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PIA-NURIMEDIA



Similar documents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기본조약\(Grundlagenvertrag\)과 베를린 상주 대표부\(Standige Vertretung in Berlin\)

2011³»ÁöÆíÁýÃÖÁ¾

<BCF6C1A42DC6EDC1FD2DC1DFBED3B5B5BCADB0FC20B1B9C1A6C7D0BCFABDC9C6F7C1F6BFF22E687770>

<C7D5C0C7BEC8C0C75FC1A6BDC3BFCD5FC3A4B9ABC0C75FBDC2C0CE5FB9E9B0E6C0CF5FC3D6C1BEBABB2E687770>

입장

DBPIA-NURIMEDIA

0429bodo.hwp

최우석.hwp

E1-정답및풀이(1~24)ok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 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 D2E687770>

cls46-06(심우영).hwp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untitled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6±Ç¸ñÂ÷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 C3D6C1BEBABB292E687770>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177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01Report_210-4.hwp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 D352D32315FC5E4292E687770>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상품 전단지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2

DBPIA-NURIMEDIA

화이련(華以戀) hwp

ÆòÈ�´©¸® 94È£ ³»Áö_ÃÖÁ¾

歯1##01.PDF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120229(00)(1~3).indd

PDF

<30322D3031BCD5B5BFC8A32DC6EDC1FD2E687770>

역사교과서 문제는 여전히 뜨겁다

74 현대정치연구 2015년 봄호(제8권 제1호) Ⅰ. 서론 2015년 1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두 명의 남성이 풍자 잡지 주간 샤를리 의 본사에 침입하여 총기를 난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열두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얼마 후에

< C7CFB9DDB1E22028C6EDC1FD292E687770>

01김경회-1차수정.hwp

DBPIA-NURIMEDIA

헨체의 엘리트적...

<C5F0B0E82D313132C8A328C0DBBEF7BFEB292E687770>

가사교향곡\(주대창\)

독일기악미학\(이경희\)

(자료)2016학년도 수시모집 전형별 면접질문(의예과포함)(최종 ).hwp


<C0FCC8C4BCD2BCB3B0FAC7E3B9ABC1D6C0C7C0FBB9CCC0C7BDC42DBABBB9AE2E687770>

Journal of Educational Innovation Research 2017, Vol. 27, No. 4, pp DOI: * The Meaning of Pl

¿Ü±¹¹ýÁ¦³»Áö09054)

212 영상기술연구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뉴 뉴웨이브 세대란 60년대 일본의 영화사에서 과거세대와는 단 절된 뉴웨이브 의 흐름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뉴웨이브 세대를 뛰어넘는다는 의미에서 뉴 뉴웨이브 세대로 불린다. 뉴 뉴웨이브 세대 감독들의 경향은 개인적이고 자유분

도비라

최종ok-1-4.hwp

<5B335DC0B0BBF3C8BF2835B1B35FC0FAC0DAC3D6C1BEBCF6C1A4292E687770>

< B5BFBEC6BDC3BEC6BBE E687770>

11월339-8[1].hwp

< BBF3B9DDB1E228C6EDC1FD292E687770>

11민락초신문4호

왼쪽 그림은 고대 인도에서 사용한 명상( 冥 想 ) 의 도구인 만다라 이다. 가운데 위를 향하는 삼각 형과 아래로 향하는 삼각형이 각각 대립하고 있으나 원이 그것을 통합하여 전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전통적인유럽교회의둥근장미창도인간이우주와하나가될수있다는믿음을나타내고 있다


<B3EDB9AEC1FD5F3235C1FD2E687770>

<B5B5BCADB0FCB0FA20C0CEB9B02DBFB9BCFA2E707562>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어니스트펀드_HF-1호_투자설명서_151204(3차수정)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

652

폴리리듬과 무질서...

歯 조선일보.PDF

독일도시형태학의시기구분 제 1 단계 ( ) : 도시형태학의태동기 Otto von Bismarck 퇴임 (1890) 1 차대전종전 (1918) 빌헬름제국시대, 제국주의시대 (Zeitalter des Imperialimus) 제 2 단계 ( )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 E687770>

<C1DFB1DE2842C7FC292E687770>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정도와 발화 행동 사이의 관계는 자연화된 인식론의 탐구 주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콰인의 이러한 설명은 여전히 의문을 남긴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산술과 논리를 아예 의심의 범위 밖 에 두는 이유일 것이다. 여기서는 단순히 정도의 차이가 아닌, 원리적인 차이가 작동하고

???? 1

<B3EDB9AEC1FD5F3235C1FD2E687770>

<313220BCD5BFB5B9CCC1B6BFF8C0CF2E687770>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C7F6B4EBBACFC7D1BFACB1B B1C72033C8A E687770>

<34B1C720C0CEB1C7C4A7C7D828C3D6C1BEC6EDC1FD D28BCF6C1A4292E687770>

〔아산서평모임 1회 모임〕

160215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hwp

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 2 - <교계소식> 광복 70년 평화통일 위해 기도의 힘 모은다 한국교회평화통일기도회 내달 9일 서울광장 개최 확정 교단 교파 초월 연합행사 구 및 보수와 진보, 기독교 통일운동 및 선교 관련 단 체 등이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기도회에서는 한국교회의

Á¶´öÈñ_0304_final.hwp

<C1DFB0B3BBE7B9FD3128B9FDB7C92C20B0B3C1A4B9DDBFB5292E687770>

Transcription:

계간 낭만음악 제20권 제2호(통권78호) 2008년 봄호 95 논문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1) 이 경 분 <요약> 이 글에서는 바그너 음악이 나치제국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밝히고 이를 통해 나치음악정책의 실제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먼저, 바이로이트 축제를 비롯 한 나치 정부의 공식적 행사에서 나타나는 열광적인 바그너 컬트와 프로파간다 이용가치에도 불구하고 나치문화정책 지도층 사이에서 바그너를 못마땅해 하는 비판적 목소리가 있었음을 서술하였다. 히틀러유겐트 지도부와 니체추종자들, 그리고 괴벨스의 적수였던 로젠베르크의 불만을 분석해보고, 이들의 비판이 공 개적인 소리를 내지 못하였던 이유를 알아보았다. 그 답으로서 히틀러의 무조건 적인 바그너 숭배가 어디에서 기인하는 지에 대해 살펴본 후, 나치제국의 음악문 화정책이 가지는 특징을 결론적으로 요약해보았다. 즉 예술음악정책에 있어서 디테일보다는 전체적인 목적과 결과에 더 큰 비중을 두었고, 예술가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락함으로써 프로파간다 효과를 오히려 배가시켰다는 가설이다. 검색어: 바그너, 바이로이트, 히틀러, 나치화된 니체, 나치음악정책, 나치즘, 프로파간다 1) 이 논문은 2006년도 정부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 사업비)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 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KRF-2006-G00038).

96 1. 시작하며: 바그너 연구의 두 가지 경향 바그너처럼 음악의 영역을 넘어 위대한 시인, 철학자, 작가들에 의해 수용된 음악가도 드물 것이다.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버나드 쇼(Bernard Shaw), 토마스 만(Thomas Mann), 니체(Friedrich Nietzsche), 에른스트 블로 흐(Ernst Bloch),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등 바그너의 음악은 예술가, 철학자에게 엄청난 자극을 주었으며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비단 당대의 문화 예술적 엘리트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현재에 도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바그너리아너 (Wagnerianer)의 존재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하지만 예술의 정수( 精 髓 )로, 또는 낭만주의의 정수로 여겨지는 바그너 음악은 정치적, 사회적 논쟁의 중심에서 각기 다른 진영의 추종자들 간의 뜨거운 토론과 상반된 쟁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독일의 나치 시기에 바그너 음악의 수용은 음악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고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띤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그너가 남긴 반유대주의적 발언과 그의 작품이 수용된 정치적인 맥락, 그리고 히틀러의 지극한 바그너 총애로 인해 바이로이트 축제(Bayreuther Festspiel)가 나치 독일에서 프로파간다적 기능을 훌륭하게 실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치제국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거친 후 바그너 음악을 둘러싼 논쟁 은 그 이전의 옹호자 대 비판자 간의 대결과는 다른 차원의 쟁점으로 들끓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논쟁의 주요쟁점을 살펴보면, 바그너 작품에서 반유대주 의적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하고 있는데, 하나는 바그너 작품의 반유대주 의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바그너 음악에 내재한 반유대주의적 분석이 그의 음악극 이해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첫 번째 입장은 바그너 음악을 이용한 나치들의 만행이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이 때문에 이미 1883년에 죽은 바그너가 책임질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음악극 작품 속에서 직접적으로 유대인 증오의 혐의를 찾아내서 증명하기 힘들다는 주 장이다. 반면에 두 번째 입장은 작품이 이해되는 콘텍스트를 염두에 둔 것인데,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97 작품은 한 번 작곡하면 그것으로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작품 속에 명시적으로 유대인 이름의 인물을 내세우지는 않 았지만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의 부 정적인 인물 베크메서(Beckmesser)나 <지그프리트 Siegfried>의 추한 난쟁이 미메(Mime)는 바그너 당시 청중이라면 누구나 유대인을 형상화한 인물로 이해 했으며, 그 전통은 나치 시기에도 마찬가지여서 이들이 유대적인 인물임에 대해 따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품이 이해되는 콘텍스트를 무시하고 작품만을 떼어서 이해할 때 오히려 자신의 음악은 음악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고 주장했던 바그너의 의도를 소홀히 하는 것이며, 이러한 음악 분석이야말로 바그너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예술적 한계 를 가진다는 것이다. 2) 바그너 음악극의 반유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무시한 음악적 해석에 관한 연구 는 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문헌이 있음과 대조적으로 두 번째의 입장에 속하는 연구는 (국내 음악학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을 비롯한 외국 음악학계에 서도 그리 많지 않다. 3) 이유는 무엇보다도 음악적 관점을 넘어서야 하는 어려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반유대주의적 상징으로 여겨졌던 제3제국의 바그너 음악을 다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음악과 정치, 음악과 이데올로기 등의 학제 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 음악학에서는 독일의 과거청산문제와 음악미학 간의 갈등 문제가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점도 중요한 이유에 속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위대한 음악이 나치의 야만성에 의해 결코 상처를 입을 수 없다는 생각이 저변에 견고하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나치 과거청산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국내 음악학계도 지금까지 나치 2) Marc A. Weiner, Über Wagner sprechen. Ideologie und Methodenstreit, Saul Friedländer und Jörg Rüsen(Hg.),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München 2000, p.344. 3) Klaus Umbach, Richard Wagner. Ein deutsches Ärgernis, Hamburg 1982; Dieter David Scholz, Richard Wagners Antisemitismus - Epistemata(Würzburger Wissenschaftliche Schriften, Reihe Literaturwissenschaft, Band 95), Würzburg 1993; Joachim Köhler, Wagners Hitler. Der Prophet und sein Vollstrecker, München 1997; Paul Lawrence Rose, Richard Wagner und der Antisemitismus, Zürich/München 1999; Saul Friedländer und Jörg Rüsen(Hg.),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München 2000. 이 저자들 대다수가 독문학자, 역사학자들에 속한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98 시기 바그너 음악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다. 4) 그 이유는 아마도 음악은 결국 음악이다 라는 전제의 순수 음악적인 관점이 지배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2003년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가 출판되긴 했지만, 음악학자가 아닌 독문 학자에 의해 씌였음은 이러한 우리 음악학계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안인희의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는 바그너 음악에 감동한 히틀 러가 바그너의 무대예술을 얼마나 훌륭하게 자신의 정치에 잘 적용하고 있는지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바그너와 히틀러의 연관성을 게르만 신화라는 중개물로 설명해내고자 하는 의도 때문에 바그너 음악에 관한 얘기는 비중이 적다. 5) 또한 히틀러를 다루는 제4장에서도 실제 바그너를 이용한 히틀러의 선전정책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이 책은 바그너와 히틀러의 밀접한 관계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나치 음악정책에서 실제 바그너 음악이 가지 는 은밀한 모순점과 갈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바그너 음악은 바이 로이트 축제에서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권위와 이로 인한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 구하고 나치의 음악이데올로기에 딱 들어맞지 않는 점이 있었고, 실제 이로 인한 나치 문화정책가들 내의 불협화음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 상황에서 본 논문도 바그너와 히틀러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 기는 하지만, 논문이라는 양적인 한계 때문에 바그너 음악이 나치제국에서 어떻 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해서만 집중하여, 이를 통해 나치 음악정책의 한 단면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려 한다. 먼저 바그너 음악극이 나치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가졌는지 바이 로이트 축제행사를 통해 살펴보고 난 후, 바그너 음악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나치 간부, 정책가들의 속사정에 대해 서술해보자. 바그너를 둘러싼 불협화음에 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 바그너 컬트에 그 누구도 이의제기를 할 수 없었던 이유를 히틀러에게서 찾아보고자 한다. 4) 김문환, 바그너의 생애와 예술-총체예술의 원류 (느티나무 1989)의 3부 전후의 바그너 수용 에서 바그너와 히틀러 관계 및 바이로이트의 친나치 역사에 관한 서술이 13페이지로 서술되어 있다. 189-202쪽 참고. 5) 저자 스스로 이를 한계로 언급하고 있다. 안인희,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민음사 2003, 247쪽.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99 2. 나치 제국의 공식적 바그너 수용 2.1.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나치들이 처음부터 바그너 음악이 가진 엄청난 프로파간다의 가치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음을 여러 자료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비단 정치적 행사만을 의미하 는 것은 아니다. 나치 치하의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단, 라디오방송국, 바이로 이트 극장이 모두 나치정부기관에 소속되었거나, 통제를 받는 단체이므로, 이들 의 바그너 공연과 방송이 모두 공식적인 바그너 수용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물론 바그너음악극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바이로이트 극장의 경우에는 문화 선전부장관 괴벨스(Joseph Goebbels)의 제국문화협회에 직접 소속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특별한 지시로 국가에서 보호해야 할 민족적인 의무행 사 6) 로서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았으므로 나치의 바그너 수용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겠다. 따라서 바그너의 문화 정치적 상징성은 바이로이트 축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1876년 이래로 존속하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1933년 이후 달라진 점은 무엇이며, 새 나치정부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33년 바이로이트의 새로운 팀 1933년 여름 바이로이트에서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von Nibelungen> 공연은 지휘자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ängler), 연출자 및 총감독인 하인 츠 티첸(Heinz Titjen), 무대연출 에밀 프레토리우스(Emil Preetorius)의 공동 작업으로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다. 이전과 달라진 이들의 바그너 음악극 해석은 세계적 주목을 받았으며, 동시에 보수적 정통 바그너추종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변화의 계기 7) 를 마련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그너의 며느리 비니프레트 6) David Clary Large, Wagners Bayreuth und Hitlers München,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p.207. 7)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이미 바그너음악극은 문화적 보수주의의 상징으로 점차 쇠 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그너 음악극에서 구사하는 영웅의 세계는 과거의 것으로 여겨졌으며, 거추장스러운 장식과 불투명한 안개를 걷어낸, 단도직입적이며 명확하고 모던한 분위기를 내세우는 현대적 오페라들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100 바그너(Winifred Wagner)였다. 1930년 남편 지그프리트 바그너(Siegfried Wagner)가 타계하자, 33세의 젊은 과부로 바이로이트의 대권을 물려받은 비니 프레트는 바그너 죽음 후 코지마 바그너(Cosima Wagner), 지그프리트 바그너 로 이어져 온 50여 년간의 바이로이트 분위기를 쇄신해 보고자 1931년 베를린의 국립극장 총감독이었던 하인츠 티첸을 신임하는 조언자로 선택하였고, 수준급 예술가들을 바이로이트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1881년생인 티첸은 유명한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Arthur Nikisch)에게서 지휘를 공부하였고, 1927년부터 베를린 국립극장 총감독으로 성공한 독특한 캐리어의 인물이었다. 그가 비니프레트와 의논하여 구성한 팀은 1944년까지 바이로이트 공연을 당시 세계 최고의 바그너 해석을 이끌어내게 된다. 물론 지휘 계의 거장 푸르트벵글러가 매년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이 제3제국 기간 동안 바이로이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기여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33년 푸르트벵글러의 바그너 음악해석은 (아직 망명가기 전) 아도르노가 바그너를 자유롭게 하는 연주 8) 로 칭찬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정통 바그너주의자, 특히 폰 뷜로(Hans von Bülow) 의 딸인 다니엘라 토데(Daniela Thode)는 이 새로운 바그너 음악극을 원조 바그너음악극과 다르다고 비난하였다. 특히 무대연출에 그 비난의 화살이 돌아 갔는데, 프레토리우스가 세운 <발퀴레 Die Walküre>의 3막에 나오는 소나무가 바그너가 감독했던 무대장식에서 보았던 것과 다르게 보인다며, 바이로이트에 낯선 정신 이 스며들어왔다고 경고하였다. 9) 이때 낯선 정신 이란 독일적이지 않은 정신, 즉 유대적, 또는 유대적 볼셰비 즘 의 뉘앙스를 가지는데, 프레토리우스가 유대인 여성과 결혼한 토마스 만의 친구이며, 티첸도 유대인들과 친분이 있었던 인물이었으므로 보수적인 바그너 추종자들에게는 매우 흥분할 일이었다. 더욱이 나치가 정권을 잡은 초기, 바이로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외국의 바그너 추종자와 바이로이트 손님들이 줄어들 면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도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는 중요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8) Theodor W. Adorno, Notiz über Wagner (1933), Adorno, Gesammelte Werke 18, Frankfurt/M. 1984, p. 204. 9) Jens Malte Fischer, Wagner-Interpretation im Dritten Reich,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p.152.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101 이트의 새 팀에게는 정치적으로 파탄을 불러올 수 있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다. 따라서 비니프레트는 애써 이를 무마하기 위해 남편 지그프리트가 1929년 베 를린에서 티첸과 프레토리우스가 올린 <로엔그린 Lohengrin> 공연을 보고 매 우 감동하였었다 며 죽은 남편까지 거론해야 했다. 10) 하지만 결국 비니프레트와 의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히틀러가 이에 대해 아무런 부정적인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 새 팀은 나치제국에서 최고 수준의 바이로이트 공연을 계속할 수 있었다. 특히 1934년에는 바이로이트 축제의 공연실황 11) 이 라디오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전달되었는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나라는 물론이고, 미국, 일본, 아르헨티나까지 여과 없이 독일제국 방송국의 라이브 공연을 방송하였다. 이로써 독일 나치정부의 문화적 수준을 국제적으로 과시하는 데 기여하였다. 당시 스위스에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하던 바그너 추종자 토마스 만도 <니벨 룽의 반지>의 라디오 생중계 사실을 알았지만, 그는 방송을 듣지 않는 대신 일기장(1934년 8월 9일)에다 나는 독일에서 오는 어떤 것도 듣기 싫다. 거기서 오는 모든 것에는 순수함이 결여되어 있고, 문화 프로파간다가 깔려 있기 때문 이라며, 그 이유를 기록하였다. 12) 그는 바이로이트의 수준 높은 음악예술이 문화 프로파간다라는 큰 틀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아주 일찍부터 간파한 것이다. 전쟁 시기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1939년 전쟁의 분위기가 짙어지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그랬 던 것처럼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휴관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히틀러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음악극 축제를 계속해줄 것을 비니프레트에게 요청 하였다. 13) 히틀러의 끝없는 바그너 사랑 으로 1933년 이래 모든 필요한 물 10) Jens Malte Fischer, Wagner-Interpretation im Dritten Reich,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p.153. 11) 1934년 <반지> 공연은 푸르트벵글러 대신 카를 엘멘도르프(Karl Elmendorff)가 지휘 하였다. <파르지팔> 공연은 1933년뿐 아니라 1934년에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지휘 하였다. 푸르트벵글러는 1936년 다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봉을 잡게 된다. Jens Malte Fischer, Wagner-Interpretation im Dritten Reich,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p.143. 12) Thomas Mann, Tagebücher 1933-1934(hg.v. Peter de Mendelssohn), Frankfurt a. M. 1977, p.502.

102 적, 14) 정신적 지원을 받아온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전쟁이 터져도, 이로 인해 관객석을 다 채우지 못할 경우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히틀러는 전쟁으로 지치고 힘든 독일군인, 시민들을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어 바이로이트 축제의 손님청중으로 보내게 했다. 로버트 레이 박사(Dr. Robert Ley)가 주관하는 단체 기쁨을 통한 힘 (Kraft durch Freude 약자로 KdF)에 의해 청중이 선발되고 바이로이트로 수송하는 등 모든 부차적인 문제들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1942년 여름에는 독일뿐 아니라 동부전선에서 3만5천명에 해당하는 청중이 바그너 음 악극을 관람하며 독일정신이 창조해낸 가장 힘찬 예술작품 15) 에서 전쟁을 위 한 힘을 얻고 돌아갔다. 독일예술의 가장 고귀한 보물은 전쟁에 기여한 사람들 에게만 공개해야 한다 16) 는 기쁨을 통한 힘 의 레이 박사의 말에서 보듯이 전쟁 동안 바이로이트는 후방에서 전쟁 수행을 돕는 중요한 프로파간다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전쟁 동안 점차 나치정부와 가까워져갔던 푸르트벵글러도 1943 년 바이로이트에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지휘하여 상이군인 등 전쟁 으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을 위로하는 행사에 적극 참여하였다. 독일의 전세가 불리해져 독일제국의 패망이 불안하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1943년 바이로이트에 서는 <반지> 공연 대신 독일의 민족오페라로 여겨졌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 터징어>만 16회 공연하였던 것이다. 1944년에도 마찬가지로 12회의 <뉘른베르 크의 마이스터징어> 공연으로 나치제국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문을 닫게 된다. 17) 13) Nike Wagner, Für uns war er überhaupt nicht der Führer. Zur Winifred Wagner,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p.182. 14) 히틀러는 매년 새 공연을 위해 5만5천 제국마르크를 사재에서 털어 주었지만, 이 액수만으 로는 부족하였으므로, 여기에 추가 지원이 더 있었다. Nike Wagner, Zur Winifred Wagner, p.182. 15) 김문환, 바그너의 생애와 예술-총체예술의 원류, 195쪽. 1940년에는 약 2만 명의 독일 장병과 노동자들이 바이로이트를 방문하였고, 독일의 승리로 인해 바이로이트는 승리의 축제공연 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 김문환 바그너의 생애와 예술-총체예술의 원류, 195쪽. 17) www.bayreuth-festspiele.de의 통계자료 참고.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나치 혐의에서 벗어나 다시 개관하게 되는데, 히틀러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비니프레트는 물 러나고, 아들 빌란트와 볼프강이 감독을 맡게 된다.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103 2.2. 그 외 연주홀, 일반 오페라하우스, 라디오방송에서의 바그너 음악 바그너 음악이 베토벤 음악 및 브루크너(Anton Bruckner) 음악과 함께 나치 독일의 문화적 수준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공연 외에도 연주홀과 일반 오페라하우스 및 라디 오방송이 기여하였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먼저 오페라 공연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홀에서는 공간의 성격상 주로 오페라 서곡이나, 오페라 중의 청중이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음악을 떼어내어 연주하였는데, <뉘른베르크 마이스터징어>의 서곡이나, <리엔치 Rienzi> 서곡, <로엔그린> 서곡 18), 또는 <신들의 황혼 Die Götterdämmerung> 3막의 지그프리트 장송곡Trauermarsch 등이 그 예에 해당한다. 물론 1933년 이전에도 바그너 오페라 서곡은 콘서트홀의 중요한 연주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으므로, 나치제국에서의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 린 필하모니가 필하모니 홀에서 연주한 바그너 오페라의 서곡은 전쟁이 시작한 후 더 자주 연주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뉘른베르크 마이스터징어>의 서곡에 집중 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전쟁이 일어나고 1년 반 동안 바그너 음악이 연주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9) 1939. 10.12.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서곡 1939. 10.18. <탄호이저> 서곡 1939. 10.29/30/31.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서곡 1939. 11.27.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서곡 1939. 12.21.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서곡 1940. 2.25/26/27. <신들의 황혼>에서 지그프리트 장송곡 과 마지막 노래 1940. 11.3/4/5. <탄호이저> 서곡 1940. 11.8.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서곡 18) 참고로 안익태도 독일 베를린에서 만든 자신의 1942/43년 팸플릿에 <리엔치>서곡, <탄 호이저>서곡, <로엔그린> 서곡을 연주 가능한 프로그램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경분, 잃 어버린 시간 1938-1944.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의 숨겨진 삶을 찾아서, 휴머니스트 2007, 141쪽 참고. 19) Saul Friedländer/Jörg Rüsen(Hg.),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와 나치 시기 베를린 필하모니의 연주 레퍼토리를 정리한 Peter Muck(Hg.), Einhundert Jahre Berliner Philarmonisches Orchester. Darstellung in Dokumenten, III, Tutzing 1982 참고.

104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서곡은 독일이 처음 전쟁을 일으킨 후 4개월 동안 베를린 필하모니의 바그너 프로그램에서 과히 압도적(6회)인 위치에 있음 을 잘 알 수 있다. C장조 3화음이 두드러지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서곡은 장조 음악 을 독일적 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나치제국에서 독일 예술의 정수로 여겨지며, 독일인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음향 적 효과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20) 다른 한편, 일반 오페라하우스에서 바그너 음악이 공연된 비중은 베를린 필하 모니의 경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오페라하 우스의 경제적 타격이 컸으므로 까다롭고 대규모의 무대장치가 필요했던 바그너 오페라 공연은 당시 인기가 상승하던 모던한 20세기 오페라 21) 에 눌려 점차 감소 추세였다. 그러나 1933년 나치들의 권력 장악 이후 독일에서 바그너 공연은 다시 증가하게 된다. 1933-1937년까지 빌레펠트, 코부르크, 도르트문트, 카를스 루에에서는 바그너 공연이 전체 프로그램 중 15%를 차지하여 1위였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는 1939년부터 44년까지 오히려 베르디와 로르칭(Lortzing) 및 푸치니의 오페라가 강세를 보여 바그너 오페라 공연은 3위로 밀려난다. 그 이유 는 전쟁 때문에 까다로운 무대 공연은 어려워지고, 더욱이 전쟁이 힘들어져감에 따라 골치 아픈 주제보다 명랑한 것에 대한 욕구가 커졌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22) 하지만 일반 오페라하우스라 해도 뮌헨과 베를린의 경우는 바그너 오페라의 중요성이 달랐다. 나치운동의 중요한 요지이자 바그너 추종자들의 중심지인 뮌헨의 오페라하우스는 1933년에서 1944년까지 17회 공연되었다(여기서 공 연 횟수는 모두 새로 연출한 경우를 의미하며, 반복한 회수는 고려하지 않은 것임). 23) 베를린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바그너 오페라는1933-44년까지 13회의 20) 물론 베토벤 음악역시 독일인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음악으로 자주 연주되었다. 오페라로서 <뉘른베르크 마이스터징어>는 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독일의 국민오페라로 인식되고 있으며, 새 오페라하우스를 개장할 때 단골 메뉴로 선택되고 있다. 21)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cker), 쿠르트 바일(Kurt Weill),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에른스트 크세넥(Ernst Krenek) 등의 오페라가 인기 높았다. 22) Nanny Drechsler, Die Funktion der Musik in deutscher Rundfunk 1933-1945, Paffenweiler 1987 참고. 23) 바그너 공연은 1922년부터 1932년까지 13회 공연되었다. J.M. Fischer, Wagner-Interpretation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105 새 프로덕션 공연으로 가장 비중이 높은 오페라로 자리매김 되었다. 24) 바이로이 트 축제극장에서는 여름에만 공연이 있으므로, 그 외 시즌에 독일 청중은 뮌헨과 베를린에서 바그너의 음악극과 오페라를 원한다면 사시사철 관람할 수 있었던 셈이다. 연주홀과 오페라 하우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모든 바그너 음악 연주는 결국 라이브 방송을 통한 매체의 도움으로 더 많은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라디오는 공식적인 바그너 음악 수용에서 대중성과 위엄성을 확보하는 데 양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즉 이미 앞서 1934년의 바이로이트 음악극 실황방송에 대해 언급했듯이, 국내외적으로 바그너음악의 영향력을 넓히고, 나 치제국의 문화적 수준을 선전하는 데 그 어떤 매체보다도 라디오의 역할은 컸다 하겠다. 25) 더욱이 바그너 음악은 이러한 예술음악의 차원을 넘어 라디오의 기능음악으로 도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면, 1933년 5월 1일부터 뮌헨의 제국 라디오방송국에 서는 바그너의 <파르지팔 Parsifal>에 나오는 성배 모티브 를 새로운 시그널음 악으로 내보냈고, 뉘른베르크 방송국에서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에 나 오는 사랑 모티브 를 시그널음악으로 사용하여 바그너 음악의 상징성을 과시하 였다. 26) 이 두 지역이 매년 나치정당대회가 열리는 뉘른베르크와 나치운동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뮌헨이라는 점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바그너와 나치의 친밀한 관계는 뉘른베르크와 뮌헨 시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 im Dritten Reich,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p.144. 24) 1921-32년까지 바그너 공연은 13회였다. 위의 책. 참고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오페라는 뮌헨 오페라하우스에서 14회, 베르디 오페라가 12회, 모차르트 9회, 푸치니 8회 공연되었고, 베를린에서는 각각 12회, 9회, 9회, 6회가 공연되었는데, 당시 생 존해 있던 현대작곡가 슈트라우스는 바그너 뒤를 이어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J.M. Fischer, Wagner-Interpretation im Dritten Reich,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p.144. 25) 참고로 라디오의 경우가 아니지만, 바그너 음악이 매체에서 사용된 경우를 언급하면, 우리나라 의 독재정권 시대에 영화 시작 전에 나왔던 대한뉴스처럼 당시 독일의 영화관에서 보여주는 나치뉴스에서 독일군의 승리를 보도할 때에 <발퀴레>의 3막에 나오는 말 타는 발퀴레들 의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Jens M Fischer, Wagner-Interpretationen im Dritten Reich, p.146. 또한 코폴라 감독의 유명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도 카우보이 모자를 쓴 대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적군을 공격하는 장면에 이 음악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된다. 26) Nanny Drechsler, Die Funktion der Musik in deutscher Rundfunk 1933-1945 참고.

106 이다. 1945년 독일민족의 지도자 Führer 히틀러가 지하벙커에서 자살한 후, 방송 국에서는 지도자의 죽음을 알린 후, <신의 황혼>의 3막 2장에서 지그프리트가 하겐의 창에 찔려 죽고 나서 연주되는 지그프리트 장송곡 을 내보냈다. 27) 이전 에는 국가적 공식 추모 행사에서 베토벤 7번 교향곡의 2악장 장송곡 을 사용하 였으나, 나치제국에서는 지그프리트 장송곡 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나치제국의 세련된 음향적 연출은 항상 정치를 예술과 혼합, 결부시켜 온 12여 년간의 프로파간다 정책과 관련이 있다. 28) 1933년 11월 17일 베를린 시립오페라하우스 개막식에서 나치의 학켄크로이처 깃발이 내걸리고, 괴벨스가 개막식 연설을 하는가 하면, 1933년 포츠담의 날에 히틀러가 국무회의를 선포하 면서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가 공연되기도 했으며, 매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리는 나치 정당대회의 축하 오페라로 연주되었고, 정당대회 개막식에서는 <리엔치Rienzi>의 서곡이 항상 연주되었다. 이처럼 정치적 행사 와 예술음악의 결합은 나치제국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3. 나치내부의 바그너 비판 그런데 이러한 나치정부의 공식적 행사에서 과시하는 바그너 열광과 바그너 음악의 프로파간다적 이용 가치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정책 지도층 사이에서 항 상 바그너를 숭상하고 떠받든 것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당시의 비평문이나, 고위 나치 문화정책가들의 언술에서 바그너를 못 마땅해 하는 비판적인 견해가 보인 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보면, 바그너 음악극이 나치의 다른 문화정책 및 이데올로기와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은 먼저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를 비롯한 청소년 문화운동의 영역이었고, 괴벨스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나치 문화 정책가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와 니체 추종자들에게서 불만의 소 27) 이 지그프리트의 장송곡은 1923년 뮌헨에서 있었던 히틀러 폭동 에서 죽은 나치 병사들을 추모하는 행사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나치제국 내내 매년 뮌헨에서 거행되었다. 28) 히틀러와 괴벨스는 프로파간다를 예술 중에서도 가장 차원이 높은 예술로 말한 바 있다.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107 리가 들려왔다. 29)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3.1. 히틀러 유겐트 운동의 이상에 맞지 않는 바그너 음악 먼저 나치독일에서 바그너의 적들은 청년운동이나 히틀러 소년단 및 민요운동 을 전개하는 나치 정책가들에게서 많았다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예를 들면 히틀 러 유겐트운동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바그너 전문가 쿠르트 폰 베스테른하겐(Curt von Westernhagen) 30) 은 (지도자 히틀러가 바그너를 무조 건적으로 찬양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우리 나치운동의 동지들은 인물 바그너를 낯설게 여기고 그를 거절하는 태도를 보인다 라고 불만스러운 상황을 언급하였 다. 31) 청소년운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젊은이들의 공동체 음악은 민요와 같이 누구 나 쉽게 부를 수 있는 민속음악이나 행진곡, 칸타타와 같은 음악이었는데, 바그너 의 음악은 함께 부를 수도 없는 너무 예술적이고 듣기에도 난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32) 나치를 신봉하는 음악가 세자르 브레스겐(Cesar Bresgen)도 나치제국에서 젊은 세대의 음악에 대한 태도가 심각하다고 보고, 나치즘이 새 젊은이를 만들 29) 또한 나치의 인종정책가들의 발언에도 바그너에 대한 회의가 반영되어 있다. 아이히나우어 (Eichnauer)는 <음악과 인종>에서 바그너를 인종적으로 혼합된 현상 이라 주장하였는 데, 이것은 북방족과 중남부 유럽의 산악지방에 사는 디나르족이 혼합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나치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일종의 모독이 될 수 있는 말이었다. 인종학적인 해석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음악에 대한 평가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아이히나우어 외에 도 인종이론을 시도했던 귄터(Günther)나 로젠베르크 모두 바그너의 종합예술작품 아 이디어를 북방적이지 않다 고 평가했다. 특히 로젠베르크는 겉으로 보면 바그너의 음악 을 북방적인 아름다움의 이상 이라 일차적으로 높이 칭송하였지만, 바그너의 예술의 개 인주의적 측면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톤을 숨기지 않았다. 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Eine Dokumentation, Hamburg 1966, p.318. 바그너의 인종 문제 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1938년 비니프레트 바그너의 제안으로 히틀러는 바그너 연구소를 세워 바그너의 출생에 대해 연구하도록 했다. 30) 전후 프리드리히 블루메(Friedrich Blume)가 편집한 1950년대의 독일음악사전 MGG의 바그너 항목을 베스테르하겐이 게르투르드 슈트로벨(Gertrud Strobel)과 함께 저술하 였다. 31) Winfried Schüler, Der Bayreuther Kreis. Wagnerkult und Kulturreform im Geiste völkischer Weltanschauung, Münster 1971, 166쪽 재인용. 32) 독일음악의 특성을 장조 음악에서 찾았던 이들에게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단조음악은 마디마디가 문제였다.

108 어내고자 한다면, 새로운 길을 가야 할 것 33) 임을 주장하면서 올바른 음악교육 을 요구하였다. 독일민족에게 음악이 다시 중요한 부분이 되도록 히틀러유겐트 가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바그너의 음악적 후계자를 길러내는 방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0년 나치의 음악사전에 따르면, 히틀러유겐트의 음악은 여러 가지 출처 를 가진 공동체 노래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여기서 탄생하는 음악은 연주회 용작품이 아니라, 도시와 시골에 있는 젊은 공동체(히틀러유겐트 역주)가 창의 적으로 나치즘을 음향적으로 실현하려는 의지를 북돋우는 그런 장르이다 34) 라 고 서술되어 있다. 이런 사정이니 히틀러 유겐트에서 매우 열성적인 단원들일수 록 어려운 바그너의 음악을 지루하게 여겼던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더욱이 바그너의 생애는 젊은이들이 본받을 만한 모범적인 것이 아니었고, 그의 개인주의와 낭만적인 예술가 타입도 히틀러유겐트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 는 사람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예술가란 바그너처럼 고독하게 혼자 고고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원들과 함께 노래하고 공동체에 잘 어울리는 평범한 사람이어야 했다. 부도덕하고 사치스러웠으며, 독선적인 천재 바그너는 이데올로기에 철저한 나치 청년에게 영감을 불어넣기에는 전혀 훌륭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치제국에서 높이 떠받들던 독일대가 바그너의 음악 적 계승자가 나치이데올로기에 철저한 젊은 세대에서 나올 수 없었던 것도 우연 이 아닐 것이다. 3.2. 로젠베르크의 바그너 음악극 비판 문화부장관 괴벨스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나치 문화정책가 로젠베르크는 바그 너 반대자라고까지 말하기는 힘들다 해도 바그너에게 불만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는 베토벤의 <에그몬트 Egmont op.84>를 최고 심오한 음악드라마 로 여기 면서, 이에 비해 바그너의 음악극(특히 <반지> 4부작과 <파르지팔>)은 실패한 것으로 보았다. 35) 33) Cesar Bresgen, Das Verhältnis der jungen Generation zur Musik, Deutsche Musik-Kultur 2, 1937/38, pp.5-8. 34) Reinhold Brinkmann, Wagners Aktualität für den Nationalsozialismus. Fragmente einer Bestandsaufnahme, Saul Friedländer und Jörn Rüsen,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p.122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109 그 이유는 첫째, 그가 생각하기에 사고를 표현하는 것이 오페라 성공의 중요한 측면인데, 바그너의 경우 오케스트라 음악이 이를 전달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즉 사고의 표현에 있어서 언어(가사)의 역할이 크다고 본다면, <에그몬 트>에서는 가사가 음악을 지배하고 있어서 성공적인 반면, 바그너 음악극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 음악이 사고(이데올로기)를 표현하려 할 때 문제가 생기는데, 베토벤의 <에그몬트>와 달리 바그너의 음악에는 오케스 트라가 너무 주도적이기 때문이다. 즉 오케스트라가 반주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무대 진행에 코멘트하고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하므로 가사는 그 외피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언어적인 측면이 음악에 억눌려서 사고를 맘껏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음악은 오히려 방해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 바그너 음악극에서 민중 장면은 원칙적으로 모두 실패한 거나 다름없다 고 로젠베르크는 주장한다. <로엔그린>의 군중 장면이나, <신들의 황혼>의 합 창에서도 민중은 수동적이고, 끌려가는 듯 어떠한 원칙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로엔그린>에서 합창은 주인공 엘자(Elsa)의 심정이나 사건을 보완하여 전달해주는 부차적인 소극적 역할에 머물 뿐, 군중들이 사건을 바꾸거나 주도하는 적극적인 경우가 없다고 지적한다. 나치즘을 민중운동으로 이해하는 로젠베르크에게 바그너 음악극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셋째, 바그너 음악극 중 특히 <반지> 4부작은 그 방대한 규모와 까다로운 무대 장치로 인해 인간과 극장에게 거의 감당하기 힘든 부담을 요구하였으며, 결코 음악 극으로서도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트리스탄과 이졸 데 Tristan und Isolde>의 주인공 트리스탄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주인공 한스 작스(Hans Sachs)는 그런대로 무대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지만, <반지>의 경우에는 바그너와 똑같은 천재가 나와 이를 개작하지 않는다면 점차 오페라 극장에서 사라져버리고 말 것 36) 이라고 비판하였다. 더욱이 로젠베르크는 바그너가 원래의 게르만 신화를 왜곡한 데에 불만이 컸 으므로, 반( 反 )바그너적 보탄 컬트 를 세우고자 하였다. 물론 이를 안 히틀러의 35) Alfred Rosenberg, Blut und Ehre. Ein Kampf für deutsche Wiedergeburt. Rede und Aufsätze von 1919-1933, Thilo von Trotha (Hg.), München 1935, pp. 427-434. 36) Alfred Rosenberg, Blut und Ehre. Ein Kampf fur deutsche Wiedergeburt. Rede und Aufsätze von 1919-1933, p.434.

110 비난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37) 3.3. 나치 니체추종자들의 비판 사실 모든 바그너의 비판은 니체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치제 국에서 니체 추종자들도 바그너에 대해 불만이 없지 않았다. 물론 나치제국에서 니체 수용도 일관성이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 여기서도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경향이 은밀하게 충돌하였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니체를 강한 자의 권력을 옹호하는 철학자이자 반유대주의자라고 선전하였던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오히 려 니체가 유대주의를 옹호하는 철학자로 보고 독일정신 위에다 유대정신을 더 높이 세운 위험한 인물이며, 나치제국의 적으로 규정하였다. 38) 니체를 파시스트화하여 옹호한 대표학자는 알프레드 보임믈러(Alfred Bäumler) 39) 였는데, 그는 이미 1933년부터 나치제국을 위한 니체의 이용가치를 재빨리 간파하였던 니체 전문학자였다. 40) 그는 니체의 친유대주의적 발언이 나치 이데올로기에 잘 들어맞지 않음도 알고 있었으므로, 나치제국의 니체 수용에서 인종 문제가 부각되지 못하도록 나름대로의 전략을 펼쳤다. 니체와 히틀러를 동일 선상에 두고 은밀하게 동일시하여 다른 모순들은 부차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우리가 청소년에게 하일 히틀러!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인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41) 라고 강조하는 식이었다. 보임믈러 외에도 니체 옹호자 진영에 속하는 바이마르의 니체 아카이브 소장 리하르트 욀러(Richard Oehler)는 니체 문제의 핵심은 피하고 외적 현상에 집착 37) 1938년 9월 6일 연설에서 히틀러는 로젠베르크의 신비화된 보탄 컬트 를 비판하였다. Reinhold Brinkmann, Wagners Aktualität für den Nationalsozialismus. Fragmente einer Bestandsaufnahme, p.124 38) Sung-Hyun Jang, Nietzsche-Rezeption im Lichte des Faschismus: Thomas Mann und Menno ter Braak, Olms-Weidemann 1994, p.64 39) 그는 나치 시기 학자 중에서 니체를 아주 잘 이해했던 사람으로, 대학생의 이상을 정치적 군인 으로 내세웠던 골수 나치였다. 40) 베른하르트 타우레크는 이탈리아의 니체 전문가 기우리오 에볼라(Giulio Evola)가 시도 한 니체와 파시즘의 관계를 보임믈러가 수용하였다고 주장한다. Bernhard H. F. Taureck, Nietzsche und der Faschismus. Ein Politikum, Leipzig 2000, p.123-128. 41) Alfred Baeumler, Nietzsche und der Nationalsozialismus. Studien zu deutschen Geistesgeschichte, Berlin 1937, p.294. Bernhard H.F. Taureck, Nietzsche und der Faschismus. Ein Politikum, p.134 재인용.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111 하는 면이 있었다. 즉 그의 주장은 히틀러가 바이마르의 니체 아카이브를 방문한 후 곧바로 바이로이트로 갔다는 사실에서 니체와 바그너가 나치제국에서 결코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니체를 나치즘에 맞지 않는 철학자로 비판했던 학자로 쿠르트 폰 베스테른하겐과 크리스토프 슈테딩(Christoph Steding)을 들 수 있다. 니체의 친유대주의를 문제삼은 베스테른하겐은 니체가 유대주의에 저항한 선구적 투 쟁자들을 정신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비하하였다 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니체의 종족관에만 국한하여 문제를 제기했던 베스테른하겐과 달리 슈테딩은 그의 책 <제국과 유럽문화의 병폐 Das Reich und die Krankheit der europäischen Kultur>(1942)에서 니체가 정치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은 아리아화가 아니라, 스위스화 Verschweizerung 이라며 니체야말로 독일의 분열을 조장하는 대 표적 철학자 로 평가하면서, 제3제국의 나치운동에 맞지 않고 오히려 제2제국인 빌헬름주의 시대의 인물로 규정지었다. 베스테른하겐의 말을 빌리자면, 니체는 독일역사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대신 그 결정적인 순간에 오히려 네 발자국 거꾸로 퇴보시켰다 라고 비난하였다. 42) 하지만 이미 제국 초기부터 니체 해석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보임믈러 의 권력에 의해 베스테른하겐이나 슈테딩과 같은 니체 비판자들은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베스테른하겐이 바그너를 옹호하 는 바그너 전문가였던 반면에, 보임믈러는 바그너에게 비판적인 로젠베르크에게 봉사하는 아카데미적 연결책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니체 옹호자가 곧 은밀한 바그너 비판자라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니체 비판과 옹호 또는 바그너 비판과 옹호가 결국에는 나치문화정책 엘리트 간의 권력투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4. 히틀러의 바그너 사랑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나치 추종자 내에서의 바그너 비판이 수면 42) Bernhard H.F. Taureck, Nietzsche und der Faschismus. Ein Politikum, p.133.

112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잠재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잠시 암시되었듯이(본고 3.2.) 무엇보다도 히틀러의 바그너 사랑 때문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1938년 9월 6일 히틀러는 한 연설에서 로젠베르 크와 힘믈러(Heinrich Himmler)를 중심으로 한 반( 反 ) 바그너적인 보탄 컬트 에 대해 직접 비판하였다. 43) 이것은 평소 문화정책에 대해서 분명한 의견을 밝히지 않아 부하들 간에 서로 의견대립이 조성되도록 두었던 히틀러의 습관에 비하면 아주 특별한 일이었으므로, 바그너를 비판하는 세력은 자신들의 의도를 더 이상 관철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인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바그너 음악에 무조건적 지지를 보냈는가? 그가 열광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44) 히틀러가 처음 바그너 오페라를 접한 것은 12살 때 린츠에서의 <로엔그린> 공연이었다. 45) 시골 공무원의 자식으로 소도시 린츠(Linz)의 부르주아지 고관 의 자식들에게 열등감을 느꼈을 히틀러에게 기존 사회적 계급구조 바깥에 속하 는 로엔그린의 신비한 세계가 그에게 꿈같은 환상을 자극하였을까? 하지만 히틀 러에게 있어서 <로엔그린>보다 더 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은 1905년 린츠에서 처음 연주된 <리엔치>였다. 이러한 바그너 경험 이후 그의 바그너 열광은 지칠 줄 몰랐으며, 무직이었던 빈 시절에도 바그너 오페라를 보기 위해 끼니를 거르면 서도 오페라극장을 찾았을 정도였다. 46) 앞서 나치 내부의 바그너 비판의 움직임에서도 보았듯이 히틀러가 본 바그너 는 나치 정책가들의 바그너 이해와 차이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히틀러는 바그너 도 시원찮게 여기는 <리엔치> 47) 를 높이 평가하여 정당대회 개막식에서 연주하 43) Reinhold Brinkmann, Wagners Aktualität für den Nationalsozialismus. Fragmente einer Bestandsaufnahme, p.124. 44) 나의 투쟁 Mein Kampf 에서 히틀러는 감동적 감사와 경탄의 대상이 되는 독일 위인 으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II)과 바그너를 손꼽았다. 45) 안인희,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303쪽. 46) 1923년 뮌헨에서 영국인이지만, 독일인보다 더 국수주의자였던 챔벌린(Chamberlain)을 만나게 되고, 바이로이트의 강력한 권력 지그프리트와 비니프레드 바그너 부부와 친분을 쌓게 된다. 바그너 집인 반프리트(Wahnfried)에서 히틀러는 바그너 추종자들에게는 생 애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특별대우를 받았는데, 바로 바그너 무덤에 가서 절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바그너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히틀러는 상류층 바그너 추종자들과도 어렵지 않게 교류할 수 있었다. 47) 안익태가 지휘한 1943년 8월 18일 베를린 필하모니의 연주회에서 첫 곡으로도 <리엔치>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113 게 했는데, 사실 이것도 문제였다. <리엔치>는 교회와 민족, 동료에게 배반당하 는 주인공의 패망과 파괴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오페라가 아닌가? 외적으로 볼 때 이 오페라는 승리와 성과를 내세우는 정당대회와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불평의 말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1938년 로버트 레이 박사는 히틀러와 바이로이트를 방문하고 사적인 자리에서 정당대회 개막곡으로 <리엔치> 대신 지금 시대(나치운동)에 맞는 다른 음악으로 교체하자고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48) 이에 히틀러는 자신이 정당대회 를 <리엔치>로 개막하는 것은 결코 우연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음악의 문제도 아니라고 반박하면서, 이 신이 축복한 음악에서 독일제국을 하나의 대제국으로 만드는 것이 성공하리라는 영감 을 린츠극장에서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 다. 49) 교회, 민족, 친구에게서 배반당하지만 오로지 신만은 자신과 함께 한다는 자기 확신이 강했던 주인공 리엔치를 통해 미학적 체험을 하였던 히틀러는 자신 이 신으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위해 소명 받았다는 확신을 얻었던 것이다. 이처럼 히틀러의 바그너 이해와 사랑은 단순히 정책적인 과시를 위한 쇼가 아니었던 것이다. 50) 독일의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면서 히틀러는 우울할 때 <트리스탄과 이졸데> 의 마지막 부분을 연주하게 했으며, 특히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 Isoldes Liebestod 이 기분을 전환하게 했다 한다. 51) 바그너가 묘사한 죽음이 히틀러에 서곡이 연주되었다.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의 숨겨 진 삶을 찾아서, 141쪽. 48) Ernst Hanisch, Ein Wagnerianer namens Adolf Hitler, Ulrich Müller(Hg.), Richard Wagner 1883-1983. Die Rezeption im 19. und 20. Jahrhundert, Stuttgart 1984, p.69. 49) Albrecht Speer, Spandauer Tagebücher, Frankfurt a. M. 1975, p.136. 50) 다른 한편, 히틀러는 1939년 9월 전쟁을 일으키면서 바그너의 <파르지팔 Parsifal> 공 연을 금지하였다. 원래 <파르지팔> 공연에 매우 애착(파르지팔을 메시아로 보고, 그가 바 로 자신임을 느꼈음)을 가지고 1934년 바이로이트 공연에는 직접 참견도 했었을 정도였 는데, 이런 조치를 내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히틀러에게 순진한 바보 영웅 파르지팔 은 적군을 공격하고 파멸시키는 전쟁 상황에는 적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한 의지보다는 동정심이 더 강조되는 파르지팔은 강한 의지의 지도자 상과 맞지 않았다. 전쟁 기간에는 금지한 대신, 히틀러는 독일이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이룬 다음에 <파르지팔>이 중심 이 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 51) Reinhold Brinkmann, Wagners Aktualität für den Nationalsozialismus. Fragmente einer Bestandsaufnahme,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p.

114 게 자극과 감동을 주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리엔치도 불 속에서 타죽 고, <신들의 황혼> 마지막 장면에서 지그프리트의 불타는 시체와 그 불에 뛰어 든 브륀힐데의 죽음, 그 불로 인해 신들의 발할(Walhall)도 불타게 되어 잿더미 로 변하게 되는데, 이 죽음의 컬트가 히틀러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중요한 테마였 을 것이다. 비니프레트 바그너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 기간 내내 히틀러는 오로지 <신들의 황혼>만 듣고자 했다 한다. 나치 정책 전문가 내부의 바그너 비판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총애와 무한한 지원은 바그너 해석의 최고 수준을 가능하게 했다. 바이로이트 공연의 핵심 인물 들은 결코 나치당원이 아니었으며, 당원 여부에 상관없이 당시 최고의 음악가, 연출가, 무대미술가들을 동원하여 최고의 바그너 공연을 하도록 바이로이트 주 인 비니프레트 바그너에게 자유를 주었다. 물론 이 자유는 나치문화정책이라는 제한된 틀 내에서만 허용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52) 127. 52) 바이로이트 공연이 예술가들에게 그나마 비정치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기여한 공간 이었다고 주장하는 관점은 어떤 맹점을 가지는 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Federic Spotts, Bayreuth. A History of the Wagner Festival, New Haven 1974; Micaela von Marcard, Hat Tietjen wirklich gelebt?, Vivace. Journal der Staatsoper Unter den Linden, 1998년 20/21호와 22/23호; Marcel Reich-Ranicki, Mein Leben. Stuttgart 1999. 여기에는 히틀러의 바그너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한 동기 였겠지만, 바이로이트의 여주인 비니프레트 바그너와의 사적인 관계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 다. 그러나 본 논문의 범위가 지나치게 난삽해지지 않도록 여기서는 생략한다.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115 5. 끝맺으며: 바그너 수용을 통해 나타난 나치의 음악정책 나치 시기 바그너 수용은 히틀러의 최고 스승이었던 바그너를 비판하는 일부 나치이데올로기 수행자들의 불만스런 목소리도 있었던 복잡한 현상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나치정부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나치 운동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 스스로 만든 정책과 이데올로기에 바그너 음 악이 잘 맞지 않았을지라도, 히틀러의 강력한 후원으로 바그너 컬트가 나치의 문화적 상징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서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나치음악정책을 파악할 수 있는가이다. 53) 지금까지의 서술을 종합해보면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 이 가능하다. 먼저, <지그프리트>에서 지그프리트가 미메를 칼로 내리치듯이, 나치들이 유 대인을 당연하다는 듯 학살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던 반유대주의자 바그너를 나 치 내부에서 거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은 일차적으로 나치의 문화정책이 일사불란하게, 위에서 아래로 명령이 하달되는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암 시한다. 다시 말해, 괴벨스, 로젠베르크, 괴링(Hermann Göring) 등 상하의 계급 체계가 확실하지 않은 채 비슷한 영역에서 정책을 추진하였으므로, 정책의 모순 과 갈등, 또 권력다툼으로 인한 불일치 등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통제가 부분적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허술한 측면이 있었던 만큼 경직되지 않고 생동적이었던 것 같다. 바그너에 관한 수용의 문제에서도 나치문화정책의 전반 에 해당하는 역동성이 그 단면을 드러낸다 하겠다. 나치 문화정책을 지나치게 일사불란한 통제와 프로파간다적 조작으로만 보는 것은 나치문화정책의 진짜 모습을 놓치는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둘째, 독일음악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바그너 음악과 민족주의자로서의 바그 너는 나치들이 새로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으로, 이들은 바그너 음악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성과 상징성을 좀더 강한 확신 53)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당시 대중매체의 진정한 비평이 없고, 여론 도 통제되고 조작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 이러한 정책이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지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치조직에서 작성한 보고서가 있고, 독일사회 민주당 망명정부에게 보고된 독일보고서(Deutsche Berichte, Sopade 보고서라 함) 등 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객관적인 자료라고 보기 힘들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데이비드 웰시, 독일 제3제국의 선전정책 (최용찬 옮김), 서울: 혜안 2001, 21쪽 참고.

116 으로 부각시켰다 할 수 있다. 게다가 바그너 음악 연주자 중 망명을 떠난 사람은 거의 없고 90% 이상이 나치 독일에 남아 활동한 덕분에, 그 이전과 별 다르지 않은 풍부한 인적 환경에서 계속 연주할 수 있었던 것도 바그너 음악을 통해 프로파간다를 하려던 나치음악정책이 누리는 장점이었다. 나치 시기 바그너 음 악 공연이 다른 분야와 달리 거의 어려움 없이, 히틀러의 무조건적 지원으로 전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질적인 연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미 이전부터 바그너 음악의 독일정신, 독일성을 자랑스러워했던 바그너 음악 가들과 보수적 바그너 추종자들은 약간의 지원과 후원으로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들을 나치제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 다. 이는 이미 물줄기가 있는 곳에 고랑을 좀더 깊게 파서 물줄기를 더 세게 만드는 원칙이었으니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효과적인 프로파간 다라 할 수 있다. 셋째, 바그너 음악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음악정책의 특징은 총체적 유효성 54) 에 있다 할 것이다. 괴벨스는 나치즘이 단순히 정치관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행위를 통째로 총괄하는 총체적 시각 이며, 우리가 지휘자에게 이렇게 또는 저렇게 지휘하라고 일일이 지시하는 열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무엇이 연주 되고 무엇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결정한 다 55) 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바이로이트 정책에서도 잘 볼 수 있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바이로이트에서 일하는 예술가들에게 직접적인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강요하지 않았고, 또 당원이 되라고 압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들이 예술적인 새로움을 추구할 수 있도록 매우 협소하나마 자유의 공간을 주기까지 했다. 그러 나 바그너 음악이 가지는 전체적인 프로파간다 역할에는 더 큰 손 이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 직접적으로 정치 냄새를 풍기지 않음으로써 더 큰 프로파간다 효과 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프로파간다의 본질은 예술 56) 이라 정의한 괴벨스의 54) E.K. Bramsted, Goebbels and National Social Propaganda, East Lansing/Mich. 1965, p.454. 55) Helmut Heiber(Hg.), Goebbels-Reden, Düsseldorf 1971, p.228-229. 56) 히틀러도 대중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을 프로파간다의 예술 이라 하였다. Adolf Hitler, Mein Kampf, München 1939, 193쪽. Reinhold Brinkmann, Wagners Aktualität für den Nationalsozialismus,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p.110 재인용.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117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치음악정책은 일종의 회색지대 를 허용함으로써 음악가나 정 책가들이 통제가 허술한 듯 자유롭게 행동하였지만, 큰 테두리의 방향과 목적은 일관되게 지향되었다 할 것이다. 디테일과 좁은 테두리 내에서의 혼란과 모순에 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프로파간다 정책이 일관성을 지닌 것은 잔인할 정도로 철저한 괴벨스의 일사불란한 계획성과 전체효과를 예측하는 지적 능력에 힘입 은 바 크다 하겠다. 57) 57) 데이비드 웰시, 독일 제3제국의 선전정책, 213쪽.

118 <참고문헌> 김문환, 바그너의 생애와 예술-총체예술의 원류, 느티나무, 1989. 안인희,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민음사, 2003.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의 숨겨진 삶을 찾아서, 휴머니스트, 2007. 데이비드 웰시, 독일 제3제국의 선전정책(원제 The Third Reich: Politics and Propaganda) (최용찬 옮김), 서울: 혜안, 2001. Theodor W. Adorno, Notiz über Wagner (1933), Adorno, Gesammelte Werke 18, Frankfurt a. M. 1984. E.K. Bramsted, Goebbels and National Social Propaganda, East Lansing/Mich. 1965 Cesar Bresgen, Das Verhältnis der jungen Generation zur Musik", Deutsche Musik-Kultur 2, 1937/38, pp.5-8. Nanny Drechsler, Die Funktion der Musik in deutscher Rundfunk 1933-1945, Paffenweiler 1987. Saul Friedländer/Jörg Rüsen(Hg.), Richard Wagner im Dritten Reich, München 2000. Helmut Heiber(Hg.), Goebbels-Reden, Düsseldorf 1971 Adolf Hitler, Mein Kampf, München 1939 Sung-Hyun Jang, Nietzsche-Rezeption im Lichte des Faschismus: Thomas Mann und Menno ter Braak, Olms-Weidemann 1994 Joachim Köhler, Wagners Hitler. Der Prophet und sein Vollstrecker, München 1997 Thomas Mann, Tagebücher 1933-1934(hg.v. Peter de Mendelssohn), Frankfurt a. M. 1977 Peter Muck(Hg.), Einhundert Jahre Berliner Philarmonisches Orchester. Darstellung in Dokumenten III, Tutzing 1982 Marcel Reich-Ranicki, Mein Leben, Stuttgart 1999. Paul Lawrence Rose, Richard Wagner und der Antisemitismus,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119 Zürich/München 1999 Alfred Rosenberg, Blut und Ehre. Ein Kampf fur deutsche Wiedergeburt. Rede und Aufsätze von 1919-1933, Thilo von Trotha (Hg.), München 1935 Dieter David Scholz, Richard Wagners Antisemitismus-Epistemata (Würzburger Wissenschaftliche Schriften, Reihe Literaturwissenschaft, Band 95), Würzburg 1993 Winfried Schüler, Der Bayreuther Kreis. Wagnerkult und Kulturreform im Geiste völkischer Weltanschauung. Münster 1971 Federic Spotts, Bayreuth. A History of the Wagner Festival, New Haven 1974 Bernhard H.F. Taureck, Nietzsche und der Faschismus. Ein Politikum, Leipzig 2000 Klaus Umbach, Richard Wagner. Ein deutsches Ärgernis, Hamburg 1982; Joseph Wulf: Musik im Dritten Reich. Eine Dokumentation, Hamburg 1966 www.bayreuth-festspiele.de

120 <Abstract> The music politic of the Third Reich through the Wagner s reception Kyung-Boon Lee Although in the Third Reich Richard Wagner was celebrated as the best German, and his music in the Bayreuth Festival contributed to demonstrate the high cultural level of the Nazi-regime not only to the Germans but also to the foreign audience, there were critical voices against Wagner and his music. Some of the leaders of the Hitlerjugend regarded folksongs as the suitable music for young people. Philosophers who were adherents of Friedrich Nietzsche criticized persistently Wagner's music as decadent, as well as Alfred Rosenberg who was one of the rivals for Joseph Goebbels in the field of culture politics. However, because of Hitler's love for Wagner their dissatisfactions could not be open shaped. In this essay I have attempted to analyze the music politics of Hitler's Germany in regard to three points; Firstly, as E. K. Bramsted asserted, the music politics of the Nazis about Wagner-cult aimed also at "total Validity"; secondly, the Nazis didn't invent their own art music tradition for the purpose of Propaganda, but used and interspersed with the German artful music of the past; Thirdly, the conflicts and dissensions among the leaders of the Nazis' culture politic might not be understood as the failure of their Propaganda. On the contrary, it could support the vitality of the Nazis culture-movement.

바그너 수용을 통해 본 나치의 음악정책 121 Keywords: Wagner, Bayreuth Festspiel, Hitler, Nietzsche, music politic of the national socialism, Propagan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