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주 제 그리스신화 속 갈등 조정 17
그리스신화 속 갈등 조정 Ⅰ. 들어가는 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 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 럼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인간이었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건축, 미술, 문학, 예술을 인간 중심으로 해석했고, 사회 제도 또한 인간의 요구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본주의는 신화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스신화의 신들은 인간의 모습을 닮았고, 인간의 본성이나 욕망은 신들에게 그 대로 투영되어 나타났다. 시기하고 질투하며 때로는 다투고 화해하는 모습까지도 말이다. 인간의 다양한 감정에 기반을 둔 그리스신화는 갈등이 서사구조의 기본이 된다. 개인 간의 갈등, 세력 간의 갈등, 이것으로 말미암은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신화 는 갈등의 이야기다. 그 복잡한 인물 관계만큼이나 다양한 갈등이 존재한다. 신들의 세계에서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그리스신화를 즐기는 핵심이다. 이 갈등의 이야기에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반추해보고 삶의 철학과 지 혜를 얻는 것은 신화읽기의 진수다. 이 글에서는 그리스신화 속 네 개의 갈등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갈등의 해결 과정 을 살펴본다. 특히 갈등이 해소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조정자를 중심으로 갈등 의 종국적 해결 과정을 분석한다. 이들이 갈등하는 양 당사자 사이의 소통과 이해 의 매개적 역할을 어떻게 수행해 나갔는지를 알아보고, 갈등 해소의 성공과 실패의 사례에서 조정자가 견지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생각해본다. 이를 바탕으로 신화 속에 나타난 갈등 조정의 특징을 포괄적으로 분석해보고 우리 사회 속 조정자의 중 요성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다. 19
Ⅱ. 그리스신화 속 갈등과 갈등 조정자 그리스신화의 수많은 이야기 중 갈등의 해소에 조정자가 중차대한 역할을 한 네 가 지 사례를 발췌하여 정리했다. 1) 이 중 두 가지 사례는 갈등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소되었지만 다른 두 가지 사례는 그렇지 못했다. 이들 이야기에서 조정자의 역할 과 함께 조정의 성공과 실패의 이유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정 성공에 필요 한 자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분노한 모성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하데스 데메테르 제우스 지하세계의 신 대지의 여신 최고의 신 모녀 부부 페르세포네 저승의 지배자 하데스는 에로스의 화살을 맞아 페르세포네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녀 를 납치한다. 페르세포네의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는 격노해 인간 세상을 돌보지 않게 되었다. 농경과 곡물, 수확의 여신인 데메테르의 분노로 인간 세계는 굶주림으로 허덕이게 되었다. 고통 받는 인간 세상을 보면서 제우스는 대책의 필요 성을 절감하고 딸을 되찾게 해달라는 데메테르의 도움 요청을 수용한다. 사자( 使 者 ) 헤르메스가 페르세포네를 데리러 갔으나, 페르세포네는 이미 그녀를 저승 세계에 예 속되게 하는 석류 한 알을 먹은 후였다. 이에 제우스는 협상안으로 페르세포네가 일 년 중 여섯 달은 지하 세계에서 하데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 여섯 달은 데 메테르와 있도록 했다. 2) 1) - 이 글에서는 김원익, 2011, 신화, 인간을 말하다 (서울: 바다출판사); 김원익, 2011, 신들의 전쟁 (서울: 알렙); 이윤기, 2010, 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 (서울: 웅진지식하우스)를 주로 참조하여 네 가지 이야기를 발췌 및 요약, 정리했다. - 그리스신화의 가장 큰 갈등 구조인 트로이 전쟁과 그 발발을 둘러싼 갈등 양상은 본지 9월호에서 보다 심층 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2) 페르세포네가 먹은 석류알의 수와 제우스가 조정한 지하세계와 지상세계의 체류 기간은 연구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페르세포네가 석류 세 알을 먹었고, 이에 세 달은 지하세계에서, 나머지 아홉 달은 지상세계에서 보내도록 했다는 연구도 있으나, 이 글에서는 이윤기(2010)를 기준으로 한다. 20
(1) 제우스의 역할 페르세포네를 둘러싼 하데스와 데메테르의 다툼에서 제우스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 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제우스는 이들의 분쟁을 합리적으로 조정해 페르세포네의 삶의 방향을 정립해야 하며, 둘째로 데메테르의 분노가 인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신과 인간계의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 이는 다자간의 이익 관계를 모두 고 려해야하는 매우 복잡한 역할이다. 또한 하데스, 데메테르, 페르세포네의 갈등이 가 족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양자 간의 이익 갈등 이상의 의미 를 가진다.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모녀관계를 둘러싼 갈등을 오늘날 양육권 갈 등과 맞닿아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3) 양자 간의 갈등의 원인과 그 결과가 단순히 두 당사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복잡한 갈등 구조는 현대사회의 그것과 궤를 같이한다. 갈수록 복잡, 다원화되어가는 오늘날의 갈등에서 제우스의 갈등 해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 제우스가 갈등 조정에 성공한 이유 제우스의 조정 성공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수사의 세 가지 기 법,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에 기반해 분석 가능하다. 4) 조정자 와 당사자 간의 서로에 대한 호감과 믿음을 의미하는 에토스의 측면에서, 양자의 의 견에 모두 귀 기울이며 편향성을 지양하는 제우스의 태도는 당사자의 신뢰를 형성하 기에 충분했다. 특히 페르세포네를 둘러싼 갈등이 그녀를 향한 하데스와 데메테르의 감정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기에 정서적인 면에 소구하는 파토스적 설득은 갈등의 종국적 해결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다. 즉, 페르세포네를 향한 이들의 사랑이 궁극적 으로 페르세포네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갈등의 불식을 종용하는 감정적 설득은 효과를 발휘했다. 여기에 논리적 설득 구조인 로고스를 겸비하며 제우스의 조정안은 이성적 토대를 갖춘다. 석류 열매를 먹은 자는 하데스의 지하세계에 머물러 있어야한 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데메테르의 지상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제우스는 페르세포네 가 농사를 짓는 기간 동안은 지상세계에 있고, 그렇지 않은 기간에는 지하세계에 있 3) Gutierrez, A., 2012, The seasons of 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 A study of mediation tactics in the context of ancient greek mythology, American Journal of Mediation, vol 6, p.68. 4) 강태완, 2010, 설득의 원리 (서울: 페가수스)를 참조하였다. 21
도록 했다. 지하세계와 지상세계 체류 기간을 핵심 쟁점으로 놓고 양자의 입장을 모 두 존중하는 최적의 안을 도출 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러한 합리성이 있었다. 2. 미의 여신, 질투의 화신 되다 프시케와 아프로디테 데메테르 대지의 여신 제우스 최고의 신 아프로디테 미의 여신 고부 모자 에로스 연인 프시케 사랑의 신 인간 그리스 최고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인간인 프시케가 새로운 미의 상징으로 추앙 받자 참을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인다. 그녀는 아들인 에로스를 시켜 프시케에게 사 랑의 고통을 줄 것을 명했으나, 에로스의 실수로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아프로 디테의 분노와 저주는 계속되었고, 프시케는 에로스를 찾아 나섰다가 데메테르 신전 에 당도한다. 데메테르는 아프로디테 신전에 찾아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것을 조 언한다. 프시케는 데메테르의 말에 따라 아프로디테를 찾아갔으나, 그녀는 프시케에 게 모진 노동을 시킬 뿐이었다. 이에 에로스는 제우스를 찾아갔고, 제우스는 아프로 디테를 설득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마침내 아프로디테는 박해의 손을 거두었다. (1) 데메테르와 제우스의 역할 여자들의 세계에서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다. 그 세계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 은 신화뿐 아니라 인류의 난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데메테르는 갈등하는 두 여인을 조정의 장으로 이끄는 조력자 역할을 한다. 미궁에 빠진 갈등은 데메테르의 조언으로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된다. 특히 한 당사자에게 포용과 관용의 태도를 견 22
지할 것을 조언하며 먼저 손을 내밀 것을 권하는 용기 있는 태도가 갈등 해결의 실 마리를 제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제우스는 완고한 당사자 인 아프로디테를 설득하 는 것이 핵심임을 간파하고, 질투의 화신이 된 그녀를 설득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질투와 증오 등 감정의 골이 야기하는 갈등이 인간계의 갈등 양상을 그대로 닮았다 는 점에서 아프로디테와 프시케의 갈등 해결은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두 당사자를 설득하는 혜안을 제시한다. (2) 데메테르와 제우스가 갈등 조정에 성공한 이유 데메테르는 조정으로 나아가는 교두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조정자뿐만 아니라 조정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독려하는 조력자의 역할도 중요함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를 바탕으로 제우스는 조정의 시작점을 설정했다. 그는 당사자 간의 의 견 합치를 도모하기 이전에 아프로디테의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것이 선행되어야함을 알았다. 특히 그대가 인간들의 어려운 사랑의 끝도 아름답게 맺어 주듯이 그대의 아들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도 그 끝을 아름답게 해 주면 좋겠어요. 5) 라는 제우스 의 설득의 메시지는 아프로디테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미와 사랑의 여신이 라는 자신의 본분과 모정을 상기시키는 설득법은 근원적 감정을 깊이 자극해 태도 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감정적 대립을 해결하려는 감정 소구의 설득법은 효과가 있 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파토스(Pathos)적 설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3. 아르골리스의 가뭄 - 헤라와 포세이돈 그리고 이나코스 이나코스 강의 신 부녀 포세이돈 헤라 부부 제우스 연인 이오 바다의 신 최고의 여신 최고의 신 제우스의 연인 5) 이윤기, 2000, 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 1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145-146쪽. 23
제우스는 아내 헤라 몰래 이오라는 여성을 사랑한 적이 있다. 헤라와 바다의 신 포세 이돈이 아르골리스 땅을 두고 싸움할 때, 아르골리스 땅을 흐르던 강의 신 이나코스 는 헤라 편을 들게 된다. 이나코스가 이오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제우스 때문에 딸 을 잃었기 때문에 제우스를 적대하고 있던 헤라 편을 든 것이다. 강의 신이 바다의 신에 반( 反 )하자 포세이돈은 매우 화가 났다. 그는 아르골리스 땅의 물을 모두 데리고 바다로 갔고, 아르골리스에는 물이 몹시 귀해졌다. (1) 이나코스의 역할 이나코스는 헤라와 포세이돈의 영토 전쟁을 조율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분쟁의 대상이 되는 지역의 강의 신으로 일종의 향판( 鄕 判 )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정부 에서 어느 지역을 대상으로 정책을 실시할 때 그 지역 책임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보다 더 적임자는 없기 때 문이다. 이나코스는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고려할 때, 두 신의 갈등 관계와 더불 어 이것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도 함께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이 지역이 이들의 분쟁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르골리스 땅 이 가뭄이라는 극단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지역을 둘러싼 갈등이 원만히 해결되 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2) 이나코스가 조정에 실패한 이유 이나코스는 지역 사정에 정통한 책임자로서 훌륭한 조정자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그 기회를 놓쳤다. 이것은 그가 조정자의 기본자세인 중립성을 상실하고 편 파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개인적인 감정이 조정 과정에 개입되었 다는 점이 조정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헤라와 포세이돈의 이익 갈등에 대 한 첨예한 시각이 부재했고, 단순히 이를 헤라와 제우스, 이오의 관계 내에서 살펴 보았기 때문이다. 조정 당사자 및 관련 인물들과 얽힌 과거사에 영향을 받아 헤라 와 포세이돈의 갈등 조정이 제우스에 대한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갈 등 조정에서 조정 당사자와 조정자의 과거 관계가 미치는 영향에 주의해야하는 이 유가 여기에 있다. 24
4. 사슴 피리, 비극을 노래하다 아폴론과 마르시아스 마르시아스 對 아폴론 반인반수 음악의 신 미다스 토몰로스 프리지아의 왕 산신 반인반수 마르시아스는 우연히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버린 피리를 줍게 되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오묘하고 매력적이었다. 그의 사슴 피리 연주로 음악의 신 아폴론의 수 금 솜씨가 무색해졌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자, 아폴론은 마르시아스에게 솜씨를 겨룰 것을 제안한다. 6) 산신 토몰로스와 미다스는 이 겨루기에 심판으로 초대되었다. 1차 대결에서 결판이 나지 않자, 아폴론은 마르시아스에게 악기를 거꾸로 들고 연주하자 는 제의를 한다. 아폴론의 수금은 거꾸로 들어도 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마르시아스 의 피리는 그렇지 않았다. 2차 대결의 결과, 토몰로스는 아폴론의 승리를 판정했고, 미다스는 마르시아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폴론은 매우 노해 미다스의 귀를 당나귀 귀로 만들어버렸다. 대결에서 진 마르시아스는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는 참혹한 벌을 받았다. (1) 토몰로스와 미다스의 역할 아폴론과 마르시아스의 갈등 구조는 힘의 불균형이라는 측면에서 면밀히 살펴볼 가 치가 있다. 아폴론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올림포스 12신 중 한 명이고, 마르시아스 는 반인반수다. 일방의 힘의 크기가 비대한 갈등 구조에서 원만한 합의점을 모색하 는 일은 쉽지 않다. 또한 갈등 조정이 힘의 논리 속에서 편협하게 전개될 위험도 간과할 수 없다. 공정한 조정을 위해서는 기존의 세력 관계에서 벗어나 동일 선상 에서 갈등 그 자체를 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선행되어야하는 이유다. 심판자로 초대 된 토몰로스와 미다스는 단순한 승패의 판결뿐만 아닌, 힘의 균형을 고려한 조정의 장을 마련하는 역할까지도 수행해야 한다. 6) 해석에 따라 마르시아스가 우쭐하여 아폴론에 도전했다는 연구도 있으나, 이 글에서는 이윤기(2010)를 기준으 로 한다. 25
(2) 토몰로스와 미다스가 조정에 실패한 이유 아폴론은 수퍼(super)갑( 甲 ) 이었다. 현대사회의 갑을관계 라는 힘의 논리처럼, 아 폴론의 권력은 조정당사자 간의 힘의 불균형뿐만 아닌, 당사자와 조정자 사이의 종 속적인 관계까지 양산했다. 갈등 당사자, 조정자 등 모든 인물 가운데에서 아폴론의 힘의 크기는 절대적이었다. 아폴론이 미다스의 귀를 당나귀 귀로 만들었다는 대목 은 이러한 힘의 불균형을 방증한다. 따라서 토몰로스와 미다스는 아폴론의 권세 앞 에서 매우 표면적이고 수동적인 역할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아폴론과 마르시 아스가 같은 높이에서 갈등을 논하도록 평등한 바탕을 다지는 것도 불가능했고, 갈 등의 원인을 분석하고 합의점을 모색하는 합리적인 조정자의 역할 또한 수행할 수 없었다. 조정당사자 양자의 관계뿐만 아니라 당사자와 조정자가 세속적 힘의 논리 에 갇힌 채 조정에 임한다는 것은 조정 결과의 공정성을 보장할 수 없는 치명적인 오류로 이어질 수 있다. Ⅲ. 그리스신화 속 갈등 조정의 특징 1. 법과 정의의 신 보다 조정자 그리스신화에는 질서와 율법의 신 테미스가 있다. 테미스는 제우스의 고모이자 그 의 두 번째 아내이다. 눈을 가리고, 천칭과 검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불편부당 성과 공정성을 견지해야하는 법관의 지향점과 닮았다. 그녀의 딸은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다. 신화 속에서 그녀는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저울을 들고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법이라는 절대적 가치로 정의의 실현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오 늘날 사법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신화에는 테미스와 아스트라이아와 관련된 일화가 많지 않다. 오늘 날 인구에 회자되는 법대로 하자 는 말처럼 현대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그 종국적 해결에 사법부가 큰 역할을 하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리스신화에서는 갈등 과 분쟁의 해결에 제3자의 역할이 중요했다. 사건의 과정과 인물들의 관계를 충분 히 알고 있는 자가 조정자가 된 것이다. 흔히 신들의 세계에서는 그 특수성으로 인 26
해 발생하는 힘의 논리가 갈등의 해결에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으나, 위 에 소개된 이야기 및 신화 속 다양한 사례는 설득과 협상의 과정도 조정에 중추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2. 조정자와 당사자들 간의 관계 그리스신화를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인물 관계가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혈육관계와 혼인하고 가정을 이루는 일이 허다하고, 일부다처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이러한 관계는 신화 속 다양한 갈등을 더욱 복잡, 미묘하게 만 든다. 특히 제우스는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십여 명의 여신과 결혼했고, 오십여 명 의 자식을 낳았다. 7) 제우스만 알면 그리스신화의 절반 이상은 이해한 것이라는 얘 기도 과장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제우스는 관계된 인물이 많았기에 다양한 이들의 갈등 조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신화 속 갈등은 혈연관계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고 적대적 관계나 권력의 종 속적 관계에서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혈연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그리스신화 의 혈연에 대한 개념이 오늘날의 그것에 비해 상당히 약했기에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이라기보다 단순한 개인 간의 갈등에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 이의 갈등의 조정자는 대체로 이들과 오랜 시간 관계를 맺어온 자였다는 점에서 과 거사가 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각별한 공정을 기해야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신화뿐만 아닌 역사의 무수한 갈등이 그렇듯, 적대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8) 전쟁의 사회적 국가적 영향을 고려할 때, 적 대자들 간의 갈등에서 조정자는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원만한 해결을 모색해야 했다. 3. 이해의 충돌 조정자와 조정당사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해의 충돌은 조정의 공정성을 방해하 는 주된 요인이다. 이것은 당사자의 이익 관계와 조정자 본인의 이해관계가 충돌하 7) Bulfinch, T., 1999, 그리스로마신화, 손명현 역(서울: 신원문화사)을 주로 참조하였다. 8) 김원익(2011), 259쪽. 27
는 것을 뜻한다. 즉, 조정의 결과가 조정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계산이 조정 과 정에 개입하는 것이다. 신화 속에서는 갈등하는 자들의 다툼의 결과가 본인의 세력 신장이나 통치권의 확장 등과 직결되는 경우, 이러한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객관적 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조정자가 자신의 이익에 대한 고려 가 많아지면 조정은 필시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조정 중재에 관한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중재인의 제척, 기피, 회피 등에 관한 제도와도 궤를 같이한다. 중재법 에서는 당사자가 중재인을 기피하거나 중재 인 스스로가 회피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9)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 한 법률 은 기피, 회피 외 제척 제도를 명시하고 있다. 10) 즉, 분쟁의 당사자나 쟁점 사항과 관련하여 이해관계를 가진 자를 제척해 조정 및 중재 절차에 관여하지 못하 도록 하는 것이다. 기피, 회피 및 제척 제도는 중재위원과 당사자의 관계가 공정한 집무 집행에 장애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제도이다. 사람과 사람 간에 일어 나는 일을 궁극적으로 사람이 주체가 되어 판단을 한다는 점에서 조정자가 사건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4. 힘의 불균형 신들의 세계에서 힘의 우월 관계는 그 세계를 존속시키는 핵심 기제 중의 하나였 다. 다툼과 갈등의 연속인 그리스신화에서 갈등은 대체로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에 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더 큰 권력과 힘에 대한 지향이기도 했고, 외부로부터 인정 받고자하는 욕구이기도 했다. 힘과 갈등의 불가분의 관계는 역설적으로 종래적 기 준에서의 힘의 논리가 갈등의 원만한 해결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포세 이돈과 이나코스의 갈등처럼 바다의 신 - 강의 신 이라는 상하위적 관계에서 갈등 의 축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고, 아폴론과 마르시아스의 갈등에서는 아폴론 이라는 거대한 신의 권력이 당사자들 간의 불균형한 관계와 당사자와 조정자 사이 의 치우친 관계를 형성해 조정 실패를 야기했다. 28 힘의 불균형과 기존의 우월 관계가 갈등 해결의 장애가 되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 도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정치적 동물 인 인간은 사적 동기를 합리화 11)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의 장에서 본인 9) 중재법 제13조(중재인에 대한 기피 사유), 제14조(중재인에 대한 기피절차). 10)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10조(중재위원의 제척 등).
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힘의 우위를 점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권력을 획득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신들의 세계든, 인간의 세계든 이러한 본성으로 말미암은 갈등을 현명하게 조정 하는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힘과 권력의 불균형으로 서로 다른 높이에 있는 양 당 사자가 그들 사이에 놓인 사다리에서 내려와 서로 같은 높이에서 갈등의 본질을 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조정자의 역할이다. 갈등 그 자체를 논하는 데에 기존의 힘의 관계가 적용되는 것은 반칙 이기 때문이다. Ⅳ. 맺음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페리안드로스는 그리스의 칠현 중 솔론, 탈레스, 비아스를 코 린토스 12) 로 모신 적이 있다. 어느 날 가장 현명한 철학자에게 라고 적힌 황금 솥을 두고 그는 고민에 빠진다. 페리안드로스는 이것을 탈레스에게 줄 것을 제안한다. 그 러나 탈레스는 이것이 비아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양보한다. 비아스 역시 이 를 사양하고, 결국 이것을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바치는 것으로 갈등은 평화롭게 해결된다. 마치 황금 솥의 세 다리처럼 정립( 鼎 立 )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13) 그리스신화에서 발이 셋 달린 청동 솥은 신성하게 여겨졌다. 디오니소스 제전의 시인 경연대회 우승자에게도 청동 솥을 수여했다. 14) 세 점은 면을 이루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두 발솥으로는 서 있을 수 없고, 네 발솥으로 지지하기 위해서는 각 발의 길이가 모두 같은 길이로 대칭 구조를 이루어야한다. 완전한 평면 위에 놓이는 것 이 아니라면 이들은 모두 제대로 솥을 지탱할 수 없다. 그러나 세발솥은 발의 길이 가 조금씩 서로 달라도, 기울어지고 울퉁불퉁한 바닥에서도 완벽하게 정립( 正 立 )할 수 있다. 15) 소통과 화해의 매개체로서 갈등의 조정자는 청동 솥의 세 번째 다리에 해당한다.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대립하는 양 당사자는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청 동 솥의 모습이다. 그들과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고, 양자의 11) Lasswell, H. D., 1985, 권력과 사회, 김하룡 역(서울: 법문사)을 주로 참조하였다. 12) 고대 그리스 코린토스 지역의 명조( 名 祖 )를 뜻한다. 13) 신동아, 1999년 4월호 델포이의 세발솥 앞에서 (이윤기)를 참조하였다. 14) 김원익(2011), 337쪽. 15) 신동아, 1999년 4월호 델포이의 세발솥 앞에서 (이윤기)를 참조하였다. 29
입장에 따라 다리의 길이와 높이를 조정하는 유연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조정자 역 할의 핵심이다. 청동 솥의 미학 은 오늘날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참 지혜다. 신 화 속 갈등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의 그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갈등 해결의 고갱이는 3 의 균형점이 되는 조정자의 역할에 있음을 신들의 세상은 말하고 있다.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