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 樂 浪 郡 ) 조선현( 朝 鮮 縣 )의 위치 -낙랑군 조선현의 평양설 및 대동강설 비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1. 머리말 낙랑군의 위치는 오랜 쟁점이었고, 현재까지도 한 중 일 사이의 역사현안이기도 하다. 낙랑군 의 위치에 따라서 동북아 고대사의 강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낙랑군의 위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낙랑군의 치소( 治 所 )였다는 조선현( 朝 鮮 縣 )의 위치이다. 위만 조선의 수도 왕험성 에 세운 것을 조선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현의 위치를 찾으면 낙랑군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며, 나아가 한사군( 漢 四 郡 )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간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두 종류의 관점이 있어왔다. 하나는 한반도 내, 특히 평양 일대에서 찾는 견해로서 고려 중기 이후 사대주의 유학자들과 일제강점기 때 조선 총독부에서 확정지은 견해였는데, 이것이 현재까지도 한국 사학계의 통설( 通 說 )이다. 다른 하 나는 낙랑군 조선현이 현재의 만주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으로 조선 후기 일부 유학 자들과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나섰던 역사학자들의 견해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에서 한반 도 북부는 중국의 역사강역이었다고 주장했는데, 그 주요한 근거가 한사군이 한반도 서북부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현재의 강역문제와 연계될 수 있는 폭발성을 갖 게 된다. 한국은 해방 후 조선총독부 사관, 즉 일제 식민사관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한사군이 한반도 서북부에 있었다는 설을 그대로 신봉하고 있다. 그래서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 조선 현의 위치를 찾는 것은 중요한데, 이는 당대의 1차사료를 검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1 -
2. 조선현의 위치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견해 전술한대로 한국 사학계는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土 城 洞 ) 토성으로 보고 있다. 먼저 동북아역사재단은 2009년 홈페이지에서 이렇게 게재하고 있었다. 위만조선은 그 왕성인 왕험성( 王 險 城 )이 현재의 평양시 대동강 북안에 있었는데, 이는 위만조 선과 한의 경계 역할을 한 패수( 浿 水 )가 지금의 압록강이라는 점,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 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는 점, 왕험성 및 조선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열수( 列 水 )가 지금의 대동강으로 비정되고 있 다든지 하는 점을 통해서 입증된다(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 고조선조 ) 1) 대한민국 정부의 국고( 國 庫 )로 운영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위 문장은 두 가지 논리구조로 되 어 있다. 하나는 위만조선은 그 왕성인 왕험성( 王 險 城 )이 현재의 평양시 대동강 북안에 있었 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 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 이라는 것이다. 종래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 자리에 낙랑군 조선현을 설치했다고 보았는데, 이 둘을 분리해서 왕험성은 대동강 북안, 낙랑군 조선현은 대동강 남안 이라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위만 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 선현의 치소 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과연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라고 특정할만한 문헌사료나 고고학적 사료가 뒷받침되고 있을까?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 수사관( 修 史 官 ) 2) 이자 국립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이병도는 1976년 간행한 신수정판 한국고대사연구( 韓 國 古 代 史 硏 究 ) 의 낙랑군고( 樂 浪 郡 考 ) 에서 이 렇게 말했다. 낙랑군은 그 수부( 首 府 : 首 縣 )의 이름이 조선현( 朝 鮮 縣 )인만큼 지금의 대동강 유역을 중심 으로 하고 있음에 대해서는 종래에 별로 이론( 異 論 )이 없었다. 또 낙랑군이 한사군 중의 중추 적인 구실( 役 割 )을 하여 왔던 것도 사실이다. 3) 낙랑군 조선현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근거로 내린 결론인가 하는 점이다. 이병도는 조선현이 지금의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에 대해 서는 종래 별로 이론( 異 論 )이 없었다 라고 말했다. 이병도는 자신의 견해를 서술할 때 이론이 없다 같은 비학문적 방식을 자주 선택하는데, 이 문장은 아마도 고려 중기 이후 사대주의 유 학자들의 견해를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후술하겠지만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낙랑군 조선현을 평양이라고 보았지 대동강 유역 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이병도도 같은 글에서 조선현 은 낙랑군의 치소( 治 所 : 首 府 )로 그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던만큼 중요한 현이거니와, 흔히 이 현명 ( 縣 名 )으로 보아 위씨조선의 수부인 왕험성( 王 險 城 ), 즉 지금의 평양이라는 설이 유행되었다 4) 1) 이는 2009년도에 동북아역사재단의 홈페이지에 올바른 역사라는 항목으로 실렸던 고조선조 의 내용 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 내용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홈페이지를 개편한다는 명목으로 슬그머니 내렸다. 2) 이는 이병도 자신이 부친의 묘지명에 조선총독부 수사관이라고 새긴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3) 李 丙 燾, 修 訂 版 韓 國 古 代 史 硏 究, 博 英 社, 1976 초판, 여기서는 중판(2001년) 133쪽. 앞으로도 특 별한 언급이 없는 한 이 중판을 텍스트로 사용할 것이다. - 2 -
라고 썼다. 그런데 조선 후기 김경선( 金 景 善 :1788~1853)은 순조 32년(1832) 동지 겸 사은사( 冬 至 兼 謝 恩 使 )의 서장관( 書 狀 官 )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쓴 사행록( 使 行 錄 ) 연원직지( 燕 轅 直 指 ) 에서 왕 험성을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고 서술했다. 당서( 唐 書 :구당서) 를 상고하니, 안시성( 安 市 城 )은 평양성과 500리 거리인데, 봉황성을 또 한 왕검성( 王 儉 城 )이라 일렀다 고 말했다. 지지( 地 誌 ) 에도 봉황성을 평양이라 칭한다 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이름이 생겼는지 알 수 없다. 또 지지( 地 誌 ) 에, 옛 안시성은 개평현 ( 蓋 平 縣 ) 동북쪽 70리에 있다. 개평현에서 동쪽으로 수암하( 秀 岩 河 )까지가 300리이고, 수암하 에서 동쪽으로 200리가 봉황성이 된다 고 했다. 만약 여기(봉황성)가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 서 에서 500리라고 칭한 것과 서로 맞는다.(김경선, 봉황성기 연원직지 ) 5) 조선후기 인물인 김경선은 평양성을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현재의 요녕성( 遼 寧 城 ) 봉황시( 鳳 凰 市 )에 있는 봉황성( 鳳 凰 城 )이라고 보았고, 여기를 왕검성으로 보았던 것이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위당( 爲 堂 ) 정인보( 鄭 寅 普 )는 조선사연구( 朝 鮮 史 硏 究 ) 上 에서 왕검성( 王 儉 城 )인 조 선현이 지금 평양과 원래 무관( 無 關 ) 6) 하다고 서술했다. 조선 양명학의 전통을 이은 이건방 ( 李 建 芳 )을 사사한 정인보는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그러나 이병도는 이런 견해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낙랑군 조선현=대동강 유역설=현재의 평양설 을 일반화 시켰다. 그러면서도 낙랑군 조선현이 지금의 평양이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다른 유력한 문헌과 더욱이 일제 초기 이래 발굴 발견된 많은 유물 유적으로 인하여 조선현 평양( 故 王 險 城 )설은 부인되고 말았다.(이병도,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 7) 그간 별로 이론이 없었던 조선현=현재의 평양설 은 부인되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이병도는 다른 유력한 문헌 과 일제 초기 이래 발굴 발견된 많은 유물 유적 을 들었다. 이병도는 조선 현=평양설 을 부인하고, 이설과 양립하고 있던 조선현=요동설 로 돌아선 것이 아니다. 낙랑군 조선현 이 대동강 북쪽의 평양이 아니라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이병도는 뒤이어 이렇게 단정했다. 과연 일제초기로부터 일인( 日 人 ) 조사단에 의해서 대동강 남안인 (대동면) 토성리( 土 城 里 ) 일 대가 낙랑군치( 樂 浪 郡 治 )인 동시에 조선현치( 朝 鮮 縣 治 )임이 그 유적 유물을 통하여 판명되었 다 낙랑의 유적과 유물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지만, 특히 이 대동면( 大 同 面 ) 토성리를 중 심으로 한 부근 일대에 집중된 감이 있다. 이로써보다도 이 일대가 낙랑군치( 樂 浪 郡 治 )인 조 선현의 소재지였던 것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이병도,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 8) 4) 李 丙 燾, 樂 浪 郡 考, 修 訂 版 韓 國 古 代 史 硏 究, 140쪽. 5) 按 唐 書, 安 市 城 距 平 壤 五 百 里, 鳳 凰 城 亦 稱 王 儉 城. 地 誌 又 以 鳳 凰 城 稱 平 壤, 未 知 此 何 以 名 焉. 又 地 志, 古 安 市 城 在 蓋 平 縣 東 北 七 十 里, 自 蓋 平 東 至 秀 岩 河 三 百 里, 自 秀 巖 河 東 至 二 百 里 爲 鳳 凰 城, 若 以 此 爲 古 平 壤, 則 與 唐 書 所 稱 五 百 里 相 合. ( 金 景 善, 燕 轅 直 指 鳳 凰 城 記 ) 6) 鄭 寅 普, 朝 鮮 史 硏 究 上, 薝 園 鄭 寅 普 全 集, 延 世 大 學 校 出 版 部, 1983, 177쪽. 이 책은 2012년 우 리역사재단에서 문성재( 文 盛 哉 ) 역주의 오천년간 조선의 얼, 조선사연구 上 이란 제목으로 보다 읽기 쉽게 재출간되었다. 7) 李 丙 燾, 樂 浪 郡 考, 修 訂 版 韓 國 古 代 史 硏 究, 140쪽. 8) 李 丙 燾, 樂 浪 郡 考, 修 訂 版 韓 國 古 代 史 硏 究, 140~142쪽. - 3 -
일제 초기 일본인 조사단, 즉 조선총독부 조사단이 대동강 남안의 토성리 일대를 낙랑군치, 즉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라고 비정했는데, 이병도는 판명되었다 라고 판정했다. 그러나 토성 동 토성을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라고 특정 지을 수 있는 유적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토성 의 흔적과 와당과 벽돌 몇 편을 가지고 자의적으로 해석 했을 뿐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왜 지금의 평양을 위만조선의 수도라고 보던 견해를 세분해서 대동강 북안의 평양과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으로 나누어보았을까? 그 해답은 이병도의 스승인 이나바 이와기치( 稻 葉 岩 吉 )에 게 있다. 조선총독부 수사관( 修 史 官 )으로서 조선사( 朝 鮮 史 ) 35권을 편수( 編 修 )했던 이나바 이와기치는 진장성 동단 및 왕험성 고( 秦 長 城 東 端 及 王 險 城 考 ) 에서 위만조선과 한( 漢 )의 경계였던 패수( 浿 水 )의 위치에 대해 패수란 지금의 대동강( 大 同 江 )을 가리킨다 9) 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사기 조선 열전 은 연나라 사람 위만이 동쪽으 로 새외를 나와서 패수를 건너 왕험성에 도읍했다 10) 라고 기술하고 있다. 위만이 남쪽 으로 패수를 건넌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건넜다는 사실은 둘째치고라도 이른바 실증 주의에 의한 문헌비판을 하다 보니 왕험성이 패수 건너편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나바 이와기치는 패수를 대동강으로 비정하다보니 대동강 북쪽에 있는 평 양을 위만 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으로 비정하기 곤란했다. 그래서 대동강 남쪽에서 낙 랑군 조선현의 치소를 찾기 시작했고 토성동에서 토성 흔적과 와당과 벽돌 몇 편이 나오자 조선현 치소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 낙 랑군 조선현의 치소라는 아무런 문헌적 근거가 없다보니 고고학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쿄제대 공대의 세키노 타다시( 關 野 貞 )가 등장하는데 그가 1915년 조선 고적도보( 朝 鮮 古 蹟 圖 譜 ) 에서 대동강 남쪽 토성리를 낙랑군치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조선 고적도보 는 낙랑군 치지( 治 址 ) 란 해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의 토성동( 土 城 洞 )은 대동강 좌안( 左 岸 )에 있는데, 사방 45정( 町 )의 지역에 흙으로 쌓은 성벽을 두른 유적의 자취가 뚜렷하다. 그 안팎에서 한나라 때 와당( 瓦 當 ) 이 발견되었는데, 이와 같은 문양을 갖고 있는 기와 및 한 위( 漢 魏 )시대에 속하는 벽돌을 다수 발견했다. 또 그 부근에 낙랑군 시대의 고분군( 古 墳 群 )이 존재하는데, 이곳은 아마도 낙랑군치 ( 樂 浪 郡 治 )의 유적일 것이다(조선총독부, 조선고적도보 ) 11) 세키노 타다시는 아마도 라는 부사를 사용했다. 단정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세키노 타다시는 조선고적도보 의 낙랑군치 라는 소제목에 낙랑군치(?) 라고 의문부호를 달아 놓았 다. 또한 당시에도 토성동은 토성이 협소한 구릉에 얕게 쌓여져 있기 때문에 천험( 天 險 )이 없 으므로 적의 공격을 받게 되면 방수( 防 守 )가 지극히 곤란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는 지적이 있 9) 이나바 이와기치는 고조선과 한의 국경이었던 패수를 지금의 대동강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대동강( 大 同 江 )이란 용어는 중국 25사 중에서 명사( 明 史 ) 조선열전 과 이성량( 李 成 梁 ) 여송( 如 松 ) 등 부자열 전에 처음 등장하는데 모두 임진왜란(1592~1597)과 관련한 내용들이다. 서기 전 2세기 이전의 지명 비정을 하면서 16세기 말에 처음 등장하는 이름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이나바의 논리는 패수가 대 동강이란 전제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패수가 대동강이 아니라면 나머지 모든 논리는 무너지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 10) 滿 亡 命, 聚 黨 千 餘 人, 魋 結 蠻 夷 服 而 東 走 出 塞, 渡 浿 水, 居 秦 故 空 地 上 下 鄣, 稍 役 屬 真 番 朝 鮮 蠻 夷 及 故 燕 齊 亡 命 者 王 之, 都 王 險 史 記 朝 鮮 列 傳 11) 朝 鮮 總 督 府, 朝 鮮 古 蹟 圖 譜 解 說 第 1 冊, 1915, 2쪽. - 4 -
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을 낙랑군치, 즉 낙랑군 조 선현 자리로 결정했다. 대동강을 패수로 보고 사기 조선열전 의 연 나 라 사 람 위 만 이 동 쪽으로 새외를 나와서 패수를 건너 왕험성에 도읍했다 는 구절에 꿰어 맞춘 위치비정 이었다. 3. 패수의 위치와 해방 후의 견해들 그런데 패수가 대동강이 아니라면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을 낙랑군 치소라고 비정하는 논 리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일제강점기 때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나 식민사학의 대부분의 논리는 이런 전제 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이런 전제가 무너지면 그를 바탕으로 수립된 하위 논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된다. 패수가 대동강이 아니라면 낙랑군 조선현을 대동강 남안에 서 찾는 것은 물론 북안의 평양에서 찾는 것도 모두 헛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일찍이 이를 예견했던 인물이 앞서 인용한 조선 후기 김경선이었다. 오호라! 후세 사람들이 땅의 경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고 한사군( 漢 四 郡 )의 땅을 망령되게 파 악해서 모두 압록강 안에 국한시켜 억지로 사실에 끌어 맞춰서 구구하게 분배했다. 이에 패 수( 浿 水 )를 다시 그 중에서 찾으니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고 지목하고, 혹은 청천강( 淸 川 江 )을 패수라고 지목하고,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고 지목했으니 이것은 전쟁도 하지 않고 (고)조선의 옛 강토를 저절로 줄어들게 한 것이다.(김경선, 봉황성기 연원직지 ) 12) 김경선의 이 말이 절묘한 것은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 한국 식민사학계의 동향까지 정확 하게 예견했기 때문이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 쓰다 소키치( 津 田 左 右 吉 )는 패수고( 浿 水 考 ) 에서 패수의 이름은 사기( 史 記 ) 조선열전 에 한나라 초기 고조선의 북쪽 경계로 기록되었 고, 또 한서( 漢 書 ) 지리지( 地 理 志 ) 에 낙랑군 속현( 屬 縣 )의 이름으로 기재되었다. 전자는 통 상 압록강으로 이해되고 있다 13) 라고 패수로 보았다. 서울대학교의 노태돈이나 교원대학교의 송호정도 마찬가지로 압록강으로 보고 있고, 앞에서 살펴본 대로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를 그대 로 추종해서 압록강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런데 이병도는 패수를 청천강이라고 보고 있다. 단 국대학교 교수 서영수는 위만조선의 형성과정과 국가의 성격 에서 패수를 요동에 있는 것으 로 보았다. 그런데 패수의 위치를 요동으로 보았으면 평양을 왕험성으로 보았던 견해는 부정 되어야 하지만 서영수는 이미 평양을 왕험성으로 단정 짓고 하위논리를 전개했기 때문에 결론 은 과거와 같았다. 그래서 서영수는 위만조선의 중심지를 요동이나 난하 동쪽에서 찾는 견해 를 비판하면서 오늘날 요하가 고대의 요수와 일치하는 것이 입증된 까닭에 이러한 견해는 성 립할 수 없으며, 사기 의 왕검성은 오늘날의 평양임이 확실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낙 랑군치는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으로 보고 있다.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고 있는 노태돈이 나 송호정도 마찬가지고, 패수를 청천강으로 보고 있는 이병도도 마찬가지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을 낙랑군치, 즉 낙랑군 조선현 자리라고 공통적으로 주장했다. 12) 嗟 乎, 後 世 不 詳 地 界, 則 妄 把 漢 四 郡 地, 盡 局 之 於 鴨 綠 江 內, 牽 合 事 實, 區 區 分 排. 乃 復 覓 浿 水 於 其 中, 或 指 鴨 綠 江 爲 浿 水, 或 指 淸 川 江 爲 浿 水, 或 指 大 同 江 爲 浿 水, 是 朝 鮮 舊 彊, 不 戰 自 蹙 矣 ( 金 景 善, 燕 轅 直 指 鳳 凰 城 記 ) 13) 津 田 左 右 吉, 浿 水 考, 朝 鮮 歷 史 地 理 (1913), 津 田 左 右 吉 全 集 (1964), 제11권, 岩 波 書 店, 11쪽. - 5 -
당초 조선총독부에서 대동강 북안의 평양이 왕험성이라는 기존 유학자들의 견해를 굳이 나누 어 대동강 남안의 토성리로 비정한 것은 대동강을 패수로 보고 사기 조선열전 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수를 요동, 압록강, 청천강 등으로 달리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낙랑군 치, 즉 낙랑군 조선현은 그대로 토성동 토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이는 패 수가 대동강이라는 조선총독부의 전제는 무너졌지만, 낙랑군치를 토성동 토성으로 비정한 조 선총독부의 견해 자체가 새로운 전제 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마치 진실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척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 조금씩 다른 견해를 표출했지만 결론은 이병도 가 이 일대(대동면 토성리)가 낙랑군치( 樂 浪 郡 治 )인 조선현의 소재지였던 것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14) 라고 말한 것처럼 조선총독부에서 교시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 으로 귀결되 었던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왕험성 및 조선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열수( 列 水 )가 지금의 대동강으로 비정되고 있다든지 하는 점을 통해서 입증된다 라고 말했는 데, 열수를 대동강으로 비정한 것은 이병도로서 이 역시 어떤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비정한 것이 아니라 패수를 청천강으로 비정하다보니까 열수를 대동강이라고 주장한 것에 불과하다. 예나 지금이나 식민사학의 위치비정이라는 것은 대체로 이런 종류들이다. 후한서( 後 漢 書 ) 군국지( 郡 國 志 ) 의 낙랑군( 樂 浪 郡 )조를 보면 전한( 前 漢 ) 때는 25개였던 낙랑군 속현이 후한 때는 18개로 줄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후한서 군국지 의 낙랑군 속현 중에 열구( 列 口 ) 현이 있는데, 열구현에 대한 주석에, 곽박( 郭 璞 )은 산해경 에 주석하기를 열( 列 )은 강이름이 다. 열수( 列 水 )는 요동( 遼 東 )에 있다 고 말했다 15) 고 설명하고 있다. 동진( 東 晋 ) 때의 저명한 훈고학자( 訓 詁 學 者 )인 곽박( 郭 璞 : 276~324년)은 식민사학에서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 서북 부에 있었다고 주장하던 시기에 살았던 학자이다. 진서( 晋 書 ) 곽박 열전 은 곽박이 하동( 河 東 ) 문희( 聞 喜 :현재의 산서성) 사람으로서 그 부친 곽원( 郭 瑗 )은 건평태수( 建 平 太 守 )를 역임했 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곽박에 대해서는 경전에 대한 학술을 좋아했고, 박학했으며 뛰어 난 재주가 있었다 16) 라고 설명하고 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살았던 곽박이 열수는 요 동에 있다 라고 말했는데, 이병도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대동강이라고 주장했고, 동북아역사 재단이 이를 따라서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패수가 요동에 있거나, 압록강이거나 청천강이라 면 낙랑군 조선현은 과거 사대주의 유학자들의 공상처럼 지금의 평양에 있어도 패수를 건너 동쪽으로 왔다 는 위만의 행적과 어긋나지 않건만 조선총독부에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이라 고 교시를 내리니 그저 이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단국대학교 교수 서영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찍부터 낙랑군의 치소로 알려져 왔던 토성리 유적 대부분이 위만조선의 왕도였던 대동강 북안의 왕검성( 王 儉 城 ) 일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동강 남안에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 다. 이는 일시적으로 확대되었던 낙랑군이 고구려를 비롯한 예맥사회의 압력에 쫓겨 군현의 중심지를 방어에 보다 유리한 대동강 남안으로 옮겼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17) 서영수는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이른바 실증주의 서술 전통을 이어받아 주지의 사실 같은 비학문적 용어를 남발한다. 또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처럼 앞뒤 모순되는 이야기를 마구 뒤섞 14) 李 丙 燾, 樂 浪 郡 考, 修 訂 版 韓 國 古 代 史 硏 究, 142쪽. 15) 後 漢 書 郡 國 志, 幽 州 樂 浪 郡 列 口 縣 註 釋 郭 璞 注 山 海 經 曰, 列, 水 名. 列 水 在 遼 東 16) 郭 璞 字 景 純, 河 東 聞 喜 人 也 父 瑗, 尚 書 都 令 史 時 尚 書 杜 預 有 所 增 損, 瑗 多 駁 正 之, 以 公 方 著 稱 終 於 建 平 太 守 璞 好 經 術, 博 學 有 高 才, 晉 書, 郭 璞 列 傳 17) 서영수, 對 外 關 係 史 에서 본 樂 浪 郡, 史 學 志 제31집(1998. 12), 17쪽. - 6 -
어 놓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 헷갈리게 만든다. 그래서 패수를 요동으로 비정해서 독자들을 헷 갈리게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조선총독부의 교시대로 낙랑군 조선현은 대동강 남안 으로 비 정하고 있는 것이다. 서영수는 언제부터 토성리유적이 낙랑군의 치소로 알려져 왔는지를 특정 하지 않고, 일찍부터 라는 말로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토성리유적을 낙랑군의 치소로 특정한 것은 도쿄제대 공대의 세키노 타다시였다. 서영수는 세키노 타다시 이전에 일 찍 토성리를 낙랑군의 치소로 본 학자가 있다면 제시하기 바란다. 서영수는 일시적으로 확대 되었던 낙랑군이 군현의 중심지를 대동강 남안으로 옮겼다 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설치 당시 의 낙랑군 조선현은 대동강 남안이 아니라는 뜻인가? 낙랑군 조선현=대동강 남안 이란 식민 사학계의 기존 통설을 고집하려고 하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마구 뒤섞어 놓은 것 이다. 서영수는 이 논문 앞부분에서 한군현의 소재지를 요동과 요서 지역으로 보는 북한의 리 지린 18) 과 윤내현 19) 의 견해를 비판하고는 주지하다시피 고조선 말기의 중심지와 이를 계승한 위만조선의 중심지가 대동강 유역이 확실하므로 이러한 견해는 성립되기 힘들다 20) 라고 비판 했다. 한군현 요동, 요서설에 대한 구체적 사료제시는 없고, 주지하다시피 대동강 유역이 확 실하므로 이러한 견해는 성립되기 힘들다 는 일방적 주장뿐이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서영수 자신의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 한국사 시민강좌 2, 1988)과 서울대학교 노태돈의 고조선 중심지 변천에 대한 연구 ( 한국사론 23, 1990), 서강대학교 이종욱의 고조선사연구(일조각, 1993) 를 적어 놓았다. 서영수가 기본적인 상식이 있는 학자라면 북한의 리지린과 단국대학 교의 윤내현 등은 이런 근거로 요서, 요동설 등을 주장했고, 자신과 노태돈, 이종욱은 이런 근 거로 대동강 유역설을 주장하고 있다 라고 써야 한다. 그러나 쓰다 소키치, 이나바 이와기치, 이병도, 서영수, 노태돈, 송호정 등은 이런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기정사실화 하는 비학문적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 서영수가 낙랑군 조선현이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이란 근거로 든 노태돈의 견해를 살펴보자. 왕검성은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가 평양 지역인만큼 역시 평양 일대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순 리이다. 평양 일대에는 B.C. 3세기 이래의 유적이 연속적으로 많이 존재하고 있음은 이를 뒷 받침한다. 조선현의 치소( 治 所 )는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土 城 洞 ) 지역으로 보인다. 토성의 규 모가 번성하였던 군( 郡 )의 수부( 首 府 )가 있었던 곳으로는 작음을 들어 회의적인 견해도 있었 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당시 낙랑군의 지배구조의 성격을 반영하는 일면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1) 노태돈도 서영수처럼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1차사료적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순리이다,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라는 비학문적 희망사항으로 일관하고 있다. B.C. 3세기 이래의 유적 이 연속적으로 많이 존재 하는 것을 근거로 삼았으면 그 유적이 낙랑군의 것이라는 근거를 대 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한다. 더구나 서기전 3세기는 낙랑군 시대가 아니라 고조선 시대다. 노태돈이 조선현의 치소를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지역 으로 보는 것 또한 조선총독부의 견해를 추종한 것일 뿐 아무런 1차 사료적 근거가 없다. 노태돈의 제자인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송호정의 견해도 마찬가지다. 송호정은 그간 식민사학 18) 리지린, 고조선사연구, 과학원출판사, 평양, 1963. 19)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일지사, 1986. 20) 서영수, 對 外 關 係 史 에서 본 樂 浪 郡, 史 學 志 제31집(1998. 12), 10쪽. 21) 노태돈, 고조선 중심지 변천에 대한 연구, 한국사론 23, 1990, 22~23쪽. - 7 -
에서 기정사실로 만들었던 한사군 한반도설 이 일체의 문헌사료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의 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이 학계를 100% 장악하고 있었던 과거와는 는 달리 이제 식민사학을 대체하는 축이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과거와는 달리 학문적 외형 을 일정 정도 띄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송호정은 구체적으로 조선이라는 실체가 언제부터 역사상에 등장하였고, 그 위치는 어디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문헌으로 접 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22) 라고 한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필자처럼 이들의 논리 와 계보를 깊게 연구한 사람들은 이들이 어디로 도망갈지 잘 알고 있다. 문헌사료적 근거가 없을 때 이들이 도망가는 곳은 유물 자체는 말이 없는 고고학 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때 이 들의 교주였던 이병도가 고고학을 근거로 삼는 행태를 크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이병도는 1975년 5월 서울평론 에서 이기백과 나눈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또 한 가지 고대사 연구에서 주의할 일이 있어요. 선사시대는 고고 인류학이 주가 되겠지만 역사시대의 역사는 원래 문헌을 주로 하는 것이고 고고학 인류학 언어학 등은 보조과학인데 요즘은 역사시대에 있어서도 으레 고고학이 앞장서는 경향이 있는 듯해요. 고고학이 주체인지 문헌이 주체인지 모를 지경이야. 가령 주종관계로 따진다면 사학은 문헌을 주로 하고 고고학 인류학 언어학은 종으로 해야 하 는데 이것이 거꾸로 되는 경향이 있어요. 고대의 유물이란 항시 굴러다니는 것이어서 꼭 그 유물이 어디에서 출토되었다는 것만 가지고, 그 사실이 역사를 지배하고 역사를 규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지 역사는 역시 문헌을 중심으로 하고 다음에 고고 인류 언어학 등을 보조과학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거듭 말하여 둡니다. 23) 이병도가 고고학에 의존하는 학문경향에 대해서 이런 비판을 한 것은 서울대학교 교수 김원룡 이 풍납토성을 발굴해보니 백제가 서기전 1세기에 건국되었다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맞다 고 한때 주장했던 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김원룡은 이후 이병도와 그 제자들의 압력에 못 이 겨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고 식민사학의 전사로 전향했지만 지금도 한강 유역이나 낙동강 유역 에서는 서기전 1세기에 신라와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맞다는 발굴결과 가 나오는 상황이다. 한국 식민사학계는 한사군=한반도설 자체가 일체의 문헌사료적 근거가 없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객관적 사실이 드러난 현실에 조응해야 했다. 그래서 말하는 문헌사 료 를 버리고 말이 없는 고고학 으로 일제히 도망가는 중이다. 최근 식민사학계는 북한에서 평양에서 낙랑목간이 발굴되었다 라고 발표하자 북한이 왜 이런 내용을 발표했는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평양이 낙랑군이란 사실이 입증되었다 고 이구동성으로 환호하고 있다. 이병도 는 마치 자신의 후학들이 이럴 것을 미리 안 것처럼 고대의 유물이란 항시 굴러다니는 것이 어서 꼭 그 유물이 어디에서 출토되었다는 것만 가지고, 그 사실이 역사를 지배하고 역사를 규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지 라고 간파했다. 그러나 이제 한국 식민사학은 고고학에 기대야만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것이다. 송호정도 고고학을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발판으 로 삼고 있다. 그는 비파형동검 출토지역인 현재의 요서지역까지 고조선의 강역으로 보는 당 연한 견해를 비판하면서 이와 달리 현재의 중국학계나 한국학계의 대다수 연구자들은 요서 ( 遼 西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동호족( 東 胡 族 )이나 산융족( 山 戎 族 )이 남긴 문화로 보고 있다 24) 22) 송호정, 고조선의 위치와 중심지 문제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58, 한국고대사학회, 2010, 28쪽. 23) 여기서는 진단학회, 역사가의 유향, 일조각, 1991년, 230~231쪽에서 재인용. - 8 -
라고 말했다. 송호정이 말하는 중국학계 란 두 말할 것도 없이 동북공정을 수행하는 중국인 학자군을 뜻한다. 송호정이 말하는 한국학계의 대다수 연구자들 이란 서영수나 노태돈, 송호 정 자신을 뜻하는 것이니 자신들이 대표하는 한국학계가 동북공정의 견해가 같다는 자기 고백 에 다름 아니다. 중국 공북공정과 한국 식민사학은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 내로 축소시키기 위해서 현재의 중국 요서지역, 즉 요녕성 서부 및 내몽골 지역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비파형 동검(고조선식 동검) 출토지역을 산융, 동호 등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비록 팩트에는 어긋나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고조선식 동검(비파형 동검) 의 출토지역을 산융, 동호의 강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서영수 노태돈 송호정 등은 어느 나 라의 이익을 위해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송호정은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 지었다. 요서( 遼 西 ) 요동( 遼 東 ), 한반도의 평양 일대 가운데 고조선의 문화와 중국 한( 漢 )의 문화가 복 합되어 나타나는 곳은 바로 평양일대이다. 그렇다면 평양 부근에 고조선 왕검성이 있었고, 그 뒤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왕검성은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가 평양 지역인만큼 역시 평양 일대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다. 평양 일대에 기원전 3세기 이래의 유적이 연속적으로 많이 존재하고 있음은 이를 뒷받침한다. 25) 앞에서 노태돈이 말한 것과 똑같이 순리, B.C. 3세기 이래의 유적이 연속적으로 많이 존재 등을 근거로 평양 일대를 고조선 왕검성이고 낙랑군 설치지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앞서 서영 수 노태돈처럼 일체의 1차사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3. 낙랑군 조선현을 평양으로 보게 된 과정 그럼 낙랑군 조선현은 언제, 어떤 근거로 평양일대로 비정되었을까? 낙랑군 조선현을 현재의 평양으로 보는 시각은 고려 중 후기에 처음 등장했다. 고려사 지리지 북계( 北 界 )조에 종합 적인 인식이 등장하는 데 이는 조선 초기 작성된 것이다. (평양은) 본래 3조선 26) 의 옛 도읍이다. 당( 唐 ) 요( 堯 ) 무진( 戊 辰 )년에 신인이 단목수 아래 내 려오니 국인들이 임금으로 삼았는데, 평양에 도읍하고 호를 단군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전조 선( 前 朝 鮮 )이다. 주( 周 )나라 무왕이 상( 商 )나라를 정벌하고 기자( 箕 子 )를 조선에 봉했는데, 이것 이 후조선( 後 朝 鮮 )이다. 41대 준왕 때에 이르러 연( 燕 )나라 사람 위만이 있어서 망명자들을 천 여 명을 모아 와서 준왕의 땅을 탈취하고 왕험성( 王 險 城 :험 險 은 다른 본에는 검 儉 으로 되 어 있는데, 곧 평양이다)에 도읍했으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그 손자 우거 때에 (한나라의) 조칙을 즐겨 받지 않자 한 무제가 원봉 2년 장수를 보내 토벌하고 사군으로 삼았는데, 왕험성 은 낙랑군이 되었다. 고구려 장수왕 15년에 국내성에서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겼고, 보장왕 27년에 신라 문무왕이 당과 함께 공격해서 멸망시키니 비로소 그 땅이 신라에 들어갔다( 고려 사, 권 58, 지리지 3, 북계) 27) 24) 송호정, 고조선의 위치와 중심지 문제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58, 한국고대사학회, 2010, 30쪽. 25) 송호정, 고조선의 위치와 중심지 문제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58, 한국고대사학회, 2010, 53쪽. 26) 단군 기자 위만조선을 말한다. - 9 -
조선 초기 작성된 고려사 지리지 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삼조선, 즉 단군 기자 위만조선의 수도를 시기 구분 없이 평양으로 고정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 중기 이후 이런 시각이 등 장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북위( 北 魏 ) 역도원( 酈 道 元 )의 수경주( 水 經 注 ) 이다. 역도원은 고구려 장수왕이 재위 15년(427) 천도한 평양성을 만주에 있던 고조선 의 왕험성으로 착각해서 패수( 浿 水 )의 흐름과 그 위치에 대해서 그릇된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 이 고구려 수도의 역사에 대해 무지했던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에게 고조선 왕험성=고구려 평 양성 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였다. 또 하나는 기자동래설( 箕 子 東 來 說 ) 이다. 은( 殷 )나라 사람 기자( 箕 子 )가 동쪽 조선으로 와서 조선의 제후가 되었다는 것이 기자동래설인데, 이 논리가 언제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지를 살펴보면 평양=낙랑군설 의 뿌리를 알 수 있다. 기자가 우리 역사에 처음 문헌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사 예지( 禮 志 ) 숙종 7년(1102) 10월조이다. 10월 임자 초하루에 예부에서 주청하기를 우리나라가 교화되고 예의를 알게 된 것은 기자로 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는 예전( 禮 典 )에 기자가 실려 있지 않으니 그 무덤을 찾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자 그대로 따랐다. 28) 기자는 서기 전 12세기 경의 인물인데 1102년까지도 고려에 기자의 무덤은 없었다는 이야기 다. 기자 사후 2천3백여년 후에 기자가 느닷없이 평양에 데뷔한 것이었다. 고려사 예지( 禮 志 ) 에 따르면 고려에서 지금의 평양에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한 때는 이때보다도 200여 년 후인 충숙왕 12년(1325) 10월로서 29) 14세기 중엽이다. 그후 유학자들이 사대주의에 경도 되어서 기자가 와서 교화를 펼친 곳이 평양이라고 믿기 시작했고, 이런 사대주의가 일종의 이 데올로기가 되었다. 고려사 악지( 樂 志 ) 속악 조는 지금의 평양을 뜻하는 서경( 西 京 ) 을 설 명하면서, 서경은 고조선이니, 곧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 30) 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대동강( 大 同 江 ) 이란 곡에 대한 설명에서는 주 무왕이 은나라 태사 기자를 조선에 봉해서 팔 조법금을 펼치게 했다 대동강을 황하에 비교했다 31)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이 고려 후기까지도 일치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사 지용수 열전 에는 본국은 요( 堯 :하)나라와 같은 시기에 건국되어서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는데, 하사 받은 땅은 서쪽으로 요하까 지 이르러 대대로 강역으로 지켜왔습니다 32) 라는 말이 나온다. 지용수는 공민왕 때의 무장인 데, 기자 수봉지를 요하까지 찾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집권이 대세가 되면서 14세기 들어서 기자의 사당을 세우고, 서경( 西 京 :평양), 대동강( 大 同 江 ) 지역을 기자와 연결시 27) 本 三 朝 鮮 舊 都. 唐 堯 戊 辰 歲, 神 人 降 于 檀 木 之 下, 國 人 立 爲 君, 都 平 壤, 號 檀 君, 是 爲 前 朝 鮮. 周 武 王 克 商, 封 箕 子 于 朝 鮮, 是 爲 後 朝 鮮. 逮 四 十 一 代 孫 準 時, 有 燕 人 衛 滿, 亡 命 聚 黨 千 餘 人, 來 奪 準 地, 都 于 王 險 城 險 一 作 儉, 卽 平 壤, 是 爲 衛 滿 朝 鮮. 其 孫 右 渠, 不 肯 奉 詔, 漢 武 帝 元 封 二 年, 遣 將 討 之, 定 爲 四 郡, 以 王 險 爲 樂 浪 郡. 高 句 麗 長 壽 王 十 五 年, 自 國 內 城, 徙 都 之. 寶 藏 王 二 十 七 年, 新 羅 文 武 王, 與 唐 夾 攻, 滅 之, 地 遂 入 於 新 羅. ( 고려사, 권 58, 지리지 3, 북계) 28) 十 月 壬 子 朔, 禮 部 奏, 我 國 敎 化 禮 義, 自 箕 子 始, 而 不 載 祀 典. 乞 求 其 墳 塋, 立 祠 以 祭. 從 之, 고려 사, 예지( 禮 志 ), 숙종 7년 조. 29) 忠 肅 王 十 二 年 十 月, 令 平 壤 府, 立 箕 子 祠 以 祭, 고려사, 예지( 禮 志 ), 충숙왕 12년조. 30) 西 京. 古 朝 鮮 卽 箕 子 所 封 之 地 고려사, 악지( 樂 志 ), 서경( 西 京 ) 31) 周 武 王, 封 殷 太 師 箕 子 于 朝 鮮, 施 八 條 之 敎, 以 興 禮 俗, 朝 野 無 事. 人 民 懽 悅, 以 大 同 江, 比 黃 河 고 려사, 악지( 樂 志 ), 대동강( 大 同 江 ) 32) 本 國 與 堯 並 立, 周 武 王 封 箕 子 于 朝 鮮, 而 賜 之 履, 西 至 于 遼 河, 世 守 疆 域, 고려사 권140, 지용수 열전 - 10 -
키는 이데올로기 조작 작업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기자동래설 은 이처럼 기자 사후 2천3 백여년 후인 12세기에 유학 이데올로기의 하나로서 처음 등장했다가 유학자들이 차차 권력을 장악하는 14세기부터 확산되는 것으로서 고려사 의 기자 관련 기록들은 모두 후대에 유학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사기( 史 記 ) 송미자( 宋 微 子 ) 세가 의 주석에는 두예( 杜 預 )가 말하기를 양국( 梁 國 ) 몽 현( 蒙 縣 )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 고 했다 33) 는 구절이 있다. 두예( 杜 預 :222~285)는 3세기 중엽 의 서진( 西 晉 ) 학자이고 양국 몽현은 지금 하남성 상구( 商 丘 ) 근처이다. 기자가 속했던 은( 殷 ) 나라가 곧 상( 商 )나라이니 상나라 언덕이란 뜻의 하남성 상구( 商 丘 )에 기자의 무덤이 있는 것 이 훨씬 이치에 맞다. 북위( 北 魏 )의 역도원( 酈 道 元 )은 수경주( 水 經 注 ) 권23에 변수( 汳 水 )조에 대한 주석에서 역시 두예의 말을 인용했는데, 보다 자세하다. 역도원은 두예가 말하기를 양 국 몽현 북쪽에 박벌성( 薄 伐 城 )이 있는데 성 안에 성탕( 成 湯 )의 무덤이 있고, 그 서쪽에 기자 의 무덤이 있다 34)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변수( 汳 水 )조에 대한 설명이니 변수가 어디인지 알면 기자의 무덤이 어딘지는 자연히 해결된다. 독사방여기요( 讀 史 方 輿 紀 要 ) 권 46은 하남 성에 대한 설명인데,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 부근에 있는 변수( 汴 水 )를 변수( 汳 水 )라고 보고 있 다. 하남성 상구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는 두예의 설명과 하남성 개봉시의 변수가 흐르는 곳에 박벌성이 있다는 것이니 두 서술이 일관성이 있다. 평양에 기자의 무덤이 생긴 것은 14세기 이후이다. 5. 중국 사료가 말하는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중국 고대 사서를 살펴봐야 한다. 중국 사서는 사기 ( 史 記 ) 와 한서( 漢 書 ) 등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한( 漢 )나라 때 편찬된 역사서와 낙랑군 대방군 이 존재했던 때의 역사서인 후한서, 삼국지, 진서( 晋 書 ) 등이 중요하다. 또 하나 중국의 역사지리지 등이 중요하다. 중국은 대원일통지( 大 元 一 統 志 ) 대명일통지( 大 明 一 統 志 ) 대청 일통지( 大 淸 一 統 志 ) 등의 일통지를 비롯해서 독사방여기요( 讀 史 方 輿 紀 要 ) 등 많은 역사지 리지 등을 편찬했는데, 이는 각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역사지리지식을 담고 있기 때문에 중요 하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는 물론 역사지리지들도 북경에서 서쪽 지역으로 가면 혼재된 역 사지리지식을 보이고 있다. 당나라 때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새로운 행정구역을 설치하지 않 고 기존의 요동( 遼 東 )에 포함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고구려 지역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발해를 비롯한 국가와 여러 동이족 민족들이 계속 살았다. 그런데 중국에 서는 관념적으로 고구려 지역을 요동으로 확대하면서 여러 혼선이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중 국 고대 사료에 나오는 요동군을 현재의 요동으로 보고 거리비정을 하면 뒤죽박죽이 되고 앞 뒤가 맞지 않게 된다. 고대 요동은 현재의 북경 부근을 뜻했다. 한서 지리지( 地 理 志 ) 가 체계적인 역사지리서인데, 현재의 북경 부근인 유주( 幽 州 ) 산하의 여덟 개 군에 낙랑군이 속해 있다. 유주( 幽 州 ) 산하의 여덟 개 군은 대군( 代 郡 ), 상곡군( 上 谷 郡 ), 어양군( 漁 陽 郡 ), 우북평군( 右 北 平 郡 ), 요서군( 遼 西 郡 ), 요동군( 遼 東 郡 ), 현토군( 玄 菟 郡 ), 낙 랑군( 樂 浪 郡 )이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 는 기자 조선의 도읍지에 세웠다는 조선현은 낙랑 군 소속으로, 위만 조선의 도읍지에 세웠다는 험독현은 요동군 소속으로 분리해서 서술하고 있다. 낙랑군 조선현이고, 요동군 험독현이다. 그 동안 이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험독현=조 33) 杜 預 云, 梁 國 蒙 縣 有 箕 子 冢 史 記 宋 微 子 世 家, 주석 索 隱 34) 杜 預 曰, 梁 國 蒙 縣 北 有 薄 伐 城, 城 中 有 成 湯 冢, 其 西 有 箕 子 冢 水 經 注 23권, 汳 水, 주석 - 11 -
선현 으로 자의적으로 생각하고는 그 위치를 평양 이라고 견강부회했던 것이다. 한서 지리 지 는 낙랑군의 첫 번째 현으로 조선현( 朝 鮮 縣 )을 실으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낙랑군, 한 무제 원봉 3년에 열었다. 왕망( 王 莽 )은 낙선( 樂 鮮 )군 이라고 불렀는데, 유주( 幽 州 ) 에 속해 있다. 호수는 6만2,812호이고, 인구는 40만6,748명이다. 운장( 雲 鄣 )이 있고, 25개 속 현이 있다. 조선현 (주석; 응소( 應 邵 )는 무왕( 武 王 )이 기자( 箕 子 )를 조선에 봉했다 라고 말했 다) 35) 낙랑군 조선현에 주 무왕이 기자를 봉한 곳 이라는 주석을 단 응소( 應 邵 :?~196년)는 현재의 하남성 출신인데, 한나라 헌제( 獻 帝 ) 때 태산( 泰 山 )태수를 역임했고 어릴 때부터 박학했으며, 한서집해( 漢 書 集 解 ) 등의 저서를 남겼다. 36) 그의 주석은 낙랑군이 존재했을 때의 인식이니 한나라 사람들의 역사지리 지식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한나라 때의 학자들은 낙랑군 조선 현을 주( 周 ) 무왕이 기자( 箕 子 )를 봉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기자( 箕 子 )는 서기 전 12세기 경의 인물로서 앞서 인용했듯이 사기( 史 記 ) 송미자( 宋 微 子 ) 세가 의 주석에는 두예( 杜 預 )가 말하기를 양국( 梁 國 ) 몽현( 蒙 縣 )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 고 했다 37) 는 구절이 있 는데, 기자 사화가 사실이라면 기자의 수봉지는 하남성에서 크게 먼 지역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나라 때 설치한 낙랑군은 왕망의 신( 新 )나라 때 낙선군으로 바뀌었다가 후한( 後 漢 ) 때 다시 낙랑군으로 환원되었고, 조조의 위( 魏 )나라 때는 공손씨 일가가 고대 요동지역을 장악함에 따 라 공손씨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사마씨의 진( 晉 )나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낙랑군을 평주( 平 州 ) 에 소속시켰는데, 평주 소속의 군들은 창려군, 요동국, 낙랑군, 현도군, 대방군의 다섯이었다. 진서( 晋 書 ) 지리지 평주( 平 州 ) 낙랑군 조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낙랑군은 한나라에서 설치했다. (현재 진나라에서:괄호는 필자)관할하는 현은 여섯 현이며, 호수는 3천7백이다. 조선현은 주나라에서 기자를 봉한 지역이다. 둔유( 屯 有 )현. 혼이( 渾 彌 )현. 수성( 遂 城 )현은 진( 秦 )나라 때 쌓은 장성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누방( 鏤 方 )현. 사망( 駟 望 )현( 진 서, 지리지, 평주 낙랑군) 38) 진나라 수성현이 진( 秦 )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말이다. 수성현의 위치를 찾으면 낙랑 군의 위치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자연히 알 수 있다. 수나라는 통일 후 낙랑군 수성현을 기 주( 冀 州 ) 상곡군( 上 谷 郡 )에 통합시켰는데, 상곡군은 현재의 북경 일대에 있던 군이었다. 수 서 지리지 상곡군 수성현 조를 보면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준다. 수성현: 옛날의 무수( 武 遂 )인데, 후위( 後 魏 )에서 남영주( 南 營 州 )를 설치하고, 영주에 준해서 5 군 11현을 설치했다. 그중 용성( 龍 城 )현, 광흥( 廣 興 )현, 정황( 定 荒 )현은 창려군( 昌 黎 郡 )에 속하 게 했다. 석성( 石 城 )현, 광도( 廣 都 )현은 건덕군( 建 德 郡 )에 속하게 했다. 양평( 襄 平 )현, 신창( 新 昌 )현은 요동군에 속하게 했다. 영락( 永 樂 )현은 낙랑군( 樂 浪 郡 )에 속하게 했다. 부평( 富 平 )현, 35) 樂 浪 郡, 武 帝 元 封 三 年 開 莽 曰 樂 鮮 屬 幽 州 戶 六 萬 二 千 八 百 一 十 二, 口 四 十 萬 六 千 七 百 四 十 八 有 雲 鄣 縣 二 十 五, 朝 鮮, 應 劭 曰, 武 王 封 箕 子 於 朝 鮮 ( 漢 書, 地 理 志 樂 浪 郡 ) 36) 黃 惠 賢 主 編, 二 十 五 史 人 名 大 辭 典, 中 州 古 籍 出 版 社, 上 冊, 1994년, 94쪽. 37) 杜 預 云, 梁 國 蒙 縣 有 箕 子 冢 史 記 宋 微 子 世 家, 주석 索 隱 38) 樂 浪 郡 漢 置 統 縣 六, 戶 三 千 七 百 朝 鮮 周 封 箕 子 地 屯 有. 渾 彌. 遂 城 秦 築 長 城 之 所 起 鏤 方. 駟 望 ( 晋 書 地 理 志 平 州 樂 浪 郡 ) - 12 -
대방( 帶 方 )현, 영안( 永 安 )현은 영구군( 營 丘 郡 )에 속하게 했다. 후제( 後 齊 )에서는 오직 창려 한 군만 남겨서 영락, 신창 두 현을 거느리게 하고 나머지는 다 생략시켰다. 수( 隋 ) 개황( 開 皇 ) 원년( 元 年 :581)에 주( 州 )를 이전했다가 3년에 군을 폐했다가 18년에 수성( 遂 城 )으로 개칭했다. 용산( 龍 山 )이 있다.( 수서( 隋 書 ) 지리지 상곡군( 上 谷 郡 ) 수성현) 39) 수나라 때의 수성현 지역이 후위( 後 魏 ) 때는 창려군, 건덕군, 요동군, 낙랑군, 영구군의 5군 1 1현을 설치했던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수서 는 수성현을 비롯해서 6개 현을 거느리고 있는 상곡군의 인구를 3만8,700호라고 말하고 있다. 한서 지리지 는 낙랑군에 대해서 호 수는 6만2,812호이고, 인구는 40만6,748명 40) 이라고 말했는데, 수서 지리지 는 낙랑군을 포함해서 11개 현을 거느리고 있던 수성현과 6개 현의 호수를 모두 3만8,700호 41) 라고 하고 있으니 절반 가까이 축소된 것이다. 고구려가 그만큼 서쪽으로 고조선의 옛 강역을 회복했다 는 뜻이다. 수성현은 지금의 창려현으로서 그 북쪽에 고대 한( 漢 )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이었다는 갈석산 이 있고, 또 그 북쪽에는 장성 유적도 있다. 그런데 북사( 北 史 ) 배구( 裵 矩 ) 열전 에는 배구 가 고려는 본래 고죽국( 孤 竹 國 )으로서 주( 周 )나라에서 기자를 봉한 지역입니다 42) 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내용은 구당서 및 신당서 배구 열전 에도 모두 나오는데, 고죽국은 현재 기자가 소속되었던 은( 殷 :상)나라의 제후국으로서 백이( 伯 夷 ) 숙제( 叔 齊 )의 고사로 유명하 다. 고죽국의 수도 자리로 두 군데가 거론되는 데 하나는 하북성 노룡현( 盧 龍 縣 )으로서 창려시 북쪽에 있다. 또 하나는 한서 지리지 요서군 영지현( 令 支 縣 )조에 고죽성( 孤 竹 城 )이 있다. 왕망은 영씨정( 令 氏 亭 )이라고 불렀다 43) 는 기록처럼 한나라 때 요서군 영지현 지역이다. 모두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하북성 일대를 뜻한다. 중국 학계는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과 직접 관련이 있는 지역이 아니면 역사 왜곡의 강도가 덜 한 편이다.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고죽국의 서쪽 경계를 현재의 하북성 당산 ( 唐 山 )시, 동쪽은 발해( 渤 海 )라고 보고 있다. 당산시는 전국 때는 연( 燕 )나라 강역이었고, 진 한 ( 秦 漢 )과 남북조 때는 우북평군과 요서군에 속해 있었는데 유주( 幽 州 ) 관할이었다. 수나라 때 는 현재의 당산시 동쪽이 북평군( 北 平 郡 )에 속해 있었다. 백이( 伯 夷 ) 숙제( 叔 齊 )가 죽을 때까지 은거했던 곳으로 추정하는 곳이 현재의 하남성 낙양( 洛 陽 )시 동쪽 30 km 정도의 언사( 偃 師 ) 의 수양산( 首 陽 山 )이라는 점에서 양 지역의 상관관계는 더 연구해보아야 할 것이지만 당나라 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전까지도 하북성 일대의 옛 고죽국 지역은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는 뜻이 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광대한 지역을 요동군으로 편입시키면서 광범위하게 역사지 리가 왜곡되기 시작한다. 이후에도 만주, 내몽골 지역은 옛 고조선, 고구려의 후예들이 살고 있었는데, 지도상으로는 중국이 지배한 것으로 표기되면서 큰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하북성 일대의에 있던 지명들을 현재의 요동으로 옮겨 표기하면서 큰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현재 중 39) 遂 城 舊 曰 武 遂 後 魏 置 南 營 州, 准 營 州 置 五 郡 十 一 縣 : 龍 城 廣 興 定 荒 屬 昌 黎 郡 ; 石 城 廣 都 屬 建 德 郡 ; 襄 平 新 昌 屬 遼 東 郡 ; 永 樂 屬 樂 浪 郡 ; 富 平 帶 方 永 安 屬 營 丘 郡 後 齊 唯 留 昌 黎 一 郡, 領 永 樂 新 昌 二 縣, 餘 並 省 開 皇 元 年 州 移, 三 年 郡 廢, 十 八 年 改 為 遂 城 有 龍 山 ( 隋 書 地 理 志 上 谷 郡 遂 城 縣 ) 40) 樂 浪 郡, 武 帝 元 封 三 年 開 莽 曰 樂 鮮 屬 幽 州 戶 六 萬 二 千 八 百 一 十 二, 口 四 十 萬 六 千 七 百 四 十 八 ( 漢 書 地 理 志 樂 浪 郡 ) 41) 樂 浪 郡 漢 置 統 縣 六, 戶 三 千 七 百 ( 晋 書 地 理 志 平 州 樂 浪 郡 ) 42) 矩 因 奏 曰, 高 麗 地 本 孤 竹 國, 周 代 以 之 封 箕 子 ( 北 史, 裵 矩 列 傳 ) 43) 令 支 : 有 孤 竹 城 莽 曰 令 氏 亭 ( 漢 書 地 理 志 遼 西 郡 ) - 13 -
국 학계는 금나라에서 설치한 함평부( 咸 平 府 )를 현재의 요녕성 심양 북서쪽 철령( 鐵 嶺 )시 산하 의 현급( 縣 級 )시인 개원( 開 原 )으로 비정하면서, 원나라 때 개원로( 開 元 路 )를 다스린 곳으로 보 고 있다. 원사 는 요양등처 행중서성( 遼 陽 等 處 行 中 書 省 ) 산하의 함평부( 咸 平 府 )조에 이 지역 을 넣고 있는데, 그 설명을 보자. 함평부( 咸 平 府 )는 옛 조선 땅으로서 기자( 箕 子 )를 봉했던 지역인데, 한( 漢 )나라 때는 낙랑군에 속했다가 그 후 고구려가 그 땅을 침략했다. 당나라에서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안동도호를 설 치하고 다스리게 했는데, 발해 대씨( 大 氏 :대조영과 그 후예)가 계속 거주했다. 요( 遼 )나라에서 발해를 평정했지만 그 땅은 험애( 險 隘 )한 곳이 많아서 성을 건립해서 유민( 流 民 )들을 거주하게 하고 함주( 咸 州 ) 안동군( 安 東 軍 )이라 불렀는데, 다스리는 현은 함평( 咸 平 )이었다. 금나라에서 함평부( 咸 平 府 )로 승격시키고 평곽( 平 郭 ), 안동( 安 東 ), 신흥( 新 興 ), 경운( 慶 雲 ), 청안( 清 安 ), 귀인 ( 歸 仁 )의 여섯 현을 거느리게 했는데, 병란( 兵 亂 )으로 다 폐지되었다. 원나라 초에 이로 인해 서 개원로( 開 元 路 )에 소속시켰다가 후에 다시 나누어서 요동선위사( 遼 東 宣 慰 司 )에 소속시켰 다.( 원사 지리지 요양등처 행중서성 함평부( 咸 平 府 ) 44) 원사 는 현재의 요녕성 심양시 부근의 함평부를 기자가 책봉되었던 곳으로 보고 있는 것이 다. 평양보다는 사실에 가깝지만 고대 요동의 위치와 당나라 이후의 요동의 위치를 혼동해서 생긴 인식이다. 청나라 고조우( 顧 祖 禹 )가 편찬한 독사방여기요( 讀 史 方 輿 紀 要 ) 는 원 이름이 21사( 史 ) 방여기요( 方 輿 紀 要 ) 로서 중국 역대 지리지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역사지리서다. 다 른 책들이 단편적인 역사지리지식을 서술했다면 독사방여기요 는 사기 부터 요사( 遼 史 ), 금사( 金 史 ), 원사( 元 史 ) 까지 21사의 지리지를 포괄해서 서술했다는 특징이 있다. 45) 고조우 는 강희( 康 熙 ) 연간에 서건학( 徐 乾 學 )의 초청으로 대청일통지( 大 淸 一 統 志 ) 편찬에 참가하기 도 했는데, 순치( 順 治 ) 16년(1659) 독사방여기요 를 편찬하기 시작해서 강희 31년(1692)까지 36년에 걸쳐 130권짜리 역사지리서를 완성한 것이다. 한 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역사지리서라 고 볼 수 있다. 독사방여기요 17권 북직( 北 直 ) 8의 영평부( 永 平 府 )조에 낙랑군 조선현의 위 치가 나온다. 독사방여기요 에서 말하는 영평부는 현재의 하북성 노룡( 盧 龍 )현 일대로서 갈석 산이 있는 창려현 북쪽이다. 영평부는 동쪽으로 산해관( 山 海 關 )까지 180리이고, 남쪽으로 해안까지 160리이고, 서쪽으로 순천부( 順 天 府 ) 계주( 薊 州 )까지 3백리이고, 북쪽으로 도림구( 桃 林 口 )까지 60리이고, 동북쪽으로 폐영주( 廢 營 州 )까지 690리이다. (영평)부에서 경사( 京 師 :북경)까지는 550리이고, 남경까지는 3, 150리이다( 독사방여기요 권 17 영평부) 46) 44) 咸 平 府, 古 朝 鮮 地, 箕 子 所 封, 漢 屬 樂 浪 郡, 後 高 麗 侵 有 其 地 唐 滅 高 麗, 置 安 東 都 護 以 統 之, 繼 為 渤 海 大 氏 所 據 遼 平 渤 海, 以 其 地 多 險 隘, 建 城 以 居 流 民, 號 咸 州 安 東 軍, 領 縣 曰 咸 平 金 升 咸 平 府, 領 平 郭, 安 東, 新 興, 慶 雲, 清 安, 歸 仁 六 縣, 兵 亂 皆 廢. 元 初 因 之, 隸 開 元 路, 後 復 割 出, 隸 遼 東 宣 慰 司 ( 元 史 地 理 志 遼 陽 等 處 行 中 書 省 咸 平 府 ) 45) 중국 사서는 시대에 따라 정사의 범주가 달라졌는데, 송나라 때는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 ( 晋 書 ), 송서( 宋 書 ), 남제서( 南 齊 書 ), 양서( 梁 書 ), 진서( 陳 書 ), 위서( 魏 書 ), 북제서( 北 齊 書 ), 주서( 周 書 ), 수서( 隋 書 ), 남사( 南 史 ), 북사( 北 史 ), 구당서, 신당서의 17사를 정사로 꼽았다. 명나라 만력( 萬 曆 ) 연간 에 국자감( 國 子 監 )에서 송사( 宋 史 ), 요사( 遼 史 ), 금사( 金 史 ), 원사( 元 史 ) 를 더 추가해 정사로 삼은 것이 21사다. 고염무는 일지록( 日 知 錄 ) 감본21사( 監 本 二 十 一 史 ) 에서 송나라 때는 17사에 그 쳤지만 지금은 송, 요, 금, 원나라의 네 역사를 합해서 21사가 되었다 라고 말했다. 46) 府 東 至 山 海 關 一 百 八 十 裏, 南 至 海 岸 百 六 十 裏, 西 至 順 天 府 薊 州 三 百 裏, 北 至 桃 林 口 六 十 裏, 東 北 至 - 14 -
그 다음이 영평부에 대한 역사적 지명 변천 사례이다. 옛날에는 기주( 冀 州 )지역이었다. 우( 虞 :순임금) 때는 나누어서 영주( 營 州 ) 땅으로 삼았다. 하 ( 夏 )나라는 이로 인해 기주 땅이었고, 상( 商 :은)나라 때는 고죽국이었다. 주( 周 )나라 때 유주( 幽 州 )에 속하게 했고, 춘추 때는 산융( 山 戎 ), 비자( 肥 子 ) 두 나라 땅이었다. 전국( 戰 國 ) 때는 연 ( 燕 )나라에 속했다가 진( 秦 )나라는 우북평, 요서( 遼 西 ) 두 군( 郡 ) 땅이었다. 한나라 때는 한서 지리지 에 의하면 우북평군의 군치( 郡 治 )는 평강도( 平 岡 道 )인데, 지금 계주( 薊 州 ) 북쪽 경계이 고, 요서군의 군치는 차려현( 且 慮 縣 )인데, 지금 영평부의 동쪽 경계에 있었다. 후한( 後 漢 )에서 도 역시 요서군 등의 땅이었고, 진( 晉 )나라 때도 요서군이었다.( 독사방여기요 권 17 영평부 ) 47) 현재의 하북성 노룡( 盧 龍 ) 지역이 과거에는 기주, 영주, 유주, 우북평, 요서지역이었다는 뜻이 다. 현재 식민사학 및 중국 동북공정에서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나누면서 요 양시 서쪽을 요서군으로 비정한 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앞서 수서 지리 지 상곡군 수성현 조에서 양평( 襄 平 )현, 신창( 新 昌 )현은 요동군에 속하게 했다. 는 구절이 있 다고 설명했는데, 독사방여기요 는 현재의 노룡현이 한때 신창현으로서 영평부에 속해 있었 다고 말하고 있다. 신창성( 新 昌 城 )은 곧 지금 영평부를 다스리는 치소이다. 한나라에서 신창현을 설치하고 요동 군에 소속시켰다. 후한에서도 그를 따랐고, 진( 晉 )나라는 요동국( 遼 東 國 )에 소속시켰는데, 지금 요동 해주위( 海 州 衛 ) 지경이었다( 독사방여기요 권 17 영평부) 48) 한, 후한, 진( 晉 )나라 때는 이 지역이 요동군이 되었다가 요동국이 되기도 했다는 뜻이다. 이 지역은 역사 상황에 따라서 요동, 요서, 우북평 등으로 분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창 에 대한 설명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조선성이 등장한다. 후위( 後 魏 )에서 잠시 이 지역을 북평군에 소속시켰고, 후제( 後 齊 )에서는 군치( 郡 治 )로 삼았다. 수나라에서 노룡현으로 개칭했다. 또 조선성( 朝 鮮 城 )이 영평부 북쪽 40리에 있는데, 한나라 낙 랑군의 속현이다. 지금은 조선 경내에 있다( 독사방여기요 권 17 영평부) 49) 여기에서 말하는 조선성에 대해서 한나라 낙랑군 속현 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곧 낙랑군 조선 현을 뜻하는 것이다.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가 드러난 것이다. 지금은 조선 경내에 있 다 는 말은 고조우도 낙랑군 조선현이 조선 경내에 있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廢 營 州 六 百 九 十 裏 自 府 治 至 京 師 五 百 五 十 裏, 至 南 京 三 千 一 百 五 十 裏 ( 讀 史 方 輿 紀 要 卷 17, 北 直 八, 永 平 府 ) 47) 古 冀 州 地 有 虞 時 分 為 營 州 地 夏 仍 為 冀 州 地 商 時 為 孤 竹 國 周 屬 幽 州 春 秋 時 為 山 戎 肥 子 二 國 地 戰 國 屬 燕 秦 為 右 北 平 遼 西 二 郡 地 漢 因 之 漢 誌 : 右 北 平 郡 治 平 岡 道, 在 今 薊 州 北 境 遼 西 郡 治 且 慮 縣, 在 今 府 東 境 後 漢 亦 為 遼 西 等 郡 地 晉 為 遼 西 郡 ( 讀 史 方 輿 紀 要 卷 17, 北 直 八, 永 平 府 ) 48) 新 昌 城 即 今 府 治 漢 置 新 昌 縣, 屬 遼 東 郡 後 漢 因 之 晉 屬 遼 東 國, 在 今 遼 東 海 州 衛 境 ( 讀 史 方 輿 紀 要 卷 17, 北 直 八, 永 平 府 ) 49) 後 魏 僑 置 於 此, 屬 北 平 郡 後 齊 為 郡 治 隋 改 曰 盧 龍 縣 又 朝 鮮 城, 在 府 北 四 十 裏, 漢 樂 浪 郡 屬 縣 也, 在 今 朝 鮮 境 內 ( 讀 史 方 輿 紀 要 卷 17, 北 直 八, 永 平 府 ) - 15 -
다. 그러나 고대 역사 사료를 보면 조선경내가 아니라 영평부, 즉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에 있 다고 기술하고 있으니 그 내용은 내용대로 서술한 것이다. 신창에 대한 설명을 계속 보자. 북위의 탁발도 연화( 延 和 ) 초에 조선 백성을 비여( 肥 如 )로 옮기고 조선현을 설치하고, 북평군 의 치소를 겸하게 했다. 고제( 高 齊 ) 때 군의 치소를 신창으로 옮기고 조선현을 병합시켰다( 독 사방여기요 권 17 영평부) 50) 북위 태무제 탁발도의 연호인 연화는 432년부터 435년까지이다. 이때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옛 조선백성들을 비여로 옮기고 조선현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비여도 한국 고대사의 위치비정 에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다. 한서 지리지 에는 요서군에 속한 속현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서 지리지 는 비여에 대해 현수( 玄 水 )가 동쪽으로 흘러 유수( 濡 水 )로 들어간다. 유수는 남쪽으로 흘러서 해양( 海 陽 )으로 들어간다. 또 노수( 盧 水 )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서 현수로 들어간다. 왕망은 비이( 肥 而 )라고 했다 51) 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양( 海 陽 )이 어 디일까? 한서 지리지 에는 역시 요서군에 속한 14개 현 중의 하나로 해양현을 들고 있는 데, 해양현에 대해서는 용선수( 龍 鮮 水 )가 동쪽으로 흘러서 봉대수( 封 大 水 )로 들어간다. 봉대 수와 수허수( 綏 虛 水 )는 모두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염관( 鹽 官 )이 있다 52) 라고 설 명하고 있다. 해양현은 전한 때 해양후국( 海 陽 侯 國 )을 설치하기도 했던 지역인데, 요서군에 속 했다가 북제( 北 齊 ) 때 비여현으로 통합되었다. 중국에서는 현재 하북성 난현( 灤 縣 ) 서남쪽으로 비정하고 있다. 진서 지리지 를 보면 진나라 때는 요서군에 양락( 陽 樂 ), 비여( 肥 如 ), 해양( 海 陽 )의 3개 현이 있는데, 호수는 2천8백명으로 대폭 축소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53) 이 비여현에 대해 현재 중 국에서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에서 조금 서북쪽 천안( 遷 安 )시 동쪽의 만군산( 萬 軍 山 ) 일대로 비 정한다. 지금의 사하( 沙 河 )인 노수( 盧 水 )와 지금의 청룡하( 靑 龍 河 )인 현수( 玄 水 )가 교차하는 지 역이다. 노룡현에는 고죽국의 왕자였던 백이, 숙제의 비석이 있는데, 만군산 일대도 옛날 고죽 국 지역이었다. 독사방여기요 의 영평부 조는 요서군, 요동군, 낙랑군이 서로 지척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후한서 군국지 및 진서 지리지 도 이 군들이 서로 인접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이 옛 신창현으로서 한나라 때는 요동군에 속해 있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40 리 떨어진 조선성은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해 있었다는 뜻이다. 이를 요동군과 낙랑군 사이의 최단거리를 설명한 것이라고 보면 10여km가 채 안 되는 거리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노룡현, 즉 청나라 때의 영평부는 요동군 소속이었고, 그 북쪽 40리의 조선현은 낙랑군 소속이었다. 독사방여기요 영평부 조는 산하의 영지성( 令 支 城 )에 대해서 영평부 동북쪽에 있다면서 한 나라 때는 영지현을 설치하고 요서군에 소속시켰다 54) 고 말하고 있다. 요서군도 이 부군에 붙 50) 後 魏 主 燾 延 和 初, 徙 朝 鮮 民 於 肥 如, 置 朝 鮮 縣, 並 置 北 平 郡 治 此 高 齊 移 郡 治 新 昌, 並 朝 鮮 縣 入 焉 ( 讀 史 方 輿 紀 要 卷 17, 北 直 八, 永 平 府 ) 51) 肥 如 : 玄 水 東 入 濡 水. 濡 水 南 入 海 陽. 又 有 盧 水, 南 入 玄. 莽 曰 肥 而 ( 漢 書 地 理 志 遼 西 郡 肥 如 縣 ) 52) 海 陽 : 龍 鮮 水 東 入 封 大 水. 封 大 水 綏 虛 水 皆 南 入 海. 有 鹽 官 ( 漢 書 地 理 志 遼 西 郡 海 陽 縣 ) 53) 진서( 晋 書 ) 지리지 상( 上 ), 유주( 幽 州 ) 요서군( 遼 西 郡 )조. 여기에서는 선비족 모용씨와 부견 등이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 그 세가 크게 위축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54) 令 支 城 在 府 東 北 春 秋 時 山 戎 屬 國 也 齊 語 : 桓 公 北 伐 山 戎, 弗 刂 令 支, 斬 孤 竹 史 記 : 齊 桓 公 曰, 我 北 伐 山 戎 離 支 孤 竹 離 支, 即 令 支 之 訛 也 漢 置 令 支 縣, 屬 遼 西 郡 ( 讀 史 方 輿 紀 要 卷 17, 北 直 八, 永 平 府 ) - 16 -
어 있었다는 뜻이다. 이 부근에 요서성( 遼 西 城 )이 있었다는 사실로도 이는 명확해진다. 요서성은 영평부 치소 동쪽에 있다. 두우( 杜 佑 :당나라 사람)는 노룡현 동쪽에 요서고성( 遼 西 故 城 )이 있는데, 한나라 요서군의 치소였다가 후에 폐지되었다. 상고해보니 한나라는 요서군을 설치하고 차려( 且 慮 )에 치소를 두었는데, 후한에서 양락( 陽 樂 )으로 옮겨 다스리게 했고, 진( 晉 ) 도 이를 따랐다. 이는 대개 후한 및 진( 晉 )에서 다스리던 군치였다( 독사방여기요 권 17 영평 부) 55) 요서성은 노룡현 서쪽에 있었다. 한나라 때는 차려현에 치소를 두었다가 후한에서 양락현으로 옮겼고, 진( 晉 )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다는 뜻이다. 고죽성( 孤 竹 城 )에 대한 설명은 연 진( 燕 秦 ) 장성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준다. 고죽성은 영평부 서쪽 15리에 있다. 세기( 世 紀 :제왕세기) 에는 탕왕( 湯 王 ) 18년에 묵태씨( 墨 胎 氏 )를 고죽국에 봉했다고 한다. 그 후 9세 후손인 고죽군( 孤 竹 君 )에게 백이, 숙제 두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를 양보하고 도망갔다. 관자 에 제( 齊 ) 환공( 桓 公 )이 북쪽 고죽국을 정벌하는데 비이( 卑 耳 )계곡에 이르렀다고 했다. 사기 에 제 환공이 북쪽 산융을 정벌하는 길에 고죽에 이 르렀다고 했는데, 이를 말한다. 한서 지리지 주석에 영지현에 고죽성이 있다고 했다. 괄 지지 에 고죽고성( 孤 竹 古 城 )은 노룡현 남쪽 20리에 있다고 했는데, 지금 옛 자취를 찾아 고증 하기는 불가하다. 성은 혹 후대 사람들이 쌓은 것인데, 옛 이름을 덮어씌운 것이라 한다( 독사 방여기요 권 17 영평부) 56) 과연 한나라 때도 이 지역을 고죽국으로 보았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지역에 설치한 낙랑군 조 선현을 기자를 봉한 곳이라고 보았던 근거를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죽성을 기자와 연결시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독사방여기요 의 영평부 조에는 만리장성에 대한 설명도 있 다. 장성( 長 城 )이 영평부 북쪽 70리에 있다. 유소( 劉 昭 )는 비여현에 장성이 있는데, 혹 연 진( 燕 秦 )에서 쌓았다는 장성이 즉 이 지역이라고 말했다. 곽조경( 郭 造 卿 )이 말하기를 옛 장성은 우 북평, 요서, 요동의 여러 새외( 塞 外 )에 있는데, 만약 이 부근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이 장성은 국초( 國 初 )의 옛 터와 비슷한 것으로, 일통지 가 진 장성으로 잘못 본 것이다( 독사방여기요 권 17 영평부) 57) 독사방여기요 는 영평부 북쪽 70리에 있는 장성에 대해 두 가지 설을 제시했다. 하나는 이것 이 연 진( 燕 秦 )장성이라는 후한서 지리지의 저자 유소( 劉 昭 )의 설이다. 다른 하나는 명나라 초 55) 遼 西 城 在 府 治 東 杜 佑 曰 : 盧 龍 縣 東 有 遼 西 故 城, 漢 郡 治 此, 後 廢 按 漢 置 遼 西 郡, 治 且 慮 後 漢 移 治 陽 樂 晉 因 之 此 蓋 後 漢 及 晉 所 置 郡 也 ( 讀 史 方 輿 紀 要 卷 17, 北 直 八, 永 平 府 ) 56) 孤 竹 城 府 西 十 五 裏 世 紀 : 湯 十 有 八 祀, 封 墨 胎 氏 孤 竹 國 後 九 葉 孤 竹 君 二 子 : 伯 夷 叔 齊, 以 讓 國 逃 去 管 子 : 齊 桓 公 北 征 孤 竹, 至 卑 耳 之 溪 史 記 : 齊 桓 公 北 伐 山 戎, 至 於 孤 竹 是 也 漢 誌 註 令 支 縣 有 孤 竹 城 括 地 誌 : 孤 竹 古 城 在 盧 龍 城 南 十 二 裏, 今 故 跡 已 不 可 考 城 或 後 人 所 築, 而 冠 以 古 名 雲 ( 讀 史 方 輿 紀 要 卷 17, 北 直 八, 永 平 府 ) 57) 長 城, 在 府 北 七 十 裏 劉 昭 曰 : 肥 如 縣 有 長 城 或 以 為 燕 秦 所 築 之 長 城, 即 此 地 也 郭 造 卿 曰 : 古 長 城 在 右 北 平 遼 西 遼 東 諸 塞 外, 不 應 若 此 之 近 此 長 城 似 國 初 故 址, 一 統 誌 誤 以 為 秦 長 城 也 ( 讀 史 方 輿 紀 要 卷 17, 北 直 八, 永 平 府 ) - 17 -
의 옛 터를 연 진장성으로 잘못 본 것이라는 곽조경( 郭 造 卿 )의 설이다. 유소는 후한서 에 주 석을 단 인물로 남조 양( 梁 :502~557)나라 때 학자이니 6세기 경의 인물이고, 곽조경은 명나라 가정 14년(1535) 진사에 급제해 형부주사( 刑 部 主 事 )를 역임한 곽만정( 郭 萬 程 )의 아들이니 16 세기 후의 인물이다. 앞 시대 인물의 지리지식이 반드시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6세기 경에 후한서 에 주석을 단 인물의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독사방여기요 의 영 평부에 대한 설명을 따라가면 한나라 낙랑군, 요동군, 요서군의 위치를 대략 비정할 수 있다.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인 영평부는 옛 신창으로 요동군 소속이고, 그 북쪽 40리에 낙랑군 조선 현이 있었고, 노룡현 서쪽에 요서군의 치소가 있었다. 58) 한나라는 한반도 서북부의 평양에 있었다는 왕험성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었다. 왕험성은 평양 일대에 있지 않았다. 그 당시 한나라 사람들에게는 한반도에 대한 지리 지식 자체가 없었다. 한나라는 고조선 서쪽에 있던 위만 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일대에 낙랑 현도 임둔 진번군을 설 치했지만 상징적 승리일 뿐 영토 확장의 의미는 크지 않았다. 임둔 진번군을 곧 철폐한 것으 로도 이는 명확해진다. 또한 한나라 요동군, 요서군, 낙랑군은 거의 비슷한 지역에 몰려 있었 다. 앞으로 한국 고대사 및 중국 고대사에 대한 역사지리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5. 맺음말 낙랑군 조선현은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 일대에 있었다. 옛 위만 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에 세운 낙랑군 조선현이 현재의 대동강 남쪽의 토성동이라는 설은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선전에 불과 하다. 북위의 역도원이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을 위만조선의 왕험성으로 잘못 인식하면서 오류 가 생겨났다. 여기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새로운 행정구역을 설치하는 대신 관념적으로 요동으로 편입시키는 바람에 요동에 대한 역사 지리지식이 더 크게 왜곡되었 다. 고려 중기 이후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기자동래설을 신봉해 평양을 기자가 다스렸던 지역 으로 둔갑시킨 것도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평양으로 오인하게 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기존의 견해들은 기자조선=위만조선 이라는 고정 관념 속에서 평양과 대동강 유역을 기자와 위만의 도읍지로 인식했지만 한서 지리지는 기자 조선의 도읍지에 세운 것이 낙랑군 조선현 이고, 위만 조선의 도읍지에 세운 것이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분리해서 기술하고 있다. 독사 방여기요 는 낙랑군 조선현을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인 영평부 일대라고 서술하고 있고, 그 북 쪽에 장성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뿐만 아니라 소위 연 진 장성의 소재까지 말해주는 중요한 구절이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체계적이고 보다 자 세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58) 독사방여기요 는 현도군은 현재의 심양 서쪽 요양( 遼 陽 )시에 있었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재 식 민사학이 비정하는 강원도 북부나 압록강 중류설보다는 전향적이지만 고우조 시대 때는 요하( 遼 河 )의 위치 비정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현도군도 낙랑군 근처에 있 었을 것이다. -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