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Member Column 1 <인사이드 르윈>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미국의 아이돌 가수이자 배우인 저스 틴 팀버레이크가 조연으로 출연하는 조엘/에단 코엔 형제 감독의 작품인데 자그마치 2013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데다 2014년 전미비평가협회상 감독상, 작품상, 작가상을 휩쓸었다. 국내에서는 올 초에 작은 극장 몇 군데서 개봉했었는데 아직 상영 선택의 문제 류 혜 림 Hyerim Ryu 삼성물산 건설부문 Civil사업부 과장 중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본 영화 속 캐릭터들 중에서 지질함으로 치면 상위 3% 안에 들 법한 포크 뮤지션 르윈 이 주인공이다. 함께 듀엣을 하던 파트너는 자살했고 매니 저는 무능해서 음반이 팔리거나 저작권료를 받을 수도 없어서 지인들의 집을 떠돌며 노숙자처럼 생활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친구의 여자친구 진 을 임신시켰다. 이렇게 써 놓으니 심각한 상황에서도 음악에 대한 예술혼을 불태우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해 야 할 것 같지만, 르윈 은 예술혼도, 뛰어난 실력도, 성실함도 없다. 사람에게 살갑게 굴어 환영 받을 성격도 못 되고 가끔은 자존심도 없어 보인다. 아, 영화 이야기를 이렇 게 길게 하려던 것은 아니고, 그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르윈 :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 첫째는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사람과 진 : 그리고 루저? A Matter of Choice
77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우리는 (아닌 척 하거나,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세상 사람 들을 나눈다. 내가 공과대학에 막 입학했던 때에는 이런 농담이 유행했다. 세상에는 남자 와 여자와 공대여자가 있다든가, 공대 여자들은 공주가 되거나 남자가 되거나 캠퍼스 커 플이 되어야 살아남는다든가. 시간이 지나면서는 공강 시간에 스타크래프트 하러 가는 친 구들과 당구 치러 가는 친구들을 나눌 수 있었고, 상대가 누구든 항상 연애 중인 녀석들과 어쩐지 늘 솔로인 친구들을 꼽을 수 있었고, 졸업을 앞두고는 취직을 준비하는 학생과 고 시를 준비하는 학생과 대학원을 준비하는 학생으로 정리가 되었다. 대학원 시절에도, 회 사 생활을 하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두세 가지 부류로 나뉠 수 있고 나 역시 그 중 어 느 한 쪽에 속해 있다. 그럼 이번에는 이렇게 나누어 보자. 문제의 답을 직접 선택하는 사 람들과 타인의 선택을 그냥 따르는 사람들. 나는,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할까? 르윈 이 진 에게 말한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어. 첫째는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사람과. 진 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르윈 의 말을 자른다. 그리고 루저? 영화<인사이드 르윈 (미국, 2013)>중에서 제62권 제5호 2014년 5월
78 선택에 대해서 내가 자주 받는 질문들은 대강 이렇다. 토목과나 환경공학을 선택한 이 유, 지금의 회사를 선택한 이유, 고양이를 키우는 이유, 머리모양을 바꾼 이유 등등. 그리 고 대개의 경우 나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하물며 주말에 친구와 만나 무엇을 먹을 지 정 하는 것도 엄청나게 고민되고 어려운 일인데, 앞으로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지도 모를 선 택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한두 가지 이유만으로 결정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오히려 가장 정확한 대답은 정말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일 지도 모른다. 사실은 주어 진 상황에서 매 순간 내 나름대로 많이 찾아보고 깊이 생각하고 오래 고민하고 어느 한 가 지를 선택하는 것인데도 그 과정을 말로 풀어놓으면 시시해지기 일쑤다. 그래서 나도 대 학입시 면접에서 제 이름이 붙은 다리를 만들고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라고 뻔뻔하게 대 답하기는 했지만, 토목공학을 고를 때는 다른 모든 수험생들이 그랬듯이 내 운 좋았던 수 능성적과 모자라는 논술 실력과, 적성검사 결과나 내신성적과, 당시의 대학별 학과별 커 트라인과, 미래의 직업과 생활수준을 복잡하게 고려했다. 환경공학이라는 대학원 전공을 선택할 때나 박사통합과정 진학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지금의 회사에 입사한 과 정에는 그보다 마음이 훨씬 더 복잡했다. 다들 그렇지 않은가? 그 때 그 말 한 마 디가 내 미래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는 식의 회상은 사실은 멋지게 다듬어진 기억일 뿐이다. 엔지니어인가, 매니저인가? 박사학위 후 시공사에서 근무한 지 3년 된 미혼여성 엔지니어의 진로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그 렇게 간단하지 않다. 선택의 문제 최근에도 인생에서 꽤나 중요한 선택을 한 가지 해야 했다. 3년이 채 안 되는 짧은 회사생활의 친정 같은 엔지니어링본부를 떠나 사업부의 전략기획파트로 부서를 옮긴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자리이동이 아니라 엔지니어와 매니저라는 직무 중 후자를 선택했 다는 뜻이고, 짧게는 향후 5년간 길게는 앞으로의 모든 경력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결정이었 다. 그래서 평소보다 좀더 신중해지려고 친한 회사 선배들과 나를 잘 아는 친구들에게 의 견도 들었고 다행히 모두 내 일처럼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한쪽으로 표가 몰려서 결 정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편한 상황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인하 여 내 인생의 방향은 고등학교 이과계열 진학 이후 점점 구체적으로 현실화 되어 오던 엔 지니어의 길에서 조금 비껴났다. 신규부서 발령 공지가 나고 자리를 옮기기 전 2주 동안 그 동안 알고 지냈던 엔지니어 링본부의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해 왔다.
나 : 아, 그게 거기서 자꾸 오라고 해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아하하하. 부장님 : 아니 류과장, 왜 갑자기 전략기획으로 가는 거야? 79 옆에 있던 다른 과장님 : 맞아, 과장님 발령 나셨죠. 어쩌다 그 쪽으로 가세요? 이런 어색한 대화를 출근 엘리베이터에서, 휴게실에서 모닝커피를 타다가, 점심시간에 회사 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아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했다는 말이다. (요즘은 가서 잘 지내냐고 비슷한 빈도로 물어보신다.) 물론 저 대답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것처럼 완전히 맞는 답도 아니다. 그래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다니. 내 대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나는 두 가지 인간 부류 중 후자-어쩔 수 없었 다고 생각하는 소심하고 수동적이고 주체성 따위는 내다 버린 부류에 속하는 걸까? 반면 엔지니어로 계속 남아있기를 선택했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또는 1년 후에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게 될까? 선택을 하는 시점에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 다. 지금 먹고 싶은 음식이 자장면인지 볶음밥인지 헷갈린다면 둘 중 하나를 먹어봐야 알 수 있다. 당신이 이미 수많은 자장면을 먹어보았고 오늘 그 중에서 제일 맛있는 집에 가 서 주문을 하는 경우와는 다르다. 우리는 경험이나 정답이 없는 선택을 할 때 미래를 장 담할 수 없기 때문에 고민하고, 망설이고, 사람들과 상의하고, 알려져 있는 장단점을 찾 아내 저울질 한다. 그래서 내가 부서 이동에 대해 조언을 얻으려고 만난 사람들도 제각기 다른 대답을 해 주었다. 모두 각자의 경험과 나에 대한 어떤 이해를 바탕으로 최선의 답 을 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선택을 했다. 어쩌다 보니 가 아니라 생각하 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 마음 속에서 어느 쪽이 49이고 어느 쪽이 51인지 가려낸 것 이다. 사실 타인의 선택이나 조언을 따른 것 같아도,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따르기로 선택 하는 것이다.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라고 말하는 사람도 결국 스스로 의 책임을 비켜갈 수 없다. 제62권 제5호 2014년 5월
80 세상에는 여전히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영원히 답 없이 불안한 선택의 연속인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선택의 찰나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경험을 쌓으면 그 선택이 맞는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알 게 된다. 부서를 옮긴 지 겨우 1주일째다. 팀 분위 기도 완전히 다르고 사람들의 성향도 어쩐지 익숙 하지 않으며 하는 일도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 다. 하지만 아직 이것을 오답이라고 하기에는 너 무 이르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어차피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이 제부터 내가 할 일은 이 상황을 정답으로 만들어가 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여전히 두 가지 부 류의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결정을 정답으로 만들 어가는 사람과 오답으로 만들어가는 사람. 나는 내 가 전자에 속한다고 믿는다. 내 선택으로 인해 잠 깐 동안 문제가 악화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내일 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예측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내 정답을 지어나가는 것 이다. 언젠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선택의 순간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나를 무너뜨릴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건 실수였다고 스스로 를 인정하고 용서하고 다시 정답을 찾아가면 되니까. 그것이 내가 엔지니어가 되든, 매니 저가 되든, 미혼이든 결혼을 하든, 여자이든 남자이든 살아가고 살아남는 방식이다. 전공 에 대한 애착을 조금 덜어내고, 경영과 경제를 배우고, 시장을 보는 눈을 키우고, 기업의 생리를 이해하게 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다. 엔지니어로서의 길을 버린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든든한 배경으로 생각하면 된다. 누가 아는가, 또 다른 길이 열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전히 궁금한 것 한 가지가 있다. 진 이 르윈 의 말을 자르지 않았다면 르윈 은 사람들을 어떻게 나누었을까? 세 부류로 나누는 사람? 나누지 않는 사람? 아니면 정 말 루저? 류혜림 박사는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공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건설환경공학부에서 토양 내 유기오염물질의 위해성 평가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를 취득한 후, 2011년부터 삼성물산 건설부문 Civil사업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hr.ryu@samsung.com 기획 : 김영진 편집위원 yj777.kim@sam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