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트랜스라틴 3호 (2008년 7월)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정치성과 상업성 임 호 준 라틴아메리카 영화에 대해 수업을 하다보면 학생들로부터 늘 받는 질문이 왜 이렇게 라틴아메리카 영화는 정치적이냐는 것이 다. 물론 수업시간에 다루는 영화들을 특별히 정치적인 것으로만 구성한 것은 아니다. 이런 질문은 필자 스스로에게도 하게 되는 데 영화제에서 최근에 만들어진 젊은 영화감독들의 영화를 볼 때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 이나 칠레 군사정권 시기에 벌 어졌던 사건들이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기 때 문이다. 브라질 영화에서 파벨라 문제와 쿠바 영화에서 망명이 단골 소재로 다뤄지는 것은 그래도 현재적 의미가 있는 것들이니 그렇다 치자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쿠데타와 군사 독재는 이제 제 법 시간이 흘러서 졸업 할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물론 모든 영화가 다 그런 건 아니다. 최근 라틴아메리카 영화 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인 아르헨티나의 루크레시아 마르텔 (Lucrecia Martel), 멕시코의 카를로스 레이가데스(Carlos Reygades) 같은 감독들의 영화는 직접적인 정치적 이야기보다는 보편적인 인간의 내면 심리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세계적인 호평 을 받고 있다. 또한 시시콜콜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노골적인 상 업 영화가 성공한 경우도 있는데 <실란트로와 페레힐 Cilantro y perejil>(1995), <섹스, 부끄러움 그리고 눈물 Sexo, pudor y laǵrimas>(1999) 등의 멕시코 영화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대부분 웹진 트랜스라틴 http://translatin.snu.ac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SNUILAS)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정치성과 상업성 105 1950년대 멕시코 코미디 영화의 대표적인 배우 칸틴플라스(Cantinflas). 데이비드 니븐과 함 께 영화 <80일간의 세계일주>(1956)에도 출연했다. 의 경우 라틴아메리카 영화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현실의 문 제와 유리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사실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상업적 전성기는 1940-50년대였고 이때의 라틴아메리카 영화는 정치성과 거리가 멀었다. 멕시코나 브라질에서 토속적인 댄스를 가미한 코미디 영화가 가장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1960년대부터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이른바 신 영화가 등장하면서 영화가 정치성과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한 다. 사회 변혁의 도구로서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신영화는 라 틴아메리카 영화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태양의 대지 위의 신과 악마 Deus e o Diablo na terra do sol>(1964), <고 통의 대지 Terra em transe>(1967), <저개발의 기억 Memorias del subdesarrollo>(1968),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 La hora de los hornos>(1968), <루시아 Lucía>(1968), <칠레 전투 La
106 트랜스라틴 3호 (2008년 7월) batalla de Chile>(1973) 등 세계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고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신영화는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많 은 영화들이 정권으로부터 상영금지를 당해 지하에서 비밀리에 상영되었고 일반 개봉관에서 상영이 된 영화들도 영화의 성격상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어려웠다. 따라서 신영화는 철저하게 비 평적 영역에서 소비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그렇다고 이 시기에 신영화의 이면에서 대중에 의해 향유된 대중상업영화가 존재했던 것도 아니다. 이미 헐리웃 영화가 라틴아메리카 영화 시장을 지 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영화의 고전적 시기가 끝난 1980년대는 라틴아메리카 영화 의 암흑기였다. TV의 보급으로 영화관객 자체가 큰 폭으로 줄어 든 데다 그 나마의 영화시장 역시 서구영화가 완벽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게다가 신영화의 열기마저 사그라지자 라틴아메리카 영 화의 존재감도 사라지고 각국의 영화산업은 도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혁명 이후 국가적 지원에 의해 제작되던 쿠바 영화만이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자국 영화산업의 붕괴를 목격한 라틴아메리카 각국 정부는 1990년대부터 영화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 자국 영화가 서서히 소생하기 시 작한다. 특히 멕시코에서 1990년대 초반은 젊은 감독들이 대거 등장하며 새로운 르네상스를 이루게 된다. <과제 Tarea>(1990), <단손 Danzoń>(1991), <항구의 여인 La mujer del puerto>(1993) 등 다채로운 작품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결정적인 작품은 1993년 알폰소 아라우 감독이 만든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Como agua para chocolate>(1993) 이었다. 이 작품은 멕시코 시장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시장에서 무려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정치성과 상업성 107 이천 백 만 불의 수입을 올렸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의 대성공은 라 틴아메리카 영화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었 다. 이전까지 비평적 영역에서 세계 영화 계에 어필한 경우는 많았지만 세계 영화시 장에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라틴아메 리카 영화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높아진 제작비를 회수하기에는 너무 협소한 자국 시장의 규모에 고민하던 라틴아메리카 영 화인들은 세계시장에서 천문학적인 성공을 거둔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의 케이스를 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극장 입장료도 저렴한 자국 영화시장에서 수익 을 남기기 위해 고전할 필요 없이 세계 시장으로 나갈 수 있다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라틴아메리카 영화는 노골적으로 세계 시장을 지향 하게 된다. 물론 1990년대에 접어들어 급격하게 글로벌화 된 세 계영화시장의 질서 또한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성격 변화에 중요 하게 작용했다. 많은 국제영화제들이 앞 다투어 창설되면서 이른 바 제3세계의 영화들에게 출품 기회를 제공했는데 영화제에서 중 요한 상을 수상하거나 현지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을 경우 서구 시장에 배급될 수 있게 되었다. 유럽국가 영화사와의 합작 프로 젝트도 대폭적으로 늘어났는데 특히 스페인ㆍ포르투갈과 라틴아 메리카 국가들 사이에 창설된 국제 합작지원 프로그램인 이베르 메디아(IBERMEDIA)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렇게 세계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지자 합작 영 화는 물론이고 일반적인 라틴아메리카 영화도 제작 단계에서부터 자국 관객이 아닌 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자국 시장
108 트랜스라틴 3호 (2008년 7월) 에 개봉도 하기 전에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고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게 되면 그 전과( 戰 果 )를 등에 업고 자국영화시장이나 해외 시 장에 배급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영화 한편이 20-30개의 해 외 영화제를 떠도는 것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 만 해도 부산영화제, 전주영화제, 부천영화제, 여성영화제 등에서 적어도 한 해에 20-30편의 라틴아메리카 영화를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제작ㆍ배급을 둘러싼 환경이 세계화되 면서 라틴아메리카 영화는 더욱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1세계의 관객이 3세계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 겠는가. 잘 만든 멜로드라마나 SF물은 많은 제작비와 뛰어난 기 술력을 보유한 자신들의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을 터이다. 그렇 다면 자신들의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그 무엇을 원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라틴아메리카 영화가 1세계에서 상영될 경우 일반 상영 관보다는 이른바 예술 영화관에서 개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뉴욕, 런던, 파리, 마드리드 등에는 예술 영화관을 표방하는 상영 관이 상당히 많다. 갈수록 헐리웃 영화가 오락화 됨에 따라 이에 거부감을 갖고 좀 더 지적인 영화를 보고자하는 시네필 그룹이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룹이 보통의 관객들보다 지적이고 그래서 3세계의 정치적 사회적 고민을 담은 영화를 보고자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3세계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 정통한 것은 아니 다. 또한 국제 영화제의 심사위원 역시 라틴아메리카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오락성 보다는 정치성이 될 것이다. 서구 관객을 1 차적인 소비주체로 삼고 있는 최근의 라틴아메리카 영화에서 정 치성이 두드러지고 있는 상황 역시 이러한 1세계의 소비주체 구 성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이렇게 전시적인 의도에서 동원되는 정치성이 많은 경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정치성과 상업성 109 우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고 심한 경우엔 왜곡되고 과장된다는 것이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관객은 새로운 것을 보길 원하지만 완전히 낯선 것에 대해선 거부감을 갖는다고 한다. 적당히 새로 운 것 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은 바로 이런 전략에 충실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많 은 비평가들이 지적하듯 이 영화엔 멕시코 북부 지방을 배경으로 요리, 전통풍습 등 시각적인 이국성과 함께 멕시코 혁명이라는 정치적 사건도 등장하지만 어느 것 하나 심층적으로 다뤄지고 있 는 것이 없다. 모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에 들러리로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이후 서구 시장에서 상업적으로 성공 한 라틴아메리카 영화들인 <중앙역 Central do Brasil>(1998), <아모레스 페로스 Amores Perros>(2000), <네 엄마도 역시 Y tu mama tambień>(2001), <신의 도시 Cidade de Deus>(2002),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Diarios de motocicleta>(2004) 등을 보자 면 모두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현실이 주인공을 둘러싼 중심 내 러티브에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서구의 관객들은, 빈곤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기차역 한 복판에서 좌판을 펴고 앉아 편지 대필업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을 보면서 시간 여행을 떠 난 듯 신기해했고, 끔찍한 투견판이 벌어지고 인간 역시 투견과 다르지 않은 폭력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멕시코시티 변두리의 삶에 경악했고, 총을 든 어린아이들이 전자 오락하듯 사람을 쏘 아 죽이는 브라질 파벨라의 현실에 아연실색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이국성이 1세계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근간에는 화면에 보여지는 것이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믿음이 존재한 다. 관객의 동일시 메커니즘을 기본으로 하여 작동하는 영화적 서사는 현실성의 믿음에 의해 흥미가 배가되는 법이다. 관객들은
110 트랜스라틴 3호 (2008년 7월) 영화 <신의 도시> 중 한 장면 <신의 도시>를 보면서 설마 이 정도일까 하고 의심하지만 이 영 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영화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멘트는 물 론 영화의 소재가 된 실제의 인물들을 담은 영상을 보여주며 영 화가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파 벨라에 살아보지 않은 필자는 이 영화에 담겨진 상황이 100% 현 실인지, 어느 정도 과장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확 실한 것은, 이것이 사실이라도 해도 브라질 사회의 일반적인 현 실이 아닌 매우 극단적인 일부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끔찍한 현 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경쾌한 사운드의 음악과 촬영으로 엮어내 는 감독의 의도에는 현실에 대한 고민이나 사회적인 책무보다도 브라질 사회의 극단적 현실을 영화적 흥행의 소재로 활용하겠다 는 상업적인 계산이 느껴진다. 요즘 라틴아메리카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른바 국경영화 도 마찬가지다. <은총이 충만한 마리아 María, eres llena de gracia>(2004)에서 보듯 주인공은 아슬아슬한 위기를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정치성과 상업성 111 모면하고 미국에 들어가지만 그곳에서 온갖 위험한 사건과 고초를 겪게 된다. 물론 이 러한 상황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만 어쨌 든 주인공을 둘러싼 스릴과 폭력은 영화적 재미를 유발한다. 국경영화가 장르화될 정 도로 최근 많이 제작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렇게 라틴아메리카 영화에 정치적ㆍ사 회적 사건이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상 업적 흥행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1세계의 관객들은 라틴아메 리카 영화라는 장르에 대해 정치성을 기대하는데 이것은 신영화 의 유산일 수도 있고 언제나 정치성에 충실해 온 라틴아메리카 예술 전반의 풍토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영화가 얼마나 정치성에 집착하는지는 미국 시 장에서 <달콤쌉싸름한 초콜릿>보다 더 흥행에 성공했다는 <네 엄 마도 역시>의 경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유부녀 한 명과 두 명의 소년이 벌이는 대담한 성적 모험이 서사의 기본 이 된다. 그런데 난데없이 여기에 반 세계화 시위와 치아파스 농 민 반란, 그리고 남부 원주민들의 곤궁한 삶, 멕시코 고위관료들 의 기만과 부패 등 정치적인 이슈들이 주인공들의 퇴폐적인 여행 과 교차한다. 사실, 전형적인 섹스 코미디 장르에 심각한 정치적 이슈들이 등장하는 것은 어디로 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정치성을 포함시킨 건 정치성에 대한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집착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영화 속에 포함된 정치성은 피상적이거나 과장 왜곡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라틴아메리카 소설이 특유의 미학 속
112 트랜스라틴 3호 (2008년 7월) 에 정치적ㆍ역사적 사건을 정제함으로써 사회적 메시지를 극대화 하는 데 성공했던 것에 비하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산업적 속성과 현재의 초국적인 제작ㆍ배급 환 경을 고려해야 한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 고 이를 회수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많은 경우 1차적인 소비주체가 자국 관객이 아니라 1세계의 관객 이라는 점이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ㆍ사회적 맥락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정치적으로 진지 한 영화를 원하는 서구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라틴아메리카 영화 의 정치성이 구성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라틴아메리카 영화에 국한된 상황은 아니다. 다른 많은 3세계의 영화들 역시 해외 영화제나 서구의 스스로 지적인 관객을 의식하여 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국 시장만 을 바라보고 내수용 영화를 만들기에는 시장규모가 작기 때문에 투입될 수 있는 예산도 적어지고 저예산 작품으론 자국시장에 수 입된 헐리웃 영화와 경쟁하기에 더욱 어렵다. 결국 현재 라틴아 메리카 영화가 채택하고 있는 전략은 현재의 산업적 상황에 대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사회적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1세 계 영화에서 왜곡과 과장은 3세계 영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회와 역사의 투명한 반영에 대한 기대와 이에 대한 부담은 3세계 영화만이 짊어지고 있는 듯 하다. 1세계 영화에 대해선 이미 그런 기대를 접어서일까? 그보 다는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경우에서 보듯 문맹률이 높은 3세계에 서 영화가 정치적 실천을 위한 도구로 쓰인 경우가 많았고 그런 인식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정치성의 전통은 라틴아메리카 영화에 있어 멍에이자 동
라틴아메리카 영화의 정치성과 상업성 113 시에 비빌 언덕 이다. 정치적 사건이나 사회문제를 세밀하게 들 여다보고 깊은 성찰의 기회를 주는 영화가 상품성까지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불행히도 오락으로서 영화에 익숙한 현재의 영화관객을 고려한다면 비록 예술영화관을 드나드는 지식인 계 층이라 해도 그건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다. 몇몇 그런 영화가 나온 적이 있고 또 앞으로도 나올 수 있지만 일반적인 기준으로 요구하긴 현실적으로 힘들다. 비록 다소 피상적이긴 해도 사회적 억압의 상황을 알리고 감정적 울림을 통해 연민과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동일시 기제의 한계를 지적한 브레히트와 이의 연장선상에 있는 라틴아메리카 신영화 그리고 현대 아방가 르드 영화 작가들의 신념과는 상충된다. 그러나 이제 와서 라티 아메리카 영화에게 상업성 없는 신영화나 실험영화의 가시밭길을 강요할 수는 없다. 3세계 국가의 입장에서는 자국영화 산업의 존 립조차 힘겨운 상황이다. 또한 한 지역의 영화를 전투적인 정치성의 틀 안에 가두는 것 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상품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3세계의 사람이라도 늘 억압과 종속, 사회적 불평등만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1세계 영화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3세계 영 화에 대해서도 보다 유연한 시각과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임호준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