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야기-6 베스
소개글
목차 1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8 2 명청상방: 관상결탁으로 생겨난 소금전매업자 13 3 명나라시대의 통신방법은? 15 4 명나라의 정보기관: 동창, 서창, 대내행창, 금의위 18 5 명나라때의 대이민 20 6 명나라때의 의문의 북경대폭발 23 7 명십삼릉 : 명나라황제는 16명인데, 왜 13황제만 묻혔는지? 25 8 명나라의 임인궁변( 壬 寅 宮 變 ), 속칭 궁녀모반( 宮 女 謀 叛 ) 27 9 십자군의 동정( 東 征 )과 몽골군의 서정( 西 征 ) 30 10 몽골이 일본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33 11 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 몽고군의 서방정벌중 최대의 참패 35 12 몽고인들은 왜 일본을 점령하지 못했는가? 39 13 카미카제( 神 風 ) : 몽고의 제1차 일본침공 42 14 원( 元 )나라 멸망이후의 몽고제국 46 15 원나라의 황제들은 왜 능묘가 없는가? 51 16 천년간 잠든 서하( 西 夏 ) 문화를 누가 깨웠는가? 52 17 북송( 北 宋 )의 비참한 최후 56 18 북제문선제( 北 齊 文 宣 帝 ) 고양( 高 洋 ) : 술고래 황제 59 19 황당한 왕조 남한( 南 漢 ) : 관리는 모두 환관으로 61 20 조어성전투( 釣 魚 城 戰 鬪 ) : 송의 가장 성공적인 몽고군 방어전 64 21 대송제국은 어떻게 멸망하였는가? 68 22 수당시대 일본과 중국의 외교전 70 23 당나라의 환관취처( 宦 官 娶 妻 ) 73 24 고징( 高 澄 ): 황제에게 주먹질한 사상최초의 권신( 權 臣 ) 75 25 수당대운하( 隋 唐 大 運 河 ): 지하의 휘황 77
26 중국역사상 가장 화려한 여행 83 27 중국역사의 분수령 85 28 당나라때 환관과 대신간의 한판 승부 87 29 당나라는 인간지옥이었다 89 30 수( 隋 )나라 대운하( 大 運 河 ) 91 31 중국역사상 가장 싱거운 전쟁 96 32 당나라때는 왜 귀족들이 공주와 결혼하지 않으려 했는가? 99 33 당나라의 굴욕 100 34 삼국시대의 명검( 名 劍 ) 102 35 호태후( 胡 太 后 ) : 황태후에서 기녀로 105 36 남조( 南 朝 ) 송( 宋 )의 황당한 골육상잔 107 37 삼국시대 사대명마 111 38 흉노( 匈 奴 ) 명칭의 유래 113 39 칠국지란( 七 國 之 亂 ): 바둑 한 판에서 비롯된 내전 115 40 실크로드: 동서문명의 상호오해 118 41 한( 漢 )나라와 로마제국의 비교 121 42 한선제( 漢 宣 帝 )는 왜 황후의 구족을 멸하였는가? 125 43 왕망( 王 莽 )의 황위찬탈후 발생한 사건들 129 44 동한왕조내부의 피비린내나는 투쟁: 외척과 환관 132 45 중국의 의술명가 : 서씨가족 136 46 서복( 徐 福 )은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139 47 진나라시대 백년간의 사천이민현상 142 48 병마용( 兵 馬 俑 )의 발견자는 누구인가? 145 49 아방궁( 阿 房 宮 )의 이름의 유래 147 50 전국옥새의 뒷이야기 148
51 화씨벽( 和 氏 壁 )과 전국옥새( 傳 國 玉 璽 ) 152 52 순식( 荀 息 )과 이극( 里 克 ): 진( 晋 )의 가장 참혹한 궁중정변 154 53 중국고대 스와핑으로 인한 멸족사건 156 54 현대중국인의 조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158 55 진( 晋 )나라의 형제지쟁( 兄 弟 之 爭 ) 161 56 오월( 吳 越 ) 전쟁의 심리전술 163 57 갑골문( 甲 骨 文 )의 살인비밀 165 58 허창인( 許 昌 人 ); 화석과 중국인의 기원문제 167 59 중국 기녀( 妓 女 ) 역사상 중요한 3명의 남자 169 60 공주와 옹주 171 61 중국 최고의 여황제 측천무후~! 178 62 사치와 향락의 중국사~! 189 63 중국의 개국황제들은 왜 공신을 죽였는가? 252 64 왜 전세계에서 중국에만 환관이 있었는가? 254 65 신중국 개국대전의 비화 256 66 중국역사상 수도선택의 원칙 257 67 중국고대의 전쟁포로 처리방법 259 68 [중일전쟁] 군벌과 중국군대 262 69 위그르족 향비 265 70 중국 고대 참혹형벌 270 71 중국 황제의 여성 편력사 285 72 일본인들의 만행, 난징( 南 京 )학살 사건 287 73 중국역사를 출렁이게 했던 시안사변( 西 安 事 變 )의 진실 294 74 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마오( 毛 )의 문화대혁명 303 75 역사를 거꾸로 쓴 약진운동의 진실 310
76 국공내전( 國 共 內 戰 )과 마오( 毛 )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314 77 불가사의한 대장정,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320 78 5.4운동과 중국공산당 탄생에 관하여 328 79 국공 내전 334 80 중국은 술과 음식의 나라 338 81 흉노의 황제 묵특 343 82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악녀, 피바람 가남풍 346 83 두 자매의 다른 길-송경령과 송미령 352 84 황금가족의 분열 356 85 한영제( 漢 靈 帝 ): 부자가 되고 싶었던 황제 359 86 병마용갱은 누가 불태웠는가? 362 87 청의 중국 지배(2) - 호복 변발과 팔기( 八 旗 ) 그리고 녹영( 綠 營 ) 365 88 청의 중국 지배(1) - 이한제한( 以 漢 制 漢 )과 한간( 漢 奸 ), 섭정 다이곤( 多 爾 袞 ) 371 89 명조의 흥망성쇠-명의 멸망 376 90.명조의 흥망성쇠- 양명학의 등장 시기 381 91 모택동이 탄복한 인물 `증국번`의 지혜 388 92 명나라가 멸망한 진정한 원인은? 392 93 중국고속철의 환상: 2조위안 시장을 주고 어떤 기술을 받았는가? 396 94 항우: 잔학해서 패망했는가 411 95 주산( 珠 算 )의 기원 414 96 황제사후 비불발상( 秘 不 發 喪 )의 비밀 417 97 주원장은 개국공신들을 어떻게 죽였는가? 419 98 남당( 南 唐 ): 독살의 역사 423 99 하일도( 夏 一 跳 ): 청나라 궁중의 무림고수 425 100 대명제국을 날린 가장 큰 심복지환 流 賊 ----이자성과 장헌충 427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2013.06.13 15:14 자금성( 紫 金 城 )에서 십삼릉( 十 三 陵 )까지. 이것은 명나라때 대부분의 황제들이 반드시 거쳐간 길이다. 단지 3명이 예외이다. 첫째는 명태조 주원장이다. 그는 남경 자금산의 아래('효릉")에 묻혀 있다. 둘째는 건문제이다. 그는 자신의 숙부인 연 왕 주체(즉 나중의 영락제)에게 패배당하여, 남경성이 함락될 때 행방불명이 되었다(전해지는 바로는 불바다 속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죽어서도 묻힐 장소를 얻지 못했다. 셋째는 제7대황제인 경태제( 景 泰 帝, 明 代 宗 )은 복벽한 영종( 英 宗, 토목지변으로 몽골 오 이라트에 포로로 잡혔다가 나중에 풀려나서 돌아옴)의 궁정정변으로 죽임을 당하였는데, '왕'의 예로 옥천산 북쪽 금산구에 묻힌다. 그가 생 전에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두었던 명십삼릉지구의 분묘는 폐기되는데, 미완공의 이 묘자리는 백여년후에 명광종 주상락의 경릉( 慶 陵 )으로 꾸 며지니, 어쨌든 쓸데없이 공사한 것은 아니었다. 건문제의 황제자리를 빼앗은 주체는 북경으로 천도하고, 자금성을 만든다. 위세를 드러내고, 영화부귀를 누리면서 죽음에도 대비했다. 서북쪽 의 창평 천수산 아래에 호화로운 능묘를 만드니, 바로 장릉( 長 陵 )이다. 그 규모와 기세는 명태조의 효릉에 비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 장릉의 보성( 寶 城 : 城 壁, 墳 山, 方 城 을 포함함) 및 지궁은 주체가 등극한 후 7년째 되는 해(1400년)부터 착공했고, 4년후에 완공한다. 지면의 주체시설인 은전(제사용)은 지금 북경지역에서 보존된 최대의 그리고 완벽하게 보존된 명나라 건축이다. 또한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목 조건축물중 하나이다. 동서의 길이와 기세는 자금성의 태화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영락제는 문치무공방면에서 큰 일을 벌이는 것을 좋 아했을 뿐아니라, 죽고나서의 사후에 대하여도 조금도 소홀히 처리하지 않았다. 허대령( 許 大 齡 ) 선생은 장릉이 십삼릉중 가장 긴 신도( 神 道 ), 가장 큰 비정( 碑 亭 )과 비( 碑 ), 최대의 향전( 享 殿 )과 최대의 보성을 지닌 것을 제 외하고 농담식으로 이렇게 말했다: "정화하서양의 목적을 보면, 그가 정화를 해외로 보낸 것이 건문제를 찾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이는 국위 를 선양하고 해외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장래 장릉에서 영락대전은 발굴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장릉 및 경릉, 헌릉에서 정화가 해외에서 가지고 온 주보, 향료가 있을 가능성은 아주 크다." 주체는 개국황제인 주원장에 다음가는 중요인물 이다. 창업형군주에 속한다. "정난지역", 천도, 변방수비, 원정(그는 타타르, 오이라트의 두 부족을 북벌하는 도중에 죽었다), 및 능묘건축에 이르기까지 '살아서는 위대함을 죽어서는 영광을' 추구했다. 장릉은 그에게 기념비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장릉의 주위에, 12개의 능이 있다. 모두 주체의 자손이다. 그들은 주체의 유산인 자금성과 금란전을 승계했다. 그리고 영락제의 삶과 영락제 의 죽음을 따라했다. 그리하여 일률적으로 토목공사를 크게 벌여서 능묘를 만들었다. 그리고 부장할 보물들도 긁어모았다. 인간세상의 황금미 옥, 능라주단을 모조리 가져가려고 했다. 장릉의 보물은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만력황제의 정릉은 이미 1956년에 발굴되었다. 출토된 대량의 부장품을 보면, 광금단료가 160필에 달하 고, 황제의 왕관 및 용포는 모두 금사금선수직으로 만들었고, 황후의 봉관도 보통이 아니었다. 보석을 백여개, 진주를 오천여개나 상감했다. 구천지하에서 보석가게를 열어도 될 정도이다. 그와 비교하면 염라대왕이 오히려 가난뱅이로 보일 것이다. 정릉은 십삼릉 중에서는 중등규모에 속한다. 방산의 서남쪽 대석와( 大 石 窩 )에서 단계( 丹 階 )로 쓸 돌(길이 3장, 두께 5척)을 운반해오는데, 2만 의 운반공들이 꼬박 28일간(하성서의 <<양궁정건기>>) 운반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재력을 들였는지 알만할 것이다. 그외에 유릉, 무릉, 태릉, 강릉, 영릉, 소릉, 경릉, 덕릉등등도 마찬가지이다.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7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규모가 비교적 작은 헌릉에 동원된 군부( 軍 夫 ), 공장( 工 匠 )이 23만명이다. 십이릉중 가장 작은 편인 경릉에도 10만명 이 동원되었다. 능 하나를 만들 때마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피와 땀을 흘렸겠는가? 예를 들어 장릉을 만드는 과정에서, 주체는 일찌기 사람을 보내어 천수산 시공부지에서 제문을 지어서 죽은 일꾼들을 위로했다. 죽은 자를 위하여 묘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인력 재력을 낭비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살아있는 사람을 죽였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중 국역사상 어두운 밤과도 같은 우매함과 암흑이다. 사망은 생명보다 중요하다. 생활보다도 중요하다. 이런 고대 제왕들의 사고방식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은 자신의 위하여 능묘를 만 드는 동시에, 무형중에 국가의 군주제시대를 점차 거대한 분묘로 몰아넣었다. 봉건사회는 제왕들의 사치와 혼용 가운데 마지막을 맞이한다. 인류의 발전사는 바로 문명과 야만의 투쟁과정이다. 문명은 최종적으로 야만에 승리한다. 황제는 결국 죽는다. 또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황제가 모조리 죽은 후에, 문명은 비로소 탄생하고, 비로소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제왕의 무덤 속에서 몸 부림쳐서 빠져나온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어쩔 수 없이 그 시황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시황은 장성을 쌓으면서 수많은 백성을 죽였다. 원래 의도는 좋은 것이었을 것이다.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하도록 외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었다. 최소한 절대적인 이기심에서 벌인 일은 아니다. 하물며 민간전설에는 맹강녀가 한번 곡을 하자 장성이 무너졌다고 하지 않는가. 장성과 십삼릉을 비교하면, 명나라황제들의 황음과 이기심이 드러난다. 이는 혼자서 누리기 위한 '장성'이다. 백성의 선혈과 뼈를 가지고 자신 을 위하여 개선문을 만든 것이다. 하물며 당시에는 어느 과부가 이 무덤 위에 엎드려 통곡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통곡할 자유마저 빼앗긴 것 이다. 명나라때는 심지어, 금나라 원나라의 소수민족의 비빈순장제도를 그대로 썼다. 명영종이 죽기 전에 비로소 유조로 폐지시킨다. 이는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의 제왕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지금 십삼릉 덕릉의 동남쪽에 있는 동정( 東 井 )과 정릉 서북쪽에 있는 서정( 西 井 )(당시에는 동서낭낭궁이라고 불렀다)에는 지금도 분홍색의 담장과 녹색 유리기와로 된 건물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곳은 영락제가 순장한 비빈들을 묻은 곳이다. 정말 악독하다. 이처럼 아름답고 살 아있는 희생물을 선택하다니. 황제는 죽으면서도, 여색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했다. 살아있는 사람을 금은주보와 마찬가지로 모조리 데려갔다(못먹는 것은 싸가지고 간다 는 말도 있다). 비빈들이 죽을 때 모두 정원에서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치면 집안으로 끌려들어간다. 이때 곡소리가 전각을 진동한다. 집안 에는 소목상( 小 木 床 )을 두고, 그 위에 서게 하고는, 밧줄을 위에 매달아 둔다. 그리고 머리를 그 안에 집어넣게 하고, 아래 소목상을 걷어낸 다. 이렇게 하면 목이 졸려서 죽는 것이다. 이들 미인들이 황제를 위하여 우는 것일까? 자신을 위하여 우는 것일까? 울어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십삼릉은 통곡한다고 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제왕의 분묘는 백성들의 백골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항상 짙은 음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 또 하나...나는 십삼릉을 다 돌아보았다. 느끼는 바가 있다: 다행히 명나라의 국운이 다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계속하 여 지어나갔다면, 교외의 좋은 논밭은 모두 다 차지하지 않았겠는가? 백성들은 고혈을 모조리 빨리지 않았겠는가? 거기의 대리석, 한백옥, 화 강암은 모두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만든 것이 아닌가?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8
겨우 십여명의 황제만으로도 수백년간 백성들을 고생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다: 고염무와 같은 지식인이 왜 황제의 무덤에 엎드려 곡을 했는가? 호소를 하지도 않고, 성토를 하지도 않고, 애 도를 했는가? 서생의 곡은 어떤 때에는 궁녀의 곡보다도 더욱 애매하다. 고염무는 명나라가 망한 후에 염무( 炎 武 )로 개명하고, 항청투쟁에 가담한다. 청나라 순치16년(1659년)에 그는 47세였다. 아마도 가능성이 없 다고 보았는지, 강소 곤산에서 북경으로 온다. 먼저 배알한 것은 자연히 한족통치를 상징하는 명릉이다. 분명히 몇번 절을 했을 것이다. 남은 19년의 기간동안 그는 시종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6번이나 십삼릉을 배알한다. 그리고 <<창평산수기>> <<경동고고록>>등 시문을 쓴다. 그 리하여 무형중에 가장 유명한 명십삼릉의 묘지기중 하나가 된다. 명십삼릉의 퇴폐한 모습은 고염무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사를 지냈고, 과거의 좋은 시절을 그리워했다. 사실, 그 십여명의 황제는 그가 눈물을 흘려줄만큼 가치가 있는가? 이는 완전히 수갑과도 같은 충군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쫓겨난 황제들이 그의 충성을 받아줄 수도 없지 않는가. 그는 숭정의 사릉에서도 애도하는 시를 지었다. 사실 숭정은 목을 매어죽은 무능한 황제였다. 그의 유골은 현지 선비들에 의해 매산의 홰나 무에서 끌어내려져 몇몇이 돈을 모아서 싼 값의 버드나무관에 넣어 창평으로 운송한 후, 요절한 귀비 전씨의 묘에 같이 묻어준다. 일찌기 난 폭했던 주명왕조는 마지막에 가서 관을 살 돈도 없었다. 겨우겨우 마음씨 좋은 사람들의 연민과 기부로 관을 마련했다. 이것이 인과응보인가? 동곽선생들아. 이들 사람을 잡아먹은 가족들에 대하여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된다. 옛황제이든 신황제이든, 죽은 황제이든 살아있는 황제이든 어쨌든 모두 짐승같다. 그들에게 골수를 빨리던 때를 잊었는가? 피까지 모조리 빨 리던 때를 잊었는가? 왜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주는가? 이자성이 거용관을 차지하고, 창평을 함락시켰다. 먼저 명릉을 점령했다. 그 후에 북경으로 밀고 들어간다. 궁중에 깊이 틀어박혀있던 숭정을 목매달아 죽게 만든다. 만일 장기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대명왕조의 장에 대하여 외통수로 장군을 부른 것이다. 황제도 죽을 지경에 처 하고, 조상의 묘도 보전하지 못했다. 황천의 주체들은 아마도 이런 것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백성의 피고름을 짜내서 만든 능묘가 자신의 업적이 산서에서 온 잡이들 에게 짓밟히게 될 줄이야. 이를 보면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숭정말에 창평의 여러 능은 이자성에 의하여 훼손된다. 감 장( 龕 帳 )이 모두 사라지고, 신주( 神 主 )도 누가 훔쳐갔는지 모른다. 이자성은 말을 타고 황가의 조상묘를 짓밟았다. 이때는 복수의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는 역대왕조의 반란자들이 동경하는 일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폭군만이 폭민을 만들어낸다. 폭정만이 폭동을 불러일으킨다. 이자성은 비록 일부 문화재를 손괴했지만, 나는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위하여 변호할 생각이 있다. 최소한 이는 독재의 왕권에 대한 필요한 경고이다. 황제들에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자신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서라면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아라, 백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말아라.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9
그렇지 않으면, 모든 황제는 프랑스대혁명중에 단두대에서 죽어간 루이 몇세처럼 될 것이다. 매산(지금의 경산)은 숭정의 단두대이다. 그가 총명했다는 것은 일찌감치 목을 맸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관중을 피하고, 굴욕을 피했다. 숭 정이 절대로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명나라의 천추기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일 것이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묻힐 능묘도 만들지 못했다. 다행히 전비묘가 있어서 그의 몸을 묻힐 수가 있었다. 능앞의 신공성덕비는 청나라황제가 그를 위하여 세워준 것이다. 비문은 자연히 나중에 쓴 것이다. 사실 이 패가망신한 자에게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십삼릉중에서, 사릉( 思 陵 )은 모양이 특수하고, 확실히 간소하다. 지는해의 쓸쓸함과 같다. 사릉의 '사( 思 )'는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 이외에 반성하는 생각이라는 뜻도 있다. 망국의 군주는 확실히 저승에서 잘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후세의 제왕은 더더욱 사릉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 모든 일에 세번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비참해질 것이다. 아쉽게 도 대청왕조는 사릉에 비를 세워주었지만, 진정으로 교훈을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같다. 그들의 결말도 대명왕조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 영 국프랑스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우고, 팔국연합군이 자금성을 함락시키고, 두 번이나 황제(함풍과 광서)를 황급히 도망가도록 만들었으니, 정 말 쓸모없는 자들이다. 멍청한 서태후(중국특색의 클레오파트라 혹은 에카테리나여왕)는 망국의 책임이 있을 뿐아니라, 매국까지 했다. 땅도 떼어주고, 돈도 물어주고, 국권을 잃는 많은 조약에도 서명했다. 조상이 물려준 장성을 모조리 팔아버린 것이다. 장성이라는 위엄과 존엄의 개념은 일찌감치 허명만 남았다. 장성은 청나라말기에 그저 소극적인 장식품이었다. 십삼릉은 열 세명의 황제의 저승에서의 집이다. 그들이 사후에 보유한 지하왕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자금성이다. 그들은 언젠가 이 집으로 이사가야 한다. 황제를 이사가게 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금관옥상, 보정향로, 예상우의, 동거석수, 심지어 덮개까지도 빠트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수량이 엄 청난 '잡비' 부장되는 화폐. 이 모든 것들은 죽는 것도 살아있는 것과 같게 보는 예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릉을 예로 들면, 건설비만도 백은800여만이 들었다. 여기에는 부장품의 가치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생활용품도 모조리 갖추어 놓는다. 황제의 유령이 만일 금벽휘황한 지하궁전에서 거닌다면, 분명히 편안하게 느낄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들이 죽은 후에 어떻게 느끼는지는 알지 못한다. 매번 기발굴된 정릉에 갈 때마다, 나는 자신이 황제의 음삼한 꿈속에 들어간 것처럼 느껴져서 냉기에 부르르 떨곤 한다. 십삼릉에서 소릉의 한켠에, 월아성( 月 牙 城 )이 있다. 속칭 아파원( 啞 巴 院 )이다. 현궁이 봉문된 후, 설계사 및 장식공들은 모두 이 곳에 갇힌다. 그리고 약을 먹인다. 모조리 벙어리( 啞 巴 )가 되는 것이다. 입은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한다. 이 방법은 도굴을 방지하는데 유효했다고 한다. 명십삼릉외에 북경근처에 있는 제왕릉으로는 금릉( 金 陵 ), 청동릉( 淸 東 陵 지금의 하북 준화)등등이 있다. 서남쪽 방산에 위치한 금릉은 금왕조(1115-1234)이 황가능묘이다. 금나라시조부터 장종까지 17명의 황제와 후비 및 왕들이 잠들어 있다. 명 십삼릉보다 400여년전에 만들어진 북경 최초의 황릉구역이다. 지금 지면건축은 모조리 사라졌고, 지하궁전만 800년의 암흑과 신비속에 잠들 어 있다.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10
건륭이 천수산 십삼릉을 구경할 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가 개창할 초기에, 예친왕이 우리 군대를 이끌고 요동에서 승리할 때, 명 나라의 군신은 성상( 星 象 )의 설에 미혹되어, 금나라때 능침이 우리 왕조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방산현의 금릉을 훼손시켰다...이후에 정릉의 향전을 철거하고 제사를 끊었다." 이는 풍수를 믿었던 만력황제가 후금이 굴기하자, 일찌기 조상묘에 대하여 토벌을 하였다는 것이다. 금나라 청나라는 모두 종족연원이 같다. 청나라병사들이 입관한 후,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명릉중 만력제의 정릉을 불태웠다. 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이닌가? 봉건시대에 왕조가 바뀌면, '개싸움'의 투쟁이 벌어졌다. 전황조의 묘를 파헤치는 것은 정신적인 승리의 일종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고, 복수의 창끝은 저승으 로 향한다. 피할 방법이 없다...황제는 죽은 후에도 편안하지 못하다. 청동릉은 민국시대에 탐욕스러운 군벌에게 도굴당한다. 공병과 폭약을 동원했다. 이는 최대규모의 도굴사건이다. 묘안의 보물은 모조리 가져 간다. 현재는 행방불명이다. 아마도 이미 조용히 팔려버리고, 군벌혼전때의 탄약비용으로 충당되지 않았을까? 그 운명은 명십삼릉보다도 못하 다. 서태후는 평생동안 돈을 배상하고 땅을 떼어주느라고 바빴는데, 죽어서는 자신의 묘조차도 지키지 못했다. 이 모든 것들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탓이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명사릉이 그러했고, 청동릉도 그러했다. 명십삼릉( 明 十 三 陵 )을 말한다 11
명청상방: 관상결탁으로 생겨난 소금전매업자 2013.06.13 15:13 중국인들은 뒤를 돌아보기 좋아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이익추구만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신용기갈증을 앓고 있다. 그리하여, 어 떤 사람은 명청상방을 떠올리고, 그들을 신용을 기본으로 하고, 신용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신용으로 사업을 발전시킨 일대 "유상( 儒 商 )"으로 이상화한다. 여기에서 최소한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 하나는, 신용은 원래 상인(물론 일반인도)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도덕수칙이 다. 만일 이것을 대단한 미덕으로 찬양한다면, 이 민족의 집단인격은 확실히 불쌍하고 가련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다음으로, 신용이 부족하 다고 하여, 무한대로 신용을 끌어올릴 수는 없다. 신용은 도덕적 품격이거나 직업소양일 뿐이다. 그것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될 수 없다. 그 리고 상인이 재물을 취득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가 될 수도 없다. 이외에, 상방이 흥성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명청의 두 왕조를 상업이 번영하고, 인민이 부유했던 태평성대로 묘사하려는 생각을 일방적으로 가지기도 한다. 명왕조에 대하여, 역사학자인 황인우는 이렇게 그 본질을 갈파한 적이 있다: "이 제국은 무력을 숭상하지 않는 경향을 보일 뿐아니라, 사회개조, 생활수준제고의 큰 뜻도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그저 대량의 인민이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서'에서도 소위 '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다'는 저표준하에서 사회의 장기적인 안정을 도모했다." 그리고 야만적인 청왕조에 대하여는 중 국에 문명의 대후퇴를 가져다 주었다. 사회경제에 여하한 혁신적인 발전도 가져다주지 못했고, 기껏해야 전왕조의 사례를 본받아서,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사회개조, 생활수준제고'를 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은 백성들이 부유해져서 재물의 세력을 믿고 관청을 무시하고, 정권을 위 태롭게 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인민을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게 한 것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또 다른 측면에서 정권을 위태롭게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는 전제통치자들이 공동으로 취했던 방식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서 출발하여, 일부러 절대다수의 백성들이 겨우겨우 먹고살 수 있는 수준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 천백년이래로, 중앙집권적 전제재도는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속에는 광명이 없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명청상방은 송나라때 관청과 결탁한 상인들과 마찬가지이다. 단지 규모가 더 커지고, 범위가 더 넓고, 더욱 집단적이 되었을 뿐이다. 역사의 진실을 복원하자면, 명청상방의 흥성은 실제로 통치자의 정치적수요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최초의 이유는 명 태조 주원장이 실시한 "개중제( 開 中 制 )"에 있다. 주원장이 몽골원나라세력을 격파하고 명왕조를 건립한 후, 여전히 북방유목민족은 큰 위협이었다. 그리하여 장성을 잇는 선을 따라 9개의 방 어구를 둔다. 이를 구변( 九 邊 ) 혹은 구진( 九 鎭 )이라 부른다. 이것은 동쪽으로는 요동진 해변부터, 서쪽으로는 감숙진 가욕관까지, 5274킬로미 터에 이러는 거대한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관할했다. 긴급한 군사적 상황이 발생하여 내지에서 지원군을 보내는 경우를 제외하고 평소에 주둔 군만 80여만에 달했다. 그중 주둔군이 가장 밀집한 지역은 "내박경기, 외공이적( 內 迫 京 畿, 外 控 夷 狄 )"의 대동( 大 同 )일대였다. 대동진이 관할하 는 장성의 길이는 323킬로미터이다. 여기에는 마보영관병 13.5만명이 있고, 말, 나귀, 노새등이 5만여필 있었다. 속담에, 병마미동, 양초선행( 兵 馬 未 動, 糧 草 先 行, 병사와 말이 움직이기 전에 병사들이 먹을 양식과 말이 먹을 풀을 먼저 이동시켜야 한다)라 는 말이 있다. 이처럼 길다란 변방체계, 이처럼 방대한 주둔군규모는 명나라정부에 거대한 공급난을 가져다 주었다. <<대명회전>>의 기록에 따르면, 대동진에서만 주둔군의 양식이 51만석, 풀이 16.9만속 필요했다. 이외에 대량의 면화, 베등 소비품도 필요했다. 이들 물자를 운송하기 위하여, 명정부는 대량의 관군을 동원했을 뿐아니라, 많은 백성들도 징집했다. 결론적으로 매년 장성에 병력을 주둔시키는데 드는 돈이 천만 냥이상이었다. 이는 중앙재정에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명청상방: 관상결탁으로 생겨난 소금전매업자 12
변방의 군사소비와 공급간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하여, 명나라정부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한 바 있다. 그중 진상( 晋 商 )의 발전에 핵심역할을 한 것은 '개중제'이다. 개중제라 함은 역대 식염( 食 鹽, 소금)을 국가가 전매하는 기초위에서, 명정부가 변방의 군수물자조달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거양득의 방식을 채택했다. 돈도 적게 들고, 시간도 적게 들며, 힘도 적게 드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의도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상인을 부유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개중제는 상인들로 하여금 변진의 변방창고에 양식을 납품하고, 이를 통해서 관염( 官 鹽 )을 판매할 수 있는 허가증( 鹽 引, 引 目 )을 주는 것이다. 이를 "납량중염( 納 糧 中 鹽 )'이라고 부른다. 모든 국가에서 전매하는 상품은 폭리상품이다. 소금은 양식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생활필수품이다. 소금은 양식과는 달리 어디서나 생산되는 물품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관청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백성으로부터 폭리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소금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아니다. 그 가치 폭은 폭리는 주로 관청의 독점때문에 나타난다. 개중제가 최초로 실행된 곳은 산서 대동진이다. <<명태조실록>> 권53의 기록에 따르면, 1370년(홍무3년), 산서행성의 관리가 조정에 건의한다: "대동의 양식저장은 능현(지금의 산동성 덕주)에서 태화령(산서성 삭주 마읍)까지 운송하는데, 길이 멀어 비용이 많이 듭니다. 상인으로 하여 금 대동의 창고에 쌀 1석을 제공하거나, 태원창고에 쌀 1석3두를 제공하면, 회염( 淮 鹽 ) 소인( 小 引, 2백근) 하나를 끊어주게 되면, 이렇게 하면 운송비가 적게 들고 변방의 창고는 충실해질 것이다." 명태조 주원장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다음해에 개중제를 실행한다. "납량중염"은 주로 구변에 집중되어 있었따. 대동진은 가장 먼저 이 제도를 실행한 곳이고 납량의 액수가 가장 큰 곳이다. 그리하여 산서상인 은 가까운데 있다보니 이득을 많이 보았다. 개중제가 다양화된다. '납량'외에 납면( 納 棉 ), 납포( 納 布 ), 납마( 納 馬 ), 납철( 納 鐵 )을 통해서 염인을 받는 방식이 나타난다. 산서상방은 여러가지 경영으로 북방의 군수무역을 독점하엿을 뿐아니라, 그 세력범위를 양회, 하동등 전국의 모든 소 금생산지로 확장시킨다. 이리하여 '무천사방( 貿 遷 四 方 )'의 전국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명나라중기에 들어서면서, 염업정책은 '개중제'에서 '절색제( 折 色 制 )'로 변화한다. 소위 "절색제"는 양식등 물자를 지정한 변방지구로 운송하고 염인을 받을 필요가 없고, 직접 은자를 주고 염인을 받아내는 방식이다. "개중제"가 산서상방을 만들었다면, "절색제"는 휘주상방( 徽 州 商 幇 )이 흥성하게 만들었다. 현대인들이 무한히 그리워하는 명청양왕조의 상방 은 사실 관상결탁으로 일어난 소금판매업자인 것이다. 개중제를 실핼할 때, 양식등 물자를 변방으로 운송해서 염인을 얻을 때는, 휘주는 멀리 떨어지고, 산속에 깊이 있으며, 교통이 불편한데다, 땅 은 좁고 사람도 적은 곳이어서, 양식을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가 없었다. 진상과 비교하면 '지리'적으로 아주 불리했다. 절색제가 실행되니, 휘 상은 내지에서 돈으로 염인을 사들일 수가 있었다. 홍치년간에서 만력년간까지, 휘주염상은 무리를 이루어 당시 전국최대의 소금생산지인 의 정( 儀 征 ), 양주( 揚 州 )와 회안( 淮 安 )등지를 장악했다. 휘주염상의 경영은 일시에 커다란 발전을 이룬다. 명청상방: 관상결탁으로 생겨난 소금전매업자 13
명나라시대의 통신방법은? 2013.06.13 15:10 사람들이활동을 할 때면 서로간에 연락을 할 필요가 있다. 명나라이전의 기나긴 역사시간동안 중국은 서신( 書 信 )의 세계였다. 사람들은 서신 을 통하여 서로간에 안부를 묻고, 장사를 하며, 새로운 사상과 계속 변화하는 관념을 교류했다. 서신은 오늘날의 학술간행물과 같은 역할을 했다. 당시 사람들의 서신왕래는 아주 빈번했다. 명나라때 학자이자 지도전문가인 나홍선( 羅 洪 先, 1504-1564)은 그와 왕기( 王 畿, 1498-1583) 간의 장기간의 통신왕래에 대하여, "구년간 서찰왕복이 대단했다"고 표현했다. 명나라후기에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은 서신왕래의 내용과 형식 을 변화시킨다. 첫째는 명사들이 그들의 서신을 출판해서, 새로운 사상과 관념을 교류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상업적인 우편 서비스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서신은 도대체 어떻게 전달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는 아주 적다. 어떤 때는 집안노비가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거리의 사람들에게 사람을 일부러 보내어 서신을 전하기는 쉽지가 않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원거리의 서신은 모두 그 방향으로 가는 여행 자에게 부탁해서 보냈다. 당연히 가장 좋기는 친구이고, 전문적으로 서신을 운반하는 사람을 보내지는 않는다. 약간의 비용을 들여서 서신을 왕래하는 상인이나 공무를 집행하는 하급관리, 역졸 혹은 관청의 심부름꾼들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규정에 따르면, 관청의 심부름꾼이나 역졸 은 사인의 서신을 휴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대운하에서 관청에서 사용하는 배에도 약간의 개인물품을 끼워넣어서 운송하는 것 과 마찬가지로, 관청의 역참제도도 마찬가지로 개인서신을 운반해주었다. 아래의 두 가지 예에서 보듯이,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 로 서신이 목적지까지 도달하도록 확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예는 작자의 가족이 보존하고 있는 편지의 원본에서 찾았다. 장신원( 庄 臣 元 )은 절강 북부의 상업도시 남심진의 한 강남선비집안에서 태어났다. 1603년 그는 40일의 여정을 거쳐 북경으로 가 진사시험에 참가한다. 다음 해에 그는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을 얻는다. 오래지 않아 모친이 사망하여 고향으로 가서 시묘를 한다. 그의 내용이 잡다한 글들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거기에는 1603년 여름에서 1605년 여름까지 북경에 있는 동안 아들에게 보낸 서신이 있다. 이들 서신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서신의 왕래는 장씨가 바라는 것처럼 시간에 맞추어 수신인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장원 신이 북경에서 보낸 첫번째 서신은 1603년 육월 십오일에 썼다. 서신에서 그는 숭문문밖에 있는 아미타불사에 머무른다고 썼고, 답신은 오충 건의 집에 있는 장집사에게 보내어 전해달라고 하라고 했다. 구월 십사일의 서신에서는 그가 이미 팔월 이십육일에 아들이 칠월 이십이일에 보낸 서신(서신이 북경에 도착하는데 36일이 걸렸다)을 받았다고 말한다. 곧이어 십월 십사일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아들에게 이미 장집사에 게 부탁하여 구월 십사일의 서신을 보냈는데, 받아봤는지를 물어본다. 그해 겨울, 서신의 왕래속도는 돌연 느려진다. 오랫동안 장원신은 집에 서 온 서신을 받아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세 통을 한꺼번에 받는다. 이 세통은 각각 구월 십구일, 십일월 십일과 십이월 이십칠일에 쓴 것이었다. 이후 속도는 다시 느려진다. 그가 1604년 육월 이일의 서신에서는 걱정스럽게 묻는다. 왜 십이월 이십칠일의 서신이후에 다시는 집안에서 오는 서신을 받아보지 못하느냐고. 11일후, 그는 다시 한번 집에 보내는 서신에서, 그의 네 명의 고향사람들은 모두 서신을 받아보 았는데, 그 혼자만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집안에 보낸 서신은 육월 이십사일에 북경으로 오는 친구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이것 은 오월 이십구일(29일의 시간만에 북경에 도착했다). 이 장집사는 보기에 오충건의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의 업무는 주인(혹은 주인과 같은 고향사람)을 위하여 서신왕래를 담당하는 것같 다. 아마도 서신은 장집사가 여행하는 상인들에게 부탁하여 보냈던 것같다. 비록 이 점을 장씨가 명확히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장원신은 장집사 이외에 다른 서신왕래경로를 알아본 적이 있고, 그중 최소 한번은 그의 동료의 노비를 통하여 고향에 보낸 적이 있다. 서신을 보내준 사람과는 북경에 돌아온 후 장원신이 3 내지 5전의 은자를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이것은 적지 않은 금액이다. 그는 또한 여러번 당부 한다. 서신을 절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맡겨서 가져가게 하지는 말라고. 유감스러운 것은 장씨는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 명나라시대의 통신방법은? 14
인지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저 우연히 만나는 사람을 말하는가? 여행하는 상인을 말하는가? 관청심부름꾼을 말하는가? 아니면 상 업적인 서신전달꾼을 말하는가? 더욱 유명한 서광계( 徐 光 啓, 1562-1633)는 북경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가 상해의 집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는 명나라때 통신 업이 좀 더 발달했다는 상세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위에서 장원신은 매 서신의 날짜를 가지고 서신의 수발상황을 파악했다. 그와는 달리, 서광계와 아들은 모든 서신을 연도별로 일련번호를 매겨서 언제든지 어느 서신을 받았고, 어느 서신을 못받았는지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그 는 1607년 봄에 집에 보낸 서신에서, "이십삼호도 도착했다. 작년에는 이십칠호만 못받았다." 1615년(혹은 아마도 1616년) 여름에 그는 이렇 게 썼다: "작년의 서신과 금년 사호이전의 서신은 모두 북경에 도착했다. 다만 삼월이후는 받지 못했다." 1616년 십일월 이십일, 그는 서신에 서 이렇게 말한다: "부관인의 집안사람이 돌아가는데 십구호 서신을 보냈으니 반드시 도착할 것이다" 서신전달을 부탁받은 사람에 대하여 그 는 그저 친구의 노비라고만 적었다. 장원신처럼 전문적으로 서신수발을 처리해주는 집사가 없었으므로, 그는 운에 따라 누군가 마침 남방으 로 가면 대신 가지고 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광계의 서신은 장원신의 것처럼 규칙적이지 않았고, 시간도 정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서광계는 1616년 육월 이십칠일의 서신에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시때때로 글을 써서 보내달라." 서신에서 서광계는 또한 물품을 같이 보낸다고 언급하고 있다. 서신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는 아들이 상해의 농장에서 부쳐주는 양식과 기타 물품으로 생활했다. 일찌기 1606년 가을에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내년봄에도 배로 쌀과 잡곡을 부쳐달라" 1617년봄에 그는 다시 재촉한다: "집안에서 물길로 보낸 것이 어떤 것이냐? 누구에게 맡겼느냐?" 그는 선박운송이 안전한지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어서 이렇게 쓴다: "어떻게 전부 써보내지 않느냐. 탄식할 만하다" 이러하기는 했지만, 선박운송으로 상해에서 북경으로 양식을 보내서 일 가족이 생활하는데는 충분했다. 그리고 북경시장에서 사는 것보다 쌌다. 비록 몇냥의은자로 운송을 부탁해야 했지만. 서씨는 여러번 상업채널을 통하여 돈을 부친 것을 언급했다. 이것은 그가 은가격파동에 민감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611년 그는 아들에게 이 렇게 털어놓는다: "회표( 會 票 )도 역시 도착했다. 은가격이 좋지 않아서 아직 가서 찾지 않았다." 이를 보면 1616에 화폐시장은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서신에서 이렇게도 적었다: "오늘 표를 되돌려보냈다. 찾아서 석교백의 집안에 써라" 명나라때 원거리 화폐송금비용은 거리의 원근에 따라 결정되었다. 몇전에서 몇냥까지 서로 달랐다. 명나라후기에 화폐송금서비스는 북경과 강남의 도 시간에 존재했다. 그리고 다른 곳도 포함될 것이다. 1660년대가 되어서, 북경에서 개인우편을 보내는 첫번째 상업기구가 전문적인 호칭을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보방( 報 坊 )"이다. 이는 신문발 행기구이다. 곧이어 분명히 상업적인 신문출판과 상업적인 서신전달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보방은 신문을 편집할 뿐아니라, 이들 신문을 각 성으로 보내어 판매까지 했기 때문이다. 서신의 전달과 신문의 정기발행을 하나로 합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이후 전문적으로 우 편을 처리하는 "표호( 票 號 )"가 나타난다. 이전에도 상업적 우편서비스는 일찌감치 있었던 것같다. 그러나 모두 다른 상업서비스의 부속서비스 였다. 번화한 강남지역에, 상업적 우편서비스가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은 1660년대이다. 1663년 항주에서 출판된 우수서신집에는 출판상의 원고모집 공고가 들어 있다: "독자들이 서신집 속집을 출판하고자 하는 모 서방에 잘 쓴 서신들을 보내주기 바람"이라고 되어 있다. 나중에 이 서신속 집은 1667-1668년간에 순조롭게 출판된다. 1668년의 속집에서는 한 여화가가 한 여성 시집편집인에게 보낸 서신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공동의 취미를 가지고 시작을 서로 부쳐주자고 한다. 1672년에 출판된 시가집의 서언에는 유사하게 우편으로 모은 원고들이다. 편집자는 두 번째 시가집을 출판할 계획임을 밝히고 있다. 독자들에게 그들의 시원고를 태주의 그의 집으로 보내주거나 혹은 양주, 북경, 남경의 4개 주소 중 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6년후, 두번째 시가집이 출판된다. 또 다른 출판은 1689년 상업적인 여성시가집중에서 편집자들이 6곳의 먼 성지역의 작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있다. 그들이 먼 곳에서 시원고를 출판사로 보내준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강남의 상업우편네트워크는 서신전달뿐아니라, 소포도 처리했다. 양주에 사는 한 1588년(만력16년)의 진사는 전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절강(아마도 항주일 것이다)의 한 친구가 한 상자의 가득한 글을 보내와서 대신 보관해달라고 했다. 그는 상자를 구석에 놓아두었다. 상자안 에 담겨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 절강의 친구가 10년후에 세상을 떠난 후에 양주에 살던 그는 책상자를 선박운송을 통하 명나라시대의 통신방법은? 15
여 죽은 사람의 아들에게 부쳤다. 죽은 자의 아들이 상자를 열어보니, 상자 바닥에 500냥의 은자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기작가는 상자 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항주로 부쳤는지는 적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와 그의 독자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흥미가 없었던 것같다. 그들은 분명히 상자를 어떻게 양주에서 항주로 선박을 통해 보낼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오늘날의 우리만 제대로 몰라서 궁금해할 뿐이다. 명나라시대의 통신방법은? 16
명나라의 정보기관: 동창, 서창, 대내행창, 금의위 2013.06.13 15:09 창위( 廠 衛 )는 명나라때 황제의 정보기관이다. 창( 廠 )은 동창( 東 廠 ), 서창( 西 廠 ), 대내행창( 大 內 行 廠 )을 말하고, 위( 衛 )는 금의위( 錦 衣 衛 )를 말한다. 합쳐서 창위라고 부른다. 동창은 명나라 영락18년(1420년)에 북경의 동안문 북쪽에 설립했다. 서창은 명나라 성화13년(1477 년)에 구회창에 설립했다. 대내행창은 명나라 정덕초년에 설립했다. 금의위는 원래 내정어림군( 內 廷 御 林 軍 )이었고, 황제의 호위부대로써 홍무15년(1382년)에 설립되었다. 창위는 명나라때 정보기관으로써, 황제의 이목과 손발이 되었다. 동, 서창 및 대내행창의 두목은 사 례감의 태감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금의위장관은 지휘사로 황제의 신임을 받는 심복이 맡았으며, 아래에 17개소와 남북진무사를 통할했다. 창과 위의 기본직책은 비슷했다. 다만 금의위는 외관이 맡 았으며 황제에게 아뢸 때는 주소( 奏 疎 )를 사용했다. 동창등의 환관처럼 가깝지는 못했다. 그래서 창 의 세력이 위보다 컸다. 금의위는 기본적으로 모든 관료를 정탐했고, 창은 관민과 금의위를 감시했 으며, 대내행창은 관민과 창위를 감시했다. 황제가 모든 정보기관을 직접 관장하였고, 완전한 체계 를 갖춘 정보기관체계를 가졌던 것이다. 창위는 사법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황제의 영을 받아 사 건을 처리하고, 관리와 백성을 체포하였으며, 형이 지극히 잔혹하여 조야상하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 워 하였다. 동창은 관서( 官 署 ) 이름이다. 명성조 영락제시기에 건문제의 잔당을 색출하고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 한편으로는 금의위를 회복시키고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명영락18년(1420년) 에 동집사창( 東 緝 事 廠, 약칭 동창)을 설치하였다. 환관이 제독( 提 督 )을 맡았다. 권력은 금의위보다 컸고, 황제에 대하여만 책임졌다. 사법기관을 거치지 않고, 임의로 관리와 백성을 체포할 수 있어, 환관이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 서창도 관서 이름이다. 명헌종시기에 정보정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성화3년(1477년)에 서집사창( 西 緝 事 廠, 약칭 서창)을 설치하였다. 유명한 환관 왕직( 汪 直 )제독을 맡았다. 그의 권세는 동창을 넘어 섰다. 왕직은 서창을 거점으로 하여, 조정의 관리와 결탁하여 자기를 따르지 않는 관리를 내쫓고, 충신과 양신들을 내보냈다. 서창에 대하여 조야의 반대가 심해지자 결국 철폐하게 된다. 명나라 무 종때 유명한 환관인 유근( 劉 瑾 )이 전횡할 때 서창을 되살린 적이 있으나, 유근이 물러나고 능지처참 된 후 다시 철폐되었다. 대내행창도 관서이름이다. 명나라 무종때 환관 유근이 전횡을 하였고, 대내판사창( 大 內 辦 事 廠, 대내 행창 또는 內 廠 이라고 함)을 두고 스스로 통할했다. 동창, 서창보다도 훨씬 악독했다. 무종이전까지 는 창, 위를 분리시켜 서로 번갈아가면서 일을 시켰는데, 이때는 동창의 수령인 구취( 丘 聚 ), 서창의 수령인 곡대용( 谷 大 用 ), 금의위 지휘사인 석문의( 石 文 義 )가 모두 유근과 한패거리였다. 그래서, 창위 명나라의 정보기관: 동창, 서창, 대내행창, 금의위 17
가 합세하여 정보정치가 판을 쳤다. 명나라 정덕5년(1510년) 유근이 모반죄로 피살되면서, 서창, 대 내행창이 모두 철폐되었다. 금의위는 황제의 시위기구이다. 전신은 태조 주원장때 만든 어용공위사( 御 用 拱 衛 司 )이다. 명홍무2년 (1369년)에 대내친군도독부( 大 內 親 軍 都 督 府 )로 바꾸고 15년에 금의위를 설치한다. 주원장은 중앙집 권정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금의위로 하여금 형옥을 장악하도록 하고 체포권한을 부여하고, 아래에 진무사를 두어 정찰, 체포, 심문등의 활동을 하게 하며, 사법기관을 거치지 않도록 하였다. 명나라의 정보기관이 동창과 금의위는 북경이외의 각지에 분지기구를 두었다. 예를 들어, 천진시 하 북구의 금의위교대가와 이전의 금의위교는 바로 당시 이 금의위의 천진사무소가 있던 자리이다. 당 시 많은 대내의 고수들이 천진성에서 횡행하였던 것이다. 특무를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비밀업무에 종사하고 군사정보를 캐내는 인물로 생각하기 쉬운데, 명나라때는 공개된 인물이었다. 명나라때의 특무기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 지방주 재하는 자, 둘째, 북경에 근무하는 자, 셋째, 임시로 외부에 파견나간 자. 금의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환관들이 담당했다. 임면은 사례감에서 하고, 반드시 황제의 최종결정을 받아야 했다. 위의 세부류 중 지방에 나뉘어 있는 자들이 가장 많았다. 명나라 영락제때부터 두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전국 각 성과 각 중요한 도시에는 모두 설치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실제로 황제를 대신하여 현지관리, 백성 을 정찰하고 군민의 동태를 암암리에 살피는 것이었다. 명나라의 정보기관: 동창, 서창, 대내행창, 금의위 18
명나라때의 대이민 2013.06.13 15:08 명나라 홍무, 영락(명의 창립황제 주원장 및 영락제 시절)때의 대이민은 파란만장하며, 슬프고 길이 남을 역사적 대사건이다. 지금은 시간적으로 근 600여년이 흘렀음에도, 그들이 옮겨간 비장한 이야 기는 아직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각지의 후손들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노래는 지 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묻노니 나의 조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산서홍동( 山 西 洪 洞 )의 대괴수( 大 槐 樹, 큰 홰나무)에서..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산서홍동의 노관와( 老 鸛 窩, 오래된 황새의 집)이라네. 수백년동안 이 민요는 중국의 산동, 하남, 하북, 북경, 안휘, 강소, 절강 일대에서 연면히 전해져 내 려왔고,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가가호호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 명나라때의 이민역 사는 그의 후손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살아서 남아 있는 것이었다. <<홍동현지( 洪 洞 縣 誌 )>>의 기록에 의하면 "대괴수는 성의 북쪽 광제사( 廣 濟 寺 )의 왼쪽에 있다. <<문 헌통고>>에 따르면, 명나라 홍무, 영락제때, 산서의 백성들을 북경, 산동, 하남 등의 곳으로 강제이 주시켰는데, 나무아래가 집합장소였다. 전해지는 바로는 광제사에 주재관서를 두고, 증빙을 보고 노 자돈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대괴수는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절도 병난에 훼멸 되었다..." 이 문헌의 기록을 보면, 바로 중국의 화동, 중원등지에서 불리우는 민요와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때 산서홍동의 대괴수에서 백성들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 도 믿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명왕조는 왜 이처럼 대규모의 백성을 이주시켰는가? 민간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정해진다 "호대해복수기"등.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전쟁이 빈번했고, 홍수로 인한 재해와 역벽으로 인한 재해 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 흐르는 황하는 중화민족의 요람이고, 염황자손의 어머니강이다. 동시에 황하 중하류에 사 는 백성들은 계속하여 재난을 당하고 있었다. 원나라 지순1년에서 명나라 홍무2년(1330-1369)까지 40년의 기간동안, 황하중하류는 7번이나 제방이 무너져 범람하였다. 홍수가 마을을 삼키고, 논밭을 삼켜서 수많은 백성들이 유리걸식하게 만들었다. 홍수가 지난 후에는 시체가 썪고 역병이 유행하며 마을에는 사람들이 살지를 못하였다. 비옥한 하남, 산동의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으로 뒤바뀌었 으며,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원나라 말기, 조정부패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지고, 당시 황하양안에는 이런 민요가 전해지고 있 었다. "석두인, 일지안, 도동황하천하반(돌로 된 사람. 외눈. 황하를 움직이니 천하가 뒤집어진다)" 명나라때의 대이민 19
이 노래는 농민반란을 암시하는 전조이다. 원나라 지정11년(1351년), 황하의 제방이 무너졌다. 중원 과 화중일대의 백성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백성들의 사활은 도외시하고, 강 제로 변량, 대명등 14로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황하를 소통시키는 공사를 하게 하였다. 그해 4월, 백 성들은 난고황릉강 하오의 아래에서 눈하나를 가진 석인상을 파낸다. 석상의 등에는 이런 두 문구 가 쓰여 있었다. "석상이 눈이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지 말라. 이 물건이 한번 나오면 천하가 뒤집어 진다( 莫 道 石 人 一 只 眼, 此 物 一 出 天 下 反 )"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역사상 유명한 홍건적의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이어서, 서수위가 계주에서, 장사성이 태주에서 반란의 깃발을 들었다. 오래지 않아. 주원 장, 곽자흥도 호주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원나라 정권은 군대를 모아서 각지의 농민군과 중원일대에 서 결전을 벌였다. 전쟁으로 인하여 하남, 하북, 산동, 강소북쪽, 안휘북쪽 일대의 사람들 10에 8,9은 죽게 되었다. 원라나 군대는 농민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 땅을 뽑아버리고, 그 성을 도륙내 는" 방식을 택하여서,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봄에 제비가 다시 돌아왔는데, 천리나 되는 빈땅에 사 람이 거의 없네( 春 燕 歸 來 物 棲 地, 赤 地 千 里 少 人 煙 )"의 경지였다. 주원장의 농민군이 원나라 조정을 멸망시킨 후에야 16년에 걸친 전란은 끝이 났다. 전란이 있으면, 재난이 따르기 마련이다. 원나라 말기에는 곳곳에서 전쟁이 있었고, 홍수와 메뚜기 떼의 해도 이어졌다. 1341년에서 1368년의 사이에, 황하, 회하는 자주 붕괴되었고, 거의 매년 홍수가 범람했다. 산동, 하남, 하북, 양회일대에는 백성의 집이 잠기고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마을과 도시가 대부분 폐허로 바뀌었다. 곡물을 땅에 심지 못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었다. 집이 10개 있으면 9개는 빈집이었다. 천재에 인재가 겹치고 기근과 전염병이 돌아서 중원의 몇 개 성의 백성 들은 엄청난 재난을 당하였다. 이 곳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바뀌었다. 주원장은 휘주의 이승이 제출한 "성벽을 높이 쌓고, 양식을 많이 준비하며, 황제에 오르는 것은 늦 춘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명나라 왕조를 개창하였다. 그런데 중원, 화중일대에는 토지가 황폐하고 사람이 살지 않아, 조세수입이 오르지 않았으며, 명나라 왕조의 통치에 부담을 주었다. 주원장은 소 기, 유구등 대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성을 이주시키는 거대한 정책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대규 모의 백성이주이벤트가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주원장 집권초기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중원지역이 전쟁과 재난에 휩싸여 있을 때, 내지에 있던 산서성은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보냈다. 산 서는 지리환경이 독특하여, 동쪽에는 태행산이 병풍역할을 하고, 서쪽에는 여량산이 막아주고 있다. 가운데로는 분하가 흐르고 있는데, 그 중에서 진남평원은 아주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토지 도 비옥하고 날씨도 좋아서 물산도 풍부하고 사람도 많았다. 원나라 말기의 전쟁도 이 지역에는 영 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산서성에는 아직도 원나라때의 건축물이 남아있는 것만 300여개 되는데, 이 것은 바로 이 지역이 원말에 전쟁에 휩싸이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구로 보아서, 홍무14년 의 기록에 의하면 하남과 하북의 인구는 모두 189만인데 반하여, 산서의 인구는 400여만에 달하였 다. 즉, 산서성의 인구가 하남, 하북 두개 성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았던 것이다. 중국의 각 지방간 인구균형이 맞지 않은 것을 보고 주원장과 그의 후계자인 영락제는 산서를 주시 했다. 당시 홍동현은 진남(산서남부)에서 가장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었고, 남북왕래의 교통요지였다. 그래서 이민은 이 곳을 중심으로 발생하게 된 것이다. 관청에서는 백성이주를 책임지는 부서를 홍 동에 두고 거기에서도 성북쪽의 광제사에 두었다. 이 절은 분하의 옆에 있고, 길옆에 있어서 지리적 인 위치가 좋았다. 절앞에는 큰 홰나무가 있었고, 홰나무 위에는 황새들의 집이 있었으니, 이 곳을 상징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것들이었다. 명나라때의 대이민 20
대괴수, 노관와, 홍동현은 중국의 명나라때 대이민을 상징하는 말들이 되어 중국인들의 기억속에 남 아 있다. 명나라때의 대이민 21
명나라때의 의문의 북경대폭발 2013.06.13 15:07 380년전인 1626년 5월 30일(명나라 천계제 6년 5월 6일) 오전 9시경에 북경의 자금성바깥 서남쪽 약 3킬로미터지역에 위치한 곳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왕공창( 王 恭 廠, 현재의 선무문지역) 을 중심으로 하여 3평방킬로미터지역에 걸쳐서 일어났는데, 북경에서 십킬로미터이상 떵어진 곳에 서도 강렬한 진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폭발의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것뿐아니라, 폭발후에 발생한 재해의 형태도 매우 기괴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최초에 이 사건을 기재한 것은 관방의 기록문서인 저보( 邸 報 )이고, <<명계북략>>에서 <<병인오월초 육기이>>로 기재하고 있는데,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계병인오월초육 사시에 하늘은 희고 맑았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큰 진동이 들리 더니 하늘이 꺼지고 땅이 가라앉았다. 깜깜한 밤처럼 어두워졌고, 집들이 무너져 평지가 되었다. 왕 공창일대는 파괴가 더욱 심하였다. 시체가 겹겹이 쌓이고, 악취가 진동했다. 성안에 있는 집들도 성 한 곳이 없었다. 모두 놀라서 날뛰었고 멀리 구름기운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어지러운 실같은 것 도 있고, 오색인 것도 있고, 영지버섯처럼 검은 것도 있었는데 하늘로 솟아올랐다. 대전에서 일하는 자들이 진동으로 떨어진 자가 2000명이었는데, 모두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상처입은 남녀들은 모두 발가벗은 상태였고, 실오라기하나 하나도 걸치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부인들이 벗은 몸으로 지나가는데, 어떤 이들은 기와로 음호를 가리고, 어떤 이들은 반쪽다리로 가렸으며, 어떤 사 람은 반쯤남은 이불로 가린 자도 있었다. 장안가의 공중으로 사람의 머리, 논썹, 코, 이마가 우수수 떨어졌다. 이상의 기록에서도 폭발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알 수 있다. 여기서 영지버섯과 같은 구름 은 마치 원자폭탄이 폭발했을 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의복이 모두 벗겨져서 모두 나체로 되었느냐는 점이다. 도대체 의복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저보>> 는 아래와 같이 기재하고 있다. 진동으로 무너진 후, 보고에 의하면, 옷들은 모두 서산에 날아가서 절반정도는 나무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창평주의 교장에도 의복이 쌓여있고, 장신구 은, 식기등 없는 것이 없었다. 관방의 보고서외에 민간에서 쓴 글에서도 이 재난을 기록하고 있다. 유약우가 저술한 <<작중지>>에 의하면 천계6년 5월 초육일 진시에 갑자기 크게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큰 나무 스무그루가 땅에서 모 두 뽑혔다. 뿌리가 위를 향하고 가지가 아래를 향하였다. 그리고, 구덩이는 수장깊이가 되었다. 구릅 이 올라갔는데 영지버섯 모양을 하고, 동북쪽으로 몰려갔다. 죽은 자들은 사지가 멀쩡하지 못하였 고,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나체였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도 역시 대부분은 옷과 모자가 벗겨졌다. 명나라때의 의문의 북경대폭발 22
정말 보지 못했던 해괴한 사건이었다. 이외에 어사 왕업호가 황제게게 바친 글에서도 스스로 겪은 바를 기재하고 있다. 신등이 진각에 관청에 들어가 일을 보려고 할 때, 갑자기 진동음이 들렸는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같았습니다. 화염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사방에서 담장이 무너지고 집이 갈라지는 소리 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이상한 것은 정원의 나무가 모두 뽑혔는데, 불에 탄 흔적은 없다는 것 입니다. 약방건물이 날아가 버리고 수장깊이의 구덩이가 생겼습니다. 각종 기재를 보면, 북경대폭발은 절대 단순한 폭발사건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많은 의문점들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왕공창이 비록 당시에 군수용품을 보급하는 기관이기는 하였 으므로, 화약을 보관하고 있었겠지만, 폭발후에도 풀하나 나무하나 불에 타지 않은 것을 보면 도대 체 어떻게 폭발한 것인지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폭발의 위력이 엄청난 것도, 그리고 사람들의 옷이 모두 벗겨져서 창평으로 날아간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머리카락 하나 손상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 공왕창에서 동북쪽으로 약6킬로미터 떨어진 화신묘에서는 폭발 전에 어떤 사람이 기괴한 음악성을 들었고, 그리고 하나의 불구덩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 다고 한다. 얼마지나지 않아 재난의 진동음이 들렸다는 것이다. 당시 공부상서 동가위는 두 팔이 절 단되었고, 어사 하정추, 반운익은 집에 있다 죽었으며, 두 집안의 가족들도 모두 흙속에 묻혔다고 한다. 또한 석부마대가의 50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돌사자는 날아서 순성문바깥에 떨어졌고, 상래가 의 황가상원의 상방은 모두 무너져서 코끼리가 놀라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승은사가의 8명이 메는 가마가 지나가다가 재난을 만났는데, 가마는 거리중심에 부서져 있는데, 가마탄 여자와 8명의 가마 꾼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었다. 채시구의 주씨 성을 가진 소흥에서 온 사람은 6명과 얘기하고 있다가 홀연히 머리가 날아가고 몸통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옆에 있던 6명은 아무 일이 없었다. 더 이상한 것은 죽은 자이건, 상처를 입은 자이건, 아무런 상처가 없는 자이건 모두 사고이후에는 옷이 날아가서 나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원홍규가를 지나가던 가마속의 여인은 재난시에 가마두껑 이 날아가고 여인의 옷과 장신구는 다 날아갔지만 그녀의 몸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가마속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어느 관리의 시종도 재난을 당했을 때 그저 모자와 옷과 바지 그리고 신발등이 순 식간에 다 없어졌다고 한다. 어느 한 관리의 소첩은 기왓장더미에 깔렸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구해 주고 보니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폭발의 힘은 주로 왕공창 중심구역내였다. 폭발후의 충격은 동, 서, 북의 세 개 방향이었고, 남쪽으로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 원인에 대하여는 수백년동안 각종 의견이 제시되었다. 지진으로 인한 것이라는 설, 화약폭발에 의한 것이라는 설, 운석에 의한 것이라는 설, 화산열에 의한 강폭풍이 있었다는 것, 등이다. 심지어 는 UFO가 나타났다든지 외계인이 침입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북경지질학회등 20여개의 단체는 1986년에 학술토론회를 열어 이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였는 데, "대기의 정전기가 재난을 불러일으켰다는 설", "지진이 화약폭발을 일으켜 사고가 났다는 설", "지구열핵의 강력한 폭발작용이라는 설"등이 제시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론은 신선하기는 하지만, 재난동안 저온이며 불이 붙지 않고, 의복이 날아가는 등의 드문 특징을 해석하기는 어려웠다. 명나라때의 의문의 북경대폭발 23
명십삼릉 : 명나라황제는 16명인데, 왜 13황제만 묻혔는지? 2013.06.13 15:06 북경의 북쪽 팔달령장성을 가는 곳에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이 있다. 명나라의 황제는 모두 16명인데, 여기에 묻혀있는 황제는 13명이다. 그럼 어느 황제 3명이 북경 십삼릉에 묻히지 않은 것일까? 첫째, 명태조 주원장 명태조 주원장의 묘는 남경의 명효릉( 明 孝 陵 )이다. 주원장은 남경을 수도로 정했고, 거기서 죽었으 므로 남경에 묻혔다. 둘째, 건문제( 建 文 帝 ) 주윤문 건문제는 삼촌인 영락제( 永 樂 帝 )에게 황위를 빼앗기는 인물이다. 그는 영락제가 군대를 이끌고 북경 에서 남경으로 쳐들어갔을 때, 주윤문은 실종되고 만다. 끝까지 그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그의 무덤도 없다. 셋째, 경태제( 景 泰 帝 ) 경태제는 대종( 代 宗 )이며 이름은 주기옥( 朱 祁 鈺, 1428-1457)이다. 선종 주섬기의 둘째아들이며 현비 오씨의 소생이다. 영종( 英 宗 ) 주기진( 朱 祁 鎭 )과는 동부이모의 형제이다. 주기옥의 생모인 오씨는 원 래 한왕부의 시녀로서 신분이 미천하였다. 영종은 오이라트를 토벌하러 떠났다가 토목보에서 소위 토목보의 변으로 불리우는 사태로 오이라트 에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그로 인하여 황실에 감국으로 있던 주기옥이 황위에 올라 황제에 오른다. 후에 우겸의 외교노력으로 영종은 포로의 신세에서 풀려나 1450년에 다시 귀국하게 된다. 귀국후 두 황제의 관계는 묘한 상태로 되고, 영종은 사실상 연금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이후 곡절을 겪어 경태제가 세운 황태자는 요절하고, 그마저도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영종이 복벽에 성공을 하 게 된다. 영종이 복위한 후 영종은 대종에 대하여 "불효, 부제, 불인, 불의"함을 들어 그를 황위에서 폐하고 왕으로 낮추게 된다. 이후 1457년 1월 19일 사망하는데, 영종은 생전에 만든 수릉을 철거하고, 경사 금산에 경태릉( 景 泰 陵 )을 별도로 만들어 황제의 예가 아니라 왕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게 된다. 이로 인하여 황제였던 대종은 명십삼릉에 황제의 예로 묻히지 못한다. 명십삼릉 : 명나라황제는 16명인데, 왜 13황제만 묻혔는지? 24
참고로,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청나라의 배려하에 황제의 예로 명십삼릉에 묻힌다. 명십삼릉 : 명나라황제는 16명인데, 왜 13황제만 묻혔는지? 25
명나라의 임인궁변( 壬 寅 宮 變 ), 속칭 궁녀모반( 宮 女 謀 叛 ) 2013.06.13 15:05 명나라의 역사상 궁중에서 일어난 해괴한 일들이 적지 않지만, 명나라 세종, 즉 가정제( 嘉 靖 帝 )때 궁녀에 의한 황제모살사건도 후세에 적지 않은 의문을 남겼다. 자고이래로 경비가 삼엄한 곳은 감옥이 아니라 황궁이었다. 황제는 다른 사람이 암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순라를 돌았다. 명나라때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 황제의 침궁은 자금성내의 건청궁( 乾 淸 宮 )이었다. 황제와 황후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이 곳에 거주할 수 없었다. 비빈들은 그저 순서 에 따라 들어올 뿐이었고, 황제의 별도 허락없이는 오래 머물 수도 없었고, 그날 밤으로 떠나야 했다. 가정연간의 건청궁은 난각( 暖 閣 )을 뒤에 두어 모두 9칸이었다. 매간은 상하양층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계단이 통해 있었다. 매칸에는 침상을 3장두었는데, 혹은 위층에 혹은 아래층에 두어, 모두 27개의 침상이 있었다. 황제는 그중 마음대로 한 곳을 정해서 거주했다. 그리하여, 황상 에 어느 곳에 자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런 방식으로 황제의 안전은 많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그의 신변에 있는 궁녀들까지 방 비할 수 있었을까? 바로 이들 궁녀들이 경천동지의 큰 일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상 "임인궁변"이라 불리우는 궁녀모반사건이다. "임인궁변"은 가정21년 (1542년) 임인년에 발생한다. 당시의 사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가정21년 10월 21일 새벽, 십여명의 궁녀는 주후총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를 목졸라 죽이기로 결정한다. 먼저 양옥향( 楊 玉 香 )이 굵은 밧줄 을 소천약( 蘇 天 藥 )에게 건냈다. 이 굵은 밧줄은 의장기에서 가져온 것으로 사화승( 絲 花 繩 )을 꼬아서 만든 것이었다. 소천약은 묶은 밧줄을 양 금영( 楊 金 英 )에게 건넨다. 형취련( 刑 翠 蓮 )은 황릉말포( 黃 綾 抹 布 )를 요숙고( 姚 淑 皐 )에게 건네고, 요숙고는 황릉말포로 주후총의 얼굴을 덮고, 그의 목을 꽉 조른다. 형취련은 그의 앞가슴을 눌렀고, 왕괴향( 王 槐 香 )은 그의 상반신을 눌렀으며, 소천약과 관매수( 關 梅 秀 )는 각각 그의 좌 우손을 붙잡았다. 유묘련( 劉 妙 蓮 ), 진국화( 陳 國 花 )는 각각 그의 두 다리를 눌렀다. 양금영이 밧줄을 묶기를 기다려, 요숙고와 관매수 두 사람 은 힘을 다해서 밧줄을 끌어당겼다. 그들이 목적을 달성하려는 순간에, 밧줄은 양금영이 잘못 묶어서 더 이상 졸라지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를 그 자리에서 완전히 죽여버리지 못했다. 궁녀인 장금련( 張 金 蓮 )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바로 도망쳐서 방황후( 方 皇 后 )에게 달려 가서 보고했다. 황제를 구하러 달려온 방황후는 요숙고에게 한주먹을 얻어맞았다. 왕수란( 王 秀 蘭 )은 진국화로 하여금 등을 끄도록 시켰다. 그 후에 다시 총패( 總 牌 )인 진부용( 陳 芙 蓉 )이 불을 붙였다. 그러자 서추화( 徐 秋 花 ), 정금향( 鄭 金 香 )이 다시 불을 껐다. 이때 관사( 管 事 )가 진부용 이 불러 달려왔고, 이들 궁녀들은 체포된다. 주후총은 이로써 목숨이 끊기지는 않았지만, 너무 놀라서 계속 혼미해 있었고, 오래 지나서야 비 로소 깨어나게 된다. 사건발생후, 사례감( 司 禮 監 )은 그녀들에 대하여 여러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하여 그들에게 진술을 얻어낸다. 그러나, 그녀들이 하는 말은 모두 양금영의 말과 일치했다. 결국 사례감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양금영등은 모반을 공모했다. 장금련, 서추화등은 등불을 꺼서 그에 가담하였 으므로, 함께 처벌한다" 사례감의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주후총은 성지를 내리는데, "이들 역비( 逆 婢 )들과 조씨( 曹 氏 ), 왕씨( 王 氏 )는 침소에서 시해하기로 공모하였으니, 흉악하고 패륜적이므로 죄는 죽어마땅하다. 너희가 이미 심문을 통하여 명확히 알아냈으니, 주범과 종범을 구분하 명나라의 임인궁변( 壬 寅 宮 變 ), 속칭 궁녀모반( 宮 女 謀 叛 ) 26
지 말고 모두 율에 따라 능치처참하라. 그의 친족들중 이에 참가한 자가 있으면 하나하나 찾아내서, 금의위가 압송해서 법에 따라 처결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에 넣어라. 진부용은 비록 역비이나 막았으니 추궁하지 말라. 이렇게 명하니 이에 따라 처리하라." 형부등 아문은 황상 의 명을 받들어 바로 집행했다. 나중에 집행현황을 보고한 서류도 있다: "신등은 성지를 받들어, 즉시 금의위 장위사, 좌도독 진인등과 함께, 범죄자들을 붙잡아 묶어서 시정으로 끌고가서 하나하나 능지처참하였습니다. 시신은 효수하여 백성들에게 보이고, 황화승, 황릉말포는 물수하 여 관고에 넣어두었습니다. 이후 계속 각 범죄자들의 친족을 잡아서, 모두 법에 따라 처결하겠습니다" 성지에 나오는 조씨, 왕씨는 누구인가? 고증에 의하면 그녀들은 영빈왕씨( 寧 嬪 王 氏 )와 단비조씨( 端 妃 曹 氏 )라고 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이 성지를 근거로 조씨, 왕씨가 지시해 서 이번 궁중변란이 일어났다고 보기도 한다. 사례감에 기록된 양금영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이번달 19일 동소간에 왕, 조시장( 侍 長, 아마도 영빈왕씨, 단비조씨를 가리키는 듯)이 있었 고, 점등시에 서로 상의하여 말하기를: '우리 빨리 손을 쓰자. 그러지 않으면 (그의) 손에 죽을 것이다(누구의 손인지에 대하여 글자가 빠져 있는데, 아마도 황제에 대한 피휘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기재를 근거로 주모자가 조씨, 왕씨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만일 주모자가 조씨와 왕씨라면, 사료에 당연히 영빈왕씨와 단비조씨의 상황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에서 언급된 행형과정에서도 조씨나 왕씨에 대한 조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깊은 궁중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거리에 해가 비칠때도 그늘의 슬픔이 있는 법이다"이것이 명나라말기의 역사학자인 담천이 이 사건을 보는 입장이다. 사실이 어떠했는지는 더이상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이것도 하나의 궁중의 수수께끼사건이 되어 버렸다. 주후총이 아직 황제가 되기 전부터 그는 연단( 煉 丹 )과 선도( 仙 道 )를 익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온 신경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두었다. 그가 황제가 된 후에 인간세상의 부귀영화는 모두 누리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장생불사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그는 널리 도사, 방사를 불러모으고, 궁중안에서 재초( 齋 醮 )등의 행사를 벌였다. 규모를 계속 확대했을 뿐아니라, 돈도 많이 쏟아부었다. 그는 호색한이었다. 예부로 하여금 경성, 남경, 산동, 하남등지에 사람을 보내어 민간여자 천여명을 궁중에 보내도록 시텼다. 이후 여러번 궁녀를 뽑았는데, 그 숫자가 수 천에 달하였다. 가정26년(1547년)에서 가정43년(1564년) 사이에만 4번의 선발이 있었고, 모두 1080명의 8살부터 14살까지의 소녀들이 입궁했 다. 이들을 뽑은 이유는 첫째, "원성순홍단( 元 性 純 紅 丹 )"을 연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주후총의 음락에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입궁한 여인들은 아주 적은 인원만이 봉호를 받았고, 대다수는 노역에 종사하고 몸을 망쳐갔다. 주후총이 이 사건을 당한 것은 그의 이런 호 색행위와 관련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발생이유에 대하여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첫째는 가정제가 장생불사의 단약( 丹 藥 )을 제조하기 위하여, 궁녀들을 학대하여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당시 시례감에서 궁녀를 심문한 기록에 보면 "우리가 해치워 버리자. 그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으냐"라는 말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으로 추단해보면, 궁녀들은 곧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어차피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면 먼저 손을 쓰자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각종 자료들을 살펴보면, 사건 발생전에 이 궁녀들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 죽을 죄를 진 것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이런 점에서 추단하는 것이 아마도 장생불로의 단약을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가정제 주후총( 朱 厚 [ 火 + 悤 ])은 여색을 밝혀, 건강상태 가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럴수록 가정제는 도교의 선술에 빠져들어 장생불사를 기원했다. 유명한 방사( 方 士, 방술을 행하는 도사)들은 비약 ( 秘 藥 )이나 연단약( 煉 丹 藥 )을 바쳐 횡재를 하곤 했다. 도중문( 陶 仲 文 )은 가정제의 가장 총애받는 방사의 하나였는데, 한번 상을 내릴 때면 10 만냥의 은을 내리곤 했고, 관직도 일품에 달하게 하여, 그의 자손들까지 덕을 보게 되었다.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전국각지에서 비약과 연단약을 갖다 바치는 것이 줄을 이었다. 당시의 단약비방중 가장 유행하던 것은 "홍연( 紅 鉛 )"이었는데, 처녀의 월경과 약가루를 섞어서 만든 것이었는데 진사( 辰 砂 )와 비슷했다. 또 하나는 "함진병자( 含 眞 餠 子 )라는 것인데, 갓태어난 영아가 입에 물고 있는 핏덩어리를 얘기한다. 가정제 때는 1547년에서 1564년까지의 사이 에 4번에 걸쳐 궁녀를 뽑았는데, 1008명의 8세부터 14세까지의 어린 여자아이들을 궁녀로 뽑았다. 당시 항제는 궁녀들에게 하혈약을 강제로 복용시켜 궁녀들의 신체가 많이 상했을 뿐아니라, 피를 뽑은 궁녀들은 아마도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하에서, 궁녀들은 다른 궁녀들이 죽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도 조만간 죽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면 가정제와 동귀어진하자고 생각하였을 것이라는 명나라의 임인궁변( 壬 寅 宮 變 ), 속칭 궁녀모반( 宮 女 謀 叛 ) 27
것이다. 둘째는 가정제가 궁녀들의 원한을 산 것까지는 비슷한데, 다만 원인을 장생불로의 단약이 아니라 가정제의 포악함에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가정제는 성격이 잔폭하고 기뻐하고 화내는 것이 순간적으로 바뀌며, 사람을 대하는게 그때그때 달랐다는 것이다. 황 후부터 궁녀까지 모두 그랬는데, 황후만 보더라도 첫번째 황후인 진씨는 단지 가정제가 호색하는데 대하여 약간의 불만이 있다는 이유로 화 를 불같이 내며 진씨와 그 복중의 아들까지 다 죽여버린다. 진씨의 사망후에 가정제는 순비 장씨를 황후로 세우고 매우 아꼈는데, 역시 사소 한 일 하나로 화가 나서 장씨를 폐출시키고 덕비 방씨를 황후로 세운다. 황후 방씨는 바로 임인궁변에서 가정제의 목숨을 구해주는 그 여인 이다. 그런데, 방씨가 황제가 총애하던 조씨를 죽게 하였다는데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몇년후 황후의 후궁에서 불이나는데, 가정제는 그저 보 기만 하고 구해주지를 않아 방씨는 무섭고 놀라서 경황이 없는 중에 사망하게 된다. 황후들에게도 이렇게 대한 가정제가 나머지 궁녀들에게 어떻게 대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조선의 사서에 의하면 가정제는 색을 탐하였으나, 궁인이 아주 조그마한 잘못을 저질러도 절대 용서하지 않고 매질을 심히 하였다. 이로 인하여 200여명에 달하는 궁녀들이 맞아죽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대우는 궁녀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동시에 너죽고 나죽자는 심정까지 생기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궁녀들 이 "우리가 먼저 손을 쓰자. 그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된 것이다. 셋째 의견은 영빈 왕씨가 주모자라는 것이다. 왜 왕씨가 궁녀들을 교사하여 가정제를 살해하도록 하였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가정제는 신체가 약하고, 항상 기침을 하였던 그녀는 가정 9년이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가정 10년부터 가정제는 궁내에 흠안전에 제단을 설치하고 후 사를 잇도록 기도를 드렸는데, 예부상서가 감례사가 되어 문무대신들이 돌아가며 향을 올렸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가정 15년에 도사 소원 절( 邵 元 節 )등이 주청하여 단을 세우고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교묘하게도 그 해부터 후궁비빈들이 사내아이를 낳았고 여러명의 아이를 낳게 되었다. 영빈 왕씨도 이 해에 가정제를 위하여 아들을 낳게 된다. 관례에 따르면, 빈에서 비로 승격시켜주어야 하는데, 왠 일인지 가정제는 영빈을 비로 승격시켜주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영빈 왕씨는 원한을 품고 있었다. 가정제가 총애하는 조씨의 궁중에서 잘 때, 양금영등 궁녀 를 시켜 황제를 목졸라 죽이게 하여 보복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며, 책임을 조씨에게 덮어씌우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설은 설득력이 좀 부족 하다. 이미 자식을 낳은 비빈이 이렇게 큰 모험을 한다는 것도 상리에 맞지 않을 뿐아니라 십여명의 궁녀가 영빈 왕씨를 위하여 생사를 돌보 지 않고 황제를 살해하는데 가담하였다는 것도 가능성이 적다. 넷째, 정치투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직전 황제인 무종은 황음무도하여 자식을 남기지 않고 사망하였는데, 유언도 남기지 못하였다. 임종시에 태감에게 태후와 조정대신들이 상의하여 후사를 정하라고만 하였을 뿐이다. 자수황태후가 조정대신들과 상의한 후 흥헌왕( 興 獻 王 ) 의 아들인 주후총을 가정제로 세우기로 한다. 배분상으로는 세종과 무종은 당형제이므로, 황위계승의 원칙과 황가의 전통에서 보자면 자기의 생부인 흥헌왕은 숙부가 되고, 무종의 부친인 명효종을 부친으로 삼는 것이 맞다. 그런데, 가정제는 자신의 생부를 황제에 추증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황통을 이을 때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하지 아니하는 바람에 가정제의 즉위후에 이를 둘러싼 조정의 논쟁은 끊이지를 않았다. 내각수보인 양정을 중심으로 한 일파에서는 명나라 황실의 전통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장총등의 사람들을 대표로 한 일 파에서는 가정제의 뜻에 따라 처리하자는 입장이었다. 명나라 조정은 이를 둘러싸고 역사에서 말하는 소위 "대예의( 大 禮 儀 )"논쟁을 근 20년간 벌인다. 표면적으로는 예의에 대한 다툼이었으나, 실제로는 조정신하와 황제, 그리고 조정신하들간의 격렬한 권력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예의논쟁이 막 가정제의 의사대로 종결되자마자 임인궁변이 일어난다. 그리고, 단비 조씨와 영빈 왕씨가 관련된다. 이로써 추측해 보자면, 대예의논쟁에서 패배한 일파?에서 비빈을 이용하여 가정제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명나라의 임인궁변( 壬 寅 宮 變 ), 속칭 궁녀모반( 宮 女 謀 叛 ) 28
십자군의 동정( 東 征 )과 몽골군의 서정( 西 征 ) 2013.06.13 15:04 11세기부터, 유럽의 기독교회는 십자군의 원정을 시작했다. 제1차 원정은 교회가 만족할 결과를 얻었다. 1099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다. 얼마전에 나온 영화 <<천국>>은 바로 이 시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였다. 성전기사단의 출현으로 교회는 자신의 직업군대를 보유하게 되 었다. 십자군원정은 나중에 많은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불러일으키는데, 그중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정이 있다: 유럽과 머나먼 동방이 직접 적인 접촉을 개시하였다는 점이다. 제1차십자군원정후 약 반세기가 지나서, 1147년, 유럽은 제2차원정을 시작하나 실패로 끝난다. 15년후, 머나먼 몽골초원에는 한 남자아이가 출생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났을 때, 손안에는 핏덩이를 움켜쥐고 있었다고 한다. 유럽인들은 나중에 이것은 마귀의 상징이라고 하였 다. 이 남자아이는 나중에 역사에서 징기스칸으로 칭하는 인물이다. 현대의 의사들은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손안에 핏덩이를 움켜쥐고 있는 것이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다고 한다. 모친의 출산과정에서 어린아이가 핏덩이에 뒤덮일 수 있고, 마침 어린아이가 손으로 잡았다면 징기스 칸처럼 마귀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징기스칸이 25세되던 해인 1187년, 아랍의 영웅 살라딘(쿠르드인)은 예루살렘을 회복한다. 유럽교회는 즉시 1189년 제3차원정을 개시한다. 결 과는 여전히 실패였다. 이때까지, 십자군원정은 근 100년간 지속되었다. 다만, 인류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동안 지속된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사는 13세기로 접어들었다. 1202년, 유럽교회는 제4차십자군원정을 시작한다. 이번 원정은 좀 특별했다. 공격대상이 유럽인 자신이 었다. 즉, 동로마제국이었다. 이번 원정에서 재물에 대한 욕심이 분명히 드러난다. 동로마제국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 가 점령된 후, 유럽교회는 '성전'을 구호로 내걸었지만, 이미 더 이상 동방의 재물을 약탈하겠다는 실질을 감추지도 않았다. 1217년, 재물을 약탈하겠다는 꿈에 눈이 어두워진 십자군은 제5차원정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대상이 이집트였다. 그러나, 이번 원정이 끝나기 도 전에 유럽은 징기스칸의 소문을 듣게 된다. 1220년, 징기스칸은 북경을 떠나, 서쪽으로 진군한다. 우리는 지금으로서야 징기스칸이 서정 ( 西 征 )을 시작한 계기가 동서접경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헛점을 노리고 쳐들어간 것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현재, 우리는 한가지는 믿고 있다. 징기스칸의 곁에는 특수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어서 서방과 계속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민간관계는 오랫동안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1221년, 징기스칸이 파견한 사신이 코카서스지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항복을 요 구한다. 같은 해 제5차 십자군전쟁은 끝이 난다. 이때의 유럽은 동방에서 밀려오는 몽골군대를 상대해야만 했다. 동유럽지역의 작은 나라들은 몽골의 철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체 유럽 이 곧 몽골인의 수중에 들어갈 형국이었다. 그러나, 1227년, 몽골인들의 공격은 돌연 멈춘다. 금방 유럽교회도 알게 된다. 원태조 징기스칸이 죽은 것이다. 이후 한동안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권력투쟁에 돌입한다. 그리하여 잠시 유럽에 대한 공격을 멈추게 된다. 그리하여 1228년, 즉 징기스칸이 죽은 다음 해에 유럽교회는 제6차 십자군원정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1229년, 원태종 오코타이가 칸의 지위에 오른 후, 몽골의 최고지도자가 확정되었다. 유럽의 제6차 십자군원정도 이 해에 끝이 난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유럽인의 동정과 몽골군의 서정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같다. 몽골인들이 멈추 면, 유럽인들이 행동을 개시하고, 몽골인들이 행동을 개시하면, 유럽인들은 바로 멈춘다. 마치 어떤 방법이 있어, 몽골의 정보가 유럽에 적시 에 전파되었던 것같다. 사실은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멀리 당나라때에는 당나라이 수도에 기독교파가 하나 있었다. 중국역사에서 경교( 景 敎 )라고 부르는 일파이고, 유럽교회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라고 불리우는 일파이다. 5세기때, 동로마제국의 네스토리우스가 이 일파를 창건하 는데, 그는 예수는 사람이고 신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유럽교회에서는 이단으로 낙인찍혀 박해를 받게 된다. 할 수없이 동쪽으로 옮 십자군의 동정( 東 征 )과 몽골군의 서정( 西 征 ) 29
겨서 발전의 기회를 찾는다. 가장 멀리는 중국까지 갔다. 이 교파는 동쪽으로 전도하는 과정에서, 시리아, 이라크, 이란, 코카서스, 인도에 모 두 흔적을 남겼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리하여, 현재의 연구자들은 네스토리우스파 즉 중국의 경교가 어느 정도 동서문화교류에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종교적인 원인으로 이들의 의사소통업무는 역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몽골인들이 언제든지 서정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는 상황하에서 유럽교회들은 동방의 형세를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1235년, 몽골인들은 모스크바를 점령한다, 1241년에는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가 현재의 헝가리를 점령하고, 비엔나 부근까지 접근한다. 다만, 몽골군대는 다시 진격을 중단한다. 바투의 군대도 돌연 방향을 동쪽으로 되돌려 가버린다. 나중에서야 유럽인들은 알았다. 징기스칸의 후계자인 오고타이가 죽 은 것이다. 바투는 바로 돌아가서 권력쟁취를 위해 싸워야 했다. 이때, 유럽교회는 알게 된다. 멀리 동방에 몽골인들이 통치하는 제국의 내부 에 기독교가 통치하는 작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한 군주가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유럽교회는 1245년, 정식으로 몽골에 사신을 파견 한다. 이는 역사상 유럽과 중국간에 기록상 남아있는 첫번째의 직접적인 접촉이다. 유럽교회의 사신은 Joannes de Carpino(중문으로 柏 朗 嘉 賓 )와 프란시스파 전도사들은 교황의 서신을 가지고 몽골인을 만난다. 그들은 몽 골의 수도안 카라코룸(Qara-Qorum)까지 가서, 오고타이이후의 칸인 원정종 구육의 즉위식에 참가한다. 유럽교황은 몽골칸에게 보낸 서신 에서, 몽골인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인 것을 질책하고, 몽골인들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라고 요구하며, 동시에 몽골인들과 정치연맹을 결성할 것을 기도하였다. 원정종 구육은 교황에게 회신을 보내는데, 서신에서는 "너는 서신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세례를 받아야 만 하고, 기독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이에 대하여 간단하게 답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왜 우리가 반드시 그래야 하는지....너희는 단지 서양인들만이 기독교도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한다.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하느님이 도대체 누구에게 은혜를 베풀었는지를 알 수 있단 말인가?...하물며 너희는 평화를 갈망하고, 너희의 행복을 우리에게도 주고자 하는데, 너희 교황이 즉시 여 러 기독교 귀족들을 친히 데리고 찾아와서 배알하고, 평화를 체결하라. 그래야만 우리는 너희가 확실히 우리와의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단계의 전후에 유럽교회가 몽골에 파견한 사신은 하나뿐이 아니었다. 또다른 것은 도미니크회 전도사인 아스린이 이끈 사절단이 몽골에 도착했다. 몽골칸도 사신을 유럽에 보내어 교황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 중의 하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하늘의 법에는, 라틴파, 그리스파, 아르메니아파, 네스토리우스파, 야곱파 및 모든 십자가에 기도하는 사람들 간에는 차이가 없다. 그들은 우리 제국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 다. 우리는 교황도 그들을 나누지 말고,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보편적인 사랑을 베풀기를 바란다" 역사학자들은 이 서신이 위조되었다고 보기 도 하나, 증거는 부족하다. 이서신은 아마도 원정종 구육이 사망한 후의 섭정자에 의하여 초안되었을 것이다. 이 서신을 통하여 몽고에는 확 실히 기독교도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역사학자는 몽골의 세번째 칸인 원정종 구육이 기독교도라고 한다. 그러나, 몽골의 기독교도는 모두 당초 유럽에서 이단으로 불리우던 네스토리우스파이다. 이 교파는 유럽교황에 대하여 비교적 모순적인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유럽정통교회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것을 바 라면서도 또한 다시 탄압을 받을까봐 두려워 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전후하여, 중국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은 한편으로는 유럽교황 에게 '신앙고백서'를 보내기도 하고, 또 다른 측면으로, 몽골의 입을 빌어, '종교자유'를 요청했다. 당시 몽골칸의 신변에는 확실이 네스토리우 스파 기독교도인 고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교화외 몽골칸의 정식 직접접촉은 한계가 있었다. 1248년, 몽골의 세번째 칸인 원정종 구육이 사망한다. 몽골칸의 다툼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1249년, 유럽은 즉시 제7차십자군원정을 시작한다. 이 교류과정에서, 우리는 교황이 몽골인들에게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였 다고 질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십자군도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몽골칸은 교황이 질책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황의 사신은 할 수 없이 요구조건을 낮추어 기독교도들은 죽이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 말에 숨은 뜻은 기독교도가 아니면 죽여도 좋다는 취지였다. 이후, 원헌종 몽케칸을 거쳐, 1260년, 원세조 쿠빌라이가 칸에 오른다. 그는 중국본토에 주력한다. 1270년, 유럽에서는 제8차 십자군원정을 일 으키는데, 마지막 십자군원정이 된다. 제1차원정으로부터 계산하자면 거이 200년에 걸친 원정이었다. 교황이 몽골에 사신을 보낸 30년후인 십자군의 동정( 東 征 )과 몽골군의 서정( 西 征 ) 30
1275년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도착해서, 동서교류에 큰 공헌을 한다. 역사학자에 따르면, 유럽교황이 몽골과 직접 접촉한 것은 정치적인 의도 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몽골과 손을 잡고 공동으로 이슬람교에 대처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방의 제왕들은 유럽의 교황이나 국왕에 비하여 '종교자유'를 더욱 선호했다. 14세기에 들면서,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제후들이 속속 이슬람교를 받아들인다. 유럽교황이 몽골의 기독 교도와 손을 잡고 공동으로 이슬람교에 대응하려던 의도는 철저히 물거품이 된다. 사람들은 왕왕 이런 명제를 생각한다: 유럽교회의 통치하에서, 어떻게 하여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유럽십자군원정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14세기에,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각 도시에서 나타난다. 양자간에는 필연적인 관련이 있다. 르네상스는 유럽내부의 자체적인 변 화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교류와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십자군원정은 처음에는 약간이나마 '성전'의 의미가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재물을 쟁 취하려는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동방의 재물은 가난한 유럽인들이 침흘리는 대상이었다. 이런 재물은 유럽인들의 기독교의 금욕적이고 청빈 을 중시하는 견해를 바뀌게 반들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 초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시작된 것이다. 다음으로, 르 네상스의 내용도 고대그리스, 고대로마로부터 왔는데, 이들 역사문헌은 그리스어를 정종으로 하는 동로마제국에 장기간 보존되어 있었다. 셋 째로, 이슬람교는 중국의 제지기술을 배운 후, 대량의 고대그리스 문헌을 번역하고, 이는 거꾸로 유럽교회의 통치하에 있던 유럽인들을 자극 하였다. 그리하여, 십자군원정의 최종결과는 우매한 유럽교회의 통치는 자신의 적에 의하여 문화적으로 패배하게 된다. 이런 국면이 형성된 하나의 원인은 바로 문화교류이다. 그중, 몽골인들은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Joannes de Carpino등이 몽골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북방의 초원지 대를 보았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곳은 남송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중국이 진정 한 부와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중에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장강유역에 도착한 후, 그는 항주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 름다운 도시라고 감탄했다. 항주와 비교하자면, 유럽에서 가장 번화했던 베니스도 시골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1299년, 마르코 폴로의 중국에 관한 책이 출판되고, 유럽에서 중세기의 최대 베스트셀러가 된다. 르네상스운동중에도 널리 전파된다. 200년후, 컬럼부스는 마르코폴로여행기 를 읽으면서 300여곳에 메모를 해놓고, 그 후에 부유한 중국으로 가서 돈을 벌기 위해 항해를 떠나게 된다. 십자군의 동정( 東 征 )과 몽골군의 서정( 西 征 ) 31
몽골이 일본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2013.06.13 15:03 일세를 풍미했던 몽골은 유라시아대륙을 휩쓸었고, 싸우는 전투마다 승리했고, 격파하지 못한 성이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두번이나 쳐들어 갔지만, 모두 참혹한 실패로 끝이 났다. 몽골인들이 일본으로 진격한 이유는 일본이 몽골제국에 신복( 臣 服, 굴복하여 신하로 자처)하지 않았 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여러번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일본으로 하여금 신하를 자처하고 공물을 바치도록 요구했다. 고려국왕도 일본에 서 신을 보내어 몽골인들에 굴복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매번 쿠빌라이의 요구를 가볍고 멸시적으로 거절했다. 이같은 무례한 나라 에 대하여 군림천하의 몽골대칸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두번에 걸친 대규모의 일본본토침략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제1차몽골의 일본침입은 1274년에 발생한다. 일본으로 진격하는 원정군은 조선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규슈로 향한다. 원정군은 모두 2만5 천명이었고, 그 중에는 몽골인과 고려인이 각각 절반씩이었다. 그리고 일부 여진족과 일부 한족이 끼어 있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몽골인 홀돈( 忽 敦 )이었고, 두명의 부사령관은 고려인 홍다구( 洪 茶 丘 )와 한인 유복형( 劉 復 亨 )이었다. 원나라군은 하카다( 博 多 )항까지 항행하여 갔고, 먼저 쓰시마섬( 對 馬 島 )와 일기도( 壹 岐 島 )를 점령했다. 그후에 세 곳으로 나누어 규슈에 상륙해서 내륙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삼로( 三 路 )의 군 대중에서 일로( 一 路 )는 주력군이었고, 양로( 兩 路 )는 보조군이었다. 주력부대의 상륙지점은 개략 나카사키( 長 崎 ) 부근이었다. 제1차 몽고침입을 맞이하여, 일본의 카마쿠라( 鎌 倉 ) 막부는 일부 정규군을 소집하여 응전했다. 규슈연해의 각 번( 藩 )들도 긴급히 사무라이와 민병을 조직하여 전투에 참가한다. 참혹한 전투는 20여일간 지속되었다. 유복형은 격전중에 전사하고, 원나라군은 절반을 잃고 바닷가로 물러나서, 대포에 의 지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원나라군의 사상자가 많아, 패전은 불가피했다. 화살과 식량도 바닥이 났으므로 더 이상 진지를 사수할 수도 없었 다. 그리하여 원나라군은 배에 올라타고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제2차몽골의 일본침입은 1281년에 발생한다. 쿠빌라이는 중국을 통일한 후, 제2차일본침입에 착수한다. 원나라제국의 방대한 원정군은 강소절 강과 조선에서 동시에 출발한다. 이번 출정의 군대진용은 이전보다 훨씬 장관이었다. 대소선박이 모두 5천척이고, 군대는 약 20만이었다. 그 중 몽골인이 4만5천명, 고려인이 5만여, 한인이 약 10여만이었다. 그중 한인의 절반이상은 신부군( 新 附 軍, 즉, 개편한 남송의 군대)이었다. 원 정군에서 몽고인들은 당연히 작전의 핵심역량이었다. 6월상순, 원나라군은 상륙작전을 시도한다. 상륙지점은 구룡산( 九 龍 山 )으로 제1차때 상 륙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번 원정군은 더욱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다. 몇명의 몽골군 고급지휘관이 연이어 전사한다. 격전은 1개 월여간 지속되었고, 원정군의 손실이 이미 1/3을 넘어섰다. 일본연해의 바닷가에 견고한 석장( 石 墻 )을 쌓아두었으므로, 원나라군의 계속된 진 공도 돌파하지 못하여 무위로 돌아갔다. 7월하순, 원나라군의 양식과 화살이 기본적으로 바닥났다. 그리하여 원나라군은 철수하게 된다. 사료를 분석해보고, 필자는 몽골이 두번에 걸친 진격에서도 일본을 정복하지 못한 주요한 이유는 아래와 같은 여섯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제1차일본진공때는 병력이 부족했다. 남송이 아직 멸망하지 않아서, 몽골은 중국의 북방만을 지배하고 있었고, 당시 몽골제국은 병사를 모아 남송을 치는 것을 준비하고 있어서, 일본에 진공하는 군대는 그저 5만여에 불과했다. 먼길을 가서 싸우는데다, 몽골인들은 바다를 건너 서 전투하는데는 익숙하지 못했다. 여기에 일본민족은 강인하였다. 그리하여 병력차이가 현격했다. 병력부족의 원인은 전선이 여러개였다는 것을 제외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쿠빌라이가 당시 군사력이 강했던 일본을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둘째, 몽골은 전술상으로 전혀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일본인의 견해에 따르면, 몽골인들의 전투력은 상상한 것처럼 강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개시후, 일본인은 몽골인과 접근전방식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몽골인들의 궁술과 대포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몽골병사들은 힘든 것은 잘 견디고, 필요하면 말고기를 먹고 말피를 마시면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작전에서는 기동력이 좋고, 적은 식량과 풀만 가지고 도 사병의 먹고 입는 문제는 현지에서 강탈하여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전쟁에서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도저히 발휘하지 몽골이 일본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32
못했다. 내륙의 주민거주지까지 진입하지도 못했다. 그러다보니 약탈할 땅도 없었다. 이와 비교하여 일본인들의 전술은 훨씬 고명했다. 셋째, 몽골은 무기장비에서도 우세하지 못했다. 대일작전에서 몽골은 제1차침입때 무기장비의 면에서 자기들에 비하여 손색이 없는 적수를 처음 만난다. 일본인들의 우세는 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사의 철갑( 鐵 甲 )에서도 두드러졌다. 원나라군의 보통사병의 도검이 일본도와 부 닥치면 바로 부러졌다고 한다(당시 일본의 야금술과 도구제작기술은 세계일류였다. 일본도의 성능은 북인도와 서아시아에서 나는 다마스커스 검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였고, 일본강철은 중국강철보다 훨씬 강했다). 거리가 조금만 멀어지더라도 몽골군의 화살은 일본무사의 갑옷을 뚫 지 못했다. 넷째, 일본사무라이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아서, 전투기술의 측면에서 몽골인들보다 뛰어났다. 몽골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 인들은 단독격투에서 뛰어났다고 한다. 이는 일본인들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일본인들은 원나라군대에서 한인들에 대한 평가는 아주 낮았다. 그들이 보기에 한인군대는 죽기를 겁내는 겁장이였고, 사기도 낮았으며, 가장 표준적인 날나리부대였다. 다섯째, 바다를 건너는 전쟁임에도 비밀유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두번의 침입은 모두 기습이 아니었다. 일본은 사전에 정보를 취득하고 있 었고, 충분한 전투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제2차침입에 대하여 일본인들은 엄밀하게 원나라제국의 동향을 파악했고, 몽골의 공격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이때 일본정국은 안정되어 있었고, 북조시종( 北 條 時 宗 )은 카마쿠라막부와 일본 각번에 대하여 잘 통제하고 있 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하여 인력과 물자를 많이 동원할 수 있었다. 막부는 규슈에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하카다만일대에 몽골군이 상륙할만한 곳에 석방을 쌓았다. 이로써 몽골기병들의 활동을 제약하게 하였다. 사실상 몽골병사들은 이 방어선을 시종 뚫지 못하 였던 것이다. 여섯째,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태풍이 일본을 도와주었다. 두번의 침입에서 모두 맹렬한 태풍의 습격을 받아, 손실히 참혹했다. 1281년 제2 차침입때인 8월 1일, 태평양상에 돌연 맹렬한 태풍이 발생한다. 퐁풍은 4일간 지속되었고, 원나라군의 남방함대의 함선은 기본적으로 모두 파 괴되었다. 북방함대의 함대도 절반이 부서졌다. 북방함대의 남은 함선에 지휘관과 일부 몽골군과 고려군을 싣고, 전장터를 떠나 고려로 돌아 간다. 남방군의 지휘관과 고위장수들은 희망이 없다고 보고, 대부대를 남겨놓고, 남방함대의 잔존한 몇 척의 배에 올라타고 도망치게 된다. 이때 구룡산의 바닷가에는 아직도 거의 10만에 이르는 원나라군대가 남아있었다. 이들은 보급선과 퇴로를 차단당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도 없게 된다. 그리하여, 절망적인 지경에 놓이는 것이다. 3일후, 일본인들이 반격을 시작하고, 잔존한 원나라군은 팔각도 ( 八 角 島 )라는 협소한 지역으로 몰아넣고, 공세를 취한다. 그리하여, 원나라군은 대부분 피살당하고, 남은 2만여명은 포로로 붙잡힌다. 몽골이 일본정복에 실패한 이유는? 33
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 몽고군의 서방정벌중 최대의 참패 2013.06.13 15:02 1260년 8월의 어느 날, 이집트의 마메루크(Mameluke) 술탄인 쿠두스(Kudus)는 12만 대군을 이끌 고 카이로를 출발해서, 시리아로 향했다. 거기서 몽골군과 결전을 벌이고자 했다. 이전 몇년동안 몽골의 서방정벌군은 훌레구의 지휘하에, 추풍낙엽처럼 페르시아와 티그리스/유프라 테스강유역을 석권했다. 2년전에 바그다드가 함락되었고, 압바스왕조(Abbasid Caliphate)의 마지 막 군주이자, 이슬람세계의 정신적 지도자인 알 무스타심(al-Mustasim)은 몽골대군에 생포되어 죽 임을 당하였고, 이로써 압바스왕조는 멸망했다. 7개월전에는 아랍인의 아시아 최후의 중요도시인 다 마스커스가 함락되었다. 이제 이집트의 마메루크정권은 이슬람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군사력이 되 었다. 쿠두스는 전체 이슬람세계가 절벽에 몰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 만회할 중책이 자신의 어깨에 달려 있다는 것도 알았고, 생사존망이 이번 결전에 달려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만일 실패한다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이슬람정권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쿠두스의 이번 결전시기는 아주 잘 선택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몇 개월전에 몽골의 칸인 몽케가 서 거했고, 훌레구의 형인 쿠빌라이와 아릭부케간에 칸의 지위를 놓고 내분이 벌어져 있었다. 훌레구는 십여만대군을 이끌고 이를 지원하러 갔다. 그저 부장인 체드부화가 이끄는 2만명의 병사가 다마스 커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쿠두스는 처음에는 훌레구가 동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경거망동 하지 못했다. 그는 다마스커스에 얼마나 많은 몽골군이 남아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기사들이 군사행동을 벌여 체드부화의 군사력이 얼마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시돈(Sidon)의 루른백작과 베이루트의 성기사단의 존은 군대를 이끌고 몽골군 순찰대를 습격했다. 전투중에 체드부화의 조카가 피살되었다. 체드부화는 대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반격했고, 존의 성기 사부대를 철저히 무너뜰ㅆ다. 그 후에 시돈을 함락시키고, 철저히 약탈했다. 몽골인들의 이러한 징 벌조치는 결과에 있어서 좋지 않았다. 십자군정권과 결렬하게 되었을 뿐아니라, 병력의 규모를 드러 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술탄 쿠두스는 다마스커스의 몽골군 병력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는 하늘이 준 좋은 기회라 여겼다. 그러나, 그의 수하에는 겨우 5만의 마메루크병사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즉시 몽골 사신의 목을 잘라 군중들에게 보여주고, 전국에서 이슬람병사를 모았다. 그리하여 12만대 군을 이끌게 된 것이다. 이때 모여든 병사들은 이집트 내륙과 리비아 사막의 유목민족이었다. 그래 서 그들은 몽골군이 얼마나 무서운지 전혀 몰랐고, 사기가 높았다. 그리고는 시리아로 가서 체드부 화와 결전을 벌이고자 하였다. 출정하기 전에, 쿠두스는 사신을 파견하여 십자군의 팔레스타인 거점 과 연락했고, 이전의 악감정을 버리고, 힘을 합하여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자고 건의했다. 십자군의 기사들은 막 체드부화의 군대에 패배를 당해서 투지를 잃고 있었으므로 쿠두스의 건의를 거절했다. 다만 마메루크대군이 팔레스타인을 지나가는 것은 방해하지 않겠다고 보증했다. 마메루크는 아랍어로 "노예"라는 뜻이다. 9세기부터, 압바스왕조의 칼리프들은 소아시아에서 코카서 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 몽고군의 서방정벌중 최대의 참패 34
스까지 노예를 매입했다. 그리고 엄격히 훈련시킨 다음에 기병부대를 조직했고, 칼리프가 직접 지휘 했다. 이들을 가지고 군대를 가진 아랍 각 부락의 수령들과 힘의 균형을 맞추었다. 나중에 아랍 각 지의 술탄들은 칼리프를 모방해서, 자기의 마메루크부대를 결성했다. 마메루크병사는 비록 노예신분 이지만, 주인으로부터 중시를 받았으므로, 대우도 괜찮고 수입도 많았으며, 마메루크 장군은 왕왕 정계의 고위직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13세기의 이집트는 원레 아유브왕조(Ayyubid)의 통치하에 있었다. 아유브왕조는 1174년에 그 이름 도 유명한 살라딘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아유브왕조가 생존을 의지한 마메루크군대는 살라딘에 의 하여 조직되었다. 살라딘의 자손은 내려갈수록 엉망이었다. 13세기초에 이르러는 압바스왕조의 속국 이 되었다. 1250년, 아유브왕조의 술탄 아-살리흐(as-Salih)가 병으로 사망한다. 돌궐출신의 마메 루크 장군인 아이바크(Aybak)는 나이어린 후계자를 죽여버리고, 아-살리흐의 미망인을 처로 삼고, 이집트 마메루크왕조를 세운다.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이 왕조를 승인하지 않고, 아이바크와 여러차 례 무장충돌을 일으킨다. 1258년, 몽골정벌군이 압바스왕조를 멸망시키고, 바그다드는 참혹하게 유 린당하게 된다. 그러자, 카이로는 이슬람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집트의 마메루크왕조 는 이때부터 당당하게 이슬람세계의 기둥을 자처하게 된다. 마메루크군대의 전투력은 이슬람세계에서는 최고였다. 원인은 병력자원과 훈련에 있었다. 매년 아랍 인신매매상인은 코카서스지역과 중앙아시아초원에서 수만의 아이들을 유괴하거나 납치해서, 그들을 바그다드, 다마스커스, 카이로의 노예시장에 팔았다. 아랍의 술탄들은 자질이 가장 뛰어난 아이들을 골라서, 군사학교에 보내고, 미래의 마메루크병사로 양성했다. 가장 환영받는 마메루크의 인력자원 은 코카서스에서 온 그루지아와 투르크 부락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역사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그루지아에서 매년 유괴되어 매매되는 아동이 2만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코카서스 산주민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은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고,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 여 병사로 삼기에는 가장 좋았다. 이집트 마메루크?오가 건립된 후 500년간, 마메루크 병사는 거의 모두 코카서스지역에서 왔다. 마메루크 군사학교는 아주 과학적인 훈련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아이들은 먼저 아랍어와 이슬람교 의를 배우고,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준다. 14살이 되면 시스템적으로 신체와 군사기술훈련을 받 는다. 여기에는 만도( 彎 刀 )를 사용하는 법, 긴창과 활을 사용하는 법, 기마술이 포함된다. 궁술은 특 히 중시되었다. 아이들은 먼저 땅 위에서 활쏘는 법을 배우고, 나중에는 말 위에서 활쏘는 법을 배 운다. 나중에는 말을 채찍으로 치고 달리면서 활쏘는 법을 익힌다. 기본적인 군사기능을 장악하게 되면, 아이들은 기마술훈련(Hippodrome)을 받게 된다. 즉, 기병전술단위의 기동훈련이다. 이곳의 아이들은 전진 후퇴 우회등의 각종 전술과 기동중의 진형유지등을 배운다. 마메루크기병은 모두 중기병( 重 騎 兵 )이다. 머리에는 강철로 만든 투구를 쓰고, 몸에는 강사로 짠 갑 옷을 입는다. 마메루크기병의 투구는 유럽기사의 것보다는 많이 가볍다. 그러나 방호효과는 크게 나 쁘지 않았다. 무기와 장비에는 강궁, 긴창, 날카로운 다마스커스칼과 방패이다. 마메루크강궁의 길이 는 몽골강궁보다 하나 더 길었고, 사정거리고 길었으며, 뚫고 들어가는 힘도 강했다. 다만 속도는 느렸다. 이들이 타는 말은 유명한 아랍의 써러브렛이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었으며 달리는 속도가 빨랐고, 지구력도 괜찮은 편이었다. 몽골기병과 다른 점은, 마메루크기병은 기본적으로 1인1마였기 때문에, 기동성에서 몽골기병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 몽고군의 서방정벌중 최대의 참패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