年 花 下 理 芳 盟 段 流 無 限 情 惜 別 沈 頭 兒 膝 夜 深 雲 約 三 십년을 꽃 아래서 아름다운 맹세 지키니 한 가닥 풍류는 끝없는 정이어라. 그대의 무릎에 누워 애틋하게 이별하니 밤은 깊어 구름과 빗속에서 삼생을 기약하네. * 들어가는 글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아이가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불 옆에 앉아 있다. 얼음장 같은 날씨에 허연 입김이 연기처럼 쏟아진다. 아이는 약탕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또다시 새카매진 하늘이 송이송이 뿌려대는 눈발을 바라본다. 한참 만에야 자리를 턴 아이는 네모난 목판에 뜨거운 탕약 그릇을 담고 잰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았 다. 관음전에는 일찌감치 이부자리를 접은 객( 客 ) 하나가 묵고 있다. 그 옆에 좁다란 길을 따라가면 이 절의 본존불상을 모신 대웅전이 나온다. 빈한한 세간에 두 개의 불전을 운영하는 것만도 벅차서 따로 요사( 寮 舍 ) ** 를 내지는 못했다. 동자승과 주지는 평소엔 관음전에서 지낸다. 그러나 낯선 객을 들이는 바람에 별수 없이 대웅전에 서 잠을 청한 것이다. 동자는 대웅전 구석에서 잔기침을 쏟는 주지를 일으켰다. 내일모레면 육십 줄에 들어서는 노승이다. 그는 올겨울에 지독한 풍한에 걸려 며칠째 고열에 시달리던 차였다. 죽어가는 노승을 살린 것은 역설적이게도, 눈밭에 쓰러져 있던 객이었다. 노승의 약을 구하러 마을 로 내려가던 중 동자가 눈 속에 파묻힌 객을 발견해 용케도 데려왔다. 노승은 밤낮으로 객을 살리려 애썼고 그 바람에 병이 더욱 심해졌다. 객은 깨어나서 노승과 동자승 의 은혜에 고마워하며 등에 멨던 봇짐에서 얼마 안 되는 재물을 풀었다. 그걸로 약과 먹을 것, 땔감을 산 후 동자와 함께 노승의 회복을 바랐다. 객은 묵묵히 동자승을 도왔다. 빨래며, 장작 때기, 밥 짓기, 해우소 청소 등 안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일을 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제법 손끝이 싹싹했다. 노승은 오가는 인연에 연연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산속에 묻혀 살며 마음을 비우다 보니 혜안이라 는 것이 생겼다. 하지만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사연 없는 사람 없는 법. 노승의 혜안은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대충 내력과 됨됨이가 보이는 신이한 능력이었다. 그는 맑은 얼굴의 청년이 비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직감했다. 세상의 시름과는 담을 쌓은 듯 보이 는 청아한 분위기에서 모진 풍파가 느껴졌다. 그날 밤. 청년이 대웅전을 찾았다. 어린 스님은 솜이불을 끌어안은 채 곯아떨어졌다. 노승은 여름에 말려둔 계수나무 차를 대접하였다. 불망울이 날리며 화로에서 새빨간 숯불이 타올랐다. 덕분에 살았소. 참으로 고맙구려. 저야말로. 노승은 청년의 진중한 목소리가 부처의 미소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내일 떠나신다고? 스님께서도 쾌차하신 듯하니. * 일휴선사, 임종게( 臨 終 偈 ) **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아이가 매우 섭섭해 할 거요. 짧은 시간에 정이 듬뿍 들었던데. 금세 잊을 겁니다. 청년은 담담하게 이별을 입에 담았다. 날 때부터 이곳에 버려졌다고요? 청년이 물었다. 느릿하게, 노승이 잠든 아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연이 끊겼지. 한여름이었기 망정이지, 겨울이었으면 꼼짝없이 얼어 죽었을 거 요. 여긴 산짐승도 많이 다녀서 제법 위험하거든. 아이가 입맛을 다시며 몸을 뒤척였다. 노승의 깡마른 손이 흘러내린 이불을 아이의 목까지 끌어올 렸다. 스님과 인연이 닿았으니 그건 저 아이의 복입니다. 허허. 빈도가 죽으면 쓸쓸한 절간 지키지 말고 하산하라 할 거외다. 속환( 俗 寰 ) * 입니까? 이곳과 어울리지 않아. 자의로 온 것이 아닌 만큼 세상 물에 찌들어도 봐야지. 타닥타닥 숯이 이지러지며 다시금 자그마한 불망울이 날렸다. 고요하고 무거운 겨울밤, 들리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세상의 모든 흐름이 멈춘 듯하였다. 밖에 홍매화가 피었더군요. 아아. 사오 년 전에 아이가 몹시 아팠던 적이 있소. 건강하게 자랐으면 해서 심었는데 올해도 어김 이 없군. 설중매는 언제 봐도 아름다워요. 매화를 좋아하시오? 꽃이라면 무엇이든. 하지만 화중군자는 연꽃이지요. 하하하! 맞소. 부처의 꽃이지. 다소 발작적인 웃음소리에 청년은 소름이 끼쳤다.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들었누? 노승은 지나가는 말인 양, 능청스럽게 찻잔을 기울였다. 청년은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똑같이 찻잔 을 기울였다. 회한에 젖은 표정을 보니 더욱 궁금해지네만,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오. 누 구나 사정이 있지. 문풍지가 파르르 떨었다. 불친절한 삭풍이 부나 보다. 청년은 그런 추위 속에 내던져 있었고, 다시 추위를 뚫고 떠나길 원하였다. 노승은 청년을 막을 길 이 없었다. 날고 들었던 많은 인연이 그러했듯이. 백창헌( 柏 蒼 軒 )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입에 걸쇠를 채운 줄 알았던 청년이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삼 년 전, 백창헌만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금지( 禁 地 )가 되었지. 관리들이 지키고 있어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 가야 해요. 늦었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맺은 인연이 있는 게로군. 청년은 짐짓 망설이듯 식어가는 찻잔을 지분거렸다. 불그림자에 그 눈빛이 더욱 어두워 보였다. 한 가지 묻고픈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스님께선 사람의 얼굴을 보면 대충 내력이 파악된다고 하셨지요? 오래 산 늙은이들의 특권 아니겠소? 아주 다 맞는 것도 아니고. 스님의 눈엔 제가 어찌 보이십니까? 무슨 뜻이오? * 속세로 돌아감
극락에 갈 수 있겠습니까? 청년의 침착하고 흑진주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 같은 죄인도 극락에 들 수 있을까요? 빈도는 사후 세계를 알지 못하니 그저 참선하여 열반에 오르라고 할 수밖에. 우문현답에 청년은 복숭아꽃을 머금은 듯 나른한 입매를 끌어올렸다. 자. 시름일랑 이 차 한 잔과 흩날리는 눈발에 묻고 가시구려. 해 뜨고 찻잔 식으면 모두 잊게 된다오. 청년은 능구렁이 같은 노승의 속내에 짧게 웃었다. 평생을 연모하고 평생을 미워한 사람이 있습니다. 노승이 화로에 탄을 집어 던졌다. 새빨간 불길이 활활 치솟기 시작했다. 01. 견인지종( 堅 忍 至 終 ) 上 소슬한 바람에 꺾인 가을 단풍처럼 검붉은 토혈. 한가로이 다연( 茶 宴 )을 즐기던 중 갑자기 한 여인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시중들던 궁녀와 상궁들 이 비명을 질렀고 모였던 비빈들은 혼비백산하였다. 쓰러진 여인을 침전으로 옮기고 내의원에 연통을 넣으라 한 것은 황후 장씨였다. 그녀는 서슬이 퍼 런 눈으로 후궁들에게 일갈했다. 폐하께서 궁을 비우신 사이에 감히 이 같은 짓을 벌여? 황후마마! 소인들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닥쳐라! 내, 배후를 낱낱이 밝혀 물고를 낼 것이다. 다들 처소로 돌아가 근신하라! 추상같은 명령에 비빈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궁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내의원 의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황후는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의원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황후의 옥 같은 이마는 살며시 구겨졌고 붉은 입매는 불만스레 휘어졌다. 비뚜름한 눈썹 아래로 구 슬 같은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후궁들이 달아날 때 단 한 사람만은 황후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녀가 눈짓을 받고는 급히 황 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노쇠한 의관이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황후에게 아뢰었다. 황공하옵니다. 신들이 무능하여 의귀비를 살릴 수 없을 듯합니다. 무능하다! 죽여주시옵소서! 원인은? 은침에 반응이 있습니다. 중독이란 말인가? 예, 마마. 태자의 생모인데 어찌! 정녕 살리지 못하는가? 의관은 난처한 듯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알았네. 마지막이라도 편안하게끔 모두 물러가게. 황후의 말 한마디에 의원과 노비들이 우르르 침전을 빠져나갔다. 이로써 침전에는 황후 장씨, 숙비 ( 肅 妃 ) 손씨, 그리고 음독으로 죽음을 앞둔 의귀비( 宜 貴 妃 ) 이씨만이 남게 되었다. 사위가 고요해지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의귀비가 침전을 둘러보았다. 희부연 시야 끝에 능라금수 차림의 황후와 숙비가 잡혔다. 황후가 한 걸음 다가오자 이씨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을 측은하게 쳐다보는 그 시선이 무척이 나 가증스러웠다. 한마디 하려는데 소리 대신 쿨럭쿨럭 기침이 터졌다. 토혈이 죽죽 쏟아졌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허나 누구나 마지막이 아름다울 순 없어. 숙비. 똑똑히 봐두게. 근엄한 어투에 숙비가 파르르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의귀비를 살폈다. 황제가 총애하던 얼 굴이 검푸르게 변하였다. 빛나던 옷차림은 시뻘건 피가 흘러 흉측하기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의귀비와 시선이 맞닿자 숙비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하였다. 그때, 갑자기 의귀비가 몸을 일으키더니 황후에게 삿대질하며 고함쳤다. 황후! 천하의 몹쓸 계집! 내 아들의 털끝 하나라도 손댔다가는, 쿨럭쿨럭! 이씨가 악을 쓰자 황후도 예상하지 못했던 듯 진주알 같은 눈을 크게 떴다. 이씨는 한참이나 기침 을 토하더니 쇠잔해지는 기운으로 말을 이었다. 죽일 것이다.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되어서라도, 네년의 사지를 갈가리 찢으러 찾아올 것이 야! 네년은 나보다 더욱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자자손손 손가락질받다가 저승에서도 편히 눈감지 못 하리라! 저런 저주를 퍼부은 계집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황후는 평소처럼 우아하게 의귀비를 쳐다봤다. 의귀비의 서슬이 퍼런 안광은 이제 황후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숙비에게로 옮겨 갔다. 그녀의 눈 길이 닿자 숙비가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못된 것! 그때 네년을 죽였어야 했다. 네년을 일찍이 죽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로다! 마, 말을 삼가시게! 손씨 네 이년!! 황후의 위세를 믿고 끝끝내 뉘우치지 않으니 네년의 끝은 빛도 들지 않는 어둠이겠구나! 네년의 두 아들도 나처럼 피를 토하며 죽을 것이다! 끔찍한 외로움과 지독한 암투 속에서!! 심장이 타들어 가 고 오장육부가 끊기는 듯 고통에 울부짖을 것이다! 향불을 사르듯 비명횡사할 것이야!!! 숙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의귀비는 핏줄이 불거져 나온 가녀린 손으로 이불을 움켜쥔 채 피눈물을 쏟았다. 오직 황후만이 그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우욱! 의귀비가 걸쭉한 피를 뱉어내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단말마로 몸부림치고 바르작거리던 미동마저 끊겼다. 황후가 천천히 의귀비에게 다가가더니 코끝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이내 그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바들바들 떠는 숙비를 손수 일으켜 세워 의귀비 앞으로 데려갔다. 숙비가 놀라 무 릎을 꿇고는 울먹거렸다. 화, 황후마마. 똑똑히 보아라. 숙비는 겁에 질려 눈시울이 붉어졌다. 천박한 계집이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오른 끝이 어떤지. 이씨의 마 지막을 가슴 깊이 새기게나. 황후는 돌연 인자한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부용꽃처럼 풍만하고 우아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자 물치려는 숙비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 겁먹을 것 없네. 자네의 충심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난 자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 이제 마지막 산을 넘을 차례지. 따뜻한 손이 숙비의 손 위로 겹쳐졌다. 숙비는 맞잡힌 자신의 손을 빼고 싶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뒤로는 천 길 낭 떠러지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시, 신첩은 황후마마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자네 충심은 내가 잘 안다니까. 숙비의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넘겨주며 황후는 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죄를 짓고 어두컴컴한
폐허 속에서 번갯불에 번쩍이는 불상을 마주하는 것과 같았다. 이씨 계집은 뜻밖에 죽은 것이네. 황태자의 생모인 의귀비를 죽였다. 이제는 황태자만 제거하면 된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풀릴 테 니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일. 어차피 황궁 생활이라는 것이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무법천지 아니던가. 피는 이 어미의 손에 묻힐 테니 너희는 부디 무럭무럭 자라나 이 나라의 강산을 책임져다오. 의귀비의 처소를 나가며 손씨는 다시 눈물을 거두었다. 네년의 두 아들도 나처럼 피를 토하며 죽을 것이다! 끔찍한 외로움과 지독한 암투 속에서!! 심장 이 타들어 가고 오장육부가 끊기는 듯 고통에 울부짖을 것이다! 향불을 사르듯 비명횡사할 것이야!!! 귓가에 메아리치는 저주와 함께 종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비명이 터지진 않았으나 목구멍에 오니를 뒹군 까마귀를 쑤신 듯 구역질이 밀려왔다. 그는 우연히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뒤로는 자주 흉몽을 꾸었다. 심해지면 연중행사처럼 몸까지 탈을 잡기 도 했다. 시간을 돌리고 싶다. 그 날 로 돌아간다면 절대 의귀비의 처소로 숨어들지 않으리라. 종인은 성마른 손길로 관자놀이의 땀방울을 닦았다. 밖은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녘. 그러나 더는 잠 을 이룰 수 없었다. 흠흠! 나지막하게 헛기침을 하자 닫혔던 장지문이 열리고 태성전( 泰 省 殿 ) * 수령태감인 하개가 달려왔다. 하개가 금색 휘장을 거두고는 바닥에 납죽 엎드리며 외쳤다. 황제 폐하께 문후 올립니다. 만안하시고 수복강녕하소서! 쩌렁쩌렁한 외침을 신호로 상궁과 궁녀들이 줄을 맞춰 들어왔다. 그녀들의 손에는 소세할 물이 담 긴 금색 대야, 손숫물, 양칫물, 화장수, 곤룡포, 면류관, 흑화( 黑 靴 ) 등이 들려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궁녀들은 순서에 맞춰 황제의 용모 단장을 도왔다. 팔을 벌리고 서자 궁녀들 이 금룡이 수놓인 용포를 순서에 맞춰 착착 입혔다. 한 겹 한 겹 더해지는 옷자락에 하얗게 드러났던 침의( 寢 衣 )는 자취를 감추어만 갔다. 마지막으로 산호와 유리 장식을 더한 요대와 옥패를 차고 머리에 붉은색 헝겊 띠가 달린 십이류( 十 二 旒 ) 면류관을 씌우자 늠름한 군주의 위용이 뿜어져 나왔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헌칠민틋한 용모는 붉은색 망룡단을 더한 현색( 玄 色 ) 의상과 어우러져 더욱 빛을 발했다. 의관을 갖춘 후에는 수라간에서 아침 수라를 갖다 바쳤다. 보통 조정대신들과 국정을 논의하는 조 회가 있기 전에 위장을 달래기 위해 가벼운 죽을 먹었으며 조회나 조강이 파한 후에야 든든한 수라상 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종인은 꽤 오래전부터 아침 수라를 거르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하개는 피가 동날 지경이라 며 매번 옆에서 잔소리를 끓였다. 한 입만 더 젓수시옵소서, 한 번이면 되옵니다. 옆에서 잔소리 해대는 하개에게 종인은 신물이 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황제는 사지육신은 멀쩡하지만 속병이 자주 나는 것이 흠이었다. 내의원에서도 시시각각 황제의 몸 상태를 확인했고 그가 체증에 걸리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하개는 주군이 속병을 앓는 원인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 주군이 영양이 부족해서 쓰러지기라 도 하면 수라간은 물론이거니와 내의원까지 칼을 물 각오를 해야 하니 신경이 곤두섰다. 폐하.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기침하셨으니 느긋하게 자릿조반을 젓수실 수 있사옵니다. 아침잠이 많은 종인은 조회에 늦는단 핑계로 조반을 자주 건너뛰었다. 그러나 오늘은 하개가 그 핑 * 황제의 침전
계를 대지 못하게 자릿조반이 마련된 곳으로 안내하며 종알거렸다. 종인이 힐끔 쳐다보자 하개는 민망한 듯 미소를 띠었다.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차조미음이옵니다. 수라간에서 황제 앞에 자릿조반을 대령했다. 마지못해 뜬 첫술을 시작으로 종인은 자그마한 그릇에 담긴 죽을 힘없이 퍼먹었다. 고작 죽 한 그릇이었지만 식사시간은 제법 길었다. 물로 입을 헹구고 난 종인은 조회에 참여하려고 태성전을 나섰다. 늦겨울의 햇살이 느릿하게 단장을 나서고 있었다. 약 이백여 년 전 태조 김여읍은 주변 국가와 크고 작은 부족들을 차례로 복속시키며 연( 沇 )이란 나 라를 세웠다. 수도는 교안( 皎 岸 )이요, 중심에는 상강( 霜 江 )이 흐르고 교안을 둘러싼 낙성산( 洛 城 山 ) 아 래에는 연의 황제와 황족이 사는 관주성( 關 朱 城 )이 자리했다. 관주성은 셀 수 없이 많은 궁과 전각으로 이루어졌는데 사시사철 피고 지는 화초와 늘 사람이 붐벼 떠들썩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짙푸른 휘장이 걸린 관주성은 연의 상징이자 교안의 자랑이었다. 황실 명맥은 태조 김여읍의 뒤를 이어 6대째 이어져 내려왔다. 그 중심에는 올해 스물이 된 황제, 김종인이 있었다. 그는 제5대 황제인 효경제( 孝 敬 帝 )의 셋째 아 들이자 숙비 손씨 소생으로 연호는 윤정( 潤 貞 )이다. 그의 생모인 숙비 손씨는 효경제가 붕어하자 슬퍼하다가 며칠 후 자결하였는데, 종인의 나이 겨우 열한 살 때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순사( 殉 死 ) * 한 숙비의 절개를 높이 사 열녀라고 칭송했다. 어린 종인은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이 보위를 이었다. 그는 친정하기 전까 지, 황태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황태후 장씨에게는 장문견이라는 아우가 있었다. 장문견은 국구( 國 舅 ) ** 이자 태위( 太 尉 ) *** 로서 강력 한 군권을 쥐고 있었다. 게다가 무정후( 武 貞 侯 )에 봉해지면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였다. 장씨 남매는 어린 황제를 앞세워 구 년이나 정권을 쥐고 흔들었는데 조정에 세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황제를 지지하는 신진세력이 없었다면 태후는 여전히 주렴을 드리우고 스스로 조정의 암호랑 이가 되려 했을 것이다. 황제가 친정을 시작하긴 했으나 조정은 여전히 장씨 남매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오늘 아침만 해도 조세 개혁 때문에 살 떨리는 논쟁이 오갔다. 종인은 가장 귀한 옷을 입고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었지만,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살쾡이 같은 신료들의 말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몹시 소극적이었다. 조정에서 논의되는 모든 사안과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자신궁( 慈 申 宮 ) **** 으 로 보고되기 때문이다. 종인은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서는 조세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의 조세법은 황실 살림보 다는 세도가의 곳간을 불리는 데 유리했다. 연말이 되면 국고는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드러냈는데, 벌 열들의 창고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온갖 재물과 곡식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비정상적인 흐름을 끊으려면 조세 개혁은 반드시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옹립을 도운 권신들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어 매번 입을 다무는 것이 종인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짐이 조금 더 상량해 보겠소. 자신이 내뱉은 말이 공허하게 머릿속을 배회했다. 이제야 아침 수라를 먹을 수 있게 됐는데 조회를 마치고 나면 늘 머리가 아파 입맛이 없었다. 태성전으로 돌아온 종인은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보료 위에 앉았다. 거무튀튀한 책상과 의자, 바닥, 기둥, 장롱. 뭐 하나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다. * 남편을 따라 죽음 ** 임금의 장인 *** 정일품. 국가 최고 군사장관 **** 황태후의 처소
종인은 신경질적으로 소매를 걷어 올렸다. 폐하. 수라상을 들이라 할까요? 하개가 간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짐이 한가로이 밥숟가락이나 뜨게 생겼느냐? 편전에서의 일은 잊으시옵소서. 저 늙은이들을 이 손으로 죽이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도 말이 새어나갈까 봐 사리문 잇새로 억누르듯이 겨우 내뱉는다. 선제께서도 매사 마음먹은 대로 처리하지 못하셨지요. 하물며 이제 막 친정을 시작하셨사옵니다. 저들 눈에 폐하께서 어찌 보이는지부터 파악하셔야 합니다. 하여 참고 있질 않으냐. 예. 아주 잘하고 계시옵니다. 그러나 폭발할 것만 같은 울화에 종인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시간은 폐하의 편이옵니다. 저들은 남은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지요. 참고 기다리다가 뭔가 해 보기도 전에 당하면? 필시 폐하께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 기회가 오기도 전에 죽기라도 한다면. 하늘은 명군을 버리지 않는 법이지요. 하개가 살살 달래며 위로하자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하개는 어릴 때부터 종인의 비위를 맞춰 온 데다 험난한 궁에서 사십 년 가까이 버틴 지혜가 있었 다.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꼭두각시처럼 보위에 오른 종인을 지척에서 모셨으므로 그 애틋함이 진하 였다. 그만 역증 내시고 수라를 젓수시지요. 매번 수저를 뜨는 둥 마는 둥 하시니 이러다 덜컥 탈이 날 까 심히 염려되옵니다. 밥알은 모래알 같고 고기와 나물에서는 비린내가 나는구나. 종인은 슬프게 중얼거렸다. 음식에 독이 들어있을까 봐 잘 먹지 못함을 하개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매번 은으로 꼼꼼하게 검사 하고 있긴 하나 참변은 경계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인이 철두철미하게 검사하고 있습니다. 지긋지긋해서 견딜 수가 없다. 참으셔야 합니다. 와신상담의 고사를 아시지 않습니까? 하개. 너는 이런 짐이 어리석어 보이겠지? 천부당만부당하십니다. 폐하께서는 성군이 될 자질이 충분하시지요. 내 앞가림도 못하는걸. 원석은 풍랑에 휩쓸리고 깎여야만 훌륭한 옥이 됩니다. 종인은 나지막하게 실소를 터트렸다. 옥을 꿰어 불세출의 보물을 만들 장인도 필요하지. 영명하십니다. 수라를 들여라. 예, 폐하. 욱여넣은 아침을 소화하려 화원으로 산책이나 갈까 하는데 급전이 날아들었다. 국경을 침범해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일삼던 예족 토벌이 끝나고 무정후 장문견이 돌아온다는 소식이었다. 예족은 맹렬하기로 소문난 부족이고 규모도 상당해서 장문견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장 반년에 걸친 노력 끝에 북녘을 평정하고 환도하는 길이었다. 이것은 연나라의 복이었으 나 종인의 숨통을 조이는 새로운 사슬이기도 했다.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종인은 장문견의 토벌령을
허락해야 했는데 막상 그가 돌아온다니 정말 달갑지 않았다. 먹은 것이 도로 넘어올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종인은 전령이 자취를 감출 때까지 온화한 표정을 유 지했다. 그러나 전령이 사라지자마자 안으로 급하게 들어가더니 기둥을 붙들고 헛구역질을 했다. 폐하! 옥도미령 하시옵니까?! 어의를 부를까요? 수선 떨지 마라. 전공을 세웠으니 이번에는 또 뭘 요구할지 모른다. 그것만 생각하면 벌써부터 목덜미에서 열이 오 르고 머리가 아팠다. 장문견이 돌아왔다니 조세 개혁은 물거품이 되겠군. 원칙대로 폐하의 뜻을 밀고 나가시면 됩니다. 저들이 원칙을 지켜왔느냐? 국정은 폐하의 손에 있습니다. 또 원칙적으로 태위는 정사에 참여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저들이 원하는 것이 원칙이고, 저들의 논리가 합리다! 고정하시옵소서. 화내시면 옥체에 해롭습니다. 끔찍하구나! 나라에 마땅한 장수가 없어서 또 장씨 일가의 손을 빌리다니! 종인이 치를 떨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마땅한 장수가 없다니요? 예족은 규모가 워낙 커서 부득불 무정후를 보내야 했으나 선봉대장은 폐 하의 사람이 아니옵니까? 무정후가 무사귀환 했다는 것은 그자 도 전공을 세우고 돌아왔다는 뜻입니 다. 파르르 떨던 종인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잊고 있었을까. 토벌을 나가는 장문견에게 일부러 딸려 보냈던 자신의 벗을! 장문견이 스스로 무 덤 파는 줄도 모르고, 데려가게 해 달라 부탁했던 그 를! 그의 공과 경험이 나날이 쌓이고 있나이다. 하지만 그도 태후의 인척이지 않은가. 그보다 폐하께서 아끼시는 벗이지요. 아니옵니까? 도무지 하개를 속일 방도가 없다. 떠보는 질문 하나에도 쉬이 넘어오질 않는다. 승전 연회를 베푸셔야지요. 그전에 논공행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제대로 보상해 줘야겠군. 종인이 가까스로 진정된 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02. 견인지종( 堅 忍 至 終 ) 下 관주성으로 향하는 주작대로( 朱 雀 大 路 )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구름 떼처럼 몰려와 있었다. 새해가 지난 후 교안이 이토록 떠들썩했던 적이 없다. 사람들은 꽃가루와 폭죽을 터트리며 환호작 약했다. 바글바글한 인파 속에서 푸른색 국기( 國 旗 )가 당당하게 나부꼈다. 도열하여 행군하는 군사들 은 기치창검을 들고 위풍당당한 기세를 뽐냈다. 개선장군의 위용은 수도를 떠날 때보다 울발하였다. 갑옷과 투구 위로 하염없이 내리비치는 태양이 장문견의 앞길을 밝게 빛내주었다. 그는 사람들의 환호에 미소로 화답하였는데 하는 모양새가 꼭 능 행을 나서는 황제와도 같았다. 박찬열은 그 뒤를 묵묵하게 따랐다. 붉은색 비단을 깐 안장에 앉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턱은 약 간 높게 쳐든 채다. 그가 언뜻 여의주 같은 눈알을 굴려 아래를 살피자 계집이고 사내고 할 것 없이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꼬는 희한한 풍경이 벌어졌다. 찬열은 그들을 무심하게 쳐다본 후 시선을 거뒀다. 당연히 나와 있을 줄 알았는데 힐끗힐끗 인파를 살펴도 그 녀석 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편장군( 偏 將 軍 ) *. 자네는 이쯤에서 집으로 돌아가게. 앞에서 들린 해괴한 소리에 찬열이 말을 몰고 와 장문견 옆에 섰다. 조금 전 뭐라고 하셨습니까? 집으로 돌아가라니까. 어깨 부상이 낫지 않았잖은가. 폐하를 배알하러 가는 길인데 어찌 소장만 빠지겠습니까? 부상병을 궁에 들이면 모양새가 그렇잖은가. 폐하를 뵈면 바로 퇴청하겠습니다. 어허. 그리 고집을 부리다가 다친 것 아닌가? 퇴각하는 적들을 쫓아 끝까지 주륙하던 중 매복에 당해 부상을 입었다. 그런 일이야 비일비재했지 만 그 날은 어쩐지 마지막까지 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만약 그들을 보냈다면 후방에서 대기하던 지원군과 합류해 더 큰 분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어깨를 내주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찬열의 판단은 옳았다. 자네는 내 재종( 再 從 ) ** 이야. 태후마마께서도 눈여겨보시는 마당에 자네에게 탈이 생기면 중간에 나만 곤란해져. 상관으로서 내리는 명령이네. 아직 궁에 도착한 것이 아니니 자네는 군령에 따라야 해.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팔을 잘못 움직이면 통증이 밀려오긴 했다. 그렇다고 환도하고 황제를 알현하 는 자리에 자신만 빠지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찬열은 태후까지 들먹이며 군령을 운운하는 장문견을 이길 수 없었다. 기나긴 길을 따라 남문을 거쳐 희조전( 凞 照 殿 ) *** 앞마당으로 들어서자 품계석 위에 문무백관이 양옆 으로 늘어서 있고, 붉은 융단이 깔린 드높은 월대에는 젊은 황제가 서 있었다. 승전한 탓인지, 전쟁의 피로에 찌들었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장문견과 휘하 장수들의 표정 은 매우 의기양양해 보였다. 장문견이 월대 밑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폐하께 문후 올립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뒤에 선 장수와 군사들도 모두 부복하며 복창하였다. 소장 장문견, 폐하의 명을 받자와 예족을 토벌하고 조금 전 환도하였나이다. 그러자 황제가 잰걸음으로 계단을 밟아 내려왔다. 면류관 양옆으로 늘어진 붉은색 헝겊과 유리로 만든 패영이 바람결에 찰랑찰랑 흩날렸다. 황제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장문견을 친히 일으켜 세웠다. 무정후! 참으로 수고가 많으셨소. 무더위 속에 군사들을 이끌고 떠났는데 어느덧 매화 피는 계절이 되었구려. 그간 강녕하셨나이까? 덕분이오. 경이 변방에서 이리 애를 써준 덕에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었다오. 오랑캐를 무찌르는 것은 소장의 직분입니다. 과연 경은 대연의 수호자요! 황제가 장문견의 거친 손을 따스하게 맞잡았다. 황제가 신하에게 이러는 것은 엄청난 특혜인지라 문무백관과 군사들이 감탄하며 그 광경을 쳐다봤다. 태후마마께서는 별고 없으신지요? 물론이오. 경의 승전보를 듣고 매우 기뻐하셨지. 변방에 있는 동안 소장은 오직 두 분의 안위만을 걱정하였습니다. * 정오품 무관( 武 官 ) ** 육촌지간 *** 관주성 정전. 주로 큰 국가 행사가 행해짐
암, 그랬을 테지. 경의 충정이 송백처럼 우직하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소? 장문견이 뻗대듯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천안( 天 眼 ) * 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는 것이 법도였지 만, 장문견은 황제와 눈높이를 맞추고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었다. 헌데 편장군이 안 보이는군. 도성에 함께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아. 경미한 부상을 입은지라 소장이 오늘은 돌아가 쉬라고 하였습니다. 황제의 표정에 희미하게 실금이 갔다. 천자를 만나기도 전에 먼저 돌아가 쉬라고 하다니 기가 막혔 다. 옆에 있던 하개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스쳤다. 그러나 황제는 천연덕스럽게 장문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이는 짐의 벗이기도 하니 특별히 더 신경 쓰고 싶었겠지. 잘하였소. 일시적으로 굳어진 황제의 표정에 약간 긴장했던 장문견은 다시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허나 다음에는 짐에게도 인사하고 가라 해 주시오. 짐은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이 딱 오해하기 좋 지 않소? 짐은 편장군 박찬열이 방자하다고 오해받는 것이 싫소. 소장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명심하지요. 종인은 빙긋 웃었다. 내달이 태후마마의 탄생일이라 승전 연회는 그때 맞춰 준비하려고 하오. 경의 생각은 어떻소? 마마의 탄신진연에 맞춰 연회를 준비해 주신다니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여독으로 심신이 곤고하겠지. 오늘은 간단하게 위로연을 마련했으니 함께 자리를 옮깁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은하수 쏟아지는 밤하늘에 시리디 시린 조각달이 새침하게 걸렸다. 스러져가는 산막 앞에 몇 그루 안 되는 매화나무는 물러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듯 앞다투어 꽃을 토해냈다. 백매와 홍매가 한데 어우 러져 흐드러지게 기지개를 켰다. 산막 앞에 걸어둔 두 개의 상등만이 달빛을 대신하여 어두운 산속을 비추는데, 한 청년이 푹푹 한 숨을 내쉰다. 달처럼 하얀 얼굴이 마치 가마솥에서 갓 삶아 건진 달걀처럼 뽀얗다. 그러나 얼굴에 잘잘 흐르는 애티 너머로 우수에 찬 눈빛에는 시름이 한가득. 도톰한 입술은 잇꽃으로 물들인 듯 붉기만 한데, 고 집스러운 입매는 일그러져 청년의 안색을 더욱 어두워 보이게 했다. 청년은 매화나무 옆 커다란 바위 위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희붐하던 새벽녘 하늘이 먹물이 될 때까지 있었음에도 추운 줄 몰랐다. 매화꽃 작다고 싫다 마라. 꽃은 작아도 풍미는 뛰어나네. ** 나지막한 울림에 청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비싼 향유를 태우며 오랜 벗이 걸어오고 있었다. 청년은 조금 전의 시름이 언제였냐는 듯, 얼른 일어나 달려갔다. 언제 왔어? 내가 오는 줄 몰랐나? 저잣거리에 사람이 그리 깔렸는데. 어머니께서 편찮으셨어. 뭐? 약은? 의원은 불렀니? 청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려가자. 의원을 불러야지. 돌아서는 찬열의 손을 청년은 꼭 붙들었다. 토사곽란이었어. 지금은 괜찮으셔. 저런. 그래도 의원에게 가보는 게, 괜찮아. 정말이야. * 임금의 눈 ** 성윤해, 영매( 詠 梅 ) 중
청년, 도경수는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고집을 피웠다. 어째서 더 야위었지? 찬열이 경수의 가느다란 팔목을 가리켰다. 경수는 짧아진 소매를 애써 끌어내리며 낯빛을 붉혔다. 겨울이었잖아. 그게 무슨, 다친 데는 없어? 경수가 뒤늦게 찬열의 상태를 살폈다. 전장에 한 번 나갔다 오면 한두 군데는 꼭 부러져서 돌아오 는지라 산막에는 늘 약재가 구비되어 있었다. 멀쩡해. 찬열은 어깨 부상을 숨겼다. 경수는 조금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달리 첨언하지는 않았다. 찬열아. 나 좀 도와다오. 진지한 투에 찬열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평소에는 제법 장난기가 있는 친구인 데다 자존심 이 세서 누구한테 부탁한다는 소리를 잘 내뱉지 않았다. 나, 무과에 응시하려고. 지금 내 실력으론 불안해서 네게 가르침을 청하고 싶어. 무과라니? 청년이 커다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자존심을 억누르는 투가 역력하다. 더는 학문에 뜻을 둘 수가 없어. 태학관( 太 學 官 ) * 에서 나오는 용전( 用 箋 ) ** 으로는 감당이 안 돼. 대 과는 언제 열릴지 장담할 수 없지만 얼마 안 있으면 무과가 열려. 말단직이라도 받으면 당장 생계는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원정 갔다가 이제 왔는데 다짜고짜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하다. 이리와. 찬열이 바위 쪽으로 경수를 끌었다. 그리고 그를 바위에 앉히고는 자신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굽 히고 자리를 잡았다. 어려운 일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얘기하란 건 이런 뜻이 아니야. 네 꿈을 접게 하면서까지 널 돕 고 싶지 않아. 내 실력이 형편없어서 그래? 날 화나게 할 셈이야? 스스로 깎아내리는 걸 싫어하는 찬열은 청년이 종종 그의 화를 돋우려고 저러는 걸 잘 알고 있었 다. 청년은 외골수지만 정직함이 장점이고, 본인이 옳다고 믿은 건 끝까지 믿는 단순한 성격이다. 그 러나 한편으로는 영악하기도 해서 친우를 이런 식으로 곤란하게 만들었다. 넌 도계한 장군의 증손이야. 그분의 핏줄이라고. 경수야. 내 눈 똑바로 봐. 찬열이 짐짓 엄중하게 요구했다. 머루알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찬열의 것과 마주쳤다. 내가 아는 도경수는 한번 마음먹은 건 반드시 하고 마는 성격이지.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 지 않는 나무와도 같아. 사람을 살뜰하게 살피기도 하고, 남들의 아픔에 공감하기도 해. 네가 아니면 장차 누가 폐하를 보필하겠어? 난 그냥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야. 그런 말로 자신을 옭아매면 좋아? 스스로를 속이지 마. * 연나라 최고 교육기관 ** 용돈
인사하고 올게. 엄중하게 경고한 후 찬열은 산막으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이곳은 늘 그렇듯 변함이 없었다. 단지, 함께 오던 친구 대신 그들의 유 품이 한쪽에 조용히 마련되었을 뿐이다. 두 개의 촛대가 소리 없이 타오르는 자그마한 단상 위에 반 짇고리와 해진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찬열은 그 앞에 서서 합장하고 겸허하게 고개를 숙였다. 경수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가위로 깊이 탄 촛대의 심지를 잘랐다. 그리고는 반짇고리 위에 방금 꺾은 매화가지 하나를 올렸다. 자당( 慈 堂 ) * 께서는 차도가 없으시니? 울화병인데 쉬이 낫지 않지. 약은? 답하지 않는 경수의 집안 사정을 얘기하자면 대충 이렇다. 날 때부터 부유했던 기억은 없다. 번번이 과거에 낙방한 아버지는 과장( 科 場 )에서 행해진다는 비리 를 접한 후로는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어머니는 병들었으며 하나 남은 동생은 이제 겨우 아홉 살 이다. 이 년 전에 세 살 아래의 누이를 역병으로 보낸 탓에 어머니의 병환은 더욱 깊어졌다. 경수 혼자서 곤궁한 살림을 책임지기에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나마 찬열이 있을 때는 그가 수시로 집을 드나들며 도움을 주었지만 지난 반년 동안 전장에 가 있느라 도움의 손길은 뚝 끊겼다. 찬열의 어머니는 남에게 늘 퍼주기만 하는 아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아들의 명성에 들러붙는 거머리가 많다 보니 경계심도, 안목도 매우 높아진 것이다. 찬열과 어릴 때부터 허물없이 자란 경수지만, 찬열의 어머니는 그가 염치도 모르고 매번 손을 뻗는 다고 여겼다. 자연스레 찬열이 도성을 비운 사이에는 그의 집에도 갈 수 없었다. 그놈의 염치 때문에. 또 고집을 피웠군. 경수는 울지 않았다. 호오가 명확했으나 속내를 잘 드러내는 성격도 아니었다. 소년처럼 티 없이 깨 끗한 얼굴은 읽을 수 없는 암호문과 같았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장점이 있으나 자신의 이 야기는 하지 않아 늘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그건 다 어머니 때문이다. 빈 쌀독, 남편의 해진 옷자락, 손님의 발길이 뚝 끊긴 대문, 금 가기 시 작한 담벼락의 벽돌을 볼 때면 어머니는 세상 시름을 전부 끌어안은 듯 처연하게 눈물을 흘렸다. 경 수는 속상한 일이 있어도 어머니를 보면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다. 슬픔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비극임을 모르는 경수는, 그렇게 꺾이지 않는 자존감을 앞세워 더욱 도도해져만 갔다. 내가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다면 부모님을 힘들게 하지 않았을 거다. 찬열의 커다란 손이 경수의 작은 얼굴에서 슬픔을 지워냈다. 먼저 간 월란에게 미안하고, 어린 연수에게도 면목이 없어. 월란이란 말에 다정하던 찬열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월란이 그렇게 아파하기 전에 의원을 불렀을 텐데. 그게 왜 네 탓이야? 그런 말 하지 마. 월란은 경수의 누이였고 한때 찬열의 정혼자였다. 그러나 찬열이 서북에서 일어난 난을 평정하러 나간 사이, 급작스레 역병에 걸려 유명을 달리했다. 고작 넉 달이었다. 찬열이 교안을 떠난 지 단 넉 달 만에 젊은 연인은 저승문을 사이에 두고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그 일은 찬열과 경수의 가슴에 크나큰 상처로 남아 있었다. 특히, 경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이었다. 도경수에게 박찬열은 둘도 없는 죽마고우이자 한 번도 내색한 적 없는 첫 연정이다. 그래서 경수는 *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
가문과 누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접어야 했다. 항상 한 걸음 뒤에 물러나서 찬열의 뒷모습 을 바라보며 그의 행복을 바랐다. 자신의 마음을 들키는 날엔 모두 불행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월란이 죽어 버렸다. 약 한 첩 제대로 못 먹고, 가을바람에 소슬하게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힘없이 꺾이고 말았다. 경수의 나이 열아홉이었고, 월란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그러나 찬열은 오래전부터 경수가 자신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입 다물고 있는 경수를 위해 그저 모른 척할 뿐이다. 찬열은 빈곤함에 허덕이는 경수를 도와주고 싶었다. 때마침 조부끼리 서로 사돈을 맺기로 했다는 유서가 발견되었고, 찬열은 적극적으로 월란을 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머니는 가문의 격이 맞지 않는다며 극심히 반대했지만 그는 경수를 위해 혼사를 밀어붙였다. 애석하게도 월란과는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없게 되었으나 찬열은 그 일로 경수가 괴로워할 때면 왠 지 모를 자책감이 들었다. 직접 혼례복을 짓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자수를 잘했었지. 너와 내 향낭은 항상 월란이 만들어줬으니까. 실수를 반복할 순 없어. 이러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 그럴수록 더욱 정신 차려야지.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떻게 집안을 일으키겠단 거야?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경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찬열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데 사라졌던 든든한 벽이 다시 세워진 기분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돌아왔잖아.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기대. 난 항상 이 자리에 있으니까. 그러다 네가 사라지면 나 혼자 못 일어날까 봐 두려워. 말을 삼키는 경수에게 찬열이 발랄하게 제 안했다. 기분전환이나 해 보련? 매화꽃이 피는 곳이 있어. 색이 어찌나 선명한지 석양을 머금은 것 같다. 어릴 때 몇 번 본 뒤로는 갈 기회가 없었지. 경수의 속눈썹에 어룽진 이슬 같은 눈물방울을 쓱싹 닦아주며 찬열은 부드럽게 웃었다. 매화 좋아하잖아. 꽃의 우아함을 좋아하는 거지, 매화라서 좋은 건 아니야. 그게 그거지. 어차피 그 근처에는 사람도 없어. 음산할 지경이라니까. 본인의 농담에 혼자서 깔깔거리는 찬열을 보며 경수도 허물어지듯이 실소를 머금었다. 모레 신정( 申 正 ) 쯤에 포목점 앞에서 보자. 찬열아. 응?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 새삼스러운 질문에 찬열은 경수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03. 홍류원( 紅 流 園 ) 짐은 개의치 않는다. 하개, 편장군을 일으켜라. 찬열은 아침 일찍 입궁해서 종인에게 죄를 청했다. 그는 종인의 배동( 陪 童 )이었고, 현재는 종인이 벗으로 여기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벗이라는 이 름은 황제의 기분이 좋을 때나 붙어서 신하가 감히 쓸 순 없었다. 찬열은 정도를 지켰고 종인은 찬열 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하지만 종인은 정말로 어제 일을 맘에 담지 않았다. 장문견에게 화가 난 일로 찬열에게 꼬투리를 잡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찬열이 태후 일족과 인척지간인 것은 껄끄러우나 그것이 십 년을 넘긴 우 정을 덮을 순 없었다.
부상이 심하다 들었는데 어떠냐?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 나았습니다. 다친 지 얼마 안 됐다면서 허세는. 내의원에 들러 꼭 치료받고 가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찬열은 그 어느 때보다 공경한 자세로 예를 갖추었다. 옥안( 玉 案 )에 쌓인 상소문을 지분거리던 종인이 흘리듯 툭 내뱉었다. 장문견이 올린 장계를 보니 네 전공이 상당하더군. 식량 탈취, 족장의 아들들을 비롯해 장수 세 명 의 수급 베기, 퇴로 차단, 지원군 일망타진. 잘하였다. 마른 침을 삼키던 찬열에게 진심 어린 미소와 칭찬이 돌아왔다. 넓게 보면 나라를 위한 일이나 좁 게 보자면 장문견의 치적을 도운 꼴이라 찬열은 내심 종인이 이것을 불편하게 여길까 염려했다. 그러나 종인은 순진하게 웃으며 찬열을 치켜세웠다. 조자룡의 현신 이라 칭할 만하구나. 과찬이십니다. 도성으로 오는 동안 여인들이 네 얼굴을 보려고 안달하였다지? 과연 반악( 潘 岳 )과 송옥( 宋 玉 )이 울 고 갈 남중일색이로다. 그 말에 찬열의 얼굴이 붉어졌다. 황제의 칭찬은 과장이 아니었다. 찬열은 관옥으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는 육척 반이 넘는 훤칠한 키와 쭉쭉 뻗은 팔다리,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소년장수로 이름을 알릴 무렵부터 실력보다는 보기 드문 백석( 白 晳 )이라며 그 명성에 홍역을 치를 정도였다. 찬열은 현재 딸을 가진 세도가라면 누구나 탐내는 사윗감이었다. 그는 외모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무신( 武 神 )이라 불릴 만큼 실력이 좋았다. 십오 세에 처음 전장에 나서 매번 승전보를 울렸다. 대대로 국가에 공을 세운 무관 집안일뿐만 아니라 현재 그의 부친인 박우헌은 사예교위( 司 隸 校 尉 ) * 였다. 찬열의 어머니는 태후 장씨의 당사촌이었으므로 넓게 보면 황제의 외척으로 엮었다. 장문견이 예족 토벌에 찬열을 부장으로 데려간 것도 그가 장씨 가문과 연결된 탓이었다. 태후는 박 찬열이 크게 될 인물이라며 장문견에게 특별히 뒤를 보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준수한 용모, 벌열 가문, 천부적인 무술과 예의 바름은 박찬열의 가치를 나날이 치솟게 했다. 이번 에 또 공훈을 쌓고 돌아왔으니 그를 사위로 들이고 싶은 가문들의 기 싸움이 더욱 치열해질 터였다. 농이다. 하여튼, 저 친구는 농조를 구분하지 못한다니까. 종인이 찬열을 가리키며 하개에게 떠들어댔다. 네 공로를 잊지 않겠다. 황공하옵니다. 헌데 폐하. 소신에게 감히 한 가지 청이 있나이다. 무엇이냐. 내일 홍류원( 紅 流 園 )을 구경하고 싶은데 괜찮을는지요? 홍류원? 찬열이 뭘 부탁하는 편이 아니라 종인은 약간 놀랐다. 그것도 자신의 잠저를 열어 달라니. 하긴. 홍매화가 흐무러질 시기지. 봐주지 않으면 꽃이 핀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소신이 감히 홍류원에 걸음 해도 되겠습니까?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 다담상이라도 마련해 줄까? 아닙니다. 폐하의 배려에 깊이 감읍하나이다. 그런 일로 일일이 감사하지 않아도 돼. 넌 짐의 하나뿐인 벗이니까. 종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의관을 정제했다. 산책 좀 하겠나? 상소를 읽었더니 좀 지루하군. * 정이품. 도성의 치안과 군권 담당 및 관리 감찰
빙긋 웃은 종인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사느란 바람에 종인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전에 눈을 흩뿌린 날씨가 다시 끄물거렸다. 한바탕 목화솜이 떨어질 모양이다. 그걸 미리 알았던 듯 하개 뒤에 선 어린 내시의 손에는 접힌 우산 이 들려 있었다. 종인은 회색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자신궁에 도착하자 정전 앞마당에서 때마침 문안을 올리고 나오는 장문견과 마주쳤다. 장문견은 거 의 예를 갖추는 둥 마는 둥 내뱉었다.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종인은 그의 오만불손함에 이골이 난 상태라 개의치 않고 대했다. 태후마마를 배알하고 나오는 길이오? 예, 폐하. 오누이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회포는 푸셨소? 예. 헌데 마마께서 심란해 보이시더군요. 그래요? 경에게는 달리 말씀이 있으셨소? 들어가 보시면 아시겠지요. 무례한 발언에 하개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으나 종인은 끝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우문현답이군. 길이 미끄럽던데 가마를 내어드릴까요? 폐하의 우악하신 성심만 받겠습니다. 그럼 미끄러지지 않게 살펴가시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장문견이 사라진 후 종인은 사리문 잇새로 조용히 뇌까렸다. 저런 개자식을 낳고도 무정후의 모친은 부끄럽지도 않았다던가. 폐하. 자신궁에는 부는 바람에도 귀가 있다 합니다. 장문견이 사라진 정문을 노려본 후 종인은 표정과 호흡을 가다듬은 후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녹라( 綠 羅 )와 금박 물린 소사( 素 紗 )를 휘장으로 늘어뜨린 자신궁 실내는 차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뿜어냈다. 탁자와 책상, 장롱, 문갑 등 다양한 가구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방 안을 꾸 몄다. 봄이면 마당에는 아름다운 화초가 가득할 것이다. 태후는 분재를 기르고 꽃꽂이하는 취미가 있었다. 이따금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나 드물었다. 수더분한 방에서 황태후 장씨는 우아한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옥안 위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종인이 그녀에게 엎드려 절을 올렸다. 태후마마께 문후 올립니다. 존체 강녕하십니까? 강녕하다마다. 편히 앉으시오. 오는 길에 무정후를 만났습니다. 담소를 나누셨는지요? 태후가 빙긋,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무정후가 군을 이끌고 출정한 것이 지난여름이었는데 벌써 한 해가 저물어 봄이구려. 무정후와 편장군 덕에 오랑캐를 정벌하였으니 이는 연의 복입니다. 종인이 은근슬쩍 찬열의 공적을 입에 담았다. 그 같은 장수들이 모두 주상 대에서 나왔으니 그건 주상의 복이오. 무슨 책을 읽고 계셨습니까? 종인이 말을 돌렸다. 심심파적이나 할까 하여 시경( 詩 經 )을 뒤적이고 있었소. 또 무슨 꿍꿍이인가? 글줄이 얕은 태후가 시경을 끼고 앉아 있다니 놀랄 노자였다. 그러셨군요. 소자도 좋아하는 책입니다. 어느 편을 읽고 계셨는지요? 관저( 關 雎 )라오.
꾸륵꾸륵 우는 물수리 황하에서 노니,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배필이라네. 종인이 한 구절을 읊자 태후는 자애롭게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마마께서 잠을 못 이루시나 봅니다. 혹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총명한 주상께서 이 늙은이가 딱딱한 서책을 읽는 까닭을 모르시진 않겠지. 소자가 아둔하여 가르침을 청합니다. 호호. 겸손하기는. 시경 관저 편은 문왕과 그 왕비의 덕을 칭송하며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좋은 여인 을 얻어 군자의 대업을 이루려는 내용을, 그것도 태후가 심심해서 읽을 까닭이 없었다. 현수궁( 賢 壽 宮 ) * 이 오래도록 비었구려. 눈은 언제부터 내리려나. 종인은 바깥 날씨가 궁금했다. 국모의 자리를 오래 비워서는 안 되오. 주상도 장성했으니 하루빨리 후사를 봐야지요. 어진 사람을 지어미로 맞아 내외가 화락한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아직 황후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군왕이란 사사로운 감정에 매달리는 자리가 아니오. 죄책감이라면 더더욱. 무릎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던 종인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따지고 싶었다. 황후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정말 모르는 거냐고. 그러나 오늘도 종인이 하고 픈 말은 아침이면 사라지는 촛불처럼 하릴없이 사그라질 뿐이다. 일전에도 말씀 올렸듯 황후의 삼년상을 마치기 전까지는 어떠한 비빈도 맞지 않을 겁니다. 살아생 전 잘해 주지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깊은 애도를 받아야지요. 그것이 지아비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장보여. 시호는 영회( 英 懷 ). 꽃다운 시절을 영원히 추억한다는 뜻이다. 그녀는 태후 장씨와 부친 장문견의 명으로 십사 세에 한 살 연하인 종인과 혼인하였다. 사 년 동안 남편과 불화했으며 삼 년 전에 물놀이하러 나갔다가 못에 빠져 익사했다. 국모의 마지막치고는 무척 이나 불운했다. 보여가 죽은 원인을 두고 여러 말이 나돌았지만 최종적으로는 비빈의 죄악인 자결 로 결론이 났다. 종인은 그녀와 생활하는 동안 한 번도 총애하지 않았고 눈길조차 제대로 준 적이 없었다. 보름마다 의무적으로 현수궁을 찾았으나 잠자리를 가진 적은 손에 꼽았다. 종인은 그녀가 장씨 가문의 여인이 라 싫어했고, 자존심 강한 보여는 남편의 박대를 견디지 못했다. 결국, 지아비의 냉대를 못 이긴 황후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물에 뛰어들었다는 것이 왕왕 떠도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황후의 죽음에 대해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다. 그 진실은 오직 종인만이 알고 있었고, 그걸 로 됐다 싶었다. 화목하지 않았어도 끝끝내 낭군을 위했던 여인. 종인이 기억하는 보여의 마지막은 그러했다. 하여 태후가 내뱉은 죄책감 이란 단어에서 종인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주상은 국상 기간이 끝나고도 삼 년간 애도하니 아름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구려. 나는 죽기 전에 건강한 황자를 안아보는 것이 소원이라오. 주상이 후궁조차 들이질 않으니 어미는 참으로 근심 이오. 마마께서는 천세를 누리실 텐데 어찌 그리 서두르십니까? 태후가 지그시 종인을 쳐다봤다. 그녀의 입가에 파르라니 날이 선 초승달이 걸렸다. 그래요. 아직 영회황후의 삼년상을 마치지 않았으니 기다려 보리다. 정무가 바쁠 테니 그만 물러가시구려. 허면 편히 쉬십시오. 그 잠깐 사이에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 중궁전
홍류원은 생각보다 작았다. 황제가 고작 몇 개월 남짓 살았다던 얘기는 들었지만 잠저치고는 지나 치게 검소했다. 마당에는 아주 작은 연못 하나와 계절에 시든 나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러나 안에 숨은 매화 정원은 솟은 담장 너머까지 가지를 뻗어와 붉은 꽃을 피웠다. 잠저의 당호가 붉은 물결 인 것이 단번에 이해되었다. 아무도 없으니까 안심해. 오기 싫다더니 벌써 호기심에 차서 눈을 빛내는 경수. 찬열은 비죽비죽 터지는 웃음을 눌렀다. 눈 온다. 아침부터 날씨가 사납더라니. 흩날리는 눈송이가 찬열의 손바닥에 살며시 앉았다가 사르르 녹아버렸다. 설중매를 볼 적당한 날씨군. 정말 가도 돼? 들키면? 폐하께 윤허를 받았다니까. 나나 되니까 홍류원에 드나들 수 있는 거다. 찬열이 으스대며 농을 던지자 경수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좁다란 홍교를 건너자 작은 쪽문이 나왔다. 담장을 따라 측백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찬열과 경수는 그것을 지나 붉은 물결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와아! 눈부신 설경이 끝없이 펼쳐진 곳에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에는 가지마다 풍성하게 붉은 꽃송이가 피 어 있었다. 꽃송이가 어찌나 크고 아름답던지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송두리째 떨어진 꽃잎이 붉은 융단으로 보 일 정도였다. 여린 꽃잎 위에는 미처 녹지 못한 채 눈꽃을 피운 하얀 소금이 묻었고, 은은한 향기가 화원 전체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바람이 불자 눈가루가 거품처럼 부서졌다. 햇살 하나 없는 흐린 날인데도 금가루를 섞은 듯 곱게 반짝거렸다. 신선이 산다는 곤륜산이 부럽지 않은 풍경. 청지기가 빗자루로 낸 길 외에 발자국 하나 없는 고매하고 청미한 경치에 시야가 탁 트였다. 경수는 황홀한 경치에 완전히 홀려 버렸다. 볼살을 잔뜩 끌어올리며 반달처럼 환하게 웃는데, 예닐 곱 먹은 어린아이 같았다. 청년은 눈 내리는 날 마당에 풀어놓은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눈밭 위를 뛰 어다니기 시작했다. 이곳은 찬열과 경수, 단둘만이 존재하는 별세계였다. 조심해! 그러다 넘어져! 찬열이 소리쳤다. 그러나 경수는 어마어마한 선물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몹시 기뻐했다. 무명옷을 입고 옷자락 나부끼며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니, 경수가 꼭 설경에 동화된 한 송이의 백 매 같았다. 난만한 붉은 꽃 사이에서 감히 튀지 않아도 청순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하얀 꽃이다. 찬열은 경수가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어어!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경수를 찬열이 재빠르게 달려가 부축하였다. 경수가 배시시 웃 으며 얼굴을 붉혔다. 뒤늦게 너무 어린애처럼 뛰어다닌 건 아닌가 싶었다. 돌아보니 찬열이 걸어온 자리는 커다란 발자국이 일정하게 나 있는데, 자신이 지나온 곳은 엉망진 창이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정도였다.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이야. 폐하를 보필한다면 얼마든지 다닐 수 있어. 꽃에 약한 걸 알고 일부러 데려온 거로군. 마침맞게 열반설( 涅 槃 雪 ) * 이 내리니 더 좋지 않아? 꼭 하늘이 먼저 알고 우릴 인도한 것처럼. 그렇게 말을 잘하면서 왜 칼 휘두르는 장수가 되셨는지 모르겠네. * 음력 이월 보름 전후로 내리는 상서로운 눈
핏줄은 속일 수 없지. 찬열의 너스레에 내심 무거웠던 경수의 마음도 완전히 풀렸다. 보기 좋다. 청년은 내리는 눈에 옷자락이 젖는 줄도 모르고 점점이 흩어진 탐스러운 홍화를 보느라 여념이 없 다. 그래서 찬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도 평소보다 반응이 느렸다. 응? 아니다. 경수가 조심스레 꽃을 어루만졌다. 떠나기 전에도, 돌아온 후에도 슬픈 표정이었어. 너 웃는 거 몇 개월 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그냥 보기 좋아서 그래. 자, 선물. 허락도 없이 꽃가지를 똑 꺾더니 찬열에게 내밀고는 쑥스럽게 웃는다. 이곳의 물건은 풀 한 포기조차 모두 폐하의 것이야. 우리뿐인데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잖아. 들키면 나만 곤란해진다고. 겨우 이거 하나로 널 혼내면 폐하께서 속이 좁으신 거다. 뭐라 해도 굴하지 않는 경수의 태도에 찬열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찬열은 스물한 살이나 먹었 으면서 여전히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은 경수가 마냥 소년 같았다. 그때, 그가 늘 납검하고 다니는 장검을 쓱 뽑았다. 그리고는 경수에게 칼자루를 넘기더니, 꽃을 꺾은 벌. 오랜만에 용연무( 龍 淵 舞 ) 한번 보여줘. 경수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찬열이 쥔 칼자루로 향하였다. 04. 설중우( 雪 中 遇 ) 폐하. 눈발이 제법 굵은데 태성전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하개가 우산을 받치며 물었다. 종인은 대답 없이 손으로 날아드는 눈송이만 움켜쥐었다. 보드라운 눈은 내려앉기 무섭게 온기에 녹아 버렸다. 장서각에서 서책을 가져다드리오리까? 찬열은 돌아갔을까? 시간이 그리 늦지 않았으니 아직 있을지 모릅니다. 갔다 해도 모처럼 매화나 감상하시지요. 나쁘지 않군. 평복으로 갈아입고 가시지요. 얼마 후 종인은 시위지신과 내관 몇을 데리고 황궁에서 멀지 않은 홍류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랜 만에 오는 옛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서늘한 풍경이다. 종인은 무심해 보였다. 그 무심한 표정 뒤에 장문견과 태후가 건드린 역린이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궁을 나오던 중에는 휘정궁( 徽 靜 宮 )을 지났다. 그곳을 비껴가던 종인의 심경은 엉킨 실타래였다. 시 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여인의 비명과 피 흘리는 시체가 나오는 악몽.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한탄하 며 그저 못 본 척 지나치는 것이 고작이다. 태후의 명으로 궁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이후, 늘 사람으로 북적이던 화려한 전각은 귀신이 나올 법 한 폐허로 변하였다. 종인이 전각을 수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청소하라고 명했지만 휘정궁은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밤마다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도 하고, 핏물을 뒤집어쓴 귀신이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나타난
다고도 했다. 종인은 미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휘정궁에 출몰한다는 원혼이 선제의 후궁인 의귀비 를 가리킨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종인은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소름에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겠다. 주변에 시위들을 세울까요? 모처럼 벗과 오붓한 시간을 즐기려는데 방해할 셈이냐? 하오면 예서 기다리겠습니다. 날이 추우니 담소가 길어지시거든 얼른 나오셔야 합니다. 잔소리는. 종인은 짐짓 뾰로통하게 핀잔을 준 후 자신의 호위를 책임지는 청신에게서 우산을 받아들고는 홍류 원으로 걸어갔다. 찬열은 돌아가지 않은 듯 눈밭에 나오는 발자국이 없었다. 다만 찬열의 것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발자국도 함께인 점이 약간 의아했다. 누굴 데려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시종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종인은 성큼성큼 쪽문을 지나쳤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서자 풍성하게 쌓인 새하얀 눈밭과 완연하게 피어난 붉은 꽃밭이 펼쳐졌다. 새 해를 맞은 후 늘 바쁘고 마음이 어지러워 편안하게 겨울꽃을 볼 시간도 없었다. 이런 화려한 멋은 오 랜만이다. 저절로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는 은은한 꽃향기를 맡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앞서 난 찬열과 그의 시종인 듯한 자의 발자 국이 퍽 괴이할 정도로 어지럽게 나 있었는데 그걸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시종 아이가 천둥벌거 숭이인가 보다. 찬열의 것에 비해 크기도 한참 작은 걸 보니 몇 살 안 먹은 소년이렷다. 종인은 발자국을 따라 조심스레 걸어갔다. 어쩐지 어린 시절 하던 숨바꼭질이 생각났다. 문득 귀를 기울이자 희미하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종인은 찬열이 옛날처럼 홀로 검술 연 습을 하는가 보다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퍽 쏠쏠했다. 무더기로 핀 붉은 매화나무가 눈앞을 가렸다가 사라지를 여러 차례. 제법 두꺼운 나무를 지나 시야 가 탁 트이자 종인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서슬이 퍼런 검을 쥐고 나비인 듯, 벌인 듯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며 춤추는 소년이 있었다. 흩날리 는 눈발 속에서 홀로 춤의 경지에 달한 듯, 무아지경으로 팔을 놀리고 허리를 꺾는 자태는 그야말로 공손대랑( 公 孫 大 娘 ) * 이 환생한 듯했다. 잠시 검을 내리고 호흡을 가다듬을 때는 보는 사람을 홀리듯 사뭇 교태 넘치는 눈웃음까지 지어 보 였다. 백옥을 깎아 만든 듯 반질반질한 얼굴에는 채 가시지 않은 아이의 풋내가 묻어나고 집중한 눈빛에 서는 번개 같은 날카로움이 엿보였으며 우직하게 다물었다가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는 입술은 연지를 바르지도 않았는데 홍옥처럼 붉었다. 가녀린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유연함과 힘이 뿜어져 나온단 말인가! 춤추는 모양새를 살피니, 멀리서 보면 흡사 서리를 맞고 날아오르는 새하얀 기러기 같고 가까이서 살피니 나부끼는 옷자락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배꽃 같았다. 무겁게 내리찍는 발은 천하를 호령하는 검의 울음이요, 다시 사뿐히 떼어놓는 걸음에서는 푸른 물 에 아른거리는 부용화의 은근함이 묻어났다. 흘러내린 소맷자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팔목은 눈처럼 하얗고 나무의 가지처럼 가늘었다. 딱 봐도 영락없는 사내인데 어찌 이런 기묘한 자색을 갖췄는지 모를 일이다. 저 아이 앞이라면 궁중의 수많은 미인과 무희들은 서시를 보고 숨어든 물고기나 다름없다. 그저 감탄하고 경탄하니 가히 천하일색이요, 군계일학이로다! 조식이 <낙신부( 洛 神 賦 )>에서 낙수의 여신을 가리켜 칭송하기를, 엷은 구름에 쌓인 달처럼 아련하 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볍구나 라고 하였는데, 종인은 오늘에서야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저런 재주꾼이 도성 안에 있는데 어째서 소문 한번 나지 않았는지 그것이 희한할 따름이었다. * 당나라 때의 기녀. 검무의 일인자
그때, 인기척을 눈치챈 찬열이 뒤를 돌아보고는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그가 예를 갖추려 하자 종인 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찬열이 혼이 빠져나간 듯한 종인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 시선 끝에 경수가 걸 려 있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 낯선 인기척에 경수가 검을 거두고 동작을 멈추었다. 코와 볼이 추위로 빨갛게 얼었다. 신명 나게 춤사위를 선보이던 그가 낯선 종인을 잔뜩 경계하였다. 찬열이 곤란한 기색으로 서 있는 걸 보 니 황제인 모양이다. 하지만 호안석( 虎 眼 石 )으로 장식한 검은색 상투관과 연꽃 모양으로 투각한 동곳, 황족치고는 검소한 옷차림이 그의 존재를 헷갈리게 했다. 단출한 평복 차림이라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쨌거나 황제의 화원에서 함부로 춤을 추는 불경을 저질렀으니 죄를 청해야 했다. 경수가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뵈옵니다. 감히 폐하의 화원을 어지럽혔으니 소인을 벌하여, 조금 전 추었던 춤이 뭐지? 용연무라 합니다. 춤의 내력을 알려줄 수 있느냐. 구야자가 간장( 干 將 )과 더불어 초나라 소왕을 위해 용연( 龍 淵 ), 태아( 泰 阿 ), 공포( 工 布 )의 세 자루 명검을 만들었다지요. 그중 첫째인 용연검에서 유래합니다. 춤사위가 독특하더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네가 만들었느냐? 소인의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외조부께서 우연히 아신 후 가문에 전수하셨다 합니다. 종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수의 말을 곱씹었다. 그토록 희귀한 춤이라면 교본으로 남겨도 좋으리라 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라. 난 폐하가 아니니까. 뜻밖의 말에 경수뿐만 아니라 찬열도 놀랐다. 종인이 무슨 속셈인지 몰라서 찬열은 불안하게 종인 을 지켜보았다. 반면 경수는 눈앞에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니라면 어느 황족일까 궁금했다. 황제가 아니라니 불행 중 다행이지만 못 볼꼴을 보인 듯하여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경수가 주춤주춤 일어서며 물었다. 하오면. 나는 누구라고 둘러댈지 고민하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김종대다. 진왕이라고 불리지. 진왕( 辰 王 ) 김종대는 현 황제의 친형이다. 날 때부터 몸이 약해 황위 싸움에서 밀려난 후로는 왕부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음 률을 아끼는 희대의 풍류가로 유명했으나 사람 붐비는 것을 싫어해 문하생이고 손님이고 일절 받지 않는 은둔 거사이기도 했다. 잔병치레가 많다고 들었는데 소문보다는 체격이 상당했다. 혼자서 요양한다더니 그동안 건강을 많 이 회복한 모양이다. 경수는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진왕이 아예 바깥출입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풍류가가 절경을 찾는 것 또한 이상하지도 않아 잠자코 있기로 했다. 무엇보다 찬열이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앞에 선 자 가 진짜 진왕이라는 증거 아니겠나. 왕부의 무희들도 너처럼 아름답게 추지 못하는데 힘과 유연함을 고루 갖추었구나. 과찬이십니다. 내가 보기엔 공손대랑의 서하검기( 西 河 劍 器 )가 유명무실할 지경이다. 그 유명한 진왕에게 지극한 칭찬을 듣자 경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윽고 종인이 경수에게 다가가 쓰고 있던 우산을 씌워주었다. 경수가 눈알을 멀뚱멀뚱 굴리다가 찬열을 바라보았다. 찬열은 말없이 희소를 머금고 있었다. 경수는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종인은 경수에게 억지로 우산을 쥐여 주었다.
오래 춤을 춰서 손과 얼굴이 얼었잖으냐. 이러시면 존귀하신 전하의 옷깃이 젖습니다. 괜찮다. 허락 없이 네 춤사위를 본 대가로 치마. 황공하옵니다. 그나저나 네 이름이 뭐지? 찬열은 종인이 경수에게 지대한 관심을 내비치는 걸 보며 조금 복잡한 심경이었다. 왜 본인의 신분 을 속였는지도 모르겠다. 경수가 찬열에게 도와 달라는 눈빛을 쏘았다. 종인이 그 시선을 따라가 찬열 쪽으로 돌아섰다. 저 친구의 이름은 도경수입니다. 대장군을 지낸 도계한의 증손으로 현재 태학관 유생이지요. 이런.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었군. 이번에는 조금 더 노골적인 시선으로 경수의 위아래를 훑는 종인. 전하. 시간이 늦어 소인들은 이만 물러날까 합니다. 찬열이 재빠르게 선을 그었다. 경수가 긴장해서 경직된 꼴이 그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이제 막 귀환한 편장군을 오래 붙들 순 없겠지. 난 여기서 매화나 조금 더 감상하다 가겠네. 그럼. 눈치껏 자신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찬열이 더할 나위 없이 고맙다. 종인은 예를 갖춘 후 서둘러 홍류원을 빠져나가는 찬열과 경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수가 우산을 쓴 채 종인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시선이 엉켰다. 예의, 보일락 말락 아슬아슬한 미소를 보인 후 재빨리 사라지는 도경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종인은 그제야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 르르 내뱉는 숨결에서는 난생처음 맛본 짜릿함이 묻어났다. 종인은 그새 많이 쌓인 눈밭 한가운데서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붉은 설중매를 지분거렸다. 꽃이 이토록 평범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홍류원을 나서면서 경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온통 붉은색 천지이던 꽃밭의 풍경이 뇌리 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그곳에서 만난 진왕의 독특한 분위기도. 병약하다더니 진왕의 상태가 소문처럼 심각하진 않나 봐. 종알거리는 경수를 보며 찬열은 가볍게 미소 지을 뿐이다. 그는 종인이 거짓말을 한 이유가 뭔지 내내 신경이 쓰였다. 사저에 틀어박혀 지낸다는 게 사실이야? 햇볕에 그을린 것처럼 가무잡잡하던데. 날 때부터 피부가 검은 편이셨대. 풍채만 보면 흠잡을 데 없는 헌헌장부더라. 훌륭하신 분이지. 진왕은 풍류가라던데, 용연무를 모르다니 조금 의외였어. 네 외가에만 전수되니 그분은 모를 수도 있어. 나랑 한두 살 밖에 차이 나지 않거든. 찬열은 경수가 받아온 우산을 대신 들었다. 고작 우산 하나지만 황제의 하사품인 만큼 찬열은 손잡 이 하나까지 예민하게 느껴졌다. 괜찮겠어? 응? 너 말이야. 나 때문에 화원이 더러워졌을 텐데 그대로 나와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폐하께서 아시기 라도 하면. 별일 없을 거야. 어떻게 확신해?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이니까. 네 춤에 마음을 빼앗겨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셨을 거야.
그럼 다행이다. 어쨌든, 고맙다.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매번 받기만 하니 그렇지. 넌 이 나라의 재상이 될 테니 투자하는 셈 치지, 뭐. 그때 가서 날 모른 척하면 안 돼.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내가 재상이 될지, 말단관리직에 만족하며 살지 네가 어떻게 알아? 나무는 평온하길 원하지만 가지는 늘 바람에 흔들리지. 네 능력이라면 평생 말단관리로 살고 싶어 도 그럴 수가 없을 거다. 낭중지추 라는 말 몰라? 경수는 찬열만이 내뿜는 따스한 기운에 끌렸다. 겨울을 사는 소년은 남녘의 쟁글쟁글한 화풍난양에 녹아내렸다. 예전보다는 무덤덤해졌지만 누구에게나 첫정이라는 꼬리표는 떼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정( 情 )의 시작이란, 문턱 없는 방에 봄바람이 드나드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누구도 알지 못하고, 누구도 막을 길이 없었다. 배고프다. 객잔에서 따뜻한 것 좀 먹고 가자. 찬열이 화사하게 웃자 경수가 불퉁하게 면박을 주었다. 네가 그러니까 교안의 남녀노소가 밤잠을 못 이루지. 내가 뭘 어쨌다고? 모르면 됐다. 참나! 툭탁툭탁 싸우면서도 찬열은 경수의 옆에 나란히 서서 눈 쌓인 길을 걸었다. 몇 걸음 앞에 있는 주 막의 굴뚝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뿜어져 나왔다. 이튿날, 눈 그친 하늘은 쾌청했고 날씨는 조금 더 추워졌다. 종인은 조회에서 북녘의 이재민과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어떻게 도울지 논의했다. 그리고 조회 가 파하자마자 곧장 태성전으로 돌아왔다. 먼저 온 찬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찬열은 이른 아침에 종인의 부름을 받고 입궁했는데, 명목상 이유는 바둑내기였다. 그러나 찬열은 종인이 어제 일과 관련해 자신을 불렀으리라고 짐작했다. 어제는 무사히 잘 들어갔나? 폐하 덕분입니다. 넌 남에게 잘 부탁하는 성격이 아니지. 홍류원을 보여 달라고 한 건 어제 그 아이 때문인가?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하개가 무슨 뜻인가 싶어 종인과 찬열을 번갈아 봤다. 어제 종인에게 딸려 보냈던 우산이 홍류원을 다녀온 후에는 없어서 그 까닭을 물었는데, 종인은 나 뭇가지에 부딪히는 바람에 살이 부러졌다고 했다. 종인이 그걸 그대로 버려둘 성격이 아닌데도 능글맞게 넘어가서 하개는 일단 잠자코 있던 참이었 다. 종인이 연메꾼과 배행하던 무리마저 물리는 바람에 자세히 몰랐지만 홍류원에는 편장군 외에 다 른 사람도 함께였던 모양이다. 폐하를 속였습니다. 연회 때도 부친과 내외하던 네가 갑자기 홍류원을 열어 달라 해서 의아하긴 했다. 일개 유생을 위해서일 줄은 몰랐지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찬열이 엎드렸다. 종인은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로 턱을 괴고는 피식 웃었다. 죽을죄라니. 딱 봐도 대단히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죽마고우쯤 되나?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집안끼리 아는 사이이기도 해서요. 증조부가 대장군이었다면 도씨 문중도 대단하다 할 수 있지. 헌데 현 조정에서는 그 문중의 사람 이 없더군. 경수의 조부가 요절하는 바람에 부친 대에서는 걸출한 인물이 나오지 못한 걸로 압니다.
부친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나? 어렵사리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했습니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 있다가 경수가 태학관에 입격한 뒤로는 조용히 자택에서 지냅니다. 그렇군. 옷차림을 보니 명문가의 후손이라기에 지나치게 검소하던데. 찬열이 답하지 않았다. 곤궁한 것이 경수의 탓도 아닌데 그런 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 는 것이 싫었다. 하긴. 그것이 어찌 그 아이의 탓이겠느냐. 찬열은 본인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종인을 다소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허면 그 아이는 태학관에서 과거 준비를 하고 있느냐? 예. 실력은 어떻지? 소신이 감히 장담하건대, 홍패( 紅 牌 ) * 는 무사히 받을 것입니다. 특히 시, 역사, 문장에 능하지요. 허언하는 법이 없는 네가 그리 자신만만하다니. 학문이든, 인품이든 흠 잡을 데 없는 친구죠. 종인이 흥미롭다는 듯 안광을 빛냈다. 찬열이 저렇게 호언장담할 정도라면 도경수가 조정에 진출하 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생각하자 왠지 가슴이 뛰었다. 폐하. 소신이 감히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듣고 있다. 홍류원에서 어찌하여 진왕 전하의 이름을 빌리셨습니까? 말문이 막혔다. 물처럼 부드럽기만 하던 찬욜이 완고하게 나오는 것도 놀랍지만, 자신이 왜 도경수 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왜 이처럼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신만으로는 부족하십니까? 즉답하지 못하는 종인. 찬열은 종인이 혼란스러워한다는 걸 눈치챘다. 폐하께서 소신에게 매번 농을 던지시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찬열은 웃었다. 그러나 종인은 찬열이 경수를 보호하려고 일부러 이런다는 것을 꿰뚫었다. 자신은 황제이고, 그 아 이는 태학관 유생에 지나지 않으니 섣부른 접근이 도리어 경수를 망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것이 틀 림없다. 경수는 아직 유생일 뿐이나 성품이 올곧고 기개도 남다릅니다. 등용하신다면 반드시 나라의 동량 이 될 인재 중의 인재이지요. 해서? 조정에는 노련한 영수들이 즐비하지만 그들이 모두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죠. 고금을 막론하고 보 필하는 자들의 성품이 올발라야 국가가 바로 섭니다. 폐하를 지근에서 모시려면 도경수 정도는 되어 야 합니다. 네가 그리 포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 가 진짜 짐의 마음이라면? 도발하듯이 물었다. 무슨 대답을 할까, 박찬열은. 그것은 도경수의 복입니다. 하오나 폐하께서 일시의 호기심으로 이러신다면 소신은 감히 폐하를 말릴 것입니다. 일시적인지 아닌지는 어찌 아는가? 네가 짐이더냐? 그러니 부탁드리는 겁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가가시라고요. 냉기를 가른 것은 종인의 웃음소리였다. 그가 입을 크게 벌리고 시원스레 웃었다. 네가 이리 횡설수설하는 건 처음 본다. 분명히 해라. 짐이 그 아이에게 네가 생각하듯이 다가가도 좋은지, 아니면 네가 몸을 날려 막을 것 * 과거에 붙은 사람들에게 주던 합격증서
인지. 끝이 무딘 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소신은 다만 일시적으로 호기심을 품으신 게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대담하군. 두 분을 지키고자 함입니다. 진심 어린 호소였다. 그러나 찬열은 종인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다는 걸 알기에 종인이 단순한 호 기심에서 경수를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너는 짐의 형제나 다름없어. 그런 널 곤란하게 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겠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든든합니다. 하오나 도경수의 복을 소신이 막을 권리는 없지요. 내 의지가 단단한지 아닌지 실험했던 것인가? 발칙한 찬열의 태도에 종인은 화도 못 내고 실소만 흘렸다. 네가 짐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써서 심술이 난 것뿐이다. 싱글싱글 웃은 찬열은 투정 섞인 태도로 말했다. 이제 소신에게는 다른 걱정이 생겼습니다. 무엇이냐. 어제 폐하를 진왕 전하라고 속였는데 나중에 경수가 이걸 알고 어찌 받아들일지. 실망할까? 종인도 뒤늦게 걱정스러운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 모습에 찬열은 종인의 마음이 가볍지 않다고 확신했다. 거짓말을 싫어하는 아이라 조금 걱정되지만 사정을 알면 이해할 겁니다. 그럼 당분간 네가 수고해다오. 적당한 때에 짐이 직접 밝힐 테니, 그동안 우리의 시간은 홍류원에 멈춰 있는 것이다. 알겠느냐? 봉명하겠나이다. 05. 진왕( 辰 王 ) 화방( 花 房 )에서 분재에 홍매화를 가지런히 꽃꽂이하여 바쳤다. 그런데 눈꽃이 피지 않아서인지 며칠 전의 감흥이 전혀 일지 않았다. 종인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종이에 적은 글자 위에 먹물을 부어 버렸다. 뭘 해도 즐겁지 않았다. 안 그래도 조세 개혁으로 권신들과 씨름 중인데, 이리도 마음이 흐트러져서야 제대로 붙기도 전에 패배할 것이다. 예족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장수들의 논공행상도 해야 하고, 머지않은 태후의 탄신 진연도 준비해 야 했으며, 조세 개혁으로 조정에서 들어온 압박도 견뎌야 하니 종인은 며칠째 피가 마르고 살이 동 나는 중이다. 꼰대들이야 어린 군주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반기 드는 것이 일이라 쳐도, 지지 세력이 약하다 보 니 매번 악순환이었다. 그건 종인을 지치게 했다. 때문에 그가 어디 털어놓지도 못하고 속 끓이는 것 은 너무도 당연했다. 밥도 잘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며칠 전에 보았던 도경수란 아이의 모습만 눈앞에 아른거리니 방년 에 요절하고 말 것이라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를 만나러 시도 때도 없이 쏘다니지 못함이 한 탄스러울 뿐이다. 종인은 헝클어진 종이 뭉치만큼 어지러운 마음을 내면의 우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폐하. 진왕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종인이 미간을 구겼다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정오 무렵에 자신궁에 들러 문안을 올릴 것이란 소리 는 들었는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싶었다. 친형제임에도 평소에 자주 왕래하던 사이가 아니라 종인은 진왕이 설면했다. 더구나 진왕은 태후가 자신의 친아들인 양 어여삐 여기는 사람이다. 태후뿐만 아니라 무례한 장문견 앞에서도 허허실실 웃
기만 하니, 종인은 자신의 형이 간과 쓸개를 빼놓고 다닌다고 확신했다. 모셔라. 종대가 모처럼 만에 태성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활기찬 모습이 보는 사람이 다 생글생 글 미소 짓게 한다. 왜소한 체격이 종인의 형이라고는 믿기 어려웠으나 두 형제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다소 각이 진 턱에 진한 눈매는 영락없는 효경제의 것이다. 그러나 종대의 깡마른 체구와 가느다란 뼈대는 숙비를 물려받았다. 폐하를 뵈옵니다. 길상을 누리소서. 종대가 예를 올리기 무섭게 종인이 일어나라고 했다. 이윽고 두 사람 앞에 조촐한 다담상이 마련되었다. 종대는 음률뿐만 아니라 미식가이기도 했다. 종 인은 종대를 경계하면서도 그를 위해 항상 최상의 차를 내놓았다. 종대에겐 어떤 꼬투리도 잡히고 싶 지 않았다. 그간 소원했습니다. 어찌 이리 아우를 찾아주지 않으십니까? 소신의 성품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외출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닌지라. 요즘은 때늦은 눈까지 와 서 더욱 집 안에만 있었습니다. 종대 역시 종인이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그저 예의로만 대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하나뿐인 아우임을 늘 염두에 두었다. 음. 남부 여름의 욱욱청청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나는 것을 보니 명주( 茗 州 )에서 딴 연꽃으로 우린 차로군요. 역시 잘 아시네요. 같은 차여도 재료와 탕수에 따라 대단한 차이가 있지요. 또한 같은 재료여도 파종 시기, 수확 시 기, 재배 환경에 따라 맛은 천차만별입니다. 종대는 다시금 연꽃차를 음미했다. 녹진하지 않은 은근한 향기가 입을 개운하게 했다. 자신궁에 문안드리는 김에 폐하를 뵈려고 들렀습니다. 아니 오셨다면 서운할 뻔했어요. 지난번에도 그냥 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폐하께서 바쁘셔서 방해될까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러셨군요. 내달이면 태후마마의 탄생일인데 형님께서 올해는 어떤 선물로 마마를 기쁘게 해드릴 지 내심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종대는 태후의 덕을 칭송하는 아름다운 문장을 지어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전에는 진기한 마하분다리화( 摩 訶 芬 陀 利 華 )를 구해다 바쳐 태후를 매우 흡족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 없는 소신은 그 때문에 고충이 많답니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자신궁을 기쁘게 할 멋진 선물을 준비하고 계시겠지요. 종인의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걸 본 종대는 응수하듯이 더욱 환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는데 조금만 미소 지어도 휘어져 올라가는 입꼬리 덕분에 더욱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머니의 것을 그대로 훔쳐간 저 입매. 그래서 더 화가 나고, 더 몰염치하게 느껴졌다. 참. 급작스레 날이 추워져 소왕( 昭 王 ) 형님의 지병이 다시 도졌다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좋은 약재 를 하사하심이 어떨는지요? 이런, 제가 이렇습니다. 도무지 세심하지 못하죠. 저는 소왕 형님의 상태를 잘 모르니 형님께서 내 의원에 들러 원하는 만큼 챙겨가세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형제끼리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아우는 우둔하여 형님들의 사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합니다. 형 님께서 자주 들러 소식을 전해 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종대가 돌아간 후 종인은 하개에게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날 염탐하러 온 걸까? 진왕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하개의 비교적 단호한 대답에도 종인은 엄습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 군색한 인간으로 만든 건 모두 태후와 장씨 일가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힘을 기르기도 전에 비빈들의 횡 포에 죽어 나간 수많은 황손처럼 비명에 죽을까 봐 두려웠다. 굳이 먼 데서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다. 태후는 한때 황태자였던 소왕을 폐위시키고 무려 사 년이 나 감옥에 가두지 않았던가. 건강하던 소왕이 누구 때문에 지병을 얻어 겨울마다 고생하는지는 태후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다. 심산하구나. 쌓인 상소문을 바라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밤에 가벼운 주안상이라도 들일까요? 이 상태로 술을 마셨다가는 술에 먹히고 말 것이다. 무희들을 불러 춤을 추게 하오리까? 아무리 뛰어난 춤이라도 용연무에 비할 순 없지. 처음 들어보는 춤 이름에 하개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오면 어찌해야 폐하의 시름을 덜 수 있겠나이까? 밤이면 달에 맡길 터이니 신경 쓰지 마라. 종인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상소문을 펼치는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구름 한 점 없는 저녁 하늘 아래, 경수는 기름을 먹인 종이로 만든 노란 우산을 쓰고 있었다. 말쑥 한 청년이 맑은 날에 우산을 쓰고 앉아 있는 모양새는 퍽 흥미로웠다. 경수는 유년기의 추억이 가득한 작은 산막을 좋아했다. 짬이 날 때면 항상 이곳을 찾았다. 산에서 들리는 청량한 물소리나 정답게 지저귀는 새소리는 경수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어린 시절, 월란까지 껴 셋이서 이곳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경수와 찬열만의 비밀장소가 되어 버렸다. 비도 안 오는데 우산은 왜 쓰고 있어? 찬열이 각등과 서책 보따리를 내려놓으며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비 올 때는 없어서 안달인데, 비가 그치면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니 우산의 신세가 참으로 딱해. 엉뚱한 소리에 찬열이 고개를 갸웃했다. 경수가 우산을 탁 접었다. 어쩐지 시무룩해 보였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기분이 별로지? 아무것도 아니야. 책 구해 줘서 고마워. 보따리를 가져가는 손에 매가리가 없는 걸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홍류원에 다녀온 후로 너 좀 이상하다. 하릴없이 책을 스륵스륵 넘기던 경수가 동그랗게 눈을 홉떴다. 멍한 것 같기도 하고 쓸데없이 감성적이기도 하고. 내가? 우울해 보여서 데려갔더니 왠지 더 심란해진 것 같아. 내 주제에 무슨. 찬열의 시선이 경수의 옆에 놓인 노란 우산으로 향했다. 거짓말도 못 하는 주제에 자기 마음도 모 르다니. 찬열은 경수가 여전히 어린아이 같았다. 실은 이걸 돌려주고 싶은데.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경수가 실토했다. 네게 하사하신 건데 왜? 그건 그렇다. 진왕은 분명히 용연무를 함부로 본 대가라며 우산을 선물로 내렸다. 그런데 그것을 굳 이 돌려주겠다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옹색한 핑계에 자신도 민망했던지 경수가 버릇처럼 커다란 눈만 깜박거렸다. 부담스럽잖아. 겨우 둘러댄 변명. 경수는 눈알을 굴리다 아무렇지 않은 척 찬열에게 물었다.
그런데 진왕은 어떤 사람이야? 네가 아는 그대로. 병약한 황족? 그보다는 고매한 풍류가라고 하는 것이 좋겠어. 인정한다. 고관대작은커녕 궁에 한 줌의 관심도 없는 경수마저 그 명성을 알고 있지 않은가. 몸이 안 좋아서 부인도 맞지 않는다면서? 그러다 절손( 絶 孫 )할 거라며 태후마마의 심려가 크다더군. 아. 너랑 친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종친과 폐하의 신하, 딱 그 정도. 그렇구나. 경수는 작은 머리통을 끄덕이며 무의식적으로 우산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찬열은 경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했다. 지금 찬열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은 심심상인( 心 心 相 印 ). 단 한 번 봤을 뿐인데 김종인과 도경수는 월하승의 붉은 실로 엮인 것처럼 서로에게 깊은 호감 을 느끼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운명에 찬열은 혀를 내둘렀다. 닷새 후 미시( 未 時 )에 장유곡 앞에서 보자. 장유곡은 왜? 오랜만에 가보고 싶어. 난 그만 가봐야겠다. 그래. 먼저 내려가. 난 책 좀 보다가 갈게. 겨울이라 산짐승이 밑으로 내려오기 십상이야. 너무 늦게까지 불을 밝히진 마라. 응. 찬열의 뒷모습마저 수풀에 가려졌을 때, 경수는 책과 우산을 챙겨 들고 산막 안으로 들어갔다. [편장군 박찬열을 무위장군( 武 衛 將 軍 ) * 에 봉하고 법도에 맞춰 녹봉과 노비를 하사한다.] 예족 정벌에 앞장섰던 일의 보상에 찬열은 성지를 받아들고 예를 갖추었다. 찬열을 무위장군에 제수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졌다. 첫째, 전쟁이 나면 다시 군사를 이끌 고 변방으로 뛰쳐나가야 하지만 당분간은 황제의 옆에 두고 보호하겠다는 뜻이다. 둘째, 젊은 나이에 높은 품계를 내림으로써 태후 쪽 사람들을 견제함과 동시에 신진 관리들에게 동 기를 부여한다는 의도였다. 능력만 있으면 나이와 출신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요직을 차지할 수 있다는 거다. 논공행상에 관심이 없던 찬열은, 그런 자신을 이용해 조정에 강한 의지를 전달한 종인에게 감탄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도록 수렴청정을 받아 아직은 유약하나 종인은 총기가 남다른 군주였다. 찬열은 그런 종인과 바둑판을 마주하고 앉았다. 찬열은 무관으로서 탁월한 실력을 갖추었지만 바둑 이나 서예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었다. 종인이 이따금 찬열에게 바둑이나 글쓰기 내기를 하자고 조를 때가 있는데, 백전백패였다. 지금도 몇 차례나 집을 빼앗긴 상태다. 볼 것도 없이 종인의 승이지만 찬열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 았다. 진지하게 바둑에 임하느라 반듯한 그의 미간에 굵다란 주름이 잡혔다. 공교롭게도 진왕이 다녀갔다. 친형님이 다녀간 것이 공교로운 일입니까? 찬열은 어떻게든 마지막 집을 사수하려 애썼다. 거의 바둑판으로 들어갈 기세였다. 하지만 돌을 놓 을수록 일말의 희망도 사라져 갔다. 소왕이 아프다며 약재를 내어 달라더군. 하개는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너도 알지 않느냐? 진왕 은. 폐하의 단 하나뿐인 동복형제시죠. * 황궁 수비대장. 종사품
종인이 진왕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은 알지만 서로 의지해야 할 형제가 반목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 긴 찬열은 종인이 진왕을 의심하면 늘 진왕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면 종인은 섭섭하다고 내색도 못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는데 이번에도 어김이 없었다. 종인의 입에서 겨울잠 같은 긴 한숨이 떨어졌다. 자신궁에 문안 올 때 말고는 따로 짐을 만나러 오지도 않는다. 폐하께서 불편해하시는데 진왕 전하라고 달갑겠습니까? 뭐? 짐의 탓이라는 거냐? 아니면 폐하께서 만기친람으로 바쁘신 걸 아시기 때문이겠지요. 과연 그럴까? 종인이 무릎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괴며 물었다. 돌들이 무심하게 오갔다. 소신은 무장이라 잘 모릅니다만, 무릇 정치란 의심에서 시작해 의심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심이 지나치면 그것은 오히려 독입니다. 경계와 의심은 군주가 곁에 두어야 할 무기이나 그것이 군 주의 몸에 해를 입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넌 항상 종대 형님을 두둔하는구나. 그저 두 분의 우애가 퇴색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담담한 찬열을 빤히 쳐다보던 종인.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실소를 머금더니 이내 남은 집을 모조리 빼앗아 버린다. 앗! 짐의 승리다. 한 수만 물러주십시오! 허튼소리 마라. 신중하게 두었어야지. 찬열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휴, 번번이 지니 영 재미가 없습니다. 검술로는 널 못 따라가니 이런 거라도 이겨야지. 폐하께서 이기셨으니 소신이 소원을 들어드릴 차례군요. 넌 짐의 눈만 봐도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지. 이번에도 맞춰보겠느냐? 찬열이 천안을 들여다보는 척했다. 종인의 애교 섞인 눈망울이 퍽 귀여웠다. 황송하옵니다. 천신( 賤 臣 )이 어리석어 신려를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짐이 백아라면 넌 종자기다. 헌데 짐이 원하는 바를 모른다고? 짐짓 장난기 섞인 투로 찬열이 중얼거렸다. 군주가 바른길로 가지 않으면 옆에서 간쟁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지요. 짐의 행보가 바른지 그른지는 역사가 판단할 일이다. 후세에 소신의 보잘것없는 이름 석 자가 간신으로 낙인찍힌다면 그건 슬픈 일 아닙니까? 중도( 中 道 )를 걷는 것은 짐의 몫이지,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정히 그러시다면 소신은 폐하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둘 다 푸르르 웃어버렸다. 내일 미행을 나서실 수 있으십니까? 왜. 모처럼 저잣거리 구경이라도 시켜줄 셈이냐? 소신이 출정 나간 동안 폐하께서 적적하셨을 테니 그도 나쁘지 않죠. 다른 의도라도 있다는 듯 들리는구나. 소신더러 종자기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능글맞은 찬열의 의도가 대충 읽혔다. 벗의 청을 거절할 수야 없지. 06. 장유곡( 莊 柳 谷 )
장유곡은 마을 두 개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계곡이다. 이곳은 봄여름이면 버들개지가 삼단처럼 흐 드러지고 온갖 기암괴석과 꽃나무가 운치를 더했다. 근처에는 초원과 숲이 있고 바위 사이에서는 풍 부한 물이 쏟아져 일대에서는 청유 나가기 좋은 곳으로 유명했다. 도성에는 수많은 계곡과 정자가 있지만 경수는 유독 장유곡의 경치를 좋아했다. 봄이면 산에서 피 는 야생 벚꽃이 한 폭의 멋진 그림처럼 보였다. 물론 이곳은 어릴 때 동무들과 함께 탐춘하러 온 추 억의 장소이기도 했다. 경수는 오늘 말이나 타자는 심산인 줄 알고 가볍게 나왔다. 그런데 계곡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찬열 뿐만 아니라 진왕도 함께인 것이 아닌가. 바깥에도 잘 안 나온다던 그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진왕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예를 갖추고 찬열을 뾰족하게 노려보자 찬열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날은 잘 들어갔느냐? 덕분에요. 날이 덜 풀렸거늘 옷을 얇게 입었구나. 이 정도 추위엔 끄떡없습니다. 경수가 뻗대자 종인이 피식거렸다. 왜 웃으십니까? 귓불이 그리 빨간데 호기롭기는 천하제일이라. 그 말에 경수의 목덜미가 화드득 달아올랐다. 그가 괜스레 찬열의 옆구리를 찌르며 타박했다. 손님을 데려올 거였으면 언질을 줬어야지. 저자에서 만났을 뿐이다. 우연. 정말 우연이야. 찬열이 억울하다는 듯 연기했다. 날 그렇게까지 불편해할 줄은 몰랐군. 전혀요. 소인은 하늘 외에는 두려운 게 없습니다. 하하하! 말본새 좀 보라지. 배포가 남다르군. 종인과 경수의 시선이 바람처럼 헝클어졌다. 한 곳에서 만난 순간은 무척이나 짧았지만 시선 끝에 서 미풍이 불었다. 온화한 초승달이 두 사람의 입가에 번졌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버드나무 그늘로 유명하지요. 여름이 아니라 휘늘어진 나무는 볼 수 없지만 산 책하기에 나쁘진 않습니다. 오다보니 초원이 있더군. 말을 타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찬열의 말에 종인이 대거리를 하는데 경수가 불퉁하게 끼어들었다. 병약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신데 말도 탈 줄 아십니까? 뭐라? 사내로 태어났다면 말타기는 기본 아니더냐? 외출을 삼갈 정도로 편찮으시다기에 말은커녕 가마만 타고 다니시는 줄 알았죠. 아녀자도 아닌데 가마? 종인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말을 탈 줄도 모르는 네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못 탄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종인이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차다가 이를 악물었다. 슬슬 화가 났다. 진왕의 소문이 이 정도로 형 편없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종친으로서 구설에 오르는 것이 싫어 외출을 삼가는 것이다. 설령 내가 그리 약골이라 하더라도 가마를 타든, 말을 타든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으냐? 누가 뭐라던가요? 낮은 목소리지만 새침하게 발을 빼는 도경수가 그저 기가 막히다. 찬열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종인을 보며 난감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성질머리에 가만히 있을 리 가 없는데. 어쩌다 진왕에 대한 소문이 그 같이 났는지 모르겠다만, 원한다면 똑똑히 보여주마! 초원으로 가
자. 가서 일정 지점까지 서로 말을 몰았다가 먼저 돌아오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자. 아이고, 역시나. 찬열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 되옵니다! 따라 나왔던 호분중랑장( 虎 賁 中 郞 將 ) * 청신이 황급히 말렸다. 아직 날이 풀리지 않아 바람이 찹니다. 무리하게 말에 오르셨다가 풍한이라도 드시면. 사냥에서 사슴은 물론이거니와 호랑이 가죽도 벗겨본 적이 있는 나다. 헌데 승마가 왜 안 된다는 거냐? 그깟 풍한쯤이야 걸리면 그만이지! 종인이 벌컥 화를 내자 찬열이 쩔쩔매는 청신을 대신해 나섰다. 선제께서는 낙마한 후유증으로 붕어하셨지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저 녀석이 먼저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경수가 직설적이긴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폐하를 진왕이라고 생각하여, 그건 그것대로 참을 수 없다! 제까짓 게 대체 형님을 뭘로 보고. 투덜거리던 종인이 말끝을 흐렸다. 찬열이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그는 청신을 보며 더는 말리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바로 아래에 객잔이 있으니 말 두 필만 빌려오게. 그리고 옆의 들판으로 오게. 하지만 찬열이 고압적으로 바라보자 청신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너. 각오해 둬라. 종인이 사뭇 진지하게 나왔다. 소인은 내기에 응한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만. 진왕에 대한 소문이 바닥부터 글러 먹었는데 나더러 가만히 있으란 것이냐? 전하께서 이기셔도 다수는 그렇게 알고 있을 텐데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단 낫다. 사람은 생산적이어야 해. 풍류가인 줄만 알았는데 나름의 통찰도 갖고 계신 모양이네요. 음률에 통달한다는 것은 남보다 뛰어난 혜안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옳은 말씀이군요. 지금 날 놀리는 것이냐?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꼬리를 내렸지만 방싯 올라간 두 볼을 보니 놀리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찬열 앞에서 더 볼썽사 나운 꼴을 보일 순 없어서 종인은 콧김을 뿜으며 화를 삭였다. 경수가 돌아서서는 키득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나란히 벌판으로 내려가자 청신이 적갈색 수말 두 마리를 데려왔다. 몸매도 날렵하고 갈기에 윤기 가 흘렀다. 관리를 잘한 준마다. 근처에 말 타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객잔에서 관리를 잘해 두었 다. 종인과 경수는 각자 등걸에 발을 걸고 안장 위에 올랐다. 승리욕에 불타는 종인의 눈에서는 흐린 하늘마저 집어삼킬 듯 불티가 튀고 있었다.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 진 사람은 소원을 들어줘야 해. 얼떨결에 내기에 응하게 된 경수는 사뭇 이기고 싶은 생각에 말고삐를 단단히 휘어잡았다. 종인도 오른손에 고삐를 한 번 감아쥐고는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졸지에 심판이 된 찬열은 계획에도 없던 승마 내기에 혀를 내둘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두 분 모두 똑바로 자세를 잡으십시오. 네, 좋습니다. 청신이 못마땅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는 사이, 찬열이 울림 좋은 목소리로 외쳤다. 출발! 구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종인과 경수의 한바탕 대결이 시작되었다. * 어전시위. 정오품
두 사람은 바쁜 전령처럼 몸을 최대한 앞으로 숙이고 속도를 높였다.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허공을 누비는 두 마리의 말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초반에는 비슷하던 둘의 거리가 중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덩그러니 놓인 느티나 무를 찍는 순간까지도 박빙이었지만 돌아올수록 차이가 났다. 효경제를 닮아 무술에도 소질이 있는 종인은 사냥을 워낙 좋아하여 날랜 짐승을 잡는 데 도가 텄 다. 그에게 말을 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고, 경수는 말에 오를 줄은 알아도 빨리 달리는 법 은 몰 랐으므로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였다. 종인은 경수가 얼마만큼 따라왔나 살피려 힐끔 돌아보았다가 문득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조그만 몸을 말목에 바짝 붙이고 낑낑거리며 악착같이 따라오는 모습이 영락없는 악바리였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이지만, 그것이 지극히 도경수다워서 종인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일에도 사력을 다하는 성격이라면 어디에 있더라도 반드시 쓰임이 있을 터. 볼수록 탐나는 아 이이다. 종인은 결승선에 다다르자 크게 숨을 토해내며 고삐를 움켜쥐었다. 말이 속력을 늦추더니 이내 투 레질 몇 번을 하고는 억새 숲 사이에서 멈췄다. 한바탕 신이 나게 뛰었더니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다. 드넓은 벌판을 이처럼 포효하듯이 달려본 적 이 언제던가. 적어도 영회황후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은 아니다. 말을 탄 적도, 마구간을 기웃거린 적도 없었다. 우연찮은 기회지만 이토록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종인에게는 크나큰 위로 였다. 종인이 말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경수가 한숨을 내쉬며 느릿느릿 돌아왔다. 경수가 말에서 내리자 종인은 잽싸게 그에게 다가가 종알거렸다. 이제 알겠느냐? 사람을 함부로 깔보면 큰코다치는 법이니라. 진 사람에게 그리 으스대는 것도 썩 보기 좋지는 않습니다. 허! 끝까지 말대꾸구나. 홍류원에서 봤을 땐 나비인 줄 알았는데 지독한 말벌이군. 소인을 어떤 식으로 보시든 전하의 맘이지만 예의는 지켜주십시오. 경수가 툴툴거리자 종인은 그것마저 귀여운지 개구쟁이처럼 웃어 보였다. 네가 졌으니 내 소원을 반드시 들어줘야 한다. 소인은 전하의 놀이판에 억지로 끌려나갔을 뿐입니다. 싫다면 처음부터 말에 오르지 말았어야지. 순 억지지만 경수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반박했다가는 장황한 잔소리가 쏟아질 것 같았다. 두 분이 볼수록 사이가 좋군요. 찬열이 끼어들었다. 속 모르는 소리라며 종인과 경수가 동시에 외쳤다. 오기로 내뱉는 허언이라 찬 열은 둘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그때,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 내내 우중충하던 하늘이 기어이 빗물을 흩뿌렸다. 열 반설이 내린 이후 날이 풀린 증거이긴 했으나 우의( 雨 衣 )도 없는 상황에서는 달갑지 않았다. 청신이 재빨리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종인의 머리를 가렸지만 굵다란 빗방울을 가리기엔 역부족이 었다. 멀지 않은 곳에 버려진 오두막이 있습니다. 잠시 비를 피하기엔 나쁘지 않을 겁니다. 경수의 안내를 따라 네 사람은 두 필의 말을 끌고 언덕바지에 있는 허름한 초막으로 향했다. 버려 진 지 오래지만 나그네들이 오가며 쓰는 곳이기도 해서 그리 지저분하진 않았다. 안은 하룻밤을 부탁할 만큼 깨끗했고 가운데는 장작을 피울 수 있게 흙으로 구멍을 파 놓았다. 거 기엔 이전에 머물렀던 사람이 태운 장작이 남아 있었는데 전부 새카만 재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대로는 추위를 물릴 수가 없었다. 쉬이 그칠 비로 보이지 않는데 아직 초봄이라 냉기가 돕니다. 근처에 땔감으로 쓸 만한 것이 있는 지 찾아보겠습니다. 경수는 비에 쫄딱 젖어 강아지처럼 부들부들 떠는 종인을 힐끔거렸다. 진왕은 날 때부터 병약했다
던데 그가 오늘 일로 득병한다면 찬열도 곤란해질 수 있었다. 넌 여기서 전하를 살펴 드려. 청신과 내가 다녀올게. 찬열이 경수를 만류했다. 자신의 손수건으로 종인의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주던 청신은 얼떨결 에 오두막 밖으로 끌려나가게 생겼다. 상관이 직접 나서겠다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어차피 산이라 뭘 꺾어도 다 장작이 될 거야. 빙긋 웃은 후 찬열은 청신을 데리고 초막을 빠져나갔다. 밖에는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물안개로 아득하고, 안은 사느란 공기에 적막강산이 되어 버렸다. 종인과 경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밖에 매어둔 말을 타고 미친 사람 처럼 경주를 즐겼는데 정작 단둘이 남으니 할 말도 없고 데면데면하기도 했다. 종인이 머리를 푸르르 털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경수를 조심스레 힐끔거렸다. 경수는 남은 나 무토막으로나마 불씨를 땅기려는 듯 잿더미를 헤집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숙인 얼굴선이 물결 위로 부서지는 달빛처럼 유려했다. 물기가 채 가시지 않아서 어쩐지 요염해 보이기도 했다. 종인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홍류원에서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춤을 추는 신선이요, 꽃의 화신. 아름답고 대차다는 말로는 부족한, 도경수의 용연무 한 사위. 수려 한 명화 한 폭이 며칠 동안 뇌리에 박혀 빠지질 않았으니 아무래도 그를 향한 이 마음이 보통은 아닌 듯하다. 약골인 줄 알았습니다. 살릴 만한 불씨가 없자 다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리에 툭 앉으며 경수가 말을 건넸다. 종인이 퍼뜩 정신을 수습하고는 옷자락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었다. 무엄하다. 아부가 듣기 좋으신가요? 기가 차서 종인은 실소를 터트렸다. 소문과는 많이 다르시네요. 기골도 장대하고 말도 잘 타시고. 섬약한 풍류가인 줄로만 알았는데 듣 던 것보다 훨씬 훌륭하십니다. 칭찬이냐? 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수한 눈에는 일말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다. 종인의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을 좋게 봐준다는데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경수가 나중에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안다면 어떨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겁먹고 실망하 겠지. 순진무구한 저 얼굴도 달처럼 이지러지고 허물어질 거야. 그러자 숨이 턱 막혔다. 갑자기 시무룩해진 종인을 보며 경수가 어디 아픈 거냐고 물었다. 종인은 매가리 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추위를 잘 타는지라 종인은 저도 모르게 손끝을 바르르 떨었다. 그것을 알아챈 경수가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나더니 제 외투를 벗어 종인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종인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경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로 돌아갔다. 종인이 끝끝내 시선을 거 두지 않자 그제야 시선을 내리깔고 부끄러운 듯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풍한이라도 드시면 모두 곤란해지니까. 종인은 그것이 핑계라고 생각했다. 내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부득부득 말대꾸까지 하던 위인이 갑자 기 눈도 못 맞추니 여간 수상쩍지 않았다. 착각이 아니라면 내게 호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은 걸까? 하지만 이것은 날 황제가 아닌 진 왕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텐데. 아니다. 자초한 일의 결과를 두려워하기보다는 현재를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다른 생각을 해 보자. 늦은 오후로 접어드는 세상은 조금 전보다 훨씬 어두워져 있었다. 창문 사이로 산간의 깊은 숨결이 새어 들어왔다. 잔기침이 터졌다. 무거운 비가 지붕을 쉴 새 없이 때렸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느냐? 종인이 적막을 갈랐다. 비 온 뒤 물안개 낀 운치를 좋아합니다.
상강에 희뿌연 물안개가 끼면 구름 속에 있는 듯하지. 예. 소인은 그 절경이 좋습니다. 그렇군. 난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 의외군요. 음률에 통달한 사람들은 대개 비를 좋아하던데. 사람마다 다르지. 너도 비 갠 후의 풍경을 아끼는 것이지 않으냐. 그건 그렇습니다. 소인은 옷깃이 축축해져서 싫어요. 장마철이면 온갖 것에 새카만 좀이 들어 냄새 도 나고 보기에도 좋지 않죠. 경수는 안개가 낮게 드리워진 듯한 종인을 바라봤다. 결례가 아니라면 비 오는 날을 싫어하시는 까닭을 여쭈어도 될는지요? 종인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입을 달싹거리는 것도 없이, 그저 고요하게. 경수는 그가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해서 객쩍게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느냐? 소원이십니까? 그래. 원한다. 바람은 한 곳에 머물지 않죠. 지금부터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전부 바람이라 여기겠습니다. 다시금 종인의 입에서 가벼운 기침이 터져 나왔다. 07. 우중밀화( 雨 中 密 話 ) 내 어머니께선 후궁의 몸으로 열녀의 칭호를 얻고 부황의 무덤에 함께 묻히셨다. 황제와 진왕의 생모인 숙비 손씨는 유명했다. 그녀는 후궁임에도 열녀라 불렸기 때문이다. 원칙에 따르면 후궁은 황실 종묘는커녕 남편인 황제와 함께 안장될 수 없다. 그런데 숙비는 황실 법도를 깨고 황제의 무덤에 들어간 여인이다. 백성들은 순사로 알았다. 황궁 사람들은 숙비가 순장됐 다는 사실을 감추었다. 숙비는 황자를 두 명이나 낳은 데다 명문가 출신이었으므로 후궁 내에서 입지가 탄탄했다. 그러나 의귀비와 총애를 다투는 과정에서 효경제의 신임을 잃었고 그것을 계기로 본인뿐만 아니라 두 아들의 장래마저 망칠 위기에 처했다. 숙비는 이를 타파하려고 당시 황후이던 장씨에게 머리를 숙였다. 우여곡절 끝에 의귀비가 죽고 그녀의 아들인 황태자마저 폐위되자 황후 장씨는 효경제에게 건의해 숙비의 차남인 김종인을 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얼마 뒤 효경제가 붕어하면서 종인이 부황의 자리를 이었다. 일반적으로 황제를 낳은 후궁은 생모 자격을 인정받아 궁호를 받거나 태비가 되어 죽을 때까지 부 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황태후는 효경제의 부고를 듣자마자 손씨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조 정 대신들 또한 손씨의 죽음을 원하였다. 태후와 조정 모두 구익부인( 鉤 弋 夫 人 ) * 의 고사를 들먹였다. 숙비는 죽기 전날 어린 두 아들과 마지막 밤을 보낸 후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뒤를 따랐다. 내 어머니께서는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빗소리와 함께 종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비를 싫어하는 이유가 어머니와 관련되었 을 줄은 몰랐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아무 말이나 던진 거였는데 뜻밖의 비화였다. 경수는 최대한 담담해 보이려 애썼다. 슬픈 표정을 하는 것조차 진왕에게는 실례일 것이다. 태후와 조정이 한뜻으로 내 어머니를 죽여야 한다고 했지. * 한 무제의 후궁이자 한 소제의 생모. 어린 태자가 등극하면 외척이 발호할 것을 경계해 무제가 역모 죄를 뒤집어 씌워 죽임. 사후 복권
그들은 틀렸어. 종인은 이곳이 궁이 아님을 알면서도 공연히 눈알을 굴렸다. 이곳까지 자신궁의 눈과 귀가 있을까 봐 내심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한 번 물꼬를 튼 이야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어머니께 죄가 있다면 가마 타고 관주성의 편문으로 들어와 우리 형제를 낳았다는 것이다. 혼인할 때 황실의 정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제의 정궁, 즉 황후뿐이다. 숙비는 후궁 이었으므로 법도에 따라 편문으로 들어와야 했다. 쉬이 그칠 소나기가 아닌지 나무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오히려 거세졌다. 세찬 빗줄기에 종인의 목 소리가 들릴락 말락 했지만 경수는 진왕 이 깊은 회한에 젖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묵묵히 진 왕 의 회고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날은 지금처럼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나는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해. 벼락이 쳤던가. 한여름을 식히는 억수 같은 장맛비에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모친의 품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천둥 이 무서웠다. 두 살 위인 종대는 의연하게 앉아 있었지만 종인은 숙비의 옷자락을 붙들고 터지려는 울음을 참았다. 부황이 세상을 뜬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종인은 촛불이 다 타도록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다. 어머니는 겨우 서른다 섯이었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촛불도 다 살라 버렸을 때, 종인은 울던 어머니의 모습을 눈에 담 은 채 이불 위에 잠들어 있었다. 일어났을 무렵에는 등극을 윤허하는 태후의 조서와 함께 옥새가 내려왔다. 어머니는 온데간데없었 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자는 사이에 끔찍한 일이 행해졌음을 알고 종인은 태후를 두고두고 원망했다. 어머니의 목숨과 맞바꾼 지존의 자리.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다. 난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쓸어주시며 계속 우셨지. 눈물이 내 볼 위로 뚝뚝 떨어지는데, 울지 말라며 어머니의 눈가를 닦아드려도 눈물을 그치지 않으셨다. 그 마지막 모습이 바로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구나. 그런데 나는 적모라는 이유로 원수의 눈치나 보며 산다. 그건 전하의 탓이 아닙니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경수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당시 전하께선 어렸습니다. 태후가 숙비마마를 자결케 한 것은 무제를 본받으려 함이었겠지요. 그 러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제는 구익부인을 죽여 외척의 발호를 막았지만 지금의 태후는 장씨 일가 전체가 조정을 농단하 게끔 방관하고 있다. 이럴 거면 내 어머니는 왜 죽였지? 종인이 울컥한 심정을 감추고 최대한 담담한 어투로 반박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전하의 아우이신 폐하께서는 이제 막 친정을 시작하셨죠. 종인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자신은 도경수 앞에서 진왕 김종대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게 무슨 상관이냐? 저수지가 클수록 썩은 물을 빼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멀리 갈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전하와 친형제시니 분명 총기가 남다른 분일 겁니다. 사람들은 머지않아 폐하께서 장 씨 일가를 축출하고 진정한 선정을 베풀 것이라 기대 중이죠. 그러니 전하께선 사사로운 복수심에 괴 로워 말고 폐하의 힘이 되어 주십시오. 폐하를 지킬 사람은 오직 전하뿐입니다. 너도 아는 그 진리를 내 형님께서는 모르지. 태후 곁에 붙어서 아부 떠는 것이 전부인 위인이니까. 보위를 둘러싼 골육상쟁은 불변의 법칙이다. 지긋지긋하고 넌더리가 나. 전하께서 폐하의 자리를 탐내기라도 한다는 뜻입니까? 무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