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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논총 제66집 (2011), pp. 357 381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김 학 재 (고려대학교 철학과) 1. 들어가며 주지하듯 이지( 李 贄, 1527 1602, 號 는 卓 吾 )는 명대의 대표적인 삼교 합일론자( 三 敎 合 一 論 ) 중 하나이다. 그는 유교, 불교, 도교(도가)가 결국 은 귀결점이 동일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귀결점은 다름 아닌 수기( 修 己, self-cultivation)와 치인( 治 人, ruling others)이었다. 1) 즉, 이지는 유 불 도 모두가 마음의 수양을 배움의 중심으로 삼고 그러한 수양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을 교화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상통한다고 생각하였 1) 자세한 것은 다음을 참고하시오. 김학재(2010), 양명학과 도가사상: 이지의 도가사 상 연구의 양명학적 동기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정신문화연구 통권121호. 주제어: 이지( 李 贄, 1527 1602), 탁오( 卓 吾 ), 노자 ( 老 子 ), 도덕경 ( 道 德 經 ), 노 자해 ( 老 子 解 ), 해로 ( 解 老 ), 도( 道 ), 유무( 有 無 ), 공( 空 ) Li Zhi( 李 贄, 1527 1602), Zhuowu( 卓 吾 ), the Laozi( 老 子 ), the Daodejing( 道 德 經 ), Laozi jie( 老 子 解 ), Jielao( 解 老 ), Dao, you-wu( 有 無 ), being and non-being, kong( 空 ), emptiness, Śūnyata

358 인문논총 제66집 (2011) 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지는 도덕경 ( 道 德 經 ), 남화경 ( 南 華 經 ), 문시 진경 ( 文 始 真 經 ), 화서 ( 化 書 ) 등의 도가류의 책들을 자기 수양을 위해 읽을 것을 권장했으며, 현재는 일실되고 없는 도교초 ( 道 敎 鈔 )를 편집 하여 후학들의 수양의 편의를 도모하기도 했다. 2) 또한 이지는 노자해 ( 老 子 解 )(혹은 해로 ( 解 老 )) 3) 와 장자해 ( 莊 子 解 ) 4) 를 저술하여 도가의 대표적 저서인 도덕경 과 장자 에 대한 전문적 연구를 수행하였는데 두 저작의 기본적인 동기 역시 수기와 치인에 관한 그의 탈 분파적( 脫 分 派 的, non-sectarian) 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노자해 서 ( 老 子 解 序 )에서 이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비자 의 해로 를 읽을 때마다 애석하게 여기지 않은 때가 없었다. 한비( 韓 非,? 기원 전 233)의 재주로도 끝내 진나라에서 살해되었으니 어찌 그가 노자를 잘 이해했다고 여길 수 있겠 는가! 이 어찌 [ 그가 말했던 노자의] 무위( 無 爲 )를 일컫는 것이겠는가! 무 릇 저 [ 깨달은] 자는 유연함과 약함을 이용하며 이 [ 무지한] 자는 견고함 과 강함을 이용한다. 이 [ 무지한] 자가 감히 [ 무엇을 하는 데에] 용기 있다 면 저 [ 깨달은] 자는 감히 하지 않는 데에 용기 있다. [ 이 자와 저 자 사이 의 차이란] 진실로 네모와 동그라미, 얼음과 숯과 같다. 그런데도 도덕경 이 신불해( 申 不 害, 기원 전 385? 337)와 한비의 근원[ 宗 祖 ] 이 된다고 말 2) 속분서( 續 焚 書 ) 권2, 서휘( 序 彙 ), 도교초소인( 道 教 鈔 小 引 ), 장건업( 張 建 業 ) 외 편, 이지문집( 李 贄 文 集 ) ( 北 京 : 社 會 科 學 文 獻 出 版 社, 2000), 제2권. 이지 저작 원문 인용은 모두 장건업 외 편의 이지문집 에서 하였다. 이 책은 간체자( 簡 體 字 )를 채 용하고 있으나 본 논문에서 제시되는 원문은 모두 원래의 번체자( 繁 體 字 )로 되돌렸 다. 번체자로 돌리기 위해 분서 와 속분서 는 사부간요( 四 部 刊 要 ) 를 참고하였 으며 노자해 의 경우 이일맹( 李 一 氓 ) 편, 장외도서( 藏 外 道 書 ) ( 四 川 : 巴 蜀 書 社, 1992) 1책을 참고하였다. 또한 분서 와 속분서 의 번역은 김혜경 역, 분서 I, II (한길사 2004)와 속분서 (한길사, 2007)를 참고하였다. 3) 노자해( 老 子 解 ), 장건업 외 편, 위의 책 제7권, 1-23쪽; 이일맹( 李 一 氓 ), 장외도서 ( 藏 外 道 書 ), 645-669쪽 4) 장자해( 莊 子 解 ), 장건업 외 편, 위의 책 제7권, 29-82쪽.

김학재 /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359 하는 것이 가당한 것인가? 소식( 蘇 軾, 1037 1101, 자: 子 瞻 )은 [ 노자 의 참된 의미를] 구했으나 얻을 수 없었고 억지로 지어 말하길, 노자의 학문 은 무위를 소중히 여기고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것을 가벼이 여겼으니 인( 仁 )으로 자애롭고 예( 禮 )로 공경할 수 없었다. 고 하였다. 한비 씨는 그 천하를 가벼이 여기는 가르침을 얻었으니 결국 잔인하고 각박하면서도 [ 그에 관해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 살핌이 이러하 다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는 없을 것이다. 노자의 배움이 과연 이러한 것이었단 말인가? [ ] 나의 성격은 곧고 화를 잘 내며 굳세고 강하여 스 스로는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다. 나는 한비의 책을 논하길 좋아하 는데 그것은 감히 도덕경 이 다시금 [ 신불해나 한비와 같은] 재앙을 일 으킬 것이기 때문도 아니며 감히 [ 한비의 책이] 도가의 사상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래서 도덕경 에서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을 풀이( 解 )로 삼았다. 더불어 그 도덕경 을 논한 이유로 서문을 지어 스스로를 살핀다. 5) 위 서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지는 노자의 철학을 잔혹한 법가와는 관 련이 없는 것으로 보았으며 수기와 치인( 治 天 下 國 家 )을 위한 가르침으 로 보았다. 6) 이 논문은 이지의 노자해 를 통해 그의 도가철학 이해의 일단을 밝 혀보고자 한다. 당연히 분석과 이해의 전제는 이지가 노자 를 통해 수 기와 치인을 위한 어떤 배움을 얻고자 했는가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주 5) 장건업 외 편, 같은 책 제7권, 노자해, 노자해서, 1-2쪽. 李 贄 曰, 嘗 讀 韓 非 解 老, 未 始 不 爲 非 惜 也. 以 非 之 才, 而 卒 見 殺 于 秦, 安 在 其 爲 善 解 老 也! 是 豈 無 爲 之 謂 哉! 夫 彼 以 柔 弱, 而 此 以 堅 强 ; 此 勇 于 敢, 而 彼 勇 于 不 敢. 固 已 方 圓 氷 炭 若 矣, 而 謂, 道 德 申 韓 宗 祖 可 歟? 蘇 子 瞻 求 而 不 得, 乃 强 爲 之 說 曰, 老 子 之 學, 重 于 無 爲 而 輕 于 治 天 下 國 家, 是 以 仁 不 足 愛 而 禮 不 足 敬. 韓 非 氏 得 其 所 以 輕 天 下 之 術, 遂 至 殘 忍 刻 薄 而 無 疑. 嗚 呼! 審 若 是, 則 不 可 以 治 天 下 國 家 也. 老 子 之 學 果 如 是 乎? 予 性 剛 使 氣, 患 在 堅 强 不 能 自 克 也, 喜 談 韓 非 之 書, 又 不 敢 再 以 道 德 之 流 生 禍 也, 而 非 敢 以 道 德 故, 故 深 有 味 於 道 德, 而 爲 之 解. 幷 序 其 所 以 語 道 德 者, 以 自 省 焉. 6) 이지의 이러한 법가에 대한 태도를 고려해본다면 이지를 법가로 규정했던 1970년대 의 중국 학계의 사조는 개관적인 서술이었다기보다는 정치적인 왜곡이었다고 볼 수 있다.

360 인문논총 제66집 (2011) 석가의 주석 연구의 경우에도 해당하는 것이겠지만 이지의 노자 이해 에 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그의 철학적 배경 - 좌파왕학 ( 左 派 王 學 )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이지의 노자 주석에 대한 연 구는 단순히 주석을 번역하여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달성되기 힘들며 그 의 다른 저작들에 대한 부가적인 논의를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7) 그러나 그러한 연구는 많은 지면을 소비해야 가능하다. 따라서 이 논 문은 노자해 전반을 다루기보다는 이지의 도 ( 道 ) 개념 이해의 양상 에 집중하여 논의한다. 이지의 노자해 와 불교사상의 관련성 문제, 노 자 덕 ( 德 ) 개념에 대한 이해, 노자해 에서 드러난 양명학적 심 ( 心 ) 개념의 운용, 노자 의 정치철학에 대한 이지의 이해 등의 문제는 다른 논문들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2.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2.1. 말할 수 없는 도와 말할 수 있는 도 이지의 노자 1장에 대한 주석은 그의 도 개념 이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노자해 전체의 방향을 결정짓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도가 말할 수 있는 도라면 항상된 도 가 아니다. ( 道 可 道 非 常 道 )라는 첫 번째 문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 하였다: 7) 우선적으로 도가철학을 언급하고 있는 저작으로는 자유해노서( 子 由 解 老 序 ), 독 남화( 讀 南 華 ), 도교초소인( 道 教 鈔 小 引 ), 성교소인( 聖 敎 小 引 ), 삼교귀유설( 三 敎 歸 儒 說 ) (장건업( 張 建 業 ) 외 편, 앞의 책 제1권, 제2권), 삼교품( 三 敎 品 ) ( 이씨총 서( 李 氏 叢 書 ), 燕 超 堂 刊, 北 京 大 古 籍 室 소장) 등이 있으며, 그의 서간문은 물론 불교에 대한 저작 역시 검토, 비교되어야 한다.

김학재 /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361 알 수 없지만 스스로 비롯되는 것이 상도 ( 常 道 )이다. 상도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다. 그 확실히 말해질 수 없는 바를 버리고 그 말해질 만한 것 을 확실하게 말한 것이 가도 ( 可 道 )인데 상도 는 아니다. 不 知 而 自 由 之 者, 常 道 也. 常 道, 則 人 不 道 之 矣. 舍 其 所 不 必 道, 而 必 道 其 所 可 道, 是 可 道 也, 非 常 道 也. 8) 가도 ( 可 道 )라는 용어가 매우 특이하다. 가도 는 보통 말해질 수 있 다 거나 언어로 표현가능하다 는 의미로 이해되므로 이지의 경우도 말 해질 수 있음 정도로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9) 문제는 이지는 상도 와 가도 의 평행관계(parallelism)를 바탕으로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다. 다시 말해서 이지는 문법적 병렬(a grammatical juxtaposition, 常 道 也 是 可 道 也, 非 常 道 也. )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가도 는 상도 와 같 은 명사( 名 詞, noun)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10) 그 의미는 언어로 표현 가능한 도 (an effable Dao) 혹은 도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한 것 (that which is possible to call Dao)이 될 것이다. 언어로 표현 가능한 도는 상도 가 아니지만( 非 常 道 ) 도의 잠정적이거나 임시적인(provisional) 양태 로 8) 노자해, 노자해상편( 老 子 解 上 篇 ) 제1장(장건업 외 편, 위의 책 제7권, p. 1.). 9) 고형( 高 亨 )은 가도 를 가설( 可 說 ) 로 풀이하였다(고형, 노자정고( 老 子 正 詁 ) ( 北 京 : 中 華 書 局, 1998), 1쪽). 10)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선례가 있다. 마왕퇴 한묘 백서( 馬 王 堆 漢 墓 帛 書 ) 노자 갑본( 甲 本 )의 도경 ( 道 經 )은 道 可 道 也 非 恆 道 也. 로 시작하며 표점은 道, 可 道 也, 非 恆 道 也. 로 표시한다. 이러한 문장 구조에서는 가도 를 명사상당구로 볼 수 밖에 없다. Robert G. Henricks는 이를 As for the Way, the Way that can be spoken of is not the constant Way 로 번역하며 Roger T. Ames와 David Hall은 Waymaking(Dao) that can be put into words is not really way-making. 으로 번역한다. 두 경우 모두 가도 를 명사로 보고 언어로 표현 가능한 도 로 번역하였다. (Robert G. Henricks, Lao-tze: Te-taoching a new translation based on the recently discovered Ma-wang-tui texts(new York: Ballantine Books, 1989), p. 188; Roger T. Ames and David Hall, Daodejing Making This Life Significant A philosophical translation(new York: Ballantine Books, 2003), p. 77.

362 인문논총 제66집 (2011) 이해될 수 있다. 송대의 정구( 程 俱, 1078 1144)와 왕방( 王 雱, 1044 1076)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지의 가도 는 가도지도 ( 可 道 之 道 : 말할 수 있는 도)가 된다. 11) 정구에 따르면 말할 수 있는 도는 그것에 의해 사회 적 제도를 세울 수 있는 것으로 상도가 현실에서 임시적인 모습을 내보 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왕방은 가도지도 를 도의 항상적 움직 임을 반영하면서 임시적인 양태를 보여주는 시의적절한 활동으로 설명 하였다. 12) 이러한 맥락에서 이지의 가도 는 사회적 규범, 제도, 그리고 제반 활동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가도 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 이 해는 이지가 노자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 소철의 노자해 로 부터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비상도( 非 常 道 )도] 도가 아님이 없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것(도)은 항상될 수 없다. 오직 말할 수 없는 것일 때만이 항상될 수 있다. 지금 인 의 예 지라고 하는 것, 이것은 도 가운데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러나 인은 의로 될 수 없으며, 예는 지가 될 수 없으니 말할 수 있는 것(도) 의 항상되지 않음이 이와 같다. 오직 말할 수 없는 도라야 인에 관해서는 인이 되며, 의에 관해서는 의가 되고, 예에 관해서는 예가 되고, 지에 관해 서는 지가 된다. 그 [ 각각의 덕목 - 인 의 예 지] 모두는 항상되지 않 으나 도는 항상 변치 않으며 말할 수 없는 것(도)의 항상될 수 있음이 이와 같다. 莫 非 道 也. 而 可 道 者 不 可 常, 惟 不 可 道, 而 後 可 常 耳. 今 夫 仁 義 禮 智, 此 11) 초횡( 焦 竑 ) 찬, 노자익( 老 子 翼 ) 권1, 1, 3쪽( 東 京 : 富 山 房, 1984); 집왕방노자주 ( 輯 王 雱 老 子 注 ) (윤지화( 尹 志 華 ), 북송노자주연구 北 宋 老 子 注 研 究 ( 四 川 : 巴 蜀 書 社, 2004), 부록). 12) 왕필( 王 弼, 226 249) 역시 可 道 之 道 라는 용어를 썼지만 그 의미는 다소 부정적이 었다. 말할 수 있는 도와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형체있는 일이나 형태를 가리키므로 항상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는) 말할 수 없고 이름붙일 수 없다. ( 可 道 之 道, 可 名 之 名, 指 事 造 形, 非 其 常 也. 故 不 可 道, 不 可 名 也.) 즉,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 된 도가 아니며 따라서 추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초횡, 위의 책, 같은 곳 참고).

김학재 /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363 道 之 可 道 者 也. 然 而 仁 不 可 以 為 義, 而 禮 不 可 以 為 智, 可 道 之 不 可 常 如 此. 惟 不 可 道, 然 後 在 仁 為 仁, 在 義 為 義, 在 禮 為 禮, 在 智 為 智. 彼 皆 不 常, 而 道 常 不 變, 不 可 道 之 能 常 如 此. 13) 비록 소철은 상도 에 중점을 두었지만 그는 일정정도 말할 수 있는 것(도), 즉 비상도 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여길보( 呂 吉 甫, 본명: 惠 卿, 1032 1111) 역시 무릇 천하의 도는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도가 아님이 없다 ( 凡 天 下 之 道, 其 可 道 者, 莫 非 道 也.) 14) 라고 하였다. 도의 부분으로 서 사회 규범(인 의 예 지)을 포함시키 거나 말할 수 있는 도를 적극적 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일정정도 명대 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듯하다. 이지의 친구였던 초횡은 이지뿐 아니라 소철과 여길보의 의견을 자신의 노자익 에서 소개하였으며, 이지와 동시대인이었던 공수묵( 龔 修 默,? 1619, 호: 晉 陵 默 居 士 ) 역시 자신의 노자혹문 ( 老 子 或 問 )에서 가도 에 관해서 비슷한 이해를 채용하였다. 15) 이지의 가도 와 상도 의 관계처럼 이어지는 이름이 지을 수 이름이 라면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 ( 名 可 名 非 常 名 )에서도 가명 ( 可 名 )과 상 명 ( 常 名 )의 평행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생겨나 저절로 구별되는 이름이 상명 ( 常 名 )이다. 상명 은 사람들이 [ 인위적 언어로] 부른 것이 아니다. 그 확실히 이름 지을 수 없는 바를 버 리고 그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에는 반드시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가명 ( 可 名 )인데 상명 은 아니다. 有 生 而 自 別 名 者, 常 名 也, 常 名 則 人 不 名 之 矣. 舍 其 所 不 必 名, 而 必 名 其 所 可 名, 是 可 名 也, 非 常 名 也. 16) 13) 소철, 도덕진경주( 道 德 眞 經 注 ), 정통도장( 正 統 道 藏 ) 제12책, 291쪽; 증조장( 曾 栆 莊 ) 외 편, 삼소전서( 三 蘇 全 書 ) 5책, 401쪽; 초횡, 노자익 권1, 2쪽. 14) 초횡, 노자익, 2쪽. 15) 중국자학명저집성( 中 國 子 學 明 著 集 成 ) 049, 304-305쪽.

364 인문논총 제66집 (2011) 이지는 가도 를 명사로 본 것처럼 가명 ( 可 名 ) 역시 명사로 보았다. 일반적으로 가명 은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으로 번역하지만, 이지는 (언어로 표현) 가능한 이름 으로 보았으며, 정구의 용어로는 가명지명 ( 可 名 之 名 : 이름지을 수 있는 이름)에 해당된다. 17) 가능한 이름 은 도와 사물의 언어적 표현들을 지칭한다. 이지가 가도 와 가명 이라는 용어를 통해 말할 수 있는 도와 이름을 부각시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실의 사회 규범과 제도들을 도의 하위 양태들(sub-modes)로 긍정하면 도의 이름으로 인간 사회와 역 사를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존하는 사회 규범과 제 도들을 도의 부분으로 인정할 때 현실 세계의 의의를 폄하하는 이원적 세계관(dualistic worldview)을 피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 사회에 있 어서 지속적 변화의 궁극적 정당성이 확보된다. 이러한 인식은 현실에 대한 보수적( 保 守 的, conservative) 정당화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즉, 심지 어 급진적인 사회 개혁과 변화들 역시 말할 수 있는 도 로 인정할 수 있으며 그 정당성은 배후에 있는 말할 수 없는, 항상된 도 의 운동으로 인해 확보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이지의 가도 와 가명 개념은 기성 규 범과 제도를 도의 잠정적 양태로써 그 존재의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그것들에 불변의 권위를 부여하는 대신 변화의 여지를 주는 개념 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8) 16) 노자해, 노자해상편 제1장(장건업 외 편, 앞의 책 제7권, 1쪽). 17) 마왕퇴 한묘 백서 노자 갑본은 名, 可 名 也, 非 恆 名 也. 이며 문법적으로 가명 을 명사구로 볼 수 밖에 없다. 이를 Robert G. Henricks는 As for names, the name that can be spoken of is not the constant name. 이라고 번역하여 가명 이 명사구로 번역하였다. Robert G. Henricks, 앞의 책, 같은 곳. 18) 이러한 이지의 가도와 가명 이해, 즉 현실과 변화에 대한 적극적 인정은 명말의 변화하고 있던 현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으며, 명말의 모순된 현실에 대한 변화 요구를 반영하는 것으로도 이해 가능하다. 하지만 이지 사상에 대한 윤리학적, 정치철학적 논의가 없이 위의 내용을 명말 현실과의 연관성을 논의 하는 것은 많은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편의를 위해 명말의 변

김학재 /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365 이지의 가도 와 가명 에 관한 위와 같은 독해는 다른 절들에서 좀 더 보강되어야 하겠지만, 가도와 가명에 관한 문장에 바로 이어지는 문장, 무명은 천지의 시작이며, 유명은 만물의 어미다. ( 無 名, 天 地 之 始, 有 名, 萬 物 之 母.)에 대한 이지의 설명은 위의 독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화하고 있던 현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거론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체제교학( 體 制 敎 學 )이었던 주자학( 朱 子 學 )에 비해 자유롭고 유연한 양명학( 陽 明 學 )이 장거정( 張 居 正, 1525 1582)을 비롯한 보수적 관료들의 견제에 도 불구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하며 발전하고 있었고, 서적 인쇄의 폭발적 증가와 더불어 풍몽룡( 馮 夢 龍, 1574 1646)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학 ( 俗 文 學 ) 및 문화가 흥성하고 있었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더불어 우상파괴적인 선불교( 禪 佛 敎 )의 부흥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이지를 포함한 좌파왕학의 인사 들은 주자학 비판은 물론 속문학의 의의를 인정하고 기존의 가식적 문학을 비판하 였다. 또한 그들은 솔직한 감성을 토로하는 창작을 고무하였는데, 원굉도( 袁 宏 道, 1568 1610)로 대표되는 공안파( 公 案 派 )의 활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명말, 특히나 이지가 살았던 만력제( 萬 曆 帝, = 神 宗. 재위: 1573 1620)의 통치 기간은 어느 누구라도 변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기간이기도 했다. 장거정 사후 만력제는 정치적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 독재를 행했으며, 세 차례의 대규모 원정( 萬 曆 三 大 征 )으로 인한 재정적 위기를 광산세( 鑛 山 稅 )와 상세( 商 稅 ) 등을 가혹 하게 거두어들여 극복하려 했다. 이는 수많은 민란을 야기했다. 또한 만력제의 만년 의 국정포기는 환관을 필두로 한 중앙 및 지방 관료들의 부패와 전횡을 야기했다. 이러한 국정의 혼란은 변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수많은 민란과 고헌 성( 顧 憲 成, 1550 1612)을 중심으로 한 동림당( 東 林 黨 )의 활동(1604 1626)은 그러 한 변화에 대한 요구가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명의 지방 통치와 부세의 기초였던 이갑제( 里 甲 制 )는 15세기 이래 해체되어가고 있었다. 이유는 부역을 면제 받는 신사( 紳 士 )와 상인( 商 人 ) 계층이 증가했고, 정부가 증가하는 은( 銀 ) 구매비용 을 지방에 전가했기 때문에 농민의 부세 부담이 과중해져 지방에서 점차 이탈, 표 류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갑제의 해체로 인한 지방통치의 부실화는 새 로운 통치 방법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켰다. 명대 말기의 자세한 문화적,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책들을 참고하 시오. 아라키 켄고( 荒 木 見 悟 ), 김석근 역, 불교와 양명학 (서광사, 1993); 미조구찌 유조( 溝 口 三 雄 ), 김용천 역, 중국 전근대사상의 굴절과 전개 (동과서, 1999); 오오 키 야스시( 大 木 康 ), 노경희 역, 명말 강남의 출판문화 (소명출판, 2007); Denis Twitchett & John K. Fairbank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8(New York: CUP, 1998).

366 인문논총 제66집 (2011) 그러나 상명 ( 常 名 )은 무명 ( 無 名 )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무릇 천지가 있은 후에야 이름이 생겨나고, 천지가 있은 후에야 만물이 있게 되며, 만 물은 나고 또 나서 변화가 끝이 없다. 그러므로 그 무명을 알면 그 미묘함 을 관조하게 되고, 그 유명을 알면 [ 천지 안의 사물들 간의] 경계를 관조하 게 된다. 然 是 常 名 也, 始 於 無 名. 及 夫 有 天 地 而 後 名 生 焉, 有 天 地 而 後 有 萬 物, 萬 物 生 生 而 變 化 無 窮 矣. 故 知 其 無 名, 則 可 以 觀 妙 矣 ; 知 其 有 名, 則 可 以 觀 徼 矣. 19) 이지는 이 문장에서 언어로 표현된( 可 道, 可 名 ) 영역인 유명 ( 有 名 )의 세계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不 道 之, 不 名 之 ) 영역인 무명 ( 無 名 )의 세계의 관련성에 관한 자신의 사유를 어느 정도 보여준다. 20) 유 명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이지만 항상된 무명의 세계에서 비 롯된 것으로, 이는 임시적인 가도 가 영원한 상도 로부터, 그리고 불완 전한 가명 이 완전한 상명 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여전히 도라고 말 할 수는 있음 을 말해준다. 따라서 가도와 가명은 단순하게 존재론적으 로 무가치한 것으로 비하될 수 없다. 그러나 위의 주석은 일견 상명, 무명 의 세계, 즉 상도 의 세계를 우선시하는 이원론으로도 읽힐 수 있 다. 그러므로 다음 절의 유 ( 有 )와 무 ( 無 )에 관한 이지의 입장 분석을 통해 좀 더 자세히 논의될 필요가 있다. 19) 노자해, 노자해상편 제1장(장건업 외 편, 앞의 책, 같은 곳). 20) 앞에서 인용된 주석에서 이지는 상명 은 사람들이 이름붙이지 않는( 人 不 名 之 ) 것, 즉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이지에게 상명 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음 을 뜻하는 무명 과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위에서 인용된 주석에서는 상명 이 무명 에서 비롯한다 고 표현되었다. 그렇다 면 당연히 이지가 앞서서 상명 과 동일시한 저절로 구별되는 이름( 自 別 名 ) 은 인 간의 언어표현 중 자연발생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저절로 구 별되는 이름 은 언어적 지칭이 없는 사물 자체(things in themselves)의 상태, 즉 인간 의 언어적 구획 없이도 존재하는 현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별명 은 무명 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김학재 /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367 2.2. 유( 有 )이자 무( 無 )로서의 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도( 常 道 )ㆍ상명( 常 名 )ㆍ무명( 無 名 )의 세계가 본체계( 本 體 界, the noumenal world)로서의 무( 無, non-being)의 세계라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가도( 可 道 ) 가명( 可 名 ) 유명( 有 名 )은 현상계( 現 象 界, the phenomenal world)로서의 유( 有, being)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따 라서 이지의 가도와 가명에 대한 적극적 이해의 철학적 기초를 찾기 위 해서 우리는 노자 철학의 유와 무 개념에 대한 그의 해석을 살펴볼 필요 가 있다. 이지의 유와 무에 대한 해석은 그의 가도와 상도에 대한 이해와 조화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와 유가 상호침투하고 상보적인 관계에 있어야 가도와 상도에 대한 그의 입장이 뒷받침될 것이다. 그런데 이지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지하는 유와 무 개념을 구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앞 절에서 살펴본 노자 1장을 무명 을 유명 에 우선시하는 듯한 주석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하였다.: 비어있음( 虛 ) 은 도의 항상된 성격( 道 之 常 )이다. 고요함( 靜 )은 도의 뿌 리( 道 之 根 ) 이다 그래서 사물이 비존재(무)로부터 생겨나 존재(유)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성하여 생겨난 것들이 결국은 그 뿌리로 다시 돌아가 고요해지니 모든 사물이 존재(유)로부터 비존재(무)가 됨을 알 수 있다. 대개 고요함은 [ 사물의] 운명이 다시 [ 향하는 것이며] 상도가 그로부 터 비롯되는 것이다. 虛 者, 道 之 常 ; 靜 者, 道 之 根 則 凡 物 之 自 無 而 有 者, 可 知 也. 又 能 知 夫 藝 藝 而 生 者, 仍 復 歸 根 而 靜, 則 凡 物 之 自 有 而 無 者, 可 知 也. 蓋 靜 者 命 之 所 以 復, 而 常 道 之 所 自 出 也. 21) 위의 주석에서 이지는 무를 우선시하여 무와 유의 이원론적 관계를 설 21) 노자해, 노자해상편 제16장(장건업 외 편, 앞의 책, 8쪽).

368 인문논총 제66집 (2011) 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좀 더 면밀한 검토를 요한다. 이지는 노자 1 장의 원문 중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 故 常 無 欲 以 觀 其 妙, 常 有 欲 以 觀 其 徼.)을 상무( 常 無 )[ 를 이해함으로써] 그 미묘함을 관조하 고자 하며, 상유( 常 有 )[ 를 이해함으로써] 그 경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로 이해하여 상도 상명 무명을 상무( 常 無, the Constant Non-being)로 귀결시키고 가도 가명 유명을 상유( 常 有, the Constant Being)로 귀결 시켜 유와 무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오직 그 지극한 무( 至 無, the Ultimate Non-being)만이 지극한 유( 至 有, the Ultimate Being) 가 되는 것이다. 오직 그 지극한 항상됨( 至 常, the Ultimate Constancy)이 그 지극한 미묘함( 至 玅, the Ultimate Subtlety)이 되는 것이다. 무릇 도를 논하여 유와 무에 통달할 수 있다면 지극한 [ 경지인] 것이다. 惟 其 至 無, 乃 所 以 爲 至 有 ; 惟 其 至 常, 乃 所 以 爲 至 玅 ( 妙 ) 也. 夫 語 道 而 通 於 有 無, 至 矣. 22) 이지에게 있어서 도를 논하되 무만을 논하는 것은 지극한 경지가 아니 며 유만을 논하는 것도 지극한 경지가 아니다. 도는 지극한 무이기도 하 며 지극한 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도가 지극한 무이자 그 자체로만 존 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알 수도 없으며 의미도 없겠지만 그 지극한 무 는 유를 가능케 하기에 의미가 있다. 정리하자면, 지극한 무와 지극한 유 는 이원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실재(reality)의 동시적인 두 측면이며, 유와 무는 서로를 실현시키고 의미를 부여한다. 결국 도와 만물은 유와 무의 상호작용(interplay)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유와 무 의 상호침투성과 상보성에 대한 생각은 이지의 노자 42장, 11장, 21장 에 관한 주석들에서 잘 드러난다.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22) 노자해, 노자해상편 제1장(장건업 외 편, 위의 책, 1쪽).

김학재 /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369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으며,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을 음( 陰 )을 등지고 양( 陽 )을 안으니 충기( 沖 氣, 비어있는 기, the force of vacancy)로 조화( 和, harmony/balance) 를 삼는다. 道 生 一, 一 生 二, 二 生 三, 三 生 萬 物, 萬 物 負 陰 而 抱 陽, 沖 氣 以 爲 和. 도는 형체가 없지만 하나를 낳고 둘을 낳고 셋을 낳으니 만물을 낳는데 이르니 [ 이는 애초에 형체도 없을 정도로] 줄어든 것이나 [ 결국은 만물에 이를 정도로] 늘어난 것이다. 道 無 形 也, 而 生 一 生 二 生 三, 以 至 萬 物, 是 損 之 而 益 也. 23) 노자 42장에 대한 이지의 주석은 노자 의 원문의 표현( 도는 하나 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을 따 르지 않고 각각의 생성의 단계에 보이지 않는( 無 形 ) 도, 즉 무로서의 도 가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무와 유는 서로 다른 두 영역에 각각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앞에서 도 를 지극한 무이자 지극한 유로 이해하는 것과 연관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러한 무와 유에 대한 이해는 상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유 의 영역에서 도의 실현태로서의 가도 에 적극적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사유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한다면 도는 그 비가시성 (invisibility)과 초월성(transcendency), 즉 무는 물론 현실에서의 현전성( 現 前 性, presence)과 공용( 功 用, function), 즉 유를 동시에 염두에 두지 않으 면 이해될 수 없다. 이지는 수레( 車 )ㆍ그릇( 器 ) ㆍ방( 室 ) 의 비유를 통해 유 는 이로움( 利 ) 의 원인이 되며, 무는 효용성( 用 ) 의 이유 를 설명하는 노자 11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수레, 그릇, 방은 그 이로움은 유( 有, being; thingness, fullness)에 있지 무 23) 노자해, 노자해하편 제42장(장건업 외 편, 위의 책, 17-18쪽).

370 인문논총 제66집 (2011) ( 無, non-being; nothingness, empty space)에 있지 않다. 그러나 타고 싣고 거 주한다는 그 효용( 效 用 )은 무에 있지 유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무가 아니 면 유가 [ 이로울 수] 없고, 유가 아니면 무가 [ 기능할 수] 없으니 이것[ 을 고려하는 것이야말로] 이로움을 균등히 하고 효용을 겸하는 도인 것이다. 사람이 어찌 무를 버리고 유를 쫓거나 유를 버리고 무를 구할 수 있겠 는가? 車 也, 器 也, 室 也, 其 利 在 有, 而 不 在 無. 而 乘 之, 載 之, 居 之, 其 用 在 無, 而 不 在 有. 然 則 非 無 不 有, 非 有 不 無, 是 均 利 而 兼 用 之 道 也. 人 亦 安 能 棄 無 而 遂 有, 舍 有 而 求 無 也 與 哉! 24) 수레 그릇 방의 예는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제적이다. 따라서 이 장 은 상도 보다는 가도 에 더 많이 관여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이지는 무와 유를 구별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만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서로가 없이는 이로울 수도 없으며 기 능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와 유의 구별은 결국 역동적 상보성 (a dynamic complementarity)을 위한 전제로 기능한다. 현상적 세계 에서의 이러한 상보성은 근원적으로 지극한 무이자 지극한 유인 도 때문 에 생겨난다. 이러한 이지의 생각은 노자 21장에 대한 독특한 독해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비어있는 덕의 모습은 오직 도로부터 비롯된다. 도의 성격은 오직 흐릿 하고도 애매하다. 흐릿한 듯 애매하지만 그 안에 상( 象, images)이 있고, 애매한 듯 흐릿하지만 그 안에 사물이 있다. 그윽하고도 어둑하니 그 안에 정수( 精 髓, essence)가 있고 그 안에 참됨( 眞 ) 이 있으며, 그 안에 믿음( 信 ) 이 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 묘사하는] 그 말( 名 ) 이 없었던 적 이 없다. 이로써 만물이 생겨나는 근원( 衆 甫 ) 을 본다. 내가 어떻게 만물의 근원( 衆 甫 ) 이 그러함을 알겠는가. 이것으로 안다. 24) 노자해, 노자해상편 제11장(장건업 외 편, 위의 책, 6쪽).

김학재 /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371 孔 德 之 容, 惟 道 是 從. 道 之 爲 物, 惟 恍 惟 惚. 惚 兮 恍, 其 中 有 象 ; 恍 兮 惚, 其 中 有 物. 窈 兮 冥 兮, 其 中 有 精 ; 其 中 甚 眞, 其 中 有 信. 自 古 及 今, 其 名 不 去, 以 閱 衆 甫. 吾 何 以 知 衆 甫 之 然 哉! 以 此. 비어있는 모습은 덕이 아니라 도의 모습이다. 만약 덕을 일컫는 것이라 면 유가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수많은 존재들 ( 衆 有, the multitude of beings) 을 형용하는 것이겠는가! 이 도는 흐릿하고도 흐릿하고 애매하고도 애매하며 그윽하고도 그윽하며 어둑하고도 어둑한 것이니 유가 될 수 없 으며, 사물이 있으면 상이 있고 정수가 있고 [ 그 존재함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무가 될 수 없다. 대개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미 이 와 같았다. 그러므로 수많은 존재들을 통해서 관조한 후에 [ 그 비어있는 모습이] 도를 따라서 생긴 것이지 덕이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어떻 게 수많은 존재들이 도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아는가? 역시 이 수많은 존재들을 통해서이다. 수많은 존재들을 버리면 관조할 바가 없게 된다. 孔 容, 非 德 也, 道 也. 若 謂 之 德, 則 有 不 得 者 矣, 安 能 爲 衆 有 之 形 容 哉! 是 道 也, 恍 恍 惚 惚, 窈 窈 冥 冥, 不 可 得 而 有 也 ; 有 物 有 象, 有 精 有 信, 不 可 得 而 無 也. 蓋 自 古 及 今, 已 若 此 矣. 故 合 衆 有 而 觀 之, 然 後 知 其 從 道 而 非 德 也. 吾 何 以 知 衆 有 之 從 道 哉? 亦 以 此 衆 有 而 已, 舍 衆 有, 則 無 所 於 觀 矣. 25) 이지에 의하면 무로써의 도와 수많은 존재( 衆 有 ) 는 서로가 서로를 착 상( 着 想 )하는 관계이다. 즉, 무 안에서 수많은 존재가 착상되며 수많은 존재 안에서 무가 거주하며 착상된다. 오직 수많은 존재, 즉 유를 통해서 만이 무( 常 道, 常 名, 常 無, 至 無 )가 관찰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도 이지 가 유와 무가 상호침투하며 상보적인 관계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와 무의 관계에 대한 사유는 당연히 상도 뿐만이 아니라 가 도 에 대한 인정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유와 무의 상호침투와 상보관계에 대한 이지의 강조는 그의 한 25) 노자해, 노자해상편 제21장(장건업 외 편, 위의 책, 10쪽).

372 인문논총 제66집 (2011) 층 더 급진적인 생각에 대한 전주곡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이지는 이 도는 흐릿하고도 흐릿하고 애매하고도 애매하며 그윽하고도 그윽하며 어둑하고도 어둑한 것이니 유가 될 수 없으며, 사물이 있으면 상이 있고 정수가 있고 [ 그 존재함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무가 될 수 없다. 고 하여 도를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유와 무의 역동적 상호관계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도를 이해할 수 없다 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요점은 도가 유 혹은 무로 규정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도는 그 자체로 실재와 하나로 녹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이지의 요점이라면,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닌 도 와 무이며 동시에 유인 도 는 그 표현이 다를 뿐 그 취지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이러한 생각은 개념에 관한 분석적 논의라기보다는 철학적 개념에 대한 경직된 태도를 경고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절에서는 이에 대해 좀 더 논의하기로 한다. 2.3. 도 아닌 도 노자 1장 마지막 문장을 이지는 다음과 같이 음미하였다: 이 둘은 같은 곳에서 나왔으나 다르게 이름을 지은 것이니 같은 곳을 일컬어 현묘함이라고 한다. 현묘하고 더욱(또) 현묘하니 뭇 미묘함의 출 입문이다. 此 兩 者 同 出, 而 異 名, 同 謂 之 玄. 玄 之 又 玄, 衆 妙 之 門. 그러나 상( 象, images)을 따르는 사람은 유에 집착하며 공( 空, emptiness) 에 집착하는 사람은 무에 집착하니 [ 그들에게는] 말할 수 있는 것과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지게 된다. [ 그러나 그들은] 유와 무라는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유와 무가 생겨나는 것이 실은 같은 것이며 무도 역시 없는 것임을 모른다. 그러니 [ 하물며] 현묘함( 玄 ) 은 어떻겠는가. 현묘하지만 현

김학재 /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373 묘함은 없는 것이니 하물며 더욱 현묘함 은 어떻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 현묘함이] 상명과 상도가 나오는 곳이며 상무와 상유의 명칭이 비롯되는 곳이라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然 徇 象 者 執 有, 蘊 空 者 滯 無, 而 可 道 可 名 者 衆 矣. 不 知 有 無 之 名 雖 異, 有 無 之 出 實 同. 無 亦 無 之, 何 其 玄 也 ; 玄 又 無 玄, 何 其 又 玄 也. 而 孰 信 其 爲 常 名 常 道 之 所 自 出, 常 無 常 有 之 所 由 名 者 哉! 26) 사유의 관심이 보여지는 상이거나 근원적 무의미성이라면 결과적으로 유나 무에 집착하게 될 것이며 세계의 실상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 지 못할 것이라고 이지는 생각하였다. 이는 유와 무라는 개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함을 제안하는 것이다. 유와 무에 대한 상호침투성과 역동적 상보성의 강조는 바로 이러한 개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단서일 것이 다. 상호침투성과 역동적 상보성은 유 혹은 무 어느 것에도 우선권을 주 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노자 1장 자체도 유와 무가 하나의 원천 - 현 묘함( 玄 ), 즉 도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강조한다. 27) 그러나 이지는 무와 현 묘함이라는 개념조차도 부정한다. 이러한 부정의 의미는 주석의 마지막 문장( 누가 [ 현묘함이] 상명과 상도가 나오는 곳이며 상무와 상유의 명 칭이 비롯되는 곳이라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으로부터 도출된다. 현묘 함과 도에서 항상된 것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며 임시적인 가도 가명 역 시 비롯되며, 더 나아가 유와 무 어느 하나에 집착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지가 현묘함과 무 개념을 부정한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이지가 위에서 인용된 주석의 첫 문장( 상( 象, images)을 따르는 사람은 유에 집착하며 공( 空 )에 집착하는 사람은 무에 집착한 26) 노자해, 노자해상편 제1장(장건업 외 편, 위의 책, 7쪽). 27) 현묘함이 곧 도 라는 것은 노자 1장의 문장의 흐름은 물론 노자 6장, 谷 神 不 死, 是 謂 玄 牝. 玄 牝 之 門, 是 謂 天 地 根. 綿 綿 若 存, 用 之 不 勤. 에서 명확하다.

374 인문논총 제66집 (2011) 다. )에서 불교의 개념인 공 ( 空, emptiness, Śūnyata)을 도입했음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지는 이 불교의 공 개념 역시 무에 집착하게 할 수 있는 위험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하여 이지는 심경제강 ( 心 經 提 綱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 관자재보살( 觀 自 在 菩 薩, Avalokiteśvara)이] 마침내 [ 사리자( 舍 利 子, Śāriputra)를] 불러서 말하길, 사리자여, 내가 공을 말하고 있다고 말 하지 말거라. 그렇게 말한다면 곧 공에 집착하는 것( 着 空 ) 일진저! 내가 색 ( 色, form, rūpa), 즉 존재(being; existence)를 말하면 공과 다르지 않다네. 내 가 공을 말하면 그것은 색과 다르지 않다네. 그러나 다만 다르지 않다고만 하면 아직 두 개의 사물이 서로 대응하고 있는 것과 같으니 아무리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한들 여전히 각각의 하나가 보존되는 것처럼 되네. 사실 내가 색에 대해 말한 것은 곧 공을 말하는 것이니 색 바깥에 공이 없다네. 내가 공에 대해 말한 것은 곧 색을 말하는 것이니 공 바깥에 색이 없다네. 색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공 역시 없으니, 이것이 진공 ( 眞 空 : 진 정한 공, True Emptiness)이지. 라고 하였다. 그런즉 공을 말하는 어려움 은 오래되었다. 색에 집착하는 자는 색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泥 色 ) 공을 말하는 자는 공에만 빠져 있다( 滯 空 ). 28) 이지는 공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과도한 집착 역시 비판적으로 본 것 이었다. 공 개념에 대한 집착, 즉 착공 ( 着 空 )과 체공 ( 滯 空 )은 수행의 장애로 작용하는 것이라 여겨 공 마저도 공한 것으로 여기는 철저한 태 도를 요구하였다. 공 마저도 부정하는 철저한 공, 즉 진공 ( 眞 空 : 진정한 28) 분서 제3권, 잡술( 雜 述 ), 심경제강( 心 經 提 綱 ), 장건업 외 편, 위의 책, 제1권, 93-94쪽. 故 遂 呼 而 告 之 曰, 舍 利 子, 勿 謂 吾 說 空, 便 即 著 空 也! 如 我 說 色, 不 異 於 空 也 ; 如 我 說 空, 不 異 於 色 也. 然 但 言 不 異, 猶 是 二 物 有 對, 雖 復 合 而 為 一, 猶 存 一 也. 其 實 我 所 說 色, 即 是 說 空, 色 之 外 無 空 矣. 我 所 說 空, 即 是 說 色, 空 之 外 無 色 矣. 非 但 無 色, 而 亦 無 空, 此 真 空 也. 然 則 空 之 難 言 也 久 矣. 執 色 者 泥 色, 說 空 者 滯 空.

김학재 /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375 공, True Emptiness)은 현상적 세계를 상징하는 색 을 부정하지 않으며 현상적 세계의 무상함을 나타내는 공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29) 다시 말 해서 진공은 색과 공 모두를 포용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지의 진공에 관한 사유는 그가 노자 의 현묘함과 도가 상도와 가도, 상명과 가명, 무와 유 모두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과 다름이 없다. 30) 그런데 이지가 주석에서 현묘하지만 현묘하지 않다 라고 현묘함을 부 정했을 때, 그 논리적 결과로, 도이지만 도가 아니다 라는 표현 역시 가 능해지는 것은 아닌가. 이지는 노자 23장과 35장에 대한 해설에서 이 문제를 명확하게 밝힌다: 따라서 도에 종사하는 자는 도에 동화되고, 덕에 종사하는 자는 덕에 동화되며, 잃음에 종사하는 자는 잃음에 동화된다. 도에 동화된 자는 도 역시 즐거이 얻고, 덕에 동화된 자는 덕 역시 즐거이 얻으며, 잃음에 동화 된 자는 잃음을 즐거이 얻는다. 故 從 事 於 道 者, 同 於 道 ; 德 者, 同 於 德 ; 失 者, 同 於 失. 同 於 道 者 者, 道 亦 樂 得 之 ; 同 於 德 者, 德 亦 樂 得 之 ; 同 於 失 者, 失 亦 樂 得 之. 그러므로 스스로 그러한 도에 종사하는 자는 그 [ 자신과 도가] 동화됨 을 이해하여 덕과 동화되는 것도 이해하며, 덕과 동화되는 것을 이해하여 잃음과 동화되는 것도 이해한다. 도와 동화되므로 즐거이 도를 얻고, 덕과 동화되므로 즐거이 덕을 얻으며, 잃음과 동화되므로 즐거이 잃음을 얻는 29) 이러한 이지의 진공 개념이 불교의 공 개념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불교 의 공 사상에 대해 용수( 龍 樹, Nagarjuna, 150? 250?)는 유와 무, 양극단이 아닌 중도( 離 有 無 二 邊 故 名 為 中 道 ) ( 중론송 ( 中 論 頌, Mūla-madhyamaka-kārikā ))이라고 말 해 공이 단순한 허무가 아님을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30) 이러한 진공 개념은 이지 사상의 중요 개념 중 하나이며 그의 노자 철학 이해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심경제강 은 이지의 학문성장 과 정의 측면이나 서지학적 측면에서도 노자해 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이지의 노자 철학 이해와 불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376 인문논총 제66집 (2011) 다. 즐거이 얻음 ( 樂 得 ) 은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이요, 즐거이 잃음 ( 樂 失 ) 은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것, 이것이 도 없는 상태 ( 無 道 : Dao-less-ness)이다. 이것을 일컬어 지극한 즐거움 ( 至 樂 ) 이라고 하며, 이것을 일컬어 오래 감 ( 可 久 )이라고 하는데 그 누가 이 를 [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겠는가! 故 惟 從 事 於 自 然 之 道 者, 知 其 同 而 亦 同 德, 同 德 而 亦 同 失. 同 道, 故 樂 得 道 ; 同 德, 故 樂 得 德 ; 同 失, 故 樂 得 失. 樂 得, 是 無 失 也 ; 樂 失, 是 無 得 也 ; 無 得 無 失, 是 無 道 也. 是 謂 至 樂, 是 謂 可 久, 而 其 誰 信 之 乎! 31) 위대한 상( 大 象, the Great Image) 을 잡을 수 있으면 천하는 귀의해 올 것이다. 執 大 象, 天 下 往. 상없는 상( 無 象 之 象, the imageless image), 이것이 위대한 상이다. 無 象 之 象, 是 爲 大 象. 32) 노자 23장에 대한 이지의 주석에서 볼 수 있듯이 스스로 그러한 도 ( 自 然 之 道 ) 를 이해한 사람은 무도 ( 無 道 )라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그러한 도는 결국 도라는 개념을 부정하게 된 다. 노자 35장에서의 위대한 상 은 일반적으로 도를 가리킨다. 이지 가 위대한 상을 상 없는 상 으로 해석한 것은 도는 도로써 정의할 수 있는 특정한 성질을 가지지 않으므로 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확실 히 이지는 노자 의 가장 상위 개념인 도 의 지위를 위태롭고 하고 있 다. 하지만 이러한 대담한 이지의 주석을 노자 로부터의 일탈이라고 보 기는 힘들다. 노자 자체에서 가장 높은 덕은 덕스럽지 않다. ( 上 德 不 德 ), 33) 위대한 소리는 희미하게 들리며, 위대한 상은 형체가 없다., 34) 31) 노자해, 노자해상편 제23장(장건업 외 편, 앞의 책, 11쪽). 32) 노자해, 노자해상편 제35장(장건업 외 편, 위의 책, 14쪽).

김학재 /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377 바른 말은 거스르는 듯하다., 35)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다. 36) 등 의 말을 통해 개념과 언어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3. 나오며 이지는 노자 의 도 개념을 상도로 국한시키거나 항상성( 常 ) 과 무( 無 ) 위주로 파악하는 형이상학적 이해를 거부하고, 가도의 존재론적 지위와 가치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는 가도와 가명을 독특하게 상도와 상명과 병렬 대치시켜 명사상당 어구로 쓰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지는 가 도와 가명이 상도와 상명은 아니지만 잠정적인 도와 이름으로서 전체로 서의 도를 구성하는, 나름의 지위와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본 것이었다. 이러한 이지의 노자철학의 도 개념 이해는 그의 무와 유 개념 이해에 의 해서도 지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무와 유를 상호침투되어 역동 적인 상보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변화하는 현실 세계를 상 징하는 유의 존재 가치를 확보하였으며 이로써 가도의 존재 의의를 지지 하였다. 이지의 무와 유에 대한 이해는 무와 유를 모두 이해해야 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무와 유 모두가 도를 구성한다는 생각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이는 상도와 가도 모두가 도를 구성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지는 도가 무이기도 하지만 유이기도 하다 는 생각뿐만이 아니라 도는 무도 아니며 유도 아니라는 대담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결국은 도 역시 없는 상태 ( 無 道 ) 가 최고의 상태라는 도 33) 노자 38장. 34) 노자 41장. 35) 노자 78장. 36) 노자 81장.

378 인문논총 제66집 (2011) 아닌 도의 관념을 제시하였다. 이는 인위적인 철학 개념에 집착하는 것 을 경계한 것으로 노자철학의 본질에 더욱 근원적이고 파격적으로 다가 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지의 급진적 사유는 그의 선불교적 경향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지의 노자해 는 노자철학 자 체의 논리로만 이해되기보다는 그의 불교 이해와 함께 논의될 필요가 있 다. 정리하자면, 본 논문에서 살펴본 이지의 노자 도 개념 이해 라는 주제는 그의 실천철학적 노자 독해, 즉 수기( 修 己 )와 치인( 治 人 )의 측 면에서의 노자 해석 이라는 주제의 기초가 된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의 연구를 기약하기로 한다.

김학재 /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379 참고문헌 李 贄, 張 建 業 外 (2000) 編, 李 贄 文 集, 北 京 : 社 會 科 學 文 獻 出 版 社., 李 氏 叢 書, 燕 超 堂 刊, 北 京 大 古 籍 室 所 藏. ( 宋 ) 蘇 轍, 道 德 眞 經 注, 正 統 道 藏 第 12 冊. ( 明 ) 焦 竑 撰, 老 子 翼 莊 子 翼, 東 京 : 富 山 房, 1984. 李 一 氓 (1992) 編, 藏 外 道 書, 四 川 : 巴 蜀 書 社. 曾 棗 莊 蘇 大 剛 (2001) 主 編, 三 蘇 全 書 第 5 冊, 北 京 : 語 文 出 版 社. 高 亨 (1998), 老 子 正 詁, 北 京 : 中 華 書 局. 尹 志 華 (2004), 北 宋 老 子 注 研 究, 四 川 : 巴 蜀 書 社. 김학재(2010), 양명학과 도가사상: 이지의 도가사상 연구의 양명학적 동기 분 석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정신문화연구 통권121호. 미조구찌 유조( 溝 口 三 雄 ), 김용천(1999) 역, 중국 전근대사상의 굴절과 전개, 동과서. 李 贄, 김혜경(2004) 역, 분서 I, II, 한길사., 김혜경(2007) 역, 속분서, 한길사. 아라키 켄고( 荒 木 見 悟 ), 김석근(1993) 역, 불교와 양명학, 서광사. 오오키 야스시( 大 木 康 ), 노경희(2007) 역, 명말 강남의 출판문화, 소명출판. Slingerland, Edward(2003), Effortless Action - Wu-wei as Conceptual Metaphor and Spiritual Idea in Early China,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Hall, David L. and Roger T. Ames(1998), Thinking from the Han - self, truth, and transcendence in Chinese and Western culture. Albany: S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Henricks, Robert G.(1989), Lao-tze: Te-taoching a new translation based on the recently discovered Ma-wang-tui texts. New York: Ballantine Books. Twitchett, Denis & John K. Fairbank(1998)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8,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원고접수일: 2011년 10월 31일 심사완료일: 2011년 11월 15일 게재확정일: 2011년 11월 24일

380 인문논총 제66집 (2011) ABSTRACT Li Zhi(1527 1602) s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Dao in the Laozi Kim, Hak Ze This article discusses the Ming scholar, Li Zhi s ( 李 贄, 1527 1602, styled Zhuowu 卓 吾 ) understanding of the philosophy of Laozi. This article focuses on his anti-metaphysical understanding of such central concepts of the Laozi as Dao, being (you 有 ), and non-being (wu 無 ), and suggests that his understanding of the Laozi relates to Zen (Chan) Buddhism. Li has been known as an non-sectarian, iconoclastic, and anti-metaphysical thinker; he was a radical student of the Yangming school, a Zen (Chan) Buddhist monk, and a Taoist at the same time. Such characteristics of his learning are well reflected in his interpretation of the Laozi; his learning in the Yangming school and Zen Buddhism influenced his understanding of the philosophy of Laozi. In his interpretation of the Laozi Ch.1, Li shows a parallelism between chang-dao 常 道 vs. ke-dao 可 道 and chang-ming 常 名 vs. ke-ming 可 名, implying kedao and keming can be deemed as nouns - an effable Dao

김학재 / 이지의 노자 도 개념에 대한 이해 381 and a nameable name, which are not the Constant Dao and name (fei-chang-dao/ming) and yet a provisional modes of Dao and name. In doing so, Li wants to find the philosophical basis of a positive understanding of the effable Dao and nameable names. And Li s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being and non-being collaborates with his understanding of the effable Dao and nameable names; he emphasizes the interpenetrative or complementary relationship of being and non-being, thereby supporting his understanding of the effable Dao and names. Li says that Dao can be understood as both being and non-being, but also asserts that Dao can be neither being nor non-being. His point seems to be that Dao in itself is totally the reality. And further, Li manifests that one can reach Dao when he understands that Dao has Dao-less-ness (wudao 無 道 ), or non-dao. At this point, Li introduces the concept of Emptiness (kong 空 ). This suggests that his radical suggestion of Dao as non-dao is influenced by another source, i.e., Buddh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