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진우 그림 우승우
노랗게 물든 아이들과 빨갛게 핀 어머니와 마른 나무 같은 아버지가 이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저구마을 아침편지 초판 1쇄발행2004년 1월 27일 초판 2쇄발행2004년 2월 03일 지은이 이진우 펴낸이 정중모 펴낸곳 도서출판 열림원 주간 이영희 책임편집 박은경 디자인 강희철 제작 송정훈 영업 김석현 배한일 관리 김명희 김은성 정소연 등록 1980년 5월 19일(제406-2003-026호) 주소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513-15 전화 031-955-0700 팩스 031-955-0661 홈페이지 www.yolimwon.com 이메일 editor@yolimwon.com c 2004, 이진우 책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ISBN 89-7063-409-6 03810
공공건물을 빼고 3층짜리 양옥집 한 채와 2층짜리 양옥집 서너 채가 있습니 다. 마을 안으로 버스 한 대 겨우 지나갈 만한 1차로가 있습니다. 시내버스 는 하루 다섯 차례, 시외버스는 하루 여덟 차례 이 마을에 옵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버스를 타러 한 시간가량 걸어와야 하지요. 서 두르고 버스 시간을 잘 맞춘다면 서울까지 하루에 다녀올 수도 있습니다. 고 속 인터넷망이 들어와서 인터넷 사용에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시골에서 산다는 것 그러나 5백 미터 정도 해안을 따라 늘어선 마을이고 1백가구정도산다 는데, 실제로얼굴을볼수있는사람은스물남짓입니다. 부지런히 선창과 논밭을 쫓아다니면 더 많은 얼굴을 볼 수 있기야 할 겁니다. 지난겨울, 서울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 시골로 와서 살게 되면 모든 게 낯설기 마련입니다. 서울에서 거제도 남단에 있는 이 마을로 올 때는 이사 가는 게 아니라 이민 가는 거라고 여겼습니다. 도시는 번잡하고 찌들고 각박 하지만 시골은 한가롭고 평안하고 정감 넘친다는 관념조차도 지웠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삶이다, 작정했습니다. 시골도 시골 나름입니다. 시골에 사는 사람의 입장으로 볼 때 제가 사는 마을은 시골이라 부르기 좀 애매합니다. 면소재지거든요. 구청 규모의 면사 무소가 마을 어귀에 있습니다. 농협 건물도 번듯하고, 보건소도 그럴듯합니 다. 자그마한 우체국도 있습니다. 그 외에 2층짜리 마을회관도 있군요. 이런 종로 어느 건널목에 서 있다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세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 다 모아놔도 이만큼은 안 되겠 다 싶었지요. 그래도 이 마을이 남부면에서는 제일 큰 마을입니다. 남부면은 남아메리카의 칠레처럼 좁고 길게 해안선을 따라 자리잡고 있 는 데다 산이 높고 험해 평지가 드뭅니다. 덕분에 거제도의 관광 명소는 거 의 다 모여 있고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남부면, 특히 이 마을로 오는 공무원이나 바로 옆 마을로 오는 초등학교 교사들은 오 지 수당을 받는답니다. 그렇게 보면 이 마을이 오지인 것도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버스로 한 시간을 가야 하지요. 신호등 없는 길을 쌩쌩 달 6 시골에서 산다는 것 7
려 한 시간이니 거리를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마을에는 아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집안의 아이들보다 근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살러 온 집의 아이들이 많지요. 토박 이 아이들 중에는 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가 드뭅니다. 대개는 할아버지, 할 머니 손에서 자라는 아이들이지요. 그 부모가 외지에 돈 벌러 나간 까닭입니 다. 그러다 보니 학교 갔다 오면 아이들은 참 심심합니다. 그래서 텔레비전 이나 컴퓨터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시골까지 살러 와서 그럴 수야 없지요. 숙제를 마치면 집 밖으로 내몹니다. 들에서 놀든 바다에서 놀든 알아서 놀라 하지요. 젊은 축에 드는 사오십 대는 거의 배를 탑니다. 농사일은 노인들 차지입 니다. 이 마을에서 노인 축에 끼려면 칠순은 되어야 합니다. 팔순 노인들도 몇백 평이나 되는 밭일을 혼자 다 합니다.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를 입에 달 고 살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안 믿습니다. 노인이 일하는 게 안쓰러워 일 도와주러 나갔다가 오히려 일 못한다는 핀잔만 한참 주워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노인들이 마을의 주도권을 잡고 있지요. 제가 사는 집은 마을 입구이면서 마을 끝입니다. 저희 집 뒤로 논밭이 쭉 펼쳐져 있고, 앞으로는 큰길 너머로 집들이 쭉 늘어서 있습니다. 노인들은 새벽 닭소리 울리기 무섭게 우리 집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 농사를 지으러 갑니다. 점심때 그리고 해질 무렵 집 옆을 지나가지요. 집에 있다 보면 인사 하기 바쁩니다. 그렇게 산 지 3년째인데, 겨우 마을 사람으로 대접을 받을까 말까 하지요. 그분들 눈에는 제가 언제든 떠날 사람인 게 틀림없습니다. 시 골 살지만 시골 사람이 아닌 게지요. 계획을 세워 시골 생활을 작정하고 내려온 게 아니라서 생활 기반을 마련 하지도 못했습니다. 집 한 채와 거기에 딸린몇평안되는텃밭. 그마저아 버지 소유입니다. 도시에서 빚잔치 하고 나서 시골 와서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 수입 뻔하지요. 인세라 도 받으면 밭을 조금씩 사보려고 했는데, 이 마을은 땅값이 너무 비 싸엄두를못냅니다. 집을개조하여방네개로민박을쳐서네 식구가 먹고살고 있습니다. 기반이 잡힐 때까지는 시골 사람이라 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습니다. 시골에 살고는 있으나 도시에서 수 입을 얻고 있으니, 시골 사람이 봐도 한심하고 도시 사람이 봐도 한심 한 노릇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생활이라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불안을 이기기 위해 우리 가족은 행복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재미있는 일을 할까, 어떻게 하면 모두 즐거울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시 골 생활이 가장 좋은 점은 자기 멋대로 무엇이든 해볼 수 있다는 점이지요. 8 시골에서 산다는 것 9
물론 결과 역시 전적으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부 담스러운 게 아니라 즐겁습니다. 스스로 원한 책임이기 때문이지요. 시골 생활에 대해 학교에서조차 배운 게 거의 없는 터라 일단 몸으로 부 대껴봅니다. 실패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경험이 되어 실패 확 률이 점점 줄어들게 되지요. 시골에서 맞부딪히는 일이 무슨 초정밀 기계를 다루는 일이 아니라서 경험이 쌓이다 보면 해결책이 나오 기 마련이고요. 일은 어렵지 않은데, 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두려움 이 많습니다. 그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2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거듭된 실 패가 오히려 용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실패가 용납될 뿐 아니라 값진 교훈 이 되는 곳이 시골이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저의 실패를 재미있어하고 다시 해보도록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역시 아이들에게 실패 시골로 돌아왔다?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길 원한 다면 시골에 살러 올 필요 없지요. 시골에는 그런 게 안 어울립니다. 그리고 도시 근교 시골에 목조 주택을 지어놓고 도시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도 시 골 사람은 아니지요. 생활의 기반이 어디에 있든 생각과 마음이 도시에 머물 러 있다면 전원생활이나 귀농이 행복할 수 없을 겁니다. 시골에서 살려면 마음이 시골을 닮아야 합니다. 시골 같은 마음, 어울려 사는 기쁨과 방법을 알면 도시에 살아도 시골에 사는 게 되겠지요. 도시나 시골은 인위적인 구분일 뿐입니다. 조금만 더 자신과 가족과 친지와 친구와 동료에게 넉넉한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내가 행복하려고 하기보다 남을 행 복하게 해서 그 모습을 보고 나까지 행복해지는 삶. 그걸 당신의 마음속에서 일구어나가시기 바랍니다. 거기가 시골입니다. 를 권합니다. 늘 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도시에서였다면 그럴 수 없었겠 지요. 실수나 실패를 너그럽게 봐줄 줄 알고 다시 도전하는 용기를 북돋워주 는 게 시골 사는 부모가 할 일 아닌가 싶습니다. 매일 칠팔순 노인을 보고, 해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마을 풍경을 보고,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자연의 순환을 보며 살다 보니 마음이 넓 어지고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간혹 시골로 돌아와 성공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그리하여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기사를 읽을 때가 있습니다. 성공하러 10 시골에서 산다는 것 11
차례 작가의 말 06 시골에서 살려면 마음이 시골을 닮아야 합니다 텃밭 68 흐르는 땀조차 단 웃음이 되었습니다 고구마 74 쟁기가 지나가면 탐스러운 자줏빛 고구마가 얼굴을 내밉니다 1.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화 79 일할 때 장화보다 요긴한 신발이 없지요 산불 조심 83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이 편합니다 풍경 19 번데기 24 가족 잠자리 30 이발사 33 풍경 소리에 취하면 어느새 꿈결이고, 아침입니다 언제든 아이들은 깜짝 놀랄 걸 들고 올 겁니다 누구도 아버지가 오래 잠 못 드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아내는 이 마을에 와서 이발사가 되었습니다 떠나오다 86 이 마을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지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물맛 89 물을 고마워하며 마실 줄 알아야 반쯤 이 마을 사람이 된 거지요 새옹지마 92 샛노란 배추꽃과 하얀 무꽃, 게을러 씨 늦게 뿌린 탓에 보게 되었습니다 하루 95 촌사람으로 사는 게 살아본 것 중에서 가장 편하고 행복합니다 바로 지금 99 날짜나 요일을 모르고 살다 보니 나중에 라는 게 없습니다 낚시 38 팔자 사나운 도다리 한 마리 걸리면, 용왕님 선물이라 여깁니다 친척관계 102 헤어져도 헤어진 일이 없으므로 지난 세월을 묻지 않았습니다 쑥국 43 시골 봄 살림에 쑥국만큼 고마운 국도 없습니다 아지트 107 바위에도 마음이 있을 거란 생각에 혼자 낄낄거리고 말지요 별이 48 아무래도 세상에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나 봅니다 지는 해 110 황금빛 햇살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가난한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줍니다 신문배달부 57 신문집 할아버지가 우리 마을 신문입니다 봄비 117 땅속에서 두려움을 참고 기다린 오랜 날들이 있어 그 빛은 시리도록 푸를 겁니다 소풍 61 가족 소풍 길에서 실수를 보듬어 안는 법을 연습합니다 슬픔 123 이틀이 지나자 친구는 오랜 불면증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유치원 졸업식 65 어린 몸으로 자연을 겪어내며 딸아이는 부쩍 자랐습니다 청해반점 126 물때를 만나 바쁜 배 위에서도 자장면은 맛나게 비벼집니다
우물 178 우물물은 자꾸 퍼주어야 썩지 않습니다 2. 학교나 집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세상을 아이들은 자연과 뒹굴면서 알게 됩니다 덕률이 184 광신지업사 189 장기의 규칙 194 장마의 추억 199 할랑할랑, 살랑살랑, 한들한들, 덕률이 일하는 게 딱 이렇습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열심히 벽지를 발랐습니다 딸은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형이고, 아들은 한 수 두는 데도 몇 분을 망설입니다 노란 비옷을 입고서 자전거를 타고 장맛비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습니다 형과 동생 131 세상 모든 형들이 이러겠지요 진수성찬 206 여기저기 나물들이 쑥쑥 올라온 밭둑은 그대로 샐러드 바였습니다 마음의 텃밭 137 먼저자라고먼저열매를맺는게꼭좋은것만은아니랍니다 아버지 211 아부지, 한판 두실랍니꺼? 조개잡이 142 오후 내내 몸을 부려 파낸 그 조개는 값으로 따질 수 없지요 아들처럼 215 장인어른, 올해도 죄송합니다 감국차 148 저도 감국차처럼 한결같은 맛이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는지요 시골 냄새 219 밥상에 집에서 기른 채소가 올라오면 꼭 오줌 얘기를 합니다 클로버 153 세 잎은 행복, 네 잎은 행운, 일곱 잎은 뭘까? 친구 224 친구가 문득 그리우면 전화를 하는 대신 잘 살기를 바랍니다 마법사 157 진짜 마법사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인터넷 227 시골에 산다고 인터넷까지 사람을 무시하냐며 투덜거립니다 밥상 161 방 한 귀퉁이를 차지한 쌀을 보면 자꾸 웃음이 나옵니다 서당개 230 가방도메지않고공부도안하는강아지, 과연3년 후엔 풍월을 읊게 될는지요 까치 둥지 165 흙과 풀과 가지가 인연으로 모여 까치 둥지가 되고 다시 풀의 집이 되었습니다 한살이 235 하루살이의 한살이든 사람의 한살이든 크게 다를 바 없지요 소중한 것들 169 무엇이 부끄럽고 부끄럽지 않은 것인지 아들에게 배워야겠습니다 상추 솎기 242 제가 받은 씨, 이젠 믿겠습니다 아이들 세상 172 그 세상은 아이들의 언어로만 설명되지요 배추꽃 246 저라는 사람, 배추만도 못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1.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마을에 와서 저는 무지렁이가 되었습니다. 전에 배우고 겪어 알고 있던 모든 걸 다 버렸지요. 그렇게 지내는 동안. 바닷빛에 젖어든 노을처럼 그렇게 마을 사람으로 젖어들었습니다. 경남 거제시 남부면 저구리에 있는 저구마을. 저에게 이 마을은, 많고 많은 마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새 나라입니다. 16
풍경 창밖에 오래된 풍경 風 磬 하나 달려 있습니다. 바람과 어울려 수다 를 잘 떨지요.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풍경을 찾아오는 바람이 늘 같 은 바람이 아닌가 봅니다. 소곤소곤, 두런두런, 시끌벅적, 투덜투 덜. 뭔 말이 그리 많은지, 별꼴입니다. 아이는 학교 가고 아내마 저 어디 가고 없는 날, 목을 빼고 창밖을 내다보노라면 풍경은 신이 나서 더 큰 소리를 내지요. 바람이 많은 바닷가 마을이기는 해도 풍경이 입을 다물 때도 있습 니다. 저녁 아홉시, 막차가 끊어지면 아직 잠들지 않은 불빛도 꾸벅 꾸벅 좁니다. 나지막하게 울리며 빈 마을을 지키던 풍경이 기척조차 풍경 19
없을 때면 창문을 열고 바람의 행방을 수소문합니다. 풍경이 한숨을 쉬듯 한마디를 내뱉고 고개를 돌리면 아직 바람이 자지 않은 줄 알 뿐이지요. 걱정이 쌓여 뒤척이는 밤이면 풍경이 수다스러워집니다. 달래준다 고 하는 소리들이 오히려 오던 잠마저 쫓아버립니다. 그러나 걱정은 이내 풍경 소리에 마음을 내주고 맙니다. 풍경 소리에 취하면 어 느새 꿈결이고, 아침입니다. 제 집은 마을 어귀에 있습니다. 가까이 버스 정거장이 있지요. 마 을 입구이면서 출구인 셈입니다. 저희 집 앞 도로 건너로 집들이 줄 지어 섰고, 뒤로 할머니 혼자 사는 집이 한 채 있습니다. 바로 담을 맞대고 붙어 있는 집이 없지요. 집 바로 옆으로 농로가 나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마을의 논과 밭 이 쭉 펼쳐져 있습니다. 새벽부터 마을 어른들이 일하러 가는 바람에 잠귀 밝은 아내는 새벽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농로 바로 건너에 있는 폐가에서 닭을 키우고 있는데, 장닭 목청이 대단합니다. 20
부산하나 바쁘거나 시끄럽지 않은 시골 마을의 하루는 노을과 함 께 저물어갑니다. 경운기가 줄 이어 털털거리며 마을 쪽으로 몰려가 면 부엌에서 저녁밥 짓는 냄새가 풍겨 오지요. 밥상을 물리면 어두운 다. 보기는 흉해도 소리는 여전히 맑습니다. 그후로는 풍경을 떼어내 라는 사람도 없군요. 풍경이나 저나 누추하지만 행복하게 지내고 있 습니다. 창밖은 벌써 적막강산입니다. 막차가 도착하면 마을은 마음을 놓고 잠이 듭니다. 그날이 그날 같은 게 시골 풍경입니다. 보일 때가 되었는데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걱정을 하는 이 마을에 풍경이 매달리던 날,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낯선 소리에 신기해했지요. 풍경이 들 려주는 바람의 말은 귀보다 먼저 마음이 듣나 봅니다. 특히 바람 부 는 밤이 지나고 나면 풍경을 보며 한마디씩 던지고 지나갔습니다. 낮지만 멀리 퍼지는 그 소리에 마음이 아린 사람도 있었고, 흥겨운 사람도 있었지요. 누가 찾아와 풍경을 떼어내라고 말을 해서 떼어놓 으면 다른 누가 찾아와서는 왜 떼었냐고 합니다. 떼었다가 달았다를 반복할 뿐입니다. 그사이 풍경 아래 달린 물고기 모양 동판이 사라져버렸습니다. 풍 경 소리 듣기 싫어하는 누가 그 놈을 떼어버렸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 습니다. 물고기 없이 벙어리가 된 채로도 풍경은 한참을 매달려 있었 습니다. 지금은 쓰고 버린 그라인더 날을 물고기 대신 달아놓았습니 22 풍경 23
데기를 매일 들여다보았지만 점점 횟수가 줄었고 잊어버렸습니다. 입춘이 지난 며칠 후, 번데기를 여느 때처럼 살펴보러 간 아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박각시나방이에요. 허물을 벗고 나온 건 눈이 크고 검어 토끼처럼 귀여운 나방이었습 니다. 아들의 동물백과에는 줄홍색박각시라고 적혀 있었지요. 아이 번데기 들은 줄홍이 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날려 보냈습니다. 허물은 아이 들의 보물 상자에 간직하고요. 작년 늦가을, 밭에 거름을 주려고 뒷집 할머니가 쌓아놓은 소똥을 가지러 갔습니다. 소똥더미를 뒤집다가 엄지손가락만 한 번데기를 발견했습니다. 함께 간 아들과 딸이 탄성을 지르며 손바닥 위의 애벌 레를 구경했지요. 어린이 동물백과를 거의 외우다시피 한 아들은 나 방 종류라고 했습니다. 번데기가 꿈틀거리자 아이들이 서로 만지겠 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아버지, 번데기에서 어떤 곤충이 나올까요? 우리 키워요, 네? 짚을 잘게 썰어 유리병에 넣은 다음 짚 사이에 번데기를 넣었습니 다. 유리병은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올려놓았지요. 처음 얼마간은 번 아홉 살 난 아들 호윤이는 호기심을 타고났습니다. 동물에 대한 호 기심은 각별하지요. 한글을 배우기도 전부터 동물백과를 끼고 살았 습니다. 아들이 한글을 혼자 깨치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동물백과 덕 분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고 보니 공룡백과도 달달 외우고 있습니 다. 책을 보고 또 봐서 거의 외울 지경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 입니다. 요즘에도 학교 갔다 오면 책부터 집어듭니다. 비 오거나 아 주 추운 날이 아니면 제발 나가 놀라고 등을 떠밀지요. 24 번데기 25
여덟 살 난 동생 지윤이는 오빠와 함께 노는 버릇이 들어 호윤이가 책을 읽고 있으면 옆에 나란히 앉습니다. 아직 한글을다못깨친아 이인데도 오빠가 읽는 어려운 책이 지겹지 않은 모양입니다. 동물을 좋아하는 오빠 따라 자연보호자가 되겠다고 합니다. 자연을 살리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아이라서 밥알 한 톨도 흘리지 않습니다. 호윤이는 네 살에서 다섯 살 무렵까지 지윤이와 함께 놀이방에 다 녔습니다. 서울에살적일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는회사에다녀야 했기 때문에 동생을 돌보는 건 오빠의 몫이었습니다. 동생은 동생대 로 오빠한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지요. 부모 없이 보내는 시간이 대 부분이었던 아이들은 같이 노는 법, 양보하는 법, 달래주거나 칭찬하 는 법을 서로에게서 배웠습니다. 시골로 이사를 와서 유치원을 다니게 되면서부터 둘은 꼭 손을 잡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3년이 흘렀고 부모가 곁에 있게 되었지만 뭘 해도 꼭 같이 하려고만 합니다. 서로 좋아하는 일이 다른데도 따 로 하지 않고 같이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기 싫은 일도 서로를 위해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아이들 눈에 아버 지가 하는 일은 마냥 신기한가 봅니다. 아버지가 밭일을 하면 밭으로 26
오고 나무하러 가면 산으로 오고 낚시를 가면 바다로 쫓아다닙니다. 뭐가 그리 볼 때마다 새롭고 신기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아이들 은 아이들. 아버지 일을 거들다가는 금방 싫증을 냅니다. 대신 아버 서 무얼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든 아이들은 깜짝 놀랄걸들고올겁니다.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비우고 살아야지요. 지 주위에서 뛰어놀지요. 제멋대로 놀면서 아이는 자연을 익히고 겪 고 마음에 두게 되었나 봅니다. 벌레나 날짐승, 들짐승 어느 것 하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건 죽었건 다르지 않나 봅니다.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해변에 산책 나갔다가 죽은 갈매기를 발견 했습니다. 반쯤 뼈가 드러난 상태여서 끔찍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은 갈매기가 불쌍하다며 그 옆을 떠날 줄 모르더군요. 그렇게 불쌍하면 무덤이라도 만들어주렴. 아이들은 조그만 자갈을 주워 갈매기의 주검 위에 하나씩 쌓았습 니다. 그러고는 갈매기의 영혼이 하늘에 가서 빛나는 별이 되기를 빌 었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있는 해변에서 짐승 뼈다귀를 주워 오 기도 합니다. 개나 염소의 두개골이지 싶은 커다란 뼈를 들고 오는 아이들을 보고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습니다. 아이들끼리는 공룡화 석이라 여겼던 모양입니다. 한동안 그 뼈를 연구하는가 싶더니 눈에 띄지 않더군요. 어디다 숨겼는지, 묻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 뼈에 28 번데기 29
내와 깔깔 웃는 딸, 뭐라 중얼거리는 아들이 어서 잠들라 재촉합니다. 그때가 가장 힘든 순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할 겁 니다. 앞으로 어찌 사나, 온갖 상념이 졸린 눈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졸음 겨운 대로, 뒤엉킨 식구들의 재촉에 못 이기는 척 잠들면 그뿐. 누구도 아버지가 오래잠못드는걸바라지않습니다. 가족 잠자리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이 꼭 묻는 말이 있습니다. 연료비를 아끼느라 한방에 모여 자고 있습니다. 네 식구가 나란히 누우면 그만인 방입니다. 초등학교 들어가는 딸과 2학년 되는 아들 사이가 늘 제 자리입니다. 아이들은 팔베개를 한 채 이야기나 자장가 를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들지요. 큰 아기, 아내도 덩달아 잠이 들고 나 면 세상이 모두 잠든 듯합니다. 창을 넘어든 희미한 불빛에 기대어 식구들의 얼굴을 둘러봅니다. 아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불을 차며 이리저리 뒹굽니다. 잠버릇이 심 한 아들이 아버지의 다리를 베고 누우면 아내의 다리가 척 걸쳐 옵니 다. 딸은 더 깊숙이 아버지의 품을 파고들지요. 잠결에 배시시 웃는 아 부인은 시골 생활에 만족합니까? 아이들은요? 그러면 대답하지요. 그건 저한테 물어서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네요. 집사람이나 아 이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런데 묻기를 참 망설입니다. 실례가 된다 생각합니다. 아내나 아 이들에게서 마지못해 산다는 대답이 나오지나 않을까 지레 짐작들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 역시 그들처럼 아내와 아이들이 어떻게 느 끼는지 종종 묻고 싶었습니다. 그간 괴로울 때도 있었고, 서로에게 상처 줄 때도 있었거든요. 그러나 그들이 아내나 아이들에게 사는 게 30 가족 잠자리 31
어떠냐고 물을 때, 저는 슬그머니 자리를 뜹니다. 그들도 제대로 알 아야 오해하거나 헛된 희망을 갖지 않을 겁니다. 몇 달 전까지는 아이들을 재웠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 이들은 아홉시면 자야 합니다. 책도 읽어주고, 옛날얘기도 해주고, 자장가도 불러주며 잠을 재우지요. 제가 바쁜 날은 아내가 대신 아이 들을 재웠습니다. 도시에서 살 때, 그러지 못한 게 가슴에 맺혀 있었 습니다. 부모의 품에서 잠이 들 때처럼 아이들 마음이 편할 때가 있 을까 싶었지요. 마음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주저할 필요가 없었습니 이발사 다. 그러기 위해 시골에 살러 내려온 거였습니다. 가족끼리 사랑을 주고받는 일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거라 여깁 니다. 사랑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지요. 도시에서 맞벌이 를 하느라 아이들을 보기 힘들었습니다. 어른이야 나중에 잘해주면 될 거라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당장 사랑에 배가 고프고 외롭고 괴롭 습니다. 그사이 아들은 무엇엔가 집착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고 딸 은 주위가 산만했습니다. 아직도 그런 모습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지 만 훨씬 나아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부모에게 사랑을 베풀어줍 니다. 사랑에 있어서 우리는 부모자식 사이가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아내가 며칠째 은근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더니 가위와 빗을 꺼내 듭니다. 머리 기를 마음이 있던 터라 팔 아프게 무슨 이발이냐고 손 을 내저어보았습니다. 아내는 흥, 분홍 보자기를 제 목에 휙, 두르고 맙니다. 햇볕 잘 드는 창 아래 퍼질러 앉은 채로 투덜거려봤자 머리 카락 싹둑싹둑 잘리는 소리만 울려 퍼집니다.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구경하다가 이내 놀러 가버립니다. 아내가 땀 흘리며 머리를 자르고 있는 동안, 저도 졸고 봄날도 좁니다. 아내는 이 마을에 와서 이발사가 되었습니다. 자신 없 다며 손을 내젓는 아내에게 이발 가위를 쥐여주며 제 스스로 보자기 32 이발사 33
를 목에 매었지요. 그동안 아내의 가위질도 제법 쓸 만해졌습니다. 손님도 저, 아들, 딸, 셋으로 늘었고요. 요즘은 옆머리가 귀 밑으로 조금만 내려와도 아내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머리 모양을 제멋대로 할 자유가 없어진 대신 아내에겐 즐거움이 생겼습니다. 살림도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을 자기 맘대로 꾸 미지요. 구슬땀 흘려가며 가위질하는 아내나 꼬박꼬박 조는 저. 사랑 에는 늘 희생이 따릅니다. 아내가 가위를 들게 만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머리 모 양은 첫인상을 좌우하는 만큼 돈 아끼려 들지 말고 전문가에게 맡겨 야 한다고 했지요. 처음엔 아내의 말을 듣고 이 마을 전문가에게 차 례로 머리를 맡겼습니다. 맡길 때마다 실망이었지요. 그렇다고 다듬 으러 도시로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길어지면 괜찮겠지, 하면서 두세 달을 보냈습니다. 아들, 딸이 미용실에 다녀오는 날은 시골에 와서 사는 게 후회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차라리 내가 잘라줄래. 34
군대 시절, 병장 말년 시절에 이발병에게 이발하는 법을 대충 배웠 습니다. 그러나 실습은 충분히 하였습니다. 이발병은 혼자 부대원 백 여 명의 머리를 깎아줘야 했지요. 윗사람이 오늘 내로 다 깎으라면 그래야 하는 게 군대였으니까요. 잘 깎았나 못 깎았나는 문제가 아니 었습니다. 계급이 낮을수록 깎는 순서가 늦을 수밖에 없어 새벽까지 순서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등병이나 일등병은 제가 서툰 걸 뻔히 알면서도 머리를 맡겼지요. 아들이 제일 만만했습니다. 이발 가위와 빗을 꺼내고 아들을 신문 지 위에 앉혔습니다. 긴장한 아들을 달래면서, 윽박지르면서 머리를 잘랐습니다. 군인 머리가 아니라 힘드네. 머리 모양이 엉망이 된 아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아들을 바로 마을 이발소로 보냈습니다. 줄곧 지켜보고 있던 아내도 답답했나 봅니다. 차라리 제가 할게요. 앉아봐요. 서 빠졌습니다. 누가 머리를 자르는 날은 가족 모두가 신이 납니다. 평상에서 목에 보자기를 두르고 앉은 사람은 힘들지 몰라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거 든요. 꼼짝 못하고 앉아 있는 사람을 놀리는 놀이, 참 재미있습니다. 특히 머리 깎기 싫어하는 아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더 신이 납 니다. 그러나저러나 아내는 열심히 머리를 깎습니다. 다음 머리 깎을 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자기 남편이, 아들이, 딸이 예쁘게 보이기를 빌고 빌면서 열심히 깎고 다듬습니다. 참, 아내의 머리는 누가 깎아주냐고요? 중이 제 머리 못 자른다고, 아내는 가까운 도시로 나가는 일이 있을 때, 미용실에 갑니다. 가서 컷만 하고 오지요. 아내는 유심히 머리 깎는 걸 보고 배워 옵니다. 일 종의 수업료라고나 할까. 또 아내의 머리 모양이 예뻐야 아내에게서 머리를 깎은 가족들도 안심합니다. 우리 머리 모양도 저렇게 예쁘겠 지,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아들이 앉았던 자리에 남편이 앉았습니다. 잔뜩 긴장하여 온몸이 뻐근할 정도로 참으로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렇게 아내의 이발사 경력은 시작된 겁니다. 주 고객은 남편이었는데, 가위질이 손 에 익자 고객을 아들로 딸로 늘리더군요. 덕분에 이발비가 가계부에 36 이발사 37
꿰어 던지면 아이들은 고래라도 잡을 것처럼 신이 납니다. 아이들은 허탕을 치는 아버지의 모습에 깔깔댑니다. 놀리는 아이들과 갯가에 서 뒹굴다 보면 생선도 잊고 맙니다. 노을이 지면 빈 낚싯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지요. 그런 날이면 바 다가 밥상머리에 한자리를 차지합니다. 생선 없는 밥상에도 바다 내 음 가득하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낚시 바닷가 마을에 살게 되면 밥상이 바다를 닮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였습니다. 마을에 시장이 없어서 생선 구경하기가 힘 들기 때문입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오는 부식 트럭에도 생선은 없었 습니다. 어부들이 사는 마을에 생선을 파는 게 말이 안 되지요. 어부 들도 자기 식구들 먹을 생선을 빼고는 모두 어판장에 내다 팝니다. 어부들에게 생선을 사려면 미리 이야기를 해두어야 하지요. 그래서 생선이 먹고 싶으면 먼 도시의 시장으로 나가거나 낚시를 하러 갑니다. 식구끼리 낚시하러 가는 날이면 아이들은 갯가에서 놀 고 저는 아내와 함께 호미를 놀려 지렁이를 잡지요. 낚시에 지렁이를 이 마을 사람들이 고기, 괴기라고 하면 생선을 말하는 겁니다. 보 통 말하는 고기는 육고기라 따로 부릅니다. 아직도 저는 생선을 보고 고기라고 부르는 게 어색합니다. 이 마을 사람들 어법에 따르자면 아 내와 아들은 육고기 체질, 저와 딸은 고기 체질입니다. 제 고향은 항구도시 통영. 열한 살 때 서울로 갔으나 어머니의 밥 상이나 식성은 고스란히 남아 있지요. 생선을 지져 먹고, 구워 먹고, 국으로 끓여 먹어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것 같습니다. 어릴 때 회 를 별로 먹어보지 않아 지금도 회는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울 토박이인 아내가 회를 좋아합니다. 38 낚시 39
이 마을 어부들에게 생선을 사먹는 건 여간 부담스런 일이 아닙니 다. 이웃끼리 돈을 주고받는 것이 우선 껄끄럽습니다. 팔아도 3만 원, 5만 원어치씩만 팔겠다니 그것도 작은 살림에는 부담스럽습니 다. 싱싱한 생선을 맛보려고 어부를 찾지만, 한두 마리는 귀찮다고 안 팝니다. 생선을 가지러 선창으로 나가야 하거든요. 그래서 이웃에 게서 생선 사기를 아예 포기했습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생선을 갖다주는 이웃도 있습니다. 주로 제철 에 나는 생선들이지요. 이건 뭘 넣고 국 끓여 먹어라, 회 쳐 먹어라, 구워 먹어라, 지져 먹어라, 젓갈 담아 먹어라, 요리 강습도 빼놓지 않 습니다. 고마워서 생선 담아 온 그릇에 뭐라도 담아 건네지요. 아내가 회 맛을 잊을 만하면 낚시를 들고 마을 해변으로 나갑니다. 좀 멀리 가면 낚시가 더 잘 된다는데, 생선을 많이 낚을 욕심도 없습 니다. 2년 전에는 반년 가까이 밤마다 장어를 잡으러 다녔고, 팔뚝만 한 민어조기를 연달아 잡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낚시 가 시들해졌습니다. 텃밭 가꾸는 게 더 좋았습니다. 낚시로 손바닥만 한 도다리나 한두 마리 잡으면 됩니다. 그 정도면 아내 혼자 실컷 먹을 수 있거든요. 그러나 요즘은 실력이 줄어 한 마 리도 잡을까 말까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낚시를 던져놓고 거의 신경을 40
안 씁니다. 애들하고 노는 게 재미있어서요. 팔자 사나운 도다 리 한 마리 걸리면, 용왕님 선물이라 여깁니다. 작은도다리비늘을치고껍질을벗기고회를치면딱회네점이 나옵니다. 접시 위에 상추를 깔고 무지갯빛 도는 도다리 살점을 올려 놓으면 아내의 눈가에도 무지개가 피어오릅니다. 특히 그런 날, 바닷 가에 살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쑥국 아이들이 손 잡고 학교 가고 나면 저희 내외만 집에 남습니다. 이 일 저 일, 함께하다 보면 알콩달콩 재미있습니다. 잠깐 책상 앞에 앉 아 있는 사이, 아내가 슬그머니 집을 비웠습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 집은 정말 쓸쓸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났나 아내가 마당을 들어서면서부터 일부러 큰 소리를 냈습니다. 말도 없이 어딜 갔다 와서 미안하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저대로 바람을 쐬는 척, 마당에 나갔습니다.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소쿠리에 담긴 쑥을 내보였습니다. 새로 난 쑥으로 끓인 된장국을 세 번은 먹어야 일 년이 건강하다 42 쑥국 43
잖아요. 사실 쑥국을 많이 먹어서 질릴 때도 되었지만 아내의 말에 맞장구를 쳤습니다. 아이들 좋아하는 쑥떡도 만들어야 된다고 한술 더 떴고요. 시골 봄 살림에 쑥국만큼 고마운 국도 없습니다. 지천 으로 깔려 있는 게 쑥. 잠깐만 품을 팔아도 한두 끼 뭘 먹나 하는 걱 정은 끝이니까요. 어디 봄이라 쑥국이 맛있겠습니까? 제 남편, 제 새끼 먹이려고 들 로 나간 그 마음이 맛있는 거지요. 아내가 향긋한 쑥국 같습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늘어지면 슬슬 짜증이 나지요. 혼자 뭐 그리 재밌는 일을 하누? 조바심을 내는 건 대개 이 사람 몫입니다. 딴청을 피우며 아내의 얼굴 보러 갑니다. 아내도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그만 손을 털고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따로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일하는 사 람 불렀다고 핀잔 듣습니다. 핀잔을 들어도 즐겁네요. 그저 바라보고 만 있어도 좋으니, 이 일을 어찌합니까? 저기, 아내가 옵니다. 모자를 눌러쓰고 자전거를 끌고 옵니다. 차 나 한잔 하자고 불러야겠습니다. 남편은 서른아홉, 아내는 서른다섯. 아직 창창한 나이인데, 시골 살다 보니 하는 짓이 노부부 같습니다. 잘 차려입고 외식을 한다거나 쇼핑을 한다거나 여행을 간다거나 해야 어울릴 나인데 말이죠. 도시 를 떠나면서, 뭐 그런 건 다 잊었습니다. 부부가 하루 종일 얼굴 보면 질린다는 말, 참 우습습니다. 질리기 는요, 오히려 좋지요. 눈빛만 봐도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으니 서로 가 서로에게 도통했습니다. 그래도 서로 일할 때는 떨어져 있습니다. 46 쑥국 47
게서 밥상머리에 앉으면 맛있는 건 자식 입에 먼저 넣어주시던 어머 니를 보았습니다. 늘 한 걸음 물러나 자식들을 지켜보시던 어머니.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이러한가요? 어머니 때문에 감히 뒤를 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 어봅니다. 어머니, 아직 거기 계신가요? 별이 별이가 이상합니다. 먹을 걸 들고 나가면 제 새끼들을 제치고 달려 오던 녀석이었지요. 그런데 오늘은 새끼들이 별이를 밀치며 달려가 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습니다. 먼저 먹으려고 제비 새끼처럼 입을 쫙 별이는 아이를 키우는 이 사람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었습니다. 어 느 잡지에 별이의 자식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썼지요. 한번 읽어보세 요. 어느 어미의 마음이 이러할까 합니다. 벌리고 달려드는 강아지들 뒤에 엉거주춤 섰습니다. 손을 내밀어도 별이는 주춤거리며 물러나더니, 어느새 달려온 새끼들에게 자리를 내 사랑, 별이 내어주고 맙니다. 극성스럽게 장난을 치는 토토와 토토보다 좀 늦게 젖을 뗀 투투. 어미젖 말고도 맛있는 게 많다는 걸 알아버린 새끼들을 바라보는 별 이의 눈빛이 오히려 편해 보입니다. 아예 엉덩이를 깔고 앉은 별이에 별이는털이긴축에드는개로, 오즈의 마법사 에 나오는 토 토 처럼 생겼답니다. 암놈이고, 흰색에 회색 점이 박여 있지요. 본 래 옆 마을 명사에 살던 개인데, 우리 집 푸들 복돌이와 눈이 맞아 48 별이 49
제 집을 버리고 우리 집에 눌러앉았습니다. 복돌이는 별이가 오고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누가 훔쳐간 건지, 사 고를 당한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좋은 곳에 가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만 믿고 싶습니다. 복돌이가 나간 후에도 별이는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복돌이 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데다 새끼를 배고 있었습니다. 별이 주인이 몇 번씩 별이를 데려갔지만 별이는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돌아왔습 니다. 출산이 가까워진 터라 별이가 새끼를 낳을 집을 지었습니다. 시 멘트 블록을 쌓고 양철 지붕을 덮고 블록 사이 바람구멍은 짚으로 막았습니다. 바닥에는 짚을 잔뜩 깔았습니다. 제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별이가 강아지를 낳았습니다. 여섯 마리를 낳았는데, 네 마리는 별이를 닮았고 두 마리는 온통 검은데 발만 흰 푸들로 복돌이를 닮았지요. 그 소식을 들은 별이 주인이 강아지를 보러 왔습니다. 별이도 주 인을 보고 반가운지 꼬리를 흔들며 반겼습니다. 그러나 그뿐. 따라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별이 주인은 그날도 별이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명사로 가는 주인의 뒷모습은 50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별이에게 무척 섭섭한 모양이었습니다. 그 러나 계속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별이는 우리 개가 아니었거든 요. 마침내 결정을 내렸습니다, 별이와 강아지를 모두 명사로 보내 기로. 다음날 아침. 별이를 어루만지며 강아지들과 함께 본래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가서 잘 살라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젖도 안 뗀 강아지를 놔두고 오면 절대 안 된다 고 또 다짐해두었습니다. 그날 점심 무렵,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밭에 나갔습니다. 별이 가 밭을 지나 어디론가 다급히 가는 걸 보았지요. 금방 돌아오겠지 했는데. 별이와 강아지를 데리러 온다던 별이 주인은 오후가 되어도 오 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전화해서야 겨우 그 집 장난꾸러기 아들 둘을 앞장세워 왔습니다. 아버지는 멀찍이 서 있고, 아들 둘이 강 아지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별이가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 았습니다. 우리 애들과 그 집 애들한테 별이를 찾아보라고 하고, 별이가 살 던 집을 허물었습니다. 깔았던 짚을 마당에서 태우고, 시멘트 블록 은 따로 쌓아놓고. 아이들이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마을이 떠 나가도록 별이를 불렀습니다. 그래도 별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 다. 밥 때가 되면 오겠지 싶어, 그 집 아들들에게 강아지를 먼저 데 려가라 했습니다. 벌써 바다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지요. 너무나 붉어서 눈이 시릴 정도였습니다. 강아지들을 보내고 난 후에 우리 가족은 마당에 피워놓은 모닥 불가에 모여 앉았습니다. 아이들은 불장난에 신났고, 아내와 저는 그저 불만 바라보았습니다. 어둠이 마당을 감싸고 모닥불이 점점 잦아들 무렵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저녁 늦게 별이가 주춤주춤 마당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습니다. 사라진 제 집 주변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두리번거렸습니 다. 제 새끼를 찾는 모양이었습니다. 별이를 불러 집 안에 들인 후 별이 주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집 안주인이 와 별이를 데려갔 습니다. 별이와 강아지들을 보내놓고 우리는 매정하게 여행을 떠났습니 다. 4박 5일의 여행이었지요. 돌아오는 길에 별이가 우리 집에 한 번은 왔었겠지, 하지만 사람도 없고 제 집도 없어졌으니 발길을 돌 리겠지, 명사에서 잘 살겠지 생각했습니다. 52 별이 53
그런데 돌아와 보니 뜻밖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별이 가 강아지 두 마리를 물고 집에 몇 번이나 왔었다는 겁니다. 별이 가 물어 온 강아지는 검은색 푸들, 토토와 투투였답니다. 우리 아 이들이 특히 예뻐하던 강아지였지요. 거의 매일 별이는 그 두 마리 강아지를 우리 집으로 물어 나르고 별이 주인은 데려가고를 반복 했답니다. 마을 사람들은 별난 짓을 하는 별이를 지켜보면서 우리를 기다 렸답니다. 어떤 할머니는 집에서 쓰던 개집을 쓰라며 가져다주셨 습니다. 아무래도 그 개는 너희가 키워야겠다면서요. 별이가 제 주 인 집으로 돌아간 날, 우리 마을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 다는 별이 주인의 말을 전해주던 마을 사람도 별이를 다시 쳐다보 았습니다. 사람들마다 입을 모아 사람보다 낫네를 연발했습니다. 며칠 전 토토가 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캄캄한 밤, 아스팔트 도 로 위에 드러누운 제 새끼를 굽어보며 별이는 꺼어, 꺼어, 울고 있 었습니다. 토토를 묻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어주었습니 다. 무덤가에 쪼그리고 앉은 별이를 두고 집으로 돌아올 때 별이의 슬픔이 가슴으로 밀려와서 저도 모르게 꺼어, 꺼어, 울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종 種 이란 것도 잊어버리고 슬픔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 습니다. 아무래도 세상에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나 봅니 다. 개의 운명을 알기에 개를 키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저였습 니다. 전에 키우던 복돌이도 남이 버린 개였지요. 불쌍해서 걷어 키운 거지, 개가 좋아서 키운 건 아니었습니다. 애완견을 극성스럽 게 키우는 사람이나 보신탕을 먹는 사람 모두를 못마땅하게 생각 하였지요. 개는 개일 뿐. 개가 개처럼 살게 내버려둘 수는 없냐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별이 같은 개는 처음이고, 얘기를 들어보지도 못했습니 다. 생긴 건 개지만 하는 짓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날 이 갈수록 별이는 개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별이는 밭엘 가든 바 다에 가든 산엘 가든 늘 제 뒤를 따라와 저를 지켜주고 저와 놀아 줍니다. 도대체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기에 이런 사이가 되었을까요? 누가 별이에 대해 물으면 제 친구라고 얘기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 이 제 곁을 떠나도 별이만은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습니 다. 제 눈을 보고도 눈을 피하지 않는 유일한 개, 별이. 우리는 눈 을 맞추며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들은 그런 저를 보고 아버지는 마 54 별이 55
법사라고 합니다. 개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요. 제가 마법사라 그 러겠습니까? 마음이 닿으면 통하지 않을 게 없는 법이지요. 신문배달부 마을 입구에 있는 태선상회 주인 황수만 씨를 우리 아이들은 신문 집 할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침마다 신문을 가져다주는 할아버지라 고 붙인 별명입니다. 가끔 신문지 할아버지라 부르기도 합니다. 신문은 통영에서 오는 첫차에 실려 옵니다.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개복숭아나무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신문집 할아버지가 서성이고 있 으면 여덟시가 된 줄 압니다. 여덟시 5분. 버스에서 20부 정도의 신 문이 내려지면 제일 먼저 마을 끝, 저희 집에 들르지요. 그 발길은 이 마을을 거쳐 명사마을로 이어집니다. 명사 가는 길에 선창이 있습니다. 신문집 할아버지는 뱃일을 하고 56 신문배달부 57
있는 어부를 만나면 안부를 묻다가 소주를 권하면 뱃머리에 퍼질러 앉고 맙니다. 그사이 해는 신나게 솟아오릅니다. 누구를 만나든 안부 를 물어야 하고, 안부를 묻다 보면 뭐라도 하나 내놓는 이 마을 인심 때문에 명사 마을 끝 집은 점심때나 돼서야 신문을 받아볼 때가 많습 니다. 신문배달의 생명이 신속함에 있다는 걸 신문집 할아버지가 잊고 사는 건 아닙니다. 단지 사람 사는 정이 먼저라 생각할 뿐입니다. 마 을 사람들도 신문이 늦으면 으레 할 말이 많은 누군가를 만났구나, 여 깁니다. 대신 신문을 가져오면 신문은 제쳐놓고 누구네 무슨 일이 생 겼냐부터 묻지요. 신문집 할아버지가 바로 우리 마을 신문 인 셈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이 담긴 그 신문에 울고 웃습니다. 오늘, 어떤 신문을 받아보셨는지요? 배달되는 건 큰일이 아닙니다. 우편물로 전해지는 지역 주간신문은 한참을 묵혔다가 읽기도 하지요. 한 번이라도 읽히고 처박히는 신문 은 다행인 편입니다. 들일로, 바닷일로 바쁜 철에는 배달된 그대로 창고에 쌓여갑니다. 그러고 보니 마을 사람이 한가로이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을 아직 본 적이 없군요. 도시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신문이 알려주는 새 소식 중에는 시골 생활과 관련된 소식이 거의 없습니다. 시골에서 신문에 실릴 만 한 특별한 뉴스거리가 나오기도 힘들긴 하겠지요. 시골에서는 급격 한 변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변화는 늘 위험하다는 걸 해마다 자연에 서 배운 때문이지요. 모쪼록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이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시골 살림을 좌우하는 정책이 신 문에 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껏 나온 정책이란 게 시골에 도움 이 되기는커녕 해만 되었다고들 합니다. 일기예보 빼면 신문에 뭐 볼 게 있냐고 합니다. 시골에서 신문은 구문이 되는 순간, 애물단지에서 보물단지가 됩 사실 시골에서 신문을 빨리 봐야 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신문은 이미 벌어진 일을 알리는 매체인 데다 도시에서 바쁘게 사는 사람들 에 초점을 맞춘 기사가 많지요. 그러다 보니 시골에서 신문이 늦게 니다. 신문지같이 얇고 질기고 커다란 종이는 시골에서 따로 구하기 도 힘들지요. 신문지는 쓰는 사람에 따라 쓰임새가 생깁니다. 차곡차 곡 쌓아놓은 신문지는 종이접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별이 되고 58 신문배달부 59
모자가 되고 배가 되고 꽃이 됩니다. 도시에 나간 식솔들에게 뭘 싸 보내는 데 쓰이고, 초배지로 쓰이고, 불쏘시개로 쓰이고, 밑닦개로 쓰입니다. 밭에 씨 뿌린 후 싹이 어서 나오라고 덮어둘 때도 신문지 를 들고 나갑니다. 소풍 봄볕 따뜻하고 모처럼 바다가 잔잔한 날, 가족 소풍을 갔습니다. 목적지는 예전엔 어장막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앙 기미 해변 근처 용새미골. 용이 살던 계곡이라 붙인 이름이랍니다. 여덟 살, 아홉 살 된 딸과 아들이 겁 없이 앞장섰습니다. 아내 손을 잡고 뒤따랐지요. 우리 개 별이도 신이 났습니다. 용새미골이 좋다며 가보란 얘기를 들은 지 이미 오래. 마을 사람들 에게 어떻게 가느냐고 물으면 멀리 보이는 앙기미 뒷산을 가리킬 뿐, 제대로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도가 있을 리 없지요. 예전에 혼자 용새미골 입구까지 간 적이 있었는데 길이 보이지 않아 60 소풍 61
발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가족과 함께 떠난 길이라 두려울 게 없었습니다. 길을 잃어 헤맬 시간까지 예상하고 일찍 떠난 터라 마음도 넉넉했지요. 징검다리를 건너고 오솔길을 지나고 풀섶, 숲을 헤쳐 용새미골에 도착하였습니 다. 작지만 참 예쁜 골짜기였습니다. 가족과 함께인데 행복하지 않은 소풍이 어디 있기야 하겠습니까만, 사과 한 알과 빵 두 봉지로도 바 랄 게 없는 소풍이었습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길은 아무리 험해도 행복합니다. 행복해야 하고 요. 물론 마음대로 따라와주지 않는 어린아이들과 아내가 때로 번거 롭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그건 아이들이나 아내에게도 마찬가지라 는 걸 잊어서도 안 될 겁니다. 아버지나 남편이 도움은커녕 방해가 되는 때도 많으니까요. 우리는 먼 길을 걸어 소풍 갑니다. 가장 오래 걸었던 게 예닐곱 시 간. 아이들이 여섯, 일곱 살 때였지요. 대개 소풍 가는 길은 낯선 길 입니다. 그럴 때마다 대장놀이를 합니다. 가족 중 누구든 앞에 선 사 62
람이 대장. 대장은 작대기 하나 들고 길을 찾습니다. 대장이 정한 길 로 모두가 따라가지요. 그 길이 옳건 틀렸건 상관없습니다. 틀리면 되돌아와 다시 시작하지요. 되돌아오게 되어도 웃고 맙니다. 틀린 걸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그게 먼 길 재미있게 가는 요령이지요.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는 가족. 살다 보면 실수가 없을 수 없겠지 요. 실수로 괴로울 때, 누가 위로해주고 힘을 줄 수 있을까요. 가족 소풍 길에 우리는 미리 실수를 연습하고 실수를 보듬어 안는 법을 연습합니다. 함께 오래 행복하게 살 준비를 하고 있 유치원 졸업식 습니다. 오늘은 딸 지윤이 유치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바닷가 옆에 붙어 있는 명사초등학교 병설 유치원. 상윤이, 상화, 광희, 초롱이, 보슬 이, 경환이, 혜빈이, 산하, 찬영이, 근영이, 소연이, 소희, 초원이, 권 욱이, 세호, 현하, 미옥이, 서윤이, 석환이 이렇게 스무 명이 졸 업했습니다. 상장도 하나씩 받고 선물도 하나씩 받았습니다. 이 아이들 중 근 포, 대포, 홍포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걸어서 유치원을 오가는데 학 교 길이 한 시간이 넘기도 합니다. 학교 오갈 때 바닷가에서 노느라 지각을 하곤 하는 딸아이와는 입장이 다릅니다. 64 유치원 졸업식 65
찬바람이 몰아치든 태풍이 오든 딸아이는 유치원에 갔습니다. 파 도가 들이치는 바닷길을 걸어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노 란 비옷을 입고 장화를 신고 비바람 속으로 보란 듯이 달려가던 딸아 이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어린 몸으로 자연을 겪어내며 딸아이는 부쩍 자랐습 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삐악거리며 졸업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참 대견했습니다. 유치원을 오가면서 궂은 날보다 좋은 날이 많다는 걸 깨우친 이 아이들. 아마도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걸어서 다니든 버스를 타고 다니든 아이들은 시간에 맞춰 유치원 에 모이고 유치원에서만큼은 즐겁습니다. 아이들에게는 학교 오가는 길이 각각 다른 추억으로 남게 되겠지만요. 그 추억이 참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영향을 끼치게 될 거고요. 서로 사는 곳과 처지가 다를지라도 친구와 선생님을 만나러 오는 길은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아무리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지윤 이, 학교 가기를 망설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날, 딸을 내보내기 참 안쓰럽습니다만 마음을 독하게 먹습니다. 상윤이 어머니가 운전을 하게 되면서 비바람이 몰아치면 우리 아이들을 태워 가기도 하였습 니다. 참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버릇 될까 봐 웬만한 비 바람에는 차를 타지 말라고 이릅니다. 명사초등학교 병설 유치원 아이들은 걸어서 혹은 통학버스로 유치 원에 모입니다. 원아 수가 적은 저구, 근포, 대포, 홍포에 사는 아이 들은 한참을 걸어옵니다. 홍포 사는 아이는 한 시간 정도 걸어와야 하지요. 홍포에서 명사 오는 시내버스라도 제 시간에 있으면 좋으련 흠뻑 젖어 집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면 달려나가 꼭 껴안아줍 니다. 고맙고 대견해서입니다. 어지간히 힘든 일은 힘들다 여기지 않 게 된 아이들. 그 아이들을 보고 도시에 젖어 살던 유약한 부모는 세 상을 다시 배웁니다. 만 사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놀면서 30분 걸리는 우리 아이, 유치원 가는 길은 대포나 홍포 사는 아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 면 아이들이 많이 사는 도장포, 해금강까지는 통학버스가 다닙니다. 66 유치원 졸업식 67
록 흙과 어울렸습니다. 아이들은 흙더미 위에서 구르거나 미끄러지 며 깔깔거리고 강아지까지 신이 났습니다. 흐르는 땀조차 단 웃 음이 되었습니다. 얼추 밭 모양을 갖춰가는 흙과 돌을 보면서 따뜻한 석양을 맞았습 니다. 며칠 후 텃밭과 화단이 완성되면 예쁜 이름을 붙여줄 겁니다. 그리고 봄볕 완연한 날, 가족과 어울려 행복의 씨앗을 뿌릴 겁니다. 텃밭 행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거지요. 가족과 함께 행복 을 만들어보세요. 마을 배수로 공사를 하느라 흙을 실어 나가는 15톤짜리 트럭에 부 탁해서 흙을 마당에 부려놓았습니다. 마당이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 고, 집 앞으로 길이 나게 되면 손바닥만 하던 텃밭마저 없어질 형편 이었지요. 아들을 시켜 마실 나간 아내를 불러왔습니다. 산처럼 쌓인 흙더미를 보고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러나 시멘트 마당 에 흙을 부어 텃밭을 만들고 화단을 만들자는 말에 팔을 걷어붙였습 니다. 흙을 옮기고 돌을 골라내면 아내는 돌로 축대를 쌓아 밭의 테두리 를 쳤습니다. 봄이 왔고, 풀처럼 꽃처럼 행복하게 살아야겠기에 늦도 사흘 만에 텃밭은 완성되었습니다. 사흘 내내 아침부터 노을 질 무 렵까지 삽으로 흙을 나르고 축대를 쌓았지요. 몸은 고단하였으나, 밭 이 조금씩 모습을 갖춰가는 걸 보니 멈출 수가 있어야지요. 꼭 그릇 을 빚는 것만 같았습니다. 밭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자는 계획도 없었습니다. 계획이라면 자 로 잰 듯 반듯하게 만들지 말자는 정도였지요. 마음 가는 대로 어느 곳은 튀어나오게 어느 곳은 들어가게 만들다 보니 밭의 테두리는 울 68 텃밭 69
퉁불퉁. 아들 머리 깎아놓았을 때처럼 후회 반, 뿌듯함 반이었습니 다. 내외는 목장갑을 벗고 연장을 씻으면서 늦은 밥상에 마주 앉아서 도 별말이 없었습니다. 말이 필요가 없었지요. 서로 먼 산을 바라보 며 피식 웃는 게 전부였습니다. 땅 깊이 묻혀 있던 흙으로 만든 텃밭. 세상 구경을 하게 된 흙은 어 었지만, 바로 그 못난 점 때문에 우리는 그 밭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 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밭에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습 니다. 언젠가 밭이 제 입으로 이름을 말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습 니다. 저에게 말을 하지 않더라도 제 아이들이나 제 손자들에게는 말 할 날이 있겠지요. 떤 기분일까 궁금했습니다. 흙에게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할 시간을 주려고 며칠을 멀리서 텃밭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사이 몇 번 비 가 내렸습니다. 빗물을 타고 쌓아놓은 돌 사이로 흘러내린 황톳물이 마당을 덮었습니다. 그래도 가만 내버려두었습니다. 비가 내려도 더 이상 돌 사이로 흙이 흘러내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안심을 했습니 다. 흙이 텃밭을 제 집으로 여겼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지요. 다시 며칠을 기다렸다가 고랑과 이랑을 만들고 퇴비를 뿌리며 흙 을 뒤집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에 날려 온 풀씨들이 먼저 자리 를 잡고 싹을 틔웠지요. 흙이 생명을 받아들일 마음이 되었다고 여기 고 씨를 뿌렸습니다. 평소에 별 인사 없이 지내던 건넛집 정 선생께서 두릅 두 그루를 갖다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텃밭을 둘러보고 한마디씩 거들었고 요. 마을 사람들에게 시멘트 위에 만들어놓은 그 밭은 거대한 화분이 72 텃밭 73
다. 또 고구마 수확을 요령껏 해낼 기계도 없고요. 이 마을 사람들은 고구마를 수확하기 하루 전, 고구마 줄기만 훑듯 걷어냅니다. 걷은 줄기는 밭가에 쌓아두지요. 다음날 아침 일찍 소가 쟁기를 메고 어슬렁거리며 고구마 밭으로 걸어옵니다. 함께 고구마 를 캘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소는 밭가에 쌓아둔 달콤한 고구마 줄기 로 배를 채웁니다. 고구마 대개 가을걷이라면 얼른 벼 수확부터 떠올리게 되는데, 고구마 농 사를 많이 짓는 이 마을에서는 사정이 좀 틀립니다. 다른 시골과 달리 이 마을 벼 수확은 왠지 농사일 같지 않습니다. 콤바인이며 트랙터며 경운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는 논을 지켜보노라 면 공장에 온 기분이 들지요. 수확하는 사람들도 인상을 쓰고 있으니 까요. 그래도 목돈은 될 겁니다. 그러나 고구마 수확하는 모습은 정겹기 그지없습니다. 고구마를 캘 때는 기계를 댈 수 없거든요. 고구마를 캐려면 밭을 뒤집어야 하 는데, 기계를 밭에 갖다댔다가는 고구마가 성하게 견뎌내지 못합니 사람들은 손에 손에 호미를 들고 등장하면서 소 등을 툭툭 두드리 며 오늘 욕 좀 봐라, 한마디씩 하지요. 소를 부리는 사람이 두둑하게 쌓아올린 고구마 밭이랑에 쟁기를 대고 이랴! 소리 지르면 나머지 사 람은 팔을 걷어붙이고 쟁기 뒤로 몰려갑니다. 쟁기가 지나가면 서 흙을 뒤집어놓으면 탐스런 자줏빛 고구마가 얼굴을 내밉니다. 쪼그리고 앉은 사람들은 호미로 슬슬 흙을 헤치면서 고 구마를 걷어냅니다. 이런 모습도 예전처럼 정겹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구마 수확을 할 때에 맞추어 중간상인이 인부 열 명 정도를 이끌고 마을로 들어섭니 다. 소가 밭을 뒤집으면 개미처럼 달려들어 고구마를 캐는 게 인부들 의 일입니다. 일당을 받고 하는 일이라 마을 사람들끼리 일하는 것처 럼 두런두런 얘기 나누면서 고구마를 캐고 있을 여유가 없지요. 74 고구마 75
하나에 몇백 평이나 되는 고구마 밭 몇 군데를 돌아가면서 고구마 를 캐야 하는 일은 고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간상인은 얄밉게도 그 밭에서 난 고구마 중에서 제일 좋은 놈만 골라 가져갑니다. 비료 부 대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로 꽉꽉 담아 테이프로 붙이지요. 그렇게 담은 고구마 한 부대 값이 8천 원이랍니다. 한 친구는 쟁기질도 고구마를 상하게 한다며 호미로만 고구마를 캤습니다. 상한 고구마는 쉬 썩는다지요. 하지만 이 마을에서도 그 친구처럼 며칠에 걸쳐 쪼그리고 앉아 고구마를 캐내는 모습은 참 희 한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친구가 고구마를 캘 무렵, 집에 바쁜 일 이 있어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제일 처음 캔 고구마를 가져다주었고, 따로 가져가 라며 올망졸망 예쁘게 생긴 고구마를 밭에 모아두었습니다. 바쁘다 며 일을 도와주지 않던 이 사람, 고구마 가져가란 소리에 얼른 밭으 로 달려갔습니다. 아무리 친구가 심성이 좋아도 얄미웠을 겁니다. 고 구마는 겨울 내내 아이들 군것질거리가 되기 때문에 가져오지 않을 수도 없었지요. 평년작도 못 되는 고구마 농사. 작년에는 고구마가 풍년이라 마을 사람들한테서 두세 부대 얻었는데 올해는 틀렸다 생각하고 있었습니 다. 그래서 친구네 고구마를 아끼고 아껴 먹자고 아내와 얘기하고 있 던 참이었지요. 그런데 마을 이장님, 주정뱅이 아저씨, 꼬부랑 할머 니가 한 부대씩 가져가라 했습니다. 중간상인이 골라가고 남은 고구 마가 밭에 듬성듬성 쌓여 있었지요. 날을 잡아 집사람과 아이들을 데 리고이밭저밭을돌며고구마를 골라 주워 담아 왔습니다. 이렇게 고구마가 네 부대 생겼습니다. 고구마 농사를 망친 올해, 예년보다 더 많은 고구마를 얻게 되어 기쁘고 미안했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한참이나 생각해보았습 니다. 누구보다도 고구마가 귀해진 걸 아는 사람들이 저희에게 다투 듯 고구마를 준 이유를 말입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고구마 농사 안 짓는 저희 집에 고구마를 가져다줄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서로 한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집에서도 주고 저 집에서도 주게 된 게 아닐까. 내가 부족함 을 느낄 때 더 부족한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그것 때문일 거라 76 고구마 77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마를 창고에 들여놓자마자 부모님, 장인, 형님, 처남 등 가까운 사람들의 몫을 종이상자에 나누어 담았습니다. 아마 산지 가격으로만 따진다면 소포비가 고구마 값보다 많이 들었겠지요. 흙 묻고 정 묻은 고구마를 받아보고 무슨 생각들 하실지. 얼마 안 되는 고구마지만 이웃과 함께 나눠 먹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내년에는 올해 고구마를 가져가라 한 분들이 고구마를 캘때꼭밭 에 나가 일을 거들어야겠습니다. 올해 받은 고구마를 내년 품삯을 미 장화 리 받은 셈 치고 지낼 참입니다. 그래야 덜 부끄럽지요. 게다가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사는 이 마을에서 1년은 아주 짧은 시간 일 터이니, 다음 고구마 철까지 느긋하게 이 사람을 기다려줄 거라 여깁니다. 바다나 들에서 일할 때 장화는 유명 신발 메이커의 최신형 기능성 신발보다 요긴합니다. 시골에 살게 되면서 장화는 비 오는 날만 신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일할 때 장화보다 요긴 한 신발이 없었지요. 이 마을로 살러 오자마자 검은 고무장화를 샀습니다. 그 장화를 신 고 밭을 갈았고 바다에 나가 고둥을 줍고 조개를 캐고 지렁이를 잡고 낚시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을 닮아갔지요. 그사이, 장화는 점점 낡았습니다. 며칠 전 텃밭을 만들다 장화가 찢어진 걸 알게 되었습니다. 버리고 78 장화 79
다시 사면 그만이지만 정이 들어 그럴 수 없었습니다. 창고를 다 뒤 져 구멍 나서 빼놓은 자전거 고무튜브를 찾았습니다. 그걸 오려 찢어 진 장화에 본드로 덧붙였습니다. 누더기처럼 변한 장화가 멋져 보였 습니다. 그런 장화를 신을 수 있는, 몸으로 일하는 사람인 게 너무 자 랑스러웠지요. 이 사람의 육신도 장화와 함께 누덕누덕 낡아가겠지요. 하지만 마 음은 오히려 태평합니다. 세상에 스승 아니고, 친구 아닌 게 없네요. 장화 얘기만 했다고 고무신이 삐친 것 같습니다. 흰 고무신. 처음 샀을 때는 너무 탱탱해서 발을 옥죄어 불편하기만 했습니다. 고무신 은 제 뒤꿈치를 몇 번 까지게 하고 나서야 저를 친구로 받아주었습니 다. 그 불편을 감수하면서 고무신을 신고 다닌 이유는 간단했지요. 고무신의 불편함 정도도 못 참으면서 어떻게 시골에서 살 수 있나 했 습니다. 오기로 신고 다니는 동안 고무신의 마음도 말랑말랑해졌습니다. 발에 착 달라붙어 신발을 신었다는 걸 잊어버리게 합니다. 그러면서 80
장화가 홀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비가 와도 고무신, 밭에 가도 고무 신, 바다에 가도 고무신. 그래도 고된 일을 할 때는 장화를 신습니다. 고무신 신고 일하다 보면 발에 상처를 많이 입게 되거든요. 장화와 고무신 때문에 도시에서 신고 다니던 가죽신들은 창고에서 곰팡이 슬어가고 있습니다. 1년에 한두 번 볕 좋은 날, 마당에 쭉 늘 어놓는 게 전부입니다. 도시로 나갈 때나 되어야 가죽신을 둘러보는 데, 참 미안합니다. 도시에서는 그저 신고 버리는 신발이었는데, 이 제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꼭 뭐라 말을 하는 듯합니다. 산불 조심 이번엔 나를 신어라. 세상 구경 좀 하자. 그래서 도시로 나갈 때 가죽신을 돌아가며 신습니다. 먼지나 툭툭 털어서 대충 신고 나가는 버릇은 장화나 고무신 때문에 생긴 버릇일 겁니다. 차를 타고 도시를 나가면, 그제야 후회를 합니다. 집으로 돌 아와서야 신발에 핀 곰팡이를 털어내고 닦아주지요. 그러고는 다시 창고로 돌려보냅니다. 아내는 가죽신을 정리해버리라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딴 에는 맞는 말입니다. 그중에 문제 없는 신발은 절반도 안 되니까요. 그러나 그게 힘듭니다. 도시는 잊었지만 신발에 얽힌 추억은 쉽게 잊 혀지지 않는 까닭입니다. 마을 친구 성관이는 지난가을부터 산불 조심 에 뽑혔습니다. 산 불조심 은 면사무소 계약직 직원으로 가을부터 봄까지 산불 예방을 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오토바이나 트럭에 산불 조심 깃발을 달고 남부면 전역을 누비고 다닙니다. 성관 이는 남부면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라산 정상에서 망을 봅니다. 어디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지체 없이 무전기를 꺼내들지요. 바다에서 불어온 매서운 바람이 계곡을 타고 가라산을 휘감아도 성관이는 아침 일찍 산에 오르고, 해질 무렵 꽁꽁 언 채 산에서 내려 옵니다. 성관이가 쉬는 날은 비나 눈 오는 날뿐입니다. 82 산불 조심 83
엉성한 초소에서 혼자 하루 종일 주위를 살펴보는 일은 도를 닦는 일이나 다름없지요. 산불이 나지 않아 도리어 지루하고 외로운 그 시 간 동안, 성관이는 초소 유리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았습니다. 바 다로 나가 일하던 어부들이 가라산 정상에서 반짝이는 유리를 보고 성관이, 사람 됐다 칭찬하는 말을 자주 합니다. 성관이처럼 보이 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이 편합니다. 기를 틀어놓으면 성관이처럼 팔공산, 유달산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 의 무전까지 들어온답니다. 경상도, 전라도 말이 뒤섞여서 벌처럼 웅 웅거리는 하루. 성관이 초소 주위로 피어나는 꽃 따라 벌 나비 찾아 들고, 뱀이며 다람쥐, 참새며 까치, 까마귀까지 모여든답니다. 얼마 전 성관이가 까마귀 한 마리를 길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 었습니다. 밥도 같이 먹고, 출출할 때 과자도 같이 먹는다지요. 둘러 보면 세상에 친구할 건 참 많습니다.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길들여지 면서 정이 들지요. 그러면서 다른 세상, 다른 일을 알아가고 받아들 이게 되고요. 비 오는 날, 비 많이 내린 다음날이면 성관이는 가라산으로 출근하 성관이는 가라산 꼭대기로 출근합니다. 성관이는 자칭 우리 마을 방범대장. 아무리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새벽같이 일어나 마을을 한 차례 돌고, 아침 먹고 한두 시간 텔레비전 보고 나서야 스쿠터를 타고 가라산 아래까지 달려갑니다. 걸어 오르면 한 시간인 거리를 성 관이는 산다람쥐처럼 달려갑니다. 아침 일찍 가라산에 오르다 웃통 을 벗어젖히고 산을 달려 오르는 삐쩍 마른 친구를 보게 된다면 성관 이인 줄 아십시오. 지 않습니다. 성관이 쉬는 날은 산이 흠뻑 젖어 있는 날. 그러나 성관 이는 쉬는 날, 더 바쁩니다. 재주가 많아서 이것저것 일러주고 고쳐 주어야 할 것도 많지요. 유난히 비가 잦았던 올봄. 성관이는 마을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였습니다. 성관이가 오래도 록 산불 조심 하러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늘 반짝반짝 빛나는 가라산 꼭대기 초소가 이 근방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전설이 되었으면 합니다. 농담인지 아닌지, 거제도에서 제일 높은 가라산 꼭대기에서 무전 84 산불 조심 85
지 않겠다며 베트남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저는 몇 년을 더 서울에서 버텼으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 싫어 서울을 떠났습니다. 이 마을이 안전 하다는 확신을 가지는 데 3년이 더 걸렸습니다. 그러나 몸을 부대끼며 얻어낸 확신이라 무엇과도 비 교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인생의 역전 따위는 꿈도 꾸지 않습니다. 부디 이 누추한 인생이 별 탈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러면서 이 떠나오다 봄,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소박한 희망의 씨를 뿌립니다. 제가 왜 서울을 떠났는지,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동네에서 집을 옮길 때도 여러 이유가 따라붙습니다. 하물며 생활 터전, 미래를 송두리째 내팽개치고 국토의 끝자락으로 떠나왔으니 궁금하기도 할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그런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스스 로 놀랍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러 이유 뒤에는 늘 기분 나쁘게 마음을 짓누르는 게 있지요.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이 폭발하고 삼풍백화점 이 무너지는 걸 겪으면서 저는 미래에 대한 꿈을 접었습니다. 삼풍백 화점 참사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친구는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 낯선 마을에서 마음을 놓고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먼저 생계 를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마음을 짓누르고, 도시에서의 화려한 날들 이 머리채를 잡고 늘어집니다. 아무리 흘러간 유행가 나의 화려한 날은 가고 를 읊조려봐도 마음을 잡기가 힘들지요. 무언가를 포 기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놈의 미련이 뭔지요. 그래서 아예 이사를 가는 게 아니라 이민을 가는 거라 마음먹었답니다. 같은 나라에서의 이민. 두 번 다른 나라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인도와 베트남. 그 여행에서 그 나라를 이해하려면 그 나라 사람들의 86 떠나오다 87
삶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 마을에 와서 저는 무지렁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받아 들였습니다. 전에 배우고 겪어 알고 있던 모든 걸 다 버렸지요. 그렇 게 지내는 동안, 바닷빛에 젖어든 노을처럼 그렇게 마을 사람으로 젖 어들었습니다. 경남 거제시 남부면 저구리에 있는 저구마을. 저에게 이 마을은, 많고 많은 마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새 나라입니다. 1백 가구 정도의 아주 작은 나라지만 참 아름답고 평화롭고 정겹습니다. 언제 이 나라에 놀러 오십시오. 비자도 필요 없고 비행기 탈 필요도 물맛 없습니다. 군대도 없고 경찰도 없습니다. 누구든 이 소박한 사람들에 게 마음을 열고 먼저 인사하면 환영받을 겁니다. 그러나 작은 나라라 고 무시하였다가는 배로 무시당할 테니 조심하십시오. 다른 나라에 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 마을에서는 마을 뒷산 계곡물을 송수관으로 연결해 물탱크에 잠시 저장했다가 각 집으로 공급합니다. 그런데 나흘째 마을에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송수관 어딘가가 어설프게 막혔나 봅니다. 수압이 낮아 가정용 물탱크까지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송수관을 따라오면서 점검해봐야 막힌 곳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일에도 요령이 있어서 칠순을 넘긴 이장님 뒤를 따라다녀야 합니다. 요즘 이장님이 막내아들 혼사 때문에 여가가 없는 모양입니다. 물을 많이 쓰는 몇몇 집에서 불평을 터뜨리기도 하였습니다만 대부분은 태연합니다. 88 물맛 89
혼자 사시는 꼬부랑 할머니가 지나가시기에, 혹시 물 때문에 고생 하시느냐 여쭸습니다. 할머니는 허허 웃으시면서, 내사 하루에 물 한바가지모쓰고남는다 하십니다. 밥그릇 하나, 반찬그릇 하나로 사는 살림이라 따로 설거지할 일도 없고 재래식 화장실을 쓰니 밥 끓 일 물 한 바가지면 충분할 겁니다. 못살아서가 아닙니다. 자연을 거 스르지 않고 사는 게 몸에 배어 있어 그리 사십니다. 욕심이 없으시 니 몸도 마음도 태평하신 게지요. 할머니, 꼬부라진 허리에 뒷짐을 지고 훠이훠이 쑥 캐러 가십니다. 부터 이 마을, 수자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앙기미 해변 뒤 왕조산에서 내려와 큰골을 타고 바다로 들어가는 물줄기가 이 마을의 젖줄입니다. 마을에서는 팔뚝만 한 관을 큰골 상 류에서부터 마을까지 묻어놓았습니다. 저는 물맛을 잘 모르겠는데, 집을 다녀간 분들은 입을 모아 물맛이 좋다 합니다. 그 물로 씻으면 피부가 뽀송뽀송해진다고 하지요. 마을 입구까지 시 수도관이 묻혀 있으나 아직 수도를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돈을 주고 믿을 수 없는 물을 왜 먹느냐는 거지요. 이 마을 물에 대해 수질 검사를 정기적으로 하는지, 검사 결과가 어떤지 사람 들은 관심도 없습니다. 혹, 이장님은 아실는지. 이 마을 어른들은 팔순을 넘겨도 정정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오히 려 밭일에 방해가 될 정도니까요. 그 힘이 어디서 오느냐 물으면 마 을 물이 좋아서라고들 말합니다. 논에 대고 밭에 뿌리고 타는 연장 씻고 목 축이고 몸 씻는 물. 이 마을 사람들, 꼭 그 물 같습니다. 그 물을 고마워하며 마실 줄 알아야 반쯤 이 마을 사람이 된 거고요. 물이 고마운 걸, 여 기 살면서야 깨달았습니다. 거제도에서도 이 마을이 속한 남부면에는 높은 산이 많습니다. 산 이 높으니 골도 깊지요. 병풍처럼 둘러쳐진 높은 산 아래 좁고 긴 평 지에 마을이 있고 마을 옆이 바로 바다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적고 교통도 불편합니다. 대신 풍광이 아름답고 자연이 살아 있답니다. 올 90 물맛 91
추나 무가 되지 않는다지요. 배추꽃, 무꽃 보기 힘들어진 까닭이 여 기 있습니다. 샛노란 배추꽃과 하얀 무꽃. 보기만 하여도 마음이 풍성해 지는 그 꽃을 게을러씨늦게뿌린탓에원도없이보게되 었습니다. 그것들은 그것들대로 한살이를 끝내고 이 사람은 이 사 람대로 호사를 누리게 된 거지요. 새옹지마 추위와 게으름, 그 악재가 도리어 기쁨을 주는 호재가 되었습니다. 배추꽃, 무꽃과 함께 나비와 벌이 날아올 겁니다. 지난가을, 김장에 쓰려고 배추와 무 씨를 뿌렸습니다. 모자란 것 같아서 열흘쯤 뒤에 배추와 무 씨를 더 뿌렸지요. 앞에 뿌린 배추와 무는 제대로 자라 김장에 쓸 수 있었지만 뒤에 뿌린 것들은 예년보다 일찍 찾아든 추위에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김장하고 나서, 밭에 듬성듬성 남은 배추와 무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못난 사람 만나 고생하는 것 같아서요. 겨우내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버틴 그것들이 요즘 동을 내밀려 고 합니다. 동을 밀어올려 꽃을 피우겠지요. 마을에서는 배추나 무에 동이 나면 먹지 못한다며 잘라버립니다. 씨를 받아봤자 제대로 된 배 우리 식구가 도시에서 시골로 자리를 옮긴 걸 보고 주위에서 대체 로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오죽하면 시골 살이를 하려 고. 솔직히 저 역시 걱정도 많았고, 적응하기까지 힘도 들었습 니다. 왜 내려왔나 후회도 했지요. 한때는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술 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몇 해를 넘겨가며 채소를 기르다가 문득, 인생사 새옹지마 란말 을 떠올렸습니다. 호사다마 란 말도 그뒤를 따랐습니다. 92 새옹지마 93
뜻대로 일이 안 될 때, 곧잘 남의 탓, 세상 탓을 합니다. 그게 맘 편 하니까요. 하지만 세상에 제 탓 아닌 일이 없더라고요. 좋은 일이 있 으면 그대로, 나쁜 일이 있으면 또 그대로, 모두가 스스로 정한 결과 입니다. 좋은 일은 반드시 좋고, 나쁜 일은 반드시 나쁘다는 생각을 버리고 부터 마음이 넓어지고 편해졌습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마음은 늘 잔 잔하게 되었지요. 감정적으로 사람이나 일을 대하지 않게 되었습니 다. 섣부른 판단이나 결정으로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하는 일도 없 하루 어졌습니다. 배추꽃, 무꽃도 처음엔 게으른 농부를 많이 탓했겠지요. 미래를 미 리 볼 수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배추꽃이나 무꽃의 마음이 어떨까 싶습니다. 벌과 나비와 어울려 새옹지마, 호사 다마, 새옹지마, 호사다마 노래 부르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 마을의 아침나절은 토끼 뜀박질처럼 빨리 지나가고 점심 무렵 은 참새처럼 수다스럽고 오후는 황소걸음처럼 느긋합니다. 밥 짓고 생선 굽는 냄새가 집에서 풍겨 나오면 해도 알아서 수평선 너머로 돌 아갑니다. 하루 동안 무얼 했는지는 물가에 앉아 손을 씻다 보면 알 게 됩니다. 손에 묻은 흙이나 냄새가 그 기록입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소박한 찬이 놓인 둥근 밥상. 밥보다 둥글게 머리를 깎은 아들과 대문니가 모두 빠진 딸, 밥 냄새 은은하게 묻어 나는 아내가 둘러앉아 맛있게 하루를 먹습니다. 뉴스에도 없고 역사 책에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저녁입니다. 94 하루 95
봄 준비에 바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주 앉아 다음날 할 일을 이야 기하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부엉이 새끼들처럼 야단법석입니다. 밤 이 깊어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세상도 따라 잠이 듭니다. 이 하루가 어찌 지나갔는지 다른 하루를 어찌 살아야 할지 생각할 줄 모르는 부모는 자식보다 더 철이 없습니다. 철이 없어서 걱정도 없습니다. 걱정이 없으니 마냥 행복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도시 사람들이 보면 과거에 살고 있습니다. 낡은 흑 백 다큐멘터리 속의 한 장면처럼 살고 있지요. 그러나 저보다 더 과 거에 살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요. 수십 년 전에 배운 지식과 상식으로 세상을 대하며 살고 있으니 까요. 호미 한 자루만 있으면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현재를 사는 걸까요? 아니면 원시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일까요? 기 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불편함을 모르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 해하시겠습니까? 경운기로 하루면 다 갈 밭을 몇 날 며칠에 걸려 호 96
미 하나로 쪼고 있는 사람들이 이 마을에는 많습니다. 심야전기보일러나 기름보일러 대신 나무를 때는 집도 꽤 됩니다. 노 젓는 배로도 통발을 놓고 낚시를 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지요. 최 신기술 이란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식 집에 전 화를 걸어달라고 집을 찾아오는 할머니들도 있습니다. 대신 할머니 들이 시골 생활을 가르쳐줍니다. 그 할머니들에게 저희는 팔푼이일 뿐입니다. 크게 눈에 띄지는 않으나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입에 풀칠할 바로 지금 수 있는 게 시골의 생활입니다. 세상이 변하여 시골도 도시를 닮아가 고 있습니다만 아주 먼 옛날부터 시골에서 살아온 방식은 그다지 변 한 게 없습니다. 자급자족하는 이웃들 사이에서 살면서 물건을 사는 게 참 부끄러웠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더니, 제가 이렇 게 변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세상물정 모르는 촌사람으 로 사는 게 살아본 것 중에서 가장 편하고 행복합니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어쩌다 이 말이 튀어나오면 우리 부부는 서로 바빠집니다. 달력은 오히려 방해만 됩니다. 그날이 그날 같아 보여서요. 아내는 가장 최근의 일을 떠올리며 날짜를 꼽아봅니다. 제가 어딘 가 놓아둔 아침 신문을 찾는 것보다 아내의 계산이 정확하고 빠릅니 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머리를 맞댑니다. 지난 기억들을 방바닥에 좌 르르 펼쳐놓고 날짜를 꼼꼼히 따져보지요. 굳이 날짜를 따질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약속이 있다거나 어딜 가야 한다거나 기한에 맞춰 뭔가를 해야 한다 98 바로 지금 99
거나. 그럴 때마다 사실 좀 짜증이 납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이건 좀 빨리 알 수 있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덕분이지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점심을 안 먹고 오니까 토요일, 가족 소풍 가니까 일요일, 아이들이 학교 가니까 월요일, 학교 가는 뒷모습을 보고 붙 잡고 싶어지니까 화요일 그러나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은 늘 헷갈립니다. 날짜나 요일을 모르고 살다 보니 우리 집에는 나중 에 라는 게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바로 그때 하고 말 지요. 바로 지금 이 가장 중요한 때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때가 제일 좋지요. 조금과 사리는 아직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습 니다. 그러나 이런 때도 달이 기울고 차는 모양, 해가 지는 모양으로 날짜를 짐작하는 마을 사람에게는 번거로운 겁니다. 굳이 외울 필요 가 없으니까요. 아까, 이따가, 때 되면 같은 두루뭉술한 표현도 사람에 따라 시간 길이가 다른데, 그걸 이젠 좀 알겠습니다. 절대적인 시간이란 게 없다고 인정해버리고 나면 사람마다 다른 상대적인 시간에도 익 숙해지나 봅니다. 참 복잡미묘한 게 사람이라지만요. 과거나 현재, 미래라는 개념이 별 소용이 없는 생활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하지 않으면 아까 나 이따가 행복해질 수도 없지 요. 행복을 생활화하는 일. 시간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 이라면 이런 게 아닐까 합니다. 행복을 위해 참고 견뎌내는 것이 아 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모든 일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것. 고통과 시간을 잊고 사는 건 참 무책임해 보입니다. 그러나 시골에 살다 보면 시간 관념이 저절로 없어집니다. 음력으로 날짜를 따지는 이 마 을에서 양력으로 적힌 달력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지요. 물일을 하 는 사람들은 물때를 따집니다. 우리처럼 조개 파고 고둥이나 따러 바 행복을 달리 보지 않고 행복 그 하나로 뭉뚱그려 보는 넉넉함을 그간 배웠습니다. 몸은 세상일에 매달려 있어 여유를 부릴 수 없다 해도 마음은 얽맬 수 없는 것이니 얼마든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겁니다. 마 음이 행복을 만든다고 하지요. 늘 행복하십시오. 다에 나가는 사람에게는 물이 많이 빠지는 여덟 물, 아홉 물, 열 물 100 바로 지금 101
아내와 밥을 짓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뒤엉켜 뒹굴었습니다. 주워 온 나무로 모닥불을 피우고 차를 끓이고 숯을 모아 고구마를 구웠습 니다. 입가를 검게 칠하면서 고구마를 먹는 아이들을 보며 맛나게 웃 었습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시간들이었습니다. 오후에 사촌동생은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오겠 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일지 모릅니다. 10년이든 20년후든다시만 친척관계 나게 되면 이번과 똑같이 대할 겁니다. 이런 게 사람 사는 모습이라 여깁니다. 서울에서 사촌동생이 가족을 데리고 밤늦게 도착했습니다. 거의 10년 만에 만난 겁니다. 그 집 아이들은 물론이고 제수도 처음 보았 습니다. 그런데도 어제 보았던 것처럼 편했습니다. 피를 나눈 사람들끼리는 헤어지려고 해도 헤어질 수 없지요. 헤 어진 일이 없으므로 지난 세월을 묻지 않았습니다. 앞으 로의 일도 묻지 않았습니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 를 나누었지요. 변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안아주기에도 아까 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날 사촌동생과 함께 산에 가서 나무를 주워 왔습니다. 제수는 이 마을의 친척관계는 복잡합니다.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결혼 으로 인연을 맺다 보니 아버지 쪽으로 따지면 삼촌뻘인 사람이 어머 니 쪽으로 따지면 형이 되는 경우는 흔해서 얘기할 것도 못 됩니다. 마을 사람끼리 말다툼을 하게 될 때, 한 사람이 중간에 끼어 족보를 따지면 서로 말다툼을 하기 참 껄끄러운 사이가 되어버리지요. 친척 과 조그만 일로 핏대를 세우는 건 창피한 일이거든요. 사돈의 팔촌 이란 말도, 여기서는 참 무섭습니다. 예전에 양씨 집 102 친척관계 103
성촌이었던 옆 마을 명사에는 아직도 저의 증조모를 기억하는 노인 들이 계시고, 저와 족보를 따져보기도 합니다. 그런 분 중에는 사돈 의 팔촌쯤, 혹은 더 먼 분들도 계신데 그렇게라도 피가 이어져 있다 는 사실에 기뻐하고 반가워합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을 꺼려하 는 씨족문화의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얘기겠지요. 그런 분의 혈연관계와 저의 혈연관계가 만나게 되면 인근에 혈연 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객지에서 잠깐 살러 온 사람이 아니라면 일단은 먼 친척으로 보는 게 당연하지요. 이 마을에는 제가 아버지로 부르는 분이 열 분 정도, 어머니로 부 르는 분이 스무 분 정도 됩니다. 아버지뻘은 모두 아버지, 어머니뻘 은 모두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도시에서처럼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불렀다간 인간 취급 받지 못하지요. 그렇게 부른다는 건, 당신과 아 무리 따져봐도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이니 나를 막 대해도 된다는 뜻 이 됩니다. 삼촌뻘은 삼촌, 형뻘은 형. 삼촌이나 형의 수만큼 숙모와 형수가 있습니다. 마을 전체가 호칭으로만 따지면 한 핏줄입니다. 마 을 토박이끼리는 아무리 멀어도 따지고 보면 사돈의 팔촌은 되지요. 모든 생명은 단 하나의 세포로부터 진화했다는 다윈의 가설을 받 아들인다면 이 마을 사람들 결국은 모두 한 핏줄입니다. 더 크게 생 104
각한다면 한민족이 한 핏줄이고, 전 인류가 한 핏줄이 되지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아버지, 어머니, 삼촌, 형이라 부르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곳에 살다 보니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제 핏줄조 차 모르고 살아온 날들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핏 줄은 핏줄입니다. 한번 이어진 핏줄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거지 요. 당사자들을 통해서, 그 후손을 통해서 핏줄은 이어집니다. 기억은 희미해질지 몰라도 몸은 피를 잊지 못합니다. 살아 있다면, 조금만 더 관심과 애정을 가진다면 핏줄처럼 따뜻한 관계도 없을 겁니다. 아지트 사촌이 데려온 조카들은 처음 보았지만 하나도 낯설지 않았습니 다. 참 신기하고 고맙고 예뻤습니다. 10년을 모르고 살아도 사촌은 사촌. 사촌의 아이들은 조카. 그들과 같은 하늘 아래서 살고 있는 것 으로도 참 행복하였습니다. 언젠가또볼수있겠지만더자주볼수 있기를, 그래서 더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남쪽 바닷가 마을에 살러 와 네 번째 맞는 겨울입니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설 때마다 한동안 멍해지는 병이 도 졌습니다. 하릴없이 또 한 해를 보냈구나, 마음이 착잡해지는군요. 그래서 내 마음의 아지트를 찾아 나섰습니다. 집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 왕조산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염소 들이 차지하고 있는 잡초 무성한 논이 있지요. 그 논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돌배나무 앙상하게 서 있고, 그뒤로 비석도 없는 무덤 둘이 놓여 있습니다. 무덤가 오솔길로 접어들면 아 늑한 분지가 나옵니다. 본래 논이라서 그런지 늘 햇살이 풍성합니다. 106 아지트 107
인기척에 느긋하게 풀 뜯던 고라니, 놀라 달아납니다. 장끼는 후다닥 풀숲으로 몸을 숨깁니다. 그 옆으로 큰골이 있습니다. 큰골은 이 마 을 사람에게조차 잊혀진 계곡이어서 늘 크고 작은 바위 사이로 유리 같은 물이 흘러내립니다. 지난 태풍에 부러져 계곡을 가로지르며 걸쳐 있는 소나무는 누운 부처 같습니다. 너럭바위에 앉아 고개를 젖히면 빈 가지 사이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와락 달려듭니다. 마음을 흐르는 물소리, 새 물론 이 사람도 외롭습니다. 가족과 함께 있어도 외롭고, 바다와 하늘과 계곡과 함께 있어도 외롭고, 꽃과 나무와 함께 있어도 외롭습 니다. 그러나 외로움은 홀로 태어난 생명들에게 자기 속을 들여다보 라 주어지는 시간이지요. 가끔은 큰골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자신만 의 아지트를 찾아 바위처럼 앉아보세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노라 면 외로움마저 친구처럼 여겨질 겁니다. 알고 보면 외로움도 참 다정 합니다. 소리에 맡겨두고 앉아 있으면 이 사람, 너럭바위 위에 놓인 바위가 된 듯합니다. 바위에도 마음이 있을 거란 데 생각이 미치 면 혼자 낄낄거리고 말지요. 시골에 살다 보면 외롭지 않느냔 말 많이 듣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외롭지 않느냐고 되묻습니다. 외로워할 시간이 없는 도시, 외로워선 안 되는 도시, 외로움을 병으로 여기는 분주한 도시의 사람들에게 외 롭지 않느냐는 말이 때론 욕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건 도시의 생리일 뿐, 본래 사람의 마음이 흘러가는 길과는 다릅니다. 108 아지트 109
저물기 전의 해는 눈이 부셔서 잠깐씩밖에 볼 수 없지요. 중천에 떠서 희멀건 얼굴로 느리게 움직이는 해와 참 다릅니다. 해가 이글거 리는 불덩이라는 사실, 그걸 다시 깨닫게 되는 시간이지요. 실눈으로 섬 위에 떠 있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 마당 대숲에 사는 참새 떼가 몰려옵니다. 수십 마리가 전깃줄에 줄 지어 앉아 있지요. 몇 마리가 먼저 대숲으로 들어가 정탐을 마치고 신호를 보내면 후르 지는 해 르, 일제히 대숲으로 날아듭니다. 저녁거리를 마련하러 마을 고양이 들이 대숲으로 모여드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우리 집 개들에 게 들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지요. 고양이가 도망친 납작한 촌집 지 이 마을 바다는 서쪽으로 열려 있습니다. 왼쪽에서 망산, 오른쪽에 서 왕조산 자락이 바다를 감싸 안고 장사도, 비진도, 죽도, 용초도, 한산도, 추봉도가 서로 겹치며 수평선을 지우고 있지요. 하늘에서 보 면 호리병 모양인 바다입니다. 매일 이 바다 너머로 해가 넘어갑니다. 봄에는 장사도 너머로 지던 붕으로 개들도 쫓아 오릅니다. 눈부신 햇살 때문에 검고 진하게 두드러지는 섬들의 윤곽과 바다 에서부터 서쪽 창까지 이어진 황금빛 햇살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이 마을, 가난한 사람들을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만들 어줍니다. 해가 요즘은 한산도 쪽으로 집니다. 제 방 창은 서쪽으로 나 있고, 창 가에 책상이 놓여 있습니다. 책상에서 일에 취해 있다가도 오른쪽 뺨 이 절로 달아오르고 햇살에 눈이 부시면,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지요. 그럴 때는 만사를 제쳐두고 해를 바라봅니다. 오늘은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황톳물을 만들었습니다. 세상에 110 지는 해 111
가득한 황금빛을 받아 옷에 황톳물을 들이려고요. 미지근한 황톳물 에 색 바랜 내복을 담그고 평상에 앉습니다. 마당을 뛰어다니며 까르 르 웃는 아이들의 얼굴이나 그뒤를 쫓아다니는 개들의 꼬리에도 황 금가루가 묻어 있습니다. 밭에 나갔던 마을 노인들이 느릿느릿 집 옆 으로 지나가면 그 구부정한 등에도 황금가루가 휘휘 날리고, 그 뒤를 따르는 황소의 누런 이빨도 황금인 듯합니다. 참, 그렇지요. 피터팬에 나오는 요정 팅커벨이 뿌려주던 마법의 가 루도 황금빛이었지요. 팅커벨이 아니라도 이 마을을 뒤덮은 황금빛 은 매일같이 마법을 펼치고 있겠지요. 그게 어떤 마법인지, 조금은 알 듯합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의 낡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해는 섬의 머리부터 서서히 붉은빛으로 물들입니다. 텔레비전 만화영화를 보러 아이들이 집으로 들어간 마당에서 황톳물 먹은 내복을 꺼내 빨랫줄 에 넙니다. 붉은 기운을 받아 황톳빛은 더욱 그윽해질 겁니다. 집 안 에서 전어 굽는 냄새 풍겨 나오고 마을길에 인적이 드문드문해지면 해는 아주 크고 둥글고 붉게 섬의 머리에 걸쳐지고, 곧 섬 뒤로 숨어 버립니다. 이 시간은 너무도 짧아서 오히려 마음이 아프지요. 조금씩 가라앉던 해의 정수리가 완전히 섬 뒤로 사라지면 발갛게 물든 하늘과 바다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무심합니다. 둘이서 짜고 시 치미를 뚝 뗀 것만 같지요. 해 진 섬을 돌아 선창으로 다가오는 통통 배 몇 척도 능청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도무지 해가 지는 걸 봤다 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하기가 민망해집니다. 그러나 해는 오늘도 졌고, 지고 있는 거지요. 조금 전 해가 넘어간, 섬 너머에 사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소를 끌 고 가다가, 경운기를 몰고 가다가, 잠깐 멈추어 황금빛 해를 보고 있 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누군가는 생의 마지막 석양을 보고 있을지 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해가 지면 나도 죽을 거야.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누군가 그를 위해 담벼락에 해 지는 광경을 그려 놓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마을에서 더 멀어질수록 해는 거꾸로 떠오르겠지요. 아주 먼 서 쪽나라에서는 이 지는 해를, 새벽 여명을 뚫고 솟아오르는 해로 보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해는 지는 게 아니군요. 서쪽으로 펼쳐진 바 다와 섬과 산을 굽이굽이 넘어가는 셈이 되겠고요. 물론 지구가 돌지 않는다면 이런 일도 없겠지요. 우리는 무서운 속도로 자전하는 지구 위에 있으면서 지구의 자전 을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공기가 있어야 숨을 쉬면서도 왜 공기가 112 지는 해 113
있어야 숨을 쉬는지 숨쉴 때마다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너무도 당연 한 일이라 그 당연함조차 잊고 삽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본질 적인 그것들. 그러나 오늘도 해는 아무 말 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금 찍은 즉석사진 같은 그 모습으로 서 서히 저녁을 맞이하는 노을 진 풍경. 그 속에 다른 풍경으로 앉았다 가 아내가 밥 먹으라 부르는 소리에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막 지은 밥의 구수한 냄새에 쫓겨 황혼은 집에서 바다 쪽으로 서둘 러 물러납니다. 둥근 상에 둘러앉아 먹는 저녁. 형광등이 켜지면서 마법은 사라져버립니다. 저녁은 그저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할 시간. 일상이 깃들지요. 서로 많이 먹어라, 재촉하면서 수저를 재게 놀리다 보면 평상에 앉아 바라보던 찬란한 풍경은 까맣게 잊혀져버립니다. 밥상을 물리고 창가에 앉으면 창 밖은 어둠으로 지워져 있지요. 띄 엄띄엄 켜진 희뿌연 가로등 몇이 사람 사는 마을임을 알려줄 뿐입니 다. 밥 달라며 개 짖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면서 마을의 밤은 잠 을 재촉합니다. 이 마을의 하루도 잠자리를 펴고 자리에 눕습니다. 새벽같이 일어 나 바다로 들로 나가는 사람들의 시계는 꼬박꼬박 졸고 있지요. 밤 아홉시, 막차가 들어오면 마을은 인적이 끊기고 대부분의 집이 불을 끕니다. 밤잠을 못 이루는 몇몇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마을의 길을 타 고 귓전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리면 그 소리를 별들이 내는 소리 라 여깁니다. 깊고 짙은 어둠이 별을 밝히는 밤하늘을 매일 밤 열시에 지나가는 비행기가 유성처럼 흘러가면 이 사람도 형광등을 끄고 벌써 잠든 아 이들과 아내를 보러 안방으로 건너갑니다. 새근새근 잠든 식구들의 얼굴을 달빛에 기대어 차례로 뜯어보다가 볼에 살짝 입맞추어봅니다. 그럴 때 빙긋이 웃어주기라도 하면 가슴 이 터져버릴 것만 같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아지면 이 하루가 어제의 그 하루였는지, 몇 년 전의 그 하루였는지 아니면 내일의 하루인지 몇 년 후의 하루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식구들이 잘 잠들었으니 세상도 잘 잠든 겁니다. 바다 쪽으로 보이 는 성관이네도, 바닷가에 사는 금종이네도 불이 꺼져 있고, 파도 소리 하나 없으니 바다도 잘 자고 있는 겁니다. 이 마을 바다 끝에 솟아 있 는 섬들도 외눈박이같이 깜박깜박 따뜻한 불빛을 모스 부호처럼 보내 고 있네요. 섬 너머로 돌아간 해도 어디선가 하품을 하고 있겠지요. 하루 해가 지고 한 해가 저물고, 다시 하루 해가 지고 다른 한 해가 저물어 이 밤을 맞았습니다. 참으로 많은 하루를 보냈으나 노을 지는 114 지는 해 115
이 마을에서 보낸 하루하루가 참 편안하였습니다. 혹 도시에 나가 살 게 되더라도 이 마을에서처럼 지는 해를 기다리고 보내고 다시 맞을 겁니다. 해는 바닷가나 도시를 가려가며 떠오르지도 지지도 않지요. 이런 하루만 이어진다면 늙어도 하나 서러울 거 없을 겁니다. 봄비 어제 해 질 무렵부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졌습니다. 어둠이 내리자 장대비로 변하더니 먼 바다에서 졸던 바람까지 휘몰아 왔습니다. 태 풍이 불어닥친 듯 천지가 요란했지요. 밤새 비는 양철 지붕을 요란하 게 두드리고 바람은 허술한 집을 뒤흔들었습니다. 참새들은 집 옆 대 숲에서 꼼짝도 않고 강아지는 문을 열어달라고 낑낑댔습니다. 이 비바람에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흔들리는 마음을 쉽게 가눌 수 없습니다. 이 세찬 비바람이 지나가야 겨울의 때가 말끔히 지워질 줄 압니다. 이 비가 채 녹지 않은 땅의 품속까지 스며들어야 게으른 씨앗들도 봄이 온 줄 알겠지요. 116 봄비 117
오늘도 종일 비가 내리고, 바람도 여전합니다. 하지만 내일이면 그 치겠군요. 대숲에서 참새들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무당새가 창 턱에 날아와 앉는 걸 보았습니다. 이 비 그치면 여기저기서 머리를 내민 새 생명을 보게 되겠지요. 땅속에서 두려움을 참고 기다린 오랜 날들이 있어 그 빛은 시리도록 푸를 겁니다. 둔한 사람에게 봄비 내리는 까닭 을 잊지 말라고 올봄도 잊지 않고 요란을 떠신 게지요. 유난히 비가 잦은 봄이었습니다. 농부들, 작년엔 가물어 걱정하더 니 올핸 비가 너무 잦아 걱정을 합니다. 늘 부족한 사랑. 자연은 사람 을 오냐오냐 하며 키우지 않습니다. 비를 맞으며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이라 일부러 비 오는 날 데리러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비가 오면 집 밖에서 놀 생각을 하 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비 오는 날, 바닷가로 놀러 갔 습니다. 아이들에게 노란 비옷을 입히고 노란 장화를 신겼습니다. 놀러 간 118
다니까 아이들은 신이 났습니다. 병아리처럼 뒤뚱거리며 앞서 달립 니다. 집에서 걸어 10분 거리에 명사해수욕장이 있는데, 모래가 곱습니 다. 명사의 옛 이름은 밀개. 조개가 많이 나는 해변이라는 뜻입니 다. 특히 맛조개가 많았답니다. 파도가 들었다 나간 모래밭은 힘을 주어야 발자국이 날 만큼 단단합니다. 그 위에 작은 구멍이막짠여 드름 구멍처럼 나 있지요. 구멍 밖으로 나와 있던 게들이 달려드는 아이들을 보고 후다닥 숨고 맙니다.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찌르고 발 을 굴러보아도 게들은 꿈쩍도 않습니다. 아이들 웃는 소리가 빗소리를 타고 날아다닙니다. 파도도 덩달아 신이 났습니다. 둘러보면 아무도 없는 모래밭. 알 수 없는 소리들이 귓가를 맴돕니다. 모래 아래서, 바다에서, 근처 솔밭에서 우리를 지 켜보는 무언가가 있는 듯합니다. 저희들끼리 키득거리는게영수상 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불청객이지요. 아이들은 비가 고마운지 허리를 펼 줄 모릅니다. 아내는 터벅터벅 바다로 걸어가 해초를 뒤적이네요. 녹아내린 미역이나 파래를 들어 올렸다가 무안한지 배시시 웃습니다. 꼭 무얼 찾으러 나온 게 아닌데 도 바다에만 오면 두리번거리는 가족. 바다가 먹여주고 가르쳐주고 보살펴준다는 걸 스스로들 깨달아버린 거지요. 아이들이 조그만 손바닥을 쫙 펼친 채 꺄 탄성을 지르며 달려옵니 다. 집을 잃은 소라게 한 마리가 그 위에 누워 있습니다. 너무 늘어지 게 누워 있어서 죽은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조금씩 움직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소라게가 어쩌다 집을 잃었는지 이야기를 지어봅니 다. 아이들이 도망치듯 소라게에게 맞는 집을 찾으러 달려가고 나면 아내는 또 시작이라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봅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거든. 아내는 입술을 삐죽 내밉니다. 피식 웃고는 파도에 떠밀려 온 솔방 울을 발로 툭 찹니다. 떼구루루 구르다 파도에 실려 둥실대다가 다시 모래밭에 내려앉습니다. 얼마나 오래 바다를 떠돌다 온 솔방울일까 궁금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도 궁금해집니다. 비 내리고 바람 불고 파도치는 모래밭에서 노랗게 물든 아이들과 빨갛게 핀 어머니와 마른 나무 같은 아버지가 무심결에 잊혀진 이야 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슬픔 없고 외로움 없고 차가움 없고 화려함도 없는, 그저 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지요. 때론 사진 한 장이 되기도 하겠고 그림이 되기도 하겠으나 눈길을 끌지는 못할 겁니다. 바다에 서 산에서 제멋대로 자라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모든 평범 120 봄비 121
한 것들의 삶이 그러하듯. 비와 바다에 흠뻑 젖은 가족이 한바탕 법석을 떨고 간 모래밭에 게 들이 몰려나와 집게발을 들고 수다를 떱니다. 겨우내 비어 있던 모래 밭에 사람이 다녀갔으니 게들도 봄이 온 걸 알아차렸겠지요. 슬픔 일 때문에 집을 비운 사이, 중학교 때 친구가 딸아이를 데리고 집 에 왔습니다. 아내가 전화로 이름을 말해주었지만 기억나지 않았습 니다. 집에 와보니 24년 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얼 굴에는 반가움 대신 저와 아내의 마음을 저리게 만드는 슬픔이 화장 보다 짙게 묻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친구가 왜, 어떻게 왔는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 을 아리게 한 친구의 슬픔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를 휩싸고 있었던 슬픔과 그 슬픔을 달랜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슬픔이 기쁨을 찾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고 122 슬픔 123
슬픔을 차오르게 만든 모든 것들을 달래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이틀이 지나자 친구는 오랜 불면증이 사라졌다고 했 습니다. 얼굴에도 열다섯 살 소녀 적 웃음이 되살아났지요. 서울로 떠나며 우리에게 선한 미소를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 그 미소는 우리 집에 오래 남아 슬픔 안에서 행복을 찾는 길을 늘 열어놓을 겁니다. 을 하는 동안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거든요. 자기 마음이 어떤 지 제대로 알면 마음을 둘러싼 껍질은 흐물흐물해집니다. 금례는 망설이다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말에 호흡법을 배웠습 니다. 슬픔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 슬픔을 용서하며 숨을 쉬라 일렀지 요. 금례는 호흡을 하다가 곤히 잠이 들었고, 깨어나서 얼굴이 밝아 졌습니다. 예전처럼 잘 웃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더 보내고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떠날때, 언제다시만나자는말도하지않았습니다. 중학교 때 여자친구, 금례는 저를 한번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무작정 저구로 찾아왔답니다. 마을 입구에서 민박집을 물으니 저희 행복해라, 인연이 되면 또 만나겠지. 만나고 헤어지면서 사람을 배우지요. 집을 가르쳐주더랍니다. 민박집에 머물면서 멀찍이서나마 사는 모습 을 보고 가려 했다는데, 들른 집이 바로 저희 집. 그냥 우연의 일치라 고 해두지요. 집으로 돌아온 저는 한눈에 금례를 못 알아봤습니다. 참 좋아했던 여자아이였는데 말이죠. 금례가 데려온 아이랑 우리 아이들, 모두 재 워놓고 어른들끼리 모여 앉아 옛날얘기를 했습니다. 금례가 자러 간 후, 아내가 금례에게서 느낀 슬픔에 대해 말을 꺼 냈지요. 그래서 우리가 배운 호흡법을 가르쳐주기로 했습니다. 호흡 124 슬픔 125
벼집니다. 피서철에는 해변을 따라 빈 그릇이 늘어섭니다. 자장면을 먹는 게 이 마을 사람들에겐 마음먹고 하는 외식이 되어 서 누구네 집 앞에 빈 그릇이 있으면 무슨 좋은 일이 생겼나 여깁니 다. 하지만 스쿠터도 주일에는 멈춰 쉽니다. 두 내외가 독실한 기독 교 신자인 탓이지요.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나르는 일에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들, 그들이 그냥 푸른 바다입니다. 청해반점 청해 靑 海 반점은 그 이름처럼 푸른 바닷가에 있습니다. 환갑을 넘긴 부부를 닮아 허름한 중국집입니다. 남편은 음식을 만들고, 아내는 배 달을 나갑니다. 물고기 비늘처럼 빛나는 철가방을 실은 빨간 스쿠터 가 해변을 달리면 자장면이 먹고 싶어집니다. 고구마처럼 길쭉한 남 부면 유일의 중국집. 어디든 빨간 스쿠터는 달려갑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길을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달려갑니다. 일손 달리는 농사철에 빨간 스쿠터는 그야말로 신출귀몰. 포장 안 된 골짜기 깊숙이 있는 논밭까지 철가방은 구슬땀을 흘리며 달려가 지요. 물때를 만나 바쁜 배 위에서도 자장면은 맛나게 비 시골에서 외식이란 게 가당키나 합니까만, 가끔은 청해반점에서 시켜 먹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으니 가서 먹을 수도 있지만, 네 식구 가 가서 두 그릇 시켜 먹자니 미안해서 전화를 겁니다. 원래 많이 먹 는 식구들이 아니거든요. 전화를 걸기 전에 뭘 먹을까, 의논합니다. 제일 먼저 정해지는 메 뉴는 짬뽕. 딸아이는 늘 짬뽕입니다. 생각이 많고 먹고 싶은 게 많은 아들은 망설이다가 선택권을 부모에게 뺏기지요. 그래 봤자 자장면 아니면 볶음밥 아니면 울면인데 말입니다. 가끔 남이 해주는 음식이 먹고 싶다는 아내가 아니라면 사실 청해 126 청해반점 127
반점에 전화 걸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난 음식은 아내의 손에서 나오거든요. 아이들도 어머니 음식 맛이 최고라고 입을 모으 지요. 아이들이 비교할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해봐야 겨우 학교 급식이 2... 니, 아이들 말은 별로 믿을 게 못 되긴 합니다. 텃밭에서 키운 채소가 밥상에 오르는 날이면 일부러 큰 소리로 맛 좋다 를 연발하는 아이들. 몸에 좋고 맛이 좋은 건 우리 밭에서 나온 다고 믿는 아이들 때문에라도 여러 가지 채소를 심습니다. 아이들에 게도 채소를 돌보라 하고 반찬 하게 뜯어 오라 합니다. 채소가 우리 를 먹여 살리는 것처럼 우리도 채소를 먹여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요. 그래서 아이들은 채소를 친구처럼 여기고 고마워합니다. 2. 학교나 집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세상을 아이들은 자연과 뒹굴면서 알게 됩니다 우리 아이들은 도시에서 놀이방과 집밖에 몰랐습니다. 놀이방과 집 사이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곳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시골에 와서는 집과 학교 사이에 참으로 놀라운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세상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펼쳐지고 아이들의 언어로만 설명되지요. 채소를 키우며 살다 보니 어디서 났는지도 모르는 음식은 달갑지 가 않습니다. 외식 자체가 시큰둥해진 또 다른 이유입니다. 그래도 청해반점은 낫습니다. 먼저 마음씨 좋은 주인을 알고, 그분들이 어느 밭에서 채소를 기르는지를 알지요. 그분들이 쓰는 재료나 음식이라 면 믿을 수 있습니다. 티 없는 마음으로 정성껏 만들어내는 한 그릇 의 음식. 화려하지도 기가 막히지도 않은 맛이지만, 집에서 만든 음 식처럼 하나 남기지 않고 열심히 먹습니다. 128
형과 동생 초등학교 3학년 때, 중학교에 막 들어간 친형이 서울로 유학 갔습 니다. 형이 처음 집에 다니러 왔다 서울로 돌아가던 겨울 새벽, 눈을 비비며 배웅하러 갔습니다. 뭐가 그리 슬펐던지 버스를 쫓아가며 형 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렀습니다. 버스 안에 있던 형은 두 팔을 벌 린 채 차창에 기대어 서럽게 울었습니다. 1년 뒤, 아버지 사업이 기 우는 바람에 서울로 이사 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만난 형제는 말을 잃었습니다. 사는 게 어렵다 보니 옷을 사도 형 것만 샀습니다. 저는 늘 대물려 입었지요. 고등학생이 되자 형과 키도 같고 발 크기도 같아졌습니다. 형과 동생 131
형은 새 옷이 창피하다며 한사코 저한테 차례를 미뤘습니다. 그땐 형 의 깊은 속을 몰랐습니다. 시골로 내려와 살게 되면서 조금이라도 아 끼려고 형에게 옷을 물려 입습니다. 지켜보기만 하던 형이 그간 잊고 지낸 사랑을 옷과 함께 보냅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랑했던 형 의 체온이 새삼스럽습니다. 제게 사랑을 일깨워주고 그 사랑을 베풀 라고 가르쳐준 사람, 형의 이름은 이재우입니다. 물론 세상 모든 형들이 이러겠지요. 한편 서울로 온 우리는 신림동 판자촌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어려 운 시절이었지요.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그 달동네 사람들 모 두의 목표일 정도였습니다. 가난한 시절, 우리 형제는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봐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서로가 경쟁하듯 공부를 하였지요. 공부 밖에 길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모두 공부를 잘했지요. 한때 부모에게 가장 많은 기대를 받았던 저였지만, 글을 쓰겠다고 하면서부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과 멀어졌습니다. 군대를 제대하면서 등단했고 거의 집을 나가 살았습니다. 부모, 형 제도 잊고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때가 되어야 겨우 집 제 위로는 형이 있고, 아래로 여동생이 있습니다. 이름은 재우, 수 화입니다. 형은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 상무로 있고, 동생은 남편과 함께 오퍼상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다는 말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식구가 서 울로 이사할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기울었습 니다. 아버지는 한뎃잠을 자면서도 어머니에게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냈습니다. 사업을 일으켜보려고 애를 썼지만 빚을 남김없이 갚는 선에서 사업을 마무리지어야 했습니다. 그 세월이 10년입니다. 에 갔습니다. 그래도 형은 저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글을 쓰 겠다면서부터 워낙 부모로부터 꾸중을 많이 들어온 터라 형이 뭐라 한들 곱게 듣지도 않았겠지요. 부모나 형에게 바라는 것도 없었습니 다. 있다면 가만히 좀 내버려두라는 것. 그러니까 저에게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결혼을 하고도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사는 모습이 변하 지 않았습니다. 결혼하고 변한 게 있다면 제가 책임져야 할 식구가 생겨 글을 더 132 형과 동생 133
많이 써야 했다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책을 낼 때마다 번번이 좌절 하였습니다.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 더 지독하게 글을 썼습니다. 먹고 사는 건 남의 일이지 제 일이 아니라고 얘기하면서도 먹고살기 위해 다른 전업 작가보다 더 열심히 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가진 재 산이 처음부터 없었기에 밤을 새워 글을 써도 살기 힘들었습니다. 적 게 버니 적게 먹어야지 하면서 하루에 두 끼만 먹고 살았습니다. 그 때의 습관이 남아 지금도 하루에 두 끼만 먹고 삽니다. 아내가 첫아이를 낳을 때, 솔직히 돈이 거의 없었습니다. 분만실에 서 스물여덟 시간 만에 나온 아들은 탯줄을 목에 감고 나왔고, 보름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형과 장인, 처남이 주고 간 돈으로 병원비를 내야 했습니다. 아내의 젖을 짜서 병원에 가져다주고 인큐 베이터 안에서 가쁜 숨을 쉬는 아들을 지켜보면서 이를 악물었습니 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정말 쉬지도 않고 몇 달씩 글을 써댔습니다. 누구는 저더러 글 쓰는 공장이라고 했습니다. 몇 달 만에 장편소설 을 써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것도 연달아서 쓰고 또 썼으니까요. 그러지 않으면 가족을 먹여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일이라곤 글 쓰는 것밖에 없었기도 합니다. 그런 저를 보는 형의 눈 에 늘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형도 바쁘고 힘 들게 살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 눈빛 말고 더는 무엇도 필요 없었 습니다. 아이엠에프 체제로 들어서면서 글공장도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 습니다. 출판사가 연달아 문을 닫았지요. 그나마 월급생활자로 밥벌 이를 하게 된 건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는 2년은 제 게 독이 되었습니다. 아내까지 직장에 나가야 도시에서의 생활을 유 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과 딸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사는 생 활. 저희는 저희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점점 지쳐갔습니다. 너무 지쳐 가족 모두 마귀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습니다. 도시를 떠나려고 할 즈음 아 내가 직장을 안 다녀도 될 만큼 월급을 많이 주겠다는 회사가 있어 한 달을 다녔지만, 그마저 싫었습니다. 그저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 습니다. 외딴 산속에서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도시를 떠났습니다. 저 때문에 너무 지친 가족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가족의 행 복만 생각하며 살아보자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민박집을 해야 하는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상황이 어떻든 행복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너무 지쳐 더는 자학할 134 형과 동생 135
힘도 없었습니다. 불행도 행복이라 여기며 살아야 했습니다. 앞에 닥 친 일이 무어든, 무조건 행복해야 했습니다. 행복만 바라보며 살았습 니다. 이 마을에서, 자연에서 행복을 찾으려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우리는 밝아졌습니다. 형이 저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게 이 마을로 오고 한 1년 뒤부터 입니다. 잊고 지낸 세월 따윈 아무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모든 일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던 때였으니까요. 그렇지만 형의 목소리 는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마음의 텃밭 그후로 한결같이 형은 저를 찾아줍니다. 도시에서 보면 정말 몰락 한 사람이 된 동생인데도, 늘 집안을 시끄럽게만 하던 동생인데도 형 은 믿어주고 지켜줍니다. 형에게 마음이 열리자 버스정류장에서 이 별하던 그 어린 때로 시간이 순식간에 되감겨버렸습니다. 그렇게 어 린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부모를 보게 되었지요. 비로소 부모에게 잘못하며 살았다,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동생 잘못되기를 바라는 형 이 어디 있겠냐에서 자식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 어디 있겠냐는 생 각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부모에게 마음이 열리는 데까진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그 시간 동안 켜켜이 쌓여 있던 앙금을 말끔하게 씻어냈 습니다. 그래서 더 행복해졌습니다. 빈 텃밭에 호미를 들고 섰습니다. 겨울을 견뎌낸 배추와 무가 노랗 고 흰 꽃으로 게으른 사람을 반깁니다. 열무, 총각무, 봄배추, 쑥갓, 가지, 상추, 피망, 고추 씨를 흩뿌렸습니다. 붓꽃, 분꽃, 봉숭아, 맨드 라미, 할미꽃, 범부채, 해바라기 씨도 뿌렸습니다. 얼마 후 유채꽃, 개복숭아꽃 만발하면 이 친구들 말고도 토란, 참나리, 머위 들도 알 아서 고개를 내밀 겁니다. 그러면 텃밭도 정신없이 바빠지겠지요. 얼마 전 도시에 사는 친구가 산다는 건 겨울 텃밭 같다는 말을 들 려주었습니다. 수확의 기쁨은 언제까지나 맛볼 수 있을 거 같지만, 겨울이 되면 텃밭도 텅 빈다는 것. 또 그 텃밭이 텅 빈 채로 겨울을 136 마음의 텃밭 137
이겨내기에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면 또 다른 수확의 기쁨을 줄 수 있 다는 것, 그러기에 텅 빔이 소중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사는게늘겨울텃밭만같아서야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만, 한 번쯤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 때 제 마음의 텃밭도 그렇게 비워봐야겠 습니다. 텅 빈 사이, 저도 모르는 어떤 기쁨의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 아들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 텃밭에서 풀과 채소의 키 재기가 한창입니다. 밭을 일군 지 몇 해가 되다 보니 싹만 보아도 어떤 녀석인지 알겠습니다. 상추와 쑥갓은 매일 밥상에 올리고 있고, 해바라기는 무릎 크기로 자라났습 니다. 고추와 가지는 새끼손가락만 하게 자라 있습니다. 처음 심은 붓꽃은 씨가 잘못된 건지 싹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닐 겁니다. 1 년은 기다려봐야지요. 아무렇게나 뿌린 봉숭아도 여기저기서 올라 오고 있고 열무와 봄배추도 제법 자랐습니다. 나중에 뿌린 허브와 딸을 위해 새로 만든 작은 꽃밭에서도 싹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 미 잎이 얼굴만 하게 자란 머위와 조막손같이 싹을 내민 토란도 볼 138
만합니다. 참나리는 줄기에 검은 씨를 맺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꽃이 나오겠지요. 그리고 곤달피. 작년에 산에서 자라는 곤달피 한 뿌리를 얻어 뒷밭 에 심어놓고 잊었었는데, 여러 뿌리로 자라 있었습니다. 밭에서 키우 볕이 뜨거워질수록 텃밭의 생명도 무성해질 겁니다. 그래서 겨우 내 비어 있던 밭이란 걸 잊게 만들겠지요. 잊어도 그만입니다. 어김 없이 겨울은 찾아올 테니까요.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 일이 반복되 면 저절로 알게 될 겁니다. 가까이 좋은 스승이 많아 참 행복합니다. 기 어렵다던 녀석이라 더 반가웠지요. 뿌리를 나누어 심어놓고, 잊기 로 했습니다. 사람의 발소리가 오히려 불편할 거 같았습니다. 박, 호박, 조롱박, 오이도 제법 잘 자라고 있습니다. 모종으로 산 토마토는 노란 꽃을 내밀었고, 한동안 꿈쩍 않던 수박도 조금씩 모양 을 바꿔가고 있습니다. 밭 여기저기, 처음 보는 풀도 눈에 뜨입니다. 그것들을 가만히 지 켜볼 겁니다. 뜻하지 않은 인연입니다. 그래서 더 소중합니다. 비어 있던 밭이 요란해졌습니다. 서로 살아보겠다고 아우성입니 다. 먼저 자란 녀석이 늦게 자란 녀석을 밀어내는 형국입니다. 그래 도 끝까지 모두 있는 힘을 다합니다. 처지를 비관할 시간이 없지요. 있는 힘을 다해 같은 종과 또 다른 종과 어깨를 겨루며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는 걸 알고 있는 듯합니다. 실제로 그렇지요. 그 세계 에선 먼저자라고먼저열매를맺는게꼭좋은것만은 아니랍니다. 140 마음의 텃밭 141
니다.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하나 둘 뻘밭을 떠납니다. 조개를 더 파야 한다는 아내와 벌써부터 그만 가자고 칭얼거리던 남편만 남겨 두고요. 남편은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아내는 발목까지 물 이 차오르도록 조개를 파고 있습니다. 오후 내내 몸을 부려 파낸 그 조개는 값으로 따질 수 없지요. 아내 눈에는 뽀얗게 우러난 조개탕을 맛있게 먹는 식구밖 조개잡이 에 보이는 게 없나 봅니다. 한 해에 두 번 바닷물이 아주 많이 빠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맞춰 조개를 실컷 파고 맘껏 조개탕을 끓여 먹지요. 그 생각에 휘영 청 밝은 달만 보아도 저절로 어깨춤이 나옵니다. 물때 맞추어 호미 쥐고 나서면 마음이 넉넉해진 사람들을 하나 둘 만나지요. 성질 급한 몇은 물도 안 나간 뻘밭에 벌써 나가 앉았습니다. 나이가 제일 어린 우리 내외는 조개잡이도 제일 서툽니다. 눈이 어 두워서 조개잡이도 틀렸다던 할머니들이 한 소쿠리씩 조개를 파고 있는 동안, 우리는 열심히 얼굴에 뻘칠을 하고 있습니다. 수십 번 해본 일이라 이력이 붙을 만도 한데, 여전히 서툴기만 합 물때가 여덟 물이 되면 조개를 캘 수 있을 만큼 물이 많이 빠집니 다. 아홉 물, 열 물까지 마을 아낙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개발 나갑 니다. 부지런히 조개를 캐서 집으로 돌아오면 조개를 까야지요. 깐 조개를 냉동실에 얼렸다가 제사 때 쓰거나 객지에서 자식들이 오면 들려 보낸답니다. 어떤 할머니는 조개를 가까운 도시에 내다 팔기도 합니다. 많이 캐는 날은 몇만 원어치 된다고 하네요. 조개만 캐도 먹 고살 수 있으니 참 살기 좋은 마을 아니냐고 농담들을 합니다. 부지런히 고둥을 줍거나 작은 게를 잡거나 굴을 따거나 지렁이를 142 조개잡이 143
캐서 팔면 돈이 될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한 달에 물이 많이 빠지는 며칠만 할 수 있는 일이니 겨우 입에 풀칠 정도는 하겠네요. 그래서인지 들로 나물을 캐러 가고, 산으로 약초를 캐러 가는 아낙들 도 꽤 됩니다. 인근 관광지에서 일손이 필요할 때 달려가 일당을 받 아 오기도 하지요. 물론 농사를 짓고, 가축을 돌보고, 배를 타고 나가 는 일은 기본입니다. 억척네가 따로 없습니다. 그렇게 자식을 키우며 학교를 보내고 땅과 집을 지키며 살아온 아낙들. 그네들의 목소리가 높은 건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아내와 함께 조개를 캐다 보면 제가 참 못난 사람이 됩니 다. 늘 아내의 반도 못 따라가지요. 시골 살다 보니 아내가 저보다 잘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자질구레한 일부터 큰 일까지 아내의 말이 옳은 게 많았습니다. 경쟁하며 살아남는 법은 쓸모가 별로 없어졌습 니다. 남과 어울리고 남을 받아들이며 사는 법을 아내를 통해 배우고 있습니다. 별 볼일 없는 남편에게 조개탕을 끓여주려고 땀을 흘리는 아내. 세 상의 아내들이 모두 이러하겠지요. 아내가 참 고맙습니다. 사실 남자는 조개 캐러 못 가게 되어 있습니다. 뻘에 나가면 고추 떨어진다고 한마디씩 하지요. 쪼그리고 앉아 어깨가 뻐근해지도록 뻘을 헤집다 보면 그 말대로 될 것도 같습니다. 힘들어도 참 신기하 고 재미있습니다. 이 마을엔 시장이 없어서 돈이 있어도 조개를 살 수 없지요. 조개 를 팔라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이 우리 먹으려고 캔 조개라며 팔지도 않지요. 옜다, 국이나 낄이 무라. 적선을 하듯 조개를 한 움큼 건네주고 맙니다. 미안해서라도 조개 를 팔라는 말 이젠 못합니다. 조개를 먹으려면 조개를 캐야 하지요. 146 조개잡이 147
채로도 보관하고, 갈색 설탕에 재어놓기도 했습니다. 올봄부터 집에 오시는 손님들께 한 잔씩 드리지요. 달리 내놓을 게 없는 살림에 정성을 다해 끓인 그윽한 감국차 한 잔. 우리끼리 있을 땐 감국차를 잘 마시지 않습니다. 감국을 보고 말리고 맛이 들기를 기다리고 물을 끓이고 대접하는 일이 좋아 굳이 맛을 보지 않아도 되 는 거지요. 감국차 손님과 함께하는 감국차. 누군가 찾아와 주어서 고맙고 함께 기쁨 을 나누니 고맙습니다. 저도 감국차처럼 한결같은 맛이 나 는 사람이 될 수 있을는지요. 한결같으면서도 질리지 않는 맛 이 마을의 가을에는 감국이 흐드러집니다. 조그맣고 샛노란 감국 이 세상에 그득했으면 합니다. 은 옹기종기 솜사탕처럼 모여 피어 있습니다. 코를 대어보면 진한 국 화향이 마음까지 파고듭니다. 그런 감국이 너무 흔한 탓에 잡초 취급 을 받습니다. 우리 내외는 하늘 높고 맑은 날을 골라 감국을 따 모았습니다. 무 성하게 자란 풀을 헤치며 감국을 모으느라 옷에는 온갖 풀씨들이 잔 뜩 달라붙었지요. 감국을 따가는 대신 풀씨를 나르는 배달부가 된 겁 니다. 잘 익은 가을볕과 감나무 그늘을 오가며 말린 감국은 꽃 그대로인 우리 집에서 내놓는 차로는 또 유자차가 있고, 자스민차가 있습니 다. 거제도는 유자의 고장이기도 하지요. 두텁고 윤이 나는 유자잎 사이에 황금처럼 열린 유자. 한때 유자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켰다는 어머니들이 많습니다. 너무 많이 심어 이제는 값이 없어진 유자. 뒷집 할머니 밭에 유자나무가 대여섯 그루 있는데, 겨울만 되면 저 148 감국차 149
희가 유자를 땁니다. 높은 데 달린 유자는 아예 딸 생각도 하지 않아 봄까지 유자가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따서 실한 건 할머니 드리고 못난 건 저희 집에 가져옵니다. 아내가 유자를 깨끗이 씻으면 반으로 갈라 속을 파냅니다. 채를 치 는건제몫. 채를친유자를흑설탕에 재어놓고 차가 익기만 기다리 지요. 빛깔이 안 좋다며 노란 설탕이나 흰 설탕을 넣어야 한다지만 굳이 흑설탕을 씁니다. 몸을 위해 마시는 차인데, 가능하면 덜 해롭 게 마셔야지요. 겨우내 온 식구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유자차를 마셨습니다. 누 가 와도 유자차 한 잔. 그리고 찌개에 밥 한 그릇과 따뜻한 잠자리. 모든 게 모자란 겨울에 시골에서 그만한 대접이면 성의를 다했다 싶 습니다. 날이 따뜻해지고 유자차가 떨어질 쯤, 감국차가 적당히 익습니다. 그 역시 우리의 성의입니다. 멀리서 찾아오느라 지치고 피곤한 몸을 달래줄 게 그 정도밖에 안 되어 늘 미안합니다. 도시에서 사 온 5백 그램에 1만 원쯤 하는 중국산 자스민차는 주로 저 혼자 마십니다. 술 대신, 커피 대신에 마십니다. 훨씬 싸게 먹히지 요. 다기에 넣고 자꾸자꾸 우려 마십니다. 자주 보는 사람들과 마시 150
는 차이지요. 녹차가 더 좋은 줄 압니다만, 비싸서 엄두를 못 냅니다. 재료도 다르고 맛도 다르고 정성도 다른 차입니다만, 끓이고 내놓 는 마음은 하나입니다. 차 한 잔을 내놓는 것으로 자주 인사하지 못 한 결례를 다 덮을 수야 없겠지요. 전화비도 아끼며 살아야 했던 세 월을 차 한 잔의 온기로 대신할 뿐입니다. 먼 곳에서 찾아갔는데 대 접이 소홀하더라 여긴 분들께 참 미안합니다. 클로버 며칠 코감기로 골골대다가 힘을 내려고 풀이 무성한 친구네 밭을 손보러 나갔습니다. 쫓아온 아들은 일을 돕는다고 설치더니 얼마 못 가 꾀를 부리더군요. 밭에 클로버가 많았지요. 하나에 집중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 네 잎 클로버나 찾아보라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너무도 쉽게 네 잎 클로버를 찾아냈습니다. 네 잎 클로버를 제 눈으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찾아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원래 요행이나 행운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나 저나 네 잎 클로버는 신기했습니다. 아버지가 놀라는 모습에 아들은 152 클로버 153
신이 났습니다. 연달아 몇 개를 더 찾아내더군요. 아버지, 여섯 잎 클로버예요. 호미를 팽개치고 아들 옆으로 갔습니다. 자세히 보니 잎은 일곱 장. 세 잎은 행복, 네 잎은 행운을 뜻한단다. 일곱 잎은 뭘까? 돌연변이든 뭐든 일곱 잎 클로버는 흔치 않지요. 우리는 의논 끝에 행운보다 소중한 행복 이라고 맘대로 정해버렸습니다. 아들은 그걸 잘 말린 후 코팅해서 문에 붙여놓고 오가는 사람에게 보여주잡니다. 행복은 나누어줄수록 느는 거라나요. 오늘, 아들한테 한 수 배웠습니다. 신문에 이 이야기를 써 보내고, 디지털 카메라로 일곱 잎 클로버를 찍었습니다. 카메라도 안 좋은 데다가 방에서 찍다 보니 영 화질이 안 좋아서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평상 위에 놓고 찰칵하는데, 바람이 휙 불어왔습니다. 어, 하는 사이에 클로버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렸지 요. 울먹거릴 아들의 얼굴이 눈에 선했습니다. 154
아무리 찾아봐도 그 작은 잎은 보이지 않았지요. 아내도 저도 포기 하고 말았습니다. 아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 었습니다. 학교 마치고 온 아들을 불러 앉혔습니다. 심각한 얼굴로 말했지요. 아들아. 아버지가 일곱 잎 클로버를 잃어버렸다. 처분만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아들은 피식 웃었습니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제가 또 찾으면 돼요. 그러고는 클로버를 찾았던 밭으로 달려갔습니다. 인생의 쓴맛을 마법사 좀 보겠구나, 멋모르고 달려가는 아들에게 미안했습니다. 한참 있다가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네 잎 클로버밖에 못 찾았어요. 다음에 또 찾죠 뭐. 그러니까 아들은 일곱 잎 클로버를 아버지 거라 생각했고, 아버지 는 아들 거라 생각했던 겁니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아들을 으 스러지게 안았습니다. 이런 게 행운보다 소중한 행복. 아들에게서 또 배웠습니다. 마법사 영화가 도시 아이들 마음을 설레게 하고 한 1년쯤 후, 우리 아이들도 학교에서 비디오로 그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며칠 동안 마 법사 얘기를 입에 달고 살더군요. 어느 날인가 저녁을 먹는데 딸이 아버지도 마법사냐고 물었습니 다. 가만 생각해보니 저도 마법사인 듯하더군요. 응. 아버진 어떤 마법을 써요? 오르위르휘익, 너희 둘을 만들었지. 와, 대단하다. 우리도 마법 나라에 데려가주세요. 156 마법사 157
그래. 그 무렵부터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마법 나라에서 신나게 노는 상상에 젖어 삽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마법사가 되었고, 아이들은 그 비밀을 간직하며 삽니다. 그 비밀을 말하고 다니면 아버지의 마법이 사라지게 된다고 말해두었지요.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아버지가 영화에 나온 마법사가 아닌 걸 알게 되겠지요. 실망이야 하겠지만 곧 자기들 눈에 비쳤던 마법 같은 일들이 아버지의 땀으로 이루어진 걸 알게 될 거고요. 그때쯤 아이들 도 자기 아이들의 마법사가 되어 있을 겁니다. 하루하루 사는 일이 마법같이 놀라운 일인 걸 깨달으면서 제대로 된 어른이 될 겁니다. 예를 들어, 아들은 1학년이 되면서부터 한자를 쓰기 시작했습니 다. 하루에 두 글자씩 꼬박꼬박 썼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한자 박 사가 되었습니다. 1학년이 되어도 한글을 모르던 딸은 매일 동화책 두 권씩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그래서 책벌레가 되었습니다. 아들은 운동 신경이 참 둔합니다. 별로 관심도 없지요. 작년 가을 운동회에서 훌라후프 돌리기를 한다며 연습을 해 오란 숙제가 있었 습니다. 딸은 곧잘 하는데 아들은 한두 번을 제대로 못 돌렸습니다. 모양새도 얼마나 엉성하던지. 자칫했으면 부모가 포기할 뻔했습니 다. 답답했지만 아들보다 더 열심히 훌라후프를 돌렸습니다. 아들은 겨우겨우 따라 돌렸지요. 그렇게 한 달쯤 지나자 아버지와 아들은 훌 라후프 오래 돌리기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칠 때까지 돌려도 떨 어뜨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지요. 모든 일이 이렇습니다. 처음은 힘든 법입니다. 쉬지 않고 꾸준히 하다 보면 도저히 이루지 못할 것만 같았던 일들도 쉬운 일이 되어버 밥상머리에서 툭 나온 마법사 얘기는 아직도 우리 집에서는 유효 합니다. 그러나 아무 때나 마법을 쓰는 게 아닙니다. 마법사는 아주 급하고 중요할 때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고 못을 박아두었지요. 그러 면서 마법 같은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리지요. 우리 아이들은 마법이 그런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마법사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부터 생각 합니다. 시골에 살면서 좋은 점은 관심을 가진 한 가지 일에 오래도록 집중 158 마법사 159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나치게 게으르지만 않으면 조금씩 자기를 변화시켜나갈 수 있지요. 누구와 비교할 필요도 없이 묵묵히 좋아하 는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아마 도시에서도 이 런 일은 가능했을 겁니다. 편하게 사는 데만 익숙해져 있고, 쉽게 부 족함을 메울 수 있는 거리들이 많아서 수고스럽게 시간을 들이지 않 았던 모양입니다. 얼떨결에, 장난으로 마법사가 되어버린 이 사람. 아이들 보기 부끄 럽지 않으려고 매일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면 진짜 마법사가 될 지 누가 알겠습니까? 밥상 시골에 살다 보니 먹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그중에서도 쌀. 처음 이곳으로 이사와 쌀 팔 돈마저 간댕간댕할 무렵, 멀리서 친구 병훈이가쌀한가마니를가져왔습니다. 눈물나게 고마운 선물이었 습니다. 아내는 방 한 귀퉁이를 차지한 쌀을 보며 자꾸 웃었습니 다. 쌀이 넉넉하니 반찬 부실해도 근심이 없었지요. 그날 이후부터 형편이 좀 나아진 지금도 쌀 팔러 가는 날이면 내외가 신바람 납니다. 쌀팔러농협가는날, 앞장선아내의걸음걸이는참당당합니다. 뒤따르는 남편도 히죽히죽. 20킬로그램 한 가마니면 식구들이 한 달 160 밥상 161
내내 배부릅니다. 공과금도 내고 반찬도 사고 학용품도 사줘야 하지 만 그건 나중 일입니다. 쌀가마니를 둘러멘 남편은 오히려 힘이 납니다. 잠깐이라도 아내 에게 쌀가마니를 맡기지 않습니다. 그게 가장한테 얼마나 신나고 중 요한 일이라고요. 가장은 쌀독에 쌀을 붓고 나서 쌀을 휘저어 봅니 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쌀알의 감촉은 벌써 김 나는 밥이 되 고 아이들 몸이 되고 사랑이 됩니다. 다시 쌀 팔러 가는 날까지 우리 식구는 부자입니다. 주는데, 저는 별로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그래서 유실수를 마당에 많 이 심었지요. 몇 년 후에는 과일 걱정 덜 하고 살 수 있을 겁니다. 텃밭에서 키우는 채소가 충분하지 않을 때, 이틀에 한 번 오는 부 식트럭에서 보충하는데 그 역시 달갑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밭 에서 얻거나 조금 사게 되면 마음이 놓입니다. 쌀은 텃밭에서 기를 수도 없고, 마을 사람들도 약을 쳐가며 기르니 그냥 농협에서 사지 요. 언젠가는 갈아엎지 않고 비료나 제초제도 쓰지 않는 쌀 농사를 지을 작정입니다. 그러기 위해 올부터 한 친구의 논을 묵히는 중입니 다. 3년 후에는 땅이 되살아나겠지요. 4, 5년 지나면 제 손으로 벼농 사를 지어 쌀 걱정도 덜 겁니다. 요즘 저희 점심 밥상은 참 예쁩니다. 김 나는 밥 한 그릇에 총각무 이 마을에는 그 흔한 양념통닭집 하나 없습니다. 햄버거, 피자 같은 건 다른 나라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의 군것질이라고 해야 5백 원짜리 과자 한 봉지. 그마저 잘 안 사줍니다. 차라리 감자나 고구마를 먹이 지요. 가끔 외식을 하지만, 그것도 자장면 정도면 만족합니다. 도시에 서 살다 와 패스트푸드 맛을 아는 아이들이지만 어른보다 빨리 그 맛 을 잊었습니다. 대신 저녁을 먹고 나면 과일 하나를 까먹습니다. 그 계절에 나는 과일입니다. 아내는 싼 맛에 오렌지나 바나나를 자주 사 김치, 쌈장, 강된장, 호래기젓, 밭에서 금방 뜯어 온 상추, 쑥갓. 그리 고 마른 멸치 몇 마리. 어쩌다 된장찌개가 올라오기도 합니다. 두 끼 먹고 사는 제게는 아침이자 점심인 그 밥상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부담스럽지 않아 좋습니다. 어제저녁에는 창희네 할머니가 주신 우럭에 칼집을 내고 소금을 뿌려 구워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맛보는 싱싱한 생선구이였지요. 너 무 잘 구워져서 젓가락질하기 엄청 부담스러웠습니다. 그 외에는 점 162 밥상 163
심때와 별다를 게 없는 밥상이었고요. 한번 들인 맛에 익숙해져 다른 맛을 부담스러워하다니 참 사 람 많이 변했습니다. 도시에 살 땐 맛있는 집이 있다면 가서 맛을 보 아야 직성이 풀렸거든요. 돌이켜보니 그때도 좋아했던 메뉴가 단출 했습니다. 냉면, 만두. 특히 오장동 함흥냉면집 냉면 맛은 잊을 수 없 군요. 그리고 형이 상무로 있는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 음식들. 아내와 아들이 특히 그곳 음식을 좋아합니다. 가족이 좋아하니 음식을 보기 까치 둥지 만 해도 맛있습니다. 음식값이 비싼 편이라 형이 식사 초대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만. 서울에 가는 일이 많아야 1년에 한두 번. 가면 꼭 형에게 부탁합니다. 초대 좀 해달라고요. 참 쑥스럽습니다. 그래 서인지 그곳에만 가면 부자가 되고 싶어집니다. 냉면과 아웃백 음식을 못 먹는다는 것 빼고는 도시에서 맛볼 수 있 는 음식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다. 아내가 워낙 음식을 잘해서 도시에 살 때도 웬만큼 이름난 식당 음식은 마음에 차지 않았으니까요. 별거 아닌 재료를 가지고 소박하게 차려내는 아내의 밥상. 그 안에 온 세 상의 맛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밥상과 그 손맛이 없었더라면 시장 도 없는 이 마을에서 사는 게 참 고역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작년 겨울부턴가 집 근처 전봇대에 까치가 집을 지었습니다. 나뭇 가지를 물어다 얼기설기 집 짓는 모양이 참 딱했습니다. 하필이면 그 많은 자리 중에서 전봇대냐, 손을 휘저어 쫓아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뿐. 까치는 종종 마당으로 내려와 개에게 쫓길 때까지 개밥을 먹고 갔습니다. 먹고살려고 저러는데 싶어 내버려두었습니다. 까악깍 다급한 까치 소리에 마당에 나가보니 전기회사 직원 이 전봇대에 매달린 채 긴 작대기로 까치집을 찔러대고 있었습니다. 까치발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까치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 다. 까치집은 얼마 못 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164 까치 둥지 165
전봇대 아래에 가보니 흩어진 잔가지 옆에 진흙과 깃털과 풀로 엮 은 둥지가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거기에 부화 직전인 까치알 두 개가 깨져 있어 안타까움이 더했습니다. 얼마 후, 까치가 마당으로 날아와 개밥을 쪼다 말고 넋 나간 듯 전 봇대를 쳐다보더군요. 어, 그런데 다리를 다쳐 한쪽 다리로만 서 있 었습니다. 제 새끼, 제 둥지 지키려다 그리 된 모양입니다. 부모로 산 다는 건 날짐승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전기회사 직원은 떠났지만 까치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후로도 까치 한 쌍이 전봇대에 연결된 전선 위에 각각 앉아 있는 게 자주 눈 에 띄었습니다. 다리는 멀쩡해 보였지만 전봇대에 둥지를 만들지 않 았습니다. 까치가 괜찮다면 우리 집에 살아보라고 전봇대에서 떨어진 둥지를 텃밭에 갖다뒀습니다. 둥지의 겉은 진흙으로 둘러져 있었고 안쪽은 깃털과 가지로 푹신하게 만들어져 있었지요. 그 높은 전봇대에서 떨 어졌는데도 모습이 그대로일 정도로 충격 흡수도 잘 되게 만들어놓 166
았더군요. 멀리서 보면 잔가지들만 엮어놓은 둥지로 보였는데, 그 안 에 잘 만든 둥지가 따로 있었습니다. 까치는 그 둥지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을 잃은 둥 지에서 이름 모를 풀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본래 둥지 만들 때 쓰인 진흙에 씨가 묻어 있었는지, 어디서 날아와 자리잡은 씨인지 모릅니 다. 비를 맞으면 진흙이 흐물흐물해졌다 해가 나면 바짝 마르기를 반 복했으니까요. 둥지는 의외의 주인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젠 새 둥지라 할 게 아 니라 풀의 집이라 해야겠습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흙과 풀과 가지가 기묘한 인연으로 모여 까치 둥지가 되고 다시 풀의 집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이 인연의 기묘함이 흩어지는 과 정을 지켜보게 되었지요. 수많은 인연이 있겠지만 부모와 자식으로 이어진 인연만큼 소중한 것도 없을 겁니다. 서로 다른 영혼이 부모와 자식의 인연으로 만나고 헤어지게 되는 섭리. 둥지를 지켜보고 있으 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는지요. 소중한 것들 아들은 끈으로 묶는 운동화를 지독히도 좋아합니다. 지난 추석 차 례 지내러 통영 갔을 때, 서울서 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사준 겁니 다. 난생처음 제가 고른 운동화이기도 하지요. 자꾸만 풀리는 끈을 묶 을 줄 몰라 애먹으면서도 아들은 늘 그 운동화만 신고 다녔습니다. 햇볕이 따스한 날 오후, 아버지가 실수로 말린다고 마당에 내놓은 그 운동화에 불똥을 튀기고 말았습니다. 불똥은 운동화 코 부분에 그 운동화 상표처럼 초승달 모양을 만들어놓고 꺼졌습니다. 아들은 울 먹거렸습니다. 아버지는 미안했지만, 그렇게 비싼 운동화를 새로 사 줄 수 없었습니다. 대신 도시에 가게 되면 구멍 난 부분에 가죽을 덧 168 소중한 것들 169
대어 주겠다고 약속했지요. 다음날 아침, 아들은 태연하게 그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갔습니다. 며칠 그러다 말겠지 하였는데 한 달이 지났습니다. 불편하지 않느냐 물었습니다. 다른 운동화도 흙 들어와요. 털어서 신으면 돼요. 아들에게 그 운동화가 왜 그리 소중한지. 오늘은 꼭 이유를 물어봐야겠습니다. 니다. 저 숨기고 싶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답이 튀어나왔습니다. 무능 함을 청빈함으로 치장하고 살아온 자. 다른 말은 변명처럼 여겨졌습 니다. 오늘 아들의 필통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사준 필통인데, 겉부분을 덮고 있는 비닐이 찢어져 일어나 있었습니 다. 투명 테이프로 그걸 붙여주었습니다. 아내는 아들에게 물건을 함 부로 쓴다고 나무랐지만 저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안은 멀쩡하니 한참을 써도 쓰겠다, 아내는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속옷. 끝부분이 해어져 너덜너덜했지요. 참 기가 막혔습니다. 늘 그렇게 살았던 터라 아들에겐 구멍 난 신발, 테이프로 덧댄 필 실수는 감추고 싶은 법입니다. 아들이 그 운동화를 신고 있는 걸 보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거기에 자꾸 신경을 쓰다 보니 아들이 일부러 돈 못 버는 아버지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격 지심까지 일었습니다. 가난한 건 아버지가 자청한 일, 아들 탓이 아닙니다. 아들의 운동 화를 보며 가난한 걸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아닌가, 자문해보았습 니다. 아니다. 그러면서도 운동화는 신경에 거슬렸습니다. 가난도 실 통, 너덜거리는 속옷 같은 게 아무것도 아니었나 봅니다. 저야 옷을 물려 입을 데라도 있지만 아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걸 모르고 지냈군 요. 그래도 늘 웃는 아이. 무엇이 부끄럽고 부끄럽지 않은 것인지 아버지가 아 들에게 배워야겠습니다. 그리고아들에게그운동화가왜그리 소중한지 묻기보다 저에게 가장 소중한 게 무언지부터 솔직하게 물 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수라고 여기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다시 캐물었지요. 말을 잃었습 170 소중한 것들 171
다 왔습니다. 아이들을 더 많이볼수없어섭섭했지만일찍오란말 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애들 중에서 늘 꼴찌로 어머니, 아버지를 외치며 달려오는 아 이들. 그때가 하루 중 제일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 아이들이 벌써 아 홉 살, 여덟 살입니다. 그사이, 세상에서 좋다는 많은 것에서 멀어진 대신 아이들은 부모 아이들 세상 를 얻고 부모는 아이들을 얻었습니다. 아쉬워할 것도, 더 바랄 것도 이젠 없습니다. 이 마을로 이사 올 때 아들은 여섯 살, 딸은 다섯 살이었습니다. 부 모가 맞벌이하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놀이방에 다니던 아이들이었 지요. 이사 오자 아이들은 눈 떠서 잠들 때까지 부모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햄버거나 프라이드치킨이 없어도 배부르고, 놀이동 산이나 동물원이 없어도 신이 났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이게 꿈인 가 생시인가 싶었습니다. 가족이 함께 있으니 낯선 시골 생활과 다가 선 막막한 현실마저도 그저 즐거운 놀이만 같았습니다. 다음해부터 아이들은 손 잡고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선생 님이 제발 아이들 집으로 귀가시켜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신나게 놀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려고 노력했지요. 맹자의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매일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아이들에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세상이 바빠지고 부모가 모두 일터로 나가게 되면서 좋은 환경 이 상품으로 만들어져 팔리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서툰 부 모보다 그런 환경이 아이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아이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라고, 또 자랍니다. 자기가 있 172 아이들 세상 173
는 환경을 다른 환경과 비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천성 이 낙천적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리 짜증나는 상황 이 되어도 재미를 찾는 아이들을 보세요. 우리 아이들은 도시에서 놀이방과 집밖에 몰랐습니다. 놀이방에서 배우고 놀고 집에서 놀고 자고. 놀이방과 집 사이는 온갖 위험이 도 사리는 곳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시골에 와서는 집과 학교 사이에 참으로 놀라운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나 집에서 가 르쳐주지 않는 세상. 친구들과 뒹굴면서 알게 된 자유롭고 신나는 세 상. 그 세상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펼쳐지고 아이들의 언 어로만 설명되지요. 그리고 그 세상에서 겪은 일은 추억이란 이 름으로 마음에 남습니다. 하고, 한자 두 글자를 써야 합니다. 충분히 놀지 않으면 만화영화도 못 보고, 책도 못 읽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책에서 옳다고 한 것 을 앵무새처럼 따라 배우기보다 스스로 옳은 걸 찾기 바라기 때문입 니다. 여기서 부모가 할 일이라곤 배고프다면 밥 주고, 다쳐 오면 약 발 라주고, 더러워진 옷 갈아입히고, 같이 놀고, 새로운 모험거리 귀띔 해주고, 싸우거나 못된짓할때벌세우고, 방에서뒹굴때내쫓고, 지켜봐주고, 신나서 자랑할 때 들어주고, 슬퍼할 때 안아주고, 졸릴 때 품어주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든 간에 집이 세상 어디보다 좋고 편하고 행복한 곳이라는 걸 깨닫 게 하려 애썼습니다.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누리는 혜택을 시골 아이들이 못 받는 걸 아쉬워할 것도 없습니다. 시골 아이들은 놀면서 다치고 상처 나면 서 자기 마음대로 깨우쳐가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아이 들마다 하는 짓도 참 다르고 생각도 참 다릅니다. 어른들 말로 하자 면 개성이 뚜렷한 아이들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집으로 올때꼭놀다와야합니다. 오는길에못 놀았으면 집 근처에서라도 놀아야 합니다. 놀기 위해 숙제를 끝내야 176 아이들 세상 177
니까요. 오가며 우물을 깨끗이 청소만 하면 옛 물맛을 맛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을 뿐입니다. 그 우물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건 집집마다 마을 수도가 놓이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네요. 이 마을 수도는 정수장에서 정화된 물을 받는 도시의 수도와는 다릅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입니다. 집 안에서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데 누가 힘들게 물동이를 이고 우물 지고 우물을 찾겠는지요. 편리함에 물맛이 잊혀졌습니다. 가끔은 그 맛이 그리워 우물을 찾는 이도 있었겠지요. 보름달이 우 물에 가득 찬 날, 자식을 위해 정화수를 뜨러 온 어머니들도 있었을 집 뒤편에 우물이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면 얼마 전까지 마을 사람 모두가 물을 길어먹던 우물이랍니다. 물맛이 너무 좋아서 마을 가운데 있는 우물은 제쳐두고 마을 끝인 이곳까지 물을 길으러 겁니다. 그러나 그 물맛을 모르는 아이들이 점점 자라고 물맛에 인이 박인 노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면서 우물은 쓸쓸함에 대해 아주 긴 명상에 들어갔을 겁니다. 왔다는군요. 시멘트로 우물 안팎을 발라놓은 걸 보면 몇십 년 전에 손을 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부터 물을 길어먹지 않았냐고 물 으면 노인들은 고개만 젓습니다. 대신 물맛이 좋았다는 말만 되풀이 합니다. 집 뒤에 우물을 두고도 물을 맛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살러 온 후, 한 번도 그 물을 먹는 사람은커녕 긷는 사람도 못 보았으 쓰지 않은 지 10년이 되었는지 20년이 되었는지도 모르는 우물이 자꾸만 눈에 밟혔습니다. 자꾸 퍼주어야 우물물이 썩지 않는 다는 말,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고요. 텃밭에 물을 뿌릴 178 우물 179
때가 되면 물뿌리개를 들고 우물가에 섰습니다. 깊지 않은 우물이라 우물턱에 엎드려 물을 길을 수 있었지요. 사람은 먹지 못하지만 아 니, 안 먹지만 채소에게는 좋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몇 해 동안 우물가를 서성인 사람은 저와 제 아이들뿐이었군요. 우물 안에는 이끼가 잔뜩 끼었고 다슬기 같은 게 눈에 띄었습니다. 가끔 가다 개구리 한두 마리 보일 뿐. 우물 중간쯤에서 물이 쉼 없이 졸졸 흘러내렸습니다. 우물이 넘치는 법은 없었지요. 올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우물은 저도 모 르는 사이에 감히 다가설 수도, 그렇다고 모른 체할 수도 없는 존재 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 이상은 우물을 그대로 놔둘 수 없다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여름이 지나면 우물 안에 들어가 청소를 할 수 없을 것같았고, 그렇게되면또한해를무거운마음으로 지낼 수밖에 없 었지요. 먼저 플라스틱 물통에 줄을 묶어 두레박 삼았습니다. 우물물이 반 쯤 줄 때까지 계속 물을 퍼냈지요. 우물 중간에서 물이 흘러들고 있 었습니다. 우물에 들어갔습니다. 우물을 지키고 있던 차고 맑은 기운이 온몸 을 감싸고 돌았습니다. 그 기운은 참 쓸쓸하였지요. 발 아래는 크고 작은 돌투성이였습니다. 돌을 치우느라 물을 퍼 올 리느라 쉴 틈이 없었습니다. 돌이야 치우면 그만이었습니다. 문제는 오랜 세월 동안 쌓인 뻘. 뻘을 걷어내려면 물을 모두 퍼 올려야 했습 니다. 우물벽에 붙은 이끼를 뜯어 물구멍을 막았습니다. 플라스틱 물 통으로 박박 긁어 물을 모두 퍼 올렸습니다. 집사람은 우물턱에 앉아 서 물통을 받아주었고요. 모터를 돌려 물을 빼내면 되는 걸 가지고 무슨 난리냐며 마을 사람 몇이 말로 거들다 갔습니다. 뻘을 뒤집어쓴 우리는 그저 웃고만 말았 습니다. 모터를 돌리고 세제를 써서 청소할 요량을 가진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럴 거면 굳이 우물을 청소할 필요도 없었거든요. 우물 청소는 우리 가족이 마실 물을 마련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하루를 시작하게 하면서 마을을 지키던 우물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물가에 모이지 않지만 여전히 그 물맛과 물 을 길으러 다니던 시절을 기억하며 우물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보호 한다는 게 우물을 더 손상시키지 않는 정도입니다만 그만한 관심조 차 없었더라면 우물은 이미 우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관심이 살아 있었기에 우물도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180 우물 181
우리 내외는 우물을 청소한 다음날 아침, 약속이나 한 듯 고열에 시달리면서 눈을 떴습니다. 몸살이 났던 거지요. 거동도할수없을 도 물을 길어오라 시킬 겁니다. 그래서 생명의 기본인 물부터 소중하 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도록 할 작정입니다. 정도로 열이 올라 집사람은 차를 얻어 타고 도시의 병원에 다녀왔습 니다. 병원에 다니는 걸 싫어하는 저는 그냥 앓았습니다. 드러누운 채 이런저런 상념에 빠졌지요. 우물 속에서 느낀 그 차고 쓸쓸한 기 운이 제 뼈 속까지 스며든 게 아닌가 싶더군요. 얼마나 우물이 외로 웠으면 그랬을까 싶은 생각이 드니 아픈 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흘쯤 앓고서야 예전의 몸을 되찾았습니다. 이제 우물을 덮을 뚜껑을 만들어야 할 차례입니다. 시간을 두고 우물에 두레박을 걸 지붕을 씌울 작정입니다. 그렇게 해놓으면 지금은 백발이 된 할 머니들이 열여덟 처녀 때처럼 물동이를 이고 하나 둘 나타나려는지 요. 그 물맛을 기억하는 남정네들이 우물에 빙 둘러서 우물물로 건 배를 하려는지요. 그 우물에 여름이 찾아오면 벌거숭이 아이들이나 들일을 나갔다 온 남자들이 웃통을 벗어젖히고 등목을 하기도 하려 는지요. 이 편리한 세상에 우물물을 마시며 살겠다는 발상 자체가 한심해 보일지 모릅니다. 물을 길어와 밥을 짓고 몸을 씻기란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물을 더 소중하게 하지요. 아이들에게 182 우물 183
마음으로야 벌써 밭을 매고도 남았지만 집에도 할 일이 쌓여 마음 만 부산해졌습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풀은 더 무성해지고 볕은 더 뜨 거워질 겁니다. 이때를 놓치면 친구네 겨울 양식도 마련할 수 없게 됩니다. 집안일을 아내에게 떠맡기고 밭으로 달려갔습니다. 한나절 김을 맸 는데도 일한 표가 별로 나지 않았습니다. 담배를 물고 밭에 퍼질러 앉 덕률이 으니 멀리 비어 있는 친구 집이 보였습니다. 빈집이 껄껄 웃었습니다. 씨는 뿌리는 시기가 따로 있습니다.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늦어도 안 되지요. 그렇다고 씨 뿌리는 날이 몇 월 며칠이라고 딱히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농사일에 서투른 저는 마을 어른들이 씨 뿌리면 덩달아 뿌립니다. 그분들끼리도 씨 뿌리는 때가 조금씩 다르지만, 김 매지 않은 밭에 씨 뿌리는 법은 없습니다. 어머니 병간호하느라 객지 밥 먹게 된 친구 덕률이가 마을에 다녀 간지한달이넘었습니다. 친구가 부탁한 작은 밭도 아직다못맸는 데 2백 평 남짓한 밭도 매달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쉬지 않고 매달려 도 일주일은 족히 걸릴 일이었습니다. 덕률이 이야기 좀 해야겠습니다. 덕률이는 길게 머리를 기르고 다 닙니다. 지리산에서 도를 닦다가 어머니 병 수발하러 내려왔습니다. 자기 말로는 도를 다 깨우쳤기 때문에 굳이 지리산으로 돌아갈 필요 도 없다고 합니다. 도를 깨치고 나니 사는 일이 스치는 바람 같아졌 답니다. 연연해하지 않는다, 이게 덕률이의 모토인 듯합니다. 덕률이는 작년에도 자기 밭에 풀이 무성하게 자란 다음에 김을 맸 습니다. 할랑할랑, 살랑살랑, 한들한들. 덕률이 일하는 게 딱 이렇습니다. 그래서 언제 다 김 매겠냐는 어른들 성화는 184 덕률이 185
한 귀로 듣고 흘렸지요. 어쨌거나 김을 다 맸고 그 밭에 고구마를 심 었습니다. 저도 덕률이랑 일하다 보면 짜증이 났습니다. 다른 할 일이 있는 저와 당장 밭일밖에 할 일이 없는 덕률이. 덕률이의 시간은 보통 사 람의 시간과 다릅니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고, 하루가 영원이나 마 찬가지입니다. 시간의 구분을 무의미하다 여기는 겁니다. 그날 잠깐 쉬는 사이, 덕률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한 저를 보면 뭐라 하겠나 싶었습니다. 뭐 할라꼬 그리 힘들거로 일하노. 그러면서 껄껄껄. 덕률이가 부탁한 건 고구마 씨를 뿌려달라는 거 였지요. 고구마 씨? 씨고구마를 밭에 심어놓아 달라는 얘깁니다. 씨 고구마에서 줄기가 나오면 줄기를 하나씩 꺾어 밭에 심습니다. 그 줄 기 하나에서 고구마가 주렁주렁 땅속에서 달리게 되는 거고요. 그러 니까 2백 평 밭 일부를 김을 매서 고구마를 심은 다음, 고구마 줄기 가 다 자라기 전까지 나머지 김을 매라는 게 덕률이의 부탁이었던 겁 니다. 가을에 고구마를 수확하면 나눠 먹자는 거지요. 그날 기어코 김을 맨 밭에 씨고구마를 심었습니다. 덕률이네는 마 을에서 가장 늦게 씨고구마를 심은 집이 되었지요. 그러나 심었다는 186
게 중요합니다. 심지 않았다면 고구마 하나도 거둘 수 없으니까요. 이 마을 고구마 농사는 쌀 농사만큼이나 중요하답니다. 쌀과 고구 마가 농부의 1년 수입을 좌우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 농 사를말로짓는친구를둔이사람. 벌써친구한테 물이 들었는지 너 무 일을 서두른 게 아닌가 후회되었습니다. 즐겁고 신나게 할 일을 툴툴거려가며 하였으니까요. 나머지 밭은 덕률이처럼 놀랑놀랑, 노래도 부르고 풀과 곤충과 얘 기도 하면서 김을 매야겠습니다. 그걸 보면 고구마도 신이 나 줄기를 광신지업사 뻗어 올리겠지요. 큰방 벽을 손보는 바람에 도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왕 도배하는 거 닥종이로 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외가가 통영 중앙시장에서 할 아버지 대부터 종이점방을 하고 있어서 외삼촌께 전화를 걸었습니 다. 외삼촌은 닥종이는 비싸고 도배하기도 어렵다면서 한지 무늬 벽 지를 바르라며 보내주었습니다. 도배하는 날, 저절로 목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광신지업사 외손자 솜씨를 보여주지. 그러나 벽지를 정확하게 자르고 골고루 풀칠하고 무늬 맞춰 붙이 는 일은 마음 같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 힘들다는 티를 낼 수도 없 188 광신지업사 189
었지요. 점심때가 지나도 도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점심상 차리러 나간 사이, 벽에 기대어 앉아 방을 둘러보았 습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한지같이 단아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아직도 그 종이점방에는 대를 물린 주판과 자가 남아 있고, 그 얼굴을 빼다 박은 외삼촌과 숙모가 있습니다. 점심도 잊고 그 옛날, 종이점방에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회 상하면서 열심히 벽지를 발랐습니다. 방이, 마음이, 세상이 다 환해지는 듯했습니다. 아침에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늘 향수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서른아홉이 된 지금도 고향으 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인 그곳에 지금 아버지, 어머니와 외가가 있고 큰고모가 살고 있습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니 예전처럼 향수병을 앓지는 않습니다. 지금 은 저구마을을 고향으로 여기고 살고 있지만 반드시 통영 땅에 뼈를 묻고 싶습니다. 통영을 그리워하며 산 까닭은 제 기억 속에 행복했던 날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외갓집이 있었습니다. 시 계탑 오거리에서 충렬사 쪽으로 가다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 면 아름다운 기와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늘 따뜻한 햇볕 내리쬐고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 의 무대가 된 고장, 통영은 제 고향 입니다. 태평동 528번지. 제가 태어난 곳이고 떠날 때 살던 곳입니 다. 지금은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통영초등학교 4학년 때 고향을 떠났습니다. 여름방학 며 칠 전이었는데, 어머니가 느닷없이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서울로 이사 간다. 그 한마디로 고향과 이별이었습니다. 그리고 열한 살 아이는 하루 웃음꽃 피던 그 집. 그 무렵 저희 집도 잘살아서 남부러울 게 없었지 요. 통영 시내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 살았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외갓 집이 좋았습니다. 늘 누군가가 맞아주고 놀아주고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통영 한복판 중앙시장 안에 있는 종이점방, 광신지업사. 그 곳에만 가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지요. 세상에서 제일 번화하고 맛 있는 곳이었습니다. 장판을 놓고 재단하던 작업대 위에 앉아서 세상 을 굽어보고 누워서 하늘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책을 좋아하게 190 광신지업사 191
된 것이나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것도 그곳에서 풍기던 종이 냄새 때 문이 아닌가 합니다. 외할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했습니다. 두 외삼촌도 외할아버지를 닮 아 기골이 장대합니다. 할아버지는 늘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할 아버지를 따라 남망산 활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시위를 당기는 할아 버지는 거인 같았습니다. 그 모습, 아직도 생생합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활통은 할머니 방에 걸렸습니다. 그 활통, 제가 세상에 서 가장 탐을 내는 물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외할머니는 몇 해 전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인자하고 우스 갯소리도 잘했지만 활기차고 대담하고 엄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 니의 역할이 바뀐 듯했지요. 그래도 애아버지가 된 후에도 이 사람, 할머니 젖을 만지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그러면 할머니 빙긋 이 웃으시며 예끼 놈, 엉덩이를 두드렸습니다. 원앙처럼 금슬이 좋기로 이름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들 둘과 되어도 모두 한자리에 모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광신지업사도 자리는 그 자리이지만 예전처럼 북적대지 않습니다. 막냇삼촌의 아이들마저 모두 객지로 유학을 가서 쓸쓸합니다. 그래 서 통영 갈 때마다 꼭 들러서 우리 아이들을 풀어놓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놀던 작업대 위에 올라가고, 아버지가 가지고 놀던 주판과 자를 휘두릅니다. 외삼촌과 숙모는 예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랬 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사탕을 물려주고 과일을 들려줍니다. 조용하 던 종이점방이 시끌벅적해지면 시장 사람들도 뭔 일이 있나 기웃거 리지요. 몇십 년째 점방 앞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노인들은 저를 알 아보기도 합니다. 삼촌의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오면 종이점방 작업대 는 그 아이들 차지가 되겠지요. 중앙시장을 지나치다가 작업대 위에 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신다면 그 아이들이 모씨 핏줄이고 광신지 업사 자손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딸 다섯을 두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지요.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옥자, 옥보, 옥실, 옥희, 병규, 용규, 옥선은 각자 집안을 이끌며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점방을 지키는 막냇삼 촌과 제 어머니만 빼고 모두 객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절이 192 광신지업사 193
장기를 가르치려 드는 아버지와 장기를 놀이로만 여기는 아이들의 한판 승부는 엉망진창, 요절복통이었습니다. 져도 재미있고 이겨도 재미있는 놀이. 놀자고 두는 장기에서 이기는 법만 가르치려 든 아버 지만 딱하게 되었지요. 아이들끼리 장기를 두라고 해놓고 마당에 나와 담배를 피웠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며 만나게 될 수많은 규칙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 장기의 규칙 습니다. 그래도 까르르 깔깔. 아이들 웃음소리에 집이 들썩거립니다. 어디서 보았는지 아들이 장기를 두자고 며칠째 성화였습니다. 벌 써 장기 둘 나이가 되었나, 제 어린 시절로 거슬러가 보았습니다. 뭐, 두어도 될 나이다 싶었습니다. 아들이 장기판에 나오는 한자 정도는 읽을 줄 알기도 했고요. 장기짝을 사오자 딸도 덩달아 장기를 두겠다 고 장기판 앞에 앉았습니다. 어디에 장기짝을 두고 어떻게 장기짝을 움직이나 침 튀기며 이야 기해주었습니다. 두 아이는 새하얀 플라스틱 장기짝만 만지작거릴 뿐, 도무지 알아듣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두어가면서 장기를 가르치 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지요. 그러니까 중학교 시절까지는 장기를 두었던 듯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장기짝.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처음 배울 때, 장기짝은 나무로 만든 거였습니다. 당시에는 그것도 공산품이었을 겁니다. 흰 플라스 틱으로 만든 장기짝을 보고 무척 좋아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장기짝보다 예쁘고 깔끔하고 촉감도 좋았지요. 장기짝이 좋다 는 이유로 한참 장기를 두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장기짝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장기 두는 건 관심 이 없고 장기짝 가지고 놀기를 더 좋아하더군요. 조금씩 한자를 배운 194 장기의 규칙 195
애들이라 한자 알아맞히기 놀이도 재미있나 봅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제법 길을 찾아 장기짝을 움직여갑니 다. 딸은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형이고, 아들은 한 수를 두는 데도 몇 분을 망설이는 형입니다. 제 머리로 확실한 판 단이 설 때까지 아들은 계산을 하고 또 하지요. 같이 두는 사람, 참 답답하게 만드는 전법입니다. 딸이 재미없다 손을 들고 간 자리에 아 버지가 대신 앉습니다. 아버지 역시 답답해서 가슴을 치다가 수를 알 려주고 맙니다. 장기는 지면서 배우는 거란다. 왜 네 실력은 생각하지 않고 이기 려만 드니? 어디서 타고난 승부근성인지 몰라도 참 대단합니다. 절대 지는 장 기를 두려 하지 않지요. 지고 나서는 눈물을 글썽거립니다. 그걸 보 고 아버지는 박수를 쳐줍니다. 열심히 둬서 쳐주는 박수란다. 그러자 아들도 눈물을 훔치며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아버지도 잘 두셨어요. 축하합니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는 법. 승자와 패자가 없으면 승부가 없 지. 네가 승자가 되면 패자를, 패자가 되면 승자를 존중해야 하는 거 196
야. 이기고 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울림이야, 알겠니? 사나이처럼 말을 주고받는 아버지와 아들. 살다 보면 이기고 지는 걸 반복하겠지요. 그러나 서로를 존중하는 법은 잊지 않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규칙보다 규칙이 만들어진 이유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 는 걸 이제 좀 알겠습니다. 장마의 추억 무더위가 시작되니 장마가 오히려 그립습니다. 장마라. 오호 츠크 해에서 발달한 차고 습한 고기압과 북태평양에서 발달한 따뜻 하고 습한 고기압이 우리나라를 오르내리며 세력 싸움을 하면서 비 를 뿌리는 때를 장마철이라 부르지요. 아주 먼 나라에서 생겨난 고기압이 우리나라 상공에서 매년 만나 는 일,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참 신기한 일이지요. 비가 쏟아지는 하늘 먹구름을 쳐다보며 저 고기압은 시베리아산이 고 저건 하와이산. 그렇다면 저건 러시아산이고 저건 미국산? 그 두 세력이 갈라놓은 군사분계선이 그저 예사롭지만 않아질 겁니다. 그 198 장마의 추억 199
래도 장마는 겨우 한 철일 뿐입니다. 장마 하면 햇볕에 말리지 못해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 나는 수건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 보면 땡볕이 내리쬐는 날, 장대를 중간에 세운 빨랫줄에 빨래를 걸어두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지요. 번지수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멋들어진 이름을 상호로 쓰는 데보다 번지수를 상호로 쓰는 데가 많았습니다. 베트남의 태양은 무척 뜨거웠고 따가웠습니다. 그 태양 아래서 베 트남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오토바이도 많았지만, 자 전거에 비하면 별게 아니었지요. 호텔 발코니에서 2차로 아스팔트 도로를 꽉 메운 자전거와 오토바이 행렬을 내려다보면 꼭 개미 떼처 럼 보였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 쉬지 않고 달리는 지 이해하기 힘들었지요. 팜응라오 거리는 주도로도 아니었습니다. 땡볕을 찾아 베트남에 간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호치민 시로 바뀐 사이공에서 한 달을 강남 제비처럼 지내다 왔습니다. 그저 남국의 느 긋함에 젖어 있고 싶었던 거지요. 피부가 검은 토착 베트남족과 북베 트남에서 내려온 중국계 베트남인 그리고 인도계 베트남인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서울의 이태원 같은 팜응라오 거리에서였지요. 제가 머물렀던 곳은 269 호텔. 6층 높이 직사각형 건물이었습니 다. 명칭은 호텔이지만 여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발코니가 있어서 팜응라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늘 다니던 식당은 215 카페. 중국계 베트남인이 주인이었는데, 외모가 한국 사 람과 다를 바 없어 마음이 편했습니다. 269 호텔과 215 카페? 숫자는 도로변에 있는 215 카페에서도 자전거와 오토바이 행렬을 지켜보 았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일이 걷는 일과 별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어떤 여자 둘이 한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한 여자는 짐받 이에 앉아 한쪽 핸들을 잡았고 다른 여자는 나머지 핸들을 잡은 채 안장에 앉아 짐받이 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페달은 각각 하나씩 밟고 있었지요. 둘은 뭐가 재미있는지 깔깔깔. 그 모습에 놀라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자전거를 탔든 오토바이를 탔든, 그곳이 혼잡한 거리든 아니든 천 천히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나란히 한 채 느긋하게 잡담하며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일상적이었습니다. 그 사람들 사이로 속력을 내며 200 장마의 추억 201
달리는 자전거, 오토바이도 일상적인 모습이었고요. 자전거나 오토 바이를 타고 달리면서 친구를 만나더라고요. 그러니까 친구를 만나 는 곳은 카페 같은 데가 아니라 도로 위였습니다. 저도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녔습니다. 시내 중심부 왕복 4차로에 도 신호등이 없었지요. 교차로에서 행렬이 뒤엉키기도 하였지만 금 방 풀렸습니다. 행렬이 뒤엉키는 까닭은 저처럼 행렬의 흐름을 잘 모 르는 사람이 끼었을 때의 일이겠지요. 얼마 후, 저도 베트남 사람처 럼 교통 흐름에 몸을 내맡길 줄 알게 되었습니다. 흐름을 잘못 타 다 른 길로 접어들더라도 조금 가다 다시 돌아오면 된다는 여유를 가지 게 되었지요. 길도 눈에 익었고요. 그새 사귄 베트남 친구들과도 길 위에서 만났습니다. 나란히 자전 거를 타고 가며 얘기를 하다가 헤어졌습니다. 그 길 위에서 한 베트 남 친구가 문제를 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오토바이 뒤에 태운 채 달리는 모습을 봐도 둘 사 이가 어떤지 알 수 있거든. 남자가 오토바이를 빨리 달릴 때 사이가 좋은 걸까? 늦게 달릴 때 사이가 좋은 걸까? 답이 뭘까요? 저는 빨리 달리는 쪽이라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 구가 말했습니다. 땡! 빨리 달리는 건 제발 좀 나한테서 떨어지라는 뜻이야. 좋아하 는 사이라면 아주 천천히 달리지. 할 얘기가 얼마나 많다고. 그 말을 듣고 보니 주위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대부분이 옆 사람을 보며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옆 차로로 쌩쌩 달리는 자 전거, 오토바이가 있었지요. 그러니까 아예 한 차로 정도가 얘기하는 자전거들의 차지였던 거지요. 그렇다고 도로 위가 늘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토바이가 내뿜는 매연이 심해서 아오자이를 잘 차려 입은 여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팔뚝까지 올라오는 긴 장갑을 끼고 있었으니까요. 한참 자전거 를 타고 나면 코 안이 새카매졌습니다. 오후 네댓 시쯤. 저는 늘 6층 발코니에서 스콜을 기다렸습니다. 그 시간이 되면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고, 보이지 않 던 제비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발코니에 앉아 있 으면 갑자기 제비들이 눈앞으로 휙휙 스쳐가는 바람에 깜짝 놀라기 도 했지요. 조금 지나면 사이공 강 쪽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려 왔 습니다. 먹구름 사이로 번개가 번쩍거렸습니다. 그리고좀더지나면 우두둑. 비가 한 방울씩 떨어졌습니다. 빗방울은 손톱만큼이나 커서 그대로 맞으면 따가울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아스팔트 도로 위의 자 202 장마의 추억 203
전거 행렬은 태평했습니다. 비가 대야로 물을 쏟아 붓듯 쏟아지면 도로는 순식간에 텅 비게 됩 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광경은 마법 같 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긋함. 그래서 마음이 편해지고 따뜻해지면 아무 일 없어도 노란 비옷을 입고서 자전거를 타고 장맛비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았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아주 급한 일이 있는지, 노란 비옷을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텅 빈 아스팔트 도로를 혼자 달리더군요. 길게 이어진 검은 도로 위를 노란 물체 하나가 선을 쭉 그으며 지나가는 것 같았 습니다. 요즘도 가끔 그 노란 비옷을 입은 사람이 생각납니다. 30분 이면 끝나는 스콜을 기다리지 못하고 모두가 태평하게 지켜보는 그 길을 달려야 했던 사연이 여전히 궁금합니다. 장맛비가 내리던 어느 날, 창가에 앉아 한참 동안 마당을 내다보았 습니다. 장맛비가 스콜처럼 금방 그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는 건, 베트남에서 본 노란 비옷 입은 사람 때문만은 아 니었습니다. 해바라기 노란 꽃이 비에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서만도 아니었습니다. 노란 비옷을 입고 학교 간 아이들이 무사히 집 으로 들어서기를 바라서도 아니었고, 시베리아와 북태평양 고기압의 안부가 궁금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 비가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 고 온 생명을 살린다는 고마움. 그러니 잦은 비가 주는 불편함 정도 204 장마의 추억 205
다. 뒷짐을진채소를끄는노인의굽은등뒤로는벌써노을이물들 었습니다. 아직도 군불을 지피는 집 굴뚝에서 연기가 느긋하게 피어 올랐습니다. 그 연기를 보니 잊었던 시장기도 피어오릅니다. 나물 캐는 재미에 푹 빠진 아내 손을 끌면서 소리쳐 아이들을 불렀 습니다. 집까지 달리기 경주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부부는 소 보다, 지는 해보다 느리게 걸었습니다. 오늘 저녁도 맛있고 풍성할 진수성찬 겁니다. 어디 진수성찬이 따로 있나요? 아내가 저녁 지을 쌀을 앉혀놓고는 반찬거리 없다며 망초 캐러 가 자고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올봄에야 온 들에 널려 있는 망초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살짝 데쳐서 된장에 버무려 먹는 그 투박한 맛. 얼 른 아내를 따라나섰습니다. 여기저기 나물들이 쑥쑥 올라온 밭둑은 그냥 그대로 샐러드 바였습니다. 망초를 캐러 간 사람들이 옆에 난 씀바귀, 고들빼기, 달래까지 손대고 말았지요.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과 아이 들을 따라온 강아지는 술래잡기하느라 바빴습니다. 밭일을 마치고 저녁 지으러 가는 아낙들 발걸음이 분주해졌습니 그림같이 사는 일은 그림 속에나 있는 줄 알고 살았습니다. 우리 식구가 그 그림 속으로 들어와 살 줄 몰랐지요. 그러나 이런 사실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행복은늘먼곳에있고, 그멀리있 는 행복을 바라보며 사는 거라 생각했지요. 그놈의 생각, 참 몹쓸 녀 석입니다. 마을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곤 합니다. 집집이 행복한 사연이 다르고 모습이 다르지만 행복은 숨 길 수 없거든요. 206 진수성찬 207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경운기를 타고 늘 같이 다니는 최씨 부부 와, 남편을 보면 아저씨 하며 손을 흔들며 달려가는 봉개 형 형수. 늦게 퇴근한 남편을 위해 낡은 탁자에 저녁상을 차려내고 턱을 괸 정 선생 부인. 남편이 모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형수와 승객이 뭐라든 내려서 아내 손 한번 쥐어보고 가는 명수 형. 귀가 잘 안 들리는 남편 탓에 마을에서 목소리가 제일 커진 성관이 어머니. 당장 우리 집 주위에 사는 사람만 떠올렸는데도, 모두 그림같이 살 고 있네요. 아기자기한 이웃들의 사랑이 그림 같아서, 우리 식구를 아버지 둘러보았더니 비슷했습니다. 그걸 글로 써놓고 보니 그림 같군요. 저, 참 뻔뻔한 사람이지요? 창밖을 보니 아들이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겠다며 마당으로 장기판 을 들고 나가는 게 보였습니다. 한때 수학선생이었던 할아버지는 깐 깐하게 장기를 가르쳤습니다. 몸을 배배 꼬고 앉아 있는 아들의 모습 이 영락없이 제 어릴 때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할아 버지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아들은 달아나버렸습니다. 제가 아들만 했을 때 아버지에게서 장기를 배웠습니다. 장기짝을 잡아보기도 전에 장기 두는 법을 한참 들어야 했지요. 아부지, 한판 두실랍니꺼? 아버지가 된 아들과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가 장기판을 두고 앉았 210 아버지 211
습니다. 칠순 가깝지만 정정하고 당당해서 어디서든 목청을 드높이 는 아버지가 어이없는 실수를 연발했습니다. 백발에 돋보기 쓴 모습 이 얼마나 멋있냐던 아버지도 나이를 속일 순 없나 봅니다. 가족을 위해 힘겹게 살아왔던 아버지에게 보답할 게 별로 없는 아 들은 착잡했습니다. 속으로 울면서 아버지를 이겼습니다. 져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바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젠 아버 지의 아버지가 될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앉아 무슨 일이든 의논할 상대가 못 되었던 거죠. 그런 아버지가 일 부러 져주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 얘기만 나 오면 주눅이 드는 아들이 아버지의 깊은 뜻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잠깐이나마 아버지 품에 안겼다 나온 듯했습니다. 아버지, 참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가족밖에 모르고 산 아버지는 가족답지 못했던 저를 쉬지 않고 질책했습니다. 도시에서 저는, 제 앞가림하기도 바빴습니다. 부모에게 형제에게 손 벌리지 않 으면 다행이다 여기며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글을 써도 제대 로 된 글을 쓰지 못하면서 전전긍긍하는 아들이 아버지 눈에 찼을 리 없고, 그렇게 사는 모습이 안타까웠을 겁니다. 글도 좋지만 먼저 먹 신문에서 이 글을 읽은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얄마, 내가 일부러 져준 기다. 아차, 아차 하며 유난스레 장기를 두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습 니다. 세상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지만, 저희 집안에는 부모 이기 는 자식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기를 못 펼 만큼 카리스마가 강하기도 합니다. 뭘 해도 대강대강 하는 법이 없는 분이고요. 그런 아버지 눈에 이 아들은 늘 모자라고 세상살이가 서툴렀습니다. 같이 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사람다운 일이라고 저를 타일렀지만, 저 에게 먹고사는 걸 해결하는 방법은 글 쓰는 것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것밖에 몰랐고요. 이 마을에 내려와 겨우 글을 쓰지 않아도 먹고살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겠습니다. 바다와 산, 들로 열심히 다니며 몸을 굴리면 굶어 죽을 걱정은 없거든요. 아버지가 빌려주고 개조해 준 집을 놀리고 있다가 작년부터 민박을 쳐서 이 마을 다른 사람들처럼은 살 수 있게 되었습 니다. 아버지 덕분에 식구들 밥 굶기지 않기 위해 글을 쓰지 않고 쓰 212 아버지 213
고싶었던글만쓰며살수있게되었지요. 민박을 저희 나름대로 열 심히 하자, 아버지도 마음을 놓는 눈치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가는 말이 살가워졌고요. 남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법이지요. 그 남은 남이 아니라 나이 고, 나는 내가 아니라 남이더군요. 아주 오랫동안 저는 저만을 위해 살아왔고, 덕분에 무척이나 황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연이 가르쳐준, 나와 남이 하나라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세상과 만나려 합 니다. 아들처럼 아내가 처남과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이번 주말에 장인 생신이라 가족이 모인답니다. 서울 토박이인 아내를 이 먼 거제도까지 데려왔 으니 장인 생신이나 장모 제사에라도 가봐야 하는 게 도리인 줄 압니 다. 하지만 아내는 가난한 남편이 미안해할까 봐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았답니다. 며칠 전에 친구들이 주말에 오기로 했다고 말했을 때도 아무 내색 하지 않았지요. 마음을 정한 아내를 붙잡고 뭐라 할 수도 없어 아이들에게 외할아 버지 생신 선물을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에게 보 낼 편지도 쓰고 과자도 샀습니다. 아내도 제 성화에 못 이겨 작은 선 214 아들처럼 215
물을 고르는 중입니다. 아내에겐 자상한 아버지고, 아이들에겐 둘도 없는 외할아버지인 분에게 딸과 손자를 자주 만나지도 못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저라 니. 친할아버지 얼굴 한번못봐외할아버지가 전부인 줄 알았던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정말 못할 짓입니다. 그래도 입이 있다고 하는 말이란 게 고작. 장인어른, 올해도 죄송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복 입은 처녀는 조현석의 동생 조연수였습니 다. 이런저런 기막힌 인연이 이어져 제 아내가 된 사람입니다. 그리 고 저는 장모를 영정으로만 뵌 사람이 되었습니다. 장모 사랑을 한 번도 받지 못하였으나 장모 덕에 결혼했으니 더 바랄 것도 없다고 얘 기하는 사람입니다. 혼자된 장인은 옛날 만화영화 주인공 뽀빠이 같습니다. 몸집은 자 그마한데 육체미 운동 한 사람처럼 근육이 울퉁불퉁합니다. 타고난 체형이 그런 데다가 지금도 쉬지 않고 철재상 일을 합니다. 지금은 몰락하였으나 원래는 대대로 을지로 일대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답 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장인은 쇠고기만 드십니다. 현석, 용석 형 제가 장인을 잘 모시니 바랄 것도 없지요. 다 좋은데 한 가지, 사위녀 남자든 여자든 결혼을 하면 새 식구가 생깁니다. 시댁, 처가. 아무 리 둘이 좋아서 결혼을 하고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 해도, 결혼은 결국 집안끼리 인연을 맺는 일입니다.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시댁이 나 처가를 멀리하면서 행복한 사람, 별로 못 봤습니다. 아, 저는 참 나쁜 사람입니다. 조현석 시인이 어머니 상을 당했다기 에 문상을 갔습니다. 소복을 입고 문상객을 접대하는 예쁘고 착하고 참한 처녀를 보았습니다. 참 괜찮은 여자다 싶어 마음이 끌렸습니다. 석 때문에 외동딸과 생이별을 하고 지냅니다. 사위는 장인 뵐 낯이 없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1년에 한 번, 최소한 일주일은 외가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아이들도 학교에 다니고 여름에는 민박을 해야 하기 때 문에 겨울방학이나 되어야 서울에 가게 됩니다. 외가에 가면 아이들 은 신이 납니다. 그 동네에서 만 2년을 살았으니 아이들에게도 추억 이 살아 있지요. 216 아들처럼 217
장인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열심히 일하는 분이고, 몸으로 세상 을 살아가는 분입니다. 가식 없고 솔직 담백한 분이지요. 장인에게는 현실이 자연인 셈이고, 서울이 시골인 셈입니다. 장인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 하나로 꿋꿋하고 바르게 세상을 대하며 살아야 한다, 몸 으로 알려줍니다. 그리고 늘 웃는 얼굴로 꼭 필요한 말만 합니다. 그 말씀, 늘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늘 감사하고 또 늘 죄송합니다, 장 인어른. 시골 냄새 새로 만든 텃밭에 씨를 뿌렸는데, 잎이 누렇게 변하더니 시들어버 렸습니다. 그냥 놔둘까 하다가 농협에서 파는 가축 분뇨로 만든 거름 을 밭에 뿌렸습니다. 덜 익은 거름 냄새는 머리가 띵할 정도로 강했 습니다. 집 옆을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도 그 냄새 참 고약하다고 한 마디씩 했지요. 이 마을에 소 키우는 사람들은 소똥으로 만든 거름을 씁니다. 봄이 되기 전까지 외양간에 켜켜이 쌓인 소똥과 지푸라기를 걷어 와 밭에 무덤처럼 둥글게 쌓아놓습니다. 잘 익은 거름이라 구수한 냄새가 납 니다. 날이 선 마음도 그 옆에만 가면 누그러지지요. 218 시골 냄새 219
농협에서 사 온 거름은 덜 익은 상태라 바로 뿌리면 오히려 채소에 게 해가 된다는 걸 이번에 알았습니다. 분뇨의 독이 아직 빠지지 않 은 까닭에 냄새도 지독하고요. 냄새를 참고 호미로, 손으로 거름과 흙을 섞었습니다. 하루 정도 지나자 텃밭에서 쇠똥 거름 비슷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 거름이 채소 의 밥이 되겠지요. 채소는 식구들이 맛나게 먹을 거고요. 세상에 버 릴 거 하나 없다는 말, 그대로 맞습니다. 시골에 살다 보니 죽음을 자주 만납니다. 도시에 비해 원시적이라 그렇겠지요. 언젠가 누가 술에 취한 채 집 옆에 있는 전봇대에 개를 매달아놓고 몽둥이로 두드리려 했습니다. 그걸 보고 아내가 고함을 질렀습니다. 아내가 마을 사람에게 소리치는 게 처음이었습니다. 저 도 덩달아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질렀지요. 개새끼는 두들기 패야 맛난다 아이가, 동숭아. 그 사람, 개를 풀어 산으로 끌고 갔습니다. 사람 사는 게 동물을, 식물을 기르고 죽여 먹는 일의 연속입니다. 220
다른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은 살벌해 보이 지만 생명을 이어가고 새 생명을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제가 밭에 뿌린 가축 분뇨 거름들의 주인도 어쩌면 누군가의 뱃속 에 들어 있었거나 화장실을 거쳐, 정화 시설을 거쳐 강이나 바다로 흘러갔을 겁니다. 고기와 가죽, 뼈와 분뇨까지 다른 생명을 위해 헌 납하고 다른 생을 기다리고 있겠지요. 생명체끼리 서로 양분을 교환하면서, 서로 섞이면서 사는 세상. 크 게 보면 각각의 생명도 세상이란 몸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몸에 있는 세포들처럼 말이지요. 모양과 역할은 달라도 우리를 지탱 하기 위해 서로 돕는 그들처럼요. 누가 더 잘나고 못나고가 어디 있 겠나 싶습니다. 1년 전쯤에 가까스로 요강을 구했습니다. 텃밭을 가꾸면서부터 요 아이들은 오줌이 채소를 키우는 양분이 되지만 변기에서 오줌을 누면 환경에 나쁜 영향을 줄 뿐이란 걸 자연스럽게 배웠습니다. 밥 상에 집에서 기른 채소가 올라오면 꼭 오줌 얘기를 했 습니다. 이 상추에 우리 식구의 오줌이 다 들어 있단다. 어때, 맛있지? 처음엔 아이들, 눈살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당연한 줄 압니다. 오줌 을 뿌려줘야 더 맛있고 튼튼한 채소를 거둘 수 있는 줄 알지요. 제 몸을 위해 먹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고, 제 몸을 위해 싸는 것을 천시하는 세태가 변비를 낳은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가지려고만 들지 말고 나누며 사는 게 당연하다는 마음을 요강에서 배웁니다. 오 줌 색깔이나 오줌발의 세기로 몸이 어떤가 알 수도 있고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강을구하려했는데, 어릴적본사기요강을고집했습니다. 구하다 구하다 결국 스테인리스 요강으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요강을 들 여놓자 아이들도 신이 나서 요강에 오줌을 눴습니다. 아내도 몇 번. 마당에 오줌을 모으는 통까지 따로 두었지요. 한 달쯤 지나 오줌이 가득 차면 아이들과 같이 밭에 뿌렸습니다. 묵은 오줌 냄새 참 요란 합니다. 오줌은 별말 없는데 냄새 맡은 사람들이 별소릴 다 합니다. 222 시골 냄새 223
친구들도 한나를 반가워했답니다. 한나는 진해초등학교에 빈자리를 만든 대신 지윤이 옆자리에 앉 았습니다. 아마 그날, 한나와 지윤이가 제일 시끄러운 학생이었을 겁니다. 오늘 학교에서 재미있었냐 물었더니, 두 아이는 깔깔 웃기만 했습니 다. 그토록 보고 싶던 친구와 함께한 시간, 무얼 한들 재미없었을까요. 친구 그동안 못 만난 제 친구들 모두 그 교실로 불러 모으고 싶었습니다. 진해에 사는 아내 친구 부부가 지난 금요일에 놀러 왔습니다. 결혼 십 년 내내 부부끼리 만나다 보니 남편들끼리도 친구가 되어버렸습니 다. 여덟살난그집딸한나와우리딸지윤이도 친구가 되었지요. 서로가 친구인 가족, 그중에서도 제일 극성은 두 딸입니다. 이번엔 다섯 달 만에 보게 되었지요. 한나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지윤이 는 매일 까치발로 서서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토요일 아침, 지윤이는 학교에 가면서 한나도 데려갔습니다. 한나 는 지윤이가 유치원 다닐 때도 몇 번 따라갔었지요. 바닷가에 있는 시골 초등학교 1학년 교실. 유치원에서 같이 1학년이 된 지윤이네 반 서울에서 보면 남쪽 끝이나 마찬가지인 이 마을에 앉아 친구야, 보고 싶다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서울에 갈 때 아니곤 전화도 거의 안 합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무소식이. 그래서 오랜만에 친구 전화가 오면 덜컥 놀라기부터 합니다. 친구들도 간다 만다, 기 약할 수 없는 약속을 하기 껄끄럽겠지요. 우리, 그러잖습니까? 예의 상, 한번놀러갈게. 하지만 최소한 2박 3일은 예정하고 찾아와야 하는 길입니다. 휴가 때가 아니면 언감생심. 오고 간다는 기약이 오 히려 부담스럽습니다. 와도 참 미안합니다. 만사를 제쳐두고 그 먼 224 친구 225
길을 달려오게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건 시간을 따지고 여유를 따지는 어른들이나 할 일이지 요. 지윤이와 한나 보세요. 다섯 달 만에 만나도 어제 헤어진 친구 같 습니다. 기다림이 뭔지를 잘 모르지요. 거참, 편하고 느긋한 방식입 니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멀리 떨어져 사는 어른들끼리의 약속 이나 기다림도 이러했을 겁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만나겠지. 살아서 꼭 만나자. 무슨 이산가족 찾기 구호 같다고요? 저는 이런 마음으로 삽니다. 우린 언젠가 어느 하늘 아래서든 어느 땅 위에서든 만날 거고,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친구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친구가 문득 그 리우면 전화를 하는 대신 잘 살기를 바랍니다. 하는일모 두 잘되기 바랍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길 바랍니다. 서상원이란 친구, 캐나다로 이민 갑니다. 이달 말까지 한국에 있을 거라 했는데, 가기 전에 한번 보자고는 했는데. 보겠지요, 언젠 가는. 인터넷 비가 좀 많이 온다 싶으면 인터넷이 먹통이 되는 경우가 부쩍 늘었 습니다. 시골에 산다고 인터넷까지 사람을 무시하냐며 이 마을에서 인터넷 쓰는 사람들은 투덜거립니다. 그러 나 이 마을 담당직원 정민 씨가 있어 푸념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어제 이 마을에 억수같이 비가 내렸고, 인터넷이 불통이 되었습니 다. 들어붓듯 쏟아지는 비를 뚫고 정민 씨가 왔습니다. 마당을 지나 오는 사이 옷이 흠뻑 젖어버렸지요. 그렇게 와준 것만 해도 고마운 데, 꼭 인터넷이 되게 해주고 가겠답니다. 정민 씨를 보았으니 까짓 인터넷, 안 되어도 그만이다 싶었습니다. 226 인터넷 227
어디가 단단히 고장이 났는지 정민 씨는 수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 습니다. 너무 고생스러워 보여서 제발 그만두라고 말렸습니다. 정민 씨, 빙긋이 웃기만 하였습니다. 정민 씨는 비에 젖었지만, 저는 그 마 음에 젖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 그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서 마른날에만 인터넷이 먹통 되기를, 그것도 자주 되기를 바랐습니다. 착한 정민 씨, 그럴 때 아니면 볼 수 없으니까요. 본래 저는 사람 낯을 많이 가리는 편입니다. 그런 사람이 민박을 하게 되었으니, 처음엔 죽을 맛이었습니다. 찾아오는 낯선 손님을 맞 으러 나가는 게 꼭 무대에 오르는 것처럼 떨리고 부끄러웠습니다. 그 러나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저보다 그 사람이 얼마나 황당할까 싶었 지요. 낯선 곳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긴장하게 되지 않나요? 그 이상한 사람이 저인 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낯선 손님을 오래 못 본 친구나 친척이라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게 아니래도 우리는 한 핏줄. 한참을 따지다 보면 희미한 인연의 한 줄기 정도는 겹쳐져 있을 거고 요. 좀 억지인가요? 그래도 사람을 불편해하는 것보다 편하게 대하 는 게 나을 겁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꼭 우리 집을 찾아오는 손님 묘하게도 이 글이 신문에 실린 날, 인터넷이 불통이 되었습니다. 햇볕 쨍쨍한 날이었지요. 정민 씨 머쓱해서 집으로 왔습니다. 안 그 래도 신문 읽어봤다고, 참 미안하다 했지요. 뭐, 바라던 대로 마른날 먹통이 되었으니 좋지 않냐며 웃어주었지요. 살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정민 씨처럼 일로 만난 사 람들과는 친해지기가 쉽지 않지요. 예전에 출판사 다닐 때 출판 에이 전시 회사를 들락거리며 알게 된 수동 씨는 특별한 경우일 겁니다. 이 아니라 길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도 마음이 편해지는 경지에 올랐 습니다. 정민 씨 오면 차 한 잔 대접하고 일이 끝날 때를 조용히 기다립니 다. 정민 씨,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꼭 성직자 같습니다. 일하는 사람. 일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그 아름다운 사람들을 닮아보려 저도 열심히 일하는 속에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습 니다. 마음, 참 편해졌습니다. 나이도 꽤 차이 나는데, 다른 사람에게 친구라고 소개할 정도지요. 228 인터넷 229
서당개 우리 집에는 서당개 두 마리가 있습니다. 나이 든 서당개 별이는 어린 서당개 투투의 어미입니다. 두 녀석은 아침 여덟시, 우리 아이 들과 함께 학교에 갑니다. 별이는 학교 밖에서 놀다가 아이들 공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나타납니다. 하지만 투투는 열심입니다. 물론 투투도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들 공부할 때는 나무 그늘 에 늘어져 자다가 쉬는 시간, 아이들이 몰려나오면 제 세상 만난 듯 뛰어놉니다. 와하고 투투를 쫓아다니는 아이들. 아이들 사이에서 투 투는 짱이랍니다. 서로 만지려 드는 바람에 우리 아이들은 뒤로 물러 날 수밖에 없답니다. 230
투투가 학교 다니기 시작한 지도 보름째. 처음 며칠은 길 잃어버리 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지요. 우리 아이들 처음 학교 보냈을 때, 꼭 그 심정이었습니다. 가방도 메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는 강아지. 과연 3년 후엔 풍월을 읊게 될는지요. 아마 아이 들 좋아서 지르는 소리는 따라 지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온 세상 어린이들이 투투처럼 학교 다니는 게 마냥 즐거웠으면 합니다. 오빠가 투투를 안고 시소 타다가 놓치는 바람에 땅에 떨어지면서 한 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리가 삔 거겠거니 했습니 다. 다치게 한 오빠에게 투투를 안고 오게 하라 해놓고 전화를 끊었 습니다. 울상이 된 아들과 딸이 집에 들어섰습니다. 압박붕대로 투투의 다 친 다리를 감아주고 어떻게 다치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습니다. 오르 락내리락하는 시소에 겁을 먹은 투투가 아들 품에서 뛰쳐나가다 생 긴 일이었습니다. 아들에게 손 들고 서 있으라 했지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투투의 아비 되 하루는 학교 가던 딸이 따라가는 투투를 집으로 쫓길래 왜 그러냐 고 물었습니다. 6학년 어떤 언니가요, 투투 학교에 데리고 오지 말래요. 그래? 그렇다고 투투가 말을 듣겠니? 묶어놓을 수도 없잖아. 딸은 안 되는데 하면서 학교로 갔습니다. 그후 투투는 종종 집에 남겨졌습니다. 별이는 매일 학교 갔지요. 원래 애들이랑은 놀지 않는 개라서 애들이 뭐라 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어느 날, 애들이 올 시간쯤 돼서 전화가 왔습니다. 투투 다리가 부 러졌다며 딸이 울먹였습니다. 차근차근 얘기해보랬지요. 그랬더니 는 복돌이도 뒷다리 하나를 절었는데, 투투가 딱 그 다리를 다친 겁 니다. 투투에게 말했지요. 너희 집안 전통인가 보다. 마을 사람들에게 투투를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기다리면 나을 거라 해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한 사흘 후에 붕대를 풀어주었 습니다. 지금은 다 나아서 멀쩡합니다. 그러나 다친 기억 때문인지, 따라 나설 때마다 딸이 쫓는지 투투는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투투가 없어도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재미있게 지내다 232 서당개 233
옵니다. 투투만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어미가 올 때까지 혼자 심심하게 지내는 투투가 안되어 보여서 제가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 곳이 비면 다른 곳이 차는 법. 투투는 저와 함께 다른 재미를 찾고 있습니다. 한살이 아이들이 개학하여 안 그래도 별일 없는 시골집이 더 조용해졌습 니다. 늦게 심은 해바라기 몇이 햇볕에 까맣게 익은 얼굴을 푹 숙인 채 명상에 빠져 있는 마당가에서는 고추 붉게 익어가고 감나무 그늘 이 길고 짙어졌습니다. 조용한 삶. 어찌 보면 별 탈 없고 어찌 보면 싱겁기 짝이 없는 시골 생활에 들어선 지도 이제 꽤 되었습니다. 지난여름, 섬으로 들어가 25년을 산 한 일본인 가족의 이야기를 짬 짬이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빙긋이 웃었습니다. 3년을 산 사람에게 나 25년을 산 사람에게나 시골은, 자연은 공평했습니다. 그이나 저 234 한살이 235
의 농사법이나 자연을 사귀는 법이 참 비슷했습니다. 자연을 바라보 는 법이 비슷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게 옳을 듯합니다. 며칠 전부터 하늘이 까마득히 높아져 아찔하고, 바다는 맑고 깊어 져 보석 같습니다. 하늘과 바다를 그저 바라보고 있으면 그대로 삼매 에 빠집니다. 몇십억 년 동안 이 땅을 굽어보고 이 땅을 어루만져온 하늘과 바다. 경이로움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가 이 런 경이로움과 함께하는 거지요. 나고 죽는 생명의 한살이 역시 경이롭습니다. 그게 하루살이의 한살이든 사람의 한살이든 크게 다를 바 없지요. 저푸른 가을 하늘과 깊은 바다도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자연에 는 늘 똑같은 모습이 없으니까요. 쉴 새 없는 변화가 생명을 만들고 이어가지요. 내 생명뿐만 아니라 자연의 생명까지도요. 고개 숙인 해 바라기처럼 크기와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생명의 하모니에 귀 기 울이다 보면 살아 있다는 자체가 너무도 고맙고 행복해집니다. 거제도에서도 외딴 곳, 공고지에 사는 병길 씨입니다. 병길 씨 가족 은비오지않는날은하루종일다람쥐처럼바쁘게숲속을움직입 니다. 농원을 하고 있지요. 병길 씨 부모님은 30년 넘게 나지막한 산을 계단식 밭으로 가꾸었 습니다. 농기계 하나 없이 맨손으로 돌을 날라 계단식 밭의 축대를 쌓았고, 나무를 심었습니다. 지금도 공고지 가는 산길은 좁은 오솔 길. 병길 씨 집 가까이에 해변이 있으나 물살이 세고 파도가 높아서 배를 대기 힘들답니다. 그래서 집 안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장 가까운 예구마을에서부터 져서 날라야 했답니다. 예구에서 공고지로 가려면 산을 하나 넘어야 하지요. 낮은 산이긴 하지만 어른 걸음으로 20, 30분 정도 걸립니다. 섬은 아니나 접근이 어려워 섬처럼 되어버린 그곳, 공고지에 병길 씨가 내려온 건 올봄. 부모님이 피땀 흘려 만들어놓은 농원에서 그 부모님처럼보일듯말듯살기위해서울생활을접었습니다. 낡고 오래된 황토집과 창고와 돌계단, 긴 해변을 따라 늘어선 돌담과 줄 지어 심어놓은 나무들이 없다면 공고지는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곳 이지요. 그저 게으르기만 한 이 사람에게 부지런한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공고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처음 찾아갔을 때, 30년 이상 사람이 236 한살이 237
정성을 들인 흔적이 자연의 일부인 듯 착각이 들었습니다. 공고지 사 람들이 해놓은 일은 그러니까 개미나 벌이 집을 짓고 사는 일처럼 너 무나 자연스러웠습니다. 아니, 개미나 벌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한 결 과가 오히려 자연적인 풍경을 만들어낸 겁니다. 공고지에 가면 우공이산 愚 公 移 山 이란 말이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아 니, 우공도 못한 일을 공고지 사람들이 해나가고 있지요. 그곳에 가 면 한가하게 앉아 있는 게 참 죄스럽습니다. 숲 어디선가 일하고 있 는 사람을 불러내는 게 미안하지요. 그래서 비가 쏟아져 일할 수 없 는 날에 만날 약속을 합니다. 그때마다 병길 씨, 웃으며 말합니다. 맑은 날 놀러 와야 나도 좀 쉬지요. 아무 때나 와도 좋다는 뜻인 줄 알면서도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게으른 사람의 자격지심 때문일 겁니다. 병길 씨는 공고지의 셋째 아들. 늦게 서울에서 결혼했습니다. 병길 씨 아내는 오지나 다름없는 공고지 생활이 두려워 아직 서울에서 머 뭇거리고 있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부모님의 뜻을 이어받아 살기 위해 정리한 서울 생활. 병길 씨에게도 미련은 남아 있겠지요. 여름이 끝날 무렵, 서울에서 친구들이 찾아와 공고지에 데리고 갔 습니다. 미리 병길 씨에게 양해를 구했지요. 막걸리 세 통 사들고 고 개를 넘어갔더니 병길 씨, 새카맣게 탄 얼굴로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 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서울물 쫙 빠지고 완전히 촌사 람 다 되어 있었습니다. 안줏거리나 잡으려고요. 해변 저쪽에서 병길 씨 어머니는 지렁이를 파내고 계셨습니다. 그 광경이,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병길 씨가 공고지를 닮아가고 있어 좋았습니다. 그날 병길 씨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차로 40분 거리이지만 공고지와 저희 마을 사이에는 버스 노선이 없습니다. 그 덕에 서로 보 기 힘든 사이가 되고 말았지요. 그러다 보니 한번 보면 오랫동안 붙잡 게 됩니다. 하지만 병길 씨는 늘 새벽같이 일어나 공고지로 돌아갑니 다.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병길 씨가 온 후로 공고지에 위성 티브이가 들어왔고, 배도 한 척 생겼습니다. 공고지 해변에는 배를 둘 수 없어 고개 너머 마을 선창 에 배를 대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고지 사람들이 세상을 더 가까이 서 보게 되었고, 만나게 되었습니다. 도시에서 살다 온 병길 씨와 도시를 잊고 살아온 부모님. 그 부모 님이 병길 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으니 공고지도 조금씩 238 한살이 239
변해갈 겁니다. 그 변화가 어떤 쪽으로 흘러갈지 아직 아무도 모릅니 다. 서두를 필요가 없겠지요. 그간의 세월, 흔들림 없이 살아온 공고지의 나날들이 무얼 의미하는 지 병길 씨는 골똘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의 말 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요. 공고지의 돌과 나무와 생명을 바라보고 가 꾸면서 몸으로 느끼고 있으니 얼마 안 있어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지난번에 공고지에 갔을 때 수선화 뿌리를 여러 개 얻어왔습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공고지라는 지명이 제게는 생명을 가진 무엇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공고지에 간다는 건 누 구를 만나러 간다는 뜻이 됩니다. 공고지 사람과 공고지 나무와 돌과 바다가 그저 한 몸처럼만 느껴집니다. 자연과 사람이 공고지에서처 럼만 조화를 이루고 살 수 있다면 환경이니 생태니 하는 말조차 별 의미 없어질 겁니다. 사람들마다 마음 한편에 자기만의 공고지를 가 꾸는 날이 오기 바랍니다. 밭 한 귀퉁이에 심어두었습니다. 다시 봄이 오면 수선화가 다투어 피 어날 겁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땅속에서 가을과 겨울을 견뎌내야 할 겁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비어 있는 땅. 그 아래서 생명이 자 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끔 수선화가 잘 자랄까 의문이 듭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경박함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탓이겠지요. 공고지에는 수선화 뿌리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살아 있는 게 많습 니다. 저 역시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곳에 가면 알 지 못하는 뭔가가 자꾸 말을 걸어옵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자연의 말이라서 알아듣기 힘듭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모르게 느껴집니다. 그런 느낌이 쌓이다 보면 어느 날엔가 한꺼번에 그 말뜻 을 알아듣게 되겠지요. 240 한살이 241
상추 솎기 아내 대신 상추를 솎아봅니다. 손가락만 하게 자란 싹을 뽑으려니 상추에게 미안합니다. 싹을 틔우기 위해 온 힘을 다했겠지요. 어디 상추뿐이겠습니까? 제대로 가늠하지 못해 배게 뿌린 채소가 모두 그 모양입니다. 싹이 트지 않을까 씨가 못 미더워 남보다 씨를 많이 뿌렸습니다. 종묘상에서 씨를 사지 않고 씨를 받아 뿌리면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는 말, 이웃에서 무시로 들은 터라 그랬습니다. 그러고 보니 농사 지으면서 제 손으로 받은 씨, 참 많습니다. 많아도 이웃에게 나 눠주지 못했지요. 혹시라도 남의 농사 망칠까 봐서요. 242
서툰 눈이지만 이젠 채소 싹만 보아도 되겠다 안 되겠다 알 만합니 다. 제 깜냥으로는 솎아주는 게 채소나 기르는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싶고요. 촘촘히 자란 상추, 뿌린 씨 하나도 나지 않은 게 없어 보입니다. 제가 받은 씨, 이젠 믿겠습니다. 씨를 믿으니 내년부터는 무 작정 많이 뿌리지 않아도 될 겁니다. 솎아내느라 마음 안 아파도 될 테고요. 이렇게 사람으로 사는 요령, 조금씩 배워갑니다. 들이 되돌아와보니 집터가 어딘지 알 수가 없더랍니다. 대충 여기까지 가 우리 땅, 저기부터는 너희 땅 하며 경계를 그리고 집을 지었답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5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는 거지, 실제 생활방 식이나 문화를 따지면 더 시대 차가 날 겁니다. 그 시대 차라는 것, 참 우습습니다. 호미 하나 들고 텃밭에 나가 앉으면 금방 수천 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다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시대 차를 느낄 수 없지요. 도시에 있을 때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생각 별로 못했습니다. 당장 하고 있는 일, 그것과 관련된 방식밖에 몰랐습니 다. 그나마 거기서 처지거나 쫓겨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고요. 그러 다가 시골에 와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살아가는 방식이 정말로 다양 하다는 걸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첨단을 걸어야 하고, 경쟁에서 이겨 예전에 인도에 갔을 때, 도시와 시골의 격차가 너무 심하다며 혀를 찼습니다. 푸리 해변에 있는, 바나나 껍질로 이은 집으로 이루어진 어촌과 캘커타의 빌딩 숲 사이에는 최소한 2천년이상시대차이가 나는 듯했습니다. 그래도 이 마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도시와 50년 정도밖에는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약 50년 전, 이 마을에 포로수용소가 들어섰습니다. 미군이 이 마을 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또 삶의 외형보다 질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멋진 삶에는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사람 사는 일, 몇천 년 전이나 지금이 나 다를 바 없다 여깁니다. 그래서 삶의 목적이 무언가, 그 목적을 이 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있는 힘을 다 쏟고 있습니다. 을 밀어버리고 주민을 쫓아내 버렸다지요. 전쟁이 끝난 후, 마을 사람 244 상추 솎기 245
배추꽃 노란빛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던 배추꽃이 따가운 봄볕에 다 지더니 씨가 맺혔습니다. 김장에 쓰고 남아 꽃 보려 남겨놓은 배추였습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튀어나올 듯 잘 영글었네요. 배추는 씨 하 나에서 시작해 배추가 되었다가 꽃을 피우고 다시 씨를 맺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이런 과정을 거쳐가지요. 가족을 위해 헌신해온 아버지는 제가 못마땅했습니다. 글 쓴다며 부모를 봉양할 생각도 않고 제 식솔도 제대로 못 먹여 살리는 저를 늘 꾸짖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삶에 무책임한 사람이 어찌 좋은 글을 246
쓰겠느냐고 호통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글 쓰는 사람은 돈에 욕심내 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제 식구는 가난했습니다. 배추꽃의 한해살이를 보며 저라는 사람, 배추만도 못한 사 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저를 낳아준 부모와 형제, 제가 낳은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사는 게 글보다 중요하다 여기게 되었지요. 저 도 가족을 위해 땀 흘리며 일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렵니다. 늦었지만 온 힘을 다해 가족의 행복을 꽃피워보겠 습니다. 세상에 널린 행복은 모두 남의 것,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보십시오. 먼 데서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데서부터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행복에도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 남루한 편지와 지루한 추신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 사드립니다. 늘 행복하세요. 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