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머리말 3 1. NGO 업무와 활동방식 7 (1) NGO 활동가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7 (2) 대형NGO 활동가 활동방식 및 업무분석 9 (3) 중소NGO 활동가 활동방식 및 업무분석 11 (4)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의 시작과 업무변화 12 참여연대 1층에 세 들어 살면서 무엇을 느꼈나? 15 보도자료, 논평, 성명, 집회 없는 시민단체 17 시민단체의 콘텐츠는 공짜가 아니다 18 정보공개운동을 통한 전문성 확보하기 20 임원은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다 22 쉬고 또 쉬어야 창의력이 생긴다 23 활동가 사직 0%에 도전한다 24 2. 활동가에서 전문가로 거듭나기 26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 26 참여연대 시민참여팀 28 정보공개운동과 기록관리학 만남 30 한국국가기록연구원 31 정보공개센터 사무국장의 역할 33 이명박 정부의 탄압과 새로운 기회 34 정보공개센터 소장과 영역의 확장 37 사직 또 다른 도전 39 3. 활동가의 비전은 무엇인가? (제언) 42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전진한 머리말 대학시절 운명처럼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경실련, 참여연대를 비롯해 소위 말하는 권력감시형 시민단체들은 수많 은 매체에서 다루는 핫 아이템이라 거의 매일 보도가 되었고, 언론 속에 비치는 활동가들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대학 도서관에 앉아 NGO, NPO와 관련된 책을 읽고 외국에는 어떤 단체들이 있는지 자료를 찾아보곤 했다. 그중에서도 박원순과 김기식이 활약하고 있었던 참여연대가 가장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점차 그들은 내게 동경 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삼성 주주총회장에서 이재 용 변칙 승계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하는 모습이었다. 시민단체가 재벌에 게 전문성을 무장한 채 문제제기를 하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멋있어 보였다. 어느 날,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필자가 다니던 대구대학교를 찾 아왔다. 2000년에 있었던 낙천 낙선운동에 대한 강의를 하는 자리였는데 맨 앞자리에서 그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1시간 동안 열정적인 강의를 들었다. 나는 지금도 강의 내용은 물론 당시의 장면이 드라마처럼 생생 하게 기억난다. 03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는데 마침 강의가 끝난 후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때 박원순 처장이 했던 발언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질문 하는 학생이 없네요? 지금 질문하면 참여연대 1차 시험을 합격 시켜주겠어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질문을 던졌다. 200-300명이 동 시에 나를 쳐다봤지만 참여연대를 입사하고 싶은 생각에 용기를 내었다. 처장님 참여연대는 왜 언론개혁운동을 하지 않는 겁니까? 허허허, 학생이 참여연대 입사해서 하면 되겠네요. 당시 이 장면은 대구대학교 학보사 1면에 보도되었다. 그 후 남들은 고시공부와 토익으로 대변되는 취직공부를 할 때, 나는 시민활동과 관련 된 책을 읽었고, 사회적으로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각종 잡지에 글을 보 내는 연습도 했다. 특히 고향이기도 했고 대학이 있었던 대구가 나는 너 무 답답했다. 서울에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고 그들에게 많은 생각과 행동을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준비 끝에 드디어 참여연대에 합격했다. 참여연대에 합격하던 날은 2002년 설날 이틀 전쯤이었는데 눈이 참 많이도 왔었다. 합격소식 을 받아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가던 날을 잊을 수가 없 다. 부모님과 지인들에게 꿈을 이루었다고 자랑스럽게 합격소식을 전했 다. 대학 때 늘 꿈꿔오던 분야의 직장을 들어간다는 게 누구나 할 수 있 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자타(?)가 축하하는 파 티를 참 많이도 했다. 서울로 입성 후, 환상은 오래지속 되지 않았고 현실은 역시 녹록하지 04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않았다. 대구촌놈이 서울생활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어려움에 닥쳤다. 누수와 곰팡이로 온갖 문제에 노출되었던 자취방과 70만 원 가량의 활 동비는 서울생활이 만만치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시절 자취방에 앉아 있으면 곰팡이가 스멀스멀 자라는 모습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더구나 서울의 물가는 살인적이었다. 한 끼 당 5천원이 넘는 밥값을 지 출하는 것만으로도 한 달에 40-50만원이 들어갔고, 보일러 기름 값이며 교통비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도 애매 했다. 부모님께 아들 월급이 70만원이라고 차마 말씀을 못 드리고 200 만원 넘게 월급을 받는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생활도 쉽지 않았다. 우선 나의 실력과 상식이 부족했다. 거 친 대구말투와 매일 욕을 먹었던 글 솜씨, 술자리마다 듣게 되던 각종 운동권 용어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활동가들이 함께 어깨를 걸고 운동권 노래를 부르는데 한 소절도 따라하지 못한 굴욕감이었다. 대학에서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했던 터라 CCM은 거의 다 알았지만 민 중가요는 한 두곡 밖에 몰랐다. 참여연대의 운동방식은 철저했다. 엄격한 결재시스템과 활동가들이 펼 치는 운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들이 있었다. 내가 기획하고 생각한 것 을 펼치기에는 실력이 너무 부족했다. 점점 지쳐갔다. 상황이 이렇다 보 니 참여연대에서도 나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적응하지 못했다. 참여연대 생활 1년도 채 되지 않아, 고향으로 도망가고 싶은 유혹이 불덩이처럼 밀려왔다. 매일 밤 선배활동가들을 붙잡고 여러 고민을 털어 놓았다. 괴로움에 많이 울기도 했던 것 같다. 매일 출근길에 참여연대 05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사무실 앞을 한동안 서성이며 들어가길 주저했던 기억도 많이 난다. 설 상가상으로 큰 힘이 되었던 입사 동기 8명도 1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시절 꿈꿔 왔던 시민활동가를 이렇게 허망하게 포기할 수 없었다.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고,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겨자씨 하나만큼 이라도 성과를 내고 싶었다. 특히 언론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자들과 술 자리를 가지며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견디다 보니 조금 씩 성과가 났다. 나는 이제 활동가 15년 차다. 20대 후반의 청년은 40세가 훌쩍 넘은 중년의 배나온 아저씨가 되었다. 외모도, 생각도 많이 변했지만 가장 많 이 변한 것은 시민활동가라는 직업이 너무 좋아졌다는 점이다. 간사에서 사무국장으로, 다시 소장까지 직책은 많이 변했지만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나는 활동가 이다. 그런데 후배 활동가들을 보니 신입활동가 시절에 고민했던 모습과 다 르지 않았다. 시민사회활동가들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담은 사이트(nowplanb.kr)에 초년병 시절 고민했던 생각들이 똑같이 재생산 되고 업데이트 되고 있 다. 세월은 지났으나 이 바닥은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이 간단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 글을 쓰려고 결심한 것은 나의 활동경험을 공유하고, 활동가라는 직업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고민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에서다. 나의 이야기가 자랑처럼 보일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도움을 얻을 지점이 06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를 평가했던 많은 사람들은 내 글과 전혀 다르게 나를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평가는 자신과 다른 사람이 동시에 하는 것이다. 문장마다 왜 곡된 기억이 있을 수도 있고, 과장된 측면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 글을 통해서 활동가들이 조금이라도 해결점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활동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직업 이라고 생각한다. 활동가로 한 평생 살아갈 수 있다면 그처럼 보람찬 일 이 없을 것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활동가로 보람을 느끼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길 바라면서 이 글을 썼다. 1. NGO 업무와 활동방식 (1) NGO 활동가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NGO, NPO, 시민단체(이하 NGO) 등 비영리단체들의 종류는 너무나 많고 그 대상도 다양하다. 주체가 되는 것만 해도 사람, 동물, 환경, 차, 교통, 주거 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 다. 바로 단체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는 점이 다. 1) 하지만 이 설명도 적당하지 않을 때가 많다. 수많은 개발 사업들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는 명분으로 별다른 합의 과정 없이 밀어붙 일 때가 많고, 그 속에서 피해를 보는 수많은 약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다. 어쩌면 NGO 활동가들은 이 지구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소외받는 존 재들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1) 비영리조직(Non Profit Organization)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말로, 비영리단체, 비영 리민간단체, 비영리기관, 비영리집단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제3섹터 또는 시민사회 조직이라고도 한다. 07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필자도 이주노동자 인권보호(1년) 2), 기록관리 및 정보공개(14년) 3) 활동 을 총 15년 동안 해왔지만 아직도 NGO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헷갈릴 때 가 많다. 사람들에게 비영리 활동이라고 말하면 활동가들은 돈을 받지 않고 일 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 고 하면, 왜 국가(질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국가의 개념)를 위해서는 일 하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NGO는 무엇일까? 사실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사례를 나눠보면 요즘 가장 많은 단체는 생활밀착형 단체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동육아, 의료생협, 먹거리 생 협, 공동주택 등 소위 말하는 공동체 지향형 단체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협동조합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필자가 소장으로 있는 알 권리연구소도 협동조합 형태로 되어 있다. 4) 요즘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의료생협이다. 주민들이 모여서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아파서 병원을 가 는 것이 아니라 건강할 때 의료생협에서 꾸준히 관리를 받는 건강관리형 조합이다. 다음으로 애드보커시형 시민단체 5) 가 있다. 참여연대, 경실련, 정보공개 센터 등 일상생활에 바쁜 시민들을 대신해서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2000년 대 초반부터 중반 이후까지 애드보커시형 시민단체가 가장 많았다. 요즘은 대안언론 등이 이런 역할을 하는 경우 가 늘어나고 있고, 이 대안언론도 회원가입을 받고 있어 시민단체들의 2) 2001년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에서 1년간 상담실장을 했다. 3)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 (사)한국국가기록연구원,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4) 협동조합 알권리 연구소 여는 전진한씨 억울한 죽음 없도록 안전 자료 찾아내 공개 할 것 경향신문, 2015년 3월 16일. 5) 주로 대변ㆍ옹호형(영어로는 Advocacy') 시민단체를 말한다. 08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전통적인 영역이 위기에 처해있다. 그렇다고 애드보커시 운동이 수명을 다한 것도 아니다. 여전히 참여연 대를 비롯해 정부의 감시자 역할은 필요하다. 최근에 세월호 관련 활동 은 이런 단체들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환경단체들도 빼놓을 수 없다. 환경단체는 애드보커시 운동과 환경 및 생태운동을 합쳐 놓은 단체들이 많이 있다. 특히 4대강, 핵발전소 등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현안들이다. 우리나라와 이웃한 일 본의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폭발하면서 환경운동은 더 이상 부문 운 동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운동이라는 것을 전 세계가 인식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유니온형 운동이 부상하고 있다는 점이 다. 청년유니온, 민달팽이 유니온, 노후 희망 유니온 등 같은 세대와 조 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유니온을 설립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유니 온 운동은 노동조합 운동이지만 사실상 시민운동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 히 청년유니온 활동은 기존의 시민단체나 노조에서 하지 못했던 많은 변 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가장 기억나는 것은 피자업체 30분 배달제 금지 캠페인 6) 인데, 아르바이트로 배달원을 하던 많은 청년들이 다치거나 죽는 일까지 발생해 이런 캠페인을 하게 되었다. 무엇이든 빠르게 배달하면 좋다는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린 훌륭한 캠페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대형NGO 활동가 활동방식 및 업무분석 활동가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많은 단체를 경험하지 못해 직접 경험한 사례로 나열할 수밖에 없다. 우선 참여연대 등 큰 시민단체 들은 대부분 운영부서와 사업부서로 구분되어 있다. 운영부서란 총무팀, 6) 2000원에 목숨 건 질주 사각지대 몰리는 '배달의 청년' 머니투데이, 2015년 4월 6 일 09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시민참여팀 등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서이다. 하는 일이 정말 많다. 활동가들 활동비, 인사, 물품, 회원관리 등 업무 종류가 수없이 많다. 특히 시민참여팀은 회원들이 퇴근 후에 참여하는 일이 많 기 때문에 야근을 기본으로 하는 곳이다. 나는 약 1년 6개월간 참여연대 시민참여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이때 경험한 많은 일들이 정보공개 센터를 창립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회원 및 시민들의 항의전화를 대응하는 일이었다. 각종 이슈가 발생하면 가장 먼 저 항의 및 격려성 전화가 오는 곳이 시민참여팀이다. 별다른 이유 없이 욕설로 시작해 욕설로 끝나는 전화들도 많은데, 이 런 전화를 몇 통 받다보면 일에 대한 회의가 밀려온다. 그렇지만 항의전 화를 받는 것도 시민운동의 과정이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동시에 발생하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항의전화까지 경 험해보면 깊이 있는 운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이다. 보람도 많은 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회원들이 보내오는 격려 물품이다. 특히 참 여연대는 날개를 달아주세요 라는 회원 요청 프로그램이 있었다. 사무실 에서 필요한 각종 물품을 소식지나 회원뉴스레터 같은 곳에 공지하면 신 기하게도 그 물품이 도착해 있다. 그런 후원물품들을 볼 때마다 회원들 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뭉클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사업부서는 말 그대로 각 분야 주제별로 사업을 하는 곳이다. 필자는 투명사회팀에 있었고 그중에서도 정보공개사업단이라는 곳에서 활동했 다 7). 처음 신입 활동가 때 배치 받았던 일을 나는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큰 단체는 한 사업부서에 계속 있을 수 없다. 신 7) 당시 참여연대 투명사회팀에는 정보공개사업단, 예산감시단, 공익제보지원단, 맑은 사 회 만들기 본부 등의 사업부서가 있었다. 활동가들은 한 사업단을 전담했고, 사업단 별로 외부 전문가들인 실행위원들이 있었다. 010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입간사들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인사이동은 계속 해서 일어난다. 상황 이 이렇다 보니 전문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는 근무기간이 오래될수 록 해결하기가 쉬워진다. 여러 부서 경험을 통해서 자신에게 가장 적합 한 운동을 찾고, 그 운동을 통해 평생 활동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 상적일 것이다. (3) 중소NGO 활동가 활동방식 및 업무분석 참여연대 및 환경운동연합처럼 활동가들을 단체로 공개 채용하는 곳은 사실 시민단체들 중 거의 없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운영부서와 사업부서를 나누는 경우도 거의 없다. 대부분 지인추천으로 입사하는 경 우가 많고, 운영과 사업을 동시에 다해야 하며, 단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활동가들의 몫이다. 게다가 활동비와 근무여건은 열악하다. 같은 처지, 서로 별반 다르지 않은 힘든 상황이니 그 어려움을 여유롭게 알아 주는 동료들도 별로 없어서 활동가가 받는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다. 정보공개센터도 근무하는 활동가들이 2명에서 시작해 5명까지 갔다. 이런 단체 활동가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바로 행사 이다. 시민단체 는 수많은 행사가 있다. 후원의 밤, 총회, 회원단합회, 임원회의 등 이런 행사들이 열리면 모든 준비는 활동가들의 몫이다. 밤을 새서 준비해도 일은 끝이 없으며, 사업예산이 별로 없어서 가장 싼 가격으로 행사를 운 영해야 하니 온갖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이런 패턴을 2-3번 반복하다 보면 지치게 되고, 더 이상 하소연할 곳 도 없으면 사직서를 내는 경우도 많다. 아마 이 글을 보고 있는 수많은 활동가들도 이 말의 의미를 금방 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활동가가 이 런 행사를 겁내면 안 된다. 사실 활동가는 행사에서 시작해 행사로 끝난 011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사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서 작은 단체들 은 큰 단체와 업무패턴을 달리해야 한다. 큰 단체들이 하는 패턴 그대로 업무를 하다보면 무리가 오기 마련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 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4)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의 시작과 업무변화 참여연대에서 4년 4개월을 근무하고 사직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참 여연대를 입사하는 것이 대학시절 꿈이었고 힘들게 시험을 통과해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던 곳이었다. 박원순 시장(참여연대 전 사무처장)의 활 동모습을 동경했고, 그처럼 멋진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그 가 썼던 책을 다 읽었다. 심지어 머릿속으로 암송도 하면서 활동가가 되 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했다. 그런데 별다른 꿈과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참여연대 문을 나서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참 힘들었다. 정들었던 안국 동을 떠나면서 배웅하던 동료간사들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건국대 근처에 있던 호프집에서 혼자 낮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초라하게 시민운동 판 을 떠나지 말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내가 시민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온 것이지, 참여연대를 위해서 온 것이 아 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결심을 하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 을 느꼈다. 어디 다른 단체에 가지 말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시민단체를 만들자는 결심을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황당하고 당돌한 생각이었다. 서울 에 연고도 없었고, 서울에 변변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동문이 있었던 것 도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창립하고 싶었고, 일반 활동가 출신들도 012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얼마든지 시민단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후 그 당 시 다니고 있던 명지대 기록관리대학원에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친 구들을 만나고 다녔다. 명지대 뿐만 아니라 중앙대, 한국외대, 이화여대, 한남대 등 기록관리대학원 8) 을 다니는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기록관리가 활성화되려면 정보공개운동이 더욱 크게 일어나야 한다고 설득하고 다녔 다. 그쯤 예전에 정보공개운동을 이끌었던 하승수 변호사가 떠올랐다. 하 승수 변호사는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 시절 누구보다는 열심히 정보공 개운동을 했고, 어떤 변호사보다도 정보공개소송을 많이 수행했던 전문 가다. 참여연대 신입간사 교육을 받았을 때 하승수 변호사에게 정보공개 청구를 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또한 지역운동을 하면서 시민운동에 누구보다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승수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해야겠 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로부터 몇 달 뒤 실제로 만났다. 하승수 변호사와 나눴던 대화내용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변호사님, 저 정보공개청구 전문단체를 한번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서울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민운동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좀 도와주세요. 전진한 간사님이 그런 일을 하신다고 하면 제가 열심히 도울게요. 같 이 해봅시다. 당시 제주대 로스쿨 교수로 있었던 하승수 변호사는 놀랍게도 나의 제 안 한마디에 바로 좋다는 답변을 했다. 이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도 무리한 제안을 흔쾌히 승낙한 하승수 변호사에게 정말 감사하 8) 기록관리를 공부하는 대학원은 전국에 20여 개 이른다. 이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 으면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기록전문요원 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 013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다. 승낙을 받는 순간 머릿속에 청량한 사이다가 들어온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고, 대낮이었지만 둘이서 맥주도 많이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2년 동안 창립을 준비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현재의 투명사회 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모델을 설명했고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 감을 보였다. 무엇보다 내용을 내세우지 않고 시민운동의 방법론의 개선 을 통해 시민운동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내용 중심이 아니라 절차(정보공개청구)가 중심이 되는 시민단 체는 국내에 없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이런 종류의 시민단체들이 더 많았지만 국내에는 OO연합, OO연대, OO행동과 같은 단체들만 존재할 뿐이었다. 누구보다 정보공개청구를 잘할 자신이 있었고, 이것이 우리사 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모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용감하 게 소위 말하는 구라 를 풀고 다닐 수 있었다. 또한 하승수 변호사가 전면에 나서서 많은 분들이 참가했다. 당시 가 장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한학수 PD(MBC 피디수첩)였다. 한학수 PD는 하승수 변호사의 대학교 친구였고 창립 당시 많은 MBC PD 및 기 자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켜주었다. 김용진(뉴스타파 대표), 성재호(KBS 기 자)도 정보공개운동이 우리사회에서 꼭 필요하다는데 공감하고 헌신적으 로 도와주셨다. 이 두 사람은 우리나라 탐사보도를 개척한 대표적인 언 론인이다. 특히 김용진 대표는 KBS 탐사보도팀을 만들었고 팀장으로 있 으면서 성재호 기자와 함께 수많은 보도를 만들어 낸 분이다. 기록학계에서는 대학원 시절 은사님이었던 이승휘 교수(명지대학교 기 록관리전문대학원 원장)와 이소연 교수(덕성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가 헌신적으로 참여해주셨다. 기록학계에서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에게 참여 014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를 독려했고, 항상 중심을 잡아주신 분들이다. 이승휘 교수는 창립 7년 이 지난 지금까지 정보공개센터 대표로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시민운동계에서는 홍일표 박사(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경건 교수(서 울시립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가 창립 당시부터 참여했다. 참여연대 시 절, 선배간사와 실행위원으로 만났던 두 사람은 정보공개센터가 꼭 필요 하다고 항상 용기를 주었고, 힘들어할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었다. 신동 호 기자(경향신문 논설위원)는 매주 산행을 같이 하면서 정보공개센터에 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고 정보공개센터에 밑거름 같은 역할을 했다. 이밖에도 기록학계 교수님 및 대학원생들, 강의 때 만났던 수많은 기 자들이 정보공개센터 창립에 참여하면서 큰 힘을 얻었다. 나는 정보공개 센터를 만들자는 제안만 했던 역할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단체가 필요하 다는 것에 공감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주었기 때문에 창립이 가능 했다. 창립을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모임을 가졌다. 매주 모여 회의를 했고,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러 모았으며 끝나고 항상 술을 마셨다. 그때 그런 모임과 만남의 기쁨들이 없었더라면 정보공개센터는 절대 창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참여연대 1층에 세 들어 살면서 무엇을 느꼈나? 드디어 2008년 9월 창립회원 160명과 이사진 30명을 모시고 창립을 준비할 모든 여건을 갖췄다. 그러나 보유하고 있는 시드머니는 3,500만 원 9) 밖에 없었고, 나와 정진임 간사(현 정보공개센터 사무국장)의 활동 9) 당시 필자가 일했던 사)한국국가기록연구원은 개원 10주년 행사로 정보공개 관련 시 민단체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 돈을 정보공개센터 창립자금으로 쓸 수 있었다. 015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비를 충당하려면 최대한 돈을 아껴야 했다. 우리는 가능하면 종로 근처로 사무실을 구하고 싶었지만 4대문 안에 있는 사무실의 비용이 우리 수준에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처음부 터 만만한 일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문득 참여연대 1층(당시 광우 병대책위원회 사무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여연대를 그만두 고 행정감시센터 실행위원 10) 등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잘만 이야기하면 좋은 조건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만드는 시민단체가 대형 시민단체에 공간을 얻었을 때 장단점을 고민해보았다. 사실 많은 분들이 참여연대 1층으로 들어가는 것에 반대했다. 큰 시민 단체와 같이 있다 보면 그 활동력에 눌려 활동 자체를 못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단점보다 는 장점이 많았다. 우선 공간이 넓었다. 그리고 참여연대 활동가로 있다 가 나와서 시민단체 창립 주체로 다시 참여연대 한 켠에 들어간다는 것 이 시민운동 동료들이 보기에도 좋을 듯 했다. 나는 하승수 변호사와 함께 당시 김민영 처장에게 싸게 임차해달라고 떼를 썼다.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1년 차에 1000만원에 70만원, 2년차 에는 1000만원 90만원(동절기 하절기에는 냉난방 비용으로 20만원을 추 가)으로 합의를 봤다. 사직한지 2년 만에 동네는 바뀌었지만(안국동 통 인동) 참여연대 11) 로 돌아왔다. 초라한 귀환인지, 금의환향인지는 헷갈렸 다. 아무튼 2년을 와신상담하며 준비했고 결국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 다는 것이 중요했다. 보도자료, 논평, 성명, 집회 없는 시민단체 10) 참여연대를 그만두고, 기록관리 정보공개분야로 실행위원으로 꾸준히 참석하고 있었다. 11) 참여연대는 2007년 안국동에서 통인동 사옥으로 이전했다. 016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막상 1층에 입주하고 나니 모든 것이 막막했다. 변변한 책상 하나 없 었다.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막막함으로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무엇보 다 50명이 넘는 대형 시민단체 1층에서 전임 2명과 당시 실무적인 일을 도와주던 직원 한 분 밖에 없는 시민단체가 어떻게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지 난감했다. 어느 날 활동에 관한 고민을 하다가 참여연대와 반대로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참여연대가 제일 잘하는 것은 보도자료, 성명 등 을 적시적소에 잘 발표하는 것이다. 또한 집회도 잘하고 고발연대라고 불릴 정도로 각 사안마다 검찰 고발, 감사원 감사 청구 등이 활동의 패 턴이었다. 참여연대 활동과 반대로 해보면 오히려 존재감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 해보았다. 성명, 보도자료, 집회, 검찰고발, 감사원 감사(감사원에 공익감 사청구는 몇 번 했다) 등을 일체하지 않고,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자료를 블로그에만 계속 업데이트하기로 했다. 묵묵히 하다보면 언젠가 반응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요한 자료를 입수했을 때 보도자료를 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최대한 참았다. 대신 딱딱한 내용으로 쓰지 않고 각종 사진과 인포그래 픽을 곁들여 일반시민들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썼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민단체들이 발표하는 보도자료, 논평 등은 너무 근엄했고 운동권 용어 가 대부분인 경우가 많았다. 운동권 용어는 일반시민들에게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고 특히나 젊은 017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세대들이 시민단체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했다. 12) 정보공개센터 는 작은 단체답게 쉽고 가볍게 쓰고자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서서히 반 응이 왔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정보공개센터 회원 중 한명이 국가기 록원에 전직 대통령의 일상을 다룬 사진을 정보공개를 받아 보내주었는 데 이 사진을 공개하니 하루 종일 블로그가 터져나갈 듯이 방문객들이 들어왔다. 아마 10만 명 쯤 방문한 것 같다. 사람들은 글 보다는 이미지와 동영상에 훨씬 더 큰 반응이 온다는 것 을 깨달았다. 많은 단체들이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보면 여전히 논평과 성명서만 있는 곳이 많은데 그 단체를 설명할 수 있는 창의성 있는 많은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시민단체의 콘텐츠는 공짜가 아니다 정보공개센터는 콘텐츠 공유에 대해서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정보공 개청구를 한 후 의미 있는 정보는 반드시 우리 회원에게 먼저 공유하자 는 것이다. 많은 시민단체들을 보면, 어렵게 만든 자료들을 모든 언론사 들에게 다 풀어버리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보도라도 많이 되면 다행이 지만 언론에 나가지 않으면 그날로 생명을 마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참여연대 시절 이런 것이 못마땅했다. 언론인들도 활동가들이 어렵게 만든 정보들을 그저 쉽게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활동가들 도 신문이나 잡지를 유료로 구매를 하니까 언론인들도 활동가들의 노력 에 대해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12) 규탄한다, 좌시하지 않겠다, 민중들이 용서치 않는다. 시민사회단체들이 대체로 이런 문장을 기계적으로 쓴다. 이런 단어들은 좀 더 현대적 의미로 고쳐서 쓸 필요가 있 다고 생각하고 있다. 018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어느 날 지역 방송 기자가 정보공개청구를 했는데 중요한 정보를 입수 했다는 연락이 왔다. 경기도 모 군에서 언론인, 국정원직원 등에게 촌지 를 뿌린 내용을 정보공개청구 답변서로 공개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기자가 일하던 언론사는 이 내용을 보도하지 않기로 했다. 소속 언론사 직원이 그 내용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내용이 그대로 묻 히기에는 너무 아쉬워 정보공개답변서로 받은 파일들을 정보공개센터로 가져온 것이다. 정보공개센터는 기자회견, 보도자료를 내지 않기로 했지만 이 중요한 내 용을 그냥 블로그에만 올리기가 너무 아까웠다. 당시 친했던 한겨레신문 기자에게 이 문제를 상담했더니 경찰팀 홍석재 기자가 찾아왔다. 당시 홍 석재 기자는 참여연대를 와봤지만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다며 회원가입까 지 하고 그 자료를 가져갔다. 이후 이 자료는 한겨레 1면 13) 에 보도가 되어 일파만파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정보공개센터는 이 자료를 찾는 기자들로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한겨레 보도 후에도 많은 언론사에서 이 사례 를 보도했다. 드디어 정보공개센터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정보공개청구로 좋은 내용이 생기면 홍석재 기자에게 자료를 주 었다. 14) 회원 기자에 대한 예우이기도 했고, 보도자료 및 기자회견을 하 지 않기로 했으니 방법도 없었다. 이후 소문을 듣고 하나 둘씩 언론인들 이 정보공개센터에 가입하기 시작했고, 참여연대에 취재를 왔다가 1층에 있는 우리 사무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언론사는 참여연대 정보공개센터 13) 가평군, 권력기관에 습관성 돈봉투 한겨레, 2009년 4월 27일. 14) 당시 정보공개센터를 찾아오는 언론사 기자들은 매우 드물었다. 이로 인해 홍석재 기자와 10여 차례 기획보도를 같이 했었다. 019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라는 이름으로 기사를 쓰기도 했고, 1층 길목에 있다 보니 시민들이 참 여연대에 항의할 문제를 정보공개센터로 와서 항의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 참여연대 아닙니다. 2층으로 올라가세요. 라는 안내를 했다. 큰 단체에 세 들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당시 깨 달을 수 있었다. 그때는 정말 반지하 조그만 사무실이라도 단독으로 가 질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루도 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정보공개운동을 통한 전문성 확보하기 작은 단체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전 문성은 작다 라는 단점을 보완해준다. 작은 단체일수록 더욱 열심히 공 부하고 더 세밀한 것들을 집요하게 찾아내야 한다. 당시 나와 정진임 간 사(현 정보공개센터 사무국장)는 둘 다 기록관리대학원에서 공부를 했고, 하승수 소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정보공개소송을 했던 변호사이다. 임원들도 대부분 기록관리 교수, 변호사, 탐사보도전문 언론인들이었고 정보공개센터 구성원 전체가 정보공개, 기록관리 라는 분야에서 전문 가로 통하던 사람들이었다. 국내에 있는 어떤 단체보다 정보공개청구를 잘할 자신이 있었고, 그 공개된 자료를 해석하고 좋은 콘텐츠로 만들어 세상에 보여줄 실력이 있었다. 이후 정보공개센터는 국내 유일의 정보 공개 기록관리 15) 전문 시민단체라는 명칭을 얻을 수 있었다. 정보공개센터는 기존 시민단체에서 크게 중요히 생각하지 않았던 블로 그를 열심히 꾸몄다. 매일 1,000명 이상의 방문자가 생기면 기존 언론에 15) 시민운동, 주장보다 팩트가 중요 재미 추구 젊은 세대 문화 있어야 한겨레, 2015 년 2월 24일 020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서 보도해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홍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매일 작은 내용이라도 꾸준히 업데이트 했고 딱딱한 내용이 아니라 정보 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자료를 재미있고 시의성 있게 쓰려고 노력했다. 정보공개청구도 문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 동영상 등 다양한 자료 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각종 인포그래픽과 함께 공개했다. 그 결과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2010년에는 미국 하버드에서 박사 공 부를 하고 계시는 의사 분께서 정보공개센터 블로그를 보고 월10만원(이 회원은 회원 증액기간에 20만원으로 증액했다) 회원가입을 했고, 사업을 하시고 계셨던 한 분(정보공개센터 이경득 운영위원)은 블로그를 보고 전 직원을 전부 회원가입 시키기도 했다. 2010년에는 한국유네스코에서 차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디지털 유산 (한국유네스코 디지털 유산 어워드)으로 지정되어 상을 받기도 했으며, 다음세대재단의 Change ON 에서 깔끔하고 아름다운 국내비영리단체 홈페이지 10곳 에 선정되기도 했다. 결국 시민들은 정보를 온라인을 통 해서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꾸준히 관리하다 보 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소문이 퍼지면서 후원자들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위의 사례처럼 블로그나 홈페이지는 중요하지만 많은 시민단체들이 온 라인에 많은 투자와 시간을 쓰지 않고 있다. 하루방문자가 10-20명이면 그만큼 시민들의 참여기회를 줄이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사회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활동을 목말라 하고 있으며 후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021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임원은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다 정보공개센터에서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바로 임원들이다. 창립당 시 임원(이사회)은 30명 정도가 되었는데 매월 이사회를 개최하기로 했 다. 이사회 운영원칙이 있었는데 회의는 최대 1시간을 넘기지 않고, 뒤 풀이는 최대한 길게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시행했다. 이 원칙은 임원 한 분이 오시던, 많이 오시던 항상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 결과 임원 한 분 한 분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많이 쌓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단체 임원들은 상임활동가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오면 말 그대로 어색 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임원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너무 바쁜 분들이 라 늘 지쳐있다. 이런 분들을 모시고 회의를 길고 지루하게 하는 것은 사무실에 오지 말라는 뜻과도 같다. 우리는 이사회가 있을 때마다 늘 다 양한 이벤트와 맛있는 집을 물색했고, 오시면 친구처럼 밤이 늦은 줄 모 르고 같이 놀았다. 임원들과 모이면 늘 재미있었던 것 같다. 단체에서 임원들이야 말로 가장 큰 후원자이자 버팀목이다. 임원들과 자주 만나지 않는 단체는 성 장하는데 많은 한계가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임원 회의를 하는 단체들 도 많은데, 그렇다 보면 활동가들과 사이도 서먹해지는 경우가 많고 단 체도 정체될 가능성이 높다. 임원들과 친구처럼 지내다 보니 가장 어려웠던 창립 초기를 잘 견딜 수 있었다. 작은 단체일수록 임원들과 자주 만나야 하고 이 분들과 인간 적인 유대감을 가져야 한다. 결국 시민단체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 들의 뜻이 모여져야만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022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쉬고 또 쉬어야 창의력이 생긴다 정보공개센터 활동가들이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새로운 정보공 개청구와 정보를 검색해서 찾는 일이었다. 육체적으로 지치거나 잡무에 시달리면 창의적인 생각이 나올 수가 없다. 멍 때리는 시간, 걷는 시간, 노는 시간들이 많아야 창의적인 활동이 나온다. 그저 의무감에 오전9시 부터 오후6시까지 사무실에 있다면 창의력이 생길 리가 만무하다. 정보공개센터는 늘 점심을 먹은 후 사무실 주변을 산책 했다. 인왕산 과 청와대 앞을 걸으면서 회의도 했고, 아이디어가 부족 할 때 서로 묻 기도 하며 결의를 다졌다. 산책이 길어질 때면 점심시간은 2시간을 넘을 때도 많았는데 그 시간은 노는 시간이 아니라 아이템을 가다듬는 시간이 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휴가도 길게 쓰기로 했다. 1년 내내 야근과 특근을 반복하다가 여름철 2-3일 놀면서 휴가를 대 체하는 직장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쉬어야지 일을 할 수 존재이다. 쉬지 않으면 단체에서 만족을 느낄 수 없고, 만족을 느끼지 못하면 퇴직이 잦아져 단체 성장에 방해가 된다. 여름휴가는 주말을 빼 고 7일이었고, 겨울휴가까지 만들어 연말연시에는 조용히 보내도록 배려 했다. 이런 휴가의 혜택은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집에서 놀다가 아이템이 떠오르면 글을 쓰기도 했고, 여러 가지 새로운 사업을 생각해 기획안을 만들기도 했다. 요즘도 집에 쉬거나 여행할 때 아이템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 휴가뿐만 아니라 평소 근무도 과감한 조정을 했다. 2013년부터 금요일 에는 오후 2시까지 근무를 하다가 결국 이것도 겉치레라는 생각이 들어 023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시민단체 중 최초로 주 4일제 근무를 시행했다. 주 4일 상상을 해보았 는가? 주 4일은 모든 것을 변화 시켰다. 불금이 아니라 불목이 되었고 1 주일이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모른다. 주 4일제라 해서 활동가들이 단순히 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활동가 는 모든 일상이 일이다. 나만 하더라도 수많은 기자들에게 걸려오는 전 화, 후원자들의 안부, 약속 등 사무실에 가지 않더라도 너무 많은 스케 줄이 밀려 있었다. 그럼에도 금요일 오전에 늦잠을 자고 나면 또 다른 에너지가 생겼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집을 나섰다. 활동가는 지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 다고 생각한다. 특히 활동가들은 감정 노동이 많고, 적은 급여로 늘 높 은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적절히 쉬는 것은 활동의 성패에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많은 노동에서 중요한 활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색할 수 있는 멍 때리는 시간 등이 많을 때 의미 있는 활동력이 생긴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사실 지난 15년 동안 나 자신을 돌아보면 가장 심심한 순간에 가장 대박을 친 활동을 많이 했다. 정보공개센터 활동도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절대 창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좋은 분들과 함께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자주 만나는 것이 늘 즐거웠다. 활동가 사직 0%에 도전한다 시민단체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활동가들의 잦은 이직인데 경험상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직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정확한 기록은 나와 024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있지 않지만 60-70%는 이 기간 안에 그만두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단체 및 개인을 위해서도 매우 좋지 않은 경우이다. 활동가들은 같은 분야에 최소 10년 이상 근무를 해야 여러 가지 시너 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나는 참여연대 4년 4개월, 정보공개센터 7년 (준비기간 포함)까지 순수 시민단체에서만 11년을 근무했다. 중간에 연 구단체까지 포함하면 15년 정도 된다. 이정도 구력이 쌓이니 이제야 시 민사회단체를 입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정보공개운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14년을 같은 분야에서 일할 기회를 잡은 것은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정보공개센터 첫 퇴직자는 나였다. 창립과 조직을 성장시키면서 지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반복되는 수면장애, 무거운 책임감, 무기력증에 시달렸고 즐거운 일도 계속 하면 힘들어 진다는 것을 느꼈다. 장래가 불 안하더라도 후배들을 위해 그만두는 것이 정보공개센터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날 후배 활동가들이 등산복과 나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감사패를 주어 무척 감사했다. 나는 다시 알권리연구소,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라는 단체 창립에 참여했고 활동가로서 의미 있는 역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니 그렇게 고질적이던 불면증은 싹 사라졌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면서 힘이 생겼다. 활동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후배들이 나처럼 활동가의 꿈을 꾸고 살 면서 공부했으면 좋겠다. 얼마나 멋진 직업인가?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 하고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즐 거운 일이다. 025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욕심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2세들도 활동가를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팍팍하기만 하다. 적은 활동비, 감정노동, 스트레스 수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미국 등 선진국들을 보면 정말 엄청난(근무조건이 좋고 규모가 큰) 비영리단체들이 존재하고, 그들도 일 반 직장인들과 비슷하게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활동 가들이 적은 활동비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활동가들도 가정이 있고 외부에 나가면 온갖 소비에 스트레스가 노출된다. 단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활동가들의 활동비를 가능하면 현실적으로 높이고 이들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면 활동가들도 단체를 책임지는 자리로 가게 되 고 후배들의 급여를 책임지는 자리에 앉게 된다. 이럴 경우 반드시 활동 가들은 활동가에서 전문가 16) 로 성장해야만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다. 지방 사립대 출신인 내가 어떻게 전문가로 성장했는지 다음 장에서 이야 기를 풀어보도록 하겠다. 2. 활동가에서 전문가로 거듭나기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 (운명처럼 정보공개를 만나다) 2002년 참여연대 공채시험을 합격하고 정보공개사업단에 배치를 받았 다. 많은 기대를 하고 부서에 갔으나 당시 팀장은 실행위원들의 피로도 가 높고, 타 단체들이 정보공개청구를 활발히 하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16) 활동가와 전문가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활동가로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 보면 전문가로 인정받게 된다. 026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다른 사업단위와 통합될 거라는 말을 했다. 처음 배치 받아 의욕적으로 시작하려고 한 팀이 통폐합 될 거라는 소식을 듣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 다. 곧 통폐합 될 사업단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일을 추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운명적으로 조영삼 국회 기록전문위원(현재 서울시 정보공개정 책과 과장)을 만났다. 조영삼 위원은 당시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에 합류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그도 매우 의욕적으로 일을 해보려고 했다. 특히 그는 정보공개운동과 좀 결이 다르지만 기록관리 운동의 필요성을 강력히 제기했고, 그 일을 정보공개사업단에서 하면 좋겠다는 뜻을 계속 피력했다. 무엇보다 당시 새로 부임한 팀장 17) 도 기록관리운동이 필요하 다는 의견을 주었다. 그 뒤 오랜 논의 끝에 정보공개사업단이 본격적으로 기록관리 개혁운동 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그 당시 활동은 일일이 기록하기도 버거울 정도 로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6개월 동안 정보공개청구와 기자들의 취재로 만들어진 세계일보 기록이 없는 나라 시리즈였다. 우리나라 최 초로 기록관리 실태를 고발하는 탐사보도였고 보석 같은 역작이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 복귀 후 이를 접하면서 이 보도에서 문 제제기 했던 것들을 참여정부에서 전면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했 다. 당시 행정자치부 허성관 장관은 보도가 나가자마자 기자회견을 자청 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명운을 걸고 해결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말 그 대로 대박을 친 것이다. 이 보도로 인해 세계일보는 이달의 기자상, 올해의 기자상, 삼성언론인 17) 현재는 한겨레신문 사회정책팀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027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상 등 상이란 상은 다 받았고, 기록관리 선진국을 취재할 수 있는 기회 를 얻기도 했다. 기록학계에도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당시만 해도 정규 직 기록연구직이 한 명도 없었지만 이 보도 이후 45명이 중앙행정기관 에 6급 상당의 기록연구직으로 채용되었다. 조영삼 위원도 이 보도 이 후에 청와대 기록연구사로 채용되었다. 이 경험은 나를 크게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우선 언론과 활동 가 및 전문가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성공하는 시민운동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기록관리 체계를 공부할 수 있 었고, 활동가에서 전문가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언론과 기록학계라는 엄청난 인맥을 선물 받았다는 점이다. 언론과 시민단체가 함께 공동기획을 하면서 이렇게 큰 성과를 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 기획에 참여했던 3자 주체(언론, 시민단체, 학계)가 공히 큰 성과를 얻었고, 나는 그 중심에 있었다. 이후 기록이 없는 나라 기획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언론인들을 교육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후일에는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가르칠 수 있었다. 이 기획을 인연으로 명지대학교 기록관리대학원에서 입학과 졸 업을 하면서 기록학계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는 투명사회를 위한 정 보공개센터를 창립할 수 있는 기반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정보공개사업 단에서 얻은 경험은 나에게 너무 소중했고 정보공개운동을 좀 더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안목을 선물해 주었다. 참여연대 시민참여팀 (시민의 중요성을 깨닫다) 당시 참여연대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부서가 시민참여팀이었다. 1만 028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명이 넘는 회원들의 행사를 불과 6-7명이 도맡아 해야 했고, 시민들의 불만이나 각종 항의 전화를 1차적으로 받는 곳이 시민참여팀이었다. 특 히 시민들은 퇴근 후에 참여연대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활동가 들에게 야근은 일상이 되어 있는 부서다. 그렇다고 해서 낮에 쉴 수 있 는 부서도 아니다. 매일 온갖 일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주말과 주중, 밤 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일이 밀려오는 것이다. 처음 이 부서로 인사이동이 되면서 한동안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정 보공개사업에서 기록관리 사업으로 한창 재밌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는 데, 이곳은 오직 회원들만 만나야 하는 부서였기 때문이다. 화려한 언론 의 조명도, 세상을 바꾼다는 자부심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힘든 일정이 반복되다 보니 팀원들만 바라보면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조금이라도 불화가 생기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시민참여팀이야 말로 제대로 된 시민운동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시민운동은 단어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시 민 운동이다. 그런데 활동가들이 시민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 것은 시민운동이 아니라 전문가 운동이나 조합원 운동이 될 것이다. 활 동가들은 시민들의 눈으로 사고하고, 그들의 필요와 요구를 늘 받아들여 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이 싫다면 연구소나 다른 분야 로 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시민참여팀에서 1년 넘게 배웠던 각종 경험들은 정보공개센터 를 창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회원들에게 전화하는 법, 손님이 오 면 응대하는 요령, 행사기획과 뒤풀이 절차, CMS의 중요성, 총회 등 그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할 소중한 경험들을 다 해볼 수 있었다. 029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기자회견과 화려한 퍼포먼스의 시위, 고소고발 운동 등 시민운동은 얼 핏 보면 화려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것은 시민에게 우리의 운동을 알리 는 과정이지 그 자체가 시민운동은 아니다. 시민운동은 말 그대로 시민 의 힘을 믿고 그들을 신뢰하면서, 막강한 권력과 싸우는 것이다. 시민의 힘이 없다면 애초에 존재자체가 불가능한 운동이다. 시민을 만나고, 토 론하고, 잔을 기울이면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때 진정 한 시민운동의 매력을 알게 될 것이다. 정보공개운동과 기록관리학 만남 (영역의 확장) 정보공개운동을 하면서 스스로 가장 잘했다고 판단한 것은 기록관리학 이라는 학문을 공부한 것이다. 기록관리학은 정보공개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기록이 있어야 공개할 것이 있고, 공개 후에 기록은 어떻 게 이관 및 보존되는지를 이론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보공개운동을 하는 사람이 정보공개법만 공부하는 것은 전문가로서 큰 한계를 노출할 수밖에 없다. 기록관리법, 대통령기록물법, 비밀관련, 개 인정보 법안들을 두루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정보공개운동을 더욱 풍성하 게 할 수 있다. 명지대학교 기록과학대학원에 지원하려고 했을 때 많은 고민이 있었 다. 우선 학비가 부담이었고 야간 과정이었지만 참여연대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정보공개운동을 한 두 해 하고 마칠 것도 아니고, 언제라도 정보공개관련 단체를 만들려고 하 는 꿈이 있었기에 과감히 지원서를 쓸 수 있었다. 결국 대학원을 입학한 것은 정보공개 활동가에서 정보공개 전문가로 성장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누구와도 바꿀 수 없었 030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던 전국의 기록관리학을 공부하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운동현장에 서 경험한 것들을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심지 어 많은 논문에서 내가 썼던 논평과 보도자료와 인터뷰가 주석으로 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논 문이나 책에서 보는 재미는 활동가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다. 당시 동료들이나 후배들은 주석에 달렸던 그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고 신기해했다. 나도 신기했다. 매번 팀장과 처장에게 혼나면서 썼던 각종 글들이 나를 설명해주는 분신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가 쉬운 것은 아니다. 5학기 동안 공부하면서 많은 위기가 있었다. 지친 몸을 이 끌고 수업에 참여하면서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들었던 적이 많았다. 활동가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향후 활동하고 싶은 분야를 세우고 관련 학문을 공부하라고 당부 하고 싶다. 이는 단순히 졸업장을 받으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활동하는 분야에서 공부를 지속한다면 활 동가에서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큰 주춧돌이 될 것이며 긴 운동을 하 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후 부인과 큰 아들이 보는 가운데 석사 졸업식을 참가하는데 그 감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한국국가기록연구원 (활동가에서 전문가 트레이닝) 참여연대에서 4년 4개월을 끝내고 한국국가기록연구원이라는 직장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이곳은 명지대 안에 연구원이 있었고 나는 대외협력처 선임연구원이라는 직책을 얻게 되었다. 월급은 참여연대와 비슷한 수준 이었지만 대외인지도는 참여연대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알려지지 않 았다. 무엇보다 송파구 방이동에서 서대문구 남가좌동으로 매일 출근해 031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야 하는 고달픔도 있었다. 하루에 왕복 3시간의 출퇴근 시간은 많은 것 을 지치게 만들었다. 더욱 문제는 매년 재정적으로 문제가 발생해 매월 체불 위기에 처했으며,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힘들었던 시기 였다. 이렇게 힘들게 연구원을 다니기 시작한 몇 달 후에 놀라운 일들이 생 겼다. 우선 참여연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각종 강연 요청이 쏟아져 들어왔고 18),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위원으로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오 기도 했다. 19) 연구원과 전 참여연대 간사라는 간판이 합쳐져 전문가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 큰 즐거움은 전국의 기록관리대학원생들을 상대로 여름에 학습 반 (주 1회, 총 8주)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참가규모가 100명을 넘을 정도로 큰 반향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다. 서울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나에게 단 한 번에 전국에 동문들이 생기 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이들과 나누는 각종 대화로 기록관리 전문가로서 서서히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은 훗날 내가 정보공개센터를 만들었을 때 엄청난 응원군이 되어주었다. 한국국가기록연구원은 나에게 정보공개, 기록관리 운동을 정리할 수 있는 훌륭한 연구소였다. 각종 읽을 연구 자료와 논문들이 가득했고, 시 간만 되면 명지대학교 안에 있는 도서관을 방문해 책을 탐독했다. 더욱 큰 경험이 되었던 것은 정부 연구용역에 참가하면서 시민운동과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 연구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연구원들과 나 눴던 대화도 잊을 수 없다. 말 그대로 밥만 먹으면 기록관리, 정보공개 18) 이 당시부터 나는 언론인, 공무원을 상대로 정보공개 강의를 해오고 있다. 19) 정보공개심의회, 기록물평가심의회 등 많은 위원회에 참가했다. 032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에 대해서만 열띤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공부의 참 맛을 알기 시작 했다. 정보공개센터 사무국장의 역할 (사업과 인간의 결합) 정보공개센터 사무국장 역할은 나에게 큰 도전이었다. 우선 채용되지 않고 창립 과정을 주도한 한 사람으로서 사무처와 회원의 이해관계를 조 정해야 했다. 특히 창립 초기에는 회원들과 친밀성을 유지하는 것이 매 우 중요했다. 모든 약속은 정보공개센터 회원 중심으로 잡았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틈만 나면 회원들을 만났다. 심지어 하루에 회원과의 약속이 세 번인 적 도 있었다. 점심약속, 저녁 약속 두 번 해서 정보공개센터 회원들이 있 는 곳이면 늘 찾아갔다. 뿐만 아니라 정보공개센터 회원들의 경조사도 늘 다 챙겼다. 참여연대 간사시절, 회원들에게 늘 받기만 하는 것이 가 끔 힘들었다. 회원들과 활동가는 공익사업의 파트너이지 일방적 후원관 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사회에서 관계성은 경조사에서 결정 난다 는 말이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경조사비용은 꼭 챙겼고, 형편이 되 지 않는 날이면 참가라도 해서 정성을 표시했다. 경조사뿐만 아니라 회원 중에 언론인들과 만나면 늘 아이템 회의를 했 고, 이명박 정부 시절 탄압받았던 수많은 언론인들을 위해 글을 썼다. 회원 중 교수들과 공무원들이 부탁하는 특강은 조건을 따지지 않고 열심 히 다녔다. 한마디로 모든 생활이 정보공개센터 회원 중심이었다. 한 단체에서 사무국장을 맡는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살림을 챙기는 것 033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과 같다. 회원들에게 부탁할 게 있으면 그들의 부탁도 들어주어야 한다. 대부분 단체를 만들고 실패하는 경우는 단체와 회원을 분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고, 또한 자신의 삶과 단체를 별개로 생각하면 단체가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힘들다. 이명박 정부의 탄압과 새로운 기회 (대학 강의의 길이 열리다) 정보공개센터 활동을 열심히 하던 중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공무원으 로 근무하던 회원이자 친구들에게 이상한 메시지가 오기 시작했는데 나 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별 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4대강 관련 문제를 폭로하는 오늘의 정보공개 청구 를 업데이트 한 다음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이 정보공개청구는 한 겨레 1면에 보도되었다. 바로 그날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년 동안 지속해왔던 수많은 강의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취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많이 당황했다. 나중에 알고 보 니 나를 포함해서 많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외부 활동을 이명박 정 부가 감시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졸지에 정보공개센터 활 동 이외에는 아무런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 이후 수많은 활동가들이 구속 및 벌금형을 받 았고 정부와 시민사회는 극도의 갈등관계에 있었다. 한마디로 반정부 인 사로 찍힌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 한 후 힘들었던 점은 친구처럼 지내 던 일부 회원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 생각지 못했던 제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학 강의였다.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과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수업을 034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교과제목은 정보공개청구와 다큐멘터리, 언론정보공개론 이라는 과목을 새로 신설해서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취 재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수업이었다. 사실 두 세 시간 강의는 많이 해봤 지만 16주를 수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기존의 강의를 계 속 하고 있었으면 대학 강의는 여건상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외부활동 이 중단되자 다시 공부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16주 강의를 위해서 많은 공부를 했다. 이 또한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당시 대학생을 만난다는 즐거움보다 잘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압박감 에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난다. 어차피 불러 주는 데도 없으니 대학 강 의 준비에 충실할 수 있었던 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수업준비를 하고 대학 강단에 섰을 때의 감격은 잊을 수 없다. 교실을 찾지 못해 1 시간을 헤매기도 했고, 학점을 어떻게 입력해야 하는지 몰라서 이리저리 많이 묻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강의는 정말 즐거웠다. 3시간 강의를 하는 동안 많은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고 있으면 매우 신났다. 수업 후 몇몇 학생들과 가졌던 맥주파티를 잊을 수가 없고, 그들과 나눴던 많 은 대화와 시간들이 정보공개센터 자원활동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대학 강의는 많은 것을 얻게 해주었다. 많은 독서와 공부를 할 수 있 었고, 학생들이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서 정보공개운동을 한 단계 높게 펼칠 수 있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정보공개센터와 한겨레신문이 함께 정보공개청구 대회를 개최한 적이 있는데 내 수업에 참석했던 학생 들이 많은 상을 받았을 때다. 가르쳤던 학생들의 작품과 얼굴을 신문에서 보면서 감격스러워 눈물을 035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흘리기도 했다. 이 수업은 기존의 단순 암기 방식으로 평가를 하지 않았 다. 정보공개청구를 해서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목표로 했고, 보도가 되 면 높은 학점을 주었다. 이런 방식으로 강의를 하다 보니 학생들의 강의 평가는 아주 좋았다. 활동가들에게 반드시 추천하고 싶은 것은 대학 강의를 해보라는 것이 다. 강의를 하다보면 자신이 펼쳤던 수많은 활동가 이론을 접목시킬 수 있고, 대학생들을 만나면 활동 감각도 더욱 좋아진다. 시민단체에서 전 문가 그룹으로 참여하고 있는 교수님들에게 수업에 참여시켜 달라는 요 청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활동가들이 경험을 쌓는 것뿐만 아니 라 대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활동가들의 경험은 대학생들에게 큰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확신한다. 예를 들어 많은 대학교에서 핵발전소와 생태론, 사법감시운동론, 정치 개혁과 의정감시론, 인권으로 본 사회현상 등 이런 강의들이 많이 생겨 서 현장의 살아있는 강의들이 학생들에게 많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그 뒤에도 인하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사이버 대학교 등 여러 대학 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고 강의평가도 좋았다. 취업훈련소로 전락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학에서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연구를 많이 해 적극적으로 대학 현장에 가야 한다. 나도 대학시절 자동 차 영업사원을 할 것인지, 공익적인 일을 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박원순 시장(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 강의를 대학에서 듣고 시민활동가의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처럼 대학 시절 들었던 강의는 누군가의 인생 을 좌우할 수도 있다. 036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정보공개센터 소장과 영역의 확장 (활동가에서 리더로) 어느 날 정보공개센터 소장을 맡고 있던 하승수 변호사가 나에게 소장 직을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하 승수 변호사는 정보공개센터 창립멤버이기도 했지만 활동가 선배이기도 했고, 정보공개센터에서 사실상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만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몇날 며칠을 얘기하면서 말리기도 하고, 읍소도 하면서 완강히 반대했 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하승수 변호사는 나에게 소장 직을 이어 받아 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이 39세에 소장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 다. 더욱이 걱정이 됐던 것은 정보공개센터의 재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수많은 토론을 벌였지만 내가 소장 직을 맡는 것에 결국 합의를 하고 말았다. 앞이 깜깜했다. 사무국장과 소장의 역할은 많이 다르다. 우선 재 정사업의 대한 책임감이 막중했고, 외부적 발언이나 행실을 신중히 해야 했다. 이것은 활동가에서 리더로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 고 활동가들의 복지와 노동조건개선도 신경 써야 했다. 열심히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소장으로 취임했지만 현실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첫 시련은 소장 취임 후 처음으로 했던 후원의 밤이었다. 후원의 밤이 끝나고 정산을 해보니 후원금액이 예년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 바로 신 임소장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당시 그걸 성적표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처참했다. 소장은 단순히 명예직이 아니라 단체 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단체의 재정을 책임 037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진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와 책임감을 동반한다. 후원의 밤 이후 재정적으로 도움 줄만한 분들을 끊임없이 만나기 시작 했다. 이제는 회원들만 즐겁게 만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회원 만남은 사실상 재정의 도움을 줄만한 분들을 만나야 하는 자리로 바뀌었다는 것 을 의미한다. 너무 힘들었다. 내가 좋은 대학을 나와서 돈이 많은 동료 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회적 명성가로 이름이 유명한 것도 아니었 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개인에게 얻을 수 없다면 매칭 사업 등을 통해서 재정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그중 첫 번째가 뉴스타파와 콘텐츠 교류 협약을 하고 월 20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뉴스타파 김용진 대표 가 배려해준 덕분이었다. 아름다운재단 사업도 빼놓을 수가 없다. 아름 다운 재단은 창립 초기에도 3년 동안 변화의 시나리오 사업 20) 을 지원해 주었지만, 내가 소장으로 취임한 후에도 핵발전소 감시 운동을 벌이겠다 는 계획에 2년간 재정을 지원해주었다. 그때의 결과물로 탈바꿈 21) 이라 는 책으로 탄생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교보문고에서 이달의 추천 책 으 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 이외에도 5.18재단, 2020재단 등 민간재단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 었고 정부 지원 10원도 없이 소장 3년 동안 잘 살아갈 수 있었다. 돌이 켜 보면 한 분 한 분 감사한 마음이다. 공익단체로부터 후원 받는 돈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공익재단이 한 단체에 재정을 지원하는 것은 공 20) 아름다운 재단은 변화의 시나리오 사업을 매년 선정해 펀드를 지원한다. 정보공개센 터는 초반기 정보공개 홈페이지 개발 및 교육 사업으로 후에는 탈바꿈 사업으로 지 원을 받았다. 21) 탈바꿈, 도서출판 오마이북, 2014년 11월 20일 038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익적 성과가 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정보공개센터는 재단으로부터 지 원 받은 예산은 철저히 기존 회계와 분리했고, 공익적 성과를 위해 어떤 사업보다 우선순위로 잡았다. 이렇게 하다 보니 후원을 한 재단들도 정 보공개센터와의 협력 사업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꾸준한 회원가입이 이루어져 안정적 회비가 마련되 었다는 점이다. 정보공개센터는 160명으로 시작해 7년 차인 지금은 1120명의 회원들이 매월 CMS 후원을 하고 있다. 처음 만날 때는 명함 을 내밀고, 두 번째 만날 때는 정보공개센터에 관한 설명을 하고, 세 번 째 만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회원가입서를 주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창립 한 단체 중 가장 성장세가 돋보였던 단체가 바 로 정보공개센터라고 자부할 수 있다. 이는 임원들과 회원, 상임활동가 들이 혼연일체로 즐겁게 일을 한 결과이다. 소장 직을 수행하면서 활동 가 시절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많은 것을 깨닫게 됐다. 시민운동은 단순 히 정부를 감시하는 운동이 아니라 종합 예술과 같다고 생각한다. 사직 또 다른 도전 소장이 된 후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소장 직은 몇 년을 해야 하는 것인가? 스스로 기획하고 만들었던 단체에서 가장 책임 있는 자리로 오긴 했는데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 막막했다. 정관과 내규에도 없었다. 하지만 일도 힘들고 수면장애가 심해 그만둘 생각 밖에 나지 않 았다. 그만둔다면 어떤 형태로 그만두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소장 직을 그만 039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두고 다시 평간사로 돌아가는 것이 미덕인지, 사직서를 내고 깨끗하게 떠나는 것이 바람직 한 것인지 헷갈렸다. 큰 단체들처럼 산하에 무슨 연 구소나 새로운 기획이 있으면 협력해서 하면 되겠지만 그것조차도 구차 하게 느껴졌다. 더욱 문제는 스스로 일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창립 전 2년, 창립 후 6년을 오직 정보공개센터만을 생각하며 달렸더니 지쳐 있는 나를 발견했다. 지쳤다는 것은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같은 사무실에 있는 활동가들에 대한 불만이 생기 기 시작했다. 나는 소위 말하는 꼰대 가 되기 시작했다. 건강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잠을 자면 불안감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자다 깨기를 반복했고 정신적 스트레스도 위험수위까지 갔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그렇다고 평생 정보공개운동만을 했는데 나가서 무엇 을 할지도 애매했다. 정보공개센터에 있는 것도 힘들었고, 나가는 것도 불안한 상태가 된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한참을 하던 중 대학원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지인들과 춘천으로 엠티를 가게 됐다. 춘천댐 근처에 지 인의 별장이 있었고, 그곳에 우리를 초대한 것이다. 춘천댐 하류에 흘러가는 물을 보며 한참 많은 생각을 하던 중, 옆에 있던 동생이 갑자기 나를 보고 한마디를 던졌다. 저기 들어갈래요? 헤엄치고 놀고 싶어요. 무슨 소리니? 저기 수심 40미터가 넘어. 수영을 조금 하긴 하지만 저 길 어떻게 들어가. 아니에요. 들어가서 수영하고 싶어요. 040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이런 대화를 주고받다가 이 친구가 갑자기 물속으로 들어갔다. 같이 갔던 친구들도 다들 놀라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이 친구의 남편 도 불안감에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에 들어간 이 친구는 너무 나 평온한 모습으로 물속에서 유유히 즐기고 있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 었지만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물속에서 뭐가 나올지도 모르고 어떤 일 이 발생할지도 모르는데 30분 넘게 물 속에서 즐기고 있었다. 이 친구가 물에서 나온 후 물어봤다. 대단하다. 무섭지 않았니? 네. 물색깔이 너무 진해서 물속에 뭐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 래도 너무 즐거웠어요. 이 작은 사건(?) 이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하나님의 음성 을 듣는 것 같았다. 약해 보이는 후배는 물과 태양을 즐기기 위해 저 깊 은 곳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불안감에 떨고 있는 나는 무엇일까? 정보공 개센터를 그만두고 발이 닿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가지만 그것을 즐겨야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고 결심했다. 우선 그만두면 분명히 필요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긍정적인 마음을 먹 었다. 그날 이후 난 사직 의사를 임원, 활동가들에게 전달했다. 말은 쉽 지만 사실 자신이 만든 단체를 스스로 그만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 었다. 그만 둔 후에는 무엇을 할지도 막막했다. 하지만 깊은 물에 들어 가서 자유를 느끼려면 불안감을 극복해야 한다. 그렇게 나 자신과 싸우 면서 지난 2월 정보공개센터 소장 직을 그만두었다. 그만두던 날, 참 기 쁘면서도 허탈했다. 사직 후 극심한 우울증 증세와 무기력증이 찾아와 계속 잠만 잤다. 꿈 041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에서는 어린 아이가 계속 울고 있었고 그 아이를 달래면서 잠을 깼다. 이 꿈은 반복되었다. 7년 동안 키워왔던 아이와 헤어지는 기분이 꿈으로 치환 되었던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면 그 생각에 눈물도 많이 흘렸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달이 흐른 지금, 알권리연구소 소장,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상임이사, 6월민주포럼 간사를 맡아 너무나도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 다. 당장 재정도, 생활도 불안하지만 현재 맡은 일들이 정말 즐겁다. 나 는 그렇게 홍역을 치르고 난 후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 새로운 일들 그만둘 결심을 하지 못했더라면 나에게 새 로운 일들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3. 활동가의 비전은 무엇인가? (제언) 최근 활동가들에게 안 좋은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세상이 활동가들의 단물만 빨아먹고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다. 최근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진상규명을 위해 열심히 운동을 펼쳐왔던 박래군 씨가 구속 22) 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2015년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현실이 그만큼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인권 활동가가 구속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더욱 나를 힘 들게 하는 것은 젊은 활동가들이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다른 직업을 선 택했다가 또 다시 세상의 큰 벽에 부딪히는 모습을 볼 때다. 시민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은 말만 들어도 가슴 떨리는 단어들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시민과 인 22) '세월호 집회 주도' 혐의 박래군씨 구속, 연합뉴스 2015년 7월 16일. 042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권 및 환경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이 바닥에서 떠나는 것을 보면 내 일인 것처 럼 안타깝고 가슴이 저민다. 단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활동가들을 보호해 야 하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부족으로 활동을 그만두지 않도록 단체는 뒤에서 묵묵히 도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단체를 성장시키거나 유지하는 것에 활동가들이 희생하 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이는 시민운동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단체가 활동가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활동가들도 모든 것을 단체에 맡겨둘 수만은 없다. 언젠가 후배들을 보호해야 하는 역할이 되며 단체의 리더가 된다. 그렇기에 스스로 변화 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앞에서 조금 지루할 정도로 경험을 나열 한 것은 그만큼 활동가라는 직업은 정말 매력적이고 충분히 장래가 있다 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의사가 평생 의사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 듯 활동가들은 활동가로 평생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활동으로 얻은 수많은 지식과 경험을 체계화해야 한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학위도 얻어야 하 고, 책도 써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한다. 활동가들이 평생 활동가로 살아 갈 때, 이 세상은 수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활동가의 비전은 평생 활동가 로 살아가는데 있다. 오랫동안 활동가의 일을 하는 것은 그만큼 성공적인 활동가의 인생을 살 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 주위에는 귀감이 될 만한 선배 들이 무척 많다. 무작정 희생하거나 견디다 보면 활동가로서 오래 버티 043 시민운동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직업입니다
지 못한다. 경제적 여건, 단체의 책임, 심지어 사회적 포지션도 중요하 다. 이를 위해 부단히 스스로를 단련하고 공부해야한다. 지난 15년 동안 너무나 즐겁게 활동가로 살다보니 어느새 큰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이 친구는 가끔 아빠가 무슨 활동을 하는지 검색해보고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현상들을 물어보기도 한다. 무뚝뚝한 아빠로 뭐 하나 잘해준 것이 없지만 이 친구에게 활동가로 평생 살아가 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그런 동료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것이 이 기록을 남기기 위한 목적이다. 장래를 고민하는 활동가들이 부디 이 글을 통해 실낱같은 해결책이라도 생겼으면 하는 소망이다. 044 시민펠로우 현장운동 시리즈
시민사회활성화 전담기관 사단법인 시민은.. 전환기를 맞이한 시민운동의 사회적 영향력 강화를 위해 네트워크와 자원을 확장함 으로써 새로운 공익생태계의 환경을 조성해 가는 중간지원조직입니다. 주소: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로 62길 1, 삼성빌딩 2층 (07317) 전화: 070-7733-3925 홈페이지: www.simin.or.kr 이메일 : simin@simi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