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해외한국기업감시 캄보디아 유혈진압 현지 실태 조사 보고서 캄보디아 유혈 진압과 한국기업 및 한국정부의 연루 해외한국기업감시(KTNC Watch)
조사 보고서 캄보디아 유혈 진압과 한국기업 및 한국정부의 연루 (2014년 1월 13일~18일) 2014 해외한국기업감시(KTNC Watch) 공익법센터 어필/공익인권법재단 공감/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국제민주연대/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사회진보연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좋은기업센터/환경운동연합)
2014 캄보디아 유혈진압 현지 실태 조사 보고서 캄보디아 유혈 진압과 한국기업 및 한국 정부의 연루 (2014년 1월 13일~2014년 1월 18일) 해외한국기업감시(KTNC Watch) 공익법센터 어필/공익인권법재단 공감/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국제민주연대/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사회진보연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좋은기업센터/환경운동연합) 현지 조사 한국 참가자 강은지(국제민주연대), 류미경(민주노총 국제국장), 유기수(민주노총 사무총장) 보고서 작성자 강은지(국제민주연대), 류미경(민주노총) 발행: 2014년 3월 해외한국기업감시(KTNC Watch) 사무국 : 서울 공익법센터 어필 서울 종로구 율곡로 47 505호(안국동) 전화: 02) 3478-0529 팩스: 02) 3478-0527
목 차 I. 들어가며 7 II.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의 대응 8 III. 인권침해 악명 높은 911공수여단 12 IV. 캄보디아 의류산업 최저임금 17 V. GMAC은 노조간부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는가? 26 첨부 문서 국제공동조사단의 캄보디아 현지 조사 보고서(A Week that Shook Cambodia)
I 들어가며 2014년 1월 2일과 3일, 새해 벽두부터 캄보디아로부터 긴박한 소식이 전해졌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최저임금 160달러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의류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과 군의 진압 과정에서 최소 5명의 노동자가 총에 맞아 죽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게다가 현지 인권, 노동단체에서 보내오는 긴급 성명서나 외신 보도마다 약진 이라는 한국 기업 이름이 거론되었다. 이후 국제진상조사단이 결성되고 현지 조사를 통해 정확한 사건 경과와 경위를 파악하여 사실확인이 되긴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현지상황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국내에서 입수할 수 있었던 자료로는 한국계 기업인 약진통상 앞에서 1월 2일 벌어진 시위 진압에 인근 911공수여단이 투입되면서 1월 3일 시위대에 대한 군경의 발포로 이어졌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약진통상 앞 시위대 진압에 군부대가 투입된 일과 관련, 1월 5일, 경향신문 등은 캄보디아 주재 한국 대사관과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경찰에 신고를 해도 잘 오지 않고 조업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해당 업체가) 가능한 인맥을 동원해 군부대에 요청을 한 것으로 안다 며 부대가 (보호) 임무와 다르게 행동한 것 같다 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저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 최저임금 160달러를 요구하며 맨 몸으로 거리로 나온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발포로 최소 5명의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간 유혈진압의 배후에 한국 기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한국 인권단체, 노동단체 등 시민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정확한 상황 파악에 분주한 사이, 1월 5일에는 연합뉴스, 경향신문 등에서 캄보디아 프놈펜에 있는 한국봉제협회 관계자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국 기업들이 캄보디아 야당 대표 및 노조 집행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소송은 캄보디아의류생산자협회(GMAC) 차원에서 이루어지겠지만 이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한국 기업이라는 보도에 다시 한 번 한국 시민사회는 이제는 70~80년대의 노동착취와 유혈진압에 이어 노동자 파업 손해배상소송 관행까지 캄보디아에 수출하고 있느냐고 분노했다.
Ⅱ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의 대응 이와 함께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이 주 캄보디아 한인회 홈페이지와 대사관 공식 페이스북 및 홈페이지에 올린 게시물들이 도마에 올랐다. 노동자들의 시위가 일주일 가까이 이어지고 있던 2013년 12월 30일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은 한인회 홈페이지에 최근 캄보디아 시위 확산과 관련하여 대사관이 취한 조치사항을 알려드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제목 하에 캄보디아 정부 고위 당국자 및 야당 등에 신속한 사태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일자별로 정리해서 실었다. 이어서 1월 6일에는 대사관 공식 페이스북에 치안정보(10) 이라는 제목으로 비슷한 글을 올렸다. 그런데 바로 이 글에서 사태발생 초기에 우리 기업들의 우려를 전달하면서 조속한 업계 정상화를 위해 각별한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청하는 대사명의 서한을 훈센총리에게 발송하였으며, 총리에게 일일보고를 하는 국가대테러위원장과 접촉하여 현 상황이 외국인투자자에게 미치는 깊은 우려를 전달하였습니다. 이로써 주재국 정부당국이 금번 상황을 심각히 고려하고 신속히 대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대목과 실질적인 조치로는 군 및 경찰당국과 우리 업체보호를 위해 긴밀히 협조해 오고 있는 바, 특히 수경사령부에 우리 업체와 동반 방문하여 실상을 전달하였으며 그 결과에 따라 방화나 약탈에 대비하여 군이 카나디아 공단 내 기업 중 우리 업체에 대해서만 직접 보호조치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라는 대목이 문제가 되었다. 훈센총리나 야당 대표, 내무부, 법무부, 경찰청 등에 협조공문을 발송한 것은 외교적으로 자국민 보호를 최우선 순위로 하는 주재 대사관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조치라 하더라도 국가대테러위원장과 접촉한 것이나 수경사령부에 직접 보호조치를 요청했다는 것은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이 게시물이 올라온 것은 군경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였음에도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 측은 사망 노동자에 대한 단 한 마디의 유감 표명도 없이 오히려 자신들의 조치를 통해 주재국 정부당국이 금번 상황을 심각히 고려하고 신속히 대처하는 계기를 마련 하였다고 적었던 것이다.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의 이 게시물이 알려지면서 국내외 온라인과 언론에서 비판이 쏟아졌고, 논란이 거세지자 1월 8일, 대사관은 이 게시물을 삭제했다. 하지만 이미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 시민사회단체와 언론에서 총기까지 사용된
9 유혈폭력진압의 배후에 한국 대사관과 기업이 있다는 의혹이 더욱 증폭된 상태였다. 한국 시민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주 한국 캄보디아 대사관 앞, 외무부 앞 등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캄보디아 당국의 책임과 함께 한국 측 연루와 관련 여러 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약진통상 측과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 한국 외교부 등에 사실확인을 요청하는 질의서도 발송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더 정확한 상황이 파악되고 국제진상조사단이 현지를 방문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국내외에서 제기되었던 의혹 중 몇 가지는 사실과 다르다는 점이 밝혀지기도 했다. 우선 초창기 국내에서는 1월 2일과 1월 3일의 시위 현장이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2일과 3일의 상황을 혼동한 면이 있었다. 즉 사망자가 발생한 1월 3일의 시위는 약진통상 앞이 아니라는 사실과 1월 2일 진압에 동원된 부대는 약진통상과 이웃하고 있는 911공수여단이지만 1월 3일 시위대에 발포한 부대는 경찰과 헌병이라는 사실 등은 사건이 발생하고 일주일 정도 지난 후에야 명확하게 확인될 수 있었다. 두 사건 현장과 진압 상황에 대해서는 국제진상조사단 보고서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약진통상 앞 시위대 진압에 군부대가 동원이 되었고, 이 군부대 역시 발포만 하지 않았을 뿐 AK-47 소총, 쇠파이프, 진압봉, 새총 등으로 무장하고 시위대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 약진통상 앞에서 10명의 시위대가 군부대에 의해 연행되었다는 점, 약진통상과 군부대와의 결착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이 국가대테러위원장과 수경사령부 등 캄보디아 군 당국을 접촉해 이른바 파업 사태 해결을 촉구했다는 점 등은 여전히 분명한 해명이 필요한 쟁점들이었다. 이와 관련,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은 1월 15일, 홈페이지를 통해 캄보디아 유혈시위사태, 그건 이렇습니다 라는 반박문을 실었다. 무려 11개 항목에 걸친 반박 내용의 상당 부분은 단순한 사실관계 오류나 해석 문제라고 보더라도 한국대사관은 대테러부대를 접촉한 적이 없다 는 대목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글에서 대사관 측은 한국대사관은 대테러부대를 접촉한 적이 없다. 연말행사로 초청된 캄보디아 고위인사중의 한 분이 여러 개 직함(대테러위원회 상임위원,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반부패청장)을 보유하고 있는데, 만찬 계기에 이 인사를 포함한 참석자들에게 한국기업들의 심각한 우려를 전달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부탁한 것뿐이다 라고 해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테러위원회 상임위원 등 여러 직함을 가지고 있는 고위 인사는 옴 옌티엥(Om Yentieng) 선임장관으로 보인다. 또한 12월 30일 한인회
10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미루어볼 때 옴 옌티엥 선임장관이 김한수 대사가 주최한 12월 27일의 한캄 의원친선협회 및 한캄 친선협회 인사 초청 만찬에 참가했고 이때 대사가 그를 만났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접촉이 단순히 만찬을 계기로 참석자들에게 의례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부탁한 것뿐이라면 옴 옌티엥 선임장관은 왜 캄보디아 정부가 과거 폴포트 치하의 유혈사태에 대한 학습효과로 인해 신중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 이라고 답한 것일까(12월 30일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에서 한인회 홈페이지에 올린 글). 또한 그렇다면 한국 대사관은 이 정도 의례적인 대화를 가지고 총리에게 일일보고를 하는 국가대테러위원장과 접촉하여 현 상황이 외국인투자자에게 미치는 깊은 우려를 전달 하였다면서 주재국 정부당국이 금번 상황을 심각히 고려하고 신속히 대처하는 계기를 마련 하였다고 자랑스럽게 선전했다는 것인가. 이 캄보디아 국가대테러위원회(National Counter-Terrorism Committee, NCTC)는 훈센 총리가 직접 의장을 맡고 있으며 옴 예티엥 선임장관과 훈센 총리의 장남인 훈 마넷(Hun Manet) 중장이 실무를 맡고 있는 최고위급 기구이다. 또한 이 기구 산하에는 여단급 직할부대인 국가대테러위원회 특수부대가 있으며 훈 마넷 중장은 이 특수부대를 비롯하여 기타 캄보디아 특수부대의 명령권을 가지고 있다. 한편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2008년 미국 외교전문에 따르면, 2008년 2월부터 사무처 직할로 운용되는 이 최정예 특수부대는 미국, 호주, 한국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국가대테러위원회는 말 그대로 국가 최고위 선에서 테러에 대비하기 위해 특수부대까지 둬서 마련된 기구인데 한국 대사가 이러한 대테러 위원회의 위원장에게 한국 업체의 시설과 교민 보호, 노동자 파업 해소를 요청한다는 것이 과연 상식적인 것일까.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는 이와 관련, 한국 정부는 자신들의 요청사항을 경찰에 전달했어야 한다. 법과 질서를 유지할 책임을 가진 기관이 경찰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이번 사안을 국가대테러위원회의 개입을 요청할 만큼의 테러리스트 관련 사안으로 분류 혹은 고려한 것에 관해, 휴먼라이츠워치는 어떠한 그럴 듯한 정당성도 발견하지 못하겠다 고 비판하기도 했다. 지난 2월 7일 한국을 방문한 캄보디아 제1야당 캄보디아구국당의 삼랭시 대표는 한국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와 전순옥 의원과의 면담 자리에서 한국 대사관 측이 캄보디아 정부에 무력 등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를 진압하고 한국 업체 및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한국 측에서 정말로 무력 진압을 요청했는지, 실제 이 요청이 영향력이 있어서 캄보디아 정부가 발포를
11 포함한 강경 진압에 나서게 된 것인지 현재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 외교부는 물론 미 국무부에서도 한국 대사관의 대응이 적절했는지 조사에 나설 정도로 이번 의류 노동자 파업에 있어서 한국 대사관의 대응은 많은 의혹과 논란을 낳았으며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번 유혈진압에 대한 한국 대사관의 반응은 과연 외교관으로서, 공관으로서 자질이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수십 명의 사상자와 연행자가 발생한 이번 진압에 대해 다른 캄보디아 주재 외국 공관 및 외국 정부는 우선적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와 유감을 표했으며 과잉진압에 대한 캄보디아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한국 대사관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죽고 다치고 구속된 노동자들에 대해서 단 한 마디의 유감 표명조차도 한 적이 없다.
Ⅲ 인권침해 악명 높은 911공수여단 약진통상과 911공수여단의 관계도 아직 분명하게 해명되지 않고 있다. 국제진상조사단이 만난 약진통상 노동자, 911공수여단 전 부대원, 노조 관계자, 그리고 캄보디아구국당 삼랭시 대표 등은 모두 일관되게 약진통상과 911공수여단이 아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직접 돈을 투자하지는 않았지만 이런저런 이권을 연결해주고 안전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911공수여단의 차 페카데이(Chap Pheakadey) 여단장이 약진통상의 지분 50% 정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캄보디아 사회에 유명하다. 실제로 차 페카데이 여단장은 약진은 내 소유 라고 말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약진통상 노동자들과 911공수여단 전 부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현재 약진통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원래 부대 소유 부지였기 때문에 2005년 처음 약진통상 캄보디아 법인이 들어설 때부터 밀착 관계가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약진 노동자들과 전 부대원 모두 약진 공장과 부대 사이에 비밀 통로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약진 측에서 부대에 전력을 공급해주고 있다고 한다. 911공수여단의 전현직 간부가 때로 약진 쪽으로 자리를 옮겨 물류창고 관리 등의 보직을 맡아 월급을 받고 일하다가 부대로 복귀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911공수여단 전 부대원은 심지어 약진의 경비는 모두 911공수여단에서 맡고 있으며 경비 업무를 맡는 사병의 월급은 반은 회사 측에서, 반은 군에서 나온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전에도 약진 공장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할 때마다 911부대에서 투입되었지만 전에는 특별한 행동은 하지 않은 채 위압감을 조성하는 정도였고, 직접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선 것은 지난 1월 2일이 처음이라고 약진 노동자들은 말했다. 그런데 제1여단, 제70여단과 더불어 왕립 캄보디아 군총사령부 직속 예하 특수부대인 911공수여단(911 Airborne Brigade)은 이전부터 인권침해로 악명이 높은 부대이다. 911공수여단이 거느리고 있는 7개 지부와 14개 대대 중 특히 대테러 14그룹은 캄보디아 최초의 전문 대테러 부대로 유명하다. 여단장인 차 페카데이 본인을 비롯해 부대 장병 대부분이 인도네시아 육군특수부대 코파서스(Kopassus)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코파서스 부대 역시 인권침해 비난을 받고 있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2011년 발표한 캄보디아 인권 보고서에서 훈센
13 총리의 총리 경호부대(PMBU)와 70여단 등과 함께 911공수여단을 인권유린 가해자로 지목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911공수여단은 1997년 캄보디아국민당의 쿠데타 당시 캄보디아민족통일전선(FUNCINPEC) 지휘부 고문 및 즉결 처형에 가담했으며, 1998년 총선 이후 벌어진 야당 인사 및 재야 세력에 대한 임의구금, 폭력탄압 등 정치적 탄압을 자행한 바 있다. 또한 최근에는 국경 분쟁이나 대규모 지역 철거 작전에도 투입되어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한다. 차 페카데이는 또한 부대 내에서 휘하의 사병들에게도 폭력적인 독재자로 군림한다고 한다. 전 911 부대원은 부대 내에서 무차별 폭력과 구금, 부당한 처벌이 횡행한다고 증언했다. 차 페카데이 여단장은 2006년에는 재산 문제를 놓고 분쟁이 있던 사병 한 명을 한 달 이상 불법 구금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이처럼 911공수여단 부대와 여단장 차 페카데이가 개인적으로, 공적으로, 무수한 인권유린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기소되거나 처벌을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차 페카데이는 훈센 총리의 가장 충실한 최측근으로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해서 지금은 훈센 총리의 캄보디아국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기까지 하다. 2014년 3월 20일 세계인권기구(World Organization for Human Rights, WOHR) 등 인권단체와 개인들이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훈센 총리와 캄보디아 정부를 학살, 반인도주의 범죄 및 기타 인권유린 혐의로 제소했다. 제소 이유 중에는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국제법정(ECCC)의 추가기소 저지 등 크메르루즈 정권의 학살을 은폐하려 했다는 점 외에도 지난 1월 의류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일도 포함되었다. 특히 이 고발장은 911공수여단의 활동을 명시하면서 차 패카데이 소장도 고발대상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911공수여단을 비롯해 캄보디아의 여러 특수부대가 수많은 인권침해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 인권단체들은 이들 부대에 대한 미국의 군사지원 중단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벌여오고 있다. 이들 인권단체들은 인권 침해 해외 군부대에 대한 미 국무부 및 국방부의 군사지원을 금지하는 법인 리히법(Leahy Law)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역시 911공수여단을 비롯해 캄보디아 군에 대한 공적 원조 및 민간 지원을 하고 있음에도 한국의 경우 딱히 이를 제재할 근거가 없는 상태이다. 공개되어 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관련 자료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2010년과 2012년 최소 두 차례에 걸쳐 캄보디아에 군용품을 양도했다. 2010년에는 항만경비정(YUB) 3척과 군용트럭, 공병장비 등 24종 223점을 양도했고,
14 2012년에는 군용차량 241대를 포함 불용 개인 장구류, 기동 공병 전산장비 등 총 20종 8,743점을 양도했다. 최근 국제 인터넷 언론 글로벌포스트 지에서 한국 정부가 훈센 총리의 총리 경호부대(PMBU)와 70여단의 공개 후원국이라면서 2011년 총리 경호부대가 2800만 달러 상당의 기갑장비를 도입할 때 한국 정부가 지원했다고 보도했지만, 관련 자료는 확인하지 못했다. 또한 911공수여단이 대우정밀에서 제작한 K2와 K1A, K7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무기들이 어떤 경로로 911공수여단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도 역시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한국은 민간 차원이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캄보디아 군과 헌병에 태권도, 경호 교육 등은 물론 특수 훈련 교관을 맡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캄보디아 군 훈련을 시작한 것은 특전사 출신으로 특전동지회 사무총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기도 한 전병만이라고 한다. 전병만의 활약에 대해서는 2001년 1월 신동아 지와 2008년 7월 29일 부산일보 등이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들 보도에 따르면 1980년대 안기부의 지시를 받아 석촌호수 포장마차 철거, 서초동 꽃동네 철거, 대우중공업 농성 해산, 현대중공업 농성 해산 등 우익테러 담당 책임자 역할을 하기도 했던 전병만은 1995년부터 캄보디아 헌병 70여명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후 총리 경호부대를 대상으로 하는 경호교육, 캄보디아 특전사령관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공수교육 등을 진행했다고 한다. 911공수여단 역시 전병만과 그와 함께 하는 한국인 교관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2000년, 한국인 교관 8명이 911공수여단 장교 107명을 대상으로 6개월간 레인저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한편 섬에 가둬놓고 훈련시킨 이 레인저교육에서는 기초체력이 약해 훈련을 이겨내지 못한 캄보디아 군인 4명이 사망하기도 했다고 한다. 2001년 캄보디아 해군의 정예장교 252명을 선발해 3개월간 실시한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 수중폭파대) 프로그램의 교육대장과 교관도 거의 대부분 전병만이 주선한 한국인들이었다. 부산일보 보도(2008년 7월 29일자)에 따르면 전병만은 이후 캄보디아 군의 정예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7월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경비업체 설립허가를 받아 CSC라는 대형 경호, 경비업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대표자 이름은 다르지만, 전병만이 세웠다는 이 CSC가 바로 약진통상의 경호업체로 확인되었다. 전 911부대원의 증언에 따른다면, 결국 911공수여단 부대원들이 CSC 직원의 형태로 약진통상의 경호를 맡았다는 것이 되며, 이 경우 지난 1월 2일의 약진통상 앞 폭력진압의 책임은 CSC에게도 있게 된다. 현재 약진통상 측은 911공수여단과의 관련성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한국
15 시민사회단체에 보낸 답변서에서 약진 측은 2014.1.2. 경에 캄보디아의 저희 자회사 주변에서 일어난 캄보디아 군대의 시위대 진압 사건과 저희는 물론 자회사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시위가 있던 기간 동안 자회사가 위치한 지역(특히 정문 앞)에서 캄보디아 시위대가 시위를 하고 있었고, 자회사와 인접하여 캄보디아 군대가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일부 오해가 있는 것으로 사료되나, 자회사 등에서 캄보디아나 한국 정부 기타 여하한 단체에 대하여도 시위와 관련하여 접촉하거나 어떤 요청을 한 바가 없으며 전적으로 캄보디아 정부의 진압활동에 따른 사안임을 명백히 하니 이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라고 해명한 바 있다. 그러나 약진 노동자들과 당시 약진 공장 앞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은 전혀 다르다. 약진 노동자들은 1월 2일 약진 사측에서 911공수여단 군인들을 공장 안으로 데려왔다고 증언했다. 아침 9시경 5~60명의 군인들이 AK-47 소총, 쇠파이프, 새총 등으로 무장하고 공장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당시 약진 앞 시위에 참가했던 다른 목격자도 군인들이 공장 안에서 나왔다고 진술했다. 또한 오전에 연행된 노동자들은 약진 공장을 가로질러 내부 출입문을 통해 군부대로 옮겨졌다고 했다.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 측의 설명이나 약진 측의 설명대로 단순히 캄보디아 군대가 인접하여 주둔해 있었고, 군부대의 통상적인 경계 업무의 일환이었다면 군인들이 약진 공장 내에서 나올 이유도, 연행자를 약진 공장으로 데리고 들어갈 이유가 없다. 또한 국제 인터넷 언론 글로벌포스트지는 약진의 한 캄보디아인 관리직원과의 인터뷰를 인용, 공장 뒤에 군부대가 있고, (공장 내) 한 노동자가 병사를 알고 있어서 군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고 보도했다. 또 같은 기사에서 캄보디아 왕립 헌병 대변인 켕 티토(Kheng Tito) 준장도 고위급에서 회담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경제구역이기 때문에 기업 측에서 어떤 요청이나 제안이 있었을 수 있다... 자신들의 이익과 재산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해 달라고 우리에게 요청을 했었을 수 있다 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한편 캄보디아데일리 지는 1월 3일자 기사에서 당시 약진통상 앞 진압 현장에 911공수여단의 사령관이자 여단장의 조카인 차 소포른(Chap Sophorn)도 있었는데, 왜 캄보디아 특수부대가 공격용 소총까지 들고 한국 소유 공장을 보호하는 이례적인 조치에 나섰느냐는 질문에 명령에 따를 뿐 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약진통상과 경호업체 CSC, 911공수여단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의혹이 남아있다. 이러한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를 규명할 책임은 약진통상과 경호업체 측에 있다.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면, 약진통상과 경호업체는 911공수여단의 무차별 폭력 행사로 수십 명이 부상당하고 10명이 연행된 1월 2일 진압에 대해 책임을
16 져야 할 것이다. 또한 인권유린 부대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적, 사적 군사 지원이나 교육에 대해서도 검토와 조치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Ⅳ 캄보디아 의류산업 최저임금 최저임금 160달러 요구는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알려지기로는 이 요구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최저임금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권한이 있는 노동부 장관에게 적정 최저임금 수준을 자문하는 역할을 하는 노동자문위원회(LAC) 산하에 설치된 소위원회가 연구/조사한 적정 생계비 수준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국제진상조사단이 체류하는 동안 이에 관한 정확한 근거를 확보하기 힘들었는데, 사후적으로 관련 자료들을 수집해 다음을 파악하였다. 캄보디아에서 의류산업은 경제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의류 및 신발 산업의 수출액은 약 미화 46억 달러로, 전체 수출의 95%를 차지한다. 이는 2012년 캄볻아 국내총생산 366억 달러의 13%에 해당한다. 캄보디아 내에는 약 600개의 의류/ 신발 생산 공장이 있고, 약 50만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다(캄보디아 전체인구는 1520만명). 다른 아시아 여러 나라와 유사하게 캄보디아 의류 산업 노동자들은 대부분 농촌에 거주하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나선 여성 노동자들이다. 전체 의류 노동자의 90% 이상이 여성이고 대부분 초등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을 지니고 있다. 캄보디아 의류 공장 90% 이상을 해외 자본이 소유하고 있는데 홍콩, 대만, 중국, 싱가포르, 한국, 말레이시아에 기반을 둔 업체들이다. 캄보디아 국내자본 소유 공장은 10%에 지나지 않으며 그 역할이 미미하다. 캄보디아의류생산자협회(GMAC) 소속 공장의 중간관리자의 80%는 비캄보디아국적자다. 이들 업체들의 생산품은 대부분 미국에 기반을 둔 대형 글로벌 의류 브랜드에 납품된다. 2012년 캄보디아 의류산업은 대미 수출액은 19억9천6백 달러, 대유럽 수출액은 14억5천4백 달러에 이른다. 미국 업체들이 캄보디아와 연관을 맺게된 것은 클린턴 정부가 글로벌 자본주의 포섭 전략으로 추진된하여 1999년 체결된 <미-캄보디아 섬유의류 무역협정> 때문이었다. 당시 클린턴 정부는 쿼터제를 통해 자국 시장을 개방하는 대신 쿼터배정량을 노동기준과 연계시켰다. 이 협정은 2004년에 만료되었으나 그 효과는 여전히도 남아있다. 미국 구매자는 저가 상품을 다량 구매한다면 유럽 구매자는 미국에 비해 소량이지만 더욱 빈번하게 품질과 디자인의 수준이 높은 제품들을 구매한다.
18 1. Gap 6. 시어스 홀딩스 11. Matalan 16. 월마트 2. H&M 7. Children's Place 12. Blue Star 17. Kohl's 3. 리바이스 8. Charles Komar 13. 나이키 18. MGT 4. 아디다스 9. William Carter 14. PVH 19. American Marketing 5. 타겟 10. VF 진웨어 15. C&A 20. JC Penny <표> 2008년 캄보디아 생산품 구매업체 상위 20개. 2011년 세계은행 통계 캄보디아 노동법은 법정 최저임금을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양질의 생활수준 을 제공할 정도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캄보디아 의류노동자들의 임금은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부족한 실정이다. 2001년~2011년 10년 동안 캄보디아 의류노동자 실질임금은 19.1% 하락했다. 법정 최저임금 인상이 물가 인상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법정 최저임금의 구매력 하락은 캄보디아 의류노동자들에게 결정적인데, 대부분의 캄보디아 의류 사업장은 법정최저임금만큼만을 기본급으로 지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에는 미화61달러에서 80달러로 최저임금이 최근 10년 중 가장 큰 폭으로 인상되었는데, 이로서 최저임금의 구매력 수준이 캄보디아 의류산업 초창기인 2000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2013년 5월 1일부터 적용된 월급 80달러 역시 캄보디아 노동법이 요구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양질의 생활수준 커녕 노동자 가족의 기본 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급여에 못 미친다. 2013년 캄보디아 NGO인 지역법률교육센터(CLEC)와 영국 NGO인 상표 뒤의 노동(LBL)이 공동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캄보디아 의류노동자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또는 1인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최소 필요 소득은 1인당 월급 150달러로 계산되었다. 다시 말해 노동자 1인이 자신과 2명의 부양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월 450달러의 소득이 필요하고 이는 2013년 기준 법정 최저임금의 6배에 이른다.
19 CLEC/LBL의 적정 생활임금 계산법 정의 -먹고살기에 충분한 기본급(생활 임금)은 노동자 1인이 식비, 주거비, 의료보험 및 기타 생 활에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기에 충분한 임금으로, 잔업, 특근 수당 또는 여타 재량 소득을 제외 하고 법정 최대 노동시간인 주 48시간을 근무함으로써 자신과 가족(성인 1인 1소비단위, 아동 1인 0.5소비단위로 계산했을 때 3 소비단위로 이루어진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임금을 뜻함. 가족 부양 캄보디아 의류 산업 노동자의 90%는 여성이며 대다수가 35세 미만임. 대부분이 부양 자녀가 있거나 지방에 거주하는 소득이 없는 부모를 두고 있음. 노동자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 을 계산할 때 이러한 부양가족은 흔히 간과되곤 함. 3 소비단위로 구성된 가족 모델은 1인 생계 부양자가 다른 한명의 성인과 두명의 아동을 부양하는 경우나 1명의 노동자가 2명의 노부모를 부양하는 경우 모두에 해당. 이 모델은 <아시아 최저 임금 연대 Asia Wage Floor Alliance> 에서 최초로 사용했는데, 여성 1인 생계부양자 모델이 보편적인 사회에 통용될 수 있을 것. 가족 부양 보통 노동자 소득의 50%는 식비로 소요되고 나머지 50%는 의료보험, 주거, 피복, 자녀양육, 교통, 연료, 교육 등의 비용에 소요된다. 이는 <아시아 최저임금 연대>가 2009년 실시한 실태 조사 결과와도 일치한다. 1인당 기본 생계비가 50%의 식비와 50%의 여타 비용으로 정의된다 고 했을 때 기본 생계비는 1인당 3000 칼로리를 섭취하는데 필요한 비용*2로 계산할 수 있고 그 금액은 150.06 달러고, 3소비단위를 부양할 수 있는 생활 임금은 450.18 달러로 산출된다. 캄보디아 의류산업 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잔업과 특근에 의존해야 한다. 2014년 1월 9일자 캄보디아 데일리(The Cambodia Daily) 보도에 따르면, 인터뷰에 응한 31세 의류노동자는 하루 식비로 2.5달러가 소요되며, 주거비로 20달러, 수도요금과 전기요금으로 15달러를 지출한다고 밝혔다. 이 노동자는 2.5제곱미터 크기의 방 하나에 거주하고 있으며 화장실과 수도는 공용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대략 생활비로 130달러즐 지출하는데, 법정 최저임금인 80달러를 기본급으로 받기 때문에, 주48시간 근무해서 받는 기본급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해서, 잔업은 선택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필수적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짐 터커 ILO 더 좋은 공장 프로젝트 수석기술자문위원은 475개 공장의 임금 현황을 조사해보니 대다수 노동자들의 월 소득이 120~130달러 정도고 이는 기본급, 잔업수당(주당 12시간), 보너스, 각종 수당이 다 포함된 금액이다. 국제진상조사단 방문시 면담에 응한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답변을 종합해봐도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20 생활임금에 훨씬 못 미치는 저임금으로 인해 캄보디아 의류노동자들은 영양부족에 시달린다. CLEC와 LBL이 2012년 10월~2013년 6월 의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중 1/3이 체질량지수(체중(킬로그램)을 신장(미터)의 제곱으로 나눈 비만도 지수. 22가 표준) 18 미만, 즉 영양부족 상태로 나타났다. 영양부족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수많은 의류 노동자들이 작업도중 기절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고, 이는 캄보디아 내에서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 2011년 캄보디아 관련 언론은 의류공장에서 300명 가량의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기절한 사례들을 보도했다. 2012년에는 29개 공장애서 2,100건의 집단 기절이 발생했으며 2013년 1/4분기에만도 5개 공장에서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기절했다고 기록된다. 뿐만 아니라 기록되지 않는 소규모 기절 (하루에 한 공장에서 한 두건)도 빈번하다고 알려져있다. 불충분한 임금으로 인해 캄보디아 의류노동자들은 식비와 생활비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노동자들은 공장 근처 자취방에서 수 명의 동료들과 함께 거주하며 식비를 아낀다. 고향에서 쌀, 고기, 생선 등을 가져다 먹기도 한다. 심지어 최저임금 인상을 줄창 반대해 온 캄보디아의류생산자협회(GMAC) 역시 이러한 현실을 인정한다. 2011년 켄 루 GMAC 사무총장은 당시 최저임금이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노동자들이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만큼 충분하다는 뜻은 아니다 라고 언급한 바 있다. 캄보디아에서 최저임금을 결정할 때 정부( 노동부) 는 노사정으로 구성된 노동자문위원회(Labour Advisory Commission, LAC)의 자문을 받는다. 2013년 8월 17일 복지부 장관은 적정한 최저임금 수준을 산출하는 역할을 하는 독자적인 조사연구 소위원회를 구성을 선포하였다. 소위원회는 복지부 장관을 의장으로 하여 10명의 고위급 정부 관료와 4명의 사용단체 대표, 7명의 노동자단체 대표로 구성되었다. 2013년 12월 16일 소위원회는 <의류 및 신발 제조업체 노동자들의 생활비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실태조사는 프놈펜 경제특구 내 노동자들과 그 바깥의 노동자들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며 단신 노동자와 부양가족이 있는 노동자를 모두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경제특구 내 노동자들은 월 157.25달러, 경제특구 외부 노동자들은 월 177.5 달러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역은 다음과 같다.
21 <1> 경제특구 내 신발 제조업체 노동자들의 생계비 실태(환율 1달러=4000리엘) # 월간비용 추가수당 기타 내용 일간비용 리엘 미달러 리엘 미달러 1 2 3 4 5 6 7 8 1 생필품 1.1 식비 조식 3000 90000 22.5 중식 4000 120000 30 83000 20.75 석식 4000 120000 30 1.2 주거 및 교통 40000 10 40000 10 1.3 통신 전화비 20000 5 1.4 피복 및 세면 도구 의류 40000 10 신발 10000 2.5 세면도구 28000 7 1.5 의료비 24000 6 1.6 수도/전기 20000 5 1.7 부양가족 200000 50 1.8 기타 40000 10 계 752000 188 노동자 개인 소요 비용 629000 157.25 회사 지급 추 가 비용 123000 30.75 2 사회보장 3 경제적 요소 물가인상 실업대비 4 기술 향상 회사가 제공하는 숙소에 거주하며 지방에 부양할 부모를 두고 있는 경우 노동자들의 임금은 144~206달러 사이에 분포되며, 가족 부양에 따른 비용은 40~100달러.
22 생활비는 157~226달려고 회사가 지급하는 수당은 7~36달러. <2> 비 경제특구 의류노동자들의 생계비 실태 # 월간비용 추가수당 기타 내용 일간비용 리엘 미달러 리엘 미달러 1 2 3 4 5 6 7 8 1 생필품 1.1 식비 조식 2000 60000 15 중식 4000 120000 30 석식 4500 135000 33.75 1.2 주거 및 교통 48000 12 28000 7 1.3 통신 전화비 20000 5 1.4 피복 및 세면 도구 의류 40000 10 신발 10000 2.5 세면도구 20000 5 1.5 의료비 20000 5 1.6 수도/전기 25000 6.25 1.7 부양가족 200000 50 1.8 기타 40000 10 계 738000 184.5 노동자 개인 소요 비용 710000 177.5 회사 지급 추 가 비용 28000 7 2 사회보장 3 경제적 요소 물가인상 실업대비 4 기술 향상
23 단신, 배우자와 2인 거주, 배우자와 자녀 2명, 함께 거주하는 부양 부모 있는 경우. 경우에 따라 부양 비용은 30~80달러 생계비는 122~216.75달러로 나타나며 회사가 제공하는 추가 수당은 7달러 이와 더불어 소위원회는 적정 최저임금 160달러에 도달하기 위한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2014년에 160달러로 인상하고, 2018년까지는 추가 인상하지 않는다. (2) 매년 16달러식 인상한다. (3) 첫 해에 16달러 이상을 인상하고 매년 인상액을 조금씩 줄인다. 그러나 이 세가지 안 모두 향후 발생할 물가인상이 임금 구매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이 발표한 세계 경제전망에 따르면 2014년~2017년 캄보디아 연간 물가인상률은 3%~5.7%로 전망된다. 이를 고려하면 2018년 노동자들의 생계비는 185달러가 된다. 소위원회가 적정 생계비와 최저임금 인상 권고안을 발표하자마자 이를 얼마만의 기간동안 달성해야 할 지를 놓고 광범위한 논쟁이 벌어졌다. 일주일 후, 스베이 렝 지역 파베트 시 소재 두 개 공단에서는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을 154달러로 즉각 인상할 것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2013년 12월 18일 의류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18개 노조 연맹 대표가 소위원회가 발표한 생계비 실태조사 결과에 대한 입장을 마련하기 위해 회의를 개최하고 그 결과를 복지부 장관에게 공문을 통해 전달하였다. 노동조합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1소위원회 연구결과에 따라 최저임금이 157~177달러로 인상되어야 한다 2 노동조합은 복지부가 제시한 첫 번째 공식에 따라 향후 5년동안 적용될 최저임금을 160달러로 인상하되, 추가 수당 지급에 대해 매년 협의해야 한다. 3 최저임금은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며 잔업 특근 수당은 인상분에 포함되지 않는다. 반면 GMAC은 최저임금 인상률을 낮추기 위한 로비를 벌였는데, 향후 5년간 130달러까지 인상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더불어 이를 무쟁의 보너스 형태로 인상할 것을 제안했는데, 최저임금을 실질적으로 인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파업에도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들만 월 130달러를 지급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문위원회는 12월 24일 섬유, 의류, 신발 산업 노동자들에게 적용되는
24 최저임금 권고안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 권고안에 따르면 2014년 적용될 최저임금은 15달러 인상된 95달러다.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최저임금 최저임금 최저임금 최저임금 최저임금 최저임금 수습후 80달 러 80+15 = 95 95+15 =110 수습기간 75달러 75+15 =90 90+15 =105 110+16 = 126 105+16 =121 126+17 =143 121+17 =138 143+17 =160 138+17 =155 이는 사용자 단체가 주장한 130달러보다 높은 금액이지만 소위원회가 제시한 인상 시기와도 거리가 멀었다. 노동자들의 기대는 물론 정부가 설치한 소위원회가 발표한 생계비(157~177달러)에 한참 못 미치는 2014년 인상안 발표를 듣고 노동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어 12월 27일에는 노동부와 정부청사 앞으로 평화 행진을 별였다. 그러자 뒤이어 GMAC은 6개 노조 연맹 지도부를 위협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12월 25일부터 공장 시설 손괴를 부추기고 작업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강요했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GMAC은 또한 노동부가 이를 방치하여 조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인해 납품기일을 맞추지 못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6개 노조 대표들에게 손실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위협했다. 뒤이어 12월 30일 노동부는 5개 연맹 지도부에 노동자문위원회가 발표한 최저임금 인상 계획에 반하는 내용을 주장하며 파업을 선동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경고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그러나 12월 24일 이후 발생한 파업은 노동부의 주장과 달리 노조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기층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이끈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그동안 억눌렸던 분노와 도로를 점거하겠다는 의지가 표출되면서 노조 지도부 조차도 놀랐다. GMAC은 회원사들에 12월 26일부터 2014년 1월 1일까지 조업중단을 명했다. GMAC은 폭력 시위에 직면하여 안전상의 이유로 조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발표했지만 공장시설을 파괴하는 폭력이 있었던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때까지 시위대가 폭력을 일으켰다는 언론 보도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 가량의 업체가 조업중단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오히려 파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더불어 마칼로트. 아림, 볼룸코코모 어페럴, 캄웰 등 최소 4개 공장은 파업중인 노동자들이 외부 거리 시위에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을 바깥에
25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는 명백한 ILO 협약 87호, 98호 위반이다. 12월 29일까지 전체 의류 노동자 절반에 가까운 수가 파업에 참여했다. 12월 31일 노동부는 기 발표한 95달러에서 5달러 더 인상한 100달러를 2014년 최저임금으로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노사 양측 모두의 반발을 샀다. 2014년 1월 2일 6개 노조와 교원노조(CITA)는 최저임금을 160달러로 즉각 인상하지 않으면 파업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발표했고, GMAC은 더 이상 최저임금 교섭에 참여하지 않고 캄보디아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곧바로 같은 날 약진통상 앞 폭력진압이 개시된 것이다. 이후 최저임금 교섭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교섭 재개를 요구하며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2월에는 잔업 거부 투쟁을 벌였고 정부와 GMAC이 교섭을 계속해서 회피한다면 크메르 신년 휴일이 끝난 후 4월 12일에 재파업에 돌입하겠다고 경고한 상태다.
Ⅴ GMAC은 노조간부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는가? 1월 2~3일 유혈 진압 사태가 국내에 알려진 뒤 1월 5일 연합뉴스(하노이)는 <캄보디아 진출 한국업체, 시위 피해 손해배상소송 추진>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프놈펜 남부공단 입주업체 협의체인 한국섬유협회 관계자는 5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노조의 시위 와중에서 일부 회원사 차량들이 파손되고 제품 납기가 지연되는 등의 피해를 봤다며 법적 대응에 나설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국제진상조사단은 이러한 사실이 캄보디아 노동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조사단이 노동조합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가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하려고 시도했을 때 노동조합 간부들은 의아해 하거나 경찰의 소환과 잘 구분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파업참가자 또는 노동조합에 대해 사용자들이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캄보디아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는 낯선 일인 듯 보였다. 조사단은 2월 20일에서야 현지단체가 법원을 통해 확보한 고발장(원본 크메르어, 비공식 영문번역본)을 확인하였다. 이에 따르면 1월 5일자로(연합뉴스 보도 시점과 일치) GMAC의 켄 루 사무총장은 검찰에 6명의 노조 간부를 형법의 여러 조항을 위반한 혐의로 고발했다. 더불어 이로 인해 GMAC 소속 업체들이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재산상의 손해를 입었다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워달라고 요청했다. 캄보디아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형사범죄가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가해자는 이로 인한 보상을 책임을 지게 되어있으며 이 고발장만으로 민사상 손해배상청구까지 제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고발장에는 구체적인 피해 액수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은 지난 십 수년 동안 국내에서 대표적인 노조탄압의 도구로 활용되어왔다. 천문학적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는 노동조합 및 개인에게 감당할 수 없는 금전적 부담을 지웠을 뿐 아니라 파산에 이르게 해 노동조합 간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ILO 및 유엔에서도 이러한 손해배상소송 관행을 중단하라는 권고가 여러 차례 이루어졌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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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총파업과 폭력 진압, 그리고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희망, 분노, 절망 (2013년 12월 - 2014년 1월) 국제 진상조사보고서 Asia Monitor Resource Centre, Hong Kong Asian Labour Study Group,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UK Asian Human Rights Commission, Hong Kong Center for Trade Union and Human Rights, Philippines Korean Confederation of Trade Union, South Korea Korean House for International Solidarity, South Korea Oxfam Solidarity Belgium Serve People Association, Taiwan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총파업과 폭력 진압, 그리고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희망, 분노, 절망 (2013년 12월 - 2014년 1월) 국제 진상조사보고서 Asia Monitor Resource Centre, Hong Kong Asian Labour Study Group,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UK Asian Human Rights Commission, Hong Kong Center for Trade Union and Human Rights, Philippines Korean Confederation of Trade Union, South Korea Korean House for International Solidarity, South Korea Oxfam Solidarity Belgium Serve People Association, Taiwan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총파업과 폭력진압, 그리고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희망, 분노, 절망 (2013년 12월 2014년 1월) 국제 진상조사보고서 Asia Monitor Resource Centre, Hong Kong Asian Labour Study Group,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UK Asian Human Rights Commission, Hong Kong Center for Trade Union and Human Rights, Philippines Korean Confederation of Trade Union, South Korea Korean House for International Solidarity, South Korea Oxfam Solidarity Belgium Serve People Association, Taiwan 국제진상조사단 크리스탈 찬(Christal Chan), 장대업, 다닐로 레이예스(Danilo Reyes), 강은지, 파미 파님방(Fahmi Panimbang), 힐데 반 레겐모르텔(Hilde Van Regenmortel), 제인 시와(Jane Siwa), 레넌 잉-다 웡 (Lennon Ying-Dah Wong), 류미경, 사뮤엘 리 싱 홍(Samuel Li Shing Hong), 산지브 판디타(Sanjiv Pandita), 유기수(Yoo Ki-soo) 사진: 별도 표기가 없을 경우 국제진상조사단 표지 및 내지 디자인: Juanathemad 발행: 2014년 2월 Asia Monitor Resource Centre Flat 7, 9/F, Block A Fuk Keung Industrial Building 66-68 Tong Mi Road Kowloon Hong Kong Tel: (852) 2332-1346, Fax: (852) 2835-5319 Email: amrc@amrc.org.hk Website: www.amrc.org.hk 번역 : 공익법센터 어필 감수 : 강은지(국제민주연대), 류미경(민주노총)
목 차 약어 34 감사의 글 35 요약 37 Ⅰ 도 입 40 Ⅱ 전반적인 캄보디아 노동현황 42 Ⅲ 총파업 4 7 Ⅳ 충돌과 진압 55 Ⅴ 피해자와 가족 68 Ⅵ 노동조합과 노동운동가 탄압 77 Ⅶ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요구사항 82 Ⅷ 결론 89 참고문헌 및 추가 자료 93
약 어 CATU 캄보디아노조연맹(Cambodian Alliance of Trade Unions) C.CAWDU 캄보디아의류노동자민주노조연맹 (Coalition of Cambodian Apparel Workers Democratic Unions) CCFC 캄보디아농민연합(Coalition of Cambodian Farmers Community) CCU 캄보디아노동조합총연맹(Cambodian Confederation of Unions) CC3 제3교도소(Correctional Centre 3) CFSWF 캄보디아식품서비스노동자연맹 (Cambodian Food and Service Workers Federation) CICA 캄보디아민주공무원협의회 (Cambodia s Independent Civil-servants Association) CLC 캄보디아노동총연맹(Cambodian Labour Confederation) CNRP 캄보디아구국당(Cambodia s National Rescue Party) CPP 캄보디아국민당(Cambodia s People s Party) CUMW 캄보디아노동자운동연합(Collective Union of Movement of Workers) FTUWKC 캄보디아자유노조연합 (Free Trade Union of Workers of Kingdom of Cambodia) GMAC 캄보디아의류생산자협회 (Garment Manufacturers Association of Cambodia) ICRC 국제적십자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 IDEA 비공식부문민주독립노동자연합 (Independent Democracy of Informal Economy Association) IDYTU 독립청년연맹(Independent Youth Union) ILO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ITUC 국제노동조합연맹(International Trade Union Confederation) LAC 노동자문위원회(Labour Advisory Committee) LICADHO 캄보디아인권증진옹호연합 (Cambodian League for the Promotion and Defense of Human Rights) MOL 캄보디아노동직업훈련부(Ministry of Labour and Vocational Training) NIFTUC 캄보디아전국섬유노조독립연맹 (National Independent Federation Textile Union of Cambodia) UNHCR 유엔난민기구(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UNOHCHR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 (United Nations Office of the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WFTU 노동자친선연맹(Workers Friendship Union Federation)
감사의 글 국제진상조사단의 활동 기간 중요한 정보와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캄보디아의 노동단체 들, 인권 NGO들과 활동가들의 친절한 지원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모두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한다. 특히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사단의 인터뷰 요청에 응해주고 용감하게 우리와 경험을 공유해준 모든 노동자들, 노조 지도자들, 목격자들, 피해자들, 그리 고 그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또한 보고서를 읽고 귀중한 평과 교정을 해준 데니스 아놀 드(Dennis Arnold)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요 약 1994년 처음 시작된 의류산업은 지난 20년 간 캄보디아 경제의 주요 원동력으로 기능해왔다. 하지만 캄보디아 근로서민층의 대다수는 여전히 의류산업 노동자들로 구성 되어 있다. 생산성 증가와 물가 인상 속도에 비해 의류산업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은 더디 게 인상되었고, 결국 실질임금이 감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전반 적인 삶의 질, 그리고 특히 최저임금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기초생활이나마 유지 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탈진할 때까지 점점 더 많은 초과근무를 해야만 했 고, 급기야 지난 2년 동안 일하다가 쓰러지는 노동자들이 4,000여명이 넘는 집단 기절 사태까지 벌어졌다. 최저임금을 미화 160달러로 인상해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에도 불 구하고, 2013년 12월 24일, 캄보디아 노동자문위원회(LAC)는 2014년 4월부터 월 최 저임금을 미화 80달러에서 미화 95달러로 인상한다는 결정을 발표하였다. 또한 위원회 는 2018년까지 임금을 미화 160달러로 인상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여섯 개의 주요 노동조합연맹 및 연합 대표자들은 최저임금을 즉각 미화 160달러로 인상할 것을 요구 하면서 위원회의 계획을 거부하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한편 이들 대표단이 요구한 최저 임금 160달러는 캄보디아에서 최저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저임금이 월 최소 157~177달러는 되어야 한다는 캄보디아 노동부의 2013년 평가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결정으로 같은 날인 12월 24일 오후, 노동자들의 시위의 시발점이 되었 고, 이후 며칠동안 노동자 대다수가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진 12월 29일, 파업은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의류산업 노 동자 및 노동단체는 물론이고 벙깍 호수(Boeung Kak Lake) 지역 주민 강제 퇴거 반대 운동 활동가, 승려, 오토바이 택시(뚝뚝) 운전기사, 가내노동자, 노점상, 공무원에 이르 기까지 다양한 집단이 파업에 동참하였다. 이처럼 일반 시민들이 시위를 지지하고 동참 하면서 시위대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번 파업은 최저임금 인상 요구를 거의 만장일치 로 지지하는 가운데 일반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파업 이라는 점에서 의미 가 크다. 사용자 측과 정부가 파업 진압을 위한 공세를 높여갔지만, 파업과 대규모 집회 는 12월 31일까지 계속되었다. 12월 31일 캄보디아 노동부가 기존 제안을 다소 수정하 여 최저임금을 미화 100달러로 인상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38 국무회의 청사(Council of Ministers) 앞까지 행진한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철조망 바리케이드와 전경들이었다. 노동자들과 정부당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2014년 1월 2일과 3일, 정부 당국은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다수의 언론 보 도, 노동자들과 목격자들이 경찰과 무장병력이 과도한 무력을 사용했고 이로 인해 최소 4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최소 38명의 노동자와 지지자들이 부상을 입는 결과가 초래되 었다고 확인해주었다. 아직 실종상태인 한 명은 사실상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국은 또한 23명의 노동자들을 연행했으며 이 보고서를 작성 중인 현재까지 21명이 여전히 구 금 상태이다. 현장에 있었던 노동자들과 목격자들은 치안 당국이 먼저 시위대에 무력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유혈진압에 분노를 표하는 노동권 옹호 단체 및 노동조합의 지지, 항의행동, 연대 메시지가 전 세계로부터 쇄도했다.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경제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임금은 정체되어 있다는 점에서,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160달러 인상 요구는 정당하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노동자문위원회가 이러한 정당한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 기 때문에 대다수 노동자들이 파업과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당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정부가 과도한 무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정부가 최저생계비 보장과 결사의 자유와 같은 노동권 및 기타 기본권을 보호하기보다 는 캄보디아의류생산자협회(GMAC)의 사용자의 이해관계와 이윤을 더 중시하고 있음 을 입증한다.
I 도입 2014년 1월 초, 국제사회는 캄보디아 의류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을 정부가 강경 진 압했다는 소식에 충격에 빠졌다. 진압이 이루어지기 전인 2013년 12월 24일부터 31일 사이, 노동자들은 기본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저임금을 미화 80달러에서 160 달러로 인상할 것을 요구하며 평화 시위를 전개했다. 2013년 12월 24일 캄보디아 노동 자문위원회가 최저임금 미화 95달러 인상을 결정한 것이 총파업의 시발점이었다. 캄보 디아 노동법 제104조는 임금이 모든 노동자의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적정 기본 생활수준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 발표된 임금 수준은 최저 생활임금에조차 미치지 못했고, 노동자들은 기본생활 유지에도 턱없이 부족한 금 액에 분노했다.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지면서 시위대의 압박이 높아지자 노동자문위원회 는 2013년 12월 31일 최저임금을 미화100달러로 다소 인상하기로 결정했지만, 시위 열기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캄보디아 당국과 사용자 측은 파업 진압을 위한 공세를 높여나갔다. 2014년 1월 2일 과 3일, 당국은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여러 언론 보도, 노동자들, 목격자들을 통해 확인된 바, 경찰과 무장병력이 치명적 무력을 사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최소 4명의 시위참가자가 사망하고 최소 38명의 시위참가자 혹은 행인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현 재까지 실종상태인 한 명은 사실상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국은 또한 23명의 노동자 들을 연행했으며, 이 보고서를 작성 중인 2014년 2월 19일 현재, 이 중 21명은 아직 구 금 상태이다. 이 비극적인 사건의 대응 차원에서, 국제 노동활동가들, 학자, 인권활동가들로 구성된 국제조사단이 현지의 독립 노동조합과 연맹의 초청에 따라 진상조사 임무에 착수하게 되었다. 조사단의 목표는 노동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조사하고 이해하는 데에 있었다. 즉 노동자들이 왜 거리로 나오게 되었는지,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 다 수의 평범한 캄보디아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고통에 빠뜨린 폭력의 책임자는 누구인지 를 밝혀내고자 하였다. 진상조사단 역시 2013년 7월 총선을 둘러싸고 이어 진 더 광범위한 정치적 혼란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번 보고서에서는 2013년 12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41 월 말 총파업 전후, 그리고 2014년 1월 초의 폭력 진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노동자 들의 경험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진상조사단은 홍콩, 필리핀, 한국, 대만, 영국, 벨기에에 기반한 8개 단체의 12명으 로 구성되었다. 캄보디아 의루산업 관련 기본 통계 및 정보 수집 외에, 조사단은 반구조 화 면담 기법을 활용하여 총파업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과 폭력 진압을 경 험한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모든 인터뷰는 녹음 및 녹화했다. 또한 조사단은 목격자들이 제공한 정보를 확인하고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주요 사건이 발생한 장소들을 방문했다. 2014년 1월 14일부터 20일까지 일주일간의 집중 인터뷰 기간, 조사단은 노동자들, 노 동조합 지도자들, 피해자 및 그 가족들, 전 부대원,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 그리고 인 권활동가 등 50여 명을 인터뷰했다. 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먼저 2장에서 캄보디아의 전반적인 노동현황을 개괄한다. 이어서 3장에서는 총파업 돌입 이전에 일어난 사건들을, 4장에서는 약진통상 과 카나디아(Canadia) 공단에서 발생한 폭력 진압과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정리한다. 5 장은 폭력 진압의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에 대해 알아보고, 6장에서는 노조 및 노동자들에 대한 연행, 탄압, 차별을 논함으로써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노동자들의 삶에 미친 영향 을 들여다본다. 마지막으로 7장에서는 노조 및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보다 상세하게 진 단한 후, 8장에서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II 전반적인 캄보디아 노동현황 캄보디아의 총 토지면적 181,035km2의 ¼정도가 경제적 토지양여 제도(Economic Land Concessions) 1 에 별도로 할당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 제도로 혜택을 보는 것 은 부유한 권력층이다. 이런 면에서 캄보디아는 불균형 경제발전의 일반적인 양상을 보 이고 있다. 즉 높은 경제성장률과 인구 대다수의 만성 빈곤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25세 미만인 캄보디아에서 장기 경제발전은 여전히 매우 어려운 과 제이다. 2012년 현재,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20%가량이 빈곤선(poverty line) 이하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약 4백만 명이 하루 미화 1.25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며, 5세 미만 아동 중 37%가 만성 영양실조 상태이다. 캄보디아에서는 사회경제적 혜택을 누리지 못 하는 사람만 예외적으로 비공식 경제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 노동인구의 약 85% 가 비공식 경제에 종사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캄보디아의 세계 경제 통합이 가속화되었다. 이후 자유시장경제와 수 출지향 산업화를 장려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함께 국제 원조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전체 노동인구의 56%가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중심 경제이지만, 2012년 국내총 생산 중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35.7%에 머무른 반면 동년 공업 비중은 24%를 기록 했다. 2004년 이래 캄보디아의 경제성장을 견인한 것은 의류, 건설, 농업, 관광산업이었 다. 특히 캄보디아의 의류산업은 1994년 설립된 이래 지난 20년 간 캄보디아 경제의 주 요 동력으로 기능해왔다. 덕분에 캄보디아는 경제위기 전까지 연평균 GDP 10% 성장을 구가했으며, 2010년과 2012년 사이에도 연 6% 성장을 기록했다. 현재 의류산업에 종사하는 등록 노동자는 약 47만 명이지만, 비공식적으로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의 수는 파악되지 않는다. 의류산업은 캄보디아의 전체 수출의 약 80%를 차 지한다. 하지만 의류산업은 단순 가공업으로서, 수입자재, 해외자본, 그리고 수출시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2008년 세계 경제위기 당시에 명확하게 드러 1. 연구에 따르면 캄보디아 정부는 경작가능 토지 약 390만 헥타르 중 2,033,664 헥타르를 토 지양여제도에 따라 사기업에 임대하고 있다. 2011년에만 약 80만 헥타르를 임대해주었다. (LI- CADHO 2012).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43 난 것처럼, 캄보디아 산업 발전의 원동력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의류산업은 국제 경쟁 심화와 요동치는 시장 등락의 영향을 받는다. 2000년대 초고속 성장을 구가 하던 캄보디아 경제는 2009년에는 성장률이 거의 제로로 떨어졌다. 미국 시장의 수요가 감소로 공식 경제 최대 고용산업인 의류산업이 큰 타격을 받았고, 그 결과 2009년 캄보디아의 상품수출 성장률은 마이너스 14.2%로 급감했다. 2008년 8월 이후 일 년 동 안 40여개 의류공장이 폐업하면서 약 5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선진국의 주문이 감소하자 잔업이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임금도 감소했다. 결과적으로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고향에 보내는 송금액도 줄었다. 캄보디아에는 약 960개의 크고 작은 의류제조업체들이 있다. 이 중 글로벌 브랜드와 유통업체에 의류를 납품하는 중대규모 수출 공장은 412개이다. 2 소규모 제조업체들은 보통 좀더 큰 규모의 업체에 납품하는 하청 업체다. 대부분의 수출제조업체들은 중국, 대 만, 홍콩,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 업체들이 의류 노동자들의 직 접적인 사용자이긴 하지만 캄보디아의 값싼 노동력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글로벌 유 통 대기업들로 전 세계에서 가장 이윤을 많이 남긴 회사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유통업 체에는 H&M과 GAP 등이 포함되는데, 이들은 2012년 전 세계에서 각각 미화 181억 3 천만 달러와 157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2012년 캄보디아 GDP인 미화 140억 5천만 달러보다 많다. 의류산업 노동자들은 글로벌 공급사슬의 바닥에 있고, 이 공급사슬은 매우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의류산업 노동자들의 엄청난 기여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근로빈곤층의 대부분은 여전히 이들 의류 노동자들이다. 의류 노동자들의 법정 최저임 금은 생산성 증가나 생필품 가격 인상과 비교해 볼 때 상승 속도가 느려 결과적으로 의 류산업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된다. 기초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초과근무를 점점 더 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캄보디아 노동법 제 139조 는 이례적이고 긴급한 업무가 있을 시에만 초과근무가 허용된다 고 명시하고 있지 만, 사실상 노동자들은 거의 매일 초과근무를 해야만 그나마 최저생활수준을 조금 웃도 는 임금을 벌 수 있다. 사용자와 정부는 노동자의 평균 소득이 미화 150달러로 최저생 활임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노동 시간을 봅시다. 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에서 12시 2 ILO 2013, p.2.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44 간, 주 6일 일합니다. 일요일도, 휴일도, 휴가도 없이 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거의 매일 하루 반의 노동시간에 해당하는 시간을 일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해 최저생활임금을 벌 기 위해서는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톤Ath Thorn, 캄보디아의류노동자 민주노조연맹 (C.CAWDU) 위원장 인터뷰, 2014년 1월 17일) (그림 2.1) 카나디아 공단 노동자들의 숙소. 카나디아 공단 내 의류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곳을 보면 이들의 실제 삶의 질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열악한 근무 환경의 결과가 의류 공장 노동자들의 집단 기절 사건이 잇따른 것 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일터에서 기절한 노동자의 수가 4천 명이 넘는다. 3 당연히 노동 자들의 불만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 오랜 기간 쌓여온 문제였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불만을 가중시킨 것은 최저임금 인상 정체만이 아니었다. 최근 점점 더 많은 사용자들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3개월 정도의 기간제 고용을 활성화하면서, 노동자들의 고용불안 문제가 심화되었다. 4 그 결과 기간제 계약이 끝나면 재계약 전까지 노동자들의 생계 유 지는 극도로 어려워졌다. 3 상표 뒤에 가려진 노동(Labour Behind the Label), CLEC(2013) 참조 4 예일법대(2011); 아놀드(Arnold)와 토(Toh)(2012) 참조.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45 대개 노동자들은 사용자 측과 단체협상을 통해 고충을 해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노동자들은 단체협상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 동조합을 결성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근시안적인 사용자들은 보통 캄보디아 의류생산자협회(GMAC)를 등에 업고 노동자들의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는 데에 소극적 인 모습을 보여왔으며, 정리해고, 노동조합 파괴 공작으로 대응했고, 그 결과 불안한 노 사관계가 초래되었다. 우리 공장의 경우, 정규직은 겨우 20%이고 나머지 80%는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 자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까 극도로 두려워하는 겁니다. 공장에서 노 동조합 결성 시도가 두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경영진이 노조 결성을 시도한 노동자들 을 해고해버렸습니다. 제가 파업에 참가한 것도 이렇게라도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 해서였습니다. (카나디아 공단에 위치한 한국 공장에서 일하는 의류 노동자 인터뷰, 2014년 1월 16일 )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한 사용자 측의 이러한 대응은 의류 산업 내 노사관계를 불안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 의류 생산 국가로서의 캄보디아의 이미 지를 손상시킨다. 이러한 이미지는 국제노동기구(ILO)가 2001년 더 좋은 공장 프로 젝트 를 도입하여 캄보디아의 의류 공장의 노동권 상황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하면서 구 축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계속 확대되어 2014년 현재 약 473개의 공장을 모니터링하고 있지만, 2010년 이후부터 근로계약, 임금, 노동시간, 휴가, 복지, 안전, 건강 등 모든 면 에서 준수율이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캄보디아 노동법을 위반하는 사 용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5 더 나아가 파업 발생 빈도도 급격 히 증가했다. 국제노동기구에 따르면 2010년에서 2012년 사이 파업이 170%나 증가하 였다. 2013년 12월 총파업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일어났다. 5 스탠포드법대와 WRC(2013) 및 ILO(2013) 참조.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46 (그림 2.2) 노동자들의 숙소. 일터 근처의 작은 방 하나를 빌리기 위해 의류 노동자들은 한달 임금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지불해야 한다.
III 총파업 시발점 이번 진상조사를 통해 2013년 12월 그리고 2014년 1월 총파업의 가장 주된 이유가 의류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노동조건과 생활환경이 제대로 개선되지 않거나 심지어 악화 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전반적인 생활수준, 특히 최저임금에 대해 대체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2013년 한 해 동안에만도 맨하탄(Manhattan) 공단과 타이생(Taiseng) 공단에 위치한 30여개 공장에서 총파업 이전부터 임금을 둘러 싼 노사분쟁이 발생했다. 조사단이 인터뷰한 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 현재의 임금수준 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기 위해 미화 160달러의 최저임금을 요구하 는 것입니다. 한 달에 100달러도 안 되는 임금으로는 생계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시장에 갈 때마다 물건값이 오릅니다. (한 홍콩 공장 의류 노동자 인터뷰, 2014년 1월 16일) 지금 여동생과 살고 있는데 두 사람 식비에 미화 50달러, 그리고 방세에 미화 35달 러 정도가 들어갑니다. 벌써 이것만 해도 85달러예요. 그러니 현 최저임금으로는 둘이 생활하기도 부족합니다. 160달러를 받을 수 있다면, 지금보다 생활이 나아지겠지요. 제 대로 먹을 수도 있을 거고요. 지금은 엄청난 초과근무를 해야만 약 120달러를 벌어요. (의류공장 노동자 인터뷰. 그녀의 여동생은 카나디아 공단 진압 당시 부상을 입었다. 2014년 1월 15일) 의류산업의 최저임금은 노사정으로 구성된 노동자문위원회(LAC)에서 정기적으로 검 토를 받는다. 현재의 최저임금인 미화 80달러는 노동자문위원회가 2013년 5월 1일 발 표한 것이다. 정부, 사용자, 노동자 대표로 구성된 이 노사정 기구는 정부의 중립성이 보 장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도 문제가 많지만, 특히 캄보디아 사회구조상 노동자 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효과적으로 반영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노동자문위원회는 정 부(노동부) 대표 14명, 캄보디아의류생산자협회(GMAC) 대표 7명, 노동조합 대표 7명 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조합 대표 7명 중 독립노조 대표는 단 두 명으로 캄보디아 의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48 류노동자민주노조연맹(C.CAWDU)와 캄보디아전국섬유노조독립연맹(NIFTUC) 소속 이다. 다른 5명의 노동조합 대표들의 경우, 일반 노동자들의 대표성 문제는 물론이고 정 부 및 사용자로부터의 독립성이 매우 의심스럽다. 그들은 민주적, 참여적인 절차를 추구 하지 않을 뿐더러 전국적 차원 및 기업 차원에서 캄보디아 정부, 여당인 캄보디아국민당, 그리고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충분히 독립적이지도 않다. 이들 노동조합이 노동자문위원 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의 본질, 그리고 위원회가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공정하게 유의미 한 방식으로 대표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여부가 2013년 12월 최저임금 협상 과정에 서 명백히 드러났다. 결국 이러한 한계가 의류 노동자와 지지자들의 대대적인 자발적 시 위를 촉발시켰던 것이다. 캄보디아의류노동자민주노조연맹(C.CAWDU), 전국섬유노조독립연맹(NIFTUC), 캄보디아노동자운동연합(CUMW), 캄보디아노조연맹 (CATU)을 비롯한 노동조합들 은 노동자문위원회 실태조사실무단(Survey Working Group)의 권고를 기반으로 최 저임금 160달러 인상을 요구해왔다. 이 실태조사실무단은 노동자문위원회의 합의 하에 캄보디아 의류 및 신발산업의 적정 최저임금수준에 대해 독립적인 조사를 실시한 바 있 다. 이 실무단은 조사 결과 적정 최저임금은 미화 157달러에서 177달러라는 결론을 내 렸다. 노동조합의 최저임금 검토 요청에 대한 대응으로 노동자문위원회는 2013년 12월 24일 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후에 이 회의는 협상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노동자문위원 회가 사전에 결정한 바를 통보하기 위한 자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2013년 12월 24일 회의에서 노동자문위원회는 법정 최저임금을 현행 미화 80달러에서 미화 95달러로 인 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12월 24일 발표된 노동자문위원회의 결정은 인간다운 생 활을 유지할 만한 임금에 대한 대다수 일반 노동자들과 노동자들의 대표의 열망을 반영 하지 않은,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노조에서 요구하는 최저임금 160달 러는 2018년은 되어야 가능할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이 발표에 분노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2013년 12월 24일 소위 협상 의 결과에 노동자들이 얼마나 실망하고 분노했는지 에 대해 한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2월 24일 협상 결과를 알아보러 노동부에 갔습니다.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협상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하지만 정부, GMAC, 친정부 노조가 사전에 협상을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49 조율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부의 제안이 발표되었을 때 C.CAWDU와 NIFTUC 의 두 대표를 제외하고 모든 참석자들이 단 3분만에 동의했습니다. 협상 전까지만 하더 라도 모든 노조쪽 대표들이 정부나 사용자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협상이 시 작되자 두 노조를 뺀 나머지는 모두 백기투항해버리더군요. 다른 노조 대표들이 협상 시 작 전에 미리 정부 제안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회의는 진정한 협상이 아니었던 거지요. C.CAWDU 위원장과 NIFTUC 위원장은 노동자들에게 협상 결과를 전달하면서 이 제안에 동의할 수 없으며 추가 협상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 다. 노동자들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이 소식은 굉장히 빠르게 확산되었고 소식의 진상을 확인하려는 동료들로부터 많은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모두가 파업을 원했습니다. (홍 콩 소유 공장의 노동자이자 노동조합 조직활동가 인터뷰, 2014년 1월 16일) 노동자문위원회의 발표는 12월 24일부터 시작된 대규모 파업의 시발점이 되었다. 협 상 결과 발표와 거의 동시에 많은 노동자들이 일손을 멈추었고, 일방적인 결정에 분노하 여 거리로 나왔다.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노동자들도 이 결정에 좌절하여 즉시 태업에 돌입하였다. 저도 12월 24일 행동에 동참하기 위해 노동부로 향했습니다. 최저임금이 95달러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동료들에게 전화로 알렸습니다. 동료들은 공장 앞에사 대기 중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장 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이 첫번째 파업 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약 2km 떨어진 대로로 행진하였고, 약 2~3시간 동안 도로를 점거하기로 했습니다. 행진 대오는 약 3천 명 정도였는데 공장의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나온 셈이었습니다. 당국에서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했지만, 우리는 계속 도로를 지켰습니다. 인근 다른 공장 노동자들도 파업에 돌입했으며 도로에 바리케이드 를 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쪽으로 합류했습니다. 이 지역에서만 약 1만 명의 노동자들 이 참가한 것 같습니다. 시위는 매우 평화롭게 이어졌습니다. 어떠한 폭력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네 차례나 돌아가서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캄퐁참(Kampong Cham) 지역 의 한 노조 지도자 인터뷰, 2014년 1월 16일)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50 총파업의 전개 2013년 12월 24일부터 2014년 1월 2일까지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대규모 거리 집 회, 공장 농성 및 태업, 또는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거나 고향에 내려가는 등의 결근 투쟁 을 비롯해 다양한 시위를 조직했다. 이번 총파업 참가 노동자 수는 캄보디아 역사상 전 례가 없는 것이었다. 6 C.CAWDU 소속 조합원들의 약 20%가 즉각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시위가 처음부터 대규모였던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26일쯤에 는 조업 중단 공장이 127개로 늘었습니다. 이때쯤에는 심지어 친정부 노조 조합원들도 업무를 중단했기 때문에 딱히 어느 노조 조합원들이 참여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습 니다. 30일, 31일에 이르러서는 약 300여 공장 노동자들이 조업을 중단했습니다. (속 춘오응(Sok Chhun Oeung), 비공식부문민주독립노동자연합(IDEA) 부위원장 인터뷰, 2014년 1월 15일) QMI1 공장에서 근무하는 한 노동자는 2014년 1월 16일 진상조사단과의 인터 뷰에서 이번 파업의 중요한 특징은 최저임금 인상 요구를 거의 만장일치로 지 지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파업 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7 2014 년 12월 마지막 주 내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중앙의 지침 없이 자발적으로 행동 을 조직하거나 참여했다. 또한 파업은 노조가 조직되어 있지 않거나 친정부 노조 가 주도하고 있어서 이들 노조 간부들이 필사적으로 노동자들의 파업 참여를 막 으려고 했던 공장에서도 전개되었다. 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노동자들은 대개 자 신들의 공장이나 근처 공장의 노조 조합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주변에 지도 부가 없는 경우에는, 지도부를 세우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신속하고 자 발적인 행동은 독립 노조 지도부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때문에 노조들은 GMAC이나 정부 측에 총파업 의사를 통보할 시간이 없었다. 6 2013년 말부터 2014년 초까지 이어진 총파업 이전에 있었던 노사분규 중 최대 규모는 2010 년 9월, 노동자문위원회의 최저임금 인상 요구 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후, C.CAWDI와 NIFTUC 가 주도한 노동자 파업이었다. 노조 추산에 따르면, 총파업 셋째날과 마지막 날에는 100여 개 공 장의 20만1,770여 노동자가 참여했다고 한다. 당시 의류 및 신발산업 노동자의 2/3 이상이 참여 한 셈이었다. 7 이 점이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에 부응하여 C.CAWDU와 NIFTUC 연맹 지도자들이 선 도한 측면이 강한 2010년 파업과의 차이이다.(아놀드(2013) 참조)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51 우리 또한 굉장히 놀랐습니다. 보통은 노조 간부들이 나서서 노동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교육해서 파업 동참을 설득해야 하거든요 심지어 그렇게 해도 노동자들은 잘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통은 정부와 사용자에게 공문을 보내 파업 의사를 전합 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조 지도부가 파업을 결정하기도 전에 노동자들이 먼저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아톤(Ath Thorn), C.CAWDU 위원장 인터뷰, 2014년 1월 17일) 이번 투쟁은 자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시작된 것입 니다. 상층에서부터 조직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상층 지도부의 역할은 지역조직 지도 부에 자문과 지지를 제공하는 데에 그쳤습니다. 소셜 미디어의 사용으로 노동자들을 매 우 신속하게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소식이 매우 빠르게 퍼져나갔기 때문에 그만큼 노동 자 조직도 빠르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물론 준비된 투쟁이 더 낫겠지요. 만약 노조가 파업을 이끌었다면 더 분명한 전략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 것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롱 춘(Rong Chhun), 캄보디아노동조합총연맹(CCU) 위 원장 인터뷰, 2014년 1월 20일) 노동자들이 먼저 행동에 나서자 필연적으로 점점 더 많은 노동조합이 파업에 동참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역사상 유례없이 많은 노동조합이 파업에 동참했다. 처음에 는 C.CAWDU, NIFTUC, CUMW, CATU가 최저임금 160달러 요구 캠페인을 주도했 고, 12월 25일부터는 FTUWKC, WFTU, IDYTU, CCU도 참여하였다. 소속 노동조합 에 상관없이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파업에 동참 한 노조 연맹을 통틀어 계산하면 섬유, 의류, 신발 산업의 총 386개의 사업장 단위 노조 의 249,700의 노동자를 대표한다.의류산업 이외의 노동조합도 파업을 지지했다. 주목 할 만한 점은, 캄보디아식품서비스노동조합연맹(CFSWF), 캄보디아민주공무원협의회 (CICA), 비공식부문민주독립노동자연합(IDEA) 등 캄보디아노동자총연맹(CLC) 산하 조직들이 대규모 연대 집회에 참여함으로써 의류 노동자 파업에 지지를 보냈다는 것이 다. 더 나아가 노동 관련 NGO, 인권 및 기타 사회운동 조직들 역시 노동자들의 시위에 동참하였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집단행동에 나서고, 파업 노동자들 사이에 일종의 다양 한 현장 조율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독립 노조들은 노동자들의 단결을 촉구하면서 대규 모 대중집회를 추진했다. 12월 26일부터는 더 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기 시작했 다. 노동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참여했다. 파업, 공단 내에서의 집회, 도시에서의 집중행 동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노동자들도 있었고, 파업 기간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는 식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52 으로 소극적으로 시위에 동참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파업에 참여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작업현장에서 중단을 하거나, 단순히 출근을 거부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이때 노동자들은 일자리와 소득을 잃을 각오를 한 것이었다.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의 파업 참여를 다양한 방식으로 저지했는데, 공장 출입문을 닫아걸기도 하고,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노동자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 거나 경비 요원을 추가로 배치하기도 했다. 파업에 일찍 동참한 노동자들은 공단 내에서 대중집회를 조직해서 공장을 순회하며 공장 안 노동자들에게 파업 동참을 호소했다. 이러한 조직화를 저지하기 위해 사용자들이 가장 흔히 사용한 전술은 공장 출입문을 봉쇄하거나, 시끄러운 음악을 틀거나, 추가 경비를 세움으로써 공장 안 노동자들과 바 깥의 파업자들을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한 예로, 마카로트(Makalot 2) 공장의 소유주 와 럭키 워커스(Lucky Workers) 라는 이름의 어용 노조 지도부는 12월 27일 노 동자들에게 진정하라면서 공장 출입문을 걸어잠갔다. 2014년 1월 16일 진상조사단과 의 인터뷰에서 이 대만 소유 공장의 한 의류 노동자는 출입문을 열고 파업에 동참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한국이 지분의 반을 소유하고 있는 볼룸코코모 어패 럴(Volumecocomo Apparel)에서도 12월 30일, 공장주가 노동자들의 파업 참여를 막 기 위해 공장 출입문을 봉쇄했다. 노동자들은 서로 도와서 공장벽을 타고 넘어가서 공 장 밖 집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12월 30일, 노동자들의 시위 행진이 공장 근처에 이르 자, QMI 1공장 노동자들도 밖으로 나와서 집회에 합류했다. 12월 31일, 노동자 행렬은 다시 QMI 1 공장 앞에 멈춰서 노동자들에게 파업 참여를 독려했다. 그러나 경영진이 추 가 경비를 공장 정문에 배치했기 때문에 공장 안 노동자들과 대화하기가 어려웠다. 아림 인터텍스(Alim) 공장의 경우, 12월 27일, 한국 소유의 다른 공장 노동자들이 와서 공 장 문을 두드렸을 때는 전체 600명 노동자 중 약 10%가 행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러나 12월 30일에는 파업 노동자들이 공장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사용자가 재빨리 출입 문을 걸어잠갔기 때문에 한 명만이 겨우 집회에 참가했다. 이 노동자는 31일 공장에 돌 아와 다른 노동자들에게 파업 동참을 설득했다. 아림인터텍스의 이 노동자는 2014년 1 월 16일 진상조사단과의 인터뷰에서 이때 한국인 간부 중 한 명이 그를 발견했고, 즉시 해고되었다고 말했다. 4번국도에 위치한 대만 소유 의류 공장 캠웰(Camwell MFG Co. Ltd.)도 12월 30일, 노동자들이 밖으로 나가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문을 봉 쇄했다고 2014년 1월 16일 진상조사단과의 인터뷰에서 IDEA의 한 노조 활동가는 전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53 했다.상당수 공장 경영진들이 해고나 임금삭감 등으로 노동자들을 위협했다. 공장주들은 또한 음악을 크게 틀어 노동자들이 공장 밖 파업 노동자들의 연설을 들을 수 없게 하였 다. 1월 16일 진상조사단에서 인터뷰한 IDEA의 한 노조 활동가는 파업 기간 파업에 참 가하지 않는 노동자에게 인센티브를 주겠다며 회유한 사용자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1월 15일 진상조사단과의 인터뷰에서 QMI 1 공장의 한 노동자는 어용노조 간부들이 나서서 노동자들에게 파업에 참여하지 않으면 회사 측에서 최저임금을 120달러로 인상해주기 로 했다고 발표했다고 말했다. 1월 15일 진상조사단에서 인터뷰한 한국계 회사인 약진 통상에 근무하는 노동자에 따르면, 약진통상 사용자는 파업 기간에 근무하는 노동자들 에게 하루에 미화 5달러와 쌀 한봉지를 지급했다고 한다. 4번국도에 위치한 대만 소유 의 타이양(Tai Yang) 공장도 파업 기간 근무에 대해 미화 10달러의 인센티브 지급을 약 속했다고 한다. 거의 모든 공장에서 파업 참가자들은 파업 기간 동안 하루치 일당 또는 반일치 일당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하면서 12월 26일부터 는 프놈펜의 거의 모든 공장이 조업을 중단해야 했다.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에게 파업이 끝날 때까지 휴가를 쓰라고 했다. 상당수 노동자들이 집에 머무르거나 시골 고향에 돌아 가서 가족의 추수를 도왔다.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프놈펜 중심가는 파업 노동자와 지지자들이 점거했다. 12월 27일, 노동자들은 C.CAWDU, NIFTUC, CUMW,CATU, FTUWKC, WFTU의 지도자들과 노동부의 협의가 진행되는 동안 노동부 앞의 도로를 점거했다.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고 면담이 끝나자, 노조들은 12월 31일부터 무 기한 총파업에 돌입한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IDYTU와 CCU도 총파업 캠페인에 동참했 다. 12월 28일, 다시 한 번 수 천명의 시위대가 노동부 앞 도로와 4번국도를 8시간 동안 점거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시위는 12월 29일에 있었던 행진이었다. 수많은 다양한 노동 단체 들이 의류 노동자들과 함께 행진에 합류했으며, 야당인 캄보디아구국당(CNRP)도 훈센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었다. 8 프놈펜 거리는 수십 만 명의 파업 노동자들, 지지자들, 8 12월 29일 시위에는 수많은 다양한 단체가 참여해서 다양한 시위와 요구가 등장했다. 벙깍 호수(Boeung Kak Lake) 철거 반대 활동가들은 여성부 앞으로 행진했다. 승려들은 종교부 앞으 로 행진했다. 뚝뚝 운전사들, 가내노동자들, 노점상들 역시 행진에 참여했다. 비공식부문 노동자 들과 공무원들도 자체 시위와 다양한 구호를 들고 참여했다. 공무원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국무회의 청사로 행진했다. 노점상들과 뚝뚝 운전사들은 IDEA와 함께 기름값 인하를 요구했고 농부들은 농산물 정부 구매가격 적정화를 요구했다. 다양한 집단들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출발하 여 다양한 정부 부처 및 청사로 행진했으며 나중에는 왓프놈(Wat Phnom)에서 모두 합류해서 프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54 캄보디아구국당 지지자들로 가득 찼다. 누가 어디 소속인지 명확히 구분하기조차 어려 웠다. 캄보디아구국당의 총선 공약은 최저임금 150달러 인상이었다. 그러나 12월 25일 이래 노동자들의 투쟁이 탄력을 받아 가속화되자, 캄보디아구국당도 노동자들의 요구를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나섰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도로로 나왔기 때문 에 경찰의 진압도 없었다. 파업과 대규모 집회는 12월 31일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2월 29일부터 사용자 측과 정부는 시위 진압을 위해 점점 더 공세를 높여나갔다. 12월 29일, GMAC은 노조 지도부 에 금전적 손실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국무회의에서는 파업 노동 자들에게 2014년 1월 2일까지 업무에 복귀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낼 것을 노동부에 촉구 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12월 30일과 31일, 노동부 앞과 국무회의 청사 앞에는 점점 더 많은 경찰들이 전기 진압봉, 방패, 총으로 무장하고 거리 시위를 막아섰다. 30일에는 또 한 차례의 노동부 협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GMAC은 참여를 거부했다. 협의에 참여하 는 노조 지도부를 지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국무회의 청사 앞까지 행진했다. 그곳에는 철조망 바리케이드와 전경이 대기하고 있었다. 파업 노동자와 무장 경찰 간의 대치는 몇 시간 만에 물리적 충돌 없이 끝났다. 12월 31일, 노동부는 최저임금 인상폭을 다소 수정 해서 미화 100달러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들도, 사용자들도 만족시킬 수 없었 다. 한편 노동자와 정부 당국 간 긴장은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놈펜 중앙도로를 거쳐 계속 행진을 이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까지 행진에 참여하면서 시위대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행진의 최종 목적지는 다수의 토지 양여 건에 대한 중국의 간 섭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중국 대사관 앞으로 향했다.
IV 충돌과 진압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2014년 새해 첫 날은 시위가 없었다. 그러나 1월 2일까지 직 장으로 복귀하라는 노동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파업은 새해까지도 이어졌다. 한편 캄 보디아구국당은 의류 노동자들에게 1월 5일 캄보디아구국당의 제3차 전국 집회에 참여 할 것을 촉구했다. 1월 2일 아침, 파업에 참가 중인 8개 노조는 공동기자회견을 개최하 여 파업은 끝나지 않았으며 노조는 파업 노동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한편 대다수 노동자들이 업무에 복귀하지 않았으며 공단을 돌며 집회를 열었다. 그러자 정부는 강경 대응 쪽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특수군부대, 경찰, 헌병이 노동자들의 시위 저지를 위해 배치되었다. 이것이 파업 노동자들과 무장병력 간 유혈충돌의 시발점이었 다. 2014년 1월 2일 아침 약진통상 앞 첫 번째 충돌은 약진통상(Yakjin Inc.) 앞에서 벌어졌다. 약진통상은 한국자본과 미국자본의 합자 회사로 프놈펜의 푸르센체이(Pursenchey) 지구에 위치해 있다. C.CAWDU 조합원들을 비롯해 2,800여 명의 약진통상 거의 전 직원이 2013년 12월 25일부터 파업에 참여하였다.1월 15일 진상조사단과의 인터뷰에서 한 약진통상 노동자 는 파업 기간동안 근무한 노동자는 50~200명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1월 2일, 일부 노 동자들은 업무에 복귀했지만 대부분은 계속해서 파업을 이어나갔다. 오전 9시 경, 약진 통상과 인근 공장들의 파업 노동자들은 약진공장 밖에서 집회를 개최하고 공장 내의 노 동자들에게 파업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약진 노동자의 진술에 따르면, 상당수의 공장 안 노동자들도 참여하고 싶었지만 출입문이 잠겨 있었고 경비가 지키고 서 있었기 때문 에 나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노동자 중 몇 명이 안에 있는 노동자들과 대화하기 위해 정 문을 열려고 시도했을 때, 911공수여단(여단장은 3성 장군 차 페카데이(Chap Pheakadey))이 개입하였다. 파업 노동자들에게 처음으로 군이 개입한 것이었다. 911공수여단 부대는 약진공장과 인접해있으며,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 기지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장과 연결되어 있고 회사 측이 부대에 전기를 공급한다고 한 다. 회사가 이 부대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또한 알려진 사실이다. 1월 15일 진상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56 조사단과의 인터뷰에서 한 약진 노동자는 일부 911공수여단 전직 군인들이 현재 약진 통상에서 일하고 있다고 진술하였다. 1월 5일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캄보디아 현지 약진통상 관계자가 군 인사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하여 군대의 개입을 요청 했다 고 한다. 9 또한 주캄보디아 한국대사관은 경향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파업으로 인 해 생산 차질이 생겼으며 경찰의 대응이 미흡하여 (군의) 개입이 필요했다고 말 했다. 10 군인들이 약진 공장의 사설보안경비 역할을 합니다. 그들의 보수의 반은 정부가 지 급하고 나머지 반은 공장이 지급합니다. (911공수여단 전직 군인 인터뷰. 2014년 1월 16일) 오전 9시 30분경, 911여단에서 나온 약 50명의 군인들이 공장 출입문을 열려고 하던 노동자들을 폭행하고 그 중 세 명의 노동자를 부상당한 채로 연행하였다. 이 노동자들은 4번국도에 위치한 대만 소유의 신발 공장 스카이 나이스(Sky Nice)의 노동자들이었다. 약진통상 앞에서 충돌이 있었고 노동자들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이 지역의 노조 활동 가들과 인근 공장의 파업 노동자들에게 전해지면서 약진 앞의 시위대의 수는 더 늘어났 다. AK-47소총으로 무장한 더 많은 군인들이 현장에 나타났고 시위대와 대치했다. 오 전 10시경, IDEA 위원장 본 파오(Vorn Pao)를 포함한 노조 지도부들이 회사 측과 노 동자들 간의 협상 지원을 위해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 도착한 노조 지도부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911공수여단에서 나온 약 100명의 군인들이 약진 공 장을 경호하면서 약 600명의 노동자와 대치하고 있었다. 본 파오는 UNHCR(유엔난민 기구)와 인권단체들에 이 사실을 알려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후 두 명의 유엔 직원들이 도착하였고, 구금된 세 명의 노동자들의 석방을 위해 군대와 협상하기 시 작했다. 911공수여단의 사령관 차 소포른(Chap Sophorn) 역시 당시 현장에 있었다. 기 자들도 다수 현장에 도착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유엔 직원들은 공장에서 나왔다. 9 경향신문 2014년 1월 5일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 html?artid=201401052116375. 10 ibid.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57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인들은 노동자들에게 빈 생수병을 던져 도발하였고, 이는 곧 폭력 으로 이어졌다. 한 노동자가 병에 맞자, 다른 노동자들은 군인들에게 소리를 질렀고, 그 러자 군인들은 더 많은 생수병을 노동자들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그 생수병 들을 주워 다시 군인들에게 던졌다. 더 이상 던질 생수병이 없자 노동자들은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군인들 또한 노동자들에게 돌을 던졌다. 군인들은 새총도 사용했 다. 결국 12시경, 군인들은 노동자들에게 전기진압봉을 가지고 돌격했다. (그림 4.1) 목격자들의 진술로 재구성한 1월 2일 약진 앞 충돌 현장 노동자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지만, 모두 무사히 도망친 것은 아니었다. 몇몇은 근 처 주택이나 상점에 몸을 숨겼다. 본 파오는 인근 작은 커피점으로 숨었지만 붙잡혀서 몇몇 군인들에게 끌려 나와 심한 폭행을 당했다. 두 명의 기자(호주 기자 1명, 캄보디아 기자 1명)와 여러 명의 승려들 또한 폭행당했다. 아직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던 유엔 직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58 원들이 구타를 막기 위해 나섰다. 이들이 사진을 찍었지만, 군인들이 카메라를 압수해버 렸다. 캄보디아농민연합(CCFC)의 활동가인 텡 사보언(Theng Savoeun)이 본 파오를 도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텡 사보언 역시 구타를 당한 후 연행되었다. 한 목격자는 당 시의 폭력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군대가 노동자들에게 돌격했을 때, 저는 약진 근처 한 커피점에 들어가서 숨었어요. 본 파오 역시 제가 있던 커피점 근처에 서 있었습니다. 한 군인이 본 파오를 가리키며 그 가 노동자들의 지도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본 파오가 도망쳐서 커피점으로 들어왔 지만 빠져나갈 뒷문이 없었어요. 결국 커피점까지 뒤따라온 군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군인들은 그를 끌고 나와서 심하게 폭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엔 대표부에서 구타를 저 지하려 했지만 군인들은 상관하지 않고 오히려 카메라를 압수했습니다. 커피점 주인이 그 광경을 다 목격했습니다. 군인들은 숨어있는 노동자들이 더 있나 찾았지만 커피점 주 인이 가게에 더 이상 숨어있는 노동자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저를 발견하 지 못했죠. 저 말고도 가게 안에는10명 가까이 되는 여성노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군인에게 머리를 심하게 맞았어요. 부상이 심각해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목격자 인터뷰, 2014년 1월 15일) 아침에 먼저 구금된 세 명의 노동자를 포함, 총 10명의 노동자 및 활동가들이 1월 2일 하루 동안 약진 공장 앞에서 군인들로부터 폭행을 당한 채 구금되었다. 승려 5명도 함께 연행되어 부대 내에 구금되었지만 이들은 다음 날 아침 풀려났다. 시위대를 연행해간 군 대는 이후 약진 공장 앞으로 되돌아가 계속 정문을 경비했다. 군대는 가까이 올 수 있으 면 와 보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시위대를 계속 선동했다. 오후 3시 30분경, 약 1000명의 지지자들이 모여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4번국도(러시안 대로)를 점거했다. 6시 30분 경 시위대는 프놈펜 특별 경제구역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연행자들의 행방은 6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같은 날 벵스렝(Veng Sreng) 도로에 위치한 카나디아 공단에서도 폭력 충돌이 일어 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미루어 볼 때 치안병력의 조치는 노동자들의 폭력에 대한 대응이라기보다는 이미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벵스렝 도로에서의 사건들도 치안병력의 의도적인 도발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59 2014년 1월 2일 늦은 오후와 저녁, 벵스렝 도로 벵스렝 도로 카나디아 은행 앞에서 파업 노동자들이 춤을 추고 있을 때 헌병대가 노동 자들을 공격하면서 폭력사태가 시작되었다. 춤을 추는 행위는 시위 행사 중의 하나였고 더 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기를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오후 3시경, 헌병이 두 대 의 군용 트럭을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헌병은 노동자들에게 해산을 요구했고 노동자들 은 동의했다. 그리고 경찰에게 노래 두 곡만 더 한 다음 끝내겠다고 알렸다. 그 동안 현 장에 있던 몇몇 노동자들은 군인들이 현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캄보디아노동총연맹 (CLC)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1월 16일 진상조사단이 인터뷰한 한 카나디아 공단 노동 자의 진술) 목격자들에 따르면, 헌병대는 노동자들의 요청을 무시하고 즉시 여성을 포함 해 현장에 있던 노동자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고 카나디아 공단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경비대가 이미 출입구를 봉쇄했기 때 문에 노동자들은 공단 내로 몸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갇혔다. 그제서야 노동자들은 현병의 접근을 막기 위해 돌을 주워 던지기 시작했다. 현병들 또한 노동자들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때가 이미 오후 4시경이었다. 경찰들이 곤봉으로 구타를 했습니다. 저는 계속 제발 그만하라고 그들에게 애원했습 니다. 하지만 그들은 구타를 계속했고 저를 세게 떠밀었습니다. 저는 거의 정신을 잃었습 니다. 저는 그들에게 계속 저를 때리면, 죽을 수도 있어요 라고 호소했습니다. (카 나디아 공단 노동자 인터뷰, 2014년 1월 15일) 일단 노동자들이 반격을 시작하자, 헌병대는 더 이상 노동자들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폐타이어로 바리케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다음 누군가가 가솔린과 병 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그저 플라스틱 생수병이었다. 사람들은 그 안에 휘발유를 넣은 다 음 타이어에 던져 불을 붙였다. 그러나 나중에 이 병들은 화염병을 만드는 데에도 사용 되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워낙 혼돈상태에서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서 누가 바리 케이드를 만들기 시작했고 화염병을 위한 재료를 가져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1월 16일 진상조사단과의 인터뷰에서 카나디아 공단에 있던 노동자들 중 한 명은 군대는 온갖 진압장비와 총으로 무장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돌밖에 없었기 때문 에 노동자들은 매 우 분노한 동시에 너무도 취약 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다만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 고 그래서 병과 바리케이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노동자와 헌병대는 서로 돌 을 던지며 그날 밤 오전 1시경까지 계속 대치했다.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60 2014년 1월 3일 이른 아침, 벵스렝 도로 이 시각 노동자들은 벵스렝 도로를 점거하고 있었다. 그때 헌병대가 이 지역을 포위하 고 전 방면에서 시위대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림 4.2 참조) 그림 4.2 목격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1월 2일 벵스렝 도로 현장 상황 인근 주민들 다수의 진술에 따르면, 오전 1시경 총성이 들렸으며 간헐적으로 중단되 기는 했지만 새벽 2시 30분까지 총성이 이어졌다고 한다. 발포가 시작되자, 인근에 사는 노동자들은 다층 건물의 옥상이나 꼭대기 층으로 몸을 피하거나 도로에 있는 노동자들 을 응원했다. 간헐적인 충돌은 이른 아침까지 계속 이어졌다. 군은 연막수류탄도 사용해 서 기절한 노동자들도 나왔다. 일부 노동자들은 건물 안으로 도망쳐서 2, 3층에서 계속 군을 향해 소리쳤다. 1월 2일, 많은 노동자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끔찍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경찰의 전기진압봉 에 폭행을 당했습니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구타로 정신을 잃었고, 경찰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노동자들을 트럭에 던져 넣었습니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1월 3일 파업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카나디아 공단에서 부상당한 한 노동자 인터뷰, 2014년 1월 15일) 이른 아침, 노동자들이 카나디아 공단 내로 몸을 피하지 못하도록 공단 출입문을 닫아 건 카나디아 공단 경비에게 분개한 몇몇 노동자들이 한 경비원의 오토바이를 불태웠다. 오전 7시경, 카나디아 공단 공장 노동자들은 공장 앞에 삼삼오오 모여들었지만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두 지난 밤의 폭력 진압 소식을 듣고 화가 난 상
캄보디아, 전국을 뒤흔든 일주일 61 태 였다(1월 16일날 진상조사단과 인터뷰한 한 노동자의 진술) 이후 몇몇 노동자들이 카나디아 공단 정문의 여닫이문을 파손하였다. 오전 8시경, 그들은 떼어낸 문을 벵스렝 도로로 끌고 가 휘발유를 이용해 불태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노동자들이 파손한 물품은 한 경비원의 오토바이와 공단 정문뿐이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노동자들은 바리 케이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8시 반경, 몇몇 노동자들이 후이첸(Huy Chen) 공장과 벵 스렝 도로 카나디아 은행(Canadia Bank) 사이에 쌓아놓은 불타는 타이어 위로 가솔린 이 들어있는 병을 다시 던졌다. 인근 주민들은 파업 노동자들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노동 자들에게 쌀과 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근처의 한 학교에서도 노동자들에게 물을 가져다 주었다. (그림 4.3) 목격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1월 3일 벵스렝 도로 현장 상황 1월 3일 늦은 아침, 벵스렝 도로 오전 9시 경, 두 방면에서 헌병대가 접근해왔다. 한 무리는카나디아 공단에서 후이첸 공장(6층 건물)으로 이동했고, 다른 무리는 벵스렝 도로를 따라 북쪽에서 남향으로 이동 했다. 헌병대가 접근해 오는 것을 발견한 노동자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 500명의 노동자가 있었지만 곧 일부 노동자가 도망치면서 약 300명으로 줄었다. 헌병 대가 공포탄을 발사하기 시작하자 많은 노동자들이 겁에 질려 돌을 떨어뜨렸다. 대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