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의 인물 4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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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셀 킴

2 소개글.

3 목차 1 4

4 :09 해남의 인물43인 머리말 4

5 추천사 CONTENTS 5

6 1장 문화, 예술분야 01 황지우( 시인. 한국예술종합대학 전 총장, 교수) "막혀가는 민주주의 숨통 윤상원 정신으로 틔워야" 02 윤학( 변호사. 문화공간 화이트홀 대표 ) 고향의 바람과 파도소리, 그 순수를 들려주고 싶어 03 손동연( 시. 동시인) 동시 시 시조 넘나들며 조화로운 삶 추구 04 남강 정기봉( 화원요 대표) 해남 녹청자 맥 이어오는 화원요 3 代 05 김준태( 시인. 5 18재단 이사장) 5월의 아픔을 몸으로 겪은 대표적 '5월 시인' 06 진원장( 화가. 조선대교수)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색채의 향연 충만 07 박명성( 연출가. 신시컴퍼니 대표) 한국뮤지컬 황금손 브로드웨이 박, "고향은 예술샘" 08 정철호( 판소리명창. 고법 인간문화재) 국창 임방울 의 마지막 제자, 유파 잇는 게 숙원 09 박수룡( 화가) 골기와 서정 서린 남녘쪽 사람들 비산비야 내고향 10 윤금초( 시조시인) 고향에 미술과 문학 어우러진 공간 만들고 싶어 2장 경제, 사업분야 01 김재욱( 광주비즈니스사장. 전 광주신용보증재단 이사장) 자타가 인정하는 금융업계 마이더스의 손 02 이영현( 낙지한마당 사장) 낙지음식 대중화 이끈 '요식업 전문가' 03 한상원( 동아에스텍( 주) 대표) 도로안전시설물 국내시장 1위점유 04 박흥석( 광주상공회의소 회장) 천혜의 자연환경, 해남을 바이오산업으로 05 성하철 ( 명성건축 회장) 진정 좋은 집 은 자연 친화적 건물 06 이장명( 피토젠 사장) '식물성 항균&탈취제'로 밝고 건강한 사회 꿈꿔 07 이인재( 광동제약 상무) 어머니가 준 선물 '옥수수 수염차'개발로 승승장구 08 김용복( 아르테 인터내셔널( 주) 회장) '영화처럼 아름다운 여성 삶 위해' 만든 니트 6

7 09 박 준( 헤어디자이너) 예술과 비지니스 접맥, 국내최고 150개 가맹점 운영 3장 정치, 행정분야 01 김형윤( 유은학원 총동문회장) 12만 유은학원 동문 하나로 이끌어 02 송희성( 전 전남도의원) 봉사와 여성권익운동 한평생 03 채일병( 전 국회의원. 전 광주발전연구원 원장) 더 나은 세계로 나가려면 진정한 소통 이뤄야 04 박광온( 전 MBC 앵커. 100분토론 진행자) 명 사회자는 대화의 물코를 잘 터주는 것 05 민형배( 광주시 광산구청장) 진정한 용기와 뚝심 비정규직 문제해결단초 제공 06 민병록( 재경 해남중. 고등학교총동창회장) 동창회는 고향에 대한 긍지와 자존심이 생명 07 백영휘( 재경해남군향우회장) 도농 직거래 네트워크로 고향발전 기여 4장 교육, 학문, 종교분야 01 양동주( 정치학자, ' 20세기 세계와 한국' 저자 ) 21세기에는 '소셜지성'이 변화의 태풍 02 문석남 ( 전 대불대 총장 전남대 명예교수) 장애인고용 법 제정 주도 1세대 사회학자 03 이석우( 겸재미술관 관장) 미술과 역사를 넘나드는 격조 높은 문화학자 04 박동희( 시당장학회 이사장) 경제 어려워도 지역인재 육성사업 지속돼야 05 박병호( 전 서울대 법대 교수, 학술원 회원) 전통법문화연구 공로 영산법률문화상 수상 06 윤내현( 국사학자. 전 단국대 교수) 우리 문화원형 찾아 고대사 연구 평생 바쳐 07 존 리( 이오영. IDF 사무총장) 섬김과 나눔의 삶 실천하는 국제 구호활동가 08 오영석( 전 한신대 총장) '하나님 전 상서' 쓴 뒤 대학총장 된 해남소년 09 이해동( 목사. ' 행동하는 양심' 이사장) 어려운 일 도맡아 원만히 해결하는 '양심설거지 꾼' 5장 의료, 체육, 사회운동분야 7

8 01 김동환( 부평 세림병원 이사장) 국내 최고의 의료복지법인 꿈꾼다 02 정철웅( 환경운동가, 현 광주과기원 감사) '지속가능한 발전'보다 '녹진화'제시 03 김성만( 누가선교회 이사장) 의료선교와 함께 해남강강술래 보급전념 04 임판길( 집필작가. 전 보훈연수원장) 해남, 고향과 역사가 주는 의미 밝히고 싶어 05 박미희 ( 배구선수. 프로배구 최초 여성해설위원) 펄펄 날던 왕년의 '코트의 여왕' 06 김성전( 이비인후과 원장. 두륜회 회장) "이제 고향을 위해 직접 봉사하고 싶다" 07 정학래선생 ( 1 세대 차문화운동가) 차의 종주지로서 해남 위상 알려 08 故 윤주연 옹( 독립운동가) 함흥형무소 문 열리자 열차 타고 고향으로... 1장 문화, 예술분야 황지우( 시인. 한국예술종합대학 전 총장, 교수) "막혀가는 민주주의 숨통 윤상원 정신으로 틔워야" 북평면 배다리 출신,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시인 황지우 교수가 최근 광주나들이를 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함박눈이 펑펑 쏟 아지던 지난 16일 저녁, 광주 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토크 콘서트 '지금, 윤상원 with 황지우'에는 400여 시민들이 눈 속을 뚫고 달려와 밤중까지 자리를 지키며 윤상원 열사의 정신과 오늘의 의미를 곱씹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콘서트의 이야기꾼으로 초대된 황 지우시인은 "오늘 우리는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는 윤 열사의 마지막 말을 상기하며 '윤상원 정 신'이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하다는 말을 이어갔다. 막혀가는 민주주의의 숨통을 윤상원 정신으로 틔워내자는 것이다. 그동안 재직했던 한국종합예술학교 총장직을 문광부의 '표적감사'압력으로 물러난 후 교수직까지 박탈당하자 황지우 시인은 국가를 상대로 교수직위확인소송을 냈었고 승소를 했지만 또다시 대법원까지 가는 과정에서 2년여 동안 심한 마음고생을 겪었다. 그러다 홀 연히 중국으로 떠나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 吉 林 大 學 )의 외국인 초빙교수로 머물며 강의와 연구, 창작활동을 계속해왔다. 교수직 복귀 가 이뤄지면서 그는 2학기 강의를 위해 지난 7월에 귀국을 했다. 8

9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신문에서 황 교수님의 토크쇼기사를 읽고 꼭 고향인 해남신문 금요초대석에도 모시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연말 무렵 연락을 드렸는데 안계시더군요. 그동안 중국에 쭉 계셨습니까? 네. 작년 8월에 나갔다가 올해 7월에 귀국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생계형 망명'(웃음)이라 놀려대기도 했지만, 장춘에 있는 길림대 학교 한국어과에서 1년 동안 한국문학 강의하면서 놀다 왔어요. 중국 길림성지방은 겨울에 보통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고 하는데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꼭 중국에 가신 이유가 있으신지 요? 장춘, 하얼빈, 대흥안령 등 만주 일대의 겨울을 최소 옷 다섯 벌을 입고 지냈어요. 노출된 얼굴 살갗을 면도날로 긋는 것 같은 그 혹 독한 추위가, 돌이켜 보면, 뭐랄까, 중독성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리워집니다. 제 첫번째 시집에서부터 '길림'이나 '봉 천' 같은 낯설고 먼 지명에 대한 동경이 언뜻언뜻 비춰나는데, 우리 젊은 시절에 그런 거 있었잖습니까? 가슴에 밀서 하나 품고 만주 설원을 가로 질러 가던 우리 독립군에 대한 환상 같은 거 말예요. 그곳에서 무엇을 하시고, 또 시인의 눈으로 무엇을 보셨습니까? 장춘은 우리 식민지 강점기 때 일본 관동군 사령부가 있던 만주국 수도 신경이었죠. 나쓰메 소세키 등이 만주 기행을 통해 대륙 이 주 러시를 조성하면서 우리 문학예술에서도 소설가 염상섭, 시인 백석, 작곡가 김동진, 김순남 등이 한때 거쳐 간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더군요. 우선 저는 필담 외에는 말이 안 통하니까 완전히 고립된 개인으로서 어슬렁거리며 응시하는 익명의 산책자로만 지냈죠. 저 로서는 오랜만에 보장받은 이 단절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격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의 중국'. 그건 두려움이었어요. 거리의 붉은 고딕체 표어들이 '문명( 文 明 )'과 '과학기술( 科 學 技 術 )'에 집중되어 있는데, 앞으로 이 표어가 현실이 될 때 14억 인구로 소용돌이 치는 중국 현대성의 블랙홀 가장자리에 근접해 있는, 그것도 분단된 한반도가 더 또렷이 바라다 보였습니다. 네. 그렇죠. 그럼 화제를 좀 바꿔서 너무나 당연한 결과지만 대학복귀를 우선 축하드리고요. 당시 임기가 아직 남은 총장 직을 사퇴한 이유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다른 이들도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정부 들어 대학을 비롯한 문화예술계가 당면한 어려움들은 무엇입니까? 이 정부는 건들어서는 안 될 것들, 즉 강과 문화를 건들었습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숨 쉬는 것들입니다. 문화예술은 근본적으로 가만 둬야 스스로 흐름을 만들고 창의성의 젖을 선사하는 거 아닙니까? 임기가 보장된 현대미술관 관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그리 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마치 포클레인으로 찍어 긁어내듯이 했을 때 저는 어떤 눈먼 권력의 도취상태 같은 것을 느꼈는데요. 특히 이른바 '한예종 사태'에 대해 UN 문화 분과가 이런 식으로 "정부가 대학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성명을 표하기도 했 지만, 전 그때 이거는 우리 문화예술계에 가해지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종의 '반달리즘'(문화파괴행위)이라고 말한 바 있죠. 작년 대 법원 승소 판결에 의해 올 9월에 학교로 복귀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그 활력에 넘쳤던 학교 분위기가 어딘가 우울해요.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 같고요. 올해에 4명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카이스트에 이어 한예종도 자살 클로스터가 되는 게 아닌가, 참으로 염려됩니다. 이번 토크쇼에서 " 질식해가는 민주주의의 숨통을 윤상원 정신으로 틔워내자" 고 하셨는데요. 윤상원 정신에 대해 좀 구체적 으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80년대 한국문학은 숫제, 광주 오월에 내가 거기에 없었다는 알리바이에 대한 죄의식의 표현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미안 함, 죄책감, 이런 것이 지나쳐 피하고 싶은 기억, 부담감, 나중에는 또 광주야? 하는 식상함까지 어느 정치학자는 그때의 광주 시 민들이 보여준 '태도'를 '절대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걸 읽은 적 있는데, 그 코뮌의 한 가운데 윤상원을 비롯해 도청의 마지 막 날을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그 자리에 안 있을 수 있었지요. 역사가 피치 못할 숙명이 아닌 자유의지로서 누 군가를 호명할 때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그분들 사람들에게서 어쩌다 정전기처럼 나타나는 '숭고'의 광채를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주 었습니다, 이제 우리 나이 육십인데, 그 당시 스물예닐곱 되었을 청년 윤상원은 이 절대적 공동체의 대명사라 하겠습니다. 민주주의 의 잔인한 나무가 요구하는 피를 기꺼이 헌혈한 그의 자유의지와 숭고, 그게 저한테는 윤상원 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 5 18정신을 오늘에 살려내자' 입버릇처럼 해온지가 수십 년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고 보시며, 만약 효과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면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오월 정신의 핵심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크겠지요.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에 사실 우리가 상당 정도 안도하거나 안이 9

10 하게 생각한 측면이 있죠. 반성해야죠. 어쨌든 그러는 사이 오월 정신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좀 시들해진 듯한 느낌? 그러나 우리가 청춘을 바쳤던 민주주의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실감시키는 오늘의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오월 정신으로부터 답을 찾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또 이제는 오월 정신이 어떤 불의한 외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끈 치솟는 것이 아니라 외압이 없더라도 스스로 우러나오는, '작용하는 정신'으로 퍼졌으면 합니다. 황지우 총장님은 몰라도 황지우 시인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관심이 컸습니까? 초등학교시 절 학우들과 고향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제가 네 살 때 일가족이 광주로 이사 나온, 전후 이농 1세대로서 저의 탯자리 해남을 고향 이야기로 말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습니다. 다만 어머님 말씀과 대조해 보면 제 기억이 두 살 무렵까지 소급한다는 걸 알았고, 두륜산 남사면 기슭이 거침없이 내리뻗어 너른 들녘을 치마폭처럼 주름지게 펼쳐놓고 바다로 쑥 들어가 버리는 북평면 배다리 일대의 풍경이 저의 정서적 원형질을 이뤘다 하겠습 니다. 제 첫 시집 첫 번째 시, <연혁>은 그 빼어난 명승을 배경으로 한 겁니다. 언젠가 문인 친구들과 그곳 여행을 갔을 때 "여기서 시인 하나 나올 수밖에 없네" 하는 말로 내 고향의 보답을 다 받았습니다. 시는 사춘기를 앓던 중학교 시절에 처음 썼습니다.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 나는 오늘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것이다' ' ' 게눈속의 연꽃' 같은 시들은 시 제목이 그대로 시집표 제가 되어 교과서에도 실리고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매우 난해하고 격렬한 풍자시가 이처럼 많이 읽히는 원인은 어 디에 있습니까? 정정 바랍니다. 전 베스트셀러 시인은 아니고요, 스테디셀러에 가깝다 해야 하나요? 제 독자의 상당수는 소위 옛날 386 세대인 거 같 애요. 그들과 시대감이 같았다 할까요? 시인이자 교육자이며 조각 등 당양한 장르의 예술에도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고 계시는데 최근 가장 몰두하신 일은 무 엇입니까? 그냥 멍청하게 있습니다. 가끔 '주역'도 뒤적여보고, '시경', '굴원 초사'를 기웃거리고 있죠. 하하. 연 보 1952년 북평면 배다리 출생 광주서중 3학년 때 학원 문학상에 입상, 광주일고 졸업 1972년 서울대 미학과 진학 2학년 때 유신반대 시위연루로 구속된 뒤 강제징집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沿 革 이 입선 같은 해 문학과 지성 에 시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며 등단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 가담혐의로 구속 1983년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발간 1985년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발간 1986년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1987년 시집 나는 너다 출간 1990년대 들어 선( 禪 )적인 세계에 몰두, 조각에 몰두 1990년 게 눈 속의 연꽃 발간 1994년 한신대학교 문창과 교수 1995년 조각과 시를 한데 묶어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발간. 조각전(학고재 화랑) 개최 199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교수 1999년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발간 10

11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총장 2010년 9월~2011년 8월 중국 길림성 길림대학교 연구교수 2011년 ~ 현재 한국종합학교 교수 수 상 1983년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로 제3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1년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3년 뼈아픈 후회 로 제8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9년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로 제 1회 백석문학상 수상 2006년 옥관문화훈장 윤학( 변호사. 문화공간 화이트홀 대표 ) 고향의 바람과 파도소리, 그 순수를 들려주고 싶어 송지면 출신 문화기획자 윤학 변호사(55. 화이트홀 대표)를 만나러 간 날은 낙엽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예술의 전당'과 이어지는 길목인 지하철 2호선 서초역 7번 출구 앞에 위치한 흰물결 <화이트홀>은 지하에 공연장과 갤러리를 갖춘 복합문화 공간이다. 3시에 열리는 음악회를 보고 인터뷰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윤학 변호사는 2005년 10월에 이 건물을 지었으니 만 6년이 되었다. 대법원청사를 마주보는 딱딱한 법조타운 한복판에 건물이 올라갈 때, 이곳이 문화와 영성이 숨 쉬는 감성공간이 되리라는 걸 짐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개관 이래 이곳에서는 '사랑의 입 맞춤'이라는 타이틀 아래 20여회가 넘는 정기음악회가 열렸고 마음을 적시는 독특한 시각을 가진 화가와 사진작가, 조각가들의 작품 전이 수시로 열려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공연은 일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아이디어, 잃어버린 순수와 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좋은 재료입니다. 나는 공연장에서 사람의 순수 11

12 한 향기를 느끼게 하고 싶어요." 변호사라는 타이틀보다 격조 있는 문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윤대표의 꿈은 지금 거의 이루어진 듯이 보인다. 22회째 공연인 이날 '사랑의 입맞춤, 가을음악회' 역시 우리가곡과 성가, 그리고 관객과 함께 부른 동요까지, 다른 여느 음악 회와는 다른 편안한 느낌의 곡들로 채워져 3백여 객석에 큰 감동을 선사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독창과 중창, 합창의 멋진 앙상블에 취해 있는 중간 휴식시간에 윤대표가 직접 나와 조근조근 음악회취지를 설 명해주는 것이다. '지금 소년시절의 꿈과 순수를 잃어버리고 일과 돈만을 쫒아가는 친구에게 이 음악들을 꼭 들려주고 싶다'고. 대표님의 인사말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느 음악회도 이런 식으로 진행하지 않거든요.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지 않고 관 객들이 진정으로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죠. 대부분의 음악회가 연주자들이 최고의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가능하면 연주외적인 멘트를 지양하는데 저는 시작과 끝에 직 원이 나와 인사를 하고 중간에 제가 인사말을 합니다. 인사말을 할 때 연주자들이 뒤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죠? 저의 멘트는 관객들 을 향한 것이면서 또한 연주자들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화이트홀의 음악은 그들의 기량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고 관객들과 함께하 는 진정한 소통의 순간이 되어야하기 때문이지요. 처음엔 의아해하더니 지금은 제 뜻을 이해하고, 그러면서 그들의 음악도 많이 달라 졌어요. 예술가 그룹 중에서도 음악인들이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화이트홀 무대는 다른 모양이지요? 회를 거듭하면서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결코 자신들의 기량이나 유명한 곡이 아니라 우리에게 친숙한, 그리고 그걸 얼마나 마음과 애정을 담아 전하느냐에 있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지요. 갤러리와 공연장을 함께 운영하시는데 전부터 음악과 그림을 좋아하셨습니까? 하하. 전 음악을 좋아하지만 잘 할 줄은 모릅니다. 저보다 집사람이 더 좋아하기도 하고 많이 알지요. 그러나 제가 늘 꿈꾸고 구상하 던 컨셉은 있었어요. 좋은 음향시설은 물론 연주자들에게 정당한 개런티를 지불하는 것은 기본이고요. '흰 물결 화이트홀' 명칭에서 보듯이 사람의 가슴에 순수하고 깨끗한 물결을 일으키고픈 소망을 선곡과 연주자선정, 그리고 공연 전체 순서에 담습니다. 연주회나 전시회나 장르를 특별히 구분 하진 않지만 휴머니티랄까 사람의 향기가 물씬 나는 그런 컨셉을 고수하려고 하지요. 문화가 다양해지고, 문화를 소비하는 관객들의 기준이 까다로워지면서 '큰 규모=좋은 공연'이란 공식은 깨진 지 오래입니다. 관객들 은 규모와 상관없이 마음을 움직이는 공연내용에 끌려서 오는 것이지요. ' 도서출판 흰물결' 을 통해 각종 단행본과 <월간독자 Reader>, e <가톨릭다이제스트< 가톨릭다이제스트>도 발행을 하시는데요. 많은 이들이 선망 하는 변호사 일을 정말 그만 두셨습니까? 저는 여전히 변호사이며, 또한 문화기획자이기도합니다. 변호사의 일과 문화기획자의 일은 어떻게 보면 다르지 않아요.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마음을 달래준다는 의미에서 비슷하지요. 공연은 음악을 통해, 잡지는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순수한 만남과 사랑을 주선하고 변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변호사의 변론대상은 몇몇 개인이지만 문화기획은 각계각층의 남녀노소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저는 지금 변호사보다 문화 쪽 일이 너무 즐겁고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전념을 하고 있지요. 어떤 공연이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관객들을 감동시킬 수 없어요. 독일, 이태리, 뉴욕에서 온갖 콩쿠르를 휩쓸었던 성악가들이 중창과 합창으로 자신을 감추면서 겸손하게 순수한 앙상블을 이룰 때 이를 보는 것이 즐겁고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집니 다. 변호사시절에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요? 아,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소위 잘나가는 변호사였습니다. 전관예우니 뭐니 하며 판검사출신이 아니고서는 사무실을 유지하 기위해 사건을 가져오는 사무장(브로커라고 한다)을 꼭 두어야한다고 모두들 말했지만 그런 사무장을 두지 않고서도 계속 고객이 이 어졌고 승소율도 90%가 넘었으니까요. 정직과 진심, 그리고 어려서부터 읽은 수많은 책들이 바탕이 되어 남보다 더 논리적인 글로 판사를 설득하고 높은 승소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뭔가 허전했고 그래서 다른 꿈을 꾸었던 것 같아요. 다른 꿈이라니요? 많은 사람들이 연호하는 사회정의라든지 규격화 된 진실에 나는 회의를 갖습니다. 천편일률적인 대중미디어들의 논조를 좋아하지 않 12

13 으며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가 진정한 가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죠. 고등학교는 물 론이고 대학도 재수, 삼수 끝에 붙었고 사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원하던 고등학교에 떨어지고 살레시오고등학교를 나온 덕택에 저는 외국신부님들이 들려주던 좋은 클래식이나 성가를 들을 수 있었고 그 기억으로 지금 음악회를 기획도 합니다. 또 <가톨릭다이제스트>를 만들면서 영혼이 아름다운 교우들의 글을 읽고, 참 좋은 글이 어떤 것인가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이란 참 오묘하지요. 화이트홀 프로그램을 보니 결혼아카데미, 에세이스쿨도 있던데 이것도 직접 운영하시나요? 요즘 젊은이들이 취업은 열심히 준비하면서도 막상 중요한 결혼에 대해서는 너무나 준비 없이 계산적으로 치루는 것이 안타까웠어 요. 미혼남녀는 물론 부모님들도 함께 참석해서 바른 결혼관을 세우도록 마련한 것입니다. 에세이스쿨은 좋은 글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이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도 알았으면 하는 컨설팅기질이랄까 이런 게 어려서부터 있었는데 심지어는 아버지한테도 '운동하시라' '공부하시라' 권했다니까요. 요즘 서점에 가보면 리더십이니 재테크니 네트워크니 하는 책들만 가득한데 진정으로 마음 을 열게 하는 글과 그런 글이 실린 책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도, 고시공부를 하면서도 책만 보면 그 책을 먼저 읽었다고 하셨는데 주로 어떤 책이었습니까? 영 향을 받은 작가와 구절이 있다면 나는 규격화 된 교과서 같은 책이 아닌 것은 다 좋았습니다. 예술? 인문서적은 물론 만화책이나 심지어는 농민지 쪼가리 하나도 재 미가 있었고, 어려운 이론보다 가슴에서 나온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에 매료되었습니다. 누구의 글인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어느 날 '세상에는 경쟁적 가치와 비경쟁적 가치가 있다. 돈과 권력 같은 경쟁적 가치는 세 상에 한정되어 있어서 남과 경쟁해서 이겨야만 얻을 수 있지만 남과 경쟁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비경쟁적 가치가 있다. 그런 가 치는 이 세상에 무한정하게 널려 있는데 예컨대 사랑과 나눔 같은 것이다'는 글을 읽었어요. 그동안 남과 경쟁해서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조바심치며 살아 왔는데 그 글을 읽는 순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지요. 사람들도 나처럼 그런 글을 읽고 인생의 방향을 잡 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글을 쓰고 어려움 속에서도 잡지를 만들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과 고향 해남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십시오.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송지면에 있는 금강초등학교를 다니다 6학년 1학기에 부모님이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신안 도초초등학교로 전 학을 갔습니다. 거기서 중학교까지 마쳤죠. 어릴 적 내가 살았던 바닷가 고향에서는 이웃마을에 영화가 들어오는 날이면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어요. 영화가 끝나 마을에 도착해 서도 사람들은 학교운동장에 모여 강강술래를 했지요. 나는 강강술래처럼 관객이 연주자가 되고 연주자가 관객이 되는 그런 공연을 꿈꾸는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주지 못해 늘 아쉬웠던 어릴 적 그 바람과 파도소리 같은 순수한 그 무엇을 이곳 화이 트홀에서 들려주고 싶습니다. 연 보 1957년 송지면 가차리 출생 송지면 금강초등학교, 신안 도초초등학교. 도초중학교 졸업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졸업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워싱턴대학 로스쿨 LL.M. 과정 수학 법학박사 (서울대학교, 헌법학) 1983년 제 25회 사법시험 합격 1986년 변호사 개업 1997년~현재 월간 가톨릭다이제스트 대표 2007년~현재 화이트홀 화이트홀갤러리 대표 13

14 2007년~현재 월간독자 Reader 발행인 1996년~현재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사회활동 경력 2005년~2007년 교육인적자원부 대학설립심사위원 2007년~2008년 교육인적자원부 대학통폐합심사위원 1998년~1999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상임위원 1996년~2006년 CBS 객원해설위원 신용협동조합 중앙회 법률고문 역임 월까지 화이트홀 음악회 '사랑의 입맞춤' 22회 기획공연 저 서 2006년 <잃어버린 신발 열 켤레> (흰물결) 2009년 <흰 눈을 털며 달려가던> (흰물결) 손동연( 시. 동시인) 동시 시 시조 넘나들며 조화로운 삶 추구 해남이 문인의 고장으로 알려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나 아동문학 쪽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인물들이 많다. 1980년대 농촌의 현실과 문제를 아동문학에 접목시킴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옥천면 팔산리출신 동화작가 윤기현씨, 그리고 얼마 전 교통사고로 14

15 안타깝게 타계한 농민운동가 정광훈씨도 있다. '별보는 밤'의 시인 윤삼현씨는 현산면 출신이다. 오늘 금요초대석의 주인공은 북일면 출신 손동연씨(56). 그의 시는 전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시 읽기가 부쩍 장려되는 요즘 지하철 역이나 공원 한 켠에 설치된 시화전시대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작가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75년, 당시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손동연씨는 이후 1976년 월간 아동문예에 동시로 또 추천을 받고, 198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가작(시),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 198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시조)에 연거푸 당선하기도 했다. 이처럼 여섯 번이나 문단의 어려운 관문을 통과함으로써 그는 시, 시조, 동시의 모든 시 문학 장르에 걸쳐 탄탄한 문학적 역량을 인정받는다. 그가 쓴 동시처럼 '나란히 줄지어 선 옥수수들에게/치과의사 같은 햇볕이 찾아가 들여다보기도 하고/심심하면/아무 곳에나 고추잠자 리 떼를/풀어 놓기도 하는' 청명한 가을날 손동연 시인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손동연 선생님을 모시게 된 것은 최근 지하철 역 어딘가에서 우연히 보게 된 ' 가을 날' 이라는 동시 때문이기 도 합니다. 약간 촌스러운 코스모스의 이미지를 그리 아름답게 그려주신 분이 해남분이어서 더 만나고 싶었지요. 하하 그렇습니까? 동시 '가을 날'은 전체 3연 8행의 아주 짧은 시죠.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작품이 실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요. 선생님은 여러 편이 실려 있지요? 시집 뻐꾹리의 아이들 중 '나하고 동갑' '이름도 잘 붙인다' '오줌 싸게 오줌 싸게' '얼레빗 참빗' '송아지가 아프면' 등의 시편들이 초등학교 읽기 교과서에, 그리고 동시 '맑은 날', '기린' '구리 구리 구리' '코끼리' 등이 국어책에 실려 있습니다. 저의 시에 나타난 이야기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시 읽는 즐거움과 시의 원리를 학습하는 데 알맞아 본보기로 활용되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는 시적 장치가 궁금하군요.(.(빼면?) 작가마다 세계관이랄까, 세상을 보는 독특한 안경이 있게 마련 인데 선생님은 시를 쓰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과 관심, 즉 따뜻한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생명체요, 서로의 '참 좋은 짝'이거든요. 그래 서 울림이 좋은 시는 늘 그 바탕에 '더불어 살기'의 마음이 깔려 있지요. 제 책상 머리맡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붙어 있어요. '어린이는 어른의 반대말이 아니라 본딧말이다.' 그래요. 동심은 모든 마음의 첫 자리요, 고향이라고 봐요. 그래서 저는 시를 쓸 때 이런 바람을 담습니다. 어린이였을 때를 까맣게 잊고 사는 어른들에게는 제 시가 '젊어지는 샘물'이, 어린 벗들에게는 '마르지 않는 꿈의 샘물'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아동문학은 야동( 野 童 )문학으로 나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훈육이나 경계가 아닌, 글로써 같이 놀고 신명을 느끼는 그런 문학. 그래 서 저는 3미( 三 味 )라는 말을 즐겨 씁니다. 재미와 흥미, 그리고 의미. 그런 시를 쓰자는 것이죠. 의미는 진실추구인데 의외로 쉽게 찾 아지는 방법이 있지요. 학교에서 아이들이 반대말, 혹은 맞섬 말이라고 배우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 중에는 동전의 앞뒷면처 럼 한 겹을 이루는 말들이 많이 있어요. 저는 남들이 다 보는 앞면보다 남들이 잘 보지 않는 뒷면을 찬찬히 살펴본답니다. 숨은 그림 찾기 놀이처럼 즐겁게요. 그러면 사물의 숨겨진 본디 의미가 더 잘 보이는 거예요. '하느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알게 해주 세요.// 그래야/ 손뼉이 쳐지잖아요./ 잘한다고 맞장구도 쳐주잖아요.'란 시도 그렇게 태어났어요. '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는 말을 뒤집어 생각한 것이로군요. 언어적 발상의 전환이 재미있습니다. 이런 재 능으로 20살 무렵 동시로 신춘문예에 등단을 하고 연이어 30세가 되기도 전에 시와 시조에까지 등단을 하셨군요. 그럼 동 시인 입니까? 시인입니까? 예술에서 장르가 해체되고 다양한 문화가 서로 교차 활용되는 시대에 동시와 시, 그리고 시조라는 형식을 구분하는 것은 크게 의미 가 없다고 봅니다. 소재에 따라 어떤 그릇에 담는 것이 효과적인가의 문제죠. 저는 동시는 물론 시와 시조를 함께 씁니다. 그러나 날 이 갈수록 '동시는 시의 아버지'라고 말했던 문단 선배들의 말을 실감하지요. 동시야말로 오롯한 알맹이를 품고 있는 씨앗이라는, '아 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그 아름다움의 핵이 동심성이라는. 그런 믿음으로 장욱진화백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의 세계를 꿈꿉니다. 고향 해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나 학교 때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북평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고 광주로 전학을 왔지요. 도시학교는 너무나 재미가 없다는 것을 그 때 느꼈습니다. 시골에서는 학교 15

16 를 오가거나 보고 듣는 것이 다 즐거움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노래까지도 공부할 내용과 엮어 외우게 하는 식이었죠. 저의 연작시화집 '뻐꾹리의 아이들'은 뻐꾹리라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제가 그리는 이상향이자 두고 온 고향이기도 합니다. 저의 시의 특질을 오세영은 '삶에 대한 긍정적 믿음과 프리미티즘(원시성)에의 동경을 바탕으로 한 민속적 향토적 세계'라고 하고, 오규원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조화로운 삶에 대한 노래'로 인식하는가 하면, 곽재구는 '자연 속에서 어우러진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아름다움과 민요나 사투리, 적절한 현대시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시를 빚어내는 솜씨를 높이 산다'고 했습니다. 시의 모태가 결국 고 향에 있는 셈이지요. 문학을 하게 된 구체적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것입니다. 국어 시간에 백일장에 나갈 학생을 뽑는다고 해서 손을 번쩍 들었어요. 글을 잘 써서가 아니고 단지 합법적으로 수업을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렇게 동신중학교에서 소설가 한승원 선생님을 만나 일주일에 한 편씩 20~30매 분 량의 글을 써서 선생님 댁을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붉은 사인펜으로 죽죽 그으며 그때 하시던 말씀이 생생하네요. "쓰고, 쓰고, 또 써라. 글이 너무 반짝인다. 반짝임부터 죽여라." "머리는 하늘에 묻고 발은 굳게 땅을 디뎌라. 그리고 가슴으로 노래하라." 고요. 고 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서정주와 박재삼을 만났고 고은을 만났으며 릴케와 타고르도 만났습니다. 닥치는 대로 시집을 구해 읽었고, 베 끼기도 하며 그야말로 독학을 했어요. 시의 요체는? 지금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데 어떻게 시 쓰기를 가르치나요? 제 손톱에 봉숭아꽃물 보이시나요? 감성은 '철딱서니 없음'에서 나와요. 남 눈치를 왜 봅니까. '물음표로 시작해서 느낌표로 나가라' 이게 감수성 훈련의 기본이에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걸어 다니는 호기심 천국'인데, 중ㆍ고등학생만 되어도 감수성이 굳어져 있어요. 개성은 '남다름'인데 그 남다름이 없으니 시가 나오지 않죠. 문학하는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예컨대 사막에서 비즈니스를 한 다고 할 때 남들이 사막의 땡볕만 생각할 때 문학인은 사막의 서늘한 밤을 먼저 생각해야한다는 거죠. '모든 사물을 물음표로 시작해 서 느낌표로 나가라' 이게 감수성 훈련의 기본이고 거기다 저는 3다를 또 주장합니다. '다 보라, 다르게 느껴라, 다양하게 표현하라.' 가장 좋은 시 교육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냥 놓아먹이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가을은 추수의 풍요가 있는가하면 나무들도 잎을 떨구는 조락의 계절이지요. 사람들을 감상에 젖게?하고 시를 읽게 하는 계절인 것 같아요. 이 가을에 읽을 선생님의 시를 하나 소개해 주시겠어요? 앞에서 언급한 '가을날'이란 동시입니다. 코스모스가 빨간 양산을 편 채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얘, 심심하지? 들길이 빨간 양산을 받으며 함께 걸어가 주고 있었다 또 이 시는 모 신문의 명작동시 50선에 게재된 '송아지가 아프면'이란 시입니다. 송아지가 아프면 온 식구가 다 힘 없제 외양간 등불도 밤내 잠 못 이루제. 토끼라도 병나면 온 식구가 다 앓제 순덕이 큰 눈도 토끼 눈처럼 빨개지제.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 동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데 잠시라도 맑은 샘물 같은 시를 감상할 수 있어서요. 16

17 연 보 1955년 해남군 북일면 흥촌리 출생 해남북평초등학교 4학년 때 광주 서석초등학교로 전학 광주동신중ㆍ고등학교졸업 조선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광주대성여고 교사로 근무하다 '전교조 사태'로 해직 후 복직 현 광주체육고등학교 국어교사 광주여자대학교 창작문학과 외래교수(1998~1999)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2000~2011 현재) 작품 활동 197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동시 '국어시간의 아이들' 당선 1978년 '아동문예'에 '해질 무렵' 외 2편 동시 추천 198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돌' 가작당선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우리선생 백결' 당선 198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나의 근본' 당선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청학동 이야기' 당선 작품집 동시집 그림엽서 (1984, 아동문예) 참 좋은 짝 (2004, (주) 푸른 책들) 뻐꾹리의 아이들 (1~6권, 1987~2011 아동문예사) 시집 진달래 꽃 속에는 경의선이 놓여있다 (1988, 한겨레) 그림책 곰에게 줄래! (2004, 교원) 영어동시집 Verse for Children With Hamster (2001, 글송이) 동시선집 연필이 신날 때 (2003, 은하수미디어) 수상 제6회 대한민국문학상(1984) 제13회 전남아동문학가상(1988) 제13회 한국동시문학상(1991) 제11회 계몽아동문학상(1992) 제30회 세종아동문학상(1997) 제37회 소천아동문학상(2007) 등 수상 한국문예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4회 수혜(1984, 1999, 2004, 2007년) 남강 정기봉( 화원요 대표) 해남 녹청자 맥 이어오는 화원요 3 代 17

18 청자하면 강진이요, 도기하면 이천이나 여주를 떠올리지 해남이 청자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런데 "해남 은 청자의 시원이다. 청자하면 상감청자만 생각하는데 그 이전의 것이 녹청자이며 여기서 발전해 청자가 된 것이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해남군 황산면 연호리에서 부친의 호를 딴 화원요를 운영하면서 녹청자를 재현하고 있는 남강 정기봉씨(55)가 그 사람이다. 그 에 의하면 청자의 시원인 녹청자는 해남에서 시작되었다. 녹청자는 이미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엽인 9 10세기경에 발생되었고 토기에 서 자기 문화의 대혁명으로 가는 과정에서 민간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곳 산이면 가마터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해남이야말로 강진이나 부안에 앞선 남도 자기문화의 발상지 아닌가? 왜 그토록 중요한 진실이 알려지지 않고 녹청자가 마 치 청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질이 떨어진 청자, 조질청자라고만 알려지게 되었을까? 태풍 '메아리'의 영향으로 종일 장맛비가 오락가 락한 지난 일요일,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제차문화전시회에 다기도예작품을 전시하러 온 정기봉씨를 광주에서 만났다 국제차문화전시회에 출품된 선생님의 녹청자 다기세트와 작품들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일반 청자와는 다른 맑고 고운 녹색 빛깔이 두드러진 특색을 보였는데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지난달 23일부터 나흘 동안 광주에서 열린 국제차문화전시회는 세계 각국 명차의 맛과 문화를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세계 8 개국 140여 업체가 참여해 차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전시회에는 세계 각국의 유명 차뿐만 아니라 다기, 다구 및 차와 관련된 문화상품들이 함께 출품됐는데요. 저는 작품으로서의 도예뿐 아니라 생활도예를 추구하는 만큼 해마다 전 시회에 작품을 냅니다. 녹청자 다기세트는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어서 항상 주목을 받지요. 일부 학계에서는 녹청자가 고려 말 청자의 쇠퇴기에 발생했다는 설도 있는데요. 청자의 시원이 녹청자라는 말과는 정반대 아닙니까? 어느 것이 맞는지요. 엄밀히 말하면 둘 다 틀린 말입니다. 청자는 당나라 때 발달한 당 문화인데 녹청자란 단어는 없는 것이지요. 1970년대에 강진에서 일 반 청자와는 다른 녹색을 띤 청자가 출토되었는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신 정양모선생께서 명명을 하셨습니다. 그 후 83년 해남 산이면에서 106기, 또 92년도엔 화원면에서 50기의 가마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다량의 청자를 해남녹청 자라 명명하고 지금까지 불려오고 있는데 이제는 청자에 대한 상대개념이 아닌 해남청자라고 정당한 이름을 부여해줘야 합니다. 강진청자, 부안청자처럼 말이지요? 그렇지요. 녹청자로 분류할 당시에는 해남 청자 가마터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산이면 진산리 일대에서 청자 가마터가 발견됐고 완도 해저에서 출토된 다량의 청자 제작지가 산이면 청자 가마터로 알려지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은 만큼 해남청자로 분류해도 손색이 없 습니다. 산이면 일대의 가마터만도 106기가 확인됐는데 이곳은 강진 대구면 청자 가마터의 규모에 결코 못지않아요. 제작시기도 그보 다 앞서고요. 지금부터라도 해남청자로 고쳐 불러야 되겠군요. 해남청자의 사료적 가치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볼까요? 녹청자 도요지는 전 세계적으로도 일본에서만 두 차례 발굴됐고, 이를 근거로 녹청자를 자신들만의 고유 양식이라고 주장했지만 1965년 인천에서, 그리고 해남에서 녹청자 파편과 가마터가 새롭게 발견되면서 학계는 녹청자 발원지와 일본 전파 경로 등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곳 산이면 일대의 녹청자 가마터에서 발견되는 찻그릇 도편 중에는 청자 발생의 기원과도 밀접한 9세기 중국 오월( 吳 越 )국에서 유행하던 해무리굽 형태를 한 찻그릇 도편이 발견되고 있어 흥미롭지요. 또 해남 가마터는 많은 수의 가마가 동시에 운영된 대단위 가마터로, 초기 청자의 양상과 변천 과정을 파악하는데 결정적 자료를 제 공할 수 있는 유적으로 고려~조선 시대 서민들이 이 녹청자를 접시, 그릇 등으로 활용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3대째 가업으로 녹청자 재현을 해 오고 계신데 어렸을 적에 본 부친과 조부님의 작품들은 어땠습니까? 지금 쓰는 공방이름 화원요는 아버님의 호를 딴 것입니다. 조부께서는 70여 년 전 장흥 용산에서 옹기제작을 하시다 청자재현을 위 해 입지조건이 좋은 해남으로 터를 옮겼다고 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힘들게 걸어온 도공의 길을 자식에게 대물림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친을 공부시켜 학교 교사로 성장시켰는데, 부친은 갑자기 교직을 접고 도예가로 전업해 2대가 됐지요.부친 화원 정형식(95년 작고) 어른은 74년 무균열 청자를 완벽히 재현해 83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을 하는 등 여러 차례 큰 상을 받았고, 수상작 일부는 서울 필동에 있는 <한국의 집>에 영구 보존되고 있을 정도로 인정을 받는 대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린 제 눈엔 너무 고생하시 는 것이 못마땅해 "나는 이 일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95년도에 전통 가마를 다 없애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버님이 작고하 18

19 시고 나니까 180도 마음이 바꿔지더라고요. 선친이 하던 것을 마저 정리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뒤늦게 진학해 공부도 다시하고 가마 도 짓고 했는데 다행히 아들이 대를 이어 도예작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4대가 한 길을 간다는 쉽지 않은데 아드님까지 대를 이어주니 마음이 뿌듯하시겠군요. 아버님의 작품은 비록 문양은 덜 세련됐지만 형태나 색깔은 우리가 따라잡지 못할 수준이었죠. 그런데 청자재현에 대한 자료를 남겨 두지 않고 돌아가셨기에 녹청차 재현에 참 많은 고생을 했어요. 적어도 아들에게는 이런 시행착오는 겪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지금은 모든 작업에 자료를 철저히 남기고 실험하는 과정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아들 병민이가 대학재학시절부터 대한민국 공예품대전,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녹청자현대도예공모전, 강진청자공모전 등 전국 각종 공모전에서 입상하는 등 실력을 인정받아 퍽 다행이지요. 이웃 강진군은 청자문화를 지역브랜드로 크게 성공시켜 많은 관광수요를 일으키고 있는데요. 해남청자에 대한 지자체의 관 심과 지원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억울하기도 합니다. 이건 단순한 루머인지 모르겠는데 초기에 문화재 조사팀이 남도지역 도요지 조사 를 하러 강진보다 먼저 해남에 왔다고 해요. 그런데 문화재구역으로 지정되면 토지가격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지주들의 데모 때문에 해남을 포기하고 강진부터 먼저 시작했다고 합니다. 순서가 바뀌었다면 어땠을까요? 또 눈앞에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문화관련 투자는 단체장인 군수나 정책입안 실무진의 의지와 마인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해남청자의 위상을 바로잡을 전시관이나 사료관의 건립이 당장 필요한데도 쉽지 않네요. 해남청자가 해남에서 나는 인기작물인 겨울배추나 고구마를 능가하는 지역문화상품이 될 가능성은? 저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사실 해남에는 화려한 문화인프라가 많지요. 대흥사나 땅끝, 우수영, 공룡화석지 등 워낙 좋은 인프라가 있다 보니 청자는 네댓 번째로 묻혀버리고 마는데 3~4년 전부터 자신감 을 얻었어요. 전국 문화상품전시회에서 해남 녹청자는 꼭 매니어가 있습니다. 한국 도자사에 독특한 패턴과 뉘앙스를 지닌 녹청자를 알아보는 것 이죠. 청자가 귀족적인 색이라면 녹청자는 보다 서민적이고 친근합니다. 식기류나 다기 쪽으로 개발하는데 훨씬 더 유리하고 많은 장 점을 갖고 있지요. 청자빛깔은 음식을 이겨버린다면, 음식을 오히려 살려주는 색이 녹청자입니다. 해남대표브랜드 겨울배추와도 어울리고, 차 문화와도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어요. 오늘 새삼스럽게 해남청자에 대한 좋은 지식을 얻게 되어 기쁩니다. 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녹청자재현과 도예작업들이 해남을 넘어 서 우리나라의 도예문화발전에 큰 축이 되길 바랍니다. 연보 1957 해남군 황산면 연호리 출생 선친 청자기능보유자 -화원 정형식 선생사사(3대째 가업) 호남대학교 대학원 산업디자인학과(도예전공) 졸업 신지식인 선정(문화예술분야) 수상경력 전국공예품대전 국무총리상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특선 전남공예품대전 대상 전라남도미술대전 대상 목포전국도자기공모전 대상 19

20 전시 심사 1989 제1회 개인전(서울 뉴코아백화점) 1991 일본 초대전(오사카NICHE백화점) 1992 세계 도자기 축제 참가(일본 아리타) 1994 일본순회전(사가, 나가사키, 후쿠오카, 오사카) 1998 러시아국립민속박물관 영구보존전시 2000 제2회 개인전(서울롯데백화점, 부산롯데백화점) 2000 LA전시(LA컨벤션 센터) 한 일 전통공예교류전 일본 초청 워크숍(나가사키) 전국기능경기대회, 전국공예품대전 심사위원 광주 전남도예가협회장 역임 호남대학교 산업경영대학원 강사 역임 현재 한국미술협회, 한국공예학회, 한국전통공예가회 회원 해남청자재현추진위원회 기술분과 위원장 전남세라믹협회 전통분과 위원장 전남공예협동조합 이사장 김준태( 시인 재단 이사장) 20

21 5월의 아픔을 몸으로 겪은 대표적 '5월 시인' 5월, 다시 5월이 돌아왔다. 적어도 광주전남 이쪽 사람들에게 5월은 1년 열두 달 중 그냥 평범한 어느 한 달이 아니라, 도장을 찍듯이 마음속에 '인권과 평화'라 고 각인해버린 그런 달이다. 5월 첫 주 금요초대석의 주인공은 김준태시인(63)이다. 화산면 출신, 해남의 아들이자 광주의 아들이고, 민족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요즘 5 18기념재단이사장으로 광주민중항쟁 주역들의 제일 큰 형님 노릇을 하고 있다. 31년 전, 서른 두 살의 김준태는 나이만큼 새파란, 보리밭이나 마늘 싹 같은 푸른 생명을 노래하는 시인이었고 고등학교에서 외국어 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만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광주시민항쟁의 한 복판에서 피눈물 흘리는 시민들을 보았고, 또 그걸 말없이 지켜보는 무등산을 보아버린 것이다 직후 전남매일신문 1면에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발표하면서 신문사는 신문사대로 2개월 후 폐간이 되고, 그는 교사직을 강제로 물러나야 했다. 이후 그의 삶은 예전과 달라졌다. 스스로의 표현대로라면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았지만, 5월의 아픔을 직접 몸으로 겪은 대표적인 '5월 시인'으로, 해남과 광 주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문화운동사에 뚜렷하게 그 이름을 새겨놓고 있다. 흙을 만지면 비록 해남의 흙이 아닐지라도 따뜻하고 척척한 느낌이 손을 타고 전해져 말할 수 없는 시적 엑스타시를 경험한다는 김 준태 이사장. 그래서 우리는 그를 역사시인이며 고향시인이고 밭의 시인이며 통일 시인이라고 부른다. 늦었지만 제10대 5 18재단이사장 취임을 축하합니다. 그동안 대부분 학계, 정계인물들이 이사장직을 맡아 오셨는데 시인으 로서 5 18재단을 이끌어가게 되신 게 흥미롭군요. 5 18기념재단 역대 이사장은 지난 1994년 창립한 이후 초대 이사장에 조비오 신부, 이기홍 변호사, 김동원 전 전남대 교수, 윤영규 전 전교조위원장, 이광우 전 전남대 교수, 강신석 목사, 박석무 전 국회의원, 이홍길 전 전남대 교수, 윤광장 전 전교조 해직교사가 역임하셨지요. 벌써 윤영규 선생님과 이광우 교수님은 저 세상으로 가셨네요. 지난 30년 동안 재단은 5 18광주항쟁의 역사적 자리매김과 5월정신 계승이라는 무거운 책무에 시달렸죠? 지금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보십니까? 5월 정신, 광주정신은 완성된 게 아니라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5월에서 민주주의로, 민주주의에서 통일로 이어져야합니다. 우리나라 는 분단 때문에 모든 비극이 발생하고 있어요. 그렇기때문에 민주주의가 완성되려면 통일이 돼야 합니다. 임기동안 오월정신의 가장 큰 덕목인 대동정신을 살리고 당시 시민들이 죽음 속에서도 하나가 됐던 아름다운 광주 정신을 회복하는데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5 18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난 후 온 국민들은 군사독재의 종식과 함께 민주화가 진전될 걸로 알고 상당히 들떠 있는 분위기였죠? 시인의 감수성으로 그 때 무엇을 예감하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틈틈이 시위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큰 비극이 올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시위기간 중 금남로에서 가 슴 한 복판에 총을 맞고 죽어가는 청년들을 보았어요. 또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대문에서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다 총에 맞아 죽은 최 미애씨가 바로 동료교사의 부인이었지요. 문상을 가서 저는 차마 귀를 막고 싶은 기막힌 얘기들을 직접 들었습니다. 나는 세 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잇달아 타계하면서 조부모 손에서 컸어요. 할머니는 대흥사 절간을 내 집 정지(부엌) 드나들 듯 그곳 에서 사시다시피 했었습니다. 말끝마다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마라"고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었지요. 내 시의 주제인 생 명 중시의 정신은 오로지 할머니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눈앞에서 소중한 생명들이 처참히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했 으니 어떠했겠어요? 항쟁이 끝나고 중단됐던 신문들이 발행되면서 첫날,, 6월2일자인가6 전남매일에 이사장님의 시 '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 자가여' 가 게재되어 광주시민들의 아픔을 어떤 글보다도 생생하게 전달해주었죠. 그 때의 상황을 좀 설명해주시죠. 오전 9시경 신문사에서 연락을 받고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딱 50분 만에 230행이나 되는 장문의 시를 썼어요. 결국 계엄군의 사전검 열에 시 전문은 게재되지 못하고 30행 정도로 줄어버렸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시는 내가 쓴 시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 가 내 몸속에 들어와 마치 접신하듯 단숨에 써진 것 같아요. 검열로 많이 잘렸지만 광주시민들의 아픔을 어떤 글보다도 생생하게 전 달해줬고 칼보다 강하다는 시의 힘을 느끼게 해줬던 것으로 저도 기억이 새롭습니다. 오전 9시경 신문사에서 연락을 받고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딱 50분 만에 230행이나 되는 장문의 시를 썼어요. 결국 계엄군의 사전검 열에 시 전문은 게재되지 못하고 30행 정도로 줄어버렸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시는 내가 쓴 시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 21

22 가 내 몸속에 들어와 마치 접신하듯 단숨에 써진 것 같아요. 검열로 많이 잘렸지만 광주시민들의 아픔을 어떤 글보다도 생생하게 전 달해줬고 칼보다 강하다는 시의 힘을 느끼게 해줬던 것으로 저도 기억이 새롭습니다. 시인으로서 일관되게 추구해오고 있는 주제는 무엇이며 시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어떠했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 '달밤'이라는 시를 썼던 기억이 있고 화산중학교 2학년 때 국어선생님인 윤전하선생님한테서 '시인이 돼라'는 칭찬 과 격려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보다 영향을 받았던 분은 조공술선생님이라고 평양사범학교를 나오신 역사 선생님입니다. 그 분의 처 남이 우리가 잘 아는 함석헌 선생님이셨는데 어느 해 우리 학교를 방문하셔서 2시간동안 강연을 했지요. 어린 마음에도 크게 감명을 받았고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후 닥치는 대로 독서를 했습니다. 중학교 때 이미 세계문학전집이나 형님이 보시던 사상계를 읽었으니까요. 해남은 김준태 시인을 비롯해서 김남주, 고정희 같은 민중시의 뿌리가 있는 곳인데 해남이라는 지역성과 민중시는 무슨 관 계가 있을까요? 글쎄요. 내 마음 속의 해남은 매우 유순한 동네라는 생각입니다. 물산이 풍부해서 사람들이 아등바등하지 않고 서로 돕는 풍조가 있 지요. 서산대사도 "내가 죽거든 유물을 3재( 災 )해를 피할 수 있다는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 보관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선시 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인과 문인이 해남에서 나왔지만 정작 해남이 시의 고향인 것은 배출된 시인의 숫자 때문이 아니 라,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넓은 밭과 땅끝이라는 공간적 절박함이 주는 시적 정서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김지하 시인과 소 설가 황석영 선생도 한동안 해남에 머물며 작품을 썼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고은 시인도 '땅끝'을 노래했지요. 고향, 화산면은 어떤 곳입니까? 고향이 시세계에 미친 영향은? 대지리 마을 앞쪽에 예전에 봉홧불을 올리던 동산이 있고, 산에 오르면 쾌청한 날에는 제주도 한라산 꼭대기가 보이는 순수한 자연 이죠. 동네에서 학교까지 9km길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일 걸어서 다녔어요. 시집 못간 처녀가 죽으면 원혼이 되어 떠 다닐까봐 사람들 발길이 닫는 길 아래에 묻고, 정월에 죽거나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자는 바로 매장하지 않고 풍장을 하는 풍습이 남아있었어 요. 지금 풍장은 없어졌지만 땅을 신성시했던 농경사회의 전통은 여러 곳에 남아있고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라는 내 시의 중심사상도 바로 고향에서 비롯된 것이죠. 내 시의 근원은 흙과 바 다 지금도 시를 쓰려면 고향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영감이 밀려오기를 기다립니다. 연보 1948년 전남 해남군 화산면 대지리 출생 화산남초등학교, 화산중학교졸업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졸업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졸업 경력 및 사회활동 76.3~ 88.7 용남고, 학다리고, 전남고, 신북중, 광주과학고 교사(독일어, 영어) 광주항쟁 詩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발표로, 보안대에 붙들려가 강제해직 86.11~87.7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영암군 지부장 88.8~ 전남일보편집국 부장, 광주매일편집국 부국장 96.3~ 99.2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04.~ 민주유공자항쟁동지회 상임회장 10.6~10.11 장휘국 광주광역시 교육감 당선자 인수위원장 98.3~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초빙교수 03.4~ 현재 광주 금남로에 작은학교 '김준태 22

23 Lykeion' 마련, 집필활동 11.1~ 현재 5 18기념재단 이사장 문단활동 전남일보와 전남매일 신춘문예 각각 詩 당선 월간 ' 詩 人 '지에 <머슴> < 詩 作 을 그렇게 하면 되나> 외 3편으로 중앙문단등단 1983 광주문학상 수상 1985 현산문학상 수상 1995 제38회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문학 부문) ,2001 중국 유럽 미국 등지를 150일 동안 문학취재, 한국문학과 한반도현대사 강연 항쟁 최초 창작판소리 <무등진혼곡>대본 창작발표 1996 <문예중앙>에 중편소설 <오르페우스는 죽지 않았다>로 소설문학 데뷔 항쟁 최초 창작오페라 <무등둥둥>대본 창작발표 1999 시전문지<시의 나라>제정 '제1회 자랑스런 시인상'수상 1998~현재 광주 전남작가회의회장, 상임고문.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한국작가회의 자문위원 저서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 비평사, 1977)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한마당, 1981) 국밥과 희망 (풀빛, 1984) 불이냐 꽃이냐 (청사, 1986) 넋통일 (전예원,1986)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실천문학사, 1988) 오월에서 통일로 (빛고을 출판사,1989)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1989) 통일을 꿈꾸는 슬픈 色 酒 歌 (미래사, 1991)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 (창작과 비평사, 1994) 지평선에 서서 (문학과 지성사, 1999) 진원장( 화가. 조선대교수)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색채의 향연 충만 23

24 뿌리를 박고 하늘로 뻗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버드나무의 늘어진 모양이 긴장감과 자유로움을 더해주는 최근 작 앞에서 진원장 교수는 이제 완벽주의를 벗고 더 자유로워지길 갈망한다고 말한다. 서정적이면서도 화려한 색채로 남도의 자연과 정서를 담아내는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 서양화가 진원장 교수(61 계곡면 출신 조선대학교 전 미술대학장)는 지금 생애 스물한 번째의 작품전을 준비하기 위해 작업실에 묻혀있다. "올 가을에 서울에서 가질 전시회인데 그림이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요. 완벽한 그림이 아닌 자유로움을 표현한 그림 " 진원장의 작품은 고향 해남의 자연과 기억으로부터 발원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남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청보 리, 완두콩, 녹두꽃, 배추꽃, 새들이 작품의 소재로 일관성 있게 등장하며, 남도의 따스한 햇살을 머금은 색채 또한 화려하면서도 절 제된 색채의 향연으로 작가 특유의 화폭을 만들어내고 있다. 온 누리가 그의 작품처럼 꽃의 축제로 화려한 막을 여는 4월에 진원장 교수를 그의 작업실로 찾아가 만났다. 그의 화실에서 문득, 이처럼 폐쇄된 공간이 밝고 화창한 자연을 재현하는데 오히려 더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언덕과 꽃과 나무들의 흔들림은 이미 화가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수님의 작품세계를 이루고 있는 정원의 꽃과 나무들이 항상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여성적인 모티브인데 꽃과 정원을 주제로 삼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인물공부를 하면서 인물에서 얻은 느낌이나 테마를 구체화하는 요소로 꽃과 풍경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우연히 생긴 것은 아닙니다. 시골출신이라 어쩔 수가 없지요. 유년의 기억 속에 아스라이 떠오르는 고향의 들녘이 펼쳐진 화폭은 우리를 향수에 젖게 하고, 정화 수를 담은 주발, 그리고 고향 집에 놓여있던 장독항아리 뒤로 보이는 아주 오래된 나무에 오롯이 피어난 꽃들은 어머니에 대한 짙은 그리움입니다. 고흐가 남불의 태양 아래에서 강한 색채에 눈을 떴으며, 마티스가 지중해, 모로코, 타히티의 햇빛으로 단련된 눈을 통 해 화려한 색을 구사했듯이 저의 작품 깊숙한 곳에는 남도의 풍광과 정서가 배어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작품세계가 구축되어 왔다 고 할 수 있습니다. 해남은 문화예술의 안목과 층이 높은 곳이고 특히 문학 쪽으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됐는데 어떻게 화가의 꿈을 갖게 되셨는 지요? 어렸을때 진로는 대부분 선생님들의 영향이지요. 제가 계곡서초등학교 6학년 때 백혜자 선생님이라고 계셨어요. 그분이 해남예술제 에 저를 데리고 가 거기서 장원을 한 것입니다. 그보다 앞서 마침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고종사촌이 외가에 내려왔는데 왕자파스 라고 아주 좋은 크레파스를 갖고 왔더라고요. 당시 시골에는 겨우 양초에 물감을 녹여 만든 정도의 크레용을 쓰고 있었는데 그 왕자 파스를 빌려 쓴 덕분인지 제가 봐도 그림이 잘 그려지더라고요. 그날 심사를 하신 분이 해남중학교 미술교사였던 나점석선생님인데 그분은 광주서중에서 최영훈, 이두헌선배들을 가르친 실력가였 죠. 미술대회 장원을 하자 졸업 무렵 나선생님이 한 시간 반을 버스를 타고 우리 집에 오셔서 아버지께 해남중으로 보내라고 설득을 하신 겁니다. 해남중을 거쳐 당시 미술명문고였던 조대부고로 입학을 했고 자연스럽게 화가의 길로 접어든 거죠. 선생님들의 성함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정말 좋은 영향을 받으신 것 같군요. 또 교수님의 모교이자 제자들을 가르치 고 있는 조선대학교미술대학은 고 오지호, 임직순선생님을 비롯해서 국내 서양화단의 대표적 작가들이 계셨던 곳인데 가장 영향을 받은 분은 누구입니까? 아무래도 임직순 교수님과 황영성교수님 두 분이 아닌가싶습니다. 특히 임직순 선생님은 색채감각이 뛰어난 분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의 인물화들은 대부분 소녀시절에 지녔던 청순성을 간직한 그림들로 골똘히 상념에 잠겨있거나 꿈꾸는 듯이 정 갈해 보입니다. 저는 인물화에 천착하던 시절 '무희의 화가'라고 불렸던 드가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화실이름도 드가화실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제가 춤추는 여인, 발레리나를 많이 그린 것도 드가의 영향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76년 전남도전 우수상, 77년 전남도 전 최고상, 84년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등 연거푸 나온 수상작들이 여인을 테마로 한 작품이다 보니 그게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로 여겨지기도 하고요. ' 순간의 영원화' 라는 차원에서 화가들이 움직이는 동작을 포착하려고 하는데 교수님의 여인상은 예컨대 ' 연습실' 같은 작품에 24

25 서 느껴지는 동작 후 잠깐 정지된 순간의 평온함이나 환희 같은 것이 느껴지지요. 일반인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작 가들은 주기적으로 작품의 대상이나 세계가 변한다고 합니다만 교수님은 스스로의 작품세계를 어떻게 분류하며 일관되게 추구하는 회화정신은 무엇입니까? 작가들은 단지 표현할 뿐이지 논리적으로 그림설명을 잘 못합니다. 또 내 그림이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이랬다고 명확히 분류하기도 어렵고요. 그건 평론가들의 몫이지요. 다만 1990년대 말에 다녀온 아프리카 여행과, 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체류하면서 행한 북미 여행은 분명히 그림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본 것은 '예술은 도발적이다'라는 것입니 다. 비슷비슷해서는 예술가로 살아남기 힘들고 남과 다른 나의 정체성을 철저히 추구해야한다는 것이죠. 그동안 기억 속에 아스라이 존재하는 남도의 풍광과 정서를 그려왔다면, 세계여행 이후 그림에서는 살아 생동하는 자연의 변화가 등 장하고, 색채는 더 화려하고 풍부해졌다 할까요? 아울러 이전의 남도 풍광의 표현 방식에 대한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지난 2009년 개인전에서 미술사가인 김승환 교수는 저의 작업원리를 "비움과 채움의 미학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평을 했더군요. 비움과 채움의 미학 참 어려운 표현이네요. 30여 년 화업의 시간동안 꾸어왔던 것은 고향의 꿈, 자연의 꿈입니다. 거기에는 화려한 색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백이 있고 비움이 있으며 저는 그 빈 곳에 무언가로 채워가려고 합니다. 때로는 구상과 추상의 대비를 통해, 때로는 거칠고 힘찬 붓질로 표현합니다. 보는 이들이 독특한 조형감각을 느끼기를 바라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좋은 선생님을 만나 20대에 전남도전 최고상을 받고 30대 초에 국전에 특선을 하셨군요. 화가로써, 또 대학 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써 비교적 성공한 인생을 살아오셨다고 할 수 있고 이를 반영하듯 작품 또한 화려하고 열정 에 넘치는데 교수님에게도 못 이룬 꿈과 고통이 있습니까? 누구에게나 말 못할 고통이 있듯이 저에게도 고통이 있습니다. 저는 타고난 화가는 아니라고 보아요. 단지 노력하고 있을 뿐이지. 되돌아보면 정말 많이 노력하며 살았다는 생각이에요. 제가 비교적 실패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남보다 한발 앞서, 혹은 남보다 조금 더, 남보다 열심히 준비를 한 덕분입니다. 어떤 경우 누군가를 선택해야하는 입장에 서 보니까 그 준비된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이 보이더라고요. 준비 없이도 선택되는 천재라면 얼마나 더 좋겠어요? 그게 제 고통이죠. 하하. 고향에는 자주 가시나요? 네. 어머님이 해남에 계셔서 자주 가는 편입니다. 손자들이 어렸을 때는 광주에 함께 살면서 돌봐주셨는데 다시 고향으로 가셨죠. 옛 집을 헐어 새 집도 짓고 마을 사람들과 즐겁게 사시는 걸보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좀 우스운 질문인데요. 만약 교수님이 해남자치단체 장이라면 계속 줄어들고 있는 해남인구를 늘일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요? 저는 나폴리모델을 실천해보고 싶어요. 호주 시드니는 낙후된 항만시설과 버려진 철도부지를 아름답고 쾌적한 친수공간으로 만들면 서 세계 3대 미항인 시드니 항을 탄생시켰다고 하지요. 하버마켓과 호텔, 컨벤션센터, 공연장, 유람선 등 문화와 상업 기능의 복합단 지를 조성해 전 세계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나폴리가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 상업과 관광 기능을 겸하고 있는 나폴리항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의 사례도 있습니다. 강진 마량은 원래 제주에서 한양으로 공출된 말이 쉬어가던 곳이었는데 이제 사람이 쉬어가는 미항으 로 변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어촌을 살리면서 관광객을 모으는 모습이 흥미로웠습니다. 세계의 여러 항구도시들이 항구를 관 광자원화해 경제 규모를 키우고 있는데 해남도 이에 못지않은 관광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만큼 이제 누가 이 자원을 잘 활용하느냐가 중요하지요.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수님의 그림 앞에서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기를 저도 기대하겠습니 다. 연보 1951년 해남군 계곡면 신촌리 출생 25

26 계곡 서초등학교, 해남중학교 졸업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졸업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조선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석사 박사) 현재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미술대학장 역임) 2002년 University of Pennsylvania 교환교수 한국미협, 신미술회원, 신작전, 무등회전, 한독미술협회회원 무등미술대전 심사 운영위원 광주시전 전남도전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광주시립미술관 자문위원 대구청년비엔날레운영위원 행주미술대전 심사위원 이인성미술상 운영위원\ 전시회 1979년 전일미술관(광주) 1981년 아카데미미술관(광주) 1988년 인재미술관(광주) 1990년 롯데미술관(서울), 목가화랑 초대전(부산) 년 이목화랑 초대전(서울) 1994년 Carmen Herier화랑 초대전(프랑스) 1996년 송원갤러리(광주), 데미화랑(서울) 초대전 1999년 나인갤러리(광주), 이목화랑(서울) 초대전 2000년 신세계갤러리(광주) 2003년 The Charles Adams갤러리(미국 필라델피아) 2004년 신세계갤러리(광주) 2005년 이목화랑(서울) 2006년 어머니의 땅(예술의 전당) 2007년 갤러리 청담(대구) 2009년 인사아트센터(서울) 이외에 수상전, 단체전 등 200여회 박명성( 연출가. 신시컴퍼니 대표) 26

27 한국뮤지컬 황금손 브로드웨이 박, "고향은 예술샘" 언제부턴가 뮤지컬이 공연예술의 꽃으로 화려한 주목을 받고 있다. 뮤지컬은 이제 예술성에 있어서나 문화생활 속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1966년 유치진의 동랑레퍼토리극단이 '포기와 베스'를 공연한 것이 우리나라 상업뮤지컬의 시작이었다고 하는데 2000년 이후 해마다 150여 편 이상의 뮤지컬이 국내에서 제작되며 '뮤지컬의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뮤지컬 산업은 급팽창했다. 16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들인 '아이다', 장년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은 '맘마미아', 갬블러, 사운드오브뮤직, 시카고, 렌트, 키스미케이트 등의 성공이 그 예이다. 이처럼 국내뮤지컬 대중화의 중심에 해남 문내면 출신, 스스로 '해남촌놈'이라고 말하는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47)가 있다. 작품으로선 성공했지만 흥행이 안돼 쫄딱 망해보기도 하고, 병고까지 겹치는 시련을 겪었지만 그는 지금 '뮤지컬계의 마이더스'로 통 하며 투자자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중의 한명이 되었다. 박 대표님, 고향 문내면에 아직 어머님께서 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추석은 고향에서 보내셨습니까? 네, 물론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고향에 간 김에 진도와 무안도 다녀왔지요. 진도에 가면 상설토요민속공연을 자주 보며 이번에도 쌍 계사와 운림산방을 들렀습니다. 평소 고향에 오시면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가족, 친척들 말고 갈 때마다 문화 쪽 사람들, 무형문화재 8호 박종숙(진도 강강술래)명창, 남도들노래를 하시는 박동례 명창 등을 자주 만납니다. 진도씻김굿의 연극을 구상하고 있거든요. 또 여성국극의 창시자 임춘앵의 일생을 다룬 만화 '춘앵전'을 뮤지컬 무대 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년에는 꼭 무대에 올리려고 서두르고 있죠. 무안에도 그것 때문에 들렀습니다. 만화를 뮤지컬로. 참 흥미 있는 발상이군요. 만화가 드라마나 영화로 성공한 사례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춘앵전'은 한승희 전진석 콤비가 여성 국극의 창시자 임춘앵을 모 델로 그린 독특한 퓨전순정만화로 크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임춘앵이 초창기 연예기획사라 할 수 있는 '권번'에 들어가 갖은 고난 을 극복하고 춤과 소리에 능한 명기로, 그리고 전통을 재창조해 진정한 예인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입니다. 박 대표님의 약력을 보면 광주에서 서석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무용과 연극을 전공하셨는데 언제부터 연극이나 공 연예술 쪽에 관심이 있었습니까? 흔히 한권의 책이나 말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게는 연극 한편이 그 역할을 한 셈입니다. 차범석 선생님의 '산 불' 연극이었죠. 고등학교 때였고, 지방이라 연극공연은 1년에 고작해야 몇 차례, 흔치 않을 때였습니다. '산불' 연극을 보는 순간 가 슴에 불이 붙었다고 할까요? 박 대표님을 연극계로 이끈 작품이 우리고장 출신 차범석 선생님의 ' 산불' 이었군요. 나는 사실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연극판에 뛰어들어 군대 3년을 제외하고 오직 연극에만 매달렸 는데 몇 년이 지나도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었어요. 배우로는 재능이 없었던 거죠. 그렇다고 연극판을 떠나고 싶지는 않아 극단의 살 림과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기획 일에서부터 연출을 하며 현장 감각을 익혔죠. 1999년 신시컴퍼니를 함께 키워온 김상열 대표가 병환 으로 타계하시고 극단을 맡아 뮤지컬에만 집중키로 하고 회사명도 신시뮤지컬컴퍼니로 바꾼 후 무섭게 일에 매달렸습니다. 한국의 ' 브로드웨이 박' 이라는 별명은 어떻게 해서 생긴 건가요? 199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는 정식 라이선스계약 없이 구닥다리 레퍼토리로 브로드웨이 공연을 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뮤지컬 시 장에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정식으로 라이선스를 획득해 공연한 게 우리가 공연한 '라이프'가 처음이었죠. 그 후 '갬블러' '렌트' '맘마 미아!' '아이다' '헤어스프레이' '시카고' '카바레' '렌트' '사운드 오브 뮤직' 등 다수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정식계약으로 제작했는데 그 뮤지컬이 다 성공한 것만은 아닙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출연료를 먼저 챙겨주기 위해 카드로 대출을 받고, 결국 살고 있던 집 27

28 의 전세금을 빼면서까지 겪어낸 경제적인 고초 등 시련도 많았어요. 그러나 국내 뮤지컬계에 최초로 라이선스 공연문화를 도입하고 정착시킨 데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그런 노력들이 한국의 '브로드웨이 박'으로 불리는 신뢰를 쌓았다고 봅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뿐만 아니라 ' 산불' 을 ' 댄싱쇄도우' 라는 창작뮤지컬로도 만드셨지요? 또 ' 댄싱쇄도우' 공연이 끝난 뒤 5억 원을 들인 무대 세트를 불태워버린 사건이 유명한데 어떤 의도였습니까? 저는 '산불'이 우리나라 리얼리즘 연극의 최고봉이라고 지금도 확신합니다. 1962년 초연된 이후 매년 어딘가에서 공연이 이어졌고 무 엇보다 나의 가슴에 연극의 불을 지핀 이 작품으로 세계시장을 노크해보자는 강한 의지가 있었어요. 영국, 미국, 독일, 호주 등지의 아티스트들을 모아서 뮤지컬의 본산지 영국에서 워크숍도 하고, 처음 구상한 때부터 무려 7년여의 준비 끝에 2007년에 무대에 올릴 수 있었죠. 칠레 출신의 세계적인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이 대본을 고쳐 쓴 '댄싱 쇄도우'는 '산불'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을 그대 로 남겨두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지역적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등 보편성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작업하다보 니 우리 정서에는 어필을 못하고, 결국 '댄싱 쇄도우'는 2007년 한국뮤지컬대상을 수상하였지만 25억 원의 적자를 보았습니다. 우리 뮤지컬의 성공가능성을 엿보았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었지만 참담한 현실이었지요.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미에서 세트를 없앤 것이 고 '산불'은 내년 6월에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새로운 해석으로 무대에 올릴 것입니다. 창작극의 저조한 흥행에 비해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대부분 제작하신 것마다 히트를 하셨는데 뮤지컬의 무엇이 요즘 사람들 을 끈다고 보십니까? 연극에 비해 뮤지컬은 아무래도 대중적이고 오락성이 더하죠. 대사로 10분 할 것을 노래로 하면 짧게 응축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나 라 국민정서가 뮤지컬에 더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객석과 무대가 하나 되는 뮤지컬의 특성상 마니아가 아니라도 즐길 수 있는 쇼 적인 특성이 있어 젊은 층에 크게 어필하죠. 그러나 요즘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거품이 많이 끼어 있어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신경 숙의 '엄마를 부탁해'같은 연극이 롱런하는 걸 보세요. 벌써 진지한 문학성을 기대하는 층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겐 순수예술인 연극을 대중화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순수예술이 활성화돼야 뮤지컬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전남 일대는 문화콘텐츠 자원의 보고라 할 수 있지요. 연극이나 뮤지컬로 제작해보고 싶은 적당한 소재가 있습니까? 제가 자주 고향에 오는 것도 그 때문인데요. 지난해 해남군청에서 전남, 아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뮤지컬 '이순신'을 만들자는 얘기 가 있었는데 아직 큰 진전은 없네요.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진도씻김굿이나 강강술래는 연극으로 만들 수 있는 좋은 소재이며 5.18광 주항쟁을 배경으로 한 황지우(북평면출신)원작 '5월의 신부'는 연극으로 계속 무대에 오르고는 있으나 뮤지컬로 더 가능성이 큽니다. 또 예전에 인기가 있었던 여성 국극은 극중에 나오는 남자캐릭터를 모두 여성이 맡아 연기하는 것으로 남자가 여성역할까지 하는 중 국의 경극과는 반대죠. '임춘앵'같은 토종뮤지컬이나 우리창작 작품으로 세계시장에 도전할 계획입니다. 해외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 히 할 수 있는 국내 창작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부디 박 대표님의 계획과 꿈들이 다 이뤄지길 바랍니다. 뮤지컬을 접해볼 기회가 많지 않은 지역민들에게 뮤지컬의 묘미랄 까, 관람 법을 좀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관람 법은 무슨. 연극이나 뮤지컬은 삶을 즐겁게, 꿈을 꾸게 합니다. 온 가족이 같은 꿈을 꾸고 함께 문화생활을 즐긴다면 그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식사를 하면서도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작품을 고르면서 다투기도 하고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 까? 연보 문내초등학교, 우수영중학교 졸업 서석고등학교(광주)졸업 서울예술대학 졸업(한국무용) 단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학사 단국대학교대학원 대중문화예술대학원 28

29 경력 1982 극단 동인극 입단 1987 극단 신시 창립 단원 1995 극단 신시 기획실장 한국연극협회 사무국장 1998 한국연극협회 이사 1999 신시뮤지컬컴퍼니 대표이사 2004 대경대학 공연예술학부 초빙교수 경희대 대학원 예술경영과정 강사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 회장 2007 한류정책자문위원회 위원 제2대 서울연극협회 회장 2008 한일연극교류협의회 회장 수상 1994 한국연극협회 올해의 연극인상 2001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02 한국뮤지컬대상 특별상 2003 한국뮤지컬대상 프로듀서상 2004 대한민국 국회대상(대중미디어부문) 29

30 정철호( 판소리명창. 고법 인간문화재) 국창 임방울 의 마지막 제자, 유파 잇는 게 숙원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靑 江 정철호 명인(84)은 해남군 북평면 서흥리출신이다. 증조할아버지 정달현( 鄭 達 鉉 ) 과 할아버지 정희연( 鄭 喜 然 )이 두루 기악의 명인이었고 아버지 정치조( 鄭 治 朝 )도 이름난 소리꾼이었던터라 마치 모차르트가 그런 것 처럼 운명처럼 국악 속에서 나고 자랐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가 성공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었으나 정철호명인 은 그런 복을 누리지 못했다. 8세에 어머니,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하나 없는 사고무친으로 할머니품에서 자라야했다. 이 할머 니가 또 누구던가. 할머니 또한 해남지무( 知 舞 )로 통하던 큰 단골이었다. 아버지와 할머니를 따라다니던 어린시절, 굿판은 그의 예술 학교이고 가족들은 음악선생이었다. 그런데 14살 되던 해 목포에 공연차 내려온 전설적인 명창 임방울을 찾아가면서 진짜 선생을 만나게 된다. 숙소로 찾아가 아버지함 자를 댔더니 "네가 치조씨 아들이냐? 어디 목이나 한번 들어보자."고 했다. 춘향가 한 대목을 불렀더니 "목 구성으로 들어서는 싹수 가 있어보인다마는 저놈이 고생을 견디어낼까." 하더란다. 그 때부터 임방울선생으로부터 직접 음악수업은 물론 무대 허드렛일이며 선생의 시중까지 드는 궂은일을 도맡아하면서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할 국악인생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마침 지난 주말부터 이번 주까지 광주에서는 임방울 선생의 예술적 업적을 기리고 그의 음악을 전승하는 제18회 ' 임방울국 악제' 전국대회가 열렸습니다. 스승이신 임방울 선생님을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저한테는 스승이지만 임방울선생님은 저 개인의 스승만이 아닌 우리나라의 국창이십니다. 판소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목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선생님의 목은 원래는 떡목이었는데, 십 년을 하루같이 수련, 적공하여 얻은 것이지요. 또한 소리하는 사람의 4대 요건인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를 완전하게 갖춘 국창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판소리 전통을 고수하여 끝까지 지킨 참 소리꾼이셨지요. 1961년 봄 그 분이 돌아가셨을 때 국악인협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는데 그날, 2백여 명의 여류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상두꾼이 되어 상여를 메고 지나갈 때 '한국의 소리'를 잃었다고 온 국민들이 함께 슬퍼했지요. 요즘 같으면 인기 연예인, 영화배우나 대중가수들의 인기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이 활약하던 시기는 민족사적으로 가장 어둡고 쓰라린 시기였습니다. 질곡의 역사와 부침의 세월을 살아 온 민 족의 한스런 정서를 온몸으로 울어 토해냈고, 핍박 받는 민중과 인정을 나누며 살다 간 소리꾼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임방울 선생님 은 소리의 계통이나 법도를 중시하기보다 서민의 정서와 한의 심성을 잘 노래한 당대 최고의 가객이었어요. 한번 공연이 시작되면 청중들이 그냥 놔주지를 않고 7창까지 재청을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임방울 선생님의 진면목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런 명창을 현대인들은 다 기억 못하죠. 판소리가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고 국악이 많이 대중화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전통예술의 한 분야로 특별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나 즐기는 음악으로 알고 있고요. 판소리와 같은 민중적 공연예술은 유동성, 현장성, 즉흥성을 속성으로 하고 있으며, 시대적 흐름과 청중의 요구에 따라서 예술의 내 용과 형식이 변화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변화된 청중들의 판소리 취향을 잘 간파해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한 분 들 중 임방울선생님은 가장 두드러진 분이죠. 언제나 가난한 서민들 옆에 서서 활동한 예술가였으며 서민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서민 들의 문제를 꺼내 그들을 웃기며 울렸던 진정한 예술가였습니다. 이제 정철호선생님 자신의 이야기도 좀 들려주세요. 어릴 적에 임방울문하에 들어가셨고 그 분의 소리를 전수한 제자로 유 일하게 남아계신데 왜 판소리고법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으셨는지요? 30

31 그 부분을 얘기하자면 쓰라린 상처를 다시 들춰내는 것 같군요. 64년 인간문화재 제도가 실시된 초기에 박녹주, 박초월, 김소희, 박 동진씨 등과 함께 나란히 인간문화재 후보에 올랐어요. 그런데 나만 지정에서 탈락됐어요. 듣자하니 내가 술을 너무 좋아해서 판소리 를 계속할 것 같지 않다느니, 나이가 어리다느니 하는 말들이 있었는데, 그런 국악계의 편파성에 염증을 느껴 다시는 소리를 하지 않 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홧김에 술도 많이 마시고 목소리도 상했지요. 비록 임방울류 판소리 인간문화재는 되지 않으셨지만 판소리 고법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으신 것은 물론 아쟁산조를 창 시하시는 등 국악계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활약을 하셨지요? 고법은 임방울선생님과 함께 다니면서 북 칠일이 생기니까 자연스레 고수가 되었고, 후에 김재선, 한성준선생님께 고법이론과 판소 리 북을 배웠지요. '일고수 이명창'이란 말도 있듯이 고수가 판소리의 연출가라는 자부심이 없었더라면 평생 북채를 쥐고 살 수가 없 었을 것입니다. 또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배우기도 했는데 엉뚱하게도 아쟁에 마음이 끌렸어요. 국립국악원 정악연주에서 아쟁을 처 음 접했는데 퍼뜩 '저걸로 민속음악 산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악기 파는 곳을 아무리 뒤져도 아쟁이 없어 가야금을 가지고 해남 대흥사로 들어가 꼬박 100일을 뜯었다, 고쳤다 하며 궁리를 했지요. 결국 가야금 12줄에서 처음엔 7줄로 해보다가 안돼 다시 한 줄을 올려서 8줄을 얹혔더니 그때야 음악이 되더라고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 음악이란 그냥 배워서 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뭔가 타고나야 한달까 요? 자유자재로 소리를 하고 악기를 다루고 곡을 만들기까지 한다는 것은 연습도 중요하지만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겠지요? 타고난다기보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환경을 잘 만들어주면 훨씬 좋겠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운명적으로 국악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사람에게 그걸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지요. 요즘 국악경연대회를 보면 기교만 익혀 나온 사람이 대다수인데 저는 '사람이 먼저고 음악은 그 다음'이란 생각입니다. 높은 연세에도 아직까지 중앙대학교에 겸임교수로 출강하시는데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나요? 일단은 제가 고법으로 문화재지정을 받았으니, 전공과목은 판소리고법에 대해 가르치지만 부전공으로 창작판소리 훈민정음(세종대왕 전)이나 안중근전을 가르치기도 하는데 학생들이 너무 좋아하고 소리를 잘 받아요. 국악은 다른 분야와 달리 종합예술에 가깝습니다. 작창을 하려면 우리 고전이나 문학도 알아야 하고, 연주를 하려면 무용과 소리를 알아야 하며 좋은 소리를 하려면 공력이 있어야 하 고 한배, 강약, 음정, 발림,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이런 걸 종합적으로 가르칠 전수관의 필요성을 요즘처럼 절실히 느낄 때가 없어 요. 한동안 전남도립국악단 지휘자로도 계셨고 많은 작품을 기획해 무대에 올리시기도 하셨는데 결국 교육의 중요성을 말씀하 시는군요. 그렇습니다. 해 온 일로 치자면 저처럼 인생의 굴곡을 겪으면서 설움도, 영화도 다 누렸고 안해 본 일이 없는데 아직 못한 일이 두 가지가 있어요. 스승이신 임방울선생님의 판소리 유파가 아직까지 전수자 하나 정해지지 못하고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그 분의 마지 막 남은 제자로서 심히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저는 2만여 곡이 넘는 국악곡을 작창해 다른 사람들을 통해 무대에 올리거나 직접 연주하고 불렀습니다. 국악계에서는 '아쟁 산조의 창시자'니, '국악계의 거목'이니 하는 찬사를 보내주지만 정작 중요한 일을 빠뜨린 허전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첫째는 임방울 유파 판소리를 영구히 전수하는 일이며, 둘째는 전수자를 양성하기 위한 '판소리고법 전수관'을 마련하여 판소리고법과 함께 임방울 류 판소리를 전수하는 일이 남은 과제입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판소리나 북 장고만 하시는 줄 알았지 우리나라 90%의 신민요, 신작 판소리 곡을 만드시고, 창무악(노 래, 무용, 음악이 합해진 서양의 오페라 같은 형식의 전통창극) 을 무대에 올린 기획 연출가이자 교육자이신 것을 오늘 자 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정철호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추앙을 받던 임방울 선생의 소리를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일의 중요성도 깨달았고요. 그런데 해남의 국악발전을 위해서도 힘을 좀 써 주십시오. 당연한 말입니다. 전수관을 짓게 되면 전국 어디나 일일생활권이니까 자연스럽게 그 곳을 중심으로 국악진흥이 이뤄질 것입니다. 한 때 대흥사를 중심으로 해남 일대가 우리나라 판소리와 고법수련의 메카였는데 어쩐 일인지 최근에 쇠퇴된 감을 느껴요. 지역 문화예 술인들이 함께 책임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31

32 많은 시간을 할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두 가지 소원이 꼭 이뤄지길 바라겠습니다. 연보 1923 해남군 북평면 서홍리 출생(호적기록, 실제나이 84세) 1940 임방울선생 문하 판소리 '적벽가 수궁가 춘향가' 사사 1948 김재선선생 문하 판소리 '고법' 사사 '아쟁산조' 민속음악으로 창시 발표 및 보급 1962 한갑득선생 문하 '거문고' 사사 1964 임방울류 '적벽가' 완창 음반취입 문화재 지정자료 녹음 1965 신작판소리 성웅 김대건은 살아있다.(작곡 및 음반취입) 보급 1972 신작판소리 성자 이차돈 '작곡 및 음반제작' 보급 1987 김대중대통령 옥중단시 (신작판소리 작곡 및 음반제작)보급 광주민주항쟁-그날이여 영원하리(편작 작곡 및 음반제작)보급 2005 신작판소리 세종대왕(훈민정음) 작곡 및 완창 음반취입 (국악방송) 수상 1947 남원명창대회 판소리부문 1등 수상 1971 국악공로상 서울특별시장상 수상(아쟁산조보급) 1982 제1회 문화재급 국악 공로상 수상 1987 KBS 국악대상 수상(작곡부분) 1995 국무총리상 표창 1998 신재효 동리국악대상 수상 1999 국가지정 세종문화상 수상(대통령상) 2000 국가지정 보관문화훈장 서훈(대통령상) 2006 광주시 문화상(임방울 국악상) 2008 제15회 방일영 국악상 2010 (현)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 (사)판소리 고법 보존회회장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겸임교수 32

33 박수룡( 화가) 골기와 서정 서린 남녘쪽 사람들 비산비야 내고향 해남문예회관을 한번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벽면에 장식되어 있는 이색적인 조형작품 한 점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가로 11m, 세로 9m 크기로 스테인레스와 칠보, 도자기판과 네온으로 표현된 조형물의 제목은 '남녘의 넋'. 마산면 출신 박수룡 화백(57)의 작품이다. 해남의 내로라하는 문화예술인들이 드나드는 문예회관 벽면에 작품을 전시하는 행운을 안고도 박화백은 "고향에 가면 뭔가 다 채워 지지 않는 쓸쓸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두 팔로 고향을 다 안고 싶은데 안겨지지 않아서일까. "광주비엔날레에 다시 작품을 낸다면 해남의 뻘을 가져다 그대로 채워놓고 싶어요. 우리 것을 그린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 다" 지난 2003년 급성 간경화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간이식과 위장절제술 등 대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은 요즘 박화백은 최 근에 또 일을 벌였다. 전에 있던 경기도 덕소의 화실 옆에 3층 규모의 새 전시실 겸 작업장을 짓고 있는 것이다. 가지고 간 카메라를 놓고 와 카메라를 찾으러 이튿날 또 한 번, 두 번에 걸쳐 박화백과 그림이야기, 그리고 고향 해남이야기를 나눴다. 언뜻 추상적인 것 같지만 골기와 서정으로 형상화시킨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는 박수룡화백. 자세히 보면 그의 그림 속에는 벽화 속 용이나, 토끼, 새와 같은 태고적 이미지와 가장 한국적인 색채가 들어있다. 박수룡 선생님의 작품은 제가 1980년대부터 인상 깊게 보아왔습니다. 전라도출신 선배화가들의 일률적인 화풍을 닮지 않은 독특한 그림을 그리셨지요? 1977년에 대학(조선대 사대 미술교육과)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잠깐 교단에 섰는데 미대 합격을 많이 시켰지요. 그런데 금방 '이게 아 니다'는 생각이 들어 교사생활을 접고 이수영, 박광훈 등 화가친구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자주 만난 선배화가들로 배동신, 박항섭, 최영림 화백 등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고장 출신인 배동신선생님은 저한테는 스승이자 친구같은 분인데 "그림을 알 고 그려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고, 그림의 밀도와 시대성, 차별성을 강조하셨죠. 그 분들로부터 '자기만의 그림을 그려야한다'고 철저 하게 배웠다할까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중앙화단에 자리를 잡으셨는데 그런 연유가 있었군요. 초기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굴절된 인간상은 시 대적 배경 때문이었습니까? 80년대가 그런 때였습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권력과 금력을 지향해 가는 굴절된 모습을 목격해가면서 환멸감을 느끼고 걸프전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지켜보면서 인권이 무참하게 유린당하고 죽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어떠한 인간상으로 어떻게 그릴 것인 가에 많은 고심을 했지요. '5월의 노래' '흔들리는 사람들'등과 같은 연작이 나온 시기입니다 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연 2회 특선을 한 후 이듬해 국전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그해 제1회 개인전을 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갖고 인데코미술관초대전을 가졌는데 상을 받는 것은 부담도 되지만 흔들릴 때 지탱해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옛 암각화의 문양이나 글씨들을 소재로 한 것 같기도 하고, 이집트의 벽화를 보는 것도 같은 갈색일색의 시대 였죠?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중앙화단의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쇼크를 먹었습니다. '그림이 과연 이런 것인가, 그림에 이론이 있는가' 생각 했고 그들의 현란한 평들 앞에 설득을 하려면 '나만의 조형을 만들어 주장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짓눌렀죠. 그 때 나온 것이 갈색 33

34 모노톤, 그 촌스러운 색깔인데 저는 그걸 오리지널 촌놈색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우리의 된장국 같은, 두엄이 썩을 때 생기는 색깔로 밀어 붙인거죠. 화면을 입체에 가깝게 매우 두껍게 칠해 독특한 질감을 표현하시는데 어떻게 작업하시나요? 유화물감뿐 아니라 종이나 합성수지, 혼합재료를 써서 찟거나 긁고 파열을 내기도 하는데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동원되 는 것이죠. 색과 선만이 아니라 질감까지 함께 주제와 일치시키고 싶어요. 추상도 사실도 아닌 독특한 조형언어를 구사하시는 최초의 동기가 궁금합니다. 어느 때부터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하셨는지요? 아, 지금 생각이 나는데요. 마산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1년에 한차례씩 해남군단위 미술대회가 열렸는데 4학년인 제가 나가게 되 었어요. 학교 교정을 그리라니까 모두들 화면 가득하게 교실을 그리는데 나는 그게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반만 뚝 잘라 건물 한 쪽 만 그렸죠. 나중에 같이 간 인솔교사가 보시고 "왜 하필 화장실을 그렸냐?" 고 했는데 그게 가작이 돼 노트 18권을 부상으로 받았죠. 남과 같이 그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그 때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전시회 약력을 보면 1999년~2000 ~2000년에 미국에서 많은 활동을 하셨더군요. 네, 마이애미아트페어, 샌프란시스코아트페어, 시카고아트페어, 팜스프링아트페어에 작품을 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백남준 선생님 과도 가까이 지냈고 그 분의 작업하시는 걸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현대미술의 한 복판에 이름 석자를 내려면 얼마나 치열하게 샅바싸 움을 해야하는 가도 보았습니다. 뉴욕을 목전에 두고 건강이 좋지 않아 포기한 게 아쉬움이 많죠. 그 아쉬움을 고향의 문화발전을 위해 더 쏟아주시기 바랍니다. 가끔 해남에 갈 때마다 느끼는 쓸쓸함은 어쩌면 일방적인 고향사랑에 대한 섭섭함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주는 섭섭함이 아니 라 내가 기대한 해남이 아닐 때, 예를 들어 전원도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파트건설이라든지, 여수나, 목포나 부산과도 차별화되 지 않는 가로수나 주거환경, 바닷가 풍경들 때문입니다. 해남은 정말 다른 곳이어야 하는데 말이죠. 예컨대 공룡박물관만 해도 더 흥미있고도 교육적으로, 공룡 꼬리 쪽으로 들어가 내부를 구경하고 머리 위로 나와 바닷가 일대를 조 망하는 형태를 구상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위환경 전체를 캔버스로 보면 화가의 눈에 정말 많은 구상이 떠오를 것 같군요 년에 크게 앓으셨는데 그 이전과 이 후에 작품에 변화가 있습니까? 건강을 상한 후로는 많이 그리지는 못하고 가끔 조형물 작업을 했습니다. 미술평론가 김복영선생님이 2003년 일민미술관 전시회 화 집 발문으로 이런 글을 쓰셨더군요. "90년대 초에서 말에 이르는 10여년 간 박수룡이 추구했던 그림들은 해체된 인간과 곤충류의 알레고리를 빌린 자화상으로, 내면세계 를 응시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자아의 얼굴을 그려내려는 다소 버거움에 눌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의 작품들은 어둡고 무겁거 나 다소 생경한 조형성에다 형상들이 튀고 윤곽이 저돌적인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2002년 신동아가 마련한 특집기획 '붓따라 길따라'에 참여하면서 내면화 과정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형상과 색채 면에서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근작들은 표정에 있어 해맑아진 것이 틀림없다"고요. 1년여 동안 자연과 함께하면서 우리나라의 풍광이 갖고 있는 색깔과 조형미를 한결 간결하고 순화된 것으로 받아들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 우리나라의 풍광이 갖고 있는 색깔과 조형미' 를 탐색하셨다면 전라도나 남녘땅 해남의 조형미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요? 저는 고향이 서울이 아니고 해남인 것이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서울에서 전혀 아름다움을 못 느낀 반면 시골길이나 못난이 소나무, 메뚜기, 바다. 이런 것들의 아름다움은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비산비야( 非 山 非 野 ), 산도 아닌 것이, 들도 아닌 것이 여름은 여름대 로 겨울은 겨울대로 독특한 지형적 특색을 보여주죠. 비가 오면 새빨간 황토위로 푸른 보리밭의 보색이 선명하고, 바닷가에 해당화가 피어있는 풍광은 서울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풍 경입니다. 해남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조형감이 저의 머리 속에는 다 들어있는 것이죠. 34

35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작품에 간간히 보이는 동물이나 새의 이미지는 미황사의 부도탑에도 있고 우황리의 공룡발자국에서 도 본 것들이군요. 하하, 그런가요?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남녘 쪽 사람들은 골기와 함께 서정이 있어요. 골기와 서정은 우리 고향사람들이 타 지역과 다 른 차별성이면서 저의 그림주제이기도 합니다. 연보 1977 조선대학교 졸업 개인전 1987 신세계미술관, 서울 1988 록갤러리, 서울 1989 인테코화랑, 서울 1990 중앙화랑, 대구 1991 문예진흥원, 서울 1992 선화랑, 서울 1993 남봉미술관, 광주 1995 선화랑, 서울 1997 선화랑, 서울 1999 박영덕화랑, 서울 2001 박영덕화랑, 서울 2003 일민미술관, 서울 2005 광주시립미술과, 광주 2007 박영덕화랑, 서울 수상경력 1987~88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국립현대미술관 1988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국립현대미술관 1994 월간미술세계 작가상 주요작품 소장처 선재미술관, 경주 성곡미술관, 서울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가사문학관, 담양 영덕조각공원, 영덕 단양조각공원, 단양 문예회관, 해남 삼성 홈플러스, 서울 35

36 윤금초( 시조시인) 고향에 미술과 문학 어우러진 공간 만들고 싶어 지역을 일컫는 많은 대명사들 중 해남을 '시문학의 본고장'이라고 부르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현산면 출신 고 이동주 시인을 비롯해서 박성룡, 김남주, 고정희. 이들을 기리는 순례여행객이 줄을 잇고, 고인은 물론 현역문인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문학관 건립도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다. 해남이 시문학의 본고장으로 자리매김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우리 국문학사상 최고봉으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 시인의 고장이 다. 어찌 시인의 문기( 文 氣 )가 서리지 않겠는가. 너무 일직 요절해 안타까운 김남주와 고정희 말고도 김준태, 노향림, 황지우 그리고 해남을 제2의 고향으로 삼은 김지하도 있다. 오늘은 고산 윤선도 시인의 피와 문재( 文 才 )를 이어받은 해남군 화산면 출신 윤금초 시조시인(68)을 만나기로 했다. 고산의 12대 손 이라고 한다. 당초에 그의 문학수업은 소설과 시로 출발했지만 대학에서 습작한 시 원고를 읽은 박목월시인이 "자네는 시조 쪽에 호 흡이 가까우니 시조를 한번 써보게."라고 말씀하셨더란다. 그는 핏속에 녹아 있는 조상의 시조호흡을 거스르지 않고, 전통형식을 깨 는 다양한 형태의 시조창작과 학회활동을 통해 시조의 대중화, 현대화에 큰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윤금초란 성함에서부터 문인, 시인의 분위기를 물씬 느껴집니다. 본명이십니까? 하하, 원래 제 이름은 윤금호( 金 鎬 )였지요. 초등학교 때 이름을 갈겨쓰는 통에 담임선생님이 금초라고 잘못 부르면서 친구들이 "금초 야, 금초야" 했던 게 어느 날 아버님이 듣고 "아, 그 이름도 괜찮다"고 해 그대로 불려 졌던 것입니다. 호적엔 아직도 금호로 남아있 는데 글을 쓰면서 필명으로 삼은거지요. 해남출신 문인들의 활동을 보면서 고산 윤선도 시인의 영향을 생각했고 그 분의 후손으로 시조를 쓰신다는 게 선생님을 이 자리에 모신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시조시인이 되고 이 후 활동을 하시는데 영향을 받으신 건가요? 고산후예들의 문맥 에 대해서도 들려주십시오. 해남윤씨의 시조 윤존부( 尹 存 富 )는 고려 중엽 때의 인물입니다. 해남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12세조인 어초은( 漁 樵 隱 ) 윤효정이 강 진에서 해남으로 옮겨 가면서 부터인데요. 대표적인 집성촌은 해남읍 연동리 마을이고 강진, 신안, 장흥, 완도, 화순 등지는 물론 전 국에 걸쳐 있습니다. 36

37 아무래도 알게 모르게 저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인데요. 어떨 때는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의 대표시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어초문답( 漁 樵 問 答 )의 어초란 용어가 해남윤씨 시조의 호에서 온 것이기도 하네요. 어초는 고기 잡는 어부와 나 무꾼이라는 뜻이지요. 요즘말로 민초( 民 草 )를 의미하며 저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문학에 입문하시게 된 계기와 특히 시조시인으로 한 길을 걷고 계신 연유를 듣고 싶습니다. 제가 고향에서 화산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를 조선대부속고등학교로 갔는데 그 학교가 전형적인 모범생학교는 아니었지만 매우 자 유롭고 문학과 예술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소설가 문순태씨가 그 때 조선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하며 우리학교에 강사로 나 왔지요. 강연균화백 등 이름을 대면 대번에 알 수 있는 유명화가와 작가들이 선후배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문학에 심취했고 고교백일장에 단편소설이 입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라벌예대에 입학했는데 당시 서라벌예대에 는 김구용, 김동리, 박목월, 서정주, 이범선, 임동권 선생 등 쟁쟁한 문인들이 출강하고 있었어요. 대학 2학년 때 목월 선생이 내 시 가 시조의 호흡에 가깝다며 시조를 쓸 것을 권했지요. 선조인 윤선도에 대한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도 작용하지 않았는가 싶습니 다. 흔히 시조시인들이 시를 쓰기도 하고 시조가 문단에서 뚜렷한 위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저는 시조야말로 세계문학에서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전통이자 문학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는 신년회에 총리나 천황이 그들의 전통시인 와카나 하이쿠를 읊는 게 가장 큰 행사고 멋인데 우리 시조는 일제의 문화말살기를 거치면서 왜곡돼 버리고 말았어 요. 최근 ' 시' 라는 영화도 나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문학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는데 방금 말씀하신 문학 의 본질이랄까 시인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참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데요. 제가 자주 인용하는 글인데 다산 정약용 선생이 대둔사의 혜장( 惠 藏 )스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시라고 하는 것은 사상의 표현이지. 시를 지으려고 할 때는 사상(철학)부터 단련하지 않으면 똥 무더기 속에서 깨끗한 물을 얻어내려는 것과 같아서 평생토록 애를 써도 이룩하지 못할 것이야. 또 있는 그대로를 써야 진실한 글이 나온다네"라고요. 이 말은 문학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면서 또 시조의 형식을 생각하게도 합니다. 문학에서 중요한 것이 사상이고 그 내용이라면 형식은 부차적인 것이며 거기에 집착해서도, 할 필요도 없다는 의미이지요. 또 시조( 時 調 )의 시 字 가 때 시( 時 )자임을 상기해야합니다. 시조는 당대의 생활과 삶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선생님의 등단작품인 ' 내재율' 의 의미나 소위 ' 옴니버스' 시조의 연원이 거기에 있군요. 저는 외형률, 그러니까 시조의 자수를 따지기보다는 그 안에 담는 내용이나 가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제목을 아예 '내재율'이라고 걸었던 것입니다. 옴니버스시조는 제가 창출해낸 것은 아니고 작고하신 이명길 선생이나 기타 몇 분이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평시조 사설시조 엇시 조 등 시조의 다양한 형태를 아우른 혼합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93년도에 '주몽의 하늘'로 받은 제12회 중앙시조대상이 옴니 버스시조로 받은 최초의 상이었죠. 첫 시조집으로 펴낸 ' 어초문답( ( 漁 樵 問 答 )' 의 일화도 재미있습니다 년이면 서른네 살 때인데 그 시절에 참 빨리 시집을 내셨더군요. 그렇지요. '어초문답'은 만적의 난을 일으킨 노비 만적을 주인공으로 삼은 장편시조인데 민중을 대변하는 어부와 나무꾼이 치열한 사 회의식으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윤씨 종친회의 도움으로 광목천으로 싼 표지에 은박을 입히고 (지식산업사 간행) 정성껏 책을 만들었는데 구상 시인과 정한모 시인 등의 심사로 제2회 '흙의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 정되었지만 당시 문공부 측에서 '역사를 빌려 현실을 풍자했다'해서 당선을 취소토록 했다고 합니다. 구상 시인한테 직접 들었어요. '비황정책' '탈놀이' 등 4편 21수로 구성했으나 나중에 제목을 '청맹과니 노래'로 바꾸고 '쑥대머리' '사물놀이' '지노귀새남' 등 전체 10 편 39수로 재구성했지요. 그러나 이 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 쓸 예정이에요. 문학의 궁극적 목표 혹은 문학인이 지향해야 할 사명은 저항의식에서 찾아야 된다고 봅니다. 저항의식 없이는 문학이 탄생할 수 없 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 비리 등을 고발하고 저항하는 게 문학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주제를 좀 바꿔보지요.. ' 땅끝' 이라든지 ' 해남나들이' 같은 시집이나 시 제목도 눈에 띄는데 선생님의 작품 속에서 고향 37

38 ' 해남' 은 어떤 곳입니까? 고향은 감성과 사상의 해 자리이며 언젠가 돌아갈 마음 짠한 원초적인 어떤 것입니다. 대흥사 장춘구곡/살얼음도 절로 녹아/마애여래상의 광배를 입고 서서/ 땟국을, 홍진 땟국을/헹궈내는 아낙들/ 그 옛날 유형의 땅 남도 끄트머리/백연동 외진골짝 고산 고택 녹우단의 겨우내 움츠린/목숨, 풀꽃 같은 백성들아/직신작신 보리밭 밟듯/돌개바람 휩쓸고 간 동상의 뿌리에도/무담시 발싸심하는 봄기별은 오는가.('해남나들이' 부분)라는 시에 담은 자연풍광을 바라 보는 정서와 호흡은 다른 모든 시를 관통하는 정서이기도 하지요. 자기가 처한 입장이나 위치에 따라 고향을 바라보는 시각은 각양각색이더군요. 최근 해남은 관광지로서 크게 주목을 받고 발전가능성을 거기에 두는 것 같습니다. 시인의 예지력으로 고향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후손들에게 전해졌으면 합니까? 유럽 여러 나라의 예에서 보듯이 그 지역의 탄생 인물이나 역사를 인프라로 한 문화발전이 더 이뤄졌으면 합니다. 덩그렇게 유물관 이나 지어놓고 텅텅 빈 공간이 아닌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모여들 수 있는 좋은 소프트웨어를 갖춘 장소가 필요하죠. 개인적으로 저 자신도 고향에 미술과 문학이 어우러진 공간을 마련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습니다. 끝으로 현재 구상하고 계신 작품이나 시조를 공부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저의 시조교육 원칙은 '삼다삼소(3 多 3 少 )법'입니다. 작을 소( 小 )가 아니고 젊을 소( 少 )입니다. 즉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창착하라. 젊게 느끼고, 젊게 행동하고, 젊게 글을 쓰라는 것이지요. 시조는 고리타분하고 고풍스럽게 써야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지만 짧다면 짧고, 작다면 작은 그릇 속에 우리 민족의 온갖 사고와 생활을 담는 민족의 리듬인 것입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연보 1943 전남 해남 화산면 갑길리에서 출생 1966 중앙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조부문 입상 1968 안부( 安 否 )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5 오늘의 시조학회 창립, 회장 1999 조선일보 방일영문화재단 저술 출판 지원금 받음 문학사상 12월호 표지의 인물 선정 현재 사단법인 '민족시 사관학교' 대표 중앙일보사 중앙문화센터 시조창작교실 출강 대표시집 1977 윤금초 시집 '어초문답( 漁 樵 問 答 )' (지식산업사) 간행 1980 에세이집 '갈봄여름없이' (어문각) 간행 1992 에세이집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의 사랑'(신원문화사) 간행 1993 시조집 '해남 나들이'(민음사) 간행 1995 이우걸과 함께 5인 시조선집 '다섯 빛깔의 언어 풍경'(동학사) 엮음 1998 '시조 짓는 마을' (삶과꿈) 간행 2003 사설시조집 '주몽의 하늘'(문학수첩) 간행 2004 '시조창작실기론', '현대시조쓰기' 등 시조 창작교재 다수 발간 수상 38

39 1974 한국잡지기자 특별상 수상 1986 정운시조문학상 수상 1991 민족시가문학대상 수상 1993 옴니버스 시조 '주몽의 하늘'로 제12회 중앙시조대상 수상 1999 문학사상사 제20회 가람시조문학상 수상 2001 이호시조문학상 수상 2002 고산문학대상 수상 2006 현대불교문학상 수상 2장 경제, 사업분야 김재욱( 광주비즈니스사장. 전 광주신용보증재단 이사장) 자타가 인정하는 금융업계 마이더스의 손 한해의 끝 달 12월이 어김없이 돌아왔다. 12월이 되면 우리 모두는 알찬 수확을 거두었는지 한해를 마감하는 대차대조표를 손에 들 고 '세월의 신' 앞에 서야한다. 지난 7월 그동안 3년간 재임했던 광주신용보증재단 이사장 임기를 마친 해남읍 출신 김재욱 이사장 (64. 광주비즈니스 사장)은 누구보다 알찬 대차대조표를 들고 있다. "이용자도 적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광주신용보증재단을 4천3백억 정도로 규모를 키우고 신용보증규모도 1조원으로 키웠습니다. 서 민경제가 너무 어려워 이사장자리가 수월치 않았는데 중책을 벗고 나니 홀가분하군요. 이제 향우회 일에 더 전념할 수 있게 돼 기쁩 니다" 그동안 재광해남향우회 감사 2년, 사무국장 2년, 상임부회장 4년, 향우회장 2년 등 10년 동안 향우회를 위해 헌신해 왔던 김 이 사장이지만 아직도 그는 고향과 관련된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다. 김재욱 이사장의 헌신적인 봉사정신과 성실성은 금융계에 몸담고 있었을 때부터 잘 알려져 왔다. 농협과 광주은행 근무당시 한국은 행 총재표창 및 재경부장관 표창을 수상한 바 있고 전략점포 지점장과 본점부장 재직 시 광주시와 전남도 금고를 맡아 관리하면서 그 공헌으로 우수기관장으로 선정돼 광주은행 최고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수상경력이 말해주듯 맡은 일에 최대의 성과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왔다. 이사장 임기를 마치고 광주비즈니스(주) 본업으로 돌아온 그를 중흥동에 있는 사무실로 찾아가 이 야기를 나눴다. 안녕하십니까? 지난 7월 임기만료 시 역대 어느 이사장보다 큰 실적을 이루었다고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하던데 3년 동안 무슨 일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과찬의 말씀입니다. 단지 맡은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임하는 자세와 집념이 실적으로 나타났다고 봐야지요. 39

40 신용보증재단이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그래요.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요. 신용보증기구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정부에서 운용하는 신용보증기금, 그리고 기술신보와 지역 16개 시 도에서 운영하는 신용보증재단이 있습니다. 광주신용보증재단은 마지막에 해당하는 것으로 1996년에 설립되었어요. 담보력 이 부족한 지역 내 소기업, 소상공인들에게 채무를 보증함으로써 자금융통을 원활히 하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자는 목적을 갖고 출범했지요. 잘 알다시피 많은 재래상인들은 고리의 사채를 쓰고 있어요. 그래서 크게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들을 제도 권 금융기관으로 끌어내어 사채로부터 부담을 줄여주자는 것이 광주신보재단의 일입니다. 재임시 이룬 결과에 대해 만족을 하시나요? 완전한 만족이야 있겠습니까? 지역 내 소 상공인들의 삶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예전 순댓국집은 지금도 어렵게 순댓국집을 합니다. 기본적으로 경제상황이 좋지 않고 정부가 출연할 재원이 많지 않다보니 금융기관과 대기업에 의존을 하는데 모두들 예전과 같지 않 아서지요. 그러나 광주신보는 지난1996년 7월 업무를 개시한 후 신용등급이 낮아 금융기관을 이용하기 어려운 저신용 자영업자, 노점상 등 금 융소외층을 대상으로 집중지원노력을 해왔고 그 결과 최근 3년간 보증잔액이 2007년도 1천100억 원 대비 4배에 달하는 4천310억 원 에 달하고 있으며 설립 이후 총 보증지원금액이 1조원을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금융업계의 인재로 지역에 계시기 아깝다는 말이 있던데 전문금융인으로 평생 살아오신 소회와 우리 금융 계의 현안을 들려주십시오. 저는 1973년에 농협에 들어와 그 후 광주은행을 거쳐 신보이사장 등 37년을 금융계에서 보냈습니다. 지금 해남농협건물, 광주은행 건 물 모두 제 손으로 지어 문을 열었으니 우연한 인연이 아니네요. 누구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로 고향의 재정상황이 눈에 보이지 요. 광주은행 근무당시 시금고, 도금고 등 최고의 전략부서를 맡았었고 그런 인연으로 IMF직후 은행 구조조정과정에서 광주은행이 출자한 광은비즈니스서비스라고 용역회사를 책임 맡았다가 거의 억지로 인수해 지금 그 사업을 하고 있지요. 금융인으로써 '현직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으로 참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재광 해남향우회 제25, 26대 회장으로 2년 동안 향우회를 이끌기도 하셨는데 주로 어느 부분에 역점을 두고 일하셨습니까? 재광해남향우회는 전국의 어느 향우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거의 행정기관 수준의 집행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두 선배 향우들의 노력의 결과인데 무엇보다도 회장선거를 시스템화함으로써 선거후유증을 최소화했지요. 차기회장은 반드시 상임부회장 수 업을 거쳐야 하며 부회장은 철저한 봉사와 헌신으로, 군림하는 회장이 아닌 일꾼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도록 훈련을 거칩니다. 이 전 통을 세운 것만으로도 재광해남향우회는 귀감으로 삼을 만하지요. 그런 향우회의 아름다운 모델이 고향의 자치단체장이나 내년 총선에도 전해졌으면 합니다만... 사실 언제부터인가 정체된 해남군의 발전은 지도자들의 문제라고 봅니다. 해남이 얼마나 좋은 콘텐츠를 갖고 있습니까? 우리나라 농 촌이 황폐됐다고 하지만 해남은 유독 인구이동률이 높고 주말이나 휴일만 되면 시내가 텅텅 비다시피 외지로 빠져나가버립니다. 인 구유입매력이 없다는 이야긴데 저는 해결할 길이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런 일에 의견을 모으자고 앞장서다 보면 항상 오해 가 따르게 되지요. "저 사람 정치하려고 저러는 거 아닌가?" "무슨 꿍꿍이속으로 앞에 나서는가?" 이런 말들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 다. 그래서 좋은 제안이 있어도 망설이게 되고 그런 전반적인 풍조가 군 전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정말 큰 문제이군요. 정치인들의 책임이 몹시 크다고 보는데 진정으로 고향을 사랑하는 이들이 ' 해남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뭉쳐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해남사랑'이니 '고향사랑'이니 하는 말을 너무 남발해버려 그 신선미가 떨어졌다할까, 식상해졌다할까요? 이제는 그런 말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오해를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른도 없고, 소통도 안 되고, 기업유치조차 관심에서 멀어졌어요. 해남이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왜 인근 강진이나 장흥에서는 기업유치를 잘 합니까? 인구유입이나 지역경제를 위해서 저는 반드시 필 요한 것이 기업유치라고 봅니다. 관광객들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어요. 외지인들이 크게 선호하는 골프장이나 레저단지에 연계기업을 집적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나 인적네트워킹을 해야 합니다. 40

41 많은 이들에게 "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 의리와 우정의 향기로 감동시키는 사람" 이란 칭송을 받으셨는데 지도자의 덕목을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저는 소위 지도자로 나서는 사람들이 뭣해야하는지를 모르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지도자는 더 낮은 곳으로 가야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진정으로 봉사할 자세와 역량과 비전을 갖추었는지 돌아봐야합니다. 무턱대고 '자기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 는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지요. 고향에는 자주 가십니까? 앞으로 더 하시고 싶은 일은? 매월 거의 한차례 씩 대흥사에 갑니다. 마침 함께 모이는 회원 한사람이 대흥사부근에서 식당을 하고 있어서요. 나는 여전히 금융인 이고 전문경영인이니까 당분간은 이 분야와 관련된 일을 해야지요. 지금도 신문에서 좋은 기사를 보면 꼭 스크랩을 해놓고, 새로운 정보에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메모를 합니다. 지금 금융가는 퇴직연금12조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분주하지요. 여전히 그런 기사들 에 눈길이 가는군요. 하하. 연 보 1948년 해남읍 출생 해남 동초등학교, 해남 중학교, 목포 홍일고등학교 졸업 광주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졸업 조선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경영학 석사) 전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경 력 1973~ 해남 농협 근무 1980~ 광주은행 해남지점 영업부 대리 근무 1997~ 광주은행 서울지점ㆍ순천지점 차장 근무 광주은행 해남지점 운암동 임동 역전지점장, 광주은행 경양로 지점장(광주광역시 금고담 당) 광주은행 남부지점장(전라남도 금고담당) 광주은행 목포지점장(목포시 금고담당) 광 주은행 본점 영업부장 영업지원부장 지역서비스 부장역임 2001~ 광은비지니스 대표이사 역임 2004~ 상장법인 동아에스텍(주) 사외이사( 現 ) 2009~2010 광주신용보증재단 이사장 역임 2011~ 현재, 광주비지니스(주)ㆍ(주)피지에이여행사 대표이사( 現 ) 사회활동 1975~1981 해남군 배구협회 총무이사 1978~1983 해남청년회의소(JC) 상임부회장 2003~2004 해남중ㆍ고등학교 제21대 총동창회장 2001~2007 재광 해남읍 향우회장 2007~2009 재광 해남군 향우회장 2007~2011 광주사회복지 공동모금회 배분분과 실행위원 2010~2015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조직위원회 위원( 現 ) 2010~ 광주전남 사)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 자문위원( 現 ) 수상경력 한국은행 총재표장(우수직원) 41

42 재무부장관 국고취급 우수직원 표창 광은대상 수상 전남도지사 표창 자랑스런 향우인상 수상 해남읍민의상 수상 광주광역시장 공로패 수상- 사회 봉사단체 활동 이영현( 낙지한마당 사장) 낙지음식 대중화 이끈 '요식업 전문가' 우리나라 사람은 옛날부터 낙지를 좋아했던 것 같다. 광해군 때 허균은 팔도음식을 평가한 '도문대작'에서 낙지는 서해안에서 잡히는 데 맛 좋은 것이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특별히 자세히 적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또 특산품으로도 이름을 떨쳤던 모양이다. 발해와 당나라 사이의 교역 품목에 낙지도 포함되어 있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옛날부터 산 낙지를 즐겨 먹은 것을 비롯해서 낙지 숙회, 연포탕 등 다양한 낙지 요리가 발달했다. 이 낙지요리 하나로 광주의 '먹자골목'을 평정한 이가 있다. 해남 송지면 출신 이영현씨(58)이다.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덕분에 낙지 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낙지음식으로 명가를 이룬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들어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 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목포로 나와 이일 저일 해 보았는데 되는 일 하나 없이 고생만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목포와 운대가 맞지 않은 것 이었다. 매제의 권유로 광주로 와 함께 카센터를 열었는데 광주는 운대가 맞아서인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카센터에서 번 돈으로 그가 두 번째로 시작한 일이 낙지전문점, 18년 전 쌍촌동 지금의 자리 바로 옆집에서 시작한 '낙지한마당'이었다. 그는 이번 달 11월말이면 맞은편에 10억 원을 들여 80평 땅을 사 새로 지은 건물로 이사를 한다. 점심시간 무렵이면 식당 앞이 와글와글 사람 들로 넘치고, 주차난을 일으키던 일도 없어질 것이다. 낙지한마당 이영현 사장과 만나 낙지음식성공스토리를 들어보았다. 42

43 16년 전 쌍촌동에 있던 직장에 다닌 관계로 낙지한마당의 명성은 익히 알았는데 사장님이 해남분인 건 우연히 알게 되었습 니다. 창업할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처음부터 제가 장사를 한건 아니었습니다. 제대를 하고 목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집사람이 통닭집을 하고 힘을 합해도 겨우 아파트 한 채 마련할 정도의 빠듯한 생활이었죠.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을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매제와 카센터 동업을 했는데 1 년 6개월 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왜냐고요? 너무 일감이 넘쳐 도저히 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죠. 이러다가는 건강을 망치겠다싶어 6 개월을 쉬면서, 대형차면허증을 따고 심지어는 도배개술에 이발 기술까지 배웠습니다. 일요일에 쉬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다싶더라 고요. 이발소도 아니고 도배기술자도 아닌 식당을 개업한 것이 히트를 쳤군요. 이렇게 성공하리라 예상을 하셨나요? 글쎄요. 한 때 이 좁은 식당에 종업원만 16명을 두었으니 성공이라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금도 납세관리대상으로 주목을 받고 있으니 제가 내는 세금이 꽤 되는 모양이지요? 우리나라는 자영업의 비율이 유난히 높고 그 중에서도 많은 비중이 외식업에 몰려있죠. 그래서 창업하긴 쉬워도 성공확률 이 가장 낮은 곳이 외식업이라고 하는데 오직 낙지메뉴하나로 광주음식명가가 되셨으니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거 아니었나 요? 제가 낙지한마당을 열 당시 광주에는 딱 네 군데에 낙지음식전문점이 있었습니다. 요 앞 큰 길 건너에 수락정이라고 하나하고 또 금 남로에 하나 있었고, 그리고 두 군데가 더 있었지요. 그 곳에 가서 다 음식을 먹어보고 전국 유명하다는 집도 가 보았는데 지금처럼 낙지음식이 대중화된 건 우리 집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지금 인터넷에 한번 낙지한마당을 쳐보세요. 전국에 주르륵 이름이 나옵니 다. 낙지한마당 프랜차이즈인가요? 천만에요. 저는 낙지한마당이라는 이름을 오로지 제가 고심하고 지었는데 장사가 잘 된다고 하니 이곳저곳에 같은 상호가 생겨나더 라고요. 누군가 '상호특허를 내라' 그러는데 그런 거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하지를 않았어요. 어떻게 손님들이 밀어닥치는지 집사람은 식당 지휘하고 저는 낙지 구입하러 새벽부터 차 몰고 다니느라고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지금은 좀 후회도 되는데 어떻겠어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래도 원조를 알고 찾아주는 분들이 있으니 다행인거죠. 이제는 정말 비결을 듣고 싶네요. 낙지한마당의 ' 시원한 콩나물 국' 은 입맛이 까다로운 우리 어머니도 좋아하시던데 메뉴가 딱 세 가지인가요? 낙지볶음, 낙지회무침, 그리고 낙지연포탕에 낙지 비빔밥, 산낙지도 있지요. 기본 다섯 가지 메뉴로 식사 전에 땅콩과 콩나물국을 내 는 것이 처음부터였고 하나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콩나물국은 이상하게 인기가 있는데, 낙지볶음이나 낙지무침의 매운 맛을 중화 시켜주는 역할로 손이 많이 가지 않으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죠. 특별한 비결은 없고 집사람이 기본적인 음식솜씨 가 있고 손이 커서 푸짐하게 내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일까요? 한때 광주3대외식업 성공사례로 ' 매월농장' 오리바베큐와 피자집 ' 그랑삐아또' ', 그리고 ' 낙지한마당' 을 들었지요. 그리고 4대 먹자골목이 송정리 떡갈비와 광주역 주변 오리탕골목, 무등산 보리밥집, 그리고 쌍촌동 낙지골목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곳 낙지골목은 좀 한산해진 것 같은데 그야말로 골목을 평정한 셈이군요. 그런가요? 제가 처음에 장사가 잘 되자 세를 준 주인이 회수해서 낸 곳도 그럭저럭 장사가 되고 비슷한 이름의 낙지음식도 광주뿐 만이 아니고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저는 낙지음식을 대중화시킨 장본인으로 소개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낙지는 한우나 오 리처럼 정부가 전략적으로 키우는 수산품목도 아니고 실제로 부화단계만 성공했지 양식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원가관리가 매우 불안 정합니다. 어떤 때는 마리당 1만5천에 육박하는 재료를 사용하는 일이라서 조마조마하기도 하지요. 모두들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해남을 고향으로 둔 분들이 각계에서 큰 활약을 하시는데 사장님은 외식업 쪽에서 단연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셨어요. 실례 지만 낙지로 번 돈이 얼마나 되십니까? 43

44 하하, 제가 한번은 어떤 인터뷰에서 하루 평균 손님이 5백명 가량이라고 하자 사람들이 대번에 계산을 해내더라고요. 하루 5백만 원 매출에 한 달이면 1억 5천, 1년이면 15억, 18년 했으니 못해도 100억은 넘었다 이렇게 말하는데 저는 좋은 재료공급에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종업원 월급으로 나가는 돈도 3천만 원 가깝고요. 그러나 많이 벌었다는 입소문은 싫지는 않네요. 제가 하루 손님 1천명은 못 넘겼지만 9백 몇십 명을 받아보았습니다. 입소문이 정말 무서운 것이더라고요. " 더위를 먹어 탈진한 소에게 낙지 서너마리를 먹이면 벌떡 일어난다" 는 설명은 정약전의 ' 자산어보' 에 기록된 것인데 낙지 의 효능을 저렇게 벽에 써 붙여놓으신 아이디어가 좋군요. 스토리텔링을 잘하셨어요. 저게 바로 제 작품입니다. 낙지에 관련된 자료라면 샅샅이 뒤져 노트 한권을 채울 정도로 기록해 익혔고 없는 솜씨로 그걸 써서 벽 에 붙이기도 했지요. 스토리텔링인지 먼진 몰라도 없는 이야길 지어서 한 것은 아니니까요. 낙지는 신경을 안정시켜주는 아세틸콜린 을 비롯해 양질의 무기질과 타우린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훌륭한 스테미너식품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흔히 보양식으로 여름에 많이 찾는데 맛으로 말하면 여름보다 이렇게 찬바람이 나는 10월 이후 지금이 낙지 맛이 가장 좋은 때지요. 그러면 낙지는 어떻게 먹는 것이 가장 맛이 있나요? 낙지에 대한 오해를 하나 풀어드려야겠군요. 낙지는 고 단백생물이면서도 다리에 붙은 동그란 흡반이 함유하고 있는 타우린은 혈액 내 콜레스테롤과 지방질 생성을 억제하고 간을 해독시켜 피로해소에 효과 있는 강장제 역할을 해요. 콜레스테롤 걱정할 필요가 없습 니다. 서울 무교동에서는 낙지를 무조건 맵게만 요리하는데 그건 좋은 재료를 못 구하기 때문이지요. 세발낙지나 싱싱한 것은 날 것 으로 먹는 것이 가장 좋고요. 맑은 물보다 갯벌에서 영양분을 흠뻑 흡수하며 자란 낙지가 그냥 살짝 물에만 데쳐도 달보드레하고 쫄 깃하니 맛이 좋습니다. 식당증축과 함께 새로운 계획은? 그동안 좁은 장소를 애용해 주신 고객들께 더 좋은 맛과 서비스로 보답하는 게 꿈입니다. 지역사회봉사도 더 하고 싶고, 그리고 지금 직장생활을 하는 두 아들 중 큰 애는 미국에 자리 잡고 있어서 어렵지만 둘째가 꼭 이 업을 이어 낙지명가의 전통을 더 발전시켜주 길 바라고 있습니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의 낙지사랑 조선후기 실학자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용은 낙지사랑이 대단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이 낙지를 좋아했다. '탐진어가( 耽 津 漁 歌 )'라는 시 에서 "어촌에서는 모두 낙지로 국을 끓여 먹을 뿐, 붉은 새우와 맛 조개는 맛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고 읊었다. 형인 정약전도 '자산어보( 玆 山 魚 譜 )'에서 낙지는 사람의 원기를 돋운다며 낙지예찬론을 펼쳤다. 또 낙지는 '영양부족으로 일어나지 못 하는 소에게 낙지를 서너 마리만 먹이면 거뜬히 일어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중국의 의서 '천주본초' 역시 낙지는 익기양혈( 益 氣 養 血 ), 즉 기를 더해주고 피를 함양해주기 때문에 온몸에 힘이 없고 숨이 찰 때 효 능이 있다고 했다. 10월 하순부터 잡히는 가을낙지를 '꽃낙지'라 부르는데 일 년 중 가장 맛있기 때문이다. 낙지를 산 것으로 먹을 때는 세발낙지가 좋다. 낙지의 발이 세 개라서 세발낙지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세'는 '가늘다'( 細 ) 라는 뜻의 한자어. 세발낙지는 발이 가늘고 길어 붙여진 이름이다. 입에 쩍쩍 달라붙어 씹을수록 우러나는 맛과 초장과 잘 어울리는 세발낙지는 남도의 명물이 된지 오래다. 한상원( 동아에스텍( 주) 대표) 도로안전시설물 국내시장 1위점유 전남 화순군 동면농공단지, 한약제품, 정화조, 타월양말, 생활자기, 식탁의자, 전자제품부품 등 도시주변 소규모공단에서 볼 수 있는 흔한 공산품들을 취급하는 기업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에 국내 최고의 상품을 생산하는 일류 기업이 있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 다. 광주에서 차로 30분 거리, 너릿재를 넘어 사평 쪽으로 가다 우측으로 접어드는 동면 운농리에 있는 동아에스텍 은 도로 가드레 일과 교량용 방호 울타리 등 도로안전시설물 제조업체로 품질이나 시장 점유율 등 모든 면에서 국내 최고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 회사 난간제품을 사용한 영종대교, 광안대교, 압해대교, 그 밖에 한강의 모든 대형교량에서 지금까지 단 한건의 교통추락사고 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강하고 충격을 흡수하는 성능이 좋다는 증거죠." 한상원회장(57, 해남군 송지면출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4

45 군대를 다녀온 뒤인 26세에 창업해 지금까지 31년간 한 우물을 파며 노하우와 기술력을 쌓아온 결과다. 시골 농공단지 공장에서 연 매출 1000억여 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동아에스텍의 저력이 무엇일까 궁금한 필자의 눈에 책상 앞에 놓인 10여권이 책들이 들어왔 다. '미래산업전망대', '2020 새로운 미래가 온다', '애프터쇼크', '오리진이 되라', '비자트 3.0', '리딩으로 리드하라', ' 살아남기 위하 여' 등 미래전망 트렌드의 책들이었다. 제조기업 오너의 책상위에 수북이 쌓여있는 책들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이 책을 다 읽으셨습니까?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주로 시골에 있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는데 독서는 혜안과 위기대응능력을 길러주지요. 해마다 3, 40권정 도 읽는데 책에서 많은 것을 얻습니다. 이렇게 여러 권의 책을 읽으시고 최근에 얻은 것이 무엇인지요. '미래산업전망대'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운영하는 SERICEO 콘텐츠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경영자들에게 상상력과 통찰력을 줄 수 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 기업의 평균 수명은 단 13년이라고 하지요. 또 다른 통계를 보면 30년이 지나면 80%의 기 업이 사라진다고 하는데 이런 현실 속에서도 오래도록 살아남는 듀폰, 3M, GE와 같은 기업도 있습니다. 이들이 100년 이상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변화하는 환경에 민첩하게 대응하여 변신을 거듭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동아에스텍은 회장님이 직접 개발한 도로안전시설 제조 특허와 지적재산권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늘 뵈니 경영자 로서의 면모가 더 돋보이는군요. 저는 엔지니어출신이 아닙니다. 정식으로 철근구조물 제조를 공부한 것도 아니고 원래 시작은 진열장으로 쓰는 앵글이나 철재울타리 를 조립해서 파는 일을 했습니다. 제가 사업 시작하던 무렵은 호남 쪽은 철강재산업 불모지였어요. 핫코일이 포항에서 생산되기 때문 에 관련업종은 전부 부산?경남이 독점했지요. 그런데 88올림픽 직전에 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세계1위라는 뉴스가 계속 나 왔어요. 세계적인 행사를 앞두고 교통사고 사망률1위는 치명적이죠. "아, 도로시설에 투자를 하겠구나"생각을 했는데 실재로 86년도 부터 SOC투자는 물론 도로안전시설투자를 대폭 늘리더군요. 회사를 키우려면 앵글조립만 갖고는 어렵고 철재를 '직접 생산 시공'해 야겠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지금 기술개발 특허를 100여개 갖고 있는데 이 사업하면서 기술자가 됐다고 봐야죠. 4대강 공사 등 우리나라는 전 국토에서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니 동아에스텍은 앞으로도 전망이 무척 밝아 보입니다만. 저희회사는 4대강 수혜회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회사전망은 밝지요. 대형교량용 안전보호대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우리 회사만 생산 능력을 갖췄고 현장 시공 경험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개발한 삼중 굴곡 도로가드레일(충격흡수형 고규격 Thrie-Beam가드레일)은 교 통사고 시 소형차는 밑에 끼는 것을 막고, 대형차는 추월을 방지하는 피해최소화 기능을 갖춰 시장지배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습니다. 또 신기술을 적용한 건축물 바닥공사용 거푸집인 데크-플레이트를 당진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데 기능?시공성?가격경쟁력 등 모든 면에서 기존제품보다 뛰어나는 것으로 평가되었고요. 전반적인 내수산업의 침체 속에서도 계속 회사를 키워 온 비결이 바로 기술경쟁력의 우위군요. 또 기술력과 함께 어떻게 미래를 내다보고 적시에 투자를 하느냐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상장회사인 만큼 투자자들이 화사의 향후 발전전망에도 관 심이 클 것 같은데요. 조만간 현재 화순공장 뒤쪽에 지금보다 두 배가 큰 6,000평 부지를 확충, 제2공장을 지을 겁니다. 전남대학교 산학협력단 송진규교수 팀과 손을 잡고 국책과제인 아토피 없고 미생물유해가 없는 친환경 콘크리트를 생산할 예정인데 미래 산업의 3대 키워드가 '그린', '스마트', '바이오'라고 하지 않습니까? 친환경콘크리트 수요증가를 예측한 전략이지요. 그동안 어려웠던 때는 없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실패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제가 창업에 나선 것은 군대에 다녀온 뒤 해남 고향집에서 일손을 돕고 있었는데 한해가 들어 끼니 걱정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을 겪 으면서였어요. 초기엔 규모가 작고 원재료를 사다 조립만하다보니 부가가치도 없고, 부실채권도 생기고 했는데 직접 생산하면서부터 는 워낙 철저히 하다 보니 크게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지금 세계경제가 무척 위태로운데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도덕적 해이에서 온 것이라 봅니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부채가 없어야합니다. 그래야 글로벌경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요. 45

46 지난 6월에 재광해남향우회 회장을 맡으셨는데 각오는? 출향인들의 고향사랑은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해남은 특히 향우회가 잘되고 있다고 봅니다. 서울도 그렇겠지만 광주는 매번 체육대 회 때마다 2,500~3,000명이 모이지요. 아마도 전라남도 22개 시군 중에서 가장 참여도나 결속력, 그리고 정체성이 높은 모범적인 향우 회가 아닌가싶어요. 선배회장님들도 모두 봉사정신이 투철하시고 사심 없이 고향을 위해서 봉사해주셨다고 생각됩니다. 이 전통을 잘 이어 가야지요. 미래변화에 관심이 큰 기업경영자의 눈으로 해남이라는 주식회사를 운영하신다면 어떤 전략을 쓰겠습니까? '고산문화클러스터'라고 이름해 볼까요? 저는 해남에 내려갈 때마다 연동에 있는 녹우당을 들릅니다. 지난해에 고산 윤선도유물전시 관이 개관됐는데 '윤두서자화상'을 비롯해 해남윤씨 녹우당 종택의 유물 4천6백여 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지요. 물론 대단한 일인데 저는 고산 윤선도의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조명돼야한다고 봅니다. 오우가( 五 友 歌 )의 가치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랴/' 얼마나 기가 막힌 노 래입니까? 오우가 하나만 가지고도 기념사업, 문화산업으로 연계해 캐릭터제작판매나 이벤트 등을 할 수 있고 외국 관광객 유치를 할 수 있습니다. 지자체 공무원들이 더 연구를 해야 합니다. 공룡화석지, 명량대첩지도 좋지만 특히 문화클러스터로서 녹우당이 중심 에 있으면 좋겠고 문화산업으로 해남이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연 보 1954년 해남군 삼산면 상가리 출생 광주상업고등학교 졸업 조선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경력 및 회사연혁 동아산업 개업 대표 동아산업(주) 설립 대표이사 동아기공(주) 설립 대표이사 02 화순군 동면 농공단지 입주 11 신기술 제품 개발 (충격흡수형 고규격 Thrie-Beam가드레일) ~05 산업재산권 출원 (특허 12건, 국제실용신안 1건, 실용신안 17건, 의장 18건 등) 08 신기술 제품 실물충돌실험 기준만족 (미국 TTI, 미국 NCHRP Report 350) 10 대한전문건설협회 전남지부 5대 대의원 건설 신기술 제10호 지정 10 교량용 강재방호책 제품개발 12 ISO9002 품질인증 유망 중소기업선정(전남도) 06 충격흡수형 고규격 Thrie-Beam가드레일시스템 실용신안 등록 10 벤처기업 지정(중소기업청) 12 조달청-우수제품 선정(충격흡수 형 고규격 가드레일) 대한전문건설협회-철물공사 부문 우수회원사 선정 12 중소기업청- 기술경쟁력 우수기업 지정 동아에스텍(주)상호변경 대표이사 INNO-BIZ기업 지정(중소기업청) 12 우수기업 선정(중소기업청) 46

47 건설 신기술 제388호 지정(건설교통부) 11 제7대 대한전문건설협회 전남도지회장 DS 강성차등형 가드레일 실물차량 충돌실험 성공 (국가기준 만족) 08 한국 증권거래소 주식상장 09 DS 강성차등형 가드레일 특허등록 심사통과 10 강재방호책 SB5급 실물차량 충돌실험 공공* (국가기준 만족) 12우수품질인증(DS 강성차등형 가드레일) 벤처기업 지정(광주전남지방중소기업청) 06 우수제품 인정(조달청) 12 기업정보화 우수기업인증(정보통신부) 교량용 강재방호책 SB4급(2단형)실물차량 충돌시험 성공 03 광주상공회의소 제19대의원 11 제8대 대한전문건설협회 전남도지회장 연임 당진공장 준공(건축사업 이지(EG데크) 수 상 대한전문건설협회 '전문건설기술부문' 장려상 수상 04 전라남도청 '자랑스런 전남인' 선정 성실납세자 재정경제부장관상 수상 12 중소기업대상(지역개발분야, 중소기업청) 수상 제38회 발명의날 철탑산업훈장 수훈 은탑산업훈장 수훈 박흥석( 광주상공회의소 회장) 천혜의 자연환경, 해남을 바이오산업으로 47

48 광주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누군지를 꼽는다면 아마 두 번째 가라하면 서운할 사람이 박흥석(66 해남군 문내면 원동리 출신) 광주상 공회의소 회장이다. 재광 해남군향우회 제17~18대 회장으로 향우회발전에도 크게 활약했고 현재도 향우회 고문으로 13만 재광 해남향우들의 든든한 울 타리가 되어주고 있다. 그러나 박 회장의 어깨에는 향우회를 넘어서 더 크고 무거운 짐들이 줄줄이 지워져 있다. 맡고 있는 직책만도 (주)럭키산업 대표이사, KBC광주방송 대표이사, 광주상공회의소 회장,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광주지역 및 전국 부의장, (주)광주시 민프로축구단 대표이사에 최근까지 한국지역방송협회 공동대표에 광주 전남 지역혁신협의회 공동대표 의장 등을 맡았으니 그가 지 고 있는 짐의 무게를 짐작할만하다. "챙겨야 할 것도 많고 처리해야 할 사안도 수북이 쌓여있습니다. 많은 기업인들이 그렇겠지만 저는 시간을 분 단위로 나눠서 쓰고 있 어요" 무슨 일을 맡아도 무리 없이 성과를 내는 '능소능대 능력 맨'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박흥석회장을 KBC광주방송 대표이사실에 서 만났다. 상공의 날을 이틀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박 회장은 대부분의 언론사 인터뷰를 거절했다고 하면서도 고향신문의 요청에는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다. 안녕하십니까? 오래 전부터 금요초대석에 박 회장님을 꼭 모시고 싶었는데 마침 내일 모레가 상공의 날이군요 년도 제 20대 광주상공회의소회장에 만장일치로 추대가 되셨죠? 네. 당시 전체의원 67명 가운데 53명이 참석했는데 만장일치 추대를 받았습니다. 임기 중 역점사업으로 상공인 화합과 단결, 회원기 업 애로해소, 지역현안 해결, 회원서비스 확대, 재정자립기반 확보 등을 내걸어 호응을 받았죠. 무엇보다도 상의 회원들의 화합에 바 탕을 두고 일할 계획이었습니다. 다행히 수백 명 수준에 머물러 있던 회원사가 1년 사이에 2,300여 회원사로 늘어났고 역대 어느 회 장보다 일을 많이 하고 상공회의소의 품격을 높였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상의가 경제주체로서 위상을 가지려면 회원기업들 에게 철저하게 서비스하고 비전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상공회의소는 상공인의 권익과 이해를 대변하는 곳, 즉 기업의 성장과 발전을 돕는 조력자이거나 상공인들을 위한 결사체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창의력과 경쟁력이 생명인 상공인들에게 상공회의소의 존재의미는 무엇입니까? 단순한 상공인들의 결사체로만 볼 수 없지요. 상공회의소는 회원 간의 정보교류와 네트워크 구축도 중요하지만 지자체 산업정책과 맞춰 기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도록 세제나 각종 규제를 건의하고 애로 사항을 정기적으로 모아서 정부에 전달하는 창구입니다. 미국 금융 불신에서 비롯된 글로벌경기의 불안정 등 대외 경제여건의 악화는 내수 경기를 위축시키고 국내경기 둔화를 가져왔습니 다. 일반국민들의 고통도 크지만 지역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지역경제의 지속 성장을 위한 끊임없 는 연구와 투자 여건 개선에 적극 나서야지요. 이런 지역의 열악한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광주상공회의소는 어떤 대안과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올해 광주 상공계 전망 및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과제를 알려주십시오. 근래에 우리지역에 금호, 대주, 삼능, 금강, 새한철강이 부도가 나는 등 많은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광주산업포트폴리오는 15~6년 전에 비해 탄탄하게 짜여 있다는 것을 저도 최근에 느꼈습니다. 과거에 무등건설 하나가 부도 나면서 광주가 얼마나 큰 타격을 받았습니까. 그때는 건설업 비중이 60%를 차지했는데 지금은 8%도 못되지요. 건설 쪽의 공백을 제 조업과 유통, 관광분야에서 매워줘 지난해만해도 34%매출 증가에 수출도 15억불로 38%가 늘었어요. 이렇게 장기적인 전망에서 산업전략이 짜여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일, 광주 R&D특구지정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또 광주은행 인수 건이 있습니다. 현재 지역자본은 타 지역으로 21%가량이 역외 유출되고 있습니다. 이를 막을 수 있고, 청년 일자리 창출차원에서도 광주은행은 중요한 역할을 하죠. 광주ㆍ전남지역 자본에 의한 광주은행 인수는 속히 이뤄져야 하며 광주은행이 정상화 된 뒤에는 시 도민에게 혜택이 돌아갈 장치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회장님은 2003년 전남대학교에서, 또 지난해에는 모 사립대학에서 두 번이나 명예경영학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요.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경영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또 해남출신 중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한 경영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같은 성공의 비결을 들려주십시오. 하하, 저는 지금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신조가 정직, 좌우명도 신뢰입니다. 하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며 결과에 48

49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구별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능소능대( 能 小 能 大 )라 하나요? 제가 사회에 나와 처음 으로 발 딛은 곳이 세무공무원이었는데 저는 퇴근 후에 저녁밥을 먹고도 또 일을 했습니다. 국가에 녹을 먹은 만큼만 일한 게 아니 라 하고 싶어서 했죠. 지금 방송국 운영도 제가 알아서 시작했겠어요? 한때 골프장을 인수한 거나 방송일이나 서로 같이 해보자고 한 사람들이 있어 시작 을 했습니다. 정직하게 운영하다보면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죠. 그 경험으로 저는 한 사람이 부족하면 다섯 사람 모으 고, 다섯 사람으로 부족하면 열사람을 모아 일을 벌입니다. 안될 일이 없지요. 사업을 많이 하다보면 어려웠던 때도 있었을 텐데요. 가장 어려웠던 시절은 언제였는지요? 사업은 항상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직원들에게 "잘 나가는 때가 더 어려운 것이다. 좋을 때는 어려워질 때를 생각해서 두 배 세배 더 노력하자"고 말해요. 그래도 방송국 인수전에 전국에서 노조가 제일 센 곳이었는데 지금은 전부 하나가 되어 저를 믿고 따라줍니 다. 결국 모든 경영은 한 곳으로 통하는 데 직원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투명하게 운영하다 보니 전국 16개 지역국 중 매출이 제일 선 두에 있습니다. 기업인으로 자연보호운동을 비롯해 청소년 선도활동, 불우이웃돕기, 장학사업, 문예진흥사업 등 지역 봉사활동도 꾸준히 전 개해오고 계시는데요. 인재육성이나 지역사회봉사에 대한 철학은? 현재 이사장으로 있는 광산장학재단은 70여억 원이 모아져 있습니다. 앞으로 좀 더 늘릴 생각인데요. 장학사업은 '공부를 잘하고 생 활이 어려운 학생들은 어떻게든 공부할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선생이 되고 싶어 처음에 목포교대에 들어갔는데 우 연히 진로를 바꿔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돈이 뭔지 모르고 살았는데 공무원 그만두고 소매상으로 1년 2개월 일할 때 처음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교육열이 높고 기대가 컸던 부모님께 누가 될까봐 악착같이 이겨내었죠. 사회봉사나 이웃돕기는 누구나 당연한 일이죠. 광주시민프로축구단 대표이사로 취임하여 지역체육발전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계시는데 실제로 축구를 좋아하십니까? 축구는 가끔 보기는 하지만 특별히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고, 지역경제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맡아야한다고 해서 사명감으로 하고 있 습니다. 축구단이 성공하려면 재정기반이 매우 중요하지요. 다행스럽게 1차 목표액 10억을 초과해 15억을 달성했고, 2차로 또 100억 을 모으려고 하는데 축구단이 인기가 있어 크게 어렵지는 않군요. 지역방송사의 대표로서 뿐만 아니라 전국민영방송협의회 회장, 지역방송협의회 공동의장 등 맡은 일마다 올바른 대안을 제 시하고, 특히 2010년 들어 우리지역 대표기업들의 법정관리 신청으로 광주경제가 어려울 때 해결방안을 제시함으로 지역 전반에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는 등 큰 성과를 내고 계신데 고향 해남의 지역발전을 위한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 주 십시오. 지금 세계적으로 가뭄이나 태풍 등 자연재앙으로 재배면적이 줄고, 인구는 증가해 식량부족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생활에 먹는 일처럼 중요한 일이 없어요. 앞으로 먹을거리가 틀림없이 경제가치가 가장 높은 산업이 될 것입니다. 해남은 다른 도시가 갖지 못한 천혜의 환경을 갖고 있지요. 깨끗한 공기, 질 좋은 개펄, 무기질이 풍부한 황토 흙 등 지역을 특화할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을 과학적 으로 분석하고 단위면적당 수확량을 높일 수 있는 종자 개량기술을 개선 등 바이오산업을 권하고 싶군요. 지난 해 미국 몬산토라는 회사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오박사들을 초빙해 웰빙식품 개발로 막대한 수익을 내 는 걸 보고 감탄했어요. 정부도 농업을 생명산업으로 키우려는 전략을 갖고 있는 만큼 이를 활용한다면 분명히 좋은 대안이 나올 것 입니다. 연보 1945년 전남 해남군 문내면 원동리 출생 문내동초등학교(14회), 우수영중학교, 목포문태고등학교(17회) 졸업/목포교육대학 졸업 전남대 행정대학원 졸업/전남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경력 49

50 1985년 (주)럭키산업 설립 1998년 대한적십자사 전국대의원 및 광주전남 상임위원 1999년 한국발명진흥회 광주지회장 2000년 광산장학재단 이사장 2001년 KBC광주방송 대표이사 사장( 現 ) 2006년 한국지역방송협회 공동대표 회장 2007년 광주 전남 지역혁신협의회 공동대표 의장 2006년 한국지역방송협회 공동대표 회장 2009년 광주상공회의소 회장( 現 ) 2010년 (주)광주시민프로축구단 대표이사( 現 ) 저서 1987년 저축의 날 동탑산업훈장 1992년 대통령 표창 1994년 광주시민대상(사회봉사부분) 1999년 로터리 클럽 무궁화대상 수상 2001년 광산구 광산구민상 2002년 11월 광주시민대상(지역경제진흥부문) 2003년 9월 노동부 장관상 재정경제부 장관상 2007년 3월 국세청 모범 국무총리 납세자상 2007년 5월 능률혁신 경영대상 2010년 12월 국민훈장 동백장 50

51 성하철 (명성건축 회장) 진정 좋은 집 은 자연 친화적 건물 전국적인 관광지로 이름난 해남 땅끝을 얘기하다보면 꼭 튀어나오는 이야기가 '잘못된 개발의 그림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땅끝의 정 점에 우뚝 서 있는 땅끝탑은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흉물스럽다는 말까지 나와 새삼 이 땅에서 무언가를 짓고 설계하는 사람들의 안목과 미의식의 중요함을 느끼게 한다. 이번 금요초대석에서 만난 건축설계 및 전문시공회사 명성건축의 성하철 회장(74)은 화산면 명금리 출신이다. 해남중 고등학교를 나 와 전남대 건축학과에서 공부하고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설계사무소를 차려 집과 건물들을 수 없이 지었다. 그 중에서도 2005년 6월에 준공된 평양낙랑구역 승리2동에 위치한 '평양라이온스안과병원'은 그가 재정위원장으로 고 김대중 대통령 의 정상회담이 있기 전부터 여섯차례나 평양을 직접 오가며 이뤄 낸 역작에 속한다. 지금은 건축현업에서는 손을 떼었지만 여전히 좋은 건축물을 보면 가슴이 뛰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싶다는 원로건축가와 고향이야 기, 그리고 좋은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1950년대에 대학을 가셨는데 그 때는 지금처럼 건축에 문화적인 개념이 덜하던 때였죠? 그렇죠. 건축자재도, 건축기술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때였으니까. 그 때에 비하면 우리 건축기술이 엄청나게 발전을 했습니다. 외국 에서 대형공사를 많이 수주해 오는 것도 그만큼 기술이 뒷받침 돼 주기 때문이죠. 못 짓는 건물이 없지 않습니까? 회장님은 우리나라 건축설계분야에서 1세대에 속한가요? 우리 이전에도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김수근과 김중업, 이분들이 한국현대 건축의 1세대로 평가되지요. 물론 해방 전 건축가 들이 존재했으나, 완전한 근대건축가로 볼 수는 없고 해방 후에도 경제적 기반의 빈약에 따른 상공업의 부진, 사회적 혼란, 현대화에 대한 적응력 부족으로 새로운 건축 창조행위가 활발히 일어났다고 보기 힘듭니다. 1960년 이후 경제성장에 따른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외국에서 서구건축을 직접 배우고 귀국한 건축가들과 국내의 건축가들이 본격적 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지요. 이들이 한국현대건축의 1세대를 형성하는데 파괴된 건축의 정체성과 도시질서를 서구 근대 건축의 개 념으로 창조하려 했지요. 건물은 한번 지어지면 적어도 수십 년, 혹은 1백년이 넘게 존속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고 심사숙고가 따라야하는 종합예 술 같은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건물의 용도와 건물이 놓이는 위치를 감안한 개념과 철학, 그리고 설계자의 디자인적 안목이 잘 살려진 건물이 예술품처 럼 가치를 갖게 되지요. 회장님은 그런 건물을 지으셨습니까? 허허. 지금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제 집을 몇 번 설계해서 지었고 세정신문 사옥, 중소기업은행합숙소와 연수원, 이동통신전남지사 와 전북지사 외에 전화국이나 우체국도 제 손에서 많이 설계, 시공까지 했지요. 편하기로만 하면 아파트만한 것이 없지만 재개발이라 고 해서 높이만 짓는 아파트는 반대합니다. 오래된 아파트들도 재개발보다는 골조는 그대로 두고 리모델링 하는게 바람직하지 않을 까싶어요. 어리석은 질문 같은데 ' 진정 좋은 집' 이란 어떤 걸까요? 혹시 일본인으로 세계적인 건축가인 안도 타다오의 건축을 본적이 있습니까? 제주도 섭지코지에 있는 종합 해양 리조트인 휘닉스 아 일랜드 안에 바로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건축물인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와 글래스 하우스(Glass House)가 있어요. '이 땅 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뜻을 가진 지니어스 로사이는 자연과 교감하고 예술과 공간이 조화로운 미술관이자 명상 공간이죠. 빛과 물, 노출 콘트리트가 주조를 이루는 안도 타다오 특유의 건축물 특징을 보이며 그곳에는 햇빛과 하늘, 바람과 돌과 물, 풀과 꽃 등 제주도의 자연이 그대로 투영되어있습니다. 전망에 초점을 두어 방해 받지 않고 수평선이나 주변의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51

52 일부러 미술관 겸 명상 공간은 지하에 지었다고 해요. 서울에서 위로만 우뚝우뚝 솟는 건물을 보다가 그 인간적이고 자연친화적인 모습이 정말 충격이었죠. 그러고 보니 광주에 짓고 있는 아시아문화전당도 지하에 많은 부분이 들어가는 것으로 설계되었던데, 일종의 트랜드인가 요? 20세기 3대 건축가의 한사람이며 미국 건축의 아버지라고 하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누가 로마네 스크 건축을 보고 경탄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건축을 여기로 가져와서 원래의 환경과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다 심어 보려고 하 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다"라고요. 라이트의 건축 사상은 '유기적'이라는 용어 속에 응축되어 있는데 그의 정의에 따르면 유기적 건 축이란 시간, 장소, 사람에 어울리는 건축입니다. 즉, 건축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시대에 부합해야 하고, 그것이 세워지는 곳의 자연환 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일차적 소명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아리조나주에 있는 그의 사무소는 지하에 있고 지상에 나온 지붕엔 산처럼 풀을 심기도 했는데 더운 지역이니까 그게 가장 이상적인 집이었던 거죠. 고향 해남의 아름다운 해변을 더욱 아름답게 보일 경관구성이 어떠해야할지 알 것 같군요. 이제 건축 현업에서 물러나셨다 니 고향에 오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고 건축과 연결된 일들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해남과는 라이온스클럽을 통한 무료개안시술봉사나 재경해남중 고동창회, 두륜회모임 등 여전히 자주 찾게 됩니다. 개안시술봉사는 1999년 7월 제가 장안라이온스클럽 총재로 있을 때 시작해 그동 안 녹내장, 백내장 환자 등 수백 명을 치료해왔죠. 또 1989년 '재경 해남중 고등학교 총동창회장'직을 맡아 재학중인 후배들에게 장 학금을 지급하고 적립하는 등, 모교발전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북한에 안과병원을 짓게 된 배경은? 국제라이온스협회와 한국라이온스연합회의 지원으로 준공된 안과병원은 시력우선 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는 라이온스의 정신과 한 국라이온들의 민족애와 동포애가 접목되어 이뤄진 것입니다. 향후 남북한 통일을 위한 작은 밀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오 랜 준비 끝에 2002년 11월 22일 첫 삽을 뜬 이래 2년7개월 만인 2005년 6월 18일 준공했습니다. 제가 건축 일을 해 봐서 재정위원장 을 맡아 연면적 3,325m2(1,005.89평)로 지하1층, 지상 3층으로 건립했죠. 12개 병실에 76병상을 갖추고 Slit Lamp(세극등 현미경)등 60여종의 최첨단 의료장비를 설치했습니다. 77억원 정도가 들었어요. 준공 후에도 병원운영을 위해 추가로 의료장비를 제공하고 안과 전문의 및 간호사 등 전문인력을 파견해 왔고 직접 평양까지 갈 수 없을 땐 연변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기도 했지요. 북한의 열악한 의료환경을 생각할 때 매우 적절한 지원을 하셨군요. 활발한 사회활동을 배경으로 정계진출을 꿈꾸는 출향 인사들도 많은데 회장님도 그런 유혹을 받았습니까? 저는 건축설계사이자 시공기술자입니다. 전문직을 가진 이들은 그 직업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 가장 빛이 나고 인생의 마무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할 수만 있다면 개인적으로 장학재단을 만들어 고향의 영재들을 돕고 싶고, 그게 더 행복하고 해 남과 모교를 사랑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바쁘게 사셨으니 고향에 한번이라도 더 자주 오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친인척들이 살고 계시나요? 해남서초등학교 교장으로 계시던 倫 자 鎬 자 선친은 50대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지역에서는 존경받는 분이셨는데 아쉽죠. 그러나 내 부모님 같은 어르신들의 실명예방과 안구수술 등 평생 해오던 봉사활동을 고향에서 더 하고 싶습니다. 라이온스총재로 있을 당시 서 울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가졌던 소년소녀가장돕기 걷기대회에 2,000여명 참석한 적도 있는데 무척 보람이 컸죠. 또 KBS 사랑의 리 퀘스트에 출연해 1억원을 모금해 한국시각장애자 복지회를 지원하기도 하고 베네수엘라 구호 국제봉사를 한 적도 있는데 저는 그런 일들이 좋습니다. 혼자서 할 수 없으면 두륜회회원들이나 뜻이 맞은 사람들과 함께 국제봉사도 하고 싶고, 탈북대학생들이나 중국유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모금 등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건축에 문외한인 필자는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와 성하철 회장이 충격을 받았다는 안도 타다오가 지은 제주도의 지니어스 로사이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다. 안도가 특별한 것은 기하학 구성을 사용하면서도 인간을 위한 공간, 인간생활을 위한 장, 공공적 성격이 강한 공간을 창조하는 안도만의 작품성향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수평선이나 경관 등 제주도의 자연이 잘 투영된 아름다운 건 52

53 물을 지어내었다. 어떤 시인이 말하기를 '해남의 햇볕과 흙은 분명히 다른 곳과 다르다'고 말했다. 유난히 붉은 흙과 맑고 투명한 햇빛, 바람과 돌, 향 기로운 풀과 꽃이 있는 해남의 자연에 어울리는 기념비적인 건축을 누군가는 지어야 할 것이다. 그가 성하철이기를 기대해본다. 이장명( 피토젠 사장) '식물성 항균&탈취제'로 밝고 건강한 사회 꿈꿔 2011년 새해가 밝아왔는데도 우리사회엔 풀리지 못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외형적으로는 성장과 발전을 누리고 있는듯 하나 도저 히 펴질 것 같지 않은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그렇고,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젊은이들의 취업난이 그렇고, 꽁꽁 언 한파도 아랑곳 하 지 않고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돼지와 소 구제역 소식은 추위보다 더 무섭게 주변을 옥죄어오고 있다. 인간들이 뭔가 잘못을 저지 른 대가를 치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맑고 향기 나는 뉴스가 그립다. 해남읍 성내리 출신 이장명 대표(49)가 설립한 천연비누&화장품 제조회사 피토젠은 그 이름 만큼이나 좋은 뜻과 향기로운 비전을 담 고 있다. 회사이름 피토젠(PhytoZen)은 식물의 약용성분+동양의 禪 사상의 합성어로 우리 고유의 전통 한방원리와 우리 땅에서 자 생하는 약용식물을 이용한 기능성 천연제품 제조전문회사를 의미한다. 자연친화적, 환경친화적, 인간친화적 제품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절대고민, 환경오염과 질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거기에 서민들이 적은 자본으로 창업까지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담고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다. 이장명 대표를 만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다듬어 온 경영철학, 수제천연비누 생산 과 창업컨설팅을 통한 '밝고 건강한 사회 만들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새해가 되었는데 사람들의 얼굴에서 밝고 희망찬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고 날씨조차 한파가 전혀 누그러질 기세가 보이지 않네요. 이 사장님은 최근에 기존 피토젠회사 말고도 학교기업 (주)CA웍스를 출범, 산학협력을 통한 밝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가겠다고 포부를 밝히셨죠.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입니까? 네, 지난 12월에 특성화 고등학교인 서울디자인고등학교(구 동도공고, 교장 신헌종)와 산학협력 협약식을 갖고 피토젠이 개발한 시설 기자재 및 실험, 지적재산권을 공동 활용하는 한편 졸업생들의 취업과 창업에 적극 협력키로 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친환경 공예비누 센터를 개설하여 동아리활동을 지원하고 친환경소재를 활용한 교육과 산업현장의 실습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졸업 후 취 업과 창업을 지원하게 되지요. ' 예비 사회적 기업' 이란 ' 사회적 기업' 의 전단계라는 말씀 같은데 CA웍스를 통해 어떻게 사회적 기업을 실현할 수 있습니 까? '사회적 기업'이란 실직자나 근로빈곤계층의 자립을 위해 만들어진 공동 기업체로 시장에서 이윤활동을 통해 안정적인 고용을 창출하 며 이윤의 지역사회 환원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경영체제입니다. 즉 일반기업과 달리 기업 활동의 결과가 숲을 푸르게 가꾸거나 환경운동 같은 공익적 서비스라는 점과 그렇게 해서 생겨진 수익이 재투자 돼 더 많은 실직자와 빈곤 계층의 일자리를 만든다는 점 에서 일반 기업과 구별되는 실업대책의 새로운 대안이지요. 한방비누, EM비누, 방향제 등 친환경제품 생산의 수익창출 모델을 저소 득층 청소년들이나 실버계층, 그리고 다국적가정 등 소외계층에 제공해서 이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울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듣고 보니 CA웍스의 운영 모델은 서울 같은 도시보다는 해남에서도 필요할 것 같은데 고향의 단체들과 제휴해 볼 생각이 53

54 없으신지요? CA웍스는 지자체는 물론 실업계고등학교나 전문대학, 그리고 비영리 기업이나 여성단체 등 누구라도 함께 이를 실현해 갈 수 있다 고 봅니다. 친환경 비누제조사용을 각 가정에서 생활화 할 수 있도록 지자체와 기업, 사회단체의 적극적인 동참을 바랍니다. 피토젠 의 기술력과 생산지원 및 교육노하우 등을 함께 나눌 준비가 저희는 되어 있으니까요. 아울러 단순한 이윤추구가 아닌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나 사회서비스도 제공하고 싶습니다. 환경 전문가는 아니지만, 비누 사업을 통한 경험을 살려 '폐식용유 10% 재활용하기, 합성세제 10% 줄여 쓰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 니다. 현재 제주도 서귀포 시에 소재한 EM환경 센터와 연계하여 서귀포시 소재한 몇 곳의 주민자치센터에 폐식용유 재활용 제조 설 비 및 기술 지원을 제공하였으며, 얼마 전 고창군청 환경과에 재생비누 설비와 제조 기술을 제공하였습니다. 맑은 환경과 생태 도시 를 꿈꾸는 고향인 해남에서도 이러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적극 지원할 계획입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오신지는 얼마나 되었는지요? 해남읍에서 출생해 해남 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남중 31회, 해남고 29회로 졸업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10여 년간 유통업계에서 잔뼈가 굵었죠. 천연비누사업과 유사한 업종인 화장품과 향료 사업체를 운영했어요. 그런데 내가 원하는 제품을 직접 만들어 팔아보자는 생각에 그동안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2007년 9월 제조공장을 창업했습니다. 창업 과 함께 소형 비누제조기를 직접 개발하기도 했고요. 수제비누의 특성상 대량생산이 어려워 부가가치 창출이 어렵고 비누제조 과정 에서 가성소다증기를 흡입하면 건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자동비누제조기가 꼭 필요합니다. 1평 내외의 작은 공간에서도 설치할 수 있는 비누제조기는 비누를 만드는 사람의 건강을 보호하고 소규모 작업환경에서도 대량생산이 가능해 주문량에도 적극 대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요. 시중에는 이미 폐유를 재활용한 비누 만들어 쓰기가 오래전부터 유행하고 있고, 개인공방 등에서도 이를 보급하고 있는데 피토젠 제품의 차별성은 무엇입니까? 피토젠은 백두대간의 약용식물과 한방 성분을 주원료로 하는 기능성 항균비누, 화장품, 항균생활용품을 OEM/ODM 생산하고 있는 전문 제조업체입니다. 농가에서 생산되는 오디, 함초, 녹차, 매실, 감귤, 유자, 어성초, 포도 등 다양한 농산물을 상품화 할 수 있는 전문기술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고요. 물론 폐식용유를 이용한 '친환경 세탁비누'를 만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제품은 깨끗한 새 유지 를 사용하지요. 한방 소재와 피톤치드를 접목한 4주 숙성비누는 국, 내외적으로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또 주문자상표를 부착해 생산하는 전문 업체로써 각 지역의 특산품 소량생산에 관심을 갖고 기술센터 및 공동작업장을 대상으로 원료추출과 비누제조 에 대한 기술교육 및 각종 세미나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피토젠의 기술노하우와 비전을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피토젠만이 갖고 있는 기술 노하우로 각 지역의 특산품이나 농산물 을 활용한 천연비누 생산을 통해 지역경제활성화는 물론 올바른 세제 사용운동도 실천하겠다는 다목적 사업이군요. 그렇습니다. 이를 사회적 기업이라 할 수 있는 것은 1인 창업 및 소규모 개인 창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고용촉진이라든가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지역특산물을 이용해 제조된 사례와 해남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연자원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뽕나무 경제특구로 지정된 전북 부안지역의 오디를 주원료로 하는 '오디비누'와 경남 하동지역에서 자생하는 야생녹차를 주원료로 하 는 '야생녹차비누' 곡성의 매실을 주원료로 하는 '청매실비누'를 제조해 공급하고 있습니다. 해남지역의 경우는 갯벌에서 나는 함초로 이미 함초비누를 만들었고 땅 끝 마을의 소나무(해송)나 현산면의 편백 등 모두가 좋은 원료가 될 수 있지요.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자 연자원에 대한 이해와 활용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입으로 먹어서 몸에 좋은 식품은 피부에도 좋아요. 화학성분을 사용하지 않고 팜오 일, 코코넛오일, 올리브오일 처럼 우리가 식용으로 사용하는 식물성 계면활성제와 약용 한방성분 그리고 들판에 널려있는 토종 산야 초를 결합 시키면 피부에 유익한 비누는 물론 피부 친화적인 화장품과 스파 제품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죠. 사장님이 구상하시는 자연자원 활용 아이디어를 하나만 더 공개해 주십시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해남하면 대흥사, 철새도래지, 땅끝마을은 다 아는데 그게 다예요. 만약 대흥사로해서 철새도래지에 갔다 가 공룡박물관을 들러 피곤한 몸을 아로마테라피로 싹 씻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떨까요? 동양에서는 한약재를 말려서 달여 마시 54

55 지만 서양 사람들은 생허브를 짜서 증류해 피부에 바르고 목욕하며 흡입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의사들이 허브티를 제조하고 테라피 를 다루는데 의료보험이 적용된다고 하지요. 해남의 갯벌은 물론 숲이나 바람, 혹은 황토나 꽃들 모두가 저에게는 활용할 수 있는 천 연자원으로 보이는군요. 고맙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군이 가지지 못한 부분을 불만만 할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자원에 눈을 돌려 좀 더 잘 활용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할 것 같군요. 그런 점에서 피토젠의 연구소와 기술력에 많은 기대를 걸겠습니다. 연보 1962년 전남 해남읍 성내리 출생 해남서초등학교 졸업 해남중(31회), 해남고(29회)졸업 1996년 10월 향료 전문회사 설립 2007년 9월 자연친화적, 환경친화적, 인간친화적 제품개발을 목표로 피토젠회사 설립 2008년 3월 천연비누제조기 개발과 숙성비누 대량생산 프로세스 개발 2008년 5월 스포츠서울 고객감동 우수기업&브랜드대상 수상 11월 천연비누&화장품 학술세미나 개최 2009년 5월 한국관광평가연구원 혁신 친환경브랜드대상 수상 10월 제8차 세계한상대회 인천송도 전시회 출품 10월 경기도 양평군에 피토젠 양평기술연구소 및 생태체험장 설립 운영 11월 친환경상품 및 피톤치드 학술세미나 개최 2010년 3월 '경기뉴타운시민대학 사회적기업 육성' 재생비누 워크샵 주관 8월 2010년 한국프랜차이즈 대전 출품 9월 피톤치드를 활용한 새집증후군제거 솔루션 개발 10월 제9차 세계한상대회 대구 전시회 출품 11월 친환경상품 및 피톤치드학술세미나 11월 친환경 항균&탈취제 플루샷 브랜드 상표등 록 완료와 제품 출시 12월 서울 디자인고등학교와 산학협력, 학교기업 (주)CA웍스 설립 55

56 이인재( 광동제약 상무) 어머니가 준 선물 '옥수수 수염차'개발로 승승장구 2011년 새해가 밝아왔는데도 우리사회엔 풀리지 못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외형적으로는 성장과 발전을 누리고 있는듯 하나 도저 히 펴질 것 같지 않은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그렇고,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젊은이들의 취업난이 그렇고, 꽁꽁 언 한파도 아랑곳 하 지 않고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돼지와 소 구제역 소식은 추위보다 더 무섭게 주변을 옥죄어오고 있다. 인간들이 뭔가 잘못을 저지 른 대가를 치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맑고 향기 나는 뉴스가 그립다. 해남읍 성내리 출신 이장명 대표(49)가 설립한 천연비누&화장품 제조회사 피토젠은 그 이름 만큼이나 좋은 뜻과 향기로운 비전을 담 고 있다. 회사이름 피토젠(PhytoZen)은 식물의 약용성분+동양의 禪 사상의 합성어로 우리 고유의 전통 한방원리와 우리 땅에서 자 생하는 약용식물을 이용한 기능성 천연제품 제조전문회사를 의미한다. 자연친화적, 환경친화적, 인간친화적 제품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절대고민, 환경오염과 질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거기에 서민들이 적은 자본으로 창업까지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담고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다. 이장명 대표를 만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다듬어 온 경영철학, 수제천연비누 생산 과 창업컨설팅을 통한 '밝고 건강한 사회 만들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옥수수 수염차를 개발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 분야에 전공을 하셨는지요? 유감스럽게도 제 전공은 건축공학입니다. 대학졸업하고 85년도에 ROTC 21기로 임관, 전역을 했는데 그해 8월에 우연히 광동제약에 입사를 했어요. 작은 중소규모의 회사였죠. 옥수수수염 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준 선물입니다 돌아가시면서 옥수수수염차를 선물로 주시다니요? 2004년 8월에 모친상을 당했어요. 날짜도 안 잊어버리네요. 2005년 7월 칠석 날 첫제사를 지내러 해남에 내려왔는데 바로 위 셋째 형 수가 서울에서 장례식에 내려오다 오줌소태가 났다는 거예요. 장시간 차를 타 그렇다는데 그 이야기 끝에 모두들 옥수수 수염을 달 여 마시라고 하더군요. 옥수수수염이 부기를 빼고 신장염치료에는 효과가 있다고 당시 모 기업에서 출시한 17차가 천만 개가 팔리던 시절이었는데 귀가 번 쩍 띄더라고요. 그러니까 어머니 제사를 계기로 형수를 만났고 형수의 방광염이야기 끝에 옥수수 수염효과를 얻어 들으신 거로군요. 그렇죠. 당시 음료수 시장은 웰빙바람을 타고 한방음료, 천연음료에서 더 나아가 자연음료, 건강음료가 유행을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56

57 홍대부근 여학생들이나 강남의 멋쟁이들이 너나없이 오늘의 차나, 전지현의 17차를 마시며 거리를 걷던 시절이었죠. 인터넷으로 옥수수 수염효과를 검색한 자료를 가지고 회의차 부산에 가면서 부산에서 한번, 동대구역에서 한 번, 앙케이트 조사를 했 습니다. 옥수수 수염효과에 대해 아느냐고요. 모두들 알고 있더라고요. 속으로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릅니다. 같은 얘기를 전라도 쪽 에서도 물었는데 오히려 경상도보다 모르고 있었어요. 2006년 6월 출시를 목표로 개발을 서둘렀는데 그해 겨울에 80만개 목표가 초과 달성돼 120만개를 생산한 이후, 1년 후인 2007년 7월 에 자연음료 부문에서 17차를 제치고 1등을 했지요. 원료의 효과가 있다고 모든 음료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닌데 상무님은 운도 참 좋으시군요. 그렇다고 봐야죠. 비슷한 시기에 이슬차라고 수국이파리를 원료로 아주 향기로운 차를 만들었는데 그건 실패를 했어요. 옥수수수염 차도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제품은 고압마개처리를 해 맛과 향을 더 오래 유지하죠. 옥수수 수염에 있는 간균이라는 토착미생 물은 섭씨 20도에서 포자가 열리기 때문에 쉬기를 잘해요. 집에서 끓여놓고 먹고싶어도 이런 이유 때문에 보관이 어려운데 우린 이 런 걸 특수공법으로 해결했지요. 광동제약의 비타 과 옥수수수염 차는 출시이래. 각각 25억 개,, 5억 5 개가 팔려나갔고 옥수수수염 차는 일본컨설팅협회가 주최한 ' 2008년 글로벌고객만족도(GCSI)' 식음료부문에서 국내 브랜드로는 유일하게 1위에 인증되기도 했는데 회사에서 크 게 인센티브도 받으셨겠는데요? 하하, 그걸 밝히기는 어렵고 오너를 제외하고는 가장 책임 있는 부서까지 올라간 것을 인센티브라고 해야겠지요? 대기업에서 스카우트제의는 오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지금 연봉보다 3배나 높은 액수 제의를 받은 적도 있는데 저는 저의 젊음을 함께한 광동제약을 더 아낍니다. 비타500과 옥수 수 수염차는 출시된 지 각각 10년, 5년째를 맞이했는데 지금도 건강음료와 차음료 브랜드 파워 1위를 굳건히 고수하고 있습니다. 제품의 주기가 평균 3년 남짓에 머무는 음료 시장에선 극히 이례적인 일이죠. 마케팅 책임자로서 한 제품을 히트시키는 것만으로도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기쁜 일인데 광동제약의 히트작 두 개를 모두 제 손으로 키워놨으니 지금 직장을 떠난다 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영광이죠. 그러나 저와 고락을 함께하는 80명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라도 전 영원한 광동맨입니다. 모두들 이 상무님을 개발 분야가 아니고 마케팅의 고수라고 하더군요. 기업경영의 꽃이라고 하는 마케팅의 고수가 되는 비결이 무엇 입니까? 2002년 7월 마케팅 총괄자로 발령받자마자 가장 먼저 현장을 찾았습니다. 3개월 동안 대리점과 약국, 슈퍼마켓 등을 지방의 촌 단위 까지 샅샅이 훑고 다녔지요. 당시 비타500은 출시 후 1년이 지나도록 부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개발기간 2년에 300억 원의 막대한 자금이 들어갔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애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소비자와 직접만나는 현장에 가보니 제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약국에 의존하 는 판로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애초 타깃이 10~20대 여성층이었지만 정작 이들은 좀처럼 약국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죠. 그 후 유통망을 늘리는 데 집중하고 종류도 슈퍼마켓, 대형마트, 편의점, 골프장, PC방, 사우나, 공항매장, 자판기 등 음료가 팔릴 만한 곳엔 모두 영업사원들을 보내 납품처를 확보했더니 결과는 대성공이었죠. 2002년 한 해 동안 3000만 개였던 비타500의 판매량이 2005년 5억8000만 개로 수직상승했습니다. 음료제품 마케팅의 관건은 유통망을 얼마나 확장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비타500의 경우 10~20대는 슈퍼마켓과 편의점에서, 중년층은 골프장과 사우나에서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후속작인 옥수수수염차가 성공한 것도 비타500을 지원하면서 유통망을 대폭 늘려 둔 덕분입니다. 철저한 현장주의, '탄탄한' 유통망 확보가 마케팅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고향의 특산물 중에서 옥수수수염 차의 후속 작으로 점찍어두신 것이 있다면 살짝 공개해주시죠. 저는 우리고장 해남에서 나오는 흑미에 관심이 많습니다. 흑미에는 안토시안이라는 항산화물질이 다량 포함돼 있는데 이게 항암제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고령화 사회에서는 건강식품, 건강음료가 더 많이 팔리고 농 어업을 배경으로 한 우리고장 해남의 경제발전도 이런 것에 맞추면 굉장히 아이디어가 많다고 봐요. 골다공증 치료제는 소뼈나 조개껍질에서 채취, 캡슐로 나오는데 이를 특수처리하면 부담 없이 바로 마시는 골다공증음료를 만들 수도 있고요. 57

58 끊임없이 음료개발에 대한 꿈을 꾸시는군요. 상무님의 진짜 꿈은 무엇입니까? 아, 사실 저는 너무 많이 뛰어 다녀서 그런지 마지막에는 한 곳에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버는 직업, 작은 슈퍼마켓 같은 것을 운영해보 고 싶어요. 하하하. 사실 광동제약의 회사 홈페이지에는 이인재 상무가 어느 세미나에서 발표한 ' 아시아의 차 문화 시장을 이끌어갈 트렌드 세 터! 옥수수 수염 차의 마케팅전략' 이란 제목의 강의내용이 있다. 거기에서 이 상무는 ' Red-Bull(드링크제 시장이 없던 유 럽에서 시장을 창출해낸 기업으로 영세기업으로 출발 십 수년 만에 오스트리아 및 서유럽 권을 석권하여 약 13억 유로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벤처회사) 처럼 세계적인 음료를 만들어 제2의 성장 동력을 만들자' 는 꿈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꿈 이 꼭 이뤄지길 바란다. 연보 1959년 전남 해남군 삼산면 감당리 출생 삼산 초등학교 42회 졸업 해남 중학교 29회 졸업 광주 대동고교 3회 졸업 단국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1983년) ROTC 21기 임관 및 전역(1985년) 1985년 8월 광동제약 입사 1993년 지점장 1996년 영업 및 물류 관리 부장 2002년 유통사업 부장 2004년 이사 승진(비타500 성공) 2007년 상무이사 승진(옥수수수염 차 개발 및 MKT) 58

59 김용복( 아르테 인터내셔널( 주) 회장) '영화처럼 아름다운 여성 삶 위해' 만든 니트 니트의류사업이라는 조금은 여성적인 업종으로 연 매출 4백억 원대를 달성하는 성공한 해남읍 출신 사업가가 있다는 사실이 궁금했 다. '아르테 인터내셔널(주)'을 창립해 전국 유명백화점 20여 곳에 매장을 내고, 중국에 진출해 10여개 해외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 용복 회장(62)을 만나고 나서 곧 이해가 되었다. 국내 니트업계의 정상에 올라있는 정호진니트의 정대표가 그의 아내이자 평생을 함 께해 온 사업파트너라고 한다. 정호진니트가 중년여성의 대표브랜드라면 'Arte'는 20~30대 젊은 여성들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니트 브랜드다. 흔히 사양 산업이라고 일컫는 섬유업, 그 중에서도 니트패션으로 글로벌사업가가 된 김용복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브랜드 이름이 아주 멋집니다. 프랑스어로 예술이라는 뜻이지요? 아르테인터내셔널은 어떤 회사입니까? 명칭 그대로 아르테 니트를 국내에 론칭하고, 해외에 수출도 하는 회사입니다. 아르테는 프랑스어로 예술을 의미하며 20~30대 여성 니트가 없던 1996년에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여성의 삶을 위해'라는 목표로 설립된 회사죠. 짐작은 했습니다만 정호진니트와 자꾸 혼동이 되더군요. 부부가 함께 운영하시니 한 회사가 아닙니까? 저도 한 때 정호진니트 대표로 있었지만 엄격히 말하면 한 회사는 아닙니다. 같은 니트 패션을 생산하지만 주 타겟층이 다르고 컨셉 이 다른 만큼 차별화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니트의 편안하고 아름다운 소재의 특성을 살린 아르테 니트웨어는 설립취지와 일치한 아르테 자체브랜드만으로 국내패션업계는 물론 미국, 일본, 중국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지요. 정호진니트를 모태로 설립한 것은 맞군요. 처음 해남에서 올라와 니트 패션사업을 시작하던 때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니트는 수편, 기편이라고 해서 이미 붐을 이루었습니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보세가공으로 수출도 많이 했죠. 집사 람이 패션 쪽에 감각이 뛰어나서 자연스럽게 그쪽 사업을 시작했고 다행히 꾸준히 성장을 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59

60 회사규모를 좀 소개해 주시죠. 롯데백화점 본점을 비롯한 백화점 20군데와 아울렛매장 17개, 그리고 미국 LA, 중국 북경 등에 15개 유통망을 갖고 있습니다. 아르테 매출의 35%는 중국에서 이뤄질 만큼 중국시장개척에 심혈을 기울였고 우리 제품이 중국에서는 최고의 명품으로 팔리고 있는 실정이 죠. 앞으로도 각 성도지역을 중심으로 10여개 매장을 더 오픈할 예정입니다. 섬유산업으로 세계를 석권한 중국시장에 깊숙이 진출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군요. 아르테만의 특별한 비결이 있는 것 아닙니까? 아르테의 제품력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2006년도부터 자체 부설니트기술연구소를 설립, 끊임없이 새로운 봉재기법을 연구하고, 디자인을 개발한 R&D의 산물이죠. 아르테만의 독특한 디자인과 소재, 컬러가 던지는 메시지가 그만큼 소비자에게 먹혀들 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국내외에 수십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연매출 400억원대면 이미 성공한 사업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생각하시 는 사업성공의 비결을 무엇입니까? 글쎄요. 성공했다고 과대 포장하여 알려지는 것 자체를 저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현실 속에서 꾸준히 정성을 다하는 자세, 그것을 저는 정성무식( 精 誠 無 息 )이라고 합니다. 정호진니트를 키워갈 때도 '옷은 정성'이라는 진솔한 마음가짐으로 한시도 손에서 니트를 놓아본 적이 없으며 한번 판 옷도 5년간 무 상수선을 해주는 등 정성을 다했지요. 한국의류산업협회 부회장으로서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미래는 어떻게 보십니까? 70년대에 우리나라 경제에 가장 기여가 컸던 종목이 섬유산업이었습니다. 소위 외화벌이, 수출증대에 효자종목이었죠. 그 때 보세상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셔츠, 블라우스 등을 수출했는데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어려워지더군요. 섬유산업이 중국에 밀려 더 어려워질 거라고 하는데 저는 오히려 섬유산업의 가능성을 크게 봅니다.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지닌 산업이 섬유산업이죠.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건강을 위해 이온음료를 마시듯이 건강을 위해 바이오섬유 옷을 입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연섬유에서 바이오섬유로 트랜드가 바뀌고 있는 것을 보면 섬유산업이야말로 영원하다는 생각이 들죠. 한 때 화학섬유로 세계시장 을 석권한 한국이 자연섬유시대엔 원자재가격이 싼 중국이나 호주에 밀렸지만 바이오시대엔 다시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업가 는 이런 트랜드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야 하지요. 내친김에 그런 통찰의 눈으로 고향 해남의 미래산업전략에 대해서도 말씀 좀 해 주시죠. 해남을 산업적인 시각으로 보면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수도권에 대한 운송 인프라가 취약하기 때문에 산업을 가지고 뭔가 생산해서 팔려고 하면 어렵고, 있는 자연을 잘 보존하여 외지인을 유치하는 관광전략이 맞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문화, 얼마나 문화 인프라 가 훌륭합니까? 고산 윤선도 시인을 비롯해서 해남이 자랑하는 문화인맥을 잘 엮으면 충분한 관광자원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고 보니 회장님은 계간 문예지 ' 열린 시학' 의 발행인이기도 하시군요. 직접 시를 쓰시기도 하나요? 하하, 나는 시를 쓰는 것보다 시 읽기를 좋아하고 시인들, 문학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요. 그래서 미약하나마 문예지 발간을 지원하 다보니 발행인이 되었네요. 고향 후배 이지엽 교수가 편집주간으로 있어 자연스럽게 인연이 되었는데 매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문예지를 통해 청소년들의 정서함양과 독서능력을 기르는 일, 그리고 고향후배들이 잘 커갈 수 있도록 매년 대학투어를 하는 일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현재 접수 진행 중인 제1회 경향 청소년문학대상, 독서논술대상 공모에 후원을 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경향 청소년문학대상은 경향신문사와 (사)한국문화예술진흥협회가 주최하는 행사인데 '감성과 이성을 아우르는 어린이 청소년들의 국내 최대 문학축제'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어 후원을 했습니다. 상금액만도 총 5500만 원에 도서 1만5000권이 부상으로 나가고 수상 자만도 850명을 배출하게 되지요. 기대가 큽니다. 60

61 ' 영화처럼 아름다운 여성의 삶을 위해' 시작하신 패션사업의 열매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영화 같은 삶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퍽 아름답습니다. 끝으로 고향 해남에 남아있는 친구나 선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고향엔 초등학교 친구인 임만식, 손정용, 조희석이 살고 있고 고등학교 동창으로 재광 해남군 향우회장인 김재욱과는 늘 연락을 주고 받으며 고향소식을 듣습니다. 해남이 인구를 서울에 빼앗기고, 광주에 빼앗기고 점점 위축돼 가고 있다는데 안타깝지요. 짱뚱어 하나로도 마을을 관광도시로 만드 는 일본처럼 해남도 특산물을 앞세워 부가가치를 더 높여가길 바랍니다. 연보 1949 해남읍 출생 해남동초등학교 해남중 고등학교(18 16회)졸업 경희대학교 체육대학원 AMP수료 중국칭화대학교 경영대학원 AMP 수료 1976 정호진니트 창립 대표이사 역임 1981 명광물산(주)설립 대표이사, 회장 1995 아르테인터내셔널 로 상호변경 창립 1997 롯데백화점 본점 매장 개점을 시작으로 현재 전국 21개 백화점, 중국 북경, 항주 등지에 직영점 11개 개설 2004 중국 북경 국제의류박람회 참가 2005 스페인 마드리드 국제패션박람회 참가 2007 중국 우시박람회 참가 2008 상하이 프리뷰인 2008패션쇼 참가 2007~2008 재경 해남중고등학교 총 동창회장 역임 현재 한국 의류산업협회 부회장 수상 2008년 제15회 '삼우당패션대상' 글로벌패션부분 수상 2008년 제22회 섬유의날 '동탑 산업훈장' 수상 특허 '의복의 이음매 처리방법' '접이식 주름 형성장치' 등 발명특허 4개 보유 61

62 박 준( 헤어디자이너) 예술과 비지니스 접맥, 국내최고 150개 가맹점 운영 '해남에 가서 족보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예부터 벌쭉한 가문과 그 후예들이 대를 이어 각계각층에서 인물을 배출하는 곳.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일찍이 미용업계에 뛰어 들어 일가를 이룬 마산면 출신 박준 회장(60 박준뷰티랩 대표) 을 만났다. 1982년 서울 명동에 박준 미용실을 개업한 이후 30년이 채 못돼 국내외에 150여개의 프랜차이즈 가맹점은 둔 준재벌기업으로 성장했 다. 월 매출 액만 해도 50억 원을 넘는다고 한다. 강남구 청담동 본사에서 만난 박준 회장은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고 한사코 손 사레를 치지만 최근 미용업이 서비스업 부문 신성장 동력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사업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 다. 실례지만 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에 오셨으며, 어떻게 미용업계에 뛰어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공부를 못 해서지요. 읍내에 있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았는데 떨어졌어요. 집에 있을 수도 없고 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것저것 밑바닥에서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스물 두 살 되던 해 친구를 만나기 위해 종로에 있는 YMCA 건물에 갔다가 그 곳에 있던 미용실을 본 순간 느낌이 팍 오더라고요. 허드렛일이라도 일을 하게 해달라고 졸랐죠. 남자미용사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는데 대단한 용기였군요. 무엇이 그런 용기를 내게 했을까요? 62

63 흔치 않은 게 아니라 없었어요. 나중에 보니 한 사람이 있기는 하더군요. 나는 어려서부터 약간 반항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남의 말 도 잘 듣지 않고. 미용업에 뛰어 든 것도 남자들이 안 하는 일이라서 흥미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벌이 뭐 중요하냐는 생각 에 진학을 하지 않았지만 미용관련 연수는 무지하게 쫒아 다녔고 부족한 지식을 메우기 위해 열심히 공부 했습니다. 용기가 있다 해서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닌데 회장님은 운도 참 좋은 편이셨군요. 그 시절 얘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당시 YMCA 미용실은 종업원이 30여명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컸고 특히 원장이신 김옥진 여사는 미용업계의 전설적인 인물이죠. 그 분의 겸손함과 일에 대한 사랑, 그리고 글로벌한 마인드와 미용감각은 감히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 밑에서 4년을 일하며 배 웠는데 결국 명동에 진출하고 싶어 배반을 한 셈이죠. 김옥진원장님을 만난 게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한테는 스승이자 어 머니와 같은 분이죠. 같은 서울인데 종로와 명동의 미용실이 달랐습니까? 아무래도 명동은 유행의 첨단을 걷는 곳이고, 각 분야의 최고들이 모이는 곳이라서 그곳에서 기술을 겨뤄보고 싶었어요. 항상 트렌드 를 이끌어 가는 곳을 찾다 보니 본사를 청담동에 내게 되었고 요즘엔 명동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면서 그 곳에 직영점을 재 오픈 하기도 했습니다. 헤어디자인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고 그 시대 첨단유행을 반영하는 것인 만큼 어디에서 일하느냐는 것은 중요합니 다. 어려서부터 그것을 몸으로 배웠지요. 당시 거꾸로 매달아 하는 커트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런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요? 하하, 나는 반항기질도 있지만 재미있는 것은 따라 하기도 잘해요. 내가 창조해 내었다기보다는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해외토픽을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 쓰여 있었어요.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커트를 했다고요. 어렵게 알루미늄 틀을 제작해 몸을 고정시키고 머리카 락을 아래로 쏠리게 한 다음 직선으로 머리를 자르면 자연스런 커트가 나오지요. 평소에 항상 그걸 할 수는 없고 일종의 퍼포먼스이 자 이벤트로서 시도했는데 매스컴에 뜨면서 대 히트를 쳤지요. 우리가 흔히 미용업이라고 하는 직업에 대한 철학과 집념이 남 다르시군요. 그렇죠. 미용업은 범위가 매우 넓은데 그 중에서도 헤어커트나 퍼머넌트는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의상보다도 머리모양이 이 미지의 70%를 좌우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저는 헤어디자이너라는 용어를 맨 처음에 썼고 지금도 헤어디자이너는 아티스트라고 생각 합니다. 그 사람의 위치나 상황을 표현하는 작품을 만든다는 자부심도 있고요. 저의 스승이기도 한 세계적인 헤어디자이너 비달사순 을 보면 미용업이 정말 디자인의 한 분야이고 멋진 예술이라는 느낌이 확실하지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미용업이 고된 노 동에 가깝습니다. 가맹점을 150개가 넘게 확장하신 것은 비즈니스로서도 성공하신 것인데 예술과 사업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게 이 업종의 양면성인데요. 거꾸로 매달아 한 커트가 일종의 예술적인 시도였다면 남성전용 미용실을 연 것은 비즈니스 측면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발소가 퇴폐의 온상지로 난리가 날 때 착안을 한 남성전용 미용실은 온 장안의 사모님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조용필, 이영하, 안성기, 이문세씨 등 소위 잘 나가는 연예인과 남자들을 다 그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가맹점이 늘어 날 수밖에 없었지요. 미용실의 명칭도 처음 썼던 박준 미용실에서 박준미용타운, 박준헤어스토리, 박준 미장을 거쳐 요즘엔 박준뷰티 랩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인식과 이 업종의 발전에 맞춰 이미지를 통합하려는 비즈니스 차원의 노력들이 합해져 미흡하지만 오늘 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장님의 남다른 끼와 추진력, 그리고 강인한 정신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지난 해 말인가 청와대에서 대통령 과도 면담을 가진 걸로 아는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요? 그 동안 적지 않게 여러 곳에서 분에 넘치는 상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소비자웰빙지수 헤어미용부문 4회 1위(2004~2006, 2008)를 했 고, 한국서비스 품질지수 뷰티샵 부문 연속 4회 1위(2005~2008), 지난해에는 국제미용건강대상 수상과 제7회 슈퍼브랜드 미용실 부문 1위를 한 것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뷰티산업을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성장산업으로 지원, 육성을 주제로 한 회의였는데 그간 안전 위생 차원에서 규제 중심으로 운영해 온 법 제도를 산업육성 중심으로 전환하고 우수기업 발굴, 해외진출 지원 등 정책지원 을 강화해 뷰티산업을 전략적 관광 수출상품으로 육성하겠다고 하셨습니다. 63

64 그 간 미용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셨는데 고향 해남을 위해서도 힘을 좀 더 써 주시지요. 고향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찡합니다. 그러나 우리 고향 전남과 해남은 그동안 개발혜택을 보지 못한 것이 오히려 복이 되었다고 자신합니다. 공해를 벗어나 청정지역으로 남은 것이 앞으로 큰 재산이 될 것입니다. 해남 군 홍보대사로써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 습니다. 미용분야의 전문성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프랜차이즈 사업가가 되시고자하는 회장님의 꿈이 더 앞당겨지시길 바랍니다. 그 리고 꾸준히 펼쳐 오신 사회 환원 활동들이 아름답게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박준뷰티랩의 이윤을 나누는 프로그램들을 살펴보면 청담본점에서 월 4회(1회1인) 장애인 헤어 관리서비스, 저소득층 주민들 에 대한 미용기술 교육, 구로복지관, 본동사회복지관, 강북 장애인복지관, 양천구 사회복지관 등에서 장애인과 어린이 학교지원, 3군 사령부 군 가정 미용기술교육, 21사 병사이발지원을 해왔으며 모교인 마산서초등학교(현재 마산초등학교 용전분교) 도서관 건립 시 에는 1000여권의 도서를 보내고 이 미용 봉사활동과 어린이 신문 발간 지원을 해왔다. 연보 1951 해남군 마산면 용반리 출생 해남 서초등학교 14회 졸업 1980 캘리포니아 비달 사순 아카데미 수료 1981 시카고 Pviot Point 미용학교 수료 1993 경원대 경영대학원 수료 1997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화예술지도자과정 졸업 런던 비달사순 아카데미 수료 2004 서울대학교 AIP 최고산업전략과정 수료 2008 중앙대학교 한류학과 CEO과정 수료 2009 동국대학교 APP 교육과정 수료 <경력> 1971 미용계 입문 1979 한 일 친선 헤어페스티발 참가 1981 박준미용타운 오픈(원장)/프랑스 헤어 패션 창작클럽 SMCF 헤어페스티발 참가 1982 한국남성 미용연구회 회장 역임 1985 파리 IDC대회 작품전 초청 1990 모스크바, 북경, 런던, 밴쿠버 등 헤어쇼 개최 1994 동성제약 세븐에이트 TV CF 출연 1995~ 피엔제이 법인 대표이사 취임 1998~ 박준뷰티아카데미 대표이사 취임 1999 결식아동학교 '곰곰이 학당' 교장 2005 경희대 초청 교양학 강의/ 원광대 교수 임명 2006 러시아미용페스티발 '네프스키베라카'심사위원 2007 한중뷰티문화 페스티벌 한국대표 헤어쇼 개최 서울국제화장품미용박람회 헤어쇼 개최 2008 서울국제화장품미용박람회 헤어쇼 개최 2009 일본 'SPLASH INTERNATIONAL' 헤어쇼 참가 64

65 2010 보건부 산하 뷰티경쟁력 강화위원 <수상> 국제뷰티서비스 협의회 초대회장 1980 미국 뉴욕 IBS(International Beauty Show) 퍼머넌트 부문 3위 입상 1987 유니세프 감사장 1989 서울특별시장 표창장 2001 미용정보신문사 미용인상 골든 상 수상 2002 재단법인 양호재단 기부 감사패 연세대 소년소녀 가장 돕기 감사패 2003 에스테티카코리아 'Top Hairstylist상'수상 소비자 만족 럭셔리 브랜드 대상 2005 SBS 미디어 한중 슈퍼모델선발대회 감사패 2007 코리아'프랜차이즈 대상' 수상 2008 한국잡지기자협회 '올해의 인물상'수상 소비자웰빙지수 헤어미용부문 4회 1위 한국서비스 품질지수 뷰티샵부문 연속 4회 1위 2009 국제미용건강대상 수상 제7회 슈퍼브랜드 미용실 부문 1위 에스테티카 우수기업 선정패 2010 대한민국 퍼스트 브랜드 대상 수상 <저서> 1995 귀까지 잘라서 죄송합니다 1997 The Art Of Hair 1998 나의 선택, 나의 길 1999 프로로 가는 길 3장 정치, 행정분야 김형윤( 유은학원 총동문회장) 12만 유은학원 동문 하나로 이끌어 동문회, 모교, 후배들. 참 오랜만에 들어본 단어들이다. 현산면 덕흥리출신 전 국정원경제단장을 만나는 자리는 우연히도 그가 졸 업한 광주상고 선후배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점심식사자리였다. 금년 1월 학교법인 유은학원(광주상고 동성고 광주여상 동 성중 동성여중) 총동문회 회장이 되면서 김형윤 회장(64)은 선후배모임이 열리는 서울과 광주는 물론 전국 어디나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모르는 이들은 최근에 제가 자주 나타나니까 정치하려는 것 아니냐하는데 천만에 말씀입니다. 솔직히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 하고 한때 고위공직에 머물렀던 관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살면서 생각이 바뀌었죠. 전면에 나서는 것이 다가 아 니고 유능하고 좋은 후배들을 위해 밑거름이 되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란 것을요" 65

66 한때 서슬 퍼런 국정원 간부로써 국가를 움직이는 중요정보를 다루고 권력과 돈들이 지배하는 또 다른 세계를 보았지만 그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말한다. 새로 뻗어 오르려는 후배들을 만나 격려하고 휴대폰에 담긴 손녀의 사진을 보며 환히 웃을 수 있는 작은 행복이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아직은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괜찮을 나이에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참 신사 같은 김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모습이군요. 국정원출신에 대한 선입관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그때는 정보부라 불렸었죠. 대학 졸업 후 군대에 갔다가 1974년에 제대를 하고 공채 13기로 중정에 들어갔어요. 중앙본 부와 광주지부 등에서 만 27년간 있다가 퇴직했습니다. 세간에 알려진 불미스러운 일로 옷을 벗었으나 제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실례지만 광주항쟁 때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제일 고통스러웠던 시기였죠. 광주에서 현장을 목격한 정보계통사람의 하나로써 진실을 전한다는 게 쉽지 않았고. 그 때 대학은사 였던 김민하 교수님(중앙대 전 총장)을 찾아간 기억이 납니다. 그분은 경북 상주가 고향인데도 김대중정부시절 민주평화통일자문회 의 수석부의장을 지낼 정도로 민주의식이 투철한 분이죠. 또 홍남순변호사님은 사모님인 윤이정여사가 해남분인 관계로 아주 가깝게 지냈는데 한결같이 "남아서 할 일을 찾아라"고 조언을 해 주었어요. 사실 정치를 하려면 그때 뛰쳐 나왔어야 하는데 말예요. 하하. 그렇군요.. 27년이면 상당히 긴 기간인데 국정원 시절 보람 있었던 일도 있었을 텐데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도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매일매일 올리는 리포트가 상층부까지 전달되기 때문에 책임이 막중하죠. 제 가 거기 있었기에 더 나았던 여러 결과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고 경제 단장으로 근무할 때 수도권 주택난 해소와 IMF시절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판교 신도시 건설 계획을 수립한 일, 그리고 민생현안을 위해 열심히 일했던 것을 제일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 가 IMF를 맞은 것도 어떻게 보면 국제화시대에 글로벌경제정보가 부족한 때문으로 여겨 그 무렵 국정원의 경제단활동은 가장 활발 했었지요. 이제 인생으로 치면 한 시절을 마감하고 2모작을 하시는 셈인데요. 모교총동문회장일은 적성에 맞으십니까? 이 일은 적성에 맞고 안 맞고의 문제가 아니고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총동문회회장을 맡기 전 재경동문회회장을 4 년 했는데 순전히 맨땅에 헤딩을 했어요. 그래도 역삼동에 사무실을 내고 유급직원을 유지했는데 총동문회는 그보다 쉽지 않겠지만 맡았으니 성과를 내야죠. 저는 취임하면서 '임기 중 하나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주상고를 비롯해서 우리 유은학원출신 동문들 이 각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아직까지 회관이 없어요. 어떤 조직이든 발전을 하려면 에너지를 모을 반 듯한 사무실이나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5억원을 목표로 올 하반기부터 회관건립 모급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미 1억500만원을 채웠어 요. 아마 틀림없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단하십니다. 요즘 같이 경제가 어려운 때에 모금이 쉽지가 않을 텐데 유은학원 선후배님들의 모교사랑과 회장님의 리더 십이 부럽군요. 리더십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저는 지도자의 덕목을 '균형감각'이라고 봅니다. 아마 다산의 '목민심서'에도 그렇게 나올걸요. 백성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최고의 덕 목이라고. 지도자는 판단기준이 정확해야하고 돈과 정을 적절히 써야하며 특히 예산을 책정할 때 우선순위를 정해서 써야하지요. 지 금 어느 자치단체나 최고의 복지는 저는 일자리창출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자리가 있으면 지역민들이 왜 타지로 떠나겠습니까? '돌아 오는 농촌'이라고 하지만 먹고 살게 있어야 돌아오지요. 내년 총선을 겨냥해서 예비후보자들이 많이 움직이고 있는데 이들이 새겨들어야할 말이군요. 국정을 다루는 일과 일반행정은 약간 다르지요. 국회의원은 적어도 법을 만들만큼의 기본상식과 비전이 일반 행정가보다 더 필요합 니다. 알라스카를 예로 들어볼까요? 현재 미국 땅의 20%에 달하는 알래스카주는 1867년까지는 러시아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시 아가 별로 가치가 없는 땅으로 여겨 72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팔아 넘겼단 말예요. 우리 돈으로 치면 72억원, 1000평당 20원꼴이니 인플레를 감안하더라도 거저나 마찬가지죠. 존슨대통령 당시 스워드 국무장관의 주도로 알레스카 매입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산 지 13년 만에 3억 달러 상당의 금광을 발견하고 금 못지않게 귀중한 석유와 천연가스가 엄청나게 땅 밑에 저장되어 있다고 해요. 그 뿐 66

67 입니까? 관광가치는 얼마며 또 군사적인 가치는 이루 말로 할 수도 없지요. 한 정치가의 비전이 국운을 좌우하기도 한다는 말을 실 감하는 부분입니다. 모교인 광주상고출신들은 금융계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데 특별히 자랑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하하. 자랑할게 하도 많아서요. 요즘 너나없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갖고 있으나 유은학원동문회 홈페이지( 한번 들어와 보세요. 거의 매일 동문소식이 올라오지 않는 날이 없을만큼 활성화돼 있어서 자랑할 만 하지요. 예전 광주상고는 물론 이고 상고의 전통을 이어받은 동성고 야구가 유명하지요. 김주형, 이원석, 한기주, 양현종, 박충식, 이순철, 신동수, 장채근, 김종모 등등. 광주상고나 여상고 역사가 워낙 오래다 보니 금융계는 물론이고 각 분야에서 중견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재들이 많습니다. 아마 내년 총선에도 4명 정도 나올까싶지 않은데요. 저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앞서 얘기한 비전과 도전정신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박지성 이 평발로 부단한 노력 끝에 오늘에 이른 뚝심도 강조하고요. 도전하는 자에게 기회는 꼭 온답니다. 자신을 잘 드러내주는 별명이나 스스로 붙인 닉네임이 있습니까? 남들은 의리의 돌쇠, 부르도자라고 한답니다. 듣기 싫지 않은 별명이지요. 저 스스로는 두주불사 형에 사람사귀기를 좋아하나, 원칙 과 신의를 중요시하며 호불호( 好 不 好 )가 분명한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성격은 때로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수양 을 하려고 많이 노력을 하지요. 8년째 매년 2박3일 일정으로 꼭 지리산 종주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등산이 이제 는 일상사가 되다시피 했군요. 동문회에서도 매년 4월 모교에서 열리는 한마음축제를 외에 골프대회와 등산대회를 봄가을에 갖기로 했지요. 고향에서 보낸 어릴 적 이야기와 추억이 있으시면 들려주십시오. 어린시절이야기는 이제는 다 추억 아닙니까? 명절이면 동네마다 콩쿨대회가 열렸는데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게 그렇게 멋지고 좋 아보였어요. 그래서 리어카에다 마이크를 달고 동네를 돌면서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주민여러분 오늘 저녁 콩쿨대회에 많이 참 석해 주십시오" 하고 외치던 생각이 납니다. 추석이면 열렸던 마을대항 축구대회 때 모든 온 사람들이 밥과 막걸리 등 먹거리를 함께 만들어 누구나 와서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했던 넉넉한 인심도 그립고요. 연 보 1947년 현산면 덕흥리 출신 현산 초등학교 졸업 목포중학교 졸업 광주상업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총학생회장 활동)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행정학 석사) 경 력 2년 늦게 입학한 대학을 72년 2월에 졸업하고, 3월에 육군에 입대하여 74년 10월에 만기 제대 제대 후 1년간 취업 준비, 75년 중앙정보부 정규과정(공채) 13기 시험, 합격 후 76년 1월 입사 입사 후 본부, 광주지부 등에서 27년 근무 후 퇴직 줄기세포 개발회사(FCB 파미셀)에 부회장으로 영입되어 회장으로 6년간 재직 2009년 BC카드 협력업체인 (주)포인트박스를 세워 현재 운영 중 동문회 활동 2006년에서 2009년까지 학교법인 유은학원(광주상고, 여상고, 동성고, 동성중, 동성여중) 재경 총동문회장 (동문수 : 3만 여명) 역임 2011년 학원법인 유은학원 총동문회장 (동문수 : 12만 2,648명) 수행 중 67

68 동문회관 건립을 위해 기금을 모금 중 -금년 하반기에만 1억 원 넘음 송희성( 전 전남도의원) 봉사와 여성권익운동 한평생 전남도의원을 역임한 해남읍출신 송희성씨(여 74)는 해남고려병원창립자이자 해남초대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독립운동 유공자 송봉 해씨의 딸이다. 정치를 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화여대 재학시절 전국 최초로 대학생 농촌계몽대를 조직해 활동했고 강원 도 삼척 탄광지역, 농촌의료봉사, 야학 운영 등을 하며 어려운 이웃과 함께한 경력이 있다 광주 민중항쟁 시에는 남편 노희관 교수(전남대)와 함께 유일한 부부구속자로 고통을 받기도 했다. "5 18당시 여성들은 물 심부름 밥 심부름 등 남성들의 조력자로서만 기록되고 있는데 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미 여성들도 민주 화에 대한 열망이 컸었고 5 18현장에서 주체적으로 참여를 했지요." 68

69 이후 송희성씨는 (사)대한여학사협회 광주지부 회장, (사)한국여성유권자 광주연맹 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중앙상임위원 및 광 주서구협의회장을 하며 적극적으로 여성운동을 펼쳤고 이 연장선상에서 전남도의원으로 뽑혀 정계에 진출, 여성특위위원장, 호남여 성의원 협의회 회장을 하고 2001년에는 남북여성 하나 되기 평양회의에 남한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해남이 낳은 걸출한 여성정치 인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송희성 전 의원을 만나 고향 해남과 살아온 인생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녕하십니까?? 75세라는 연세를 느끼지 못할 여전한 아름다움을 갖고 계시는군요. 서울 출장을 다녀오시는 길이라고 하셨 죠? 네. 한국여성지도자 연합회 광주 전남회장으로서 서울에 출장을 자주 갑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침 영국에서 돌아와 대전에 살림을 차린 아들집에 들렀다 오는 길이지요. 제가 송희성 선생님을 처음 뵙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참 단아한 미인이셨는데 지금도 그때와 별 다름이 없습니다. 무슨 비 결이 있습니까? 모두들 그런 말을 하는데 난 사실 너무 바빠서 화장도 제대로 할 시간이 없어요. 타고난 체질에 구태여 말한다면 늙을 시간이 없다 고 할까요? 대체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매우 바쁘게 산다는 것이에요. 정신의 활력이 육체에 미치는 긍 정적인 효과라 할까요? 당시 60년대에 시골에서 이화여대를 간다는 것은 대단한 화제였을 텐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십시오. 정확히 말하면 1956년 3월이에요. 6 25전쟁 후라서 모두들 어렵고 배고플 때인데 병원의사셨던 아버님 때문에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 절을 보냈죠. 더구나 위로 오빠가 한분 계셨는데 중학교 때 사망한 터라 무남독녀였어요. 마음껏 멋을 내고 즐겁게 살수도 있었는데 학창시절 4년간 줄 곳 농촌봉사활동만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강원도 일대 화전민과 벽촌, 농어민을 찾아가 야학과 밭매기 등 봉사를 하는 틈틈이 문맹퇴치, 야학도 하고, 생활개선에 주력을 했죠. 그 때는 더 배운 사람들이 베풀어야한다는 사회봉사활동이 일종의 의 무감처럼 있었어요. 이력을 보면 초창기 계몽운동, 봉사활동에서 여성단체 활동을 하시다 정치인이 되셨죠? 일반적인 여성들의 각성과 의식화 에 따른 자연스런 진로선택인데 가장 보람 있었던 때가 언제입니까? 아무래도 대학시절부터 꿈꾸어오던 여성지위향상과 복지증진을 위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던 정치인 시절이 아닌가 싶어요. 95년도 지방선거에서 전남도의원으로 당선돼 문교사회 내무위원으로 활약하며 여성특별위원장이 됐지요. 우선적으로 30억원의 여성발전기금을 조성하는 바탕을 만들었고 농어촌여성의 위생과 건강, 농촌아동을 위한 유아교육기관 설치, 사회 각 분야별 여성인력 30%등용운동 및 정책건의, 각 시군 여성봉사대에 예산할당, 여성노동자의 처우개선, 농어촌 농번기탁아소설치 등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을 돕는 정책들을 입안해낼 때가 제일 기뻤습니다. 지금 하시고 계시는 일, 우리민족음식문화보존협의회와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입니까? 저는 의원시절에 시간적 여유가 없는 농촌여성들을 위해 골다공증 및 부인암 검사설비를 간춘 의료서비스 차량을 마련, 순회검진하 게 하는 등 구체적이면서도 피부에 와 닿게 여성의 시각에서 정책들을 개발하고 현실화하고자 애썼습니다. 우리민족음식문화보존협 의회를 꾸린 것은 전적으로 농촌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한 것으로 의원활동을 끝내고 곧바로 시작한 일이지요. 그 때 시작 한 일이 지금 자연스럽게 열매를 거두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은 지자체마다 자신들의 고장에서 나온 특산물을 이용해 음식개발을 하 는 게 유행이고 그걸 통해 여성들이 크게 경제자립을 다 하더라고요.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도 이데올로기를 떠나 원초적인 입맛이 라는 공통정서를 기반으로 남북통일을 대비하자는 것입니다. 결국 민주화운동, 정치운동에서 자연스럽게 통일운동으로 이어진 셈이군요. 이렇게 평생을 개인의 안온한 삶에 머물지 않고 사회운동에 힘을 기울여 오신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지난해에는 광주시 여성단체협의회가 주는 무등여성대상을 받으셨 죠? 부끄럽습니다. 평생 봉사하며 살라는 명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라고 하지만 유엔개발계획에서 발표한 성별권한 69

70 지수를 보면 109개국 중 61위로 아직도 형편없이 낮지요. 우리여성들의 교육수준이나 능력은 전 세계가 놀랄 만큼 높은데 정치, 경 제, 사회참여현실은 그에 따르지 못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어요. 만약 다시 도의원을 하신다면 해남을 어떻게 돕고 싶습니까? 저는 대학 졸업 후 바로 고향 해남에 내려와 삼애농민복음학원교사, 사감을 했고 유달영 박사와 함께 농민운동을 한 경험, 그리고 재 건국민운동해남군부녀실장을 하기도 해서 해남은 지금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시 그 일이 주어진다면 여전히 해남지역뿐만 아니라 전라도 여성들을 위한 일을 할 것입니다. 도의원시절 관심 있게 지원했던 해남여성회관 운영이라든지, 우항리 공룡테마파크 조성, 우수영명량대첩지 성역화사업들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도 살펴야죠. 호호. 이화여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시고 한때는 수필도 쓰셨는데 여렸을 적 꿈이 문학인이었습니까? 난 사실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평소에 왕진을 늘 다니시던 부친은 여자의사는 너무 힘들다고 절대 반대셨죠. 해남동국민 학교시절부터 웅변이나 그림, 글쓰기에 소질이 있었고 수피아여고시절에도 문예부장을 했는데 당시 이수복 시인이 담임이셨어요. 어 느 날 집에 오셔서 '희성이는 국문과로 가야한다' 고 서정주 시인께 소개장까지 서주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진로가 정해졌지요. 59년 도인가 전국대학생즉흥시경연대회에서 입상해 정식 시인으로 데뷔하기도 했는데 당시 여류문인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에 실망을 해서 인지 문학 활동을 열심히 못했어요. 그냥 가벼운 수필만 쓰는 정도지요. 해남은 수필이나 시의 소재가 무궁무진한데 하나만 고른다면. 학이요. 목을 길게 빼고 고고한 학이 나는 너무 좋았어요. 어느 해인가 해남향우지에 '학의 노래'라는 글을 쓴 적도 있는데 학은 해남 의 분위기와도 참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또 부엉이, 밤에만 날아다닌다는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도 좋아합니다. 해남에 '한듬문학동 인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은 우리 집에서 발족모임을 가졌답니다. 아련한 옛이야기네요. 연보 1937년 해남읍 남동리 출생 해남읍 동초등학교, 해남중학교, 광주수피아여고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국어군문학과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조선대학교정책대학원 지방자치학과 졸업(행정학 석사) 호남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졸업(법학박사-헌법전공) 경력 정신여자중학교, 해남 옥천중학교 교사 ~ 광주 숙문여고(현재 송원 여고)교감 1974~1984 광주 YWCA이사 및 임원 5 18 광주 민중항쟁시 연행 구속(유일한 부부구속자) ~ (사)대한여학사협회 광주지부 회장 ~ (사)한국여성유권자 광주 연맹 회장 1990~2003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중앙상임위원 및 광주서구협의회장 1994~ 기념재단 이사 ~ 전라남도 도의회 의원 및 여성특위 위원장 1997~1999 호남여성의원 협의회 회장 ~ 전라도 전통음식 보존연구회 창립 회장 ~2005 새 정치 여성연대 중앙회 이사 및 전남 회장 ~ 조선대학교 및 호남대학교 겸임교수 남북여성 하나 되기 평양회의 남한대표 참석 ~ 현재 (사)한국여성지도자 연합회 광주. 전남 회장 70

71 2001.5~ 현재 (사)우리민족 음식문화 보존협의회 중앙회창립 회장 ~ 현재 (사)우리겨레 하나되기운동 광주 전남본부 상임대표 ~ 현재 광주사랑어머니 한부모가정돕기이사장 수상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제 6050호 대통령-총무처) 청소년 지도보호육성 공로 표창장 (체육청소년부 장관상) 국가사회발전기여 공로 표창장 수상 (대통령상) 여성정치참여기회 확대추친 공로상 수상 (여성단체협의회상) 여성정치 발전인상 수상 (한국여성유권자연맹상) 정부추진 국정 개혁공로 표창장 수상 (김대중 대통령상) ~ 현재 광주 민주유공자 (국가보훈처) 최초 여성 의병장 애국열사 윤희순상 수상 (춘천시장) 저서 및 논문 <통일로 가는 길> 수필집-공저 <꿀맛, 맹물맛, 땡감맛> <위기와 시련을 넘어 21세기 열린 미래를 향하여> <대통령과 함께한 사람들4> <여성과 사회, 정치>(조선출판부) 논문 <지방의회의 정책결정 능력향상 방안에 관한 연구> 논문 <헌법상 정당제도에 관한 연구> 채일병( 전 국회의원. 전 광주발전연구원 원장) 더 나은 세계로 나가려면 진정한 소통 이뤄야 71

72 더 나은 세계로 나가려면 진정한 소통 이뤄야 이름이 일병이라서 '영원한 일등병'으로 불려온 채일병 전 의원이자 광주발전연구원장(64. 해남군 화산면 출신). 그가 지난 8일자로 3 년 임기의 연구원 원장 직을 마치고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30여 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돈도 배경도 없는 전라도 출신으로 표창이 나 보직관리와 승진 등에서 항상 불이익을 받아서 동료들보다 뒤쳐지는 시련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는 말하지만, 누가 보아도 두루 요직을 거쳐 온 것을 알 수 있다. 광주광역시의 지식과 정책을 생산하는 씽크탱크 역할이 그렇고, 선출직 국회의원에 행 자부인사국장, 또 참여정부시절 부패방지위원회 초대 사무처장은 어떤 자리인가. 영원한 일등병은 '영원한 해결사'로, '부패방지전도 사'로 마당발이 아닌 '운동장 발'로 별명을 바꾸어 불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남들이 보는 것과는 다르게 나는 수많은 실패와 시련, 역경을 겪으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와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 단 한 차례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며 불굴의 신념으로 재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지요." 한 사람의 이 같은 뼈저 린 소회는 분명히 함께 귀 기울여 볼 무언가가 있다. 그는 요즘 몇 사람이 모인 곳이라도 찾아가 자신의 인생경험담을 나누고 싶어 한다. 연구원을 퇴임한 바로 이틑 날도 광주경총 조찬모임에 나가 '영원한 촌놈의 공직회고'를 들려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엊그제 광주발전연구원 원장 직을 퇴임하셨죠?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회가 어떻습니까? 그동안 우리연구원과 제게 베풀어주신 광주시민들의 격려와 성원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저로서는 지난 3년이 굉장히 행복하 고 축복받은 기간이었죠. 광주는 역사적, 정치 사회적으로 대단한 자부심과 상징성이 있는 도시입니다. 광주발전연구원은 이 도시의 지역발전에 대 한 종합적이고 전문적인 조사 연구를 하고, 지역특성에 맞는 미래지향적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기관이지요. 어깨가 많이 무거웠을 텐데요. 그렇죠. 취임초기에 왜 정치인이 연구원장으로 왔냐는 등 말이 있었죠. 그러나 저는 정치인이기 전에 광주와 전남, 내 고향을 사랑하 고 오랜 중앙 행정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연구원이 아카데믹한 학문연구만 하는 곳이 아니고 도시문제를 해결하고 도시 발전을 촉진 하는 구체적인 정책개발을 수립하는 곳이기 때문에 행정경험과 정치적 역량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실제로 제 자랑이 아니라 저의 임기동안 우리 연구원이 많은 발전을 했다고 봅니다. 광주발전전략을 세우는 싱크탱크로서의 기능이 미흡하다는 의견도 많은데요. '한입에 배부를 수 없다'는 속담이 있지요? 우리 연구원은 2007년 후반에 광주 전남발전연구원에서 분리, 독립한 신생조직입니다. 출 범 초기인 2008년에는 불과 28건이 정책과제를 수행했는데 2010년에는 세 배에 가까운 72건을 했습니다. 연구원 수도 5명에서 15명으 로 늘었고요. 이제 어느 정도 기본 틀은 갖추었는데 솔직히 아쉬움은 있지요. 연구원 수와 예산이 더 늘어야 합니다. 독립청사도 없 이 시 공무원교육원 건물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곳은 광주밖에 없어요. 광주가 워낙 재정여건이 좋지 않다보니 어쩔 수 없다하더 라도 명품도시를 꿈꾸는 광주의 경쟁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라도 연구원의 싱크탱크 기능이 더 보강돼야합니다. 광주발전전략의 연장선에서 고향 해남발전 전략도 많이 생각해 보셨을 텐데요. 대한민국 최고의 농업군이었던 해남경제가 피폐되고 인구 급감, 읍내 중심상권 약화 등을 겪고 있는데 이는 비단의 우리 군의 문제 만은 아니고 전 호남의 문제이자 우리 농촌의 현실입니다. 게다가 지방자치 이후 모든 자치단체가 경쟁관계가 돼 버렸습니다. 전국이 일일 생활권이라 대체작목도 가격경쟁력을 유지하기가 어 려운데 이제는 지역민들이 정말 똘똘 뭉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절실합니다. 언젠가 뉴질랜드 출장을 가서 보니 해남 참다래 가 최고상품으로 취급되고 있더군요. 참다래와 고구마는 원래 부가가치가 없었는데 지금은 인기상품이 됐죠. 해남은 원래 인물고장이지 않습니까? 참다래와 고구마 말고도 인적인프라를 활용해 지역브랜드가치를 높이는 방안도 있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이제는 모든 주변 환경이나 무형의 유산조차도 지역브랜드가치측면에서 제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꼭 유명한 사람일필 요도 없어요. 원래 해남 윤씨 家 가는 여자들이 더 스케일이 있고 장부라고 해요. 예를 들어 우리 어머니(윤순례. 89세)같은 경우 27세 72

73 에 청상이 되셨는데 온 동네 거지와 행상들을 돌보며, 살림살이며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효부였어요. 채 씨 대종회 총회에서 효 열상 1호였죠. 많은 일화와 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미 알려진 유명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고향에 친한 친구들이 많이 남아있나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해남에서 다녔으니까 당연히 있죠. 누구라고 다 거명하기는 그렇고, 제일 마음에 남아있는 친구가 남주입니다. 김남주 시인 나랑 중학교 동기이자 고등학교는 남주가 일 년 더 늦게 입학했는데 정말 잊을 수가 없는 친구죠. 군사독재 그 험한 세월을 누구는 몸으로 저항하며 피를 흘렸는데 나는 어떻든 고시패스하고 잘 먹고 살았으니 빚이 남아 있다고 봐야죠. 한번은 교보 서점에서 남주의 시집을 샀는데 화장실에 가서 표지와 목차를 잘라서 들고 나왔어요.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 둘이서 보신탕집엘 간 적이 있는데 자꾸 담배를 피더라고요. "오래 살려면 담배 끊어라" 했더니 "아직은 안 된다 고 "그러고 얼마 있다 갔어요. 누군가에게 빚진 심정, 특히 친한 친구의 혁명가적 삶이,원장님께서 살아오시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꼭 그런 건 아니고, 저는 저대로 소신과 철학 속에서 그래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올 곧게 살려고 애를 썼죠. 나의 인생관은 '정직 과 성실'이며 공직관은 '올 곧고 정의롭게 살자'입니다. '멸사봉공'은 못하더라도 '선공후사'의 자세로 살려고 노력하며 '대세보다는 대 의에 따르자'는 정신으로 불이익은 감수하되 불의에는 저항해 온 삶이었다고 감히 회고합니다. 엊그제 퇴임을 하신 분께 이렇게 묻기는 좀 빠른데요.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슨 일을 더 하고 싶습니까? 잘 물어주셨어요. 우리 국가도 그렇지만 저 개인적으로 지금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다고 여깁니다. 전라도 촌놈으로 태어나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생활을 시작한 이후 40여 년 동안 공무원과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최근까지 도시발전을 위한 정책연구에 몰 두를 했지요. 한 번은 써 먹어야 되지 않나 생각하며 국가적으로도 내년 12월이면 대선정국입니다. 정권교체를 반드시 해야지요. 원장님의 경륜이 더 넓게 쓰일 기회가 오길 바라겠습니다. 끝으로 광주사람은 물론이고 고향 분들까지 포함해서 우리가 더 나은 세계로 나가기 위해 뭔가 한 가지 고쳐야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소통을 강조하고 싶어요. 진정으로 소통하지 않으면 대기업도, 잘 나가던 알짜회사들도 나가떨어지는 세상입니다.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국가나 경제도 서로를 열고 포용해야 합니다. 밖에서 볼 때 우리 고장 사람들은 흔한 말로 '우물 안 개구리' '고립된 섬'이 라고 해요. 나도 40여 년 동안 서울에서 공직생활 하면서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하나로 숱한 손해를 감수하며 살아왔던 지역주의의 피해자인데 DJ말이 맞아요. 호남이 먼저 나서서 지역주의를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지역 간 계층 간 소통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마 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요즘 소셜네트워크가 화두 아닙니까? 연보 1947년 해남군 화산면 송산리 출생 학력 해남 화산초등학교, 해남중학교 졸업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국민대학교(법학), 단국대학교(행정학)졸업 국방대학원 국제관계 석사 미국 남가주대 (USC): Visiting Scholar 서울대 국가정책과정, 최고경영자 과정(AMP) 경희대 언론대학원 Speech 토론과정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박사과정 수료(정책학) 공직/정치경력 73

74 1973년 제 14회 행정고등고시 합격 1974~91 총무처 사무관: 과장 1991~93 행정제도 심의관(부 이사관, 해외훈련) 1993~ 95 대통령자문 21C위원회 사무국장(부이사관) 1995~96 정부합동민원실장, 복무감사관(이사관) 1996~99 행자부 인사복무, 자치지원, 인사국장(이사관) 1999~02 행자부 소청심사위원(1급) 2002~04 부패방지위원회 초대사무처장(차관급)겸 상임위원 2006~08 제 17대 국회의원(민주당, 해남 진도) 2006~07 민주당 원내 수석부대표 사회경력 2003 한국투명성기구(TI Korea)자문위원 2005~ 한국스피치토론문화진흥회 회장 2006~ (사)21C 한 중교류협회 사무총장, 부회장 2006~ (사)뉴거버넌스 연구센터 이사장 2006~ 한민족 응원문화운동본부 공동총재 2007~09 채 씨 중앙종친회 회장, 세계 종친총회 부이사장 2008~ (사) 전통경관보존경과연구원 상임고문 2008~ (사)누가선교회 이사 2008~ (사)세계미술연맹 총재, 한국 신미술회 회장 2009~ 광주 서중 일고 총동창회 부회장 학회활동 2006~현재 대불대학교 석좌교수, 호남대학교 겸임교수(행정학) 기타 한국행정학회, 한국산업재산권법학회, 한국정책학회, 한국부패학회 이사 및 고문역임 저서 땅 끝에서 희망을 보라(2008, 하이미디어) 상훈 황조근정훈장(올해의 공무원상), 근정포장, 장관표창 수상 74

75 박광온(전 MBC 앵커.. 100분토론 진행자) 명 사회자는 대화의 물코를 잘 터주는 것 꼭 1년 전 오늘이다. 해남군 현산면 출신 박광온이라는 사람이 MBC '100분토론'의 새 사회자로 발탁됐다는 뉴스를 읽은 것이 년 10월21일 '무엇이 언론개혁인가'를 주제로 첫 방송을 한 이래 대한민국 TV토론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100분토론은 그 때까지 고 작 1~2%였던 TV토론을 5%이상으로 끌어올리면서 지식층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토론프로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었다. 2008년 12월 8일 방송된 400회 특집 '대한민국을 말하다'는 심야프로그램으로는 이례적으로 7.5%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고, 6시간 7분이 라는 최장시간 기록을 세웠던 '2003년 정치개혁대토론-한국정치의 새로운 비전을 열자'를 비롯해 '광우병파동과 촛불정국', '미네르바 구속파문', '디워-과연 한국영화의 희망인가', '2007대선후보론', '종교인 과세논란' 등 수많은 논쟁들이 시청자를 TV앞으로 바싹 끌어 당겨 놓았다. 전임자 권재홍 앵커의 후임으로 선임된 박광온 논설위원(56)은 그러니까 대한민국 대표시사프로그램의 제5대 사회자가 된 셈이다. 어 지간히 부담이 되었음직도 하다. "토론프로그램 진행자의 역할은 양쪽의 대화가 엉키지 않고 물 흐르듯 흘러가도록 돕는 것이죠" 토 론을 잘한다는 것과 토론진행을 잘한다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며 자신은 진행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왔다고 말하는 박광온위원을 주말을 맞아 고향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광주에서 만났다. MBC 100분토론 사회를 맡은지 벌써 1년이 되었네요. 매회 주요이슈들을 찾아 분석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찾도록 토론을 이끌어가는 것이 쉽지 않으실텐데요. 감회가 어떻습니까? '아, 벌써 1년이구나'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시 전임자가 9시뉴스앵커로 가게 되면서 토론 프로에 대한 준비와 기대 없이 갑작스레 맡게 되었어요. 그동안 참 많은 주제들을 다뤘습니다. 사회 각 곳에 얽힌 다양한 견해들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시청자들이 판단할 수 있는 장을 나름대로 제공해왔다고 자부하지만 평가는 시청자들이 하는 것이죠. 故 정운영 교수를 비롯해서 유시민, 손석희, 권재홍씨 등 쟁쟁한 선임자들의 뒤를 이어 프로를 맡게 되면서 부담도 컸을 텐 데요. 100분 토론은 전에 박경재 변호사와 유재건 의원(변호사 시절) 등이 진행하던 시사토론을 이어받은 것으로 앞서 정운영, 유시민 두 분의 진행자에 이어 손석희씨가 7년 넘게 맡아 틀을 잡아 지금도 매니어 층이 많습니다. 토론이 끝나면 게시판에 활발하게 의견들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 '선임자들의 그늘이 길구나' 하는 것을 느끼지요. 부담이라기보다는 그런 분들과 함께 진행을 맡았다는 게 영광 스럽습니다. 지난 1년 동안에 수많은 사건과 새로운 사회현상들이 나타났고 이런 현상들이 주제로 다뤄졌죠? 최근만 해도 반값 등록금 문제나 한반도 방사능 오염문제, 카이스트 학생들의 잇단 자살, 또 연예계에 일어나는 오디션 열풍,, ' 재보선 이후 정국' 같은 사회문제나 정치문제를 다뤘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토론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사실 다 기억에 남죠. 그런데 그 중에서도 지난 3월, 500회 특집으로 다뤘던 '오늘 대한민국, 희망을 말한다'라는 주제는 시청자들의 반응도 좋았고 시종 열띤 토론으로 이어져 인상 깊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실시된 시청자 앙케트 조사를 토대로 불신, 불안, 불통으로 꽉 막힌 우리시대를 진단해보고,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와 그로 인한 개인의 불안을 넘어선 우리 사회의 희망이 무엇인지를 논의했 었는데요. 평소 트위터와 블로그 등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 문제, 저소득계층 복지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보여준 배우 김여진 씨의 발언이 돋보였습니다. 얼마 전 마침 시나리오작가 최고은씨의 생활고와 지병으로 인한 죽음 소식이 충격을 주었던 때였으니까 요. 100분토론 같은 시사토론프로에서는 참가하는 패널들의 구성도 중요하지만, 갑론을박 치열한 설전이 오고갈 때 이를 정리 해서 쟁점을 더 깊이 파고들게 하는 진행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텐데요. 토론진행을 잘 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박위원님 께서 가장 비중을 두는 부분은 어떤 것입니까? 저는 매 프로마다 '토론의 주인공은 사회자가 아니라 패널들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임합니다. 대화가 엉뚱하게 딴 길로 가지만 않는 75

76 다면 막지 않고 충분히 얘기하도록 하죠. 이럴 때 의견을 달리하는 시청자들은 불만이 많겠지만 진행자의 덕목이랄까 자질은 균형감 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널리 듣고 겸허하게 말하며 서로 다른 생각과 마음을 한데 녹여서 조화로운 생명체로 통합하는 것'이야말로 언론의 지상과제인데 토론은 이 정신을 더 중시하죠. 정보사회에서 정치는 정당성 확보를 위해 미디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정치권에서는 언론계 출신들을 많이 영입합 니다. 방송계 선배기자나 앵커 중에 정계에 진출한 경우도 참 많았는데 크게 성공한 경우가 있나요? 하하. 어려운 질문이군요. 국민 누구나 참정권이 있고 평소의 소신과 인생관을 실현한다는 입장에서 정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중 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연장선상에서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정계에 진출해 훌륭한 역할을 한 분들도 있지만 매끄럽지 못한 선택으로 후배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선배들에게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광주상고를 나와 대학진학을 하고, 또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방송계로 진출한 진로선택이 좀 의외였습니다. 당시 이 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현산 남초등학교(19회)를 졸업하고 광주에 와서 동성중학교와 광주상고를 다녔습니다. 다른데 시험을 봐서 떨어졌지요. 고등학교 1학 년 때 10월 유신발표가 있었는데 잘 아시다시피 유신체제 등장과 관련된 일련의 조치들이 행해졌지요.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우 면서 장기집권을 노리고 정치와 언론은 물론 평범한 시민의 삶까지도 속박하고 통제하는 터무니없는 조치들이었죠. 그 때 담임선생 님이 윤영규 선생님이라고 나중에 전교조 전신인 전교협 초대회장도 하시고 5 18때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구속되어 수감 생활 도 한 분입니다. 그 분을 통해 알게 모르게 사회문제를 보는 시각을 배우고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 도산 안창호선생의 가르 침을 통해 민족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대학에서는 대학신문기자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방송 언론계 쪽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해남에서 보낸 초등학교시절은, 그리고 그 때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8형제 중 막내인데 다른 형들은 진학을 못했어요. 그래서 고향의 형들에게,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부채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오랜 세월 기자생활을 하다 보면 어려움을 겪는 사람 들을 많이 만납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민원을 해결해줄 수 있는 분들이죠. 저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주고 싶고 완벽하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납득이 될 만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박위원님의 고향에 대한 생각과 앞으로의 꿈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송도 요즘은 무거운 주제도 즐겁게, 엔터테인 먼트화 하는 경향이 있지요. 만약 지금 고향 해남을 주제로 100분토론을 진행하신다면 어떤 주제로, 누구를 패널로 초대하 고 싶습니까? 꽤 재미있겠는데요. 저는 제일 먼저 '해남인구를 늘리는 방법'을 택하고 싶습니다. 한때 25만 명에 육박했던 해남인구가 최근 너무 많 이 줄었더라고요. 도시의 비대화와 더불어 농촌공동화 문제를 해결할 대책이 일사천리로 나올 수는 없겠지만 꼭 한번 다뤄보고 싶은 주제입니다. 군민 의견조사를 토대로 20~30대 여성들도 패널로 초대하고, 출산여성과 태어날 아이들에게 줄 복지혜택을 감안한다면 군수와 교육 장도 초청해야겠네요. 무엇보다도 지역사회가 활력을 얻으려면 환경, 특히 교육환경이 중요하고 지역에서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해 야 합니다. 해남에 행복바이러스를 퍼뜨릴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도 많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연보 1955년 해남군 현산면 황산리 (분토리)출생 현재 문화방송 보도본부 논설위원(100분토론 진행) 학력 1968년 해남 현산남초등학교 졸업 76

77 1972년 광주동성중학교 졸업 1975년 광주 상업고등학교 졸업 1983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회학과 졸업 2010년 동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석사 경력 1984년 문화방송 입사 도쿄특파원, 정치전문기자, 정치국제담당 에디터, 보 도국장 MBC뉴스데스크 앵커, MBC '뉴스와 경제' 앵커 '일요 인터뷰 인', '뉴스와 인터뷰', 100분토론 진행 사회활동 흥사단 아카데미 단우 관훈클럽 편집위원 방송기자클럽 주요취재방송 1987년 남극 세종기지 건설현장 취재 생방송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현장 취재 방송 1990년 동서독 경제통합, 전독일 통합선거 취재 방송 1992년 대선개표 방송 해외정상회담 수행취재 1998년 오부치 게조 일본총리 인터뷰 1999년 고노 요헤이 일본 외무장관 인터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현지 뉴스 진행 2004년 17대 총선 방송 2007년 17대 대선 특별 방송 진행 77

78 민형배( 광주시 광산구청장) 진정한 용기와 뚝심 비정규직 문제해결단초 제공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광주광역시 광산구청장에 당선된 민형배 당선자는 "광산구민들에게 바른 정책과 부지런한 실천으로 보답 할 것"이라는 당선소감을 피력한 적이 있다. 말이 쉽지 '바른 정책과 부지런한 실천'이란 게 누구에게나 가능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앞을 향해 진전했을 것이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지만 모두들 요령껏 눈치껏 미뤄버린 그 일을 당차게 치고나와 요즘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이가 바로 우리고장 해남 출신 민형배 광산구청장(49 마산면 안정리)이다. "광산구청 기간제 근로자들을 모두 정년이 보장되는 무기계약근로자로 전환하겠다"는 민 구청장의 발언은 전국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뿐 아니라 공공기관이 앞장서 비정규직 문제를 풀어냄으로써 다른 기관이나 기업들에 미칠 파장까지 생각하면 보통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민단체활동이나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할 때 '깨끗하고, 늘 대안을 낼 줄 안다'는 평가를 받았던 민형 배 구청장을 금요초대석에서 만나 한 발짝 먼저 발을 뗀 그 진정한 용기와 뚝심에 대해 들어보았다. 요즘 아마 제일 바쁜 사람 중의 하나일 것 같은데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구청 비정규직을 무기직, 즉 정규직으로 돌 린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 배경과 발표 후의 반응을 듣고 싶습니다. 이 문제는 지난해 구청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크게 네 가지 배경이 있는데요. 첫째는 참여정부 시절 사회조정 비서 관으로 있으면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개인적으로나마 부채의식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인권도시를 자임하고, 또 지향하고 있는 광주에서 그것도 공공부문에서 편법적인 비정규직 양산이나 유지는 옳지 않다고 보 았습니다. 옳지 않은 비인권적 관행은 광주에서부터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셋째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공공부문이 제공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시장의 왜곡을 보완하거 나 바로 잡는 것이 공공부문의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는 철학의 문제입니다. 꼭 필요한 노동이라면 정당한 평가와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노동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정의 의 문제인 것이죠. 청장님은 광산구청의 선례가 소위 ' 노동의 유연성' 이라는 명제아래 진행되고 있는 우리사회의 고용불안정 문제를 해소하는 대안이 될 것으로 기대하시나요?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우리사회의 구조가 고용불안정의 본질입니다. 노동에 대한 임금은 개별 사업장에서 제공하는 시장임금이 있고, 실업급여처럼 공동체가 주는 사회임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 우 사회임금이 제로에 가깝습니다. 저는 시장임금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서 고용안정성을 보장하는 쪽으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만, 근본적으로 사회임금, 곧 사회안전망까지 손을 댈 수 있는 위치는 아닙니다. 다만 저와 광산구의 노력이 전국을 움직이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예컨대 성남시나, 노원구가 광산구에 이어 정규직 전환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또 민주당은 물론이고 한나라당까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문의를 해 오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가는 측정 하기 어렵지만, 단초를 제공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광산구청장에 취임하신 후 펼친 행정방침이 기존에 해 왔던 것들과는 많이 달라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던데요. 예를 들 78

79 면 매주 1~2차례씩 전체 직원이 한자리에 모여 주제를 정해 놓고 하는 전체회의라든지, 인사를 위한 상호근무평정과 지원 제 및 내부 공모제 같은 것은 효과가 있었나요? 현실이 어떻든 간에 지자체를 밀고 이끌어 가는 동력은 분명하게 공직사회입니다. 선출된 구청장의 의지만으로 잘 할 수 있는 시간 은 그 구청장의 재임기간에 한정됩니다. 공무원의 내발적 역량이 강화되어야 지자체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보할 수 있지요. 말씀하신 시책들은 공무원 개인의 역량을 강화시키고, 동시에 조직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된 것들입니다. 저는 효과가 있 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외부에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효과를 증명할 수 있는 지표는 성과일 것입니다. 전남일보 기자, 광주 전남의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 참여자치 21' 대표, 전남대 연구교수( 사회학 박사) 를 거쳐 참여정부 때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하는 등 다채로운 사회경험을 하셨는데요. 이런 경험들이 구 행정에 반영이 됩니까? 당연히 반영됩니다. 선거과정에서 쏟아진 질문 중 하나가 '행정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저는 오히려 행정경험이 많다고 답변했습 니다. 행정의 지향점은 지역사회이고, 지역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씀해 주신 제 경력은 지역사회로서 광주와 광산의 현안들을 살피고, 이곳에서 생활하시는 사람들의 욕망이나 의지를 폭넓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기자생 활을 하면서 광주시청, 전남도청, 교육청, 일선 구청 등 거의 모든 행정기관을 취재했었고, 시민단체 활동을 할 적에는 지역 현안에 대해 비판과 대안을 꾸준히 제시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구청 일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 자신을 길러준 8할은 바람이었다" 고 했는데 오늘이 있기까지 남다른 가치관과 철학을 얻게 되었다면 어떤 영향이 가장 컸습니까? 기자생활, 시민단체 활동은 아무래도 관찰자, 비판자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다가 청와대에 들어가 일하면서 직접 일을 추진하는 주 체, 책임자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어느 것 하나를 꼭 집어서 말하기 곤란합니다만, 크게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80년대 청년기를 광주에서 보냈다는 바탕이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제 행위에 보편적인 규정력을 갖는 것 같습니다. 대 충, 적당히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긍정적인 강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보낸 청와대 시절입니다. 선한 권력이 이 세상을 좋게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경험한 시 간이었습니다. 정치에 뜻을 두게 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청와대 비서관 근무 시절 가까이에서 보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과 그 분의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꿈을 좀 들려주 십시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분 스스로도 말씀하셨듯이 '원칙과 상식'을 중요시하는 분이고, 그걸 실 천했습니다. 또 그분의 국정운영 철학의 중요한 기둥 중 하나가 국가균형발전이었는데 수도권을 비우고 지방을 채워야 대한민국의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주 확고했죠. 수도권이 패권을 유지하려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방에서도 그 나름대로 패권구조가 있다는 현실인식이 중요합니다. 광역지자체가 중 앙정부를 향해서는 자치와 분권을 이야기하면서도 일선 자치구와의 관계에서는 패권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죠.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로드맵을 짜자는 것이 노무현대통령의 생각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행정수도 이전으로 나왔고,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지방정부의 동력과 계획으로 실천하기를 바랐어요. 고 노무현대통령은 퇴임 후 고향 봉하에서 환경농법실험 같은 농민운동을 시도했는데 현실적으로 지금 해남 같은 농어촌에 필요한 지역발전전략을 제시해 주신다면. 고향에서 여러 방면으로 애쓰시는 분들이 계셔서 전문가도 아닌 제가 이런저런 말씀을 드린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원리적인 차원에서 저는 이식 형 사업보다는 내부역량을 최대한 끌어내는 쪽으로 일들이 진행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습니 다. 해남은 산, 들, 바다가 어울리고 인구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 자기완결성이 아주 높은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든, 자 원이든, 혹은 풍광이든 내부역량에 기초한,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을 짜는데 기반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신문사 기자생활과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전문위원으로도 활동하셨죠? 현재 자치단체 장으로써 지역신문과 자치단체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건전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홍보기사를 써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거꾸로 기사를 막으려고 애 쓰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 79

80 고 봅니다. 언론과 지자체의 부적절한 관계가 시작되는 출발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관계는 언론에도 지자체에도 도움이 되 지 않습니다. 언론뿐만 아니라 의회, 시민단체 모두 지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창구이어야 합니다. 자치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역 발전과 지역민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두고 특성이 다른 일을 할 뿐입니다. 공유하고 소통은 해야 하되 거래가 있어서 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바쁘신 중에도 고향신문을 위해서 좋은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청장님의 남다른 행정행보가 큰 성공을 거두길 바랍 니다. 연보 1961년 해남군 마산면 안정리 출생 마산초등학교(49회), 해남중학교(30회), 목포고등학교(28회) 졸업 전남대 사회학과 졸업, 동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석사, 사회학박사 경력 노무현대통령 사회조정비서관 노무현대통령 인사관리행정관/국정홍보행정관 동신대 사회과학대학 초빙교수 전남대 연구교수(사회과학연구원 전임연구원) 조선대 겸임부교수/광주대, 광주여대 겸임교수 CMB광주방송 '이슈광주전남' 진행 전남일보 논설위원 기자/참여자치21 대표 운영위원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전문위원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위원 지방분권 국민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대표 광주전남자치연대 집행위원장 노무현재단 기획위원/시민주권 운영위원 민주당 중앙위원/홍보미디어위원회 부위원장 뉴민주당비전위원회 위원 CT연구원 광주유치위원회 집행위원장 더좋은 민주주의연구소 이사/(사)지역미래연구원 이사 2010년 6월 민주당소속 광주광역시 광산구 구청장 당선 현재 제12대 광주광역시 광산구 구청장 저서 대화 문화중심도시 광주, 열개의 풍경 재외 한인의 언론수용구조와 한국어 매체의 내용 재외 한인언론의 역사와 현황기초연구 지역의 비전과 광주문화중심도시 지역권력구조와 언론의 문화정치 80

81 민병록( 재경 해남중.고등학교총동창회장 고등학교총동창회장) 동창회는 고향에 대한 긍지와 자존심이 생명 우리나라처럼 동창회, 향우회가 번성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대부분의 중?고등학교 동창회가 그렇듯이 학교 소재지에 있는 총동창회 말고도 지역마다 친목회 형식의 동창회가 또 존재한다. 학교 역사가 오래되고 명문으로 소문이 날수록 타 도시의 동창회, 특히 서울 에 있는 재경동창회는 본 동창회를 능가하는 인물과 넘치는 열정으로 뭉쳐있다. 재경 해남 중 고등학교 총동창회도 예외가 아니다. 동창회에서 만든 인터넷 카페를 들어가 보면 동문 만남의 광장, 동문자랑, 안부 나누기, 애경사, 향우소식, 고향해남소식 등의 메뉴 안에 떠나온 고향과 지나간 세월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친다. 누구는 엊그제 딸을 시집보냈고, 누구는 식당을 개업했으며, 또 누군가는 모친을 여의고 아내와 사별했다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민병록 재경 해남중 고등학교 동창회장(59, 효산건설(주) 대표)은 타향에서 만난 중 고등학교 동창회는 '동문 간 상호협력과 고향에 대한 긍지와 자존심 을 지켜가는 것이 생명'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동창회의 이미지는 폐쇄적인 학맥, 인맥의 산실로 우리사회의 끼리끼리 문화를 이끌어 왔다는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이를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부분이 훨씬 많기 때문에 아직까지 건재하다. 지난해 4월 제 23대 재경동창회장에 선출돼 '명품동창회만들기 3운동'을 펼쳐온 민병록회장을 만나 동창회를 통한 모교사랑과 고향발전에 대 한 이야기를 나눴다. 건설회사 대표님 방이 생각보다 검소하고 수수하시네요. 여기서 동창회 일도 보시나요? "아, 그럼요. 원래 사무실치레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겉모습보다 내실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지요. 종합건설업은 워낙 기복이 심 하고 연관업체들이 많아 한번 삐끗하면 여러 사람에게 타격이 크기 때문에 허세를 가장 경계해야합니다. 이 작은 사무실에서 못할 일이 없지요." 동창회장 취임 후 펼쳐 오신 ' 명품동창회 3운동' 은 무엇입니까? 우리들 모두 명품을 좋아하는데 실제로 우리 사는 모습이나 의식, 그리고 자주 나가는 모임에서조차 질이 떨어지는 일들이 자주 일 어납니다. 동창회가 활성화 안 되는 원인 중에는 '누구누구 보기 싫어 안 나간다' '아무개는 건방지다' 등 인신공격적인 폄하나 질시 가 큰 원인이지요. 우리가 한 고향에서, 같은 선생님께 배우고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인연입니까? 명품동창회 3운동 은 그 소중함을 다시 기억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무슨 캠페인 성 구호 같은데 좋은 성과를 얻으셨나요? 저는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수도권에 해남중고등학교 동문들이 3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해요. 학교가 역사가 깊다보니 (1946년 11월 6년제 중학교로 설립인가) 그동안 5만 명 가까운 졸업생들을 배출했는데 절반이상이 서울, 수도권에 살고 있는 셈이지 요. 어떻게 보면 고향에 있는 총동창회보다 재경동창회가 모교나 지역발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중요성을 차츰 차츰 더 81

82 깨달아가고 있어요. 농촌인구가 줄어들고 소위 말하는 유능한 인력들은 계속 도시로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동창회장님으로서 지역인재육성에 대 한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우리는 농촌이나 지방이 더 발전되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실력이 좋은 인재는 서울의 유수한 대학에 진학해야한다고 생각하고 그 걸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 재경해남중고 동창회만 해도 연례행사로 후배들의 SKY투어, 즉 명문대 탐방을 지원하고 대대적으로 환영행사까지 하니까요. 상당히 이율배반적이지요. 그러나 고향후배나 동문들이 명문대를 합격하고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크게 축하하는 것은 현실입니다. 지역인재육성의 의미가 무조건 지역에 남아 있으라는 것은 아니니까요. 문제는 이들이 다시 고향을 위해 일하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유대를 갖고 의식을 함께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의식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에요. 회장님은 오랫동안 건설업을 하셨고 사업적으로 성공도 하셨죠? 해남군 경영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요? 아, 좋은 질문을 해주셨는데요. 제가 다른 데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먹고 사는 것이 화두'이니만큼 어느 지방자치단체는 군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소득을 증대시켜주고 삶의 질을 높여줄 실물경제에 매진해야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해남을 '도농복합도 시로 만들자는 것인데요. 해남 고유의 특성을 보존하면서 한편으로는 도시화하고 그 도시화의 틀 안에서 농어민들도 함께 새로운 먹 거리를 창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봅니다. 도시와 농촌의 윈윈전략이나 상생프로젝트 같은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런 개념이 아니죠. 서남해안관광레저도시(일명 J프로젝트)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간척지를 활용해 중국과 일본 등지를 겨냥한 대규모 관광ㆍ레저단지를 만들면 일자리 창출은 물론 지역경제가 상당히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최근 정부에서 J프로젝트의 다섯 배에 달하는 새만금개발계획 안을 발표했는데 내용을 보면 사실 우리지역에서 먼저 추진한 것들이죠. 관광 레저도시와 함께 기존 농어촌을 친환경 농어업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농수산물공급 및 가공 산업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제는 해 남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머물 것이 아니라 목포, 광주, 여수 등으로 연결된 관광허브역할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해남-제주 간 해저터널 건설이 반드시 성사되어야 하지요. 또 우리지역은 풍력, 조력, 태양열 해조류 바이오에너지 등 신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곳 으로 신 재생에너지 사업은 화석에너지의 고갈과 환경문제의 대안으로 차세대 성장 동력이 될 것입니다. 도농복합도시는 가장 미래 지향적 지역발전방안이라고 확신합니다. 회장님의 이력을 보니 환경공해추방운동중앙회나 서남해안포럼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신 적인 있던데 모두 오랜 연구 활동과 경험 속에서 나온 생각들이군요? 저는 비즈니스를 해 와서 그런지 뜬 구름 잡는 명분보다 실질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환경보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우리 가 할 수 있는 것을 미룬 채 기존방식만 고수하다간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고생해도 소득의 범위는 한정적이라는 거죠. 그 러나 지금이라도 새로운 먹거리를 준비한다면 당대에, 혹은 다음세대들 누군가가 혜택을 보게 되겠죠. 2012년 총선에 지역구후보로 거론되고도 있던데요. 개인적인 사업이지만 기업경영과 사회활동을 하면서 얻은 경륜을 고향발전을 위해 쏟아보고 싶다는 것은 솔직히 제 꿈이기도 합니 다. 사업하면서 남에게 크게 원망 듣지 않고, 오히려 서울 목동 정풍연립주택재건축조합이나 부산광역시, 춘 천시 등에서는 감사패를 받기도 했는데 이제 고향사람들에게 심사를 받고 싶은 거죠. 특히 정치를 하려면 기본적인 자격을 갖춰야하는데 제가 그 자격을 갖 췄는지 심사받고 싶습니다. ' 정치인의 자격' 을 들으니 요즘 TV에서 뜨고 있는 ' 남자의 자격' 이란 프로가 생각나는데요. 회장님은 남자의 자격, 그 중에 서도 정치인의 자격을 어떻게 보십니까? 돌아가신 아버님은 평범한 어르신이었지만 자식교육만은 준엄했지요. 남한테 피해주지 말아라, 성실하고 정직해라, 내 이익을 위해 남을 괴롭히지 말고 남한테 손가락질 받는 일은 절대하지 마라, 그리고 또 강조한 것이 허세부리지 말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이 평생 삶의 신조가 되었고 진정한 남자라면, 진정한 정치인이라면 적어도 이런 기본적인 자질부터 갖춰야 된다고 봅니다. 옛말에도 있지요? 修 身 齊 家 治 國 平 天 下 라고. 그런 다음 천하인의 생각을 가져야지요. 올바른 생각, 항상 바른편에 서야하고 대소, 선후, 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하하. 82

83 주요 학력 및 경력 1953 해남읍 연동리 출생 해남 동초등학교(54회), 해남중학교(23회), 광주고등학교 졸업(21회) 경희대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경영학과, 미국 하트포드대 경영대학원(MBA) 수학, 고려대 경영대학원(AMP), 서울대 국제대학원(GLP), 연세대 부동산 디벨로퍼과정 수료, 고려대 경영대학원 경영학석사(E-MBA) 졸업 ~현재 효산건설(주) 대표이사 ~현재 스타건설(주) 회장 ~ 경실련 중앙위원 겸 경실련 서울시 공동대표 ~ 아태평화재단 아카데미회원 및 제5기 수석부회장 ~현재 대한사회복지 개발원 봉사사업단장 ~현재 팍스 코리아나 21 연구원이사 ~ 재경 해남군향우회 운영위 부의장, 향우회지도위원 ~ 서남해안포럼 운영위원 ~현재 환경공해추방운동중앙회 부총재 ~현재 민주당 중앙당 산업안전대책 특위위원장 ~현재 재경 해남중 고총동창회 회장(23대) 수 상 새정치국민회의(총재 김대중) 표창장 춘천세무서장 성실납세자 표창장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사장 고려대 경영대학원장 공로상 서울시 목동정풍연립주택재건축조합 감사패 부산광역시장 표창장 춘천시 지방세 성실납세자 지정 83

84 백영휘( 재경해남군향우회장) 도농 직거래 네트워크로 고향발전 기여 지난 반세기,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도시화를 거친 대한민국 수도 서울. 서울의 인구는 가장 최근의 통계가 1,046만여 명이 다. 1960년 244만5천여 명에서 2009년 1046만여 명으로 328% 증가했다. 이 중 순수한 서울 토박이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전국 각지 에서 모여 든 서울의 인구는 더러는 떠나 온 고향을 잊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경향우회라는 조직을 만든다. 한국인 고유의 유별난 뿌 리의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만 뿌리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서양에도 유태인과 아일랜드,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은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 강대국의 외침으로, 혹은 생활고로 고향을 등진 이방인들에게 뿌리의식은 민족의 전통과 언어와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있는 통로였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70년대 말 해남을 떠난 출향 인들도 그렇게 향우회를 만들었다. 처음엔 1백 명 남짓 모였다. 고향이 그리우면 서 로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고, 애경사를 나누며 어려운 시절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돼주기도 했다. 온 나라가 1일 생활권에 든 요즘, 재경향우회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백영휘 재경해남향우회장을 때마침 고향에 시제를 모시고 돌아가는 길목 광주에서 만났다. 고향에서 시제를 모시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디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 선산이 마산면, 송지면, 현산면, 북평면 등지에 있어요. 북평면 쪽은 못가고 나머지 세 곳을 들러 시제를 모셨습니다. 해마다 봄가을 시제에 빠지지 않고 다녀가지요. 단일성인 수원 백씨는 시조 백우경(호는 송계)이 중국 소주사람으로 780년(신라 선덕왕1)에 신라에 귀화했다고 합니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에 사당이 있지요. 고려 때 족보가 생길 즈음에 수원에서 국록으로 용토를 받은 중시조로 출 발해 저의 고조부가 1800년대에 해남에 내려와 일가를 이뤘지요. 족보를 다 기억하시고 조상에 대한 예의가 극진하신걸 보니 정말 뿌리의식이 투철하시군요. 향우회도 일종의 뿌리 찾기 아 닙니까? 지나친 뿌리의식은 배타적 민족주의가 되고, 고향사랑도 지나치면 타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편향된 성격을 만드는데 요즘 같은 정보화시대에 향우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재경 해남향우회가 만들어진 게 1978년이예요. 초창기부터 회원으로 참여를 했는데 그 때는 서울에서 고향사람들 뭉치는 게 지금보 84

85 다 훨씬 더 절실했지요. 100명 남짓으로 출발해 계속 불어나 올해 체육대회 모임에 1000여명이 나왔습니다. 한 때 23만 명에 달했던 해남군 인구는 금년에 8만 명에서 더 빠져나갔다는데 비공식통계지만 수도권에 30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해요. 이런 상황에서 향우회 의 존재의미는 확실하지요. 우리 부모가 살고계시고 조상들이 묻혀있는 고향의 발전에 관심을 갖고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는 친목에 목적을 둬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재경향우회는 그 목적에 맞게 잘 운영되고 있습니까? 어떤 모임이나 성장기와 발전기가 있고 또 침체기가 있듯이 항상 발전할 수만은 없는 거지요. 지난해 5월 취임이후 한동안 침체된 모임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독려하는데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모임에 강제조항이 없다보니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나와 버리고 회비부담이 되는 분들도 있다 보니 생각처럼 크게 활성화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재경향우회는 도시 소비자조직으로서 고향의 생산자조직과 긴밀히 연계하면 현실적으로 고향을 돕고 고향의 경제발전에 기 여할 수 있는 길이 될 텐데요. 그렇습니다. 그동안 군이나 농협을 통해 그런 직거래장터가 꾸준히 마련돼 왔고 해남농산물 브랜드인 '해남미소'에서 나온 상품을 정 기총회나 체육대회 때 팔기도 했는데 이런 일들은 사업성만 따질 것이 아니라 사회적기업차원에서 누군가가 더 진전시킬 필요가 있 다고 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에 적응하려면 개인적으로 농촌에도 기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만, 자본은 다 서울에 몰려 있 지요. 향우회가 그런 일에 나설 수 있을까요? 농업경제 재생, 농촌사회 재활은 농민들의 뿌리 깊은 숙원이지요. 친환경농산물 기반의 로컬 푸드 생산. 가공. 유통, 생태건축. 생태 마을 중심의 농촌지역개발 컨설팅, 도농상생 목적의 도농교류, 직거래 네트워크 등, 지속가능한 수익모델을 창출할 수 있는 유망 사 업 분야는 적지 않지만 문제는 사람이지요. 기업경영을 책임질만한 역량 있는 기업가,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진정으로 고향발전에 앞 장 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느냐하는 것이죠. 회장님은 언제 서울로 올라와 무슨 사업을 하셨습니까? 저는1946년에 현산면 상구시리에서 나서 현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남중학교(16회)와 해남고등학교(14회)를 졸업했습니다. 1971년 에 제대를 하고 처음에 건강의료기기 판매를 했지요. 7년 동안 열심히 돈을 벌어 1977년에 '대신전자'라는 의료용구제조회사를 설립 해 운영을 했습니다. 부천에 공장도 짓고 95년에는 중국천진에 서해전자라는 지사도 설립해 확장을 해 왔는데 이제 가업으로 물려주 고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할 수 있지요. 고향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적절한 때에 향우회회장을 맡고 계시는군요. 향우회가 때로 정계진출을 위한 통로로도 역할을 하나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하고 실제로도 그런 유혹을 받겠지만 향우회가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다 보면 꼭 두 쪽이 나게 됩니다. 언젠가 한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후유증이 너무 커 최근에 서로 자제를 하고 있지요. 고향사람들과 연결이 돼 있다 보니 선거 때면 불편한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동안 비교적 중립을 잘 지켜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향우회를 이끌면서 회원들에게 강조해 오신 말씀은? 자기주장을 피력하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 배려하는 향우회로 성숙시켜 나가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선후배들의 건설적인 의견을 수 렴해 발전된 향우회가 되는데 제가 앞장서겠지만 솔직히 향우 회장은 희생정신 없으면 못하겠더군요. 각종 행사참여는 물론 읍면조 직 행사까지 다 참여하려다보면 개인생활이 거의 없어지는데 그런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임기동안 회원들이 믿고 잘 따라와 주시기 만 바랍니다. 회장님은 해남신문 창간 때 소액주주로도 참여하셨더군요. 지역 언론에 대한 기대와 역할을 주문해주시지요. 아, 그렇지요. 1990년 그 때 한 계좌가 10만원이었어요. 재경향우회가 주주모집에 참여했던 기억이 납니다. 김창섭 해남신문 초대 대 표이사님이 상경 창간모금활동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지났네요. 출향 향우들은 비록 고향엔 자주 못가고 있지만 신문을 통해 고향소식을 접하는데 비교적 지역의 여론을 공정하게 수렴해 보도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지역신문은 그 지역사회의 개발과 복지증진 85

86 그리고 주민들의 관심사를 두루 수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점에선 저희 재경향우회와 비슷한 공통점이 있군요. 하하. 우리 모 두 삶의 터전으로서 해남에 뿌리를 박고 투철한 사명의식을 갖고 살아갑시다. 고맙습니다. 지역민들의 요구뿐만 아니라 재경향우들의 의견도 수렴해 편집에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연보 1946 해남군 현산면 상구시리에서 출생 1959 현산 초등학교 졸업 1962 해남중학교 1965 해남고등학교 졸업 1990 세종대경영대학원AMP수료 1997 연세대경영대학원AMP수료 2003 방송통신대학교중문과 졸업 2005 국민대학교경영대학원 MBA석사. 동 대학원 박사과정 휴학 경력 1985 부천시 원미구원미동에 공장신축 1995 중국천진에 서해전자 설립(단독투자) 대표 2004 제조업 대표 퇴사 2007 현재 임대업(대신, 대명) 운영 국민대경영대학원 동문회회장 ~ 재경해남군향우회운영위의장 현재 재경해남군향우회 회장 4장 교육, 학계, 종교분야 양동주( 정치학자,, ' 20세기 세계와 한국' 저자 ) 21세기에는 '소셜지성'이 변화의 태풍 대통령선거만큼이나 많은 관심을 모았던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났다. 선거결과에 대한 분석이 아직도 인터넷에 난무한다. 시민대표 로 나선 박원순 후보가 215.8만 표 가량 득표해 186.8만 표 가량에 그친 한나라당의 나경원 후보를 제치고 큰 차이로 승리한 이번 선 거를 '한국의 정치가 20세기의 기득권 정치구도에서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로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첫 선거였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미국 뉴욕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스포츠정치학', '20세기 세계와 한국' 같은 저서를 낸 해남출신 정치학자 양동주박사(67 경희 대객원교수)는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기성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변화를 바라는 각성된 젊은이들이 SNS라는 신무기를 들고 치른 한 판 스포츠게임 같았다"고 말했다. 스포츠는 국민통합이나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고 동일시의 상징성 등 뛰어난 효과를 갖고 있기 때 86

87 문에 자주 정치적인 영역으로 전환될 수 있고, 정치 역시 그 상징성과 경쟁성 그리고 결과의 예측불허성 때문에 스포츠와 같다고 말 한다. 20세기가 지난 지 10년이 넘었고 새로운 21세기를 맞아 우리사회 전면에 불고 있는 변화의 조짐은 이렇게 소리 없이 스며들어 오는 데 우리는 그 준비를 다하고 있는 것일까? 양동주박사와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 그리고 지역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안녕하십니까. 정치학자로써 매우 흥미 있는 지난 한 달이었죠. 서울시장 보권선거에서 이긴 박원순후보의 승리의 배경을 좀 더 정치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분석해 주시겠어요? 국민들의 바람은 온갖 중상비방과 네거티브 전략, 정책토론 부재 속에서도 불구하고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지식정보화 시대에 익숙 한 20-40대가 선거의 승부를 결정지었다는 사실로 결말이 났습니다. 기성정치권에 대한 기대가 환멸로 바뀌면서 민심의 변화가 나타 난 거죠. 우리나라의 정치적 선택이나 사건들을 보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선진적입니다. 정치적 혜안이 있는 거예요. 그렇군요. 이러한 민심의 변화는 진보- 보수의 이념구도와 지역구도가 판을 치던 과거에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것이었는데요. 그렇다면 20세기의 패러다임이었던 지역배경이나 진보 대 보수의 문제가 앞으로 선거에서 그리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단 말씀인가요? 야권 후보단일화 경선에서 민주당은 박영선 후보를 내세워 총력전을 펼쳤으나 조직기반이 없는 박원순 후보에게 패배했습니다. 기득 권이 살아있는 경선에서는 민주당이 이겼으나 국민이 직접 참여한 경선부문에서 참패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도 박원순 후보에게 패배를 했지요. 한나라당은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박근혜의원이 지원유세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참패를 했습니다. 이것은 즉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기득권을 다 동원해서 총력전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무소속 시민대표에게 진 것 인데 결과적으로 민심을 외면한 기존 정당들은 공중에 붕 떠버린 상태가 되었어요. 앞으로 선거에서는 지역성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 치겠지만 보다 큰 변수는 다른 데에 있다고 봐야죠.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보듯이 민심은 가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만들어 내지요.. 20세기의 정치, 사회, 문화 패 러다임의 특징과 21세기의 특징을 얘기해 주시겠어요? 20세기의 첫 대 사건은 1903년 라이트형제의 비행기출현이었으며 마지막 대 사건은 1992년에 있었던 핵무기감축조항입니다. 20세기는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가혹한 시행착오를 경험한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성이론으로 시간 공간 물질 에너지를 결합시킨 아인슈타인은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변혁을 일으킨 주인공인데, 그 밖에도 20세기에는 뛰어난 많은 천재들이 나타나 세상을 진보시 켰지요.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역시 냉전종식, 핵무기감축, 환경 보호 등 인류의 자기조절 능력이 한층 제고되고 인간의 잠재력이 현실화 될 것으로 봅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집단지성, 즉 불특정 다수들이 모여 개별적 천재보다 뛰어난 지성을 만들어 내고, 특정한 취향과 생각의 공유로 뭉친 소셜지성의 힘이 변화의 태풍을 가져오리라 보지요. 이번 서울시장선거에서도 그게 나타나지 않 았습니까? 교수님은 스포츠정치학이라는 흥미 있는 책도 내셨는데 스포츠정치학이 무엇인가요? 그 책은 객원교수로 있는 경희대학교 체육대학원에서 2000년 봄 학기부터 처음 개설하여 강의한 스포츠정치학에 대한 이론적 연구와 실증을 담아낸 책인데요. 스포츠와 정치의 닮은꼴, 그것을 비교하면서 카타르시스, 즉 정화작용에 특히 주목을 했지요. 스포츠와 정 치는 둘 다 자유, 평등, 윤리, 정의, 카타르시스를 기반으로 하며 경쟁성, 상징성, 불확실성이라는 세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우 리 인간은 호모사피엔스이며 동시에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동물입니다. 또한 인간은 정치사회적 동물로서 두 사람 이상이 공동체 를 이루는 복수가 되면 누군가가 권위와 힘을 구사합니다. 여기에 공동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정치이며 스포츠 역시 일정한 룰 을 만들어 그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추구해 온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의 학계에 처음으로 '스포츠정치학'이란 이 학제간의 학문을 소개한데 대해 일종의 자부감 같은 감동을 감히 느껴봅니다. 실제로 스포츠와 정치가 공공선의 추구나 최근 프로축구단의 승부조작사건 같은 예에서 보듯이 명확한 룰이 적용되지만은 않은 현실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렇죠. 스포츠는 규칙을 어기는 순간 존재의미가 없어지는데 프로스포츠가 등장하면서 많이 퇴색해버렸어요. 정치 역시 권력의 사 유화가 난무하고, 공공선의 추구라는 본래의 목적을 지키지 않은 예들이 많습니다. 스포츠에서 스포츠맨십을 강조하는 것처럼 정치 에서 스테이트맨십을 되살리는 일이야말로 시급한 일입니다. 87

88 해남이라는 좁은 시골에서 미국유학을 꿈꾸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또 정치학을 택하신 이유는요.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동물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발길질을 하는 것으로 놀이를 시작하듯이, 태어나 서 사회생활을 경험하는 순간부터 소극적이나마 정치를 하게 돼있는 것이죠.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한 직후 패기가 한창 일 때 아버지 돈 30만원을 갖고나와 배추장사로 시작해서 밑바닥인생을 경험을 했습니다. 미국유학을 한 것도 74년도에 국가유학시 험에 합격해 단돈 40불로 유학길에 올랐죠. 홀트양자회에서 알선해 준 3개월 된 여야를 안고 시카고에 있는 양부모한테 아이를 넘겨 주는 조건으로 무료비행기를 탔으니까요.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빈손으로 미국엘 들어가 흑인여성들에게 가발을 팔아 번 돈으로 공부를 했으니 흑인여성들이 은인이지요. 하하. 교수님은 스포츠정치학강의뿐 아니라 실제로 마라톤 완주기록을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무슨 생각으로 마라톤을 하십니 까? 50이 넘어서 30킬로 감량을 하고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전 독일 외무부장관 요쉬카 피셔는 '나는 달린다'라는 책에서 마라톤에 대 한 예찬을 했어요. 등산은 건강에 좋지만 아침운동으로는 좋지 않다는 연구 발표가 있는데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 수에 도 구애 받지 않고 경제적이기도 한 마라톤이야말로 정말 좋은 운동입니다. 운동화 한 켤레 런닝복 한 벌만 사면 준비 끝, 더 이상 돈이 들지도 않아요. 2003년 4월 18일 군산-전주간 마라톤 (42.195km)완주를 시작으로 저는 총 17회 완주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일요일에도 중앙일보주최 서울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데 같은 날 집사람은 뉴욕마라톤에서 뛰게 되지요. 집사람을 제가 마라톤마니아 로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매력이 큰 운동이지요. 가족들이 미국에 사시나요? 네, 저는 뉴욕과 서울과 해남에 집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글로벌마인드를 갖기에 적합한 생활이라 할까요? 요즘은 교통발달로 사 실상 국가 간의 국경은 의미가 없고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보아요.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같은 이들이 소셜인맥 을 중심으로 엄청난 파급력을 갖는 시대가 되었어요. 고향 해남에 대한 시각과 비전도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있을 때 더 잘 보이 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사)북태평양문제연구소나 서남부발전은 중국의 부상과 함께 대단히 중요하게 바라보 아야할 문제라고 여깁니다. 끝으로 고향 선후배들에게 한 말씀 남겨주신다면? 저는 마라톤 풀코스를 처음으로 완주한 날, 그리고 1975년 2월6일 '우슬재를 넘어' 고향을 떠나던 날을 지금껏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땅 끝에서 태어나 한없이 넓은 세계를 보고 싶었고, 세계의 한 복판에 서보기도 했다가 다시 땅 끝으로 돌아왔습니다. '자 유를 만끽한 자가 자유를 가장 잘 안다'고 하지요. 어려운 이야기지만 저는 저 자신과 제가 속한 공동체의 자유와 행복을 확대하기 위해 마라톤에 도전합니다. 마라톤이 사랑받는 국민스포츠로 정착을 한 것처럼 정치도 권력투쟁이 아닌 생활정치로서 사람들에게 편 안함과 즐거움을 주는 정치가 되었으면 좋겠고 그걸 위해 함께 뛰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연 보 1944년 옥천면 팔산리 죽촌 출생 해남동초(44회), 해남중(13회), 광주고등학교(11회) 졸업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뉴욕대학교(NYU) 대학원 정치학 석사. 박사학위 취득 약 력 뉴욕대학교 연구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교수 경희대학교 객원교수(현) 세계한국통일위원회 공동의장(현) 서남부발전위원회 위원장(현) 88

89 (사) 북태평양문제연구소 소장(현) 저 서 <20세기 세계와 한국> <20세기 대사건 100장면> <북태평양의 분쟁과 협력> <스포츠정치학> 문석남 (전 대불대 총장 전남대 명예교수) 장애인고용 법 제정 주도 1세대 사회학자 문내면출신 문석남교수 (76 전남대명예교수 전 대불대총장)는 아직 사회학에 대한 개념이 부족할 때 전남대학교 사회학과에 와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긴 사회학 분야 발전의 독보적인 역할을 했다. 스웨덴 유학시절 부전공으로 연구했던 선진 사회복지정책은 노태우대통령의 장애인복지대책자문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빛을 발하였고, 89

90 참여정부시절 교수출신으로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장관급인 경제사회연구회 이사장을 지냈는가하면 국민의 정부에서도 대통령 직 속 반부패특별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는 등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학문을 지향하였다. "1974년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부교수로 있었는데 마침 국내공업발전을 위한 문교부의 석학초청프로그램이 있 었어요. 여러나라에서 10여명이 초청되었는데 모두 공학계열 쪽으로 9명이 왔고 사회학으로는 저 한명이 왔죠. 당시 전남대학교 정득 규총장님의 청으로 전남대로 오게 되었는데 귀국이나 서울에 남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문석남교수는 2009년 8월 학내분규가 일었던 대불대 총장으로 부임했다가 임기를 미치고는 현재도 대학재단 안정화를 위해 일하고 있다. 은퇴와 동시에 일선에서 물러나 연금생활만 하는 선진복지국가 스웨덴에 비해 나이 들어서도 일을 할 수 있는 한국이 훨씬 더 좋다고 한다. 안녕하십니까? 태풍 무이파의 영향으로 비가 많이 오는군요. 이렇게 교수님과 자리를 함께하게 돼서 반갑습니다. 대불대 총장임기를 마치고 1년이 되었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2년 임기를 마치고 한텀을 더 연장할 수 있는데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학교를 떠난 것은 아니고 재단 이사장으로 주 2~3회 정도 일을 도와주고 있지요. 오랜 분규가 지속되었던 대불대총장이나 이사장을 맡기가 참 부담스러웠을 텐데요. 학교는 정상화가 되었는지요? 취임당시 저는 대불대를 목포와 영암 등 전남 서남권 지역에 지식과 정보, 기술을 제공하는 거점대학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는데 짧은 기간에 총장이 그걸 실현하기는 어렵고 나름대로 학사행정의 투명성, 각 분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규제철폐, 시스템 개발 등 나 름대로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임기 동안에 학과 철폐에 따른 구조조정도 있었지만 신규채용도 11명 정도 이뤄졌고요. 총장님께서는 오랫동안 국립대학교수를 지내셨고 지난해까지 사학총장을 맡기도 하셨는데 우리나라 대학교육이 처한 어려 움과 과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대학들이 처한 어려움은 베이비붐세대에 맞춰 비대해진 학교운영입니다. 국립대는 학생 수가 줄어도 문제가 안 되는데 사립대는 수 도권 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다 문제지요. 아마 이번 8월 대학 총감사가 끝나면 4~50개 정도의 대학들이 문을 닫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학 존속의 기준은 첫째 학생 TO충원, 둘째 교수와 학생의 비율, 셋째가 재단의 건전성인데 다행히 대불대는 다른 대학에 앞서 추 진해 온 중국 유학생유치로 학생충원이 되고 있어요. 대학에서 중국 유학생이 차지하는 비중을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 이 결국 한ㆍ중 협력의 주인공이 될 것이며 고국에 돌아가면 각 분야의 인재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의 입장에서 보면 대학 생들이 학점경쟁과 취업경쟁 등 경쟁 구도로만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 제일 큰 문제라고 봅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시고, 당시 흔하지 않게 스웨덴에 유학을 가셔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스웨덴과 어떤 인연이 있으셨습니까? 제가 대학에 진학할 때인 1956년은 '보릿고개'로 대표되던, 전후 혼란과 궁핍의 시기였습니다. 가난 탈출이 모든 이의 소망이었을 때 나도 그쪽으로 나가려고 신흥초급대(1960년 경희대로 개명) 법학과에 입학했지요. 고등고시에 합격해 집안을 일으켜 세우자는 게 저 의 꿈이었는데 어쩌다가 4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서울시청에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국립의료원 건축 원조를 스웨덴, 노르 웨이, 덴마크에서 공동으로 해주었는데 통역을 하던 중 만난 노르웨이출신 닥터 딜리엣 부부의 도움으로 64년도에 노르웨이 국제개 발처 1년장학금을 받아 가게 되었지요. 지난 두 정부를 거치면서 장관급 정부기관 자문역을 하셨는데 그 때 역점을 기울여 추진하셨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전에 군사정부이긴 하지만 노태우대통령자문 장애인복지대책위원회 위원을 1년 하기도 했습니다. 전공이 사회학이지만 부전공으 로 사회복지를 연구했었고 스웨덴 노인정책이나 연금제도, 장애인정책은 워낙 유명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장애인 복지법이나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된 것이 1991년인데 그게 바로 제가 관여했던 스웨덴모델입니다. 일생에서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이기도 하지 요. 이제 고향 해남이야기를 좀 들려주시겠어요? 어린 시절 꿈은 무엇이었는지요? 문내면은 잘 알다시피 우수영이 있는 유명한 곳인데 집이 몹시 가난했어요. 머리하나는 좋아서 초등학교 때부터 1, 2등을 맡아하고 면소재지에서 6Km떨어진 영명중학교를 다닐 때는 우편물을 배달하는 우체국알바장학금을 받으며 다녔어요. 어떻게 하든 가난을 벗 90

91 어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 졸업하고 서울시청 4급 공무원에 합격해 안정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안정보다는 세계 최 고의 복지국가 스칸디나비아반도 유학이라는 도전을 택했어요. 스웨덴에서 안주할 수 있는 여건이었는데 한국으로 돌아온 것도 도전 이었습니다. 유교의식에 젖어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들의 의식개혁을 하고 싶었지요. 교수님은 사회학자로써 한국사회의 오랜 고질병인 지역감정문제들을 진단, 처방하시고 지역발전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을 많이 연구해 오셨죠? 한때 목포대 임병선총장, 안영섭 목포해양대총장과 함께 성명을 내고 목포와 무안, 신안을 하나로 묶 는 ' 무안반도 통합' 을 촉구한 적도 있으신데 이의 배경과, 해남을 포함한 서남해안 발전전략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신안, 무안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욕심만 버린다면 목포와 통합해서 발전 상승효과를 갖는 게 답입니다. 해남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서남해안은 기후는 물론 공기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좋습니까? 멜론과 같은 고부가가치 과일을 사시사철 특화할 수도 있고 다도해와 연결, 여름피서지, 휴양지로 특화하는 방법이 있겠지요. 전남일대는 산업적 입장에서 발전하기는 어렵고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관광 휴양지로써 가치를 극대화해야한다고 보지요. 사회학자의 눈으로 노령화사회의 문제와 노인인구가 태반인 우리농촌의 미래를 진단해 주신다면. 노령화세대의 3고는 첫째 병고, 둘째 경제문제, 셋째 외로움과 고독입니다. 복지가 그렇게 잘된 북유럽 나라들이 자살률이 높은 것은 병고나 경제문제보다도 세 번째 외로움과 고독이 더 심각하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적 배려 와 책임이 필요한데 '요람에서 무덤까지' 정부가 책임을 지는 북유럽 복지선진국가에 비하면 우리나라 노인들의 의료관리, 영양보급 은 많이 부족합니다. 농촌에서 이런데 착안해 농작물특성화를 하는 것도 좋겠지요. ' 인생은 70부터 부터' 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교수님은 이제 막 시작하는 인생인데,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지금 무슨 욕심을 더 내겠어요?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도 욕심이고, 그냥 지금껏 해왔던 나주 계산원장애인관리, 광주 YMCA 이사, 4 19기념재단 자원봉사를 하면서 외국어 서너 개 하니까 2015년이 되면 국제유니버시아드대회 같은데서 통역봉사를 하고 싶군요. 하하. 연 보 1935년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 출생 학 력 우수영초등학교(29회), 영명중학교, 목포공업고등학교(5회) 졸업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법학사 스웨덴 웁살라대학교 사회학 석사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 사회학 박사 주요경력 및 활동 ~ 전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직선제 초대학장 ~ 전남대학교교무처장 ~ 한국사회학회 회장 ~ 대통령자문 장애인복지대책위원회 위원 ~ 지역감정해소국민운동 광주전남협의회 공동의장 ~ 광주방송(KBC)이사 ~ 광주광역시 국제화추진협의회 부회장 ~ 보건복지부 옴부즈맨 ~ 교육부중앙교육심의회 위원 ~ 광주전남 장애인고용대책위원회 위원장 91

92 1999.9~ 대통령직속 반부패특별위원회 위원 ~ 세계박람회 유치위원장 ~ 경제사회연구회 이사장(장관급) ~ 대불대학교 총장 ~ 현재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 현재 한국기후변화센터 지도위원 ~ 현재 학교법인 영신학원 이사장 수 상 전라남도 문화상 성옥문화상 국민훈장 석류장 저 서 전남인의 의식구조(1984, 대왕사) 도시체계론(역서, 1987, 대왕사) 한국사회의 갈등연구, 복지국가의 사회정책 (1989, 대진문화사) 지역 사회와 사회 의식 (공저, 1994, 문학과 지성사) 지역사회의 연고주의 혈연, 지연, 학연의 관계망과 실태 (1990, 일진사) 지역사회와 삶의 질 (2001, 나남출판) 복지국가의 사회정책외 다수 논 문 지역편차와 갈등에 관한 연구(1984, 한국사회학 18집) 전남인의 가치의식 변화추세에 관한 연구 (1992) 스웨덴 장애인정책의 이념과 지원시책 (1993) 스웨덴 연금제도와 그 문제성에 관한 연구 (1994) The Quality of Modern Life in Korea (1998) 북유럽 삼국(Sweden, Norway, Denmark)의 노인복지정책과 연금제도에 관한 연구(1996) 일자리 창출과 청년실업 해소방안(2004)외 다수 이석우( 겸재미술관 관장) 미술과 역사를 넘나드는 격조 높은 문화학자 92

93 지난 2009년 4월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 문을 연 겸재정선기념관의 초대관장으로 부임해 2년이 채 못 된 짧은 기간에 기념관을 강 서 제1의 문화허브로 키워 낸 이석우 관장(70)은 우리 고장 해남군 화원면 후산리 출신이다. 역사학자로 서양사를 전공했고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평생을 보낸 그가 겸재정선기념관장으로 부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목포중학교(10회)에 입학했는데 그 곳에 마침 한국추상미술의 선구자중 한명으로 꼽히는 양수아화백이 미술선생으로 계셨다. 미술실과 양수아선생의 아틀리에에서 살다시피 그림에 심취하며 전국미술대회 입상을 하기도 했던 소년은 부 친의 반대도 있었지만 3학년 때 스승이 광주사범학교로 전근해 가면서 그만 그림과 멀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다시 그림에 빠지게 된 것은 80년대 초, 광주민주화운동 등 시대적 아픔과 절망 속에서 그는 인사동 화랑가를 들렀다가 그림을 만나면서 마음에 큰 위안 을 받았다고 했다. 역사 속에서 명멸해 간 예술가들의 혼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는가를 체험한 그는 이후 '역사의 들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 '예술혼을 사르다 간 사람들'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등의 저작을 내면서 색다른 미술평론의 경지를 개척해 냈 다. 지난 해 12월에는 '박물관에 가면 그림이 그리고 싶다'라는 주제의 두 번째 개인전을 열기도 한 화가이자 격조 높은 문화학자 이 석우 관장을 겸재 정선의 혼이 오롯이 깃든 기념관에서 만났다. 전통 한국화가인 겸재정선기념관이라고 해서 한국적인 건물을 생각했는데 아주 현대적인 외관에 전시물 하나하나가 첨단과 학이 결합된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네요. 사학자로서 특히 서양사를 전공하신 분께서 어떻게 조선시대 겸재의 그림세 계에 매료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미술과 만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죠. 미술은 텍스트보다 더 직접적이고, 사실 많이 남아있기도 하기 때문에 서 양사 연구는 서양미술과 뗄 수가 없습니다. 서양사자체가 서양미술사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런 관점들이 자연스레 우리 역사와 우리 미술로 이어졌다고 할까요? 겸재 정선은 독창적인 한국의 산수기법을 창안하여 특유의 미술적 감각과 그 속에 내포된 정신으로 조선 의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겸재정선기념관은 이 같은 겸재의 화혼과 진경산수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졌 지요. 그러면 관장님께서 기념관 기획단계에서부터 참여한 것입니까? 아녜요. 저는 기념관이 완성된 후 관장공모과정에서 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에 경희대 중앙박물관장을 한 적이 있고 미술평론가협 회 회원이기도 하기 때문에 겸재 정선의 가치와 재조명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고 관심도 컸지요. 중고등학교 때 배웠듯이 겸재 정선 은 독창적인 한국의 산수기법을 창안하여 특유의 미술적 감각과 그 속에 내포된 정신으로 조선의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사대주의를 거부하고 실학이 형성된 시대에 활동했는데, 이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기념관은 지역인물자원의 문화콘텐 츠화와 그 중요성을 간파한 서울시와 강서구청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요.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총 169억원이 들어갔습니다. 그렇군요. 사실 진경산수의 창시자로 미술교과서에도 나오고 천 원짜리 지폐에도 그의 ' 계상정거도"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겸 재 정선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안에 생가 터가 있다는데 말년에 양천 현령( 지금의 강서 구청장 격) 을 지낸 인연으로 강서구청이 기념관을 유치한 노력이 대단히 놀랍습니다. 모든 지자체들이 문화자원에 대한 이런 접근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 고향 해남은 뭐라고 할까요? 너무나 풍요로운 곳이지요. 물론 지금은 전국의 농촌이 그렇듯이 침체된 분위기지만 문화의 측면에서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해남군청에서 홍보대사로 임명해주어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해남의 멋스러운 풍광과 문화를 자랑하는데 듣는 사람들이 더 공감하더군요. 다음 달이면 기념관 개관2주년을 맞게 되는데 관장님께서는 이 같은 개인이름을 딴 기념관의 역할과 위상을 어떻게 잡고 계시나요. 여러 지자체들에 역사인물들을 기리는 기념관에서부터 예술가들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관들이 있거나 들어설 예정입니다. 더러는 운 93

94 영이 미흡한 곳도 있는데 이런 기념관이 발전하려면 끊임없는 연구와 교육, 전시기획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우리기념관은 우선 10년 계획으로 겸재 작품 전부를 영인화 할 계획이며 수준 있는 정선논문집을 출간하고, 학회결성은 물론 논문현상공모도 할 것입니다. 또 한 겸재미술대전, 겸재오름전, 겸재사생대회 등 유수한 대전을 통해 미술인들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터전이 될 것이며 무엇보다도 전시 공간 제공 등 미술작가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편 개인 기념관이지만 서울시가 출연한 공공기관으로서 전시뿐만 아니라 문화체험교육, 학술, 행사, 자료제공 등 다방면에 걸쳐 시 민들의 문화적 삶에 기여하는 문화센터의 기능에도 충실할 것입니다. 해남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자화상이며 초상화 중 최고 걸작으로 손꼽혀 회화로서는 드물게 국보( (240호)로 지정된 ' 공 재 윤두서( ) ( 자화상' 이 있습니다. 지난해 9월 고산 윤선도유물전시관 정식 개관에 맞춰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이미 보셨겠지요? 물론입니다. 공재 자화상은 그동안 해남 윤씨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 등을 통해 임시 전시되기 도 했으나 고향인 해남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지요? 그 초상화 작품에서 저는 윤두서 개인의 내면의 울분과 남도의 애절함을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집은 부유했으나 출세 못한 양반으로서 열망과 안타까움, 그러면서도 자기를 지키려했던 선비적 강직함에 오히려 연민이 있습니다. 10여 년 전 들렀을 땐 스산함이 느껴졌는데 요즘은 고택을 중심으로 문화제도 열고 유물전시관도 건립돼 무척 다행입니다. 관장님의 저술 목록을 보면 역사와 신학과 철학, 미술 등 정말 관심사가 다양하십니다. 가장 최근에 펴낸 ' 역사의 숨소리, 시간의 흔적' 은 무엇에 관한 책입니까? 그 책은 첫 번째 전시회 그림 도판들이 들어 있어 좀 두꺼운 책인데요. 역사와 미술이 만나는 접점에 대해 그동안 여기저기 발표해 온 글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입니다. 저의 역사인식과 미학적 사유를 담은 글들이지요. 역사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동인을 탐구하 며 역사철학을 거론하고 있으며, 미술과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고 즐길 뿐만 아니라 직접 그리고 전시회를 열기도 하셨는데 전시회 제목처럼 정말 박물관에 가면 그림이 그 리고 싶어집니까? 국민일보 손수호 논설위원이 저의 전시회를 보고 이런 글을 썼습니다. "두 전시의 공통점은 역사와 그림이다. 그가 걸어온 길과 고스 란히 포개진다. 역사 속에서 아름다움의 원형을 찾고 그 전통의 아름다움에 취해 붓을 잡은 것이다. 한 조각 와당에서 조형의 역동성 을, 민화에서 자유의 정신을, 금관에서 세계적 디자인감각을 찾는다."고요. 그러고 보니 박물관 유물을 소재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렸 네요. 박물관은 내게 유물이나 미술품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곳을 넘어 역사와 문화, 특히 미의 발견, 미의 원형을 찾아가게 하는 살 아있는 체험공간이었습니다. 아, 이제 관장님께서 왜 그렇게 겸재 정선에 매료되시고 기념관을 단순한 기념관이 아닌, 시민들과 소통하는 다이내믹한 공 간으로 만들려고 하는지 알겠습니다. 겸재의 그림에 담겨있는 우리의 풍경, 우리의 삶, 우리의 정서에 함께 공감하자는 것 이지요? 그래요. 요즘 기념관 프로그램 중에 가장 인기 있는 것이 '어린이 겸재진경교실', '명사.석학과 함께하는 미술.인문학강좌 대학'입 니다. 저는 이 공간을 찾는 시민들이 우리 것,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진정으로 행복해졌으면 합니다. 아무리 정보가 많아도 정보를 판단할 가치관이 없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를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래서 어린이 대상 교육과, 인 문, 역사, 철학 강좌를 열며 누구와도 함께 소통하는 기념관이 되기를 꿈꾸는 것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해남군 홍보대사로써 고향의 문화자원과 특히 박물관, 기념관 등의 운영에도 큰 관심을 부탁드립니 다. 연보 1941년 해남군 화원면 후산리 출생 94

95 경희대 사학과 졸업 미국 애드리안대학교 사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석사) 경희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경력 경희대 사학과 교수 / 경희대 신문방송국장, '대학주보' 주간 옥스퍼드대학교 사학과 연구교수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장 / 경희대 중앙박물관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 경희대 명예교수(현) 에스라성경대학원 대학교이사(현)E-Land그룹 문화재단이사(현) 겸재정선기념관 관장(현) 저서 대학의 역사(한길사) / 아우구스티누스(민음사) 역사의 숨소리, 시간의 흔적(인디북) 명화로 만나는 성경은 새롭다(예경) 기독교사관과 역사이해(경희대 출판국)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시공사) 예술혼을 사르다간 사람들(아트 북스) 역사의 들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소나무) 서양 중세사 강의(느티나무) 95

96 박동희( 시당장학회 이사장) 경제 어려워도 지역인재 육성사업 지속돼야 옛 주택은행장과 중소기업은행장을 거쳐 1986년 대신경제연구소 대표를 지낸 후 대신개발금융, 대신 투자자문, 대신증권 대표를 거쳤 으며 대신그룹 부회장을 지낸 박동희씨(81)는 해남이 낳은 대표적인 금융인이다. 요즘 대학문을 나서는 젊은이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 은 곳 1위로 꼽는 금융계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유교의 영향으로 돈 밝히는 것을 금기시했으며 수재들은 법학이나 의료계 쪽으 로 진출했다. 5년제 순천중학교를 나온 박동희 이사장은 어려서부터 경제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작심했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를 들어가 스물 세 살이던 2학년 때 행시에 합격하고 졸업과 동시에 재무부 이재국 사무관으로 출발, 한평생 재계와 금융계에서 뼈를 굳혔다. 지금은 부친이 세운 시당장학회 이사장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고 있는 박동희 이사장을 서초동 자택으로 찾아가 뵈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이사장님을 초대석에 모시도록 추천해 주더군요. 주로 서울에서 재계와 금융인으로 한평생을 사 셨는데 요즘 대학 졸업생들의 직업선호도를 생각할 때 선견지명이 있으셨군요. "허허 그런 것은 아니고, 집안이 대단한 부자는 아니었지만 어렵지도 않아서 꼭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경제학공부 자 체가 참 좋았어요. 그 때 순천에서는 민족계열인 고려대학교를 많이 갔지요." 이사장님의 지나온 길을 보니 자녀들의 금융업진출을 적극 권장한다는 유태인가문들이 생각나는군요. 부모님들의 영향이 있었습니까? 부친은 전형적인 한학자셨습니다. 일제 때 일본의 신식교육을 배우지 않고 한학에만 전념해 어릴 때 사서삼경과 경학, 주역을 다 공 부했다고 들었습니다. 한학만 하시다 3 1운동 후에 배워야 만이 국민이 똑똑해지고 그로 인해 독립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하지요. 그래서 1930년부터 40년까지 마을에 한문서당을 열고 수업시간 간간히 안중근의사 이야기며 일장기를 달고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선 수이야기를 들려주며 나라의 중요성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해방 후에 화산중학교를 설립하시고 1968년 해남향교 전교를 역임하기도 하셨는데 평생 교육자로 사셨지만 특별히 경제교육을 강조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시당( ( 時 堂 ) 박장수 어르신은 해남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의 장남으로서 가까이서 보신 부친의 특 출하신 면모를 들려주십시오. 제가 말씀드리기는 뭣하지만 그 분의 한평생 업적을 기록한 時 堂 集 이 추모집 형태로 2007년에 발간이 되었어요. 서화작품 100여점과 한시집인 소남만록( ( 素 南 漫 錄 )에) 수록된 한시들을 번역한 작품들이 소개돼 있고 해남에서 펼쳤던 교육 사업과 시당장학회를 설립한 교육철학, 장학회 활동 내역들이 나와 있는데 한번 읽어보세요. "사람은 항상 정직해야한다"는 말씀을 두고 쓰시고 서도를 통해 가정교육과 검소 정신을 가르쳐 주셨지요. 글씨는 정신공부이기 때문 에 잡념을 없앨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정진하신 결과 한번은 유진산( 柳 珍 山 )씨가 글씨를 받으시고는 의제 허백련( 許 百 鍊 )님께 보였더 니 "그 글씨를 날 주고 내 그림 중에 하나를 가져가시라"고 했다더군요. 96

97 특히 아버님의 글씨는 시당체라고 불릴 만큼 독자적인 서체를 선보였는데 그중 초서는 여초( 如 初 )선생님이나 김창환( 金 昌 煥 )선생이 우리나라 최고의 글씨라고 칭찬을 했지요. 아~ 지금 맡고 계시는 시당장학회의 시작이 부친의 그 유명한 글씨로부터 조성되었군요. 그렇지요. 시당장학회가 올해로 30회째를 맞았는데 1980년 6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그동안 모아둔 서예 작품으로 개인전을 연 수익 금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개인전에서 얻은 수익금이 2천500만원 가량 되었는데 사재를 보태 3천만원으로 시당장학회를 설립하고 이듬해부터 해남지 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1988년 미수를 맞아 서울 백상기념관에서 시당88수전( 壽 展 )을 개최하고 그 수익금 2000만원까지 합해 지금에 이르고 있지 요.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개인이 만든 장학회로는 독보적인 것이지요. 그동안 700명이 넘은 학생들이 혜택을 보았으니까요. 부친의 뜻을 이어 장학기금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장학금이란 게 출연기금에 대한 은행이자로 충당이 되는데 지금은 이율이 떨어져 어려움이 크지요. 아버님은 넉넉해서도 아니고 남 다른 교육열정이 있었기에 장학 사업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기금이 좀 더 모아져 장학회가 발전됐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경제가 문제군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직업군 중 1위가 증권회사라고 하는데 이런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보십니까? 경제활동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근원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돈을 버느냐 하는 과정이 중요하지요. 저는 증권회사 책임자를 오래 맡았지만 증권을 단기투기로 보는 사고방식에는 찬동하지 않습니다. 흔히 증권시장을 ' 자본주의의 꽃' 이라 하는데 여기서 증권이란 주식과 채권처럼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증서란 뜻입니다. 보통 증권하면 주식만을 떠 올리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증권이란 주식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이지요. 이를테면 장기금융시장이라 할 까요? 장기금융시장이란 말 그대로 자금을 장기로 거래하는 시장입니다. 만기가 따로 없는 주식이나 1년 이상인 채권 등 단기금융시장과 대비되지요. 이렇게 채권이나 기업어음 등 다른 증권들도 함께 사고 파는 시장을 자본시장이라고도 하는데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안정이 되려면 이 자본시장이 커지고 활발해져야 합니다. 젊은이 들이 자본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이 건전했으면 좋겠어요. 이사장님은 재정 관료와 금융계 리더로서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오신 걸로 여겨지는데 금융리더, 즉 경쟁력을 갖춘 금융 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덕목과 자세가 필요할까요? 그러지만도 않았어요. 공직에서 물러난 후 1996년인가 A. M 파이낸스라고 금융회사 책임자로 있었는데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개인 적으로도 큰 손해를 보았지요. 금융인은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중요합니다. 남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나 조직이 책임의식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 어요. 일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합니다. 1987년 우리나라는 물론 동남아시아 전역에 위기를 불러왔던 금융위기, 그리고 서브프라임모기지로부터 시작된 미국 발 금 융위기는 물론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유럽 여러 나라의 재정위기 등 세계경제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요. 이 원인을 한마디 로 진단할 수는 없겠지만 왜 이렇게 전 세계적 경제위기가 끊이지를 않을까요? 방금도 얘기했지만 관련업계 종사자들의 무책임과 방만한 의식, 그리고 보다 심층적으로는 인간들의 욕심이 문제입니다.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는 애초에 미국의 부동산에서 시작됐지요.. '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금융시장의 파생상품에 끼어들 면서 금융위기를 야기한 것인데 2차 세계대전 후 최대 금융위기라고들 합니다. 정부가 올바른 정책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제 지방선거가 끝났는데요. 선거가 끝나고 나면 항상 물가가 오르고 환율이 큰 변동성을 겪는데 올 한해 경제전망을 해 97

98 주십시오. 경제전망은 무슨. 해마다 물가가 오르니 걱정이지요. 장학금도 그대로 둘 수가 없어 그동안 중학생들에게는 20만원, 고등학생에게 는 30만원 지급해 오던 것을 올해부터는 각각 30만원, 50만원으로 증액해 지급했는데 당초 40명이 받던 것을 19명으로 줄였지요. 그러나 선친의 유지인 만큼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지역인재 육성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장학회는 잘 유지 하겠 습니다. 마지막 말씀에 더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사장님의 잘 지은 자식농사를 보면 700여 남의 자녀들에게 베푼 노블리스 오블리 제는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참고로 3남1녀를 둔 박동희 이사장님의 장남은 국민은행 본점 본부장,, 2남은2 치과의사로 한림대 치의대학원원장이며,, 3남은3 삼성의료원 내과의사, 그리고 장녀 인미씨는 미국 유학 후 추계예술대학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보 1930 해남군 화산면 월호리에서 출생 화산초등학교, 순천중학교 졸업 1955 고려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 졸업 1959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제4회 국가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재무부 이재국 사무관 외무부 외환국 외무관리과장 재무부 총무과장 전매청 생산국장 재무부 서울 세관장 재무부 관세국장 조달청 차장 관세청 차장 한국은행 감사 한국 주택은행장 중소기업은행장 삼희투자금융 대표이사 대신경제연구소 대표이사 대신종합개발금융 대표이사겸직 대신투자자문 대표이사 대신증권 대표이사 대신증권 부회장 주은투자자문 대표이사, 회장 1996 A. M 파이낸스 회장 1992~현 시당장학회 이사장 표창 1963 대통령표창 1969 재무부 장관표창 1976 홍조 근정훈장 98

99 박병호( 전 서울대 법대 교수, 학술원 회원) 전통법문화연구 공로 영산법률문화상 수상 화산면 월호리 출신 대학자를 만나기로 했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을 지내고 정년퇴임 후부터는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한국학대학원 고문헌관리학과 창설과 동시에 초빙되어 한국고문서학의 교육을 위한 교과과정, 학과운영, 고문서학 강 의에 주력하고 있는 박병호 교수님이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정규대학체계 밖에서 지금까지 10명의 학생을 직접 지도해 문학박사로 키움으로서 고문서학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분이다. 소문이 났던대로 박병호 교수님(80 전 서울대 법학과 교수, 학술원회원)은 노익장이셨다. 만나기로 한 여의도우체국 계단 앞에 단번 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건장한 한 분이, 한 손엔 책가방을, 한 손엔 우체국에서 파는 포장용 박스를 손에 들고 서계셨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아 인근에 있는 인터뷰 장소인 한일문화교류센터까지 택시를 잡으려는데 한사코 걸어서 가자고 하신다. 요즘 근황이 궁금합니다. 한때 간염으로 고생하시다 전통의학요법으로 완쾌하셨다고 뉴스에 났었는데 역시 건강이 좋으신 것 같군요. 무슨 비결이 있으신가요? 광주출신 기준성씨의 자연건강법이라고 있어요. 그 분이 자연식 말고도 네가티브 요법이라 해서 부항에 관한 발명특허를 내었는데 그걸 지금까지 쭉 해오고 있지요. 아주 좋아요. 또 밥을 꼭 현미잡곡밥으로 해 먹어요. 현미쌀에다 쥐눈이콩, 수수, 율무, 차조, 찰보 리를 섞어 압력밥솥에 해놓으면 먹기도 좋고 맛도 있지요. 또 운동을 많이 하는 편이예요. 60대까지는 아침마다 관악산을 올랐는데 70대 이후부터는 구보로 바꿨지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8km씩 걸었는데, 요즘은 4km를 걷지요 년에 전남 해남군 화산면 월호리에서 출생하셨는데 부친과 모친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어렸을 적 고향에 대해 기억하 시는 일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부친은 성당 박철수(1907~2006), 모친은 양천 허씨 정현(1907~1988)의 4남4녀 중 장남으로 났습니다. 부친이 1950년 5월부터, 그러니까 6 25동란 중 전남도지사를 하신 분이죠. 부친은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가훈으로 후손들은 마땅히 지켜야한다는 서론과 함께 신호붕우( 信 乎 朋 友 ) 등 12개의 사자성어를 일일이 새겨 현판으로 만들어 걸어놓고 외우게 할 정도로 엄하 셨던 분입니다. 학창시절 중 국어와 불어에 크게 흥미를 느껴 그 쪽으로 대학진학을 하려하자 극구 말리며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이니 수산대학 아 니면 법과를 나와 판검사나 관리가 되라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 분 말씀대로 관리는 못되었지만 법대에 진학해 효도를 하긴 했는데 고문서와의 인연은 어머니 쪽 영향입니다. 외조부가 서 예와 사군자에 능하신 효봉 허자 소자 어르신인데 어렸을 적 우리 집에 오시면 10일에서 한 달간씩 머물며 내게 습자본을 만들어 주 시고 먹가는 법이며 문방사우와 친하게 하셨죠. 초등학교, 그러니까 보통학교는 어디서 다니셨고 고향에 기억나는 동창이나 친척이 있나요? 부친의 임지를 따라다니다 보니 광양 서공립심상소학교에 입학했다가 3년을 마치고 담양 동공립국민학교를 졸업했어요. 어렸을 적 친구들이 이제는 많이 타계를 했겠지요. 99

100 중학교를 서울로 가셨는데 집안에서 기대가 컸겠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십시오. 중학교 입학은 광주서중학교로 했습니다. 동창 중에 금호그룹 회장을 지낸 박성용( 朴 晟 容 )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언론인 출신으로 금호문화재단 고문을 한 이강재 등이 있지요. 광주 서중학교 2년을 다니고 중앙중학교에 전학을 했는데 당시는 민족학교라고 고려대학교 재단인 중앙중학교를 많이 갔어요. 아까 도 얘기했지만 학교다닐 때 국어와 불어를 좋아했지요. 국어 고문을 주시경선생의 아드님이신 주왕산 선생이 가르쳤는데 두시언해 강의가 그렇게 좋았고 종로 5가에 있던 불어강습소에 등록하여 불문학 공부도 하면서 마치 문인이 된 기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결국 법대에 진학하시고 문학과 서화는 취미로 남으셨는데, 다시 고문서연구에 말년을 보내고 계시니 운명적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교수님은 한국 법제사연구의 대가로 많은 연구업적을 남기시기도 했는데 평생의 업적을 나눈다면 어떻게 정리할 수 있습니까? 업적이라 말할 것 까지는 없고 구태여 구분하자면 법사학 학술연구와 고문서 정리 및 해석분야, 그리고 평생 해온 연장선상에서 후 진양성을 위해 제정한 영산법제사 학술상 제정이라고 할 것 같군요. 내가 말하기는 쑥스러운데 학술부문은 2007년 영산법률문화재단 (이사장 윤관 전 대법원장)이 수여하는 제3회 영산법률문화상을 주면서 이렇게 적었더군요. "38년간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리의 전통법문화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한국법제사라는 기초법 분야를 체계화시키고 하나의 독자성 있는 학문분야로 자리 잡게 하 는데 크게 기여한 점을 높이 샀다."라고요. 두번째 고문서 정리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술적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틈만 나면 음악과 서예, 글쓰기를 좋아했고 저도 한시를 읽 으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을 수가 없었어요. 대학에서 당시 중앙도서관 관장으로 보직을 맡고 계시던 정광현 교수님 지도를 받았는 데 그분 곁에서 많은 고서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죠. 석사학위도 당초 민법 쪽을 택하려했으나 교수님의 엄명으로 법제사쪽으로 정 했고 대학에 교수가 되기 전부터 고문서정리 촉탁일을 하게 된 인연도 크지요. 1996년 정년퇴임한 후에는 40여년 강의했던 가족법, 한국법제사 등과는 결별한 체 국사편찬위원회 초서연수과정에서 한국고문서학과 초서사료강독을 담당하였고 정신문화연구원의 초서강독, 고문서학회창립 및 연구지발간 등을 해왔지요. 지금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에 나가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하며 후진양성을 하고 있어요. 사재를 출연하여 만드신 ' 영산법사학 상' 의 배경과 시상제도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영산법사학 상'은 영산법률문화재단이 주는 상과는 좀 다른 것이죠. 우연히 영산이라는 이름이 같아 오해를 하기도 하는데 제가 그 문화재단이 수여하는 제3회 법률문화상을 받았어요. 당시 상금이 5천만원이나 되었는데 그 돈을 의미 있게 쓰고 싶어서 개인 돈 5천 만원을 더 보태 제 호를 딴 '영산법사학 학술상'을 만들게 되었지요. 얼마 되지는 않지만 2회까지 시상했고 올해 3회째 수상자를 선 정하고 있습니다. 발표논문 중 ' 한국전통사회와 법' 에 대한 내용이 많은데 우리 전통사회의 ' 법' 은 어떠했습니까? 흔히 ' 윤리' ' ' 도덕' 이라고 하 는 것과 법의 차이는 무엇일가요? 법은 예치( 禮 治 )를 위한 보조수단이라는 공맹의 '예주법종'사상이 우리나라, 특히 조선시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사상가인 정약용의 저서 '경세유표'도 '예'는 천리와 인정에 합당한 법'을 뜻한다며 예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함을 강조 했지요. 조선시대 민사의 영역에서 '이'가 중요한 판단기준이었으며 '이'는 사물에 내재하는 보편적 이치인 사리를 뜻합니다. 그러나 일제강점 과 함께 이같은 전통적인 법관념이 퇴색하기 시작, 법과 윤리와 도덕을 별개의 개념으로 파악하게 되었지요. 일제시대 강압통치 수단 으로 모든 실정법은 예외없이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도록 강제되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죠. 우리나라의 법률은 특별한 기술적인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대부분 유교적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법의 운용에 있어서도 법조문을 정확히 인용하되 그 배경이 된 유교경전의 정신을 충분히 살려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성이어서 그런지 선생님께서 가족법개정에 찬성하신 내용이 인상적이군요. 우리가족법의 문제는 무엇이며 앞으로 더 고쳐야 할 방향은 어떻습니까? 아, 가족법 개정에 당연히 찬성을 했지요. 60년대에 가정법률상담소를 만드신 이태영 박사님은 대학선배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세상 은 변하고 의식도 변하고 있는데 전통만 고집해서는 사회발전은 요원합니다. 호주제도란 일제의 잔재인데 개정이후 아무 문제가 없 100

101 지 않습니까? 가부장제나 남성우위전통이란 원래 우리전통이 아닙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같은 외침 시에 필요한 전시형 제도이지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엔 남녀평등, 여권이 강했던 전통이 있어요. 3남 2녀를 키우시면서 특별히 강조하신 점이나 교육철학이 있으신지요? 자녀에게 무엇을 강조하거나 당부하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하게 하고 학자로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무언의 교육'이라 고 생각합니다. 2007년도에 서울대 동창회보에서 10명이 동문가족이라고 소개를 한 적이 있는데 장남, 박진우(국사학과), 차남 박한 우(사법학과), 작은 며느리 김지현(의학과), 큰사위 권기범(법학과), 그밖에 남동생 박병서와 사촌형 박병훈, 박동훈, 매제 정정훈을 소개했더군요. 지금은 몇사람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어떻든 집안에 박사와 교수가 많은 것은 근검절약과 학문을 중시했던 선대의 영 향인 것 같아요. 다섯 자녀들이 각계에서 모범적인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고 11명의 손자손녀 외손들이 사회에 나가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 그 밖에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사람에게는 자유욕구성과 통제욕구성이라는 두 개의 근본적 본능이 있는데 나의 지난 80년 인생은 중요한 고비마다 자유욕구성이 억 압되고 통제적 규율 속에 살았던 인생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는 일제와의 전쟁 속에서 인내와 극기를 강요받았으며, 대 학에 들어가서도 겨우 2주간 공부하고 피난길에 올라 1년을 휴학한 뒤 복교했더니 전국의 대학 졸업예정자들이 간부후보생으로 교육 을 받게 되어 결국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졸업을 하게 되었지요. 선친께서는 내가 자유분방하고 의지가 약한 점을 걱정하시어 귀가 아프도록 '인내와 신념'을 강조하시며 '풍월을 읊지 말라' '한시짓기를 하지말라'고 하셨는데 지금 세상 같으면 그러지 않으셨겠 지요. 결국 인생에 낙오는 되지 않았으나 아쉬운 점이 많아요. 특히 한 가지 아쉬운 것이 바둑을 배우지 못해 노후에 친구와의 파적 ( 破 寂 )거리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점이지요. 하하.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100세에 타계하신 부친처럼 계속 노익장을 유지하시고 지금이라도 바둑을 꼭 배우시길 권합니다. 연보 전남 해남군 화산면 월호리 출생 광양공립심상소학교 입학, 담양공립초등학교 졸업 광주서중학교 입학, 서울 중앙중학교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 주요 경력 고문서정리 촉 탁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 수 서울대학교 법률도서관 관장 서울대학교 도서관 규장각 관리실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학부장 서울대학교 도서관 관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1996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명예교수 한국법사학회 회 장 한국고문서학회 회장 한국가족법학회 회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자료심사실 객원교수 학교법인 한성학원 이사장, 이사 101

102 2000 현재 한국학대학원 초빙교수 2008~현재 학술원 회원 주요 저서 한국법제사 특수연구(1960) 전통적 법체계와 법의식(1972) 한국법제사고(1974), 한국의 법(1974) 한국의 전통사회와 법(1985), 가족법(1985) 세종시대의 법률(1986), 가족법논집(1996) 근세의 법과 법사상(1996) 호남지방 고문서기초연구(1999) 조선양반의 생활체계(2004) 상훈사항 법률문화상 금호학술상 국민훈장 목단장 현암법률저작상 한국토지법학회 제1회 학술상 102

103 윤내현( 국사학자. 전 단국대 교수) 우리 문화원형 찾아 고대사 연구 평생 바쳐 "윤내현교수님을 아십니까?" "네, 역사학자 윤 교수님이요? 고조선과 단군에 대해 연구하신..." "그렇죠. 고조선을 신화가 아닌 역사로 복원하는데 크나큰 힘을 발휘하신 분이 윤내현 교수님이죠. 윤 교수님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 린 아직도 고조선은 한반도에 있었고, 그 건국도 기원전 700년경이라는 설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중국이 동북공정이다 뭐다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데 우리고대사가 여지없이 중국에 묻힐 뻔 했 군요." "윤내현교수님은 대고조선설, 대륙백제설, 열국설 등 많은 설들의 문헌적 증거를 찾아낸 분이기도 합니다. 학문적 성과가 대단하시 죠. 그런데 그 분이 전남 해남출신이란 것도 아세요?" "아, 그런가요? 그건 몰랐는데요. 역시 좋은 고장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오는군 요. 얼마 전 열반하신 법정스님도 해남출신이죠?" 최근에 한 지인과 나눈 대화다. 신문에 해남출신 출향인사 인터뷰를 싣기로 하고 찾아 본 인물 중에 윤내현교수님(71)은 의외로 고향 사람사이에서 덜 알려져 있다. 비교적 조용한 목소리로, 오로지 아무도 건드리려하지 않던 우리 고대사연구에 한 평생을 보내고, 지 금은 평생 재직하신 대학에서도 은퇴해 집필에만 몰두하고 계시는 윤교수님을 지난 주말 서울 시청부근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 처음 뵙겠습니다. 교수님의 업적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서울에서 쭉 활동해 오신 까닭에 직접 뵙기는 처음입니다. 고향 해남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죠." "하하, 내 고향은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예요. 흰백 字, 포구포 字, 白 浦 理...그보다 공재선생의 고택이 있는 곳이라고 하면 더 잘 알까? 백포리, 옛 백방포(백포)는 백방산, 망부산 등 전설이 살아 있는 곳으로 백포 들머리 신방리 연방죽의 그림 같은 풍경이 유명하지요." "아, 유명한 고산( ( 孤 山 ) 윤선도시인의 후손이시군요" "공재( 恭 齎 ) 尹 斗 緖 께서 9대조 할아버지가 되지요. 그 분이 고산의 증손자이시니까 孤 山 은 나한테는 12대조 할아버지가 되시고... 또 고향마을에는 집안 형님되시는 크라운제과 창업주 윤태현회장의 생가도 있고 백포리는 해남윤씨 자손들이 대대로 한 마을을 이루며 살아온 곳이지요." "' 크라운 산도' 로 유명한 크라운 제과 창업주 윤태현회장님은 작고하시기 전에 만나뵌 적이 있습니다만, 사업가라기보다 과 자만드는 장인이셨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요. 형님은 평소에 '내 자식이 먹을 수 있는 과자를 고객에게 제공한다.'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병 상에서도 과자샘플을 두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셨죠. 그게 오늘 날 크라운이라는 장수기업의 원동력이 된게 아닌가 싶어요." " 저는 교수님께서 어떻게 역사공부를 하게 되셨는지, 그 중에서도 고대사연구에 빠져들게 되신 연유가 궁금합니다. 처음부 터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시려고 작정하신 겁니까" "천만예요. 나는 과학자가 되려고 했어요. 고향에서 현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때 목포로 갔는데, 자녀들 교육 때문에 목포로 이사해 사업을 벌이신 선친께서 그만 사업에 실패를 하는 바람에 아무래도 대학을 못갈 것 같아 목포공고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런 데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어요. 내가 평소에 존경해마지 않던 아인슈타인박사의 아인슈타인, 나의 세계 관 이란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 분이 생전에 유엔에서 한 연설 중 외교관이나 정치인들에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해 하소연을 하는 대목이 있었지요. 어린 마음에 '과학자가 이래서 되겠는가'하는 실망이 오더군요. 과학자도 자신의 연구에 끝까지 책임질 수 있 103

104 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차라리 철학이나 역사를 공부하자' 이렇게 다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 아인슈타인이 과학에 접근하려던 한 청년을 역사쪽으로 밀어내 버렸군요. 덕분에 우리에겐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 장이 열 린 셈이고 " "1960년대에 동양사를 전공한다고 하면 당연히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사였지 한국사는 생각지도 않았지요. 그런데 중국 고대사 를 연구하던 중 자연스럽게 갑골문을 접하게 된 거예요. 당시 국내에서는 갑골문을 봤다는 사람도 드물 만큼 자료가 없어 어렵게 자 료를 모아 논문을 썼지요. 석사논문 제목이 '갑골문을 통해 본 은왕조의 숭신사상과 왕권변천'이었는데 교수님들이 내친김에 박사학 위논문까지 쓰라고 권유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쓴 박사논문이 '상왕조사 연구-갑골문을 중심으로'였지요. 그런데 '선배교수들 중에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 없는데 몇 년 후에 제출하면 어떤가'라는 말도 있었고 '우선 심사나해보자'라고도 했는데, 당시 논문심사를 하 신 동양사학회 원로 교수님들이 '정말 갑골문에 이런 기록이 나오느냐'고 질문들을 해요. 당시 빈약했던 학계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 지요. 학위심사가 끝나고 집에 오니 장충식 총장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저녁 늦게 총장님댁으로 찾아가 뵈었는데 대뜸 발령장을 만 들어놓았다고 학교에 남아있으라는 거예요. 갑골문이라는 특이한 분야가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까지는 한국 고대사가 아닌 중국의 역사연구에 몰두해 계셨군요" "학위는 받았으나 연구가 너무나 부족해서 1년 후에 결국 하버드대로 갔습니다. 거기서 세계적인 인류학자인 K.C. 장이라는 중국계 미국인 교수를 만난 게 행운이었어요. 당시 중국과의 국교가 이뤄지지 않아 학술교류도 무척 어려웠던 때였는데 그 분의 도움으로 홍콩의 용문서점을 통해 중요한 자료들을 구하고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의 중국 자료들은 다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중국의 근현대 사까지 다 공부하려고 했는데 고대사만도 너무 자료가 많은 거예요. 복사한 것이 상자로 60박스나 되었지요. 그 자료들을 기반으로 쓴 책이 '중국의 원시시대'라는 책입니다. 이후 기자가 실존인물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중국에서 기자가 와서 우리를 지배했다 해서 자존심 상한다고 뺀 것인데 역사연구는 정확히 실체를 규명해야지 그렇게 해서는 안되지요. 나는 그 때 한국사를 정 리할 여력이 없었고 단지 문제만 지적해 다른 학자들이 더 연구하도록 할 생각이었는데 주위상황이 내 뜻대로 가게 놔두지를 않더군 요." " 그러니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우리 고대사연구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셨다는 말씀인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습니 까" "1982년에 앞의 내용을 중심으로 '기자신론'이란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어요. 내가 중국의 사서와 갑골문의 연구로 밝힌 기자는 '상 ( 商 )나라 즉 은나라 왕실의 후예로 기( 箕 )라는 곳에 봉해진 제후였으나 상나라가 서주 무왕에 의해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한 사람이라 는 것, 기자가 망명한 곳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아닌 국경 근처 변방으로 기자는 그곳의 제후가 되었다는 내용이었지요. 즉 단군조선 은 기자를 예우하여 은나라와 동일하게 제후로 봉하여 단군조선의 변경인 국경 지역을 맡게 한 것이고 기자가 다스린 고조선의 변경 은 지금의 베이징 옆인 갈석산과 난하일대라고 한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갈석산 동쪽인 한반도와 만주 일대가 모두 고조선 땅이 되 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지요." 논문에 대한 학계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부족집단 정도로 인식해온 국내 사학계에서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고조선은 받아들여지기 어려 웠죠. 더구나 중국사전공의 젊은 학자에게 권위가 침탈된 것으로 생각하고 적대감을 보였는데 1984년 무역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논 문발표회 때 대선배 교수 한 분은 노골적으로 책상을 치면서 '영토만 넓으면 좋은 줄 아느냐,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며 화를 내시 더군요. 폐쇄적이고 학연ㆍ지연의 벽이 높은 학계에 비해 오히려 언론이나 일반 국민의 관심은 컸습니다. 동아일보의 김중배논설위 원이 횡설수설에서 나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다뤄주었고 며칠 후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전화가 왔어요. 문화부 장과 셋이서 점심을 먹으면서 '민족의 고향, 고조선을 가다'란 특집을 기획해 두 달동안 연재를 하기도 했지요." 그동안의 일반적 통설과 다른, 교수님이 주장하신 고조선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요약하긴 어려운데 우선 고조선은 실제로 있었는가? 그 연대와 위치는 어떠하며 인근에 있던 중국과의 관계, 체제 등에 관 104

105 한 것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신화라고 생각하는 단군왕검과 고조선이야기가 신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조선은 2000년 가까이 존재 한 나라로 봅니다. 문헌적 기록뿐만 아니라 중국 랴오닝성의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청동기는 방사성탄소 실험결과 기원전 2400년 정도의 것으로 판명돼 단군조선의 실재 가능성을 확인시켰지요." 워낙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가시다보니 대학강단에 계시면서도 비정통역사학자니, 국수주의자니 하는 오해도 많이 받으셨죠? "한때 '북한학설을 따르는 자'라는 오해도 받았고 거꾸로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면 독재정권에 협력하 는 학자로 매도당하던 시절도 있었지요. 그러나 최근에 고대사 특강에 청중이 몰리고 '고조선 제대로 알기' 열풍이 부는 걸 보면 그 동안 외롭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무엇이며 우리가 수천년 전 고대사를 연구하는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라기보다 그 사건 속에서 정신과 의미를 찾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실제로 우리는 '홍익인간'을 주창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분이 다르면 같이 하지 않는 중국과 달리 우리민족들은 남녀노소 차별 없이 연일 먹고 마시고 가무를 즐겼다고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불교 유교처럼 지배계층의 이념으로 작용한 외래문화가 유입되기 전의, 온전한 민족 원형은 고조선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고대사는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고 역사학의 뿌리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 데도 고대사 연구가 무척 취약하다는 게 큰 문제지요. 망실된 우리 문화의 원형을 고대사를 통해 되찾아 이를 후대에게 바로 가르치 는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곡된 역사기술을 바로잡기 위해 자료더미 속에 묻혀 사시고 새 학설을 발표할 때마다 쏟아진 모함과 의혹의 눈길을 감내 하며 묵묵히 연구와 저술작업에 매진해 오신 교수님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 지요? "작년말로 고조선학회 회장 일을 넘기고 공식적인 활동은 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많이 바뀐 것은 사실 이지만 학자들이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온 것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건강이 허락할 때 까지 그동안 책에서 이해가 잘 안됐던 부분을 보완하고 쓰는 작업을 계속해야지요. 또 나이가 들어가니 오랜 친구, 고향의 선 후배들 과 만나는 것이 낙이기도 합니다. 매월 셋째 주 금요일에 두륜회라고 재경해남향우들이 만나서 고향이야기도 나누곤 하는데 바로 오 늘 저녁이군요. "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보 1939년 6월 11일 출생 약력 -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졸업 -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 박사 -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동아시아역사언어학과에서 수학 - 단국대학교 문과대 교수, 하버드대 인류학과 객원교수, 단국대학교사학과 학과장, 박물관 관장, 문과대학 학장,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단군학회 회장,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 고조선사연구회 회장 등 역임 105

106 주요저서 '상왕조사의 연구' '한국 고대의 사회와 국가' '한국고대사 신론' '중국사 1 2' '동아시아의 지역과 인간' '고조선 연구' '고조선,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한국 열국사 연구' '사료로 보는 우리고대사'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등 다수 수상 '오늘의 책'상, 일석학술상 금호학술상 국무총리 표창 등 존 리( 이오영.. IDF 사무총장) 106

107 섬김과 나눔의 삶 실천하는 국제 구호활동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연말연시를 맞으면서 온 시내가 북적거린다. 먼 중동지역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예수의 탄생이 온 세계 사람들 의 기쁨이 되고 큰 명절이 된 것은 기독교가 실천하려는 '사랑'이란 명제가 그만큼 크고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 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 크리스마스의 정의는 바로 하늘에서 영광인 것처럼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분쟁과 전쟁이 있는 곳에는 전쟁을 멈추고, 가난과 질병이 있는 곳에는 치료와 배고픔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 곧 평화를 실천하는 것이다. 황산면 연당리출신 존 리(56, John Lee, 한국명 이오연)박사는 이 같은 예수의 교훈을 몸으로 실천해 온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알려 져 있다. 황산초등학교(44회)와 황산중학교(15회)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졸업 한 후 일찍이 미국에 건너가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러다 특별한 사명이 있어 UN NGO기관인 IDF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다. 올 7월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제 3세계를 위해 봉사한 공로로 미국 바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으로부터 봉사상과 골드 메달을 받기도 하였다. 세계 173개 국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 민족의 '디아스포라'인들과, 제 3세계 개발지역 국민들을 도울 목적으로 시작된 (사)'돕는 사 람들' IDF 운영이사장이기도 한, 리박사가 지난 19일 '사랑 나누기 자선의 밤' 행사를 위해 잠시 한국에 나왔다. 국내외적으로 경제사 정이 좋지 않아 지구촌 곳곳이 불안하고, 구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은 여전히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박사와 고향 해남에 대 해, 그리고 진정한 이웃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녕하십니까? 해마다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이웃사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데요. 사무총장님은 일 년 열두 달이 모두 이 웃사랑 실천의 달이군요. 하하, 그런 셈이 되었군요. 해남 촌놈이 미국에 살면서 늘 마음속에 품은 뜻이 있는데 그 것은 남을 한 번 멋지게 돕고 사는 것이었 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초등학교(지금은 초등학교라 한다지요)다니면서 학교에서 주는 옥수수가루 죽과 빵을 먹었습니다. 미국에서 살다 보니 UN, NGO 단체들이 우리조국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빚진 자의 마음으로 지금의 일에 매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IDF가 어떤 단체인지 듣고 싶습니다. IDF는 International Diaspora Founda tion의 약자로 1996년 북한 동포와, 1860년 연해주로 이주했던, 고려인 및 세계에 흩어져있 는, 한 민족 '디아스포라'인들을 돕고자 미국에서 설립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란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조국을 떠나 망향의 슬픔을 갖고 사는 사람을 말하지요. 보통 팔레스타인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된 유대인의 경우를 말하지만, 최근 사회이론에서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 전쟁난민뿐만 아니라 본국에 살지 못하고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는 전 세계에 700여 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임진왜란 때는 강제로 몽골 멕시코 등에 노예처럼 팔려갔고 일제침 략 후는 망명과 강제징용 등으로 흩어졌습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다시 한 번 우리의 자녀들이 해외로 입양되어 열다섯 개 국가에 15만여 명이 살아가고 있다고 하죠. 더러는 보다 나은 기회와 안전을 얻기 위해 스스로 본토를 떠난 '디아스포라'가 있지만,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국을 떠나 망향의 슬픔을 갖고 떠도는 백성, 또는 지배국들의 강요적인 추방정책으로 어디론가 떠나가 가난과 고통으로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들에게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무총장님은 사단법인 ' 돕는 사람들' ' IDF 운영 이사장이기도 하신데요, 두 기관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두 단체는 같은 목적으로 설립됐습니다. 다만 '돕는 사람들' IDF는 지부개념이 아닌, 한국에 있는 별도의 재단으로 해외구호뿐 아니 라 우리의 양극화 문제, 북한동포 문제, 이웃의 장애우, 소년소녀가장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IDF USA와 긴밀한 협조를 하고 있 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미국인 신분으로 그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활발하게 구호활동을 펼쳐오셨는데 지금 현재 가장 도움의 손길이 필요 한 곳은 어디라고 보시는지요? 어떤 질문을 하시려는지 알겠는데요. 과거 사회주의국가체제를 갖던 나라들이 대부분 어렵지요. 아프리카지역은 물론 볼리비아나 라 107

108 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같은 재해지역도 어려운 곳이 많이 있지만 솔직히 북한의 사정이 가장 좋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 기관에 서 모금한 것만 해도 (미국본부) 약 4,000만 불 어치 현물을 모아 지원했습니다. 해마다 3~4회씩 북한을 다녀왔지요. 천안함 때만해 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던 구호활동이 연평도 사건이후 올 스톱인데 감사할 줄 모르는 그들이 밉지만 한편으로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입니다. 앞에서 예전 원조를 받은 나라의 국민으로서 ' 이제 멋지게 남을 돕고 싶다' 고 하셨는데 진정한 이웃돕기랄까? 사랑의 실천 에도 철학과 소신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돕고자하는 나눔의 마음은 생각의 끝이 아니라, 작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는 행복한 다짐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 나눔 의 문화는 개인을 변화시킨다고 하지요. 저는 이 일이 진정으로 즐겁고 다른 어떤 일보다 행복감을 주기 때문에 하고 있습니다. 부모 들이 솔선하여 이웃사랑이나 나눔의 문화를 실천한다면 구태여 자녀교육을 따로 할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자 식은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 사회는 빈곤, 인권, 교육 등 수많은 사회적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데에 관심을 갖고 사회 가치를 창출하는데 모든 힘을 모아 가 는 것, 또 이런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며 진정한 기쁨과 의미를 찾아가는 축복의 길이 될 것이라 봅니다. 구체적으로 그동안 어떤 지원을 주로 하셨나요? 저희 기관은 구호방법에 제한이 없습니다. 의료봉사, 개발, 교육, 식수환경 개선을 위한 우물파기, 이. 미용 무료봉사, 하루 밥 한 끼 제공하는 밥 퍼 운동 등 이들 봉사활동들은 현물이나 현금으로 지원해주는 후원자들이 있기도 하지만 몸으로 봉사하는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이들을 씨줄, 날줄로 엮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는 것, 이 일에 한번 빠지면 다른 일을 하기 가 어려울 만큼 중독이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봉사에 대한 보람과 성취를 얻는다면 이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고민을 하고 있어요. 한 대학으로부터 부총장직을 제안 받았는데 오랫동안 해보고 싶던 일이라서 선뜻 포기를 못하겠어요.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상도 받으셨던데 무엇에 대한 시상이었습니까? 제가 16년 동안 제 3세계를 위해 봉사한 공로로 지난 7월에 미국 바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으로부터 봉사상과 골드 메달 을 받았습니다. 일례로 아이티에서 일어난 지진은 사망자만도 10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죠. 세계 각 곳에서 많은 구호 금품이 전달되었지만 현지에 가보면 여전히 절망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린이들과 주민들에게 물질적인 구호품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즉 태권도등을 가르치며 스포츠를 통한 희망을 함께 전해주려 했습니다. 이런 한 공로가 인정된 것 같습니다. 일반인들은 마음은 있어도 국제구호활동에 방법을 몰라 참여를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IDF는 미국에 있는 직원만 해도 지금은 600여명으로 조정을 했지만, 일이 많을 때는 2,000명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경기도 평촌에 있는 새 중앙교회 박중식 목사님 이 아시아지역책임자(총재)이자 한국위원회(회장)를 맡고 있는 신뢰할만한 UN NGO기관이죠. 목사가 책임자로 있다 보니 선교활동 을 위한 것 아니냐하시는데 저희는 교파나 종파를 초월하여 후원자와 피 후원자를 연결하고 작은 성금도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 단 체 말고도 굿네이버스나 월드비전 같은 국제구호단체들이 있는데 기회가 올 때마다 어디든 참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19일 행사는 잘 마치셨는지요? 그리고 앞으로의 일정은? 처음 예상했던 4천명의 참석인원을 초과한 5천명이 넘는 내외 귀빈과 후원자들이 참석하여 자선의 밤을 빛냈습니다. 해남 출신 최대 호 안양시장, 김성제 의왕시장, 영화배우이자 개그우먼 박희진씨도 오셨고 방송인 김성환씨가 사회를 맡아 사랑과 봉사 나눔의 조화 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잔칫날이 되었죠. 저는 2011년 첫 구호대상국인 라오스로 곧 떠날 계획입니다. 라오스에는 약 30억(한화) 상당의 구호품을 건넬 예정으로 지금 선적작업중이지요. 해남출신으로 이렇게 폭넓게 국제적인 구호활동을 이끌어가는 분이 있다는 게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바쁘시더라도 고향에 가끔 들러주시고 해남의 아들로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차남인데(부친은 운수업을 하던 이용운씨, 작고) 현재 고향집에 남동생이 아직 농사를 짓고 있어요. 먼 타 향에 있다 보니 항상 고향이 그립습니다. 그래서 밥 퍼 활동에 사용하는 쌀도 해남 황산농협 쌀을 쓰고 있지요. 하하. 연보 1955년 해남군 황산면 연당리 출생 108

109 황산초등학교(44회)와 황산중학교(15회)를 졸업 1986년 도미 Oakland City University (B.A.)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M. Div) 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D. Min) (A Study of St. Paul's Preaching in Acts. 박사학위 취득) 미국 Vision Christian University 교수 역임 라디오 코리아 은혜의 시간 진행 (A.M 1230) 미주 동포뉴스에서 선정한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사람들 '칭찬 합시다' 선정 우리 민족 서로 돕기 운동 L A본부 사무총장 겸 집행위원장 역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선정한 한국 교회 차세대 지도자 100명 가운데 한사람으로 2003년에 선정됨 현 IDF 사무총장(UN. NGO International Diaspora Foundation USA ) 현 사단법인 '돕는 사람들' IDF 운영이사장 미 오바마 대통령 봉사상 및 골드메달 수상 (2010년 7월1일, 제3세계를 위한 봉사 공로) 오영석( 전 한신대 총장) 109

110 '하나님 전 상서' 쓴 뒤 대학총장 된 해남소년 편지를 대신하여 인터넷 메일이나 휴대폰 문자가 등장한지 오래다. 편지라는 낭만적인 통신수단이 세상을 연결해주던 느슨했던 시대 에 하나님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꿈을 전달하려 했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신이었다. 소년은 그 꿈을 이루 었을까? '하나님 전 상서'의 주인공 오영석목사(67. 전 한신대 총장)를 만난 건 그의 꿈이 영글고 펼쳐졌던 서울 강북구 수유동 도봉 산 아래 한신대 대학원 캠퍼스, 대학교 설립자인 장공 김재준기념관 앞 잔디밭이었다. 해남사람이면 거의 다 아는 총장님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 하나님 전 상 서' 라는 편지를 써서 무작정 우체통에 넣었다구요? 말하자면 무대포 정신이랄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꿈을 꾸시 고 이룩하셨는데 어떻게 어린 소년이 그런 용기를 내셨는지요? "하하 무대포정신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막다른 골목에서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이판사판 뭐든 해보는거. 아무 것도 하 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이 가난해 진학을 못했는데 너무나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서 견딜 수 없었지요. 어느 날은 후배가 소개해 준 목포 유달원이라는 고아원을 버스비도 없어 운전수한테 욕을 먹어가며 찾아갔는데 '가족이 있으면 유달원에서 살 수 없 다'고 해서 고하도에 있는 다른 시설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어요. 거기서도 받아주지 않아 다음날 아침 목포로 나와 큰 상점과 가게를 돌아다니며 점원으로 쓰고 대신 야간 중학교를 임금 대신 보내 주도록 호소를 했지요. 그러나 아무도 그 절실한 호소를 들어주지 않아 뜻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당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들려주십시오. 무대포정신이 통하지 않자 하나님께 편지를 쓰신 거군요. "고아원이라도 들어가 공부하려했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전처럼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땔감을 해오거나 논밭 에서 어머님과 함께 일을 했는데 마음은 항상 공부 생각 밖에 없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년이 지나고 2년째 여름방학이 되어 동네교회에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는데, 광주에서 간호학교에 다니는 여선생님이 와서 성경을 가르쳤어요. 그 선생님은 설교와 위생교 육 외에도 '장발장'같은 흥미진진한 동화를 많이 해주셨는데 큰 감명을 받았지요. 당시 나는 교회 종지기로 아침 저녁 종을 쳤는데 하루는 종이 비틀어져서 위에 올라가 바로잡고 내려오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서 앞이 보이지 않더군요. 선생님 같은 여성도 배우면 저렇게 큰일을 하는데, 나는 왜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허송세월하고 있나 기가 막혀서였지요. 한참을 종 각 위에서 울다가 땅으로 내려와서 종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희망하는 일이 이뤄지도록 자신이 믿은 신께 빌거나 기도를 하는데요. "기도도 엄청 했지요. 낮에는 산과 들에서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라'고 기도하고 저녁에도 잠이 깊이 들면 하나님 이 부르는 것을 듣지 못할까 봐 자다가 깨다가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때 하 나님이 내편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어요." 어느날 우체통에서 편지들을 꺼내 분류하던 해남읍 우체국 직원들이 ' 하나님 전 상서' 라는 낯선 편지를 보고 우체국장께 드 렸는데 그 우체국장이 마침 해남읍교회의 신실한 신도였고, 결국 그 교회 이준묵 목사님께 전해져 공부의 길이 열렸다고 하지요. 아무렇게나 써 넣은 ' 편지한 장' 이 그토록 원했던 학업의 길을 열어준 현실로 나타났는데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적입니까. 진정한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아무렇게나 쓴 편지가 아닙니다. 그 편지를 쓰기까지 얼마나 오래 생각하고 궁리하고 또 기도를 했겠습니까? 소년이 할 수 있는 방 법을 다 하고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담판하듯 편지를 보낸 것이지요.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린 나의 기도를 듣고 내 편지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답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대답을 기다리는 심정이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김찬원이란 해남읍교회 장로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내 편지를 읽어본 이준묵 목사님께서 찾는다는 것이었습 니다. 1956년 3월 6일인데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어 비를 맞으면서 사정교회 장로님께서 주신 비파나무 분재 한그루를 안고 버스에 올랐었지요. 나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은 그의 역사를 사람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기적'이라고 하지요." 110

111 이준묵 목사님을 만나 그가 운영하시는 등대원에서 중? 고등학교를 마치고 의과대학에 합격했는데 도중에 진로를 바꾼 배경 은 무엇입니까? "의대를 택한 건 목사님 사모님의 추천이었지요. 1962년 2월 해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선배와 함께 전남의대에서 보낸 합격증을 첨 부하여 지원서를 제출하려고 버스를 탔는데 차 안에서 선배가 이런 말을 하는거예요. "아프리카에서 병든 흑인들을 무료로 치료하여 주는 슈바이처 박사같은 좋은 의사가 되려면, 슈바이처 박사처럼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 받은 후에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거 예요. 그래서 뜻을 바꿔 1962년 2월 20일 경에 한국신학대학에서 다시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2월말에 이준묵목사님께서 등록금을 갖고 오셔서 등록을 하려는데 "오영석 학생이 일등을 하였으므로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하며 삼성모직에서 각 대학의 수석입학 생들에게 준 양복 기지 선물까지 주었지요. 그 기지로 교복을 지어입고 한신대 교정에 들어서던 기억이 어제일 같군요." 해남 뿐만 아니라 교계에서는 거의 성자로 알려지신 이준묵목사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목사님은 호남의 굴지의 기업가로 아시아 자동차 공장과 나주 비료공장을 창업한 이문환 회장님의 동생이기도 하지요. 원래 결혼을 하지 않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거지 성자로 불린 이현필 선생님과 강순명 목사님과 함께 활동을 하셨죠. 어느 날 중국에 선교사로 가 려고 모든 수속을 밟고 광주에 계신 부모님과 형님에게 송별 인사를 갔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면 집안호적에서 삭제하겠다."는 엄포 에 포기를 하고 김수덕사모님(당시 간호사)과 결혼하셨다고 해요. 김수덕 사모님은 목사님보다 더 넓은 아량과 덕과 깊은 지혜를 지 닌 분이셨지요. 당시 읍교회의 신자들은 20 명에 불과했는데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시면서 교회는 점차로 부흥 발전해 36년 목회하시고 은퇴하실 때, 신자들의 숫자가 400명이 넘었어요. 6 25가 나자 전쟁고아들과 걸식아동들을 모아 돌보았고 새마을 운동이 시작하기 훨씬 전인 50년 후반부터 농촌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군단위로는 전국에서 제일 처음에 해남읍에 YMCA를 창설하신 분이죠. 나주 비료공 장에서 일하던 독일 기술자 호만씨의 협조를 통하여 해남에 호만학교를 설립하시고, 가정형편 상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는 많은 학생들에게 중고등학교의 교육을 받도록 하신 교육자였습니다." 해남출신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자와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한신대총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총장님께서 추 구하는 기독정신이랄까 진실한 기독교인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제가 한국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캠퍼스, 그것도 장공 김재준기념관 앞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바로 장공신학을 통해 기독교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장공신학의 중심주제는 '현실과 변혁'이지요. 그분은 음식 속에 들어간 소금처럼,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 간 누룩처럼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현실을 그리스도 생명의 현실로 변혁해 가야한다는 생활신앙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사회참여운동에 앞장서며 민주화 운동에 교회가 적극 뛰어들도록 길을 폈고 보수 일색으로 경직됐던 한국 신학계에 현대신학 의 물줄기를 들여와 교회 갱신에도 힘을 썼지요. 그 분을 따르던 인물들, 장준하, 문익환, 강원룡, 안병무박사 등 민족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고비마다 양심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사람들을 보면 참 기독교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 뒤에 도서관 입구에 써진 성경문구는 히랍어인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이지요." 대학에서 은퇴를 하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한신대학교에서 교수와 총장으로서 25년 남짓 재직하다가 2005년 8월에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서 일주일에 한 번 씩 한 세미나를 인도하며, 세계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의 교회교의학을 번역하는 책임을 수행하고 있지요. 그의 신학사상 은 20세기 초에 신학사상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의 교의학 책이 워낙 방대하고 깊고 어려워서 번 역하기가 어려운데 13명의 저명한 교수들이 참여해 많은 진전을 이뤘지요. 그 책이 모두 번역 출판돼 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읽고 공 부를 한다면, 한국교회와 강단의 생명력은 훨씬 풍성해지고 활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지난 해 여름부터 네 달 동안 고향 해남읍교회에 오셔서 목회를 하셨는데 아주 오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네,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어서 잠시 설교목사로 갔었는데 기회가 되면 고향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기름진 흙을 실컷 밟으면서 해 남에서 살고 싶습니다. 지금도 잠을 잘 때 꿈을 꾸는데 꿈의 대부분이 거의 고향에서 펼쳐집니다. 금강곡의 맑은 물소리와 풍경들, 중고등학교 때 땔감을 하러 갔던 우슬재, 해남군청 광장 앞의 아름드리 나무들과 시끌벅적한 고도리 장터는 마음이 울적할 때면 찾 아가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지요.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특별히 이준묵 목사님과 사모님의 큰 은혜와 해남읍교회에서 큰 도움을 111

112 받았지만,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 빚진 죄인의 심정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한신대 장공기념관 앞에서 뵙게 돼 매우 즐거웠습니다.. " 해남이 한국에서만 아니라 세계에서 빛을 발하는 문화 의 고향이 되기를 바란다" 는 총장님의 기도가 꼭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연보 전남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생 1962 해남고등학교 1969 한신대학교(신학사, Th. B) 1971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신학석사, Th. M.) 1982 스위스 Basel University(신학박사, Th. D.) 1972~1975 전남 해남 백야교회 목회 1975~1976 전남 해남 해남읍교회 목회 1984~2007 한신대학교 교수(조직신학, 신학과) ~ 7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 객원교수 1997~1998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 1998~2000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장 1999~2002 칼 바르트 학회 회장 ~ 한신대학교 총장 2009~현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이해동( 목사.. ' 행동하는 양심' 이사장) 어려운 일 도맡아 원만히 해결하는 '양심설거지 꾼' 5월이다. 라일락과 아카시아향기가 가득한 좋은 계절이지만 5 18의 아픔이 새겨진 역사의 달이기도 하다. 이맘때면 특별히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민주주의와 역사를 생각하고 이를 위해 일하다 죽음과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112

113 생각나기도 한다. 해남군 황산면 출신 이해동 목사님(77)은 자신이 직접 3 1민주구국사건과 80년 5 18때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내란음모죄로 몰려 두 번의 옥고를 치루기도 했지만, 지난 정부에서는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으로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억 울함을 당한 무고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준 특별한 역할을 했다. 지금도 개혁세력의 분열을 걱정하며 민주통합 국민행동 운동에 앞장 서 계신 목사님을 경기도 일산 성저마을에 있는 자택으로 찾아 가 말씀을 들었다.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목사님께서 일찍부터 기독교장로회 교회에 계시고 이북출신 인사들과 교분이 깊으셔서 그런지 우리고장 해남출신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무슨 그런 오해를. 정확히 해남군 황산면 우황리라고 왜 공룡발자국 발견된데 있지 않습니까? 인조대왕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이 신 6대 조부 여릉( 驪 陵 )군 明 자 錫 자 어른께서 해남에 귀양을 와 터를 잡으신 곳이 우황리예요. 증조부가 참판을 지내셨는데 그 곳에 서 이참판 댁이라고 하면 많이 알죠. 국민학교 5학년 때 해방이 되었는데 황산국민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렇군요. 남녁 끝 해남에서 어떻게 진보적인 기독교장로회 목사가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 보면 대부분의 동네사람들에게 하대를 하는 전형적인 양반출신인데 어머니가 목포 정명학교를 졸업한 기독교인이셨어요. 어머니의 영향으로 집안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는데 어머니는 어느 날 소위 계급타파를 시도했죠. 남자들의 경우 장가를 갔으면 양존 을 하고, 여자들은 나이기준으로 연상이면 존대, 연하면 '하게'라는 평존으로 바꾸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형식적 계급타파가 뼈 속까지 스며들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자 동네 분들과 하나가 되자는 생각에 마을 동각에 교회를 열기로 했지요. 목포 중앙교회 이국선목사님의 지원으로 전도사 한 분이 매주일 배를 타고 와서 예배를 보았는데 처음 예배 를 보던 날 중앙교회 풍금을 그 시골까지 지고 와 예배를 보던 기억이 납니다. 모친의 영향으로 신앙을 갖게 되고 목회를 하시게 된 것이군요? 중학교는 목포에서 다녔어요. 목포공업중학교라고 6년제인데 6.25 후에 분립되면서 목포제2중학교와 목포공고로 나뉘어졌죠. 고등학 교는 목포고등학교 4회로 원래 2회여야 하는데 전쟁 통에 어쩌다 보니 2년이나 늦게 들어가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김재준목 사님이 학장으로 계시던 한신대에 들어가게 된 게 그 후 목회생활과 민주인사들과의 교분으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지요. 고 김대중대통령은 목포상고출신이시고 평생 동지처럼 지내셨는데 그분과는 고향에서 만나셨습니까? 천만에요. 연령대로 봐도 목포에서 직접 만날 수는 없죠. 1954년 그 분이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처음 출마했을 때 내가 고 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유세장에 연설을 들으러는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직접 대면한 것은 1976년 3월 8일인가, 9일 서소문에 있던 검찰청 대기실에서였습니다. 이른바 3.1민주구국사건으로 일주일 가량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은 후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 되기 위해 한 밤중에 검찰청으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고 대기실에 오니 거기에 김대중대통령이 계셨습니다. 그 때 함께 구속되고 재 판을 받았던 분들이 문익환 목사님, 윤반웅 목사님, 서남동 목사님, 문동환 목사님, 이문영 박사님, 안병무 박사님, 신현봉 신부님, 문정현 신부님, 함세웅 신부님, 윤보선 전대통령, 함석헌 선생님, 정일형 박사님, 이태영 박사님 등인데 많이 고인이 되셨네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가까이에서 접하신 고 김대중 대통령의 면모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두 번 감옥생활을 했는데 우연히도 두 번 다 김대중대통령과 함께였습니다. 같은 이유로 감옥생활을 하면서 그 분에 대한 이해 의 폭과 깊이를 한층 새롭고 두텁게 할 수 있었다할까요? 첫째 부드럽고 섬세한 그 분의 인간성입니다. 76년 당시 재판이 매주 토요일마다 대법정에서 열렸는데 우리 재판이 있는 날이면 검 찰청이나 법원의 다른 모든 업무는 중단되고 민간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가운데 온종일 우리 재판만 엽니다. 관련 피고인들 모두가 독거수감 되어 평소에는 접촉이 불가능한데 재판이 있는 날은 예외죠. 재판정에 오고가는 차 안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 분의 인간성과 따뜻함에 놀랐고 두 번째는 그 분의 실력입니다. 3.1민주구국사건 관련자들은 모두들 상당한 실력을 갖춘 학자들이 많 았는데 함께 나누는 대화에 전혀 거침이 없습니다. 정치, 경제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신학이나, 철학, 특히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 식은 정말 놀라웠죠. 세 번째는 그 분의 돈독한 신앙심입니다. 몇 번이나 죽음에서 살아나온 개인적 체험을 개인구원이나 영혼구원의 저급한 차원으로 매몰시키지 않고 사회구원의 동력으로 삼는 건강한 신앙의 소유자라는 점은 정말 믿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113

114 지난해 김대중 대통령 서거 후 재야원로급 인사들이 주축이 돼 ' 민주통합시민행동' 이란 단체를 만드셨는데 그 후의 진전 상 황이 궁금합니다.. ' 민주통합시민행동' 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요. 사실 김대중대통령 시절과 노무현대통령 시절 10년 동안은 재야단결의 필요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지요. 오히려 정권감시 정도였다 고 할까. 그런데 현 정부에 들어와 걱정하는 목소리가 이심전심 전달되고 노무현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민주개혁진영이 연합해야겠 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대중대통령이 돌아가시면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의 유지인 민주, 민생, 평화를 지키기 위해 서라도 뭔가 행동이 필요하게 된거죠.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거예요. 80년대 말 6월항쟁 이후 시민운동이 확산되지 않았 습니까? 인권운동뿐 아니라 환경운동, 여성운동, 소비자운동 등 다양한 목소리들이 많아지면서 저변확대는 되었는데 그만큼 구심점 은 약화 된 거죠. 민주대연합시민행동은 시대적 요청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지만은 않더군 요. 누가 그것을 하느냐에 따라 내용도 달라지고 비슷한 이름의 단체가 네 개나 생기고요. 허허. 행동이라면 정치적인 활동을 연상시키는데 목사님은 바쁜 일상을 사는 시민들이 어떤 행동을 해주기를 바라십니까? 김대중 대통령 이야기를 좀 더 하지요. 지난해 6월 9일입니다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김대통령께서 준비위원 들을 모아 수고했다며 점심을 사주었습니다. 여의도 63빌딩 어디였는데 울먹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정권이 잘못을 하면 나쁘 다고 말을 해라, 항의도 하고, 글을 쓰고, 투표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벽이라도 향해 욕을 해라"라고요.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그 분은 전직 대통령이라는 편안한 권좌에 앉아 계시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분의 '행동하는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우리 역사에서 계속 계승, 발전시켜야 할 위대한 가치입니다. 어느 정당이나 개인 이 사유화할 것이 아니고 역사가 공유해야할 가치라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DJ는 말 바꾸기 선수'니 '실용주의자'니 하지만 민주주의와 민족화해라는 원칙과 이상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으며 두 가지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방법론으로서 실사구시를 선택한 것이라고 봅니다. 거의 도통한 경지이죠. 이제 곧 지방선거가 실시되는데 그 분이 살아계셨으면 틀림없이 투표를 통한 '행동하는 양심'의 실천을 다시 한 번 강조했을 것입니 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자유, 서민경제 지키고, 평화로운 남북관계 지키는 이 일에 모두 들고 일어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희망 있는 나라를 만들자"고 돌아기시기 전 6 15기념식에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선 투표라도 잘 해야 합니다. 언론인 김종철 선생님은 목사님을 가리켜 ' 설거지 꾼' 이라는 표현을 했더군요. 그만큼 어려운 일을 많이 맡으시고 원만히 해결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겠지요. 특히 지난 정부에서는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크게 실적을 남기셨는데요. 내가 인연을 맺은 건 김 전 대통령인데 이상하게 노대통령시절에 감투를 많이 썼어요. 충북에 있는 서원학원 이사장, 또 덕성여대 관 선이사장으로 일했고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학살진상규명법위원회와 베트남 전 민간인학살진실위원회 대표 등인데 군 의문사진상규명 위원장으로 2006년에서 2008년까지 일했던 게 제일 큰 보람입니다. 진정 건수 600건 중 395건이 해결되었고 2009년까지 나머지도 다 해결되었다고 들었어요. 단지 유일하게 결론을 짓지 못한 게 '5 18발포명령자가 누구인가'인데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가지요. 목사님으로서 자의반 타의반 정치적 행동도 많이 하셨는데 목사님이 보시는 정치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정치혐오를 얘기하지만 정치를 떠나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국민 생활 자체가 정치죠. 이제는 시민들이 오히려 정 치의 품격을 높이는 역할을 적극 해야 합니다. 건강에 굉장히 좋아 보이는데 요즘은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김대중 대통령의 유지를 살려가는 '행동하는 양심'이사장 외에 평화박물관 건립과 언론인 송건호선생 기념사업인 청암언론문화재단 일을 거들고 있습니다. 또 취미로 시작한 서예에 요즘 한창 재미가 붙었어요. 자랑하나 할까요? 한국전통서예협회 공모전에 주기도 문을 행서와 해서, 초서로 써 세 개를 냈는데 행서와 해서에서 입선, 초서에서 특선을 했답니다. 5월 12일부터 전시회도 갖는다고 해 요. 하하하. 평생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자 설거지 꾼으로 사셨으니 이제 삶을 좀 즐기셔도 되겠어요. 언젠가 이해동 서예개인전을 기대 해 보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보 114

115 이해동 목사는 평생 두번의 옥고를 치렀다. 76년 3월1일 있었던 '3 1민주구국선언사건'과 80년 5월 신군부에 의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때 각각 1년 가까이 옥살이를 한 것. 3 1민주구국선언사건은 유신통치가 극에 달한 76년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이문 영 서남동 등 10명이 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 철폐 등을 요구하는 구국선언을 발표한 일이다. 당시 33세로 한빛교회를 이끌던 이목사는 선언문 등사를 맡았다. 석방 뒤 한빛교회를 운영하며 구속자 석방운동을 벌였으나 이 활동은 79년 직후 계엄령으로 중단된다. 80년 5월에 시작되어 8 월14일 열린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군법재판은 김대중을 죽이기 위한 신군부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읽히는 '죽음의 의식'이었다. 81년 5월 1년 만에 석방된 후 83년 영국연수를 거쳐 84년부터 88년까지 독일의 한인교회에서 시무했다. 서울 한우리교회를 개척, 2002년까지 담임목사로 일하다 자원은퇴 후 재야시민운동에 앞장서 오고 있다. 약력 1934 전남 해남군 황산면 출생 196 2한신대 졸 1961~1964 목포 항도교회, 중앙교회 전도사 경기노회 목사안수 1976 '3 1민주구국선언사건'관련 구속, 295일간 옥고 1980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관련 구속, 1년간 옥고 1994~1995 제66회 서울노회 노회장 2001~2005 학교법인 덕성학원 이사장 2006~2008 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김대중대통령 국장 시 예배인도 현. 행동하는 양심 이사장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대표 청암언론문화재단 이사 5장 의료, 체육, 사회운동분야 김동환( 부평 세림병원 이사장) 국내 최고의 의료복지법인 꿈꾼다 맹자( 孟 子 )에 나오는 역지사지( 易 地 思 之 )를 원훈으로 쓰는 부평 세림병원. 역지사지를 직역하면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헤아려보라"는 뜻이니 병원에 적용하자면 '환자의 입장에서 병원을 운영하라"는 말이 되겠다. 기독교 재단이 운영하 는 병원이 아님에도 창설당시부터 원목실을 두고 생활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무료치료와 봉사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 하고 있는 독특한 병원이다. 설립자 겸 이사장의 약력 역시 평범하지가 않다. 보통 의료재단은 전문 의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는데 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공인회계사로 미국에서 잘나가는 회계사무소에 근무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형님들이 맡아하시지만, 아버지가 해남종합병원 설립자셨어요. 병원일이 생소하지가 않았죠. 더군다나 세림병원 설립 당시인 80년대 말은 전통적인 운영이 아닌 병원도 뭔가 새로운 운영기법 도입이 절실해지던 때였지요. 공인회계사로 15년간 닦은 노하우를 적용하고 싶었습니다" 1989년 6월, 인천광역시 부평구 청천동에 위치한 임직원 수 320명, 300병상 규모의 부평 세림병원을 인수, 20여년이 지난 현재 탄탄한 115

116 제약회사를 비롯하여 경기도 노인전문 여주병원, 200병상규모의 노인전문 시애노병원, 사회복지법인 세림복지재단, 세림주택, 시애노 병원 부설 전문요양센터를 개원하고 강원도 원주에 양한방 의료지원체계를 갖춘 300명 규모의 실버타운까지 조성하고 있는 해남읍 출신 김동환 세림병원 이사장(61)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자료를 통해 병원의 규모를 보면서 병원재벌쯤을 연상하고 왔는데 이사장님의 방이 생각보다 초라(?) (?)하군 요. 이 방에서 그 많은 일들을 하십니까? 하하, 병원의 주인은 의료진들이지 관리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의사도 아니고 구태여 말하자면 의료전문경영인이지요. 역대 최연소 공인회계사로 앞날이 더 밝았을 텐데 의료경영인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군요. 사실 그 분야에서도 잘 나갔죠. 회계사무소를 열어 운영하다가 83년도에 미국에 연수를 갔는데 미국에서 일했던 아더영 LA회계사무 소는 미국 내에서도 빅5중의 하나였고 그 때 현대자동차 미국지사가 설립되어 제가 매니저로 작업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자동차수출의 문을 열게 한 일이었는데 나름대로 보람도 컸지만 개인적으로 선진경영을 실천해보고 싶은 생각 이 컸습니다. 병원이라고 해서 개업한 후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닌데 이사장님의 선진경영기법은 무엇이었습니까? 병원운영의 허점을 최소화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은 병원을 장치산업으로 생각합니다. 즉 투자시설을 도구로 생각해서 과잉투자를 하더라도 벌면 된다고 생각하서 처음부터 무리하게 건물 짓고 고급 기자재들 들여오고 하는데 초기투자를 많이 하게 되면 병원은 회전율이 낮다보니 부실운영을 하게 되는 거죠. 회계사무소를 하다 보니 그런 병원들이 많이 보였어요. 현 셀트리온 제약도 악화일로의 제약회사를 인수하여 인수해 5년 만에 선택 과 집중에 의한 경영으로 만년적자의 소형제약회사를 중견제약회사로 변모시킨 경우입니다. 역동적으로 병원을 확장해 오시면서 어려울 때는 없었습니까? 병원주인이 의사가 아니다보니까 불필요한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죠. 그러나 사심 없이 운영을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제일 어려웠을 때가 막 설립하고서 IMF때였는데 근처에 있던 대우자동차가 넘어지면 서 노동자들이 대거 정리해고 됐어요. 경영학에서 한계이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변동비만 커버된다면 공장은 돌려야한다'는 이론 이죠. 그 때 의료보험이 없어진 노동자들에게 무료진료를 다해주었습니다. 그런 일들이 결국 나중에 병원발전과 신뢰감으로 돌아오 더군요. 잇달아 개원한 병원들이 하나같이 노인전문병원들인데 이것도 고령화시대를 겨냥한 운영전략의 하나입니까? 그렇다고 봐야죠. 저는 청소년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노인문제라고 봅니다. 청소년들은 어떻게든 자라죠. 그러나 노인들은 사회 가 해결해주지 않으면 자력으로 헤쳐 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경기도 노인전문 여주병원은 용인정신병원에 이어 경기도에서는 두 번째로 일찍 문을 연 노인병원인데 12,000평의 부지에 경기도와 중앙정부와 우리병원이 각각 1/3씩을 내 설립한 거예요. 지자체로는 최초로 1999년에 사업계획을 수립해 3년 만에 완공해 세림병원 이 위탁운영을 하고 있지요. 여주병원과 가까이 있는 시애노병원도 노인전문병원이지요? 이름이 매우 독특한데요. 무슨 뜻입니까? 시애노( 是 愛 老 ), '노인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선언적인 이름입니다. 증가하는 노인의료수요에 대응하고 서비스차별화를 하기 위해 2005년에 지하1층, 지상 4층 규모의 노인전문클리닉(200병상)을 증설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돌아가신 선친께서도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시골인 군 지역에 종합병원을 설립해 지역의료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화 제가 됐는데 제 몸 속에 그 DNA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아요. 하하. 그렇게 화제가 되셨던 부친에 대해서 좀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선친(김제현 옹)은 해방 전후 변호사 자격시험 합격을 비롯해 전국 최연소 의사자격 국가고시 합격, 공무원 시험이었던 보통문관 국 가고시 합격 등 짧은 기간 내에 3가지 종류의 시험에 합격하신 분이예요. 그 세 가지 중 자신의 성격과 인품에 맞는 의료분야에 몸을 담기로 하고 서울대학병원에서 수련과정을 밟은 후 6 25전쟁 때는 군의관으로 복무하기도 하셨지요. 116

117 제가 군산사범부속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광주에서 살레시오중학교를 졸업했는데 강진 도립병원장을 비롯해 광주구호병원장, 해남군 보건소장 등을 역임한 부친을 따라다닌 덕분입니다. 1993년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 때 전 병원 인력을 동원해 인명구조에 앞장선 공로로 적십자사 박애장 은장을 수상했고 1999년에 는 의료인으로서는 최초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기도 했고요. 참 과묵하고 존경할 만한 분이셨죠. 부친의 헌신적인 의료정신을 자녀분들이 고향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넓혀 경기도에서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말이 나온 김에 요즘 자주 화제가 되고 있는 의료영리법인도입에 대한 의견은? 저는 반대입니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단순한 경제적인 관계가 아니라 의료 윤리가 개입되는 행위인데 의료에 자본이 개입되면 의 료 행위가 왜곡되고 의료 윤리가 손상되지요. 우리나라처럼 아직 공공의료체계가 부족한 상태에서 환자와 의사 사이에 자본이 개입되면 경제적인 이유에서 과잉 진료가 일어나거 나, 이익을 주지 못하는 환자에 대한 기피 등 의료의 왜곡이 발생하고 결과 적으로 환자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겠지요. 해남은 공기가 맑고 기후가 따뜻해서 노인휴양시설지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는데 시애노병원 전문요양시설이나 실버타 운을 해남에 조성할 계획은 없습니까? 치매보호센터 '행복의 집'(2004년 개원)에 이어 지난해 9월에 또 치매, 중풍 등 만성 노인성 질환 어르신들에 대한 의료서비스를 24시 간 지원하는 100평 규모의 요양센터를 병원부근에 개원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노인병원이나 시설일수록 대도시를 크게 벗어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해남은 기후나 자연환경은 최적이지만 접근성에서 볼 때 오히려 젊은이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동적인 고장으 로 변하죠. 예를 들어 노인시설보다는 해양스포츠 같은 것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입니다. 장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양한방 협진을 통해 노인복지, 노인성질환 치료 및 재활과 노후 지원사업을 아우르는 종합의 료시설로의 도약을 꿈꾸는 이사장님의 구상이 더 멋지게 꽃피우시길 바랍니다. 연 보 전남 해남군 해남읍 읍내리 출생 군산사범부속초등학교, 광주살레시오중학교 졸업 1968 광주상고 졸업 1972 명지대학교 졸업(경영학 학사) 1975 연세대 경영대학원 졸업(경영학 석사) 1985 일리노이주립대 국제경영자과정 수료 주요 경력 공인회계사 합격 - 최연소 기록 1974 ~ 1989 공인회계사 개업 1983 ~ 1985 미국 아더영 LA사무소 근무 부평 세림병원 인수, 이사장 취임 23개 과목(의료진 30명, 수련의 11명), 임직원 320명, 300병상 규모 한서제약(현 셀트리온제약) 인수 악화일로의 제약회사를 인수하여 간질환 전문 치료제인 고덱스를 개발하고 러시아, 아프리카 등으로의 수출판로 개척, 인수 5년 만에중견 제약회사로 변모시켜 2007년 코스닥 상장 경기도립 여주노인전문병원 개원 (현 경기도 노인전문 여주병원) 사회복지법인 세림복지재단 세림주택 설립 시애노병원 개원 117

118 2009. 셀트리온 인수 합병, 현 셀트리온제약으로 개명 시애노병원 부설 전문요양센터 개원 원주시 신림면 소재 25만 坪 의 임야 취득, 양한방 의료지원체제를 갖춘 300명 규모의 실버타운조성 예정 정철웅( 환경운동가, 현 광주과기원 감사) '지속가능한 발전'보다 '녹진화'제시 일본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능누출과 경북 왜관 캠프캐럴 기지 고엽제 매몰 의혹 등 유난히 환경보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 었던 올 봄이었다. 환경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은 이것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우리 삶에 불안감을 드리운다. "우리가 과연 하나 뿐인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때마침 내일 모레 6월5일이 '세계 환경의 날'이다. 1972년 지구환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스톡홀름에서 113개국 대표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는 <오직 하나뿐인 지구>라는 주제로, 그 날 회의에서 유엔인간환경선언을 채택했고, 유엔 내의 환경전 문기구(UNEP)를 설치하며, '환경의 날' 정해 환경논의를 정례화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러니까 환경의 날은 전 세계인이 환경을 생각 하고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구체적인 실천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기념하기로 정한 지구적인 기념일이다. 해남읍출신 정철웅 전 광주전남환경연합의장(64. 현 고문)은 여러 이력이 화려하지만 환경운동가로 훨씬 잘 알려져 있다. 1980년대 가톨릭회관 7층에서 김지하 시인의 "인간들은 지구에서 주인행세를 하면서 동식물들을 주변화하고 있다"는 강연에 필이 꽂혀 평생 환경운동에 몸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낙후된 고향 해남을 생각할 때 환경이 좀 훼손되더라도 관광 쪽으로 발전전략을 짜야하지 않느냐는 다수의 의견에도 그는 '아니 다'고 일침을 가한다. 모두들 바라고 떡고물이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J프로젝트도 그의 눈을 통해서보면 협잡이 많이 섞여있다. 환경 118

119 운동연합 공동의장의 짐을 벗고 지금은 광주과학기술원 감사로 또 다른 중책을 맡고 있는 그를 집무실로 찾아가 대화를 나눴다. 안녕하십니까? 오랜 세월 낯익게 들어온 환경운동가 정철웅선생님을 이곳에서 뵈니 좀 의외네요. 그런가요? 상임은 아니고요. 지난해 10월부터 전임자의 추천으로 이곳에 와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본업을 환경운동이란 생 각을 벗지 않고 있어요. ' 환경의 날' 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크나큰 환경문제가 많이 불거졌죠? 그렇죠. 후쿠시마원전피해로 인한 방사능누출사고를 비롯해서 경북 왜관미군기지뿐 아니라 또 다른 미군기지인 춘천 캠프페이지에서 도 고엽제를 살포, 폐기했다는 정황이 드러나며 논란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굵직한 환경뉴스가 많았는데 저는 그보다도 4대강 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영산강을 살리는 방법은 하천을 준설하고 둑을 쌓는 것이 아니라 개천과 지천부터 살려놓고 보아야 하는데 거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지요. 올 1월에도 영산강사업 6공구 준설공사현장인 서창교 주변에서 물고기 수 백마리가떼죽음 당하고 대부분의 물고기들이 폐사 직전인 모습으로 발견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 광주 전남지역의 방사선 수치가 평상시보다 4~5배, 서울의 30배 이상 높게 나타나 지역주민들이 방사능 공포로 불안한 하루를 보냈다고 광주환경운동연합이 발표를 했는데요. 오랫동안 몸담고 계신 광주환경운동연합에 대해 소개해 주 시죠. 환경운동연합은 19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에서 시작한 환경오염 피해자 중심의 반공해 운동이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으로 이어지면서 당시 공추련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열린 공간에서 대중적인 환경운동을 펼쳤습 니다. 공추련의 창립 직후 부산, 광주, 목포 등 전국에서 환경단체들이 하나, 둘 연이어 만들어지고 전국적 연대로 연합체를 결성하 게 된 것이죠. 현재 지역에는 광주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해서 환경조직이 51개에 이르고 시민환경연구소, 환경법률센터, 환경교육센터, 월간 '함께 사는 길', 시민환경정보센터 등 전문성과 대중성을 높이기 위한 전문기관들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 하나 뿐인 지구' 라는 명제는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그 사실성 때문에 섬뜩한 느낌을 주는데, 과연 인류는 ' 하나뿐인 지구' 를 보존하고 잘 지켜낼 도덕성이 있는지 의문이 드는 요즘입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오늘날 세계적으로 지구환경이 이상 징후를 보이고 재앙이 잦은 것은 그냥 생긴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지금 지구 3대 환경의 문제는 화석연료의 과다사용, 숲의 파괴, 그리고 쓰레기 양산입니다. 그런데 이상기후만 해도 받아들이는 입장이 다 틀려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인 것, 즉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거죠. 친환경을 앞세우는 '편리한 거짓말'도 난무합니다. 대중 강연은 물론 활발한 신문기고, 그리고 방송을 통해서 환경의 중요성을 역설하시고, 특히 해남발전방안의 하나로 추진 되는 J프로젝트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셨는데요.. J프로젝트J 프로젝트, 즉 해남을 포함하여 목포 무안일대 서남해안 개발은 무엇이 문제입니까? 앞서도 얘기를 했지만 국민들이 '불편한 진실'과 '편리한 거짓말'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을 해야 합니다. 서남해안 개발, 즉 J프로젝트 니 뭐니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관광 레저 기업도시만들기'예요. 골프장을 만들고 호텔이나 카지노를 유치해 국내외 관광객들을 끌어오자는 것인데 저는 우리 고장 해남, 완도, 진도 일대는 그야말로 '지붕 없는 박물관'이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어떻게 잘 보존 해야할 것인가가 나와야하는데 개발얘기만 하고 있으니 난감하죠. 환경영향평가를 거쳐 적재적소에 이뤄지는 공영개발은 저도 반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난개발, 사개발은 철저히 막아야죠. 선생님의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어떤 경로로 환경운동 쪽에 관심 갖고 몸을 담게 되셨는지요? 해남동초등학교 2학년 때 서석초등학교로 전학을 와서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 졸업 후 광주에서 쭉 직장생활을 했는데 환경운동은 김지하 시인 때문에 알게 되었어요. 그 분이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광주에 와서 강연을 많이 했거든요. 보통 가톨릭센터 강당에서 수백 명씩 빽빽이 모여 강의를 들었는데 그 분의 '생명사상'이랄까, "동물과 식물, 그리고 우주는 하나다. 인류는 이들과 함 께 공존해야한다"는 내용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어요. 고향에는 자주 가시는지, 고향에서 느끼시는 요즘 정서는 어떻습니까? 아. 물론 자주 가지요. 고향이니까. 그런데 저는 모 신문에 '해남의 브랜드가치는 추락 중'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어요. 해남엔 '천일 119

120 관'을 비롯해서 윤 씨, 민 씨 가문도 브랜드가 될 수 있고 대흥사나 토말, 울돌목, 진양 주, 한눈에 반한 쌀, 황토고구마 등 브랜드가 치가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조들이 쌓아놓은 격조 높은 브랜드들이지요. 또 브랜드가 거국적으로 훼손된 사건들도 있습니다. 돈 선거로 인한 기관장들의 구속, 사회복지기금 횡령사건 등 같은 거 말입니다. 한마디로 해남의 1순위 브랜드는 '천혜의 자연생태'이며, 이를 키우고 가꿀 책임은 1차적으로 지자체 단체장에게 있는데 그동안 이를 위한 노력들이 많이 이뤄졌다고 하나 저는 다분히 '헛손질'수준이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으론 좀 나아지겠죠. 그래도 해남의 자연과 풍광은 ' 개발의 횡포' 에서 빗겨간 듯 원초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데요. 선생님께서 보시는 해남 의 가장 멋진 곳 세 곳을 고른다면? 뭐 10개라도 고를 자신이 있지만 첫째, 송지면 어란 마을에서 바닷가 토말을 거쳐 완도 초입까지 이르는 해안가 도로입니다. 분명히 니스보다도 아름다워요. 도로 주변에 꽃과 나무를 더 심고 이곳을 달리는 차들은 40km정도로 속도제한을 해야 합니다. 둘째는 산이면 황토밭과 길인데요. 비산비야( 非 山 非 野 ), 산도 아닌 것이, 들판도 아닌 것이 왜 그렇게 가슴 저리게 하는지 모르겠습 니다. 또 대흥사 숲길과 미황사 뒤쪽 진불암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어떤가요. 가을에 가도 좋고 여름에 가도 좋고, 바다와 들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멋진 풍광에 아마도 모두 놀랄 것입니다. 이렇게 환경을 염두에 두시고 고향의 브랜드가치를 염려하시는 모습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앞으로 더 하시고 싶은 일은 무 엇입니까? 올 10월에 광주광역시와 UNEP(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시가 공동 주최하는 세계 100여개 도 시 정상들이 모이는 '2011 UEA(도시환경협약)광주정상회의'가 광주에서 열리게 됩니다. 'Green City, Bet-ter City'를 주제로, UNEP와 지방정부가 연계하여 환경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죠. 여기서 2011도시환경회의 '광주선언문'을 채택할 것인데 선언문작성기초위원장을 제가 맡았습니다. 이 선언문에 저는 소위 '녹진화'라 는 개념을 담고 싶어요. 인류사회 변천에 따른 주요화두는 산업화, 민주화, 자본화, 도시화, 세계화, 정보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화두들은 빈곤, 갈등, 오염, 양극화, 비인간화 등 각종 사회모순을 야기 시켰죠. 이를 완화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명제가 나 왔는데 이것은 경제성, 사회성, 환경성이라는 세 영역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녹진화'는 이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보전의 가치, 자연보전의 가치, 공동체보전의 가치, 미래보전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도시관리행정의 준거도 녹진화에 둘 것을 선언문에서 강하게 드러내려는 거죠. 연 보 1947년 해남군 해남읍 해리출생 해남동초등학교 2년 마치고 광주서석초등학교 전학 졸업 광주동중학교, 광주고등학교졸업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경 력 미원(주)교육훈련 주임 화천기공(주)총무과장, 기획과장 무등양말(주)기획관리실장, 상무 (주)와이엔텍 광주지사 고문 전남대학교 상임감사 한국전력기술(주)사외이사 현재 광주과학기술원 감사 사회활동 120

121 '내일신문' 광주전남운영위원장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현재 5.18기념재단 감사(비상임) 주요저술 및 기고 '잣대꽝 세상( ) 내일신문, 광주일보, 전남일보 등 칼럼 110여회 현재 '남도투데이'(KBS라디오)환경시사 방송 중 김성만( 누가선교회 이사장) 의료선교와 함께 해남강강술래 보급전념 그의 이름 앞에는 참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수식어가 함께 붙어있다. 지구촌 곳곳을 찾아나서는 의료봉사 선구자, 누가선교회 이사 장, 재경해남강강술래단 이사장, 누가메디컬센터 원장 모두 해남 문내면 공영리 출신 김성만 이사장(60세)의 직함이다. 언젠가 인 터뷰를 청하러 전화했더니 해외에서 봉사 중이라는 소식이었는데 지금은 서울에 있다. 을지로3가역 근처에 있는 좁은 사무실에서 지 난 6년 동안 이룬 누가선교회의 의료사역을 반추하며 '누가세계선교비전센터' 건립 10개년 계획을 구상 중이다. 우리는 지구촌 모든 이웃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치유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선교, 의료, 복지, 교육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 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목표지요. 이처럼 지구촌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치유를 목표로 지난 2005년에 사단법인으로 출발한 누가선교회에는 뜻을 같이 하는 의 사, 변호사, 목사, 대학총장, 경제, 사회 각층의 저명인사들이 이사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언뜻 보아도 인맥네트워킹의 달인이라 여겨 질 만큼 참 다채로운 인물들이다. 121

122 선교회의 이사진들이 교계, 학계, 의료계의 명망가들이 많군요. 고향 분들도 많이 참여하셨습니까? 선교회 중추인맥은 가능하면 전국적이고, 교파를 초월하여 구성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강희부 변호사, 전 광주발전연구원장인 채일병 원장, 이안재 전 새마을중앙연수원원장 등 고향 분들이 계시네요. 참 많이 도와주고 계십니다. 누가는 성서에 나오는 의사라고 알려진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 아닙니까? 선교회 명칭에서 바로 의료선교가 목적인 것을 알 것 같은데요. 누가는 누가복음을 쓴 학식이 풍부한 의사이며 예수님의 제자이자, 동시에 바울의 동역자지요. 누가선교회는 1995년 의사와 대학교수 들로 구성된 '한양의료복음선교회'가 전신인데, 국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펼쳐오다 1996년부터 해외로 눈을 돌려 볼리 비아, 파라과이, 페루, 칠레 등 남미 지역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벌였고, 1998년에는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 등 동남아 지역으로도 범 위를 넓혔지요. 그러다 좀 더 조직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2005년에 사단법인체를 설립했는데 현재 7명의 의료팀장과 150여 명의 의사 변호사 목사 교육가 사업가 등으로 구성된 이사진과 3000여명의 회원이 있고 45개의 협력단체가 있습니다. 해외에는 900여 명의 협력선교사 가 함께 사역하고 있습니다. 회장으로는 광주시장을 지내신 이효계(전 숭실대학교 총장)장로가 봉사해 주십니다. 종합의료법인 누가메디컬센터는 선교회와 관련이 있습니까?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의료봉사의 기반을 위해 누가클리닉, 누가치과병원을 함께 개원했는데 의료봉사 외에 선교사 부부들에게 기 본적인 의술을 가르치는 간호학원과 한의원도 열고 요즘 사회복지 추세에 맞춰 요양보호사교육원도 개설하여 15회 졸업생 약 1,500 여 명을 배출했습니다. 누가전도대학까지 하면 8개의 사업을 함께하는 셈이죠. 또 소외된 노인들을 위해 노인전문병원도 설립할 예정 인데 앞으로 건립될 '누가세계선교비전센터'는 이 시설들이 들어설 겁니다. 구체적으로 해 오신 의료봉사활동은? 원래 이 자리에 있다가 지금은 당산동으로 확장 이전한 누가치과 병원은 평일에는 정상적인 영업진료를 하지만, 각 메디컬센터에서 는 매주 토요일에는 장애인, 저소득층 가정, 외국인 근로자, 농어촌 미자립교회 목회자, 선교회 회원 등 선교회가 수용 가능한 하루 40~50여 명의 환자를 무료진료하고 있습니다. 누가한의원은 침술, 지압, 물리치료 등을 주로 하는데, 한방 진료는 짧은 기간 내에 국내외에서 봉사를 펼칠 때, 복음을 신속하게 전 할 수 있고 소형 장비로 사역의 효과를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어 누가선교회 내에서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죠. 그동안 선교지역에 가서 보면, 보내주는 약품들을 사용할 줄 몰라 그대로 방치하는 경우가 있어 간호학원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간 호학원은 1년 과정으로 이수자는 간호원자격증을 받아 국내 어느 병원에서도 취업할 수 있지요. 특히 선교사 부인들에게 장학금 혜 택을 주어 간호학원을 꼭 수료하게 합니다. 간호학원에서 습득한 기초적인 의료기술은 현지인과의 접촉을 쉽게 할 수 있어 사역하는 데 큰 효과가 있지요. 고향분이 이처럼 사회봉사활동의 선봉에서 큰일을 하시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처음 이 분야에 발을 딛게 된 계기가 있습 니까? 계기라 할 것까지는 없고 어려서부터 남을 돕는 일이 좋았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이지요. 재경 해남문내면 강강술래단 운영만 해도 저는 강강술래가 즐겁고 좋아서 따라다니다 보니 이사장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기왕에 벌인 일이니 강강술래협회도 만들고 제대로 일을 해 보아야지요. 강강술래하면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로 2009년도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가 되었지요? 자타가 인정하는 해남의 자랑거리인데 정부나 지자체의 보호육성외에 민간인협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강강술래는 정부 지정 우리 고향, 해남우수영일대의 전승문화재이며 지방마다 특색을 가지고 있지요. 전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우리 전통 문화이면서 세계가 함께 지켜야할 문화유산이란 거죠. 강강술래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전승 지역마다 조금씩 특 색이 있고 그러기 때문에 막상 실연현장에서는 서로 '자기 것이 맞네'하는 등 이견도 분분합니다. 그동안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부분도 많이 있지요. 협회가 만들어지면 체계적인 학술대회 같은 것을 가져 연구도 하고 강강술래를 배우고 싶어하는 일반인들을 비 롯해 학교에서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도자도 양성해야 합니다. 현재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나 전수자 단원들이 자연스럽게 지 122

123 도자로 나갈 수 있겠죠. 아리랑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전통문화로 저도 강강술래를 꼽고 싶습니다. 초등학생들의 체력단련에도 효과가 클 것 같고요. 그렇습니다. 한 연구를 보면 놀이와 함께 하는 강강술래는 음악을 몸으로 느끼게 하여 체득하게 하는 좋은 교육 재료이고, 우리 음악 의 가장 기층적인 구조와 원리를 담고 있다고 해요. 즉 민족음악의 모국어라고 할 수 있는 강강술래는 우리 춤의 기본이 되는 발 디 딤과 춤사위로 이루어져 있어, 몸으로 기억하여 이어온 우리 민족의 무용사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을 만 큼 쉽고 반복적이며, 민중적이자, 민주적인 놀이인 강강술래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해야 합니다. 선교와 문화사업, 다 재정지원이 필요하고 힘든 일인데 20년 가까이 성공적으로 운영해 오신 비결이 무엇입니까? 계속 성장만 한 것은 아니고 지난 2년 동안은 참 힘이 들었어요. 온 나라와 사회가 모두 어렵다보니 선교사업도 약간 위축이 되었는 데 이제 다시 조직을 정비하고 의료지원팀도 12개 분과로 새롭게 구성을 마쳤습니다. 여러 일을 하지만 마지막 목표는 선교사역이라 는 한가지이고 의료선교를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확대하여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사마리아 땅끝까지 나아가겠다는 각오가 있습 니다. 이사장님의 의지를 보니 장기목표로 세우신 누가월드비전센터의 실현도 머지않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나님의 사역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의 뜻에 의해 이뤄집니다. 선교와 의료, 교육, 복지센터로서의 누가월드비전센터는 영육의 아픔을 치료하는 전인치료 종합병원과 간호, 요양학교, 청소년과 노 인들을 위한 수양, 요양센터를 포함하는 미래형 선교본부가 될 것입니다. 연 보 해남군 문내면 공영리 출생 해남군 문내면 공영리 출생 사회활동 및 선교활동 누가의료복음선교회 창립 (저소득층 무료 및 저가 의료진료봉사 시작) 볼리비아, 파라과이, 페루, 칠레 의료봉사/ 누가 한의원 이전 및 간호학원 개원 필리핀, 태국, 싱가폴 의료봉사 사단법인 누가선교회 설립허가 누가치과병원 개원 매주 토요일 의료진료봉사 시작 03 인천 은혜의 집 의료봉사 05 누가 한의원 및 누가 간호학원 개원 중국 장춘 의료봉사 03 미국연방정부 사단법인 누가선교회 미국지회승인 06 필리핀 의료봉사 08 몽골 의료봉사, 누가메디컬센터 확장이전 10 무의탁 결식노인 무료진료 미국지회장 이길부목사 파송 02 한국누가요양보호사협회 및 교육원 창립 07 미국 LA지회장 이우승선교사 파송 08 전남 신안군 중도면 병풍도 의료봉사 123

124 08 육군사관학교와 협정 08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지역 의료봉사 08 서울역 노숙자 의료봉사 08 육군 제9사단 조양현 목사와 제5사단 안만국 목사 파송 10 누가요양복지센터 개원 11 중증장애인 '섬김의 집' 의료봉사 11 방글라데시 전필립 목사 파송 11 누가 전도대학교 창립 통일부 하나원 새터민의료 지원협정 02 사회법인 기아대책 행복한 실버요양센터 협력협정 05 서울기독대학교 외국인 의료봉사 2010 중국, 필리핀, 태국 의료선교 임판길( 집필작가. 전 보훈연수원장) 해남, 고향과 역사가 주는 의미 밝히고 싶어 한반도의 지형과 지명, 그리고 조선상고사를 통해 비밀을 깨닫고 지난해 9월 '천하의 중심 대한민국'이라는 책을 출간한 해남군 옥천 면 영춘리 출신 임판길씨(73). 그는 요즘 독자들로부터 예언가라는 소리를 듣는가하면 초판 2천부가 동이 나버리는 놀라운 일을 겪고 있다. 바로 이웃나라 일본의 지진과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방사능재앙을 암시한 내용 때문이다.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 사람들은 스스로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대륙사관은 반도사관으로 찌그러들었죠. 그러나 2020년대 대한민국은 남북이 통일되어 중국 일본과 손잡고 5백 년간 조화의 문명으 124

125 로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오존층 파괴를 우리나라만 피해 가고 인류는 환경 재앙을 피하기 위해 한반도로 몰려 올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해남은 생명잉태의 비밀을 간직한 축복받은 땅이죠."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이 이야기를 임씨는 조선시대 지리학자 김정호 선생의 동여도에 나타난 덕음산, 옥천종, 우슬치, 차일봉 등의 지명과 인근의 지세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지진보다도 더 무서운 방사능공포로 어수선한 요즈음, 경기도 기흥에 살고 있는 임판길씨와 강남터미널에서 만나, 그가 15년에 걸쳐 연구, 조사하고 마침내 책으로 펴냈다는 '천하의 중심 대한민국' 얘기를 듣기로 했다. 안녕하십니까? 지난해 펴낸 책에서 2040년 경 일본열도의 1/3침몰을 주장하고 자연재앙에 대한 경고를 하셨는데요. 그게 생각보다 빨리 오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드는 요즘입니다. 선생님은 어떤 근거에서 그런 내용을 쓰셨는지요? 일본침몰에 대해 얘기한 것은 제가 처음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수없이 많은 지진과 화산피해를 겪었고 그 원인에 대해서도 '판구조론'으로 설명이 되고 있어요. 일본 스스로도 몇 년 전 '일본침몰'이라는 영화가 제작되어 충격을 준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다 만 저는 지구온난화의 진행상황으로 보아 예상보다 빨리, 2040년경으로 그 시점을 잡았다는 거죠. 2040년 경으로 년도를 적시한 근거를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지구는 지표로부터 지각, 맨틀, 외핵, 내핵이라는 층상구조로 이루어져있고, 지표를 구성하는 지각은 맨틀의 상부와 함께 약 100km 정도 두께의 판(plate)으로 구성되어있어 틀의 대류로 인해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들 판의 경계에 놓여있는 일 본,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미국 캘리포니아, 칠레, 아이티 등에서 지진과 화산 활동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약 2천만 년 전 인도지각판이 아시아대륙판을 계속 밀치는 바람에 아시아대륙이 갈라지면서 그 틈 사이로 바닷물이 채워져 동해가 되고 대륙에서 떨어져나간 것이 일본열도라고 해요. 지금은 태평양지각판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어 앞으로 일본의 해양지각판이 태 평양판과 두 아메리카 대륙 지각판에 밀려 위기를 맞게 되는데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지면 갑작스럽게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 전조가 보이고 있는 것이죠. 선생님은 일본열도의 침몰 말고도 한국이 고대 동이족이 차지했던 광활한 영토를 되찾게 될 것이라 하셨는데요. 아주 옛날에 중국 사천성은 바다였다고해요. 최근에도 인도 판이 중국으로 밀고 들어와 지각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과정에서 대지진 이 일어나고 있는데 2008년 사천성대지진이 그 예죠. 중국땅도 몇천만년이 지나면 세 개로 쪼개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도판과 유라 시아판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어 지각판들이 구불어지면서 열점대가 생기기 때문이예요. 중국 지괴의 산서성 지역에 열점대가 형성되 어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을 동쪽으로 밀면 황해는 육지가 될 것입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고대 동이족이 차지한 영토를 되찾게 되 는 결과를 얻게되고요. 먼 훗날의 일이지만 정말 무서운 재앙이네요. 우주에서 보았을 때 지구는 유일하게 생물체가 살 수 있는 천국이라고 하지 요. 그런데 근래에 잦아진 자연재해들을 보면 그냥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고 뭔가 인간들이 저질은 오만에 대한 경고같 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습니다. 지구의 역사를 모면 현생인류 이전에도 인류의 조상이 있었고 이들은 어떤 연유인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인류 가 나타났습니다. 현생인류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로 자연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주범이 되었으며 그 결과 인간에게 재앙이 오고 있 다는 느낌입니다. 위기를 느끼면서도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은 지금 코앞에 놓인 먹고사는 문제에 급급하게 됩니다. 우리민족의 과거와 미래 에 대해서 이렇게 오랜 기간 연구하시고 책까지 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옥천면에서 국도를 따라 해남읍으로 넘어가기 전에 좌측으로 보면 벌바위라고 있어요. 어려서 벌바위 맞은편 쪽 영춘리에 부모님과 4남2녀가 살았는데 1942년부터 44년 3년 사이에 남동생 세 명이 죽고 저도 병으로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겨우 살아났다고 해요. 사람 들이 벌바위와 마주한 음기 때문에 남자아이들이 살아남지 못한다고 수근거렸죠. 다행히 빨리 이사를 한 덕분인지 살아남아 보훈처 에서 36년간 봉직하고 이사관으로 퇴직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해 공직생활 3년 기간에 13권의 책을 만들기도 하고 글쟁이란 별명이 따라 다녔지요. 보훈연수원장 광주지방보훈청장 등 재직 시에 문화유적 답사와 문헌 수집에 취미를 가졌었는데 저의 집안사를 비롯 한 과거사에서 출발해 고향과 민족의 역사가 주는 의미를 밝혀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다할까요? 책을 쓰는데 꼬박 15년이 걸렸습니 다. 125

126 특별한 사명감이 있었다는 말씀이군요? 책의 서두에도 썼는데 저는 우리 한반도가 축복받은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해남은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인 생명을 잉태한 땅으 로 그 축복의 의미와 조건을 지형이나 땅의 이름에 담고 있어요. 15년 전 우연히 지리산 천왕봉 등산길에 나섰다가 환상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녁무렵 천왕봉위에 떠 있는 북두칠성을 바라보다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고향 옥천면 덕음산과 그 일대 지형이 보 이고 그 후로도 여러번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꿈을 꾸었어요. 그게 뭘까하고 답답했는데 우리 상고사를 공부하면서 실마리가 풀렸죠. 바이칼호에서 발원해 한반도에 이른 우리 상고사는 반도사관에 머물던 민족의 뿌리를 광활한 대륙까지 연결시키는 혁명적 경험이었 습니다. 옛 고구려나 고조선이 영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만 ' 고토회복' 같은 용어들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요. 그렇다면 중국은 왜 기회 있을 때마다 '동북공정'을 얘기합니까? 저들은 아마도 지금 북한쪽 땅만이라도 자기들 역사에 묶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땅에 대한 역사의식과 꿈이 없다면 남북통일도 요원합니다. 저는 남과 북이 통일해야하는 것을 당위로 보 며 그것은 적어도 2014년 봄부터 돌발사건이 일어나 2017년까지 3년간의 과도기를 거쳐서 2020년까지는 국민적 합의가 이뤄질 것으 로 봅니다. 이렇게 시점까지 찍어서 얘기하시는데 부담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일본침몰이나 통일연대를 얘기하는 것은 나름대로 통찰의 단계를 거쳐 나오는 것입니다. 통일은 아무래도 정치지도자의 역량이나 지 도자가 교체되는 시점으로 판단했는데 그 때쯤이면 확실한 결론이 나리라 보는거죠. 물론 통일을 완성할 지도자는 지금까지와는 다 른 덕목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것을 고향 옥천면 덕음산의 지형과 지세속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듣고 보니 산과 바위 모양하나하나가 의미가 있고 재미있습니다. 덕음산 일대의 모성상징 바위나 우슬치, 그리고 차일봉 등 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연보 1939년 해남군 옥천면 영춘리에서 출생 옥천 초등 23회 졸업 해남중 9회 졸업 목포고 8회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국사상사학과를 만학으로 졸업 경력 1960년 고등학교 졸업후 보통고시 4급합격 1965년 국가 보훈처에서 공무원으로 출발 36년간 봉직 후 이사관으로 퇴직 공직생활 동안 13권의 논문, 책 출판 논문/저서 - 일본 영국의 보훈제도 소개( ) - 미국의 신체장애분류지침( ) - 한 일 신체장애등급과 보상체계 비교( ) - 국가유공자 및 유족의 보상수준지표설정과 접근방안( ) 126

127 - 1987년도 국가유공자 사회 지표( ) - 일본의 보훈제도 동향( ) - 국가보훈대상자 복지세대의 실태( ) 년도 국가유공자 사회지표( ) - 사회복지요약 및 일본의 사회 복지동향( ) - 국가보훈제도 장기발전과제( ) - 국가보훈제도의 발전방안( ) - 국가보훈제도 발전의 단계적관리( ) - 한국보훈시대사( ) 박미희 (배구선수. 프로배구 최초 여성해설위원) 펄펄 날던 왕년의 '코트의 여왕' 127

128 지난 11월 27일 막을 내린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제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항상 마라톤이 장식하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엔 여자 배구가 맨 마지막 날 경기를 했다. 중국은 국민적 열광이 드높았던 여자배구로 마지막을 극적으로 이끌 셈이었던 모양이었다. 결과적 으로 여자배구경기는 중국이 금메달, 우리나라가 은메달을 차지함으로써 중국의 기대를 뒷받침해 주었다. 그날, 아시안게임 폐막식 직후 때마침 왕년의 국가대표배구선수를 지내고 현재 KBS N(스포츠전문채널)배구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화산면 출신 박미희 위원(48)을 만나기로 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나라 여자배구는 결승전까지 갔지만 지난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는 역대 최하의 경기를 보였고, 2008 베이징올림픽에선 본선티켓 마저 놓침으로써 실추된 한국여자 배구의 위상을 새롭게 다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때문이었다. 한편 금요초대석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해남출신 재경인물들 중 여성을 꼭 한번 초대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박미희 위원과 여성체육인으로서의 애환, 그리고 한국여자배구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아시안게임으로 많이 바쁘셨습니까? 아닙니다. 전 이번에 중계가 없어서 광저우에 가지 않았어요. 뉴스를 통해 광저우소식을 듣는 정도였죠. 방금 전에 들었는데 여자배 구가 은메달에 그쳐 퍽 아쉽게 되었네요. 그러나 이 정도로 메달확보를 한 것도 잘했다고 봅니다. 그동안 배구협회와 선수들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걸 알겠어요. 박위원님은 청소년국가대표선수는 물론 프로로써 국제경기에 대표선수로 많이 활약하셨죠? 그 때가 우리나라 여자배구의 전성기 아니었습니까? 여자배구는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구기 종목 메달을 획득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것인 데, 그 후 90년대 들어 호남정유(현 GS칼텍스) 출신 장윤희, 홍지연, 이도희 등의 선수들이 국내대회를 평정한 뒤, 이들이 주축이 된 대표 팀이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중국을 이긴데 이어, 개최국인 일본마저 물리치면서 감동의 금메달 을 따낸 바 있습니다. 저는 1982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 우승멤버로 이듬해 여자실업배구 대통령배에서 신인왕을 차지하며 '코트의 여우'란 소리도 그 때 들었습니다. 1984년과 88년 두 차례 올림픽 대표선수로 출전했지요. ' 코트의 여우' 란 별명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제 키가 배구선수로선 작은 축에 해당하는 1m74cm예요. 신체적으로도 '약골'이었고요. 그걸 극복하려다 보니 머리를 쓸 수밖에 없었죠. 꾀가 많다고 해서 '여우'라고 그랬대요. 신체적 조건이 크게 좋지 않은데 어떻게 해서 배구선수생활을 하시게 되었나요?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겠지만 그 시절엔 가능했어요. 화산초등학교 때 체육을 좋아하고 좀 잘하다보니 학교대표로 군 대회 같은 델 나갔는데 부모님들은 반대를 많이 했죠. 졸업하면서 광주중앙여중에 체육특기로 진학을 하려했는데 키 문제로 퇴짜를 받았어요. 학 교에서 나오다 우연히 광주여상에 계시는 노정현 선생님을 만났는데 이야기를 듣더니 동성여중에 추천을 해주신 거예요. 노정현 선생님의 지도로 광주여상에 진학을 하고 고1때 청소년대표로, 고3때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 때 노선생님을 만나 지 않았더라면 아마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웃음) 박미희 선수를 알아 본 노정현 선생님이 누구신지 새삼 고맙군요 년부터 시작된 실업배구단 시절은 어땠습니까? 제가 입단한 미도파는 80년대 여자 배구코트를 점령한 배구 명문이었어요. 조혜정언니를 비롯해 유경화, 유정혜 등 1세대에 이어 김 화복으로 대표되는 2세대, 곽선옥의 3세대, 4세대의 '명세터' 이운임이 있었고 저는 사실상 미도파 시대의 마지막이었다고 봐야죠. IMF직전 미도파가 해체됐으니까요. 현역시절 수많은 남성 팬들을 몰고 다니던 박미희선수가 생각납니다. 요즘 같으면 얼짱에 속한다고 할까요. 대단한 미인이 시고 더 뛸 수 있었던 시기에 은퇴한 것 같은데요. 미도파의 해체로 은퇴하셨나요? 1983년 미도파에 입단해 팀의 전성기에 활동하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끝으로 28세 때 결혼하면서 은퇴했어요. 요즘엔 128

129 주부선수들도 더러 있긴 하는데 당시엔 결혼을 하면 당연히 그만 두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니까요. 그러나 한 번도 배구를 그만뒀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9년간의 실업선수 생활을 끝으로 서울시립대와 기독대, 수원 장안대 등 에서 실기 강의를 펼치며 배구와의 인연을 이어나갔지요. 다행히 현역시절 공부를 한 덕에 은퇴 후 대학에서 후배들을 지도했고 더 욕심이 생겨 중국에 3년 동안 배구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습 니다. 박미희 위원님의 이력엔 국내최초가 여러 개 있는데 실업시절 대학을 간 여성배구 선수 1호, 그리고 배구유학에다 여성해 설위원 1호 등이 있지요? 또 대한배구협회의 경기기술강화위원으로도 계시는데 그건 무슨 일을 하는 것인가요? 협회의 기술강화위원은 남자와 여자배구가 각각 나뉘어져 있는데 국가대표선수를 비롯해서 감독을 선임하고 주니어 유스대표들과 감 독들을 선발하는 자리예요. 국내최초를 여러 개 달고 보니 항상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게 있나 봐요. 어깨가 무겁죠. 배구해설위원은 어떻게 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배구해설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엔 주로 비치발리볼을 중계했죠. 저를 TV해설가로 추천한 사람은 이세호 강남대 교수세요. 여자프로배구단이 생기고 TV에서 프로 전 경기를 중계하면서 2006년부터 계속 투입이 됐어요. 아직도 사투리가 남아있고 경기해설은 타이밍이 중요하다보니 많이 어렵지만 그냥 편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박미희 해설위원은 " 별명만큼이나 해설에도 여우다운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같은 말이라도 맛 깔나게 전달할 수 있는 말주변과 순발력도 갖췄다" 고요. 잘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원래 성격은 내성적이었는데 선수생활과 방송활동을 하면서 외향적으로 변했다고 주변에서도 많이 놀라 더라고요. 경기해설을 하면서 선수시절처럼 인기를 얻은 비결이 무엇입니까? 인기라니 부끄럽습니다. 아무래도 실전경험이 많다보니 다양한 애드리브를 구사할 수 있고요,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경기흐름에 대응하기가 어렵죠. 여자배구가 이번에 은메달이라는 값진 결과를 얻었는데 우리 배구가 발전을 하고 다음 국제대회에서 더 좋은 성적을 거두 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저는 후배 선수들에게 너무 지도자들에게만 의지하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어요. 좋은 선수가 되려면 주는 밥만 잘 먹어선 안 되는 거거든요. 지도자 분들이 가르쳐주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만 다른 선수들보다 더 잘하는 선수로 거듭나려면 생각하는 배구 에 익숙해져야 해요 스스로 생각하는 플레이를 해야지만 진정으로 뛰어난 선수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지도자들은 어린 선수들에게 체력단련과 함께 배구가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심어주고 기술은 더 나중에, 고등학교 때 가르쳐 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골프나 수영처럼 고향 해남에 박미희 배구학교나 기념사업을 할 생각은 없는지요? 그건 더 나중에. 우선은 '현장 감각을 갖춘 여성 지도자가 필요한 때'이니만큼 방송활동을 하면서 더 늦기 전에 가능하면 프로팀 을 맡아 지도를 해보고도 싶어요. 호호. 박위원님의 배구지도자로서의 꿈이 더 크게 펼쳐지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연보 1963년 전남 해남군 화산면 출신 해남 화산초등학교 졸업 광주 동성여중, 광주여상 졸업 한양대 체육학과 졸, 129

130 한양대 체육대학원 석사 경력 1980~1983 아시아청소년배구선수권대회 우승 한 일 교류배구대회 출전 세계청소년대회 우승 (체육훈장 기린 장) 1983~1991 미도파배구단 입단 - 대통령배 실업연맹 박계조배 종별선수권 전국체전 등 출전 다수 우승 대회 MVP 베스트상 인기상 공격상 수비상 신인상 등 수상 1984~1987 서울 국제배구대회 일본 NHK배 국제대회 출전 1985~1987 국제배구연맹컵대회 국가대표 디나모 국제대회(독일 네덜란드) 출전 1984~1988 미국 LA올림픽 5위 서울올림픽 여자선수단 주장 러시아초청 국제배구대회 출전 1980~1990 국제배구연맹 역대최고선수 100인 선정 1991 뉴델리아시안게임 3위, 북경아시안게임 2위 1992~1995 북경, 페루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미도파배구단 은퇴, 생활체육지도자 배구국가대표 경기분석 위원 대한배구협회 강화분과위원 (국가대표-청소년대표 선발위원) 1995~2010 대한배구협회 강화분과위원 2003~2006 9인제 배구연맹 국제이사. 서울시배구협회이사 2007~2010 중국 연변과학기술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대한체육회 스포츠외교전문가 과정 1기 수료 (경기대학교) 현 KBS N 배구해설위원(V-리그 및 국내외대회, 비치발리볼 해설) 서울시립대, 성신여대 강의 130

131 김성전( 이비인후과 원장. 두륜회 회장) "이제 고향을 위해 직접 봉사하고 싶다" 인터뷰 약속 시간인 지난 토요일 오후 1시, 신촌로타리에 있는 병원에 정시에 도착했는데 아직도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있다. 예약을 하지 않아 두 시간째 기다린다는 나이 지긋한 두 아주머니가 서로 의사선생님의 명성을 확인해 준다.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 출신 김성전 이비인후과 원장(69)은 특히 이비인후과 계통 수술로 유명하다. 비염, 중이염, 축농증 등 낫기 어 려운 만성 환자도 그의 손을 거치면 재발없이 깨끗이 낫는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1시간 남짓 나머지 환자들을 다 본 후에야 코수술 잘하기로 이름난 김성전 원장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한 환자분이 멀리 화곡동에서 일부러 원장님 진료를 받으러 왔다고 하더군요. 하루에 치료받는 환자들이 몇 명 이나 됩니까? 허허, 그걸 공개하면 큰일 나지요. 세무서에서 당장 들이닥칠 것 아닙니까? 이건 농담이고, 아침 7시부터 나와 준비를 하고, 환자위 주로 진료를 하다 보니 다른데 보다는 많은 편이지요. 얼마 전에는 뉴질랜드에서도 수술 받으러 일부러 왔다고 하더군요. 이비인후과 의사로 명성을 얻으셨는데 원장님이 개업하실 당시 이비인후과는 인기 있는 과가 아니었지요? 왜 이비인후과를 택하셨나요? 당시 70년대에는 외과가 인기였어요. 의대에서 공부 잘하면 외과를 택했지요. 그런데 나는 진짜 수술은 잘 보이지 않는 곳, 코나 귀 나 뇌와 관계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즘 이렇게 인기순위가 역전될지는 몰랐어요. 내가 학교 다니던 그 때, 광주에 이비인후과는 반상진 이비인후과라고 하나 밖에 없었 거든요. 전남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개업을 하실 생각을 하신 것이 궁금하군요. 졸업과 동시에 대학에 남을 수도 있었는데, 어렵게 형님 도움으로 대학을 마쳐 빚을 갚고 싶었지요. 당시 인턴의사 월급이 1,000원이 었는데 미국에 가면 월 300~500달러를 받았어요. 미국의사시험에 합격하고 준비를 하다가 우연히 서울에 남아 개업을 하게 되었지요. 신촌하면 세브란스라는 유명한 의대가 있는 코앞인데 지방대학출신이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은 대단한 도전이군요. 아, 처음부터 병원이 잘된 것은 아니죠. 아주 고전을 했어요. 그런데 수술 하나만은 자신이 있었지요. 왜냐하면 내가 군대에 가 있던 70년대 초에 이비인후과 출신 군의관은 거의 없어서 모든 수술이 다 나한테 돌아왔습니다. 3년 동안 하루도 쉴틈 없이 그야말로 수술 을 해댔으니까요. 내가 남한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는 이 때다 싶어 수술을 미루고 군대에 들어온 사병들에게는 "너 수술할 돈 없지. 여기서 하고 나가라"고 강권을 하기도 하고요. 하도 수술을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그 사람 얼굴모양만 보고도 코 속, 귀속이 다 보 입니다. 하하. 운이 좋게도 국가가 원장님께 넘치게 임상체험기회를 준 셈이네요. 그렇죠.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제가 미국에 가지 않고 여기 남아있게 된 이유도 하나님한테 받은 달란트를 우리나라에서 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엔 전쟁공포까지 있어 미국에 가려는 의사들이 꽤 있었는데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죠. 기독교인이시고 교회에선 장로님인데 일요일에도 진료를 하신다고요? 131

132 네. 매주 일요일에도 오전에 1시간씩 진료를 합니다. 의술은 하나님이 준 선물이고, 병원과 의사는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거죠. 응급 환자가 아니라도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이 있다면 종일 병원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건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요일 진료가 기독교교리와 배치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일요일에 병을 고쳤 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흔히 의술을 인술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의미가 뭘까요? 진정한 인술의 의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인자( 字 )를 한문으로 보면 사람인( 人 )변에 두이( 二 )자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의사와 환자, 혹 은 의사와 신과의 관계라 할까요? 생명을 구하는 일은 혼자 할 수 없고 아무리 쉬운 수술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는 믿음과 신뢰하는 관계가 환자의 병을 낫게 하지요. 그래서 저는 수술에 앞서 꼭 환자와 손을 잡고 함께 기도를 합니다. 한번은 스님이 수술하러 왔는데 기도가 끝나자 '아멘'하더라고요. 언젠가 정읍에서 온 여자환자는 1년 후 다시 와서 "나 치료받으러 안 왔어. 나 예수 믿어! 병도 다 낫고..." 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 릅니다. 이렇게 환자들을 많이 치료하시니 기억에 남는 환자들도 많겠군요? 뇌막염 직전까지 갔던 중이염환자가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이었는데 세브란스병원에서도 위험하다고 수술을 해주지 않 아서 왔더군요. 그 때는 밤 10시까지 외래환자 볼 때였는데 9시경에 찾아왔어요. 고름이 뇌쪽으로 흘러 그냥 두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단돼 바로 수술을 시작해 끝나고 나니 새벽 2시더군요. 지금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찾아온다니까요. 이제 원장님의 고향사랑, 해남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들려주십시오. 가끔 해남에서, 특히 명절 뒤 끝에 친지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는 고향 환자들이 있는데 참 고맙고 반갑지요. 어렸을 때 화원국 민학교를 들어가 2년 마치고 중화국민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 학교 3회 졸업생인데 모교가 폐교돼 너무 섭섭합니다. 하다못해 도 서라도 보내주고 싶고 장학금도 낼 수 있는데. 다행히 두륜회라고 해남출신 재경인사들 몇이서 조금씩 기금을 모아 노인들 개안수술이나 이웃돕기는 하고 있는데 어디 의미 있게 봉사할 수 있는 일 있습니까? 해남에 탯자리를 둔 사람이면 모두들 두륜산을 사랑하고 모임에 두륜회라는 명칭을 많이 쓰더군요. 원장님이 참여하시는 두륜회를 좀 소개해 주시지요.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두륜회라는 명칭은 대흥사의 불교학술대회에도 쓰였어요. 다산 정약용에게 차를 가르쳐 준 혜장스님도 나이 서른에 이 두륜회의 주맹(대표)이었다고 나오지요. 명칭이야 해남사람 아니라도 쓸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회장을 맡고 있는 두륜회는 1977년 10월 향우회조직에 앞서 만들어졌는데 윤태현(크라운제과 회장) 박동희(주택은행장), 김학래 (백양메리야스 사장), 김재열(세정신보 사장), 홍현덕 회장, 채석봉(변호사), 이국식(한국은행 조사부장) 서형렬(재무부 국고총괄국 장), 이경식(법무사), 이강현(한국일보 부장), 이찬호(보사부 과장), 성하철(건축사), 박점수(전우신문사 차장), 김동희(호남정유 지점 장), 박춘수(MBC TV방송국차장), 윤내현(단국대학교 부총장)등 16명이 참여하였죠. 윤태현 회장께서 일천만원을 두륜회 기금으로 희사해 회원 전원이 재경해남향우회를 창립하는데 있어서 큰 에너지원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은 분들이 작고하기도 하고 새로 들어온 분들도 계시는데 일종의 해남출신 친목모임이지요. 단 정치색은 배제하려고 해요. 의미 있게 봉사할 수 있는 일을 물으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두륜회가 뜻이 모아진다면 지역사회 문화상이나 봉사상 같은 것 을 만들면 좋지 않겠습니까? 자꾸 인구가 줄어드는데 고향에 남아 문화를 가꾸고 봉사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 좋은 의견입니다. 그렇잖아도 국제라이온스협회354-D지구 총재를 맡으면서 사회봉사의 참 뜻을 깨닫고 실천하려고 노력은 합니 다만 마음처럼 쉽지가 않더군요. 우선 고향에서 올라온 농산물부터 사먹는 운동을 하고 자주 고향에 가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지요. 고맙습니다. 원장님의 개인명의나 라이온스협회가 후원하는 지역사회봉사상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132

133 정학래선생( (1세대1 차문화운동가) 차의 종주지로서 해남 위상 알려 차인이 아니라도 해남하면 대흥사, 대흥사하면 초의선사가 먼저 떠오른다. 신라 때부터 오랜 전통을 이어 오던 우리나라의 다도는 조 선 후기 대흥사의 초의선사에 이르러 다시 꽃피기 시작하였다. 초의선사는 대흥사 일지암에서 '동다송( 東 茶 頌 )'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우하며 한국의 다도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한국의 다성( 茶 聖 )이라 일컫는다. 해마다 초의선사를 기리는 차 문화제를 열고, 차인대회가 해남에서 열리지만 그러나 어쩐 일인지 해남이 차의 종주지로서의 위상을 갖지는 못한 것 같다. 차밭하면 보성차밭이고 야생차는 하동이 먼저 떠오르며, 티백차생산은 제주도에서 먼저 치고 나갔으니 실속 있 는 것은 다 타 지역에 내준 셈이 되어버렸다. 무슨 까닭일까? 갑작스레 기온이 내려 따뜻한 차 한 잔이 더욱 생각나는 날, 해남출신 원로 차 연구가 정학래선생(80)을 찾아뵙기로 했다. 경기도 고 양시 덕양구 선유동이란 곳에서 차와 명상수련을 하며 살고 있는 곳, 일우제( 一 羽 齊 )라고 한다. 자신의 호 일우( 一 羽 )에서 따 왔다는 조촐한 농장에서 해남과 차와 그리고 초의선사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일우( ( 一 羽 )라는) 호는 날개라는 뜻인 것 같은데 어떤 의미로 지은 것인지요? 한창 차 운동을 하던 시기에 만난 전각의 대가 청사 안강석선생께서 지어주신 거예요. 중국 당나라 때 다경( 茶 經 )을 쓴 육우( 陸 羽 )라 는 사람의 이름에서 우( 羽 )자를 따 지은 거지요. 육우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용개사 스님인 적공( 積 公 )대사에 의해 길러졌다고 해요. 적공대사는 차를 무척 좋아하여 육우가 어렸을 때부터 차 끓이는 법을 가르쳤는데 나중에 이것을 편집해 묶은 게 다학전문서로 다경 의 초고가 된 거죠. 오늘날 차에 관한 많은 이론들은 이 다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저도 차 연구가로 한평생을 살고자하는 염원에서 이 호를 받았지요. 그렇군요. 동다송은 이를테면 중국의 다경과 같은 책인가요? 차 이야기를 꺼낼 때 초의선사와 동다송을 빼놓을 수 없지요. 중국에 육우의 '다경'이 있으면 한국에는 '동다송'이 있다고 말합니다. 동다송은 곧 '한국의 다경'이라고 할 수 있는 '차의 전문서'죠. 초의선사는 원래 해남출신은 아니고 정조10년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 나 순조 헌종 철종 고종 3년(81세 입적)에 이르기까지 해남 대흥사에서 승려로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아암 혜장, 자하 신위 133

134 등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유불의 경계를 넘어 교유했습니다. 저서로 '일지암시고', '일지암문집', '초의선과', '선문사변만어', '동 다송', '다신전' 등이 있지요. 선사의 저서 중 다신전과 동다송이 가장 유명한데 내용에 무슨 차이가 있나요? 다신전( 茶 神 傳 )은 차 생활에 필요한 지침서로서 찻잎 따기, 차 만들기, 차의 보관, 물 끓이는 법, 차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차의 색깔, 향기 등 20여 가지 목차로 상세하게 다룬 책이지요. 나이 43세(1828년) 여름, 지리산 칠불선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중국의 '만보 전서( 萬 寶 全 書 )'라는 백과사전 속에 수록되어 있는 '채다론( 採 茶 論 )'의 원문을 초출( 抄 出 )했는데 2년 뒤인 경인년 봄에 사원에서 차를 알고자 하는 이가 많아 책명을 '다신전'이라 하고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동다송'은 52세(1837년) 되던 해 봄, 다도를 묻는 해거도인 홍현주(정조임금의 사위)에게 저술해 보낸 내용으로 '우리나라 차를 찬 송'하는 492자의 칠언시로 쓴 다서( 茶 書 )라고 할 수 있지요. 선생님은 우리나라 차 연구와 차문화운동의 1세대라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일찍이 차의 세계에 입문하시게 되셨습니 까?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일본의 통치와 전쟁을 겪으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급박해 한가롭게 차를 즐길 여유가 없어졌 다고 봐야죠. 더군다나 일본사람들이 차를 즐기니까 '차'하면 일본문화라고 여겨 백안시하는 풍조였고요. 해방 후엔 차 마시는 사람 이 없어서 일본사람들이 조성해놓고 떠난 차밭이 70년대 말까지 황폐된 체 버려져 있었어요. 60년대 초 어느 날 의제 허백련선생을 뵈러 갔어요. 차를 한잔 앞에 놓고 그림얘기보다 차 예찬을 많이 하시더군요. 크게 흥미를 느껴 그 때부터 자료를 모으고 차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차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차 문화 운동을 일구던 당시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려주시죠. 저는 원래 약학을 전공했다가 진로를 바꿔 일본에 가서 정경대학을 다녔는데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민예론에 심취해 있었어요. 그 의 미학적 다도 철학에 빠져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을 정도였지요. 그 시절 대흥사의 일대 강사였던 정학천 스님을 찾아 차의 이 론을 들을 수 있었고 고향에서 김봉호 선생 등 선배 차인들과 교유하면서 차 공부를 했습니다. 그 후 미술사학자 김호연씨를 만나 '분재 수석'이란 잡지에 3회에 걸쳐 '차란 무엇인가'를 기고하면서 본격적으로 차의 정신에 빠져들었지요. 초의선사가 계시던 대흥사와 일지암이 있는 해남이 고향이라는 점도 차와 인연을 맺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겠군요. 당시에 선생님이 펼친 차 이론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차란 평화스러운 것입니다. 다산, 추사, 초의의 어울림을 보십시오. 당시 신분계층이 엄했던 시절에 차를 통해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극대화시켜 주는 매개체로 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지요. 다산은 가톨릭과 실학의 학자요, 추사는 유학자, 초의는 승려 인데 한 잔의 차는 이 세 사람의 종교적인 울타리까지 무용지물로 만드는 구심점이었습니다. 일본은 다도라고 해서 차를 만들고 마시는 일이 엄격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다도, 즉 차의 정신이 중국이나 일본과 다 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중국에서 시작된 차는 처음에 약용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는 보건음료로서 효과가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 서 차는 사람들이 건전한 삶의 길을 걷는데 있어 가장 소중한, 몸을 튼튼히 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귀중한 기호음료지요. 뿐만 아니 라 차를 끓이고 마시며 대접하는데 있어 따르는 정성과 예의범절 및 청정하고 고요로운 분위기 등에서 각성의 생활을 체득( 體 得 )하 게 됩니다. 대흥사의 초의선사가 김명희에게 보낸 다시( 茶 詩 )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어요. '예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즐겼나니 차는 군자처럼 성미에 사악함이 없어서라네' ( 古 來 聖 賢 俱 愛 茶 茶 如 君 子 性 無 邪 ) 이런 의미에서 다도란 차생 활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지이지 차생활의 예절이나 법도 그리고 차를 끓이는 행다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현재 각 지자체들이 차를 테마로 다양한 문화행사들을 펼치고 해남에서도 초의선사 입적일을 전후로 차 문화제 열리는데 개선할 점 이나 불만은 없으십니까? 차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불만은 없습니다. 80년대 초까지 한국차인회 상임이사로 일선에 있을 때 우리차를 보급하기 위해 어깨띠 를 메고 거리에 나가기도 하고 사무실을 활성화해 보려고 서화전시회를 열어 기금모금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지자체들이 나서서 134

135 행사를 추진해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요.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초창기의 그 때에 비해 너무 상업적으로 흐른 감이 있습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선( 禪 )과 같다'하여 선다일여( 禪 茶 一 如 ), 혹은 다선일미( 茶 禪 一 味 )라고 하는데 명예욕으로 행사를 끌어가려고 해서 는 안 됩니다. 근래에 명원차문화재단 학술상과 지난해 초의대상을 받으셨는데 사실 너무 늦은 감이 있었지요? 아닙니다. 저기 윗목에 살아계실 때 자주 만나 뵙던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께서 직접 써준 다시( 茶 詩 )가 있네요. '차 한 잔은 목과 입을 축여주고/ 두 잔을 마시면 외롭지 않고/ 석 잔째엔 가슴이 열리고/ 넉 잔은 가벼운 땀이나 기분이 상쾌해지 며/ 다섯 잔은 정신이 맑아지고/ 여섯 잔은 신선과 통하며/ 일곱 잔엔 옆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나온다.' 차인은 모름지기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선의 경지에 있어야하는데 나는 아직 어림도 없지요. 이 경지를 생각하며 오늘도 차를 마십니다. 선생님 같으신 분이 여기 경기도 말고 귀향해서 고향 해남에서 차밭을 일구고 차 문화 발전을 위해 마지막 열정을 다해 주 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연보 1930년 전남 해남읍 수성리 출생 해남 동초등학교 졸업 6년제 해남중학교 2회 졸업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3년 중퇴, 도일 일본대학교 정경학부 졸업 1960년대 초 의제 허백련( 毅 齋 許 百 鍊 )선생을 만나면서 차 세계에 입문 1976년 법륜지 에 '초의선사의 차' 발표 1979년 식물학자 이덕봉씨, 박종한, 김미희 씨 등과 함께 한국차인회 창립 주역 1980년 1월 한국차인회 상임이사 부임, 첫 사업으로 일지암 복원추진 등 차 문화 보급에 앞장 1980년 분재 수석 에 '한국의 차를 말한다' 발표 1983년 정원학회지 에 '한국의 다도' 발표 월간 다원 창간호에 '일본의 차 정신' 등 발표 1990년 경기도 고양시 선유동에 1000여평의 자연농원 개발 귀농 후 대체의학, 자연식 연구, 다도, 요가, 단식, 명상수행 생활 현재 명원문화재단 고문 수상 2006 제11회 명원차문화대상 학술상 수상 2009 제18회 초의문화제 초의상 수상 135

136 故 윤주연 옹( 독립운동가) 함흥형무소 문 열리자 열차 타고 고향으로... 서울이나 타지에서 활동하시는 해남출신 주요인물들을 모셔, 고향얘기며 살아오신 삶의 흔적들을 들어 보는 금요초대석. 이번 주에 는 도무지 뵙기 어려운 한 분을 만났다. 지난 2, 3년째 노환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계신, 해남군 삼산면 창리에 탯자 리를 두신 윤주연( 尹 柱 淵 95)옹이다. 10여년전 까지만 해도 3 1절이나 광복절, 혹은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치시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는데 최근 급격이 기력이 쇠 해지신 후 침대에만 누워 계신다고 한다. 지하철 8호선, 성남시 남한산성 입구 역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더 가야하는 한 다가구주택 2 층에 그 분이 계셨다. 1939년 일제의 만행이 극을 달리던 때 당시 재학하던 연희전문학교를 중심으로 '조선학생동지회'라는 비밀결사 를 하다 체포돼 심한 옥고를 치루기도 한, 우리시대에 어쩌면 마지막으로 만나뵐 수 있는 독립투사이시다. 인터뷰는 노환으로 청력은 물론 대화가 자유롭지 못해 곁에서 수발을 해 주시는 부인 나윤자( 羅 允 子 85)여사의 도움을 받아야했다. 또 중요한 내용은 종이에 질문을 써 보여주면 불편한 손으로 대답을 해 주시는 필담을 거쳐 이뤄졌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70년도 더 넘은 의기충천했던 젊은 시절을 꿈 꾸듯 회상하시는 老 지사의 모습은 의외로 장엄하면서도 기개가 넘쳐보였다. 웅변대회 1등, 일제통박하는 내용으로 정학 윤주연옹은 해남 윤( 尹 )씨 윤선도 家 의 10대 손으로 부친 尹 富 浩 의 4남4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용머리라 불리던 고향 창리에서 해남 읍까지 갈려면 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못 간다는 말을 들을 만큼 대 지주 집안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형님의 사업실패로 살림이 좀 기울긴 했으나 연희전문시절 왕가인 도정궁( 都 正 宮 )에 하숙을 할 정도로 귀하게 자랐다. 해남에서 심상소학교(지금의 해남동초등학 교)를 마치고 서울 중동중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136

137 "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가셨으면 선친께서 자녀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갖고 계신 것 같은데 선친은 어떤 분이셨 습니까?" 곁에서 대답을 거들던 나여사님이 시아버님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 주신다. 광주고보를 다녔던 큰 아들과 함께, 둘째아들에 대한 기대 도 남달랐던 선친은 민족계열학교인 중동중학교를 일부러 택해 유학을 보냈다는 것이다. 소학교 시절 해남 고향에서의 추억이나 어 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험하고 긴 세월을 살아오신 나이 든 어른 같지 않게, 맑은 눈빛만 보내 올 뿐이었다. 1906년에 설립돼 초대교장으로 독립운동가 오세창선생을 모시기도 한 중동중학교에서 청년 윤주연은 하키선수로 활약하였으며, 폭넓 게 친구들을 사귀는 활달하고 패기 넘치는 생활을 했다. 특히 연설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936년 8월 중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전 조선중등학교 웅변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윤옹은 전체 1등을 했는데 평소 조선인 학생에 대한 일인의 차별대우에 적개심을 품어 오던 중 일제를 강하게 통박하는 내용을 담았다 하여 종로경찰서에 불려가 1개월간 유치되는 사건을 겪기도 하며 민족정신을 키워갔 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상과(사회경제학과)에 진학한 후 재학시절 일제에 의해 투옥된 사건, 즉 '조선학생동지회'에 대해서는 지금처럼 기력이 쇠해지기 전 이미 한 권의 책을 펴낼 요량으로 잘 정리해 두고 있었다. 140여페이지에 걸쳐 역사적 배경, 동기, 사건의 유래, 정도궁 회의, 남한산성 회의, 동지규합과 운동범위의 확대 등 사건의 전말이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였다. 그 사람이 가진 사회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각성된 영혼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투쟁과 저항의식, 그리고 민족상실의 고뇌가 당시 의 거사를 이뤄내게 한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함흥교도소에서 취조를 당하면서 겪은 일본경찰의 고문장면에서는 왜 우리가 독립지사들이나 순국선열들에 대해서 마음깊이 존경을 보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실감케 하였다. 인터뷰 도중 윤옹은 자꾸 손을 등 으로 가져가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할머니가 '효자손'을 찾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때 인두로 온 몸에 불고문을 당한 흉터가 지 금도 가려워 저렇게 효자손을 곁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상실의 고뇌와 번민으로 거사, 세 번 투옥 "내가 시집오기 전이라 그냥 들은 이야기인데 하루는 일본 경찰들이 찾아와 부자들이 돈을 모아 비행기 한 대 값을 내라고 했대요. 시아버님이 '내 자식이 감옥에 있는데 나더러 군량미를 내라고 하냐.' 이러고는 어느 날 저녁 하인들을 시켜서 해남, 강진, 보성 일대 임산부 있는 집들을 찾아 추수한 쌀을 다 내어주었다고 해요. 독립운동하는 아들한테 생활비를 보내주면 그 돈이 어디에 쓰였겠어요. 당신이 직접 하신거나 마찬가지지." 전 광주시장을 지내고 현재 빛고을노인복지재단 원장으로 있는 나무석 원장의 친 누님이기도 한 나윤자 여사는 기억력이 출중하여 옛 사건이나 들은 이야기들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 함흥교도소에서 만기출소하고 중국으로 가셨다가 용정에서 다시 구속돼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했는데 그 후엔 어떻게 보내 셨는지요?" 해방 후 이승만 정권 아래서 독립지사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직접 듣고 싶은 마음에서 여쭈어 보았 다. 나여사님의 이야기로는 처음에 감찰관이라는 직책을 맡아 잠깐 일했으나 그만 두고 광주로 내려와 광주상고에서 역사를 가르치 는 교사로 5년, 목포 동광고등학교 교장으로 8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다행히 교직에 몸을 담게 되어 정치바람을 덜 타고 무난히 가정 을 꾸려낸 셈이었다. "동광고 교장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 때 목포에서 국회의원을 나왔는데 연설장소를 못 구했어요. 박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무서 워서 그랬지요. 그 때 DJ에게 턱! '동광고 운동장을 쓰라'고 빌려준 사람이예요. 저 사람이." 어느 사이에 인터뷰는 윤옹을 제쳐두고 한 세월 분신처럼 동고동락 해 온 나윤자 여사와 나누는 셈이 되어 버렸다. "그 양반하고 살면서 겪은 이야기는 소설 한 권으로는 다 못 적어요. 바깥 일만 보고 가정사는 모르니 서울로 이사 온 후 내가 20년 137

138 동안 시멘트 블록을 찍어 팔아 아이들을 가르쳤다면 누가 믿어 줄랑가?" 윤옹은 지금 살고 있는 성남시가 생기던 무렵부터 살았다. 한 때 국회의원도 출마를 하고 교육재단을 만들어 육영사업에도 뜻을 두 었었다. 그러나 다 여의치가 않았고, 큰 뜻에 비해 돌아 온 열매는 씁쓸하기만 한 실패담도 있었다. 2007년 광복회 경기지회장을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윤옹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중요한 결정을 한 가지 하였다. 그동안 집 안에서 가보처럼 모셔온 이조판서 남파( 南 坡 ) 홍우원( 洪 宇 遠 )이 숙종에게 올린 윤선도의 시장( 諡 狀 )을 고산유물전시관에 기증한 것이 다. 시장( 諡 狀 )이란 임금이 내리는 시호를 미리 3개 만들어, 그 중 하나로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적은 두루마리 문서로, 윤선도는 이 때 숙종으로부터 충헌공이란 시호를 받게 된 것.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정확하게 기술하였다 하여 고문서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선대의 기념관에 기증한다고 하지만 적잖은 가치를 지닌 문화재급 자료를 내어놓기가 쉽지만은 않았겠네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으로부터 당연히 기증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번 들어서인지 서운하다거나 그런 것은 추 호도 없었습니다." 셋째아들 윤목씨(강남에서 광고회사경영)의 말이다. 해남 내려오면 녹우당과 천일식당 꼭 찾아 "지금 해남이나, 고향 어디에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신지요. 해남 특산물 중 잡수시고 싶은 것은요?" 노트에 써서 보여드렸으나 말씀을 못하시고 눈을 살며시 감으신다. 윤주연옹은 직접 쓴 소책자에 해방되던 날의 기쁨을 감격스럽게 적어놓았었다. 함흥형무소 문이 열리자 바로 서울로 와 仁 村 김성수 씨 댁을 찾아가 저녁을 먹고 곧바로 호남행 열차를 탔다고 한다. 고향에 오니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하셨고 아버지는 눈을 감고 말씀 을 못하시었다. 사방에서 몰려든 일가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은 감옥에서 막 나온 청년 윤주연을 얼싸 안고 울고 웃고 춤을 추었다. 아 버지는 모여든 군중에게 막걸리를 몇 석이고 가져오게 하고 돼지를 세 마리 잡아 마음껏 먹도록 잔치를 베풀었다. 이 집안의 아들사 랑이 어떠했음을 짐작케 하는 장면이다. 어머니는 한술 더 떴다. '대흥사에서 매일 냉수로 목욕을 하고 아들의 옥중무사를 기도했다'는 대흥사 주지 甘 船 月 의 말을 듣고 윤주 연은 '내 살을 찢고 뼈를 깎아도 부모의 은혜를 못 갚겠다'며 어머니에 대한 각별한 효심을 보였다. 지금 병상에 누워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고향 해남이며 선산과 대흥사 언저리 풍경들이 아닐까. '아버지가 거처하신 사랑 채 뒷방에서 토종꿀을 먹고 감옥에서 상한 몸이 회복되어 다시 상경하였다'고 했는데 지그시 감은 눈으로 그 추억들을 찾고 있는 지 도 모를 일이다. 아들 윤 목씨는 아버지가 해남에 내려오면 천일식당과 녹우당을 꼭 들렀다고 전해 준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 나 눈빛과 마음으로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려는데 어렵게 한 손을 올려 보이신다. 나도 어느 자리보다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나왔다. " 부디 오래, 건강하세요." 유주연옹은 인터뷰를 마친 00개월 후 0년 00월 0일에 성남 자택에서 운명하셨다. ' 조선학생동지회' ' ( 朝 鮮 學 生 同 志 會 )사건은) 무엇? 윤주연, 서영원(서재필박사의 손자. 윤주연의 친구) 등은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9년 12월 같은 학교 학생인 김상흠, 이동원, 김영하, 민영로 등과 함께 윤주연의 집에 모여 항일결사단체인 '조선학생동지회'( 朝 鮮 學 生 同 志 會 )를 조직한다. 조선학생동지회는 독립 투쟁을 3 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거행하기로 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러면서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로 하고 동경유학생 등 해외 유학생과도 연락을 맺어 거국적인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는 조선에서 1930년 이후 집단적 단체를 만들어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철저한 관리와 투쟁을 획책하여 첫 출발 훨씬 이전부터 투쟁 138

139 봉기를 목적으로 생성된 단체였는데, 1930년 이후 단체를 결성하여 항일 저항한 단체는 오직 '조선학생동지회'뿐이었다는데 큰 의의 가 있었다. 학생들은 동경유학생 및 전국 각지의 동지들과 함께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 냉천동 약수터, 연희전문학교 뒷산, 벽제관 등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 고취와 동지 규합 및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41년 7월 하부조직인 원산상업고등학 교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조선학생동지회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조선학생동지회에 가담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 들 및 전국적인 세포망은 일제히 9월에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연희전문학교에서도 퇴학당하였다. 윤주연 옹을 비롯한 이들 주모자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1943년 3월에 함흥지방법원에서 각각 징역 1 년에서 2년반까지 징역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연희전문학교에서는 명예졸업장은 물론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추가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또한 정부에서도 독립운 동과 관련한 공훈을 인정하여 조선학생동지회 가담자들에게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139

140 블로그 저자 발행일 미셸킴의 회색노트 미셀 킴 :01:38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와 전재를 금합니다.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차례 1~3쪽 머리말 4 1. 계대 연구자료 7 가. 증 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진공 사적기 7 나. 족보 변천사항 9 1) 1416년 진양부원군 신도비 음기(陰記)상의 자손록 9 2) 1605년 을사보 9 3) 1698년 무인 중수보 9 4) 1719년 기해보 10 5) 1999년 판윤공 파보 10 - 계대 10 - 근거 사서 11 (1) 고려사 척록(高麗史摭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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