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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016년 4월 30일 ~ 5월 17일 제173호 노동자 연대 27년 만에 진실이 밝혀진 영국 힐즈버러 참사 경찰이 무고한 축구팬들을 죽게 만들었다 김종환 영국 힐즈버러 참사는 1989년 4월 축구 경기장에서 96명이 압사당한 사 건으로 영국판 세월호 참사 라 불린 다. 축구장이 붕괴한 것도, 총기 난사 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96명이나 사망 한 것은 순전히 경찰이 관중을 한 곳으 로 무리하게 입장시켜서 생긴 일이었 다. 희생자 중 60명은 25세 이하였고 그중 37명은 청소년이었다. 최근 영국 법원은 힐즈버러 참사의 원인이 술 취한 관중 탓이 아니라 당 일 현장을 지휘한 경찰에 있다고 판결 했다. 유가족들이 27년 동안 줄기차게 주장해 온 진실이 마침내 인정받았다. 영국판 가만히 있으라 참사 당일, 힐즈버러 축구 경기장에 아수라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야말로 서는 FA컵 준결승전이 예정돼 있었 영국판 가만히 있으라 였다. 실제로 당 다. 관중석의 해당 구역이 이미 포화 일 현장을 지휘한 경관은 훗날 우리는 상태였는데도 경찰은 계속 관중들을 관중들의 경기장 난입을 막는 일을 최 그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당시 영국 축 우선으로 여겼다 하고 진술했다. 구 경기장의 관중석은 하층부가 입석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경찰이 당일 이었고, 축구장 내 난동을 막는다는 명 경기장 통제소에서 지휘만 제대로 했 분으로 내부 이동이 어렵도록 설계됐 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 이라 었기 때문에 관중들은 경찰이 허용하 고 울분을 토했다. 는 곳으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사람들이 관중석을 필사적으로 벗 출입구의 폭은 고작 77 센티미터였고, 어나자 경기 진행은 어려워졌고 경찰 어두워서 앞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은 결국 경기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여 결정적으로, 현장을 지휘한 경관은 전히 관중의 이동을 막는 데 치중했다. 경기 전에 사람들을 최대한 입장시키 심지어 경찰은 구호에 나서려고 입석 려고 회전문까지 개방하는 통에 입장 구역을 벗어나려던 관중을 구속하겠다 줄이 밀리는데도 계속 우겨 넣었다.(그 고 위협했다. 구급차 44대가 경기장으 러나 참사 직후 경찰은 관중들이 억지 로 왔지만 경찰은 오직 한 대만 경기장 로 문을 열어젖혔다고 거짓말했다.) 안 에 들여 보냈다. 인근 병원에서는 환자 쪽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압사 직전이 들의 규모를 예상하지 못해 이송된 환 었는데도 말이다. 그라운드 쪽 관중들 자도 제대로 처치를 받지 못하는 일이 은 뒤에서 밀려드는 관중 때문에, 그라 속출했다. 제대로 된 응급처치만 받았 운드와 관중석을 구분하는 철망에 눌 어도 희생자 중 절반가량(41명)은 살 려 질식사했다. 수 있었다고 2012년의 진상조사위원 심지어 경찰은 압사 공포를 느낀 관 회 보고서는 결론 내렸다. 정부가 긴급 중들이 철망을 오르거나 다른 구역으 상황 을 선포하지 않아서 잃은 목숨이 로 벗어나려 하자 이를 제지하며 도로 었다. 어처구니없는, 그러나 예고된 참사 힐즈버러 경기장은 월드컵 8강전이 운영하는 구단 측은 비용상의 이유로 열릴 정도로 중요한 경기장 중 하나였 이를 무시했다. 지만 안전 관리는 형편없었다. 참사 전 당시 힐즈버러를 관할한 시 공무원 인 1981년, 1987년, 1988년에도 관중 은 안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정치적 결정 이었다고 말했다. 참사 경기장 하층부를 입석으로 운영하 3년 전에 안전 사항을 지적하자 경기 면서 입장 인원을 확인하는 기본적인 장 운영자들은 격노하며 운영을 방해 수단도 구비돼 있지 않았다. 이는 명백 하면 시당국을 고소하겠다고 으름장 한 안전 규정 위반이었지만 경기장을 을 놨다. 1989년 참사 당시의 모습 경찰이 관중을 입석으로 우겨넣고 탈출마저 제지해 많은 희생자들이 철망에 눌려 질식사 했다. 그런데 경찰은 참사를 희생자 책임으로 몰고 모욕했다. 진실과 정의의 주역들 4월 26일 법원 앞에서 유가족들이 진실을 인정한 판결을 환영하며 환호하고 있다. 온갖 모욕과 고통 속에서도 투지를 꺾지 않 아 온 유가족들은 책임자 처벌을 위한 투쟁을 이어갈 것이라 말한다. 권력자들은 국민보다 자신의 수족(경찰)을 더 지키려 했다 세월호 참사에서처럼 영국에서도 구조에는 무능한 경찰이 은폐에는 신 속했다. 경찰은 참사 발생 2시간 만에 경찰 사진 팀에게 경기장 주변 쓰레기통을 뒤져 술병 사진을 찍으라고 시켰다. 술 취한 훌리건들이 무리하게 입장한 탓 으로 몰아가려고 작정한 것이다. 경 찰은 10살 아이는 물론 사망자들에게 서까지 혈액을 채취해 음주 측정을 했 고 사망자 96명에게 전과 기록이 있는 지 뒤졌다. 참사 나흘 만에 언론 재벌 루퍼트 머 독이 운영하는 보수 신문 <선>은 힐즈 버러의 진실 이라는 1면 헤드라인으로 술 취한 관중들이 억지로 출입문을 열 어 기어이 사고를 냈다는 경찰의 주장 을 뒷받침하는 기사를 실었다. 생존자 들이 쓰러진 관중들의 호주머니를 털 고, 오줌을 갈기고, 인공호흡을 하는 경찰들에게 발길질을 했다 하고 날조 했다. 무질서한 대중이라는 편견을 조 노동당도 은폐에 가담하다 1997년 노동당은 18년 만에 정권교 체를 이뤄 냈다. 그러나 노동당의 집권 은 노동자 투쟁이 전진하면서 이뤄냈 다기보다 노동당이 우경화해서 지배자 들의 환심을 산 덕분이었다. 영국 보수 정치의 거물이자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은 1997년 선거에서 노동당을 후 원했고, 이런 우경화를 이끈 노동당 총 리 토니 블레어(사진)는 선거 후 머독의 자녀 중 한 명의 대부( 代 父 )가 됐다. 노동당은 머독의 치부인 힐즈버러 사건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노동당 의원 앤디 번햄은 총리 시절의 블레어 가 루퍼트 머독을 건드리게 되니까 힐 즈버러 사건을 파고 들지 마라 하고 직 접 지침을 내렸다고 (2015년에야) 폭 로했다. 성하려는 시도였다. 힐즈버러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우리 는 훌리건이 아니고, 참사의 책임은 바 로 경찰에게 있다 하고 거듭 항변했다. 한 유가족은 숨진 아이 아빠가 술 취한 훌리건이 아니라 한 가정의 건실한 가장 이었음을 믿어 달라 하고 울부짖었다. 후속 조사 과정에서 경찰 고위층은 당일 현장에 있던 경관들의 진술을 일 일이 확인하며 그런 진술은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니 진상조사위원회에 제출하기 전에 다시 숙고하라 고 지침 을 내렸다. 경찰 한 명은 당일 비번이라 관중으로 경기장에 있었는데, 그는 주 변 경찰들이 내 입에 자신들의 말을 우 겨 넣으려 했다 며 진술 강요를 폭로했 다. 또한 경찰은 생존자들을 취조하면 서 작성한 진술서를 당사자에게 보여 주지도 않고 서명하라고 윽박질렀다. 당시 작성된 생존자 증언 이 수십 년 뒤 공개되자 당사자들이 자기가 한 말과 다르다고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노동당 집권 후 만들어진 새로운 진 상조사위원회의 결론은 대처 정권 하 의 진상조사위원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경찰이 진술을 조작했다 는 숱 한 증언도 인정하지 않았다. 참사가 벌어진 지 21년, 노동당 집권 12년이 지난 2009년이 돼서야 노동당 정부는 진실 인정을 요구하는 운동의 압력을 받아 수사자료를 공개하라고 남요크셔 경찰청에 지시했다. 당시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생존자 와 희생자들을 매정하게 비난하며 경찰 을 감쌌다. 참사가 벌어진 힐즈버러를 관할한 남요크셔 경찰이 1984~85년 광원 파업 당시 오그레이브 전투 에 투 입돼 파업을 파괴하는 데 주된 공을 세 운 바 있기 때문이다. 남요크셔 경찰청 장 피터 라이트는 5년 전 오그레이브 전투 를 지휘한 장본인이었다. 보수당 정치인은 TV에 나와서 책 임을 희생자들 탓으로 몰아갔다. 또한 경찰에 불리한 증언을 삭제하도록 진 상조사위원회에 압력을 넣었다. 보수 당 정부가 구성한 진상조사위원회는 1989~90년에 걸쳐 활동했지만 많은 증거를 인정하지 않았고, 경찰과 경기 장 운영진을 질책하긴 했지만 어떠한 징계도, 고발 조처도 뒤따르지 않았다. 당일 현장 책임자는 징계 없이 조기 퇴 직했고, 경찰 두둔에 앞장서고 진상조 사를 훼방한 보수당 정치인과 경찰 간 부는 훗날 기사 작위를 받았다. 책임자를 처벌하라 유가족은 이번 재판 결과를 환영하 면서도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밝혔 다. 참사 당시 현장을 지휘한 경찰이 나, 진상조사를 방해한 경찰 고위층은 아무런 징계도 처벌도 받지 않은 것이 다. 참사로 당시 17살이었던 동생을 잃은 슈테판 그레엄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재판은 우리가 그동안 투쟁해 온 것이 정당했음을 완전히 입증했습니다. 저는 줄곧 관중들이 경찰의 과실치 사로 죽었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이 인 정받아서 정말 기쁩니다. 특히 관중들 은 이번 참사에 조금도 책임이 없다 고 판사가 분명히 밝힌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죄없는 사람을 죽여 도 감옥에 가지 않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희생자 96명을 위 한 정의를 찾으려는 투쟁은 계속될 것 입니다. 사진 출처 Joe Gidden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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