의 농사에는 다시 바랄 만한 것이 없습니다. 35) 하였다. 사람들이 밀도살을 하는 것을 넘어 죽은 고기를 땅속에 묻은 것을 다시 몰래 파내어 먹고는 설사병에 걸려 죽는 상황도 벌어졌던 것이다. 2) 밀도살을 강력히 금지하다. 당시 우리 나라에 우역이 번져 나갈 때, 사람들은 소가 죽기 전에 잡아먹는 경향이 있었다. 병든 소를 잡아먹는 것이 위험 한데도 불구하고 위험성에 대한 사전 인식을 못 한 결과로 보여 지는데, 소 값이 급격히 하락하고 죽어가므로 소가 죽기 전에 잡아먹거 35) 현종 12년 신해(1671) 7월 5일 현종개수실록 12년 신해(1671) 7월 5일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35

나 죽은 소를 도굴해서 먹으므로 한성부에서는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법을 거듭 요구하 였다는 것이다. 36) 그리하여 우역이 극성을 부리게 되는 현종 4년(1663) 9월 15일에는 마침내 밀도살을 한 자에게 사람을 죽인 죄와 동일한 죄를 적용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평 윤우정( 尹 遇 丁 )이 아뢰기를, 올해 우역( 牛 疫 )이 매우 참혹하게 번져 앞으로 종자가 끊길 염려마 저 있습니다. 일찍이 정축년에 우역이 있었을 때 소를 죽인 자는 사람을 죽인 것과 똑 같은 죄를 적용하기로 영갑( 令 甲 )에 기재하였으니, 지금도 이 법에 의거하여 통렬히 금 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이 일을 두고 실록을 기록한 사신은 논하기를 윤우정은 사람은 귀하고 가축은 천한 의리를 모르는 자라고 할 수 있겠다. 라고 평가 할 정도였다. 37) 한편, 우역이 기승을 부리던 현종 임금 때에는 사람들이 도살장을 차려놓고 소를 잡 는 지경이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논의를 거쳐 도살장을 없애고, 소를 잡아먹는 자들 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여 멀리 전 가족을 변방으로 보내는 전가사변( 全 家 徙 邊 ) 의 벌칙 을 엄격히 시행하기로 하였다. 38) 숙종 7년(1681)에도 임금이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이상진이 팔도[ 八 路 ]에 소 전염병[ 牛 疫 ]이 날로 심해지고 있으니 경외( 京 外 )의 도사( 屠 肆 )에 도살을 금단 ( 禁 斷 )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9) 2년 후(1683) 우암 송시열이 12조목의 건의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 소를 잡는 폐단에 대해 건의하기를 우역( 牛 疫 )이 있은 뒤로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도 소 잡기를 그치지 아니합니다. 우리나라의 풍속이 쇠고기를 가장 좋은 맛으로 여겨서 이를 먹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것 같이 여깁니다. 비록 금지하는 명령이 있어도 오히려 이를 돌아보지도 않으니, 만약 금 지하는 조목( 條 目 )을 따로 만들어서 중외( 中 外 )에 반포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실농( 失 農 ) 이 한재( 旱 災 )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중략) 문성공( 文 成 公 ) 이이( 李 珥 )는 평생 쇠고기를 36) 인조 14년 병자(1636) 9월 21일 37) 현종 4년(1663) 9월 15일 38) 현종 11년 경술(1670) 10월 19일 현종개수실록 11년 10월 24일 39) 숙종 7년 (1681) 8월 23일 136 윤종준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집에는 지금도 쇠고기를 가지고 이이( 李 珥 )에게 제 사지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 오늘날 어떻게 이와 같은 사람을 볼 수 있겠습니까? 삼 가 원하건대, 정자( 程 子 )와 이이( 李 珥 )의 말로써 여러 신하들을 책려( 責 勵 )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 廟 堂 )으로 하여금 품처( 稟 處 )하게 하였다. 40) 3) 농사용 소를 매매하지 못하게 하다. 영의정 이천보가 또 말하기를, 전 함경 감사 윤득재( 尹 得 載 )가 말하기를, 본도에 우 역( 牛 疫 )이 크게 치성한 까닭에 회령( 會 寧 ) 경원( 慶 源 )에서 청나라 차원( 差 員 )이 개시 ( 開 市 )할 때에 농우( 農 牛 )를 매매하던 것을 금단하도록 장청( 狀 請 )하였으나, 피인( 彼 人 ) 들은 개시 때 오로지 소를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한결 같이 엄히 막으면 혹 말 썽을 일으킬까 염려되며, 근일에 우역도 자못 그쳤다. 고 하니, 도신으로 하여금 조금 팔도록 허락하소서.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41) 청나라와의 거래에서 농사용 소를 거래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한편으로 우역이 덜한 경우에 거래를 부분적으로 허용해 주었던 것이다. 4) 송아지로 보상을 하다. 우역에 대한 정부 측의 대응은 도살을 금지하는 것 외에 죽은 소나 말에 대하여 송아 지로 보상해 주기도 했다. 워낙 많은 말이 죽게 되자 목자( 牧 子 )들이 살아갈 방도가 없 으므로 제조( 提 調 ) 이서( 李 曙 )가 송아지로 대신 보상하는 것을 허락하여 마침내 크게 번 식하였고, 이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여 임금이 이서에게 표피( 豹 皮 )로 만든 요를 하사하 였다. 42) 40) 숙종 9년 (1683) 1월 28일 41) 영조 30년(1754) 11월 4일 42) 인조 14년 병자(1636) 10월 12일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37

5) 외국에서 수입을 해서 보급하다. 병자호란의 참혹한 겨울을 지내는 동안 우역은 더욱 창궐하여 백성들을 고통으로 몰 아넣었다. 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끌려갔던 사람들 780인이 되돌아오게 되었는데, 이 때 청나라 황제의 칙서에 우역( 牛 疫 )이 나라 안에 일어났다. 고 언급되었다. 이것은 곧 청나라의 군대징발 요구와 각종 공물 요구에 대해 국내 사정이 어려운 점을 들어 인조 가 청나라 측에 제시한 국내 정황이었다. 한편으로, 조선 정부는 우역으로 거의 멸종 단계에 이른 축산농가를 지원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소를 수입 해다가 공급하였다. 인조 임금이 호조 판서 심열( 沈 悅 ), 공조 판서 이시백( 李 時 白 ), 부제학 이경석( 李 景 奭 ), 형조 참판 임광( 任 絖 )을 불러서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수비 대책을 논의 하는 자리 에서 이경석에게 이르기를, 경이 소를 무역해 오는 일을 전담하고 있는데, 어떻게 사 가지고 올 작정인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지금 몽고 지방에서 무역해 오려고 합니다. 신이 소 값이 가장 헐한 곳에 가서 사오라는 뜻으로 차인( 差 人 )에게 말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재이가 거듭 나타나고 민력이 탕갈되었으니, 종묘의 제향에 쓰는 물건 또한 편의에 따 라 재량해 줄여야 합니다. 그 중에 중포( 中 脯 )는 우역( 牛 疫 )이 돈 뒤로 더욱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심열이 여기 있으니, 아뢰어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심열 에게 이르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경석의 말이 옳습니 다. 변통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노루나 사슴을 사냥해다가 대신 쓰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43) 6) 외교적 노력 한편, 청나라 측에서 때로는 국경지대의 조선 농민들로부터 농업용 소를 사가는 경우 가 있었는데, 요구하는 게 지나친 경우가 많았다. 조선 정부는 농사에 필요한 소를 일 정한 마리 수를 유지 관리 하고자 노력하여 청나라 측에서 요구하는 수매량을 다 들어 43) 인조 16년 무인(1638) 1월 4일 138 윤종준

주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 측에서 불만을 가지고 조선 국왕에게 은 1만냥의 벌 금을 내라고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좌의정 남구만이 스스로 죄를 청하니 임금이 오히려 위로를 해 주었다. 44) 7) 제사를 지내다. 영조 25년(1749) 8월에 강화에서 소 1천여마리가 죽었으므로 유수 원경하가 제사 지 내기를 요청했다. 그러자 임금은 문헌에 제를 지낸 기록이 있는가를 물었고, 약방 제조 ( 提 調 ) 김상로( 金 尙 魯 )가 말하기를, 소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을 위하는 것입니 다. 하니, 임금이 문헌을 상고하라고 명하였는데 사례( 事 例 )가 없어 중지하였다. 45) 하 지만 농사용 소가 없어 사람이 밭을 갈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제사를 허락하게 되었다. 원경하가 옛날 마조( 馬 祖 )에게 기도한 사례에 의거하여 제사를 마련하여 재앙을 물리 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에 예조에서 건의하기를, 각 고을에서는 중앙에 단( 壇 )을 만들게 하고 서울에서는 마단( 馬 壇 ) 가운데에 함께 목신( 牧 神 )을 설치하게 하 자 고 하여, 드디어 제도( 諸 道 )에 신칙하여 도재( 屠 宰 )를 금하게 하고 서울의 현방( 懸 房 ) 은 한 달을 한정하여 파하게 하였다. 46) 영조 25년 (1749) 9월 18일, 말을 처음 기른 선목에게 제사지내는 선목단( 先 牧 壇 )에 제사하는 의식을 수거( 修 擧 )하도록 명하였다. 오례의( 五 禮 儀 ) 에, 중하( 仲 夏 )의 두 번 째 절후 다음 강일( 剛 日 )에 선목에게 제사하되 마사( 馬 社 )와 마보( 馬 步 )로써 배향하 며, 단은 동교( 東 郊 )에 있다. 축판( 祝 版 )에는 조선왕( 朝 鮮 王 )이라 일컬으며, 생뢰( 牲 牢 ) 는 돼지 한 마리로 하고 사관( 祀 官 )은 3품으로 하며 4배( 四 拜 )에 3헌( 三 獻 )으로 한다. 음복( 飮 福 )하고 수조( 受 胙 )하며 축문과 폐백을 묻는다. 그 나머지는 영성( 靈 星 )에 제사 하는 의절과 같다. 하였다. 임금이 원경하( 元 景 夏 )의 말을 받아들여 장차 우역( 牛 疫 )을 빌려고 이 제도를 다듬고 44) 숙종 11년(1685년) 8월 15일, 45) 영조 25년(1749) 8월 23일 46) 영조 25년 (1749) 9월 12일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39

대신에게 물으니, 다른 말이 없었다. 예조에서 길한 날을 가리어 단을 살곶이[ 箭 串 ] 마 장( 馬 場 ) 안에 쌓고 봉상시( 奉 常 寺 )에서는 위판( 位 版 )을 만들었는데, 오방( 五 方 )의 신위 ( 神 位 )는 동방( 東 方 )에 6위( 六 位 )와 서쪽 남쪽 북쪽 중앙에 모두 7위( 七 位 )로 선목위 ( 先 牧 位 )는 동방에 있고 천사위( 天 駟 位 )는 아래이다. 마사 선목 마보 등의 단은 고려조의 의종( 毅 宗 ) 때에 시작되었는데, 단의 너비는 9 보( 步 )요 높이는 3척이며, 사방( 四 方 ) 섬돌[ 陛 ]이 나오게 하고 제단의 토담[ 壝 ]은 아울러 15보이다. 축문과 폐백을 묻는 구덩이는 모두 신단( 神 壇 )의 임방( 壬 方 ) 남쪽에 있으며 나온 섬돌은 모가 나고 깊어서 물건을 용납하기에 족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그 대략 이다. 47) 3. 우역이 끼친 다른 피해들와 우역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우역이 발생하면서 소가 죽어 나가는 경제적 손실 외에 소값의 폭락이 이어졌고, 또 한 우역의 창궐로 인해 다른 부수적인 사업들이 중단 되기도 하였다. 마치 현대 사회에 서 구제역 때문에 체육대회나 문화행사등 다중이 모이는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다. 임금을 호위할 금군( 禁 軍 )이 활쏘기와 포쏘기는 해마다 연습하였으나, 호란 뒤에는 말이 없어 기사( 騎 射 =말타기)는 연습하지 못하였다. 무명 1백여 동을 제주에 들여보내 어 소를 사들이려 하였으나, 우역( 牛 疫 )을 만나 시행하지 못하고 모두 제주에 유치해 두었다가 이제(1639) 목사로 하여금 이 무명으로 말을 많이 사들여 무사에게 나누어 주 어 기사( 騎 射 )를 연습하게 하였다. 48) 우역에 대한 옛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보면, 옛날의 위정자들 특히 임금은 자연재해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태풍이나 해일, 번개, 일식과 월식, 자연 의 돌연변이적 현상 등 모든 자연현상에 대하여 하늘이 경고를 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47) 영조 25년 (1749) 9월 18일 48) 인조 17년 (1639) 4월 16일 140 윤종준

인조임금은 여역( 癘 疫 )이 있으면 의국( 醫 局 )을 시켜 약을 지어 구완하게 하고, 또 유사 를 시켜 여사( 廬 舍 )를 지어 거처하게 하고 관가에서 그 죽반( 粥 飯 ) 거리를 주게 하셨다. 난리를 겪은 뒤에 우역( 牛 疫 )이 매우 치성하여 거의 다 죽었는데, 여러 목장에서 기르 던 것을 몰아서 여러 고을로 흩어 보냈으므로 소가 크게 번식하여 백성이 밭갈이에 괴 롭지 않았다. 혹 대신과 비국의 신하를 부르거나 근신( 近 臣 )을 불러 과실을 듣기를 바 라셨다. 일찍이 김류에게 이르기를 원훈( 元 勳 )은 국가와 고락을 같이하는 사람인데 입 시( 入 侍 )한 때에도 내 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고 그 뒤에 또 대신에 게 이르기를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임금이 잘못을 고치는 것밖에 없고 또 인재를 얻기에 달려 있다. 이 두 가지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잘못이 있으면 대관( 臺 官 )이 말해 야 할 것이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 책임은 대신이 담당해야 할 것이다. 49) 하였다. 영조 26년(1750) 11월 30일에는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부교리 김 치인( 金 致 仁 )이 말하기를, 금년의 여역( 癘 疫 )에 죽은 자가 무수히 많아 추동( 秋 冬 ) 이 래로 날마다 매장 하기를 일삼아 이 때문에 추수( 秋 收 ) 역시 때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 니다. 또 우역( 牛 疫 )이 연달아 3년 동안 치성( 熾 盛 )해서 가을갈이를 하면서 소 대신 사 람이 갈고 있다 하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지금의 제일 급선무는 바로 백성을 돌보는 정사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옳게 여겼다. 우역은 조선 말기에도 기승을 부렸는데, 고종 임금은 향축을 내려 보내어 여러 곳에 서 제사 지내라는 전교를 하면서 들으니 우역( 牛 疫 )이 크게 돌아 농사를 지을 가망이 없다고 한다. 농민에게 소가 없으면 땅을 갈 수가 없고, 땅을 갈지 못하면 먹고 살 수 가 없는 법으로, 말이 이에 미치니 밥을 먹어도 밥맛을 모르겠다. 백성들의 일에 관계 되는 바는 심상하게 논할 수 없다. 별도로 향축( 香 祝 )을 내려 보내어 도내의 여러 악독 ( 嶽 瀆 )에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 지내, 기어이 영검을 얻어 북방을 걱정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펴게 하라. 제문은 대제학으로 하여금 짓게 하라. 하였다. 50) 퇴계 이황은 41세 되던 해 3월, 경연에 들어가 임금에게 일을 아뢰게 되었는데 이 때 에 우역( 牛 疫 )이 심하였기에 선생이 아뢰기를, 오행지( 五 行 志 ) 에 이르기를, 토( 土 ) 49) 인조대왕 행장 50) 승정원일기, 고종 9년(1872) 1월 7일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41

가 만물을 낳는 것인데 토기( 土 氣 )를 길러 주지 않으면 농사가 잘 되지 못하며, 그래서 소의 화가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난겨울에는 지진의 변괴가 있었는데, 이제 전염병 과 우역이 한꺼번에 일어났으니 옛사람의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닙니다. 게다가 봄에 가뭄이 들까 염려되고, 토맥( 土 脈 )이 윤택하지 못하여 흉년이 들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으니, 농사 역시 가히 점칠 수 있습니다. 재앙과 이변( 異 變 )이 겹쳐서 일어남이 오늘 날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주상께서는 더욱더 수양과 반성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 뒤에 석강( 夕 講 )에 들어가 또 아뢰기를, 한나라 명제( 明 帝 ) 때에 날이 가물 어서 종리의( 鍾 離 意 )가 상소하여 간하니, 명제가 즉시 토목 공사하던 것을 중지시키고, 백관들에게 자기의 허물을 효유하였더니 즉시 큰비가 내렸습니다. 근래 재변이 있었을 때 주상께서 근심하시고 놀라시어 죄가 내게 있다. 하신 말씀이 역시 매우 간절하셨기 때문에, 하늘이 때맞추어 비를 내렸습니다. 이것으로 보아도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응한 다는 이치는 틀림이 없으니, 대개 마음속으로 진실하게 정성을 다하면 그에 알맞은 보 응이 오는 법입니다. 라고 하였다. 51) 4. 우역에 대한 치료법 52) 홍만선의 산림경제 에 보면 소의 질병에 대하여 여러 가지 문헌을 참조하여 상세하 게 치료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몇 가지만 골라서 제시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역( 牛 疫 )이 근처에 들어왔을 때에는 병들지 않은 소에게 소변을 하루에 3~4차례 먹이면 전염이 되지 않는다. 소는 본시 사람의 오줌을 좋아하므로 남자가 소의 입에 바 로 대고 오줌을 누면 스스로 받아 먹는데 아주 효과가 있다. 치료방 자토( 赭 土 붉은 흙) 주토( 朱 土 )를 뿔 위에 바르면 역기( 疫 氣 )를 물리친다. 치료방 발병하기 전에 침[ 涎 ]을 흘리는 것은 바로 온역( 瘟 疫 )의 조짐이니, 황백( 黃 柏 )을 갈아 서 낸 즙( 汁 )과 백석( 白 石 양기석( 陽 起 石 )의 이칭)을 태운 재를 술에 섞어 입에 들이부 51) 이황, 퇴계선생연보 제1권 연보( 年 譜 ) 1 52) 홍만선, 산림경제 제2권 목양( 牧 養 ) <소기르기 [ 養 牛 ]> 142 윤종준

으면 예방이 된다. 고사촬요 침을 계속 흘리는 경우에는 향묵( 香 墨 참먹) 먹 을 갈아 만든 먹물과 쪽[ 藍 ]의 즙을 내어, 매번 3푼에 석회 1홉과 술 반 되[ 升 ]를 혼합하여 먹인다. 치료방 발병하기 전에 미리 양제( 羊 蹄 소루쟁이) 솔옷 즙 2~3되를 먹이고, 발병한 뒤에도 먹 인다. 증류본초 막 병기( 病 氣 )가 있을 때 천금목( 千 金 木 붉나무) <븕나모>를 베어다가 외양간에 두른 다. 증류본초 우역( 牛 疫 )에는 파초( 芭 蕉 ) 뿌리를 캐다가 짓찧어 즙을 내어 한 번에 한 사발씩 3일 동안 먹이면 아무리 심한 우역이라도 번번이 낫는다. 파초는 향촌( 鄕 村 )에 항상 있는 것이 아니므로 미리 심어 두었다가 우역에 대비함이 가하다. 고사촬요 거가필용 에 석남등( 石 南 藤 )에다 파초의 자연즙 5되와 섞어서 먹인다. 하였다. 석남등은 중국 약재이다. 12월의 술지게미[ 糟 ] 주염이 큰 되로 1되, 적복령( 赤 茯 苓 ) 가루 4냥, 석창포와 대황 가루 각 2냥, 지황즙( 地 黃 汁 ) 1되, 초( 醋 ) 반 되, 사람의 오줌 큰 되로 1되를 섞어 하루 에 한 번씩 먹이되, 격일로 5차례 먹인 뒤에 그만둔다. 그리고 이어서 코털[ 鼻 毛 ] 난 부분을 침( 針 )으로 1푼쯤 찔러 피가 나오면 차도가 있다. 치료방 진다( 眞 茶 좋은 작설차( 雀 舌 茶 )) 됴흔 작셜차 2냥을 가루로 만들어 물 5되에 타서 먹 인다. 신은지 소나 말이 전염병을 앓을 때는 너구리고기[ 獺 肉 ] 너고릐고기 나 똥을 끓여 식혔다가 먹인다. 본초 에는 또 너구리의 고기 간 밥통[ 肚 ]을 물에 끓여서 그 물을 먹이지 만, 똥은 사용하지 못한다 하였다. 소나 말이 전염병을 앓을 때 흑두( 黑 豆 )를 삶은 물을 먹인다. 증류본초 소나 말이 전염병을 앓을 때는 백출( 白 朮 ) 여로( 藜 蘆 박새) 박씨 궁궁( 芎 藭 ) 세신 ( 細 辛 족두리풀 뿌리) 귀구( 鬼 臼 두여머조자기 석창포를 같은 분량으로 거친 가루를 만들어 코 앞에서 태워 그 연기가 뱃속으로 들어가게 하면 즉시 낫는다. 우마의방 소나 말에 전염병이 처음 발병되었을 때는 신체상에 작은 종기 조금 부어오른 것. 가 생기는데, 자세히 찾아내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지진다. 또 냉수를 몸에 끼얹되, 체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43

온이 내릴때 까지 계속한다. 또 쑥으로 새끼손가락 크기의 심지를 만들어 신궐혈( 神 闕 血 ) 배꼽 한가운데이다. 을 30번 뜬다. 우마의방 소나 말의 모든 병에는 버들잎과 생우유를 함께 넣고 찧어 탄알[ 彈 子 ] 크기만한 환 ( 丸 )을 만들어 햇볕에 말렸다가, 사용할 때는 보드라운 가루로 만들어 생우유에 타서 먹이면 신기한 효험이 있다. 증류본초 Ⅳ. 맺음말 최근 우리 나라가 겪은 구제역 파동은 많은 상처와 좌절을 안겨주었던 사회적 사건이다. 축산 농가는 자식과도 같이 길러온 가축들을 생매장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고 어렵게 가꾸어온 재산을 불의의 재앙으로 빼앗기게 되어 좌절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이 역사속에서는 어떻게 비쳐져 왔을까?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생 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사간원( 司 諫 院 )에서 아뢰기를, 금년 가뭄은 어디나 다 같으나 그중에서도 영남과 호 남의 상도( 上 道 ) 지방과 호서( 湖 西 )의 백마강( 白 馬 江 ) 일대가 더욱 혹독하게 재해를 입 었으니, 앞으로 연분( 年 分 )을 답험( 踏 驗 )할 때에는 마땅히 충분히 자세히 살펴 일일이 면세하여 원통하다는 백성이 없게 하소서. 병화를 겪은 다음에 겹쳐서 거듭 우역( 牛 疫 ) 이 퍼져서 소 한 마리가 갈던 것을 열 사람 힘으로 대신하였고, 겨우 파종과 모내기를 끝내고 나서 즉시 가뭄이 닥쳐와서 김매기가 전보다 십 배나 더 어렵게 되었으니, 농민 들의 고생이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한 달이 넘도록 가뭄이 계속되어 비가 내리 지 않으니, 비옥한 들판이 다 타버렸고, 그중에서 혹 다행으로 모가 자라난 것도 가을 이 되어서는 이삭이 나오지 않으니, 이것은 뿌리가 이미 상하여 피어날 힘이 없기 때문 입니다. 처음부터 갈지도 못한 논밭은 이미 노력을 들이지 않았으니 비록 수확이 없다 해도 재력은 손해가 없겠지만, 종자를 넣고도 전부 손해만 보고 있는 것은 이미 많은 재력을 넣고 한 됫박의 수입도 없으니, 농민의 원통함이 황무지로 버려둔 것보다도 더 욱 심합니다. 이른바 급재( 給 災 ) 라는 것은 세납만 면제하는 것이고, 전결( 田 結 )에 대한 144 윤종준

부역은 다 면제가 되지 못하니, 그것은 성상의 백성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덕에 손상됨 이 적지 않습니다. 청컨대, 손실이 더욱 심한 곳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 논하도록 하여 아울러 진황지( 陳 荒 地 )와 같은 처리를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계주 ( 啓 奏 )대로 하라. 하였다. 53) 옛사람들의 고통이나 지금 사람들의 고통이 한가지임을 보여 주는 글이다. 옛날에 가축전염병은 주로 소를 중심으로 역사 기록에 등장하고 있다. 말이나 돼지도 있지만 피해 목록에서 중심적인 조명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이것은 소가 지닌 상징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소는 다른 가축과 달리 농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 인 재산 가치를 지니는 존재였다. 소가 없으면 밭을 갈 수 없고, 먹을 것을 만들 수 없 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을 싣고 다닐 수도 없게 된다. 소가 없으면 몇 갑절의 힘을 사 람이 직접 써야만 한다. 고종 임금은 <사사로이 소를 도살하는 일을 힘써 규찰하라>는 전교를 내리면서, 밭 에서 쟁기를 끄는 데 힘입어 쌀밥을 먹을 수 있고, 사방으로 짐을 나름에 있어서 무거 운 짐을 실어 나르니, 사람을 위해 쓰임에 있어서 이와 같으니 어찌 무고히 소를 죽일 수 있겠는가? 지금 봄철이 돌아와서 장차 봄 농사가 시작될 때인데, 곳곳마다 우역( 牛 疫 )이 치성하 고 있다고 하니, 백성들의 일을 생각함에 몹시 마음이 편치 않다. 안으로는 형조와 한 성부 양사가, 밖으로는 팔도와 사도( 四 都 )가 단속하는 것을 과연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서로 간에 힘써 잘 규찰하여 감히 그럭저럭 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기 어이 실제적인 성과가 있도록 하라 하였으니, 54) 소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은 임금이나 농민이나 생각에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축 전염병을 일컫기를 우역( 牛 疫 )이라 하고 소의 떼죽음에 대하여 각별한 정책을 펼쳤다. 우역이 돌기 시작하면 일반 사람들은 소 값이 폭락하는 것을 경험해야 했는데 이 때, 사람들은 소를 불법으로 잡아서 먹는가 하면 매장한 죽은 소를 토굴해서 53) 조경남, 속잡록 4( 續 雜 錄 四 ), 인조 16년(1638년) 9월 54) 승정원일기, 고종 10년 (1873) 1월 13일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45

먹는 사례가 흔하였다. 심지어는 왕의 최측근이라 할 임금의 동생과 아들 집에서까지 밀도살이 자행되어 전가사변이라는 처벌을 받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러한 밀도살에 대해 조정에서는 처음에 살인죄와 같이 다룰 정도로 엄격하게 다루 다가 사람의 인격이 짐승만도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여론 때문에 전가사변( 全 家 徙 邊 )이 라는 국경지대 강제이주 처벌로 사형을 면하게 된 것이었다. 한편 농사용 소를 일정한 마리수를 확보하여 노동력을 유지하고자 청나라 측과의 무 역 거래에도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하다가 청나라 측이 벌금을 낼 것을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피해를 입은 축산농가에는 소를 대여 해주어 밭을 갈 수 있게 해주는가 하면, 송아지 를 보급하기도 하였고, 전국의 소가 씨가 마를 지경이 되었을 때에는 백헌 이경석을 몽 골에 보내어 소를 수입해 와서 보급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농민사회의 붕괴를 막고 자 노력하였다. 한편으로는 재앙을 없게 해달라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까지 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병자호란 이후 전란으로 피폐해진데다 천연두의 창궐과 우역이 기승을 부리는 불운한 시대였다. 심지어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임금조차도 9살과 13살 밖에 안된 사랑스런 두 딸이 불과 석 달 사이에 천연두라는 무서운 병마를 이겨내지 못 하고 영원한 이별을 해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옛 임금들은 자연의 재해에 대하여 경건하게 반성하며 자신을 수양하는 경고의 의미 로 받아들여 더욱 더 자숙하는 계기로 삼았다. 146 윤종준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1) 중종실록 2) 명종실록 3) 인조실록, 인조대왕 행장 4) 숙종실록 5) 영조실록 6)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2. 승정원일기, 고종 3. 고려사 忠 烈 王 五 年 十 二 月, 慶 南 道 牛 疫, 屠 者 爛 手 而 死. 4. 황현, 매천야록 제6권 5. 허균, 성소부부고( 惺 所 覆 瓿 藁 ), 한정록 제16권 <소를 기름[ 養 牛 ]> 6. 이황, 퇴계선생연보 제1권 연보( 年 譜 ) 1 7. 홍만선, 산림경제 제2권 목양( 牧 養 ) <소기르기 [ 養 牛 ]>, <말 기르기[ 養 馬 ]> 8. 조경남, 속잡록 4( 續 雜 錄 四 ) 9. 인터넷 싸이트 1) 구제역 http://fmd.go.kr/ 2) 네이버 백과사전 (인평대군, 능원대군) 10. 신문기사 1) 동아일보 2011년 3월 7일, 역대구제역 피해현황 조선시대 가축전염병 우역( 牛 疫 )발생 고찰 147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조 성 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 目 次 I. 머리말 II. 여흥민씨 삼방파의 형성 III. 노론과의 관계 IV. 삼방파의 가풍( 家 風 ) V. 명성황후 어린 시절 VI. 맺음말 집필자 : 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 여주군사 편찬위원, 국사편찬위원 사료조사원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49

Ⅰ. 머리말 올해는 명성황후 탄신 160주년이 되는 해이자,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시해 당한 지 116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100여년의 시간이 지났음 에도 황후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부정적 시각의 대략은 황후가 미천한 가문의 소생으로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 興 宣 大 院 君 )에 의해 간택되었음에도 그와 권력 투쟁을 벌여 실각시켰으며, 민씨 척족을 끌어들여 국정을 농단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았 는가 하면 대외관계에서도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자초하다가 마 침내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명성황후의 집안인 여흥민씨 삼방파는 인현왕후( 仁 顯 王 后 )를 배출한 노론의 명문가였고 대원군에게 서 성인( 成 人 )이 된 남편 고종( 高 宗 )의 왕권을 되찾아 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으며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화비용의 증대가 백성들의 오해와 불신을 초래하였으나 명성황후 자신은 국제정세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를 바탕으로 외교를 추진하였으며 국력의 열세로 인해 열강의 각축 속에서 국가가 멸망하는 비운을 당했다고 보는 시각이 그것이다. 명성황후를 친견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도 황후에 대한 양론을 찾아볼 수 있다. 냉정하고 침착한 비운의 왕비 정치지향적 인물 매력적이고 섬세하며 지적인 인상 명민하고 이지적, 종교맹신 문호개방, 권력지향적, 대원군과 적대적 재색 겸비한 권력지향적 인물 권력지향적이고 야심적인 기질의 소유자 일본에 적대적, 고종에 영향력 행사 뉘우칠 줄 모르고 매우 강퍅함 재능이 풍부하고 빈틈없는 왕비 - 알렌(미국, 의료선교사) - 묄렌도르프(독일, 외교고문) - 묄렌도르프 부인 - 이사벨라 비숍(영국, 지리학자) - 헐버트(미국, 선교사) - 그리피스(미국, 신학자) - 맥켄지(영국, 신문기자) - 로제티(이탈리아, 외교관) - 원세개(청, 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 - 미우라(일본, 외교관) 150 조성문

당대의 준물, 일본국익 위해 제거 마땅 국권농단, 재정탕진, 미신집착 - 고바야카와(일본, 한성신보 편집장) - 황현(조선, 학자) 본고에서는 명성황후의 친가인 여흥민씨 삼방파와 외가인 한산이씨 단봉공파( 端 峰 公 派 )를 중심으로 한 친인척들의 기록과 이야기를 통해 황후가 지닌 인성의 바탕을 살펴 보고 명성황후의 어린 시절을 유추해 봄으로써 황후의 평가에 대한 정확성 여부를 가려 보고자 한다. Ⅱ. 여흥민씨 삼방파의 형성 여흥민씨 삼방파는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민광훈( 閔 光 勳 )을 파조( 派 祖 )로 하여 그의 세 아들인 시중( 蓍 重 ), 정중( 鼎 重 ), 유중( 維 重 )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민광훈은 1628년(인 조 6)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큰 아들 시중이 1664년(현종 5) 춘당대 문과장원, 둘째 아들 정중이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정중의 아들 진장( 鎭 長 )이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니 3대가 연이어 장원급제를 하였다하여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세문장( 三 世 文 章 )이라 일컫기도 했다. 조선 중엽에 형성된 여흥민 씨 삼방파는 조선 말엽까지 약 300년 동안 문과급제자 70인, 상신( 相 臣 ) 7인, 종묘배향 공신( 宗 廟 配 享 功 臣 ) 6인, 정2품 판서이상 47인, 종2품 및 정3품 당상관 80여명을 배출 해 내는 명문가를 이루게 된다. 1) 조선왕조실록과 문집, 야사에 남아있는 민시중 3형제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빼어난 자 질을 국가에 대한 지극한 충성으로 승화시켜 가문을 빛냄으로써 여흥민씨 삼방파의 근 간을 이루는 특징적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민시중( 閔 蓍 重 1625-1677) 자는 공서( 公 瑞 ). 호는 인재( 認 齋 ) 송시열( 宋 時 烈 )의 문인으로 1650년 생원시험에 장원하고 1664년 춘당대문과 회시에서 1) 여흥민씨 삼방파보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51

장원급제하였다. 이 무렵 흑산도( 黑 山 島 )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서 왜구들이 좋은 목재를 채취하려고 자주 출몰하였다. 급제 이후 병조좌랑을 역임했던 민시중이 호남일 대를 돌아보고 흑산( 黑 山 ) 임치( 臨 淄 ) 자은( 慈 恩 ) 비금도( 飛 禽 島 )에 진( 鎭 )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노비와 이속들을 진 근처에 살도록 하여 평시에는 둔전( 屯 田 )을 개간하고 무예를 익히다가 비상시에는 배를 타고 방어에 나설 수 있도록 함으로써 흑산 도에서 지속적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민시중은 지평, 남양현감, 이조좌랑, 교리, 수원부사를 거쳐 1669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가 경상도 관찰사 로 있으면서 남긴 치적이 실록에 실려 있다. 1670년 8월 14일. 가을추수가 가망이 없어 백성들이 아침 저녁끼니를 잇지 못하 게 되자 이런 때 군졸들을 모으게 되면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므로 수군의 조련을 일체 정지시켰다. 8월 17일. 떠도는 거지들이 길에 가득한 채 살 곳을 잃고 방황하면서 어린아이 들을 길가에 버리는 일이 잇따랐는데 백성들을 모집하여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8월 30일. 다른 도의 유민들이 진주( 晋 州 ), 함양( 咸 陽 )등 10여 고을에 가득하여 꼭 굶주린 까마귀 떼 같은데 도둑질이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노약자는 구렁에 엎어져 죽을 것이며 건장한 자은 도적이 될 것이니 제때에 구제해서 다른 근심이 없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임금께 아뢰어 대책을 마련하게 하 였다. 10월 2일. 경상도에서 진헌할 호표피( 虎 豹 皮 )의 값을 진휼하는데 보태 쓰겠다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11월 16일. 경상도의 전결( 田 結 )의 등수를 낮추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1671년 1월 19일. 통영( 統 營 )의 벼 4천석을 덜어내어 좌 우도( 左 右 道 ) 각 진포( 鎭 浦 )의 군졸에게 고루 나누어주어 그들의 생활을 도와주었다. 2월 4일. 좌도의 해변을 방어하는 군졸에게 지급하는 번포( 番 布 )를 나라에서 줄 였으므로 군졸들이 의지해 살아갈 길이 없어서 구덩이에 굴러 죽을 걱정이 조석에 닥치자 월과미( 月 課 米 )를 덜어내 나누어주고 죽을 쑤어 구제하였다. 152 조성문

이외에도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참상을 임금에게 보고하여 구제할 방법을 백방으 로 모색하였다. 다음은 민시중이 보고한 당시의 참상 중에 하나다. 선산부( 善 山 府 )의 한 여인은 그의 여남은 살 된 어린 아들이 이웃집에서 도둑질 하였다 하여 물에 빠뜨려 죽이고, 또 한 여인은 서너 살 된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갔으며, 금산군( 金 山 郡 )의 굶주린 백성 한 사람 은 죽을 먹이는 곳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의 아내는 옆에 있다가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곡하였습니다. 천성으로 사랑하는 관계인데도 죽이기도 하고 버리기 도 하며 죽음에 대한 슬픔이 먹을 때에는 나타나지 않으니 윤리가 딱 끊겼습니다. 이는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민시중의 마음 씀씀이가 이러하였기에 그가 임기를 마치고 경상도를 떠나자 대구( 大 邱 )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는 청덕무휼군졸영세불망비( 淸 德 撫 恤 軍 卒 永 世 不 忘 碑 )를 세워주었다. 이후 민시중은 호조참판, 강화부유수를 역임했고 대사헌 시절에는 현종임 금의 죽음에 따른 시호( 諡 號 )와 승습( 承 襲 )을 청하기 위한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 다. 그 뒤 형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였다. 민시중은 53세에 죽었는데 재주와 방책은 두 아우에게 미치지 못하였지만 충후( 忠 厚 )함은 앞서므로 사람들이 선인( 善 人 )으로 불렀 다고 한다. 묘는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 梧 溪 里 )에 있다. 민정중( 閔 鼎 重 1628-1692) 자는 대수( 大 受 ), 호는 노봉( 老 峯 ) 관찰사 민광훈( 閔 光 勳 )의 아들이다. 1649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 적, 예조좌랑을 지냈다. 인조( 仁 祖 )의 묘호를 정할 때 부수찬 유계( 兪 棨 )가 이미 인종 ( 仁 宗 ; 조선12대 임금)의 호칭이 있으므로 인( 仁 )자를 쓸 수 없다고 주장하다 효종의 노 여움을 사서 함경도 온성( 穩 城 )으로 유배를 갔다. 이듬해 귀양에서 풀려난 유계가 돌아 오는 길에 한 젊은 선비를 만났다. 마침 같은 방향이었으므로 말동무를 하며 동행하게 되었는데 해질 무렵, 다리를 건너던 선비가 냇물에 빠지고 말았다. 부실했던 다리가 무 너져 내린 탓이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 않은 선비는 젖은 옷을 말리고 갈 테니 유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53

계에게 먼저 주막에 가 있으라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선비가 오지 않자 걱정이 된 유 계는 선비를 찾아 나섰고 얼마 후 땀을 뻘뻘 흘리며 다리를 헐어내고 있는 선비를 발견 했다. 아니, 여보게 선비! 자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하니, 젊은 선비는 예, 다리를 부수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다치지 않았지만 날이 어두워 뒤따라오는 과객들이 이 다리로 인해 다칠 것이 분명하니 이것을 헐어버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 사려 깊은 젊은 선비가 민정중이다. 그가 부사과( 副 司 果 )로 있을 때 올린 상소문이 효종( 孝 宗 )임금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으니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 수령 과 감사를 잘 뽑아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으로 삼으십시오. 둘째 : 인재를 잘 헤아려서 책임을 맡기십시오. 셋째 :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여 아랫사람의 뜻을 소통시키십시오. 넷째 : 인륜을 밝히고 교화를 열어주십시오. 다섯째 : 명분을 엄하게 하여 예모를 높이 십시오. 여섯째 : 기강을 일으켜 염치를 권장하십시오. 일곱째 : 인정을 베풀어 억울함 을 풀어주십시오. 여덟째 : 전례를 중시하십시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그대의 소장 을 보고 가상히 여겨 마지않았다. 그대는 나이 어린 학사로서 사무를 통달하고 세태를 알고 있는 것이 어찌 이렇게도 해박한가. 사안에 따라 할 말을 다하고는 숨기는 것이 없으니 내 마음에 더욱 가상하게 여겨진다.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그대도 또한 나쁜 세속에 물들지 말고 이 충직한 기개를 잘 길러나가 원대한 성취를 기약하도록 하 라. 하고는 특별히 호피( 虎 皮 )를 하사하였다. 민정중은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병조참 의, 동부승지, 대사성, 함경도관찰사, 대사헌, 이조 호조 공조판서, 한성부윤, 의정부 참찬등을 지냈다. 1675년 숙종 때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남인의 배척으로 장흥 ( 長 興 )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 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 碧 潼 )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 었다. 그의 졸기를 보면 전 좌의정 민정중이 벽동의 적소( 謫 所 )에서 졸하였는데 65세 였다. 사람됨이 영특하고 강직하여 굴하지 않았으며 예법으로 자신을 신칙하였다. 일찍 이 괴과( 魁 科 ; 문과의 갑과)에 올랐고 극력 청의( 淸 議 )를 붙들었으며 송시열( 宋 時 烈 ), 송준길( 宋 浚 吉 )등 제현이 가장 중시하는 바가 되었다. 국자감의 장관이 되어 선비들을 조성해 내는 데에 매우 공효가 있게 되므로 당시에 정엽( 鄭 曄 ) 이후의 제일인 사람이라 고 했다. 다른 관직에 뽑혀서도 겸임하고 체직되지 않았으며 게을리 하지 않고 교도하 154 조성문

므로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뒤에 윤휴( 尹 鑴 )와 허적( 許 積 )이 나라의 일 을 맡게 되자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갔었는데 비록 배척받는 가운데 있었지만 여망은 더 욱 높아져 오늘날의 진요옹( 陳 了 翁 )이나 유원성( 劉 元 城 )같은 사람이라고 하게 되었다. 기사년의 변( 變 ) 뒤에는 뭇 간신들이 기필코 죽이려고 하면서도 오히려 돌아보며 두 렵게 여기는 바가 있어 실행하지 못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는데 뒤에 관작을 복 구하고 시호를 문충( 文 忠 )이라고 하였다. 고 되어있다. 묘는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상거 리( 上 巨 里 )에 있다. 민유중( 閔 維 重 1630-1687) 자는 지숙( 持 叔 ). 호는 둔촌( 屯 村 ) 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 민광훈( 閔 光 勳 )이고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 李 光 庭 )의 딸 이다. 대동기문( 大 東 奇 聞 )에 나오는 옛 이야기 한 토막이다.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전 국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집집마다 피난길을 떠나기에 정신이 없었다. 조정이 수도를 강 화로 옮기려 하자 대부분의 백성들도 강화는 천연의 요새라 믿을 만한 곳이니 피난을 강화로 가자 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 나이 어린 민유중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 님이 가시는 곳에는 으레 적군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들었습니다. 강화로 가는 것은 반 대입니다. 결국 민유중의 가족은 영남으로 피난을 갔고 일가가 모두 안전할 수 있었 다. 이때 민유중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다고 한다. 1649년 진사가 되고 1651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경성판관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 이조참의,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이후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호조 공조 병 조판서가 되었으며 1681년 3월 딸이 왕비에 책봉되자 여양부원군( 驪 陽 府 院 君 )에 봉해지 고 이어 돈녕부영사( 敦 寧 府 領 事 )가 되었다. 이듬해에 금위영( 禁 衛 營 )의 창설을 주도하여 병권과 재정권을 모두 관장하였는데 외척이 벼슬을 하여 국가의 변란을 초래하였다는 교리 이징명( 李 徵 明 )의 상소가 있자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다 죽었다. 1657년 민 유중이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가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체직될 당시 사건 하나가 연루되 어 있었다. 종친인 낭선군( 朗 善 君 ) 이우( 李 俁 )가 동생 이간( 李 侃 )이 저의 종을 빌려 임 금의 거둥에 참여하러 가던 중 이간의 말이 민유중의 말과 대궐 문밖에서 서로 싸우자 양쪽의 종들이 싸움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때 민유중의 종이 저희 형제의 이름을 들먹이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55

며 방자하게 욕을 하였습니다. 라는 단자를 종부시( 宗 簿 寺 )에 올렸다. 이 사건은 민유중 이 이우의 종을 잡아가두고 형신( 刑 訊 ) 끝에 죽게 한 일로 발전되었고 이것이 종실을 업신여긴 괘씸죄로 확대되어 장령 오두인( 吳 斗 寅 )은 북청판관으로, 민유중은 경성판관 으로 쫓겨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실상은 이러했다. 1657년 2월 말경에 무뢰인들이 칼을 빼들고 서로 싸운다는 말을 듣고 오두인이 그들을 붙잡아 들였는데 이 들은 낭선군의 하인으로 홍귀종( 洪 貴 宗 )과 강시망( 姜 時 望 )이었다. 원한을 품은 이들은 3 월 4일 민유중의 종을 오두인의 종으로 착각하고 피를 토하도록 마구 때리며 사헌부 관 리들을 욕했다. 당시 주변사람들의 증언을 들은 오두인과 민유중은 이들을 잡아다가 형 신을 가하고 옥에 가두었는데 며칠 뒤 한 사람이 죽었던 것이다. 이 일로 3정승까지 나 섰으나 왕손( 王 孫 )이 사노( 私 奴 )에게 치욕을 당했다고 느끼고 있던 효종임금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민유중은 억울하게 경성으로 쫓겨 갔지만 백성들을 잘 다스렸기에 그가 떠나올 때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레를 가로막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슬퍼하였고 비석을 7개나 세워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 민유중은 둘째딸 인현왕 후( 仁 顯 王 后 )가 폐위되기 2년 전인 1687년 6월에 죽었다. 실록에 기록된 졸기를 보면 여양부원군 민유중이 졸했는데 나이가 58세였다. 민유중은 성격이 강직하며 방정하고 총명하여 통달했었는데 형 민정중( 閔 鼎 重 )과 함께 경술( 經 術 )을 가지고 진출하여 사림들 의 두터운 인망을 받았다. 조정에 벼슬을 함에 언론이 준엄하고 단정하여 업적이 융성 하게 나타났고 집에 있을 때에는 행의( 行 誼 )가 독실하여 예법으로 자신을 제어하였으니 임금이 왕비를 그의 가문에서 정하였음은 대개 그의 가법( 家 法 )이 올바름을 살폈기 때 문이다. 이때 민유중이 서전( 西 銓 )의 장관으로 있으면서 위계가 보국( 輔 國 )에 올랐으므 로 아침저녁 사이에 대배( 大 拜 )하게 되었었는데 국가의 제도에 얽매여 기밀한 요직을 모두 내놓고 마침내 등용하지 못하게 되므로 여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고 되어있다. 시 호는 문정( 文 貞 ). 묘는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陵 峴 里 )에 있다. 여흥민씨 삼방파는 시중 정중 유중 3형제가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 宋 時 烈 ) 송준길 ( 宋 浚 吉 )의 문인으로 활동하면서 중앙정계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특히 1680년(숙종 6) 민유중의 딸이 숙종의 왕비(인현왕후)로 간택되면서 서인정권이 표방했던 국혼물실( 國 156 조성문

婚 勿 失 ; 왕실과의 혼사를 놓치지 않는다)을 실현한 주체로서 최고의 명문가로 부상하였 다. 이후 민시중 3형제와 그들의 아들인 진후 진원 진장 진주 등이 서인 노론의 선 봉장으로서 정국을 주도하였으며, 또한 독자적인 문중활동을 전개하면서 여흥 민문 전 체를 주도하는 지도적인 집단이 되었다. Ⅲ. 노론과의 관계 15세기 말엽부터 중앙정치에 진출하여 훈구파( 勳 舊 派 )의 탄압을 이겨내며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파( 士 林 派 )를 서인( 西 人 )이라 한다. 기호학파( 畿 湖 學 派 )의 중심학자인 이이 ( 李 珥 ) 성혼( 成 渾 )과 교유관계에 있었던 인물들이 대체로 서인을 형성했다. 서인과 대 립하던 남인( 南 人 )은 경신대출척( 庚 申 大 黜 陟 )으로 실각하는데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놓고 서인은 강경론을 주장하는 노론( 老 論 )과 온건론을 주장하는 소론( 少 論 )으로 양분되 었다. 이들의 대립은 송시열과 그의 제자인 윤증( 尹 拯 ) 사이에서 벌어진 이른바 회니시 비( 懷 尼 是 非 )와 노론 4대신이 사사되는 신임사화( 辛 壬 士 禍 )를 계기로 악화되었다. 기호학파는 율곡 이이를 조종( 祖 宗 )으로 여겨 율곡학파 라고 부르기도 한다. 율곡학 파는 퇴계학파와 더불어 한국 유학사에 큰 영향을 미친 양대 학파 중에 하나다. 율곡학 파는 기본적으로 학문과 경세( 經 世 )를 병행함으로써 유학의 진면목을 드러내었는데 현 실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적극적인 현실참여가 이 학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이의 학통은 20세 때부터 이이의 문하에서 도학을 배워 율곡학파를 영도하게 되는 김장생( 金 長 生 ), 경전과 예학연구에 힘쓰며 아버지 김장생의 학문을 이어받으려 노력했 던 김집( 金 集 )을 거쳐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李 惟 泰 ) 윤원거( 尹 元 擧 ) 윤선거( 尹 宣 擧 ) 이상( 李 翔 ) 등 유명한 산림( 山 林 )들이 이어받았다. 김집의 문인 중에서 관인( 官 人 ) 으로는 유계( 兪 棨 ) ( 李 選 ) 윤문거( 尹 文 擧 ) 민유중 이상진( 李 尙 眞 ) 이경억( 李 慶 億 ) 등이 있다. 고려 말 성리학이 전래되면서 함께 수용된 주자가례( 朱 子 家 禮 )는 하나의 사회규범으 로 조선에 정착하였다. 사림파의 주도로 주가가례의 수신서라 할 수 있는 소학( 小 學 )과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57

이의 사회적 구현이라 할 수 있는 향약( 鄕 約 )의 보급, 사회적 윤리를 강조하는 이륜행 실도( 二 倫 行 實 圖 )의 보급이 이를 증명한다. 2) 특히 임진왜란 이후 피폐된 사회 윤리와 질서의 회복이라는 절대적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예( 禮 )의 숭상과 실천이 강조되었는데 그 중심에 김장생 김집 송시열이 있었다. 송시열 이후 율곡학파는 정치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으로, 학문적으로는 호학( 湖 學 )과 낙학( 洛 學 )으로 나뉘어진다. 장지연( 張 志 淵 )은 호학과 낙학의 분열의 원인을 미발선악 ( 未 發 善 惡 )과 인물오상설( 人 物 五 常 說 )을 둘러싼 한원진( 韓 元 震 )과 이간( 李 柬 ) 사이의 논 쟁에서 이간을 지지한 사람들이 낙하( 洛 下 ; 서울근교)의 학자들이어서 낙학이라 하고, 한원진을 지지한 사람들은 호중( 湖 中 ; 충청도지방)에서 살았으므로 호학이라고 한 것이 호학과 낙학이 분화된 시원이라고 하였다. 3) 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처럼 두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호학과 낙학의 분리는 사람과 사물의 성( 性 )이 같은가 다른가에 관한 서 로 다른 주장에서 비롯되었는데 인물성이론( 人 物 性 異 論 )을 주장한 한원진과 인물성동론 ( 人 物 性 同 論 )을 주장한 이간 사이의 논쟁이 대표적이었다. 호학과 낙학의 대립은 주자학에 대한 이해 차이 외에도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 음에 기인한다. 호학이 군자와 소인의 엄격한 구별을 통해 사회적 질서를 회복하고 그 바탕 위에서 북벌복수를 추구하였다면 낙학은 소론은 물론 남인까지도 포용하고자 하는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노론 산림의 문하에서 나온 일군의 경화사족( 京 華 士 族 )은 낙론을 기반으로 경제지학( 經 濟 之 學 )과 명물지학( 名 物 之 學 )을 중시하고 의리지 학( 義 理 之 學 )의 관념성에 반기를 들기까지 하였다. 도시의 발전, 상공업의 발전 등의 변 화를 직시하고 연행( 燕 行 )에서 알게 된 청조( 淸 朝 ) 문물의 선진성을 인정한 이들은 전통 적 화이론( 華 夷 論 )을 수정하고 북학( 北 學 )의 수용을 주장하였다. 문화적 자존의식으로는 고립 낙후된 조선사회를 개선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지도적 지식인인 사림의 사 회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청조문물을 수용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1805 년 순조( 純 祖 )의 등장과 함께 호학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낙학이 정치의 주도권을 2) 한국사상사 연구회, 조선후기 산림세력연구 (1999), 37쪽. 3) 같은 책, 350쪽. 158 조성문

장악했으나 외척세도의 파행적 정치상황으로 인해 이들의 주장이 실천으로 옮겨지는 데 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4) 그러나 낙학에 연원을 둔 박지원, 홍대용 등이 북학파를 형성 하였고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를 통하여 개화사상으로 이어졌음에 주목해야 한다. <호론의 학맥>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 김한록 김귀주 송능상 송환기 윤 담 이상수 박문호 권진응 윤봉구 김지행, 김일주, 위백규 최징후, 채지홍 정 호 김위재 김정묵 송치규 송달수 송병선 <낙론의 학맥> 송시열 김창협 이 재 김원행 박윤원 홍직필 임헌회 전 우 김이안, 황윤석, 홍대용 오윤상 오희상 유신환, 민치록 송명흠 민우수 김종후, 김종수, 김양행 이우신 임성주 임정주 어유봉 이천보 박지원 4) 전인식, 1998, 이간과 한원진의 미발 오상 변론 연구, 198쪽.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59

낙론의 학맥을 살펴보면 오희상의 문하에 유신환과 명성황후의 부친인 민치록이 있음 을 알 수 있다. 오희상은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정조 때 대제학을 지낸 오재순( 吳 載 純 ) 의 아들이다. 특별한 사승( 師 承 )없이 어려서부터 형 윤상( 允 常 )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출 세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학문으로 두각을 나타낸 오희상은 후일 서연관이 되어 강서할 때 정조가 문 밖에서 그것을 듣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5) 민치록은 스승이자 장인인 오희상으로부터 함께 도학( 道 學 )에 나아갈 수 있을 만하다. 6) 라는 극찬을 들을 만큼 학문적 재능과 깊이가 있었다. 특히 민치록의 절친한 친구로 동문수학한 유신환의 문하에서 서응순( 徐 應 淳 ) 민태호( 閔 台 鎬 ) 민규호( 閔 奎 鎬 ) 김윤식( 金 允 植 ) 남정철( 南 廷 哲 ) 등 온건 개화론자들이 나왔다 7) 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뒷날 명성황후가 고종과 함께 쇄국에서 벗어나 개국으로 정책방향을 바꾸게 되는 배경에 이러한 주변인물들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흥민씨 삼방파는 노론의 쟁쟁한 가문들과의 통혼으로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삼방파가 개창 초기에 혼인을 맺었던 주요 가문은 안동김씨( 安 東 金 氏 ) 연안이씨( 延 安 李 氏 ) 우봉이씨( 牛 峯 李 氏 ) 은진송씨( 恩 津 宋 氏 ) 양주조씨( 楊 州 趙 氏 ) 평산신씨( 平 山 申 氏 ) 풍산홍씨( 豊 山 洪 氏 ) 등 이다. 민시중의 부인은 풍산홍씨 부사 홍이상( 洪 履 祥 )의 딸이고 민정중의 부인은 평산신씨 동양위 신익성( 申 翊 聖 )의 손녀이며 민유중의 부인은 은진송씨 판서 송준길( 宋 浚 吉 )의 딸 이다. 민유중의 사위 우봉이씨 이만창( 李 晩 昌 )은 1687년(숙종 13) 우의정을 역임한 이숙 ( 李 䎘 )의 아들이다. 민유중의 큰아들 진후는 연안이씨 이단상( 李 端 相 )의 딸과 혼인하였 다. 이단상은 인조( 仁 祖 ) 때 좌의정을 지낸 월사 이정귀( 李 廷 龜 )의 손자이자 안동김씨 김수항( 金 壽 恒 )의 아들인 창협( 昌 協 )의 장인이기도 하다. 유중의 셋째아들 진영( 鎭 永 )은 은진송씨 송상진( 宋 相 鎭 )의 딸과 혼인하였다. 민시중의 손자 응수( 應 洙 )는 양주조씨 대 사헌 조태동( 趙 泰 東 )의 사위이며 민정중의 손자 계수( 啓 洙 )는 안동김씨 영의정 김창집 5) 노대환, 세도정치기 산림의 현실인식과 대응, 2006, 6) 여흥민씨 삼방파 문중, 역대 현조 묘비문집, 2008, 163쪽. 7) 금장태, 1990, 한국근대의 유교사상, 35쪽. 160 조성문

( 金 昌 集 )의 사위이고 민진원의 큰아들 창수( 昌 洙 )도 김창집의 사위다. 진원의 셋째아들 통수( 通 洙 )는 은진송씨 판서 송상기( 宋 相 琦 )의 사위이고 민진원의 손자 우의정 백상( 百 祥 )은 우봉이씨 이구( 李 球 )의 사위다. 8) 삼방파의 후손들은 소론가문과도 혼인을 맺었다. 대상가문은 파평윤씨( 坡 平 尹 氏 ) 경 주이씨( 慶 州 李 氏 ) 대구서씨( 大 邱 徐 氏 ) 덕수이씨( 德 水 李 氏 )등이다. 민유중의 둘째아들 진원( 鎭 遠 )은 파평윤씨 좌의정 윤지선( 尹 趾 善 )의 사위다. 윤지선의 동생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윤지인( 尹 趾 仁 )은 민시중의 외손인 경주이씨 이서곤( 李 瑞 坤 ) 을 사위로 삼았다. 대구서씨 영의정 서문중( 徐 文 重 )은 민진장의 아들인 재수( 在 洙 )의 장 인이고, 민진원의 딸은 덕수이씨 이조판서 이주진( 李 周 鎭 )과 혼인했다. 9) 낙론의 학풍이 소론과 남인을 포용할 만큼 유연했었다는 것을 이처럼 그 학풍을 이어받 은 여흥민씨 삼방파의 혼맥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Ⅳ. 삼방파의 가풍( 家 風 ) 가풍은 한 집안에서 계승되는 선조들의 모범사례와 생활관습, 또는 범절( 凡 節 ) 등을 말한다. 가풍은 세대가 바뀌어도 가족 구성원의 생활양식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여흥민씨 삼방파 파조 민광훈은 교유( 交 遊 )를 즐기지 않고 성색( 聲 色 )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살림살이의 있고 없음을 묻지 않았다. 항상 침묵하고 말 수가 적었으며 이해 득실에 담담하였고 집안사람들을 다스림에도 과실을 덮어주니 내외가 화목하여 서로 등 을 돌리지 않았다. 안으로는 종족을 사랑하고 밖으로는 어진 선비들을 친하게 모셨으며 선조를 받들고 선대의 미덕을 추양( 追 揚 )함에도 정성을 쏟았다. 조정 중신들이 서로 적 대시하여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었는데 민광훈은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않고 친애하여 당세에 인후장자( 仁 厚 長 者 )로 불리었다. 8) 여흥민씨 삼방파보. 9) 같은 책.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61

민광훈의 큰아들 시중은 국왕의 조정을 잘 보필하여 사림의 촉망을 받았다. 곧은 필봉 으로 간( 諫 )하였으며 그 풍채가 준엄하고 엄정하였다. 임금을 모시고 경륜을 논함에 성 심으로 보좌함이 많았다. 정치에 참여하면 안팎이 도리에 맞아 참으로 학술하는 선비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민광훈의 둘째아들 정중은 효종시대에 빛을 발하였다. 효종은 불세출의 뛰어난 무덕 ( 武 德 )으로 밝게 나라를 다스렸는데 북벌의 대의를 펼치기 위해 은밀히 신하들과 의논 하여 수양( 修 攘 ; 덕을 닦아 오랑캐를 치는 것)의 계획을 시행하려 하였으나 덕있고 명 망있는 사람들도 그 뜻을 감당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민정중은 매우 하찮은 신진으로 서 한마디 말로 임금의 마음을 편하게 하니 그 지기와 절조를 크게 포상하여 심려( 心 膂 ; 가장 신뢰하는 사람)로서 의탁하였다. 민광훈의 셋째아들이자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형들과 함께 살았는데 큰 형의 초상 때에 그 슬퍼함이 옆 사람을 감동시켜서 어떤 사람은 자식의 일인 줄로 여길 정도 였으며 둘째 형의 병환 때에는 그 탕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고 들였으며 부호( 扶 護 )하기 를 친히 하였고 큰 누이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민정중의 아들 진장은 5세 때에 어머니가 병이 나자 뜰에서 절을 하며 하늘에 빌었으 며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백성을 진휼하는 일에 전심하여 백성들로부터 살아있는 부처 라는 칭송을 들었다. 어머니가 심화병으로 앓아눕자 공무에 분주하면서도 매일 해뜨기 전에 침실에 나아가 몸소 세수시키며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지극한 정성이 낯빛과 말 투에 나타나면서도 숨긴 아픔이 가슴 속에 있어서 사람들을 대할 때 말하고 웃기는 하 나 미간에는 근심이 모였다. 간혹 취하여 돌아와서는 무릎을 꿇고 젖을 빨아 어린애 시 늉을 하며 곧 울음을 보이기도 하여 집안사람들이 쳐다보지 못했다. 이렇게 효행이 지 극하여 나라에서는 진장이 죽은 뒤에 정려문( 旌 閭 門 )을 세워 주었다. 민유중의 아들 진후는 예법을 숭상하여 자신에게는 엄격하였고 남에게는 관대하였다. 어린 사내 종이 죽었을 때에도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고, 남이 질병으로 죽어 초상이 나 면 가족처럼 처신했고 친구에게는 더욱 돈후( 惇 厚 )하였다. 호화로운 것을 싫어하고 실 질적인 것에 힘썼으며 함부로 낭비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담박하여 즐기거나 욕심내는 것이 없어 마구간에는 말 한 마리 키우지 않았고 정원에는 화초를 가꾸지 않았다. 선 162 조성문

( 善 )을 즐겨하고 선비를 좋아했으며 부정한 것을 보면 토할 듯 하였고 가문이 대대로 사론( 士 論 )의 종주( 宗 主 )가 되었으나 깊이 스스로 몸을 낮추었다. 민진후의 아들 익수가 기록한 여흥민씨 삼방파의 집안 예절을 보면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에 배알한 후 대부인에게 문안드리고 퇴조( 退 朝 ) 후에도 대소의 길흉사와 원근의 출입에 관한 사항을 반드시 고하였다. 아침저녁 가족 간에 줄을 서서 문안인사를 하며 장기 출타 시에는 웃어른과 사당에 고함은 물론 부녀자는 중문 안에서 숙배하였으며 자식들은 말 아래서 인사하였다. 손님이 조금이라도 나이가 많으면 당에 서 내려와 공경의 뜻을 표한 다음에 당에 올랐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홀로 된 누이와 고아가 된 조카를 자식처럼 돌보았으며 가사가 빈궁한 일가친척을 정성껏 도왔 다. 10) 고 되어있다. 겸손한 가운데 검소한 생활을 강조해 온 여흥민씨 삼방파의 가풍은 일상생활에서의 검약을 생활화 하였다. 음식과 의복의 사치를 경계하여 밥상에 여러 종류의 고기를 올 리지 못하게 하고 부녀자들은 비단이나 옥구슬을 착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가죽 옷을 걸치지 않고 면포를 즐겨 입었다. 11) 명성황후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역시 아버지 민치록이다. 민치록은 이조 참판과 개성유수를 지낸 민기현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준수하여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 7세 때 관찰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호서지방에 내려갔다가 감영의 장부 와 직원록을 한번 보고는 바로 암기했는데 하나도 착오가 없었다. 13세에 아버지의 장 례를 어른처럼 치러냈으며 생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하였음을 일생의 통한으로 여겼다. 어머니를 정성으로 봉양하였는데 병환이 나면 근심이 얼굴에 가득하여 몸을 펴지도 않 고 웃지도 아니하며 약품을 저울질하고 물을 헤아리는 일을 옆 사람에게 맡겨두지 아니 하였다. 1838년 어머니가 위독하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어머니의 입으로 흘려 넣음으 로써 곧바로 소생시키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발을 구르고 울부짖어 몇 번이 나 기절하였다가 깨어났다. 검약한 생활이 몸에 배어 옷에는 명주를 사용하지 않았고 10) 김명숙, 여흥민씨 가승기략을 통해 본 17-18세기 여흥민문의 형성과 가문정비, 2006년, 한국사 상과 문화 제 46집, 287쪽. 11) 같은 책, 287~288쪽.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63

자리는 이중 방석을 깔지 않았다. 공사간의 옛 문헌에서 선대의 좋은 말이나 선한 일 등을 골라 집안 내에서 얼굴을 맞대고 명하거나 입으로 가르쳤으며 구용구사( 九 容 九 思 ) 에 힘쓰도록 하였다. 비록 날아다니는 새와 벌레 및 초목 같은 미물일지라도 조심해서 살생을 하지 않도록 조심시켰다. 평생 빠른 말투나 당황하는 빛이 없었으며 좋아하고 화나는 마음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경학( 經 學 )으로써 군자의 진수( 進 修 )하는 근본 을 삼을 것이며 벼슬하여 출세하는 것은 겸공( 謙 恭 )하는 지개( 志 槪 )가 아니다. 12) 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있어 과거시험에 응하지 않고 학문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에 몰두하 였다. 민치록의 명성이 높아지자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익종( 翼 宗 ; 순조의 아들 효명세 자)이 특별히 예찰( 睿 札 )을 내려 과거보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크게 등용하고자 함이었 다. 민치록은 과분하고 특별한 대우에 감사하면서도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벼 슬길에 나아갔다. 항상 서책 보기를 좋아하여 경서를 읽어 그 심오한 뜻을 깊이 강구하 고 옛 것을 고증하여 현재의 사실에 증거로 세웠으며 후진을 가르침에 부지런히 힘써서 게으르지 않았다. 가르침을 받던 사람들이 혹 의심하고 막힌 곳이 있으면 곧 바로 그것 은 어떤 책의 몇 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를 상고해 보면 틀림이 없었다. 제자백가의 서책도 통독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길흉사의 행사예절에 관하여 사람들이 와서 질문하 는 이가 많아 세상에서는 민치록을 경연초계관( 經 筵 抄 啓 官 ) 감이라고 여겼다. 또한 베 풀어 주는 것과 위급한 재난을 도와서 구원해 주는 것을 좋아하였으되 오히려 돌보아 줄만한 사연을 듣지 못하였을까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민치록의 문하에서 교유하는 사 람들은 마치 순후한 술을 마시는 듯,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듯하여 마음에 간직하고 경탄해 마지않는 이가 없었다. 명성황후의 어머니는 한창부부인( 韓 昌 府 夫 人 ) 이씨다. 이조판서로 증직된 규년( 圭 年 ) 의 딸이며 병자호란 후 영의정에 추증된 충정공 이현영( 李 顯 英 )의 8대 손이다. 행실이 순수하고 법도에 맞으며 집안 살림을 잘 도왔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뒤에 집안 이 융성하고 빛났어도 조심하고 검약하며 인후하였다. 한창부부인 이씨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8살 때 아버지를 잃은 어린 명성황후를 기품있는 국모로 길러 낸 현 명한 어머니였음은 분명하다. 12) 여흥민씨 삼방파 문중, 역대 현조 묘비문집, 2008, 166쪽. 164 조성문

<명성황후 가계도> 유중 진후 익수 백분 기현 치록 승호 영익 명성황후=고종 진원 창수 백순 양현 치화 원용 영준 응식 영위 형수 백상 홍섭 치삼 태호( 台 鎬 ) 영기 인현왕후 = 숙종 백흥 상섭 치오 태호( 台 鎬, 출) 영소 치삼(출) 규호 진영 낙수 백술 단현 치대 경호 영규 치구 태호( 泰 鎬 ) 영환 승호(출) 영익(출) 순명효황후=순종 겸호 영찬 영환(출) 부대부인 민씨 = 흥선대원군 치인 관호 영달 <한산 이씨 가계도(단공봉파)> 윤경 인간 효진 창세 자성 곡 색 종덕 맹진 연기 서 윤번 귀지 대수 현영 휘조 수령 명관 하무 지손 인두 규년 규년 정부 경직( 畊 稙, 耕 稙 출) 한창부부인 이씨 = 민치록 선부 정직 * 이경직은 궁내부대신으로 명성황후 시해 당시 황후를 보호하다 죽었다.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65

Ⅴ. 명성황후 어린 시절 1850년을 전후한 시기, 조선의 주변 국가들은 근대화를 위한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있었다. 중국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만성적자에 시달리고 있던 영국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에 파는 이른바 아편무역을 고안해 냈다. 영국은 육체노동으로 지친 하층민들을 대 상으로 아편장사를 했고 이 아편은 중국 전역에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다. 아편이 확 산되고 일상화 되면서 국가기강의 해이, 농촌경제의 파탄, 국부의 유출 등 심각한 문제 들이 발생했는데 특히 청나라 정규군인 8기병( 八 旗 兵 )들과 관리들에게 아편이 만연되면 서 사회통제 체제가 이완되었고 각종 반란에 대한 효과적인 진압능력이 크게 떨어지게 되자 청나라 조정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청나라 황제는 아 편엄금론 을 주장한 임칙서( 林 則 徐 )를 전권대신으로 삼아 광저우( 廣 州 )로 보냈으나 임 칙서의 강경조치는 오히려 영국의 파명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편을 사이에 두고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진 청나라는 치외법권 인정, 관세 자주권 포기, 최혜국대우 조항 승인 등의 굴욕적인 강요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아편전 쟁 이후 기대만큼 이익을 얻지 못한 영국은 지속적으로 조약의 개정을 청나라에 요구하 게 되었다. 때마침 발생한 애로우호 사건과 프랑스 선교사 피살사건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또 다시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개항항 구의 확대, 아편무역의 합법화, 기독교 공인 등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 에 홍수전( 洪 秀 全 )이 주도하는 태평천국( 太 平 天 國 )의 난이 일어나 전국을 휩쓸게 되면서 중화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중국은 뿌리 채 흔들리게 되었다. 13)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필모어 대통령의 개국요구 각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검 은 연기를 내뿜는 철제 증기선을 처음 본 도쿠가와( 德 川 ) 막부( 幕 府 )는 공포 속에서 2 개 항구의 개방, 미국선박에 대한 식량공급, 외교관의 주재, 최혜국 대우 등의 요구조 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모욕을 당한 막부는 미국을 비롯한 구미 열강과의 전쟁을 13) 이혜령 외, 근대화와 동서양, 2009, 297쪽. 166 조성문

고려했으나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일단 관망하면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 외세의 위협에 막부가 유화적으로 대응하자 사쓰마( 薩 麻 )와 조슈( 長 州 )를 중심으로 한 반막부( 反 幕 府 ) 세력들이 정권에 도전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대 정봉환( 大 政 奉 還 )을 이끌어내었으며 천황의 이름으로 막부를 해체시키니 이것이 메이지 유신( 明 治 維 新,1868)이다. 메이지유신의 중심세력들은 원래 천황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낸다( 存 王 攘 夷 ) 라는 명분을 내걸어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하였으나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오히 려 서양화를 추구했다. 구미열강의 힘을 직접 목격한 일본은 이들을 따라잡기 위한 개 혁을 시행하였고 근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관 주도하에 혁신적인 개혁들을 단행하였 다. 수도를 교토( 京 都 )에서 에도( 東 京 )로 옮기고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를 발족시켰으며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 의회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었다. 폐번치현( 廢 藩 置 縣 )의 실 시, 계급제 혁파, 사민평등을 실현하였으며 이와쿠라( 岩 倉 ) 사절단을 파견하여 구미의 선진문물을 배워오게 하였다. 서양화를 통한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찬성하는 사 람도 있었으나 급진적인 개혁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이 불만은 정한론( 征 韓 論 )과 아시아 침략으로 이어지게 된다. 근동과 발칸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유럽 열강과의 패권다툼인 크림전쟁(1853-1856)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였다. 크림전쟁의 패배 는 국제무대에서 러시아 제국의 위상을 크게 떨어뜨렸고 이는 당연히 러시아 국내에서 자국의 후진성 문제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전쟁기간 동안 러시아인들은 선조총 ( 旋 條 銃 )과 증기선으로 무장한 서유럽 열강의 군사력을 실감했다. 이 군사력의 차이는 기술 과학 경제 등 러시아 사회 전 분야의 격차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14) 1855년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2세는 귀족들을 설득하여 농노해방령을 선포했다. 농노해방령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여러 근대적 개 혁을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 폐지의 여세를 몰아 1864 년에는 토목, 위생, 교육, 경제 등의 공공업무를 담당하는 지방자치기관인 젬스트보 14) 같은 책, 357쪽.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67

(zemstvo) 를 설치하였다. 젬스트보의 의석은 귀족과 관리에게 42%, 농민에게 38%, 상인과 기타 계층에게 20%가 배정되었으며 뒤처진 농촌의 환경을 개선하는데 크게 이 바지 하였다. 그 외에도 대학 자치의 확대를 통해 교육이 활성화 되었고 공개재판, 변호사 제도 및 배심원 제도가 도입되면서 근대적 사법제도가 확립되었다. 또 국민 개병제가 도입되고 군대 내 체벌이 금지되었으며 복무기간의 축소, 병사들의 처우개선 등 군제개편도 이루 어졌다. 알렉산드르 2세는 영토팽창에도 힘을 쏟았다. 크림전쟁의 패배로 남하정책에는 실패 했지만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투르케스탄, 투르크멘 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 였으며 극동지역으로는 아무르강과 우수리강 지역을 차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 였다. 하지만 전제권력 자체의 개혁이 빠진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서유럽식 입헌 군 주제를 원하는 급진개혁가들을 실망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15) 왕조 말기에 접어든 조선의 정세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조( 正 祖 ) 이후 순 조( 純 祖, 11세 즉위), 헌종( 憲 宗, 8세 즉위), 철종( 哲 宗, 19세 즉위)의 경우에서 보듯이 나이 어린 임금이 등장은 왕실 외척의 권력 장악으로 이어져 이른바 세도정치( 勢 道 政 治 )가 행해지게 되었다. 세도정치의 폐해로는 관료체제의 파탄과 삼정( 三 政 )의 문란을 들 수가 있다. 정치권력이 몇몇 가문에 의해 독점되면서 매관매직이 성행하게 되었다. 뇌물로 관직을 얻은 지방관은 지방의 향리( 鄕 吏 )들과 결탁하여 사리( 私 利 )를 꾀하게 되 었고 이서배( 吏 胥 輩 )들은 백성들을 수탈하여 그 대가를 벌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악 순환의 과정에서 민심이 동요하였고 결집된 백성의 힘은 1612년 홍경래( 洪 景 來 )의 난과 1862년 진주민란( 晋 州 民 亂 )을 촉발하였다. 16) 18세기 후반에 변화를 갈망하던 조선사회에 서학을 통해 천주교가 전래되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기존 사상과 충돌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천주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양반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서 15) 같은 책, 213~215쪽. 16) 한우근, 양반정치의 파탄과 민중의 반발, 1978, 선거관리 22, 112쪽. 168 조성문

양세력과 천주교에 대항하는 동학( 東 學 )이 1860년 최제우( 崔 濟 愚 )에 의해 창도되었다. 이렇듯 대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기였던 1851년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여주군 근 동면 섬락리( 蟾 樂 里 ;현 여주읍 능현리 250)에서 명성황후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성부 원군 민치록( 閔 致 祿 )이고 어머니는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1818-1874)이다. 1남 3녀를 낳았으나 어려서 죽고 명성황후만 남아 무남독녀로 자랐다. 1858년 풍비( 風 痹 )병을 앓 고 있던 아버지가 영주( 榮 州 )군수를 끝으로 서울 감고당( 感 古 堂 )에서 사망했으니 명성황 후는 적어도 8세 이전에 여주를 떠나 서울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성황후 생가 는 원래 1687년(숙종13) 숙종대왕의 장인인 여양부원군 민유중( 閔 維 重 )의 묘막으로 지 어 진 집이었다. 민유중의 5대 종손인 민치록은 이곳에서 선조의 묘를 관리하면서 살다 가 명성황후를 낳았던 것이다. 능현리에는 명성황후와 관련된 이야기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명성황후가 태어난 것이 불과 150여년 전이니 지금 남아있는 이야기에 꽤 신빙성이 있을 듯 싶다. 명성황 후는 무척 영리했다고 한다. 한번 본 책이나 사람을 잊지 않고 정확히 기억해 내는 솜 씨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런 딸에게 아버지 민치록은 일찍부터 글을 가르쳐 주었는데 명성황후가 공부하던 방이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탄강구리비( 誕 降 舊 里 碑 )가 서있다. 또 명성황후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처럼 머리를 땋아 댕기를 매고는 들에 나가 새를 쫒곤 했던 소녀로 기억되고 있기도 하다. 하루는 명성황후가 어머니의 치맛 자락을 잡고 동네 우물가로 갔다. 저녁을 짓기 위해 쌀을 씻으려던 어머니를 따라 나선 길이었다. 우물가에는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도 하고 물을 긷기도 하며 수다를 떨 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여인이 저녁거리로 좁쌀을 씻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린 명성황 후가 이를 보고 나도 이 좁쌀만큼이나 많은 노비를 데리고 살아봤으면 하고 되뇌였 다고 한다. 고종이 직접 지은 명성황후 애책문( 哀 冊 文 ; 임금이나 왕비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글)을 보면 황후의 어린 시절을 짐작할 수 있다. 한창부부인이 신해년( 辛 亥 年 ) 9월 정축일( 丁 丑 日 ) 자시( 子 時 )에 여주군 근동면 섬락 리 자기 집에서 황후를 낳았다. 이 날 밤에 붉은 빛이 비치면서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69

가득 찼었다. 황후의 어릴 때 이름은 자영( 紫 英 ) 정호( 貞 鎬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태어날 때의 상황이나 같은 항렬의 돌림자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처녀 아이들이 꽃을 꺾어 벌레를 희롱하니 말리며 말하기를 벌레들을 잘 기르고 자 라게 하는 것은 너를 기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고 하였다. 황후가 벌레와 같은 작은 생물들을 사랑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착하고 여렸다는 반 증이다. 황후를 친견했던 사람들도 황후가 어린아이를 유난히 좋아했고 외교관 부인들 과 환담을 나눌 때에도 손을 어루만졌다고 증언했다. 그만큼 황후가 다정다감했다는 뜻 이다. 순간공( 純 簡 公 ; 민치록)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두세 번만 읽으면 곧 암송하였다. 알기 어려운 심오한 뜻을 분별해서 대답하였고 조목조목 통달하였다. 또 기억력이 비상하여 심상한 사물이라도 한 번 보기만 하면 빠짐없이 잘 알았다. 황후의 기억력을 정평이 나있었다. 왕비가 되어 서양외교관들의 부인들을 접대할 때 지난 번에 만났을 때의 모습과 상황을 정확히 기억해 내며 친근감을 표시하여 부인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들이 남아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역대의 정사에 대한 잘잘못과 옳고 그른 것을 마치 손바닥을 보듯이 환히 알았으며 나라의 근거가 될 만한 옛 일과 역대 임금들의 좋은 말과 아름다 운 행실과 혹은 야사나 보감( 寶 鑑 )에 실려있는 것 까지도 능히 말하니 이것은 그 가정 의 견문이 본래 있어서이므로 다른 집은 미칠 바가 못되었다. 황후가 고종과 함께 중국에서 가져 온 최신 서적을 공람하며 국정을 고민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들 순종의 기억 속에서 황후는 가정교사 이상의 자상하고 능력 있는 어머니였다. 서연( 書 筵 )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매번 그 글 뜻을 찾아서 풀 어주었으며 비근한 예를 들어 반복하여 쉽게 이해하도록 하였고 이해가 되어 마음이 기 뻐할 때 비로소 다음 배울 것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아는 것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 없었 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곡을 하며 우는 초상범절은 마치 어른이 하는 것과 다름 없었 다. 염할 때에 집안사람들이 나이가 어린 것을 생각하여 잠깐 피할 것을 권하자 정색하 170 조성문

여 말하기를 어찌 남의 지극한 인정을 빼앗으려 합니까. 라고 하였다. 장례 때에도 일 을 끝마치고 섧게 실컷 운 다음에야 물러갔다. 황후의 이런 모습에서 아버지 민치록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학문적 자질과 효성에 이르기 까지 아버지를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을축년( 乙 丑 年, 1865) 안국동 자기 집( 感 古 堂 )에서 꿈을 꾸었는데 인현성모(인현왕 후)가 옥규( 玉 圭 ) 하나를 주면서 가르치기를, 너는 마땅히 내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주어 자손에게 미치게 하니 영원히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부부인의 꿈도 같았다. 성모가 가르치기를, 이 아이를 잘 가르칠 것이다. 나는 나라를 위하여 크게 기대한다. 라고 하였다. 황후의 어머니 한창부부인 이씨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어 머니와 딸이 한 마음이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아무리 인현왕후의 체취가 서려있 는 감고당에 살고있다 하더라도, 또 온 국민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왕비할머니를 평소 에 흠모해왔다 하더라도 한 날 한 시에 예언적 계시라 할 수 있는 인현왕후의 꿈을 함 께 꾸었다는 것은 모녀사이의 빈틈없는 정신적 교감이 전제되지 아니하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철종의 3년 상이 끝나자 왕실 상하에서는 왕비의 책봉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 작했다. 외척의 시달림을 뼈저리게 체험한 대원군은 좌의정 김병학( 金 炳 學 )의 딸과의 정혼도 파기하고 대왕대비가 관심을 두고 있던 영의정 조두순( 趙 斗 淳 )의 손녀도 거절한 채 외척발호의 우려가 없고 자기에게 순종하되 정치에 간여하지 않을 만한 인물을 고르 기 위해 고심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들을 대신하여 한시적으로 정권을 쥔 대원군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 지난 60여 년 동안 형성된 외척세력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원군은 이들을 누르고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동참할 지 지 세력을 찾아야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여흥민씨였다고 여겨진다. 민경혁( 閔 景 爀 )의 딸을 어머니로, 민치구( 閔 致 九 )의 딸을 아내로 둔 대원군에게 있어서 이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 즈음에 부대부인 민씨와 민승호 등이 명성황후를 추천하자 대원군은 부자간에 동서( 同 壻 )관계가 된다하여 한때 반대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71

그러나 1866년( 丙 寅 고종3) 1월 대왕대비인 신정왕후( 神 貞 王 后 )는 12세부터 17세까지 의 처녀들의 금혼령을 내린 뒤, 1월 16일 자연스럽게 국혼( 國 婚 )장소를 대원군의 저택 인 운현궁( 雲 峴 宮 )으로 정했다. 2월 25일 초간택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5명 을 선발하고 2월 29일 재간택에서 명성황후만을 삼간택에 들게 하고는 3월 6일 서둘러 서 명성황후를 고종의 왕비로 결정해 버렸다. 이날 민치록은 의정부 영의정 여성부원군 ( 驪 城 府 院 君 )으로, 오씨는 해령부부인( 海 寧 府 夫 人 )으로 추증되었고 생모 이씨는 한창부 부인에 봉해졌다. 마치 미리 계획이나 한 듯 일사천리로 왕비책봉이 진행되었다. 대왕 대비와 실권을 가진 대원군 간에 묵계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3월 9일 납채례( 納 采 禮 ), 3월 11일 납징례( 納 徵 禮 ), 3월 17일 고기례( 告 期 禮 ), 3월 20 일 책비례( 冊 妃 禮 )에 이어 21일 별궁에서 친영례( 親 迎 禮 ), 22일 인정전( 仁 政 殿 )에서 문 무백관의 하례 속에 상견례( 相 見 禮 )가 거행되었다. 이때 명성황후의 나이 만 14세 6월, 명성황후의 국모로서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17) Ⅵ. 맺음말 주변 국가들이 근대화로 가는 길목에서 치열한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지정학적 특성 에 의해 한 옆으로 비켜 서있던 조선은 곧이어 밀어닥친 서세동점이라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다가 마침내 망국의 쓰라림을 겪고야 말았다. 조선의 마지막 시기에 등장한 명성황후는 백척간두에 선 국가의 명운을 되살려 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던 여인이었다. 국가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두고 남편 고종과 함께 국정을 운영했던 왕비에게 혹독한 역사적 질책이 있었음을 안다. 그러나 모든 일 에 있어서 명암이 존재하듯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도 어느 일방이 책임져야할 진실은 존 재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세월 명성황후에게 가해졌던 비판의 목소리들이 진실성을 가지고 17) 조성문, 명성황후를 찾아서, 2000, 33~34쪽. 172 조성문

있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명성황후가 속한 여흥민씨 삼방파는 학맥과 혼맥을 보더라도 결코 미천한 집안이 아 니었다. 6대조 민유중은 병조판서, 여양부원군, 시호 문정( 文 貞 ). 5대조 민진후는 개성 유수, 시호 충문( 忠 文 ), 4대조 민익수는 사헌부 장령, 시호 문충( 文 忠 ). 3대조 민백분은 충청감사. 2대조 민기현은 개성유수를 지냈다. 뼈대 있는 가문을 자랑하는 집안에서도 명성황후 삼방파처럼 대를 이어 높은 벼슬과 빛나는 명성을 지니기가 어렵다. 특히 조 선시대에 시호를 받는다( 贈 諡 )는 것은 까다로운 자격조건이나 절차만큼 크나큰 가문의 명예여서 자손대대로 긍지의 상징이 되었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에 대해서는 그 동안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으나 외손자인 순종( 純 宗 )이 황태자 시절에 쓴 신도비문을 통해 면모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민치록의 벼슬은 비록 4품에 불과했으나 그는 조상으 로부터 물려받은 우수한 자질과 본인의 노력에 의해 스승인 노주 오희상으로부터 극찬 을 들은 촉망받는 제자였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위였다. 민치록은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과거장에 나가지 않았다. 이는 정통학자의 길을 걸으며 사림의 존경을 받았던 스승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도비의 표현대로 민치록은 효도하고 우애 하며 예법을 준수했고, 도의( 道 義 )에 정밀하고 확실했으며 문장이 길고 넓은 사람이 었다. 명성황후의 외가( 外 家 )도 알려진 것은 별반 없었다. 단지 가정 이곡( 李 穀 )과 목은 이 색( 李 穡 )의 후손으로서 인조( 仁 祖 )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현영( 李 顯 英 )을 집안의 인물로 자랑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외세의 침입과 내부의 반발에 직면하고, 암살의 위험 속에서 국권수호를 위해 밤잠을 설칠 때 궁내부 대신으로서 황후의 측근 역할을 했던 이가 외삼촌의 아들 이경직( 李 耕 稙 )이었다는 사실은 외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 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경직은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1895년 10월 8일 새벽, 건청궁 ( 乾 淸 宮 ) 옥호루( 玉 壺 樓 )에서 명성황후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 낭인들을 맨 몸으로 막다 가 팔이 잘려 죽은 바로 그 사람이다. 명성황후의 어린 시절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은 고종과 순종의 기억이 전부였다. 그러 나 황후가 아버지를 닮아 효성이 지극했고 벌레와 같은 미물( 微 物 )까지도 사랑했으며,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고 왕비로 간택이 되어 별궁에서 왕비수업을 받던 중에도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73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했다. 명성황후의 타고난 성품과 자질은 뒷날 왕비가 되어 고종과 함께 국정을 이끌 때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성취된 학문적 지식으로 아들인 순종을 바르게 길러내었고, 개인적인 일로 국가의 재 정을 낭비하거나 백성들의 손실을 모른 체하지 않았으며, 국가와 백성의 장래를 위해 선진 문물의 도입과 국가부강의 방책을 세우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명성황후와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 적 시각들이 근거가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명성황후의 가문이 한미했다거나 가난한 집에서 버릇없이 자라 표독한 성질을 부리며 시아버지와 맞섰다는 이야기는 이 제 더 이상 거론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74 조성문

<참고문헌> 1. 고종실록 2. 매천야록 3. 여흥민씨 삼방파보 4. 한산이씨 족보 5. 여흥민씨 가승 단행본 1. 이태공과 민후합전 기구치 겐조 성진출판사 1973 2. 한국근대의 유교사상 금장태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0. 3. 명성황후시해사건 최문형외 민음사 1992. 4. 한말비사 윤효정 교문사 1995. 5. 조선 유학의 학파들 한국사상사연구회 예문서원 1996. 6. 한국인물탐사기 이태영 오늘 1996. 7. 서울 600년 김영상 대학당 1998. 8. 조선후기 산림세력연구 우인수 일조각 1999. 9. 운현궁 신영훈 조선일보사 1999. 10. 상투의 나라 언더우드 집문당 1999. 11. 여흥민씨사(인물편) 민찬식 베스트디자인 1999. 12.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이사벨라비숍 집문당 2000. 13. 명성황후를 찾아서 조성문 여주문화원 2000. 14. 조선시대 당쟁사 이성무 동방미디어 2000. 15.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한영우 효형출판 2001. 16. 여흥민씨 문헌록 민영근 상록출판사 2001. 17. 고종과 명성 변원림 국학자료원 2002. 18. 여주왕비이야기 조성문 여주문화원 2005. 명성황후( 明 成 皇 后 ) 가계와 어린 시절 175

19. 조선의 왕실과 외척 박영규 김영사 2005. 20. 다시보는 명성황후 오영섭외 여주문화원 2006. 21. 안동김문연구 이경구 일지사 2007. 22. 여주와 함께 한 사람들 조성문 여주문화원 2007. 23. 역대현조묘비문집 여흥민씨 삼방파 종중 2008. 24. 근대화와 동서양 이혜령 외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2009. 25. 고종 44년의 비원 장영숙 너머북스 2010. 논문 1. 양반정치의 파탄과 민중의 반발 한우근 1978. 2. 조선말기 서구인들에게 비친 서울상 최승규 1995. 3. 이간과 한진원의 미발 오상 논변 연구 전인식 1998. 4. 조선 숙종~영조대 근기지역 노론학맥 연구 조준호 2003. 5. 근대의 궁중여성(명성황후의 권력과 희생) 이민원 2005. 6. 세도정치기 산림의 현실인식과 대응 노대환 2006. 7. 여흥민씨 가승기략을 통해 본 17-18세기 여흥민문의 형성과 가문정비 김명숙 2006. 8. 명성황후와 감고당 이민원 2008. 9. 여성정치인으로서의 명성황후 장영숙 2009. 176 조성문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안 국 승 (한북사학회 회장) 目 次 I. 序 論 II. 本 論 III. 中 央 政 界 에 나서다 IV. 獨 立 協 會 의 활동 V. 安 駉 壽 의 富 國 强 兵 과 立 憲 君 主 制 운동 VI. 安 駉 壽 의 對 外 對 策 論 VII. 結 論 집필자 : 안국승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초대 소장, 전 의정부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의정부, 동두천 시사 편집, 죽산 안씨 대종회 회장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77

Ⅰ. 序 論 丙 寅, 辛 未 양요와 운양호 사건 등 열국의 砲 艦 外 交 로써 開 港 을 强 要 하였으나 大 院 君 의 斥 和 로써 쇄국의 문을 굳게 닫을 뿐 아니라 보수집권세력에 의하여 한국의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자 이에 맞서 젊은 개화파 세력파인 金 玉 均, 徐 載 弼, 洪 英 植, 朴 泳 孝 등 에 의하여 甲 申 政 變 을 통하여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三 日 天 下 로써 이것마 저 실패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것은 체계적 연구로써 金 玉 均 등에 대하여 올바른 평가를 받고 있 다. 그러나 우리 安 城 이 낳은 개화기의 선구자 安 駉 壽 에 대하여서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安 駉 壽 에 대한 연구로서 이를 밝혀 그가 올바른 평가를 받는데 一 助 가 되고자 본 논문의 주제로 삼았다. Ⅱ. 本 論 1. 가계 안경수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家 系 부터 살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가계를 살피고자 한다. 그의 姓 은 安 氏 요 관향은 竹 山 이며, 이름은 駉 壽 요 자는 聖 哉 이고, 호는 河 醒 이며, 시호는 毅 愍 이다. 그의 시조는 중국 隴 西 인 李 瑗 으로 서기 807년 당나라 헌종 원화 2년(신라 애장왕 7 년)에 李 琦 ( 錡 )의 난을 당하여 동생 璜 과 같이 중국에서 신라에 망명해 와 松 嶽 山 밑에 살고 있었다. 이때 廣 州 ( 漢 山 )에서 城 主 를 죽이는 반란이 일어나자 전기 형제가 이에 참전하여 이를 평란하는데 그 전공이 큰지라 국왕께서 공을 높여 安 國 之 臣 이라 하시고 178 안국승

형 瑗 에게는 賜 姓 安 氏 1)라 하고 동생 璜 은 본성을 지키라고 固 城 君 을 봉하니 이에서 東 邦 安 氏 와 固 城 李 氏 가 비롯되었다. 이어 804년 신라 景 文 王 4년에 甲 申 倭 亂 이 일어나자 瑗 의 아들 삼형제인 枝 春, 葉 春, 花 春 등이 이를 平 定 하는데 그 功 이 큰지라 경문왕께서 三 兄 弟 에게 更 名 封 君 하시니 枝 春 은 邦 俊 에 竹 城 ( 後 에 竹 山 ), 葉 春 은 邦 傑 에 廣 州, 花 春 은 邦 俠 에 竹 州 君 을 봉하니 이 에서 竹 山, 廣 州, 竹 州 의 관향 2) 이 비롯되었다. 食 邑 을 내린 것은 후대에 封 君 한 것으로 기록한 것으로 본다. 安 駉 壽 는 시조 邦 俊 公 의 31대손으로 1853년 6월 20일에 安 城 郡 古 三 面 鳳 山 里 꽃뫼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한미한 殘 班 光 逸 公 과 어머니 全 州 李 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 났다. 그림 1 公 의 묘소 앞에서 후손들과 같이 1) 安 氏 同 源 錄 과 文 獻 備 考. 2) 安 氏 同 源 譜. 國 善 (1878~1926)은 안경수의 양자로서 경응의숙 보통과 3년제 동교전문학교(현 早 稻 田 大 )를 1899년에 졸업하고 1902년 전후에 귀국하였으나 체포되어 2년간 투옥되었다가 1904년에 석방되어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항일성격이 강한 보성관에서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저술가 로서 명성을 쌓았다. 1906년 敦 明 의숙 교사로서 정치 등을 강의하였다. 1907년에 광신상업학교에 서 상업 행정법을 강의하였다. 1908년 탁지부 이재국 근무, 1911년 청도군수 역임, 대동전문학교에 서 정치학, 경제학 강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정치학원론 을 저술하고 신소설로 금수회의 를 썼 다. 독자로 必 承 이 있는데 호는 懷 南 으로서 소설가이다. 그리고 가까운 집안의 輔 承 은 예명기에 홍 난파와 같이 음악에서 활동하였고, 弼 承 의 配 位 로서 세계적인 무용계의 거성 崔 承 喜 와 제승의 배위 金 白 峰 은 우리나라 무용계의 一 人 者 이며 모두 京 畿 道 安 城 봉산리 꽃뫼에서 난 뛰어난 人 物 이다.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79

2. 가계 약도(竹山 安氏 大同譜에 의함) 安邦俊 國輔 國弼(2世) (尙書左僕射) 儉 晩生 慾 孟謙 瀘 令儀 世亮 洪祥 永年 (3世) (5世) (9世) (10世) 述 子誠 社 玹 曾 季仁 子謹 (15世) (高城 迢 子誠 郡事) (贈 (17世) 子訴 兵曹 子謙 慄 克禮 參判) (行免山縣監, (行英陵參奉) (成均進士) 黃海鎭管兵馬節制都尉) 子詮 澍 尙德 鎔 處益 相東 (司憲府監察)(行武臣兼宣傳官)(通德郞) (成均進士) 椐 允諧 宗復 그림 2. 최승희(앞줄 왼쪽) 와 남편 안막, 딸 승자 180 안국승 輔承 光台 亨壽 璹善 弼承 配 崔承喜 濟承 配 金百峰 光逸 駉壽 國善 必承 檢 光喬 稷壽 國善(系出) 그림 3. 서울감옥서 1903년 리승만, 리승린(리상재씨 아 들), 안국선(안경수씨 아들) 그림 4. 한국문학가협회에서 안국선 기념비

그는 어려서 성품이 강직하고 마음이 영특하였다. 3) 또한 선견지명이 있어 16세~19세 전후하여 부산에 내려가서 일인이 경영하는 상점에 종사하면서 일어를 배워 일어에 능 통하였다. 그러나 뜻하는 바 있어 4)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부친을 도와 농사를 짓는 한 편 四 書 三 經 을 공부하고 무예를 닦아 1876년(고종 13) 그의 나이 24살 때 무과에 급제 하였다. 5) 3. 勢 道 家 閔 泳 駿 의 문객이 되다 그는 뜻하는 바가 있어 고향에서 농사하는 일을 그만두고 漢 城 에 나와 세도가를 출입 하다가 당시 세도가인 閔 泳 駿 의 문객이 되어 일어에 능통한지라 그의 관심과 총애를 얻 어 宮 內 府 進 需 職 을 맡아가지고 당시 궁중에서 일본에 주문하여 사용하는 일체의 물품 을 안경수가 단독 일본에 왕래하며 구입 진상 6) 하였다. 4. 日 本 留 學 1880년 전반기에 정부에서 근대화 정책의 하나로 다수의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였 다. 그러나 유학생 몇 명에게는 서양의 인문 사회 과학을 배우게 하고 대부분에게는 금 은 분석술, 양잠, 방직기술 습득을 위하여 파견하였다. 안경수는 1884년 8월에 일본의 岡 山 에 가서 방직기술을 배우고 졸업하였다. 7) 당시 학업 이수기간은 보통 1년 정도로 보아 그는 적어도 1883년 그의 나이 31세 때 일본으 로 간 것으로 본다. 그는 일본을 자주 왕래하면서 일어가 더욱 능통하였다. 3) 安 駉 壽 神 道 碑. 4) 日 刊 紙 朝 鮮 日 報 연재소설 徐 基 源 저 光 化 門 하염없는 제국 族 孫 安 孝 承 증언. 5) 安 駉 壽 神 道 碑. 6) 1898년 6월 안경수와 함께 고종 폐위에 참가하였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망명한 尹 孝 完 의 단편글. 7) 李 光 麟 의 개화 초기의 한국인의 일본유학 p.63. 1996.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81

Ⅲ. 中 央 政 界 에 나서다 1. 주일번역관에 임명되다 1887년 4월 34살 때 外 衛 門 主 事 에 임명되고, 1887년 5월에 민영준이 주답 일본 변리 代 臣 에 임명되다. 그는 6월에 주일 번역관 8) 에 임명되었 다. 주일 번역관으로서 안경수는 일본 정계 인사 들과 자주 접촉을 가질 수 있어 후일에 안경수 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림 5. 안명선의 손자 병현과 병섭 안필승의 조카 안병섭 2.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엽전을 폐지하고 금 본위 화폐를 주조하다 이에 앞서 정부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888년에 필랜드로프를 초빙하여 전환 국 총판에 임명하고 그의 의견에 따라 근대화폐를 주조하여 유통하려 하였으나 실행단 계에서 좌절되었다. 1890년에 안경수가 전환국 방판에 임명되어 朴 定 陽, 金 嘉 鎭 과 함께 본위제 화폐개혁 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890년 말에 고종의 명을 받아 안경수가 일본의 화폐제도와 전환국 운영 개혁을 위하여 일본에 파견하였다. 9) 그는 大 阪 製 鋼 會 社 의 增 田 信 之 를 만나 우리나라 본래 화폐인 엽전의 주조를 상의하자 이는 불가능하다고 하며 문명국에서 발행하는 근대적 화폐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하여 본국 정부와 협의하여 이를 받아들여 엽전을 폐지하고 근대적 화폐를 주조하기로 하였 다. 이어 大 三 輪 을 전환국 관리로서 한국 정부가 정식으로 채용할 것을 제시하여 일본 정부의 승인을 얻어 전환국 건축비와 기계 설립비에 2만700원을 한국 정부에 기증하기 로 하고 자신도 25만원을 한국 정부에 대여하였다. 이 계약에 따라 전환국을 서울에 건 8) 日 省 錄 고종 24년 6월 8일. 9) 日 省 錄 고종 27년 10월 7일. 182 안국승

립하지 않고 일본인의 영향이 큰 인천시 전동(현 인천여상 자리)에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大 三 輪 을 초청하여 1891년 11월 16일에 임기 5년의 會 辨 에 임명하였다. 10) 이와 같은 조건으로 우리나라에서 은본위 화폐를 개혁하는 활동이 시작되어 안경수는 전환국 방판으로서 당시 호조판서 朴 定 陽 을 비롯하여 金 嘉 鎭, 李 商 在, 大 三 輪 과 같이 신식 화폐 조례를 상의 결정하여 1891년 12월 6일에 고종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11) 이 에 따라 세계 조류에 따라 은본위 제도를 채택하였다. 1891년 10월까지 약 23만원의 화폐를 주조하여 1891년 2월 4일부터 신식 화폐를 발 행하였다. 그러나 大 三 䎾 과의 의견충돌로 1893년 1월 6일에 인천 전환국의 주조사업이 중단을 당하자 增 田 은 우리 정부와 담판하여 투자금액과 이자를 포함하여 14만9천99원 11전을 정부로부터 수령하고 1893년 3월 23일에 시설을 우리 정부에 인도하고 일본으 로 돌아갔다. 12) 그 후 인천 전환국에서 화폐를 계속 주조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금 부족을 비롯하여 다음과 같은 사유로 중단되었다. (1) 전환국과 교환국의 업무담당 영역이 명확하지 않고 (2) 당오전의 피해가 막심한 가운데 다시 新 貨 를 주조하는 것은 더 큰 해를 끼칠 것 으로 생각하여 鄭 範 朝 와 같은 정부 관리의 반대 (3) 袁 世 凱 는 새로 주조한 화폐 뒷면에 大 朝 鮮 이라고 기입한 것을 들어 淸 國 의 속방 이라는 것을 내세워 大 字 를 삭제할 것을 요구하며 발행을 중지할 것을 요구 13) 등 으로 중단하였다. 이와 같은 어려운 조건을 무릅쓰고 발행하다가 끝내 중지되었다. 그러나 전기한 난관 을 극복하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신화폐를 주조 발행한 것은 안경수의 독보적인 공 헌이 컸다는 것을 명기한다. 10) 日 省 錄 고종 28년 11월 16일. 11) 安 田 吉 實, 1874 李 朝 貨 幣 交 換 と 大 三 䎾 文 書 について 조선학보 p.58. 12) 三 上 豊 이석준 역, 1930년 曲 典 園 局 回 顧 錄 한국경제신문자료 1집 p.56. 13) 신문집성 명치편년사 명치 26년 6월 1일.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83

2. 甲 午 更 正 을 알아본다 1) 日 本 군의 왕궁을 무단 점거와 협박 1894년(고종 31년 甲 午 ) 6월 18일에 淸 나라 袁 世 凱 가 본국으로 도망치듯이 돌아갔다. 이에 大 鳥 公 使 는 의기충천하여 朝 鮮 國 은 自 主 邦 이니 淸 軍 을 境 外 로 遂 出 하여 自 主 의 위 신을 세우고 韓 淸 間 에 성립한 통상무역 협정을 폐기하여 自 主 實 績 을 보이라고 강박했 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대답이 없자 大 鳥 는 日 軍 여단사령관 大 島 小 將 과 상의하여 21 일까지 일본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武 力 行 事 도 불사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에 영의정 沈 舜 澤 은 사표를 내고 세도재상인 閔 泳 駿 은 출입을 기피하는 등 책임을 전가하 는 상태에서 대답이 없자 그들은 1개 연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경복궁까지 불법 점령 대 문짝까지 쳐부수고 어전까지 난입하자 閔 氏 일당이 뒷문으로 도망하자 같은 무리들인 兩 殿 下 를 모시던 侍 臣 과 호위군마저도 양전하를 그대로 두고 도주하는 14) 不 忠 을 범하 였다. 이에 궁궐에 쳐들어온 日 本 군은 번쩍이는 칼을 빼어 들고 양전하를 에워쌌다. 이때 신난영에 있던 병사가 건춘문을 들어와 일병에게 총을 쏘거늘 安 駉 壽 가 들어와 이를 중 지시키자 箕 兵 이 군을 탈출하여 돌아갔다. 이때 고종께서 안경수를 불러 일병에게 연유를 물어보라고 하시었다. 이에 사유를 알 아본즉 大 鳥 가 칼을 빼어들고 고함을 치는 것은 大 院 君 을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것 이라고 말씀드렸다. 大 鳥 는 大 院 君 을 옹립하여 閔 氏 척족 世 道 정치를 打 倒 하고자 함에 서이다. 2) 大 院 君 의 입궐 이에 金 嘉 鎭 과 安 駉 壽 와 岡 本 등을 시켜 大 院 君 을 입궐시키고자 하였으나 이에 불응 하자 大 院 君 의 側 近 으로서 투옥된 鄭 雲 鵬 을 시키어 설득하였으나 任? 命 을 들어 不 應 하 자 또다시 安 駉 壽 와 兪 吉 濬 이 대궐과 大 院 君 邸 를 왕래하여 勅 使 를 大 院 君 에게 파견하여 간신히 허락을 받고 大 院 君 께서 입궐했다. 14) 梅 泉 野 錄 제2권 고종 31년 甲 午 (1894) 일본인의 대원군 영입. 184 안국승

이때 일군이 침입하여 궐내가 몹시 소란한 가운데 大 院 君 과 고종이 서로 협의하여 大 島 는 고종의 교서를 받아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이때 일병들은 대궐 문을 지키고 들어 오는 사람마다 일일이 점검하여 들어오게 하였다. 이에 金 弘 集, 金 炳 始, 趙 秉 世, 鄭 範 朝 등이 들어오고 沈 舜 澤 은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때 侍 臣 과 호위군이 모두 달아나 수 라마저 들어오지 않아 양전하께서 수라를 운현궁에게 명하여 들여오는 것을 일병이 모 두 빼앗아 먹어치우는 민족의 수치를 당하였다. 15) 이때 일본군의 행패에 대하여 항거한 평양병 500여 명이 연달아 일본군에게 포를 쏘 자 大 鳥 는 좁은 문을 통하여 몰래 고종을 만나서 협박하자 맹동하는 자는 참하라고 명 하자 병들이 통곡하며 총통을 부수고 군복을 찢고 칼을 뽑아 땅을 치니 곡성이 산이 무 너지는 듯하였다. 16) 3) 무기와 문화재 약탈 이에 일병이 우리 군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빼앗으니 대포가 30문, 기관총 8문, 소총 2,000정, 기타 무수한 화승포, 궁시군마 14필 등이었다. 또한 수백 년 동안 왕실에서 보존 수호하던 이 나라 최고급 국보와 문화재를 마치 교 전 중 전승국이 패잔국에서 빼앗은 전리품처럼 백주에 궁궐을 뒤져 약탈해가지고 인천 을 통하여 본국으로 가지고 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17) 이와 같이 하여 서울에는 그나마 군인도 무기도 없고 척족 閔 氏 는 모두 도피하고 없 었다. 閔 泳 柱 는 楊 州 로 도피하고, 閔 泳 駿 은 關 西 로 도피하는 등 모두 도피하였다. 4) 大 院 君 의 말씀 大 院 君 이 피박되어 입궐하자 趙 義 淵 과 安 駉 壽 가 맞이하며 말씀 올리기를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은 모두 閔 氏 들이니 모두 죽이라 하자 대원군이 냉소하며 말씀하시기를 나 도 20년 갇힌 몸으로 이리 되었으니 이번의 死 活 은 諸 君 에게 달려있다 고 하였다. 중궁 이 이를 듣고 큰 덕이요 과연 大 監 이라고 하였다. 18) 15) 梅 泉 野 錄 제2권 上 同. 16) 상동. 17) 상동.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85

5) 친일 개화인을 대폭 등용하여 정부를 조직하였다. 19) 金 嘉 鎭 외무협변, 兪 吉 濬 외무참의, 李 源 競 내무참의, 安 駉 壽 우포장, 魚 允 中 선화당 상, 趙 義 淵 장어사 등. 6) 軍 國 機 務 處 설치( 日 本 의 명치유신의 원로원과 추밀원 같은 기구) 영의정 金 弘 集 을 회의 총재로 박정양, 김윤식, 김종한, 조의연, 이윤용, 김가진, 안경 수, 유길준 등 9명 합계 17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김가진, 안경수, 유길준 등이 중심이 되어 大 島 公 使 杉 村 岡 本 등의 조언을 받으며 大 典 會 通 六 典 條 例 에 의하여 구제도를 원 칙적으로 보충하여 근대 법치국가의 내각 제도를 참작 조화 고심 끝에 의정부 관제를 근대적 기구를 개편하는 등 近 世 王 朝 500년의 정치제도를 근대국가의 형태로 개편하 여 (1) 의정부 관제개혁 (2) 궁내부 신관제 공포 (3) 일반 사회 제도의 개혁 (4) 재정 경제 개혁 (5) 군제개혁이 중심이 되었다. 20) 이상과 같이 전기 3인이 주동이 되어 甲 午 更 張 의 획기적 개혁을 실시한 것으로 언제 인가는 누가 할 것을 친일파의 따가운 평가를 감수하며 이루어 놓은 것이다. 일본의 것 을 그대로 베꼈다고 일부에서 논하지만 이는 미국이 프랑스의 三 權 분립제도를 본받았 고, 日 本 은 미국의 삼권분립제도와 독일의 프러샤 헌법과 상법에 21) 있어서는 나폴레옹 의 상법을 그대로 본받아 제정한 것과 같이 자기 나라보다 선진된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국제적 관례로 우리는 日 本 의 제도를 본받은 것으로 본다. 4. 乙 未 사변 1) 독경승 三 浦 公 使 의 兇 謀 일본 공사 井 上 가 300~500만원의 공수표를 남발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자 새로 부임 한 三 浦 공사는 讀 經 으로 일념하고 있어 王 室 과 척족 계열은 그를 상대로 되지 않은 인 18) 梅 泉 野 錄 제2권 고종 31년 甲 午 (1894). 19) 梅 泉 野 錄 제2권 고종 31년 甲 午 (1894). 20) 梅 泉 野 錄 제2권 고종 31년 甲 午 (1894). 震 檀 學 會 韓 國 史 현대편 ( 甲 午 更 張 양상) p.224-250. 21) 東 京 帝 大 교수 笠 原 一 男 祥 說 日 本 史 硏 究 明 治 憲 法 體 制 特 色 1992. 1/10. p.346~390 186 안국승

물이라고 얕잡아 보고 친러 친미 정책을 노골적으로 강화 실시하였다. 심지어 친일계 훈련대의 해산설과 무장해제설까지 유포하였다. 이어 친일계인 金 嘉 鎭 이 면관되고 이어 兪 吉 濬 은 의주 감찰사로 좌천시키고 친로파인 李 範 晋 이 金 嘉 鎭 을 대신하여 임명되었다. 2) 독경승의 정체 이때 독경승으로 가면을 쓴 三 浦 는 강력한 무력행사를 내세우는 육군 중장으로 돌변 하여 친러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는 길은 왕비를 제거하는 길 밖에 없다는 무서운 결심 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무서운 함정이 기다린 줄도 모르고 러시아 세력만 믿고 을미사 변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인 8월 7일에 훈련대 해산과 무장해제 그리고 척신 척족계열 이 閔 泳 駿 의 궁내부대신 임명 등을 가지고 王 后 閔 氏 계에서는 군부대신 安 駉 壽 를 시켜 일본 공사관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三 浦 公 使 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몹시 격노하였다. 이 것은 결국 을미사변을 결행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2) 안경수와 함께 갑오개혁 1기 활동을 했던 趙 義 淵 과 權 瀅 鎭 등 소수친일파 관료들은 이 모의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훈련대 2대당장 禹 範 善 과 제5진을 담당한 李 斗 璜 등 친일 고급 장교들은 폭도들과 같이 이 사건에 직접 가담하기로 하였다. 3) 다. 三 浦 의 王 后 제거 결행 우선 三 浦 는 杉 村 서기관을 시키어 공덕리에 계시는 大 院 君 을 찾아가 그에게 협조를 강박하자 大 院 君 은 직접 국왕을 보익하며 궁중을 감독하고 일제의 정부는 내각에 맡기 고 간섭하지 않는다. 金 弘 集, 魚 允 中, 金 允 植 등 三 人 으로 정부를 구성하되 李 載 冕 을 궁내부 대신에 임명할 것 을 요구하자 三 浦 가 이것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王 后 제거에 착수하였다. 23) 三 浦 는 동향인 態 本 출신으로 한성신보 사장과 주필 편집장과 언론 출신 등 다수와 낭인 등 양복을 입은 자, 일본 복을 입은 자, 大 刀 를 어깨에 맨 자, 허리에 찬 자, 곤봉 22) 小 早 秀 雄 閔 妃 殺 害 記 1965. p.49. 23) 震 檀 學 會 韓 國 史 現 代 篇 p.594.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87

을 든 자, 양복에 짚신을 신은 자, 피스트를 가진 자 등 50명 내외로 구성된 草 賊 의 兇 惡 無 道 한 殺 人 百 鬼 夜 行 의 倭 賊 暴 徒 로서 일군 1개 대대 병력과 참령 禹 範 善 과 李 斗 璜 이 지휘하는 3.5대대 병력을 日 公 使 관 무관 楠 瀨 육군 중좌가 총지휘하는 부대 일부가 담을 넘어 광화문을 열자 大 院 君 이 탄 보교가 들어섰다. 이에 훈련대 연대장 洪 啓 薰 이 군부대신 安 駉 壽 와 함께 1개 중대 시위 병력을 거느리고 建 春 門 일대에서 폭도의 침입 을 막고자 처참한 공방전이 벌어지자 홍계훈이 적탄에 쓰러지자 중과부족 시위대가 전 의를 잃고 도망치자 안경수도 할 수 없이 현장에서 몸을 피하였다. 사실 안경수는 이 사건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가 사건 당일에 훈련대 연대 장 홍계훈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행동대원 4~50명 정도의 인원 정도로 파악하고 1개 중 대병력이면 충분하다고 믿고 1개 중대 시위대를 거느리고 대항한 것 같다. 살인 폭도들 은 다시 제너럴 따위 가 지휘하는 시위대 사이에서 2차 공방전이 있었으나 약간의 사상자를 내고 분산 도주하였다. 이같이 하여 500년 王 朝 구중궁궐까지 폭도들이 쳐들어가 국왕의 편전인 坤 寧 殿 과 王 妃 의 침전 玉 壺 殿 에서 국왕과 王 子 가 계시는 바로 눈앞에서 一 國 의 王 妃 가 日 帝 의 칼 날에 무참히 쓰러지는 참화를 당하는 천고에 없는 민족적 비극을 가져왔다. 24) 이와 같은 민족적 비극은 민족에게 대한 두고두고 뼈아픈 경고요 피눈물 나는 무서운 교훈될 虛 言 聲 勢 실천 없는 君 臣 有 義 와 爲 國 忠 節 을 신조로 한다는 벼슬아치와 지식인 (양반)들이 낳은 소임을 남에게 미루고 자기만을 앞세운 自 招 的 비극이요 불행이 아니 고 무엇이랴. 4) 王 妃 살해범 사후 처리 일본 정부는 三 浦 를 본국에 소환하고 杉 村 등 40여명 관련자를 체포하여 廣 島 감옥에 가두고 10월 30일에 井 上 馨 등을 위문사로 파견하여 조선 정부와 절충하여 즉일로 勅 命 으로 훈련대를 해산시키고 훈련대장 禹 範 善, 李 斗 璜 은 해직시키고 전군부대신 趙 義 淵, 경부사 柳 瀅 鎭 은 면직시키고 사건에 직접 가담한 李 周 會, 朴 銑, 尹 錫 禹 는 사형에 처하고 大 院 君 은 운현궁으로 돌아갔다. 24) 震 檀 學 會 韓 國 史 現 代 篇. 188 안국승

5. 椿 生 門 사건 乙 未 사건 이후 친일 내각에 의하여 宮 內 에서 포로상태에 계시는 고종을 椿 生 門 을 통 하여 移 御 시키고 국모의 복수와 당시 친일내각원을 반역죄로 투죄하기 위하여 러시아 공관에 있는 李 範 晋, 시종원 李 載 純, 시종 林 最 洙, 참령 李 道 徹, 정위 李 敏 宏, 전위원 李 忠 求, 탁지부사계 국장 金 在 豊, 시과 李 世 鎭, 참령 1대대장 李 範 來, 제2대대장 李 軫 鎬 그리고 전군부대신 安 駉 壽 등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李 軫 鎬 에 의하여 魚 允 中 에게 사전에 밀고 되어 申 羽 均 거느린 친위대가 대기 상태에 있었다. 25) 안경수가 이를 자세히 검토해 보니 오합지졸일 뿐만 아니라 이미 전기한 바와 같이 李 軫 鎬 가 魚 允 中 에게 고변되어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안경수는 내부대신 김 윤식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11월 28일 새벽에 林 最 洙 등이 거느린 30여명이 경복궁을 습격하였으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친위대 申 羽 均 이 거느린 친위대에게 패하여 李 道 徹, 林 最 洙, 南 萬 里, 李 敏 宏 등 14인은 모두 친위대사관에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李 範 晋 을 러시아공관으로, 李 允 用 은 미 공관으로 망명하고 安 駉 壽 는 仁 川 으로 도망가다가 체포되 어 재판에 회부되어 태 100에 징역 3년에 처하고 을미사변의 전모를 모른다고 해주부 장연군 백영도에 유배되었다가 26) 1896년 2월 6일에 면죄되었다. 27) 친위대장이 대응하기로 하고 안경수가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밀고하고 李 軫 鎬 가 나중 에 군부대신 서리 魚 允 中 에게 밀고했다고 하고 있으나 김윤식의 수기에는 李 軫 鎬 가 밀 고하고 800명이 담을 넘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28) 6. 俄 館 播 遷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일본이 민비 몰락 후 그 세력을 상실하자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것을 구실로 수병 100명을 공사관에 주둔시키고 李 範 晋 으로 하여금 궁녀 엄상궁을 통 25) 宋 京 垣 梨 大 석사논문 韓 末 安 駉 壽 의 政 治 的 經 濟 活 動 硏 究 1993. 26) 國 府 錄 고종 32년 12월 6일. 27) 梅 泉 野 錄. 28) 震 檀 學 會 韓 國 史 現 代 篇 椿 生 門 사건 개요 p.684.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89

하여 고종에게 친러의 필요성을 말씀 올리어 을미사건으로 놀라 공포심에 시달리어 국 가 원수나 군주의 체면과 관계없이 생명의 보전을 위하여 어디라도 피신하겠다는 고종 의 승낙을 받아놓았다. 이에 이범진 일파는 11일 새벽에 50여명의 러시아 병을 이끌고 北 壯 洞 小 路 를 따라 神 武 門 에 들어가 고종과 황태자께서 궁녀의 교자에 타고 미리 배웅 한 내시 몇 명과 같이 러시아 병의 호위를 받으며 궁중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관으로 파 천하고 大 王 大 妃 와 王 太 子 妃 는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 사실을 친러 파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천고에 유례가 없는 망국의 비극이었다. 이에 이범진이 군 인과 경찰을 통하여 총리 金 弘 集 과 농상무대신 鄭 秉 夏 에게 이 변을 알리자 이를 듣고 궁중으로 들어오다가 경무청 대문 밖에서 타살되고 魚 允 中 은 고향으로 가다가 용인에서 村 民 에게 타살되었다. 이어 러시아는 다시 수병 200여명을 증원하여 貞 洞 일대를 엄중히 지키고 이범진의 승낙 없이는 비록 大 官 일지라도 출입이 금지되어 이범진이 일방적으로 고종에게 주청하 여 러시아공관 내에서 정식으로 詔 를 받아 실시하였다. 심지어 11월 28일에 李 敏 宏, 安 駉 壽 등이 죄를 특사 받고 이어 경무사에 임명되었으며, 李 範 晋 은 법부대신, 李 完 用 은 外 大 겸 學 大 金 炳 始 는 총리로, 朴 定 陽 이 임시로 서리를 보게 되어 朝 鮮 의 天 下 는 親 露 派 의 수중으로 돌아가고 만반 정사는 러시아 공사의 코밑에 좌우되며 君 上 父 子 는 일개 흘러들어온 나그네와 같이 러시아 공관 한규통에서 기거하니 당시 국사는 실로 한심하 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안경수는 내각과 뜻이 맞지 않아 사임하고 중추원 1등의 관직 에 전임되다. 한편 경원 종성 광산 채굴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 채벌권, 철도부설권, 마산 부근 율구미만 러시아 동양함대 석탄저장고 및 해군 병원 설치권 등 많은 이권에 개입 남하정책을 감행하려 하였다. 이에 독립협회가 만민공동위원에서 반대시위가 일어나 1896년(건양 2년) 1월 20일에 고종께서 덕수궁으로 환어하였다. 29)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친러파인 별관 김홍집이 고종과 왕세자를 독살하려고 커피에 독을 넣어 드리어 고종은 이상히 여겨 마시다 토하시었으나 왕세자는 그대로 마시어 생 명을 건졌으나 그 후부터 정신을 흐리게 했다. 29) 별건곤 19호 1929. 2. 1. 李 太 王 아관파천 사건 2원정변기. 190 안국승

Ⅳ. 獨 立 協 會 의 활동 1. 독립협회의 목적과 구성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내각이 성립되어 일단 일본의 세력은 견제되 었다. 그러나 국가의 자주성은 크게 손상되어 열강의 이권쟁탈전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재필 등은 자유민주주의적 개혁사상을 민중에게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 로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독립협회를 구성하였다. 30)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淸 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것으로 종래 淸 에 대한 事 大 의 상징이었던 迎 恩 門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고 독립공원을 조성할 목적으로 창립되 었다. 2. 독립협회장 겸 회계장에는 안경수 31) 가 선출되고 위원장에는 이완용, 위원에는 김가진, 김종한, 민상호, 이채연, 권재형, 현흥택, 이상 재, 이근호, 감사위원에는 남궁택, 오세창 등 10여명의 다양한 성향의 관료들이 참석한 일종의 고급 관료 클럽이었다. 여기에서 서재필은 고문으로 참여하였는데 이것에 대하여 정말 서재필은 외국인을 자 처했기 때문에 회원이 되지 않고 30-1) 회중의 제반사를 단지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라고 밝히고 있다. 독립협회의 목적은 비정치적 성격을 띠었고 따라서 내외의 광범위한 후원을 받고 있 었다. 즉 당시 독립협회는 안경수를 회장으로 하여 정부 관료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 나 갔다. 서재필은 고문으로 협회를 이끄는데 조언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안경수가 30) 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독립협회와 대한제국 2002. 3. 1. p.329. 31) 안경수가 회장에 선출된 것은 그의 정치적 배경을 들 수 있다. ⑴ 고관을 지냈으며 비교적 연 배가 많고 ⑵ 친일파로 불리우는 세력뿐만 아니라 정통파 세력과도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 ⑶ 한 성은행장으로서 자금관리가 편한 점 ⑷ 당시 관리들의 일종의 관직 대기소였던 중추원 의관이었 던 점. 31-1) 신용하, 신판독립협회연구 독립협회창립 2006. 11/10. p.114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91

회장에 선출된 것은 주32)에 있으니 참고해 주기 바란다. 회장으로서 그의 역할은 회의 중 참석하여 會 中 大 少 사무를 최종 결재자이었다. 즉 안경수는 자금 출납뿐만 아니라 협회에서 개최되는 모든 일을 최종 결재하는 지위에 있 으며 회의에서 그의 역할과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32) 안경수는 회장으로서 토론회에 직접 참석하여 사회를 담당하고 서재필이 토론 진행을 지도하였다. 토론 주제는 정치적이 아닌 경제 사회 문제 등이다. 조선의 급선무는 교육이다 도로 개수가 위생상 제일방책 등이었다. 그러나 토론 회가 점차 진행에 치우게 되어 본격적인 救 國 政 治 운동으로 변하게 되었다. 3. 1896년에 발간한 독립회보 1호에 순한문으로 된 안경수의 序 가 있다. 여기에서 안경수의 근본 입장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안경수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그 일부를 소개한다. 그는 먼저 수백년 이래로 우리나라는 스스로 우리나라요 백성 역시 우리 백성인데 오늘날 독립된 형세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당시의 우리나라 형세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랄히 비판 논박하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즉 세계는 군웅할거의 시대이며 세계 각국은 침략 야욕을 가지고 신중히 계획하고 거 래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시대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은 각국의 침입을 받아 일대 난극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원인을 다음과 같 이 말하고 있다. 公 卿 大 夫 된 자들은 오직 老 少 南 北 의 당쟁이나 일삼고 儒 生 된 자들은 오직 心 性 理 學 의 논쟁이나 하고 과거 보는 자들은 오직 詩 賦 表 策 의 상투적인 글재주에나 힘쓰고 銓 衡 官 들은 오직 문벌이 높고 낮음이나 저울질하여 나라 땅에 있는 鐵 을 녹여 쓰지 못했으며 또 기름을 뽑아 쓰지 못했는가. 참으로 虛 文 이 너무 많았고 쌓인 폐단이 너무 심하였다. 예의를 빙자하여 태평을 일삼고 고루함을 달게 여기 32) 宋 京 垣 梨 大 史 學 科 석사논문 韓 末 安 駉 壽 의 政 治 經 濟 活 動 硏 究 p.93. 192 안국승

면서 스스로 높은 체 하여 利 用 厚 生 과 富 國 强 兵 의 實 事 求 是 하는 일에 이르러서 는 내처 떨쳐버리고 외면하면서 물리쳐서 마침내는 넘어져 오늘의 일대 난극에 이르렀다. 33) 4.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립 1) 독립기금 모금 이에 당면과제로 거국적인 기념사업으로 청나라 지 배에서 벗어난 독립을 기념하는 뜻에서 事 大 의 상징 이었던 迎 恩 門 자리에 서재필의 제안으로 프랑스 파 리에 있는 나폴레옹의 개선문을 본따 독립문을 세우 기로 독립협회에서 결의하였다. 이에 독립협회 회원 들이 우선 국민의 모범이 되기 위하여 510원을 거출 하였다. 이에 따라 아래로 소학교 학도가 2원을 기부 하는 것을 비롯하여 위로 왕세자가 1,000원을 하사하 는 등 각계각층과 외국인 선교사 등 통합하여 3,825 원과 추후에 2,068원12전2리까지 합친 총 5,893원12 전2리의 대금을 모금하였다. 모금한 것을 회장 안경 그림 6. 독립문 수에게 보내면 독립신문사에 보내 기부한 사람의 이름을 신문에 보도하고 안경수가 34) 관리하는 은행에 예금하였다. 2) 독립신문 발간 안경수, 박정양 등 개화파와 서재필의 합작으로 정부의 재정 지원금 3,000원을 받고 서재필에게 월봉 300원을 지급하기로 하여 발간하였다. 35) 그 당시 쌀 한 가마에 5,6원 하는 것을 보아 300원을 대금으로 이를 보수로 받고 33) 大 朝 鮮 獨 立 協 會 報 1호 p.1-2. 34) 震 檀 學 會 韓 國 史 現 代 篇 p.847. 35) 愼 鏞 廈 新 版 獨 立 協 會 硏 究 (상) 2006. 10. 9.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93

일했다. 3) 독립신문에 게재된 기사 내용 이와 같이 기금은 내는 것은 천추만대에 충심을 보이고 자주독립국으로서 세계 동 등국이 되어 조선 대군주 폐하까지 각국 제황과 같은 권리를 가지게 하려는 것이며 동 포형제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하여 공덕이 모두에게 미치게 하려는 뜻이 있으며 자기 이 름이 들어 천추만대에 충심 있고 조선 영광이 독립된 것을 세계에 광고하고 조선 영 광이 독립된 것을 36) 전하는 표적이 되어야 하며. 4) 독립문 건립에 대한 여러 가지 설 (1) 고등학교 국사 : 서재필 등은 국민의 힘으로 독립협회를 구성하였다. (2) 서재필 자서전 : 독립협회의 요청을 받고 당시 서울에 사는 러시아 건축사의 요 청을 받아 설계하였다. (3) 大 韓 季 年 史 : 서재필이 독립문을 설계하고 감독하였다. (4) 서울 600년사 : 독립문의 설계는 독일공사관에 근무하던 스위스 사람이 설계하고 서양건축업에 고용되어 있는 木 手 河 某 가 감독하였다. 37) (5) 독립문 건축비 5,833원12전2리에서 부족한 것은 회장과 부회장이 보를 서 차용하 였다. 38) (6) 준공식 : 서재필이 직접 주관하여 39) 6,000여명의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당일 식 사에서 서재필이 自 力 富 强 을 강조하였다. (7) 독립문 경조식 식순 40) 1 합창 : 조선가 배제학당 2 정초거행 3 기도 : 아페셀러 목사 36) 독립신문 기사. 37) 서울 600년사 제3권 독립협회 1979. 12. 31. p.149. 38) 상동 39) 진단학회 한국사 현대편 독립문 건립 1963. 7. p.846. 40) 신용하 신판 독립협회 연구 독립문 2006. 11. 10. p.314. 194 안국승

4 회장 연설 : 안경수(독립 회장) 5 합창 : 독립가 배재학당 6 축사 : 이재연(한성판윤) 7 축사 : 이왕용(외무부대신) 8 축사 : 서재필(조선내 외국인) 9 합창 : 進 步 歌 배재학당 10 체조 시범 : 육영공헌 학도 일동 11 연회 : 내빈 및 참석자 일동 5. 회장 안경수의 상소문 1898년 2월 22일에 안경수가 올린 상소문에 爲 國 爲 民 하는 臣 下 가 없으므로 皇 帝 께 서 자주독립의 권리를 날마다 잃어버려 兵 權 官 人 춘척하는 권리를 모두에게 빼앗김을 분탄히 여겨 尹 致 昊 등 회원 100여명이 皇 帝 와 大 韓 自 主 獨 立 의 권리를 위하여 목숨이 라도 바치겠다 맹서한 사연으로 상소하기로 작정하고 獨 立 協 會 長 이며 중추원 1등의 관 인 安 駉 壽 가 다음과 같이 상소문을 올리니 나라가 나라 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自 立 하여 他 國 에 의뢰하지 않는 것과 自 修 하여 一 國 에 憲 法 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上 天 에서 폐하에게 부여하는 하 나의 大 權 입니다. 大 權 이 없은즉 그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臣 등이 독 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설치하는 것은 위로는 皇 上 의 지휘를 높이고 아래로는 人 民 의 뜻을 굳게 하여 억만년의 부강한 기초를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 일의 국세를 보면 위태롭고 모든 조치가 크게 민망에 어그러져 말로만 자립을 부 르짖고 있습니다. 재정은 양여하여서는 안 되는데 양여하고 軍 士 의 출첩이 간신배 들의 기회를 인연하여 종간에서 사리를 꾀하여 혹 外 權 을 끼고 至 尊 을 위협하여 흑 풍설을 지어내어 聖 權 을 현혹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95

이 상소문은 러시아가 1898년 무산 절용도 조차를 강력히 요구해 정부가 이를 승인 하려고 하자 독립협회가 구국운동을 선언하는 안경수의 상소문이다. 이것으로 萬 民 共 同 會 가 개최되고 공격적인 反 露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한 2천만 국민의 바램이요 상징으로서 內 外 國 人 의 성대한 축하 속에 독립의 새 출발을 다짐했던 하늘에 우뚝한 독립문을 나는 우러러 본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의 개선문은 200여년의 역사가 흐른 지금에도 프랑스인 가슴 가슴에 영광스러운 자랑으로 가득찬 모습을 볼 때 우리 독립문은 찾는 이 없는 한갓 역 사적 유물로 여기는가. 우리 독립의 새 출발점이요, 개화의 첫 출발 민주주의의 첫 출 발점이 여기 선 독립문이 푸른 하늘에 높이 우뚝한 웅대장엄한 偉 容 인 獨 立 門 찾는 이 없어 쓸쓸함만이 더 하다.(2011. 9. 7) 6. 독립협회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41) 1) 1단계 고급관료 주도기(1896. 7. 12~1897. 8. 20) 정부 개혁파 관료 중심으로 독립문 건립 기금 기부함으로 회원이 되었다. 협회 회관 독립관에서 회원들의 稱 帝 건의로서 大 君 主 陛 下 로 칭하고 국호는 大 韓 이란 독립제국을 세계만방에 선포하다. 2) 2단계 민족 진출기(1897. 8. 25~1898. 2. 26) 토론회 주력시기이다. 일부 간부 민중 계몽에 앞장선 시기로 매주 토요일에 토론회 개최한 민중 진출시기이다. 회장 안경수가 토론회 주관하였다. 3) 3단계 民 衆 主 導 期 (1898. 2. 27~1898. 8. 27) 1898년 2월에 안경수 명의로 救 國 선언 상소문을 올리고 본격적인 민주 민권 사상운 동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이권 개입 반대운동 1898년 2월 27일 회장 임기만료로 이완용 선출했으나 이권 관여로 제명되고 윤치호가 회장대리에 취임하다. 41) 愼 鏞 厦 新 版 獨 立 協 會 硏 究 조직과 회원 구성 2006. 10. p.117-134. 196 안국승

4) 4단계 민중 투쟁기(1898. 8. 28~1898. 12. 5) 1898년 8월 28일 임원 개선으로 회장에 윤치호, 부회장에 이상재가 선출되다. (회원 수 4,173명) 러시아, 영국이 거문도 저탄소 요구, 일본과 러시아 부산 절영도에 저탄소 요구하고 철도, 광산, 목재 벌채권, 한러은행 개설 등 러시아의 분할 점거에 정부가 방치하자 독 립협회는 정부의 무책임을 규탄하고 러시아 제국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만민공동회 이름으로 전 시민항쟁으로 제지하였다. 1898년 2월 9일 종로 네거리에서 수천 명을 동 원한 萬 民 共 同 會 를 내세워 열성회원 李 承 晩, 洪 正 厚 가 등단하여 한러은행 내용 폭로하 여 러시아인 재정고문과 군사고문을 해고시키고 정부에 제정군사 주권 수호를 요청하여 채택하여 정부에 건의하다. 42) Ⅴ. 安 駉 壽 의 富 國 强 兵 과 立 憲 君 主 制 운동 독립협회의 투쟁목표인 상기 사항을 구현하기 위하여 안경수는 몸소 몸을 던져 실천 했으나 입헌군주제 실현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그의 원대한 한국의 근대화의 꿈이 애 석하게도 중단된 것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富 國 强 兵 이루어 힘을 갖출 때 잃어버린 나라를 찾는다고 하여 그는 국가의 근 대화는 實 事 求 是 를 기본으로 한 富 國 强 兵 에 있다는 것을 통감하고 자신의 이윤추구에 앞서 그 스스로가 현장에 몸을 던져 全 力 을 다하여 우리나라 경제 발전과 企 業 振 興 을 위하여 독립협회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회원과 같이 心 力 과 精 力 을 다하였다. 1. 은행 창립(1896. 10. 20) 개항 이후부터 일본 금융가들이 침투하여 일본 상인에 의한 고리대금업이 점차 확대 되어 그의 대응책으로 1896년에 조선은행을 창설하여 한국인에 의하여 민족계 은행 설 42) 震 檀 學 會 韓 國 史 現 代 篇 萬 民 共 同 會 항쟁 p.60-70.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97

립의 선구자가 되었다. 안경수는 탁지부 대신 신상훈과 농상공부협판 이채연과 협력하 여 은행 창업에 착수하여 자본금 20만원을 1구좌로 5만원으로 4,000주를 발행하여 1897년 10월 20일에 안경수가 초대 은행장에 취임하였다. 2. 大 朝 鮮 苧 麻 製 絲 회사 설립(1897) 이 회사는 삼과 모시로 실을 만들어 上 海 에 있는 비단제조소에 수출하는 것을 목적으 로 國 內 外 人 과 같이 설립하였다. 회장에 안경수 그리고 이채연, 이근호, 윤균섭, 서재필 등 독립협회에 속한 회원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안경수의 모의사건으로 실시하지 못하였다. 3. 大 韓 織 造 工 場 설립(1897년) 안경수는 반관반민으로서 일본 산업과 협의하여 木 織 의 직기공장을 경영하기 위하여 정부로부터 공장 부설 가옥과 工 手 生 徒 모집 등의 지원을 받아 기숙사 시설까지 갖춘 근대적 방직회사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면화가 많이 생산되지만 소비하는 布 (광목)는 거의가 외국에서 수입하여 쓰는 수량이 많아 본국에 공장을 세워 스스로 방직하여 면화를 수출하고 포를 수입하는 번거로움을 없애려는 것이다. 이것은 淸 日 戰 爭 으로 대량 수입하는 일제 면직 품을 국내 생산품으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더구나 1886년에서부터 1889년에 걸친 일본 기업의 발흥은 방직공장으로부터 시작되 었으며 이는 영국의 산업혁명 후 방직공업으로 인도와 호주의 목화와 양모를 수입하여 방직으로 수출하여 영국의 근대공업의 기초가 된 것을 일본이 본받은 것이다. 안경수는 이를 본받아서 정부의 殖 産 興 業 政 策 의 일환으로서 회사의 출자액은 외자 4만원, 내자 3 만5천원으로 구성하였으며 경영진에 안경수 부회장, 이채연, 이근배, 서재필 등 독립협 회 임원으로서 近 代 企 業 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안경수의 모의 사건으로 중단되었다. 이처럼 독립협회 중심으로 개화파 참여하였다. 198 안국승

4. 釜 下 鐵 道 會 社 창립(1897. 7) 청일전쟁, 아관파천 및 대한제국 성립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을 둘러싼 열강의 이권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제국주의 국가의 철도투자 그 자체가 자본수출이 며 군사 경제 침략을 촉진하였다. 이에 철도 부설권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전개되 었다. 1892년에 일본이 경부철도 부설권을 약탈한 바 있어 이에 맞서 부하 철도회사를 한 국인 최초로 설립되었다. 안경수의 모의 사건으로 중단되었다. 5. 立 憲 君 主 制 43) 독립협회 내에는 두 개의 흐름이 있었다. 가) 윤치호와 남궁억 계열은 강력한 전제 군주권을 바탕으로 민과 결합하여 운영되어 나가는 군주제를 상징하였으며 관민 합동에 의한 개혁의 완수를 추구하였다. 나) 안경수의 정교 계열은 개화파 개혁론을 추구하면서 國 民 共 治 論 에 입각하여 군주 권을 제단하고 개명 관료하여 독재를 구성하여 권력 장악 운동을 전개하였다.(주 신은 1996. 3. 2) 다) 한편 일본 유학생 安 明 善 은 친목회보 9호에서 정치 득실에서 대의 정치를 찬양하 면서 입헌정치와 독단정치로 나누고 있다. 독단정치도 군주가 영명하여 선량한 정치를 베풀면 人 民 이 幸 福 을 누릴 수 있고 衆 治 정부라도 그 나라 국회의원의 주 의와 주견이 없으면 나라가 망하지만 원리상 입헌 정치의 우위성을 독단정치에 비할 바 아니라고 하며 동양에서는 日 本 이 이를 이룬 유일하게 실행하여 성공한 나라라고 일본을 찬양하고 있다. 라) 그러나 정작 일본의 대의체제는 天 皇 制 로 구심을 얻기 위해 변칙적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조선의 정치체제는 조선의 군주전에 불리한 서구의 대의제도를 반드시 받 아들여야 할 과제를 말하였다.(이태진 2000-47-44) 43) 안경수 도서.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199

마)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운동은 고종에 의해 결국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고 그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의회가 없고 황제만 있을 경우 황제 한 사람만 위협하 면 주권침략이 쉬우므로 일본은 독립협회를 파괴하도록 공작했다는 것으로 해석 된다.(신용하 1966. 9) 이에 안경수는 독립협회에 명시된 國民共治論에 입각한 君主의 權限을 제한하는 근대 적 立憲君主 國家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림 7. 1903년, 한성감옥에서 동지들과 함께 앞줄에 앉아있는 사람 강원달, 홍재기, 유성준, 월남선생, 김정식 뒷줄 이승만, 안명선(안경수씨의 집안 조카), 김린, 유승근, 이승연(월남선생 아들), 부친 대신 복역 중의 소년 6. 立憲君主制의 필요성 이것은 朴泳孝의 君民 共治論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다같이 立憲君主制로서 내각책 임제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근대국가의 흐름이요 시대의 요청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 200 안국승

라의 현실은 至 尊 이요 君 主 로서 면면히 내려오는 봉건적 전제군주국가로써 君 主 의 權 限 을 제한한다는 것은 유림을 비롯한 보수층이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고종은 30여 년간 專 制 君 主 로서 군림한 분으로서 독립협회에서 일어난 人 權 운동을 제제하고 나아가 독립협회를 해산까지 한 절대군주로서 立 憲 君 主 制 의 近 代 국가 의 건설을 받아들이기란 심히 어려울 것이다. 이에 안경수는 이웃나라 日 本 이 30 代 젊은이들이 중심이 된 倒 幕 派 인 신정부군이 되 어 幕 府 와 싸우는 과정에서 8,265명의 戰 死 者 와 西 南 役 에서 사상 20,000명 처형, 2,764명 고귀한 피의 대가로 얻어진 大 政 奉 還 에 의한 主 政 復 古 가 이루어져 만14세의 明 治 를 天 皇 의 位 에 올려 日 本 의 近 代 化 44)를 이룬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반해 안경수는 평화적으로 고종을 양위시키고 王 世 子 를 王 位 에 받들어 모시고 우리나라 근대화를 위한 정치적 개혁을 부득불 감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결심한 것으로 안다. 7. 실천의 필요성 폐하께서 등극하신지 35년의 오랜 세월동안 홀로 精 勵 하시어 과도한 정신적 노고를 하였으니 마땅히 옥체의 건전을 도모하여 聖 壽 를 향유하게 하려면 여기에서 大 權 을 황 태자에게 양위하시고 잠시 섭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황태자께서 大 權 을 장악 하게 되면 임금 측근의 奸 小 輩 및 奎 閣 妄 臣 들을 제거하여 大 權 을 쇄신할 필요가 있으므 로 志 士 들은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45) 8. 실천 방법 圖 謀 者 의 한 사람인 尹 孝 定 의 표현에 의하면 46) 황태자 추대 계획을 3단계로 나누어 실시한다. 44) 東 京 帝 大 교수 笠 原 一 南 祥 說 日 本 史 明 治 維 新 と 富 國 强 兵 1992. 1. 20. p.322-336. 45)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문서 제목(27) 양위 사건에 관한 의옥 종결의 件 (문서번호 기밀 제33호). 46) 윤효정 1984 風 雲 韓 末 秘 史 p.206-207.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201

1단계는 宰 輔 派 운동으로 안경수가 책임을 지고 舊 日 의 大 臣 가운데 황제가 총애하 는 인물들로 하여금 이분의 협조하에 대리 집정을 이르도록 권유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하면 2단계로 尹 孝 定 이 사회파 운동을 책임지고 독립협회 지사 50명을 구하여 입궐하여 대리 집정을 강요한다. 이것마저 실패하면 3단계 군인운동으로 金 在 豊 이 책임지고 軍 을 동원하여 대리청정을 이루도록 하는 것 이다. 9. 안경수의 계획 실패 안경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은 大 尉 禹 南 圭 라는 자가 안경수를 방문하자 安 은 자기의 심복이라고 믿고 본건의 계획을 말했고 또 황제가 다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잠행할 염려 가 있으므로 李 等 을 궁궐 호위에 맡겨서 더욱 주의해야 할 점과 宮 城 도면을 내놓고 지 시하였다. 그러나 禹 는 곧바로 시위대장 李 學 均 에게 밀고하고 이 두 사람은 金 元 植 을 더하여 3인이 함께 당국자에게 밀고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안경수의 근대화를 위한 원대한 실천계획을 大 尉 禹 南 圭 의 밀고로 애 석하게도 실패하고 안경수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0. 안경수의 귀국 1900년 1월에 안경수가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돌아왔다. 그는 자수한 후 수감되어 신 문을 자청하였다. 그는 일본의 후원을 받으면 자기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 고 망명자들의 만류를 듣지 않고 귀국하여 자수하였다. 1) 그에 대한 두 단체의 상소 47) 고종을 양위시키고 왕세자를 왕위에 모시지 않을 수 없는 이유 47) 梅 泉 野 錄 21 안경수의 상소문. 202 안국승

2) 서민 나석주 등의 상소 서민 나석주 등 서민들은 그의 신원을 위하여 상소하고 서민들은 그를 위로하기 위하 여 줄을 서서 방문하고 술을 권유하였다. 이는 그가 갑오경장 등 사변이 있을 때마다 서민의 편에 썼기 때문이다. 3) 보수파들의 討 逆 상소 김성근, 김규홍 등은 갑오년 이후 난신 적자들이 줄을 지어 일어나고 있다. 안경수도 난적의 한 사람이니 황제께서는 후일의 후환을 막기 위하여 邦 法 을 바르게 하여 징계하 시어 해 주시기 바란다고 하였다. 11. 안경수, 권형진 처형되다 乙 未 사변의 내용이 탄로되어 고종은 이유인을 시켜 처형을 명령하여 이유인의 大 逆 不 道 한 안경수와 한 하늘에 있자니 피가 끓어올라 미처 아뢰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교 살하여 위로 하늘에 계시는 聖 母 영령에게 고하고 아래로 우리 동포들의 천고에 망극한 슬픔을 위로하니 春 秋 를 읽은 여러 군자와 혈기 있는 백성의 뜻을 모아 알아주기 바란 다고 거리에 방을 붙였다. 1900년 5월 28일 平 理 院 재판장 이유인, 판사 이인영 등 2명. 12.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48) 안경수와 권형진이 사망하였는데 이를 모르고 있다고 하며 이는 나라를 욕되게 하 는 동시에 직무를 유기했다고 공사를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안경수 고문치사에 대한 반박 올해 1월 중에 안경수가 인천에 도착했을 때 마침 본 공사가 폐하를 만나게 되어 안 경수의 귀국을 직접 폐하에게 아뢰고 聖 問 의 勅 答 을 받았는데 만약에 안경수를 자수하 도록 해주면 국법에 비추어 공정하게 재판하여 처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고문이나 형 48) 주한일본공사 기록 문서 제목(27) 양위사건에 관한 의혹 종결의 건 기밀 제33.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203

초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고문이나 형초는 甲 午 이래 전부 폐지하였으니 국법이 용서하 지 않을 것이다. 이런 보증을 받고 당국에 요청하여 안경수를 자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경부사 이유 인이 나타나 그 직임을 받아 가혹하게 문초하여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3일간 음식 을 먹지 못하였다고 하여 한국 외무대신에게 다음과 같이 함의하였다. ⑴ 황제의 뜻을 어긴 것이고 ⑵ 국법에 위반된 일이며 ⑶ 천하의 人 道 를 저버렸다고 하는 등 한일간의 외교 문제로 옥신각신 하다가 이 사건은 한국 정부가 이유인을 비롯 한 관련자를 유형 처분하고 고종과 정부 관료가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이 일본 정부에 참작되어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안경수의 처형을 둘러싼 문제는 고문을 둘 러싸고 의사의 진단서까지 동원되어 다시 국내외 분위기를 야기시켰다. 13. 그의 부국강병에 의한 立 憲 君 主 政 으로서 한국의 근대화는 깨어지다. 안경수의 처형은 이유인이 자의적 집행의 형식을 취한 고종의 밀령에 의하여 1900년 (광무 4) 5월 1일에 집행한 것이다. 49) 이상과 같이 그는 평리원에서 모진 고문 끝에 교수형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말씀하시 기를 내가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나라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반드시 원통한 일이 해결되기를 기다리며 뼈와 혼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50) 하시고 처형되니 그때 그의 나이 48세이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의 富 國 强 兵 을 기반으로 한 立 憲 君 主 制 에 의한 우리나라 近 代 化 의 원대한 꿈은 애석하게도 깨어지고 말았다. 49) 梅 泉 野 錄. 50) 안경수 선도비문. 204 안국승

14. 伸寃 안경수가 처형된 지 7년 만인 1907년 흉희 1년 7월 19일에 그가 나라 위해 억울하고 원통하게 처형된 것이 밝혀져 융희 황제에 의하여 신원되어 자헌대부에 중추원 1등의 관군부대신 에 복직되었다. 강직하여 능히 일을 올바르게 하는 것을 毅 라 하고 나 라에 있어서 어려움을 말하는 것을 愍 이라 하여 毅愍의 시호를 내리시다.51) 그림 8 그의 고향 꽃뫼마을 그림 9 안경수 숭모비 이어 1907년 9월에 그가 바라고 바라던 고향 안성에 있는 꽃뫼마을 화산에 뫼셔져 억울함을 달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경기도 안성이 낳은 개화기의 위대한 선각자인 初代 獨立協會長 안경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지면상 자세한 것은 제대로 살피 지 못한 것 같다. 51) 梅泉野錄 제6권 隆熙 4년 庚戌(1910) 정병하, 서광범, 안경수 시호 정함. 初代 獨立協會長 安駉壽의 活動에 대한 硏究 205

Ⅵ. 安駉壽의 對外 對策論 1. 한일 제휴론 안경수가 한일 제휴론을 주장한 것은 1896년 4월에 민영환이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후였다. 이때 한국 정부는 러시아가 일본의 속박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해 주기를 바라는 한편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받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민영환 이 와 보니 러시아의 태도가 너무나 소극적으로 보아 그가 귀국한 후 러시아를 믿기 어 렵고 조선은 이러한 경우에 일본을 떠나서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고 하여 한일 양국 이 서로 의논하여 동양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안경수는 한일 제휴론 을 주장하였으며, 민영환, 이완용, 이윤동 등이 이에 동의하였다. 이와 같은 한일 제휴론은 아관파천 후 러시아의 침략태도에 대한 대응 방법으로 안경 수를 비롯한 정부 관리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2. 三國 同盟論으로의 전환 안경수는 일본으로 망명한 후 한일 제휴론의 연장으로 韓淸日 三國 同盟論을 주장하 여 일본의 동경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본의 고유전통 가운데 眞善美 를 구해 이것을 기초로 국민 국가를 편성하려는 국수 보호주의를 社是로 한 유명한 잡지 日 本人 52)에 1900년 6월 1일부터 9월 20 일까지 8회에 걸쳐 발표하였다. 그가 처형된 지 8일 후에서이다. 이것은 지 정학적으로 보아 러시아가 남하하여 義 州가 러시아의 소유가 되면 우리 京城 그림 10 日本人 은 없게 되고 한국이 위태롭게 되면 일 52) 東京帝大 교수 笠原一男 祥說日本史 思想界の動向 1992. 1. 10. p.366. 206 안국승

본도 편할 수 없고 한국을 중심으로 한 지정학적으로 삼국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 存 在 를 함께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韓 淸 日 三 國 은 서구 열강의 침입에 대비하여 동맹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53) 그 방법에 대하여서는 지면상 생략한다. Ⅶ. 結 論 이상과 같이 살펴본 바와 같이 安 駉 壽 는 京 畿 道 安 城 郡 古 三 面 鳳 山 里 꽃뫼마을에서 한미한 서민에 가까운 殘 班 으로서 태어나 탁월한 능력과 일어에 능통하여 척신이며 세 도가인 閔 泳 駿 의 총애를 받아 일찍이 中 央 政 界 에 뛰어들어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한 立 志 的 뛰어난 韓 末 政 界 에서 보기 드문 人 物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安 駉 壽 는 1890년에 전환국 방판으로서 재정적 기술적 난관을 극복하여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금본위 화폐를 발행하는데 성공하였으며 甲 午 更 張 에서는 軍 國 機 務 處 에서 金 嘉 鎭, 安 駉 壽, 兪 吉 濬 이 大 典 會 通 六 典 條 例 를 기본으로 구제도를 보충하여 근대법치국가 의 내각제를 고심 끝에 의정부 관제 근대적 기구를 개편을 하는 등 근세왕조 500년의 정치제도를 개혁하여 ⑴ 의정부제 개혁 ⑵ 궁내부 신관제 공포 ⑶ 일반사회제도 개혁 ⑷ 재정경제면 개혁 ⑸ 군제 개혁 이상과 같이 金 嘉 鎭, 安 駉 壽, 兪 吉 濬 등 3인이 중심 이 되어 그 막대한 양의 제도적 설치 개혁하여 甲 午 更 張 의 주동적 역할을 했다. 이는 金 玉 均 이 이루지 못한 우리나라 근대화의 기본을 이루는데 그 공이 크다고 한다. 친일파의 따가운 평가를 받아가며 大 典 會 通 六 典 條 例 를 들어 우리의 자주성을 살려 甲 午 更 張 을 이룬 것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근본이 된 것을 생각할 때 그에 대한 평가에 대하여 인색함을 떠나 너그러워야 된다고 본다. 사실 미국은 프랑스의 三 權 分 立 을 본받고 日 本 은 미국의 三 權 分 立 과 독일의 프러샤 헌법과 프랑스의 나폴레옹 상업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아 전기 3인이 중심이 되 53) 宋 京 垣 梨 大 史 學 科 석사논문 韓 末 安 駉 壽 의 政 治 와 經 濟 活 動 硏 究 對 外 인식과 外 交 대응논지 1993. p.71-84.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207

어 이룩한 甲 午 更 張 에서의 제도 개선은 우리나라 고루한 양반에 의한 봉건제도는 개선 되어 근대화 되는 것이 선진 각국의 흐름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乙 未 참변에 있어서 일본 육군 중좌가 총 지휘하는 대병력의 옹호를 받으며 행동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안경수는 홍계훈이 거느린 1중대 병력을 가지고 대항하다가 홍계훈이 적탄에 쓰러지자 중과부족 시위대가 사기를 잃고 도망치자 안경수 역시 피하였다. 그러나 안경수가 자리를 피한 것은 잘못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홍계훈과 같이 쓰러져야 옳은 것이라는 일부 평가도 있다. 椿 生 門 사건에 대하여서는 서로 어긋나는 증언이 있어 이를 평가하기란 어렵다. 독립협회 구성과 독립문 건립에 대하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서재필 등은 독립 협회를 구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독립문 건립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 어 이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독립문 건립에 대한 여러 가지 설(본 논문 p.15 참조) ⑴ 고등학교 교과서 : 서재필 등 독립협회 구성하였다 ⑵ 서재필 자서전 : 독립협회의 요청을 받고 러시아 건축사의 요청을 받아 설계하였다. ⑶ 大 韓 季 年 史 : 서재필이 독립문을 설계하고 감독하였다. ⑷ 서울 600년사 : 독립문 설계는 독일 공사관에 근무하던 스위스 사람이 설계하고 서양건축업에 고용된 木 手 河 某 가 감독하였다. ⑸ 독립문 건축비 부족한 것을 회장과 부회장이 보를 서 차용하였다. ⑹ 준공식 서재필이 직접 주관하여 6,000여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당일 식사에서 서재필 이 하였다. - (서재필 자서전) 식순에 보면 1 연설 안경수(독립협회 회장) 2 축사 한성판윤 외부대산 조선에 있는 외국인(서재필) 축사를 하다. 이상을 검토해 볼 때 ⑴서재필 등이 독립협회 구성하였다. ⑵항만이 서재필이 단독으 208 안국승

로 하였다. ⑵항은 독립협회 요청을 받고 하였다. 그러나 ⑷항은 서재필이 이름조차 없다. ⑸항 회장과 부회장이 보를 섰다. 항의 식순에서는 항에는 서재필이 한일 연설은 협회장 안경수가 하고 서재필은 외국인을 대표하여 식사를 하였다. 이상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독립협회의 요청에 따라 독립문이 건립되고 정초식 은 서재필이 주관한 것이 아니라 독립협회가 주관한 것으로 해석해야 옳은 것 이다. 독립협회 업무는 회장 안경수 명의로 한 것이 옳다고 판단된다. 건축비 부족금을 회 장, 부회장이 보를 섰다고 하였다. 회장은 안경수이고, 부회장은 위원장 이완용을 지칭 하는 것 같다. 이상으로 보아 독립협회 구성이나 독립문 건립은 독립회장 안경수의 명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단된다. 서재필은 고문으로 결정권이 없고 자문에 응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더욱 독립회장으로서 안경수의 역할은 독립협회 신문 1호에 안경수의 序 가 있는 것으 로 보거니 1898년 2월 22일 임기 끝나기 5일 전에 상소문을 낸 것이다. 그는 임기가 만료되자 자리에 연연치 않고 후세에 자리를 물려줌으로써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본다. 그는 회장직을 물러나서도 독립협회원의 한 사람으로 富 國 强 兵 을 위하여 독립협회 회원 같이 산업현장에 몸을 던졌고 평화적으로 立 憲 君 主 制 를 실시하여 우리나라의 近 代 국가 를 건설하려다가 목숨까지 바쳐 희생한 것이다. 부언 하면 그는 우리나라의 立 憲 的 君 主 國 家 로서의 近 代 化 를 위하여서는 富 國 强 兵 이 필요하다고 實 事 求 是 산업현장에 독립협회 일원으로서 서재필 등 독립협회 위원과 같이 우리 산업 진흥을 위하여 스스로 몸을 던졌고 立 憲 君 主 制 실현을 위하여 金 玉 均 과 같이 武 力 行 使 로서 이룩하려는 것도 아니요 日 本 과 같이 수천 명의 피를 흘려 이루고자 한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209

것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실행하려다가 실현을 보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그는 평소에 親 日 이 아닌 미국이 프랑스를 본받고 일본이 미국과 독일, 프랑스를 본 받은 것과 같이 近 代 化 된 일본을 본받고자 한 것이 安 駉 壽 의 근본 정신인 것이다. 이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理 解 하리라 본다. 끝으로 安 駉 壽 의 愛 國 忠 誠 을 다하다가 목숨마저 바친 것으로 보아 그는 韓 末 政 治 的 混 亂 期 에 있어서 甲 午 更 張 과 獨 立 協 會 그리고 獨 立 門 건립으로서 우리나라 近 代 化 실현을 위하여 主 動 的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특히 立 憲 君 主 制 를 실현하여 우리나라 근대화 국가를 이루고자 목숨마저 바친 우리 安 城 이 낳은 뛰어난 歷 史 的 人 物 이라는 것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210 안국승

附 錄 안경수의 略 歷 1853(철종4) 1876(고종13) 1884(고종21) 1887(고종24) 6월 10일 京 畿 道 安 城 에서 出 生 武 科 급제 일본의 岡 山 縣 에서 방직기술을 學 習 하고 卒 業 윤 4. 20 통리교섭사무아문주사에 임명됨 6. 8 駐 日 飜 譯 官 1890(고종27) 10. 7 전환국방판 10.18 壯 衛 營 領 官 1892(고종29) 1 月 別 軍 職 4 月 竹 山 府 使 12.21 전환국 방판 1893(고종30) 1894(고종31) 富 平 府 使 7.24 右 邊 捕 盜 大 將 7.27 군국기무처위원 7.30 惠 上 公 局 堂 上 8. 7 한성판윤 겸 경리사 8.15 경무사 8.18 형판 8.19 공무아문협판 12.17 탁지부협판 1895(고종32) 4.25 탁지부협판 6. 6 경무사 8.10 副 將 겸 軍 部 大 臣 8.11 탁지부대신 임시서리 10.8 免 官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211

10.12 중추원 1등의관 11.28 춘생문사건 가담 12.30 춘생문사건 관련으로 笞 1백, 징역 3년의 刑 을 받음 1896(건양원년) 2.11 특방, 특면징계, 경무사에 임명됨 2.22 중추원 1등의관 7. 2 독립협회 창립과 함께 초대회장이 됨 1897(건양2) 5. 7 강원도 관찰사 5.18 강원도 관찰사직을 사임함 5.31 중추원 1등의관 1898(광무2) 2.27 독립협회 회장 임기만료로 교체됨 3.14 경기도 관찰사 3.31 경기도 재판소 판사 겸임 4. 7 황해도 관찰사 4.18 황해도 재판소 판사겸임 5. 4 황해관찰사 사직소 제출함 6.21 황해관찰사 免 官 6.23 중추원 1등의관 8.23 독립협회에서 출회됨 10.2 일본으로 망명 1900. 6. 5 일청한 동맹론 발표 1900(광무4) 2. 7 인천으로 귀국함 5.28 권형진과 함께 처형 순국함 竹 山 安 氏 大 同 譜, 高 宗 實 錄, 統 署 日 記, 舊 韓 國 官 報, 大 韓 季 年 史, 獨 立 新 聞, 皇 城 新 聞 을 참조하여 작성함. 212 안국승

<참고문헌> 1. 梅 泉 野 錄 2. 주한일본공사 기록 3. 안경수 도서 4. 조선왕조실록 5. 일성록 6. 승정원 일기 7. 한국화폐사 8. 愼 鏞 厦 新 版 獨 立 協 會 硏 究 9. 柳 永 烈 大 韓 帝 國 期 의 民 族 運 動 10. 신용하 독립협회와 개화운동 11. 震 檀 學 會 韓 國 史 現 代 篇 12. 車 河 淳 西 洋 史 13. 笠 原 一 男 祥 說 日 本 史 硏 究 14. 竹 山 安 氏 大 同 譜 (4~5권) 15. 論 文 梨 大 史 學 科 宋 京 垣 석사논문 韓 末 安 駉 壽 의 政 治 經 濟 活 動 硏 究 1993년. 初 代 獨 立 協 會 長 安 駉 壽 의 活 動 에 대한 硏 究 213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신 일 균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目 次 I. 서론 1. 연구의 필요성과 방법 II. 가평지역의 특성 1. 지정학적 특성 2. 역사적 군사적 특성 3. 가평지구의 전략적 위치 III. 본론(한국전쟁 중 가평지구 전투개요) 1. 민병대의 가평지구 전투(1950, 11월 16일 ~24일) 2. 육군 제5사단의 가평지구 전투 3. 육군 제5, 6사단 4월 25일 가평전투 4. 영연방 각국의 참전 5. 육군 제6사단의 용문산 전투 6. 미 제213야전포병대대의 참전 7. 미 제40사단의 참전비가 된 희망탑 IV. 결론 집필자 : 신일균 가평문화원 4 5대 원장 가평의 지명과 유래(상. 하권), 6.25 한구전쟁 중 가평지구 전투사, 가평의 금석문집, 가평의 초등교육 100년사, 가평의 중등교육 50 년사, 가평의 얼과 인맥 등 편찬 출간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15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과 방법 1) 연구의 필요성 가평지구에는 한국전쟁에 관련된 참전비가 한국군 관련 2개, 유엔군 관련 5개, 기타 3개 등 10개가 있고, 이곳에서는 매년 관련 국가나 참전단체와 기관에서 주관하는 기념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6월이 되면 각종 매스컴에서 이곳 참전비에 관련된 특집보도를 하고 수도권 일대에서 주말이면 이곳 자연경관을 즐기려는 관광객이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다. 그러나 세계평화와 자유 수호를 위하여 알지도 못한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조국의 부름을 받고 이 땅에 와서 고귀한 피를 흘릴 UN군 장병들이나 한국군 장병들의 무용담을 실감하기에는 안내판은 너무나 빈약하다. 외지에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고사하고 이곳에서 성장한 전후 세대들에게도,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들의 악전고투한 무용담과 별 차이 없는 과거사로 인식되는 것이 현실이다. 관련 자료가 산재해 있고, 방대한 자료로 일반에게 보급되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여, 조국의 독립과 자유 수호를 위하여 고귀한 피를 흘린 호국영령들과 유엔군 장병들의 숭 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전사 자료를 간략하게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겨, 전후세대들에 게 호국안보의 한 교재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본 연구를 추진하였다. 2) 연구방법 각 참전비가 건립된 본군의 지정학적 역사적 특성을 개관하고, 각 참전비 등을 답사 하여 건립취지(안내문 등)나 규모, 건립 경위 등을 조사하고, 그에 관련된 전사 자료를 조사하여, 요약정리하고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진과 함께 연대 순( 日 記 式 ) 으로 편집 하고자 한다. 216 신일균

Ⅱ. 가평지역의 특성 1. 지정학적 특성 가평( 加 平 )은 한반도 지도에 X자를 그릴 때, 그 교차점에 해당하는 중심부에 위지한 다. 푸르고 맑은 북한강( 北 漢 江 )이 소리 없이 서남으로 유유히 흐르며, 경기도( 京 畿 道 ) 와 강원도( 江 原 道 )의 천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38 선에 위치한 경기도 최고봉인 화악산( 華 岳 山 : 경기 5악의 하나, 1468)의 동북줄 기( 鷹 峰 1436, 燭 坮 峰 1125, 蒙 德 山 680, 加 德 山 858, 北 倍 山 867, 鷄 冠 山 665, 月 頭 峰 157)가 화천군, 춘천시와의 접경에 위치하여 도계를 이룬다. 화악산에서 서북쪽으로 원통산( 圓 通 山 567), 청계산( 淸 溪 山 849), 강씨봉( 姜 氏 峰 830), 국망봉( 國 望 峰 157), 석룡상( 石 龍 山 1135), 운악산( 雲 岳 山 936)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포천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경기 5악 중의 하나인 운악산 남쪽으로 주금산( 鑄 錦 山 814), 축령산( 祝 靈 山 879) 등이 남양주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남쪽에는 용문산( 龍 門 山 1157)이 양평군과의 경계를, 그 동북쪽으로 봉미산( 鳳 尾 山 656), 장락산( 長 樂 山 628), 왕터산( 400)이 홍천군과의 경계를, 또 서남쪽으로 증미 산( 仲 美 山 834), 통방산( 通 方 山 650), 화야산( 禾 也 山 755)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양평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가평군 전체가 높은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는데다가, 화악산에서 서남쪽으 로 명지산( 明 智 山 1267), 연인산( 戀 人 山 1069) 우정봉( 906), 매봉( 928), 대금산 ( 大 金 山 704), 청우산( 淸 雨 山 619)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있고, 연인산( 戀 人 山 )에서 장수봉( 879), 노적봉( 869), 옥녀봉( 417)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등, 여러 갈래의 크 고 작은 산줄기가 관내를 여러 구역으로 갈라놓고 있다. 전체면적은 경기도에서 양평군 다음으로 넓은 면적(845km 2 )이지만, 산림면적이 78%를 차지하여, 경지나 주거주역으로 이용되는 면적은 좁은 지역이다. 이들 산맥사이를 가평천, 조종천의 2대 하천이 5개읍 면을, 미원천이 설악면을 관통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17

하면서 여러 계곡의 지류를 모아, 북한강으로 유입하면서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남북으 로 있는 통로의 구실도 담당한다. 또 홍천강은 또 하나의 강원도와의 경계를 이루며 북 한강으로 합류한다. 이들 산과 계곡, 하천과 강이 조화를 이루어 자연 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산세 가 수려하고 예로부터 밤과 잣, 꿀과 산채, 두태( 豆 太 ) 등, 산지에서 생산되는 토산품이 유명한 고장이다. 가평은 수도 서울(64km)과 춘천(28km)을 잇는 중간지점에 있기 때문에 육로는 경춘 국도(46번국도)나 경춘선이, 수로는 북한강이 동서를 잇는 운송의 수단으로 활용되어, 서울과 춘천, 나아가서는 강원도를 잇는 관문의 역할을 하여 왔으며, 푸른 산, 맑은 물, 깨끗한 공기가 어울리는 3청의 고장이 수도권 시민의 휴식처로, 국민 관광지로 애용되 는 곳이다. 더구나 2009년에 개통된 경춘 고속도로와 2010년 개통된 경춘간 전철이 이 지역을 수도권의 1일 생활권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2. 역사적 군사적 특성 하면 현리에는 3국시대의 산성터가 남아있고, 국민 관광단지로 애용되고 있는 대성리 는 신라의 북한강 기지인 화랑포라는 지명이 있다. 또 용문산은 진흥왕 때 상비군을 주 둔시켜, 남. 북한강을 통제하여, 3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던 곳이다. 또 고려 말 고종 40년(1253년), 몽고군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축조한 함왕성지가 아 직도 남아있다. 용문산은 조선조 시대의 왜란과 호란 그리고 구한말의 의병과 승병들이 활동 근거지가 삼았던 곳이다. 가평읍 승안리 용추계곡 상류에 있는 전폐는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의 군대가 머물 었다는 전설과 왕후 강씨를 유폐하였던 고장이라는 전설이 있으며, 강씨봉은 유폐된 왕 후 강씨가 궁예와 왕자를 그리워하며, 철원을 바라보기 위하여 자주 올라간 봉우리에서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적목리 산 위에 산성을 축조하고 난을 피 했다고 하는데, 현재 그곳에는 도성재(적목~논남)라는 지명과 성곽의 흔적이 남아있으 218 신일균

며, 공민왕이 산 정상에 올라가 송경(개성)을 바라보았다는 국망봉이 있다. 가평읍 승안리의 옥녀봉 남쪽 자락을 자리터 라고 하는데, 이것은 군대가 진을 치는 터, 즉 진대( 陳 垈 )가 와전되었다는 말이 있고, 밤나무도 팔진도법에 의거하여 식재( 植 栽 )하였기 때문에, 밤에 이곳을 잘못 들어가면 밤새도록 헤매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빠 져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가평읍의 보납산도 한말 춘천과 가평지구의 의병들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치른 곳으로, 도계에 있는 줄길리(개곡리)는 한말 의병들이 일본군을 죽이리라는 다짐을 한 것이 와전 된 것이라고 한다. 3. 가평지구의 전략적 위치 가평은 38 선상의 접경지대로 한국전쟁 전에도 자주 피아간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하 였던 곳이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북한군이 침공하여 6월 26일에는 이미 적치 하 에 놓이게 되었고, 9. 28 수복과 10월 1일 38 선 돌파에 이은 북진 작전 등이 숨 가쁘 게 전개된 과정에서도, 가평은 10월 4일에야 수북 되었다. 북진 통일이라는 목표달성을 위하여, 수복 직후 치안 행정은 경찰에 일임되고, 군대 는 패주하는 북한군 섬멸과 북한 수복에 전력을 경주하여, 평양, 원산을 지나 압록강 초산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다. 그런데 10월 중순경, 아군의 정예부대들이 압록강 두만강 국경지대를 향하여 진격하 고 있어, 수도권에는 이렇다 할 병력이 없는 틈을 타, 양구 방면으로 패주하던 부대는 그 진로를 차단당하고 양구 산악지대에 약 3,000명이 집결하여, 양구 춘천지구에서 준동하다가, 11월 23일에는 제2군단 10사단 27연대라는 완전한 정규부대로 재편되어 아군과 대치하였다. 중공군의 개입이 확실해 지자 사기가 오른 이들은 아군의 최정예부대가 국경선 진출 을 목전에 두고 중공군의 대공세에 악전고투하고 있을 때, 11월 중순 수도 서울을 위협 하며 춘천 가평지구로 침공하여 제2의 전선을 형성하여 1. 4 후퇴까지 수도권을 위협 하였던 것이다.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19

아군 측은 당초에는 패잔병들의 생존을 위한 노략질 정도로 알고 전투경찰 병력으로 대응하다가 춘천 가평이 그들에게 점령되는 사태가 벌어져, 이를 재탈환하기 위하여 낙 동강 전선의 잔적 소탕작전을 수행하던 제5사단을 급거 이동시켜, 가평 춘천 탈환전을 전개하게 한 곳이다. 1.4 후퇴 후 재차 반격하기 시작한 아군과 소위 중공군의 춘계 1차 2차 대공세가 전 개된 격전지가 바로 용문산과 화악산 사이에서 전개된 격전이다. Ⅲ. 본론(한국전쟁 중 가평지구 전투개요) 1. 민병대의 가평지구 전투(1950, 11월 16일 ~24일) 1) 방위군의 창설 1950년 10월 20일 경, 경찰이 100여 일의 적치( 赤 治 )하에서 결사 항전을 한 반공단체 들의 협조를 얻어, 적색분자나, 이적 행위자를 색출하고, 패잔병들을 생포하는 등, 치 안유지에 진력할 무렵, 정부에서는 향토방위대의 창설령을 발동하여, 각 읍 면 동 단 위로 향토방위대를 편성하였는데, 가평군 향토방위대는 특별 제3사단(사단장 김연상 중 령) 경기도 제7지편대로 편성되었다. 支 編 隊 長 申 庚 均 ( 前 靑 防 隊 長 ), 부관 鄭 三 得 ( 前 訓 練 部 長 ), 중대장 張 好 錫 ( 工 作 隊 中 隊 長 ) 등이 중심이 되고, 대한청년단에서 선발하여, 교육을 받은 13명의 방위소위가 대 원들의 교육과 훈련을 맡았으며, 적치( 赤 治 )하에 반공산악회, 결사대 등을 조직 반공 투쟁을 하던 청년 약 200명을 전투중대로 편성하여, 노획한 각종 화기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정규 군대에 별 손색이 없었으며, 사기( 士 氣 )면에서는 정규군을 압도하였다. 1950년 10월 30일경에는 그 동안 관내에서 생포한 북한군 패잔병 600여명을 서울운동 장으로 호송하여, 성동경찰서에 정식 인계하고,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의 표창과 부상을 받았다. 220 신일균

2) 민병대의 참전 (1) 용소목 전투 용소동은 북면 적목리 거릿내(삼거리)에서 북쪽으로 약 4km 지점에 놓여있는 화악산 아래 부락의 소지명인데, 일명 용수목(관광명소)이라 부르는 마을이다. 1950년 11월 13일 이 마을에 밤이면 무장공비들이 내려와 주민을 괴롭힌다는 긴박한 보고가 들어왔다. 적목리에 나타난 적의 숫자가 불과 10여명 정도라는 보고에 의하여 경찰특공대 1개 분대와 방위군 1개 분대 그리고 북면 학도의용대와 지역 방위대를 동원 하기로 구체적인 계획을 확정한 지휘본부는 이튿날 9시 트럭을 이용하여 적목리로 떠났 다. 이때의 총지휘관은 보안과장이었고, 향토방위군은 부관이었던 정삼득이 지휘를 맡 았다. 적목리 거릿내 삼거리에 도착해보니 향토방위대 대원 10여명이 황덕 불을 피어놓 고, 토벌부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북한군 출현의 자세한 사항을 보고 받고, 곧이어 4대의 참모들이 모여 작 전계획을 세웠는데, 청년단과 학도대는 우측능선을 타고, 용수목에 이르기로 하였으며, 토벌 경험들이 있는 방위군은 중앙의 도로를 통하여 정면에서 진격하기로 하였다. 중앙 으로 진격해 올라가던 방위군이 1.5km전방에 있는 가림마을에 이르러 적의 동태를 살 펴보았으나 아무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빈집이 있어 들어가 쉬고 있는데, 밖에 세워 둔 보초병이 들어와, 용수목 쪽에서 수상한 두 사람이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전 대원이 밖으로 나와 잠복 중, 적군의 척후병 두 명이, 하나는 장총을 들고, 또 하나는 따발총 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방위군이, 길옆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를 생포하는데 성공 했다. 이들을 문초한 결과, 그들은 북한군으로서 국군의 후방에 들어, 북으로 후퇴치 못한 패잔병이었으나, 도마치(가평과 사창리 연결고개)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서울로 진격해 들어갈 계획을 세운, 1개 사단의 전투부대라는 엄청난 사실을 확인했다. 생포한 척후병을 거릿내로 호송시키고, 계속 진격하여 용수목 부락에 다다르니, 부락 입구 개울가 잣나무 밑에 서있는 보초병 둘을 발견하여, 이들을 사살하고, 계속 진격해 들어가려는 찰라, 북한군 10여명이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21

방위대는 즉시 응사( 應 射 )하면서 계속 진격해 들어가니, 초소 안에 있던 적군들이 도 망쳐 가기 시작했다. 적군들은 보초만 세워놓고 태평히 있다가 뜻밖에 기습을 당한 듯 절골 쪽을 향하여 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수효가 엄청난 사실에 방위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략 800여 명이나 되어 보이는 북한군들이 절골 쪽 콩밭 등지로 뛰어 오르는 뒤를 향하여, 사정없 이 총격을 퍼부으니, 그들은 이때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놓고, 작은 능선을 넘어 숨어 버리고 말았다. 적군들이 머물고 있던 초소로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그들이 버리고 간 따발총 1정과 소련 제 장총 1정이 있었고, 상위에는 대형지도가 놓여 있었으며, 지도에 는 가평까지의 진격 침투도를 그려 놓은 게 보였다. 이때 오른편 능선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방위대원들은 학도대와 청년단이 도착하여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믿고, 밖으로 나가 공포 3발을 발사하니, 이때 양 능선 쪽에서 방위대원들이 쉬고 있는 곳을 향하여 일제히 사격을 감행하는 것이 아닌가? 적군들은 38교( 橋 ) 우측 골짜기인 조무락골에 머물고 있던 잔류 패잔병들이었는데, 이들은 방위군의 숫자를 몰라, 그곳에 숨어 있다가 능선 위에서 이를 확인하고 공격을 시작해 온 것이다. 방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대항해 나갔다. 그러나 대열 을 정비한 절골 쪽에 있던 북한군마저 이때를 놓칠세라 왼편 능선에 올라서서 집중적인 총공세를 취해왔다. 어느 틈에 내려왔는지 누런 인민군복을 입은 북한군들 수 백 명이 용소동 개울을 건너오는 것이 보였다. 방위군은 적군들이 밀려오는 쪽을 향하여, 계속 사격을 감행해봤지만, 워낙 큰 숫자에 밀리고 있었는데, 실탄마저 떨어지게 되니, 부득 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밤 도보로 목동까지 철수한 것은 새벽 2시가 지나서 였다. 이튿날 아침 향토방위군 제7대 지편대장이 북면으로 올라와 자세한 보고를 받고, 다 시 가평으로 연락, 방위대 180명의 지원을 받아 도대리로 출동해 올라가니, 경찰과 학 도대들이 주둔하여 벌써 북한군들과 교전을 하고 있었다. 이날 밤, 전 공격대들은 적들 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리다가, 결국 후퇴하여 제령리 쪽에 방어선을 설치하였는데, 밤 10시경 또다시 교전이 벌어져 처절한 공방전을 전개해야 했다. 한편 도대리 관청부락에 머물러 있던 북한군들은 애기고개를 넘어 소법리로 빠져 나 222 신일균

와 목동리 서낭당 고개에 이르렀고, 그들은 다시 목동부락에 내려와 초가에 불을 지르 고,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여 목동리가 적군들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때까지 제령리에서 공방전을 벌리던 방위군 경찰 학도대는 후퇴로가 차단되었음 을 무전을 통해 듣고, 부득이 제령리 화랑보를 통하여 후퇴하는데, 적군들은 뒤쫓아 오 며 중화기로 공격하여 오기 때문에, 힘을 다해 개울을 건너서 꽃넘이 고개를 넘어 후퇴 하였다. (2) 가평시가지 전투(11월 21일~23일) 1 밀려오는 공동묘지 북면을 적의 손에 넘겨주고 가평 본대로 되돌아온 방위군 경찰 청년단 학도의용 대는 가평읍의 사수를 위하여 전열을 재정비하여, 경계태세에 들어갔고, 치안책임 사령 관인 가평경찰서장은 각대의 참모들을 서장실로 불러놓고 작전계획 수립에 만전을 가하 고 있었다. 향토방위군의 주력이, 북면 용수목에서 적에게 밀려 가평으로 되돌아 온지 6일 만인 1950년 11월 21일, 이날은 아침부터 이슬비가 처량하게 내리고 있었다. 모든 특공대와 방위대원들은 차디찬 비바람을 피해 담당지역 민가에 들어가 쉬고 있 었으며, 이날도 하루가 다된 듯 어두워 오는데도 북한군들은 기척도 없었다. 이때 가평에는 중무기로 무장한 방위군 정예대원이 200여명이나 되었고, 서울에서 내 려온 경찰지원대가 100명, 인천에서 올라온 경찰(66대)이 100명, 대한청년단이 80여명, 그리고 학도대가 100여명, 가평경찰서 소속 경찰관이 120명, 도합 700여명의 병력이 편성되어, 총사령관인 가평경찰서장(경감)의 지시대로 가평읍 시가지를 중심으로, 보납 산에서부터 북부 옹기점(계량내)까지는 방위군이 지역을 전담하고, 옹기점(계량내)에서 부터 공동묘지까지는 경찰특공대, 공동묘지에서부터 바우메기(대곡리)까지는 청년단과 학도대가 공동으로 방어한다는 기본계획이 세워져, 각대는 책임지역에서 방어태세로 돌 입해 있었다. 이날 밤 10시경 공동묘지 쪽에서는 때 아닌 노래 소리가 구성지게 흘러오고 있었으 니, 다름 아닌 북한군의 여군들이었고, 그들은 아리랑과 유격대 노래, 인민군노래 등이,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23

가평읍 시가지 쪽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작전본부는 그야말로 비오는 달밤에 적들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 지 못하여 날이 밝을 때까지 진지방어만을 긴급지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밤 11시경 마장리 쪽에서부터 횃불을 든 인민군들이 와! 와! 소리를 내며 계 량내 쪽으로 몰려오는 것이 보여, 방위군은 반격태세로 들어가 계량천을 사이에 두고 교전을 벌리게 되었으며, 일부 경찰병력이 방위군을 지원하려고, 이동하는 찰라 현 가 평초등학교 뒷산과 공동묘지 쪽에서 횃불 100여 개가 나타나, 군가를 합창하며 내려오 고 있었으니, 가평은 완전히 긴박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공동묘지 쪽에서 내려온 적군들은 어느 사이에 가평역 뒤에 이르러 불을 밝혀 놓았던 가평역을 기습하여 유리창이 부서지는 처지였고, 보납산에서 그들이 쏘는 반격포가 읍 내 곳곳에 쏟아지고 있었으며, 경찰병력은 대곡리 논들로 피하여 교전하는 바람에 향토 방위군은 포위상태에 들어가 버렸다. 방위군이 시내로 밀려나오자 이미 시내까지 내려 온 적들과 마주쳐 처참한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비오는 밤인지라 아군인지 적인지 분간 할 수 없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때 청년단과 학도의용대는 방위군이 포위에 들었음을 알고 계속 지원사격을 가하여 방위군은 복지관 앞을 지나 대곡리 논들까지 무사히 도착하였으며, 경찰과 학도의용대 청년단은 상색을 지나 상천으로 철수해 갔고, 방위군은 달전리 밤벌(새말)을 지나 북한 강을 건너 춘성군 남면 방하리 문의골로 들어갔다. 2 반격작전 달전리 일부와 방하리에서 뜬눈으로 지새우다 새벽을 맞은 방위군은 반격작전을 계획 하고 일단 달전리 밤벌에 집결했다. 아침 5시가 조금 지났는데 이날따라 안개가 몹시 내려 1m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선 수색 선발대로 중대장 장호석이 직접 나서고, 뒤따라 달전리 유경수가 나섰다. 이들은 달전리에서 대곡리로 가는 도중 오목내 다리에서 북한군 수색병 2명을 발견, 안개를 이용하여, 곁에 바싹 다가가 격투 끝에 생포하여 심문한 결과, 그들은 1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고, 앞으로 7일 이내에 서울까지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224 신일균

이 포로들은 본대로 호송하고, 다시 대곡리 비석거리(삼거리)까지 갔다가, 본대로 되 돌아간 수색병(장호석, 유경수)은 즉시 읍내로 진격할 계획으로 일열 횡대로 3m사이를 두고 대곡리 논들을 지나 무사히 역전에 이르렀고, 역 철둑에 올라가 엎드려 가평 읍내 를 바라다보니 구 버스 정류장 부근에는 5~6명의 북한군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총을 멘 채,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고, 그 이외에는 아침이라 그런지 비교적 조용한 분위 기였다. 이 집 저 집에서 아침 연기가 오르는 것으로 보아 조반들을 지어먹는 것 같이 보였다. 이때 최전방에 나가 적의 동태를 살피던 방위군 소대장이 철교 밑을 빠져나가 안개 속을 헤치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방위대원들은 철둑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만일에 경우 발사태세로 희미한 안개 속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 암호! 암호! 적군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들의 암호를 알 턱이 없다. 소대장이 잠깐 우물 쭈물하고 있는 사이 적들은 희미한 안개 속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소대장 이 시장 쪽으로 몸을 숨기가 무섭게 철둑 위아래에 엎드려 있던 방위군은 일제히 집중 사격을 가하니, 그들은 당황한 나머지, 사거리 군청 쪽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방위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 밀어붙여 기습해 들어가니, 적군들은 아침밥 을 지어놓고, 먹지도 못한 채 달아나, 집집마다 밥 냄새가 진동했고, 너무 급한 나머지 차바퀴 밑에 숨어 있다가 사살되기도 했고, 마루 밑 다락 속 광 전 매서에 쌓아둔 빈 담배상자 속에까지 숨어 있다가 생포되기도 했다. 도주한 북한군은 현 가평초등학교 뒷산을 넘어 경반이 쪽으로 달아났고 방위군은 잔 류 북한군을 찾아 집집마다 수색하여 모두 사살 해버렸다. 이렇게 작전을 완료한 후 방 위군 10명이 경찰서에 들어가 가평읍 탈환의 환호로 만세를 부르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 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경찰들은 상천 등지에서 주둔하고 있다가 급거 귀환하여 방 위군과 합류했는데, 이때가 정오 12시 반이었다. 북한군은 아침밥을 지어 놓고 있다가 방위군이 쳐들어오니, 밥도 먹지 못한 채, 불을 지르고 달아나, 불은 끄는 사람이 없는 탓으로, 시가지가 제멋대로 변하였다. 곧이어 학도의용대와 청년단이 들어와 북한군 소탕에 합류하였고, 청평에서 가평이 탈환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방위군이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청평 시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25

민들이 주먹밥을 마련하여 싣고 와서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반이로 달아난 북한군들은 다시 대곡이 사기막 마을 뒷산을 돌아 바위메기 산으로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지휘본부는 즉각 반격을 개시하 여 가평역 뒤로부터 진격, 그들이 점령한 바위메기 뒷산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사살된 북한군이 16명이고, 생포 2명, 60mm 박격포 2문, BR 2개, 장총 11정 등을 노 획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우리 측 대원 3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3 회한의 철수와 고귀한 희생 가평읍을 계속 사수하며, 한편으로는 죽은 대원의 시체를 역 대합실에 임시로 안치하 고 부상한 대원들을 그제야 청평으로 후송시켰다. 벌써 해는 지고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적군들은 활동을 개시해왔다. 또다시 공동묘지 쪽을 뚫고, 가평역을 기습하여 처내려온 것이다. 시내와 계량천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 과 대치하고 있던 향토방위대는 완전히 포위당한 형편이었고, 서울에서 지원 나온 경찰 들은 트럭 3대에 노획한 무기를 싣고 청평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놈들과 대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자 신경균 지편대장은 철수를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3) 반공산악동지회 1 6 25 반공산악동지회전투기념비 위치 : 가평군가평읍 개곡리 산 345 건립년도 : 1999년 4. 25 건립기관 : 가평군 6.25 반공산악동지회 비문 내 고장을 빼앗기지 않고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나를 훌훌히 버린 자랑스런 젊은이들의 업을 기리며 여기 북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강변 옆에 자리한 장승공 원에 전적비를 세우다 붉은 무리의 말발굽이 은혜 받은 우리 강토를 이 고장의 젊 226 신일균

은이들은 바위에 등을 대고 풀로 몸을 가리 면서 맨주먹으로 붉은 무리를 무찔렸다. 이제 그들의 슬기와 용기를 길이 후세에 전 하고자 이 비를 세움에 그 이름 길이 빛날 것이다. 조국의 알찬 번영과 함께 영원히 1999녀 4월 19일 가평군수 이 현 직 2 결의문 세계 연방제국의 공칭 하에 일증 융성하여 자유와 평화에 잠든 대한민국에 야수와 같 은 이북 괴뢰 공산도배들이 6월 25일 불의에 침입하여 국민의 자유와 평화를 파괴하며 살인 인권유린 재산박탈 등 잔악무도한 폭행에 격분한 우리 동지 일동은 역사 깊은 8월 16일을 기하여 세계만방에 빛나는 대한민국의 민족성을 보장하여 자손만대의 건국초석 에 기여 공헌코자 반곤투쟁공작산악대를 조직하여 지방 공산주구, 내무서원, 후방인민 군, 소탕을 결사 투쟁함을 맹세함으로서 적의 후방을 교란케 하는 동시 대중에게 적개 심을 환기시키는데 결사 투쟁을 결의함. 단기 4283년 8월 15일 반공투쟁 공작산악대 일동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27

3 반공산악동지회 조직과 활동 개요 1950년 8월15일 광복절을 기하여 춘성군 남면 방하리 산속에서 피신하며 반공투쟁을 전개하던 가평지구 우익인사 36명과 가정리 방하리 등지에서 항거해온 애국청년 29명 계 65명이 함께 모여 방공투쟁산악회를 조직하고 대장에 이승균, 고문에 유봉상 중대장 에 장호석 등 임원을 선출하여, 정식 무장단체로 발족하였다. 그 후 중대장 장호석이 부대에서 낙오하며 몰래 숨겨 가지고 온 M1소총과 몽동이를 무기로 낙동강 전선에서 38 선을 목표로 기진맥진 찾아가는 북한 패잔병들이 농가를 찾아 식사를 요구하며 휴식하는 틈을 노려 기습하여 사살하고 무기를 하나 둘씩 노획하 여 나중에는 소대규모의 무장을 가춘 큰 무장 세력으로 성장하고 군량 수송 선박을 습 격하여 130여가마니의 쌀을 빼앗고, 청촌 지소를 습격, 부역자들과 내무서원, 보안서원 을 사살하는 등 9. 28 수복까지 많은 전과를 올렸고, 수복 후에는 대한청년단, 향토방 위군 학도대 등의 간부로 재편성하여 가평지구 전투의 민병대 주력으로 전투경찰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하였다. 가평탈환작전은 방위군의 전투개요와 중복되므로 생략한다. (명단, 활동상황 등 상세한 것은 상게서 가평반공투쟁사를 참조바람.) 4) 가평학도의용대참전기 (1) 학도의용대 조직 1 가평학도의용대의 변천 9.28 수복(가평은 10월 4일 수복됨)후 과거 반공학생연맹 을 조직, 반공 투쟁에 앞 장섰던 학생들과 적치( 赤 治 ) 하 부모가 학살, 혹은 납치되어 간 유족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가칭 가평 학도호국단 이라는 간판을 달고, 수복 직후의 선무공작( 宣 撫 工 作 )에 앞장섰다. 후에 학도호국단 은 학교단위의 조직 편제이고, 6. 25 동란 중에는 국방부 이성을 정훈 국장 밑에 손 도심 대장이 이끄는 학도의용대 가 유일한 반공학생단체라 는 것을 통고 받고, 그 휘하로 편입하기로 하고, 국방부 정훈국 학도의용대 가평지 대 라고 개칭하였으나, 약칭 가평 학도의용대라고도 하였다. 군 단위 조직으로 각 면 에 파견대 형식으로 지부를 두고 운영하였다. 시초에는 100여명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228 신일균

행정기관을 돕고, 우익단체들과 협력하여 주로 패잔병 색출에 진력하였다. 후에 적의 재침으로 소개령이 내려지자 학도대에 입대하는 인원이 급증하여 근 300여명이 되었고, 1. 4후퇴 당시 5사단 각 연대에 현지 입대한 대원들도 상당 수 있다. ② 가평학도의용대 참전비 위치 : 가평읍 대곡리 321-1 건립자 : 가평군, 가평의회 건립연도 : 2000년 11월 11일 비문 전우여! 고이 잠드소서! 해방의 감격, 독립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에 6.25 동란! 동족상쟁의 피 바람 몰아치니 단락했던 보금자리가 송두리 채 흔들렸다. 민족의 자유와 가족의 행복이 위협받을 때 새 나라의 동량으로 거듭나려단 학생들도 운의 꿈을 접고 배움의 요람을 떠나야 했다. 자유, 평화 정의의 실현을 갈구하며 세운 대망의 설계도, 비상의 날개도 접어 버린 채 오직 하나뿐인 목숨을 자유 수호에 받쳤다. 에 띤 학생들이 호국영령으로 산화한지 50년! 조국의 평화와 통일, 민족 번영의 서광이 비치니 전우들이 가신님을 기리며 이 탑을 세우노라 2000년 11월 11일 가평군수 이 현 직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29

3 가평학도의용대 참전개요 11월 21일 가평지구탈환 합동작전 때 공동모지전두 등 전투경찰대 및 민병대와 연합 작전을 수행하고, 11월 22일 수동면의 대민보호 철수작전, 23일 빛고개 경계임무 중 격 전, 12월 31일 5사단 철수작전 시 빛고개 경계임무 등을 수행하며 분전하였으며, 그 과 정에서 전사자가 나오는 등 고귀한 희생이 발생하였으며, 각 읍면파견대는 현지 경찰 및 군부대와 연함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와 희생을 냈으나 지면 관계로 생략함. 2. 육군 제5사단의 가평지구 전투 1) 가평 춘천지구 탈환전 (1) 육군 제5사단 전투개항 상술한 바와 같이 낙동강 전선에서 패주하던 북한군 패잔병들이, 북한군 제10사단 27 연대로 재편하여 춘천 가평지구 북쪽 산악지대에서 준동하다가 중공군의 참전이 확실 해 지자, 춘천 가평지구를 점령 수도권을 위협하게 되자, 영주, 지리산, 김천지구에서 잔적 소탕작전 중인 5사단을 긴급 이동시켜 가평에서부터 진격 춘천지구 탈환작전을 전 개하게 된다. 그 개요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육군 제5사단 27연대 11월 25일 OP(관측소)를 상천역 부근 (호명산 록)에 위치하고, 제1대대는 예비대로 연대 CP(지휘소)에 배치하고, 제2대대는 261(상천역 동북방 5.5 km; 큰 메꼴~갑바 지꼴~이화리)에서 적과 교전 후, 계속 전진하고, 제3대대는 상천역 동북방 297(상천 역 동북방 3.5km)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11월 26일 CP를 초옥동(상천1리: 만국동)으로 이동, 제1대대는 연갈리(상색리)에, 제2 대대는 261(상천역 동북방 5.5 km; 큰 메꼴~갑바지꼴~이화리)에서 전진, 이화리 고 개(가평 서남방 2km)를 점령하고, 17시에는 장승고개, 한산머루(하색리)를 점령, 제3대 대는 상천 1리(큰 메꼴)를 출발, 중색현리(빛고개)를 통과, 17시 말구리(대곡4리:사그 230 신일균

막~경반리)를 점령 확보 중이다. 11월 27일 OP를 하색리 경유, 가평 후방고지(가평군청 뒷산)에 진출시켰다. 적은 춘천 방면으로 도주하고, 아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훈련된 공격대 약 250 명과 소총으로 무장한 보병대 약 800명이 전선에 배치되었으며, 한편 촌락을 습격, 식 량을 약탈하여, 저항을 기도하고 있으며, 적 제28연대는 거림천(적목리 명화동 거린내: 용수목과 논남의 분기점 마을)에서 적목리로 병력을 이동 중이다. 27연대 1대대는 좌(불기산 줄기)~우(상천 1리 큰 메꼴)를 잇는 선에서 공격을 개시하 여 경반리로, 제2대대는 제1대대와 같이 행동을 개시하여 가평 죄측 고지(늡산: 자라목 고개)를 점령하고 계속 공격 중이다. 3대대는 마루산(읍내5리 엽광촌~개곡리 소재)을 점령하고 춘천행 도로(줄길리: 도계)를 차단 경계중이다. 11월 28일 제1대대는 병현리에서부터 좌(개곡리)~우(달전리 장승고개)를 잇는 좌측에 서 290을 향하여 진격 중이다. 제2대대는 보납산(읍내8리)을 점령 후, 북한강을 도하 서천리 (해꼴)를 향하여 수색 작전 중이다. 재3대대는 마루산(마장리~목동2리) 동쪽 약 1km 지점(개곡리)로부터 노루목 고개(마장리~ 이곡2리)를 향하여 진격 중이다. 11월 29일 1대대는 좌(노루목 고개)~우(줄길고개: 개곡리)를 있는 선에서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월두봉(안보리)을 향하고 있다. 제2대대는 북한강을 도하, 서천리 문이골~다 락터를 경유하여 서천리 도치골에서 계속 교전 중이다. 제3대대는 225(마루산 부근으 로 추정)로부터 줄길리로 이동, 현재 예비대로 대기 중이다. 중간 생략 12월 2일 잔비의 거점인 춘천을 목표로 하여 연일 악전고투하여 온 사단은 금일 09 시에 춘천 탈환의 임무를 달성하고 계속 도주하는 적을 추적 하였다. 2 육군 제5사단 36연대 11월 25일 OP를 상천역 서쪽 2km(하천1리 유답촌: 속칭 버들습말) 지점에 설치하고 제1대대는 OP북방 2km지점 (상천 3리 수리재)에서 적과 교전 후 그 지점을 확보하고, 제2대대는 상천역 서남방 2km지점 (하천 1리 유답촌~능골 주봉 314)에서 적과 교전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31

후 확보 중이고, 제3대대는 청우산 남쪽 2km(덕현리 주정동 고개)에서 적과 교전 후 계속 전진하여 462 북쪽 1km지점에 도달하여, 그 지점을 확보 중이다. 11월 26일 OP를 최골 절터 또는 돼지우물(상천3리)에 설치하고, 제1대대는 연대 CP 에 배치하여 불기산(상천~두밀리)을 공격 중이며, 제2대대는 수리현(상천3리)을 수색한 후, 무명고지(수리봉: 상천 3리)를 점령하고 계속 공격하여 불기산을 점령 확보 중이다. 제3대대는 청우산(덕현리)를 경유 은고개(대보리~두밀리, 덕현리 북방 2km)를 점령하 고, OP를 이곳에 설치하고, 계속하여 상삼의곡(윗삼일 계곡)과 수리봉(두밀리~경반리) 을 향하여 진격 중이다. 11월 27일 CP를 상천리를 경유, 중색현리(빛고개)에 진출 설치하였다. 1대대는 좌(하 색2리: 한산머루)~우(상천 1리: 초옥동)를 잇는 선부터 공격 개시, 경반리를 경유, 수 정봉(승안2리 우무동)을 점령 후 옥녀봉(승안리)을 향하여 공격 중이다. 제2대대는 제1 대대와 같이 공격을 개시하여, 자리대(자릿터: 승안 1리)를 경유, 옥녀봉을 향하여 공격 전진 중이다. 제3대대는 제1 2대대와 병행하여 선인봉(승안리~백둔리 소재)을 경유 장천동을 점령한 후, 옥녀봉을 향하여 공격 전진 중이다. 11월 28일 OP를 가평에 설치하고 제1대대는 옥녀봉과 마루산 좌단을 점령 후, 연대 예비대로서 가평에 배치하였다. 제2대대는 좌(적목리 거린내)~우(엽광촌)를 있는 선으 로부터 이곡리(평나무 고개~주장골)를 향하여 공격 진전 중이며, 3대대는 제2대대와 병행하여 공격 중이다. 11월 29일 제1대대는 예비대로 가평에 위치하였다. 제2대대는 좌(노루목고개)~우(능 머루)를 있는 선에서부터 율미촌(율미마을 성안재 고개: 개곡2리)을 공격 점령 후, 싸리 재(목동 2리~안보리)를 향하여 공격 중이다. 제3대대는 이곡1리(평나루 고개~주장골) 를 공격 점령 후, 목동 2리 성황당 고개 남쪽 산을 향하여 공격 중이다. 11월 30일 제1대대는 목동에서 신당리(속칭 새댕이: 화악 1리)를 향하여 공격을 개시 하였다가 연대 예비대로 CP지점에 위치한다. 12월 1일 제1대대는 좌(화악 2리 신당리)~우(목동2리 성황당 고개)를 잇는 선으로부 터 공격을 개시, 신당리를 점령하고 계속 전진하여 좌(화악2리)~ 우(지암리)를 잇는 선 232 신일균

을 확보 후, 몽덕산(화악2리~지암리 오월리)을 공격 중이다. 제2대대는 안새당이를 향하여 공격하다가, 방향을 전환하여 좌(목동2리 멱골)~우(목동2리 싸리재)를 잇는 선 에서 북배산을 공격 점령 후, 가덕산 방면으로 공격 전진 중이다. 제3대대는 연대 예비 대로 개곡리에 위치하였다 12월 2일 제1대대는 몽독산를 점령하고 촉대봉을 공격 중에 있으며, 제2대대는 화악2 리 안새당이와 북배산을 잇는 선으로부터 가덕산을 향하여 공격 중이다. 제31연대는 정 면의 적을 소탕하여 춘천 동북방으로부터 춘천을 공격하여 제27연대보다 약 1시간 늦게 춘천에 돌입한 후 27연대와 합류하여 일부는 춘천 경비에 임하고, 주력은 양구 방향으 로 적을 추격 중에 있다. 한편 아군은 춘천을 점령 후 계속 북진하여 가평 북쪽의 지암리와 화천 일대에서 계 속 적을 소탕하였으나, 적의 집요한 공격으로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공방전만 계 속 되었다. 3. 육군제5, 6사단 4월 25일 가평전투 육군 제5, 6사단은 육군 제1군단 예하 부대로 5사단은 상기 [2-1)] 가평 춘천 지구 탈환전에서 북한군 제10사단과 치열한 공방전 끝에(1950.11.23~12.30) 가평 춘천 지 구를 탈환한 전공을 세웠다. 제6사단은 1951년 4월에 감행된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 때 사창리 지역에서 국군 제6사단의 전선이 돌파되어 이 지역으로 침공한 중공군 제20 39 40군이 가평방면으로 돌파구를 확대하려 하였다. 이때 제6사단은 가평 북한강을 배수진으로 삼아 일대 반격전을 준비 중이었고, 적은 4월 25일 03:00 가평과 청평간의 주보급선을 차단하려고 야간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2개 연대(제7 19연대)는 빛고개 진지를 고수하고 치열한 격전을 전개, 적에게 많은 피해를 가하자 07:30부터 적은 퇴각 하기 시작하였다. 좋은 기회를 잡은 2개 연대는 적을 추격하여 가평 서북쪽 7km까지 진격해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그 일대 진지를 편성하였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33

전적비문 중국 제39군 및 제40군과 북한 10사단의 적과 대 전한 아군 재5사단 및 제6사단은 미 9군단과 함께 치열한 적의 포연탄우를 무릅쓰고 싸운 결과 이 지 구를 최후까지 확보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하였음 1958. 3. 15 건립기관 ; 육군 제1군단 사령부, 경기도 가평군 4. 영연방 각국의 참전 1) 각국의 참전비 (1) 영연방 참전 기념비 한국전쟁 당시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4개 국 장병들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우리나라에 파병되 어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싸 운 전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전적기념비이다. 영 연방 전투는 1951년 4월 22일부터 4월 25일까지 중 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맞아 호주, 캐나다, 영국군이 북면일대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서울~춘천간 도로를 향해 진격하던 중공군을 막아 한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확보하여 막대한 피해를 막아낸 큰 의미를 지닌 전투이다. 이곳에서 매년 4월말이면 영연반 한국전쟁 참전기념 행사가 열리고,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4개국의 참전용사와 가족, 각국 대사관 직원 등 200여명이 가평을 방문한다. 234 신일균

(2) 호주(Australia) 참전 기념비(북면 목동리) 호주와 뉴질랜드 참전비는 목동리 북배산 입구 성황 당고개에 있다. 후주 참전비는 640평, 뉴질랜드 참전비 는 500평의 대지 위에 조성되어 있으며, 두 비가 마주 보고 서 있다. 호주 참전비는 1983년 12월 27일 가평군 이 세운 것으로 4.6m의 비에는 호주전투기념비 가 가 로로 세워져 있으며, 비 오른쪽으로 전투현황지도가 동 판으로 새겨져 있고, 비 왼쪽에는 자연석 위에 동판으 로 새긴 참전약사가 있다. (3) 뉴질랜드(New Zealand)참전비(북면 목동리) 뉴질랜드 참전비는 1988년 9월 23일 가평군이 세운 것으로 커다란 자연석에 참전을 기념하는 동판이 있으 며 비문은 유엔 헌장의 숭고한 원리를 수호하기 위하 여 한국에서 복무한 모든 뉴질랜드 용사들의 공헌을 기념한다. 라고 명문이 새겨져 있다. 호주는 한국전쟁 에서 311명 사망, 1,230명이 부상하였고, 뉴질랜드는 40명 사망, 7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4) 캐나다(Canada)참전 기념비(북면 이곡리) 캐나다 참전비는 북면 이곡리 도로변에 있다. 500 평의 대지 위에 높이 0.7m의 기단 위에 6.5m의 비 가 중앙에 세워져 있으며, 오른쪽에 참전약사가, 왼 쪽에 캐나다의 상징탑이 세워져 있다. 이 참전비는 1983년 12월 30일 가평군과 유엔 한국 참전국협회가 세웠으며 입구 오른쪽의 기념비석은 2003년 7월 29 일 캐나다에서 휴전 50주년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35

캐나다는 한국전쟁 참전으로 사망 309명과 1,203명의 부상자, 그리고 32명의 실종자가 발생하였다. 이는 캐나다를 비롯한 호주 뉴질랜드와 함께 1차 대전 이후 최대의 피해라 고 한다. 2) 영연방군의 분전 (1) 영연방 제27여단의 분전 영연방 제27여단이, 4월 19일, 군단 예비로 가평으로 남하한지 3일 민인 1951년 4월 23일에 벌어진 이른바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로 발단된 것으로, 동 여단이, 한국전쟁 에서 겪은 가장 큰 규모의 전투이자 또한 큰 영광을 안겨준 격전이다. 전투 전의 개황: 영영방 제27여단이, 4월 19일 사창리 4km 서쪽에서 한국군 제6사단 제19연대에, 전선을 인계한 이틀 뒤인 21일, 미 제9군단은 7시를 기해, 우익 미 제1해 병 사단이, 화천 북쪽으로, 좌익 한국군 제6사단이, 김화방면으로 Wyoming 선을 목 표로 각각 진격하고, 한국군 제6사단 좌측에서는 미 제24사단이 미 제1군단의 우측이 되어 병행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4월 22일 시작된 적의 이른바 제1차 춘계공세에 부딪친 UN군의 공격사단 들은 일단 진격을 멈추고, 일대 격전을 치르게 되고, 김화 남방의 광덕산( 1045)~복주 산( 1112)일대에서, 적의 주력인 중공 제20군 예하 제60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은 제6사 단은, 가평계곡을 따라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동 사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현지에 남게 된 여단의 뉴질랜드 제16포연대도 부득이 가평지역으로 철수하는 혼란을 빚었다. 이처럼 전방 상황이 악화되자, 영연방 제27여단장 Burke 준장은 곧 여단지역으로 들 이닥칠 위기를 직감하였는데, 이 때 군단으로부터 뉴질랜드 연대로 하여금 한국군 제6 사단을 계속 지원하는 한편, 각 대대를 전방에 배치하여 동 사단의 철수로를 확보, 그 의 철수를 엄호하라 는 요지의 작전명령을 수령하였다. 이에 따라 Coad 준장은 뉴질랜드 포병연대를, 가평 10km복방 794(수덕산)부근으 로 급파하는 동시에, Middlesex대대를 794(수덕산: 제령리~ 도대리)로 이동시켜 뉴 질랜드 포병연대를 엄호토록 조치하였다. 이에 여단은 예비로 있은 지 4일 만에, 가평 236 신일균

에서 일대작전을 겪게 되었다. 여단장은 이어 잔여부대의 배치에 착수 가평천 서쪽 677(이곡리: 내촌2km 남쪽) 일대에 PPCLI대대를, 그리고 가평 6km 서쪽 504(죽둔리 동쪽) 일대에 오스트레일리 아군를, 각각 배치하고, Argyll 대대를 예비로 가평부근에 집결시켰다. (2) 오스트레일리아 대대, 뉴질랜드 포병연대의 분전 이 날 전투는 오른쪽 일선에 오스트레일리아 대대의 진지에서부터 먼저 일어났다. 한 국군 제6사단의 주력부대를 우회한 적은, 23일 22시경부터 오스트레일리아 대대의 방 어진지를 탐색하기 시작한 듯이 보이더니, 다음 날 1시 30분경에 이르러 차차 공격기도 가 노골화 되어갔다. 이리하여 전투는, 마침내 B중대 전면에서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죽둔리 -골말(현 북면 사무무소 동북쪽)간의 협로( 峽 路 ) 변에 연해서 동쪽으로 뻗은 산 능선에 배치된 B중대는 1개 중대 규모로 추산되는 적이, 유효사거리권내로 접근하자, 중대의 전화기로 일제 사격을 집중하여, 일단 이들의 최초의 공격을 격퇴하는데 성공하 였다. 이때 B중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동 중대진지 앞 사면에, 미 제72전차대대 1개 소대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삼삼오오로 짝을 지어 계속 남하하는 한국군 제6사단 병사 들을 적으로 오인하였음인지, 당황한 나머지 죽둔리 후방 대대지역으로 철수하고 말았 다. 그 결과 전차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 적은, 재빨리 B중대 우측으로 우회하여 곧바 로 A, C, D 중대의 진지로 공격해 왔고, 이를 격퇴하려는 오스트레일리아 용사들은 결 사적인 저항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심야에 불붙은 공방전은 피아간의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철야 계속되고 일부 적은, D중대 후방에 위치한 대대본부 가까이 까지 침투하여, 일대 혼란을 빚졌다. 날이 밝자, 뉴질랜드 전 포병연대와 미 공군 지원에 힘입어, 전황은 다소 호전되어 가는 기 세를 보였으나, 대대본부와 가평에 이르는 도로를 완전히 감제( 瞰 制 )할 수 있는 고지를 확보한 적은, 끊임없는 파상공격으로 온 종일 대대를 위협하였다. 여단장은 이와 같이 계속되는 적의 강압 속에서 또 하룻밤을 현 진지에서 지탱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 17시경 마침내 대대장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37

이에 따라 대대장은 대대의 일제철수를 시도하였으나, 전차와 포병연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적의 집요한 공격으로 일제 철수가 어렵게 되자, 각 중대별로 각기 중대장들 의 제량에 맡겨, 백주에 각계 철수를 감행한 끝에 예비대인 Midlesexe대대의 진지까지 철수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철수과정에서 대대에 배속되어 있던 미제72전차대대 A중 대는 수많은 전사상자를 후송하기 위하여 11회를 왕복하였다. 이때 여단의 전황을 보고 받은 군단은, 제8군으로부터 군 예비로 있던 미 제1기병사 단 제5연대를 배속 받아, 곧 가평으로 급파하고, 이 연대가 이날 18시 여단지역에 도착 하자, Coad 준장은 곧 그 병력을 양분하여 좌 일선의 PPCLI대대의 후방과 예비인 Midlesex대대 후방으로 각각 이동시켜, 예상되는 상황진전에 대비케 하였다. (3) 캐나다 부대의 분전 한편 가평천 서쪽에 PPCLI대대의 진지에서는 우측 오스트레일리아 대대가, 철야로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도 아무런 공격 증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대장은 Stone 중령은 23일 677 일대를 방어하기 위하여, 좌로부터 D C A 중대 순으로, 그리고 B중대를, 전초로 D중대 전면의 돌출부의 배치하고, 24일 04시에는 CP까지도 내촌(이곡리 안말) 바로 동쪽 산 능선 후사면으로 옮겨 놓는 등, 세밀한 방어책을 세워 놓고 있었다. 좌 일선 PPCLI대대에 대한 적의 공격이 차츰 노골화되기 시작한 것은 24일 20시경 부터 였다. 이때 적의 박격포탄이 대대 진지로 집중되더니, 곧이어 2정의 기관총이 장 거리 사격을 퍼붓고, 또 다른 1정이 B중대 진지에 예광탄을 집중하였는데, 이것이 적의 공격신호였다. 약 15분이 경과되자, 증강된 1개중대규모의 적이 중대 전면에 있는 제6 소대 진지로 공격을 가해 왔다. 그러나 이 첫 공격은 숨을 죽이고 대기하고 있던 B중대 원들의 기관총을 비롯된 소화기의 일제사격과 대대 박격포의 탄막 사격으로 무참하게 격퇴되고 말았다. 23시 적은 또 다시 박격포 사격을 전주로, 이번에는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B중대 진지를 공격하였다. B중대는 암중의 혼전 속에서 선전 분투하였으나, 결국 최전면의 제 6소대 진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제6소대원들은 소대장의 지휘로 재빨리 B중대 238 신일균

주진지로 철수하여, 재편성한 다음, 곧 역습을 감행하여 치열한 백병전 끝에 좌충우돌 하는 적을 밀어내고 진지로 재탈환하였다. 그런데 이때 적은, B중대에 대한 공격을 계속 반복하는 한편, 그 주력을 동 중대 후 방으로 우회시켜, 일부 병력으로 대대 본부와 박격포 진지를 공격케 하고 다른 일부 병 력으로는 가평천 좌안을 따라 중대 2km 후방에 있는 Midlesex 대대를 공격케 하여 가 평으로 남하하려고 시도하였다. 적의 이러한 기도를 재빨리 간파한 Stone중령은 즉각 B중대장에게 진지고수를 명령 한 다음 대대의 81mm박격포와 50mm기관포 반에게 대대 지역으로 침투하고 있는 적 (증강된 1개 중대로 추산)을 집중 사격하라고 명령하였다. 불과 얼마 안 되어, 적은 이 대대 중화기의 적시 맹타에 완전히 말려들어,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한편 Midlesex 대대 진지로 공격해 오던 적병들은 개활지에 이르렀을 때 빗발치듯 집중된 뉴질랜드 포병의 사격을 받고, 더욱 가혹한 떼죽음을 당하였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이 채 후송하지 못한 시체만도 71구를 헤아렸다. 이처럼 적은 23~24일 양일에 걸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비교적 기동하기 좋은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가평으로 침공하려고 하였으나, 이것이 끝내 실패로 끝나자, 25 일 새벽에는 공격방향을 돌려 677에 있는 D중대 진지를 전면 포위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D중대장이 요청한 뉴질랜드 포병대의 V-T탄의 집중으로 막심한 인원 손실을 입 고 격퇴되었다. D중대 공격에 실패한 적은 그 후 완전히 공격을 체념한 듯 여단 지역 으로부터 물러났다. 이 영연방 제27연대의 가평전투는 한국전쟁에 참가한 모든 UN군부대에게 가장 모범 적인 전투의 하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미국정부에서는 이때 영연방군이 세운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부대에 수여하는 표창으로서는 최고인 대통령의 부대표창을 오 스트레일리아 및 가나다 양 대대와 이를 지원한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에 각각 수여하 였다.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39

5. 육군 제6사단의 용문산 전투 1) 용문산 전투 기념비 용문산전투는 1951년 5월 18일부터 동 30 일 사이에 중공군 제65군 예하 3개 사단과 국군 제6사단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전적비이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제6사단이 혈전 끝에 완전 섬멸시키고 대승을 거둔 전투로서, 이 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하여 국군과 유엔군 이 재 반격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니, 미 육군 사관학교 전술 교본으로 삼고 있을 정도로 세계사에 남는 전투이다. 용문산전투전적비는 863평의 부지 위에 조 성되어 있는데, 1997년 6월 23일 세웠으며 높이 19.51m에 폭 19. 50m로 비 중앙에 청 성군인인 4명이 진격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높이 19,51m인 것은 1951년도의 전투를 의미하며, 폭이 19.50m인 것은, 한국전쟁 발발 연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2) 용문산 전투의 의의 용문산 전투는 1951년 5월 18일에 중공군 제63군의 선제공격으로 개시되어 19일까지 2일에 걸친 혈투로 점철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진지를 지켜낸 보병 제6사단 장병들 이 20일 05시에 총반격을 개시하여 22일까지 당면한 적을 격멸하고 장쾌한 승리로 매 듭지은 전투이다. 노 네임<No name> 선상의 방어전의 일환으로 전개된 이 전투는 미 제2사단의 778 고지전투(일명 방커 고지 전투)의 승전과 함께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를 격퇴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 호기를 포착한 미 제8군은 전 전선에서 다시 재 반 240 신일균

격을 단행하여 일거에 60km를 진출, 캔사스 선까지 확보하게 되는 대승의 진격 작전으 로 이어진다. 24일부터 30일까지 전개되는데 이 작전기간 중에 제6사단은 적의 집결지로 알려진 가평 북방의 지암리 일대를 포위 공격한 끝에 2,500여명의 중공군 포로를 획득하고, 이 어 춘천 북쪽의 부용산을 넘어서 화천발전소를 탈환하는 등 승승장구 개가를 올리면서 캔사스 선까지 진출한 다음, 5월 30일 이 작전을 종결짓게 되었다. 따라서 이 작전 은 용문산 방어전으로부터 화천발전소 탈환작전까지 일련의 연속성을 가지면서 전개된 작전이었다. 이 기간에 중공군은 10만의 병력을 잃고 중요장비를 거의 상실하는 등, 결정적인 타 격을 입어, 수세 일변도로 밀리게 됨으로써, 마침내 공산 측에서 휴전회담을 제의하기 에 이르렀으며, 이때부터 전선은 제한전쟁의 성격을 띠고, 정치적 협상이 진행되는 가 운데, 고착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용문산 전투는 일개 방어전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사상 최고의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적인 작전 이였으며, 이보다도 오히려 승패의 갈림길에서, 적의 기도를 분쇄하여 공세이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3) 제2연대 각 대대의 분전 (1) 제1대대 미사리( 彌 沙 里 )의 서전( 緖 戰 ) 1 홍천강 도하의 저지: 제1중대의 전초전 홍천강 남쪽의 미사리 정면을 담당한 제1대대는, 18일 새벽에 그 대안의 벌박암 골 짜기에, 수 미상의 적이 출현하더니, 19:00를 기하여, 가정리 일대의 적이, 먼저 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접전이 전개되었다. 이곳의 수심은 1.5m 내외로서, 동시에 100여명이 강물로 뛰어 들어 헤엄치자, 중대장은, 60mm 박격포 사격을 지시하고, 동시에 대대에 서도 제1중대 지역으로 추진한 81mm 박격포의 사격을 집중토록 하였다. 이로부터 강폭 300m 내외의 강심( 江 心 )에 뛰어든 적은, 무수히 수장( 水 葬 )되어 갔으나, 이들은 아랑곳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41

없이, 속속 강을 건너 마침내 왕터산 동쪽의 마곡리( 馬 谷 里 ) 계곡으로, 그 선두가 들어 서고, 적의 82mm 박격포탄 10여 발이 낙하하여,. 이 시각에도 적의 후속 부대가 계속 강을 건너고 있으니, 중대장은 1개 분대의 경계 분초를 남겨 놓고 철수하라. 는 명령을 하달하기에 이르렀다. 중대 정면의 적은, 왕터산 동쪽의 마곡리 계곡으로 침투 하여, 21:00에 이르러서는, 그 선두가 제2소대 진지 정면의 410고지로 기어오르기 시작 하였다. 이로부터 대대의 81m 박격포를 비롯한, 각 중대의 60mm 박격포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어, 여기에 집중사격을 가하고, 기관총 소대도, 동쪽 계곡으로 지향한 최저 표적사격 을 개시했으며, 제3소대의 청음 초소에서도 적 발견 신호탄이 오르고, 수류탄 폭음이 연발하였다. 남쪽의 제3소대는. 마곡리에서 차츰 남쪽으로 이동한 적이, 장락골(동막리~송산리) 계곡으로 넘어 가려하자, 소대 지역에 배치된 기관총 제2소대의 중기관총 제1반과 함 께, 그 선단을 제압하였으나, 끝내 기관총 진지가 폭파되고, 사상자가 속출하여, 대대 지휘소가 있는 감투봉 쪽으로, 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운담 마을의 전투: 제2중대의 분투 대대의 북서쪽 진지를 점령한 제2중대는, 옹장골(미사리)에 OP(관측소)를 선정하고, 그 서쪽 사면의 W자형 능선(운데미, 운담마을)에, 3개 소대를 배치한 다음, 중앙의 제2 소대에서 1개 분대를 뽑아, 박암리의 도하지점인 속칭 앞버댕이(미사2리) 강변에 경 계 분초로 추진하여, 미사리 계곡을 중점 감시하던 중, 여기에서는 제1중대의 경우보다 1시간 뒤인 22:00에 접적( 接 敵 )이 있었다. 이때에 중대장은 1km 전방의 나루터 일대에, 60mm 박격포 사격을 가하도록 하는 한편, 대대에 포격과 아울러, 조명탄을 투하해 달 라 고 요청하였다. 24:00가 가까워지면서, 제2소대의 청음 초소에서 집적 신호가 오르고, 뒤이어 체코식 기관총 사격과 함께, 수류탄 폭음이 들려왔다. 이때가 19일 0시 30분으로, 교전이 시작 된 지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적은 벌써 중대 정면의 거의 전 지역에서, 공격을 개 시하였으며, 특히 제2소대 지역에서는, 치열한 수류탄전으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진지 242 신일균

가 돌파되어, 일부의 병사들이 281고지 남서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 중대의 좌( 左 )일선 진지를 지키고 있던 제3소대가, 미사리 개활지로 밀 려드는 적을 저지하다가, 중대의 기관총 제2반이, 적의 수류탄 공격에 제압당한 뒤로, 밀어닥치는 공세에 밀려, 감투봉 서쪽 능선으로 분산 철수하기에 이름으로써, 전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적은, 진로를 타개한 뒤로, 고지의 공격을 중지하고 오직 병력의 진출에 주력함으로써, 중대는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을 획득하였다. 3 축차 진지(나산 : 위곡리)의 점령 19일 06:00에, 장락골에서 중대 규모의 적이, 대대 지휘소가 위치한 감투봉를 향하 여, 공격을 감행해 왔다. 이에 중대는 즉시 전투태세로 전환하여 사격을 가했으며, 특 히 제1소대장은, 골짜기로 밀려드는 적에게, 격심한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08:00가 되 자, 미 제5공군의 F-51 전폭기 1개 편대가, 상공( 上 空 )에 나타나, 네이팜(Napalm)탄과 기총소사로, 이 일대를 제압함에 따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09:30에, 연대로부터, 제1대대는 10:00에 철수를 개시하여, 송산리와 위곡리를 경 유, 15:00까지 나산의 축차 진지를 점령하라 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각 중대는 철수하 기 시작 대대의 주력은 예정된 시간에 나산으로 올라가 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2) 제2대대의 지연전: 울업산(일명 신선봉) 전투 18일 23:00에, 제2대대 진전에 적이 나타났다. 제2대대는, 북한강(청평댐) 남안의 울 업산을 중심으로, 대대 전면방어 진지를 편성하여, 연대의 좌( 左 )일선 진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곳은 천연 장애물인 북한강(청평댐)이, 평균 5m의 수심에, 800m의 강폭으로 가로질러 흐르고 있기 때문에, 적의 진출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1 진전(북한강) 도하의 거부 중공 제188사단도, 18일 08:00에, 역시 북한강(청평댐) 북쪽의 제2대대 진전에서 강 을 건너려고, 120mm 박격포와, 10여 문의 야포로서, 엄호사격을 가하면서 나룻배를 띄 웠다. 그러나 대대의 81mm 박격포를 비롯한 기관총과, 3.5"로켓포 등, 전 화력이 여기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43

에 집중되고, 또한 적 출현 보고에 따라 지원된 미 제5공군의 F-51 전폭기 편대들이, 북한강(청평댐) 북안의 고성리와 호명리는 물론, 제2사단 정면의 청평 일대에 이르기까 지, 10여 회에 걸친 대지공격을 가하였으며, 특히 공군기들은 적들이 수집한 나룻배까 지, 모조리 파괴함으로써, 도하수단을 잃고 말았다. 따라서 이들은, 청평댐 제방을 이용게 되었고, 그것도 격심한 타격을 받으면서 건너 야 했고, 강을 건넌 직후에도, 다시 제2사단의 경계 부대인 제31연대의 저항에 부딪쳐, 이날 12:00에 이르러서야, 그 선두가 회곡리)에 다다랐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 연대의 제1대대와 교전이 전개되어, 13:00에는 청평발전소 남쪽 산의 백병전으로 격전을 전개 하게 되었다. 그 후 병력을 계속 증강한 적은, 마침내 제2연대 제2대대의 서측방인 신천리로 진출 하여, 제5중대의 경계 분초가, 접적 신호를 올린 것은 23:00이었다. 적의 선두가 사근내 를 건너, 제5중대 정면으로 밀려들자, 산야를 밝힌 조명아래, 미리 계획된 최후 저지사격으로 통격을 가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린디 루 포병의 지 원사격이 시작되어, 적의 후속 부대를 강타함으로써, 일순간에 신천리 일대가 초연에 뒤덮이고 말았다. 그런데 적은, 한차례 교전이 있은 뒤에, 물러서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부터 간단없는 포격만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느덧 24:00를 넘어서게 되었으나, 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대대는 다음날 03:30에 관측소를 소리고개로 이동시키고, 제7중대의 제1소대를 송산리 정면으로 재배치시켜, 남쪽으로 지향한 방어 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2 미원천<사근내>전투: 3시간의 주간전투 이와 같이 제2대대가 방어태세를 재조정하는 동안, 북한강(청평댐) 부근과 신천리 일 대에는 조명탄이 계속 떠올랐다. 이렇듯 침묵을 지키던 적은, 이윽고 04:30에 이르러 재공격을 감행해 왔다. 미원천 제방(신천리)으로 추진 배치한 제5중대의 청음 초소에서, 접적 신호가 오르고, 이어 중대 규모의 적이, 미원천을 건너고 있다는 보고가 뒤따랐으 며, 그 뒤로 차츰 날이 밝아지면서, 500m 전방의 사근내 개활지에, 대대 규모의 적 이 나타났다. 244 신일균

특히 제5중대 제2소대 지역인, 신포 부락(신천2리) 부근으로 500여명의 적이 집중 하였다. 이때 대대는 적절한 사격통제를 가해, 적의 집단 병력이 개활지에 나타나자, 주로 60mm와 81mm 박격포에 의한 제압사격을 가하였으며, 이들이 다시 미원천을 넘어서면 서부터,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기관총 소대의 중기관총을 비롯한, 대대의 모든 화 기가, 동시에 불을 뿜어, 연속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무수히 쓰러지면서도 계속 밀려들어, 수류탄을 연속 투척함으로써, 마 침내 돌출 능선(신천2리 남쪽 200m)의 기관총 진지가 폭파되고, 이어 제2소대 진지가 끝내 돌파되어, 꺼먹바위(설악중고교 뒤산)에서는 백병전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중대장은, 적의 배후인 신포부락 일대에, 60mm 박격포 사격을 집중토록 하는 한편, 제3소대로 하여금, 측방에서 이를 역습토록 하였다. 제3소대가, 뛰어 올라, 함성 을 지르면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자, 적은 당황하여 물러서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더불 어, 제1소대 정면의 적도 한양부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창말고개(송산리~ 창의리)의 제6중대 지역에서도, 수류탄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적은 제1대대 지역을 통과한 중공 제187사단의 선두 부대로서, 교전 초기에 적의 병력규모가 1,000여명을 헤아려 중대는 크게 당황한 바 있었으나 전투가 시작된 지 30 분 만에 UN 공군의 F-51 전투기 편대가 이들을 강타함으로써 이에 고무된 중대의 장 병들이 용기백배하여 분투한 끝에 이를 물리치고 말았다. 3 427고지(활골<엄소리>~왕방<설곡리> 서북방고지)로 제2대대는, 제1대대가 철수한 직후인 17:00에, L19가 투하한 통신통( 通 信 筒 )에 의한 철수 명령을 수령하였다. 즉, 19일 18:00에 철수를 개시하여, 위육골(위곡3리)과 마치 고개(위곡3리~엄소리 활골)를 경유, 제7중대를 선두로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 일몰 무렵인 19:30에 마치고개를 넘고, 다시 활골(엄소리) 을 지나, 예정 시간보다 40분 뒤 인 21:40에, 목적지에 당도하여 427고지를 점령하였다.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45

(3) 353고지( 高 馬 山 또는 고만산 : 창의리~엄소리)의 제3대대의 혈투 1 적의 파상 공격 제3대대가 포진한 고마산(엄소리)은, 직( 直 )후방의 427고지와, 묵안리( 墨 安 里 ), 그리 고 갈고개 를 넘어, 용문산으로 직행하는 두 줄기 접근로를, 양 측방( 側 方 )에 끼고, 타 원형으로 높이 솟아올라, 사면을 감제( 瞰 制 )하는 주요 고지이다. 19일 22:00를 전후하여, 제10중대 지역에서, 접적 신호가 오르고, 다시 5분도 채 못 되어, 수류탄 폭음이 연발하였다. 이에 중대는, 3.5" 로켓포 1발에 일제히 사격을 개시 하고, 여기에 수류탄 투척과, 측방의 기관총 사격이, 종횡( 縱 橫 )으로 전방을 제압함으로 써, 이후 30분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고, 적은 무수한 시체만을 남긴 채, 퇴각하 였다. 그러나 20여분이 지난 22:50에, 그 제2파인 다발총 사격조가 다시 침투하였다. 치열 한 사격전이 전개되었는데, 아무리 격멸해도 숫자상으로 우세한 적은, 무섭게 밀려들 어, 마침내 제1소대의 진지 일부가 무너지고, 동 제1분대장과 자동소총 사수가 전사하 는 등, 잇달아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에, 제3소대 진지 좌 하단에서, 중화기 중대 의 기관총 사수는 제1소대장이 적탄에 쓰러지면서도 나를 버려두고 사격을 계속하라 고 외치자, 결연히 다시 기관총을 움켜잡고 20분 동안에 걸쳐, 치열한 사격을 가했다. 이에 고무된 소대원들이, 분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 후 약 50분 뒤인 23:40에 이르러, 적의 제3파인 장총 돌격대가, 또다시 제10중대의 정면 으로 공격해 왔으나, 아군은 이곳저곳에서 함성을 지르며, 적을 무찌르고, 중대의 진지 를 모두 회복하게 되었다. 2 제11중대의 위기 위육골 골짜기 전투 당시 11중대는, 고만산에서 북동쪽으로 600m쯤 떨어진 250고지에서, 제10중대의 경 우보다 대체로, 40분쯤 늦은 22:40부터, 동쪽의 제2소대 지역에서, 불시의 격돌( 激 突 ) 을 하게 되었으며, 특히 이 지역은, 대대 지휘소가 위치한 고만산의 바로 북동쪽 계곡 인 까닭에, 큰 위협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때에 이 지역을 담당한 제2소대는, 소대장를 비롯한 34명의 소대원들이, 이 같은 경황( 驚 惶 )속에서도, 사격 군기를 엄수하여, 적의 전개 병력을 진전 50m 내외의 지근거 246 신일균

리로 접근시켜, 3.5" 로켓포의 발사를 사격개시 신호로,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제1파 를 격멸 시켰으며, 이와 더불어, 불어대기 시작한 중대 나팔수의 나팔 소리를 신호로 하여, 중화기 중대 기관총에, 제2소대장이 지휘하는 중기관총 제2반이, 또한 동시에 최 후저지 사격을 가함으로써, 이들은 방망이 수류탄을 휘두르거나, 머뭇거리는 사이에, 대부분이 쓰러지고, 남은 그 일부는 도주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그 특유의 파상 공격을 감행하여, 연속적으로 제2, 제3의 돌격조 가 공격해옴으로써, 여기에서도 23:00를 넘으면서부터, 심야의 혈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부터 위육골 계곡에는 적의 시체가 무수히 쌓여가고 있었으나, 아군도 사상자가 속 출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기관총 소대장은, 제3분대의 기관총 사수가 적탄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직접 사격을 계속하다가, 적의 수류탄에 의해 파괴된 기관총을 안은 채, 현지에서 전사하고, 같은 분대원 2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제2소대의 병력도, 20% 정도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이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은 소대는, 힘겨운 분투를 거듭하 였지만, 끝내 진지는 무너지고, 이를 돌파한 적은 다시 관측소로 밀려들었으며, 또한 그 일부는 대대 지휘소가 위치한, 353고지로 침투하였다. 이때가 대체로 20일 00:30을 전후한 깊은 밤이었는데, 이같이 위기를 맞이한 중대는, 내곽의 제1소대 지역으로 진지를 축소하면서, 적에게 연속적인 타격을 가하였으며, 이 와 함께 제9중대의 제1소대도, 353고지의 동쪽 계곡에 맹화력을 지향하였다. 바로 이 무렵에, 제10중대 지역으로 역습 차 출동했던 작전장교가, 2개 분대의 병력 을 인솔, 복귀하자, 예비대를 갖지 못한 대대장은, 다시 그에게 노무자까지 무장시켜, 제11중대와 제9중대간의 계곡을 막으라고 긴급 지시하였으며, 이어서 중화기 중대장에 게도, 지금 353고지 후사면( 後 斜 面 )으로 올라오고 있는, 81mm 박격포 소대원을, 소총 병으로 전투 편성하여, 동측방( 東 側 方 )에 배치하라 고 지시하였다 결국 포탄을 다 쏘아버린 81mm 박격포 소대원들은, 감시병만을 남겨놓고, 이제 소총 수가 되어, 내곽 진지의 일부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 제11중대는, 중대장의 지 휘 하에, 내곽의 제2선으로 진지를 축소하여, 분투를 거듭하고 있었다. 제1소대장이, 직접 경기관총 사수 노릇을 하는가 하면, 중대장 자신도 수류탄을 가마니에 담아다 놓 고, 직접 던지고 있었으며, 이를 바라본 소대원들은 물론이요, 전령이나 위생병, 통신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47

병, 할 것 없이 전 장병이, 혼연 일체가 되어, 위육골 정면의 적을 격파하는데, 온 힘 을 기울였다. 적은 마침내 20일 01:00을 전후하여, 퇴각하고 말았으며, 여기에는 포병의 지원이 뒤따라준 효과가 크게 작용하였다. 3 353고지(고마 산)의 2차 공방전: 3시간의 혈투 353고지로 지향한 적의 제2차 공격은, 제1차 교전이 끝난 2시간 뒤인 20일 03:00에 시작되었다. 이때에 제10중대는, 2명의 소대장이 전사 또는 중상을 입은 까닭에, 선임 하사관이 그 직무를 대행하고 있었으며, 소총수까지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가운데,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먼저, 송곳바위산(엄소분교 뒤산)으로 추진한 경계분초에서, 적이 상촌( 上 村 ; 엄소리) 계곡으로 새까맣게 올라온다. 는 보고 후, 20분도 채 못 되 어, 제2소대의 진지 전방에 중대 규모의 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어서 제1소대 지역에 서도, 창의리 일대에 2개 중대 규모의 적이 출현하였다 는 보고가 뒤따랐다. 그러나 양 소대는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사격개시신호가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적이 40~50m 바로 전방까지 접근한 뒤에야, 쏘아올린 3.5" 로켓포의 사격을 신호로, 중대 나팔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적 쪽에서도 이번에는 공격 속 도가 빠르고, 그 수법도 더욱 가열하여, 예의 파상 공격이 계속 이어짐으로써, 교전이 시작되자마자, 격전이 전개되었다. 이 같은 백병전을 전개하는 등 고귀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용전하여, 일단 이 적을 물 리칠 수 있었지만, 적들은, 다시 04:00을 전후하여 제3, 제4의 파상 공격이 연속되어, 끝내 제2소대 진지가 와해되고, 내곽의 제2선으로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제1소대 지역에서도, 혼전을 거듭하다 돌파됨으로써, 이제 중대는 내곽의 제 3소대 지역으로 진지를 축소하며, 반복되는 혈전을 전개케 되었으며, 제3소대는 2명이 전사하고, 4명이 중상을 입을 뿐만 아니라, 6명이 경상을 입는 등, 12명의 병력 손실을 보고 있었지만, 필사적인 결의로 뭉쳐 완강히 버티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제1선에서 철수한 병력도 방어정면을 축소하여, 제3소대의 진지에 이은 서쪽 진지를 점령함으로 써, 중대는 고마산 고지의 6부 능선 상에서, 상호 연결된 진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중간 생략 248 신일균

4 427고지<왕방, 설곡리>로 철수 20일 08:30에 사단의 L-19 정찰기가 통신통( 通 信 筒 )을 떨어뜨렸다. 이를 확인한 결 과, 철수 명령이었다. 투명도상에 약식 명령으로 하달된, 이 철수 명령의 요지( 要 旨 )를 보면, 적의 선두는 이미 4km 후방의 방일리까지 침투하였으며, 대대의 축차진지는, 바 로 그 북동쪽의 427고지에 연한, 연대의 주력이 있는 곳으로, 사단에서는 이 거점을 확 보하여, 적을 크게 포위 격멸하려 함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연대의 실정은 전날의 많은 전과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전날(19일) 석양에 왕방으로 이동한 연대 지휘 본부가, 이날(20일) 아침 07:00에 적 의 기습을 받아 분산됨으로써, 연대장이 행방불명이고, 모두 통신이 끊기고 말았던 것 이다. 이날 12:00경에, 연대장이 사단과 SCR 694에 의한 무전 교신을 재개할 때까지, 전방대대는 사단장이 직접 지휘하는 상황이었다. 09:00부터 철수하기 시작한 대대는, 마치고개 로 올라가던 중, 돌연 적의 기관총 사 격을 받아, 첨병 분대의 선단이 무너지고, 이어서 적의 소총 사격이 296 쪽으로 집중 하였다. 이에 첨병소대장은, 즉시 병력을 공격대형으로 전환하여, 포복 전진하면서 적 의 화력을 제압하려 하였으나, 지형 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소대는, 좀처럼 이 철 수로를 타개하지 못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10:00을 넘어서서, 후속 병력이 당도하니, 점점 혼란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 무렵 제9중대장은, 다시 제3소대를 공격에 투입하였 으나, 역시 마치고개 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대대장은, 제9중대장에게 이 적을 계속 견제하라고 지시한 다음, 후속 병력을 296 서쪽으로 우회시켜, 엄소리 계 곡을 따라 구간 약진토록 조치하였다. 재9중대를 비롯한 제3대대는, 전 병력이 예정 대로, 20일 12:00까지 축차 진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4) 나산( 羅 山 : 속칭 보리산<위곡리~설곡리 소재>) 제1대대의 파탄( 破 綻 ) 1 나산의 진지편성 미사리에서 철수한 제1대대는 19일 하오에, 표고 628m인 나산에 오르자마자, 그 정 상에 대대 관측소를 개설하고, 동쪽의 동막리 정면에 제3중대를 배치하는 동시에, 494 번 도로에 직면한 북쪽 능선에는, 제2중대를 581고지 부근까지 추진 배치하였으며, 최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49

초 진지에서 격전을 치른 바 있는 제1중대를, 남서쪽의 활골 정면으로 전개시켜, 다 시 대대 전면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와 같은 상황아래, 19일 22:00을 전후하여, 353 고지의 제3대대 지역에서 교전이 시작되더니, 이보다 1시간 뒤인 23 : 00에, 돌연 동쪽 의 제3중대 지역에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2 제1대대의 위기 이곳은 급경사로 산길이 외줄기로 가로질러, 고개 너머까지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만일 이곳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암벽을 기어오를 수밖에 없는 험한 곳이었다. 중대에 서도 이 점을 감안하여, 제3소대를 여기에 배치하고, 중화기 중대의 기관총 1개 반을 배속하여, 이 요지를 고수토록 하였다. 적측에서, 야음을 이용, 은밀히 접근한 다음, 불 시에 기습공격을 가함으로써, 접적 신호와 동시에, 돌연한 격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 다. 이 적의 연속적 공격으로, 소수의 병력으로 힘겨운 교전을 반복하던 동, 소대는 끝 내 진지를 지탱하지 못하고, 교전이 시작된 지 30분 만에 돌파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혼전이 야기되어, 피아( 彼 我 )간에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특히 제3중대의 화 기소대장은, 적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직접 기관총을 사격을 가하다가 적 의 수류탄 공격으로 말미암아, 현지에서 전사하고, 제3소대 제2분대의 자동소총 사수 도, 연속 사격을 가하다가, 진지가 폭파되어, 전사하는 등, 아군은 몸을 던져 혼신의 분투를 거듭하였지만, 보람도 없이 끝내 밀리고 말았다. 연속적인 압력과, 혼란 속에 빠져버린 병사들이, 서쪽으로 고개를 넘어서, 어두움에 쌓인 위육골 계곡으로 질주함에 따라, 수습할 길이 없었다. 이 무렵 대대 지휘소도, 나산의 9부 능선까지 침투한 적이, 어느덧 정상으로 뛰어오 르며, 수류탄 공격을 받아, 대대 영현장교가 바위틈에서 전사하고, 작전과 선임하사관 이 부상을 입는가 하면, 대대장까지도 중상을 입고, 쓰러지게 되었다. 이 위급한 고비 에서, 마침 제2중대 제2소대의 기관총 분대장이, 경기관총을 가슴에 안고 북쪽 능선으 로 뛰어올라, 측방( 側 方 )에서 10여분 동안에 걸친 연속 사격을 가한 끝에, 겨우 이 적 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대대장의 중상과 무전기기 파손, 그리고 분산 병력의 혼란 등 의 와중에 휘말려, 지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250 신일균

3 임무의 전환 제1대대는, 이날 11:30에 이르러서야, 교전 중에 분산된 제3대대 제9중대의 일부 병 력과 합류하여, 비로소 제3대대가 철수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때부터 급전진( 急 轉 進 )하여 427고지로 향하였다. 기동간에 특별한 적정은 없었으나, 활골 계곡으로 들 어서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중공군 2명을 사로잡고, 또 다른 1명이 아군 대열에 섞이 어 함께 행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포로로 하여 계속 전진한 끝에, 15:00에 427고지에 당도하여, 제2대대와 합세하였다. (5) 마지막 보루 427고지(활골<엄소리>~왕방<설곡리> 서북방고지) 울업산에서 철수한 제2대대가 427고지에서, 새로운 진지를 점령한 19일 22:00 현재, 353고지의 제3대대는, 벌써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이보다 1시간 뒤인 23:00에는, 나산의 제1대대도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 427고지에서는, 아직 까지 아무런 적정이 없었다. 1 427고지(활골<엄소리>~왕방<설곡리>)의 진지편성 이때 427고지의 제2대대는, 제5중대를 북쪽 능선의 활골 정면에 배치하고, 제6중 대는, 활골 과 258간의 북서쪽 능선에 배치하는 한편, 제7중대는 남쪽 능선의 왕방 ( 王 訪 ) 마을 정면으로 배치하여, 대체로 그 7부 능선 상에 각각 진지를 구축케 하였으 며, 제8중대는 중앙 공간지대에, 81mm 박격포진지를 선정케 하고, 2개 기관총 소대는 제5중대와, 제6중대에, 각각 1개 소대씩 배속시켜, 삼면을 에워싼 타원형 진지를 편성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방대대의 교전 상황이 최고조에 달한 이날 밤 24:00에, 뜻밖에도 산줄기로 가로막힌 활골 마을 동쪽 계곡에서 적이 출현하였다. 적이 공격한다면 당연히 기동로가 양호한 엄소리나, 최단거리 접근로인 마치고개 로, 침투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표고가 500~600m를 헤아 리는 첩첩 산중인, 그것도 암석과 급경사로 면면히 이어진 산맥(장락산~봉미산) 중간인 가락제(설곡리 삼밭골~길곡리) 쪽을 넘어서, 측방 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때 잣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51

나무 고지(엄소리)에 있던 제5중대의 제3소대장은, 동 고지 우 하단(구정벌)으로 추진한 청음초소에서 접적 신호가 오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곳은 곧, 활골 에서 왕방( 王 訪 ) 으로 넘어가는 산길(왕방고개) 어귀로서, 만일 이 곳이 돌파된다면, 427고지는 물론, 그 후방의 연대지휘소까지 위협을 받게 되므로, 최 초부터 이 지역을 특별히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예상 밖의 지역으로 적이 침투 하여, 측방 공격을 가해오자,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정신을 가다듬은 소대장은, 곧 중대에 적의 공격 상황을 보고하는 한편, 소대 원들을 독려하여 전투태세로 돌입하였는데, 이곳을 점령한 지 2시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각 개 병사들은, 벌써 개인호를 거의 완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에 서 이에 맞서게 되었다. 2 제5중대의 분투 교전이 시작되자, 7부 능선상의 유리한 진지를 확보한 소대원들은, 가파른 능선을 기 어오르는 적에게, 연속적인 타격을 가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중화기중대 제2소대의 중 기관총 2개 반이, 좌우 양 측방( 側 方 )에서 교차 사격으로, 활골 개활지를 휩쓸자, 공 격해오던 적은 무수히 쓰러지면서, 개울을 따라 서쪽으로 도주하고, 남은 일부는 활 골 뒷산 계곡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이때에 잣나무 고지 서쪽의 제1소대가, 개울 쪽으로 밀리는 적에게, 다시 집중사격을 가하자, 이들은 어둠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여,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 무렵 81mm박격포 소대는, 10여 발밖에 남지 않은 조명탄을, 시차로 발사하는 동 시에, 활골 계곡에 30여 발의 집중포격을 가하였으며, 사단의 제27포병대대에서도, 그 후방의 576고지 일대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적측에서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그 후속 부대들이 계속 왕방( 王 訪 ) 고 개 로 몰려들어, 집중공격을 가함으로써, 이후 3시간동안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반복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지역을 담당한 제5중대는, 실탄이 모자라, 2중의 난관을 극 복하면서도, 혼신의 힘을 기울여,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다행히 이 정면에는 사단포병 의 지원이 적절하여,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20일 03:00을 전후하여, 적이 물러 252 신일균

설 때까지 간단없는 포격지원이 계속되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요인 의 하나가 바로 이 포병활동의 공헌이었다. 당시 사단에서는 1,157m의 용문산 봉우리 에서 적의 움직임을 낱낱이 살펴보며, 연속 부단한 포격으로 그들의 기도를 여지없이 분쇄하였던 것이다. (6) 427고지(활골<엄소리>~왕방<설곡리>서북방고지)의 확보 사실상 이때부터 중공 제63군은, 패전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공격개시 3일째 가 되는 20일 새벽, 그러니까, 바로 이 시간에, 그들은 예비인 제189사단까지 투입하 여, 초월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이도 또한 사단 주저항선 전방의 가일리~방일리~묵안리 일대에서, 군단 포병의 집중포격에 휩쓸려, 주( 主 )진지( 陣 地 ) 지대에까지, 단 한 발자국 도 발을 붙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화력지대를 벗어나기에, 정신이 없었던 것 이다. 중간 생략 주저항선 전방에는, 항공 조명이 이어지고, 천지를 뒤흔드는 포성이 메아리치는 가운 데, 427고지를 공격하던 적도, 이미 전의를 상실하여, 독전대의 총부리 앞에 무작정 밀 려드는 군상에 지나지 않았다. 즉, 왕방( 王 訪 ) 고개 로 오르려던 적이, 수류탄 몇 발을 던지자, 흩어지는 양상이 그러했고, 제7중대의 제1소대장이 사로잡은 포로는 탈진한 상 태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결국 이들은 제2대대 장병들의 분투와 지원 포병의 효과적인 근접지원으로, 끝내 427 고지를 돌파하지 못하고, 다시 산악지대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날이 밝아오자, 포격은 주저항선 전방에 집중되고, 07:00부터 UN 공군의 전폭기 편대가 날아와, 남쪽 의 설곡리( 雪 谷 里 )와, 묵안리 일대의 골짜기 상공을 선회하면서, 기총소사( 機 銃 掃 射 )와, 네이팜탄 공격으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다. (7) 작전지역의 회복 용문산으로 침공한 중공 제63군은, 20일부터 접촉을 단절하고 분산 철수한 후, 21일 03:00을 기하여 전면적으로 철퇴를 개시하였다. 21일 06:00에 공격을 재개한 제7연대 와 제19연대가, 당일에 494번 도로까지 진출하는 동안, 일부의 엄호부대만이 산발적으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53

로 저항할 뿐, 특기할만한 교전이 없었으며, 다시 22일에 최종목표인 조지아 선까지 도 일방적인 소탕전으로, 일관되었다. 제7연대는 21일 06:00에 공격을 재개하여, 08:00에 632고지(설곡리 곰의골?)를 손실 없이 점령한 뒤로, 계속 전진한 끝에, 나산(보리산 : 위곡리)을 경유, 22일 13:00에 홍 천강 남안의 조지아 선까지 진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장락산에 잔류한 적의 엄호 부 대와, 경미한 교전이 있었을 뿐, 아무런 적의 저항 없이 12km를 북상하여, 사단의 작전 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이 진출 과정에서 선두에 선 제1대대가, 22일 07:00에 장락산 서쪽 능선에서, 증강된 소대규모의 적을 격파하여, 대부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으며, 특히 나산과 미사리 지역에서는 110여 구의 적의 시체를 확인하였다. 제19연대는 벽암산( 霹 岩 山 ; 방일초교 뒷산)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제2연대 제3대대 의 격전장이었던 353고지와, 곡달산 간의 야산지대를 답파한 끝에, 신천리를 점령하고, 이어 북한강(청평댐) 남안의 울업산까지 위력수색대를 진출시킴으로써, 21일에 조지 아 선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제6사단의 용문산 방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이 전투에서 연대는 무려 827구의 적의 시체를 확인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제2연대 의 전과로 판명되었으며, 연대에서도, 이날 4명의 포로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제2연대 의 낙오병력 6명과 중상을 입은 동 연대의 제9중대장 박홍기 중위를 구출하여 호송하 였다. 그 후 22일에 제2대대가 보납산( 寶 納 山 : 사룡리)을 공격하여, 중대규모의 적을 격멸 하고, 7명의 포로를 획득하였는데, 이들은 북한강(청평댐)을 확보하기 위하여 최후까지 남은 엄호부대인 듯, 3시간 동안을 저항하다가 대부분이 사살되고, 그 일부가 미리 대 기시켜 놓았던 나룻배로 강을 건너 도주하였다. 이하 용문산 전투개요 생략 6. 미 제213야전포병대대의 참전 1) 기념비문 213TH FIELD ARTILLER BATALION korea-feb 1950 MAR 1952 254 신일균

1951년 5월 26일 밤 가평군 홍적이 인근에서 한국 전쟁에 참전 중이던 미국 남부 유타주의 213야전 포병대대 소속 방위군은 24보병사단 21 보병연대 포격지원부대가 적군을 포위하기 위하 여 전진해 버리자 포병부대는 엄호 없이 고립되 어 버렸다. 유타주 서벗 카운티 출신인 A. Frank Dalley 중령은 부하의 안전에 대하여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600명의 장병은 유타주의 작은 마을 Ceder 시, Fillmore. Beaver ST. George 및 Richfield 출신이었다. 이들은 장교 몇 명 을 제외하고 모두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경험이 풍부하고 단련된 병사가 아니라, 학자 이자, 농부이며, 점잖고 존경할만한 사람들로서 우리의 형제이자 사촌이며 삼촌이자 조 카이고 천척이자 평생의 친구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가족을 위해 보다 안 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며 자신들이 임무를 완수 해 낸다면 자녀 들이 무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보병부대에 포위된 것을 알게 된 4천명의 중공군들은 240명의 본부 및 본부포대와 A 포대(Ceda시와 Richfield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가 지키고 있는 좁은 계곡으로 탈출하 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중공군은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이른 아침 벌어 진 생존을 위한 전투는 치열하였다. 어둠 속에서 육박전이 벌어졌으나, 240명의 용사들 은 기적적으로 진지를 지켜 낼 수 있었다. 새벽이 되자 Ray Cox 대위는 105mm곡사포를 탱크삼아 두 포병부대에서 차출된 병 사로 구성된 전투순찰대를 조직하였다. 그의 지휘에 따라 순찰대는 수많은 기관총 진지 를 파괴하고 수많은 적들을 살상하면서 계곡을 돌진해 내려갔다. 저들은 마침 내 퇴각 하여 치열한 집중 포격 속에 주변의 언덕으로 기어오르려 하였다. 하지만 괴멸적인 포 격에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적들은 돌아서서 집단으로 투항하였다. 수백 명 의 적들은 중상을 입고 쓰러지거나 사망하였지만, 213부대원들은 단 한 명도 생명을 잃 지 안했다. 380명의 적군이 사망하고 830명 이상이 포로가 되거나, 투항하였다.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55

2) 미국Utah St Cida City 참전용사 공원 기념동상 이 기념동상은 6. 25 한국전쟁당시 가평군 북면 화악 이 일원 가평 전투 에 참가했던 미 제213포병대대 (1951, 12, 23 미 대통령 부대 표창)의 빛나는 전공을 기리기 위해 2008년 9월27일 유타 주 시다지 참전용사 공원에 세워진 동상의 모형이다. 7. 미 제40사단의 참전비가 된 희망탑 소재지 : 가평군가평읍 대곡리 113번지 장소 : 가평고동학교 건립년도:1963년 10월 16일 이전년도:1998년 10월 16일 건립자 : 가평고등학교, 탑 이름: 희망탑 건립사유 : 미제40사단은 한국전쟁 때UN군의 일원으로 참전, 연천지구 전투에서 격 전을 치룬 후 부대 정비 차 가평으로 이전 예비 병력으로 주둔 중 대민지원사업의 하나로 학교 건물<10교실 분과 부속건물>을 건축 정부에 기증하고 공립 중고등하교 로 인가 받도록 도와주고 교명을 미 제40사단의 최초의 전사자 가이사의 이름을 따 가평가이사 중고등하교로 해 달라는 요청을 한 바 있다. 그리고 초석에 이 학교는 미제40사 단 장병들이 대한민국의 장래 지도자들 에게 봉헌한 것입니다 라고 기록하였 다. 휴전 후 본국으로 복귀한 미제40사단은 학습교재와 교구 학용품 등을 X-MAS선물 256 신일균

을 보내고 당시 사단장으로 본교 건축을 주도한 그래란드 장군은 작고할 때까지(1977녀 까지) 매년 장학금을 보내왔고, 작고 후에는 그 미망인이 장군의 유지를 이어 1999년까 지 장학금을 보내왔다. 사딘에서도 장학금과 우수졸업생에게 그래란드 자도자상를 수여 하며 학교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학교에서는 학교 개교 10주년인 1963년에 그래란드 장군 부부를 초청 훈장을 추서하 도록 주선하고 희망탑에 가이사 병사와 그래란드 장군의 흉상( 胸 像 ) 부조물을 부착하여 이들의 공로를 영원이 기념하게 되었다. 사단에서는 매년 졸업식 때 장학금과 시상을 겸하여 본교를 방문하고 희망탐에 헌화 하고 사단사령부와 학교에 가이사 기념관을 각각 설치하여 그간의 기록물 및 기념품을 전시하고 있다. Ⅳ. 결론 본 연구는 가평군 관내에 산재한 한국전쟁 관련 참전비문을 중심으로, 이 지구에서 전개된 각 전투의 개황 자료를 정리하여, 이 고장에서 자라나는 전후세대들과 수도권에 서 주말 등 휴가철에 이 고장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국가안보의 소장함과 자유우방 들(UN군)의 집단안보체제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으로, 우리나라를 공산 침략 으로부터 수호하여, 오늘 날 대한민국 번영의 기초를 다지고,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 국민의 자유보장의 밑거름이 된 전몰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귀중한 교육 자료로 활용되 기를 희망하여 이 연구를 추진하였으나, 일부 자료(가평지구 전투 전적비 관련 자료)를 늦게 얻어 본 연구 자료에는 지면과 시간제약으로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였으며, 연구자 의 능력부족으로 자료정리도 불실함을 자인하며, 참전용사들의 무훈을 소상히 기록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하며, 상세한 것은 참고문헌의 자료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다만 본 연구 과정을 통하여 관련 부대 및 행정 당국과의 의사소통으로 건립 후 잊혀 져가던 가평지구 전투전적비의 건립 취지를 일깨우는 계기를 마련하여 앞으로 산 안보 교육장으로 활용하겠다는 다짐을 하게된 것을 조그마한 보람으로 생각한다. 가평지구 한국전쟁 전적 자료 조사 연구 257

<참고문헌> 1. 가평반공투쟁사, 신현정 편저 가평향토문화추진협의회(가평문화원 전신), 1984년, 115~150쪽, 162~188쪽 2. 가평의 지명과 유래 (하), 가평문화원, 2001년, 319~348쪽 3. 보병 제5사단 부대역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79년, 제3절 가평 춘천 탈환전 4. 6.25 한국 전쟁 중 가평지구전투전투사, 가평문원, 2002년, 77쪽 5. 가평군지 2권, 가평군사편찬위원회, 2006년, 431쪽 6. 한국전쟁사 제10권 UN군참점편[1950, 6, 25~1953, 7, 27], 1979년, 국방부 군사편 찬연구소, 436~417쪽 7. 용문산 전투,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3년, 11~192쪽 8. 가평군 중등교육 50년사, 가평문화원, 2005년, 94~141쪽 258 신일균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권 효 숙 (파주향토문화연구소 책임연구위원) 目 次 I. 시작하는 글 II. 장단군의 지리와 역사 1. 위치와 면적 2. 장단군의 역사 III. 장단군의 세거성씨와 移 居 1. 장단지역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성씨 2. 장단군의 동족부락 3. 장단군의 주요세거성씨의 移 居 현황 IV. 파주 장단지역의 인물들 1. 고려, 조선시대 인물 2. 근현대인물 V. 맺는 글 집필자 : 권효숙 파주향토문화연구소 책임연구위원 고양시 시사편찬위 상임연구원, 파주시 시사편찬위 상임연구원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59

Ⅰ. 시작하는 글 문산에서 경의선을 타고 가다보면 임진강역을 지나 도라산역으로 갈 수 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위를 철교로 건너면 철조망이 처져있는 민통선 지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민간인통제지역이라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무성한 숲과 나무들, 고라니, 멧돼지 등 야 생동물들과 이름 모를 풀꽃들, 그리고 그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는 백로, 기러기, 독수 리가 보인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듯한 이곳, 민통선 내 장단지역.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던 6 25전쟁 이전에는 임진강가에서 배를 부리는 소리, 도당굿하는 소리, 열차가 지나가 는 소리, 주막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담소 나누는 소리들로 북적였을 이곳이 적막한 군부대 관리지역으로 변한 것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이 왕건에게 신라를 넘겨주고, 개성으로 와서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와 결혼해 살면서 신라의 도읍지가 그리워 늘 오르던 도라산( 都 羅 山 ), 비 무장지대 땅 밑을 뚫고 들어온 1,653m 북한의 제3땅굴, 장단콩 두부를 만들어 파는 통 일촌, 대성동 자유의 마을, 실향민이 정착한 해마루촌, 동의보감을 쓴 허준 묘역 등은 우리 민간인이 가볼 수 있는 민통선 내 지역이다. 국내외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이곳...분단의 아픔으로만 기억되는 이곳... 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경기도 장단군 이다. 고려 때부터 왕궁이 있던 도읍지 근교이고, 조선조 에도 한양과 멀지 않아, 왕실과 사족들이 거주하거나 사후 문중의 선영지가 많은 곳이 다. 많은 사람들이 판문점, 제3땅굴, 도라산전망대, 도라산역이 현재 파주시로 알고 있으 나 이는 모두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에 따른 임시행정구역이다. 현재 도라산역, 도라산 전망대, 제3땅굴, 판문점의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 260 권효숙

현재 임시행정구역 본래 행정구역 도라산역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노상리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노상리 도라산전망대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도라산리 제3땅굴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점원리 판문점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개성직할시 판문군 판문점리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어룡리 판문점 제3땅굴 필자는 이 지역을 답사할 때마다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생 활모습을 상상해보곤 한다.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뛰어놀았을 것이며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환갑잔치를 하고, 장례 도 치르고 묘도 썼을 것이다. 지금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역사 속에서 알 수 있는 인물은 있을까? 그 인물들의 집안은 어떤 문중일까? 이런 의문에서 필자는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을 연구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잊 혀져 가고 있는 한반도의 찢겨진 땅 장단지역에는 동의보감의 주인공 허균의 문중 양천 허씨 집안도 있었고, 세조 때 살생부를 쥐고 흔들던 청주 한씨 한명회 집안도, 조선에 유교를 도입한 순흥 안씨 안향의 집안, 당대 9봉군을 자랑하던 안동 권씨 권부( 權 溥 )의 집안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장단군민회가 있어서 고향을 잃은 아픔을 서로 달래며 결속하고 있고 명예군수까지 선출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61

Ⅱ. 장단군의 지리와 역사 1. 위치와 면적 장단군은 경기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연천군( 漣 川 郡 ), 남쪽은 파주시 ( 坡 州 市 ), 서쪽은 개풍군( 開 豊 郡 ), 북쪽은 황해도 금천군( 金 川 郡 )과 이웃하고 있다. 면적 은 1916년에 간행된 <통계연보>의 자료에 의하면 총 10면 67개 동( 洞 ) 리( 里 에) 면적 46.92방리( 方 里 )로 되어 있다. 46.92평방리면 약 724km2에 해당된다. 국토 총면적의 0.057%에 해당되며, 도( 道 ) 소재지까지의 거리는 철로로 38.6마일, 즉 62.12km이다. 행정구역은 1849년에 간행된 장단지( 長 湍 志 ) 방리조( 坊 里 條 )에서는 20면 63개리였으 나 1911년 한 일 합병 이후에는 20면 68개리로 되었다가 1930년 초에는 10면 66개리 로 조정되었다. 1934년 초에 간행된 < 面, 名 稱 及 區 域 (면의 명칭과 구역)>에 의하면 10면 66개리의 구역은 다음과 같다. 장단면( 長 湍 面 ) 군내면( 郡 內 面 ) 진동면( 津 東 面 ) 진서면( 津 西 面 ) 장남면( 長 南 面 ) 장도면( 長 道 面 ) 대남면( 大 南 面 ) 대강면( 大 江 面 ) 강상면( 江 上 面 ) 소남면( 小 南 面 ) 동장리. 도라산리. 노상리. 노하리. 서장리. 정동리. 덕산리. 거곡리. 석 곶리. 강정리. (이상 10개리) 읍내리. 점원리. 방목리. 정자리. 백련리. 송산리. 조산리(이상 7개리) 하포리. 동파리. 서곡리. 초리. 용산리(이상 5개리) 눌목리. 분지리. 금릉리. 어룡리. 선적리. 경릉리. 전재리 (이상 7개리) 고랑포리. 원당리. 반정리. 판부리. 자작리.(이상 5개리) 고읍리. 사시리. 석주원리. 중리. 상리. 하리. 오음리. 항동리. 매현리. 두매리 (이상 10개리) 위천리. 성곡리. 석재리. 장좌리. 가곡리. (이상 5개리) 청정리. 나부리. 포춘리. 우근리. 독정리(이상 5개리) 구화리. 마성리. 덕적리. 갈운리. 임강리. 자하리. 솔랑리(이상 7개리) 유덕리. 지금리. 홍화리. 박연리. 두곡리.(이상 5개리) 262 권효숙

6.25전쟁 이전의 장단군 행정구역 지도 장단군은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이후 38선으로 양단되었고, 6.25 전쟁 이후 휴전선이 장단군의 동남부를 지나, 3분의 1정도만이 수복된 상태인데 이 지역 역시 4km 넓이의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어 거의 전역이 황폐화되고 말았다. 장단군은 1934년 당시 10면 66개리였는데 6.25 전쟁 휴전 후 북한은 장단. 개성지역 의 행정 구역을 1시(개성시) 3군(개풍군. 판문군. 장풍군) 86동으로 개편하였고, 이중 판문군과 장풍군이 주로 장단지역이다. 북한은 이 지역의 원주민들을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다 하여 점차적으로 내륙의 오지( 奧 地 )로 이주시켰다. 1962년에 이르러 남한 쪽 장단군 지역은 파주와 연천에 폐합되었다. 파주지역에 포함 된 곳은 군내면, 장단면, 진동면, 진서면이며, 연천군에 포함된 곳은 장남면, 장도면, 대강면이다. 강상면. 대강면. 대남면. 소남면이 DMZ속에 들어갔거나 일부는 북한의 장 풍군, 판문군으로 흡수되었다.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63

장풍군( 長 豊 郡 ) 판문군( 板 門 郡 ) 개풍군( 開 豊 郡 ) 장풍읍 서암리 고읍리 구화리 임강리 십탄리 원고리 가천리 덕적리 장좌리 가곡리 석촌리 귀존리 냉정리 장학리 석둔리 솔현리 세골리 자하리 사제리 국화리 판문읍 대룡리 덕수리 임한리 월정리 조강리 영정리 신흥리 대연리 상도리 흥왕리 진봉리 선적리 전재리 동창리 평화리(비무장지역내) 판문점리 화곡로 개풍읍 해선리 묵산리 연릉리 연강리 광답리 삼성리 남포리 유릉리 묵송리 광수리 의포리 신성리 해평리 고남리 여현리 최근의 북한지도에서 보면 세 군의 읍. 리는 다음과 같다. 북한의 개성시 개풍군 장풍군 판문군 지도 264 권효숙

장풍군에 장단군의 마을이 많이 포함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장단면 동장리 서장리 정동리 덕산리 대강면 청연리 독정리 우근리 나부리 강상면 구화리 갈운리 자하리 마성리 덕적리 솔량리 대남면 위천리 가곡리 성곡리 장좌리 석촌리 소남면 홍화리 유덕리 두곡리 지금리 서남면 석둔리 솔현리 이밖에 연천군 왕징면의 일부 마을 냉정리, 가천리, 장학리, 귀존리, 오암리, 고장리, 고잔살리, 고왕리, 기곡리도 장풍군으로 흡수되었다. 판문군에는 장단군 진서면의 선적리, 분지리, 경릉리, 전제리, 대원리가 포함되었으며 개풍군에는 장단군지역 마을이 포함되지 않았다. 1924년 당시 장단군청의 임단문 2. 장단군의 역사 장단은 본래 고구려의 장천성현( 長 淺 城 縣 )인데, 신라 경덕왕( 景 德 王 ) 때에 장단으로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65

개칭, 우봉군( 牛 峰 郡 )의 영현( 領 縣 )이 되었다. 고려시대 목종( 穆 宗 ) 때에는 시중( 侍 中 ) 한언공( 韓 彦 恭 )의 고향이라 하여 단주( 湍 州 )로 승격시켰으나, 그 후 다시 장단현( 長 湍 縣 )이 되었고, 문종( 文 宗 ) 때에는 개성부( 開 城 府 )에 직속되었다. 조선시대 태종( 太 宗 ) 때 에는 이웃 임강현( 臨 江 縣 )과 합쳐서 장림군( 長 臨 郡 )이 되었는데, 세종 때 또다시 장단현 이라 칭하게 되었다. 세조( 世 祖 ) 때에는 중궁( 中 宮 )의 3묘( 三 廟 )가 이 땅에 있다 하여 군( 郡 )으로 승격시키 고, 치소( 治 所 )를 당시의 백악산( 白 岳 山 )의 남록( 南 麓 ) 임진( 臨 津 )에서 도원역( 桃 源 驛 )으 로 옮겼다. 그러나 광해주( 光 海 主 ) 때 다시 옛 터로 돌아갔다. 예종( 睿 宗 ) 때 도호부( 都 護 府 )로 승격된 후 대체로 변경이 없다가 조선 후기인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지금 과 같이 되었다. 별칭( 別 稱 )으로 장천성( 長 淺 城 ) 야야( 耶 耶 ) 야아( 夜 牙 ) 단주( 湍 州 ) 장림( 長 臨 ) 임 단( 臨 湍 ) 등이 있다. 관할구역은 장단 군내( 郡 內 ) 진서( 津 西 ) 소남( 小 南 ) 대남( 大 南 ) 강상( 江 上 ) 대강( 大 江 ) 장도( 長 道 ) 장남( 長 南 ) 진동( 津 東 )의 10개면이고, 군청 소재지는 장단면 도라산리( 都 羅 山 里 )이다. 여러 문헌 사료에서 살펴보면 장단군의 강역( 彊 域 )은 옛날의 장단현. 임강현. 임진현 의 땅으로 보인다. 그리고 개풍군과는 시대에 따라서 군계( 郡 界 )에 이동이 있었으므로 개풍군에 속하는 지방 중에는 일찍이 장단군에 속했던 땅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장단군은 38선으로 갈라지면서 많은 군민들이 북한과의 접경을 벗어나 남하 하였다. 1950년 6.25 전쟁 3년간 상당수의 군민이 남으로 피난 나왔으며, 종전( 終 戰 )되 기 3개월 전 전선을 고착( 固 着 )시키려는 무렵, 고랑포 전투 등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고, 휴전이 성립되자 대부분의 군역이 비무장지대 또는 이북에 들어감으로써 장단군은 1962년에 마침내 파주, 연천 등에 폐합되었다. 266 권효숙

Ⅲ. 장단군의 세거성씨와 移 居 1. 장단지역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성씨 1) 임진 김씨( 臨 津 金 氏 ) 임진( 臨 津 )은 경기도 장단( 長 湍 )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진임성( 津 臨 城 )이다. 시조 김인조( 金 仁 朝 )는 신라종성( 新 羅 宗 姓 )이며 김일신의 아들로 신호위상장군( 神 虎 衛 上 將 軍 )을 지냈다고 한다. 문헌이 없으므로 세계( 世 系 )나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데, 다만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임진( 臨 津 )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 世 系 )를 이어왔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서는 임진 김씨가 전국에 25가구 11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 타났으며 경기도에 12가구 34명이 있으나 파주시에는 거주자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2) 장단 김씨( 長 湍 金 氏 ) 시조 김선( 金 璇 )은 신라 대보공( 大 輔 公 ) 김알지( 金 閼 智 )의 후예로 전하고 있으나 사적 ( 事 蹟 )이 없기 때문에 그 세계( 世 系 )를 알 수 없으나 그가 장단부원군( 長 湍 府 院 君 )에 봉 하여졌으므로 그 후손이 관향을 장단( 長 湍 )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또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아홉 번째 아들 학성부원군( 鶴 城 府 院 君 ) 덕격( 德 擊 )의 후 예로 전하는 김일신( 金 日 新 )을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보인다. 장단 김씨는 2000년 통계 자료에서 전국에 4가구 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파주시에는 거주자가 없다. 3) 단주 한씨( 湍 州 ( 湍 川 ) 韓 氏 ) 단주( 湍 州 )는 파주시 장단면( 長 湍 面 ) 군내면( 郡 內 面 ) 진서면( 津 西 面 ) 진동면( 津 東 面 ) 일대의 옛 이름이다. 시조 한총례( 韓 聰 禮 )는 고려 현종의 국구( 國 舅 )로서 광록대부 ( 光 祿 大 夫 ), 소경( 少 卿 )을 역임하였고 사후에 내사령( 內 史 令 )에 증직되었다고 한다. 1001 년(목종 4)에 문하시중( 門 下 侍 中 )에 올랐던 한총례의 아들 언공( 韓 彦 恭, 940~1004))이 고향인 장단을 단주( 端 州 )로 승격시켰는데 이후 아버지 한총례를 시조로 하여 단주 한 씨가 되었다. 그러나 본래 청주 한씨의 분파였기 때문에 후에 다시 청주 본관과 ( 合 本 )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67

되었다. 고려인물중 장단이 고향인 인종 때의 한안인( 韓 安 仁,? 1122)과 그의 사촌 충 ( 冲,? 1129)은 본관이 단주로 기록되어 나타나지만 그 후의 인물 악( 渥,1274~1342)과 수( 脩,1333~1384), 공의( 公 義,1307~1365), 제( 齊,1340~?)는 본관이 청주로 기록되어 있어 단주 한씨가 후에 청주 한씨로 합쳐졌음이 확인된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단주 한씨는 전국에 31가구 총 138명이 있으 며 파주시에는 거주자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파주 한씨가 전국에 698명 파 주시에 10명, 교하 한씨가 전국에 7명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들 한씨는 모두 청 주로 합본되고 곡산 한씨만 제외되었음이 1987년~1993년 사이에 편찬된 제6교 청주한 씨대동족보에서 확인되었다. 2. 장단군의 동족부락 장단군은 고려 왕조가 한반도를 통치하는 동안 개성( 開 城 )의 근교로서 고려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장단군의 문화는 왕가 및 정치 중심지로서의 문화를 그대로 이어 온 곳이다. 신라 경순왕의 왕릉을 비롯하여 고려 세 왕릉이 이곳에 있고, 수많은 명승 고적이 이 고을에 있으며, 고려조에서 관직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 장단 지역 에서 세거해 왔다. 조선시대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이 지역의 성씨는 장단 에 한( 韓 ). 전( 田 ). 풍( 馮 ). 허( 許 ). 선( 宣 ). 김( 金 ). 이( 李 )씨와, 임진의 송( 宋 ). 김( 金 ). 함( 咸 ). 형( 邢 ). 표( 標 ). 선( 宣 ). 종( 宗 )씨와 임강의 이( 李 ). 정( 鄭 ). 노( 盧 ). 경( 卿 ). 사 ( 史 )씨와 송림( 松 林 )의 김( 金 ). 문( 文 ). 전( 田 ). 송( 宋 ). 차( 車 ). 미( 米 )씨가 장단에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1931년에 일제가 실시한 동족부락 에 대한 조사에는 다음과 같은 성씨가 있었다. 268 권효숙

면 동리( 洞 里 ) 성( 性 ) 본관( 本 貫 ) 호수( 戶 數 ) 김해( 金 海 ) 45 조산리( 造 山 里 ) 김( 金 ) 군내면( 郡 內 面 ) 강릉( 江 陵 ) 21 백련리( 白 蓮 里 ) 최( 崔 ) 강릉( 江 陵 ) 18 초리( 哨 里 ) 이( 李 ) 전주( 全 州 ) 38 진동면( 津 東 面 ) 김( 金 ) 의성( 義 城 ) 22 하포리( 下 浦 里 ) 정( 鄭 ) 청주( 淸 州 ) 21 장남면( 長 南 面 ) 자작리( 自 作 里 ) 이( 李 ) 전주( 全 州 ) 38 원당리( 元 堂 里 ) 최( 崔 ) 전주( 全 州 ) 26 한( 韓 ) 청주( 淸 州 ) 27 포춘리( 浦 春 里 ) 안( 安 ) 죽산( 竹 山 ) 25 최( 崔 ) 전주( 全 州 ) 15 대강면( 大 江 面 ) 한( 韓 ) 청주( 淸 州 ) 22 독정리( 篤 正 里 ) 허( 許 ) 양천( 陽 川 ) 30 우근리( 禹 勤 里 ) 허( 許 ) 양천( 陽 川 ) 66 나부리( 羅 浮 里 ) 이( 李 ) 전주( 全 州 ) 28 임강리( 臨 江 里 ) 이( 李 ) 전주( 全 州 ) 70 윤( 尹 ) 파평( 坡 平 ) 18 강상면( 江 上 面 ) 덕적리( 德 積 里 ) 이( 李 ) 전주( 全 州 ) 45 김( 金 ) 경주( 慶 州 ) 24 구화리( 九 化 里 ) 이( 李 ) 전주( 全 州 ) 38 이( 李 ) 개성( 開 城 ) 16 마성리( 馬 城 里 ) 이( 李 ) 신평( 新 平 ) 20 김( 金 ) 경주( 慶 州 ) 45 위천리( 渭 川 里 ) 이( 李 ) 전주( 全 州 ) 25 석촌리( 石 村 里 ) 이( 李 ) 전주( 全 州 ) 29 이( 李 ) 전주( 全 州 ) 23 장좌리( 長 左 里 ) 대남면( 大 南 面 ) 김( 金 ) 김해( 金 海 ) 27 가곡리( 佳 谷 里 ) 김( 金 ) 김해( 金 海 ) 26 이( 李 ) 전주( 全 州 ) 17 성곡리( 聖 谷 里 ) 박( 朴 ) 울산( 蔚 山 ) 24 소남면( 小 南 面 ) 홍화리( 弘 化 里 ) 이( 李 ) 한산( 韓 山 ) 15 매현리( 梅 峴 里 ) 이( 李 ) 전주( 全 州 ) 25 장도면( 長 道 面 ) 오음리( 梧 陰 里 ) 윤( 尹 ) 해평( 海 平 ) 25 갈현동( 葛 峴 洞 ) 김( 金 ) 강릉( 江 陵 ) 38 계당동( 桂 堂 洞 ) 우( 禹 ) 단양( 丹 陽 ) 18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69

면 동리( 洞 里 ) 성( 性 ) 본관( 本 貫 ) 호수( 戶 數 ) 김( 金 ) 김해( 金 海 ) 30 금릉리( 金 陵 里 ) 박( 朴 ) 무안( 務 安 ) 94 진서면( 津 西 面 ) 경릉리( 景 陵 里 ) 김( 金 ) 경주( 慶 州 ) 15 눌목리( 訥 木 里 ) 이( 李 ) 전주( 全 州 ) 20 도라산( 都 羅 山 ) 박( 朴 ) 창원( 昌 原 ) 31 진남면( 津 南 面 ) 거곡리( 巨 谷 里 ) 박( 朴 ) 밀양( 密 陽 ) 29 이( 李 ) 진위( 振 威 ) 29 노산리( 盧 山 里 ) 이( 李 ) 전주( 全 州 ) 23 이 표에서 보면 장단군에서 가장 많이 살던 성씨는 다음과 같다. 성씨 총호수 가장 많이 살던 곳(호수) 전주 이씨 418 강상면 임강리 (70호) 김해 김씨 128 군내면 조산리 (45호) 양천 허씨 96 대강면 우근리 (66호) 대강면 독정리 (30호) 무안 박씨 94 진서면 금릉리 (94호) 경주 김씨 84 강상면 마성리 (45호) 강릉 김씨 59 장도면 갈현동 (38호) 청주 한씨 49 대강면 포춘리 (27호) 죽산 안씨 25 대강면 나부리 (25호) 2009년 증보판 장단군지( 長 湍 郡 誌 ) 에서 각 면의 지명유래가 기록된 부분을 보면 마 을의 집성촌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대강면. 강상면. 소남면 등은 조사되지 않았지만 다른 면에서 조사 기록된 마을의 집성촌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집성촌이 있었다는 기 록만 있고 몇 호나 되는지 알 수 없는 곳이 많아 아쉽다. 270 권효숙

면 리 마을명 성씨 호 집성시기 서장리 창동( 倉 洞 ) 선산김씨 1450년부터 덕산리 사창동( 士 昌 洞 ) 해주오씨 80 장단면 강정리 고루동( 高 樓 洞 ) 행주기씨 50 도무동( 桃 茂 洞 ) 제주고씨 석곶리 한수동 황해황씨 50 거곡리 조랑동 밀양박씨 1580년부터 군내면 점원리 점희릉동 안동권씨 진동면 하포리 아현동 독매마을 풍양조씨( 趙 氏 ) 40 금촌동 김해김씨 30 진서면 금능리 마장동 의령남씨 50 내동 무안박씨 80 장남면 원당리 원말 함안조씨 백작리 오리골 해평윤씨 전의이씨 고랑포리 배나무골 연일정씨 갈매울 안동김씨 20 반정리 운개미 단양우씨 3. 장단군의 주요세거성씨의 移 居 현황 1) 행주 기씨( 幸 州 奇 氏 ) 행주기씨는 고려조의 성족( 盛 族 )으로 순우( 純 佑 )의 손자 윤위( 允 偉 ) 윤숙( 允 肅 )이 대 장군( 大 將 軍 )으로 고종( 高 宗 ) 때 이장대( 李 將 大 )의 난과 여진( 女 眞 )의 내침을 격퇴하였 고, 탁성( 卓 誠 )은 명종조( 明 宗 朝 )에 부원수( 副 元 帥 )로 조위총( 趙 位 寵 )의 난을 평정하였으 며, 자오( 子 敖 )는 충렬왕( 忠 烈 王 ) 때 내안( 乃 顔, 원태조의 동생)의 반당을 토평하는 등 많은 장신( 將 臣 )을 배출했다. 따라서 고려 때부터 관직생활을 하던 기씨들의 거주처가 장단지역이었으며, 그 후손들이 장단면 강정리에서 5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오 다가 6.25 전쟁 이후 각 지역으로 흩어졌다. 파주시 교하읍 송촌리 감골마을에는 행주 기씨가 15세기에 입향조 기정지( 奇 廷 芝, 1461년생)이후로 정착하여 살고 있는데 현재 송촌리에 행주 기씨가 40여 호 집성촌을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71

이루어 세계( 世 系 )를 이어나가고 있다. 고양시 세거성씨 중에서 제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행주기씨는 B.C 30년에 고양 행주지역에 세거하였다고 하나 지난날 융성하였던 시대에 고양, 행주, 능곡 등지에 수 십 가구가 살다가 가문의 입지가 쇠퇴되고 난세를 당해 삼지사방으로 이주 하였다. 이 후 조선조 중엽에 능곡 지방에 집성을 이루다가 기묘사화 등으로 인하여 전라도 등 각 지방으로 분산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고 하며 현재 고양에는 특별히 집성되는 마을이 없고 선조의 묘와 최근 덕양 서원이 설립되어 업적을 연구 발표 등 다양한 사업 을 펼치고 있을 뿐이다. 2) 안동 권씨( 安 東 權 氏 ) 안동권씨는 고려 때 시조 권행의 10세손 추밀원부사 권수평( 權 守 平 )이 1210년경 안동 에서 출생하여 관직을 이수하기 위해 송도로 진출한 이후 그를 비롯한 그의 후손들이 대개 장단의 임진강 주변(현재 진동면 기온리 주위)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그는 추밀공 파의 파조가 되었는데 장단에 있던 묘소는 실전되어 진동면 하포리에 제단을 설치했고, 한림학사, 지제교를 역임했던 그 아들 위( 韙 )의 묘소도 실전되어 추밀공 단소아래 단소 를 마련했다. 찬성사. 판군부사사를 지낸 손자 단( 㫜 )의 산소는 개성 근처 덕달동에 있 고, 고려 충선왕이 양자로 삼았던 추밀공의 현손 후( 煦 )의 묘소는 진동면 기온리(지금의 하포리 저운동)에 있다. 이후 시조로부터 19세손까지 후손들의 묘소가 장단의 진동면에 있고 20세 이후의 후손 묘는 김포에 있다. 17세 화산부원군 복( 復 )의 3자공( 恭 )은 태종 의 12녀 숙근옹주의 부마였다. 추밀공의 증손 권부( 權 溥 )는 자신을 포함해 그의 아들 5 형제와 그의 사위 3명이 모두 군( 君 )에 봉해져서 명성을 떨쳤다. 당대 9봉군( 當 代 九 封 君 )은 역사상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이 가문의 자랑이다. 이를 볼 때 안동권씨는 1200년경부터 개성근교인 장단지역에서 뿌리를 내려 동족마 을을 이루고 6.25전쟁 이전까지 오래 세거해왔다가 이후 각지로 이거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장단에 살던 안동권씨들은 최근 서울에 20가구, 고양시에 20가구, 파주시에 16가구, 기타 지역에 11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72 권효숙

안동권씨 문중 신도비문 봉독하는 모습 3) 강릉 김씨( 江 陵 金 氏 ) 고려 공민왕 때 감무공 김윤남( 金 允 南,1361년생)은 호가 운암( 雲 巖 )으로 공조판서( 工 曹 判 書 ) 추( 錘 )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공민왕 때 홍건적과 왜구를 막아 큰 공을 세운 충 의지신의 업적을 남겼으나 고려 말에 국운이 다함을 예견하고 장단( 長 湍 )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다 별세하였다. 그의 아들 윤남도 조선 개국 후 낭천감무( 狼 川 監 務 )의 벼슬을 버 리고 오리곶면 내포리(현 문산읍 내포리)에 은거하였다.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며 나라의 쇄망을 한탄하여 그 이후 이 산을 국사봉( 國 思 峰 )이라 칭하였다고 한 다. 윤남의 후손들은 국사봉 아래 월롱면 능산리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려 세거해 나갔 으며 윤남의 증손 23 世 세 사기( 士 奇, 1517년졸)는 창녕 성씨 성담수의 사위인데, 사육 신 사건의 여파로 진사에 머물렀다. 그의 동생 사희( 士 熙 )의 손자가 파주 사족의 핵심 인물의 하나인 장포공( 長 浦 公 ) 김행( 金 行, 1532-1588)이다. 김행은 뛰어난 덕행과 학 문, 그리고 효행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장포공파( 長 浦 公 派 )로 분기한 김행의 후손들은 내포1리 장포마을에 거주하며 세계 世 系 를 이어나가고 있다. 효자 성중( 聖 重 )과 규( 矢 + 見 + 木 )를 배출한 능산리의 감무공파의 입향조 윤남의 묘는 문산읍 내포1리 산 24번지 에 있으며 현재 능산리에는 후손들이 26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내포1리 장포공파 후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73

손들은 예전에 많이 모여 살았을 때는 45호 이상이었으나 최근엔 외지로 많이 나가 9 호가 살고 있다고 한다. 적성면 두포리 밤고지 마을에는 강릉 김씨 한림공파가 15세기 후반부터 정착해서 거 주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30여 호 이상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지만 지금은 6가구만 거주 하고 있다. 고양시에는 39세손 김남필( 金 南 弼 )이 장 단군 진서면에서 거주하다가 6 25동란으 로 인하여 남하 하던 중 고양땅(지금의 사 리현동)에 가세( 家 勢 )와 일터를 이루어 그 후 약 50여년동안 강릉김씨 지산군파의 일가를 이루며 번성해왔다. 강릉김씨는 고양시 사리현동에다 망향제 단(26 世 ~30 世 까지)을 세우고, 숭조당(납 골묘)도 크게 지었다. 고양시 강릉김씨 숭조당(납골당) 4) 청주 한씨( 淸 州 韓 氏 ) 청주 한씨는 고려 때부터 장단을 고향으로 한 인물들이 조정에 많이 진출하였다. 한 언공( 韓 彦 恭,940~1004)은 문하시중( 門 下 侍 中 )에 올랐으며 고향인 장단을 단주( 端 州 )로 승격시켰고 목종의 묘정( 廟 庭 )에 배향되었으며, 한공의( 韓 公 義,1307~1365)는 상당부원 군 악( 渥 )의 아들로 음보로 녹남부사에 임명된 뒤, 많은 관직을 거쳐 소부, 위위, 선공 의 세 판사를 역임하였고 이어 대언에 이르렀다. 또한 품계가 벽상삼한삼중대광( 壁 上 三 韓 三 重 大 匡 )에 이르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된 한악( 韓 渥,1274~1342)이 있으며, 벼슬이 판후덕부사( 判 厚 德 府 事 )에 이르고 청성군( 淸 城 君 )에 봉해진 당대의 명필 한수( 韓 脩,1333~1384)와, 이조판서를 지낸 한리( 韓 理,?~1417)와 호부판사를 역임한 한제( 韓 齊,1349~1398)는 공의( 公 義 )의 세 아들이며 수( 脩 )의 아들 상질( 尙 質,?~1400) 등이 청 주 한씨의 고려 때 인물이다. 진동면과 서곡리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조에 들어 와서는 리( 理 )의 차남 승순( 承 舜,1380~1448)이 점지중추원사를 지냈으며 승순의 아들 274 권효숙

서룡( 瑞 龍,1398~1461)은 사헌부감찰. 첨지중추원사를 역임했고, 차남 서봉( 瑞 鳳, 1412~1456)은 이조정랑에 제수되고 좌익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삼남 서구( 瑞 龜 ) 는 첨지중추원사와 대사헌을 지냈으며 수충위사협찬 정난공신 2등에 훈록되었다. 이들 의 묘역은 교하면 교하리에 있다. 유항 한수 묘역 유항 한수 신도비 적성면 장파리 봉우재마을 후손들은 연천군 미산면에서 약 300여 년 전에 입향한 참 판공파가 20여 호가 세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장단 쪽의 청주 한씨와는 19 世 유항공 수 ( 修 ) 대에서 갈라진 후손들이며 입향조 한내문( 韓 乃 文 )의 묘는 적성면 답곡리에 있다. 6.25때 장단에서 피난 와서 정착한 청주 한씨들은 조리읍 장곡3리의 14호가 살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장단군 대강면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던 청주한씨들은 6.25전쟁이후 서울 등 각지로 나갔는데 장단군민회 대강면회 회원명부에 나타난 최근 주거지는 서울 시에 36가구. 파주시에 7가구, 고양시에 3가구, 기타 지역에 19가구이다. 5) 풍양 조씨( 豐 壤 趙 氏 ) 문산읍 문산리의 풍양 조씨는 면( 沔 )을 파시조로 하는 언양공파이다. 입향조 면은 춘 천으로부터 장단 진동면 초리로 17세기 후반에 들어왔으며 묘도 진동면 초리에 있다. 초리와 인근 하포리 아현동 독매마을 등지에 60여 가구가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6.25 전쟁 이후 피난을 나와 각 처로 흩어졌다. 현재 파주시에 18가구, 고양시에 2가구, 서 울시에 18가구, 기타지역에 4가구가 살고 있다.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75

6) 양천허씨( 陽 川 許 氏 ) 양천허씨는 고려 목종( 穆 宗 ) 때 내사사인( 內 史 舍 人 ) 지제고( 知 制 誥 ) 태자사의( 太 子 司 議 )등을 지낸 원( 元 )과 증손( 曾 孫 ) 정( 正 )이 예부상서( 禮 部 尙 書 )를 지낸후 태자재보( 太 子 太 保 )에 이르는 등 관직생활을 하면서 장단에 세거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많은 후 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왔다. 해방 후 장단군 대강면 독정리( 篤 正 里 )에 30호, 우 근리( 禹 勤 里 )에 66호 등 양천허씨들은 이곳에서 누대를 이어왔으나, 지금 이곳은 비무 장 지대로서 후손들은 6.25 전쟁 이후 모두 피난을 가서 각지로 흩어졌다. 대강면의 양 천허씨들은 주로 서울에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26가구), 파주와 연천에 각 1가구, 기타 지역에 5가구가 살고 있다. 이들은 매년 9월이면 연천군 백학면 백연리 두류봉 최전방 철책선 아래에서 망향제를 올리는데 이곳에서 고향땅이 보이기 때문이란다. 허준의 고향은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을 저술한 명의 허준의 묘가 진동면 화포리 129번 지에 있는데 이곳은 문중 묘역은 아니며, 허준의 어머니 묘와 허준부부의 묘만 있다. 허준은 양천허씨 시조의 11 世 판도좌랑공 관( 冠 )에서 분파하여 12세손에서 영월공( 寧 越 公 ) 서( 舒 )로부터 다시 분파되는 영월공파 5세손으로서 그의 고향은 대성동 부근 비무 장지대안에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양천허씨 장단군민회 前 대강면장 허병복씨 증언) 허준 선조의 묘소는 우근리를 중심으로 하여 도보로 1시간을 전후로 한 지역에 몰려 있다. 양천허씨 시조 허선문( 許 宣 文 : 삼한공신 공암촌주)은 고려 태조 때의 인물로서, 837년에 태어나 공암현(현재의 양천 강서 지역)에 살았으며,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 할 때 많은 군량미를 공급하여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의 아들 현( 玄 )이 소부감(나라의 중요 물건보관창고를 관리하는 관청)의 소감(고려 관직.종4품)을 역임했고 손자 원( 元 )이 예빈성(국빈을 접대하는 관청)의 경( 卿 )을 역임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아들부터는 개성에 기반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허선문으로 부 터 14세 허금( 許 錦 )까지는 고려시대에 태어나서 고려시대에 사망 하였다. 그런데 시조 로부터 9세까지의 묘소는 전하지 않는다. 시조의 10세손 허공( 許 珙 )은 충렬왕 때 추밀 276 권효숙

원지사와 지공거. 밀지사판사를 지냈으며 묘는 경기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에 있다. 12세손 허백( 許 伯 )은 개성부 전포에, 14세손 허금( 許 錦 )은 개성부 승제문밖 외수우리 다대동, 14세손의 부인 원주원씨는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에 묻혔다. 16세손 허비( 許 扉 ) 와 그의 부인 전의이씨는 장단군 대강면 해공에, 18세손(조부) 허곤( 許 琨 : 1468 1523) 은 장단군 임진면 북백목동에 묻혔다. 허준의 모친과 허준, 그리고 허준의 9세손 허규( 許 壋 : 1790?)까지 대대로 장단군 진동면 하포리에 묘소가 있다. 즉, 고려의 도읍지는 개성이고, 허준의 직계 조상들로 묘소가 전하는 모든 분들이 개성 주변과 장단에, 그리고 허준의 모친과 허준, 허준의 직계 자손 거의 대부분이 장단에 묻힌 것을 보아, 허준은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에 세거 ( 世 居 )하던 양천 허씨 집안 사람임이 분명하다. 대개의 경우 선산( 先 山 )에서 10리를 전후로 한 거리에 그 선산과 관련된 자손 들이 살았다. 선산이란 대개의 경우 공을 세운 신하에게 하사한 땅이므로, 선산은 가문의 근 거지이며, 그 주변에 사는 자손들에 의하여 지켜져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았을 때 허준의 고향은 당연히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로 확인 된다. 파주시 진동면 화포리의 허준 묘역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77

Ⅳ. 파주 장단지역의 인물들 1. 고려, 조선시대 인물 1) 권준 權 準, 1280년(충렬왕 6)~1352년(공민왕 1)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安 東, 자는 평중 平 仲, 호는 송재 松 齋 이다. 영가부 원군 永 嘉 府 院 君 부 溥 의 아들이다. 충선왕을 연저 燕 邸 에서 만나 대언 代 言 에 발탁되고 무위장군 武 衛 將 軍 합포만호 合 浦 萬 戶 에 임명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밀직부사 密 直 副 使, 1313년에 지밀직사사 知 密 直 司 事 에 올랐다. 조적 曺 頔 등이 심양왕 瀋 陽 王 고 暠 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을 때 의리를 지켜 가담하지 않았고, 이들이 평정되자 첨의찬성사 僉 議 贊 成 事 에 임명되고 길창부원군 吉 昌 府 院 君 으로 봉해졌다. 충목왕이 돌아가자 기로대신들과 원에 글을 올려 공민왕을 세울 것 을 청하기도 하였다. 조부 이래 명문으로서 권세와 부귀를 누렸으나, 세도를 믿고 뇌물 을 받아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들었다. 아버지의 지시로 이제현 李 齊 賢 과 함께 효 행록 孝 行 錄 을 지었다. 시호는 창화 昌 和 이며, 진동면 서곡리에 묘가 있다. 2) 권후 權 煦, 1296년(충렬왕 22)~1349년(충정왕 1)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安 東 이며, 초명은 재 載, 몽고 이름은 탈환 脫 歡 이 다. 정승 부 溥 의 아들이다. 충선왕의 신임을 받은 형 준 準 의 덕분으로 낭장 郎 將 에 오르고, 다시 삼사판관 三 司 判 官 으로 전임되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불리어 가서 아들로 입적되면서 왕후 王 煦 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나, 조선조에 들어와서 권근 權 近 의 건의로 본성을 회복하여 권후가 되었다. 1308년(충렬왕 34) 충렬왕의 죽음으로 충선왕과 함께 돌아와 사복부정 司 僕 副 正 을 거쳐 사헌집의 司 憲 執 義 에 임명되었으며, 계림부원대군 鷄 林 府 院 大 君 에 봉해 지니 그때 사람들이 왕의 아우라 칭하였다. 1314년(충숙왕 1)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상왕이 되어 원나라에 들어가 있던 충선왕의 요청으로 다시 원나라에 가서 황태자 의 시구르치 速 古 赤 : 侍 子 가 되고, 계림군공 鷄 林 君 公 의 작위와 전택을 하사받았다. 1320 278 권효숙

년(충숙왕 7)에는 토번에 유배되어 있던 충선왕을 호위하여 원나라의 서울로 돌아왔다. 1325년 충선왕이 죽자 최마복 衰 麻 服 : 상복을 입고 영구를 모시고 고려로 돌아와 장사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사사로이 능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죽은 지 20여 년이 지나도록 충선왕의 시호가 없으므로 원나라에 가서 시호를 청하고, 아울러 충숙왕의 시호도 받아 돌아왔으며,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는 성절사 聖 節 使 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해 우정승에 임명되었으나, 다음해 정방 政 房 을 폐하고 인사권을 전리사 典 理 司 와 군부사 軍 簿 司 에 각각 귀속시킨 일과 권세가에게 소속된 녹과전 祿 科 田 을 원상태로 회복하려는 일을 시도하다가 도리어 권문세가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364년(공민왕 13) 입조하라는 순제 順 帝 의 명에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좌정승 김영돈 金 永 旽 과 함께 제지 帝 旨 를 가지고 돌아와서 정치도감 整 治 都 監 을 설치, 찬성사 贊 成 事 안축 安 軸, 판밀직 判 密 直 김광철 金 光 轍 등과 함께 판사가 되어 33인의 속관 屬 官 으 로 각 도의 토지를 측량하도록 하였다. 1347년(충목왕 3) 영도첨의사사 領 都 僉 議 司 事 에 임명되고 다음해 다시 정승에 올랐다. 1349년(충정왕 1)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 아오던 중 창의현 昌 義 縣 에 이르러 병사하였다. 공민왕의 묘정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헌 正 獻 이다. 진동면 하포리에 묘가 있다. 3) 김응순 金 應 淳, 1728년(영조 4)~1774년(영조 50)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安 東 이며 호는 낙운와 樂 雲 窩 다. 군수 郡 守 영행 令 行 의 후손으로 목사 牧 使 이건 履 健 의 아들이다. 1753년(영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774년(영조 50)에는 준등과 俊 登 科 에 합격하였다. 후에 지평 持 平, 도승지 都 承 旨, 부제학 副 提 學 을 거쳐 이조참판 吏 曹 參 判, 대 사헌 大 司 憲, 경상도관찰사 慶 尙 道 觀 察 使 등을 역임했다. 1774년 사노비 寺 奴 婢 의 폐지를 상소하였으며, 한성부판윤 漢 城 府 判 尹 이 되었다. 사후에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풍계록 楓 溪 錄 이 있다. 장단군 장북면 조목동에 묘가 있다. 4) 김정국 金 正 國, 1485년(성종 16)~1541년(중종 36)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성 義 城 이며, 자는 국필 國 弼, 호는 사재 思 齋 ㆍ팔여거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79

사 八 餘 居 士 이다. 부사 府 使 로 이조판서 吏 曹 判 書 에 증직된 익령 益 齡 의 손자이며 예빈시참 봉 禮 賓 寺 參 奉 으로 우찬성 右 贊 成 에 증직된 연 璉 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예빈시정 禮 賓 寺 正 조유형 趙 有 亨 에게서 양육되었으며, 한훤당 寒 喧 堂 김굉필 金 宏 弼 의 문인으로 조광조, 이장곤 등과 교류하였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와 진사시에 오르고 150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 후 홍문관부수찬 弘 文 館 副 修 撰, 승문원교검 承 文 院 校 檢 을 거쳐 홍문관수찬 弘 文 館 修 撰 으로 지제교 知 製 敎 를 겸하였으며 사간원정언 司 諫 院 正 言 에 제수되었다. 1510년 이조좌랑 吏 曹 佐 郞 으로 선임되어 문관의 인사 행정을 담당하고 1512년 홍문관부교리 弘 文 館 副 校 理 로 옮겼다가 이듬해 교리로 승진하였다. 곧이어 사간원헌납 司 諫 院 獻 納 에 임명되었고, 1514년에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해 이조 공조 호조의 정랑을 거쳐 승문원교리로 전직 되었다가 1515년 다시 이조정랑에 선임되었다. 1516년 의정부검상 議 政 府 檢 詳 을 거쳐 이 듬해 의정부사인 議 政 府 舍 人 으로 승진하고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518년 직제학 直 提 學 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승정원동부승지 承 政 院 同 副 承 旨 로 승진하여 왕명을 출납하였다. 우승 지 右 承 旨 로 승진하여 연산군을 위해 입후 立 後 하기를 청하였고, 황해도관찰사 黃 海 道 觀 察 使 로 재임 중인 1519년 경민편 警 民 編 을 편찬하는 등 지방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으 며,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향약 장려 운동에 호응하여 향약의 보급을 통한 향촌 교 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다음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등 사림파 학자들의 무고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으나 사태가 급박하여 상소를 중지하였다. 후에 이러한 일들이 대간에 알 려져 조광조 등의 사림파를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형인 안국 安 國 과 함께 관직이 삭탈되 었다. 그 후 고양군 중면 망동으로 내려가 스스로 팔여거사 라 칭하였다. 고양에 은거 하면서 학문을 닦고 저술과 후진 교육에 전심하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관직에서 떠난 지 20년 만인 1537년 관직이 복구되어 이듬해 용양위대호군 龍 揚 衛 大 護 軍 을 거쳐 전라도관찰사 全 羅 道 觀 察 使 가 되었다. 전라도관찰사로 재임 중 수십조에 달 하는 편민거폐 便 民 去 弊 의 정책을 건의하여 국정에 반영하게 하였으며, 시골 백성의 병 을 치유하기 위하여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약방문을 수집하여 촌가구급방 村 家 救 急 方 을 간행하였다. 1539년 병조참의 兵 曹 參 議 와 공조참의 工 曹 參 議 를 역임하고 가선대부 嘉 善 大 280 권효숙

夫 로 승진하여 경상도관찰사 慶 尙 道 觀 察 使 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병으로 관 직을 사퇴하였다가 1540년 예조 병조 형조참판 등의 요직을 차례로 지내고 지중추부 사 知 中 樞 府 事 에 이르렀다. 성리학과 역사, 의학 등에 밝았으며,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다. 형인 김안국이나 정광 필 鄭 光 弼 과 같이 조광조의 지치주의 至 治 主 義 를 지지하였으나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하였 다. 좌찬성 左 贊 成 에 추증되었으며 장단의 임강서원 臨 江 書 院, 용강의 오산서원 鰲 山 書 院, 고양의 문봉서원 文 峰 書 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성리대전절요 性 理 大 全 節 要 4권 2책과 시문집인 사재집 思 齋 集 4권 2책이 있으며, 그 밖에도 촌가구급방, 역대수수 승총입도 歷 代 授 受 承 統 立 圖, 기묘훈적 己 卯 勳 籍, 경민편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 文 穆 이다. 진동면 하포리에 묘와 신도비가 있으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5) 김추 金 錘, 생몰년 미상 고려 말 인물로 본관은 강릉 江 陵 이며 문하시중 門 下 侍 中 명원부원군 溟 原 府 院 君 김광을 金 光 乙 의 아들이다. 공조판서 工 曹 判 書 를 지냈으며 일선군 一 善 君 에 봉해졌다. 부인이 순 흥 안씨 順 興 安 氏 로 안향 安 珦 의 증손 안원숭 安 元 崇 의 딸이다. 묘는 장단 대덕산에 있다. 6) 상득용 尙 得 容,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장단 출신이다. 본관은 목천 木 川 이며, 자는 약능 若 能, 호는 덕 옹 德 翁 이다. 영의정 진 震 의 후손으로, 동기 東 耆 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守 門 將 이 된 뒤 선전관 宣 傳 官, 훈련원판관 訓 練 院 判 官, 화량진 첨사 花 梁 鎭 僉 使 등을 역임하였다. 무인으로서 독서를 즐겨 육도 六 韜, 손자 孫 子, 무자 武 子 등 병서에 해박하였고, 경사 經 史 에도 밝았으며 천문 주수 籌 數 에 두루 능하 였다. 말년에는 고향에 돌아가 제자 양성에 노력하여 우수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저서로 성루합편 星 漏 合 編, 동국산천고 東 國 山 川 攷, 주행통보 周 行 通 譜, 속장감 續 將 鑑, 제자수영 諸 子 髓 英, 동인가곡 東 人 歌 曲 등이 있다.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81

7) 서유구 徐 有 榘, 1764년(영조 40)~1845년(헌종 11)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달성 達 城 이며 자는 준평 準 平, 호는 풍석 楓 石 이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吏 曹 判 書 호수 浩 修 이며, 어머니는 김덕균 金 德 均 의 딸이다. 주 로 장단과 서울에서 살았다.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검열 檢 閱 과 대교 待 敎 를 거쳐 대사성 大 司 成, 형조판서 刑 曹 判 書, 예조판서 禮 曹 判 書, 부제학 副 提 學, 이조판서 吏 曹 判 書, 우참찬 右 參 贊, 대제학 大 提 學 등의 내직과 순창군수 淳 昌 郡 守, 의주부윤 義 州 府 尹, 강화유수 江 華 留 守, 전라감사 全 羅 監 司 등의 외직 등 핵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는 제자백가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문에 심취하여 이용후생 利 用 厚 生 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해동농서 海 東 農 書 를 지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농업 분야에 깊 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농서를 저술함으로써 농민의 생활 향상에 일조하였다. 1798년 (정조 22) 정조는 영조가 적전 籍 田 을 직접 경작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에 농사의 중요 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농서 農 書 를 올리라는 윤음 綸 音 을 내렸다. 이때 순창군 수로 있던 그는 각 도에 농학자를 두어 농업 기술을 조사 연구하도록 한 후 그것을 바 탕으로 농서를 편찬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실제 농사 를 짓는 곳에서 실험과 결과를 통해 책을 저술하자는 그의 주장에서 이용후생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1834년 전라감사로 있을 때는 흉년으로 고생하는 농민을 위해 강필리 姜 必 履 의 감저 보 甘 藷 譜, 김장순 金 長 淳 의 감저신보 甘 藷 新 譜 등을 연구하여 종저보 種 藷 譜 를 저술 함으로써 구황식물인 고구마를 재배하여 기근을 탈피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꾸준히 농업 기술의 개혁과 정책 변화를 건의하였고, 저술 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여 농업을 집대성한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 林 園 經 濟 志 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당 시에 나와 있던 국내의 여러 농서들과 중국 문헌 등 800여 종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으 로 18세기말 조선 농업의 실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업적이다. 난호어목지 蘭 湖 魚 牧 志, 누판고 鏤 板 考, 행포지 杏 浦 志, 금화경독기 金 華 耕 讀 記 등과 음악 관 련 서적 유예지 遊 藝 志 를 저술하였다. 시호는 문간 文 簡 이다. 묘는 진서면 금릉리 金 陵 里 의 선영 아래에 있다. 282 권효숙

8) 서일수 徐 日 修, 1685년(숙종 11)~?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달성 達 城 이며, 자는 신지 新 之 이다. 명순 命 純 의 아들이다. 55세의 늦은 나이로 진사에 합격하였고, 관직은 충주목사 忠 州 牧 使 에 이르렀다. 사복 시정 司 僕 寺 正 에 추증되었다. 장단면 도라산리에 묘가 있다. 9) 서종태 徐 宗 泰, 1652년(효종 3)~1719년(숙종 45)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달성 達 城 이며, 자는 군망 君 望, 호는 만정 晩 靜 서곡 瑞 谷 송애 松 厓 이다. 병조참의 兵 曹 參 議 를 지낸 문상 文 尙 의 아들이며 영의정 領 議 政 을 역임 한 문중 文 重 의 조카이다. 1675년(숙종 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1680년 문과별시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검열 檢 閱 이 되어 실록청도청낭청 實 錄 廳 都 廳 郞 廳 으로 현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오두인 吳 斗 寅, 박태보 朴 泰 輔 등과 소를 올리고 은퇴 하여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다시 관직에 나 와 승지 承 旨, 대사간 大 司 諫, 대제학 大 提 學, 공조판서 工 曹 判 書, 대사헌 大 司 憲 을 역임하였 다. 1703년 정조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판서 吏 曹 判 書,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거쳐 1716년 행판중추부사 判 中 樞 府 事 가 되었다. 저서로 만정당집 晩 靜 堂 集 이 있다. 시 호는 문효 文 孝 이다. 장단면 도라산리에 묘가 있다. 10) 안원 安 瑗, 1346년(충목왕 2 1411년(태종 1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흥 順 興 이며 초명은 정 定 이다. 고려 말의 유학 자 향 珦 의 5대손이며, 정당문학 政 堂 文 學 원숭 元 崇 의 아들이다. 고려 공민왕 때 파주 서 교를 개간한 안목의 손자로서 용재 성현의 외증조부이기도 하다. 임진강 낙하 지역의 농장에서 살았고 태조 이성계가 형조판서 刑 曹 判 書 를 제소했을 때에도 나아가지 않고 파 주농장인 서원별서 瑞 原 別 墅 에 은둔하고 있었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전서 工 曹 典 書 를 지냈다. 1390년(공양왕 2) 국왕이 천도하려고 하자 이는 술사 術 士 들의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 성계가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건국 후에는 정치 참여를 거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83

부하니, 이로써 반대파의 사람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 면서 강제로 구도 舊 都 의 관리를 맡기니 유후 留 後 의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그 뒤 태조가 형조전서 刑 曹 典 書 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하여 몸소 찾아가 간청하여 벼슬에 나아가니, 1401년(태종 1) 우군동지총 제 右 軍 同 知 摠 制 로서 사은사 謝 恩 使 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서 대학연의 大 學 衍 義, 통 감집람 通 鑑 集 覽 등의 서책을 구해왔다. 1404년 경상도관찰사 慶 尙 道 觀 察 使 를 지내고 1407년 사헌부대사헌 司 憲 府 大 司 憲 이 되어 태종의 밀명을 받고 외척으로서 횡포를 부리 던 민무구 閔 無 咎 형제를 탄핵하여 외방으로 유배시켰다. 이어서 판한성부사 判 漢 城 府 使 와 개성유후 開 城 留 侯 를 역임하고 66세로 병사하였다. 평소 근면 성실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였다. 시호는 경질 景 質 이며 묘소가 장단에 있다. 11) 염제신 廉 悌 臣, 1304년(충렬왕 30)~1382년(우왕 8)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서원 瑞 原 : 坡 州, 자는 개숙 愷 叔, 어릴 적 이름은 불노 佛 奴 이다. 첨의중찬 僉 議 中 贊 을 지낸 승익 承 益 의 손자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원나라에 가서 평장사 平 章 事 로 있던 고모부인 말길 末 吉 의 집 에서 자랐다. 원나라 태정황제 泰 定 皇 帝 를 시종하며 총애를 받다가 귀국하여 어머니를 만나보고, 다시 원나라에 건너가서 상의사 尙 衣 使 가 되었다. 뒤에 다시 어머니를 봉양하 기 위하여 귀국을 청하여 정동성낭중 征 東 省 郞 中 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그는 동료들의 횡포를 억제하는 한편, 토지와 노비의 소송은 모두 관계 부처에서 처 리하게 함으로써 충숙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다시 원나라에 건너가서 익정사승 翊 正 司 丞 이 되었고, 뒤이어 강절성 江 浙 省 에 나가 중정원 中 政 院 의 전화 錢 貨 를 회계하게 되었 는데, 이때 관기들이 뇌물을 주어 매수하려 하는 것을 모두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 사 실을 보고받은 원나라 순제 順 帝 가 특별히 등용하려 하였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귀국하 였다. 충목왕 때 삼사좌사 三 司 左 使 에 수성익대공신 輸 誠 翊 戴 功 臣 으로 봉해졌다가 뒤이어 도 첨의평리 都 僉 議 評 理 가 되었다. 1349년(충정왕 1) 찬성사 贊 成 事 가 되었으며, 이듬해 하 284 권효숙

정사 賀 正 使 로 원나라에 갔다. 1354년(공민왕 3) 좌정승과 우정승을 역임하였으며, 단성 수의동덕보리공신 端 誠 守 義 同 德 輔 理 功 臣 에 봉해지고 곡성부원군 曲 城 府 院 君 이 되었다. 그 때 원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 고려에 구원을 청하므로, 유탁 柳 濯 등과 함께 군사 2천을 이끌고 원나라에 갔다가 그해 10월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였다. 1356년 친원파 기철 奇 轍 일파를 숙청한 뒤 서북면도원수 西 北 面 都 元 帥 가 되어 원나라 의 공격에 대비하며 수문하시중 守 門 下 侍 中 을 겸하였다. 1358년 문하시중 門 下 侍 中 을 거 쳐 관직과 명망이 최고위에 이르자 1361년 사직하였다. 그 뒤 1363년 우정승에 임명되 었으나 홍건적의 난 때 어머니를 버리고 피난한 것이 문제 되어 서경 署 經 에 통과되지 못하여 파면되었으며, 1364년 영도첨의사사 領 都 僉 議 司 事 에 임명되었다. 그 후 1371년 서북면도통사 西 北 面 都 統 使 가 되어 오로산성 五 老 山 城 : 元 刺 山 城 을 정벌하고 돌아와서 곡 성백 曲 城 伯 에 봉해졌으며, 그의 딸이 신비 愼 妃 로 책봉되었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한 후 영삼사사 領 三 司 事 에, 뒤이어 영문하부사 領 門 下 府 事 에 임명 되었으며,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 忠 誠 守 義 同 德 論 道 輔 理 功 臣 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경 忠 敬 이다. 장단군 강남면 대곡리에 있는 그의 묘 앞에는 왕명에 의하여 이색이 찬하고 한수가 쓴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12) 우현보 禹 玄 寶, 1333년(충숙왕 복위 2)~1400년(정종 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단양 丹 陽 이며 자는 원공 原 功 이다. 적성군 赤 城 君 길생 吉 生 의 아들이다.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春 秋 官 檢 閱, 집의 執 義, 좌사의대부 左 司 議 大 夫 를 거쳐 우왕 때 밀직대언 密 直 代 言, 제학 提 學, 동지밀직사사겸대사헌 同 知 密 直 司 司 兼 大 司 憲, 정당문학 政 堂 文 學, 문하찬성사 門 下 贊 成 事, 삼사좌사 三 司 左 使 를 역임했다. 1388년(우왕 14) 다시 찬성사 贊 成 事 가 되어 순충익대좌리공신 純 忠 翊 戴 佐 理 功 臣 의 호를 받았다. 이해 요동 정벌 때는 경성유수 京 城 留 守 로 남아 있었고,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좌시중 左 侍 中 으로 있다가 곧 파직되었으며, 뒤에 단양부원군 丹 陽 府 院 君 으로 봉해졌다. 1390년(공양왕 2) 다시 판삼사사 判 三 司 事 로 있다가 이초 彝 初 의 옥사 獄 事 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이어 석방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철원 鐵 原 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85

려나와 단산부원군 丹 山 府 院 君 에 봉해졌다. 1392년(공양왕 4) 도평의사사 都 評 議 使 司 에 의해 다시 원배 遠 配 되었다 풀려나왔으나 이해 조선이 개국되자 또 광주 光 州 에 유배되어 이듬해 석방되었다. 1398년(태조 7) 복관되고, 이듬해 단양백 丹 陽 伯 에 봉해졌으며 1400 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문인 이래 李 來 로부터 반란의 소식을 듣고 이를 이방원 에게 알린 공으로 난이 평정된 뒤 추충보조공신 推 忠 輔 祚 功 臣 이 되었다. 시호는 충정 忠 靖 이다. 묘소는 장단군에 있으며 파평면 두포리에 단이 있다. 13) 윤보 尹 珤, 1252년(고종 39)~1329년(충숙왕 16)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파주에서 한동안 우거하였다. 본관은 파평 坡 平 이며, 초명은 문 옥 文 玉 이다. 문하시중 門 下 侍 中 을 지낸 관 瓘 의 후손이며 감찰어사를 역임한 순 純 의 아들 이다. 1276년(충렬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장사랑 비서동정에 임명되었다. 1278년(충렬왕 4) 에 내시 內 侍 첨사부녹사 詹 事 府 錄 事 로서 정방필도치 政 房 必 闍 赤 에 임명되어 전주 銓 注 를 관장하였다. 이후 15여 년 동안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국정을 살피는 데 힘썼다. 1296년 좌승지로 있으면서 국자감시 國 子 監 試 를 총괄하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과거의 책임자로서 자기 직분을 올바르게 지켜 편벽됨이 없이 인재를 선발하였다. 다음 해 밀직학사 密 直 學 士 로 승진하여 재추 宰 樞 의 반열에 올랐다. 1298년 1월 충선왕이 즉위 하자 바로 홍문관학사 弘 文 館 學 士, 의조상서 儀 曹 尙 書 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 밀직부사 樞 密 副 使, 성균관대사성 成 均 館 大 司 成, 수문전학사 修 文 殿 學 士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원에 의해 충렬왕이 복위하자 두 달 뒤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도 지휘사 西 北 面 都 指 揮 使 가 되었다. 이듬해 3월 고려에서 만호 벼슬을 하고 있던 몽고인 인후 印 候 가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한희유 韓 希 愈 등을 제거하고자 무고 사건을 일으키 고 원으로 도망간 일이 있었는데, 국경의 책임자로 그가 원나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 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후 충선왕이 원에서 무종을 옹립한 공을 인정받아, 1307년 3 월경부터 다시 국정을 장악하게 되자 밀직부사 密 直 副 使 를 거쳐 선부판사 選 部 判 事 와 우 문관대제학 右 文 館 大 提 學 에 올랐다. 그 뒤 1321년(충숙왕 8) 수첨의찬성사 守 僉 議 贊 成 事 를 나이가 많아 물러났으며, 다시 정승치사 政 丞 致 仕 의 직이 더해지고 영평군 鈴 平 君 에 286 권효숙

봉해졌다. 시호는 문현 文 顯 이다. 원래 묘가 장단에 있었으나 실전되었다. 14) 윤승례 尹 承 禮, 생몰년 미상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 坡 平 이다. 영평군 척 陟 의 다섯째 아들이다. 봉익대부 奉 翊 大 夫 에 오르고 정3품직인 판도판서 版 圖 判 書 를 지냈다. 이후 고려가 망하 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고려의 충신들은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거나 두문동 72현처럼 절조를 지켰다. 이때 윤승례는 파평산에 들어가 길재 등과 함께 고려를 그리 워하면서 노후를 보냈다고 한다.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후에 손녀인 번 璠 의 딸이 세조비 정희왕후 貞 熹 王 后 로 책봉됨에 따라 영의정에 추증되 었으며, 손자인 공간공 恭 簡 公 형 炯 이 좌익공신 佐 翼 功 臣 에 책훈되어 순충보조공신 純 忠 補 祚 功 臣 에 추증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후손 중에서 고관대작과 학자가 많이 배출되 어 집안이 크게 번창하였다. 시호는 문충 文 忠 이다. 묘는 장단에 있다. 15) 윤안숙 尹 安 淑,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 坡 平 이며 문현공 보 珤 의 넷째 아들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327년(충숙왕 14) 충숙왕이 심왕 고에게 왕위를 빼앗 길 뻔 했을 때 왕권을 보위한 공으로 추성익위좌명공신 推 誠 翊 衛 佐 命 功 臣 2등으로 책훈 되고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또한 1349년(충정왕 1) 충정왕을 왕으로 옹립한 공으 로 그해 7월 추성좌리공신 推 誠 佐 理 功 臣 으로 삼사의좌사 三 司 議 左 事 에 올랐다. 8월에 삼 중대광도첨의사사의찬성사 三 重 大 匡 都 僉 議 事 司 贊 成 事 를 임명받았다, 이후 영평부원군 鈴 平 府 院 君 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간 良 簡 이다. 장단면에 묘가 있다. 16) 윤암 尹 巖,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 坡 平 이며, 태종의 딸 숙경옹주 淑 慶 翁 主 의 남편이 다. 좌익공신 左 翼 功 臣 2등에 책훈되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파평군 坡 平 君 에 책봉되었 으며 시호는 제도 齊 度 이다. 장단에 묘가 있다고 전한다.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87

17) 윤인첨 尹 鱗 瞻, 1110년(예종 5)~1176년(명종 6)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 坡 平, 자는 태조 胎 兆 이다. 정당문학 政 堂 文 學 을 지 낸 언이 彦 頤 의 장남이다. 의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시어사 侍 御 史 가 되었으나 일을 논하다가 고관의 뜻에 거슬려 좌사원외랑 左 司 員 外 郞 으로 좌천되었다. 1153년(의종 7) 예부원외랑 禮 部 員 外 郞 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기거주 起 居 注 에 올랐다. 1165년 형부시랑 刑 部 侍 郞 으로 승급하고 서북면병사부사 西 北 面 兵 使 副 使 가 되었는데, 그때 금나라 군사가 압록강 안의 섬에 침입하여 정주 靜 州 : 현 의주의 방수별장 防 守 別 將 원상 元 尙 등 관원 16인을 잡아갔다. 당시 정주판관 靜 州 判 官 조동희 趙 冬 曦 등과 은밀히 상의하여 첩문 牒 文 을 금나라의 대부 大 夫 영주 營 主 에게 보내어 잡혀간 사람들을 돌아오 게 하였다. 1169년 우간의대부 右 諫 議 大 夫 가 되고, 이듬해 정중부 등의 무신의 난이 일어나 장남 종악이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1171년(명종 1) 국자감대사성 國 子 監 大 司 成 이 되었다가 곧 참지정사판병부사 參 知 政 事 判 兵 部 事 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 中 書 侍 郞 平 章 事 에 올랐으며, 1172년(명종 2) 동북면병마판사행영병마겸중군병마판사 東 北 面 兵 馬 判 事 行 營 兵 馬 兼 中 軍 兵 馬 判 事 가 되었다. 이듬해 김보당 金 甫 當 이 반기를 들자 이의방 李 義 方 이 그가 김보당과 모의하였을 것이라 의심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유응규 庾 應 圭 의 힘을 입어 면하게 되 었으며, 뒤이어 상장군을 겸하여 중방 重 房 에 참여하게 되고 수태사 守 太 師 의 벼슬이 가 하여졌다. 1174년 서경유수 西 京 留 守 조위총 趙 位 寵 이 반기를 들자 원수 元 帥 가 되어 3군을 거느리 고 서경을 치게 되었으나 절령 岊 嶺 : 慈 悲 嶺 에서 패하였다. 다시 원수가 되어 부원수 기 탁성 奇 卓 成, 좌군병마사 진준 陳 俊, 우군병마사 경진 慶 珍, 중군병마사 최충렬 崔 忠 烈 등 과 더불어 서경을 쳐서 1176년 이를 평정하고 조위총을 죽였다. 그 공으로 추충정란광 국공신 상주국감수국사 推 忠 靖 亂 匡 國 功 臣 上 柱 國 監 修 國 史 에 올랐다. 죽은 뒤 수태사문하시중 守 太 師 門 下 侍 中 이 증직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3형제가 과거 에 급제하였으므로, 그 처에게는 나라에서 상을 내리어 매년 녹 祿 을 주었다. 명종 묘정 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 文 定 이다. 묘는 장단에 있다. 288 권효숙

18) 한언공 韓 彦 恭, 940년(태조 23)~1004년(목종 7) 고려 초기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 淸 州 다. 광록소경 光 祿 少 卿 총례 聰 禮 의 아들로 장단 長 湍 이 고향이다. 광종 때 15세의 나이로 광문원 光 文 院 의 서생 書 生 으로 있다가 곧 광문원의 승사랑 承 事 郞 이 되고 이어 내의승지사인 內 議 承 旨 舍 人 에 올랐다. 984년(성종 3) 형관시랑 刑 官 侍 郞 에 올랐고 이어 병관시랑 兵 官 侍 郞 이 되었다. 990년 송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금자광 록대부검교병부상서겸어사대부 金 紫 光 祿 大 夫 檢 校 兵 部 尙 書 兼 御 史 大 夫 를 제수 받고 대장경 481함 函 2,500권과 송 태종이 지은 전소요연화심륜 詮 逍 遙 蓮 花 心 輪 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후 어사예관시랑판예빈성사 御 史 禮 官 侍 郞 判 禮 賓 省 事 가 되어 송의 제도를 따라 중추 원 中 樞 院 의 설치를 건의하여 실현되자 부사 副 使 를 거쳐 중추원사 中 樞 院 使 가 되었다. 이 어 전중감 殿 重 監 과 지예관사 知 禮 官 事 를 거쳐 참지정사상주국 參 知 政 事 上 住 國 을 역임했으 며, 997년 목종이 즉위하면서 내사시랑평장사 內 史 侍 郞 平 章 事 에 제수되었고 1001년(목종 4)에 문하시중 門 下 侍 中 에 올랐다. 목종은 그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하여 옛 본관인 장단 을 단주 湍 州 로 승격시키기도 하였다. 한언공은 전폐 錢 幣 의 사용으로 추포 麤 布 를 금하여 백성의 불편이 커지자 그 폐단을 상소하여 전폐를 다주 茶 酒 나 식미 食 味 등의 점포에서만 사용하게 하고, 그 밖의 교역에 서는 토산물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뒤 개국후감수국사 開 國 侯 監 修 國 史 가 되었으며 죽은 뒤 내사령 內 史 令 에 추증되었 다. 1027년(현종 18) 목종 묘정에 제향되었고, 1033년(덕종 2) 다시 태부 太 傅 가 증직되 었다. 시호는 정신 貞 信 이다. 19) 한제 韓 齊, 1349년(충정 원년)~1398년(태조 7년)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 淸 州 )이며 밀직부사를 지낸 공의( 公 義 )의 셋째아들이 다. 우왕조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부판사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멸망하자 전원 으로 들어가 은둔하다 별세하였다. 진동면 서곡리에 묘가 있다.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89

20) 허공( 許 珙 ), 1234년(고려 고종20)~1291년(충렬왕17). 고려의 문신 추밀원 부사를 지낸 허수( 許 遂 )의 아들이다. 시조로부터 10세손이다. 자는 온독( 韞 匵 ) 이고, 초명은 허의( 許 儀 ), 시호는 문경( 文 敬 )이며 우리 양천허씨의 원류계파( 原 流 系 派 ) 를 이룬 동주사공 허정. 판도좌랑공 허관. 대제학공 허부의 부친이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위( 奇 偉 )하였으며, 1258년(고종 45)에 평장사( 平 章 事 ) 최자( 崔 滋 )의 문하에서 병과로 급제, 승선( 承 宣 ) 유경( 柳 敬 )의 추천으로 최령( 崔 寧 ) 원공식( 元 公 植 )과 함께 내시( 內 侍 )로 추천되어 정사점필원( 政 事 點 筆 員 )이 되니, 당시 사람들은 이 들을 정방3걸( 政 房 三 傑 )이라 불렀다. 이후 국학박사( 國 學 博 士 )를 거쳐 합문지후( 閣 門 祗 候 )를 제수 받았다. 1267년(원종 8) 호부시랑( 戶 部 侍 郞 )이 되어 신종 희종 강종 등 3조( 朝 )의 실록을 찬 수하였다. 1269년 우부승선 이부시랑 어사대지사( 御 史 臺 知 事 )가 되었으며, 이때 권신 임연( 林 衍 )이 그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자 청혼하였으나 거절하여 미움을 샀다. 그해 임연이 왕 을 폐하고 안경공( 安 慶 公 ) 창을 세울 때, 많은 조신들이 살해되었으나 부인의 장례 때 문에 양천에 가서 있었던 관계로 화를 면하였다. 그 뒤에도 전선( 銓 選 )을 맡을 적격자가 없어 추밀원첨서사( 簽 書 事 )로 중용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추밀원지사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온 뒤, 1276년 밀직사사 겸 지공거( 知 貢 擧 )를 거쳐 세자조호( 世 子 調 護 ) 밀직사판사를 지냈다. 1279년 첨의부지 사( 僉 議 府 知 事 )로 있을 때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위하여 고려에 전함의 건조를 명하자 전함 90척을 건조하게 되었는데, 경상도도지휘사로 이를 지휘하였다. 당시 전라도 도지 휘사 홍자번( 洪 子 藩 )이 일을 반도 마치지 않았을 때 이미 마치고 돌아오니 그 유능함에 크게 탄복하였다. 1280년 문학참사( 文 學 參 事 ) 세자보( 世 子 保 )가 되고, 1284년(충령왕10) 수국사( 修 國 史 )를 겸해 원부( 元 傅 ). 한강( 韓 康 )등과 함께 {고금록( 古 今 錄 }을 찬술하였다. 1288년 첨 의중찬( 僉 議 中 贊 )이 되어 재차 지공거를 겸하였고, 1290년(충렬왕 16)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합단( 哈 丹 )이 침입하였던바 이때 홍자번과 더불어 서울을 수비하였다. 이때에 유언비어가 있어 적( 賊 )이 이미 가까이 들어왔다 하므로, 민심이 흉흉하여 조신들이 모 290 권효숙

두 강화로 피난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홀로 어찌 유언비어를 믿고 마음대로 국도( 國 都 )를 옮기리오! 하며 반대하였다. 이듬해인 1291년 원나라와 함께 합단( 哈 丹 ) 공격에 출전했다가 병사하였다. 청렴하기로 유명하였으며, 1310년(충선왕 2)에 충렬왕( 忠 烈 王 )의 묘정( 廟 庭 ) 배향공신 ( 配 享 功 臣 )이고 초현원( 招 賢 院 ; 경기 장단군)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에 있다. 21) 허금 許 錦, 1340년(충혜왕 복위 1)~1388년(우왕 14)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 陽 川 이며, 자는 재중 在 中, 호는 야당 埜 堂 이다. 지 신사 知 申 事 를 지낸 경 絅 의 아들이다.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교감 敎 書 校 勘 에 임명되고 예의정랑 禮 儀 正 郞 에 올랐다. 우왕 대에 좌상시 左 常 侍 를 거쳐 전리판서 典 理 判 書 에 이르렀다. 평소 온화한 인 품으로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시호는 문정 文 正 이다. 장단에 묘가 있다. 22) 허종 許 琮, 1434년(세종 16)~1494년(성종 25)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 陽 川 이며 자는 종경 宗 卿 종지 宗 之, 호는 상우당 尙 友 堂 이다. 군수 郡 守 손 蓀 의 아들이며, 좌의정 左 議 政 침 琛 의 형이다. 1456년(세조 2) 생원시를 거쳐, 1457년 별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의영고직장겸세 자우정자 義 盈 庫 直 長 兼 世 子 右 正 字 가 되고, 1458년에 군기시직장겸세자우정자 軍 器 寺 直 長 兼 世 子 右 正 字 가 되었다. 1459년(세조 5) 언로를 개방하고, 이단을 물리치고, 경연을 열 것 등을 상소하여 세조의 신임을 얻으면서 선전관 宣 傳 官 을 겸하였으며 사가독서 賜 暇 讀 書 의 혜택을 받았고, 통례문봉례랑지제교세자좌정자 通 禮 門 奉 禮 郞 知 製 敎 世 子 左 正 字 가 되 었다. 1460년(세조 6) 여진족의 침입 때 평안도병마절제사도사 平 安 道 兵 馬 節 制 使 都 事 로 출정하였고, 돌아와서 성균관주부 成 均 館 主 簿, 예문관봉교 藝 文 館 奉 敎 를 거쳐 이듬해 형 조도관좌랑 刑 曹 都 官 佐 郞 이 되었다. 그 뒤 함길도도사 咸 吉 道 都 事, 사간원정언 司 諫 院 正 言, 함길도경차관 咸 吉 道 敬 差 官, 훈련원판관 訓 練 院 判 官 을 거쳐 1465년 성균관사예 成 均 館 司 藝 에 오르면서 평안 황해 강원 함길도체찰사 平 安 黃 海 江 原 都 體 察 使 한명회 韓 明 澮 의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91

종사관이 되어 북변 경영에 공헌하고, 동부승지 同 副 承 旨 에 발탁되었다. 1466년 함길도병마절도사 咸 吉 道 兵 馬 節 度 使 가 되었으나 아버지상을 당하여 사직하였 다. 이듬해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기복 起 復 되어 난을 평정하는 데 공헌하여 적개공신 敵 愾 功 臣 1등에 책록되고 양천군 陽 川 君 에 봉하여졌다. 1469년(예종 1) 평안도관찰사 平 安 道 觀 察 使, 전라도병마절도사 全 羅 道 兵 馬 節 度 使 등을 거쳐 대사헌 大 司 憲 에 오르고, 이듬 해 병조판서 兵 曹 判 書 가 되었다. 1471년(성종 2) 순성좌리공신 純 誠 佐 理 功 臣 4등에 책록 되고, 지중추부사 知 中 樞 府 事, 판중추부사 判 中 樞 府 事, 오위도총부도총관 五 衛 都 摠 府 都 摠 管 을 거쳐 1477년 예조판서 禮 曹 判 書 가 되었다. 그해 10월 여진족이 침입하자 평안도순 찰사 平 安 道 巡 察 使 로 파견되어 이에 대비하였고, 이듬해 의정부좌참찬 議 政 府 左 參 贊 이 되 었다가 할머니상으로 사직하였다. 1481년 호조판서 戶 曹 判 書 가 되었으며, 이듬해 임원준 任 元 濬 등과 함께 소문충공집 蘇 文 忠 公 集 을 주해 註 解 하고 우찬성 右 贊 成 이 되었다. 1483년(성종 14) 세자이사 世 子 貳 師 를 겸하였고 세조 비 정희왕후 貞 熹 王 后 의 국상 때 산 릉도감제조 山 陵 都 監 提 調 가 되었으며, 서거정 노사신 등과 함께 연주시격 聯 珠 詩 格, 황산곡시집 黃 山 谷 詩 集 을 언해하였다. 1485년(성종 16) 어머니상으로 사직하였다가 1487년 기복되어 이조판서 吏 曹 判 書 가 되었으며, 이듬해 명나라 사신 동월 童 越 과 부사 왕창 王 敞 의 원접사 반송사로 활약하고 병조판서 兵 曹 判 書 가 되었다. 1489년 강원도축성 사 江 原 道 築 城 司 로 파견되어 축성 병기를 고험 考 險 하고 곧 영안도관찰사 永 安 道 觀 察 使 가 되었다. 1491년(성종 22) 여진족이 함길도 방면으로 침입하자 북정도원수 北 征 都 元 帥 가 되어 이를 격파하고 이듬해에 우의정 右 議 政 에 올랐다. 성종 때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문집으로 상우당집 尙 友 堂 集 이 있고, 편서로 의방유취 醫 方 類 聚 를 요약한 의문정요 醫 門 精 要 가 있다. 시호는 충정 忠 貞 이다. 묘가 장단에 있다. 23) 허준 許 浚, 1539년(중종 34)~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의 의인 醫 人 으로 본관은 양천 陽 川 이며, 자는 청원 淸 源, 호는 구암 龜 巖 이다. 할아버지 곤 琨 은 무과 출신으로 경상도우수사 慶 尙 道 右 水 使 를 지냈고, 아버지 론 碖 도 무 관으로 용천부사 龍 川 府 使 를 지냈다. 그런데 그는 의관으로 내의원 內 醫 院 에 봉직하면서 내의 태의 어의로서 명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동의보감 東 醫 寶 鑑 을 편술하여 우리 292 권효숙

나라 의학의 수준을 높였다. 1574년(선조 7)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내의원 內 醫 院 에 들어갔다. 1575년(선조 8) 2월 어의로서 명나라의 안광익 安 光 翼 과 함께 임금의 병에 입진 入 診 하여 많은 효과를 보 게 하였다. 1587년(선조 20) 10월 어의로서 태의 양예수 등과 함께 입진하여 병을 호전 시켜 호피 虎 皮 를 받았으며, 1590년 12월 왕자의 두창 痘 瘡 을 낫게 하여 당상 堂 上 의 가자 加 資 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그 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출사하여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 다. 1596년(선조 29)에 선조의 명을 받들어 유의 儒 醫 정작 鄭 碏, 태의 양예수 김응탁 등 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 을 편집하기 시작하였으나 다음 해의 정유재란으로 의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일이 중단되었다. 그 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 편집의 일을 맡김으로써 본격적인 편찬은 1600년부터 시작되었 다. 이후 1601년 지중추부사 知 中 樞 府 使 로 승진하였고 1604년 호성공신 扈 聖 功 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1606년에는 양평군 陽 平 君 에 올라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 輔 國 崇 祿 大 夫 로 승진하였으나 중인 신분으로는 과도한 벼슬이라 하여 대간 臺 諫 들의 반대로 보류되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책임 어의로서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나 광해군의 어 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았다. 이후 주로 의서를 편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의보감 의 완성이다. 1610년 완성된 이 책은 총 25권 25책으로 당시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 醫 方 類 聚, 향약집성방 鄕 藥 集 成 方, 의림촬요 醫 林 撮 要 등을 비롯하여 중국의 의서 86종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의방서 등 을 증보 개편하거나, 알기 쉽게 한글로 해석하여 간행하였다. 죽은 후 보국숭록대부 輔 國 崇 祿 大 夫 에 추증되었다. 허준의 묘는 위치가 파악되지 않다가 1991년 9월 30일 양천허씨족보 에 기록된 진 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 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조사한 결과로 확인되었다. 묘 역은 약 50평의 규모로 우측 묘는 부인 안동 安 東 김씨 金 氏 의 묘로 추정된다. 이들 두 묘 위쪽으로 허준의 생모 묘로 추정되는 묘가 한 기 더 있다. 묘소에는 묘비, 문인석,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원래의 묘비는 두 쪽으로 파손되어 땅속에 매몰되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93

어 있었다. 발굴 당시 원비의 마모된 비문 가운데 陽 平 聖 功 臣 浚 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선생의 묘인 것이 밝혀졌다. 24) 허침 許 琛, 1444년(세종 26)~1505년(연산군 11)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 陽 川 이며, 자는 헌지 獻 之, 호는 이헌 頤 軒 이다. 재 령군수 載 寧 郡 守 를 지낸 손 蓀 의 아들이며 우의정 右 議 政 을 역임한 종 琮 의 동생이다. 1462년(세조 8) 진사시를 거쳐 1475년(성종 6) 참봉 參 奉 으로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한 뒤 감찰 監 察 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사가독서 문신에 뽑혀 장의사 藏 義 寺 에서 머물렀 으며 이후 전적 典 籍, 부수찬 副 修 撰, 부교리 副 校 理 등을 역임하였다. 1478년 지평 持 平 에 이어 병조정랑 兵 曹 正 郞, 지제교 知 製 敎 등을 지냈으며, 1482년 진현시에 병과로 급제하 고 세자시강원필선 世 子 侍 講 院 弼 善 이 되어 세자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 1483년 보덕 輔 德 으로 승진한 뒤 덕행과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1488년 홍문관직제학 弘 文 館 直 提 學 으로 예문관응교 藝 文 館 應 敎 를 겸하였고, 이듬해 삼강행실 三 綱 行 實 간행에 힘썼다. 1490년 동부승지 同 副 承 旨, 좌부승지 左 副 承 旨, 우승지 右 承 旨 등을 거친 후 좌승지 左 承 旨 에 이어 1492년 전라도관찰사 全 羅 道 觀 察 使 로 나갔으며, 다음해 동지중추부사 同 知 中 樞 府 事 를 거 쳐 곧 대사헌 大 司 憲 으로 옮겼다. 1494년 예조참판 禮 曹 參 判 으로 있다가 천추사로 명나라 에 다녀온 뒤 1498년(연산군 4)까지 병조참판 兵 曹 參 判, 경연특진관 經 筵 特 進 官, 실록청 당상 實 錄 廳 堂 上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후 김일손 金 馹 孫 의 사초 사건에 연루되어 첨 지중추부사 僉 知 中 樞 府 事 로 좌천당하는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목민관으로서의 명망을 인정받아 경상도관찰사 慶 尙 道 觀 察 使 로 부임하여 널리 선정을 베풀었다. 다시 내 직으로 들어와 1499년 동지중추부사 同 知 中 樞 府 事 로서 동지춘추관사 同 知 春 秋 館 事 가 되 어 신승선 愼 承 善 등과 함께 성종실록 成 宗 實 錄 을 찬진하였다. 1500년 호조참판 戶 曹 參 判, 이조참판 吏 曹 參 判 을 거쳐 이듬해 다시 호조참판을 역임하고 형조참판 刑 曹 參 判 이 되 었다. 1502년 경기도관찰사 京 畿 道 觀 察 使, 이조판서 吏 曹 判 書 를 거쳐 이듬해 우참찬 右 參 贊 에 올랐다. 우의정 右 議 政 으로 발탁된 1504년 갑자사화로 연산군의 생모 윤비 폐출에 관여한 많은 사람이 처벌되었지만 조모상으로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관직이 좌의정 左 議 政 에 이르렀다가 고질이 발병하여 생애를 마감하였다. 성종 때 청백리에 녹 294 권효숙

선되었으며 시호는 문정 文 貞 이다. 장단면에 묘가 있다. 25) 홍길민 洪 吉 旼, 1353년(공민왕 2)~1407년(태종 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 南 陽 이다. 검교중추원부사 檢 校 中 樞 院 副 使 를 지낸 보현 普 賢 의 아들이다. 문음으로 관직에 올라 전법정랑 典 法 正 郞 에 임명되었고,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 하였다. 이어 강릉도안렴사 江 陵 道 按 廉 使 로 나가 지방의 토호세력들을 진무한 공을 인정 받아 장령 掌 令 에 올랐다. 1390년(공양왕 2) 우사의대부 右 司 議 大 夫 로 있을 때 정몽주가 우상에 임명되자 서경 署 經 을 거부하다 파직 당했다. 정몽주가 원래 한미한 가문 출신으 로 언관을 축출하고 전제 田 制 를 문란케 한 장본인이라는 것이 거부의 이유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될 때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의 공을 세워 좌부승지 左 副 承 旨 에 임명되었 다. 이와 함께 개국공신 開 國 功 臣 2등에 책훈되고 추성협찬개국공신 推 誠 協 贊 開 國 功 臣 의 훈호를 받았다. 이어서 상의중추원사 商 議 中 樞 院 事 로 임명되고 남양군 南 陽 君 에 봉해졌으 며 자헌대부 資 憲 大 夫 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 文 景 이다. 장단면 고능동에 묘가 있다. 26) 홍낙성 洪 樂 性, 1718년(숙종 44)~1798년(정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 豊 山 이며, 자는 자안 子 安, 호는 항재 恒 齋 이다. 예 조판서 禮 曹 判 書 상한 象 漢 의 아들이며, 어유봉 魚 有 鳳 의 사위이다. 1744년(영조 20) 통덕랑 通 德 郞 으로서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정언 正 言, 사서 司 書, 지평 持 平, 사간 司 諫, 승지 承 旨 를 지내고, 1757년(영조 33) 대사성 大 司 成, 이조참 의 吏 曹 參 議 가 되었다. 그 뒤 강화부유수 江 華 府 留 守, 도승지 都 承 旨, 이조참판 吏 曹 參 判 등을 역임하였다. 1768년 이조판서 吏 曹 判 書 가 되고, 1771년 전라도관찰사 全 羅 道 觀 察 使 를 지낸 뒤 1775년 예조판서 禮 曹 判 書 와 우참찬 右 參 贊 을 거쳐 형조판서 刑 曹 判 書 와 병조 판서 兵 曹 判 書 를 지냈다. 1782년(정조 6) 좌의정 左 議 政 에 오르고, 이듬해 사은사 謝 恩 使 의 정사 正 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784년 세자부 世 子 傅, 영의정 領 議 政 이 되었다. 1797년(정조 21) 80세에 궤장 几 杖 을 하사받고 치사 致 仕 를 청하여 영중추부사 領 中 樞 府 事 에 전임되어 기로소 耆 老 所 에 들어갔다. 글씨에 뛰어났다. 시호는 효안 孝 安 이다. 군내면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95

점원리에 묘가 있다. 27) 홍석주 洪 奭 周, 1774년(영조 50)~1842년(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 豊 山 이며, 자는 성백 成 伯, 호는 연천 淵 泉 이다. 영 의정 領 議 政 낙성 樂 性 의 손자이며, 우부승지 右 副 承 旨 인모 仁 謨 의 아들이다. 약관에 모시 毛 詩, 경례 經 禮, 자사 子 史, 육예백가 六 藝 百 家 의 글을 모두 읽어 학문이 깊었을 뿐만 아 니라 한 번 읽은 글은 평생 기억하는 총명도 지녔다. 1795년(정조 19) 전강 殿 講 에서 수석을 하여 직부전시 直 赴 殿 試 의 특전을 받고, 그해 춘당대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옹원직장 司 饔 院 直 長 에 제수되었다. 1797년 승정원주서 承 政 院 主 書, 1802년(순조 2) 정언 正 言, 1807년(순조 7) 이조참의 吏 曹 參 議 에 이르렀다. 이듬해 가선대부 嘉 善 大 夫 에 올라 병조참판 兵 曹 參 判 이 되고, 1815년 충청도관찰사 忠 淸 道 觀 察 使 로 나갔다. 1832년 양관 대제학 大 提 學 을 거쳐, 1834년(순조 34) 이조판서 吏 曹 判 書 가 되었다. 그 뒤 좌의정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 左 議 政 兼 領 經 筵 使 監 春 秋 館 事 세손부 世 孫 傅 가 되었고 1842년(헌종 8)에 죽었다. 저서로 연천집 淵 泉 集, 학해 學 海, 영가삼 이집 永 嘉 三 怡 集, 동사세가 東 史 世 家, 학강산필 鶴 岡 散 筆 등이 있고, 편서로 속사략 익전 續 史 略 翼 箋, 상예회수 象 藝 薈 粹, 풍산세고 豊 山 世 稿, 대기지의 戴 記 志 疑, 마 방통휘 麻 方 統 彙, 상서보전 尙 書 補 傳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 文 簡 이다. 군내면 점원 리에 묘가 있다. 28) 홍여방 洪 汝 方,,?~1438년(세종 20)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 南 陽 이며 자는 자원 子 圓, 호는 연생당 戀 生 堂 이다. 판서 判 書 를 지낸 길민 吉 旼 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원자우동 시학 元 子 右 同 侍 學 을 거쳐 예문관검열 藝 文 館 檢 閱, 사헌부감찰 司 憲 府 監 察 을 지냈다. 1410 년 지평 持 平, 1414년 집의 集 議 에 올랐다. 이듬해 동부대언 同 副 代 言 과 지형조사 知 刑 曹 事 를 겸하였으나 판결을 잘못한 책임을 지고 한때 면직되었다. 이후 다시 관직에 올라 좌 부대언 左 副 代 言 에 이어 1417년 이조참의 吏 曹 參 議 에 임명되었다. 외직으로 강원도관찰사 296 권효숙

江 原 道 觀 察 使 로 나갔으나 어머니의 병이 깊어지자 일시 사직하였다가 곧 순승부윤 順 承 府 尹 으로 부름을 받았다. 1418년 8월 세종 즉위 후 인수부윤 仁 壽 府 尹 을 거쳐 예조참판 禮 曹 參 判 과 형조참판 刑 曹 參 判 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 사헌 大 司 憲 이 되었으나, 불법으로 병조의 아전을 책문했다 하여 문외출송 門 外 黜 送 을 당 해 처음에는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장단으로 이배되었다. 1426년(세종 8) 풀려나와 인순 부윤 仁 順 府 尹, 평안감사 平 安 監 司, 한성부윤 漢 城 府 尹 을 거쳐 좌군총제 左 軍 摠 制 가 되었 다. 이어 경상도관찰사 慶 尙 道 觀 察 使 로 부임하여 지방의 실정을 살피던 중 조정에 진상 한 문어가 정결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433년 복관되어 전주부윤 全 州 府 尹 이 되었고 1437년 판한성부사 判 漢 城 府 使 가 되었다.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예 문관대제학 藝 文 館 大 提 學 에 임명되었으며, 북경에서 돌아올 때 황제가 칙명을 내려 원유 관복 遠 遊 冠 服 을 보내 주었다. 귀국 후 벼슬이 이조판서 吏 曹 判 書 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 양 文 良 이다. 장단면 고능동에 묘가 있다. 2. 근현대인물 1) 강기동 姜 基 東,?~1909년 한말의 항일 독립운동가로, 장단 출신이다. 고랑포 高 浪 浦 에서 일본 헌병보조원으로 있으면서 옥문을 열어 갇혀 있던 의병들을 구출하고 자신은 투옥되었다. 그러나 곧 탈 옥에 성공하여 1908년 강원호 姜 元 浩, 오수영 吳 壽 泳 등과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 군대와 싸우다가 포천 땅에서 잡혀 사형 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大 韓 民 國 建 國 功 勞 勳 章 복장 複 章 이 수여되었다. 2) 김수민 金 秀 敏,?~1908년 한말의 의병장으로 장단 출신이다. 1907년 의병을 모집하여 13도 총도독 總 都 督 이 되어 각처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많 은 성과를 거두었다. 뛰어난 전략가이며, 전술 면에서도 사격술은 물론, 탄환과 화약을 만드는 기술까지 겸비한 특출한 인물이었다. 장단 덕음동 長 湍 德 陰 洞 을 근거지로 하여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97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게 되자 마부 馬 夫 로 가장하여 서울에 잠입한 뒤 사세 事 勢 를 살피다가 체포되어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3) 백종렬 白 鐘 烈, 1899년~1938년 항일독립운동가로 장단 출신이다. 호는 혜원 惠 園 이며, 이명 異 名 은 종열 宗 悅 이다. 1917년 2월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4월 통화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한족회 韓 族 會 에서 활동하다가 8월 김좌진의 입단을 계기로 기구를 크게 개편한 북로군정서 문관 양성소의 교관에 임명되어 오상세 박영희 김춘식 강화린 최해 이운강 등과 함께 독립군의 군사훈련을 지도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를 앞두고 김좌진 등 북로군 정서의 간부와 홍범도 안무 최진동 등 다른 독립군부대 지도자들과 만나 연석회의 끝 에 북로군정서는 제2연대가 되자 여기에 소속되었다. 이민화 김훈 한련원 등과 함께 독립군 제2연대의 종군 장교로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 뒤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여하여 1921년 노령 자유시 참변으로 큰 타격과 시련을 겪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북만 영안에서 조직된 신민부의 제1대대장으로 오상세 문우천 주혁 장종철 박두희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 쟁에 적극 전개하는 한편, 독립전쟁을 담당할 사관 양성을 위해 목릉현 소추풍에 설치 한 성동사관학교의 교관으로서 크게 이바지하였다. 1938년 중동현 이도하자 二 道 河 子 에 서 40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4) 윤복영 尹 復 榮, 1868년~1967년 한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파평 坡 平 이며 호는 화전 樺 田, 장단 출신이다.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서당을 개설하였다. 1910년 주권이 상실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의 기지 건설과 이주동포 자제들의 교육에 투신하였다. 1919년 김좌진 서일 김 성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에 가담하여 길림분서 고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길림성에서 만주지역의 독립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전만통일준비회 全 滿 統 一 準 備 會 가 결성되자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동지들의 노력에 의해 일시적인 통합은 이루어졌으 나 곧 분열되자 1925년 연안에서 북로군정서의 정신에 입각한 신민부를 김좌진 김혁 298 권효숙

등과 조직하였다. 그때 고문과 외교의원의 직책을 맡아 신민회의 총괄적인 운영을 지도 하고 대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하였다. 이 결과 한족동향회 韓 族 同 鄕 會 회장에 추대 되는 등 교민 사이에서 대단한 명망을 얻었다. 또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회의에 길림성 교민의 대표로 참가하여 국민의회와 한국독립당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후 만주지 방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교민들의 생활 향상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기금으로 조달하려 했으나 만주사변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항상 독립군 세력의 근거지로 이 주하면서 군수품 보급과 적의 정보수집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 서되었다. 5) 윤효중( 尹 孝 重 ), 1917 1967. 장단출신의 조각가이다. 본관은 파평 坡 平 이며 호는 불재 弗 齋 이다. 서울 배재고등보통 학교를 거쳐 1937년에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 목조( 木 彫 )를 전공하고 1941년에 졸업하였다.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 鮮 展 )에 물동이를 인 여인상인 목조 아침 이 첫 입선한 뒤 1941년에는 P선생의 입상 과 정류 靜 流, 1942년에는 대지 大 地, 그리고 1944년에는 활을 당기는 목조 여인상 현명 弦 鳴 (특선)이 계속 입선하면서 주목을 끌었다. 광복 후에는 1948년에 홍익대학( 弘 益 大 學 )미술학부를 창설하고 교수가 되어 조각학도 들을 가르치는 한편, 국전( 國 展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풍부한 조형 역량을 발휘하고, 새로운 형상의 작품을 시도하였다. 그의 작품은 1952년의 스위스 만국박람회와 1953년의 영국 국제조각대회에도 출품되 었다. 1955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뽑히고, 1957년에는 한국미술연구소를 개설하여 전통 적 청자( 靑 磁 ) 백자( 白 磁 )의 현대적 산업화에 열중하여 한때는 크게 성공하였으나 마침 내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타격에서 재기하려고 1966년에 일본에 건너갔으나, 오히려 병을 얻어 도쿄에서 사망했다. 예술적 야망의 실현과 좌절 속에 그는 사회적 기념동상과 기념탑 작품도 많이 남겼는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299

데, 동상은 1956년의 민충정공상 閔 忠 正 公 像 김원근상 金 元 根 像 박현식상 朴 顯 植 像 엄익주상 嚴 益 柱 像 을 비롯하여 1960년의 임영신상 任 永 信 像, 1963년의 최제우상 崔 濟 愚 像 등이고, 기념탑은 1956년의 해병대 충혼탑 (문산) 과 경기도 충혼탑 (수원), 1959년의 우장춘( 禹 長 春 ) 기념비 (수원), 1961년의 육사( 陸 士 )약진탑 등이다. 1957년에 서울 남산에 높이 세워졌던 이승만( 李 承 晩 )대통령상 은 1960년 4 19학 생의거 때에 파괴당하였다. 대표적인 현존 작품은 초기의 아침 과 현명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이다. 6) 이진구 李 鎭 九, 1899년~? 항일독립운동가로 장단 출신이다. 일찍이 기독교인으로 항일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중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원산 남촌동의 남감리교회 목사 정춘수 鄭 春 洙 의 지도 아래 서울에서 발송해 온 독립선언서 300여 매를 전달받고, 1919년 3월 1일 원산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조직 적으로 계획하였다. 2월 28일 밤 서울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정춘수를 비롯하 여 이가순 李 可 順, 이순영 李 順 榮, 차광은 車 光 恩, 차용운 車 用 運, 함하은 咸 河 殷, 김기헌 金 基 憲, 김장석 金 章 錫, 김계술 金 啓 述, 정연수 鄭 延 壽, 인이극 印 利 極, 함태영 咸 泰 榮 등 동지 14명과 함께 원산 진성여학교 進 誠 女 學 校 에서 만나 서울에서와 같이 3월 1일 거사를 계 획하고 밤새워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이미 이가순이 초안하여 차광은 집에서 등사한 2,000여 장의 독립선언서 배포 및 시위 계획을 의논하였다. 시위 방법으로는 당일 상 경할 정춘수를 제외한 13명의 주동자들이 시내 요소를 담당키로 하는 한편 이날 밤 자 정에 이순영으로 하여금 함흥에 연락을 취하도록 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일 오후 2시 동지들이 시내 요소마다 배치된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장촌동 장터로 행진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가세한 8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일본 인 집단거류지를 지나 원산경찰서를 향해 행진하며 크게 기세를 올렸다. 일본 경찰 헌 병 소방대가 출동하여 처음에는 물감을 탄 물을 소방용 호스로 뿌리면서 해산시키려 했으나, 시위 군중이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만세 시위를 전개하자 오후 6시경 공포를 300 권효숙

쏘면서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 후 일본 경찰은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을 집중적으로 체 포했는데, 그때 체포되어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위반 및 출판법위반혐의로 1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Ⅴ. 맺는 글 지금은 가볼 수 없는 지역에 살았던 세거성씨들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 다. 6.25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모두 놓아두고, 각 처로 이거( 移 居 )해나간 장단군 사람들의 고향에서의 삶은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서 멈춰져 있다. 집안의 뿌리를 이루 던 선조들이 누워있는 땅을 가볼 수 없고, 곡식을 거두어 임진강에 배를 띄워 나르던 일들도 강물 위로 다 흘려버려야 했다. 고려 때부터 살아왔던 명문거족 중에 안동권씨 집안과의 혼맥으로 장단에 거주하던 달성서씨 집안과 장단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던 전주이씨 문중, 해주오씨, 무안 박씨, 의령남씨, 황해황씨, 경주김씨 등에 대해서는 추적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이 글 에서 다루지 못함이 아쉽다. 그러나 평소에 늘 궁금하고 여러 설이 분분했던 양천허씨 구암 허준의 고향과 뿌리를 알 수 있게 된 점은 하나의 성과이며, 개인적으로 안동권씨 추밀공파인 나의 선조에 대한 뿌리를 찾아볼 수 있었음에 뿌듯한 보람을 느낀다. 차후 문중별 조사가 자세히 이루어져 파주지역의 세거사 연구에 일조를 할 수 있기를 마음먹 으며 이 글을 마친다. 파주 민통선 내 장단지역의 세거성씨와 인물 301

<참고문헌> 1. 통계연보, 1916년 2. 장단지( 長 湍 志 ), 1849년 3. 面, 名 稱 及 區 域 (면의 명칭과 구역), 1934년 4. 장단군지( 長 湍 郡 誌 ), 2009년 증보판 5. 제6교 청주한씨대동족보, 1987년~1993년 6. 고양시씨족세거사, 2011년 7. 파주시지 제3권 <파주사람>, 제7권<인물자료집> 8. 장단군민회원명부, 2010년 9. 양천허씨대동족보 10. 남강공 권상 실기( 南 岡 公 權 常 實 記 ), 안동권씨 남강공 종중 발행. 2011년 302 권효숙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김 택 기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目 次 I. 文 字 (문자)의 기원설( 起 源 說 ) II. 한자의 발달사와 사상( 漢 字 의 發 達 史 와 思 想 ) 1. 한자란 한( 漢 )은 은하수 한( 漢 )자이다. 2. 한자( 漢 字 )는 은하수로부터 시작 3. 한일( 一 )자는 태극( 太 極 ) 4. 하느님은 한사람 즉 일인( 一 人 )이다. 5. 육서지법( 六 書 之 法 ) 6. 죽서( 竹 書 )와 목판( 木 板 ) 인쇄와 문민정치 7. 한자( 漢 字 )의 발전 8. 옥편( 玉 篇 ) 글자순은 한민족사상( 韓 民 族 思 想 ) 9. 한문자( 漢 文 字 )에 깊은 철학사상( 哲 學 思 想 ) 10. 글( 㓞 )을 한자( 漢 字 )라고 부르게 된 내역 11. 결어 12. 첨부 1) 안호상 박사와 임어당과의 일화 2) 한글학자 한갑수와 중국인 사학자 서량지 선생간의 일화 집필자 : 김택기 동두천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동두천시 시사편찬위원회 위원, 동두천 박물관 준비위원, 민족사바로찾기연구회 회장, 전 동두천향 토문화연구소장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03

Ⅰ. 文 字 (문자)의 기원설( 起 源 說 ) 우리가 알고 있는 甲 骨 文 字 (갑골문자)는 殷 (은)나라 때 나온 것이 아니다. 단지 은 나라 때 점술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점괘를 보는 형식으로 일반 백성 에게 특수하게 사용됐다. 殷 (은)나라 때 뿐만 아니라 복희씨( 伏 羲 氏 ) 때부터 내혼제( 內 婚 制 )와 외혼제( 外 婚 制 )도 실시됐다. 그리고 신농씨( 神 農 氏 BC 3071년) 때는 글자를 만 드는 주조술( 鑄 造 術 )도 있었다. 물론 이때는 창칼, 농기구도 만들었지만 쇠물로 녹여 만 든 엽전같은 주폐술도 있었다는 기록이 한단고기 신시본기편에 기록하고 있다. 은나라 때보다 1305년 전에 쇳물로 녹여서 창칼과 농기구도 만들었으며 엽전같은 돈도 만들었 다는 기록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해동역사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반고한인씨( 盤 固 桓 因 氏 BC 8936년~8478) 때부터 법화경( 法 華 經 )과 병서( 兵 書 ) 그리고 각종 경전( 經 典 )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러면 다음 사서들을 통해 문자의 기원설을 밝혀 보고자 한다. 역대 신선통감 권1편 6페이지에 나타난 문장을 간략하게 소개해 본다. (주 1) ( 歷 代 神 仙 通 鑑 第 一 券 本 文 페이지 6 參 考 ) 此 日 月 星 之 推 驗 也, 地 鏗 爰 定 三 辰, 上 告 天 皇, 天 皇 乃 以 所 制 干 支 之 名, 加 於 日 月 時 上, 以 紀 次 之 所 在, 周 而 復 始, 曉 示 四 方, 而 民 始 有 節 侯 ) 역대 신선통감은 41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아홉책( 九 冊 ) 속에 본시 41권이 들어있는 셈이다. 한문으로 된 책은 본래 한 책속에 몇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사기 는 한책속에 50권이다. 삼국유사는 한책속에 5권이며 위서( 魏 書 )는 한 책속에 114권이 들어있다. 구당서, 신당서가 합해 425권이며 청사( 靑 史 )가 상하권이 529권이다. 한서 ( 漢 書 )가 100권 후한서( 後 漢 書 )가 합해 120권 사기( 史 記 )는 합본이 130권이며 백화사기 ( 白 話 史 記 )도 130권이다. 그런데 단행본으로서는 원사( 元 史 )가 210권이며 명사( 明 史 )는 단행본으로는 최고 많은 권수를 갖고 있다. 무려 332권, 그리고 이십오사( 二 十 五 史 )의 합본은 3,749권으로 열두책( 十 二 冊 )이 엮어져 있다. 304 김택기

역대 신성통감은 지금으로부터 청나라 강희( 康 熙 AD 1673년) 경진( 庚 辰 )년에 출간된 것으로서 320년전의 책이다. 이 책은 상해( 上 海 )에서 발간된 고서로서 대단히 훌륭한 사서( 史 書 )이다. 그럼 주1를 풀어보기로 한다. <한문 풀이>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을 체험하고 연구하였다. 지갱( 地 鏗 은 地 皇 이 됨 BC 8464 년)은 별자리를 빠짐없이 정리하여 천황( 天 皇 BC 8479년 단군조선 제1기 2세)에 게 상고하였다. 천황( 天 皇 )은 간지( 干 支 란 天 地 )의 이름으로 제정하게 되었다. 천황은 더 이상 상세하게 해와 달 그리고 시( 時 )까지 차례를 정하여 기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반복하여 처음으로 돌아오면 쓸 수 있도록 했다. 밤이 가고 아침이 오면 사방이 밝아져 보이듯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절기가 있음 을 알리고 언제나 생활에 불편함이 없이 쓸 수 있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유학수지( 幼 學 須 知 )는 1736년 병진( 丙 辰 ) 7월에 청( 淸 )나라 건융( 乾 隆 )대 서창 ( 西 昌 ) 정윤승( 程 允 升 ) 서창( 西 昌 ) 정석산( 程 錫 山 ) 양선생이 지은 것으로 어린 후학들을 위해 전 4권과 34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가 이씨조선( 李 氏 朝 鮮 ) 19대 숙종때이다. 이후부터 27대 순종( 純 宗 ) 때까지 다시 말해 1945년 광복이전까지 이씨조선시대의 어린 이용 교과서로 약 208년이나 사용해 온 희귀본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난후 줄곧 한국땅에 있는 사서( 史 書 )와 모든 문서, 족보 등은 모조리 수탈당하고 말았다. 그중 특히 한민족 사관을 말살하기 위해 사서의 귀중본은 깡그리 약탈해 간 것이다. 한국정부는 얼마나 약했던지 아직도 일본에 보관되어 있는 문서와 유물을 찾지 못하 고 있음은 실로 가슴을 치고 통곡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유학수지는 한국상고사학회 회 원인 이상도( 李 尙 道 )씨가 여러 사서를 구해오는 과정에서 이중재 회장님의 눈에 띄인 것이다.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05

유학수지( 幼 學 須 知 ) 본문 제1권 47페이지 통계편을 조사해 보기로 한다. 註 2 幼 學 須 知 本 文 47 統 計 編 參 考 盤 固 首 出 御 世 天 地 初 分, 盤 固 猶 言 盤 固 也, 胡 五 峰 日 生 于, 大 荒 莫 知 所 始 明, 天 地 之 道 達, 陰 陽 之 理 爲, 三 才 首 君 于 是, 混 茫 開 이, 又 曰 混 沌 氏, 天 皇 澹 泊 無 爲, 干 支 始 建 取, 天 開 于 子 義 故 曰, 天 皇 淡 泊 無 爲, 而 俗 自 化 制, 干 支 以 定 歲, 而 民 始 知, 天 地 所 向 이, 又 獨 斷 干 幹 也, 其 名 有 十 亦 曰 十 母 卽,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是 也, 支 枝 也, 其 名 有 十 二 亦 曰 十 二 子, 卽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也, 中 略 보기 一. 乾 (건) 天 幹 干 天 (천간간천) 二. 氣 (기) 人 中 心 人 (인중심인) 三. 坤 (곤) 地 枝 支 地 (지지지지) (주2 풀이) 반고( 盤 古 )는 천지가 생긴이래 세상에서 처음 성인이다. 반고는 옛날 옛적에 기 반을 잡고 나침반처럼 정확하다는 설에서 반고( 盤 固 )라고도 한다. 반고씨는 처음 서역( 西 域 )의 다섯봉우리가 있는 곤륜산( 崑 崙 山 )속 우전( 于 窴 )에서 출생했다. 세상이 크게 황망하고 혼돈할 때 막지( 莫 知 )라는 부인을 만나게 되어 처음으로 행복감을 느꼈다. 그후 천지의 도( 道 )를 통달한 것은 음양오해( 陰 陽 五 行 ) 대자연 의 진리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삼재( 三 才 란 천황, 지황, 인황( 天 皇, 地 皇, 人 皇 )의 첫 임금이 되었다. 인간 세상이 혼돈하고 황망할 때 나라를 열었다. 그리하여 혼돈씨( 混 沌 氏 )라고도 한다. 천황( 天 皇 )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처음으로 간지( 干 支 )를 세웠다. 즉 간지를 만들어 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하늘을 열었다. 다시 말해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이름하여 신시( 神 市 )를 세웠다 하여 환인의 나라를 정통국( 正 統 國 )이라 불렀다. 그후 천황은 사심이 없고 청결하여 속세로 처음 내려와 처음으로 백성을 다스 리고자 했다. 하늘 땅에서는 처음 세워진 나라이다. 또 독단적으로 간( 干 )을 간 306 김택기

( 幹 )이라 했다. 그 이름은 열 개의 어머니( 十 母 ) 즉 십간( 十 干 )이다. 다시 말해 십모( 十 母 )는 십 간( 十 干 )을 뜻한다. 십간( 十 干 )은 다음과 같다. 갑( 甲 ) 을( 乙 ) 병( 丙 ) 정( 丁 ) 무( 戊 ) 기( 己 ) 경( 庚 ) 신( 辛 ) 임( 壬 ) 계( 癸 )이다. 간 ( 干 )이 생긴 것은 간( 干 )은 하늘을 뜻한다. 하늘은 하나( 一 )에서 시작한다. 그러므 로 일( 一 ) 건( 乾 ) 천( 天 ) 간( 幹 )이며 간( 幹 )의 약자를 따서 간( 干 )이 되었다. 또 셋 ( 三 )은 곤( 坤 )이며 땅( 地 )이다. 그리고 지( 枝 )의 약자를 따서 지( 支 )이다. 그러니까 간( 干 ) 지( 支 )는 천지( 天 地 )이다. 간( 干 )은 하나( 一 )이고 지( 支 )는 삼( 三 )에 속한다. 一 은 간( 干 ) 천( 天 ), 三 은 지지( 支 地 )이다. 그런데 인( 人 )자가 빠지고 없다. 인 ( 人 )은 둘( 二 )에 해당함으로 一 天, 二 人, 三 地 이다. 그리하여 천( 天 ) 인( 人 ) 지( 地 ) 의 삼원일체( 三 源 一 體 )를 이룬다. 그럼 지( 支 )는 지( 枝 ) 즉 가지에 해당되므로 지( 支 )에 대한 글자를 살펴보기로 한다. 지( 支 )는 열두아들( 十 二 子 )을 뜻한다. 간( 干 )은 모( 母 ), 지( 支 )는 자( 子 )이다. 자( 子 ) 축( 丑 ) 인( 寅 ) 묘( 卯 ) 진( 辰 ) 사( 巳 ) 오( 午 ) 미( 未 ) 신( 申 ) 유( 酉 ) 술( 戌 ) 해 ( 亥 )이다. 열두아들( 十 二 子 )을 십이지( 十 二 支 )라 한다. 보통사람이나 역술, 점술, 무당들도 모두 띠로 따지고 있다. 물론 해학적인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띠로 따지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다. 간지( 干 支 )의 이름을 정하고 세세년년( 歲 歲 年 年 이란 해년 해마다)마다 쓰기로 하였다. 갑왈( 甲 曰 ) 즉 甲 이란 것은 자연 속에서 죽어있는 듯 하면서 만물( 萬 物 )이 쪼 개지고 나누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을 뜻한다. 을( 乙 )이란, 만물이 돋아나면서 서로 서로 다투며 소리나고 구부러지는 현상을 뜻한다. 병( 丙 )이란, 만물이 햇빛을 받으면서 부드럽다. 그리고 한없이 나타나면서 저 마다 이름을 가지고 나타나는 현상을 뜻한다.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07

정( 丁 )이란, 억세게 강한 힘으로 좁은 문을 뚫고 만물이 솟아나면서 기운차게 나타나는 현상을 뜻한다. 무( 戊 )란, 만물이 서로 다툼이 없이 서로 화합하면서 굳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기( 己 )란, 음기를 억제하고 모든 곡식을 소생케 할 때 나타나는 기( 氣 )의 현상 을 뜻한다. 경( 庚 )이란, 최고의 음기로서 만물을 알차게 할 때 일어나는 기( 氣 )의 현상을 뜻한다. 신( 辛 )이란, 강한 음기 빛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물을 여러 곳으로 생( 生 )하게 할 때 일어나는 현상을 뜻한다. 임( 壬 )이란, 해( 亥 )의 검은 기운과 함께 있으나 양( 陽 )의 기가 더할 때 나타나 는 현상을 뜻한다. 계( 癸 )란, 양기( 陽 氣 )가 있으므로 만물을 절도있고 규범있게 나타내려고 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뜻한다. 자( 子 )는 혼돈하고 어두운 공간을 뜻한다. 즉 태극( 太 極 )이 이에 속한다. 축( 丑 )은 붉은 기운이 쉴새없이 일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양기의 빠른 움직임 에 눌려 만물은 모두 젊음을 유지시키는 특성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인( 寅 )은 모든 음기를 섭제( 攝 提 란 받아들이는 것 즉 포용하여 수용하는 것)하 여 만물을 양기( 陽 氣 )의 힘으로 일어나게 하는 현상을 뜻한다. 묘( 卯 )는 하나를 죽이거나 막으면서 즉 음의 기운을 억제시키고 양의 기운을 내게 하여 만물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현상을 뜻한다. 진( 辰 )이란, 음( 陰 )의 기운속에서 움추려 있다 서서히 몸을 움직이며 모두 밖으 로 일어나려고 하는 기운의 현상을 뜻한다. 사( 巳 )란, 크게 떨어지게 하거나 만물을 모두 크게 나타나게 한뒤 다시 떨어뜨 리게 하는 기의 작용을 뜻한다. 오( 午 )는 만물이 모두 번성하게 강하고 활발하고 씩씩한 현상을 뜻한다. 미( 未 )란, 모든 만물이 협동하고 화합하면서 함께 영글며 성장하는 현상을 뜻 한다. 308 김택기

신( 申 )이란, 물을 토하듯 습기를 제거한다. 마치 어린애가 음식물을 토하듯 한 다. 다시 말해 음력 7월이 되면 만물은 몸에서 물을 토하듯 한다는 현상을 뜻 한다. 유( 酉 )란, 만물은 놀랄 정도로 모든 어린애가 일어나듯 영글어 가는 현상을 뜻 한다. 술( 戌 )이란, 무성하던 만물은 성장을 멈춘다. 마치 남자인 내시처럼 모두 숨듯 빠져버린다. 즉 만물은 저장되는 현상을 뜻한다. 곰과 냉혈동물이 동면 상태에 들 듯이 성장을 촉진하던 상태가 멈추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해( 亥 )란, 큰 물결이 잠겨있듯이 만물의 성장과 촉진을 크게 공헌하기 위해 하 늘의 양기를 깊이 심장( 深 藏 이란 깊숙하게 저장한다는 뜻) 시키는 현상을 뜻한다. 이 모두는 이른 새벽과 이른 봄을 맞이하기 위한 천기의 작용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간지( 干 支 )의 사상은 우주에서 내리는 대자연의 순환법칙을 오묘한 철학사상 의 진리로 표현 또는 구현시켜 놓은 것이라고 볼수 있다. 단순히 미신적으로 샤머니즘 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상의 문장에서 보면 반고환인 이전에 간지( 干 支 )로 된 글자 즉 오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고환인 때라면 상원갑자년이라 했으므로 1990년에서 계산해 보면 BC 8936 년이니까 10926년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여하간 반고환인은 신시( 神 市 )를 정했다. 상원갑자년 음력 10월 초3일에 흑수삼위태 백인 돈황에 도읍을 설정했다는 것은 정설이므로 반고환인은 정통국을 상원갑자년 음력 10월 3일에 세운 것은 문헌상 확실해진다. 다음은 사요취선( 史 要 聚 選 )을 보기로 한다. ( 註 3) 史 要 聚 選 券 一 本 文 페이지 1. 帝 王 編 參 考 朴 致 維 田 以 采 자, 天 皇 氏, 盖 取 天 開, 於 子 之 義 一 姓, 兄 弟 十 二 人 亦 曰 成 鳩 氏 是 曰,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09

天 靈 澹 泊 無 爲 始 制, 干 支 盖 十 母 十 二 子 之 名, 以 定 歲 之 所 在, 甲 曰, 閼 逢 言 萬 物 剖 甲 而 出, 乙 曰, 旃 蒙 言 萬 物 之 軋 軋, 丙 曰, 柔 兆 言 陽 道 著 明, 丁 曰, 彊 圉 言 萬 物, 丁 狀, 戊 曰, 著 雍 言 萬 物 之 固 也, 己 曰 屠 維 言 陰 氣 穀 物, 庚 曰, 上 章 言 陰 氣 庚 萬 物, 辛 曰, 重 光 言 萬 物 辛 氣 方 生, 壬 曰, 亥 黓 言 陽 氣 任 養 於, 癸 曰, 昭 陽 言 萬 物 可 揆 度, 子 曰, 困 敦 言 混 沌, 丑 曰, 亦 奮 若 言 陽 氣 舊 迅 萬 物 若 其 性, 寅 曰, 攝 提 格 言 萬 物 承 陽 而 起, 卯 曰, 單 閼 言 陽 氣 惟 萬 物 而 起, 辰 曰, 執 徐 言 伏 蟄 之 皆 勅 徐 而 起, 巳 曰, 大 荒 落 言 萬 物 皆 大 出 而 荒 洛, 午 曰, 敦 詳 言 萬 物 盛 壯 之 意, 未 曰, 協 治 言 萬 物 和 合, 申 曰, 涒 灘 言 계 萬 物 吐 之 兒, 酉 曰, 作 噩 言 萬 物 皆 起 之 兒, 戌 曰, 閹 茂 言 萬 物 皆 奄 冒, 亥 曰, 大 淵 獻 萬 物 於 天 陽 氣 深 藏 於 下 也, 初 春 天 氣 旱 晨 時 이상과 같이 한자( 漢 字 )가 단군조선( 檀 君 朝 鮮 ) 제1기( 第 一 期 ) 반고환인씨( 盤 古 桓 因 氏 ) 이후 천황( 天 皇 )때 국가적 차원에서 제정하여 공포되었다. 그때가 전술한 바와 같이 BC. 8479년이다. 천황씨( 天 皇 氏 ) 부인은 후토부인( 后 土 夫 人 )이며 아들 열하나를 두었다. 천황씨 장남이 지갱( 地 鏗 )이다. 바로 지갱이가 지황씨( 地 皇 氏 BC. 8364년)가 간지( 干 支 )법을 정리하여 천황씨 때 공포하였던 것이다. 간지( 干 支 )가 갑골문자( 甲 骨 文 字 )의 시조( 始 祖 )격이다. 갑골문자는 상형문자이면서 반 면에 대자연의 법칙사상과 음양오행( 陰 陽 五 行 )의 대변자의 문자이다. 이상과 같이 문자의 기원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간지( 干 支 )는 천지를 배경삼아 만들 어진 문자이다. 그러므로 대자연사상을 배경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갑골문자 의 모체이며 한문자의 모체가 되는 것이다. 다음은 한자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한자가 가진 글, 한자 한자가 어떤 사상으로 되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다음에 한자의 발달사와 사상에 대하여 면 밀히 고찰하고져 한다. 310 김택기

Ⅱ. 한자의 발달사와 사상( 漢 字 의 發 達 史 와 思 想 ) 1. 한자란 한( 漢 )은 은하수 한( 漢 )자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한자를 무조건 중국글이니 외국어니 하는 사람들이 득실댄 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자기 잘못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 잘못한다고, 떠넘기 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는 그릇된 이데올로기가 팽배해 있다. 그러니 사 회가 시끄럽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아는 자가 없는 세상이 돼버렸다. 그리고 아는 자가 말해도 듣는 귀가 어두워 옳은지 옳지 않는 것인지 분간도 하지 못한다. 무조건 자기 생각 자기 말이 옳다는 현실이 너무 팽배해 있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한문자의 한( 漢 )자가 한수한자라 하여 한나라때 중국에서 썼던 중국 글이라는 고정관 념을 뿌리 내린채 오늘에 이르렀다. 한문자의 한( 漢 )자는 한나라 한자이거나 한수한이란 고정관념을 떨쳐버리게 하기 위 해서 이중재씨는 한민족 우주철학사상 이란 책을 1986년에 출판한바 있다. 이 책에서 한문을 옥편의 순서대로 엮고 해설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2. 한자( 漢 字 )는 은하수로부터 시작 한( 漢 )자의 한은 은하수 한이다. 즉 은하수가 한( 漢 )이며 한은 은하수이다. 다시 말해 은하수 한자란 뜻이다. 그래서 한자( 漢 字 )는 은하수에서 시작된다. 어두운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 약 6,000억개의 별구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은하 수( 銀 河 水 )이다. 은하수라는 한문자를 보면 강물이 은( 銀 )과 같다는 뜻이 은하수이다. 다시 말해 은하수는 글자 그대로 가장 물이 많은 공간세계가 은하계이다. 그래서 어둡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11

게 보이는 곳이기에 유난히 별빛이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은하계는 어두운 공간세계이므로 물이 많은 물의 보고이다. 은하계는 물( 水 )의 고장 인 태극( 太 極 )이라 하였다. 태극에서 즉 물에서 마이너스 일(-1)이 발생한다. 태극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은하 수( 銀 河 水 ) 한( 漢 )이라 하였다. 한문은 하나( 一 )로부터 시작한다. 일이란 숫자가 하나 ( 一 )이다. 그래서 한문 또는 한자라 한다. 한( 漢 )은 이렇게 하여 시작된다. 그러기에 한자( 漢 字 )인 한자 일자( 一 字 )가 바로 한자 이다. 한문 옥편을 펴 보면 한일자로부터 시작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문자는 이상에서 본 것처럼 하나에서 시작된다. 은하계가 물의 창고이다. 한문자는 은하계에서 시작되므로 물 한, 은하수한 또는 검은물 한이라 한다. 그러므로 한문자의 한( 漢 )자이다. 3. 한일( 一 )자는 태극( 太 極 ) 한민족의 높고 높은 도통( 道 通 )의 지혜가 번득이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한민족을 동 이( 東 夷 란 크게 어질고 착한사람 또는 하늘사람, 큰활을 가진 동쪽사람이라는 뜻)라 했 으며 대대로 도를 통해 내려오는 배달( 倍 達 )겨레라 하였다. 배달민족은 홍익인간화( 弘 益 人 間 化 ), 이화세계( 理 化 世 界 )를 건설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한민 족의 위대한 철학사상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경천애인지( 敬 天 愛 人 地 )이다. 하늘을 공경 하고 사람과 땅 자연을 사랑한다는 한민족의 기본철학 사상은 면면히 뿌리를 내리고 살 아왔다. 이러한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삶의 목적을 뚜렷이 해 주는 것은 역시 백성을 알게 하는데 있었다. 그러기에 반고한인께서는 글자를 먼저 만들어 각종 경서를 지었다고 해동역사에서 기 록한 것을 보았다. 지금부터 한자( 漢 字 )의 발달사에 대하여 적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한자의 사상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알아보기로 한다. 312 김택기

한자가 만들어 질 때 단순히 형상 즉 모양만 보고 만든 것이 아니다. 한자를 만드는 과정은 도( 道 )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남의 것을 보고 만드는 것은 쉬울 수 있다. 창작이란 피나는 각고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특히 글자를 모양만 보고 만드는 것이 아 니고 내면적인 공간세계의 세상까지 질서 정연하게 글자순으로 기록하여 만든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현대 제 아무리 아이큐 가 높은 대학자라 할지라도 한일( 一 )자의 진리를 공( 空 )의 세 계까지 이론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분은 없을 것이다. 특히 차이나에서 대학자라 하더 라도 한일( 一 )자의 생기는 과정을 다 알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반고환 인씨( 盤 古 桓 因 氏 BC 8936년)때 성씨가 한일( 一 )자 성이었다. 천황( 天 皇 BC. 8477년), 지황( 地 皇 BC. 8364년), 인황( 人 皇 BC. 8247년)도 모두 한일( 一 )자의 성을 지녔다. 왜 한일자의 성씨를 지녔을까. 바로 하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왜, 하늘 사람인지 그 뜻 은 무궁무진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일( 一 )자를 설명하려면 공( 空 )의 세계까지 그 이론이 전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태극( 太 極 )에서 시작하므로 태극을 설명해야 한다. 성리학( 性 理 學 )의 최고 이상이 태극이다. 태극을 리( 理 )로 설명하고 있다. 리( 理 )는 무엇이며 형이상학( 形 而 上 學 )은 도 무엇이 냐고 따지고 들어가면 무한대의 공( 空 )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공( 空 )의 세계도 백 공( 白 空 )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진공( 眞 空 ), 시공( 時 空 ), 천공( 天 空 ), 인공( 人 空 ), 지공 ( 地 空 )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무한( 無 限 )에 에너지원의 세계인 백공( 白 空 ) 하나만 설명하여도 엄청난 도학 이 필요하다. 백공의 세계부터 천문학적인면과 도학적인면 그리고 물리학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 우주의 공( 空 )의 세계를 먼저 이론적으로 이해한 뒤 순차적으로 삼단계를 거쳐서 비로소 태극( 太 極 )의 자리에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알아야 한다. 주자학은 아직도 모순덩어리며 불안전한 학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태극에서 시작한 이후의 세계 즉 현실세계와 만상의 세계는 잘 정 리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13

주자학 이전에 이미 반고한인씨께서 모든 공의 세계와 만유 만물의 도통없이는 제석 ( 帝 釋 )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 석가도 만유 만물을 깨달았지만 제석이라 하지 않고 석( 釋 )자만 앞에 붙인다. 그래서 석가( 釋 迦 )이다. 석가 위에 깨달음을 얻은 분은 연등( 然 燈 )이다. 연등은 반고한인씨의 오대손( 五 代 孫 )이다. 연등의 이름은 금선자( 金 蟬 子 )이다. 요즘도 불교계서는 연등제( 燃 燈 祭 ), 연등놀이를 하는 것도 금선자의 호가 연등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석가는 세 번째 해당된다. 4. 하느님은 한사람 즉 일인( 一 人 )이다. 환인씨( 桓 因 氏 )께서 한일( 一 )자의 성을 쓴 것도 하늘사람이란 듯이다. 물론 한 사람 ( 一 人 )은 천인( 天 人 )이므로 누구나 하늘사람이다. 즉 한 일( 一 )자는 하늘이므로 천( 天 )자 이다. 하느님을 믿으시오 라고 하는 말은 자기 자신은 물론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믿음을 강열하게 심어주고 있다. 뿐만 아니 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하느님이므로 사람을 공경하고 사랑하라는 정신사상은 은 연 중 교훈을 심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경천애인지( 敬 天 愛 人 地 )의 대자연사상과 인간과 자연사 상을 철저히 지키게 한 한민족의 조상들은 위대하지 않을 수 없다. 5. 육서지법( 六 書 之 法 ) 한자의 발달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한일( 一 )자에서 시작된 것이다. 반고한인이나 천황, 지황, 인황은 모두 한일( 一 )자의 성을 가진 데부터 한자의 발달이 시작되는 것 이다. 그 후 지갱( 地 鏗 )이 간지( 干 支 )법을 정리하여 천황( 天 皇 BC 8479년)이 정식으로 공포 한 것이 한자의 발달이 시작되는 단계이다. 314 김택기

다음은 한자( 漢 字 )의 발달과정을 기록하기로 한다. 역대 신선통감 제1권 제6절 천서성질설현기( 天 書 成 帙 洩 玄 機 )편에 나타난 육서( 六 書 )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앞에서 설명한 문장을 소개하고 풀어보기로 한다. 진서( 陳 書 )설에 의하면 희( 羲 )자를 가진 사람은 복희( 伏 羲 ) 이전에도 있었다. 복희 이 전부터 명을 받고 축대를 하천 위에 쌓았다. 문자( 文 字 )를 제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 금의 개봉성( 開 封 城 )이다. 개봉성은 섬서성 화현 서북이다. 이곳에 축대를 쌓고 문자( 文 字 )를 제조하기 위해 축대위에 붉은 글씨 28자를 쓰고 올려 놓았다. 창힐( 倉 頡 )은 글자 를 만드는 책임자의 벼슬 이름인데 어떤 사람은 아예 성을 힐( 頡 )이라 한 사람도 있었 고 어떤 사람은 창( 倉 )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창( 史 倉 )이라 하여 역사를 만드 는 창고라는 뜻과 글자를 만드는 창고라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 사창이다. 하지만 본래 의 관명 즉 벼슬이름은 창힐( 倉 頡 )은 붉은 글씨를 써서 축대 위에 28자를 올려 놓고 하 늘의 무궁무진한 변화가 있기를 기원했다. 하늘을 바라보니 별과 별들은 둥근 것 같으면서도 제각기 모양이 다르게 구부러져 있 었다. 모든 산천도 같았고 손가락과 손바닥도 같았다. 하지만 글자가 생길 듯 하였다. 그때 지어진 것이 육서( 六 書 )이다. 육서란 본시 한문이 만들어져 내려왔지만 한자가 만 들어진 기본적인 글씨의 체는 없었다. 그리하여 정해진 것이 육서지체( 六 書 之 體 )이다. 그럼 육서의 글체에 대해 적어보기로 한다. 가) 모양과 형상이 같은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해와 달 즉 日, 月 과 같이 모양과 형상이 체가 비슷한 것을 뜻한다. 나) 한자를 양쪽으로 벌려 가상적으로 만들어 쓰는 경우이다. 다) 손가락처럼 순서가 있듯이 위 아래가 함께 어울려지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 사람 人 字 에 두획을 더하면 천( 天 )자가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사람인( 人 )자에 위 아 래로 두획을 그으면 어질인( 仁 )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글 자를 소리로서 표현하게 하는 방법이다.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15

라) 뜻이 모여서 글자를 이룬다. 예를 들면 사람인( 人 )자와 말씀언( 言 )자가 합하여 생 긴 글자가 믿을 신( 信 )자이다. 그리고 그칠지( 止 )자와 창과( 戈 )자를 합하여 만들어 진 글자가 무( 武 )자이다. 글자와 글자가 합하여 만들어지면 뜻을 이루게 되는 것 을 뜻한다.( 桉, 格, 吾, 古, 含, 淡, 凉, 淙, 灯, 炎, 炯 ) 마) 글자가 모여 옮겨지면서 깊고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경우를 말한다. 즉 수레거 ( 車 )자와 전할전( 專 )자가 합하여 생긴글이 말로서 표현되는 경우를 듯한다. 예, 전( 轉 )등이다. 바) 말끼리 모여 소리를 내는 경우를 뜻한다. 많은 물이 모이고 섞이는 것처럼 말들 이 섞여 만들어진 소리로 된 글을 의미한다. 예를들면 큰물묘( 淼 )와 같다. 삼갈전 至 ( 孨 ), 편안할품( 品 ), 개다라날표( 猋 ), 돌무더기뇌( 磊 ), 막을지( ), 벌레충( 蟲 ), 걸 足 음빠를착( 足 足 ) 등이다. 至 至 6. 죽서( 竹 書 )와 목판( 木 板 ) 인쇄와 문민정치 이상과 같이 만들어진 글자는 천하에 옳고 바른 이치로 만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文 字 로서 쓰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육서( 六 書 )는 무궁무진한 문자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반 드시 훌륭한 육서의 몫을 다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대 신선통감 본문 31페이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흉년이 몹시 들었을 때 사회의 현실을 소상히 알기 위해 서응( 瑞 應 )과 힐( 頡 )은 史 倉 임. 사창이란 역사 담당한 벼슬이름)을 불렀다. 그랬더니 이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그때 현실은 너무 알지 못하여 굶주림을 당하므로 이러한 것을 문자로 기록을 남겨 미리 미 리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고 들려 주었다. 복희씨는 이들을 승진시켜 제후로 봉하고 방 방곡곡 어느 곳이던 세상이 밝게 될 수 있도록 힘쓰라고 격려하였다. 다시 말해 문민정 치( 文 民 政 治 )로서 나라를 부흥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 주양씨( 朱 襄 氏 BC 3388년)에게 명령하여 대나무를 깎아 진실하고 중요한 글 귀만을 적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무도 깎아 목판에 육서체의 글을 새기도록 하였다. 역대 신선통감 본문 30페이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316 김택기

황신씨( 黃 神 氏 BC 702년)는 정력을 다하여 수련을 연마하고 단련시켜 능히 도( 道 )를 열었다. 즉 득도( 得 道 )한 것이다. 그리하여 삼재( 三 才 )때 나온 글을 모두 달관하였다. 여기서 삼재( 三 才 )라면 반고한인씨의 후예인 천황, 지황, 인황을 말한다. 기원전 8479년에서 기원전 8247년 전이다. 상천( 上 天 )의 명을 받아 글을 정리하였다. 이때 많은 신하와 제후왕들을 백명이나 사 신을 보내 소집하였다. 그리고 모든 백성과 함께 군신( 君 臣 )들도 모이게 하였다. 제후왕 들은 백성들이 본뜰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도록 하라고 하였다. 백왕( 百 王 이란 백명의 왕, 또는 많은 왕을 의미함)과 신하들에게 본뜰 수 있도록 훈 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풀과 띠로서 짚신도 만들고 사랑방이나 누각에도 풀이나 띠로 덮도록 하였다. 주위에 는 탱자나무 같은 가시나무나 왕대씨리 같은 나무를 꽂고 울타리를 쳐서 병풍처럼 보기 좋게 하라고 하였다. 당시 도읍은 진( 陳 )나라가 있던 곳이다. 진주( 陳 州 )는 춘추시대 때 하남성 항성현( 項 城 縣 )이었지만 지금은 하남성 회양현( 淮 陽 縣 )이다. 옛날 황신씨( 黃 神 氏 BC 7024년)가 있을 당시 항성현( 項 城 縣 ) 동북이다. 1993에서 기원전 7024년이므로 합산한다면 무려 9017년 전에 짚신도 만들고 탱자나무와 싸 리나무 또는 가시나무를 병풍처럼 울타리도 쳤다. 풀이나 띠로서 지붕도 이고 또 소쿠리, 바구니같은 것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문민정치를 하도록 하였다. 7. 한자( 漢 字 )의 발전 1) 지갱(지황 BC 8364년)은 간지법( 干 支 法 )을 창안 정리하였다. 간지는 한자의 모체 이다. 지갱이 간지와 일( 日 ) 월( 月 ) 오행( 五 行 : 水 木 火 土 金 )인 요일(일주일)을 만들어 정하고 하루 한달 일년을 정해 상고하므로 천황( 天 皇 BC 8479)이 공표하 고 백성들에게 절기를 알게하여 사용케 하였다. 2) 유잠씨( 有 蠶 氏 BC 4796년)는 누에 즉 잠업에 대한 글자를 지었다. 이때 도( 道 )를 얻어 형상( 形 象 )으로 된 많은 문자를 계속 만들었다.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17

3) 사황씨( 史 皇 氏 BC 4055년. 일명 사창 또는 창힐)는 역대 신선통감 본문에서 보다 시피 육서법을 정하고 만들었다. 4) 제홍씨( 帝 鴻 氏 BC 3386년 일명 창힐)는 단군조선 제2기 때 도( 道 )를 얻은 사람이 다. 제홍씨는 한자( 漢 字 )를 사상적( 思 想 的 )으로 만들었다. 5) 신농씨( 神 農 氏 BC 3071년 일명 창힐. 임오년)는 화덕왕( 火 德 王 )이란 불을 정치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정치제도)으로서 그의 부인은 청( 廳 )이었다. 염제신농씨는 구름 운( 雲 )자와 벼화( 禾 )자로서 글자를 만들었다. 6) 유모씨( 有 媒 氏 BC 2978년 일명 창힐 己 巳 )는 새조( 鳥 )자와 고기어( 魚 )자로서 글 자를 완성하였다. 7) 유웅씨( 有 熊 氏 BC 2679년 일명 黃 帝, 또는 蒼 頡 戊 申 年 )는 토덕왕( 土 德 王 이란 농 경사회를 정책으로 내세움)으로서 생각하고 사고( 思 考 )하는 사상적( 思 想 的 )인 문자 를 만들고 무려 141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이에대한 책이름과 권수 등은 한민족사 본문 471쪽 한문자의 창시 년대와 갑골문자의 창조기 란 제목에 잘 나타나 있다. 8) 창힐씨( 蒼 頡 氏 BC 2563년 辛 亥 年 )는 도( 道 )를 통한 사람으로 황제의 어머니였던 부보( 附 寶 )씨의 명을 받고 계집녀( 女 )자로서 글자를 만들었다. 8. 옥편( 玉 篇 ) 글자순은 한민족사상( 韓 民 族 思 想 ) 한문자에 대하여 옥편을 간략하게 소개해 본다. 옥편은 한획부터 살펴보면 한일( 一 )자부터 시작함을 알 수 있다. 한일자가 바로 하늘 이다. 그리고 두이( 二 )자가 다음이고 석삼( 三 )자가 세 번째이다. 이것이 천인지( 天 人 地 ) 이다. 한일은 천( 天 ), 두이는 인( 人 )변이므로 人, 석삼( 三 )은 흑토( 土 )변이므로 土 이다. 그래서 한민족의 본체사상인 천( 天 ) 인( 人 ) 지( 地 )로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은 음양( 陰 陽 )이다. 사실 음양은 나타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성 리학에서는 음양을 기로 보았기에 물질로 보았던 것이다. 주자( 朱 子 )나 퇴계( 退 溪 )는 그 러했다.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오이다. 음양은 기임은 분명하지만 보이는 물질이 아 님을 알아야 한다. 단순히 성리학에서는 기를 물질로 보았기에 학문이 뒤틀린 것이 되 318 김택기

었다. 물질은 형이하학( 形 而 下 學 )이기 때문이다. 한일( 一 )자는 하늘이므로 형이상학이 다. 그리고 두이( 二 )는 사람이기에 기( 氣 )이다. 즉 사람은 몸체로 보는 것이 아니고 정 신( 精 神 )과 마음을 기준하므로 기( 氣 )로 본 것이다. 다시말해 정신과 마음은 물질이 아 니다. 그러나 물질을 만들 수 있는 본체이다. 이 본체는 바로 형이중학( 形 而 中 學 )에 속 함을 의미한다. 형이중학이란 기( 氣 )를 뜻한다. 기는 물질이 아니다. 석삼( 三 )은 만물 ( 萬 物 )을 뜻하고 땅을 뜻한다. 그러므로 형이하학( 形 而 下 學 )이다. 이와같이 형이상학, 형이중학, 형이하학이 서로 공 존하고 있는 것이다. 더 깊이 얘기하면 형이상학에도 정신기물( 精 神 氣 物 )이 있다. 인간 에게도 그리고 땅에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구단( 九 段 )으로 운용되고 있는 것이 다. 이와같이 天 人 地 의 삼원일체사상( 三 源 一 體 思 想 )을 옥편의 첫머리부터 적용시켰다. 그다음은 음양인데 음양은 전술한 바같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게 배합했다. 음과 양을 결합시키는 작용이다. 한문자는 하늘부터 처음 생겼고 또 하늘부터 시작된다. 그러기에 하늘자인 한획( 一 ) 부터 始 作 됨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획 두획 삼획이 끝나면 사획으로 들어간다. 이때부 터는 만물이나 사상이 완연히 시작된 단계이므로 물질로 된 글자와 정신적으로 된 글자 가 시작된 단계이므로 물질로 된 글자와 정신적으로 된 글자가 음양법에 의해 혼용되는 것이다. 그 첫째가 마음심( 心 )부터 始 作 된다. 그러나 天 人 地 와 음양 다음으로는 五 行 이기 때문에 사획에는 五 行 의 순위에 따라 획수가 정해진다. 그것이 목( 木 나무) 수( 水 물) 화( 火 불)이다. 그 다음은 오행의 순위에 따라 제일 많은 금( 金 )이다. 金 은 8획에 있다. 이렇게하여 天 人 地 는 土 이므로 土, 木, 水, 火, 金 의 順 으로 하여 음양을 合 해 天 人 地 ( 三 ), 陰 陽 ( 二 ), 오행( 五 )의 열가지를 天 地 의 自 然 法 에 맞추어 漢 文 字 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대명사가 水 木 火 土 金 의 五 行 인 간지( 干 支 )법 사상( 思 想 )이다. 옥편( 玉 篇 )은 단순한 육서( 六 書 )에 의해 만들어진 것 뿐만 아니고 한 民 族 우주철학사 상을 배경삼아 만들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단순히 한획, 두획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옥편이며 한문이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옥편의 한자순은 한민족 철학사상이 깊이 담겨져 있었음을 알게될 것이다. 그럼 옥편에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19

숨겨져 잇는 철학사상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로 한다. 지금부터 옥편의 글자순에 대한 사상적인 개념을 다시 한번 살펴 보고자 한다(1962년 경 國 韓 最 新 弘 字 玉 篇, 弘 字 出 版 社 發 行 ) 옥편의 글자 순서대로 있는 本 文 을 해설해 보기 로 한다. 一 (일), 丁 (정), 上 (상), 下 (하)자는 모두가 天 에 해당하는 글자이다. (고), 七 (칠), 万 (만)자는 人 에 해당하는 글자이다. 三 (삼), 丌 (괴), 丈 (장), (차)는 地 (지)에 해당하는 글자이다. 午 ( 五 는 오)는 만물의 법칙이 깊이 숨겨져 있는 윤회( 輪 廻 )사상의 근본을 뜻하는 대자 연법칙( 大 自 然 法 則 )의 대명사격인 오행( 五 行 )을 의미한다. 하( 下 ), 상( 上 )은 순환의 원리 를 뜻하고 있다. 다시 살펴보면 천자( 天 字 ) 해당하는 글자가 넉( 四 )자이고 인자( 人 字 )에 해당하는 글자는 석( 三 )자이며 지자( 地 字 )에 해당하는 자는 넉( 四 )자이다. 끝 三 字 (삼자) 는 상하( 上 下 )와 하상( 下 上 )으로 계속되는 반복글자로서 만유만상( 萬 有 萬 象 )이 순환하면 서 윤회하는 법칙사상( 法 則 思 想 )이 담긴 글자이다. 그러면 앞에 나타난 글자의 본문을 간략하게 해설해 보고자 한다. 우주( 宇 宙 )의 기운( 氣 運 )이 하늘에서 위아래로 일곱 번(일곱번이란 빛과 번개는 일초 동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정도 돈다고 함. 즉 기( 氣 ) 흐름이 음양오행의 법칙에 따라 일곱 번의 기류( 氣 流 )가 반복되는 작용을 하는 것을 듯함) 반복 내리니 땅위에서는 만 물이 번창하고 자란다. 그 원인은 다섯가지 즉 (음양오행을 말함, 음양은 보이지 않으 므로) 五 行 ( 金 水 木 火 土 )의 작용에 의함이다 라고 되어 있다. 다시 옥편의 삼획( 三 劃 ) 본문을 풀기로 한다. 만약 우주의 기운이 내리지 않는다면 땅에서는 만물이 자라지 못하고 작은 바위나 언 덕이 많이 생겨 높아지고 굳어질 것이며 땅은 점점 식어갈 것이다. 장차 세상에 밝은 빛이 계속된다면 찬 기운은 사라지고 동서남북 뿐만 아니라 천지간에 아름답고 평화로 움만이 가득할 것이다. 다음 세 번째 연결된 옥편 문장을 해설해 보기로 한다. 두 번째 문결되는 뜻으로 그렇게 된다면 천지간에 기운이 가득하여 두 갈래로 음양 이 갈라지면서 서로 상통하고 화합할 때 아름다움의 극치( 極 致 )가 생겨난다. 그때 땅속 320 김택기

에서는 광석이 생겨나며 땅위에서는 잔디와 수풀이 무성하게 될 것이다. 丶 (주), (하), 丸 (환), 丹 (단), 井 (정), 主 (주), 丿 (별), 乀 (불), 乃 (내), (유), 乂 (예), (오), 久 (구), 么 (요), 之 (지), (수), 乍 (사), 乏 (핍), 乎 (호), 乖 (괴), 乘 (승), (수) 의 문장을 풀어보기로 한다. 하늘에서 미립자( 微 粒 子 )같은 점이 내려 땅에 이르면 탄환( 彈 丸 총탄)처럼 둥글고 크 게 된다. 그것이 점차로 커지면서 붉은 색이 생기고 우물이 생기며 주인이 나타나게 된 다. 그리고 이쪽 저쪽 또는 옆으로 뻗어 내리는 기운( 氣 運 )은 질서 정연하게 순리( 順 理 ) 로 끊임없이 당기며(뉴튼의 만유인력과 같은 법칙) 다스리는 것은 다섯가지이다( 五 行 : 금, 수 목, 화 토) 그것은 무한한 시공속에서 가고 오고 내리면 오르고 다시 내리는 끝 없는 일을 계속하며 物 質 이 생기게 된다. 그 물질은 잠깐 왔다 갔다 하면서 형체는 변 하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가운데 오르고 내리면서 다스림을 자유자재로 하는 것을 뜻한 다. 이 얼마나 놀라운 우주철학 사상인가. 옥편 한획 일부에 신부 일부와 주부( 丶 부), 별 부( 丿 부)까지 옥편 순서에 있는 글자 71자( 字 )를 풀어본 결과이다. 옥편은 단순히 글자 순으로 엮어진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天 人 地 (천인지) 三 源 (삼원)의 사상과 연계된 음향오행이 합친 위대한 한민족의 우주철학사상이 숨쉬고 있음을 알았으리라 믿는다. 특히 한민족은 우 주를 하나의 집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차원높은 사상인가 우( 宇 )자란 집우 자이며 주( 宙 )자도 역시 집주이다. 우주를 집으로 생각할 만한 지혜를 가진 민족이 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9. 한문자( 漢 文 字 )에 깊은 철학사상( 哲 學 思 想 ) 공부( 工 夫 )하라는 말도 단순히 공부하라는데 그친게 아니다. 공자( 工 字 )는 하늘( 一 은 天 )과 땅( 一 은 地 一 字 위에 있으면 天 이며 아래 있을 때는 地 를 뜻한다)을 연결하는 글 자이다. 공부의 뜻은 하늘과 땅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夫 字 (부자)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21

는 하늘 天 字 (천자) 위에 꼭대기가 올라간 글자이다. 부( 夫 )란 지아비 부자이다. 지아비 란 사나이란 뜻이며 일명 남편이란 뜻도 된다. 사나이는 하늘을 뚫은 기상을 지녀야 한 다는 뜻이다. 공부( 工 夫 )의 두 글자를 합해서 생각해 보자. 하늘을 뚫을 기상을 갖고 땅 에서부터 하늘까지 무언가 연결하도록 하라는 뜻이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되어 우주까 지 날라가 하늘에 이를 것을 우리 선조들은 알고 공부( 工 夫 )하라고 한 것으로 느껴진 다. 仁 字 (인자)를 풀어보자. 사람이 하늘과 땅을 안고 있는 형상이다. 사람은 하늘과 땅을 안을만한 능력 즉 그러한 정신자세가 필요함을 강조한 글자이다. 사람이 하늘과 땅을 얼싸 안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어질고 착하 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하늘과 땅을 안을만한 도량( 度 量 )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상할 수 없이 어질 것이 아니겠는가. 즉 仁 字 (인자)란 天 人 地 와 같다. ( 人 天 地 이다. 즉 人 一 天 一 地 合 仁 ) 天 字 (천자)를 한번 풀어보자. 하늘이 ( 天 )있고 땅( 地 )있고 사람( 仁 )이 함께 묶어져 있 는 글자이다. 그러니까 天 人 地 (천인지) 三 源 (삼원)이 함께 합쳐져 이룩된 글자가 天 字 (천자)이다. 바로 이 天 字 (천자)가 한민족의 천인지( 天 人 地 ) 삼원일체( 三 源 一 體 ) 사상( 思 想 )임을 대변해 주는 글자이다.(사람도 머리, 몸통, 다리를 합한 작품이다. 삼원일체 사 상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하늘이 있어 땅이 생긴 뒤 사람이 생겼지만 하늘천( 天 )자에서 보듯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있는 것은 역시 사람뿐이다. 하늘 천( 天 )자는 한민족의 철학사상인 천인지( 天 人 地 )의 일체를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글이다. 다음은 도( 道 란 길도임)자를 풀어보자. 도( 道 )란 무엇이냐고 묻고있다. 도( 道 )란 책에 목숨을 건 것이 도( 道 )라고 답하고 있다. 길 도( 道 )자는 책받침변( 辶 )과 목숨수( 首 )자가 합쳐 있는 글자이다. 그러기에 책에 목숨을 걸면 도( 道 )가 열린다는 뜻이다. 도란 길인 것이다. 책에 목숨을 걸면 인생이 살아갈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박사( 博 士 )는 자기의 글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박사는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제일 엷고 여리고 약한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어린 선비라는 뜻이다. 어린 선비란 이제 글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박사는 박식한 선비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박사는 대단한게 아님을 뜻하고 있다. 322 김택기

다음은 각( 覺 )자와 불( 佛 )자 그리고 학( 學 )자를 간략하게 풀어보기로 한다. 각자( 覺 字 )는 수풀, 바위, 돌 등과 같이 차단된 속에서(동굴이나 집이나 바위나 어떤 곳이던 차단된 곳이라는 뜻) 깨달음을 얻어 볼수 없는 상황에서도 볼수 있는 것을 뜻한 다. 눈을 뜨고 보는 것은 허상( 虛 想 거짓물건, 거짓세상을 뜻함)이요 눈을 감고 보는 것 은 실상( 實 相 참된 모양, 진실된 모양)을 보는 것이라고 했듯이 차단된 공간속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밝은 눈으로 볼 수 있는게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글자 가 각( 覺 )자이다. 이 각자는 주관적이며 각인적인 것인데 비해 불( 佛 )자는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 人 )이 활( 弓 )과 화살( 失 의 표현이 작대기 화살 들을 표시함)을 놓고 선( 禪 )하 는 모습으로 된 글자이다. 그래서 불타( 佛 陀 )란 동이( 東 夷 )의 땅에 불( 佛 )이 있음을 뜻하는 글자이다. 많은 사람 이 활과 화살을 놓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으로 쓰이는 글자가 바로 깨달을 불( 佛 )자이 다. 학( 學 )자는 어떤가 알아보자. 볼수 없는 공간( 空 間 ) 즉 차단된 일정한 곳에 있어 어린 아이라는 뜻으로 말들어진 글자가 배울 학( 學 )자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학생이란 제약 된 환경과 생활속에서 바른 정신사상과 올바른 길을 배우면서 성장해야 한다는 깊은 뜻 을 갖고 있는 글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 이르기를 배움의 길을 도학( 道 學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도( 道 )를 통( 通 )한다는 것은 책에서 얻은 바른 진리 를 터득하는 길을 뜻한다. 바른 진리( 眞 理 )를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라는 뜻에서 글자가 달( 達 )자 이다. 달자는 책에서 얻은 행복이란 뜻으로 도( 道 )가 통( 通 )한 사람은 달달한다고 하여 만들어진 글자가 달자( 達 字 )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한문은 한민족의 말과 정신사상을 바탕하여 천인지( 天 人 地 )의 일체 사상( 一 體 思 想 )을 배합하고 음양오행을 합해 십단( 十 段 즉 열단계)의 완벽한 이론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의 거짓된 역사를 만들었어도 자기들 역사라고 하고 있으며 한 문자( 漢 文 字 )도 자기 것이 아닌데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뻔히 알고 있으 면서도 역사와 우리 글을 찾는데 너무도 무관심했던 것이다.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23

앞으로 우리 정부 당국은 하루빨리 한글 정용만을 고집하지 말고 훌륭한 우주철학사 상이 알알이 담긴 한문자의 혼용이 시급히 필요함을 재삼 강조하는 것은 전술한 바와같 은 철학사상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10. 글( 㓞 )을 한자( 漢 字 )라고 부르게 된 내역 한자( 漢 字 )란 명칭은 본래 동이족( 東 夷 族 )의 글( 㓞 )이 변칭된 것이다. 우리 동이 선조 가 창제한 글( 㓞 ) 글( 契 ) 서글( 書 契 ) 진전( 秦 篆 ) 설문( 說 文 ) 한어자( 漢 語 字 ) 한자( 漢 字 )는 당시에 중원 대륙에서 생활하였던 각 종족으로 전파된 것이니 동이족의 나라인 은 나라터(현. 중국 하남성 안양현)에서 갑골문이 발견됨으로써 입증이 된 것 이다. 이 갑골문을 은허서글( 殷 虛 書 契 )이라 칭한다. 한인( 漢 人 )들은 한어( 漢 語 )라는 언어만이 있을 뿐이므로 한자자전( 漢 字 字 典 )의 명칭을 한어자전( 漢 語 字 典 )이라고 표기( 表 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역대 모든 한자자전의 자음은 북( 北 )자의 경우에서처럼 1음절인데 한어(중국어)로는 2 음절인 베이 로 발음하고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 한자( 漢 字 )가 한어족( 漢 語 族 )의 문자가 될 수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실증되는 중요한 사실은 후한 학자 허신( 許 愼 )이 서기 107년에 진전( 秦 篆 )을 그대로 종이에 옮겨 편찬한 설문( 說 文 ) 이래 양( 梁 )나라 때 편찬한 옥편(서기 543 년 편찬)으로부터 청( 淸 )나라 때 편천된 강희자전( 康 熙 字 典 1716년 편찬)에 이르기까지 모든 한자자전에 표기되어 있는 한자의 발음기호인 절운( 切 韻 )이 한어음과 괴리가 심하 여 발음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이러한 어문괴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중화민국은 1912년 1월 건국후 이 문제에 역점을 두고 추진한 결과 한자의 새로운 발음기호인 주음 자모( 主 音 字 母 : 주음부호로 개칭)를 1918. 12. 23. 제정 공포하였고 중국대륙과 대만이 분리된 후인 1958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독자적으로 한어병음자보를 제정하여 절음대 신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어문 현실이므로 한어를 연구 하는 중국인 전문학자라고 할지라도 위와같은 논증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 한( 韓 )민족은 현재까지도 옥편 및 강희자전 등 모든 한자자전에 표 324 김택기

기된 자음( 子 音 글자의 음)을 거의 그대로 발음하고 있으니 한자( 漢 字 :글( 㓞 )가 우리 동 이족의 문자임은 명명백백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 동이족의 선조는 동방 ( 東 方 ) 최초로 글( 㓞 )이라는 상형문자(표의문자)를 창성하였고 조선조 세종 때에는 표음 문자인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는 등 고대로부터 동방문화를 주도한 선진문화민족임이 분명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문자를 글( 契, 書 )이라고 칭하는 민족은 우리 한민족 뿐이니 서글( 書 契 )의 창제주체를 논함에 있어 이보다 더 뚜렸한 증거가 어디에 있겠는가 서글( 書 契 )이 우리 조상의 창제물임을 더욱 확실하게 나타내주는 유증( 遺 證 )은 우리의 선조들께서 공부하신 곳이 서당( 書 堂 )과 글방( 契 房 )인데 이 명칭이 서글( 書 契 )이란 단어 에서 연유한 것이다. 11. 결어 한자( 漢 字 )는 이미 BC 2679년에 황제는 경서를 140여권이나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반고 환인때(BC 8936년) 상원 갑자년 이후에 이미 동굴이나 바위에 법화경과 국사가 비장되어 새겨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한민족은 우주를 집 으로 보았다. 그래서 집우( 宇 ) 집주( 宙 )라고 했다. 우주를 집으로 보고 우주철학사상을 창출해 냈던 위대한 민족이었었다. 인류 최초의 민족이자, 인류의 시조이다. 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상 그리고 철학사상상 최초, 최상의 민족임을 두말할 나위 없다. 한문자가 만들어진 천.인.지( 天. 人. 地 ) 삼원일체사상이라든지 갑골문자가 간지법( 干 支 法 )과 음양오행의 글자에서 시작되엇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영국의 동양철학자인 에버하르트(Eberhard)가 말하기를 서구의 정신적 멸망 뒤에 오 는 유일한 해결책은 음양오행의 법칙 밖에 없다고 하였다. 또한 한자( 漢 字 )는 반고 환인씨 이후 천황, 지황, 인황의 삼재( 三 才 ) 즉 삼황( 三 皇 )에 서 시작된 한자의 발달사는 갑골문체의 본체다. 간지법인 천,인,지( 天. 人 地 ) 음양오행의 대 자연사상을 기준하여 위대한 한민족의 글인 漢 字 를 사상적인 면까지 발전시켜 왔던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25

것이다. 앞으로 사회 일각에서 한문 때문에 발전을 못한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 즉 차이나나 일본은 우리들보다 한자를 엄청나게 많이 쓰고 있다. 게다가 사성음( 四 聲 音 )으로 사용하면서도 문화는 우리나라보다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한자( 漢 字 ) 폐지론을 주장하는 한글 전용주의자들은 한민족의 훌륭하고 위대한 사상 적인 글을 모독하는 것이며 따라서 성인( 聖 人 )이었던 선조들을 모독하는 행위임을 알아 야 한다. 이제 한국은 세계를 리더할 책임이 주어진 민족으로 한자에 나타난 한민족의 자연사 상을 모체로 하여 새로운 한국의 사상을 고취시켜 한민족 정기를 다시금 되살리고 바로 잡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말은 70%가 한자에서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한문을 알면 국어사전도 거의 필요없게 된다. 이상과 같이 한문자와 갑골문은 한민족이 최초로 만들어 놓은 훌륭한 작품이다. 간지와 오행은 눈으로 보고 끝나는 글자나 부호가 아니다. 오행( 五 行 : 간지와 오행) 은 세상 아니 우주 속에 있는 모든 진리를 모두 풀 수 있는 오묘한 신법( 新 法 )이 있음 을 밝혀둔다. 공자가 오죽했으면 오행에는 신법이 있다고 했겠는가? 이제부터 한민족은 선조들이 남겨준 위대한 철학사상과 사관을 바로 잡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한민족 사관과 사상이 바로 잡히는 날 한민족 뿐만 아니라 전세계 인류가 평화의 진 미를 맛보게 될 것이다. 12. 첨부 1) 안호상 박사와 임어당과의 일화 2) 한글학자 한갑수와 중국인 사학자 서량지 선생간의 일화 326 김택기

첨부 1. 안호상박사와 임어당과의 일화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위와같은 사실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한자( 漢 字 )는 중국인( 中 國 人 )의 선조가 만든 문자가 될 수 없다는 점과 동이족( 東 夷 族 )이 창제한 문자( 文 字 )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 기회에 우리나라의 초대 문교부장관( 文 敎 部 長 官 )을 역임한 안호상( 安 浩 相, 1902년-1999년)박사와 중국( 中 國 )의 정명한 문학자이며 평론가인 임어당( 林 語 堂, 1895 년-1976년, 美 國 定 住 )선생의 대담( 對 談 ) 중에서 한자( 漢 字 )와 관련된 일화( 逸 話 ) 한토막 을 소개하기로 한다. 안호상 박사가 문교부장관 재직시에 임어당 선생을 만난 기회에 사석( 私 席 )에서 여담 ( 餘 談 )으로, 중국( 中 國 )이 한자( 漢 字 )를 만들어 놓아서 우리나라까지 사용하게 됨에 따 라 어려운 한자( 漢 字 ) 때문에 문제점이 많다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임어당 선생은 안박 사의 말에 답( 答 )하기를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 漢 字 )는 당신네들 동이족( 東 夷 族 ) 조 상이 만든 문자( 文 字 )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소 라고 핀잔투로 말하였다고 전한다. 참으 로 크게 봉변( 逢 變 )을 당한 것이다.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한글 전용을 주장하던 안호상( 安 浩 相 ) 박사는 임어당( 林 語 堂 ) 선생으로부터 한자( 漢 字 )는 당신네들 조상인 동이족( 東 夷 族 )이 만든 글자라는 말을 들은 이후 이를 계기로 하여 한자( 漢 字 )의 발생 근거를 추적( 追 跡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韓 )민족의 상고사 ( 上 古 史 )를 터득( 攄 得 )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40여 년이 경과된 후에 급기야는 <겨레 역사 6천년>(1992. 9. 5. 기린원 발행)이란 저서( 著 書 )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안( 安 )박사는 동( 同 ) 저서( 著 書 )에서 기술( 記 述 )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조상과 역사를 잊어버린 까닭에, 우리의 조상과 역사를 잃어버렸다 라고 한탄하였으며, 우리는 겨레 역사와 나라 역사를 구별해야 한다. 겨레는 혈통적 종족이고, 나라는 지역적 영토다. 한국( 韓 國,조국)의 역사는 곧 한국 겨레인 배달겨레의 역사가 되지만, 중국의 나라 역사는 중국 겨레의 역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나라로서의 중국이나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27

중국 겨레라는 말이 옛 시대(진나라 진시황 이전)에는 없었던 까닭이다. 현대의 중국학자 임혜상은, 중국이 16계족( 系 族 )들, 곧 겨레들이 혼합해 된 것이라 하 였는데, 사실 그 핵심적이고 주도적인 겨레 계통은 우리 배달겨레인 동이 겨레( 東 夷 族 )다. 그리고 오늘날 동양의 역사를 알고 보면 동이 역사인 것이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글에서 우리 한( 韓 )민족의 상고사( 上 古 史 )를 터득하여야만 한( 韓 )민족의 사실( 史 實 ) 과 동이( 東 夷 ) 선조의 우수성( 優 秀 性 )을 올바르게 인식( 認 識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328 김택기

첨부 2. 한글학자 韓 甲 洙 박사와 中 國 人 史 學 者 徐 亮 之 선생간의 일화 소개 먼저 평생토록 한글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시고 2004. 11. 21 영면( 永 眠 )하신 한갑수( 韓 甲 洙 ) 선생님의 명복( 冥 福 )을 빌면서, 생전에 선생님의 특별초청 강연회에서 필자가 청취한 서량지( 徐 亮 之, 중국인 역사학자) 선생과의 일화( 逸 話 ) 내용을 소개하기 로 한다.(2002. 8. 20. 강연내용) 그동안 우리 한국의 어문학계( 語 文 學 界 )를 이끌어 오신 석학( 碩 學 )의 강연을 들었다는 점과 더구나 韓 박사님과 서량지( 徐 亮 之 ) 선생간에 있었던 일화( 逸 話 )를 듣게 되었음은 참으로 귀중한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韓 박사님께서는 처음에 계촌법( 計 寸 法 :일가의 촌수를 계산하는 법) 강의를 끝내신 후 청중( 聽 衆 )을 향하여 우리 한( 韓 )민족의 시조( 始 祖 )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시니 청중들은 서슴지 않고 거의 일시에 단군( 檀 君 )님이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韓 박사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단군왕검( 檀 君 王 儉 ) 을 시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환인이 시조이며, 그 시기는 환단고기( 桓 檀 古 記 )라는 책 을 근거로 계산하면 서기전( 西 紀 前 ) 7198년에 시작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9,5000년 전이었다고 설명하시면서 우리 한( 韓 )민족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위대한 민족이라고 일깨워 주신 후 韓 박사님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 유학시절에 만난 동기생( 同 期 生 ) 서량지( 徐 亮 之, 중국 대만인) 선생간의 일화( 逸 話 )를 소개하시는 것이 었다. 필자는 강연이 끝난 후 별실에서 韓 박사님을 특별히 모시고 서량지( 徐 亮 之 ) 선생에 관한 궁금한 부분을 추가하여 여쭈어 보니 그 때의 체험담을 자세하게 말씀하여 주셨는 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당시 미국 공군지휘 참모대학 입학생( 入 學 生 ) 60명 중 동양인( 東 洋 人 )은 韓 甲 洙 (한갑 수) 한박사님과 서량지( 徐 亮 之 ) 선생 뿐이었는데, 입교식( 入 校 式 )날 저텩에 서량지( 徐 亮 之 )선생이 韓 박사님의 방으로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귀국( 貴 國 ) 한( 韓 )민족은 우리 중국 ( 中 國 )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 中 國 人 )이 한( 韓 )민족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29

의 역사( 歷 史 )가 기록( 記 錄 )된 포박자( 抱 朴 子 )(갈홍 편저)를 감추고 중국역사( 中 國 歷 史 ) 를 조작( 造 作 )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 本 人 ), 서량지( 徐 亮 之 )이 학자적( 學 者 的 ) 양심( 良 心 )으로 중국인( 中 國 人 )으로서 사죄( 謝 罪 )하는 의미( 意 味 )로 절을 하겠으니 받으라고 말을 하면서 큰 절을 하므로 엉겁결에 절을 받고 나서 포박자( 抱 朴 子 )에 기록 ( 記 錄 )되어 있는 우리 동이( 東 夷 ) 선조의 상고사( 上 古 史 )에 관하여 대담( 對 談 )을 하셨다 는 귀한 말씀을 들려 주셨다. 서량지( 徐 亮 之 ) 선생은 현대 중국역사학자( 中 國 歷 史 學 者 )로서 그의 저서( 著 書 )인 <중 국사전사회( 中 國 史 前 史 話 )>에서 기술( 記 述 )하기를 우리 동이( 東 夷 ) 선조가 중국역사( 中 國 歷 史 ) 이전( 以 前 )에 중국역법( 中 國 曆 法 :달력)을 창시( 創 始 )하였고, 주즙(배와노) 궁시 (활과 화살)도 우리 동이에서 창시하였으며, 동이( 東 夷 )의 음악교육( 音 樂 敎 育 )도 중국역 사( 中 國 歷 史 ) 이전( 以 前 )에 있었다고 기술( 記 述 )하였다. 330 김택기

<참고문헌> 1. 처음으로 밝혀진 한민족사 이중재 저 2. 상고사의 새발견 이중재 저 3. 갑골문체와 천부경 최명재 저 4. 한철학 이중재 저 漢 子 (한자)는 우리 韓 民 族 (한민족)의 文 字 (문자)이다 331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이 명 수 (동두천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目 次 I. 서 론 II. 본론 1. 기후변화로 전 세계 곡물 생산량 감소 전망 2. 벼농사의 유래 3. 벼 품종의 역사와 쌀이라는 말의 유래 4. 물 부족과 수리시설 5. 우리겨레의 쌀 6. 벼농사의 공익적인 외부경제효과 7. 식생활 및 국민건강상의 쌀의 위치 8. 농지정책과 농업진흥지역 III. 결 론 집필자 : 이명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조사위원회 위원, 독립기념관 사료조사위원, 동두천시 문화재 보호위원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33

Ⅰ. 서론 쌀은 곧 우리의 생명이다. 쌀미( 米 )자는 곡물 알갱이들이 줄기에 상하 좌우로 매달려 있는 모양은 팔십팔( 八 十 八 )자를 위 아래로 합친 글자로 88번의 품이 들어가는 힘든 농 사라는 것으로 풀이했다. 쌀은 원래 아열대 식물로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베트남, 필 리핀, 인도네시아 같은 더운 나라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벼농사는 우리나라 유구( 悠 久 )한 역사와 함께 수천 년을 내려온 농촌농민들의 생활은 지금도 변동 변함없이 춘하 추동 사철에 같은 농사방법으로 되풀이해 내려왔다. 농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 는 안 될 천하지대본( 天 下 之 大 本 )이라 하여 태양과 바람 구름에 비와같이 중요한 것이 다. 이것은 억만년이 가고 또 가도 사람들이 살아있는 한 변할 수 없는 진리( 眞 理 )인 것이다. 윤봉길 의사( 義 士 )의 농민독본( 農 民 讀 本 )에 보면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해도 지구의 생명창고에 열쇠는 농민이 쥐고 있다는 그 말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가슴에 다가오는 요즘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벼가 재배( 栽 培 )되었을까 가장 오 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에 보면 백제와 신라에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지금부터 5천 년 전쯤에 중국 양쯔강과 화이허강 유역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측 하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에서 최근 구석기시대에 옛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함께 볍씨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제까지 우리학계에 알려진 한반도의 벼농사 도입 연대(경 기 여주, 전남 나주)보다 거의 2천년이나 앞서게 한 위대한 발굴이다. 그 후 나주시 다 시면에서 기원전 1,050년 전의 탄화( 炭 化 )된 벼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 유적에서 3천년 전의 탄화미( 炭 化 米 )가 발견되었다. 5천년 전부터 중국과 같은 시기에 우리 조상들이 여주 한강변에서 벼농사를 주축으로 삶을 이어왔음을 실증( 實 證 )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의 쌀은 세계인종( 人 種 )중에 가장 두뇌( 頭 腦 )의 밀 도가 높고 천재성이 두드러진 우리 겨레의 피와 살 정신문화를 형성해 왔다. 쌀은 국민 건강유지와 직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농민의 주요 소득 작목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다. 또 우리에 맞는 식생활을 쌀밥을 주식으로 하고 여기에 김치, 된장, 고추장 과 한우와 토종돼지를 곁들인 식생활이다. 때문에 쌀을 중심으로 우리의 식사행태는 고 탄수화물 식품에서 고지방질까지 다채롭고 폭넓게 식단을 즐길 수 있으며 균형 잡힌 영 334 이명수

양섭취가 비교적 용이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쌀 소비의 급격한 감소는 식생활의 서구화 로 촉진시켜 당뇨, 비만, 혈압 등 건강 불균형을 초래하기도 한다. 쌀은 밀가루에 비해 섬유소 함량이 두 배 가량 많아 수분 유지력에 큰 관계로 변비를 예방하며 인슐린 분비 는 적어 비만, 고혈압, 당뇨, 동맥경화 등 성인병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 쌀이 우리 국민의 건강에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비중을 고려할 때 쌀 소비의 지나친 감소는 국민 건강유지에 상당한 문제를 유발시키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쌀은 한국인의 지식( 知 識 ) 으로 후손들에게 풍부하게 농사지을 땅을 물려주어야 한다. Ⅱ. 본론 1. 기후변화로 전 세계 곡물 생산량 감소 전망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2020년에는 현재보다 지구의 기온이 평균 섭씨 2.4도가 올라 가고 대규모 식량부족 사태가 올 수 있다고 미국의 민간기관인 유니버설 생태기금 (UEF)이 밝혔다. 이 기관은 기후 변화의 식량수급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2020년에 인 구가 현재보다 9억명 가량이 늘어나 세계인구가 78억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 나 온실 효과와 인구 증가 등으로 인해 곡물 생산량이 세계 인구가 필요로 하는 수요에 비해 밀 14%, 쌀 11%, 옥수수 9% 등이 각각 모자라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이 보고 서가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지구의 기온이 올라가면 가뭄지역의 가뭄 피해가 더욱 확 산되고 강우 지역의 강우량은 더욱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 은 기후 변화로 곡물 재배지역이 줄어들어 전 세계적인 곡물 생산량이 감소할 것이라고 이 보고서가 강조했다. 그렇지만 지구온난화로 곡물을 재배할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나고 더위에 잘 견디는 품종의 곡물생산량은 늘어날 수 있어 각국별로 식량 생산량이 달라질 것으로 예상됐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쌀 생산량은 6억8580만톤 가량이다. 쌀은 2020 년에는 7억7510만 톤이 필요하나 그 당시에 생산량이 6억9210만 톤에 그쳐 8290만 톤 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됐다. 다만 한국, 중국, 미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일본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35

등에서 쌀 생산은 현재보다 늘어날 것으로 추정됐다. 쌀 생산량 감소가 예상되는 국가 는 인도, 브라질, 이집트 방글라데시, 네팔, 스리랑카 등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밀의 생 산량은 6억8340톤이다. 2020년에는 7억7230만 톤이 필요하나 그 당시 생산량은 6억 6310톤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다. 이 때문에 2020년에 밀1억90만 톤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됐다. 옥수수는 현재 8억2620만 톤이 생산되고 있다. 2020년에 필요한 옥수수는 9 억3370만 톤이나 그 당시 예상 생산량이 8억290만 톤에 불과해 8500만 톤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됐다. (가) 우리 미래의 농업을 그리면서 가장 걱정되는 것이 급격한 기후변화와 강수량 일 사량 등 변화시켜 농업의 생산성을 악화시키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최근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일본 동북부지역에 9.0강진이 발생하여 그 넓은 농경지 를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경각심이 높아 졌고 좁은 국토가 산업화 물결로 농경지에 산업단지 및 아파트들이 산처럼 들어 서 우리나라의 식량생산에 많은 차질이 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나) 첨단산업의 발달로 식생활까지 바꿔놓았다. 외국에서 들여온 밀과 옥수수로 빵, 피자 라면 또는 가축사료용으로 활용하여 밀과 옥수수는 국내 생산량이 5%인데 반해 쌀 소비량이 줄면서 잡곡은 부족한데 쌀은 남아도는 실정이다. 외국산 밀 가루로 만든 국수 만두, 빵, 피자 대신 밥과 떡을 더 즐겨야 되고 대신 쌀로 만 든 가공식품을 만들어 상품화하여 밀 대신 쌀 소비량을 늘려나가야 할 것이다. (다) 조상들이 피땀 흘려 일구어놓은 논과 밭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곡물 자급자 족율이 26.7%에 그치고 있다. 우리 후손들 살아가야 할 이 땅에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 더 이상 논과 밭의 훼손은 농업에 살아갈 희망은 없다. 앞으로 갯벌과 산지를 개발하여 생산 산업단지 확장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 벼농사의 유래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벼가 재배되었을까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에 보면 백 336 이명수

제와 신라에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기록도 있고 지금부터 5000여 년 전쯤에 중국 양쯔 강과 화이허강 유역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재배 벼는 원산지가 인도, 동남 아, 중국 등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동쪽으로는 육로 또는 수로를 통해 중국 필리핀 한 국, 일본 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 벼가 전파된 경로를 살펴보면 원 산지인 인도의, 아삼, 원난 지역에서부터 중국으로 갔다가 중국의 산둥반도를 통하는 바닷길 또는 랴오둥 반도를 통하는 육지나 바닷길을 통해 한강이나 대동강 연안에 벼가 전파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한국과 중국에서 발견된 벼의 유적에 근거한 것으 로 경기도 고양 가와지 유적에서 발견된 볍씨는 약5000년 전 충남 부여 유적에서 출토 된 탄화미는 약2600년 전 그리고 경남 김해의 패총 탄화미가 약1900년 전의 것으로 추 정돼 한강이나 대동강 유역에서 시작된 벼농사가 한반도의 남쪽으로 전파됐음을 보여주 고 있다. 쌀을 재배하기 시작한 시기를 보면 세계적으로 기원전 8000년경으로 중국이 기원전 약6,000년경 우리나라는 이보다 조금 늦은 기원전 2300년경에 이미 벼농사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쌀은 중국의 중남부 해안으로부터 동지나해를 건 너서 한반도 중부지역 한강유역으로 들어왔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우리나라의 벼 재배중심의 농업은 매우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벼농사 시작 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에서 기원전 1050년경으로 추정되는 탄화된 벼가 발견되었다. 그 리고 경기도 여주시 흔암리 유적에서 3,000년 전의 탄화미가 또 발견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벼농사 시작은 기원전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농경 생산의 발달은 토지 사용의 확대와 잉여생산물의 증가로 사유재산의 필요성을 낳게 되었으며 빈부격차 와 계급발생의 근원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정착농업의 시작에 대해서는 대략 1만 년 전 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농업에 대해서는 크게 북방계와 남방계로 나누어지는데 일 반적으로 남방계가 먼저 시작한 것으로 알려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남방계보다는 북 방계로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우 정착농업은 남방계보다 좀 더 늦은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착농업의 중심이 되는 벼농사는 대략 4 천 년 전쯤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정착농업 초기부터 벼농사를 시작한 것은 아니 다. 초기 정착농업에 있어서 주요 작물은 주로 야생의 밀과 보리, 조를 꼽는데 우리나 라의 경우 초기 농업을 시작한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조와 피 등의 작물만이 발견되고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37

있다. 정착농업 이후 후기부터 재배된 것으로 알려지는 벼의 경우는 탄화미를 통해 대 략적인 전파 경로를 알려주고 있다. 이 전파 경로에 관해서는 북상설과 남방설 절충설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나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는 북방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중 국대륙의 어느 지역을 통해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러한 정착농업은 크게 전기 와 후기의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에는 괭이나 뒤지개 등의 생산도구를 주 로 이용한 시기이다. 농기구는 돌로 만든 것도 있으나 대부분 뿔로 된 것을 사용했다. 뒤지개는 사슴뿔의 뾰족한 끌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괭이는 동물 뿔의 끌을 날카롭게 다 듬어서 사용하였다. 후기에 들어서는 낫이나 보습(땅을 갈아엎는데 쓰는 삽처럼 생긴 기구)을 주로 이용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들어서 쌀 등의 맥류가 점차적으로 농업의 주를 이루기 시작한다. 그것은 각지에서 출토되는 유물에서 입증된다. 탄화물토기에서 나오는 벼와 쌀의 자국이 석기와 토기 등을 통해서 함께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 일반적으로 쌀을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 초기로 알려져 있 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근래 들어 새롭게 수정되었다. 그것은 바로 1991년 일산 의 가와지와 김포의 가현리 강화 우도 등에서 볍씨와 볍씨 자국 벼과의 꽃가루 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존에 발견된 벼와 관련된 유물은 평양과 부여 김해 에서 발견되어 모두 청동기시대로 밝혀져 왔다. 따라서 벼농사의 시작을 청동기 시대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위에서 말하는 고양과 김포 등지의 유적은 모두 신 석기 시대 후기유적으로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을 훨씬 이전으로 앞당기게 하 였다. 더구나 한국 선사고고학회와 일본 도호쿠( 東 京 )대 스즈끼, 미쯔오 교수팀 이 공동으로 지난 1997년 통진면 가현리 450번지 일대의 이탄층을 채취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법을 이용한 3년간의 연구조사 끝에 이제 김포가 국내 쌀재배의 원조라는 사실은 정설 로 굳어지고 있다. 선사고고학회 임효재(서울대 문학박 사)회장은 26일 일본의 스즈끼 미쯔오 교수팀과 가현리에서 채취한 이탄층을 조사한 결과 가장 아래쪽은 BC 5천440년, 중간층은 BC 4천720년 가장 위쪽은 BC 4천420년에 형성된 것으로 판명됐다 고 밝혔다. 이렇게 김포가 우리나라 최 초의 벼농사 중심지를 이루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나오고 있다. 338 이명수

첫째, 양자강에서 북쪽으로 계속 올라와 산둥반도에 이른 다음 황해를 건너 우리나라의 중서부지방에 닿았다는 도해설이 있다. 이는 중국의 산둥반도와 황 해의 벽란도, 경기도의 강화도가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중국과 교류에 유 리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중국의 하모도와 김포의 가현리가 서로 마주보 는 지형인 것도 도해설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중국의 하모도는 그 기원설로 따져보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기인 7천년전에 벼가 재배되었고 주변의 일 본이나 시베리아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기에 우리나라와도 교류가 있었다는 측면 에서 도래 설을 이야기 한다. 둘째는 산둥 반도 북쪽의 요동열도를 거쳐 요동반도에 이르러 한동안 쌀이 재 배되다 남만주를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와 시각을 조 금 달리하여 산둥반도에서 계속 바닷가를 거쳐 발해만 주위와 요동반도를 거쳐 서 바로 한반도로 유입되었다는 육로설이다. 이 요동반도는 한반도의 주요 터전 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우리나라와 끊임없이 문화를 교류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평양 등지에서는 조와 피같은 초기 작물은 발견되었지만 아직까지 벼농사와 관계된 흔적이 발견된 점이 없기 때문에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 러 유입설과는 별도로 한반도에서는 오래전부터 벼농사를 통한 정착생활이 시작 되었다는 점에서 김포는 벼농사와 함께 우리나라 정착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중 요한 지역이다. (나)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쌀 을 먹었을까 벼농사는 청동기 시대에 시작되었다. 대략 10세기경이다. 북쪽으로는 평양 근처 남경마을에서 볍씨가 나왔고 광주의 신청동에서도 비슷한 볍씨가 나왔다. 평균 길이 4.3~4.5mm 평균 너비2.5mm의 짧고 뭉툭한 볍씨였다. 물론 두 마을 외에도 여러 곳에서 벼농사의 흔적이 발견 되고 있다. 그때도 마을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논에다 물을 대고 빼는 수로도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울산 광주 논산 등 여러 곳에서 논자리와 수로의 흔적도 발굴되었다. 안동 저전리에서는 2800여 년 전의 저수지가 발굴되어 벼농 사와 저수지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사실 세계에서 가장 오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39

래된 볍씨가 발견된 곳도 우리나라에서 1만5천여 년전의 볍씨가 창원 소로리에 서 발견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었다. 하지만 그 볍씨만으로는 벼농사를 지었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더 연구가 필요하다. 재배 벼는 종자식물문/피자식 물아문/단자엽식물강/영화목//벼과/벼속에 속하는 식물로 약20개의 야생종과 oryza sativa L, subsp. japonica와 oryza L.subsp. indica kato의 2개 아종으 로 구분된다. 그중 oryza sativa L.는 동남아 지역에서부터 재배가 시작되어 동 북과 서남 지방으로 전파되어 재배되고 있는 종으로 kato shigemoto는 oryza L. subsp japonica와 oryza sativa L.subsp. indica kato와 2개 아종으로 구분 하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쌀(벼)과 관련된 자료는 1920년대 김 해 패총에서 발견된 탄화미가 전부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쌀은 기원전후에 일본 을 통해 유입되어 재배되었던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여주 흔암리 주거지에서 기원전 10세기경의 탄화미가 다량 출토되어 우리나라 벼농사 의 시작이 일본보다 앞선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평양 남경과 부여 송국리 유 적 등에서도 탄화미가 출토되었으며 하남 미사리 서산 휴암리 안면도 고남리 승 주 대곡리 합천 붕계리 거창 대야리 울주 검단리 등의 여러 유적에서 토기바닥 에 볍씨 자국이 찍힌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논산 마전리에 서 청동기 시대의 논이 확인되어 청동기 시대에 이미 벼농사가 전국적으로 이루 어졌음이 밝혀졌다. 한편 출토된 볍씨나 볍씨 자국은 그 형태가 단립형으로 현 재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쌀과 같은 형태이다. 그러나 최근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구석기 시대의 토탄층 (연대 : 12,500BP ~ 14,600BP)에서 볍씨 (japonica형과 indica형)가 발굴되고 그 이전의 층에서는 유사벼가 발굴되어 크 게 주목 받고 있다. 소로리 유적에서 출토된 볍씨는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로 보 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인 것으로 밝혀져 벼의 기원 진 화 전파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 벼농사의 시 작은 종전까지는 대개 BC 21세기경으로 보았으나 1991년 김포군 동진면 계현리 일대의 토탄층에서 BC 2400년대의 우리나라 최고의 볍씨가 출토되어 우리나라 벼농사가 이미 신석기시대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벼농 340 이명수

사는 신석기 시대의 시작되어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에 걸쳐 많이 재배되 기 시작했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쌀의 생산량이 많아져 쌀밥이 주식으로 중 요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는 쌀 생산량의 절대량이 부족하 여 쌀밥이 귀했다. 벼의 토박이 알은 베 계( 벼 포함)와 나락 계로 나뉜다. 언어 지도에서 베 계와 나락 계는 남북으로 나뉘어 표시됐다. 베 계는 경기, 강원, 충남북에 분포하고 나락 계는 경남북과 전남북에 분포한다. 3. 벼 품종의 역사와 쌀이라는 말의 유래 중국남부에서는 벼( 稻 )를 net nl nuan 이라 하고 베트남 지역의 nep 과도 이어지 는데 중국 자전에 보면 옛발음은 nl 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nuan 이란 말은 우리말의 논 과 발음이 흡사하여 흥미롭다. 황해도에서는 쌀밥을 이팝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고 어는 니밥 이며 이는 나 와 밥 이 합쳐진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벼( 稻 )를 벼, 니 우케 등 여러 가지로 부르고 있다. 우리말의 벼 는 식물체와 열매의 이름을 동시에 나 타내는 말로 쓰이는데 니 는 입쌀 이팝 과 같이 쌀이나 밥과 결합된 말로 쓰여 진다. 벼가 어릴 때 논에 심는 일을 모내다 모심다 라고 하는데 이 모 는 벼의 고유어였던 것 같이 생각된다. 일본어에서 벼알을 나타내는 모미 는 바로 mo( 稻 ) 와 mi( 實 ) 가 합 쳐져서 이루어진 말이다. 우리나라로부터 벼농사의 전래를 받아들인 일본에서 稻 =일어 イネ (ine)' 漞 =モシ(momi)'등 우리말과 연계된 언어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어 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 남부지방 방언에서 벼 를 나락 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날+알 낟알 나달 나락 으로 여러 개의 유사어가 생길 때 발생하는 민간어적인 어형변화와 유음화현상 을 거쳐 나락 이 된 것이다. 여기서 낱 은 니( 稻 ) 에 알 이 붙어서 날 낟 낱 으로 형태적 변화를 거쳐서 생겨난 말이다. 쌀 은 화본과 곡식의 껍질을 벗긴 알맹이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 옛말로 밥 짓는 곡식을 모두 이 라고 했고 이것 이 오늘날 쌀 이 된 것이다. 이 은 불 시 알 이 압축되어 생겨난 말로서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41

우선 불+시 브시 [ 種 ]로 되고 여기에 알 이 합쳐져서 된 것이다. 원래는 벼, 보리, 조, 수수 등의 낱 껍질을 벗긴 알맹이를 모두 이 라 했는데 현대어에 와 서 밥 짓는 재료로 말뜻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나) 벼의 종류 벼의 생태형 분류는 일본학자 가또오(1928)가 동남아 각지에서 수집한 벼 품종 들 간의 잡종 붙임 정도와 형태적 차이 등에 따라 처음으로 인디카(indica)와 자 포니카(japonica)의 두 개 군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켕 (keng)과 센(sen)으로 분류하여 왔고 중국학자 정영( 丁 潁 )(1949)은 야생 벼에서 센이 분화되고 센에서 다시 켕이 분화되었다고 추정하였다. 여기서 센은 인디카 에 켕은 자포니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디카와 자포니카에 모두 논. 밭재배의 적응성 차이 즉 내한성( 耐 旱 性 )에 따라 논벼와 밭벼가 있다. 일반적으 로 밭벼는 논벼에 비해 잎이 두텁고 넓고 크며 분얼이 적고 줄기 절단시 재생력 이 거의 없으며 뿌리가 굵고 깊이 뻗으며 대부분 출수가 빠르고 키가 큰 편이며 도열병 저항성이 강한 편이고 특히 토양에 대한 적응성이 높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밭벼도 논에 물을 댄 상태로 심으면 밭재배 보다 소출이 많이 나 고 좋은 쌀을 생산하는데 유리하다. (다) 벼의 품종 이름에 얽힌 이야기 새로운 볍씨가 개발되면 육종가는 마치 자식을 낳으면 이름을 지어 주듯이 새로 운 벼에 품종 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 이럴 경우 육종가들은 그 벼 품종의 유 래나 주요한 특징 및 적응지역을 고려하여 작명을 하기에 여간 고심하지 않는다. 이 새로운 이름은 기존의 품종명에서 없었던 것으로 부르기에 좋으면서 그 품종 의 특징에 합당하는 의미도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종가가 지어 제시하는 몇 개의 품종 명명( 命 名 )안은 주요 농산물 종자심의회에서 이를 다시 검토하여 그 중에서 적절한 것을 정하게 된다. 대개 품종명을 지을 경우 그 품종이 육성 된 것을 나타내는 지명이나 유명 사적지명 등을 붙일 경우도 있고 그 양친( 養 親 ) 품종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붙일 경우도 있다. 수성( 水 成 )이나 팔달( 八 達 ), 용 주( 龍 珠 ), 별성( 憋 成 ), 만경( 萬 頃 ) 등은 육성모지를 나타내는 이름이고 진흥( 振 興 ) 342 이명수

재건( 再 建 ) 등은 농촌진흥청의 설립과 제3공화국의 출범시 슬로건과 관련된 이름 이며 관옥( 關 玉 )은 양친 품종 이름에서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지난 1980년대부 터 조생종은 산 이름 중만생종은 강 이름을 붙이기도 하여 오대벼, 설악벼, 관악 벼, 도봉벼, 천마벼, 그리고 동진벼, 낙동벼, 섬진벼, 한강찰벼, 금강벼, 영산벼, 등 우리나라의 유명한 산이나 강 이름중에서 부르기 좋은 이름은 이미 거의 다 벼 품종 이름으로 써버린 상태에 이르렀다. 벼 품종명은 그 품종이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특성을 적절하게 나타내는 방향으로 짓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병 충해나 재해에 대한 저항성이 강함을 나타내는 청청( 靑 靑 )벼, 상풍( 常 豊 )벼, 대안 ( 大 安 )벼, 등이나 쌀 품질 및 식미가 양호함을 나타내는 수정( 水 晶 )벼, 청명( 晴 明 )벼, 진미( 珍 味 )벼, 일품( 一 品 )벼 등이 그것이다. 또한 꽃가루 배양법을 이용하 여 육성된 품종들은 화성( 花 成 )벼, 화청( 化 淸 )벼, 화중( 花 中 )벼, 화남( 花 南 )벼 등 과 같이 모두 화 자 돌림으로 명명되어 있어 특수한 육종법에 의해 만들어졌음 을 쉽게 알 수 있게 하였다. 4. 물 부족과 수리시설 벼농사는 물이 생명이다. 한국고대사회에서 경제의 바탕은 논농사와 밭농사였다. 그 중에서 논농사는 제때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고대와 조선시대의 수리시설 의 분포가 한반도의 지형특성 및 발달과정과 어느 정도는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같은 기후환경에서는 6~7월 한 달 사이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기 때문에 오랜 기간 물을 필요로 하는 논농사에는 그다지 좋은 기후환경이 아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동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논농사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쌀 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 이유는 곡저부가 발달한 우리나라 지형환경에서는 그나마 논농 사가 안정적인 생활을 세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논농사는 개전단계부터 수리시설 평 탄화 작업 고저차이에 의한 논둑의 설치 등 집약적인 노동력과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이중에서도 수리시설은 벼농사에 필요한 물의 저장과 공급만이 아니라 홍수로부터 논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논농사의 성패를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43

(가) 정치가가 치수( 治 水 )를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삼은 이유도 바로 논농사가 백성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수리시설은 논농사의 규모와 연관된다. 작은 곡저부나 구릉 하단 부를 개전지로 활용했던 논농사 초기단계에는 곡부의 물을 가두는 작 은 보시설이 전부였지만 정치체가 완비된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대규모의 저수 지가 축조되기 시작한다. 고대수리시설의 축조방법으로 부수공법( 敷 樹 工 法 )이 확 인되었다. 이 부수공법은 1959년 한( 漢 )나라 때 축조된 안풍당( 安 豊 塘 )저수지 유 적에서 확인되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김제 벽골제 사비나성 함안 성산산성 일 본의 경우 구주( 九 州 )의 대재부( 大 宰 府 ) 수성( 水 城 )과 대판시( 大 阪 市 ) 협산지( 狹 山 池 )가 이러한 공법에 의해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나) 고대사회에 있어 수리시설의 축조는 농업생산력의 증대라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 미치는 효과가 큰 일종의 국책사업이었다. 따라 서 축조기술뿐만 아니라 수리시설을 만들게 된 배경과 운영주체 몽리의 효과 파 손된 저수지의 보수 등에 대한 연구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더불어 중국 과 일본에서 수리시설을 만든 과정과 우리의 경우와 비교하는 연구도 필요하다. 신석기 중기 이후 한강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벼가 처음 도입된 후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조현동,2004) 수전 에서 생산되는 벼가 한전작물에 비해 훨씬 우월한 작물이었다는 것은 당시에도 잘 알려져 있었지만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 조건하에서는 적당한 수리시설 없이 는 수전을 확대하기 어려웠다. (문중양,2000) 파종기인 3~5월의 강우량이 절대 적으로 부족하여 수전에 물을 대는 것이 어려운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리 고 6~8월에는 집중호우로 인해 하천주변의 충적지들이 주기적으로 홍수를 경험 하게 된다. 또한 높은 산지 비율과 얇은 토양층은 홍수기의 첨두 유량에 도달하 는 지체시간을 단축시켰으며 하상계수를 극단적으로 증가시켜 작물피해 뿐만 아 니라 자연재해의 위험성도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황상일.윤순옥,1998) (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각 정부는 관개시설의 건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시대에 이미 소택지나 저습지 근처에 수전을 개발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지만 배수가 자유롭지 않은 지형 특성 때문에 생산량이 높지 344 이명수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덕재,2007) 대신 간단한 수리시설로 계류를 막아 물 을 대는 수전이나 천수답이 고대 및 삼국시대 수전의 주종을 이루었다. 고려 말 이후 조선 초를 거치면서 산지산록 중심의 한전( 旱 田 )에서 평지와 저습지의 수전 ( 水 田 )으로 전환되면서 농경지가 확대되어 하천상류의 곡저평지에서 하천 중하류 의 충적지로 농경지의 개간과 정착이 활발히 진행되어왔다. (문중양,2000)16세 기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수전 농업과 이양법의 발달로 농지개간이 활발해 지고 둑, 제방과 저수지의 축조로 농경지역이 평야, 저지대로 확산되었다. 하지 만 수전이 전체 경작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30%를 넘지 못하였으며 20세기 초에 이르렀어야 50%를 넘는 수준을 보이기 시작하였 다 따라서 조선후기라고 하더라도 수전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적당한 지형적 조건이 필수적이었다. 5. 우리겨레의 쌀 쌀은 우리겨레의 삶 그 자체였다. 볏짚방석에서 자고 일어나 메밥을 먹고 들판에 나 가 제철에 맞춰 벼농사 일을 행하였다. 1년 24절 세시풍속 자체가 벼농사이었고 우리 겨레가 사는 곳에는 어느 곳이든 벼농사가 있었고 겨레가 이동한 곳에는 언제나 벼농사 가 함께 따라갔다. 강가에도 해변에도 심지어 산골짜기에도 다락 논을 일구어 공동으로 벼를 심고 가꾸었다. 벼농사는 바로 가족과 마을과 사회 국가 및 사직( 社 稷 )의 기둥이 었던 것이다. 벼농사가 있는 곳엔 토양침식이나 홍수 가뭄은 물론 먼지 공해도 없다. 도리어 논이 바로 저수지와 보( 洑 )가 되어 거친 강 흐름과 변덕스러운 늪의 범람을 막 고 산사태 토사 피해 등 대자연의 재해를 최소로 줄여준다. 공기를 정화하여 쾌적한 환 경을 조성해 준다. 그리고 파종, 모내기, 벼 베기 등 농사일은 반드시 때에 맞춰 그것 도 공동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사회 구성 원간에는 생활화된 끈끈 한 공동체 의식과 자연에 순응하는 보수적 규율이 형성되었다. 그 가운데 쌀은 우리 겨 레의 번성과 사직의 안녕을 지켜준 업( 業 )이며 축복이었다. 기름진 문전옥답( 門 前 沃 畓 ) 을 물려받은 부지런한 후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조상들의 피와 땀의 결과를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45

소중하게 받들고 그가 속한 지역사회의 전통과 문화를 사랑하며 다음 세대의 미래를 걱 정하는 그 사회의 가장 보수적인 구성원이 되어 왔다. 공맹( 孔 孟 )의 유교사상이라든지 힌두교 법전 화랑의 세속오계도 따지고 보면 도작( 稻 作 )문화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 다. 1990년 10월 UR과 외국농산물 이란 주제로 일본 오사카에서 일본 주니치( 中 日 )신 문사 주최의 국제 세미나가 열렸을 때 일본 대표가 쌀은 우리 문화요 종교의 바탕이 다. 서양 종교를 가지고는 외국 쌀과 농산물을 막아내는 데 면역성이 약하다 고 말해 크게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쌀이 단순한 식품이 아니고 더욱이 한낱 공산품과 같은 무기물( 無 機 物 )상품이 아닌 점을 강조했을 뿐이라고 서로 양해함으로써 가까스로 이 대 립을 면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쌀(벼)은 이 지구상 인류에게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공동체 문화와 문명을 길러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자동차를 몰고 홈컴퓨터를 사용하 며 햄버거. 스파게티를 먹는 세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명맥을 보존하여 현대 사회 구성원들의 생활양식을 음양으로 지배하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벼농사는 인류의 기록문화가 시작되기 전 중국남방과 동남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한반도는 물론 만주대륙 서남부의 인도 페르시아로 퍼져 나가 헝가리의 발라톤 호수 유역에까지 이르 렀다. 지금은 스페인, 호주, 남미는 물론 미국 서남부지역 캘리포니아, 아칸소, 텍사스, 루이지애나)에서도 벼농사가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다. 쌀은 지구상에서 이제 밀( 小 麥 ) 다음으로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는 작물이 되었다. 연평균 약5억 톤이 생산되는데 그 중 90%가 아시아지역에서 재배 소비되고 있어 확실히 쌀은 원산지답게 동양인의 주식 이 되어 왔음을 말해준다. 쌀이 세계인구의 반이 넘는 비목축국 사람들에 의해 주식의 위치를 수천 년간 자리 잡아 온 것은 그 어느 농산물보다도 단백질, 지방질, 탄수화물 이 균형적으로 함유되어 있어 일상 식단에 동물성 단백질 식품을 크게 추가하지 않고도 개개인의 생명과 신체를 원활히 유지,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 말로 콜레스테롤이 없는 가장 이상적인 식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시아지역에는 벼농사가 바로 몬순계절풍 지대의 풍토에 가장 잘 순응하는 자연과 농업의 조화를 보장해 왔기 때문이다. (가) 이 지구상에서 재배되고 있는 벼 품종은 크게 나눠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주식으 346 이명수

로 삼는 단립종(자포니카)과 우리에게 안남미로 알려진 장립종(인디카)으로 그 재배율이 17대83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금세기 후반부터 벼농사가 자국민 의 주식으로서가 아니라 국제교역을 목적으로 서방세계 특히 식생활과 농경관습 이 전혀 다른 미국호주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재배되면서 동양세계의 전통문화 그리고 국민생존권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는 비행기로 씨를 뿌리고 농약을 대량 살포하여 대형수확기로 추수 탈곡한 미국산 쌀이 아시아와 중동 등 전통 또는 비전통적인 쌀문화 도작( 稻 作 ) 국가들에 이르기까지 그 시장을 학대하 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중 이라크, 이란 등은 2차 대전 후 미공법 제480호 (PL480)에 의한 계속적인 무상원조로 국민의 식생활 패턴이 차츰 밀 음식으로 부터 쌀 위주로 전환되는 과정에 있으며 이라크는 1991년 UN결의에 의한 식량 봉쇄 조치로 큰 타격을 받은 바 있다. 한국과 일본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윤기 나고 차진 자포니카 타입의 쌀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생산량이 적은 미국 으로서는 1970년대 초반 세계 식량 파동 때 까지만 해도 미국산 소맥(밀가루)의 판촉대상으로 분류하여 밀 판매에 열심이었다. 그 주요 무기가 미공법 480호 이 었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에서 일단 분식의 보편화에 크게 성공하였지만 그 수 요량이 주식의 수준까지 오르지 못하고 여전히 쌀 소비의 보조적인 위치에 머무 르게 되었으며 그 원인이 자포니카 쌀의 특성(맛,향기 등)에 있음을 뒤늦게 깨닫 게 되었다. (나) 세계 식량파동을 전후해서 미국은 한국시장을 겨냥해 자포니카 쌀 재배면적을 켈리포니아주 등지에서 급격히 증가시켰다. 쌀 전업농가는 한때 미국 서남부지 역에 2만호까지 이르렀으나 지금은 1만2천호 정도이다. 그 중 자포니카 계통의 쌀 생산만을 전문으로 하는 농가가 약2천여호이며 이들을 위한 미국정부의 쌀 생산 및 수출지원 정책이 이른바 한국과 일본의 수입개방 압력의 실체인 셈이다. 특히 자포니카 쌀은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주식이 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 조야 는 고미가( 高 米 價 )와 과잉생산에 몰리고 있는 이 두 나라의 쌀시장 개방을 위해 필사적이다. 캘리포니아와 아칸소주 등 일부 서남부주의 자포니카 쌀 재배는 그 동안 미국정부의 각종 지원과 지도 아래 국제시장(실은 한국, 일본)을 목표로 시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47

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쌀 그것도 자포니카 쌀의 국제시장 개방실현은 역대 미국정권의 대물림으로 내려온 부담이며 그곳 출신 국회의원들의 숙원사업 이라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상품으로서 쌀 무역 전쟁이 1973년 제1차 세계 식량 파동 이후 각국이 증산에 박차를 함에 따라 줄어든 국제 쌀시장의 개방을 놓고 미국과 일본 미국과 태국 그리고 다시 미국과 한. 일간에 전개되게 된 것 이다. 우리나라도 1973년 세배로 뛰어오른 캘리포니아산 쌀을 현금을 주고도 사 기 어려웠던 쓰라린 악몽과 쌀 수입과 관련된 코리아게이트 파문을 계기로 하여 녹색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마침내 1977년과 1978년(미곡년도)에는 외국쌀 의 도입이 없이도 자급자족이 가능해졌다. 통일벼를 주축으로 하는 녹색혁명과 이중 곡가 제도가 어느덧 결실을 본 것이다. 그리고 1978년 우리나라는 대망의 백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한다. 그와 더불어 정부 일각에서는 비교생산비설에 입각한 농산물 수입개방론이 터져 나온다. 곧이어 이중 곡가제의 폐지를 골자로 하는 양정전환론이 제기된다. 제정출혈을 감내하면서까지 구태여 국제시세보다 비싼 쌀 자급이 필 요하느냐 하는 것이 주된 논리였다. 하늘이 노했는가 쌀 푸 대접 논의가 무성한 가운데 1980년 초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벼농사 는 대풍작을 맞는다. 당시 농수산부의 집계로는 적정재고 유지에 추정 1백40만 톤(약9백76만섬)이 부족한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실제 수입량은 2백40만톤으로 결정되었다. 쌀1백40만톤 긴급수입안이 농수산부에서 입안되어 청와대로 제출되 었는데 어떤 영문인지 추가로 1백만톤(약6백90만섬)이 보태어져 2백40만톤으로 수입량이 결정된 것이다. 이유는 농수산부 통계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 로 알려졌다. 문제는 미국으로부터 막상 쌀을 수입하려 해도 1980년산 미국의 쌀 재고는 일부 안남미까지 합쳐 94만톤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대미곡상 ( 大 米 穀 商 )코넬사와 캘리포니아 쌀경작자협회(UGA)가 모두 거머쥐고 있었기 때 문에 순식간에 가격이 1톤당 2백달러에서 5백50달러로 뛰어 올랐다. 쌀을 비롯 한 주요곡물의 국제유통은 소수의 다국적 곡물 메이저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다급해진 우리 정부는 이웃나라 일본이 일찍 부터 쌀 자급을 이룩해서 고미( 古 米 )재고에 고통을 받고 있는 사실에 주목한다. 348 이명수

일본은 고미 해결을 위해 10년 거치 20년 분할상환 이자는 3%라는 파격적인 조 건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격도 국제시세에 준한 것이었다. (다) 미국의 쌀 생산자 및 곡물상들이 미 의회와 정부에 극렬히 압력을 가한다. 미국 정부가 1970년대 초 FAO(국제식량농업기구)를 통원하여 만들어 놓은 잉여농산 물 덤핑수출 규제에 관한 국제규약과 미 통상법301조를 원용하여 일본의 대한 ( 對 韓 )쌀 수출 규제에 제동을 걸어 왔다. 다급해진 우리 정부 대표는 미국에 통 사정한 끝에 추가로 다음 연도(1981년)의 캘리포니아 쌀을 50만톤 더 구매하겠 다는 조건 을 붙여 일본의 묵은 쌀을 들여올 수 있었다. 도합 1천5백만섬의 쌀 이 이런 과정을 거쳐 한해에 도입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1981년 이래 우리나라 양곡창고는 적정 재고량인 최소 7백만섬을 상회하는 과잉 재고미가 계속 이월되 어 쌓여 있게 된 것이다. 그 후 기상조건은 풍우 순조하여 1991년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1985,1989년) 대풍작을 포함 계속 쌀이 남아돌게 되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80년대 평균 자급률은 82~90년 기준 97%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91년 추수 때에 느닷없이 정부가 1천1백만섬 재고미 운운하고 크게 떠들고 나온 이 면에는 이렇듯 5공 초기 일시에 과잉 도입된 외국산 쌀의 순환재고가 이월되어 왔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감춰져 있다. 지금 쌀이 남아돈다고 모두들 걱정이 태 산 같다. 그리고 우리 주식인 쌀이 푸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확실히 1인당 쌀 소비는 줄고 재고는 쌓여 있다. 그런데 이상한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쌀 자급 률이 92년도 추수기부터 마침내 적신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다수확 품종인 통일계 벼가 정부의 감산정책에 따라 퇴장하고 UR파고와 정부의 벼 수매 제도 후퇴에 사기가 죽어 쌀 경작면적과 쌀 생산량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연속 10년 풍년농사의 행진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이 추세대로라면 벼농사는 위축일 로를 걸을 것이 명확하다. (라) 농사지을 사람이 갈수록 줄어들고 논이1992년 한해만 5만ha나 놀고 있기 때문이 다. 쌀 자급률이 급전직하로 떨어져도 되는가 쌀 부족 사태가 만성화돼도 괜찮 은가 아니 벼농사가 사라져도 문제없다는 식의 사고방식과 언행이 난무하기 시 작하고 있는데 과연 그러한가. 제5공화국 초기에 1백여만톤(6백90만섬)이나 초과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49

수입했던 이월 과잉재고를 제외하면 현재 우리나라 쌀 재고는 7백여 만섬이 될 까 말까이다. 이는 연간 적정재고량 7백만섬 수준에 지니지 않는다. 어느 때든 단 한 번의 흉작으로 소모되어 버릴지도 모를 수준이다. 그런데 북녘 땅의 2천5 백만 우리 동포들은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일 만큼 식량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국내 쌀 소비구조를 보더라도 우리는 아직 쌀 부족시대 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쌀이 남아돌아 주체를 못 한다 하면서도 쌀이 남아돈다고 통일벼 생산을 중단한다느니 1백만ha로 논 면적을 줄인다니 하 는 식의 정책대응은 실상을 도외시하고 너무 일찍 김칫국물을 마시는 격이다. 참고로 쌀을 제외한 여타 곡물의 자급률은 밀은 거의 0%이고 콩이 14% 수준에 불과하여 쌀을 제외한 곡물전체의 자급률은 8%가 될까 말까한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벼농사마저 흔들리기 시작한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농민에게 있어서는 온가족의 생존이 달린 임금생활재( 賃 金 生 活 財 )가 쓰러지기 직전이며 소 비자에게 있어선 주식의 몰락을 뜻한다. 그동안 소비자 소득의 향상과 쌀 소비 감소로 비록 한 끼에 약350원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쌀은 아직도 엄연한 주식이며 필수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기초를 이루어 왔 던 문화와 전통의 몰락과 더불어 벼농사가 상품외적 기능으로 제공해 왔던 환경 보전효과와 국토의 균형발전효과 등 천문학적인 가치가 사라질 운명이다. 그리 고 국민의 생존권을 남의 나라 농민과 장사꾼에게 맡겨야 하는 민족자존의 훼손 을 무엇으로 보충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벼농사 문제를 국민 모두 의 문제로 인식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형성되어야 한다. 농민 생산자들의 희생 과 대가를 국민 각자가 가격과 소비를 통해 나누어 보상해 주려는 새로운 인식 의 확산이 절실히 요구된다. 우리 자신과 후손을 위해서라도 농업이 없는 나라 농촌과 농민이 사라진 도시국가 그리고 국제곡물상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소비자 의 운명을 미리 막는 일은 우리 당대의 과제이자 의무인 것이다. 350 이명수

6. 벼농사의 공익적인 외부경제효과 시장경제질서는 효율의 추구를 통하여 운영되고 성장한다. 자원의 배분도 효율을 기 준으로 하고 경제활동의 성과 배분도 효율을 기준으로 한다. 효율적인 모든 것은 시장 경제질서 하에서 승자가 된다. 효율적인 산업은 번성하게 되고 효율적인 조직이나 사람 은 성공적인 부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어떻게 효율을 극대화시킬 것이냐 하는 문제는 행정이나 산업현장 그리고 학계와 개인의 일상생활에서까지 현안의 연구과제가 되고 있 다. 왜냐 하면 치열한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새로운 효율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시장경제하에서 일반적으로 낮은 효율을 보이는 사업은 쇠퇴 하게 되고 높은 효율을 보이는 산업은 번창하게 된다. 시장가격으로 평가된 효율의 크 기가 산업구조와 소득구조를 궁극적으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가격이란 시장에 반영 된 가치이다. 효율이 가격의 크기에 의해서만 평가되기 때문에 시장경제질서는 효율을 중시한 나머지 자칫 시장가격으로 반영되지 않은 가치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되어 값비 싼 보상을 두고두고 치르게 된다. 가장 좋은 본보기가 전통적인 미풍양속이 황금만능 풍조에 밀려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치체계의 혼란현상이다. 미풍양속의 중요성이 시장가격이란 효율의 평가기준에 포함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전세계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지구촌의 환경오염문제 역시 환경의 중 요성이 시장가격으로 평가되지 않기 때문에 효율위주의 경제성장과정에서 환경파괴 가 거침없이 진행되어온 결과로 빚어진 문제라 할 수 있다. 효율보다는 형평을 보다 중 요시했던 공산주의 실험이 효율의 저하로 실패한 현재 역설적으로 효율을 중시해 왔던 시장경제체제는 지나친 효율추구로 인한 부작용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중병을 앓고 있 다. 그것은 산업간, 지역 간, 부문 간의 심각한 발전격차와 소득격차 해소 문제로 요약 된다. (가) 한국의 경우에 있어서도 지난 30년간의 공업화 경제성장 과정에서 농업부문이 지나치게 위축되어 왔다. 이 역시 효율만을 기준으로 한 경제발전전략에서 농업 발전이 소외되었기 때문에 유발된 결과이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국민경제의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51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서 일정규모의 국내 농업이 필수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이유로서 농업부문이 생산하고 있 는 가격으로 환산되는 기능보다는 가격으로 개량화되지 않는 공익적 기능의 유 지라는 점이 더욱 강조되고 있어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국 내에서보다는 선진 외국에서 더욱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 지나 친 효율 추구 만에 의해서는 국민경제가 안정적으로 유지 될 수 없다는 반성에 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국농업의 큰 위기로 인식되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 소위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이란 생소한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만 해도 효율의 크기로 시작에 반영되지 않았던 농업의 공익적인 기능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나 무관심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과연 무엇이 농업이 소위 비교역적 기능에 해당하는가 가격으로 표시되어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농업의 기능은 과연 무 엇인가. 가장 먼저 국내 농업의 식량안보적 기능부터 들지 않을 수 없다. 농산물 시장이 개방되어 값싼 외국 농산물이 국내에 제한 없이 들어온다고 가상해 보자. 국제경쟁력이 취약한 대부분의 한국 농업은 마치 밀과 면화처럼 이 땅에서 사라 지게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나) 식량안보란 자국의 국민에게 충분하고 만족할 만한 품질의 식량을 필요한 시기 에 필요한 장소에서 입수 가능하고 또 소비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상태를 장기적 으로 지속 할 수 있는 보증이라고 국제식량기구(FAO,1988)에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기능이 한국의 벼농사가 포기되면 충족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1991년 현재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37%수준으로 떨어지고 있고 매년2%정도씩 하락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만약 UR협상이 타결되고 수입자유화가 더욱 진전된다면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더욱 떨어지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자국 민의 먹을거리의 대부분을 외국에 의존해야 할 식량수입국의 입장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 중의 하나는 앞으로도 국제곡물가격이 계속해서 현재 수준의 낮고 안정된 값으로 공급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식량공급능력이 충분한 나라는 세계적으로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주와 호주 등 일부 국가에 불과하며 그 나마도 다국적 기업의 손에 의해서 수출량과 가격이 좌우되고 있기 때문에 국제 352 이명수

곡물가격은 수시로 폭등해 왔으며 앞으로도 식량가격의 상승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기 때문에 자국 내의 최소한의 식량생산능력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 1973년도를 전후한 국제식량파동 때 콩값은 4.6배 밀과 쌀값은 3배씩이나 폭등 하였으며 한국의 경우에 있어서도 1980년을 전후한 흉년 때 당시의 국제시세보 다 3배나 높은 가격으로 미국 쌀을 수입해야 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식량증산을 가능하게 했던 녹색혁명과 같은 생산기술의 지구환경을 파괴시킨다는 자각에서 선진국들로부터 환경조화형 지속적 농업생산(소위 LISA : Low Imput Sustinable Agricuiture)이 1990년대 들어서 본격화함에 따라 생 산성 향상이 더욱 정체될 것으로 전망되므로 세계 식량생산 능력은 점차 감퇴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따라서 식량자급률이 낮은 한국의 식량안보 문제는 더 욱 심각해질 것이고 이는 무엇보다도 기초식품인 쌀을 생산하는 벼농사의 유지 에서 부터 찾아야 한다. 세계의 식량생산능력은 1985년 이후 점차 감퇴되고 있 으며 선진국의 과다한 식량재고에도 불구하고 세계인구의 1할에 해당되는 5억의 인구가 현재 영양결핍상태에서 허덕이고 있어서 최소한의 국민 먹을거리를 우리 의 능력으로 확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식량안보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데올로기 중심의 동서 냉전 상태가 사라진 지금 선진국들이 가장 유효하게 사 용 될 수 있는 카드는 식량무기화를 비롯한 자원 위협인 것이다. 만약 적정한 수준의 국내 농업규모가 유지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을 보장받기 어렵게 된다는 것은 국제원유가의 상승에 따른 충격이 따를 것이다. (라) 우리 경제가 당했던 지난날의 어려움을 통해서도 우리는 쉽게 예상 할 수 있다. 만약 기상이변이나 국지적인 전쟁의 돌발로 식량사정이 악화되어 국제미가 폭등 할 경우 우리 사회의 불안정을 무엇으로 막으려 하는가. 언젠가는 통일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1인당 쌀 소비량이 남한 주민의 절반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북한 동포들에게까지 우리 쌀을 공급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 기 때문이다. 쌀은 전통적으로 정치 사회의 안정을 담보해 왔다. 먹을거리가 부 족해지면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는 큰 혼란을 겪어 왔다. 홍경래의 난이 그렇고 전봉준의 동학혁명이 그랬으며 가까이는 5.16군사혁명도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53

없는 것이다. 또한 안정된 가격수준으로 식량의 공급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수 입농산물이 우리 국민의 건강에 안전한가 하는 문제는 전혀 별도로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수입 밀가루에서는 벌레도 생기지 않는다. 수입 콩에서는 콩나물도 발 아되지 않는다. 수입쌀에서는 벌레마저 죽어버린다. 보관과 수송과정에서 건강에 해로운 약품들이 혼합된 수입농산물은 값이 싼 만큼 건강에 해로운 것이 사실이 다. 따라서 국민에게 안전한 식량을 안정된 값에 공급할 수 있는 국내 농업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이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농업생산자에게 우리 사 회는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가야하며 이는 벼농사 유 지 보호를 위한 일에서부터 착수되어야 한다. (마)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나가는 국내 농업의기능이 단순한 효율(국내가격과 국제가격간의 차이)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선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한 나라의 식량안보는 그 나라의 주권인 동시에 그 나라 정부의 책임인 것이며 국제사회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농림업이 자연환경과 국토보전을 위해서 수행하고 있는 공익적 기능에 대해서이다. 농림업은 그 생산 과정에서 자연환경을 보전하고 국토를 관리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단지 그 기능이 시장기구하에서 시장가격으로 반영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국민은 무임승차자로서 그 혜택을 받고 있을 뿐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UR협상에서 소위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이 의제로 등장하면서 농림업의 환경보전적 기능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최근 들어서 활발하게 이루 어지고 있다. 농업이란 자연생태계를 식량생산에 적합하도록 개조한 인공적 생 산 질서이니 만큼 자연조건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자연생태계의 순 환 질서를 거슬리는 농업기술의 개발이 지구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온 것 이 사실이다. 즉 지나친 화학비료와 농약의 사용 그리고 대규모 가축사육과 단 작화( 單 作 化 )된 전문경영체계는 토양생태계의 순환 질서를 파괴했으며 수질오염 과 대기오염 등을 수반하여 왔다. 그러나 농업생산은 그 생산과정에서 자연환경 훼손에 대한 이러한 역기능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을 정도의 국토와 환경보전 적 순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농업의 환경보전에 관한 기능은 각국의 입장과 여 354 이명수

건에 따라서 환경순응적인 농사의 종류가 서로 달라지므로 국가별로 관심분야가 다르게 된다. 예컨대 스위스 관광자원과 연관하여 산지 관리를 위한 축산에 관 심이 높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아시아 몬순기후대에 속하고 있는 관계로 벼 농사에 관심이 높다. 그러므로 각국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은 나라별로 독특한 입장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서 농림업이 수행하고 있 는 공익적인 환경보전 기능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한국의 벼농사는 홍수조절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아시아 몬순기후대에 속하고 있는 한국에는 강우량의 60%가 여름철에 집중된다. 장마 때에 논둑에 담기는 물이 벼농사 포기로 인해서 낙동강. 한강. 금강으로 그대로 방류된다면 그로 인해 매년 되풀이 되는 우리나 라의 홍수피해는 추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 정부에서 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은 물 담수량과 홍수조절용으로 공사가 한창이다. 전국 논 면적에 담기는 물의 양은 우리나라의 6개 다목적댐에 담기는 홍수 유효 조절량의 1.5배 크기에 해당된다. 벼농사가 포기되고 나면 논둑관리도 포기되므로 논의 홍수조절기능도 약화된다. 논의 담수기능에 대신하여 이 물을 가두어서 최소한 현재 정도의 홍 수피해로 그치게 하려고 한다면 온난화로 인한 폭우 피해를 줄이려면 대략 국내 최대 규모인 충주호 정도 크기의 댐을 전국 곳곳에 8개나 추가로 건설해야 하며 이 댐의 건설을 위한 건설비의 이자와 관리비만 해도 4조 8천억원(2000년 가격) 에 이른다. 논의 지하수 함양기능은 기존 저수지의 8~9배 크기에 해당한다. 또 한 벼농사는 그 생산과정에서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배출되는 총 탄산가스 양의 12%를 탄소동화작용을 통해서 제거해줌으로써 대기정화의 기능도 무보수로 수행 하고 있다. 벼농사는 토양의 유실과 침식을 방지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논 은 수평으로 되어 있고 논둑이 있기 때문에 홍수에 의한 표토( 表 土 )의 유실을 막 아주고 있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연작피해가 없기 때문에 토양의 악화를 방지해 준다. 이러한 환경보전적 기능들이 시장가격으로 반영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 되어서도 안 된다. (바) 일본의 경우에는 이러한 농림업 생산의 외부 경제적 효과로 창출되는 공익적 기 능이 시장가격으로 평가되는 생산액의 두 배가 넘는다는 추정결과를 발표하고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55

있으며 스위스도 농림업의 자연환경보전적인 기능 때문에 그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꾸는 정원사로서 농업 종사자를 우대하고 자국의 농업생산을 보호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공업화를 위주로 하는 경제성장정책의 추진과정 에서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식량을 공급하고 노동력을 공급하는 등의 소극 적인 역할에 안주해 왔던 국내농업의 역할은 농업부문의 지나친 위축이 진행되 고 있는 이 시점에서 역설적으로 국민경제에 대한 새로운 역할을 중심으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농업부문의 새로운 역할은 국민에게 안전한 농 산물을 공급하는 생명의 산업으로서 그리고 국토와 자연환경을 보전하고 지역사 회를 유지해 가는 중심산업으로서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할의 중 요성에도 불구하고 단지 국내농업의 가치와 역할을 시장기구하에서 가격으로 표 시된 효율만을 기준으로 평가해서 수입개방을 주장하는 의견들이 수시로 돌출하 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들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효율을 얻는 대신 그보다 훨씬 큰 농업의 시장가 격으로 반영되지 않는 외부경제효과인 공익적 기능을 잃게 된다는 점을 무시하 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국내의 벼농사가 포기되고 해외에서 쌀을 수입하게 된 다면 벼농사의 가격으로 표시되지 않는 이러한 공익적 기능마저 수입해 올 수 있는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전체 국민들은 다시 한 번 우리 농업 특히 쌀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7. 식생활 및 국민건강상의 쌀의 위치 오늘날처럼 국민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때는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건 강하게 장수할 수 있을까 하고 누구나 생각하게 되는데 식생활이 국민건강과 밀접한 관 계가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욱이 근래에 들어 성인병이 식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명백해짐에 따라 식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경제성장으로 국민소득 이 증대됨에 따라 국민의 식생활은 양적 질적으로 많이 변화되어 왔다. 1990년 식품수 급표에 의한 열량의 구성비를 보면 탄수화물 62%, 단백질 13% 그리고 지방질이 25%로 356 이명수

거의 이상형(65:15:20)에 접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현재 한국인의 식생활이 영양학적으로 균형이 이루어진 한국형 식생활이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식생활의 내용을 살펴보면 쌀, 김치, 채소, 콩 등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식생활 패턴 에 육류, 우유, 유지, 과실 등의 서구 식생활 패턴이 어우러져 다양하고 풍요해진 것이 다. 쌀로부터 공급되는 열량과 단백질의 구성비는 각각 41%, 26%나 되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쌀은 식생활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쌀은 한국인의 주식으로서 국민건강유지와 직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농민의 주요 소득 작목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우리 풍토에 맞는 식생활은 쌀밥을 주식으로 하고 여기에 김치를 위시한 육류와 기타의 부식을 곁들인 식생활이다. 때문에 쌀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식사형태는 고탄수화물식에서 고지방질식까지 다채롭고 폭넓게 식단을 즐길 수 있으며 균형 잡힌 영양의 섭취가 비교적 용이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1992년 초 제 14차 국제영양학회에서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쌀을 주식으로 하는 경우 대장에서의 발 효관정에서 낙산( 酪 酸 )이 생겨나 대장암의 발생을 억제시키며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추 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한 쌀의 섬유질 성분은 구리, 아연, 철성분 등과 결합하여 우리 인체에 해로운 중금속이 체내에 흡수되는 것을 막아준다. 쌀은 밀 가루에 비해 섬유소 함량이 2배가량 많아 수분 유지력이 큰 관계로 변비를 예방하며 인 슐린 분비는 적어 비만, 고혈압, 동맥경화증 등 성인병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 그러 나 쌀밥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식생활이 소득향상과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점차 바 뀌고 있고 이에 따라 쌀 소비도 점차 줄고 있다. 특히 서구식 식생활의 맹목적인 선호 에 따라 최근에 들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쌀밥 이탈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앞으로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는 쌀의 소비가 더욱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쌀이 우리국민의 건강에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비중을 고려할 때 쌀 소비의 지나친 감소는 국민건강 유 지에 상당한 문제를 유발시키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가) 쌀 소비의 급격한 감소는 식생활의 서구화를 촉진시켜 영양공급의 불균형을 초 래한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 국민의 영양섭취 양상은 전국 평균적으로 볼 때에 는 균형 상태에 있다. 그러나 소득 계층 간 또는 지역간 식량분배의 불균형상태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57

를 고려한다면 농촌지역보다는 도시 중하류층 도시의 중하류 층보다는 도시 중 상류층의 동물성 식품 소비가 월등히 많은 것이 사실이므로 이로 인한 성인병의 문제가 국민 보건상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의료보험공단의 자료 에 의하면 1979년부터 1984년까지 총 진료건수가 6배 증가한 반면에 고혈압게통 질환과 당뇨병 등은 8~11배나 증가하였다 또한 3대 사인( 死 因 ) 즉 암과 각종 사 고 그리고 고혈압과 뇌혈관질환 등을 합한 순환기계통 질환이 차지하는 비율이 1981년 45%에서 1988년에는 62%, 1989년에는 64%로 급격한 증가 추세에 있다. 이로부터 여러 선진국에서 고민하고 있는 성인병의 문제가 우리와 무관한 문제 가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도 벌써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쌀 소비의 감소는 필연적으로 축산물 등 동물성 식품의 소비증가로 이어지게 될 것이며 이 는 영양공급의 불균형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특히 영양의 불균형적 과잉은 비 만증과 동맥경화증 아나가서는 당뇨병, 고혈압 그리고 암과 같은 성인병의 발생 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서구사회의 예에서 뿐만 아니라 지난 30년간의 일본의 경험을 통해서도 살필 수가 있다. 또한 성인병의 증가는 급속 한 의료비의 증가를 초래하여 국가적으로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게 된다. 1977년 미국 상원에 제출된 멕거번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의 사망자 6명 중에 한 명 꼴이 잘못된 식습관에 원인이 있으며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한 의료비 추가부 담액은 연간 무려 4백억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때문에 이 보고서는 식생활이 개선 없이는 심장병만으로 미국은 기울어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촉구한 바 있다. 다행히 현재 우리나라에 있어 성인병 의 문제는 선진국에 비하면 그렇게 심각한 편은 아니나 최근의 식품소비추세가 지속된다면 가까운 장래에 우리도 선진국의 고민을 답습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성인병의 문제를 최소화하고 모든 국민의 영양상태를 적정수준으로 유지 시키며 특히 다음 세대의 주역이 될 젊은 층들에게 올바른 식습관을 형성시키기 위해 쌀을 주축으로 하는 한국형 식생활의 정착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는 쌀 소비를 적정수준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노력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골프 와 수영 그리고 에어로빅을 열심히 하고 사우나탕에 부지런히 들락거리면서 땀 358 이명수

을 빼지 않으면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없는 비만형 체질을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한 식생활습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 감소된 쌀 소비를 대체한 전분질 섭취는 주로 밀가루 음식에서 충당될 것인데 이 밀가루가 수입농산물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실제로 열량 기준으로 볼 때 쌀 소비량의 26%수준에 육박하는 급격한 밀가루소비량증가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는 밀 종자조차 구입 할 수 없을 정도로 밀 생산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수입곡 물은 수확과 운반과정에서 인체에 해로운 각종 농약들이 추가로 처리되고 있기 때문에 안전한 식품이 못 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더구나 이를 이따금씩 간식으로 먹을 때에 비해서 주식으로 늘 먹게 되면 체내에 축적되는 독소는 더욱 많아져서 건강에 더욱 해로울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수입밀가루는 식품으로서의 가공과정에서 또 한 차례 위해( 危 害 )요소가 추가되고 있다. 부패방지를 위한 방부재, 보기 좋게 하기 위한 표백제 등의 처리에서 부터 튀김식품(스낵류)제조과정 역시 인체에 해로운 결과가 초래되고 있다고 한다. 라 면은 계속적으로 끓고 있는 산패( 酸 敗 )된 기름에 튀긴 식품이므로 안전성이 의심 스럽다. 아침조회시간 때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훈화가 10분만 넘어서면 땅바 닥에 픽픽 쓰러지는 뚱뚱하지만 뒷심이 약한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밥보다 더 좋 아하는 라면과 햄버거를 계속 먹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 쌀의 소비감소는 결국 육류와 수입곡물의 소비증대로 대체될 것이다. 육류소비 역시 수입 사료곡물의 소비 증대행위이므로 국민 식량의 해외 의존도만 계속 높 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쌀밥 소비감소는 김치 소비감소로 이어지 고 있어서 지난 10년간 배추와 무의 식부면적이 연평균 각각 2.4%, 3.2% 씩 감 소하고 있다. 현재의 해외농산물 수입액은 국제수지 적자액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UR협상의 타결과는 관계없이 앞으로 농산물 수입액은 더욱 증가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별로 건강에도 바람직스럽지 못한 수입농산물을 먹는 습관이 더욱 보편화되면 공산품 수출로 해서 애써 벌어 들인 귀중한 외화를 이를 사기 위해 몽땅 낭비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한때 우리나라는 쌀 생산의 부족을 염려해서 밀가루 소비를 늘리기 위해 매스컴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59

을 동원하는 등 온갖 수단으로 분식장려운동을 벌인 적이 있지 아니한가 부끄러 운 과거를 반성한다는 뜻에서라도 우리 건강에 적합하고 국내자원 의존적인 쌀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서 쌀 소비촉진 운동이 벌어져야 할 때이다. 8. 농지정책과 농업진흥지역 쌀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의 하나인 농지에 관한 정책은 생산구조 개선정책 과 함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논의 이용을 규제하는 농지정 책은 크게 농지보전정책과 농지이용정책으로 나눌 수 있다. 농지보전정책은 쌀 자급을 비롯한 식량의 안정적 공급을 위하여 농업생산의 기반인 농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라 도시화,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농지전용을 막기 위하여 1971년 농경지 보호를 위한 시행요강이 시행되었고 1972년 농지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이 제정되어 1973년부터 시행되었는데 이러한 입법취지는 절대농지의 지정 농지전용의 제 한 대체농지의 조성 및 농지 지목변경의 금지가 주된 내용이었다. 농지이용은 성실경작 의무 휴경지에 대한 대리경작 및 다년생식물 등의 재배를 금지시키는 등 농지보전과 이 용을 규제하도록 하였다. 그중 쌀 생산에 가장 중요한 정책이 절대농지의 지정으로 절 대농지는 공공투자에 의하여 조성된 농지, 농업용수 개발사업, 경지정리사업, 기반정리 사업, 관정 및 양수시설이 이루어진 농업기반이 정비된 농지, 집단화된 농지를 말한다, 이러한 절대농지는 타용도로 전용할 수 없고 식량자급을 위하여 쌀 생산에 한하여 이용 될 수 있는 농지를 말한다. 이것은 토지공개념에 의한 농지에 대한 재산권 이용의 제한 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농지의 지정이 지역여건이나 토양의 물적 형질분석 등 을 감안하지 못한 채 획일적으로 지정되었으며 필지별로 절대농지를 지정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져왔다. 특히 절대농지 주변의 도시화에 의한 지가상승과 토지투기로 인한 지가의 차이는 농민의 영농의욕을 저하시키고 영농규모 확대를 위한 농지구입을 저해하였다. 농지개혁 이후 1975년까지 땅값은 쌀값과 비슷한 추세를 가져왔다. 1975년 이후 제1차 오일쇼크(1972년)를 계기로 정부의 경기부양을 위한 인플레 정책과 토지 투 기의 만연으로 농지가격이 앙등( 昻 騰 )하여 현시 지가가 수익 지가를 앞질렀다. 따라서 360 이명수

농촌을 떠난 이농민들도 미래의 지가 앙등을 기대하고 농지를 처분하지 않음으로써 농 지는 생산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절대농지는 필 지보전기능( 筆 地 保 全 機 能 )위주이기 때문에 도시개발 관계법이나 산업입지관계법 등에 의한 권역확장에 우량농지가 전용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권역적 농지보전방식인 농 업진흥지역으로 전환시켜 보다 효과적인 농지보전을 위하여 1990년 농어촌발전특별조 치법 에 의하여 농지를 권역별로 이용 보전하는 방식으로 바꾸도록 규정하고 있다. (가) 진흥 지역 내에 현실적으로 포함된 농지는 상대적으로 수요가 큰 비농업 목적으 로 전용될 수 없기 때문에 지가 상승이 상대적으로 둔화되어 권역내 농지소유 농민의 재산상의 피해가 초래된다는 점은 절대농지에서의 마찬가지이다. 특히 농지 이외의 토지투기에 대한 방지대책이 미흡하고 토지공개념에 의한 농지 이 외의 개발지역의 지가 차익에 대한 중과세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농민들의 상대 적 자산가치의 감소에 따른 반발과 영농의욕 저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농지 정책과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임차농 문제이다. 우리나라 임차농의 비 율을 보면 농지개혁 직후 임차면적은 전농지의 10%에 불과했으나 1990년 78만8 천ha로 37.4%에 이르고 있다. 이중 비농민 소유의 임차면적이 51만3천ha로 전 임차면적의 65.1%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농지개혁이 이루 어진 일본과 대만의 농지소유 형태를 보면 1989년 일본은 총 농가의 81.2% 대만 은 85.5%가 자작농인데 반하여 우리나라는 1988년 자작농이 28.8%에 불과하고 나머지 60.2%가 자작지와 임차지를 동시에 경작하고 순 임차농은 8.2%를 나타 낸다. 대만과 일본은 지가가 높은데도 자작농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나 우리나라 는 자작농체제가 붕괴되고 있다. 이론과 대만의 경우에는 경제발전과정에서 공 업의 지방 분산이 이루어져 지가 앙등과 함께 농외 취업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크다. 따라서 농외소득으로 전업농보다 높은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겸업 농을 농 촌에 유지시킬 수 있었고 그들이 높은 지가에 따른 농지의 보유에 대한 욕망이 컸기 때문에 농지를 매각하지 않고 자작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경제발전과정에서 서울. 경기 권과 부산. 영남권 등 소위 성장거점을 중심으로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61

한 공업화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농민들의 농외취업 기회가 전체 농촌지역에 서 고루 창출되지 않았다. 이농이 가속화되고 농지가격이 상승하자 농지소유 목 적이 자산증식화 함에 따라 농지의 매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임차농의 증가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농지정책이 이러한 상황에서 임차지에 대 한 적정 임차료나 임차제도를 적정시기에 규정하지 못하고 임차지 확대에 따라 막대한 소작료가 비농업부문으로 유출되고 토지용역비가 생산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게 되어 국제경쟁력 향상이 크게 제약된 것이 사실이다. 정부는 1986년 농지임대차관리법을 제정하여 1990년부터 이를 시행하고 있다. 현행 헌 법에는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한다고 되어 있으나 임차와 위탁경영을 예외로 하여 농지제도에 대한 분명한 기본적인 목표와 방향이 아직 불명확한 상태에 있 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작농주의나 차지농주의와 같은 뚜렷한 농지제 도에 대한 기본방향이 정립되지 않은 채 농지정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 적 문제라 할 것이다. 엉거주춤한 현행의 농지제도는 소유와 이용권 및 규모화 의 실현에 대한 기본적인 갈등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있다. (나) 농가인구와 농가의 격감에도 불구하고 농가당 경영규모는 여전히 영세하여 농업 소득만으로도 자립이 가능한 전업농가 육성은 물론 경영규모 확대를 통하여 국 제경쟁력을 강화시켜 나가야 할 개방대응 전략수행에도 기본적인 장애가 되고 있다. 1965년부터 1991년까지의 26년 동안 농가인구는 1천5백81만2천명에서 6백 6만8천명으로 연평균 3.62%씩 감소해 왔다. 그러나 농가당 경영규모는 이보다 훨씬 낮은 연평균 1.2%씩 능가함으로써 1965년의 90a에서 1991년에는 123a로 확대되었으며 논 면적은 51a에서 연평균 1.6%씩 증가하여 78a에 그치고 있어서 영세규모는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국제경쟁력의 향상을 위해서는 규모 화가 필수적이라고 볼 때 이를 소유권 이전에 의한 자작농 중심으로 실현해 갈 것인지, 아니면 경영권 이전에 의한 차지농( 借 地 農 )중심으로 갈 것인지, 만약 높은 지가 등의 이유 때문에 자작농( 自 作 農 )보다는 차지농 중심으로 갈 수 밖에 없다면 중심적인 농업경영 주체인 전업적 자립농가를 어떻게 확보해 갈 것인지 그리고 농지의분산적 소유에 의한 영세경영을 막기 위해서 어떤 제도개선이 이 362 이명수

루어져야 할 것인지, 규모화와 관련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현행제도는 너무나 등한하다. (다) 농지의소유권은 인정하되 이용권은 제한된다는 소위 토지공개념적인 제도에 의 해서 농업 이외의 용도에 대한 사용이 제한되고 있다. 이는 농업생산의 국민경 제에 대한 식량안보 등 경제적 비경제적 역할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한 목적의 수행상 필요한 조치로 인정된다. 그러나 농지의 타목적 용도로서 이용이 제한된 가운데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주택. 공장 등 다른 용도로서 땅값은 상대적으로 크게 올랐기 때문에 농지의 자산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어서 농민들의 불만은 크게 고조되고 있다. 이에 따라 농업진흥권역의 지정이나 심지어 경지정 리 등 생산기반 조성사업조차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생산기반 조성사업이 완료된 경지는 타목적으로의 전용이 억제되기 때문이다. 농지가격이 제도적인 이유로 그 상승이 억제되고 있는 바탕 위에서 비농업부문 지가의상대 적인 급격한 상승은 이를 소유하고 있는 일부계층의 자산소득을 크게 부풀려 왔 고 이는 최근까지의 거품경제 유발의 원인으로 까지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들의 소득 중 일부분은 농지가의 억제에 따른 반사적인 이익이라 볼 수 있지 않 은지, 그렇다면 이러한 불로소득의 일부계층에 의한 사유화가 사회적으로 정당 화 될 수 있는지, 과연 사적 재산을 공공적인 목적수행을 이유로 하여 그 이용 권을 다른 보상적인 수단이 없이 계속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정당한지, 사회 전 체의 목표 때문에 이용이 제한되고 있는 농지소유자의 자산가치 하락에 대한 소 득 보상적 재정 지출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닌지 하는 등의 질문에 대 해서는 현행의 농지정책은 너무 소홀하다. (라) 농지의 소유는 소위 경자유전( 耕 者 有 田 )의 원칙에 의해서 농업생산자만이 소유할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다. 이에 따라 생산요소로서의 토지에 대한 자유스러운 시장접근기회가 봉쇄되고 있어서 땅값 상승이 더욱 억제되고 있다. 농업 이외 다른 용도로서 이용이 제한되고 농지를 구입 할 수 있는 자격마저 제한되어 있 기 때문에 농지에 대한 시장수요가 더욱 어렵게 되어 농지가격은 상대적으로 하 락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봉건적 토지소유제도에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63

대한 반동으로서 그리고 농업 이외에는 다른 용도로의 토지수요가 적었던 산업 화 초기단계에서는 무엇보다도 북한 공산주의자와 체제경쟁을 벌이고 있던 준전 시상태에서는 농민의 의한 생산수단의 소유를 보장함으로써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필요 불가결한 조치였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전되고 인구와 소 득수준이 증가함에 따라 공급이 제한된 땅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해 왔으며 앞으로도 증가할 전망이다. 토지가 유일한 생산수단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자본 (기계와 시설)의 크기도 현대적 농업생산을 위해서는 보다 중요한 생산수단이 되 고 있다는 점, 또한 농업의 입장에서는 규모화와 자본집약화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농지소유자격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비농업 부문의 자본유 입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 등의 문제들이 제기되면서 농업도 각개의 농장경영 을 하나의 기업개념으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정치적 논리에 의해서 세워진 정책은 정치 환경이 변화에 따라서 고쳐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즉 농 업을 농민의 생존유지수단으로 보는 자작농주의에 집착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을 고수하기보다는 농지도 소유와 경영을 분리시켜서 소유자격을 개방할 필요가 있 다는 주장들이 그것이다. 용도제한을 받고 있는 그린벨트 등 다른 부문의 토지 에 대해서는 소유자격을 제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들은 일반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만약 소유자격 제한을 개방할 경우에는 비농민에 의한 토지 투기가 일반화되어 전국토가 투기장 화 할 위험이 있으며 소유자격이 제한 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불법적인 비농민의 농지소유현상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 을 들어서 이 제도가 현실화될 때 그 부작용을 우려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농지 값의 상승에 따라서 토지용역비가 궁극적으로 오를 것이기 때문에 농산물 생산비가 오를 수밖에 없게 되어 우리 농산물의 국제경쟁력이 더욱 약화 될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므로 농지의 이용 권 제약과 소유자격 제한문제에 대해서 현행농지제도는 문제를 덮어두고 미봉만 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농업발전방향과 연관하여 보다 깊은 연구를 거쳐서 부 작용을 최소화하고 농업의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킨다는 관점에서 발전적으로 개 선되어야 할 시점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농지소유와 이용에 대한 364 이명수

원칙의 개선이 이루어진다는 전제하에서 현행의 농업진흥권역 지정문제는 새로 운 검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농업진흥권역 제도는 앞으로의 농지이용방향의 중심적인 구실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농업진흥지역 지정은 경지의 집단화 정도나 경사도 정도 등 경지의 물적 조건을 기준으로 하여 이루어질 것이 아니 라 앞으로 농업생산에 기여해야 하고 국민경제에 대한 몫을 충분히 다할 수 있 는 규모를 기준으로 그 지정기준을 바꾸어야 한다. 예컨대 적정한 식량자급률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벼농사를 위해서는 최소한 1백10만ha이상을 확보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Ⅲ. 결론 세계적인 기상이변에 따른 곡물수확량 감소로 식량대란과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 다. 우리나라 곡물자급률이 사상최저인 26.7%로 떨어졌다고 한다. 조상들이 피땀 흘려 개척( 開 拓 )한 논과 밭은 아파트나 공장지대로 바뀌어 앞으로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 시급한 문제에 와 있다. 곡물 가운데 사료용을 제외한 식량자급률도 51.4%로 2004년 50.4%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식량안보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전 세 계적인 곡물가격 폭등은 혹한 폭우 폭설 가뭄 등 이상기후 등 빈발하고 있다. 지난 해(2010) 3~4월 전국에 평균 기온은 9.9도로 평균 기온 통계 작업을 시작한 1973년 이후 가장 낮았고 겨울엔 전국적으로 34일간 한파가 몰아쳐 과일나무 냉해로 꽃눈이 얼어붙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올해(2011)일찍 찾아온 장마가 끝인가 했더니 온난화의 기상이변에 따른 폭우 동두천시(7월26일~28일)가 680mm의 비가 쏟아져 농 작물은 물론 시가지가 잠기는 등 시련을 겪어야 했다. 전국적으로 쏟아진 많은 양의 폭 우는 농작물의 피해로 예년에 비해 일주일이나 빨리 찾아오는 추석에 과일 수급 공급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최근 경제 협력개발기구(OECD)와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향후 10년간 국제식량가격상승에 따라 식량자급도가 낮은 국가들에 대한 식량안보위협은 계 속증가 할 것이라고 경고 한바 있다. 우리나라도 쌀 이외에는 식량안보를 제대로 떠받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65

쳐 줄 품목이 거의 없으니 난감한 일이다. 특히 쌀을 제외한 곡물 자급률은 5%에 불과 한데 채소, 육류 기반마저 위태로워지고 있으니 큰일이다. 설상가상으로 경지면적( 耕 地 面 積 )조차 최근 급속도로 5년(2005~2010)사이에 강원도 전체 면적에 육박하는 10만 9000ha가 감소했으니 농업과 소비자의 미래가 암울하다. 국제적인 이상기후로 인한 생 산량 감소가 심각해 현재 국제곡물값 상승( 上 昇 )은(2007~2009)나라 안팎으로 악재 투 성이인 이런 현실에서 정부와 정치권은 식량문제로 야기되는 농경지 보호법과 식량자급 률 제고를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미래에 후손들을 생각하자. 366 이명수

<참고문헌> 1. 한국의 역사 토농공상의 생활(시사문화사)1979.12. 이상옥 2. 국사대사전(한국출판사) 1982. 5. 조향근 3. 식 경 (자유문고) 1987. 10. 조병빈 4. 쌀 어떻게 지킬 것인가 (농민신문사) 1992. 12. 한국농업의 장래를 연구하는 모임 5. 농협 이야기 (좋은 날) 1996. 6. 권갑하 6. 흙을 알아야 농사가 산다(도서출판 들녘) 이홍식 7. 한국 고대의 수전 농업과 수리시설(서경문화사) 한국고고환경연구소 8. 세계일보, 중부일보, 경기매일, 2011년 1월~8월 경제기사내용발췌 우리겨레의 쌀 활용보전( 活 用 保 全 )과 벼농사의 유래 367

地 名 由 來 에 대하여 ( 高 陽 배다리 中 心 ) 김 득 환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目 次 I. 지명의 개요 II. 지명의 발생과 변화 III. 행정단위 명칭의 체계정립 IV. 주교리와 배다리 유래에 관하여 1. 주교리와 배다리에 관한 유래에 대하여 2. 유래설 비교 3. 행정구역에 따른 배다리와 주교리에 관하여 V. 맺는말 집필자 : 김득환 고양시 문화관광해설사 방송통신대학 관광학과 재학 地 名 由 來 에 대하여( 高 陽 배다리 中 心 ) 369

Ⅰ. 지명의 개요 세상 萬 物 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람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성과 이름을 갖게 된다. 사물의 이름이 주어지는 것은 다른 것과 구별하거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한 표식 이듯 사람 이름 또한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예부터 사 람의 이름을 지을 때 먼저 姓 이 주어지고 다음에 本 貫 에 따라 문중별로 五 行 에 의한 行 列 을 따져 이름을 지었다. 洪 吉 童 이라는 같은 이름이 많더라도 같은 사람이 아닌 同 名 異 人 으로 분별할 수 있다. 이름은 개인을 상징하는 고유명사로 죽어도 영원히 남게 되 는 것이다. 그렇다면 地 名 은 어떨까? 사람 이름이 한 개인의 표시인 것처럼 地 名 도 특정 지역의 위치를 나타내는 表 示 로서 사람 이름처럼 永 久 히 공존하는 것이다. 다만 사람과 다른 점은 이동성이 없는 不 動 의 고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地 名 은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 속의 위치, 즉 곳( 所 )을 표시한 것으로 사람이 늘어남 에 따라 그들이 정착하면서 필요에 따라 發 生 한 것이다. 그러나 옛날 고구려, 신라, 백 제 등 古 代 로 올라갈수록 지명이 광범위한 영역을 대상으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지 금 보다 훨씬 크고 넓은 지역을 상대로 하는 지명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고구려시대에 고양의 명칭은 달을성현( 達 乙 省 縣 )이었으나 그 이하에 세부지역의 명칭 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당시에도 달을성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고 그들이 삶 을 영위해 가는 과정 속에 수많은 지역 명칭이 생기고 사라지고 했을 터인데 현존하는 지명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고려시대 고양지역은 고봉현과 덕양현(행주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당시 세부적인 지명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이나 구전되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고봉사람, 행주사람(고봉인, 행주인) 등으로 지칭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후 향조향이 언제부터인지 고양 주엽지역 으로 불리었는데 1755년경의 고양군지 에 율악부곡( 栗 岳 部 曲 ) 등의 명칭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고려 전후 등 정확한 시대를 알 수 없으나 1,000여 년 동안 관청의 명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주엽리(동) 지역 또는 고양군 중면 일산9리 밤가시마을이 栗 岳 部 曲 임을 알 수 있다. 370 김득환

지명은 사람이 살면서부터 지어지게 되었으며 특히 오래된 성씨들이 정착한 마을의 지명을 보면 그 성씨와 관련된 지명이 나타난다. 분가하여 등 너머로 가면 뒷골, 앞으 로 가면 안골, 새로 생기면 新 基 (샛터말), 샘물이 나오면 冷 泉, 물이 흐르는 곳은 물골( 水 谷 ) 등 사람이 살면서 어떤 모양, 위치, 方 位 등을 가지고 있는 마을 이름이 있는가 하면 姜 氏 가 살기에 姜 村, 설씨가 살아서 설촌말, 고양군이 있다고 하여 古 谷 (고골)을 고양읍내 등 명무수히 많은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명칭이며 이름의 지어진 연유가 즉 역사와 함께 이어지고 있으나 이동성이 없는 不 動 체로서 때로는 그 이름이 바뀌고 없어지고 때로 옆 땅의 이름과 공존 협상으로 공동의 이름이 지어진 것 도 있다. 원당면 성사리에 五 里 谷 (밀성박씨 세거지)이 신원당아파트마을로 변하고 花 井 里 에 햇 빛, 별빛마을이 생기고 원당면내 신원리와 원당리를 합하여 신원동, 도내리와 원흥리를 합하여 홍도동, 고려시대 고봉현과 덕양현을 합하여 고양현 등의 예를 볼 수 있으나 지명도 사람의 이름(성, 본관, 오행, 항렬)과 같이 계통적으로 체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Ⅱ. 지명의 발생과 변화 지명은 사람이 살면서부터 지어진 것으로 보면서 오래된 성씨들이 정착한 마을의 지 명을 지었으리라 생각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분가하며 등 너머로 가면 뒷골, 앞으로 가면 안골, 새로 생기면 新 基 (샛터말), 샛물이 잘나면 冷 泉, 물이 흐르는 곳에서 물골이( 水 谷 ) 등 우리 선조들은 사람이 살면서 어떤 모양, 위치, 方 位 등을 갖고 마을 이름이 있는가 하면 姜 氏 가 살기에 姜 村, 설씨가 살아서 설촌말, 고양군이 있다고 하여 古 谷 (고골)을 고양읍내 등 무수히 많은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명칭이며 이름의 지어진 연유가 즉 역사와 함께 이어지고 있으나 이동성이 없는 不 動 체로서 때로는 그 이름이 바뀌고 없어지고 때로 옆 땅의 이름과 공존 협상으로 공동의 이름이 지어진 것 도 있다. 원당면 성사리에 五 里 谷 (밀성박씨 세거지)이 신원당아파트마을로 변하고 花 井 里 에 햇 地 名 由 來 에 대하여( 高 陽 배다리 中 心 ) 371

빛, 별빛마을이 생기고 원당면내 신원리와 원당리를 합하여 신원동, 도내리와 원흥리를 합하여 홍도동, 고려시대 고봉현과 덕양현을 합하여 고양현 등의 예를 볼 수 있으나 지명도 사람의 이름(성, 본관, 오행, 항렬)과 같이 계통적으로 체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Ⅲ. 행정단위 명칭의 체계정립 고려말 1394년에 고봉감무에서 1413년 고양현감으로 이어질 때까지도 특별한 지명의 기록을 볼 수 없는 상태이다. 행정단위구역의 명칭이 나타나게 된 사항을 볼 수 있는 것은 1755년 이석희 군수의 고양군지에 비로서 고양의 모습을 나타내는 8개면 40개리 98개 본관과 3,508가구, 인 구 13,878명의 생활 속에서 지명이 시작한 것으로 보아지고 있다. 인구의 증가와 생활속에 교통과 교류의 복잡하여짐에 따라 생활터전의 위치 표기도 발전하여 오늘에 도, 시, 군, 읍, 면, 동, 리, 마을, 번지, 아파트, 층, 호, 등으로 지명도 광 역 명칭에서 세분화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을 보면 지명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관리 보전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인구증가에 따른 주택지 조성, 아파트 건설 등에 따라 행정구역이 분리되는 가운데 마을 명칭의 발생 변경 등 변화가 있었고 1991년에 행정리가 194개리로 내부에 서 지어진 지명을 비롯한 고양군 지명유래집 에 나타난 수천을 헤아리는 지명이 나타 나고 있는 실정이다. 지명이 바로 역사를 엮어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지명도 함께 변천사항에 대하여 연구 조사 되어야 한다. 이렇게 생활과 지명은 공존하고 있음을 살피면서 역사는 흐르고 변하고 없어지고 새 로 생기는 것인바 사람은 족보가 있어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지명의 변화는 사람 과 같이 변동의 내용이 자세하지 않고 새로 지정된 명칭 속에 살면서 옛것을 왕왕 잊어 버려 후손들이 우리 선조 조상의 살던 마을 묘지의 위치를 찾고 있는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372 김득환

각기 가지고 있는 가승, 족보 등에 상세히 표기하여 전수하는 것이 방법일 것으로 보고 지방에서도 지명에 대하여도 체계있는 더 깊은 조사와 연구로서 이에 대응이 필요하다. Ⅳ. 주교리와 배다리 유래에 관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유래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지역의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있다. 설령 알고 있다 하여도 잘못 전래된 것을 사실인양 인식하기에 이르러 우리지역 유래에 대한 올바른 고 찰을 하기 위해 이글을 싣는다. 고도 문명( 文 明 )의 발달( 發 達 )과 더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도 도시화의 거센 물결 로 인하여 나날이 변화하고 있다. 불과 수년전까지만 해도 우리 지역은 아름다운 시골 풍경 그대로였고 고유의 마을 이 름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도시화의 거센 물결은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과 살고 있는 마 을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로 인하여 우리 옛것을 후손에게 올바르게 전해주고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 워 주기 위하여 우리 지역의 유래, 풍습, 전설, 설화, 민담 등을 조사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록된 자료와 이용하는 이용자에 따라서 자료가 변화되어 올바르게 전래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한 예로 원당읍 배다리와 주교리에 관한 유래가 기존의 기록된 자료와 이용자 사이에 변화되어 다시 원유래를 찾아 올바르게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주교리와 배다리에 관한 유래에 대하여 고양군지와 경기도 지명유래집 및 주간고양신문에 게재된 유래를 살펴보고 각각의 차 이점과 공통점, 그리고 올바른 유래를 규명해 보아야겠다. 地 名 由 來 에 대하여( 高 陽 배다리 中 心 ) 373

1) 고양군지에 나타난 배다리와 주교리의 유래 고양군지(1987. 9. 30.) p.1479에 의하면 주교리는 한자의 뜻을 한글로 풀어 배다리 라고 하는데 지형이 배와 같이 생겼기 때문에 부른다는 설과 1925년 을축년 대홍수시 이곳에 배가 떠밀려 내려와 주민들이 배로 다리를 만들어 놓고 건너 다녔다하여 배다리 라고 하는 설도 있다. 2) 경기도 지명 유래집에 나타난 주교리와 배다리 유래 경기도 지명유래집(1987. 10. 10.) p545에 의하면 주교리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배가 이곳까지 떠내려와 주민들이 배로 다리를 놓고 건너 다녔다고 하여 배다리 라 칭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배주( 舟 ) 다리교( 橋 )자를 써서 주교리로 불리우고 있다.(이 준섭 남 62세 구술) 3) 주간고양신문에 보도된 주교리와 배다리의 유래 주간고양 1990년 1월 4일자에 의하면 원래 주교리는 한자식 표기어로써 우리말로 배 다리 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데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지형과 관련된 것으로서 지역의 형태가 배의 모양처럼 생겼기 때문에 배다리 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다. 둘째는 1925년 을축년에 있었던 대홍수시 배가 떠내려와 배로 다리를 놓고 건너 다 녔다는 데서 배다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다. 위의 두 가지 유래 중 어느 것이 더욱 정확한 유래인지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전자 보다 후자가 더욱 유력한 설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말이다. 4) 지명이 품은 한국사 (이은식, 타오름, 2010) - 홍수에 배로 다리를 만들다 - 舟 橋 는 배다리라는 뜻으로 이 이름은 1925년 대홍수로 인하여 배가 이곳까지 떠밀려 내려왔을 때, 주민들이 배로 다리를 놓고 건너다니면서 불리게 되었다. 또 마을 지형이 374 김득환

배 모양처럼 생겼기 때문에 배다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첫 번째 설이 유력 해 보인다. 이후 배주( 舟 ), 다리교( 橋 ) 자를 써서 주교리라고 부른 데서 동 이름이 유래하였다. 5) 한국의 지명 변천 (송호열, 성어문화사, 2006) 경기도 高 陽 市 德 陽 區 서북부에 법정동이자 행정동, 원래 고양군 元 堂 面 二 牌 里 지역 도로 1906년 주교상리, 주교하리와 朴 齋 宮 里 를 병합하여 주교리가 되었다. 계속 그대로 유지해 오다가, 1979년 원당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92년 고양시 승격과 함께 주교 동과 星 沙 洞 각 일부를 관할하는 행정동이 되었다. 법정동 역시 주교동과 성사동 관할 하에 있다. 1996년 고양시의 구제 실시로 덕양구 관할이 되었다. 지명은 1925년 대홍수 로 인하여 배가 이곳까지 떠밀려 내려왔는데, 주민들이 배로 다리를 놓고 건너 다녔다 고 하여 처음에는 배다리라고 부르다가 한자화된 것이다. 2. 유래설 비교 이 다섯 곳의 유래설 중 공통되는 점도 발견된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달라지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표1)을 보면서 세 곳의 유래설을 비교해 보자. 자료 구분 1925년 홍수로 인하여 배다리라 부른다는 설a 지형이 배처럼 생겨서 부른다는 설b a설이 b설보다 유력하다는 설 고양군지 지명유래집 주간고양신문 지명이 품은 한국사 한국의 지명 변천 표 3 세 곳의 유래설 비교 地 名 由 來 에 대하여( 高 陽 배다리 中 心 ) 375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1925년 대홍수로 인한 배의 다리 역할로 인한 유래설은 세 곳의 공통된 부분이고 지형 모양으로 인한 배다리의 유래는 고양군지와 주간고양신문에 서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주간고양신문에서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한 설을 근거있는 설로 주장 하고 있다. 3. 행정구역에 따른 배다리와 주교리에 관하여 1755년 편찬된 고양군지와 1902년 각사등록 경기도편, 1906년 병오조 호, 결, 호포전 조사성책( 丙 午 條, 戶, 結, 戶 布 錢 調 査 成 冊 )과 1910년 발표된 경기도 고시 제6호를 각각 살펴보면 고양군의 행정구역 변천에 따른 지명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다. 1 1755년(영조 31년) 편찬된 고양군지를 보면 당시 고양군은 8개면(원당면, 사리대 면, 구이동면, 중면, 구지도면, 송산면, 사포면, 하도면)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 원당면은 일패리 ( 一 牌 里 ); 청대동촌( 靑 大 同 村 ) 도촌( 島 村 ) 물고리촌( 勿 古 里 村 ) 신 촌( 新 村 ) 루( 樓 ) 능곡( 陵 谷 ) 와 이패리 박제궁촌( 朴 齊 宮 村 ) 주교촌( 舟 橋 村 ) 리잉 곡( 利 礽 谷 ) 사근사( 沙 斤 寺 ) 성라산촌( 星 羅 山 村 ) 신원리( 新 院 里 ) 목희리( 木 稀 里 ), 도내동리( 道 內 洞 里 )등 5개리로서 되어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원당면 이패리에 주교촌이란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각사등록( 各 司 謄 錄 ) 경기편(1902. 2. 6.) p.15에 의하면 당시 고양군수 이주현의 보고서 내용에 주교장 주교포 등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주교 촌에 장이서고 정육점등이 있어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때도 주 교촌이란 말은 계속 사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3 병오조 호, 결, 호포전 조사성책(1906년 12월 고양군수 박주헌)에 의하면 당시 행 정구역이 9개면(하도면, 구지도면, 원당면, 중면, 이포면, 송산면, 사리대면, 신혈 면)으로 그중 원당면은 12개 리동으로 1755년 간행 고양군지의 원당면 이패리가 박제궁, 주교상리, 주교하리, 사근사리, 삼패리로 변경되었다. 376 김득환

표2)를 살펴보자. 1755년(고양군지) 이패리 박제궁 리잉곡 주교촌 사근사 성라산촌 1906년 12월(병오조) 박 제 궁 주교상리 주교하리 사근사리 삼 패 리 표 4. 행정구역에 의한 변화 위 표에서와 같이 주교촌이 정식 행정구역 명칭으로 주교상하리로 불리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경기도 고시 제6호 리동 합병 개칭에 의한 주교리 변화(1910년 8월 23일) 박제궁, 주교상하리가 합쳐져서 주교리가 되었고 사근사리, 삼패리가 합쳐져서 성사 리가 되었다. 위 변화를 표3)으로 알아보자. 병오조(1906) 박 제 궁 주교상리 주교하리 사근사리 삼 패 리 경기도고시 제6호(1910) 주 교 리 성 사 리 표 5. 1906년 병오조와 1910년 경기도고시 제6호 비교 위 표를 보면 1910년 비로소 주교리란 명칭이 정식으로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주교촌(배다리)이란 자연부락이 1755년 훨씬 이전부터 있 었음을 알 수 있고, 1910년 8월 23일 경기도 고시 제6호로 인하여 박제궁, 주교상하리, 세개의 리가 합쳐져서 주교리란 행정구역 명칭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地 名 由 來 에 대하여( 高 陽 배다리 中 心 ) 377

378 김득환

地 名 由 來 에 대하여( 高 陽 배다리 中 心 ) 379

380 김득환

地 名 由 來 에 대하여( 高 陽 배다리 中 心 ) 381

그러므로 배다리(주교촌)는 주교촌을 순수한 우리말로 풀어쓴 마을 이름이고 주교리 는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명칭이므로 서로 다른 의미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앞에서 고양군지, 경기도 지명유래집, 주간고양신문의 유래설과 행정구역 변천사에 따른 주교리에 대한 것을 비교해 보면 다른 점이 나타난다. 첫째로 고양군지, 경기도 지명유래사, 주간고양신문에서 주장한 1925년 을축년 대홍 수로 인한 배다리(주교촌)의 유래는 1755년 고양군지에 나온 주교촌과는 연대적으로 약 170년의 시차가 발생된다. 이것은 세 곳에서 주장하는 1925년 대홍수로 인한 배다리의 유래는 연대적으로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교촌(배다리)은 1755년 이전부터 홍수가 일어나 한강이 범람하여 물이 이곳까지 밀려오면 배로 다리를 놓고 건너다녔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25년 대홍수로 인하여 배다리(주교촌)란 유래가 생겨났다는 설은 타당하지 않 고 연대를 1755년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는 주교리가 지형상 배의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란 것에도 의문점 이 생긴다. 왜냐하면 주교의 한자어를 보면 배주( 舟 ) 다리교( 橋 )란 점에서 지형이 배주 ( 舟 )자를 쓴 것은 타당하나 다리교( 橋 )자를 썼다는 데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유래설은 올바른 유래설이라 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배다리와 주교리는 서로 다른 각도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볼 수 있다. 배다리(주교촌)는 1755년 이전 자연부락 형성시 홍수로 인하여 한강이 범람하면 이곳 에 물이 들어와 배로 다리를 건너다녔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며 주교리는 1910년 경기도 고시 제6호에 의하여 박제궁, 주교상리, 주교하리 3개의 법정리를 한데 묶어 주교리가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배다리(주교촌)는 1755년 이전부터의 명칭이고 주교리는 1910년에 배다리 (주교촌)을 비롯한 리잉곡, 박제궁을 합친 법정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생긴 명칭이란 것이 증명된다. 그리고 배다리 지역은 1755년 주교촌이란 자연부락이며 주교리는 범위가 박제궁, 리 잉곡, 주교촌을 포함한다는 것도 아울러 밝혀둔다. 향토문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 스스로 만들고 가꾸어 가는 것이다. 382 김득환

그러므로 보다 더 정확하고 상세하게 기록 보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배다리와 주 교리에 대한 미비점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가 고양을 사랑하는 여러분에 의하여 계속 제시되기 바란다. Ⅴ. 맺는말 지명에 담긴 이야기는 그대로 설화 문학의 모태가 되며, 또한 설화 자체만으로도 자 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정신적 향수가 되고 있다. 또한 지명은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향토적 배경과 강한 보수성으로 인하여 한번 생성되면 보통 새로운 지명으로 바뀌 지 않는다. 때문에 그 안에 내재된 古 語 와 각 고장의 독특한 방언이 투영되어 있는 등 실로 고유 지명이 지닌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지명은 소중한 우리 민족문화 유산의 체험적 근거임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산 업화 추세에 따른 도시 개발로 인하여 고유한 지명과 뜻이 인멸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명이 품은 역사는 이제까지 전승되어 온 고유한 지명을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전통 지명의 고유성을 유지하고 지명에 얽힌 선조들의 생활상과 애환을 비롯하여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의 역사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덧붙여 각각의 지역이 갖고 있는 연혁, 역사, 언어, 민속, 산업, 자연 등 종합적인 지 명 연구의 계기를 마련하고 지역 개발의 참고 자료로 전승되고 보존되었으면 하는 목적 도 있음을 밝힌다. 아무쪼록 고장과 우리나라를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내 고장 사랑의 길잡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명은 사람들이 주변의 지표, 취락, 지형, 하천 등에 붙이는 고유한 이 름으로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지명은 직접적으로 인식된 공간 형태를 나타내기도 하 고, 정치적 변화의 역사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민속이나 인구 이동, 언어 의 확산과 음운 변화, 지표를 점유한 인간의 환경에 대한 지각과 변경, 환경에 대한 인 간의 가치 평가와 관념 등 다양한 문화를 반영하는 일종의 문화유산이다. 또한 지명은 地 名 由 來 에 대하여( 高 陽 배다리 中 心 ) 383

지리학이 추구해 온 지역성 파악에도 매유 유용한 요소이다. 최근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지명이 문화유산이자 문화콘텐츠로서 재인식되고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와 근대와 과정에서 변경된 전통 지명을 되찾으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현대에 와서는 토지 이 용 변화, 교통 발달, 도시화 과정 등으로 인해 지명의 제정, 변경, 폐지 등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어 지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 되어야 한다. 384 김득환

<참고문헌> 1. 고양군지, 고양군, 1987년 2. 지명 유래집, 경기도, 1987년 3. 이석희, 고양군지, 1755년 4. 각사등록 경기도편4, 1902년 5. 경기도고시 제6호 1910. 8. 23. 6. 丙 午 條, 戶, 結, 戶 布 錢 調 査 成 冊, 1906년 7. 이은식, 지명이 품은 한국사, 타오름, 2010년 8. 주간고양신문, 1990년 6월 7일자 9. 주간고양신문, 1990년 1월 4일자 地 名 由 來 에 대하여( 高 陽 배다리 中 心 ) 385

京 畿 鄕 土 史 學 발 행 인:오 용 원 편 집 인:최 영 주 발 행 처:한국문화원연합회 경기도지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116-1(경기문화재단 6층) Tel. 031-239-1020 Fax. 031-239-3785 인 쇄:2011년 12월 30일 발 행:2011년 12월 30일 인 쇄 처:동 명 사 (031-652-9490) 경기도 평택시 합정동 672-20번지 편집위원:한동억 김장환 이 책은 2011년도 경기도 보조금 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비매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