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언론매체들의 기여 유 네, 오늘은 2012년 7월 11일 수요일입니다. 오늘도 역시 이상만 선생님과 함께 국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인데요,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네, 선생님 오늘도 좋은 말씀 부탁드릴게요. 이 네. 이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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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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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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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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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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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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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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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 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일시 2012년 7월 11일 수요일 10:00~12:00 장소 이상만 자택(서울 마포구 도화동) 진행 구술_이상만 (이) 면담_유은선(유) 촬영_권혜경 채록문 녹취_권주렴 검독_박효연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언론매체들의 기여 유 네, 오늘은 2012년 7월 11일 수요일입니다. 오늘도 역시 이상만 선생님과 함께 국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인데요,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네, 선생님 오늘도 좋은 말씀 부탁드릴게요. 이 네. 이제 우리나라 그 국악이 이렇게 그 발전된 것 중에는 중요한 동기가 1933년 그 경성 중앙방송국에 제2방송이 시작되면서 국악인들이 방송에 출현함으로서 국악에 대한 새로 운 관심이 촉발이 됐는데. 그때에 우리나라의 그 중요한 민족지라고 할 수 있는 두 신문이 있었습니다. 그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였었는데, 이 두 신문이 문화면이라고 하지 않고 학예면이라고 호칭을 했는데 그때에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대한 기사들을 많이 실렸습니 다. 특히 조선일보가 전국에 민속에 대한 것을 체계적으로 탐방하는 기사를 썼고, 또 전 국에 민속을 경연하는 그러한 대회 같은 것도 열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동아일보도 마찬 가지로 우리나라 전통 꼭 그 음악뿐만 아니고 여러 가지 전통 예술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 켰습니다. 근데 그 원인 중에 하나는 그 신문을 창설한 두 분이 특별히 국악에 대한 관심 이 아주 깊었습니다. 그래서 인촌 김성수 선생님이 특별히 판소리를 중심으로 해서 소리 를 듣는 귀가 아주 예민했던 분이어서 그 시대에 중요한 가객들을 자기 집에다가 불러가 지고 밤새도록 소리를 듣는 그러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북에서 온 그때는 그 북한을 서북이라고 그렇게 호칭을 했는데 조선일보 방응모 181 씨는 서북사람입니다. 그래서 한분 은 호남에서 와서 김성수 씨는 고창분이신데, 그 분이 서울에 와서 둥지를 틀었고. 또 이 북에서 방응모 씨는 서울로 내려와서 신문을 시작했습니다. 1920년 같은 시기에 이 두 그 민족지가 탄생을 했는데 그 민족지에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우리 민족의 정신, 우리 민족의 전통, 우리 민족의 문화 이런 것들을 선양하는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 말에 대한 연구라든가, 그때부터 소위 신문에 연재소설이 실리게 됐는데 그런 것들 이 우리나라 문학을 선도해나간다고 할까. 또 대중적인 확산을 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게 181 방응모( 方 應 謨, 1883~1950): 언론인. 호는 계초( 啓 礎 ). 평안북도 정주 출생. 조선일보의 사장으로 취임해 장학회인 이 심회 를 창설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임전대책협의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활동을 벌였다. 8 15광복과 더불어 조선일보 를 복간하고 사장으로 있다가 6 25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7일 납북되 었다. 120

제5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됐습니다. 그래서 이 두 신문사가 음악에 대한 행사 같은 것을 많이 허게 됐습니다. 특히 동아일보는 외국에서 온 음악가들을 주최를 해주고, 또 후원해주는 역할 같은 것을 많이 했는데, 특별히 한국 허고 관계가 되는 분들을 초청해서 음악회 같은 것을 열어주었습니 다. 동아일보가 첫 사업으로 시작헌 것이 그 당시 일본에서 유명한 앨토Alto 가수를 초청 해다가 음악회를 했는데 그분이 야나기 가네꼬라고 하는 분입니다. 우리말로 읽으면 류겸 자인데 그분이 누구냐 허면은 그 광화문을 헐지 말라고 역설을 했던 일본의 그 야냐기 미 네요시 182, 우리말로 읽으면은 류종열 씨의 부인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두 신문들 이 민족적인 정기라 할까 이런 것들을 바로 세우는데 필수적으로 민족예술이 따르게 되 고. 다만 국악의 보존 뿐만 아니고 또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는데도 열성적인 그 신문의 역 할이 컸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지끔까지도 신문사가 많은 문화 사업을 하고 있는 것 이 1930년대에서부터 시작이 된 거라고 생각헙니다. 근데 그 지나간 지금 조선일보가 그 방일영문학상, 아 저 국악상 {국악상.} 이런 것을 하는 것도 다 조선일보 사주들이 국 악에 대한 그 애착이 아주 강했고 또 소리를 듣는 귀가 보통 사람들을 뛰어넘어서 그 집에 불려 가면은 금방 출세를 하는 그런 시대도 있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쨌든 그런 시기를 지나서 사회현상으로 보아서는 일제 말기나 또 해방 직후까지도 국악의 교육이라 든가 사람들한테 혜택이 없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국악에 대한 이해라든가 애착에 대한 것들은 언론기관을 통해서 상당히 깊이 뿌리가 내려졌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까지 우리나라 국악의 전통을 이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 면은 동아일보가 당시 별로 그 관심이 없었던 5대 명창들을 불러다가 공연을 주선해주고 하던 것들도 1960년대 초에 시작했던 일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 제가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1973년에 언론계의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신문의 얘기를 쪼끔 했습니다만은 어쨌든 간에 방송이 국악의 흐름을 주욱 이어주는 중요한 기관 이었는데 국립방송, 국영방송이 공사로 전환되는 그런 계기가 생깁니다. 그게 73년도입 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허면은 민족문화중흥선언이라는 것이 제정이 되었습니 다. 박 대통령 183 시기입니다만은 이런 것을 만들었던 분이 윤주영 장관이십니다. 앞서도 제가 그 세분의 문화장관을 이제까지 문화발전에 출중하게 기여하신 분 세분을 들었습니 182 야나기 미네요시( 柳 宗 悅 (유종열), 1889~1961): 미술평론가. 도쿄( 東 京 ) 출생.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10년 가쿠슈인( 學 習 院 ) 고등과 재학 중 시가 나오야( 志 賀 直 哉 ),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武 者 小 路 實 篤 ) 등과 함께 문예잡지 시 라카바[ 白 樺 ] 를 창간하였다. 1924년 조선미술관을 설립했고, 이조도자기전람회와 이조미술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저 서로 조선과 그 예술, 종교와 그 진리, 신에 대하여, 차( 茶 )와 미( 美 ) 등이 있다. 183 박정희 대통령. 121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다만은 오재경, 윤주영, 이어령 그 중간에 그 윤주영 씨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학교 고려 대학교를 나오신 분인데 고려대학교 다닐 적에 연극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일보 편집국 장을 역임한 언론인 출신의 장관입니다. 물론 공화당 창당할 적에 주역으로써 참여를 허 셨는데 그때는 윤주영 장관이 굉장히 그 말 빨이 쌨던 분이고 또 그뿐만 아니고 조직 능력 이 굉장히 강했던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처음으로 그 문화행정에 제도적 그 장치를 그 시작한 분인데, 새로운 기관들이 많이 생기게 됐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문예진흥원입니 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울중앙방송국을 방송공사로 바꿨습니다. {확대 시킨거죠?} 예. 그때 방송국 직원이 공무원이다 보니까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전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방송을 국유화한 예가 자유세계에 서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감안을 하고 큰 문제는 민간방송들이 자꾸 생겨 나서 봉급이 국영방송직원들보다 3배, 4배나 뛰는데 아무리 우수한 사람, 신념이 있던 사 람들도 방송국에 남어 있기를 꺼려했습니다. {차이가 많이 나니까. 예.} 예. 그래서 방송 공사를 여러 가지 그런 이유에서 설립하게 된 거죠. 어떻게 되면은 그 방송공사가 생기지 않았더라면은 우리나라 언론이라든가 문화계 구조 같은 것은 오늘날과 같은 형태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쨌든 국악 발전에도 굉장히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이렇 게 생각을 합니다. 또 이 방송공사와 거의 동시에 생긴 것이 문화예술진흥원입니다. 그 밖 에 많은 조직과 단체들이 생기게 됐는데 문화예술진흥원이 생기면서 처음으로 문예 진흥 5개년 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 뒤에 지속적으로 승계 받아서 했어야 되는 건 데 5개년 계획이 실시된 다음부터 형식상으로서는 뭐 계속해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만은 정부의 적극적인 문화예술 진흥계획 같은 것들은 그때만큼 활기를 띄지를 못했습니다. 이 제 그 5개년 계획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 문화예술의 기반 조성이었었는데 그 기반조성 의 일환으로 (떨어지는 소리) {아이고, 죄송합니다.} 자연히 국악발전의 계획 같은 것들이 포함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 업무를 실무적으로 그 관장했던 분이 나중에 문화부 차관까 지 역임을 하고 얼마 전까지 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을 했던 김동호 184 씨입니다. {김동 호. 예.} 저도 그때 문화예술 5개년 계획에 추진위원으로 쪼끔 참여한 바가 있습니다. 그 런 과정에서 국악에 대한 인식과 이런 중요성이 쪼끔 증폭이 됐습니다. 근데 한 가지 방송 공사가 개편되면서 제가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게 생각 허는 것이 래디오부에 속했습니다 184 김동호( 金 東 虎, 1937~ ): 전 공무원 영화인. 강원도 홍천 출생. 문화공보부 국장, 예술의전당 초대사장, 문화부 차관, 영화진흥공사 사장,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집행위원회 위원장 등 역임. 현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원 장,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명예 집행위원장. 122

제5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만은 래디오 부의 제작과에 음악계라는 것이 있었고, 연예계가 있었습니다. 연예계는 주 로 방송극이라든가 연예프로그람을 담당하는 곳이고 음악계는 음악전반을 그 관장하는 곳 인데, 공사가 생기면서 그 부서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공사 창립이 외형적으로는 상당 히 화려했지만은 음악방송을 있게 관리해가는 부서가 없어졌기 때문에 정부나 방송에 음 악정책을 본질적으로 수립하는 핵이 되는 그런 기관 같은 것들이 없어졌다고 생각이 됩니 다. 60년대 말부터 소위 민족문화센터의 건립, 추진이 됐는데 민족문화센터의 건립을 추 진하게 된 것은 그때 남북이 처음으로 물밑 교류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7.4공동성명 이 그 발표가 됩니다. 그러기위해 이후락 185 씨가 북한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때까지만 해 도 북한과 남한은 경제적인 면, 또 문화적인 면에서 상당히 북한이 앞선 상태였습니다. 그 리고 평양이 새롭게 도시건설을 허면서 심지어는 일본의 아사히 신문에까지 평양은 지상 의 낙원이다. 아주 깨끗한 그런 그 평양거리의 모습을 소개를 하고 또 옛날 유명했던 원 산 같은 도시도 아주 살기 좋은 도시로 소개가 됐는데 그때 우리 눈을 가장 끈 것은 북한 의 건설된 큰 극장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남북협상을 위해서 갔던 대표들한테 가장 자극적 인 것이 극장건물 이었습니다. 우리는 새 건물이 없고 낙후되었고 그때 뭐 해방 후에 지어 진 건물이라고는 61년에 완공된 시민회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민회관은 크게는 지었습니다만은 극장 개념으로써 그렇게 화려하지는 못했습니다. 72년에 불이 탔지만은 {예예.} 그런 것으로 해서 남산에 국립극장 건물을 민족문화센타라고 하는 이름으로 짓게 됐습니다. 그래서 73년에 건물이 완성이 되서 외형적으로는 자리가 잡혀지게 된 겁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국립국악고등학교의 건물을 짓고, 국립국악원은 신축허자마자 그 소 극장 주변을 국립국악원이 썼습니다만은 겉으로 보면은 셋방살이를 하는 입장이었습니 다. 아무래도 주인이 국립극장이니까. 그러고 부속 건물은 처음에 문화예술진흥원이 출 발할 때도 그 옛 국악고등학교 자리에서 출범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국악고등학교 자리는 국악고등학교가 혼자서 쓰는 것이 아니고 여러 문화기관들이 함께 쓰는 곳으로 변했습니 다. 지금은 국립극장의 박물관이 됐고 거기 쪼끄만 {별오름 극장.} 극장이 있었지만은 그 것을 지을 때도 국립국악원의 공연을 의식해서 지은 건데 불과 150석 정도의 자리니까 그 때 국악을 인식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떠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185 이후락( 李 厚 洛, 1924~2009): 군인 정치가. 경상남도 울산군 출생. 1942년 울산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 일본 규슈( 九 州 )의 다치아라이비행학교( 大 刀 洗 飛 行 學 校 )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았으며, 광복 후 귀국하였다. 5 16군사정 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중앙정보부 부장 등을 지냈다.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을 지내다가 제5공화국 출범 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중앙정보부장 재임중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남북 비밀회 담을 열었으며,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하였다. 123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만 해도 국악은 변두리에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는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남산에 국립 극장이 서기는 했습니다만은 개관작품이 <남한산성>이라는 연극이었었는데, 개관허면서 회전무대가 중간에 딱 서는 사고가 {멈춘거에요? 중간에.} 있어가지고 {사고였네요. 첫 개 막하는 날.} 날부터. 예. 그래서 불길한 감이 들었고. 급기야는 74년도에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거기서 {총살.} 저격을 {아.} 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런 걸 계기로 해 서 대통령은 다시는 국립극장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는 이상하게 거창허게 시 작을 했습니다만은 결과적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 그 이후로도 다른 대통령 들도 안가셨나요?} 다른 대통령도 {갔단 소리를 못들은 것 같네요. 저 있을 때두.} 별로 즐 겨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국립국악원의 공연은 그때까지만 해도 대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저 국립극장에 전속돼 있는 단체가 창극 단인데, 창극단이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또 이후에 판소리 한마당, {완창 판소리.} 완 창 판소리. 이런 것들이 그때부터 시작이 된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앞서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민간방송이 생기면서 국악을 방송을 헐라면은 국악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 는 프로듀서가 있어야 되는데 그런 교육을 받은 프로듀서들은 별로 없었고, 일반 다른 교 양프로그람이나 연예프로그람을 맡았던 프로듀서들이 프로그람을 제작하니까 아무래도 국악프로의 질은 쪼끔 낮아졌다고 이렇게 생각이 되고. 그러나 지난시간에도 말씀을 드렸 습니다만은 동양방송이 그 사주인 이병철 씨 고 故 호암 湖 巖 이 그 국악인들을 많이 좋아해 서 거기에 드나드는 사람들 중심으로 해서 국악프로를 해서 한때 상당히 시청률이 높은 프 로그람으로 등장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 1975년에 들어서서 광복 30주년의 해입니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이북과의 격차도 쪼끔쪼끔씩 생기고 특별히 69년에 인가? 경부고속 도로가 생기면서 물동량이 생기고 지방의 공업단지도 생기고 그러면서 경제적으로는 활 기를 띤 그런 시기가 됐는데. 그때 정부에서 광복 30주년을 축하허기 위해서 광복 30주 년 기념음악제를 하게 됩니다. 기념음악제를 하게 되는데 물론 서양음악이 주축을 이루는 때였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는 서양음악 허는 사람들도 이제 우리나라 국내에서는 별로 인재들이 많이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외국에 유학 갔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두각을 나 타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언론의 초점은 전부 그런 사람들한테 맞춰지게 됩니다. 특별히 60년대부터 한국의 악기를 허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가가지고 그 국제적인 상을 획득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처음에 그 전쟁 195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124

제5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소년이 한동일 186 이라고 하는 {한동일이요?} 예. 피아니스트입니다. 그분은 여기 왔던 공 군 사령관 앤더슨 장군이라고 이름이 기억되는데 전쟁 헌 나라에서 이런 재기있는 피아노 연주하는 사람이 생기니까 미국으로 장학금을 주어서 유학을 시킵니다. 그래서 줄리어드 에 가서 공부를 허고 아마 그 한동일이가 최초로 우리나라 사람으로써는 미국에서 국제 콩 쿨에 입상을 하게 됩니다. 그 뒤에 백건우, 김영욱, 정경화. 이런 사람들이 가고 쪼끔 시 차를 두어서 강동석 이런 사람들이 미국에 가서 국제적인 콩쿨에 수석 입상을 허게 되니 까 한국, 특히 현악기를 하는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그 두각을 나타나게 되고. 또 그 때 비 슷한 시기에 유태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게 그 이작 펄만Itzhak Perlman 187, 그리고 핀커스 주커만 188 이런 사람들이 그 김영옥, 정경화 189 와 나란히 줄리 어드에서 줄리어드The Julliard School와 커티스Curtis Institute of Music에서 이반 갈라미 아Ivan Galamian 190 라고 하는 알매니아 계통의 미국인으로 유명한 분인데 이분의 지도하 에서 한 문하에서 대거 출중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배출되가지고 유태인과 한국 사람들 이 아주 바이올린을 잘하는 사람으로 부각이 돼서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광복30주년 기 념 음악회를 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광복30주년음악제를 할 적에 서양음악제지만은 그때 제가 사무국장 역할을 해서 총 예술감독 같은 위치였었는데 저는 1962년 그 서울국 제음악제 때와도 마찬가지로 {국악을 했죠.} 첫머리에는 국악을 꼭 그 넣어서 국악으로 시 작을 했습니다. 그래야만 뭔가 한국이 서양음악을 하더라도 한국의 전통적인 음악이 있는 데에서 시작을 했다는 상징성 때문에 {그렇죠.} 그렇게 했는데 {그때도 국악원이 연주를 했나요?} 그때는 국악원이 {정악을?} (고개를 끄덕이며) 응, 정악으로. 네. 정악으로 연주 를 했던 그런 기억이 나고. 그때 음악제로서는 상당히 큰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근데 그 186 한동일( 韓 東 一, 1942~ ): 피아노 연주가. 함경남도 함흥 출생. 줄리어드스쿨 음악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텍 사스주립대 교수, 보스턴대 음악대학 교수, 울산대학교 피아노 교수 등으로 역임하였다. 수상내역은 리벤트리트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187 이작 펄만(Itzhak perlman, 1945~ ): 바이올린 연주가. 이스라엘 텔아비브 출생. 현란한 기교로 유명하며, 레빈트릿 콩 쿨에서 우승하여 유명해졌다. 아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가 사망한 후 오늘날 바이올린의 주요 레파토리를 가장 훌 륭히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로 평가받고 있다. 188 핀커스 주커만(Pinchas Zukerman, 1948~ ): 바이올린 비올라 연주가. 지휘자. 이스라엘 텔아비브 출생. 이작 펄먼과 나란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태계 바이올린 주자의 전형적인 한 조류를 잇는 이스라엘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갈라미안 문하의 수재이며 13세에 카잘스(Pablo Casals)에게 인정받아 줄리어드 음악학교에 유학하며, 데뷔 후 레벤트 리트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의 정경화와 공동으로 우승했다. 189 정경화( 鄭 京 和, 1948~ ): 바이올린 연주가. 서울 출생. 줄리어드스쿨 음악학교 졸업. 레벤트리트 국제 콩쿨, 그라모폰 상, 20세기를 빛낸 예술인 음악부문, 21회 호암상 예술상 등에서 입상하였다. 엘리자베스콩쿠르 심사위원, 줄리아드 스 쿨 교수, 실내악단 정경화 체임버 대표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 줄리아드스쿨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음악학부 관현악전공 석좌교수. 190 이반 갈라미아(Ivan Galamian, 1903~1981): 바이올린 연주가 20세기의 영향력있는 바이올린 교사. 1944년부터 커티 스음악원에서 가르쳤고, 1946년 줄리어드에서 바이올린전공의 학과장(the head of violin department)이 되었다. 바이 올린의 주법과 교수법에 관한 책을 썼다. 영국 왕립음악아카데미의 명예회원 역임. 125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런 것들이 또 촉발허게 된 것은 그 당시에 한국일보라고 허는 지금도 있습니다만은 굉장 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 한국일보의 사주가 부총리를 역임한 장기영 씨였는데, 그 분이 흥행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분은 민족문화를 중흥시킨다고 하 는 입장보다는 그 신문의 진가를 좀 올리고, 또 돈도 좀 벌고. 이런 일을 시작을 했었는 데, 예를 들자면은 독일 서커스단을 데려다가 흥행을 헌다던가. 그리고 그러면서도 한국 의 전통적인 것도 소홀히 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 그때 송파산대놀이를 그 주역이 라 할까. 보살피고 그러던 허호영 191 씨라고 하는 아주 있었는데 아주 명물입니다. 만물박 사인데 민속적인 잔치가 있으면은 그 사람이 안끼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은 앞서 과거로 돌아가지만은 전에 문화관광부가 있고 미국대사관이 있는 건물, 거기가 공터 였습니다. 공터였었는데 거기서 한국일보가 독일의 그 서커스단을 초청해서 천막을 치고 했고, 또 연날리기 대회도 했어요. {앞에서요?} 예. 그 광장에서. 그리고 아주 상당히 관 심을 끌었는데, 그 연날리기 대회, 또 팔씨름대회를 많이 했어요. {우리 민속을 찾는 거군 요.} 예. 우리 민속들. 그런 것들을 다 주관했던 분이 허호영이라고 하는 분이고 아주 팔 씨름도 잘하고 이랬던 분인데 지나간 얘기지만 하여튼 그분도 간접적으로 국악 발전에 굉 장히 기여를 많이 하고. 특별히 <송파산대놀이> 같은 것들을 부각시켰던 이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1970년에 그 베토벤 200주년 탄생기념 {탄생기념.} 행사를 그때 한국일보가 주동 기념행사를 했죠. 그때도 제가 연구발표를 했던 일이 있는데 그때를 돌 이켜 보면은 한국은 독일음악의 나라고, 베토벤의 나라였습니다. {(웃음) 근데 그걸 또 많 이 일반인들 많이 찾으니까 그게 또 수요가 있으니까.} 그렇죠. 수요가 있었고 또 어쨌든 간에 그 일본 사람들 하고의 관계, 때문에 독일음악에 대한 선호가 아주 거의 신앙적이었 다고 생각이 되고, 독일음악이 최고의 음악이라고. 그러고 베토벤이 글자 그대로 악성이 라고 이렇게 생각을 했던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럼 상대적으로 국악에 대해서는.} 그런 것은 상대적으로 국악은 {더더.} 그런 것이 올라가니까 국악에 대해서는 {더 열악해 지고.} 더 열악해지고. 그리고 솔직히 그 교육기관으로 국악사양성소가 있었지만은 그건 일반사람들은 잘 가지 않는 곳이고 {예예.} 국악을 세습하는 사람들만 가는 곳으로 {인식 이 됐었죠.} 이렇게 인식이 됐고. 어쨌든 아까 말씀드린 그 민족문화센터의 건립과 함께 그 추진됐던 것이 국악고등학교의 건립이기 때문에 이제 그 73년도 그 윤주영 장관의 이 191 허호영( 許 浩 永, 1915~ ): 송파산대놀이의 탈춤연구 및 연희자.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의 예능보유자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1976년에 해제되었다. 126

제5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시기가 국악에 대한 인식과 국악교육을 궤도에 오른 정부의 정책적인 배려 속에서 국악이 제대로 우리 것으로 인식이 되는 이제 그런 시기였다고 생각헙니다. 1975년에 그때 제일 광복 30주년때 물론 김영욱, 백건우 192 이런 사람들이 다 와서 연주를 했고, 그때 강동석 193 이도 데리꼬 올라고 그랬었는데 병역문제로 해서 이루지 못했고. 74년에 정명훈이가 에 그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2등을 했습니다. 그랬는데 그때 김포 공항에서 서울시내까지 카 {퍼레이드를.} 퍼레이드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의 분위기 가 얼마나 양악에 심취가 됐고 또 한국 사람들이 국제적으로 쪼끔 이름을 올리니까 한국 사람들의 자신감 이런 거에 거 뭐 일조 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1975년에 광복 30주년 이 행사가 음악제를 중심으로 해서 영화제도 하고 그랬습니다만은 그때 제일 부각이 것은 음 악제였었습니다. 유 그러면은 그때 국악을 오프닝을 하고 그 다음에 양악 하시는 {응. 양악.} 분들이 나왔는데 그분들은 국악을 같이 쓰는 거에 대해서는 싫어하지 않았나요? 이 뭐 그래도 프로 프로그램은 따로따로니까. {그래도 같은 현장에서 만나게 되잖아요.} 아니 오. 그런데 날짜가 다르니까. {아, 다른 날짜요?} 그렇지. {아, 그럼 국악을 첫날 하루로 국 악을 하고.} 으응. 그렇죠. 나머지 {둘째날부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예. 그렇죠. 대한민국음악제, 대한민국국악제, 세계음악인대회 이 그런 그리고 그 이듬해에 광복30주년이 성공되니까 그때 장관이었던 분이 그 김성진 194 192 백건우( 白 建 宇, 1946~ ): 피아노 연주가. 서울 출생. 미국 줄리어드음악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71년 뉴욕앨리스튤 리홀서 첫 독주회를 하고 국립관현악단과 미국순회공연을 하였다. 부조니콩쿠르 금상, 나움버그콩쿠르 1위, 프랑스 황 금디아파종상, 은관문화훈장(2010) 등 수상. 193 강동석( 姜 東 錫, 1954~ ): 바이올린 연주가. 서울 출생.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한 뒤 국제적으로 알려 졌고 메뉴인(Yehudi Menuhin)의 추천으로 파리에서 데뷔하면서 바이올린의 표범 이라 불리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콩 쿠르 3위, 몬트리올 콩쿠르, 칼 플레시 콩쿠르에 입상하였다. 194 김성진( 金 聖 鎭, 1931~2009): 황해도 해주( 海 州 ) 출생. 한국일보 기자, 워싱톤특파원, 정치부장,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 청와대 대변인, 제4공화국 문공부장관, 연합통신 초대 사장 역임. 127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씨라고 허는 분이에요. 청와대 대변인도 하시고 그러던 분인데 문화에 대한 의욕도 많고 그래서 대한민국음악제 를 만들면 좋겠다. 그래서 최초로 국가 주관의 대한민국음악제를 만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대한민국음악제 때는 국악을 처음에 넣지는 않았던 것 같아 요. 제 기억으로는. 그대신 창작, 그때는 연주가 중심이고 그 특히 그때 동구권하고 교류 같은 것이 물밑으로 시작이 될 땐데. 제일 만만했던 나라가 유고슬라비아였었습니다. 그 래서 유고슬라비아에서 두 사람의 음악가를 데리고 왔죠. 지휘자는 니키자 바레자Niksa Bareza라고 하는 사람이고 그 피아니스트는 브라드미르 크르판Vladimir Krpan이라고 하 는 사람인데, 어쨌든 동구권과 물꼬를 트고. 그리고 그 음악한국이라 할까 이런 입지를 쪼끔 다지는데 대한민국음악제가 기여를 한 바가 큰데 그때도 제가 사무국장 역할을 맡 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광복30주년 기념음악제가 성공을 허니까 그때 세종문화회관이 마 침 기초공사를 하고 집을 짓기 시작할 땐데, 총리가 김종필 195 씨였었어요. 그 분이 상당 히 음악에 대한 이해가 아주 깊었고 특히 국악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분입니다. 그래서 아 무래도 뒤에서 국악 발전허는데 상당히 그 김종필 씨의 힘 같은 것들이 많이 그 작용했다 고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 세종문화회관의 그 개관을 준비하고 또 한편으로 그 제1회 대 한민국음악제도 준비를 하고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을 했었는데. 그 중간에 이제 어떠한 일이 있었느냐 하면은 1977년에 대학 아 국제청소년음악연맹세계대회가 한국에서 있 었습니다. 그때 음악 관계 그 국제적인 행사로써는 최초의 행사예요. 그래서 3천명 정도 의 그 외국 사람들이 왔었습니다. 굉장히 큰 그 잔치였었죠. 그리고 이 운동이 어디에서 시작했느냐 허면은 해방 이후에 2차 대전 끝나고 나서 그 벨 기에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국제연맹은 벨기에와 프랑스 그 두 나라가 주동이 돼서 시작을 했는데. 그 동기는 2차 대전 어려울 적에 벨기에 사람들이 그 폭격 중에 지하실에 숨어서 사람들이 그 좋은 음악을 듣고 위안을 받고 했기 때문에 장차 청소년들을 건강하게 키울 라면은 좋은 음악을 들려줘야 된다. 그래서 음악을 듣기 위해서 접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고, 특별히 대표적인 게, 일류음악가들을 그 단체가 초빙을 해가지고 그 일류음악가들 한테 사례를 쪼끔만 받고. 그리고 청소년에게는 아주 싼 값으로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운 동을 시작을 했습니다. 제가 벨기에 유학을 허는 동안에 그 운동이 조금 좋겠다 이렇게 생 195 김종필( 金 鍾 泌, 1926~ ): 자민련 총재. 호는 운정( 雲 庭 ). 충남 부여 출생. 1947년 서울대학 사범대 교육학부 2년을 수료 하고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임관, 주로 참모직을 역임하였다. 1961년 중령으로 5 16군사정변의 주역으로 참여하 였고 1963년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을 지냈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민 자당 대표위원을 지내던 중 1995년 2월 민자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총재가 되었다. 128

제5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각을 해가지고 돌아와서 의논을 해가지고 72년도에 국내 단체를 그때 제일 관심을 가지 고 있고. 또 청소년 교육, 예술 교육에 앞장선 학교가 서울예술고등학교니까 교장 임원식 씨 허고 의논을 해서 조직을 했죠. 그래서 임원식 씨가 회장이 되고 제가 초대 사무국장 을 했는데 그때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영자, {네.} 뭐 또 서우석 196, {네.} 또 이성재 197, 이 성재 씨가 부회장을 했고. 그리고 또 그 예고 교장 허던 정우현 198 {작곡가들 중심으로 했 네요?} 예. 성두영 199, 이런 분들이 아무래도 연주가보다는 쪼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필 요로 해서 73년에 이스라엘에서 그 대회가 있을 적에 우리나라가 참석해가지고 그 회원 국이 됐습니다. 진땀을 빼면서 회원국이 됐는데 그때에 회원국이 미쳐 안 된 쥬네스 뮤지 컬Jeunesses musical(유스뮤직youth Music) 에서 행사 중의 하나가 월드 오케스트라를 조 직하는 일입니다. 아마 그 세계 각국사람들을 모아가지고 오케스트라를 조직한 첫 번째 죠. 청소년이지만은. 그래서 그걸 모집허는데 이스라엘에서 할 적에 두 사람을 우리가 파 견을 했어요. 그게 이택주 200 라고 하는 사람이고, 이화여대 교수인 바이올리니스트고. 그 리고 한 사람은 비올라를 하는 유관일이라고 허는 사람인데 지금 홍콩필하모닉 연주자로 있습니다. 두 사람을 보냈는데 현악기 연주자들이죠. 거기서 두각을 나타내서 이택주는 악장이 됐어요. 우리나라 그 음악가들이 외국에 가서 이런 조직적인 단체에서 악장을 허 고 하니까 그때 국내에서 굉장한 화제가 되고 그 대표로 뽑혀 가는 것도 오디션을 해가지 고 뽑아가는데. 그때 예루살렘에서 연주를 하는데 지휘는 누가 했느냐면 주빈 메터 201 가 했어요. 그러니까 청소년 오케스트라지만은 굉장히 연주자의 기량도 좋고 한 달쯤 합숙 해가지고 오케스트라를 만드는데 그 힘이 넘치자나요. 그래서 굉장한 환호를 받았던 일이 있고. 그 아마 많은 사람들이 거기 참여를 해서 거의 2000년대까지 주욱 참여를 했는데 한 100여명의 그 연주자들이 참여를 해서 그 사람들이 국제무대에서 교류를 허는 그 국 196 서우석( 徐 友 錫, 1940~ ): 작곡가 음악평론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및 동대학원에서 작곡을 공부하였다. 서울대학교 교수, 청소년교향악단진흥회 회장 등 역임. 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7 이성재( 李 誠 載, 1924~2010): 작곡가. 호는 석천( 石 泉 ). 경기도 이천 출생. 서울대학교 음대 졸업. 서울대학교 음대 교수 역임. 198 정우현( 鄭 佑 賢, 1926~ ): 작곡가. 경남 함양( 咸 陽 ) 출생. 서울대학교 음대 작곡과 졸업. 1975년부터 서울예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1992년 정년퇴임하였다. 작품으로 <교향곡>과 <현악 4중주> 등이 있다. 학교법인 이화예술학원 이사 역임. 199 성두영( 成 斗 永, 1929~ ): 작곡가 음악평론가. 서울 출생. 정종길( 鄭 鍾 吉 ) 이문근에게 작곡을 배웠고, 파리사범음악원 을 졸업했다. 1970년 귀국해 성신여대 등의 강사를 거쳐 1976년 이화여대 음대 작곡과 교수로 활동하다가 1993년 정년 퇴임했다. 200 이택주(1951~ ): 바이올린 연주가. 세계청소년교향악단 한국대표, 서울시립교향악단 악장 역임.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201 주빈 메터(Zubin Mehta, 1936~ ): 지휘자. 인도 봄베이 출생. 7세 때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공부하였고, 1954년에 빈 음악아카데미에 들어가 스바로프스키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58년 리버풀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 1959년에 빈 필하모니에 데뷔하였다. 몬트리올 교향악단(Montreal Symphony Orchestra)의 음악감독.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음 악감독,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지휘자, 뉴욕 필하모닉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 역임. 이스라엘 필하모닉 음악 고문. 129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1973년 9월 세계청소년 음악연맹총회 참가 당시 이스라엘 갈릴리호수에서 (가장 왼쪽은 비올리스트 유관일, 가운데는 바이올리니스트 이택주, 그 옆은 구술자 이상만) 제적 활동에 큰 그 발판을 만들어 준건데, 그 얘기는 지엽적인 얘기고. 그때 그 30주년 (전화벨이 울려 잠시 멈춤) 유 그 얘기는 좀 이따 다시 얘기 해주시죠. 선생님. 아, 끊겼네요. 예. 계속하시죠. 이 예. 30주년 기념이 되던 그런 해였어요. 1947년에 그 연맹이 시작이 되서 77년에 그 30 주년이 되는 해니까. 제가 뭐 이 얘기는 쪼금 허는 것이 쫌 좋을 것 같아요. 이스라엘에 딱 가가지고 끄때. 이 하나만 중간에 조금 잊어버린게 있어서 1976년에 대한민국음악제가 생기고 난 다음에 그 재빠르게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들이 {무용.} 무용허는 사람들 {대한민국무용제가 생 겼죠.} 대한민국무용제가 음악제 다음으로 생기게 됐습니다. 무용하는 사람들은 몸을 움 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행동도 조끔 빨라요. 그리고 그 다음에 연극제가 생겼고. 그 제일 마지막에 국악제가 생겼습니다. 그걸 보면은 국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느린지. {여 유가 있는 거죠.} (같이 웃으면) 아니, 그러고 그때는 잘 기관이 조직화가 안 되고 그래서 그 시작헐 때도 문예진흥원이 주도해서 시작을 해가지고 나중에 국악협회로 넘어갔다가 국악협회가 잘 못하니까 KBS로 {KBS.} 갔다가 지금은 {다시 또 국악협회로.} 국악협회 로 갔는데 그런 상황을 거치게 됐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까 말씀드리다가 그 중단됐던 쥬 네스 뮤지컬, 세계음악인대회에 그 얘기를 하자면은 제가 73년에 그 예루살렘에서 그 총 회가 있어서 거기에 참여를 했었는데, 우리나라가 가입하는데 굉장히 까다롭더라고요. 조건이.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때 그 불어를 하시는 이영자 씨를 모시고 가서 공용어가 그 당시만 해도 불어를 더 중요하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해서 그 이걸 가입을 하고 그 130

제5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때는 국제기구에 가입을 헌다고 허는 것이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고. 그 운동을 기초를 시작을 했던 사람으로서 감개가 컸죠. 그래서 가입허고 나서 그 예루살렘에 골고다 언덕 에 올라가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면서 그때 회장이 질르 르파브어Gilles lefebvre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캐나다 사람인데 캐나다에서 그 문화부 차관까지 지내고 파리 문화원장까지 역임한 그런 사람인데 아주 대단한 사상가고, 일을 많이 했던 훌륭한 분이 었어요. 그래서 그분 앞에서 내가 빠른 시일 안에 이 대회를 서울에 유치를 허겠다고 포부 를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아 좋다고 아주 그걸 잘 뒷받침 해주드라고요. 그래서 73년 에 가입했는데 가입헌 지 4년 만에 그 세계대회를 유치를 헌 것은 우리나라로서는 대단한 문화적인 사건으로 기록이 됐죠. 근데 그때 개회식을 어디에서 했느냐면은 3천명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니까 {세종문화회관 밖에 없었겠네요?} 아니 그때는 세종문화회관이 {없 을 때.} 없을 때고 {아 예.} 국립극장은 {1800석정도.} 예. 쪼끔 적고. 그래가지고 그때 도 뭐 이렇게 그 집회보다는 텔레비전에 중계가 되는냐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래서 국 립극장의 소극장에서 개막식을 했어요. 그때 실질적인 그 주관은 뭐 그 한국청소년연맹이 했지만은 그 연맹자체가 실질적으로 기능을 가진 그런 단체는 아니었기 때문에 국제문화 협회라고 하는 지금은 그게 국제교류재단이 됐습니다. 그때에 국제문화협회에 회장이 홍 성철 202 씨라고 장관도 역임하고 청와대 비서실장도 역임하고 하여튼 우리나라 정계, 문화 계의 거물이었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만, 그 분이 회장을 맡을 때니까 그 문화협회가 자 기네들이 돈두 다 대고 그렇게 해서 이것을 맡아주겠다. 그래서 실질적인 일은 국제문화 협회가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국제문화협회에 김광이라고 하는 분이 사무총장, 실질적 인 사무총장. 그러고 아무래도 이 기술적인 문제 이런 것들은 연맹 측에서 참여해야 되니 까 저 허고 둘이서 공동사무총장을 해 했고, 국제적인 여러 가지 관계는 제가 책임을 맡 고 김광 씨가 국내에서 조직하고 하는 것은 그분이 맡았는데 유능한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걸 치루면서 개회식을 허는데 제가 국제연맹이 30년이 되는 해니까 한 세대가 지나서 는 새로운 전통을 수립을 허야 되겠다. 이제까지는 그 서양음악 위주로 이 운동이 전개가 됐는데 최초로 동양에서 개최되는 대회인 만큼 한국적인 색깔을 입혀야 되겠다 그래서 여 러 가지 순뇌진들과 의논하고 그때 회장은 킬드 한센이라고 하는 덴마크 사람이었고. 그 202 홍성철( 洪 性 澈, 1926~2004) 외교관. 본관은 남양( 南 陽 ). 황해도 은율군 출생.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 부대에서 통역 임무를 맡았다. 주미 참사관 및 공사, 국무총리비서실장,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내무부 장관, 보건사회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국토통일원 장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 역임. 은퇴 후에는 고 향을 잃은 이북5도민들의 모임인 황해도민회 명예회장으로 일하였고, 소록도 나환자들을 돕는 상록회를 주도하여 소 외된 이들을 도왔다. 131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상임이사가 벨지움 사람이었는데 벨지움이 그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상임이사는 벨 지움 사람이 허게 되는데 아드레앙 도네Adrian donnet라고 하는 사람이었었는데, 실질적 인 결정권한은 그 상임이사가 가지고 있었는데. 저 허고 벨지움 시대부터 교분을 쌓고 그 래서 잘 아는 분이거든. 그래서 그분을 설득해서 마침 월드오케스트라가 조직이 됐는데 그 사람들이 개회식에서 연주를 허야 되는데 그 분은 따로 국립극장에서 연주회를 마련을 해 줄 테니까. 개회식만은 우리나라 음악으로 시작을 했으면 좋겠다 이런 제안을 했어요. 아주 선선히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음.} 그래서 국립국악원 아악단이 개회식 연주를 했 어요. 그게 문화사적으로 보면은 획기적인 일이죠. 이런 그 세계음악기구의 아주 중요한 단체, 이 단체가 결국 지금 유네스코를 만들게 한 우산대의 하나인 단체니까. 그 세계음 악기구로써는 가장 실질적이고 그 왕성한 활동 하던 단체였어요. 청소년단체이긴 허지만 은. 그러나 회원들이 청소년이고 그걸 그 관리하는 사람들은 전부 성인들인데. 그래서 아 악을 연주를 허게 되는데 국립극장 소극장이 아주 작잖아요. 그런데 한국적인 관례로 해 가지고 주최측과 사람들이 단상을 점검하다보니까 거기는 오케스트라 {쓸 수가 없죠?} 쓸 수가 없고 그래서 2층 구석에다가 놓고 개회식을 음악을 연주를 했어요. {국악을요?} 국 악을. {객석 2층에다가?} 예. 객석 2층에다가 놓고 그랬는데 뭐 헐 수 없는 조치였었죠. 그러고 아무래도 그때 국제문화협회면은 아무래도 장관도 나오고 그러는데 그 사람들도 예후를 해주고 그럴라면 단상을 그사람 {무대도 올라와야 되니까.} 그래서. 나는 차라리 그런 단상배치를 허지 않고 사람들은 객석에 앉고 국악원을 탁 무대에 딱 세우고 얘기헐 때만 딱 그 이렇게 무대에 올라가서 얘기 허게 허고 하는 이런 것을 헐라고 그랬었는데 그 건 제 뜻대로 안됐어요. 유 근데 그 당시 그 국악원 연주자들이 2층의 객석에서 하라고 해도 연주를 했나요? {했죠.} 그게 가능해요? 객석자리에서. 가야금 같은 경우는 놓을 수가 없잖아요. 이 한구석에서는 어쨌든 간에 {만들어서.} 예예. 만들어서.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그걸 허 고 났더니 난리가 난거야.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 왜 이런 좋은 음악을 가운데다가 놓지 않고 {구석에서 하느냐.} 이렇게 구석에서 하느냐. 참 유감스럽다. 그리고 이 한국의 아 악이 이렇게 훌륭한 음악인줄은 몰랐다. 정말 감동적이고 이게 그 쥬네스 뮤지컬 그 역사 에 길이 남을 일이다. 간단한 개회식의 상징적인 연주가 그 사람들한테 그렇게 그 감명을 주었어요. 그랬는데 어쨌든 간에 두 가지 효과는 있었어요. 구석에서 연주허니까 사람들 의 전부 시선이 글로 가는 거라. {오히려 더 뭔가 하고 또. 예.} 응응. 예. 그런데 {그런데 2층이면 1층에서 안보이잖아요.} 응? {객석이 2층이었으면 1층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132

제5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그런데 옆 구석에서 해서 일부가 보일 수 있게 그렇게 해놨는데 무대에서는 다 보이지. {그렇죠.} 예. 그랬던 일이 있는데 그게 쪼끔 기획한 사람으로써는 자존심도 상허고 {네.} 그러나 어쨌든 간에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런. 아쉽네요.} 예. 그런 계기를 마련해주 고 그때 전부 귀를 가진 세계의 그 음악지도자들인데 그 사람들한테 그 아악을 이렇게 보 여줬다는 것은 참 그 대단한 일이었어요. 물론 그 전에 국립국악원이 유럽연주를 했죠. 크로더 사무엘 지난번에 말씀드린 그분이 블란서 사람이 주선 해서 주로 독일, 블란서를 돌고 그래가지고 유럽의 심장부에서는 한국 아악이 대단한 음악이다라고 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런 인식이 있었는데, 어쨌든 실지로 한국에 와서 그런 음악을 듣고 홍주의 를 입고 그렇게 연주하는 이런 모습에 세계 중요한 음악가들이 매료되었다고 하는 것, 이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생각 허고, 그때 한국측의 많은 사람들은 모두 이걸 반대했어 요. 심지어는 그 연맹의 한국 회장인 임원식 씨까지도 못마땅해서 왜 네 맘대로 허느냐. 이런 비난까지도 받으면서도 그걸 강행했던 것이 제 일생의 보람이 있는 일이 아니었는 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세종문화회관 개관, 5 16음악전 개최 이 그 이듬해에 결국 78년 4월 14일에 드디어 세종문화회관이 문을 열게 됐죠. 근데 이미 세 종문화회관은 국제회의장으로 설계가 됐고, 그때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고 하는 것이 생 겨가지고. 남북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여기서 회의를 헌다 하고 그때는 국제회의장이 없었 어요. {그 이름이 대강당이었죠.} 처음에는 대강당이었죠. 대강당이었었는데, 이것은 국 제회의장으로 지을라고 마음을 먹은 거죠. 그랬는데 제가 사무국장으로 가서 보니까 국제 회의장으로 지어 놓으면은 몇 번이나 쓰겠는가. {그렇죠.} 나머지 시간은 어떻게 {이용.} 이용을 하느냐 하는 문제가 그 대두가 되드라고요. 그리고 그때만 해도 그대로 시민회관 이에요. 이름은. 시민회관을 복원허는 거니까 시민회관인데, 이러고 곰곰이 생각 하는 데 그때 광복30년 성공적인 그 행사를 치루고 총리실에 주관을 헌거거든요. 그리고 건설 133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은 서울시에서 그 허는 거고. 저는 그때 방송공사에 부장의 신분이었어요. 앞서 말씀 드 렸듯이 음악부가 없어지니까 제가 다른 부서로 돌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일 을 거쳤는데 제가 성장하는데 많이 도움이 됐지만은 하여튼 75년부터 주욱 밖으로만 나 가 돌았는데. 그때 서울시는 총리실 직할이었습니다. 그리고 방송공사 직원이 정부부서 로 파견허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그랬는데 더군다나 문화관광부가 관리하는 공사인데 서울시에 파견한다는 게 앞뒤가 맞지 않죠. 그래서 형식은 광복30주년은 총리실 파견이 고 그런 연장선상에서 {서울시.} 예. 서울시 준비를 허게 됐는데 그때 그 나하고 관계됐던 저 분 하나가 거기 비서실장 같은 분이 분이고. 이 얘기를 허자면은 이제 그 옛날로 돌아 가야 되는데, 이제 60년대에 그 5.16민족상이 제정됐어요. 그래서 5.16민족상을 제정 허면서 아무래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 그래서 5.16콩쿨 같은 것을 하나 만들어야 되겠다. 그래서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이런 단체에서 콩쿨이라는 외래어를 쓴다는 것이 아 주 부담스러운 그런 때였습니다. 그랬는데 그때 마침 그 일을 그 주관했던 사람이 음악전 문가로써는 제가 그 참여를 했는데. 제 위에서 중간역할을 해주었던 분이 한글학자 한갑 수 203 씨에요. 그 분이 5.16주최세력들 하고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원래 이 양반이 전공 은 성악이에요. 일제시대 성악을 전공허다가 나중에 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도 허 셨던 분인데 그때는 그 양반이 아마 국어를 가르켰던 것 같아요. 양반이 외국어에 재주가 있어가지고 공군에 들어가서 또 영어통역 장교 역할을 하고 그러던 분인데. 한갑수 씨가 그 당시로써는 KBS에서 우리말의 바른길 이라고 하는 그 강좌도 갖고 그래서 아주 유명 했던 분이죠. 그분이 중간에 들어서서 이 콩쿨을 음악전 音 樂 典 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했어요. 하나는 서양음악 콩쿨은 뭐 그때도 상당히 많으니까 국악 콩쿨 을 쪼끔 허야 되겠다. 근데 이것은 전부 청소년대상입니다. 그래서 5.16음악전을 실시 를 허게 된 건데 그때 국악부에서 특상을 받은 사람이 강문득이. 에 그분이 특상을 받고 하여튼 그때 그러고 양 한양대학에 {양연섭.} 양연섭. 몇 년 허다가 중단이 됐는데. 그 거 헐 적에 과제곡을 우리나라 신작을 부여를 했어요. 그래서 가야금 경연을 헐 적에 60 년대 말이니까 이성천 씨의 작품을 가야금 과제곡으로 이렇게 선정을 해서 그것이 5.16 민족상이니까 굉장히 권위와 또 상금도 많았고. 그래서 거기에 입상하면은 최고의 영예였 203 한갑수( 韓 甲 洙, 1913~2004): 국어학자 한글학자. 경기도 가평군 출생. 1941년 일본 메이지대학( 明 治 大 學 )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주오( 中 央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성악을 공부하였다. 1948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중앙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54년 미국공군대지휘참모학교를 졸업하였고, 1975년에는 미국 유니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글학회 회장, 한글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KBS 라디오 바른 말 고운 말 에 출연, 한글의 바 른 용법을 알렸다. 세계교육재단 평화문화상수상. 저서로 바른말 고운말 사전, 국어대사전 이 있다. 134

제5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었어요. 거기 과제 곡에 국악창작곡이 들어가니까 이게 그 창작에 대한 값어치가 굉장히 상승을 했는데. 그걸 제가 우겨서 말하자면 과거 곡만 가지고는 안 된다. 새로운 곡도 연 주할 수 있는 기량을 가지야만 살아있는 연주가가 되지 않느냐.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습 니다. 그런 걸 지나다보니까 거기 분들허고 교분을 맺게 되고 그분의 한분이 그 {입상자 요?} 아니 저 그 5.16민족상의 사무국장을 하던 분이 아 난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이명 춘 그런분인데 그 그분이 그때 그 총리의 조정관인가 높은 역할을 했어요. 그러고 5.16 아 광복30주년 그 음악제를 헐 적에 총리실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줬던 분이 그 아마 총리 조정실장이었을 것 같은데 박승복 204 씨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뒤에 샘표간장의 회장이었어요. {박승복.} 예. 박승복. 그분이 절대적인 후원을 했죠. 그래서 그분허고도 교류가 생기구 그래가지고 서울시 공무원들은 여러 가지 결제 같은 걸 맡을려면은 힘들어 했어요. 어려운 결제 같은 것은 나를 앞세웠죠. 그래서 제가 가면은 보지도 않고 사인을 하니깐. 그런 인연이 있었는데. 이명춘 {그럼 그분이 하시던 일이? 소속이 어디였던 거에 요?} 5.16민족상 사무총장을 했고 나중에 타워호텔 그 사장도 하셨던 그런 분인데 하여 튼 5.16혁명 때 대령 출신인데 황해도 분인데. 하여튼 그분의 도움으로 총리실은 쉽게 드 나들 수가 있었고. 또 김종필 씨 하고는 그런 관계를 떠나서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분이니까 사적으로 그분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많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세 종문화회관을 지으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다 했어요. 이게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허자면은 적어도 5천명 정도의 그런 좌석이 필요한데, 이건 아무리 해도 그런 좌석은 나오지 않는 다. 기껏 늘려봤자 3800석 정도 이렇게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이 회의장으로 지어 놓으면 쓸모가 없게 된다. 그래서 그때 제가 필리핀에 자주 갔었었어요. 갔는데 필리핀은 그 당 시에 우리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고. 마닐라에 있는 그 필리핀 마닐라 문화의 전당cultural center를 70년대 초반에 이미 완성을 했거든요. 그래서 아시아에서는 제일 최초로 그런 큰 규모의 그런 그 공연장을 지었고. 또 그거에 의해서 그 이멜다Imelda Marcos라고 하는 그 대통령 부인이 성악가 출신이거든요. 그래서 필리핀을 세계 알리느라고 미스 유니버 스 대회를 유치를 했어요. 그래서 그 유니버스 대회를 유치하는데 단기간에 집을 져야허 기 때문에 30개 회사가 붙어서 석 달 동안에 {건축을.} (고개를 끄덕이며) 건축을 다 지었 어요. 그런 나라였거든요? 내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은 그 문화공보부가 쓰던 광화문 미국 대사관, 이 건물이 유솜USOM:Unitel States Operations Mission(미국대외원조처) 건 204 박승복(1922~ ): 기업인. 샘표식품 대표이사 회장. 135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물인데 그 공사는 필리핀 사람들이 와서 했어요. 20년만 임시건물로 쓰고 헐기로 했는데 지금 그 건물 진지 50년 넘는데 아직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장충체육관도 필리핀사람들 이 지었고. 그래서 그때 마침 그 그런 것을 해놓고 바다를 매립해가지고 국제컨벤션센터 를 지었는데, 짓고 나서 그 72년도에 지었는데 짓고 나서 국제회의를 4번 밖에 못했어요. {음.} 텅텅비는거지. 그런데 그런 정보를 알고 내가 그 그걸 {물밑 작업을 하셨군요. (웃 음) 물밑 작업.} 응. 물밑작업 허야되겠다. 64년 일본이 올립픽 대회를 치뤘는데 경기장 근처에다가 NHK 새 홀을 지었어요. 근데 지을 적에 주로 공개방송 홀로 그 생각을 허고 지었는데 그때 일본의 그 NHK회장이 그 선견지명이 있었던 그런 분이라 공개방송 하나 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 그때 NHK심포니도 있고 하는데 이 심포니도 여기 와서 공연을 하고 예술적인 이런 그 {장소로.} 장소로 지어야 되겠다. 그래가지고 중간에 설계 변경을 해가지고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를 했어요. 저는 방송국에 있을 때니까 그런 정보가 많을 때고, 그래서 그걸 머리에 떠올라서 애당초 설계가 없어가지고 옆에다가 파이프 오르간 을 붙였거든요. 그래서 그걸 알고 제가 총리실에 건의를 한 거에요. 속마음으로는 말뚝을 박고 싶은데 그럴라면은 뭔가 기능과 상징성이 있어야 되잖아요. 우리도 파이프 오르간 을 하나 {하자. (웃음)} 하자. 그렇게 했더니 김종필 총리가 무릎을 탁 치고 그거 좋은 생 각이다. 그때 파이프 오르간 붐이 조금 불어서 연세대학교의 그 곽상수 205 교수라고. 그 분이 치밀한 분인데 아주 파이프 오르간의 찬양론자고 그 분의 도움도 많이 받아서 결국 은 우리도 파이프 오르간을 하나 짓자. 그래서 설계에 없던 파이프 오르간을 짓게 된 거에 요. 그래서 세종문화회관에 가시면은 {상징이죠. 예.} 옆에 그게 붙어 있는거에요. {예. 때 만든 게 계속.} 예. 그때 만들었는데, 일본이 그때 파이프 수가 7,700개 였었어요. {아, 우리나라에 있는 건.} 그래서 일본꺼 보다는 크게 만들어야 되겠다. 그래서 8,800 개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만들적에 저는 속마음으로 파이프 오르간 가지고 한국음악도 쪼 끔 연주를 할 수 있게 허면 어떻겠느냐 하는 이런 생각을 속마음으로 했어요. 그래서 그 제작진들하고 그 의논을 하고 그러다 보니까 도저히 파이프 오르간을 만들라면은 음정이 고정이 돼서 그 파이프를 5음음계의 음률에 맞춰서 파이프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시간 과 기술과 확보가 안되서 {그렇죠.} 그때 그 전자적인 장치가 발전이 돼서 거기다가 그 전 자음향 장치를 해서 음을 쪼끔 미끄러지게 하는 것을 제가 요구했더니 그것도 자기 기술 205 곽상수( 郭 商 洙, 1923~2013): 교회음악가 지휘자 파이프오르간 연주가. 1947년 9월 서울대기독학생운동의 일환으로 성 종합창단( 聖 鍾 合 唱 團 )을 창단하였다.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역임. 제1대 및 2대 한국오르가니스트협회 이사장, 제1 대 교회음악학회 회장 역임. 136

제5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로서는 {기술로는 안되고.} 안되겠다 해서 결국 그 낙착된 것이 외형만 한국적인 디자인 을 그 하자. 그래서 파이프의 케이스가 거문고 모양을 딴 거에요. 그리고 끄트머리에 그 스페니시 트럼펫spanish trumpet이라고 앞으로 나오는 그런 그 파이프가 있는데 그것은 한국 지붕 {기와.} 처마 같이 그런 곡선 라인으로 허고. 그리고 그 거기다가 범종 梵 鐘 을 달 은거라고요. 그게 상징적이지만은 대단히 중요한 구상을 헌 거죠. 그리고 이름도 시민회 관. 너무 촌스럽다. 그래서 그때 일본의 동경문화회관이라고 하는 그런 그 공연장이 있었 는데 일본 동경에서는 제일 활발하게 헌 그 그때로써는 새로운 건물이었어요. 그래서 문 화회관이 쪼끔 좋지 않겠느냐 해서 처음에는 서울 문화회관으로 구상을 했었어요. 그랬 는데 이제 곰곰이 생각을 하다보니까 아무래도 파이프 오르간도 뭐 외형적으로는 한국적 인 냄새가 {나긴 나지만.} 나지만은 그런데 또 너무 {마음에 안차신.} 서울문화회관도 앞 에 이름을 붙여야 되겠는데 여러 가지 고민을 많이 했죠. 개관 한 1년 전쯤 해가지고 그 때 이름 때문에 고심을 허다가, 그때 예술원 회장이 박종화 206 씨였어요. {시인이요?} 작가 죠. 그래서 그 양반이 소설 <세종대왕> 작가죠. 그래서 내가 그 소설에서 감명을 많이 받 았거든요. 그래서 세종대왕의 업적 이런 것들이 부각이 되드라고. 그래야만 쪼끔 한국적 인 독특한 뭐가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이렇게 보았더니 거기가 바로 세종로 아니에요. {그 당시에도 세종로였던거죠.} (고개를 끄덕이며) 세종로였죠. 그러고 내가 동아일보에서도 근무를 했으니까 거기도 세종로라. 세종로, 세종이라는 것이 떠나지 않는 거죠. 마침 그 저 통의동 쪽에 세종문화 세종대왕의 생가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말패라도 박 아놨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을 때였고. 그래서 박종화 선생을 찾아갔죠. 근데 그때 직 제상으로 봐서는 시민회관 이라는 직제가 아직 살아있어서 관장으로 배문환 씨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내무국장도 하고 그 서울시에서 고위직도 하고 나중에 그 시설관리공단 이사장도 그랬던 분인데. 이분이 참 충청도 분인데 생각도 깊고 그 아주 문화적인 의식도 강하던 분이었죠. 그래서 그분하고 아주 긴밀하게 마음이 맞았어요. 그래서 지금으로 말 하면은 그분은 주로 외형에 공사 추진이라든가 하는 것을 감독하고, 저는 그 알맹이를 채 우는 그런 역할을 허는데. 그 분이 관장이지만은 내가 예술제 사무국장으로 파견했지만 은 자기 직원도 아니고 또 그 외부에서 간 사람이니까 비교적 대우를 받아 가면서 일을 추 진을 했는데. 그 분허고 긴밀히 연락을 해가지고 박종화 선생을 같이 찾아뵈었을 겁니다. 206 박종화( 朴 鍾 和, 1901~1981): 소설가. 호는 월탄( 月 灘 ). 서울 출생. 소년시절 사숙( 私 塾 )에서 12년간 한학을 수업한 뒤 1920년 휘문의숙을 졸업하였다. 동국대, 성균관대, 연세대 교수 역임. 예술원 종신회원 및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으로 활동했다. 제1회 예술원상, 5 16민족상, 문화훈장 대통령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 수상. 137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이름 좀 하나 지어주십시오. 그랬더니 (갸우뚱 하며) 아 자네 생각은 뭐가 좋겠는가. 그 렇게 했더니 저는 거기가 세종로고 또 그 하나의 그 한국문화의 상징이니까 한국적인 이 름을 짓는 게 좋겠는데, 저는 세종문화회관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벌써 박종화 선생 의 마음을 읽은 거야. 뭐 그 세종대왕 소설을 쓴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귀결되리라고. 무릎을 탁 치시더라고. 그거 좋은 생각이야.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박 대통령께 편지를 하나 써주십시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쓰신거에요?} 지필묵을 딱 끄 내시더니 장문의 (서예를 하는 동작을 하면서) {왜 그렇게 지어야 하는지?} 예. 그러고 대 통령께 딱 그 보냈었다고. 근데 또 박 대통령도 박종화 씨를 좋아했고 또 공식적으로는 예 술회 회장이고, 이 분이 편지를 보내니까 옆에서 얘기할 사람이 없는 거야. {그렇죠.} 그 래서 나중에 그 편지를 발송 발송하는 건 아마 배문환 씨 그 관장이 했을 꺼에요. 그래서 그 저 청와대에서 이렇게 허라. 이렇게 그 지었고 그것은 여러 가지 그 짓는 건축의 소재, 세종문화회관의 건축 양식 이런 것이 그때 엄덕문이라고 허는 분이 그 설계를 허셨는데 지붕의 소재, 또 기둥 이런 것 등등이 굉장히 한국적인 건축양식 창작에 발판을 두고 설 계를 허셨거든요. 그러니까 세종대왕의 그 소위 그 창의적인 생각허고 그 이름이 딱 맞아 {맞았군요.} 떨어진 거죠. 그래서 결국 세종문화회관 이름이 {지어진거에요.} 지어진거 에요. 그렇게 허고 나중에 휘호를 박 대통령이 문화예술의 전당이라고 그 휘호를 내려줬 는데 문화 자 빼고 예술의 전당 이 바로 예술의 전당 이름이 된 거에요. 그니까 이름 하나 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런 것을 했고, 그게 되니까 프로그람 이런 것들이 모두 팔 리게 된 거에요. 그리고 그때 157개 공연을 했는데 서양음악만 헌 것이 아니라 연극, 또 국악, 또 무용, 이런 것들이 복합이 되어가지고 세종문화회관 개관 행사가 역사적으로 상 당히 중요한 뜻을 갖게 되었고. 물론 그 당시에 외국에 저명한 단체들이 오고, 또 해서 국 제적인 그 이런 것두 했지만은 세종문화회관이라고 하는 이름을 짓고 그래서 떳떳허게 한 국의 그 무대예술, 국악, 이런 것들이 정말 그 당당하게된 (고개를 끄덕이며) 계기가 됐는 데. 그때 전부 공연이 한 100일 동안에 공연 회수는 157회, 제가 목표했던 것이 그때 서 울 인구가 500만이었었는데 {아, 500번 하셨으면 하셨는데. (웃음)} 아니, 서울 인구의 일할, 일할은 {국가기관?} 세종문화회관 개관 잔치에 올 수 있도록 {아 올수 있도록.} 결 국 그 목표치에는 달성하지 못하고 27만이 관객이 동원이 했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공연 사상으로써는 획기적인 일이었고. 그때 세종문화회관에 그 개관헐 적에 시그널 신 호 음악을 파이프 오르간이 아직 완성이 되기 전이어서 그 소리를 따서 헐라고 그랬는데 그건 못하고 그 유사한 소리를 강석희 씨한테 작곡 의뢰를 해가지고 <새야새야 파랑새야> 138

제5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에 세 음을 기조로 해서 그것을 그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굉장히 우리나라 음조를 그 상징적으로 이렇게 표현한 첫 번째 일인데 다른 극장에서는 징이나 치고 이랬던 것을 그 때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에 이걸 채용을 했는데 지금 세종문화회관이 개관한지 35년이 됐는데 아직도 그걸 쓰고 있어요. 바로 그 파이프 오르간 소리로 바꿨어야 했는데 지끔은 오래돼서 그 테이프가 울어요. 늘어져가지고. 그거 하나도 굉장히 그 쪼끔 챙피헌 노릇이 다 이런 생각을 그 허게 됐습니다. 이 이제 우리나라 음악이 실질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이 된 것은 1981 년에 있었던 IFCM207. 세계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허게 됐습니다. IFMC의 이사로써 이 혜구 선생이 참여했을 때니까 그 힘으로 된 건데. IFMC의 조직이 제대로 사무적으로 정 착이 안됐기 때문에 모든 뒷받침은 문화예술진흥원이 그것을 뒷받침을 해주고 단지 사무 1988년 올림픽 개회식 당시 개폐회식 전문위원이었던 구술자 207 IFMC(International Folk Music Coouncil)를 말한다. 139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총장을 하와이에 있던 이병원 씨를 모셔다가 사무총장을 하고, 저는 그때 공연관계만 책 임자로써 일을 했는데. 뭐 그것을 계기로 IFMC가 이름을 바꾸게 됐어요. ITCM 208 으로 바꾸게 됐는데, 어쨌든 간에 한국에서 그런 세계적인 모임을 갖고 또 그것을 이름까지 바 꿀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허는 것은 그 대회가 한국음악의 위상을 세계적으 로 널리 심어준 그런 계기가 됐지 않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간에 그 후에 우리 나라의 역사적인 88년 올림픽이 열리게 됐는데 그것이 한국문화, 한국국가의 위상을 바 꿔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특별히 개폐회식을 아주 짜임새 있게 했 고, 역대 올림픽이 소위 서구에서 발상한 이런 운동이기 때문에 서구음악중심으로 치루었 는데, 이제는 개폐회식을 한국의 전통예술, 중에서도 한국의 국악을 중심으로 해서 치루 고 모든 거에 한국적인 색깔을 입혔다. 이런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고, 이런 정신적 인 작업이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문화에 대한 자신감, 존중심을 일으키고. 세계 사람들한 테는 아, 한국도 이름 없는 쪼끄만 나라인데 이런 훌륭한 문화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다. 또 새롭게 창의적인 노력으로 올림픽 문화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을 알리게 된 것은 중요하게 높이 평가가 되는 그런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걸 계기로 해서 그동안 에 조금 망각됐던 한국사람, 한국문화, 한국예술, 한국음악에 대한 생각이 결정적으로 바 뀌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경제적인 국가의 힘, 그 터를 잡는데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헌 거라고 생각을 하고. 또 그런 것으로 해서 또 이북과의 하나의 대치점에서 문화 창조의 하나의 해결문이라 할 까. 이런 것들을 한국이 주도하게 됐다고 하는 점 등 상당히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집니 다. 물론 뭐 제가 그때는 개폐회식 전문위원, 또 그 추진위원회 음악분과위원장을 맡으면 서 제 역할이 그렇게 컸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은 올림픽을 조금 문화적으로 치루겠다는 그 평소의 생각하고, 또 미국에서 학교 다닐 적에 올림픽 문화의 역사를 탐색했던 계기가, 그 논문이 영향을 주었지 않았겠는가 생각이 됩니다. 208 ICTM(International Council for Traditional Music)을 말한다. 140

제5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유학시기 유 선생님 그 저희가 못들은 얘기가 유학가신 얘기는 어떤 계기로 가셨고, 어디서 어느 기간 만큼 있었는지 간단하게만 이야기 해주실 수 있겠죠? 이 예. 저는 그 {몇 년도 였는지.} 1970년에 제가 그 벨기에 유학을 그 가게 됐습니다. {특별 한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그런데 그때는 그 프로그람 제목이 Media on the Art 라고 하는 주제의 특별 그 강좌였습니다. 그런데 그 강좌는 유네스코 또 벨기에 고등기술학교, 그리고 그 빈Vienna에 있는 IMDT라고 International Institute of Music and Dance라고 하 는 곳의 공동 프로그람이었었는데, 그것은 근대예술을 어떻게 새로운 미디아를 통해서 표 출하느냐 허는 것들을 탐색하는 최초의 프로그람이죠. 굉장히 행운이었어요. 제가. 유네 스코의 장학금을 받아서 갔는데 근데 너무 그 방면에 일찍 눈을 떴기 때문에 {앞서 가실 수 밖에 없었겠네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그것을 써먹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걸 통 해서 방송공사의 그 건물을 짓고 허는 그런데는 그런데서 얻은 미래지향적인 지식이 쪼끔 은 {자문위원.} (고개를 끄덕이며) 응. 쪼끔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을 하고. 특별히 그 뒤에 한때 그 방송국을 그만두고 과도기 동안에 몇 년의 그 낭인 생활을 거쳐서 주식회사 예음, 지금 이제 객석을 발간하는 그런 곳에서 7년 동안 근무를 했습니다. 예술종합지이고 또 거 기에 쪼끄만 공연 공간이 있었습니다. 예음홀이라고 {예음홀. 예.} 그때는 예음홀을 상당히 국악 프로그람을 상당히 중요시하는 {가야금산조.} 여섯 마당이라든가, 뭐 또 전판 연주 같 은 것들이 그런데서 시작됐고, 쪼끄만 무대 같은 것도 아주 그 옛날에 누마루 같은걸 짜가 지고 거기서 공연을 했던 뭐 그런 일이 있었 {객석 콘서트도 하시고.} 예. {국악으로.} 그 다음에 제가 그런 그 뉴미디어의 기술 이런 것 때문에 한때 그 SKC라고 {네.} 선경의 그 자 문위원으로 한 5년 동안 일해가지고 그 우리나라에서 CD음반 만든 기초 작업을 시작을 했 고. 결국 지금 그것이 SK Telecom의 기초가 된 그런 역할을 했고. 그 다음에 세종문화회 관 개관이 끝나고 이건 개인적인 얘기지만은 KBS는 나를 그 세종문화회관에 팔아먹고 굉 장히 뒤에서 이득을 많이 챙겼어요. 이득을 챙겼는데 제가 밖으로 나도니까 그 사람들한테 는 질시와 {본연의 업무를 충실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아니. 본연의 업무가 파견근무로 본 의 아니게 갔는데 이건 KBS사람이 아니다. {파견을 해놓고? (웃음)} 뭐 그렇죠. 그렇게 141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하고. 거기서 이득 챙길 것은 다 챙기고. 심지어 KBS 앞에 있던 광장 5만평을 서울시에서 관리이전 받고 나하나 팔아가지고. 구자춘 씨라고 하는 분이 대단한 사람인데 {서울시장.} 당신 때문에 내가 큰 거 하나 해줬어.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그걸 끝내 고 나서 전에 홀브라이트 장학금 시험을 쳐 놓은 게 있는데 그 해에 가지 않으면 무효가 돼. {예예. 근데 못가신거에요?} 아니, 그래서 KBS로 일단 복귀를 허고 그리고 바로 {유학을.} 미국으로 떠났는데, 처음에는 비교음악 같은 것을 공부헐라고 갔었어요. UCLA 갔는데 그런 강의도 들었지만은 그거보다도 새로운 것을 공부를 허야 되겠다. 그래서 UCLA가서 예술경영을 공부를 한 거에요. 내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일했던 것도 있고 세종회관 끝나고 나니까 당신 관장을 하라고 나보고 구자춘 209 씨가 그러더라고요. 그걸 믿지는 않았지만은 어쨌든 그걸 뿌리치고 미국에 유학을 한 거죠. 그래서 처음에 UCLA가서 공부를 허다 보 니까 동부에 가고 싶어서 여러 가지 궁리 하다가 장학금 연장을 했죠. 보니까 홀브라이트 장학금은 연장을 해주는 법이 없다. 그런데 내가 {특별히.} 홀브라이트 재단에 편지를 하나 써주마. 그래서 그 양반이 아주 간곡한 편지를 썼는데. 그때 마침 일본사람하나가 장학금 포기를 해서 자리가 났다고. 그래서 동부로 가게 됐는데 마침 내가 동부에 가니까 예일대학 교에 극장경영 프로그람이 있더라고. 그래서 주임교수한테 편지를 써 준거야. 그랬더니 거 기서도 아주 쉽게 받아들여가지고. {네.} 그래서 그 극장행정을 공부했는데, 거기서 극장 행정을 공부허다 보니까 뭐 UCLA에서 배운 것에 거의 유사한 거야. 더 강의를 많이 들을 필요가 없어가지고 그래서 저는 그때 마침 유명한 그 연극학교수가 있었어요. G.S. 카프 만이라고 하는데, 영화, 음악, 뭐 연극에 통달한 세계적인 학자야. 그리고 제가 속한 학교 가 Drama School이에요. 근데 그 G.S. 카프만이 Drama School의 교수니까. 또 내 가 비평을 하고 그러니까 그분 문하에 들어가서 예술철학 박사코스를 조금 했었죠. 그리고 여름에는 방학 때는 방학이 기니까 뉴욕에 와서 NYU 거기서 니싸Nyssa라고 하는 교순데, 철학교수 같은 그런 분인데 어쨌든 예술경영에 아주 미국의 권위자예요. 그 사람이 특별 코 스를 만들었어요. 예술의 재정과 경제. 이런 그 프로그람을 제가 또 그 방학 동안에 연수를 해서 미국에서는 정식으로 그 좋은 학교 UCLA, NYU, 예일 {좋은 학교는 다 가셨네요.} (같이 웃으며) 다 갔으니까 뭐 사람들이 껍데기만 보고는 굉장히 부러워 209 구자춘( 具 滋 春, 1932~1996): 군인 행정가 정치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생.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6 25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일선 지휘관으로 참여하였다. 서울시장으로 4년 4개월간 봉직하여 장수시장 의 기록을 세웠다. 박정희( 朴 正 熙 )대통령의 신임 속에서 내무행정을 수행하다가 10 26사태로 인한 계엄령 선포, 최규 하( 崔 圭 夏 )의 과도정부 구성, 12 12사건 등 격변의 와중에서 내무장관직을 사임하였다. 142

제5장 사회변동과 국악 양악의 공존 국악의 미래에 대한 제언 유 지금 쭉 말씀을 듣다 보니까 작곡가로, 또 방송 프로듀서로, 또 평론가로, 또 공연기획자 로, 공연예술행정가로 이렇게 정말 다양한 예술과 항상 함께 살아오셨는데, 그 중에서 어 떻게 보면은 서양음악을 모토로 해서 출발하신 분으로써 이혜구라는 국악의 대가를 모셨 던 분이고. 이런 차원에서 국악의 흐름을 이제 한 뭐 몇 십 년을 쭉 반세기 이상을 활동해 오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국악이라는 게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흐름, 앞으로는 이런 흐름 을 받아서 어떻게 가야 된다 이런 한마디로 요약이 가능하실까요? 음악자체만 보면. 이 음악 자체만 보면은 그 정치적인 상황, 일제강점기를 지나서 그동안의 우리나라가 문화 적으로 서구지향적인 그런 세대를 {(말이 겹쳐서 안들림)} 살아왔습니다. 근데 88올림픽 을 계기로 해서 하나의 그 민족적인 자각현상 이런 것들이 생기게 돼서 점차로 한국문화 에 대한 한국예술에 대한 값어치, 중요성 이런 것들을 인식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인식의 초보단계입니다. 전환점은 같지만은 그러나 이걸 가지고 하나 심화를 시켜야 됩니다. 한국 음악의 본질이 뭔가. 또 한국 음악이 미래 사람들한테 줄 수 있는 영향력과 또 그 음악을 새롭게 만들어서 창조하는 그 창조의 힘 같은 것이 세계 역사 속에 어떻게 기 여할 것인가 이런 거에 대한 깊은 통찰을 허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국악인들 은 이제까지는 서양 것은 좋고 우리 것은 뒤떨어졌다 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었 는데, 이제는 우리 것도 좋다. 그러나 서양 것은 나쁘다 이렇게 얘기를 허면은 그건 시대 착오적인 거죠. 서양 것도 좋지만은 우리 것은 더 좋다. 아 이러한 확고한 신념을 가져 야만 우리가 독자적으로 우리 문화를 꽃 피울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전환점에 저 희는 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요소들, 이런 것들이 그 음악하나만 가지고는 안되 고, 여러 가지 사회문화가 말하자면 함께 어울려서 또 역사, 자연 이런 것과 함께 어울려 서 이렇게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이러한 시대가 와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저 는 요새 언어와 우리나라 음악의 관계 이런 것들을 굉장히 깊이 생각하고 있는데 최근에 한자를 우리 동이족이 만들었다고 하는 그런 그 학설이 상당히 설득력을 가지고 그 인식 되고 있습니다. 특히 1800년대 말에 갑골문자가 발견이 되면서 그게 소위 그 은대의 동 이족이 한자를 만들었다고 하는 그런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도취돼서 함몰 143

국립국악원 구술총서 13 이상만 되면 안 될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한자문화와 우리 순수한 우리말이 공존하고 있 는데 어떻게 보면은 한자 때문에 우리말의 좋은 것들, 다 잃어버리고 빼앗기고 그런 아픔 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다시 한 번 인식을 허야 될 것으로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유 선생님 마지막으로, 국악을 아무튼 지켜오고 이어온 국악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오늘 날 국악이 있는데, 국악인들 예전에는 사실 어떤 운명적으로 하셨던 분들이라면 지금은 선택적으로 국악을 전공을 삼아서 하고 있는데. 요런 분들의 어떤 의식차이라든가 그리고 앞으로 국악인들이 국악을 더 그야말로 더 좋은 한국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마음가 짐을 했으면 좋겠다 이런 말씀 한 말씀 더 해주시죠. 마지막으로 이 국악을 지켜온 선배들, 아 두 종류가 있겠습니다. 그 한 부분은 쪼끔 정말 우리문화를 사랑하고 우리 국악을 자랑스럽게 생각허면서 지켜온 분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호 구지책으로 헐 수 없이 그렇게 지켜온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지기 보다는 이제는 객관적인 위치에서 정보화 사회 모든 것들이 열린 이런 시대입니다. 그래서 과거 에 그런 이걸 지켜야 되겠다고 하는 이런 정신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제는 어차피 문 화라고 하는 것은 맞닿게 되어있습니다. 손뼉을 같이 쳐야만 (손뼉을 치면서) 이렇게 소 리가 나듯이, 역시 외래문화와 이 자생적인 문화가 마주쳐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게 되 는데 그 함량이 어느 쪽이 더 과학적으로 볼 적에 많은 지수를 가지고 있느냐 이게 문제입 니다. 그것이 어떤 요즘 말하는 크로스오버나 퓨전이라고 허는 현상이 뭐 절대적으로 있 는데 그 함량을 어떻게 지키느냐 이것이 상당히 중요하고. 그런 함량을 더 순도를 높여야 만 정말 우리 것이 되는 것이지. 외래 것들이 그 함유량이 지나치면은 우리 것으로 인정 을 못 받는 지금 지적 소유권의 시대이니까 그런 시대상황을 인정을 허야 될 것이라고 생 각이 됩니다. 유 아, 장시간 동안 국악의 어떤 그 양악과의 소통, 일반인과의 소통, 세간의 소통을 위해서 항상 가교 역할을 해주신 이상만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감사합니다. 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