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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연구논문 유미림 Ⅰ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4 이상균 최희 Ⅰ 북한의 영토교육과 한민족의 독도 영유권 44 김주환 Ⅰ 중국의 제해권 확충 노력 - 조어도 분쟁을 중심으로 74 황재원 Ⅰ 독도와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 100 신승복 최재영 Ⅰ 제국주의 침략에 따른 베트남 중국 관계와 조선 중국 관계의 변화, 그리고 두 관계의 상호작용 124 서평 이명찬 Ⅰ 도설 다케시마=독도 문제의 해결 : 다케시마=독도는 영토 문제가 아니라 역사 문제다 184 영토 해양 일지 영토 해양 일지 194 연구노트 유미림 Ⅰ 가제냐, 강치냐 - 호칭의 유래와 변천에 관한 소고 156 영토해양연구 간행 및 논문 심사 규정 198 연구에세이 오송 Ⅰ 동해 표기 문제와 위키피디아 176

연구논문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유미림 한아문화연구소 소장 과세해왔음을 알 수 있다. 독도에 대한 실효 지배 를 입증하려면 울릉도 수 출품 안에 독도 산물이 포함되어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부산 영사관에서 외무성에 보고한 내용에는 1904년과 1905년의 강치 통계가 들어 있다. 이 때의 강치는 독도에서 포획된 것이었다. 3 일본 외무성은 울릉도에서의 납 세과목을 수출세 4 라고 주장했다. 일본인들이 대한제국의 규정에 의거, 독 도 산물에 대해서도 납세했다면 이는 독도를 울릉도의 속도로 보고 그에 대한 군수의 관할권을 인정했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이런 필자의 주장에 대해 대내외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첫 번째 비판은 Ⅰ. 머리말 이 글은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에 앞서 대한제국이 독도를 관할해온, 이른바 실효 지배 1 를 입증하는 연구의 일환이자 그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 다. 이전에 필자는 1902년 대한제국 내부가 울도 군수 에게 내려준 울도군 절목 의 세금 조항을 독도 강치 에 적용하여 군수가 독도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해왔 음을 입증한 바 있다. 2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울도군 절목 에 는 한인과 일본인의 세금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 안의 출입 화물에 대한 100분의 1세 운운은 일본인에게 해당된다. 당시 화물은 일본인이 수출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일본인은 1900년 이전부터 벌목과 교역 등의 불법행위를 묵인받는 대가로 울릉도 도감에게 물건 값의 100분의 2세를 납부해왔었다. 이것이 1902년에 는 100분의 1로 줄어들었지만 이 조항을 보면 군수가 1 이 글에서는 실효 지배 (실효적 지배)에 대한 정의를, 무주지( 無 主 地 )에 대한 일국의 선점( 先 占 )이 성립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일 정 영역에 대하여 영유 의사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국가 권력을 행사하거나 점유 행위를 행한 사실을 의미한다. 무인도인 경 우, 실제적인 인간의 정주가 요구되지 않을 수도 있다. 토지에 자국 법령을 적용하고, 경제활동에 과세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실 효 지배의 조건을 충족하는 통치행위다(김 현수 박성욱, 2007, 독도영유권과 실효적 지배 에 관한 연구,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한국해양수 산개발원 편, 2011, 독도사전, 한국해양수산개 발원). 2 유미림, 2013, 수세관행과 독도에 대한 실효지배, 우리사료 속의 독도와 울릉도, 지식산업사. 3 이때의 강치가 울릉도 강치인지 독도 강 치인지에 대해서는 아래 자료를 참고할 것. 通 商 彙 纂 50호( 鬱 陵 島 現 況, 1905. 9. 3), 랑 코 도(ランコ 島 )의 강치잡이는 작년(1904년- 역자) 경부터 울릉도민이 잡기 시작했고 라 고 했으므로 독도 강치를 의미한다. 4 수출 이란 용어는 국내 간 운송 물품에 도 붙이지만, 외무성이 언급한 수출세 는 외국으로 운송하는 물품에 대한 세목임을 의미한다. 5 유미림, 2014, 1900년 칙령 제41호의 제정 전후 울릉도 수출세 의 성격, 영토해 양연구 7호, 동북아역사재단; 竹 島 問 題 硏 究 會, 2014, 竹 島 問 題 100 問 100 答 (ワッ ク 出 版 ), Q85항에 대한 반론. 6 절목이 울도군에 하달되지 않았을 가능 성도 제기하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 할지라 도 수세관행에 따른 입증 사실이 방해받는 것은 아니다. 일본인이 수출세를 납부했음 은 여러 정황으로 입증되며, 절목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여러 정황 중의 하나기 때문 이다. 더구나 배계주가 군민에게서 고소당 한 1902년에도 중앙정부는 배계주가 2% 세액[ 十 二 之 稅 額 ]을 거둔 것을 인지했음에 도 爲 補 於 公 用 야 不 得 已 而 行 之 者 也 오 實 不 欲 營 私 之 計 이온즉 이라며 선처를 검토하고 있다( 司 法 稟 報 < 乙 > 36, 보고서 제 137호, 1902. 8. 25). 이는 절목 이후에도 2% 세율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울도군 절목 에서 규정한 출입 화물에 대한 세금 은 한국인에게 적용되는 것인데 필자가 잘못 이해했다는 점, 두 번째 비판은 독도 강치는 울릉도에서 가공되어 수출된 것이므로 독도에 대한 직접적인 주권 행사와 는 관련이 없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재반론 을 한 바 있다. 5 전자 6 에 대한 반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899년 6월과 9월, 1900년 6월 모두 세 번에 걸쳐 울릉도를 조사한 바 있는데 그때 일본 외무성과 해군성, 프랑스 해관 세무사, 대한제국 관리가 공통적으로 지적한 사 실은 일본인들이 화물에 대한 세금으로 울릉도 수장 에게 100분의 2세를 관행적으로 납부해왔다는 점이 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수세 조항은 이 관행을 인정해준 것이며, 1902년의 울도군 절목 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자에 대해 서는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울릉도의 일본인은 수출 품에 일종의 수출세를 납부했지만 물건에 따라 납세 하는 종가세( 從 價 稅 ) 체제가 성립되어 있었으므로 그 들이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면 독도 산 물을 제외하고 납부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4 5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독도산물에 대한 과세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인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7 현재 일본은 1905년을 전후하여 울도군이 강치에 과세한 사실이 독도에 대한 직접적인 주권행위임을 부인하고 있다. 그 대신 일본이 직접적인 주권 행위를 했음을 예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1905년의 편입 후 시마네현[ 島 根 縣 ]의 어업규칙을 개정하여 다케시마[ 竹 島 ] 어업을 허가제로 한 뒤 감찰( 鑑 札 ) 을 교부하여 국유지 사용료를 매년 징수했다 8 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일 본이 직접적인 주권 행위의 예로 제시한 시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시 기는 바로 일본이 1905년 2월 독도를 이른바 다케시마 라는 이름으로 편 입한 이후다. 일본은 독도에 대한 직접적인 주권행위를 주장하려면 편입 이 후의 증거를 제시할 것이 아니라 편입 이전의 증거, 즉 1905년 이전 독도 강치에 대한 과세 사실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일본 시마네현은 1905년 편 입 이전 강치업자에게 과세한 사실이 있는가? 이 글은 그에 대한 실증적 고 찰이다. Ⅱ. 오키국의 어업과 강치 포획 1. 오키에서의 강치어업 오키[ 隱 岐 ]인들이 울릉도로 가다가 독도에서 수백 마 리의 강치를 목격한 시기는 1890년대 초다. 이때 오키 인들은 독도가 포경장( 捕 鯨 場 )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9 오키인들이 독도에서 강치를 잡은 시기는 1897년으 로 추정된다. 10 그러나 이때는 본격적으로 독도로 출어 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오키인들의 목적지는 울릉도였 으므로 독도 어로는 울릉도 출어 중에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독도 출어는 주로 울릉도를 근거지로 해서 이 7 竹 島 問 題 硏 究 會, 2014, 竹 島 問 題 100 問 100 答 (ワック 出 版 ), Q85항에 대한 반론 참조. 8 竹 島 問 題 硏 究 會, 2014, 竹 島 問 題 100 問 100 答 (ワック 出 版 ), Q85항 참조. 9 山 陰 新 聞, 1894. 2. 18, 朝 鮮 竹 島 探 檢 [ 兒 島 俊 平, 1988. 2, 隱 岐 漁 民 의 竹 島 ( 鬱 陵 島 ) 行, 鄕 土 石 見 21호, 42쪽에서 재인용]. 10 오쿠하라 헤키운[ 奥 原 碧 雲 ]에 따르면, 1897년 울릉도에서의 난파선 수색을 위해 도항했던 오키 어선이 독도에서 강치를 잡 아 판매한 이래 포획을 계속해왔다고 한다. 가와카미 겐조[ 川 上 健 三 ]에 따르면, 1890년 대에 일본인들이 울릉도와 독도에서 어로 했으나 강치잡이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러나 이시바시 쇼타로는 1890년대 중반에 울릉도는 가지 않고 독도에서만 강치잡이 에 종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뤄지고 있었다. 울릉도와 오키, 두 지역민이 독도 강치를 본격적으로 포획 한 것은 1903년 전후로 보인다. 강치 포획은 독도에서 본격적으로 행해지기 전부터 오키에서도 행해지 고 있었다. 그 시기는 1886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11 이 11 井 上 貴 央 佐 藤 仁 志, 1991, 隱 岐 島 の アシカ 獵, 隱 岐 の 文 化 財 22호, 74쪽. 12 島 根 縣 統 計 書 ( 勸 業 之 部 )에는 농업, 차업( 茶 業 ), 잠업, 축산, 임업, 어업, 공업, 광 업, 어업, 금융, 기상, 잡( 雜 )을 싣고 있다. 어 업은 어선, 난파어선, 어획물, 수산제조물, 수산양식, 원양어업에 관한 통계를 싣고 있 지만, 현세총람( 縣 勢 總 攬 ) 형식으로 어획, 수산제조, 기타 수산의 총액을 적고 있다. 島 根 縣 農 商 統 計 表 와 내용이 중복되기 도 하는데, 같은 해의 통계가 다른 경우가 있다. 13 이즈모 이와미 오키가 시마네현 관할 이고, 다시 스키 오치 아마 지부군 4군은 오키국 관할이다. 14 어종을 명기하되 기타 로 분류한 것도 있어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대략의 숫자는 파악할 수 있다. 15 1891년 통계에 따르면, 오키국의 어획 물은 약 34종, 이즈모국은 68종, 이와미국 은 52종이, 1892년에는 이즈모국이 65종, 이와미국이 50종, 오키국이 36종이 있다. 그러나 고래나 강치는 보이지 않는다. 16 수산물은 함수산물( 鹹 水 産 物, 해수산물로 도 표기)과 담수산물로 구분되는데, 함수산 물은 다시 건물류( 乾 物 類 ), 염물류( 鹽 物 類 ), 태조류( 苔 藻 類 ), 잡류( 雜 類 )로 세분된다. 17 외해 의 사전적 의미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즉 외양 으로 내해( 內 海 ) 와 반 대되는 의미다. 내해 는 중해( 中 海 )의 의미 에 가깝다고 되어 있지만, 시마네현 자료에 도 명확한 구분 기준은 없다. 18 1905년에는 다케시마 즉 독도 도 외해 의 범주에 들어 있다. 를 입증해주는 자료가 시마네현 농상통계표 (1890~1903)와 시마네현 통계서 12 등의 통계서로 남아 있다. 시마네현 농상통계표 에는 농사, 잠사( 蠶 事 ), 축 산, 상사( 商 事 ), 공업, 수산, 회사, 선박 등에 관한 통계가 실려 있다. 이 안의 수산 에는 수산제조 물산의 가액 ( 價 額 ), 포획고, 선명( 船 名 ) 및 어부, 어선 통계 등이 실려 있다. 이들 통계서에 나타난 오키국 13 의 어획고와 과세 여부를 보면, 과세와 실효 지배의 연관성이 파악될 것 이다. 오키국의 어업 통계는 1890년(1892년 발간)부터 보인 다. 오키국 어획물로는 약 34종 14 이 있지만 강치는 보 이지 않는다. 강치가 보이는 것은 1895년 통계부터다. 강치는 오키국 통계에서는 보이지만 이즈모국[ 出 雲 國 ] 과 이와미국[ 石 見 國 ] 통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15 고래 와 강치는 모두 함수산에 속하는 어종이다. 16 1894년에 시마네현은 새로 건조한 어선을 조사하 면서 해역을 빈포호천( 濱 浦 湖 川 ), 중해( 中 海 ), 외해( 外 海 )로 구분했다. 17 오키국은 외해 18 로 분류되어 있다. 오키국 의 스키군[ 周 吉 郡 ], 오치군[ 穩 地 郡 ], 아마군[ 海 士 郡 ], 지부군 [ 知 夫 郡 ] 4군은 다시 각각의 연해로 세분되었다. 또한 4군 안에는 각각 사이고정 외 16개 촌, 쓰도촌[ 津 戶 村 ] 외 9개 촌, 아마촌[ 海 士 村 ] 외 7개 촌, 미타촌[ 美 田 村 ] 외 4개 촌 순으로 소속지명이 밝혀져 있다. 1894년에 이즈모국과 이와미국 어획물에 고래가 6 7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보였지만, 오키국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19 1895년이 되면 강치(원문은 海 驢, 아시카) 20 가 오키국 함수산 21 어획 물로 맨 앞에 나온다. 오키국 가운데 지부군 연해 5개 촌 22 의 어획물로서 어획량은 750관, 가액( 價 額 )은 35엔 23 이다. 이 숫자가 오키국의 총계이므로 지부군의 총계 가 바로 오키국 총계임을 알 수 있다. 시마네현 농상 통계표 에는 1896년도분이 누락되어 있다. 24 강치는 1897년의 통계에서도 가장 먼저 나오는데, 스키군 25 의 어획량은 300관 250엔, 지부군 26 은 60관 40엔, 합 계가 360관 290엔이다. 1895년에 비해 수량은 감소한 (750관 360관) 반면, 가액은 35엔에서 290엔으로 증가 했고 스키군이 새로 추가되었다. 이해에는 해역이 중 19 어종은 이즈모가 51종, 이와미가 96종, 오키는 58종이 있다. 고래 포획이 어선의 크기와 관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해에 시마네현에서 5칸 이상 어선을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은 아이카군[ 秋 鹿 郡 ]이다. 5칸 이 하의 선박은 스키군이 6척, 지부군이 5척, 아마군이 2척, 오치군은 없다. 20 한국은 강치 혹은 바다사자라고 부르지 만 조선시대 문헌에는 가지어( 可 支 魚, 嘉 支 魚, 可 之 魚 )로 나온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 규경은 가지 는 동해 사람이, 强 治 는 북해 사람이 붙인 명칭이라고 했다. 정약용에 따 르면, 어명( 魚 名 )에 治 자를 붙이는 것은 방 언이라고 했으므로 바다사자에 대한 조선 시대 속명( 俗 名 )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는 일본 호칭 아시카[ 海 驢 ] 의 대( 對 )로서, 그리고 특정 시기의 호칭으로서 강치 로 칭 하고 필요한 경우 원문을 병기했다. 郡, 那 賀 郡, 美 濃 郡 이다. 액( 漁 業 採 藻 稅 課 目 課 額 ) 을 따르는데, 고래는 마리 수 31 에 따라, 어망은 크기에 따라 등급을 매겨 인원별로 과액을 매긴다. 채조( 採 藻 )에 대한 세금은 인원 혹은 어장을 구분하여 매긴다. 주로 연세 혹은 계절세로 부과된다. 1900년 강치 어획량을 보면, 스키군이 102관 40엔, 지부군이 275관 72엔이다. 전과는 달리 강치 가 맨 마지막에 나온다. 1901년에도 어획물 64종 가운데 강치 어획량은 스키군이 75관 31엔, 오치군이 60관 18엔, 지 부군이 918관 306엔이다. 지부군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오치군이 추가 된 것이 특징이다. 32 1902년에는 62종의 어획물 가운데 강치는 스키군이 608관 116엔, 지부군이 632관 210엔으로 비슷하며 이번에는 오치군이 빠 져 있다. 아마군은 줄곧 통계가 없었다. 1903년의 어획량은 스키군이 550관 165엔, 지부군이 887관 288엔이다. 그런데 시마네현 농상통계표 에서 강치 통계가 보이는 것은 1903년까 해외해( 中 海 外 海 ), 중해, 외해 27 로 분류되어 있다. 1895년에는 스키군 연해 안의 스키군 으로 칭했는 21 이하 강치가 함수산 어획물이라는 사실 은 생략한다. 이 글의 통계는 함수산 어획 물 통계다. 28 스키군은 사이고 나카정 외 21정촌, 오 치군은 津 戶 村 외 八 村, 아마군은 海 士 村 외 7 村, 지부군은 美 田 村 외 4 村 으로 변동 지다. 이 통계표는 이후 시마네현 통계서 에 통합된 듯하지만 여기에도 1904년 이후 어획물 명단에 강치 데, 1897년에는 스키군 으로 칭하고 있다. 28 1894년에 22 美 田 村, 別 府 村, 宇 賀 村, 浦 鄕 村, 知 이 없고, 오치군만 촌 한 개가 증가했다. 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3 는 스키군 소속의 사이고정 외 16개 촌( 村 ) 으로만 표 기했는데, 1895년에는 스키군에 속한 정촌( 町 村 )의 이 름을 전부 표기하고 있다. 29 그런데 다케시마 30 라는 촌 명은 1905년 4월 이전까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夫 村 이다. 23 1895년 쌀 10kg당 가격을 기준으로 환 산하면 1엔은 약 6,000엔이다. 메이지 시대 쌀값은 변동이 심해 10kg 기준, 2,500엔에 서 6,000엔까지로 편차가 크다. 2004년 기 준으로는 10kg당 3,536엔이다(박병섭, 2009, 29 스키군에는 3개 정( 町 )과 16개 촌이 있 다. 오치군에는 10개 촌, 아마군에는 9개 촌, 지부군에는 5개 촌이 있다. 이 글에서 촌의 이름은 생략한다. 30 이 글에서 칭하는 다케시마 는 특기하 지 않는 한 독도 를 가리킨다. 다만 인용문 한편 1904년은 독도에서 포획한 강치 통계가 보이 는 해다. 위에서 언급한, 1903년까지 시마네현이 강치 과목을 명기하지 않은 원인을 구명하기 전에 먼저 오 키국의 강치 어획량을 정리해보면 <표 1>과 같다(조사 1898년의 강치 어획량은 스키군이 400관 40엔, 지 부군이 30관 15엔이고, 오치군과 아마군의 어획량은 보이지 않는다. 1899년에는 어획량이 강치, 고래 순서 한말 울릉도 독도 어업, 한국해양수산개발원, 266쪽 참고). 24 일실된 듯하다. 島 根 縣 統 計 書 는 마 이크로필름이 있지만 어획 통계는 나와 있 등에서 일본이 주체일 경우 다케시마 로 표 기하는 경우가 있음을 밝힌다. 31 1889년 포경에 대한 과액은 한 마리당 25엔이다. 일은 12월 말일 기준, 1896년은 통계자료 자체가 없음). 이상의 통계로 알 수 있는 것은 1890년대 중반부터 1903년까지는 오키국 4군의 연해에서 강치가 포획되 로 열거되어 있다. 강치 어획량은 스키군이 330관 64엔, 지 않다. 32 고래는 오치군이 425관, 85엔의 어획고 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강치가 독도 강치가 아님은 지부군이 250관 75엔으로, 합계가 580관 139엔이다. 이해에도 스키군이 지부군을 앞섰다. 25 사이고[ 西 鄕 ] 나카정[ 中 町 ] 외 21정촌( 町 村 )이다. 26 미타촌[ 美 田 村 ] 외 4개 촌이다. 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어 강치보다 많다. 33 어획물은 어류, 개류( 介 類 ), 조류( 藻 類 )로 구분되어 있는데, 기타를 포함해서 대략 포획지를 지부군 연해 라고 밝힌 것으로도 알 수 있 다. 오키 강치 34 포획은 1895년경 지부군에서 시작되 그렇다면 강치에 대한 과세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일반적으로 어획물은 잡종세 안에서 어업채조 로 분 류되어 과세된다. 구체적인 것은 어업채조세 과목과 27 이즈모국 야쓰카군[ 八 束 郡 ]은 중해외 해 로, 노기군은 중해 로 분류되어 있다. 오 키국 외에 이즈모국과 이와미국 가운데 외 해 로 분류된 지역은 簸 川 郡, 邇 摩 郡, 安 濃 48종의 어획물이 명기되어 있다. 고래는 어 류에 보인다. 34 편의상 오키 강치, 독도 강치로 칭하기 로 한다. 었지만 스키군, 오치군으로 확대되었다. 스키군의 포 획량이 지부군을 초월하다가 다시 지부군이 스키군을 초월하는 양상을 띠지만 큰 격차로 보기는 어렵다. 오 8 9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표 1> 오키국의 강치 어획량 연도/지역 스키군(수량/가액) 오치군 아마군 지부군 오키국 총계 해역 구분 1895 없음 없음 없음 750관/35엔 750관/35엔 외해/지부군 연해 1896 1897 300관/250엔 없음 없음 60관/40엔 35 360관/290엔 외해/스키군 1898 400관/40엔 없음 없음 30관/15엔 430관/55엔 외해/스키군 1899 330관/64엔 없음 없음 250관/75엔 580관/139엔 외해/스키 1900 102관/40엔 없음 없음 275관/72엔 377관/112엔 외해/스키 1901 75관/31엔 60관/18엔 없음 918관/306엔 1053관/355엔 외해/스키 1902 608관/116엔 없음 없음 632관/210엔 1240관/326엔 외해/스키 1903 550관/165엔 없음 없음 887관/288엔 1437관/453엔 외해/스키군 1904 이후 없음 없음 없음 없음 치군은 뒤에 포획지에서 빠져 있다. 그런데 1903년까지 보이던 오키 강치 가 이후로는 통계서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일본 외무성이 작 성한 1904~1905년간의 울릉도 수출통계 에서 보인다. 이때의 강치는 독 도 강치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시마네현은 1903년까지의 오키 강치에 대해 서는 과세했을까? 이를 검토하기 전에 먼저 오키국의 어업 현황이 강치 포 획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만 오키국은 어유( 魚 油 ) 제조 기록도 없다. 이즈모국의 해수산물은 65종이지 38 가호 숫자는 겸업을 포함한 숫자고, 어 선은 총수를 나타낸 것이다. 어선은 1890~ 1893년까지는 어망에 따른 어선으로 구분 하다가, 1894년부터는 신조어선, 폐용어선, 난파어선, 어선으로 구분하고 있다. 크기에 따라 5칸 이상과 5칸 이하, 3칸 이하로 구 분하는데, 3칸 이하가 대부분이다. 1903년 까지는 島 根 縣 農 商 統 計 表 에 근거했고, 이후는 島 根 縣 統 計 書 에 근거했다. 39 5 間 (1891년 도량형법에 기초, 1 間 을 6척, 약 1.818미터로 하는 단위를 따름) 이상 어선을 보 유한 군은 4군 가운데 하나도 없고, 5칸 미 만 3칸 이상 어선 보유현황을 합하면 스키 군(1,741척)이 가장 많다. 지부군이 1,242척, 아마군이 842척, 오치군이 577척이다. 40 島 根 縣 農 商 統 計 表 의 해수산물 포획 고 표 에서 오키국(스키, 오치, 아마, 지부)의 통계만을 적었다. 41 원문이 분명하지 않다. 만, 오키국은 38종이다. 어업 인구, 어선, 어획물 종류 로 보면, 이즈모국에 비해 오키국이 상대적으로 어업 이 발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강치는 오키 국에서 포획되고 있다. 189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 까지 오키국의 어업 가호를 보면, 38 인구나 어선 보유 면에서 스키군이 다른 군을 앞서고 있고 그다음이 지 부군이다. 1903년 어선 보유현황을 보면, 스키 지부 아마 오치군 순이다. 39 1903~1904년에 독도로 출어한 자들도 대부분 스키군 출신이었다. 어선 보유현황, 어 업 가호나 인구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키국 어획고에서 강치가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표 2>와 같다. 40 어획량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는 어종의 상품성 이나 어로기술, 어선의 크기와 보유현황, 인구 등을 들 <표 2> 오키국 어획고와 강치 비율 (1896년은 자료 없음) 2. 오키국 어업 인구와 강치 포획 통계 같이 시마네현 관할인 이즈모국과 이와미국 일부에서는 강치 포획에 관 한 통계가 보이지 않는다. 오키국 4군 가운데서도 지 부군이 가장 먼저 보인다. 이런 현상이 어업 현황과 관 계가 있는가? 1893년 오키국의 어업 인구 36 를 보면, 겸업인구를 포함하여 스키군이 2,998명, 오치군이 구분되어 있다. 868명, 아마군이 2,138명, 지부군이 1,527명, 모두 7,531명이다. 스키 아마 지부 오치군 순서다. 37 그 런데 어선 현황을 보면, 이즈모국은 18척인데 오키국 은 한 척도 없다. 수산제조물에 고래기름이 들어 있지 35 지부군도 해역이 외해/지부군 혹은 외 해/지부 형식으로 되어 있다. 36 통계서에는 전업 인구와 겸업 인구로 37 이즈모국 시마네군의 어업 가호는 1,901호다. 이 가운데 어업을 전업으로 하 는 남자가 1,628명, 여자는 215명이다. 겸 업으로 하는 남자는 1,771명, 여자는 59명 이다. 모두 3,973명이 어업 종사자다. 대체 로 겸업 가호가 많다. 연도 어종 수량(관) 가액() 강치 표기 강치 포획 통계 1892 鯛, 烏 賊 등 36종 1,854,121 89,983 없음 통계 없음 1893 鯛, 烏 賊 등 38종 2,536,582 138,890 없음 통계 없음 1894 58종 1,750,532 98,761 없음 통계 없음 1895 59종 1,863,114 141,712 海 鱸 (アシカ) 750관/35엔 1897 96종 8,859,773 6,822,800 海 驢 360관/290엔 1898 96종 11,042,435 10,577,432 海 驢 430관/55? 41 엔 1899 통계 없음 통계 없음 海 驢 (アシカ) 580관/139엔 1900 57종 10,386,444 880,684 海 驢 377관/112엔 1901 64종 8,127,243 917,669 海 驢 1,053관/355엔 1902 62종 9,305,617 1,016,702 海 驢 (アシカ) 1,240관/326엔 1903 60종 8,153,995 942,889 海 鱸 1,437관/453엔 1904 62종 통계 없음 87,337 없음 통계 없음 1905 40종 통계 없음 1,067,942 없음 통계 없음 10 11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수 있다. 강치 어획은 오키와 다른 지역 간 비교에서는 어선 보유량 등과 무관한 데 비해, 오키국 안에서는 어 선이나 어업 인구와 상관이 있었다. 다만 스키군이 어 업 가호나 인구, 어선 보유 면에서 다른 군을 앞지르지 만, 강치 포획 총량은 지부군이 가장 많다. 총량이 아 닌 연도별 가액은 대체로 스키군이 고른 포획량을 보 인다. 평균적으로는 스키군, 지부군, 아마군, 오치군 순 이다. 다만 오키국 전체의 어획량과 어획고에서 볼 때 강치가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고래는 한 마리당 25엔의 세금을 매기도록 되어 있는 데, 1901년 오키국의 고래 포획량은 425관 85엔이고, 강치는 355엔이었다. 이해의 오키국 총 어획고는 917,669엔으로 이는 64종에 대한 가액이다. 이는 하 나의 어종당 14,338엔 정도의 어획고를 올린 셈이 된 다. 고래와 비교하면 강치 어획고가 많은 편이지만, 전 <표 3> 1903~1908년간 강치 포획 통계49 (단위는 포획량/가액) 42 합자회사의 3개년 통계는 1909년 6월 7일 오키 도청 농상계 서기 有 美 孫 (유비손, 아리 비손?)의 조회[농( 農 ) 제377호]에 대한 나 카이의 답신서에 나온 통계다. 43 가죽 통계만을 적었다. 44 박병섭은 현재의 쌀값으로 환산하여 240만 엔으로 보았다(박병섭, 2009, 한말 울 릉도 독도 어업,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자료에 따름). 45 4,260엔으로 기록한 것도 있다. 이시바 시 쇼타로, 하시오카 도모지로[ 橋 岡 友 次 郞 ], 이구치 류타 세 사람의 주업자, 종업자 관 계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진술이 엇갈린다. 4,260엔은 자본금을 뺀 금액이다[ 메이지 37년 다케시마(구 리양코도) 강치어업조합 사업,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 문서 제목은 시 마네현이 철하면서 붙인 건명( 件 名 )으로, 원 문 제목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여 기서는 시마네현이 붙인 소장 문서의 건명 을 따랐다. 이하도 마찬가지다. 46 자본금은 1,500엔이다[ 메이지 36년 조사 연도/포획자 1903 1904 1905 1906 1907 1908 42 포획지 오키인 1,437관/453엔 오키 울릉도인43 800관/600엔 44 1,275관/700엔 독도 하시오카 도모지로 외 /1,960엔 나카이 요자부로 /849엔 30전46 610마리/4,025관/ 4,235엔 45 독도 7,690관 3750관 (2,760마리)/ (1,003마리), 독도 2,723엔 40전 47 기름 3,200관48 체 어획고와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다. 그럼에도 고래에 대한 과목 과액 은 있고, 강치에 대한 과목과액 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 까? 이는 다시 고찰할 것이다. 다만 강치 포획은 1901~1903년까지 꾸준히 증가했고 1903년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었음을 밝혀둔다. 1904년부터는 <표 3>에서 보듯이 강치는 오키인과 울릉도인, 두 지역민이 포획하고 있었 다. 포획지를 불문하고 1903~1908년까지의 강치 포획 통계를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표 3>의 통계는 1903년에 오키와 독도 50 두 지역에서 강치 포획을 했음 ( 中 井 養 三 郞 강치어업),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 47 1904년 조사, 자본금은 300엔이다. 이 문서에는 어획고만 나와 있다[ 메이지 37년 조사( 中 井 養 三 郞 강치어업 경영),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 포획한 개체의 두( 頭 )수와 무게는 리양코 섬 영토 편입과 대여 요청 설명서 사본, 秘 竹 島 에 보인다. 48 리양코 섬 영토 편입과 대여 요청 설 명서, 竹 島 一 件 書 類 및 昭 和 28 年 度 涉 外 關 係 綴 (1953) 중 竹 島 어업의 변천 에 수록된 다케시마 강치어업 성적도( 成 績 圖 ), 38년도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 영업보 고서 ( 竹 島 一 件 書 類 수록), 박병섭(2011, 竹 島 = 独 島 漁 業 の 歴 史 と 誤 解 (1), 北 東 アジア 文 化 研 究 第 34 号 )에는 금액을 2,559엔, 현 재 쌀값으로 998만 엔으로 적었다. 1906년 부터 1909년 사이의 포획 두수는 같으나 금액은 5,437엔, 5,940엔, 5,878엔으로 각 각 다르다. 을 보여준다. 다만 이때까지는 오키에서의 어획고가 독도보다 많다. 그러다가 1904년부터는 오키에서의 강치 포획 통계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포 획이 이뤄지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통계가 누락되어서 인가? 1904년부터는 시마네현 통계서 로 통계가 이 어지고 있지만 여기에도 1904년부터 강치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는 오키에서 더 이상 강치 포획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시마네현이 강치 포획을 독 도로만 제한한 것은 1905년 4월 이후다. 그런데 그전 부터 오키인들은 더 이상 오키에서 포획하지 않고 있 었던 것이다. Ⅲ. 어업 관련 세제( 稅 制 )의 변천 나미 간이치 가토 주조 890엔(자본금은 1,121엔) 300엔 (자본금 200엔) 독도 독도 49 수량과 어획물 가액은 기록에 나타난 대로 적었다. 가액은 자본금을 제외하지 않 은 금액이다. 1. 1905년 이전 현세부과규칙 의 변천 이구치 류타, 326마리 (2,142관)+기타/ 이시바시 쇼타로 1,261엔 35전 다케시마어렵 합자회사 975엔 (가죽이 715엔) 1,385마리/ 1,948엔 독도 1,600마리/ 1,680마리/ 2,094엔 1,889엔 독도 50 다무라는 1903년 이전 독도 강치어업 에 대해서는 뚜렷한 자료가 없다고 보았다 (김선희, 2010, 다무라 세이자브로의 시마네현 다케시마의 신연구 번역 및 해제, 한국해양수산 개발원). 1904년부터 더 이상 오키 강치가 포획되지 않았음 은 <표 3>의 통계로 입증된다. 1903년부터 독도 강치 를 포획한 기록이 보인데다 그 양이 오키 강치를 초과 12 13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했다면(<표 3>), 이는 포획지가 오키에서 독도로 옮겨졌음을 의미한다. 강치 는 일본 연안과 동해안에 서식하는 동물이지만 생식을 위해서는 조용한 무 인도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강치에게는 오키 연해보다 독도가 생식에 최 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어로자들이 집중적으로 강치를 포획하던 시기도 생 식기였다. 오키 강치는 독도에서 암컷을 쟁탈하기 위한 권력투쟁에서 패한 수컷들이 오키로 내려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51 이에 근거한다면 강치 생식 지는 오키가 아니라 독도라고 볼 수 있다. 1903년 이전 오키인들이 오키 연 해에서 포획한 강치가 본래는 독도에서 간 것이라면, 독도 왕래자들은 오키 에서보다 더 많은 강치를 독도에서 목격했을 것이다. 1904년과 1905년에 나카이 요자부로[ 中 井 養 三 郞 ] 52 를 비롯한 어로자들이 독도에서 포획한 숫자가 오키인들이 오키에서 포획한 숫자보다 훨씬 많았던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 1904~1905년에 독도 강치를 포획한 사람은 두 부류다. 하나는 오키에서 건너간 사람들, 다른 하나는 울릉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다. 울릉도에서 건 너간 사람들이 독도 강치에 대해 울도 군수에게 이른바 수출세 를 납부했 음은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오키에서 건너가 독도 강 치를 포획한 사람들도 오키 도사에게 납세했을까? 시마네현 지사는 현내의 관할구역의 장( 長 ) 즉 도사 ( 島 司 )나 군장( 郡 長 ), 시장( 市 長 )에게 경제활동에 대한 과 세와 징수권한을 부여해왔다. 지방세 징수체계는 부현 제의 발전과 역사를 함께하여 53 1887년 3월에는 영업 세잡종세 징수규칙 이 제정되었고(현령 제20호), 지방세 있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징수규칙 취급수속 도 제정되었다. 어업 관련 세제는 현세부과규칙( 縣 稅 賦 課 規 則 ) 안에서 영업세잡종세 로, 그 가운데서도 잡종세 로 분류되고, 잡종세에서 어업 채조( 漁 業 採 藻 ) 의 범주에서 과세되었다. 규칙이 제정되 면 시행세칙 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영업세잡종세 과 목과액 54 이 상정된 것은 1889년 1월(현령 4호)에 와서 고, 잡종세에는 조수렵( 鳥 獸 獵 ) 규정도 55 포함된다. 51 이노우에는 오키에서는 어린 강치가 잡 힌 기록이 없음을 들어 적어도 메이지 중기 이후로는 미다베[ 三 度 ] 근처에서 강치 서식 은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밝 혔다( 井 上 貴 央 佐 藤 仁 志, 1991, 앞의 글, 82쪽). 52 나카이는 1909년 기록에서 이전부터 오키 도젠의 미타베에서 강치를 생포할 수 53 일본에서 부현제가 제정된 것은 1878년 7월 부현회( 府 縣 會 ) 규칙을 반포하면서부터 다( 現 行 地 方 制 度 提 要, 川 又 岩 吉, 1892. 12). 54 영업세 과목과액 은 상업, 공업으로 분 류된다. 상업은 다시 회사 은행 소매상 등 으로, 공업은 공장 직종별 제조장 직공에 대해 매겨진다. 잡종세 과목과액 은 요리 점, 음식점, 이발사, 배우, 스모, 시장, 인력 거, 승마, 도축, 조수렵, 자전거 등과 연관된 모든 직업에 매겨졌다. 55 조수( 鳥 獸 ) 한 마리당 연세( 年 稅 )가 1엔 ( 圓 )으로 정해졌다가 삭제되기도 한다. 56 시마네현령 제109호(1887. 12. 14). 57 현령은 현 지사가 제정하는 규칙으로, 현세부과규칙, 어업단속규칙 등이 현령 으로 제정 개정된다. 58 영훈( 令 訓 )에는 달( 達 ), 훈령, 통지( 通 知 ) 가 포함된다. 훈령은 상급기관이 지휘감독 권에 근거하여 하부기관에 발하는 명령을 말한다. 59 고시 문서철에는 고시( 告 示 )와 고유( 告 諭 )가 철해져 있다. 고시 란 공기관이 정한 사항을 널리 일반에게 공식적으로 알리는 것 혹은 그 형식의 하나다. 60 시마네현립도서관 소장 島 根 縣 令 은 秋 鹿 村 役 場, 서무 1부가 작성한 것으로 되 어 있다(청구번호는 S 貴 093.1). 61 이를 테면, 地 引 網 은 1등급 1측의 길이 가 920심( 尋 ) 이상인 경우, 7엔 50전이 부과 된다고 했다. 62 1등급 1측에 대해, 1엔부터 어획고 300엔 미만은 100분의 1,300엔 이상은 100분의 1.5, 400엔 이상은 100분의 2를 늘려 부과한다 고 했다. 63 투망어업의 경우 1등급, 한 사람당 연세 ( 年 稅 )가 40전이다. 64 湖 川 部 어획물에 대한 과액도 규정되 어 있다. 65 연세가 어획고 300엔 미만은 100분의 1,300엔 이상 500엔 미만은 100분의 2,500 엔 이상은 100분의 3 으로 정해졌다. 66 1890년 9월 30일 법률 제88호에 따라 府 縣 稅 徵 收 法 이 공포되었다(관보 10월 1일). 각 시정촌은 부현세를 징수하여 이를 부현에 납부하도록 의무화했다. 부현제가 시행될 때까지는 이 법을 지방세 징수에 적용하게 했다( 国 安 久 助 編, 1891, 県 税 取 扱 規 程 ). 어장 및 어구, 어망 등 어업에 관한 사항은 어업조 합규약 56 과 어업단속규칙[ 漁 業 取 締 規 則 ] 으로 규제된다. 시마네현은 어업 환경이 변할 때마다 현세부과규칙과 시행세칙, 어업단속규칙, 어업채조세 과목과액을 거의 해마다 개정했다. 관련 법규가 개정되면 현령( 縣 令 ), 57 훈령, 58 고시 59 등의 형식으로 공표된다. 시마네현령 제 1호 60 는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86년 11월(1887. 12. 28 간행)부터 발령되어 현공보( 縣 公 報 )에 등재되었고, 군 사 무소 및 호장( 戶 長 ) 사무소에 게시되었다(1886. 11, 시마네 현령 제43호). 어업 관련 세제도 대부분 현령으로 공포되 었다. 어업채조세 과목과액 (1. 29, 현령 제6호)이 처음 보인 해는 1889년이다. 포경( 捕 鯨 )과 지인망, 61 중인망, 대부 망, 62 수조망, 잠수기, 오징어낚시, 해조류 채취 등 모두 39종으로 분류하되 각기 두( 頭 ), 측( 側 ), 측장( 側 長 ), 인원 63 에 따라 연세( 年 稅 ) 혹은 계절세를 부과했지만 64 강치에 관한 과목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강치를 잡은 기록이 없으므로 과목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1890년에 개정된 어업채조세 과목과액 (1. 31, 현령 제 8호)은 관할 구역 밖에서 왔을지라도 본적지에서의 납 세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 시마네현의 규칙에 따라 납 세하도록 했다. 포경세 내용도 1889년보다 구체화되 었다. 65 이해에는 부현세 징수법 66 이 공포되고 세칙 67 도 정해졌다. 1891년 1월에 어업채조세 과목과액 이 다시 개정되었다(현령 제14호). 1892년에는 부현세 징수 법 세칙 도 개정되었다(현령 제5호). 어업채조세 과목과 액 도 개정되었는데, 포경세가 없어지고 과세 대상인 어망의 종류도 감소했다. 1893년의 영업세잡종세 과 14 15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목과액 (1. 20, 현령 제9호)을 보면, 잡종세 안의 어업채조세 과목액은 별도로 정 한다(제3조)고 했다. 변경된 어업채조세 과목과액 에(1. 26, 현령 제11호), 포 경세가 다시 포함되었다. 이어 개정된 영업세잡종세 과목과액 (현령 제123호) 에서는 조수렵 68 도 개정되었다. 1894년(현령 제15호)의 어업채조세 과목과액 에는 포경 과 지인망 등 약 32종에 대한 과액이 규정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대부망( 大 敷 網 ) 의 과액은 1889년보다 감소했다. 69 1895년에 처음으로 오키 강치에 관한 통계가 보인 다. 이해에 수산업 조합규칙 이 만들어졌다(12. 27, 현령 제71호). 영업세잡종세 과목과액 (12. 29, 현령 제73호)이 개정되었지만, 여전히 강치 관련 과목은 보이 지 않는다. 강치 포획에 관한 통계가 있는데 이에 대한 과목과액 이 보이지 않는다면, 강치를 포경이나 다른 어망에 포함시켜 과액을 매겼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까? 이는 어망 명기의 추이를 보면 알 수 있다. 188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 중반까지 잡종세의 어업채조 부분을 보 면, 포경과 어망에 관한 내용이 계속 바뀌고 있다. 1896년의 어업채조세 과 목과액 시행규칙 (2. 19, 현령 제14호)에는 이전에 없던 부망( 浮 網 ) 등이 추가되 었다. 1898년(2. 1, 현령 제7호)의 지방세 부과규칙 의 어 업채조 에는 서양형 증기선과 풍범선, 50석( 石 ) 이상의 일본 선박 등에 관한 과목도 추가되었다. 1899년의 현세부과규칙 (현령 제14호) 어업채조 를 보면, 이전처 럼 52종의 어망과 선박 종류를 명기하고 있지만 70 강 는 면제한다 는 내용이다. 치를 잡을 만한 어망은 보이지 않는다. 1900년에도 어업채조 를 포경, 대부망, 부망 등으로 분류한 것은 이전과 같은데 71 세수( 稅 收 )가 오키국 4군 가운데는 스 키군이 1,425엔 40전으로 가장 많다. 1900년은 한해 통어조합 규칙 이 정해진 해다(2. 13, 현령 제7호). 이 규칙 은 한국 연안으로 가는 일본인 어업자에게 조합 설치 를 의무화한 것으로, 조합은 시마네현 한해통어조합 으로 칭하게 했다. 이해에도 현세부과규칙 시행규칙 67 세칙의 골자는 島 司 郡 長 市 長 이 징 수법 제5조, 제6조, 제7조에 따라 매년도 지조할( 地 租 割 ), 호수할( 戶 數 割 ), 영업세, 잡 종세를 징수한다 (제1조)는 것이다. 68 수렵규칙에 따라 면허료를 납부한 자 69 1등급 1측을 기준으로, 춘하에는 1엔 부터 그 이상 300엔 미만은 1,000분의 7, 300엔 이상 400엔 미만은 1,000분의 10, 400엔 이상은 1,000분의 15 를 과세하도록 정했다. 추동 은 이보다 적게 과세한다. 70 서양 선박에 증기선, 풍범선 외에 밧테 라선(パッテ-ラ 船, bateira, 포르투갈어로 작은 배를 뜻함-필자주)이 추가되었다. 71 다만 오키 4군을 스키군 사이고 니시마 치 외 2정( 町 ) 등의 형식으로 묶었다. 다른 3군도 마찬가지다. 이 개정되었는데(3. 25, 현령 제26호), 어업채조업을 하는 자로서 어장구역[ 場 區 ] 을 정하는 자는 지명 및 차구( 借 區 ) 허가의 연월일을 기재하도 록 했다. 1901년(3. 11, 현령 제11호)에는 현세부과규칙 72 의 어업채조 73 에서 해역이 해부( 海 の 部 ) 와 호천부( 湖 川 の 部 ) 로 나뉘었다. 해부 에서 포경과 서어( 鱪 漁 ), 대부망( 大 敷 網 ), 지인망( 地 引 網 ), 사장망( 四 張 網 ) 등 모두 39개에 걸쳐 과액이 매 겨져 있다. 또한 이해에는 해조채 에 어업구역[ 漁 業 場 區 ] 이 추가되었다. 어 업구역에 대한 세금은 차구( 借 區 ) 1반보( 壹 反 步 )당 5리( 厘 )로 정해졌다. 시마네 현에서의 포경세 규정은 1889년부터 보였지만, 오키국에서는 1901년부터 보였다. 이해의 현세부과규칙 시행규칙 은 서양형 선박과 일본형 선박은 감찰[ 船 鑑 札 ]을 받도록 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1903년에 개정된(2. 26, 현령 제 7호) 현세부과규칙 의 어업채조 부분은 1901년에 추가한 어업구역 을 다 시 1종과 2종으로 나누어 등급에 따라 과액을 매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1등급은 연세를 구역당 2엔을 부과하는데 주로 정치( 定 置 )어업 1호 2호와 특별어업 1호 2호가 이에 해당되는 대신, 이전에 있던 포경세가 없어졌다. 현세부과규칙 이 개정됨에 따라 현세부과규칙 시행규칙 과 현세징수기 한 도 따라서 개정되었다. 한해통어조합규칙 은 1903년에 폐지되었다(4. 13). 1904년 현세부과규칙 (3. 11, 현령 제12호) 74 의 어업채조 관련 내용을 보 면, 수조망, 괘망, 투망, 사수망 등이 크기에 따라 과액이 변경된다. 이렇듯 어업에 관한 과목이나 과액은 어업 환경이 변함에 따라 그에 맞 춰 계속 개정된다. 어망의 크기에 따라 과액이 개정되거나 잠수기어업 등이 새로 추가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1905년까지 강치어업 이 따로 명기되거 나 이와 연관지을 만한 어망이 추가된 경우는 없었다. 현세부과규칙 의 어 업채조 에 어망이나 어종, 어장을 명기하고 있다는 것 72 이 현령은 다이쇼 6년 개정되었다 는 사실이 수기( 手 記 )로 덧붙여져 있다. 73 1892년 규칙에는 어업 과 채조 가 구분 되어 있었다. 74 1901년 3월 현령 제11호에 대한 개정 이다. 은 이들에 세금이 부과되었음을 의미한다. 어업채조 에 명기된 어망이나 어종이 39종인데 과목과액 에 39종이 보였다면, 모든 어종에 과세되었다고 볼 수 있 다. 그런데 실제 어획물은 50종이 넘는데 어망의 종류 는 39종만 명기되어 있다면 모든 어종에 과세된 것이 16 17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아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장에 과세되었기 때문에 어종에는 과세되지 않은 것인가? 1900년 오키국의 어획물은 약 57종이 열거되어 있다. 그런데 이해의 어업채조 에는 포경( 捕 鯨 )을 위시하여 약 53종에 대한 과액이 명기 되어 있다. 따라서 과액이 거의 모든 어종을 망라하고 있지만 이 숫자가 반 드시 과목과액 의 숫자와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1900년에도 강치는 포획되었다. 그렇다면 53종 75 가운데 강치는 어느 어망에 속하는가? 강치와 같은 포유류인 고래는 초기부터 포경 으로 과목이 성립되어 있었 다. 이때의 포경 안에 강치가 포함되어 있다면 1905년에 굳이 강치어업 을 분리해서 추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1905년에 현은 강치어업 을 새 로 추가하면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이는 강치가 포경을 포함한 53종의 과목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1904년부터 는 오키에서 강치를 더 이상 포획하지 않았으므로 과세의 필요성도 없어졌 다. 아래에서는 1905년에 강치어업을 따로 명기하게 된 배경을 살펴본다. 2. 어업단속규칙 과 1905년 오키국 다케시마 삽입 어업 관련 세제는 현세부과규칙 의 잡종세 안에서 규정되었지만, 실제 어로상의 규제와 규칙은 어업단속규칙 에 따라 이뤄지고 있었다. 1889년 에 어업단속규칙 이 상정되었고(10. 19, 현령 제118호), 1893년에 개정되었다 (11. 20, 현령 제59호). 이때 어업 이란 해천호소지( 海 川 湖 沼 池 ) 에서 생산 또는 양 식한 어개수조류( 魚 介 水 藻 類 )를 채포( 採 捕 )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1902년 말(11. 28, 현령 제30호)에 개정된 어업단속규칙 은 76 1905년 4월에 개정된 내 수조망어업( 手 繰 網 漁 業 ) 백어장절망어업( 白 魚 張 切 網 漁 業 ) 반 괘망어업( 魬 掛 網 漁 業 ) 부망어업( 浮 網 漁 業 )[야쓰카군( 八 束 郡 ), 히카 와군( 簸 川 郡 ) 지방의 명칭] 일정한 예양장( 曳 揚 場 )을 지니지 못한 지예망어업( 地 曳 網 漁 業 ) 전항의 허가를 받은 경우 감찰을 교부한다. 제 2조 잠수기어업 허가 기간은 1개년 이내, 백어장절망어업과 부망어업의 허가 기간은 3개년 이내로 한다. 제 3조 어업허가를 받으려는 자는 원서에 허가 기간(백어장절망어업, 부망 어업, 잠수기어업에 한한다)과 어업 장소를 기재해야 한다. 즉 1902년의 어업단속규칙 은 지사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허가어업의 종류를 명시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강치어업은 명기되어 있지 않다. 1903년에도 어업단속규칙 이 개정되었지만(현령 제30호), 1902년의 규칙 가 운데 어망 에 관한 내용만 개정되었다. 1904년에는 어망의 강목( 綱 目 )의 길 이[ 寸 法 ] 가 개정되었다. 이렇듯 어업단속규칙 은 1889~1904년까지 개정 되는 동안 어망이 추가되거나 허가어업의 종류가 명시되는 등의 변화를 보 였지만, 강치어업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강치어업과 관련된 변화가 보인 것은 1905년 4월의 개정(현령 제18호)에서다. 이해의 어업단속 규칙 에서 관계된 부분을 보면 아래와 같다. (고딕은 인용자) 제 1조 가운데 부망어업( 浮 網 漁 業 ) 다음에 아래와 같이 삽입한다. 1. 해려어업[오키국 다케시마( 隱 岐 國 竹 島 )에서 하는 것에 한한다] 용과는 차이가 있다. 먼저 1902년의 내용 중 관계된 부분을 인용하기로 한다. 제1조 아래에 든 어업을 하려는 자는 지사의 허가를 받 아야 한다. 타뢰망어업( 打 瀨 網 漁 業 ) 간망어업( 竿 網 漁 業 ) 75 이 가운데 이름만으로 어종이 드러나는 것은 포경, 鱪 漁, 鯖 網, 鰡 網, 章 魚 掛, 章 魚 繩, 鮭 掛 網, 鮎 掛, 鰻 搔 등이다. 잠수기, 해조, 貝 採 등도 어종을 짐작케 한다. 나머 지는 어망이므로 어종을 특기하기 어렵다. 76 시마네현 소장 행정문서 1, 竹 島 關 係 資 料 集 제2집 (시마네현 총무부 총무과), 158~159쪽 참조. 제2조 가운데 부망어업 다음에 해려어업을 삽입한다. 제 3조 괄호서( 括 弧 書 ) 가운데 잠수기어업 다음에 해려어업을 삽입한다. 이들 개정사항을 반영하여 1905년의 어업단속규칙 을 재작성하면 아래 와 같다. (고딕은 인용자) 18 19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제 1조 아래에 든 어업을 하려는 자는 지사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타뢰망어업 간망어업 수조망어업 백어장절망어업 반괘망 어업 부망어업(야쓰카군, 히카와군 지방의 명칭), 해려어업[오키국 다케시마( 隱 岐 國 竹 島 )에서 하는 것에 한한다] 제 2조 잠수기어업 허가 기간은 1년 이내, 백어장절망어업과 부망어업, 해 려어업의 허가 기간은 3년 이내로 한다. 제 3조 어업허가를 받으려는 자는 원서에 허가 기간(백어장절망어업, 부망 어업, 잠수기어업, 해려어업에 한한다)과 어업 장소를 기재해야 한다. 이렇듯 어업 관련 규칙에서 정식으로 해려어업( 海 驢 漁 業 ) 즉 강치어업 을 명기한 것은 1905년 4월에 이르러서다. 오키 강치에 관한 통계는 1903년 까지 보였지만 강치어업을 명기한 적은 없다가 1905년에 명기된 것이다. 그런데 1905년에 명기된 강치는 오키 강치가 아니다. 제1조에 해려어업( 隱 岐 國 竹 島 에서 하는 것에 한한다) 라고 했듯이, 다케시마 즉 독도 강치를 말한다. 그러면 시마네현이 오키에서의 강치어업을 1905년 4월에 다케시마 로 제 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905년 2월 다케시마 를 새로 일본 영토로 편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은 다케시마 를 오키국 다케시마 라고 하 여 오키국 소속임을 밝혔다. 이는 오히려 편입 이전까지는 다케시마 가 오 키국 소속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이전의 어업 통계에서 오키국 관할의 스 키 오치 아마 지부 4개 군과 촌명을 모두 명기한 적은 있지만, 다케시마 를 명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도 이를 방증한다. 다케시마 를 오키국 관할로 명기하고 나서 1년 뒤인 1906년에 시마네현 은 어업채조 에서 경어( 鯨 漁 ) 뒤에 해려어 를 삽입했다. 1889년까지는 어 업채조 에 39종이 유지되다가 1892년에는 오징어낚시[ 烏 賊 釣 ] 가 삭제되었 고, 1894년에는 사수망( 四 手 網 )과 병지망( 抦 持 網 )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징어 낚시가 삭제되어 다시 37종이 되었다. 어업상의 변화가 반영되어 어종이 추가 혹은 삭제되긴 하지만 포경, 지인망, 대부망, 사장망, 청망( 鯖 網 ) 등의 순서로 나온다. 그러다가 1906년에 경어 뒤에 해려어 가 들어가게 된 것 이다. 이 역시 고래와는 별개로 강치를 다룬 것임을 보여준다. 1906년의 현세부과규칙 은 강치에 대한 연세를 어획고의 1000분의 15 로 매겼다. 이는 대부망에 매겨진 과액 77 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1906년 이 전 강치에 대한 과액이 대부망에 포함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랬다면 1894년에 四 手 網 ( 抦 持 網 을 포함함) 이라는 형 식으로 변화내용을 밝혀주었듯이, 1906년에도 대부망(해려어를 포함함) 혹은 자망(해려어를 포함함) 78 이라는 형식으로 설명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형식이 아니라 강치어업 을 따로 추가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1905년 이전까지는 오키 강치에 대해서도, 독도 강치에 대해서도 과목으로 분리하 거나 과액을 표시한 적이 없었음을 말해준다. 고래와 오징어, 어망 등에 변동사항이 생기면 그때마다 어업채조세 과목 과액 도 개정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강치에 대해서는 1905년 4월 이전 까지 개정되지 않았을까? 또한 일본은 왜 1905년에 강치어업 을 새로 넣으 면서 오키국 다케시마 라고 명시했을까? 이에 대하여 일본은 시마네현이 1905년 이전에는 강치어업 을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넣을 수 없었다고 주 장하기는 어렵다. 오키 강치의 포획량이 통계로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마네현은 왜 1906년에야 비로소 강치에 대한 과목 을 마련하게 되었을까? 이는 1904~1906년 사이의 과 세공백과도 연관된 문제다. 나카이 요자부로를 비롯한 오키인들이 1904년에 독도에서 잡은 강치는 모두 3천 마리, 가액으로는 8천 원 79 이 넘는데 이 액수는 1903 년 오키 강치의 가액 453엔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다. 그런데도 시마네현은 1904년의 포획물에 대해서는 과세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시마네현이 포획지인 독 도를 오키 관할로 확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생 각된다. 시마네현이 1904년에 독도를 오키 관할로 간 주했다면 독도 강치에 관한 통계도 당연히 시마네현 의 통계서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1904년부터는 오키 77 1엔부터 그 이상 300엔 미만은 1,000 분의 7,300엔 이상 400엔 미만은 1,000분 의 10,400엔 이상은 1,000분의 15 다. 78 1906년에 오쿠하라는 독도에서의 강치 포획방법에 대해, 자망( 刺 網 )을 쓴다고 했 다. 즉 그물을 동굴 입구에 쳐놓고 양 끝을 동굴 입구에 있는 두 명의 어부가 잡고 있 고, 다른 어부는 동굴 안에 잠복해 있는 강 치를 내몰아 강치가 달려나오다 그물에 걸 려 폐사( 斃 死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외에 도 작살로 죽이거나 총으로 쏘아 잡기도 했 으므로 1905년 이전 어망에 강치어업이 포 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79 1904년 오키국 총 어획고는 87,337엔 이었으므로 강치 어획고가 약 10%를 차지 한다. 20 21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국 통계에 강치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는 강치를 포획한 1904년 시점 에 시마네현은 독도를 오키국 관할로 여기지 않았음 을 방증한다. 이 때문에 일본은 독도 강치에 대해 1904년까지도 과세할 생각을 못하다가 편입 이후에 야 과세 입법을 추진한 것이다. 이는 4장에서 다시 다 씬 더 많다. 루겠다. 1905년 이전 세제 가운데 변화된 내용을 정 리하면 <표 4>와 같다. 80 령의 호수다. <표 4> 현세 관련 법령 변천과 어업 관련 내용의 변천 80 어업과 관련하여 바뀐 내용이 있는 경 우를 적었으므로 법령명을 모두 적은 것은 아니다. 법령에 따라 거의 해마다 약간의 개정이 있었으므로 실제 법령의 숫자는 훨 81 아래 호수는 특별한 명기가 없는 한, 현 연도 현세 관련 법령 어업 관련 주요 개정 내용 호수 81 1886. 11 시마네현령 제1호 발령 1889. 1 영업세잡종세 과목과액 상정 어업채조: 포경, 조수렵에 과액 명시, 어망에도 종별로 과 액 명시 1889. 1 어업채조세 과목과액 개정 포경 등에 과액 명시 6호 1889. 10 어업단속규칙 상정 과료( 科 料 ) 규정 118호 1890. 12 부현세징수법 세칙 도사( 島 司 ), 군장( 郡 長 ), 시장( 市 長 )이 징수 84호 1892 어업채조세 과목과액 개정 포경 삭제, 어망에 따른 과액 명시 1893. 1 영업세잡종세 과목과액 개정 어업채조세 과목액 별도로 정함. 포경 에 다시 과세 9호 1893. 11 어업단속규칙 개정 본현 관할지 연해천( 沿 海 川 ) 및 관유 호소지( 湖 沼 池 )에서 어업하는 자 모두에 규칙 적용 59호 1894 어업채조세 과목과액 개정 포경, 어망별 과액-대부망(400엔 이상은 1,000분의 15) 외 15호 1897. 1 지방세 부과규칙 기한 개정 포경, 어망 명시하고 지역별 연세를 규정 3호 1897. 1 부현세 징수법 세칙 개정, 지방세 부과규칙 시행규칙 도사, 군장이 징수, 시장은 제외 5호 1899 현세부과규칙 개정 대부망( 大 敷 網 ) 외에 부망( 浮 網 ) 추가, 세수 명기 14호 1900 현세부과규칙 개정 오키 4군을 묶어 세수 합산 21호 1901. 3 현세부과규칙 개정 납부 일시 변경, 海 部 와 湖 川 部 로 구분, 포경 과액을 세분 11호 1901. 3 현세부과규칙 시행규칙 개정 선박은 감찰을 받도록 규정 17호 1902 어업법 시행규칙 특별어업 제한, 부망어업( 敷 網 漁 業 ) 예외 1902 어업단속규칙 개정 부망어업( 浮 網 漁 業 ) 명기 130호 1903. 2 현세부과규칙 개정 어장 구역을 세분, 포경 삭제 7호 1903. 7 어업단속규칙 개정 어망에 따른 과액 개정 30호 1904. 3 현세부과규칙 개정 어망에 따른 과액 개정 12호 1904. 4 어업단속규칙 개정 어망 길이 개정 29호 4호 3. 강치어업 허가 과정과 관유지 대장 등재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가 공포된 이후 시마네현은 바로 강치어업 허가제 방침을 발표하지 않았다. 독도가 일본에 편입되자마자 오 키 도사는 나카이 요자부로가 제출한 10년 대여 신청서와 도면 82 을 첨부하 여 지사에게 제출했다. 1905년 2월 26일 나카이의 청원을 시작으로 강치어 업 허가원 신청이 잇따랐다. 이전부터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한 오키인들이 청원하기 시작했다. 3월 3일에는 오키국 스키군 사이고정 오아자 나카마치 82 도면에는 방위가 동경 131도 5분, 북위 37도 15분으로 되어 있다.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는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 도 55분 으로 되어 있다. 현재 한국에서 동 도는 북위 37도 14분 26.8초, 동경 131도 52분 10.4초, 서도는 북위 37도 14분 30.6 초, 동경 131도 51분 54.6초로 되어 있다. 1953년 시마네현 고시 제352호 해면 공동 어업권 면허에는 어장의 위치가 오치군 고 카촌 다케시마(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에 있는 다케시마) 일대로 되어 있어 현 고시 제40호를 따르고 있다. 83 副 申 案 ( 中 井 養 三 郞 이 대여를 청원) 2월 26일의 신청서에 대하여,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84 다케시마 출어 요청에 대한 內 申 사 본 (1905. 3. 7), 秘 竹 島. 어업허가원이 많이 제출되자 오키 도사가 현 지사에게 어 업단속규칙을 공포할 것을 내신한 것으로 이해한 경우[김수희, 2010, 나카이 요사부로( 中 井 養 三 郞 )와 독도어업, 인문연구 58호, 138쪽] 가 있다. 그러나 시마네현 자료(갑 서 제16호) 의 내용을 보면, 도사가 건의한 것은 지적 편입에 대한 별도의 훈령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어업단속규칙을 공포하는 일은 지 사가 할 것으로 예견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즉 단속법의 공포를 도사가 지사에 게 건의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수순임을 언급한 것이다. 에 거주하는 나미 간이치[ 永 海 寬 市 ], 3월 5일에는 오키 국 오치군 고카촌 오아자 구미 거주자 하시오카 도모 지로[ 橋 岡 友 次 郎 ]가 허가원을 제출했다. 이들은 허가원 에서 독도를 다케시마 로 칭하지 않고 리양코 도 를 병칭했다. 한편 나카이는 포획 제한이 없을 경우의 경 쟁적 남획을 우려했다. 83 오키 도사 히가시 분스케[ 東 文 輔 ]는 독도 출어의 유 래를 잘 아는 자였다. 그는 독도 출어가 2~3년 전부터 행해져왔으며 두세 명의 섬사람이 그 섬에 출어하여 상당한 양을 포획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 는 개정된 어업단속규칙 이 공포되더라도 누구에게 허가할 것인지 충분히 심의해야 한다고 시마네현 지 사에게 내신했다. 84 그는 1905년 4월 11일자 문서( 農 제 487호)에서 관하( 管 下 ) 다케시마의 강치어업이 이번 어 업단속규칙에 따라 허가어업으로 되어 지난번 부내( 部 內 )의 아래 사람들이 제출한 원서에 대하여 각각 처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85 이라고 했다. 이는 그가 4월 초에 강치어업을 허가어업으로 할 방침이 정 해졌음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시마네현 내 무부장 호리 신지[ 堀 信 次 ]는 청원자들의 경영 공로와 22 23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사업계획의 충실성 여부를 조사해줄 것을 오키 도사에게 요청했고(4. 11), 86 이어 개정된 어업단속규칙 이 공포되었다(4. 14). 시마네현은 신청자 가운데 울릉도에 도항한 경험만 있거나 도해했지만 목적이 불확실한 사람은 심의 에서 탈락시켰다. 87 청원자들은 어업허가를 신청할 때부터 강치보호의 필 요성을 역설하여 포획기간과 크기, 숫자를 제한할 것을 제안했다. 1904년 에 독도에 출어했던 가토 주조[ 加 藤 重 造 ]도 이 점을 분명히 했다. 88 1905년 5월에는 돗토리현 사람도 허가를 신청하여 5월 10일 이전의 신 청자만 해도 11명이었다. 이때 오키 도청은 4명만 불러 조사할 계획을 세우 고 있었다. 소환 예정자는 가토 주조(스키군), 나카이 요자부로(스키군), 이구치 류타(스키군), 하시오카 도모지로(오치군)였다. 89 이에 앞서 시마네현은 오키 도 청에 신청자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었는데, 나카이 요자부로, 나미 간이치, 하시오카 도모지로, 이시이 주타로, 야마네 후사마쓰, 미우라 주이치로, 몬와키 사다타로, 이구치 류타였다. 조사 조회, 秘 竹 島. 오키 도사는 5월 6일자 문서에서, 이들 가운데 나카이, 이구치, 하시오카 3명은 1903년부터, 가토는 1904년 부터 어업을 해왔지만 다른 사람은 독도에 도항하여 종사한 바가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바가 있다. 도사 는 4명 가운데 영토 편입에 대한 나카이의 공로는 인 정하지만 나카이가 독점하면 다른 사람의 설비를 물 거품으로 만들게 되고, 그렇다고 여러 사람이 할 경우 남획의 폐해도 우려된다고 보았다. 이에 도사는 4명의 공동어업 형태를 제안했고 90 현은 5월 10일 이를 받아 들였다. 이로써 도사는 4명에게 새로 공동출원서를 받 기로 하고 이전 원서를 반환했다. 공동허가제는 관행 을 존중하는 어업법 91 의 취지에 따른 것이다. 1905년 5월 17일 시마네현은 (독도가-필자주) 영토에 편입되어 이름만 있을 뿐 아직 지적( 地 籍 )도 정해지지 않았으며 면적 등도 확실하지 않으니, 해당 규정에 따 85 다케시마 강치어업 관련 종래 경영자 86 다케시마 강치어업 관련 종래 경영자 조사 조회 농 제487호, 秘 竹 島. 87 몬와키 사다타로[ 門 脇 貞 太 郎 ]와 노쓰 이 치타로[ 野 津 市 太 郎 ]가 전자에, 고베 요시키 치[ 甲 邊 由 吉 ]가 후자에 해당된다( 농 제265호 강치어업 계속 관련 건 회답 농 제271호, 1905. 4. 29,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 88 다케시마 대여 청원, 가토 주조의 청 원,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89 다케시마 강치어업 출원자 소환서 초 안,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90 다케시마 강치어업 경영사업 전망 조 회 회답서 ( 乙 農 제92호, 1905. 5. 6), 秘 竹 島 (원문에는 1903년으로 되어 있으나 오기임). 91 어업법 부칙 34조에 종래의 관행에 따 라 제3조 또는 제4조의 어업자는 본법 시 행일로부터 1년 이내에 출원할 때는 그에 게 면허를 주어야 한다 고 했다. 제3조와 제4조는 정치어업 또는 수면전용어업을 하 는 권리를 얻으려 하는 자를 말한다. 라 처리하기가 어렵 92 다고 여겨, 다케시마 를 오키국 4군의 관유지 대장에 등재했다(5. 17, 제32호). 1905년 5월 27~29일에는 일본과 러시아 간 해전이 있었다. 관유지 사용허가가 내려진 것은 5월 27일에서 9월 21일 사이였고, 나카이 등은 그 사이 독도에 출어하여 1,000마리 이상(3,750관)의 강치를 잡 았다. 1905년에 울릉도에서 출어한 사람들도 1,275관/700엔의 수출고를 기록했다. 나카이가 잡은 양에 비춰 계산해보면, 울릉도인은 대략 300마리 이상을 잡은 것이 된다. 앞서 5월 20일, 4명의 청원자는 공동어업으로 하기로 규약을 맺고 3개년 간 93 강치어업을 허가해줄 것을 현 지사에게 요청했었다. 현은 이들에게 공 동어업을 허가했다(1905. 5. 20. 乙 農 제805호). 4명 중 3명은 스키군 사이고정 나카촌 오아자 거주자였고, 하시오카 도모지로는 오치군 고카촌 오아자 거 92 副 申 案 ( 中 井 養 三 郞 가 대여를 청원) 甲 農 제13호(1905. 2. 27),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93 1905년 4월의 어업단속규칙 제2조에 는 강치어업의 허가기간이 3년으로 되어 있다. 94 다케시마 강치어업 공동영업 규약 신 고서 사본, 秘 竹 島 ; 다케시마 海 獵 합자회사 설립 신고서,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95 나카이가 100분의 40(1,200엔)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하시오카와 이 구치는 23%(690엔)로 동일하며, 가토가 14%(420엔)로 가장 낮다. 나카이 외 3명 공 동 어업 요청서 허가 통지 사본 (1905. 5. 22, 乙 農 제805호), 秘 竹 島. 96 5월 20일 감찰이 내려진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김수희, 앞의 글), 이날은 청원 한 날이다. 97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를 보면 원 문은 다케시마해려합자회사 로 되어 있고, 정식명칭인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 로 되 어 있는 것도 있다. 주자였다. 나카이는 하쿠슈 도하쿠군[ 東 伯 郡 ] 오가모촌 [ 小 鴨 村 ] 출신이지만, 오키국 스키군 사이고정 오아자 니시마치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각의 출자 비 율에 따라 권리를 갖기로 했다. 94 5월 22일, 오키 도사 가 시마네현에 허가를 요청했고, 95 마쓰나가 다케요시 지사는 6월 3일 허가를 통지한 뒤 5일에 어업감찰을 교부했다. 96 4명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같은 날 강치 어업 불허 통지 가 내려졌다. 회사 정관을 만든 4명의 어업자는 어업법 시행규칙 (1902) 제18조에 의거, 다케 시마해려합자회사 97 업무집행사원 나카이 요자부로를 대표자로 하여 6월 8일 시마네현에 신고서를 제출, 6월 13일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 로 정식 등록되었다. 강치어업을 허가제로 전환하여 합자회사에게 강치 포 획의 길을 열어준 시마네현은 독도에 이어 울릉도 침 탈을 위한 본격적인 행동에 착수했다. 그 시발은 두 섬 에 대한 시찰이었다. 계획은 1905년 8월 중순부터 시 작되었지만, 실제 시찰은 1906년 3월 말에야 이루어 24 25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졌다. 98 시찰단 일행이 타고 갈 배의 편승자 명단에는 시마네현과 오키 도청 관리, 기술원, 경찰, 교사, 사진사 외에도 적지 않은 수산업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99 수산업자 대부분이 독도 출어와 관계된 자들인 점에 비춰보면, 1905년 편입 후 시찰을 계획하던 당시부터 희망하던 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05년 6월 합자회사가 어업허가를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납세절 차는 구비되지 않았다. 의미한다. 현재 일본은 시마네현이 현령 제8호로 인해 비로소 강치어업의 세율을 정해 과목에 추가함으로써 강치어업이 이익을 내게 되었다 102 고 주 장한다. 이는 그 이전에는 강치어업이 이익을 내지 못했으며, 따라서 과세 대상이 아니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둘째, 강치어업 해역을 규정할 때 외해 부 로 변경한 것은 오키국 다케시마 해역을 외해부 로 규정한 것이다. 이 는 독도를 외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셋째, 고래와 강치어업에 Ⅳ. 강치어업에 대한 과세와 포획량, 그리고 어업권 1. 1906년의 독도 강치 과세규정과 이후의 변천 1905년 6월, 시마네현은 독도의 강치어업 100 을 허가 제로 했지만 과세규정을 구비한 상태는 아니었다. 1906년 3월, 현세부과규칙 (현령 제8호)의 어업채조 부 분이 개정되었는데, 경어( 鯨 漁 ) 와 해려어( 海 驢 漁 ) 에 대 한 과목과액이 추가됨으로써 비로소 강치에 대한 과 세규정이 구비되었다. 이들 어종이 속한 해역은 해부 ( 海 部 ) 에서 외해부( 外 海 部 ) 로 변경되었다. 두 어획물에 대한 연세는 어획고의 1,000분의 15 101 로 정해졌고, 이 지역 어업자가 아닌 경우에도 과세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시마네현이 1906년에야 비로소 현세부과규칙 을 개정하여 강치를 과목에 새로 넣었다는 것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규칙은 독도 강치에 대한 과 세를 처음 법령으로 규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 말은 그 이전에는 오키 강치에 대한 과세 법령도 없었음을 98 당시 시마네현과 오키 도청이 주고받은 문서를 보면, 독도에 대한 조사사항뿐만 아 니라 울릉도에 대한 조사사항도 거론되어 있다. 현은 (울릉도에-역자주) 농어( 農 漁 )를 위해 몇 호 정도가 이주하여 생활할 수 있 는지, 농작물 종류와 경작의 개략, 차지( 借 地 )의 유무, 연초( 煙 草 ) 재배의 가능성 여부, 샘을 팔 수 있는지의 여부 등을 조사할 계 획이었다[ 제3부장 회답안 (다케시마 울릉도 시 찰 조사) (1905. 8. 28),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 99 나미 간이치, 나카이 요자부로, 나카하 타 가네시게[ 中 畑 兼 繁 ], 우노 와카지로[ 宇 野 若 次 郎 ], 이구치 류타, 가토 주조, 야하타 겐 지[ 八 幡 源 次 ], 노쓰 도미타[ 野 津 富 太 ], 사사 이 사다타로[ 笹 井 貞 太 郎 ], 우노 도키와[ 宇 野 常 盤 ], 니시무라 기요[ 西 村 ギヨ], 야마모토 가쿠노스케[ 山 本 覺 之 助 ] 등이다[ 다케시마 시 찰 일행(시찰자 명부), 竹 島 一 件 書 類. 1906년 3월 18일 확정된 명단 가운데 수산업 관계자만 추출함]. 100 1905년 이후 강치어업은 특기하지 않 는 한 독도에서의 강치어업을 말한다. 101 원문은 年 稅 金 上 り 高 千 分 の 十 五 다. 시마네현 소장 행정문서 1, 2011, 竹 島 關 係 資 料 集 제2집 (시마네현 총무부 총무과)에 도 실려 있다. 대해 오키 어업자 이외에도 과세하게 한 규정은 1906년 시점에 나카이 요 자부로의 회사를 의식한 과세규정임을 보여준다. 편입 이전부터 독도 강 치를 포획하고 있던 나카이 요자부로는 돗토리현[ 鳥 取 縣 ] 출신이기 때문 이다. 앞의 통계에서 보았듯이, 1903~1905년 사이에 오키인들은 독도 강치를 포획했다. 그러나 오키인들은 1905년에 시마네현이 강치 포획지를 오키국 다케시마 라고 규정해주기 전까지는 관할지를 단정하지 못했었다. 오키인 들은 자신들이 출어하던 섬의 이름이 다케시마 라는 사실도 이때 확인했 다. 그 이전에는 주로 양코도 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시마네현은 1905년 4월에 강치 포획지가 오키국 다케시마에 속한다 는 사실을 언명한 지 1년이 다된 1906년 3월에야 과목과액 을 정했다. 그런데 그에 앞서 다 케시마 를 관유지 대장에 등재하는 일을 먼저 수행해야 했다(1905. 5). 독도에서의 강치어업을 허가받은 자가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에 한정되 었기 때문에 다른 어업자들은 이른바 해면전용 어업권을 얻으려 했다. 이에 시마네현은 어업단속규칙 을 개정했다. 1908년 6월 30일, 어업단속규칙 의 제1조와 제8조는 아래와 같이 개정되었다. 102 시마네현 소장 행정문서 1, 2011, 竹 島 關 係 資 料 集 제2집, 7쪽. 103 아래에 열거한 어업은 그 어업을 하 는 수면을 관리하는 지방장관의 허가를 얻 지 않으면 할 수 없다. 1. 藻 手 繰 網 漁 業 2. 藻 打 瀨 網 漁 業 3. 藻 曳 網 漁 業 4. 잠수기어 업 5. 空 釣 繩 漁 業 제 1조 어업법 시행규칙 제56조 103 에서 든 어업 외에 아래에 든 어업을 하려는 자는 지사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다만 제7호의 어업은 1905년 2월 본현 고시 제 40호가 정한 다케시마에서의 어업에 한하며, 또한 제 8호 내지 제11호의 어업은 호소하천에서의 어업에 한 26 27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한다. 1. 타뢰망어업 7. 해려어업 10. 공어괘망어업( 公 魚 卦 網 漁 業 ) 전항( 前 項 ) 어업의 허가를 받은 경우는 어업감찰을 내준다. 즉 1911년에 독도는 수산동식물 채포가 금지된 금어구역이었지만, 강치 어업은 예외였다. 그러므로 전용어업권 108 을 지닌 강치어업자는 포획할 수 있었다. 1905년 편입 이후 법령의 변천을 정리하면 <표 5>와 같다. 제 8조 다케시마(1905년 2월 본현 고시 제40호-원주)와 그 지선( 地 先 ) 20정( 丁 ) 104 이내에서 해려어업 이외의 어업을 금한다. <표 5> 1905~1911년 사이 어업 관련 법령의 변천 연도 개정된 세제 관련 법령 어업 관련 내용 호 수 1905. 4. 11 오키 도사, 강치어업 허가어업이 된다는 사실 언급 農 제487호 위 어업단속규칙 은 허가어업의 종류를 개정했지만, 강치어업을 다케시 마로 제한한 데는 변함이 없다. 다만 1905년에 해려어업(오키국 다케시마에서 하는 것에 한한다) 라고 한 것이 1908년에는 1905년 2월 본현 고시 제40호가 정한 다케시마에서의 어업에 한 한다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둘 다 다케시마 이외에서는 강치어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지만, 1908년에는 구역을 다케 시마와 그 주변 지선 20정 이내 까지로 구체화했다. 1910년에도 현세부과규칙 의 일부가 다시 개정되었지만(12. 6, 현령 제 40호), 105 이때는 한국을 병합한 이후다. 따라서 1911년 5월 17일, 개정된 수 산업 보조규칙 (현령 제21호)은 보조금을 교부받는 지역으로 조선을 포함시켰 다. 1911년에 개정된 어업단속규칙 (12. 30, 현령 제54호)에는 아래와 같은 내 용이 있다. 1905. 4. 14 어업단속규칙 개정 제1조에 1. 海 驢 漁 業 ( 隱 岐 國 竹 島 에서 하는 것에 한 한다) 삽입, 부망어업 다음에 해려어업 삽입 1905. 5. 17 다케시마 를 관유지 대장에 등재 1905. 5. 20 현, 강치어업을 공동어업으로 허가 乙 農 제805호 1906. 3 현세부과규칙 개정 1908. 6 어업단속규칙 개정 外 海 部 에 鯨 漁 와 海 驢 漁 병기, 연세를 어획고의 1,000분의 15 로 명기 허가어업인 강치어업을 다케시마 와 지선 20정으로 한정 1910. 12 현세부과규칙 개정 어업채조 의 中 海 及 湖 川 部 개정 40호 1911. 5 수산업 보조규칙 개정 조선, 대만에의 출가어업에 보조금 교부 21호 1911. 12 어업단속규칙 개정 전용어업권을 지닌 강치어업만 허가 54호 시마네현은 1905년 어기( 漁 期 )에 나카이 등이 포획한 독도 강치에 과세할 수 없었다. 법령이 구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령이 구비되기까지 여러 절차가 필요했다. 현세부과규칙 과 어업단속규칙 을 개정해야 했고, 관유 18호 8호 48호 지 대장에도 등재해야 했다. 이어 공동어업을 조건으로 합자회사를 설립하 제 1조 아래에 열거한 어업을 하려는 자는 지사에게 출원 허가를 받아야 한다. 다만 전용어업권에 의거해서 하는 경우는 이 제 게 한 뒤에야 과세할 수 있었다. 이런 절차를 정비해온 사실로도 일본이 독 도 강치를 포획하던 초기에도 독도를 고유영토로 인식해오지 않았음을 알 한을 따르지 않는다. 1. 백어건망어업 11. 해로( 海 鱸 ) 106 어업(자망, 박살, 총살) 107 제 15조 아래에 열거한 구역 안을 금어구로 하여 수산동 104 町 과 같다고 보면, 1정은 109.09m므 로 20정은 약 2,180m다. 105 내용은 어업채조 에서 中 海 及 湖 川 部 에 魚 來 籠 網 一 側 에 대한 세금을 추가 한 것이다. 수 있다. 2. 강치 보호를 명분으로 한 어업조합 설립 도모와 무산 식물의 채포를 금한다 5. 다케시마(1905년 2월 본현 고시 제40호) 및 그 지선( 地 先 ) 별지 제5호도 빨간 선 안의 구역, 단 해려어업은 이 제한을 따르지 않는다. 106 현의 관리가 수기( 手 記 )로 驢 자로 바 로잡아 놓았다. 107 이 세 가지 어구는 1906년에 오쿠하라 헤키운이 언급한 바 있다. 108 어업법 시행규칙 (1902. 5. 17)에 따르 면, 전용어업이란 정치( 定 置 )어업, 구획어업 및 특별어업이 아닌, 수면을 전용하여 하는 어업을 말한다. 나카이는 강치 포획을 본격화한 지 1년도 안 돼 다 케시마 경영상 필요한 계획 을 세우기 시작했다(1906. 4. 28). 다케시마 경영에 관한 진정서 도 제출했다(1906. 4. 28 29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30). 이어 섬 전체의 장기 대부와 해면전용면허에 대해서도 진정했다. 강치 과세법이 시행된 직후에 납세도 하기 전에 나카이가 진정서부터 준비한 이 유는 무엇인가? 이는 강치 포획 전망과 관계가 있다. 나카이는 강치 포획에 대한 허가는 받았지만 강치가죽 판로를 확립하지 못한 상태여서 충분한 이 익을 내지 못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홋카이도 판매를 개시하는 등 여러 판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강치가 죽뿐만 아니라 기름과 비료를 만들 설비도 필요하다고 여겼다. 즉 강치어 업을 방해하지 않는 방법과 정도의 범위 내에서 다른 어업을 시도할 준 비 109 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그가 어업조합 설립을 고려한 배경이 기도 하다. 1905년 6월,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는 시마네현으로부터 어업감찰을 받 았는데, 현은 다시 1907년 6월에 청원한 어업 건을 허가하면서 9월에 감찰 을 발급했다. 나카이는 청원서에서 오는 1908년 5월로 허가해주신 기간이 일단 만기가 되어 신고를 하 니, 다시 허가기간을 1908년 6월부터 1911년 5월까지 3년간 으로 해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1907년 5월 13일에는 스키군 사이고정 니시마치[ 西 町 ]어업조합 이, 114 5월 20일에는 오치군 고카촌 구미어업조합이 다케시마를 지선으로 편입하는 건을 신청했다. 특히 구미어업조합 115 은 다케시마 해면전용 어업 면허까지 청원하며 농상무성에도 청원했다. 그러나 시마네현은 다케시마 가 어업조합의 지구 안으로 편입할 수 있는 곳이 못 된다며 허락하지 않았 당시 합자회사는 허가기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나카이는 어업기간이 만 료되어 다른 어업자에게 허가될 경우 강치 보호도 책 임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회사는 엄청난 손해 竹 島. 를 입을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강치사업을 장 기적이고 독점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장기 대부와 해 면전용면허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1906년 6월, 나카이는 하시오카, 가토, 이구치를 어 업조합 발기인으로 하여 다케시마어업조합 설치 건 을 신청하고 어업조합 규약도 만들었다. 어업조합 지 구는 시마네현 오키섬 소속 다케시마 구역 으로 했다. 주소지를 가져야 한다는 어업법을 의식하여 가주소 를 가진 자는 조합원이 될 수 있게 했다. 조합원의 어 업권에는 강치뿐만 아니라 전복, 고래, 우뭇가사리 등 수 있다. 이다. 해산물과 해조류를 포함시켰다. 110 그러나 시마네현은 이들의 5~6개월 출어가 독도에 주소지를 둔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 어업법 제18조 111 에 의거, 어업조 109 다케시마 경영상 필요한 계획, 秘 110 해면전용어업, 수면전용어업, 지선수 면전용어업 등 원문의 용어 내지 후학자의 해석이 달라 혼돈을 주고 있다. 필자는 해 면전용어업과 수면전용어업을 같은 의미로 보았다. 당시는 수심이 아니라 거리를 기준 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1 일본에서 어업법안이 처음 제출된 것 은 1893년이지만 법안이 최종 통과된 것은 1901년이고, 시행은 1902년 7월 1일부터 다( 羽 原 又 吉, 1952, 日 本 近 代 漁 業 經 濟 史, 岩 波 書 店, 104~123쪽). 어업법 18조의 내용은 일정 구역 안에 주소를 지닌 어업자는 행 정관청의 인가를 얻어 어업조합을 설치할 112 다케시마 어업조합 설치 신청 건 不 許 통첩 (1906. 10. 20),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113 1907년 6월 어업통제규칙이 개정되어 114 신청자는 이사 마쓰자키 미지로다. 이 때 사이고정 니시마치어업조합은 다케시마 를 사이고정에 편입시켜줄 것을 청원하기 도 했다. 나카이는 상신서(1907. 5. 22)를 올 려 반대했다. 115 신청자는 이사 이케다 요시타로다. 116 다케시마 편입 관련 신청서 제출 지시 전달 수( 水 ) 제19호(1907. 8. 14),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117 수산조합과 어업조합은 별개다. 1906년 기준 오키 지역의 어업조합은 47개로 나타 나 있다( 島 根 縣 統 計 書 ). 118 다케시마 어업조합 규약 제25조,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119 나카이는 1906년에 지선과 수면의 배 타적 이용은 합법적인 절차가 끝나지 않았 기 때문에 아직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머지않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으로 믿고 있 다고 했다( 메이지 39년 도 업무집행 전말,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 고, 다케시마 해면전용 어업면허 청원도 기각했다. 116 이들이 신청한 해면전용 어업면허의 기간은 1907년 5월부터 1927년 4월까지 약 20년간이었다. 이들이 청 원한 어획물 종류는 전복, 우뭇가사리, 오징어, 볼락, 고등어, 상어, 범고래 등이었다. 두 어업조합의 신청에 앞서 나카이 회사는 1906년 6월 20일 어업조합 117 설치를 청원한 바 있다. 이때 어 업조합이 향유하는 지선수면전용 어업권 에는 김과 우뭇가사리 등의 해조류뿐만 아니라 강치도 들어 있 었다. 118 니시마치와 구미의 어업조합은 강치를 뺀 어 업권을 주장한 데 비해, 나카이 회사는 강치를 포함한 어업권 119 을 주장하고 있었다. 오키 도사는 두(니시마치, 구미) 어업조합이 해면전용 어업면허를 신청한 목적이 어패류의 어획에 있기보다는 강치에 있으며, 강치어업 자를 방해하려는 데에 있다고 보아 지사에게 기각을 건의했다. 120 합을 설치할 수 없음을 통지했다. 112 1906년 10월 20일, 나카이의 조합설치 신청은 기각당했다. 113 공동어업권이 어업조합이 아닌 나카이 개 인에게 허가된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김 수희, 2010, 앞의 글, 144쪽). 120 다케시마 본도 地 先 編 入, 해면전용 면허 신청 (8월 3일자 문서),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1907년 8월 3일, 오키 도사는 나카이가 4월에 제출 한 해면전용어업 관련 신청서를 시마네현 지사에게 30 31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상신했다. 121 나카이가 1907년 4월, 다케시마 해면전용 어업면허에 관한 신 청서와 진정서를 도사 122 에게 제출한 바 있었는데, 오키 도사가 이를 상신한 것이다. 나카이는 4월의 신청서에서 본사가 다케시마에서 강치[ 海 馬 ]어업 권과 토지사용권을 허락받았을 뿐, 아직 해면전용에 대한 면허를 받지 않은 점을 노려, 근래 강치 이외의 수산물 채취를 표방하면서 다케시마로 도항하 려는 사람이 있는데 123 라고 하며 다른 어업자의 도항을 경계했다. 그도 다른 수산업자들이 도항하면 강치 남획도 시도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나 카이는 다케시마 경영권 독점이 필요한 사정 과 다른 어업의 피해 등을 적어 첨부했다. 그에게 독도의 가치는 오직 강치에 있었다. 오키 도사는 나카이의 진정서를 숙지했고 독도를 지선에 편입시키기 위 해 두 어업조합이 신청서를 제출한 상태에서, 독도 주변 해면에서의 이익은 사실상 강치어업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본 현령의 어업단속규칙 에서 다케시마 강치 이외의 모든 어업을 금지한다는 조항을 서둘러 추가하도록 해주기를 124 지사에게 상신했다. 그리하여 개정된 어업단속규칙 에서는 강 치어업을 다케시마와 지선 20정 으로 한정했다. 이는 어업조합의 남획을 막기 위해서인 듯하지만 사실은 나카이의 청원을 들어준 것이다. 오키 도사가 나카이 의 진정서를 접수한 것은 1907년이지만, 어업단속규 칙 의 개정은 1908년에 이뤄졌다. 1907년에 현세부 과규칙 의 일부가 개정되었지만 125 강치어업에 관한 개정사항은 보이지 않는다. 1908년 6월 30일, 어업단속규칙 이 개정되었다(현령 제48호, 7월 1일 시행). 강치어업을 독도로 한정하고 지사 의 인가를 받게 하되, 독도 주변에서 126 강치어업 이외 의 어업을 금지하는 내용이 골자다. 이는 1905년 4월 에 강치어업을 독도로 한정한 것과 1907년에 독도어 있다. 업을 강치어업으로 제한한 것을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 다. 1906~1907년의 독도 강치 어획고를 보면, 1906년 121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의 해면전용 건 갑농( 甲 農 ) 제91호(1907. 8. 3),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122 제출처가 오키 도사에서 시마네현 지 사로 바뀌어 있다. 다케시마 해면전용 관 련 신청서 (1907. 4. 17),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123 다케시마 해면전용 관련 신청서 (1907. 4. 17),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124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의 해면전용 건 갑농 제91호(1907. 8. 3),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125 1907년 2월 22일, 3월 26일, 4월 15일 현세부과규칙 의 일부가 여러 번 개정된 바 126 다케시마 및 그 지선( 地 先 ) 20정( 丁 ) 이내에서의 강치어업 이외의 어업을 금함. 에 1,385마리(1,948)/5,437엔, 1907년에 1,600마리(2,094)/5,940엔, 127 1908년 에 1,680마리 128 다. 주로 해륙( 海 陸 )에서 그물, 작살, 박살( 撲 殺 ), 총 등의 방법 으로 4월에서 9월 사이에 포획한다. 연간 포획 숫자는 1905년(1,000여 마리) 과 비교해보면 더 많은 숫자다. 독도어업을 강치어업으로 제한한 시기가 1907년인 점을 감안하면, 그 이전까지는 해면어업이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 다. 그런데 당시 어업조합은 해면전용 어업허가를 얻지 못했다. 설령 허가 받았다 하더라도 강치 주산지인 독도에서 그들이 강치 포획에 집중하지 않 고 해면어업에 집중했을 리는 없다. 1905~1907년 사이의 강치 포획량이 비슷하다는 것은 독도에 군집해 있던 개체 수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종사 인력과 자본금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한 나카이 회사의 연간 포획량도 비슷했을 것임을 의미한다. 3. 1906~1910년간 강치 어획고와 과세 현황 127 김수희 논문(2010, 146쪽)의 통계는 다무 라 세이자부로의 島 根 縣 竹 島 의 硏 究 (1953) 및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의 自 38 年 原 書 兼 指 令, 竹 島 關 係 綴 (1953), 昭 和 28 年 度 涉 外 關 係 綴 에 근거한 것으로, 괄 호 안 숫자는 어렵합자회사 내부 자료의 숫 자다. 128 1909년 6월 7일 오키 도청의 질의에 대한 답신 ( 農 제377호), 昭 和 28 年 度 涉 外 關 係 綴. 129 答 申 오키 도청(1907. 7. 12)의 질문에 대한 나카이의 답신 (1907. 7. 15), 昭 和 28 年 度 涉 外 關 係 綴. 130 나카이는 1907년에 시마네현 시찰단 과 함께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 온 바 있다. 131 願 書 메이지 40년(1907) 7월 14일, 昭 和 28 年 度 涉 外 關 係 綴. 1907년 공동으로 운영되던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 는 이구치 류타와 사이가 벌어졌고, 7월까지의 강치 포획은 770마리 정도였다. 이 숫자는 제한숫자를 무 시하고 초과 포획한 숫자다. 이구치 류타의 제한 해제 요청에 따라 나카이는 이미 포획한 초과량을 불문에 부치기로 하는 한편, 기존의 포획 한도 600마리를 1,500마리 이내로 변경할 것을 총회에서 결의했다. 129 한편 나카이는 1907년부터 해마도( 海 馬 島 : 사할린)의 강치 포획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30 나카이는 7월에 홋카이도[ 北 海 道 ]에서 독도 강치 판로를 여는 데 비용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해마도에서 강치 포획 의 길이 열릴 것을 우려했다. 본래 해마도에서는 강치 가 금어 어종이었으므로 나카이는 언제 개금( 開 禁 )되는 지 알아봐줄 것을 오키 도사에게 요청했고, 131 도사는 32 33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현행 어업규칙으로는 허가할 수 없으며 언제 허가할지 모른다고 통보했 지역/연도 1906 1907 1908 1909 1910 1911 다. 132 1908년의 독도 강치 어획고는 1,681마리였으나 1909년부터는 1,152마리로 감소했고, 1910년대부터 는 679마리로 떨어졌다. 133 1908년에 나카이는 홋카이 도 치시마국[ 千 島 國 ] 시무시루도[ 新 知 島 ] 외 8개 섬에서 총 지적( 地 積 ) 12만 8천 184평의 유료사용 허가를 홋카이 도청 네무로[ 根 宝 ] 지청에 청원하여 허가받았다. 134 1909년에는 해마도 어업 허가도 획득했다. 나카이가 1909년부터 홋카이도의 강치 포획에 매달려 강치 포 획기에 숙련된 인부를 홋카이도 치시마국으로 보내자 독도 포획량이 감소했다. 나카이는 강치가 연해에서 번식하는 동물이므로 독도에 많이 군집해 있지만, 물개 [ 膃 肭 獸 ]도 군집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어부들이 강치 새 끼와 물개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여겼고, 135 Sea Lion 이라는 서양 이름도 숙지하고 있었다. 136 그는 1910년 까지도 독도 강치의 전망을 낙관했다. 남획만 절제한 다면 이익은 무궁할 것으로 137 예측했다. 그렇다면 1906년 이후에는 오키인들이 독도 강치 에 대해 잡종세를 납부했을까? 1901~1911년까지 통 계로 확인된 울릉도와 오키에서의 강치 포획량을 보 면 <표 6>과 같다. 138 132 農 제789호, 昭 和 28 年 度 涉 外 關 係 綴. 133 김수희, 2010, 앞의 글, 146쪽. 134 (도청에 제출함) 이력서, 昭 和 28 年 度 涉 外 關 係 綴. 135 다케시마 상황보고 (1908. 4. 20), 昭 和 28 年 度 涉 外 關 係 綴. 136 그는 강치, 물개, 해표 등을 구분하고 있다. 나카이는 강치를 대부분 海 驢 로 표 기했다(1909년 1월 26일 도사에게 보낸 나카이 요자부로의 답신). 137 (오키 도청에 제출함) 이력서 부속의 사 업경영 개요, 昭 和 28 年 度 涉 外 關 係 綴. 138 박병섭에 따르면, 1,600엔은 현재 쌀 값으로 환산하면 207만 엔, 10,000엔은 현 재 쌀값으로 천수백만 엔이다( 竹 島 = 独 島 漁 業 の 歴 史 と 誤 解 (1), 21~23쪽; 일본의 새 논조 와 시마네현 어민의 독도 어업, 239~242쪽). 그 렇다면 당시 1엔은 약 1,293엔 정도로 추정 된다. 139 貫 이 枚 로 표기된 문서도 있다. 140 2,760마리로 기록된 것도 있다. 141 사업경영 개요 에는 1,003마리로 되 어 있고, 다무라도 수컷(535)과 암컷(339), 새 끼(130)를 합쳐 1,003마리로 써놓았다. 다케시마 어렵합자회사 1,385(1,948)마리/ 5,437엔 1906년과 1907년 142 합자회사의 강치 포획량은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오키 도청에 보고한 숫자와 회사 장부(괄호 안의 숫자)의 숫자가 일치하지 않 는다. 제한 숫자를 초과해서 남획한 것을 숨기기 위해 이중장부를 만든 셈 이다. 143 위의 표에서 1904년과 1905년의 독도 강치 포획량을 보면, 울릉도 인이 포획한 숫자는 없고 가죽의 총량만 나와 있는데 이를 오키인의 포획 숫자와 비교해보면, 일단 가죽 총량 면에서 오키인의 포획량이 울릉도인 을 크게 앞선다. 1904년에는 거의 9배가, 1905년에는 3배 정도의 차이가 난다. 1904년과 1905년에 울도 군수가 울릉도인(일본인 포함)이 포획한 독도 강치 에 대해 과세했음은 선행 연구에서 밝혔다. 그런데 시마네현은 1906년 3월 이전에는 법령이 구비되지 않았으므로 오키인에게 과세할 수 없었음도 확 인했다. 1906년 3월 이후부터는 법이 구비되었으므로 합자회사는 현세부 과규칙대로 1906~1911년간의 어획고에 대해 납세했 을 것이다. 그런데 1906년도 합자회사의 대차대조표 142 1907년에는 2,094마리로 기록되어 있 1,680(2,192)***마리/ 5,940엔 1,680(1,681)마리/ 5,878엔 1,153마리/ 4,344엔 679마리 (1,152) 796마리 (511) 종업원 수 27인 23인 18인 23인 잡종세** 81엔 89엔 88엔 65엔 * 울릉도의 수세 관행과 울도군 절목 의 규정에 의거, 1902년까지는 물건값의 2%, 1903년부터는 1%를 세금으로 매긴 금액임. ** 잡종세는 어획고의 1,000분의 15를 매긴 금액임. *** 1907년 이구치 류타가 나카이의 남획을 상신했을 때 나카이는 771마리를 포획했다고 변명하고 있어 숫자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음. <표 6> 1901~1911년 강치 포획량(1903년까지는 오키 강치, 이후는 독도 강치임) 지역/연도 1901 1902 1903 1904 1905 오키국(4군) 1,053마리/355엔 1,240마리/326엔 1,436마리/453엔 울릉도(가죽만) 800관/600엔 1,275관/700엔 울릉도 수출세* 7.1엔 6.5엔 6엔 7엔 잡종세** 5.3엔 4.8엔 9엔 10.5엔 다케시마어렵 합자회사 6척 약 4,070엔 이상 7,690관 139 (2,750 140 마리) 3,750관 (1,004마리141) 는 것도 있다( 井 上 貴 央, 1995, 日 本 海 竹 島 の ニホンアシカ 2 捕 獲 頭 数 の 変 遷, 海 洋 と 生 物 96, Vol. 17, No. 1, 生 物 研 究 硏 究 社, 42쪽). 포획 두수는 기록마다 다르므로 감안해서 볼 필요가 있다. 143 이 글에서는 도청에 보고한 숫자를 공 식 기록으로 보았다. 144 메이지 39년도 업무 집행 전말,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 메이지 39년도 계산서, 竹 島 貸 下 海 驢 漁 業 書 類. 를 보면, 자본금과 인건비 등이 명시되어 있지만 세금 관련 기술은 없다. 오히려 1905년도는 손실금이 1,500 엔, 1906년도는 손실금이 336엔 정도로 나와 있고 144 1910년부터는 포획량도 급감했다. 나카이가 치시마 어업에 손을 대게 된 것도 독도 강치 포획에서 이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증언에 비춰보면, 합자회사의 설립은 결국 이익도 보지 못한 채 독도 강치의 멸절만 34 35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을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145 적자여서 그런지, 대차대조표라서 그런지, 세 금 관련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관유지 사용료를 납부했는가를 보 면, 이것도 합자회사 장부에 명시된 바는 없다. 146 통계상으로는 오키인들이 독도 강치를 포획하여 가장 많은 이익을 낸 시기가 남획이 극에 달했던 1904년이라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Ⅴ. 맺음말 1900년 전후 강치는 오키(오키 강치)와 독도(독도 강치), 두 곳에서 잡히던 동 물이었다. 오키인들은 독도 강치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부터 오키 연해에서 강치를 잡아왔는데, 그 사실이 시마네현 통계기록으로 남아 있다. 시마네현 은 현세부과규칙 에 의거하여 영업세잡종세 를 부과해왔는데, 어획물은 잡종세 중에서도 어업채조세 과목과액 으로 분류되 어 있다. 기록상 오키 강치가 처음 보인 1895년의 어 업채조세 과목과액 을 보면, 고래에 관한 규정은 있지 만 강치는 없다. 통계상 오키 강치가 보인 것은 1903 년까지고, 오키국 전체 어획고에 비하면 강치 어획고 는 너무 적다. 이 때문에 과세하지 않은 것인지는 명확 하지 않지만 시마네현이 강치에 대한 과세 입법절차에 착수하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1905년에 다케시마 를 편입하고 난 이후다. 1903년부터는 독도 강치의 포획 통계와 오키 강치의 포획통계가 함께 보이는데 독도 강치 포획량이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독도 강치의 일 부가 오키로 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학자도 있다. 시마네현은 새 한 마리, 해조류 하나에도 면허세 혹 은 어장별 과세를 해왔고, 어획물도 어망에 따라 과세 해왔다. 그런데 강치에 대해서만 과세하지 않았다면 145 1911년 독도가 금어구역으로 지정된 데다 1920년대에 소유권 양도 등의 복잡한 상황이 있어 강치포획 관련 보고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하시오카가 생포한 강치를 서 커스단에 판 기록이 보이긴 하지만 강치 포 획 등 어획에 관한 보고서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가 1933(4)년 부정기 출어를 하고부 터다. 1933년 하시오카는 강치를 생포하여 팔았으나 1,242엔의 손실을 보았고, 1934년 에는 210엔의 손실을 보았다. 1935년부터 1,700엔의 이익을 내기 시작하여 이후 1939년까지 이익을 냈다(김선희, 앞의 책, 147~149쪽). 146 기록상으로는 1925~1941년까지 관 유물 대여료와 토지사용료를 오키 지청에 납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금액은 도서면적 23정 3반( 反 ) 3무보( 畝 步 )에 대해 연액(각 연 도 4월부터 3월까지) 4엔 700전으로 나와 있 다(국세 외 제 수입 징수 원장 오키지청, 昭 和 28 年 度 涉 外 關 係 綴 중 참고자료). 도서 면적이 토지대장상으로는 69,990평(1945년 기준)으 로 나온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강치가 주요 어종이 아닌데다 어획고가 적 었기 때문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같은 포유류인 고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과세해왔으며 또한 과세가 반드시 어획고와 비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04년부터는 오키인의 독도 강치 어획고가 급증했음에도 시마네현은 바로 과세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이 유를 다른 데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시마네현이 강치 포획지인 독도를 오 키국 관할지로 단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마네현은 1905년 2월 정부가 다케시마 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나서야 과세입법 준비에 들어갔다. 첫 번째 조치는 바로 1905년 4월, 허가어업의 종류에 海 驢 漁 業 ( 隱 岐 國 竹 島 에서 하는 것에 한한다) 이라는 내용을 추가한 것이었다. 이런 조치는 1905년 4월 이 전까지는 시마네현이 다케시마 를 오키국 관할지로 여기지 않았음을 의미 한다. 현은 다케시마 를 편입한 뒤에도 바로 강치에 과세하지 못했다. 지적 ( 地 籍 )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현은 1905년 5월 17일, 다케시마 를 오키국 4군의 관유지 대장에 등재했다. 1905년 이전부터 강치를 포획해 왔지만 관유지 대장에 등재하고 나서야 과세를 위한 법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로써 경어( 鯨 漁 ) 에만 부과되던 잡종세 과목과액에 강치어업 이 추가되었고, 1906년 3월 이후부터는 과세할 수 있게 되었다. 1906년부터는 실제로 다케시마어렵합자회사를 상대로 과세했는가? 현 이 관유지 사용허가를 내린 시기가 1905년 5월 27일부터 9월 21일 사이므 로 관유지 사용료는 그 후에야 부과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잡종세의 경우는 1906년 10월 147 이후 아니면 다음해 3월에야 부과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런데 나카이의 합자회사가 잡종세를 납부했다는 사실은 기록상으로는 보 이지 않는다. 관유지 사용료 납부도 기록상으로는 1920년대에야 보인다. 일본은 竹 島 問 題 100 問 100 答 (2014)에서 시마네현이 1905년 편입 이후 다케시마에 대한 국유지 사용료를 매년 받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일본이 강치어업에 과세하기까지의 경위를 보면, 1906년 이 147 연세 부과시기는 1년에 두 번, 즉 3월 부터 9월, 10월부터 4월까지고, 납부기일은 각각의 첫달 1일이다. 전까지는 잡종세를 부과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를 정리해보면 <표 7>과 같다. 36 37

1905년 전후 일본 지방세와 강치어업, 그리고 독도 <표 7> 1905년 전후 강치 포획지와 포획자, 포획기, 납세 여부 포획지 포획자 1904년 이전 포획 납세여부 1904~1905 년간 포획 납세여부 1906년 이후 포획 납세여부 오키 울릉도인 오키인 독도 울릉도인 오키인 주도한 자들도 149 있었다. 이들은 오키와 울릉도, 두 지역의 사정을 양측 에 전하고 있었으므로 독도를 무주지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1903~1906년 사이에 시마네현은 포획한 독도 강치에 대해 자국민에게 과 세하지 않은 반면, 울도군은 1905년까지 일본인에게 과세했다면 어느 쪽이 실효 지배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는 포획 및 납세, 는 포획 및 납세 안함, 는 불분명, 울릉도인에는 일본인 포함됨. <표 7>을 보면, 1906년 이전까지 독도에서 강치를 포획 납세한 자는 울 릉도인이다. 오키인은 1905년까지 독도 강치에 납세하지 않았다. 이렇듯 1906년 이전까지 오키인이 강치(오키 및 독도 강치)에 납세한 적이 없 던 사실을 일본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해 일본은 1905년 이전까 지는 독도가 무주지였으므로 오키인들이 독도 강치에 대해 납세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당시 일본 외무성은 울릉도의 일본인들이 1905년 이전부터 울도군에 납세 해왔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독도 강치를 포함한 울릉도 수출품에 대한 세목 을 수출세 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148 현재 일본의 주장대로 당시 울릉 도의 일본인들이 독도를 무주지로 여겼다면, 강치는 무주지의 산물이므로 울릉도 과세 품목에서 제외하고 나머지 산물, 이를테면 목재나 곡물에 대해서만 납부 했어야 한다. 그런데 외무성은 독도 강치를 울릉도 수 출품목 에 포함시켰다. 뿐만 아니라 수출세 납부를 빌 미로 군수에게 울릉도 거주권을 주장하도록 자국민을 사주( 使 嗾 )하기까지 했다. 1905년을 전후해서 오키 거 주 일본인은 독도를 무주지로 인식하고, 울릉도 거주 일본인은 독도를 울릉도의 속도( 屬 島 )로 인식하는 일이 양립 가능한가? 울릉도 거주 일본인 중 대부분은 겨울 이면 오키로 가서 지내다가 봄에 돌아오곤 했다. 그런 사람 가운데는 선박과 자금을 제공하며 강치포획을 148 일본인들은 양국통어장정 과 통어규 칙 에 따라 준단( 准 單 ) 즉 허가증 소지자에 한해 조선에서 해빈 3리 이내에서의 어로 가 가능했다. 다만 울릉도가 비( 非 )통상항구 이므로 교역은 금지되었다. 울릉도의 일본 인이 군수의 징세요구를 수용한 이유가 여 기에 있다. 1906년에 울릉도를 시찰한 오 쿠하라 헤키운은 한국 정부가 군수에게 조 세권을 일임했다고 기술했으므로 군수의 징세는 1906년에도 지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군수는 울릉도에서는 과세했 지만 1904~1905년 사이에 행해진 나카이 등의 독도 어로는 금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업허가증을 소지하고 있는 한 어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카이 등은 허가증 을 소지하지 않았음은 물론 자국 조합에도 신고하지 않고 도항한 불법 어로였다. 149 대표적인 자가 와키타 쇼타로[ 脇 田 庄 太 郞 ]와 가타오카 기치베[ 片 岡 吉 兵 衛 ]다. 와 키타는 1899년 도감과 주고받은 약조문에 등장하며, 1901년 일상조합의 의원 명단에 도 나온다. 1905년에 한인과 일본인을 데 리고 독도 강치 포획을 주도했으며, 1906년 에 시마네현 관민 시찰단이 울릉도에 왔을 때 자신의 집을 휴식처로 제공하기도 했다. 1896년부터 거주했던 가타오카는 일상조 합 조합장으로서 울릉도의 수산물 수출통 계를 오쿠하라 및 농상공부 수산국에 제공 했고, 1904년에는 초대 우편소장을 지냈다. 38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