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1990. 5 18,.,.,,.., 5 18.,,.. 5 18,,.,. * 이 논문은 2006년도 정부(교육인적자원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이다(KRF-2006-353-B00041). 이 글을 같이 만들어주신 익명의 논평자 선생님들과 2007년 비판사회학대회에서 토론을 해주신 최종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 성공회대 민주주의와사회운동연구소 연구교수 사회학 junghghg@paran.com
1. 1990년대에 들어 한국에서는 근 현대의 사건을 집단으로 기억 또는 기념하는 의례들이 생겨났다. 국가가 의도적으로 은폐, 망각 또는 방치했던 사건이 의례의 대상이었다. 5 18민중항쟁이 제기한 정치 사회적 과제를 달성하고 희생자를 추모 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5월운동 과 5월행사 가 이러한 집단 의례의 탄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1) 특히 5월행사는 저항의례(resistance rituals) 의 형성과 확산의 선행 모델이었다. 5월행사는 저항, 포섭, 배제 등이 복잡하게 작동한 광장의 정치 였다. 5월행사는 다양한 개별 행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근간을 이룬 행사들은 국가의 탄압을 극복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제도권의 행사와 달랐다. 5월행사는 정치 사회의 변동 및 5월운동과 길항 관계를 이루면서 재구성되었거나 변화했다. 1981년 5월 18일 공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망월묘역에서 약식으로 개최되 었던 위령제가 5월행사의 기원이다. 위령제라는 명칭은 1984년까지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추모제 또는 추모식 등으로 명명되었다. 초기의 추모제 2) 는 제례() 가 중심이었으나, 확대 및 발전하면서 다양화되었다. 이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 국가의례가 된 기념식이다. 기념식이라는 명칭은 5 18민중항쟁에 대한 노태우 정부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피해보상이 실시된 1991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추모제의 주체는 이원화되어 있었다. 제례는 유족회가, 추모식이나 기념식은 행사위원회 또는 이 역할을 담당한 시민사회단체가 주관했다. 추모제에 다수의 정치인들이 참석한 것은 유화 국면이 형성되어 김대중이 귀국하고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이 대거 당선되었던 1985년이었다. 그리고 관료가 추모제에 공식적으로 참석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한 1993년부터였다. 광주시장이 행사위원회의 초청 형식으로 추모제에 참석하여 추모사를 한 것이다. 3) 추모제는 1) 5월운동과 5월행사에 관한 정의( 定 義 )의 변화와 내용, 범주는 정호기(2004)를 참조. 2) 추모제는 때로는 망월묘역에서의 의례 전반을 가리키는 광의의 용어로, 때로는 제례만을 지칭하는 협의의 용어로 사용할 것이다. 3) 협의의 추모제가 민 관 공동으로 개최된 것은 1996년뿐이다. 1997년 5월 18일이 국가기념 일로 지정되면서 추모제는 다시 유족회가 주관하게 되었다. 1
망월묘역에서 한 번만 개최되었으나, 기념식은 2회 개최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1993년의 경우, 오전은 망월묘역에서, 오후는 5월행사의 주 무대인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기념식이 열렸다. 다음해에 광의의 추모제는 분리되었고, 협의의 추모제는 기념식의 일부 형식을 보완했다. 이때부터 국가화 4) 되기 이전까지 기념 식은 광주의 도심에서만 개최되었다. 기념식은 (범)국민대회 로 명명되었던 집회 와 결합했다. 5) 이러한 변화는 저항의례의 제도화가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국가화 가 임박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또한 추모 에서 기념 으로의 변화는 기억하 려는 5 18민중항쟁의 의의와 내용의 강조점이 달라졌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1997년 5월에 5 18묘지 6) 가 완공되고, 5 18민주화운동 국가기념일이 지정되었 다. 이를 기점으로 5월행사는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식과 민간단체로 구성된 행사 위원회가 관리 및 주관하는 기념식 이외의 모든 행사로 구분되었다. 정부가 기념 식을 주관하면서 저항의례의 특성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행사에 대한 언론과 방송의 보도 방식도 달라졌다. 즉, 전야제 와 기념식 이 열리는 17일과 18일의 상황에 대한 보도는 범람했으나, 이후엔 소강상태를 보였고, 27일의 부활 제 를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일상으로 복귀했다. 이와 같이 5 18민중항쟁의 추모의례는 제도권으로 진입했다. 조희연(2006: 455~456)의 개념을 빌자면, 5 18민중항쟁의 국가화 가 진행되어 내재화와 배제 라는 차이의 정치가 작동한 지 11년이 경과했다. 대비적으로 5 18민중항쟁의 사회화 는 점점 축소되었다. 사회화의 축소는 항쟁의 내포와 외연의 협소화 및 4) 이 글에서는 제도화와 국가화를 구분했다. 의례의 주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국가화 이전에도 제도화는 이루어질 수 있고, 시민사회운동 단체가 주관한다고 해서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5) 이와 같이 5 18민중항쟁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그 뜻을 계승하기 위한 망월묘역에서의 행사는 명칭, 주체, 내용이 변화해왔으므로, 통칭하여 추모의례 라고 했다. 6) 새로 조성된 집단묘지는 5 18묘지로 명명되었으나, 2002년 1월 26일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제6650호, 이하 유공자법 ) 이 제정되면서 국립5 18묘지 로 개칭되 었다. 그리고 2005년 7월 29일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7649호)이 제정되면서 국립5 18민주묘지 로 재개칭되었다. 이 글에서는 5 18묘지로 통일하여 사용했다.
추상화를 촉진시켰고, 국가화가 곧 전국화 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국가화와 사 회화가 각축을 벌였으나, 국가화의 속도와 효과는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국가화 는 그동안 어렵게 창출해낸 성과를 평가 절하하고 심지어 폐기시켰다. 그럼에도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진영은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이를 방치했다. 민주주의 를 비대칭적 사회관계에 내재한 모순을 매개로 전개되는 끝없는 운동을 통해 재구성해가는 과정으로 본다면, 국가기념일로 제도화한 5 18민중항쟁 속에서는 민주주의의 생명력을 찾기 어렵다고 주장한 이광일의 연구(2005: 125)는 이러한 현상을 압축적으로 정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적은 저항의례의 국가화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고찰이 필요함을 대변해준다. 5 18민중항쟁뿐 아니라 유사한 사건의 저항의례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생했거나 발생할 개연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 하고 분석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은 5 18민중항쟁의 추모의례 에서 저항의례의 국가화가 갖는 의미를 공간과 주체의 변화 및 효과, 그리고 계승 담론을 둘러싼 정치를 쟁점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 글은 망월묘역과 5 18묘 지에서 개최되었던 추모의례, 특히 추모식과 기념식을 국가기념일 제정 직전부터 살펴봄으로써, 그 변화와 차이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이 글은 저항 기억의 국가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억의 전국화와 공감대 형성이 답보 상태를 보이는 원인을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2. 1) 근래에 들어 국가기념일의 지정과 국가의례(State rituals)에 대한 연구가 다수 이루어졌다(김민환, 2000; 김현선, 2004; 송현동, 2005). 이 연구들은 국가기념일과 국가의례의 사건적 배경과 변화 그리고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이 글과 접맥되는 지점은 저항의례의 국가화와 그 이후 국가의례의 작동에 관한 것인데, 위의 논문 들은 구성상 이에 관한 다양한 변수의 관계와 구체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있지 1
않다. 연구의 초점이 저항의례에서 국가의례로의 변화가 지닌 의미를 해석하는 데 맞추어져 있어서 국가의례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며, 이를 둘러싼 제 세력 의 관계는 어떠한지, 담론의 활용 형태는 어떠한지 등은 고찰되지 않은 것이다. 국가의례에 관한 연구는 캐너다인(D. Canndaine)의 글에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영국 군주정의 의례와 기념행사를 주제로 다룬 연구 경향을 분석했 는데, 여기서 두 가지 큰 흐름을 착목했다. 하나는 의례가 갖는 통합적 힘과 뿌리 깊게 널리 퍼져 있는 대중적 가치를 구현하고 반영하며 지지 및 강화하는 방식을 강조하는 뒤르켕(E. Durkheim)적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한 의례를 대중적 합의의 표현이 아니라 편견의 동원 을 구현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 다. 캐너다인은 이 연구들이 모두 본질적으로 의례 자체가 놓인 맥락을 무시한 채 의미를 연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Canndaine, 2004: 212~213). 그는 국가의례 의 분석은 집합 행동이 이루어지는 맥락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하며, 다양한 주체들의 관계 속에 위치 지어야 한다고 지시한다. 이와 같은 연구를 위해 그가 검토를 권유한 항목은 최소 10가지이다(Canndaine, 2004: 215~216). 그러나 이것 들은 국가의례의 배경과 특성, 규모, 접근 가능성 등에 따라 선별될 수밖에 없다. 또한 오늘날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국가의례의 시대적 맥락과 정치 사회체제가 상이하다는 점에서 주요 분석 지점의 변환이 요구된다. 따라서 이 글은 국가의례 를 하나의 문화 구조로 보고, 이를 구성하는 3가지 요소, 즉 공간, 주체, 담론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고자 한다. 7) 이 글의 분석 대상은 근대 국가의 형성과 안정기에 만들어졌던 국가의례와는 태생적으로 다르다. 이는 저항 기억 또는 의례 로 존재하다가 국가의례에 편입된 것이다. 푸코(M. Foucault)는 저항을 현존하는 권력 관계의 균형을 전환시키려는 노력으로, 해방을 권력의 효과에서 해방된 존재를 약속하는 것으로 구분했다 (Mackenzie, 1996: 162). 이에 따르면, 저항 기억과 의례는 국가화 및 제도화와 대척점을 이루는 것으로 설정할 수 없다. 저항은 요지부동의 대치물 로서 권력 7) 이 외에도 문화적 재현 방식과 내용의 재구성, 관련 조직 및 기구의 변화 및 갈등, 참여자의 의식과 목적의 변화, 언론과 방송 매체의 보도 내용과 태도, 국가의례의 미시적 효과 등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져야 하지만, 이후의 과제로 남겼다.
관계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항의 투쟁 수단과 실제적인 사회적 위치는 만연된 권력 형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Minson, 1994: 150). 이러한 문제 제기는 국가화와 제도화를 거부하는 세력의 존재와 활동을 부인하 지 않는다. 지배와 저항의 대당 구도는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작동하는 5월운동과 5월행사의 국가화를 단순화할 위험이 있음을 환기시킨다. 이것은 저항의례에서 국가의례로의 전환에 자발적 순응 기제가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국가화는 지배 권력의 성공적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질서 안으로 편입될 것을 전제로 하며, 이 과정에서 저항 기억과 의례의 열망은 중립화 주변화되고, 포섭 또는 억압된다(Kaye, 2004: 112). 그렇다고 저항 기억의 제도화가 항상 성공적이며,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에서의 완전한 변화가 아닌 한 제도화의 외부는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 힘 관계 속에서 다시 위치 지어진다. 8) 5월행사에 관한 연구는 1997년에 정근식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5월행사의 국가화가 이루어지면서 그간의 과정에 대한 고찰과 평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후의 5월행사 연구들은 정치 사회적 변화와 전개 양상 및 형식의 변화를 조명하 는 데 관심을 두었다. 따라서 이 연구들은 기본적으로 시간적 변수를 고려했고, 사실의 복원과 정리, 내용과 형식의 쟁점, 성격 변화 등을 주요하게 고찰했다(정근 식, 1999; 정문영, 1999; 윤기봉, 2000; 정호기, 2001). 이 연구들은 모두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하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국가의례의 진면목을 충분히 경험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성되었다. 2000년 이후의 연구에서는 5월 17일에 개최되는 전야제 가 주제로 다루어졌다(정근식, 2005). 이 글은 1988년에 등장하여 5월행사 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정착한 전야제에서 항쟁의 기억이 어떻게 재현되었으며, 여기에 투사된 집단적 감수성 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2000년과 2004년에 초점 을 두고 살펴보았다. 8) 이를테면, 노동절(May Day)은 국가기념일이 되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가 쇠퇴하고 노동자의 집합 기억도 순치되었지만, 사회적 기억 속에서 여전히 유의미한 존재로 남아 환경에 따라 환기되어 다시 작동하고 있다(김영범, 1998: 170; Hobsbawm, 2004: 532~534). 1
2) 이 글의 주요 연구 방법은 현장조사(field research) 라는 관찰법이다. 관찰 (observation)의 방법은 완전한 참여자(complete participant)와 완전한 관찰자 (complete observe)를 양극으로 펼쳐진 스펙트럼에서 특정한 위치를 갖게 되는데 (Mason, 1999: 106), 이 글은 완전한 관찰자의 입장을 취했다. 이 연구가 현장조사에 의미를 둔 것은 일반적으로 선호되는 문자 매체에 의존해서는 국가의례의 아우라 (aura)와 참여 주체의 다양한 행동 및 주장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상물은 문자 매체보다 역동적이고 현실감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영상물의 대부 분은 국가의례의 주요 무대인 참배 공간을 중심으로 촬영된 것이어서 기획된 국가의례의 순서와 절차를 벗어난 주체들의 관계와 대립, 그리고 정황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다. 이로 인해 연구 대상을 국가의례의 공식 담론으로 국한하지 않는 한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이 관찰자의 주관성과 경험에 경도된 편견이 분석에 영향을 미쳐 신뢰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현장조사 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 방법을 선택한 이유이다. 현장조사 연구는 특정한 사건과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나, 이 글은 연구 대상의 변화와 재구성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장기적인 관찰이 필요했다. 현장조사는 국가가 추모의례를 직접 주관한 시기부터 시작했으 나, 모든 추모의례를 대상으로 수행되지는 못했다. 현장조사를 실행한 경우는 노무현 정부 이전에는 국무총리가 주빈으로 참석했던 3회의 기념식이고, 이후에 는 2005년을 제외한 4회의 기념식이다. 9) 현장조사를 실시하지 못한 추모의례는 문자 매체와 텍스트에 의거하여 연구했다. 주요 문자 자료는 신문의 기록이다. 5 18민중항쟁의 추모의례에 관한 신문의 기록은 언론사에 따라, 그리고 전국 신문과 지역 신문 여부에 따라 보도 내용과 논리가 다르게 나타났다. 하지만 9) 5 18민중항쟁의 추모의례는 다른 민주화운동 및 국가폭력에 관한 추모의례에 비해 연속성과 지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다수의 경험자가 있다. 그러나 추모의례, 특히 국가화 이후의 추모의례에 매년 참여한 사람은 항쟁의 당사자이거나 관련자가 아닌 한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주기성과 반복성을 지닌 추모의례의 차이를 분명히 구별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언론과 방송 매체의 보도 태도, 내용, 주장을 분석하는 것은 부차적인 과제이므로, 신문의 기록은 사실(fact)을 확인하고 현장조사에서 누락한 내용을 보안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활용되었다. 3. 추모의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고, 이를 주관 혹은 참여하는 주체가 존재해야 한다. 공간과 주체는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추모의례의 전반을 규정한다. 이때의 공간은 물리적 의미와 정치 사회적 의미를 모두 함유하 고 있다. 주체는 추모의례의 형식과 내용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변인이다. 1) 추모의례가 국가화되면서 추모제의 개최일은 5월 17일로 변경되었다. 10) 추모 제의 형식과 절차는 1993년에 재구성된 방식을 약간 수정했다. 중앙정부와 의회 등을 대표한 사람들도 공식적으로 참석하여 추모사를 했다. 그러므로 추모제의 전반적인 절차와 내용은 연속적인 측면이 많았다. 그럼에도 추모제는 이전과 매우 다른 경관을 연출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추모의례 가 전개되는 공간성에서 찾을 수 있다. 공식 명칭이 광주시립공원묘지 제3묘역인 망월묘역에서의 추모의례는 죽음과 삶이 일체를 이루고 있었고, 주체와 객체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았다. 이것은 망월묘역이 지닌 공간적 특성에 기인했다. 1,000여 평에 불과한 망월묘역에는 종단하기 어려울 정도의 밀집 대형으로 희생자들이 안장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1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추모의례가 개최되기도 했으니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10) 추모제 전반에 대한 합의는 1996년 2월 15일에 있었다. 합의의 주체는 5 18 관련 단체 책임자들과 광주시였다. 합의를 통해 추모제와 기념식을 같은 날에 개최하기로 했다( 무등일보, 1996.2.15). 1
없었다. 11) 그러므로 추모의례의 여러 절차가 진행되는 무대와 참관석 사이에 거리를 두어 차별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참배객은 묘 사이에 비집고 앉거 나 서 있었고, 무대 뒤편을 비롯하여 망월묘역을 겹겹이 둘러서 병풍과 같은 경관을 연출했다. 이것은 마당극 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모습과 흡사했다. 망월묘역은 극장(theater) 의 공간적 특성도 갖고 있었다. 묘역의 완만한 경사는 낮은 쪽에 제례와 의식을 지내는 무대를 두게 했고, 나머지 모든 공간은 관람석이 되었다. 소규모의 무대가 설치된 것은 공권력의 탄압이 다소 완화된 이후였다. 망월묘역에 여유 공간이 생기고, 12) 5월행사가 반합법화의 단계에 접어들었던 1988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제단과 무대를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대의 규모는 10여 개의 의자가 놓일 정도에 불과했다. 무대는 추모의례의 격식을 갖추 고 진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설치되었는데, 이로 인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둘러싸고 이견 대립과 차별 짓기가 나타났으며, 이전과 달리 무대를 올려 다보는 참석자의 시선이 생겨났다. 한편, 5 18묘지에서 개최된 추모제는 우천 시를 제외하고는 참배광장에서 이루 어졌다. 추모제의 제례는 유교 의례를 확대시킨 것 이외에 다른 변화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공간이 바뀌면서 추모제의 전반적인 모습은 완전히 다른 인상을 주었다. 가장 가시적인 변화는 추모제의 공간이 위계적으로 분할 배치된 것이었다. 희생자가 안치된 묘역, 제례를 지내는 참배단, 유가족과 참배객이 위치 한 참배광장으로 구역이 나뉘면서 위계성이 확연해졌다. 참배광장에서도 유가족, 공식 초청 대상자, 일반 참배객이 명시적으로 구분되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11) 추모의례 참석자 수는 국가의 탄압과 기타 조건에 따라 매년 부침했다. 참석자의 규모에 대한 언론의 보도와 구술 내용은 괴리된 경우가 많았다. 전두환 정부하에서 참석자가 가장 많았던 추모의례는 1984년으로 3,000여 명이었고, 합법화되기 직전인 1987년의 경우는 약 500명이었다. 따라서 1988년에 참석자가 1만여 명이 되었던 것은 급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 전두환 정부는 망월묘역의 상징성이 강화되어가자 이를 해체하기 위해 1982년 12월부 터 1984년까지 묘지 이장 공작 을 단행했다. 이 공작은 유가족과 시민의 저항으로 중단되었는데, 총 126기 가운데 26기가 이장되었고, 이로 인해 듬성듬성 여유 공간이 생겼다(나간채, 2001: 686).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들이 빈 터에 안장되었으나, 여유 공간을 모두 채우지는 않았다.
일체화되었던 제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모습이었다. 또 다른 변화는 추모제가 격식을 강조하면서 경건성과 엄숙성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 참배자의 접근과 참여를 제약하여 그들만의 의례 로 축소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망월묘역에서의 추모제와 동일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던, 그리고 도심에 집결한 군중들과 함께 진행되기도 했던 기념식은 의례 공간이 5 18묘지로 이동함에 따라 이전의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5 18묘지는 조성 계획을 수립할 때 국가의례가 개최될 것을 염두에 두고 기획된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기념식의 형식과 공간 이용 방식의 전면적 개편은 불가피했다. 기념식의 주관 주체가 시민 사회단체가 아니라 정부라는 점도 변화의 필연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기념식은 추모제와 동일한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기념식의 무대는 5 18민중항쟁추모탑 앞인 참배단에 설치되었다. 망월묘역과 달리 참석자가 올려다보는 구조였기에 단상을 설치할 이유가 없었다. 참배 객석의 전면에는 주빈과 각 정당 대표 및 정치인, 관료와 법조인, 관련 단체 대표 등의 좌석이 배열되었다. 이들의 주변과 배후에 유족과 피해자가, 그리고 그 외곽에 학생과 시민 등 일반 참배객의 좌석이 순차적으로 배치되었다. 불과 1미터도 되지 않았던 죽은 자와 산 자의 간극은 이제 수십 미터가 되었고, 학생과 시민은 기념식의 경관을 풍성하게 하는 소품으 로 전락했다. 2) (1) : 5 18민중항쟁의 추모제는 관련 단체 대표들이 집례하는 제례, 추모사, 추모시 낭송, 유족회장 인사말, 추모곡 제창, 헌화, 분향 등으로 진행된다. 제례는 전통 유교식 이다. 이렇게 바뀐 것은 지방정부와 관련 단체 및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으 로 행사위원회를 구성한 1995년부터였다. 언론은 유교식 제례를 시각적 측면과 의식의 경건성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광주일보, 1995.5.19). 1993년부터 추모제에서는 반정부 구호와 주장, 집합 행동이 크게 줄어들었다( 광주일보, 1993.5.19). 이와 같은 변화에는 자기 검열과 전통적 관습으로 귀의하려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1
추모제가 5 18묘지에서 개최되면서 기념사는 다시 추모사로 개칭되었다. 누가 추모사를 하는가는 의례의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해마다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추모사를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지방정부 대표, 지방의회 의장, 지방보훈청장, 행사위원회 위원장 혹은 5 18기념재단 이사장이었다. 이처럼 추모 제는 지역의 행사로 자리매김했는데, 2007년에 들어 지방의회 의장 대신 국회의장 이 추모사를 함으로서 위상의 변화를 꾀했다. 망월묘역에서 광의의 추모제가 개최될 때의 참석자 수는 최대 2~3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표 1>이 보여주듯이, 국가화 이후에는 추모제 참석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나마 국가화 초기에는 1,000여 명을 유지했으나, 김대중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한 2000년에는 300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여태까지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3) 추모제 참석자의 감소 이유를 개최일의 변경에서 찾기도 했으나, 그것은 지엽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추모제 개최일이 정착된 이후에도 참석자 수는 답보 상태였 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를 시민들의 무관심과 볼거리 부족에서 찾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무관심하게 된 원인에 대한 고찰과 관심을 촉발할 수 있는 방안의 마련에 대해서는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2000년에 추모제의 제2부로 문화 행사를 추가하여 참배객의 관심을 유도하는 방안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5 18민 중항쟁 제20주년행사위원회, 2000: 31), <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효과는 미미했 다. 14) 추모제의 주관자들은 저항의례로 이루어졌던 당시의 자발적 참여자의 목적과 의식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시민과 학생은 기념식과 분리된 제례를, 그것도 정치인 및 관료가 중심이 된 추모사를 청취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15) 또한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그동안 5 18민중항쟁 13) 다른 해에 비해 1997년과 1998년의 참석자가 많았던 것은 신묘지를 관람하려는 참배객 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5년 추모제에 참석자가 많았던 것은 유공자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위 때문이었다. 관련자들은 다음날 서울로 집결할 예정이어서 의지를 결집하고 기념식 불참을 대신하고자 다수가 참석했던 것이다. 14) 추모제를 주관한 단체는 참석 인원을 600여 명으로 보고했으나, 언론에서는 300여 명으로 보도했다.
<1> (: )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1,000 1,000 500 300 500 200 200 300 200 300 400 주: 참석자 수는 언론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중복된 수에 근거하여 정리함. 의 추모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부채의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6) 그리고 추모제에 사람들을 유인했던 요인으로 작용한 시민사회운동 진영의 역할이 사라지고, 저항 담론의 발화가 차단됨으로 인해 저항의례의 기원과 단절한 점 등이 오히려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 국가의례인 기념식은 법률과 내규로 규정된 형식과 절차를 준수해야 했다. 그 내용은 다소 차이를 두어 차별화를 꾀할 수 있으나, 정부가 5 18민중항쟁에만 예외적인 국가의례의 절차를 적용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은 국가화 이전 십수 년에 거쳐 형성되었던 저항적 추모의례의 문화를 폐기하고, 국가의례의 질서로 편입, 포섭 또는 순응함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정근식, 2005: 10). 5 18묘지 기념식 참석자는 정부의 관례, 일반 시민에 대한 통제,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동원 이라는 기준에 의거하여 선별되었다. 여느 국가의례와 마찬가지로 기념식은 선별된 대상에게만 초청장을 발송했다. 그 대상자는 3부 요인, 정당 대표, 국회의원, 관련 부처 장 차관, 각계 대표, 유족 등이었다. 국가의례 의 규모와 위상은 기념식에 참석하는 주빈에 따라 결정되었다. 17) 11년 동안 대통 15) 1980년대 학생운동의 정체성 형성과 5 18민중항쟁의 영향을 받은 저항의례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동현, 2007). 이러한 정황은 국가화된 추모제에 왜 학생들이 참여하지 않게 되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16) 이러한 조짐은 광주시가 추모제를 공동 개최하면서부터 나타났다. 1978년에 발생한 교육지표사건 과 5 18민중항쟁으로 인해 두 번 해직되었던 이방기 교수는 1984년에 복직한 후 동료 교수들을 설득하여 5월 18일 아침 일찍 망월묘역을 참배했으나, 5월행사 에 광주시가 참여하면서부터 이를 그만두었다고 한다(이방기 구술, 2006: 216). 17) 언론은 중앙 정치인의 참석 규모에 따라 5 18민중항쟁의 위상을 평가했다. 2004년에 1
<2> ( ) 1997 5,000 1998 20,000 1999 5,000 2000 2,300 2001 3,000 2002 2,000 3부 요인 등 500명이 초 대선자금 공개 요구 국무총리 청되었으나 30~50여 명 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 (고건) 만 참석 고 류재을 장례를 둘러싼 시위 IMF 관리 체제 관련 단체가 제시한 915 국무총리 김대중 정권 출범 후 첫 행사 명을 5 18인사로 수용 (김종필) 지방선거 임박 군 장성들의 첫 참석, 국무총리 김대중이 박정희와 화해 선언 여권 인사만 대거 참석 (김종필) 국회의원 총선거(2000년) 여야 국회의원 30여 명 대통령 분단 55년 만의 남북정상회담 참석 (김대중) 386의원 술자리 사건 관련 단체 회원들은 국회 국무총리 5 18민주화유공자예우에관한법 의사당에서 항의 집회 (이한동) 률 제정 무산 여야 국회의원과 광주 전 국무총리 월드컵 축구대회 남 지역 광역 기초단체장 (이한동) 지방선거 임박 및 의원 후보 대거 참석 주: 내무부는 1997년의 기념식에 대한 자체 평가에서 참석자를 2만여 명(초청 2,000명, 자율 참여 18,000명)으로 집계했다. 1999년의 경우 전국 신문은 5,000여 명으로, 지역 신문은 1만여 명으로 추산했다. 령이 기념식에 참석한 경우는 6회였고, 국무총리가 참석한 경우는 5회였다. 주빈 으로 대통령이 참석하게 되면, 청와대와 정부 관료를 비롯하여 정치인에게 할당되 는 초청장의 수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시민의 몫은 감소했다. 왜냐하면 초청장은 매년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2,000~3,000명으로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18) 가장 많은 정치인들이 참석했는데, 130여 명 정도였다. 이들을 수행하는 보좌진까지 계산하면, 최소 300여 명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2005년에는 중앙 정치인의 참석자 수가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자 광주 정신 이 퇴색한 것 아니냐고 꼬집기도 했다( 광남 일보, 2005.5.19). 18) 초청장은 비표 또는 출입증 이라고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비표는 기념식장에서 초청장을 제시하고 교환한 출입 허가 증표이다. 정부의 기념식 절차에 문외한인 시민들
초청장 없이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경찰 및 경호 요원에게 거칠게 항의했 다. 이들은 정부가 주도하는 기념행사를 위해 일반인의 참배를 막는다면 이는 5 18 정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행위 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1997.5.20). 대비적으로 1997년 기념식의 경우, 3부 요인 등 500여 명에게 초청장이 발부되었 으나 참석자는 30~50명에 불과했다. 딜레마에 직면한 정부는 참석자에 대한 통제 조치를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발급된 초청장 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기념식에 입장할 수 있었다. 이들은 망월묘역에서의 추모의례와 같이 여기저기에서 선 채로 지켜보았고, 참배단 부근을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이동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98년의 기념식까지 계속되어 국가의례가 된 이후 참석자들이 가장 많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참석자들은 국가의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체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19) 기념식에 대한 통제가 강화된 것은 1999년부터였다. 경찰은 국무총리의 경호를 이유로 들었다. 20) 언론은 경찰의 통제에 대해 철저한 경비 활동, 접근하여 질문하려던 기자가 붙들려 나갈 정도로 삼엄 이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이는 정부 의 기념식 개최 기조가 바뀐 것이 아니라 국무총리의 경호와 안전을 빌미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렇지만 시민의 기념식 참석 의지를 완전히 차단하기에는 초청장 미소지자가 많았다. 그래서 1999년의 기념식은 초청장 발급 대비 두 배가량의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2000년의 기념식은 5 18민중항쟁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김대중이 대통령의 자격으로 참석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목을 끌었다. 김대중의 기념식 참석은 이 비표를 받기란 정말 어렵다. 최근 인터넷으로 시민의 기념식 참가 신청을 받고 있으나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공개된 바 없다. 19) 이 점은 기념식 통제에 대한 항의가 현장에서는 경찰과 경호 요원을 대상으로 이루어졌 으나 이후에는 행사위원회 에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5 18민중항쟁 17주년 행사위원회, 1997: 13). 시민들은 행사위원회가 아니라 정부가 기념식을 주관한다는 점을, 그리고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20) 경찰은 기념식 봉쇄를 강화한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얼마 전 충남대를 방문한 김종필 국무총리가 학생들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남지역 총학생회연합 소속의 대학생들이 김종필의 기념식 참석을 저지하겠다는 정보를 입수 했다는 것이다( 무등일보, 1999.5.19; 호남신문, 1999.5.19). 1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혹여 기념식 참석이 보수 세력에게 정치 공세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음을 고려했던 것이다. 지역주의와 색깔 이데올로기의 위협을 받던 김대중으로서는 적절한 행보였다. 그래서 그는 1999년 10월부터 우회의 경로를 밟기 시작하여 기념식에 참석했다. 21) 그런데 이 기념식은 시민에 대한 통제 수위가 가장 높아진 의례였다. 초청장 미소지자의 입장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유족에게도 적절한 수량의 초청장이 발부 되지 않아 원성이 높았다. 유족은 자신들마저 통제 대상이 된 것에 격양했다. 22) 이것은 국가의례인 기념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절감하게 했다. 그리고 대통령 으로서 김대중과 호남인의 애환 및 고통의 담지자로서 김대중이 동일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정부의 통제 수위는 기념식의 위상이 국무총리 주관의 행사로 한 등급 낮아진 이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특히 대학생과 노동자는 접근이 금지된 최고의 감시 대상이었다. 그나마 2001년에 일반 시민들의 기념식 참석이 허용된 것은 유공자법 제정 무산에 항의차 유가족을 비롯한 5월단체 회원들이 상경했기 때문이었다. 유공자법 이 제정되면서 기념식의 주관 부처는 내무부(행정자치부)에서 국가 보훈처로 변경되었고, 5 18묘지는 국립묘지가 되었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기간 내내 기념식에 참석함으로써 5 18민중항쟁 기념식의 위상을 정부가 주관하는 최고 수준의 국가의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의 첫 기념식 참석은 순탄하지 않았다. 정부 수립 이후 열린 국가 행사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이 지연 입장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발단은 대통령의 미국 방문과 굴욕 외교 논란에 있었다. 사회운동 세력은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5 18묘지에 집결 했고, 경찰과 경호요원이 이를 차단하면서 정문의 출입이 봉쇄되었다. 정부는 21)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10월에는 부산민주공원 개관식에, 2000년에는 마산에서 개최된 3 15의거 기념식과 서울에서 개최된 4 19혁명 기념식에 참석한 후, 마지막으로 5 18민 중항쟁 기념식에 참석함으로써 민주화 운동 을 주제로 한 기념식 순회를 마쳤다. 22) 대부분의 언론은 정부의 기념식 통제 조치와 실태를 크게 보도했다. 유족의 참석이 제한된 것은 유가족 1가구당 1장의 초청장만 할당되었기 때문이었다. 유족 이외에도 기념식장 밖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기념식을 찾은 시민이 이토록 많았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관련자의 엄중 문책과 대처 방안을 발표했다. 23) 사건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났 고, 기념식의 개최가 차질을 빚은 점,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자부해온 대통령 과 정부를 항거 대상으로 삼은 점만이 부각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대통령과 정부의 초기 대처는 권위주의 시대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입장권 미소지자의 기념식 입장을 철저히 차단하여 일반 시민의 기념식 참석은 불가능했다. 언론은 정부의 통제 조치에 항거하는 시민과 유가족의 주장을 보도했으나, 정부의 방침은 점점 더 경직되었다. 24) 몇 년 전부터 기념식장 외부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여 입장권이 없는 시민을 배려한다고 했으나, 이는 미봉책일 따름이다. 한편, 기념식장 내의 경직화도 심화되었다. 집권 초기에는 기념식장 뒤편의 입석 참관이 허용되었으나, 중반부터는 이석과 이동이 금지되었 다. 위반자에게는 행사 진행 요원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사진 촬영도 점점 제한되어 원거리 촬영도 규제했다. 오직 언론인만, 그것도 제한된 위치에서 촬영 할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하에서 개최된 기념식에 동원된 공권력의 규모는 다소 부침이 있었으나 <표 3>과 같이 계속 증원되었다. 2003년에는 15개 중대의 경찰 병력이 동원되었는데, 2007년에는 61개 중대 6,00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약 4배로 늘어났다. 25) 이는 기념식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더욱 엄격해지고 삼엄해졌음을 23) 대통령은 난동자에 대해 법을 엄격히 적용하라 라고 지시했다. 법무부장관과 행정자치 부 관은 관련자에 대한 엄벌 계획을 앞 다투어 발표했다. 기념식이 개최되기 1시간 전까지 기념사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행사 일정도 제대로 알리지 않았으며, 시민에 대한 통제 위주의 행사 진행과 과잉 경호 논란을 유발시켰던 국가보훈처는 5 18묘지에 헬기장을 설치하라 라고 긴급 지시했다( 광주타임스, 2003.5.19; 무등일보, 2003.5.19; 광주매일, 2003.5.19). 24) 2005년의 기념식에서는 국가보훈처의 행사요원까지도 신분증을 제시하고 비표를 받아야 했고( 광남일보, 2005.5.19), 2006년에는 일단 기념식장에 입장한 후에는 나갈 수 없었다( 광남일보, 2006.5.19). 25) 5월행사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던 노태우 정부 집권기인 1991년에 동원된 경찰 병력이 57개 중대 8,500여 명이었고( 중앙일보, 1991.5.16), 김영삼 정부 집권기인 1995년에 광주 도심에 배치된 경찰 병력이 68개 중대 7,500여 명이었다 ( 동아일보, 1995.5.18). 이와 비교해보면 노무현 정부가 기념식에 동원한 공권력의 1
( ) 2003 2,000 경찰과 학생 시민 대통령의 미국 방문 중 굴욕 외 단체의 충돌. 정부 교 논란 의 일방적 초청장 대통령 15개 중대 대통령 기념식 지연 입장 발급과 행사 진행 신당 창당 갈등 에 대한 항의 폭증 2004 2,000 열린우리당 의원 30개 중대 대통령 탄핵 기각 직후 대통령 100여 명 참석 3,000여 명 이라크 파병 찬반 논쟁 2005 2,000 보훈단체 회원 20개 중대 미사일 기지(제1전투비행단) 폐 대통령 30여 명 참석 2,000여 명 쇄 및 주둔 미군 철수 시위 2006 2,000 평택 미군기지 이전 보훈단체 회원 40개 중대 대통령 열린우리당 이원형 의원 발언 200명 참석 4,000여 명 지방선거 임박 2007 2,500 정당 대표, <3> 대선 주자 집결 61개 중대 FTA 체결 반대 시위 대통령 6,000여 명 대통령 선거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콜린스(R. Collins)가 9 11테러 사건 의 추모의례에서 개념화했던 보안 의례 와 상동성을 띠었다(Collins, 2007: 398~ 410). 정부의 기념식 통제는 참배 문화를 바꾸어놓았다. 일부 시민은 기념식 참석을 아예 포기했고, 일부 시민은 기념식을 피해 참배했다. 2007년의 기념식은 이를 잘 보여주었다. 언론은 노무현 정부에서 개최된 기념식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인 2,5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는 국가보훈처가 홍보한 보도 자료에 수록된 참석 예정 인원과 같다. 이 수는 배포한 초청장이 2,500여 장임을 의미할 뿐, 참석자가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당일 기념식장은 행사가 마무리 될 때까지 400석 이상의 좌석이 비어 있었다. 빈 좌석은 시민 및 학생의 몫으로 할당된 행사장 후면 좌우편에 많았다. 이러한 현상이 초청장 배부 과정에서 발생 한 단순한 실무상의 착오인지, 아니면 초청 대상자들이 참석을 거부한 것인지를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판단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하다. 그러나 이 현상은 처음 발생한 것이었고, 실무적 인 문제로 간주하기에는 참여율이 매우 저조했다. 또한 기념식장 밖에서 기념식이 종료되기를 기다리는 일반 참배객의 수도 줄어 있었다. 4. 추모의례의 국가화 이전에는 5 18민중항쟁의 정신 계승을 둘러싼 담론의 대립 구조가 독재와 반독재 또는 민주와 반민주로 비교적 분명했다. 5 18민중항쟁에 관한 국가의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고, 5월행사의 제도화가 점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여전히 방어적 입장이었고, 5월단체와 사회운동 세력은 공세적 이었다. 그러나 국가화가 정착되면서 계승 담론은 점차 다양화되었다. 이 장에서 는 기념식을 전후하여 의제화 된 계승 담론들을 전유, 통제, 협상으로 분류하여 살펴볼 것이다. 1) : 1993년부터 광주시장 및 전라남도 지사가 추모사를 했으나, 이 효과는 지역 내에 머물렀다. 추모제가 생중계된 것은 1995년부터였는데, 가시청권은 광주와 전남 지역이었다( 동아일보, 1995.5.18). 기념식이 전국에 생중계된 것은 1998 년부터였다. 26) 이것은 5 18민중항쟁의 추모의례가 문자와 몇 컷의 사진에 의거하 여 사회적 기억의 재구성에 영향을 주던 것을 넘어 전국에서 동시간대에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변화였다. 5월이 되면, 각 정당은 5 18민중항쟁에 관한 입장을 발표했다. 이것은 매년 균일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세에 따라 부침이 있었다. 국가가 기념식을 주관하기 오래전부터 여당은 입장을 표명했으나, 그것이 국가의 공식 견해라고 26) 5 18민중항쟁의 추모의례가 처음 방송된 것은 1989년이었는데, 라디오를 통해 생중계 되었다. 1
할 수는 없다. 김영삼 정부의 시기에 이르면 각 정당의 입장은 강약의 차이는 있으나 대등소이해지면서 수렴되는 모습을 띠었다. 그러므로 국가의 공식 입장이 매년 발표된 것은 추모의례의 국가화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기념사는 5 18민중항쟁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정치 사회적 위상과 공식적 기억을 대변했다. 김대중 정부의 기념사들은 5 18민중항쟁의 성격 규정,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과 효과,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고 복원하기 위한 과제의 수행 방법과 의지의 표명, 현재적 계승을 당면 문제와 연계시킨 후 지지와 협조의 호소, 그리고 희생자의 명복을 빌면서 의지를 표명으로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흐름을 보였다. 기념사는 개인의 감정과 주장을 담은 것이 아니라 정부의 공식 입장이므로 매우 정제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아닌 국무총리가 기념사를 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 아무래도 국무총리의 기념사는 무게가 덜 실리게 마련이었고,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가 아니므로 발언에 더욱 주의를 기해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제20주년 기념사에서 5 18민중항쟁을 1 인권 정신, 2 비폭 력 정신, 3 성숙한 시민정신, 4 평화 정신으로 정의했다. 이는 항쟁의 성격을 순화시킨 것으로, 진상 규명 운동과 정신 계승 투쟁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집합 행동의 주장 및 특성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네 가지의 항쟁 정신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이전부터 주장해온 것이었다. 특히 비폭력 은 김대중에 대한 보수 진영 의 부정적 낙인을 약화시키기 위해 애용된 논리였다. 그리고 성숙한 시민정신은 체제 전복이 아니라 질서와 규범을 준수한다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정신에 토대를 두고 지역 간 계층 간 분열과 대립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지역감정의 극복, 화합과 협력을 강조하는 데 발언의 역점을 두었다. 아울러 임박한 남북정상회담 을 통해 남북한 간의 불신과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협력과 공존 공영의 대화합을 이루자고 제시했다. 노무현 정부의 기념사는 김대중 정부의 기념사와 큰 흐름을 같이했다. 희생자 의 명복을 비는 것과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위로를 기념사의 서두에 배치하는 형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내용과 주장의 수위는 김대중 정부의 기념사에 비해 높아졌고, 구체적이었으며, 당면한 정치 사회적 쟁점에 대해 명확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5 18 광주의 숭고한 희생이 만들어낸 정부 라고 자임하면서
대화와 협력뿐 아니라 분권과 자율, 참여와 존중 등을 실천 덕목으로 제시했다. 이 모든 것이 최종 도달할 지점은 김대중 정부와 마찬가지로 국민 통합 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종종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현재의 정세에 관해 민감한 발언을 하여 논란을 유발하곤 했다. 특히 2007년의 기념사는 그간의 관례 와 달리 정치 연설과 차이가 없는 견해를 장시간에 걸쳐 발표했고, 절제해왔던 말 을 쏟아냈다. 그는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던 주요 쟁점에 대해서도 확실한 입장을 피력했다. 이와 관련하여 각 정당과 여야 정치인은 변명, 책임 회피와 전가, 사회적 갈등 증폭에 비중을 두고 평가하는 세력과 동의, 이해, 절박한 호소, 미흡한 점을 제시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2) : 5월행사가 시작되면 언론에는 과열을 우려하는 기사가 실리곤 했다. 이러한 기사는 지역에 상주하는 공권력이 발표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였다. 때론 지방정부 도 한목소리를 냈고, 독재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에는 대학 당국도 거들었다. 보수 성향을 띤 언론들은 시민의 인터뷰를 활용하여 압박했고, 지역 경제인은 투자 축소와 일자리 감소 등을 운운하면서 우려를 표명했다. 이러한 주장은 초반 에는 5월행사 자체를 거부하는 흐름으로 나타났다. 그러다가 5 18민중항쟁이 정치 사회적으로 재평가되자 추모의례는 인정하지만, 진상 규명 운동과 계승 행사가 사회운동의 성격을 띠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전화했다. 이러한 집합 행동이 폭력화될 개연성 이 높으며, 사회질서를 파괴 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강조점은 다소 변했으나, 이 주장은 오늘날에도 유사한 맥락에서 작동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국가 차원의 다양한 기념사업이 추진되었고, 정부가 정신 계승 을 공식 표방했으며, 현 정부는 과거와 같은 독재 정권이 아니라는 것 등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5 18민중항쟁의 추모의례가 합법화 국가화되면서 행사를 주관하 는 관련 단체와 시민단체에서도 이와 비슷한 입장이 표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순수한, 비정치적인, 엄숙한 등의 수식어를 사용하여 금 긋기를 하고 차별화했다. 추모의례가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는가 여부가 관심사였고, 이 점에 서 정부와 이해가 일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을 1
때는 극단적 권위주의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던 방법을 재활용하는 역설적 태도를 보였다. 국가화된 기념식에서는 정부에 반하는 어떤 집합 행동도, 입장 표명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는 기념식장 일대의 모든 사회운동적 집합 행동을 규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식장 주변에서는 5 18민중항쟁의 진정한 적자임을 주장 하는 크고 작은 시위가 계속 발생했다. 이러한 행동은 기념식장의 경계인 민주의 문 을 넘지 못했다. <표 3>이 보여주듯이, 기념식이 열릴 무렵에는 노무현 정부에 반하거나 상이한 운동 정치 의 견해가 활발하게 주장되곤 했다. 2003년에는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서 이루어진 굴욕 외교 가 쟁점이었고, 2004년에는 이라크 파병 찬반 논쟁이 이슈였다. 2005년에는 광주에 주둔하고 있는 미사일 기지의 폐쇄 및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시위가 발생했고, 2006년에는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2007년에는 FTA 체결 반대 시위가 전개되었다. 망월묘역에서 추모식 혹은 기념식의 마무리 의식으로 빈번하게 선택되었던 화형식을 경험했던 사람들, 그리고 하나의 행사로 개최되었던 기념식과 국민대회 에 참여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의사소통의 장을 상실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대통령은 2004년의 기념사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는 대화와 타협의 규범과 방식을 주조하고 제도를 지배해온 세력이 통치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주장해온 논리이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은 억압하고 배제하고 일방통행하던 권위주의 시대의 낡은 생각과 습관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대규모 로 동원된 경찰과 경호 요원에 의해 구축된 보안 의례의 기념식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민주의 문 밖의 담론은 2003년을 제외하면,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27) 그래서 27) 2006년 5월 18일 기념식장 밖에서 평택 사건 을 알리는 피켓시위를 벌이려던 대학생 7명이 격렬한 몸싸움 끝에 경찰에 연행되었다( 광주매일, 2006.5.19). 국제평화캠 프 의 일환으로 기념식에 참석하여 이 광경을 목격한 외국인은 광주는 한국 민주주의 의 성지이자 요람이며, 오늘은 민중항쟁을 기념하는 날로 알고 있는데,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는 젊은이들이 제지되고 연행되어가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이해하기 힘들다 라 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남매일, 2006.5.19).
참배객들은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를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2007년에는 이전과 다른 집합 행동이 등장하여 관심을 끌었다. 국가 기념식이 열리던 같은 시간에 망월묘역에서 5월 정신 계승대회 및 한 미 FTA 비준 저지 결의대회 가 개최된 것이다. 이 행사의 담론은 대통령의 기념사를 침범했다. 순간 기념식은 술렁거렸고, 엄숙한 분위기에 균열이 생겼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후에 는 망월묘역도 공권력의 직접적 통제 권역으로 바뀔지 모른다. 망월묘역에서의 집합 행동에 대한 통제는 신군부의 집권 초기에만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3) : 국가가 기념식을 주관하면서 새로운 담론이 힘을 획득했다. 지방정부와 자본, 언론 등이 주도하는 성장 연합(Growth Coalition)의 긴밀한 협조로 생산된 지역 발전 담론이 그것이다. 지역 발전 담론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던 뿌리 깊은 역사를 갖고 있다(정근식, 1998). 그러나 이 시기의 담론은 5 18민중항쟁의 청산과 정신 계승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지역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는 인식이 더 지배적이었다. 5 18민중항쟁의 발발 원인 가운데 지역 차별과 낙후 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국가의 관심과 정책적 배려를 촉구하기도 했으나 정치구조의 특성상 이것이 수용될 수 있는 여지는 협소했다. 그러던 지역 발전 담론이 5 18민중항쟁의 추모의례가 국가화되면서 돌파구를 찾았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5 18민중항쟁과 관련된 미해결 과제의 성사와 국가 차원의 정신 계승 요구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역 발전과 관련된 요구가 전면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항쟁 정신의 전국화라는 과제 달성에 반하는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는 지역화 혹은 자기 것 화의 혐의를 안고 있었다. 대통령의 지역 방문은 드문 일이어서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주요 관심사였다.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하면 자치단체장이 근접 수행을 하고, 기념 식 이후에는 지역 여론 수렴을 명목으로 주요 인사 및 여론 형성자와의 간담회가 열렸다. 대통령은 기념식 참석에 수반한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기 위해 지역에 선물 을 주어야 했고, 지역에서 요구하는 사안을 국가정책으로 수용할 것인지의 여부를 응답해야 하는 부담스런 자리였다. 대통령의 발언과 약속은 선거와 같이 1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는 정부의 개입으로 간주될 수 있고, 다른 지역과의 차별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대통령의 발언은 자칫하면 정부의 정책 수행 에 장해물이 될 수 있었고,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때는 비판 여론으로 인한 지지율 하락을 초래할 수 있었다. 지역 발전 담론이 주요 쟁점으로 다루어졌던 해는 2003년, 2005년, 2007년이었 다. 2004년에는 대통령의 발언이 갖는 딜레마적 상황과 다른 이유들이 겹치면서 기념식 직후 곧바로 상경했고, 28) 2006년에는 이 담론이 공유되는 자리가 마련되 지 않았다. 그러므로 위의 시기에만 지역 발전 담론이 제기된 근거와 쟁점을 살펴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이후 수차례에 거쳐 집권 과정에서 호남의 지지가 큰 힘이 되었고,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음을 표방했다. 특히 2003년의 기념식에서는 지방분권과 지역 균형발전을 이루 겠다고 하고, 당일 오후 전남대 에서의 특별 강연에서는 당시 (광주 시민들의) 가슴 속에 잠겨 있었던 또 하나의 항쟁 이유는 소외와 차별이었을 것 이라고 했다. 이러한 발언은 노무현 정부를 향한 지역 발전 담론의 배경이 되었고, 논리를 강화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29) 2003년에 제기된 지역 발전 담론의 핵심은 광주 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 과 광양항 개발이었다. 특히 광주 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은 광주시가 그해 초부터 국가사업으로 확정짓기 위해 공을 들여왔던 과제였다(박해광 김기곤, 2007: 45).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에 찬 어조로 이 사업에 대한 호감과 긍정적 추진 의지를 표명했다( 전남일보, 2003.5.19). 2005년의 경우, 기념식 전날에 지역 언론들이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배신감과 서운한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되었다고 전제하고, 일각에서 대통령의 기념식 불참 을 주장하기도 한다면서 분위기를 형성했다( 광주일보, 2005.17). 어떤 28) 2004년의 기념식 참석과 행보가 간소했던 것에는 탄핵 국면에서 벗어난 첫 대외 행사였다는 점, 광주광역시장이 수감 중인 점, 임박한 보궐선거(6월 5일)에서 전남도지 사가 선출되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29) 지역 발전 담론은 호남이 노무현 정권의 집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상기시키고, 이 빚을 갚아야 하는 것 아니냐 라는 논리로 표출되었다( 광주일보, 2004.5.18; 2004.5.19).
언론사들은 민심 달랠 보따리 풀까 ( 전남일보, 2005.5.17), 등 돌린 호남 민심 다독이기 ( 전남일보, 2005.5.18) 등의 제목을 단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지역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노골적인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기념식 당일 오찬 간담회에 참석한 지역 대표자들은 호남 고속철 조기 착공, 한전 등 공공기관 이전,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조속 추진, 서남권 관광 레저 복합도 시 등이 현안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은 어떤 사안에는 진전된 입장을 표명했으 나 전반적으로 원론적 수준에서 대응했다. 이에 대해 지역의 한 언론은 지역발전 견인할 선물 은 없었다 라고 기사의 제목을 달았다( 전남일보, 2005.5.19). 2007년에는 지역의 경제인들이 서남권 발전 사업과 혁신 도시, 기업 도시 등의 차질 없는 추진을 위한 정책 마련 을 촉구했다( 전남일보, 2007.5.19). 노무현 대통령은 간담회를 마무리하면서 광주의 광( )산업과 전남의 생물, 소재 분야 연구 사업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을 약속하고, 문화중심도시 조성 사업에 대해서는 긴 호흡을 갖고 멀리 봐야 한다. 우리의 의식을 통째로 바꿔야 한다 라 며 지역 기업인과 지역민의 참여를 강조했다( 무등일보, 2007.5.19). 이와 같이 5 18민중항쟁의 국가의례와 담론을, 노무현 정부는 지지 기반의 확충을 모색하는 장으로, 지역의 성장연합은 지역 발전 담론의 구체적인 방안과 답변을 요구하는 장으로 활용했다. 지역 발전 담론은 성장 연합이 중앙정부에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정책 입안을 요구하는 자리였고, 대통령은 이를 적절하게 요리하거나 회피하면서 제도 정치를 실행했다. 이러한 정황은 5 18민중항쟁을 광주와 전남에 국한된 상징적 사건이라는 것에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 이에 근거 하여 지역 발전 담론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5. 오늘날 5 18민중항쟁이 직면한 고민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방부과거 사진상규명위원회 의 보고서 발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 계승을 활성화할 방안과 방향을 정립하는 것이다. 전자는 국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해결이 요원하다. 반면 1
후자는 5 18민중항쟁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단체들과 사회운동 진영의 몫이다. 5 18민중항쟁이 제도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상징성은 상승했지만, 사회적 기억의 자장은 반비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거대한 군중집회로 진행되 었던 5월행사가 이제는 그 명성을 유지하는 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 단적인 예이다. 한마디로 예전과 같은 시민 참여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추모의례는 5월행사 가운데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다. 추모의례는 주기 성과 반복성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5 18민중항쟁의 사회적 기억을 확산시키는 핵심 매체였다. 추모의례는 5월행사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가장 많이 달라진 사례이다. 이와 같은 변곡점은 1997년이었다. 망월묘역을 주요 공간으로 하여 개최되었던 추모의례는 국가화라는 제도적 질서 를 받아들이면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망월묘역의 추모의례는 기획되지 않은 자발적 시민 참여로 탄생했다. 망월묘역 의 공간적 특성과 국가의 탄압은 저항적 추모의례의 형성과 발전을 촉진했다. 추모의례는 마당극과 극장이 융화된 의례 문화가 생겨나게 했다. 추모의례는 사회운동적 진상 규명 운동 및 정신 계승 투쟁이 결합하면서 한국의 대표적 저항의례가 되었다. 그러나 추모제에 정부가 참여하면서 사회운동성과 저항의례 의 속성은 탈각되었다. 광의의 추모제에서 기념식이 분리되어 도심으로 진출하고, 사회운동적 정신 계승을 목적으로 한 행사와 결합한 것은 이러한 균열이 극단화된 것이었다. 추모제의 공간이 5 18묘지로 바뀌면서 시민의 자발적 참여는 크게 줄어들었다. 추모제의 공간 구조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일체성을 분절시켜놓았고, 추모제의 형식과 내용은 시민들에게 의의와 감동을 줄 수 없었다. 추모제는 여느 국가 행사와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제도화되어 있었다. 추모제의 주체들은 시민의 참여를 호소하고 있지만, 이러한 변화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광의의 추모제에서 분리된 기념식은 또 다른 의미에서 고전하고 있다. 기념식 은 사회운동적 특성을 일거에 버리고 국가의례로 탈바꿈했다. 5 18묘지의 공간적 구조와 특성은 이미 국가의례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것이 주는 효과는 기념식이
국가화된 이후에 비로소 파악되었다. 정부가 기념식을 주관하면서 망월묘역과 도심에서의 추모의례를 함께 연출했던 주인공인 시민은 주변인으로, 기념식장의 소품으로 전락했다. 국가의례로서의 기념식은 정부의 관례, 일반 시민에 대한 통제,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동원이라는 원칙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는 기념식의 참석 대상자를 선별하고, 배제하고, 통제했다. 이러한 조치는 대통령의 참석 여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해마다 차이는 있으나, 관료와 정치인들의 참여는 대폭 늘어난 반면, 시민은 물론 심지어 유족마저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기념식은 해를 거듭할수록 증강된 경찰과 경호 인력의 보호 속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이들은 5 18민중항쟁에 대한 국가와 다른 기억과 정신 계승을 주장하는 이들의 기념식 진입을 차단하고 격리시켰다. 국가화된 이후 기념식과 이를 둘러싼 일련의 정신계승 담론은 전유, 통제, 협상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된다. 첫째, 기념사를 통해 발표는 국가의 공식 담론은 전유에 해당된다. 이 담론의 최종 결론은 국민 통합 이었고, 정부의 정통성과 정책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기념사에는 정신 계승을 주장하는 정부의 정치적 입장과 현재의 정세에 대한 발언이 포함되면서 비제도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제도 정치권의 정치투쟁의 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둘째, 이른바 기념식장 외부에서 간헐적으로 발화되고 있는 통제된 담론이다. 이 담론은 잃어버린 기념식에서의 담론과 연속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담론은 기념식장에서 극단적인 억압과 통제의 대상일 뿐이다. 셋째, 5 18민중항쟁의 발생 배경과 계승 정신이 지역 발전 담론과 결합된 협상 담론이다. 이 담론은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을 계기로 활성화되었다. 기념식은 정부에게는 정치적 지지와 기반을 확충하는 장으로, 지역의 성장 연합에게는 발전 담론의 구체성을 관철시키는 장으로 활용되었다. 이것은 전국화와는 대척점을 형성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한국의 근 현대사에 발생했던 많은 과거사의 관련자들이 국가의 기억(state memory) 을 목표로 집합 행동을 전개하고 있다. 여전히 은폐되고 망각된 과거사에 있어 5 18민중항쟁의 국가화는 선망의 대상이자 나아갈 좌표로 보인다. 그러나 국가화 이후, 즉 국가의 기억이 된 이후의 모습에 대한 구상은 없다. 저항의례의 국가화는 과거사 피해자에게는 카타르시스와 같은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이다. 1
그러나 5 18민중항쟁이 보여주듯이, 국가화로 인한 부정적인 대가도 감수해야만 한다. 따라서 과거사의 추모의례와 기억을 국가화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가, 아니면 새로운 대안을 창출해야 하는가,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요구된다. 국가의례, 5 18민중항쟁, 추모의례, 기념식, 기억, 5월행사 5 18민중항쟁 제17주년행사위원회. 1997. 5 18민중항쟁 제17주년 행사 평가 보고서. 5 18민중항쟁 제20주년행사위원회. 2000. 5 18민중항쟁 제20주년 기념행사 자료모 음집. 권귀숙. 2006. 기억의 정치. 문학과지성사. 고동현. 2007. 저항의 기억과 의례, 정체성 형성: 1980년대 학생운동 연구. 상징에 서 동원으로. 이학사. 김민환. 2000. 한국의 국가기념일 성립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영범. 1998. 집합기억의 사회사적 지평과 동학. 사회사연구의 이론과 실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현선. 2004. 현대 한국사회 국가의례의 상징화와 의미 분석.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나간채. 2001. 5월단체의 형성과 활동. 5 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 찬위원회. 매켄지, 이언(Iain MacKenzie). 2006. 권력. 피델마 아셰 외 지음. 현대 사회 정치 이론. 이항우 옮김. 한울. 메이슨, 제니퍼(Jennifer Mason). 1999. 질적 연구방법론. 김두섭 옮김. 나남출판. 민슨, 제프(Jeff Minson). 1994. 사회주의자들을 위한 전략?: 푸코의 권력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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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ationalization of a Resistance Rituals and Politics of Discourses Jung, Ho-Gi Since the mid-1990s, new ceremonies and rituals have come into being that have different types of origins and backgrounds than those of preceding ones. Among these, the memorial ceremonies to commemorate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are the largest in scale and have the highest status. The uprising took place in Gwangju, Korea, back in 1980. This paper views the memorial ceremonies to mark the uprising as constituting a cultural structure and analyzes the cultural structure s functions and effects. More specifically, the paper examines how the nationalization of a ceremony that marks a resistance ceremony changes and influences who holds the ceremony where and who participates in it. It also takes a close look at politics centering on discussions of who inherits the spirit of the resistance. This study analyzes newspaper contents, text, investigative records and photographs collected from on-site observations. The memorial ceremony as a resistance ritual at Mangwol Cemetery employed a space that combined the characteristics of modern theaters and Madanggeuk, traditional Korean outdoor theaters. Meanwhile, the nationalized memorial ceremony held at the May 18 Cemetery was no different from the typical national ceremonies of any average nation in form and content, revealing a clear discrepancy. The nationalization of the memorial ceremony brought about considerable changes to the participants as the government s conventions, principles for mobilizing participants and control of participants were applied. As a result, many fewer civilians and students, who were voluntary participants in the resistance ritual, participated in the nationalized ceremony. Discussions of the spirit of the uprising taking place before and after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memorial ceremony are appropriated, controled and suppressed by the state, as well as negotiated through regions. The discourses form relationships of
confrontation, compromise or understanding to be used as discourses regarding political acts.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examine the changes and effects brought about by the nationalization of a resistance ritual and engage in a broad range of discussions to produce a solution. Keywords: national ceremony,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the memorial ceremony, a commemorative ceremony, memory, memorial event for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Memory of the Cultural Revolution by Chinese Workers Baek, Seung-Wook This paper, using oral history method, shows the influences of the Chinese workers memory of the Cultural Revolution on the evaluation of the present situation. Old Chinese workers compare bright side of past memory with dark side of present situations. This evaluation is a result of worsening status of workers. On the contrary, for a long time during the past, to become a worker implanted a strong memory of honor for many Chinese workers. Dalian s cultural revolution began with Four Cleanup Movement and the Great Tour from outside. The cultural revolution in Dalian gave rise to factional division of active workers into three groups: sixiang, zhuyi, and sanlianbu. Among other things, it was remarkable that conservative fractions were divided into two groups. Chinese workers at present time mobilize historical experiences and memory, and criticize present situation using such various strategies as comparisons, anger, analysis, and nostalgia. Keywords: China, the Cultural Revolution, workers, memory, oral history, Dalian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