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3 www.beomeo.kr 금정金井 은 금정총림 범어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사보寺報로 범어사의 소식 및 교계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목차 4 처염상정處染常淨 한 생각 자체를 놓아 버리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선禪 이다_ 범어사 조실 지유 대종사 6 범어사계梵魚四季_ 석공 스님 8 범어사 성보聖寶 부산 범어사 조계문_ 범어사 박물관 10 법향의 숲 불교의 본분은 수행이다_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 14 특집, 금정총림 범어사 범어사가 주는 세 가지 고마움_ 허남식 한국불교의 중심에서 불법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호국 사찰, 범어사_ 강대민 자비희사 慈悲喜捨, 화합과 상생의 마음을 내는 한 해가 되길_ 목종 스님 범어사와 불교의 미래_ 임광명 24 특별기획 프롤로그 미리 가 보는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_ 하정은 불교평화론과 평화운동 그리고 한반도 평화_ 박인탁 30 선禪 범어사 금어선원 유나 인각 스님의 선禪 이야기 ① 겨울 가면 봄이 오는 일 그 속에 선禪이 들어차 있다 34 특별기고 한국불교, 정치와의 올바른 관계 맺음을 생각할 때_ 김종인 38 우리의 스승, 동산 대종사 ①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정관 스님_ 천미희 43 나마스테 금정총림 범어사 율학승가대학원장 수진 스님 지계청정持戒淸淨, 모든 수행의 근본입니다_ 편집부 46 말사순례 금련산 마하사_ 편집부 52 문 없는 문을 열다_ 조계종립 특별수도원 봉암사 바람이 부니 꽃이 피어난다_ 유철주 58 절집 밥상 겨울 언 대지를 깨우는 봄맛! 냉이된장찌개_ 범어사 대성암 60 선우善友 범어사신도회 부산광역시불교연합신도회 이윤희 회장_ 편집부 62 행복한 나눔_ 동호의 일기 김태진 암상금정岩上金井 바위 위의 금빛 나는 우물. 암상금정 에서 범어사의 창건 설화와 금정산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있다. 64 금정소식 및 알림마당
처염상정 處 染 常 淨 한 생각 자체를 놓아 버리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선 禪 이다 범어사 조실 지유 대종사 삼동결제 三 冬 結 制 하고 비로소 해제날을 맞게 된 오늘, 우리는 밤낮없이 마음먹은 바 정진해 온 끝에 찾고자 했던 답이 과연 나왔는지 자문해 봐야 합니다. 수없는 시간 동안 오로지 다른 생각 없이 부지런히 목표를 향해 노력해 온 수행 정진의 결실로 과연 무엇을 얻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었다고 말하는 도 道 와 깨달음과 진리를 결론적으로 얻었습니까? 만일 얻었다고 한다면 부처님의 말씀 및 조사스님의 어록과 대조하여 일치하는지 확인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선 禪 은 특별하게 다른 교가의 가르침과는 달리 일초직입여래지 一 超 直 入 如 來 地, 성불하는 길 중에서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하는데, 마음을 푹 놓고 수행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선문촬요와 임제 록, 조사 어록에는 불법은 결코 특별할 것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금강경 을 보면 부처님께서 수보 리야, 여래 如 來 는 일반 사람과 다른 특수한 특징이 있느냐. 고 묻습니다. 그 물음에 수보리 존자께서는 특수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특수한 것이올시다. 라고 답하였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남과 달라야 하고 누구보다 대접 받기를 원하고 최고를 지향하고 특별한 것을 구하지만 부처님은 그런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일반 사람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래가 아주 멀고도 먼 과거에 연등불 처소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었는지를 묻자 수보리 존자는 실지는 깨친 것이 없고 얻은 것도 없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등불 燃 燈 佛 께서 여래에게 그대가 장차 미래세에 석가모니라는 이름으로 성불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만일 그때 연등 불 처소에서 도를 얻은 것이 있다고 했다면 연등불께서 이렇게 예언하지 않았을 터인데 다행히 도를 얻 은 것이 없고 깨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장차 석가모니가 될 계시를 얻었던 것입니다. 이는 금강경 에 나 온 말입니다. 우리가 곧잘 말하는 얻었다 잃었다 하는 것은 모두 가짜이고 얻은 것이 없고 잃은 것이 없는 것, 무득 무실 無 得 無 失 이 바로 실지입니다. 잃어버렸다고 착각하여 잃었다고 이름을 붙인 것일 뿐, 얻을 것도 잃은 적도 없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무엇을 얻어야 하고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은 이 말에 부합 되지 않지만 대심중생 大 心 衆 生 은 부처님의 이러한 말씀에 귀히 깨달음을 얻습니다. 금강경 의 내용을 보면 일체 구류중생 九 類 衆 生 난생 卵 生 태생 胎 生 습생 濕 生 화생 化 生 의 사생 四 生, 유색무색 有 色 無 色 유상무상 有 想 無 想 비유상비무상 非 有 想 非 無 想 이라 하여 부처님이 모든 중생들을 남김없이 열반에 들 게 하여 제도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도 이러한 편안한 경지에 든 이가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열반, 진리, 깨달음이라는 이름을 익히 알고 있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 지 못합니다. 내용이 실지 열반이 아니고 진리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찾아다녔던 능엄경 의 연야달다 演 若 達 多 의 잃은 것이 없으니 찾은 것도 없다. 는 말처 럼 깨달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있는 한 자기 머리를 찾지 못하듯, 생각 자체를 놓아 버 리면 저절로 알게 됩니다. 선도 그렇습니다. 일체 환상에서 벗어나는 자를 부처라고 하듯 사량분별 思 量 分 別 에서 벗어나 마음을 놓고 행주좌와 行 住 坐 臥 생활하는 그 자체가 진리이고 도 道 이며 선이므로 이를 지 혜의 눈으로 간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월 24일 범어사 조실 지유 대종사의 동안거 해제 법문을 편집부에서 정리하였습니다. 4 5
범어사계 梵魚四季 봄이, 도처에서 고물대고 있다. 절집의 여여如如한 풍경은 마음을 깨우는 범종이자 경전經典이다. 그 자체로 팔만사천법문이다. 나옹 선사 懶翁 禪師가 이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7 6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화창한 봄볕 아래 온갖 번뇌 망상을 벗어 놓고 청정한 마음으로 삼보에 귀의한다. 석공 스님
범어사 성보 聖寶 부산 범어사 조계문釜山 梵魚寺 曹溪門 보물 제1461호 부산 범어사 조계문은 모든 법이 하나로 통한다는 법리를 담고 있어 삼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 기둥이 일자로 배치되어 지붕을 받치고 있는 구조로 처음 건립된 것은 1614년 묘전 화상에 의해서이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세속에서 때묻은 마음을 벗고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진리의 세계는 변함없는 여여한 세계이기 때문에 마음 가운데 차별하는 생각을 비워서 연꽃 같은 마음으로 이 문 안에 들어오라는 뜻이 있다. 조계문의 중앙 어칸에는 조계문曹溪門 이라 편액하고 좌우 협칸에는 금정산범어사金井山梵魚寺 와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이라 편액하였다. 한국 전통 건축의 구조미를 잘 표현하여 우리나라 일주문 중에서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글. 범어사 박물관 석공 스님 8 9
법향의 숲 우리는 불교가 무엇을 가르치는 종교인지 잘 알고 믿어야 합니다. 불 교는 부처님께서 스스로 마음을 깨닫고 세상 모든 것이 마음과 둘이 불교의 본분은 수행이다 아님을 분명히 알고 난 뒤에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해 주기 위해서 평생 가르침을 주신 것이 뒷날 제자들에 의해 정리되어 하나의 종교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결국은 부처님 말씀이 불교가 된 것인데, 그 부처님 말씀이라 하는 것은 중생들을 지혜로운 세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수단으로 베푸신 것이지, 종교라 하는 조직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얽매려고 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종 宗 이라 하는 것은 언어나 문자, 생각으로 표현 할 수 없는 진리의 궁극적인 자리입니다. 그것을 문자로 종 이라고 표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 현한 것입니다. 교 敎 라 하는 것은 진리를 깨달은 성현들이 그 깨달음 을 자기 혼자 간직하지 않고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자 깨달음을 통해 우러나온 것을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종교학은 이 교 를 좀 더 빠르게 상대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발전해 온 방편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보편화시키고 대중화시킨 것이 종교사 상이고, 거기에서 더 정밀하게 파생되어 나타난 결과가 종교이념입니 다. 이것을 통해 종교사업을 펼치고 종교교육을 행하고 종교윤리를 실천하고 또 종교의식도 행하는 등 다양한 종교활동이 지금까지 생성 과 소멸을 반복하며 정교하게 다듬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모든 활동 들은 종교를 이해시키기 위한 도구이며 사다리입니다. 이것은 징검다 리일 뿐이지 종교 자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알고 보면 종교 또한 진 리를 깨닫게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종교 본연의 목적은 잊고 그 활동에 만 집착하게 되면 종교를 위한 종교생활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처음 종교가 만들어졌을 때의 이유와 목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종교도 없고 진리를 깨달을 기회도 없어져서 우리의 삶을 정 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는 상실한 채 오로지 종 교활동만 남아서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10 11
법향의 숲 이제 우리는 차원을 달리하는 부처님 가르침에 눈떠야 합니다. 부처님 참된 가르침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여 지혜롭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할 것입니다. 바야흐로 불교의 본분인 수행에 지금까지보다 더 적극적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비유를 들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올바로 영위함에 있어서는 두 개의 수레바퀴가 있어야 하는데, 한 쪽은 종교생활 그리고 다른 한쪽은 사회생활입니다. 여기서 종교생활은 정신적인 것이고 사회생활은 물질적인 것을 의 미합니다. 수레는 두 바퀴가 똑같은 크기일 때 바르게 나아갈 수 있는 운송 수단입니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균형을 이룰 때 바르게 갈 수 있지, 한쪽이 작고 다른 한쪽이 크면 바르게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로 가는 길에 바로 올라서서 균형을 잡고 바로 나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정신과 물질 두 수레바퀴의 크기 와 무게가 같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수레가 작으면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탈 수 있고 수레가 크면 많이 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레를 끌고 가 는 사람이 능력이 있으면 큰 힘을 발휘해서 많은 사람을 태우고 진리에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수레 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수레를 탄 사람도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정신과 물질은 둘 다 진리에서 비롯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진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정신과 물질은 둘이 아니고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크나큰 존재가치라고 하겠습니다. 종교를 가지는 이유와 목적은 진리를 깨달아 스스로의 삶을 한층 지혜롭고 여유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다 면 종교를 가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알고 보면 같은 종교 안에서도 차등이 있어서 마치 초등학교 과정을 마 치고 나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올라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적을 상실한 채 맹목적으로 하는 종교활동 은 초등학교 과정만 수십 년 다니며 세월만 허송하는 것과 같아서 진리로 나아가는 데 꼭 필요한 중급, 고급의 종교를 체험하고 실천해 보지도 못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급의 종교가 어떤 것인지 개념상으로 어렴풋이 이해할지는 몰라도 실제로 접해 본 이는 많지 않습니다. 똑같은 이름을 빌려서 종교라고 쓰고 있지만 질적인 면에서 보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 종교를 가진 분들 가운데 불교를 믿는 분이 가장 많다고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인과 因 果 나 십이인연 十 二 因 緣, 사성제 四 聖 諦, 팔정도 八 正 道 그리고 공 空 이 뭔지, 보살도 菩 薩 道 가 뭔지, 여래지견 如 來 智 見 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몸으로 느껴 알지 못할뿐더러 개념적으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리고 끝끝내 어리석음에 빠져 지금도 많은 분들이 기복불교를 행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진리를 깨닫게 하는 수단으로 기도, 염불, 간경, 참선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불교계 현 실은 잘살게 해 주십시오.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소원 성취를 비는 기복적인 방향으로 흘러 버렸습니다. 이것을 불교라고 한다면 불교는 참으로 어리석은 종교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차원을 달리하는 부처님 가르침에 눈떠야 합니다. 부처님 참된 가르침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것을 일상 생활에서 실천하여 지혜롭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할 것입니다. 바야흐로 불교의 본분인 수행에 지금까지보다 더 적극적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12 13
특집_ 금정총림 범어사 사람은 누구나 마음 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참선을 통해 내면의 참다운 불성을 일깨우고 망념을 없애 중생 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금정총림金井叢林 범어사梵魚寺.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는 수행도량으로 130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온 범어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짚어 보았다.
특집_ 금정총림 범어사 2005년 11월 어느 가을날, 한 무리의 단아한 여인들이 범어사를 찾아왔다. 이들은 범어 사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과 불이문, 보제루를 차례로 둘러보며 고색창연한 천년고찰에 연 방 감탄을 쏟아냈다. 그리고 심검당에서 녹차와 연차를 시음한 뒤 바라춤과 달마도 그리 시민 화합과 도시 발전의 기 氣 를 창조하는 공간 기 시연을 감상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범어사는 이들에게 부산의 역사와 전통을 오 감으로 체험하게 해 준 인상 깊은 명소였다. 이들은 바로 전 세계 영부인들이었다. 로라 부 내가 범어사를 고맙게 생각하는 두 번째 이유는 부산의 발복 시 미국 영부인을 비롯한 호주, 베트남, 인도네시아, 멕시코, 페루, 대만의 영부인들이 동행했 發 福 을 기원하는 최고의 기도 도량이라는 점이다. 21세기 첨단 고 권양숙 여사가 이들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2005년 부산APEC 정상회의 때의 일이었다. 을 걷는 시대라고 해서 발복 이니 기원 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 당시 범어사를 방문했던 세계 각국의 영부인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부산이 역사와 첨단 을 겸비한 아름다운 도시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들의 뇌리 속에는 아 름다운 범어사의 늦가을 풍경도 고스란히 각인되었을 것이다. 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부산의 발전을 기원하고 화합과 시민의 안녕을 축복한다면 그 것은 엄청난 발전의 기운, 즉 에너지로 승화될 수밖에 없을 것 범어사, 스스로를 돌아보는 참선의 장소 범어사가 주는 세 가지 고마움 부산을 세계적인 관광 컨벤션 도시로 만든 일등 공신 2012년 부산에서 열린 라이온스 세계대회 당시에도 범어사는 부산을 알리는 데 큰 역할 을 했다. 2012 라이온스 부산세계대회는 세계 120개국에서 5만 5천여 명의 인원이 참가한 이다. 나는 매년 석가탄신일마다 범어사를 빼놓지 않고 방문한다. 1만여 개의 연꽃등이 장관을 이루고 수천 명의 불자가 자신들 의 행복과 더불어 부산 발전과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만큼 뿌듯하고 감동적인 장면이 내게는 또 없다. 부산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도시이기도 하지만 안팎으로 범어사가 고마운 세 번째 이유는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사색 과 참선의 공간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비단 석가탄신일이나 범 어사 개산대재 같은 큰 행사가 아니더라도 나는 범어사를 방문 할 기회가 자주 있다. 그럴 때마다 범어사의 맑고 깨끗한 기운 을 내 몸과 마음에 한껏 받아들이려 애쓴다. 범어사는 우리나 라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찰대본산이 아니던가. 한국 대회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민간대회로서 기네스북에 등재할 만큼 규모가 컸다. 많은 어려움을 가진 도시이기도 하다. 부산이 그간의 여러 어려 선불교의 중흥조였던 경허 스님을 비롯해 용성, 성월, 동산 스 글. 허남식(부산광역시 시장) 부산시는 당시 부산 관광을 원하는 라이온스 회원들을 위해 5개의 관광코스를 만들었는 데 그 중 하나가 범어사와 해동용궁사를 차례로 방문하는 사찰답사 코스였다. 이 코스는 움들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해 올 수 있 었던 것은 부산 시민들만의 독특한 단결력과 화합 정신이 있었 님 같은 대선승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곳이다. 영혼이 아 름다운 사람은 법신에서 법향 法 香 이 난다고 하지 않던가. 그분 회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초여름의 싱그러운 범어사를 방문한 참가자들은 원더풀, 부 기 때문이다. 그러한 화합과 단결력은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발자취만이라도 좇아 보려고 애쓴다. 산! 을 연발했다. 나는 범어사가 범시민적인 단합이 이루어지는 큰 도량이 되어 밝은 아침에 가면 더 환하게 빛나는 일주문의 풍성하고 여유 라이온스 세계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자기 나라, 자기 지역사회에서 나름 큰 주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모두가 복되기를 바라는 로운 모습, 천왕문과 불이문에서 느껴지는 말할 수 없는 고적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다. 이들이 자국으로 돌아가 부산을 한번 가 보라 권한다면 그것 불교의 큰 가르침이 부산 최고의 도량 범어사를 통해 부산 시민 한 아름다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대웅전 앞에서 바라보는 요 만큼 영향력 있는 도시 홍보가 또 어디 있겠는가. 부산시가 라이온스 부산세계대회를 민간 들의 성정으로 가슴 깊이 새겨진 것이라 믿는다. 사채 지붕의 상쾌한 선들, 그 하나하나가 내게는 가르침이고 의 행사로만 생각하지 않고 마치 부산시 주최의 행사처럼 도운 것은 그 때문이었다. 부산이 깨우침이다. 부산시장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나 범어사 같은 매력 있고 아름다운 관광 자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세계적인 규모의 행 에게 범어사는 이렇게 두루 고맙고 소중한 공간이라 할 수 있 사를 마음 놓고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범어사를 고맙게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부산 최고의 관광 명소라는 것이 다. 신성한 대가람을 일개 관광지로만 생각하느냐고 물어도 하는 수 없다. 오늘날 부산을 아시아 4대 국제회의 도시, 서울을 제친 전국 최고의 마이스(MICE) 도시로 만든 일등 공신 가운데 한 곳이 범어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부산시장으로서 나는 그 점을 참으로 감사 하게 생각한다. 그 누가 부산을 찾아와도 제일 먼저 소개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부산의 보물이 바로 범어사인 것이다. 허남식 2004년부터 21대 22대 23대 부산광역시 시장을 맡아 오고 있으며 이전 35년간 부산시 경제진흥국장, 내무국장을 거쳐 기획관리실장과 정무부시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개발 성장에 초점을 맞춘 문화창조도시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16 17
특집_ 금정총림 범어사 부산의 명산인 금정산 기슭에 자리한 범어사는 양산의 통도사, 합천의 해인사와 더 불어 부산 경남지역의 3대 사찰이자 대한민국의 대표적 사찰이다. 범어사에는 대웅 전과 3층석탑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물론 많은 문화재가 있어 문화적 가치 도 대단히 높다. 하지만 범어사의 의의를 가장 범어사답게 만드는 것은 현재 한국불 교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이곳 범어사를 호국도량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은 부산이라는 지리적 위치에 서 비롯된다. 부산은 한반도의 동남단에 위치한 지정학적 관계 때문에 중국 및 러시 아의 대륙국가와 해양국인 일본과의 세력 다툼에 휘말렸었다. 결국 우리의 국익과는 관계없이 이들 나라의 교두보로 이용되는 아픈 역사를 지니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왜구의 침략이 잦아 백성들의 생계가 위태로웠고, 특히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 대륙 침략 야욕의 전초기지가 되기도 했다. 또한 구한말에는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국권 피탈의 거점이 되어 무참히 짓밟히는 수난을 당했던 곳이다. 범어사 창건은 이러한 지리적 위치와 관련이 있다. 신라시대, 문무대에 잦은 왜구의 침략으로 고민하던 중앙정부는 의상 대사로 하여금 불력 佛 力 으로 왜구를 막고자 범 어사를 창건하였다. 이는 당시 국가의 사찰 건립이 불력으로 왜구를 막고자 하는 신 앙적 기원과 사찰의 무력적 기반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국가의 의도가 어우 러져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창건된 범어사의 변천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 는 것은 임진왜란 때 범어사의 전각과 기록물들이 대부분 전소되었기 때문이다.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일본의 부산성 공격을 시작으로 동래성을 지나 서 울로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동래성 함락과 함께 범어사 역시 직접적인 약탈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서산 대사가 호국 사찰인 범어사를 사령부로 두고 수많은 승병들과 함께 왜군에 맞섰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통해 보여준 승병들의 활약은 이후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를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향상시켜 주는 계기를 만들었고 일시적으로 불교의 부흥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에 일어난 선문 논쟁으로 다시 침체되었던 불교는 범어사의 경허, 오성 한국불교의 중심에서 불법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호국 사찰, 범어사 글. 강대민(경성대학교 사학과 학과장) 강대민 월, 동산을 잇는 정혜결사의 노력으로 1900년대 명실상부한 선찰대본산으로서 많은 참선 학인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구한말 일제의 국권 침탈이 시작되자 범어사는 선찰대 본산으로서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에 반대하는 임제종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는 범어 사를 항일 민족불교의 정신적 기반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또한 범어사는 민족 교육 을 위하여 근대식 교육기관인 명정학교를 개교하고 포교당을 통한 사회 활동을 활발 히 벌임으로써 민초들에게 종교적 측면 이외에도 교육 계몽적 측면에서까지 의지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 시기 범어사는 호국 사찰로서 부산 경남지역 항일독립운동의 공간적 사상적 근간을 제공하였고 부산지역의 3 1운동을 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후에도 지속적인 불교정화운동과 일제의 탄압에 맞선 독립운동을 실시하여 호국도 량으로서의 의의를 다하였다. 또한 1945년 해방의 조국을 맞이하게 된 범어사는, 한 국 현대사의 격랑에 지친 민중들에게 때로는 사회의 등불로 또는 마음의 안식처로서 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몇 해 전 방화로 인해 천왕문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지만 현재까지도 범어 사는 불법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호국 사찰로 여전히 한국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난해 동화사, 쌍계사와 함께 총림으로 지정된 범어사는 우리 부산의 대표적 인 문화재이자, 무엇보다 근대 한국불교의 명맥을 잇는 선찰대본산으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더하고 있다. 경성대학교 사학과 학과장 한국학연구소장이며 부산광역시 시사편집위원장과 지명개정위원, 문화재위원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 부산지역학생 운동사, 근대 부산의 민족운동, 한국의 향교 연구, 한국 근현대사의 이해 등이 있다. 18 19
특집_ 금정총림 범어사 범어사 대웅전 앞, 부산시민과 불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일출을 관망하며 계사년 새해를 일념으로 맞았다. 한반도와 세계 평화 를 기원하는 전국의 3천여 불자들이 모인 포교결집법회가 함께 열려 올해의 서두를 장식했다. 2013년 범어사는 한국전쟁 정전60주년을 맞아 9월 27일 대한불교조계종 이 주최하고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 운영위 원회 가 주관하는 한반도평화대회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 이에 1월 1일 새해맞이 포교결집법회, 2월 20일 한반도평화대회 선포 기자회 견을 시작으로 한반도평화기원 수륙재, 평화기원 세미나, 현충원 UN공원 참배, 틱낫한 스님 초청 평화 걷기와 명상, 평화의 빛 거 리 조성, 한반도평화기원 음악회, 자비구현 인류화합 한반도평화대법회 등의 행사가 진행될 예정에 있다. 또한 부처님오신날에는 범 어사의 위상 정립과 불교문화 계승을 테마로 장엄등과 행렬등의 제작 교육을 지원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전통등의 저변 확대를 위한 공 모전과 장엄등 전시 등 범어사 경내를 축제의 장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 외에도 범어사를 새로이 단장하는 도량 내 불사는 올 한 해도 지속적으로 진행되는데 보제루 단청 불사, 불이문 불사, 함홍당 남요사 해체 보수, 청풍당 비로전당 미륵전당 금어선원 문간 해체 보수, 일로향각 단청 및 보수 등의 많은 불사가 예정되어 있으며 특히 조실스님께서 머물고 계신 원효암 전각 해체 보수도 진행되어 수 행도량의 정비가 보다 활발히 이뤄질 것이다. 또한 지난 2월 방영한 부산MBC 선문촬요, 부처 마음을 읽다 와 부처님오신날에 방영할 자비희사 慈 悲 喜 捨, 화합과 상생의 마음을 내는 한 해가 되길 연 제작 촬영에 협조 지원하여 불교문화의 기록과 유지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는 실정이다. 범어사는 수행도량으로서 역할뿐 아 니라 불교의 위상 정립과 불교문화 대중화를 위한 도량 정비를 비롯해 여러 종교 문화 행사를 기획 진행하고 있음을 밝힌다. 부산불교의 중심에서 세계 평화와 조국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국민의 서원을 하나로 모으고 선찰대본산의 면목으로 여러 고승대덕을 길러낸 수행사찰의 역할을 공고히 하고, 사무량심 四 無 量 心 의 불교문화를 널리 펼쳐내어 한반도 평화구축을 이뤄내는 한 해가 되기를 긴 글. 목종 스님(범어사 기획국장) 히 소원한다. 시방세계의 부처님, 한반도와 온 누리의 평화를 기원하오니 자비로 섭수 攝 受 하여 주시옵고 분열과 대립에서 화합과 통일로 경쟁에서 상생으로 너와 나에서 우리로 하나의 큰 물결이 되어 흘러갈 수 있도록 널리 자비광명 비춰 주시옵소서. 목종 스님 부산 범어사에서 양익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현재 해운대 대광명사 주지로 있으며, 부산불교방송 목종 스님의 월요법문 과 불교TV 목종 스님과 선우용녀의 이야기쇼, 가피 등 방송을 통해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20 21
특집_ 금정총림 범어사 범어사와 불교의 미래 는 모습이다. 반갑고도 고마운 일이다. 위상을 되찾는다는 건 엄중한 일이다. 단순히 기뻐함에 그쳐 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총림의 지정이 그렇다. 수십 년 이상 유 겠다. 현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은 간화선이 수행의 최상승법임을 강조한다. 최근의 한 법문에서 스님은 선은 신비가 아니라, 굳 이 말하면 공개된 비밀 이라 했다. 인류를 무지에서 깨어나게 지돼 온 5대 총림 체제가 허물어지면서 총림의 권위 자체가 흔 할 수 있는 정신적 혁명 이라고도 했다. 선이 허상이 아님을 밝 글. 임광명(부산일보 기자) 들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소위 총림 인플레 가 걱 힌 것이다. 선찰대본산으로서 범어사의 미래가 밝아오는 느낌 정된다는 것이다. 당장 전국선원수좌회는 각 교구본사가 총림 이다. 천불 千 佛 이 모인 자리에서는 천불이 싫어( 嫌 )하고 군마 群 魔 가 치열하게 수행하는 모습은 보는 그 자체로 감동이다. 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하는 추세가 우려스럽다 며 모든 교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부처 본래의 면목을 직지 直 指 하는 선종 득시글거리는 데서는 군마가 미워( 憎 )하는, 더러운 냄새의, 털 우리나라에선 그동안 5대 총림 체제로 유지돼 왔으나, 이제 3 구본사가 총림이 되면 종단 전체가 공멸할 수 있다 고 선언하 이 석가모니 부처의 으뜸 제자 마하가섭에서 기원한 것임은 주 안 깎아 짐승 같은, 법맹승 法 盲 僧 하나가 오늘도, 오라지도( 請 ) 개 총림이 더해졌다. 범어사도 그중에 끼었다. 일종의 승격이 고 나선 판이다. 자칫 범어사 총림 승격의 의미가 퇴색할 수 있 지의 사실. 하지만 인도에서의 선종은 28조 보리달마 이후 맥이 않은, 누구네 잔치의 앞자리에 버티고 앉았습! 다. 기실, 그동안 범어사는 그 역사와 위상에 걸맞은 대접을 받 는 부분이다. 눈을 새롭게 부릅떠야 한다. 이 시점에서 범어사 끊겼다. 그러나 맥은 중국으로 옮아와 오히려 흥성해졌다. 달 지 못했다. 창건이 신라 문무왕 18년(678년)에 이루어졌다 하니 는 근본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마는 중국 선종의 초조 初 祖 로 거듭났고 혜가, 홍인을 거쳐 육 六 소설 쓰는 사람, 박상륭을 좋아한다. 좋아한다 해서 그의 작품 통도사에 버금가고 해인사보다는 오히려 앞선다. 현재 국내 불 총림에 앞서 범어사는 선찰대본산 禪 刹 大 本 山 이다. 한국불교는 조 혜능 존자에게서 절정을 맞았다. 세계나 신념 따위를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다. 일상의 어법 따 교 문중 가운데 문도 수 많기로는 범어 문중을 따라갈 곳이 없 일찍부터 선 禪 을 받아들였고, 오늘날 한국불교 주류는 선종 禪 宗 어쩐 일인지 선가의 조사는 육조에서 이어짐이 끊어졌다. 혜 위야 간단히 무시해 버리는, 용천지랄하는 그의 글풀이는 더럽 다. 한국 불교의 큰 줄기를 이루어온 데다 승가 안에서의 영향 이다. 선찰은 참선을 근본 수행법으로 삼는 도량이다. 대본산 능은 그 의발을 전하지 못했고, 제자들이 전하는 것도 금했다. 게 읽기 어려워서, 시정의 잡배 같은 범인 凡 人 으로선 도저히 체득 력도 으뜸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어사는 그 은 그런 선찰 가운데 종주격이란 의미다. 범어사가 오늘날 한 묘하게도, 혜능이 활동했던 시기(서기 700년 전후)와 범어사의 창 불능이다. 그럼에도 그를 좋아하는 것은, 부처도 싫어하고 마 동안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사찰이라는 인식에 머물렀다. 그런 국불교의 본원 本 源 이자 종주 宗 主 라는 이야기이고, 이제 총림으로 건시기가 맞물린다. 인도에서 28조, 중국에서 육조에 그친 선종 귀도 미워할 정도로 누구도 반기지 않지만, 그런 혐증 정도는 손 가운데 총림 승격은 범어사의 제 위상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반 그 권위가 더해졌다는 의미이다. 의 줄기가 우리나라로 건너왔음이라 감히 단정해 본다. 톱 아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고고오오 高 高 傲 傲 가 부러운 것이고, 가운 일이라 하겠다. 범어사가 선찰대본산임을 선언한 것은 구한말의 성월 스님에 다시 박상륭으로 돌아가서, 그의 표현을 빌려 하면 이렇다 하 그를 가능케 하는 구도자로서의 순정과 열정이 존경스러운 것이 총림 승격에 이은 호재가 이어진다. 범어사를 중심으로 부산 서 비롯됐다. 당시 범어사 주지로 소임을 보고 있던 성월 스님 겠다. 육조는, 칠조 七 祖 에게다, 씨앗을 담보해 두고 있어, 그 다. 그에게는 그래서 감히 따라가고픈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불교계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팔관회 행사의 문화재 등재도 가 은 범어사를 선찰대본산으로 명명하고 당대의 고승 경허 스님 불덩이를 수용하여, 키워낼 만한, 자궁을 기다리고 있습지. 위의 인용문은 박상륭의 20여 년 전의 소설 칠조어론 七 祖 語 論 시화되고 있고, 오는 9월이면 한반도평화대회도 범어사가 주축 을 범어사 조실스님으로 초빙했다.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는 선종의 칠조를 탄생시키는 씨앗을 담보해서 그 불덩이를 안 첫머리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평소 스스로 밝힌 바 학자도 못 이 돼 개최될 예정이다. 수행도량임을 만방에 고한 것이다. 어쩌면 불보종찰을 내세우 고 키워내는 자궁 역할을 하는 선찰대본산 범어사의 모습을 기 되고 중도 못 되는 존재이지만 선가 禪 家 의 조사 祖 師 를 꿈꾼다. 는 양산 통도사, 법보종찰을 표방하는 합천 해인사, 승보종 대한다. 아는 바 없음( 法 盲 )으로 인해 오히려 다른 이가 벌여놓은 판에 서초생가운 瑞 草 生 嘉 運 찰을 추구하는 순천 송광사보다 더 엄중한 책무를 가진다 하 당당히 앞자리에 나서 눈을 부라릴 수 있는 일대종사! 그는 묻 임화결조춘 林 花 結 早 春 는다. 이 시대의 조사는 어디 있는가? 육조 六 祖 에 끊긴 선가의 맥은 어디서 다시 이어질 것인가? 바야흐로 한국 불교에 총림의 바람이 불고 있다. 총림은 선원, 강원, 율원 등 스님들의 수행을 위한 여러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 진 거대 사찰이다. 그 큰 절에서 스님들이 무성한 수풀처럼 모여 상서로운 풀은 좋은 운수를 만들고 숲 속의 꽃은 이른 봄을 가져온다. 범어사 조실로 있던 동산 스님이 1960년 선시를 통해 읊었던 범어사에 대한 그 소망이 5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비로소 성취되 임광명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시대의 옳고 그름은 분별할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에 1987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 학했다.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부하며 졸업, 1995년 부산일보사 기자로 입사했다. 생활과학부 사회부 경제부 편집부 등 여러 부서 를 거쳤으나 문화부에, 그 중에서도 종교담당 기자로 가장 오래 있었다. 22 23
특별기획 프롤로그 비극의 역사를 청산하고 너와 나를 가리지 않고 전쟁에서 희생된 모든 이들의 천도와 살아남은 자들의 해원을 기원한다. 한반도평화대회를 통해 통일 염원이 확산되고 인류 화합과 지구촌 평화 실현을 위한 담론의 장이 형성돼 사회갈등 해소의 기반이 마련되길 바란다. 1 # 미리 가 보는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 인류 화합과 평화 실현을 위한 담론의 장 부산 중심의 영남권, 평화의 등물결이 일어난다. 24 글. 하정은(불교신문 기자) 지난 2월 20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열 부산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일대에선 한 린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 (이하 한반도평화대회) 국전쟁 최대의 격전이 벌어졌던 것. 이때 범어사는 전국 각지에 관련 기자회견에서 상임운영위원장 수불 스님은 이같이 말했다. 서 몰려든 수많은 스님과 난민들의 피난처였다. 당시 범어사에 한반도평화대회는 이달부터 오는 9월까지 다채로운 행사로 는 불교정화운동을 이끌던 동산 스님이 조실로 주석하고 있었 구성될 예정이다. 전국 곳곳에서 평화기원 세미나를 개최하여 고, 스님은 피난민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조용했던 산사는 늘 한반도 정세와 남북 관계, 불교의 평화론, 이웃종교의 평화 담 북적거렸고 스님들은 부식을 자급자족하기 위해 채마밭을 가 론 등을 자유롭게 펼쳐낼 계획이다. 꾸는 등 대중 울력에 참선 정진에 양식 조달에 쉴 새가 없었다. 한편 9월 말 한반도평화대법회가 봉행된 뒤 10월 28일부터 1950년 8월 18일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한 이후 군과 정부는 11월 8일까지 부산 일대에서 제10차 세계교회협의회(WCC) 총 금정산과 범어사와 동래온천 인근의 금정사에 순국 전몰장병 회가 열린다. 수불 스님은 WCC 총회와 한반도평화대회는 별 영현안치소 를 설치하고 사망장병들의 영현을 봉안했다. 관리 개 라며 얼마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관계자가 범어사를 방 는 육군병참단 묘지등록중대에서 맡았다. 1952년 정부 주관으 문했을 때 이웃종교인의 정신문화 배움의 차원으로 범어사 템 로 이승만 대통령과 외교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동산 스님을 플스테이 등을 수락하는 뜻을 전했다 고 말했다. 법주로 모시고 전국군경합동위령제 가 봉행됐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그해 9월에 대통령의 역사적으로 일본의 침략이 발생할 때마다 부산은 한반도의 재가를 받아 서울 동작동 일대가 국군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 부 최전선 기지가 됐다. 또 북쪽으로부터 대규모 침략전쟁이 벌어 지로 확정됐다. 묘역 공사는 1954년 3월부터 3년여에 걸쳐 이 졌을 때는 최후방이 되어 수많은 피난민을 수용했다. 이는 임진 뤄졌다. 범어사는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옮겨지기까지 수 왜란에도 범어사가 동래성 함락과 동시에 왜군의 직접적인 방화 년 동안 한국전쟁으로 숨진 군경들의 위패를 모시고 넋을 위로 와 약탈로 파괴됐던 이유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남쪽 해 왔다. 이외에도 범어사는 전쟁 중에 입대해서 낙동강 전투에 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정부가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한 서 전사한 향토 출신의 전몰장병 39명의 유해를 처음 안치한 곳 핵심요인이기도 하다. 이기도 하다. 25
특별기획 프롤로그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 영남권 9개 교구본사 손잡다 올해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가 대한불교조계종 총 무원을 중심으로 부산 범어사 등 영남권 9개 교구본사가 손을 맞잡 고 조직위를 구성키로 했다. 한반도평화대회는 1953년 한국전쟁의 1952년 범어사 위령제에 얽힌 이야기 정전停戰을 종전終戰으로 만들어 한반도 평화와 남북통일을 기원하 자는 주제로 21개국 16만 명에 달하는 유엔 참전용사들의 위령제 등을 봉행하고 전 세계를 향해 평화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다양한 행 1952년 범어사에서 봉행된 군경합동위령제와 관련한 유 사로 전개될 전망이다. 불교세가 강한 부산에서 오는 9월 열리게 될 한반도평화대회는 조계종 포교원장 지원 스님과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 등으로 꾸려 진 조계종 유엔평화사절단이 지난해 11월 미국 뉴욕 유엔본부를 방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만난 자리에서 행사 취지를 전했다. 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정부는 범어사 조실 동산 스님께 정전60주년 불교평화론 세미나 개최 당시 반 총장은 흔쾌히 같이 했으면 좋겠다. 는 뜻을 비쳤다. 지 이승만 대통령이 도착해서 위령제를 함께 지내기로 약 속이 돼 있었다. 그러나 위령제가 열리는 날 이승만 대통 지난 1월 16일 부산 범어사에서는 영남권 9개 교구본사 주지스님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반도평화대회의 진행 경과를 공유하고 조직 위원회 구성과 예산안 편성에 관해 논의했다. 한반도평화대회 관련 영남권 본사 주지스님들의 첫 회동이다.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은 불교계가 화합된 모습으로 한반도평화를 선언하고 남북통일을 지향하는 명분을 갖고 정전60주년을 기 념하는 평화대회를 대대적으로 열어보고자 한다. 면서 올해는 한국불교의 중심축인 영남불교계가 이를 위해 발 벗고 나설 때 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 26 서 위령제의 법주가 되어주길 요청했고, 당일 오전 10시까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오는 9월 열리는 한 령은 유엔군사령관과 외교사절들을 동반하고 예정보다 반도평화대회 를 앞두고 2월 27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 1시간을 훌쩍 넘긴 시각에야 범어사에 도착했다. 대웅전 관 국제회의장에서 불교평화론과 평화운동 그리고 한반 앞에 다다른 대통령이 전각 안에 모셔진 불상을 손가락으 도 평화 를 대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이번 세미나는 오 로 가리키며 외교사절들에게 무어라고 설명하는 광경이 동 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가 불교와 이웃종교의 산 스님의 눈에 띄었다. 대통령은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평화론 을 주제로 기조발제를 했다. 총 3편의 발제문도 발 동산 스님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동산 스님은 일 표되었다. 박경준 동국대 교수는 불교평화의 이론적 모색 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불전佛殿 앞에서 모자도 벗지 않 을 주제로 발제했다. 유승무 중앙승가대 교수는 불교평 고 손가락으로 부처님을 가리키는 것은 어디서 배운 예의 화운동의 성찰과 대안 을 테마로,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냐? 고 말했고, 대통령은 스님의 호통에 놀라 이내 정중히 사과하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삼배를 올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평화대회 세미나 2월 27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 남북경협을 통한 한반도 평화질서 구축 을 중심으로 각각 국립서울현충원 참배 3월 15일 국립서울현충원 발제에 나섰다. 이도흠 한양대 교수와 김재성 서울불교대 한반도평화기원 수륙재 3월 26일 부산 범어사 학원대 교수, 이창희 민족공동체추진본부 기획위원 등이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 및 남북통일 기념대법회 4월 30일 양산실내체육관 한국전쟁 참전국 대사 리셉션 5월 8일 진관사 틱낫한 스님 초청 평화 걷기와 명상 5월 10일 부산 범어사 등 토론자로 참석했다.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은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국민으 로서 지구촌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 한 노력에 힘써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며 그러한 노 청소년 어린이 세계평화대회 사생그리기대회 및 한반도평화대회 동영상 공모 6월 16일 장소 미정 6 25 전사자 위문위령법회 6월 16일 용산전쟁기념관 한반도평화대회 세미나 7월 27일 부산 범어사 평화의 빛 거리 조성 9월 9일~30일 유엔광장거리 및 영남권 9개 본사 경내 한반도평화기원 열린음악회 9월 중 장소 미정 한국전쟁 참전 희생자 묘역 참배 9월 27일 부산유엔묘지 자비구현 인류화합 한반도평화대법회 9월 27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력의 일환으로 한국전쟁 정전60주년을 맞아 한반도평화 대회를 봉행한다. 고 말했다. 한편 지난 1월 16일 부산 범어사에서 영남권 9개 교구본 사 주지스님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반도평화대회 개최에 힘 을 모으기로 결의한 데 이어, 2월 14일 조계종 포교원과 부 산과 울산 등 경남권 참여 사찰 대표급 스님과 실무자들 간의 연석회의가 범어사에서 열렸다. 연석회의에서는 한반 도평화대회의 구체적인 일정과 행사들을 최종 조율했다. 27
특별기획 프롤로그 2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는 불교 및 이웃종교의 평화론과 통일의 # 길 이라는 기조발제를 통해 동서양 종교의 평화관을 살펴본 뒤 평화로운 세상 구현 방편으로 달라이라마가 강조한 내적 비무장 을 제시했다. 오 교수는 달 라이라마께서는 평화로운 세계를 위한 방편으로 외적 비무장 도 필요하지만 한국전쟁 정전60주년 세미나 내적 비무장 이 더욱 더 필요하다고 강조하셨다. 면서 연기법과 총체적 견해 가 더욱 퍼져 나가게 하는 것이 남북화해와 세계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에 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 라고 주장했다. 박경준 동국대 교수는 불교의 평화론과 남북관계 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평 불교평화론과 평화운동 화와 이데올로기를 바라보는 불교적 입장을 짚어본 뒤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 원과 발원을 뛰어넘어 실천을 통해 실질적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고 제 시했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 글. 박인탁(불교신문 기자) 이밖에도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남북경협을 통한 한반도 평화질서 구축-북 남북 화해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 한 3차 핵실험 국면 을, 유승무 중앙승가대 교수는 불교평화운동의 합심주의 분쟁 없는 지구촌 위해 자비심으로 정진해야 적 특성과 그 실천적 함의 를 주제로 발표했으며 이창희 조계종 민족공동체추 진본부 기획위원과 이도흠 한양대 교수,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 등이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불교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위기 토론자로 참석해 토론을 펼쳤다. 를 해소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법석이 마련됐다. 한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은 인사말에서 범어사와 부산은 다양한 역사적 배경 국전쟁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 봉행위원회(위원장 자승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으로 정전협정 60주년을 맞는 소회와 평화에 대한 간절함이 특별하고 남다르 가 주최하고 제14교구본사 범어사(주지 수불 스님)가 주관한 한국전쟁 정전60주 다. 면서 이번 세미나를 시작으로 향후 다양한 행사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모 년 학술세미나 가 지난 2월 27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200 아서 한반도 평화 구축에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고 서원했다. 여 명의 사부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불교평화론과 평화운동 그리고 한반도 평화 를 대주제로 열린 이날 학술세 미나는 1부 기념법회와 2부 세미나 등으로 진행됐다. 통도사 주지 원산 스님(한반도평화대회 공동운영위원장)은 한국전쟁 정전60주년, 불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주제연설을 통해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 분쟁 지역에 자비희사慈悲喜捨 사무량심四無量心의 불교문화가 꽃피어 평화로운 지구 촌이 되도록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 한다. 고 당부했다. 28 29
선 禪 겨울 가면 봄이 오는 일 그 속에 선 禪 이 들어차 있다 범어사 금어선원 유나 인각 스님의 선 禪 이야기 1 봄이 왔다. 겨울 가면 봄이 오는 일, 그 속에 선 禪 이 들어차 있다. 금어선원 앞마당의 매화가 꽃봉오리를 터뜨렸다. 그 꽃봉오리도 선의 발현이다. 겨우내 얼었던 마당의 흙은 봄 햇살에 녹아 폭삭하다. 그 흙을 밟고 걷는 것도 선이다. 이렇게 풀어내면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은 세상천지 만물의 실상이기에 어느 것 하나도 선 아닌 게 없다. 만유불성 萬 有 佛 性. 일체 생명은 다 불성이 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하신 이 말씀은 우리 모두의 관념을 깨는 폭탄선언이다. 이 말을 자주 듣고 많이 접해서 별다른 감 응이 없는 이들도 많을 것이나 이 말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깨달 은 이만이 할 수 있는 말이고 알 수 있는 진리의 세계다. 봄이 오면 꽃이 피는 이치처 럼 우리는 언젠가는 선의 길을 갈 수밖에 없고 끝내 부처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할 존귀한 존재라는 소식이다. 헛된 망상을 일 분 일 초도 여의지 못하는 존재에서, 어 리석음에 하루에도 몇 번 제 발등을 찍는 우를 범하는 자리에서 부처의 지위를 회복 할 수밖에 없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이 소식이 어찌 놀랍지 않으랴. 우리 모두는 이생에 아니 하면 다음 생에라도 언젠가는 성불을 해야 하는 존재라는 희소식이다. 참선은 이처럼 내 존재의 가치를 뒤바꾸는 개혁의 시작점이고 삶의 질을 변화시키 는 터닝포인트(turning point)와 같다. 사람 사람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가지고 있는 마음 하나로 시작하는 마음농사다. 마음밭을 가꾸는 이 농사는 마음밭 가운 데 가득한 망상도 뽑아내고 어리석음도 제거하며 나의 본래 모습을 밝혀 참다운 나 를 키워낸다. 자기 마음, 자기 주인공을 깨닫고 보면 중생이라는 착각에서 홀연히 깨어나 참다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참다운 인간 본래의 참모습을 밝혀서 인생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선이야말로 웰빙의 전제 조건이며 모든 아픔과 고통 의 근원을 치유하는 궁극의 힐링(healing)이다. 근원이 해결되면 지엽은 저절로 해결 되는 이치이다. 선이 불교의 요체이며 궁극일 뿐 아니라 모든 종교, 인종, 국가를 넘 어 전 인류, 전 존재의 궁극이 되고도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좋은 소식을 듣고도 몸과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움 직여야 변화가 온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몸이 그에 응하지 않으면 기회 를 놓친다. 요즘은 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선이 무엇인가, 어떻게 선 공부를 해야 하나 질문들을 자주 한다. 그러나 그러곤 그만이다.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 다. 제아무리 언변이 뛰어난 이가 선을 잘 설명해 주었다 해도 설사 부처님이 선을 30 31
선 禪 설해 주셨다 해도 그것이 선의 참맛은 아니다. 직접 맛을 봐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이 발심이다. 발보리심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깨닫고자 하 는 간절한 목마름이다. 생로병사로 인해 벌어지는 천차만별의 고통을 여의고 영원 히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간절한 마음이다. 그러니 이 발심이 없고서는 한 발짝도 떼어놓을 수가 없다. 당장 먹고 사는 일에, 또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에 집 착하여 그것이 전부라고 매달려 있으면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취향 심을 일으키기 어렵다.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한 한 걸음은 현재의 것을 놓고, 지금 가진 생각의 범주를 깰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끊어진 자리를 선이라고 하나 이상하게도 선종에 유독 어록이 많다. 그것 은 아마도 말을 떠난 그 선을 이렇게 저렇게 말로 표현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모든 선원의 납자들은 누더기 한 벌로 평생을 화두로 생명을 삼고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금어선원에 도 묵묵히 앉아 나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제대로 푹 쉬는 납자들이 살고 있다. 선찰 대본산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대중들과 더불어 정진하다 보면 새삼 선을 이어 온 역 대 조사들과 선지식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말로는 풀어낼 수 없는 선의 세계를 온몸으로 이어 온 이들이 있었기에 선찰대본산 범어사가 있고 지금까지도 선의 맥이 이어져 오는 것이 아닌가. 올해는 범어사가 선찰대본산으로 확정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꼭 100년 전 범어사에서 일어났던 선풍이 여전히 금어선원 대숲에 불어오고 있다. 바람 소리 를 듣는 이 홀연히 깨어나라 깨어나라 하고 푸르게 푸르게 흔들리면서.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 말은 기실 선과는 무관한 것이다. 사족 蛇 足 인 것이다. 부처 님께서 팔만사천법문을 설하시고도 한마디도 한 바가 없다고 하셨던 것처럼. 그래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_정리. 편집부 서 선은 더욱 직접 체험해서 요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이 가르쳐서 알려 줄 수 있 는 게 아니다. 스스로 음식을 먹어야 배가 부르지 옆의 사람이 맛있는 것을 먹고 아 무리 설명해도 그 맛을 알 수 없고 내 배가 부를 수도 없는 이치다. 선이 곧 삶이니 삶 역시 그러하다. 자기 스스로 혼신을 다해 이뤄나가야 하는 것이 선이고 삶이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인생길에서 외롭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선의 길 로 들어서야 한다. 고통을 여의고 괴로움을 벗어나게 해 주는 최고의 동반자인 선 과 더불어 선의 맛을 보면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 발심하고 움직여야 한다. 마음농사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발심이 시작이다. 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어 부처님처럼 되고 싶다는 발심이 서야 한다. 발심은 세상의 무상함을 아는 것에서 싹튼다. 세상 모든 것들은 무상하다. 언젠가는 없어지는 것들을 전부라고 알고 좇 고 있는 나를 바로 봐야 한다. 선은 무상에서 출발해서 간절함으로 화두를 참구하 는 것이다. 여기서 나도 수행하면 부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신심은 농사에서 비옥한 땅처럼 중요하다. 기본 터전인 신심 위에 선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자, 이제 이렇게 시작하여 마음농사를 짓게 되면 어떤 열매를 맺어 맛을 보게 될 까? 이 역시 말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 전부를 줘도 바꿀 수 없는 열매 가 열리고 그 열매로 세상 전부를 먹이고도 남겠으나 그 열매를 말로 할 재주는 없 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나라는 생각에 매이고 어리석음에 발을 묶인 이들을 선으로 건져올려 볼 요량으로 하릴없이 던져 보는 그물이다. 선으로 나아가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부처님과 같은 대지혜가 발 휘된다. 자기에 대해, 인생에 대해 끊임없는 물음표가 끝이 나고 진정한 진리의 길, 금정총림 범어사 금어선원 32 33
특별기고 한국불교, 정치와의 올바른 관계 맺음을 생각할 때 글. 김종인(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정교분리는 종교와 정치의 기본적 관계에 대한 근대의 보편적 상식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정교분리라는 말이 정치와 종교가 잘라진 무 토막처럼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또 그렇게도 될 수 없다. 정치와 종교 어느 쪽이나 그 사회 대중의 포괄적인 삶을 규정하는 이상 양자는 많은 영역에서 서로 관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교분리는 이렇게 사회의 많은 영역에서 관여되는 정치 와 종교가 상호 간에 지나치게 서로 얽히는 것을 경계하 는 의미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정교분리는 주로 정치권 력에 대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개념이다. 서구 사회에서 정교분리의 문제는 로마제국시대 때부터 제기되었다. 로마는 공화정에서 출발하지만 나중에 제정 시대가 되면서 로마 황제는 로마 사회에서 절대적인 지위 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황제가 가지는 절대적인 권력은 황제를 신적인 존재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로마 황제는 신과 다름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신으로서의 로마 황제는 유일신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기 어 려운 것이었다. 세속의 영역은 물론이고 신앙의 영역에서 마저 자신들을 지배하는 로마 황제에 대해 유대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양자 간에 갈등 이 생겨났다. 이 갈등 과정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다가 생명을 잃었다. 기독교와 로마 황제와의 갈등은 후에 기독교가 국교로 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기독교의 공인 후에도 서구 사회에 서 정치와 종교, 황권과 교권의 갈등은 중세에 걸쳐서 지 속적으로 야기되었지만 그것은 종교적 자유의 문제는 아 니었다. 순전히 권력 투쟁의 문제였다. 서구 사회에서 종 교 자유의 문제가 다시 제기된 것은 프로테스탄트가 출 현하면서부터이다. 종교혁명이 일어나면서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종교의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정교분리를 제 기하게 되었다. 구교의 영향력하에 있는 정치권력으로부 터의 독립 없이는 프로테스탄트의 독립은 어려운 것이었 던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루터는 두 개의 왕국 개념을 내세워 시민사회의 영역(정치)과 양심의 영역(종교) 을 분리시키고 전자에 대한 후자의 자유를 주장했다. 이 두 왕국 개념은 프로테스탄트의 나라 미국 헌법을 기초한 34 35
특별기고 토마스 제퍼슨에 의해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개념으로 두는 가치관의 충돌이었다. 부처는 세속 생활의 덧없음을 이러한 과정에서 되새겨보아야 할 것은 유교에 의한 불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이곤 하였다. 그 결과 불교는 정착되었다. 깨닫고 생사를 초월하는 세계로 나아갈 것을 말한 반면 교의 탄압에 불교가 어떻게 대응했는가 하는 것이다. 동 정치적으로 무시해도 상관없는 집단처럼 되었다. 에, 공자는 초월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부정한다. 삶도 다 아시아의 불교인들은 한 번도 적극적으로 대응한 사례가 불교는 흔히 출세간의 진리를 추구한다고 한다. 승려란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 것인가 하는 것이 공자의 입장 없다.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정치권력을 자기화하고 오늘날 한국불교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무력 가정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정치에 이었다. 유학적 사고는 출세간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았으 그것을 활용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해방 이후 한 하다. 2000만 명의 신도가 있다고 하지만, 정치인들은 그 관여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처럼 보인다. 까닭에 정치와는 며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에서의 정치권력에 대한 기독교와 불교의 서로 다른 대 숫자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 수가 단지 부풀려진 숫 무관한 종교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불교의 응 또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의 숫자 크기를 떠나서 정치적 역사는 그렇지가 않다. 불교 역시 종교이며, 수많은 신도 유교는 모든 인간관계를 세속적 위계질서 속에 넣기를 으로 결집된 숫자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까닭에 수천 명 를 가진 종교가 정치와 전혀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원한다. 그런 까닭에 승려들도 왕에 대한 공경의 예를 갖 기독교인들은 정치에 대해 적극적인 관여의 태도를 취했 의 승려와 수십만 명의 불자들이 서울 한복판에 모여 정권 가능한 일이 아니다. 불교 역시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출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에 대해 승려들은 승려 다. 한편으로는 반공 이데올로기의 공유를 통하여 보수 의 종교 편향에 항의하는 집회를 가졌지만 의미 있는 정치 맺어 왔다. 석가모니 역시 출가를 한 몸이지만 당대의 정 는 왕을 공경할 수 없다 는 논리를 펴기도 하였으나 인도 권력과 협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 실현의 구호 적 결실도 거두지 못했다. 한국불교의 이러한 무력함은 지 치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 주변의 강대국인 에서 사제계급이 가졌던 지위를 가지지는 못하였다. 승 속에 진보적 세력과도 협력해 왔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금까지 자신을 적극적으로 옹호할 정치적 세력을 스스로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의 왕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 예의 사문불경왕자론 은 정교분리에 대한 불교적 선언이 은 청와대의 조찬기도회에 참석하고, 진보적인 기독교인 만들지 못한 정치적 어리석음의 결과이다. 으며, 석가족의 존립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었는데, 이러한 논리는 유교사회에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들은 민주화 시위와 집회에 동참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 정치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종교 생 동아시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승려들 자신이 직접 않았다. 유교 문화가 지배하는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승 는 한국의 정치권력에 막강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까닭에 종교도 정치로부터 자유 정치권력을 추구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왕을 비롯한 려들 역시 통치의 대상에 들어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동 있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 로울 수는 없다. 정교분리는 종교적 자율성에 대한 필요 정치 실력자들에게 정치적 조언을 해 왔다. 그런데 불교가 아시아 불교야말로 가장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할 수 들의 그러한 활동은 기독교의 존재 이유를 이 사회에 각인 와 요청의 구호이지 저절로 작동하는 원리는 아니다. 정 정치와 무관할 수 없었던 것은 승려들이 왕이나 귀족들에 있다. 이슬람 문화권, 기독교 문화권, 힌두교 문화권 모두 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보수적인 국민들에게 기독교는 자 교분리의 구호는 역설적으로 종교와 정치의 밀접한 연관 게 정치적 조언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쳤 에서 종교인들은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출세간 유주의의 옹호자로, 진보적인 국민들에게는 민주주의의 성을 보여준다. 한국불교가 오랜 세월 동안 자의 반 타의 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현실이 불교에 영향을 미친 탓이 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유교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 옹호자로 기독교가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반으로 사회와 떨어져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무지한 상태 더 크다. 불교는 유교적 전통이 자리 잡고 있던 동아시아 었던 동아시아에 전래된 불교는 그러지를 못했다. 특히 독 반면에 불교는 정치적으로 한없이 어리석었다. 정치권 로 지내 온 것은 종교와 정치의 이러한 밀접한 연관성에 대 사회에 전래되면서 유교적 가치관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선이 강한 성리학이 지배한 송나라 이후의 중국, 그리고 력을 자기화할 줄 몰랐다. 스스로 정치권력을 자기화할 한 자각 내지는 인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종 받는다. 공격은 때로는 이념적 공세이기도 하고 때로는 조선사회에서 불교는 정치권력을 장악한 유학자들의 편 줄 몰랐으며, 다만 정치권력의 들러리와 희생양이 되곤 하 교와 정치의 밀접한 연관성을 인정하고 정치와의 올바른 물리적 탄압이기도 하였다. 유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견으로 인하여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특히 조선의 성리 였다. 심지어는 정치적 우호세력과 적대세력에 대한 구분 관계 맺음을 이루어야 한다. 불교에 대한 이념적 공격은 두 사상의 근원적 차이에 관한 학 신봉자들은 지극히 폐쇄적인 탓에 불교에 대한 지속적 조차 하지 못했다. 불교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세력에게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세간적인 가치관과 출세간에 근본을 이고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냉담하고, 도리어 자신을 이용하고는 내버릴 세력을 지지 김종인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이며 조계종 국제교류위원, International Lay Buddhist Forum(국제재가불교포럼) 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평설, 한국의 대학과 지식인은 왜 몰락하는가 등이 있다. 36 37
우리의 스승, 동산 대종사 1 이른 아침 시간, 영주암 마당에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 그림은 곡선과 직선이 우리 시대의 스승인 동산 스님과 한 제자의 이야기 어우러진 선화다. 흙이 빗자루의 결을 따라 이리저리 쓸려 간 흔적. 마당 가득 한 그 그림은 그 어떤 선화보다 울림이 크다. 화가가 붓을 들듯 빗자루를 들고 매일 아침 그 그림을 그리는 주인공은 정관 스님. 정관 스님은 그 그림을 은사 인 동산 스님께 배웠다. 우리 스님께서는 매일 마당을 쓰셨어. 새벽 6시 대중공양을 마치고 마당을 쓸었는데 겨울이면 채 어둠이 가시기 전에 시작하거든. 겨울엔 낙엽도 별로 없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정관 스님 고, 밤새 바람이 불고 하니 쓸 것도 없다 싶은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하셨어. 어 른이 나오니 대중이 안 나올 수가 없지. 모든 대중이 다 나왔어. 어른이 가니 우리는 마당비 들고 쫄쫄 따라가면서 쓰는 거지. 그때는 어릴 때니까 따라가 면서 마당 쓸다가 마당비로 장난도 치고. 밤새 각 방에서 있었던 얘기들이 다 글. 천미희 나와. 밤새 누구는 어땠고, 어떤 자세로 잤다느니 해 가면서. 우리 스님은 그 런 얘기들을 듣고 싱긋 웃으시고. 열반 드는 그날까지도 마당을 쓰셨으니까. 가장 좋은 스승은 제자에게 기본을 가르친다. 그 기본 위에 무언가를 덧붙여 배우는 것은 제자의 몫이다. 은사 동산 스님은 매일 아침 마당비를 들고 마당 을 쓸었고 수많은 제자들은 그 뒤를 따랐다. 똑같은 그 현장에서 제자들은 저 마다 다른 것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마당비를 휘두르는 장난을 쳐 가며 은 사의 뒤를 따라다녔던 어린 제자는 이제 그 당시 은사스님보다 더 많은 세수가 되었고 가장 앞서서 비질을 하는 자리에 있다. 그래서 절로 헤아려지는 스승의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모든 존재는 교학상장 敎 學 相 長 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성장,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두두물물이 스승 아님이 없으며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배우는 제자의 입장에 있다. 여기 한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가 있다. 제자들의 기억 속에서 아직도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우리 시대의 스승인 동산 스님과 그 제자들의 이야기.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겠으나 그 하나 속에 가르치고 배우는 일 전부가 다 들어 있음이니 어찌 눈 열고 귀 열어 들어 보지 않으랴. 이 이야기들이 우리의 깊은 내면에서 숨죽이고 있던 교학상장의 씨앗을 틔워 줄 것이니. 마음이 있다. 도량에 사고가 나거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우리 스님께선 도량청정무하예 道 場 淸 淨 無 瑕 穢 삼보천룡강차지 三 寶 天 龍 降 此 地 그 말도 모리나(모르나)? 모리나(모르 나)? 하고 호통을 치곤 하셨는데 마당을 쓰시는 것으로 그 어떤 말보다 더 큰 가르침을 주신 거지. 그래서 내가 범어사 주지를 맡던 4년 동안 단 하루도 마 당 쓰는 일을 빼 먹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일과가 되었어. 정관 스님은 은사 동산 스님을 우리 스님 이라고 했다. 우리 스님이라고 할 때마다 흠모와 정겨움, 그리고 존경의 마음이 스며 있다. 정관 스님은 우리 스 님 이 될 동산 스님을 경주에서 처음 만났다. 설법제일 하동산이라는 말이 유행 할 만큼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동산 스님의 경주 포교당 법회에 학생 때부터 참 여했다. 원효 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을 읽고 원효 스님처럼 되고 싶다고 발 심해 있던 열여섯 어린 소년에게 큰스님의 법회는 그저 좋기만 했다. 그리고 출 가해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동산 스님은 제자에게 경환 慶 煥 이라는 법명을 주 38 39
우리의 스승, 동산 대종사 1 었다. 경주에서 돌아온 사람이라는 뜻이 담긴 법명이었다. 막상 계를 받고 이 름까지 받았으니 정관 스님은 그때부터 출가 수행자가 된 것에 대한 부담감이 커져만 갔다. 계를 받았는데 그 계를 지키지 못하면 나는 뭐가 되나? 하는 자 문자답이 깊어졌다. 그 물음을 거듭하던 스님은 출가 수행자로서 제 역할을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절박함으로 어떻게 하면 바른 수행자가 될 것인가 를 묻고 또 묻다가 문득 정관 正 觀 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그 당시는 팔정도가 뭔지도 모를 때였으나 바로 보려고 노력하면 계를 받은 사람으로서 바른 길을 갈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은사스님을 찾아갔다. 아직 은 어른에게 당돌하게 뭔가를 얘기할 때도 못 되니 머리를 긁적이며 스승 앞에 앉았다. 스님 제 이름을 정관이라고 바꾸고 싶은데요. 동산 스님이 제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정관? 그래? 그럼 정관 해. 그렇게 은사스님은 정관이라고 이름을 고쳐 주었다. 그러나 그 이름 덕에 은 사스님의 놀림과 타박을 많이도 들었다. 정관 스님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게 바로 보는 거야? 그게 바른 거야? 하며 물으시곤 했고 신도들 앞에서도 저 스 님은 자칭 정관이야. 바로 본다네. 하며 이름으로 놀리곤 했다. 조그만 잘못을 해도 그게 바로 보는 거야? 타박하며 일깨움을 주셨던 은사 동산. 어린 제자 가 이름을 스스로 지어 바꾸어 달라고 한 만큼 그 이름대로 바르게 보는 수행 자가 되라는 경책을 그렇게 했던 것이리라. 정관 스님 역시 그 후 걸어온 평생의 여정이 이름값을 하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정관 스님은 지 금도 스승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스승은 아직도 다다르지 못한 그리움 이고 언제나 닮고 싶은 표상이다. 우리 스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 법신이 잠시 사람 몸을 빌려 보여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니까. 우리 스님은 신심이 남 다른 분이었지. 그야말로 신자 信 者 야. 전기가 없던 시절 2시 5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법당 가는 준비를 하시는데, 시자가 물을 데워 드리면 아주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를 하셔. 의무적으로 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 조왕단을 시작으로 열 군데가 넘는 전각, 탑 등을 모두 참배하셨는데 사시, 저녁 하루 세 번 하실 때마다 언제나 그 표정이셨어. 우리 스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시계 를 맞춰도 될 만큼 정확한 시간에 하루도 빠짐없이 하셨으니 지금에 와서 생각 해도 그런 신심은 감히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게 아닌가 싶어. 그리고 사시 예 불 때는 불공 끝날 때까지 서 계셨는데 일반 불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더 신심 스님 제 이름을 정관이라고 바꾸고 싶은데요. 동산 스님이 제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정관? 그래? 그럼 정관 해. 을 내곤 했어. 그리고 지금도 내 수행의 좌표이고 표본은 우리 스님이야. 안거 기간에는 대중들과 똑 같이 정진하신 것은 물론 이고 해제 때에도 혼자 시작 죽비 치시고 정진 하시다가 마치면 또 죽비 치시고 하면서 하루 9시간 이상은 꼭 정진을 하셨거든. 신심이 샘에서 물오르듯 해야 한다. 고 늘 강조하셨던 동산 스님. 동산 스 님의 일상이 바로 그러했다. 정관 스님은 예불 준비하시던 은사의 모습이 눈앞 에 있는 듯 선연하다. 약간 볼그레한 얼굴에 서려 있던 기쁨과 설렘은 어디 좋 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의 그 마음이 담겨 있는 듯 느껴졌다. 언젠가 3년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관음전 부전을 지낸 적이 있었다. 어느 겨울 새벽, 도량은 텅 빈 듯 조용하고 낙엽은 떨어져 뒹구는데 풍경이 뎅그렁 울렸다. 그때 동산 스님이 도량 참배를 위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정 관 스님은 절로 이렇게 생각했다. 저 어른 앞에서는 차디찬 돌이라도 감응을 안 할 수가 없겠다. 우리 스님의 모습을 보면 감응을 안 할 수가 없어. 스승과 제자 사이라도 감 응이 없으면 소용이 없잖아. 제자 아니라 돌이라도 감응 안할 수가 없는 분이 우리 스님이야. 그래서 지금도 우리 스님 얼굴을 생각하면 정신이 퍼뜩 들곤 해. 그런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 마음은 어떠했을까? 늘 대중공양을 하셨던 어 른이니까 어느 날 점심 공양에 안 계셔서 물으니 병원에 가셨대. 가끔 병원에 가 시기도 했으니 그런가 보다 했지. 그런데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저녁 7시쯤 기도 중인데 어떤 스님이 문을 똑똑 두드리며 우리 스님이 돌아가셨다는 거야. 처음엔 장난인 줄 알고 계속 기도를 했어. 그런데 계속 문을 두드리며 세 번째 로 스님이 돌아가셨다고 했을 때 이거 진짜구나 싶었지. 그때는 하늘하고 땅 이 딱 붙는 거 같았어. 동산 스님의 다비식에는 부산이 생기고 제일 많은 인파가 범어사를 찾았다고 할 정도로 동산 스님을 마지막으로 보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때마침 범어사 주차장 공사를 끝낸 며칠 뒤라 사람들이 불편을 덜 겪었다고 정관 스님은 회고 했다. 그렇게 육의 은사스님을 보내드려야 했다. 그러나 정관 스님은 지금까지도 은사스님의 영향으로 일생을 이어오는 것들이 많다. 이제 은사스님은 정관 스 님 안에서 살고 계신 것이다. 매일 아침 마당을 쓰는 일 외에도 아침은 죽 공양 으로 하는 것, 은사스님께 그대로 공부를 이어가면 된다. 는 격려를 받고 이어 온 염불선 수행이 그것이다. 우리 스님은 어른이라고 별도로 공양을 드시지 않고 늘 대중공양을 하셨어. 40 41
우리의 스승, 동산 대종사 1 나마스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그리고 늘 아침공양은 죽으로 드셨어. 아침을 죽으로 먹으면 열 가지 이익이 있다고 했으니 나도 따라 그렇게 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어. 그리고 이제 나에게 둘도 없는 내면의 동반자가 된 염불선도 우 리 스님의 격려 덕분에 더 익어졌지. 우리 스님 덕분에 자기 성찰, 자기 제도, 자 기 정화의 길을 쭉 걸어올 수 있었으니 우리 스님의 마음이 나에게로 이어진 듯 하여 더없이 감사하지. 스님의 염불선은 관음기도를 하던 중 시작됐다. 원효암에서 철야 정진을 일 주일 동안 하는데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는 이게 뭔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 작했다. 기도를 마치고 은사스님을 찾아가 여쭈었다. 동산 스님은 그렇게 하 면 선도 되고 염불도 되는 것이니 그대로 해! 하고 제자의 공부를 인정하고 격 려해 주셨다. 그 후 정관 스님은 오늘까지 매일 새벽 2시 30분이면 일어나 염불 선 시간을 갖는 것을 시작으로 두 시간 정진하고 두 시간 쉬면서 잠자리에 드 는 9시 30분가지 이어진다. 스님은 정진을 항상 서서 한다. 수마를 떨치기 위 금정총림 범어사 율학승가대학원장 수진 스님 지계청정 持 戒 淸 淨, 모든 수행의 근본입니다 글. 편집부 해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해 왔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 모습을 보고 스님이 기도를 하는 줄 알겠지만 정관 스님에게 있어 그 시간은 화두 참구의 시간이다. 염불하는 이게 뭔가 하는 시심마 화두를 놓치지 않는 시간, 그 시간이 스님에 겐 부처님을 위시한 일체의 제불을 모시는 시간이며, 본래지로 돌아가는 시간 이다. 첫 의증을 일으켰을 때 제자를 격려해 주신 은사스님 덕분에 더욱 힘을 받아 이어 온 공부이기에 은사스님을 향한 감사함이 더욱 진할 수밖에 없다. 좋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라고 해서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불교의 뿌리는 계율 戒 律 이고 계 戒 는 주초석 柱 礎 石 이다. 한 채 마하사로 출가하였다. 아침부터 저녁나절까지 고향 뒷동산에 아니다. 가르치는 스승이 아무리 훌륭해도 배우는 제자의 감응이 없으면 그만 의 집을 잘 짓기 위해서는 주초석이 제대로 놓여 있어야 하듯 홀로 앉아 하늘을 고요히 물들이는 석양을 바라보며 굳힌 결 이다.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은사가 일러주신 불교종단에 있어서 계율이 그러하다. 부처님의 말씀과 율 律, 진 심이었다. 그저 노을과도 같이 편안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기본에 충실하되 스스로 더욱 깊어지는 공부를 이어가 향상일로를 걷는 것이 리를 근간으로 살아간다면 선도 善 道 를 가게 될 뿐 아니라 악도 싶은 한 가지 바람뿐이었다. 스님은 출가 후 두 달도 채 안 돼 가장 뛰어난 제자라 할 것이다. 음식이 귀했던 옛 시절, 생전에 상추전을 즐겨 惡 道 로는 향하지 않게 된다. 대지를 적시는 봄비에 피는 매화같 시자 侍 者 가 되어 은사스님을 모셨다. 출가 수행자가 먹을 것 드시고, 배고플 때 머리를 긁적이면 과자를 꺼내 제자들에게 주시던 은사를 그 이 부처님의 율법대로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채워 간다면 맑 다 먹고, 갈 곳 다 가고, 잘 것 다 자면 도는 도대체 어디 있겠 리워하는 정관 스님은 스승을 닮고 싶은 마음이 뼈까지 스민 제자로 보인다. 고 진한 향을 토하는 꽃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느냐? 는 은사 문성 스님의 가르침이 시발점이 되어 잠을 버리 인터뷰를 마치고 정관 스님이 주석하시는 본래지당 本 來 知 堂 앞마당에서 사진을 부처님의 계율과 율장정신을 이르는 수진 스님의 어조는 담 고 공부에 매진했다. 지금도 스님은 2시간 이상 잠을 자는 일 정관 스님은 1954년 동산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고 1957년 비구계를 수지했 다. 범어사 강원을 거쳐 14안거를 성만했으며 쌍계사 주지, 범어 사 주지를 역임했다. 1984년 부산불교어린이지도자회와 1986년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 창립과 초대회장직을 맡았으며 1995년 사단법인 불국토 대표이사를 맡아 불교사회복지의 터를 닦았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이며 영주암 회주로 영주암 본래지 당에 주석하며 선의 길을 안내하는 지남철이 되고 있다. 찍는데 가사를 수하고 앉아 있는 정관 스님의 모습에 설핏 사진에서 접한 동산 스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정관 스님은 그렇게 은사 동산 스님을 닮아가며 본래지당에 머물고 있다. 백했다. 1974년 3월 사미계를 받은 수진 스님은 범어사에서 초대 율학승가대학원장 소임을 맡게 되었다. 범어사는 참선 수 행하는 선원 禪 院, 경전을 배우는 강원 講 院, 계율을 공부하는 율 원 律 院 등을 모두 갖추어 총림 叢 林 으로 승격했다. 수진 스님은 서쪽 하늘의 석양처럼 평온하고 충만한 삶을 일 구고 싶은 마음을 안고 1971년 13세의 나이에 범어사 말사인 이 거의 없다. 1200여 년 전에 쓰인 화엄경청량소초 230권 전 문을 국내 최초로 번역하는 작업을 2006년부터 진행해 온 힘 의 근간이 아마도 여기에서 나왔으리라.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기품과 곧은 기개가 스님의 그동안의 행보에서 고스란히 느껴 졌다. 42 43
나마스테 금정총림 범어사 율학승가대학원장으로서 스님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범어사 율학승가대학원 1기생을 받게 된 만큼 한 해 동안 부처님의 율장을 근간으로 하여 부처님의 계 율정신에 따라 스님들과 수행의 표상을 함께 그리고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범어사에서 계율 을 기반으로 한 수행자의 모습이 살아나고 변화하는 데 제가 일조하길 바랍니다. 그 새로운 바람이 커 져서 대한민국의 종단에 율장정신의 회복이 점진적으로 이뤄졌으면 합니다. 지계청정 持 戒 淸 淨, 계를 지켜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모든 수행의 근본이다. 해방 전후로 200만 명도 안 되던 불자를 1500만 명 불자로 길러 낸 유구한 역사의 한국불교의 힘은 어쩌면 여기서 비롯된 것 은 아니었을까. 미래 한국불교 새로운 100년의 역사는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고 그 중심에 금정총림 범어 사가 자리해 있다. 금정총림 범어사 율학승가대학원 범어사는 스님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범어사에서 계를 받고 37년 만에 공식적으로 범어사 첫 율학승가대학원장의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1976년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범어사 승가대학에 다시 방부를 들여 잠시 행자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지요. 범어사와 해인사의 승가대학 학장 제의를 고사 해 오다 1993년 해인사 학장을 맡아 7년간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계를 받았던 1970년대 전만 하더라도 범어사 금강계 단은 그야말로 황금기였습니다. 범어사에서 사미계, 비구계, 사미니계, 비구니계를 받은 이들이 실로 수백 명이 될 정도로 제일 많았 고 그때의 해인사, 통도사는 범어사의 계단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에 그쳤습니다. 1980년대 이전 본사 本 寺 별로 계단 戒 壇 을 설치하여 계 를 주었는데, 스님들이 범어사에 와서 계를 받아야 진짜 계를 받은 느낌이 들 정도로 해방 이후 외형적으로 계단이 가장 큰 곳이 범어 사였습니다. 스님께서는 한국불교와 범어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선찰대본산으로서의 명맥을 이어 왔지만 제가 기억하는 범어사는 금강계단이 가위 대단했던 곳이었습니다. 그 사라진 금강계단(율 학승가대학원)이 설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줄곧 지녀오고 있었지요. 금강계단을 필두로 한 제2의 중흥이 필요한 지금, 범어사가 총림 으로 지난해 승격된 것은 참으로 경축할 일입니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도래한 것인 만큼 소위 율원이 범어사의 굳건한 뿌리가 되어 대중을 서로 화합시키고 수행 정진의 분위기를 조성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계율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율장정신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한 국불교는 여전히 대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될 뿐,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가슴에 학식 學 識 과 도 道 가 아무리 철철 넘쳐도 스님 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과 행동을 하지 않으면 사회의 지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기본적인 율장정신의 회복이 한국불교의 신망 과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를 던져줄 것이고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범어사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진 스님 1971년 부산 마하사에서 문성 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74년 범어사에서 계를 받았다. 1976년 해인사 승가대학, 1984년 금산사 화엄학림을 졸업하고 이후 10년간 수행하였다. 현재 금정총림 범어사 율학승가대학원장, 부산 해인정사 주지, 대한 불교조계종 부산연합회 회장, 동명대학교 불교문화학과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44 45
말사순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한을 품어온 고찰, 금련산 마하사 摩 訶 寺 3월, 어느새 잎순을 틔운 봄물 오른 나뭇가지 틈새로 온순해진 바람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 다. 수줍게 고개를 내민 매화 망울과 기분 좋은 눈인사를 나눈다. 질기게도 늘어지던 겨울 한 파를 이겨낸 봄날의 하늘은 유독 말갛다. 비죽비죽 거죽을 뚫고 어린잎이 안간힘을 내고 있 다. 곧 머지않아 하나의 우주가 피어날 것이다. 그날을 위해 몇 날 며칠을 앓았을 저들처럼 나 도 뜨거운 몸부림으로 내 가지를 벋어내야 하지 않을까. 한 걸음 한 걸음 빠르지도 느리지도 고고하게 솟아오른 산봉 山 峯 이 흡사 금빛 연꽃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금련산 金 蓮 山. 부산의 동 남해안에 뻗어 있는 황령산의 서북쪽 여러 산봉 중 하나인 금련산에는 1천 6백여 년 된 고찰, 마하사 ( 摩 詞 寺 연제구 봉수로 138)가 자리해 있다. 해발 400m의 산자락에 앉아 있는 마하사는 금학 金 鶴 이 알을 품 고 있는 금학포란 金 鶴 包 卵 의 지형을 하고 있다. 둥근 나이테를 안고 있는 노송처럼 긴 세월의 무늬를 간직한 채 묵묵히 한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절이다. 불법 佛 法 으로 중생들을 온몸으로 품어 청정하고 글. 편집부 않은 걸음으로 나는 오는 봄을 마중 나간다. 160여 개가 넘는 범어사의 말사 末 寺 를 찾아 나 선 길. 마하사로 향하는 어깨 위로 떨어지는 따사로운 봄볕에 마음이 한껏 가벼워진다. 지혜로운 부처를 키워낼 영원한 요람 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마하사는 작지만 아늑한 둥지 같기도 하고 한없이 포근한 엄마의 너른 품을 닮았다. 발 길 닿는 자리마다 묵중한 긴 세월의 깊이가 진득하게 배어나온다.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향내음이 나는 것 같다.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모든 것들은 화려하지 않아도 이렇듯 오래도록 눈을 잡 아끄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을 가만 들여다보노라면 어느새 어지러운 세상살이에 꽁꽁 매여 있던 마음이 정갈해지고 몸 구석구석이 훈훈해진다. 노파의 주름진 손을 맞잡는 것처럼 가 슴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움이 번진다. 세상의 온기는 이렇게도 전해지는 것이다. 존재 그 자체만으 로 뜨거운 울림이 가슴 곳곳을 채운다. 천 년의 시간들이 겹겹이 쌓이는 동안, 많은 이들이 마하사를 숱하게 오가며 부처의 세계로 가는 길을 냈을 것이다. 그들의 정성과 원력이 오롯이 느껴지는 것 같 다. 마하사의 마하 摩 訶 는 범어 梵 語 로 위대한, 훌륭한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가히 이름대 로다. 46 47
말사순례 국내 최초의 정통 나한도량, 마하사 부처와 중생을 이어주는 나한 신앙 산사로 향하는 외딴길은 고즈넉하고 평온하다. 모든 잎을 떨구고 초연하게 서 있 는 나무 군락이 특유의 은은한 정취를 자아낸다. 길섶에서 만난 녹죽 사이로 쉼 없 이 오가던 바람이 청량한 파도 소리를 낸다. 코끝을 스치는 봄내음에 불쑥 반가움 이 인다. 1965~1970년 중창 불사 당시 대웅전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내물왕 39년(394) 아도 화상 阿 道 和 尙 이 경북 선산에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 桃 李 寺 를 세우 고, 남으로 내려와 나한기도도량인 마하사를 세웠다고 한다. 초창 당시 마하사의 말사로 반야암 般 若 庵 과 바라밀암 波 羅 密 庵 이라는 부속 암자가 있었는데 마하사, 반야 암, 바라밀암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가 담겨 있는 마하반야 바라밀다심경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하사의 진입로에 들어서면 범종과 사천왕 그림이 상하층으로 놓여 있는 범종각 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설법전 중앙을 가로지르는 하심문을 지나 경내로 진입하면 좌측에 나한전과 대웅전, 우측에 대방(마하대복연)이 자리해 있다. 앞쪽으로는 5층 석 탑과 돌계단 위에 앉아 있는 삼성각이 보인다. 가까이에서 경쾌한 새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고요하고 한갓진 산사를 찾은 이가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오밀조밀 붙어 있는 마하사 도량을 눈으로 매만져본다. 이어 대웅전으로 들어가 삼배의 예를 올린다. 마하사 대웅전은 금동아미타불을 주존불로 봉안하고 있고 관음보살과 대 세지보살이 좌우 협시하고 있다. 아미타삼존불좌상 아래로 석조석가여래삼존상을 모셨는데 조선 후기에 제작된 이 불상은 현재 부산시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되 어 있다. 마하사의 나한(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성자)들은 6신통 六 神 通 을 발휘 하는 걸로 유명하다. 6신통은 무엇이든 꿰뚫어 볼 수 있는 천안통 天 眼 通, 모든 소리를 분별해 들을 수 있는 천이통 天 耳 通, 어느 장소나 갈 수 있는 신족통 神 足 通, 타인의 마음속을 알 수 있는 타심통 他 心 通, 전세를 알 수 있는 숙명통 宿 命 通, 초능력적인 다리를 가진 신족통 神 足 通, 온갖 고뇌를 벗어날 수 있는 누진통 漏 盡 通 을 가리킨다. 불가의 불제자 가운데 부처의 경지에 오른 16명의 뛰어난 제자를 십육나한 이라 하는데, 이들은 스스로 수명을 연장하여 세속에 거주하면서 중생과 불법 을 수호한다고 한다. 부처가 열반한 뒤 제자 가섭이 부처의 설법을 정리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을 때 모였던 제자 500명을 오백나한 이라고 하는데 나한 이 보살과 다른 점은 그들이 대개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한민족의 오랜 신앙이었던 나한신앙의 근본도량인 마 하사에는 나한이 6신통을 발휘한 여러 설화가 존재하는데, 그 중 불씨를 구 해 준 나한과 동지팥죽 이야기가 제법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어느 동짓날 전후의 이야기다. 사찰의 화덕에 불 씨가 모두 꺼져 버려 등불을 밝히지 못한 채 밤을 보내게 되었다. 다음 날 아 침 공양주는 불씨를 얻기 위해 서둘러 황령산 봉화병을 찾았는데 그에게서 눈 보라가 치던 어젯밤, 한 상좌가 애타게 불씨를 구하러 왔기에 너무나 애처로 워 불씨와 함께 팥죽을 먹여 보냈다 는 말을 전해 듣는다. 공양주는 의아해하 며 다시 절 부엌으로 돌아오는데 뜻밖에 화덕의 불이 다시 타고 있는 것을 발 견하게 된다. 되살아난 불씨로 동지팥죽을 정성껏 준비하여 나한전에 올리러 갔는데, 우측 세 번째 나한의 입술에 놀랍게도 팥죽이 묻어 있었다. 나한전의 나한이 타심통을 발휘해 신족통으로 멀고 험한 황령산에 가서 불씨를 구해다 놓은 것이었다. 공양주는 태만으로 불씨를 꺼뜨린 자신의 잘못을 빌고 열심히 기도하여 성불하였다고 한다. 나한전(응진전)에는 십육나한도 앞쪽으로 제각각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석조나한좌상이 앉아 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석 조나한좌상 중 12구는 부산시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나머지 4구는 근래에 추가로 만들어졌다. 인간의 삶을 구도 하는 고행자의 형상을 한 십육나한의 모습은 친근하면서도 유쾌하기 그지없다. 마치 서로 저마다 다르지만 어쩌면 비슷하게 살아 가는 우리네 모습과 유사하기도 하다. 48 49
말사순례 한국 최초로 오백나한도를 펼쳐내다 해사모단탄거해 解 使 毛 端 呑 巨 海 능장개자납수미 能 將 芥 子 納 須 彌 영기묘용초삼계 靈 機 妙 用 超 三 界 외도천마총부지 外 道 天 魔 摠 不 知 그 지혜는 터럭 끝에 큰 바다를 삼키시고 겨자씨 속에 수미산을 들일 수 있도다. 신령하고 오묘한 기용 機 用 으로 삼계를 벗어나니 외도의 천마들도 모두 알아채지 못하도다. 천년의 불교문화와 전통사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오 백나한에 대한 전체적인 기록은 전무했다. 강화도 정수사에서 오백나한 불사를 봉안하고 있던 진효 스님은, 2008년 십육나한과 오백나한의 게 송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펼쳐냈다. 지심귀명례의 심정으로 쏟았던 정성의 결실이다. 현재 진효 스님은 마하사에서 주지를 맡고 있다. 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털끝 안에 거해가 담겨 있고, 작은 겨자씨 속 에 천지가 숨겨져 있다. 수천수만 개의 열매가 씨 안에 감춰져 있듯 우 리의 마음도 그러하다. 마음을 잘 내기만 한다면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세계를 낳을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일체 만물을 현상으로만 보 면 몇 가지밖에 볼 수 없다. 는 진효 스님의 설명에 서서히 감화된다. 십 육나한 중 첫 번째인 빈두로존자 의 게송이다. 모든 존재들과 마주할 때 그 속의 거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주관과 잣대로만 재단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들어맞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 삼천대천세계 우주 만물의 세계를 이미 열 어놓으셨다. 불교의 위대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의 석학들은 훗날 인간을 견인해 낼 수 있는 언어의 생명적 창조를 불교에서 찾고자 했다. 는 스님의 말씀은 차분하면서도 강고했다. 스님은 생명의 원음인 범어 천년의 불향 佛 香 을 간직하고 있는 고찰, 마하사 를 통달해내지 못한 옛일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나한과의 인연 때 문인지 줄곧 높은 곳에서 살게 된다는 진효 스님은 중생과 가장 가까이 에서 만날 수 있는 포교의 일선에서 여러 목소리를 들으며 설법의 등불 을 밝히고 있다. 긴긴 세월을 지나온 것들과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삶의 무게 를 내려놓게 되는 모양이다. 편안해진 마음을 안고 마하사를 내려오는 길, 금빛 연꽃 이 피어오르고 눈앞에서 오백나한이 어룽대며 춤을 춘다. 나는 호기롭게 천년의 불법 佛 法 을 두 손에 가득 쥔 채 크게 발돋움을 해 본다. 50 51
문 없는 문을 열다 조계종립 특별수도원 봉암사 바람이 부니 조계종립 특별수도원 봉암사 계곡의 바람은 매서웠고 산도 그대로였다. 해제를 얼마 남겨놓지 않았지만 희양산의 눈은 떠날 줄 몰랐고 꽃이 피어난다 정진하는 수좌스님들의 공부 열기 또한 글. 유철주 사진. 하지권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한국불교의 특별수도원 봉암사는 그렇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 다. 봉암사에 가는 날이면 괜스레 마음이 고요해진다. 목적이 취재든 참 배든 마찬가지다. 지난겨울 봉암사가 그리워 발길을 문경으로 돌렸다. 언제나 그렇듯, 절 입구 관리사무소에 도착하니 거사님이 나와 어떻 게 오셨냐? 고 묻는다. 수좌首座 적명 스님을 친견하러 왔다. 고 하자 단단하게 묶여 있던 출입통제선 이 내려진다. 봉암사는 1982년 조계종 립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된 이후 1년에 딱 한 번 부처님오신날에만 대중 들에게 문을 열어줄 정도로 오직 정진 만 하는 도량이다. 부처님과의 특 별한 인연이 없는 한 쉽게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 바로 봉암사다. 납자衲子들의 영원한 고향 이제는 익숙하지만, 봉암사로 올라가는 길은 흡사 세간의 인연을 잠 시 내려놓고 출세간의 인연을 찾아가는 그런 여정 같다. 심란했던 마음 이 제자리를 찾아갈 즈음 전각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며칠 전 내린 눈이 경내에 가득했다. 눈 사이로 스님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이 반듯하게 정리 돼 있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잠시 곳곳을 둘러봤다. 경내 곳곳에는 봉암사의 기상 이 서려 있다. 여기서 기상 은 바로 봉 암사 결사 의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 청담, 향곡, 자운 스님 등이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 며 3년여간 진행한, 말 그대로 결사 結社 다. 여기서 근 현대 한국불교의 기틀이 잡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들은 훗날 조계종의 종정과 총무원장을 역임 하면서 조계종의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성철 스님이 말하는 봉암사 결사 의 동기를 다시 들어본다. 53
문 없는 문을 열다 조계종립 특별수도원 봉암사 해) 라고 쓰인 주련이 걸렸다. 이 문을 들어오는 사람은 알량한 알음알이를 갖지 말라는 의미다. 지나던 스님은 깨달음을 얻고 자 한다면 자신이 가진 그 어떤 지식, 생각마저도 비워야 한다 는 뜻으로 알면 된다. 며 웃는다. 스님의 미소에서 봉암사 선방 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금색전을 비롯해 경내 전각을 둘러본 뒤 마애불 참배를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눈길 사이를 걸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 마애 불 앞에는 작은 돌탑들이 눈 위로 솟아 있다. 영원한 행복을 염 원하는 불자들의 정성이 모아진 것 같아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전략) 봉암사에 들어간 것은 정해년 丁 亥 年, 내 나이 그때 36세 때입니다. 지금부터 36년 전입니다. 봉암사에 들어가게 된 근본 동기는, 청담 스님하고 자운 스님하고 또 우봉 스님하고, 그리고 내하고 넷인데, 우리가 어떻게 근본 방침을 세웠느냐 하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이 원 願 이었습니다. 즉 근본 목표다 이 말입니다.(후략) 이렇게 스님들은 부처님 법대로만 살기를 서원하고 결사를 진 행했던 것이다. 비록 결사가 한국전쟁으로 중단되긴 했지만 이 후 봉암사는 납자 衲 子 들이 꼭 한번쯤은 살아보고 싶은 영원한 고향 으로 자리 잡았다. 봉암사에서 정진하지 않고서는 명함 도 내밀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봉암사의 대소사에는 많은 스님 들이 자기 일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힘을 모은다. 100여 명의 선객 禪 客 이 태고선원 큰방인 서당 西 堂 과 성적당 惺 寂 堂, 남훈루 南 薰 樓 에서 3개월 동안 화두와 한판 대결을 펼치고 있 는 봉암사는 고요했다. 남훈루 6시간, 서당 10시간, 성적당 14 시간 등 차별화된 정진 시스템으로 스님들은 동안거를 보내고 있다. 봉암사에 온 이상 선원 큰방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태고선원 서당 정문인 진공문 에는 入 此 門 內 莫 存 知 解 (입차문내 막존지 마애불 참배를 하고 다시 눈길을 헤치며 일주문으로 내려오는 길에 포행 중인 스님들과 눈인사를 나눴다. 모두들 여유가 넘치 는 모습이다. 봉암사 구석구석을 둘러본 뒤 적명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동방 장 東 方 丈 실로 갔다. 스님은 안거 중인 한 스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공부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듯 대화는 유쾌했다. 대화가 끝나길 기다린 뒤 스님에게 봉암사에 대한 몇 말씀 을 청했다. 스님은 세수로 70대 중반을 넘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 도로 단아하고 꼿꼿한 모습으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자의 본분을 차분하게 들려줬다. 적명 스님은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 스님과 함께 선원 최고의 어 른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영천 은해사 기기암 선원에서 주석하 다 봉암사 대중들에 의해 2009년 2월 봉암사 수좌로 추대됐다. 대중들은 조실 祖 室 로 추대했으나 스님은 한사코 수좌 로 살겠 다고 해 조실 격 수좌 를 맡고 있다. 당시 동안거 해제 법회에서 적명 스님은 수행을 위한 외적인 불사가 이제 원만하게 마무리 된 만큼 내적 불사 에 매진해야 한다. 며 종립선원으로서의 위상 을 재정립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벌써 4년이 지났습니다. 4년간 딱히 한 일이 없어서 뭐라 말 씀드릴 게 없어요. 스님은 미소로 말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봉 암사는 스님이 수좌로 온 이후 특별수도원 의 자리를 확실히 지 키고 있다. 스님은 안거가 진행될 때마다 매월 한 차례 법문을 한다. 참선의 구체적 방법에서부터 정진 도중 일어날 수 있는 장 애를 물리치는 방법 등에 대해 자세하게 풀어준다. 또 동방장실 54 55
문 없는 문을 열다 조계종립 특별수도원 봉암사 문을 항상 열어둬 납자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궁금한 것을 물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느 선원에서 좀처 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대중들과 함께 선방에 앉아 정진하는 것은 물론이다. 얼마 전에는 봉암사 내규 內 規 를 만들어 수행가풍을 확고히 했다. 내규에는 철저한 대중공의 원칙 고수, 전대중의 울력 의무화 등을 명시해 놓았다. 젊은 시절 봉암사에서 10여 명의 대중이 같이 산 적이 있어요. 지금처럼 도량이 정리되어 있지도 않았어 요. 여느 시골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조그만 사찰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떤 스님은 밭에서 김을 매고, 어떤 스 님은 마루에 앉아서 바둑을 두고, 어떤 스님은 방에 앉아서 참선을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은 서로에 대 해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무한신뢰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비 스님은 당시를 꿈 같은 시절 이었다고 말할 정도예요. 그때처럼 대중들이 서로를 믿고 탁마하는 도량으로 봉암사를 가꾸고 싶은 생각입니다. 생사 生 死 해결의 열쇠 선 禪 에 있어 는 거죠. 이렇게 되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고 아무런 시비와 적명 스님은 결제 때 대중이 오면 최소 세 철에서 여섯 철 정도 를 봉암사에서 살아 보라 당부한다고 한다. 스님은 이 기간 동 안 선 禪 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으며, 또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 분별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훗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다면 그 중심에는 부처님께서 전한 무아 無 我 와 연기 緣 起 의 가르침이 있 을 겁니다. 겠다고 단언했다. 생사 生 死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선 禪 에 있습니다. 진 정한 대자유를 누릴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체험을 하면 확신이 듭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부처님 가르침과 선에 대한 확고한 믿 음( 大 信 心 )이 있어야 해요. 이렇게 살면 가슴에 수좌 라는 도장을 찍을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은 참선을 목숨 걸고 해 볼 만한 일 이라고 여러 차례 강 조했다. 그렇다고 불교와 선이 깊은 산중에 처박혀 있는 것에는 단호히 반대했다. 최근 불교계에 제기되고 있는 세상과의 괴리 지적에 대한 답도 내놓았다. 선이 사회에 줄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어요. 두 가지 정도로 보는데, 첫째는 선정 禪 定 이고 둘째는 깨달음입니다. 선정을 통해 봉암사는 해제 직후 한 달간의 산철결제에 돌입한다. 해제 기 간이지만 정진에 결코 휴식은 없기 때문이다. 적명 스님 역시 대 중들과 함께 정진한다. 요즘 선지식 善 知 識 이 없다고 난리다. 선 지식 아닌 게 없다 는 조사 祖 師 들의 가르침에도 남 탓 만 하는 풍 토는 여전하다. 그러나 이제 봉암사 일주문을 들어서면 이런 말 도 할 수 없게 돼 버렸다. 스승 적명 스님과 스승을 믿고 정진하 는 100여 납자들이 있고, 또 이번 동안거 해제 이후 새롭게 주지 를 맡아 대중외호와 봉암사의 살림을 이끌 석곡 스님이 함께하 고 있기 때문이다. 적명 스님에게 좋은 가르침을 받다 보니 어느새 해는 저물고 있었다. 여전히 바람은 차가웠지만, 생사를 걸고 정진하는 봉암 사 스님들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특별한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깨달 음을 통해서는 나와 네가 둘이 아니( 不 二 )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 범어사에서는 불기2557년 3월 25일 봉암사로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56 57
절집 밥상 겨울 언 대지를 깨우는 봄맛! 냉이된장찌개 글 사진. 범어사 대성암 혹한 추위와 매서운 칼바람을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을 싹 틔우기 위한 대지의 발돋움으로 온 세상이 진동하는 이때, 눈 푸른 납 자들은 길고 긴 삼 개월 동안거 결제를 회향하고 산문을 나선다. 항상 그렇듯 대중이 빠져나간 산중의 빈자리에는 동장군이 시기하듯 꽃샘추위가 밀려오곤 한다. 그 속에서도 가지가지마다 맺힌 꽃봉오리들을 보며 밭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아직은 얼어 있는 땅 속에서도 제법 푸른빛들이 보이는 듯하다. 그 푸른빛 속에 유난 히 눈에 띄어 발목을 붙잡는 무언가가 있다. 봄의 향기를 잔뜩 머금고 나온 냉이! 손을 뻗어 냉이를 뽑으니 그 뿌리에서 특유의 향 이 코끝을 자극한다. 음식은 눈과 코와 입으로 먹는다고 했던가. 산과 들을 다니며 여러 채소들로 끼니를 챙기는 산중의 스님들에 겐 봄의 별미 중 하나가 바로 냉이다. 냉이는 뿌리째 먹는 것이 좋다. 월동한 뿌리는 인삼보다 좋은 명약이라는 말이 있듯 냉이는 봄에 먹는 인삼이라고도 한다. 비타 민A가 특히 많은 냉이는 간을 튼튼하게 하고 눈을 밝게 한다고 한다. 특히 새벽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스님들에게는 봄날 오후 찾 아오는 졸음과 싸우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곤 하는데, 냉이는 점심공양을 한 후 기분 좋은 봄바람과 햇살 속에서도 떨칠 수 없는 졸음을 이겨내는 데 톡톡히 한몫을 한다. 냉이는 비타민A뿐만 아니라 단백질, 칼슘, 철분 그리고 무기질 함량도 매우 높다. 냉이로 할 수 있는 음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냉이나물, 냉이된장찌개, 냉이겨자무침, 냉이튀김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절집에서는 빠질 수 없는 별미인 된장찌개에 냉이를 넣고 봄철 입맛을 돋우는 상차림을 준비해 보았다. 냉이된장찌개 재료 : 다시마, 표고버섯, 무, 감자, 호박, 고추, 두부, 냉이, 된장, 고춧가루 1. 감자, 호박, 무, 표고버섯, 두부를 적당한 크기로 깍둑썰기 한다. 2. 다진 고추와 손질한 냉이를 1cm 정도의 크기로 썰어 놓는다. 3. 다시마를 넣고 채수를 만든다. 4. 된장에 고춧가루를 조금 넣고 3번의 채수와 함께 풀어 놓는다. 5. 3번의 채수에 무, 감자, 표고버섯, 호박을 넣고 살짝 끓인다. 6. 된장과 두부를 넣고 다진 고추와 냉이를 넣고 한소끔 끓인다. 한번 먹어보면 언제고 다시 찾게 되는 맛, 삼일장! 메주와 김치국물로 담가 먹는 삼일장은 만든 후 빨리 먹는다는 의미로 삼일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김치국물이나 메주는 발효식품으로 그 효능이 아주 뛰어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김장김치의 국물만 걸러 적당한 크기 로 부순 메주를 함께 넣어 담근 삼일장은 밥을 먹을 때 함께 곁들여 먹으면 좋다. 메 주를 먹기보다는 주로 국물 위주로 먹는다. 59
선우 善 友 자리이타 自 利 利 他 의 정신으로 부산불교와 지역 발전의 상생의 길을 모 색해 온 이윤희 회장. 그는 오늘도 자비의 불법을 실천하기 위해 부산 불자들의 신심을 다지고 불교의 길을 밝히는 연등을 달고 있다. 나이에 속박당하지 않고 청년보다도 기민하고 형형한 얼굴로 부산 불교의 로드맵을 그리는 사람. 우리가 첫 번째로 찾아간 선우 善 友, 범 어사신도회와 부산광역시불교연합신도회를 이끌고 있는 이윤희 회장 을 봄의 길목에서 만났다. 강심수정 江 深 水 靜, 강이 깊을수록 물은 한없이 고요하다. 이윤희 회장 은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차분하면서도 울림 있는 진솔한 목소리였다. 부산 불교의 역사 한가운데 서 있는 범어사에서 신도회장을 맡은 지 5 년째. 스스로 자신의 길을 내며 삶을 일궈 온 그의 성실한 태도가 말끝 에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범어사신도회 부산광역시불교연합신도회 이윤희 회장 부산 불교의 중심사찰에 걸맞은 선도적인 행보를 이어나가겠습니다 글. 편집부 범어사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덧붙여 범어사신도회와 부산광역시불교연합신도회의 역할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경북 군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불심 깊은 부모와 함께 곧잘 법당을 찾게 되었고, 결혼 후 부산으로 내려와 범어사부터 통도사, 내원사를 오가며 불심을 다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 고 있는 이 부산 지역은 200만 불자가 국태 민안과 불교 중흥을 기원하는 한국불교의 중심지 라고 할 수 있는데, 세월이 지나 이렇게 부산에서 신도회 회장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더 큰 원 력과 발심으로 신도회는 불사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적극 지원하여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돕고, 재가불자들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여 부산 불교를 견인해 나가고자 노력해 오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범어사신도회장을 맡아 온 이윤희 회장은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불도를 펼쳐 가고 있었다. 그는 가장 보람 있던 일로 보제루를 해체 복원하는 광경을 목도했던 때를 첫손에 꼽았다. 1812년 중창불사 때 단층으로 구조가 바뀐 뒤 일제 강점기를 지나온 노후화된 보제루 를 다시 복원하는 것을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감회가 그에게는 남달리 깊었던 것이었다. 이윤희 회장은 범어사신도회장과 부산광역시불교연합신도회 회장뿐 아니라 한국BBS부산연 맹회장, 부산구치소 교정협의회장, 부산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회위원장, KBS부산방송총국 시청자위원회위원장 등 여러 능선을 오가며 활약해 오고 있다. 특유의 진중함으로 분주하게 걸 어온 이윤희 회장의 이력은 시간이 지나도 식지 않는 그의 삶의 온도를 대신 말해주는 것 같다. 2010 산업자원부장관상, 2011 부산광역시 사회공헌장, 2012 여성가족부 국민표창상, 포교대 상 공로상 총무원장상 등의 수상은 이윤희 회장이 걸어온 길의 일부를 증명하는 표식이다. 범어사신도회와 부산광역시불교연합신도회 회장으로서 2013년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범어사의 대사회적 위상을 격상시키고 부산 불자들을 운집시키는 일에 최선으로 집중하려 합니다. 부산대 효원재 입구에서부터 범어사까지 이어지는 금정산 둘레길처럼 자연스럽게 범어 사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한 때입니다. 현시대 흐름에 맞춘 도심포교에 주력 하고, 보다 적극적인 행동과 실천으로 불교의 무한 잠재력을 열어나가는 데 힘을 보태고 싶습 니다. 선문화 체험 행사 같은 일반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는 자리도 기획 구상하고 있 습니다. 나아가 수많은 대중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설법전과 공양간을 갖춘 범어사를 보는 것이 제 삶의 또 다른 서원이기도 합니다. 부산 불교를 외호하는 일이 행복한 사명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 앞에서 이내 마음이 숙연해 진다. 불교복지단체와 청소년을 위한 장학 사업을 통해 동량지재를 키우고 있는 그의 참된 덕 성이 지금의 이윤희 회장을 만든 원천이 아니었을까. 금정산 자락의 기상을 닮은 그에게서 부산 불교의 숨어 있는 저력을 발견한다. 60 61
행복한 나눔 동호의 일기 한국전쟁 정전60주년 아차! 화질 좋은 카메라를 안 가져왔어요. 이 정신머리하고는. 괜찮아요. 우리에겐 세계에서 인정한 휴대폰이 있으니. 하하. 그럼 찍겠습니다. 하나, 두울, 셋! 오늘을 기록할 몇 장의 사진들이 휴대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찰칵, 셔터 소리에 불과 30분 전 부장님과 벌인 실랑이가 떠오른다. 강 쌤, 같이 찍어요. 제가 사진 찍을게요. 안 돼요. 부장님이 모델로 나오셔야 해요. 기관의 얼굴은 관장님, 부장님입니다. 담당자가 계속 만날 건데 담당자가 찍어요. 안 돼요. 오랜 실랑이 끝에 현판을 부장님 손에 쥐여 주고 점장님을 불러 옆에 세우고 부리나케 사진을 찍었다. 나의 하극상은 결국 성공했다. 어색 한 웃음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사진을 찍고 난 뒤 부끄 러워 몸부림치며 밖으로 나서는 부장님을 그래도 커피는 한 잔 하고 가야죠. 하며 당당히 계산대로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멋지게 혀를 굴리며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하나 하고요 녹차 주세요. 하는 순간, 죄송하지만 손님, 녹차는 없습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부끄러운 상황을 모면하고자 서둘러 다른 종류의 차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매장 계산원 은 내게 상냥한 목소리로 몇 가지 종류의 차를 설명해 주었다. 라벤더. 뒷말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었던 나는 라벤더 주세요! 한마디를 던지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도시 속의 시골 청년인 나와 그런 나의 하극상을 받아주던 부장님. 우리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앉아 라벤더 향을 맡으며 향긋한 담소를 나누었다. 올해는 한국전쟁 정전60주년입니다. 한반도 및 지구촌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한국전쟁 전사자 위패를 최초로 봉안하였고, 1952년에는 정부 주관으로 대통령과 외교사절의 참석하에 전국군경합동위령제 를 봉행하였으며, UN기념공원을 품고 있는 부산의 범어사에서 전쟁 없는 세상을 염원하며 6 25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 의 일환으로 한반도평화기원 수륙재 를 봉행합니다. 이에 전쟁과 폭력이 종식되고 기필코 세계 평화가 실현되기를 다 함께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불기 2557(2013)년 3월 좋은 날 한국전쟁 정전60주년 한반도평화대회 운영위원회 상임위원장 수 불 합장 글. 사회복지법인 범어 재단법인 범어청소년동네 사무국 위 내용은 지난 2월 28일 스타벅스 센텀KNN점 오픈 기념 나눔컵 후원행사 수익금을 수령하러 간 날의 일기입니다. 스타벅스는 각 지점 오픈 시 컵 판매를 통한 수익금을 인근 복지시설에 기부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금정이마트지점, 온천지점, 사직지점, 센텀KNN지점에서는 사회복지법인 범어 금정구종합사회복지관에 수익금 모두를 기부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기부해 주신 후원금으로 복지관에서는 지역 내 저소득 어르신, 장애인, 청소년들에게 월동 물품과 명절 선물을 지원하였습니다. 또 경계선지적장애를 가진 저소득 아동들의 학습을 지원하고 이들이 건강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재능을 계발하고 사회성을 향상시키는 프로그램에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유난히도 추웠던 올겨울, 스타 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부해 주신 시민들로 인해 우리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이 예년보다 더 따뜻한 겨울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스 타벅스의 진한 커피향처럼 기부의 향기가 널리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오늘 커피 한 잔 할까요? 일시 : 불기 2557년 3월 26일 (음력 2월 15일) 화요일 오전 10시 장소 : 범어사 대웅전 문의 : 종무소 (051)508-3122, 원주실 (051)508-3636 범어사는 대사회사업을 위해 1997년 사회복지법인 범어와 1999년 재단법인 범어청소년동네를 설립하였다. 행복한 나눔 은 지속적으로 보살행을 실천하는 범어법인의 이야기를 게재합니다.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