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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016학년도 수시모집 전형별 면접질문(의예과포함)(최종 ).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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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ㅍㅍ통계지식과 경제적 상상의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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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권 제3호 Ⅰ. 문제제기 온라인을 활용한 뉴스 서비스 이용은 이제 더 이 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뉴스 서비스는 이미 기존의 언론사들이 개설한 웹사이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 며 기존의 종이신문과 방송을 제작하는 언론사들 외 에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신생 언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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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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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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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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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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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石 堂 論 叢 49집 기꾼이 많이 확인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유형이 가족 담, 도깨비담, 동물담, 지명유래담 등으로 한정되어 있음도 확인하였 다. 전국적인 광포성을 보이는 이인담이나 저승담, 지혜담 등이 많이 조사되지 않은 점도 특징이다. 아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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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영상기술연구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뉴 뉴웨이브 세대란 60년대 일본의 영화사에서 과거세대와는 단 절된 뉴웨이브 의 흐름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뉴웨이브 세대를 뛰어넘는다는 의미에서 뉴 뉴웨이브 세대로 불린다. 뉴 뉴웨이브 세대 감독들의 경향은 개인적이고 자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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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18 輯 1 號 ) 과의 소통부재 속에 여당과 국회도 무시한 일방적인 밀어붙이기식 국정운영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다양하게 논의될 수 있지만, 민주주의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적 조건은 권력 행사에서 국가기관 사이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시도서목록(CIP) 일본만화의 폭력성과 우리 청소년 / 청소년위원회 청소년 보호단 매체환경팀 편집. -- 서울:청소년위원회, 2005 p. ; cm. -- (청소년 ; ) ISNB :기타 K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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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Educational Innovation Research 2018, Vol. 28, No. 1, pp DOI: * A Analysi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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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 東 古 典 硏 究 第 24 輯 이상적인 정치 사회의 구현 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따라서 천인 합일론은 가장 적극적인 경세의 이론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권근은 경서의 내용 중에서 현실 정치의 귀감으로 삼을 만한 천인합일의 원칙과 사례들을 발견하고, 이를 연구하여

232 도시행정학보 제25집 제4호 I. 서 론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사회가 다원화될수록 다양성과 복합성의 요소는 증가하게 된다. 도시의 발달은 사회의 다원 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화된 도시는 경제, 사회, 정치 등이 복합적으로 연 계되어 있어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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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동북아역사논총 42호 금융정책이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 대외금융 정책의 기본원칙은 각 식민지와 점령지마다 별도의 발권은행을 수립하여 일본 은행권이 아닌 각 지역 통화를 발행케 한 점에 있다. 이들 통화는 일본은행권 과 等 價 로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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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통권 제12 호 (2012) 제에 의하여 라는 외부적인 포스트- 식민화의 문제점을 노정하는지, 그리고 4 3이나 5 18과 비교 할 때 근대 국민 국가 성립 전의 조선과 대한민국을 포괄하여 일본군위안부가 어떻게 법적 언어로 구성되고 있는지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역사의 위조(僞造)는 용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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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진흥재단 지정주제 연구보고서 해외동포 언론의 국내뉴스 보도 연구 책임 연구 한동섭(한양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공동 연구 김형일(극동대학교 언론홍보학과 교수) 연구 보조 최진호(한양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석사과정) 발행인 이성준 편

목 차 2013 년도 주요성과 및 평가 2014 년도 추진여건 및 전략 주요과제 추진계획 1. 정부3.0 일하는 방식 2. 투명한 정부 3. 유능한 정부 4. 서비스 정부 5. 정부3.0 변화관리 < 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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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식민지 공공영역 으로서의 1910년대 每 日 申 報 * 1) 윤상길** 2)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본고는 1910년대 당시의 시대상황과 합병직후의 문화상황 속에서 每 日 申 報 가 가지는 사회적 역할 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이를 식민지 공공영역 개념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강제 병합 직후 식민지 조선의 공론장 구성이 일본어를 근간으로 한 지배적 공론장과 조선어를 근간으로 한 저항적 공론장으로 이원화 된 상황 속에서, 每 申 은 지배적 공론장과 저항적 공론장을 담론적으로 연결 하는, 식민지배자와 피식민지인 간의 담론투쟁의 장으로서의 위상을 차지하였다. 또한 식민통치의 동원 을 위해 필요한 식민적 공공성 을 담론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담론전략으로서, 每 申 은 항간의 소문을 반 박하는 논박형태의 선전전략을 구사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적 공공성 의 담론적 구현을 위한 조건창출의 전략으로서 이중어적 언어상황에 개입하였다. 즉, 1912년 무렵 단행되었던 每 申 의 지면개 편은 전통적인 조선인 지식인층을 교화 포섭하고 식민적 공공성 구현을 위한 담론적 구성을 겨냥한 저널리즘 장치였을 뿐만 아니라, 每 申 의 필진에 참여하였던 조선인 지식인층은 식민권력의 지배적인 해 석틀에 제한적이나마 도전하기도 하였다. Key words : 매일신보, 식민지 공공영역, 공론장, 소문, 담론 * 본 논문은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다. ** cyrus92@naver.com, 커뮤니케이션과 역사 연구회

식민지 공공영역 으로서의 1910년대 每 日 申 報 57 1. 문제제기 1910년대 일제강점기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무단정치의 시기 라는 말로 대변되어왔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무자비하고 전일적으로 이뤄진 시기로 간 주되어 왔으며, 악랄한 일제의 총칼에 조선반도는 철저히 짓밟혀 조선 민중은 일제의 압제 에 의해 거의 숨도 쉴 수 없었던 시기로 인식되었다. 특히 저항적 민족주의 혹은 민족사관 의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 시기는 매우 당혹스러운 시기이기도 하였다. 조선 민족이 일제의 지배에 대해 철저하게 저항한 사회운동의 움직임이나 이를 뒷받침해 주는 역 사적 자료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일제의 무자비한 강점 이라는 말로 조선민족의 주체성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1910년대의 일제강점기는 왠지 미심쩍은 애매한 암 흑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이후 1910년대 일제강점기에 대한 학문적 관 심이 기울여지기 시작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 초기의 폭압 의 이미지에 대한 학문적 재검토 가 이뤄지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맥락에서 1910년대 일제의 조선 동화정책은 주목받게 되었 다(권태억, 2002). 그러나 이러한 역사학계의 연구경향과 달리 언론학계에 있어서 1910년대 언론 상황에 대 한 조망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민족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민족지 가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1910년대의 언론 상황은 거의 항상 無 신문기 나 암흑기 로 규정 되어 왔고(임근수, 1975 ; 최준, 1965), 1910년대 거의 유일한 한국어신문으로서 발행되었 던 총독부 기관지 每 日 申 報 (이하 每 申 )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상대적으로 저조하였다 1). 한국언론사 연구에 있어 철저한 反 面 敎 師 로서의 사료적 가치에 주목한, 每 申 에 관한 본격 적인 최초의 연구라고 할 수 있는 정진석의 연구(1988)는 실증적으로 每 申 의 경영과 편집, 활동기자 등의 측면을 밝힘으로써 민족지 에 머물러 있었던 연구영역을 기관지 로 확장시켰 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지만, 每 申 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2). 이런 측면에서, 장석흥의 연구(1992)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1910년대 每 申 의 신문사설에 나타난 식민주의 논리를 규명함으로써 每 申 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 1) 2000년대 초까지 매일신보 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단 2편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정진석 (1988), 每 日 申 ( 新 ) 報 硏 究, 한국언론사 연구, 서울 : 일조각 ; 장석흥 (1992), 일제의 식민지 언론정책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또한 최근의 성과인 김민환 박용규 김문종의 공저인 일제강점기 언론사 연구 (나남, 2008)에서도 평가의 주안점은 민간지가 등장했던 1920년대 이후의 시기를 대상으로 하 였고 1910년대 언론상황에 대한 평가는 상당부분 유보되어 있다. 2) 최근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였던 京 城 日 報 에 대한 연구를 추가하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기 관지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단행본 언론 조선총독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로 집대성하였지만, 이 저서 또한 동일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韓 國 言 論 學 報, 55권 2호 (2011년 4월) 58 다. 당시 每 申 이 조선총독부의 선전기관으로서 식민지통치의 모순을 은폐, 호도하는 데 앞 장서고 일제의 침략정책 및 식민지 통치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每 申 이 기본적으로 총독부 기관지로서 가지게 되는 선전적 성격을 지 나치게 신문내용적인 차원으로 소급 해석한 한계를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석흥의 연구는 앞서 언급한 2000년대 즈음에 나타난 역사학계의 1910년대에 대한 인식변화와 맞물 려 每 申 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2003년과 2005년 수요 역사연구회가 발행한 두 권의 저서, 식민지조선과 매일신보 : 1910년대 (신서원, 2003)와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매일신보 : 1910년대 (두리미디어, 2005)는 2000년대 역사학 계의 每 申 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보여 준다. 이 연구들의 기본적인 목적 이 1910년대 일제의 지배정책을 每 申 의 신문기사를 통해 밝히는 것에 있었던 만큼, 대다수 연구들은 每 申 에 나타난 혹은 每 申 을 통해 본 종교, 경제, 귀족, 위생, 교육 정책 등에 관 한 것이었다. 한편, 2000년대 중반이후 국문학계에서는 每 申 의 국문연재소설에 관심을 기울여왔는데, 특히 이들의 주된 관심은 每 申 이 갖고 있는 근대 매체적 속성과 소설양식 간의 관계를 규명 하는데 있었다(송민호, 2009 ; 이영아, 2007 ; 이희정, 2004 ; 전은경, 2005 ; 전은경, 2006). 우선 이희정(2004)은 소설 광고 등과 같은 每 申 의 상업적 정책이 이해조의 신소설이 쇠퇴하 는 데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밝혔고, 이영아(2007)는 每 申 이 매체 홍보를 위해 사 용했던 다양한 수단들 - 소설 예고를 통한 광고, 삽화의 삽입, 독자투고의 활성화 등 - 이 독 자의 흥미를 위한 대중지향성을 확대하는 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또한 독 자투고 나 독자감상 등의 형태에 주목하였던 전은경(2005, 2006)은 매체와 독자, 그리고 소설양식 간의 관련성을 다루었다. 특히, 每 申 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독자투고란 의 등장은 작가와 독자가 소통적인 관계를 이루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고, 每 申 의 독자층 형 성에 대한 역할을 강조하였다. 반면 每 申 과 소설 간의 관계를 每 申 이 소설에 대해 일방향적 인 영향을 미치는 관계가 아니라 양방향적인 영향관계로 보고자 하였던 송민호(2009)는 每 申 신문연재소설의 사실적 글쓰기가 每 申 지면의 기사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써, 1912년 이후 每 申 의 사회면 기사는 점점 더 소재적인 면에서 대담해지고 사회의 풍속을 적 나라한 필치로 묘사하게 되는 경향성을 가졌음을 보여 주였다. 이와 같이 每 申 에 관한 본격적인 최초의 연구인 정진석의 연구(1988) 이후, 每 申 에 대한 연구는 언론학계보다는 오히려 역사학계와 국문학계를 중심으로 2000년대 중반이후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1910년대 每 申 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에 대한 평가는 조선총독부의 선전도구 라는 기존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측면에 많 다. 첫째, 조선총독부 정책의 일방적인 산물로서 每 申 이 일제의 선전정책을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피식민지인의 수용상황과 무관하게 每 申 이 식민지 정책을 옹호 하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퍼뜨리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둘째, 每 申 과 여타 매체 간의

식민지 공공영역 으로서의 1910년대 每 日 申 報 59 관계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이른바 언론폐색 정책 속에서 每 申 이 거의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다는 점은 강조되어 왔지만, 每 申 이 여타 신문들이나 미디어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 고 있었는지는 고려되지 않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每 申 은 조선총독부의 일본어 기관지였던 京 城 日 報 에 예속된 부록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되기까지 하였다(정진석, 1988, 246쪽). 물론 강제병합 이후 중단되지 않고 발간된 유일한 한국어 신문인 每 申 의 주요한 임무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을 선전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 만 당시 사회 전반의 커뮤니케이션/문화 상황과 커뮤니케이션 욕구를 고려한다면, 每 申 이 가졌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은 간단히 선전기관 으로 일소해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 려 매우 다차원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조선 민중의 저항을 무릅쓰고 조선을 병합 하였던 일본은 자연스럽게 기층 민중들의 울분과 반발을 무마시키는 여론을 조성할 필요성 을 느꼈겠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소통될 言 路 가 거의 완벽히 차단당한 조선 민중들의 커뮤 니케이션 욕구는 어용지인 每 申 에 대한 불신과 결부되면서 다른 형태의 커뮤니케이션 채널 을 통해 표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每 申 의 역할과 위상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을 일 방적으로 선전하는 양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적으로는 다양 하고 복잡한 현실사회 내의 역학이 개입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공공영역 (public sphere)과 공론장 (publics)의 이론적 관점에서 일 제가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하던 1910년대에 每 申 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역할과 위상을 가 졌는지를 평가해 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식민지 공공영역 (colonial public sphere)이란 개념을 제기하고 이 개념에 입각하여 1910년대 每 申 이 가졌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을 평가하 고자 한다. 2. 이론적 논의 : 식민지 공공영역 의 문제틀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물리력에 기반한 강압의 양상을 보이던 1910년대의 언론 상황 을 공공영역 (public sphere)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떠한 분석적 유용성을 가지는가? 익 히 알려져 있듯이, 하버마스(Habermas, 1962)가 개념화한 공공영역 개념은 이질적인 집단 간의 논쟁이 언제, 그리고 어떠한 조건 하에서 정치적 행위의 권위적 토대가 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룬다(Calhoun, 1992, p.1). 즉, 공공영역 개념은 사람들이 모여서 비판적, 이성 적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이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합의를 이루려 노력하고, 거기에서 얻어진 합의는 여론으로서 정치에 영향을 행사 (김세은, 2001, 98쪽)하는가를 해 명하려는 이론적 시도이다. 그러나 서구사회의 경험에서 출발한 개념인 공공영역 개념을 그 대로 1910년대의 언론 상황에 적용하여 설명하려 든다면 이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韓 國 言 論 學 報, 55권 2호 (2011년 4월) 60 있다. 왜냐하면, 주지하듯 식민지 조선에서는 서구적 의미에서의 인민민주주의와 대의정치 가 가능하지도,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가능했고 또 존재할 수 있었 던 유일한 정치양식은 저항의 정치 뿐이었다. 하지만 저항의 정치를 중심으로 식민지 조선 을 해석하게 되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식민지민의 정치를, 나아가 식민지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윤해동, 2008, 194쪽). 이러한 이해불가능성을 배제하고 저항적 민족주의 패 러다임이 놓치고 있는 다양하고도 복잡한 과정을 드러내기 위하여 본고에서 제기하는 문제 틀이 바로 식민지 공공영역 (colonial public sphere) 3) 개념이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언론 상황을 공공영역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지는 분석적 의의는 무엇보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강제적 억압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헤게모니적 측면에서 파악하는 데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개념화한 공공영역 개념이 본래부터 헤게 모니 개념을 함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버마스의 이론화가 가진 문제점에 대해서는 그가 접근가능성, 이성성, 지위위계의 중지 라고 칭찬해마지않던 공공성이라는 담론은 그 자체로 구별짓기의 전략 (Eley, 1992)으로 채택되었다는 것에 아이러니가 있다는 점, 또 이러한 아이러니는 공공성(publicity)과 지위 간의 관계가 하버마스가 암시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다는 점, 그리고 지위적 구별짓기가 괄호쳐지고 중립화된 공간이라 선언하는 것은 효 율적이지 못하다는 점 (Frazer, 1992, p.114) 등이 지적되어 왔다. 말하자면, 그간 이뤄져 온 서구의 공공영역 연구들은 하버마스의 개념화가 다수의, 중첩되는 또는 다투는 공론장 - 평민적 공론장 - 이 존재할 수 있음을 간과하였다고 비판하고(Eley, 1992 ; Frazer, 1992 ; Negt & Kluge, 1972), 역사적으로 다양한 공론장이 존재하였음을 증명함으로써 공공영역 을 담론적 연결의 장 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생산적일 것 (Calhoun, 1992, p.38)임을 제기하였다. 이로써, 식민지 시기의 지배-저항관계를 보다 다층적인 지배-저항 관계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진 것이다. 특히, 담론적 연결의 장 으로서의 공공영역 개념에 입각한 접근방식은 사회 내 존재하는 다수의, 중첩되는 또는 다투는 공론장들 간의 관계를 건축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Nerone, 2006, p.258). 단수형의 공공영역 (a public sphere)과 복수 형의 공론장(publics) 간의 관계를 구분한 찰스 테일러(Taylor, 2004/2010)의 논의는 그 건축 학적 함의를 잘 정리해 준다.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한 미디어 - 인쇄 미디어, 전자 미디어, 면대면 접촉 -를 통해 서로 만나고 공통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들을 토론하며 그에 관해 공 3) 한국에서 영어 colonial 은 일반적으로 식민적 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식민지 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식민지적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따라서 엄 격한 의미에서 볼 때 colonial public sphere 라는 용어는 여러 식민지 사회들 간의 비교작업을 통해서 만 도출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식민지 사회의 공공영역들에 대한 비교연구가 축적 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잠정적으로 식민지 상황 하의 공공영역 이란 의미로서 식민 지 공공영역 이라고 번역하였다.

식민지 공공영역 으로서의 1910년대 每 日 申 報 61 통의 의견을 형성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공통공간 (a common space) 으로 공 공영역 개념을 이해한 테일러는, 이러한 하나의 커다란 공간을 함께 엮어내는 것이 바로 다 양한 장소한정적 공통공간 (topical common space)임을 지적한다. 특히 그의 시각에서 특징 적인 것은 공공영역을 사회적 상상의 소산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의하면, 책, 팸플릿, 신문 등이 서로 참고하고 또 반박하면서 각종 주장과 분석, 논거와 반대논거를 실어 나르며 교육받은 공중(public) 사이에서 유통되었고, 널리 읽혀진 인쇄물들의 내용은 종종 면대면 모임에서 또 응접실이나 커피하우스, 살롱 그리고 의회처럼 더 권위있는 공적인 장소 에서 논의되는 과정을 거쳐 나온 일반적인 시각은 새로운 의미에서의 공론으로 여겨졌다. 여 기서 그는 어떤 결론이 공론으로 여겨진다 는 것은 그렇게 상상되는 한에서만 공공영역이 존 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공공영역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에 의하면, 상상만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고, 국지적인 토론의 상호참조 및 인쇄 자본주의 (print capitalism)의 요건들이 본질적 인 공통의 이해가 생성될 수 있는 적절한 문화적 맥락 속에 자리잡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식민지 조선에서 하나의 식민지 공공영역 (a colonial public sphere)의 성립에 필 수불가결한 요건인 공통의 이해 (즉, 공공성 4) =공공적 가치)가 생성될 수 있는 문화적 맥락 은 존재했는가? 그동안 식민지와 피식민자의 대면이라는 이( 異 )문화적 상황은 공통의 이해 가 성립될 기반 자체를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이해되어 왔고, 또 취약한 조건 속에 서 성립되었던 공통의 이해는 식민권력이 국가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과 헌신을 공적인 것 으로 미화하려는 정치적 의도 또는 사적 영역을 이른 바 공공성의 명분으로 국가영역으로 포섭하려는 의도가 개입된 이데올로기적 언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윤해동(2008)에 의하면, 식민지 조선에서 공공성은 선공후사( 先 公 後 私 ), 멸사봉공( 滅 私 奉 公 )이라는 슬로건 아래 식민권력에 의해 절대적 가치로서 언표되는 한편, 민족형성을 위한 저항담론으로도 활용됨으로써, 전체적으로 식민지시기 공공성을 둘러싼 논의의 장은 식민국 가와 조선인 엘리트들 사이에서 대중에 대한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위해 경합하는 공간이었 고, 그런 점에서 식민지 조선에서도 사적 이해를 반영함으로써 공통의 이해를 관철시키려는 의도로 만들어 낸 공공의 가치 혹은 공공의 영역이 존재하였다고 보았다. 그는 식민지에서의 저항과 협력이 교차하는 지점에 존재하는 바로 이러한 공공의 영역을 일컬어 식민적 공공성 4) 근대적 공공성의 중요한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국가에 관계된 공적인 (official) 것이라는 의미로서, 이 의미에서의 공공성은 강제 권력 의무라는 울림을 가진다. 둘째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관계된 공통적인 것(common)이라는 의미로서, 이 의미에서 의 공공성은 공통의 이익 재산, 공통적으로 타당한 규범, 공통의 관심사 같은 것을 가리킨다. 세 번 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open)는 의미로서, 이 의미에서의 공공성은 누구의 접근도 거부하지 않는 공간이나 정보 같은 것을 가리킨다( 齊 藤 純 一, 2000/2009, 18~19쪽). 본고에서 사용하는 공공성 의 의미는 공통의 이익과 관계된 것이라는 두 번째 의미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韓 國 言 論 學 報, 55권 2호 (2011년 4월) 62 이라고 보았다. 지금까지 본고는 식민지 공공영역 (a colonial public sphere)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 질 수 있는 분석적 유용성을 제시하고자 하였지만, 본고의 식민지 공공영역 개념은 (근대성 (modernity)이나 민족주의(nationalism) 개념과 달리) 독자적인 이론적 체계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식민주의(colonialism) 개념 5) 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식민지 적 (colonial)인 고유의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까지 개념화되지 못한 채 아직 시론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를 물리적 폭력과 구별되는 헤게모니적인 문화적 기획으로 보고자 하는 서구 학계의 시각에 의한다면 6), 본고가 제시하고자 하는 식민지 공공영역 이 문화적 기획으로서의 식민주의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치이데올로기 혹은 문화적 기술들로 작용할 수 있는 중요한 담론적 공간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간디(Gandhi, 1998, pp.29-30)에 의하면, 근대 식민주의는 서구 자본주의 확장의 일환으로 서구 가 비서구 의 문화적 가치와 차이를 체계적으로 폐기하거나 부정하려고 시도하는 역사적 과정의 시발점, 즉 일종의 결정적인 역사적 접합점이다. 그리고 근대의 식민주의는 두 식민 당사자들 - 서구 와 비서구, 식민자와 피식민자, 자아와 타자, 문명과 야만, 주인과 노예- 간의 만남에서 비 롯된다. 각각의 자아는 자신 앞에 또 하나의 자아(즉, 타자)와 대면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 을 확보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서로 대면하고 있는 이 두 자아 사이에는 적대와 적의가 존재 하며 각각은 타자의 폐기나 죽음, 그리고 파괴를 목표로 한다. 따라서 일시적으로는 한 쪽 만이 인정받고 다른 쪽은 인정해 주는 상황이 야기된다. 이렇게 보면, 결국 식민주의란 두 식민당사자들 간의, 상호 인정(recognition)을 목표로 한 대면의 결과로서, 피식민자의 문 화적 가치나 차이가 식민지배자에 의해 체계적으로 폐기 부정되는 역사적 과정에 다름 아 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결국 본고가 제시하고자 하는 식민지 공공영역 은 식민지 사 회 내에서 여러 담론들이 공존 대립하는 가운데 식민지배에 의해 피식민자의 문화적 가치 가 폐기 굴절 부정되는, 여론형성의 물리적/상징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5) 식민주의 의 독자적인 이론화의 문제점과 관련해서는 박명규의 글(2001)을 참조바람. 6) 서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식민주의 개념은 물리적 폭력과 구별되는 통치전략의 일환으로 파악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식민주의와 문화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하였던 더크(Dirks, 1992, p.3)에 의하면, 식민지정복이 비록 우월한 무기, 군사조직, 정치권력, 그리고 경제적 부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더라 도, 그것은 또한 복잡하게 연관된 다양한 문화적 기술들 (cultural technologies)에 기초하는 것이었 다. 식민주의는 근대화와 세계자본주의의 냉혹한 논리에 의해 종종 간과되어왔던 문화적 효과들을 가 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체로 통제의 문화적 기획이었다. 식민적 지식 (colonial knowledge)은 식민지정복을 가능하게 한 동시에 그것에 의해 생성되었다. 새롭게 분류된 전통사회에서의 문화적 형 식들 (cultural forms)은 식민자와 피식민자, 근대와 전통, 남성과 여성 간의 새로운 범주들과 대립들 을 창출해 내는 정복과 지배의 식민적 기술들 (colonial technologies)에 의해, 그리고 이를 통해 재구 성되고 변형된다.

식민지 공공영역 으로서의 1910년대 每 日 申 報 63 그렇다면, 강제병합 직후 식민자와 피식민자가 대면하게 되는 문화적 상황에서, 그리고 언론폐색정책 아래 조선인의 목소리를 대변할 매체를 차단당했던 당시의 매체적 상황에서, 1910년대 每 申 의 식민지 공공영역 내 위상은 무엇이었으며, 그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관련된 실증적 연구가 많이 축적된 이후에나 가능하다. 이런 측 면에서 본고의 기획은 시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또 기존의 연구성과를 재해석하였다는 점에서 다분히 기존연구에 대한 주석에 가까운 성격을 띤다. 3.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공론장 구성과 每 日 申 報 상상적 공간이자 담론적 공간으로서의 하나의 식민지 공공영역 은 다수의 경쟁하는 공론 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만나고 공통의 이해관계 가 걸린 문제들을 토 론하며 그에 관해 공통의 의견을 형성할 수 있는 하나의 공통공간으로서의 식민지 공공영역 은 면대면 접촉으로부터 사회조직, 모임, 인쇄미디어 등과 같은 장소 한정적 공통공간 (공 론장, publics)들의 상호매개와 상호참조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이는 매체들 간의 상호매개가 공통의 이해 가 생성될 수 있는 적절한 문화적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어야 가능하다(Taylor, 2004/2010, 135쪽). 그러나 강제병합 직후의 매체적 상황과 문화적 상황은 공통의 이해 를 생성시키기에는 사 회 내 문화적 이질성의 정도가 매우 높았다. 특히 이는 미디어정경 (mediascape)의 근저에 위치해 있는 매체인 언어의 이질성으로부터 비롯된 바가 컸다. 즉, 식민지배자의 언어인 일 본어와 피식민자의 언어인 조선어가 공존하는 이중어적인 (bi-lingual) 문화상황은 공론장 의 구조뿐만 아니라 당대의 모든 사회구성 (social formations)을 계기지웠던 조건이었다. 미디어와 사회와의 관련성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조망하고자 했던 머레이와 벤 그라프(Murray & Wengraf, 1970, pp.185-186)에 의하면 7), 보통 근대사회에 있어서 직접 적인 구술발화 (oral speech)는 일반적으로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양식이 될 수 없지만, 이 중어적인 사회구성과 엘리트 언어의 존재는 불균형적인 (asymmetrical) 발화관계를 확증하 7) 이들은 커뮤니케이션과 사회 의 관계를 파악하는 개념으로서 다분히 유물론적 개념인 커뮤니케이션 체계와 커뮤니케이션 양식의 개념을 역사적인 관점과 결합시킨다. 즉, 모든 사회( 사회구성체 )는 특 정한 역사상의 커뮤니케이션 체계 (historic communication system)를 가지고 있고, 각각의 역사상 의 커뮤니케이션 체계 는 서로 다른 커뮤니케이션 양식 의 조합이라는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다. 이들의 논의는 국가와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미디어가 맺는 관계를 검토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본 고의 연구기획에 잘 부합된다. 특히 계급사회에서 역사상의 커뮤니케이션 체계 는 지배계급의 권력과 응집력을 향상시키고 확증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종속계급의 종속화와 파편화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그들의 명제에 의한다면, 국가와 커뮤니케이션 양식 간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韓 國 言 論 學 報, 55권 2호 (2011년 4월) 64 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때 특혜는 두 가지 형태를 띨 수 있다. 첫째, 엘리트만이 제 2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비밀유지와 사상에 대한 제한된 유통을 유지될 수 있 기 때문에, 지식은 한 가지 언어로 유통되고 무지는 다른 언어에 보존되는 형태이다. 반면, 둘째 非 엘리트는 제2언어(즉 엘리트의 언어)를 배우기를 강제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제국주의적 식민화와 토착어의 탈정당화 (de-legitimation)에 있어 특징적이다. 이는 많은 유용한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는데, 식민자에게 영구적인 유리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토착 민에게 식민자의 문화적 산물을 노출시키는 것을 가능하도록 언어를 강제로 배우게 하는 것 은 식민지적 문화지배를 용이하게 한다. 이처럼 강제병합 직후 연출된 이중어적인 문화상황에서 구술발화적인 양식이 지배적인 커 뮤니케이션 양식으로 부상하게 됨에 따라, 강제병합 직후의 공론장 구조 또한 언어를 중심으 로 재편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인에 의해 발행되었던 일본어 신문과 잡지들은 지배적 공론 장으로서의 위상을 점하게 되었다. 강제병합 이전시기, 경성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일본어 신문으로 京 城 日 報, 京 城 新 報, 大 韓 日 報, 朝 鮮 日 日 등 5개의 신문이 있었지 만, 병합 직후 조선총독부는 이 가운데 京 城 日 報 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약간의 폐간 료를 주고 폐간시켰다. 또한 개항 이후 개항장을 비롯하여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던 지역에 서도 일본어 신문이 상당수 발행되었지만, 병합직후 조선총독부는 이들 지방신문들까지도 1 개 지역에 1개 혹은 2개 신문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폐간시켜 1910년 강점 당시 발행되었 던 지방신문은 18개에 불과하였다. 특히 이러한 지방신문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폐간정책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조차 언론기관의 박멸책 이라 하여 비판할 지경이었다고 한다(박용규, 2006, 40쪽 ; 박찬승, 2009, 19~20쪽). 이와 같은 병합직후 조선총독부의 일본어신문에 대한 강제적인 통폐합 조치는 총독부 기관지였던 京 城 日 報 에 우윌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이 를 중심으로 지배적 공론장을 관리하기 위한 차원에서 취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8). 반면, 조선문자의 신문발행이 허가되지 않음으로써 조선인의 정치적 발언의 길은 원천 봉 쇄되었다. 1910년 이후 신문지법에 의해 조선인의 출판활동이 허가된 일은 전무했고 대대적 인 禁 書 조치가 보여주듯 단행본 출판의 자유 역시 철저하다시피 제약당했다. 단행본 출판 8) 일본 외무성은 강제병합 이전에 일본인 발행 지방신문들에 대해 보조금을 지원해 주었는데, 이는 일본 정부가 조선에서의 신문경영을 일본세력 확장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한편 일본의 외교정책에 어긋나는 논조를 견지하지 않도록 통제 하에 두기로 했기 때문이다(미즈노 나오키, 2007, 255~256쪽). 반면 조 선총독부는 병합 이후에 지방신문들에 대해 별다른 지원을 해 주지 않았는데(박용규, 2006, 41쪽), 이는 조선총독부의 일본어 지방신문에 대한 인식이 기존의 육성정책에서 신문지규칙에 의한 정간조치 등을 위주로 한 관리정책으로 변모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조선총독부가 더 이상 지방신문들 을 육성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주된 이유는, 일제하 지방신문의 대부분의 목표가 총독정치에의 협조와 거류일본인의 권익 옹호 (김진화, 1978, 63쪽)에 있었고 또 이 두 가지 목표는 대부분 조화를 이루었지만, 때로는 거류일본인의 권익 을 지나치게 앞세워 조선총독부의 입장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박용규, 2006, 48쪽).

식민지 공공영역 으로서의 1910년대 每 日 申 報 65 규칙에 따라 발행된 정기간행물의 존재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천도교회월보, 公 道, 惟 心 등 다수의 종교 잡지를 제외하면 1910년대의 잡지란 신문사-반도시론사 간행의 신문계 및 반도시론, 그리고 신문관 발행의 붉은 저고리, 아이들보이, 새별, 청춘 이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권보드래, 2010b, 21쪽). 물론 1910년대에 每 申 을 제외하곤 한국어로 발행된 신문매체가 아예 없었다는 통념과 달리, 1910년대 초반기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어로 발행되었던 몇몇 신문들이 존재하였지만 9), 발행기간이나 정치적 영향 력이 있어서는 매우 미미했다. 더구나 병합직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결사 정치적 집회 를 금지함으로써, 면대면 접촉에 의한 언론활동까지도 통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조선어 를 매개로 한 저항적 공론장들은 주변부화되어 비밀결사체나 소문과 같은 형태로 음성화되 게 되었다. 이와 같이 병합직후의 이중어적인 문화상황 속에서 식민지 조선의 공론장 구조는 언어를 기준으로 이원화된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이원화된 공론장의 구도 하에서 每 申 이 가졌던 위상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이지만 피식민자의 언어인 한국어로 발행되었다는 측면에서 매 우 양가적인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라는 측면에서 每 申 은 분명히 지배적 공론장에 해 당되었지만, 피식민지인의 언어로 발행되었다는 측면에서 지배적 공론장 내에서 차지하는 每 申 의 위상은 일본어신문이었던 京 城 日 報 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변적인 위상을 지녔다. 이러한 每 申 의 지배적 공론장 내 주변부적 위상은 병합 직전 데라우치( 寺 內 ) 총독의 언론정 책 구상과 신문사 조직구성의 측면에서도 확인된다. 정진석(2005, 68~100쪽)에 의하면, 데 라우치는 처음에 일본 國 民 新 聞 사장 도쿠토미 소호( 德 富 蘇 峰 )에게 大 韓 每 日 申 報 만 맡기려 하였지만, 도쿠토미가 이 기회에 일체의 신문을 일어판 京 城 日 報 에 집중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아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京 城 日 報 와 每 申 을 하나의 회사로 통합하였는데, 이때 도쿠토미가 京 城 日 報 와 每 申 을 자신의 체제로 장악한 후 사원들에 게 훈시( 訓 示 )한 내용 중에는 매일신보는 경성일보와 제휴하고 항시 그 보조를 동일하게 할 것 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체의 신문을 일어판 京 城 日 報 에 집중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도쿠토미의 의견개진, 그리고 每 申 을 항상 京 城 日 報 의 내용에 보조맞추도록 한 도쿠토미의 훈시문은 모두 每 申 의 주변부적 위상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신문사 조직구성 상에 있어서도 1920년 민간신문의 출현에 대응하여 조직변화를 꾀하기 이 9) 경남 진주에서 발행되던 지방지이긴 하지만 1910년대 중반까지 발행되던 慶 南 日 報 와 일본인이 발행 하던 신문의 한국어판 신문인 朝 鮮 新 聞 이 이에 해당된다. 開 化 에 무관심한 영남지방의 교육과 발전을 신문의 발간으로 도모하겠다는 취지에서 1909년 10월 15일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창간되었던 慶 南 日 報 는 중앙지가 아니라서 그 영향력이 매우 한정적이었던 덕분에, 그리고 정치적 문제를 피하고 민지 ( 民 智 ) 개발 과 실업장려 라는 목적에만 치중했기 때문인지 병합 이후에도 총독부의 묵인 하에 일정기간 지속되었지만 결국 1914년 말 폐간되었던 신문이다(최기영, 1988, 185~206쪽 ; 정진석, 2001, 121~122쪽). 또한 인천지역에서 일본인이 발행하던 朝 鮮 新 聞 신문은 조선어판을 1911년 10월 1일부 터 발행하였는데(윤상길, 2010, 42쪽), 조선어판의 주된 내용은 사회면과 문예면에 한정된 것이었다.

韓 國 言 論 學 報, 55권 2호 (2011년 4월) 66 전까지 每 申 은 京 城 日 報 편집국장 밑에 한 개의 부( 部 ) 수준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식민적 대면상황과 커뮤니케이션 상황은 每 申 의 지배적 공론장 내 주변부적 위상 을 역전시켰다. 왜냐하면 강제병합 이후 인식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갑작스레 방향 상실 에 빠져버린 1910년대의 조선인들은 일상에서 겪는 폭력과 차별과 통제, 그에 대한 공포와 불만을 소문 의 형식으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식민화 초기에는 재산을 압류하거나 강제 예치시킨다는 소문, 인두세를 징수하고 토지를 몰수하리라는 소문이 돌았고, 단발과 일본 의복을 강제하며 여성은 모두 일본인과 결혼시킨다는 풍문도 퍼졌다. 전염병이 대대적으로 유행하리라는 소문 때문에 비싼 돈을 받고 부적 파는 사기꾼이 판치고, 계룡산에 새 왕조가 선다는 풍문이 번지면서 秘 訣 장수가 수지맞기도 했다(권보드래, 2010a, 4쪽). 소문이란, 어떤 비정상적인 일이 발생했을 때 그의 해결을 위해, 관련된 사람들의 지력을 모으는 과정 에서 생성된 커뮤니케이션 유형 (Shibutani, 1966, p.9 ; 방정배 최윤희, 1989, 405쪽에서 재인용)으로서, 어떤 상황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한 집합적인 노력 (Lang & Lang, 1961, p.51 ; 방정배 최윤희, 1989, 405쪽에서 재인용)이다. 특히 소문은 극적인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뉴스의 부족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행되거나, 매스미디어가 그의 기능을 제대 로 하고 있지 못하거나, 또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을 때 발생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정보관리체제 중의 하나인 매스 미디어가 주위 환경변화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민중들에게 전달해주지 못하여, 이를테면, 민중들이 정보의 빈곤상태 혹은 정보에 대한 굶주림상태 에 놓여 있을 때, 혹은 주위환경에 대해서 충분한 정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원우현, 1982, 8 쪽), 소문은 민중들이 (거의 맹신에 가까울 정도로) 의지할 수 있었던 대안적인 미디어로 재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여론형성의 사회영역 이라 할 수 있는 공론장이 식민지배에 의해 굴절 왜곡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서 유언비어와 같은 소 문은 매우 중요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식민지배자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 한 방편으로서 허위적 정보로 이루어진 선전메시지를 지배적 공론장을 통해 유포시키는 한 편, 피식민지인들의 커뮤니케이션적 욕구를 해소해 줄 매스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식민지배 자들에 의해 차단되어 있는 경우라면, 이때의 소문은 사회적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며 저항적 공론장 의 성격까지도 지니게 된다. 소문이 형성된 상황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 면, 이는 1) 당시의 매체 상황을 포함한 사회적 소통상황의 양상, 2) 당시의 제도적 커뮤니 케이션 매체인 언론에 대한 피식민지인들의 불신감을 잘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 문의 내용과 관련시켜 보면, 대부분의 소문이 거짓 정보에 불과한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식 민지적 상황에서 비롯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구조의 왜곡이 야기한 소문의 경우에는 반드 시 거짓이라고 단정지울 수 없으며, 이는 또한 기층 피식민지인들의 식민지배 상황에 대한 집합적 해석의 노력으로서 이들의 저항적 의지의 발로이자 억압된 커뮤니케이션 욕구가 분 출된 저항적 공론장 (counter publics)으로 이해된다 10). 이렇듯 신뢰할 만한 민간 언론이

식민지 공공영역 으로서의 1910년대 每 日 申 報 67 사라진 상황에서 소문은 유사-언론이자 유사-네트워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권보드 래, 2010a, 4쪽). 이와 같이, 병합 직후 조선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저항적 공론장의 유력한 매체로서 등장 하게 됨에 따라, 每 申 은 京 城 日 報 에 비해 주변적인 지배적 공론장으로서의 위상에서 탈 피하여, 적극적으로 지배적 공론장과 저항적 공론장을 중개하는 위상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식민화 초기 每 申 은 조선인 토착사회 내에서 널리 유포되고 있던 소문을 반박하는 형태의 선전전략을 채택하게 되었다. 다음의 신문사설은 모두 소문이 대인커뮤니 케이션 채널을 통해 유포되는 사회적 소통상황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항간의 풍문을 반박하 는 형태로 선전 전략을 채택하는 경우에 해당되는 사례들이다. 먼저 첫 번째 사설은 조선은행의 정화준비와 관련해서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한 사 람들의 불안심리와 그로부터 야기된 여러 풍문들에 대해서, 사설을 쓴 기자가 탁지부 담당 자를 취재한 결과로 태환 준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大 抵 謨 銀 行 을 물론 고 正 貨 의 준비가 完 固 치 못 면 도저히 신용을 得 키 難 거던 況 朝 鮮 銀 行 은 朝 鮮 全 道 의 금고라 其 신용의 如 何 更 無 可 論 이어 近 日 에 各 種 風 說 을 據 건 대 其 은행은 如 何 다 其 은행은 如 何 다 야 其 喧 傳 (훤전)이 不 一 으로 度 支 部 (탁지 부) 當 局 者 에게 對 야 其 실황을 得 聞 則 同 은행권은 태환준비로 야 발행액과 동액의 正 貨 ( 金 貨 及 日 本 銀, 兌 換 券 )와 公 債 기타확실 證 券 及 商 業 手 形 을 保 証 으로 충실함을 每 週 官 報 의 공고와 如 히 고...(중략)... 兌 換 준비에 關 정부의 감독은 상술과 如 則 一 毫 도 의심 자가 없다하니 此 정확 實 報 라 發 行 額 及 準 備 額 의 일람표 旣 本 報 에 全 載 하 載 얏기로..(1911년 12월 2일, < 朝 鮮 正 貨 의 準 備 >) 아래의 사설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의 결과로 나타난 수입초과 상황을 우려하는 비관론자 들의 풍문들을 반박하면서, 수입초과의 경제상황은 이후의 과도시대에 불가피한 현상이며 오히려 조선경제가 진보하는 과정에서 앞으로 수출이 번성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고, 수 입이 많은 것도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이기 때문에 그리 걱정 할 것이 못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10) 비슷한 맥락에서 네그트와 클루게(Negt & Kluge, 1972)는 공론장 개념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이 공 론장을 어느 특정한 사회적 삶의 맥락(life-context) 을 특별히 표현하고 있지 않은 중간영역으로 상정 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공론장을 반드시 구체적인 사회적 삶의 맥락 과 관련된 경험으로서 파 악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네그트와 클루게의 주장은 비단 자본제적 생산과 관련된 - 노동과 관련된 - 경험뿐만 아니라 여성의 경험, 제국주의적 지배와 민족주의적 저항이라는 양극 사이 의 여러 경험들을 공론장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경험의 영역으로 서 공론장 개념을 식민지시기 조선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식민지 시기의 다양한 경험영역을 복원해 내 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여진다.

韓 國 言 論 學 報, 55권 2호 (2011년 4월) 68 近 者 조선경제계의 추세에 대 야 일부 비관론자 第 一 憂 慮 바의 輸 移 入 超 過 等 은 吾 人 이 再 三 論 陳 과 如 히 과도시대에 可 히 免 치 못 현상이니 금일의 移 入 초과 卽 조 선경제계 진보의 道 程 인즉 不 及 에 輸 移 出 을 번성케 素 子 -라 謂 야도 可 나. 然 나 其 輸 移 出 入 品 의 태반은 全 히 외국으로브터 수입 이 안이오 內 地 로브터 수입 이 多 니 足 히 憂 慮 바가 안이로다. 帝 國 全 體 上 論 면 反 히 好 현상이라 야도 可 다 은 다 만 吾 人 뿐 안이라 識 者 의 공인 바이오로다. 朝 鮮 現 下 의 경제계 見 건대 합병이래 로 의연히 순조로 진행 뿐 안이라 近 時 지방경제의 발전이 현저 고 지방농민의 구매력 이 의외에 증진 야 此 最 近 二 三 年 前 에 비교 면...징세성적도 양호 며 금융도 원만 즉...(1911년 12월 24일, < 朝 鮮 經 濟 界 >) 아래의 사설은 당시에 제정된 부과세 징세가 인민의 곤란만을 증가시킨다는 항간의 반발 에 대해, 그것은 가옥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막기 위해 가옥의 소유권을 확고하게 할 방 법을 시행하는 데에 따르는 비용일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近 來 부과세가 出 後 로, 高 等 定 見 이 無 자, 往 往 誹 言 을 作 되, 가옥세도 곤란을 不 免 얏거던, 부과세가 又 히 出 니, 此 稅 를 何 處 에 用 인지, 徒 히 인민의 곤란만 증가 다 야, 莫 重 應 稅 를 관리가 制 壓 으로 收 去 과 같이, 일반이 誤 解 니, 此 誤 解 者 에 對 야 責 바이 안이라 稍 히 상식이 有 자가 隣 里 부근에게 其 利 害 를 詳 細 說 明 치 안이 으로 由 얏다 지로다. 대저 가옥세 가옥의 소대를 물론 고 各 其 상당 稅 納 이 有 야, 雖 曰 公 用 이라 謂 지나, 卽 자기가옥에 應 經 費 에 보충 이니 자기가 자기가옥에 應 경비를 보충 고 反 히 誰 f를 怨 리오...가옥의 소유권이 확고치못 으로 爭 訟 이 不 息 얏스니, 其 時 官 廳 은 시비가 起 연후에 惑 從 長 備 決 러니와, 一 分 이라도 其 소유권을 확고히 방법은 不 講 얏도다. 今 에 일반가옥의 확고케 방법을 시행 야, 家 券 을 명료케 동시에, 必 算 外 의 경비를 要 지니, 此 가 卽 가옥세의 원인이 라...(1912년 6월 26일, < 賦 課 稅 의 誤 解 >) 마지막 사설은 국유미간지취체령(1912)에 대한 조선 민중들의 반발에 직면해서, 국유미 간지취체령은 조선인민의 미간지 이용사상을 고취하여 그 이용방법을 널리 알리는 것이 주 목적이라는 반박하면서, 同 令 의 적실성을 선전하고 있다. 此 令 [ 國 有 未 墾 地 取 締 令 ]이 出 ㅣ, 惑 人 民 中, 復 非 의 論 이 有 나, 조선인민이 미간지 를 이용함을 不 知 뿐 안이라 惑 이용 지라도 규율이 散 亂 야 徒 히 공사의 손해만 生 케 으로, 本 令 을 制 定 이 인민으로 야곰 미간지의 이용사상을 고취 며, 미간지의 이용방법 을 周 知 케 이니, 卽 人 民 에 對 야, 미간지이용을 獎 勵 이라...(1912년 6월 28일, < 國 有 未 墾 地 取 締 令 >) 이러한 위의 사설들은 모두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대한 기층 민중들의 반발이 유언비어와

식민지 공공영역 으로서의 1910년대 每 日 申 報 69 풍문의 형태로 유포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이러한 세간의 소문들에 대해서 반박하기 위해서 쓰여 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항간의 풍문들이 모두 조선 민중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매체가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였고, 그 풍문의 내용에 대해 각 사설이 반박하 는 과정에서 일제의 경제침탈의 결과에 대한 조선민중의 우려와 불만이 은연중에 표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1910년대 每 申 은 양쪽의 공론장을 담론적으로 연결 하는 장이자 식민지배자와 피식민지인 간의 담론투쟁의 장( 場 )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 할 수 있다. 4. 식민적 공공성 구현을 위한 每 日 申 報 의 담론전략 3장의 내용을 통해 본고에서는 1910년대의 每 申 이 당대의 지배적 공론장과 저항적 공론 장을 담론적으로 연결시키는 하나의 식민지 공공영역 (a colonial public sphere)으로서의 사 회적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1910년대의 식민지 조 선에 있어서 물리적 강제력에 의한 저항진압에 지배의 중심이 있었고, 헤게모니적 계기는 아직 미약 (오하다 히로시, 1992, 153쪽)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화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조 선총독부의 동력 또한 빈약하였던 탓에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지배정책은 동화주의 와 종 속주의 사이에서 요동하면서 억압적 권력으로 시종( 始 終 )하였다(권보드래, 2010b, 19-23 쪽). 이러한 상황 속에서, 每 日 申 報 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간단히 말해 조선총독부를 자신의 통치구역 내에서 공공적 가치를 구현해 내는 최상위의 주체로 생산(구성)해 내는 것 이었다 (김현주, 2010, 223쪽). 식민정책에 필요한 인간군의 효율적인 동원을 위해 식민지 에도 이성과 합리성이 중요한 가치체계로서 이식 (정태헌, 1996, 242쪽)되기 때문에, 식민 지 공공영역 은 식민지배에 필요한 식민적 공공성 (colonial publicity)의 성립을 요구한다. 이러한 식민적 공공성 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피식민지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열등의식의 앙양뿐만 아니라, 근대화 혹은 문명화의 사명에 대한 내면화가 수반되게 된다. 본 장에서는 1910년대의 미약한 헤게모니적 계기 속에서 每 申 이 식민적 공공성 의 담론적 구현을 위한 조건창출을 위하여 어떠한 전략을 구사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선 우선 좀더 넓은 시각에서 선전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거 대부분의 선 전연구들이 견지한 관점은, 선전을 정치지배자의 조작의도가 삽입된 조작된 여론 11) 혹은 소수인 엘리트가 지도력에 의해 다수인 대중을 교화시키는 엘리트적 여론주도 현상 12) 으로 11) 조작이론에서 설명하는 여론은 사람은 주관적 의견을 여론이란 말을 빌어서 인용하고 여론인 것처럼 조작하려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자신을 표현하거나 타인을 설득하는 수단 으로 원용하면서 이를 여론이라고 내세우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원우현, 1990, 43쪽) 12) 엘리트 이론은 여론에 대한 시각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것으로서, 사회성원을 엘

韓 國 言 論 學 報, 55권 2호 (2011년 4월) 70 지나치게 협소하고 고립된 현상으로 간주해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연구에서는 항상 시민이 국가로부터 분리된 존재인 것처럼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이고도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서 선전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여 왔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선, 선전을 근대사회의 본질적인 한 측면으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엘뤼(Ellul, 1965)는 선 전을 사람들이 어떤 목적으로 위해서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회학적 현상으로 간주 하고, 특히 근대 기술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그에 의하면 실질적인 선전의 차원을 구별하기 위해선, 항상 문명이라는 맥락에서 선전을 사고 (p.17)해야 하며, 선전(propaganda)은 체제(regime)의 정치수단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고자 하 는 기술사회의 효과이며, 완벽히 통합된 사회이고자 하는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현 재 선전은 이러한 통합경향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며, 국가와 행정적 기법의 힘이 점차 증가하는 상황 한 가운데 위치해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p.18). 이렇듯 정치학적 현상 이 아니라 사회학적 현상으로 선전을 파악하고자 한 엘뤼의 통찰은 선전이 식민국가 (colonial state) 의 사회통합 목적에 기여하는, 식민지 공공영역 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점 을 시사해 주는 한편, 근대사회의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서 선전을 조망할 수 있 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즉, 사회 전반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고려 속에서 선전을 다시 사 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앞서 3장에서 지적한 바대로 병합 직후인 1910년대 초 조선인 토 착사회에 떠도는 소문을 반박하는 논박형태의 선전전략은 每 申 이 식민적 공공성 의 담론적 구현을 위한 담론전략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每 申 의 선전전략이 피식민지인의 공 포와 불안을 무마시키기 위한 담론적 차원의 조치였다면, 1911년 이후 조선총독부와 每 申 이 취하였던 일련의 조치들은 식민적 공공성 의 담론적 구현을 위한 조건창출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창출의 착수지점은 이중어적인 언어상황이었다. 1910년대의 (문자)언어상황은 한글과 일본어라는 두 개 항을 넘어 보다 복잡했다. 서유 견문 과 독립신문 이래의 어문 혁신에도 불구하고 한문의 문화적 위치에 대한 재조정 작 업이 완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每 申 은 한문의 문화적 가치를 재조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는 데(권보드래, 2010b, 13~14쪽), 이는 조선총독부의 정책방향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즉,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 초부터 조선인들을 지도하고 대표할 집단으로 조선귀족 과 중 앙 및 지방의 유림을 지목하고 이들이 조선인들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도록 다양 한 담론적 지원을 해 왔는데, 이는 일선인( 日 鮮 人 )의 중류 이상 계급(유력자, 사상가, 실업 가 등)이 진정으로 융화하면 그 이하의 사회는 저절로 따라온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김현주, 2010, 247쪽).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정책방향에 따라 每 申 은 제1 2면에 한학 지 리트와 비엘리트로 구별하여 여론은 엘리트에 의해 생성 조종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여론의 주 도자는 엘리트이며, 여론이란 지배적 엘리트의 가치와 선호경향에 좌우된다고 보는 견해이다 (원우 현, 1990, 51쪽)

식민지 공공영역 으로서의 1910년대 每 日 申 報 71 식인의 만필( 漫 筆 )이나 한시를 위한 난을 상설화하고 현상문예를 통해 한시를 공모하는가 하면, 유학과 한문학 관련 행사가 있을 때마다 홍보자의 역할을 자임했다. 문명의 완성에는 유학이 필수적이라는 주장하는 신문사설을 게재하는가 하면, 신지식을 두루 갖추었더라도 한학 교양을 아울러야만 최종적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설파하는 신문사설, 유학이 조선인 의 정신교육 방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문사설 등 사설란을 통해 한문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권보드래, 2010b, 15쪽).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한문의 문화적 위치에 대한 재조정 작업이 1912년 3월 1일에 단행된 每 申 의 지면개편과 무관치 않다는 점이다. 每 申 은 京 城 日 報 와 통합된 후에도 국 학문판과 한글판 두 개의 신문을 발행했으나 1912년 3월 1일부터는 한글판을 폐지하는 대신 에 3면(사회면)과 제4면(문화면)을 한글 전용으로 제작하였다 13) (정진석, 2005, 94쪽). 이 렇듯 지면을 내용상 그리고 언어표기상 분할하였던 1912년의 지면개편의 중요한 요점은 하 나의 신문지면 속에서 언어적이고 내용적인 분화를 꾀하여 지면을 비균질적인 공간으로 만 드는 것에 있었는데, 이는 지면 속에서 식민통치이념의 선전이라는 정치적인 측면과 한글소 비계층을 위한 읽을거리를 제공함으로써 그간 보여왔던 판매부진을 해소하고자 하는 상업 적인 측면을 구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면이 없지 않다(송민호, 2009, 189쪽). 그러 나 무엇보다 이러한 지면개편의 기저에 놓여있는 식민권력의 의도는 일제의 식민통치 이념 을 담고 있는 1,2면의 정치와 경제 기사에 기존의 전통적인 조선인 지식인 계층에게 익숙한 한문체를 사용함으로써, 전통적 지식인 계층인 유학자를 교화 포섭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 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지면구성은 1910년대 중반이후까지도 지속되는 한편, 식민권 력이 의도하였던 유학자 포섭은 일정정도 성공을 거두어 상당수의 조선인 유학자들이 외부 필진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장지연은 이미 1914년부터 고정필자로 활동하였 다(김현주, 2010, 243~246쪽). 한편, 1912년 3월 1일의 지면개편과 관련해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사회면의 사실성 강 화와 사회면의 사회 라는 범주에 대한 관심이다. 每 申 의 사회면이었던 3면을 순한글로 바꾸 면서 나타난 특기할 만한 중요한 변화는 사회면 기사가 이전의 사실적인 정보제시를 중심으 로 한 글쓰기로부터 소설적 묘사에 상당하는 글쓰기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 화를 통해서 사건을 재구성하는 신소설의 일반화된 방식이 신문기사 글쓰기에 도입됨으로 써 사실 의 역동화가 꾀해졌다(송민호, 2009, 190쪽). 한편, 병합 직후의 每 申 에서 사회 범 주의 존재성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1912년 지면개편에 따라 새롭게 마련된 13) 정진석(2005)에 의하면, 이른바 경파기사( 硬 派 記 事 )인 정치와 경제 기사를 싣는 1면과 2면에는 국한 문을 쓰고, 연파기사( 軟 派 記 事 )인 사회면(3면)과 문화면(4면)을 한글 전용으로 쓰기 시작한 방법은 이때부터 신문 제작의 패턴이 되었고, 그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될 때에도 정치-경제면(1~2 면)은 국한문, 사회-문화면(3~4)면은 한글을 전용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어 광복 후까지 신문편집의 전형으로 확립되었다(94~95쪽).

韓 國 言 論 學 報, 55권 2호 (2011년 4월) 72 편집체제에서 조선인들의 생활세계를 재현하는 지면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특히 전체 지 면의 1/4에 해당하는 3면 전체를 조선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사고를 보도하는 기사에 배당하기 시작함으로써 每 申 은 (조선인들의) 사회 를 중요한 사회적 실재로 다루기 시작하 였다(김현주, 2009, 241~249쪽). 이러한 1912년 3월 1일의 지면개편을 계기로 나타났던 사 회면의 사실성 강화와 사회면의 사회 라는 범주에 대한 관심은, 식민적 공공성 을 구현하기 위해 식민적 공공성 에 위배되는 조선인 토착사회 내 현실을 담론적으로 구성해 내기 위한 저널리즘적 장치의 마련에 每 申 이 얼마나 교묘한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순한글의 사회면과 관련해 특히 관심을 끄는 점은 식민지인으로서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 신들의 삶에 새로운 공동성을 조직하기 위해 每 申 의 지배적인 해석틀에 도전하기 시작하였 다는 점이다. 每 申 에 게재되었던 이광수의 신문기사에 대한 분석을 통해 1910년대 사회적 공공성의 궤적을 추적하였던 김현주의 연구(2010)에 의하면, 사회 가 추구해야 할 공동의 가치를 질서 로 규정하고 그것을 실현할 힘을 개인의 도덕심 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每 申 이 사회 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계속적으로 견지해 왔는데, 이러한 사회면 의 수사적 목표는 조선인 독자들이 자신들의 사회 를 치안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에 있었다. 즉, 무질서한 도덕적 타락을 일소하는 데 식민권력이 기여했음을 보여줌으로써 통치정당성을 부여받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每 申 에 게재되었던 이광수의 글은 기존의 지배적인 해석 틀인 직접적인 치안 의 관점에 도전하여, 사회는 법률로는 향상시킬 수 없으며 사회가 스스 로 다스려 가도록 해야 한다 는, 말하자면 사회의 질서유지는 식민자가 구축한 국가의 법과 는 다른 기제가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기존의 해석틀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으 로 지적되었던 청년들의 나태와 타락, 범죄는 청년 개개인의 도덕적 결함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청년들을 그러한 처지에 둔 사회의 결함에 기인한 것이며, 따라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은 청년들이 아니라 사회라고 봄으로써, 이광수는 청년들의 범죄를 개인 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의 문제로 해석했다는 것이다(237~240쪽). 이러한 1910년대 중반 이광수의 사례를 토 대로 김현주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1910년대 중후반의 2년여 동안 每 日 申 報 에 실린 이광수의 모든 글의 내적 형식은 사회비 평으로 정의할 수 있다. 외적으로는 기행문, 서간문, 소설 등의 형식을 취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회적 공공성의 감각과 이데올로기를 확산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광수의 기행 문, 서간문, 소설들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이익을 공유하고 공통의 가치 규범에 의해 규율되는 동질적인 공동체, 곧 (조선인들의) 사회 의 구성원으로 상상하도록 했다. 이로써 사회 는 조선인들의 공동가치가 만들어지고 저장되는 장소이며 공적 발화의 숨겨진 주체이 자 행위자인 것처럼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김현주, 2010, 254쪽). 인용문에서 제시한 김현주의 결론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인다면, 1910년대 후반 每 申 이라 는 담론공간( 공론장 )은 당대의 식민적 공공성 이라는 공통의 이해가 생성될 수 있는 적절한

식민지 공공영역 으로서의 1910년대 每 日 申 報 73 문화적 맥락 속에 자리잡게 됨으로써, 상상적인 하나의 식민지 공공영역 (a colonial public sphere)의 성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점은 조선사회 전 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每 申 의 조선인 독자들에 대한 每 申 의 영향력이다. 일견 1910년 당시 의 발행부수도 12,000부에 불과하며 1910년대 시기의 발행부수도 2만부 내외일 것으로 추 산할 때, 每 申 의 영향력이 상당히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문배포와 같은 신문제작 및 배포의 조건들을 생각해 보면, 每 申 의 사회적 영향력이 생각만큼 작지 않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慶 南 日 報 나 朝 鮮 新 聞 과 같은 한국어 신 문들이 1910년대 중반까지 존재하긴 하였지만 지방(진주와 인천)에서 발행되었던 이유로 인 해 이 신문들의 영향력은 상당부분 제한적이었지만, 각 郡 面 등 지방행정단위별로 每 申 의 구독을 의무화함으로써 총독부의 비호 하에 보급되었던 전국규모의 중앙지로서 每 申 이 가진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5. 결 론 본고는 1910년대 당시의 시대상황과 합병직후의 문화상황 속에서 每 日 申 報 가 가지는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가를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당시 사회 전반의 커뮤니케이션 상황과 커뮤니케이션 욕구를 고려한다면 每 日 申 報 가 가지는 사회적 위상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인식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서 소문에 주목하면 서 1910년대 언론 상황과 每 日 申 報 의 사회적 역할을 식민지 공공영역 과 공론장 개념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강제병합 직후의 매체적 상황과 문화적 상황은 공통의 이해 를 생성시키기에는 사회 내 문화적 이질성의 정도가 미디어정경 의 근저에 위치해 있는 매체인 언어의 이질성으로 인해 매우 높은 식민지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어적인 문화상황은 공론장의 구조 뿐만 아니라 당대의 모든 사회구성 (social formations)을 계기지웠던 조건이었고, 이에 따 라 합병 직후 식민지 조선의 공론장 구성이 일본어를 근간으로 한 지배적 공론장과 조선어를 근간으로 한 저항적 공론장으로 이원화되었다. 특히 소문이 저항적 공론장의 유력한 매체로 등장하게 됨에 따라 지배적 공론장 구성 내에서 상대적으로 주변적 위치를 점하고 있던 每 申 의 사회적 위상은 건축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지배적 공론장과 저항적 공론장을 담론적으로 연결하는, 식민지배자와 피식민지인 간의 담론투쟁의 장으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每 申 의 사회적 위상이 지배적 공론장과 저항적 공론장을 담론적으로 연결하는 하나의 식 민지 공공영역 이었다는 점은 제한된 공통성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每 申 이 식민통치의 동원 을 위해 필요한 식민적 공공성 을 담론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담론전략에서도 확인된다. 우 선 每 申 은 항간의 소문을 반박하는 논박형태의 선전전략을 구사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韓 國 言 論 學 報, 55권 2호 (2011년 4월) 74 는 식민적 공공성 의 담론적 구현을 위한 조건창출의 전략으로서 이중어적 언어상황에 개입 하였다. 즉, 1912년 무렵 단행되었던 每 申 의 지면개편은 전통적인 조선인 지식인층을 교 화 포섭하고 식민적 공공성 구현을 위한 담론적 구성을 겨냥한 저널리즘 장치였던 것이 다. 뿐만 아니라, 每 申 의 필진에 참여하였던 조선인 지식인층은 식민권력의 지배적인 해석 틀에 제한적이나마 도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고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연구 상의 한계점을 지닌다. 첫째, 이론적 관점으로부 터 每 申 의 사회적 역할을 규명하는 데 연구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소문을 반박하는 사설의 양적 분석이나 내용분석, 그리고 1912년 지면개편의 내용 등과 같은 연구쟁점들을 본격적으 로 다루지 못하였다. 또한 每 申 내부의 변화와 식민지 통치정책 간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지 못하였다. 둘째, 언론학계의 연구부진으로 국문학계의 특정 연구성과에 지나치게 많이 의 존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구 상의 한계점들에 대한 보완은 추후의 과제로 남기며, 이러한 보완에 보다 많은 언론학 연구자들의 참여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권보드래 (2010a), 1910년대, 암흑에의 적응,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사회사학회 공동주체 학술 회의(2010.8.17), 한국 근현대 100년, 일상생활의 변화. 권보드래 (2010b), 1910년대의 이중어 상황과 문학 언어, 한국어문학연구 54집. 권태억 (2002), 1910년대 일제의 조선동화정책,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학술토론회 자료집. 김세은 (2001), 유교문화와 공론권, 언론과 사회 Vol.9 No.4. 김민환 박용규 김문종 (2008), 일제강점기 언론사 연구, 서울 : 나남 김진화 (1978), 일제하 대구의 언론 연구, 대구 : 영남일보사. 김현주 (2009), 1910년대초 매일신보 의 사회 담론과 공공성, 현대문학의 연구 39집. 김현주 (2010), 식민지에서 사회 와 사회적 공공성의 궤적, 한국문학연구 38집. 미즈노 나오키 (2007), 자료소개 : 식민지기 조선의 일본어신문, 역사문제연구 제18호. 박명규 (2001), 역사사회학의 시공간성: 신기욱 교수에 대한 비판적 논의, 한국사회학회. 박용규 (2006), 일제하 지방신문의 현실과 역할, 한국언론학보 50(6). 박찬승 (2009), 언론운동, 천안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방정배 최윤희 (1989), 여론과 정치설득, 서울 : 나남. 송민호 (2009), 1910년대 초기 매일신보 의 미디어적 변모와 소설적 실감 의 형성, 한국문학 연구 37. 수요역사연구회 편 (2003), 식민지조선과 매일신보 : 1910년대, 서울 : 신서원. 수요역사연구회 편 (2005),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매일신보 : 1910년대, 서울 : 두리미디어. 오하다 히로시 (1992), 헤게모니 관점에서 재조명한 일제하 언론사연구, 한국언론정보학보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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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國 言 論 學 報, 55권 2호 (2011년 4 월) 430 The paper aims to reveal the social role of ' '( ) which was the official press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in 1910s, in terms of the theoretical perspective of 'colonial public sphere'. Directly after the forced annexation of 1910, the social formation of publics in colonial Korea, which was made up of dominant publics based on Japanese language as the colonizer's language and subordinate publics based on Korean language as the colonized's language, had dualistic characters. ' '( ) played a role as 'a colonial public sphere', that is, a discursive bridge between dominant publics and subordinate publics, in that it published many newspaper stories which refuted rumour as expression of the colonized's oppressed opinion. Also, In the purpose of discursively realizing 'colonial public' which was mobilized as way of rule, ' '( ) intervened in the bilingual-bicultural situation of colonial Korea by carrying out reorganization of newspaper page. So to speak, this reorganization of newspaper page served as a journalistic device to realize 'colonial public' discursively, and win Korean elite over. Also Korean elite who did active work writing news story in Korean often challenged the dominant hermeneutic framework of ' '( ). Key words : ' '( ), colonial public sphere, publics, rumour, discour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