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한국문학논총 제46집 그가 남긴 자료의 태반이 일본어 문건이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겠으나, 그에 대한 한국학계의 대응은, 일부 회고담 및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1966), 1) 그리고 신지방주의론 과 민요시, 번역시 문제를 다룬 근래의 연구성과 수편을 제외하면,



Similar documents
최우석.hwp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0429bodo.hwp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 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 D2E687770>

untitled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E1-정답및풀이(1~24)ok

6±Ç¸ñÂ÷

cls46-06(심우영).hwp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 C3D6C1BEBABB292E687770>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177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01Report_210-4.hwp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 D352D32315FC5E4292E687770>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상품 전단지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2

DBPIA-NURIMEDIA

화이련(華以戀) hwp

ÆòÈ�´©¸® 94È£ ³»Áö_ÃÖÁ¾

歯1##01.PDF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120229(00)(1~3).indd

< B5BFBEC6BDC3BEC6BBE E687770>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11민락초신문4호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

652

歯 조선일보.PDF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 E687770>

<C1DFB1DE2842C7FC292E687770>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 1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34B1C720C0CEB1C7C4A7C7D828C3D6C1BEC6EDC1FD D28BCF6C1A4292E687770>

160215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hwp

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C1DFB0B3BBE7B9FD3128B9FDB7C92C20B0B3C1A4B9DDBFB5292E687770>

ad hwp

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공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교육실습 소감문

1

¼þ·Ê¹®-5Àå¼öÁ¤

109

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歯 동아일보(2-1).PDF

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33352D2D31342DC0CCB0E6C0DA2E687770>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38C1D6C2F728C6EDC1FD292E687770>

DBPIA-NURIMEDIA

1-1Çؼ³

내지4월최종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15강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106월 평가원] 1)심청이 수궁에 머물 적에 옥황상제의 명이니 거행이 오죽 하랴. 2) 사해 용왕이 다 각기 시녀를 보내어 아침저녁으로 문 안하고, 번갈아 당번을 서서 문안하고 호위하며, 금수능라 비

2 국어 영역(A 형). 다음 대화에서 석기 에게 해 줄 말로 적절한 것은? 세워 역도 꿈나무들을 체계적으로 키우는 일을 할 예정 입니다. 주석 : 석기야, 너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 무슨 좋은 일 있니? 석기 : 응, 드디어 내일 어머니께서 스마트폰 사라고 돈

Microsoft Word - 青野論文_李_.doc

<B3EBB5BFB0FCB0E8B9FD20B1B9C8B820B0E8B7F920C0C7BEC828C3D6C1BE29A4BB2E687770>

<B5B6BCADC7C1B7CEB1D7B7A52DC0DBBEF7C1DF E687770>

부벽루 이색 핵심정리+핵심문제.hwp

No Title

입장

PSAT¿¹Á¦Áý ȨÆäÀÌÁö °Ô½Ã (¼öÁ¤_200210) .hwp

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2힉년미술

<B0ADC8ADC7D0C6C428C3D6C1BE292E687770>

PDF

2월 강습회원의 수영장 이용기간은 매월 1일부터 말일까지로 한다.다만,월 자유수영회 원,자유수영 후 강습회원은 접수일 다음달 전일에 유효기간이 종료된다.<개정 , > 제10조(회원증 재발급)1회원증을 교부받은 자가 분실,망실,훼손 및


인 사 청 문 요 청 사 유 서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넓은 들을 배경으로, 낙동강의 풍부한 수자원은 예로부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운 상주의 원동력이다. 강은 단순 히 물은 담아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사 문화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또한 강은 크고 작은 여러 하천들이 모여 큰 물줄기를 이룬다. 낙동강 역시 상

< FBBF5BBE7BFAC5FC0CCBDB4C1F8B4DC5FB3AAC8A6B7CEBEC6B5BFB4EBC0C0C3A55B315D2E687770>

기사스크랩 (160504).hwp

Transcription:

한국문학논총 제46집(2007. 8) 307~337쪽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1)심 원 섭 ** 차 Ⅰ. 머리말 Ⅱ. 養 子 意 識 속의 成 長 史 -외조부, 小 林 一 茶, 영원한 어머니 Ⅲ. 私 的 세계로서의 문학과 金 億 과 의 사숙 관계 례 Ⅳ. 신민요의 창작과 김사엽과의 민요 논쟁 Ⅴ. 결론 Ⅰ. 머리말 제2의 김문집 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 김종한은, 정지용의 추천으 로 文 章 에 데뷔한 시인이자, 최재서와 함께 일제 말기 평단의 최대 주 역의 하나로 자리해 온 인물이다. 이외에 그는 김소운에 버금가는 한국 문학 번역자로서로서, 전시체제 속에서는 문제적인 일어시 창작자로서 폭넓은 활약을 벌인 바 있다. 그를 빼놓고 일제 말기 문학사를 거론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이런 데에 있다. * 본 논문은 2006~2008년도 日 本 學 術 振 興 會 科 學 硏 究 費 補 助 金 의 支 援 으로 씌어 졌음. **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객원교수

308 한국문학논총 제46집 그가 남긴 자료의 태반이 일본어 문건이라는 점과도 관련이 있겠으나, 그에 대한 한국학계의 대응은, 일부 회고담 및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1966), 1) 그리고 신지방주의론 과 민요시, 번역시 문제를 다룬 근래의 연구성과 수편을 제외하면, 2) 그의 전생애와 문학에 관한 본격 연구는 사실상 방치상태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연구사적 공백을 메워온 것은 일본 측의 연구인데, 김종한 전집 의 출간을 비롯 한 大 村 益 夫, 藤 石 貴 代 등의 연구가 그것이다. 3) 김종한 연구에 필요한 자료적 기반의 마련, 신지방주의론 등의 문제 제기, 전기조사 면 등에 서 이 성과들이 갖고 있는 연구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연구자료 및 일부 선행 연구가 확보된 현재, 그에 대한 본격 연구가 더 미뤄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 연구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 작업을 위 해서는, 그의 문학과 생애의 출발점이자 원형이 되는 초기 문학 수업시 대의 면모를 면밀하게 재검토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大 村 益 夫 와 藤 石 貴 代 의 연구를 보완하는 한편 이 연구들에서 다뤄지지 1) 李 石 薰, 金 鐘 漢 の 人 と 作 品, 國 民 文 學 1944.11, 金 文 洙, 金 鐘 漢 のこと, 民 主 朝 鮮 1946.4, 金 達 洙, 太 平 洋 戰 爭 下 の 朝 鮮 文 學, 文 學 1961.8, 유정, 好 漢 孤 獨 金 鐘 漢, 現 代 文 學 1963.2, 임종국, 친일문학론, 평화출판사, 1966 참조. 2) 윤대석, 국민문학의 신지방주의론, 사에구사 도시카쓰외 한국근대문학과 일 본, 소명출판, 2003, 김윤식, 이중어글쓰기 공간에서의 시인 김종한, 시와 정 신 2004, 정종현, 식민지 후반기 한국문학에 나타난 동양론 연구, 동국대 박사 논문, 2005 참조. 민요시는 박경수, 한국근대민요시 연구, 부산대 박사논문, 1989, 번역시는 林 容 擇, 金 素 雲, 朝 鮮 詩 集 の 世 界, 中 公 新 書, 2000, 심원섭, 金 鐘 漢 과 金 素 雲 의 鄭 芝 溶 詩 번역에 대하여, 한국문학논총 41집, 2005.12 참조. 3) 大 村 益 夫, 金 鐘 漢 について, 旗 田 巍 先 生 朝 鮮 歴 史 論 集, 下 1979.3, 藤 石 貴 代, 金 鐘 漢 論, 九 州 大 學 東 洋 史 論 集 17, 1989.1, 川 村 湊, 酔 いどれ 船 の 青 春, 講 談 社, 1986, 藤 石 貴 代 大 村 益 夫 沈 元 燮 布 袋 敏 博 편, 金 鐘 漢 全 集, 綠 蔭 書 房, 2005 참조. 앞의 두 논문은 김종한의 생애와 문학의 전모를 다룬 것으로서, 전자는 김 종한의 종합적 면모 제시 및 신지방주의론 의 해석과 관련하여, 후자는 전기 자 료 면에서 매우 유용하다. 川 村 湊 는 김종한의 시에 대한 유연한 해석이 특징적이 다. 大 村 益 夫 의 논문은 朝 鮮 近 代 文 學 と 日 本, 綠 蔭 書 房, 2003에 수록되었다가 윤 동주와 한국문학, 소명출판, 2001에 번역 재수록되었다. 金 鐘 漢 全 集 은 앞으로 전집 으로 표기한다.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09 않은 부분들을 중심으로, 김종한의 초기 인생과 문학 수업 내용의 일단 을, 자료 중심으로 검토해 보려는 본고의 연구 동기는 여기에 있다. 한편 으로는 이 시대 그의 특징들이 후일의 그의 문학및 생애와 어떻게 연결 되는가 하는 점도 조심스럽게 제시해보려 하였다. Ⅱ. 養 子 意 識 속의 成 長 史 - 외조부, 小 林 一 茶, 영원한 어머니 김종한은 1914년 2월 8일, 함경북도 明 川 郡 立 石 洞 의 농민 가정에서 출생했다. 6세 때 백부댁에 양자로 가, 친모와 양모의 애정 다툼 속에서 소란한 가정생활을 보낸다. 초등교육은 기록 부재로 확인이 불가능하며, 20세 때 鏡 成 高 等 普 通 學 校 를 졸업한 이후 22세(1935년)부터는 1년 여에 걸쳐 향리의 사립학교인 零 城 學 校 교사로 일하게 된다. 문단 활동은 상당히 이른 편이다. 15세(1928) 때 최초의 시작품을 朝 鮮 日 報 에 발표한 이후, 18세(1931) 때 東 光 에 번역 한시를 발표한다. 이후 21세(1934) 때부터, 도일하여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하게 된 것으 로 추정되는 24세(1937))까지는 別 乾 坤 東 光 朝 鮮 日 報 朝 鮮 中 央 日 報 東 亞 日 報 등의 중앙지에 약 20여 편에 달하는 민요시 및 시작 품이 당선되거나 발표되거나 한다. 4) 이런 작품 활동의 이면에는 경성고 보 시절의 문학 수업 내지 문학적 분위기가 그 기반으로 자리하고 있었 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5) 4) 이상 생애 및 작품 사항은 김종한 연보 전집 849~866면 참조. 그의 자기소 개문 속에는 경성고보 졸업 후 西 關 大 學 중도퇴학 이라는 기록이 있다. 신춘문 예당선자소개 ( 東 亞 日 報 1936.1.14) 關 西 대학의 오기일 가능성도 있는데, 김종 한은 이후 이 경력을 재론한 적이 없다. 5) 김종한은 경성고보 시절 김억을 사숙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본고의 3장 참조. 한편 당시 경성고보에는 이효석이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김종한 바다, 孝

310 한국문학논총 제46집 이상이 도일 이전까지의 그의 생애와 문학활동의 대략인데, 그가 소년 기부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 민요시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는 점, 한시 번역 경험이 있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유소년기 의 체험을 회고한 그의 글 속에는, 그의 생애의 원형적 체험으로 볼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그의 회고담 중 내용이 가 장 길고 체계적인, 일본어 시집 어머님의 노래(たらちねのうた) 발문 의 서두부터 인용한다. 대나무로 짠 커다란 삿갓을 쓰고, 프랑시스 쟘을 울리고 말 것 같은 당나귀에 걸터앉아, 1년 내내 제자의 집을 歷 訪 하셨다. 저 유명한 방랑 시인 김삿갓의 아류셨던 것 같다. 이따금 귀향하시면, 벼락같은 불평을 남발하였다. 나의 외조부는, 지방에서는 한학자로 시인으로 알려져 있었 다. 툭하면 말세로다, 말세로다 라는 말을 애용하시었다. 세상은 말세, 벚꽃만 흐드러지고. 이것은 잇사( 一 茶 )의 一 句 인데, 나는 잇사에게서 혈 액적인 것을 느낀다. 아마 그의 속에 내 조부의 모습이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호는 閑 西 였다. [중략] 우리 집도 달빛 찬란한 논( 田 ) 동네 사이에서 낡아가고 있었다. 6) (원문은 일문) 그는 유년기 회고담을 외조부에 관한 에피소드로부터 풀어나가고 있 다. 생모 쪽인지 양모 쪽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외조부에 관한 산문 기록 은 이것이 유일하다. 7) 이 기록이 주목되는 것은, 초등교육의 면모가 밝 혀져 있지 않은 김종한의 경우, 그의 家 學 과 문학 수업의 원형적 분위기 石, 下 宿 ( 春 秋 1942.7) 140면. 전집 445면. 이외에 이용악, 김동환, 함형수, 유 정 등 유수 시인들의 생산지 인 경성 및 경성고보의 문학적 분위기에 대한 글로 는 유정의 好 漢 孤 獨 金 鐘 漢 이 자세하다. 유정, 好 漢 孤 獨 金 鐘 漢, 現 代 文 學 1963.2, 188~189쪽. 전집 809~810쪽. 6) 김종한, あとがき たらちねのうた ( 人 文 社, 昭 和 18 年 7 月 ) 40면. 전집 218쪽. 졸역. 이후 인용한 모든 일문도 졸역임을 밝혀둔다. 7) 외조부를 소재로 했을 가능성이 있는 시 작품으로서 <할아버지>와 < 係 圖 > 두 편이 확인 가능했다. 文 章 1939.8 124~126면. 전집 59~61쪽.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11 를 이것이 암시해주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우선 김종한은 방랑벽이 있는 시인이자, 한학자 그리고 고향에서 제자 들을 양성하고 있었던 문학교사로서 외조부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 선 확인 가능한 것은, 김종한은 유년기 교육 기간 동안 외조부로부터 한 학 교육을 받았거나 혹은 그런 지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있 다는 점이다. 김종한이 18세라는 나이에 東 光 에 번역 한시를 발표한 것은 이런 家 學 적 소양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 된다. 두 번째는 김종한이 묘사한 외조부의 이미지와 김종한 자신과의 관계 다. 그가 묘사한 외조부의 모습에는 낭만적인 방랑시인으로서의 이미지, 벼락 같은 불평 을 하는 가부장으로서의 이미지, 그리고 선비적인 한학 자로서의 이미지가 혼재되어 있다. 특히 벼락 같은 불평을 남발한다 는 묘사는 김종한의 불만과 애착과 혼합되어 있는 유모러스한 기술로도 읽 힌다. 8) 이 묘사는, 실은 선후배 문인에게 독설을 남발 하면서 제2의 김 문집 으로 불리고 있었던 김종한의 후일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데가 있다. 김종한은 이 외조부에게서 자신의 미래상의 일부, 즉 낭만적인 방랑시 인, 재기있고 유모러스한 독설을 남발 하는 시인으로서의 자기 이미지를 견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9) 김종한의 스승 정지용 역시도 이런 이 8) 외조부에 대한 김종한의 애착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추측되는 <할아버지>의 1연 을 인용한다. 벼락이시더니 할아버지의 單 純 한 性 格 은 지나가면 / 정다운 푸른 하늘이 있을 뿐이더니 文 章 1939.8 124쪽. 전집 59쪽. 9) 김종한의 성격에 대한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스케치가 있어 인용해 둔다. 김 종한은 순수하고 자아가 강한 만큼, 서울에 나와서도 가는 곳마다 충돌하여 문단 동료들로부터 백안시를 당했다. 그는 조금 편협하면서도 고독함과 동시에 젊은이 가 대개 그러하듯이 상당히 야심적이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선배나 동료의 작품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비판하면서도 자기의 재능에 대해서 때로 대단한 자부심을 보이는가 하면 때로 절망의 밑바닥에 빠지기도 해서 오오무 라 마스오, 김종한에 대하여, 윤동주와 한국문학, 소명출판, 2001, 257쪽.

312 한국문학논총 제46집 미지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지만, 후일의 성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을 김종한의 유소년기 속에서 찾는다고 할 경우, 그의 외조부는 무 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유소년기 의 그에게 비친 외조부의 자랑스러운 면모들은, 자신을 양자로 보냈던 친부, 후에 등장하는 엄격한 이성적 인간 양부를 대신하는 바람직한 父 性 的 모델 로서 기능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외조부에 대한 김종한의 또 다른 이미지는 일본의 歌 人 잇사 관련 에 피소드로 제시되고 있다. 김종한이 혈액적인 것을 느낀다 고 한 잇사, 즉 고바야시 잇사( 小 林 一 茶 )라는 인물은, 김종한의 내면을 엿보는 데 있 어 중요한 단초가 된다고 생각되는 인물이다. 고바야시 잇사(1763~1827)는 잇사조( 一 茶 調 ) 라는 시적 개성을 일본 시가사에 남긴 하이카이( 俳 諧 )시인의 한 명으로서, 김종한이 인용한 싯 구는 그의 작품 중 사회불안의 해소를 비는 심정 을 노래한 세상 바꾸 기( 世 直 し) 시편들 중의 하나로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10) 역문과 원문은 다음과 같다. 세상은 말세, 벚꽃만 흐드러지고 此 やうな 末 世 を 桜 だらけ 哉 11) 한 인간이 특정인에게서 혈액적인 것을 느낀다 는 말은, 자신과 동질 적인 무엇인가를 그 에게서 느낀다는 의미가 아닐까. 실제로 고바야시 잇사의 생애 속에는 김종한이 연민감을 나눌 만한 요소가 풍부하게 들 어 있다고 판단된다.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1763년 시나노( 信 濃 ) 지방의 개척농가에서 태어난 고바야시 잇사는 6 세 때 친모를 잃고 계모를 맞이한다. 계모가 득남한 뒤부터 지속적인 핍 박에 시달리다가, 15세 때 부친의 권유로 집을 떠나 에도로 간다. 이후 10) 靑 木 美 智 男, 一 茶 の 時 代, 敎 倉 書 房, 1988.4, 190~209쪽. 11) 荻 原 井, 新 編 一 茶 俳 句 集, 岩 波 書 店, 昭 和 10 年 2 月, 57쪽.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13 35년간 전국을 방랑하며 고독과 빈한의 문학 수업기를 보낸다. 부친의 사망 이후 유산 문제를 둘러싼 계모와의 갈등을 해결하고 고향에 정착 한 것이 51세 무렵. 결혼을 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등 사회적 안정감을 비로서 맛보게 되나, 처자가 줄이어 사망하고 자신도 재난과 병고 속에 서 숨을 거두는 비극적 운명의 길을 걷게 된다. 12) 잇사의 대표작이자 그 의 생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을 두 편 소개한다. 이리 와 같이 놀련. 어미없는 참새야 我 と 来 て 遊 べや 親 のない 雀 가신 어머니, 바다를 볼 때마다 바다를 볼 때마다 亡 母 や 海 見 る 度 に 海 見 る 度 に 13) 안식처로서의 가정을 소유했던 기억이 없는 인간의 깊은 원망이 드러 나 있는 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인간의 마음을 평생 지배한 트라 우마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가정 부재 혹은 어머니 부재 라는 용 어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건전한 인격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기본 적인 모성애와 가정 내의 화합적 경험이 결여된 상태에서 일생을 보내 는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란, 그 상실된 세계를 증폭된 형태로 보상받고 자 하는 의지일 가능성이 높다. 고바야시 잇사에게 김종한이 끌린 이유 는, 이어지는 다음 문장 속에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집은 상놈 집안이었는데, 6살이 되자 나는 백부 댁에 양자로 갔 다. 본가에서 상속해 마땅한 남자가 없을 때는, 분가의 장남을 양자로 맞아들이는 것이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의사였던 양부는 엄격한 이성적 인간이었는데, 양모는 아들이 없는 중년의 부인이면서도 편집광적인 애정의 소유자였다. 그 즈음부터 생모와 양모 사이에는 나를 중심으로 12) 尾 澤 喜 雄, 小 林 一 茶 とその 周 辺 ( 岩 手 大 学 尾 澤 喜 雄 教 授 退 官 記 念 事 業 協 賛 会, 昭 和 47 年 6 月 ). 13) 각각 靑 木 美 智 男, 위의 책 27면. 荻 原 井, 위의 책 160쪽.

314 한국문학논총 제46집 애정의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한쪽은 자기가 낳았으니 자기애라 한다. 한쪽은 자기가 길렀으니 신경 끄라 한다. 두 어머니를 소유한, 행복적으 로 불행한 유년의 나날이었다. 결국 나는 어머니의 애정이라는 것을 모 르고 어른이 되었다. 14) (밑줄:인용자) 어머니가 일찍 사망했거나 혹은 부재한 상태에서 인간이 겪는 심리적 상처를 어머니 부재로 인한 모성적 경험의 결핍 이라 명명할 수 있다면, 두 어머니의 애정 갈등 때문에 불우한 추억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김종 한의 경우는 어떤 진단을 내려야 할까. 3자가 보기에는 그의 문제는 애 정의 부재 가 아니라 애정의 과잉 문제로도 읽힐 수도 있다. 어떻든 중 요한 것은 김종한의 주관적 반응일 터인데, 그는 양모가 편집광적인 애 정의 소유자 이며 본인은 어머니의 애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어른이 되 었다 라고 극언하고 있다. 극단적 발언을 삼가지 않는 이 스타일은 후일 김종한의 문단 활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김종한 의 이 극단성은 과잉애정을 받은 응석받이 특유의 반응일 가능성도 생 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인 정향이야 어떻든간에, 잇사의 어머니 부재 못지 않은 일종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김종한이 유년기의 문제로서 간직하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이러한 그의 어머니 에 대한 집착은 이어지는 기록에서는 보다 큰 규모로 재생산된다. 어머니를 향한 애정이라는 것은 조국애와 통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 한다. 후일 나는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올라왔던 것인데, 관부 연락선 속에서 나는 정치적으로도 자신이 양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 러한 심리적 뒤틀림은, 조선에 징병제실시가 결정되어, 일본이 확고한 나의 조국이 된 작년 5월 8일에, 처음으로 해방되었던 것이었다. 만엽집 속에 이런 노래가 있다. 어머니를 거스르고 너와 나 누가 일을 이루랴. 한편, 동경에서의 나는 [중략] 몰래 혼자서 촌내 나는 조선어 시를 써놓고 즐기곤 했다. 시제는 뭐였던지간에 모티브는 언제나 영원한 어 14) 김종한, あとがき 위의 책, 40~41쪽. 전집 218~219쪽.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15 머니에 대한 향수였다. 중략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도 이것저것 조금씩 생각하는 청년으로 바뀌어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 곁에 앉아 전쟁과 평화 를 읽어드렸다. [중략] 나이와 더불어 찾아온 안정감 덕분일 것이다. 어머니의 애정 면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었다. 15) (밑줄:인 용자) 그는 어머니 문제 가 조국애 라는 정치적 차원의 문제와 동질적인 것 이라 규정하고는, 그 두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 문제 해결 과정 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두 어머니 사이에서의 애정 문제(양자체험) 나이가 들면서 해결됨 두 민족 사이에서의 정치적 양자의식 일본이 조국이 된 이후에 해 방됨. 이것이 당시 30세였던 김종한의 자기 진단이었던 셈인데, 전체적으로 이 글은 한 인간의 절실한 내면 풍경의 기록으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 로 체계적이고 단정적이다. 후자가 특히 믿기 어렵다. 선명한 '권선징악 적' 결론을 내려놓고 문제로부터 서둘러 도피하고픈 욕구의 소산으로도 읽혀진다. 당시 그가 국민문학 편집자로서 신지방주의론 의 선두역을 맡고 있었으며, 조선문인보국회 시부 간사로서 시국 속에 깊이 발을 들 여놓고 있었음을 고려해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의 이 논리는, 아무래 도 정치적인 보호막의 소산이라는 점을 고려에 넣고 읽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정밀한 상황적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어머니 문제, 촌내나는 조선어 시 영원한 어머니에의 향수 등의 부 분은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높지 않은가 생각된다. 과연 김종한의 문학과 생애 속에는, 어머니 라는 테마와 관련된 요소들이 다수 발견된다. 후 15) 위의 책, 41~42쪽, 전집 220~221쪽.

316 한국문학논총 제46집 일의 시 작품 일부를 보기로 한다. -아즈머님 지금 울고있는 저 벅국이는 작년에울든 그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드레박을 넘처흐르는 푸른하늘만 길어올리시네 드레박을 넘쳐흐르는 푸른 傳 說 만 길어올리시네 <낡은우물이잇는 風 景 > 2,3,4연 이 寫 眞 을 보세요, 어머니 [중략] 당신은 永 遠 한 基 地, 어머니 / 白 髮 이 勳 章 보담도 華 麗 하오 < 航 空 哀 歌 > 2연, 6연 16) 전자는 김종한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온 작품의 하나다. 화자의 돈호가 작품의 미감을 지탱하는 중요 요소인데. 그 대상은 이상화된 중년 여성, 즉 화자를 포용해들이는 정서적 친숙감과 이성적 매력을 겸비하고 있는 중년 여성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김종한의 이상화된 여성상 혹은 어머 니상 은 이런 곳에 그 일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밑의 작품은 시국 문제를 주로 쓰던 시기의 일본어 작품인데, 자신의 회고담과 대응 되는 느낌을 줄 정도로 확대된 어머니상 이 제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그의 생애 속에는 여성 문제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다. 17) 전통 여성의 삶의 애환에 대한 연민이 형상화되어 있는 민요시들 18), 첫 사랑의 연인에 대한 공공연한 언급들, 최정희 여사에 대한 집요한 구애, 16) 순서대로 林 和 편, 現 代 朝 鮮 文 學 全 集, 學 藝 社, 1939.1, 186쪽, 전집 47쪽. 文 章 1941.4. 178~179쪽, 전집 141~142쪽. 17) 한때 김종한의 직장 동료였던 정비석은 종한은 불우한 인생 탓인지 여성에의 동경이 매우 강했다 고 밝힌 바 있다고 한다. 연보, 전집 862쪽. 18) 본 논문의 4장 참조.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17 투병 중에 간호하는 여성을 범했다는 에피소드 등이 그것이다. 19) 앞서 도 거론한 바 있으나, 그의 인생 속에는 어머니 체험과 관련된 모종의 욕망의 결핍 이라는 말로 집약 가능한 심리적 트라우마 내지 이와 관련 된 복합감정이 있으며, 그것이 그의 문학적 생애를 관통하는 보상적 기 제로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Ⅲ. 私 的 세계로서의 문학과 金 億 과의 사숙 관계 위에서도 예를 보았지만, 김종한은 자기 를 거리낌없이 외부에 발설하 는 스타일을 갖고 있다. 그가 문학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밝힌 대목도 그렇다. 民 謠 뵈짜는색씨 / 作 者 略 歷 / 乙 巴 素 / 本 名 은 金 鍾 漢 二 十 一, 明 川 立 石 産 鏡 城 高 普 卒. 同 姓 同 名 의 友 人 에게 연인을 빼앗긴 까닭으로 關 西 로 滿 洲 로 노쓰탈챠의 애닯은 放 浪 을 하고잇다가 지금은 故 鄕 의 私 立 高 에 落 着 하야 生 의 再 出 發 을 計 劃 하고잇다. 20) 민요시 <뵈짜는색씨>가 중앙지에 세 번째로 당선되었을 때 김종한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이다. 21) 주목되는 것은 同 姓 同 本 의 友 人 에게 연인을 빼앗긴 까닭으로 노스탈챠의 애닯은 放 浪 을 하고 있다가 라는 19) 첫사랑 연인 건은 다음 3장 내용 참조. 최정희 여사 건은 김영식 편 작고문인 48인의 육필서한집, 민연, 1999, 368~389쪽 참조. 병원 에피소드는 유정, 好 漢 孤 獨 金 鐘 漢, 現 代 文 學 1963.2, 291쪽, 전집 812쪽 참조. 20) 朝 鮮 日 報 1935.1.3, 전집 13쪽. 21) 김종한의 시가 최초로 중앙지의 현상문예에 당선된 것은, 1934년 소곡 <임자업 는 나룻배>로 別 乾 坤 의 第 1 回 新 流 行 小 曲 大 懸 賞 에서, 두 번째는 같은 해 동 지에 역시 소곡 <빨내하는색시>로 당선된 것이었다. 김종한연보, 전집 850 쪽 참조.

318 한국문학논총 제46집 대목이다. 실연이 청춘기의 최대의 사건인 것임은 당연하나, 22세의 교 사가 중앙 일간지에 공표한 행위로서는 상당히 이색적이다. 다소의 稚 氣 와 함께, 자신의 고통을 극화시킴으로써 세인의 주목을 끌고 싶어한 듯 한, 동기상의 순진성 역시도 읽혀진다. 문제는 이 에피소드가, 그가 문단 에서 자리를 굳혀 가던 28세 때에도 본격적으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音 樂 倚 子 라는 유희가잇다. 참가하는 인원수보다 倚 子 의 수를 하나만 적게놋는다. 音 樂 에마처 의자의 圓 周 를 돌다가 갑자기 音 樂 이 중지되면 倚 子 에안저야한다. 의자에 안지못하고만 나머지한사람만은 餘 興 을해야 되는것이엇다. 열일곱살 된 少 年 은 흔히 나머지 한 사람이 되어 餘 興 을 해야할 것이 다. 그때 떨리는 목소리로 부른 노래가 무엇이엇든지는 지금 기억에 남 지 안핫스나 실내가 電 燈 불빗으로 花 環 처럼 밝앗든 것과 또 金 禮 童 이란 배아트릿체가 잇섯든 것만은 잇처지질 안는다. 십년후에 그 소년은 북쪽 항구 雄 基 로 돌아가보앗다 두 어린애의 어 머니가 된 그 女 人 은 침착한 얼굴로 방문해주는 것이엇다. 나도 조용한 심정으로 그 여인의 어린애를 쓰다듬어줄수가 잇섯다. 흔히 世 上 사람들은 사회를 위하야 문학을 試 作 했다는 말을 公 言 하나 부끄러운 告 白 이지만 나는 베아트리체를 憎 惡 할 方 便 으로 詩 를 始 作 햇 다. 22) (밑줄:인용자) 6년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베아트리체 에 대한 집착 이, 성년이자 문인으로서의 본격적인 행로에 들어서 있었던 그에게 문학 적 표현 욕구의 근본 동기로서 자리하고 있었다는 고백을 여기에서 들 을 수 있다. 한국 사회 속에서 문인이 지녀온 전통적인 사회적 이미지를 고려할 때, 그리고 문단 내에서 나름의 위치를 구축해가던 김종한의 위상을 고 려할 때, 이 고백은 여전히 이색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다른 문인들은 22) 김종한, 憎 惡 의 倫 理, 每 日 新 報 1941.8, 전집 418쪽.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19 사회를 위하야 문학을 시작했다는 말을 공언'한다는, 어딘가 반어적인 뉘앙스마저도 풍기는 말을 그가 부언한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바로 이 점이 김종한이라는 인간이 갖고 있었던 개성임과 동시에 그가 갖고 있었던 새로운 세대의식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사회 나 역사 민족 과 같은 거대 담론의 세계가 아니라 개인적이고 사소한 세계 가 문학적 출발점이 되었다고 거침없이 고백하는 김종한의 모습, 이 속에서는 선배 문사들의 면모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자기의 현재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그 부끄러울 수도 있는 점 을 대수롭지 않게 공표하는 새로운 세대 감각을 지닌 청년의 모습이 여기에 제시되어 있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3) 한편으로 습작기의 그에게 문학적 동기를 부여한 인물로서 김억의 존 재를 빼놓을 수 없다. 베아트리체 체험이 원초적인 표현 욕구를 유발케 한 동기였다면, 기성 문사 김억은, 창작 방법론 내지 문학관의 형성이라 는 본격 문학 수업 과 관련된 자극을 그에게 줄 수 있었던 인물이기 때 문이다. 우선 두 사람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최초의 기록을 소개한다. 新 春 文 藝 當 選 者 紹 介 / 民 謠 望 鄕 曲 ( 當 選 ) / 金 鐘 漢. 名. 乙 巴 素 二 三 歲. 咸 北 明 川 立 石 出 生. 鏡 城 高 普 卒 業 後 西 關 大 學 中 途 退 學. 岸 曙 의 知 遇 를 받아 詩 歌 修 業 에 다시 立 志 하엿다고. 즐겨 民 謠 를 쓰고 小 曲 을 읊는다. 現 在 는 故 鄕 사립 高 校 에 在 職. 24)( 은 판독 불능:인용자) 23) 김종한의 민족주의 부정 논리 및 일본어에 대한 친화성 등 신세대 감각과 관련 해서는, 정종현, 식민지 후반기 한국문학에 나타난 동양론 연구 (동국대 박사 논문, 2005)가 본격적이다. 172~188쪽 참조. 다소의 이견은 있다. 가령 청년들 에게는 실감으로서의 민족주의란 있을 리 없다 ( 一 支 의 倫 理 國 民 文 學 1942. 3)는 등 신세대적 극언을 김종한은 아끼지 않았지만, 이 말은 신지방주의 론의 설득력을 더하기 위한 논리 혹은 일본측의 오해 가능성에 대한 자기방어 적 논리라는 맥락과 함께 읽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24) 東 亞 日 報 1936.1.14 전집 31쪽.

320 한국문학논총 제46집 1936년 김종한은 김억의 지우( 知 遇 )를 받았다 즉 김억에게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고 썼다. 이 사실은 다음 기록에서 바로 입증된다. 그만은 작품에서 나는 을파소 한사람을 발견하엿을 이외다. / 이 신 인에게 나의바라는바는 실로 크외다. 모도다 시가가 되랴다가 되지못한 관을 주는 시가 중에서 을파소의 작품만은 뛰여나게 의의와 가치를 가 졋든 것이외다. 이리하야 을파소의 작품이 어려편이 되엿습니다. 아무리 조흔상이라도 시가에서는 그 표현의 기교가 능치못하면 아모러한 의미 도 가질수업는것이외다. 을파소의 想 그것과 가튼것이 얼마든지 잇섯것 만은 표현으로의 기교와 용어가 그곳을 잊지못하여서 아모것도 되지못 한것이만핫다는 말을하나 부기에 두고십습니다 / 을파소의 그것은 능하 외다. 소위 기성시인으로서 이만한 표현능력을 가지지 못한 것을 볼 때 에 이 신인에게 나의 기대는 압날을 괄목치 아니할 수 없습니다. / 을파 소의 <가기는 가오리다> <나머지한밤> 가튼 것은 유행가외다. 이러한 것은 귀사에서 레코드회사에 이약기하야 [마스크]를 통케 하는 것이 조 흘이라 합니다. 25) 1935년 김억이 공개한 심사 결과 중에서 김종한 부분만을 인용한 것 이다. 같은 호에는 김종한의 시 < 巨 鐘 >이 실려 있는데, 김억은 이것과 그가 '유행가'라고 평가한 투고작 다수를 뽑았던 것 같다. 김억의 평가 내용은 단순하다. 기성시인보다 표현 기교가 능하 며 앞날을 괄목치 아 니할 수 없 다는 것이다. 표현기교가 능하다는 평은 훗날 김종한을 文 章 에 추천할 때의 정지용의 발언과 동일하다. 어쨌든 이 내용을 보면, 김종한의 知 遇 관련 소개 내용은 앞뒤가 맞 는다. 1935년 김억의 知 遇 를 받고 작품을 三 千 里 에 실었으며, 이듬해 1936년에는 민요 < 望 鄕 曲 >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까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종한은 김억의 지우를 받고서 詩 歌 修 業 에 立 志 한 것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이전부터 김억의 문학 25) 金 岸 曙, 詩 歌 의 選 을 끝내고, 三 千 里 1935.12, 200~201쪽. 전집 22~23쪽.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21 세계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 관심을 활자화하여 중앙지에 발표까지 한 적이 있다. 4년 전 18세 때, 즉 경성고보 재학 시절에 그가 東 光 에 발표한 번역 한시 < 野 老 歌 - 岸 曙 의 譯 詩 論 을 읽고>가 그것이다. 한시 원 문은 제외하고 역문만 인용한다. 늙은아비 홀로 가난에지처 / 사흘가리 火 田 이나마 씨뿌리고김매고 가 진 苦 초로 / 秋 收 할곳 바이없는 이내 身 勢 에 / 納 稅 만은 如 前 히--먹을것 없네 // 보라 우리들의 피땀을 짜내어 / 그네들의 倉 庫 의 채움을- / 이 해도 저물어 서리바람 살쩜을어이는데 / 먹을것없는 빈방안에 쌀살한 바람만 掩 襲 하는고녀 // 우리들은 이리하야 헐벗은 무명옷을 부등케쥐 고 / 뒷 東 山 에올라 도토리를 줏는것이옵네 / 江 中 의뜨노는 배(선)안에서 / 勸 酒 歌 一 曲 이 바람에 쓰처올때 / 피방아찌는가삼을 살못이 눌리고서 / 배안에기르는 김생들의 生 活 도 / 우리보다 나은것을 똑똑히 알엇네 26) 소작농의 생활고와 유한계급에 대한 계급적 증오가 주된 내용을 이루 고 있다. 번역시이긴 하지만, 이런 테마는 김종한의 이후 작품에서는 나 타나지 않는 세계다. 10대 후반의 김종한은 이런 세계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어쨌든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이 작품이 안서의 역시론을 읽고 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역 시가 안서의 譯 詩 論 을 읽고 난 뒤 그에 응대하는 형식으로 씌어진 글 이라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과연 김억은, 김종 한의 이 역시가 발표되기 수개월 전에 譯 詩 論 ( 上, 下 )을 같은 東 光 지 에 발표한 적이 있다. 東 光 21호와 22호에 게재된 김억의 譯 詩 論 은, 한시 번역 예문을 다수 제시하면서 자신의 문학관과 번역관을 밝힌 글이다. 10페이지에 달 하는 장문이지만 중심 논리는 단순하다. 김종한의 훗날의 문학론 내용과 연관된 부분이 많으므로 그대로 인용한다. 26) 김종한, 野 老 歌 - 岸 曙 의 譯 詩 論 을 읽고, 東 光 26호, 1931.10.4, 95쪽. 전집 4 쪽.

322 한국문학논총 제46집 시가란 결코 번역할 것이 못됩니다. 이 점에서 나의 역시 불가능론이 그 의의와 주장을 가지게 됩니다. [중략] 시가의 무어라 말할수업는 묘미는 언어 그 자신의 어미와 어의와 어음과 어향을 도라보지 아니하 고는 맛볼수업는 것이외다. 의미의 정확만으로 유일한 목적삼는 과학서 류나 법률의 조문같은 것에 사용되는 언어와, 문예품에 사용되는 언어 에는 근본부터 그 성질이 다른 것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는 일이외다. [중략] 의미와 어감으로의 시가를 그대로 옴겨놓지 못하는 것을 우리 는 진정한 의미로의 역시라고 볼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곳에는 원문 시의 가진바 조건 전부를, 다시 말하면 시가의 형식이니, 음조니, 어미 니, 어수니 하는 것을 전적으로 옴겨놓은 것이라야 신정한 역시라로 평 가할 모양이니 [중략] 한마디로 말하면 역시의 가치는 원시의 여하에 있는 것이 아니요, 전연히 역자의 시적 소질 여하에 있는 것이외다. [중략] 이미 역시란 [중략] 역자가 그 자신의 개성을 거쳐서 창작하 는 것이 좋은 일이라 합니다. 27) 김억은 문학 언어와 산문언어와의 차이점을 설명한 뒤, 번역 불가능 론 을 제시한다. 음조 어미 어수 등 원시가 갖고 있는 조건 전부 를 번 역시 속에 옮겨놓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어 실천적인 번역 방 법론으로는 역시 창작론 을 제시한다. 번역시는 원시와는 별도의 존재로 서, 역자의 시적 개성을 거쳐 새롭게 형상화된 창작품이라는 결론이 그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자면 김억의 논리는 문학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형식 주의 문학론의 한 형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8세의 문학도였던 당 시의 김종한은 이 논의에서 상당한 문학적 자극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그가 부랴부랴 한시를 번역해서 東 光 에 투고한 이유, 안서 의 역시론을 읽고 라는 부제를 달았던 이유는, 김억의 역시론 에 대한 자신의 감동 과 그 실천 예를 김억에게 직접 보이고, 또 그로부터 지우 를 받고 싶었던 데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7) 김억, 譯 詩 論 上, 東 光 21호, 1931.5.1, 박경수 편 金 億 全 集 5 文 藝 批 評 論 集, 韓 國 文 化 社, 1987, 486~488쪽.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23 이상의 예를 통해서 김종한은, 三 千 里 에서 김억으로부터 智 愚 를 받 기 이전부터 이미 김억의 문학론을 공부 하고 있었으며, 또 그로부터 인 정을 받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까지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습작기의 김 종한에게 있어서 김억이라는 유명 문인은 사숙의 대상이었음이 확인된 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 김종한과 김억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는 김종한이 쓴 민요시들, 그리고 후일 김종한이 발표한 여러 시론 속에서도 그 흔적 이 확인된다고 생각한다. 민요시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루고, 후자를 보 기로 한다. 김종한의 시론의 요점은 선행 연구에서도 명료하게 제시된 바 있지만, 28) 예문을 추가해서 재론해 보기로 한다. 시인은 인생비판이나 사회비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의 예술시, 즉 서정시를 창작할 때는 그러한 관념을 노출하거나 논의해서 는 안될 것입니다. 29) 詩 에 要 求 할 思 想 性 시로 맑시즘을 연설하고 다시 그것으로 知 性 을 연설했다고, 제군은 그런 것을 시 자체의 進 化 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 우리가 시에 요구할 사상성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산문으로서도 가능한 관념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산문이 될 수없는 <그러한 관념>을 가진 부분이 시가 된다. 거 기서 시문학의 獨 自 性 과 自 律 性 이 분화되는 것이다. 30)(밑줄:인용자) 현대를 광의로 寫 實 主 義 의 시대라고 말할수있다면 그것에 결합시킬 시단은 당연히 純 粹 詩 등의 超 俗 的 인 이념이어야 할 것입니다. / 그리 고 明 日 의 西 洋 詩 의 正 統 도 포오, 마라르메, 보오들레에르, 바레리이 等 을 연결하는 순수한 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조선시단에서는 [중략] 低 腦 無 智 한 시인들이 自 然 主 28) 오오무라 마스오, 김종한에 대하여 앞의 책, 248~249쪽. 29) 김종한, 詩 集 憧 憬 讀 後 感, 海 峽 三 文 社, 1938.10, 5쪽, 전집 376쪽. 30) 김종한, 나의 作 詩 設 計 圖, 文 章 1939.9, 129쪽. 전집 384쪽.

324 한국문학논총 제46집 義 에 데모크라시이의 沒 詩 觀 念 을 결합시켰습니다. 그때에 활약한 23인 의 시인들은 演 說 草 案 같은 시를 써놓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중략] 충실한 맑스의 제자들은 위대한 속물인 막스의 배설물을 시적 이념으로 오신하고 시의 예술성을 선전비라에까지 低 落 시켜버렸습니다. 31) 특히 詩 에 있어서는 內 容 이 形 態 에 內 屬 하는 것이므로 言 語 自 體 의 美 를 떠나서는 如 何 한 詩 想 도 思 想 도 空 虛 한 觀 念 에 不 過 한 것입니다. 32) (밑줄:인용자) 위의 내용 중 초속적 이념으로서의 순수시 론 등은 발레리가 유행했 던 것으로 보이는 1930년대 일본 문단의 풍조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면 밀하게 검토해봐야 할 대상이므로 구체적 논의는 피한다. 그러나 그 차 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위의 논리의 핵심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용이 형태에 내속 한다는 형태우위론적 입장을 갖고 있는 그는, 김억 처럼 시문학의 독자성과 자율성 론을 중심에 놓고, 관념과 예술적 형상 과의 관계에 대해 논하고 있다. 또 그는 김억처럼 산문과 시, 관념과 시 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해 논하고, 예술 밖의 차원에 존재하는 관념과 예 술적 형상 속에 녹아든, 즉 육화된 관념 과의 차이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문학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 면에서 볼 때, 김종한의 문 학관은 김억의 문학관과 먼 거리에 있지 않으며, 그 문학관의 형성의 이 면에는 역시 소년기의 김억 체험이 밑바탕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외에도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후일 김종한의 직업적 자의식의 중 요한 바탕이 된 번역가로서의 모습이다. 물론 김종한이 번역가로서 적극 적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사토 하루오( 佐 藤 春 夫 )와의 교류를 포함한 여러 변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33) 그러나 국내에서의 문학수업기에만 31) 김종한, 詩 壇 改 造 論, 朝 光 1940.3, 전집 403~404쪽. 32) 김종한, 詩 文 學 의 正 道, 文 章 1939.10, 199쪽. 전집 386쪽. 33) 오오무라 마스오, 김종한에 대하여 앞의 책, 247~248쪽, 257~258쪽 참조.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25 국한한다면, 당시 김종한이 지켜보기 쉬웠던 국내 번역가의 모델은 김억 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김억의 역시론 속에 등장하는 많은 양의 번역 예, 그리고 당시 김억이 번역문학계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위 치, 그런 그를 김종한이 주목하고 있었던 사실을 종합해 보면, 역시 김종 한은 김억으로부터 번역가로서의 자아상도 부여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Ⅳ. 신민요의 창작과 김사엽과의 민요논쟁 기존 연구 성과 중에는 김종한의 초기 민요시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엿보인다. 일리가 있다고 보나, 필자는 관점을 약간 달리해서 보고 싶 다. 34) 1935년(22세)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 민요부문에 당선된 김종한의 <베짜는 각시>를 예로 제시한다. 1 봄이야 오든 마음 서러운 맘에 바듸나 울려가며 해[를 지]우네 / 들 고짱 노코짱짱 / 노코짱 들고짱짱 / 바듸나 올려가며 해를 지우네 3 북에다 감은 실은 물려가건만. 가삼에 매친 실은 엉켜가네 / 들고짱 노코짱짱 / 노코짱 들고짱짱 가삼에 매친 실은 엉켜만가네 4 열두새 이 가는 배 다짜고 나도 한번 간 그님이야 올 줄 잇스리 / 들고짱 노코짱짱 / 노코짱 들고짱짱 / 한번 간 그님이야 올 줄 잇스리 5 봄이라 봄이라고 서름도 자라 바듸만 올려가며 해를 지우네 / 들고 짱 노코짱짱 / 노코짱 들고짱짱 / 바듸만 올려가며 해룰 지우네 35) (띄 어쓰기: 인용자) 34) 박경수는 김종한의 민요가 순수미학과 서정성에 치중한 나머지 현실과의 대응 력을 갖추지 못했으며 때문에 불행한 시사의 굴레 속에 빠져들었다 고 보았다. 박경수, 한국근대민요시 연구, 부산대 박사논문, 1989, 199쪽. 35) 朝 鮮 日 報 1935.1.12 전집 13쪽.

326 한국문학논총 제46집 이 작품은 조선일보 민요 부문 에 투고된, 말하자면 애초부터 당시의 통속 장르였던 신민요 장르를 목표로 씌어진 작품이라는 점을 먼저 전 제로 하고 싶다. 작품 속에는, 가신 님 에 대한 한을 품고 있는 여성으로 설정된 전통 여성의 다양한 생활감정이 베짜기 작업 과정과 맞물려서 노래불려지고 있다. 바디질 작업 시의 올리고 내려놓는 손동작과 짱 하 는 바디소리 의성어를 섞어 짠 후렴귀도 참신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 속에서 빛나는 것은, 베틀을 동반자로 삼고 살아가며 삶의 애환 을 감내해야 했던 전통 여성들의 바디 소리의 원한, 36) 그것으로 연민 의 눈으로 지켜보아 온 숨은 화자(implied narrater)의 존재다. 그 화자가 후일 제2의 김문집 이라 불리운 문제아 김종한이라면, 믿기 어려운 데가 있다. 시적 재능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거나 향토문화에 대한 체질적 관 심 내지 전통 여성의 삶에 대해 연민적 공감을 공유해오지 않은 이라면 쓰기 어려운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훗날의 그의 평론활동의 핵심개념이 었으며, 암흑기 문단의 중요 표제이기도 했던 신지방주의론 역시도 이 러한 향토적 체험의 위에서 성장하고 있었던 개념이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바로 이 작품의 작자가 22세 청년교사 김종한이었던 것이며, 그 재 능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객관적 결과로 입증되고 있었던 것 이다. 이 작품을 위시해서 당시의 김종한은 레코드 발매를 전제로 한 신민 요(당시 명칭으로서는 유행소곡 내지 민요 )의 창작에 적극적으로 손을 대고 있었다. 37) 1935년 별건곤 의 현상 모집에 유행소곡 <임자없는 36) 김종한, 民 謠 를 通 해 본 吉 州. 明 川 1, 朝 鮮 日 報 1936.8.7, 전집 365쪽. 37) 민요 혹은 유행소곡 으로 불리운 김종한의 작품들이 전통 민요나 유행가요와 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 그 자신이 신민요 라는 명칭을 사용한 점, 학계에서 신 민요 명칭이 사용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김종한의 이 부류 작품들에 신민요 라는 명칭을 붙여보았다. 신민요 란 유행가와 더불어 대중가요의 큰 줄기를 이 루었던 노래 장르로서 연주를 전제로 개인이 작사 작곡한 장르라는 특징을 갖 는다. 악곡, 사설 모두 민요계 잡가(통속민요) 및 동시대 유행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전선아, 일제강점기 신민요 연구, 강릉대 대학원 석사논문, 1998,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27 나룻배>, < 내하는 색시>가 연속 당선된 후 1938년까지는 현대시 습 작을 계속하는 한편으로, 신민요 작품 다수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중앙지에 발표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 시기에 그의 재능이 가 장 활발하게 발휘되었던 장르는 신민요 장르였다고 생각된다. 이 점을 볼 때 이 시기의 그는, 1920년대 중반 김소월을 내면서 개화를 보았으며 이후에도 한국 시사의 저변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던 김억 류의 민요 시 운동의 영향권 아래에서 성장하고 있었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38) 신민요의 연이은 당선 및 발표로 지명도를 높여가던 김종한은 민요 이론 역시도 지상에 발표한다. 民 謠 를 痛 해 본 吉 州 明 川 (전3회) ( 朝 鮮 日 報 1936.8.7~9), 新 民 謠 의 情 神 과 形 態 (전4회) ( 朝 鮮 日 報 1937.2.6,7, 9,13)가 그것이다. 특히 후자는 김사엽의 즉각적인 반론의 대상이 될 정 도의 자극적 요소를 갖고 있었는데, 39) 이 역시 김종한의 문학관이나 성 격적 특질이 잘 드러나 있는 자료여서 고찰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4회에 걸쳐 연재된 이 글은 신민요의 예술적 계보, 신민요와 개성 신민요의 템포 신민요의 시대성 이란 4장으로 나눠져 있는데, 주된 논지는 첫장에 요약되어 있다. 첫장에서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民 謠 는 스사로 發 展 하는 것이 아니다 發 展 하는 것은 生 活 樣 式 이다. 다시 말하면 生 産 樣 式 과 交 通 樣 式 이다. 生 活 樣 式 의 發 展 이 새 文 化 를 産 出 하고 그 文 化 의 一 部 分 으로 새 문화의 民 謠 樣 式 이 出 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新 民 謠 는 新 民 謠 이전의 모든 傳 統 的 民 謠 에서 出 發 해야할 何 等 의 義 務 도 없다. 新 民 謠 는 土 民 民 謠 가 終 焉 되는 곳에서 새로 出 發 할 65~66쪽 참조. 38) 김종한의 윗글에는 김소월의 민요시 산 을 주옥 같은 작품이라고 소개하며 인 용하는 대목이 나온다. 전집 370쪽 참조, 39) 김사엽, 藝 術 民 謠 存 在 論 -그 時 代 性 과 土 俗 性 에 關 하야 (전4회) 朝 鮮 日 報 1937, 2.20~24. 전집 727~731쪽 참조.

328 한국문학논총 제46집 民 謠 形 式 일 것이다. [중략] 新 民 謠 의 特 異 性 은 곳 그것의 母 胎 되는 現 代 社 會 機 構 의 反 映 絶 對 的 인 그리고 必 然 的 인 反 映 일 것이다. 40) 시인 유정은 김종한의 시와 행동 속에서 簡 明 直 裁 를 읽어낸 바 있지 만, 41) 그의 산문 역시도 그런 것이 아닐까. 짧고 단정적이며 논리의 이 동이 신속한 그의 특징적인 문체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글에 서 특징적인 것은, 김종한이, 당시 새로운 대중 시가 장르로 등장한 신 민요 를 고찰하는 그 관점이다. 그는 예상과 달리, 작품 내부에서 출발하 는 방식, 즉 형식주의적 관점에서 신민요를 보고 있지 않다. 문학을 둘러 싼 외부 환경, 즉 사회 역사적 발전 단계라는 관점에서 그 현상을 포착 하고 있다. 생산양식과 교통양식 이 문화를 결정한다고 김종한은 말하 는데, 이는 기실 맑스주의 문학관의 대전제, 즉 하부구조인 생산양식이 상부구조인 문화를 결정하는 주요인이 된다는 사고방식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앞장에서는 그가 문학의 독자성과 자율성론을 옹호하는 김억류 의 문학관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장르라는 거시적인 문 학현상을 다룰 때의 김종한은, 1920년대 프로문학식 표현을 빌면, 과학 적 인 관점을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김종한의 문학관 속에는 이런 사회과학적 안목 내지 유물론적 안목도 겸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장의 마지막에는 그의 논의의 요점이 차례대로 요약되어 있는데, 이를 원문 그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제작과정으로 보면, A 自 然 發 生 的 이든 民 謠 가 일정한 作 詩, 作 曲 家 에 의하야 代 辯 적으로 製 作 되게 된 것./ 文 學 방면은... 土 性 의 敗 北. 時 代 性 의 勝 利 / 人 生 에 대하야 否 定 的 정신 / 音 樂 면은 歌 謠 曲 에의 接 近 / 單 旋 法 의 獨 步 / 傳 播 常 態 로는 機 械 藝 術 (레코-드, 라디오)파의 握 手 / 消 費 40) 전집 369쪽. 41) 유정, 好 漢 孤 獨 金 鐘 漢, 現 代 文 學 1963.2, 290쪽. 전집 811쪽.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29 體 系 的 / 傳 播 期 間 이 매우 짜른 것 / 都 市 에 流 行 하다가 農 村 에서 사라 짐 / 노래하는 것보다 듣는것이 위주가 되어 감. 따라서 勞 動 民 謠 의 상 실 42) 김종한은 당시 시단에 대두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민요 내지 유행 소곡을 재빨리 신민요 라는 장르명 아래 묶고 그것이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 하에서 탄생 발전되어 갈 새로운 대중 장르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김사엽은 김종한의 이런 관점이 한국 의 전통 민요에 대한 모독이라며, 격앙된 투의 반론을 제기하였다. 金 氏 가 본 소위 新 民 謠 란 아름답지 못한 名 稱 하에 구솔하야서 精 神 上 으로나 形 態 上 으로나 完 全 히 民 謠 와 絶 緣 시킨 다음에 曖 昧 한 時 代 性 을 드러 그에게 依 據 하야서 새로히 出 發 할 것이라 하얏고 노래하는 것보 담듯는것이 위주 가 된다하며 大 膽 히도 鄕 土 性 의 敗 北 勞 動 民 謠 의 喪 失 까지를 豫 言 하야 너무도 獨 斷 的 인 創 說 에 讀 者 로 하여금 啞 然 치 안흘수 업게 하엿다. 43) 뒤를 이어 김사엽은, 김종한이 말한바 신민요와 같은 저속한 유행가가 아니라, 민족 고유의 이디옴 을 계승한 새로운 예술민요로 이를 계승 발 전시켜 가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럼으로 藝 術 民 謠 라 하야 民 族 의 思 想 과 풍상( 傳 統 的 인)과를 떠나서 민족의 문학을 이저버리고 다만 자기 一 身 의 一 時 의 興 에 겨워 技 巧 에 만 끄칠 것이 아니며 形 態 며 音 樂 的 방면도 民 族 固 有 의 [이디옴]을 멀 리 떠나서는 안될 것이다./ 이럼으로 民 謠 창작과 流 行 歌 창작과는 그 稱 譽 이며 形 態 에 잇서서 根 本 的 으로 크다마한 지정이잇다. 불행이도 이 구별을하지못한 乙 巴 素 는 크다란 過 誤 를 犯 하고 마럿다. [중략] 지금 은 舊 民 謠 와 新 民 謠 와의 過 渡 期 에 잇스니 將 來 할 藝 術 民 謠 는 在 來 民 謠 42) 전집 369쪽. 43) 朝 鮮 日 報 1937.2.20 전집 727쪽.

330 한국문학논총 제46집 에 대한 기픈 認 識 을 파악하야 이속에다 根 據 를 두고 出 發 하여야 할 것 이다. 이 根 本 觀 念 을 무시하고 지금 盛 行 되는 流 行 歌 의 現 象 을 가지고 新 民 謠 의 그것이라고 논한 乙 巴 素 의 觀 點 을 좀더 올흔 角 度 로 향하야 再 認 識 치 안는다면 그의 論 을 축조검토한들 徒 勞 에 그치고 말것이다. 44) 전체적으로 보건대, 김사엽은 당시의 신민요 를 저속하게 보고, 대안 적인 민요 문화를 제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견해는 경청의 가치가 있겠으나, 현실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그 추이를 냉철하 게 예측하는 면에서는, 그는 이상론자 특유의 약점을 여기서 노출하지 않았는가 생각되는 바가 있다. 김종한의 경우는, 신민요의 저속성 에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나아가 민요의 이상적인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데에도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신민요 적 작품을 발표해 오면서 문명을 얻었으니, 일부러 그럴 필요성도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현재 발생하고 있는 새 로운 민요현상의 특성을 면밀히 살피면서, 그것의 발생 원인을 사회경제 적인 측면에서 찾았다. 그리고 같은 관점에서 신민요 현상이 앞으로 전 개되어 갈 방향성도 예측했다. 위에서 보다시피 개별 항목은 많으나, 그 가 결국 신민요 현상의 추이 속에서 보아낸 것은, 통속적인 대중문화가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이 판 단이 정확했음은, 후대의 역사는 물론 식민지시대의 대중가요나 신민요 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보증하고 있는 바다. 45) 김종한과 김사엽이 신민요를 두고 벌인 논쟁을 보면서 다시금 김종한 이라는 인간의 생의 스타일을 생각하게 된다. 김사엽이 목전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이상주의적 지사적 스타일을 고집했다면, 김종한은 현실의 44) 朝 鮮 日 報 1937.2.24 전집 731쪽. 45) 신민요가 자본주의 체제에 부응하는 대중문화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은 당시의 대중가요 및 신민요 연구 성과 속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박용구 신 문화 100년, 신구문화사, 1971, 이영미, 일제시대의 대중가요, 노래 1 실천문 학사 1984, 위의 전선아 논문 참조.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31 추이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그 대세에 일정하게 따르면서 미래를 예측해 가는 분석가적 스타일 내지 현실주의적 스타일을 보여주었던 것이 아닌 가 생각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이런 스타일 역시도, 앞장에서 본 바 와 같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지언정 현재의 사실 을 있는 그대로 인정 하고 공표하는 그의 신세대적 스타일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도 볼 수 있 겠다. 김종한이 國 民 文 學 편집을 시작한 1942년 무렵부터에 대한 견해지 만, 임종국은 현실의 추이를 대하는 김종한의 생의 스타일에 관해서 다 음과 같은 발언을 남긴 바 있다. 다른 文 章 출신에게는 없었던 전쟁에의 관심, 이것이 김종한의 명민 한 시대감각에서 오느냐 아니면 시류에 영합할 줄 아는 능난한 처세술 이냐? 이 질문은 어디까지나 그의 인간 및 작품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 요 따라서 이 책이 상론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김종한은 <누구 보다도 먼저 춘복을 입>으려던 그의 의지처럼 文 章 출신 중에서 가장 일찌기 자기의 좌표를 마련한 사람이었고 또한 그 무렵의 시류에 동조 한 유일인이었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 46) 임종국 특유의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과연 임종 국의 발언대로 인간의 본질 에 관한 평가는, 혹 그 대상에 대한 연구성 과가 풍부하게 축적되었다 하더라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러나 그의 초기 문학 수업 시대의 면모에 국한시켜 볼 때, 이 시기의 김 종한은 임종국이 진단한 바와 같은 명민한 시대감각 을 연상케 하는 생 의 스타일을 일부 보여주었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닌 듯하다. 물론 이 런 명민함 이 김종한이라는 인간의 총체적 특성이라고 단정할 수 없음 은 물론이다. 앞에서 보아온 바대로 그는 상실한 어머니 라든가, 향토와 민요 장르에 대한 집착, 그리고 형식주의와 유물론이 공존하는 다중적인 46) 임종국, 친일문학론, 평화출판사, 1979, 232~233쪽 참조.

332 한국문학논총 제46집 문학관 등을 이 시기에 노출해 왔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전체상이 보다 뚜렷하게 제시될 수 있을 때까지, 그의 인간과 문학에 대 한 구체적 연구, 나아가 평전적인 종합적 연구가 본격화되어야 할 필요 성을 실감하는 것은 물론이다. Ⅴ. 결 론 김종한의 초기 문학 수업 시대 면모의 일단을, 유소년기의 성장사적 측면, 문학관의 형성과 주변 문인과의 영향 관계, 당시 그가 가장 큰 능 력을 발휘했던 장르인 민요시 창작 및 민요 이론 중심으로 고찰해보았 다. 각각의 검토 결과를 요약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시인이자 한학자였던 외조부를 문학적, 인격적 모델의 하 나로서 학습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종한의 한학적 소양, 낭만적 시인으로서의 면모, 유모러스한 독설을 구사하는 발화 스타일 등의 이면 에서 외조부로부터의 영향을 읽을 수 있었다. 두 번째, 김종한은, 계모와의 갈등 때문에 평생을 불우하게 살았던 일 본의 시인 고바야시 잇사( 小 林 一 茶 )와 연민적 교감을 나누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종한 자신도 양자로서 모성애의 결핍 이라는 트라 우마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자신의 양자 체험을 민족적 차 원으로 확대시키는데, 결핍된 모성체험 의 보상이라는 과제가 그의 생의 주요 과제로 기능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해 보았다. 세 번째, 역사나 민족 같은 문제가 아니라 실연 때문에 문학을 시작했 다고 공언한 그의 발화스타일 속에서, 그가 私 的 인 세계를 중시하며 거 리낌없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문학세대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네 번째, 그는 김억에게서 인정을 받고 문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소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33 년기부터 그를 私 淑 하고 있었으며, 후일의 그의 문학론 속에 김억의 형 식주의적 문학관과 관념의 육화 론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섯 번째, 그가 청년기에 다수 발표한 신민요 속에서 김종한의 시적 재능 및 향토적 세계, 전통 여성의 삶에 대한 공감도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체험이 그의 신지방주의론 의 맹아가 되었을 가능성도 생 각해 볼 수 있었다. 여섯 번째, 그의 신민요론 속에서, 그가 현실의 추이를 냉철하게 분석 해내는 분석가적 기질과 대세에 거스르지 않는 처세 스타일을 갖고 있 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또 그는 김억류의 형식주의적 관점 이외에, 문학현상을 사회과학적 안목, 즉 유물론적 안목을 갖고 분석하는 관점 역시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제어 : 김종한, 김억, 고바야시잇사, 小 林 一 茶, 김사엽, 친일문학, 국민 문학, 신민요, 민요시, 신지방주의, 번역시, 일본어 시

334 한국문학논총 제46집 참고문헌 김광림, 김종한 소론 한국현대시문학대계 21 박남수 김종한 지식산 업사, 1982. 김영식 편, 작고문인 48인의 육필서한집 민연, 1999. 368-389쪽. 김윤식, 이중어글쓰기 공간에서의 시인 김종한 시와 정신 2004. 가 을. 24-30쪽. 박경수 편 金 億 全 集 5 文 藝 批 評 論 集 韓 國 文 化 社, 1987. 486-488쪽. 박경수, 한국근대민요시 연구 부산대 박사논문, 1989. 199-200쪽. 박용구, 신문화 100년 신구문화사, 1971 박혜숙, 현대 한국민요시의 전개양상 연구 건국대 박사논문, 1987 심원섭, 김종한과 김소운의 정지용 시 번역에 대하여 한국문학논총 41집, 2005.12 오오무라 마스오, 김종한에 대하여, 윤동주와 한국문학 소명출판, 2001. 240-258쪽. 오오무라 마스오, 심원섭 정선태 역, 조선의 혼을 찾아서 소명출판, 2007. 34-35쪽. 유 정, 好 漢 孤 獨 金 鐘 漢 현대문학 1963.2 188-189, 290쪽. 윤대석, 국민문학의 신지방주의론 사에구사 도시카쓰 외 한국근대문 학과 일본 소명출판, 2003. 257-268쪽. 이영미, 일제시대의 대중가요 노래 1 실천문학사, 1984 임종국, 친일문학론 평화출판사, 1966. 232-239쪽. 전선아, 일제강점기 신민요 연구 강릉대학교 석사논문, 1998. 65-66쪽. 정서은, 일제강점기신민요의 음악학적 고찰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 문사학위논문, 2003 정종현, 식민지 후반기 한국문학에 나타난 동양론 연구 동국대박사논 문, 2005. 172-188쪽.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35 후지이시 다카요, 김종한과 국민문학 사이 창간호 2006.11. 荻 原 井, 新 編 一 茶 俳 句 集 岩 波 書 店, 1935. 57쪽. 金 文 洙, 金 鐘 漢 のこと 民 主 朝 鮮 1946.4. 33-35쪽. 金 達 洙, 太 平 洋 戰 爭 下 の 朝 鮮 文 學 文 學 1961.8. 77-86쪽. 大 村 益 夫, 金 鐘 漢 について 旗 田 巍 先 生 朝 鮮 歴 史 論 集, 下 1979.3. 尾 澤 喜 雄, 小 林 一 茶 とその 周 辺 岩 手 大 学 尾 澤 喜 雄 教 授 退 官 記 念 事 業 協 賛 会, 昭 和 47.6. 金 子 太, 小 林 一 茶 小 沢 書 店, 昭 和 62.9. 川 村 湊, 酔 いどれ 船 の 青 春 講 談 社, 1986.11. 83-84쪽. 靑 木 美 智 男, 一 茶 の 時 代 敎 倉 書 房, 1988.4. 190-219쪽. 藤 石 貴 代, 金 鐘 漢 論 九 州 大 學 東 洋 史 論 集 17, 1989.1. 小 林 計 一 郎, 一 茶 -その 生 涯 と 文 学 信 濃 毎 日 新 聞 社, 平 成 14.10. 林 容 擇, 金 素 雲, 朝 鮮 詩 集 の 世 界 中 公 新 書, 2000.10. 大 村 益 夫, 朝 鮮 近 代 文 學 と 日 本 綠 蔭 書 房, 2003.10. 藤 石 貴 代 大 村 益 夫 沈 元 燮 布 袋 敏 博 편, 金 鐘 漢 全 集 綠 蔭 書 房, 2005.

336 한국문학논총 제46집 < 要 約 > 金 鐘 漢 の 初 期 文 學 修 業 時 代 について 沈 元 燮 金 鐘 漢 の 初 期 文 學 修 業 時 代 を, 幼 少 年 期 の 成 長 史 的 な 側 面, 文 學 觀 の 形 成 及 び 当 時 の 文 学 者 との 影 響 關 係, 当 時 彼 の 得 意 の 分 野 であった 民 謠 詩 及 び 民 謠 理 論 を 中 心 として 考 察 してみた 檢 討 結 果 は 次 のとおりである 1) 彼 は 詩 人 で 漢 學 者 であった 外 祖 父 を 文 學 的 人 格 的 モデルとして 學 習 していた 可 能 性 を 確 認 した 金 鐘 漢 の 漢 學 的 素 養, 浪 漫 的 な 詩 人 として の 面 貌, ユーモラスな 毒 舌 を 驅 使 する 發 話 スタイルなどの 裏 側 に 外 祖 父 の 面 貌 が 存 在 している 可 能 性 を 提 示 した 2) 金 鐘 漢 は, 繼 母 との 葛 藤 のため 一 生 不 遇 に 暮 せざるを 得 なかった 日 本 詩 人 小 林 一 茶 に 交 感 を 寄 せていたことがわかった 金 鐘 漢 も 彼 と 同 じ く' 母 性 愛 の 缺 乏 'というトラウマを 抱 えていたからである 以 降 彼 は 自 分 の 養 子 体 験 を 民 族 的 な 次 元 にまで 拡 大 するが,' 缺 乏 した 母 性 體 驗 の 報 償 という 世 界 が 彼 の 人 生 の 主 要 課 題 として 機 能 していた 可 能 性 を 提 示 し た 3) 文 學 の 出 發 點 が 歷 史 や 民 族 問 題 のような 巨 大 な 問 題 ではなく 失 戀 にあると 公 言 した 彼 の 發 話 スタイルから, 彼 が 私 的 な 世 界 を 重 視 し 躊 躇 なく 自 分 を 表 現 する 新 しい 文 學 世 代 としての 特 徵 を 持 っていたことを 確 認 した 4) 彼 は 金 億 に 認 められてから 文 學 を 始 めたのではなく, 少 年 期 から 彼 を 私 淑 していたという 点 後 日 彼 の 文 學 論 の 中 に 金 億 の 形 式 主 義 的 文 學 觀 と' 觀 念 の 肉 化 ' 論 の 跡 形 が 残 っていることが 確 認 できた 5) 彼 が 数 多 く 發 表 した 新 民 謡 を 通 して 金 鐘 漢 の 詩 的 才 能, 鄕 土 的 世 界 及

金 鐘 漢 의 초기 문학수업 시대에 대하여 337 び 傳 統 女 性 の 人 生 に 関 する 彼 の 共 感 度 も 確 認 できた この 體 驗 が 彼 の' 新 地 方 主 義 論 'の 萌 芽 として 機 能 した 可 能 性 も 推 測 できる 6) 彼 の 新 民 謠 論 の 中 から, 彼 が 現 實 の 推 移 を 冷 徹 に 分 析 する 分 析 家 的 な 氣 質 と 時 流 に 適 應 するスタイルを 持 っていたことを 確 認 した また 文 學 現 像 を 社 會 科 學 的, 唯 物 論 的 な 目 で 分 析 する, もう 一 つの 文 學 的 観 点 を 具 備 していたことを 確 認 した 核 心 語 : 金 鐘 漢, 金 億, 小 林 一 茶, 金 思 燁, 親 日 文 學, 國 民 文 學, 新 民 謠, 民 謠 詩, 新 地 方 主 義, 翻 譯 詩, 日 本 語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