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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 18민중항쟁 최정기 유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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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목 차 Ⅰ. 총론 05 Ⅱ. 광주지역의 5 18민중항쟁 08 1장 신군부 세력의 집권과 5 17 비상계엄 1절 5월 학생 시위와 5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2절 전남대 정문 앞 시위 장 항쟁의 발발과 광주지역의 확산 1절 학생시위대의 시내 진출과 계엄군의 과잉진압 2절 시민들의 참여와 항쟁의 확산 장 시민군의 등장과 활동 1절 시민들의 무장과 시민군 2절 도청 지휘부와 선전 활동 장 시민군의 등장과 활동 1절 시민들의 무장과 시민군 2절 도청 지휘부와 선전 활동 장 시민자치조직과 공동체 1절 수습위원회의 조직과 무기회수 2절 자치조직의 재편과 그 활동 3절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장 최후항쟁 (26~27일) 1절 도청지도부의 재편과 기동타격대 2절 도청항쟁과 광주진압 Ⅲ. 전남지역의 5 18민중항쟁 73 1장 5 18민중항쟁의 확산과정 1절 화순 방향 2절 나주 방향과 목포 및 해남 방향 3절 광산군 방향 4절 담양 및 장성방향

6 2장 전남지역의 5 18민중항쟁 거점들 1절 목포지역의 항쟁 2절 화순지역의 항쟁 3절 나주지역의 항쟁 4절 해남지역의 항쟁 장 전남 시민군의 광주진입 시도 100 4장 항쟁의 매개 지역들 1절 영암-강진-장흥-보성지역의 5 18민중항쟁 2절 함평-영광-무안지역의 5 18민중항쟁 장 전남지역 항쟁의 특징 1절 강력한 향토애와 지역연대 2절 난리 에 대한 방어 행동 Ⅳ. 1980년 이후 5 18민중항쟁과 오늘 1. 5월 27일 이후의 항쟁 진상규명 과정과 그 한계 3. 현재의 5 18민중항쟁

7 Ⅰ. 총 론 1980년 5 18민중항쟁은 한국사의 한 기점, 전환점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왜냐하면 5 18항쟁이 1987년 6월 항쟁과 한국의 민주화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은 항쟁의 지도세력과 참여주체의 계급 계층을 확인하는 작업, 항쟁의 원인과 배경, 항쟁을 비롯하여 항쟁이후의 민주화운동이 가지는 한국사[ 國 史 ]적 의미 를 규명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1) 이에 항쟁에 관한 연구들은 한국 사회의 정치 공학적 구도를 배경으로 항쟁의 진실 진상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 의 연장선상에 이루어졌다. 2) 이에 반해 1980년 광주항쟁 당시의 현장성을 주목하거나, 다양한 사건들과 사건들이 일으키는 항쟁의 분위기 속에서 지역민 내부의 움직임 은 단조롭게 이해되었다. 3) 본 글은 5 18항쟁 시기의 시위 대중 이라는 집단을 중심으로 항쟁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대중 은 서구세계의 근대적 시선에 의해 규정된 집단으로서, 4) 학문적 관찰의 대상 이었다. 5)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fascism)에 대한 일련의 연구들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대중은 조작 왜곡될 수 있는 동원되는 대상( 對 象 ) 으로서 근대 세계가 극복해야 할 부정적 인간상 의 하나였다. 대중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근대의 동원 체제 내에서 대중이 보여주는 일체화와 1)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편, 역사와 현장1-5 18광주민중항쟁 9주년 기념학술토론회, 도서출판 남풍, 이정로,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 전환, 노동해방문학 (5월호), 손호철, 80년 5 18항쟁: 민중항쟁인가, 시민항쟁인가?, 현대 한국정치, 사회평론, 안종철, 광주민중항쟁의 배경과 전개과정, 광주민중항쟁과 5월운동 연구, 전남대 5 18연구소, 이종범, 5 18의 지역적 배경, 5 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김영택, 5 18 광주민중항쟁 연구, 국민대 사학과 박사논문, ) 이용기, 5 18 에 대한 역사서술의 변천, 5 18민중항쟁과 정치 역사 사회 3(5 18기념재단, 2007) ; 임종 명, 5월항쟁의 대중적 참여와 그 계기 및 의식성-5월 18일과 19일을 중심으로, 역사학연구 32(호남사학회, 2008). 3) 이에 반해 일군의 연구들은 항쟁의 확산과 사실관계 및 계엄군의 폭력과 이에 대한 저항세력의 활동을 밝히는 데 주목하였 다. 최정기, 광주민중항쟁의 지역적 확산과정과 주민참여기제, 광주민중항쟁과 5월운동 연구 (전남대5 18연구소, 1997) ; 국가폭력과 대중들의 자생적 저항-5 18에서의 국가폭력과 저항을 중심으로-, 5 18민중항쟁과 정치 역 사 사회 2(5 18기념재단, 2007) ; 신진욱, 사회운동의 연대 형성과 프레이밍에서 도덕감정의 역할-5 18광주항쟁 팜플렛에 대한 내용분석, 경제와 사회 73(한국산업사회학회, 2007) ; 김정한, 대중운동의 이데올로기 연구 광주항쟁과 6 4천안문운동의 비교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박사논문, 2009) 등 참조. 4) 조지 모스(임지현 김지혜 옮김), 대중의 국민화, 소나무, ) 대중 에 대한 논의는 귀스따브 르봉(민문홍 강영숙 옮김), 군중의 심리, 학문과 사상사, 1981 ; 오르테가 이 가세트 (황보영조 옮김), 대중의 반역, 역사비평사, 2005 ; 천정환, 대중지성의 시대, 푸른역사, 2008 참조. 5 18민중항쟁 5

8 동일화의 외면성 에 주목한 것들이다. 그러나 보다 주요한 것은 대중 이 어떠한 내부의 동력에 의해 구성되는 공동체인가이다. 이에 따라 대중이 어떠한 조건이나 사회적 분위기 또는 어떠한 관계 속에서 결속이나 해체의 과정을 거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의를 배경으로 이 글은 5 18항쟁 시기의 대중, 즉 시위 군중들의 사건을 통해 항쟁의 발발과 확산의 과정 속 시민들의 모습에 주목하고자 한다. 1980년 5월 18일 계엄군과 시위군중의 충돌로 시작된 사건의 전개와 사건들의 상호적 연쇄반응 속에서 사람들의 행위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전 5 18항쟁에 대한 서술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985, 풀빛)을 시작으로 1988~89년 광주청문회 를 계기로, 광주민중항쟁: 다큐멘타리 1980 (1990, 돌베개) 등에서 잘 정리되었다. 또한 광주5월민중항쟁자료전집 (1990, 풀빛)과 같은 종합 자료집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이들 도서는 5 18민중항쟁을 이해하는 교과서 로 자리매김해 왔지만, 5 18진상규명이 미진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5 18민중항쟁에 대한 서술은 항쟁의 진실, 즉 1980년 광주항쟁 기간, 그리고 5월 운동 의 전 과정에서 끊임없이 요구 실천되었던 의제였다. 6) 1980년대 분산적이고 산발적 이었던 구호와 과제들 중 5 18의 진실 은 책임자 처벌과 함께 1980년 5월 광주의 과제를 해결하는 선결조건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투쟁 의 원칙으로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주요 동력 노릇을 하였다. 민주화운동의 주체들은 5 18의 진실규명이 곧 한국의 민주화 와 직결되는 과제였다. 이에 반해 신군부와 정부는 항쟁을 진압한 이후 5 18항쟁을 불순분자 및 고정간첩들 에 의한 선동과 난동 으로 규정해 왔다. 따라서 5 18항쟁에 대한 서술은 곧 항쟁의 진실 을 획득하는 투쟁의 과정이었다. 1980년대 5월 운동 역시 항쟁의 사실들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확산시키는 진실투쟁 의 과정이었다. 7) 그러한 과정을 거쳐 1989~90년 광주청문회가 이루어졌고, 1995년 5 18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다 1995~98년 사이 5 18특별법 제정과 전두환 노태우 재판을 통해 5 18항쟁에 대한 공식적인 진실규명이 시작되었고, 2007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군 자료 등이 공개되면서 6) 애초에 5 18담론에서는 진상 이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쓰였다. 5월운동의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 이 1990년대 중 반이후 한국사에서의 과거청산 작업으로 전환되면서 진실 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을 생각된다. 사전적 의미에서 진상과 진실은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지난 30년의 과정을 고려한다면 진상 이라는 용어는 왜곡된 사실의 폭로와 참된 사실의 확산 인정 을 의미한다면, 진실 은 해외의 과거청산 사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진다. 전 자의 경우 사실의 내용적 측면을 강조하며 사실의 발굴과 확인된 사실의 인정 그리고 이러한 내용의 전국적 확산 을 핵 심으로 하고 있다면, 후자의 경우 제도적 측면에서 과거사 바로잡기 를 통한 정치적 복권, 나아가 진실이 가지는 절대적 가치를 사회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의미성까지 포함한다. 7) 5 18이 끝나자마자 계엄사령부는 이른바 광주사태 에 대한 최종 보고를 하였다. 이 발표는 진상을 은폐하고 희생을 축 소한 것이었지만, 이 발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거나 항쟁의 진상을 말하는 것은 유언비어 유포죄로 검거되었다. 거짓과 참 이 전도된 상황에서 이에 대한 투쟁은 죽음에 대한 추모와 진실 규명 요구를 기초로 전개되었다. 예컨대 1980년 6월 천 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이라는 유인물을 통해 자신들이 목격하고 체험했던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 다(정근식, 청산과 복원으로서의 5월운동, 5 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2001). 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 5 18항쟁에 총괄적인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5 18항쟁의 사실들은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 진실의 위상을 부여받았고, 후속작업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최근에까지 지만원을 비롯한 보수세력 들은 광주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의 소행이다 등의 5 18왜곡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어 5 18항쟁의 사실이 보다 중요해 지고 있다. 8) 이에 본 글은 기왕의 1980년 5 18민중항쟁의 연장선상 속에서 만들어진 항쟁사( 抗 爭 史 )에 관한 기록과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밝혀지고 정리된 사실들을 한데 모아 5 18민중항쟁의 전개과정을 정리하였다. 먼저 광주지역과 전남지역을 구분하여 1980년 항쟁의 전개과정을 서술하였고, 1980년 이후 항쟁의 연장선상에서 5월 운동 및 5 18진상규명의 과정과 의미를 정리하였다. 8) 5 18민주화운동과 과거청산 운동과 관련된 논의는 정근식, 청산과 복원으로서의 5월운동, 5 18민중항쟁사 (광 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2001) ; 조현연, 5 18 진상규명 투쟁과 광주청문회, 5 18민중항쟁과 정치 역 사 사회 5(5 18기념재단, 2007) ; 5 18기념재단 엮음, 5 18민중항쟁과 법학 (5 18기념재단, 2006) ; 정일준, 5 18담론의 변화와 권력-지식관계, 민주주의와 인권 4-2(5 18연구소, 2004) ; 정근식, 대한민국 5 18: 광주 의 전국화 명제를 다시 생각함, 기억과 전망 10(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5) ; 노영기, 5 18항쟁기 민간 인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곡, 역사비평 90(역사문제연구소, 2010) 참조. 5 18민중항쟁 7

10 Ⅱ. 광주지역의 5 18민중항쟁 1장 신군부 세력의 집권과 5 17 비상계엄 1절 신군부 세력의 집권과 5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4 19민주혁명의 열망을 짓밟고 1961년 등장한 박정희 군부정권은 1972년 유신헌법을 공포하며 1인 영구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폭력적 억압 속에서 계속되던 민주화운동은 1979년 10월 16일 부 마 민주항쟁 으로 이어졌다. 난관에 부딪친 독재 정권은 스스로 무너져 내려,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궁정동 안가 만찬회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해 버린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최규하 권한대행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10월 27일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전두환은 정보 보안 수사 등 업무를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는데, 군권을 장악하고자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로 연행하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노태우 등 하나회라는 군부 사조직을 기반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국가권력을 정권을 탈취하고자 하는 계획을 실행해 갔다. 이들이 바로 박정희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한 정치장교로서, 박정희 사후 등장한 신군부 였다. 박정희 시해사건은 한국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긴급조치 로 상징되는 18년간의 유신독재가 끝나고, 1980년 봄을 맞이하면서 대학가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유신체제에 저항하다 강제로 대학을 떠났던 해직 교수와 제적생들이 복직 복교되어 학교로 돌아왔다. 대학가는 학원자유화 의 바람이 불어일어나, 이름뿐인 1979년 박정희 시해 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 학생기구였던 학도호국단을 해체시키고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1980년 3월 서 울 대 총 학 생 회 의 출 범 을 시 작 으 로 전 국 대학에서 학원민주화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박정희의 사망으로 국민 대다수는 독재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가 실현 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기대에 찬 사람들은 1980년 초를 서울의 봄, 겨울공화국이 끝나고 민주화의 봄 이 왔다고 생각했다.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은 학원민주화투쟁을 거쳐 계엄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다. 1980년 4월은 그야말로 학원민주화투쟁 시기였다. 5월이 되자 대학생들은 계엄령 해제,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 중단, 노동 3권 보장 등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며, 대학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5월 10일 전국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정치권은 최규하 정부 하에서 개헌주도권을 둘러싸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관료집단에 대항하며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1980년 2월 김대중이 합법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자, 경향신문 1980년 4월 15일자. 김영삼과 대립하며 야당인 신민당이 분열 위기에 봉착하였고, 공화당 김종필은 야당과 신군부의 힘겨루기를 관망할 뿐이었다. 정치권이 힘을 하나로 결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신군부는 전국의 주요 도시에 군을 투입하며, 권력을 장악 할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9) <표> 1980년 5월 신군부 충정부대 이동 상황 일 시 내 용 5월 3일 1개 특전여단(9특전여단) 수도군단에 배속 5월 5일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에게 해병 1사단의 1개 연대를 소요사태 진압부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건의 9) 학생들의 가두 진출 등 민주화의 압력이 보다 거세어지자 신군부세력은 공수부대를 중심으로 한 충정부대들을 서울 주변에 배치시키고 있었다(정상용 외, 1995, 광주민중항쟁, 돌베개, 쪽). 5 18민중항쟁 9

12 5월 6일 위 건의 승인 11, 13여단 이동 지시 5월 7일 13여단 거여동 배치, 11여단 김포 배치 5월 9일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에게 해병 1사단 1개 연대의 추가 투입 건의 국방부장관 위 건의 승인 5월13일 경장갑차 차출(1군 26대 수경사 배속, 3군의 24대 수도군단 배속) 5월14일 소요사태 진압부대 투입준비 지시 소요사태 진압본부 개소 특전부대 이동을 위한 차량 245대 지원 2군 500MD 헬기 5대 지원 3특전여단 12대대 국립묘지 배치 청와대 특정 경비지역 봉쇄 7개 방송국 경계 강화 5월15일 20사단 60연대와 포병단을 제외하고 잠실종합운동장과 효창운동장으로 이동 5월16일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에게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한 20사단 60연대와 포병단을 상용할 수 있도록 요청 한미연합사령관이 국방부장관에게 20사단 60연대와 포병단을 사용토록 승인. 국방부장관이 육군참모총장에게 20사단의 60연대와 포병단 사용 승인 5월17일 20사단 태릉으로 이동 * 정해구, 군 작전의 전개과정, 5 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고령, 2001) 263쪽 5월 14~15일 전국 27개 대학 학생대표는 서울역 광장에 모인 10만 명의 학생들을 이끌며 가두시위를 시작하였고, 지방 24개 대학의 학생들 역시 각 지역에서 시위를 진행하며 경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서울역 광장에 모인 학생들은 연좌농성을 벌이며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에 대한 대규모 성토대회를 벌였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는 상황이었다. 학생들은 이런 상황에서 군과 충돌은 현명치 않다는 판단에 정치일정을 관망하고자 서울역 회군 을 결정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서울역 회군에 결정된 것과 달리 광주 전남 지역의 대학생 민주화운동의 전개 양상은 달랐다. 전남대학교 학생회는 4월부터 병영집체 훈련의 거부 를 주장하며 철야 농성을 벌여 왔었다. 학생들은 '병영집체 훈련은 과거 유신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실시된 군사 훈련이었기 때문에 "병영집체 훈련 전면거부"는 정당성을 갖는 것이다.'고 하며 학원민주화 운동을 계속해 갔다. 이후 5월에 이르기까지 대학생들은 교내 어용교수 문제를 제기하며 학원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나아가 학생들의 학원민주화운동은 점차 정치상황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1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 현금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시대적 상황은 대학인에게 안일과 무사의 소극적 자세를 더 이상 허락치 않는다. 사태는 심각하고 추세는 불확실하여 낙관은 요원하다. 이에 진정한 민주를 성취하려는 전남대 학생 일동은 구체제 잔재에 대한 부단한 청산작업과 조국 민주화를 위한 능동적인 방향 제시를 위해 민족민주화성회 를 갖게 되었다.(전남대 총학생회 민족민주화성회를 위한 취지문 ) 10) 5월 학원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5월 8일부터 1주일간 민족민주화성회를 개최한다고 선포했다. 이에 8일에는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가 제1시국선언문 을 발표하였고, 전남대 도서관 앞에서는 5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하는 대규모 학내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1주일간의 학내 시위가 계속되었고, 14일에는 교외로 진출하여 대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민족민주화성회 이후 교수 학생시민 행진 (1980년 5월 16일) 15일에는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육대, 조선대공업전문대, 동신실업전문대, 송원전문대, 성인경상전문대, 기독병원 간호전문대, 서강전문대 등 광주 시내 9개 대학 학생 3만여 명은 10) 전남대 총학생회 민족민주화성회를 위한 취지문 5 18민중항쟁 11

14 오후 3시 부터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여 시국성토대회를 열며 각종 시국선언문을 낭독했다. 11) 시국성토대회에서는 각 대학 학생대표들이 연합해 작성한 제2시국선언문 이 낭독됐고, 복학생을 대표해 정동년(38세, 전남대 화공과 4학년)이 메시지를 읽었다. 학생들은 6시 30분부터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돌며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광주 시내를 돌아온 시위대는 도청 앞 광장에 다시 모여 2개조로 나뉘어 계엄철폐 의 구호와 정의가, 투사의 노래 등을 부르며 횃불 시가행진을 벌였다. 횃불시위를 마친 학생들은 다시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여 유신체제와 5 16군사쿠데타를 응징한다는 의미에서 5 16 화형식 을 진행하기도 했다. 횃불시위를 마친 학생운동 지도부는 사태를 관망한 뒤 5월 19일 다시 성토대회를 열자고 결의했다. 12) 특히 당시 박관현은 시민 학생들에게, 내일 도청에서 만납시다 라는 약속을 강조하였다. 만 약 오늘 저녁에 휴교령이나 휴업령이 내려지면 이미 총학생회에서 공고했듯이 교문이나 후문 앞에서 오늘과 같은 시위를 벌일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12시 정오에 도청 앞에 집결하여 오늘과 같은 시위를 벌일 것을 여러분과 함께 약속합니다(5월 14일 연설문 중에서). 이와 같은 암흑의 시대, 칠흑 같은 질곡의 역사를 정말로 우리 민주화의 횃불로 밝히기 위해 모든 전남지역 대학생들의 이름으로 내일 오후 3시에 이곳 도청 앞에 모여 횃불시위를 거행하겠습니다. 내일의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5월 15일 연설문 중에서). (김병인, 2001: ) 그 동안 수업을 팽개치고 행했던 학내외의 집회와, 특히 연 3일 동안 진행된 시가지 시위와 도청 앞 집회에서 충분히 우리들의 뜻이 전달되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성스런 요구가 묵살될 때에는 또다시 수업을 중단하고 투쟁할 것입니다. 휴교령이 발표되면 즉시 투쟁할 것을 약속합니다. (나의갑, 2001: 225) 이 시기 5월 17일자 동아일보는 이들은 4백여 개의 횃불을 들고 대오를 지어 5만여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질서정연하게 시가를 행진했고, 일부 학생들은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 데모 대열이 지나간 지저분한 거리를 말끔히 청소하기도 했다.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 시위학생들의 11) 당시 전라남도 경찰 국장이던 안병하와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과의 사전약속에 의해 그날 밤 시위는 평화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었다.(나의갑, 5 18의 전개과정, 5 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고령, 2001), 225쪽) 12)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 22~29쪽; 정상용 외, 같은 책, 153~154쪽. 1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5 앞과 뒤를 따라갔으며, 시위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고 보도했다(나의갑, 2001: 226). 그런데 같은 시기 신군부는 국무회의에서 5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가 통과되기 전부터 군사작전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5월 10일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전남북의 향토사단인 제31사단과 제35사단 사단장들에게 학원을 포함한 지역 내 무기고 경계 및 통제 철저 히 하고, 각 사단은 학원을 포함한 지역 내 무기고 및 탄약고의 통제 책을 재확인 점검하여 불순분자에 대한 피탈사항이 없도록 강구 하라고 지시했다. 5월 10일에는 2군에서 전교사에 2군 학원소요에 대한 증원계획지시 를 내렸다. 여기에는 공수부대의 배치지침이 구체적으로 명시됐다. 전북대에는 7공수여단 제32대대, 충남대 31대대, 전남대와 광주교대 제33대대, 조선대와 전남대 의대 제35대대가 배치됐다(전교사, 전교사 작전일지 ). 당시 7공수여단은 시위진압에 대비한 충정훈련을 매일 시행하고 있었다. 광주 시내에 계엄병력이 처음 배치된 때는 5월 14일이었다. 이날 KBS, 전일방송, MBC, CBS 등 주요 시설물에 31사단 병력이 배치되었고(31사단, 작전 상황일지 ),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작전에 대비해 주요 목표물을 파악하라고 31사단과 35사단에 지시했다(전교사, 전교사 작전일지 ). 이날 오전 전남도지사실에서는 학원사태 대책회의 가 열려 학원사태에 대한 분석보고가 이루어졌다. 13) 2군사령부는 5월 17일 오후 5시 군 사령관 구도 지시 사항으로 충정작전 유효, 00:01를 기해 불순분자를 체포, 04:00 이전 주요 학교 점령 토록 하달했고, 부대이동 및 작전준비 지시 를 각 관구 작전참모와 해병대사령부, 7공수여단에 내렸다. 신군부는 또한 충정작전 지시 80-2호(작상전 414) 와 학교 점령시간 변동 지시(육본 지시에 의거) 를 내려 비상계엄 전국 확대 를 치밀하게 준비해 갔다(2군사령부,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 1980년 5월 17일 저녁 9시 40분경 정부는 임시국무회의를 개최, 국방부가 제출한 비상계엄 확대선포 안을 찬반토론 없이 통과시켜 버렸다. 불과 8분만의 일이었다. 이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은 특별성명 을 통해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현 지역계엄을 전국 비상계엄으로 전환 선포할 것을 발표했고, 계엄사령관 이희성 역시 포고령 10호 를 내려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언론 출판 보도 방송의 사전 검열, 대학의 휴교, 직장 이탈 및 태업이나 파업 행위의 금지, 그리고 유언비어의 날조 등을 금지시켰다. 당시 신군부 세력이 전국 계엄령을 실시하며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국내적으로 계속되는 사회혼란을 이용한 북한 공산집단의 대남 적화책동이 날로 격증되고 우리사회 교란을 목적으로 한 무장간첩의 계속적인 침투가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정적 시기 조성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중대한 시기에 일부 정치인, 학생 및 근로자들의 13) 이 회의에 참석자는 전남도지사, 전남대 총장, 조선대 총장, 중앙정보부 광주지부장, 광주전남 합수단장(505보안부대장), 전남도 경찰 국장이었다. 5 18민중항쟁 13

16 무책임한 경거망동은 이 사회를 혼란과 무질서, 선동과 파괴가 난무하는 무법지대로 만들고 있으며 이에 정부는 국가를 보위하고 3천7백만 명의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며 일대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4) 이때 505보안부대 대공과장 중령 서의남은 사령부 지시에 따라 광주지역 예비검속 대상자들에 대한 검거에 들어갔다.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 15) 이었다. 505보안부대는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12명을 검거했다(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국방부과거사위 ), 2007: 375). 16) 5월 17일 저녁 12시 전국에 비상계엄이 확대되자 7공수여단은 광주 외에도 대전(32대대)과 전주(31대대)로 출동했다. 광주와 전주 및 대전에 배치된 7공수여단의 병력은 아래와 같이 배치되었다(특전사, 전투상보 ). 17) 7공 수 여 단 은 18일 아 침 전 남 북 에 서 대 학 내 79명 을 연행했다(7공수여단, 전투상보 ; 전교사, 전투상보 ). 18) <표> 7공수여단 배치도 대대 출동인원(장교/병사) 주둔학교 부대출발시간 점거시간 31 16/172 전북대 : : /291 충남대 : : /321 전남대, 광주교대 : : /283 조선대, 전남대 의대 : :30 본부 10/76 조선대, 전남대 의대 : :50 계 148/1,143 14)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1988, 특별성명, 5 18 광주민중항쟁 자료집, 도서출판 광주, 144~145쪽. 15) 전남대 : 박관현, 윤한봉, 정동년, 박선정, 윤목현, 한상석, 박진, 윤강옥, 문덕희, 하태수, 박형선, 김상윤. 조선대 : 김운기, 이경, 유소영, 송찬식, 이강래, 유재도, 이곤섭, 양희승, 구교성. 16) 정동년, 박선정, 윤목현, 김상윤, 박형선, 문덕희, 하태수, 김운기, 유소영, 유재도, 이곤섭, 양희승(보안사, 광주사태 합 동수사 ). 전남대 복학생 김상윤은 그날 오후 11시 30분쯤 서점 셔터를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후배들이 왔는가 싶어 황급히 문 쪽으 로 갔다. 반쯤 셔터를 들어 올렸다. 안면이 있는 광주서부경찰서 소속 형사가 이 사람이 맞다 고 하자, 뒤에 있던 사람이 권총을 들이댔다. 그를 검거하러 온 일행은 4명이었고, 그 길로 그는 광주505보안대에 연행되었다. 정동년이 505보안대로 끌려갔다. 그날 밤 정동년, 김상윤 외에도 광주에선 윤목현, 박선정, 박형선, 문덕희, 양희승, 유재도, 이승룡 등 대학생 및 재야인사 14명 가량이 예비 검속되어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에 연루되었다(나의갑, 2001: 226). 17) 전북에는 14개교(52/660)에 배치됐고, 전남은 20개교(14/1132)에 배치됐다. 18) 학교별로는 전북대 33명, 전남대와 광주교대 23명, 조선대와 전남대 의대 33명이다. 전북대에서는 공수부대의 연행을 피하 려다 학생 1명(이세종. 전북대 농대 농학과 2학년)이 실족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전교사 보고는 약간 다르다. 전교사 의 전투상보 에 따르면, 학교별 연행자 수는 다음과 같다. 전남대 69명, 조선대 43명, 전북대 34명, 원광대 23명 등이었 다. 또 주모자 검거 항목에 전북은 46명중 6명이 검거되었고, 전남은 22명 중 8명이 검거되었다. 1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7 <표> 5월 17일 24:00 충정부대 대학점령 현황(정상용 외, 1995: 146) 부 대 점 령 대 학 비 고 1공수여단 4개 대대 5공수여단 4개 대대 11공수여단 3개 대대 13공수여단 2개 대대 보병 20사단 3개 연대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 고려대 동국대 성균관대 국민대, 산업대, 경희대, 한양대, 외대 수경사 작전통제 9공수여단 3개 대대 서울대, 중앙대, 숭전대 수도군단 작전통제 3공수여단 5개 대대 육군 중앙 기동 예비부대로 거여동 주둔 육군본부 작전통제 7공수여단 4개 대대 해병 1사단 2개 연대 광주(전남대, 조선대) 전주(전북대), 대전(충남대) 대구(경북대) 부산(부산대, 경남대) 2군사령부 작전통제 2절 전남대 정문 앞 시위 계엄사는 17일 충정작전 의 발효와 동시에 예비검속을 완료하고, 18일 새벽 4시까지 대학점거를 완료하도록 윤흥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에게 시달했다. 제7공수여단장에게는 전남대와 광주교대, 조선대와 전남대 의대 등을 18일 새벽 2시까지 점거하고 새벽 4시까지 소요주모자 전원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18일 새벽 전남대에 진주한 33대대는 교내를 수색하여 학생회관과 도서관에서 농성하거나 공부하던 학생을 체포했고, 조선대에 도착한 35대대는 학생 43명을 체포하여 31사단 헌병대에 인계했다. 전남대학교 운동장에는 군인들의 대형 천막들이 설치되었고, 교문에는 정부조치로 휴교령이 내려졌으니 가정학습하기 바란다 는 총장의 공고문이 붙었다. 그 옆으로 제7공수여단 33대대 9지역대 7중대 소속 11명의 공수부대원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들은 휴교령이 내린 사실을 말하면서 학생들에게 귀가를 강요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고, 10시가 넘어서자 부근에 남아있던 100여 명의 학생들이 정문 앞 다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휴교령이 내리면 그 다음날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 고 했던 박관현 학생회장의 약속을 기억하고 시위를 시작했던 것이다(나의갑, 2001: 227). 19) 19) 5월 16일 대성회 마지막 날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의 약속이었다. 그는 휴교령이 내리면 아침 10시에 각 학교 정문 앞 에서 만나자.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낮 12시 도청 앞 광장에 모여 총궐기하자 고 했다. 5 18민중항쟁 15

18 학생들이 항의시위를 벌이자 2개 지역대가 증원되었고, 해산에 나선 7공수여단 부대원들은 학생들을 인근 집이나 상가까지 쫓아가 폭행을 가했고, 심지어는 신분을 밝힌 전남대 교수까지 폭행했다. 근처를 지나던 시내버스에서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에 항의하던 학생들도 폭행을 당했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376). 점차 시위에 합세하는 학생들이 200~300여 명으로 불어나자 자연스럽게 노래와 구호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무력진압을 개시하였다. 처음 곤봉으로 머리를 때리는 공수부대원들에게 학생들은 쉽게 대응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전남대 정문 쪽 건축공사장에서 돌을 구해 군인들에게 던지자, 군인들은 "지금 즉시 귀가하지 않으면 강제 해산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학생들을 뒤쫓았다. 학생들은 골목으로 도망쳤고, 군인들은 끝까지 추격하며 구타하고 강제 연행했다. 이내 학생들은 도청 앞으로 나가 시민들에게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자 는데 합의하고 시내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시내를 향하다가 가까운 광주역 광장에 학생들이 집결했다. 10시 30분경 400여명으로 늘어난 학생들은 광주역 앞 광장에서 대열을 가다듬고 공용버스터미널을 앞을 거쳐 중심가인 금남로로 뛰어갔다. 이들은 18일 아침의 상황을 군사쿠데타로 규정짓고 이 사실과 계엄군의 폭력을 시민과 동료 학생들에게 알리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학생시위대는 비상계업 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오전 11시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선을 좁혀 오자, 농성을 하고 있던 학생들이 인근 골목길로 흩어졌다. 그때 이미 금남로 일대 인도는 시위를 구경하는 시민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나의갑, 2001: 228). 학생들의 시위는 전국계엄령 의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정도였지만, 시민들은 경찰과 학생시위대의 충돌이 며칠 전 양상과는 다르게 전개되고 있음을 서서히 목격하였다. 11시 30분경, 학생들이 수를 불려 다시 금남로로 진출하자, 경찰은 전일빌딩과 한일은행 광주지점 앞길에 저지선을 구축했다. 그 중간에 자리를 잡은 학생들은 길가의 대형 화분대 등을 깨뜨려 바리게이트 를 만들었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는 플래카드도 등장했다. 학생들의 김대중이 석방하라 는 구호가 나오자, 시민들은 학생들의 시위와 김대중의 연행 소식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학생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격렬해지며, 금남로 일대가 최루가스로 뿌옇게 뒤덮였다. 학생들은 두 갈래로 갈라져 충장로 방향의 시위대열은 황금동-수기동-광주공원-현대극장-한일은행 4거리를 거치면서 500여 명으로 늘어났고, 또 다른 대열은 금남로-광주공고-청산학원-중앙초등학교- 대인동을 돌면서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학생시위대는 대인동 공용버스터미널 부근에서 합류하여, 광주를 오가는 승객들에게 계엄령의 부당함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이후 학생시위대는 몇 무리로 갈라져 충장, 동산, 산수, 지산, 대인 등 6개 파출소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시위를 벌였고, 젊은 시민들 이 자발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하며 그 수가 2천명에 이르렀는데 경찰의 저지선을 넘을 수는 없었다(나의갑, 2001: 229). 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9 점심시간을 전후하여 소강상태에 접어들던 시위는 오후 3시가 되면서 재개되었다. 이때부터 시위대의 시위에 대한 군경의 대응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수천 명으로 늘어난 학생 시민 시위대는 보다 조직적으로 공세적인 양상을 띠었다. 그러자 계엄군은 공수부대를 시위진압에 투입했다. 18일 광주에서 벌어진 군 활동사항을 살펴보면, 먼저 11시 40분경 광주시 동구 가톨릭센터 앞에서 학생들과 경찰이 대치하자 7공수여단이 출동 준비를 시작했다(보안사,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 31사단은 작전명령 1호 를 통해 전남대와 조선대에 주둔한 7공수여단 병력의 출동준비 지시를 내렸다(12:45)(보안사, 광주소요사태 진행상황 ). 이것은 전남대 및 조선대에 주둔한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를 최소의 학교 경계 병력만 남기고 시내 소요사태 진압을 위해 출동 준비하라는 지시였다. 지시를 받은 공수부대는 대학 주둔지를 나와 수창국민학교에 집결하였고, 조선대에서 정웅 31사단장 주재 아래 7공수여단 대대장 및 경찰서 경비과장들이 참석한 대책회의가 열렸다(14:30). 31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7공수여단 33대대(35/267)와 35대대(26/196)가 광주 시내 시위진압에 투입됐다(15:40)(보안사,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광주 시내로 출동한 시각은 각각 15:40과 15:50이었고, 금남로와 충장로로 이동한 시각은 오후 4시경이었다(16:00)(7공수여단, 전투상보 ). 시내에 투입되기 시작한 공수부대는 과잉진압을 시작했다. 20)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구경하는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곤봉이나 총 개머리판으로 사람들을 구타했는데, 연행한 젊은이들을 길 한복판에 옷을 벗겨 기합을 주기도 했다. 시민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이런 광경을 바라보자, 군인들은 시민들을 윽박지르며 모멸감을 주기도 했다. 당시 진압군으로 파견된 공수부대가 보인 이러한 폭력성은 5 17 전국계엄령 이전에 훈련받은 내용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공수부대가 받은 시위진압 훈련 충정작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정해구, 2001: 262). 21) <표> 충정작전의 개요 구 분 소 요 폭 동 정 의 학생 및 사회집단이 의사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표현 (법질서 위협) 다중의 집단이 사회법질서를 파괴할 목적으로 폭도화 (법질서를 파괴) 진압책임 경 찰 군, 경찰 작전성격 수세적 저지 공세적 진압 20) 이때쯤 서울에서는 광주의 혼란 과 북괴의 심상치 않은 동태 를 이유로 제3 제11공수여단과 육군 제20사단의 광 주투입이 결정되고 있었다. 21) 차후 공개된 군의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 에도 시위 발생 시 초동단계에서 강경하게 진압해야 된다 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5월 18일 광주지역에서 펼쳐진 계엄군의 살인적 과잉진압을 시사하는 점이 있다. 5 18민중항쟁 17

20 작전목표 장 비 확산방지, 자진해산 (이해 설득, 봉쇄 저지) 자기보호 우선 (방석모, 방석복, 방패 등) 돌격, 와해, 재집결 불허 (분쇄, 주모자 체포) 기본화기 최대 이용 (진압봉 휴대: 와해후 체포시 필요) 계엄군의 과잉 폭력 진압(출처, 5.18기념재단) 당시 공수부대는 끝까지 쫓아가 잡는다 두들겨 팬다 팬티만 남긴 채 옷을 벗긴다 군 트럭에 싣는다 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여성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의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금남로 일대는 한 순간에 생지옥으로 변했다.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로 사방은 아비규환이었다. 군인들이 덮쳐올 때마다 시민들은 이리저리 피해 숨을 곳을 찾느라 난리였다. 군인들은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는 시내버스나 택시도 예외 없이 세워놓고 젊은이들을 골라내 두들겨 패고 군화발로 짓밟았으며,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도 뛰어들어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또 광주제일고등학교에 들이가 수업중인 방송통신고등학교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팬 뒤 어디론가 끌고 가기도 했다. 도망치는 젊은이를 잡는다고 집 안방까지 침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군인들은 벽장을 뒤지고 심지어는 장롱까지 열어 보며 '어디다 숨겨놨느냐'며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며,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나의갑, 2001: 230). 이날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의 폭력 진압은 농아 김경철의 사망을 비롯해 당시의 부상자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김경철은 후두부타박상에 의한 뇌출혈로 19일 적십자병원에서 사망하였고, 22) 조선대 의대 4학년 이민오는 구타 후 연행되어 상무대 영창에서 복통과 구토를 호소하다가 22) 광주통합병원 영안실로 옮겨진 후 상무대 내 101사격장에 매장, 이후 망월동에 안장 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1 광주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된 이후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피해 양상은 당시 공수부대의 진압이 단순한 시위해산이 아닌, 죽을 수 있을 정도 의 폭력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계엄군의 폭력을 길거리에서 목격한 시민은 구타로 붙잡혀 가는 사람들에게 지역민으로서의 연민을 느껴 자기 집으로 피신시키거나, 자신의 자녀들을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하기도 했다. 18~19일 양일간 광주 시내에서는 754명이 계엄군에 의해 검거되는데, 검거된 이들에 대한 소식이 두절된 상황에서 시민들은 가족에 대한 걱정, 자녀들의 보호, 친척 등의 안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이날의 광경을 지켜봤던 한 노인은 한국 전쟁 당시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김영택, 2010: 265). 이날 계엄군은 전국의 주요도시에 진주하였지만 계엄군에 맞서 저항한 곳은 오직 광주뿐이었다. 사전검속으로 인해 전국의 학생운동 지도부는 마비된 상태에 있었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의 행동지침도 전국적으로 비슷했다. 그런데 광주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가능했던 이유는 1980년 봄 광주지역의 정치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광주지역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의 구체성과 치열함을 학생들이 가지고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계엄이 확대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에 굴하지 않고 이렇다 할 지도부나 조직도 없이 즉각 저항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저항의 초기단계 공수부대의 엄청난 폭력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간 것은 이름 없는 학생들 이었다. 그리고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있었다. 특히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자행된 공수부대의 살상행위는 시민들의 저항을 분출시키는 자극적인 기폭제 가 되었다. 계엄군의 폭력이 오히려 폭력의 공포를 사라지게 하고 치열한 연대감과 폭력에 대한 증오심을 낳은 것이다. 2장 항쟁의 발발과 광주지역의 확산 1절 학생시위대의 시내 진출과 계엄군의 과잉진압 18일 오후가 되자 학생시민시위대는 오전과는 달리 공수부대의 잔인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이날 김대중 체포와 전두환의 쿠데타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동향 출신 정치인 김대중의 핍박과 수난을 전라도 지역민에 대한 수난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광주시민들은 김대중의 투옥을 민주화에 대한 그들의 열망과 기대가 좌절된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잔혹한 진압을 가하는 공수부대에 분노하면서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학생 시민 시위 대중들은 숫자가 수천 명으로 늘어나고, 기동성을 갖추기 시작하며 보다 조직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계엄군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광주를 직접 방문하며 진압에 대한 결의를 과시하기도 했다. 오후 6시쯤 전남 북 계엄분소는 광주시내 통금시간을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로 연장한다 고 발표했다. 군은 통금시간 직전 5 18민중항쟁 19

22 도청을 중심으로 주요시설 및 교차로 등에 병력을 배치, 시위대의 집결을 원천봉쇄하려 했지만, 학생시민들의 산발적인 시위는 계속되었다(나의갑, 2001, 230). 이날 오후 광주공원 부근의 시위대는 도청 쪽으로 진출하면서 학생회관 앞에서 경찰과 충돌, 페퍼포그차 1대를 전소시키기도 했다. 이때부터 시내에 진출한 공수부대원의 진압과 학생시민 시위대의 경찰에 대한 공격이 번갈아가면서 진행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와 충장로 등 광주시내 전역을 누비면서 젊은 사람만 보면 두들겨 팬 후, 옷을 벗기고, 포박하여 연행해 갔다. 이에 맞서 시위대는 동명동이나 지산동 등지에서 파출소를 습격하거나 파괴하였으며, 시장 관사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5시경에는 경찰차를 포위한 시위대가 30여 명의 경찰을 잡아, 방석모와 곤봉 등을 빼앗기도 하였다. 18일 오후 7시쯤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는 학생시민 시위대 수백 명이 공수부대와 충돌했다. 시위대는 각목 등을 들고 공수부대원들과 육탄전을 벌였다. 이에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밀리기도 했다. 이날 저녁 공수부대는 인원을 증파하여 젊은 사람만 보면 무조건 연행해 가버렸다. 이 때문인지, 이날 오후부터 진압과정에서 일부 군인들이 경상도 특유의 억센 사투리를 사용하는 상황이 발생하며, 경상도군인들이 전라도사람 다 죽인다 는 내용의 유언비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유언비어가 지역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한 것이지만, 유언비어가 전하는 계엄군의 잔악한 진압 내용은 사실이었다. 계엄군에 의한 젊은이들의 연행은 밤새 계속되었고,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시민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소식을 전했고, 광주의 시민들은 공포와 분노 속에서 점차 하나가 되어갔다. 계엄사령부는 이날 밤 광주지역의 상황이 악화되자 이에 대한 대비를 준비해 갔다. 우선 광주시내 전역에서 직장예비군의 무기와 탄약을 회수하여 군부대에 보관하게 했다. 이날 밤 거두어들인 무기는 총기류 4,717정, 탄약 115만 발이었다. 2군사령관은 각 공수부대에 시내 출동, 융통성 있게 운영 하며,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 하여 주모자 체포 하고 단호한 조치 를 취하라고 지시하였다(23:00)(2군사령부,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 또한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 하며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 하도록 했다( 충정업무 일일 주요사항 ). 이 같은 지침은 다음날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더욱 더 과격한 진압을 하게한 상부의 명령이었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380). 23) 23) 반면 안병하 전남도경찰국장(아래 도경국장 으로 줄임)은 시위진압을 지시하면서도 군과는 다른 지시를 내렸다. 5월 18일 11시 안병하 도경국장은 광주 시내에서 시위가 발생하자 분산되는 자는 너무 추격 말 것, 부상자 발생치 않도록 할 것, 기타 학생은 연행할 것 등을 지시했고, 이어 연행과정에서 학생의 피해가 없도록 유의 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시 위 중인 학생을 철저하게 검거하라고 지시했다. 안병하 도경국장은 오후 3시경 16:20부터 공수단이 투입되어 협동작전 을 하게 되니 각 부대장은 현장을 유지하고 가스차 피탈이나 인명피해가 없도록 조치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인명피해 를 바라지 않았던 도경국장의 지시는 공수부대의 과격진압으로 지켜지지 않았다. 2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3 도시게릴라식 소요 및 난동 형태에 대비. 소규모로 편성한 다수 진압부대를 융통성 있게 운용. 전 작전가용 병력 최대 운용. 바둑판식 분할 점령. 대대단위 기동타격대 보유 조기에 분할 타격 체포. 군중 10인 이상 집결 방지. 다수 편의대 운용(첩보 수집). 치명상을 입지 않은 범위 내에서 과감한 타격. 통금시간 대폭 연장. 총기피탈 방지(엄중 문책). 주민에게 선무 홍보활동 강화(전단, 방송)(전교사, 전투상보(충정작전결과) ) 위의 자료를 보면 계엄군은 시위의 원인에 대한 규명 없이 시민들의 행위를 난동 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2군사령부는 5월 20일 계엄군 자세 확립 지시(작상전 439호) 를 통해 총기 피탈 방지, 대민 적대행위 방지, 장기작전 대비, 연행자 처리 등을 지시했다(18:25). 같은 날 훈시문에서는 계엄군의 이성적 행동 강조, 이적 행위자-단호히 조치, 선량한 학생 및 시민 보호, 군인 기본자세 견지, 정부 재산 보호(주둔지 시설 포함) 라고 하며 계엄군의 과격한 진압 행위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이때부터 광주지역의 시위를 이적행위 로 규정하며 이적 행위자 와 선량한 학생과 시민 을 분리시키라는 지침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전교사, 전투상보(충정작전결과) ). 계엄사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 나 고첩 들의 책동으로 왜곡 은폐했고,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담화문을 통해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 고 왜곡하여 발표했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 결국 5 18민중항쟁은 시위 진압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의 폭력적인 진압에서 시작되었다. 사전에 진압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는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시민까지 폭력을 행사했고, 이에 저항하는 지역민들의 시위는 점차 확산되었다.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일방적인 폭력적 진압에 분노 하면서 항쟁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특히 지역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적 진압의 이유 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문을 통해 상황을 이해해야만 했다. 이것이 정부와 언론이 말하는 유언비어 이다. 즉, 계엄령으로 인해 공공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언비어는 지역민들이 사이에서 대안 언론의 역할을 했다. 18일 오후부터는 시내 산수동, 계림동 부근에 유인물이 배포되기 시작했다. 이 유인물들은 극회 광대 회원, 24) 전남대 학생, 들불야학 학생들이 만든 것이었다. 이들은 당시의 상황을 분명하게 알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유인물을 제작하였다. 이들 유인물은 18일 오전 중에 일어났던 공수부대의 24) 이들은 현대문화연구소(윤한봉, 정용화)가 후원한 YWCA소속 극회 광대 의 회원들이었다. 5 18민중항쟁 21

24 폭력과 만행 그리고 진상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학생회나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체포되거나 잠적해버린 상황에서 계엄군에 대응하려는 학생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 < 그림 18~19일 유인물 > 광주에서 이렇게 신군부에 의한 폭력 진압이 일어나고 있을 때, 정부와 언론은 평소와 다름없이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5 17조치 와 관련하여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최근의 소요로 야기된 사회혼란 상태가 더 이상 계속되면 국가의 기강을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할 우려가 있으므로, 국가를 보위하고 3,700만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는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2절 시민들의 참여와 항쟁의 확산 두려움에 떨며 18일 밤이 지났다. 19일 초 중 고교학생들은 등교를 시작했고, 관공서와 회사들이 정상적으로 근무함에 따라 여느 날과 다름없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내 중심가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한 상태였다. 이른 새벽부터 군인과 경찰들이 시내 전 지역에 걸쳐서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금남로는 일체의 차량이 통행할 수 없었다. 시민들의 왕래가 잦은 곳은 계엄군 일개 소대 정도의 병력이 주둔하여 젊은 사람들과 차량의 통행을 통제하고, 검문을 실시하고 있었다. 계엄군의 배치로 도시 전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으며, 시민들은 어제의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5 했다. 사람들의 표정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이런 와중에 시민들은 시내로 나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고자 했고, 몇 명씩 짝을 지어 금남로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전 9시 학생과 시민들이 골목을 빠져나와 금남로 가톨릭회관 앞으로 모여들었다(보안사, 광주사태 상황보고 ). 10시 모여든 군중은 3,000~4,000명으로 불어났으며, 자연스럽게 군경과 대치하고 있었다. 일반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공수부대가 00도 출신 군인들만 뽑아 갖고 왔다면서요. 군인들에게 약을 먹였다는 소문도 맞는가 봐요.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런 거지요. 00도 군인들이 00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고들 야단이던데 참말이 답니까? 그럴 리가 있겠어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근데 군인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참말인 것도 같고. 18일 오후부터 나돌기 시작한, 이 출처불명의 소문들에 시민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반신반의했다(나의갑, 2001: 231). 모여든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계엄군과 경찰은 확성기와 헬기를 동원하여 시민들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공중에 떠서 돌아다니는 헬기를 향해 주먹다짐과 욕설을 퍼붓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18일] 10:00 전남대 학생 약 200여명 공동터미날에서 금남로 경유 관광호텔 골목으로 가고 있음 11:30 카톨릭센타 앞에서 도로에 전남대학생 200여명 앉아서 연좌대모 및 구호외침(계엄령 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중략) 14:44 아모레 화장품 앞에서 인도시민 및 학생들에게 최루탄 발사로 흩어짐 14:50 현대극장 앞 100명이 데모 중앙극장 앞 학생과 기동경찰 투석전 (중략) 16:10 구 금성여객 장소에서 학생과 군인 투석전 (중략) 17:00 현대극장 앞. 군인과 학생 투석전중. 학생 및 시민 군용차량에 2 台 연행 약 40 名 20:30 광주은행 앞 학생 150여명 군인 경찰과 투석중 전대병원 앞에서 공수부대원이 학생 10여명 구타 [19일] 10:20 카톨릭센타 앞 무장공수부대 5명 시민 1000명 정도 구경 학생을 잡으려 할 때 시민들의 야유로 저지 (중략) 10:35 무장군인 20명을 카톨릭센타 앞 배치로 시민들 흥분 야유 ( 5 18사태일지-광주시 동구 ) 당시 작성한 위와 같은 문서들을 보면 학생들의 시위에 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18일 계엄군의 폭력에 시민 들은 시위 군중과 군인들이 충돌하는 광경을 인도 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시민 들을 학생들과 함께 군용차량에 실어 연행해 가자, 시민들은 (19일) 길거리에 계엄군들에게 야유 를 보내는 등 점차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무장 군인들의 숫자는 증가했고, 이에 시민들은 흥분 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시민들을 해산시키고자 군인들은 곤봉 을 휘둘렀다( 5 18사태일지-광주시 동구 ; 상황보고-광주시 ; 5 18민중항쟁 23

26 학원사태보고 ). 지역민은 시민학생 이라는 시위대를 이루어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였다. 이러한 자료들은 학생들과 기동경찰의 충돌이 학생-공수부대의 충돌, 그 사이 시민이 시위 군중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렇게 학생들의 시위에 점차 시민들이 참여하고 여기에 계엄군이 더 폭력적인 진압을 행사는 모습은 전 시내에서 이루어졌다. 10:48 무장군인 약 25명 동구청 앞 = 광주은행 앞에 있는 시민들을 해산시키고자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로 달려 도망다님 (중략) 11:00 금남로 통은 쫓고 쫓기며 현재 금남로 통에는 사람이 별로 없음 11:00 무장군인 소위 25) 가 시민들 돌에 의해 얼굴에 부상 시민들 무차별 난타로 부상 부지기 11:00 탱크 2대 군용차 15대 카도릭센터 앞 배치 11:00 군용차량 1대에 학생 반죽음으로 싣고 감 ( 상황일지 ) 위의 자료는 공수부대의 때리 는 행동에 시민들은 투석전으로 대응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부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에 군인들은 학생 시민 시위대를 무차별 구타 하여, 학생들이 죽 는 지경에 이르렀고 시민들은 피 까지 흘렸다. 짐작컨대, 무장군인과 시민학생 사이의 투석전 과정에서 상황이 시위와 진압이 점차 가열되었다. 결국 일반 시민들에 대한 계엄군의 폭력이 지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며 이후 더욱 큰 저항을 불러왔다. 일반 시민을 폭행, 연행하는 계엄군(5 18기념재단) 시민과 학생들은 도청광장 쪽으로 진출하려 했다. 도청광장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 은 스피커를 25) 기록에는 소위로 되어 있으나, 군위 였다는 증언이 있다. 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7 통해 시민들의 해산을 종용하고 있었다. 공중에서는 군 헬리콥터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10시 40분부터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해산에 나서 다 죽여 버린다. 빨리 창문 가리고 일이나 해, 자식들아. 군인들은 내다보는 눈 을 진압봉으로 탁탁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나의갑, 2001: 232). 그러나 어제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던 시민들은 그냥 쫓겨 도망가지 않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잔인한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버스기사, 고시학원 창가에서 구경하던 어린 학원생들, 모두가 진압 대상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지나는 행인은 물론이고 사무실과 주택으로 들어가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팬 뒤, 연행하였다. 붙잡힌 시민들은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겨진 채 길거리에서 가혹한 기합을 받아야만 했다. 버스에 올라탔던 학생들도 잡혀갔고, 버스나 택시를 몰던 운전기사가 구타를 당하였다.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하자 택시기사들은 자진하여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운반했지만, 공수부대원이 택시에 실려 가는 부상자와 운전기사까지도 구타하였다. 이들의 만행을 보다 못한 경찰들이 서성거리는 시민들에게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 고 말 해줄 정도였다 (국방부과거사위, 2007: 284쪽). 26) 공수부대의 과도한 폭력 진압에 시위대를 뒤쫓는 계엄군(5월 19일)(5 18기념재단) 의해 시내는 텅 비워졌다. 관공서와 회사들도 낮 12시가 되자 직원들을 퇴근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잉 폭력 진압은 시가지 전역에 거쳐서 자행되고 있었다. 금남로는 완전히 교통이 차단되었고, 도청 앞은 다시 기동경찰이 바리게이트를 치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일부 군인들이 시내 요소를 지키는 가운데 대부분의 군 병력은 점심을 먹기 위하여 주둔지인 조선대 캠퍼스로 이동하였다. 그러자 골목에 숨어있던 시민들이 다시 금남로에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불어난 사람들은 오전보다 훨씬 많은 시위군중이 되었다. 시위대 가운데 섞여있던 학생, 청년들은 애국가, 정의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불렀고, 시위는 차츰 시가전( 市 街 戰 ) 양상을 보였다. 시위군중과 진압하는 26) 5월 19일 보안사의 보고에는, 이때까지의 피해 현황 중 인명피해를 총 69명으로 보고했으나 이것은 경찰의 피해였다 (14:30). 보안사는 민간인 1명만 사망한 것으로 파악했으며 민간인 피해자가 확인될 경우 인명피해는 더욱 증가될 것으 로 예상 했다. 5 18민중항쟁 25

28 군경 사이에는 돌과 화염병, 최루탄이 오가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도로 가의 대형화분을 넘어뜨리고 보도블록을 깨트려 계엄군에 던졌다. 근처 지하상가 공사장 등에서 무기가 될 것을 들고 나와 경찰에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화염병이 등장하기도 했다(700보안부대, 광주사태 동향 ). 무장력에 한계를 느낀 시위 군중들은 차량이나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 바리게이트에 굴려 보내기 시작했다(보안사,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 군경도 가스차나 최루탄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위대에 달려들어 곤봉과 총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시킨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곤 하였다. 그때마다 시위대는 흩어졌다가 진압군경이 돌아가면 다시 모여들곤 했다. 시민들은 도로변의 대형화분과 공중전화박스 가드레일 버스정차장 입간판 등을 뜯어 바리게이트를 치고 보도블록을 깬 조각을 던지며 계속 저항했다. 그 후로도 금남로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수십 차례 거듭되었다. 이들 사이의 공방전을 전남도청에서 작성한 5 18사태 주요 사건일지 는 군 공수부대 200여명 투입. 학생 및 학생차림 젊은 층 무차별 구타 연행. 혹독( 酷 毒 )한 진압 목격 시민, 흥분 분개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전남도청, 5 18 주요 사건일지 ). 동구청에서 작성한 5 18사태일지 는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광주시 동구청, 5 18사태일지 ) :00 조선대학 입구 철로변에서 공수부대 군인이 지나가는 학생 11명을 총개머리판으로 구타. 1시간 20여분 정도 :52 조선대학으로 군 트럭(1대)에 학생들을 연행 갑바를 씌워 일어나면 발로 차고 감 :00 무장군인 소위가 시민들 돌에 의해 얼굴에 부상. 시민들 보이면 무차별 구타중 :00 금남로 통은 공수부대들이 곤봉으로 때리므로 시민들 없음 :15 일반 시민 15명 정도가 충금지하상가 쪽 및 각처에서 팬티만 입고 관광호텔 앞에 있으며 등 어깨 다리는 곤봉 및 워커발 태죽이 보이며 빨갛게 되었음 :25 동구청 민원홀에 학생으로 보이는 2명을 잡아 구청 변소 앞에서 공수부대 7~8명이 곤봉 및 구둣발로 때리고 있음 :34 동구청 앞 도로에 머리 길고 젊은 사람은 잡혀오고 있으며, 허리띠를 빼서 차창 옆에 던지고, 엎드리게 하고 두 손으로 곤봉을 잡아 전부 때리고 있고, 뒹굴게 하여 동작이 늦으면 곤봉으로 무차별 때림. 일차 5분여 동안 기압이 끝나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손은 허리에 올려 두 손을 잡게 하여 잘못하면 구둣발로 등을 차고 있으며 일부 시민은 머리에서 피를 흘려 윗옷이 빨갛게 되어 있음. 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9 가열된 시위와 잔혹해진 진압과정 속에서 공수부대원들의 진압봉이 교체되기도 했다. 새로 배분된 진압봉은 원래의 진압봉보다 길이가 긴 것이었다. 또한 시위 진압에 대검이 사용되었다. 전교사에서 작성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에는 대처상황 중 수습 및 작전에는 7 空 輸 隊 銃 劍 鎭 壓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5월 18일 20:15)(전교사,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 1985년 안기부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 으로 기술되고 있다. 대검을 M16에 착검한 사례는 사진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래 사진에 속 착검 군인은 7공수여단 서 중사로 밝혀졌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387). 27) 착검한 총을 들고 뛰는 계엄군(5월 19일) 전남매일 (정상용 외, 1990: 196) 시위대는 주위 동료들뿐만 아니라 길가에서 구경하던 시민들까지 처참하게 살상당하는 것을 보고 죽음을 각오하고 공수부대에 대항했다. 도청 앞 가톨릭센터, 양림교, 광주공원 앞 다리, 양동시장 그리고 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충돌이 발생했다. 시민들은 맞아죽기 보다는 싸우다 죽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제 군과 경찰은 수적으로 우세하였지만 겨우 간선도로와 시 외곽으로 연결되는 국도만을 확보하고 있었고 작전상의 주요지점을 지키는데 급급했다. 오후 4시경부터는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정상수업을 한다고 해서 등교했지만, 공수부대의 폭력을 목격하고 밖에서 벌어지는 참상이 전해지면서 누구도 수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오후 4시경 전남고와 대동고 그리고 중앙여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했다. 27) 광주항쟁 기간 총 11명의 자상 사망자들이 있었다. 5월 23일 발생한 지원동 총격사건(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의 사망자 중 2명의 젊은 여성도 총상 외에도 자상이 있었다. 5 18민중항쟁 27

30 학생들은 교정에 모여 시가행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광산여고와 정광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 학교의 정문에는 계엄군이 배치되어 학생들의 시가행진이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방과 후 고등학생들이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고등학생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에 전남 도교육위원회는 광주 시내 37개 고등학교에 하루 동안 휴교조치를 내렸다. 시민들의 저항도 갈수록 거세졌다. 오후 4시 30분경에는 공용터미널 근처에서 공수부대와 치열한 접전이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공용터미널 지하도 속으로 쫓겼던 시민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지하도 속에서 공수대원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5시 10분경에는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장갑차까지 동원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었다. 당시 시민들은 장갑차의 눈 역할을 하는 감시 경을 돌로 깨트리고 장갑차를 포위한 뒤 장갑차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그때 장갑차 안에서 뚜껑을 열고 공수대원 한명이 나오더니 총을 발포했다. 이 발포로 조선대부속고등학교 3학년 김영찬(19)군이 손과 대퇴부에 3발을 맞았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 28) 오후 5시 30분, 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7여단 병력이 11여단 1병력으로 교체되었다. 11여단은 증파 명령을 받고 18, 19일 선 후발대로 나눠 광주에 왔다. 그 틈을 타 수만 명의 시위군중이 다시 금남로로 몰려들었으나, 이내 흩어지고 맞았다. 이런 밀고 밀림 은 금남로 등 곳곳의 시위현장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나의갑, 2001: 233). 오후 6시 대인동 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에는 7~8구의 시체가 늘어져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의 대검에 찔리거나 맞아 죽은 사람들이었다(김영택, 2010: 301). 또한 부상자를 싣고 가던 택시 기사가 공수부대의 명령을 거부했다고 칼에 찔려 죽기도 했다. 29) 당시 공수부대는 시내에서 연행해 간 사람을 대학교, 상무대 유치장에 수용했는데, 어느 누구도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 온몸에 난 상처를 안고 차분하게 앉아서 쉬거나 치료받지 못하고, 물도 먹지 못한 채 두들겨 맞거나, 기합을 받다가 쓰러져 끌려 나가는 상황이었다(김영택, 2010: 310). 하늘에서는 군용 헬기가 상공을 선회하면서 선무방송을 하고 있었다. 모든 시민은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거리에 나오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계엄군은 시내 질서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들은 안심하십시오. 라는 방송만 반복했다. 상황이 매우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측에서는 광주의 상황과 관련하여 아무런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다. 또한 각종 보도매체들도 계엄당국의 철저한 통제 속에서 광주의 상황과 관련된 보도를 전혀 하지 28)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 대위가 M16을 발포했고, 당시 조대부고 3학년인 김영찬이 유탄에 총상을 입었다 :00 보안사는 현지 505보안부대로부터 고교생 1명(인적사항 미상)이 우측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전남의대 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았다. 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11여단의 전투상보, 상급부대인 31사단과 전교사의 상황일지 등 에는 발포에 관련된 어떤 내용도 찾아볼 수 없다. 11공수여단에서 상급부대에 보고를 하지 않은 채 발포 사실을 은 폐한 것으로 판단된다. 29) 이날 낮부터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는 중환자가 줄을 이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행히 계엄군의 트럭 에 실려 가지 않고 중상을 당한 채 달아났거나 주위의 도움을 받아 계엄군의 무자비한 손길을 벗어났던 사람들이었다. 그 러나 병원에 옮겨져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광주 시내 병원시설로는 이들 전체를 수용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2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1 않고 있었다. 오후 7시 도청에서 광남로에 이르는 길은 경찰과 공수부대가 여전히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시내 곳곳에서 시위대가 곡괭이, 삽, 몽둥이 등으로 무장하고 이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광주역 앞에 있던 KBS 방송국을 공격하기도 하고, 인근 파출소로 몰려가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날 밤 시위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서도 통행금지 시간인 7시를 훨씬 넘긴 저녁 10시까지 계속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계엄군은 지역민들에 대한 선무활동을 목표로 호남출신 장교들을 광주에 파견했다. 이들 장교들은 5 18 의 주요 원인이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이라고 지적했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388). 전교사 충정작전결과 에는 진압 간 일부 구타 사항 목격, 주민데모 합세 확대화 (전교사, 충정작전결과 ), 30) 전교사 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 에는 소요사태로 전개된 직접적인 원인 중의 하나로 진압부대의 일부 충동 행위로 인한 군중의 정서적 흥분 이라고 기록되었다. 특전사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총괄) 에는 소요진압간 발생 부상자 후송 대책 결여로 장기간 노상방치로 군중 자극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공수부대의 초기 과격진압은 학생시위에 시민들이 적극 동참해 항쟁으로 나가는 주요 원인이었다. 1989년 국회청문회 대비 보안사 문건에서도 계엄군의 과격진압 사례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보안사 3처 2과, 1989: 광주사태 전말보고 ). - 무차별 구타(일부 군인 대검 소지) - 유혈 낭자 시민 계속 구타 및 시민 면전에서 끌고 다님 - 도망자 계속 추적 검거 구타 - 도망자 숨겨둘 경우 상점 물건 파손 - 무혐의 가게 종업원 및 배회자 연행 - 대중 면전 탈의 상태로 원산폭격 및 구타(금남로) - 버스, 택시 검문, 학생 모두 연행 - 장년, 노년층에게 이 새끼, 저 새끼 등 욕설 사용 - 일부 여자에 대한 과격한 저지 - 학생 수송 택시 운전사 제재 결국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의 과격진압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들의 저항은 더 격렬해 졌다. 이에 육군본부는 제3공수여단의 추가 파병을 결정했다. 이날 7시 30분 전교사 사령관실에서는 광주지역 계엄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광주시내 시위 상황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계엄군의 30) 이외에도 학원자율화 이후 문교정책, 초기 단계의 과감한 조치 결여, 주동자 미검거, 유언비어, 시위과정의 투석, 파괴, 살 인 등을 들고 있다. 전교사, 충정작전결과 ( )(보안사, , 293쪽 인용). 5 18민중항쟁 29

32 강경진압에 학생들을 동정하는 시민들이 가세했다는 점이 지적됐다. 또 지역감정을 유발시키는 유언비어 방지를 위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30분간 간격으로 광주시내 학생소요와 관계되어 계엄군이나 학생이 사망한 바 없으며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않도록 계몽을 실시 하기로 결정했다. 또 5월 20일부터 계엄간담회를 통한 선무활동을 실시함과 동시에 시위대가 게릴라식으로 대항할 것에 대비해 계엄군 투입을 위한 1개 공수여단의 추가 지원을 육군본부에 요청하며 강력한 진압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보안사,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 광주지역 시민들의 저항에 계엄군은 더 강력한 진압을 계획했던 것이다. 3장 시위대의 형성과 도청 앞 발포 1절 학생 시민 시위대와 차량 시위 20일 오전 충장로와 금남로의 상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시민들은 군데군데 모여 공수부대의 과격진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광주시 동구청, 5 18사태일지 ). 전교사 병 력(6/135명)이 금 남 로 청 소 작 업 을 위 해 출 동 했 다 가(06:20), 철 수 했 다(09:00)(전 교 사, 전교사 작전일지 ). 전교사는 공수부대의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확대되자, 주요 기관장 회의(10:20~12:50), 각계 대표 56명과 31) 특별참모 간담회를 주재했다(14:00~14:20). 이날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공수부대의 과격진압과 유언비어 문제를 원인으로 제기했다(보안사, 광주사태 상황일지 전문 ). 오전 10시경 대인시장 주변 천여 명의 시민들이 전날의 계엄군에 대해 이야기하며 분노와 적개심으로 하나가 되고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들이 형성한 시위대는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에 의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금남로에서는 시위 군중과 계엄군 사이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반복되었고, 여기에는 전날 도착한 제11공수단에 이어 제3공수여단 병력 1,392명이 증파되어 있었다(김영택, 2010: 313).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시내는 대체로 소강상태였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광주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대략 10만이 넘는 인파가 금남로에 모여 들었다. 시내의 도처에는 투사회보 라는 유인물이 수천 매씩 뿌려지고 있었다. 32) 오후 3시, 금남로의 시위대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으며,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대를 저지하려했다. 시위군중은 경찰의 저지에 대항하며 시위대를 형성했다가,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몰려들기를 31) 주요 참석자들은 광주상공회의소장, 전남의사회장, 전남약사회장, 한국부인회 광주지회장 등이었다. 32) 투사회보 는 윤상원이 중심이 된 광주지역의 사회운동 진영에서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만 들어 낸 대안 언론이었다. 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3 반복했다. 이윽고 시민들은 금남로에 앉아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도청 쪽으로 이동하면서 공수부대 물러가라, 우리를 죽여라 죽여, 계엄령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고 외쳤다. 도청 앞 공수부대가 철수하고 1,000여명의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시위대를 압박했다. 시위대는 애국가를 부르거나 갖가지 구호를 외치면서 도청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던 중 전면에 있던 경찰병력 대신 공수부대 3개 소대가 배치되어 시위대를 향해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불어났으며, 도망치거나 방관하는 사람은 없었다. 도청 앞 광장을 통하는 모든 도로에는 시민들이 물결처럼 술렁이고 있었다. 청년 하나가 나서서 스피커를 들고 시위대를 독려하는 선전활동을 시작했다. 직접 시위에 참가하기 어려운 여자와 노약자는 시위대에 물이나 돌 등을 운반했다. 도청에서 뻗어 나오는 길목에는 군경의 저지선이 있었고, 분수대를 중심으로 탱크와 수많은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시위군중은 순식간에 2~3만여 명으로 불러났고, 이들은 드럼통과 화분대를 굴리면서 군 경저지선으로 접근하는 투석전을 벌였다. 금남로 (5 18기념재단) 오후 5시 50분경 충장로 입구 쪽의 시위군중 5천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 번의 충돌 후 양쪽은 다시 대치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들 중 일부는 경찰들에게 다가가 광주시민을 적으로 취급하는 공수부대와 사생결단을 내고 싶으니 경찰은 비켜 달라 고 말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폭력에 분노의 공감대를 나누며 모여들었고, 서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해 나갔던 것이다. 그렇다고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러한 비조직적 시위는 21일까지 계속되었다. 5 18민중항쟁 31

34 한편 20일 오후 시내 택시 기사들은 공수부대의 폭력 진압에 대한 이야기를 곳곳에서 나누었다. 그들은 버스와 택시를 세우고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무작정 끌고 가면서 기사들까지 구타하거나 연행하는 일을 두고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느냐 는 공분을 형성했다. 기사들의 공분은 직접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자는 의견으로 집약되었고, 자신들이 운전하는 택시를 한 장소에 대량으로 모이게 한 후 일제히 도청을 향하자는 데까지 의견이 모아졌다. 오후 3시경 무등 경기장 앞에 영업 택시들이 한 대 두 대 모여들기 시작했다. 버스도 있었고, 화물자동차도 있었다. 오후 6시가 되자 모여든 차량이 200여 대가 넘었다. 운전기사들은 시민들의 투쟁대열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무등 경기장을 출발하여 저녁 7시쯤 금남로에 들어섰다. 대형버스와 화물차 그리고 택시가 그 뒤를 이었다. 화물차 위와 버스 안에는 머리에 흰 머리띠를 두른 젊은이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갖가지 구호를 외쳐댔고, 시민들이 구호를 따라 외치며 차량 대열에 합세 하였다. 차량행렬이 금남로에 이르자, 어찌할지 모르고 군경 저지선에 맞서 있던 군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이들을 환영했다. 금남로 차량시위(5 18기념재단) 이날 택시, 버스 등 차량 시위가 진행되면서, 차량은 항쟁시기 매우 중요한 시위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상황일지 ). 33) 시위대와 시민들은 기사들의 차량시위를 보고, 차량 을 이용한 시위의 효과와 위세를 몸소 체득했다. 이에 항쟁시기에 소방차, 스쿨버스, 아세아자동차에서 생산한 33) 광주시 상황일지 에는 19:00Bus 8대 TAXI 50여대 10ton화물트럭 1대 구청 앞까지 도착 시위군중 앞 집결 Bus 1대 남동쪽에서 분수대까지 진출 군중 4,000 ~ 5,000 名 라는 기록이 있다. 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5 일반차량과 군용 차량에 이르기까지 많은 양의 차량들을 동원되었고, 시위군중은 차량을 타고 활동하였다. 34)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시위가 진행되던 오후 7시, 청년 7명이 시외버스에 올라 운전기사에게 버스로 공수부대 군인들을 밀어 버릴 테니 달리고 있는 동안 열심히 돌을 던져줘야 합니다. 꼭 그렇게 해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7시 10분, 시위 진압 차량이 최루탄[페퍼포그]를 군중을 향해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버스는 가로수와 충돌하기도 했고, 시위대 여기 저기에서 힘겨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200 여명의 군인들이 뛰어나와 군중에게 진압봉을 휘둘러댔다. 차량의 창문 부수고 불 켜진 헤드라이트를 하나하나 두드려 부쉈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면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가득했다(나의갑, 2001: 236). 당시 시위대는 공용터미널에서 버스를 몰고 온 시위대와 합류하며 계엄군을 압박하였고, 그 기세에 군경저지선은 금남로 전일빌딩 앞까지 후퇴하였다. 또한 시위군중은 도청으로 통하는 6개 길목에서 군 경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노동청 쪽과 학동쪽, 충장로 입구에서도 길을 가득 메운 채, 공수부대와 경찰을 포위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도청 앞 광장이 시위대의 손에 넘어갈 것 같은 형국이었다. 군 경은 방독면을 쓴 채 최루탄을 쏘아대며 가까스로 시위 군중들을 막아내고 있었다(김영택, 2010: 330). 이날 밤 시위군중은 2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계엄군의 방어는 필사적이었으나 시위군중은 시시각각 그들을 압박해 갔다. 시위대가 MBC와 KBS 방송국을 장악해 방송이 중단되었으며, 시내 파출소가 파손되거나, 방화되었다. 밤 9시 20분경에는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 군경저지선을 뚫고 돌진하던 광주고속 차량에 경찰이 사망하기도 했다. 35) 밤이 깊어갈수록 양 측의 공방전은 고조되었다. 그러던 중 MBC 방송국이 불타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 뉴스에서 광주의 상황을 보도하지 않았다고 분노한 시위대가 방송국에 몰려가 불이 난 것이다. 다음 날 새벽 KBS도 불에 탔다. 36) 34) 항쟁에 참여한 지역민들은 차량을 매개로 대( 隊 ) 를 이루어 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위대 들은 광주의 상황을 알리고자 사방으로 내달리며 광주에서 제작되는 유인물을 먼 장소까지 전달해 항쟁의 동참을 선전하거나, 무기와 인원을 광 주 내부로 들여오기도 하였다. 항쟁 시기 시위대와 차량이 내달렸던 도로는 광주 이외 지역은 전남지역의 연결되어 있었고, 시위대들의 인적 관계를 따라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계엄군과 정부는 그 확산을 제압하고자 광주와 통하 는 주요 도로를 차단하였고, 시위대는 주요 길목에서 계엄군과 가두 시위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35) 함평에서 파견 나온 경찰관 강정웅(39), 박기웅(40), 이세웅(31), 정충길(40) 이상 4명이다. 36) 광주MBC 화재는 저녁 9시 30분, KBS광주방송은 21일 새벽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5 18민중항쟁 33

36 이날 시내에는 트럭에 스피커를 매단 선전 차량이 등장하기도 했다.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도대체 어느 나라 군대입니까? 경찰 아저씨, 당신들은 우리 편입니다. 제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김영택, 2010: 334) 시내 주변을 돌며 흘러나오는 여성의 애절한 호소는 온 시내를 뒤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이 목소리의 호소력은 지도자도 없는 항쟁의 시위대에게 일종의 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정해구, 1999). 이 무렵 공수부대 제11여단은 조선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와 대치하였고, 제7여단 33대대는 조선대로 복귀했고, 제35대대는 도청으로 이동해 11여단과 합류했다. 제3여단 제12 15대대는 광주역 앞에서 다섯 갈래의 방사형 도로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수천 명의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일부 시위자들이 드럼통에 불을 붙여 굴려 보내거나 차량을 돌진시켜 하사관 3명이 중상을 입자, 대대장은 권총으로 시위대의 차량을 향해 발포했다. 여단장이 경계용 실탄은 위협사격용으로 사용하되 그 이외 사용 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 는 지시와 함께 발포를 허락했던 것이다(나의갑, 2010: 237). 광주역 앞의 계엄군도 발포를 했다. 광주역에서 경계중인 제3여단 군인이 시위대의 차량에 사망하자 3공수여단장(여단장 최세창)은 각 대대에 M-16 실탄을 배부하고 장착토록 지시했다((보안사,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 37) 당시 3공수여단 본부중대 소속 하사 이 는 본부중대 병력들이 3공수여단 작전 참모와 작전과 선임하사의 지휘 아래 지프와 트럭에 실탄을 싣고 전남대에서 광주역으로 지원 나갔으며, 그 과정에서 지원 병력을 막아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루어졌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394). 계엄군의 발포에 선두에 섰던 청년들이 쓰러졌다. 38) 새벽 2시쯤 제3공수여단은 전남대로 철수했다. 결국 3개 여단의 공수부대가 장악하고 있던 주요 기점에서 일제히 시위대에 대한 발포가 이루어졌다. 시민 시위대는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새벽 1시 시위대는 국민들의 삶과 복지를 위하여 쓰라고 거두어진 세금이 자신들을 죽이려는 군대와 그들의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며 세무서를 장악했다. 시민들의 위세가 오르자 도청 앞 광장의 군 저지선에는 긴장감이 흘렸고, 계엄군 쪽에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라는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나의갑, 2001: 238). 지금 집에서는 부모형제들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이제 제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시민 여러분, 저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서는 37) 사망한 군인은 16대대 정관철 중사이다. 38) 김재화(26, 이북일(29), 김만두(45), 김재수(25) 등 4명이 사망했고, 최명철(39세) 외 6명이 부상당했다. 3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7 안 됩니다. 절대로 동요해서는 안 됩니다. 공수부대가 우리 광주를 어떻게 했습니까. 공수부대가 우리 광주를 박살내고 있지 않습니까. 공수부대가 광주시민을 폭도로 취급하고 있는데 물러서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끝까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공수부대를 몰아내고 광주를 지켜야 합니다. 그 무렵 도청과 광주역, 교도소, 전남대, 조선대 등 계엄군이 주둔한 곳을 제외한 광주시 일원은 사실상 군 경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오전 3시 밤은 깊어가자 도청 앞의 시위 군중들의 기세도 가라앉고 있었다. 21일 새벽 시외전화가 끊기면서 광주는 외부로부터 통신이 두절되었다. 2절 21일 도청 앞 시위와 발포 광주에 투입된 3개 공수여단은 21일 아침 시내에 재배치되었다. 제3공수여단 제11대대는 황금동 주변, 제12대대는 광주시청 대기, 제33대대는 공용터미널 일대, 제15대대는 양동 사거리 일대, 제16대대는 전남대 잔류 예비대, 제7공수여단 제33대대는 계림동 파출소와 광주고등학교 주변, 제35대대는 한일은행 사거리 일대, 제11공수여단 제61대대는 상업은행 일대, 제62대대는 충장로의 광주우체국 주변, 제63대대는 광주은행 사거리 일대에 각각 재배치되었다(김영택, 2010: 352). 카톨릭센터 앞에서는 새벽 4시부터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나온 시민들과 공수부대원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지난 밤 광주역에서 사망한 시민이었다. 시민들은 군용 차 뒤에다 손수레를 연결해서 그 위에 시체들을 싣고 대형 태극기로 덮어 천천히 시내로 나아갔다. 지난 밤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노동청 쪽 시가는 폐허처럼 보였다. 불에 탄 7~8대의 버스와 승용차들이 아무렇게나 길에 놓여 있었고, 노동청 건물 일부는 불에 타 있었다. 오전 9시경 금남로를 향하여 몰려든 군중들은 1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도청으로 모여든 시민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도지사와 협상을 시도하고자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군의 집단 발포가 이루어졌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84~89). 39) 아래의 증언을 참고해 보자. 아침에 상업은행 앞 웬 여자가 은행 앞에서 청바지를 입고 마이크를 든 채로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리어커에 시체 2구가 태극기에 덮여 실고, 피묻은 태극기 아래로 양말이 신겨진 발목이 덜렁덜렁 했다. 어젯밤 광주역 앞 전투에서 죽은 시민이라고 누군가가 말해주었다. 순식간에 십만에 육박하는 군중이 모였다. 얼마나 모였는지 보려고 소년체전을 알리는 홍보용 아치에 매달려서 보니까 금남로 끝이 안 보일 정도였다. 마이크를 잡은 여자를 중심으로 계속 도청 쪽으로 밀고 가서 결국 YMCA와 전일빌딩 앞까지 시민들이 전진했다. 그 상태에서 동구청 뒤쪽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나도 그곳에 가서 돌을 던졌고 최루탄도 맞았다. 도청 앞에서 39) 5월 21일 도청 앞 발포상황에 대해 명확하게 정리된 군 측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 광주 지역민의 증언과 관 련 자료를 수합하여 정리할 수 있겠다. 5 18민중항쟁 35

38 마이크를 잡은 여자가 광주시장 출두를 요구했다. 시장이 나오더니 광주시민 만세 를 외쳤다. 시민들은 도청 쪽의 군 저지선을 뚫으려했지만 최루탄이 밀가루처럼 쏟아져 내려 군중이 흩어졌다.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넘어지면 그대로 밟혀 죽을 만한 상황이었다. 하늘에서는 헬기가 계속 선회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다시 모여들었다. 약 1시경 어떤 시민들이 버스 3대, 장갑차 1대, 6톤 트럭 4대가 도로를 꽉 메우며 들어왔다. 먼저 계엄군에게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자 얼굴에 수건을 쓴 사람들이 차에 올랐다. 계엄군들도 장갑차 위에서 사격준비를 했다. 나는 전일빌딩 공사장 위로 올라가서 그 광경을 보았다. 1시 20분경 시위대 차량에 탄 사람들이 군 저지선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분수대를 우로 돌아서 계엄군을 향해 전진하자 군인들은 노동청 쪽으로 밀렸고 시민들은 와 하는 함성을 질렀다. 불과 30여 초도 되지 않아 타당탕탕 총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로 도청 광장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되었다. 그 많던 사람들은 모조리 골목골목으로 숨어 들어갔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10여 명이 조준사격을 받아 쓰러지고 있었다 (한국현대사사료현구소(이하 현사련 ), 1990: 김길식의 증언). 21일 도청 앞에 모여든 시민 시위대 남아 있는 기록과 증언을 종합해 보면, 공수부대의 총격과 구타로 인해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에 분노한 시민들은 전남도청과 전남대, 조선대 등지로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각목 등을 들고 살인을 저지른 공수부대를 광주에서 몰아내겠다며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고, 전춘심(31세, 일명 전옥주)과 차명숙은 전화박스로 만든 연단에 올라가 스피커를 통해 시위 대열의 맨 앞에 자리를 잡았다. 3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39 오전 9시 25분경, 시민들은 대표를 뽑아 전남도청에서 정부 측과 협상을 시도했다. 시민 대표로는 전춘심과 김범태 등 3명이 장형태 도지사와 도청 수산국장실에서 협상을 벌였다. 이들은 도지사에게 1 도지사가 유혈사태에 대해 1차적인 책임을 질 것, 2 연행자를 전원 석방할 것, 3 계엄군은 21일 낮 12시까지 철수할 것, 4 전남 북 계엄분소장과의 협상을 주선해 줄 것 등 4개항을 요구했다. 40) 장형태 지사는 시민들의 요구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었는지 매우 곤란한 표정으로 계엄군 쪽에 여러분의 뜻을 충분히 전달하겠다 는 말만 했다(나의갑, 2001: 239). 그러나 거리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10시경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가져온 시민군 측 장갑차가 군 저지선 방향으로 돌진하자 공수부대원들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했다. 그러나 그 위세에 밀려 계엄군은 도청 분수대에서 100m 떨어진 전일빌딩 옆 4거리까지 후퇴했다. 전남도청 앞에 있던 63대대 공수부대원들과 시위대를 막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교대했고, 이때 교대한 공수부대원들 일부에게는 실탄이 지급됐다. 11시경 전남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선무방송을 하면서 공수부대가 12시까지 철수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약속했던 12시가 되어도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자 시민들은 장갑차를 앞세워 공수부대를 더욱 압박했고, 계엄군의 점점 뒤로 밀려났다. 이때 11공수여단은 중대장 이상까지 실탄이 분배되었고, 일부 하사관들에도 실탄이 배분된 상태였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399). 이 시기와 관련된 증언은 좀 더 상세한 내용을 전해 준다. 시민 대표가 공수대들에게 시간 제약을 주며 퇴각할 것을 요구하자 군인 중령이 나와 말했다. 상부에 연락을 취해 곧 나가도록 해보겠다. 그런데 12시 30분이 되었는데도 움직일 기세가 보이지 않자 시위대 측에서는 다시 요구를 했다. 왜 약속을 해놓고 물러가지 않느냐. 빨리 물러가라. 그렇지만 오후 1시가 되었는데도 공수부대는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위대 측에서는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니까 예의 그 중령이 다시 나와서 말했다. 상부에서 아직 연락이 안 와서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 늦어도 1시 30분까지는 나가겠다. 그 뒤부터 시위대 쪽에서는 시간별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현사련, 1999: 이수범의 증언). 그때가 12시에서 1시 사이였는데 공수부대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곳마다 약 10분간에 걸쳐서 무자비하게 총을 난사해 댔다. 나는 7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당시 나는 전일방송 VOC에서 사회인으로 구성된 여성 기타합주단 강사였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전일빌딩 7층에 오곤 했었다. 그래서 건물의 내부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7층에서 내려다보니 도청 앞에는 부처님 40) 계엄군 투입, 무차별 구타에 대한 공개사과, 연행 학생 및 시민 석방, 금일 12:00까지 공수단 완전 철수 를 요구했다(보안 사,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 5 18민중항쟁 37

40 오시는 날이라고 하며 현수탑이 세워져 있었고 자비로운 날이라 씌어져 있어서 이상한 기분을 자아냈다. 공수부대가 도청 앞에서 화분대를 바리케이드로 쳐놓고 총을 쏘고 있었다. 금남로 아래쪽에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든 남자가 타이어가 달린 장갑차를 타고 상체를 밖으로 내민 상태에서 도청을 향해 달려왔다. 곧바로 그 남자는 공수대원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또 군용 트럭을 탄 사람이 도청 쪽으로 오다가 총에 맞았다 (현사련, 1999: 정해민의 증언). 오후 1시, 시위대에서 시위진압에 지원 나왔던 기갑학교 소속 장갑차 한 대에 화염병을 던지자, 불이 붙은 이 장갑차는 뒤로 후진했다. 동시에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했다. 저지선이 붕괴된 계엄군은 도청 분수대 뒤와 도로 주변으로 피신했으며, 그 과정에서 11공수단 63대대 8지역대 소속 무전병 권용운 41) 일병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장갑차가 잠시 멈춘 다음 분수대를 돌아나갈 때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에 사격을 가했고, 뒤따라오던 버스가 돌진하자 10여명의 공수부대원이 버스에 사격을 가해 운전사가 사망하면서 분수대를 들이받고 멈췄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400). 이어 뒤따라오던 차량과 시위대가 도청 쪽으로 몰려들었다. 돌진하는 버스를 공격하는 계엄군 이때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분수대 앞에 공수부대원들의 집중사격이 이루어졌다(전라남도, 41) 국방부과거사위 보고서는 권용운 으로, 김영택( 5월 18일, 광주 (역사공간, 2010)은 권상운 으로 보고 있다. 3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1 5 18사태 주요 사건일지(5. 14.~27.) ) 42) 깜짝 놀란 시위 군중들이 소리가 나는 도청 옥상 쪽에서 눈을 채 떼지도 않았을 때, 총성이 쏟아졌다. 황급히 주변 골목길로 피신했던 시위 군중들이 금방 공포탄임을 알아차리고 다시 집결해, 계엄령 해제하라, 전두환이 물러가라, 광주를 끝까지 지키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청 앞 공수부대와 대치했다. 그때 5~6명의 청년들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나와 흔들어대며 전두환이 물러가라 고 외쳤다. 또 한바탕 사위를 찢어 놓을 듯 총성이 울리고, 그 청년들이 길바닥에 쓰러졌다. 공수부대원들의 조준사격이었다. 몇 사람이 쓰러진 청년들을 수습하는 사이, 또 다른 청년들이 앞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었지만, 그들도 쓰러지고 말았다(나의갑, 2001: 240). 당시 도청에 주둔했던 11공수여단 61, 63대대와 7공수여단 35대대는 부대를 정비한 후 주변 건물로 저격 요원들을 배치하여, 시위 주동자나 돌진하는 차량에 사격을 가했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400). 계엄군 측 장갑차도 금남로 쪽과 노동청 쪽으로 배치되어 일부 사격을 했다. 오후 3시 30분경 장갑차를 타고 오던 태극기를 든 청년이 관광호텔 앞에서 총을 맞아 사망했다. 그런데 당시 공수부대는 아래와 같이 장갑차의 위협사격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13시부터 폭도들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소총사격을 하면서 계엄군을 공격 많은 부상자를 냈으며 국민은행 앞에는 자동소총 1정과 칼빈 2-40정을 거치하고 사격함, 이때는 광주 주변의 모든 경찰관서가 피탈되고 화순에 있는 한국 화약의 화약고도 피탈되었음(11특전여단,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전투상보), - 도청 앞 금남로 일대 작전개요). 그러나 2007년 국방부과거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엄군 사상자 명단에는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총상에 의한 부상자나 사망자는 없다. 오히려 군 측 상황일지 자료(육군본부, 31사단, 전교사)에는 시위대의 발포와 계엄군의 사상에 대한 내용은 있으나 공수부대원의 발포로 인한 시민들의 사망보고는 없다. 당시 전남도청에 있었던 7공수여단과 11공수단의 전투상보 에는 전남도청 앞 발포상황이 누락됐으며, 상급부대인 31사단과 전교사의 작전상황실에도 발포 보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403). 아래의 증언들을 참고해 보자. 청년들은 트럭에 불을 붙여 공수부대에게 밀어붙였으나 트럭은 관광호텔 앞 가로수에 부딪히고 말았다. 잠시 후에 장갑차 한 대가 도청을 향해 질주했다. 뚜껑을 연 장갑차에는 상의를 벗어던진 42) 애국가를 방송한 것이 발포와 관련되었을 것이란 설이 있지만 이것은 전남도청 내무국장이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목적에서 틀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남도청에서 금남로까지 약 500m 거리에 있었던 시민들과 계엄군은 애국가를 들었다, 못 들었 다 라는 증언이 엇갈린다. 그러나 시위대의 함성과 총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 그리고 반경 1km의 시위 공간을 생각해 보 면 애국가 방송을 발포와 인과관계로 연관 짓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하다. 5 18민중항쟁 39

42 젊은 청년이 타고 있었다. 갑자기 탕 하는 총소리가 들리더니 장갑차 위에 타고 있던 청년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공수대원의 조준사격이 정확히 청년의 목에 맞은 것이었다. 장갑차는 청년의 시체를 실은 채 노동청 방향으로 빠져 나갔다 (현사련, 1990: 최치수의 증언). 조금 후 장갑차 한 대가 서서히 도청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나는 현재의 광주백화점 앞에 있었다. 장갑차에는 런닝샤쓰 차림의 한 청년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만세! 만세! 하고 외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총성이 들렸고 장갑차에 탄 청년이 쓰러졌다. 청년이 쓰러지고 다른 청년이 장갑차에서 나와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었다. 이때는 더 이상 총격은 없었다. 장갑차가 뒤로 후진하는데 도로에 깔린 자갈더미 때문에 기우뚱 기우뚱하였다. 목에 총을 맞은 시신이 장갑차 위에서 목 윗부분과 아래의 몸체가 따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시민들은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 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현사련, 1990: 장준영의 증언). 위와 같은 당시 시민들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이를 뒷받침하는 도청 앞 사격이 있은 뒤 주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 하였고, 광주관광호텔 옥상에 4명이 1조가 되어 올라갔으며 사수의 지시에 따라 조준경이 달린 총으로 주동자나 총기를 휴대한 시위대를 조준사격 했다는 군인들의 증언이 있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403). 43) 시위대에 총이 있었다 는 군 기록과, 군인들의 증언이 있지만, 당시 시위대는 총기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청 앞 집단발포가 발생한 이후 화순, 나주, 시내 곳곳의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을 시작했다. 결국 군 기록에 있는 13시부터 폭도들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소총사격을 하면서 공격하였다는 내용은 왜곡 조작된 것이다. 당시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도청 앞 집단사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공수부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무장을 해야 한다 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총이 아니면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시민들은 인근 지역을 다니며 관공서나 예비군 중대에 보관 중인 총기를 가져와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주, 무안, 목포, 화순, 보성, 강진, 영암, 해남, 완도, 담양, 곡성, 구례, 장성, 영광 등지로 진출, 주로 경찰서와 지서의 무기고를 찾아갔다. 시위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카빈소총, M1소총, 탄약, 권총, LMG 등을 손에 넣었다. 특히 화순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확보하기도 했다(나의갑, 2001: 241). 아래의 내용을 보자. 44) 13:00 광산군 하남면 파출소 13:00 화순광업소 무기고 카빈 64정 43) 11공수여단 62대대 5지역대장 박 소령, 11여단 62대대 소속 한 일병. 44) 보안사 505보안부대, 광주사태시 상황일지 ; 전남도경, 상황일지. 4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3 13:30 남평 무기고, 신포 예비군 무기고 13:50 화순 본서 예비군 무기고 14:00 나주 본서, 영산지서, 금천지서, 영광지서, 중앙 파출소, 금성 파출소, 다시 지서 14:00 화순 능주지서, 화순 동복지서, 화순 동복 예비군 무기고 14:30 나주 금성 예비군 무기고, 나주 영광 예비군 무기고 위와 같은 당시 군 기록을 정리하면 시민들은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된 21일 오후 1시경 광주시 인근 지역의 파출소나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를 빼내 무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군 측 기록에 남아 있는 13시부터 폭도들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소총사격을 하면서 라는 기록은 사실이 아니며, 군이 자신들의 발포 사실을 정당화하고자 이와 같이 기록을 조작했던 것으로 보아진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 시민들이 무장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하자 광주시내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들의 철수가 결정됐다. 3시가 넘어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국 확산 방지, 선무활동으로 시민과 불순세력 분리, 지휘체제 일원화 군사기 진작, 교도소 끝까지 방어, 광주시 외부로 나가는 도로망 차단, 광주시의 지역에 자제 촉구 선무활동 등을 명령했다(15:35)(보안사,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 2군사령부, 사태수습을 위한 참모총장 지시(작상전 455호),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 이어 전교사령관에게 폭도가 부대에 침입해도 최대한 제지하고 약간의 피해는 감수하라. 설득할 때까지 최대한 설득하다 그래도 군 지역에 확대되면 다시 보고하여 지시를 받으라 고 지시했다(15:50). 그러나 이지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시민들의 무장과 공수부대의 대응으로 조선대와 전남대 등지에서는 시민과 공수부대의 교전이 발생했다(보안사,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 4장 시민군의 등장과 활동 1절 시민들의 무장과 시민군 의 등장 계엄군의 집단 발포에 도청 일대는 아수라장이었다. 도청 앞에서는 헬기가 내리고 뜨며 군인들을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었고, 광주시민 여러분 으로 시작되는 윤흥정 계엄분소장 이름의 전단이 뿌려지고 있었다. 잠시 후 2시 15분경에는 장형태 도지사가 경찰 헬기를 타고 시민의 자제와 해산을 종용하는 방송을 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의 발포에 분노한 시민들이 무기를 확보해 적극적인 방위에 나서는 것을 말릴 수는 없었다. 당시 시민들은 무장한 시민들은 시민군 이라고 불렀다. 5 18민중항쟁 41

44 < 유인물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 시민군 일동 ( )> 시민들의 무장은 전적으로 공수부대의 집단사격 때문이었다. 무장은 부당한 발포에 대한 대항하는 적극적인 방어이자, 저항 활동이었다. 시민들이 무장을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몇 사람이 총기류를 통제하고자 나서게 되었고, 이것이 자발적인 지도부의 조직으로 이어진 것이다. 오후 3시 20분경 계엄군의 발포에 시민군이 응사하기 시작했다. 양측의 시가전은 도청을 중심으로 전남대 의대 방향, 노동청 방향, 공원 방향, 금남로 방향 등지에서 벌어졌다. 온 시가지가 총성에 휩싸이고,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할 때까지 총격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와의 총격전은 4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5 승산이 없는 것이었다. 훈련 받은 정예 공수부대와 비조직적인 무장 시위대의 총격전은 결과가 분명했다. 시민 측 사상자가 속출했다. 차츰 전투를 치루는 과정에서 시민군의 대오와 편제가 갖추어 졌고, 오후 4시에서 5시경 사이 광주공원으로 수백 대의 차량과 무장 소식을 들은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사이에는 자발적으로 지도부가 형성되었고, 이들 지도부들은 무기를 소지한 사람들을 10여 명씩 나누어 조를 편성하였다. 유동삼거리에서도 비슷하게 조직된 시민군 약 300~400명이 각각 조별로 광주 시내 주요지점으로 배치되었다. 오후 5시경, 시민군의 위세에 도청 앞 공수부대가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나의갑, 2001: 242). 결국 계엄군은 도청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미 시민군들에게 포위당한 도청의 계엄군은 퇴각로를 확보하고자, 장갑차 1대로 도청과 지원동 입구를 왕복하면서 길가에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다음으로 계엄군을 실은 군용 트럭들이 총을 난사하면서 조선대 쪽으로 후퇴했다. 이때 군의 발포로 집에 있던 무고한 주민들이 총에 맞아 숨지기도 했으며, 집집마다 총탄을 막기 위해 방문에 솜이불을 둘러놓았다. 제7공수여단 제33대대를 비롯한 5개 공수 대대병력은 도보 및 차량을 이용하여 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제11공수여단의 차량부대는 오후 7시 30분부터 장갑차를 선두로 조선대-전남도청- 제2수원지 부근으로 철수하였다. 도보부대는 다음날 아침 조선대 뒷산을 넘어 주남마을로 이동 제7공수여단과 합류했다. 공수부대가 철수하자, 도청상황실은 오후 4시 30분경, 경찰 상황실은 오후 5시 15분경 폐쇄되었다. 이날 광주시를 벗어난 모든 계엄군은 송정리 방면으로 통하는 화정동, 화순 방면의 지원동, 목포 방면의 대동고등학교 앞, 여수 순천 방면의 문화동, 제31사단 방면의 오치동, 장성 방면의 동운동, 교도소 일대 등 7개 외곽지점을 점거하고 광주를 외부로부터 차단 고립시켰다. 계엄군의 퇴각은 광주시민들의 투쟁의 산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군의 전술적인 작전 이기도 했다. 계엄군은 이미 광주지역의 봉쇄-내부교란-최종진압 이라는 단계적 작전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날 계엄사는 전교사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 는 지시( 작전지시 80-5호 )를 내렸고(19:30)(보안사,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 광주시내에서 철수한 계엄군은 이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것이다. 계엄군은 광주와 전남의 새로운 17개 소요 확산 지역과의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광주시를 봉쇄, 여타 지역으로부터 고립시킴으로써 경제적 곤란을 초래케 하고 광주시민으로 하여금 소요의 과오를 하루속히 뉘우치게 해 광주사태를 조기에 해결하면 그 다음 군소도시 문제는 쉽사리 진압할 수 있다 고 보았다. 이에 22~23일 사이 광주에서 완전철수, 광주시 외곽에 부대별 책임지역을 할당, 배치함으로써 광주와 타 지역과 연결하는 모든 도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 계엄군이 철수했지만, 광주시의 검찰청, 보안대, 정보부 등을 통해 비밀 감시 업무는 계속 이루어졌고, 이들에 의해 시민들과 시민군의 동태가 중앙정부와 계엄사령부에 보고되고 있었다. 5 18민중항쟁 43

46 <표> 외곽봉쇄 작전부대 및 봉쇄지역(5. 21~ :00) 부 대 병 력 비 고 3공수 265/1,261 광주교도소 경계, 남부 고속도로 차단 7공수 82/604 광주-화순 도로 차단 11공수 163/1,056 광주-화순 도로 차단 20사단 308/4,778 60연대 추가 투입, 광주-목포간 도로 차단 31사단 22/294 자대 주둔 전교사 42/746 자대 주둔 계 882/8,739 5개 진입로상, 6개 차단지역 운영 한편 계엄군들은 외곽봉쇄지역에서 총기를 난사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3공수여단이 경계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이었는데, 이 부근에서 민간인에 대한 살상사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광주교도소는 계엄군에 의한 민간인 살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왜곡되어 전해졌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409). 이외 많은 지역에서 계엄군에 의한 민간인들 학살사건이 발생했고, 지원동 미니버스 총격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45) 이날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광주 시내의 모든 병원들은 총상환자로 넘쳐 났다. 버스나 소형차량들은 부상자나 시체들을 보이는 대로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의약품이나 일손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전력을 다했다. 병원 앞에는 가정주부, 아주머니, 아가씨들이 헌혈을 하려고 몰려들었다. 45) 7공수여단은 5월 22일 오후 1시 16분경 너릿재 터널 입구에서 화순에서 광주로 오던 1/4톤 트럭에 발포해 1명을 연행하고 1명을 사살했다. 전교사의 작전상황일지 에는 :30 광주 소태 폭도 50명(버스 1대) 군부대 기습 기도. 군부 대(11공수) 반격소탕. 생포 3명(부상 2명). 사살 17. 칼빈 11정, 실탄 12발, M1 1정, 무전기 1대, 버스 1대 로 보고됐다. 미니버스 발포 직후 계엄군들이 현장을 확인하러 미니버스에 올라갔고, 지역대 및 대대 간부들이 현장으로 갔다. 현장 지휘 관인 지대장 도 중위는 버스에 올라가서 버스 상태를 확인했으며 곧이어 철수했다. 홍금숙 외 2명의 부상자들은 주남 마을 여단 상황실로 이송됐다. 당시 현장으로 출동했던 간호봉사원이 사상자들을 전남대병원으로 후송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이를 거부했다. 처음에는 5지역대 병사들이 부상자들의 이송을 담당했으나 중간에 주남마을 경계를 서고 있었던 4지역대 병사들로 교체됐다. 주남마을 뒷산에 위치한 11공수여단 상황실에서 부상자들의 상태를 본 11공수여 단 작전보좌관 김 소령이 데려온 것을 책망하자 상황실 주변에 있었던 4지역대 병사들이 부상자들을 처리했다. 당시 부상자들을 처리했던 병사는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 지대 정 중사 등 3명이었다. 야산 중턱으로 리어카를 몰고 간 한 일병에 의하면 누군가가 안락사를 시키자고 한 후 사살했고, 묻고 났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다고 했다. 당시 현 장 부근에 있었던 11공수여단 간부들 중 누구도 이들의 행위를 제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 중사가 부상자들을 사살 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별다른 제재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주남마을 뒷산 헬기장 부근에 암매장된 시신은 6월 2일 주남마 을 주민들의 신고로 광주시청에서 수습해 망월동 시립묘지에 안장했고, 2002년 망월묘지 이장과정에서 유전자 감식을 통 해 신원이 확인됐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 4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7 시민들의 헌혈 동참(5 18기념재단) 계엄군이 철수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시민군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공수부대가 사라지자, 군중들은 공수부대를 물리치고 광주를 지켜냈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서로 얼싸안고 광주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시민군 가운데 총을 쏘면서 도청 안으로 뛰어 들어 갔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도청이 비어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나의갑, 2001: 243). 그날 도청은 그렇게 시민들의 세상이 되었다. 이후 수습위 등이 도청에 들어서면서 이후 전남도청 건물은 시민항쟁의 본부로 활용되었다. 다음날 22일 시민들이 도청을 장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곳곳의 시민군 시위대가 도청으로 모여 들었다. 광주공원 부근에 있던 무장시위대는 도청에 들어와 조직을 재편성하였다. 이때부터 시민군 은 자체조직과 병력을 통제하고,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먼저 5, 6명의 청년들은 시위 차량에 일련번호를 부여하여 별도의 장부를 만들었다. 또한 시민군으로 하여 시내 곳곳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서방 사거리 학동 신역 로타리 산수동 백운동 화정동 및 금남로 부근에 인력을 배치하고 남은 사람들은 도청 정문과 후문 및 그 주변 경계를 서게 했다. 이들 시민군은 도청 1층 서무과를 작전상황실로 사용했다. 상황실에서는 차량통행증과 시내 주유소의 유류를 보급받기 위한 유류 보급증, 상황실출입증 등을 만들어 발부하였고, 외곽지대에서 자체방위를 맡고 있던 시민군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출동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선전조가 구성되어 옥외방송을 통해 도청 앞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에게 사망자의 신원과 인적사항을 발표하고, 시민들의 협조 하에 마이크와 스피커를 장만하여 궐기대회를 준비하였다. 시 외곽지역에서는 시민군들이 계엄군에 대응하여 2백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바리게이트를 쌓아 대치하고 있었다. 5 18민중항쟁 45

48 2절 도청 지도부와 선전활동 22일 아침, 시민들은 도청으로, 금남로로 모여 들었다. 도청 정문에선 시민군이 총을 들고 출입자를 통제했고, 시민들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불에 탄 차량들과 대형 화분대, 깨진 유리조각과 보도블록, 돌멩이 등을 치웠다. 시민군은 경찰들이 버리고 간 방석모를 쓰고 있었고, 무전기를 든 시민군도 있었다. 각목으로 차체를 두들기며 시가지를 다니는 시민군의 모습은 전날과 다를 바 없었고, 이들이 탄 차량에는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붙여 있었다. 오전 10시 30분경, 군용헬기가 시가지를 돌며 폭도들에게 알린다. 즉시 자수하라 고 방송하면서 전단을 뿌렸다. 이 무렵 중 고교생 2백여 명이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무렵 30-40대 주부들이 도청으로 들어왔다. 유동에 산다는 그들은 시민군의 점심을 해준다며 몇몇은 취사도구를 들고 와 취사시민군 을 자청하기도 했다.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들은 정리할 사람이 따로 정해지기도 했다(나의갑, 2001: 244). 이날은 양동시장의 5일장 이 다시 서, 채소나 소규모 생활용품을 손수레에 싣고 나오는 상인들이 있었다. 특히 채소류는 시기를 놓치면 상하기 때문에 이를 방치할 수 없어 들고 나온 인근 농민들과 소규모 영세 상인들이 많았다. 그런대로 장날의 모습은 갖추어져 반찬거리와 약간의 곡식, 그리고 값싼 생활용품이 거래되었다. 장에 모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광주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때 시민들에게 투사회보 제2호가 배포되었다. 민주투사들이여! 더 욱 힘 을 내 자! 승 리 의 날 은 오고야 만다! 로 시작된 유인물은 아침 일찍 시내 주택가에 뿌려졌다. 유인물 투사회보 2호 4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49 이 시기의 유인물은 광주의 상황을 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대안 언론의 역할을 하였다. 18일 이후 광주 지역에 배포된 유인물들은 유신잔당 및 전두환 놈의 사주를 받은 공수부대, 특수부대가 죄 없는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인 한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46) 특히 18일 이후 등장하는 유언비어( 流 言 蜚 語 ) 는 이러한 내용의 사실( 事 實 ) 들을 급속하게 전파 확산시켰다. 다시 말해 유언비어는 항쟁 시기 지역민이 처음으로 공유했던 사실적 정보인 셈이다. 항쟁 초기 계엄군의 폭력적 진압은 이후의 수많은 자료를 통해 증명되었다. 47) 또한 항쟁 당시의 참여자들은 계엄군의 잔악한 진압 에 대한 경험과 목격담을 전하고 있다. 문제는 당시 언론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 여지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사실대로 작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언론이 사실을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 을 유인물과 유언비어가 전달해 준 것이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 죽이고 있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난다. 18일에는 40명이 죽었고 시내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다는데 군인들이 여학생들의 브래지어까지 찢어 버린다. 공수부대 애들이 대검으로 아들딸들을 난자해버리고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게 한 후 장난질을 한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데모 군중의 머리를 무차별 구타, 눈알이 빠지고 머리가 깨졌다. 진압 군인들은 경상도 출신만 골라 보냈다. 48) 계엄군에 의한 진압이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확대되면서 유언비어는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을 전라도인에 대한 경상도인의 핍박으로,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계엄군의 살인행위로 재현하였다. 항쟁 초기 사람들은 1980년 5월 에 대한 정보의 부족함 속에서 유언비어 를 통해 지역에서의 인적 관계망을 촘촘하게 끌어당겼고, 사태에 대한 인식을 공유해 나갔던 것이다. 계엄군의 잔악한 진압이 야기한 죽음의 재현은 성하게 얽혀있는 사람들 사이사이를 메워나갔지만 그들의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전해지는 죽음의 공포 는 사람들을 죽음의 이해와 의미지평 안으로 들어서게 만들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에 대한 관계정립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49) 그런데 같은 시기 계엄군과 정부는 지역민들이 이해하는 광주와 대조적인 광주 를 말했다. 46) 전두환의 광주 살육작전(5월 21일 이후 제작), 자료총서 2, 27쪽. 47) 이 시기 피해자 및 사망자에 대한 사망진단서 와 검시보고서 는 자료총서 20권에 전재. 48) 광주일원 소요 학생시위 시민합세 군경 민간 6명 사망, 경향신문, 1980년 5월 21일자. 49) 장휘숙 최영임, 죽음공포와 죽음수용의 관계, 한국심리학회지 발달 21-2, 한국심리학회, 2008 참조. 실제로 지 역민들은 계엄군의 검문, 검속이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고자 피신시키거나,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 했다(김병인, 5 18과 죽음 그리고 학생운동의 정치적 복권, 5 18민중항쟁과 정치 역사 사 회 3, 5 18기념재단, 526~527쪽). 또한 5월 27일 계엄군의 진압에 의해 항쟁이 종결된 이후 통신시설이 복구되면서 지 역민들은 가장 먼저 사람들의 생사를 확인하려 했다. 5 18민중항쟁 47

50 지금 외부에서 많은 폭도들이 잠입,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50) 어제 밤에는 일부 시위군중의 난동으로 인하여 십명의 군경이 사상되고 경찰서를 비롯한 일부 관공서와 3개 방송국이 파괴되고 불태워졌습니다. 51) 지난 18 日 발생한 광주지역 난동은 부득이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지금 광주지역에서 야기되고 있는 상황을 살펴 볼 때 법을 어기고 난동을 부리는 폭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 주민여러분은 애국심을 가진 선량한 국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52) 당시 계엄군은 광주 를 폭력과 파괴가 벌어지는 소요 폭동의 지역으로 묘사하였다. 계엄군과 정부는 소요 난동 사태 가 발생한 지역을 광주로 한정했으며, 이러한 내용을 언론을 통해 전국화 시켰다. 53) 언론은 18일 이후의 사건을 불순분자 와 깡패 등 불량배들의 난동으로, 급기야 북으로부터 온 간첩의 책동 으로 규정했다. 54) 광주의 지역민들은 언론 및 정부의 이러한 사실 왜곡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지역민의 분노가 MBC와 KBS에 대한 방화로 이어졌던 것이다. 정부와 계엄군은 광주시민들의 적극적인 방어와 저항 활동을 광주사태 라 명명하였다. 5월 18일 이후 연일 신문 지상을 통해 보도되는 광주사태 는 광주를 폭도가 날뛰는 난동의 공간으로 재현하면서, 남한 사회를 간첩과 북괴의 위협으로 인한 위기의 상황에 놓였다고 설명하였다. 55) 동시에 5월의 시위상황 을 광주지역에 한정시켜, 광주에서의 저항을 지역 의 문제로 유폐시켜버림으로써, 시민들의 항쟁을 주변화 시켰다. 이렇게 광주지역에서의 선전활동은 점차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인물의 경우 처음 극회 광대 가 김선출, 김윤기, 김태종, 전용호 등을 중심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다음으로 전남대 대학의 소리 발행 팀, 여기에 광천동 들불야학 팀이 윤상원을 중심으로 유인물( 투사회보 )을 발행했다. 항쟁 초기 이렇게 분산되어 있었던 선전활동은 22일 이후 윤상원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단일한 투사회보 가 발행되었다. 특히 투사회보 는 윤상원과 전용호가 주로 문안을 작성하면 박용준이 필경을 하고 김성섭 나명관 윤순호 등이 등사기로 밤을 새워 5,000~6,000장의 유인물을 만들어냈다. 제작된 회보는 근로자, 여공들의 치마 속에 숨겨 전달되었다. 25일부터는 200부씩 한 묶음으로 묶어서 50) 시민여러분!, 자료총서 2, 101쪽. 51) 호소문(20일) (김성, 5 18민중항쟁과 왜곡보도에 관한 연구, 5 18기념재단, 2000, 58쪽). 52) 경고문(5.21), 자료총서 2, 30쪽. 53) 서울신문 1980년 5월 21일자 광주에 소요 ; 동아일보 1980년 5월 21일자 담화문(이희성) ; 警 告 文 (21 일), 자료총서 2, 30쪽. 54) 조선일보 1980년 5월 22일자. 55) 최영태, 극우반공주의와 5 18광주항쟁, 역사학연구 26, 호남사학회, 2006 참조. 4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1 길거리에 지나가는 시민군 차량에 실어주면 시내 전 지역으로 전해졌다. 25일 항쟁지도부가 새로 개편되자, 유인물팀은 YWCA로 옮겨 본격적인 홍보 활동을 진행했다. 이들의 선전 활동은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면서 시민들의 행동과 의식을 고취하는 등 항쟁 전개에 크게 기여했다. 5월 21일 밤 계엄군이 시내에서 철수한 이후 극회 광대 는 시민들의 항쟁을 민주화투쟁으로 이끌기 위해 궐기대회를 주도했다. 이 자리에서 각종 성명서를 낭독하고 이를 유인물로 만들어 배포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항쟁은 단순한 학살에 대한 저항에 그치지 않고 민주화운동으로서 그 의미를 부여했다. 이들은 계엄해제,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민주정부의 수립, 광주학살에 대한 사죄와 보상 등을 요구하였다. 22일 투사회보의 내용은 광주시민의 봉기에 전국 각지에서 호응해오고 있다는 것, 무기가 반입되어 싸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투사를 규합하여 싸우자는 것 등을 담고 있었다. 23일의 투사회보 는 광주시민은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무장을 강화한다 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도청 내에 구성된 시민과 학생층의 수습위원회는 주로 타협 주의적 인물들로 짜여졌다. 이들은 무기를 수습하여 계엄군에 반납하고 항쟁을 끝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투사회보 팀은 연일 궐기대회를 가지면서 항쟁의 지속을 강조하였고, 마침내는 5월 25일 기존의 타협적인 인사들을 모두 몰아내고 항쟁파로서 수습위를 재구성하였다. 윤상원을 중심으로 한 항쟁파는 광주시민이 요구하는 것은 사태의 수습이 아니라 민주화라는 목적을 관철하는 것이며, 따라서 광주시민의 항쟁은 죽음을 건 항전이라고 생각했다. 또 시민들은 최규하 대통령이 담화를 통해 광주시민들의 난동 혹은 광주시의 치안부재 등을 언급한 데 대해, 80만 광주시민은 세계인류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질서와 평온을 유지하면서 민주시민임을 과시하고 있다고 반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각종 성명서는 정부당국과 계엄군측이 난동 지역감정 일시적인 흥분 등의 용어를 써서 광주 와 광주 밖 을 구별 분리하려는 태도에 대해 분노하고, 이를 하나하나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5월 25일 제3차 궐기대회에서 나온 유인물은 계엄령의 해제, 전두환의 처단, 구국과도정부의 수립 등을 요구하고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80만 시민은 투쟁할 것 을 선언하였다. 26일 계엄사측과 수습위의 최후담판이 실패로 끝나자 300여명의 청년 학생들이 26일 밤 최후항전에 들어갔다. 26일 오후 배포된 투사회보 가 이름을 바꾼 민주시민회보 10호는 무등산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는 제목 하에 우리는 반민족적이요, 역사를 역행하는 유신세력의 일소를 위해 끝까지 싸운다 고 선언하고, 광주시민 장송곡 이라는 노래를 통해 자랑스러운 민주투사 젊은 영들이여 정결한 피 최후의 날 우리 승리하리라 고 자신들의 심경을 표현하였다(박찬승, 2001: ). 5 18민중항쟁 49

52 <표> 5 18민중항쟁 시기 광주지역에서 만들어진 유인물 번호 선언문 명칭 작성 주체 일 자 내 용 1 민주시민들이여! 조선대민주투쟁위원회 호소문 광주시민민주투쟁회 일의 상황을 알리고, 매일 12시, 3 시에 도청, 시청 앞에 집결할 것을 촉구 5월 20일부 정오부터 계속해서 금남로에 집결할 것을 촉구 3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학생혁명위원회 상황보고와 행동강령(무기를 제작하라, 특공대를 조직, 무기를 탈취하라) 4 전두환의 광주살륙작전 조선대민주투쟁위원회 의 진상 폭로 5 광주시민 총궐기문 전남민주통일을 위한 국 민연합, 민주청년민주구 국총학생연맹 의 진상, 광주시민, 농민들의 궐기 촉구 6 민주수호 전남도민 총궐기문 전남민주민족통일을 위 한 국민연합, 전남민주 청년협의회, 전남민주구 국총학생연맹 전남도민이여! 총궐기하라. 모두 곡괭이 를 들고 도청앞으로! 7 전남민주회보 전남민주인 민주화투쟁에 적극 나서자 8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 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전대 조대학생혁명위 원회 행동강령(무기를 제작하라) 최후의 1인까 지 투쟁하라 9 투사회보 제2호 투사회보팀 행동지침, 21일 소식 10 선언문 전남민주민족통일을 위 한 국민연합, 전남민주 청년협의회, 전남민주구 국학생총연맹 최규하 퇴진, 살인마 전두환 처단, 구국 과도정부 구성, 구속학생 민주인사 석 방, 계엄령해제, 휴교령철폐, 언론의 광주 참상 보도 등 요구 11 우리 겨레와 세계자유민 에게 보내는 목포시민의 결의문 목포시민민주화투쟁 위원회 광주양민학살 책임자 처단, 비상계엄 해 제, 김대중 석방, 교통 및 통신소통, 광주 시민의 피의 값 보상 등 요구 12 투사회보 제5호 투사회보팀 광주지도급인사의 계엄사방문, 민주쟁취 시민궐기대회 등 소식과 구호 13 투사회보 제6호 투사회보팀 우리의 행동강령(최후까지 항쟁) 14 광주시민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시민대책위원회,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시민의 질서회복, 총기의 회수, 일상업무 복귀주장 5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3 15 시국선언문 전남대학연합대표자회 의 모든 무기는 도청내 지휘통제부 관할하 에 두어야. 도청내의 대학생대표자회의 에 신뢰를 부탁. 16 광주애국시민들에게 근로자 대표 전두환처단, 계엄해제, 노동3권보장, 어 용노조 퇴진, 정부당국 책임요구 17 민주시민 여러분 시민 대표 질서회복, 서로 돕자 18 투사회보 제7호 광주시민민주투쟁협의회 제1차 전남도민 시국궐기대회(5.23) 보고 19 계엄분소방문협의결과 보고 5 18사태수습대책 위원회일동 계엄군의 시가지 진입중지, 연행자 석방 등 교섭결과 보고 20 대한민국 모든 지성인에 게 고함 전남대학교 교수 일동 광주시민이 원하는 것은 사태의 수습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을 관철하는 것. 21 껍데기정부와 계엄당국 을 규탄한다 미상 전두환 퇴진, 군부독재 하수인인 과도정 부 퇴진, 구국과도 정부수립, 김대중 등 석방 등 요구 22 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 는 글 80만 광주시민 일동 사태의 진상, 살인만 전두환을 처 단하라, 애국시민의 궐기촉구 23 국민에게 드리는 글 광주시민 일동 의 진상, 민주성전에 동참촉구 24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승리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광주시민에 대한 위로 25 최규하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 정부잘못 시인, 사과, 보상, 불보복 등 요구 26 광주시민 여러분께 광주시민 일동 광주시민의 결의(과도정부 퇴진, 계엄 해 제, 살인마 전두환 공개처단, 민주인사 석 방, 구국과도정부 수립,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 27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 에 없었는가 시민군 일동 총을 들게 된 이유, 시민군은 폭도가 아 니다 28 광주사태에 대한 우리의 견해 광주사태 수습대책위원회 광주사태의 원인, 해결에 대한 견해 (책임자 처단 등) 29 희생자 가족에게 드리는 글 전남광주시민 일동 희생자가족에 대한 위로, 희생자들의 피 가 헛되지 않게 최후까지 투쟁 30 전국 종교인에게 보내는 글 광주시민 일동 모든 종교인의 총궐기 촉구, 종교인은 광 주지역 질서회복에 앞장서라 5 18민중항쟁 51

54 31 국민에게 드리는 글 광주시민 일동 민주국민의 총궐기 촉구 32 전국민주학생에게 보내는 글 광주민주학생 일동 민주학생들의 총궐기 촉구 33 광주시민혁명에 대한 목포지역 교회의 신앙 고백적 선언문 목포시 기독교연합회 비상구국기도회 광주 목포의 시민봉기는 3 1운동 등 을 잇는 시민혁명, 학살자는 처벌해야, 민 주헌정의 수립, 언론인에 분노, 자유우방 의 지원 촉구 34 과도정부의 최규하 대통령께 보내는 글 광주시민일동 시외전화 소통, 자유로운 보도, 사망자와 부상자 수 파악을 위한 공동조사단 구성 등을 요구 35 80만 민주시민의 결의 80만 민주시민 민주시민회보 제9호 광주시민일동 우리는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을 원한다.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한다. 수습위 신뢰, 시민군 협조 당부. 피해상황 (확인사망자 102구) 37 홍보문 -가두방송 원고- 민주화투쟁 대학생대책 본부 시민들의 상호 협조 당부, 시민군 지원 당부, 정상적 생활을 통해 지구전 대비 38 광주 민주시민 여러분께 광주시민일동 급보, 다같이 단결합시다 미상 우리는 진정한 민주정부수립을 원한다.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한다. 26일 오전 6시30분, 계엄군이 돌고개까 지 진입했다가 후퇴 40 광주시민은 통곡하고 있다 광주시민일동 ~21일의 상황설명, 언론인에게 당부함 도지사가 도민에게 드리 는 글에 대한 반박문 전국언론인에게 보내는 글 미상 도지사의 평화적 수습론에 대한 비판 광주시민 일동 광주의거에 대한 보도 촉구 43 계엄사의 허위약속을 폭로한다 시민대책위원회 일 오전 4시반, 계엄군은 화정동과 백 운동에 진입했다가 퇴각. 군에 속지 말자 44 대한민국 국군에게 보내는 글 광주시민 일동 우리는 국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 다, 살인마 전두환에 총을 겨눠라 45 정부의 오도된 보도를 바로잡는다 수습대책위원회 수습위원회 분열 책동을 중지하라. 수습 위원회는 굳게 뭉쳐있다. 5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5 46 민주시민회보 제10호 - 무등산은 모든 것을 알 고 있으리라 - 광주시민학생구국위원 회(구 수습대책위원회) 유신세력의 일소를 위해 끝까지 싸운다. 전두환 세력이 득세한 현 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 광주의거에 대한 계엄사발표는 거짓이다. 47 대한민국 언론 지성인들 에게 보내는 글 광주시민 일동 광주참상을 언론인들은 보도하라. 우리 가 원하는 것은 수습이 아닌 목표관철 48 고등학생 여러분 고교생일동 미상 고교생들도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라 49 결의문(2) (민주헌정수립을 위한 제5차 목포시민궐기 대회) 목포시민 민주투쟁위원회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 방, 군 폭도 의 색출 처형, 광주 목 포의 시민궐기는 시민혁명 50 광주사태의 진상을 고함 광주시민 일동 전두환 일당의 광주대량학살사건의 진상 * 당시 만들어진 유인물의 상당수는 궐기대회 현장에서 직접 쓴 수기원고이다. 이 수기원고의 역사성에 따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장 시민자치조직과 공동체 1절 수습위원회의 조직과 무기회수 22일 금남로와 도청 주변에 모여든 수많은 시민들은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신문이나 전단을 깔고 앉아, 무엇인가 만족할만한 조치가 발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시채 부지사 등 6명의 도청 간부와 일부 직원들이 도청에 출근했고, 이종기 이기홍 변호사 조철현 신부 최한영 윤영규 신용순 장휴동 등 각계 인사들과 합류해 광주 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논의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계엄당국과의 협상을 통해 상황을 해결하고자 낮 12시 30분경 관료, 신부, 목사, 변호사, 기업가 등 15명으로 구성된 광주사태수습시민대책위원회 를 결성하여 협상대표로 계엄분소에 보내기로 하였다. 오전에 열린 수습대책위원회 의 회의에서 결정한 7개항의 수습대책은 다음과 같다. 1 사태수습 전에 군을 투입하지 말라. 2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라. 3 군의 과잉진압 인정하라. 4 사후보복을 금지한다. 5 18민중항쟁 53

56 5 부상자, 사망자 전원에 대한 치료 및 보상을 실시한다. 6 전일방송은 즉시 재개하여 사실보도를 한다.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한다. 이상의 것들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 방지와 질서유지 라는 명분 아래 결정되었다. 이것은 그동안 시민들이 요구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계엄철폐,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 항쟁시기 시민들의 목소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몇몇 학생 청년들 사이에 이견이 생기기도 했다. 오후 1시 30분경 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에 있는 전남 북 계엄분소 소준열 분소장을 찾아가 수습안을 제시했다. 3시간 동안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계엄사령부와 협의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수습대책위원회의 성과는 없었다. 도청 광장과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협상대표들이 계엄분소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시민궐기대회를 열고 있었다. 궐기대회 중에도 사망자의 시신이 담긴 관이 도청 앞으로 운반되어 왔다. 또한 도청 상황실에서는 계속해서 사망자의 명단이나 인적사항을 알렸고,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도청 앞 광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지만, 시민들은 차분함 속에서 궐기대회를 진행해 갔다. 시민들은 누구의 통제나 지시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제각기 분수대 위에 올라가 계엄군의의 만행을 규탄하고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했다. 분수대는 발표자의 연단으로 사용되었고, 시민들의 자유발언대 역할을 하였다. 상인 종교인 교사 가정주부 고교생 노동자 대학생 할 것 없이 누구나 연설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 자유발언이 향후 범시민궐기대회 로 자리 잡게 된다. 시민들의 발언은 다소 거칠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요구를 제시하거나, 여러 가지 구호나 통곡으로 표현되었다. 대부분 군부의 퇴진 과 민주정부의 수립 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계엄분소 방문 결과에 대한 협상보고대회는 오후 5시를 넘겨 이루어졌다. 수습위 는 시민들에게 이렇다 할 협상성과를 제시할 수가 없었다. 정시채 부지사의 사회로 8명의 수습위원들이 차례로 분수대에 올라가 협상내용을 설명하면서 자신들의 소신을 이야기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계엄분소장은 개인적으로 과잉진압 부분을 인정했으며, 다른 부분도 상부와 협의하여 들어주겠다며 시간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수습위원들이 유혈방지와 질서유지를 강조하자 시민들 대부분은 이에 공감하는 듯 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무 성과 없이 돌아왔다 는 이종기 위원장의 말에 시민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수습위원들은 원만한 수습을 위한 방법은 무기를 회수해야 한다며 시민들을 설득하였지만, 시민들은 야유를 보내거나 굴욕적인 협상반대 를 외치기도 하였다. 수습위원들은 대체로 총기를 회수해야 한다는 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시민군 이라는 상징성만을 남기고 총기를 반납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안이자 수습책이라 보았다. 더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 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자 김창길(전남대 3년) 등은 이번 사태는 대학생들이 책임져야 할 사안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5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7 나서서 수습하겠다 고 하며 별도의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며 나섰다. 당시 대학생들은 남도예술회관 앞에 따로 집결했는데, 이중 전남대와 조선대에서 각 5명씩, 그리고 전문대 등에서 5명을 뽑아 15명으로 학생 수습위 를 구성한 것이다. 이들과 함께 전남대 교수 송기숙, 명노근 등이 오후 6시경 도청에 마련된 상황실로 들어갔다. 이들은 위원장에 김창길, 총무 정해민(전남대 상대 4년), 대변인 양원식(조선대), 무기 관리담당 허규정(조선대), 부위원장 겸 장례담당 김종배(조선대), 기타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수리보수반, 질서회복반, 의료반 등의 학생 수습위 조직을 꾸렸다. 이것으로 수습위원회 는 지역 인사들의 일반수습위 와 대학생들의 학생수습위 로 이원화되었고, 전자는 주로 계엄사 측과의 협상이나 시민의 설득에 중점을 두었고, 후자는 실질적인 대민업무를 맡아 보았다. 22일 오전, 전날 새로 임명된 박충훈 국무총리서리가 광주를 방문하였다.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박총리가 광주 시내로 들어와 죽어있는 시신이나 부상자들을 직접 보고, 자신들의 요구가 정부에 전달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상무대에서 도지사와 계엄분소장의 보고만 듣고 돌아가 버렸고, 다음과 같은 호소문이 시민들에게 전해졌다.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의 노력으로 광주사태는 호전되고 있다. 시민들은 극소수의 폭도와 불순분자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현혹되거나 부화뇌동하지 말라. (계엄분소장) 현재 광주 시내는 군 병력도 경찰도 없는 치안부재 상태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 무기를 탈취하여 군인들에게 발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정부의 명령 때문에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못하여 울화통이 터지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사태는 시청 직원이 사무를 보고 전기, 수도가 공급되며 은행 약탈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호전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 (국무총리 TV 방송) 박총리의 이러한 발언은 광주 시민들의 입장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시민들은 자신의 행동을 의거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박충훈 총리의 발언은 시민들의 분노를 부채질 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 전재 속에서 일반수습위 는 무기회수를 결정하고, 도청과 공원 등지를 돌아다니며 시민군들에게 무기 반납을 설득하고 다녔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무기들을 반납했다. 그들은 이제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으니 그 곳의 지시를 따라 질서 있는 행동을 하자 고 판단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무기회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였다. 이들은 문제의 해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총기를 반납하는 것은, 죽어간 사람들을 모독하는 5 18민중항쟁 55

58 것이며 죽음의 의의를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절 자치조직의 재편과 그 활동 계엄군이 물러난 지 이틀째인 23일, 시 외곽지역에서는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지만, 시내는 시민들의 승리감이 채 가시지 않았다. 학생들은 금남로 등 시가지를 청소하면서 도청 확성기를 통해 연신 시민정신 을 강조하였다(나의갑, 2001: ). 계엄군은 이제 시내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들 스스로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시민 여러분, 거리부터 깨끗하게 치웁시다. 청소를 하게 나와 주십시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길거리를 청소했고, 시장 주변 길가에는 솥이 내걸리고 밥을 짓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밤새워 경계근무를 하던 시민군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이 날부터는 상가들도 열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모여든 시민들로 도청 앞 광장은 거의 5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무기회수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오고 가기도 했다. 도청 주변 건물 외벽에는 선전팀이 그려놓은 각종 플래카드가 붙어있었고, 남도예술회관 벽면과 충장로 방향 YWCA 부근 담벼락에는 사망자 명단과 함께 잔혹하게 죽은 시신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도청 맞은편에 있는 상무관엔 언제 옮겼는지 사망자들의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관이 부족하여 아직 입관하지 못한 시체들은 무명천이 덮여 있었다. 입구에는 분향대가 설치되어 향이 피워졌고,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한편 지난밤 학생수습위 는 일반시민 수습대책위원들이 모두 귀가한 상태에서 밤을 새워 대민질서, 홍보, 장례, 무기회수 문제 등을 토의했다. 이들은 다른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지만, 무기회수 문제에서는 의견이 나뉘었다. 위원장인 김창길 외 몇몇 학생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부위원장인 김종배, 허규정 등은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조건이 관철된 상태에서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이들은 먼저 일부 총기를 계엄사로 가지고 가서 그 반응을 살펴본 뒤에 총기회수 여부를 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오전 10시경, 일반수습위와 학생수습위는 도청에서 회합을 갖고 조직을 재정비했다. 일반수습위는 처음 15명에서 5명이 사퇴하여 10명이 남았으며, 여기에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 각각 10명이 참여하여 총 30명으로 수습위원회 (위원장 : 천주교 대주교 윤공희)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회수된 무기 1천여정 중에서 2백정을 가지고 계엄사에 반납한 후 연행자 34명을 인수해 저녁 7시 5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59 40분쯤 도청에 돌아왔다. 총기반납 이 시민 석방 으로 이어지면서 수습위원들은 더욱 강력하게 무기반납을 주장하였으며, 수습위원회 의 일반적인 분위기도 이를 지지하였다. 이날 저녁까지 시민군이 갖고 있는 무기의 중 2천 5백정의 카빈소총, M16, 권총 등이 회수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시민들이 회수한 무기(5월 24) (최영태 외, 2008: 8) 이러한 상황 전개 속에서 도청 서무과에 자리한 상황실 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재구성된 수습위원회 와는 별도로 상황실을 장악하고 시민군의 조직화와 차량 통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민군을 조직화해 나가면서 전투장비 와 보급물자의 확보하는 등 계엄군에 대한 방어선 구축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비무장으로는 시민군의 조직화와, 계엄군의 재투입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며, 시민군들에게 강력하게 무기반출금지를 주장했다. 수습위원회 가 무조건 무기반납을 주장하며 무기 반납이 이루어지면서도 이를 반대라는 의견과 세력이 계속 존재했던 것이다. 23일 저녁 궐기대회를 준비했던 사회운동 인사들이 YWCA 소심당에 모여 자체 평가회를 가졌다. 이 모임에서 상황실 에서 파악된 현재의 전체적인 문제점이 논의되었다. 이들은 현재의 수습위원회 로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강력한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또한 광주 이외 지역과의 연대를 확보하는 문제, 시민군의 조직과 예비군의 동원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렇게 수습위원회의 활동 중에서 상이한 의견들이 계속되면서 지도부 는 끝내 각자의 길로 가고 있었다. 24일 오전 수습위원회 는 계엄사 측과의 협상 내용 8개항을 인쇄하여 시내에 배포하였다. 그 내용은 계엄군이 시내에 한명도 없다는 것과, 과잉진압을 인정하여 연행자 927명 중에서 79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석방했으며, 보상계획 수립과 치료대책 완비, 사실보도에 노력할 것, 폭도나 5 18민중항쟁 57

60 불순분자라는 용어 사용 중지, 비무장 민간인의 시외통행 허용, 사태수습 후 보복금지 약속 등이었다. 더욱이 이날 아침 8시에 계엄사는 KBS 라디오를 통해 총기를 소지한 사람은 24일 오전까지 국군통합병원, 기타 경찰서에 무기를 반납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 는 방송을 했고, 수습위원회 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다수 시민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반발하고 있었다. 수습위원회 에 대한 불만은 이날 오후에 열린 궐기대회에서 이야기되기도 했다. 한편 전날부터 도청에서는 무기반납을 주장하는 세력과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세력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다 견고한 항쟁 지도부를 준비 중이던 민주화운동 진영은 수습위원회를 대체할 새로운 준비 기구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기획담당에 윤상원, 김영철, 이양현, 홍보집회 담당에 박효선, 김태종, 궐기대회 비용 및 인쇄제작 담당에 송백회의 정유아, 이행자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또한 대학생들을 완전히 조직화하여 그 세력을 기반으로 도청에 진입해 지도부를 구성할 계획을 세우고 다음날부터 YWCA로 대학생들을 집결시키기도 했다. 24일 오후 7시경 도청 식산국장실에서는 윤상원의 안내로 들어온 정상용, 김영철, 이양현 등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학생수습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현재의 학생수습위 를 구축하고, 자신들이 새로운 집행부를 결성하여 투쟁적인 자세로 임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회의 도중에 학생 수습위원장과 설전이 벌어졌다. 한동안 논쟁이 벌어졌으나 이미 조직적으로 참여한 대학생들이 도청 내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였다. 3절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23일 오전 11시 반경 도청 앞 광장에는 15만 명이 훨씬 넘는 인파가 모여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를 개최하였다. 시민들은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부르는 등 행진하며 도청 앞 광장으로 모여 들었다. 도청 담벼락과 주변 건물에는 선전팀이 만든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고, 각 동별로 앞세우고 온 플래카드들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빙 둘러 있었다. 전날보다 한층 조직적인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궐기대회는 전남대 등 학생운동권 출신의 청년 운동가들이 주도하였다. 김상윤이 운영하는 녹두서점 과 현대문화연구소, 들불야학 등에 관계하면서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던 청년들이 주로 참여하였다. 극회 광대 는 계엄군 철수 기간 동안 선전활동을 도맡다시피 했다. 이날 청년 운동권과 학생 운동권, 노동운동권 관계자들은 모임을 갖고 항쟁의 진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그들은 항쟁의지를 북돋우고 열기를 온존시키기 위해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시민들의 의사가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하고 향후 활동을 모색하는데 의견을 모았다. 학생, 노동자, 교사, 농민, 가정주부 등이 분수대 위로 올라가 신분을 밝히고 자신의 의견을 5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1 개진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주최 측은 시민들의 발표 내용과 시민들의 반응을 고려하여 시민 결의문을 채택해 갔다. 이어 수습위원회에서 공지사항 전달과 함께 피해상황을 보고했으며, 군중들 사이에서는 장례 준비를 해야 한다며 자발적으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대회가 끝나갈 무렵인 오후 5시쯤 헬리콥터가 나타나 계엄당국의 경고문을 뿌렸다. 그 전단은 광주시민들을 계속해서 폭도 내지는 불순분자 로 규정하고 있었다(나의갑, 2001: 248). 1차 범시민 궐기대회가 끝나고 저녁에 궐기대회를 준비하였던 사회운동 인사들이 YWCA에 모여서 자체 평가회를 가졌다. 그 결과 첫째, 시민들의 피해상황 만으로는 대중 호소력이 약했다는 점, 둘째, 기자재 준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셋째, 시민들의 의사표현이 감정에만 치우쳐 있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따라서 홍보부는 기획방향을 항쟁의 의의나 목적,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부각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시민 각계각층의 대표연사를 미리 접수받아 발표하도록 했다. 또한 궐기대회의 진행과정에서 연사의 연설뿐만 아니라, 시 낭독, 노래 부르기, 화형식, 촌극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하였다. 24일 아침, KBS 라디오 8시 뉴스에서 24일 정오까지 광주시내는 국군통합병원, 다른 지역은 경찰서와 지서에 무기를 반납하면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 는 내용이 방송을 되었다. 결국 무기 반납이 관건이었다. 외곽으로부터 봉쇄된 상황이 지속되면서 양식과 생활필수품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오후 1시경 도청 상황실에서는 학생들의 강경한 주장이 관철되어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이 결의되었다. 첫째, 금번 광주사태에 대하여 일부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5 18사태로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보상을 전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 학생수습위는 1 폭도로 규정한 점에 대한 해명과 사과, 2 사망자의 시민장, 3 구속학생 시민 전원 석방, 4 전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피해 보상 등 4개항의 요구사항이 결의되었다. 우리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무기 반납은 시민들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 라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시민수습위에는 천주교 관련 인사와 홍남순 변호사 등이 합류하였고, 개신교 목사 등 몇몇 인사들은 별도로 수습위를 만들기도 했다. 시민수습위쪽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총기도 반납하고 시민들을 흥분시키는 궐기대회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었다. 오후 2시 30분에 열린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가 10여만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5 18민중항쟁 59

62 개최되었다. 이날 수많은 시민들이 분수대 위로 올라가 책임자 처벌과 피의 보상을 외치며 열변을 토했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계엄군과의 협상을 투항 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발언들이 나왔다. 시민들의 수습위 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수습위 를 해체시켜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대회 도중에 갑자기 폭우가 내렸지만 시민들은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대회를 강행하였다. 사회자가 이 비는 억울하게 숨져간 우리 민주영령들이 흘리는 눈물 이라고 울부짖자, 군중들 속에서 옳소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 80만 광주시민 일동 명의로 된 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 이 낭독되었고, 한 여대생이 등단해 민주화여 란 시를 울먹이는 목소리로 낭송했다(나의갑, 2001: 250). 이날 외신기자들의 취재가 이루어졌다. 시민들은 광주의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국내 기자들을 불신하였고, 외신 기자들에게는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따라서 국내기자의 도청 출입은 상당한 통제를 받았지만, 외신기자들의 취재영역은 훨씬 자유스럽게 개방되었다. 폭우 속에 계속된 궐기대회가 오후 6시 경에 끝나자 대회를 주도했던 청년, 학생 25명은 YWCA에 모여서 자체 평가와 조직 강화를 위한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항쟁 지도부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나왔다. 윤상원, 김영철, 이양현이 기획을 맡아,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고, 대학생들을 조직화하여 항쟁을 주도하고자 했다. 이들은 YWCA를 대학생 집결장소로 삼아 현관에 대학생 집결소 라고 써 붙였다. 향후 운동방침은 아래와 같았다. 첫째, 재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하여 항쟁과정에 적극 참여시킨다. 둘째, 시민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궐기대회를 적극 추진한다.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방송 시설 확보와 유인물, 플래카드, 리본 등을 제작한다. 셋째, 도청 내 수습대책위원회의 투항 주의적 노선을 자신들이 직접 개입하여 투쟁노선으로 바꿔나간다. 이를 위해서 도청 내의 일부 투쟁지도부와 합세하여 병력을 차츰 교체시킨다. 수습위원회 의 활동이 제각각 이루어지는 데 반해, 시민들은 어느 정도 질서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시장과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고, 사회복지단체에 대한 식량공급이나 전기, 수도 등은 관련 공무원의 지원으로 해결해 나갔다. 병원들은 한때 수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할 때도 있었지만, 시민들의 헌혈로 혈액원마다 피가 남아돌 지경이었다. 치안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은행이나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으며, 일반 상점에서도 별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수습위원회 나 시민군이 필요한 돈은 자발적인 성금으로 해결했으며, 3~4백 명에 이르는 시민군과 항쟁지도부의 식사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어다 준 밥으로 끼니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수습위원회 는 이날도 시민군의 무기 반납을 두고 팽팽한 대립을 계속하고 있었다. 학생 수습위는 전날부터 이날 새벽까지 회의를 계속했다. 새벽 1시경 정해민, 양원식 등 학생 수습위의 6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3 일부 위원들은 의견충돌로 조직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또한 황금선, 박남선, 김화성 등 일반 청년들이 이에 새로 가담하여 학생 수습위의 조직이 개편되기도 했다. 수습위는 여전히 무기회수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으며, 이에 맞서 민주화운동 진영에는 지역 내 재야인사들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25일 오전 10시경 재야인사들과 청년운동권 대표들이 광주YWCA에서 모였다. 홍남순(변호사), 이기홍(변호사), 이성학(장로), 송기숙(교수), 명노근(교수), 장두석, 윤영규(교사), 조아라(광주YWCA 회장), 이애신(광주YWCA 총무), 박석무(교사), 윤광장(교사) 등 재야 인사와 윤상원, 정상용 같은 청년들이 모였다. 재야인사들은 더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 는 점에서 시민수습위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당시의 조건에서 무장 투쟁의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청년운동권 대표들은 싸움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이니 저희들을 적극 지원해달라 고 호소하기도 했으나, 모두의 동의를 얻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오후 5시쯤 시민수습위에 합류한 재야인사들은 도청 부지사실에서 회의를 갖고 김성용 신부가 제안한 4가지 사항을 만장일치로 최규하 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 을 채택했다. 여기서 채택된 4가지 사항은 아래와 같다. 여기에 김성용 신부를 대변인으로 한 25명의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들이 서명을 했다(나의갑, 2001: ). 56) 첫째, 이번 사태는 정부의 잘못임을 시인할 것, 둘째, 사과하고 용서를 청할 것, 셋째, 모든 피해는 정부가 보상할 것, 넷째, 사후에 어떠한 보복조치도 없을 것 등이었다. 한편 재야인사들의 협조를 얻는데 실패한 사회운동 진영은 새로운 집행부의 구성을 도모했다. 먼저 가두방송을 통해 대학생들을 YWCA로 모이게 하는 한편, 사회운동진영을 대표하여 윤상원이 도청으로 들어갔다. 그는 우선 도청 내에서 무기반납을 반대 한 김종배, 박남선 등을 만나 협조를 부탁하였다. 이들은 서로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힘을 합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협조 속에 YWCA에 모인 대학생 50여 명이 도청에 합류하였다. 56) 25일 저녁 6시경 최규하 대통령은 광주를 방문했다. 그는 상무대에 들러 계엄분소장과 지사에게 보고를 들은 뒤 준비된 담화문 을 발표하고 돌아갔다. 5 18민중항쟁 61

64 궐기대회(5 18기념재단) 이러한 상황에서 25일 오후 3시부터 제3차 궐기대회 가 개최되었다. 참가숫자는 전날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 시민 약 5만여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래의 자료를 보자. 나를 버리고 가시는 시민 여러분 십리도 못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꽃같이 어여쁜 우리 형제들은 무자비한 계엄군에 끌려서 죽음으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57) [노래] (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곡에 맞춰) 투사의 노래 58) 1. 이 땅의 민주를 수호코자 일어선 사람들 시민들은 단결하여 다같이 투쟁하자 피에 맺힌 민주사회 언제-오-려-나- 강철같이 단결하여 끝까지 투쟁하자 2.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일어선 시민들 학생들과 시민들은 다같이 투쟁한다 피에 맺힌 전두환놈 언제-죽-이-나- 피에 맺힌 전두환놈 언제-죽-이-나- 57) 고 은, 광주5월민중항쟁 이후의 문학, 광주5월민중항쟁, 풀빛, 1990, 225쪽. 58) 전남대학교5 18연구소, 5 18연구소 자료 모음집 6, 2007(미발행), 112쪽. 6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5 위의 자료는 당시 선전활동을 벌인 전춘심이 아리랑 의 노래 가사를 바꾸어 불렀던 노래와 투사회보 팀이 배포한 유인물에 적힌 투사의 노래 이다. 이외에도 항쟁 시기 거리와 광장에서는 익숙한 장단의 구호가 외쳐지고, 익숙한 가락의 노래들이 불려졌다. 이들 노래는 사람들의 음성을 타고 대중들을 하나로 합치게 하거나(이준희, 2007; 2008), 대중에게 열정과 어떤 의지를 샘솟게 했다(김영택, 2010). 동일한 음절이 가지는 시간성은 대중을 동일한 시간의 간격으로 포섭하면서 상호간의 동일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지역민의 자기인식(selfknowledge)은 개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반해 대중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 또한 벌어졌다. 먼저 계엄군과 정부는 선전활동을 통해 폭도 와 시민 을 구분 분리시키려 했다. 폭도는 북괴 오열의 선동을 받은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었다. 정부의 이러한 반공주의 선전은 대중의 내적 움직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하였고, 선전활동을 벌였던 이들을 간첩 으로 간주하여 계엄군에 인계하기도 하였다. 최규하 정부 물러가라, 전두환 처단하라 는 구호와 함께 김일성은 오판말라 는 구호 또한 대중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외쳐졌다. 요컨대, 광주 는 정부와 계엄군이 1980년 5월의 시위상황 을 지역으로 유폐시키고 대중적 저항을 남한사회에서 격리시키고자 하는 전략에 의해 불려졌다. 대중들 또한 외부로부터의 고립 과 함께 항쟁의 확산과정에서 광주 의 참 모습을 확인하는 행위들을 지속적으로 실천했다. 집단의 안과 밖을 구성하는 포섭과 배제의 움직임들이 결국 광주시민 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아래의 사료를 보자 지금 우리 광주시민은 모두 하나가 되어 독재를 깨뜨리고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한 승리의 계기를 잡고 있습니다. 이 하늘이 주신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이 땅에 민주정치 실현이 어려워질 것이며 또다시 군부 독재정치가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민주사회가 되기를 열망하는 국민 여러분! 역사의 심판의 내려질 그날까지 우리 모두 이 민주의 성전에 다같이 동참합시다. 민주국민이여! 다시는 독재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고 이 땅에 찬란한 민주의 꽃을 피울 그날까지 우리 모두 총궐기합시다! 59) 다음날인 26일 오전 10시경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시민들은 예정에 없는 4차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오후 1시쯤 대회가 끝나자 2만여 시민들은 시가행진을 했다. 시민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금남로를 출발하여 광주공원과 양림교, 청산학원, 계림파출소 등을 지나 다시 도청 앞으로 되돌아왔다. 59) 자료총서 2, 67쪽. 5 18민중항쟁 63

66 그리고 새 지도부가 들어선 이후 오후 3시경 제5차 궐기대회가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시민들은 80만 광주시민의 결의 7개항을 채택하였다. 전두환 공개 처형,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투쟁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선언한다는 내용으로, 광주의 요구사항 중 가장 강경한 것이었다. 오후 5시쯤 계엄군의 진압계획이 도청 투쟁위에 통보되어 오자, 대회장에서 오늘 밤에 계엄군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고 공식 발표하였다. 대회장의 분위기가 일시에 가라앉으면서 시민들은 불안해했다. 끝까지 싸우자 는 고함소리도 터져 나왔다. 대회를 마친 뒤 5천여 명의 시민들은 유동 삼거리를 거쳐 계엄군이 진을 치고 있는 화정동까지 시가행진을 했다. 80만 광주시민의 결의 에 나타난 시민들의 요구는 아래와 같다. 1.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은 과도정부에 있다. 과도정부는 모든 피해를 보상하고 즉각 물러가라. 2. 무력탄압만 계속하는 명분 없는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 3. 민족의 이름으로 울부짖는다. 살인마 전두환을 공개 처단하라. 4. 구속 중인 민주인사를 즉시 석방하고 민주인사들로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하라. 5.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 조작, 왜곡 보도하지 말라. 6.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피해보상과 연행자 석방만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한다.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우리 80만 시민 일동은 함께 투쟁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선서한다. 행진을 마치고 나자 거리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도청 앞 광장에는 1천여 명의 시민들이 갈 곳을 몰라 서성이고 있었다. 이때 광주시민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 오늘 밤 계엄군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라는 선전팀의 방송이 있다(나의갑, 2001:253). 6장 최후항쟁 1절 도청지도부 재편과 기동타격대 25일 오후 7시경 도청 식산국장실에서 학생수습위원들과 윤상원, 정상용, 이양현 등 청년운동권 6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7 관계자들이 회의를 갖고 새 조직을 구성했다. 60) 새 지도부는 최후까지의 투쟁 을 목표로 삼았다. 명칭도 학생시민투쟁위원회 로 바꾸고 위원장에 김종배, 내무담당 부위원장 허규정, 외무담당 부위원장 정상용, 대변인 윤상원, 상황실장 박남선 등으로 구성했다. 그들은 먼저 총기반납을 중단하고 무장 투쟁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날 계엄군은 12시까지 무장 해제, 총기 반납, 경찰의 치안 회복 등을 일방적으로 요구했다. 협상은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사실상 계엄군의 최후통첩이었다. 다음날 26일 오전 5시 20분경, 시민군의 화정동 초소에서 도청 상황실로 무전연락이 왔다. 계엄군이 탱크 2대를 앞세우고 화정동쪽에서 전남농촌진흥원쪽으로 진출했다는 것이다. 탱크는 시민군의 바리케이드를 깔아뭉개고 1km 남짓 밀고 들어와 한국전력 광주지점 앞길에 버티고 있었다. 또 오전 8시경 백운동 서광여중 부근에도 탱크 2대가 나타났다는 무전이 들어왔다. 곧 전 시민군에 비상령이 떨어졌고, 도청 안이 몹시 술렁거렸다. 가두방송 반은 계엄군이 공격해오고 있다며 시민들을 도청 앞으로 모이게 했다. 다른 시민수습위원 17명과 함께 도청에서 밤을 새운 김성용 신부가 탱크가 있는 곳으로 가자, 여기 있어도 죽을 것이고 거기 가서도 죽을 것이라면 탱크 앞에서 죽자 고 제안했다. 오전 9시경 탱크가 있는 한전 앞에 이르렀을 때 인파는 점점 늘어났다. 김성용 신부 등 수습위원들이 그 자리에 나와 있던 계엄군 책임자를 만나 어젯밤의 위치로 철수하지 않으면 우리가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다. 탱크로 깔아뭉개든지 알아서 하라 고 단호하게 말하자, 탱크는 소음을 내며 물러났다. 그날 수습위는 그 계엄군 책임자의 요구로 상무대에서 4시간 동안 협상을 했으나,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새로 구성된 항쟁 지도부는 학생수습위의 일부 투쟁파와 청년운동권, 그리고 항쟁 기간 시위에 참여한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새 지도부는 무기반납을 중단하고 조직적인 역할을 분담했으며, 행정체계를 잡고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정상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한편으로 항쟁을 계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협상을 계속해 나가려 했다. 이에 예비군을 동원하여 자위대를 편성할 계획을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군의 공격에 대비해 다이너마이트를 폭파하겠다 는 위협적인 협상조건을 계획하였다. 또한 항쟁의 장기화 될 것을 대비하여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사항도 검토되었다. 오전부터는 각 부서별로 업무를 담당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항쟁을 외부에 알리고자 대변인실에서 외신기자들과 일부 국내기자들을 모아 기자회견을 갖기도 하였다. 윤상원은 도청 내무국장실을 임시 기자실로 하고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5시 두 차례씩 기자 회견을 갖기로 했다. 60) 이때 김창길 위원장이 회의장에 나타나 이견을 제시하고 지도부에서 사의하였다. 5 18민중항쟁 65

68 외신기자들은 팔에 외신기자 또는 소속사 이름을 한글이나 영문 약자로 쓴 띠를 두르고 다녔다. 61) 도청에 재구성된 항쟁지도부는 계엄군의 진압작전 실행여부나 미국의 의도 등에 대하여 확실한 입장이 없었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26일 보다 체계적인 무장조직으로 기동타격대 를 편성하였다. 그동안 무장투쟁을 총지휘해 온 박남선은 지도부의 상황실장을 맡고 기동타격대장에는 윤석루(20세, 자개공), 부대장에 이재호(33세, 한양공대졸, 회사원), 경비대장에 김화성(21세, 식당종업원)이 각자의 역할을 맡았다. 이시기 도청 지도부의 조직 체계는 아래와 같다(김창진, 2001: 314). <표> 항쟁지도부 조직체계 시민군 투쟁위원장 업무총괄 대변인 모든 결정사항 공식발표 내무부 위원장 도청 내부 및 장내관할 외무부위원장 계엄사 협상관할 기획부장 지도부의 제반업무 및 기획 민원부장 제반대민업무 상황실장 시민군 군사업무 담당 보급부장 식량조달 및 식사공급 홍보부장 궐기대회 홍보 및 제반홍보업무 담당 조사부장 치안질서 위배자 조사 기획위원 기동타격대장 군사업무 경비담당 군사업무 이 기동타격대는 5~6명을 1개조로 각 조마다 조장 1명, 타격대원 4~5명, 차량 1대, 무전기 1대, 개인 소총(카빈) 1정, 실탄 1클립을 배정하고, 총 8개조를 편성되었다. 이들은 상황실장- 기동타격대장-부대장-조장-조원에 이르는 지휘체계를 구성하고, 유사시에는 상황실장에게 시민군의 지휘관 역할을 맡게 했다. 이들은 주로 시내순찰, 계엄군 동태파악, 계엄군 잠입저지, 거동 수상자 체포, 연행, 치안유지, 외곽지 시민군과의 연락업무 등을 했다. 점차 계엄군의 진압이 확실해 지면서 도청 지도부는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다 윤상원, 박남선, 김종배, 정상용 등 항쟁지도부 간부들은 따로 모여 작전회의를 가졌다. 기동타격대를 재정비하고, 전남대병원 옥상, 학동방면, 전남일보사, 계림초등국교, 서방시장, 유동 삼거리 등 시내 곳곳에 시민군을 배치했다. 이날 밤 광주시내 곳곳에 배치된 시민군 현황은 다음과 같다. 61) 프랑스의 르몽드,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타임즈, 위싱턴 포스트, NBC 방송, CBS 방송, UPI 통신, 영국의 선데이 타 임, 독일의 차이퉁, 일본의 아사히 신문, NHK 방송 등이었다. 6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69 계림초등학교 : 30여 명(본부 파견) 유동 삼거리 : 30여 명(본부 파견) 덕림산 : 30여 명(본부 파견) (이곳에는 50~200명으로 추산되는 예비군 자체방어가 형성되어 있었음) 전일빌딩 : 40여 명(LMG 기관총 설치) 전대병원 옥상 : 수 미상(LMG 기관총 설치) 서방시장 : 수 미상 학동, 지원동, 학운동 : 30여 명 광주공원 부근과 광주시 외곽에 산재되어 있던 훨씬 많은 수의 자체방어 병력은 파악되지 않았지만, 이날(27일) 새벽 도청 안에는 10여 명의 여학생들을 포함하여 200명 정도의 인원이 남아있었다. 2절 계엄군의 광주 진압 광주 외곽 을 봉쇄하고 있던 계엄군이 시민들의 항쟁을 진압하고자 광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광주 진압은 이미 23일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 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가 내용을 검토했고, 육군본부 작전지침(상무충정작전) 에 의해 5월 26일 전교사령관과 제2군사령관에게 하달되었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437). 먼저 5월 23일 2군사령부 작전처장 김준봉 준장은 육군참모총장에게 최종 진압작전인 충정작전 계획 을 건의했다(15:00). 이에 대해 육군참모총장은 미국과의 협의가 필요하고, 무력 진압은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크기 때문에 24일까지 진압작전을 연기시켰다. 주영복 국방부장관도 25일(02:00)까지 진압작전 연기를 지시했다. 애초에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는 항쟁을 진압하는 3가지 방안(시민 자체 해결지원, 광주시 장기봉쇄, 조기 진압)에 대해 장단점을 검토한 뒤(2군사령부,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 무력 진압을 제안했던 것이다. 군 상위층이 위와 같이 진압을 계획하고 있을 때, 전남북계엄분소는 23일 점거당한 광주시의 평온을 되찾고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광주시내에 진주한다. 선량한 난동자는 불순분자에게 더 이상 속지 말고 총을 버리고 자수하라. 시민은 거리로 나오지 마라. 반항하는 자는 사살한다. 학부형들은 자녀를 단속하라. 작전은 금일 중으로 실시한다. 는 내용의 최후 통첩문을 광주시에 배포했다. 24일에는 전교사 군무원 배 을 전남도청에 투입시켜 지하실에 있던 TNT를 비롯한 폭약물을 해체했다. 25일 제2군사령부는 작상전 517호(충정작전 유효 지시) 를 통해 전교사령관으로 하여금 5월 27일 01:00 이후 상무충정작전을 실시 하도록 지시했다(25일 5 18민중항쟁 67

70 12:05)(2군사령부,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62) 26일 오후 6시경 시민들은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온다 는 소식을 들었다. 이른 새벽 화정동에서 계엄군의 탱크가 움직이자 김성용 등 일반 수습위원들이 이에 항의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계엄군 진압 소식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수습위원들의 권유에 많은 사람들이 도청에서 나갔지만, 이들을 만류하는 사람은 없었다. 도청 지도부는 이미 궐기대회에서 최후까지 싸울 수 있는 사람만 남아달라는 말을 했었다. 마지막으로 도청에 남은 사람 중 80여 명은 군복무를 마친 사람들이었고, 60여 명은 고등학생이나 군 경험이 없는 청년들이었다. 10여명의 여학생도 10여 있었다. 63) 27일 0시경 도청 상황실의 시외통화가 끊기면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 이 시작됐다. 전화가 끊기자 도청 안은 술렁거렸다. 2시가 넘자 농성동 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계엄군이 M16 소총을 쏘면서, 시 변두리에 진입하고 있었다. 계엄군의 총소리와 함께 지산동과 산수동 쪽에서 마지막 선전 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다. 도청 시민학생투쟁위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항쟁의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에 송원전문대 박영순 학생은 도청 안 상황실의 방송장비와 확성기로 새벽 3시경까지 계엄군의 진압상황을 시내 전 지역을 향하여 방송했다. 64)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계엄군은 공수부대 제3, 7, 11여단과 보병 제20사단, 제31향토사단,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예 하 병 력 등 47개 대 대 2만 317명(장 교 4,727/사 병 15,590)을 편 성 하 여, 도 청 광 주 공 원 광주관광호텔 전일빌딩 등 4개 지점 확보하고자 사방에서 일제히 진입해 들어왔다. 제20사단 1개 연대는 지원동에서 광주천을 따라 적십자병원을 거쳐 전남도청 남방에서, 제20사단 1개 연대는 지원동에서 학동과 전남대병원을 거쳐 전남도청 후문으로, 제 20사단 1개 연대는 백운동에서 월산동과 한일은행을 거쳐 전남도청 정문으로, 제31시단 1개 연대는 서방에서 계림초등하교와 시청을 거쳐 전남도청 북방으로, 상무대 병력은 화정동에서 양동 유동 삼거리 금남로를 거쳐 전남도청 정문으로, 기타 공수부대 제3여단은 도청, 제7여단은 광주공원, 제11여단은 광주관광호텔과 전일빌딩에 침투했다( 광주 상황보고서 ). 62)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성을 되찾아 가는 경향, 광주시민은 생필품 고갈, 생활에 고통, 공산주의자와 폭도 양민이 분 리됨으로써 작전을 실시할 여건 조성, 전교사령관 책임 하에 :01 이후에 실시, 양민 및 계엄군 희생 최소로 감소, 작전 수행 상 조치 및 착의사항( :00) 적용, 고도의 보안을 요망 등이었다. 63) 한편 일부 항쟁 지도부와 종교계 인사들은 YWCA에서 김성용 신부를 서울로 보내 김수환 추기경에게 광주의 실상을 알리 기로 했다. 김성용 신부는 27일 밤 서울에 도착했지만 이미 계엄군이 광주 진압이 시작된 후였다. 64) <오월항쟁기간 방송활동에 대한 조사 결과>, 5 18기념재단( ) 6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1 5 27 도청진압 작전 시 부대이동 상황 먼저 제7여단은 시민군 본부인 광주공원의 시민회관에 별다른 저항 없이 진입했다. 광주공원의 시민군이 대부분 도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도청 상황실에는 계엄군의 진입상황이 속속 전해지고 있었다. 도청 정문과 뒤쪽엔 시민군이 2-3명씩 1개조로 담벼락을 따라 배치되어 있었고, 실내에는 1층부터 3층까지 시민군을 겹겹이 배치했다. 시민군은 간간이 들려오는 총소리에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의 불빛이 도청을 향해 훤히 비추었다. 이어 항복을 권유하는 방송이 나왔다.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완전 포위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제3여단 특공대는 도청 뒷담을 넘고 있었다(나의갑, 2001: 254). 시민군이 계엄군의 라이트 불빛을 향해 발포하자, 이것을 신호로 하여 계엄군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시민군들이 하나 둘 쓰러지면서 시민군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민군의 화력은 이를 제압하려는 계엄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같은 시각 전일빌딩과 상무관에서도 계엄군의 발포가 계속되었다. 제11공수여단은 YWCA 안에 있던 32명의 시민군과 교전한 끝에 3명을 사살하고 29명을 체포했다. 새벽 5시 21분 제3공수 특공조가 도청 진입에 성공함으로서 사실상 시내 진압 작전은 끝나갔다. 도청 내 참호와 상무관 부근 옥상에서 시민군의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으나 6시 20분경 시민군의 저항이 끝나가고 있었다. 03:30, 작전개시 04:10, 도청에 투입 04:11, 도청에 3공수 투입 5 18민중항쟁 69

72 04:30, 광주공원 7공수 투입 04:40, 관광호텔, 전일빌딩 11공수 투입 04:53, 도청에서 61연대 지원 하에 폭도들과 치열한 교전 04:55, 도청 완전 점령 05:04, 광주보병학교 외곽배치 완료 05:05, 광주공원 완전 진압 05:10, 62연대 1대대 도청 병력 증원 05:20, 61연대 2대대 광주경찰서 진입 05:22, 도청 잠적 폭도 소탕완료 도청 앞 시신(5월 27일)(최영태 외, 2008: 362) 날이 밝아지면서 시체들이 도청 밖 현관 앞에 놓여있었다. 붙잡힌 시민군들은 양팔이 뒤로 묶인 채 복도에 머리를 거꾸로 박고 엎드려 있었다. 계엄군은 시민군이 조금만 움직여도 가차 없이 군홧발로 짓이기고 두들겨 때렸다. 시민군의 등에는 총기소지, 극렬, 실탄소지 등의 단어가 매직펜으로 쓰여 있었다. 시내를 장악한 계엄군은 도청을 비롯해 곳곳에서 소탕작전 을 계속해 갔다. 그들은 시내 요소요소에서 시민들을 검문하며 통행을 막았다. 또한 거리방송을 통해 공무원의 출근과 무기소지자의 투항을 권고했다. 또한 계엄군의 시내 진입에 대한 담화문 을 지방방송국을 통해 발표했다. 총을 버리고 항복하라는 내용이었다. 일부 젊은이들은 끝가지 투항을 거부하기도 했다. 65) 10일간의 시민들의 항쟁 기간 동안 군인 23명, 경찰 4명이 사망했고, 잠정적으로 민간인 166명이 65) 전입빌딩에서 2명, YWCA에서 5명이 붙잡혔고, 수협 전남지부 건물에서 고교생 1명이 무장한 채로 검거됐다. 7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3 죽은 것으로 파악되었다(국방부과거사위, 2007: 438). 66) 군인 108명, 민간인은 852명이 부상을 입었다(육군본부, 광주사태 자료정리 결과 ). 2007년 7월 광주시청 민주선양과에 등록되어 있는 5 18 유공자는 5,064명이며, 사망 행방불명 318명, 부상 2,267명, 기타 희생 2,479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광주 시민들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기간 동안 공수부대 3개 여단 10개 대대를 포함 총 47개 대대 20,297의 병력이 동원됐다. 동원됐던 부대와 병력은 아래와 같다(전교사, 전투상보(충정작전결과) ). 계엄군의 광주 진입(5월 27일) 희생자의 장례(망월동) 66) 이 숫자는 광주지검에서 작성한 자료(1980년 6월 21일)에 국방부에서 추가 신고 된 2명(1985)을 포함한 것이다. 5 18민중항쟁 71

74 <표> 5 18민중항쟁 시기 동원됐던 부대와 병력 부대 대대 인원(장교/사병) 비고(장교/사병) 3공수여단 265/1212 특전사 7공수여단 92/780 10개 대대(504/2901) 11공수여단 147/909 60연대 87/ 사단 61연대 85/ 연대 86/1449 9개 대대(279/4667) 사단 직할 21/120 31사단 55/1367 보병학교 1923/864 전교사 포병학교 1165/1700 기갑학교 357/ 개 대대(3944/8022) 화학학교 75/293 직할대 365/2063 계 47개 대대 4727/15,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5 Ⅱ. 전남지역의 5 18민중항쟁 1장 5 18민중항쟁의 확산과정 5 18민중항쟁이 발발한 초기부터 광주시민들은 자신들의 봉기가 정당함을 확인하고자 했으며, 그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이른바 광주사태 의 진상과 주민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타 지역민들의 동조와 지지를 구하고자 했다. 한편 항쟁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신군부의 움직임도 확고하였다.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항쟁이 타 지역으로 전파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결국 항쟁 당시에는 전남의 서남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확산이 불가능하였다. 5 18민중항쟁 당시 항쟁의 불길이 광주 이외의 지역으로 번져간 것은 항쟁 나흘째인 5월 21일이었다. 그날 오전, 진압군의 폭력에 분노한 시위 군중들은 아세아자동차 공장과 각종 차고에서 차량을 대거 획득하였고, 이를 계기로 시위 군중들이 광주시 외곽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도청 앞에서 발생한 계엄군의 시위대에 대한 총격은 이러한 항쟁의 흐름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시위대들은 계엄군의 총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무기를 구하러 다니는 한편 각 지역으로 항쟁의 동조자를 찾아다녔다. 도청 앞에서는 최초의 총격전 후 간간이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시위대는 시급히 무장을 강화하고 있었고, 계엄당국은 본격적인 무장 진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31사단 사단장은 15시 45분부로 전 병력에게 완전무장 및 충분한 실탄 휴대를 지시하고, 발포 권한도 개인에게 부여한 상태였다(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 당시 시위대의 일부는 보다 전국적인 항쟁의 확산을 목적으로 전주 서울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광주-장성 사이의 사남터널 부근에 대기중이던 계엄군에 의해 강력한 제지를 받게 되면서 불가능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광주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퍼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신군부는 광주에서 북상하는 길을 우선적으로 차단하였던 것이다. 계엄군 당국이 취한 조치의 일단은 다음의 지시에서 확인된다. 즉 2군사령부는 21일 19시부로 35사단에 사남터널(장성과 정읍 사이에 있는 터널, 호남터널이라고도 함)에 병력 100명을 추가 5 18민중항쟁 73

76 배치토록 지시하는 한편, 전남에서 오는 데모대가 폭도라고 확인되면 즉각 발포토록 지시 하고 있다. 당시 이미 사남터널에는 6/62명의 경비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상태였지만, 추가병력의 배치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경계병들은 1인당 실탄 510발과 수류탄 2발씩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60기관총 2대를 거치한 상태(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였다. 전남지역에서 발생한 항쟁을 전남 경계를 넘어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군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시위대들은 서울 쪽 방향으로의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시위대들은 화순을 거쳐서 순천 쪽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산악지역으로 주요 거점도시가 별로 없고, 길이 험한 화순의 동쪽 방향(당시는 주암댐 건설 전으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으로는 시위대의 진출이 어려웠다. 그 결과 극히 일부 시위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위대들은 주로 전남 도내 서남부에 있는 각 시, 군으로 진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5월 21일 정오 무렵부터 광주와 가까운 화순과 나주지역에 광주지역 차량시위대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최초 이들은 광주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만행과 그에 저항한 시민들의 항쟁소식을 전하고 지지를 구하기 위하여 이들 지역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군부대의 총격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부터는 군부대의 총격에 맞설 수 있는 무기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근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이들 시위대가 이르는 곳마다 그 지역 주민들의 열렬한 성원과 협조 속에서 자발적인 참여자와 다량의 무기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육군참모총장은 21일 15시 35분 경에 목포, 여수, 화순지역으로 나가는 도로망을 차단하고 기타 도시에서 사전 선무활동을 하라(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 를 하달하고 있다. 한편 전남 도내 각 지역의 주민들은 개별적인 참여나 시위대에 협조하는 수준을 넘어서 해당 지역 주민들로 이루어진 차량 시위대를 구성하기도 했다. 화순, 나주, 영암, 함평, 목포, 해남 등 시위대가 진출했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들 지역 시위대는 5월 21일 저녁부터 22일 오후까지 광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주-광주 간 도로와 나주-송정리 간 도로로 몰려들었다. 당시 나주지역은 전남 도내 각 지역에서 몰려든 수 백대의 차량들과 수 천명의 인파로 들끓었다고 한다. 이들은 함께 광주로 들어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계엄군 당국이 두려워한 것도 이들 전남지역 시위대와 광주지역 시위대가 하나로 뭉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계엄군은 엄청난 무력을 동원하여 이들 지역 시위대의 광주 진입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계엄군은 나주에서 광주로 진입할 수 있는 두 갈래 길, 즉 남평 인근의 산포 비행장도로와 광주-송정리 간 도로를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차단하였다. 또 광주-화순 간 도로에 있는 너릿재 터널 역시 모든 차량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계엄군의 차단시설 및 인근 도로에 접근하는 차량에는 총격이 가해졌으며,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 지역 시위대는 광주로의 진입을 포기하고, 다시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서 지역방어에 종사하거나 인근 도로망을 중심으로 차량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7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7 5 18민중항쟁이 확산되는 경로를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전남에서 항쟁이 발발한 대부분의 지역이 광주에서 차량을 타고 이동해 온 시위대에 동조하는 과정에서 항쟁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각 지역의 민중들은 그 전에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하여 처참한 학살극이 자행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감정적으로 분노한 상태였고, 이웃, 친지들과 함께 분노를 나누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광주에서 온 시위대들로부터 정확한 상황을 전달받으면서, 또 시위대들의 감정이 지역민들에게 이입되면서 그 분노가 저항으로 폭발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항쟁이 발발한 지역이 시위대가 접근하기 용이했던 서남해 지역에 집중해 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 5 18민중항쟁의 확산과정 또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은 항쟁의 발발 지역이 주로 광주 이남 서남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전남지역과 다른 여타 지역을 분리하여 전남을 고립시키려는 신군부와 계엄군의 전략 전술에도 그 원인이 있지만, 동시에 이 지역이 지닌 사회경제적 특성이나 공간적인 환경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도로망의 분포나 주민들의 생활영역,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 분포 등이 시위대의 진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광주시를 제외한 전남지역의 시위는 21일과 22일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다가 23일 이후에는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전남 도내 각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군부대들이 도로의 5 18민중항쟁 75

78 중간중간을 차단해서 시위대들의 이동이 막혔다는 것과 광주로 향하던 시위대들이 계엄군의 봉쇄선에 막혀서 출구를 찾지 못한 점, 그리고 광주가 고립된 채 더 이상의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지역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던 운동 동력이 소진한 점 등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나름대로의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목포지역만이 최후까지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광주를 제외한 전남지역의 5 18민중항쟁은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던 광주지역과는 달리 주로 차량시위를 중심으로 항쟁이 전개되었으며, 지역 내에서는 우리 지역은 내가 지킨다 라고 하는 지역방위론을 중심으로 지역민의 참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계엄군이 차량시위대를 저지하거나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몇 번의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주지역의 항쟁이 진압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전남지역의 항쟁도 사그러들었다. 1절 화순 방향 화순군은 광주지역과 너릿재 터널을 사이에 두고 바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통학생이나 직장인 등 광주와의 인적 교류가 많은 지역이다. 따라서 광주에서 계엄군들이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면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과 그것에 저항하여 전 시민적인 항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화순 지역민들은 한 편으로는 광주시민과 일체감을 느끼면서 분노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사태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화순 지역민들 중에는 5월 17일부터 시작된 광주에서의 시위에 합류하거나 옆에서 목격했던 사람들도 많이 살고 있었으며, 따라서 공수부대의 진압작전을 직접 목격하거나 그것에 의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 그러던 5월 21일 오전 11-12시 경 두 대의 시위차량을 타고 광주에서 내려온 수 십명의 시위대가 화순 버스터미널과 화순경찰서 사거리 등지에서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시위대가 최초로 내려온 시간은 분명치 않다. 도경찰국 상황일지에는 21일 12시 16분 파출소 방화 라는 기록이 남아있고, 군 자료에도 21일 12시 36분, 버스 4대가 화순읍 도착, 읍민 박수갈채 속에 하차, 중앙파출소에 방화, 2대는 광주 및 동면 방향으로 향발(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 이라는 기록이 있다. 즉 정부당국의 자료에는 대략 12시 경부터 화순에 시위대가 도착해서 시위를 전개했고, 동시에 이들 시위대가 파출소 등을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역민들은 그러한 시위 이전에 이미 시위차량이 화순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들 시위대는 한편으로는 광주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만행을 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화순 지역민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이들 시위대들은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노동 3권 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며, 당시로써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미 광주에서의 소식을 접하고 분노하고 있던 화순 지역민들은 이들 시위대에 적극 가담하기 7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79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광주에서 계엄군의 총격이 시작되면서 무기를 찾아 달려온 시위대들에 의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화순지역에 들어왔던 시위대들과 이들에 동조하여 화순에서 만들어진 시위대들 중 일부는 화순을 넘어 전남 동부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시위대들은 대체로 승주군 지역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고 한다. 화순을 넘어서 순천이나 보성으로 가는 길은 중간에 거점도시가 별로 없고, 인구도 희박한 지역이었으며, 소수의 시위대만으로 순천이나 보성으로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군 자료는 다소 애매하다. 군 자료에서는 승주군 지역에 시위대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즉 21일 22시, 순천방면에서 시위대 120여 명이 군복을 착용하고 무장 트럭 3대에 승차 송광지서에 도착하여 기물을 파괴(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료는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이다. 하나는 이들이 순천 방면에서 나타났다는 점과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순천지역에는 시위대가 없었으며, 21일 저녁에는 시위대가 군복을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문은 더 있다. 같은 자료에는 22일 5시 10분, 21일 22시 경 송광지서에 나타났던 시위대들이 고흥경찰서 대서지서에서 칼빈 1정, 실탄 미상을 획득(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고흥지역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이들 시위대(?)가 승주군 송광지서에서 고흥까지 갔다는 경로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시 군의 자료는 상당부분을 확인되지 않은 첩보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잘못 만들어진 것도 상당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위대가 승주군 지역까지 간 것은 맞지만, 그 외 부분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2절 나주 방향 나주지역은 광주시와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광주로 통학하는 학생이나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역이다. 그래서 80년 5월 당시에도 광주에서 발생한 일을 어느 지역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자도 많았기 때문에 신군부와 계엄군에 대한 분노가 매우 강했던 지역이다. 또한 나주지역은 광주에서 북상하는 길이 막힌 상태에서 전남 서남부 지역으로 진출하는 관문이기도 하며, 따라서 전남지역의 항쟁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공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20일(19일이라는 증언도 있지만, 전체적인 상황으로 판단할 때 20일이라는 증언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오전 10시 경 광주와 나주 사이를 오가는 대중 교통이 군의 저지선에 의해 차단되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5시에는 나주로 나오다가 효천 부근에서 계엄군에 의해 부상당했다는 젊은이를 포함한 7-8명의 사람들이 나주터미날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나주지역에 광주지역에서 온 시위차량이 처음 등장한 것은 5월 21일이었다. 그 날 점심 5 18민중항쟁 77

80 무렵이 지났을 때 쯤 총기를 구하러 광주에서 내려 온 시위대들이 나주지역에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남평면 인근을 한 바퀴 돈 다음에 나주터미날 광장과 나주경찰서 앞 삼거리에 모여 있던 지역민들에게 계엄군의 발포 소식을 전하면서 시위에 동참할 것과 무기 조달을 호소하였다. 이미 광주지역의 소식을 듣고 분노하고 있었던 나주지역민들은 이들 시위대에 적극 동조하였고, 500여 명이 시위대에 합류하여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나주터미날에는 광주로 가려다가 길이 막히면서 세워둔 수 십대의 차량이 있었는데, 시위대들은 이 차들을 타고 차량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주지역의 시위는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광주와 여타 전남지역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즉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지역에서 참여한 시위대가 합쳐져서 새롭게 만들어진 시위대들은 이후 새로운 지역으로 항쟁을 확산하기 시작하였다. 그 주된 방향은 한편으로는 나주-함평-무안-목포 방향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나주-영암-강진- 해남 방향이었다. 이들 시위대로 인해 전남 서남부지역이 5 18민중항쟁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3절 광산군 방향 광산군 지역은 1988년 1월 1일 이후 광주광역시로 편입되었지만, 1980년 당시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다. 이 지역은 광주에 인접해있다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항쟁의 여파가 바로 미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군비행장, 상무대 등 군부대가 밀집해 있다는 조건으로 인해 항쟁이 일어나기 어려운 곳이었다. 광주지역에서 계엄군의 총격이 시작되고, 무기와 시위 동조자를 찾아 사방으로 달려나온 시위대가 광산지역에 온 것은 21일 오후 세 시경이었다. 이는 나주와 화순에 비해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는데, 아무래도 광주와 광산군 사이에 있었던 상무대(전투교육사령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무대 근처는 군의 경비병력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의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대들은 상무대를 우회하여 광산군 내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한편으로는 무기를 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위에의 동참을 호소하고 다녔다. 광산지역에서 시위대가 출현했다는 기록이 있는 최초의 자료는 도경찰국 상황일지다. 그에 따르면, 21일 15시 경에 삼도지서와 대촌 예비군 무기고를 시위대가 공격했으며, 15시 15분에는 비아지서를, 그리고 16시 40분에는 비아 예비군 무기소를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전남도경, 상황일지 ). 이렇게 볼 때 광주지역의 시위대는 한편으로는 나주쪽으로 우회하여 광산군 대촌면과 삼도면 지역에 들어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광주에서 국도1호선을 타거나 장성으로 우회하여 비아지역으로 들어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당시 비아지역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21일 15시 39분 경, 버스 3대에 분승한 7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1 시위대가 장성을 거쳐 비아에 도착했으며, 이들 시위대는 비아지서를 공격하여 총기를 획득한 다음 송정리로 향하고 있다(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 이러한 사실은 광주지검의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즉 21일 15시 30분 경, 시위대가 비아지서를 습격하여 칼빈 9정, 권총 1정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광주지검, 광주사태 당시 학원동향 ). 당시 광산지역에서는 그 외에도 상무대 인근의 광주-송정리간 도로에 있는 서창지서가 시위대의 공격으로 기물이 파괴되기도 했다. 이후 광산지역의 시위대는 방송내용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21일 17시 23분에 KBS 송신소를 공격하기도 했으며(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삼양타이어에 진입하는 등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군 자료는 이들 시위대의 규모를 1,000여 명의 군중과 버스 3대라고 기록하고 있다(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 이들 시위대는 저녁이 되면서 대체로 해산하였지만, 그 일부는 영광으로 갔다. 즉 군 자료에 21일 23시 23분, 송정리에서 25명 가량의 시위대들이 무기 탈취 목적으로 영광으로 진입 중(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이들의 동태에 대해 계속 보고가 있다. 4절 담양 및 장성방향 계엄당국은 광주지역의 항쟁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가장 경계했지만, 특히 항쟁의 불길이 북쪽으로 전해지는 것을 가장 경계하였다. 이 시기에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던 김대중 사주설, 즉 광주의 항쟁을 김대중과 연결시키려는 시도 속에서 전남지역의 항쟁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주의 항쟁이 전북을 넘어서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으려고 했다. 그래서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APC장갑차가 시위대 손에 넘어간 직후인 21일 12시 30분 장성 및 담양경찰서에서는 APC의 진출을 막기 위해 도로목에 바리케이트를 설치(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하였다. 군의 움직임은 더 확고하였다. 광주에서 발생한 항쟁이 전남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기 이전에 이미 전남과 전북의 경계(장성과 정읍 사이)에 있는 사남터널에는 전주 35사단 병력 6/62명이 주둔하면서 경비를 서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군은 전남과 전북 사이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하여 21일 12시 40분부터는 사남터널 너머에 있는 정읍 비상활주로에 35사 예비병력 20/100명을 배치하였다. 이들은 로켓트포 4문, APC 3대, 2와 1/2톤 4대, 1/4톤 2대로 중무장한 병력이었으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500MD헬기가 공중 초계 비행을 하고 있었다(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 이와 같이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2군사령부는 21일 19시부로 35사단에 사남터널(장성과 정읍 사이에 있는 터널, 호남터널이라고도 함)에 병력 100명을 추가 배치토록 지시하는 한편, 전남에서 오는 데모대가 폭도라고 확인되면 즉각 발포토록 지시 (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하고 있다. 5 18민중항쟁 79

82 그러나 이러한 군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광주에서 퍼져나간 시위대들 중 상당수는 광주 인근의 북쪽 방향인 장성과 담양 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장성 쪽에서 최초 시위대의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21일 14시 22분 경이었다. 장성사거리에서 머리에 띠를 두른 학생 30-40명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나아가 21일 19시 25분 경에는 남면에 칼빈으로 무장한 시위대들이 버스를 타고 남면중학교에 집결(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에도 산발적으로 지속되었다. 즉 22일 13시 30분 경, 황룡면 신기마을 앞 화남삼거리에서 무장 학생들이 차를 정지시킨 후 차내를 수색하고 있었으며, 신기마을로 시위대가 집결할 예정(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23일 오후에는 시위대 300여 명과 계엄군이 대치(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장성지역은 항쟁의 확산이 불가능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광주지역과의 통로는 점차 막히기 시작했다. 장성에서 전북으로 가는 길은 애초부터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23일 오후를 마지막으로 장성지역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는다. 한편 담양지역은 광주의 북동쪽에 바로 인접해있으며, 역시 서울이나 충청도지역 및 전남동부지역과 경상도지역으로 진출하는 관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담양지역은 그 지역을 벗어날 경우 비교적 산악지역이어서 항쟁의 확산이 여의치 않은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다. 나아가 광주와 담양의 경계 부근은 광주교도소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군의 경계가 매우 삼엄한 상태였고, 그만큼 항쟁의 확산이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담양지역에 최초 항쟁의 불길이 번진 것은 21일 오전이었다. 21일 오전 11시 30분경, 군용차량 1대와 소형버스 1대, 택시 1대, 대형버스 1대에 나누어 탄 시위대들이 담양과 광주 서방 사이를 다니고 있었다. 또 오후 14시 22분에는 고속버스 2대, 군용트럭 1대, 세단 1대, 대한통운 트럭 1대에 나누어 탄 시위대들이 교도소 앞에서 담양으로 가는 것이 계엄군 당국에 포착되기도 했다(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 이들 시위대들 중 일부는 14시 30분 경 무기를 구하기 위하여 창평 예비군 훈련장으로 갔으며(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 군 부대 주둔지 (179지단 1훈련대 주둔) 앞에서 2,000여 명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의 시위는 상당기간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위대가 군 부대 앞에 간 지 4시간이 지난 뒤인 18시 55분 경에도 창평 훈련장 500m 전방 지점에서 시위대 70여 명이 버스에서 하차하여 집결하고 있으며, 2대의 버스는 잔여 인원 수송을 위해 광주로 출발하고 있다. 또 20시 30분 경에는 이들 시위대 50여 명이 경운기를 앞세우고 위병소까지 진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시위대는 창평에서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결국 23시 20분 경, 시위대 70여 명이 나누어 탄 차량들이 옥과로 이동하면서(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창평에서의 상황은 종료되었다. 8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3 이들 시위대와 같은 집단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시위대에 의해 담양경찰서가 공격당하기도 했다. 21일 16시 경, 광주시내에서 온 장갑차 1대와 찦차가 경찰서 정문으로 돌격하여, 경찰서 기물들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이때 장갑차에 타고 있던 시위대 1명이 추락해서 부상을 당했고, 생명이 위험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광주지검, 광주사태 당시 학원동향 ). 이와 같이 담양지역에서 시위대의 활동이 빈번해지자 계엄당국 역시 그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즉 21일 21시부로 35사 2대대 병력 3/22명이 담양-순창 간 도로로 경비병력을 지원하고자 출동한 것이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그러나 담양지역의 시위대는 더 이상 확산될 수 없었다. 담양을 넘어선 지역은 비교적 산악지역으로 거점도시가 많지 않으며, 광주로의 통행은 교도소 경비병력으로 인해 막힌 상태였다. 그 결과 22일부터는 담양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는다. 다만 23일 23일 11시 40분 경, 시위대 40여 명이 옥과에서 광주쪽으로 들어오다가 방향을 바꿔서 곡성으로 이동하였으며, 곡성경찰에게 무기를 반납하고 경찰서장의 배려로 식사 중이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2장 전남지역의 항쟁 거점들 1절 목포지역의 항쟁 67) 1980년 봄 각 대학에서는 학생회가 부활되고 학내 유신잔재 청산 문제가 거론되었으며, 병영집체훈련과 관련하여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4월말에서 5월초에 걸쳐 진행되었다. 목포에서는 1980년 5월 15,16일 이틀 동안 목포대와 목포실업전문대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에서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정치일정을 밝히라 고 요구하였다(광주매일신문사, 1995 ; 366). 15일과 16일, 광주에서도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생 등 대학생들의 시가지 시위가 있었으며, 16일 시위는 야간 횃불시위로까지 연결되었다. 목포의 5 18민중항쟁은 광주지역 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 하지만 목포에서 5 18민중항쟁이 격렬하게 전개된 것은 70년대 이후 이루어진 민주화운동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전국에 계엄 확대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신군부는 김대중과 문익환, 예춘호, 송건호, 한완상, 이호철 등 재야인사들을 소요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 구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목포시민들은 충격과 분노로 휩싸였다. 그리고 5월 18일 저녁부터 광주로부터 계엄군의 만행 소식이 목포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광주에 있는 가족과 친지의 안부가 궁금한 이들은 직접 광주로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목포로 돌아왔으며, 그들을 67) 목포지역의 항쟁에 대해서는 박찬승의 연구, 1980년 목포민중항쟁의 배경과 전개과정 을, 일부 군의 자료를 첨가한 것 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5 18민중항쟁 81

84 통해 광주의 상황이 목포 시민들 간에 전파되었다. 한편 목포의 민주인사들에게 5월 17일 밤의 계엄 확산과 민주인사 연행 소식은 일단 공포로 다가왔다. 5월 18일 일요일 안철은 연동교회의 야유회에 참석하고 귀가하였다. 그 때 광주에서 내려온 학생들이 안철을 찾아와 피신을 권유하였다. 안철은 밤에 목포 중앙교회 유원규 전도사를 불러 함께 해남으로 피신하여 이틀 밤을 자게 된다. 5월 20일 안철은 방송을 통해 광주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판단하고, 직감적으로 목포에서도 무언가 일이 터질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이에 대비하여 자신이 할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21일 새벽 첫 차로 목포로 돌아왔다. 뒤에 보듯이 그의 육감은 정확한 것이었다(안철 증언 ). 한편 엠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였던 박광웅은 5월 19일 서울에서 엠네스티 이사회가 있어 이에 참석하기 위해 18일 직장이 있던 비금도에서 목포로 나오는 배위에서 계엄 전국 확대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목포에 도착한 그는 서울의 엠네스티 본부에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고, 서울에서 많은 재야 활동가들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5월 19일 박광웅은 광주에 가서 명재용, 최형주와 함께 홍남순을 만났는데,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 10시경 금남로에 가서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해 있는 것을 보았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도청 앞에서 시민과 계엄군 간에 충돌이 빚어졌고,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19일 저녁 광주에서 자고 20일 목포로 내려왔다가 광주소식이 궁금하여 21일 다시 광주로 기차를 타고 가서 광주 상황을 지켜 본 다음 송정리에서 마지막 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왔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야당 당원 생활을 해온 박정두, 오양수, 장흥섭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들도 광주 소식이 궁금하여 20일 광주에 올라가서 금남로에서의 시위에 직접 참여했다. 오양수는 군인들에게 얻어맞고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시외버스 터미널로 달려가 오후 2시경 버스를 타고 목포에 내려와 병원에 입원했다. 박정두는 20일과 21일 금남로 시위에 참여했는데, 21일 오후 2시경 군인들에게 붙들려 무수히 얻어맞고 쓰러졌다. 다행히 어느 화물차 기사가 차로 송정리역까지 실어다 주어 기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와 역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장흥섭도 금남로 시위에 참여했다가 군인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하고 광주역으로 가서 막차를 타고 목포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박광웅 증언 , 박정두 장흥섭 오양수 증언, ). 68) 한편 안철은 해남에서 영암 용당까지 차를 타고 와서, 배편으로 목포로 돌아왔다. 그는 오후 1시경 죽동교회 유기문 목사에 연락하여 교회로 갔다. 그곳에는 정권모 목사, 김현식 목사, 광주의 강신석 목사 등이 모여 있었다. 당시 강신석 목사는 지금 광주에서는 난리가 나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목포사람들은 뭐하고 있느냐 고 힐책했다. 이에 안철은 지금부터 하겠다 고 대답하고, 몇 가지 구호를 정했다. 구호는 김대중을 석방하라 유신잔당 물러가라 민주정부 수립하라 68) 박정두, 박광웅은 당시 50세였으며, 장흥섭, 오양섭 등은 당시 40대 내지 50대 초반이었다. 8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5 등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체적으로 광주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밖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와 밖으로 나가보니 광주 시위대가 버스 4대를 타고 목포에 들어와 광주의 상황을 전하면서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광주매일신문사, 1995 ; 368). 이로써 이후 1주일에 걸친 목포 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이제 5월 21일부터 27일까지의 상황을 발단-발전-정리의 3시기로 나누어 재구성해보기로 한다. 1) 발단기 : 5월 21~22일 5월 21일 69) 광주에서 시위대가 버스로 목포에 도착한 것은 21일 오후 2시 15분경이었다. 이들은 나주, 함평, 무안을 거쳐 목포에 들어왔다. 광주의 시위대는 그날 오후 1시경 광주에서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되자 총기를 구하기 위해 차량을 타고 광주 외곽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화순, 나주 방면에서 다량의 총기를 구하여 광주 시내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광주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함평, 무안, 목포 방면으로까지 나왔다. 당시 버스 2대는 나주-함평을 거쳐 온 시위대 약 20명 정도가 타고 있었고, 이들은 총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나머지 버스 2대는 무안에서 온 청년 약 20명 정도가 타고 있었고, 이들은 각목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 시위대는 가두방송을 하면서 광주의 상황을 알리고, 계엄령을 해제하라,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고 외치면서 목포 시민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버스 4대에 분승한 무장시위대의 출현은 목포 시민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시위대와 부닥친 안철은 재빨리 이들 시위대의 버스 가운데 버스 한 대에 올라타 유달산의 노적봉 옆에 있던 MBC방송국으로 차를 인도했다. 그는 급히 방송 원고를 써서 유달산에 버스가 도착한 뒤 학생들에게 원고를 들려 보내 방송을 하도록 했으나, 이미 방송은 중단된 상태였다. 당시 방송국측은 광주에서 시위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방송을 중단한 채 몇 가지 기재를 부수고 직원들이 철수해버린 상황이었다. 광주에서 온 시위대들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의 소식을 알린 뒤 목포역 앞 광장으로 이동했다. 20일부터 텔레비전 방송이 중단된 가운데 광주 소식에 목말라 하던 목포 시민들은 광주에서 온 시위대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의 상황을 알리는 가두방송을 하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은 목포역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오후 4시경부터 목포는 사실상 치안부재 상태로 들어갔고, 목포역 광장에 모인 1만이 넘는 시민들은 가두 행진에 나섰다. 당시 경찰들은 광주 시위 진압에 투입되어 거의 병력이 없었고, 따라서 이 같은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없었다. 안철 일행도 목포역 광장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목포역 광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역 앞 태화장 여관 69) 이하 21일의 상황은 정사 5.18 (상), 368~369쪽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권위원회, 1980년대 민주화운동 (Ⅵ), 94쪽, 안철 증언 ( ), 양지문 증언( , , ), 목포시에서 작성한 목포사태보고 등 을 정리한 것임. 5 18민중항쟁 83

86 3층에 본거지를 마련하고 옥상에 올라가 상황을 지켜보면서 본격적인 상황 지도에 들어갔다. 우선 그는 목포역 방송실을 점거해 엠네스티 간사로 있던 최문에게 광주의 실상을 알리는 방송을 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구호는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와 광주사태에 항의하는 내용들이었다. 저녁이 되자 광주에서 온 시위대는 일부 목포 청년들을 차에 싣고 목포를 빠져 나가 광주로 향했으나, 목포 시민들의 시위는 계속되었다. 연동파출소 등이 파괴되었고, 상가는 거의 철시한 상태였으며, 주요 행정기관도 모두 시위대에 의해 장악되었다. 소수의 경찰병력은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자진 해산하였고, 목포는 문자 그대로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외부와의 육로, 해로 교통은 모두 두절되고, 시위대가 탈취한 차량들이 시내를 질주하였다. 오후 7시 20분 경 군용헬기 한 대가 10여분 동안 시위대의 동태를 정찰하였다. 시위대는 더욱 격렬해졌다. 밤 9시 목포경찰서가 습격당하였으며, 경찰 트럭 1대, 호송차 1대가 방화로 불탔다. 밤 9시 20분경 시위대는 KBS와 MBC의 기물을 부쉈고, 9시 30분경부터 방송국이 완전히 마비되어 방송이 중단되었다. 밤 10시경에는 무안과 함평에서 자체적으로 봉기한 무장 시위대가 목포 시내로 진입해 들어와 목포의 시위대와 합세하였다. 이날 오후부터 목포역 광장에는 학생들도 다수 쏟아져 나왔고, 연동교회에서 야학을 하던 학생들, 기청 학생들도 대부분 목포역 광장에 나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양지문에 의하면, 이날 밤 15명 정도의 학생들이 박대인의 집 창고에 모여 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이들은 상황을 분석하고 이튿날 아침 일찍 목포역에 나와 상황을 주도해가기로 의견을 나누게 된다(양지문 증언 ). 5월 22일 70) 새벽 2시 시위대는 목포역 대합실을 파괴하고, 연동파출소에 방화하였으며, 중앙정보부 목포분실, 항동파출소, 세무서, 해안경찰대 등이 파괴, 방화되었다. 일부 시위대는 경찰서와 파출소의 무기고에서 획득한 총기로 무장하였다. 하지만 예비군 무기고에는 이미 실탄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사태 발생 하루 전인 5월 20일 예비군 무기고의 실탄을 군부대로 모두 옮겼기 때문이다. 한편 새벽 3시에는 그동안 저임금 문제로 갈등이 있었던 남양어망 공장이 습격, 파괴당하였다. 그리고 이날 새벽, 각 고등학교는 학교장 재량으로 휴교령이 내려졌다. 한편 이날 새벽 6시 경 양지문 등 학생들은 목포역으로 나가 상황을 지켜보았고, 8시 경 연락받은 학생들 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무기를 일단 회수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것은 총기로 인한 불미스런 사태가 발생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또 광주와 같은 군의 무장 진압이 아직 없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총기를 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이날 오전 시민들의 시위를 주도해나가기 위해 목포청년학생투쟁위원회를 만들기로 하고, 위원장에 양지문을 70) 5월 22일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안철, 양지문, 박광웅의 증언과 광주매일신문사편, 정사 5.18 (상) ;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 민권위원회, 1980년대 민주화운동 (Ⅵ),(Ⅶ) 등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8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7 선출하였다. 양지문은 목포 출신으로, 1976년 한양대 2학년 재학 중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제적되어 고향에 내려와 중앙교회, 연동교회 등에서 활동한 바 있었다(양지문 증언 ). 71) 학생들은 이날 11시에 첫 유인물 200장을 인쇄하여 뿌렸다고 한다. 당시 유인물을 작성한 이는 김준모(목포 출신의 서울대 사회학과 학생)였다. 72)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이와 같은 급격한 상황 변화를 지켜보던 안철 등 목포의 민주화 운동 지도부도 같은 상황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무질서한 시위는 자제하고 시민과 학생들을 조직화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는 속히 질서를 잡은 뒤, 시민들이 동참하는 민주화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22일 아침 9시 안철은 중앙교회에서 명재용 박광용 유기문 정권호 이복일 등을 만나 목포사태 수습 방안을 논의하고, 이날 오후 1시 목포시장, 목포대학장, 목포경찰서장 등과 함께 안철의 집에서 만나 사태 수습을 논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안철은 이날 오전 목포민주시민투쟁위원회 의 조직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안철 증언 ). 그런 가운데에도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민들은 아침 7시부터 목포역 광장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안철은 최문 등 학생들을 시켜 9시경 역 건물에 계엄령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광주사태는 양민학살이다 는 플래카드를 내걸도록 하였다. 그리고 목포역에 있던 학생 지도부에게도 연락을 취하였다. 안철은 11시경 목포시 명륜동 소재 통일당 당사에서 강수복 김길도 등을 만나 목포에서의 시위를 조직적, 체계적으로 지휘하기 위해서 수습대책위원회 를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안철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동양여관에 방을 잡았는데, 마침 그곳에 목포경찰서 수사과장이 있어 그에게 무정부상태는 해소해야 하고, 관민이 협력해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시장, 경찰서장 등이 참석하는 민관 대책회의를 해야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당시 목포경찰서장은 용당의 해군부대로 피신해 있는 상황이었다. 오후 1시 반경 민관대책회의를 위해 15명 정도가 안철의 집에 모였다. 이곳에는 목포시장 이병래, 목포대학장 오창환, 교회 목사, 엠네스티 간부, 그리고 학생 대표 등이 참석했다. 경찰서장은 끝내 오지 않고 대리인을 보냈다. 안철은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제기다. 첫째, 무정부상태 속에서나마 치안은 유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민이 협력해야 한다. 둘째, 광주시민 학살만행을 규탄하고 군부와 유신잔당의 정치적 음모를 폭로하여, 민주헌정 수립을 촉구하기 위한 시민들의 평화적 의사 수렴 및 주장의 실천을 위해 시민들 스스로, 시민의 이름으로 궐기대회를 갖도록 해야 한다. 셋째, 위의 내용들이 실행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71) 이날 아침까지는 학생층과 안철 등 일행은 서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양지문은 이즈음 서울에 머물고 있다가 5월 14일 자신의 숙소에 들이닥친 경찰을 간신히 피해 광주로 갔다가 5월 18일 광주 상황을 보고, 목포에 내려왔다고 한다. 72) 양지문의 증언( )에 의하면 이후 목포 항쟁 지도부에서는 모두 6차례에 걸쳐 유인물을 만들어 살포하였다고 한다. 이 가운데 2종만 현재 전해지고 있다. 5 18민중항쟁 85

88 1 이 시간 이후 사태에 개입한 데 대해 추후에 정치적, 법적 책임을 묻지 말 것, 2 계엄군이 목포에 진입하면 엄청난 유혈사태가 예상되므로 시장은 계엄군의 목포 진입을 중지토록 요구할 것, 3 시장은 시위 학생, 청년들에게 대용식을 제공하고, 역 광장에 방송시설을 준비할 것, 4 시내에 있는 모든 식량은 외부방출을 중지하고 비축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한편 관측은 비폭력시위를 강조하면서 무기의 회수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양측은 1 시위대의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한다, 2 목포대학장은 연설을 통해 평화적 시위를 유도한다, 3 시장은 계엄당국에 비폭력시위는 인정하도록 건의한다는 3개 항에 합의를 보았다(목포시, 1980 ; 7). 한편 안철은 이 자리에서 투쟁은 평화적으로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질서를 되찾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기구와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를 위한 기구로서 수습대책위원회 를 구성하기로 하고, 위원장 책임을 안철에게 맡겼다. 이날 회의에는 양지문 한봉철 김준모 등 학생 3명도 연락을 받고 참여했는데, 이들은 수습대책위의 명칭이 옳지 않다고 반발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또 재야 운동을 해온 김상옥이 정당에 관계하는 정치인들의 참여는 뒷날 정치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정당인들이 나가버렸다고 한다. 결국 수습대책위는 재야파인 엠네스티 목포지부와 청년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안철 등은 회의를 마친 뒤 목포역으로 가서 2층에 본부를 차렸다. 이어서 그들은 역 광장에서 시민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수습대책위의 결성을 발표하고, 대책위 주최의 1차 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안철 증언, ). 이 자리에서 안철과 오창환 목포대 학장이 연설을 했으며, 시장은 불참하였다. 목포대 오창환 학장은 질서를 유지하고 평화적으로 시위를 전개할 것을 호소하였다(목포대학교, 2000 ; 767). 이어서 안철은 광주시민 학살은 자유 시민을 억압하던 유신독재 잔당들과 군인들의 정권욕이 결탁하여 빚어낸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반역사적, 반민족적 음모에서 비롯된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김대중 선생은 자유투사이고 민주주의 선봉자인데 용공분자로 모는 것은 부당하므로 즉각 석방하라 고 요구하였다. 당시 김대중은 목포 시민들에게는 희망의 상징 이었다. 안철은 또 목포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경찰에 맡길 수 없으니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 고 말하고, 시민 스스로 치안대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시위대의 무기는 모두 수습대책위원회에 반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평화적 투쟁을 주장하면서, 희생이 필요할 경우 자신이 앞장서겠다고 말하였다. 궐기대회 후 시민들은 시가행진을 하였으며, 시민들은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였고, 식량 확보를 위해 성금이 모금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민들의 일치된 협조는 27일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수습대책위가 아직은 시위대를 완벽하게 통제한 것은 아니었다. 22일 오후 무장 시위대 1백여 명은 대형소방차, 해군 지프차, 교회 버스 등에 분승하여 법원, 검찰청 등의 공공건물을 파괴했다. 이들은 평소 법원과 검찰청에 불만이 많았던 이른바 불량배 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8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89 이에 청년학생투쟁위쪽 학생들은 일차 시가지 시위가 끝난 오후 4시 이후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에는 계엄군이나 경찰관이 대치하고 있지 않은데, 여러분이 공포를 쏘고 다니면 시민들이 오히려 불안감을 느낀다 며 무장시위대의 카빈총과 MI총을 회수하고자 하였다. 그런가하면 시장과 보안대장 쪽의 협조 요청을 받은 JC(목포청년회) 회원들도 총기 회수에 나섰다. 하지만 JC는 오랫동안 친정부적인 입장을 취해온 단체였기 때문에 시위대는 그들에게 총기를 잘 내주지 않았고, 시민들도 반발하였다. JC측은 결국 두 시간 정도 만에 총기회수를 단념하고, 회수한 총기들을 청년학생투쟁위 쪽에 넘겨주었다. 이날 목포역 광장에서 회수된 총기는 모두 1천 여정에 달했다. LMG도 2정이 있었고, 다이너마이트도 20상자나 나왔다고 한다. 실탄은 1천여 발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청년학생투쟁위쪽은 총기를 분류하여 쓸만한 230여 정의 총기만 보관하고, 나머지 사실상 쓸모가 없는 830여 정의 총기는 군 부대에 반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230여 정의 총기는 목포역 건물 안의 창고로 옮기고, 나머지 800정 정도의 총기를 반납하게 되었다. 반납을 위한 연락을 JC회장 이형래가 나서서 취하였으며, 이날 밤 9시 반 경 청년학생투위의 40여 명의 학생들이 무장을 갖춘 채 두 대의 트럭에 총기를 싣고 여객선터미널 쪽에 나가 군 부대(목포 제3해역사)에서 온 배에 총기를 실어 이를 반납하였다고 한다(양지문 증언 ). 한편 이날 밤 목포 시민들은 다시 목포역에서 궐기대회를 갖고 야간 횃불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런데 밤 11시경 목포역에 방화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사복 군인의 소행이었다. 시민들이 그를 붙잡아 구타하였으며, 그는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날 저녁 목포 시내 초 중 고등학교에는 모두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졌다. 한편 이날 밤 수습대책위원들은 회의를 갖고 다시 명칭에 대해 논의하였다. 학생들이 명칭과 조직에 대해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수습대책위원회는 목포시민민주투쟁위원회 (이하 시민투 )로 이름을 바꾸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자리에는 시장이나 목포대 오창환 학장은 참석하지 않았고, 주로 목사와 엠네스티 관계자들, 그리고 학생대표만 참석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시민투의 구체적인 조직은 아직 짜지 못한 상태였다(양지문 증언 ). 2) 발전기 : 5월 23~25일 5월 23일 22일 목포시민민주투쟁위원회가 구성된 이후 23일부터 집회와 시위는 훨씬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오전 8시부터 시민들이 목포역 앞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휴교령으로 학교에 가지 못한 중고생들도 이날부터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오전 8시경 1만이 넘는 시위대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4백여 개의 횃불과 150개의 피켓을 들고 시가행진에 나섰다. 오전 10시에는 제2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기대회가 목포역 광장에서 열렸다. 안철은 이날 궐기대회에서 오창환 목포대 학장과 정권모 목사에게 연설을 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5 18민중항쟁 87

90 목포청년회의소(JC)는 전날 앞장서서 총기를 회수 반납한 데 이어 이날 집회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목포청년회의소는 집회를 위한 연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트럭을 제공하는 듯 위장하여 위원장 안철이 트럭 위에 올라가자 트럭을 움직여 그를 납치하려 하였다. 이에 시민들이 이를 가로막아 납치 기도는 좌절되었다. 한편 오창환 학장은 집회에 나오지 않았고, 정권모 목사는 안철에게 대신 연설을 하라고 권유하여 결국 안철이 30분 정도 연설을 하였다. 안철은 이날 연설에서 더 이상 김대중 선생을 탄압하지 말라. 김대중 선생은 우리 목포시민이 30년 동안 탄압받으면서 탄생시킨 목포가 낳은 이 민족의 지도자다 고 주장하였다. 정권모가 쓴 성명서는 강수복이 낭독하였다. 우리 겨레와 세계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 결의문 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리 목포시민들은 지난 5월 18일 광주에서 빚어진 살육 참상을 보고 듣고 확인했다. 거세되지 않은 자유 시민임을 자부하는 우리들은 이제, 오늘의 광주 목포 사태를 보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우리의 뜻을 한 데 묶어 우리 겨레와 세계 자유민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우리는 지난 며칠 동안의 광주 사건을 조직적으로 감행된 변명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양민 학살로 본다. 그날의 광주시는 흡사 인간도살장이었다. 80만 시민이 숨쉬는 도심지에 공부특전대를 투입한 사례를 어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1. 우리는 이번 광주 목포 사태를 통해서 이 나라 이 민족 우리 시민은 총칼 등 어떠한 폭력적 탄압으로 억압한다고 해서 눌러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았다. 녹슨 쇠고리이고 폭압정치의 흉기인 비상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 1. 이유없이 두절된 통신 기차와 정규노선 버스의 차단은 자유시민을 굶겨 죽이려는 포위공격으로 볼 수밖에 없다. 통신과 교통수단을 이 시간부터 정상화시켜라. 1. 피값은 외상이 없다. 광주시민들이 흘린 피의 삯은 구체적으로 즉각 보상되어야 한다. 그 자유시민의 피값을 보상하기 위해 국정을 독점, 농단하는 정치적 폭력배들을 오늘 당장 몰아내고 민주헌정을 조속히 실현하라.(광주광역시5.18사료편찬위원회, 1997 ; 37) 이날 집회에서는 위원회 쪽 사람들만이 아니라 시민들도 자유롭게 연단에 올라가 연설할 수 있었다. 위원회 쪽에서 광주의 상황과 투쟁방향을 말하면, 광주시민이 나와서 증언을 하기도 했고, 학생들도 연단에 올라 자기주장을 폈다. 시민 중심의 집회가 되어 간 것이다. 이날 우리가 조금씩이라도 식사를 준비해서 시위대에게 주자 는 안내 방송이 있은 후, 먹을 것과 성금이 답지했다고 한다. 이날 집회가 있은 후 시가행진이 전개되었다. 시가행진은 목포역-1호광장-목포여고-죽교동- 북교국민학교-남교시장-무안동-구 경찰서앞(현 초원호텔앞)-항만터미널-선창-대한통운- 목포역으로 되돌아오는 코스에서 진행되었다. 시위대는 행진하면서 비상계엄 해제 등의 구호를 8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1 외쳤다. 그런데 목포청년회소(JC) 측은 차량으로 시위대를 따라다니면서 질서를 지킵시다 등의 구호를 방송하면서 시위행진을 방해하였다. 이에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결국 청년회의소측은 이날 밤 시민민주투쟁위원회측에 사과하고 이후에는 일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이날 오후 3시 경에는 안철의 주도 하에 목포시민민주투쟁위원회(이하 시민투위 )의 세부 조직이 짜여졌다. 시민투위는 일반인들이 중심이 된 위원회와 집행부로 나뉘었다. 위원장은 안철이 맡고, 일반부 위원으로는 명재용(엠네스티 목포지부 운영위원), 박광웅(엠네스티 위원), 최형주, 김대유, 김상옥 등 엠네스티 등 재야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중심이 되었다. 73) 집행부에는 기획실, 총무(재정), 홍보(선동), 대외협력 등의 부서를 두었다. 집행부 위원장은 박상규(목포실업전문학교 2학년)가 맡았으며, 기획실장은 양지문(한양대 휴학생)이 맡았다. 총무는 황인갑(한신대 3년생)이 맡았고, 홍보(선동)는 한봉철(중앙교회 청년부 회장)이 맡았으며, 대외협력은 이진선(목포대생)이 맡았다(양지문 증언 ). 이들 집행부는 위원회에서 결정된 집회의 일정에 따라 실무를 준비하고 집행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안철은 매일 아침 최문을 통해 박상규에게 메모를 보내, 그날의 행사를 준비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집행부는 그밖에도 분향소 설치, 치안유지 등을 맡았다. 또 학생들은 시 중심가와 외곽 경비를 위해 경비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에게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40여 정의 총기가 지급되었으며, 경비대는 야간에는 경계근무를 서고, 낮에는 집회와 시위행렬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광주매일신문사, 1995; 372). 당시 집행부에 참여한 청년학생들은 20여 명이었고, 역전에 상주하던 인원들은 약 1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에는 예비군도 상당수 있었고, 이들 가운데 신원이 확실한 20 내지 40명 정도가 선발되어 무장을 갖추고 외곽에 나가 경계와 연락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양지문 증언 ). 이날 밤 8시부터는 태극기를 앞세운 횃불 행진이 이어졌다. 이날 시위대는 횃불 4백 개, 피켓 1백50여 개를 들고 목포 시가지를 누볐다. 이날 밤의 행진 코스는 이날 낮의 행진 코스와 같은 것이었다. 시민들은 이날 횃불 행진에 참여한 숫자가 수만 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목포의 인구는 22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24일 혹은 25일경 목포시내 고등학교 학생회장들은 목포고등학생 대표자협의회를 구성하였다고 한다(양지문 증언 ). 당시 고등학생들은 매일 수백에서 수천 명씩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5월 24일 이날 오전 10시 제3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시민들은 각 학교별, 동네별로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대회장에서 김대중을 석방하라 는 혈서를 쓰기도 73) 강수복(통일당원), 김길도(통일당원) 등은 정당인이라 하여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박광웅 증언, ). 그리고 이 명 단에 들어간 이들도 당시 자리에 없어 본인에게 미처 승낙을 받지 않고 이름을 넣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5 18민중항쟁 89

92 했다. 시민투위는 희생된 광주시민 영령들을 위한 분향소를 목포역에 설치하여 시민들의 분향을 유도했다. 또 시 행정당국에 경찰과 공무원은 정상근무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 경찰은 시내에 나오지 말 것, 교통경찰만 시내버스 운행을 도와줄 것 등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시내버스가 일부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날 밤 목포경찰서장과 정보과장은 안철을 집으로 찾아와 시위 종결을 요구했다. 하지만 안철은 광주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평화적인 방법으로 계속하겠다며 이를 거절했다(안철 증언 ). 5월 25일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안철 등 시민투위 집행부는 목포 각 교회 목사들에게 이날 낮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 기독교연합회 구국기도회를 열어줄 것을 요청했다. 교인들은 11시 각 교회별로 예배를 보고 12시에 역 광장에 모였다. 연동교회 교인들은 광주사태는 명백히 계획적, 조직적인 양민학살 사건이다. 피 값에는 외상이 없다. 즉각 보상하라 는 플래카드를 들고 나왔다. 이날 대회에서는 8절지에 가득 쓴 광주 시민혁명에 대한 목포지역 교회의 신앙고백적 선언문 이 채택되었고, 참석자들에게 유인물로 배포되었다. 그 주요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정의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 땅에 파종하고 가꾸는 일에 앞장서는 우리 목포지역 교회는 최근 광주 목포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의 물결, 이 사건이 역사 속에서 우리보다 먼저 가셔서, 주의 백성을 탄압하고 살육하는 오늘의 뿔 달린 짐승과 투쟁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 목포 교회는 교파적인 이해를 떠나 오직 앞서 가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단합된 믿음을 갖고 이 나라 자유 시민들과 전국 형제 교우들과 세계 자유우방을 향해 다음과 같이 고백 선언한다. 1. 최근 광주와 목포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시위 항거는 동학혁명, 3.1운동, 광주학생사건, 4.19와 명동 민주구국선언의 법통을 잇는 역사적인 시민혁명이었다. 1. 우리는 시위 군중에 의하여 방송국 건물이 불타는 자리에서 우리 하나님이 역사적 현장을 외면하고 있는 이 나라 언론인에 대해 분노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신문 통신 방송 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언론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더러운 노예로 만족했다는 지탄을 받지 않기 위해 광주 목포의 참상을 바로 보고 정확히 전달해주기 바란다. 1.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 시민들과 세계 교회 형제들은 소수 군벌독재자의 감언이설에 더 이상 속지 말고 우리의 아픔,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여 지쳐 있는 광주, 목포 시민들의 들을 밀어 주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기를 원한다(광주광역시 5.18사료편찬위원회, 1997 ; 69). 이 선언문은 우선 광주 목포의 5월 민주화투쟁을 동학농민혁명, 3.1운동, 광주학생운동, 4.19혁명, 그리고 1975년의 명동민주구국사건을 잇는 역사적 시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는 9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3 목포 민주화운동 지도부가 자신들이 참여하고 있는 항쟁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선언문은 당시 광주에서 나온 선언문들이 시민들의 투쟁소식을 알리고, 또 투쟁을 선동하는 데 주력했던 것에 비해, 5월 민주화투쟁의 역사적 의미를 짚고 그 정당성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고자 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명서도 23일의 결의문과 마찬가지로 정권모 목사가 집필한 것이었다(안철 증언 ). 이날 집회에서는 목포에서는 유혈사태는 없어야 하며, 이를 위해 목포 YMCA에서 책임지고 무기를 회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편 이날 오전 광주에서 광주 상황을 전하기 위해 목포로 온 이들이 있어, 이들을 중심으로 이날 오후 2시부터 광주사태 현장보고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26일 목포에서도 사진과 유인물들을 챙겨 광주로 학생들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광주로의 진입로가 모두 막혀 광주 진입은 좌절되었다(양지문 증언 ). 3) 정리기 : 5월 26~27일 5월 26일 오전 10시부터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제4차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날 낮에는 비가 내렸다. 시위의 열기를 식히는 비였다. 오후 4시에는 시민투위의 운영위원 회의가 열려 향후 방향을 논의하였다. 운영위원들은 광주에 계엄군 진입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접하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시민투위 운영위원회는 계엄군의 광주 진입에 맞추어 목포의 시위도 종결하기로 결정하고, 모든 상황 정리를 위원장인 안철에게 위임하였다. 안철은 상황 종료에 앞서 마무리 투쟁을 위해 이날 저녁 8시부터 수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3차 횃불 시위를 시가지에서 전개하였다. 광주에서는 이날 밤 윤상원 등 시민군이 계엄군 진입을 예상하면서 최후의 밤을 맞고 있었다. 5월 27일 이날 새벽 6시 계엄군은 광주에 진입하였고 시민군은 진압되었다. 이 사실은 방송을 통해 목포에도 전해졌다.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날보다 일찍 목포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전 9시, 시민투위의 일반부 위원들은 목포역 앞 세기다방에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사태의 마무리를 위한 집회 및 시위를 예정대로 갖기로 하고, 변인석이 궐기사를, 김인채가 광주사태 진상보고를, 박승태가 결의문 낭독을, 강수복이 만세삼창을 하기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9시 30분경 계엄사는 헬기 2대로 시내 상공을 돌면서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해산을 종용하는 방송을 했다. 오전 10시 시민투위는 마지막 궐기대회를 목포역 광장에서 열었다. 오전 11시 30분경 목포역의 상황실에는 12시까지 자진해서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 진압하겠다는 통첩이 전달되었다. 시민투위 지도부는 마지막 궐기대회와 시가행진으로 시위를 종결하기로 하고 대회를 진행시켰다. 이날 궐기대회에서는 우리 겨레와 세계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 결의문(2) 이 채택되었다. 결의문 5 18민중항쟁 91

94 가운데에는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광주사태의 책임자를 남김없이 처단하라 광주 및 목포 사태는 시민혁명이다 위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피의 항쟁을 계속 한다 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74) 궐기대회가 끝나고 2만여 시민은 시가행진을 하였으며, 오후 3시경 집행부는 일단 시위를 종료하였다. 그러나 집행부의 청년학생들은 이와 같은 해산 방식에 불만이었다. 이들은 며칠이라도 더 버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전 10시의 회의에서 이와 같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민투위의 위원들은 오후가 되면서 대부분 피신하였다. 그리고 집행부 학생들 가운데에서도 일부는 오후에 피신하였다. 결국 지도부는 10여 명의 집행부 학생들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역 광장에는 아직 시민들이 해산하지 않고 모여 있었다. 집행부는 이날 밤 횃불시위를 다시 시도하였다. 마지막 횃불시위 역시 수만 명의 인파가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러나 시위 후 목포역에 남은 사람은 크게 줄어들었다. 계엄군측은 속속 진압 통보를 해왔다. 이때까지 남은 10여명의 학생 집행부는 최후까지 싸우기로 결의하였지만 역전에 모였던 시민들은 대부분 돌아가고 고등학생 2천여 명만 남은 상황이었다. 결국 집행부는 항쟁의 지속을 포기했다. 고등학생 대표자 협의회 학생들은 집행부의 대학생들에게 자신들이 다시 시가지 시위를 하는 동안 이에 섞여 있다가 피신할 것을 권유하였다. 망설이던 집행부는 결국 그 길을 선택하였고, 새벽 1시 경 수천 명의 고등학생들이 다시 시가지 시위를 전개하는 가운데 집행부의 청년학생들은 이에 섞여 있다가 자연스럽게 피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가지 시위가 끝난 뒤 일부 고등학생들은 다시 역전으로 돌아와 역 주변을 청소하다가 역 주변을 포위해 온 사복경찰과 보안대원들에 체포되었다고 한다(광주매일신문사, 1995 ; 378~379). 이로써 1주일간 진행된 목포의 5월 민주화운동은 그 막을 내렸다. 2절 화순지역의 항쟁 광주에서 온 시위대가 화순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5월 21일 오전이었다. 이들 시위대들은 3일간에 걸친 광주에서의 항쟁으로 인해 몹시 격앙된 상태였다. 이들 시위대들은 광주에서와 마찬가지로 화순에 들어오면서 각 지역에 있는 지서나 예비군 무기고를 공격하고 있었다. 경찰들의 기록에는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들이 잘 나타난다. 즉 21일 12시 16분 파출소 방화, 13시 50분, 예비군 무기고, 14시, 능주지서, 동복지서, 예비군 무기고, 14시 30분, 한천지서 및 한천 예비군 무기고(전남도경, 상황일지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시위대를 향해 지역민들은 적극 호응하고 있었다. 21일 12시 36분, 버스 4대가 화순읍 도착했으며, 읍민들의 박수갈채 속에 74) 안철의 재판기록 참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87c ; 610) 9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5 하차하여 중앙파출소에 방화하고, 2대는 광주 및 동면 방향으로 향발(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했다는 기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던 5월 21일 오후 2시 30분 광주에서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숨가쁜 소식이 광주에서 달려온 시위대에 의해 화순지역에 전해졌다. 이들 시위대는 발포하는 계엄군에 저항하기 위하여 무기를 구하러 온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화순 지역민들은 곧바로 시위대에 합세하였다. 그리고 화순경찰서로 달려가 무기고를 부수고, 그곳에 있던 총과 수류탄, 소량의 총알 등으로 무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당시 경찰들은 시위대를 피해 이미 몸을 숨긴 상태였으며, 따라서 경찰서의 무기고를 지키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 무기의 대부분은 획득된 즉시 광주지역의 시위대에 전달되었다. 한편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의 일부와 화순 지역민들은 또 다른 시위대를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이들 시위대들은 화순군 내 전 지역을 돌면서 시위를 전개하는 한편 무기를 구하러 다녔다. 이들 시위대들에 의해 역청공장, 동면지서, 남면지서, 화순역전 지서, 사평지서, 이양지서, 능주지서 등의 무기고가 열렸으며, 그곳에 있던 무기들이 광주지역의 시위대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렇지만 그다지 많은 무기를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경찰당국도 대비를 했었는지, 대부분의 지서에서는 이미 무기를 치워버린 상태였으며, 다만 역전 앞 지서에서만 약간의 무기가 나왔다고 한다. 화순지역에서 획득한 무기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폭약이었다. 그래서 화순 경찰서 무기고에서 무기 40여 정을 획득한 시위대들은 15시 5분 경, 화순광업소로 향하여 이동하였다. 이들은 동면에 있는 화순광업소를 방문하여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전하는 한편 시위에의 동참과 무기를 제공해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시위대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광부들은 이들의 요구에 적극 호응하였고, 시위대들은 광부들의 협조 속에서 다량의 TNT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15시 35분부터는 이들 시위대가 무기를 전달하기 위해 광주 쪽으로 이동하였다(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 계엄당국 자료에는 이 과정에서 예비군과 시위대가 충돌했으며, 광업소가 폭파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화순지역에는 세 개의 회사 소유 탄광을 비롯해서 여러 개의 탄광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무기가 나온 곳은 화순광업소 하나였다. 아마도 사전에 회사 혹은 정부당국의 조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화순광업소에서 나온 무기의 양은 다이나마이트 10상자(약 1,000개)와 소총 몇 자료였다. 이곳에서 획득된 다이나마이트는 그 직후 도청에 설치되어 항쟁 전 기간 동안 시민군에게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최종 무기가 되었으며, 계엄군에게는 작전의 성공을 위협하는 골치 아픈 무기가 되었다. 한편 이날 저녁에는 일단의 화순 지역민들이 화순읍 유천리에 있는 예비군 대대본부를 방문하여 총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무장 시위대 700여 명이 17시 57분 경, 화순 예비군대대로 5 18민중항쟁 93

96 접근(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하기 시작했으며, 19시 20분에는 시위대 50여 명이 칼빈 및 실탄을 휴대하고 대대 무기고로 진입(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대대장이 부대에 있는 총과 병력은 화순지역의 방위에만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하였고, 이런저런 논란 끝에 결국 시위대가 물러나면서 상황이 종결되었다. 또 그날 저녁에는 화순 출신 청년들로 구성된 일단의 시위대가 화순군내 각 지서를 돌아다니다가 나중에는 승주군까지 진출하여 송광지서에 이르렀고, 계속해서 밤 11시 경에는 화순 북면지서에 도착하여 무기를 획득한 후 철야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시위 도중 순천지역은 계엄군이 지키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송광지서까지만 진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차량시위를 전개하면서 화순군 사평지역으로 가기 위해 철동마을 앞을 지날 때 두 명의 학생들이 여수 돌산에서 가져왔다는 다이나마이트(당시 픽업트럭에 실려 있었다고 함)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계받기도 했다 75). 인계받은 다이나마이트 중 일부는 일행 중 광부였던 사람의 도움으로 잘라서 개인용 무기로 조립하고, 나머지는 22일 새벽 4시경 계엄군이 주둔하고 있던 너릿재를 넘어 지원동 부근에서 광주지역 시민군에게 전달하였다. 당시 공수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너릿재를 차량으로 통과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다름 없었으나 왠일인지 이들 차량에는 총격이 가해지지 않아서 무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시위대의 움직임과는 달리 화순지역에서는 무기를 회수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일부 주재기자들과 청년회, 경찰, 예비군 중대장 등으로 이루어진 이들 무기회수파는 무기 유출이 가져올 파장을 두려워하면서, 최초 화순경찰서 무기고가 습격받을 때부터 적극 개입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신원이 확실한 화순지역 청년들에게만 무기를 나누어주면서 계엄군으로부터 지역을 방위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 무기들을 다시 회수하여 만년사 입구 동구리 저수지 부근 산 속에 감추기도 했다. 이들 무기들은 지역민들의 반발로 다시 시민군 측에 회수되었다가 군청 앞 광장에서 또 다른 총기 회수세력들에게 회수당했다. 22일이 되면서 화순과 광주를 잇는 너릿재의 경비가 강화되었으며, 이동하는 차량들은 모두 군의 집중사격을 받게 되었다. 22일 13시 16분, 화순에서 광주로 1/4 찦차를 타고 진입하던 시위대 2명이 그곳을 경비하던 7공수 부대원들의 집중사격을 받아서 1명은 현장에서 사살당하고, 1명은 체포되었으며, 차량은 전복되는 사건(합참, 상황보고철 )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주남마을 학살사건 으로 알려진, 광주 쪽에서 너릿재고개로 가는 도중에 있는 주남마을 앞 도로에서 지나가던 버스에 계엄군이 총격을 가해 17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사망하고, 여고생 1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23일 13시 경이었다. 유사한 사건이 여러 건 발생했으며, 이제 광주와 화순은 군의 총격으로 인해 통행이 완전히 차단된 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전날 도청이 함락되고 광주지역이 계엄군의 포위망에 의해 고립되었기 때문인지 75) 당시 여수 돌산에서 다이나마이트를 광주로 보냈다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이 다이나마이트의 출처는 아직 분명치 않다. 9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7 화순지역에서도 더 이상의 사태진전은 없었다. 너릿재 고개는 강화된 계엄군에 의해 차단되었으며, 화순지역도 평상시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만 주민들이 수 십명 씩 모여 서로간에 정보를 교환하거나 계엄군을 성토하는 자리만 연일 마련되었다. 그러한 움직임은 주로 화순경찰서 앞 사거리와 군청 앞 광장, 역전 광장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화순지역 출신의 사망자는 12명 정도로 추정된다. 항쟁이 끝난 후부터는 경찰을 중심으로 주모자 색출 및 그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화순지역은 무기가 많이 반출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경찰들의 보복성 압박이 심했던 곳이다. 당시 대부분의 관련자들은 체포된 이후 먼저 화순경찰서에 수감되었는데, 이곳에서 자행된 구타와 고문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형사 등 세 명의 경찰이 1990년대 중반 피해자들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3절 나주지역의 항쟁 광주에서 볼 때 나주는 접근성이 매우 좋고, 도로 주변에 인구가 많은 면소재지가 이어지고 있으며, 전남 서남부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항쟁의 확산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그래서 21일 오전부터 수많은 시위대들이 나주지역으로 몰려왔다. 군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면 아래와 같다. 21일 10시 43분에는 100여 명의 시위대들이 광주고속 1대 등 차량들을 타고 나주 금성파출소 앞에 집결(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해 있었다. 10시 45분 경에는 1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남평지서 앞에 집결되어 있는 버스 20대의 유리창을 부수고 남평읍을 돌며 동참을 호소하고 있었으며, 트럭에 탄 20여 명은 나주와 영산포를 오가며 동참을 호소하고 있었고, 그 외 40여 명의 시위대는 광주고속 버스 1대에 타고 목포를 향해 출발(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하였다. 11시 20분 경에는 20여 명의 시위대들이 타이탄 1대로 나주와 영산포 사이를 오가면서 시민들에게 선전활동을 하고 있었으며(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11시 23분에는 광주에서 내려온 차량 6대에 승차한 200여 명이 선전활동 후 광주로 돌아가기도 했다(합참, 상황보고철 ).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나주지역의 급박한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들 시위대들에게 나주지역민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으며, 나주지역민들의 시위 동참으로 시위대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광주에서 계엄군의 집단 사격이 발생하고, 그 소식이 전해진 5월 21일 오후 2시 반부터 상황이 험악해지고 있다. 이들이 무기를 획득하려고 경찰서와 지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 시위대들은 먼저 나주경찰서와 나주읍 금성동 파출소로 몰려 가 자신들이 타고 온 차량으로 무기고 문을 부순 다음, 그곳에 보관 중이던 카빈 소총, M1 소총, 실탄 등을 획득하였다. 또 예비군 대대본부의 무기고로 몰려가서 문을 부순 다음 기관총을 비롯한 각종 총기와 수류탄을 획득하였다. 5 18민중항쟁 95

98 군이 파악한 당시의 상황도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즉 21일 14시 30분, 나주경찰서 외 4개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의 총기가 피탈당했으며, 버스 7대에 분승한 시위대들이 광주방향으로 오면서 총을 쏘고 있고, 나주경찰서의 총기 피탈 현황은 칼빈 780정, M1 235정, 실탄 46,400발, 38구경 12정, 4.5구경 16정(합참, 상황보고철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획득한 무기로 무장력을 갖춘 시위대는 나주군 노안면, 산포면 등지에서 차량시위를 하다가 당일 오후 5시 경 그 중 일부가 획득된 무기를 싣고 광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머지 시위대는 나주지역, 영암지역, 강진지역, 해남지역 등지를 돌아다니며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 소식을 전달하는 한편, 각 지역에서 항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다녔다. 전술한 바 있지만, 나주지역은 지리적 위치 상 전남의 서남부지역과 광주를 잇는 거점지역이다. 그래서 광주지역의 시위대가 항쟁에의 동참과 무기를 구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찾아든 곳도 나주지역이지만, 전남의 서남부 지역에서 항쟁에 동참하려는 사람들이나 획득된 무기를 광주로 가져가려는 사람들 역시 나주를 지나야만 광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21일 밤부터 22일 사이의 나주읍 내는 수 천명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시위대들에게는 인근 아주머니 등 지역민들이 자발적으로 김밥 등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였다. 수 십대의 차량들이 서로 얽히는 혼란 속에서 나름대로 질서를 유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즉 나주지역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차량이 나온 지역별로(광주, 나주, 함평, 영암 등) 차량을 구별한 다음, 해당 지역별로 차량에 번호를 부여하면서 전체적으로 관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 일을 했던 사람의 기억에 의하면, 차량에 번호를 붙이다가 너무 많은 차량 수와 통제의 어려움 때문에 작업을 중단했다고 하는데, 자신이 번호를 붙인 차량 수는 총 48대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48대보다 훨씬 많은 차량들이 시위에 동원된 것이다. 또 다른 증언자에 의하면, 당시 나주지역에서 시위대들이 타고 다닌 차량을 대 이상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들 차량들이 주로 근거지로 활용한 곳은 나주경찰서 입구 삼거리와 군청 앞 광장, 남문 광장 등이었다. 한편 나주지역에서도 무기회수의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비군중대장을 비롯한 몇 몇 인사들이 어린아이들까지 총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대략 23일부터 무기 회수를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총기의 남발로 지역이 안전이 훼손될까 우려하였다고 한다. 지역방어의 논리와 함께 사태의 진전에 대한 불안감이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 선에서 일부 지역인사들은 나주읍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경계근무를 서기도 했다. 당시 이들의 움직임은 상당히 조직적이었다. 이들은 군청 입구에 있는 한 건물(대림상회 자리)을 본부로 하고, 세 명을 1개 조로 하여 요소요소에서 경계근무를 섰다. 또 이들은 상호간에 암호를 정하거나 경계근무지에 차량이 접근할 때에는 라이트를 끄게 하는 등 주로 군에서 사용하는 행동양식을 차용해서 자신들의 행동규칙을 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23일 경까지 유지되었다. 나주읍을 벗어난 지역에서는 여전히 시위대와 계엄군의 대결구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9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99 군이 광주를 비롯한 도로의 곳곳을 봉쇄한 상태에서, 그리고 항쟁의 동력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시위대 역시 약화되고 있었다. 23일 07시 50분, 나주에 집결 중인 시위차량 5대가 봉황을 거쳐 화순쪽으로 이동 중이고, 4대는 해남으로 출발하였으며, 나주에는 100여 명의 시위대가 운집(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해 있었지만, 그것이 마지막 위력 시위였다. 23일 11시 10분, 산포에서 나주로 가던 버스 1대, 타이탄 1대에게 접근 바리케이트를 치던 병력이 정지를 명하자 차를 회전 도주하려는 것을 대대장 명에 의해 타이어를 사격하여 정지시키고 시위대 15명을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이제 시위대의 힘이 계엄군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게 된 것이다. 결국 광주지역의 분위기가 잠잠해지고, 모든 간선도로가 계엄군에 의해 통제되면서 나주지역의 시위열기도 점차 사그러들고 말았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나주군에서 실시한 대청소였다. 나주에서는 24일 06시-07시 사이에, 군 부대의 운용 하에 예비군 대대가 주관하여 나주군 대청소를 실시하였다. 무기 수색이 주요 목적이었다고 하지만(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항쟁이 한창이라면 이러한 행사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주는 23일 오후를 넘어서면서 평상시의 상태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4절 해남지역의 항쟁 해남에 첫 시위대가 나타난 것은 5월 21일 오후로 시위차량의 첫 차에는 여학생이 타고 있어서 지역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들 시위대는 교육청 앞 광장을 중심으로 광주지역에서 발생한 처참한 소식을 전하면서 해남 지역민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당시 해남 지역민들 역시 가까운 지인이나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던 상태였고, 또 정부나 계엄당국에 대해 울분을 느끼던 상태였다. 그래서 해남 지역민들은 시위대에 적극 동조하였다. 이들은 먼저 군청 소유의 덤프트럭을 타고 인근 군부대를 찾아가 무기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들 시위대들을 만난 군 부대장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당시 이미 해남경찰서는 광주지역 시위대와 함께 대한통운 트럭을 타고 온 함평 출신 시위대들에게 무기를 빼앗긴 상태였다. 당시 해남지역의 상황에 대해 검찰청 보고라인에서는 21일 오후, 버스 4대와 트럭 2대에 분승한 시위대들(총기 소지)이 옥천지서에서 총기를 다량 획득한 다음 해남경찰서로 갔다가 해남 관내에서 1박하고, 강진, 장흥, 성전면, 영암 등을 거쳐 광주로 가고 있다(광주지검, 광주사태 당시 학원동향 )고 보고하고 있다. 군부대의 거부로 더 이상의 무기를 찾지 못한 시위대들 중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무기를 찾아 나섰다. 해남에 온 시위대와 해남 자체에서 봉기한 시위대 및 차량들(광주고속 버스, 완행 버스, 트럭 및 그 외 여러 가지 형태의 차량)이 모두 모여서 찾아 간 곳은 완도 방향이었다. 21일 22시 경, 5 18민중항쟁 97

100 시위대 중 일부인 200여 명이 차량 4대에 나누어 타고 무기 및 동참자를 구하기 위해 완도로 갔던 것이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이들은 완도로 가는 도중에 화산면, 현산면, 월송면, 남창면 등의 지서에 들어가 무기고를 열어봤는데, 무기를 찾지는 못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들 시위대는 밤에 완도에 도착하였는데, 완도군민들의 호응 역시 좋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무기를 찾을 수는 없었고, 다만 완도사람들이 일부 시위대에 합류하는데 그쳤다. 이들 시위대는 또 다시 무기를 찾아 진도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다가 시위대는 버스를 가지고 완도로 내려오고 있던 완도 출신 청년을 만났는데, 그 버스 안에는 광주에서 갖고 온 총기들이 실려 있었다. 그 청년이 해남 인근에서 만들어진 시위대들에게 칼빈 소총 12-24정을 주었으며, 이 무기들로 해남 시위대는 무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탄은 없었다. 이 시위대들은 무기를 찾아 여러 곳을 헤매었지만 더 이상의 무기를 찾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밤이 깊어지자 이들 시위대는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대흥사로 갔다. 대흥사에는 여관이 많기 때문에 잠자리와 먹을 것을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시위대의 차량은 7-8대 가량(버스 3대, 기타 트럭 등)이었다. 대흥사 인근 주민들의 호응도 좋았다. 이들 시위대들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 속에 광주여관과 안흥여관, 유선여관 등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수건과 김밥, 요구르트, 음료수 등을 얻어서 다음날인 22일 아침 광주로 향하였다. 이들은 해남읍에서 한 차례 선전활동을 펼친 다음 강진으로 갔다. 강진으로 간 이유는 강진농고생들을 시위에 합류시키려는 목적에서였지만, 그 목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이들 시위대는 강진읍을 거쳐서 강진군 성전면과 영암군 지역, 나주군 등을 거쳐서 광주로 향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시위대들이 준 총기와 실탄으로 어느 정도 무장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나주에는 수많은 시위대들이 집결해있었는데, 해남시위대는 광주로 진입할 것을 결정하고,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송정리와 남평 쪽 모두에서 광주로의 진입이 저지당하자 이들 시위대는 군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해남지역 시위대는 타지역 시위대까지 합세한 채 무기를 구하러 해남으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해남지역의 군부대장이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정을 설명하면 무기를 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때 차량이 모두 53대였다고 한다. 이들은 해남에 도착한 후 먼저 해남지역 사람들에게 광주까지 올라갔다 온 이야기를 한 다음, 해남 사람들에게 같이 해남의 군부대로 가서 부족한 무기를 얻어보자고 설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22일 17시 30분에는 시위대 55명이 총을 발포하면서 해남경찰서를 점거(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또 19시 50분에는 해남경찰서를 점거 중이던 폭도들이 해남읍으로 진입(작전상황실, 상황일지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다수의 해남 사람들이 함께 군부대를 방문하였으며, 부대장과 무기 인수에 관한 협상을 시작하였다. 9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1 그런데 이때 위병소에서는 쌍방이 서로 총을 겨누고 있었으며, 공중에서는 한 대의 헬기 76) 가 선회하면서 지상의 군인들과 계속해서 무전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결국 무기인수는 실패하였으며, 시위대는 다시 해남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전개에 실망한 일부 시위대는 다른 지역으로 나가버렸으며, 남은 시위대들은 일단 해남중학교로 집결하였다. 해남지역은 전남 남부 해안지역에서 항쟁을 확산시키는 새로운 거점이었다. 지역민들이 항쟁에 가담하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시위대들이 무기를 구하고 동조자를 규합하기 위하여 인근 군 지역들을 돌며 시위를 전개하는 본부 역할을 하는 곳이 해남읍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위대들이 광주로 가는 출발지 역시 해남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점차 시위대에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광주로 들어가는 길은 막혔으며, 최초의 시기에 나타났던 저항의 동력은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이 무렵 갑자기 해남지역에 간첩이 내려왔다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소리였지만, 이로 인해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시위대 내부에서도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해남 군수가 시위대 대표들에게 회의를 하자고 제안하여 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군수, 지역 시위대 대표, 읍내 명망가, 군부대 부대장, 군 보안대장 등이었다. 여기서 군수가 일단 무기를 회수해야 되지 않겠냐고 하였고, 부대장은 간첩 침투 이야기를 하였다. 회의참석자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논쟁이 벌어졌지만, 결국은 총기를 회수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시위자들의 식사는 군수가 책임지기로 하였다. 이때까지 남은 차량 수는 약 20여 대였으며, 회수된 총기는 총 175정이었다. 그런데 총기회수 회의를 하고 있는 사이에 군인들이 강진에서 해남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우슬재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차량통행을 막기 시작했다. 이때 이미 군부대장(중령 장윤태)은 발포 명령을 받았다고 하였다. 군인들은 우슬재를 올라오는 산 중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산꼭대기에도 10 여명의 군인들이 배치되어 경계를 하고 있었다. 결국 23일 아침 우슬재에서 이들 군인들이 시위대 차량에 발포하여 수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또 해남에서 진도로 가는 도중에 있는 상등리 앞에서도 군인들이 발포하여 한 명의 시위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 해남에서 완도로 가는 길에 있는 안동리 군부대 앞에서도 한 명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군부대에서 시체를 부검한 의사에게 전해들었다는 한 증언자는 당시 군부대에 세 구의 시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해남지역에서 시위대들로부터 무기를 회수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이들 해남지역 시위대들은 정부와 계엄군에게 항의하는 평화적인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들은 지역주민들에게 페인트(스프레이 몇 박스)를 얻어, 전두환이 때려잡자, 신현확 총리 물러가라 등의 내용으로 프랑카드를 작성하여, 이것을 앞세우고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총기를 반납하면서, 그리고 광주지역의 사태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시위를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결국 이후에는 해남지역의 76) 군 당국은 22일 16시 10분, 해남 쪽으로 500MD 헬기 1대를 출동(작전상황실, 상황일지 )시킨 상태였다. 5 18민중항쟁 99

102 시위는 종료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5일 경에는 데모에 가담한 사람들을 잡아들인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결국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해남경찰서로 연행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이 상무대로 끌려가 상당 기간 구속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들 시위 참여자들 중 해남경찰서에서 고문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이는 항쟁 기간 동안 시위대들과 경찰을 비롯한 관료들 사이에 별다른 앙금이 없었던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해남지역의 시위대는 완도지역의 항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완도지역에는 21일 22시 50분 경, 버스 4대에 나누어 탄 시위대 200여 명이 도착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완도경찰서의 무기고를 부쉈지만, 그곳에 무기가 없자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 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또 21일 23시 40분에는 버스 2대, 찦차 4대에 나누어 탄 시위대들이 완도 원동검문소의 바리케이트를 부수고 진입하였으며, 22일 0시에는 이들 시위대가 완도경찰서를 파괴하고 있었다. 당시 현장에는 여 명의 시위대가 손뼉을 치면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그러나 완도지역에서 경찰서 등 관공서를 공격하던 시위대는 그날 밤 중으로 해남으로 이동하였고, 완도지역에는 더 이상의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3장 전남 시민군의 광주 진입 시도 전남지역에서 세를 불린 시위대는 21일부터 광주지역의 항쟁에 합류하기 위하여 광주로의 진입을 수 차례 시도하였다. 처음에는 군 부대가 도로에서 경비를 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량 통제를 하지 않았지만, 그 후 대략 21일 오후부터는 나주에서 광주로 들어가는 입구인 효천 근처의 야산과 남평 인근 고개 근처에 군인들이 매복을 하고 있으면서 지나가는 차량에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2-3대의 버스가 전복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또 화순 너릿재 부근에서도 지나가는 차량들은 총알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수 차례의 피해를 입은 후에는 그곳을 통해 광주로 진입하는 도로는 차단되었다. 22일 아침에 광주로 진입을 시도한 시위대는 송정리 쪽에서 형성되었다. 즉 22일 오전 07시 경, 버스 14대, 트럭 6대에 탑승한 시위대들이 송정리 역에서 광주 쪽으로 진입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시위대는 비행장 입구에서 통행을 저지당했으며, 이에 시위대들은 분산하여 송정리 방향으로 도주하면서 그중 일부 시위대들이 삼양타이어에 들어가 방화하기도 했다. 또 오전 08시 45분에는 학생 대표자 1명이 계엄군과 극락교를 통과시켜 달라고 요구하고 있으며, 9시 20분에는 시위대 500여 명이 버스에 탑승하여 비아지서에 산발적으로 사격을 가하기도 했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10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3 계엄상황일지 ). 한편 22일에는 전남 서남부지역에서 광주로 올라오는 시위대를 가로막는 군부대의 저지선이 남평 바로 아래에 있는 산포비행장도로 까지 확장되었으며, 그곳에서 군인들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모든 차량들의 교통을 차단하였다. 당시 그 곳에는 목포, 해남 등지에서 항쟁에 참여하려는 수백 명의 시위대가 수십 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올라오다가 행로가 막히면서 시위대와 시위차량의 집합소가 되고 있었다. 이들 차량들은 장갑차까지 앞세우고 시위대열을 막으려는 계엄군의 저지선과 대치하여 긴장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시위대의 빈약한 무력으로 계엄군의 저지선을 돌파할 수는 없었으며, 시위대들이 죽음을 무릎 쓰고 저지선으로 나아갈 동력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위대들은 남평-광주 간 도로를 포기하고, 나주 노안-송정리-광주 간 도로를 통해 광주로의 진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곳 역시 나주 노안에서 송정리역 사이의 도로와 송정리 비행장 경비 및 서창다리 경비를 담당하는 군부대에 의해 통행이 차단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을 뚫고 광주로 진입하려는 시도는 수 차례 반복되었다. 22일 14시 45분에는 태원여객 1대와 트럭 4대에 나누어 탄 시위군중들이 송정리에서 광주시내로 진입하다가 영산강사업소 앞에서 군경과 대치하였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또 같은 날 18시 45분에는 목포 평원여객 1대, 군 트럭 4대에 나누어 탄 시위대들이 광주로 진입하다가 영산강사업소 앞에서 군과 대치하기도 했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결국 이들 시위대들은 계엄군의 봉쇄망을 뚫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만을 남긴 채 물러나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나주 노안 쪽에서 송정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다리 밑으로 차량이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시위대들은 그 차량의 구조에 필요한 장비 지원을 군부대에 요청하였지만, 계엄군 당국은 그 마저도 거부하였다. 또 일부 시위대들은 비아 쪽으로 우회하여 광주로의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즉 24일 11시 경, 광산군 비아면에 있는 상동교를 통해 시위대들이 광주로 진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계엄군이 대치상황(합참, 상황보고철 )으로 되었고, 결국은 봉쇄되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시위대들은 오던 길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 시위대는 광주 진입이 실패하자 일부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22-23일 경까지 각 지방을 돌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군부대가 전남 내 각 지역의 교통을 통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결국 이들 시위대는 모두 자취없이 해산하고 말았다. 5 18민중항쟁 101

104 그림 2) 전남 타 시 군 참여자들의 광주진입 시도 4장 항쟁의 매개 지역들 1절 영암-강진-장흥-보성지역의 5 18민중항쟁 1) 영암지역 영암지역에 시위대가 들어온 것은 5월 21일(부처님 오신 날) 점심 무렵이었다. 이들 시위대는 신북 삼거리와 신북 터미날에서 광주 소식을 전한 다음 영암읍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때부터 신북에는 연이어서 차량시위대가 들이닥쳤다가 다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그들 차량에는 나주나 영암군 내 면지역에서 탑승한 경우가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날 오후 영암군 신북면 지서 무기고가 시위대에게 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21일 14시 30분에는 신북면 예비군 무기고가, 15시 20분에는 도포면 예비군 무기고가, 그리고 21시 50분에는 군서지서가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고, 무기를 빼앗겼다(전남도경, 상황일지 ).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다수의 신북지역 젊은이들이 시위대열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차량을 타고 광주로 갔는데, 그중 일부는 광주 진입에 성공하여 광주에서 시민군으로 10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5 활동하였지만 77), 그 외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입이 차단당해서 차량으로 영암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사태 전개에 의분을 느낀 13명 정도의 신북 젊은이들이 22일 아침부터 자체적으로 시위대를 조직하여 차량을 타고 영암 일원을 돌아다니며 무기를 구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군민들의 지지와 적극적인 참여를 확인한 이들은 시위대의 수가 점점 많아지자 오전 11시 경에는 영암군 군서면 지서에, 오후 2시 30분 경에는 학산면 지서에, 오후 6시 경에는 시종면 지서에 들어갔다.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한 것은 광주로 가져갈 무기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지서들은 타지역의 항쟁 소식을 전해들은 경찰들이 이미 무기를 옮겨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시위대가 이들 지서에서 무기고를 열었지만, 무기를 발견할 수는 없었고, 시위대는 무기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무기를 찾아 다니던 이들 시위대는 주민들의 제보로 결국 22일 7시 경 시종지서 뒷산에 은닉된 다량의 무기를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획득된 무기의 일부로 자체 무장을 하였으며, 그 외 대부분의 무기는 광주지역에 전달하기 위해 오후 7시 30분 경 나주읍 군청광장에 모여 있는 시위군중들에게 전달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시종지서 뒷 산 무기를 가져간 이들은 총알이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알고 실탄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실탄을 구하지는 못하였고, 대신 배고픔과 피로감이 이들을 엄습하였다. 그래서 이들 시위대는 주민들이 제공한 음식으로 공복을 해결하고, 신북국민학교에 들어가서 잠을 잤다. 다음 날인 5월 23일, 이들 시위대는 또 다시 실탄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오전 10시 경, 이들은 영암군 도포면 덕화리 저수지 근처에서 경운기에 실탄을 싣고 대피중이던 예비군 중대장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실탄 21,470여 발을 획득하였고, 이어서 경찰이 숨겨놓은 총기류 60여 정을 발견하여 자신의 트럭에 옮겨 실었다. 이들은 이렇게 획득한 무기들과 실탄들을 갖고 영암으로 가서 오후 2시 경부터 1시간 가량 읍으로 들어가는 입구 로터리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시위대들에게 실탄 1상자 씩을 올려주었다. 한편 영암읍에서도 시위대가 들이닥친 21일 오후부터 항쟁 분위기가 고양되기 시작하였다. 이날 영암읍에 온 시위대들은 오자마자 광주에서의 참상과 항쟁의 발발 소식을 전한 뒤 경찰서 무기고를 부수고, 그 안에 있던 20여 정의 총과 실탄 약간을 가져갔다. 이를 계기로 그 날 오후부터 영암읍 지역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항쟁에 참여하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서로의 참여 의사를 확인하면서 광주로 갈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군서면에 있는 도갑사에 버스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 시위대들은 즉시 버스를 가져와서 차량에 플래카드와 지역명을 부착하였다. 그리고 22일 12시 15분 경, 600여 명이 차량 18대를 나누어 타고 광주로 가기 위해 나주방향으로 이동하기 77) 항쟁 당시 광주로 올라가 시민군으로 활동하던 중 전사한 치운 이란 사람의 묘가 신북면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5 18민중항쟁 103

106 시작하였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일부 지역민들은 이들에게 시위과정에 사용하라고 돈을 갖다 주기도 했다. 당시 시위차량에는 광목에 페인트로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는 등의 구호를 적고 영암군이라고 쓴 플래카드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광주로의 진입이 계엄군의 저지로 실패하자 이들 차량의 대부분은 22일 오후 영암읍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시기 영암지역은 광주로 올라오는 시위 차량과 남해안 쪽으로 내려가는 시위 차량들이 통과하는 통로였다. 22일 15시 30분에는 영암에서 해남 쪽으로 수 미상의 시위대들이 버스 8대, 트럭 6대에 분승하여 이동하고(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있었다. 22일 19시 33분에는 경찰들이 숨겨놓았던 무기를 찾아 무장한 시위대들이 일부는 총기를 전달하기 위해 나주지역으로 가고, 다른 일부는 버스 3대를 타고 해남으로 진입하였다. 이들 중 40-50명의 시위대는 다른 지역으로 가지 않고, 영암경찰서 정문 앞에서 농성하기도 했다(작전상황실, 상황일지 ).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영암지역에서도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자체 방어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광주와 나주지역에서 강진과 해남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영암지역에는 총을 가진 외지인의 출입이 많았는데, 지역민들 중 일부는 이들 외지인을 경계한 것이다. 정식으로 수습위 등의 조직이 꾸려진 것은 아니지만, 지역 유지들(하대주, 김희규, 김무, 최충일)이 23일 오후부터 영암지역에 들어온 시위대들로부터 총기를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시위대를 영암국민학교로 데려가서 총을 회수한 다음, 시위대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의 일단이 군의 기록에 남아 있다. 즉 영암에서 23일 1시 30분, 농촌지도소에서 시위대 300여 명이 숙식하고 있는데, 지방청년들의 선무활동 결과 총기 정을 회수(합참, 상황보고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영암지역 역시 23일 오후부터는 평상으로 돌아갔다. 2) 강진지역 강진지역에서의 시위는 5월 21일 16시 경에 광주를 빠져나온 시위대가 3대 가량의 버스에 나누어타고 강진에 도착(광주지검, 광주사태 당시 학원동향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미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소상하게 알고 있었던 지역민들은 이들 시위대를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많은 군민들이 시위대열에 합류하였다. 당시 강진지역의 경찰들은 시위대가 도착하면서 도망가버렸고, 군부대 역시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진지역에서는 시위대와 진압병력 사이에 별다른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강진에서 항쟁을 지원한 세력은 강진읍 교회(목사 윤기석)와 기독청년회였다. 이들은 강진읍 교회에 본부를 두고 상당히 조직적으로 시위 및 항쟁에 참여하고, 지원하였다. 여기에 강진농고 학생들과 지역청년들, 심지어 청년회의소 회원들까지도 항쟁에 가세하였다. 이들 시위대들은 21일 17시 경, 강진경찰서를 공격하고 총기 100여 정을 획득하였다. 강진에서 10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7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이들 시위대들은 차량 5대에 나누어타고 19시까지 광주로 가야한다며 강진을 떠났다(광주지검, 광주사태 당시 학원동향 ). 하지만 강진군 내 면지역에서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21일 18시 55분에는 성전면 지서의 무기고가 시위대에 의해 공격을 당했으며, 무기를 빼앗기기도 했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성전면 지역은 영암과 강진 및 해남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던 관계로 시위차량의 출입이 빈번하였다. 이러한 시위는 22일에도 계속되었는데, 그러한 움직임의 공간적 중심은 터미날 부근이었다. 시위대들은 시위를 하다가 날이 저물면 강진읍으로 돌어와 교회에서 해준 밥을 먹고, 교회와 남도장 여관에서 잠을 잤으며, 이튿날에는 다시 시위를 나가는 식이었다. 이 무렵의 시위는 사실 나주- 해남간 도로와 나주-목포간 도로가 중심이었는데, 강진으로 들어온 시위대는 항쟁의 확산을 위해 장흥이나 보성지역으로 가기도 했다. 예를 들면, 22일 10시 30분, 해남 및 강진지역 시위대 200여 명이 버스 4대에 분승하여 장흥교도소 쪽으로 이동하였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는 기록이 있다. 한편 5월 23일 아침 해남 우슬재에서 군부대의 총격으로 두 명의 학생(나주 출신의 고등학생으로 알려져 있음)이 부상을 당해 강진도립병원에 입원하자, 강진교회는 이들의 뒷바라지도 담당하였다. 도립병원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은 사람은 없었지만, 항쟁 과정에서 다쳤다고 주장하는 환자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 부상자들은 2-3일 이후 상황이 악화되자 위험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두 병원에서 나가버렸다. 부상자들 중 우슬재에서 부상당한 두 명을 제외하고는 심한 총상 환자는 없었다. 강진지역의 시위 역시 5월 23일이 되면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물론 23일 이른 아침에 있었던 우슬재에서의 총격사건이 시위대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그것은 시위 참여를 독려하기보다는 해산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3일 오전 8시 현재 강진읍에는 시위대가 40명(LMG 1정 보유) 정도 있었으며, 성전면에도 100명(일부 무장) 정도의 시위대가 있었지만(광주지검, 광주사태 당시 학원동향 ), 우슬재에서 총격을 가한 군부대를 공격하려는 의사는 보이지 않는다. 이미 정국의 추이가 항쟁의 패배를 짐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며, 시위대들도 시위를 중단하고 하나, 둘 해산하기에 이른 것이다. 5월 23일 강진에서는 강진농고생 4-500여 명이 교복을 거꾸로 뒤집어쓰고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들의 구호는 계엄철폐, 민주회복, 김대중 석방 등이었다. 이들의 시위를 끝으로 강진에서 더 이상의 시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강진에서 만들어진 시위대들은 강진군 일대는 물론이고, 장흥과 보성 방면까지 진출했었지만, 진압하는 쪽과 별다른 충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진과 가까운 지역에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대략 24일 정도가 되면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5 18민중항쟁 105

108 3) 장흥 보성지역 당시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 발생한 항쟁의 중심은 나주-목포간 도로와 나주-해남간 도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다른 지역은 항쟁이 발생한 주요 도로에서 벗어나 동참을 호소하고, 무기를 찾는 과정에서 그 도로와 연결되는 지역을 시위대가 찾아가면서 항쟁이 발생하였다. 장흥도 그런 지역들 중 하나이다. 장흥에 최초로 시위대가 들이닥친 것은 22일 오전이었다. 강진을 출발한 시위차량이 장흥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약간의 선전활동을 벌인 이후에 보성방면으로 갔다가 되돌아왔으며, 다시금 장흥지역에서 시위 동참을 호소하였다. 장흥지역민 역시 이들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일부 지역민들은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 시위대가 장흥에 머문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이들은 13시 40분 경, 30여 명이 버스 2대에 분승하여 다시 강진으로 향하고 있다(합참, 상황보고철 ). 이후 장흥지역에서는 별다른 시위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는다. 다만 23일 9시 경에 100여 명의 시위대가 장동면 지서의 기물을 파괴(합참, 상황보고철 )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또 그 날 11시 30분 경에는 200여 명으로 추산되는 시위대들이 차량에 나누어 타고 장흥을 출발했으며, 13시에는 보성에 도착하여, 순천 방향으로 출발했다는 기록이 있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하지만 장흥 사람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편 보성지역의 상황은 장흥과는 조금 다르다. 보성은 화순 방면에서 온 시위대와 장흥방면에서 온 시위대가 들어왔던 곳이며, 지역에서 시위에 동참한 경우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군의 자료에서 보성지역의 시위대와 관련하여 기록된 최초의 시간은 21일 20시였다. 당시 시위대 120명이 몽둥이로 무장한 상태이며, 택시 2대와 트럭 10대에 분승하여 80명은 장흥 쪽으로, 30명은 보성 역 방향으로 이동(합참, 상황보고철 )하고 있다. 이들은 보성지역에서 계엄군 물러가라, 전라도 뭉치자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트럭 3대, 택시 2대로 벌교 쪽을 향하여 이동(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하였다. 그러나 보성에서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니며, 이들 시위대는 그냥 지나가는 수준이었다. 보성에서 또 다시 시위대가 발견된 것은 23일 12시 경이었다. 화순군과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문덕면에 무장시위대 100여 명(총기 69정, 실탄 560발 소지)이 나타난 것이다. 이미 이 시기는 화순과 보성 지역의 시위는 상황이 끝나가던 시점이었으며, 군과 경찰은 이들 시위대를 소탕(광주지검, 광주사태 당시 학원동향 )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시위대의 숫자는 계속 줄어들고 있었으며, 결국은 무기를 반납하고 자수한 것으로 보인다. 10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09 2절 함평-영광-무안지역 1) 함평 영광지역 광주와 목포의 중간에 위치한 함평지역에 광주지역에서 계엄군에 의해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고, 시민들이 그에 저항해서 항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항쟁이 발발한 5월 18일이었다. 그때부터 함평지역도 광주에서 학교다니는 자식들이나 친척들에 대한 걱정과 불안 및 계엄군에 대한 분노로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과 불안 및 분노로 몇 일간을 보내는 동안 가끔 광주에서 도망 나온 학생이나 젊은이들이 함평으로 들어오면서 광주지역의 참상과 시민들의 저항 소식이 전해졌고, 그때마다 지역민들 역시 광주사람들과 일체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항쟁이 발발한지 나흘째인 5월 21일 오후 1시 경 고속버스와 트럭 등 10여 대의 차량에 나누어 탄 광주지역의 시위대가 나주를 거쳐 함평에 도착하였다. 당시 함평지역의 사람들은 그동안 전해들은 소식만으로도 분위기가 고양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폭발 직전의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광주에서 시위대는 함평지역의 항쟁이 폭발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함평읍민들은 광주에서 온 시위대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면서 그들과 함께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경찰들의 대부분은 광주지역으로 파견나가 있는 상태였고, 극소수의 잔류병력만 남아있을 때여서 이들을 제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함평에서 최초로 형성된 시위대 중 일부는 함평지역에서 시위를 전개하였지만, 차량 3대에 탄 시위대는 목포 쪽을 향하여 나아갔으며, 경찰은 이에 대비하여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다(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 당시 함평지역의 항쟁은 세 갈래로 나뉘어진 시위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중 하나는 함평읍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위대였으며, 다른 하나는 나주-목포 간 도로를 오가던 타지역 시위대들과 함평 지역 군민들이 결합하여 학다리(학교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시위대였고, 마지막으로는 함평-영광 간 도로를 중심으로 신광면과 대동면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시위대였다. 먼저 함평읍 시위대의 경우에는 관청과 지역 유지들이 매우 조직적으로 항쟁이라는 돌발사태에 대처한 경우였다. 최초의 대응형태는 타지역과 함평지역이 유사하다. 21일 함평읍으로 들이닥친 광주에서 온 시위대는 읍사무소 옆 사거리에서 광주지역의 소식을 전한 다음 경찰서 무기고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지역민들도 적극 가담하여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차량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들 시위대들은 21일 17시 05분 경, 버스 8대에 분승하여 3대는 함평으로, 그리고 나머지 5대는 영광으로 이동(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하고 있다. 한편 21일 23시 25분에는 버스 5대에 나누어 탄 시위대들이 예비군 대대의 위병소에 도착 군과 대치하기도 했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 그리고 이들을 회유하려는 것인지 부대 측이 실탄 한 박스를 그냥 주어서 별다른 충돌 없이 읍내로 돌아왔다. 또 그리고 이들 함평에서 조직된 5 18민중항쟁 107

110 시위대는 나주로 가서 광주로의 진입을 시도하거나, 무안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해남까지 가서 해남경찰서 무기고를 공격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함평지역과 타 지역의 행동양식이 유사하다. 차이가 나기 시작한 것은 5월 22일부터이다. 그 날은 함평 장날이었는데, 함평에서는 외부 시위대가 없는 상태에서 함평군민들만의 궐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지역유지들과 함평읍장 등이 중심이 되어 함평지역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열린 것이다. 이날 오전 11시에 함평읍 공원(읍사무소 뒤)에서 시작된 궐기대회에는 명 정도의 군민들이 참가하여 30-40분 정도 진행되었다. 이날 대회에서는 광주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 이라는 유인물이 배포되었는데, 10가지(국민들의 입장에서 해결되기를 원한다, 치안부재로 무고한 양민들이 다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치와 상관이 없다, 국민에 의해 민주적으로 해결방안을 찾기 바란다 등) 정도의 입장 표명이 적혀져 있었다. 타지역의 움직임에 비해 사태를 무마하려는 의도가 가장 강하게 들어있는 유인물이었다. 그 결과 시위대를 중심으로 한 무장세력들은 이들의 주장에 항의의 뜻을 표출하면서 타지역으로 차량시위를 나가버렸다. 이 궐기대회를 기점으로 함평읍의 분위기는 함평읍지역만의 안전을 보장하자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결과 먼저 예비군 중대장들을 중심으로 자체경비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읍장과 함께 방화나 총기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함평읍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막자는 등의 내용을 의논하였다. 그리고 함평읍으로 들어오는 각 입구(대동면 쪽에서 들어오는 길과 함평다리 부근)에 젊은이들을 보내 교통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바리케이트를 치지는 않았지만, 차량의 출입 자체는 확인하여 지역의 안전에 문제가 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출입시키지 않았다. 함평읍지역은 중심도로에서 떨어진 관계로 외부 시위대가 비교적 많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 구성 역시 함평사람들이 많이 섞여있어서 이러한 통제가 통할 수 있었다. 함평으로 들어온 차량들은 읍사무소 옆 사거리나 경찰서 앞 등지에서 돌려나가게 했다. 이와 함께 함평지역의 질서유지파들은 그때까지의 경과를 함평군 방위협의회 회장을 겸직하고 있는 군수(나승포, 함평출신)에게 보고하고, 자위행동에 나서고 있는 사람들의 저녁식사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군수가 읍장을 통해 20여 만원을 주었고, 이들은 이 돈을 각 지역에 나가서 경계근무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또 이들은 함평에 들어오는 시위차량들을 대상으로 무기회수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읍장 및 군청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40여 정의 총과 2천 발이 넘는 실탄 및 두 세 개의 수류탄 등 각종 무기를 회수하여 군청에 갖다 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함평읍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편 신광면과 대동면 지역은 자체적으로 시위대를 구성하여 차량 시위를 전개하고, 신광면 지서 등에 들어가는 등 시위대가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지역이다. 당시 대동면 지역은 함평 고구마사건 의 핵심적인 지도자였던 서경원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농민회 조직이나 서경원의 10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1 영향력이 강했던 지역이다.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과 봉기 소식을 들은 이 지역 젊은이들은 서경원을 방문하여 이럴 때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를 질문했었다고 한다. 그때 서경원은 계엄군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고 대답을 했고, 젊은이들은 그 말에 따라서 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이들은 21일 하루 동안 시위를 전개하였지만, 함평읍으로 가는 길목과 영광으로 나가는 길목이 모두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 지역에서만 시위를 하다가 해산하였다. 항쟁 시기에 함평지역 내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타지로 나간 시위대 중 일부가 피해를 입은 경우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함평지역에서 무기를 반납한 사람들 중 몇 명이 구속되었고, 궐기대회 개최와 연관되었다는 죄목으로 읍장이 합동수사본부에 불려가 곤혹을 치루기도 했었다. 그러나 훗날 읍장은 항쟁 시의 행동과 관련하여 지역방위협의회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한편 영광지역에도 시위대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별다른 활동 없이 되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영광지역은 21일 12시 30분 경에 이미 영광 법성포와 고창 간 도로에 3/50명의 병력이 배치(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 )되어 있었다. 또 한국전쟁의 피해 경험 때문에 항쟁에의 참여를 매우 주저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영광지역에 시위대가 처음 들어온 시간은 21일 오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군청 앞에 들어왔던 시위차량이 별다른 활동 없이 그냥 차를 돌려 나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군의 자료에는 21일 23시 15분, 영광읍에서 시위대 20-30명(8명 무기 휴대) 가량이 부근 부대로 접근 중이라는 보고를 하고 있다. 또 21일 23시 34분에는 송정리에서 온 25명의 시위대가 버스터미널에서 시위 중(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이라는 보고도 있다. 하지만 22일 13시, 트럭 2대에 분승한 시위대 20여 명이 영광에서 주민들의 설득으로 광주로 되돌아갔다(2군지구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는 기록과 영광은 22일 23시부터 평온한 상태(합참, 상황보고철 )라는 보고가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영광지역은 시위대가 들어왔다가 별다른 활동 없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2) 무안지역 무안지역 사람들 역시 5월 18일 이후 불안과 분노라는 양가적인 감정으로 지내다가 광주에서 온 무장시위대가 이 지역에 들이닥친 5월 21일이 되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항쟁을 시작하였다. 이날 오후 2시 경 광주에서 온 무장시위대 30여 명이 3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무안군에 들어온 것이다. 당시 무안 지역민들은 광주에서의 소식을 듣고 분개하고 있던 때여서 즉시 그들과 합세하여 군내를 돌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무안에서 시위대에 합세한 차량은 두 대(한 대만 사람들이 탔고, 나머지 한 대는 비어 있었음)였다. 이들 시위대는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부는 목포를 향하여 갔고, 나머지는 무안군 내에서 차량시위를 하며 무기를 찾아다녔다. 또 이들은 그 과정에서 광주로의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5 18민중항쟁 109

112 이들 중 광주로의 진입을 저지당한 시위대는 송정리를 통해 영광으로 갔다가 영광경찰서 앞에서 차를 돌려 영암으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무안지역에서 나온 차량시위대는 무안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나주, 영광, 영암, 함평, 목포 등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차량시위를 전개하고 있다. 무안지역은 특히 목포로 들어가는 관문이면서 인근 서해안 및 함평, 영광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수많은 시위차량들이 이 지역을 통과하고 다녔던 것이다. 한편 22일 오후에는 시위대가 무안경찰서 읍내파출소 무기고를 M1소총으로 잠금장치를 쏘아서 부수고, 무기를 가져가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무안에 거주하는 한 청년이 내 지역은 내가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차(일반 트럭)에 실린 무기를 다른 곳(?)으로 가져가버렸다고 한다. 그 결과 무안지역의 무기는 시위대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무안경찰서는 그 외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고, 각 면단위 지서들은 시위대들에게 현판을 뜯긴 정도의 피해만 입었다. 당시 지서에는 이미 무기가 없었다고 하는데, 그 지역 사람들은 사전에 지역 군부대인 지산부대로 무기를 옮긴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22일 저녁 무렵에는 계엄군들이 무안지역의 양쪽 외곽지역을 차단하고 있었다. 우선 목포방면은 잔등 앞에서 계엄군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었으며, 지산부대 앞도 군의 저지선이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무안에서 광주 쪽으로 가는 길목인 함평군 학다리 사거리에도 이미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 무렵 무안터미날에서는 무안경찰서의 한 정보과 형사가 사람들에게 집에 들어가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광주로 진입하지 못한 차량들은 무안에서 총기를 쏘면서 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무안을 둘러싸고 있는 도로들은 계엄군이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대략 23일 쯤이 되면 터미널 부근으로 계엄군이 지나다니기도 했으며 인근에 호를 구축하고 경계근무를 서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위대는 이제 무안지역에서 발견하기 어렵게 되었다. 군의 자료에서도 무안지역은 23일 1시 30분, 총기 일부를 반납한 후 평온한 상태(합참, 상황보고철 )라고 보고하고 있다. 5장 전남지역 항쟁의 특징 1절 강력한 향토애와 지역연대 78) 비인간적인 폭력에 대항하여 생명을 건 저항이 발생할 경우, 그러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네트웍의 존재를 전제해야 한다. 물론 일상적 수준에서 작용하는 주민들 사이의 네트웍 그 자체는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저항적인 네트웍 혹은 저항공동체가 78) 최정기(2002)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하였다. 11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3 형성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네트웍을 토대로 하지만 그것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형태의 네트웍이 형성되어야만 한다. 1980년 광주의 경우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요인들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5 18 직전의 학생시위를 통해 형성된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동의 및 그에 대한 시민 스스로의 확인이었다. 둘째는 김대중의 구속이 이 지역주민들에게 제기하는 효과였다. 셋째는 국가권력이 사용하는 폭력의 문제인데, 이것은 다시 두 가지 질문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국가권력의 폭력행사에 대한 시민들의 동의 여부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폭력행사가 무차별적인가 아니면 선택적인가 이다. 먼저 1980년 5월 광주지역에는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동의와 학생시위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지지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한 공동체의 가능성이 현실화된 것, 그리고 개별적인 수준에서 동의나 지지를 보내고 있던 시민들이 서로의 의사를 확인한 것은 전남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도청을 비롯한 시내 일원에서 개최한 민주화 대성회 였다. 당시 광주지역의 시위는, 진압 경찰과의 충돌로 갈등구조가 표면화된 타 지역과 달리, 경찰과의 유기적인 협조 하에 평화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학생운동과 시민들 사이에 강한 연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특히 16일 밤의 횃불시위를 마친 다음 민주화에 역행하는 정국의 반전이 일어날 경우에는 시위를 재개할 것 등 이후의 행동지침이 결정되었다는 것은 5 18의 발발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다음으로 김대중 구속은 적어도 광주 전남 사람들에게는 민주화과정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한 이래 70년대 전기간에 걸쳐 감금과 가택연금을 당하였던, 김대중은 당시 민주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한 인식은 그의 출신지역인 전라도지역에서 특히 강했다. 따라서 5월 18일에 전해진 김대중 구속 이라는 소식은 대부분의 지역민들에게 곧바로 그때까지의 민주화운동이 거부되고 유신체제와 같은 정치체제로의 복귀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와 함께 전해진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79) 소식은 그러한 인식을 더욱 강화시켰으며, 대다수 지역민들에게 커다란 좌절과 분노를 야기하였다. 마지막으로 국가폭력의 잔인함과 무차별성이 저항공동체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근대 국가는 그 자체가 폭력의 독점이지만, 문제는 그러한 폭력의 행사가 사회적 수준에서 동의를 획득해야만 한다는 데 있다. 국가권력이 행사한 폭력이 일반 국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행위로 규정될 때, 그 만큼 저항의 가능성은 커진다. 또 무차별적인 폭력의 사용은 폭력의 대상이 될 사회집단으로 하여금 강력한 운명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고 저항의 가능성을 높이는 반면에, 선택적인 폭력의 사용은 그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그런데 5 18 당시 계엄군의 폭력은 79) 당시 민주화운동의 주된 요구 중 하나는 비상계엄 철폐 였다. 그런데 별다른 상황 변화도 없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 대 실시한 것은 민주화운동의 요구에 대한 거절을 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5 18민중항쟁 111

114 광주 지역민들의 동의를 받지도 않았지만, 그 행사방식도 매우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당시의 진압작전은 그 만큼 높은 저항의 가능성을 내포한 상태였다. 이들 변수들 중 폭력의 잔인함과 무차별성은 5 18 당시의 항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광주사람들은 1980년 5월 18일을 피의 일요일 이라 부른다 80). 계엄군의 폭력이 상식에서 벗어나 매우 잔인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당시 계엄군의 폭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알기 위하여 사망한 날짜별로 사망원인이 어떻게 분포하고 있는가(표 5-1)와 부상자들이 부상당한 날짜별 분포(표 5-2)를 검토해보자. 표 5-1) 사망일 및 사인별 사망자수 사망원인 사망일 19일 20일 21일 22일 23일 24일 25일 26일 27일 불명 합계 자상 차량사 총상 타박사 합계 * 광주지검 검시조서, 1980, 광주광역시 5 18사료 편찬위원회, 1999, 5 18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20권의 내용을 필자가 통계 처리하였다. 표 5-2) 5 18 당시 날짜별 부상자수 사망일 구분 18일 19일 20일 21일 22일 23일 24일 25일 26일 27일 사건 이후 날짜 미상 합계 수(%) 40 (15.9) 48 (19.1) 43 (17.1) 67 (26.7) 18 (7.2) 5 (2.0) 1 (0.4) 0 (0) 0 (0) 10 (4.0) 4 (1.6) 15 (6.0) 251 (100) *5 18기념재단에서 1999년경 구술 채록한 피해자실태조사 의 원본을 분석하여 필자가 정리함 80)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5 18의 첫 사망자는 김경철인데, 그는 언어 및 청각장애자이다. 그는 5월 18일 오전 금남로 2 가 부근에서 공수부대원에게 구타당하여 그 다음날인 19일 육군통합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듣지도, 말하 지도 못하는 장애인에게 죽을 때까지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목격자는 그가 무릎꿇고 두 손으로 비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 다. 이 사건은 당시 계엄군의 폭력이 지닌 무차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5 18광주민중항쟁유족회, 1989: 235). 11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5 사실 5월 18일과 19일, 그리고 20일, 3일간에 걸쳐 자행된 공수특전단의 행위는 시위진압이 아니라 학살극이었으며, 그 만큼 잔인했다. 이는 그 시기에 발생한 시신들 중 자상과 타박상으로 인한 시신이 14건이라는 점과 사망자의 39.8%(표 5-1), 부상자의 52.1%(표 5-2)가 그 시기에 발생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시민들은 그 장면을 보고 광주사람 다 죽인다 고 생각했다. 진압봉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고, 질질 끌려가 트럭 위로 던져지는 광경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광주사람들이 떠올린 것은 한국전쟁과의 비교였다 때도 이렇지 않았다 는 표현은 당시의 증언 속에서 매우 많이 발견된다. 이미 광주사람들은 광주사태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쟁 으로, 그리고 전쟁 의 또 다른 경험인 학살 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계엄군의 폭력이 갖는 무차별성도 전 시민적인 항쟁을 야기한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점은 연령별 분포와 저항할 수 없는 자에 대한 폭력의 행사에서 드러난다. 사망자의 연령분포는 20대가 절대 다수(42.2%)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외 연령층도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10대의 비중이 적지 않다는 점(27.3%)과 시위와는 무관한 연령층으로 판단할 수 있는 50대 이상의 비중(6.2%)이 만만치 않다는 점은 당시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폭력의 행사를 짐작하게 한다 81). 이러한 사실들은 계엄군의 폭력이 매우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 결국 당시 광주지역에서 저항공동체를 형성시킨 계기는 세 가지로 정리된다. 14일-16일의 민주화 시위를 통하여 형성된 시민들의 동의와 김대중 구속이라는 상징적 사건으로 인한 시민들의 좌절과 분노, 그리고 계엄군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폭력 행사가 그것이다. 특히 계엄군의 폭력은 기존의 지역 네트웍과 민주화 시위 및 김대중 구속을 통하여 형성되어 있던 심정적 수준의 연대가 저항공동체로 구체화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은 시민들에게 짐승 같은 삶이냐, 인간다운 저항이냐를 택일하게 만들었고, 폭력의 무차별성은 시민들 사이의 네트웍을 일종의 운명 공동체로 바뀌게 한 것이다. 그 결과 5월 18일부터 21일에 이르는 사이에 광주지역에는 상식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저항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다음의 증언은 그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창회 친선 축구대회를 마친 우리들은 --- 금남로까지 걸어갔다. 동방생명 사거리 앞에 서 있던 공수부대가 달려들어 우리들을 구타했다. --- 집에 들어가 있는데 부아가 치밀었다. --- 대학에 다니던 앞집 두 아들이 가택수색을 하던 공수부대원에게 구타를 당했다. ---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모범생이었던 절친한 친구가 공수부대에게 맞아서 집에 누워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그때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조성환, 현대사사료연구소, 1990: 306) 81) 광주지검 검시조서, 1980, 광주광역시 5 18사료 편찬위원회, 1999, 5 18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20권의 내용을 필자가 통계 처리하였다. 5 18민중항쟁 113

116 그런데 광주지역에서 만들어진 저항공동체는 강한 향토애에 근거해서 형성된 것이었다. 전 시민들의 동의가 형성되었던 민주화시위는 광주 전남지역만의 경험이었다. 김대중 구속에 대한 분노와 좌절 역시 지역 분할적인 정치적 지형 때문에 광주 전남지역에서 가장 강하게 표출되었다. 또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계엄군의 진주에 분산적인 소규모 저항이 일어났고, 이들 소규모 저항이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대규모 저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계엄군의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폭력 역시 광주시민들만의 역사적 경험이었다. 당시의 유언비어들 중 가장 위력적인 것은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린다 (현대사사료연구소, 1990: 347)이며,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증언은 광주사람 다 죽는다 이다. 이와 같은 지역주의적인 요소들은 저항의 발발과 지역민들의 자발적 참여에는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지만, 역으로 계엄당국이 시민들의 저항을 지역적인 것으로 폄하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2절 난리 에 대한 방어 행동 82) 주지하는 바와 같이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은 5월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전남대 정문 앞에는 도서관에 공부하러 나왔다가 계엄군에 의해 출입이 저지된 학생들과 또 휴교령이 내리면 그 다음날 오전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는 약속을 기억하고 나왔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1980년 3월부터 계속 해 왔던 대로 자연발생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 공수부대원들은 상식을 초월하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대응하였다. 전남대 교문 앞은 순식간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학생들과 끌려가는 학생들, 너무나도 뜻밖의 사태에 도망치는 학생들로 아비규환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 이러한 사태는 한 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광주시내에서는 5월 18일 하루 내내 이러한 사태가 반복되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는 더 잔인해지고, 심해졌다. 당시 이러한 광경을 본 사람들의 충격을 짐작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당시 유인물 등에 나타난 어휘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거기서 가장 많이 나온 어휘들은 피, 죽음 등과 같이 살상과 관련된 어휘들이었다. 특히 죽다, 죽이다 등과 같은 용어들은 가장 많이 등장하는 어휘였다. 두 번째 많이 나오는 어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극한 분노를 표출하거나 가해자를 지칭하는 단어들이었다. 상황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단어로는 흡혈귀, 무차별, 무참히, 천인공노 등의 단어가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나아가 총, 칼, 대검 등과 같이 무기와 관련된 용어가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동시에 군대를 가리키는 어휘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어휘들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들을 목도한, 학생을 포함한 광주시민들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82) 최정기(2010)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하였다. 11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7 그런데 현장에서 도망친 학생들, 또 그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은 이와 같이 믿기 어려운 사실들을 다른 시민들에게 알려야 했다. 시민들은 학생들 편을 들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장면을 전해 줄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학생들이 얻어맞았다는 단순한 사실의 전달만으로는 뭔가 부족했으며, 그 보다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는 식의 의사전달이 필요했다. 그 순간 사용한 단어가 난리 났다 는 말이었다. 이 말은 광주민중항쟁이 진행되었던 10일간 사태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 구어 표현으로는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일 것으로 생각한다. 난리 라는 말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겠지만, 당시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한국전쟁 시기를 연상하게 하였다. 실제 사람들은 당시 공수부대의 잔인한 폭력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6 25 때도 그렇지는 않았다 는 식의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다. 또 난리 라는 말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에 대응하는 행동양식을 규정하는 것 같다. 실제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난리 가 나자 많은 사람들이 곧바로 가족의 안위에 대한 걱정 및 자녀들의 보호, 개인적인 행동의 조심, 친척 등 가까운 인적 네트웍의 가동, 피해가 우려되는 사람의 피신 등 자기보존적인 행동양식을 보이고 있다. 표 5-3) 광주민중항쟁 당시 전남지역에서 무기회수를 주도한 세력들 지역 무기회수를 주도한 세력들 화순 예비군 조직, 청년회, 주재기자 등 나주 예비군 조직 등 함평 예비군 조직, 읍 공무원, 교회조직 등 목포 민주화투쟁위원회(재야인사 주도, 시장, 목포대학장, 목사 등), 청년회 등 영암 재향군인회, 청년회 등 사회단체, 주재기자 무안 군청직원과 시위대의 협조 해남 대책회의(군수, 군 부대장, 시위주도자 등), 청년회 등 *출처: 최정기(1997)에서 인용 난리 에 대해 가장 전형적인 행동이 나타난 것은 도시보다는 공동체적 의식이 남아있던 농촌지역에서였다. 항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무력항쟁 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광주지역과는 달리 전남의 각 지역들에서는 이른바 무기회수 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무기회수를 주도한 세력은 이른바 지역유지 들이었으며, 그것을 실행한 세력은 예비군들 이었는데, 그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극에 대한 경계심으로 계엄군의 공격으로부터 자기 지역을 보호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장시위대로 인해 야기된 불안감 및 공포로부터 자기 지역이 벗어나려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5 18민중항쟁 115

118 구하려는 것이었다. 전남지역에서, 직접적인 무력대결이나 사태의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주민들의 자구책으로 발생한 무기회수 및 질서유지 움직임은 한 편으로는 냉전이데올로기의 효과인 레드 콤플렉스 때문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들의 생활세계 속에 살아있는 난리 시의 대응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표현이 지역 내 질서유지 였다. 당시 이 표현은 항쟁이 발생한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는 구호이며, 이를 통해 지역유지들은 무장 해제를 유도하거나 행정기관과 협조하여 예비군의 조직적 동원을 시도하였다. 난리 담론이 항쟁의 성격을 정확히 전파하려는 의도에서 사용되었지만, 그것이 전파되는 과정은 항쟁의 진정 및 다양한 수준에서 전개된 자기보존책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19 Ⅳ. 1980년 이후 5 18민중항쟁과 오늘 5 18광주민중항쟁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도청 진압을 계기로 종결되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이 예고된 상태에서 대중은 다시 죽음의 공포 에 내몰렸고, 시민들의 결집력은 다시 파편화되기 시작했다. 광주시내로 진격해 오는 탱크 소리와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총소리 그리고 항쟁 지도부의 마지막 선전방송이 들려오는 가운데 시민들은 숨죽이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도청에서의 결사항전 을 선택한 소수의 사람들은 시민들의 침묵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결국 정부와 계엄군의 진압(진압에 대한 공포) 은 시민과 시민군 사이의 경계를 만들어 이들을 단절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항쟁 시기 만들어진 죽음의 서사로 이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 항쟁시기 죽음에 대해 시민들은 죽음의 잔인성 죽음의 가해 주체 광주의 비극적인 모습 죽음을 위한 투쟁, 단결 민주주의 투쟁 의 서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결국 도청의 최후항쟁은 숨어있는 시민들로 하여 다시금 죽음을 목격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에 죽음의 상흔을 새겨 넣었다. 이로 인해 5월 27일의 상황과의 관계를 정립해야만 하는 자기인식의 틈새, 실천의 틈새가 만들어진 것이다. 27일 도청 결사대의 죽음은 계엄군과 정부의 진압(진압의 공포 곧 죽음의 공포)에 의해 다수의 시민들과 소수의 시민군 사이가 단절되는 계기지만, 민주주의 투쟁의 최종적 실천으로서 이를 목격했던 시민들은 시민군과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자기인식의 틈새, 실천의 틈새를 열어 놓는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s)이었다. 1. 5월 27일 이후의 항쟁 1980년 5월 18일 정부는 당시의 지역 계엄을 전국 비상계엄으로 전환 하면서 주요 정치인과 운동권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83)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 에게 학원 소요와 교외 소요의 국가적 시련의 속에서 국민 모두 의 협조를 부탁하면서 비상시국을 극복하고 국가 발전과 민주 사회를 83) 특별성명(18일), 자료총서 2, 20쪽. 5 18민중항쟁 117

120 건설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전국 주요대학에는 계엄군이 급파되었고 1980년 봄부터 진행되어 왔던 학생들의 시위를 사전에 차단하였다.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벌어진 학생들과의 시위를 과격하게 진압했다. 이에 지역민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합세하자 공수부대를 투입 더욱 더 잔악한 폭력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당시 정부와 계엄군은 광주 지역이 북한 공산 집단의 위협에 노출되었다며, 시민 학생의 저항 활동이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 한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또한 불순분자는 터무니없는 악성유언비어 를 유포하고 공공시설을 파괴하며 방화와 장비 및 재산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 사태를 선동하고, 난동을 선동한다는 내용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하였다. 지역민과 저항세력이 주장하는 사실 들은 유언비어 로 폄하되었으며, 오히려 체포와 진압의 명분 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정부와 계엄군은 지역민의 저항과 북괴의 간첩 활동 을 동일하게 선전하며, 광주를 전국적 상황과 분리하고, 시위를 진압하는 명분으로 정권을 찬탈하는 전략으로 활용하였다. 신군부 세력이 1980년 5월 27일 도청을 진압하면서 항쟁이 진압되었다고 하여, 저항세력의 투쟁 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저항세력은 항쟁 기간 중 분산되어 있던 항쟁 사실 들을 정리하여 5 18의거 이후 경과일지 와 같은 민중의 기록물을 만들기 시작했고, 84) 이러한 내용이 광주이외의 지역과 해외에 까지 확산되기 시작했다( 찢어진 기폭 - 어느 목격자의 증언 85), 하나가 되어 싸우고 있다고 온 세계에 알려 주시오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 보고>-광주 시민과 연대하는 재독 한국학생의 모임 86) ). 항쟁이 진압된 직후부터 전국적 차원에서 5 18항쟁의 사실투쟁 이 새롭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1980년 6월 1일 서강대 학생 김의기는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 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고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한다. 1981년 5월 27일 서울대 학생들은 광주항쟁 희생자 위령제를 지내려 하자 경찰이 저지, 이에 1천여 명이 침묵시위를 벌였고, 도서관 6층에서 공부하던 김태훈은 전두환 물러가라 라는 구호를 외치고 자신의 몸을 던져 버렸다. 1주기 추모제는 항쟁을 통해 집권한 군부에 의해 조용히 치러져야 했지만, 1982년 10월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오랜 단식 끝에 숨을 거두며, 그의 죽음을 계기로 광주에서는 1980년 이후 최대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87) 이렇게 항쟁 이후 사람들은 1980년 84) 5 18의거 이후 <경과일지>, 5 18연구소 자료모음집 6권, 155~162쪽. 85) 찢어진 기폭 - 어느 목격자의 증언, 5 18연구소 자료모음집 6권, 221~228쪽. 86) 하나가 되어 싸우고 있다고 온 세계에 알려 주시오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 보고)-광주 시민과 연대하는 재독 한국학 생의 모임, 5 18연구소 자료모음집 6권, 199~220쪽. 87) 한홍구, 광주민중항쟁과 죽음의 자각, 창작과 비평 148, 창비(2010), 403~406쪽. 1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1 5 18항쟁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죽음의 투쟁이었다. 5월 27일 도청이 진압되면서, 저항세력인 시민들의 사실 또한 진압되고 말았다. 지역민 및 저항세력의 사실은 유언비어로 낙인 찍혔고, 정부 및 계엄군에 의해 정리된 광주사태 의 과정만이 (전)국가적 사실로 유포되었다. 당시 정부는 언론을 통해 지난 18일에 발생한 광주지역 난동 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각종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가세 하고,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 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 한 사건인 광주사태 로 명명하였고, 이후(6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으로 공표했다. 88) 사태 로 대표되는 정부의 사실과 의거 와 봉기 로 불러진 저항세력의 사실 속에서 항쟁 이후의 사람들은 5 18의 진상을 구성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1980년 이후 이러한 5 18진상규명 운동은 1980~90년대 5월 운동 의 면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5 18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이 1993년 광주문제 해결을 위한 5원칙 으로 정리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러한 5원칙 의 의제는 1980년 5 18항쟁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89) < 1980년 5 18항쟁 시기 지역민 및 저항세력의 요구사항 > - 광주 의거에 관한 계엄사의 발표 일체가 거짓임을 밝힌다. - 사망자와 부상자 및 행방불명자의 확실한 숫자를 위하여 계엄당국과 시민군의 공동 조 사단을 구성할 것을 호소합니다. - 사태 발단의 진실을 정부와 군이 인정을 하고, 겸손한 사죄의 표시를 하여야 할 것 진실규명 - 유신잔당과 전두환 쿠데타일파는 민족반역의 살인극을 중단하고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으라. - 살인마 전두환을 즉각 처단하라. - 시민학살을 명령한 정부 책임자와 이 학살사건에 동원되고 가담한 군과 경찰은 지위 고 하를 막론하고 당장 색출하여 가차없이 처형하라. - 공수특전대의 책임자는 처단되어야 한다. - 군인들이 만행에 대한 명령책임자를 엄중히 처단할 것을 약속하셔야 우선 급박한 현사 태의 수습의 가능할 것입니다. 책임자 처벌 -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전남인과 경상인의 지역감정으로 왜곡보도 허위조작하 지 말라. - 이번사태는 정부의 잘못임을 시인해 주시고 - 이번 봉기 사건의 모든 보도기관의 자유로운 취재활동의 검열 없는 바른 보도를 호소합 니다. 명예회복 88) 계엄사 발표 김대중 등 37명 내란음모 혐의, 경향신문, 1980년 7월 4일자. 89) 1980년 5 18항쟁 당시 광주지역에 배포되었던 유인물에 산발적으로 나와 있는 요구사항들을 정리하였다. 5 18민중항쟁 119

122 - 피값은 외상이 없다. 광주시민이 흘린 피의 삯은 구체적으로 즉시 보상되어야 한다. - 모든 피해에 대하여 정부가 보상하고. - 80만 광주 시민의 피맺힌 한과 응얼진 마음의 상처를 전 민족적 차원에서 치유해야 한다. - 과도정부는 모든 피해를 보상하고 즉각 물러나라! - 이번 투쟁에서 희생된 사망자는 엄숙한 시민장으로 거행 되야 합니다. - 광주시를 민주화운동의 성역으로 가꾸게 하는 일 또한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 비명에 가신 시민학생을 의사로 추대하고 자유의 전사들을 더 이상 폭도로 몰지 말라. - 껍데기 최규하 정부는 즉각 물러가라. -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 보상/배상 기념사업 기타 위의 내용은 1980년 10일간의 항쟁 기간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시민들의 요구사항이다. 시민들은 신문을 통해 보도되는 계엄사의 내용이 전혀 거짓이며 진실은 따로 있다는 것, 정부는 이 진실 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시민들의 주된 요구이며, 사망자 사상자 등과 관련된 내용의 진상이 명확하게 조사되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학생운동권 및 민주화운동 진영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항쟁이 이들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90) 이에 계엄군의 만행 과 같은 항쟁의 원인이 전두환 등 유신잔당에게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처단과 처벌을 문제해결의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시민들과 학생 운동권은 정부와 언론의 왜곡 조작보도 를 강력하게 규탄했다. 또한 이들은 10일간 항쟁 동안 벌어진 살상과 피해의 대가를 요구하며, 실질적인 보상과 상징적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보상 은 곧 국가의 공식적 사과, 정확한 진상조사, 책임자에 대한 처벌 그리고 물질적 차원의 피해보상이 포함되었다. 동시에 사상자에 대한 장례가 잘 치러지고 항쟁의 의의 또한 다음 세대에게 명확히 전해지기를 희망했다. 결국 5 18항쟁 시기 지역민과 저항세력은 계엄군의 잔악한 진압이 사실이기 때문에, 전두환과 같은 책임자 처벌, 피해에 대한 보상, 왜곡 정정을 통한 명예회복, 사망자에 대한 예우, 지역에 대한 치유 등 몇 가지 원천적 요구사항들을 제시했던 것이다 진상규명 과정과 그 한계 1987년 6월 항쟁은 5 18항쟁의 진상을 전국으로 알리는 계기였다. 6월 항쟁을 계기로 광주사태 치유방안 이 만들어졌고, 국가차원에서 5 18에 대해 공식적인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90) 5천만 겨레여-대학생중고생시민봉기위원회, 1980년 5월 14일자 ; 호소문<광주애국시민여러분!>-광주시민 민주 투쟁회, 1980년 5월 19일자. 12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3 이에 시민사회는 광주항쟁에 대한 명백한 진상규명 을 강조했지만, 노태우 정부가 구성한 민주화합추진위원회 는 5 18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발단 이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진실 발견의 어려움과 조사의 지연에 따른 피해자 보상의 지체가 불가피하다 고 하며 5 18의 진상규명이 국민 화합을 저해 한다며 중단하고 말았다. 뒤이어 1988년 4월 1일 정부는 광주사태 치유대책 을 발표하지만 명확한 진실규명 을 정략적으로 배제시켜 버린다. 이에 대항하여 5 18 관련자들과 관련단체 및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정부의 정책 노선을 거부하고, 진상규명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다 제13대 총선결과로 형성된 여소야대 국면을 이용하여 1988년 7월 국회에 5 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이하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를 계기로 5 18진상규명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특별위원회는 1988년 7월 8일 제1차 위원회를 개최한 이래 1989년 12월 30일까지 총 32회의 전체 회의를 개최하면서 5 18에 관한 사건들을 조사하였다. 결국 광주청문회 가 구성되었으며, 5 18의 관련자들이 국회에 출석하여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진술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요 관련자들은 진술을 거부하였고, 관련 자료에 접근하는데 현실적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의 진상들이 밝혀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뒤이어 집권한 김영삼 정부는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민주주의의 밑거름이며 현 정부는 그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로서 그 정신을 기리고 명예를 높일 사업을 적극 지원할 것 이라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5 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김영삼 정부는 진상규명이 결코 암울했던 시절의 치욕을 다시 들추어내어 갈등을 재연하거나 누구를 처벌하자는 것은 아닐 것 이라고 하며,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 라고만 하였다. 이 담화에 대해 관련단체와 시민사회단체는 즉각 반발했다. 이들은 선 진상규명, 후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반발은 전국의 각계각층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2 12, 5 18 고소고발사건>으로 이어졌다.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는 5~6공화국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하여 1994년 5월 13일부터 1995년 4월 3일 사이에 피고소 고발인 58명에 대하여 총 70여 건의 고소 고발장을 접수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들 전원에 대해 국가기관에 의한 최종적이고 완벽한 진상규명 은 이루어졌다고 하며, 1995년 7월 18일에 공소권 없음 을 결정한다. 이에 검찰의 5 18불기소 결정에 항의하여 기소 촉구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 서명 운동 등이 광범위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때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정축재 내용이 국회에서 폭로되면서 대선자금 문제로 정국의 흐름이 급변했다. 이에 김영삼은 5 18특별법 제정을 지시했고, 이에 의하여 및 5 18특별 수사본부 가 설치되었다. 이로부터 이틀 만에 두 대통령이 전격 구속되었고, 이들에 대한 사법적 5 18민중항쟁 121

124 처벌을 위한 조사와 재판이 진행되게 되었다. 91) 이를 계기로 검찰 수사에 의해서 5 18항쟁의 많은 사실들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실규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군부대의 이동과 작전일지 및 진압에 참여 혹은 동원된 계엄군에 관한 자료, 당시 정부와 보안부대 등의 자료들은 공개되지 않았다. 5 18특별법을 적용하면서 검찰이 작성한 수사 기록은 30만 쪽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5 18기념재단이 행정 소송을 통해 공개된 수사 기록은 5만여 쪽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5 18 특별법에 의거한 조사 결과, 재판 도중 사망자를 제외한 15명에 대한 처벌이 1997년 4월 18일 대법원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이었다. 1997년 대법원의 최종선고 결과 이 름 선고결과 당시직책 이 름 선고결과 당시직책 전 두 환 무기징역 보안사령관 허 삼 수 징역 7년 보안사인사처장 노 태 우 징역 17년 수경사령관 최 세 창 징역 6년 3공수여단장 황 영 시 징역 8년 참모차장 차 규 헌 징역 5년 허 화 평 징역 8년 장 세 동 징역 3년 6월 작전참모 이 학 봉 징역 8년 보안사대공처장 신 윤 희 징역 3년 6월 정 호 용 징역 7년 특전사령관 박 종 규 징역 3년 6월 이 희 성 징역 7년 계엄사령관 박 준 병 무 죄 20사단장 주 영 복 징역 7년 국방장관 그러나 5 18과 관련하여 현장 지휘관들의 책임은 묻지 않았고,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형식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제의하였고 이들에 대한 사면 복권이 이루어졌다. 92) 이렇게 광주청문회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한 사건 관련자들이 군사반란 및 내란죄 로 구속되어 처벌이 이루어졌지만 5월 21일 전남도청 앞 발포 명령, 지휘권 이원화, 외곽봉쇄 과정에서의 민간인 살상, 실종자 등의 문제 등이 미해결로 남게 되었다. 91) 5 18특별법 제정과 특별검사제 도입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비등해지자,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에 관한 특 별법 과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 헌법파괴범죄 등의 공소시효에 관한 법률 등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이후 개정된 법률명인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 과 5 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이 제정되었다. 92) 1998년 8월 15일 전두환, 노태 우 외 사면복권이 되지 않은 관련자 전원에 대한 특별복권이 이루어졌다. 또한 5 18민중항 쟁 진압 및 12 12군사반란에 참여하여 수여된 훈장 또는 포장의 박탈 운동이 벌어져 이들에 대한 훈장은 5 18특별법과 상훈 법에 의거하여 전원 박탈하게 되었다. 그러나 12 12군사반란 관련자의 경우 실형이 선고된 자만 서훈이 취소되었다. 1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5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미해결 과제를 해결하고자 국방부 내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을 재조사하여 규명하도록 했다. 이에 국방부과거사위는 국회청문회, 검찰 수사와 법원의 재판 등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국방부 내부 자료를 수집 검토하고, 관련된 장병들과의 면담을 통해 5 18진상규명 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복 자료를 제외한 4만 8천여 쪽의 자료를 수집, 시위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 71명에 대한 면담을 실시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진상에 접근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계엄사와 육군본부의 작전상황일지, 보안사의 여러 종류의 일일보고, 전교사 31사 11공수여단 등 작전부대의 작전상황일지, 전교사의 광주소요사태 분석 등의 평가분석 자료와 계엄사 계엄위원회 회의록, 5월 17일에 열렸던 전국주요지휘관회의록 (필사본) 등 총 57권의 자료를 기무사령부 자료실에서 찾았다. 기무사 자료 중에는 합동수사본부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5 18 을 연계시키려고 시도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와 광주교도소습격사건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아가는 자료도 있었다. 2007년 7월 24일 국 방 부 과 거 사 진 상 규 명 위 원 회 는 12 12, 5 17, 5 18사 건 조사결과보고서 발간하였는데, 그 주요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계엄령 발동과 계엄군의 이동 - 광주시내에 계엄군이 처음 배치된 것은 비상계엄조치가 통과(5월 17일)되기 이전인 5월 14일이었다. 신군부는 5월 10일 전투교육사령부에 공수부대의 배치 지침이 구체적으로 명시된 2군 학원소요에 대한 증원 계획지시 를 하달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5월 14일 광주시내의 주요 시설물인 방송국 등에 제31사단 병력이 배치되었다. - 5월 15일에 전투교육사령부와 3관구 사령부 등의 지원 트럭이 제7공수여단에 도착하였다. 제7공수연단은 5월 17일 24:00부로 광주에 제33대대와 제35대대를 출동시켜 대학을 점령하였다. - 제2군 사령부는 5월 17일 17:00에 구두 지시로 충정작전 유효, 5월 18일 00:01를 기해 불순분자 체포, 5월 18일 04:00 이전 주요 학교 점령 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2 계엄군의 5 18민중항쟁 진압 - 서울에 배치되었던 제11공수여단의 광주 투입 결정은 광주에 기 투입되어 있던 제7공수여단 병력이 본격적으로 시위진압에 투입되어 금남로와 충장로 등에 출현한 5월 18일 오후 4시경 이전인 오후 3시 40분에 이루어졌다. 5 18민중항쟁 123

126 - 서울에 배치되었던 제11공수여단의 광주 투입 결정은 광주에 기 투입되어 있던 제7공수여단 병력이 본격적으로 시위진압에 투입되어 금남로와 충장로 등에 출현한 5월 18일 오후 4시경 이전인 오후 3시 40분에 이루어졌다. - 발포가 처음 이루어진 날은 5월 19일임. 당일 오후 4시 50분경 광주시 계림동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민과 대치하던 제11공수단 제63대대 작전장교 차모 대위가 당시 조대부고 3학년생인 김영찬에게 M16을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5월 20일 밤에도 광주역 근처에서 제3공수여단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하기도 하였다(최초의 발포 시점 문제). 이 두 사건은 상급부대인 제31사단과 전투교육사령부에 보고되지 않았고, 발포로 인한 사망 사건은 불순세력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왜곡되었다. 발포 책임자에 대한 문책은 없었고, 사건 종료 이후 관련자들에게 훈 포장이 수여되었다. 최초의 희생자인 김경철이 사망한 것도 5월 19일인데, 청각 장애인이었던 그가 친구들과 점심을 하고 돌아가던 중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로 사망했다. - 5월 21일 계엄군은 도청 앞 집단 발포시 저격 요원들을 배치하여 시위대와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조준 사격을 하였다. 저격병은 4인 1조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조준경이 장착된 총이 지급되었다. - 공수부대원은 상무대로 연행된 시위자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여 사망하게 했다는 증언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3 기타 민중항쟁의 진압 작전에서 사망한 군경 27명 가운데 일부의 공적 조서가 폭도에 의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들은 시민군과의 교전이 아니라 진압 부대 간의 오인사격으로 사망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또 다른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1988~9년 광주청문회에서 군부 및 전두환 정권이 청문회를 대비하면서 5 18항쟁의 책임을 면하는데 급급했던 자료가 새롭게 발굴되었다. 1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7 기무사 보관자료 30 <이슈별 질의 내용 및 질의자> 외 20건 ( ) 기무사 보관자료32 <광주사태 발발원인과 배경>외 50건 ( ) 기무사 보관자료36 <광주사태의 전모>외 7건 ( ) 전전대통령 청문회 질문 중 당 부대 관련사항 검토보고(광주특위), 기무사 보관자료37 <광주사태 청문회 예상 질의답변(505부대장)외 9건 ( ), 기무사 보관자료38 <광주사태관련 현안문제관련 자료(보고)>외 18건 ( ) 기무사 보관자료41 <광주사태 관련자료 기록검토>외 9건 ( ) 광주사태 당시 전남지구 보안 부대의 역할, 기무사 보관자료42 <5 17계엄확대조치의 불가피성>외 23건 ( ) 기무사 보관자료43 <광주사태 전말보고(합수사항중심)외 18건 ( ) 위자료들은 1988~89년 사이 5 18의 주요 쟁점이 국회 청문회에서 다루어질 때 군부가 사전에 정리했던 예상 답변 또는 청문회의 사항들을 기록해 놓은 것들이다. 특히 1988~89년 작성된 국회 광주 청문회 대비 자료 라는 문건은 청문회 당시 군부가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고자 조직적으로 대응했던 구체적인 정황을 보여준다. 이들 자료의 작성자는 국방부 511위원회와 보안사의 511분석반으로, 국방부 511위원회는 당시 국방부에서 발굴했던 자료를 중심으로 청문회에 대비하기 위한 광주사태 라는 책자를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각 시간대별로 부대(대대 또는 지역대 단위) 배치 및 활동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아마 청문회에 출석했던 5 18 당시 군 인사들은 이 책자를 통해 답변을 사전에 준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민주화 과정에서의 진실규명작업은 사법적 절차에 따라, 정치적 타협에 의해 때로는 미봉적 차원에 그친 것으로 평가된다. 93) 시기별 5 18진상규명 내용 및 미해결 사항 시기 내용 비고-미해결 전두환 북한의 고정 간첩과 김대중의 추종 세력들을 지칭하는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유발된 폭도들의 무장난동 지역감정 에 의한 발발 (유언비어) 93) 정병준, 한국의 과거사 유산과 진상규명작업의 역사적 의미, 민주주의와 인권 5-2, 전남대5 18연구소, 2005, 205~206쪽. 5 18민중항쟁 125

128 노태우 (1987) 민주화합추진위원회 국민화합분과위원회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발단 -광주 학생 시민들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투쟁 - 과잉진압의 책임 - 사건의 구체적 내용, 전개, 책 임 등 광주청문회 (1988~89) , 5 18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주도 년 초 전군에 폭동진압훈련 실행 비상계엄과 신군부의 정권찬탈 음모 - 진압과정과 참상을 공개 - 계엄군의 집단 발포, 민간인 학살 공개 - 미국의 관련 사실 - 발포명령계통과 지휘체계의 이원화 배경 - 민간인 사망자의 규모 - 미국의 역할과 책임 등 김영삼 (1995) 전두환 노태우 및 관련자 15명에 대한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죄 - 현장 지휘관 노무현 (2007)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 광주시내 계엄군 배치 5월 14일 - 5월 15일 ~ 17일 제7공수여단 충정작전 - 5월 19일 오후 4시 계림동 첫발포 - 5월 19일 김경철 사망 - 5월 20일 광주역 발포 - 5월 21일 도청 앞 발포 - 연행된 시위자에게 폭력 행사 - 진압 부대 간의 오인 사격으로 인한 사망 왜곡 - 발포 명령자 - 전두환의 자위권 발동 - 실종자 및 암매장 - 지원동 미니버스 총격사건 - 자료 공개 등 3. 현재의 5 18민중항쟁 5 18항쟁에서 진상규명 이라는 의제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1980년 항쟁의 발생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980년 항쟁시기 지역민과 저항주체들은 항쟁 발생의 원인을 잔악한 진압의 주체인 전두환과 공수부대 로 보았다. 이에 반해 정부 및 계엄군은 항쟁의 원인을 불순분자 및 고정간첩들 에 의한 선동과 난동 으로 명명 규정했다. 다시 말해 1980년 항쟁을 두고 억압의 주체와 저항의 주체들은 서로 다른 사실들을 이야기 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이를 통해 도청진압과 집권의 명분을 구축하였고, 광주시민들과 민주화운동 세력은 저항의 정당성과 민주화 운동의 필연성을 획득했다. 결국, 1980년 항쟁 이후 5 18은 억압 세력과 저항 세력의 사실들이 충돌하는 투쟁 이었으며, 5월운동은 저항 세력의 사실이 확인 인정되는 진실투쟁이었다. 따라서 5 18진상규명은 1980년 5 18항쟁과 이후 진행되었던 민주화운동 및 정치적 격변들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또한 여타의 과거청산작업과 따로 떼어서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리고 지난 30년 동안 진실규명을 실천해 왔던 주체, 즉 피해자와 유가족 및 5 18단체 그리고 각종 시민단체, 1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29 정치정당 그리고 국가기관 등의 역학관계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루어진 진상규명의 성과를 살펴보면, 1980년 5 18항쟁 시기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던 저항세력의 사실 과 별반 다를 게 없다. 1980년 이후 소위 비합법적 민간단체에서 발행한 관련 유인물 등의 내용(예컨대 찢어진 깃폭 등)이 국가에 의해 인정 되고 구체적인 사실관계와 증거가 찾아졌을 뿐이다. 결국 그 동안의 5 18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은 국가에 의해 사적 논의로 유폐 되었던 5 18항쟁을 공적 논의로 확장시키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내용 변화에서도 나타났다. 1982년 고등학교 국사 에는 이후 한때 혼란상태가 계속되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북한 공산군의 남침위기에서 벗어나고 국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정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한 뒤, 각 부문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고 적혀 있다. 94)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90년 고등학교 국사 에는 10 26사태로 정치 사회는 한때 심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어서 1979년 12월 12일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일부 병력을 동원하여 군권을 장악하였으며, 나아가 정치적 실권도 장악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과 대학생들의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요구는 광주에서 비롯된 5 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고 하였다. 95) 교과서에서 5 18항쟁은 혼란 상태로서의 5 18 에서 민주화운동으로서의 5 18 로 변화하였다. 또한 5 18항쟁을 필두로 한 국가의 진상규명은 제주4 3항쟁, 70년대 민주화운동 관련자, 여순사건, 의문사 사건, 85년 미문화원점거 사건, 군산 오송회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가능하게 했다. 96) 동시에 국가기구로서 국가인권위원회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이 설치되면서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건과 관련자들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과 명예회복 그리고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진상규명의 성과에 힘입어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던 사람들이 복직되거나 개인적 명예를 회복하는 사례도 있었다. 97) 그러나 5 18 및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가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진 후에 다시 진상규명을 왜곡 폄훼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94) 이용기, 1999, 5 18에 대한 역사 서술의 변천, 학술단체협의회 편, 5 18은 끝났는가, 푸른숲, 395쪽. 95) 교육부, 1990, 고등학교 국사(하),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7쪽. 96) 4 3피해자 위령탑 등 건립추진 명예회복 조례안 마련, 조선일보, 1999년 3월 22일자 ; 71년 민주화운동 명예 회복 보상요구, 조선일보, 2000년 10월 5일자 ; 공대위 4000명 서명받아 특별법 제정청원 여순사건 진상규명 나선다, 조선일보, 2000년 10월 23일자 ; 의문사 5건 규명진정서 접수, 조선일보, 2000년 11월 24일자 ; 85년 미문화원 점거 민주화운동과 관련 보상심의위, 성격규정, 조선일보, 2001년 2월 23일자 ; 군산 오송 회사건 9명 중 7명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조선일보, 2002년 1월 19일자. ; 진실화해위 80년대 간첩사건 3건 조작 오주석 재일동포유학생 이종수 임성국 사망사건, 영장도 없이 구금한채 자백 강요 증거물도 조작해, 국가는 피 해자 가족에 사과하고 재심 조치하라 권고, 조선일보, 2008년 10월 14일자. 97) 양성우씨 30년만의 교단복귀 1975년 민청학련관련 해직 광주중앙여고 복직결정, 조선일보, 2005년 2월 18 일자 ; 27년만에 명예회복한 5 18유공자 당시 전남대생 고방인호씨, 조선일보, 2007년 8월 13일자. 5 18민중항쟁 127

130 지난 2006년 친북반국가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의 출범 자리에서는 일련의 과거청산 작업이 좌파진영이 정부권력을 끼고 역사 뒤집기 를 진행하는 것 으로 평가되었다. 98) 또한 2008년 12월에는 사노맹 사건 관련자에 대한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결정에, 국가정체성, 법적 안정성, 대한민국의 정통성 의 시비가 불거지기도 했다. 99) 2009년 2월 18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안보문제연구소가 개최한 토론회에서도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 작업과 관련하여 국가정체성, 헌정질서 위반을 둘러싼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이 자리에서는 아래의 제시문과 같이 민주화운동을 공산주의 활동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100) 당시 5 18항쟁 왜곡은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101) 지난한 투쟁을 통해 5 18의 정당성을 공식적으로 승인받았지만 학살의 책임자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보다 어떠한 법을 어겼는가? 라는 질문만 받았을 뿐, 이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살의 책임자와 5 18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취한 전략은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로의 복귀를 희망하며 같은 입장을 공유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은 주요 보수 웹사이트를 중심으로 5 18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정하고, 진보세력을 이념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이들의 주장은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으며, 특히 5 18에 대한 지식이 없는 대중들과 청소년들을 날조된 내용을 퍼트리고 있다. 102) 예컨대 지만원은 역사심판의 죄악에 대해 全 斗 煥 대통령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5 18광주폭동은 반미주의의 뿌리이며 북괴군의 적화전략이다., 5 18도 5 18묘지에 묻힌 민주열사도 다 좌익들의 자산이다 등의 글을 자신의 인터넷 사이트에 버젓이 게재하고 있다. 또 다른 보수 웹사이트는 왜 우리는 광주사태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 (2010년 1월8일), 집단발포를 한쪽은 5 18무장단체였다 (2009년 3월17일), 광주사태를 간첩이 선동했다고 보는 50개의 이유! (2003년 2월26일)등의 글을 수년간에 걸쳐 게재하고 있다. 103) 최근에는 12 12와 5 18 (지만원, 서울:시스템, 2009),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 친북반국가행위진상규명위원회 출범기념 <국가정체성과 좌익공안사건 재조명> 세미나(2006년 5월 25일, 배재대학원 학 술지원센터), 인터넷 신문 <<KONAS net>> 친북공안사건 재조명, 우리가 맡겠다 참조( article/article.asp?idx=8732&project=). 99)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시비를 건 단체의 핵심간부까지 민주화운동 보상대상자로 인정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화운동의 빛 을 흐리게 한다. (세계일보, ) 법적 안정성과 국가 정체성을 해치는 결정이다. (동아일보, 2008년 ) 100) 민주화보상위원회는 각종 공산주의 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 명예회복 및 보상해 왔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반헌법적 반국가적 행태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민보상위의 이 같은 행태는 남북대치 상황에서 북한의 사주로 빈발해 온 각종 공산주의 활동을 국가적 명예회복 및 보상대상으로 추모 및 추앙케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역 사적 정통성과 이념적 정체성을 뿌리부터 파괴하는 행위이다. 101) 5 18왜곡담론의 양상은 웹사이트 내 5 18바로잡기 유형별 조사-보수웹사이트 텍스트를 중심으로- (5 18기념 재단, 2010)을 참조하였다. 102) 일베 광고중단 철퇴 맞고도 5 18 왜곡 여전, 광주일보, 2013년 5월 24일자; 5 18영령 앞에 고개 숙인 일 베 회원들, 뉴시스, 2014년 7월 10일자. 103) 지만원은 2002년 8월 16일 동아일보에 대국민 경계령! 좌익세력의 최후발악이 시작됩니다 라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이러한 지만원의 특정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 행위는 법원의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지만원은 5 18을 북한 특수부대의 소행 이라고 폄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계속해 나가고 있다. 12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1 (자유북한군인연합, 2009)과 같은 책이 출판하기도 하였다. 104) 물론 이들의 주장이 5 18의 사실관계를 무시하여 자의적으로 배치 조작 하고 있다는 점, ~했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 와 같이 간접 참여자의 증언을 직접 참여자의 증언으로 과장하고 있다 는 점, 일부 보수세력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은 그저 미비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독일사회에서 소수 세력에 불과했던 히틀러가, 보수 정당과의 결집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했던 역사를 유념한다면, 그 위험성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105) 현실에서 진실은 항상 권력과의 관계에서 구성되고 또 재구성된다. 106) 1980년대 억압과 저항 이라는 대결구도 안에서, 1990년 광주청문회와 1995년 5 18특별법의 제정에서, 일련의 진상규명 과정을 통해 5 18항쟁의 사실들은 새로운 진실 의 위상을 획득했다. 광주청문회는 5 18을 전국적으로 공식화 하였고, 5 18특별법은 법적 지위를 인정하면서 가해자의 사법적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 그리고 명예회복을 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제도적 절차 를 통해 마련된 5 18의 진실은 과거 저항 주체들의 정치적 복권을 의미하며, 107) 관련자들의 삶에 대한 피해정도를 측정, 이를 인정했다는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5 18의 법적 제도적 진상규명 작업은 과거 저항의 주체를 대상화시켜 버리는 한계를 가진다. 1980년 5월 시민의 저항은 신군부 세력에 의해 폭도의 난동 으로 왜곡되면서 그들은 대한민국의 타자로 불려졌다. 진상규명은 신군부를 가해자에서 책임자로 종국에는 범법자 로 그 위상을 격하시켰고, 시민은 피해자 에서 유공자 로 그 사회적 위상을 격상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는 항상 5 18의 진상을 규명하는 주재자( 主 宰 者 )로서의 위치를 잃지 않았다. 국가주도의 진상규명 작업 속에서 저항의 주체는 정치적 복권이 되는 위치에 있었고, 관련자는 보상을 받는 수동적 대상이었다. 과거 저항세력은 국가의 신화 안으로 포섭되고, 5 18의 관련자는 당사자 로, 이후 세대는 민주화의 수혜자 가 되고 말았다. 최근 5 18 왜곡문제는 과거 신군부세력에 의한 5 18의 은폐하고 실상을 지역에 고립시키고, 왜곡담론을 전국화시킴으로서 당대의 민주화 요구를 차단하고자 했던 정치적 목적 및 전략의 잔재이다. 오늘날의 5 18왜곡 또한 5 18의 진실을 폄훼하면서 궁극적으로 진보세력을 104) 최근 지만원은 5 18분석 최종보고서 (2014, 시스템)라는 책에서 5.18은 북한특수군 600명이 천대받던 사회불만세 력 을 부나비로 이용하여 남남전쟁을 유발시켜 놓고, 이를 남침전쟁으로 연결하기 위해 벌인 고도의 이간작전이었다. 광주 인에 의한 독자적인 광주인 시위대는 없었다. 민주화운동도 없었다. 전남지역에 20-30만명이 동원된 폭동과 살인과 방화 가 있었지만 이를 지휘한 한국인은 없다. 국가는 북한군 작전에 소모품으로 이용된 4,634명의 광주-부나비들에 초특급의 유공자 대우를 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국가의 돈으로 학교를 만들고 책자를 만들고 영상물을 만들어 자라나는 어린이 들에 국가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주고 있다. 국가는 북한이 써준 글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썼다, 국가도 국민도 남북한-공 산주의자들에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고 하였다. 105) 로버트. O. 팩스턴, 손명희 최희영 옮김, 파시즘, 교양인, ) 정일준, 5 18 담론의 변화와 권력 지식관계, 민주주의와 인권 4-2, 5 18연구소, 2004, 105쪽. 107) 김병인, 5 18과 광주지역 사회운동-학생운동의 5 18의 발발과 정치적 복권 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5 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 2001, 151~154쪽. 민주화운동 129

132 반정부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함으로써 반대로 보수세력의 집결을 도모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법적 제도적 과거 청산과정에 정략적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소통을 전제로 한 사회통합과 이를 통한 사회적 진실의 위상을 형성하지 못한 한계를 반성해야 한다. 2011년 유네스코는 1980년 5 18관련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했다. 1980년 시민들의 성명서, 기자들의 취재 수첩, 재판자료, 사진과 시민들의 증언 등 4,000권의 자료와 1,700여장의 사진 1,400여명의 증언을 인류의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들은 세계기록유산을 선정하며 5 18이 대한민국의 인권의 전환점이자,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인권이라는 개념은 사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일제 36년의 식민지배와 냉전의 비탈길을 미끄러져 온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무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해방 과 민주주의 에 대한 다양한 요구와 실천의 밑바탕에는 인류가 지향하는 가치가 늘 자리하고 있었다. 1980년 5 18은 우리 스스로 그 가치를 깨달았던 소중한 역사적 자산임에 틀림없다. 결국 5 18항쟁의 가치는 국가나 다른 누군가가 명명해 주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이루어 낸 민주화의 역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역사를 학습하고 그 가치를 공유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가진다. 1980년 5월 무고하게 죽어갔던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민주주의 를 가능하게 했다면, 그 역사의 결과인 우리 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 진정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항쟁 해야 할 것이다. 1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3 참고문헌 자료 일반자료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종합보고서 제2권,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광주광역시, 광주시사 제3권, 광주광역시사편찬위원회 광주광 역 시5 18사 료 편 찬 위 원 회, 광 주5월 민 주 화 운 동 자 료 총 서 권,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광주광역시, 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고령) 광주매일 정사 5 18특별취재반, 정사 5 18, 사회평론사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편, 광주민중항쟁 자료집, 도서출판 광주 전남대학교5 18연구소, 연구소 자료 모음집 6, (미발행) 전라남도, 1996, 5 18 기념사업 종합계획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전라남도지 제9권 김영택, 월 18일, 광주, 역사공간 김영택, 일간의 취재수첩, 사계절 현대사사료연구소 편, 역사와 현장 1, 남풍 정상용 외, 광주민중항쟁: 다큐멘타리 1980, 돌베개. 한국현 대사사료연구소(1989), 광주민중항쟁일지, 미간행자료. 이것은 이후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 (1990)으로 발간됨 서울지방검찰청 국방부 검찰부, 관련 사건수사 결과 보고서.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5월민중항쟁자료전집, 풀빛. 민주화운동 131

134 한국기 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년대 민주화운동: 광주 민중항쟁 자료집 및 상반기 일지 Ⅰ,Ⅱ.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군 관련 자료 2군사령부, 광주권충정작전간군지시및조치사항 2군지구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31사단, 작전상황일지 700보안부대, 광주사태동향 7공수여단, 전투상보 계엄사, 계엄일지 계엄사, 충정일일주요업무상황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 국방부, 대침투작전태세강화지시 국회청문회, 5 18당시 광주시내상황(유언비어)(1989) 기무사보관자료, 광주사태관련자신원사항 보안사505보안부대, 광주사태시상황일지, 보안사, 5 17전국비상계엄배경 보안사, 광주사태상황보고 보안사, 광주사태일일속보철 보안사, 광주사태전말보고 (1989) 보안사, 광주소요사태진행상황 보안사, 긴급계엄회의결과보고 보안사, 충정업무일일주요사항 보안사령부, 광주사태일일속보철 보안사령부, 제5공화국 前 史 4편(1982). 육군본부작전상황실, 상황일지 육군본부, 전교사작전상황일지 전교사, 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 전교사, 전교사작전상황일지, 전교사, 전교사작전일지 전교사, 전투상보(충정작전결과) 1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5 전교사, 전투상보 전교사, 충정작전결과 전남도경, 상황일지 전남도경찰국, 상황일지 전남도청, 5 18주요사건일지. 전라남도, 5 18사태주요사건일지(5.14.~27.) 특전사, 광주소요사태진압작전(총괄) 특전사, 전투상보 특전사령부,군사연구실, 광주지역소요사태진압작전 합참, 상황보고철 사진자료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1980년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집 오월광주, 도서 5 18기념재단 엮음, 민중항쟁과 법학, 5 18기념재단. 5 18기념재단 엮음, 민중항쟁과 정치 역사 사회 1~5권, 5 18기념재단. 5 18기념재단, 웹사이트 내 5 18바로잡기 유형별 조사-보수웹사이트 텍스트를 중심으로-, 5 18기념재단. 김보현 김상봉 외, 2009, 5 18 민중항쟁에 대한 새로운 성찰적 시선, 한울. 김재균, 2000, 5 18과 한국정치: 광주보상법과 5 18특별법 결정과정 연구, 한울. 김정한, 2013,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소명출판. 나간채 외, 1997, 광주민중항쟁과 5월운동 연구, 전남대학교 5 18연구소. 박은정 외, 1995, 5 18 법적 책임과 역사적 책임, 이화여대 출판부. 박찬승, 1980년 목포민중항쟁의 배경과 전개과정 (미게재 원고) 손호철, 1995, 해방 50년의 한국정치, 새길. 이내영 박은홍, 2004, 동아사아의 민주화와 과거청산, 아연출판. 정해구 외, 1990, 광주민중항쟁연구, 사계절. 조정환, 2010, 공통도시 -광주민중항쟁과 제헌권력, 갈무리. 민주화운동 133

136 조희연 정호기 엮음, 2009, 5 18민중항쟁에 대한 새로운 성찰적 시선, 한울. 조희연 편, 2002, 국가폭력, 민주주의 투쟁, 그리고 희생, 함께읽는 책. 천정환, 대중지성의 시대, 푸른역사. 최영태 외, 2008, 5 18 그리고 역사, 길. 최정운, 1999,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풀빛편집부, 1997, 5 18 특파원리포트, 풀빛. 학술단체협의회 편, 1999, 5 18은 끝났는가, 푸른숲. 로버트. O. 팩스턴, 손명희 최희영 옮김, 파시즘, 교양인, 2006 베네딕트 앤더슨, 윤형숙 역, 상상의 공동체, 나남 출판, 조지 모스, 임지현 김지혜 옮김, 대중의 국민화, 소나무, 귀스따브 르봉(민문홍 강영숙 옮김), 군중의 심리, 학문과 사상사, 오르테가 이 가세트(황보영조 옮김), 대중의 반역, 역사비평사, 자크 랑시에르(오윤성 옮김),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 도서출판b, 논문 강진철, 서평: 5 18, 이 시대 법과 역사의 화두, 법과 사회, 법과 사회이론학회, 곽노현, 5 18헌법소원 및 5 18특별법의 쟁점과 해법, 민주법학 10, 고 은, 광주5월민중항쟁 이후의 문학, 광주5월민중항쟁, 풀빛, 김병인, 5 18과 광주지역 사회운동, 5 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김병인, 5 18과 죽음 그리고 학생운동과 정치적 복권, 5 18민중항쟁과 정치 역사 사회 3, 5 18기념재단, 김 성, 5 18과 매스 커뮤니케이션, 5 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김 성, 5 18민중항쟁과 왜곡보도에 관한 연구, 5 18기념재단, 김성천, 5 18특별법의 쟁점과 흐름, 법과사회, 법과사회이론학회, 김용철. 광주항쟁과 한국정치의 민주화: 탈군부정치의 역사결정적 국면의 원천으로서 광주항쟁, 민주주의와 인권 1-1, 5 18연구소, 김정한, 대중운동의 이데올로기 연구- 5 18광주항쟁과 6 4천안문운동의 비교,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박사논문, 김창진, 시민의 저항과 무장항쟁, 5 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나의갑, 5 18의 전개과정, 5 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노영기, 5 18항쟁기 민간인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곡, 역사비평 9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37 박광주, 5 18, 왜, 어떻게 일어났으며 무엇을 남겼는가, <5 18학술심포지엄 발표논문집>, 한국정치학회, 박찬승, 선 언 문 성 명 서 소 식 지 를 통 해 본 5 18, 5 18민 중 항 쟁 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변정수, 5 18특별법 제정의 전말, 민주법학 13,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손호철, 80년 5 18항쟁-민중항쟁인가, 시민항쟁인가?, 현대한국정치, 사회평론, 송정민, 뉴스의 현실구성에 관한 연구-뉴스매체의 5 18광주항쟁 보도를 중심으로, 서강대 박사논문, 신진욱, 사회운동의 연대 형성과 프레이밍에서 도덕감정의 역할-5 18광주항쟁 팜플렛에 대한 내용분석, 경제와 사회 73, 한국산업사회학회, 안종철, 5 18자료 및 연구현황, 5 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오유석, 외곽지역의 항쟁으로 본 5 18민중항쟁, 5 18민중항쟁과 정치 역사 사회 3, 5 18기념재단, 유경남, 광주5월항쟁 시기 광주 의 표상( 表 象 )과 광주민주시민 의 형성, 역사학연구 35, 호남사학회, 이영재,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5 18 사법적 처리의 의의를 주심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4-2, 전남대5 18연구소, 이용기, 5 18 에 대 한 역 사 서 술 의 변 천, 5 18민 중 항 쟁 과 정 치 역 사 사 회 3, 5 18기념재단, 이재승, 과거청산과 인권, 민주법학 13,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이재의, 5 18 특집: 법적 처리 어떻게 진행돼 왔나, 월간 예향 1995년 5월호. 이준희, 선거따라 노래따라, 내일을 여는 역사 30, 내일을 여는 역사, 2007, 권력은 노래를 부른다, 내일을 여는 역사 31, 내일을 여는 역사, 2008 임종명, 표상과 권력:5월광주항쟁의 전용, 역사학연구 28, 호남사학회, 임종명, 5월 항 쟁 의 대 중 적 참 여 와 그 계 기 및 의 식 성-5월 18일 과 19일 을 중 심 으 로, 역사학연구 32, 호남사학회, 전진성, 과거는 역사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과거사진상규명 을 바라보는 시각, 역사와 경계 53, 부산경남사학회, 이정로,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전환, 노동해방문학 통권제2호, 이진경 조원광, 단절의 혁명, 무명의 혁명 -코뮌주의의 관점에서-, 5 18민중항쟁에 대한 새로운 성찰적 시선, 한울, 장휘숙 최영임, 죽음공포와 죽음수용의 관계, 한국심리학회지 발달 21-2, 한국심리학회, 민주화운동 135

138 조정환, 광주민중항쟁과 제헌권력, 5 18민중항쟁에 대한 새로운 성찰적 시선, 한울, 조현연, 5 18 진 상 규 명 투 쟁 과 광 주 청 문 회, 5 18민 중 항 쟁 과 정 치 역 사 사 회 5, 5 18기념재단, 정근식, 5 18광주항쟁, 역사비평 30, 역사문제연구소, 1995., 부활 광주?: 과거 현재 미래, 문학과 사회 50, 문학과 지성사, 2000., 부마항쟁과 79-80레짐, 지역사회학 2-1, 지역사회학회, 2000., 청산과 복원으로서의 5월운동, 5 18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5 18사료편찬위원회, 2001., 과거청산의 역사사회학을 위하여, 역사와 사회 61, 2002., 대 한 민 국 5 18: 광 주 의 전 국 화 명 제 를 다 시 생 각 함, 기 억 과 전 망 1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근식 정호기, 민주화운동에서의 폭력 에 대한 제도적 청산, 사회과학연구 13, 서강대사회과학연구소, 정일준, 5 18 담론의 변화와 권력 지식관계, 민주주의와 인권 4-2, 5 18연구소, 정해구, 지역주의 정치화 한국 민주주의, 기억과 전망 창간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호기, 한국 과거청산의 성과와 전망: 과거청산 과련 국가기구의 활동을 중심으로, 역사비평 69, 역사문제연구소, 최영태, 극우반공주의와 5 18광주항쟁, 역사학연구 26, 호남사학회, 최정기, 광주민중항쟁의 지역적 확산과정과 주민참여기제, 광주민중항쟁과 5월운동 연구, 전남대학교 5 18연구소, 1997., 국가폭력과 대중들의 자생적 저항, 기억과 전망 창간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2., 1980년 봄의 위기담론과 지역엘리트의 대응: 광주지역의 서울의 봄 및 난리 담론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10-3, 전남대학교5 18연구소, 최정운, 폭력과 사랑의 변증법-5 18민중항쟁과 절대공동체의 등장, 5 18민중항쟁과 정치 역사 사회 3, 5 18기념재단, 2007 최정운, 폭력과 언어의 정치-5 18담론의 정치사회학, 5 18민중항쟁과 정치 역사 사회 1, 5 18기념재단, 한인섭, 국가폭력에 대한 법적 책임 및 피해회복: 5 18민주화운동의 법적 해결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법학 43-2, 한홍구, 광주민중항쟁과 죽음의 자각, 창작과 비평 148, 창비, 2010 홍석률, 의문사 진상규명: 과거청산을 위한 진상규명의 시도와 쟁점,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8, 민주사회정책연구원,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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