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된 관료제는 적이 영토를 점령하더라도 최고간부만 교체될 뿐 아무 지장 없이 기능하기 때문에,관료제 기구를 장악한 사람은 최고의 권력수단을 장악하게 된다(Weber,1956,한태 연 김남진 역,1959:60-63).이에 따라 대한제국의 관료제는 조선총독부 관료제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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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관료제 연구: 그 비상통치기구적 성격을 중심으로 한 승연(충북대) Ⅰ.서 론 국민의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근대 국가는 법을 제정하는 권력(입법권)과 법을 집행하는 권력(집행권)을 분리하여 서로 견제와 균형을 도모하고 있다(Montesquieu, 신상초 역,1980:161).이와 함께 근대 국가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3권 분립의 전통과 함 께 법과 정책을 집행하여 이를 현실로 구현하는 정부관료제가 잘 정립되어야 한다.한국의 근대 관료제는 전통적인 유교 관료제 원리에 구한말 서구에서 수입된 근대 관료제와 일제 식민지 관료제가 3중으로 결합되어 매우 강대한 관료제가 성립된다.그리고 그 강대함 의 요체는 법을 집행하는 권력이 법을 제정하는 권력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3권 분립이라는 견지에서 보면,모든 전근대적 국가가 그러했듯이 조선시대 제정법의 기 본은 국왕의 명령 이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6:6).구한말에 만국공법 체제하의 근대 법치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을 시도했으나 그 결실을 맺기 전에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 다.그 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소위 식민지 법치행정 을 추구했으나,그것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의 법제도가 아니었다.더욱이 조선총독부는 3권이 분립된 체제가 아니라,총독이 행정 과 입법,사법의 전권을 장악한 전제적 체제로서,조선총독이 법률을 대신하는 법규명령( 制 令 )을 발할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일제 35년 동안 한국에서는 의회를 구성한 경험이 없고, 따라서 일본 헌법이 보장하는 입법권과 행정권의 대립은 없었다.다시 말해 조선총독의 지 위는 관제상으로는 절대권의 소유자이고,정치적으로는 부왕( 副 王 )( 石 森 久 彌,1932:8),조선 에서는 천황 의 지위에 있었다( 渡 部 學,1975:158).게다가 일제는 식민지에 대해서는 헌법 상의 원칙인 법치주의를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그 행정은 결함이 있고 불완전했으며,행 정작용에 의해 권리를 침해받은 사람에 대해 행정재판을 통해 구제받을 수 있는 권리도 인 정되지 않 아서,일제시대 한국인에게는 행정소원과 행정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었다( 內 田 達 孝,1934:29,259,263). 한편 총독부 관료제의 운영체제를 보면 일제 35년 내내 무관 출신의 총독이 문관관료제 를 지배했다.그런가 하면 일본정부의 모든 관리는 정부기관이 아니라 천황의 관리 로서 천 황 에게 충성하고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는 점에서( 官 吏 服 務 規 律 제1조,칙령 제39 호,1887)매우 전근대성을 띠고 있었다.아울러 조선총독들은 경성을 떠나 도쿄( 東 京 )에서 체제한 날이 많았기 때문에,실제 총독부 행정은 정무총감과 총독관방에 총독이 심어둔 비 서관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총독부 관리들의 행정적 자율성과 자의성이 비교적 높았다 고 볼 수 있다.이는 행정 실제에서 법령을 초월하는 행정규칙의 남발로 이어졌다.게다가 일제는 일반행정이 해야 할 일의 상당부분을 경찰이 담당하였다(Esman,1947:106). 이러한 조선총독부 관료제의 특징을 종합하면 전쟁 또는 천재지변과 같은 국가비상시에 최고통치자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비상통치기구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그리고 조선총독의 강대한 권력을 현실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총독부 관료제라고 할 수 있다.행정 의 관료제화가 완전히 실시되면 사실상 파괴하기 어려운 지배방식이 형성되고,합리적으로 - 1 -

정비된 관료제는 적이 영토를 점령하더라도 최고간부만 교체될 뿐 아무 지장 없이 기능하기 때문에,관료제 기구를 장악한 사람은 최고의 권력수단을 장악하게 된다(Weber,1956,한태 연 김남진 역,1959:60-63).이에 따라 대한제국의 관료제는 조선총독부 관료제로,조선총 독부 관료제는 다시 미군정 관료제로,미군정 관료제는 또다시 대한민국 관료제로 대체되며 연속되고 있다.다시 말해 일제시대에 형성된 관료제의 원형(prototype)은 일제시대는 물론 광복 이후 현재까지도 한국 정부관료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위에서 지적한 조선총독부 관료제의 특성은 그 자체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기 보다는 메이지( 明 治 )관료제의 속성에서 유래하며,그 시초는 이미 통감부 관제에서 형성되었 다.따라서 오늘날 한국의 관료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형을 이루는 조선총독 부 관료제의 성격과 그 산실인 메이지관료제의 성격을 함께 규명해야 할 것이다.그동안 조 선총독부 관료제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나,메이지관료제와의 연속선상에서 연 구한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이 논문에서는 메이지관료제의 특성이 투영된 통감부 관제 를 계승한 조선총독부 관료제의 비상통치기구적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Ⅱ.고대 율령 관료제 메이지 관료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일본 고대의 율령관료제에 대해 간단히 설 명하기로 한다.출신가문의 성분에 따라 관위와 승급이 결정되던 고대 일본의 씨족사회는 646년의 다이카개신( 大 化 改 新 )을 계기로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를 정비한다.그 배경에는 당 나라의 율령제( 律 令 制 )정비를 비롯하여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중앙집권화와 경쟁과 같 은 국제적인 변화에 대응하고,일본 국내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응해 중앙집권적 율령제를 통해 국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宮 崎 市 定,1959:50-51; 利 光 三 津 夫 笠 原 英 彦, 1998:22,31-32,39-40,60).고대 일본에서 율령제의 형성이란 야마토 내지 기나이( 畿 內,메 이지 이전 궁성 부근의 직할지로서 교토에 가까운 5지방의 총칭)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 의 집단이 중국에서 계수한 율령법을 무기로 전국에 걸쳐 정치권력을 확대함으로써 지역적 왕권이 국가적 왕권으로 승격한 것을 말한다( 早 川 庄 八,1986:2,28).다시 말해 율령 1) 국가 의 건설이란 왕을 중심으로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하고,이를 위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 하는 관료제의 확립을 의미하며,이는 7세기 후반에 최고통치기관인 다이죠칸( 太 政 官 )제가 성립되며 완성을 이룬다( 利 光 三 津 夫 笠 原 英 彦,1998:39,48,58).다이죠칸이란 율령관료기 구의 중추를 이루는 기관으로서,다이죠칸은 백관을 통할하고 행정명령을 발할 수 있는 최 고관청이자,왕의 자문에 응해 국정을 심의하고,그 합의에 의해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국 정의 최고결정기관이었다( 早 川 庄 八,1986:3).율령제 하에서 천황 은 율령국가의 통치권의 총람자이자 지배계급 전체의 이해를 대표하는 정치적 수장이라는 2개의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이와 함께 율령법에서 규정한 천황 의 지위는 중국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율령을 초 월한 존재로서 절대권력을 갖는 군주이기는 하지만,다이죠칸이 결집해 천황 의 전제와 자 의를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었다( 早 川 庄 八,1986:28-29,186-187).실제로 헤이안시대( 平 安 時 代,794~1185)부터 에도시대( 江 戶 時 代,1603~1867)까지 긴 역사 속에서 천황친정 시대 1)율령에서 령이 근본법전이라면 율은 거기서 파생한 법전에 해당하고,령은 조정의 시정방침을 선언한 것으로 서 현재의 헌법과 유사한 성질을 갖는다.령은 명령의 령으로써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상태를 규정하기 때문 에 당위와 강제를 나타낸다면,율은 그러한 명령을 어기는 자를 벌하는 규칙에 해당한다( 宮 崎 市 定,1959:45). - 2 -

가 비교적 짧았던 것은 사실이다( 早 川 庄 八,1986:187). 율령 관료제의 운영원리는 관인( 官 人 )질서와 관사( 官 司 )질서라는 2개의 서로 다른 구조 로 구성되어 있었다.여기서 관인질서란 군주가 전체 관인에게 군림하며 군은( 君 恩 )을 베풀 고 신하에게 봉사를 요구하는 것으로써 인적 질서를 의미한다.이에 반해 관사질서란 군주 가 계통제의 정점에 서서 국가의지의 최종결정권을 장악하는 것으로써 기능적 질서를 의미 한다( 吉 川 眞 司,1998:41).이러한 권력의 이원성은 중세 장군권력에서도 나타난다.곧 가마 쿠라( 鎌 倉 ) 무로마치( 室 町 )막부의 장군에게는 무사에 대한 지배권 (주종제적 지배권)과 재 판권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권적 지배권 이 있어서,전자는 인격적 사적 지배권,후자는 영 역적 공적인 지배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佐 藤 進 一,1963). 이에 따라 당나라의 관품령은 관의 등급을 규정하는 반면,이에 해당하는 일본의 관위령 ( 官 位 令 )은 位 와 함께 官 의 등급을 규정하는 것이다( 時 野 谷 滋,1953 10:311).따라서 관품 령은 모든 관직을 망라해 정연하게 등급을 붙인 관직등급일람표에 해당하지만,관위령에서 위는 영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카바네( 姓,고대 씨족의 존비를 나타내기 위한 계급적 칭호)와 연결되어 있어서 각각 격차가 있었고,원래 관직과 영전을 나타내는 관위( 冠 位 )는 별개로 발 달했기 때문에 이 둘을 융합한 관위령은 관직등급표로서 다소 복잡하고 일관성이 떨어진다 ( 時 野 谷 滋,1953 12:420).말하자면 일본의 위는 왕과 관인 간의 신분적 거리에 따라 직접 사람의 등급을 매긴 것이고,당나라의 품은 사람이 갖는 관직의 등급을 매긴 것과 같다( 宮 崎 市 定,1959:48).이 때문에 율령관료제에서 관인선발에 능력주의를 채택했다고는 하지만, 높은 위계를 가진 집안의 자제만이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고 승진도 빨랐다( 阿 部 猛,2011: 6-8).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일본의 고대 율령관료제는 국내외의 정세 변화에 대응해 당나라 의 관품령을 바탕으로 하면서도,관사제라는 기능적 질서에 일본 고유의 인적 질서를 가미 한 관위령을 채택했으며,이러한 권력의 이중성은 중세 막부정권에도 계승되었다. Ⅲ.메이지 관료제 19세기 중반 이후 일본에 대한 서양의 개항 압력이 거세지면서 메이지정부는 이러한 외 압에 대처하기 위해 고도의 중앙집권화를 이룰 필요가 있었다.이에 메이지 2년(1869)한세 키호칸( 版 籍 奉 還 )과 동 4년(1871)의 하이한치켄( 廢 藩 置 懸 )을 통해 기존의 번을 폐지하고 지 방행정구역을 부와 현으로 일원화하여 지방을 하위체계화함으로써 중앙-지방간에 상하관계 가 성립하였다.곧 정부에서 지방에 행정관을 파견하는 한편,구 번주를 지사로서 중앙에 종 속시키고,부현관제와 현치조례( 縣 治 條 例,1872)를 제정,정비하였다( 越 智 昇,1971:19).그런 데 이 당시 지사들은 민사재판권을 비롯하여 강대한 권한을 휘둘렀고,이에 따라 지방행정 을 전단하는 자가 속출했다.여기서 지방행정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지방관으로부터 재판권을 독립시켜,결국 지방장관은 정부의 하위체계의 직무를 분담하는 한정된 지위에 머 무르게 된다( 越 智 昇,1971:19-21). 그러나 당시 정부는 소위 보수파,급진파,체제파 등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즉위 당시 16세였던 메이지 일왕은 아직 유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2) 정부는 수구파 공경들의 2)이는 일왕 스스로 인정한 바이다.예를 들면 메이지 원년(1868)음력 3월 5개조 서문 포고 당시 함께 발포 - 3 -

권위가 필요했다.게다가 정부의 급진적 개혁에 대한 수구파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에,관제 와 인사 개혁의 실질적 추진자였던 소에지마( 副 島 種 臣 )의 회고에 따르면, 당상의 공경들과 국학자들이 서양의 번역과 같은 관제로는 승복하지 않는다고 하므로,.다이죠칸이라는 것을 세워서 구래의 관명으로 관등과 무언가 적당히 만들어 ( 丸 山 幹 治,1936:125-130)하는 분위기여서,일단 메이지정부에서 다이죠칸제가 부활하고,이에 따라 1868년에 다이죠칸규 칙 을 제정하고,이와 함께 고금에 익숙한 조치로서 관료조직의 계통질서를 정한 관위상 당표 를 3) 작성한다( 笠 原 英 彦,1991:40,52).당시 메이지정부는 서구 열강과 여러 가지 외 교문제에 봉착해 있었던 관계로 비록 수구파가 권력을 잡았다 할지라도 회계나 외교상의 여 러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소위 개명파 관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그들은 근대적 지식 을 무기로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笠 原 英 彦,1991:32). 메이지국가는 근대사회와 근대국가의 실체가 수반되지 않은 채 중앙정부의 관료들을 중 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해 형성되었다.관료는 국가관료제의 성격을 내적으로 규정 하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므로 메이지 초기에 형성된 관료가 일본 행정관료의 원형을 이룬다 는 점에서 이들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越 智 昇,1965:38). 유신 정부를 구성한 관료는 구번의 하급무사층이 중심을 이루었으며,이들의 가치체계는 크게 관 료제와 계층제라는 제도에 참여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 전통주의와 특정한 목표 를 달성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 업적주의로 나눌 수 있다( 越 智 昇,1965:38-39). 전통주의는 신정부에 참여하여 왕실의 가산관료로 활약하기를 기대하고,왕정복고를 지지하 며 조신( 朝 臣 )의식을 창출한다.이처럼 전통주의가 尊 을 尊 으로 여기는 데 반해 업적주의는 賢 을 賢 으로 여긴다 는 주의로써,일본 내외에서 익힌 서구의 신지식을 배경으로 개명적 시 책에 공헌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越 智 昇,1965:39,45-47).이처럼 각각의 정책영역에 서 독자적인 정치의식을 갖고 행동한 유신관료,특히 칙임관급으로 각 성에서 정책지도를 담당하고,아울러 정책결정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 관료군은 정책관료 라고 부른다( 笠 原 英 彦,1991:7,66).특히 후자에 속하는 관료와 정상( 政 商 ),학자 출신 관료들은 근대국가 의 창설을 위해 서로 공적을 경쟁하는 가운데 공통의 가치체계를 창출하게 된다.그런데 1882년을 전후로 민권운동이 절정에 달하고,이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양축이 결합하면서 결 국 일본 관료제는 절대주의적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越 智 昇,1965:46-49). 한편 메이지 8년(1875) 입헌정체 수립의 조서 를 발포할 때가 되면 일왕의 권위가 급 속하게 비대해지고,이 과정에서 메이지 일왕은 유약한 이미지를 불식하고 英 帝 로서 등장 하며, 신=짐 이라는 천황 의 신격화가 일어난다( 佐 々 木 克,1984).메이지 11년(1878)에는 참 모본부를 육군성에서 독립해 일왕 직속기관으로 설치하여 군사이원조직을 확립하는데,이는 한 신한( 宸 翰 )에서 짐이 아직 유약하여 라든가,같은 해 윤 4월22일에 발포한 포고 에서도 주상이 유년 에 계셔서 라고 하여 일왕의 유년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佐 々 木 克,1984). 3) 令 義 解 (권 제1) 官 位 令 제1 에 따르면, 대신 이하 書 吏 이상을 官 이라 부르고,1품 이하 초위 이상을 位 라고 부른다.모든 위에는 귀천이 있고,관에는 고하가 있으니,계가 귀하면 관직이 높고,위가 낮으면 낮은 자 리에 임용한다.관과 위는 서로 상당하고 각기 등급이 있어 관위라고 부른다 고 관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經 濟 雜 誌 社,1900:5).이는 관인기구상의 제도로 관직과 위계의 대응관계를 규정한 것으로써 기요미하라( 淨 御 原 )령 (689)에서 시작되어 다이호( 大 寶 )령 (701)으로 완성되었다.영제( 令 制 )에서는 관인은 위계를 부여 받고 그 위계에 상응하는 관직에 취임하게 했다.위계는 정 종1위~정 종8위, 大 小 初 位 까지 18계로 구분 하고,정4위 이하는 각각 상 하로 구분하여 전부 30계로 편성하였다.거기에 5위 이하의 20계에 대해서는 내 위와 외위로 구분하였다.관과 위가 서로 상응하지 않을 때는 위계가 높고 관직이 낮으면 行,그 반대일 때는 守 라 불렀다( 阿 部 猛,2011:9).관직을 9품으로 구분하는 제도는 중국의 위나라에서 구품관인법을 제정한 이 래 고대 동양에서 널리 사용하던 것이다. - 4 -

종래 군정과 군령을 포함한 모든 국정을 다이죠칸에게 일원적으로 집중시키고 있던 권력통 치=관료제기구의 원리를 개혁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하다( 山 中 永 之 佑,1974:65).이토( 伊 藤 博 文 )를 비롯한 문관관료들은 자유민권운동을 중핵으로 하는 반정부인민투쟁에 대항해 자기 방위를 위한 수단으로 군대를 강화하는데,그 과정에서 군대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없 게 되자 참모본부를 독립시키지만,이는 문관관료제의 제어를 받지 않는 방향으로 군사관료 제를 제도화시켜,결국 군사관료우위 군사관료의 독재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이러 한 경과를 거쳐 문관관료제에 대해 군사관료가 우위를 점하는 전전 일본관료제의 특징적 성 격이 형성된다( 山 中 永 之 佑,1974:78-79).나아가 조신을 통해 억조(인민)를 지배하던 구도는 메이지 14년(1881)정변을 계기로 조신과 인민을 하나로 뭉뚱그린 신민 이라는 말을 창출하 며,유약한 천황 의 이미지는 완전히 소멸한다( 飛 鳥 井 雅 道,1984:49). 더욱이 메이지 22년(1889)에 공포한 대일본제국헌법 에 의해 일왕은 입법권과 행정권, 군통수권,비상대권 등을 부여받아 천황대권 이 확립된다. 4) 특히 일왕은 행정각부의 관제와 문무관의 봉급을 정하고,그들에 대한 임면권을 가짐과 동시에(제10조), 행정각부의 관제와 기타 관규에 관한 중요한 칙령 은 추밀원의 자순( 諮 詢 )사항으로 함에 따라 의회가 행정부 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을 약화시켰다( 山 中 永 之 佑,1974:8). 전제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군주는 먼저 늘 모든 관직을 그 일신에 통일 하는데(Montesquieu,신상초 역,1980:162),이 로써 일왕도 전제군주로 변신한다.일본관료제에서 나타나는 정치와 행정의 안이한 상호의 존관계,그것은 정치가의 관료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행정의 비대화를 초래했는데,이는 일본관료제의 원류를 이루는 다이죠칸제의 유산이기도 하다( 利 光 三 津 夫 笠 原 英 彦,1998: 188).이처럼 일본관료제는 일왕에게 광범한 위임입법권을 부여함과 동시에(한승연,2009: 171),법을 정치의 편의를 위해 이용함에 따라 그 절대주의적 성격을 불식할 수 없었다( 山 中 永 之 佑,1974:8-9). 메이지 18년(1885)에 자유민권운동을 극복하고 식산흥업을 궤도에 올려놓은 일본정부는 의회 개설을 앞두고 다이죠칸제를 폐지하고 내각제를 창설해 궁중과 부중을 분리하여 근대 적 관료제를 정비하였다( 山 中 永 之 佑,1974:8).이에 따라 다이죠칸 6부제 곧 법제부,회계부, 군사부,내무부,사법부,외무부는 내각 9성제 곧 외무성,내무성,대장성,육군성,해군성,사 법성,문부성,농상무성,체신성으로 확대 정비되고,내각 밖에 궁내성을 두었다.다이죠대신 은 각 성의 장관에 대해 제도상 완전한 지휘감독권을 갖고 있었으나,내각총리대신은 이런 권한을 갖지 않았다( 秦 郁 彦,1981:661). 메이지헌법에서 일본의 모든 관리는 천황의 관리 로 탄생하는데,이는 이전의 다이죠칸 제 시절에 비해 후퇴한 것이다.곧 메이지 15년(1882)에 제정된 행정관리복무기율 ( 太 政 官 達 제44호)제1조는 모든 관리는 법률과 직제장정에 따라 각자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특히 이와 함께 공포한 동 설명서( 內 達 )에서는 행정관리는 정부의 기관 으로서 치화의 본원이다.마땅히 특별한 기율로서 정신을 유지하고 의무를 嚴 明 히 해야 한 다 고 규정하여( 內 閣 法 制 局,1903:641-642,644-645),대체로 근대관료제의 합법적 권위관계 를 나타내고 있다.이에 반해 내각제 설립 이후에 공포한 관리복무기율 (칙령 제39호, 1887)은 제1조에서 모든 관리는 천황 폐하와 천황 폐하의 정부에 대해 충순과 근면을 주로 하고,법률과 명령에 따라 각자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어( 內 閣 書 記 官 室 記 錄 4)일왕은 국가원수로서 통치권 총람(제4조),입법권(제5조),법률공포권(제6조),국회 소집과 해산권(제7조),비상 명령권(제8조),관리임면권(제10조),육해군 통수권(제11조),전쟁선포권과 조약체결권(제13조),계엄선포권(제14 조),사면권(제16조)등의 강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朝 鮮 總 督 府,1916:제1집,1). - 5 -

課,1910:제6집,17),모든 관리는 천황의 관리 로서 무정량의 복종의무를 강조하고 있어 대 체로 가산관료제의 전통적 권위관계를 나타내고 있다.또한 이 기율에서는 관리에 대해 청 렴의 의무와 영리추구금지의 의무를 유달리 강조하고 있다. 5) 이는 당시의 관리들이 그만큼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관리 임용에서 실적주의 원칙을 최초로 채용한 것은 메이지 20년(1887)에 제정한 문관시험시보와 견습규칙 (칙령 제37호)이다. 그리고 2년 뒤에 선포한 메이지헌법에서도 일본 신민은 법률과 명령이 정하는 바의 자격에 따라 평등하게 문무관과 그 밖의 공무에 종사할 수 있다(제2장 제18조)고 능력주의에 입각 한 관료선발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朝 鮮 總 督 府,1916:제1집 1).내각제 수립 이후 일본관료 제는 높은 할거성과 특권성을 띤다.곧 일본의 민권사상가 나카에 쵸민( 中 江 兆 民 )이 초기의 내각을 내각 주마등 에 비유했듯이 죠슈( 長 州 )와 사쓰마( 蕯 州 )출신들이 번갈아가며 내각을 장악했고,천하의 공기인 관직과 제도를 지배세력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마치 사유물처럼 간주하는 관습이 생기고,이러한 관행은 일본 행정사를 통해 계속 이어진다( 辻 淸 明,1969: ⅲ,87,97-98). 이와 함께 경찰제도를 정비하였다.일본의 경찰제도는 메이지 6년(1873)9월에 프랑스의 경찰제도를 시찰하고 온 가와지 토시요시( 川 路 利 良 )대경시( 大 警 視 )의 건의를 채용해 그 다 음해 1월 내무성에 사법성의 경보료( 警 保 寮 )를 이속하고,또 도쿄경시청을 통합해 나졸을 순 사로 개칭하고,종래의 파수꾼을 폐지해 순사로 편입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통해 형성되었 다( 山 中 永 之 佑,1974:80).메이지 초기의 경찰은 구 지배계급인 사족 중에서 뽑았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친위대적 역할을 담당했다( 福 島 新 吾,1954:1077).그리고 이들은 아직 덜 개화 된 인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인민에 봉사하는 공복이 아니라 인민의 보호인을 자처하게 된다.특히 자유민권운동의 대두로 정치경찰 우위의 경향이 가속화되고, 가와지의 정치경찰 우위의 경찰국가 사상에 의해 일본 경찰은 메이지 8년(1875)경에 사법 경찰에서 행정경찰로 전환되었다.경찰제도가 정비,강화됨에 따라 탄압법도 정비,강화되었 다( 山 中 永 之 佑,1974:80-88).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메이지정부는 하이한치켄 이후 중앙-지방간의 상하관계 확립,징 병제 실시,지조개정,참모본부 설치,경찰제 확립,내각제 실시,메이지헌법의 제정 등을 통 해 천황대권 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한다.이에 따라 메이지정부는 의회의 행정부 견제력이 약하고,문무의 모든 관리는 일왕에게 무정량의 충성을 바쳐야 하 는 전제군주제로 흐르면서 비상통치기구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게다가 참모본부의 독립은 군부관료가 문관관료제를 압도하며 독제로 흐르는 전전 일본관료제의 성격을 규정하는 빌미 를 제공한다.무엇보다 메이지관료제의 이러한 성격은 통감부와 조선총독부를 통해 한국에 도 그대로 이식된다. 5) 행정관리복무기율 은 전체 12조 가운데 성실의 의무(제1조,제9조),복종의 의무(제2~3조),청렴의 의무(제4 조,제7~8조),비밀준수 의무(제5조),영리추구금지(제6조),근무지 이탈금지(제9조),징계 감찰(제10~12조)로 비교적 고른 분포를 보인데 반해, 관리복무기율 은 전체 17조 가운데 성실의 의무(제1조),복종의 의무(제2 조),청렴의 의무(제3조,제8~10조,제14~15조),비밀준수 의무(제4~5조),직장이탈금지(제6조),영리추구금지 (제7조,제11~13조),기타(제16~17조)등으로 청렴의 의무와 영리추구금지의 의무와 관련한 조항이 10조목으 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 6 -

Ⅳ.통감부 관료제 일제는 한국을 합병하기 전에 이미 갑오개혁을 비롯한 구한말의 여러 개혁과정에 개입하 였다.특히 갑오개혁에서는 의정부와 각 아문의 관제를 근대 관료제 체제에 맞게 개혁했으 나,중앙과 지방의 관계는 상하관계로 귀결되었다.이전까지 지방관은 관할지방에 대해 행정 권,사법 경찰권,징세권,군사권 등 입법권을 제외한 전권을 행사했다( 經 國 大 典 吏 典 考 課 條 ).그러나 1894년 6월 갑오개혁으로 지방의 일반행정은 내무아문의 주현국(나중에 지 방국)이,지방세무는 탁지아문의 주세국이,지방재판은 법무아문이,군정은 군무아문이 관장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각아문관제,송병기 외,1970:6-14).다음 7월에는 지방관의 경 찰사무를 내무아문으로 이속하고( 경무관제 직장을 의정한 뒤 내무아문에 소속시키는 건,송병기 외,1970:17),다시 며칠 뒤에는 좌우포청을 합쳐 경무청을 설립하고 내무아문 에 예속시켜 수도의 경찰사무 일체를 관장케 했다( 경무청관제 직장,송병기 외,1970: 38-41).특히 경찰제도의 개혁과정에는 일본 경시청으로부터 경시를 초빙하여 고문으로 삼 고 일본의 제도를 모방해 사법경찰제도는 어느 정도 정비하였으나 행정경찰의 정비가 뜻대 로 되지 않자,1905년 2월에 일본 경시 마루야마 시게토시( 丸 山 重 俊 )를 경무고문으로 용빙해 먼저 한성의 경찰사무를 쇄신하고,이어서 지방을 정비하였다( 統 監 府,1908:106-108). 1906년 2월 통감부 설치 후에는 2번에 걸쳐 경무를 확장하고,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1907년 7월에 한일신협약을 체결함에 따라 한국군대를 해산하고(8월1일),일본인을 한국정부 관리에 임용하는 길이 열려 다수의 일본 경찰관리가 한국정부에 임용되고,전국의 경찰은 내부 경무국에서 총람하게 되었다( 統 監 府,1908:109-113,118).1909년말 현재 전국 경찰관 수를 보면 한국인이 3,259명(61.1%),일본인이 2,077명(38.9%),합계 5,336명에 달했다( 朝 鮮 總 督 府,1911:59).이를 1906년 1차 경무확장 때의 한국인 2700여명,일본인 557명과 비교하면 일본인 경찰관의 수가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 統 監 府,1908:110).또한 한일신협약에 따라 사법사무와 일방행정사무를 분리하고(제3조),1909년 7월에는 사법과 감옥사무를 통감부에 위임하였다( 朝 鮮 總 督 府,1935:4).이어서 한국 경찰제도는 1910년 6월 강압적으로 교환된 한국경찰권위탁각서 에 의하여 같은 해 6월 30일에 전폐되었다.이에 따라 한성의 경찰을 통감부 직할로 편입시켰으며,지방에서는 관찰사의 경찰권을 박탈하고,종래 경시(문관)를 각 도의 경찰부장에 임용하던 것을 고쳐 헌병분대장이 경무부장을 겸임토록 하여 무단적인 새로운 헌병경찰제도가 출현하여 총독부기로 이어지게 되었다(정구선,2008:96).한국의 농 민운동을 격파하고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일제는 한국에서 탄압기구를 제일 먼저 정 비,확장하였다. 결국 갑오 을미개혁을 거치면서 관찰사는 내부대신의 지휘와 감독에 속하고,각부의 주무에 대해서는 각부대신의 지휘와 감독을 받고,법률과 명령을 집행하여 관할내의 행정사 무를 총리 하게 되어(칙령 제101호 地 方 官 制 제5조,1989년 5월,송병기 외,1970: 403-405),이제 지방관은 각 지역별 일반행정의 책임자로 그 권한이 크게 축소되었다.이러 한 중앙-지방의 관계는 이후 지방자치제 실시 전까지 한국의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규정하 였다.이는 한편으로는 지방관의 부패와 횡포를 방지하고 근대적 3권분립으로 가는 과정이 기도 하지만,이 과정에서 일제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점과 6) 지방의 자율성이 크게 훼손되었 6)이는 1894년 7월 3일 일본공사 오토리 케이스케( 大 鳥 圭 介 )가 한국정부에 제시한 內 政 改 革 方 案 綱 目 條 5개조 26개항 중 지방개혁과 관련된 조항은,제1조 중앙정부의 제도 및 지방제도를 개정하고 인재를 채용할 것,동 제4항 부 군 현을 폐합하여 줄일 것,동 제5항 불필요한 관원의 도태,동 제10항 지방관리의 정폐를 - 7 -

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의 지방제도 개혁방식을 한국 에 거의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한편 일제의 총독부 정치는 이미 통감부 시대에 이토 통감에 의해 마련되었으며,그는 한국식민지화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침략정책을 추진하였다(유재곤,1993:204). 한국 은 만주와 함께 동양 事 局 의 중심이어서 강화도조약(1876)체결 이래 한반도를 넘보던 일 제는 1904년 한일의정서를 체결함에 따라 한국정부에 대해 시정개선을 충고 한다(제1조)는 명분으로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게 되었으며,군사요충지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제 4조)( 統 監 府,1908:1-2).그 뒤 같은 해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고 일본정부가 추천하 는 재정,외교,경무,학부 고문을 한국정부에 초빙하여 소위 고문정치시대를 열었다. 7) 그 다음해 4월에 일제는 한국의 통신기관을 접수하고( 한국통신기관위탁에 관한 취극서 ),11 월에 다시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을 체결하고,12월에 통감부급이사청관제 (칙령 267 호)를 공포하여 한국에 통감을 주차시켜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항을 장악하였다.그러면 훗 날 총독부 관료제의 근간을 이루는 통감부 관료제를 분석하기로 하자. 먼저 통감부의 기구를 살펴보자. 통감부급이사청관제 에 따르면( 田 島 義 方, 1906: 179-184)통감부에 친임의 통감을 두고,통감은 일왕에 직례하며,외교에 관해서는 외무대신 을 거쳐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고,기타의 사항은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여 상주하고 재가 를 받았으며(제2조),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했다(제3조).이와 함께 한국의 안녕질서를 보지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한국수비군 사령관에게 병력의 사용을 명령할 수 있었다 (제4조).이 조항과 관련하여 문관인 이토는 일본 군부와 담판을 벌였다.곧 참모본부와 한 국주차군이 문관이 군사령관에 대해 명령권을 갖는 것은 통수권의 독립에 위배된다는 이유 로 이를 반대했으나,이토가 군대지휘권을 얻지 못한다면 통감에 취임하지 않겠다고 완강하 게 주장하고,또 당시 육군대신이던 데라우치( 寺 內 正 毅 )등도 참모본부가 이토의 요구를 받 아들이도록 측면에서 도왔다( 井 上 淸,1968:268).그리하여 통수권의 주체인 일왕이 이 제4 조를 토대로 통수권의 일부를 특명으로 통감에게 위임한다는 이례적인 조치를 통해 이토 통 감은 군대지휘권을 부여받게 되었다(유재곤,1993:207).이토가 이토록 군대지휘권을 갖고 자 했던 이유는 통감 재임 중 한국의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하는데 이를 저해하는 요인을 무 력으로라도 제거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유재곤,1993:207).또한 통감은 재한 일본관리의 임면권을 장악함과 동시에(제6조,제9조),통감부령을 발하고 금고 1년 이하 또는 벌금 200 원 이내의 벌칙을 부과할 수 있어(제7조),한국에서 입법권과 함께 일부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통감부관제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사항은 외교사무 대행기관인 통감부에 농상공무 총장을 두고 농상공 기타 산업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게 한 점이다(제11조,제14조).이는 사 실 을사조약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항이며,넓게 보면 일제가 주장하는 소위 한국의 시정개 선에 대한 충고 내지 지도 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8) 교정하는 법을 설정할 것,제4조 민란을 진정하고 안녕을 보지하는데 필요한 병비와 경찰을 설치할 것,동 제3 항 경성과 각 성읍에 경찰을 설치할 것 등으로 지방제도의 개혁을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오토리는 이 개혁안을 제출함과 동시에 각각의 실행기한을 정하여 10일 이내 실행(갑),6개월 이내 실시(을),2년 이내 실 행(병)등으로 구분하여 한국정부를 압박하였다( 山 辺 健 太 郞,1969:94-97). 7)일본인이 한국정부에 고용된 것은 고문정치 이전인 18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891년 11월 16일 일본의 大 森 輪 長 兵 衛 가 교환서회판(1900년 4월 7일 철도원 감독으로 임명)으로 임명된 적이 있고,일본공사를 지낸 加 藤 增 雄 은 수륜원 부총재로 임명된 바 있다.또한 일제는 한국정부의 군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1904년 3월 24 일 일본공사관 무관이던 육군중좌 野 津 鎭 武 를 군부고문으로 배치한 바 있다(안용식,2001:ⅱ). 8)통감부관제를 공포한 이틀 뒤인 1905년 12월 22일 당시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桂 太 郞 )는 통감직무심득 ( 統 監 職 務 心 得 ) 을 정한다.모두 17조로 이루어진 이 규정을 분석하면,한국의 내정간섭 조항(5-6,11-14조), - 8 -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일제는 통감부 설치를 전후하여 한국의 통신기관과 외교권,사 법 감옥사무,경찰사무를 완전히 장악했으며,군대도 해산시켰다.또한 갑오 을미개혁을 통해 지방을 중앙에 종속시켰을 뿐 아니라 통감부 설치 당시 주한 일본영사관을 모두 이사 청으로 개편하고,그 아래에 이사청지청을 설치함에 따라 합방 때까지 지방행정은 1국2체제 가 되었다.이와 함께 한국에 관한 일제의 침략과정은 바로 한국정부의 인사권 장악과정과 맥을 같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정구선,2008:69).우선 한일신협약 체결 직후인 1907년 9월 통감부관제 (칙령 제295호)를 개정하여, 통감은 한국에서 제국정부를 대표하고 조약과 법령에 근거해 제반의 정무를 통할한다 (제3조)고 하여 통감의 직권을 확장하고,부통감을 신설하였다(제10조)( 朝 鮮 總 督 府,1918:30). 한일신협약과 비밀각서에 9) 의해 일본인들이 실 제로 한국정부의 관리에 임용되기 시작한 것은 1907년 8월 초부터다 (정구선,2008:75).이 처럼 일본인들은 내각의 거의 모든 관직에 두루 임용되었으나,특히 내부,탁지부,농상공부, 학부 등의 실무요직에 주로 배치되어 경찰과 재정,산업 등 식민지 지배와 수탈을 위한 부 문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정구선,2008:78).결국 한일신협약과 비밀각서를 통해 통감 은 한국의 행정과 사법,행형,경찰,군사 등 내정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유재곤,1993: 230).더욱이 한국정부에서 임용된 일본인 관리는 합방 후에 대부분 총독부 관리로 남아 식 민지 한국을 지배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는 데서 조선총독부가 통감부의 연속체임을 알 수 있다. 10) Ⅴ.조선총독부 관료제 일본 근대관료제의 창설자라 할 수 있는 이토가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식민지화의 전초 기지를 마련했다면,이를 발판으로 완성한 사람은 3대 통감이자 초대 총독인 같은 죠수 출 신의 데라우치였다.그가 일제 강점 초기 한국통치의 방침으로 내세운 것은 일본의 국책인 동화주의보다는 시세와 민도를 표준으로 정책을 편다는 점진주의 11) 노선이었으나( 朝 鮮 總 督 府,1935:25; 萩 原 彦 三,1969:22)1930년대 이후 일본의 전체주의 경향이 강화됨에 따라 점 차 동화주의에 근거한 내선일체로 직진하게 된다( 穗 積 眞 六 郞,1974:45-46). 그들은(일제- 필자)한국인을 경멸하는 마음으로 통치를 시작했다.선정은 위정자가 동정하는 마음씨를 가져야만 가능한 것인데,덮어놓고 무모하게 얕잡아 보는 한 동정심이 우러날 리 만무했 한국 외무관련 조항(7-10),이사청 관련 조항(15-17),일본정부 관련 조항(1-4,18)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가운데 통감은 한국정부를 지도하여 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재산을 보호하고 교육을 보급하는데 유의 해 한국정부에 대해 적의 권고해야 한다 (제14조), 통감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한국정부의 회의에 열석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제12조)고 하여 한국정부에 대해 간섭할 것을 통감에게 노골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日 本 外 務 省 陸 海 軍 省 文 書,MT( 明 治 大 正 文 書 ). 9)이 각서는 한일신협약의 취지에 따라 이토 통감과 이완용 사이에 조인된 것으로 그 내용은,1)재판소를 신설 할 것.2)감옥을 신설할 것.3) 軍 備 를 정리할 것.4)고문 참여관을 모두 해고할 것.5)중앙정부와 지방청 에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할 것 등이다( 朝 鮮 總 督 府,1918:115-117).앞에서 서술했듯이 이 사항들은 실제 순차 적으로 추진되었다. 10)총독부 설치 직후의 고등관 인사를 보면 전체 212명 중 18명을 제외한 194명(91.5%)이 모두 구한국정부(157 명)나 통감부의 관리(37명)를 거친 사람이었다(안용식,2001:ⅲ). 11)데라우치는 통감 취임 당시 통감부 외교부장이던 고마쓰 미도리( 小 松 綠 )에게 한국병합의 방침으로 먼저 한국 의 시정을 개선하여 한국민이 일본에 歸 復 한 뒤에 병합을 실행하는 점진설에 대해 의견을 조회한 적이 있었 는데,이때 고마쓰는 그것은 백년하청 이라고 반대의견을 내고 단행설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小 松 綠,1920:81-84). - 9 -

다 (Mckenzie,1920,이광린 역,1995:131).그래서 일제는 모든 문물에서 앞선 자신이 한국 인이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정하고,적극적으로 지도하고 충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충만했 다. 조선총독부 관료제는 설치 이후 여러 번 개편되었지만 대체로 초기의 형태가 말기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이 연구에서는 주로 설립 초기의 관제와 인사행정,정책과정을 중심으로 논의하기로 한다. 1.조선총독부 관제 한국의 내각은 1894년 2차 갑오개혁 때 내부,외부,탁지부,법부,학부,군부,농상공부 등 7부였으나(왕현종,1996:269-271),1906년 통감부의 설치와 함께 외부가 폐지되고,1909 년 다시 법부와 군부가 폐지되어 한국 강점 당시 4부만 남아 있었다( 朝 鮮 總 督 府,1911:35). 합방 당일 일본정부는 한국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 칙령 제319호) 한국과 통감부의 기구를 모두 흡수하였고,1달 후인 1910년 9월30일에 조선총 독부관제 (칙령 제354호)와 각 소속관서관제를 공포하여 총독부 관제를 정비하였다.이에 따르면 총독부에는 총독관방을 비롯하여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사법부의 5부와 그 아래 9국을 두고,소속관서로 각 도와 경무총감부,중추원 외 다수의 기관을 설치하였다 ( 朝 鮮 總 督 府,1935:27-29표 참조).이를 일본내각 수립 당시의 9성제와 비교하면 조선총독 부는 독립국가의 관제가 아닌 만큼 외무성과 육군성,해군성의 3성이 없다.체신성에 해당하 는 기구로는 소속관서에 통신국이 있다. 총독부의 모든 관제는 3 1운동 이후 근본적인 변혁을 가하게 된다.총독부 본부 관제는 처음에 部 局 체제였으나,이를 개편하여 총독관방 외에 내무국,재무국,식산국,법무국, 학무국,경무국 등 6국으로 확대 개편하고,관료제의 계층은 局 課 체제로 축소하였으며, 약간의 변동이 있었지만 전시동원 전까지 대체로 이 골격을 유지한다( 조선총독부관제, 칙령 제386호,1919년 8월19일).지방행정기구는 조선총독부 지방관관제 (칙령 제357호, 1910년)에 의해 총독부 소속기관이 되었고,지방행정구역은 도 부 군 면으로 편성되어 총독부 본부에 의해 계통적으로 지휘,감독을 받았다.1914년 4월부터는 府 制 (제령 제7 호)를 시행했으며( 朝 鮮 總 督 府,1935:163),1917년 10월부터는 面 制 (제령 제1호)를 시행 하여( 朝 鮮 總 督 府,1935:240)일제는 한반도 전국을 구석구석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헌병경찰제는 이미 통감부 시절에 설립되어,통감 직속으로 중앙에 경무총감부를,지방에는 지방행정기관과 별도로 경무부를 두고,경무총장에는 조선 주차헌병 장인 육군장성을,경무부장은 각 도 헌병대장인 육군 좌관을 임명하고 경무총장의 명을 받 들어 부무를 담당하게 했다.이후 총독부관제의 실시와 함께 총독부 경찰관서관제로 개정했 으나,경찰관서는 여전히 중앙에 경무총감부,지방에 경무부와 그 밑에 경찰서를 두고,경무 부장은 도장관의 명령을 따르게 했다.헌병경찰제는 일종의 변칙적인 제도였으나 한일합방 에는 큰 도움이 되었으며,경찰관서와 직원이 정비되어 1910년 말 현재 전체 헌병수는 2,019 명,전체 경찰관수는 5,693명,그 가운데 한국인 수는 헌병보조원이 전부 1,012명,경찰관은 경무관 이하 순사보까지 3,428명에 달했다( 朝 鮮 總 督 府,1935:33-34).특히 육군의 관점에서 보면 헌병경찰제는 헌병과 경찰에 대한 지휘명령계통이 일원화되어 통치에 효율적이고 경비 도 줄일 수 있어 나름대로 합리성을 갖고 있었다( 森 山 茂 德,1991:71).그런데 3 1운동을 계기로 헌병경찰제는 헌병과 경찰을 분리하여,1919년 8월19일 총독부관제를 개혁할 때 총 - 10 -

독부에 경무국을 두고 각 도의 경찰과 소방,위생사무를 감독하게 했다( 조선총독부사무분 장규정 중 개정,조선총독부훈령 제30호,8월20일). 12) 이와 함께 경무총감부와 각 도 경무 부를 없애고,아울러 지방관관제를 개정해 경찰권을 도지사에게 옮기고,각 도에 제3부를 설 치해 도사무관을 부장으로 임명했다( 朝 鮮 總 督 府,1935:331).이에 따라 경찰서는 일반행정 기관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는데,이 체제는 1991년 경찰청이 내무부에서 독립할 때까지 계 속된다.이러한 개편의 이유는 헌병경찰에 대한 한국인의 혐오와 함께 당시 정당내각인 하 라( 原 敬 )내각이 육군에 의한 한국의 정치적 독립영역화를 지탱하는 수단이 된 헌병경찰제 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도를 실시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森 山 茂 德,1991:83).관제 개정 직후인 1919년에는 경찰관서가 모두 2,761개소가 되어 그 전 해의 751개소에 비해 단 번에 3.7배나 확충되었다( 朝 鮮 總 督 府,1929:338<표 241>). 다음으로 1907년에 개정된 통감의 권한과 총독부 개설 당시 조선총독의 권한을 비교하면 <표 1>과 같다.첫째,지위를 보면 통감과 총독 모두 친임관이고 일왕에 직례하는 점은 같 지만,총독은 육해군 대장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이 조항은 3 1운동 이후 관제 개정에서 육해군 대장 이라는 말을 삭제했으나( 조선총독부관제 제386호,1909년 8월19일),일제 35년 동안 총독은 모두 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다. 둘째,일본정부와 관계를 보면 통감은 외교사무와 기타 사무를 구분하여 보고 경로가 두 가지였으나,조선총독과 일본정부의 관계는 대체로 한국의 정무는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여 상주하고 재가를 받았다.이 조항은 나중에 일본정부에 척무성의 존재 유무와 내무성과의 관계에 따라 몇 차례 개정이 있었다(자세한 사항은 전상숙,2005;한승연,2009참조). 셋째,관리임면권은 통감과 총독 모두 부하직원 중 주임문관의 진퇴는 내각총리대신에게 상주하고,판임문관 이하는 전행하였다. 넷째,군사권도 통감이나 총독 모두 한반도 내에서 군통솔권이 있었으나,군부에 대해서 는 총독 취임 당시 육군대신을 겸직하고 있던 데라우치의 영향력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조항은 3 1운동 이후 관제 개정에서 한국에서 육해군 사령관에 대한 출병청구권으 로 약화되었다(제3조의 2). 다섯째,입법권은 통감과 총독의 권한 중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문이다.통감과 총독은 둘 다 직권 또는 특별위임에 따라 통감부령 또는 조선총독부령을 발할 권한이 있었으나,조 선총독은 이와 함께 법률의 위임에 따라 제령을 발할 수 있었다.이에 대해 일본정부 내에 서는 위헌 논란까지 있었지만,일제시대 내내 조선총독에게는 위임입법권 가운데 독립명령 을 제외한 비상명령과 법규명령에 해당하는 위임명령과 집행명령을 발할 권한이 있었다.그 리고 이는 무엇보다 조선총독의 통치권한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한승연, 2009: 166, 171-172).조선총독에게 제령권을 허용하는 문제는 메이지헌법을 한국에 적용할 것인가 하 는 문제와 결부된다.식민당국자들의 의중에는 한국에 헌법을 시행하면 일본과 마찬가지로 일일이 의회의 협찬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법률사항을 발포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타이완 의 선례에 따라 법률사항을 총독의 명령으로 발포하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小 松 綠,1920: 12)헌병경찰 시절 경무총감부에는 서무과와 고등경찰과,경무과,보안과,위생과의 5과를 두고,고등경찰 업무와 병기탄약,사법경찰 외에 민적관련 사항,재해구제와 교통단속,각종 영업단속을 비롯한 모든 단속,소방,위생, 보건,방역 등 사회전반에 걸쳐 헌병경찰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조선총독부경무총감부사 무분장규정,조선총독부훈령 제4호,1910년 10월1일).3 1운동 이후의 관제 개정으로 경무총감부는 폐지되 고 총독부 본부에 경무국을 신설하고 경무과와 고등경찰과,보안과,위생과의 4과로 축소되었으나( 조선총독 부사무분장규정 중 개정,조선총독부훈령 제30호),서무업무가 줄었을 뿐 다른 업무는 별 차이가 없었다.일 제시대 경찰제도의 특징은 사법경찰과 함께 행정경찰의 비중이 매우 컸다는 점이다. - 11 -

96).말하자면 총독에 대한 제령권의 허용은 식민통치 당국자들의 행정편의주의를 극대화하 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써,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토 등의 소위 유신관료들이 메이지 헌법을 제정할 당시 헌법을 의식적으로 간략화시켜 장래 국운의 진퇴에 따라 신축적으로 운 영할 수 있게 함으로써,입헌주의의 골자를 빼버리고 자신의 지배를 관철하려는 사고의 연 속이라고 할 수 있다( 山 中 永 之 佑,1974:8-9). <표 1> 통감과 총독의 권한 비교 구분 통감 총독 지위 친임관,일왕 직례 친임관,육해군 대장,일왕 직례 일본정부와 외교:외무대신 수상 상주,재가 관계 기타 사무:수상 상주,재가 수상 상주,재가 행정권 일본정부 대표로 제반 정무 통할 한국 관할,제반 정무 통할 관리임면권 군사권 입법권 사법권 주임관:수상 경유 판임관 이하:전행 한국수비군 사령관에게 병력 사용 명령권 통감부령,명령 처분 취소권 금고1년 이하,벌금 200원 이내 벌칙 좌동 육해군 통솔,조선방비 담당 나중에 출병청구권으로 약화 제령,조선총독부령,명령 처분 취소권 1년 이하 징역 또는 금고,구류, 200원 이하 벌금 또는 과료의 벌칙 부과 출처: 통감부급이사청관제 (칙령 제295호,1907), 조선총독부관제 (칙령 제354호, 1910), 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 (긴급칙령 제324호,1910년 8월 29일) 마지막으로 사법권에서는 통감에 비해 총독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에 처할 수 있 는 권한이 추가되었다.이는 일제가 갑오개혁 이래 지방관의 경찰권과 사법권,군사권을 단 계적으로 박탈하여 행정권과 사법권을 분리했던 방침과는 어긋나는 예외적인 조치이자 행정 편의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통감이나 총독 모두 한국에서는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모두 장악했으나,1국 2체제였던 통감에 비해 한국의 식민지화가 마무리된 뒤에 취임한 총독의 권한이 훨씬 더 막 강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특히 총독은 통감에 비해 입법권이 강대했다.정상적인 근대 관 료제에 비해 예외적인 조항과 조치를 광범하게 허용하는 이러한 관료제 구조는 국가비상시 에나 있을 법한 비상통치기구적 성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이는 메이지관료제 성립 이 래 외형적으로는 입헌주의를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그 알맹이를 빼 정부관료제의 권한을 극대화하려는 유신관료들의 발상과 식민통치의 특수성 논리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빚어낸 위험한 장치 였다. 2.인사행정 메이지관료제는 관리를 칙임관과 판임관으로 나누었다.곧 일본정부는 메이지 25년(1892) - 12 -

에 고등관관등봉급령 (칙령 제96호)을 제정하여 친임관 외의 고등관을 9등으로 나누고 1~2등을 칙임관,3~9등을 주임관으로 나누었다(제1조).칙임관 중 특별히 친임식을 거치는 사람은 친임관(대신급)으로 불렀다.칙임관의 임면은 내각총리대신이 봉행하고,주임관은 내 각총리대신이 주천( 奏 薦 )하거나 각성에 속하는 직원은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여 주임대신이 주천하였다.그 전해에는 문무판임관등급표 (칙령 제43호)를 개정하여 판임관을 1~5등급 으로 나누었으나( 內 閣 法 制 局,1904:706,722),1910년에는 이 등급표를 폐지하고 문무판임 관등급령 (칙령 제267호)을 제정하여 판임관의 등급을 1~4등급으로 개정하였다(제1조)( 朝 鮮 總 督 府,1916:제2집,65).이와 같이 정부 관리를 일왕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도에 따라 친 임관,칙임관,주임관,판임관으로 나누고 각각의 임용형식도 달랐다.이는 고대 관위령에서 관인의 등급에 따라 관품을 정하던 관습을 근대적으로 변형한 것으로 볼 수 있다.내각제 실시 이후 대체로 주임관 이하 관리의 임용은 실적주의를 기본으로 삼았으나( 秦 郁 彦,1981: 664),대체로 제국대학 출신자라야 고등관이 될 수 있는 현실에서 정부관료제를 이렇게 이 원화시키면 판임관이 고등관으로 승진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진다.이제는 일왕에 대한 개인 적 충성도와 제국대학 졸업 여부에 따라 관리의 경력발전 경로가 결정되는 것이다.이러한 새로운 신분제적 인사행정의 원리는 조선총독부 관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인사행정이 기본적으로 실적주의 원리를 채택했다는 점에서는 일본정부와 노선이 같지만,여기에 데라우치 총독은 관리 현지화 방침 을 채택했다.곧 직원임용의 근 본방침으로서 조선의 관리는 조선에서 양성하고,기술관처럼 특수한 기능을 요하는 자 외에 는 전부 이를 달리 구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조선의 현상과 그 민도에 적응한 행정을 시행할 수 있는 관리를 임용하는데 힘쓰고,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내지인과 조선 인의 구별없이 주임관은 시보,판임관은 견습에서 이를 채용하는 제도를 정 ( 朝 鮮 總 督 府, 1915:49)하였다.이와 함께 관리복무규율이 있지만 조선과 같은 신영토의 관리는 한층 그 규율을 엄숙히 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고,1912년 4월 복무심득(준수사항-필자주)을 훈시 하고,관리 신임 때는 반드시 복무심득서에 서명하게 하고,또 매년 정치 시작일에 관리복무 규율과 함께 그 송독식을 거행하였다 ( 朝 鮮 總 督 府,1915:51).당시에는 일반관리와 교원도 금테 제복과 대검을 착용했던 점을 감안하면, 13) 매년 시무식 때 총독부의 관리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이를 송독하는 장면은 마치 군대의 단체훈련을 연상케 한다. 조선총독부 관리임용의 근간을 이룬 것은 문관임용령 과 고등시험령, 보통시험 령 등이고,이들 시험은 기본적으로 자격시험이었다.우선 일제는 한일합방 당일인 1910년 8월29일,구 한국정부에 속해 있던 관청과 관리들을 조선총독부 소속의 관청과 관리로 승계 하는 조치를 취했다(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 칙령 제319호)(한승연, 2007: 1020-1021).조선총독부의 관리자격은 원칙적으로 크게 3가지가 있었다.첫째 일본 신민일 것,둘째 만 20세 이상의 성년 남자일 것,셋째 관직에 필요한 지능을 가질 것,곧 시험에 합격할 것 등이다( 內 田 達 孝,1934:122-124; 車 田 篤,1934:200-203).총독부의 관리임용 방법 은 크게 일반임용과 특별임용,고원 촉탁 임용으로 나눌 수 있는데,여기서는 임반임용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일반임용은 보통시험과 고등시험이 중심을 이루었다.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오는 관리 13)이는 1911년 5월31일부터 시행한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 직원복제 (칙령 제176호)에 따른 것으로 친임관, 칙임관,주임관,판임관 등 등급별로 제복의 지질과 어깨휘장,모자,대검 등의 문양과 길이 등이 달랐다.한국 인의 빈축을 샀던 이 제도는 3 1운동 이후 1919년 8월 31일부로 폐지되었다(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 직원복 제 폐지 건,칙령 제403호,8월19일). - 13 -

들을 현지화하기 위해 총독부는 1911년 11월 문관채용에 관한 건 (조선총독부령 제142 호,이하 부령)을 제정하여,고등시험에 합격하고 주임문관으로 최초로 총독부 관리로 채용 하는 자는 1년 이상 시보로(제1조),보통시험 등에 합격하고 판임문관으로 최초로 총독부 관 리로 채용하는 자는 견습 또는 견습고원으로 1년 이상 행정사무를 실지연습시켰다(제2조). 다음 1912년 5월에는 시보와 견습에 관한 건 (부령 제103호)을 제정하여 시보와 견습제 도를 구체화하였다.이에 따르면 교관과 기술관,특별임용에 따른 경우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총독부 시보와 견습으로 채용된 사람은 각각 1년 이상 사무연습을 시켰다.고문합격자나 제 국대학 졸업자 또는 관립 고등 또는 전문학교 졸업자는 예외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제5조). 견습을 채용할 때는 체격검사와 필기시험을 실시했고,필기시험은 한글,조선의 현행법령 해 석,조선지리,작문 등 한국사정에 대한 지식여부를 검정했다(제7~8조). 1918년에 보통시험령 (칙령 제8호)이 제정되기 전 보통시험에 해당하는 시험들,곧 1911년 6월에 제정한 조선인판임문관시험규칙 (부령 제79호)과 1912년의 시보와 견습 에 관한 건 (부령 제103호,판임문관견습시험),1913년의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 문관채 용에 관한 건 (부령 제64호)등은 대체로 교양과 실무 과목으로 구성되어 있고,교양과목은 일본의 언어와 역사,지리에 치우쳐 있으며,실무과목은 하급 행정에 필요한 최소한의 과목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일제는 을사조약 체결 이후 대체로 한국인 하급 실무관리에 대해 민 족의식 배제,국제정세에 대한 안목 배제,일본 문화와 실무지식 강조 등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인판임문관시험규칙 이 규정하고 있는 지원자격을 보면 연령과 학력,경력과 관련한 특별한 제한은 없지만,수험지원자는 신분과 직업,연령에 관한 경찰관서의 증명서를 첨부하도록 하고 있어(제4조),한국인 지원자의 사상적 성향을 중시했던 것 같다.거기에 제 국대학이나 각종 관공립 학교 졸업자에게는 무시험 임용의 특전이 주어졌다.이렇게 복잡하 게 시행되던 판임문관에 관한 임용시험은 1918년 8월 이후 문관임용령 으로 통일된다(한 승연,2007:1021). 다음으로 보통시험령 과 같은 날 공포된 고등시험령 (칙령 제7호)에 따라 주임문 관의 임용자격시험은 고등시험 이라 불렀으며,매년 1회 도쿄에서 실시했다.이 두 법령은 문관시험규칙 (칙령 제197호)에서 지정한 문관보통시험 과 문관고등시험 을 각각 대체한 것이다.이 두 시험은 1919년 이후 각각 판임문관과 주임문관을 선발하는 근거를 이루었다 (한승연,2007:1024).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 시보와 견습에 관한 건 은 1922년에 폐지 되었다(조선총독부령 제112호). 한편 조선총독부의 인사제도에는 능력주의 외에 민족별 할당과 같은 한국인의 배제와 수 용에 관한 원칙도 존재했다(박이택,2006:288).예를 들면 관리의 관등과 봉급 같은 인사규 칙을 정할 때 한국인은 관여할 수 없었고,한국인 고위관리는 그 수도 적었지만 임용되어도 실권이 없는 직위와 지방청에서 재직했다( 岡 本 眞 希 子,2002:147,159).또한 고급 기술직은 한국인에게는 금지영역이어서,일제 말기 총독부 본부의 기술직 고급관리 119명 중 1명만이 한국인이었고,지방행정기관에서도 전체 89명의 기사 중 6명만이 한국인이었다(안용식 김 천영,1989:214).대체로 조선총독부의 한국인 관리들은 식민통치의 일선 담당자 내지 조력 자에 지나지 않았다(최창희,1981:252).조선총독부 한국인 관리들은 임용과 승진에서 큰 차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일본인 관리들이 받는 식민지재근 가봉수당을 받을 수 없었기 때 문에 만성적인 불만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富 永 文 一 外,2002:256-257). 그러면 데라우치의 총독부 관리 현지화 방침은 어느 정도 실행되었을까?쓰지 키요아키 ( 辻 淸 明 )가 메이지관료제의 2대 특징으로 지적한 할거성과 특권성은 총독부 관료제에서도 - 14 -

여실히 드러난다.곧 총독부 설립 당시 이를 움직이는 주체는 육군 중에서도 데라우치 총독 파였다.총독 밑의 정무총감,수석비서관,참사관,인사국장,외사과장,문서과장,회계국장, 총무국장,토목부장,내무부장관,농상공부장관,사법부장관,학무국장,통신국장관,철도국장 관,전매국장 등의 고급관리는 전부 데라우치파든가 아니면 야마가타( 山 縣 )벌에 속하는 인물 이었다.초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 山 縣 伊 三 郞 )는 원로 정치인 아리도모( 有 朋 )의 양 자였다( 森 山 茂 德,1991:69).총독과 총감은 같은 죠수 출신이면서도 문무관으로 대립하고 있어서,총독부 수뇌부와 지방장관의 인사를 보면 무관을 중심으로 한 총독파와 내무성을 중심으로 한 총감파로 나뉘어져 있었고 총독파가 총감파를 압도했다(이형식,2011:184).실 무 관료 간에도 내무부 출신 대 대장성 출신 관리의 알력이 있었고(이형식,2011:181),이것 이 1920년대가 되면 총독부 토박이 관리(재래종)와 정무총감 교체시 등 일본정부에서 일시 파견된 관료( 新 來 種 )사이의 갈등으로 발전하지만 대체로 토박이 관리가 득세했다.왜냐하면 신래종은 인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왔다가 자신이 모시던 상관이 본국으로 귀국할 때 함께 떠났기 때문이다( 穗 積 眞 六 郞,1974:100,131-132,268-270; 木 村 健 二,2000:293).게다가 총 독부의 한국인 관리와 일본인 관리 사이에도 허물 수 없는 벽이 늘 존재했다. 다음으로 총독부의 부장관,국장,지방장관들은 통감부 관료와 합방 전후에 부임한 관료 들로 충원되었고,충독부가 설치된 뒤로는 본국의 관료 유입은 별로 없었고,그 대신 결원이 생기면 내부승진을 통해 충원했다(이형식,2011:184).1910년부터 1920년까지 고문합격 후 총독부 시보로 임용된 71명 중 절반을 훨씬 넘는 46명(64.8%)이 총독부에서 관료생활을 마 쳤다(이형식,2012:218).또한 일제 35년간 자료 추적이 가능한 일반관리 1,372명 가운데 20 년 이상 재임한 사람이 360명(26.2%)이나 되고,평균 14.6년 정도 재임한 것으로 볼 때 총독 부 일본인 관리의 근무기간은 대체로 장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안용식 외,2007:187).그 러나 이를 순전히 데라우치의 관리 현지화 방침 의 효과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왜냐하 면 총독부 일본인 관리의 장기근무 경향은 일본정부 관료제의 할거성 때문에,주임관 이하 관리의 경우 일단 총독부에 입직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면 자리 잡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었 고,친임관 50%,고등관 40%,판임관 60%의 높은 재근가봉 수당과 같은 금전적인 혜택도 있었기 때문이다( 岡 本 眞 希 子,2002:163). 당시 일본정부 관료제는 일반행정가주의를 채택하면서도 일단 각 성에 임용되면 평생 거 기서 근무하지만,총독부의 내부임용에서는 한 사람이 내무부에 근무하다 재무부로도 옮겨 갈 수 있어서 비교적 순환보직이 잘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岡 本 眞 希 子,2002:215).고등관 인사에서도 본부국장이 도장관이 되거나 그 반대도 되고,한 사람이 2개 이상의 도장관으로 순환하며 근무하기도 했다(안용식 외,2007:178).일반행정가주의의 가장 큰 장점은 순환보 직을 통해 다양한 업무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조직에 대한 이해가 넓어져서 조직간 업무협조 가 잘 된다는 점이다.그러면서도 위에서 설명했듯이 총독부 내에는 무관 대 문관,내무부파 대 대장성파,재래종 대 신래종,한국인 대 일본인 관리의 대립이 늘 존재하고 있어,일본관 료제의 할거주의보다 총독부 내의 할거주의는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띠며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특히 총독이나 총감이 새로 부임할 때 일본내 자신의 인맥을 대거 기용했다가,자 신이 귀환할 때 이들을 다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총독부 고위관리들이 관직을 사유화했음 을 말해주는 것이다.결국 데라우치의 관리 현지화 방침 이라는 것은 한국의 형편에 맞는 행정을 위해 필요한 조치면서도,다른 한편으로는 정실 임용을 통해 자파의 인물을 대거 끌 어들여 조선을 정치적 독립영역으로 만들어 내무성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행정 편의주의가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 15 -

3.정책과정 일제 35년간 조선총독부의 정책과정을 보면 1910년대는 데라우치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 가 점진주의 노선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선만일체화 정책을 추진했다면,1920년대 이후는 정당내각의 정책의지가 총독부의 정책과정에 깊이 작용한 면도 있지만,시간이 흐를 수록 식민통치를 담당하는 인물도,정책도 장기적인 시각을 갖는 사람이 줄어들었다.특히 1930년대 이후가 되면 한국인에 대한 정책적 배려는 거의 없어지고 단순하고 노골적으로 대 륙병참기지화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森 山 茂 德,1991).조선총독부의 정책은 큰 틀에서 동화 주의 내지 내지연장주의 식민정책을 추구하는 일본정부의 정책노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 을 수밖에 없었다.우선 조선총독들은 모두 일본 군부와 정계 내에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 었고,또 일반회계보충금을 비롯한 재정지원을 일본정부로부터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정 부의 정책노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그리고 정책이 반드시 합리적 모형에 근거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조선총독부 공문서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요식문으로써 기안용지의 특징은 재질과 형식 을 표준화했을 뿐 아니라 기재사항까지도 표준화해 문서작성의 과정과 책임이 그대로 드러 나게 했다.기안자와 회의( 回 議 ),합의( 合 議 )에 참여하는 자는 각각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서 일정하게 문서작성에 개입했고,그 결과가 기안용지에 그대로 드러나도록 했다(박성진 이 승일,2007:61).일본에서는 메이지관료제 성립 이래 일본 고급관리 내의 높은 동질성이 각 성청 내의 정책결정에 품의제라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하게 만들었다. 14) 총독부의 정책결정 도 기본적으로 이 품의제의 원리를 따르고 있으며,공문서 형식에 따라 품의에 참여하는 사 람은 기안용지에 단계별로 기록이 남게 된다. 여기서는 총독부의 정책과정을 중심으로 논의하기로 한다. 15) 먼저 총독부 내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총독의 역할은 최종결정자로서 중요하지만,실제로는 총독부 본부 과장과 국장의 역할이 중요했다.전 총독부 사무관(나중에 척무성 차관)와기하라 히코자와( 萩 原 彦 三,2002: 203-204)의 회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먼저 총독부의 정책에 관한 중대 문제가 생기면 1 주일에 두 번(화요일,금요일)열리는 국장회의에서 논의가 된다.국장회의에서는 주로 총독 과 총감에게 알려둘 필요가 있는 연락사항 또는 각국이 서로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써 장래에 필요한 방침을 결정할 때 그 방향을 제시한다.때로는 총독이 특정사안과 관련하여 의견을 조회하면 국장회의에서 논의하고,문서로 처리하지 않고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16) 따 라서 일본의 각의와는 전혀 다르다.각의에서는 일정한 각의결정사항을 요하는 것은 반드시 14)메이지관료제에서 고급관리는 구 사족으로서 동질성을 갖고 있었고,문관시험제도가 확립된 이후에 이 동질 성은 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자라는 것으로 대체되었다.마침내는 대신까지도 이 고급관리 중에서 등용되면서 대신부터 고위관리에 이르는 고도의 동질성이 결재권의 하부이양을 촉진하고,대결을 허용하며,또한 정책형 성을 경력직을 중핵으로 하는 조직단위의 집단적 의사결정에 맡기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그 뒤 현재까지도 일본 중앙성청의 의사결정은 모두 품의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西 尾 勝,1996,강재호 역,1997: 262-263). 15)일본정부와 총독부 간의 교섭에서는 한국 사정에 맞춰 정책을 집행하려는 총독부 관리와 단지 일본의 형편에 맞게 한국을 꿰어 맞추려는 일본정부 관리 사이에는 늘 충돌의 여지가 있었다( 穗 積 眞 六 郞,1974:131-132).예 를 들어 산미증식계획 같은 정책은 일본정부와 연계되어 있지만,실제 농업기술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입안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중견 내지 베테랑 기사가 담당하고,성안 단계에서는 일본정부에서 건너온 사무관(소 위 新 來 種 -필자주)이 담당하고,그것을 참사관실에서 심의한 다음 일본 내각 법제국과 교섭해 결정하였다( 木 村 健 二,2000:296). 16)이는 총독부 공문서 처리방식에 어긋나는 것으로써 그만큼 총독부 국장들의 자율성이 컸음을 나타낸다고 하 겠다. - 16 -

각 대신의 도장이 있어야 결정되는데,총독부에서는 총독이 혼자서 어떻게 결정하든 상관이 없었다.그렇다고 총독부의 근본방침이 전부 총독 한 사람의 생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 고,총독은 최후의 결정권을 쥐고 있을 뿐 실무는 전부 그 밑의 관료들이 처리한다.곧 과장 급에서 실무를 처리하고 국장의 양해를 얻으면,이것을 총독의 이름으로 발표할지 여부는 총독이 결정하였다.총독이 실무를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대체로 국장이 좋다고 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총독도 국장회의에 출석하고 발언도 하지만 국장회의의 주최자는 정무총감이었다.총독 은 제령 또는 부령 같은 법령을 발하는 데 반해,정무총감은 통첩을 발했다.정무총감 통첩 은 총독부 내의 여러 과에서 올라오는 기안 가운데 일반 관리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을 때 총감 이름으로 발했다.또한 각 국장들은 사안 가운데 국내( 局 內 )일반에 알릴 필요가 있을 때는 국장통첩을 발했다.규칙 가운데 전례가 되는 것도 대부분 정무총감 통첩으로 발하지 만,경무국처럼 기밀을 요하는 사항이 많은 경우는 국장통첩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萩 原 彦 三, 2002:204-205).이와 함께 도장관회의는 통상 매년 1회(1월 10일)총독부에서 개최했으나, 문제가 있을 때는 몇 번 씩 열기도 했다( 萩 原 彦 三,2002:211).특히 데라우치는 합방 초기 여서 각 고등관들과 연락사항이 많아서인지 총독부 장관과 국장회의는 물론,도지사회의,각 도 내무부장회의,각도 경무부장회의 등을 수시로 개최하였다( 山 本 四 郞,1980참조). 한편 총독이 총독부 정책의 최종결정자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정책결정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총독의 심복이거나 정무총감이었다.예를 들어 데라우치 총독은 사무가형으로 정치적 수완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고( 山 本 四 郞,1980:4-5),훈시를 즐겨하고, 17) 일개 시보가 작성한 복명서를 정성들여 읽고 자신의 감상을 색연필로 비평을 써서 돌려주는 자상한 구석이 있었 지만( 萩 原 彦 三,1945:79-80),실제 그의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사람은 육군성 시절의 부하이 자 총독부 수석참사관인 아키야마 마사노스케( 秋 山 雅 之 介 )였다.총독관방의 참사관실은 1912 년 4월의 1차 관제개정 때 신설되었다( 조선총독부관제 개정 건,칙령 제22호).데라우치 는 중요한 문제나 귀찮은 문제는 일단 전부 아키야마에게 보이게 하고 그가 좋다고 하면 도 장을 찍을 정도였다( 萩 原 彦 三,1969:7).이는 총독이 실무에 밝지 않을 뿐 아니라 장기간 경성을 떠나 도쿄에 체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8) 제3대 사이토( 齋 藤 實 )총독도 일본의 정 치사정을 살피느라 정변이 있을 때마다 조상참배 를 이유로 귀국했기 때문에,취임 당초부 터 한국통치는 전적으로 정무총감 이하의 관리들에게 맡겼다( 齋 藤 子 爵 紀 念 會,1992:제2권). 이러한 통치방식은 결국 정무총감 이하 실무관리들의 자율성을 높이고 책임감을 낮추어, 1920년대 이후는 총독부가 초창기의 성격을 잃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거대한 관료기구로 변 하여,정책도 인물도 장기적인 안목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森 山 茂 德,1991:92). 다음으로 총독부 내의 일상적인 집행과정을 보기로 하자.일단 어떤 사안이 19) 생기면 업 17)데라우치 일기에 따르면,재경성 고등관을 총독부에 소집하고 개정관제에 대해 일장 훈시(1912년 4월1일),각 도 농업기사회의를 열고,출장 가서 일장 훈시(12월9일),중추원 고문과 참의를 불러 만찬을 하고,식사 후 현 금 조선의 식산상의 사정에 대해 일장 연설(1913년 2월13일)등 그 외 다수가 있다( 山 本 四 郞,1980:535,570, 583). 18)데라우치를 보면 통감 시절(1910년 5월30일~8월28일)에도 그는 7월23일에야 경성에 도착했고,그리고 8월~9 월 사이 다시 일본에 있었다.1911년에는 6월20일~11월30일까지 일본에서 체재했으며,1913년에도 7월19일 경성을 떠나 9월 또는 10월 중에 귀임했다가 11월29일에 다시 도쿄로 가서 1914년 6월7일에야 경성으로 돌아 왔고,9월13일~10월8일까지 다시 도쿄에 머물렀다.이처럼 1914년은 절반 이상을 일본에 머물렀다.1915년에 도 4월3일~6월7일까지 일본에 체재했으며,1916년에도 1월 중에 일본을 다녀왔고,7월1일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으며,그 해 10월9일 수상에 취임했다.또한 그는 총독시절뿐 아니라 수 상이 된 뒤에도 집에서 집무한 날이 많았다( 山 本 四 郞,1980:474-766참조). - 17 -

무의 성질에 따라 주관국( 主 管 局 )을 정하고,소관이 모호하면 관계국들이 논의해서 합의 를 20) 이룬다.예를 들어 농업과 관련한 문제는 비료든 미작이든 모두 농무과의 업무에 속한 다.그런데 미작과 관련하여 용수 문제가 생기면 하천관계는 내무국 토목과의 업무이다.그 러면 농무과와 토목과가 협의한 다음 농림국이 기안해서 농림국장이 도장을 찍고,이번에는 토목과로 넘어와서 토목과에서 찬성하면 토목국장이 도장을 찍은 다음 정무총감의 결재를 받는다.경우에 따라서는 관계국들이 해당 사안이 서로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하여 관청 내에서 서류가 왔다갔다 하기도 했다( 萩 原 彦 三,2002:203). 요컨대 총독부의 중요한 정책결정은 총독이 참여하고 총감이 주제하는 국장회의에서 참 여자들 간의 협의를 통해 이루어진다.총독이 경성에 머무르지 않을 때는 총독의 심복 비서 관 또는 총감이 정책결정을 대신하기도 하고,총독이 출근했더라도 관방 참사관실 같은 비 선조직에서 비공식적으로 먼저 검토한 뒤에 총독이 결재를 하기도 했다.이는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관료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관행으로 조선총독부 관료제의 비일상성을 나타낸 다고 하겠다.원칙적으로 국장회의의 내용은 문서로 기록해야 하지만,국장들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구두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었다.총독부 내의 일상적인 집행과정은 어떤 사안이 생기면 그 성질에 따라 주관국을 정하고 국내의 담당과에서 처리했으나,사안이 여러 국에 겹칠 때는 관련 국 과의 회의와 합의를 거쳐 결정하였다.이러한 정책결정 방식은 품의제 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경우도 있어,대체로 고위관리들의 자율성은 높 았던 반면,갈수록 관료화되면서 관리들의 정책적인 안목도 단기화 되고 행정에 대한 책임 도 낮아지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Ⅵ.결 론 식민지 라는 왜곡된 현상은 식민모국의 사람과 식민지의 사람 모두를 노예로 만들고,인 간성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둘 다 치유가 필요하다. 21) 그리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정 확한 진단이 필요하다.필자는 일제 식민통치가 우리에게 남긴 제도적 유산에 관심을 갖는 다.그 유산이란 무관이 지배하는 정부관료제는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는 한 언제 든 국민을 전쟁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데서,정상적이고 안정적인 관료제가 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잔재는 훗날 평화시의 관료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역사적으 로 알렉산더와 시저,테무친,나폴레옹 등 무관의 정치지도자들은 모두 인민을 전쟁의 고통 19)조선총독부 문서행정에서는 공무를 처리하기 위한 계획을 의안( 議 案 )또는 사안( 事 案 )이라고 하고,그것을 문 서로 표현하는 것을 기안( 起 案 )또는 입안( 立 案 )이라고 불렀다.기안된 문서가 회의( 回 議 )되어 관계자의 승인 이나 찬성 또는 수정을 거쳐서 최후의 결재를 완료한 경우를 성안( 成 案 )이라고 불렀다(박성진 이승일,2007: 65). 20)기안자가 작성한 기안문은 반드시 주무계통의 상사 또는 합의 관계자를 거쳐서 최후의 결재자까지 순차적으 로 회부되어 승인 또는 동의 표시를 하게 되는데 이것을 回 議 와 合 議 라고 한다. 회의 는 주무부서 내부의 협 의절차를, 합의 는 주무부서 외의 다른 부서와 서로 협의하는 것을 뜻한다(박성진 이승일,2007:65-66). 21)소설가 조지 오웰은 인도제국 경찰 시절,한번은 발정난 코끼리가 난동을 부린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나,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진정된 터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자신을 따라온 2,000여명의 군중들이 자 신을 마치 마술사처럼 쳐다보고 있어서 원주민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억지로 주인공이 된 것이다(조지 오웰 산문선 코끼리를 쏘다 참조).정신과 의사이자 알제리의 대프 랑스 무력독립투쟁에 직접 참가한 적이 있는 프란츠 파농도 식민의 결과로 나타난 왜곡된 인간의 집단심리에 초점을 맞추고,흑인은 식민의 기억이 몸에 새겨짐에 따라 흑인은 자신을 흑인성 안에 가두고,백인은 자신을 백인성 안에 가두는 왜곡된 현실을 고발한다(Fanon,이석호 역,1998). - 18 -

속으로 몰아넣었다.따라서 동양의 역대 왕조들이 정치가 안정되면 왜 과거제를 시행하여 문관의 인재를 뽑고 무관을 견제하려 했는지를 깊이 통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메이지관료제와의 연속성을 중시하며 조선총독부관료제의 성격을 관제와 인사 행정,정책과정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메이지관료제의 근간을 이루는 일본의 고대 율령관료제는 당나라의 관품령을 바탕으로 하면서도,관사제라는 기능 적 질서에 일본 고유의 인적 질서를 가미한 관위령을 채택했으며,이러한 권력의 이중성은 중세 막부정권에도 계승되었다.이에 반해 메이지정부는 중앙-지방간의 상하관계 확립,징 병제 실시,지조개정,참모본부 설치,경찰제 확립,내각제 실시,메이지헌법의 제정 등을 통 해 천황대권 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한다.이에 따라 메이지정부는 의회의 행정부 견제력이 약하고,문무의 모든 관리는 일왕에게 무정량의 충성을 바쳐야 하 는 전제군주제로 흐르면서 비상통치기구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그러면서도 관리임용제도는 율령관료제의 전통을 계승하여 일왕에 대한 관리의 개인적인 충성도에 따라 친임관,칙임관, 주임관,판임관 등으로 나누고 각각 그 임용형식도 달리했다.무엇보다 메이지관료제의 이러 한 성격은 통감부와 조선총독부를 통해 한국에도 이식된다. 일제는 이미 갑오 을미개혁 과정에 개입하여 일본과 같은 방식으로 지방을 중앙에 복속 시키고,일반행정조직으로부터 사법 경찰권과 조세권,군사권을 차례로 분리시켰다.게다가 통감부 설치를 전후하여 한국의 통신기관과 외교권,사법 감옥사무,경찰사무를 완전히 장 악했다.이와 함께 헌병경찰제를 실시하여 한일합방의 주구로 이용하였고,한국정부의 경찰 과 재정,산업 등 식민지 지배와 수탈을 위한 부문에 일본인 관리를 대거 임용하였다.특이 이들 관리는 합방 후에도 대부분 총독부 관리로 남아 식민지 지배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는 데서 조선총독부가 통감부의 연속체임을 알 수 있다.한일합방 전에 이미 통감부는 한국의 행정과 사법,행형,경찰,군사 등 내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다음으로 조선총독부 관료제 설립 초기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첫째,일제 35년 간 총독부관료제는 무관 출신의 총독이 문관관료제를 지배하고,총독은 통감과 마찬가지로 행정과 입법,사법의 3권을 모두 장악함과 동시에 제령 제정권이라는 강대한 위임입법권을 부여받았다.무관 총독제가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군부관료제의 원리가 문관관료제의 운영 에 사실상 그대로 투영된다는 점이다.단적으로 효율성 논리를 앞세운 헌병경찰제의 실시,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일반 관리와 교원의 제복과 대검 착용 및 복무심득서 단체 송독 등 을 들 수 있다.헌병경찰제의 특징은 사법경찰과 함께 행정경찰의 역할이 광범해서 경찰이 일반행정이 할 일을 대신함으로써 경찰업무가 비대해졌다는 점이다. 둘째,일본과 마찬가지로 총독부관료제도 할거성과 특권성이 매우 높았다.총독은 고등관 일부를 제외하면 관리임면에서도 거의 일본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고,정실 임용을 통해 자신의 인맥을 총독부에 임용할 수 있었다.그리고 총독이나 총감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는 다시 그들을 데리고 감으로써 관직에 대한 사유성과 높은 특권성을 나타냈다.총독부는 내 부임용에 일반행정가주의를 채택함으로써 일본의 각 성청에 비해 국 부 간의 벽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일부에서는 총독부 내의 내무성파 대 대장성파의 대립이 있었고,나아가 무 관 대 문관,재래종 대 신래종,한국인 대 일본인 관리 간의 대립이 늘 존재하고 있어,사실 일본정부보다 더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데라우치의 관리 현지화 방침 은 어 느 정도 효과가 있었고,한국의 형편에 맞는 행정을 위해 필요한 조치면서도,다른 한편으로 는 정실 임용을 통해 자파의 인물을 대거 끌어들여 조선을 정치적 독립영역으로 만들어 내 무성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행정 편의주의가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 19 -

마지막으로 총독부의 중요한 정책결정은 국장회의에서 참여자들 간의 협의를 통해 이루 어졌다.총독이 경성에 머무르지 않을 때는 총독의 심복 또는 총감이 정책결정을 대신하기 도 하고,총독이 출근했더라도 관방 참사관실 같은 비선조직에서 비공식적으로 결정하기도 했다.총독부내의 일상적인 집행과정은 품의제 원리를 따르면서도 문서주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어 관리들의 자율성은 높은 반면 책임의식은 약화시켜,결국 총독부관료제 자체가 관료화의 길을 걷게 된다. 요컨대 총독부관료제는 총독 한 사람에게 행정,입법,사법의 3권이 집중됨과 동시에 광 범한 위임입법권이 보장되고,관리임용에서는 높은 할거성과 특권을 나타내고,정책결정에서 는 극소수 관리의 독단이 작용하고,법령을 초월하는 규칙이 남발하고,정책집행 과정에는 관리의 자율성과 예외성이 일상적으로 보장되는,따라서 국가비상시에나 있을 법한 비상통 치기구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고 하겠다.이는 소위 유신관료들이 입헌주의를 약화시켜 정부 관료제의 권한을 극대화하려는 발상과 식민통치의 특수성 논리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빚어낸 위험한 장치 였다.더 큰 문제는 헌법이 생략된 채 비일상성과 예외성,행정편의주의에 바탕 을 둔 총독부관료제가 광복 이후 정상적인 국가의 관료제 구조에 그대로 투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참고 문헌 박성진 이승일.(2007). 조선총독부 공문서:일제시기 기록관리와 식민지배.서울:역사 비평사. 박이택.(2006여름).조선총독부의 인사관리제도. 정신문화연구,29(2):287-318. 송병기 박용옥 박한설.(1970). 한말근대법령자료집 Ⅰ.서울:국회도서관. 안용식.(2001). 대한제국하 일본인관료 연구.서울: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안용식 김천영.(1989).일제말 고급관료에 관한 연구. 현대사회와 행정,1:193-216. 안용식 외.(2007).조선총독부하 일본인관료 연구. 동방학지,137:151-212. 왕현종.(1996).갑오개혁기 관제개혁과 관료제도의 변화. 국사관논총,68:251-285. 유재곤.(1993).일제통감 伊 藤 博 文 의 대한침략정책(1906~1909):< 大 臣 會 議 筆 記 >를 중심으로. 청계사학,10:203-251. 이형식.(2011).무단통치 초기(1010.10-1914.4)의 조선총독부:인사 관제개혁 예산을 중심으 로. 일본역사연구,33:173-203..(2012).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인사정책:조선총독부 試 補 를 중심으로. 한일군사문 화연구,13:203-225. 전상숙.(2005).일제의 식민지 조선 행정일원화와 조선총독의 정치적 자율성. 일본연구논 총,21:281-308. 정구선.(2008). 한국 근대 관리 임용 연구.서울:국학자료원. 최창희.(1981).관리임용제도.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편). 서울6백년사(제4권),201-256. 서울:서울특별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86). 역주 경국대전:주석편.경기 성남: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승연.(2007).행정 관료의 변화에 관한 역사적 연구:관료 임용시험제도를 중심으로. 한 국행정논집,19(4):1009-1052. -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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