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고 새로운 우리의 세계사 도현신
소개글 여태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거나, 혹은 전혀 몰랐던 새롭고 놀라우며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실을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을 넘나들며 엮었습니다.
목차 1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7 2 고려군에게 엉덩이를 내보이다 우습게 죽은 어느 왜구... 12 3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15 4 소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어느 고려 장수 이야기 22 5 티무르와 로도스 기사단과의 대결전! 26 6 몽골의 유럽 원정군에 길잡이 역활을 했던 영국인 기사. 29 7 몽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과 손 잡으려 했던 아사신 교단 31 8 바이킹들의 격언. 34 9 월드컵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던 기막힌 이야기! 36 10 조선 시대에 나타났던 UFO 이야기! 39 11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해 만든 음식, 탕평채! 42 12 신에게 구원을 받았던 무신론자의 이야기... 45 13 전생( 前 生 )이나 환생( 還 生 )은 동양만의 사고방식인가? 48 14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 51 15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조경남의 저서 <난중잡록> 55 16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57 17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고 했던 일본인들. 64 18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67 19 서자 출신의 의병장, 홍계남 74 20 1억 원 이상을 내야 교리를 들을 수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77 21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82 22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을 외면하고 도망간 한국의 정치인들 87 23 페르시아(이란)는 동양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90 24 켈트족의 재미있는 풍습들... 94 25 로마는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97
26 옛날 사람들은 왜 담배를 그토록 많이 피웠을까? 102 27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06 28 로마인 이야기가 완전히 빼먹은 기원전 120년 경의 게르만족 대이동 113 29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116 30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2 31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29 32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 136 33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0 34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148 35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를 택하라! 153 36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겠다고 제안한 항왜들 156 37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159 38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163 39 일제의 강제 징용을 돈 받고 변호해 준 로펌, 김앤장... 168 40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2 41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179 42 고종 임금이 좋아했던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183 43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85 44 한국 전쟁 당시, 부산에서 벌어졌던 모습들... 198 45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201 46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1) 206 47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210 48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215 49 너무나도 비참했던 1950년대의 한국 220 50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223
51 청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한 남명의 명장, 이정국 229 52 조선시대 선비들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어떻게 보았을까? 232 53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34 54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40 55 모택동- 고추 소스 같은 가짜 공산주의자 252 56 중국을 파탄으로 몰고 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255 57 이자성과 장헌충 등, 명나라 말기의 도적 집단인 유구에 대해서... 261 58 중국 역사를 통틀어 도적들은 왜 발생하는가? 264 59 여색을 무척이나 밝혔던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267 60 왜 중국은 티벳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가... 271 61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간통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동생이 형을 죽이다! 274 62 모택동은 미소녀를 좋아해 278 63 청나라 군대가 양주에서 저지른 끔찍한 대학살 289 64 17만 명의 백성들이 청군에게 살육당한 강음성의 비극 292 65 청나라의 무자비한 언론 탄압, 문자의 옥 296 66 모택동은 아편을 팔아 거금을 번 마약왕이었다? 301 67 인육을 먹었던 홍위병들의 만행 304 68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1) 307 69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2) 310 70 서구 문명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소머리 괴물 치우의 후손인가? (3) 313 71 북유럽 신화의 대략적인 개요 315 72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1) 318 73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2) 325 74 북유럽 신화: 천둥의 신 토르 (3) 334 75 <북유럽 신화> 살인으로 시작된 천지창조 339
76 <북유럽 신화> 토르, 세계를 감싼 뱀을 들어 올리다. 350 77 [중국 신화]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네 악신들 360 78 <중국 신화> 김용옥 교수의 호인 도올 은 중국 신화의 괴물 이름! 367 79 신들에게 도전했던 거인 형제, 오토스(Otus)와 에피알테스(Ephialtes) 370 80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들 376 81 올림포스의 신들마저 두려워한 거인, 브리아레오스(Briareos) 386 82 <북유럽 신화> 로키, 종말을 일으킬 세 괴물을 낳다. 394 83 [슬라브 신화] 죽지 않은 시체들을 불화살로 태워 없애는 태양의 신들. 402 84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의 주인공이 된 '아르타이우스' 409 85 [켈트 신화] 바다를 선 채로 건넌 거인왕, 브란 420 86 중국식 튀김빵인 유조... 437
01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2008.05.27 00:50 1637년 12월 17일,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면서 강화도의 방위 책임을 김경징( 金 慶 徵 )이란 인물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반정공신이자 체찰사 김류( 金 )의 아들로서, 아비의 권세를 믿고 평소에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병자호란의 상황을 기록한 사서 <병자록>에 따르면 김경징은 강화도에 들어갈 때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는 각각 덮개 있는 가마에 태우고 계집종은 전모( 剪 帽 )를 씌웠으며, 집에서 싣고 나온 짐 보따리가 50여 개나 되어 그것을 운반하기 위해 경기도의 인부와 말이 거의 다 동원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피난 행렬을 이끌고 가는 도중에 한 계집종이 말의 발이 겹질리는 바람에 땅에 떨어지는 사건이 있자 김경징은 피난 행렬을 수행하던 관리를 노상에서 곤장을 치게 했습니다. 또한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김경징은 배를 모아서 그의 가속과 절친한 친구들만 먼저 강화도로 건너가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함 께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그 때문에 배를 타지 못한 피난민들의 행렬이 수십 리에나 뻗쳐 있었으며, 심지어 세자의 아내인 빈궁 일 행이 나루에 도착해도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한 채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추위에 떨며 굶주릴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참담한 광경을 보다 못한 세자빈이 가마 안에서 김경징아, 김경징아, 네가 차마 이런 짓을 하느냐! 하고 소리를 지르자, 장 신( 張 紳 )이 듣고 김경징에게 부탁하여 간신히 배로 건너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양반 집 아녀자들이 온 언덕과 들에 퍼져서 구해 달라고 울부짖다가 청군 기병대가 갑자기 들이닥치니 순식간에 말발굽에 차 이고 밟히거나 혹은 끌려가거나 그러기를 두려한 나머지 바닷물에 뛰어들다 빠져 죽는 등, 그 참혹함이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 니다. 청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간신히 강화도에 도착하고 나서도 김경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당시 강화도에는 봉 림대군( 鳳 林 大 君 : 훗날의 효종 임금)과 빈궁 일행 등을 비롯하여 많은 고위급 인사들이 피난 와 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김경징은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하려 하여 장신이나 김상용 같은 대신들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최소한의 전략적 식견도 없었던 김경징은 청군은 결코 강화도를 건너지 못하고 따라서 강화도는 절대 함락되지 않은 요새라 여기 고는 태평스럽게 방종하여 날마다 술만 마셔 대며 술주정을 일삼았습니다. 마침 인조가 머무는 남한산성이 청군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술독에 빠져 흥청망청 거리며 임금의 신변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봉림대군과 다른 대신들이 간혹 명령이나 건의를 하려고 오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이때를 당하여 대 군이 어찌 감히 나와 말하려 하며, 피난 온 대신이 어찌 감히 나를 지휘하려고 하는가. 하고 건방지게 뻗대었습니다. 아무리 제 아 비가 임금을 왕위에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반정공신이라고 해도, 어떻게 신하가 왕자에게 저렇게 오만무례하게 굴 수 있는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8
지 정말 신기할 따름입니다. 김경징은 김포( 金 浦 )와 통진( 通 津 )에 보관되어 있던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배로 실어왔으나, 정작 자신의 가족과 친한 친구들 이외에는 한 사람에게도 나눠주지 않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샀습니다. 그는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잔뜩 퍼마시고 아버지는 체찰사요 아들은 검찰사니 국가의 큰일을 처리할 자가 우리 집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하고 큰 소리 치기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마치 자기 집안이 왕가( 王 家 )라도 된 듯 착각에 빠졌던 듯 합니다. 이 때, 충청 감사가 적과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대신들이 임시방편으로 이민구( 李 敏 求 )를 대신으로 임명하고, 이어 전 라와 충청 경상 등 삼도의 흩어진 군졸들을 빨리 모아서 싸움을 독려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민구는 강화도는 안전한 곳이고 전라도는 반드시 죽을 곳이라 생각하여 가려고 하지 않고, 김경징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김상용( 金 尙 容 )이 김경징을 불러서 너의 아버지는 임금을 받들고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위기가 코앞에 닥쳐 있는데, 네 가 설령 임금의 욕됨은 걱정하지 않을지라도 홀로 너의 늙은 아버지마저 생각하지 않느냐? 삼남(전라, 충청, 경상도)의 군졸을 독려 하는 것이 대단히 급한 일인데 네가 어찌 차마 저지하는가? 이민구가 너의 유모 노릇한 지가 오래이다. 너의 나이 지금 얼마인데 어 찌 감히 이러느냐! 라고 준엄하게 꾸짖자... 꾸중을 들은 김경징은 화가 난 채 밖으로 나와 도장을 내팽개치며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하고 씩씩거렸다고 합니다. (-_-;) 이민구가 부득이 출발하려 하자 김경징은 추위를 막으려면 술이 없을 수 없다. 라고 하며 술을 데우는 것을 핑계하여 지연시키 고, 또 큰 배를 구하여 그의 처자를 태우고 가려 하였습니다. 이 한심한 추태를 본 김상용은 천하에 어찌 처자를 거느리고 다니는 사신이 있는가! 한갓 각 고을에 먹이를 구하는 것뿐이니, 비록 간다 할지라 무익할 것이다. 라고 힐책하였습니다. 김경징은 방비와 수비에는 마음이 없어 초관( 哨 官 )들을 풀어주어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고 한 섬 외에는 정탐도 하지 않으니, 식자 ( 識 者 )들이 한심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갑곶( 甲 串 ) 이하에서 연미정( 燕 尾 亭 ) 이북까지의 사이에는 일찍이 몽둥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 하나 없었을 정도로 방비 상태가 엉망이었습니다. 충청 수사( 忠 淸 水 使 ) 강진흔( 姜 晉 昕 )이 밤을 도와서 들어와 원조하니, 김경징이 강진흔이 거느린 배를 연미 ( 燕 尾 )와 여러 곳에 나누어 배치하고 경기도 배는 모두 광진( 廣 津 )에 두었습니다. 이때 적군이 삼강( 三 江 )에 모여 있으면서 가옥을 헐어 재목으로 혹은 작은 배를 만들고 혹은 동거( 童 車 )를 만들고 있으니, 그 의 도가 아마 강화도에 있는 것 같다. 라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김경징은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면서 강에 얼음이 아직 단 단한데 어떻게 육지에 배가 다닐 수 있겠는가? 라고 무시할 뿐이었습니다. 정월 21일 밤 초경에 통진 가수( 通 津 假 守 ) 김정( 金 )이 김경징에게 첩보하기를, 적이 혹은 낙타에 배를 싣고 혹은 동거에 배를 실어 갑곶 나루로 향하고 있으니 밤에 물을 건너려는 것이다. 하니, 김경징이 이르기를 군정을 요란하게 한다. 하고 막 베어 죽이려고 하는데 갑곶을 파수하는 장수의 보고가 또 들어왔습니다. 김경징이 비로소 놀라고 두려워 이일상( 李 一 相 )과 박종부( 朴 宗 阜 )로 하여금 파수( 把 守 )할 계책을 분부하고, 화약과 철환( 鐵 丸 )을 나 누어주고 있는, 돈을 계산하여 낱낱이 기록하였습니다. 해숭위( 海 嵩 尉 ) 윤신지( 尹 新 之 )로 대청포( 大 靑 浦 )를 지키게 하고, 전창군( 全 昌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9
누어주고 있는, 돈을 계산하여 낱낱이 기록하였습니다. 해숭위( 海 嵩 尉 ) 윤신지( 尹 新 之 )로 대청포( 大 靑 浦 )를 지키게 하고, 전창군( 全 昌 君 ) 유정량( 柳 庭 亮 )으로 불원( 佛 院 )을 지키게 하고, 유성증( 兪 省 曾 )으로 장령( 長 零 )을 지키게 하고, 이경( 李 坰 )으로 가리산( 加 里 山 )을 지키게 하며, 김경징 자신은 진해루( 鎭 海 樓 ) 아래 나가 스스로 갑곶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22일에 해가 세 발( 丈 )이나 올라오자 김경징이 천천히 성을 나가는데 군졸은 2, 3백 명도 되지 않고 모두 맨 주먹으로 가고 있었습 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본부에 군기( 軍 器 )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오늘 쓰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는가. 하니, 김경 징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우리 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것인데, 내가 어찌 감히 마음대로 쓰겠느냐. 하였습니다. 봉림대군이 김경징과 함께 진친 곳에 나가 보고 군사의 수효가 심히 적은 것을 보고 도로 성중으로 들어와서 다시 군병을 수습하 여 방수( 防 守 )의 계책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사람들이 모두 도망쳐 흩어졌으므로 부득이하여 비로소 성을 지킬 계획을 하였습니다. 한흥일( 韓 興 一 )과 정백형( 鄭 百 亨 )을 시켜 성중에 피난한 사람을 거느리고 성첩( 城 堞 )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연미 서쪽은 풍덕 군수 ( 豐 德 郡 守 ) 이성연( 李 聖 淵 )이 지키고, 연미 북쪽은 개성 유수( 開 城 留 守 ) 한인( 韓 仁 )과 도사 홍정( 洪 霆 )이 지키고, 갑곶 이하는 첨지 유성증이 지키고, 선원( 仙 源 ) 이하는 유정량이 지키고, 광성( 廣 城 ) 이하는 윤신지가 지키게 하였습니다. 한흥일과 정백형과 임선백( 任 善 伯 )은 각각 아이 종을 데리고 남문 위에 앉고, 회은군( 懷 恩 君 )은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동문 위에 앉고, 민광훈(민 光 勳 )ㆍ여이홍( 呂 爾 弘 ) 등 두 세 명의 조신( 朝 臣 )은 서문 위에 앉았는데, 북문은 사람이 부족하여 지키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은 모두 분개하였습니다. 일은 대단히 위급한데 게다가 성첩이 무너져 사방에 완전한 곳이 없었는데, 갑자기 천연적으로 만들 어진 장강( 長 江 )의 요새지를 버리고 맨주먹으로 무너진 성안에 돌아와 지켰습니다. 청군이 나루터에 주둔하여 홍이대포( 紅 夷 大 砲 )를 쏘니 포환이 강을 넘어서 육지 몇 리 밖에 떨어졌습니다.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 하며 파괴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김경징과 이민구는 겁에 질려서 정신을 잃고 창고 밑으로 피하니 온 군사가 요란하여 항렬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김경징이 대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성으로 돌아가서 굳게 지킬 계책을 세우겠다. 하였습니다. 이때 김경징이 도로 부성( 府 城 )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두 대군과 김상용( 金 尙 容 )ㆍ박동선( 朴 東 善 )ㆍ조익( 趙 翼 )도 함께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임선백은 호조 낭관으로서 군사의 요미( 料 米 )를 맡고 있었는데 용기를 분발하여 한번 싸우려고 하였으나 일이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몸을 물에 던졌으나 뱃사람이 건져내었습니다. 임선백이 나루 창고에 들어가 대군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어찌 천연으로 된 요새지인 장강을 버리고 허물어진 성안에 들어가 지 키려고 합니까. 국가의 존망( 存 亡 )이 이번 한 싸움에 달려 있으니, 대장된 몸으로서 결코 물러나 위축되어 군사들의 마음을 꺾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습니다. 대군도 그렇게 여겨 김경징을 굳게 말리자, 경징은 당황하여 넋을 잃어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나서 창고 담장 아래에 앉았습니다. 김선백이 또 대군에게 적선은 빠르기가 나는 것 같고, 우리 배는 썰물 때는 움직이기가 어려우므로 수군만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으니, 진해루 아래에 진을 펴서 지세가 좁고 험함 곳을 끼고 총과 활을 크게 배치하여 혈전( 血 戰 )을 기약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 성을 지키는 것은 아이들의 장난과 같으니 성안에 있는 군사를 몰아내어 모두 체찰부의 군기를 사용하여 오로지 나루터에서 힘을 쓰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라고 고하자 봉림대군은 그렇다. 내가 마땅히 말을 달려 성에 들어가서 군정( 軍 丁 )과 군기를 직 접 거느리고 오겠다. 하고 결의를 다졌습니다.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10
그러나 그 말을 나눈 지 얼마 안 되어 청군의 전선이 날아오듯이 건너왔습니다. 김경징은 배를 빼앗아 달아났는데, 어머니와 아내, 며느리를 전혀 챙기지 않았고 그 바람에 그의 어머니는 청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내와 며느리는 모두 자살하였습니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고, 강화도는 청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실 인사들과 수많은 조정 대신들과 그 가솔들이 포로가 되었고, 이밖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 김경징은 대간으로부터 강화 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았는데, 인조가 원훈( 元 勳 )의 외아들이라고 해 특별히 용서하려 했으나 그의 한심한 추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탄핵 요구가 빗발치는 바람에 결국 김경징은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출처: 연려실기술과 인조실록, 병자록 등. 원균에 필적했던 명장(?) 김경징을 아십니까? 11
02 고려군에게 엉덩이를 내보이다 우습게 죽은 어느 왜구...
고려군에게 엉덩이를 내보이다 우습게 죽은 어느 왜구... 2008.05.27 00:53 1377년 5월 우인열이 정예 기병 5백 명을 보내어 왜적을 사불랑송지( 沙 弗 浪 松 旨 )에서 치니, 적이 무너져서 배를 타려고 다투다가 물에 빠져 죽고 화살에 맞은 자가 또한 많았다. 순라하는 군사가 또 말하기를, " 적선이 해도 ( 海 島 )에 숨었다가 나타났다 하여 많고 적은 것을 알 수 없읍니다 "하였다. 이 때에 우리 태조(이성계)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 공포에 싸였다. 인열의 급보가 계속하여 이르 니, 태조가 이틀 길을 하루에 행하여 적과 지리산 아래에서 싸웠는데, 상거가 2백여 보쯤 되는 곳에 한 적이 돌아서서 몸을 구부리고 손으로 궁둥이를 두드려 두려울 것이 없다는 모양을 보여 모욕하였다. 고려군에게 엉덩이를 내보이다 우습게 죽은 어느 왜구... 13
태조가 작은 살을 쏘아서 한 화살에 거꾸러뜨리니, 이에 적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기운을 빼앗겼다. - 고려사절요 제 30권에서 발췌 - 과연 화살은 어디서 맞았을까요? (첨부한 사진은 전 재산 40억 원을 영화 '클레멘타인'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하고 원금 회수도 못하자, 똥꼬쇼까지 하면서 생계를 이 어갔던 영화 배우 이동준씨... 왜 40억이란 거금을 몽땅 영화에 투자했던 것인지? 차라리 요새 잘나가는 차이나 펀드에 넣어뒀으면 몇 배로 더 벌 수 있는데... -_-;) 고려군에게 엉덩이를 내보이다 우습게 죽은 어느 왜구... 14
03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2008.05.28 00:34 아래 글은 민속원에서 출판된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에서 발췌했습니다. --------------------------------------------------------------------- 몽골지역에는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바위그림들이 무수히 산재해 있다. 또 이 바위그림에는 무당의 제구용 활이나 사냥용 활들이 수없이 묘사되어 있다. 원래 북방민족들은 부여의 주몽이나 몽골의 메르겐(mergen)이라는 칭호에서도 나타나듯이 백발백중의 명사 수를 매우 우대하고 칭송하는 관습이 있다. 바위그림에 활이 묘사되어 있고, 유목국가 성립 후 명사수를 중시하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는 것은 바로 활이 북방민족의 생존에 매우 필요한 도구이자 무기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유목제국인 흉노에서부터 몽골에 이르는 역대 유라시아 기마민족들의 활은 말 위에서 화살을 발사하는 '파르티안 샷', 즉 기 마사법에 알맞게 길이가 1.5~1.6m 정도의 단궁 계열이며 재료면에서는 모두 합성궁에 속한다. 활은 전투용과 수렵용의 2종류가 있으 며 화살은 사용용도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역대 북방민족 중 활과 화살의 기술이 가장 정점에 달한 시기는 역시 13세기의 몽골제국 때이다. '파르티안 샷'으로 상징되는 북방 민족의 기마사법은 정확도와 사정거리에서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 화기의 등장 이전까지 북방 유목제국이 중국, 페르시아, 유럽 등의 주변 제국보다 군사적인 우위를 지니게 된 원인도 바로 이 사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활은 1.8m를 기준으로 장궁과 단궁으로 나뉘며 자료에 따라 단궁( 單 弓 또는 단판궁: 單 板 弓 )과 복합궁( 複 合 弓 또는 합판 궁: 合 板 弓 )으로 크게 분류된다. 단궁은 나무나 대나무의 단일 재로로 만들어진 활이며 복합궁은 두 종류 이상의 재료로 만들어진 활 이다. 1932년 고고학적인 출토물을 근거로 흉노의 활을 복원한 바 있는 Alfoldi와 J.werner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흉노의 전투용 활은 길이가 1.4m~1.6m이고 스키타이나 몽골의 활처럼 이중 꺾임(double curve)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후대 몽골의 활과 같이 심줄 과 뼈를 사용하여 강도를 높인 것으로 나타났다. (O.J.Maenchen-Helfen, [The World of Huns- studies in Their History and Culture-] Berkeley and London, 1973, p.222) 몽골의 활은 나무로 틀을 잡고 양면에 동물의 뿔과 심줄을 끓여 압축해 붙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즉 시위를 당기는 쪽에 압축성이 매우 뛰어난 소나 산양의 뿔을 가공해 붙이고 그 반대쪽에 신축성이 강한 심줄을 붙이고 있다. 그리고 접착력을 높이기 위해 활 전 체를 사슴 가죽으로 말아 감으며 온도의 변화를 예방하기 위해 도료를 칠한다. 흉노의 고분에서는 전투용 활과 함께 부장된 사냥용 활이 출토되었는데, 고대 몽골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사냥용 활은 고고학적 유물이나 [몽골비사] 등의 문헌에 기록된 것을 참조로 할 경우 전투용 활과는 달리 이중 꺾임 구조가 아닌 C-형 구조를 가 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16
- 몽골군은 두 개의 활을 보유하였는가? 몽골의 활에 관련되어 자주 나오는 설 중 하나가 몽골군이 두 개의 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대표적인 예로 G.Vernadsky 등 일부 학자들은 [몽골비사] 195절의 "yeke, taran"이라는 기록이나 마르코 폴로의 기록, 고대 북방민족들의 고분에서 나오는 몇 종의 각기 다른 활의 근거로 토대로 몽골군은 전투시 2종의 다른 활을 보유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몽골비사] 195절의 "yeke, taran"은 yeke numun(큰 활)과 baga numun(작은 활)의 생략형이 아니라 동일의 활에서 화 살대에 따라 힘의 완급을 조절하는 표현에 불과하며 페르시아의 삽화 등 현존하는 그림자료를 참조할 경우에도 전투 때 2종류 이상 의 활을 소유한 자를 발견할 수 없다. G.Vernadsky 등의 추론은 전투시 사용하는 활과 사냥시 사용하는 활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한 채 막연히 이끌어낸 추상적인 결 론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실려 있는 몽골 기병의 전투 장면 출전하는 타타르(몽골)병사는 각자 60개의 화살을 휴대할 의무가 있다. 그 가운데 30개는 짧은 화살인데 이것은 적을 움직이기 못 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나머지 30개는 긴 화살로 화살촉도 큰데 이것은 근접 거리에서 적병의 얼굴 및 팔을 관통하거나 적병의 활시위를 절단하거나 그 외의 곳에 직접 손상을 가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이 60개의 화살을 모두 써버리면 그들은 칼이나 철퇴, 창을 휘둘러 서로 치는 백병전에 돌입한다... 화살을 다 쏴 버리자 병사들은 각자 활을 화살통에 넣고 칼과 철퇴를 들고 적에게 돌격하였 다. 몽골제국은 이전에도 설명했듯이 역대 북방민족 중 활과 화살에 대한 기술이 가장 정점에 달한 제국이다. 몽골제국의 활과 화살에 대해서는 당시 군사정찰의 목적으로 남송이나 유럽에서 몽골로 파견된 사신단의 보고서, 즉 조공의 몽달비록이나 팽대아, 서정의 흑 달사략, 카르피니의 몽골여행기, 루브룩의 루브룩 여행기 등에 아주 구체적이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들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당시 몽골의 활은 이중꺾임 구조의 완양각궁이 주류를 이루며 무게는 7.2kg 이상으로 나타난다. 또 화 살대는 주로 사류( 沙 柳 : 여기서는 그냥 버드나무를 뜻함)로 만들며 근거리 사격용의 경우 그 길이는 90cm 정도이다. 화살대의 끝 부 분에는 3매의 깃털을 붙여 날아가는 도중 강한 회전력을 유지케 해 사정거리의 안정성을 높이고 있다. 시위는 사슴의 목 가죽으로 만든 것을 주로 사용한다. 활을 쏘는 방식은 거의 수직에 가깝게 활을 잡은 뒤 왼손의 엄지 위에 화살을 놓고 오른손 엄지의 제 2 관절로 시위를 당겨 발사하 는 독특한 방식(몽골식 사법)을 사용한다. 몽골의 활은 시위를 잡아당기면 모양이 둥근 형태가 되기 때문에 화살의 속도가 매우 빠르 고 사정거리도 매우 길다. 몽골제국 때 가장 유명한 활쏘기 시합은 1224년 칭기스칸이 호라즘 원정에 돌아와 제국의 서부지역인 보카-소치카이에 머물 때 행 한 사격대회이다. 이 시합의 우승자가 바로 예숭게(칭기스칸의 동생인 카사르의 둘째 아들)로 그는 자기의 유목지인 동몽골의 어를렁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17
거에 다음과같은 비석에 이를 새겨넣었다. - 칭기스칸이 사로타울(호라즘) 백성에서부토 돌아와 말에서 내려 모든 몽골의 귀족들을 보카-소치카이에 모았을 때 예숭게는 원 거리 사격으로 335알다의 곳까지 멀리 쏘았다. 예숭게가 원거리 화살을 날려 우승한 335알다는 오늘날의 척도로 약 525~560에 이르는 장거리이다. 그러나 이 비문에는 예숭게가 쏜 거리의 의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즉 이것이 원거리 화살의 최대 사거리인지 혹은 과녁을 맞춘 살상 유효사거 리인지를 좀더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몽골비사] 195절에는 고대 몽골인들의 근거리 사격과 원거리 사격의 사정거리를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 카사르가 분노하여 앙구아 화살을 당겨 쏘면 산 너머에 있는 10명 20명의 사람들을 일거에 꿰뚫게 쏜다. 전투가 벌어져 황야를 질주해 달려오고 있는 적들을 향해 케이부르 화살을 당겨쏘면 줄줄이 관통하도록 쏜다. 크게 힘을 주어 쏘면 9백 알다(alda)의 곳까 지 나가고 작게 약간 힘을 주어 쏘면 5백 알다의 곳까지 나간다. 위 기록은 카사르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표현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몽골활의 사정거리가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역주: 이 글의 원 저자인 박원길 교수)는 이러한 점에서 예숭게 비문에 나타난 335 알다는 과녁을 맞춘 명중 사거리일 가 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또 예숭게 비문을 근거로 할 경우 고대 몽골인들의 최대 명중 사거리는 대략 300 알다(450~525m)전후라고 보여진다. 위의 카사르에 대한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화살의 종류에 따라 사정거리의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정거리의 차이 는 [몽골비사]의 기록처럼 발사 때의 힘의 차이라기보다는 위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화살촉의 모양과 크기에 따른 화살대의 차이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G.Vernadsky는 몽골활의 사정거리가 182~274m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몽골의 학자인 O.남난도르지는 강력한 활일 경 우 사정거리가 900m에 이른다는 실례로 제출하고 있다. O.J.Maenchen-Helfen은 W.E.Mcleod의 연구보고를 근거로 흉노를 포함 한 고대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합성궁 유효 사정거리는 160~170m일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루브룩의 몽골여행기에는 몽골활의 시위와 화살촉에 관한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 몽케칸은 두 사람이 달려들어도 제대로 시위를 당기기 어려운 강고한 활과 화살 두 개를 만들었는데 화살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 은촉이 달려 있었다. 이 은촉화살은 날아갈 때 마치 호루라기 같은 소리를 낸다. 몽케칸은 테오돌루스를 따라 파견될 몽골인에게 다 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이 사람과 같이 프랑크의 왕에게 가게 될 것이다. 가서 나를 대신하여 이 물건들을 바쳐라. 만약 그가 우리와 평화를 원한다 면 우리들은 사라센으로부터 그의 왕국이 이어지는 곳까지만 정벌하고 그 나머지 서쪽 세계는 그에게 통치하게 하겠노라고 말하라. 만약 그가 평화를 원치 않는다면 활과 화살을 다시 갖고 돌아오면서 그에게 전하라. 우리는 이런 활로 화살을 발사하는 데 아주 멀 리 가고 또 강하다는 것을.' (C.Dawson, [The Mongol Mission], p.159)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18
참고로 위의 인용문 중 "두 사람이 달려들어도 제대로 시위를 당기기 어려운 강고한 활"이라는 구절과 관련하여 몽골인들의 시위를 당기는 완력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원사](목화려전- 칭기스칸의 장수 무칼리)에도 실려 있다. 몽골의 활, 그 모든 것.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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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소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어느 고려 장수 이야기
소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어느 고려 장수 이야기 2008.05.27 22:23 김진( 金 縝 )은 전라도 원수로 있을 때에 도내의 이름 난 기생을 많이 모아 놓고 휘하 사관들과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놀았다. 김진 은 소주를 즐겼으므로 군대 안에서 그를 소주도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사병과 보좌관이 조금만 자기 비위를 거스리면 곧 후려 갈기며 욕설을 하였으므로 모두 울분과 원망을 품었다. 왜적이 합포( 合 浦 ) 병영에 방화하고 약탈하자 군인들이 말하기를 <소주도더러 적을 치게 하라. 우리들이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며 물러 서서 나가 싸우려 하지 않자 김진은 혼자 말타고 도주하여 마침내 대패하였다. 이에 김진을 서민( 庶 民 )으로 만들어 창녕현( 昌 寧 縣 )으로 귀양 보냈다가 이어 가덕도( 嘉 德 島 )로 옮기고 합포 도천호( 都 千 戶 ) 이동부( 李 東 木 + 專 )와 김원곡( 金 元 穀 )을 사형하였다. - 고려사 열전 최영( 崔 瑩 ) 편에서 - --------------------------------------------------------------- 본래 페르시아(또는 아라비아?)의 증류주였던 소주는 13세기, 몽골의 중동 원정군이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몽골과 만주, 고려 등 지에 전해졌습니다. 소주의 원 명은 아라비아어의 '아락'(Arag)으로 역시 소주를 일컫는 만주어의 '아얼키'( 亞 兒 吉 ), 몽고어의 '아라키'( 亞 利 吉 )등은 여기 에서 유래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경북 안동에서 '아랑'이라고 부르는데, 이것 역시 원래 이름인 '아락'이 변한 것이죠. 몽골 원나라가 고려를 복속 시킨 후, 두 차례 일본 원정을 하면서 많은 몽골 병사들이 안동에 주둔했는데, 이 때 소주의 제조법이 고려에 전해진게 아닌가, 하는 이론이 소주의 기원입니다. 현대의 몽골에도 소주가 남아 있는데, 4년 전 몽골로 여행을 갔을 때 '아르히'라 불리는 독한 증류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 라 소주와 마찬가지로 술의 빛깔이 투명해서 한 번 살짝 마셔보았는데, 취기가 빨리 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머리가 너무 아 프더군요. 나중에 몽골인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그 술의 알콜 도수가 무려 49도나 한다는 군요...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낼려고 몽골인은 독한 술을 즐겨마셨고, 원대의 황제들도 소주를 즐겨마시다가 일찍 요절하지 않았을까 요? 실제로 원 세조 쿠빌라이칸 이후의 황제들은 어린 나이에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주 이외에도 우리나라에는 전통주가 참 많고 다양했었는데, 제 3공화국 시절에 밀주 금지법이 시행되면서 전통주의 맥이 거의 단 소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어느 고려 장수 이야기 23
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생활 수준이 나아진 요즘에 와서야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니 불행 중 다행이랄까요? 소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어느 고려 장수 이야기 24
소주 좋아하다가 패가망신한 어느 고려 장수 이야기 25
05 티무르와 로도스 기사단과의 대결전!
티무르와 로도스 기사단과의 대결전! 2008.05.27 22:19 칭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몽골 제국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정복자 티무르. 이 사람의 최후를 화려하게 빛낸 전투가 바로 오스만 투르크에게 치명타를 가한 앙카라 전투라는 사실은 많이들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앙카라 전투가 끝나고 나서, 로도스 기사단(요한 기사단)과도 한판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 지 않더군요. 앙카라 전투 이후, 티무르는 오스만의 수도인 부르사를 약탈하고, 진로를 남쪽으로 돌려 당시 로도스 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던 요새 스미르나(현 지명은 이즈미르)로 향합니다. 스미르나를 포위한 티무르는 총독인 수사 기욤 드 문트에게 무슬림으로 개종할 것과 항복 을 권유했지만 총독은 분개하며 거절했습니다. 티무르의 정복 활동을 다룬 사서 '승전기'에 따르면, 스미르나의 포위는 1402년 12월 2일에 시작되었고 2주일 후 급습에 의해 함락 됨으로써 막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븐 아라브사흐(Ibn Arabshah)같은 경우는 12월 28일이라고도 주장하고, 아무튼 사서들마다 약간 씩 다르지만, 어찌되었든 스미르나에서 로도스 기사단은 영구히 축출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스미르나가 티무르군에 함락되자, 곧 학살과 약탈이 뒤따랐고 기독교 함대에 의해 구출된 몇몇의 기사들만이 간신히 살아날 수 있 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무슬림 학자인 '자파르 마나'는 "오스만 술탄이 7년 동안이나 포위했어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스미르나를 티무르는 고작 2주도 채 못 되어 정복해 버렸다. 무슬림들은 신을 찬양하며 시내로 들어가 적의 머리를 감사의 제물로 드렸다."라고 논평했습 니다. 스미르나가 함락된 여파는 에게해 곳곳으로 퍼져갔습니다. 오스만과 이탈리아의 중요한 교역 중심지였던 포케아도 티무르군에 포 위되었지만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겨우 재앙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맞은편 섬인 키오스를 소유하던 제노아인들의 교역회사인 '마호네'는 티무르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비잔티움의 섭정 요한 7세도 티무르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사신을 보냈습니다. 역사의 큰 흐름에서 보았을 때, 티무르의 승리는 오스만의 위협에서 기독교 유럽을 잠시나마 구한 셈이 되었습니다. 오스만 술 탄 바예지드에게 철저하게 봉쇄된 콘스탄티노플은 곧 함락될 위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티무르가 앙카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소아시아 반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면 오스만 왕조는 회복 불능의 치명타를 입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다면 훗날의 대제국 오스만도 성립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앙카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티무르는 곧바로 본 거지인 사마르칸트로 돌아갔고, 10년 동안 비틀거리던 오스만 투르크는 곧바로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서, 결 국 1453년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맙니다. 티무르와 로도스 기사단과의 대결전! 27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참조.) 티무르와 로도스 기사단과의 대결전! 28
06 몽골의 유럽 원정군에 길잡이 역활을 했던 영국인 기사.
몽골의 유럽 원정군에 길잡이 역활을 했던 영국인 기사. 2008.05.27 22:02 헝가리군이 궤멸당하면서 빈으로 통하는 길이 뚫렸고, 몇 주 안 지나 도시 외곽을 배회하는 몽골 척후병들이 지역 주민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의 군대는 이런 전위 한 부대와 작은 전투를 벌인 뒤에 몽골군 장교 한 명을 사로잡았다. 기독교인들은 소 스라치게 놀랐다. 이 장교는 글도 읽을 줄 아는 30세의 잉글랜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지(예루살렘)까지 갔던 사람인데, 그곳에서 자신에게 언어를 배우고 번역하는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 같다. 교 육 수준이 높다는 점, 또 잉글랜드에서 탈출했다는 점 때문에 그가 1215년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도록 강요한 일에 관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잉글랜드에서 피신한 뒤,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좀더 관대한 몽골군 에 합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럽인, 그것도 기독교인이었던 사람이 몽골군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몽골군이 악마가 아니라 인간들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밝혀졌 다. 그러나 겁에 질린 기독교인들은 몽골군이 빈 외곽까지 온 이유를 캐묻지도 않고, 이 잉글랜드인 배교자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에서 발췌했습니다. 이 영국인 기사의 정체를 다룬 흥미로운 소설이 옛날에 나왔는데, 가브리엘 로네이(Gabriel Ronay)가 쓴 타타르 칸의 영국인(The Tatar Khan's Englishman )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과연 저 성명미상의 영국인은 무슨 목적으로 유럽을 침공하는 몽골군과 합류했던 것일까요? 몽골의 유럽 원정군에 길잡이 역활을 했던 영국인 기사. 30
07 몽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과 손 잡으려 했던 아사신 교단
몽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과 손 잡으려 했던 아사신 교단 2008.05.27 22:01 1238년, 바투가 이끄는 몽골 대군이 러시아를 한참 유린하고 있을 무렵 잉글랜드에 반갑지 않은 불청객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다 름아닌 이슬람교의 일파인 아사신 교단의 사절단이었습니다. 아사신 교단의 사절단은 당시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헨리 3세에게 머지않아 중동과 지중해 방면에도 들이닥칠 몽골군의 위협을 경 고하였으며, 헨리 3세에게 자신들과 동맹을 맺고 몽골에 맞서자는 전혀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아사신 교단은 기독교 유럽에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아사신 교단은 모든 이슬람 종파들로부터 이단이 라고 갖은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이슬람 종파들을 위협하던 십자군 세력을 적대시 하지 않았습니다. 1149년 봄 안티오크 공작인 레몽 드 푸아티에가 누레딘과 전투를 벌일 때, 레몽의 휘하에 아사신 교단파 지휘관이 있었을 정도였고 그 외에도 프랑스 십자군이 아사신 교단을 찾아왔을 때, 아사신 교단의 교주는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준다면 교단 전원이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충격적인 제안까지 했습니다. 또한,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1세는 아사신 교단에 청부를 하여 자신을 적대했던 십 자군 지휘관을 암살했다는 의혹까지 받았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참조하시길) 기독교도와 이슬람 교도가 손을 잡다니. 얼핏 이해가 가지 않을만도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영국의 몽골연구 전문가인 데이비드 모건에 의하면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는 1241년 10페니 무게의 금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런데 그 당시 이런 무게의 금화는 아프가니스탄 가즈나에서 고르 왕조의 술탄이 주조한 것 뿐이었습니다. 페르시아어 사료에 의하면 고르왕조의 사자가 몽골군이 중동에 나타났을 무렵, 아사신 교단의 교주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즉, 고르왕조의 금화가 13세기 전반기 에 어떠한 경위로든 아사신 교단을 거쳐 잉글랜드에 전해진 가능성이 있다는 것지요. 그러나 아사신 교단의 제안은 당시 헨리 3세의 궁정에 있던 윈체스터 주교 페테르 드 로쉐의 단호한 거부로 무산됩니다. 그는 헨리 3세에게 이런 말을 남겼죠. "이 개들(몽골군과 아사신 교단)끼리 서로 뜯어먹도록 하십시오. 이것들끼리 서로 먹어치우다 사라지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적도를 향하여 나아감에 있어, 남은 것들마저 다 죽여 없애야 하고, 지상을 깨끗이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온 땅이 하나의 교회 아래 순명하며, 오직 한 목자에 한 무리의 양떼만이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기독교 서유럽과 아사신 교단과의 협력은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1238년의 이 기괴한 협정이 무산된지 18년 후인 1256년. 알라무트 산중의 굳건한 요새 속에서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에 맞서 항전하던 아사신 교단은 전멸되고 맙니다. 그 때, 잔당 중 일부 몽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과 손 잡으려 했던 아사신 교단 32
가 인도로 탈출하여 오늘날까지 아가 칸을 수장으로 하는 아사신 교단의 명맥은 이어져 온다고 합니다. 참고문헌 <몽골 세계제국>, <팍스 몽골리카>, <십자군 전쟁- 성지탈환의 시나리오) 몽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과 손 잡으려 했던 아사신 교단 33
08 바이킹들의 격언.
바이킹들의 격언. 2008.05.27 10:10 아래 글은 '주니어김영사'에서 출판된 <바이바이 바이킹>에서 발췌했습니다. ---------------------------------------------------------------- -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을 보고 비웃지 말게나. 노인은 지혜를 말해줄 수 있다네. - 손님이 그대의 집에 찾아오면 몸을 씻게 하고, 따뜻하고 안락한 자리를 권하라. - 맥주와 꿀술에도 나쁜 점은 있다네. 머리를 흙탕물처럼 흐리게 만드니까. - 겁쟁이처럼 자기 집에 꼭꼭 숨는다 해도, 시간은 결국 목숨을 거두어 간다네. - 적을 죽이려는 사나이는 동작이 재빨라야 하고, 굼떠서는 안 되며, 먹이를 덮치려고 하는 늑대는 땅바닥에 등을 대고 편히 잠자지 않나니. - 소나 친구들이나 부모님은 죽는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죽는다.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영웅의 위대한 이름뿐. - 누가 그대를 노릴지 그대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니 문 밖으로 나가기 전에 항상 주변을 살펴라. - 밖에 나갈 때는 언제나 칼과 창을 가지고 다녀라. 언젠가 적이 눈 앞에 나타나리라. - 팔이 없는 사람은 양을 몰 수 있지만, 시체가 되면 아무런 쓸모도 없다네. 바이킹들의 격언. 35
09 월드컵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던 기막힌 이야기!
월드컵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던 기막힌 이야기! 2008.05.27 01:16 월드컵 때문에 실제로 전쟁이 벌어진 적까지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농담 같다고요? 그러나 엄연히 있었던 사실입니다. 1969년 7월 14일, 월드컵 예선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 있었으니, 중미의 작은 나라인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두 나라 간의 월드컵 지역 예선전이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968년 5월부터 시작된 1970년 월드컵 지역 예선전, 북중미 예선 14조 A지역은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갈파에서 온두라스와 엘살바 도르 두 나라가 최종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69년 6월7일 엘살바도르 선수단이 묵고 있는 호텔 밖에서는 밤새도록 온두라스 응원단이 자동차 경적을 울리고 깡통을 두 드리며 고함을 질러대 엘살바도르 선수들은 잠을 못 자, 다음날 열린 1차전에서 엘살바도르가 그만 1대 0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더욱 커져, 엘살바도르에서 이 경기를 TV로 지켜보던 한 소녀가 충격에 못 이겨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말았는데, 이 소녀의 장례식에 대통령을 비롯해 전각료가 참석하고 대표선수단도 조의를 표했고 이 장면이 TV로 전국에 중계되었습니다. 6월 14일 온두라스 팀이 2차전을 위해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 왔습니다. 경기 전날 밤 온두라스 팀이 묵고 있는 호텔 밖 에선 엘살바도르 응원단이 보복이라도 하듯 호텔 창문을 깨고 죽은 쥐를 던지며 난동을 피웠습니다. 역시 한숨도 자지 못한 온두라스 선수들은 엘살바도르에 3대0으로 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경기장에서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관중석에서는 이미 응원단끼리 패싸움이 벌어져, 온두라스 응원단 차 150여 대가 불 타고 응원단 2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많은 사람이 다쳤습니다. 같은 시각 온두라스 전역에서도 엘살바도르 인에 대한 폭행이 벌어져 수십명의 엘살바도르 인이 살해되었습니다. 약탈 방화도 일어 나 재산 피해만도 2천만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6월 23일 극도로 감정이 악화된 두 나라는 국교를 끊었고 6월 27일 중립지역인 멕시코시티에서 두 나라의 최종전이 열렸습니 다. 이 날은 관중보다 경찰이 더 많았으며 경기는 난폭했습니다. 결과는 2대 2무승부라서 연장전으로 이어졌는데. 전반 12분 엘살바 도르의 로드리게스가 결승골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이 한골이 바로 전쟁의 신호탄이 되고 말았으니, 7월 14일 엘살바도르 비행기가 선전포고와 동시에 온두라스 네 개 도시를 폭격했습니다. 탱크를 앞세운 보병부대는 온두라스 국경을 넘어 25 마일이나 진격했고, 이에 온두라스는 즉각 대응해, 낙하산 부대를 엘살바도르 후방에 투입해 교란작전을 펼쳤습니다. 월드컵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던 기막힌 이야기! 37
이 전쟁은 사흘 간이나 계속되다가 미주기구(OAS)와 이웃나라들의 중재로 7월 18일 정전에 들어갔습니다. 피해는 온두라스가 더 커 온두라스는 축구에도 지고 전쟁에도 져 더 큰 상처를 입은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3000명이 죽고 1만2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15만명이 집을 잃는 피해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1969년의 월드컵 전쟁은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두 나라 국민들의 가슴에 씻기 힘든 상처만을 남긴 채 끝났습니다. 월드컵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던 기막힌 이야기! 38
10 조선 시대에 나타났던 UFO 이야기!
조선 시대에 나타났던 UFO 이야기! 2008.05.27 01:04 다.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 光 海 君 日 記 )의 원년( 元 年 (1609년) 9월( 九 月 ) 25일( 日 )자 기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놀라운 기록이 나옵니 강원 감사 이형욱( 李 馨 郁 )이 치계하였다. 간성군( 杆 城 郡 )에서 8월 25일 사시 푸른 하늘에 쨍쨍하게 태양이 비치었고 사방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었는데, 우뢰 소리가 나면 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해 갈 즈음에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니, 푸른 하늘에서 연기처럼 생긴 것이 두 곳에서 조금씩 나왔습니다. 형체는 햇무리와 같았고 움직이다가 한참 만에 멈추었으며, 우뢰 소리가 마치 북소리처럼 났습니다. 원주목( 原 州 牧 )에서는 8월 25일 사시 대낮에 붉은 색으로 베처럼 생긴 것이 길게 흘러 남쪽에서 북쪽으로 갔는데, 천둥 소리가 크 게 나다가 잠시 뒤에 그쳤습니다. 강릉부( 江 陵 府 )에서는 8월 25일 사시에 해가 환하고 맑았는데, 갑자기 어떤 물건이 하늘에 나타나 작은 소리를 냈습니다. 형체는 큰 호리병과 같은데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컸으며, 하늘 한 가운데서부터 북방을 향하면서 마치 땅에 추락할 듯하였습니다. 아래로 떨어질 때 그 형상이 점차 커져 3, 4장( 丈 ) 정도였는데, 그 색은 매우 붉었고, 지나간 곳에는 연이어 흰 기운이 생겼다가 한 참 만에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사라진 뒤에는 천둥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천지( 天 地 )를 진동했습니다. 춘천부( 春 川 府 )에서는 8월 25일 날씨가 청명하고 단지 동남쪽 하늘 사이에 조그만 구름이 잠시 나왔는데, 오시에 화광( 火 光 )이 있었 습니다. 모양은 큰 동이와 같았는데, 동남쪽에서 생겨나 북쪽을 향해 흘러갔습니다. 매우 크고 빠르기는 화살 같았는데 한참 뒤에 불처럼 생긴 것이 점차 소멸되고, 청백( 靑 白 )의 연기가 팽창되듯 생겨나 곡선으로 나 부끼며 한참 동안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우뢰와 북 같은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다가 멈추었습니다. 양양부( 襄 陽 府 )에서는 8월 25일 미시( 未 時 )에 품관( 品 官 )인 김문위( 金 文 緯 )의 집 뜰 가운데 처마 아래의 땅 위에서 갑자기 세숫대야 처럼 생긴 둥글고 빛나는 것이 나타나, 처음에는 땅에 내릴듯 하더니 곧 1장 정도 굽어 올라갔는데, 마치 어떤 기운이 공중에 뜨는 것 같았습니다. 크기는 한 아름 정도이고 길이는 베 반 필( 匹 ) 정도였는데, 동쪽은 백색이고 중앙은 푸르게 빛났으며 서쪽은 적색이었습니다. 쳐다 보니, 마치 무지개처럼 둥그렇게 도는데, 모습은 깃발을 만 것 같았습니다. 반쯤 공중에 올라가더니 온통 적색이 되었는데, 위의 머 리는 뾰족하고 아래 뿌리쪽은 짜른 듯하였습니다. 곧바로 하늘 한가운데서 약간 북쪽으로 올라가더니 흰 구름으로 변하여 선명하고 보기 좋았습니다. 이어 하늘에 붙은 것처럼 날아 움직여 하늘에 부딪칠듯 끼어들면서 마치 기운을 토해내는 듯하였는데, 갑자기 또 가운데가 끊어져 조선 시대에 나타났던 UFO 이야기! 40
이어 하늘에 붙은 것처럼 날아 움직여 하늘에 부딪칠듯 끼어들면서 마치 기운을 토해내는 듯하였는데, 갑자기 또 가운데가 끊어져 두 조각이 되더니, 한 조각은 동남쪽을 향해 1장 정도 가다가 연기처럼 사라졌고, 한 조각은 본래의 곳에 떠 있었는데 형체는 마치 베로 만든 방석과 같았습니다. 조금 뒤에 우뢰 소리가 몇 번 나더니, 끝내는 돌이 구르고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그 속에서 나다가 한참만에 그쳤습니다. 이때 하늘은 청명하고, 사방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었습니다. 원전 31 집 456 면 분류 *과학-천기( 天 氣 ) 얼핏 믿어지시 않으시겠지요?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엄연한 사실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잘 요약해 보면 1609년 9월 25일 강원도 등지에 나타났던 괴물체는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갑자기 나타나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흰 연기를 뿜고, 두 조각으로 갈라져 하늘을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다니는, 세숫대야처럼 생긴 둥글고 빛나는 것...>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UFO와 너무도 흡사한 모습이 아닙니까? 혹시, 지금으로부터 약 4백년 전에 나타난 UFO를 강원 감사 이형욱이 목격했던 것은 아닐까요? 조선 시대에 나타났던 UFO 이야기! 41
11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해 만든 음식, 탕평채!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해 만든 음식, 탕평채! 2008.05.27 00:58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조선은 선조부터 정조까지 거의 250년간 조정에서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대북 과 소북, 노론과 소론 등으로 관리들이 서로 벌인 당파싸움으로 골치를 앓았습니다. 왕비와 세자의 책봉, 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 왕위 계승 등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정치적 대결로 몰아가 국력이 크게 낭비되 었습니다.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 역시 당쟁의 피해자였습니다. 무수리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열등감에 시달리던 영조는 소론측이 장희 빈의 아들 경종을 밀자 노론측의 도움을 많이 받아 즉위했습니다. 그런데 1724년 경종이 게장과 생감을 먹고 집권 4년만에 죽자 소론은 이를 영조와 노론측의 독살이라 주장하며 1728년 이인좌 의 난, 1755년 나주 벽서사건 등으로 영조의 정통성에 내내 시비를 걸었습니다. 급기야 영조는 매우 성격이 날카로와져 1762년 소론과 가까이하려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직접 가두어 죽이는 천인공노할 만행까 지 저지르고 맙니다. 영조는 드디어 아들까지 죽인 당쟁을 바로 잡으려고 당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는데 그 대책으로 요리 한가지를 제의 했으니 그것이 바로 탕평채( 蕩 平 菜 )였습니다. 탕평이란 말은 서경( 書 經 ) 홍범조( 洪 範 條 )의 왕도탕탕 왕도평평( 王 道 蕩 蕩 王 道 平 平 ) 에서 나온 말로 왕은 자기와 가깝다고 쓰 고 멀다고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평등한 인재 등용 원칙을 가리킵니다. 탕평채를 만드는 법은 이렇습니다. 1. 청포묵은 굵게 채쳐서 끓는 물에 투명해 지도록 데쳐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을한다. 2. 쇠고기는 가늘게 채썰어 양념해 국물 없이 볶아 식힌다. 3. 숙주는 머리와 뿌리를 떼어 내고, 미나리는 데쳐 낸다. 4. 김은 바싹 구워 가지런히 체썰고, 달걀은 황백지단으로 부쳐 채썰어 고명으로 준비한다. 5. 황백지단, 미나리, 숙주, 쇠고기를 돌려 담고 가운데 1의 청포묵을 담고 묵위에 김을 얹는다.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해 만든 음식, 탕평채! 43
6. 5와 초간장과 함께 내 먹기 직전에 비벼 먹는다. 이렇게 모든 재로들이 하나로 모여 맛을 내듯, 소론과 노론으로 패가 갈려 서로 싸우지 말고 하나로 화합하여 나라를 잘 이끌어 나 가자는 뜻으로 영조가 내린 고육지책이 바로 탕평채였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탕평채는 오늘날까지 그 맥이 쭉 이어져 내려오 고 있는 것입니다. 음식으로 당파 싸움을 없애고 나라를 평안케 하려는 영조의 뜻! 가끔씩 탕평채를 먹으면서 그 뜻을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해 만든 음식, 탕평채! 44
12 신에게 구원을 받았던 무신론자의 이야기...
신에게 구원을 받았던 무신론자의 이야기... 2008.05.27 00:55 인도의 고대 경전에서 발췌한 이야기입니다. (뭔지는 잘 생각이 안 납니다.) 고대부터 인도하면, 수많은 신을 섬기는 다신교(브라만교, 힌두교 등등)가 성행하던 나라였죠. 그런데 이 인도에 어느 특이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무신론자였습니다. 이 무신론자는 항상 입버릇처럼 "신은 없다! 신은 없다!"라고 중얼거렸죠.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이 무신론자는 계속 자신을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시간이 흐르고 흘러 드디어 이 무신론자도 늙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무신론자는 평생동안 신을 부정하면서 살았지만, 막상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되자 매우 두려워졌습니다. "나는 신을 부정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저승이 있고, 내가 죽어서 그리로 가야한다면 자신을 부정한 신 이 과연 나를 용납하겠는가? 나는 어떻게 될까?" 두려움에 떨던 무신론자는 드디어 숨을 거두었고, 그의 영혼은 육체를 빠져나와 저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는 저 승에 가서 신을 만나게 되었죠. (무슨 신인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브라흐만인가, 비시누인가, 시바인가, 아니면 인드라였던가...) 신을 본 무신론자는 겁을 먹고 자신이 신을 부정하면서 살았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이제 신이 자신에게 무슨 벌을 내릴지가 벌써부 터 두려워졌죠. 그런데 뜻밖에도 신은 그 무신론자에게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놀라는 무신론자에게 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평생 신이 없다고 말하며 살았지만,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를 생각했으니 결과적으로 너는 나의 존재를 강하게 믿은 것이다. 따라서 너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강력한 부정은 강력한 긍정의 다른 표현이었던 걸까요? 어찌되었든 그 무신론자는 신에게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에게 구원을 받았던 무신론자의 이야기... 46
신에게 구원을 받았던 무신론자의 이야기... 47
13 전생( 前 生 )이나 환생( 還 生 )은 동양만의 사고방식인가?
전생( 前 生 )이나 환생( 還 生 )은 동양만의 사고방식인가? 2008.09.08 22:25 중국, 인도,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를 통틀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널리 신봉되고 있는 종교는 단연 불교입니다. 이 불교의 핵심 교리는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죽어도 다른 생명체로 계속 다시 태어나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끝없는 윤회의 고통에 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도를 하여 열반의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전생( 前 生 )과 환생( 還 生 )론은 동아시아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 동양인들의 사고에 큰 믿 음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양과 멀리 반대쪽에 떨어져 있는 서양에서는 과연 이런 전생과 환생에 대한 믿음이 없었을까요? 고대 서양의 근간을 이루는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켈트족과 게르만족의 사고방식에서는 놀랍게도 전생과 환생에 대한 믿음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중엽, 그리스 남부인 크레타 섬과 남부 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섬에서 널리 신봉되었던 오르페우스 신앙은 육체는 짧 게 소멸되지만 영혼은 불멸의 존재이며, 인간이 죽은 뒤에도 그 영혼은 살아 있다가 다른 인간이나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교리를 가졌습니다. 이처럼 윤회론을 믿은 오르페우스 신앙에서는 신도들에게 육식을 절대 금지하고, 채식을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신도들이 죽여 먹은 짐승의 고기가, 바로 얼마 전 죽은 가족이나 친구일 수도 있으니까요. 또한 기원전 5세기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이 타락하면 새나 동물로 태어나며, 영혼은 계속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기 3세기 경, 이집트에서 태어난 로마 철학자인 플로니토스는 살아있을 때, 선행을 한 사람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지만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가축으로 태어나 고통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나치게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은 새가 되고, 포악한 독재자는 독수리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변경 지역에 살았던 켈트족도 전생이나 환생 같은 윤회론을 깊이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켈트족의 전설에는 아일랜드에 맨 처음 정착한 반족의 후손인 핀탄은 파도에 휩쓸려 죽었지만 연어나 독수리, 매로 다시 태어나 수 백 년 동안 인간의 의식을 가진 채 살면서 아일랜드의 역사를 남겼다고 합니다. 또한 두 번째로 정착한 파르홀론족의 마지막 생존자 인 투안은 늙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슴이나 멧돼지, 바다독수리, 연어 등으로 환생하여 핀탄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아를 가지고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여인 이테르는 청년 미다르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의 부인인 푸암나크의 미움을 사서 생명의 위협을 받 자 연못과 잠자리로 변했다가 이타의 딸인 이테르로 다시 태어났고, 끝내는 미다르와 함께 백조로 변해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피 해 달아났다고 합니다. 전생( 前 生 )이나 환생( 還 生 )은 동양만의 사고방식인가? 49
켈트 신화에서 전쟁의 여신인 '마하'는 무려 네 번이나 환생했다고 하는데, 첫 번째는 네베드 족장의 부인으로 태어나 거인족인 포 모르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것이며, 두 번째는 신들의 왕인 누아자의 부인으로 태어났다가 죽음의 신인 크로우 크루아흐에게 죽임 을 당했고, 세 번째는 밀레족의 여왕이 되어서 얼스터 지방을 통일하였고, 마지막 네 번째는 부유한 농민인 크룬느의 부인으로 살았 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켈트족의 신앙에서는 인간의 세계인 이승과 다른 세계인 지하세계가 있는데, 이 지하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결코 죽지 않 는 불멸의 존재이며, 자주 이승의 인간이나 동물로 환생한다고 합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켈트족의 세계관은 참 아리송하죠. 저승 에서 이승으로 왔다가,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 살다가 또 이승으로 올 수 있으니. 도대체 무엇이 삶이고 죽음인지가 무척 헷갈립니다. 켈트족의 이웃이었던 게르만족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최근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이는 죽은 사람이 신생아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동양과 거리가 먼 고대 서양에서 이처럼 환생에 대한 생각이 널리 퍼진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리안족의 이동에 따 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환생을 주장한 불교는 브라만교에서 파생된 종교인데, 이 브라만교를 창시한 사람들은 인도에 들어온 백인 계 유목민인 아리안족입니다. 아리안족은 인도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유럽에까지 널리 퍼져나가 정착해 살았습니다. 기원전 12세기 무렵, 북방에서 그리스로 침입한 도리안족이나 켈트 및 게르만족 모두 아리안계 민족인 것을 감안한다면 말이죠. 사족을 덧붙인다면, 불교의 상징인 만( 卍 )자는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와 구조상 거의 동일한데 이것 역시 아리안족의 이동에 서 비롯된 일이라고 봅니다. 만자 또는 갈고리 십자가는 고대 아리안족들이 행운과 빛의 상징으로 즐겨 사용했던 도식이라고 합니다. 좀, 비약을 하자면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금발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백인이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너무 황당하다고요? 하지만, 이란의 북동부 지방에 살던, 북유럽인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한 소녀의 사진이 얼마 전에 공 개되었죠? 인도에도 백인들과 거의 같은 외모를 가진 '화이트 인디안(하얀 인도인)'이라는 집단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고대 인도인과 유럽인의 기원이 같다는 원리는 이미 고고학계에서는 정설로 굳어졌더군요. 고대 인도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가 영 어의 기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무척 놀라운 일이죠.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동양뿐 아니라 고대 서양에서도 전생이나 환생에 대한 믿음은 폭넓게 존재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서기 4세 기 이후, 기독교가 유럽의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점차 사라진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전생이나 환생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 에게는 오직 한 번의 삶만이 주어진다고 가르치니까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요즘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호응을 얻고 있는 뉴에이지 운동은 어쩌면 서구인들 스스로의 믿음으로 돌아가려 는 귀소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생( 前 生 )이나 환생( 還 生 )은 동양만의 사고방식인가? 50
14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 2008.08.27 00:51 아직 올림픽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이 때에, 이런 글을 올리면 욕을 먹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제 생각을 한 번 적어 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8 베이징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2008년 올림픽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거라는 존 티토의 예언은 말짱 구라가 되었고, 이번 경기에서 종합 1위를 한 중국은 당장에라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올라선 것처럼 요란법석을 떨 고 있으며, 7위를 기록한 한국의 정부 인사들도 한국이 세계 7대 강국이 되었다고 자평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히 생각해 본다면, 그런 종류의 호들갑에 대해서 씁쓸한 웃음만 짓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치른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경우를 봅시다. 그 때, 종합 1위는 132개의 메달을 따냈던 구소련이었고, 그 다음을 102개의 메달을 따낸 동독이 차지했으며, 자유 세계의 맹주이자 소련의 라이벌이던 미국은 3위였습니다. 주최국인 한국은 4위였고, 문화와 예 술의 나라라고 자처하던 프랑스는 9위였으며, 일본은 14위였습니다. 그런데 88서울 올림픽에서 종합 1위를 기록한 소련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991년, 경제난에 시달린 끝에 붕괴되어 15개의 나라로 산 산히 찢어지고 무려 10년이 넘게 경제 빈국으로 전락해야 했습니다. 소련에 이어 2위에 오른 동독은 어떻습니까? 2년 후인 1990년, 서독에 흡수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은 8월 2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올림픽 7위를 한 것은 한국이 세계 7대 강국으로 도약한 증거라고 공식 논평 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논리대로라면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한 구소련과 동독은 미국보다 훨씬 강한 강대국이었 다는 말입니까? 당시 4위를 차지한 한국은 14위를 기록한 일본을 능가한 선진국이었나요?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의 정신 상태는 분명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올림픽에 못지 않은 국제적 스포츠인 월드컵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제까지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나라는 브라질입 니다. 반면, 미국은 아직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5번을 우승한 브라질은 미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하 고 강력한 나라일까요? 2002년,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일 월드컵도 그렇습니다. 한국 대표팀이 예상을 뒤엎고 4강에 진출하자, 국내외 언론들은 당 장이라도 한국이 세계 4대 강국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난리법석을 떨었습니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나고 나자 어떻게 되었나요? 한국 이 선진국의 대열에 오르고, 국내외에 산적한 실업 및 고물가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습니까? 아닙니다. 1달 간의 흥분과 열기에 가 리워졌던 일상 속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제자리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열정의 끝에 남은 것은 텅 빈 공허함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대표팀이 스포츠 경기에서 미국이나 일본 및 다른 나라들을 이긴다고 한국이 그들 나라보다 더 잘살고 훌륭한 나라가 되는 것 은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인가요? -_-;) 그런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단지 착각에 불과합니다.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 52
전 세계에서 올림픽 이상의 지명도를 가진 월드컵에 단골로 우승을 차지하는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국가들을 보십시오. 그 나라들 이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군사 독재와 불안한 치안, 극심한 빈부 격차에 시달리며 대부분의 국민들이 불행하게 살고 있는 형편입니다. 멕시코는 우리보다 훨씬 앞선 1986년에 이미 월드컵을 개최했지만, 월드컵을 치르는 데 돈을 너무 많이 쏟아붇는 바람에 월드컵이 끝나자 물가가 치솟고 재정 적자가 발생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번에 올림픽 1위를 차지한 중국은 언론 매체를 동원해 "중국은 군사 분야를 제외한 경제, 문화, 외교 및 모든 분야에서 미국 과 맞먹는 초강대국이 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마치 올림픽 1위를 했으니 당장이라도 세계 최강대국이 된 것처럼 굴 고 있지요. (드디어 끝난 2008 베이징 올림픽, 그러나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올림픽으로 모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시선 에서 가리워진 것 뿐...)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베이징 올림픽의 요란한 보도에 가리워져 많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중국 상하이의 주가 지수는 올림픽 을 치르기 이전보다 더욱 떨어졌습니다. 또한, 중국에 투자된 핫머니들도 속속 빠져나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동안 중국이 주도하고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 53
있던 저임금 노동집약적 산업들도 중국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가면서, 서서히 문을 닫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보도된 뉴스를 보니, 장난감이나 봉제를 만드는 중국의 공장들 중 많은 곳이 폐업을 했고, 중국 부동산의 사정도 악화되어 많은 부동산 회사들이 지점을 폐쇄했다고 합니다. 마치 일본이 버블 경제가 꺼지면서 불경기에 접어들었듯, 중국도 더 이상 고도의 경제 성장을 계속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스포츠 경기는 물론 재미있고 신이 납니다. 일상 생활에서 느꼈던 온갖 스트레스들이 시원한 홈런과 골인 한 방에 깨끗이 날아갑니 다. 하지만 그런 통쾌함은 경기가 끝나는 순간과 동시에 사라집니다. 스포츠는 스포츠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가 스포츠 경기로 먹고 사는 운동 선수가 아닌 다음에야, 스포츠 경기가 어떻게 끝나든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습니 다. 월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물가나 기름 값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정부에서 세금을 깎아주지도 않습니다. 한국이 국제 스포츠 시합에서 1등을 한다고 세계 최강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꼴찌를 한다고 해서 세계에서 가장 못난 나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렇기에 저는 강조합니다. 덧붙여, 한국이 올림픽에서 7위를 했으니 747 공약이 달성되고 세계 7대 강국의 반열에 올라간 것이라고 공식 논평을 했던 홍준표 의원과 그 말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에게 탄식과 절망의 한숨을 보내는 바입니다. 스포츠는 단지 스포츠일 뿐! 54
15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조경남의 저서 <난중잡록>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조경남의 저서 <난중잡록> 2008.06.04 21:21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번역한 것을 모아서 한글 파일로 만들었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 혹시 문제가 된다 면 자삭하도록 하겠습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조경남의 저서 <난중잡록> 56
16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2008.06.04 13:09 대장금( 大 長 今 ). 2003년과 2004년에 방송되어 오랜만에 '국민 드라마'라는 칭송까지 얻으며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일본과 중국, 대만과 이 란까지 수출되어 '드라마 한류'를 불러일으키까지 한 명작이었습니다. 대장금의 중심 인물은 수랏간 숙수이자 의녀인 '장금'인데, 이 장금의 실존 여부를 두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금이란 인물 자체가 실존하지 않았던 가공인물이다.", "제작진에서 전부 허구로 꾸며낸 가짜다. 세상에, 남녀 차별이 제일 심했던 조선 시대에 어떻게 여 자가 왕의 주치의가 될 수 있겠느냐?", "있지도 않은 가짜 인물을 그럴싸하게 꾸며내어 진짜인 것처럼 굴다니", "한의학같은 사이비 가짜 의학을 무슨 신비의 의학으로 포장한 파시즘적 민족주의의 극치"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일변도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대장금(장금)이 실존하지 않았던 가공 인물인지, 아니면 실존했던 인물인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조선왕조 실록의 중종실록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58
중종 21권, 10년(1515 을해 / 명 정덕( 正 德 ) 10년) 3월 21일(무인) 1번째기사 헌부에서 선 교 양종의 위전을 추쇄하도록 아뢰다 전교하였다, 대저 사람의 사생이 어찌 의약( 醫 藥 )에 관계되겠는가? 그러나 대왕전에 약을 드려 실수한 자는 논핵하여 서리( 書 吏 )에 속하게 함 은 원래 전례가 있었다. 왕후에게도 또한 이런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니,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또 의녀( 醫 女 )인 장금( 長 今 )은 호 산( 護 産 )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대고( 大 故 )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 였다. 상은 베풀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형장을 가할 수는 없으므로 명하여 장형( 杖 刑 )을 속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양단( 兩 端 ) 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뜻이다. - 장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처음 실록에 보이는 것은 중종 10년인 1515년 3월 21일 기사에서입니다. 보시다시피 장금은 엄 연한 의녀( 醫 女 )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표기됩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을 의녀로 설정했던 것이 현실에 기반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죠. 조선 시대라고 해서 여자가 의원이 될 수 없던 것도 아니고, 왕을 치료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 중종 46권, 17년(1522 임오 / 명 가정( 嘉 靖 ) 1년) 9월 5일(무신) 1번째기사 대비의 병세가 나아지자 약방들에게 상을 주다 대비전( 大 妃 殿 )의 증세가 나아지자, 상이 약방( 藥 房 )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제조( 提 調 ) 김전( 金 詮 ) 장순손( 張 順 孫 )과 승지 조순( 趙 舜 )에게는 말안장 20부( 部 ) 활 1정( 丁 ) 전죽( 箭 竹 ) 1부( 部 ), 의원 하종해( 河 宗 海 )에게는 말 한 필과 쌀 콩 각 10석, 김순몽 ( 金 順 蒙 )에게는 말 1필, 의녀 신비( 信 非 )와 장금( 長 今 )에게는 각각 쌀 콩 각 10석씩을 주고, 내관( 內 官 ) 반감( 飯 監 ) 별감( 別 監 )에게 도 모두 하사가 있었다. - 여기서 의녀 장금은 쌀과 콩 10석을 상으로 받습니다. 아마, 대비전의 증세가 나아진 것에 따른 포상이던가, 그렇지 않으면 적어 도 대비의 병세의 호전에 뭔가 공헌을 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 중종 52권, 19년(1524 갑신 / 명 가정( 嘉 靖 ) 3년) 12월 15일(을사) 2번째기사 의술에 대한 권과 의녀의 요식 등에 대해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백공( 百 工 )의 기예( 技 藝 )는 다 부족하여서는 안되고 권과 절목( 勸 課 節 目 )이 상세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다만 각사( 各 司 )의 관원 이 힘을 다하여 권과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성효( 成 効 )가 없다. 그 가운데에서도 의술( 醫 術 )은 더욱 큰일인데 각별히 권과하지 않으 니, 지금 그 기술을 조금 아는 자는 다 성종조( 成 宗 朝 )에서 가르쳐 기른 자인데, 이제는 그 권과하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사( 醫 司 )에 물어서 아뢰라. 또 의녀( 醫 女 )의 요식( 料 食 )12682) 에는 전체아( 全 遞 兒 )12683) 가 있고 반체아( 半 遞 兒 )가 있는데, 요즈음 전체아 에 빈 자리가 있어도 그것을 받을 자를 아뢰지 않으니, 아래에서 아뢰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의녀 대장금( 大 長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59
今 )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 大 內 )에 출입하며 간병( 看 病 )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 요식( 料 食 ) : 급료. 전체아( 全 遞 兒 ) : 상시 근무하고 급료의 전부를 받는 체아. 체아는 현직( 現 職 )의 자리에 있지 않은 자에게 급료를 주거나 대우하기 위 하여 두는 직역( 職 役 )인데, 체아직을 두는 경우는 매우 많아서 자세히 논할 수 없으나, 대개 실직( 實 職 )에서 떠나 다음 실직을 받을 때까지 녹을 주기 위한 경우, 실무는 있으나 현직의 자리가 없는 자에게 녹을 주기 위한 경우, 실무도 녹도 없이 대우만을 위한 경 우, 임시로 직함을 지닐 필요가 있을 경우 등이 있다. 여기서부터 장금은 대장금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대( 大 )라는 호칭이 장금의 의술을 높이사서 붙여지게 된 것인지, 어떤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드라마에서는 그렇게 설정되었죠) 그러나 본문의 대장금과 장금은 결코 동명이인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아래의 기사들을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 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 嘉 靖 ) 12년) 2월 11일(갑신) 1번째기사 약방 제조와 의원들을 상주다 전교하였다. 내가 여러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약방 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의녀( 醫 女 ) 대장금( 大 長 今 )과 계금( 戒 今 )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관목면( 官 木 綿 )과 정포( 正 布 )를 각기 10필씩 내리고, 탕약 사령 등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상을 내리라. ------------------ 장금(대장금)은 여전히 의녀로 불리며, 중종의 병이 회복되자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받는 포상을 얻습니다. -------------------------- 중종 101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년) 1월 29일(무진) 1번째기사 내의원 제조에게 감기약을 의논하라고 이르고 중화의 주물도 멈추라고 전교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내가 접때 감기가 들어 해수증( 咳 嗽 症 )을 얻어서 오래 시사( 視 事 )하지 못하였다. 조금 나아서 경연( 經 筵 )을 열었더니, 그날 마침 추워서 전의 증세가 다시 일어났다. 의원( 醫 員 ) 박세거( 朴 世 擧 )와 홍침( 洪 沈 ) 및 내의녀( 內 醫 女 ) 대장금( 大 長 今 )과 은비( 銀 非 ) 등에게 약을 의논하라고 이미 하유( 下 諭 )하였거니와, 이 뜻을 내의원 제조에게 이르라." - 중종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자 의녀 대장금은 왕명으로 다른 의원과 의녀들과 함께 약을 제조하게 됩니다.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60
-------------------- 중종 102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년) 2월 9일(무인) 1번째기사 내의원 제조와 의원 의녀들에게 상을 내리다 전교하였다. 내의원 제조 윤은보( 尹 殷 輔 )와 정순붕( 鄭 順 朋 )에게 각각 숙마( 熟 馬 ) 1필씩을 하사하고 도승지 이해( 李 瀣 ), 의원 박세거( 朴 世 擧 ) 홍침( 洪 沈 )에게는 모두 가자( 加 資 )하고, 유지번( 柳 之 蕃 ) 한순경( 韓 順 敬 )에게는 아마( 兒 馬 ) 각 1필씩, 의녀 대장금( 大 長 今 )에게는 쌀과 콩을 도합 5석( 石 ), 은비( 銀 非 )에게는 쌀과 콩 3석을 하사하고 탕약 사령( 湯 藥 使 令 )들에게는 관고( 官 庫 )의 목면 2필씩을 지급하라. - 의녀 대장금은 왕으로부터 쌀과 콩을 5석 씩 포상으로 받습니다. ------------- 중종 105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년) 10월 25일(경인) 3번째기사 의녀와 의원이 왕의 병세에 대하여 말하다 의정부 중추부 육조 한성부의 당상 및 대사헌 정순붕 등이 문안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날 의녀 장금( 長 今 )이 나와서 말하 기를 어제 저녁에 상께서 삼경( 三 更 )에 잠이 들었고, 오경에 또 잠깐 잠이 들었다. 또 소변은 잠시 통했으나 대변이 불통한 지가 이미 3일이나 되었다. 고 했다. - 대장금이라고 불리던 것을 여기서는 장금이라고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기사 내용으로 보건데, 의녀 대장금과 내 의녀 대장금, 혹은 의녀 장금이 다른 인물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의 기사에서 의녀 장금은 이제 직접 중종의 병세를 진찰하고 그것을 조정 대신들에 말하는 역할까지 맡습니다. 그만큼 장금이 왕의 병세의 진찰에서 맡고 있는 비중이 커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중종 105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년) 10월 26일(신묘) 1번째기사 정원이 문안하자 병세에 대하여 답을 내리다 상에게 병환이 있었다. 전교하기를, 내 증세는 여의가 안다. 여의 장금( 女 醫 長 今 )의 말이 지난 밤에 오령산을 달여 들였더니 두 번 복용하시고 삼경에 잠이 드 셨습니다. 또 소변은 잠깐 통했으나 대변은 전과 같이 통하지 않아 오늘 아침 처음으로 밀정( 蜜 釘 )을 썼습니다. 하였다. - 저번 기사와 마찬가지로 의녀 장금은 계속 왕을 진찰하며 상태를 자세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61
중종 105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 嘉 靖 ) 23년) 10월 29일(갑오) 1번째기사 상의 병환에 하기가 비로소 통하다 상에게 병환이 있었다. 정원이 문안을 드리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중략) 아침에 의녀 장금( 長 今 )이 내전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 를, 하기가 비로소 통하여 매우 기분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 장금이라는 인물이 실록에 보이는 것이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아마 장금은 중종의 진찰을 마친 후, 사망한 듯 합니다. 지금까지의 기사들로 보건데, 조선 중종 무렵에 의녀 장금(혹은 대장금)이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녀가 임 금인 중종을 직접 진료하며 병세를 관찰하고 약을 지으며 치료의 역할을 맡았던 것도 모두 사실입니다. 물론, 드라마 대장금의 초반부에서 나왔던 수랏간 숙수(요리사)라든지, 장금이 직접 음식을 만들거나 혹은 수랏간의 책임자 자리를 두고 동료들과 경쟁을 벌인다든가, 제주도로 귀양을 간다든가 하는 설정은 모두 제작진들이 극중 흥미를 위해 꾸며낸 허구입니다. 여하튼, 장금이라는 여의는 분명히 실존인물이니, 괜히 쓸데없는 비하는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62
대장금의 '장금'은 실존 인물인가, 가공 인물인가? 63
17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고 했던 일본인들.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고 했던 일본인들. 2008.05.28 21:59 1. 고유문자 못가진 문화 콤플렉스(일본어 폐지론과 그 후) 자료 : 경향신문 1992. 8. 3(일본, 일본인, 일본문화 시리즈 22편) - 1940년대 불완전한 국어(일본어-편집자 주)에 반기 - 당시 원로 문인들 "프랑스어 쓰자" 제안 세계에서 관찰되고 기록된 언어만도 2,797종을 헤아리나 문자는 약 50종 뿐이며 현재 통용되고 있는 문자는 10여종에 지나지 않는 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아라비아 문자가 두루 쓰이고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로마문자, 희랍정교를 수용한 슬라브문화권에서는 희랍 문자를 손질하여 만든 키릴문자가 널리 쓰이고 있듯 일반적으로 한 문화권에서는 한 문자가 통용된다. 그러기에 고유 문자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은 크다. 한국처럼 한 민족이 한문자(한글)을 쓰고 있는 것은 단일 민족이 단일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는 구체적 표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본말은 한자와 한자에서 빌려 만든 '가나'문자를 섞어서 표기한다. 콜럼부스의 신대륙발견 500주년을 기념하여 스페인 세비야에서 개최하고 있는 1992년 만국박람회(4.20~10.12) 일본관의 전시테마 가운데 하나는 '외래문화의 흡수와 일본화'인데, 중국문자인 한자 ( 眞 名 )을 50음도로 정리된 가나( 假 名 ) 문자로 변형시켜 쓰고 잇는 것을 외래문화를 소화하여 일본의 독자적 문화로 가꾼 대표적 예로 다루고 있다. 경제대국으로 세계에 군림하게 된 일본은 이제 한자를 약식화한 가나문자를 '외래문화의 일본화'로 자랑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 었으나 일본 스스로의 고유문자가 없다는 것은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에게 오래전부터 참을 수 없는 문화적 콤플렉스였다. 18세기 에도 중기 이후 국학이 진흥되면서 한자 도래이전 상고시대 때부터 일본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일었던 것은 그 콤플렉스의 발로일 것이다. 오늘에 와서는 히부미( 日 文 )로 일컬어지는 '신대문자'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미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면 한자를 애써 가나문자로 둔갑시킬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 훈독 두갈래의 한자와 가타( 片 )가나, 히라( 平 )가나를 섞어서 표기하는 번거로움은 명치유신을 거쳐 유럽의 기계문명을 본격적으로 들여오게 되면서 한자폐지론, 로마자 전용론, 일본어 폐지론으로까지 번졌다. 1872년, 주미공사 모리 아리노리( 森 有 禮 : 훗날 문부경=교육부장관)가 "일본은 무역입국을 표방하고 있으므로 세계 무역을 주름잡 고 있는 영어국민의 말을 국어로 채용하지 않고서는 일본문명의 진보는 불가능하다"며 영어위방어지론( 英 語 爲 邦 語 之 論 )을 편 것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고 했던 일본인들. 65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1890년 중의원 의원으로 첫 당선된 뒤 25회 연속으로 당선됐던 대표적 의회정치인 오자키 이쿠오( 尾 崎 行 雄 )도 전후에 이르러 한자 망국론을 펴면서 영어나 에스페란토어를 제2국어로 채용할 것을 거듭 주장했다. 정치인뿐만이 아니다. 패전 직후인 1946년 일보의 대표적 문호로 추앙 받았던 시가 나오야( 志 賀 直 哉 )는 "일본의 국어처럼 불완전하 고 불편한 것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장래 일본이 진정한 문화국가가 될 수 있는 희망은 없다"면서 프랑스어를 국어로 채용할 것을 월간지 개조( 改 造 ) 4월호에 기고하여 일본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엔지니어 분야의 인사가 나름대로 효율론을 들어 자국어 폐지론은 펴더라도 이를 말려야 할 입장인 정치인이나 작가가 오히려 앞 장서서 일본어 폐지론을 폈던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에 관해 언어사회학자 스즈키 다카오( 鈴 木 孝 夫, 65) 게이오 대학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이슬람, 인도, 중국 등 오래된 문명은 설혹 영양실조(물질부족)로 육체는 보잘 것 없이 되더라도 넋을 파는 일은 없다. 그런데 독자적인 문명(넋)을 가꾸어 본 적이 없고 언제나 그때 그때 앞서가고 있는 외국문명을 마치 자동차의 부품이라도 바꾸듯 들여왔던 일본에서는 극단적으로는 말 을 바꿔 갖자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일본은 부품교환형 문명, 장기( 臟 器 )이식형 문명이기 때문에 자국어 폐지론도 나오는 반면 정신적으로는 '스스로의 식민지화(Auto Colonization)도 마다하지 않고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한때 일본의 일부지식인들이 폐지를 주장했던 일본어 학습열이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다. 국제교류기금 일본어 국제 센터가 최근 발 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본 밖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은 981,000명(1990년)이며, 1979년 조사이래 10년 사이에 약 8배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강범석 아주 본부장]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고 했던 일본인들. 66
18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2009.06.05 12:40 임진왜란 동안에 가장 유명세를 얻은 의병장은 곽재우나 김덕령이지만, 이룩한 전과로 따진다면 나는 단연 함경도 를 일본군의 손에서 되찾아낸 정문부를 꼽고 싶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제 2번대와 매국노 국경인의 수작으로 함경도는 한 때 도의 대부분이 일본군의 수 중에 떨어지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북평사 정문부의 탁월한 의병 전쟁으로 인해 일본 세력을 축출하고 국 토와 백성을 지킬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그 중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2진 20,800명은 한양에 입성한 후, 진로를 동북 방향으로 돌려 강원도를 순식간에 석권하고 함경도로 북상해 오기 시작했다. 가토는 6월 1일, 함경도와 강원도의 길목인 철령을 거치면서 우리는 새로운 임금을 세우고 너희들을 잘 살게 해 주겠다. 항복하는 주민들은 결코 해치지 않으니, 안심하고 나와 우리를 맞으라. 하고 외치며 통행증을 뿌렸다. 무섭 게만 여겨지던 일본군이 뜻밖에도 난폭 행위를 하지 않는 모습을 보자, 함경도 백성들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나라와 조정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며 적군의 앞잡이로 돌변했다. 가뜩이나 함경도 주민들은 추운 날씨와 여진족의 잦은 침입에 중앙 정부로부터 고위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는 차별 대우를 받아 조선 왕조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았던 터였다. 여기에 함경도로 피신을 온 두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이 주민들을 상대로 식량과 옷가지를 빼앗는 등의 행패를 부리자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군이 들어와 위민 정책을 펴자 함경도 주민들은 억눌려 왔던 불만을 폭발시켜 버린 것이다. 함경도를 지키고 있던 남병사 이혼과 병마절도사 한극함은 일본군과 교전했으나 병력이 너무 적은데다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일패도지했다. 이혼은 달아났다가 일본군과 내통한 백성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 고, 한극함은 여진족의 영토로 넘어 갔으나 도로 그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함경감사 유영립은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도망쳤으나 역시 친일 반역자들에게 생포당해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명천과 종성에서는 관가의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켜 관아를 점거하고 관원들을 붙잡아 적에게 내주었다. 외적의 침입을 당한 함경도는 이처럼 자중지란을 맞아 붕괴되고 있었다. 자신들을 지켜줄 군대도 없어지고 주민들이 적개심을 품고 반민 행위를 일삼자 겁에 질린 임해군과 순화군은 국경 의 끝인 회령까지 도망쳤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그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회령의 아전 국경인은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 함경도 백성들의 민심이 조선 왕조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알았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68
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숙부 국세필과 짜고서 회령의 군사들과 무뢰배들을 선동하여 두 왕자를 붙잡아 일 본군에 넘기는 경천동지할 일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순변사 이영( 李 瑛 )과 부사 문몽원( 文 夢 轅 )이 이 일을 막아보려고 했으나 국경인이 그 사실을 미리 입수하고 부하들 을 보내 군관들을 죽이자 겁이 난 그들은 달아나 버렸다. 왕자 일행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긴 대가로 국경인은 가토로부터 판형사제북로( 判 刑 使 制 北 路 )라는 관직을 받았고 그의 숙부인 국세필과 다른 일당들도 허울뿐인 벼슬을 얻어 의기양양했다. 이렇게 해서 여진족과 마주한 함경도 북방 최전선인 회령마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여러 진( 鎭 )과 보( 堡 )의 토병( 土 兵 )과 호수( 豪 首 )가 모두 관리를 붙잡고 배반하며 항복하였으므로 일본군은 함경도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부분의 성과 마을을 점령하게 된 셈이었다. 이대로 일본군과 반민들의 손에 계속 지배될 것 만 같았던 함경도의 상황은 그러나 얼마 못가 급변하게 되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명나라 군사가 올 터인데, 그럼 왜군을 도운 함경도는 역적의 소굴로 간주되어 토벌을 당한 다! 라는 소문이 퍼졌으며, 가토가 지휘하는 일본군 쪽에서도 식량 부족과 추위에 시달리면서 함경도 백성들을 상대 로 양식과 옷을 빼앗고 반항하는 백성들을 가차 없이 죽이자 일본군에 보여주었던 백성들의 인심이 점차 차갑게 얼 어붙고 있었다. 이 무렵 정문부는 일본군과 반역자들을 피해 자신의 제자인 교생 지달원의 집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지달원의 집은 경성의 가장 외진 해변 가에 있어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쉬웠다. 한동안 몸을 피한 채, 민심의 동향을 살펴보던 정문부는 일본군에 대한 주민들의 심기가 적대적으로 변해가고, 조 정에서 명군을 끌어들여 일대 반격을 하려 한다는 조짐을 파악하자 지금이 바로 일어설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제자 지달원과 최배천 등과 함께 은밀히 뜻있는 선비들과 무사들을 규합했다. 수백 명의 함경도 지방 군사들 과 선비, 무사들이 모였고 그들은 정문부를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대는 경성 사람인 전 만호 강문우를 선봉에 내세우고 즉시 부성( 府 城 )에 이르렀다. 부성은 국 경인의 숙부인 국세필이 다스리고 있었다. 정문부가 강문우를 보내 관북의 여러 사람들이 우리를 따르고 있다. 항 복하면 살려두겠지만, 저항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라고 위협하자 국세필은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성문을 열어 맞아들였다. 정문부는 크고 작은 병사와 백성들이 예전에 범한 죄는 문책하지 말라. 는 명령을 내렸고 국세필에게 그대로 예 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아마 일단 국세필 일당들을 안심시켜 놓은 뒤에, 부성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들을 더 모으고 그렇게 해서 세력을 탄탄히 다진 다음 국세필 일당들을 제거하려 했던 계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69
부성을 제압한 정문부는 각 성읍에 격문을 퍼뜨렸다. 그것을 본 종성( 鍾 城 )의 무사 김사주와 경성인 오박 등이 병사 들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종성 부사 정현룡과 경원 부사 오응태, 경흥 부사 나정언과 고령 첨사 유경천, 군관 오대남 등은 산 속에 숨어 대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는 와서 모였다. 이렇게 해서 함경도 의병들의 수는 3천 명으로 늘어났다. 의병 중에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들을 뽑아 선봉대를 조직 했고 이를 유경천이 거느렸다. 길주에 주둔한 일본군이 이 소식을 듣고 1백 명의 군사를 보내 성의 서쪽에 와서 정황을 알아보게 했는데, 강문우 가 선봉 기병대를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을 참살하자 남은 왜병들은 달아났다. 일본군 일단의 병력을 격퇴시키자 의병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부성의 백성들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각 지휘관 들은 군사를 출동시킬 날짜를 가려 출발하려 했으나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일본군과 내통했던 국세필 등의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일이었다. 정문부는 국세필과 그 일당 13명을 잡아 참수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애당초 왜적과 내통해 역모를 하 는데 앞장선 자들은 이들뿐이며 이 밖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성 안 사람들은 안심하라. 하고 말하니, 많은 사람들 이 기뻐하였다. 일본과 내통한 수천 명의 백성들을 전부 처벌하려 했다가는 심한 반발을 사고 폭동이 일어날 우려도 있었다. 최소한의 처벌로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정문부의 이러한 조치는 현명한 일이라고 봐 야 한다. 국세필 일당을 처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국경인 차례였다. 정문부는 육진에 격문을 보내어 수천의 의병들이 정 의의 깃발을 들고 일어섰으니, 이제 곧 함경도는 회복될 것이며 왜적도 물러갈 것이다. 누구든 의기 있는 자는 역적 국경인의 목을 쳐 죄인의 굴레를 벗고, 나라에 공을 세우라! 라고 외쳤다. 이 격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글을 읽은 회령의 유생 신세준은 동료 유생들과 군사들을 모아 국경인이 사는 집 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갑작스러운 화재에 놀라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국경인을 신세준과 다른 유생들이 참살하였 고, 이로써 함경도 제일의 반역자는 숙부와 함께 더러운 이름을 남기고 사라졌다. 국경인의 사망으로 많은 성과 요새들을 의병들이 접수했으며 다른 반역자들은 백성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달아났다. 하지만 아직 함경도에서 일본군이 완전히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 정문부는 의병을 둘러 나누어 한 쪽은 고참역( 古 站 驛 )으로, 다른 한 쪽은 명천( 明 川 )으로 보내 일본군과 내통했던 정말수를 죽이고 성을 되찾게 하였다. 그러자 부성에 군사를 보냈다 패한 길주의 일본군이 다시 성 밖으로 나왔고, 그 중 하나가 명천의 해창( 海 倉 )으로 향했다.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70
일본군은 길주성의 동쪽에 있는 장덕산( 長 德 山 ) 밑에 이르렀으나 이미 길주의 남쪽 마을에 함경도 의병들이 매복해 있었다. 의병들이 먼저 산 위를 차지하자 일본군은 조총을 쏘아대며 서둘러 산을 오르려 했다. 이 때 유경천이 기병 대를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가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와 동시에 고경민이 미리 군사를 서쪽 산 밑에 잠복시켰다가 대 포를 쏘며 병사들을 돌진시키자 일본군은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황급히 퇴각해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의병들이 추격하였다. 그들은 계곡을 겹겹이 에워싸고 일본군이 달아나지 못하게 했다. 그날 밤, 폭설이 내리고 추위가 심해 일본군 대부분이 동상에 걸리고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물론 의병들도 추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함경도에서 살아오면서 추위에 익숙해진 형편이었는데 반해, 일본군 대 부분은 따뜻한 남쪽 지방 출신이어서 추위에 더욱 약했다. 아침이 되자 의병들은 포위망을 열고 계곡 안으로 들어가 급습을 감행했다. 이미 일본군 중 적지 않은 병사들이 손 발이 부르트고 쓰러져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 전투에서 6백 명의 일본군이 죽임을 당했고, 간신히 살아남 은 자들은 길주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감히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문부가 의병 본대를 이끌고 성을 포위하자 일본군은 성벽 위에 올라 조총을 쏘아댔다.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아군 의 피해도 커질 것 같아 정문부는 일단 물러나고, 그들을 더욱 추위에 떨게 만들어 전투력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으로 성의 땔감 공급로를 차단했다. 이 때, 일본군 한 부대가 마천령( 摩 天 嶺 ) 아래 영동관 책성( 嶺 東 館 柵 城 )에 주둔하면서 임명촌( 臨 溟 村 )을 불태우고 노 략질 하자 정문부는 의병들을 이끌고 공격하였다. 양측 군대는 쌍포( 雙 捕 )에서 전투하였는데 수와 기세에서 밀린 일 본군이 패주하자 의병들이 추격하면서 적병 60명을 참살했다. 패배한 일본군은 책성으로 퇴각해 성을 굳게 지킨 채 나오지 않았고, 정문부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포위하였다. 해가 바뀐 1593년 1월 1일, 마침내 길주에서 농성하던 일본군이 성을 비워놓고 후퇴했다. 의병들이 포위가 계속되 자 성 안의 일본군은 불을 피울 장작과 양식을 공급받을 수 없어 민가를 뜯어서 땔나무로 쓰는 등 그 형세가 점점 궁 색해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철수한 것이다. 길주성의 일본군은 조선군의 추격이 두려워 밤중에 도주하였으나 그조차 여의치 않아 조선 의병들이 쫓아오자 정신 없이 패주하여 황급히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달아났다. 도망가면서 일본군은 단천과 이성( 利 城 ) 등 주변 고을들을 모 두 불태웠고, 약탈하였다. 이로써 1592년 12월, 길주성을 접수한 정문부는 북으로 육진( 六 鎭 )을 순행하면서 반역자들 을 찾아내 처형하고 여진족과 교섭하여 그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요새를 수복하여 장교들을 파견 해 굳게 지키게 한 후, 해가 바뀐 1593년 1월 13일 길주로 돌아왔다. 한편 안변에 머무르던 가토 기요마사는 이 소식을 접하자 군사들을 이끌고 북상하면서 내가 다시 함경도를 평정 하겠다! 라고 호언장담했다.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71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 주력 부대가 전진해 오자, 단천 군수( 端 川 郡 守 ) 강찬( 姜 燦 )은 정문부에게 군사를 보내어 함께 싸우자고 요청했다. 정문부는 그의 전언을 듣고 정예 기병 2백 명을 4대로 나누어, 1대장은 훈련 정( 訓 鍊 正 ) 구황, 2 대장은 훈련 첨정( 訓 鍊 僉 正 ) 박은주, 3대장은 훈련 판관( 川 鍊 判 官 ) 정원침, 4대장은 훈련 판관 고경민이 각기 50명씩 을 거느리고 1593년 1월 20일에 산길로 단천에 도착했다. 이튿날 아침 4대의 군사를 단천성 밖 20리쯤 되는 지점에 숨기고 단천 군사 30명으로 하여금 성 밖 4리 가량 되는 지점까지 진출하여 도전케 하니 성안에 머물던 적들은 2백여 명이 일시에 성을 나와 곧바로 진격해왔다. 단천 군사들이 패하는 체하면서 되돌아 달아날 즈음 피로한 말을 탄 두 병졸이 적에게 살해되자 적은 더욱 기세등 등해 추격해 왔다. 일본군이 조선 의병들이 잠복한 지점까지 이르렀을 때. 4대의 복병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와 정면 을 막고 후방을 차단하면서 화살을 비 오듯이 퍼붓자, 왜적은 갑자기 튀어 나온 기병들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조총을 마구 쏘아 댔으나 당황한 중에 쏘는 것이라 모두 빗나갔다. 사기가 떨어진 일본군은 도망가기에 겨를이 없어 감히 조선 의병에게 덤비지 못했다. 조선군이 추격하여 성 밑에까지 이르자 일본군은 거의 사살되고 겨우 30여 명이 남았는데 그것도 태반은 화살에 맞 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 때 죽인 적의 수효는 적어도 백여 명은 되며, 싸우면서 간 거리는 20여 리나 되었다. 그러나 아직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 본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가토의 본대에 앞서 순찰 중이던 일본군 척후대를 유 경천이 만나 수십 명을 참살하자 가토가 대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왔으므로 유경천은 급히 후퇴했다. 소수의 기병으로 족히 수천이 넘는 대군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가토가 지휘하는 일본군 본대가 마천령을 넘어오자 정문부는 3천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영동책( 嶺 東 柵 ) 외곽에서 그 를 맞아 격전을 벌였다. 세 번의 치열한 교전 끝에 수적에서 불리한 의병들이 일단 경성으로 후퇴하여 농성전의 태세 를 갖추었다. 그러나 일본군 쪽에서도 피해가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혹독한 추위와 보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더 이 상 전투를 계속한다는 것이 무리임을 알고 밤에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철수했다. 정문부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빠른 경기병 부대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함흥에 이르렀지만 가토가 이미 안변( 安 邊 )으로 들어가 버려 잡을 수 없었다. 안변성에 도착한 가토는 의병들의 공격보다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군량과 보급 물자들이 다 바닥이 났던 것 이다. 남쪽의 후방에서는 의병들의 연이은 봉기로 인해 보급로가 차단당했고, 이로 인해 일본군은 극심한 추위와 굶 주림에 시달리며 겨울을 보내야 했다. 결국 1593년 2월 1일, 가토는 안변에서 모든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여 한양으로 향했다. 이로써 함경도는 완전히 평정되었다. 이것이 약 8개월에 걸친 북관대첩 의 진상이었다. 백성의 손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던 항일 의병은 그 후 병자호란과 구한말 일제의 국권 강탈에 맞선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 이어진다. 국란을 맞아 민중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외적과 싸워 가족과 나라를 지키려 한 의병 전쟁은 민중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72
들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힘을 깨닫게 한다. 북관대첩의 영웅, 정문부 73
19 서자 출신의 의병장, 홍계남
서자 출신의 의병장, 홍계남 2009.06.05 12:37 다소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의병장으로 홍계남( 洪 季 男 )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수원 출생으로 충의위( 忠 義 衛 )를 지낸 홍자수의 서자이며 어머니는 기생이었다고 전해진다. 임란을 앞둔 3년 전인 1590년, 군관의 자격으로 김성일과 황윤길이 이끄는 통신사에 소속되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 때 홍계남은 일본인들 앞에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보였는데 그 솜씨가 출중하여 보는 사람들을 무척 놀라게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홍계남은 이일과 신립의 휘하에 들어갔으나 두 장수가 탄금대에서 대패하고 신립이 자결하자, 홍계남은 고향인 수원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여러 이복형제들과 함께 의병들을 모집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며 일본군과 싸웠다. 그런데 그가 다른 의병 부대에 연락을 하기 위해 떠난 사이, 부친인 홍자수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홍계남을 유인해 죽이기 위해 부친인 홍자수의 시신을 성벽에 매달아 놓는 반인륜적인 계략을 꾸 몄다. 부친의 죽음을 안 홍계남이 안성으로 달려가자 일본군들은 홍자수의 시체를 성 밖으로 내던지고 그를 죽이기 위해 성에서 나왔으나, 홍계남은 부친의 시신을 안고 말을 달려 무사히 빠져나갔다. 홍계남은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의병 부대를 총괄하게 되었고 이에 다른 이복형들도 반발하지 못하고 그의 지시 를 따랐다. 서자를 천시하던 조선 시대의 풍습에 비추어 본다면 매우 이색적인 일이다. 그가 이끌던 의병은 약 1백여 명에 불과했으나, 소수의 인원이라는 점을 최대한 살려 날랜 기병 부대로 일본군을 기습하며 적의 후방과 보급로를 노리는 전술로 번번이 큰 공로를 세웠다. <선조실록>에서는 그의 용맹이 군중에서 제 일 뛰어났고 일본군을 많이 살해하여 홍계남의 이름만 들어도 그들이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 조정에서도 그의 무훈을 인정하여 1592년 9월 11일, 수원 판관에 제수하였다. 다음해인 1593년, 홍계남은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다른 의병장인 이빈과 선거이, 송대빈과 연합하여 남원과 진주, 경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전공을 올렸다. 그 해 6월 6일에는 용인 지방에서 일본군을 만나 58명을 참살하는 전과 를 거두기도 했다. 서자 출신의 의병장, 홍계남 75
6월 29일에 있었던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홍계남도 참전하여 일본군을 치려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가 가진 병력 이 너무 작아 본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고, 진주성이 이미 함락된 뒤에 현장에 도착했다. 다만, 그는 휘하 의병 3백 명을 거느리고 영( 嶺 )을 내려가다가 일본군의 선봉 부대를 만나 분투하여 구례와 광양에서 그들을 격퇴시켰다고 한 다. 홍계남 의병 부대는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 군사를 구해내기도 했다. 11월 2일, 안강( 安 康 )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명 나라 장수 오유충( 吳 惟 忠 )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 복병을 설치하려 가다가 일본군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여 뜻하지 않게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 군사들은 양가죽으로 만든 긴 옷을 입어서 행동이 민첩하지 못해 일본군과 의 육박전에서 크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 때, 마침 홍계남의 부대가 나타나 일본군 병사들을 사살하고 포로로 잡혀 가던 명나라 군사 70여 명을 구출해냈다. 1594년 이후로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홍계남은 이렇다 할 활약상을 보이지 못한다. 단지 조정에서 그의 가 족에게 식량을 지급하고 그에게 좋은 말을 내려주거나 포( 布 )를 내려 준다는 간략한 기사만이 보인다. 홍계남의 최후는 확실치 않다. 다만 1597년 1월 24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이 때 홍계남이 권응수, 김태허 같은 다 른 의병장들과 부산 산성( 釜 山 山 城 )에 진을 치고 있다는 기록이 보이며, 5월 3일자 기사에 홍계남이 세운 전공에 따 라 죽은 뒤에 내리는 증직( 贈 職 )을 더하게 하고 그의 늙은 어머니에게 매달 요미( 料 米 )를 내리게 하자는 논의가 나타 난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홍계남은 부산 산성을 치는 공방전을 벌이던 이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과의 전투에 서 전사했다면 으레 기록이 남을 텐데 그런 언급도 없으니, 아마 병으로 죽은 듯하다. 홍계남의 죽음에 대해 실록을 적는 사관은 홍계남은 본시 미천한 사람으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몸을 돌보지 않 고 우뚝이 충청도의 한쪽 보루가 되었다. 그가 과감히 보인 용맹과 적개심에 불타 왜적을 막은 공로가 어찌 저 한 몸 만을 온전히 하고 처자식을 보전시킨 신하들과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겠는가? 라고 그의 용맹과 전공을 극찬 하였다. 선조 임금도 그의 공적을 인정하며 증직을 해야 마땅하다고 전교를 내렸다. 서자 출신의 의병장, 홍계남 76
20 1억 원 이상을 내야 교리를 들을 수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1억 원 이상을 내야 교리를 들을 수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2009.05.20 22:58 <미션 임파서블>로 유명한 헐리우드 영화 배우 톰 크루즈는 영화사와 마찰을 빚어 한 때, 영화사와의 계약 연장에 실패할 위기까지 초래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사이비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Scientology)의 열렬한 신도이며, 인터뷰나 기자 회견을 할 때마다 사이언톨로지를 반드시 믿으라는 장황설을 늘어 놓아 평판이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최근 벨기에의 법원은 사이언톨로지를 범죄 집단으로 규정해, 톰 크루즈는 잘못하면 범죄자로 몰릴 우려까지 있다 고 합니다. 이밖에도 미국의 연방 법원은 사이언톨로지 신도 9명에게 강도와 위조, 불법침입, 사법 방해 등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톰 크루즈의 최신작 <발키리>도 촬영에 많은 지장이 있었는데, 사이언톨로지는 독일에서 불법화된 종교 단체라서 독일 정부가 톰 크루즈에게 자국 안에서 촬영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오랫동안 거 부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이언톨로지는 어떤 종교이길래 세계 각국의 정부로부터 위험한 단체로 분류를 받고 있을까요? 사이언톨로지는 시작부터가 참 이상한 종교인데, 우선 이 종교를 창시한 사람은 SF 소설가인 L. 론 하버드(Ron. Hubbard)였습니다. 론 하버드는 오컬트 단체인 캘리포니아 아가페 지부의 회원이었는데, 같은 지부의 회원이자 친구 인 로켓 과학자 잭 화이트사이드 파슨스의 돈 5만 달러와 그의 애인을 빼앗아 도망치고 사이언톨로지 교단을 창시했 습니다. 로켓 과학자가 어떻게 오컬트 단체의 회원이 될 수 있느냐고 이상하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아이작 뉴턴을 비롯하여 암암리에 오컬트와 마법을 신봉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론 하버드가 만든 사이언톨로지는 그의 취향인 SF와 외계인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종교의 핵심 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7천 5백만 년 전, 포악한 우주의 독재자 '제누'에게 쫓겨나 지구로 도 망쳤다가 핵폭탄 공격을 받고 화산 속으로 숨은 테탄(thetan)이라는 외계인의 유전자를 받은 집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외계인의 후손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교리를 들으려면 교단에 입교해서 12만에서 15만 달러 가량의 돈을 내야 합니다. 최소한 1억 원 이상을 교단에 바쳐야 교리의 핵심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교리의 핵심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종교들이 많은데, 뭔가 좀 이상하군요. 사이언톨로지에 처음 입교하면 우선 '오디팅'이라는 수업을 거친 후, '정화'의 단계를 거쳐 오퍼레이팅 테탄의 단계 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서 오디팅을 한 번 더 끝내고 나면 텔레파시 같은 영적인 능력도 얻게 된다는데, 정말로 그 런 능력을 얻은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1억 원 이상을 내야 교리를 들을 수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78
수많은 논란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이언톨로지는 전 세계적으로 8백 만이나 되는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으 며, 그 중에는 앞서 언급한 톰 크루즈를 비롯하여 제니퍼 로페즈, 존 트라볼타, 윌 스미스 같은 헐리우드의 유명 스타 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1억 원 이상을 내야 교리를 들을 수 있는 종교 사이언톨로지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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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2009.05.11 17:13 일찍이 공산주의 사상가 마르크스는 종교를 가리켜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마약 같은 것. 이라 고 혹평한 바 있다. 비단 마르크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이비 종교로 인한 폐해는 어떤 강력 범죄보다 끔 찍하다. 사이비 교주를 신처럼 모시고 살다가 재산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숱한 여성들은 성폭행까지 당한다. 게다가 잘못해서 교주의 비위에 거슬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목숨조차 보장받기 어렵다. 마르크스가 활동했던 시대보다 2백 년 뒤인 지금의 한국에서도 사이비 종교들은 엄연히 존재하며 사회와 국민들에게 무수한 피해를 끼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에서 이런 사이비 종교들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 까? 암울한 일제 강점기인 20세기 초, 한 사이비 종교와 교주의 죽음은 온 한반도를 충격과 공포에 떨게 했 다. 교주가 수백 명이 넘는 신도들을 잔혹하게 살해해 암매장하고 여신도들을 겁탈하다 경찰의 수사를 받 게 되자 끝내 자살하고 만 백백교( 白 白 敎 ) 사건은 한국 역사상 최악의 사이비 종교라 할 만 하다. 백백교는 전정운( 全 廷 雲 )에 의해 창시된 사이비 종교 백도교( 白 道 敎 )의 전신이었다. 평안도 출신의 동학 교도였던 전정운은 1900년,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이 전국 각지의 명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신통력을 얻 어 미래를 보았는데, 앞으로 4년 후에 전 세계가 불바다가 되어 멸망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전정운은 다른 사이비 교주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을 따르면 죽지 않고 새로 다가올 낙원에서 살게 되며 그 때는 돈이 필 요하지 않으니 모두 자신에게 바치면 그걸 좋은 일에 쓰겠다는 언급을 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전정운의 궤변에 놀아난 순진한(혹은 멍청한) 사람들은 앞 다투어 재산을 바쳤고, 어서 세상의 종말이 와 선택받은 자신들이 살아남기만을 바랬다. 그러나 전정운이 약속한 4년이 지나가도 지구 종말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흥분한 신도들은 전정운이 자 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항의했다. 사기술이 들통나자 전정운은 얼른 재산을 챙기고 자신을 맹목적 으로 추종하는 광신도들을 거느리고서 강원도로 도망쳤다. 강원도에 도착해 새로운 터전을 일군 전정운은 챙겨온 재산으로 왕궁 같은 저택을 짓고, 수십 명의 여신 도들을 성적으로 농락하며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1919년,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교주에 오른 인물이 바로 아들 전용해( 全 龍 海 )였다.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83
1923년, 전용해는 교단의 이름을 백도교에서 백백교( 白 白 敎 )로 바꾼다. 어째서 교단의 이름을 백백교로 바꾸었을까? 글자 그대로 풀이해보면 하얗고 하얗다( 白 白 )는 뜻인데, 세상을 깨끗하게 한다는(자기들 나름 대로) 뜻이 담겨 있다. 일설에는 신도 백 명쯤은 눈 깜짝 안하고 때려죽일 수 있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아무리 잔혹무도한 사이비 종교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살인을 표방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전용해는 아버지가 만든 교리를 그대로 재탕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부지런히 교세를 닦아나갔다. 이 제 얼마 후에 온 세상이 불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니, 백백교에 입교하여 마음을 깨끗이 정화받아야지만 살 아남는다. 그리고 종말이 끝나면 동쪽 바다에 아름다운 낙원이 생겨나 아픔과 죽음도 없는 행복한 삶을 영 원히 누릴 것이라는 교리였다. 우리가 보기에는 황당무계한 헛소리지만,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백백교가 선전하는 저런 교리에 혹해서 웬만큼 학식 있고 부유한 사람들도 상당수가 백백교에 입교하겠다고 몰려왔으니 말이다. 하긴, 현대에도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부류가 고급 대학을 나온 엘리트라니, 인간의 나약한 마음은 사회적 신분과는 무관한가 보다. 그러나 백백교에 들어간 사람들은 구원은 고사하고 생명과 재산의 안전마저 보장받지 못했다. 남자들은 가진 돈을 몽땅 털어 헌납해야 했고, 여자들의 경우는 깨끗한 피를 가지게 해준다는 명목 하에 교주 전용 해와 강제로 성관계를 맺어야 했다. 만일 재산 헌납이나 교주와의 성관계를 거부하면 강제로 돈과 몸을 빼 앗기고 깊은 동굴로 끌려가 몽둥이로 맞아 죽임을 당했다. 전용해가 선호하는 살해 수법은 일단 죽이고자 하는 대상이 된 사람을 기도를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산 속 깊은 동굴로 끌고 가서, 미리 준비한 신도로 하여금 몽둥이로 그 자의 뒷통수를 내리쳐 죽인 다음, 시 체를 암매장하는 것이었다. 행여 피살자가 지르는 비명 소리가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해 살해와 동시에 화약 을 터뜨려 소리를 감추었다고 한다. 순순히 돈과 몸을 내어주더라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돈을 있는 대로 바쳐도 전용해의 눈에 거 슬리면 즉각 살해되어 깊은 산 속에 암매장되었고, 전용해의 첩 노릇을 해도 그가 싫증이 나면 역시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되었다. 전용해는 일반 신도들만을 대상으로 포악하게 군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충심으로 섬기는 교단 간부들도 믿지 못했다. 자신이 내리는 지시에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며 복종하지 않거나, 원하는 만큼보다 재산을 적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84
게 바치거나, 교단의 정기 모임에 자주 나오지 않거나, 행여 교단에서 저지르는 일들을 외부에 알렸을 경 우에는 즉시 살해되었다. 아무리 교단을 위해 공적을 많이 세우고 충성을 다하는 원로 간부라고 해도 예외 가 없었다. 사이비 종교들이 그렇듯이, 백백교도 교단 내의 비리를 외부에 알리는 신도들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한 번은 어느 신도가 전용해가 저지르는 잔인한 만행을 낱낱이 편지에 적어 총독부와 경찰서에 보내려다 발 각된 일이 있었다. 내부 고발자에게 전용해가 베푸는 보답(?)은 잔혹하지 그지없었는데, 건장한 청년들로 구성된 신도들을 보내 한밤중에 그 신도가 사는 집에 쳐들어가 신도 본인은 물론이고 일가족 전부를 모두 죽이고 시체를 암매장했다고 한다. 더욱 잔인한 것은, 그 신도에게는 갓 태어난 아이가 있었는데 한 간부 가 "아이까지 죽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전용해는 아이는 물론 그 간부까지도 죽 여 암매장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용해 자신과 성관계를 가진 여신도들이 자칫 임신을 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산모와 태아까 지 모두 살해되었다. 비밀이 밖으로 새어나갔을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지만, 어떻게 자신의 핏줄인 갓난 아기들까지 태연하게 죽이라고 명령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리 잔인한 악인이라도 자신의 가족은 사랑하는 법인데, 전용해는 그렇지도 못했다. 동생들이 자신에 게 복종하지 않자 그들이 자신과 교단이 저질러온 비리를 폭로할까봐 신도들을 시켜 죽여 버리는 천인공 노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역사서에 흔히 등장하는 포악한 전제 군주와 스케일의 크기가 다를 뿐, 동일한 자아를 가진 전용해는 이 렇게 무소불위의 악랄한 통치를 하며 향락과 타락에 젖어갔다. 그러나 그가 누리던 영화는 뜻하지 않은 이 변을 당해 무너지게 되었다. 황해도 해주에서 약품 가게를 하던 유곤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청년은 부친이 백백교에 빠져 여동 생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치고 전재산을 헌납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중대한 결심을 하고 교주 전용 해와의 면담을 교단에 신청했다. 간부들의 호위를 받으며 유곤용의 집에 찾아온 전용해는 곧장 그에게 재 산을 헌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곤용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전용해와 백백교의 비리를 공박하며 그를 꾸짖자 전용해는 지니고 있던 칼을 뽑아 그를 찌르려 하였다. 유곤용은 칼을 피하며 그를 구타했고 전용해가 지른 비명 소리를 듣고 집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부와 신도들이 달려와 교주를 업고 달아나는 한편, 유곤용과 몸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마침, 유곤용의 집은 동대문경찰서 왕십리주재소 옆이었다. 싸움 소리를 들은 일본인 순사 부장이 순사들을 이끌고 급히 달려와 신도들을 체포해 주재소로 끌고 갔는데, 그 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백백교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살인과 비리 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85
백백교의 끔찍한 살인 행각은 연일 신문 지상을 통해 크게 보도되었고, 경찰은 8개월에 걸쳐 백백교 교 단과 전용해가 은신해 있을 법한 별장들을 모두 수색했다.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달아난 전용해는 몇달 후, 경기도 용문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세간에는 신출귀몰한 전 용해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잡아다가 자기의 옷을 입히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고 도망쳤을 것 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경찰의 수사 결과, 백백교 교단의 주변 산과 동굴에서는 암매장된 시체가 수백구나 나왔고, 1941년 1월에 마무리 된 백백교 사건의 선거 공판에서 백백교 교단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은 무려 464명이나 되었다고 한 다. 그 중 전용해는 간부 문봉조 등 18명과 함께 신도 314명을 죽였으며, 다른 간부인 김서진은 170명, 이 경득은 167명, 문봉조는 127명의 살인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미 죽은 교주 전용해의 머리는 잘려져 포르말린 용액에 담겨 보관되었는데, SBS 백만불 미스테리 취재진이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의 지하실을 방문했을 때, 발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오랫동안 떠돌아 오던 "국 과수 지하실에 백백교 교주의 머리가 보관되어 있다."라는 유언비어는 결국 사실로 밝혀졌던 것이다. 일제 시대, 전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이 백백교 살인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되었고, 교단은 해체되어 사라 졌다. 하지만 아직도 그 교단의 관계된 사람들의 후손들은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 SBS에서 한참 이 백백 교 사건이 방영될 즈음, 전용해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계속 국과수에 전화를 걸어 자기네 교주의 머 리를 돌려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한다. 잔인무도한 한국의 사이비 종교, 백백교 86
22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을 외면하고 도망간 한국의 정치인들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을 외면하고 도망간 한국의 정치인들 2009.05.08 02:12 한국인으로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만, 해외에 나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한국 대사관보다는 일본 대사관 을 찾아가 부탁해 보라는 말은 이미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다. 오죽이나 자국민 보호에 무신경하면 남의 나 라 대사관에 찾아가 사정을 해야 할까? 이런 자국민 보호에 무신경한 한국 정부의 처사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나라가 막 들어선 1950 년대 초반에도 그랬으니까.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이 선제 남침을 시작해 한국 전쟁이 벌어졌다. 말로만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 라고 떠들었지만,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던 한국 정부와 군대는 무기력한 패주만을 거듭했다. 북한군의 노도와 같은 공세에 기겁을 한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한 정 부 요인들은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기로 했다. 그런데 피난을 떠나기로 결정을 내리면서 그들은 서울 시민들의 처지를 외면했다. 대통령 이승만은 우 리 국군은 용감히 북괴군을 격퇴시키고 있으니, 전혀 걱정하시지 말고 서울에 남아 계시기 바랍니다. 라 는 내용의 미리 녹음해 놓은 목소리를 라디오 방송으로 틀어놓은 채, 다른 수뇌부들과 함께 대전으로 도망 가 버렸다. 하지만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서울 시민들은 대통령이 아직까지 경무대(청와대의 옛 이름)에 남아 정 말로 방송을 하고 있는 줄로 알고 그대로 서울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북한군이 들이 닥치자 그때서야 대 통령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도망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너무나 늦었다. 서울이 점령당한 3개월 동안, 시민들은 북한군에게 끌려 나가 강제로 부역을 했고, 군대에 징집되어 동족들과 싸우는 전장에 투입 되는 등 온갖 고생을 했다. 미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여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군은 그들이 내려온 북으로 후퇴했고 서울은 국 군과 유엔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하지만 돌아온 정부 인사들은 북한군에게 시달리며 고초를 당한 서울 시 민들을 위로하기는커녕, 그들을 북한군에게 자발적으로 협력한 부역자로 몰아 처벌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생포되었다 석방된 자국의 전쟁 포로들을 반역자. 로 규정하여 처형시켜 버린 소련의 우매 한 독재자 스탈린이 저지른 짓과 다를 바 없다.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을 외면하고 도망간 한국의 정치인들 88
일부 양심이 있는 인사들은 이승만에게 각하, 서울 시민들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 까?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냈지만, 이승만은 되레 역정을 내며 내가 당나라 덕종마냥 내가 덕이 없어서 이런 일을 당하게 했소, 라고 말이라도 해야 한단 말이냐? 나는 결코 사과 같은 건 못한다. 당신 들이나 해라. 라며 뻔뻔스럽게 굴었다. 1200년 전, 중국의 전제 군주도 변란을 당한 백성들에게 미안하다 는 사과를 했는데 명색이 민주 국가의 수장이 그 정도도 못하겠다고 버틴 것이다. 대통령부터 이러니 다른 권력자들이 오죽이나 국민들을 업신여겼을까? 결국, 너무나도 부패하고 타락한 정부에 분노하여 1960년 4월 19일 국민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지만, 자국민을 멸 시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일이 옛날에만 일어났을 것이라고 마음을 놓지 말기 바란다.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 반 화교 폭동이 일어났을 때, 일본과 싱가포르 및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들은 위험에 처한 자국민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특 별기들을 보내 모든 사람들을 안전하게 구해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단 한 대의 특별기만을 보냈고, 그것도 1200달러를 지불해야만 교민을 태워 주었다. 거기에 주 인도네시아 한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폭력 사태에 휩쓸린 교민들을 외면 한 채, 자기들끼리만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쳤다. 덕분에 피신하지 못하고 인도네시아에 남은 한국 교민들 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흥분한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폭행당하고 재산마저 약탈당해야 했다. 앞으로 여러분은 정부는 언제나 국민 여러분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라는 허울 좋은 너스레를 믿지 말고, 자기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방도를 세우기 바란다. 특히, 해외에 나간 교민 분 들의 경우는 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정부의 말만 믿고 있다가 큰 봉변을 당할지 누가 알겠는가?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을 외면하고 도망간 한국의 정치인들 89
23 페르시아(이란)는 동양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페르시아(이란)는 동양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2008.09.17 17:10 2007년, 전 세계는 페르시아의 백만 대군과 이에 맞선 스파르타의 300용사들을 다룬 영화 <300>에 열광했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 도 큰 인기를 끈 이 영화는 개그 패러디에 이용될 정도로 대중의 높은 호응을 얻었다. 그런데, 이 <300>을 두고 국내의 보도 매체들은 "서양을 부각시키기 위해 동양을 일부러 비하시킨 영화다."라는 식으로 비판했다. 그 말 속에는 서구 문명의 시조인 그리스와 싸웠던 페르시아(이란)은 동양권에 속한다는 고정관념이 깔려있다. 그러나 과연, 페르시아(이란)을 인도나 중국, 한국, 일본과 같은 동양권으로 볼 수 있는가? 그렇게 보아야 하나? 물론 민주정을 채택한 도시국가들의 모임인 그리스에 비해서, 중앙집권적인 전제왕정을 실시했던 페르시아는 동양적으로 보일 수 도 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문화와 종교, 인종적인 요소를 고려한다면 꼭 그렇게 분류하기도 무리이다. 우선 페르시아의 문화적인 부분이 과연 동양권 문명인 인도와 중국, 한국과 일본에 비해 얼마나 다른지 간략하게 알아보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는 문화적인 요소를 한가지 들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용( 龍 )을 택할 것이다. 다신 교 신앙을 숭배하는 전통적인 동양권 문명에서 용은 신성한 존재이다. 인도 신화에서 태초에 신들과 마족들은 불사의 영약인 암리타 를 얻기 위해, 세계의 중심인 만라다 산을 거대한 용인 바수키로 휘감았다고 전해진다. 유지의 신 비슈누는 천개의 머리를 가진 아난 타라는 용 위에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 세계의 창조신인 브라흐마를 낳았다. 또한 비슈누는 인간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9번의 화신 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그 중 하나인 바라라마는 인간의 모습에서 본래의 신성한 모습을 되찾게 되자, 천 개의 머리를 가진 용으로 변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용은 인도보다 더욱 숭배와 찬양을 받는다. 중국의 신화에서 미개한 인류에게 문명을 전파해준 신인 복희와 여와는 사람 의 상반신에 용(또는 뱀)의 하반신을 한 반인반수였다. 오늘날 모든 중국인들의 시조가 되었다는 황제 역시 복희-여와와 마찬가지로 하반신이 뱀의 모습이었다. 황제를 도와 치우와 싸웠다는 성스러운 동물인 응룡 역시 거대한 용이었다. 중국의 북쪽에 있는 종산에 살면서 사계절의 움직임과 밤낮의 운행 등 시간을 관장하는 신인 촉음은 인간의 머리에 용의 몸을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재물의 풍 요를 안겨주는 홍예는 무지개의 모습을 한 용이며, 또한 중국의 동서남북 바다에 산다고 일컬어지는 네 마리의 사해용왕은 중국인들 로부터 열렬한 숭배와 인기를 얻고 있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다나카 요시키의 <창룡전>은 바로 이 사해용왕들을 주인공으로 다 루고 있다.) 현대의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용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정도이니, 용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애정을 알만 하다. 중국보다는 다소 약하지만, 한국의 신화와 전설에서도 용은 신성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는 하늘에서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나라를 세웠으며,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고 당군을 몰아낸 신라의 위대한 문무왕은 바다의 용이 되어 남쪽의 왜구들을 막아내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신라의 신성한 피리인 만파식적은 그 일부를 떼어 물에 던지면 용으로 변 할 수 있는 마력을 지녔다고 한다. 페르시아(이란)는 동양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91
일본에서 용은 비와 물을 지배하는 정령이며, 자연과 풍요를 주관하며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며, 오래 전부터 널리 신봉되었다. 이처럼 동양권에서 용은 신성한 이미지인데 반해, 유일신 신앙인 유대-기독교를 숭상하는 서구에서 용은 사악한 악마로 인식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은 페르시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대 페르시아의 경전 <자무야즈드 야슈트>에 따르면 사악한 신 앙그라 마이뉴는 인간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강력한 악룡 아디 다 하크를 만들어냈다. 이 아디 다하크는 세 개의 머리와 튼튼한 비늘을 가졌으며, 입에서는 독과 불을 뿜어대며 천 가지의 마법을 자유 자재로 다룰 수 있다. 거기에 잔인하고 교활한 성격을 지녔고, 종종 왕자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선한 사람들의 믿음 을 방해하는 악한 존재였다고 한다. 이슬람교가 전래된 이후에도 아디 다하크는 악한 이미지를 계속 가지고 있었다. 11세기에 페르시아의 시인인 페르도우시가 쓴 서 사시 <왕서:샤나메>에 의하면 아디 다하크는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 살던 왕자로 악마의 부추김을 받아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 나, 동시에 악마의 저주를 받아 두 어깨에서 뱀이 돋아나는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아디 다하크는 페르시아에 쳐들어와 성현왕 자므 시드를 죽이고 천년 동안 페르시아를 공포와 살육으로 통치하다가 영웅왕 팔리둔에게 퇴치되었으나, 그 영혼은 아직도 살아 있어 언 제고 다시 부활하여 지상을 다시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다고 한다. 또한 페르시아의 카샤프 강에 살고 있는 무서운 독룡은 맹렬한 화염과 독을 뿜어대어 사람과 동물과 초목을 말라죽게 했으며, 마침 내 용감한 영웅 사므가 나서서 이 악룡을 격렬한 혈투 끝에 간신히 처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용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카샤프 강 에 스며들어 강은 아무런 생명체도 살지 못하는 죽음의 강이 되었다고 한다. 이 밖의 신화나 전설에서도 용이 인간에게 유익하거나 신성한 존재라는 내용은 페르시아의 문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용이 인 간을 돕지 않고, 해치려 하는 위험한 존재이며 그래서 영웅에게 퇴치된다는 설화는 중세 유럽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설화와 거의 비슷한 구조의 이야기가 페르시아에도 있다는 사실은 페르시아의 서사 문화가 동양권보다는 서구에 더 가깝다는 반증이다. 종교적인 부분은 어떨까?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에 예언자인 자라투스트라에 의해 조로아스터교가 성립되었다. 조로아스터교에 서는 세계는 두 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앙그라 마이뉴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아후라 마즈다는 인간을 사랑하고 지켜주는 선한 신인데 반해 앙그라 마이뉴는 인간을 증오하고 세계를 파괴하려는 악한 신이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인간은 아후라 마즈다의 법을 따라 선행 을 베풀어야 하며, 앙그라 마이뉴가 퍼뜨리는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는다고 믿었다. 또한 세계의 종말이 오면, 15세의 처녀가 구세주 사오슈안트를 낳고 이 구세주에 의해 최후의 심판이 행해져 세상의 모든 악은 소 멸되고 정의가 승리한다고 한다. 이제까지 세상을 어지럽혀 온 악신 앙그라 마이뉴와 그 일당들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고 악한 인 간들도 지옥으로 추방된다. 일단 지옥에 떨어진 인간들은 죄를 속죄한다고 해서 용서를 받지도 못한다. 반면 선행을 하고 아후라 마 즈다를 굳게 믿은 선인들은 천국으로 들어가 끝없는 행복과 안락을 누리게 된다. 절대선과 절대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 세계의 종말과 구세주의 출현, 영원히 계속되는 축복과 형벌이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동 양적 신앙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대-기독교적인 유일신 신앙과 거의 흡사하다. 종교 연구가들의 말에 따르면, 조로아스터교 의 교리는 훗날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에 반해, 동양권에서 널리 신봉되는 종교인 불교나 중국에서 탄생한 도교에서는 윤회-환생론과 음양이론을 주창했다. 그러나 페 페르시아(이란)는 동양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92
르시아의 전통 신앙인 조로아스터교에 윤회론이나 절대선악을 부정한 음양이론은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인종적인 문제를 한 번 들어보자.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인들은 흑인이나 까무잡잡한 아랍인으로 나온다. 그러나 페 르시아인들과 직접 싸웠던 그리스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 따르면, 그리스군에 붙잡힌 페르시아군 포로들 은 피부가 너무 하얀 색이어서, 그들을 사러 온 노예 상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은 매우 허약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이런 <역사>의 서술 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페르시아의 주 민족 구성원인 아리안족은 엄연한 백인종에 속한다. 이란의 북부나 서북부에는 북유럽인들 과 외관상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금발 머리와 녹색눈, 또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러한 외모는 몽골 계 황인종들이 주로 살고 있는 동양권 국가들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페르시아(이란)을 동양권 문명으로 분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럽의 동쪽에 있다고 해 서 무조건 동양(동아시아)라고 보는 것은 짧은 견해가 아닌지. 페르시아(이란)는 동양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가? 93
24 켈트족의 재미있는 풍습들...
켈트족의 재미있는 풍습들... 2008.09.14 16:39 1. 켈트족들은 사람의 머리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과 지혜와 영혼이 담겨져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자신이 죽인 적의 머리를 가져와서는 집의 대문이나 벽에 매달아 놓고는, 자신과 집을 지켜주는 부적으로 삼았다. 만약 머리를 가져오지 못하면, 잘린 머리 모습을 그려넣거나 순무를 사람 머리처럼 만들어서 매달아 놓았다. 2. 켈트족들은 1년을 4분기로 나누어 각각 삼하인(Samhain), 임볼크(Imbolc), 벨테인(Beltain), 러프나사(Lughnasa)로 이름 붙였 다. 삼하인은 11월 1일, 임볼크는 2월 1일, 벨테인은 5월 1일, 러프나사는 8월 1일부터 시작된다. 3. 이 중에서 겨울인 삼하인 축제가 시작되면 켈트족들은 저승의 문이 열려 죽은 유령들이 이승을 마음대로 돌아다닌다고 믿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의 집 문과 벽에 걸려있는 사람의 두개골 속에 갈대 촛불을 켜서 유령들이 산 사람들을 저승으로 데려가지 못하도 록 막았다. 이러한 삼하인 축제는 오늘날 미국의 대중적인 문화 축제인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의 기원이 되었다. 할로윈 데이에 등장하 는 호박 조각은 순무를 사람의 머리처럼 조각하여 만들고, 그 속에 촛불을 켜던 켈트족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4. 켈트족들의 생사관과 세계관은 매우 복잡했다. 그들은 죽은 다음에는 저승인 지하세계에서 다시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보통 지 하세계는 이름처럼 땅속에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때로는 바다나 호수 밑에도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일단 죽어서 저승에 간 사람들도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태어날 수 있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서, 또 다시 살았다가 죽다니? 그렇다면 결국 켈트족의 내세 관에서 '삶'과 '죽음'은 동전의 한 면처럼 동일한 것이었을까. 5. 켈트족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매우 높았다. 부족의 여성들은 원정에 나가 있느라 바쁜 전사들을 대신해서 어린 소년들에게 전투 훈련을 가르쳤다. 켈트족 사회의 사제였던 드루이드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여성도 얼마든지 드루이드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여성도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 될 수 있었다. 서기 71년과 83년에는 여족장이 이끄는 켈트족의 일파인 브리간테스 부족들이 로마군을 공격한 일도 있었으며, 브리튼에서 로마군에 맞선 여왕 부디카의 이야기는 익히 유명하다. 남편이 아내보다 재산이 적으면, 그 집안의 주인은 아내가 되고 남편은 아내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갈리아의 여자들은 포도주 상 인, 가축 도살, 의사, 약사 등의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이외에도 켈트족 여성들은 남편과 살다가 싫증이 나면 위자료를 주지 않고 도 마음대로 이혼할 수 있었다. 켈트족의 재미있는 풍습들... 95
6. 아일랜드에 살던 켈트족들은 위생과 청결을 중시했다. 그들은 매일 아침마다 손발을 씻고, 저녁마다 목욕을 했다. 목욕을 할 때 도 비누와 리넨 천으로 몸을 박박 문질렀다. 그것도 따뜻한 물로 말이다. 7. 어린 아이들은 7살이 되면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 옆집에 가서 살아야 했다. 그 집의 부모들은 이웃집의 아이들을 자신의 친자 식처럼 길렀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만이 아니라, 전체 부족에 대한 소속감을 가지게 되었다. 보통 17살이 될때까 지 그렇게 살았다. 8. 켈트족들은 천둥과 벼락이 치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들은 뇌우가 심하면 하늘이 무너져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믿었다. 그 래서 다른 부족들과 약속을 할 때면 이런 주문을 외쳤다. "만약 내가 약속을 어긴다면, 하늘이 내 머리 위로 무너질 것이며, 바다가 내게 덮칠 것이며, 땅이 솟아올라 나를 삼켜 버리리라!" 9. 13이라는 숫자를 불길하게 여기는 사고방식도 켈트족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켈트족의 족장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 자기 앞 과 뒤에 각각 3명의 병사와 양 옆에 각각 2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갔다. 여기에 족장 자신과 전차를 모는 기수까지 합치면 12명이 되고, 그 옆에서 항상 함께 '죽음'이 달리기 때문에 13을 곧 죽음의 수라고 생각했다. 10. 왕이나 족장이 심하게 다쳐 신체부위 중 일부분을 상실하면, 그는 곧 권력을 잃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켈트족들은 지도자 를 부족 전체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지도자는 언제나 완전한 존재여야 한다고 믿었다. 만약 지도자가 불구가 되면 그 부족 전체가 불 구가 되는 것이기에. 11. 켈트족들은 먼 서쪽 바다에 하이 브라실(Hy Brasil)이라는 축복의 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켈트 문화의 저승인 지하세계 와도 동일시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남아메리카에 있는 지금의 브라질도 이 '하이 브라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2. 아일랜드의 수도사인 성 브렌던은 서기 6세기 경, 소가죽과 버드나무 가지로 짜서 만든 배 '코라클'을 타고 항해를 시작해, '성 자들의 약속받은 땅'에 도착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말한 '성자들의 약속받은 땅'은 오늘날 서아프리카의 카나리아 제도라고 여겨지 며, 일부 연구가들은 그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왔다 갔다고 본다. 콜롬버스보다 9백년, 바이킹보다 4백년이나 앞서서 아일랜드인이 신대륙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13. 켈트족들은 외부에서 방문하는 손님을 잘 대접했다. 켈트족들은 잔치가 벌어지면 절대로 집의 문을 잠그지 않으며,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도 거리낌없이 잔치에 초대해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시며, 잔치가 끝날 쯤에야 누구인지 물었다. 켈트족의 재미있는 풍습들... 96
25 로마는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로마는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2009.06.27 19:53 극우 성향의 일본인 작가 시노오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나 세부적인 묘사 부분에서 틀리거나 아예 빠뜨린 부분들이 적지 않다. 3권 <승자의 혼미>편에서는 테우토네스(튜튼)족과 킴브리족이 로마군과 싸운 부분에서는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지가 이탈리아라고 적었다. 사실, 테우토네스족과 킴브리족은 갈리아와 스페인으로 먼저 갔다가 원주민들의 저항을 받고 정착지를 찾지 못하자 부득이하게 이탈리아로 온 것이다. 그리고 로마군이 두 게르만 부족과 싸워 패한 전투의 과정을 그냥 싸울 때마다 졌다. 라고 간략하게 넘어갔지 만, 105년 10월 6일 갈리아 남부 아라우시오(Arausio)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만 로마군은 무려 8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며 대패했다. 105년 마살리아와 107년 이탈리아 북부의 론 강 전투에서도 로마군은 사령관이 생포되어 처형당하고 수만 명의 병사들이 모두 전멸했을 정도로 게르만족들의 격렬한 공세에 밀리며 파국의 직전까지 갔다. 마지막 15권에서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를 다루면서 지성이나 교양에서 뛰어나지 못했다고 적었지만, 전 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법 대전을 편찬하는 사업을 벌였을 정도로 당대 제일의 학자이자 지 식인이었다. 이런 과정들을 상세히 묘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 것은 반한(좋아하는) 것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 라는 작가의 성향이 좌우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책의 말미에 인용한 수많은 자료 목록을 보건대, 결코 몰라서 빠뜨린 것이 아니 다. 그래서 그녀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로마인 이야기>를 가리켜 역사서가 아닌 동인녀가 쓴 소설에 가깝 다. 라고 혹평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로마인 이야기>는 한국에서 약 2백만 부가 팔리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한 국인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기독교 박해 정도로밖에 알려진 것이 없을 정도로 로마사에 대 한 훌륭한 대중 인문 서적이 없었던 한국 사회의 척박한 풍토에서 세부적인 결함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로마사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를 쉽고 폭넓게 보여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로마에 대한 일반적인 대중들의 인식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다가 하루아침에 외침을 받고 몰락한 제 국. 에서 몇 백 년 동안이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인식이 사실에 들어맞을까? 로마는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98
로마가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전설적인 왕들이 로마에서 추방되고 귀족들이 다스리는 공 화정 체제가 들어선 시점은 기원전 509년이다. 건국왕인 로물루스가 나타난 연대까지 소급한다면 기원전 75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면 로마는 과연 어느 때 멸망했는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서기 476년을 들 수 있다. 이 연대에서 509년을 더한다면 985년이 나온다. 거의 천년에 가깝다. 로물루스를 비롯한 전설적인 7왕들의 연대까지 더하면 그 수치가 1천 1백 년을 훌쩍 넘어간다. (로마 제국 최전성기인 트라야누스 황제 당시의 영토. 다키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까지 점령했었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이 무너졌다고 로마 제국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다. 오늘날 터키의 대도시 이스탄불인 콘스탄 티노플을 수도로 한 동로마 제국, 다른 말로 하면 비잔티움(Byzantine, 비잔틴) 제국은 여전히 건재했고, 오스만 투 르크에 멸망당하는 1453년까지 존속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비잔티움 제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언제나 로마인 이 라고 불렀고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 제국 이라고 여겼지 결코 비잔티움이나 비잔틴 제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비 잔티움이라는 말은 15세기 말의 어느 독일 학자가 만들어낸 용어에서 비롯되었다. 로마라는 도시의 수립에서부터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합산한다면 자그마치 2207년이라는 세월이 나온 로마는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99
다.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 제국의 역사라고 볼 수 없다면, 로마 공화정의 종말에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만이라도 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가 경쟁자인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패망시키 고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의 칭호를 받은 기원전 27년이 로마 제국의 시작이라고 본다 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서기 476년까지의 세월은 얼마나 되나? 503년이다. 중국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한 왕조가 5백년은 고사하고 4백년이나 존속한 적은 없었다. 319년을 버틴 송 ( 宋 )나라가 제일 오래되었다. 더구나 송을 비롯한 역대 중국 왕조들은 존속하는 내내 숱한 외침을 겪었고, 이는 로마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역대 중국 왕조들이 주로 북방과 서방의 유목민족들과 싸웠다면, 로마 제국은 북방의 게르만 부족들과 동방(이란)의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과 대결을 벌여왔다. 하지만 이처럼 똑같이 외침을 당하면서 도 로마 제국은 중국의 왕조들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버틴 것이다. 그것도 일방적인 수세에 몰렸던 것이 아니라, 선 제공격을 벌이는 입장에 선 적도 많았으니 정말 놀라운 결과다. 적게는 503년에서 많게는 985년, 심지어 2천 년이나 존속했던 나라를 가리켜 과연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 에 망했다. 라고 보는 관점이 적합한가? 그래도 로마인들은 사치스럽게 살지 않았느냐?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씀씀이나 사치는 그들의 적국인 페르시아인들과 비교하면 훨씬 소박했다. 제정 초기에는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부터 상당히 검소 한 생활을 영유했다. 제국 말기가 되어도 이때는 대부분의 황족과 귀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여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엄청난 사치를 벌이며 살지 않았다. 오히려 종교적인 이유로 금욕을 지켜며 산 사람들이 많았다. 로마 시대를 요란하게 묘사하거나 기독교 박해를 선전한 헐리우드 영화로 인한 이미지가 역사적인 진실을 가리고 사람들의 인식을 왜소하게 만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로마는 도덕적 타락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졌을까? 100
26 옛날 사람들은 왜 담배를 그토록 많이 피웠을까?
옛날 사람들은 왜 담배를 그토록 많이 피웠을까? 2009.06.26 17:23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1990년대 초반 쯤, 공개된 국제 통계 자료에서 한국 성인 남성의 흡연률이 불가리아에 이어 세계 2위라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었죠.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서 흡연을 강하게 규제하려는 태세와는 달리, 한국은 아직도 성인 남성들의 흡연률이 상 당히 높은 편입니다. 이런 높은 흡연률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담배가 막 전해진 임진왜란 직후에도 비슷한 양상을 띄었다고 합 니다. 17세기 초, 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에 의하면 당시 조선에서는 어른 뿐만 아니라 4 세 밖에 안 된 어린 아이나 여자들도 태연하게 담배를 피웠다고 되어 있으니까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어린 아이나 여자, 미성년자나 또는 상사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금기시 되어 있지만, 이런 담배 예절이 생겨난 시점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18세기 말 경이었습니다. 정작 우스운 일 은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런 식의 담배 예절이 없다는 것이죠. 한국 사회의 높은 흡연율의 이유에 대한 답을 몇 가지 찾아본다면... 1. 옛날에는 지금과는 달리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었고, 때문에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나면 별로 할 일이 없었는데, 담배가 전래되고 나서 그런 심심함을 푸는 데 제격이었습니다. 비슷한 이유로 19세기 중국에서도 놀이나 유흥문화가 발달하지 못해서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아편을 피워대는 바람에 전 국민의 약 4분의 1 가량이 아편 중독자가 되 기도 했죠. 옛날 사람들은 왜 담배를 그토록 많이 피웠을까? 102
(담뱃대를 잡은 기생.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흡연을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조선 시대에는 여 자들도 자유롭게 담배를 피웠습니다.) 2. 또한 담배는 피우는 데 많은 돈이 들지 않고, 담뱃대 하나만 있으면 담배밭에서 얻어온 담뱃잎을 썰어 담뱃대에 넣고 피우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편하면서도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 도구였기 때문에, 더욱 담배가 편리하게 여겨졌 을 것입니다. 3. 담배가 의학적인 용도로 사용된 탓도 있었습니다. 지금 의사들이 본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지만, 옛날 의사들은 종 종 환자들에게 담뱃잎을 빻아 나온 액을 피부에 바르라는 권유를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담배잎에 포함된 타르 성 분에는 기생충 같은 벌레들을 죽이는 살충 효과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담배가 전래된 16세기 말의 영국에서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군요. 4. 위와 비슷한 일이지만 담배의 해악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담배가 인체에 나쁘다는 사실을 옛날 사람들은 왜 담배를 그토록 많이 피웠을까? 103
몰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식사 후에 피우는 담배가 소화에 좋다는 낭설이 진실인 양, 그대로 믿어지는 일도 있었죠. 5. 담배를 피우는 일이 남자다움의 상징이고 멋있는 행위라는 어설픈 권위 의식이 사회 전반에 자리잡은 이유도 한 몫 합니다. (미국의 담배 회사 말보로도 그런 식의 카우보이 광고를 냈다가, 광고 모델이 지나친 흡연으로 인해 폐암 에 걸려 죽으면서 흡연의 위험성이 알려졌죠.) (남성다움의 상징이라고 여겨졌던 말보로 담배. 사실은 생명을 위협하는 주범이었습니다.) 6. 지금은 법이 바뀌었지만, 얼마 전까지만해도 대부분의 한국 남성이라면 반드시 가야만 하는 군대에서 담배는 필 수적인 보급품이었습니다. 개인의 일탈 행동이 허락되지 않고 똑같은 단체 행동을 강요받는 군대의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데, 홀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면 무척 거북한 느낌을 받았겠죠. 담배를 안 피던 사람들도 군 대에 가면 그렇게 해서 담배를 배우는 일이 많았습니다. 7. 마지막으로 담배에 포함된 니코틴 성분이 지독한 중독성을 가져서, 한 번 담배의 맛을 들이게 되면 도무지 끊기 가 무척 어렵습니다. 담배를 끊고자 하는 사람들도 금연한 이후의 금단 현상에 시달리다 다시 담배를 집어 들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죠. 뭐, 이러나 저러나 자신과 타인의 건강에 심각한 해를 주는 담배는 아예 피우지 않는게 제일 낫겠죠... 옛날 사람들은 왜 담배를 그토록 많이 피웠을까? 104
27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2009.06.18 21:54 종종 다른 동아시아권 국가들과 한국을 비교해 볼 때, 참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바로 옆 나라인 중국 과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유독 기독교가 매우 강렬한 교세를 띄고 활동한다는 것이다. 하긴 3백년 넘게 스페인 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제외하면, 동아시아에서 한국처럼 기독교 세력이 왕성한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시점은 그다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본고장인 미국과 유럽에서도 이제 교세가 쇠퇴하고 있 는 추세가 일반적인데, 어찌해서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여전히 왕성한 힘을 과시하는 걸까? 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기독교의 교리와 한국 사회의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현대의 한국은 1945년 8.15의 해방 에서 태어난 나라가 아니다. 지옥 같았던 6.25 전쟁의 무수한 시체 더미 위에서 만들어진 나라이다. 북한군의 남침으 로 시작되어 무려 3백만의 인명이 희생된 이 잔혹한 전쟁은 한국인의 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와 사회 부분에 거 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 전쟁은 기독교의 교세 확장에 매우 혁혁한 공헌을 한 계기인데, 기독교에서 외치는 하나님과 사탄의 이분법, 이원론적 세계관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전쟁의 공포와 북한 공산당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몸서리를 떨던 한국인들 에게 놀라운 파급 효과를 불러왔다.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북한과 공산주의, 공산당 및 그와 연계된 세력들은 모두 절대악인 사탄이 되 었고, 그에 반비례하여 군사를 보내 멸망의 위기에 처한 한국을 구해낸 미국은 자연스레 절대선인 하나님과 일치되었 다. 결코 지나친 억측이 아니다. 하늘처럼 떠받들던 제국주의 일본을 패망시키고 이어 침략군인 북한마저 격퇴시킨 미국의 위상을 보며 한국의 기성세대들은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인간을 악한 길로 유혹하여 영원한 고통인 지옥으로 이끈다는 사탄의 모습은 전쟁을 일으키고 폐쇄적인 파시즘 통 치로 북한을 경제 파탄으로 몰고 간 김일성과 절묘한 매치가 되었다. 반대로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전쟁을 겪으면 서 거지꼴이 된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미국의 모습은 영락없이 착한 사람들이 죽어 서 갈 수 있다는 영원한 행복의 땅인 천국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한국이 고속 경제 발전에 성공한 1970년대와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강해졌다. 성경에도 있지 않 던가? 두드려라 열릴 것이요, 구하라 얻을 것이다., 1달란트를 가지고 노력하여 2~4배로 불린 자는 천국에 들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06
어가리라. 하고 말이다. 둘째로는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들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국을 해방시키고 전쟁으로 완전히 망가졌던 한 국을 멸망의 나락에서 구해낸 세력은 미국이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라도 미국의 눈에 잘 보이지 못하면 한 자리도 꿰차지 못했다. 1950년 초반 당시 한국 정계와 군부에서는 영어를 잘 하거나 기독교 신자라야 권력을 얻을 수 있다. 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미군정 치하에서 일본 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넘겨받아 장사를 하여 거부가 된 사람들이 생겨났을까. 그러니 미국인들이 신봉하는 기독교(개신교)를 믿어야 그들로부터 호감을 얻고, 어느 정도 권력의 핵심부에 조금이 라도 더 접근할 수 있을게 아닌가. 마지막 요인으로는 개인적인 친분과 이를 이용한 사업용 커뮤니티의 역할을 기독교 교회가 잘 제공해 주었기 때문 이라고 추측한다. 유교적인 위계질서와 서열이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마음 터놓고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 사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로 들어가면 사람과 쉽게 만나 친해질 수 있고, 교회 내부의 활동까 지 하게 된다면 더욱 돈독한 우정을 쌓을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IMF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이자 고환율 정책으로 국내외로부터 무수한 비판 여론에 휩싸인 강만수 장관을 계속 그 자리에 앉혔던 이유도 서로가 소망교회를 함께 다 닌 30년 지기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렇게 쌓여진 인맥은 자신이 벌일 경제적인 사업에 매우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 하겠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의 이모와 이모부는 원래 동양 철학을 믿고 기독교를 배척하는 분이었지만, 제작년 무렵 갑자기 교 회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여 물어보니 기독교의 교리가 좋아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사 람들과 잘 사귀어서 사업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라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기독교가 폭넓게 퍼진 이유도 정말로 기독교의 교리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교회에 들어가게 되면 그 교세를 자신의 이득 챙기기에 잘 이용할 수 있는(정치권력이나 경제적인 이득 등)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원인대로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세하며 기세를 떨쳐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렇게 무소불위의 위세를 누린 기독교의 위상에 서서히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얼마 전, 종교인 조사 통계를 보면 기독교 중 개신교 신도들의 비중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교회에서 나가는 신 도수가 많아지는 것만이 아니다. 어느 인터넷 게시판이든 돌아다녀 보면, 가장 인기 있는 화제 거리가 단연 기독교와 교회 및 목사들을 비판하는 내용들이다. 해방 이후 약 50년 동안 막강한 권력 집단이었던 교회가 어느새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집단 중 하나가 되어버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07
린 것이다. 이유가 뭘까? 우선, 한국 사회가 점차 다원화 되면서 기독교의 이분법, 이원론식 교리가 더 이상 먹혀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공산주의=빨갱이=절대악 이라는 냉전적 사고방식은 남북간의 교류가 확대되고 평화가 정착된 지금에 와서 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냉전적 분위기를 다시 고취시키려는 뉴라이트 등 보수 세력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지만, 그렇다고 군사 독재 시절처럼 머리에 뿔난 빨갱이 식의 이미지 선전은 이제 누가 보아도 효용성이 없다. 또한 기독교 교리 자체에 대한 반감도 상당히 높아졌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것뿐이고, 다른 종교를 믿 으면 결코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기독교의 배타적인 교리는 이제 경외가 아닌 놀림감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다. 기독교의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승천하지 않았고,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다가 죽었다 는 소설 <다빈치 코드>와 무신론을 주장하는 인문서적 <만들어진 신>이 한국에서 대히트를 친 현상은 한국 사회 전반 에 만연한 반 기독교적 기류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한국의 보수적인 기독교, 특히 개신교계에서 문화를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완고하고 편협하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어느 근본주의 개신교 종파에서 내는 문화 잡지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서적에서는 김밥과 비빔밥을 가리켜 서로 다른 것을 섞는 혼돈의 음식이니, 독실한 신도들은 결코 먹어서는 안 된다. 라는 한 목사의 말을 대서특필하여 마치 교회 신도들이 꼭 참조해야 하는 말인 것처럼 다루었다. 아울러 교회에서 미션 스쿨을 맡는 교사들이 옛날에는 외식으로 짜장면을 먹으면 되었는데, 요즘에는 피자가 나와 당혹스럽다는 말도 전했다. 구태의연한 교사들이 피자가 입맛에 맞지 않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짜장면은 하나님 의 음식이고 피자는 악마의 음식이라는 뉘앙스인가? 동서양의 요리법을 혼합시키는 퓨전 푸드에 대해서도 이런 것 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고, 건강에 나쁜 병을 유발시킨다. 라는 근거 없는 소리까지 늘어놓았다. (그 잡지의 이 름을 알고 싶은 분은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면, 가르쳐 드리겠다.) 구약 성경 레위기에 신이 서로 다른 것을 섞어서 제물로 바치거나 하지 말라는 것 때문에 그런다는데 그런 식의 논 지라면 구약의 예언자들이 다른 종교의 신상이나 사원을 파괴하고 그 사제들을 마구 죽였으니, 오늘날의 개신교도들 도 그렇게 해야 성경적인 삶 이 아닐까? 아, 이미 어느 교회에서는 불상의 목을 자르고, 모든 사찰들이 무너져야 한다는 기도까지 올린 적이 있었다. 2007년 8월, 한국 사회는 기독교계에서 저지른 문제로 큰 파문을 겪었다. 점령군인 미군에 대한 테러와 보수적인 이 슬람교가 지배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기독교(개신교) 선교를 하겠다며 의기양양하게 나선 샘물교회 선교단이 탈레 반에 피랍되어 약 한 달 동안 억류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다루는 한국 사회의 시각은 둘로 나누어져 서로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중앙 일간지나 방송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08
사 등 메이저 언론에서는 피랍자들의 신변을 염려하며 이들을 구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논조의 보도 들을 집중적으로 내보냈지만, 정작 일반 국민들 특히 네티즌들의 여론은 매우 싸늘했다. 대체 뭐하러 갔는지 모르겠다., 이슬람이 국교인 나라에서 기독교 선교가 말이나 되나?, 굶주린 아이들 에게 과자를 나눠주고 찬송가를 부르게 했다니, 도대체 그게 제정신인 일인가?, 아프간 사람들의 자존심을 그렇 게 짓밟으면서 어떻게 그들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것인가? 등의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더욱이 샘물교회 선교단이 2006년에도 아프간 선교에 나서려다 정부의 강력한 반대로 나가지 못하기 되자 자기네 교회 게시판에 정부를 가리켜 사탄 이라는 욕설을 퍼부었고, 아프간 현지에서 관광객 같은 차림으로 현지 주민들 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는 등의 사실들이 알려지자 인터넷상의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목사 2명이 살해되고 한국 정부가 직접 나서서 탈레반과 협상을 한 후에 선교단원들이 풀려남으로 써 일단락되었지만 그 후로도 여전히 많은 의문점들을 남겼다. 한국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몸값도 치르지 않 았다고 주장했지만, 탈레반이 약 2백만 달러를 받았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또, 선교단 일행들이 아프간에서 풀려 난 이후에 면세점에 들러 쇼핑을 했다거나 그들이 청바지에 피랍일기를 적었다는 것들도 사실 여부를 놓고 구설수에 올랐다. 아프간 선교단 일행의 납치 사건은 같은 시점에 벌어진 소말리아 해상에서 조업을 하던 한국인 어부들이 해적들에 게 납치된 사건과도 맞물려 말들이 많았다. 아프간 선교단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납치 세력과 협상을 벌여 인질들을 풀려나게 했지만, 소말리아 해상의 어부들이 피랍된 사건은 정부의 늑장 대응과 언론사들의 외면으로 많은 국민들의 분노와 탄식을 자아냈다. 부유한 종교계의 지원을 받는 아프간 선교단 사건에는 신속히 대응하면서 생계를 위해 먼 나라의 바다에까지 가서 고기를 잡는 가난한 어부들에 대해서는 저렇게 찬밥 대접을 하느냐는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이런 교리상의 문제들보다 한국인들의 발걸음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는 1등 공신은 기독교 성직자들이 저지르는 엄청난 부정부패와 비리들이다. 교회의 부패 얘기가 나오면 많은 신도들은 그건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 또는 사이비 교회나 해당되는 것이고 절 대 다수의 교회들은 그렇지 않다! 라고 강변하기 일쑤다. 하지만 과연 문제 있는 교회들이 일부에만 그치는 걸까? 그렇다면 왜 부정을 저지르는 교회들이 계속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교회들이 일부나 사이비에 국 한된다면 기존 교단에서는 어째서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사이비 운운하는 일도 그렇다. 지금 한국 제일의 교회라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도 처음에는 기존 교단들로부터 이단 이라고 매도당하다가 교세가 커지자 그런 비난들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정통 교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09
한국의 많은 종교 단체들 중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계이 돈에 얽힌 비리와 부패에 제일 많이 연루되는 것은 교회 의 재정을 신도들이 내는 헌금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네티즌이 인터넷에 올린 글에 의하면, 일반 신도가 교회에 내야할 헌금들은 무려 70여 개나 된다고 한다! 그 종류들을 알고 보면 더욱 기가 막히다. 아이가 태어나고 백일 맞이 돌 잔치를 하거나 새 자동차를 사거나 취업 및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거나 목사가 가 정을 방문하거나 이사를 가거나, 자동차 면허를 취득하거나, 집을 팔거나 고칠 때도, 생일이나 환갑잔치 때도, 결혼 식이나 장례식을 치를 때도, 큰 병이 들어 수술을 하거나 병이 나아도 치료나 치유의 명목으로, 외국으로 유학을 가 거나 대학 수능이나 입사 시험을 치를 때나 교회를 새로 짓거나 부지를 매입했을 때나 모두 교회에 헌금을 내야 한 다고 한다. 물론 신도들이 기본으로 자기 수입에서 10%를 내야 한다는 십일조는 제외하고서 말이다. 이렇게 신도들에게서 많은 헌금을 걷고 있지만, 그 돈들이 과연 제대로 필요한 곳에 쓰일지 의문이다. 목사나 장로 같은 성직자들도 결국 사람인데, 재물의 유혹에 초연할 수 있을까? 실제로 많은 교회들에서 돈 문제가 불거지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더욱이 개척 교회들의 경우, 목사들 중 상당수는 교회를 맡을 새로운 후계자를 선정할 때 자신의 아들에게 양도한 다. 종교 단체인 교회를 마치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발상에서 나온 일이 아닐까? 그래서 일부에서는 한국 교 회는 종교의 이름을 내건 개인 사업체다. 라는 자조 섞인 말도 나오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 이외에도 교회의 성직자들은 성( 性 )문제에서도 많은 비리를 안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세계적인 인터 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까지 등록된 일명 장목사 사건이다. 사건의 개요는 대강 이렇다. 2003년 12월 2일 경, 인천의 한 오피스텔을 방문한 장효희 목사는 집에 있던 여신도와 간통을 하다가 그녀의 남편이 들이닥치자 급히 배란다 난간으로 도망쳐 집 밖의 에어컨 실외기에 10분 동안 매달려 있다가 고령에 힘이 다했는지 그만 떨어져 숨지고 말았다. 마치 불륜을 다룬 3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이 기막힌 사건을 접한 국내의 네티즌들은 장효희 목사를 가리켜 에어장, 에이콘장 이라는 별 명을 붙이며 한동안 실컷 비웃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추락사한 장효희 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정통 교단 중 하나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 교단인 합동정통교단의 총회장으로 활동한 한국 개신교계의 거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결코 사이비나 이단 계열의 목사가 아니 었다. 헌데 장목사가 활동하던 평화교회에서는 사망원인을 과로사라고 주장했으며 이 보도 자료가 기독교계 신문인 국민 일보에 그대로 실려 양식 있는 사람들로부터 더욱 실소를 자아냈다. 보수적인 다른 중앙일간지에서조차 여신도와 간통 끝에 추락사 했다고 발표했고, 경찰의 수사 결과도 같았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 것이다. 하긴 고인 이 사망할 당시 나이가 56세인데, 에어컨 실외기에 10분 동안이나 매달려 있는 일도 무척 힘들었을 테니 과로사라는 말도 틀리지는 않다.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10
굳이 공정성(?)을 적용해 밝혀둔다면 사이비 종교 단체로 판명된 JMS교단의 교주인 정명석도 여신도를 상대로 한 성폭행 면에서는 기성 교단보다 훨씬 유명세를 떨쳤으니 피장파장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개신교가 아닌 천주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걸까?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 성당으로 옮기는 일들이 많 아지고 있다고 하니, 상대적으로 양호하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천주교 교단에서도 산하 기관인 병원이나 다른 보 육 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임금 문제로 시비가 자주 일고, 문제를 일으킨 신부들의 처우가 너무 가볍다는 지적 들이 재기되는 걸 보면 결코 안심할 수준은 아닌 것 같다. 한국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계가 뼈를 깎는 자정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지금 이대로 부패의 나락 속에 빠져든 다면, 국민들의 외면을 받고 유럽의 경우처럼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왜 동양에서 한국만 기독교(개신교)가 기세를 떨칠까? 111
28 로마인 이야기가 완전히 빼먹은 기원전 120년 경의 게르만족 대이동
로마인 이야기가 완전히 빼먹은 기원전 120년 경의 게르만족 대이동 2009.06.17 16:45 로마인 이야기에 관한 글이 올라왔기에 한가지 덧붙여 봅니다. 기원전 120년 경부터 시작되어 108년에 끝난 테우토네스(튜턴)족과 킴브리족 등의 게르만족이 로마를 침공한 사건 이 있었죠. 이 사건을 두고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와 페터 아렌스가 쓴 <유럽의 폭풍 :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정 반대로 서술했죠. 먼저 게르만족들이 어디를 목표로 했는지를 두고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처음부터 이탈리아로 갈 생각이었다고 주 장합니다. 그러나 <유럽의 폭풍 : 게르만족의 대이동>에서는 그들의 목적지 자체가 확실하지 않았고, 갈리아와 스페인으로 갔 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 이들 게르만족과 로마군의 첫 번째 전투인 기원전 113년의 노레리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참패했고 그 중 2개 군 단, 약 1만 2천 명의 군인들이 킴브리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을 <유럽의 폭풍 : 게르만족의 대이동>에서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만,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두 번째 전투는 기원전 109년에 론 강 유역에서 벌어졌는데, 이 때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지휘하던 로마군 4개 군단 2만 4천 명의 대부분은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에게 궤멸당했습니다. 그리고 로마군을 격파한 게르 만족은 로마로 가지 않고 갈리아를 향해 이동했습니다. 이에 관해서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습니 다. 이보다 2년 후인 기원전 107년에 게르만족과 함께 왔던 켈트계 티구리니족 역시 로마군을 전멸시켰고, 더 2년 후인 105년에는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론 강 유역에서 전직 집정관 스카우루스가 이끌던 로마군 3개 군단 부대를 격 파하고 스카우루스를 붙잡아 처형시켰습니다.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여전히 묵묵부답입니다. 같은 해 10월 6일, 로마의 집정관 말리우스 막시무스와 전 집정관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지휘하던 로마군 8만 로마인 이야기가 완전히 빼먹은 기원전 120년 경의 게르만족 대이동 113
명은 아라우시오(Arausio) 부근에서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의 연합군에게 몰살을 당하는 참패를 겪기도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인들은 겁에 질려 칸나에 전투 때 그랬던 것처럼 갈리아인과 그리스인 부부 한 쌍을 로마 광장에 공개적으로 생매장을 하는 인신공양을 했습니다. 로마의 신들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칠테니 제발 게르만족의 침략에서 구해달라는 간절한 분위기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은 단일 전투에서 이렇게 많은 로마군이 전사한 사실이 <로마인 이야기>에는 한 마디도 실려있 지 않다는 겁니다. 아라우시오라는 지명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로마인들이 패전 소식을 듣고 공황 상태에 빠져 서 인신공양을 했다는 사실도 없습니다. 뭐, 시오노 나나미 본인이 자기가 좋아하는게 아니면 안 쓴다고 했으니, 쓰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았다면 할 말이 없지만... 2권에서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에게 로마군이 연전연패하는 과정은 생생하게 묘사했으면서, 게르만족에게 참 패하는 로마군의 모습은 전혀 다루지 않은 것이 영 아리송하기만 하군요. 로마인 이야기가 완전히 빼먹은 기원전 120년 경의 게르만족 대이동 114
29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2009.06.11 19:46 수백 만의 인구와 풍족한 농업 생산력을 가진 아즈텍 제국이 고작 1천 명도 안 되는 스페인 군대에게 힘없이 무너 진 이유 중 하나는 제국 내부의 사정에 능통한 첩자의 도움이 컸다. 놀랍게도 그 첩자는 여자였다. 말린체라는 이름 으로 불린 그녀는 스페인 군대의 사령관 에르난 코르테즈의 정보담당관이자 애인이 되어 아즈텍 제국의 사회 구조와 약점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고, 결국 아즈텍 제국이 멸망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같은 아즈텍인인 그녀가 동족을 배신하고 외부 침략자인 스페인 군대와 결탁한 이유는 어릴 적, 그녀의 아버지가 황제 몬테수마에게 처형되고 그녀는 노예가 되어 이곳저곳으로 팔려 다니며 학대받은 것에 대한 복수극이었다고 전 해진다. 한국사에는 이런 일이 없었을까? 물론 존재했다. 수많은 매국노들이 버젓이 활개치던 구한말 시절, 그 중에서는 여 성도 당당히 포함되어 있었으니 바로 배정자( 裵 貞 子 )였다. 1870년, 김해 밀양부에서 아전으로 일하던 배지홍( 裵 祉 洪 )의 딸로 태어난 배정자는 3년 후, 뜻하지 않은 변고에 휘 말려 아버지를 잃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가 역모의 혐의를 쓰고 처형당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유 때문에 역모 죄를 받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조선 시대에 역모는 살인이나 강간보다 더 큰 죄였다. 다른 혐의도 아닌 역적이 되어 죽었으니 그 일가족은 생계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배정자의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 어린 딸을 데리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거지에 가까운 생활 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어린 배정자는 아버지를 죽게 만들고 자신과 어머니에게 비참한 궁핍을 강요한 조선이라 는 나라와 세상에 대한 격렬한 원한과 증오를 마음 속 깊이 새겼다. 9년 간의 떠돌이 생활 끝에 배정자는 1882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통도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하지만 답답 한 절간 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지, 그녀는 2년 후에 절을 뛰쳐나왔다. 절을 나왔지만, 당장 가진 것도 없고 갈 곳도 없던 그녀는 절에 들어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 과정에서 기생이 되었다는 말 도 있으나 확실한 사실은 아닌 듯 하다. 그대로 떠돌이 생활로 끝났으면 훗날의 역사에 더러운 오명은 남기지 않았으련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녀는 구원의 손길을 붙잡았다. 그녀의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였던 동래부사 정병화( 鄭 秉 和 )와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의 도움을 받 게 된 것이다. 너의 처지가 참으로 딱하구나. 하지만 너는 역적의 딸이라 이 땅에서는 먹고 살기가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마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116
침 나한테 자주 왕래하며 친한 일본인이 한 명 있다. 내가 그에게 부탁해서 너를 일본으로 데려가 달라고 해주마. 일 본에서 너는 역적의 딸이 아닌 자유로운 몸이니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네 생각은 어떠냐? 달리 선택할 방도도 없던 터라 배정자는 정병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일본인 마쓰오( 松 尾 )는 그녀를 일본으로 데려가 살게 해 주었다. 이때가 1885년, 그녀 나이 15세 무렵의 일이었다. 배정자의 일본행은 (민족적으로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녀 개인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일본의 도 움을 받아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려는 김옥균 같은 개화 인사들이 많이 체류하고 있었다. 배정자는 일본에서 생활하면 서 그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고, 그 중 한 명인 전재식( 田 在 植 )과 결혼까지 하였다. 일본에 머무르던 개화 인사들은 친 일 성향이 강했고, 그들과 교류하는 동안 배정자는 자연스럽게 근대화된 일본을 열렬히 추앙하며 동시에 낙후된 조선 을 더없이 멸시하는 신념을 굳혀나갔다. 그녀의 태도를 결코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제 강점기 때, 만주에서 활동하던 어느 독립군 장교는 휘황찬 란한 일본 도쿄 거리를 보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 아, 일본이 이렇게나 잘 살고 힘센 나라였다니! 이런 일본을 우리는 도저히 이길 수 없겠구나! 차라리 일본에 편 입되어 부귀영화를 함께 누리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나서 즉시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일화도 있으니까. 좌우지간 그런 그녀에게 결정적인 인물이 나타났으니 바 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장차 조선를 집어삼키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조선인이면서도 조선을 미워하던 배정자. 두 사람 의 만남은 영락없이 다시 태어난 코르테즈와 말린체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고 나서 얼마 후, 배정자는 그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며 살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녀가 만들어 주는 불고기나 너비아니 같은 조선식 고기 요리를 아주 좋아했고, 자주 그녀와 정을 통했다. 둘은 단순히 주 인과 하녀의 관계라기보다는 일종의 연인에 더 가까웠다. 훗날 이토 히로부미는 배정자와의 사이를 양부와 양녀 관계 라고 규정지었지만, 허울에 불과했다. 이토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배정자는 오늘날 일본으로 건너가 극우 세력의 앞잡이가 되어 한국을 매도하고 있 는 오선화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강요받거나 속아서 생긴 일이 아니었다. 배정자의 친일은 어디까지 나 자발적인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핍박받고 살아온 그녀에게 조선은 조국이 아니라 멸망시켜야할 가증스러운 악마의 소굴이었고, 그런 그녀의 증오심에 약간의 정당성만 부여하여 불만 붙여주면 거대한 불길이 활활 타오르게 된 형편이 었다.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117
어느 새 배정자는 20세의 나이로 접어든 성인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녀를 단순한 하녀가 아니라 일본을 위 해 일하는 첩보원으로 교육시키며, 조선으로 건너가 고급 정보를 빼내올 것을 지시했다. 이미 일본 제국주의의 열렬 한 신봉자가 되어 있던 그녀는 기꺼이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4년 간의 양성 끝에 완벽한 첩보원으로 태어난 배정자는 1894년,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그녀의 공식 직함은 조선의 일본 공사관에서 일본인들을 위한 조선어 통역관이었다.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그녀는 조선의 왕족들과 교분을 쌓았 고, 그들을 통해 고종 황제와도 만날 수 있었다. 고종은 그녀의 진짜 정체를 까맣게 모른 채,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 와 영리한 재치에 흠뻑 빠져 그녀를 깊이 신임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고종은 그녀와 성관계까지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중에 고종은 러일 전쟁 직전, 일본군 의 손길을 피해 국외로 망명하려 했는데 그 때 배정자에게 너를 꼭 데리고 가마. 라고 말했고, 배정자는 그곳이 어디입니까? 라고 묻자 고종은 천연덕스럽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라는 곳이다. 그 곳에 가면 일본군도 감히 나 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라고 털어놓았다. 나라 밖으로 나갈 때에도 그녀를 데리고 가야 할 정도였다면 고종이 그녀 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고종의 말을 들은 배정자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즉시, 일본 공사관 측에 이 사실을 전해 일본 측에서 재빨 리 손을 써, 고종의 해외 탈출을 철저히 막았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고종은 자신의 망명이 무산된 원인을 몰라 허 둥대기만 했으니 참으로 딱할 뿐이다. 러일 전쟁이 끝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배정자의 위상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그녀의 일가친척들은 모두 고위 관직에 올랐고, 정부의 고위 관료들도 그녀를 만나면 머리를 조아리며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배정 자는 자신의 본래 임무인 스파이 활동에도 충실했다. 날로 가중되어오는 일제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고종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준 등 세 명의 밀사를 파견해 국제 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사건이 터지자, 이 사건의 경 위를 일본 정부에 상세히 알려 결국 고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한데에도 그녀의 공로(?)가 매우 컸다고 한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녀의 인생에 충격전인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 로부미를 저격한 일이었다. 열렬히 사랑하던 연인인 이토가 안중근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배정자는 대 성통곡을 하며 한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고 폐인처럼 지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 후, 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이 소식을 들은 배정자는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실의와 좌절의 늪에 빠져 있던 배정자에게 다시 구세주로 나타난 것은 조선주둔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明 石 元 二 郞 ) 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밀정 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를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 터지고 일본도 시베리아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하게 되자, 배정자도 일본군을 따라 함께 갔다. 이곳에서 배정자는 포로가 되기도 하고 마적단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기면서도 일본 군의 밀정으로 맹활약했다. 이때 배정자는 중국 마적단의 두목과 상당 기간 동거생활을 하면서 정보를 빼내 일본군에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118
넘겨주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면서 일제의 밀정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 뒤 배정자는 일본 외무부 촉탁으로 자리를 옮겨 펑톈( 奉 天 )영사관에 근무하면서 주로 남만주 일대의 조선인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감시하여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그후 국내로 들어와 얼마동안 활동하다가는 1919년 3 1 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임무를 부여받고 만주로 갔다. 일제가 배정자에게 내려준 임무는 만주에 보민회( 保 民 會 )를 창설하는 것이엇다. 1920년 봄, 일제 총독부는 최정규( 崔 晶 圭 ), 이인수( 李 寅 秀 ) 등을 중심으로 한 옛날의 일진회 잔당들을 끌어모아 만 주의 독립운동단체를 파괴하기 위한 무장 첩보단체로서 보민회를 만들었다. 보민회의 후원자는 조선총독, 조선군사령 관, 총독부 경무국장 등이었다. 보민회의 반민족적 성격은 1920년 4월11일 초대 보민회 회장 최정규 등이 독립군 장 기정을 잡고 무기와 서류를 빼앗은 일에서도 알 수 있다. 배정자는 밀정이었으므로 제우교 성부인( 濟 愚 敎 誠 夫 人 )이라는 직함으로 발기인에 참여했으며, 보민회 고문이 되었 다. 그녀는 보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총독부로부터 운영자금을 조달하는 데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기도했다. 배정자는 보민회 활동을 마치고 1922년 국내에 들어와 총독부 경무국촉탁으로 있으면서 밀정노릇을 계속했다.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 丸 山 鶴 吉 )의 주선으로 촉탁이 된 배정자는 그의 지령으로 항일독립투사를 잡아들이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총독부는 이러한 공로를높이 평가하여 약 600여 평이나 되는 토지를 그녀에게 주기도 했다. 배정 자는 1924년 57세로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총독부는 그 뒤에도 촉탁이라는 이름으로 봉급을 계속 주어 넉넉한 생활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1940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배정자는 70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남양군도로 달려갔다. 당시 배정자는 전선에서 자신의 조국 일본 장병들이 고생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하여 일본군의 후원으로 조선인 여성 100여 명을 군인위문대 라는 이름으로 끌고 갔다. 배정자는 같은 조선인 여성들을 성욕에 굶주린 일본군들의 노리개감으로 바치면서까지 일 제의 승리를 위해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배정자는 뛰어난 미모에 걸맞게 늙은 나이에도 항상 파마머리를 하고 당당하게 걸어 다녔다. 밀정으로 활약하면서 서울과 일본에서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닐 만큼 남성 편력도 화려했다. 그녀는 두번째 남편인 현영운과 1년 살다가 이혼한 뒤, 동생으로 부르던 박영철과 다시 결혼했다가는 또 1년 만에 헤어졌다. 이와 함께 일본인 오하시( 大 橋 ), 은 행원 최씨, 전라도 갑부 조익헌, 대구의 유명한 부호인 정경진 등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또 57세로 은퇴할 때에 도 25세 된 일본인 순사와 동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기보다 훨씬 늙은 이토 히로부미에 고종 임금, 중국인 마적단 두목과도 놀아났고, 나중에는 22세 연하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까지 했다니.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50세 이전까지 남자가 없이는 하루도 잠을 자지 않았다던 데, 배정자도 딱 그 꼴이다.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119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광복될 때, 배정자는 지난날의 반민족적인 밀정 행위에 대한 응징이 두려워 집 에서 숨어 지냈다. 1948년, 신문사의 기자들이 그녀가 머물고 있는 성북동의 집으로 찾아가 조선이 광복되고 새로 정 부가 세워진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배정자는 기쁜 마음이 가득 차서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자신이 저질렀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으며, 다 어리석고 나이가 어렸던 까닭에 어찌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횡설수설을 늘어놓았다. 이 때 옆에 있던 배정자의 손자가 자신의 할머니에게 저질렀던 모든 죄를 자백하고 사람들 앞에 용서를 빌라고 다그 쳤다고 전해진다. 반민특위의 해산으로 감옥에서 나온 배정자는 주위에 돌봐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힘들게 살다가 1951년, 서울 에서 81세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하였다. 조선인이면서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하며, 일제를 위해 국제 간첩이자 매춘부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한 여인은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배정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제를 사랑한 국제 스파이 겸 매춘부 120
30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2009.06.09 12:52 전쟁으로 잡힌 적군 포로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닌 선량한 시민들을 강제로 끌고 다니면서 무려 10만 명 이 굶어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게 만든 사건이 있다. 국민들의 인권이 철저히 억압당했던 제정 러시아나 고대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60년도 채 되지 않은, 그것도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대 한민국 정부의 명령으로 실행되었던 일이었다. 이름하여 국민방위군 사건 이라 불리는 이 끔찍한 만행은 그 경과가 너무나 수치스러워 한국 현대사 에서 철저히 은폐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950년대 말인 12월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정부는 수도를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긴 상태였다. 잠시 전세가 역전되어 북진을 하기는 했지만, 중공군이 참전함으로써 전세가 불리해져 서울로 쉽게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공군의 남진에 한국군이 그토록 믿었던 미군과 유엔군도 속수무책으로 패주하게 되자, 이승만 정권의 수뇌부들은 불의의 사태를 염려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이후, 북한군의 파죽지세 같은 남침에 청장년들 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강제 징용 당했던 전례가 다시 되풀이 될 우려에서였다. 아울러 인해전술 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에 이쪽도 인해전술 로 맞서겠다는 취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 12월 16일, 부산의 국회에서는 일사천리로 국민방위군 설치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의 내용인즉 슨, 전국의 만 17살 이상에서 40살 이하의 모든 청장년들을 징집하여 각 지역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여 1만 명씩 맡아 훈련시킨 뒤, 총집결지인 부산으로 보내 다시 북쪽의 전선으로 올려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 국민방위군을 총괄할 사령관으로 임명된 인물이 바로 김윤근이었다. 그는 출생 연도조차 확실치 않은 데,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윤근은 일제 치하였던 1928년, 제2회 전국 씨름 대회에 서 전 회의 우승자 이도남을 물리치고 우승한 경력이 있는 씨름꾼이기도 했다. 그 뒤로 7번 정도 우승을 한 후, 일본군에 입대했다고 전해진다. 해방이 되자 그는 1948년, 우익 성향의 어용 단체인 대한청년단에 들어갔다. 청년단에서 일하는 그는 뜻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2
하지 않은 행운을 얻었는데, 이승만이 청년단을 방문하던 날, 우렁찬 목소리로 그의 눈에 들게 된 것이었 다. 이 일을 계기로 김윤근은 이승만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고작 목소리가 좋다고 최고 권력자의 눈에 들어 출세를 하게 되었다니, 무슨 전제 왕조 시대의 일화 같 지만 이승만이란 인물 자체가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이라기보다는 봉건 왕조의 국왕에 더 가까운 성격이어 서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실제로 이승만은 조선의 왕족인 양녕대군의 후손이었고 미국 유학 시절, 이를 미국인들에게 자랑하고 다 녔다고 한다. 그리고 귀국 후에 정권을 잡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은 세종의 후손들이 나라를 망쳤으니, 이제 양녕대군의 후손인 대통령 각하께서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라는 얼토당토않은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혹세무민을 일삼았다. 이런 풍문을 보고도 이승만은 아무런 제지나 단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지 않았을까?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 전쟁은 김윤근에게 고속 출세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이 터지자 대 한청년단은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청년방위대로 증설되었고, 후방에서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역할까지 맡 았다. 이로 인해 대한청년단의 간부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구 휘두르며 열심히 사복 을 채워나갔다. 대한청년단의 일원이었던 김윤근은 이승만의 오른팔인 국방장관 신성모와도 끈끈한 인맥을 맺어 그의 소개로 결혼까지 했으며, 1950년 말 무렵에는 대한청년단의 최고 권력자인 단장에 취임했다. 청년단의 단장이 된 그에게 이승만은 더욱 큰 감투를 내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 창설된 국민방위 군의 방위군 사령관 직위였다.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공식적으로 한국 육군의 준장 대우를 받는 자리에 해 당되었다. 일제 말기에 일본군 사병 노릇을 잠깐 했다는 것이 군 경력의 전부인 엄연한 민간인 신분이었던 김윤근은 이렇게 해서 졸지에 준장이라는 장성 직에 올랐던 것이다. 국민방위군은 자원입대도 가능했지만, 그보다는 징집의 경우가 더 많았고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에서의 도입 부분에서 두 주인공이 군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장면이나, 소설 태 백산맥 의 국민방위군 사건을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1950년 12월 21일, 서울 지역에서 1만 여명이 징집되어 부산을 향해 남하하는 것을 처음으로 약 50만 명 에 달하는 국민방위군이 전국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엄연한 군인인 이들에게 군복이나 군화 등의 생필품이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는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3
사실이었다. 때마침 12월의 한겨울이어서 무척 추운 날씨였음에도 정부는 추위를 막을 방한복조차 나누어 주지 않았다. 막연히 정부에서 군복이나 방한복을 지급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국민방위군 장병들은 뼛속까 지 파고드는 매서운 추위를 온 몸으로 실감하며 눈물을 흘려야했다. 그나마 할당된 식량 관련 예산(209억 원)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것조차 사령관인 김윤근과 부사령관인 윤 익헌 등 고위 간부들이 대부분 횡령해 먹어 실제로 장병들에게 돌아간 액수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 나중에 국회 조사단이 밝힌 자료에 의하면 전체 예산의 3분의 1인 약 60억 원이 횡령되었다고 전해진다. 방위군 계획이 시작된 초기에는 양곡권이 배급되어 마을에 가면 식량을 얻었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 나자 그조차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전쟁 중이던 나라 상황에서 50만 명이나 되는 굶주린 배를 한꺼번에 채워줄만한 식량은 누구도 갖고 있지 않았다. 방위군 병사들이나 하급 장교들이 마을 이장과 동장들에게 양곡권을 내보이며 식량을 달라고 악다구니를 썼지만, 아무리 그들을 다그쳐봐야 없는 식량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내 식량이 바닥나자 양곡권은 쓸모없는 휴지 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이런 와중에도 병사들의 훈련을 맡은 전국 각지의 교육대 장교들은 막상 자기가 맡고 있는 교육대에 병 사들이 몰려오면 다른 교육대로 가라고 쫓아보냈고, 그러면서 마치 자신의 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은 것처 럼 서류를 조작하여 정부로부터 또 예산을 타내 그것으로 사복을 채우기 일쑤였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자, 국민방위군에 징집된 장병들은 소지한 금반지나 각종 패물들을 장교에게 주 고 징병을 면제받거나 아예 감시가 느슨한 밤을 틈타 도망가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럴 재산도 기운 도 없는 사람들은 열악한 처우에 대해 불평을 털어 놓았다가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병사들은 이미 이성적 판단력을 상실하고 동물적인 생존 본능만 남은 상태였다. 하루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들리는 마을 주민들에게 구걸을 하거나 식량을 얻기 위해 도둑질을 하다가 들 켜 싸움을 벌이는 일은 이미 일상다반사가 되어 버렸다. 휘하 병사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얼어 죽고, 굶어 죽고, 거기에 이와 전염병으로 인해 무수히 죽어가고 있음에도 방위군의 총사령관인 김윤근과 부사령관인 윤익헌 등은 이런 병사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횡령해 먹은 수십억의 예산액을 어떤 용도로 썼을까? 놀랍게도 부산 시내에 서 영업 중이던 기생집들을 돌면서, 밤이면 밤마다 돈을 트럭에 싣고 와서 기생들을 향해 선심 쓰듯 뿌리 며 질펀하게 놀아났다고 한다. 이런 끔찍한 참상이 탈출한 국민방위군 병사들의 입을 통해 사실로 들어나자,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4
성토하는 민심이 끓어올랐다. 야당인 민주당도 이 문제를 국회에 정식 거론하여 이승만 정권이 저지르는 엄청난 비리를 공격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자인 김윤근은 1951년 1월 8일 발표한 성명에서 국민 방위군 50만 병사들에게는 먹을 식량과 군수품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다. 라는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늘 어놓았다. 다음날인 1월 9일, 이승만도 국민방위군과 청년단 수십만 명을 앞세우고 다 같이 일어나서 (중공군의) 인해전을 인해전으로 막아야 할 것 이라고 거들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달랐을지 모르지만 국민방위군 병사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워낙 많았기에 이렇게 진실을 은폐, 축소하려는 권력자들의 사탕발림은 통하지 않았다. 다시 12일 후인 1951년 1월 20일의 기자회견에서 김윤근은 현재까지 한국 보수 세력들이 단골로 써먹는 메뉴를 내놓았다. 국민방위군 백만 명은 정상적으로 훈련을 받고 있으며, 방위군 병사들이 열악한 처우 에 놓였다는 이야기는 일부 불순세력들이 퍼뜨린 낭설이다. 이라는 식으로 색깔론을 펼친 것이다. 김윤근 의 뒤를 봐주던 국방부장관 신성모도 제 5열(스파이)의 책동에 동요하지 말라. 며 그를 응원했다. 하지만 권력층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궁핍한 민생과 방위군에 징집된 병사들의 참상을 목도한 사람들의 기억까지 조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갈수록 여론은 악화되고 방위군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다. 민주당 의원들도 여당 측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계속 이 사건의 비리를 다룬 정보들을 수집해 나갔다. 마침내 국민 여론과 야당의 공세에 더 이상 진실을 은폐하는데 한계를 느낀 정권의 수뇌부들은 그러나 여전히 꼼수를 부렸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다룬 재판을 총괄하게 된 신성모는 자신의 심복인 김윤근을 보 호하기 위해 자신과 절친한 친구인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을 재판장에 임명했다. 이선근은 재판을 한 지 불과 3일 만에 서둘러 김윤근에게 무죄, 윤익헌에게 징역 3년 6개월이라는 가벼운 형만을 선고했고 그 외 나머지 간부들은 모두 무죄 처리하여 사건을 서둘러 축소시키려 했다. 정말 골치 아프게 된 것은 이 정도로 했으면 적당히 알아서 잠잠해졌어야할 여론이 더욱 악화되어 도대 체 수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야당의 공세도 거세기지만 했다는 사실이었다. 민중들의 격렬한 분노 앞 에서 이승만 정권의 수뇌부들은 무척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대로 흥분한 여론을 방치했다가는 언제 정권을 타도하자는 목소리로 바뀔지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생살을 깎는 아픔을 무릅쓰고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자신의 심복인 신성모와 김윤근을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5
쳐내기로 한 것이었다. 아무리 충실한 부하라고 해도 자신의 권력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마지막 날을 앞두고 신성모와 김윤근이 만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상상력을 동원해 가상으로 그들 간의 대화를 복원해 보기로 한다. 김윤근: 각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오직 각하와 대통령 각하에 대한 충성으로 그런 것뿐입니다. 신성모: 이 사람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자네가 한 일이 뭔지 아직도 모르는 건가! 김윤근: 각하께는 정말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저만 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각하와 대통령 각 하에 대한 저의 충성심은 아직도 변함이 없습니다. 제발 대통령 각하께 잘 말씀드려 저를 꼭 살려주십시 오. 신성모: 이미 늦었네. 김윤근: 각하! 신성모: 그러기에 적당히 해먹었어야지. 누가 그렇게까지 하랬나? 김윤근: 이렇게 엎드려 빕니다. 이 못난 놈을 살려주실 분은 각하 밖에 안 계십니다. 저를 살려주신다면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각하, 각하 신성모: 정말 이렇게 나올텐가? 나도 더 이상 자네를 어쩌지 못해. 대통령 각하께서 나도 해임하신단 말 일세! 나나 자네나 이제 끈 떨어진 조롱박 신세라 이 말이야! 김윤근: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통령 각하께서 왜 충신이신 국방부 장관 각하를 신성모: 그게 다 자네가 저지른 짓거리 때문이 아닌가! 그것 때문에 나까지 쫓겨나게 되었다 이 말일세! 김윤근: 모든 건 제 잘못이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각하, 각하 신성모: (김윤근을 밀치고 나가면서) 에잇, 어쩌다 저런 무식한 씨름꾼 놈한테 별을 달아줘서 이 지경까 지 만들었는지 원!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6
이승만의 지시로 신성모는 국방부 장관에서 해임되었고 대신 이승만의 아내인 프란체스카와 절친한 사 이였던 박마리아의 남편인 이기붕이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기붕은 이승만의 의향을 간파하고 재판 을 다시 열었다. 원래 군사재판은 비공개가 원칙이지만 워낙 여론이 들끓다보니 정부에서도 재판을 공개 진행으로 처리하였고, 그 바람에 재판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51년 7월 5일, 대구 동인초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육군고등군법회의장에서 검찰관인 중령 김태청은 증 인인 전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에게 엄연한 민간인인 김윤근이 하루아침에 준장 자리까지 올랐는가? 라 고 물었다. 그에 대한 정일권의 답변은 모두 이승만의 명령에 의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김윤근이 군인이 되어 한국 전쟁에서 무수한 전공을 세운 것 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산이 많아 가난한 국고에 거액을 헌납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그가 국민방위군의 사 령관에 임명된 것은 전적으로 이승만의 입김에 의해서였다. 결국 김윤근과 김윤근과 윤익헌 등 국민방위군의 최고 간부 5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대구 교외의 야 산에서 모두 공개 총살형에 처해졌다. 굳이 사형을 공개한 이유는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김윤근이 권력층 의 비호로 외국으로 빼돌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었다. 최고 권력자의 눈에 들어 민간인 신분에서 하루 아침에 육군 장성이 되었다가 자신이 저지른 천문학적인 공금횡령으로 인해 처형된 김윤근의 경우는 1공화국 당시, 한국 사회가 얼마나 원칙을 잃고 무분별하게 운영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김윤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참상인 국민방위군 사건 의 주역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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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2009.06.09 12:48 제테크를 통한 신분 상승을 최고의 가치로 꼽는 요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할 인물을 한 명 소개하 고자 한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여성운동가와 국회의원을 거쳐 마침내 부통령의 부인이 되어 인생 역전을 이룩한 자랑스러운 대한의 딸, 박마리아가 그 주인공이 되겠다. 박마리아는 구한말 무렵인 1906년 3월 26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 나는 바람에 홀어머니인 고대의( 高 大 義 )의 밑에서 가난하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고대의는 목사 인 정춘수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딸을 키웠는데, 정춘수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 다. 박마리아 역시, 어머니처럼 열성적인 신앙을 가진 개신교도로 자랐다. 그녀는 다른 집들의 어린 아이를 봐주는 보모 생활과 틈틈이 밭일을 하며 받는 품삯으로 힘들게 연명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에게는 두 가지의 굳은 신념이 자랐으니, 하나는 독실하다 못해 거의 광신적일 정도의 뜨거운 신앙이었고 다른 하나는 (많은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증오에 가까운 가난 혐오 였다고 한다. 어찌보면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집념이 아닐 수 없다. 박마리아는 13세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919년 개성의 호수돈( 好 壽 敦 ) 여자고등보통학교에 들어 갔다. 학교를 다니면서 그녀는 생활비의 대부분을 친일파인 윤치호의 딸 윤봉희에게 얻어서 썼다. 이런 성 장 과정을 거친 그녀가 친일파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마리아는 얼마동안 강릉에서 어머니와 함께 교회 일을 하다가 같은 학교를 나온 조 현경의 도움을 받아 1924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영문과에 들어간 박마리아는 증오에 가까운 가난 혐오 를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학업에 몰두했고 그 결과 4년 후, 수석으로 영문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학교를 나온 박마리아는 학교에서 같이 일했던 선교사 헨리 G 아펜젤레(Hernry Gerhard Appenzeller)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미국 테네시주의 스카릿 대학을 졸업하고 1932년 귀국한 박마 리아는 유학시절 만난 이기붕과 약혼을 하고 3년 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29
이기붕과 결혼한 이후, 그녀는 기독교 여성 단체인 YWCA의 총무로 활동하게 되었다. YWCA에서 두각 을 나타낸 박마리아는 민족의식을 지닌 일부 회원들과는 달리, 일제 및 총독부에 철저한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1930년대 말, 일본이 중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면서 조선의 상황은 급변했다. 일본은 전국적인 동원 체제를 가동하여 조선의 지식인 계층을 철저히 복속시키려 하였고, 이에 많은 지식인 계층과 종교 단 체들은 자발적으로 굴복하여 적극적인 친일의 대열에 앞장섰다. 식민지 치하의 조선이 전시 체제에 들어가자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일부 회원들은 YWCA에서 떠나 기도 했지만 박마리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세계 YWCA에서 탈퇴하고 일본 YWCA의 산 하 기관으로 흡수될 것을 결정했다. (1938년 7월 15일) 통합에 앞서 박마리아를 비롯한 조선의 YWCA는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에서 황국신민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미 박마리아가 활동하던 YWCA는 1938년, 일본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위문금을 모금해 총독부에 바치는 등의 친일 행 각을 벌인 터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박마리아의 친일 행각은 일제로부터 무슨 혹독한 압력이나 강요에 못 이겨 그랬던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행동이었다는 사실이다. 한 번 선택한 길이니 이제 거칠 것이 없다. 박마리아는 노천명, 모윤숙 같은 친일 여성 인사들과 손잡고 일본군에 지원하여 달려가라는 찬조 연설을 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녔고, 그런 와중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 대( 朝 鮮 臨 戰 報 國 團 婦 人 隊 )라는 단체의 지도 위원이 되는 허울 좋은 감투를 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친일 언론이었던 조광( 朝 光 )이 주최한 1942년 5월 23일의 간담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용기백배한 발언을 남겼다. <우리들은 가정에서 죽음을 너무 무서워한다는 점을 타파시켜야겠어요. 어차피 사람이 한 번 태어나서 죽는 것은 당연한데 죽음을 뭐 그리 무서워합니까? 나라를 위해 한번 몸을 바친다는 것이 어떻게 떳떳한 일인가를 깊이 인식시켜 주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야 사나이로 나서 총검을 들고 전선에 나가는 것이 곧 인간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는 일이 아닙니까?> 마치 나도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자원입대를 해 전쟁터로 갔을 것. 이라는 말을 했던 친일 여류 시인 의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그렇게 전쟁터가 좋으면 종군 위안부에 자원이라도 해서 갔어야 하지 않을까?)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30
많은 친일파와 조선인들이 절대 망하지 않고, 망하더라도 최소한 2백년 후에야 망할 것이다. 라고 철 썩 같이 믿고 있던 대일본제국은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지 고작 4년 만에 힘없이 패망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박마리아는 다소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민족정기가 되살아나 친일파 척결을 당해서가 아니라 남편인 이기붕의 사업이 침체기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이기붕은 종로의 국일관 지배인을 지내거나 다방,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수익을 거두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이런 박마리아 일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구세주가 등장했으니 바로 이승만과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 였다. 이화여대 동문들의 소개로 만나게 된 프란체스카는 박마리아와 그야말로 환상의 커플이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고 영어만 구사하던 프란체스카로서는 능숙한 영어 실력에 권력자의 비위를 살살 맞추는 재주를 가진 박마리아가 마치 입안의 혀처럼 느껴졌으리라. 프란체스카의 신임을 얻은 박마리아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52년, 박마리아 는 한국 YWCA의 회장에 취임했으며 그녀의 남편인 이기붕도 이승만의 신임을 얻어 집권당인 자유당 중 앙 위원회의 회장이 되었다. 부부가 나란히 최고 권력자의 빽 을 쓰고 있으니 그들에게 남은 것은 출세 의 탄탄대로를 달리는 일 뿐이었다. YWCA의 회장이 된 지 4년 후, 박마리아는 한국 여성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모임인 대한부인회의 회장 으로 당선된다. 그리고 3년 후인 1959년에도 재선에 성공해, 한국 부유층 여성계의 명실상부한 대모의 위 치에 오르게 되었다. 권력의 행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들이 없어 후계자를 물색하는데 고민 중이던 이승만을 위해 박마리아는 자신과 이기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들이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박마리아와 절친했던 프란체스카의 입김이 작용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로서 박마리아와 이기붕 부부는 아들이 최고 권력자의 후계자로 공식 임명되었으니 사실상 대한민국 을 좌지우지할 위치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 데만 집착했고, 그 권력을 가지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슨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특히 프란체스카의 신임을 얻고 방약무인하게 행동하던 박마리아는 갈수록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같은 시대, 박마리아를 직접 만나본 이승만의 비서 박용만은 그녀에 대해 이런 증언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31
을 남겼다. 박마리아 여사는 내가 오랫동안 겪어 보았지만, 욕심이 많고 남에게 지기를 싫어했으며 자존심이 지나 칠 정도로 높았다. 특히 물욕이 너무 많은 굉장한 이기주의자였으며 자기 것은 쌀 한 톨도 남에게 주지 않 으면서 남의 것은 주는 대로 받았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몰라도 퍽 인색했으며 그러면서도 콧대는 대단히 높았다. 박용만의 발언에서 언급된 자기 것은 쌀 한 톨도 남에게 주지 않으면서 남의 것은 주는 대로 받았 다. 란 부분을 주목하라. 저 한 문장이 바로 박마리아라는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압축해 보여주는 내용이 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 상류층들의 행태일 수도 있다. 수십, 수백억의 재산을 가지고도 세금을 내기 싫어 자신을 빈곤층이라고 신분을 속이고 정부로부터 생계 보조금까지 타먹는 얄팍한 부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박마리아가 누리던 무소불위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포악성, 그리고 극에 달한 부정부패를 견디지 못한 국민들이 서서히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3인조, 5인조 부정 선거를 벌이면서까지 장기 집권의 야욕을 부렸던 이승만 정권의 행태에 분노한 국민 들이 일으킨 첫 번째 봉기는 1960년 3월 15일, 전국 대학생들의 시위였다. 그런데 이 시위 소식을 들은 박마리아는 <이대학보> 1960년 4월 15일자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악의적 으로 비난하였다. 학생들이 군중들의 앞장에 서서 시위를 선동하고 떠들었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신의 섭리에 순종하 고 신을 두려워할 줄 아는 국민이라야 위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이 역사의 섭리이다. 어떻게 하면 신을 두려워하는 국민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박마리아의 논지대로라면 전쟁이 터지자 국민들을 내팽긴 채 자기들끼리만 도망을 쳤고, 죄 없는 국민들 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고, 심지어 전쟁터로 나선 병사들에게 식량과 의복을 지급하지 않아 10만 명을 굶 겨 죽였으며, 미국이 지원해준 물자마저 횡령하여 자기들의 배를 불릴 정도로 부정부패를 일삼던 이승만 정권에 맞서 봉기를 한 일은 신에게 거역을 한 범죄라는 것이다. 폭압적인 파쇼 정치의 극치를 달린 이승 만 정권이 신의 대변자라는 것일까. 하긴, 오늘날에도 시위하러 거리에 나온 사람들을 모두 빨갱이 라 고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을 보면 박마리아만 욕하기란 부적절해 보인다. 한 번 불붙은 국민들의 저항은 정부가 경찰과 정치 깡패까지 동원하며 탄압을 해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32
3.15 시위가 벌어진 지 한 달 후인 4월 19일에는 전국적으로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일으켰으며, 6일 후인 25 일에는 대학 교수들까지 거리로 나와 부패한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외쳤다. 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이를 보고 있던 미국도 매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해 현 사태가 진정되지 않는다면 3억 달러의 경제 지원도 다시 생각해 보겠다. 라고 이승만에게 엄포를 놓게 되 었다. 국물이 흘러넘치는 냄비처럼 정국이 심하게 요동을 치는 상황임에도, 박마리아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 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가진 권력의 더러운 힘을 이용해 민중들의 분노를 막아보려고만 했다. 4월 19일 전국적인 학생 시위가 일어나기 직전, 박마리아는 반공청년단을 향해 당신들을 3백만 단원들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까짓 학생들 시위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는가! 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반공청년단 본부에서 는 임화수, 유지광 등의 정치 깡패들을 동원하여 시위에 참석한 고려대 대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집단 폭행 했는데, 이 사건이 학생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마침내 4월 19일의 국민 항쟁으로 번지게 되었던 것이다. 권력의 단맛에 취해 이성을 잃고 있던 박마리아와 이기붕 부부는 학생 시위대로부터 분노의 표적으로 인 식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기붕의 아들마저 시위대에 가담해 아버지인 이기붕에게 꾸중을 들었는데 제 가 데모를 안 하면 나라가 망하고, 데모를 하면 집안이 망합니다! 하고 외쳤다고 한다. 박마리아 부부가 사는 저택은 4월 25일의 교수단 데모 이후로 학생 시위대로부터 공격을 받아, 이기붕 일가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집을 떠나 경기도 포천에 있는 육군 제 6군단으로 피신했다. 나중에 시위대가 이기붕 일가가 살던 저택을 습격해 집안을 수색해 보니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고가품이 던 냉장고와 TV, 전축 등의 호화로운 물건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하긴, 권력의 실세였던 그들이 청렴결백 하게 살았다면 더 이상한 일이리라. 국민들의 대규모 저항과 든든한 빽이었던 미국도 이제 뒷손을 거두는 조짐을 보이자, 이승만은 더 이상 권좌에 오래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신의 충신(?)을 버릴 수 없었던지 이승 만은 차를 보내 이기붕 일가를 경무대 별관 옆에 있던 관사로 피신케 하였다. 관사로 피신한 이기붕 일가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낸 하루 였다. 아침이 되기 전, 이승만의 양자이자 이기붕의 장남인 이강석은 두 자루의 권총으로 아버지인 이기붕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33
과 어머니인 박마리아, 그리고 동생 이강옥을 쏘고 자신도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나중에 국회조사단에 의해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먼저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했으 며, 그 뒤에 이강석이 부모와 동생이 살아날까봐 총을 쐈다고 한다. 마치 옛날 조선 명종 무렵, 온갖 탐학 과 횡포를 부리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윤원형과 정난정이 권세를 잃고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되자 그 고통 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빈곤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친일파와 독재 정권과 결탁하며 신분 상승을 달성했던 여걸(?) 박마리아는 결국 이렇게 해서 오욕으로 얼룩진 인생을 마감했다. 박마리아, 친일과 독재 정권에 빌붙어 권력의 야욕을 불태웠던 악녀 134
32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 2009.06.05 12:45 이순신을 필두로 한 조선 함대의 눈부신 승전에 버금가는 전승의 주역들은 단연 의병들이다. 빈약한 장비와 부족한 훈련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의 가족과 고향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 강대한 일본군에 맞서 과감히 분투를 벌였던 의병들은 적을 맞아 달아났던 왕실과 조정 대신들에 비하면 살아있는 영웅이라 할만하다. 최초의 항일의병을 일으킨 장본인은 경상도 의령 출신의 곽재우였다. 그는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대학자 인 남명 조식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곽재우는 젊어서 과거를 보아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에 조정의 부패를 꼬집는 내용 을 적어 낙방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오랫동안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마하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한 량 생활을 하고 다녔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 1군 18,700명이 부산포에 상륙해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그는 집안에 있던 재산을 모두 털어 평소에 친분이 있던 용감한 장사들과 친구들을 설득하여 약 1천 명 규모의 의병을 조 직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11일 후인 4월 24일의 일이었다. 곽재우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지만 재산을 모두 털어도 의병들을 먹이고 입히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곽재우는 의 병을 일으키자마자 가장 먼저 초계( 草 溪 )의 빈 성으로 들어가 무기와 군량을 가져왔다. 이런 그의 행동이 합천 군수 전현룡에게 도적으로 의심을 받아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도사 김영남과 초유사 김성일이 그를 직접 만나보고 의심을 풀어 큰 탈 없이 끝났다. 곽재우를 만난 김성일은 그에 대해서 성정이 매우 급하고 과격하여 돌격 대장으로 적합하다. 라고 평가했는데, 그에 걸맞는 일이 발생했다. 경상감사 김수는 전쟁이 터지자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났는데, 이에 곽재우는 매우 분개 하여 김수의 10가지 죄를 적은 격문을 경상도 내의 여러 장령들에게 보내어 김수의 머리를 베어 선조가 피난해 있는 행재소에 보내야 한다고 선동을 했을 정도였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곽재우가 지은 격문에는 네(김수)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숨을 쉬고 있으나 실제로는 머 리가 없는 시체와 같다. 네가 조금이라도 신하된 자로서의 의리를 안다면 너의 군관으로 하여금 너의 머리를 베게 하 여 천하 후세에 사죄해야 마땅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장차 너의 머리를 베어 하늘과 사람의 분노를 씻 겠다. 너는 그것을 알라. 라는 무시무시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을 죽이겠다는 내용의 격문을 읽은 김수는 크게 노하여 휘하의 수령들을 시켜 곽재우가 일개 백성의 신분으로 감히 감사를 죽이라는 협박을 했으니 역적이나 다름없다는 격문을 지어 돌리게 했으며, 초유사 김성일에게 이 사실을 알려 곽재우를 옥에 가두어야 한다고 편지를 보냈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 136
그러나 김성일은 김수의 부탁을 거부하고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곽재우가 자발적인 충성심에서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킨 정황을 보고했다. 그는 장계에서 곽재우가 일개 백성의 신분으로 감사의 죄를 성토하여 그를 죽이라는 격문을 돌린 일은, 아무리 스스로 국가를 위하여 했다고 해도 질서를 어지럽힌 백성의 행위에 해당되니 즉시 처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때를 당하여 홀로 외로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무찔렀으므로 도내의 쇠약한 백 성들이 그를 방패나 성처럼 든든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실수를 하였다는 이유로 즉시 처형한다면 남은 성을 보존하여 적을 막을 계책이 없을 뿐더러 군사와 백성들도 필시 일시에 무너지고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미봉책( 彌 縫 策 )으로 재삼 경계시키고 타일러 이미 순종하였는데, 이 일 때문에 순찰사에게 죄를 얻게 된다면 서 로 용납하기 어려울 듯 하므로 신이 또 김수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잘 대우하게 하였으니 염려할 만한 변 고는 없을 듯합니다. 라고 곽재우를 변호했다. 마침 선조도 김수가 곽재우를 역적이라고 욕한 장계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하게 여기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김성일의 장계를 보고는 미심쩍은 의심이 풀려 즉시 김수를 소환하니, 이에 경상도의 인심이 크게 감동하였다 고 한다. 곽재우와 김수의 악연(?)은 계속 이어져, 훗날 김수는 산음현( 山 陰 縣 )에 있다가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근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을 거꾸로 타고 정신없이 함양으로 달아났을 정도로 그를 두려워했다. 이에 경상도의 사람들 중에서 김수가 왜적에게 겁먹고 또 곽재우에게 겁을 먹었구나! 라고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말이 잠시 빗나갔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곽재우는 의병 조직을 이용한 게릴라전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아버지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에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철릭( 帖 裏 )을 입고서, 자신과 얼굴과 체격이 비슷 한 의병 10명을 선발하여 그들에게도 역시 붉은 비단옷을 입히고 말에 태워 싸우게 했다. 그리고 의령현의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누비면서 일본군을 보면 재빨리 돌격하여, 번번이 그들을 패주시켰다. 곽재 우는 자신과 닮은 복장과 얼굴을 가진 기병 10명을 함께 내보내어 일본군으로 하여금 어느 누가 장수인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그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왜적들이 이 지 방에는 홍의 장군( 紅 衣 將 軍 )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고 했다. 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곽재우가 거둔 전공 중 가장 빛나는 승리는 승려 출신의 일본 장수, 안고쿠지 에케이( 安 國 司 )의 경상우도 진출을 막 아낸 것이었다. 안고쿠지 에케이는 스스로 전라감사라고 칭하면서 창원과 함양을 거쳐 의령에 들어와 남강을 건너려 했다. 그 사실을 미리 입수한 곽재우는 중요한 지역마다 척후병과 복병을 숨겨놓아 일본군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폈으 며, 산 위에서 일본군의 병력 규모에 따라 횃불로 신호를 보내게 했다. 안고쿠지가 거느린 일본군이 강을 건너는 순간 산마루에 숨었던 곽재우의 척후병이 호각을 불어 알렸고, 곽재우가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 137
미리 숨겨둔 복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예기치 못한 조선 의병의 공격에 일본군이 당황해하면서도 조총을 쏘았 지만 조선 의병들은 적이 총을 당기기도 전에 몸을 숨겨 총탄에 맞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곽재우는 미리 조총의 장 전 속도와 발사 시간까지 면밀히 조사해 의병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조선 의병들은 일본군에게 기습적인 돌격을 감행 해 최소한 1백 명을 참살했으며, 놀란 일본군은 서둘러 달아났다. 곽재우는 정인홍 및 김면 같은 다른 의병장들과 연합 작전을 벌여 일본군이 점령한 현풍성을 탈환하는 데도 앞장섰 다. 그는 연합 의병 4천여 명을 이끌고 1592년 7월 말, 낙동강을 건너 현풍으로 진격했다. 곽재우는 군사들을 시켜 성 주변의 비파산에 배치해 한밤중에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횃불을 올리는 식으로 여러 차례 무력시위를 벌이며 홍의 장군이 여기 왔다. 내일 성을 함락시키고 너희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라고 고함을 지르게 했다. 곽재우가 벌인 이 심리극에 동요했는지 일본군은 다음날 성을 버리고 창녕 쪽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곽재우는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현풍성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밖에도 곽재우는 특이한 공적을 몇 가지 더 세웠다. 임진왜란 동안 조선 땅에는 일본군과 내통하여 매국 행위를 하던 반역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 중 공휘겸( 孔 撝 謙 )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 자는 일본군에게 자발적으로 붙어 적 의 길잡이 노릇을 하였고 그 대가로 경주 부윤이라는 허울뿐인 벼슬을 받기도 했다. 출세(?)를 자랑하고 싶었는지 공 휘겸은 자신의 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가 그만 곽재우의 손에 넘어오게 되었다. 파렴치한 매국노의 행태에 분 노한 곽재우는 미리 공휘겸의 집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그가 오자 체포하여 목을 베었다. 또한, 곽재우는 낙동강에서 일본 배 한 척을 나포하기도 했는데 그 배를 조사해 보니 조선 왕실의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고 한다. 아마, 조선 왕릉을 도굴한 한양의 일본군과 같은 패거리였던 것 같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임란 동안 의병에 앞장섰던 곽재우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곽재우가 의령 등 두어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 鼎 津 江 )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 下 道 )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왜병을 현풍과 창녕 사이에서 잇따라 물리치니 적이 주둔지에서 철수하여 도망하였다. 왜적 들이 감히 정암진( 鼎 巖 津 )을 건너 호남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곽재우의 공이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곽재우 138
33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2009.09.11 21:33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무적의 군대라고 자칭하던 일본군, 임팔에서 최악의 추태를 보이다. 1998년 무렵, 인터넷 통신 매체인 <나우누리>에서는 박상욱 씨가 쓴 구타교실 이라는 소설이 큰 인기 를 끌었다. M고( 高 ) 라는 한 사립 고등학교를 통하여 한국 사회의 후진적이고 낙후된 모습을 풍자하는 소설이었는데, 본문에 등장하는 M고의 이사장은 입만 열면 옛날 일본군은 세계를 재패한 무적의 군대였 다. 라며 일제를 찬양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M고의 늙은 이사장이 유독 특별한 인물이어서 그런 말을 하고 다녔을까? 그렇지는 않다. 당장 내 아버지 만 해도 술이 들어가면 일본은 미국 말고는 어느 나라와 싸워서도 져 본 일이 없다. 2차 대전 때 미국이 원자탄만 만들지 않았으면 일본이 이겼을 것이다. 라면서 열변을 토하니까. (그런데 일본이 이겨서 우리 한테 좋은 거 있어요?) 사실 이런 식의 일본군에 대한 이미지는 비단 몇몇 인사만이 아닌 50~60세 이상의 대부분의 기성세대들 이 간직한 것이기도 하다. 절대 다수의 한국인이 존경하는 박정희와 김종필 등의 권력자들만 해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였지 않은가? 그렇다면 2차 대전 당시의 일본군은 정말 무적의 군대 였던 것일까? 그 무적의 일본군이 고작 원 자탄 두 방을 맞고 미국에 무릎을 꿇었다면 너무 허탈해서 맥이 빠지는 일이다. 과장이나 신화가 아닌, 진짜 일본군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면 임팔 작전을 참고하면 된다. 이 임팔 작전 의 개요를 알게 된다면 구 일본군이 무적 이었다는 환상이 철저하게 부서질 것이다. 1943년 3월, 도쿄의 일본군 수뇌부는 인도 북동부의 작은 도시인 임팔을 점령하는 이른바 임팔 작 전 을 기획한다. 당시, 인도가 영국의 지배하에 있는 상황에서 임팔을 비롯한 인도의 동부 지역을 일본군 이 점령하게 되면, 일본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중국에 영국이 지원을 하는 것을 차단함과 동시에 인 도의 영국 지배 체제를 뒤흔들어 인도에 친일 정권을 수립할 가능성도 컸다. 실제로 인도의 반영( 反 英 ) 운 동가 찬드라 보즈는 일본의 수상인 도조 히데키( 東 條 英 樹 )와 만나 일본군이 임팔을 거쳐 인도로 진격해 오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0
면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내응하여 인도에서 영국군을 몰아낸다는 약속까지 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작전의 실행 여부를 두고 일본군 내부에서도 의문을 품거나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 전선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일본군의 보급로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실제로 이 무렵, 일본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의 맹렬한 공세를 맞아 크게 고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서 저 먼 인도에까지 군대를 보낸다면, 태평양 방면의 전력이 분산되어 크게 약화되고 자연히 전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군인 출신 수상 도조 히데키의 심복인 육군 중장 무다구치 렌야( 牟 田 口 廉 也 )는 이런 임팔 작전의 실행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그는 도조 히데키에게 끈덕지게 졸라대 결국 작전의 재가를 얻어내는데 성공 했다. 그러나 임팔 작전을 승인해준 도조 히데키 본인은 정작 이 계획이 성공하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 았다고 한다. (무다구치 렌야의 사진. 한국의 네티즌들은 그가 임팔 작전을 무모하게 고집하다 일본군의 전력을 붕괴 시킨 점을 가리켜 일본인 출신 독립 운동가이니, 한국 정부에서 독립 유공자 훈장을 수여해야 한다. 라 고 조롱했다.) 임팔 작전이 통과되자 가장 신이 난 쪽은 작전의 구상자인 무다구치 렌야였다. 물론 일본군 수뇌부 안에 서도 임팔 작전의 성공 여부에 대해 심각한 반론들이 무수히 제기되었다. 미얀마에서 인도까지라면 전선 이 더욱 길어지고 그만큼 보급선도 길어질 텐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라는 반론도 나왔지만 이에 대해 무다구치는 다음과 같이 태연하게 반박했다고 한다. 우리 황군( 皇 軍 )이 가는 지형은 산과 정글로 우거져 있다. 눈에 보이고 널린 게 풀과 나무인데, 무슨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1
보급이 어렵다는 것이냐? 배고프면 그대로 뜯어서 먹으면 될 게 아닌가? 그리고 우리 일본인들은 옛날부 터 고기를 먹지 않고 풀만 먹어도 건강하게 잘 살아왔다. 고기와 빵을 먹어야하는 서양인들과는 다르다.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 스스로도 못내 불안했던지 보급품을 실어 나를 방안을 내놓았다. 이름 하 여 칭기스칸 작전 인데 옛날 몽골의 칭기스칸이 세계 정복을 했을 때, 별도의 치중대를 두지 않고 소나 말 같은 가축 떼를 끌고 가다가 배가 고프면 그대로 잡아먹었던 것처럼 일본군도 임팔로 진격할 때, 물소 떼들에게 보급품을 지우고 가는 것과 동시에 물소들도 식량으로 활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참고로 중국의 당태종 이세민도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가축 떼를 끌고 가는 방법을 썼다. 이리하여 1944년 3월, 마침내 임팔 작전이 실행되었고 미얀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약 10만 명이 임팔 방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팔 작전은 그 출발부터 삐걱대는 조짐을 보였다. 무다구치가 자신만만하게 준비했던 물소 떼들 은 정작 험준한 계곡으로 이동하자 대부분이 죽고 말았다. 강과 호수에서 살던 물소들은 건조한 고지대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칭기스칸 작전 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부스러져 버 렸다. 또한, 무다구치가 주장한 것과는 전혀 달리, 임팔로 가는 밀림 지대에서 나는 풀들은 사람이 먹지 못하 는 종류들뿐이었다. 나중에 굶주림에 못 이겨 아무 풀이나 닥치는 대로 뜯어 먹었다가 심한 배탈이 나 설 사를 하다 죽어가는 병사들이 속출했을 정도였다. 더욱이 무다구치는 일본군이 싸워야 할 영국군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 전에 참모들 을 상대로 영국군들은 모두 겁쟁이라 하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놈들은 우리 대일본 황군이 공중 에 대고 총 몇 발만 쏘면 벌벌 떨면서 항복해오는 얼간이들에 불과하다. 라는 무책임한 발언을 수시로 했 다고 한다. 이런 인식은 비단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일본군 장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태평양 전쟁 초기, 중국 과 동남아시아의 영국 식민지를 일본군이 손쉽게 점령하면서 영국군을 깔보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임팔 주변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은 일본군 수뇌부들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영국군들은 각지에 튼튼한 보루와 기관총에 탱크와 박격포까지 갖춘 상태였고, 여기에 비행기를 통한 공중 보급과 연합군인 미군의 지원까지 받으며 일본군의 공세에 전혀 압도되지 않고 완강하게 저항했다. 영국군을 얕보고 무작 정 반자이!(만세라는 뜻의 일본어)를 외치며 돌격했던 일본군 병사들은 안전한 보루에서 보호받으며, 영국 군이 쏘아대는 기관총 세례에 벌집이 되어 번번이 패주하기 일쑤였다. 거기에 영국군에 소속된 네팔인들로 구성된 구르카(Gurkha) 부대는 산악전과 정글 전투에 탁월한 기량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2
을 보여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때의 정황을 묘사한 기록들에 따르면, 한 구르카 병사가 그들이 가 진 검인 구크리(Khukuri)로 철모를 쓴 일본군 병사의 머리를 내리치자 그 병사는 철모와 함께 머리까지 쪼 개져 즉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본군과의 정글 전투에 대해 일본군과 숲속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상어를 잡으러 바다 속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이다. 라고 망설였던 영국군 장군들도, 구 르카 용병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는 것을 보고는 이내 일본군과의 정글 전투에 자신감 을 가졌다. 전황이 이렇게 악화되어 가는데도 무다구치는 초기의 작전을 개선하거나 아니면 서둘러 철수하여 남은 전력을 온전히 보존하는 일은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후방의 사령부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요정을 차 려놓고 게이샤(기생)들을 불러 매일같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전쟁터에까지 여자를 데리고 와 놀아나는 일은 일본군 내에서도 흔한 일이었으니 무다구치 만을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아무튼 전방에서 말단 사병 들이 영국군의 포화와 싸워가며 죽어가고 있는 동안, 총사령관은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는 모습이 일반 병 사와 양식 있는 장교들의 눈에 좋게 보일리 만무했다. 자신을 둘러싼 여론이 악화되자 무다구치는 나름대로 개선책을 내놓았는데, 그것도 가관이었다. 기지 안 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신불( 神 佛 : 일본의 전통 신들과 부처가 합쳐진 것)에 승리의 기원을 올리는 축문 을 읆어 대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무다구치의 축문을 들은 일본군 장병들은 사령관 이 귀신이 들렸나? 아니면 머리가 돌아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전 쟁터에서 기도를 한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7월로 접어들면서 임팔을 중심으로 한 인도 동부 전선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다름 아닌 우기가 시작 되면서 연일 비가 쏟아졌고, 그와 동시에 습기가 높아짐에 따라 각종 전염병들이 창궐하기 시작했던 것이 다.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해 굶주린 상태의 일본군 병사들에게 전염병은 그보다 더 나쁠 수는 없 다. 였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병사들이 이름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어나갔다. 약간의 기력이라도 남 은 병사들은 정글로 들어가 뱀이나 개구리, 심지어 벌레와 풀까지 먹으며 버티려 했지만 그런 것들로 배고 픔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더구나 그것들은 소화되기 어려운 것들이어서 먹은 병사들은 굶주림보 다 더한 배탈과 설사, 장염으로 인한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었다. 물론 무다구치는 병사들이 전염병과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동안, 안전한 후방의 사령부에서 최고급 식사를 즐겼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을 보다 못한 장교들은 차라리 영국군을 공격해 그들이 가진 식량이라도 빼앗아 먹자! 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생각했고, 그대로 실행하기도 했지만 영국군이 순순히 식량을 내줄리 만무했 다. 영국군 진지에 돌격한 일본군 병사들은 영국군이 맹렬하게 퍼붓는 대포와 기관총 사격에 피떡이 되어 무참히 살육을 당했다.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3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전투에 무의미한 개죽음만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무다구치를 제외한 온 일본군 장성과 병사들에게 퍼져 나갔다. 급기야 육군 31사단을 이끌던 사토 중장은 총사령관인 무다구치의 승인 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철수하는 사태까지 강행했다. 임팔 작전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거 기에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한 영국군과 미군 연합군은 일본군에 대한 역공세를 취하고 나왔다. 사태가 이쯤까지 치닫자, 무다구치도 더 이상의 전투 수행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사토 처럼 철수하기로 했는데, 그러나 명색이 총사령관인 처지에서 차마 철수 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가 쑥 스러웠는지, 북쪽 전선을 둘러보고 온다는 핑계를 대고 재빨리 퇴각해 버렸다. 총사령관 본인이 포기한 전투이니, 다른 장병들로서야 더 이상 수행할 의지도 사라졌다. 먼저 퇴각한 사 토 중장의 부대를 제외한 다른 부대들은 무질서하게 패주를 거듭하면서 질병과 배고픔에 지쳐 죽어간 동 료들의 시체를 그대로 정글과 산악 지대에 방치하며 돌아왔다. 임팔에서 미얀마로 통하는 도로 곳곳마다 하얗게 변한 일본군 병사들의 유골이 가득 널려 있었다고 해서, 이 도로는 백골( 白 骨 ) 가도 라는 섬뜩 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나마 도망갈 수 있었던 병사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적지 않은 부대 병력 들이 철수하지도 못한 채, 영국군과 미군의 공격을 받고 죽어갔다. 임팔 작전은 이렇게 해서 끝났지만, 그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애초 작전에 동원된 10만 명의 인원들 중, 영국군과의 전투로 죽은 사상자는 3만에 달했고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굶어죽거나 전염병에 시달 리다 죽거나 그밖에도 미처 도망치는 본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행방불명된 병사들도 2만 5천 명이나 되었 다고 한다. 전체 인원의 절반 이상이 임팔 작전에서 죽어간 셈이다. 그러나 임팔 작전이 이렇게 파멸적인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부는 아주 조용했다. 무모한 전투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유족들이 정부 청사 앞으로 몰려가 반전 시위를 벌이거나, 전쟁을 고집한 책임 자들을 처벌하라는 요구를 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정글과 물 속에 널린 우리 병사들의 시체,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구나. 나도 그렇게 님(천황)을 위하여 죽고 싶구나. 라는 노래까지 만들어져 임팔에서 개 죽음을 당한 병사들을 찬양하며 오히려 더 열심히 싸워야 한다고 선동을 하는 정신병적인 분위기까지 연 출될 정도였다. 위정자들의 무지와 무능으로 인해 수만 명의 국민이 애꿎은 죽임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나서 서 항의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는 사회, 공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마구 유린해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세상,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알면 본받아야 할 이상향으로 삼자고 할 만 하다. 제국주의 일본은 이렇듯 멸망해야 마땅한 막장 국가였던 것이다. 임팔 작전을 적극적으로 주동했던 무다구치는 그 후로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수상인 도조 히데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4
키의 심복이던 그는 자신의 인맥을 무기로 살아남았다. 그가 받은 처분은 육군 군사학교의 교장에 임명된 다는 조치였다. 군사 재판이나 강등이나 지휘권 박탈도 근신도 아닌 전직에서 그친 것이다. 일을 맡아 실 패했을 경우, 스스로 배를 갈라 책임을 진다는 사무라이 정신은 공염불에 불과했던 것일까? 2차 대전이 일본군의 패배로 끝난 이후에 무다구치 렌야는 다른 동료들처럼 연합군에 의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를 감싸주던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다른 장성들은 대부분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 졌지만, 그는 살아남았는데 영국 측 판사가 그에게 내린 판결은 참으로 황당하고도 우스꽝스러웠다. 다름 아닌 임팔 작전에서 그가 벌인 무책임한 작전이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승리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그를 전쟁 범죄자로 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수치심을 아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워했을 법도 하건만, 그에 게서는 전혀 그런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무다구치 렌야는 자신이 쌓은 부로 인해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으며, 임팔 작전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그건 내 부하들이 전부 멍청해서 그렇게 실패한 것이고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 다! 라는 주장을 계속해 양식 있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1966년 8월 2일, 그는 78세의 나이로 사망했 는데 장례식장에 찾아온 사람들은 그의 아들이 뿌린 전단지를 받아들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임팔 작전은 전혀 자신의 잘못이 아니며, 모든 책임은 당시 참여했던 부하들이 져야 한다는 글귀였던 것이다. 사실, 임팔 작전의 책임을 모두 무다구치에게만 묻는 것은 어쩌면 부당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다구치가 그것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해도, 최종 결정권자인 도조 히데키나 주위의 참모진들이 끝까지 거부했다면 승인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최강과 동아시아 재패라는 망상에 빠져 있던 일본 군부는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무다구치가 펴놓은 피비린내나는 군국주의적 몽상을 선택하고 말았다. 이는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1905년, 기적과도 같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은 자신의 힘 만으로 세계 최강대국 러시아를 이겼다는 착각에 빠졌고(러시아는 시대착오적인 전제 군주 국가였고, 발 틱 함대는 낡은 구식 폐기물에 불과했으며, 무엇보다 일본의 전쟁 자금은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영국과 미 국이 제공했다.), 이것은 전쟁을 담당한 일본 군부의 발언권을 크게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1차 대전 이후 일본 사회는 군부가 정계와 재계를 제압하고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군국주의적 체재로 변질되었다. 일본군의 수뇌부들은 자신들만이 일본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광신적인 이념 을 가졌고,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제거를 일삼았다. 심지어 천황을 대신한 최고 실 권자인 수상조차 예외가 없었다. 일본 군부는 두 차례의 쿠데타를 일으켜 전쟁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수상 이누카이와 문부 대신들을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5
살해했고, 급기야 군인 출신인 도조 히데키가 수상이 되었을 정도로 사이코 같은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신 들이 일본을 번영과 발전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이 일본을 이끌고 간 길의 끝에는 원폭과 패망 이라는 지옥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기 성찰과 반성이 전혀 없이 무작정 돌진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한 광신도 같은 일본 군부를 영웅시하 며, 그들의 미친 짓거리마저 본받자고 주장하는 한국의 유명 인사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한심함을 넘어 절망 마저 느낀다. 더욱 불행한 사실은 보급을 경시하고 단기 결전에만 치중했던 일본군의 전략 사상이 일본군 및 그들의 괴뢰 국가인 만주군에서 복무했던 한국군에게로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뒤에 가서 설명할 국민방위 군 사건 도 그런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일제 패망의 전주곡이 된 임팔 작전 146
34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2009.09.10 15:05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부패한 왕실 치하에서 인권 탄압을 자행하면서도 미국의 친구 가 된 나라.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어떤 사건을 분기점으로 시작되었을까? 나는 주저 없이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쌍둥이 무역센터 빌딩이 비행기 테러로 무너진 사건을 꼽고 싶다. 평화롭던 가을의 어느 날, 갑자 기 뉴욕 상공에 나타난 2대의 비행기가 쌍둥이 무역센터 빌딩을 정면으로 들이받는 장면은 전 세계에 생 방송으로 중계되어 많은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떨게 했다. 당시 나도 그 장면을 TV로 보았는데, 헐리우 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도무지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미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쌍둥이 무역센터는 무너졌고 그 과정에서 자그마치 3천 명의 미국인들이 비참하게 죽어나갔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의 지구를 지킨다는 미국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졌 다. 9.11 테러 직후, 미국 정부는 테러의 주범을 이슬람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로 들었고, 그들의 배후로 아프 간과 이라크를 지목했다. 그리고 2001년, 아프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고 2003년에는 국제적인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라크를 공격해 후세인 정부를 타도하고 이라크 전 국토를 점령하고 말 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9.11 테러와 관련하여 미국이 내세웠던 테러를 도운 아프간과 이라크를 응징 해야 한다. 라는 명분이 점차 흔들리고 있다. 탈레반이 과연 알 카에다를 도왔는지도 확실치 않으며, 후 세인 정부에 대해서는 전쟁을 추진한 부시 행정부도 이라크 점령 이후 후세인 정부와 알 카에다 사이에 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라고 실토했다. 오히려 놀라운 점은 따로 있다. 9.11 테러의 주범인 18명의 미국 여객기 납치범들 중 단 한 명만이 아프 간인이고, 나머지 17명은 모두 사우디아라비아 인들이었다. 더욱이 이슬람 테러 집단인 알 카에다의 총수 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역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 출신이었다. 그의 집안인 오사마 가문 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부시 가문과 매우 밀접한 사이였으며, 9.11 테러 당일 미국에 오사마 가문의 일 가 친척이 머물고 있다가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 정부가 특별히 마련해준 전용기를 타고 미국을 빠져나갔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148
다는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사우디아라비아가 관련된 이슬람 테러는 비단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헤즈 볼라 같은 과격한 이슬람 테러리스트 조직에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세력이 바로 사우디아라비아 왕 가이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극단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인 와하비즘을 신봉하고 있으며, 전 세계 이슬람 국가들에게 25년 동안 약 700억 달러 가량의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여 와하비즘을 전파하고 있다. 애당초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나라 자체가 19세기에 발생한 와하비즘을 토대로 만들어 졌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 수출은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게 적지 않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가장 세속적이고 자유분방한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조차 사우디가 퍼뜨리는 와하 비즘 때문에 점차 원리적인 이슬람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사우디를 비롯한 많은 무슬림 교도들은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현실을 마 치 이슬람이 이교도인 미국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굴욕으로 여겨 내심 분노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런 무슬림들의 반미 감정을 적절히 이용하여 그들에게 돈을 대줄테니 반미, 반 이스라엘 테러 단체를 결 성하라고 은밀히 꼬드기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을 증오하는 전 세계 무슬림들의 맹주 역할을 톡톡히 맡고 있다. 와하비즘을 국시로 삼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워 자국민들을 철저히 억압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범죄자는 공공장소에서 손목이 잘리거나 참수를 당한다. 범죄자를 엄하게 응징 하는 것이 질서에 좋은 방법이라고 박수칠 사람도 있을 테지만, 문제는 그만큼 사우디에서 개개인의 인권 은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는 현실이다. 저런 식의 잔혹한 압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니까! 사우디아라비아는 2005년에야 최초로 민주적인 국민투표가 도입되었을 정도로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국 가이다. 그나마 남성들은 투표를 할 수 있지만, 여성의 경우는 더욱 가혹하다. 여성에게는 아예 투표권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 뿐만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은 남자 가족이 없이는 혼자서 차를 운전할 수도 없고, 남자 가족이 동행하지 않으면 공공장소를 돌아다니거나 외국에 여행을 갈 수도 없다. 여기에 사우디 여성들은 집 밖으로 나갈 때, 온 몸을 가리는 검은색 부르카를 반드시 입어야 한다. 나름대로 엄격 한 이슬람 국가인 이란에서도 여성은 부르카를 입으면 남성들과 같은 직장에서 근무할 수 있지만, 사우디 에서는 그조차도 불가능하다. 이렇게 여성들을 철저히 억압해 놓는 방침이 이슬람 교리에 따른 것이며 문란한 성생활을 방지한다고 긍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149
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자국민들의 성은 저렇게 짓눌러 놓고서, 사우디의 지배층들은 방탕한 성생 활을 실컷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 거느리고 있는 후궁들만 공식적으로 무려 2백 명에 달한다. 옛날, 한국의 군사 정권에서 남녀 간의 키스신이 나오는 영화들은 풍기 문란 을 이유로 상영 금지를 시켜놓고, 정작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아내가 있으면서도 기생들과 놀아나는 난잡한 성생활을 했던 이율배반적인 모습과 똑같다. 들리는 바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권력자들도 애정 표현이 나오는 영화들은 이슬람 율법으로 빌미로 영화관에 들여놓지 못하게 하거나 그런 장면들을 삭제하라고 압력을 넣는다고 한 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문란한 성생활에 푹 빠져 살고 있으니, 세계 어디를 가나 독재자들이 하는 짓이란 똑같은 것 같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미국 정부는 9.11 테러의 배후나 주범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지목하거나 그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오히려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이라크를 공격했을 뿐이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 이었을까? 20세기에 들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긴밀한 밀착 관계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중동에서 영국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그 빈자리는 미국이 대신 들어섰고, 미국의 대 중동 정책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중동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우방으로 붙들어 두게 되면, 자연스 레 중동에서 미국의 지배력은 견고히 성립될 수 있고, 더 나아가 현재 중동에서 유일한 반미 국가인 이란 을 견제할 수 있다. 여기에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최대의 원유 생산국임과 동시에 산유국들의 모임인 OPEC의 리더이 기도 하다. 에너지 자원의 대부분을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에서 사우디아라 비아는 결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동맹국이다. 미국의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무어는 그의 영화 <화씨 911>에서 미국 정부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유착 관계를 폭로한 바 있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미국에 투자한 자금은 밝혀 진 것만 자그마치 2조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금융 공황과 달러화 가치 하락으로 고민하고 있는 미국으로 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돈이 절실히 소중한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를 점령하면서 애초에 내걸었던 알 카에다와의 연계점이나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를 찾을 수 없자, 뜬금없이 중동에 민주주의를 전파하러 왔다. 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런 명분 자체가 전혀 진실되지 않은 공허한 선전에 불과하다. 정말로 미국이 중동에 민주주의를 전파하러 왔다면, 사우디아라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150
비아의 부패한 왕실부터 없애고 국민들에게 자유를 주는 민주 정부를 수립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9.11 테러의 주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였다? 151
35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를 택하라!"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를 택하라!" 2009.09.04 18:11 루마니아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이 망하더라도 네가 옳다고 믿는 것을 하라." 현실에서 이런 경우를 찾자면 중국 명나라의 학자, 방효유가 있겠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자신의 손자인 건문제에게 제위를 물려 주었지만, 그의 네 번째 아들인 연왕 주 체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큰 인물이어서 끝내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건문제가 거느린 병사들은 60만에 달했지만, 주원장이 벌인 숙청으로 유능한 장군들이 모두 제거되어 버 린 바람에 제대로 군대를 통솔할 사람이 없었고... 반면 연왕 주체는 휘하에 용맹스러운 몽골 기병들을 거느렸고, 그 자신부터가 원래 교활하고 병법에 능 숙한 인물이어서 건문제가 보낸 진압군을 모조리 격파하고 마침내 수도인 남경까지 쳐들어 왔죠. 결국, 건문제는 황후와 함께 불 속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고, 황위는 연왕 주체가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켜 찬탈한 주체, 영락제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해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가 바로 대학사인 방효유였습니다. 영락제는 방효유에게 자신이 일으킨 반란은 정당하니, 자신의 등극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축하하라는 글 을 쓰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방효유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나중에 네 글자를 쓰고 붓을 던져 버렸는데, 영락제가 보니 "연적찬 위"였습니다. 연나라 도적이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뜻이죠. 자신을 모독하는 글귀에 격분한 영락제는 "당장 그 글자를 지우고 다시 쓰지 않으면 너의 삼족을 멸하겠 다."라고 윽박질렀지만, 방효유는 "내 9족이 모두 죽더라도 결코 지울 수 없소이다."라고 맞섰습니다.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를 택하라! 153
미친듯이 화가 난 영락제는 방효유의 가족과 친척 및 그의 제자들을 모두 잡아와 그가 보는 앞에서 한 명씩 한 명씩 모두 죽였지만, 방효유는 끝내 영락제를 찬양하는 조서를 쓰지 않고 버티었습니다. 이 때, 방효유의 눈 앞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모두 8백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방효유는 영락제의 명령에 의해 입이 찢어지고 사지가 토막나 죽는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 선비의 굳은 절개를 보여주었다 하여 사후에 칭송받게 되었죠. 영락제처럼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세조)을 따르지 않다가 죽임을 당한 우리나라의 사육신과 비 슷한 인물이라고나 할까요?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를 택하라! 154
36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겠다고 제안한 항왜들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겠다고 제안한 항왜들 2009.08.19 21:53 조선군에 투항한 항왜들은 백병전 같은 전투에도 뛰어났지만 모략과 암살에도 능숙했다. 1595년 2월 29일 <선조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항왜인 주질지( 酒 叱 只 ), 학사이( 鶴 沙 伊 ) 등이 경상 좌병사 고언백에게 우리들은 이미 조선 사람이 되었으니 마땅히 적의 괴수를 베어야 한다. 우리들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드나드는 모습을 자주 보았는데, 거느리는 군사가 10여 인에 불과하였고, 홀로 와서 술을 마시 며 즐기다가 해가 저물면 돌아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또 군졸과 더불어 사냥할 때에도 단기로 뒤를 따라 가 혼자 높은 봉우리에 서 있기를 자주 했다. 이때에 내응하는 사람과 도모한다면 그를 죽이는 것도 손바 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라며 가토 기요마사의 암살을 제의하기도 했다. 항왜들은 조선의 무관인 고언백에게 일본군의 대표적인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를 자기들이 암살하겠다는 대담한 제안을 해온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상관이었던 자를 태연하게 죽이겠다는 태도를 이상하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 나 항왜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자신들은 이제 일본군이 아닌 조선군 소속이다. 게다가 순수한 조선인 도 아니고 얼마 전까지 조선군과 싸우던 적이었다. 그런 입장이니 만큼 조선인보다 더 조선의 입장에 충실 해야 의심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조선인들이 가장 두려워하여 미워하는 왜장 가토를 죽여 그 목을 갔다 바치겠다는 제안은 얼마든지 해볼 만하다. 만약 성공한다면 자신들의 입지가 더욱 강화되고, 실패하거나 조선쪽에서 제안을 거부해도 그만큼 자신 들이 조선에 충성한다는 것을 증명해줄 사례이니 어떻게 되든 항왜들로서는 결코 손해 볼 일이 아니다. 항왜들과 같은 입장에 놓였던 자들은 비단 임진왜란 뿐 만이 아니었다. 2차 대전 당시에도 미군에 항복 한 일본군들은 미군들이 모르는 정보를 자세히 알려주었으며, 개중에는 자원해서 폭격기를 몰고 옛 동료 들이 있던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는 자들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 살던 일본인 이민자들은 미군에 입 대하여 일본계 미국인들만으로 구성된 사단을 만들어 미 국무성에 일본 상륙전에 자신들을 선봉으로 세워 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였다. 그들이 외친 구호는 (일본에) 가서 죽자! 라는 것이었다나. 하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정예 부대인 예니체리(Janissary) 병사들도, 원래는 오스만 투르크의 적인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겠다고 제안한 항왜들 156
기독교도들을 납치하거나 생포하여 만든 군대였다. 순수한 투르크인이 아니니, 그만큼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용감하게 싸웠던 것이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겠다고 제안한 항왜들 157
37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2009.08.19 21:50 병자호란은 매우 안타까운 전쟁이다. 적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던 임진왜란과는 달 리, 청군의 노도 같은 진격에 일방적으로 밀리다 끝내는 국왕이 나와 항복하는 완패로 끝나버렸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매우 아쉬운 부분들도 눈에 띈다. 조금만 준비를 더 갖추고, 침착했더라면 전세를 뒤바꿔놓았을 수도 있는 흐름들이 말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군 체제를 대폭 개편하였다. 기병 전력을 대폭 축소하고, 창과 칼을 쓰는 근접전 담당 병과인 살수( 殺 手 )와 일본을 통해 들여온 조총을 사용하는 포수( 砲 手 )를 집중 양성하고 활을 쓰는 사 수( 射 手 )를 곁들인 삼수병 체제를 채택한 것이다. 임란 전까지 조선의 주력 부대였던 기병은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많은 허점을 드러냈다. 조선군의 장기인 기사( 騎 射 : 마상 사격)는 일본군의 조총 사격에 상대가 되지 못했고, 육박전에서도 일본군 보병 부대의 장 창 전술에 밀리기가 일쑤였다. 일례로 조선 제일의 맹장이라 칭송받던 신립은 그가 북방에서 여진족을 격 퇴할 때 선보였던 기병 돌격을 탄금대 전투에서 4차례나 반복했으나, 일본군의 조총과 밀집 창병진형에 막혀 참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기병과 관련되어 조선군은 지나치리만큼 활과 화살에 의존했다. 무관을 뽑는 무과시험에서 기마술과 궁 술은 필수였지만 검술이나 창술은 선택 과목이거나 아예 보지 않았다. 이러한 편향적인 성향에 대해 임진 왜란의 전란을 한참 겪고 있던 1592년 12월 9일, 사헌부에서는 우리나라의 장기( 長 技 )는 활만 믿는 처지 인데 적과 싸운 지 이미 오래이므로 계속 지탱할 방책이 없어 각도에서 패배했다는 보고가 날마다 이르고 있으니 라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 물론 조선시대의 무기들이 활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활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어 위험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활에 치우친 결과, 조선군은 길고 큰 창과 날카로운 일본도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일본군 의 돌격에 제대로 대응조차 해보지 못한 채, 겁을 먹고 패주하는 일이 속출했다. 평소에 활쏘기만 하고 백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159
병전에 필요한 창검술은 전혀 연마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근접전에 약한 조선군의 단점은 조정에서도 일찍부터 논의가 되었다. <중종실록>에는 왜구( 倭 寇 )가 검 을 빼어들고 수군의 배에 올라타면, 용감한 병사가 10명이 있어도 당해내지 못한다. 는 언급이 있으며, < 선조실록>에도 우리나라의 병사들은 전투가 시작되면 오직 고함을 지르며 활을 쏘다가 적이 다가오면 달아나고 맙니다. 라는 탄식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인 정조 시대 편찬된 병법서 <무예도보통지>에서 검이나 창, 곤봉, 편곤 같은 백병전 기술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이유도 임진왜란 때 지나치게 활에만 의 존하다가 참패한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이후, 조정에서는 기마와 궁술에 치우쳤던 종래의 군제를 탈피하여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 장수들이 전해 준 보병 전술인 절강 병법 을 토대로 한 삼수병 체제를 새로이 만들어 채택한 것이다. 삼수병 체제에서는 종래에 도외시되었던 창과 검술을 다루는 근접 전문 보병인 살수와 임란 때 맹위를 떨친 조총을 사용하는 포수를 중요 병과로 채택하였다. 창검술은 명나라 장수들이나 조선에 투항한 항왜 들이 주로 도맡아 가르쳤다. 조총의 경우는 전쟁 중에 일본으로부터 노획한 것을 쓰다가 점차 기술을 습득 하여 자체적으로 제작하였다. 조총의 사격 방법은 항왜들로부터 전수받았다. 반면 여태까지 조선 전력의 핵심이던 활을 쓰는 사수는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고, 시간이 갈수록 그 비중이 점차 줄어들기에 이른다. 이렇게 편성된 삼수병 체제가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세 부대 간의 원활한 조율과 합동이 반드시 필요 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혼란이 발생하여 전체 부대에 악영향을 줄 수 있었다. 한 예로 1637년 1월 3일 경기도 광주 쌍령( 雙 嶺 )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군 4만여 명은 약 3백 명의 청 군 기병대에게 대패를 당했다. 당시 지휘를 맡은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은 아군 병사들이 청 군을 보면 겁을 먹고 조총을 마구 쏘아댈 것을 염려하여 일부러 화약을 적게 나누어 주었다. 조선군이 쓰 던 조총은 총에 강선(라이플)이 없어 유효 사정거리가 짧고 명중률이 낮아 먼 거리에서 쏘면 대부분 맞지 않았다. 따라서 최소한 적이 5~60미터 안에 들어온 후, 일제히 밀집 사격을 퍼붓는 것이 기본적인 전술이 었다. 이것은 조선군뿐 아니라 그 당시 세계 모든 나라들이 다 그러했다.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화약을 많이 분배해 주었다가 아군 병사들이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마구 사격을 하여 화약을 낭비할 수도 있다는 우려는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160
하지만 화약을 조금씩만 나누어 준 결과, 그만큼 포수들의 화약이 빨리 떨어져 조총을 더 이상 쏠 수 없 게 되고 말았다. 화약이 떨어진 병사들이 어서 화약을 달라고 소리를 쳤다. 병사들이 화약을 분배받는 동 안, 청군 기병대가 돌격을 감행하자 조선군은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조총만 갖춘 포수 였고, 창과 칼을 들고 근접전을 수행할 살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총을 가진 포수가 기병의 돌격을 막 아내기 위해서는 총구에 총검을 달고 보병들의 밀집 대형인 방진( 方 陣 )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군에 게 총검이 있을 리 만무했다. 총검은 1600년대 후반에야 프랑스에서 개발되었으니 말이다. 청군 기병대의 급습을 받은 조선군은 혼란에 빠졌고 이윽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겁을 먹고 달아났다. 조 선군의 대열은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청군은 그런 조선군을 추격하며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 기막힌 전투 에서 조선군은 약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지휘를 맡았던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도 전사 하고 말았다. 쌍령 전투의 패인은 삼수병 체제의 핵심 중 하나인 살수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 에서 원거리 병과인 포수에만 편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유능한 지휘관과 엄정한 군기와 각 부대 간의 효율적인 운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면, 삼수병 체제는 탁월한 효과를 드러냈다. 앞서 언급한 광교산 전투와 금화 전투가 그 예이다. 쌍령 전투, 병자호란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패전 161
38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2009.08.19 21:47 요즘 KBS TV 드라마 추노가 한창 인기 폭발이죠? 그 드라마가 병자호란 직후, 혼란한 조선 시대 사회상을 다루고 있는데요... 흔히 병자호란 하면 조선이 힘도 못쓰고 일방적으로 패하기만 전쟁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163
1637년 1월 5일, 광교산과 1월 28일의 금화 전투에서는 청나라 태종의 사위인 양구리를 전사시키는 승리 를 거두기도 했으니까요. 우리 역사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 병자호란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637년 1월 5일, 전라병사 김준룡( 金 俊 龍 )은 약 2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기도 용인과 수원 사이에 있는 광교산( 光 敎 山 )에 도착했다. 김준룡은 광교산에 진을 치고 산과 골짜기의 곳곳에 복병을 설치했으며, 정찰병을 여러 군데에 보내 청군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수천 명의 청군이 광 교산으로 진군하는 것을 정찰병이 발견하고 알리자, 김준룡은 전군에게 명을 내려 제 1선에는 포수를, 제 2선과 3선에는 각각 사수와 살수를 배치하도록 했다. 이윽고 산기슭에 수천 명의 청군이 당도했다. 광교산으로 진군한 청군을 지휘하던 장수는 청 태종 홍타 이지의 사위인 양구리( 楊 古 利 )였다. 그는 청 태종으로부터 초품공( 超 品 公 )이라는 직위를 받았으며, 6천 명 의 기병을 휘하 병력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청군은 산에 진을 친 조선군을 보고는 단숨에 짓밟을 기세로 말을 몰아 올라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준룡은 북을 울리고 기를 흔들게 하여 1선의 포수들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포수들이 일제히 조총 을 쏘는 것과 동시에 사수들이 활을 쏘아대자 청군은 당황했다. 여태까지 그들이 상대해온 조선군은 자기 들이 돌격을 하면 지레 알아서 겁을 먹고 도망을 가던데, 이 군대들은 사뭇 달랐다. 조선군의 총탄과 화살 세례가 퍼부어지자, 말들이 쓰러지고 기수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청군이 돌격을 계속 하지 못하고 주춤거 리자, 이 틈을 타 제 3선의 살수들이 앞으로 나와서 청군을 향해 창과 칼을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죽였다. 조선군의 맹렬한 공세에 놀란 청군은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산 아래로 퇴각했다. <(인조실록), (연려실기 술)> 조선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김준룡은 아군들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진형을 굳게 갖추라고 엄중히 명을 내렸다. 아직 청군의 주력 부대는 손상을 입지 않았고, 조선군이 승리에 도취되어 방비를 허술히 하 다가 청군이 기습을 해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1월 6일, 청군의 공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총사령관인 양구리 본인이 직접 남은 병력 을 모두 이끌고 공격해왔다. 산의 곳곳에서 조선군과 청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가 한창 전개될 무렵, 조선군의 동남부 진영이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 기병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이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청군을 통솔하던 양구리가 매복해 있던 조선군 포수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통솔자를 잃은 청군은 당황하여 물러났고, 미처 퇴각하지 못한 청군 병사 들은 조선군의 손에 의해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다. 이틀간에 걸쳐 진행된 광교산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청군의 총지휘관이자 청 태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164
종의 사위인 양구리를 비롯하여 약 2명의 청군 장수가 전사했으며, 수천 명이 넘는 청군 병사들이 죽었다. 훗날 영의정 체제공은 1794년, 광교산에 기념비를 세워 김준룡의 공적을 찬양했다. 광교산 전투로부터 22일 후인 1월 28일에는 금화( 金 化 )에서 다시 조선군과 청군 간에 두 번에 걸쳐 큰 전 투가 벌어진다. 근왕병을 이끌고 오던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 洪 命 耉 )는 포수 3천 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포 위당하고 있는 인조를 구원하러 오고 있었다. 평안병사 유림( 柳 琳 )은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그와 함께 오고 있었는데, 홍명구와 전술에서 의견이 달라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1월 26일, 홍명구는 금화( 金 化 )에 이르러 그곳에서 약탈을 벌이던 수백여 명의 청군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힌 조선인 백성들을 구출해냈다. 홍명구의 부대와 싸운 청군 패잔병들은 그들의 본대로 달려가 조선군 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다음날인 1월 27일, 1만 명의 청군 기병이 금화의 외곽에 도착했다. 청군의 본대를 본 홍명구와 유림은 급히 회의를 벌였으나, 두 사람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각자 부대를 나누어 진을 쳤다. 홍명구는 평지 에 진을 쳐서 적과 싸울 것을 주장한데 반해, 유림은 기병이 대부분인 청군을 상대하는 데는 평지보다 산 이 더 유리하다고 반박했던 것이다. 홍명구는 목책을 설치하고 포수와 사수와 살수를 순서대로 배치하여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것을 본 청군은 우선 평지에 진을 친 홍명구 부대를 먼저 공격해 쳐 없애고 다음에 산에 진을 친 유림 부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청군은 대포를 동원하여 조선군의 목책을 부수고 병사들을 돌격시켰다. 홍명 구는 삼수병 체제의 기본적인 전술대로 포수와 사수의 원거리 사격을 퍼붓고 살수들을 내보내 청군의 초 반 공세를 막아냈다. 순식간에 청군은 두 명의 장수를 잃었고 수천 명의 병사들이 전사했다. 서전에 불리 해진 청군은 별동대를 산의 뒤편으로 보내 홍명구 부대의 후방을 공격토록 했다. 별동대는 말에서 내려 보 병이 되어 털옷으로 몸을 감싸고 한꺼번에 홍명구 부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조선군은 전력을 다해 저항하였으나,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청군의 기세를 끝내 막지 못하고 무너졌다. 홍명구는 급히 연락병을 보내 유림을 불렀지만 유림은 불리한 정황이니 가보아야 소용없다고 판단하여 가 지 않았다. 구원병을 받을 수 없게 되자, 홍명구는 최후를 실감했다. 그는 병부( 兵 符 )와 인감( 印 鑑 )을 가져 다 아전에게 넘겨주고 나는 여기서 죽어야 마땅하다! 하고 외치며 손수 활을 당겨 청군을 쏴 죽이다, 청군이 쏜 화살을 세 대 맞자 화살을 뽑고 칼을 들어 청군과 싸우다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홍명구 부대를 전멸시킨 청군은 이제 산에 진을 친 유림 부대를 향해 몰려왔다. 유림은 청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삼수병 체제의 기본을 바꾸어 제 1선에 살수를 배치하고 2선과 3선에 사수와 포 수를 넣었다. 그리고 산 중턱에 별동대를 매복시켜 놓은 후, 청군을 기다렸다. 청군이 산에 올라오자 유림은 살수들을 돌격시켰다. 살수들은 청군이 탄 말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기 수들을 낙마시키고 떨어진 기수들을 죽였다. 그리고 살수보다 높은 곳에 진을 치고 있던 사수와 포수들은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165
산 아래에 있는 청군들을 향해 교대로 화살과 총탄을 쏘아댔다. 조선군의 유기적인 삼수병 전술에 청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지 못했다. 청군은 일단 군사들을 물린 후, 3번에 걸쳐 다시 공격해 왔으나 조선군의 전열을 뚫지 못하고 사상자만 늘려갈 뿐이었다. 청군이 4번째 공세를 진행하자 유림은 산 중턱에 매복시킨 병사들을 출동시켜 그들을 타 격했다. 전투가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청군을 지휘하던 장수가 조선군 포수가 쏜 총탄에 저격당하자 청군 은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했다. 이상이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의 삼수병 체제가 청군을 상대로 위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거둔 두 가지 전투 이다. 금화 전투가 안타까운 것은 유림이 승리를 거둔 때와 동시에,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 게 항복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적을 맞아 방비를 좀 더 확실히 갖추었더라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는 일 도 없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청군은 결코 무적이 아니었고, 그들도 얼마든지 패배를 겪었으니 말이다. 병자호란에서 조선군이 이긴 적도 있었다! 166
39 일제의 강제 징용을 돈 받고 변호해 준 로펌, 김앤장...
일제의 강제 징용을 돈 받고 변호해 준 로펌, 김앤장... 2009.08.18 01:26 요즘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효율적인 마케팅 방법 중 하나는 바로 대중들의 감수성을 이용하는 것 입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란 말은 이제 우리 생활 속에서 익숙한 현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우리는 기술이 아닌 인간을 지향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빛이 있어 행복한 세상" 등등... 사람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광고 문구들은 TV 광고에서 각 기업들의 홍보를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광고 문구들의 내용처럼, 정말로 기업들은 사람 본위의 세상을 지향하고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저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익히 아시고 있는 것처럼, 모든 기업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 하나, "돈"입니다. 정치가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쥐는 것이 목표이듯, 기업가. 장사 꾼들이 원하는 것은 돈입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기업들이 외치는 각종 광고 문구들은 그저 돈을 벌어들 이기 위해 사람들을 현혹하는 싸구려 속임수(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여기 한 기업의 경우를 그 예로 들겠습니다. 김&장이라는 로펌(법률사무소)이 있습니다. 이 로펌은 김영무, 장수길 두 변호사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 졌는데, 정부의 전직 관료들을 끌어들여 고문으로 삼고, 전관 출신 변호사와 검사, 판사들까지 영입하여 국내 변호사 수만 228명에 이르는 거대 로펌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김&장을 가리켜 검사 출신의 한 변 호사는 "김&장은 법조계의 삼성이다"라는 말까지 남길 정도였습니다. 이 김&장은 "토종 로펌"을 운운하며 소비자들에게 외국의 거대 로펌과 맞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법률 사무소, 라며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케팅 전략을 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김&장이 내세운 구호인 '토종 로펌'의 진실성이 의심받는 사건들이 속속 벌어지고 있 습니다. 지난 2005년 2월 28일,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귀국한 사람들의 모임인 '태평양전쟁 피해자 일제의 강제 징용을 돈 받고 변호해 준 로펌, 김앤장... 168
보상추진협의회" 소속 회원인 여운택(85)씨 등 5명이 "지난 1942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동원돼 일본제철(신 일본제철의 전신) 소유의 제철소에서 강제노동을 했으나 당시 임금과 강제저축금을 받지 못했다"며 신일 본제철을 상대로 "미지불 임금과 돌려받지 못한 강제 저축금 및 위자료 등을 지급하라"며 총 5억 원을 요 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헌데, 원고인 신일본제철측은 한국의 최대 로펌인 김&장을 법률대리인으로 내세웠으며, 김&장 측은 이 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김&장 측이 공짜로 변호를 할리는 없고, 필시 신일본제철측으로부터 거 액의 수임료를 받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즉, 한국 기업이 과거 일본 제국주의 수탈의 주역이었던 원고를 돈을 받고 변호한다는 말이지요. 이에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 회원인 장양익 씨 등이 지난 3월 15일, 김&장의 사무실에 찾아가 '22만 강 제징용 피해자들의 운명이 달린 일인데, 제발 도와 달라.'라고 호소했지만 김&장 측은 이를 단호히 거절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여론의 빗발치는 항의에 대해서도 김&장 측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오히려 익명의 변호사들 을 내세워 "누구나 변호 받을 권리가 있는데, 김&장 측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까지 흘려보내고 있 습니다. 뭐, 좋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입니다. 살인자든 사기꾼이든 강간범이든 수임료만 내면 누구나 변호 받을 권리는 있습니다. 그 말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평소에 '토종 로펌'을 운운하며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케팅을 해왔던 김&장 측이 일제의 강제징용을 (돈을 받고) 변호하는 입장에 서다니, 이것은 결국 김&장 측이 그동안 줄기차게 외쳐왔던 '애 국심 마케팅'이 허구였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실이 아닐런지요? 김&장 측의 이중적인 행동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외환 은행을 인수한 지 3년 만에 이를 다시 매각하여 4 조 5천억 원의 이득을 챙긴 뒤,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고 해외로 달아나버린 악덕 투기 자본인 론스타를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바로 김&장 측은 론스타가 건네주는 수임료 2백만 달러를 받고 법률자문을 맡아 재정경제부를 상대로 로비를 전담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토종 로펌임을 설파하던 김&장은 그러나 말과는 정반대로 22만의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의 피땀 을 착취한 일제 치하 기업과, 4조 5천억 원이라는 막대한 국부를 챙긴 해외 투기 자본을 변호해 주는 비애 국적인 행동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전직 고위 관료들과 법조계 인사들을 끌어들여 정, 재, 법 일제의 강제 징용을 돈 받고 변호해 준 로펌, 김앤장... 169
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들리는 바로는 요즘 한창 시끄러운 야동 저작권 시비를 불러 일으킨 장본인도 국내의 법무법인인 "한 서"라고 합니다. 지금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의 의장을 맡았던 신기남 의원이 대표로 있는 곳인데, 이 한서 측에서 미국과 일본의 성인 영화사들에게 자기들한테 일정한 수임료를 주면, 그 대가로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한 저작권 고소를 하겠다고 부추겼답니다. 참고로 법무법인 한서는 수 천 명의 여신도들을 성폭행한 혐의로 징역 6년 형을 받고 수감된 JMS 교단의 교주인 정명석을 변호했던 전력이 있습니다. 변태 파렴치 교주와 일제 강제 징용 변호에 이번에는 불특정 다수의 네티즌들을 상대로 합의금 130만원 씩을 뜯어내려는 법무법인 여러분,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꼭 부자 되세요~~~~~~~~~~~ 일제의 강제 징용을 돈 받고 변호해 준 로펌, 김앤장... 170
40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2009.07.08 13:55 먼나라 이웃나라. 1980년대, 아직 한국인들에게 생소했던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만화의 형식을 빌어서 쓴 인문 교양 서적. 집계된 판매 부수만 1백 만부가 넘게 팔렸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부터 이원복 교수가 쓴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를 무척 감동있게 읽으며 자랐습니다. 이런 이 교수가 얼마 전에 세계사를 주제로 한 인문 교양 도서를 새로 시작했더군요. 이름은 <가로세로 세계사>... 그런데 그 중 세 번째 시리즈인 중동편을 읽다 "아무리 보아도 이건 아닌데."하고 고개가 갸우뚱거리는 부분을 발 견했습니다.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2
먼저 125페이지에서 "셀주크 왕조의 전설적인 군주였던 바이바르스는"이란 부분이 나오더군요.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입니다. 우선, 바이바르스는 1223년(또는 1228년)에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투르크계 유목민인 킵차크족 출신입니다.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3
(바이바르스가 소속되어 싸웠던 맘루크 부대) 더욱이 그는 1242년, 몽골군의 포로가 되어 이집트로 팔려가 노예가 되었다 1260년에 이집트를 통치하는 맘루크 왕 조의 술탄이 되었고, 1277년에 사망한 인물입니다. 결코, <가로세로 세계사 3권>에서 서술된 것처럼 셀주크 왕조의 군 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위에서 언급한 본문은 차라리 "셀주크 왕조의 전설적인 군주였던 알프 아르슬란(1030~1072)은" 이라고 수정 하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실제로 셀주크 왕조의 군주였던 알프 아르슬란은 1071년에 벌어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 스 4세를 포로로 잡고 비잔틴 군대를 무찌른 대승리를 거둔 인물이니 말이죠. 또, 126페이지에서 셀주크 제국의 본거지인 아나톨리아 반도에 티무르가 지휘하는 몽골군이 쳐들어가 셀주크 제국 에 큰 피해를 주었다고 나오지만, 이것 역시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4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5
(티무르의 동상) 셀주크 제국은 1037년에 건국되었다가 1092년에 왕위 다툼으로 붕괴되었던 나라입니다. 더욱이 바이바르스가 태어날 1223년 무렵이면 셀주크 투르크는 몇 개의 소왕국으로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그 중 하 나가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던 룸 셀주크 왕조였습니다. 이 룸 셀주크 왕조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준 장본인이 몽골군은 맞습니다만, 책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티무르는 아 닙니다. 룸 셀주크 왕조가 몽골군의 공격을 받은 시점은 1241년, 쾨세다크 전투인데 이 당시 몽골군을 지휘하던 인물은 티 무르가 아닌 바이주 노얀이었습니다. 티무르는 1336년에 태어나 1405년에 사망한 인물이며, 룸 셀주크 왕조가 몽골군의 침공을 받은 시기와는 95년이나 차이가 납니다. 1241년 무렵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티무르가 어떻게 룸 셀주크 왕조를 공격할 수 있었겠 습니까? 그리고 3페이지 뒤인 129페이지에서는 다시 티무르가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여 술탄 바예지드를 생포했다고 나오는 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티무르가 오스만 제국을 쳐부순 앙카라 전투는 1402년에 벌어진 일이며, 앞에서 언급한 셀주크 왕조의 침공 과는 시차가 서로 모순됩니다. 다. 그러니 126페이지에서 셀주크 제국을 공격한 몽골군의 지휘자는 티무르가 아닌 바이주 노얀이었다고 해야 옳습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보는 국민 도서인 <먼나라 이웃나라>의 자매품이라고 할 수 있는 <가로세로 세계사>에서 이런 심각한 오류가 발견되어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6
제가 언급한 이런 내용들이 어려운 전문 학술지나 논문에 실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서 출판 된 대중적인 인문 교양 도서인 <중동사>나 <터키사>만 대충 훍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이원복 교수가 어느 자료를 보았길래, 저렇게 중대한 오류를 저지른 건지 모를 일입니다.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3편에서 발견된 심각한 모순점들... 177
41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2009.10.28 22:32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성욕의 갈등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려 했던 필사의 노력. 어떤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비하 내지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허기에 시달릴 때와 배설을 할 때라고. 나는 거기에 덧붙여 성욕을 느낄 때도 추가하고 싶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 이라 부르며 동물과 구분된다고 하지만, 과학 기술과 도덕적 관념을 제거하고 생체 본능만 남는다면 인간도 동물과 다를 바 없다. 먹고 자고 싸고 그러다 죽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 바로 종교 인데, 간혹 어 떤 사람들은 이 종교에 깊숙이 심취한 나머지 아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기행을 벌이기도 한다. 카톨릭의 신부와 수사, 수녀들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신앙 생활에만 몰두하는 것이 규칙이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인지라 성이 개입된 불미스러운 사고를 심심치 않게 저지른다. 그러자 어느 종교인들은 아 예 섹스를 할 수 없게 성기를 없애면 되지 않겠느냐? 는 극단적인 발상까지 했는데, 그들이 바로 근대 러 시아의 정교회 수도사들이었다. 1770년, 탈영한 군인인 이반 셀리바노프(Ivan Selivanov)가 창시한 종파인 스코프쯔이, 일명 거세파는 수 도자들이 스스로 성기를 거세하고 성욕에서 벗어난 청정한 정신 수련을 주장했다. 그들은 인간이 성욕에 휩싸여 있는 한, 결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마음의 평화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거세파의 이런 주장은 결코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신약 성경의 마태 복음 22장 30절 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부활의 날에는 사람들이 장가들지도 않고 시집가지도 않으며 다만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된다.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또한 인간이 성욕의 갈등에서 벗어나면 좀 더 초인적인 존재로 진화한다는 믿음은 기독교 이전에도 존재 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원래 인간들은 남녀가 한 몸이었고 팔과 다리 도 네 개고 눈도 네 개여서 지금보다 힘과 지혜가 훨씬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너무 강력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179
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주신 제우스가 마법으로 인간들을 남자와 여자로 분리시켜 버리자 모든 면에서 인 간은 약해져 버렸고, 평생을 자신의 짝을 찾아 헤매는 바람에 그만큼 귀중한 인생을 낭비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나 영웅, 위인들은 자신들이 성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 기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널리 선전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한니발을 자마에서 격파하여 공화정 로마를 구한 명장 스키피오만 해도 포로로 잡힌 아름다운 소녀들을 전혀 손대지 않고 풀어 주었으며, 훗날 로마 제정 말기의 황제 율리아누스도 이런 스키피오를 본받아 사산조 페르시아 황실의 여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로마인 뿐 아니라 그들에게 야만인이라고 경멸받던 게르만족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사 르가 남긴 갈리아 전기에 의하면 게르만족들은 가급적 동정을 오래 지키는 자가 더욱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어,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다는 믿음을 지녔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중세 아랍 사회나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거세한 환관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기도 했다. 실제로 환관들로 구성된 부대는 뛰어난 무술 솜씨를 보였는데, 거세를 한 덕분에 성욕의 시달림에서 벗어 난 덕분이라고 한다. 5대 10국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중국을 통일한 송태조 조광윤의 수하이자 용맹한 장수 였던 진한이나 서하를 격파하고 방랍의 난을 진압한 명장인 동관도 모두 환관이었다. 이들과는 좀 다르지 만, 명나라 영락제의 지시로 7차례에 걸친 대항해를 단행한 제독 정화도 환관의 신분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거세파의 창시자인 이반 셀리바노프가 주창한 교리는 많은 러시아인들에게 환 영을 받아 널리 퍼졌다. 거세파에 가담하거나 그 교리를 따른 대표적인 유명 인사로는 프랑스 군대를 격퇴 시킨 18세기 말의 명장인 수보로프 장군이나 심지어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도 포함되었다. 셀리바노프는 알렉산드르 1세의 총애를 받아 궁전에 자유자재로 드나들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이밖에도 거세파를 따른 사람들은 많았는데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신도들과 사제들은 물론 이고 일상생활에 지루함을 느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도 섞여 있었다. 성적인 욕망은 생명체의 기본적인 본능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려는 본능적인 욕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성욕은 인간도 동물의 하나임을 증명해주는 굴욕적인 표식이기도 하다. 자신의 성기 를 잘라내는 아픔을 무릅쓰면서까지 거세를 했던 사람들의 심정에는 생로병사의 굴레에 억매일 수밖에 없 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피나는 노력이 숨겨져 있던 것이 아닐까?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180
http://video.nate.com/12060423 링크한 동영상은 본문의 내용과 상관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 ^ ~ 내가, 내가,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 어흑흑...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거세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181
42 고종 임금이 좋아했던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고종 임금이 좋아했던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2009.10.07 14:01 http://news.nate.com/view/20090918n03290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발견해서 링크를 겁니다. 기사에 따르면 고종 임금은 면 종류나 만두를 좋아했고, 특이하게도 술은 전혀 못 마시고 대신 식혜나 사이다? 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겨울에는 따뜻한 설렁탕이나 온면을 즐겨 먹었고, 차가운 동치미 국물에 만 국수도 먹었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서양 선교사들이 선물해준 커피도 무척 좋아해 거의 매일 같이 마실 정도였다죠. 섬세한 미식처럼 정치도 잘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고종 임금이 좋아했던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183
43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2010.01.25 02:17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우리가 즐겨보는 TV 드라마와 영화, 만화 같은 대중 문화 작품들을 두고 심심치 않게 불거져 나오는 시 비가 바로 표절 문제다. 어느 드라마나 영화가 좀 잘나간다 싶으면 무슨 작품을 베꼈다는 식으로 표절이 거론된다. 얼마 전까지 MBC의 인기 드라마였던 선덕여왕은 무궁화의 여왕 이라는 연극의 내용과 비슷하다고 해서 표절 문제가 불거졌고,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끈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도 일본 만화인 원령공주나 바람의 나우시카와 비슷하다고 하여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 등이 자주 표절 시비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두고 한국인들은 어 릴 때부터 주입식 교육만 받고 자라서 창의력이 없고, 그러다보니 남의 걸 베낄 수밖에 없다. 라고 자학 적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자기비하와 편견으로 가득 찬 푸념에 불과하다. 사실 모방이냐 표절이냐 하는 문제는 명확하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단순히 비슷한 내용이 들어간 오마쥬 나 패러디의 경우도 엄격히 따지면 표절 시비에 걸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외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100% 순수한 창작으로 이루어진 산물은 없었다. 비 단 우리만이 아니라 서구나 일본의 예술 작품들도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자면 표절이나 모방의 범주에 들 어가지 않는 경우가 없다. 여러분은 그리스 신화를 좋아하는가? 동화나 만화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그리스 신화를 재미있게 본 사 람들은 매우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 문화의 토대가 된 그리스 신화가 그리스인들만의 독창적인 작품일 까?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인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운 청년 아도니스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저승의 여신인 페르세포네도 아도니스를 좋아하는 바람에 두 여신은 아도니스의 소유권을 두고 다툰다. 결국 둘은 합의 끝에 1년을 둘로 나눠 각각 여섯 달 씩 아도니스와 함께 지내기로 한다. 그러나 아도니스 는 사냥을 나갔다가 멧돼지에 받혀 죽게 되고, 아프로디테와 그녀의 숭배자들은 이를 매우 슬퍼하여 매년 봄마다 아도니스를 기리는 축제를 열고 그의 상여를 만들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85
봄마다 아도니스를 기리는 축제를 열고 그의 상여를 만들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보다 더 일찍 만들어진 수메르 신화에도 이와 꼭 닮은 내용이 나온다. 아프로디테처 럼 사랑의 여신인 이난나는 남편인 풍요의 신 두무지가 죽자 직접 저승에 내려가 그곳의 통치자인 여신 에레쉬키갈과 만나 두무지를 다시 이승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미남인 두무지에 반한 에레 쉬키갈은 그를 저승의 왕으로 삼고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이난나는 에레쉬키갈과 싸우다 마침내 합의를 하는데, 1년 중 절반은 두무지가 에레쉬키갈과 함 께 있고 나머지 절반은 자신과 함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무지가 저승에서 돌아오는 계절로 알 려진 매년 봄마다 이난나와 그녀를 섬기는 여사제들은 두무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하는 축제를 만들었 다. 여신과 애인(또는 남편)의 이름만 제외하고 보면 거의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와 수메르라 는 두 지역에서 어떻게 이런 식으로 신화 구조가 비슷할까? 답은 간단하다. 후발 주자인 그리스인들이 이 미 만들어진 수메르 신화의 구조를 가져다 조금만 바꿔서 사용한 것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무단 도용과 전재인 셈이다. 또, 구약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전설인 노아의 홍수는 아카드 신화에 언급된 우트나피쉬팀 (Utnapishtim)의 홍수와 그 전개 구조가 완전히 일치한다. 늙은 현자인 우트나피쉬팀은 아득한 옛날, 슈르파크란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인류의 죄악이 너무나 커서 신들은 대홍수를 일으켜 지상을 정화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신들을 정성스럽게 섬기며 산 우트 나피쉬팀과 그의 가족은 살려주기로 하고, 그에게 방주를 만들어 가족과 동물들을 태우라고 명령했다. 방주를 만든 우트나피쉬팀은 가족과 동물들을 태우고, 6일 동안 지구를 뒤덮는 대홍수를 견디며 니시르 산기슭에 도착했다. 그리고 비둘기와 제비, 까마귀를 보내서 물이 빠지고 마른 땅이 들어난 것을 안 우트 나피쉬팀은 가족들을 이끌고 방주를 나와 신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지냈다. 우트나피쉬팀을 노아로, 신들을 기독교의 유일신으로 대체하고 6일이란 숫자를 40일로 고친다면 두 신화 는 너무나 흡사하여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연대상으로는 아카드 신화가 구약성경보다 오래되었으 니, 유대인들이 아카드 신화를 베껴서 자기 식으로 조금 고쳐 성경에 넣었으리라. 그리고 세상의 종말이 올 때, 신과 악마가 싸워 결국에는 신이 승리하고 악마와 그를 숭배한 인간들은 모두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 받게 된다는 기독교의 교리는 다분히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교에서 영 향을 받았다. 조로아스터 교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예언자였던 조로아스터가 만든 종교로,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86
선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의 신 아흐리만이 우주를 둘로 나눠 지배하며 서로 인간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싸우다 최후에는 선한 신이 악신을 물리쳐 지옥으로 추방한다고 가르쳤다. 사도 요한이 신약 성경의 요한 묵시록을 쓴 때보다 5백 년이나 더 앞선 것이다. 즉, 기원전이라 불리는 최소한 2천 년 전에도 이런 식의 짜깁기와 베끼기는 곳곳에서 성행했었다. 그것 도 별 볼일 없는 삼류 역사서가 아닌 오늘날 인류 문명의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 즘의 대표적인 문헌에서 버젓이 저지른 것이다. 케케묵은 옛날 일만 들춰내기는 뭐하니, 현대의 모방 사례들을 들어보기로 할까? 헐리우드에서 3편의 시 리즈 영화로 제작되어 세계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킨 <반지의 제왕>은 원작 자체가 북유럽과 켈트 신화의 주요 내용과 장면의 상당 부분을 짜깁기하고 베껴 넣어서 만들어졌다. 몇 가지 예로 <반지의 제왕> 이전의 시대를 다룬 소설 실마릴리온(Silmarillion)에서 등장하는 악의 화신 모르고스는 공포의 철퇴 그론드(Grond)를 사용한다. 그론드는 한 번 내리칠 때마다 땅이 움푹 패이고 산 이 흔들리는 가공할 무기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게르만 신화에서 천둥신 토르가 휘두르는 천둥 망치 묠 니르(Mjolnir)가 변형된 것이다. 또한, 모르고스를 따르는 무시무시한 불의 괴물 발로그(Balrog)들은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거인 들인 무스펠(Muspell)이다. 무스펠은 불의 세계인 무스펠헤임에 살면서 세상의 종말인 라그나뢰크 때, 선 한 신들을 상대로 싸우고 세상을 불태워 없앨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발로그들도 불이 타오르는 지하 세계 에 숨어 있다가 그들의 주인인 모르고스의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나타나 중간계의 인간과 엘프들을 상대 로 불의 검과 채찍을 휘두르며 싸운다. 너무나 유명해서 이제는 판타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한 번 쯤 그 이름을 들어보았을 신비의 종족 엘프 (Elf)는 바나헤임(Vanaheim)에서 온 풍요의 신 프레이르가 다스리는 세계인 알프헤임(Alfheim)의 주민 알 브족(Alf)의 영어식 발음이다. 알브족들은 금발의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에 푸른 눈을 가졌으며 선량한 종족 이라고 <에다>에 묘사되는 데, <반지의 제왕>은 이 설정을 그대로 따왔다. 엘프에 못지않게 유명한 종족 드워프(Dwarf) 역시, 지하에 살면서 각종 무기나 도구 개발에 능숙한 요정 인 드베르그족(Dvergr)에서 따온 것이다. 판타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요괴인 트롤(Troll)도 게르만 신화에서 태양을 쫓는 하늘의 늑대인 스콜(Skoll)의 별명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작품의 핵심 주제인 절대 반지를 빼놓을 수 없다. 절대 반지는 게르만 신화를 바탕 으로 한 중세 독일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따왔다. 악신 로키에게 반지를 빼앗긴 드베르그족인 안드바리가 가지는 사람에게 파멸을 가져다주리라고 저주를 퍼부은 반지는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인 사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87
안드바리가 가지는 사람에게 파멸을 가져다주리라고 저주를 퍼부은 반지는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인 사 우론 이외에는 누구도 사용할 수 없고 사악한 유혹으로 소유자를 망하게 만드는 절대 반지로 다시 태어났 다. <니벨룽겐의 반지>의 영향은 더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엘프족들이 아라곤의 조상인 엘렌딜이 가지고 있던 보검 나르실의 부러진 파편을 모아 안두릴이라는 명검으로 재탄생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니벨 룽겐의 반지>에서 드워프족 대장장이 레긴(Regin)이 주인공 지그프리드의 아버지 지크문트가 쓰던 검인 발뭉의 부서진 조각을 모아서 그보다 더욱 훌륭한 명검인 그람(Gram)으로 만들어낸 광경을 패러디한 것 이다. 물론 <반지의 제왕>에는 게르만 신화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켈트 신화의 흔적도 보인다. 작품의 끝 부분에서 주인공 프로도와 샘은 현자 간달프를 따라 머나먼 서쪽 바다 너머의 땅으로 떠난다. 이것은 켈트 신화에 등장하는 서쪽 바다 건너에 있는 축복 받은 섬인 하이 브라실(Hy Brasil)의 다른 모습이다. 켈트족 들은 먼 서쪽 바다에 영원불멸의 선한 자들이 살고 있는 낙원이 있다고 믿었고, 그 이름을 하이 브라실이 나 아발론이라고 불렀다. 이밖에도 반지의 제왕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톨킨의 취향이 반영된 기독교적인 시각도 나타난다. 태초에 세계를 창조한 절대신 엘루는 기독교의 절대 유일신 엘로힘(Elohim)에서 유래했으며, 그가 만든 존 재인 발라(천사)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고, 자신이 모든 세계의 권력을 차지하려 반란을 일으킨 멜코르(모르고스)는 타락 천사 루시퍼의 다른 모습이다. 이처럼 <반지의 제왕>은 서구 문명의 정신적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유대-기독교 문화와 게르만-켈트 신 화를 저자의 입맛대로 짜깁기하고 모방해서 만들어낸 작품인 셈이다. 서양이 아닌 동양 쪽은 어떨까? 역시 별반 다를 바 없다. 일본인들은 11세기에 쓰여진 겐지모노가타리 ( 源 氏 物 語 )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편 소설이라고 자랑한다. 하지만 겐지모노가타리는 어떤 글자로 쓰 여졌는가? 가나( 仮 名 )다. 가나는 어느 천재가 골방에 틀어박혀 명상을 하다가 만들어낸 순수한 창작물인 가? 아니다. 중국의 한자에서 50개의 문자를 가져다가 변형시켜서 나온 글자이다. 현대 일본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만화들 중 명작으로 인정받는 <드래곤볼>과 <베르세르크 >, <슬램덩크>들도 다른 문학 작품들을 상당 부분 모방한 것들이다. <드래곤볼>의 주인공은 누구나 알다시피 손오공이다. 하지만 그 이름은 작가인 도리야마 아키라의 독창 적인 발상이 아니다. 16세기 중국에서 나온 환상소설 서유기( 西 遊 記 )의 주인공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88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을 비롯한 사이어인들은 보름달을 보면 거대한 원숭이로 변신해 폭주하는데, 이는 서유기에서 벌거벗은 채로 날뛰며 천상계를 닥치는 대로 파괴하던 손오공의 모습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 다. 후기로 갈수록 드래곤볼은 SF화 되지만, 초기의 손오공은 근두운을 타고 여의봉을 휘두르는 서유기의 손오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드래곤볼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서유기는 독창적인 작품일까? 물론 아니다. 많은 연구가들의 이 론에 따르면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은 기원전 3세기에 쓰여진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에 등장하는 원숭이왕 하누만(Hanuman)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불교와 함께 인도 문화가 중국으로 전래되 어 하누만이 손오공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라마야나에서 하누만은 최고신 비뉴수의 화신인 라마와 함께 마왕 라바나를 무찌르기 위해 모험에 나서 서 마침내 승리한다. 그리고 그의 공적이 인정받아 신으로 숭배 받게 된다. 불경을 구하려 삼장법사를 모 시고 천축으로 떠나 득도하여, 부처가 되는 손오공의 모습과 겹치지 않는가? 어둡고 음울한 중세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는 평을 받는 미우라 켄타로의 베르세르크는 다분히 영국의 클라이브 바커(Clive Barker) 감독이 만든 공포 영화 헬레이저(Hellraiser)와 1974년 브라이언 드 팔마 (Brian Russell De Palma) 감독이 제작한 낙원의 유령(Phantom of the Paradise)을 모방한 작품이다. 베르세르크에서 인간의 욕망에 의해 작동되면서 이 세상과 지옥을 연결시키는 소품인 베헤리트는 헬레 이저에서 선보인 악마의 퍼즐의 복제판이며, 소환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마왕 고드핸드(God Hand)들은 헬레이저의 지옥의 승려(Monk)들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다. 베르세르크의 주인공이자 악역인 그리피스는 동료들을 고드핸드들에게 제물로 바치고 자신도 페무토라 는 이름을 가진 고드핸드가 되는데, 그 모습은 영락없이 낙원의 유령 에서 나온 주인공과 똑같다.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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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베르세르크라는 제목 자체가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오딘을 숭배하는 포악한 전사 (Berserk)를 그대로 따온 이름이다. 1990년대,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농구 열풍을 불러일으킨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슬램덩크>는 강백호와 채치수를 비롯한 주인공들이 다른 고교팀과 농구 시합을 벌일 때 보인 포즈들 중 상당수가 미국 NBA 선 수들의 시합 장면을 찍은 화보집에서 나온 장면들과 거의 판박이였다.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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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선수들의 화보집을 찍은 사진 기자가 슬램덩크의 내용을 크게 문제삼지 않겠다고 한 덕분에 무사히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94
넘어갔지만, 엄밀히 말해서 다케히코 이노우에의 행동은 저작권 침해에 해당된다. 그래서 일본 2CH의 네 티즌들은 이노우에를 가리켜 "미농지 대고 그대로 배꼈다!"라고 조롱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른 작품이나 자료를 보고 모방한 문화 예술 작품들은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방을 단순히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후발주자가 선두주자를 단기간 내에 따라잡 으려면 모방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포에니 전쟁을 벌이던 시절의 일화다. 초기의 해전에서 로마는 카르타고와 싸우는 족족 패배했다. 오랫동안 육지에서 농사만 짓고 살아온 농경민족인 로마인들로 서는 뛰어난 뱃사람들이자 해상 무역의 제왕이었던 카르타고와 해전에서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 다. 어떻게 하면 카르타고를 해전에서 이길 수 있을까를 놓고 고민하던 로마인들은 전투에서 노획한 카르타 고 함선들을 일일이 분해했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부품들을 다시 조립하여 전함을 완성시켰고, 뱃머리에 코르부스(까마귀)라는 이름의 사다리를 장착해서 전선에 투입했다. 로마군 함대를 본 카르타고 인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었다. 저게 대체 뭐냐? 우리 배를 그대로 가져다 베껴 만들다니! 게다가 뱃머리에 요상하게 단 건 뭐에 쓰는 물건이냐? 하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카르타고는 로마군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면서 참패하고 말았다. 카르타고 인들이 사용하던 군함과 똑같은 성능을 발휘하는 배와 카르타고 인들의 함선에 사다리를 걸친 다음, 육전 에서 단련된 로마군 병사들이 몰려가 육박전을 벌이는 전술에 카르타고 인들은 도무지 저항할 수 없었다. 짝퉁-모방 이 원조 를 이긴 셈이다. 1950년대와 60년대, 한창 경제 발전에 골몰하던 일본은 해외 여행을 나가는 국민들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린다. 미국이나 유럽의 공장들에 견학을 가면, 카메라로 공장 기계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오라는 지침 이었다. 정부의 말에 잘 순종하는 일본 국민들은 그대로 시행했고,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공장들의 도면은 그대로 일본 기업들이 짓는 공장의 샘플이 되었다. 그러자 서구 언론들은 이런 일본의 모습을 심하게 비아냥거렸다. 일본 기업들이 독창적인 개발은 하지 않고 미국이나 유럽의 제품들을 흉내만 내는 짝퉁이나 만든다는 어조였다. 특히, 일본의 자동차 업체들이 GM이나 포드 및 크라이슬러 같은 미국 자동차들의 디자인과 내부 구조를 그대로 베껴 만들자, 일본인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95
은 원숭이처럼 남을 따라 하기만 하고 창의력은 없는 민족이냐! 라고 야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07년대와 80년대에 이르자, 그런 식의 폄하는 쑥 들어갔다. 수많은 모방 끝에 도요타와 닛산 같 은 일본의 자동차 업체들은 자신들이 보고 배웠던 미국의 자동차들보다 더욱 뛰어난 성능과 저렴한 가격 까지 갖춘 자동차들을 연이어 출시하여 세계 자동차 시장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인터넷상에서 자주 거론되는 화제가 중국 제품들이 한국 제품들의 디자인과 상호 등을 무단으로 베껴서 짝퉁이나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한국도 그다지 다를 것 없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일본 제 품들을 열심히 보고 베낀 나라가 한국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일본 역시 미국과 유럽 제품들을 부지런히 배우고 모방하여 오늘날의 수준에 이르렀으니 피장파장이지만. 모방은 무조건 나쁜 것일까? 앞서 말했듯이 그리스 신화나 성경, 반지의 제왕, 겐지모노가타리, 드래곤 볼, 베르세르크, 슬램덩크 등이 다른 문화권과 문학 작품들을 모방했다고 해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 기다! 라고 일축하며 쓰레기통에 처넣어야 올바른 태도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자신보다 훌륭한 장점을 가진 외부 문물을 배우고 익혀서 그보다 더 좋게 다시 만든다면 모방이야말로 창조의 아버지가 아닐까?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라는 고대 그리스의 속담도 있다. 다. 끝으로 덧붙이자면 이 글은 창작자들의 노력을 폄하하거나 표절을 두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님을 밝혀둔 인류 역사는 짜집기와 베끼기의 과정이었다. 196
44 한국 전쟁 당시, 부산에서 벌어졌던 모습들...
한국 전쟁 당시, 부산에서 벌어졌던 모습들... 2010.05.27 23:13 1950년 8월 18일, 대구에 있던 정부는 부산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헌병과 경찰, 청년방위대원들, 민간극우단체들은 임시 수도로 지정된 부산의 안전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9월 28일 서울 수복까지 부산시의 전체 가구들을 세 차례나 훑 으며 좌익 활동은 할 경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체포해 특무대로 넘겨 죽였다. 1960년 제 35회 국회에서 부산진 을구 의원 박찬현은 "특무대가 수천 명씩을 긴급 구속해서 매일 저녁 수십 대의 트럭에다가 가득 사람을 실어가지고, 철사로 모두 묶어서 바다에 던져버리거나, 해운대, 김해, 양산 등지에서 기관총 으로 학살하였다."고 고발했다. - 허만호 <6.25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이병천과 조현연 <20세기 한국의 야만: 평화와 인권의 21세기를 위하여> 부산에 결집한 상당수 고위층과 부유층 인사들은 배를 부산항에 대놓고 전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일본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이미 일부는 제주도로 피난간 상태였다. 일본으로의 밀항은 이른바 '돼지몰이'로 불렸다. 밀항 주선 비 용은 1인당 50만원, 나중에는 100~150만원까지 올라갔다. 밀항을 위한 배를 빌리는 돈은 500만원에서 1천만 원까지 이르렀다. 서울, 대전, 부산에서의 도망 행렬을 볼 때 이들의 국가수호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 렵지 않다. 법무부 장관 태윤기에 따르면 임시 수도 부산의 혹심한 상류사회의 비리와 부패는 아예 이곳에 들리고 싶 지도 않도록 만들었다. -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부산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먼저 내려온 정부 고위층 가족들은 전쟁에 아랑곳없이 환락에 잠겨 있었고 부산 유흥가 는 전쟁을 모르는 채 화려한 네온사인에 뒤덮여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부산 앞바다 20리 전방에 수백 쌍의 기동선이 전세를 관망하면서 일본 도피를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대부분 정부 고위층과 사회 유력 인사 들의 가족이라고 했다. 100리 전방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민족의 자유를 수호하는 전쟁에 아랑곳없이 보화를 싣고 자식들만 데리고 일본으로 피난가려는 가증한 반민족 모리배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서 출전 자금을 뜯어내려고 결심한 나는 이른 새벽에 발동선 한 척을 강제로 징발했다. 기관총 1정을 싣고 특공대원에게 권총을 휴대시킨 후 내가 선두에 서서 부산 앞바다 20리 지점에 정박하고 있는 그들의 배에 올라타 금 품을 강제로 희사받았다. 당시 그들의 선실을 뒤졌을 때 나는 그들의 화려함에 놀란 정도가 아니라 기절할 뻔 했다. 군대에 가야할 적령기에 한국 전쟁 당시, 부산에서 벌어졌던 모습들... 198
있는 젊은이가 여인들과 춤을 추고 있었고, 외래품으로 몸을 감싼 그들은 양주병을 앞에 놓고 엔조이에 한창들이었 다. 쌍권총으로 무장하고 광복동에 있는 '늘봄'이라는 댄스홀로 갔다. 댄스홀 앞에는 고급 세단과 군대의 고급장교들이 타는 지프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댄스홀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양손에 권총을 들고 16발을 공중에 발사했다. 쌍쌍이 춤을 추던 남녀가 한꺼번에 땅에 엎드렸다. 불과 100여 리 전방에서는 전투가 치열해 젊은 청년들 이 쓰러져가고 있는데, 전쟁에 아랑곳하지 않는 특권층들은 여자들과 함께 일대 육체의 향연을 베풀고 있었던 것이 다. 이러한 반민족분자들을 나는 치고 때리고 했다. '너희들이 가진 금품을 이 광주리에 담아라. 나는 단순한 금품강도가 아니다. 포항 작전에 의용군으로 참여했다 부 상당해 돌아온 500명 학도병 치료비로 쓸 것이다. 또다시 국가와 민족을 망각하고 춤을 추러 다니는 년놈은 부산 앞 바다에 수장시켜 버릴테니 알아서 해라.' - 김두한 <김두한 자서전>2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면서 육군 본부에서는 김익렬 대령에게 헌병 1개 소대를 주어 부산항만 일대의 선박에 대해 수색토록 했다. 유명 정치인과 고위 장성까지 붙들려 왔는데 이들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배에 탄 채로 염탐을 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는 중령급 이상 8명도 포함되어 있어서 체포되었다. - 안용현 <한국전쟁비사 2: 낙동강에서 38선> 당시 후방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군기도 매우 문란해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은 9월 8일 일부 후방 근무 장병들이 군 의 사명을 망각하고 탈선행위, 풍기문란, 민중에 끼치는 폐해 등으로 군에 대한 비난이 자자하다면서 다음과 같은 명 령을 내렸다. "1. 장병들의 요정, 식당 출입을 엄금한다. 2. 입원환자의 외출을 엄금한다. 3. 군인의 개인 입장에서의 가옥 차용을 금지한다. 4. 본부 장교는 일체 병영 내에 거주하라. 5. 헌병은 특히 야간순찰을 이행하며 사전 적발에 철저하라. 6. 공용 이외 차량 사용을 금한다." -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일선에서는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총을 들고 나간 학도병들이 쓰러져 가고 있을 무렵 부산에서는 이렇게 상 류층들의 주지육림이 한창이고 있었다. 한국 전쟁 당시, 부산에서 벌어졌던 모습들... 199
45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2010.05.19 23:56 1592년 9월 24일, 남부 지방에 주둔해 있던 가토 미쓰야사( 加 藤 光 泰 ), 하세가와 히데카즈( 長 谷 川 秀 一 ), 나가오카 다 다오키( 長 岡 忠 興 ) 등의 일본군 장수들은 약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김해에 집결했다. 그들은 창원을 거쳐 진주성으 로 진격하려 했다. 물론 조선군도 이런 일본군의 움직임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만 보지는 않았다. 이보다 한 달 앞서 8월에 진주목사로 부임한 김시민은 성곽을 수축하고 성 안에 화포와 화약을 충분히 비축했으며, 휘하 군사들을 잘 조련하여 곧 닥칠 전 투에 대비했다. 또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활약하던 곽재우와 최경희 등의 의병장들과 일본군이 성을 공격하면 성 밖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함께 호응하기로 미리 합의를 해 놓은 상태였다. 진주로 진격하던 도중, 창원에 다다른 일본군은 전라우병사 유숭인이 지휘하는 2천 명의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어렵지 않게 격퇴시키고 창원과 함안을 함락시켰다. 10월 3일, 일본군은 진주성의 인근에 도착했는데 창원에서 패배한 잔여병력들을 지휘하던 유숭인이 성의 외곽에 먼 저 도착해 진을 쳐 놓고 있었다. 원래 유숭인은 진주성에 들어가 김시민과 함께 싸우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김시 민이 성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유숭인은 2만의 일본군에 맞서 최후까지 분전하다 휘하 병력과 함께 전 사하고 말았다. 김시민이 왜 유숭인의 병력을 거부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전투를 앞두고 패잔병들을 성 안에 들어오게 했을 때, 그 들을 통해 패배감이 아군 병사들 사이에 확산되어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유숭인이 입성하면 군사 지휘권을 양도해야 한다거나 명령 계통에 차질이 생길 문제를 감안해서 그랬을 까? 어찌되었든 유숭인 부대의 전멸과 동시에 진주성 전투는 시작되었다. 김시민은 자신과 함께 성 안에 있던 판관( 判 官 ) 성수경과 곤양 군수 이광악 및 전 만호( 前 萬 戶 ) 최덕량 등과 함께 각자 병력을 이끌고 성문을 나누어 지켰다. 이 때, 성 안에 있던 조선군은 약 3,800여 명에 불과했다. 10월 5일, 일본군은 대나무로 엮은 방패를 줄지어 앞세우고 진형을 만들었다. 여러 개의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방패 는 일본의 전국 시대에 흔히 쓰였으며, 주로 적의 화살이나 총탄을 막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대나무 방패의 사이사이에는 나무판자로 만든 다락들을 세워 놓았는데, 이는 성벽을 기어올라 위에서 성안을 내려다 보며 공격을 하려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201
공성 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성 아래로 몰려와 크게 함성을 지르며 조총을 어지럽게 쏘아댔다. 조선군보다 훨씬 많 은 병력을 가진 일본군은 이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순차적으로 병력을 투입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일본군은 병력을 나누어 신시( 申 時 )에 물러갔다가 초경( 初 更 )에 다시 진격해 왔으며, 삼경에 다시 병력을 철수시켰 다. 연이은 공격으로 조선군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피로를 가중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본격적인 총공세는 이틀 후인 7일에 있었다. 일본군은 한밤중에 진주성의 동문과 북문, 그리고 서문에 병력을 투입 해 공격했다. 이때 그들은 다양한 공성 방법을 동원했는데 긴 사다리를 성벽에 걸쳐 놓기도 했고, 성 밑에 땅굴을 파 기도 했으며, 장작과 짚단에 불을 놓아 성 안으로 던지는 화공 전술까지 구사했다. 그러나 조선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총사령관인 김시민은 자신이 직접 병사들을 독려했다. 그는 일본군이 사다 리를 타고 성벽에 오르면 뜨거운 물을 퍼붓도록 했으며, 많은 일본군이 3층의 다락에 탑승해 성벽을 향해 다가오자 화포를 쏘아 부숴버렸으며, 땅굴을 파고 기어 올라오는 적들에게는 불을 밝혀서 그 위치를 알아낸 다음, 끓는 물을 쏟거나 혹은 진천뢰( 震 天 雷 : 부분적으로 폭발하는 화약탄)를 던지기도 하여 모두 죽여 버렸다. 전투가 한창이던 8일 경, 일본군의 거센 파상 공세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낀 김시민이 아마도 성을 온전하게 하기 는 어려울 듯 하니 몰래 수문( 水 門 )을 열어서 노약자들을 내보내야 하겠습니다. 라고 제안하자, 이광악은 그렇게 하면 군사들의 마음이 약해지고 사기가 떨어져 성을 지킬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큰 소리로 말렸다. 이광악의 태 도에 김시민도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전투에 전념했다. 이 무렵, 뜻하지 않은 변고가 발생했다. 전투를 독전하던 김시민이 난데없이 날아온 총탄에 이마를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목사의 절명을 안 병사들은 당황했고, 성 안은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조선군의 혼란을 안 일본군이 북문을 5 6척이나 뚫고 들어오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임전태세를 가다듬었다. 그의 침착한 지휘로 조선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으며, 성 내로 난입하려는 일본군에게 화 살과 돌을 퍼붓고 끓는 물을 쏟으며 화포를 쏘아대 적의 공세를 저지했다. 이 때, 비단옷을 입은 한 일본군 장수가 말을 타고 와 군사들을 지휘하며 돌진해 오자 이광악이 직접 활을 쏘아 사 살했다. 화살에 맞아 쓰러진 일본 장수의 시체를 일본군 병사들이 메고 구슬프게 통곡을 하며 도망쳤는데, 그것을 본 조선군 병사들은 모두 기뻐하며 사기가 충천했다. 서문을 공격한 일본군 수천 명이 맹렬한 공세를 퍼붓자 성가퀴를 지키던 조선군들이 겁을 먹고 도망쳐 버렸다. 그 러자 서문의 방어 책임자인 최덕량은 영장( 領 將 ) 이눌과 함께 도망가는 군졸 몇 사람을 베어 죽이며 끝까지 싸울 것 을 명령하자, 군사들이 그제야 다시 모여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을 떨치며 힘껏 싸웠다. 조선군의 결사적인 저지에 일 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도로 철수했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202
동문을 지키던 성수경은 5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을 넘어오는 적들을 무수히 베어 죽인 끝에 결국 적의 공 격을 막아내고 성을 지킬 수 있었다. 성의 외곽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시민과 미리 협력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던 의병장 곽재우는 일본군이 본격적인 공세를 펼쳤던 10월 6일 밤, 선봉장 심대승( 沈 大 昇 )으로 하여금 2백 명의 의병과 함께 북산( 北 山 )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포를 쏘아대고 성을 향해 전라도의 원병 1만여 명과 의령의 홍의 장군 곽재우가 합세하 여 내일 아침에 와서 적을 죽이기로 하였다. 라고 크게 외치게 했다. 이 말을 듣고 성 안에 있던 조선군 병사들과 백성들 역시 크게 외치면서 기뻐하였다.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 윤탁과 정언충 등은 성의 동쪽 방면에서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했으며, 합천 가장( 陜 川 假 將 ) 김준민은 용맹한 육군 장수 정기룡( 鄭 起 龍 )과 조경형( 曺 慶 亨 )등과 함께 성의 북쪽 방면으로 들어갔으며, 최경회는 임계영과 더불어 2천의 군사로 서쪽에서, 고성 가장( 固 城 假 將 ) 조응도와 복병장( 伏 兵 將 ) 정유경은 5백 명의 군사로 남 쪽으로 각각 일본군을 압박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진주성을 포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 안팎의 조선군에 의해 역포위를 당한 꼴이 되고 말 았다. 성의 북쪽 방면을 공략한 김준민이 결사대 80여 명을 거느리고 단계현( 丹 溪 縣 )에 도착해, 관사( 官 舍 )를 불태우던 일 본군을 발견하고 곧바로 돌격하여 20여 리를 뒤쫓자 일본군은 흩어져 퇴각했다. 다른 의병장 조응도는 남강( 南 江 ) 10 리 밖에 이르러 멀리서 형세를 이루고 있으면서 남은 일본군을 나누어 소탕했다. 결국, 조선군의 굳건한 방어와 의병들의 파상 공세에 더 이상의 전의를 상실한 일본군은 공격을 시작한 지 약 닷새 가 되는 10월 10일, 성 밖에 있는 1천여 채의 집을 불사르고 신시( 申 時 )에 포위를 풀고 물러나 함양으로 철수했다. 일 본군의 공세가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던 동문과 북문 앞에는 그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조선군은 목사 김시민이 전사한 것을 제외하고는 큰 피해가 없었다. 진주성 전투에서 분전하며 일본군을 격퇴시킨 김시민은 그의 직함인 목사 를 따서 일본군에게 모쿠소 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모쿠소는 일본군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주었던지, 임란이 끝나고 한참 후인 에도 막부 시대 일 본에서 상영된 가부키에서 일본을 멸망시키려는 사악한 괴수인 모쿠소 라는 캐릭터로 남게 된다. 어느 정도의 일본군이 전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족히 수천이 되는 병력을 잃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장악은 무산되었으며, 동시에 전세도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넘어가게 되었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김시민과 다른 조선 장수들이 진주성에서 거둔 승전을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권율의 행주대첩에 필적 하는 진주대첩이라 부르며 기리고 있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203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1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204
46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1)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1) 2010.05.19 23:58 하지만 진주성 전투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1차 전투가 끝난 지 5개월 후인 1593년 3월과 4월에 도 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나가 있는 장수들에게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일본군은 1월에 조 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을 빼앗기고 한양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철수해 전황이 매우 불리했다. 거기에 명나라와 휴 전 협상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이런 즈음에 돌연 5~6개월 전에 있었던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라는 비상식적인 명령을 왜 히데요시는 내렸 던 것일까? 우선, 행주와 진주성 등지에서 계속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군대를 다시 추스르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자신감을 회 복하기 위한 동기를 들 수 있겠다. 특히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이 당한 패배를 히데요시는 무척이나 분하게 여 겨, 반드시 진주성을 쳐 치욕을 씻으라고 세 번이나 직접 지시를 했다고 한다.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전투를 벌인다 는 것이 얼핏 이해가 안 갈지 모르지만, 군사들은 그런 것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인 진주성을 점령함으로써 전라도로 진출하여 군량을 확보 하려는 의도도 포함될 것이다. 작은 진주성을 치기 위해 일본군 수뇌부는 사전에 미리 철저한 준비를 했다. 우선, 한양에서 철수해 부산에 집결한 일본군 병력의 대다수를 진주성 공격에 투입하기로 결정했으며, 그 부대를 총 6개로 나누어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등 조선 침략을 담당한 중요 장수들에게 지휘토록 했다. 또한 수군을 동원하여 진주 연해로 나아가 마치 조선 수군과 일전을 벌이려는 것처럼 위장해 만에 하나, 조선 수군 이 진주성에 주둔한 조선군을 돕지 못하도록 전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맡겼다. 일본군이 대군을 동원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군의 부총병 유정은 가토 기요마사에게 사자를 보내 진주성은 작은 지역인데 무엇 때문에 명나라에 신의를 잃으려 하는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너희들을 남김없이 섬멸할 것이다! 라고 엄포를 놓았고, 일본과 외교 교섭을 하던 명의 심유경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항의했으나 가토는 유정의 말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고니시도 내가 아니라 가토가 주장했으니, 성을 비워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무시했다. 유정의 엄포는 아무런 힘도 근거도 없는 말이었음이 나중에 입증 된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1) 206
일본군이 명의 교섭을 거부하자 명군과 조선군은 다급해졌다. 명의 제독 이여송은 유정에게 진주성으로 내려가 조 선군을 지원하라고 말했지만, 유정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따르지 않았다. 조선군 수뇌부는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일전을 준비했다. 순변사 이빈과 전라병사 선거이와 충청병사 황진, 그리고 전라방어사 이복남이 권율의 지휘 아래 창녕 등지에 분산 주둔했다. 그러나 이빈과 권율의 군대는 양식 이 떨어져 제대로 싸울 처지가 못 되었다.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라는 명을 받은 의병장 곽재우는 무모한 전쟁에 아 까운 병사를 잃을 수 없다. 라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총 8만 3천의 일본 육군은 1593년 6월 15일, 예전의 침공 루트였던 김해와 창원을 거쳐 함안으로 진격했다. 함안에 주둔해 있던 이빈과 권율, 선거이가 거느린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으며 곽재우도 승산이 없다고 여겨 철수했 다. 다음날인 6월 16일에는 일본 수군 함대 8백 척이 웅천과 제포, 안골포에 나타났으며 그 선봉대가 영등포와 견내량 사이의 해협에 이르렀다. 이를 본 이순신은 통영 앞 한산도에 조선 수군의 주력을 이끌고 나가 대치했으며, 만에 하 나 있을지 모르는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이 때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견제하고 진주성의 조선군을 돕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끝내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6월 19일, 일본군은 진주성 외곽에 도착했다. 이 때 진주성 안에는 창의사 김천일과 진주목사 서예원, 경상우병사 최경회와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 호남의 의병장 고종후와 임회진 등이 각기 군사 3,500명을 거느리고 주둔 해 있었다. 장수들 대부분이 이미 지난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워 이긴 경험이 있어 사기가 충천해 있었 지만, 문제는 진주목사 서예원이었다. 그는 어리석고 겁이 많아서 무장으로서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고, 평소 에도 겁이 많아 다른 장수들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했다. 성 안에는 화포와 화약 무기도 충분히 비축되어 있었고 양곡도 10여만 섬이나 있어 장기전도 문제없어 보였다. 거 기에 지난 진주성 전투의 승전보를 기억하고 있던 인근 주민들도 끝없이 몰려들어 그 수가 6만여 명에 달했다. 그들 중 4분의 1 가량은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이었으며 그들도 병사들을 도와 전투에 참가하였다. 장수들은 상주와 구례에 주둔한 명군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그들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끝내 모습 을 보이지 않았다. 6월 21일, 일본군의 선발대인 기병 2백여 명이 동북산 위에 나타났고 다음 날인 22일 진시( 辰 時 )에 일본군의 기병 5 백여 명이 북산에 올라 진형을 갖추고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진주성의 조선군 수뇌부는 섣불리 군사를 내보내 응전하지 않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 이제 중요한 싸움이 벌 어질 텐데, 자칫 적의 도발에 넘어가 한 명이라도 귀한 병력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1) 207
드디어 일본군 본대가 성 아래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병력을 나누어 1대는 북문, 2대는 서문, 3대는 동문을 향해 공 격을 감행했으며, 나머지 4대와 5대는 각각 동쪽과 서쪽 길 외곽에 주둔하여 혹시 있을지 모르는 조선군의 지원 병력 을 상대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본군이 진주성에 도착하기 앞서, 성을 지키던 조선군 수뇌부는 성의 남쪽은 험한 촉석( 矗 石 )루와 남강이 흐르고 있으니 성의 서쪽과 북쪽에 깊은 해자를 만들면 적이 동쪽으로만 공격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전투가 벌어지자 일 본군은 해자를 파내어 물을 빼고서 다 마른 뒤에 흙을 운반해 날라 해자를 메워 큰 길을 만들었다. 조선군은 일본군 의 기발한 작전에 의표를 찔리고 만 셈이었다. 일본군 병사들이 새로 만든 길을 이용해 성벽 밑으로 다가와 성벽의 밑돌을 파내기 시작하자, 성벽 위에 있던 조선 군이 화살과 총통을 퍼부어 30여 명을 쏘아 맞히자 일본군은 급히 철수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일단 물러난 일본군은 초저녁에 다시 진격해 와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2경에 물러갔고 3경에 다시 진격해 와서 5경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6월 23일, 한낮에 일본군은 본격적인 공세를 세 번이나 감행했다. 그러나 조선군도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모두 격퇴 시켰으며, 밤에 일본군이 다시 네 번을 공격해오자 화포와 화살을 어지럽게 날리며 악전고투 끝에 네 번 모두 물리쳤 다. 이 때 수만 명의 일본군이 외치는 고함 소리가 밤중에 천지를 진동하여 조선군 병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 다. 다음 날인 6월 24일에 적의 증원군( 增 援 軍 ) 5 6천 명이 와서 마현( 馬 峴 )에 진을 치고 또 5 6백 명의 증원군이 와 서 동편에 진을 쳤다. 갈수록 늘어나는 적의 군세와 그에 반비례하여 지원군의 소식이 전혀 없는 조선군 장수와 병사 들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전황 (1) 208
47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2010.05.19 23:59 6월 25일, 일본군은 동문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토옥( 土 屋 )을 세워 성 안을 내려다보고서 조총을 비처럼 퍼부었다. 잠깐 사이에 수많은 조선군 병사들이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러자 충청 병사 황진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성 안에 높은 언덕을 쌓도록 지시했다. 그는 갑옷과 투구를 벗고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날랐으며, 이를 본 성 안의 백성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힘을 다해 축 조를 도왔으므로 하룻밤 사이에 언덕은 완성되었다. 황진은 언덕 위에서 현자총통을 쏘아 일본군의 토옥을 모조리 부 숴버렸으나 일본군은 즉시 다시 만들었다. 이날 일곱 번에 걸친 일본군의 파상 공세를 조선군은 힘겹게 막아낼 수 있 었다. 토옥에서의 조총 공격이 실패하자 일본군은 다음 날인 6월 26일에는 동문 밖에 큰 나무 두 개를 세워 그 위에 판옥 ( 板 屋 )을 만들어 놓고는 그 위에서 많은 불화살을 성 안으로 쏘아대니 성 안의 초가집이 일시에 연달아 불에 타서 연 기와 불꽃이 하늘까지 뻗쳐올랐다. 이에 서예원은 겁을 먹고서 허둥대며 어쩔 줄을 몰라 하자, 김천일은 서예원이 목사의 자격이 못 된다고 판단하여 급히 의병 부장( 義 兵 副 將 )인 장윤을 임시 목사로 삼았다. 진주성을 지키는 조선군에게 악재는 계속 이어졌다. 때마침 날씨가 습기 차서 조선군의 활시위가 느슨하게 풀려 버 렸다. 시위가 풀리면 화살을 쏠 수 없어 이는 활을 주력 무기로 하는 조선군에게 매우 나쁜 일이었다. 더구나 닷새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밤에도 계속 전투를 벌여 조선군 병사들은 모두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일본군은 명나라의 군대도 항복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어찌 감히 항거하는가? 라는 내용의 편지를 성 안으로 쏘 아 보냈다. 조선군 수뇌부는 즉각 우리는 죽음으로 싸울 뿐이며, 더구나 명나라 군사 30만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하 여 남김없이 섬멸하고 말 것이다. 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그 편지를 읽은 일본군 병사들이 바지를 걷고 엉덩이 를 두드리며 명나라 장수들은 이미 다 물러갔다! 라고 조롱하였다. 사실, 명나라 장수들이 물러간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조선군을 전혀 돕지 않고 방관만 했으니, 일본군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편지를 보냈다고 해서 일본군이 공세를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은 이날 낮과 밤에 각각 3~4회의 공격을 감행했 다. 조선군은 모두 막아내었지만 이제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210
6월 27일, 일본군은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언덕을 축조하고 그 위에 대나무를 엮고 조망대( 眺 望 臺 )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조망대에 많은 병사들을 올려 보내 성 안을 내려다보고 조총을 쏘아대게 하자 순식간에 성 안의 조선 군 병사 중 3백여 명이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바퀴가 네 개 달린 큰 나무 궤짝을 만들어 군사들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궤를 옹위( 擁 衛 )하여 나 아가며 쇠망치로 성벽에 구멍을 뚫게 했다. 이 때 일본군이 사용한 나무 궤짝을 귀갑거( 龜 甲 車 )라고 부른다. 성 안의 조선 병사와 백성들은 급히 성 아래로 기름을 붓고 횃불을 계속 던져 귀갑거와 그것을 끌고 온 일본군 대 부분을 불에 태워 죽였다. 요행히 타죽지 않은 일본군들은 도망쳤다. 초저녁에 일본군이 다시 신북문( 新 北 門 )으로 침 범해 오자, 이종인이 휘하 병력과 더불어 힘을 다해 싸워서 많은 적을 죽여 격퇴시켰다. 모든 장수들이 이렇게 분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예원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야간 경비를 맡고 있음에도 임무를 소홀히 하였고, 그 바람에 일본군 병사들이 몰래 와서 성벽을 허물어 성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28일 새벽 무렵에 성을 점검하다 이를 안 이종인이 분노하여 서예원을 크게 꾸짖었다. 일본군이 성 밑까지 바싹 다가오자, 성 안의 병사와 백성들은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다. 한참 싸움이 치열해 질 무렵, 일본군 장수 한 명이 조선군이 쏜 조총에 맞아 죽자 일본군 병사들은 그 시체를 끌고 황급히 후퇴했다. 전투가 끝난 성 안을 황진이 둘러보며 오늘 싸움에서 죽은 적이 천 명은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을 때, 성 밑 에 잠복하고 있던 일본군 병사 한 명이 위로 대고 조총을 쏘았다. 그 총탄이 나무판자에 비껴 맞고 튕겨 나와서 황진 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저격을 당한 황진은 급히 의원 막사로 옮겨졌으나 상처가 깊어 그만 숨지고 말았다. 진주성 전투 내내 황진의 용맹과 전공은 최고였으므로, 그의 죽음을 접한 조선 장병들은 매우 흉흉해하고 두려워하였다. 황진은 임진왜란 기간 중에 활동한 조선 육군의 장수들 중, 매우 용감한 장수로 알려졌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김성일 일행과 함께 일본에 통신사로 갔는데 여비를 모두 털어 일본도( 日 本 刀 ) 두 자루를 사왔다. 이상하게 여 긴 주위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왜적이 언젠가 쳐들어 올 테니 그 때 이 칼로 무찌를 것이오. 라고 자신만만하 게 대답했다. 2차 진주성 전투를 다룬 일본 측의 기록들에서도 붉은 갑옷을 입은 조선 장수가 쌍칼을 휘두르며 우 리 병사들을 보는 족족 베어 죽이니 매우 두려웠다. 라고 전해진다. 다음날인 6월 29일, 황진의 죽음으로 서예원이 그를 대신해서 순성장( 巡 城 將 )이 되었다. 그러나 서예원은 영 장수의 재목이 못 되었다. 그는 겁을 먹고 투구도 벗은 채 말을 타고서 눈물을 흘리며 순행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 한심한 모습에 병사 최경회는 서예원이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하여 죽이려다가 그만두고서 장윤으로 대신 순성장을 삼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장윤도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 날 미시( 未 時 )에 갑자기 비가 내려 동문 쪽의 성 일부가 무너졌다. 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며칠 동안 일본군 병 사들이 성에 달라붙어 성 밑의 기초석을 빼내는 일을 열심히 해왔고, 그런 노력의 결실로 인해 성이 드디어 무너진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211
것이었다. 뜻밖의 기회를 포착한 일본군 병사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오자 이종인은 휘하 병사들에게 활과 화살을 놓아두고 창과 칼을 들고서 육박전을 하도록 지시했다. 격렬한 저항 끝에 일단 일본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철수했다. 그러나 곧 이어 서문과 북문 쪽이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뚫리고 말았다. 일본군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 며 돌진해 오자 잇따른 전투에 지친 병사들이 무너지고 흩어져 모두 촉석루( 矗 石 樓 )로 집결했다. 일본군이 본성으로 올라와 칼을 휘두르며 날뛰자 겁에 질린 서예원이 제일 먼저 달아났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조선군이 사기를 잃고 뿔 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끝까지 도망가지 않고 싸우던 이종인은 결국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나머지 장수들인 김천일과 그 아들 김상건 및 최경회와 고종후, 양산숙 등은 촉석루 밑 남강 바위 위에 모였다. 그 들은 선조가 있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하고 모두 강으로 뛰어내려 투신자살했다. 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우왕좌왕 하며 도망치는 조선 병사와 백성들에게 창고 안으로 들어가면 살려주마! 라고 소리쳤다. 그 말을 믿고 많은 사람들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불을 질러 모두 태워 죽이고 말았다. 창고 안으로 들어 가지 않고 도망치거나 곳곳에서 저항하던 사람들 역시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다. 더 이상 죽일 사람이 없자 소나 말, 개나 닭 같은 동물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리 일본군 수뇌부들에게 진주성 안에 있는 사 람과 동물을 사그리 도륙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일본군이 이토록 잔혹한 살육을 벌인 저의는 어디에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공포 전술 의 일환이 라고 본다. 일본군에게 저항했다가는 이렇게 무자비한 죽임을 당한다는 메시지를 조선과 명에 알린 것이다. 또한 조선인들에게 일본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을 심어주고 그로 인해 조선의 통치를 더욱 쉽게 하 며, 나아가 이 승리를 계기로 조선 정부를 압박하여 조선의 영토 중 일부를 할양받기 위한 일석삼조의 계책도 담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히데요시가 직접 기획하고 일본군 수뇌부가 실행한 이 진주성 전투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만을 심어주었을 뿐, 그들이 기대하던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여러 주장들이 분분하다. 최소 3만에서 최대 8만이라고도 한다. 다만 그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전투가 끝난 후, 감사 김늑이 사근 찰방( 沙 斤 察 訪 ) 이정을 시켜 조사하게 하였는데 성 안에 쌓인 시체가 1천여 구( 軀 )이고, 촉석루에서 남강의 북안( 北 岸 )까지 쌓인 시체들이 서로 겹 쳤으며, 청천강( 菁 川 江 )에서부터 옥봉리( 玉 峯 里 ), 천오리( 遷 五 里 )까지 죽은 시체가 강 가득히 떠내려갔다고 한다. 이로써 열흘 간에 걸친 처절했던 제 2차 진주성 전투는 끝났다. 임진왜란 7년 동안, 한 성을 치는 데 8만이 넘는 대 병력이 동원되어 이렇게 처절했던 싸움을 치른 적은 없었다. 비록 전투의 승리는 일본군이 거두었지만, 절대적으로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212
부족한 병력과 지원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열흘 동안이나 치열하게 맞서 싸운 조선군 장졸들은 대단한 저력과 투혼 을 보여주었다. 만약, 성 안의 병사들이 더 많이 있었고 1차 진주성 전투에서처럼 성 밖에서 일본군을 견제할 지원 병력들이 있었 다면 2차 진주성 전투의 양상이 바뀌지는 않았을까? 지나간 역사의 현장과 비극을 상기해 보면 무척이나 안타깝다. 임진왜란의 결정적 순간,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 (2) 213
48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2010.09.08 17:36 사우디아라비아의 여권에는 여권 소지자가 "왕족의 소유물('belongs' to the royal family)"라고 쓰여져 있다. 사우 디의 평민은 가재도구, 즉 알 사우드 왕가의 제대 왕궁이나 롤스로이스 실버 클라우드 모델과 다를 바 없는 재산에 불과하다. 사우디 왕국 안에는 의회나 헌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리라는 것이 없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충실한 현명하고 관대한 왕과 왕족이 통치하는 낭만적인 왕국이라면 좀 나 을 것이다. 그러나 사우디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최고위층부터 말하자면 1995년 파드 국왕이 뇌졸증으로 쓰려진 이 래, 뇌사 상태에 빠져 있고 그 틈을 타 다른 왕족들은 저마다 국고의 돈을 빼먹으며 방탕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사우디 왕족들은 모두 정부로부터 상당한 수당을 받는다. 왕족들 중 윗세대들은 1만 2천 명은 한 달에 최고 27만 달러를 받으며, 3세대 왕족들은 1만 9천 달러를 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많이 받아도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왕족은 없다. 프랑스 리비에라 해안에서 웬만한 보트라도 한 대 장만해서 파티를 벌일려면 적어도 한 해에 1백만 달러는 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거의 대다수의 왕족들은 건설 프로젝트에서 나오는 뇌물이나 무기 거래, 마약 밀수, 시민 재산의 탈취 와 민간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방식으로 돈을 챙긴다. 그 중에서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장 많이 퍼져 있는 왕족들의 횡포는 바로 시민들의 재산을 노골적으로 빼앗는 일이다. 이러한 왕족의 재산 갈취 행위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진 탓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전통적인 상인 계층과 신흥 중산층들로부터 완전히 민심을 잃고 있다. 만약 어떤 사우디 왕족이 한 레스토랑에 갔다가, 장사가 잘되는 모습을 보 면 보통의 시가보다 훨씬 싼값에 레스토랑을 사겠다고 수표를 긋는다. 레스토랑 주인은 아무런 군말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헐값에 자신의 재산인 식당을 팔아야 한다. 거부했다가는 감옥에 갇히게 되니까. 나이든 왕자들은 한술 더 뜬다. 그들은 자신들이 맡고 있는 정부 내의 직위를 이용하여 더 큰 규모의 부정을 저지 른다. 예컨대 쇼핑몰이 들어서는 목 좋은 땅을 고른 뒤, 법원에 명령을 내려 국가의 이름으로 그 땅을 수용하도록 하 고, 국왕의 명령을 빌려서 그 땅을 자기가 차지한다. 여기에 연루된 돈은 어마어마하며 이런 관행은 갈수록 심해졌 다. 고참 왕자들은 이런 관행에 의존해 비대해진 개인 비용을 충당하기 시작했다. 왕족들의 무분별한 토지 강탈에 지방장관인 알 샤이크는 "왕족이 손을 뻗어서 쥐지 못한 유일한 땅은 달 뿐이 다."라고 개탄할 정도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사우디 왕족들은 술과 마약도 판다. 2002년 7월 미국 플로리다 주 대배심은 사우디의 내무부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215
장관인 나이프 빈 술탄이 1999년 개인 비행기를 이용해 2톤의 코카인을 카라카스에서 파리로 실어 날랐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뿐만 아니라 사우디 왕족들은 은밀하게 테러를 지원하기도 한다. 미국 주재 사우디 대사의 부인은 9.11테러의 주범 중 2명에게 돈을 전달했으며,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9.11납치범의 용의자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사우디 외교관의 명함 이 나왔다. LA를 방문했던 납치범 2명은 사우디 국방부와 계약을 맺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우디인의 마중을 받았다. 다른 사우디인들은 자동현금출납기를 납치범들이 이용하도록 도왔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조사단이 사우디의 살만 왕자가 설립한 보스니아 지원 사우디 고등판무관 사무실을 조사하 자,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 대사관의 폭파 사진과 세계무역센터, 미군 전함 USS 콜호의 사진이 발견되었다. 2002년 11월 워싱턴 주재 사우디 대사관은 알 카에다에 연루된 용의자의 부인에게 새 여권을 발급해 주었다. 미국 연방 대배심에서 그녀를 소환하라는 통보장을 보내자, 그녀는 다섯 명의 자녀와 함께 사우디 정부가 발행해준 여권을 가지고 미국을 빠져 나갔다. 1995년, 미국 올란도를 방문하면서 사우디의 내무부장관 나이프의 부인인 마하는 남자 하인을 구타했다. 그가 20만 달러 어치의 현금과 보석을 훔쳤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6년 뒤, 역시 올란도에서 사우디 공주 한 명이 하녀를 때 리고 계단 밑으로 밀어 떨어지게 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미국 경찰은 공주를 가중폭행죄로 기소했는데, 조사 과정에 서 그녀가 전직 운전기사한테서 6천 달러어치의 전자 제품을 빼앗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우디 왕족들이 벌이는 가장 막장스러운 행태는 바로 섹스에 관련된 일이다. 겉으로 보기에 사우디아라비 아는 세계에서 가장 성적으로 억압받는 나라로 비추어진다. 하지만 돈과 권력을 가진 왕족들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 지 않는다. 1970년대 초, 오일달러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사우디 왕족들은 매춘부 찾기에 골몰했다. 그 때를 맞추어 레바논의 매춘업자들은 해외에서 여자들을 데려와 미들 이스트 항공사의 승무원으로 가장시키고 사우디로 들여왔다. 사우디 왕 족들을 상대로 한 매춘업에서 엄청난 이윤을 얻은 레바논인들 중 10여 명은 고국으로 돌아가 정치판에 뛰어들어 정 치 권력을 거머쥐기까지했다. 왕족용 매춘에 낄 수 없는 다른 사우디인들도 만만치 않다. 그들은 부인을 여러 명 두는데, 가급적 어린 여자일수 록 좋다. 70살 먹은 사우디 남자가 10대 초반의 어린 소녀와 결혼하는 건 사우디에서 이야기거리도 안 될 만큼 흔한 일이다. 다른 부자 사우디인들은 아예 외국으로 나가 창녀를 찾는다. 프랑스의 코트다쥐르 지역이나 몬테카를로에 잇 는 인기 클럽에서 하룻밤만 지새도 사우디의 젊은 남자들이 밤을 세며 여자들과 질탕하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런던의 홍등가와 콜걸 서비스는 사우디인들이 최대 고객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내 총생산에서 놀랄 만큼 큰 부분을 섹스에 지출한다. 우리가 사우디 원유에서 뽑은 휘발유를 차에 채울 때마다 사우디 왕족의 경호원들에게 1달러를 헌납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사우디인들이 옷을 벗고 드러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216
눕는데 추가로 50센트 씩을 헌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에는 사우디 왕족들이 매춘부와 놀아나기 위해서 지은 왕궁들이 즐비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예전에 사우디의 파드 국왕은 프랑스 앙티베(Antibes) 근처에 왕궁 같은 호화 별장을 지었는데, 이 별장 을 관리하는 국왕의 집사가 프랑스 정부에 별장에서 멀리 떨어진 파리와 니스를 오가는 기차 선로를 옮겨 달라고 요 청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프랑스 안에서 회자된다. 기존 선로가 별장에서 그렇게 가깝지도 않고, 선로를 옮기는데 수백 만 달러가 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집사는 그 이유를 말하기를 파드 국왕의 별장의 정원을 거닐다가 멀리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짜증을 낼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프랑스 관리들이 알기로 파드 국왕은 10년 넘게 별장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1970년대 초, 파드 국왕이 니스의 한 카지노에서 한 번에 6백만 달러를 잃고, 여러 명의 젊은 미녀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이 사진에 찍히면서 사우디 왕가의 환락은 갑자기 끝났다. 사우디 왕가는 새로운 놀이터를 찾아야 했다. 그러자 빈털터리 신세였던 모로코의 하산 국왕은 파드 국왕에게 전화를 걸어 모로코 탕헤르 근처의 땅을 팔겠다고 제안했다. 파드 국왕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모로코 탕헤르의 험한 산 속에 여러 채의 별장을 짓고 그곳을 왕족들이 즐기는 새로운 휴양지로 삼았다. 탕헤르는 황량한 무법 지대로, 사우디 내의 완고한 성직자들과 서방 언론의 귀찮은 눈을 피 하면서 사우디 왕족들이 마음껏 주지육림의 환락을 만끽하는데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내가 모로코에 있을 때마다 CIA는 워싱턴 고위층을 친구로 둔 사우디 왕자 한 명이 난잡한 술파티를 벌이다가 젊 은 모로코 여자의 가슴을 물어뜯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하산 국왕은 즉시 이 사건을 쉬쉬하며 덮었다. 여자의 가족에게는 돈이 지불되었고, 대신 그 여자가 입을 다물지 않으면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것이라는 협박까지 들 려왔다. 이 같은 강압 전술은 제대로 먹혀 들어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밖에도 여러 명의 부인을 거느린 사우디 왕자들은 섹스가 가능한 일생 동안 한 사람당 40~70명의 자식들을 낳는 다. 해가 갈수록 사우디 왕족들은 높은 출산율 때문에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미 사우디 왕가에 등록된 왕족만 3만 명에 달한다.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이 숫자는 2배나 3배, 혹은 그 이상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2025년 경이 면 사우디의 원유 생산량도 지금보다 줄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어난 사우디 왕족들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경제 상황은 어떻게 될까? 파드 국왕을 대신해서 사우디의 섭정을 맡고 있는 압달라 왕자는 사우디 왕족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부패하고 사 치스러운 생활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휴가를 보내지 않았으며, 가능하면 사막에서 낙타젖 을 마시고 대추야자 열매를 먹으며, 자식들도 모두 엄격한 평등과 청빈에 기초하여 키웠다. 압달라 왕자는 두둑한 돈 다발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는 다른 사우디 왕족들의 수많은 자식들과는 달리, 자기 아들들에게는 이를 엄격하 게 금지하고 있다.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217
압달라 왕자는 자기가 왕위에 오를 경우, 왕족들의 도둑질을 끝장내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사우디 왕족들은 압달라가 자신들이 누리는 부패와 이권을 축소하려 한다며 분노하고 있으며,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고 그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 -------------------------------- 중심출판사에서 번역된 <악마와의 동침>에서 참조했습니다. 사우디 왕족들의 막장 행태 218
49 너무나도 비참했던 1950년대의 한국
너무나도 비참했던 1950년대의 한국 2010.06.30 17:47 1950년대 말, 한국의 정부 예산에서 국방비의 비율은 33% 가량이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집계된 실업률도 그와 비 슷했다. 더구나 국민들의 절반은 절대 빈곤에 놓인 극빈층이었고, 도무지 가난으로부터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던 상황 이었다. - 김흥수의 <한국전쟁과 기복신앙확산연구>에서 발췌 국가 산업의 대외의존도는 90%에 이르렀고, 공업생산은 일제 말기의 절반도 안 되었다. 심지어 1960년까지도 수도 서울의 집들 중 39%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농촌은 더 심각해서 무려 82%의 가구들이 전기의 공급도 못 받았다. - 한영우의 <다시찾는 우리역사> 제 3권에서 발췌 1955년, 한국의 대외 무역 중 총수출의 50%와 총수입의 30~50%가 일본을 상대로 한 무역에서 나왔다. 또, 미국은 한국에 원조를 주는 조건으로 일본 상품을 사라고 요구했다. 1958년 경에는 일본이 한국에서 수입하는 비중은 총 수 입액의 0.35%, 수출액은 0.53%였으나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비중은 21%, 수출 비중은 57.3%에 이를 정도로 경제 분야의 대일 종속이 심했다. - 이원덕의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 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에서 발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국민들의 막연한 반일 정서에 매달려 지지율을 올려 보려는 포퓰리점적인 외교를 일삼았다. 1955년 한국 정부는 갑작스럽게 한국인의 일본 왕래와 일본을 상대로 한 모든 무역을 전면 중지한다고 선언했고, 1959년에도 일본이 재일교포들을 북한으로 보내는 것을 이유로 다시 대일 경 제 단교 및 왕래 금지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경제 분야 대부분이 일본을 상대로 하고 있던 현실에서 이는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정책이었다. 자칫하면 한국 경제 전체가 파탄으로 치닫을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1955년의 대일 단교 선 언을 불과 열흘 만에 취소했고,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이 끝나자마자 한일회담을 재개한다고 제의를 해왔다. 이승만 정권은 대일 정책은 뚜렷한 원칙도 없이 오직 이승만 본인의 즉흥적인 감정에 맞춰 나가는 식이었다. 그래서 1959년 6월 16일,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한국인 거류민단은 "이제와서는 자유당이나 한국의 현 정부를 믿거 나 지지할 수 없다."라고 발표하기까지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식으로 오락가락하는 이승만 정부의 외교 정책 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너무나도 비참했던 1950년대의 한국 220
- 서중석의 <비극의 현대지도자: 그들은 민족주의자인가 반민족주의자인가>에서 발췌 1956년, 한국 농가들이 안고 있던 부채의 80%는 사채였으며, 대부분의 농민들이 연간 60% 이상의 높은 이자에 고 통스러워하고 있었다. 1957년의 조사에 의하면, 농민들의 절반이 하루 세 끼의 식사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궁핍했 다. 이런 현실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울로 떠나 손에 잡히는 대로 막일이나 하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울로 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운이 좋은 극소수를 제외한 절대 다수의 농민들을 기다 리는 것은 불안한 일용직 노동자나 그것도 잡지 못해서 가난한 실업자로 사는 길 뿐이었다. - 박진도의 <근대화 물결에 떠내려간 농촌>과 한국사연구회의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2권에 서 발췌 1950년대, 한국의 경제적 궁핍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하나 있다. 1956년 6월 16일, 황태 영에 의해 정식으로 문을 연 HLKZ-TV 방송국은 1년도 안 된 1957년 5월 6일, 문을 닫고 말았다. 당시 쌀 한 가마의 가격은 1만 8천환이었는데, TV 한 대의 가격은 무려 34만 환이었다. 이러니 TV를 살 사람이 몇 이나 되겠는가? 황부영은 1년 간의 월부제 판매방식을 도입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TV를 사가는 소비자들은 나타나 지 않았다. 광고수입도 거의 없었고 광고주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던 HLKZ는 결국, 매달 5백만 환의 재정 적자를 이 기지 못한 채 간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왕을 참하라!>를 쓴 백지원 선생께 이 자리를 빌어 부탁드립니다. 조선을 가리켜 "백성들의 피눈물로 버텨 온 인간 지옥이었다."라고 책에 적으셨던데, 제가 보기에는 1950년대의 한 국이야말로 그런 수식어가 잘 어울립니다. 혹시, 앞으로 내실 역사 서적에서 1950년대의 한국사를 다루실 때, 저 문구를 넣어주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당부드립니다. 앞으로 누가 "1950년대가 살기 좋았다."느니 "이승만이 정치를 잘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1. 거짓말쟁이거나 2. 사 기꾼이거나 3. 이승만 정권 시절에 정부 기관과 결탁해서 부정부패로 살았음에 틀림없다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너무나도 비참했던 1950년대의 한국 221
50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2010.12.18 00:39 명나라의 군 편성은 다섯 개의 대관구로 이루어진다. 세분화하면 전군도독부의 예하에 광동, 호광, 강서의 도독부가 배속된다. 다시 호광, 복건의 행도사에는 홍도유수부가 배속된다. 이것은 다시 77개 위와 124개의 소로 편성되어 있으 니, 총 병력은 57만 8천 명에 이른다. 위는 5600명이 정원이며 지휘사가 배치된다. 소는 1120명의 천호소와 120명의 백호소로 구분된다. 병력단위의 가장 적은 분류는 오라고 하는데, 오가 둘이면 12명의 대가 되며, 지휘관은 대총이다. 대가 셋이면 36명의 기가 되고 지휘 관이 기총이다. 기가 셋이면 110명을 초과하는 초가 되며 지휘관은 백총이다.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223
초가 셋이면 450명에 이르는 사가 되며 지휘관은 파총이다. 사가 둘이면 900명에 이르는 부가 되고 지휘관은 천총 이다. 부가 셋이면 2700명에 달하는 영이 되고 지휘관은 장관이 된다. 중군 도독부는 중도 유수부와 하남도사가 배속되며, 50개 위와 26개 소로 편성되니, 총 병력에 40만에 약간 못 미친 다. 후군 도독부는 산서, 대령, 만전의 삼개 도사와 산서행도사가 배속되며, 109위와 32개 소로 편성되니 총 병력은 64만을 넘는다. 다음 우군 도독부는 섬서, 사천, 광동, 운남, 귀주의 다섯 도독부와 협서와 사천 두 군데의 행도사가 배속되며, 111 개 위와 94개 소로 편성되니 총 병력은 72만에 이른다.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224
좌군 도독부는 절강과 요동, 산동의 도독부가 배속되며 66개 위와 71개 소, 총 병력은 45만 가량이다. 여기에 수도인 북경과 제 2의 수도인 남경에는 각각 친군들이 배속되어 있으며, 그것만 합해도 20만이 훨씬 넘는다. 게다가 황제가 거주하는 북경의 황궁인 자금성을 경호하는 금군과 우림군을 포함하면 총 병력은 350만은 가볍게 뛰 어 넘는다. 반란으로 황제가 된 영락제는 1409년 대장군 구복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북방으로 후퇴한 몽골을 치게 했으나, 역습을 받아 구복과 그의 군대가 전멸당하자 자신이 직접 50만 대군을 이끌고 다섯 번이나 북방 원정에 나섰다.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225
명나라는 청과 농민 반란군에 시달리는 후기까지도 북방 지역에 청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50만의 병력을 주둔시킬 정도로 대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 배상열 님이 쓰신 대하소설 <풍운>의 3권에서 명의 군사 제도에 대해 설명이 되어 있어 발췌했습니다. 자료 조사는 저보다 더 철저하시더군요. ^ ^ ~ 3백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렸던 명나라 226
51 청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한 남명의 명장, 이정국
청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한 남명의 명장, 이정국 2010.12.09 20:09 남명이 19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장헌충이 거느렸던 반란군인 대서군이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중 에서도 장헌충의 부하 장수인 이정국은 매우 공이 컸다. 이정국은 열 살 때, 농민 반란에 가담했다. 그는 용감하고 싸움을 잘해 주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만인적이라고 불렀다. 그는 17세에 벌써 2만 명의 병사들을 지휘했다. 장헌충이 청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이후에는 남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명 정권과 협력해서 영력 황제를 추대하는 공을 세웠다. 이정국은 삼국지연의를 좋아했는데, "내가 감히 제갈공명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관우나 장비만 되어도 좋다."라고 말했다. 또, 남송의 충신인 문천상과 육수부, 장세걸처럼 충성을 다하는 신하로 남겠다는이야기도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했다. 1652년, 이정국은 보병과 기병 8만 명을 이끌고 계림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 면서 그는 군대의 규율을 엄격하게 정했다. 모든 군사들에게 백성을 죽이지 말고 민가에 불을 지르지 말며, 여인을 간음하지 말고 가축을 함부로 훔쳐서 먹지 말고, 재물을 약탈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정국의 부대는 이런 규율을 철 저히 지킨 덕분에 백성들의 옹호를 받았다. 계림으로 통하는 길목인 전주 부근의 엄관을 지키고 있던 청군은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에 이정국은 운남에서 가져온 20여 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해 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엄관을 넘었다. 청군의 지휘관인 공유덕이 다시 용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자, 이정국은 코끼리들을 방어선으로 내몰았다. 청군 병사들은 코끼리가 울부짖는 소리 를 듣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다. 이정국은 그 기세를 타고 청군을 추격하며 닥치는 대로 죽였다. 공유덕은 간 신히 살아서 도주했다. 승리한 이정국의 군대는 계림을 포위했다. 사흘 후, 코끼리들이 성문을 돌파하자 공유덕은 절망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이정국은 계속 북상해 형양과 장사, 악주 등지를 점령하고 3천리의 영토를 세력권 하에 두었다. 그의 병사 절반은 서로 다른 민족이었지만, 서로 허물없이 지냈다. 그들이 장사에 반년 동안 주둔해 있었지만 백성들은 그런 군대가 옆 에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이정국의 승리로 청나라 조정이 떠들썩했다. 당시 청나라 조정에서는 남방 7개 성을 포기하자는 말까지 나왔을 정 도였으나, 경근친왕 니칸을 정원대장군으로 파견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남방을 정벌하기로 했다. 니칸이 출정하던 날,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청나라 순치 황제는 몸소 남원에 나와서 전송을 해주었다. 청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한 남명의 명장, 이정국 228
그해 11월, 호남에 들어선 니칸은 첫 싸움에서 남명군을 크게 이기고 상담을 점령했다. 이정국은 청군을 유인하기 위해서 장사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그러자 빨리 적을 토벌하고 승전고를 울리려던 니칸은 급한 마음에 직접 경무장을 한 기병대를 이끌고 추격했다. 이정국은 형양으로 퇴각하는 길에 일부러 투구와 갑옷들을 버리고 밀림 속에 매복했 다. 그들을 추격하던 니칸은 승리를 확신하고 북경에 승전 소식을 알렸다. 승전보에는 "날이 밝으면 형양성을 점령할 것이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편지를 보낸 다음 날 아침, 니칸이 형양성에 접근했을 때 돌연 숲속에서 미리 매복하고 있던 이정국의 군사 가 뛰쳐나와 공격을 했다. 북소리를 크게 울리며 큰 코끼리들이 앞에서 돌격했다. 이 격전에서 니칸은 전사하고 지휘 관을 잃은 청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순치 황제가 형양을 공격하기 전에 보낸 니칸의 첩보를 받았을 때는 이미 그가 죽은 후였다. 이정국의 두 차례 대승은 남명군이 청군을 상대로 거둔 전례 없는 승리였다. 후에 명나라의 유신인 황종희는 이렇 게 칭송했다. "계림과 형양에서 이정국의 싸움은 천하를 뒤흔들었다. 이 두 차례 승리는 만력 무오년(1618년) 이래 천하에서 유례 가 없었던 일이었다." --------------------------------- 신원출판사에서 나온 <중국을 말한다> 14권에서 참조했습니다. 청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한 남명의 명장, 이정국 229
52 조선시대 선비들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어떻게 보았을까?
조선시대 선비들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어떻게 보았을까? 2010.11.03 15:17 선조실록에 삼국지연의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길래, 한 번 올려봅니다. ---------------------------- 선조 3권, 2년(1569 기사 / 명 융경( 隆 慶 ) 3년) 6월 20일(임진) 1번째기사 석강에서 근사록 을 강하고 기대승 윤근수 등이 역사를 공부하는 법을 논하다 상이 문정전 석강에 나아갔다. 근사록( 近 思 錄 ) 제2권을 진강하였다. 기대승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 장필무( 張 弼 武 )를 인견하실 때 전교하시기를 장비( 張 飛 )의 고함에 만군( 萬 軍 )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 사( 正 史 )에는 보이지 아니하는데 삼국지연의( 三 國 志 衍 義 ) 에 있다고 들었다. 하였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가 오 래 되지 아니하여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나, 간혹 친구들에게 들으니 허망하고 터무니 없는 말이 매우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천문( 天 文 ) 지리( 地 理 )에 관한 책은 이전에는 숨겨졌다가 나중에 드러나는 일이 있기도 하지만, 사기( 史 記 )의 경우는 본래 실전되어서 뒤에 억측( 臆 測 )하기 어려운 것인데 부연( 敷 衍 )하고 증익( 增 益 )하여 매우 괴상하고 허 탄하였습니다. 신이 뒤에 그 책을 보니 단연코 이는 무뢰( 無 賴 )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 古 談 )처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잡 박( 雜 駁 )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칩니다. 위에서 우연히 한번 보셨으나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그중의 내용을 들어 말씀드린다면 동승( 董 承 )의 의대( 衣 帶 ) 속의 조서( 詔 書 )라든가 적벽( 赤 壁 ) 싸움에서 이긴 것 등 은 각각 괴상하고 허탄한 일과 근거없는 말로 부연하여 만든 것입니다. 위에서 혹시 이 책의 근본을 모르시는 것은 아닐까 하여 감히 아룁니다. 이 책은 초한연의( 楚 漢 衍 義 ) 등과 같은 책일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종류가 하나뿐이 아닌데 모두가 의리를 심히 해치는 것들입니다. (중략) 위에서 무망( 誣 罔 )함을 아시고 경계하시면 학문의 공부에 절실 ( 切 實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삼국지연의 는 괴상하고 탄망( 誕 妄 )함이 이와 같은데도 인출( 印 出 )하기까지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어찌 무 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문자를 보면 모두가 평범한 이야기이고 괴벽( 怪 癖 )한 것뿐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어떻게 보았을까? 231
53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010.10.28 17:01 서구의 세계 지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2008년 무렵, 인터넷 정치토론 사이트 <서프라이즈>에 개굴이네 집 이라는 필명으로 현실 정치와 국제 정세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다가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된 시인은 자신의 글에 서 서구는 천년 전부터 다른 문명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아마 그렇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막연한 환상일 뿐, 사실이 아니다. 서구의 대다수 석학들은 서양이 세계를 주도하기 시작한 때는 중 국과의 아편 전쟁을 승리로 이끈 1840년부터라고 입을 모은다. 그 이전까지 서구는 다른 문명권과의 경쟁에서 압도적 으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채 백중세였으며, 오히려 때때로 밀리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실제로 보아도 그렇다.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구는 줄곧 무섭게 팽창하는 이슬람 세력에 비해 크게 불리한 위 치에 놓였다.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스페인 등지가 이슬람의 손에 떨어졌으며, 로마 제국의 후계 자인 비잔티움 제국도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두 차례나 이슬람 군대에 포위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리고 713년, 스페인을 정복한 이슬람은 무려 780년 동안이나 스페인을 지배했다. 비슷한 시기에 시칠리아를 정복 한 이슬람 세력도 11세기 초, 노르만인들에게 쫓겨날 때까지 3백년 동안 존속했다. 물론 서구도 나름대로 반격을 가하여 대 이슬람 연합군인 십자군을 결성하여 1097년,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탈 환하고 그 주변 영토를 지배하는 예루살렘 왕국과 안티옥 공국 등을 세웠다. 하지만 서유럽의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에 세운 예루살렘 왕국과 안티옥 공국은 1296년 이집트 맘루크 왕조에게 멸망당했다. 서구인들이 2백년 걸려 중동에 구 축한 세력이 완전히 축출된 것이다. 십자군의 중동 진출은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한 이슬람의 역습을 불러 일으켰다. 1237년, 멀리 동방에서 쳐들어온 몽 골군은 칭기스칸의 손자인 바투의 지휘 아래 라잔과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키예프 등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을 삽시 간에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폴란드와 헝가리로 쳐들어가 그들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만약 1241년, 몽 골제국의 대칸인 오고타이가 갑작스레 죽지 않았다면 몽골군의 진격은 어디까지 계속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오고타이칸의 죽음으로 몽골군의 유럽 원정은 중지되었지만, 몽골인들은 아시아로 돌아가지 않고 우크라이나 지방 에 정착하여 킵차크 칸국을 세운다. 그리고 킵차크 칸국의 초대 칸인 바투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한 베르케는 이 슬람교로 개종하여, 이슬람 세계에 편입된다. 정착을 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해서 몽골인들의 침탈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몽골인들은 수시로 러시아와 리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33
투아니아, 폴란드 등지를 침략해 주민들을 살육했다. 그로 인해 이슬람 세력은 남부 유럽만이 아니라 동부 유럽까지 파고들게 된 셈이다. 특히나 몽골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러시아는 제일 피해를 심하게 입었다. 몽골의 멍에를 쓰게 된 러시 아는 자그마치 3백년이 넘게 그들의 수탈을 받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가혹한 양의 세금을 내지 못하면 아이 들을 노예로 바치거나, 그것조차 없으면 본인의 목을 내놓아야 했다. 수많은 러시아 남자들은 킵차크 칸국의 군대로 징병되어 부림을 당했고, 여자들은 끌려가 성적 노리개가 되었다. 이렇게 몽골 치하에서 억압받으며 살던 러시아인들은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모스크바 공작 드미트리 돈스코이 가 주동이 되어 마마이 칸이 이끌던 몽골군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2년 후인 1382 년, 마마이를 이어 칸이 된 톡타미시는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모스크바를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1480년, 모스크바의 이반 3세가 킵차크 칸국에게 공물 바치기를 거부하고, 1502년 킵차크 칸국이 내분으로 붕괴됨 으로써 형식상으로는 몽골 지배가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1571년, 킵차크 칸국을 계승한 크림 칸국은 모스크바를 기 습하여 무려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크렘린 궁을 제외한 시내의 모든 건물을 불태워버리는 참변 을 일으켰다. 이후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대대적인 국가 개혁을 단행하는 18세기 초까지 크림 칸국에 쳐들어오지 말아달라며 공물을 바쳤다. 크림 칸국은 1783년이 되어서야 예카테리나 대제의 원정군에 의해 소멸되었다.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 이 러시아에 쳐들어 온지 약 540년 동안, 몽골의 존재는 그렇게 러시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몽골의 침략은 러시아와 리투아니아, 폴란드 등 동유럽 일대에만 국한되었지만 그보다 더욱 심각하고 거대 한 위협으로 다가왔던 세력이 있었다. 오늘날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등장했던 것이다.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34
1354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넘어온 오스만 투르크는 1371년 마리차 강의 전투에서 세르비아 군을 격파하고 불가리아를 속국으로 삼았으며, 1389년의 코소보 전투에서는 헝가리와 세르비아 연합군과 싸워 이기고 세르비아를 복속시켰다. 오스만 제국의 급격한 세력 팽창을 두려워한 프랑스와 스페인 등 유럽 각국들은 투르크에 저항하는 십자군을 결성 했으나,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처참히 궤멸당하고 말았다. 1402년, 갑자기 쳐들어온 티무르 군대에게 앙카라에 서 참패하고 술탄(이슬람 국가의 국왕) 바예지드가 포로로 잡혀가 한동안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기는 했지만, 1413년 메흐메드 1세가 등장하여 국정을 쇄신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다시 부흥기를 맞이했다.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35
파멸의 위기에서 벗어난 오스만 제국은 다시 영토 확장을 시작했다. 이를 우려한 동유럽 국가들 중 비교적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폴란드는 이슬람을 믿는 오스만 제국을 저지하는 가톨릭 국가로서의 사명을 내세우고 1444년 바르나에서 그들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폴란드는 국왕인 부아디수아프 3세가 전사하고 전군이 궤멸당하는 대패를 겪었다. 그리고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는 10만 대군으로 54일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끝에, 마침내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켰다. 무려 1063년이나 존속해 오던 로마 제국의 후계국인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이제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 동부의 내륙 깊숙이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 었다. 1455년과 1456년에는 세르비아와 보스니아가 오스만 투르크의 손에 들어갔다. 1470년에는 베네치아의 식민지인 네그로폰투스도 점령되었고, 1479년에는 알바니아마저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마침내 1480년에는 이탈 리아 남부 오틀란토에 투르크 군대가 상륙하여 이탈리아 본토를 노리는 대담한 모습마저 보여주었다. 1481년, 메메드 2세가 사망함으로써 오스만 군의 서진은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1504년 술탄 바예지든 2세는 다시 유럽 원정을 재개하여 루마니아를 정복했으며, 1520년 즉위한 술레이만 1 세는 1526년에는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국왕 라요시 2세가 지휘하는 헝가리군을 왕과 함께 전멸시키고 헝가리 남 부를 장악했다. 또한 1529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포위하여 한 달 동안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연이어 장마가 퍼붓는 악천후로 인해 오스만 대군은 끝내 비엔나에서 철수했지만, 서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인 비엔나에까지 오스만 군대가 몰려온 사건은 유럽인들에게 크나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 1559년에는 트란실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으며 1566년 9월, 술레이만 1세는 직접 원정에 나서 헝가리 의 베오그라드를 점령하고 시게트바르 요새를 포위하고 맹공격을 퍼부은 끝에 함락시켰다. 9월 5일,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오스만 군대를 철수했지만,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 1621년 술탄 오스만 2세는 10만의 병력과 66문의 대포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코침(Chocim)을 침공했으며, 1682 년 술탄 메메드(Mehmet) 4세의 명령을 받은 오스만 제국의 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Kara Mustafa Pasha)는 15만 의 대군을 이끌고 두 번째로 비엔나를 공격했다. 유럽을 향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은 약 3백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압도적인 대병력과 물량 공세에 번번이 참패한 유럽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거대한 공포심을 느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침 략을 받은 적이 없는 잉글랜드에서조차 16세기 말, 역사가 리처드 놀스가 투르크 제국은 오늘날 지구상 전체를 두 렵게 한다. 라고 술회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내세운 이슬람권의 위협에 서구는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는 19세기 중엽까지 시달려야 했다.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36
시인 개굴이네 집 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한 서구의 이미지는 다분히 환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17세기 말까지 이슬람권의 위협에 시달렸던 유럽 237
54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010.12.18 01:48 크림 칸국(crimean khanate)은 1430년, 킵차크 칸국의 시조인 바투의 동생의 후손인 하지 기레이가 세웠다. 1771 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가 보낸 러시아 군대가 정복할 때까지 하지 기레이의 가문이 통치했다. 크림 칸국은 지 금의 우크라이나 영토 남부와 크림 반도 인근을 지배했다. 크림 칸국의 주민들 일부는 크림 반도에 세워진 도시에 정착해 살았으나, 칸국의 구성원인 타타르(몽골-투르크계 주민)족들 대부분은 여전히 선조들처럼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다. 하지 기레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이 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하지 기레이의 여섯 째 아들 인 멩글리 기레이는 제노바 인들과 손을 잡았다가 크림의 도시인 카파로 쳐들어온 오스만 투르크 제국 군대에게 포 로로 잡혔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하는 속국이 될 것을 맹세했고 그 덕분에 잡힌 지 2년 후에 풀려났다. 그러나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 사실은 오히려 멩글리 기레이와 그의 후계자들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 러시아에 남은 마지막 몽골 세력, 크림 칸국의 군사들 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