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진 형 상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낙동강으로 흐르는 으뜸천 병성천 의 역사와 문화 (rt4567@korea.kr) 강은 문화를 이룬다. 인류문화의 발상지는 모두 강을 끼 꽃피웠다. 고 형성되었다. 강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 조선시대 이름난 책인 세종실록지리지, 연려실기술 요한 조건이자 새로운 문화를 전달하는 전파자의 역할을 한 등에는 낙동강의 어원을 상주에서 찾고 있다. 낙동강은 상주 다. 이러한 강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경상북도 상 의 옛 이름인 낙양(洛陽), 즉 상락(上洛)의 동쪽에 와서야 강 주의 낙동강이다. 으레 상주하면 낙동강을 떠올릴 만큼 낙 다운 강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상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동강을 뺀 상주는 상상할 수 없다. 상주 사람들은 오래전부 낙동강을 바라보고 삶을 이어왔고, 지금도 시간을 거슬러 역 터 낙동강을 끼고 삶의 터전을 이루었고, 농사를 짓고 삶을 사와 문화를 담은 강물을 바라보며 그네들의 삶을 살아간다.
넓은 들을 배경으로, 낙동강의 풍부한 수자원은 예로부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꽃피운 상주의 원동력이다. 강은 단순 히 물은 담아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사 문화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또한 강은 크고 작은 여러 하천들이 모여 큰 물줄기를 이룬다. 낙동강 역시 상주의 여러 하천들이 곳곳에 서 모여 들어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냈다. 이 가운데 여기 서는 상주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으뜸천 이라 할 수 있는 병성천 을 만나보자. 강의 흐르는 모습이 다양한 것처럼, 이름 역시 지역에 따라 굽이굽이 흘러갈 때마다 변화무쌍하다. 병성천 1) 은 옛 속문 산이던 백운산의 북서쪽에 있는 이화리의 옛 소리지역인 원 상리 고개에서 시작하여 이화천( 以 花 川 ) 이라는 이름을 가 지고 북서쪽으로 흐른다. 한편, 김천 지역에서 용문산이라고 도 불리는 웅산( 熊 山 )의 국수봉 동쪽 영오리에서 발원하여 영오리 북쪽 이등지들에서 병성천 이라 이름을 얻은 물줄기 가 옥산을 향해 북쪽으로 흐르는데 거창리의 창말 북쪽에 있는 원말 북쪽 500m 지점에서 이화천 과 만난다. 이화천의 발원지인 백운산 북서쪽 계곡은 상주의 공성면 지역에서 지금의 김천시 감문면 문무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 이곳의 마을 이름은 본래 소리 音 里 였다. 소리 는 이 음리 2) 로 이름이 바뀌어 고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원 이음<지금의 원상리> 상이음<지금의 상리> 중이음<지금 의 중리> 하이음<지금의 하리>으로 불리다가 행정구역 개 편으로 화봉리( 花 峰 里 )와 아울러 지금의 이화리( 以 花 里 )가 된 것이다. 소리천의 옛 물길 이름은 소리정 이라는 정자와 소리교 라는 옛 다리를 통해 우리 곁에 오롯이 남아 있다. 공성면 소 리천 가에 있었던 소리정 이라는 옛 정자와 지금은 사용되 지 않지만 남아 있는 소리교 는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 앞 옛 다리 이름인 것이다. 공성면 도곡리와 장동리에서 내려오는 물은 장동천( 掌 洞 川 ) 이라는 이름으로, 옥산의 북쪽 400m 지점에서 합류하여 북동쪽 500m 지점에서 백운산 북쪽 산현리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내려온 백운천( 白 雲 川 )과, 백두대간의 개터재에 서 발원하여 회룡골로 내려와 오광리를 거쳐 온 물이 서산의 서쪽에서 온 물과 금계리 동쪽 들판에서 만난 물이 동서 양 쪽에서 동시에 병성천에 합류한다. 또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250m 지점에서는 백운산 북쪽에 서 발원한 평천( 平 川 )이 산태백재에서 발원한 물과 공성면 평천1리 주막걸 조상걸 서쪽에서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르 다가 병성천에 합류하여 북쪽으로 흐른다. 청리면 하초마을 동쪽과 공성면 용안리 다부동 마을 서 쪽 사이에서 병성천은 무곡리에서 북쪽으로 흘러온 물과 만 난 다음 가천리 신촌 북쪽에서는 마공에서 흘러온 물을 받 아들인다. 수선산과 돌티에서 발원하여 청상지에 모였다가 서북쪽으 로 흐르던 청하천( 靑 下 川 )은 원장리 서쪽과 수상마을 남쪽 에서 병성천에 합류한다. 수상마을 북쪽 500m 지점에서 청리면 월로리 대리골에 서 온 물을 아우르고 100여m 더 북상한 다음 청리천( 靑 里 川 )을 받아들인다. 청리천은 백학산 동북쪽인 외남면 충티에서 발원하여 소 1) 조희열, 상주시사 참고 2) 兪 昌 均 은 삼국시대의 漢 字 音 民 音 社 1991에서 音 을 삼국시대에는 이음 < 以 音 > 으로 발음했다고 한다. 하천과 문화 Vol.10 14 15 No.1 겨울
곡지(召谷池)에 모였다가 동쪽으로 흐르면서 외남면 송지못 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형제의 우애가 남달랐던 것으로 널 에서 남동진한 물을 외남면과 청리면의 경계지점인 청리면 리 알려진 월간 창석 두 형제의 사당이다. 월간 창석 형제가 덕산리 신전 마을 북쪽에서 모으고, 그곳에서 동쪽 550m 지 자리한 이 곳을 흔히 달래 라 일컫는다. 흥양 이씨인 두 형제 점인 청리면 율리 들마 남서쪽에서 외남면 흔평리 내골 북쪽 는 다른 지역에서까지 달래 이씨로 알려져 있다. 달래 마을 내금지에서 내려온 물을 거두어 청리천이라는 이름으로 병 앞으로 천이 흐른다. 성천에 든다. 계속 북상하던 병성천은 갑장산 남쪽 와목에서 발원하여 용흥사 남쪽 수둥디미 산성 북쪽을 돌아 질구내 연악서원 앞 을 지나 온 물을 양촌리 구포마을 북쪽과 지천리 뒷미 서쪽 에서 받아들인다. 이곳에서 북동진한 병성천은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 앞 소천교 를 지나 화개동 서쪽을 지나면서 동시내 혹은 동수 내 라는 이름을 얻고, 복룡동 동쪽 끝에서 북천을 맞는다. 창석사당 복룡동에서는 복룡동유적지 발굴 조사결과 사벌주 내답 (沙伐州 內沓) 이라 쓴 석기가 나와 이 지역의 옛 지명을 짐 작할 수가 있다. 북동쪽을 향해 내려가던 병성천은 낙상동 남쪽 낙상산(洛 上山, 155.8m) 남쪽 아래에서 구리내[銅川]를 합류하고 살 짝 남동진하여 동쪽으로 낙동강을 찾아들기 직전 욕심스레 사벌면 덕담리 백담저수지(白潭貯水池)에서 온 삼덕천(三德 川)을 마지막으로 아우른다. 체화당 이처럼 병성천은 상주의 중심부를 흐르는 하천으로 주변 에는 병성천과 함께한 오랜 역사를 대변해 주는 많은 유적 월간과 창석 두 분의 우애는 예부터 아주 각별하였다고 전 들이 확인된다. 상주 공성면에서 상주시를 거쳐 낙동강까지 해진다. 월간선생은 1558년에 출생하고, 창석은 1560년에 출 흘러가는 동안 오랜 세월 그네들의 삶과 함께 하면서 다양 생하여 어릴 때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쫓고 따르며 희롱하 한 역사 문화를 꽃피웠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병 면서 놀다가 조금 커서는 같은 스승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산 성천이 지나간 고을고을마다 남긴 문화유적의 발자취를 더 사에서 독서하며 잠시라도 서로 따르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듬어보자.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하늘이 주는 큰 재앙을 맞이하였으나 친척도 드물다보니 오직 두 사람이 천명으로 하여 서로 의지 이전, 이준 형제애를 담은 형제급란도 하였던 것이다. 1593년 봄에 창석 선생은 월간 선생을 따라서 현재는 모동 공성면을 지나 청리면 소재지에 이르기 전 병성천의 서쪽 지역인 중모현(中牟縣)에 있는 고모담(錮鉧潭)에서 군대를 으로 가면 낮은 산 아래 아담한 고택 2채가 눈에 띤다. 한 곳 일으킨 상의군(尙義軍)의 향병소에 있었다. 그때 왜적이 들 은 체화당 이며 다른 한곳은 창석사당 이라 이름 붙여져 있 이닥쳤는데 창석선생은 갑자기 토사곽란이 일어나서 형인
월간선생에게 나는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형님은 빨리 이곳 을 벗어나서 선조의 제사를 받드십시오. 라고 하니, 형은 창 석 선생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전에 형제가 서로 내가 죽겠다고 한 일도 있었는데 내가 어찌 혼자 살겠다고 너 를 버리고 갈 수 있겠느냐? 라고 하면서 창석 선생을 업고 백 화산으로 올라가서 모두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훗날 형보다 벼슬이 높았던 창석 선생이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서 위와 같은 사실을 중국의 화공에게 이야기 하니 그들이 감동 이 되어 그림을 그려 주었는데 그 그림에다가 서문과 시문을 넣어서 형제급난지도( 兄 弟 急 難 之 圖 ) 를 만들었다.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타국에서도 얼마나 실감나게 이야기 했는 지, 그림 속 백화산의 모습은 실제 백화산과 닮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지금까지도 형제의 우애 하면 으레 창석 월간 형제를 떠올릴 정도이다. 형제급란도(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17호) 이 전 ( 李 㙉 ) 1558(명종 13) 1648(인조 2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흥양( 興 陽 ). 자는 숙재( 叔 載 ), 호는 월간( 月 磵 ). 수인( 壽 仁 )의 아들이다. 동생 준과 함 께 류성룡( 柳 成 龍 )의 문하에서 퇴도( 退 陶 )의 학설을 배워 주자서( 朱 子 書 )를 전심으로 공부하였다. 임진왜란 때 준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적중에 포위된 적 이 있었는데, 그때 동생을 등에 업고 적진 탈출에 성공하여 형제가 무 사할 수 있었다. 뒤에 준이 감복하여 화공을 시켜 이 모습을 그리게 하 고 급난도 急 難 圖 라고 하니, 당시의 명공 거경들이 이 일을 가영 ( 歌 詠 )하였다고 한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여 세마를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 지 않았다. 인조 때에는 지례현감 을 제수 받았으나 사퇴하였다. 42세에 두 개의 낙사계를 합계하는 데 동참하였으며, 1604년에는 수선서당을 중건하였고, 1606년에는 도남서원의 창설에 공을 세웠다. 55세 때인 1612년에는 이준, 정경세, 조찬한, 김지복, 정호선, 전이성 등과 함께 집에서 매화를 완상하는 문회를 열었고, 1617년에 옥성서 원에서 강회를 열 때는 임숙영, 고인계, 최현 등 많은 분들이 모이게 되었다. 1622년에는 5월에 연악서당에서 문회를 가지고 연악문회록을 남 겼으며, 7월에는 낙동강에서 배를 띄우고 시를 짓는 임술범월행사를 가지면서 임술범월록을 남기었다. 상주의 옥성서원( 玉 城 書 院 )에 배향 되었다. 이 준( 李 埈 ) 1560(명종 15) 1635(인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흥양( 興 陽 ), 자는 숙평( 叔 平 ), 호는 창석( 蒼 石 ). 조년( 兆 年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탁( 琢 )이고, 아버지는 수인( 守 仁 )이며, 어머니는 신씨( 申 氏 )이다. 류성룡( 柳 成 龍 )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 (선조 2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이듬 해 경 상도도사가 되었으며, 이 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 ( 正 邪 )를 밝힌 중흥귀감 中 興 龜 鑑 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 인홍( 鄭 仁 弘 )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들을 주변에 모았으나 가담하 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류성룡( 柳 成 龍 )이 국정운영의 잘못 등으로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 해 가을 소모관( 召 募 官 )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 防 禦 使 )와 협 력해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 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 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했고, 조도사( 調 度 使 )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 섬의 군 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 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 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 대에서 인조 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해 많은 시무책( 時 務 策 )을 제시했으며, 정경세와 더 불어 류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 한, 정치적으로는 남인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 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 玉 城 書 院 )과 도남서원에 배향되었고, 풍 기의 우곡서원( 愚 谷 書 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 을 남겼 으며, 형제급난지도 兄 弟 急 難 之 圖 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 文 簡 )이다. 하천과 문화 Vol.10 16 17 No.1 겨울
마궁(馬宮)리에 담겨진 죽음길의 배웅 - 청리고분군- 되어 마골이 되었다는 이곳에, 산 자가 죽은 자에게 했던 마 지막 바람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다. 삶의 이야기가 담긴 상주 복룡동 상주 청리고분군 전경 청리면 마궁(馬宮), 마골이라 부르던 마공 마을 북동쪽에 120m~150m 사이 능선을 따라 옛무덤들이 있다. 이곳의 작은 복룡동 유적 전경 개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병성천에 닿는다. 1400년 전 쯤 이 곳에 터 잡았던 이들도 작은 내에서 천(川)으로 연결 되 병성천과 북천이 합류하는 삼각지 안쪽의 비옥한 평야지 듯 삶과 죽음 앞에서 의미를 지닌 고리를 지금을 살아가고 있 대에는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상주 사람들의 터전이 펼쳐져 는 이들에게 보여준다. 지금의 사람들은 옛사람이 살았던 삶 있다. 상주 시가지 북동쪽 외곽에 위치한 복룡동은 통일신라 의 흔적을 공장을 짓게 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대 고대도시 사벌주의 북동쪽이자 조선시대에는 상주읍 작은 내가 흐르던 이곳에 살던 오래 전 사람들은 죽음이 성의 동문에서 북동쪽으로 약 500m 떨어져 있던 곳으로 현 끝이 아니란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 물길이 다른 물길 재는 이곳은 복룡동 우방아파트 서쪽 시민문화공원으로 조 을 만나 더 큰 물길이 되는 것처럼 1400년 전 이 마을에 터 잡 성된 곳이 바로 상주 복룡동 유적(사적 제477호)이다. 았던 이들은 삶의 길도 죽음의 길도 연결되었다 여겼나보다. 오래 전 이 곳에는 웅덩이와 갈대숲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삶의 길에서 죽음의 길로 떠나는 자에게 산 이들은 몇 가 마치 용이 엎드린 모습과 같다하여 복룡伏龍 이라고 이름 붙 지 일을 했다. 죽은 이 몸에 장식품을 지니게 해 주는 일, 죽 여졌으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주읍성 밖 동쪽 끝자락에 위 은 자를 다른 세계로 연결해 주는 바람의 모양을 함께 묻는 치하는 마을이라 해서 끝골 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일,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한 제(祭)를 지내는 일이 그것이다. 2001년 복룡동 일대는 대규모 주택건설사업과 관련하여 이 세 가지를 담아 죽은 자 곁에 둔다. 이 세 가지가 지니는 의 문화재 조사가 진행되어 청동기시대 주거지를 비롯한 통일 미의 갈래는 다르지만 물줄기가 연결되듯 삶과 죽음이 하나 신라시대~조선시대의 건물지, 주거지, 우물, 구상유구(배수 의 선에 있었다 여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갈래 지어진 개울 로) 등 다양한 생활유구와 함께 엄청난 양의 유물이 쏟아 들이 하나의 천(川)으로 모아지 듯 기양산 아래 큰 골짜기가 졌다. 상주 복룡동 유적은 통일신라시대~조선시대의 다양한 주 거시설과 같은 생활유구를 통하여 고대 사벌주의 지방도시 의 구조와 성격과 조선시대 상주읍성 외곽의 취락모습 등 당 시의 생활상을 복원하는데 역사적 가치가 높은 중요한 생활 청리고분군 6호 토광묘 유물 노출 상태 6호 토광묘 출토 오리 모양 토기 유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2007년 국가지정 사적 제 477
호로 지정되었다. 운데 몇 부분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그곳을 지나면서 알려 지게 되었다. 병풍산에 자리 잡고 있던 고분들은 낙동강과 하천, 땅길이 교차하는 곳에 터 잡고 있다. 철기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땅길과 물길이 교차한다는 이곳과 다르지 않다. 하루하루 일상이 모여 삶이 된다. 땅 위에서는 쌀 열매를 거 둬들이고 담았다. 땅길도 물길도 만나게 되던 곳에 터 잡았 던 사람들은 물 안에 생물을 물 밖으로 끌어올리고, 땅 위에 쌀 열매를 담으면서 일상을 만들어갔다. 복룡동 유적 공원 땅 길도 물길도 지나는 곳 쌀 열매 담고 살아왔던 곳 - 병풍산고분군 - 병풍산 전경(낙동강과 병성천 합류 지점) 영남의 수서원.. 도남서원을 가다. 병풍산고분군(1910년 경 촬영) 병성 마을 앞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던 병성천은 낙동강을 적을 막기 위해 산성을 쌓았다 하여 마을 이름이 병성(屛 만나 도남서원까지 이어진다. 도남서원은 영남의 으뜸서원 城)이라 전한다. 지금도 마을 뒷산인 병풍산 꼭대기에는 지 으로 일컬어지며, 1606년에 낙동강 가에 만들어졌다. 1606년 금도 성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낙동강과 가까이 있어 에 우복 정경세가 지은 도남서원 상량문에 따르면 영남에서 한 말까지 부산에서 소금배와 어물을 실은 배가 마을까지 다 일어나 전해진 도학의 정맥(正脈)이 이 서원을 통해 천년이 녔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병천교가 놓여져 있 나 이어질 것을 기원 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1606년(선조 어 오고감에 불편함이 없지만, 할머니들 기억속에는 추운 겨 39)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 울 돌다리를 건너다가 수도없이 넘어졌던 기억이 살아있는 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곳이기도 하다.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옛 사람들이 삶을 이어온 곳에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 뒤 1616년(광해군 8) 노수신(盧守愼) 유성룡(柳成龍), 는 이 마을 능성에서 고분군을 발견했기에 이곳을 병성동 고 1635년(인조 13) 정경세(鄭經世)를 추가 배향하였다. 1677년( 분군이라 일컫는다. 이 곳의 북쪽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병 숙종 3) 도남(道南) 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하였 성천이 흐르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병성천은 얼마 떨 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최근 이 어지지 않은 곳에서 낙동강과 자연스레 어울린다. 이 곳 가 준이 추가 배향되어 현재 도남서원은 9위를 제향하고 있다. 하천과 문화 Vol.10 18 19 No.1 겨울
양한 배움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상주는 낙동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긴 유래도 상주의 옛 지명인 상락의 동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아니던가? 상주의 낙동강 지천은 크게 보면 병성천과 이안천 두 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병성천은 북천과 남천, 동천, 3개 의 지류가 합하여 내를 이루었으므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네 개로 보는 게 맞을 수도 있다. 백두대간 국수봉에서 발원하여 공성 청리 외남을 거쳐 낙 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를 일컬어 요즘은 그냥 병성 천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북천과 동천을 만나기 전까지의 구간은 남천이라고 불렀으며, 이 남천이 북천, 동천과 합류한 지점부터를 병성천이라고 불렀었다. 병성천 하류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훗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인 도정사(道正祠), 동재인 손학재 날 고려의 태조 왕건과 마지막 일전을 불살랐던 곳으로 유명 (遜學齋), 서재인 민구재(敏求齋), 신문(神門)인 입덕문(入德 한 병풍산성이 있는 병풍산이 위엄을 간직한 채 자리하고 있 門), 강당인 일관당(一貫堂), 누각인 정허헌(靜虛軒)과 풍우 으며, 임진왜란 이후 흩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유림들이 세 단(風雩壇) 영귀문(詠歸門) 등이 있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 운 도남서원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다. 이 도남서원과 병풍산 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 성 사이로 병성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지점이며 건너 쪽 봉 하다가, 1992년 지역 유림들이 힘을 모다 복원하여 지금의 모 황산에서 바라본 이곳의 풍경은 그야말로 천하제일이라 해 습을 이루었다. 해마다 음력 2월, 8월 하정일(下丁日)에 위패 도 과언이 아닐 만큼 멋진 자태를 간직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를 봉안하고 있는 인물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유림들은 이곳을 영남의 적벽 이라 부르며 가을이면 배 띄 지금도 춘추향사를 지냄은 물론, 상주 관내 학생들에게 다 워 놓고 적벽부 를 읊조리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