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의 향기 사랑하는 일과 닭고기를 씹는 일 최승자,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유 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강사/문학평론가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우리 시의 향기 97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1) 1) 최승자(2010),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32~33쪽. 98 새국어생활 제22권 제4호(2012년 겨울)
사랑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증오? 무관심? 당신이 어떤 답변을 마 련했든, 지금 나는 닭고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닭고기를 씹어야 하는 일 이라고 답하고자 한다. 적어도 우리가 여기서 함께 읽고자 하는 시 에 의하면 그렇다. 사연을 풀어 보자면 이렇다. 자, 상황을 하나 떠올려 보자. 당신은 지금 누군가의 소개로 이성과 첫 만남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식사 때가 되었다. 무엇을 먹으러 가겠는가? 이 질문에 대뜸 닭볶음탕 이나 찜닭 이라고 답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 은 씹고 뜯는 행위, 즉 현실의 적나라함을 보여 주는 상징적 행위를 동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좀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살아가는 일이 란 씹고 뜯는 일이다. 당신의 오늘 하루를 되새겨 보라. 씹고 뜯지 않 고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비유적으로도 그렇다. 그 일에서 성공하면 맛보고 즐기고 의 단계까지 이를 수 있지 만, 대개는 씹고 뜯는 일에서 일상은 굴러가기 마련이다. 이 역시 물 리적으로도, 비유적으로도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씹다 와 뜯다 가 비단 음식물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동작만을 나타내지 않고 그 외연 을 넓혀 비유적으로도 널리 쓰인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누군 가를 모함하거나 욕할 때도 우리는 씹다 와 (헐)뜯다 라는 단어를 사용 한다. 마키아벨리나 홉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강조하고, 인간의 사회적 삶을 만인 전쟁의 형태로 이야기한 것도,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그리 지나친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세상 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은 현실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은 그 상상을 뛰어넘는 전제적인 힘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것은 마치 가랑비라 생 각하고 우산 없이 나갔을 때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와도 같아서 우리를 무람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호랑이나 사자, 유령을 무서워하지만, 하루 하루를 호랑이나 사자, 유령들과 보내거나 스스로 호랑이나 사자, 유령 이 되어야 하는 어른들은 그러한 현실이 두려울 뿐이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은 그런 우리 시의 향기 99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의미심장할 뿐, 괴물과의 싸움에서 괴물 이 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괴물이 되지 않으면 제물이 되 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우리 가 여기서 같이 읽는 시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대한 애처로운 몽상에 서 기인한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시인은 그저 사랑에 맞선 현실의 견고한 크기 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인데, 여기까지 상념이 미쳐 버렸다. 아마도 이 역시 현실 의 힘이 작용한 탓이리라. 이 시의 제목은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이고 내 용 역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럼 현실 말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그런데 현실 말고 사랑 이라고? 사랑은 현실이 아닌가? 아마 반쯤은 그렇고 반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매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공중 부양이 가능하 기 때문이다. 사랑은 존재를 들어 올린다. 적어도 지면에서 한 3센티미 터 정도는 들어 올린다. 그러니 지면에 허다한 돌에 채일 일도 없고, 흙먼지에 신발을 더럽힐 일도 없다. 사랑은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다. 그곳의 공기는 훨씬 부드럽고 온화하고 향기롭다. 그곳에서는 하루 종 일 뮤즈가 노래하며, 천사가 나팔을 분다. 아니, 우리 자신이 뮤즈가 되 고 천사의 나팔이 된다. 사랑에 빠진 자들을 잘 살펴보아라, 등 뒤에 날개가 돋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 바로 앞 단락을 한 줌의 냉소나 회의 없이 읽을 수 있을까? 그 러기 위해서는 존경할 만한 무지나 무감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랑은 100 새국어생활 제22권 제4호(2012년 겨울)
천상에서 시작해 자동차 안에서 끝난다 라는 니콜라스 루만(독일의 사 회학자)의 말은 지극히 냉소적이어서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지만, 이 말 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여력이 우리들에겐 없다. 사랑의 시작은 솜 사탕을 한가득 입안에 넣고 그 달콤함을 음미하는 일이지만, 곧 그것은 현실의 밥 때론 식어 빠지거나 쉰 밥 을 묵묵히 씹는 일이고, 종국에 가서는 모래를 삼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여전히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 쪽이다. 사랑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은 중력을 거슬러서 공중 부양한 채로 살아가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지면에 더욱 단단히 발을 딛고 살아가겠다는 이야기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대를 아무 리 사랑한다 해도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뼈가 목구 멍에 걸리거나 체하는 일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추방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 반대다. 현실의 교주가 이단의 혐의를 씌워 독 방에 가둬 둔 사랑을 우리는 구출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출은 단순히 사랑이 흔히 불러일으키는 낭만적 흥취만을 복원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점을 읽을 수 있다. 일단 우리가 계속 주목한 둘째 연을 다시 읽어 보자.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우리 시의 향기 101
~다 해도 라는 구절은 대개 그 앞의 내용을 바로 뒤에 이어지는 내 용으로 부정하려 하는 경우에 쓰인다. 가령 권력이 아무리 세다 해도 국민이 이긴다 는 말처럼 말이다. 이 시에서도 일단 사랑은 닭고기를 씹는 일 과 눈물을 삼키는 일, 즉 현실 로 인해 부정되거나 적어도 그 가치에 있어서 하락이 일어나고 있는 듯 보인다.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라는 말은 사랑의 무력성에 대별되는 현실의 완고함과 강함에 대한 상징적 발언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들은 더욱 살벌하다. 비유 가 아니라 주먹이며,/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라는 말은 앞서 말 한 현실의 힘의 역학 관계에 대한 비유 주먹 을 이야기할 때조차 시 는 비유 를 쓴다 이다. 바스라지는 주먹 과 바스라뜨리는 주먹 이 있 을 뿐이며, 그러한 주먹의 세계에서 사랑은 링 위에 오른 갈비씨만큼이 나 무력하고 처연하다. 그렇다면 시인은 사랑을 부정하는가?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에서 이룰 수 없는 것 이란 무얼 말하는 걸까? 두 갈래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루다 라는 말 은 사랑 과 일 둘 모두를 목적어로 삼는다. 사랑을 이루다, 원하는 일을 이루다 처럼 쓰이는 게 대표적인 용례이다. 사랑도 일도 그 근원 에 있어서는 모두 이루기 힘든 대상이다.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맹신에 빠져 집착하는 일은 생을 그르친다. 다음에 이어지는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라는 구절은 그 집착 의 헛됨을 보여 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성서의 <전도서>에 나오는 구절이기도 한데, 시인은 이 구절을 차용해 헛됨과, 그 헛됨의 이룸에 대한 미망을 경계한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비유 에 비해 주먹 의 힘을 강조하고, 사랑 에 비해 닭고기 와 눈물 의 힘을 강조한 시 102 새국어생활 제22권 제4호(2012년 겨울)
인이 이제 그 사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우리의 관심사다.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반전이 일어나는 부분이다. 시의 앞선 구절들은 바로 이 구절부터 일어나기 시작하는 도약을 위한 디딤돌 같은 구실을 한다. 가거라, 사 랑인지 사람인지, 에서의 사랑 은 바로 그 앞에 나오는 구절에서의 의 미를 이어받는다. 즉, 이룸에 대한 헛됨 에 사로잡혀 있는 사랑을 말한 다. 그때의 사랑이란 닭고기 와 눈물 의 힘을 경시하는 낭만적 경솔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제대로 사랑하려면 공중 부양하며 노닐 것이 아니라, 지면에 굳건히 발을 딛고 뚜벅뚜벅 우직하게 걸어 나가야 한 다. 그것이 때로 무참 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살아,/기다리는 것이다,/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라는 구절을 통해 시인이 이야 기하고자 하는 바도 이것에 가깝다. 특히, 살아, 라는 말이 독립된 한 행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너를 위해 죽는 다는 말이나 행위는 실제로는 대부분 자기 자신을 위해 그렇 게 하는 것에 대한 기묘한 심리적 수사학적 도착인 경우가 많다. 유치 한 나르시시즘의 젖을 먹고 자란 자가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은 요원한 우리 시의 향기 103
일이다. 중요한 것은 사는 일이다. 살아가는 일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오늘 하루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투의 말을 했을 때, 프랑스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몽테뉴는 이런 식으로 대꾸했 다. 뭐라고? 자네는 오늘 살아 있지도 않았단 말인가? 살아가는 것, 그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네. 사랑도 그렇다. 사랑한다는 것은 유치 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 아니다. 드라마의 바깥, 결코 녹 록하지 않은 그 현실을 온몸으로 사유하는 일이다. 그 사유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살아 야 한다. 그게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한 일이라 할지 라도 말이다. 그래서 사랑은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라, 중력의 이 치를 몸에 각인하는 일이다. 물론 이때 각인 이라는 말은 순응 의 동의 어가 아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104 새국어생활 제22권 제4호(2012년 겨울)
순응의 논리로는 위와 같은 발언을 할 수 없다. 이 구절에서 흥미로 운 것은 나 의 몸을 분지르고, 팔과 다리를 꺾는 주체가 너 가 아니라 사랑 이라는 점이다. 즉, 화자는 꿋꿋이 살아가면서 현실과의 연관 아 래 얼크러져 있는 사랑 속에 몸을 내어 맡긴다. 현실의 독재 아래 투옥 된 사랑을 구원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 서 한 음절이 각기 독립된 한 행을 구성하며 꽃병에 꽂힌 꽃의 형태를 상형 문자처럼 보여 주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엄정한 하나의 현실 로서의 사랑에 투신하는 것을 이미지화해서 보여 주고자 하는 노력으 로 보인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행여나 닭고기를 씹는 일이 사랑하는 일을 깔보고 흘겨보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식시킨다. 살아간다는 것은 닭고기를 씹고, 눈물을 삼키는 일인 동시에 사랑하는 일이다. 셋 중 어느 하나에 삶의 전권을 부여할 수는 없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 랑하는 일에 물론 닭고기를 씹고 눈물을 삼키는 가운데 사랑하는 일 조금쯤 힘을 더 실어 주고 싶은 것이 숨길 수 없는 마음이기는 하다. 그러니 우린 이제 이 시를 바꿔 쓰도록 하자. 우리가 아무리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우리가 아무리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우리 시의 향기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