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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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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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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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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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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임 송 자 목 차 1. 연구목적과 필요성 2.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 3. 연구성과 대한노총과 자유당 규약개정운동 전국노협 결성과정 전국노협의 활동 및 대구지역 노동운동 한국노련 결성과정 한국노총 재편성과정 전국노협 의장 김말룡 제일모직 노동조합 결성운동 <참고문헌>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3 1. 연구목적과 필요성 본 연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에서 기획한 현장민주화운동 연구사업의 일환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을 파악하는 데 있다. 이러 한 연구성과물은 노동운동에 대한 기초적인 토대를 마련하고, 노동운동사에 대한 연 구를 심화시키는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간 1950년대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는 한국노동조합운동사 (한국노총, 1979), 한국노동운동사 (김낙중, 1982), 韓 國 資 本 主 義 とその 特 質 1945~53 年 - 政 治 体 制 勞 動 運 動 勞 動 政 策 を 中 心 として- (김삼수, 1990), 한국노동운동사 4(송종래, 2004),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보수적 기원 (임송자, 2007) 등이 있다. 이외에도 조돈 문, 김용철, 정영태 등의 연구논문이 있어 양적 질적으로 많이 축적되었다. 1) 그러 나 이시기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특히 1950년대 후반부 터 4월혁명기까지, 그리고 1961년 5 16군부쿠데타시기의 노동계 동향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현 시기 노동운동 상황을 직시하고 앞으로의 올바른 운동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 는 노동운동사의 객관적, 실증적 재조명이 필수적이다.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4월 혁명기까지, 그리고 1961년 5 16군부쿠데타시기의 노동계 동향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시대상황을 분명히 읽으면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 는 자료 및 문헌에 의존하는 기존의 연구방법론상의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따 라서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구술사방법론을 채용하여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 대 초기까지 현장에서 활동했던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1950년대 대한노총의 활동상, 1950년대 후반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과정, 1960년 4월혁명기 진보적 노 1) 조돈문, <50년대 노동계급의 계급해체 -노총의 호응성 전략과 노동자들의 저동원>, 경제와 사회 29, 1996년 봄호 ; 김용철, <제1공화국하의 국가와 노동관계 -수혜적 포섭에서 약탈적 후원으로->, 한국정치학회보 29-3, 1995년 12월. ; 정영태, <노동조합 정치참여의 역사와 평가>, 論 文 集 9, 인하대사회과학연구소, 1990년 6월.

4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동운동의 성장과정, 그리고 1961년 5 16군부쿠데타에 의한 진보적 노동운동의 좌절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자료 및 문헌을 이용하여 실증적 접근방식으로 연구한 기존의 연구성과와 비교 분석함으로써 구술만을 채용하여 연구하는 한계를 보완하고자 한다. 이를 통 해 보다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1950년대 후반기~1960년대 초기 노동계의 동향에 대한 파악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 2.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 1950년대 현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인사들은 대부분 1920년대~1930년 대에 출생하였다. 대부분 70~80세 이상의 고령자들이며,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사람 도 드물다. 이번 연구사업에서는 현재 생존해 있는 김관호, 이찬혁, 김기곤, 권오봉, 나경일선생에 대한 구술채록을 하였다. 구술채록은 2007년 3월 15일부터 3월 23일까지 실시되었으며, 구술조사 대상은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그 하나는 대한노총에서 활동하였던 김관호 이 찬혁선생을 대상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기 대한노총의 동향에 대해 집 중적으로 인터뷰하였다. 2) 김관호 이찬혁선생에 대한 구술작업은 4시간 30분에 걸 쳐 진행되었으며, 이를 통해 대한노총의 조직적 문제, 대한노총과 자유당과의 관계, 전국노협과 대한노총의 갈등 대립, 4 19시기 노동단체 통합과정, 한국노총으로의 조직 재편성과정 등을 개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1950년대 후반 1960년대 초기 노동운동사에서 지역적으로 대구지역이 크게 부각되는 바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김기곤 권오봉 나경일선생을 대상 으로 전국노협의 결성과정과 활동상 및 단위사업장에서의 파업 등에 대해 집중적으 로 인터뷰하였다. 3) 김기곤 권오봉 나경일선생에 대한 구술작업은 약 4시간 정도 2) 김관호 인터뷰(일시 : 2007.3.16 14:00~17:00 / 장소 : 남영역 근처 레인보우호텔) ; 이찬혁 인터뷰(일시 : 2007.3.15 11:00~13:30 / 장소 : 한국노총 서울지역본부 사무실)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5 소요되었으며, 구술작업 결과 대한노총 대구지구연맹 활동, 전국노협 결성과정, 전국 노협의 4 19 이전과 이후 활동, 전국노협과 교원노조 은행노조 혁신세력과의 관 계, 4 19시기 노동단체 통합과정, 한국노총으로의 조직 재편성과정에서의 한국노련 및 김말룡의 활동, 4 19시기 노동운동 등을 개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대한노총에서 활동한 김관호선생은 1922년 8월 2일 황해도 사리원 출생으로, 5년 제 농업학교를 나와 과수원을 경영하다 해방 후 월남하여 평안청년회에서 활동하였 다. 이후 대한노총 조직에 가담하였고, 대한노총 감찰부장, 경기도연맹 부위원장, 광 산연맹 사무국장 부위원장을 지냈다. 이찬혁선생은 1924년 10월 8일 황해도 천동 면 출생으로, 숭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선생을 하다가 해방 후 서울(마포)로 올라와 국학대학(현 고려대학교에 편입됨)에 다녔다. 서북청년회에서도 활동하였고, 이후 대한노총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대한노총 철도연맹 선전부장, 대한노총 철도연 맹 부위원장, 대한노총 법규부장, 한국노총 위원장을 지냈다. 대구지역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한 김기곤 선생은 1933년 5월 14일 경북 청도군 출 생으로, 청구대학(현 영남대학교)을 졸업하였다. 대한노총 대구지구연합회 총무, 전 국노협 경북협의회 총무부장, 전국연합노련 대구시청노조 위원장을 지냈다. 권오봉 선생은 1926년 2월 25일 경북 영주 출생으로, 청구대학(현 영남대학교)을 졸업하였 다. 대구 대한방직 노동조합에서 활동하였으며, 섬유노련 대구지구연합회 쟁의부장 을 지냈다. 나경일 선생은 1930년 12월 7일 일본 규슈( 九 州 ) 나가사끼( 長 崎 ) 출생으 로, 1945년 12월에 귀국하였다. 제일모직 노동조합 감찰위원장, 섬유노련 대구지구 연합회 쟁의부장을 지냈다. 3) 김기곤 인터뷰(일시 : 2007.3.22 17:30~20:00 / 장소 :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카넬모텔) ; 권오봉 인터뷰(일시 2007.3.22 21:00~22:20 / 장소 :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카넬모텔) ; 나경일 인터뷰(일시 2007.3.23 11:00~12:30 / 장소 :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카넬모텔)

6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3. 연구 성과 <대한노총과 자유당> 1953년 노동관계법 제정 공포 이후 대한노총에서는 재조직을 위해 1954년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때 정대천파와 이진수파로 분열되었다. 정대천 김주홍 이준수 등을 중심으로 한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전국대회소집위원회(이하 전대위)와 이진수 오차진 김순태 등을 중심으로 한 대한노총 전국대의원대회 소집준비위원회 (이하 소준위)가 그것이다. 4) 이들은 제각기 자신들이 이대통령의 유시를 받들고 있 다면서 서로가 정통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집권 자유당은 정대천세력을 적극 지지 하였다. 결국 대한노총은 1954년 재조직대회를 통해 조직을 개편하는데, 이때 정대 천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재조직대회에서 미군정기와 정부수립 이후 대한노총을 주 도했던 인물이 교체되었다. 이후 1958년 김기옥 위원장체제가 들어서기까지 정대천 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주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정대천과 자유당과의 관계로 설 명할 수 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1954년 대회 이후 대한노총 조직은 정대천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정대천을 매개 로 자유당과의 주종관계가 형성되었다. 1954년 12월 16일 이승만의 담화는 자유당 과 대한노총 간의 주종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즉 이승만은 담화를 대한노총 내에 서 의견이 갈리거나 분쟁의 염려가 있을 때는 사실을 들어서 黨 部 에 보고 한다면 자유당 간부들이 해결할 것이며, 또한 상부에 보고하면 정당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 고 하였다. 여기서 상부 는 이대통령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4) 전대위의 정대천은 대한노총 경전노조 위원장이었으며, 김주홍은 대한노총 철도연맹 위원장 이었다. 그리고 이준수는 광산노련 위원장이었다. 소준위의 이진수는 자유노동조합연맹을 배 경으로 하고 있었다. 오차진은 노동조합법에 의거하여 개최한 1953년 6월 5일의 대의원대회 에서 대한노총철도노동조합연맹 위원장으로 선출된 김주홍에 대항하여 9월 3일 따로 전국철 도노동조합 창립대회를 열어 위원장이 되었던 인물이다. 전국철도노동조합은 1954년 4월경 에 해산되었다. 김순태는 조방에서 강일매가 사장으로 취임할 당시 노조위원장이었으나 점 차 어용화됨으로써 지탄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안종우, <조방쟁의>(상), 노동공론 1972년 8월호, 118~119쪽;전국광산노동조합, 광로20년 약사, 1969, 24~25쪽;전국철도노동조합, 철로 30년사, 1977, 444쪽.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7 대한노총은 이승만 자유당의 권력유지를 위한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그 대표 적인 예는 1956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1956년 5월의 정부통령선 거를 앞둔 3월 5일 자유당은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 기붕을 지명하였다. 이승만이 3선은 민주주의에 배치되니 다른 인물을 내세우라 는 요지의 메시지를 공표하여 대통령후보 지명을 수락할 생각이 없는 것 같은 발언을 하였다. 이승만 자신은 사사오입개헌에 책임이 없으며, 집권연장을 위한 불법행위 같은 것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제스추어였다. 5) 대한노총은 이승만의 제스추어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 대한노총 최고위원이며 전업노련 위원장인 정대천은 그 다음 날인 3월 6일 전업노련 산하의 노동조합원을 동원하여 이승만의 대통령 재출마염원 데모를 벌였다. 6) 3월 12일에는 대한노총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이승만이 대통령 재출마를 승낙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음날인 13일 정오를 기하여 교통부문 노조에서 총파업을 단행하겠다는 중대결의를 하였으 며 7) 대한노총 전국대표자 60여 명은 이대통령이 재출마를 하지 않으면 직장을 포 기하고 죽음을 택하겠다 는 탄원서를 이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13일 정오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8) 나는 명예나 지위에 관계치 않고 욕심도 없는 것이며 동포들이 나를 추대해 주어 서 성심껏 해온 것인데 이번에는 내가 물러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 므로 이번에는 내 의사를 존중해 주기 바라며 나는 이미 작정한 것을 공포한 것인 데 내가 또 하겠다고 하면 내 말 값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시간을 주고 다 돌아가서 기다려 주기 바라며 여러분들이 파업을 한다는 것은 절대 금하여야 한 다. 3월 13일 대한노총 경전노조의 발동으로 시내전차가 낮 12시부터 하오 2시까지 두 시간동안 총스톱 되었다. 9) 대한노총은 우마차까지 동원하여 시가행진을 하며 이 5) 김낙중, 한국노동운동사, 청사, 1982, 231쪽. 6) <주한미대사관 일등서기관 Edwin M. Cronk가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1956. 12.12)>(NARA,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55~1959 ). 7) 김낙중, 앞의 책, 231쪽. 8) 경향신문 1956년 3월 15일자, <파업은 좋지 않다. 이대통령, 노총대표에 권고>.

8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승만의 대통령 재출마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임으로써, 민의( 民 意 ) 아닌 우의( 牛 意 ), 마의( 馬 意 )의 데모라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10) 이어서 대한노총은 1956년 4월 9일 정 책위원회 모임을 갖고 다가오는 선거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을 각각 자유당후보를 지 지하겠다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1) 대한노총과 자유당, 대한노총 최고위원 정대천과 자유당의 관계에 대해 이찬혁선 생은 정대천이라는 사람이 자유당하고 가깝지. 자유당 국회의원 했잖아. 파주출신 인데. 헌데 정대천 어떤 사람이냐면 사람자체가 악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야 라면 서 보스적인 기질이 있었으므로 최고위원을 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12) 김관호 선생은 정대천이 자유당의 권력을 이용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즉 정대 천이가 자유당의 권력을 이용을 못했어요. 그적에(그 당시에) 정대천이가 그간에 계 속해서 노총에 헤게모니를 고저(그저) 최고위원이지 위원장도 아니거든. 그쩍엔(그 당시에는) 최고 완전히 최고위원적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대천은 개혁성도 없고 실천력도 없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었으며, 최고위원의 대표급으로 있었을 뿐 실 제적으로 정대천 밑에서 실권을 장악한 사람은 차국찬, 이상진, 김관호(정대천을 지 지하는 외곽조직의 한사람)라고 하였다. 자유당 내 세력을 강경파, 온건파로 분류할 때 정대천은 온건파에 속했다고 하였다. 13) 김관호 선생이 지적한대로 정대천이 온건파에 속했는지 의문이 든다. 자료상으로 볼 때, 정대천은 이기붕과 긴밀하였다. 이에 대해 면담자가 정대천과 이기붕의 관계 를 묻자 김관호 선생은 그거는 이기붕씨가 노총 위원장이라는 데서 한몫 놓아주었 지. 이기붕씨 세력을 업고 뭘. 그랬으면 그쪽의 위원장 했지 위원장 못했잖아요. 이 기붕 업고 뭘 하지를 못했어요 라고 답변하였다. 14) 김관호선생이 한때 윗분으로 모 9) 조선일보 1956년 3월 14일자, <서울전차 두시간 총스톱. 버스도 파업 기미. 각 교통기관 에 점차 파급?>. 10) 김낙중, 앞의 책, 231쪽. 11) <주한미대사관 일등서기관 Edwin M. Cronk가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1956. 12.12)> (NARA,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55~1959 ). 12) 이찬혁 인터뷰 13) 김관호 인터뷰 14) 김관호 인터뷰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9 시고 있었던 정대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는 게 잘못되었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지 만, 정대천과 이기붕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파악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정대천에 이어 1958년 10월 대한노총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실권을 장악한 김기옥 도 자유당과 밀착하였다. 대한노총 내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당과 긴밀 한 관계를 유지하여야만 한다는 현실의 반영이었다. 김기옥 또한 이전의 권력자 정 대천의 전철을 되밟고 있었다. 1959년 10월의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채택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에는 명년 정부통령선거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조직의 정비와 강화를 더욱 공고히 하고 우리 노동자 농민의 정당인 자유 당에서 추대한 정부통령 후보자의 당선을 위해서 총역량을 주입하고 평소에 崇 敬 하 옵든 각하를 지지하는 열의를 다시금 가다듬는 바입니다 라고 15) 하여 이승만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김기옥 체제하의 대한노총은 1960년의 정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제12차 전국대의 원대회를 개최, 이승만과 이기붕의 정 부통령 지지를 결의하였으며, 독자적인 선거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1959년 12월 5일의 제6차, 12월 21일의 제7차 회 무처리위원회에서는 선거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조직요강 초안이 작성되었다. 1960년 2월 8일의 대한노총 경북연맹 제2차대회도 자유당의 선거대책을 위한 것이 었다. 즉 결의문은 자유당 정 부통령 입후보자를 당선시켜 전국 노동자 간의 유대 를 공고히 한다는 내용이었다. 16) 1959년 7월 20일에 열린 자유당 조직위원회는 자유당에 동조하는 사회단체에 대 한 정비 강화책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대한노총의 분규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해결책 을 제출하도록 하였다. 자유당의 기간단체 조직강화를 위한 요령에는 다음과 같이 대한노총의 조직강화에 대하여 적혀 있다. 17) 1. 각급 노조 및 연합체 책임자는 전 조합원에게 자유당의 강령을 주입시켜 당에 대 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한편 당 기관지와 선전계몽운동을 통한 이념적인 지도방 15) 한국노총, 한국노동조합운동사, 1979 16) 한국노총, 앞의 책, 448~449쪽. 17) 한국노총, 앞의 책, 449쪽.

10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식으로써 진실한 당 지지운동을 일으켜 전체적인 조직공작을 전개해야 한다. 2. 노동조직이 있는 지역에 있어서는 각급 지방당 사회부장을 대한노총 지방 조직체 내에서 선임한다. 3. 각 단위 노조 대표자는 당원 획득공작을 철저히 하고 세포조직 강화에 치중한다. 4. 각 단위 노조의 책임자는 노동조합에 대한 당적관계를 조사하고 당성이 을( 乙 ), 병( 丙 )에 속하는 지도인물에 대해서는 당성을 강화시켜야 한다. 5. 입당한 사람에 대한 직장보장과 신분보장을 철저히 하여 당원의 사기를 앙양시키 고 계속적인 지도방침을 확립시켜야 한다. 6. 대한노총에서 야기되는 조직적인 분규는 자체 내에서 수습하도록 하는 것을 원칙 으로 하며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노동조합 운동에 대해서는 당책에 의거하여 보 장 육성한다. 7. 대한노총 조직이 침투되어 있지 않은 미조직 사업장에 대한 조직화 문제는 대한 노총에서 제출하는 조직 확대 강화계획에 의거하여 당 방침으로 추진한다. 자유당에서 대한노총에 지시한 조직강화요령에 대해 이찬혁선생은 전혀 기억이 없는 듯이 보였다. 다만 근데(그런데) 그건 아니 현장꺼정(까지) 가지는 않았어 그 런건 이라는 답변만을 하였다. 18) 김기곤 선생 또한 그러한 사실에 대해 모른다고 답 변하였다. 19) 정대천이 위원장으로 있는 대한노총 경전노동조합에서는 12월 2일 임시대의원대 회를 열고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이 당선되도록 총역 량을 집중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20) 그리고 정부통령 선거대책추진위원회를 구성 하였다. 21) 1960년 1월 19일에는 당선추진위원회 결성식을 거행하였다. 22) 1960년 3 15선거를 맞이하여 대한노총은 산업별, 지역별, 직업별 노동조합을 통 하여 노동조합원에게 부정선거를 지시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노동조합으로부터 거둬 들인 조합비를 선거자금으로 썼으며, 대한노총 간부들은 자유당으로부터 수억 환의 선거자금을 받아 횡령하였다. 23) 18) 이찬혁 인터뷰 19) 김기곤 인터뷰 20) 대한노총 경전노동조합, 노동 제8권 제1호, 1960년, 68~69쪽. 21) 대한노총 경전노동조합, 노동 제8권 제1호, 1960년, 80쪽. 22) 당선추진위원회 각 부서별 임무와 임원명단에 대해서는 대한노총 경전노동조합, 노동 제8 권 제1호, 1960, 84~87쪽.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11 <규약개정운동> 1958년에 전개된 규약개정운동의 주요한 내용은 현 최고위원제를 위원장제로 변 화시키려는 것이었다. 규약개정운동은 자유당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정대천 의 세력을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인의 위원장제는 통일된 지도력을 제공하고 분파주의를 감소시키고 노동자들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 었다. 하지만 김기옥과 그의 지지자는 규약개정운동이 정대천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위한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운동에 최고위원 김기옥 이주기, 前 최고위원 김주홍은 지지하였고, 이에 반해 최고위원 정대천 김용학 하광춘은 반대하였다. 1958년의 규약개정운동은 상 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58년 대회에서 규약개정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1954 년부터 유지되어 오던 최고위원제 대신에 위원장체제로 대한노총 조직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1959년에 탄생한 전국노협은 규약개정 반대운동에서 시발되었다는 점에서 어떠한 내용으로 규약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김관호 선생은 그때의 상황이 김기옥을 위원장 시켜 줄 수 없었다고 얘기하였다. 김기옥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으며 한국운수노조 위원장 을 하면서 청와대 곽영주와 연줄을 맺으며 비료조작비 횡령을 한 부도덕한 사람으 로 평가했다. 24) 당시 비료조작비 조사를 직접 담당했던 김관호 선생의 직접적인 증 언으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김관호 선생은 인천에서 부두노조 위원장을 지낸 바 있으므로 부두사정을 누구보 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비료조작비가 정부대충자금에서 나왔습니다. 예 전에 AID(미국국제개발처 ; 필자) 대충자금에서 나와요.... 다른 조작비는 쫙 올라 갔는데 비료조작비만은 안 올라간다 이기야(이거야). 그래서 조사를 했어요 라고 하 였다. 그리고 조사 결과 횡령액이 삼 십 몇 억 이 나왔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부정횡령의 책임자로 있던 김기옥을 위원장으로 앉힐 수가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25) 23) 조선일보 1961년 2월 12일자 <노총간부에 체포령. 부정선거자금도 횡령>. 24) 김관호 인터뷰 25) 김관호 인터뷰

12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부산과 인천에서의 노동조합 위원장들이 조선운수 사장과 결탁하여 부두노임을 횡령한 것에 대해 김관호는 김인숙, 최종자와 함께 1958년 11월 1일자로 서울지방 검찰청에 고발하였다. 국회를 통과한 정부예산에서는 정부도입물자의 조작비를 인상 해 주었는데도 그 하역작업을 맡은 조선운수주식회사가 어용적인 노동귀족인 부산 부두노조 위원장 김기옥 및 인천부두노조 위원장 이창우와 결탁하여 노동자의 노임 은 인상해 주지 않았으므로 그 금액을 횡령 착복했다는 것이다. 26) 그러나 이 사건은 1958년 8월 이래 <비료조작비 문제>로 국회에서 문제 삼았지 만 자유당이 지배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에서 묵과되었다. 또한 1959년 국회 에서 진상조사단까지 구성하였지만 27) 집권당의 방해와 비협조로 유야무야되고 말았 다. 28) 반면에 이찬혁 선생은 원래 최고위원제가 좋지 않으므로, 제대로 조직이 되려면 1인의 지도체계가 되어야 하므로 규약개정을 하였다고 언급함으로써 김기옥에 대해 서도 권모술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순박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였다. 29) 위와 같이 대한노총 중앙조직에서 활동하였던 김관호와 이찬혁의 입장은 크게 다 르게 나타나고 있다. 김관호는 김기옥을 부도덕한 사람으로 규정한 반면에 이찬혁은 순박한 사람으로 표현하면서 김기옥을 중심으로 한 규약개정운을 긍정적으로 평가 하였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김관호는 규약개정운동의 부당성을, 그리고 이찬혁은 1인의 지도체계가 조직운영에서 효율적이라는 명분으로 규약개정을 지지하는 입장 에 서 있었다. 당시 규약개정운동을 적극 반대했던 김관호와 김기옥체제 하에서 법 규부장을 지냈던 이찬혁의 대조적인 견해를 엿볼 수 있다. 26) 김낙중, 앞의 책, 242쪽. 27) 비료조작비 문제는 십장제의 폐해에서 나온 것이었다. 인천, 부산, 군산 등 부두노동에는 일 제시대부터 십장제 또는 반장제가 있어 그것이 부두노동자들의 작업활동을 규제하여 왔으며, 해방 이래 노동조합의 가면을 쓰고 온존되고 있었다. 김낙중, 앞의 책, 240쪽. ; 국회 본회 의는 59년 6월 8일 인천, 부산, 여수, 목포, 군산, 마산에 국회조사반을 파견할 것을 결정하 고 십장의 임금중간착취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현지조사를 통하여 국회 조사단은 노 조간부의 노동자 착취를 조절하기 위한 입법조치를 마련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거액의 노임 횡령사건은 규명될 수 없었고 십장제의 모순과 폐해의 시정도 철저한 조사를 실시하지 못함 으로써 그 한계를 드러내었다. 한국노총, 앞의 책, 443-444쪽. 28) 김낙중, 앞의 책, 243쪽. 29) 이찬혁 인터뷰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13 1958년 전국대의원대회에서 김기옥이 규약을 고쳐가며 위원장제를 만들어 1인독 재체제를 수립한 것을 계기로 규약개정의 부당성 및 김기옥의 부도덕성 등을 들어 김관호, 김말룡, 노응벽, 최종자 등은 이의신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1월 11일 대한석탄광노동조합연합회 위원장인 노응벽과 대구지구연합회 위원장 인 김말룡의 이름으로 제기된 이의신립, 대명광업노조의 김관호와 부산지구노조연 합회 최종자의 명의로 된 대한노총 전국대의원대회 및 결격 노동조합에 대한 이의 신립 이 그것이다. 30) 그러나 이의신립은 묵살되었다. 그리하여 대회의 합법성 여부 와 관련하여 법의 판결에 맡겨지게 되었고, 계속적인 분쟁을 야기하였다. 31) 노응벽 김말룡은 이른바 신립의 이유 를 규약변경에 관한 사항과 임원선거에 관 한 사항으로 구분하여 내세웠다. 규약변경에 관한 사항으로 1 규약변경은 총회 또 는 대의원대회의 결의사항(노동법 제17조)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 변경을 위하여는 노동법 제27조에 의하여 대회 2주일 전에 공고해야 하며 또한 대한노총 규약 제15 조 제1항 단서 및 제2항 1호에 정한 절차를 준수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32) 노동법 과 규약을 위반하고 대회 당일 규약변경안을 제의 상정하여 불법적인 표결을 강행 하였다는 것. 2 1958년 8월 27일자 보건사회부장관 명의 보사( 保 社 ) 제683호에 의 하면 십장 또는 반장을 위주로 구성된 노조는 노동조합법 제3조에 저촉된다고 명기 되어 있으므로 부산부두노조와 인천부두를 위시한 자유노련대의원 전원이 불법대의 원이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임원개선에 관한 사항으로 1 규약변경 자체가 불법이 30) 노응벽 김말룡의 이의신립과 최종자 김관호의 이의신립 내용은 한국노총, 한국노동조합운동 사, 1979, 472~475쪽 참고. 31) 한국노총, 한국노총50년사, 2002, 300쪽. 32) 대한노총 규약 제15조 1항 및 제2항 1호는 다음과 같다. 제15조 제1항(대의원대회 소집) 정기대의원대회는 매년 10월 중에 위원장이 차( 此 )를 소집한 다. 단, 천재지변 기타 사정으로 부득이한 경우에 있어 대회개최가 불가능할 시( 時 )에는 연 기할 수 있다. 임시대의원대회는 위원장이 필요로 인정할 시( 時 ) 또는 중앙집행위원 2/3 이 상이나 대의원 과반수 우( 又 )는 회원 1/4 이상의 요청이 유( 有 )할 시( 時 ) 위원장이 차( 此 )를 소집한다. 대의원대회 소집은 적어도 2주일 전 기( 其 )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하여 공고하 여야 한다. 제2항(대의원대회 기능) 대의원대회는 본 연합회 최고결의기관으로서 하기( 下 記 )의 기능이 있다. 1. 규약의 제정 및 변경. 단 규약변경은 재석대의원 2/3 이상의 결의에 의한다. 한국노총, 앞의 책, 470쪽.

14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며 무효이므로 변경규약에 의거한 임원선거 역시 무효라는 것 2 임원개선 역시 노 동조합법 제27조와 대한노총 규약 제15조 제1항 단서 및 제2항 제1호에 정한 절차 에 의거하여 대회 2주일 전에 공고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동 대회는 노동법과 규 약을 위반하고 대회 당일 임원개선을 제의 상정하여 불법개선( 不 法 改 選 )을 강행하였 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최종자 김관호의 명의로 된 이의신립 의 내용을 보자면 부산부두노동조합은 위 원장 김기옥을 위시하여 조합간부 전원이 조합원의 노임을 중간착취하고 있는 도반 장 십장 반장이므로 중간착취배제의 근로기준법 제36조 및 제3조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산부두노동조합과 인천자유항만노동조합은 노동조합법 제3조에 저촉되는 노동단체이므로 이러한 노동조합 출신으로서 대회에 참가한 대의원 및 새 로 선출된 대한노총 간부는 무효이며, 부산부두노동조합과 인천노동조합은 불법노동 조합이므로 해산을 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국노협 결성과정> 1958년 대회에서의 김기옥 1인체제 성립을 계기로 대한노총 분열은 극단화되었 고, 결국 反 김기옥파는 대한노총과는 별도로 노동조합 중앙조직을 결성하고자 운동 을 추진하였다. 1959년 7월 반김기옥파는 대구시내 교동에 있는 천일여관에서 따로 회합을 가졌다. 집행위원 및 각 도 산업별 노조연맹 대표 등 90여명이 회합하여 대 한노총을 탈퇴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대한노총과 별개의 전국연합체를 조직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어서 1959년 8월 11일 경전노조 회의실에서 산업별 및 지역별 노조 대표들(24개 노조연합회 대표 32명)이 회동,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국노협) 설 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설립준비위원회 선언문을 통해 볼 때, 설립목적은 민주적인 노동조합 운동의 발전 에 있었다. 이를 위해 악질기업주와 그 주구 및 노동부로커 와의 투쟁, 봉건잔재적 관료적인 일체의 요소를 타파 를 결의하였다. 전국노협 설립 준비위원회는 대구지구노동조합연맹 위원장 김말룡, 부산지구노동조합연맹 위원장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15 최종자, 광산노동조합연맹 위원장 김정원 부위원장 김관호, 석탄광노동조합연맹 위 원장 노응벽, 경전노동조합 정대천 이상진 등이 중심이 되었다. 노동조직이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으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자 자유당 조직위원회에 서는 적극적으로 분쟁해결에 나섰으며, 보건사회부에서도 적극적인 화합공작을 하였 다. 그러나 전국노협과 대한노총과의 화합이 성사되지 못한 채 1959년 10월 7, 8일 대한노총 전국대의원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한노총이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자 전 국노협은 즉각적으로 불법대회라는 것을 지적하며 대회를 부인하였다. 그리고 10월 26일 서울시내 세종로에 있는 태화관에서 대한생사노조 외 14개 단위노조 대표 21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식을 가졌다. 이날 중앙위원회 의장 김말룡을 비롯한 임원 을 선출하였다. 그런데 임원구성은 전국노협 설립준비위원회 당시의 임원구성과 현 격히 달랐다. 정대천 이상진 등 정대천파는 물론이고 김기옥체제에 반대하여 이의 신립을 하였던 노응벽 최종자 김관호 등도 설립준비위원회 때의 임원명단에는 올 라와 있었지만 결성 당시의 임원명단에는 제외되어 있었다. 더욱이 설립준비위원회 당시 위원장으로 있었던 김정원도 임원명단에 없다. 전국노협의 결성과정에서 짚어야 할 부분이 전국노협 설립준비위원회 때와 전국 노협 결성단계에서의 임원 변동상황이다. 어떠한 구상에서 전국노협이 설립되었으 며, 그리고 결성 시점에서 대거 이탈하였는데 이는 어떠한 요인이 작용했는지 파악 할 필요가 있다. 김관호 선생이 이의신립운동을 주도하였으므로, 이의신립운동으로 발단된 전국노 협 결성과정을 잘 알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1959년 10월에 결성된 전국노협과 1960년 11월에 조직된 한국노련을 혼동하였다. 그리하여 미리 준비해 간 전국노협 설립준비위원회, 전국노협 결성 때의 임원 그리고 한국노련 임원을 제시하고 설명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전국노협 설립준비위원회 때의 임원을 대략 기억하고 있었으나 전국노협 결성 때의 임원들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라고 답변하였다. 다만 한몽연이나 김은호는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한국노련 임원들에 대해서는 대 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덧붙여서 전국노협과 한국노련은 전혀 별개의 조직이라고 증 언하였다. 당시 대한노총은 자유당과 밀착했던 세력이 밀려난 상태였으며, 각 산업

16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별노조는 건재해 있었으므로 산업별 위원장들이 모여 노동조직 통합을 논의했으며, 전국노협을 지지한 세력이 통합과정에서 합류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33) 한편 전국노협 의장 김말룡의 측근이었던 김기곤선생은 전국노협 결성과정에 대 해서 정통파들이 김기옥체제에 반발하여 새로운 노동조합을 만들자고 결의하여 결 성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34) 처음에는 김기옥체제에 반발한 세력이 많았지만 나중에 많은 조직이 이탈함으로써 대구를 중심으로 한 36개 단위노조 35) 가 모여 조직되었다 고 하였다. 즉 그는 58년 대회 이후 대한노총이 자유당의 어떤 그늘에서 여기에서 이래서는 안되겠다. 정치적으로 중립하고 올바른 어떤 노동조합을 해야 되겠다. 민 주적인 노동조합을 해야 되겠다 새로운 노동조합을 만들자 여기는(대한노총 : 필 자) 자유당 앞잡이 뿐이고 권력의 시녀로 정상적인 노동조합이 아니다 고 하면서 대 한노총에서 이탈하여 중앙조직을 만들려고 하였다고 그 당시의 분위기를 설명하였 다. 그러나 그 이후 자유당의 탄압에 의해 거의 대다수가 대한노총 조직으로 들어갔 다고 하였다. 36) 전국노협에서 대거 이탈자가 생겨났던 것은 정부와 자유당의 탄압에 기인하였다. 정부와 자유당은 전국노협의 결성이 1960년의 정부통령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전국노협 결성을 부정하였다. 전국노협 결성문제에 대하여 보 건사회부장관은 그들은 법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결성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결 성함에 있어서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결성하였기 때문에 행정당국은 유령단체 로 보고 있다 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37) 더 나아가서 전국노협에 가담한 자에 대하여 물리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전국노협 결성의 중심인물이었던 김말룡이 대한노총으 로부터 손을 떼고 별도로 또 하나의 새로운 노동단체를 만든다는 일은 이( 李 )독재정 권하에서 그리 용이한 문제가 아니었다. 관권의 간섭이나 탄압 정도가 아니라 투옥 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못할 일이었다 38) 고 할 정도로 전국노협에 대한 탄압은 극심 33) 김관호 인터뷰 34) 김기곤 인터뷰 35) 실제적으로 14개 단위노조였다. 김기곤선생은 36개 단위노조로 잘못 알고 있는 듯했다. 36) 김기곤 인터뷰 37) 동아일보 1959년 10월 29일자 <노조협의회는 유령. 손보사장관 談 >. 38) 김말룡, <노동조합운동의 전망>, 새벽 1960년 7월호, 150쪽. 또한 김말룡은 전국노협의 엄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17 했었다. 정대천은 자유당에 의한 김기옥파와의 화합공작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전국노협에 서 발을 빼고 있었으며 자유당의 화합공작에 의해 대한노총에 포섭당하였다. 정대천 의 경전노조는 1959년 10월 6일 가칭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설립위원으로 참가하였 으나 현정세에 비추어 행정당국의 종용으로 대동단결을 원칙으로 합의를 보고 전협 (전국노협;필자)에 대하여는 향후 일체 관계를 끊는 바이다 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9) 그리고 10월 7일에 개최된 대한노총 전국대의원대회에 참석하였다. 1959년 8월 11일 설립준비위원회 결성에 합의했을 당시에는 24개 노조연합회 대 표 32명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10월 26일 전국노협 결성 참여세력은 14개 단위노조 대표 21명으로 크게 줄었다. 자유당의 회유공작에 포섭된 정대천세력을 비롯하여 김 기옥체제에 반대하여 이의신립 운동을 전개하였던 광산노동조합연맹(위원장 김정원, 부위원장 김관호), 대한노총석탄광노동조합연맹(위원장 노응벽), 부산지구노동조합연 맹(위원장 최종자)이 전국노협에서 이탈한 결과였다. 1959년 말 현재 조합 수가 558 개였음에 40) 비추어 14개의 단위노조를 거느린 전국노협의 세력은 상당히 미약했다 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결성된지 4개월이 경과된 1960년 3월의 시점에서 전국의 70 여 단위노조를 거느리고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41) 자료의 제약상 사실파악은 곤란한 형편이다. 다만 그 짧은 기간에 더욱이 자유당의 탄압이 강한 상황에서 50여 개가 넘는 단위노조를 어떻게 확보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전국노협의 세력에 대해 이찬혁선생은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분명 히 얘기할건 전국노협은 산하조직이 하나도 없었어. 그때 우엣것만(위에 만) 있지 대가리만 있었단 말이야. 없었어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신문기사에서는 상당한 정 도로 세력을 포섭했다고 보도한 사실을 면담자가 상기시켰으나 아니 뭐 겉으로만 그렇다니까. 위에만. 위만 있었지 아래는 아무것도 없었단 말야 라고 답변하였다. 42) 동옥( 嚴 東 鈺 )은 전국노협 결성 이후 연 1주일간 경찰에서 문초를 받았다고 하였다. 39) 대한노총경전노동조합, 노동 제7권 제11호, 1959년 11월, 26~27쪽. 이 성명서는 대한노총 경전노동조합 위원장 정대천( 丁 大 天 ), 부위원장 김성환( 金 成 煥 ), 감찰위원장 이상진( 李 相 鎭 ), 감찰부위원장 박상익( 朴 商 翊 ) 김규성( 金 奎 星 ) 명의로 나온 것이다. 40) 보건사회부, 보건사회통계연보, 1961, 412~413쪽. 41) 동아일보 1960년 3월 10일자, <노조협의회 측서 노동절 맞아 성명>.

18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김관호 선생도 이찬혁 선생과 일치된 증언을 하고 있는데, 그는 협의회(전국노협 : 필자)가 별도로 나왔는데 협의회세력은 미미했어요 라고 하였다. 43) <전국노협의 활동 및 대구지역 노동운동> 1959년 10월 민주적인 노동운동, 노자평등의 균등사회 건설 을 내걸고 결성된 전국노협은 자유당 정부하에서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조직적인 약세와 더불 어 자유당의 탄압책으로 인해 1960년 4월혁명 전까지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 였다. 그러나 이후 4월혁명이라는 열려진 공간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하였다. 4 19 이전 전국노협의 활동에 대해서 김기곤 선생은 조직자체가 뭐 권력에 탄 압받고 뭐 뭐 또 노동조합 조직이 뭐 명칭만 그렇지 물론 안의 그 자체 단위노동조 합 활동을 할 수 있지만은 대외적인 관계라든지 이런 어떤 그런 활동을 할 수 가 없었지요 라고 하였다. 44) 4월혁명에 의한 자유당 붕괴는 이와 관련된 모든 사회단체의 전면개편을 초래하 였다. 이에 따라 전국의 노동단체도 지도체제를 재편성하기에 이르렀다. 45) 전국의 노동단체가 정권교체에 영향을 받아 지도층의 일대개편을 단행한 것은 4월혁명에 의한 민주화 요구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1950년대 자유당의 권력유지를 위한 정치적 동원체로 전락되었으며, 1960년 3 15부정선거에 깊이 개입하였던 대한노총은 4월혁명에 의한 자유당정권 붕괴에 강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46) 자유당정권이 붕괴되자 대한노총 내 기존 집권 42) 이찬혁 인터뷰 43) 김관호 인터뷰 44) 김기곤 인터뷰 45) 전국철도노동조합, 철로30년사, 1977, 128~129쪽. 46) 대한노총은 자유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긴밀한 관계 는 주로 상부 수준의 노동조합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지방적이고 하부 수준의 조직에서는 당과의 연결이 직접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시위나 정치적 선거에서 당과 협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다. 재정적 지원을 받기 위해서 노사협상 에서 지원을 받기 위해 당과 협력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한미대사관 경제문제 상담역 (Counselor of Embassy for Economic Affairs) Edwin M. Cronk가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 (1959.12.30)>(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19 세력은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발표하였다. 47) 이는 대한노총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 려는 의도였다. 4월혁명 이후 대한노총 조직은 수습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한노총을 재조직하고자 하였다. 또한 전진한 김두한 등이 중심이 된 제3세력이 대두하여 노동계에서 세력 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김말룡 중심의 전국노협은 4월혁명의 여세 를 몰아 대한노총의 어용성 비민주성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조직화 작업을 활발히 하였다. 대한노총과 대립하여 별도로 노동조직을 구성한 전국노협은 (1) 노동조합의 본질 에 입각하여 노동운동 전개 (2) 노동조합과 정당과의 관계:노동조합의 정치적인 중 립주의 (3) 노동조합의 주체성 확립이라는 운동방향을 목표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48) 4월혁명 후 통치권력이 이완되고, 대한노총이 와해되는 상황에서 전국노협은 즉 각 활동에 나섰다. 전국노협은 4월혁명의 여세를 몰아 대한노총의 어용성 비민주화 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조직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전국노협은 신정부 수립 때까지 일체의 노동운동을 중지하고 노조정비기간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전국노협은 4 19 이후 6월 초순까지 상당한 정도의 조직을 규합한 것으로 보 인다. 49) 전국노협 위원장 김말룡은 앞으로의 노동운동에 대하여 민주적이고 순수한 노동 운동을 전개하여 근로자의 복지와 경제적 사회적 향상에 헌신하여야 한다, 정치도 구화 되어서는 안 된다 고 강조하였다. 50) 또한 전국노협은 전국 각급 노조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고 통일적인 노동조합 중앙조직을 결성할 계획을 세웠다. 51) affairs of Korea, 1955~1959 ) 47) <주한미대사관 이등참사관 Elizabeth Gallagher이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1960. 8.17)>(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60~1963 ) 48) 동아일보 1960년 1월 29일자, 김말룡 (논단) <한국노동운동의 비판 -앞으로의 방향을 중 심으로-> 49) 4 19 이후 6월 초순까지 170개 단위노조를 개편 포섭하여 16만 명의 노조원을 흡수하였다 는 견해가 있을 정도로 상당히 급속도로 조직을 확장하였다. 동아일보 1960년 6월 9일자, <자유 찾은 노동운동. 노총은 해산상태. 월말까지 전국노조 개편>. 50) 동아일보 1960년 6월 9일자, <자유 찾은 노동운동. 노총은 해산상태. 월말까지 전국노조 개편>.

20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김관호 선생은 4 19 이후 노동운동은 전국노협이 중심이 돼 서 전개되었지만 별로 활동할 시간이 없었으며, 조직확장이 되었는지 또한 의문이라 고 증언하였다. 52) 이찬혁 선생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전국노협이 결성되었지만 실체 가 없었으며, 실제로 현장을 장악한 게 없다고 하였다. 4 19 이후 신규조직이 전국 노협에 편입이 돼서 확장된 것이 아니라 전국노협 세력은 거의 없었다고 하였다. 53) 김기곤 선생은 전국노협이 실질적으로 조직되었지만 권력의 탄압 등으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였으며, 1960년 3월 10일 노동절 때 전국노협의 성명서를 발 표하는 정도였다고 하였다. 4 19 이후 노동조건의 열악함, 임금체불 등으로 인해 노동운동이 전개되고, 그때부터 전국노협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고 하였 다. 그리하여 신규조직도 전국노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증언하였다. 권오봉 선생은 4 19 이후 대구지역에서 해고자 복직 등 수습운동이 전개되었고, 그 결과 많은 해고자들이 복직되었으며, 내외방직 삼호방직 등 어용노조들이 전국노 협으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54) 전국노협과 교원노조 은행노조와의 관계, 전국노협과 혁신세력과의 관계 등에 대 해서는 면밀히 밝혀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 주목할만한 특징은 정신노동자인 교원, 은행원, 신문기자의 노동조합결성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노동조합운동의 폭이 넓 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교원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을 단순한 경제투쟁의 범위를 넘어 정치적 차원에 이르게 하는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었다. 55) 교원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은 1950년대 후반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1959년 서울 시내 일부 사립대학교수들에 의해 교원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다시 나타났다. 이를 계기로 정부당국은 순수한 노무종사자 이외에 어떤 일반공무 51) 동아일보 1960년 7월 10일자, <노협 중앙단체 8월 중에 구성>. 52) 김관호 인터뷰 53) 이찬혁 인터뷰 54) 권오봉 인터뷰 55)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한국현대사 2, 풀빛, 1991, 215쪽.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21 원도 노조에 가입할 수 없으며, 만일 노조가 조직되더라도 이를 불법시 하겠다 는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56) 교원노동조합운동은 1950년대 후반 교원노동조합 결성이 시도되었던 대구에서 1960년 4월 29일 대구시교원노동조합결성준비위원회 구성을 시발로 급속히 확산되 었다. 교원노동조합 결성이 확대되어 가는 시점에서 5월 9일 이항녕 문교부차관은 교원노조 구성을 막지 않을 방침 임을 밝혔으나 5월 18일 이병도 문교부장관은 기 존 정부의 견해와는 달리 교원노동조합에 대한 불허방침을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노협을 선두로 대한노총, 공무원노동조합 등 각 노동단체들에서 교원노조에 대 한 지원투쟁을 전개하였다. 전국노협에서는 6월 26일 교원노조의 합법성을 쟁취하 기 위하여 공동투쟁전선을 형성하고 적극 투쟁할 것 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6월 29일 전국노협 노동쟁의위원회에서 문교부장관을 노동조합법 위반혐의로 검찰 에 정식 고발하였다. 57) 이후 교원노동조합은 당국의 불허방침에도 불구하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7월 말까지 전교원의 25%에 해당하는 2만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58) 이에 따라 조직 정비 및 확대강화를 위한 전국대표자대회가 7월 3일 대구에서 개최되었으며, 7월 17 일 서울에서 제1차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한국교원노동조합 총연합회(한국교 조) 로 개칭하고 임원개편을 단행하여 전국적 조직체계를 정립시켰다. 59) 1960년 4월혁명에 의하여 자유당 정권이 쓰러지자 은행종업원들은 금융민주화를 추구하며 즉시 은행노동조합 결성을 추진하였다. 60) 1960년 6월 1일 조흥은행 노동 조합 결성을 선두로 한국상업은행(6월 8일), 제일은행(6월 11일), 한일은행(6월 11 일), 서울은행(6월 18일)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7월 23일에는 전국은행노동조합 연합회 결성대회가 개최되었다. 61) 56) 이철국, <4 19시기의 교원노동조합운동>, 1950년대 한국사회와 4 19혁명, 태암, 1991, 184쪽. 57) 송종래 외, 한국노동운동사 4, 지식마당, 2004, 562~564쪽. 58) 각 지방 주요 교원노조 결성상황에 대하여는 이철국, <4 19시기의 교원노동조합운동>, 1950 년대 한국사회와 4 19혁명, 태암, 1991, 185쪽 <표2> 참조. 59)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한국현대사 2, 풀빛, 1991, 226쪽. 60) 김낙중, 앞의 책, 279쪽.

22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교원노동조합과 금융노동조합 이외에 신문기자들에 의한 노동조합 결성운동도 전 개되었다. 1960년 5월 15일 대구일보 기자들이 회사의 기술공 등 여타 직원들과 함 께 대구일보노동조합을 결성한 것을 비롯하여 6월 17일에는 연합신문이, 6월 22일에 는 평화신문이 각각 직장노조를 결성하고 기자들이 이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신문노 동조합은 전국적인 노동조합 결성으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62) 이에 대구지역에서 활동한 김기곤 권오봉 나경일선생에게 집중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김기곤 권오봉 선생은 4 19 이후 교원노조를 조직할 때 전국노협 관계자 들이 노동조합 조직에 대한 절차 등 조직결성에 대한 안내를 해 주었다고 증언하였 다. 63) 나경일 선생은 제일모직 노동조합 간부들이 교원노조 집회가 있을 때 동참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혁신세력하고도 인적인 교 분을 쌓았다고 하였다. 64) 4월혁명기 대구지역에서 노동조합결성투쟁의 대표적 사례로서 제일모직을 꼽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나경일 선생의 증언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당시 대구에는 대한방직, 삼호방직, 내외방직 등 대한노총 계열의 노동조합이 있 었다. 대구에서 제일모직이 비교적 규모가 큰 공장이었으나 노동조합은 존재하지 않 았다. 따라서 4 19 이후 제일모직 안에서는 노동조건의 열악함, 3 15부정선거에 대한 반감 등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논의가 일기 시작하였고, 4 19라는 열려 진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노동조합 결성을 추진하였다. 노동조합 결성에서 주목되는 점은 노동조합 안에 대한노총 조직에도 있던 감찰위원회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기능은 차이가 있었다. 대한노총 감찰위원회 기능은 김관호 선생이 증언한 바대 로 노총원의 사상을 감찰하는 기능 즉 좌익사상 침투를 막거나 좌익사상을 가진 노 총원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일모직 노동조합에서의 감찰부서는 노동 조합의 규약에 위배되는 행위 또는 노동조합조직에 불리한 행동을 하는 것을 감찰 61) 김낙중, 앞의 책, 279~280쪽;한국노총, 앞의 책, 890쪽에는 조흥은행노조가 6월 2일에 결성 된 것으로, 527쪽에서는 6월 1일에 결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62) 김낙중, 앞의 책, 292쪽;한국노총, 앞의 책, 889~890쪽. 63) 김기곤 인터뷰 ; 권오봉 인터뷰 64) 나경일 인터뷰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23 하기 위한 것이었다. 65)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제일모직 노동조합이 전국노협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자발 적으로 결성하였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1960년 5, 6월 결성 당시 계엄령 상태였기 때문에 시국이 안정되고 어느 정도 사회질서가 유지되었을 때 상부조직에 가입하겠다 는 의도였다. 제일모직과 전국노협과는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1960년 12월 제일 모직 파업 당시에 한국노련(1960년 11월에 한국노련이 결성되므로 이때는 전국노협 조직이 아니었음에도 나경일 선생은 전국노협으로 얘기함)과 연계가 이루어진다. 제 일모직 파업 당시 노동조합은 한국노련에 가입하였고, 한국노련은 파업을 지원하기로 약속을 했다고 나경일 선생은 증언하고 있다. 66) 특기할 사항은 사실확인이 되지는 않 지만 김말룡(한국노련 임시의장)의 파업지원 방기로 인해 파업이 와해되었다는 주장 이 제기되었다. <한국노련 결성과정> 1960년 7 29총선까지 노동계는 김말룡을 중심으로 한 전국노협세력, 성주갑 김 주홍 등의 대한노총 잔존세력이 있었다. 7 29총선 이후 이러한 노동계 판도에 새 로운 세력 즉 제3세력이 등장하였다. 제3세력은 전진한( 錢 鎭 漢 ) 김두한( 金 斗 漢 )이 중심이 되었다. 1946년 9월 총파업 이후 대한노총 위원장이었던 전진한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1952년 11월대 회에서 제거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한때 대한노총 내 반자유당파를 결집하여 대한노 총에서의 세력을 확보하고자 시도하였다. 노농당 당수였던 전진한은 1957년 대한노 총 대회를 앞두고 철도노련 위원장 김주홍과 연결하여 67) 자유당의 비호에 의해 권 력을 장악하고 있던 정대천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행동으로 65) 나경일 인터뷰 66) 나경일 인터뷰 67) <주한미대사관 일등서기관 Edwin M. Cronk가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1957. 8.28)>(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55~1959 ).

24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옮겨지지는 못했다. 김주홍이 노동운동의 경제적 자립과 정치적 중립 을 주장하면 서 정대천의 강력한 라이벌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는 자유당과의 단절을 적극적으 로 고려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전진한과 김두한은 미군정기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한민주청년동 맹(대한민청) 68) 의 감찰부장 김두한의 반공활동은 대한노총의 조직확장에 지대한 공 헌을 하였다. 미군정기 대한노총과 우익청년단과의 공조체제 속에서 대한민청 감찰 부장 김두한의 반공활동이 대한노총의 조직확장에 기여함으로써 두 조직 간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리고 대한민청 청년조선총동맹 69) 의 회장 유진산과 대한노총 위원장 전진한은 개인적으로 돈독한 사이였으므로 두 조직 간의 공조체제 또한 확고 하였다. 이러한 관계에서 전진한이 결성한 노농당에 김두한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70)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은 노동계 통합에 합의하였다. 통합 결정 배경에 대해서는 자료의 제약으로 파악하기 곤란하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대한노총과 대립되는 조직 으로 출발했던 전국노협이 대한노총과 통합하고자 했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만 노동계 통합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한몫을 하게 되어 통합을 결정 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또한 이 당시 아래로부터 진행된 노조민주화운동에 힘 입어 노동조직이 신설 개편되어 나가고 있음에 고무되어 노동조직 통합을 통하여 전국노협 세력이 노동계를 주도해 나가고자 의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68) 대한민주청년동맹은 1946년 4월 9일 결성되었으며, 결성 당시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유진산( 柳 珍 山 ), 부회장 김창형( 金 昌 炯 ) 김근찬( 金 根 燦 ), 총무부장 유우석( 柳 愚 錫 ), 사업부장 김후옥( 金 厚 玉 ), 재정부장 박정래( 朴 禎 來 ), 감찰부장 김두한( 金 斗 漢 ), 지방부장 김후옥( 金 厚 玉 ), 정보부장 장우극( 張 愚 極 ), 선전부장 박용직( 朴 容 直 ), 조직부장 조권( 趙 權 ), 교도부장 유 약한( 劉 約 翰 )이었다. 선우기성, 한국청년운동사, 금문사, 1973, 666~667쪽. 69) 청년조선총동맹은 1947년 4월 7일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대한민주청년동맹이 1947년 4월 20일 시공관에서 열렸던 전국문화예술인 경연대회를 유회시키고 정진룡( 丁 鎭 龍 ) 등 3명을 타살한 사건으로 인해 자진 해산한 후 다시 결성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단체는 대한민 청이 간판만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선우기성, 위의 책, 669쪽. 70) 노농당은 1955년 2월 15일 결성되었다. 노농당의 선언, 강령, 당면정책은 대한민국건국10년 지, 1956년, 205쪽 참조. 노농당은 1960년의 대선을 앞둔 1959년 12월 20일 당명을 민족주 의민주사회당으로 개칭하였다. 동아일보 1959년 12월 21일자, <민족주의민주사회당으로. 노농당대회 개칭 결정. 대통령후보와 당수도 분리>. 김두한은 1958년 12월 3일 탈당 성명서 를 발표하고 노농당에서 탈당하였다. 동아일보 1958년 12월 3일자, <노농당서 탈퇴. 김두 한씨>.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25 대한노총 대표 성주갑과 전국노협 대표 김말룡은 1960년 9월 14일 4 19 이후 전체 근로대중들의 절대적인 요망과 구태의연한 정치적 경제적 공격 및 점고( 漸 高 ) 해가는 새로운 사회불안에 대비코 오직 <단결만이 우리들의 삶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대국적인 견지에서 노동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10월 통합대회를 개 최할 것에 합의하였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71)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4 19정신 을 기본으로 하여 한국노동운동의 새출발 을 기하며, 노동조합운동의 주체성을 확 립하고 정치적인 중립 을 기하며, 당면한 교원노조의 합법성 전취를 위한 투쟁을 적극 지원 한다고 결의하였다. 1960년 10월 1, 2일에 개최된 전국노동단체통합대의원대회는 각 파간 의견대립으 로 휴회되고, 다시 11월 25~26일에 통합대회가 개최되었다. 1960년 11월 통합대회 를 통하여 김말룡 중심체제의 한국노련이 성립되었다. 한국노련 중앙운영회는 11월 30일 임시 정 부의장 및 사무총장을 비롯한 임원을 다음과 같이 선출하였다. 72) <한국노련 임원> 의장:김말룡(경북노련) 부의장:이규철( 李 奎 喆, 철로노련) 성주갑( 成 周 甲, 조양사) 김정원( 金 正 元, 광산노련) 사무총장:최유식( 崔 有 植, 전남노련) 총무부장:한진희( 韓 眞 熙 ) 기획부장:이상배( 李 相 培 ) 조직부장:김관호( 金 觀 浩 ) 선전부장:김종홍( 金 鍾 洪 ) 조사 통계부장:최종자( 崔 鍾 子 ) 쟁의 지도부장:정국권( 鄭 國 權 ) 국제부장:박영기( 朴 榮 基 ) 법규부장:배병우( 裵 炳 宇 ) 교육부장:박종규( 朴 鍾 圭 ) 부녀부장:미정 71) 한국노총, 앞의 책, 530쪽 부록 7-4-4. 72) 동아일보 1960년 12월 2일자, < 正 副 의장 선출. 勞 聯 운영위>.

26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위 임원구성을 볼 때, 전국노협 중앙위원회 의장이었던 김말룡이 한국노련 의장 에 선출됨으로써 전국노협세력이 중심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직부장 김관호, 조 사 통계부장 최종자는 1958년 대한노총 위원장 김기옥체제에 반기를 들었으며, 73) 1958년 8월에 성립한 전국노협 설립준비위원회 임원이었다. 또한 부의장 김정원은 전국노협 설립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으며, 사무총장 최유식은 지도위원의 한사람이 었다. 74) 이들이 비록 10월에 결성된 전국노협에는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김기옥체제 하의 대한노총에 대한 주요한 비판세력이었음은 자명하다. 이규철은 4월혁명 이후 철도연맹 개편대회에서 위원장에 선출되어 막강한 세력을 발판으로 한국노련 부의 장에 선출되었다. 그런데 김말룡이 한국노련의 의장이 된 과정에 대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였다. 왜 냐하면 당시 대한노총 조직에 비하여 전국노협 세력이 약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 데,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의장이 되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김관호 선생은 전국노협과 대한노총이 통합했다고 그러기보다 그쩍에(그 당시에) 전국노협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여기 다 들어왔으니까 마 통합이라고 얘기할 수 있 는데 사실상은 별개 라고 하였다. 또한 대한노총이 4 19 이후 자유당 잔재세력이 물러나고 수습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었는데 수습위원회가 한국노련을 만들었다 고 하였다. 그래서 면담자는 한국노련을 주도한 세력이 대한노총 수습위원회라고 하 는게 맞는 설명인지를 반문하였다. 이에 대해서 김관호선생은 뭐 수습위원회를 고 저 수습위원회를 주도했다기 보다도 그쩍에(그 당시에) 이심전심으로 고 저 산별위 원장끼리 모여서 합의하여 결성한 것이라고 하였다. 75) 김관호 선생의 설명대로 대한노총 산업별노동조합이 중심이 돼서 한국노련이 결 성되었다면, 전국노협을 주도했던 김말룡이 한국노련 의장에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에 대해 이찬혁 선생은 한국노련의 정식 의장이 아닌 임시의장이었다는 식으로 답변하였다. 그는 그래 임시의장으로 있어서 그래. 임시 73) 한국노총, 앞의 책, 472~475쪽. 74) 김진선, <자유당시대의 노동조합운동>, 노동공론 1975년 3월호, 36쪽;한국노총, 앞의 책 490쪽. 75) 김관호 인터뷰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27 의장으로 있어서 그랬는데. 임시위 간부들도 이쪽 이쪽 다 같이 했는데 김말룡이 제 가 데려온 사람은 별로 없고. 옛날 조합 안했던 사람들 대거 했어 라고 하였다. 76) 반면에 김기곤 선생은 그 당시의 분위기로 설명하였다. 당시 김말룡이나 전진한 외에는 부각되는 인물이 없었으며, 전국노협의 세력이 약했지만 김말룡을 임시의장 에 앉혀야 한다는 당시의 분위기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77) 김관호 선생에 증언에 의하면 한국노련 중앙 임원들 중에서 총무부장 한진희는 부두노조 출신으로 노총의 총무부 차장으로 있은 사람이며, 나중에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 노동부 차관을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기획부장 이상배는 화공노조, 선전부 장 김종홍은 철도연맹, 쟁의 지도부장 정국권은 부두노조 출신이라고 하였다. 법규 부장 배병우는 김치선교수의 지도를 받고, 서울법대 사회문제연구소 학생소장을 지 냈으며, 이후 경전노조 부위원장,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까지 지냈던 사람이라고 하 였다. 78) 한편 김관호선생은 한국노련 중앙운영위원(13인)에 선출되는 과정에서 김말룡이 자신의 표가 모자라자 (불리한)표를 포켓에다 넣었다는 일화를 소개하였다. 79) 이찬 혁 선생은 1960년 11월의 통합대회도 전국노협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으며, 대회에서 의 대의원들도 거의 대부분 대한노총 세력이었다고 결론지었다. 80) <한국노총 재편성과정> 4월혁명에 의해 노동운동은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노동대중의 밑으로부터 요구인 임금인상 등 경제투쟁, 노동조합결성과 노조민주화운동 등 자연발생적인 요 구가 집약되어 민주 민족운동의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 한 운동으로 전화되지 못했다. 81) 76) 이찬혁 인터뷰 77) 김기곤 인터뷰 78) 김관호 인터뷰 79) 김관호 인터뷰 80) 이찬혁 인터뷰 81) 장명국, <해방후 한국노동운동의 발자취>, 한국노동운동론 1, 미래사, 1985, 125쪽.

28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노동자 대중의 사회변혁운동은 5 16군부쿠데타로 인해 일시 후퇴하게 되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육사 5기생들이 주축이 된 군부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동시에 입법 사법 행정권 등 일체의 장면 정권을 인수한다고 선언하였다. 82)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9일 명칭을 국가재건최고 회의라 개칭하고, 계엄사령부 공고 제5호로서 <경제질서회복에 관한 특별성명서>를 발표하여 모든 노동쟁의를 일체 금지시켰다. 83) 이어서 5월 22일에는 포고 제6호를 공포하여 모든 정당 사회단체를 5월 23일을 기해 해산시켰다. 84) 이에 따라 한국노 련을 비롯한 전국의 노동단체는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5월 23일 장덕승( 張 德 昇 ) 보 사부장관은 5 16 전에 계류 중이던 각종 노동쟁의는 백지화되었다고 밝혔다. 85) 한 편 문희석( 文 熙 奭 ) 문교부장관도 교원노조 문제와 관련하여 어떠한 학원의 정치활동 및 노동조합운동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86) 포고 제6호는 5월 30~31일로 예정되었던 한국노동단체 통합대회를 무산시키는 결 과를 가져왔다. 1960년 11월 25~27일에 개최된 통합대회가 임원개선문제로 김말룡 계와 전진한계의 대립으로 무산되었고, 그간 노동단체 통합대회를 추진하여 오던 중 이었다. 87) 포고 제6호가 노동조직에도 적용되는지를 문의하기 위해 한국노련 의장 김말룡 (경북노련), 부의장 이규철( 李 奎 喆, 철도노련), 김정원( 金 正 元, 광산노련)은 보건사회 부장관을 방문하였다. 88) 이때 참석한 인사들은 3명의 한국노련 지도자, 보건사회부 82)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한국군사혁명사 제1집(상), 1963, 329쪽. 83) 한국노총, 앞의 책, 569쪽. 84) 동아일보 1961년 5월 23일자, <정당 사회단체에 해산령. 학술 종교단체는 제외. 31일까 지 재등록 실시>. 포고문 제6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정당 사회단체는 단기 4294년 5월 23일을 기하여 이를 해체한다. 단 정치성이 없는 구 호단체, 학술단체 및 종교단체 기타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별도 허가하는 단체는 소정의 절 차에 의하여 단기 4294년 5월 31일까지 재등록을 실시하라. 85) 동아일보 1961년 5월 25일자, <5 16 전에 계류중인 노동쟁의 백지화. 이유 없는 노동자 해고도 불허. 張 보건사회부장관 談 >. 86) 조창화, 앞의 논문, 145쪽. 87) 동아일보 1961년 5월 14일자, <30일에 통합대회. 대립되어 온 노동단체>. 88) <대화 비망록:한국노동지도자의 군사쿠데타에 관한 견해와 노동운동의 미래(1961. 5.24)> (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60~1963 ).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29 장관, 차관, 노동국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한국노련 지도자들은 한국노련이 반공투쟁 에서 필수적인 세력임을 강조하고, 자유로운 노동조직의 유지를 강력히 촉구하였 다. 89) 이날의 모임은 보건사회부장관이 노동국장에게 노동단체 지도자들의 청원이 최고회의에서 받아들여질지 문의해보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끝냈다. 포고령 제6호로 기존 정당 사회단체를 해체시킨 군사정부 당국은 동시에 정치성 없는 구호단체, 노동단체 및 종교단체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별도로 허가하는 소 정의 절차에 의하여 1961년 5월 31일까지 재등록을 실시하라고 공고하였다. 90) 포고 제6호에 의한 재등록 결과 155개의 단위노조와 22개의 연맹체가 기일 전에 등록을 미필하였거나 유명무실한 조합이라는 이유로 해체되었다. 한국교원노조연합 회도 5 16 이전에 허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재등록할 자격이 없다 하여 해체 되었다. 91) 한국노련 의장 김말룡은 7월 5일 한국노련을 중심으로 중앙조직을 재건하고자 국 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게 서한을 보냈다. 김말룡은 서한을 통해 1960년 11 월 25~27일 통합대회에서 조직된 전국적 중앙조직인 한국노련은 정치적이고 부패한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축출하였으며, 한국노련 조직을 통해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기초를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재조직 계획안을 제출하였다. 92) 계획안에는 목적 과 임무, 잠정적 계획, 과제, 대행위원회 임원 선출 계획, 재조직 절차 등을 제시하 였다. 한국노련 의장 김말룡의 재조직 계획안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노련 의장 김말룡의 재조직 계획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국가재건최고회 의는 철도노련 위원장이며, 한국노련 부의장인 이규철을 중심으로 노동조직 중앙을 89) <대화 비망록:한국노동지도자의 군사쿠데타에 관한 견해와 노동운동의 미래(1961. 5.24)> (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60~1963 ). 90) 한국노총, 앞의 책, 569쪽. 91) 한국노총, 앞의 책, 569쪽. 92) <주한미대사관 경제문제 상담역 Albert E. Pappano가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1961. 9. 6)> (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60~1963 ).

30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재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8월 3일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 법> 공포 이후 현실화되어 나타났다. 1961년 8월 3일 <근로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하여 근로자의 단체활동을 부활시켜 헌법과 노동조합법에 의하여 보장되었던 근로자의 단체활동권 을 다시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93) 이어 같은 날짜로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 률 중 개정법률>이 공포되었다. 이 법의 제2조 1항에는 근로단체도 등록하라는 조 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희섭 보건사회부장관이 8월 4일에 발표한 담화에서 전국단일산별노조의 필요 성 을 강조한 것은 김말룡을 중심으로 한 한국노련계 간부들을 배제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군사정부는 노동조합 활동을 허용함과 동시에 8월 5일 산업별 노동조합조직 책임 자를 지명하여 이규철을 의장으로 하는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를 발족시켰 다. 94) 재건조직위원회는 9개의 산업별노동조합 대표자로 구성되어 9인위원회 라고도 93) 동아일보 1961년 8월 4일자, <근로자의 단체활동 인정. 노조신고 당국서 심사. 신고증 교 부로 과거협약도 유효>;한국노총, 앞의 책, 586쪽 부록 2-1. 전문 3조 부칙으로 된 이 법률 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본법은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에 불구하고 근로자의 단체활동을 보장하여 근로 자로 하여금 국가재건 과업완수에 적극 기여하도록 지도 보장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근로자의 단체활동은 본법의 규정하는 외에 노동조합법의 규정에 의한다. 제3조 1 노동조합을 설립하고져 할 때에는 노동조합법 제11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사항을 구비하여 행정관청에 신고하여야 한다. 2 행정관청이 전항에 의한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접수하였을 때에는 지체없이 그 내용을 심사하여 신고증을 교부하여야 한다. 3 노동조합은 신고증을 교부받았을 때에 성립한다. <부칙> 본법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단기 4294년 5월 21일 이전 단체협약을 체결한 노동조합이 본법에 의하여 설립신고를 하여 신고증을 교부받았을 때에는 그 조합이 체결한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이 존속하는 한 그 단체 협약이 갱신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 94) 한국노총, 앞의 책, 570~571쪽.;<주한미대사관 일등서기관 William J. Ford가 미국무부에 보낸 노동보고서(1961.10.23)>에서는 포고가 8월 3일(보고서에서는 8월 4일로 되어 있으나 8월 3일의 착오이다)에 나왔다는 사실과 이규철이 8월 5일 아침에 한국노동단체재건조직위 원회 형성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이규철과 한국노동단체재건조직위원회 구성원들이 국가재건 최고회의에 의해 승인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주한미대사관 일등서 기관 William J. Ford가 미국무부에 보낸 노동보고서(1961.10.23)>((NARA, Records of the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31 불리웠다. 재건조직위원회 임원은 다음과 같다. 95) <한국노동단체재건조직위원회 임원> 의장:이규철( 李 奎 喆, 철도) 총무책임위원 겸 대변인:한기수( 韓 基 洙, 광산) 조직책임위원:이광조( 李 光 朝, 외국기관) 재정책임위원:조창화( 趙 昌 華, 전력) 위원:김광수( 金 光 洙, 섬유) 조규동( 曺 圭 東, 체신) 안강수( 安 康 洙, 운수) 최재준( 崔 載 峻, 해상) 김준호( 金 濬 浩, 금융)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는 혁명정신을 받들어 참신하고 건전한 노동조합을 조직 재건하여 노동자의 기본권익 향상과 산업부흥에 이바지하고저 하는 바이다, 성스러운 국가개혁기를 맞이하여 모든 적폐와 타성을 일소하고 건전한 노동단체를 재건하여 민주적 노동운동 발전을 기하며 노동자의 권익을 수호하고 생산증강에 적 극 헌신함으로써 역사적인 국가재건운동에 참여케 하는 바이다 라는 내용의 성명서 를 발표하고 다음과 같이 노동조합운동의 기본방침과 재건조직요강을 제시하였다. 96) <노동운동 기본방침> 1. 우리들은 반공체제를 강화하고 자주경제확립으로 민주적 국토통일을 기한다. 2. 우리들은 공고한 단결로 노동자의 기본권리를 수호하고 생활수준의 향상을 기 한다. 3. 우리들은 정치적 중립과 조합재정의 자립으로 민주노동운동의 발전을 기한다. 4. 우리들은 노동자의 교육과 문화향상의 강력한 실천을 기한다. 5. 우리들은 건전한 근로정신으로 국가산업의 발전을 기한다. 6. 우리들은 기간산업의 공유화와 산업의 민주화를 기한다. 7. 우리들은 민주우방의 노동자와 국제적 유대를 강화하여 세계평화에 공헌한다.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60~1963 ). 95) 한국노총, 앞의 책, 571쪽. 96) 한국노총, 앞의 책, 588~589쪽 부록 2-3.

32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노동단체 재건조직 요강> 1. 각 산업별의 건실한 지도자의 동지적 결합체인 한국노동단체재건조직위원회의 지도하에 각급 노동단체를 조직한다. 2. 모든 용공 및 반혁명분자를 발본배제( 拔 本 排 除 )하여 반공체제를 강화한다. 3. 산업별노동조합의 단일조직체계를 확립하여 조직의 난맥을 지양하고 무질서한 노동쟁의를 방지한다. 4. 노동단체의 재정자립으로 노동조합의 부패와 의타성을 지양한다. 5. 노동단체의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며 민주노동운동의 발전을 기한다. 6. 어용노동단체 사이비노동단체 및 사이비 노동지도자를 철저히 제거하여 건전 한 노동단체의 발전을 기한다. 7. 노동단체의 조직체계의 합리적 편제로 경비를 절감한다. 8. 국제노동단체와 유대를 강화한다. 한편 전 한국노련계 간부들은 전국노동단체 재조직연락위원회를 구성하고 김말룡을 책임위원으로, 김정원(광산) 이기철(섬유) 전병민(자유) 박민균(해상) 김대연(화학) 조재규(한전) 조규동(체신) 김중길(은행) 등 약 40명의 산업별 노동조합 대표들을 위원으로 선정하였다. 97) 책임위원 김말룡을 비롯한 광산 섬유 자유 해상 철도 화학 등 28개 단위의 위원과 9명의 연락실무위원의 연명으로 <전국노동자 동지에게 고함>이라는 유인물을 신문사 등에 배부하였다. 성명서를 통해 과거의 모순된 운동 을 지양하고 노동운동 본래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구악과 부패를 제거해야 한다 고 전제하고 이규철을 중심으로 한 한국노동단체재건조직위원회를 비난하였다. 98) 이에 대하여 정부당국에서는 전국노동단체 재조직연락위원회를 배제할 뜻을 분명 히 하였다. 보사부 당국은 8월 8일 노동조합 재조직을 위해 이규철이 이끄는 한국 노동단체재건조직위원회가 무난하다고 보고, 노동조합 재건이 자율적으로 추진되어 야 할 것이나 현실문제로서는 적당한 지도역할이 필요할 것이라고 시사하였다. 또한 한신( 韓 信 ) 내무부장관도 8월 9일 담화를 통해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 노동단체 조직을 빙자하여 법질서를 문란케 하는 사례가 있음은 심히 유감된 일 이라고 지적 하고 합법적인 조직이라 할지라도 이를 악용한 중상모략행위, 불법집회 등 사회의 97) 한국노총, 앞의 책, 578쪽. 98) 동아일보 1961년 8월 6일자, <노조 재조직에 벌써 혼선. 두 단체가 서로 반목, 연일 한곳 씩 출현 비난성명도>.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33 혼란을 야기시키는 행동은 엄중 단속할 방침 이라고 경고하였다. 99) 김말룡 중심의 전국노동단체 재조직연락위원회를 배제하고 이규철 중심의 재건조 직위원회(위원장 이규철)를 통하여 노동조직 중앙을 결성하고자 했던 정부당국의 적 극적 지원에 힘입어 한국노동단체재건조직위원회는 8월 6일과 8월 9일 두 차례에 걸친 회합에서 15개 산업별 조직위원을 위촉하는 등 중앙조직 결성대회 준비를 일 사천리로 진행해나가고 있었다. 각 산별노조재건조직위원회는 1961년 8월 30~31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하 한국 노총) 결성대회가 개최되기 전까지 기본방침과 조직요강에 따라 산업별노조를 재건 조직하였다. 한국노동단체재건조직위원회는 15개의 산업별노조를 토대로 중앙조직을 결성하려고 하였다. 100) 결성대회 전까지 조직을 완료한 조직은 전국철도노동조합, 전국섬유노동조합, 전국광산노동조합, 전국외국기관종업원노동조합, 전국체신노동조 합, 전국운수노동조합, 전국해상노동조합, 전국금융노동조합, 전국전매노동조합, 전국 화학노동조합, 전국금속노동조합 등 11개 산업별노조였다. 이러한 산업별조직을 토대로 1961년 8월 30~31일 서울 용산에 소재한 교통부우 회관에서 한국노총 결성대회가 개최되었다. 101) 결성대회에서 선출된 임원은 위원장 이규철( 李 奎 喆 ), 부위원장 김광수( 金 光 洙 ) 남준현( 南 俊 鉉 ), 사무총장 한기수( 韓 基 洙 ), 사무차장 이광조( 李 光 朝 ), 총무부장 정구섭( 丁 龜 燮 ), 조직부장 김용성( 金 容 聲 ), 조사 통계부장 김흥배( 金 興 培 ), 교육선전부장 박영성( 朴 泳 成 ), 법규부장 김종흔( 金 鍾 昕 ), 국제부장 박영기( 朴 榮 基 ), 부녀부장 단길수( 段 吉 秀 ), 회계감사 최재준( 崔 載 俊 ) 안강 99) 한국일보 1961년 8월 9일자(한국노총, 앞의 책, 578쪽에서 재인용). 100) 15개의 산별노조는 전국철도노동조합, 전국섬유노동조합, 전국광산노동조합, 전국전력노동 조합, 전국외국기관종업원노동조합, 전국체신노동조합, 전국운수노동조합, 전국해상노동조 합, 전국금융노동조합, 전국전매노동조합, 전국화학노동조합, 전국부두노동조합, 전국금속노 동조합, 전국출판노동조합, 전국연합노동조합 등이었다. 101) 동아일보 1961년 8월 30일자, <노조총연맹 결성대회개막 산별대표 78명 참가>;한국노총 결성대회에 배당된 대의원 현황은 다음과 같다. 전국철도노동조합 12명, 전국섬유노동조합 14명, 전국광산노동조합 8명, 전국외국기관종업원노동조합 7명, 전국체신노동조합 4명, 전 국운수노동조합 10명, 전국해상노동조합 7명, 전국금융노동조합 3명, 전국전매노동조합 5 명, 전국화학노동조합 5명, 전국금속노동조합 3명으로 총 78명이었다. <주한미대사관 일등 서기관 William J. Ford가 미국무부에 보낸 노동보고서(1962. 2. 2)>(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60~1963 ).

34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수( 安 康 洙 ) 지연일( 池 淵 日 ) 조규동( 曺 圭 東 ) 조희원( 趙 羲 元 ) 등이었다. 102) 김관호 선생은 대한노총 재건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 김규라고 하였다. 김규가 舊 노총의 차장급으로 9명을 뽑았는데, 그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광산노 조에 적을 두고 대한노총 본부의 쟁의부 차장을 지냈던 한기수라고 하였다. 한기수 를 중심으로 대한노총 본부의 차장급, 각 산별노조 위원장급하고 9인의 재건위원을 조직하여 집중적으로 교육을 시켰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9인의 재건위원을 중심으로 한국노총이 결성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결성방식에 대해서도 새로 조직하는데 뭐 조직체는 있으니까 산별위원장만 바꾸면 된단 말이야. 그건 간단하니까. 그래서 자 기네 구미에 맞는 사람들만 전부 위원장이 된 거지 하향식으로. 그래가지구 한국노 총으로 이름을 곤치고(고치고) 연맹기를 그 단체의 숭상인 연맹기를 바까(바꿔) 버 리고 또 연맹가를 바까뿌렸습니다(바꿔버렸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16개 산별 노동조합의 힘이 강해지고 한국노총 중앙조직도 산별노동조합 위원장의 인준권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103) 한편 이찬혁 선생은 이규철이 한국노총 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규철이 철 도노조 위원장이었으며, 당시 한국노동조합운동에서 철도가 중요한 조직이었기 때문 인 것으로 설명하였다. 즉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조직과 형태 이런 걸 다 봐야 되 잖아. 그러니까 이규철이가 철도위원장 했잖아. 철도 빼놓고 없거든. 요즘 좀 달라 졌지...옛날에는 한국노동조합운동에 철도 빼면 아무것도 안되게 돼 있을 정도로 철도노조가 중요했어 라고 하였다. 또한 이규철과 함께 석공노조의 한기수, 외기노 조의 이광조가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인물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104) 노동조합 재조직의 중심인물을 선정한 것과 관련하여 1959년 대한노총 말기부터 1964년 한국노총 시절까지 간부를 지낸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05) 102) 동아일보 1961년 8월 31일자, <위원장에 이규철씨 노조총연맹 임원선정>;한국노총, 앞 의 책, 574~575쪽. 103) 김관호 인터뷰 104) 이찬혁 인터뷰 105)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5, 지식마당, 2004, 108쪽.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35 1961년 8월 초순경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인 홍종철이 나를 찾아왔다. 이 자 리에는 치안국 경사출신으로 대한노총 출입을 담당했던 김성운이 배석하였다. 홍종 철은 황해도 출신으로 강직한 인상을 풍겼고 노조재조직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홍 종철은 나에게 많은 노조간부명단을 보이고 이들에 대해 아는 바를 물으면서 이 중 에 누가 재건조직의 중심인물로 적합한가를 물었다. 나는 아는대로 누구누구는 안된 다고 대답하였다. 그때 재건위원회 이규철씨는 명단에 없었다. 이규철씨는 4 19혁 명 후 철도파업을 주도한 사람으로 상당히 신망이 두터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규철을 중심으로 한 한국노총 결성에 대한 한국노련 의장 김말룡의 대응이 궁 금하여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김관호 선생은 9인위원회에서 철도노조 위원장 이 규철을 한국노총 위원장에 앉힌 것으로, 고용 위원장에 불과하였다고 하였다. 즉 이규철이는 말하자면 고용 고용위원장입니다. 왜냐하며는 9인위원회에서 자기네가 위원장하면 조직적으로 먹어주지를 않았어요. 엊그제만 해도 노총 차장하던 놈들이 위원장 한다고 말이 되겠어요? 그러니께(그러니까) 이규철이가 말을 제일 잘 들으니 까 갖다 썬거에요(쓴거예요) 라고 하였다. 또한 이규철은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안기부의 장난에 의해 밀려났다고 덧붙였다. 106) 김말룡은 한국노총 결성에 반발했지만 조직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는 뭐 반발이야 뭐 굉장히 했지요. 반발을 해도 그쩍에(그 당시에) 조직이 9인위 원회한테 한풀 죽어가지고 그냥 있을 때니깐 김말룡이 반발이 얘기가 안되고 김말 룡이가 그거를 반발을 하면서 김수환 추기경한테 접근 을 하였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였다. 107) 김기곤 선생은 한국노총이 결성되는 날 김말룡은 연행되었고, 결성되고 난 후 정보부에서 풀려났다고 하였다. 그때 새로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였지만 여의치 않았다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108) 한편 김정원은 1962년 말부터 7개 산별위원장들과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진 끝에 노동자 정당을 만들자는 데 뜻을 모으고 가칭 민주노동당 발기위원회 를 구성하였 다. 109) 그러나 이는 미수에 그쳤는데 김정원의 노동당 결성 기도사건에 대해 김관호 106) 김관호 인터뷰 107) 김관호 인터뷰 108) 김기곤 인터뷰 109)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5, 지식마당, 2004

36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선생은 노동당을 만들어 노동자를 위해 일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조직 하려고 했 으나 중앙정보부에서 이러한 사실을 입수하여 반격함으로써 실패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조창화 뭐 뭐 등등해서 노동당을 발기인을 맨들었어요(만들었어요). 발기인을 맨들었는데 그걸 중앙정보부에서 그 정보를 입수해가지고 압력을 가핸거야(가한거 야). 너희 노동당할거 같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 그러는 바람에 다 흩어지고 말았어 요. 그래가지고 노총에서 김정원씨 제명처분했습니다 라고 하였다. <전국노협 의장 김말룡> 전국노협은 대구 대한방직쟁의 과정에서 어용적 태도를 취한 대한노총 경북지구 연맹에 반발하여 결성된 대한노총 대구지구연맹이 주축이 되었다. 전국노협 의장 김 말룡은 대한방직 쟁의과정에서 대구지구연맹 위원장으로서 쟁의지도에 헌신하였던 인물이다. 110) 노동자들의 투쟁과정 속에서 세력을 결집하여 대한노총의 어용화에 반 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대구 대한방직 쟁의는 조방쟁의와 더불어 1950년대 노동운동 의 중요한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자유당에 예속된 대한노총을 비판하고 이에 대항하여 대한노총과 별도로 조직된 전국노협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1950 년대 후반 전국노협이 결성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말룡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김말룡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4월혁명기 전국노협을 이끌고 노동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60년 11월 노동단체 통합과정을 통해 조직된 한 국노련의 (임시)의장이었던 점에서 김말룡에 대한 연구는 노동운동사의 영역을 넓히 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된다. 김기곤 선생은 그분이 하는 어떤 운동 자체가 정말로 옳은 운동이었었고, 그분 이 나아가는 길은 오직 노동조합을 위한 길 마 정치적인 것을 떠나서 중립한다는거 정신 이런거 해서 그래가 많은 감명을 받았지요 라고 하였다. 111) 110) 김사욱, 앞의 책, 106쪽. 111) 김기곤 인터뷰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37 대구지역에서 활동했던 김기곤 선생은 부산 조방쟁의 전까지 대구에서는 어용세 력이 없었으나 부산 조방을 계기로, 그리고 내외방직 쟁의, 대한방직 쟁의를 계기로 어용화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1950년대 중반부터 김말룡이 노동조합의 어 용화에 반대하는 세력의 중심인물로 자리잡기 시작되었던 듯하다. 김기곤 선생은 55년도 대한방직 쟁의를 계기로 해가지고 거의 다 대구에서는 약간 분파가 있었고, 자유당 그 도당 간부들이 인자 김말룡씨를 위주로 하는 어떤 조직을 자꾸 저쪽 편 으로 몰아부쳤고, 자유당 도당에서도 김말룡씨를 어떻든 조질라 카는(하는) 어떤 그 런 게 있었구요.... 김말룡씨를 계속해서 압력을 가했어요 라고 하면서 김말룡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가했던 상황을 술회하였다. 112) 권오봉 선생은 그 당시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알았어. 그 어느 정도 위협의 적 이 되어 있었어. 두려움의 적 이었다면서 기업가들이 노동운동가 김말룡을 위협적인 인물로 인식하였다고 한다. 또한 1955년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의 재정부장직을 맡 고 있던 설경동이 대한방직을 인수받아 대구로 내려올 때 김성곤을 찾아갔는데 그 때 김성곤이 설경동이에게 딴 거 걱정할게 없고 단 조심할거는 김말룡이다. 김말룡 이 하나만 잘 다루면 당신 살 수 있소 라고 하였다는 일화를 소개하였다. 113) 한편 권오봉 선생은 김말룡에 대해서 좋은 평가만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는 1961 년 겨울 제일모직에서 파업을 결정하고 대한방직에서 응원대를 보내기로 되었는데 인원동원에 실패하고 파업이 무산된 것이 김말룡 때문이었다고 한다. 즉 그가 김말 룡을 찾아갔을 때 권동지 말이지 그렇게 말이야 파업을 무모하게 하는 사람이 어딨 어요 라고 하여 파업이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말룡이 오해를 받았고, 대 구지역 노동운동가들과 결별하게 되었음을 술회하였다. 114) <제일모직 노동조합 결성운동> 1950년대 한국 민간산업의 대부분은 섬유산업이었으며, 섬유산업 기업주들은 특 112) 김기곤 인터뷰 113) 권오봉 인터뷰 114) 권오봉 인터뷰

38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별히 자유당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이 분야에서의 노동조합운동은 가혹하게 탄압받았으며, 철저히 어용화되는 경향이 짙었다. 115) 이승만정권하에서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은 4월혁명을 계기로 노동운동을 본격화 하였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어용노조를 반대하며 민주적인 노동조합으로 개편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노동조합을 갖지 못한 곳에서는 노동조합결성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지역이 전국노협의 발원지였던 만큼 4월혁명 이후 노동운동이 활성 화되었다. 대구 대한방직은 1956년 이래 쟁의 과정에서 쫓겨났던 배형이 다시 복직 되어 노동조합을 개편하였으며, 내외방직에서도 1954년 12월 쟁의 당시 해고된 노조 위원장을 비롯한 약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복직하여 임금인상투쟁을 전개하였다. 삼 성재벌의 기업으로 자유당 치하에서 노동조합 결성이 곤란했던 제일모직은 4월혁명 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부당노동행위 즉각 중지 등을 내걸고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일모직 노동조합 감찰위원장을 지낸 나경일 선생은 대구에서는 이제 대한방직 이나 삼호방직 내외방직 노동조합이 대한노총 계열의 조합이 있었고. 제일모직만이 유독 큰 회사치고 노동조합이 없었거든 이라고 하면서 제일모직에서 1960년 5월에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고 하였다. 116) 제일모직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된 계기는 3 15부정선거에 대한 높은 불만에서 촉발되었다고 한다. 즉 그는 자유당의 이승만 이가 장기집권 할라고(하려고) 3 15부정선거를 하는데 심지어 제일모직 같은 데서 는 종업원 상호간에 3인조 5인조 카는 거를(하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서로 투표장 에까지도 서로가 한조가 같이 투표소에 가가(가서) 서로가 감시하도록 이런 공작을 꾸며가지고 종업원들한테 강요 했다고 한다. 117) 그리하여 회사의 강압적 통제방식과 자유당권력의 압박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조직을 결성해 야 되겠다는 의식이 싹텄다고 하였다. 제일모직에서의 노동조합결성은 4 19 이후 대구지역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사례 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결성은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제일모직 노동조합이 결성될 때까지 회사측은 온갖 회유 공갈 협박을 자행하였다. 노동조합이 115) 김낙중, 앞의 책, 266쪽. 116) 나경일 인터뷰 117) 나경일 인터뷰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39 결성된 후 경상북도 사회과 노동계에 설립신고를 하고 난 후에는 공장폐쇄를 단행 하여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파괴에 나섰다. 회사 측의 공장폐쇄에 대응하여 노동조합 측에서는 경상북도 노동위원회에 조정을 의뢰하였으며, 그 결과 노동조합을 인정하 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회사 측은 제2노동조합 즉 어용노동조합을 만들어 민주적으로 결성된 노동조합 파괴에 나섰으며, 118) 공장을 폐업하고 일부 노동자들을 불법적으로 휴직 조처하였다. 119)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1960년 6월 14일 제일모직 대구공장에서 여공 400 여명이 단식투쟁에 들어갔는데 그들의 요구조건은 1 부당노동행위를 즉각 중지하 라 2 152명에 대한 불법 휴직 조치를 즉시 철회하라 3 불법 폐업을 중단하고 정 상 작업을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이어 노동자들은 6월 17일 어용노조 타도를 외치 며 농성에 들어갔다. 120) 경상북도 당국에서 회사의 공장폐쇄가 위법임을 들어 그 시 정을 촉구하게 되어 6월 20일부터 조업을 재개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회사측에 서는 어떤 대책과 조치도 취하지 않아 제일모직 노동조합에서는 6월 22일 경상북도 당국에 쟁의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21) 그러나 회사 측에서 아무런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이에 노동자들은 7월 4일 공장 사무실을 점거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회사 측의 고발로 200여 명의 경찰들이 출동하여 농성한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하려고 했고, 1시간 이상의 충돌로 인하여 여 공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내 다른 공장들에서 1,500여 명의 노 동자들이 대오를 이루어 농성을 지원하였다. 이날 강권으로 사태를 진압하려던 경찰 도 4 19 후의 분위기 속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경찰에 대신하여 계엄군 헌병 들이 회사 내의 경비를 맡았으며 농성은 평온리에 진행되었다. 회사측도 하는 수 없 이 보사부 당국의 조정을 받아들여 8월 10일 이 투쟁은 종결을 보았다. 122) 보사부 조정안은 다음과 같다. 118) 나경일 인터뷰 119) 김낙중, 앞의 책, 302쪽. 120) 김낙중, 앞의 책, 302쪽. 121) 한국노총, 앞의 책, 516쪽. 이때 요구조건은 1 노조결성 및 노동운동의 불법방해 즉시 중 지 2 152명의 공원에 대한 부당 휴직 조치 즉시 철회 3 공장조업 즉시 재개였다. 122) 한국노총, 앞의 책, 516-517쪽 ; 김낙중, 앞의 책, 302-303쪽.

40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1 회사 내의 신 구 양파 노조는 통합 단일화를 위해 모두 해산한다. 2 회사는 두 개 노조의 해산을 확인하고 3일 내에 직장 폐쇄를 해제 조업한다. 3 통합 단일노조는 조업 개시 후 40일 이내에 결성하기로 하고 외부의 개입이나 간섭을 받지 않는다. 보사부 조정에 따라 두 개의 노동조합이 해산되고 이어서 노동조합이 다시 결성 되었다. 나경일 선생은 이러한 투쟁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 장미상조회를 만들어 회 원들에게 온갖 특혜를 베푼 반면, 조합원들에게는 압박을 가하고 해고를 단행했다고 한다. 즉 그는 회사에서 인자(이제) 선수를 치는게 모냐하면(뭐냐 하면) 장미상조회 하는거 만들었다고 우리가 노동조합 다시 단일노조를 만들려고 하기 전에 벌써 이 쪽에는 장미 노동조합을 이제 간판을 떼버리고 장미상조회 하는 거를 만들어서 거 기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가지고 거기에 회원들한테는 온갖 특혜를 베풀어주는 거예요 감시원이 있어가지고... 화장실 출입자체도 자기 필요에 따라서 생리적인 볼일도 제대로 못보고 구박을 받고 지내는데...무슨 문제거리가 있으면 그걸 핑계 해서 막 짤라(잘라) 내는 거예요 라고 당시의 상황을 술회하였다. 123)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제일모직 노동조합에서는 1960년 12월 파업을 단행 하기로 결정하였다. 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정하는 자리에는 전국노협에 소속되어 있 던 노동조합의 위원장들이 다 모였었고, 이들은 연대투쟁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파 업 당일 인력동원에 실패하여 결국 파업은 와해되었다. 이에 대해 나경일 선생은 다 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124) 김말룡씨가 그때 인자[이제] 노협에 의장 아닙니까. 의장이자 쟁의부장이고 또 뭐 등등 이래[이렇게] 있었는데. 파업일자까지 결정 노동조합 현 노협에서 회의를 통해 서 다 이루어졌는데. 계획이 짜여져 가지고 인자[이제] 실행하는 날, 밖에 인자[이제] 경찰 인자[이제] 그 병력하고 그걸 막기 위한 그걸 막기로 하고 밖에서 우리 안에서 는 우리 종업원끼리 현장에 인자[이제] 위탁해가지고 소위 발전소 발전공장 그걸 포 위하고. 그 안에서 인자[이제] 스위치 내려버리면 전 공장이 스톱될 거 아닙니까? 그 123) 나경일 인터뷰 124) 나경일 인터뷰

1950년대 후반기 ~ 1960년대 초기 노동계 동향 41 래 바깥의 방해꾼만 인자[이제] 막아 놓으면은 안에서는 계속 파업을 유지할 수도 있었는데. 그 당시 날짜까지 정해놓고 나서 실행하는 날 김말룡씨 어디가 있었나하 면 서울 서울 올라가가지고 반도호텔이요. 그때 이병철이 사장의 본거지가 바로 반 도호텔이야. 당시 한국노련 의장으로 있던 김말룡이 제일모직 파업 와해에 얼마나 커다란 영 향을 미쳤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말룡이 왜 그러한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 1960년 7 29총선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7 29총선 선거자금을 기업주와 연결하여 충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4 19 이후의 열려진 공간 속에서 전개된 제일모직 노동조합운동은 대자본 삼성 재벌의 힘에 눌리어 결국 1960년 12월에 와해되고 말았다. 이후 현재까지 제일모직 에서의 노동조합 결성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참고문헌> <대화 비망록:한국노동지도자의 군사쿠데타에 관한 견해와 노동운동의 미래(1961. 5.24)>(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60~1963 ) <주한미대사관 경제문제 상담역 Albert E. Pappano가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1961. 9. 6)>(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60~1963 ) <주한미대사관 경제문제 상담역(Counselor of Embassy for Economic Affairs) Edwin M. Cronk가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1959.12.30) (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55~1959 ) <주한미대사관 이등서기관 Elizabeth Gallagher이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1960. 8.17)>(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42 2007년 현장민주화운동연구 종합보고서 internal affairs of Korea, 1960~1963 ) <주한미대사관 일등서기관 Edwin M. Cronk가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1956. 12.12)>(NARA,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55~1959 <주한미대사관 일등서기관 Edwin M. Cronk가 미국무부에 보낸 보고서(1957. 8.28)>(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55~1959 ). <주한미대사관 일등서기관 William J. Ford가 미국무부에 보낸 노동보고서 (1961.10.23)>(NARA,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Korea, 1960~1963 ) 김낙중, 한국노동운동사, 청사, 1982 김말룡, <노동조합운동의 전망>, 새벽 1960년 7월호. 김사욱, 한국노동운동사 (상) (하), 산경문화, 1979 김삼수, 韓 國 資 本 主 義 とその 特 質 1945~53 年 - 政 治 体 制 勞 動 運 動 勞 動 政 策 を 中 心 と して, 동경대 경제학연구과 박사학위논문, 1990 김영태, <도큐멘타리 노동운동 20년 소사>, 노동공론 (1)~(6), 1971년 12월호~1972 년 5월호. 김용철, <제1공화국하의 국가와 노동관계 수혜적 포섭에서 약탈적 후원으로->, 한국 정치학회보 29-3, 1995년 12월. 김준, <5 16 이후 노동조합의 재편과 한국노총 체제 의 성립, 사회와역사 제55권, 1999.5. 노동운동회고 鼎 談, 대한노총결성전후, (1)~(10), 노동공론 1971년 12월호~ 1972년 10 11월호. 대한노총 경전노동조합, 노동 제8권 제1호, 1960년 대한노총경전노동조합, 노동 제7권 제11호, 1959년 11월 변명희, <한국 교원노동조합의 비판적 연구>,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석사학위논문, 1986. 보건사회부, 보건사회통계연보,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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