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1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남상구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Ⅰ. 머리말 2015년 8월 15일 아베 신조[ 安 倍 晋 三 ] 총리는 야스쿠니[ 靖 國 ]신사에 공물료를 보냈고 각료 3명은 동 신사를 참배하였다. 한국 정부는 식민침탈과 침략전쟁 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는 야스쿠니신사에 아베 총리가 또다시 공물료를 봉납 하고, 일부 현직 각료와 정치인들이 참배를 강행 한 것을 비판하는 외교부 대 변인 논평 1) 을 발표하였다. 중국 정부도 화춘잉[ 華 春 瑩 ]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강력한 반대와 강렬한 불만을 표시 하였다. 2) 이렇듯 일본 총리와 각료의 참배가 외교 현안이 되다보니 야스쿠니신사 문제라고 하면 총리나 각료의 참 배 문제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렇다면 일본 총리나 각료가 참배하지 않으면 야 스쿠니신사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 투고: 2015년 8월 7일, 심사 완료: 2015년 10월 30일, 게재 확정: 2015년 11월 23일 1)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공물료 봉납에 대한 외교부 대변인 논평 (외교부 홈페이 지, http://www.mofa.go.kr/main/index.jsp). 2) 연합뉴스, 2015. 8. 15.
2 동북아역사논총 50호 한국 입장에서 보면 총리나 각료의 참배와 더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 군인이나 군속으로 강제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한국인 약 21,000명이 유족의 동의도 없이 무단으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는 사실이다. 총리나 각료 참배와 한국인 무단합사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야스쿠니신사가 일본 패전 이전 (이하 전전)에 식민침탈과 침략전쟁에 국민을 동원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 라 지금도 A급 전범 합사에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듯이 이러한 침략의 역사를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 입장에서 보면 야스쿠니신사 문제란 국 가에 의한 전사자 추도(시설), 헌법의 정교분리원칙, 유족의 감정이 얽히고설 킨 문제다. 3) 야스쿠니신사와 관련하여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한국인 무단합사, 총리 참배,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 역사인식을 둘러싼 문제다. 이를 사안별로 쟁점, 문제점, 문제의 성격, 현황을 개관하면 <표 1>과 같다. 야스쿠니신사 문제는 동아시아 역사 갈등의 핵심적인 문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나 현재까지 이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연구는 없는 실정이다. 이 글의 목적은 첫째, <표 1>에서 제기한 4가지 사안을 중심으로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역사적 경위와 현황, 쟁점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둘째, 국내 연구를 중심으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4) 3) 다카하시 데쓰야[ 高 橋 哲 哉 ]는 야스쿠니신사에 의한 전몰자 현창 추도는 국민을 전 쟁에 동원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하면서 유족 감정, 역사인식, 종교, 전통문화, 새로운 추도시설이라는 측면에서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분석하고 있다. 高 橋 哲 哉, 2005, 靖 国 問 題, 筑 摩 書 房. 4) 일본에서 야스쿠니신사에 관한 선행연구는 야스쿠니신사 국영화와 공식참배 문제 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강하게 반영하면서 이루어졌다. 즉 일본에서의 선행연구는 단순한 학문의 영역을 벗어나 현실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이루어졌다. 대 표적인 연구로는 야스쿠니신사 국영화 반대운동의 이론적인 기반을 제공한 무라카 미 시게요시[ 村 上 重 良 ]의 慰 霊 と 招 魂 靖 国 の 思 想 ( 岩 波 書 店, 1974), 충혼비 소 송에서 원고 측에 관여했던 오에 시노부[ 大 江 志 乃 夫 ]의 靖 国 神 社 ( 岩 波 書 店, 1984), 피고 측에 관여했던 오하라 야스오[ 大 原 康 男 ]의 忠 魂 碑 の 研 究 ( 暁 書 房, 1984), 총리 참배를 지지하고 야스쿠니신사에 긍정적인 고보리 게이이치로[ 小 堀 桂 一 郎 ]의 靖 国 神 社 と 日 本 人 (PHP 研 究 所, 1998), 총리 참배를 반대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비판적인 다카하시의 靖 国 問 題 ( 筑 摩 書 房, 2005), 고야스 노부쿠니[ 子 安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3 <표 1> 야스쿠니신사 문제 개요 사안 쟁점 문제점 문제의 성격 현황 식민지에서 병력동원 수단 식민침탈 역사 한국인 유족의 인격권 침해 인권 침해 일본에서 한국인 합사 무단합사 철회 소송 (1건) 진행 중 무단 야스쿠니신사의 2건 일본 대법원에서 기각 합사 식민침탈의 역사 긍정 역사인식 당함 일본 정부 관여 헌법 정교분리원칙 위배 헌법 해석 일본 총리 참배 새로운 국립 추도 시설 역사 인식 A급 전범합사 (1978. 10) 침략전쟁 미화(도쿄재판 부정) 동북아 외교 갈등 초래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 외교 갈등 위헌 여부 정교분리원칙 위배 헌법 해석 총리 참배로 인한 갈등 국립 전사자 추도시설 건립 A급 전범합사 침략전쟁 정당화 유족회 등 야스쿠니신사 지지 세력이 적극 반대 평화헌법 개정 기반 구축 식민침탈, 침략전쟁의 역사를 긍정 미화 국가에 의한 전사자 추도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인식 새로운 국립추도시설 건설, A급 전범 분사 등이 해결방안으로 제기됨 일본에서 아베 총리 참배 위헌 소송(2건) 진행 중 일본 안보관련 법안 개정 으로 새로운 전사자 발생 가능성 대두 야스쿠니신사 역사인식이 일부 역사교과서에도 반영됨 국내에서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 로[ 小 泉 純 一 郎 ] 총리 참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주로 총리 참배에 대한 비판 이라는 시각에서 일본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한국인 무단합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야스쿠니신사 자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연구 성과의 축적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러한 점 을 고려하여 주요 학술회의 자료집도 대상으로 하였다. 宣 邦 ]의 国 家 と 祭 祀 : 国 家 神 道 の 現 在 ( 青 土 社, 2004)를 들 수 있다. 일본 패전 이후의 야스쿠니신사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로는 다나카 노부마사[ 田 中 伸 尚 ] 의 靖 國 神 社 の 戰 後 史 ( 岩 波 書 店, 2002)가 있다. 일본의 연구성과가 한국어로 소 개되는 것은 2001년 고이즈미 총리 야스쿠니신사 참배 이후로 무라카미, 오에, 다카 하시, 고야스의 저서가 출판되었다.
4 동북아역사논총 50호 Ⅱ. 한국인 무단합사 문제 1_역사적 경위와 현황 야스쿠니신사의 합사 대상은 기본적으로 내전과 대외 침략전쟁에서 사망한 일 본군의 군인과 군속이다. 5) 이러한 신사에 한국인이 합사된 것은 1910년 강제 병합 이후다. 전전에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은 415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야스쿠니신사는 육 해군성이 관리하는 국가의 공적인 추도시설이었 다. 일본 패전 이후(이하 전후) 야스쿠니신사를 관리하던 육 해군성은 해체되 었고 야스쿠니신사는 종교 법인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육 해군성의 업무를 인 계한 후생성이 한국인 합사를 야스쿠니신사와 공동으로 모의하고 한국인 전사 자 신상자료를 동 신사에 제공하였다. 7) 야스쿠니신사 합사는 후생성이 제공한 자료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는데 후생성이 야스쿠니신사에 제공한 한국인 자료 는 20,727명 분이었다. 연도별로는 1959년 19,650명, 1964년 82명, 1972년 66명, 1973년 385명, 1975년 509명의 자료가 야스쿠니신사에 제공되었다. 8) 일본 정부는 한국의 유족들에게는 전사자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야스쿠니신 사도 한국인 유족에게는 합사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협력으로 한국인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는 사실은 선행연구에서 구체적으로 밝 혀졌다. 9) 5) 야스쿠니신사의 합사 대상에 대해서는 남상구, 2006, 야스쿠니신사 합사 문제에 관한 고찰, 일본사상 제10호를 참조. 6) 남상구, 2006, 위의 글, 169쪽. 7) 国 立 国 会 図 書 舘 国 立 国 会 図 書 館 調 査 及 び 立 法 考 査 局, 2007, 新 編 靖 国 神 社 問 題 資 料 集. 8)厚 生 労 働 省, 朝 鮮 人 靖 国 神 社 合 祀 に 関 する 情 報 提 供 について( 回 答 ) (2006. 11. 16). 9) 남상구, 2014, 해방 후 한국인이 야스쿠니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된 경위, 동북아 역사재단 편, 야스쿠니신사에 묻는다 야스쿠니신사 무단합사 철폐소송, 212~230쪽.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5 제소 법원 도쿄 [ 東 京 ] 1 오사카 [ 大 阪 ] 도쿄 [ 東 京 ] 2 오키나와 [ 沖 縄 ] 도쿄 [ 東 京 ] 3 제소 연월 2001. 6 2006. 8 2007. 2 2008. 3 2013. 10 <표 2> 야스쿠니신사 합사 철폐 소송 개요 원고 한국인 피해자, 유족 416명 일본인 유족 8명 한국인 유족 10명, 생존자 1명 일본인 유족 5명 한국인 유족 10명 판결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기각 (2006. 5) 기각 (2009. 2) 기각 (2011. 7) 기각 (2010. 1) 진행 중 기각 (2009. 10) 기각 (2010. 12) 기각 (2013. 10) * 상고하지 않음 기각 (2011. 9) 기각 (2011. 12) 기각 (2011. 12) 기각 (2012. 6) 주요 청구내용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신 사 합사통지를 철회하고 정신적 피해에 대해 손해 배상을 할 것 야스쿠니신사는 제신명 표, 제신부, 영새부에서 원고 유족의 기록을 삭제 할 것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신 사에 대한 합사 통지를 철회하고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할 것 일본 정부는 1952년 4월 19일 법무부 민사국장의 평화조약 발효에 따른 한 국인 타이완인 등에 관한 국적 및 호적 사무 처리에 관하여 라는 통지를 근거 로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일본 국적을 일괄적으로 박탈 하였다. 하지만 일 본 정부는 이렇게 국적이 박탈 된 한국인 전사자 신상자료를 야스쿠니신사에 제공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전상병자전몰자유족등원호법(이하 원호법)과 은급법 등 보상에서는 국적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배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문제는 유족이 합사 철폐를 요구하는 소송 을 제기한 이후 동 소송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철폐 소 송은 일본인 유족을 포함하여 5건이 제기되었는데 그 개요는 <표 2>와 같다. 5건의 소송에서 원고는 합사 철폐와 합사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였다. 도쿄 소송 1(2001. 6)은 야스쿠니신사 합사 철폐뿐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의 생사 확인, 유골 반환, 미불금과 군사우편저금 반환, BC급
6 동북아역사논총 50호 전범과 시베리아 억류자에 대한 손해배상 도 포함한 소송이었다. 도쿄 소송 2(2007. 2)에는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생존자 1명 10) 이 원고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오사카 소송의 경우, 타이완 유족 1명도 원고로 참가했었으나 친족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지 않은 사실이 확인되어 소송을 철회하였다. 도쿄 소송 3(2010. 10)은 일본 정부가 유족에게 정식으로 전사를 통보하고 유골을 반환할 것도 요청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합사 철폐 소송 3건은 대법원에서 기각되었고, 1건은 고등법원 기각 후 상고를 하지 않아 재판 이 종료되었다. 도쿄 소송 3은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2_쟁점 한국인 무단합사 문제는 야스쿠니신사 합사 철폐 소송을 통해 법적인 다툼을 하고 있는데, 쟁점별로 원고의 주장과 사법부의 판결의 개요를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첫째, 한국인 피해자가 침해당한 인격권을 법적 권리로 인정할 것인지 여부다. 도쿄 소송 2에서 원고 는 가족을 자기 의사에 반하는 종교적 방법으로 위령을 받지 않을 이익이 침해 당했는데, 이것은 개인의 사적 영역을 문제로 삼는 사생활권이 아니라 일본국 에 의한 조선 지배 및 피항소인 야스쿠니신사가 그 정신적 지주로 행한 역할 등 역사적 사실 및 동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가해와 피해의 구조를 요소 10) 야스쿠니신사는 전쟁에서 사망한 일본인 군인과 군속 등을 합사 대상으로 하고 있 는데,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2006. 12. 30 현재)에 따르면 생존자로 야스쿠니신사의 합사 대상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야 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은 60명에 이른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신사 에 제공한 자료에는 사망자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살아있었던 사람들이다. 생존 자 합사에 대해 야스쿠니신사는 생존한 사람은 처음부터 초혼 합사가 되지 않았다 고 주장하면서도, 영새부에서 이름을 삭제하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영새부가 종교 의식에 사용되는 명부이기 때문에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부하고 있다. 야 스쿠니신사 답변서, 2006. 11. 20.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7 <표 3> 야스쿠니신사 합사 소송 쟁점 개요 구분 사안 원고 주장 피고의 주장과 사법부 판결 1 2 3 4 종교적 인격권 경애 추모 인격권 민족적 인격권 일본 정부 개입 자신의 방법으로 추도하는 권리를 침해 당하였음 가족적이고 인격적인 유대 가운데 친족 을 경애 추모하는 권리를 침해당하였음 친족이 자신을 침략한 국가 고유의 종교 에 의해 침략한 국가에 충성을 다한 자로 모셔지고 있는 것은 피해 민족으로서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원 고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낮아짐 * 민족적 인격권이란, 누구라도 자기가 속한 민족의 일원으로 그 민족 고유의 문화, 풍습, 전통 등을 자신의 생활방식 으로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는 권리(도 쿄 소송 3, 2013. 10. 22) 국가가 특정의 종교단체에 전몰자의 개 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헌법의 정교분 리 원칙에 반함 법적으로 보호해야 할 이익이 아니며, 합사는 종교적 교의에 관한 문제로 법률 로 판단할 대상이 아님 종교 행위 때문에 발생하는 불쾌한 감정 에 불과한 것으로 이를 법적 이익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야스쿠니신사 의 신앙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음 법적 이익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합사 로 인해 사회적 평가가 낮아졌다고 볼 수 없음 합사는 야스쿠니신사의 판단에 의한 것 으로 일본 정부가 전몰자 정보를 제공한 것은 일반적인 행정사무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것임 로 하는 특수한 인격권 11) 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원고가 식민지 피해 라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한 것은 1988년 야마구치 호국신사 자위대원 합사 소 송 12) 에 대한 일본 대법원의 판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1988년 6월 1일 대법원은 상기 소송 판결에서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는 타자의 신앙에 기 초한 행위에 대해 관용적이어야 한다며 종교상의 인격권 침해를 인정하지 않 11) 東 京 高 等 裁 判 所, 2011, 平 成 23 年 (ネ) 第 5515 号 平 成 25 年 10 月 23 日 判 決 言 渡 判 決 要 旨. 12) 1968년 1월 12일 순직한 자위대원을 자위대원 OB조직이 유족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야마구치 현 호국신사에 합사한 것에 대해, 유족(부인)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 당했다고 합사 철회를 요구하는 소송을 하였다.
8 동북아역사논총 50호 았다. 즉 타자의 종교 행위로 인해 감정을 상하거나 불쾌감 혹은 혐오감을 갖 는 것은 법으로 보호할 이익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쿄고등법원(2013. 10)은 1988년 대법원 판결( 종교적 관용 )을 내세워 한국인 원고가 주장하는 권 리를 부정하였다. 도쿄지방법원(2011. 7)도 한국 국적을 가진 원고들이 식민 지 시대에 일본국에 징병 징용되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 가 사망한 자의 유족임을 감안할 때 피고 야스쿠니신사에 의한 본건 합사 행위 등에 대해 강한 거부 의사를 표시하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원고들의 역사인식 등을 전제 로 하면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13) 라고 평가를 하면서도 1988년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원고의 주장을 기각하였다. 한국인 유족이 종교적인 문제로서 가 아니라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적 역할과 역사인식으로 인한 인격권 침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음에 불구하고 사법부는 종교의 문제를 내세워 원고의 주 장을 기각한 것이다. 둘째, 일본 정부가 한국인 야스쿠니신사 합사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관한 문제다.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신사에 한국인 전사자 신상자료를 제공한 것에 대해, 일반적인 행정사무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합사는 야스쿠 니신사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오사카고등법원은 2010 년 12월 국가가 개인정보를 신사 측에 제공한 것은 종교 행위의 원조 조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된다 며, 합사에 국가의 협력 이 불가피했다고까지 얘기할 수 없으나 합사의 원활한 실행에 큰 역할을 했다 는 것이 명백하다 고 판결하였다. 14) 앞에서 기술했듯이, 선행연구를 통해 일 본 정부의 협력 없이는 한국인의 야스쿠니신사 합사가 불가능했다는 점이 밝 혀졌다. 셋째,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강제 동원된 한국인 합사를 어떻게 평가할 것 인가 하는 문제다.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신사에 전사자 신상자료를 제공한 것 13) 남상구, 2014, 앞의 글, 274쪽. 14) 大 阪 高 等 裁 判 所, 平 成 21 年 (ネ) 弟 792 号 霊 璽 簿 からの 氏 名 抹 消 等 請 求 控 訴 事 件 の 判 決 (2010. 12. 21).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9 에 대해 도쿄고등법원은 전후처리 문제의 하나로 당시 국회 답변에서 찾을 수 있듯이 전쟁에서 순직한 자 또는 그 유족이 피항소인 야스쿠니신사 합사를 바 라고 있었다고 충분히 믿을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었던 상황에서 15) 이루어졌 다고 주장하였다. 유족이 야스쿠니신사 합사를 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원 고는 도쿄 소송 3 소장에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을 강제적 으로 빼앗겨 전사를 당한 고통을 맛보며 고통스러운 인생을 강요당한 원고들 에게, 그 침략전쟁의 정신적 지주이자 침략자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사 랑하는 아버지 형제가 합사된 것은 우롱당하고 모욕당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 도 아니다 16) 라고 야스쿠니신사 합사를 비판하였다. 3_연구 성과와 과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한국인 숫자, 합사 범위, 합사 경위, 합사자 명 부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사실 17) 만이 알려졌을 뿐 체계적인 연구는 없었다. 가 장 큰 원인은 야스쿠니신사 합사자 관련 정보가 개인정보 보호와 종교적 이유 라는 명목으로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A급 전범합 사 문제와 일본 총리의 참배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심이 높음에도 불구하 고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한국인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상대적 으로 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1년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을 계기로 한국인 합사 문제에 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 문제에 관한 연구로는 2001년 8월 13일 개최된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및 한국인 합사 무엇이 문제인가? 15) 東 京 高 等 裁 判 所, 平 成 23 年 (ネ) 第 5515 号 平 成 25 年 10 月 23 日 判 決 言 渡 判 決 要 旨 (2013. 10. 23). 16) 한국인 합사 철폐 소송, 訴 状 (2013. 10. 22), 41쪽 17) 國 立 國 會 図 書 館 調 査 立 法 考 査 局, 1976, 靖 國 神 社 問 題 資 料 集 ( 調 査 資 料 : 76 2) 에는 1976년 한국인 합사자 수가 20,636명이라는 사실과 개략적인 야스쿠니신 사 합사 경위가 기술되었으며, 도쿄신문[ 東 京 新 聞 ], 1995. 8. 26에는 한국인 합 사자 수가 21,181명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10 동북아역사논총 50호 라는 공청회 자료집, 한국인의 합사 경위를 조사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 상규명위원회(책임자: 남상구)의 진상조사보고서(Ⅶ 1): 야스쿠니신사 한국 인 합사 경위 및 합사자 명부 조사 (2007), 남상구의 한국 한국인과 야스쿠 니 신사 문제 ( 한일관계사연구 제35집, 2010), 식민지기 한국인 합사 문제를 중점적으로 검토한 노기 가오리[ 野 木 香 里 ]의 야스쿠니신사의 한국인 합사에 관한 연구 ( 2008년도 동북아역사재단 국내외 신진연구자 육성 사업 연구결 과보고서, 2009), 장신의 일제하 조선에서 야스쿠니신사의 표상과 조선인 합사자 ( 역사문제연구 통권25호, 2011)가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야스쿠 니신사에 한국인이 합사된 경위와 일본 정부의 관여, 합사 대상과 숫자, 명단 등이 밝혀졌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진상보고서는 강제동 원 피해자에 대한 조사와 병행한 결과 생존자 60명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 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카자와 시로[ 赤 澤 史 朗 ]의 戦 没 者 合 祀 と 靖 国 神 社 ( 吉 川 弘 文 館, 2015)는 일본 국회도서관이 발간한 新 編 靖 国 神 社 問 題 資 料 集 등을 참고로 합사 기준의 변천을 검토했는데, 이는 한국 인 합사 문제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철폐 소송에 대해서는 1차 도쿄 소송의 소송 경과, 원고 와 일본 정부 및 시민단체의 주장을 비교 검토한 김광열의 전쟁 책임에 대한 현대 일본 사회의 인식-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 문제를 중심으로 ( 근현대 일본의 한국 인식, 동북아역사재단, 2009), 제2차 도쿄 소송 1심과 도쿄지방 법원 판결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강경민의 야스쿠니 소송의 경과와 쟁점 ( 역 사와 책임 제3호, 2012)이 있다. 상기 연구는 재판의 쟁점을 원고 측의 논리에 따라 정리하고 일본 사법부의 판결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 단 편의 야스쿠니신사에 묻는다 야스쿠니신사 무단합사 철폐 소송 (2014)은 도쿄 소송 2와 관련하여 도쿄고등법원에 제출한 의견서를 수정 보완한 것이 다. 일본 법정에서 한국인 유족과 연구자들이 개별적으로 의견을 진술한 적은 있었으나 한국 측 견해를 종합적으로 일본 재판부에 전달한 적은 처음이었다. 의견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야스쿠니신사는 침략신사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 제로 하여 원고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제2의 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무시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11 하고 있는 야스쿠니신사와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 의견서가 비록 일본 재 판부의 판결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야스쿠니신사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연구 성과와 논의를 총괄하여 일본 법원에 제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고 할 수 있다. 동서에서 주목할 연구는 일본 재판부의 판결 논거인 종교적 관 용론 의 문제점을 법리에 중점을 두면서 다각적으로 비판한 이석태의 글과, 한 국의 전통적인 추도 문화라는 관점에서 야스쿠니신사 합사가 한국인 유족의 추 모권을 침해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지영임의 글이다. 지영임의 연구는 야스 쿠니신사 합사로 인해 유족이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민속학적인 측 면에서 접근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문제는 동 신사가 영새부에서 한국인들의 이름을 삭제하고 더 이상 한국인들을 야스쿠니신사의 신으로 모시지 않아야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는 종교법인의 외피를 쓰고 종교적 교의 를 내세워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야스쿠니신사가 종교시설이기 때 문에 정부가 간섭하는 것은 헌법의 정교분리원칙에 위배된다는 논리를 내세우 고 있다. 18) 앞으로 야스쿠니신사와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를 정치하게 만 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인 합사 문제를 제2의 가해 와 탈식민지화라는 차 원에서 접근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야스쿠니신사의 한국인 합사가 식민지기 전시동원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전후 유족이 구체적으로 어떤 피 해를 받았는지에 대한 연구도 과제다. 그리고 야스쿠니신사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약 28,000명의 타이완인도 합사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타이완인이 어떤 경위로 합사되었는지에 대한 비교연구는 한국인 합사 문제에 대한 연구의 폭을 넓히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19) 최근 타이완에서 야스쿠 18) 2004년 당시 A급 전범을 야스쿠니신사에서 분리하자는 의견에 대해 아베 관방장관 은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합사 취하를 요청하면 헌법에 정해진 신교( 信 敎 )의 자유와 정교분리원칙에 위배된다 고 발언하였다. 산케이신문[ 産 経 新 聞 ], 2004. 4. 11. 19) 타인완인의 야스쿠니신사 합사 문제를 다룬 연구로는 위나이밍, 2008, 타이완의 야스쿠니신사 문제: 역사 인식과 충돌, 동북아역사논총 제28호가 있다.
12 동북아역사논총 50호 니신사 합사 문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타이완과의 공동연구도 시 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Ⅲ. 총리 참배 문제 1_역사적 경위와 현황 먼저 전후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현황을 정리하면 <표 4>와 같다. 총 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 직후부터 재개되었으 나 이것이 외교 문제가 된 것은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中 曽 根 康 弘 ] 총리가 공식 참배를 내걸고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면서부터였다. 나카소 네 총리의 참배에 대한 비판의 근거는 야스쿠니신사에 A급 전범이 합사되었다 <표 4> 전후 일본 총리 야스쿠니신사 참배 현황 이름 재임 기간 참배 횟수 참배 일자 비고 히가시쿠니노미야 1945. 8. 17~1945. 10. 9 1 1945. 8. 18 나루히코[ 東 久 邇 稔 彦 ] 시데하라 기쥬로 [ 幣 原 喜 重 郞 ] 1945. 10. 9~1946. 5. 22 2 1945. 10. 23, 11. 20 요시다 시게루[ 吉 田 茂 ] 1946. 5. 22~1947. 5. 24 0 가타야마 데쓰[ 片 山 哲 ] 1947. 5. 24~1948. 3. 10 0 아시다 히토시[ 芦 田 均 ] 1948. 3. 10~1948. 10. 15 0 요시다 시게루[ 吉 田 茂 ] 1948. 10. 15~1954. 12. 10 5 하토야마 이치로 [ 鳩 山 一 郞 ] 1954. 12. 10~1956. 12. 23 0 1951. 10. 18, 1952. 10. 17, 1953. 4. 23, 10. 24, 1954. 4. 24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13 이시바시 탄잔 [ 石 橋 湛 山 ] 이름 재임 기간 참배 횟수 참배 일자 비고 1956. 12. 23~1957. 2. 25 0 기시 노부스케[ 岸 信 介 ] 1957. 1. 31~1957. 2. 25 0 임시 대표 기시 노부스케[ 岸 信 介 ] 1957. 2. 25~1960. 7. 19 2 1957. 4. 24, 1958. 10. 21 이케다 하야토 [ 池 田 勇 人 ] 사토 에이사쿠 [ 佐 藤 栄 作 ] 다나카 가쿠에이 [ 田 中 角 榮 ] 1960. 7. 19~1964. 11. 9 5 1964. 11. 9~1972. 7. 7 11 1972. 7. 7~1974. 12. 9 5 1960. 10. 10, 1961. 6. 18,11. 15, 1962. 11. 4, 1963. 9. 22 1965. 4. 21, 1966. 4. 21, 1967. 4. 22, 1968. 4. 23, 1969. 4. 22, 10. 18, 1970. 4. 22, 10. 17, 1971. 4. 22, 10. 19, 1972. 4. 22 1972. 7. 8, 1973. 4. 23, 10. 18, 1974. 4. 23, 10. 19 미키 다케오[ 三 木 武 夫 ] 1974. 12. 9~1976. 12. 24 3 1975. 4. 22, 8. 15, 1976. 10. 18 후쿠다 다케오 [ 福 田 赳 夫 ] 오히라 마사요시 [ 大 平 正 芳 ] 이토 마사요시 [ 伊 東 正 義 ] 스즈키 젠코 [ 鈴 木 善 幸 ] 나카소네 야스히로 [ 中 曾 根 康 弘 ] 하시모토 류타로 [ 橋 本 龍 太 郞 ] 고이즈미 준이치로 [ 小 泉 純 一 郞 ] 1976. 12. 4~1978. 12. 7 4 1978. 12. 7~1980. 6. 12 3 1977. 4. 21, 1978. 4. 21, 8. 15, 10. 18 1979. 4. 21, 10. 18, 1980. 4. 21 사적 참배임을 처음 명시 1980. 6. 12~1980. 7. 17 0 임시 대표 1980. 7. 17~1982. 11. 27 9 1982. 11. 27~1987. 11. 6 10 1996. 1. 11~1997. 9. 11 1 1996. 7. 29 2001. 4. 26~2006. 9. 26 6 1980. 8. 15, 10. 18, 11. 21, 1981. 4. 21, 8. 15, 10. 17, 1982. 4. 21, 8. 15, 10. 18 1983. 4. 21, 8. 15, 10. 18, 1984. 1. 5, 4. 21, 8. 15, 10. 18, 1985. 4. 22, 8. 15 2001. 8. 13, 2002. 4. 21, 2003. 1. 14, 2004. 1. 1, 2005. 10. 17, 2006. 8. 15 아베 신조[ 安 倍 晋 三 ] 2013. 12. 26~현재 1 2013. 12. 26 85. 8. 15 공식 참배임을 명시 사적 참배임을 명시
14 동북아역사논총 50호 는 것이었는데, A급 전범이 합사된 것은 1978년 10월 17일이고 이러한 사실이 여론을 통해 알려진 것은 1979년 4월이었다. A급 전범들의 합사 후에도 20회 에 걸친 총리의 참배가 있었으나 나카소네 총리의 공식 참배 전까지는 외교적 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일본 보수파는 한국과 중국이 야스쿠니 신사 문제를 정치적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이 야 스쿠니신사 참배에 반발하자 나카소네 총리는 1986년부터는 A급 전범 합사 는 침략당한 상대방 국민의 감정을 자극한다 는 이유를 내새워 참배를 중단하 였다.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총리의 공식 참배에 대해 한국 정부는 공식적 인 견해를 발표하지 않았다. 동년 10월 29일 이원경 외무장관이 일본인 기자단 과 가진 회견에서 우리로서는 한일 간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더욱이 근린 제국에 대해 불필요하게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일본 측이 대처할 것을 희망한다 라고 발언하는 데 그쳤다. 20) 하지만 이원경 외무장 관의 발언은 한국 정부가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역사인식의 문제라는 차원에서 비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총리 참배가 다시 문제가 된 것은 고이즈미 총리가 2001년부터 2006년까 지 재임기간 내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면서였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인한 외교 갈등을 해결한 것은 그 후임인 아베 총리였다. 아베 총 리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음으로써 냉각되었던 한일, 중일 간 외교관 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는 2013년 12월 26일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함으로 써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아베 총리 참배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가 이례적으로 일본은 (미국의) 동맹국이자 친구이지만 일본 지도자가 주변 국가와의 긴장을 격화시키는 행동을 한 것에 실망 한다 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 정 부는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역사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 주변 국 가와의 갈등 관리라는 차원에서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했다고 할 수 있다. 21) 20) 요미우리신문[ 読 売 新 聞 ]( 夕 刊 ), 1985. 10. 29. 21) 야스쿠니신사와 미일관계를 다룬 연구로는 마크 셀든, 2008, 전쟁과 역사의 기억 그리고 아태지역의 미래 미일과 야스쿠니 문제, 동북아역사논총 제28호.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15 한편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계기로 2005년 10월 20일 한 국, 타이완, 일본, 오키나와 4개 지역의 야스쿠니신사 관련 단체의 대표단이 타이완에서 야스쿠니 반대 공동행동 선언을 발표하는 등 국제공조활동이 이루 어지고 있다. 22) 고이즈미와 아베 총리 야스쿠니신사 위헌 참배 소송에는 한국 과 타이완의 유족과 활동가들도 원고로 참여하였다. 2_쟁점 총리 참배 문제의 쟁점은 첫째 총리 참배가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인가, 아 니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국가 지도자가 경의와 감사를 표하 는 것으로 국제적으로도 용인되는 일인가하는 점이다. 아베 총리는 국회에서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려고 한 남군( 南 軍 ) 병사도 모셔져 있지만, 대통령은 노예제도를 긍정해서 (참배하러) 가는 것은 아니다. 국가를 위해 돌아가신 숭고한 영혼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다 23) 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야스쿠니신사를 알링턴과 같은 전사자 추도시설 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총리 참배를 지지하는 세력은 2012년 8월 15일 다카이치 사니에[ 高 市 早 苗 ] 총무상이 어떻게 위령하고 참배하느냐는 각 나라의 국민의 문제 라며 외교 문제화할 일이 아니다 라고 발언했듯이, 24) 총 리 참배는 외교 문제가 아니라 내정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매년 8월 15일 일본 정부가 주최하는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 총리가 전사자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이 아무런 비판 도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정치 지도자가 자국의 전사자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하고 추도하는 것 자체가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야스쿠니신사 22) 야스쿠니신사 반대 운동의 성과에 대한 자료로는 2014년 8월 21일 국회에서 개최 된 일본의 우경화와 야스쿠니 문제 대응을 위한 국제회의 자료집, 2014, 동아시아 평화와 야스쿠니신사 가 있다. 23) 중의원 예산위원회, 2013. 4. 13. 24) 연합뉴스, 2015. 8. 15.
16 동북아역사논총 50호 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A급 전범 합사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A급 전 범은 포츠담선언에 기초하여 일본의 침략전쟁을 심판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도 쿄재판)에서 침략전쟁을 주도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일본은 샌프란시스 코강화조약(제11조)에서 도쿄재판의 판결을 수락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하였다. A급 전범도 신으로 모시고 있는 곳에 정치적 상징성을 갖고 있는 총리나 각료 가 참배하는 것은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것으로, 일본이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1985년 5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이 나치 SS 친위대 대원도 매장된 독일 비트부르크 묘지를 참배했다가 미국 의회는 물 론 유럽의 거센 비판을 받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 지도자가 전범이 포 함된 시설을 방문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도 용인되지 않고 있다. 두 번째 쟁점은 총리 참배가 일본 헌법 20조 25) 와 89조에 규정된 종교 활동 에 해당되는지, 즉 헌법의 정교분리원칙을 위배했는지 여부다. 총리의 야스쿠 니신사 참배에 대해서는 그것이 헌법의 정교분리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라는 참 배 위헌소송이 제기되어 왔는데, 그 개요는 <표 5>와 같다. 총리 참배를 헌법의 정교분리원칙과 연계해 비판하는 주장은 1985년부터 일본 국내에서 제기되었다. 하지만 2001년 고이즈미 총리 참배 당시에는 위헌 여부보다도 총리 참배로 인한 외교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26) 일본 국내적으로 도 총리 참배가 전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27) 니혼게이자이 25) 일본 헌법 제20조를 보면, 1항 종교의 자유는 누구에게라도 이것을 보장한다. 어 떤 종교단체도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거나 정치상 특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2항 누구라도 종교상의 행위, 축전( 祝 典 ), 의식 또는 행사에 참가하는 것을 강제당하지 않는다. 3항 국가 및 기관은 종교 교육 기타 어떤 종교 활동도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명기되어 있다. 26) 浅 野 健 一, 2007, 靖 国 問 題 と 日 本 のマスコミ 動 向, Anti Yasukuni U.S Campaign 자료집 인권, 문명, 평화의 눈으로 야스쿠니신사를 본다. 27) 2013년 12월 26일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요미 우리신문(2014. 1. 13)은 참배를 평가한다 45%, 평가하지 않는다 47%, 아시히신문 [ 朝 日 新 聞 ](2014. 1. 28)은 찬성 41%, 반대 46%로 참배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17 <표 5> 야스쿠니신사 관련 소송과 판결 개요 1 2 3 소송명 판단(정교분리 위헌 여부) (제소 연월)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나카소네 총리 야스쿠니신사 참배 위헌 소송 1 하리마[ 播 磨 ](1985. 11) 기각(1990. 3) 기각 확정(1993. 3) 2 간사이[ 關 西 ](1985. 12) 기각(1989. 11) 기각/위헌소지 강함 확정(1992. 7) 3 규슈[ 九 州 ](1986. 6) 피고: 나카소네, 국가 고이즈미 총리 야스쿠니신사 참배 위헌 소송 1 규슈[ 九 州 ] 야마구치[ 山 口 ] (2001. 11) 기각(1988. 2) 기각(1989. 12) 기각/위헌 확정 (2004. 4) 기각 확정(1988. 11), 기각/계속하면 위헌 확정(1992. 2) 2 시고쿠[ 四 国 ](2001. 11) 기각(2004. 3) 기각(2005. 10) 기각(2006. 6) 3 오사카[ 大 阪 ](2001. 11) 기각(2004. 2) 기각(2004. 5) 기각(2005. 7) 기각/위헌 확정 (2005. 9) 기각(2006. 6) 4 도쿄[ 東 京 ](2001. 12) 기각(2005. 4) 기각(2005. 9) 기각(2006. 3) 5 지바[ 千 葉 ](2001. 12) 기각(2004. 11) 기각(2005. 9) 기각(2006. 6) 6 오키나와[ 沖 縄 ](2002. 9) 기각(2005. 1) 기각(2005. 10) 기각(2007. 4) 아베 총리 야스쿠니신사 참배 위헌 소송 1 간사이[ 關 西 ](2014. 4) 소송 진행 중 2 도쿄[ 東 京 ](2014. 4) 소송 진행 중 신문[ 日 本 経 済 新 聞 ]이 2006년 7월 20일 조간 1면에 쇼와 천황, A급 전범 야 스쿠니 합사에 불쾌감 이라는 제목으로 궁내청장관이었던 도미타 도모히코[ 富 田 朝 彦 ]의 메모를 공개한 것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견제하 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인 의견보다 높았다.
18 동북아역사논총 50호 3_연구 성과와 과제 총리의 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연구로는 전후 총리의 참배 문제를 역사적 흐름에 따라 검토한 노길호의 일본의 굴레 야스쿠니신사 (문창출판, 1996), 총리 참배 문제를 신국가주의(neo nationalism)이라는 일본의 우경화 경향과 침략전쟁의 망각이라는 역사인식의 문제와 결부시켜 검토한 이규수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논란과 동아시아 근대사 인식 ( 사림 제26호, 2006)이 있다. 그리고 총리 참배에 대한 일본 내 견해 차이를 민족주의와 연계하여 검 토한 곽진오의 글로벌화와 일본 민족주의: 야스쿠니신사의 사례를 중심으로 ( 일본학보 제68집, 2006), 총리 참배와 유족회와의 정치적 관계에 주목한 이 상훈의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소고 ( 일본연구 제43호, 2010), 고이즈미 총리 참배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후쿠오카 지방법원 판결 (2004. 4. 7)을 중점적으로 검토한 조진구의 일본의 과거 역사인식과 야스쿠 니신사 문제 ( 한국과 국제정치 제21권 제4호<통권 제51호>, 2005)가 있다. 상기 연구들은 일본에서의 야스쿠니신사 연구 성과를 적극 수용하면서 야스쿠 니신사는 침략신사라는 점을 중심으로 총리 참배에 대한 비판 논리를 구축하 는데 중점을 두었다. 총리 참배 문제를 한국적인 시각에서 비판한 논문으로는 박진우의 한국에 서 본 야스쿠니 문제 ( 일본역사연구 제30집, 2009)가 있다. 박진우는 총리 참배 문제를 시기별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는데, 1985년 나카소네 총리 참배에 대해 한국이 비판한 것을 민주화운동으로 궁지에 몰렸던 전두환 정권이 상황 돌파를 위해 반일 내셔널리즘을 이용한 것이라고 분석한 점이 독창적이다. 하 지만 한국이 나카소네 총리 참배에 대해 비판을 한 것은 10월 이원경 외교부 장관이 일본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발언한 것이 처음으로, 전두환 정부가 나 카소네 총리의 참배를 국내 정치에 이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추가적인 연구 가 필요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박진우는 A급 전범 합사 문제를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를 상기시킨다는 점과 연계해 검토하고 있는데, 일본 천황제에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19 대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전문성 이 돋보인다. 총리 참배에 관한 연구는 총리 참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이루어 졌다. 일본의 연구 성과에 의존하다 보니 한국적인 시각이 제대로 반영 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일본적인 시각이 아닌 한국적인 시각에서 총리 참 배를 비판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야스쿠니신사 자체에 대한 연구 를 진척시킬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기존의 연구는 일본에서의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총리 참배 문제를 논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에 서 총리 참배가 추진된 정치적 배경과 이에 대한 한국과 주변 국가의 비판이 시 기별로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에 대한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Ⅳ. 새로운 전사자 추도시설 건립 문제 1_역사적 경위와 현황 전후 야스쿠니신사가 종교법인으로 바뀌면서 국가와의 공적인 관계는 단절되 었다. 이로 인해 공적인 추도시설을 갖지 못하게 된 일본에서는 새로운 국립 전사자 추도시설을 건립하자는 주장이 1952년 강화조약 발표 직후부터 제기되 었다. 28) 이러한 흐름 속에서 후생성은 1959년 신원불명의 전사자 유골을 안치 28) 새로운 추도시설을 건립하는 논리는 도카노 사토코[ 戸 叶 里 子 ] 사회당 의원이 국회 에서 이대로는 야스쿠니신사에 국비를 지출하는 것은 당연히 헌법 위반으로 불가 능하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유족을 위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외국에 있는 것과 같은 무명전사의 묘지를 만들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닌가 (25회 중위원 특별 위원회, 1956. 11. 18)라고 발언한 것에 나타나 있듯이, 국립 추도시설이 필요한데 야스쿠니신사는 법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새로운 시설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20 동북아역사논총 50호 하고 추도하기 위한 시설로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건립하였다. 하지만 이 시설은 야스쿠니신사 지지 세력의 반대 29) 로 일본을 대표하는 공적인 전사 자 추도시설로는 자리매김하지 못하였다. 30) 야스쿠니신사와 지도리가후치 전 몰자 묘원을 비교하면 <표 6>과 같다. 1956~1974년까지는 헌법의 정교분리원칙에 의해 단절된 야스쿠니신사와 국가의 공적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야스쿠니신사 국영화운동이 있었으나 사회당을 비롯한 야당, 신도계열을 제외한 종교계(신흥종교단체), 진보적 시민 <표 6>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과 야스쿠니신사 비교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건립 연도 1959년 1869년 대상 해외에서 사망한 군인 군속 등 유골 중 신원확인이 불가능한 유골 358,260위 목적 유골 안치 위령/추도 전몰자 현창 위령 성격 주요 행사 국가시설(후생노동성, 환경성) * 일본 정부는 국가를 대표하는 공적인 추도시설로 평가하지 않음 5월 후생노동성 주최 배례식(유골 안치), 10월 위령제 야스쿠니신사 1853년 이후 내전과 침략전쟁에서 사망한 군인 군속 준군속 등 약 246만 명(A급 전범 14명 포함) 종교법인 4월 춘계예대제, 8 15 종전기념일, 10월 추계예대제 문제점 총리 각료 참배에 대한 비판 없음 총리 각료 참배는 침략전쟁 정당화 공통점 국가를 위해 희생된 군인 군속을 국가가 추도하는 것은 당연(의무)하다는 것이 전제로, 기본적으로 민간인 희생자는 대상이 아님 29) 새로운 추도시설 건립 반대 논리는 아이자와 간[ 逢 澤 寛 ] 자민당 의원이 국회에서 야 스쿠니신사를 국가가 관리하지 않게 되면 그 중심은 무명전사의 묘지로 옮겨져, 한 쪽은 국가가 관리해 집중적인 추도가 가능하게 된다. 다른 한 쪽은 참배자도 점차 줄 어들 것이다. 지금은 육친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유지가 되겠지만 나중에는 풀이 무 성해질 것이다 (25회 중위원 특별위원회, 1956. 11. 28)라고 발언한 것에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새로운 추도시설은 야스쿠니신사의 위상을 저하시킨다는 것이었다. 30) 전후 일본에서의 전사자 추도시설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연구로는 남상구, 2005, 전후 일본에 있어서의 전몰자 추도시설을 둘러싼 대립: 야스쿠니신사와 치도리카 후치 전몰자 묘원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학회 제22집이 있다.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21 단체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야스쿠니신사 국영화운동은 결과적으로 국가가 종 교법인 야스쿠니신사와 공적인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론화하고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 새로운 추도시설 건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8월 고이즈미 총리 자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비판을 무 마하기 위해 야스쿠니신사와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에 대한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국내외 모든 분들이 거리낌없이 추도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 는 취지의 담화문을 발표한 이후다. 2001년 12월 후쿠다 야스 오[ 福 田 康 夫 ] 관방장관은 추도 평화 염원을 위한 기념비 등 시설 문제를 생각 하는 간담회 를 설치하고, 2002년 12월 무종교의 국립 추도시설 건설을 제안하 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2005년 11월에는 자민 민주 공명 3당 의원 약 130명이 새로운 국립 전몰 자 추도시설 건설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국립 추도시설 건설을 생각하는 모임 을 결성하였다. 민주당은 2009년 8월 중의원선거에서 아시아 중심 외교 표방 의 일환으로 국립 추도시설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추진은 없었다. 일본 정부가 국가 시설로 관리하고 있는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확대하고 그 위상을 국가의 공적인 전사자 추도시설로 하자는 방안도 제기되었으나 제안에 그치고 있다. 2013년 10월 3일에는 미일 안전보장협의위원회 참석을 위해 일본을 방문 했던 존 케리(John Kerry) 미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Chuck Hagel) 국방장관 이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참배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야스쿠니신사 총 리 참배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새로운 전사자 추도시설 건립 문제는 총리와 각료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외교 갈등을 초래하고, 일본 정부가 안보관련 법안을 개정함에 따라 전쟁 지역 에 자위대를 파견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면서부터 다시 대두되고 있다. 31) 31) ( 戦 争 のリアル: 3) 近 づく 靖 国 と 自 衛 官 戦 後 70 年 第 2 部, 戦 闘 での 死 定 まら
22 동북아역사논총 50호 2_쟁점 새로운 전사자 추도시설 건립을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대립구조를 정 리하면 <표 7>과 같다. 새로운 추도시설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은 국가에 의한 전사자 추 도시설이 없다는 것 자체가 국제적 관점에서 볼 때 비정상이고, 천황의 야스쿠 니신사 참배 중지로 발생한 천황의 전사자 추도시설 참배 문제를 해결할 수 있 <표 7> 새로운 추도시설을 둘러싼 대립 구조 지 지 반 대 세 력 논 리 세 력 논 리 새로운 추도시설 건설 민주당, 사민당, 공명당, 공 산당, 자민당 일부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위상 강화 요미우리신문 국립 추도시설이 없는 것 자체가 국제적 관점에서 볼 때 비정상적 상황임 천황이 참배 가능한 추도시설 필요 새로운 전사자 발생 시, 추도시설 역할 수행 야스쿠니 총리 참배로 인한 외교적 갈등 해소 새로운 시설은 야스쿠니 및 지도리가후치 묘원과 는 다른 성격의 시설로 공존이 가능 기존 시설의 확대를 통한 조속한 추진이 가능 자민당, 유족회, 야스쿠니신사, 신사 본청, 우익단체, 일 부 평화운동 단체(관계자) 일본의 중심적 추도시설은 야스쿠니로 새로운 추도시 설이나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확대는 야스쿠니의 존재 의미를 크게 훼손 일본이 다시 전쟁을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평화운동 단체) 야스쿠니신사 국가 관리 (A급 전범 분사) 자민당 일부, 유족회 일부 A급 전범 분사 후 야스쿠니를 비종교법인으로 만들어 국가 가 관리 야스쿠니의 추도시설로서의 역사성과 유족의 감정 존중 자민당, 유족회 A급 전범 분리 반대 교리상 불가능 식민지 합사자 문제와 연계 도쿄재판을 인정하는 결과 초래 ぬ 追 悼 の 形. 아사히신문, 2015. 2. 18.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23 고, 32) 향후 자위대가 전쟁 지역에 파견되어 사망할 경우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국가적인 추도시설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는 점 33) 을 내 세운다. 한국이나 중국은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인한 외교 갈등을 해소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 방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새로 운 추도시설을 지지하는 국민 여론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으로 34) 국립 추도시 설 건립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 상된다. 새로운 추도시설 건립에 반대하는 측은 야스쿠니신사의 전사자 추도시설 로서의 역사성과 유족의 감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이들은 야스 쿠니신사의 공적 성격을 확보하기 위해 A급 전범을 분리 후 동 신사를 비종교 법인으로 만들어 국가가 관리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A급 전범만 을 야스쿠니신사에서 분리하자는 제안에 대해 야스쿠니신사는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분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본래 교의( 敎 義 )와 교전( 敎 典 )을 갖고 있 지 않는 신도에서는 신앙상의 신령( 神 靈 )관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예전부터 분령( 分 靈 )을 해서 다른 신사에 모시는 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분령 이라고 해도 본래의 신령도 분령한 신령도 각자가 전 신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스쿠니신사는 246만 6천 여 주의 신령을 모시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의 신령을 분령한다고 해도 본래의 신령은 존재합니다 35) 라고 분사론과 합사취하 32) 하토야마 유키오[ 鳩 山 由 紀 夫 ] 민주당 대표는 2009년 8월 12일 기자회견에서 천 황폐하도 야스쿠니신사는 참배하지 않는다. 매우 괴로운 심정이실 거라고 생각합 니다. 폐하가 마음 편히 참배하실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발 언( 산케이신문, 2009. 8. 12, 23: 24) 하는 등 천황이 참배 가능한 시설의 필요성 을 누차 강조하였다. 33) 일본의 평화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와 관계자들 일부는 새로운 추도시설이 새로운 전사자 추도시설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점을 우려하여 새로운 추도시설 건설에 반대하고 있다. 34) 전사자 추도시설로 적당한 장소를 묻는 여론조사 결과( 아사히신문, 2006. 5. 2) 를 보면 야스쿠니신사(37%), A급 전범을 제외한 야스쿠니신사(19%), 국립시설 (19%), 지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15%), 기타(10%) 순이었다. 35) 야스쿠니신사 사무소 의견서, 2004. 3.
24 동북아역사논총 50호 자체가 신도의 교리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민당은 A급 전범 분사 문제는 신사 측이 자발적으로 결정할 문제로 정부가 이를 요구하는 것은 헌법의 정교분리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야스쿠니신사 는 향후 자위대원이 전사할 경우엔 합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36) A급 전범 분사론에 대해서는 A급 전범을 야스쿠니신사에서 분리해도 야스 쿠니신사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시설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국 정부나 언론이 먼저 A급 전범 을 분리하는 것이 마치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인 것 처럼 언급하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다. 3_연구 성과와 과제 일본에서의 전사자 추도와 국립 추도시설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연구로는 지 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중심으로 전후 일본에 있어서 추도시설을 둘러싼 대립을 다룬 남상구의 전후 일본에 있어서의 전몰자 추도시설을 둘러싼 대 립: 야스쿠니신사와 치도리카후치 전몰자 묘원을 중심으로 ( 한일관계사학 회 제22집, 2005)가 있다.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을 검토한 연구로는 추도 평화 염원을 위한 기념비 등 시설 문제를 생각하는 간담회 보고서가 자위대 해 외 파견의 원인이 되는 국제공헌 활동으로 인한 사망자도 그 대상으로 상정하 고 있음을 지적한 곽진오의 글로벌화와 일본 민족주의: 야스쿠니신사의 사례 를 중심으로 ( 일본학보 제68집, 2006), 새로운 국립추도시설 건설에 대한 일본 종교계의 의견을 검토한 박규태의 야스쿠니의 신화: 현대일본의 종교와 정치 ( 종교연구 제50호, 2008)가 있다. 최영호는 2009년 12월 4일 고려대 학교 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가 개최한 학술회의에서 대체 추도시설 건립 문 제를 검토하고,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가 일본 사회 쟁점으로 부상하게 되거 36) 교도통신[ 共 同 通 信 ], 2015. 8. 13.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25 나 외교적 차원에서 무종교적 참배의 필요성이 요구될 경우 일본 정부가 국립 추도시설 건설에 나설 가능성이 적지 않다 고 지적하였다. 37) 일본의 새로운 전사자 추도시설 문제에 대해서는 야스쿠니신사 문제로 인 한 외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자위대의 활동 범위 확 대에 따른 전사자 발생 시 공적 추도시설로서의 역할도 염두에 두고 연구를 진 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공적인 전사자 추도시설 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 닌 근대국가의 보편적인 문제라는 관점에서 근대국가와 전몰자 추도(시설)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야스쿠니신사 문제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나가는 것 이 필요하다. Ⅴ. 역사인식 문제 1_역사적 경위와 현황 야스쿠니신사는 전전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성전( 聖 戰 )으로 미화하고, 전사 자를 천황과 국가를 위해 죽은 영령으로 위령 현창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전 사자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패전 이후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978년 10월 A급 전범 합사와 1986년 다시 개관한 부속 전시관인 유슈칸[ 遊 就 舘 ]의 전시내용이다. 야스쿠니신사는 1978년 10월 17일 A급 전범 14명을 소화순난자( 昭 和 殉 難 者 ) 라는 명목으로 합사하였다. 동 신사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 이후 일 본 정부가 A급 전범을 일본 국내법상으로는 공무사( 公 務 死 ) 로 취급하여 은급 37) 최영호, 2009, 21세기 일본정부의 야스쿠니 정책, 고려대학교 동아시아문화교류 연구소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야스쿠니의 역사적 재조명.
26 동북아역사논총 50호 법의 대상으로 한 점을 근거로 A급 전범이 범죄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5년에는 야스쿠니신사 경내에 도쿄재판에서 재판관 중 유일하게 피고단 전원 무죄라는 의견서를 제출한 펄 박사 현창비가 건립되는데, 야스쿠니신사 의 침략전쟁에 대한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슈칸은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 기까지 근대 일본의 모든 대외 침략전쟁을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전쟁으 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것도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평가한다. 태평양전쟁 이후 아시아 각국의 독립에 대해서는 일본의 공적이라고 직접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군의 눈부신 승리 이후였다 고 기술, 일본의 전쟁이 아시아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음을 간접 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2001년 고이즈미 총리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한일, 중일 간의 갈등을 고조 시킨 것을 계기로 동 신사의 역사인식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도 높아졌다. 2006년 9월 14일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개최된 청문회에서 헨리 하이드 (Henry Hyde) 위원장이 우리 세대는 도쿄의 유슈칸이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아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여러 민족을 서방제국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시작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한국, 필리핀, 싱가포르, 솔로몬 군도를 방문하여 그들과 비참한 기 억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일본의 황군이 해방자였다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이 박물관에서 가르치고 있는 역사는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지 않으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38) 고 발언한 것은 국제사회가 야스쿠니신 사의 역사인식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38)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 자료집, 2006, JAPAN S RELATIONSHIP WITH ITS NEIGHBORS: BACK TO THE FUTURE? ;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 지, http://www.nahf.or.kr/data/야스쿠니%20미하원%20청문회.pdf.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27 2_쟁점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인식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일본의 대외전쟁이 침략이었 는가 아니면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는가라는 점이다. 일본 헌법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참화를 반성한다는 것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인식으로 평가받고 있는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村 山 富 市 ] 총리 담화는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끼친 것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표명하였다. 아베 총리 담화 준비를 위한 21세기 구상 간 담회 보고서도 1931년 이전의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는 세계적인 조류였다는 것을 내세워 정당화했지만, 1931년 이후의 전쟁에 대해서는 침략이었다고 명 기하고 있다. 아베 총리 담화도 침략이라고 명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1931년 이 후의 전쟁에 대해서는 잘못된 전쟁임을 인정하고 반성을 표명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모든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이것을 일본의 자위자존을 위한 전쟁으로 정당화하는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인식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 인식과 헌법의 이념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인식이 중학교 역사교과서(이쿠호샤[ 育 鵬 社 ], 지유샤[ 自 由 社 ]) 기술에까 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3_연구 성과와 과제 1978년 10월 A급 전범 14명 합사와 1985년 8월 나카소네 총리 야스쿠니신사 공식 참배를 계기로 야스쿠니신사는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시설이라는 인식 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가 구체적으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려고 하는지, 이러한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해왔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그다 지 높지 않다. 장세윤의 일본 야스쿠니신사 유슈칸의 한국 관련 전시 내용 검 토 ( 한국근현대사연구 제45집, 2008)는 유슈칸의 한국 관련 전시를 중심으 로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인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전후 야스쿠니신사의
28 동북아역사논총 50호 역사인식의 변화를 시간의 흐름을 축으로 하여 검토한 연구로는 아카자와의 靖 国 神 社 せめぎあう< 戦 没 者 追 悼 >のゆくえ ( 岩 波 書 店, 2005)가 있다. 동 연구는 야스쿠니신사 기관지 등을 통해 동 신사가 기본적으로 침략전쟁을 정당 화하는 시설이나 한시적으로 평화주의를 반영하기도 했었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인식 문제를 비판할 때는 A급 전범 합사 문제 가 주로 거론되고 있는데, 한국 침략 과정에서 전사한 자들이 야스쿠니신사에 어떻게 합사되었는지를 검토한 연구로는 송경섭 김광열의 開 港 期 朝 鮮 에서 死 亡 한 日 本 軍 의 야스쿠니[ 靖 國 ] 神 社 合 祀 : 江 華 島 事 件 부터 淸 日 戰 爭 까지 ( 한일민족문제연구 제24호, 2013)가 있다. 유슈칸의 전시내용과 그 변화를 통해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인식을 검토하 고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는 동 신사의 역사인식의 문제점을 입체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필요하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자들이 한국 침략과 어떤 관 계가 있었는지, 야스쿠니신사가 조선에서의 강제동원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인식의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본 우경화의 흐름 속에서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일본 국민 들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독일이 침략전쟁과 전사자 및 전쟁희생자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비교 분석하는 것도 야스쿠니신사 역사인식의 문제점을 밝히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Ⅵ. 맺음말 야스쿠니신사 문제는 1985년 나카소네 총리의 공식 참배 이후 한일, 중일 간 외교현안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외교 과제다. 그리고 한국인 강제동 원 피해자 약 21,000명이 무단으로 합사되었고 유족이 2차 피해 를 당하고 있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29 다는 점에서 식민지 청산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야스쿠니신사와 관련하여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인 무단합사, 총리 참배,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 역사인식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역사적 경 위와 현황, 쟁점, 연구 성과를 검토하고 과제를 제시하였다. 이 글에서는 논리 전개의 편의를 위해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4가지로 나누 어 검토했으나 이 문제들은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밀접 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총리 참배가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인 무단합사와 침 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역사인식이 문제이고, 한국인 무단합사가 문제가 되는 큰 이유는 총리 참배와 역사인식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립추도시설 건립 문제도 일본의 침략전쟁과 전사자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야스쿠니신사와 일본 정부가 침략전쟁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인 무단합사가 가능했던 것도 피해자가 아닌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일본 국 가의 논리를 앞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해결방안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 가 있다. 2015년 8월 14일 발표된 아베 총리 담화는 1931년 만주사변 이전의 침략전 쟁이 시대의 조류였다는 논리를 내세워 정당화하고 있다. 침략을 인정하는 것 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사자에 대한 모독이라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왜곡된 역사인식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아베 담화는 야스쿠니신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 만 아베 담화에서 언급한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고 가족의 행복을 빌면서 전쟁 터에서 산화한 분들, 즉 일본의 전사자들을 국가를 위한 죽음 으로 현창하는 시설이 야스쿠니신사다. 아베 담화의 역사인식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 1995년 무라야마 총리 담화가 아니라 침략전쟁을 정당 화하고 자국의 전사자를 현창하는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인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쟁점은 식민지 지배를 비롯한 일본의 침략전 쟁과 그로 인한 희생자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다. 자민당은 2015년 11
30 동북아역사논총 50호 월 29일 총재 직속기구로 청일전쟁 이후의 역사를 검증하는 역사를 배우고 미 래를 생각하는 본부 를 설치하였다. 39) 동 기구가 어떠한 결과를 도출할지 주목 된다. 자민당의 검증에 대한 재검증도 포함해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실태 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제2의 가해 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 요하다. 야스쿠니신사 문제는 근대국가가 안고 있는 공적인 전사자 추도라는 보편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식민지와 침략전쟁 피해라 는 일본만의 특수한 문제이기도 하다. 식민지 청산과 유족의 인권이라는 관점 에서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야스쿠니신사는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메이지 2년)에 건립된 시 설로 일본이 근대국가 건설 과정과 침략전쟁에서 전사자 추도(위령)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전전과 전후를 관철하는 역사인식이 무엇인지를 검토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연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적 시각에서 야스쿠니신사와 동 신사를 둘러싼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함과 동시에 근대국가 일본의 성립 과 침략전쟁에 동 신사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에 대한 연구를 병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뿐 아니라 야스쿠니신사 자체에 대한 연구를 통해 보다 넓은 시야에서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40) 39) 동아일보, 2015. 11. 30. 40) 야스쿠니신사와 신도에 관한 연구로는 박규태, 2000, 야스쿠니[ 靖 國 ] 신사와 일 본의 종교문화, 종교문화연구 2권; 박진우, 2007, 국가신도와 야스쿠니신사, 초혼사의 통합과정에 대한 재검토, 일본사상 12권; 전성곤, 2009, 야스쿠니신 사[ 靖 国 神 社 ] 와 문화 이데올로기 습합의 문제: 예대제( 例 大 祭 ), 제식( 祭 式 ), 친배 ( 親 拝 )를 중심으로, 일본문화연구 제30집이 있다. 그리고 2015년 5월 7일에 개 최된 고려대학교 일본연구센터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2015, 야스쿠니에 다가서 다 에서 발표된 박규태, 감정의 야스쿠니: 모노노아와레의 르상티망 ; 조규헌, 야스쿠니신사 예대제와 봉납스모 ; 박삼헌, 야스쿠니신산의 공간적 변용: 유흥 의 공간에서 국체의 공간으로 ; 김용철, 야스쿠니신사 유슈칸의 건립과 동시대 전 쟁박물관으로의 성격 변화 는 야스쿠니신사 자체에 대한 연구가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31 참고문헌 논문 강경민, 2012, 야스쿠니 소송의 경과와 쟁점, 역사와 책임 제3호. 곽진오, 2006, 글로벌화와 일본 민족주의: 야스쿠니신사의 사례를 중심으로, 일본 학보 제68집. 김광열, 2009, 전쟁 책임에 대한 현대 일본 사회의 인식-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 문제를 중심으로, 함동주 김광열 임현순, 근현대 일본의 한국 인식, 동북아 역사재단. 남상구, 2005, 전후 일본에 있어서의 전몰자 추도시설을 둘러싼 대립: 야스쿠니신사 와 치도리카후치 전몰자 묘원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학회 제22집. 남상구, 2006, 야스쿠니신사 합사 문제에 관한 고찰, 일본사상 제10호. 남상구, 2010, 한국 한국인과 야스쿠니신사 문제, 한일관계사연구 제35집. 노기 가오리, 2009, 야스쿠니신사의 한국인 합사에 관한 연구, 2008년도 동북아역 사재단 국내외 신진연구자 육성 사업 연구결과보고서. 마크 셀든, 2008, 전쟁과 역사의 기억 그리고 아태지역의 미래 미일과 야스쿠니 문 제, 동북아역사논총 제28호. 박규태, 2000, 야스쿠니[ 靖 國 ] 신사와 일본의 종교문화, 종교문화연구 제2권. 박규태, 2008, 야스쿠니의 신화: 현대일본의 종교와 정치, 종교연구 제50호. 박진우, 2007, 국가신도와 야스쿠니신사, 초혼사의 통합과정에 대한 재검토, 일본 사상 제12권. 박진우, 2009, 한국에서 본 야스쿠니 문제, 일본역사연구 제30집. 송경섭 김광열, 2013, 開 港 期 朝 鮮 에서 死 亡 한 日 本 軍 의 야스쿠니[ 靖 國 ] 神 社 合 祀 : 江 華 島 事 件 부터 淸 日 戰 爭 까지, 한일민족문제연구 제24호. 위나이밍, 2008, 타이완의 야스쿠니신사 문제: 역사 인식과 충돌, 동북아역사논총 제28호. 이규수, 2006, 야스쿠니 신사참배 논란과 동아시아 근대사 인식, 사림 제26호. 이상훈, 2010,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소고, 일본연구 제43호. 장세윤, 2008, 일본 야스쿠니신사 유슈칸의 한국 관련 전시 내용 검토, 한국근현대 사연구 제45집. 장신, 2011, 일제하 조선에서 야스쿠니신사의 표상과 조선인 합사자, 역사문제연
32 동북아역사논총 50호 구 통권 25호. 전성곤, 2009, 야스쿠니신사[ 靖 国 神 社 ] 와 문화 이데올로기 습합의 문제: 예대제( 例 大 祭 ), 제식( 祭 式 ), 친배( 親 拝 )를 중심으로, 일본문화연구 제30집. 조진구, 2005, 일본의 과거 역사인식과 야스쿠니신사 문제, 한국과 국제정치 제21 권 제4호(통권 제51호 2). 지영임, 2013, 야스쿠니재판을 통해 본 한일 종교관의 쟁점과 해결방안, 일본문화연 구 제46호. 단행본 노길호, 1996, 일본의 굴레 야스쿠니신사, 문창출판. 동북아역사재단 편, 2014, 야스쿠니신사에 묻는다 야스쿠니신사 무단합사 철폐 소 송, 동북아역사재단. 赤 澤 史 朗, 2005, 靖 国 神 社 せめぎあう< 戦 没 者 追 悼 >のゆくえ, 岩 波 書 店. 赤 澤 史 朗, 2015, 戦 没 者 合 祀 と 靖 国 神 社, 吉 川 弘 文 館. 大 江 志 乃 夫, 1984, 靖 国 神 社, 岩 波 書 店. 国 立 国 会 図 書 舘 調 査 立 法 考 査 局, 1976, 靖 國 神 社 問 題 資 料 集 ( 調 査 資 料 : 76 2). 国 立 国 会 図 書 舘 国 立 国 会 図 書 館 調 査 及 び 立 法 考 査 局, 2007, 新 編 靖 国 神 社 問 題 資 料 集. 小 堀 桂 一 郎, 1988, 靖 国 神 社 と 日 本 人, PHP 研 究 所. 子 安 宣 邦, 2004, 国 家 と 祭 祀 : 国 家 神 道 の 現 在, 青 土 社. 高 橋 哲 哉, 2005, 靖 国 問 題, 筑 摩 書 房. 田 中 伸 尚, 2002, 靖 國 神 社 の 戰 後 史, 岩 波 書 店. 田 中 伸 尚, 2007, 靖 国 訴 訟 ー 戦 死 者 の 記 憶 は 誰 のものか, 岩 波 書 店. 村 上 重 良, 1974, 慰 霊 と 招 魂 靖 国 の 思 想, 岩 波 書 店. 학술회의 자료집 고려대학교 동아시아문화교류연구소 국제학술회의 자료집, 2009, 야스쿠니의 역사적 재조명. 고려대학교 일본연구센터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2015, 야스쿠니에 다가서다. 일본의 우경화와 야스쿠니 문제 대응을 위한 국제회의 자료집, 2014, 동아시아 평화와 야스쿠니신사.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33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2007, 진상조사보고서(Ⅶ 1): 야스쿠니신 사 한국인 합사경위 및 합사자 명부 조사. Anti Yasukuni U.S Campaign 자료집, 2007, 인권, 문명, 평화의 눈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본다.
34 동북아역사논총 50호 [국문 초록]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남상구 야스쿠니신사 문제는 1985년 나카소네 총리의 공식참배 이후 한일, 중일 간 외 교현안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외교 과제다. 그리고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 약 21,000명이 무단으로 합사되었고 유족이 2차 피해 를 당하고 있다 는 점에서 식민지 청산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글 에서는 야스쿠니신사와 관련하여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한국인 무단합 사, 총리 참배,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 역사인식을 둘러싼 문제의 역사적 경위 와 현황, 쟁점, 연구 성과를 검토하고 과제를 제시하였다. 이 글에서는 논리 전개의 편의를 위해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4가지로 나누 어 검토했으나 이 문제들은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야스쿠니신사와 일본 정부가 침략전쟁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인 무단합사가 가능했던 것도 피해자가 아닌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일본 국 가의 논리를 앞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야스쿠니신사의 역사인식 문 제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실태를 밝히는 것이 필요 하다. 그리고 야스쿠니신사 문제는 제2의 가해 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야스쿠니신사 문제는 근대국가가 앉고 있는 공적인 전사자 추도라는 보 편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식민지와 침략전쟁 피해라는 일본만의 특수한 문제이기도 하다. 식민지 청산과 유족의 인권이라는 관점에 서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35 주제어 야스쿠니신사 문제, 총리 참배, 한국인 무단합사, 역사인식, 새로운 국립추도 시설
36 동북아역사논총 50호 [ABSTRACT] Current Status and Research Trends of the Yasukuni Shrine Issue Nam Sanggu The Yasukuni Shrine issue has significance in two aspects. First, the issue is a diplomatic challenge for Korea. The Yasukuni Shrine issue has been a pending issue among Korea, China, and Japan since Nakasone Yasuhiro, the former prime minister of Japan, officially visited the shrine in 1985. Second, it is also a historical challenge to solve the remaining problems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More than 21,000 Korean people, who were forcibly mobilized by Japan, were enshrined in Yasukuni Shrine together with Japanese war criminals without any notice. The bereaved families of the mobilized Koreans insist upon receiving their ashes, but their requests have been ignored. The families are still suffering from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this paper, I focus on controversial issues related to Yasukuni Shrine: 1) the enshrining of Koreans in Yasukuni Shrine; 2) the prime minister s visit to the shrine; 3) the new national memorial facilities; and 4) the Japanese view of history. I present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each issue, controversies regarding each issue, results of earlier studies related to each issue, and tasks to be solved. Even though I dealt with the four issues separately in this paper for logical convenience, they are, in fact, closely related. The most important factor is how Yasukuni Shrine and the Japanese government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현황과 연구 동향 37 view the history of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the war of invasion. Enshrinement of Koreans in Yasukuni Shrine reflects Japan s recognition of a history that justifies its war of invasion. Before criticizing Japan s view of history, analysis of the history of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the war of invasion should proceed further. The Yasukuni Shrine issue can be seen from two perspectives: honoring the fallen soldiers, and disregard for damages from the Japanese colonial era and the war of invasion. We should focus on the second view from the perspectives of the elimination of Japanese colonial rule and the human rights of the bereaved. Keywords Yausukuni Shrine Issue, the prime minister's vist, the enshrining of koreans, the new national memorial facilities, view of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