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 洋 史 學 會 秋季硏究發表會 일시: 2010 년 10 월 30 일 ( 토 ) 장소: 고려대학교 서관(문과대학) 주최 : 동양사학회 주관 : 고려대학교 사학과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후원 : 동북아역사재단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東洋史學會 2010 秋季硏究發表會 日程 전체 일정 참가자 등록: 9:30~10:00 (서관3층) 오 전 발 표: 10:00~12:00 (서관3층) 점 심 시 간: 12:00~14:00 오 후 발 표: 14:00~17:00 (서관3층) 우호 동양사학 저작상 시상: 17:10~17:30 (서관317) 학회 리셉션: 17:30~18:30 (우산골) 분과별 발표 일정 中國古代史 장소 : 서관 314A호 오전사회 : 김병준(한림대) 박봉주(서울대) :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양순자(고려대) : 한비자의 法과 術의 관계 재조명 오후사회 : 정하현(공주대) 토론 : 이명화(한양대) 토론 : 임병덕(충북대) 최진묵(서울대) : 張家山 漢簡 算數書의 程 과 중국고대 기술과 생산의 표준화 토론 : 김진우(고려대)
中國中世史 장소 : 서관 314B호 오전사회 : 최재영(서울대) 오후사회 : 김종섭(서울시립대) 조성우(서울대) :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 - 道敎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토론 : 김선민(연세대) 최진열(동덕여대) :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墓誌銘의 분석을 중심으로 이영철(영남대) : 唐代 藩鎭의 攝職 토론 : 김호(고려대) 토론 : 정병준(동국대) 홍승태(한국외대 역사문화연구소) :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연구 -<春秋>에 대한 기본인식과 三傳의 활용을 중심으로- 토론 : 김석우(원광대) 宋遼金元史 장소 : 서관 316A호 오전사회 : 김위현(명지대) 오후사회 : 김용완(충남대) 최해별(이화여대) : 당송시기 妾의 생활 - 夫妾 관계의 계약적 특성을 중심으로 김상범(한국외국어대) : 五代 시기 거란과의 전쟁과 외교 유원준(경희대) : 송-서하간 전쟁의 발발 배경과 그 성격 김영제(단국대) : 북송 神宗朝의 대외 교역정책과 高麗 토론 : 조복현(충남대) 토론 : 박지훈(경기대) 토론 : 오원경(숙명여대) 토론 : 나영남(한국외대) 이근명(한국외국어대) : 10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토론 : 육정임(경희대)
明淸史 장소 : 서관 307호 오전사회 : 서인범(동국대) 오후사회 : 정철웅(명지대) 홍을표(강원대) :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 八陣合變圖說을 중심으로 토론 : 강원묵(육군사관학교) 이민호(한국한의학연구원) : 淸代 懷慶藥商 의 對外進出과 商業네트워크 김문기(부경대) : 17세기 中國과 朝鮮의 小氷期 기후변동 토론 : 정혜중(이화여대) 토론 : 염정섭(한림대) 송요후(인천대) : 南通, 昆山, 蘇州 지역의 破血湖 儀式 에 대해 김선민(고려대) : 雍正帝의 동북 변경 통치 中國近現代史 토론 : 이경룡(세종대) 토론 : 송미령(전북대) 장소 : 서관 317호 오전사회 : 이은자(전북대) 오후사회 : 유용태(서울대) 박정현(고려대) : 19세기 말 조선의 중국인 거류지와 운영체제 토론: 이옥련(인하대) 손승희(인천대) : 중국민주동맹의 좌절과 선택: 국공내전시기 제3세력의 독자성 모색 토론: 이재령(단국대) 오병수(성균관대) : 냉전시기 호적과 중국의 반공적 자유주의 천성림(한남대) :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동향과 과제 토론: 조경란(연세대) 토론: 이성이(서울여대)
日本史 장소 : 서관 316B호 오전사회 : 남기학(한림대) 오후사회 : 함동주(이화여대) 김선민(숙명여대) : 聖스러움과 女帝 - 善德과 皇極의 즉위배경- 토론 : 김은숙(교원대) 김영(한국외대) : 장군 미나모토 요리이에(源賴家)와 겐지장군관(源氏將軍觀) 최은석(한국해양수산개발원) : 일본 근세의 도시와 재해 토론 : 신미나(고려대) - 막부의 사후대책에 초점을 맞추어 이수진(연세대) : 전간기 일본의 산파와 출산정치 김민규(동북아역사재단) : 脫亞論 讀法 토론 : 윤유숙(동북아역사재단) 토론 : 이은경(서울대) 토론 : 방광석(성균관대)
目 次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박 봉 주 1 韓非子 의 법(法)과 술(術)의 관계 재조명 양 순 자 13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최 진 묵 21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 道敎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조 성 우 35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墓誌銘의 분석을 중심으로 최 진 열 43 唐代 藩鎭의 攝職 이 영 철 69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 연구 春秋 에 대한 기본인식과 三傳의 활용을 중심으로 홍 승 태 83 당송시기 妾의 생활 夫妾관계의 계약적 특성을 중심으로 최 해 별 93 오대시기 거란과의 전쟁과 외교 전쟁과 외교가 민간신앙의 전개에 미친 영향 김 상 범 107 송-서하 전쟁 원인 분석 유 원 준 115 北宋 神宗朝의 對外交易 政策과 高麗 김 영 제 127 10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이 근 명 131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八陣合變圖說 을 중심으로 홍 을 표 141 淸代 懷慶藥商 의 對外進出과 商業네트워크 協盛全 과 杜盛興 을 중심으로 이 민 호 153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김 문 기 165
江蘇省 南通, 蘇州 및 昆山 지역 一帶의 破血湖 儀式에 관하여 송 요 후 181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김 선 민 193 19세기 말 조선의 중국인 居留地와 운영체제 박 정 현 221 중국민주동맹의 좌절과 선택 국공내전시기 제3세력의 독자성 모색 손 승 희 229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현황과 과제 천 성 림 241 聖스러움과 女帝 善德과 皇極의 즉위배경 김 선 민 263 장군 미나모토 요리이에(源頼家)와 겐지장군관(源氏将軍観) 김 영 273 일본 근세의 도시와 재해 막부의 초기 대응을 중심으로 一 최 은 석 283 전간기(戰間期) 일본의 산파와 출산정치 이 수 진 295 脫亞論 (1885年) 讀法 김 민 규 305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박봉주(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目 次 머리말 Ⅰ. <<楚辭>> 초지역의 巫歌 Ⅱ. 巫와 巫儀의 대한 素描 Ⅲ. 楚地域의 巫俗의 神들 맺음말 머리말 春秋戰國時代의 다수 지역문화 계열 중에서도 長江 이남 문화권을 대표하는 楚文化圈 의 문화 사회적 특징과 세부 내용들은 최근 2 30년 동안 滿開한 해당 지역의 풍부한 고고학 연구 성과 및 그를 활용한 문헌사료의 보다 정밀한 분석 등으로 인해 많은 부분 이 새롭게 규명되었다. 楚國 강역 곳곳에서 출토된 풍부한 簡牘 帛書 帛畵 및 각종 副 葬品 등으로 인해 전국시대 초나라의 통치체제와 행정제도 및 諸子思想 自然哲學 宇宙 觀 등 다양한 내용들이 재조명되었고, 그로 인해 楚文化의 면모도 더욱 다각적으로 밝혀 지게 되었다. 초지역의 諸子思想 自然哲學 宇宙觀 등은 그 자체로도 관심 대상이지만, 북방 中原 文化圈 齊魯文化圈 秦文化圈과 남방 楚文化圈 吳越文化圈 등의 차이와 각각의 특수성 을 부각시켜 戰國時代 지역문화의 다원성을 명료하게 그리는 데에도 유용한 소재가 된 다. 또한 동일한 문제 의식 하에 전국시대 초지역에서 巫俗的 呪術的 기풍과 종교적 신화적 세계관이 여타 지역보다 오래도록 강하게 온존된 점이 계속 지적되어 왔다. 그러 나 이런 류의 지적은 楚地에 巫風 淫祀가 성행하였다 1)는 식의 단편적 결과적 서술에 1) ① <<楚辭章句>> <九歌序>, 昔楚國南郢之邑, 沅 湘之間, 其俗信鬼而好祠. 祠, 一作祀. ② <<漢書>> <地理志曰>, 楚有江漢川澤山林之饒 信巫鬼, 重淫祀.
2 그칠 뿐, 정작 초의 巫風과 淫祀의 세부 내용과 실체를 專論한 연구 성과는 의외로 많지 않다. 출토 자료 중에서도 초지역의 토착 신앙과 巫俗에 관련된 내용은 諸子思想 등에 비하면 빈약한 편이다. 토착 신앙과 민간 巫俗 등은 해당 지역문화의 (타지역과의 교류가 본격화되기 이전의) 고유성과 순수성을 보다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지역문화의 이해와 관련해 검토할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초지역의 민간 무속 신앙에 관해서는 <<詩經>>과 함께 중국 고대의 양 대 시가집으로 꼽히는 <<楚辭>>에 상당히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따라서 본고는 <<楚辭>>를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楚文化圈 영역 내에서 출토된 다수의 帛書 簡牘 殘片 및 각종 초문화 관련 文物들을 접목시키면서 전국시대 초지역의 巫俗과 관련 의식 등을 대략적으로 소묘해 보고자 한다. Ⅰ. <<楚辭>> 초지역의 巫歌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분석하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지만, 楚 辭의 경우 문학 양식 및 작품 내용을 뜻하는 辭 와 지역성을 상징하는 楚 를 따로 분리 하기 힘들 정도로, 楚辭 는 고대 초지역과 불가분의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남방 초지역 의 방언을 다량 채용하였고, 초지역의 풍속을 상세히 반영하였으며, 초지역의 山川과 物 産, 기후 등을 묘사하였고, 楚聲을 사용하여 (<<詩經>>과 구별되는) 독특한 운율과 성조 를 지니는 등(<<宋文鑑>> <翼騷序>, 屈宋諸騷, 皆書楚語, 作楚聲, 紀楚地, 名楚物, 故可 謂之楚辭.) 다른 지역 문화권에서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해당 지역의 문화적 개 성과 풍취를 온전히 담고 있다. 주지하듯 북방의 <<詩經>>과 남방의 <<楚辭>>를 대비시 켜 각각의 제작 환경, 형식, 작품성, 내용 등을 비교한 諸說은 예로부터 분분하였으나,2) <<詩經>>이 북방의 다수 列國과 諸文化圈 중 어느 하나에 전적으로 대응되지 않는 것과 2) 대체로 아래와 같이 비교하는 것이 일반적인 듯하다. <<詩經>> 제 작 黃河 유역의 북방 지역에서 春秋時代에 환경 주로 저술됨. 華夏族의 평민 작자 중심. 4언 위주 短詩. 短句 音調 重疊, 詠嘆 형식 반복. 작 품 性情을 구속하고 근신하며, 표현이 質朴 성 하고 사실적임 人事와 실생활에 관한 온화하고 평민적 내용 내용 <<楚辭>> 長江 유역의 남방 지역에서 戰國時代에 주 로 저술됨. 荊蠻 귀족 시인 중심. 6언 위주 長詩. 長句騈語. 직접적 서술 위 주. 자유분방하고 美麗하며 낭만적임. 신화 전설 중심. 귀족적이고 열렬함.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 박 봉 주 3 는 대조적으로, <<楚辭>>는 일찍부터 초지역 초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되었다. 따 라서 초문화와 관련해 반드시 검토해야 할 자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기존에는 楚辭의 문학적 완성에 크게 기여한 屈原의 憂國忠情의 詩心에 경도된 나머지 <<楚辭>> 전체를(굴원의 작품은 물론 그의 작품이 아닌 것까지도) 忠君 愛國 덕목을 고 취하는 유가적 교훈시처럼 인식하고 존중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어서 그 속에 담긴 초 지역의 민간 신앙, 巫俗 巫儀에 관한 내용들을 다소 간과하였다. 지역사 연구가 활성화 됨에 따라 <<楚辭>>의 문학적 美麗함, 애국충정의 정서 외에도 초문화의 고유성을 전하 는 부분, 즉 전국시대 초지역의 민간 신앙과 巫俗을 반영하는 내용들을 재조명하게 되었 다. 특히 <<楚辭>>의 효시인 <九歌>가 기원전 5 3세기 무렵 남방의 荊蠻 지역에서 유 전된 민간 巫歌 내지 민간 戀歌(순수한 연가라기보다는 연가 양식을 띈 무가임)를 채 록 정리한 작품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와 관련하여 楚辭의 辭 를 <<易經>>의 각 辭(卦辭 爻辭 象辭 繫辭), 종 갑골문의 卜辭 및 祭辭 祝辭 告辭 哀辭 弔辭 등과 동일한 의미의 神語性 글로 파악하게 되었다.3) 적어도 <九歌>만큼은 전국시대까지 초 지역에서 대대로 전승된 신에게 바쳐진 巫歌들, 즉 이 지역의 巫가 각종 巫儀에서 숭배 대상인 신령을 위해 부른 노래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초지역의 토착 巫俗文化를 대표하 는 작품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이런 성격은 <九歌>만이 아니라 굴원의 작 품과 後人이 擬作이라 추정되는 <招魂>, <大招>, <遠遊>, <卜居>, <漁夫> 등에서도 부분 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楚辭는 초지역 초문화의 색채와 개성을 강하게 담은 남방 문학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楚辭의 범위는 지역문화적 성격을 보존하던 전국시대 前漢 초기, 초지역 출 신의 屈原 宋玉 淮南小山 嚴忌 등이 지은 작품들로 한정해야 할 것이다.4) (즉 굴원의 <離騷>, <九章> 9편, <天問>, 宋玉의 <九辯>, <招魂>, 淮南小山의 <招隱士>, 嚴忌의 <哀 時命>와 미상의 楚人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招魂>, <大招>, <遠遊>, <卜居>, <漁夫> 등 이다. 현재 王逸本 <<楚辭章句>>에 정리된 <惜誓>, <七諫> 등 漢代의 작품들은 楚辭體 를 계승한 漢賦로 파악되는 경향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楚辭>> 諸篇에 반 영된 巫俗 巫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3) 4) ① <<楚辭>> <離騷>, 跪敷衽以陳 辭 兮, 耿吾旣得此中正. ② <<楚辭>> <抽思>, 玆歷情以陳辭 兮, 蓀詳聾而不聞 與美人抽怨兮, 幷日夜而無正. 憍吾以其美好兮, 敖朕辭而不聽. <<史記>> <屈原列傳>, 屈原旣死之後, 楚有宋玉 唐勒 景差之徒者, 皆好辭而以賦見稱.
4 Ⅱ. 巫와 巫儀의 대한 素描 원시시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민간의 巫儀 내지 祭儀는 크게 迎神(=請神) 娛神(혹은 祭神) 送神의 3단계로 이루어진다. 儒敎의 禮經 禮書 등에 정리된 규범적 체계로서의 祭禮는 이보다 몇 단계로 세분되지만, 원시시대부터 후대까지 관행적 사실적 질서로서 행해진 민간 巫儀 내지 祭儀는 대략 이 정도로 구분될 듯하다. 巫儀의 주재자인 巫는 각 단계에 해당하는 巫歌를 읊조리고 巫樂을 연주하며 巫舞(淨潔舞 迎神舞=請神舞 本舞= 娛神舞 送神舞)를 추어 의식의 열기를 고조시키면서 점차 無我境 상태로 몰입하여 신과 합일됨을 지향한다. <<楚辭>>의 다수 편에서는 이러한 민간 巫俗 巫儀의 일련의 진행 과정이 곳곳에서 散見되는데, 이는 여타의 문헌 사료와 출토 자료에서는 보기 힘든 <<楚辭>>만의 특징이 며, 그 중에서도 특히 <九歌> 11편에 핵심 내용들이 집중되어 있다. 11편은 <東皇太一>, <雲中君>, <湘君>, <湘夫人>, <大司命>, <少司命>, <東君>, <河伯>, <山鬼>, <國殤>, <禮 魂>인데, 이들은 초지역의 토착 天神 地祗 人鬼들로서 최고신이자 天帝인 東皇太一(太 一神), 月神인 雲中君, 湘水를 다스리는 남신인 湘君, 湘水를 다스리는 여신인 湘夫人, 인 간의 壽命을 관장하는 大司命, 유아의 壽命을 관장하는 少司命, 태양신인 東君, 강의 신 河伯, 산의 정령인 山鬼, 순국 영령들인 國殤, (무사히 일생을 마친) 여느 영혼들을 뜻하 는 禮魂 등이다. 각 편은 해당 신령에게 바치는 巫儀의 진행 과정을 (편마다 가감 장단 의 차이는 있지만) 迎神 娛神(혹은 祭神) 送神의 단계에 따라 묘사하고 있다. 迎神 娛 神의 중간에 (迎神의 결과로) 降神하는 광경이 美麗하고 장엄하게 묘사되기도 한다. 이처 럼 <九歌>의 각 편들을 통해 해당 신령들이 전국시대 초지역의 민간 신앙과 무속 의식 의 대상이 된 사실과, 관련 무속 의식의 대강의 절차를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巫儀에서는 巫 1인이 의식을 주관하는 儀巫 내지 祭巫가 되어 獨唱 獨舞하 지만, 때로는 2인의 巫가 1인은 神巫(신령 역할을 담당하는 巫)로, 1인은 儀巫(의식을 주 관하는 巫)로 분장하여 번갈아서 唱 舞하며, 부분적으로 群唱 群舞가 동원되기도 한다. 東皇太一 河伯 山鬼에게 바치는 巫儀에서는 儀巫가 독창 독무하고, 湘君 湘夫人 大 司命에게 바치는 巫儀에서는 2巫가 번갈아 唱 舞하며, 雲中君 少司命에게 바치는 무의 에서는 의무가 독창하고 신무가 독무한다. 또한 東君에 대한 무의에서는 태양으로 분한 神巫와 群巫가 번갈아 唱 舞한다. 대체로 남신에게 바치는 무의는 女巫가 주재하고 여 신에게 바치는 무의는 男巫가 주재하는데, 이러한 異性의 神 巫 간의 교류는 때때로 남 녀의 연애나 밀회로 은유 각색되기도 한다. 남신인 湘君, 여신인 湘夫人, 여성적 성격의 山鬼에게 바치는 무의를 각각 여무 남무 여무가 주재하면서 그 과정이 마치 남녀의 戀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 박 봉 주 5 事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장치인 동시에, 巫儀에 戱劇的 성 격을 부여하여 일종의 巫劇 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九歌> 각 편에 수록된 11신령에 대한 무속 의식의 진행 절차 및 주요 특성을 표로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신령 東皇太一 雲中君 湘君 湘夫人 大司命 少司命 東君 河伯 山鬼 國殤 禮魂 神格 太一神-天神 月神-天神 水神-地祗 水神-地祗 人鬼 人鬼 日神-天神 水神-地祗 山神-地祗 人鬼 人鬼 巫 儀巫 1인 神武 儀巫 神武 儀巫 神武 儀巫 神武 儀巫 神武 儀巫 神武 群巫 儀巫 1인 神武 儀巫 巫儀 절차 迎神 娛神 送神 獨唱 獨舞 儀巫 獨唱 神武 獨舞 合唱 合舞 合唱 合舞 合唱 合舞 儀巫 獨唱 神武 獨舞 合唱 合舞 獨唱 獨舞 巫歌 合唱 巫舞 合舞 비고 娛神 절차 매우 상세함 남녀 戀事처럼 각색됨 남녀 戀事처럼 각색됨 戀詩 양식을 차용함. 娛神 절차 매우 상세함. 남녀 戀事처럼 각색됨 ( ) 鎭魂歌적 성격. ( ) 鎭魂歌적 성격 * <國殤>은 迎神 送神 절차는 생략된 채 전투 장면 묘사를 통해 순국 영령들( 國殤 )의 넋을 위 로하는 내용으로, 순국 영령들에 대한 鎭魂은 넓은 의미에서 娛神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이 다. 여느 영혼들에 대한 鎭魂을 다룬 <禮魂>은 迎神 娛神 절차가 생략된 채 소략하게 送神 위 주로만 구성된다. (<禮魂> 편에 대해서는 楚辭의 종결 어구인 亂辭 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이하에서 迎神 娛神(혹은 祭神) 送神의 각 단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1. 淨潔 告辭와 迎神 특정 신령에게 바치는 무속 의식은 해당 신령의 지상 강림을 유도하는 迎神 절차로부 터 시작된다. 迎神에는 巫가 신령을 영접하는 행위 그 자체뿐 아니라, 이와 관련된 巫儀 의 제반 준비 과정 및 영신 결과 신령이 강림하는 장면까지가 앞 뒤로 포함되어 함께 묘 사되기도 한다. 巫儀를 주재하게 된 巫는 迎神 전에 심신의 정결성을 신령에게 고하는 巫辭를 읊고 그 를 입증하는 淨潔舞를 추는데, 이는 신과 인간을 매개하고 巫儀를 주관하는 巫에게 있어 서 심신의 정결성이야말로 필수 조건인 때문이다. 특히 신내림을 받은 降神巫에 비해 世 襲巫는 淨潔의 告辭가 더욱 중시되었는데, <<楚辭>>의 <九歌>와 기타 제편에는 관련 내 용들이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淨潔 告辭에는 종종 무의를 준비하는 절차, 즉 祭壇 祭殿을 정비하고 祭品을 진설하며 巫服을 구비하는 등의 행위들도 함께 연계되어 묘사되
6 기도 한다. (또한 淨潔 告辭는 11신령에 대한 의식뿐 아니라 <<楚辭>> 전반을 관통하는 詩作의 영적 동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楚辭>> 제편에는 江離(暖海의 얕고 맑은 물에서 나는 향초), 揭車, 瓊芳, 菌桂(계수 나무의 일종), 杜若, 杜衡, 木蘭(=木蓮), 麋蕪(궁궁이), 芳芷, 芳香, 白芷, 薜荔(줄사철나무), 山椒, 石蘭, 蓀(창포의 일종), 宿莽(宿根草. 겨울에도 죽지 않는 향초), 申椒(山椒의 일종), 辛夷(백목련), 女羅, 留夷, 幽蘭, 荃(石菖蒲의 일종), 秋蘭(가을에 연보라빛 꽃이 피는 향 초), 辟芷(숲 속에서 나는 향초), 蕙茝(蕙草와 白芷), 蕙草 등 다양한 香草와 香木들이 계 속 등장하며, 巫가 이들로 沐浴齋戒하고 이들을 몸에 지녀 정결함을 유지한다는 내용이 곳곳에서 散見된다. 굴원의 작품이자 <<楚辭>>의 대표작으로도 꼽히는 <離騷>에는 굴원 이 자신의 생애와 가계를 구술하면서 세습무5)의 후예인 사실을 顯彰하는 내용이 두드러 지며, 아울러 무의 정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香草 靈草 등으로 몸을 깨끗이 하는 한편, 은나라의 神巫였던 巫咸을 비롯한 선대의 뛰어난 巫師들을 귀감 삼아 속세의 비루 함에 물들지 않고 정신적 고결함을 지키고자 다짐하는 내용들이 반복된다.-6) 이로부터 屈原이 초지역의 세습무라는 정체성에 입각해 楚辭 작품을 창작하고, 선대로부터 전승된 민간 巫歌(<九歌>)들을 채록하여 수준 높고 유려한 楚辭體로 改作 增刪한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정결성의 巫辭를 신에게 고하고 淨潔舞를 추는 절차는 유교의 규범화된 祭 禮에서는 齋戒에 대응될 것이며, 이와 연계된 무의의 준비 과정은 陳設 排設 등에 대응 될 것이다. 심신의 정결성을 고한 다음 巫는 신을 영접하게 되는데, <九歌> 11편에는 國殤과 禮魂 을 제외한 9신령의 迎神 장면이 아래와 같이 다채롭게 묘사되고 있다. ① 東皇太一 : 吉日兮辰良, 穆將愉兮上皇. 撫長劍兮玉珥, 璆鏘鳴兮琳琅. 瑤席兮玉瑱, 盍將把 兮瓊芳. 蕙肴蒸兮蘭藉, 奠桂酒兮椒漿. ② 雲中君 : 浴蘭湯兮沐芳, 華采衣兮若英. 靈連蜷兮旣留, 爛昭昭兮未央. 蹇將憺兮壽宮, 與日 月兮齊光. ③ 湘君 : 君不行兮夷猶, 蹇誰留兮中洲, 美要眇兮宜修, 沛吾乘兮桂舟. 令沅湘兮無波, 使江水 兮安流 望夫君兮未來, 吹參差兮誰思 ④ 湘夫人 : 帝子降兮北渚, 目眇眇兮愁予. 嫋嫋兮秋風, 洞庭波兮木葉下 ( 중략) 白玉兮爲 5) 6) <離騷>에서의 屈原의 자칭인 靈均 은 초지역의 세습 巫師를 지칭하며, 楚 懷王에 대한 별칭인 靈修 는 무의 수장인 師巫長을 뜻한다. 기타 靈氛, 靈保(=神巫. 특정 신으로 분장한 무당) 등의 호칭도 발견된다. <離騷>, 帝高陽之苗裔兮, 朕皇考曰伯庸. 攝提貞于孟陬兮, 惟庚寅吾以降. 皇覽揆余初度兮, 肇錫余 以嘉名. 名余曰正則兮, 字余曰靈均. 紛吾旣有此內美兮, 又重之以脩能. 扈江離與辟芷兮, 紉秋蘭以 爲佩. 汩余若將不及兮, 恐年歲之不吾與. 朝搴阰之木蘭兮, 夕攬洲之宿莽.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 박 봉 주 7 鎭, 疏石蘭兮爲芳. 芷葺兮荷屋, 繚之兮杜衡. 合百草兮實庭, 建芳馨兮廡門. ⑤ 大司命 : 廣開兮天門, 紛吾乘兮玄雲. 令飄風兮先驅, 使涷雨兮灑塵. 君迴翔兮以下, 踰空桑 兮從女. 紛總總兮九州, 何壽夭兮在予 高飛兮安翔, 乘淸氣兮御陰陽. 吾與君兮齋速, 導帝 之兮九坑. ⑥ 少司命 : 秋蘭兮麋蕪, 羅生兮堂下. 綠葉兮素枝, 芳菲菲兮襲予. 夫人自有兮美子, 蓀何以兮 愁苦 ⑦ 東君 : 暾將出兮東方, 照吾檻兮扶桑. 撫余馬兮安驅, 夜皎皎兮旣明. ⑧ 河伯 : 與女遊兮九河, 衝風起兮橫波. ⑨ 山鬼 : 若有人兮山之阿, 被薜荔兮帶女羅. 旣含睇兮又宜笑, 子慕予兮善窈窕. 영신에 보답하여 신령이 강림하는 장면은 <湘君>, <湘夫人>, <大司命>, <少司命>, <東 君>, <河伯>, <山鬼> 편에 묘사되고 있는데, 이들을 통해 초지역 민간 신앙의 숭배 대상 이 된 신령들의 위풍당당한 모습과 그들에 대한 민중들의 흠모 숭배의 양상을 간접적으 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남녀신에 대한 숭배의 정서가 연애시의 형태로 표현된 점 등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2. 娛神 무는 영접한 신령을 즐겁게 하기 위해[ 娛神 ] 아름다운 巫服을 입고 長劍 佩玉 玉 珥 玉瑱 琳琅 등의 聖物을 고루 갖추어 의식의 화려함과 위엄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멋지게 장식한 祭壇이나 祭殿에 각종 香草와 祭物을 陳設하여 신에게 바치면서 娛神의 巫辭를 읊조리고 娛神의 樂舞를 연주하며 다양한 遊戱를 벌임으로써, 신과 인간이 합일 되는 無我境의 축제의 장을 연출한다. <九歌>의 11신령 중에서 東皇太一, 大司命, 少司命, 東君, 山鬼에게 바치는 의식에 娛 神 절차가 포함되며 다른 의식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東皇太一과 山鬼에게 바치는 娛神 절차가 특히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① 東皇太一 : 揚枹兮拊鼓, 疏緩節兮安歌, 陳竽瑟兮浩倡. 靈偃蹇兮姣服, 芳菲菲兮滿堂. 五音 紛兮繁會, 君欣欣兮樂康. (娛神 절차를 거행하자 신령이 기뻐했다고[ 君欣欣 ] 한다.) ② 山鬼 : 表獨立兮山之上, 雲容容兮而在下. 杳冥冥兮羌晝晦, 東風飄兮神靈雨. 留靈脩兮憺忘 歸, 歲旣晏兮孰華予. 采三秀兮於山間, 石磊磊兮葛蔓蔓. 怨公子兮悵忘歸, 君思我兮不得閒. 山中人兮芳杜若, 飮石泉兮蔭松柏. 君思我兮然疑作. 한편 <湘君>, <湘夫人>, <河伯> 편에서는 巫가 신령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남성을 멀 리서 흠모하는 여성의 마음으로 은유해서 표현하고 있는데, 상세한 경위는 추적할 길이
8 없지만 혹시 오신 절차가 민간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남녀의 연애사나 戀心으로 각색되고 전환된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娛神 절차는 원시 巫俗에서는 대단히 중시된 듯하고 그를 통해 무속 의식을 공동체 축 제의 장으로 승화시키려 한 듯하지만, 유교의 규범화된 祭禮에서는 즐거움과 흥겨움을 중시하는 민간의 오신 절차는 대부분 수용되지 못하였고, 대신 경건하고 엄숙하며 儀禮 와 격식을 중시하는 祭祖 祭神의 절차로 정착되고 전형화되었다. 예컨대 원시 무속에서 상용되던 빠르고 경쾌한 음악(鼓樂 등 타악기 중심 편성) 대신, 느리고 조용한 현악기 중 심 편성의 雅樂으로 대체되고, 迎神 娛神 절차에서 진행된 신과 무의 교류 교감을 남 녀 戀事에 비유하여 巫劇처럼 전개시키는 방식 등은 사라지게 되었다. <<楚辭>> <九歌> 등에 반영된 娛神 장면들은 아직까지 원시 무속적 전통을 간직한 단계의 민간 신앙과 관 련 의식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전해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3. 送神과 天界 幻遊 신령을 즐겁게 하여 神 人 공동 축제의 장이 벌어진 다음에는 신령을 天界로 되돌려 보내는 送神 절차를 거행하였다. 送神은 迎神이나 娛神에 비해 간략하게 진행되는 것이 보통인데, 이와 관련하여 <雲中君>, <湘君>, <湘夫人>, <大司命>, <少司命>, <東君>, <河 伯>, <山鬼>, <禮魂> 편에 送神 절차가 묘사되고 있다. 특히 湘夫人과 河伯의 送神은 분 량이 길 뿐 아니라 내용 자체도 단순한 送神이라기보다는 신령이 (되돌아 가는 과정에 서) 天界를 幻遊 歷遊하거나 혹은 巫가 신령과 하나되어 천계를 유람하고 逍遙하는 장 면을 상상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편들도 보다 짧고 간략하긴 하지만, (신령이 나 巫의) 천계 환유(혹은 그를 상상함)을 암시하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① 雲中君 : 覽冀州兮有餘, 橫四海兮焉窮. 思夫君兮太息, 極勞心兮忡忡. ② 湘君 : 桂櫂兮蘭枻, 斲冰兮積雪. 采薜荔兮水中, 搴芙蓉兮木末. 心不同兮媒勞, 恩不甚兮輕 絶. 石瀨兮淺淺, 飛龍兮翩翩 (중략) 聊逍遙兮容與. ③ 湘夫人 : 捐余袂兮江中, 遺余褋兮醴浦. 搴汀洲兮杜若, 將以遺兮遠者. 時不可兮驟得, 聊逍 遙兮容與. ④ 大司命 : 乘龍兮轔轔, 高駝兮沖天. 結桂枝兮延佇, 羌愈思兮愁人. 愁人兮柰何, 願若今兮無 虧. 固人命兮有當, 孰離合兮可爲. ⑤ 少司命 : 孔蓋兮翠旍, 登九天兮撫彗星. 竦長劍兮擁幼艾, 蓀獨宜兮爲民正. ⑥ 東君 : 靑雲衣兮白霓裳, 擧長矢兮射天狼. 操余弧兮反淪降, 援北斗兮酌桂漿. 撰余轡兮高駝 翔, 杳冥冥兮以東行. ⑦ 河伯 : 與女遊兮河之渚, 流澌紛兮將來下. 子交手兮東行, 送美人兮南浦. 波滔滔兮來迎, 魚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 박 봉 주 9 鱗鱗兮媵予. ⑧ 山鬼 : 雷塡塡兮雨冥冥, 猿啾啾兮又夜鳴. 風颯颯兮木蕭蕭, 思公子兮徒離憂. ⑨ 禮魂 : 成禮兮會鼓, 傳芭兮代舞, 姱女倡兮容與. 春蘭兮秋菊, 長無絶兮終古. 이처럼 送神 절차를 묘사하면서 神 巫, 神 人 합일의 천계 환유를 연결시킨 구성을 통해 당시 초지역의 巫俗 신앙에서 숭배된 신령들의 모습과 그들이 거주하는 天界의 풍 경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초지역의 민간 신앙과 상고 神話에 관련된 내 용을 부분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九歌>의 구성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굴원의 <離騷>, <九章> 9편과 <天問>, 작자 미상의 <遠遊>, <招魂>, <大招> 등에서도 無我 상태로 羽化登天하여 天界 를 幻遊 歷遊하는 장면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九歌> 외의 편들의 천계 환유는 巫儀 의 연장선상에서 神 巫가 합일되어 피안의 세계를 유람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속세 에서의 개인적 불운, 세속 정치에 대한 환멸과 우국충정의 비통함을 극복하고 승화시켜 심신의 정결함과 영혼의 구원을 얻고 永生을 추구하려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민간 巫俗 巫儀의 送神 절차와도 연관성을 지니는 羽化登天과 天界 幻遊 歷遊에의 염원은 초지역에서 출토된 文物 자료를 통해서도 그 실체가 확인된다. 楚國 墓葬 및 楚 係 墓葬에 다수 副葬된 漆木製의 虎座飛鳥 像, 虎座鳥架鼓 像, 長沙 지역 楚墓에서 발견 된 두 건의 人物龍鳳 帛畵 등이 登天에의 염원을 표현한 대표적인 실물 자료이다. 虎座 와 鳳鳥는 각각 大風과 吉祥風을 관장하는 風神을 상징하며 鹿角은 祥瑞를 상징한다. 이 조각상은 묘주의 수호신 겸 천계로의 등천 시에 혼백의 인도신으로 삼기 위해 제작된 듯 하다. 楚人들은 이같은 실물상을 제작하여 혼백의 안전하고 편안한 등천과 천계 환유 및 永生을 보장하려 한 듯하다. (曾侯乙墓에서 출토된 立鶴鹿角像은 그 변형으로 추정된다.) 한편 1942년 2월 長沙 陳家大山 楚墓에서 발견된 人物龍鳳帛畵는 細腰女人이 龍鳳이 이 끄는 人魂舟를 타고 登天하는 모습을 묘사한 帛畵이고, 1942년 9월 長沙 子彈庫에서 출 토된 人物御龍帛畵는 귀족 남자가 龍舟를 타고 등천하는 광경을 그린 帛畵로서, 이들도 각각 등천에의 염원을 표현하고 묘주의 편안한 내세와 永生을 보장하고자 한 것이다. Ⅲ. 楚地域의 巫俗의 神들 상술한 것처럼 <<楚辭>>에는 전국시대 초지역의 토착 巫俗과 巫儀에 관한 내용이 풍 부하게 담긴 동시에, 巫俗 巫儀의 대상인 토착 신령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天界에 대한
10 묘사도 적지 않다. 초지역의 巫俗의 神들과 天界에 관련된 내용은 출토 자료와 文物에서 도 유사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하 상호 연관시켜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楚辭>> <九歌>에는 전국시대까지 초지역 민간에서 숭배되던 11신령 東皇太 一, 雲中君, 湘君, 湘夫人, 大司命, 少司命, 東君, 河伯, 山鬼, 國殤, 禮魂 의 존재가 확인 되는데, 이들 중 東皇太一, 雲中君, 湘君, 湘夫人, 東君 등은 <<楚辭>>에서만 발견된다. 東皇太一은 초지역의 최고신으로 추정되는데, 東皇 은 초지역 사람들이 조상신으로 숭배 한 顓頊 高陽氏의 별칭으로 추정되고, 太一은 남방 계통에서 숭배된 天帝로서 타지역 출 토 자료에서도 종종 확인된다. 그렇다면 東皇太一은 조상신과 지상신을 겸한 신격인 동 시에, 顓頊 高陽氏가 火神인 것과 연계되어 화신 내지 태양신으로서의 성격도 겸비했을 가능성이 있다. 東皇太一이 조상신 겸 天帝이자 태양신까지를 겸한 복합적인 신격인 데 비해 東君은 순수한 태양신으로 추정되며 동군에게 바치는 巫儀 장면에서 확인되듯이 태 양의 천상 운행을 인격신적 관점에서 객관화시켜 묘사한 점이 특이하다. 특히 중국 상고 신화 체계에서 (기타 문화권에 비해 상당히) 빈약한 편인 태양신격과 관련된 내용이 초 지역 문헌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중국 신화의 지역성 및 그 전승 과정과 관련하여 주목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대체로 <九歌>의 신들은 동황태일을 제외하면 天體와 자연을 관 장하는 自然神이 많으며, 湘君 湘夫人처럼 지역성을 강하게 띈 신령도 포함된다. <<楚辭>>의 다른 편에서는 五方의 神인 五帝, 즉 동방의 신인 太皥, 서방의 신인 少 昊, 남방의 신인 炎帝, 북방의 신인 顓頊, 중앙의 신인 黃帝 등에 관해 묘사하고 있고, 이 외에도 陽侯(파도의 신), 豊隆(구름의 신, 雲師), 西皇(서쪽 하늘의 신), 蓐收(가을의 신), 湘靈(湘水의 신), 祝融(불의 신, 남쪽의 신), 海若(바다의 신), 馮夷(水神), 宓妃(洛水의 여신, 伏羲氏의 딸), 句芒(동방과 봄을 다스리는 鳥身人面의 신), 飛廉(風神), 玄冥(북방의 신), 黔嬴(造化의 신), 康回(共工) 등 다양한 신령들이 확인된다. 신령뿐 아니라 重華(帝舜 의 별칭), 赤松子(神農 때의 雨師), 巫咸(은나라 때의 神巫) 등 선대의 賢君 賢臣 神巫 등의 영령과 조우하거나 조우하려는 염원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들 신령과 영령들이 거 주하는 天界에 위치한 崑崙, 縣圃(천제의 정원), 瑤之圃(천계에 있는 玉樹의 밭), 九疑山 (帝舜 등 여러 신령이 있는 산), 淸源(바람의 근원지인 北海) 등 신령한 장소에 대한 묘 사도 비교적 풍부하다. 이들 역시 초지역의 상고 민간 신화의 구조와 내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한편 1942년 長沙 子彈庫 楚墓에서 발굴된 帛書의 사방 둘레에는 12월의 月令을 관장 하는 듯한 12신상이 그려져 있고 각각의 주위에는 12월의 禁忌를 짧게 정리한 12단의 단문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아마도 12신상은 초지역의 민간 신앙에 기원을 둔 월령신들 이 아닌가 추측되는데, 이 추측이 맞다면 이것은 전국시대 楚國 月令을 반영하는 (현재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 박 봉 주 11 로서는) 거의 유일한 출토 자료이며, 따라서 戰國 齊의 月令인 管子 의 玄宮, 玄宮圖 와 戰國 秦의 월령인 呂氏春秋 十二紀 에 비견될 만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長沙 馬王堆에서 출토된 帛書의 <神祗圖>(일명 <太一將行圖>)에는 太一 神과 휘하의 3龍 및 그를 호위하는 雨師, 雷公과 軍神으로 추정되는 4人의 武弟子들이 그려져 있다. 12신상과 태일신 휘하 諸神들의 그림 및 관련 설명은 초지역 민간 신앙의 汎神觀的, 주술적 면모 를 이해하는 데에도 참고할 만하다. 대체로 <<楚辭>>에서 묘사된 신령들과 天界의 모습은 사실적 구체적이어서 후대의 諸子書나 출토 자료에 다분히 관념화 추상화되어 등장하는 신령 天界 天象 우주 등 의 구조와는 구별된다. 예컨대 <<郭店楚簡>> <太一生水> 편은 우주 만물의 근원인 太一 의 만물 생육 작용을 水와 연계시켜 아래와 같은 다단계의 우주 생성론을 제시하였다. 이 경우의 태일은 인격신과는 거리가 먼, 우주만물의 근원자이자 섭리자로서 상당히 哲理化된 성격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민간 무속 신앙에서는 인격신적 天帝로 숭배되고 巫儀의 대상이 되었던 태일(혹은 동황태일)이 諸子思想에서는 自派의 관점에 따라 관념 화 이론화의 대상으로 인식 변용되는 과정을 함께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이한 내용은 신령적 혹은 근원자적 존재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그같은 이론화 철리화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민간 巫俗 신앙 상태에서의 신령들의 모습과 그들 에 대한 무속 의식의 양상을 확인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맺음말 지금까지 <<楚辭>>를 중심으로 戰國時代 楚地域에서 통행된 민간 巫俗 巫儀에 관련 된 내용들을 검토하였고, 그 숭배 대상이 된 신령들에 대해서도 관련 자료들을 원용하면
12 서 살펴보았다. 그를 통해 漢代 儒敎에 의해 정립된 규범적 체계가 아닌, 그 이전부터 민 간에서 관행적으로 통용된 사실적 질서로서의 민간 祭儀 내지 巫儀의 구체적인 면모와 巫俗 신령들의 모습을 추적할 수 있었다. 관행적 사실적 질서는 규범적 체계에 일부 영향을 미치고 후대에는 역으로 규범적 체 계를 일부 수용하기도 한 사실을 비추어 볼 때 후대의 禮經 禮書에 정리된 유교 祭禮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전대의 민간 巫俗과 巫儀에 대해 관심을 지닐 필요 가 있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상고의 민간 巫俗 巫儀에 대한 내용을 전하는 문헌 사료와 출토 자료가 둘다 부족한 상황에서 <<楚辭>>는 (문학 작품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내용들을 전달해주는 듯하다. 동시에 전국시대 지역문화와 지 역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참고가 될 듯하다. 이런 관점에서 초지역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기존에 방계 내지 간접적인 자료로 인식되어 소극적으 로만 원용되었던 문헌들에 대해서도 가능하고 필요하다면 출토 자료와 연계시켜 보다 적 극적으로 검토하고 활용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韓非子 의 법(法)과 술( 術) 의 관계 재조명 양 순 자(고려대) 한비자 정치 이론에서 법과 술은 세와 더불어 중요한 통치 도구로 알려져 왔다. 일반 적으로 학자들은 한비자의 법은 관료들이 일반 백성을 다스리는 법률 또는 형벌인 반면 에 술은 군주가 신하들을 관리하는 술수로 본다.1) 이런 견해는 韓非子 定法 편에 근 거를 두고 있는데, 한비자는 그 편에서 상앙을 법의 이론가로, 신불해를 술의 주창자로 제시한다. 지금 신불해는 술을 말하고 공손앙은 법을 주장한다. 술이란 것은 능력에 맞추어 관직을 주고, 관직에 따라 실적을 추궁하며 살생하는 권병을 손에 들고 여러 신하들의 능력을 시 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군주가 장악하는 것이다. 법이란 것은 내건 명령이 관청에 명시되 고 형벌은 반드시 민의 마음속에 새겨지며 상은 법을 삼가는 자에게 있고 벌은 명령을 어 기는 자에게 가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신하가 모범으로 삼을 바이다. 군주에게 술이 없으 면 윗자리에서 눈이 가려지고 신하에게 법이 없으면 아래에서 어지러워진다. 이것은 하나 도 없을 수 없이 모두 제왕이 갖출 조건들이다.2) 한비자는 상앙의 법과 신불해의 술은 군주가 통치하기 위한 필수조건들이라고 주장한 다. 법은 군주의 명령이 관청에 명시되고 보관되어 관료들이 백성들을 다스릴 때 사용하 는 것이며, 술은 군주가 관료들을 등용하고 평가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위 구절만으로 보면 법은 성문법적인 법률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며 술은 술수의 의미가 강하다. 상앙 의 법과 신불해의 술은 한비자가 그의 정치 철학을 형성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 로 알려져 왔다. 1) 2) 王邦雄, 韓非子的哲學 (臺北 : 東大圖書公司 : 總經銷 三民書局, 1977), 147-165쪽과 179-204쪽; 鄭良樹. 韓非之著述及思想 (台北: 臺灣學生書局, 1993), 472-492쪽. 韓非子 定法, 今申不害言術, 而公孫鞅為法 術者, 因任而授官, 循名而責實, 操殺生之柄, 課 群臣之能者也, 此人主之所執也 法者, 憲令著於官府, 刑罰必於民心, 賞存乎慎法, 而罰加乎姦令者 也, 此臣之所師也 君無術則弊於上, 臣無法則亂於下, 此不可一無, 皆帝王之具也
14 그러나 중국 고대 저작에서 법 이라는 글자는 법률, 법조문이라는 의미 이외에 다양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장현근과 크릴(H. G. Creel)이 지적한 것처럼 법 은 명사로서 모 델, 기준, 규칙 등을 의미하고, 동사로서는 본받다 등을 뜻한다.3) 그라함(A. C. Graham)과 슈왈츠(Benjamin Schwartz)는 기본적으로 크릴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한비자 에서 법 이라는 글자는 광범위한 의미의 모범(model) 또는 기준(standard)의 의미로 쓰였 다고 주장한다.4) 또한 한비자 사상에서 술 이라는 글자는 일반적으로 군주독재를 강화하 기 위한 일종의 정치책략술로 폄하되는 경향이 있는데, 크릴은 술 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즉 그는 신불해의 사상을 논하면서, 신불해의 주요 사상인 술은 관료체 제를 다스리는 행정술(administrative technique or statecraft) 로 파악한다.5) 이와 같이 법 / 술 은 중국 고대 정치 철학에서 법률/술수라는 의미 외에 다양한 함의 를 가지고 있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이 관점에 동의하면서, 한비자 사상에서 그들이 어떻 게 쓰였는지 분석해보고, 그들의 관계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한비자 에서 법이 관리가 일반 백성을 다스릴 때 기준으로 삼는 성문화된 법률의 의미로만 쓰였는지, 또한 술은 군주가 신하들을 부릴 때 사용하는 권모술수인지를 분석해 볼 것이다. 아래에 서 밝히겠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한비자 사상에서 법은 성문법이외에 군주가 관료를 등 용하고 평가하는 방법과도 관련이 있다. 즉 법은 국가 내의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법 률의 의미와 관료체계를 다스리는 행정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술 은 두 번째 의미의 법을 잘 운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방법을 뜻한다. 필자는 정법 편 이외에 한비 자 의 다른 편들을 살펴봄으로써 논의를 전개해나가고자 한다. 한비자 에서 법 이라는 글자가 성문화된 법률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보여준 연구 는 많으므로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 논의하도록 하겠다. 이때의 법은 서양의 law 개념과 3) 4) 5) 장현근, 선진정치사상에서 법 의 의미 한국정치학회보 제27집 2-2호(1994), 75-96쪽; H. G. Creel, Shen Pu-hai: A Chinese Political Philosopher of the Fourth Century B.C.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4), 92-120쪽 참조. Benjamin Schwartz, The World of Thought in Ancient China (Cambridge, Mass.: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84), 321-349쪽; A. C. Graham, Disputers of the Tao (La Salle, Ill. : Open Court, 1989), 273-8쪽. H. G. Creel, Shen Pu-hai: A Chinese Political Philosopher of the Fourth Century B.C. 참조. 크 릴은 신불해를 중국 관료주의 체계를 세운 최초의 사상가로 평가한다. 신불해의 사상에 관한 다른 자료는 陳復, 申子的思想 (台北: 唐山出版社, 1997)을 참조. 또한 김영태는 한비자의 술 을 관리의 임용과 인사제도와 연관해서 재해석하고 있다. 김영태, 韓非의 術論 硏究, 철학논 구 제21집(1993). 그는 한비의 술론을 參觀, 信賞必罰權, 刑名이론의 측면에서 분석함으로써, 한비의 술이 관리의 임용과 인사제도와 연관이 있음을 밝혔다. 또한 그는 한비의 법과 술은 밀 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법은 술론에서 이미 언급된 상벌만을 통해 臣民 을 동시에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즉 법은 분명하게 대중에게 공표된 것이고 術은 은밀하게 행사되는 것으로 법과 술을 구별한다.
韓非子 의 법(法)과 술(術)의 관계 재조명 / 양 순 자 15 유사한 의미로 쓰인다. 법(law)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일 반적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된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내린 일반적인 명령으로 그 것을 어길 경우에는 처벌을 받는 사회 규범 을 법이라고 정의한다.6) 한비자 에서도 법 이라는 글자가 위의 정의에 들어맞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법은 군주의 명령 이며7)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성 을 띤다.8) 법은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신분이 높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9) 그리고 공식적으로 새로운 법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일 관되게 적용되는 항상성 을 가진다.10) 만약 군주가 일관된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국가 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11) 또한 법은 일반 백성들까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한다.12)) 특히 한비자는 법의 명확성 을 강조하는데, 신하들이 자신 들의 이익을 위하여 법을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13) 다른 한편, 한비자 에는 법이라는 글자를 법조문을 갖춘 법률 체계로 해석하기에 불 명확한 예들이 있다. 즉 법이라는 글자가 공표성, 성문화, 구체적인 규율 등등의 속성을 지니지 않는 경우들이 보인다. 그보다는 법이 군주가 관료들을 채용하고 평가하는 방법 의 의미로 쓰일 때가 있다. 다음은 유도(有度) 편의 한 구절이다. 이제 만약 칭찬을 근거로 능력자라 하여 등용한다면 신하는 위로부터 이탈하여 아래로 자 기들끼리 패거리를 만들 것입니다. 만약 또 파당관계를 가지고 관계를 등용한다면 백성들 6) 7) 8) 9) 10) 11) 12) 13) 이상돈, 법학입문 (파주: 법문사, 2005), 6쪽; Edward Adamson Hoebel, The law of primitive man; a study in comparative legal dynamic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4), 28쪽 참조. 韓非子 飾邪, 君之立法, 以為是也. 韓非子 有度, 故以法治國, 舉措而已矣 法不阿貴, 繩不撓曲 法之所加, 智者弗能辭, 勇者弗 敢爭 刑過不避大臣, 賞善不遺匹夫 故矯上之失, 詰下之邪, 治亂決繆, 絀羨齊非, 一民之軌, 莫如 法 다만 군주는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한비자의 정치이론은 법에 의한 다스림 (rule by law)이지 법치(rule of law)라고 할 수 없다. 韓非子 飾邪, 語曰 家有常業, 雖饑不餓 國有常法, 雖危不亡 夫舍常法而從私意, 則臣 下飾於智能, 臣下飾於智能則法禁不立矣 是妄意之道行, 治國之道廢也 治國之道, 去害法者, 則不 惑於智能 不矯於名譽矣 韓非子 心度, 故治民無常, 唯治為法 法與時轉則治, 故聖人之治民也, 法與時移而禁與能 變 韓非子 八說, 書約而弟子辯, 法省而民訟簡 是以聖人之書必著論, 明主之法必詳事 盡思慮, 揣得失, 智者之所難也; 無思無慮, 挈前言而責後功, 愚者之所易也 明主慮愚者之所易, 以責智者之 所難, 故智慮力勞不用而國治也 韓非子 難三, 人之不事衡石者, 非貞廉而遠利也, 石不能為人多少, 衡不能為人輕重, 求索不能 得, 故人不事也 明主之國, 官不敢枉法, 吏不敢為私, 貨賂不行, 是境內之事盡如衡石也 此其臣有 姦者必知, 知者必誅
16 은 사적인 교제에만 힘을 쓰고 법에 의한 임용은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관리들 중에 능력자가 없게 되면 그 나라는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칭찬받는다 하여 상을 주고 비 방당한다 하여 벌을 준다면 상을 좋아하고 벌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공도를 버리고14) 사리 쪽으로 수작을 부려 작당해서 서로 감싸줄 것입니다. 군주를 잊고 바깥과의 교제에만 힘 써 자기 패거리만을 추천하려고 든다면 윗자리를 위한 아랫사람들의 충정이 엷어질 것입 니다. 교제가 넓고 패거리가 많아져 조정 안팎에 파당이 만들어진다면 비록 큰 잘못을 저 질렀다고 하여도 그것이 은폐되어 모르게 되는 경우가 많아질 것입니다.15) 한비자는 추천제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드러낸다.16) 그는 만약 군주가 근거 없는 명성 이나 비방에 의해 관료들을 등용한다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지적한다. 어떤 사람에 대한 칭찬은 그가 뚜렷한 업적이 없을지라도 같은 패거리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만 들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방 또한 잘못이 없을지라도 정적(政敵)들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 한비자는 만약 군주가 그런 근거 없는 칭찬이나 비방에 의해 관료들을 다스린 다면, 신하들은 사적인 관계를 맺는 데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며, 법에 의한 임용은 구하 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한비자는 법 이라는 글자를 관료들을 등용하는 맥락 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비자는 유도 편의 다른 부분에서도 군주가 법에 따라서 관료들을 등용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는 법이 사람을 고르도록 하고 자기 임의로 등용하지 않으며 또한 법이 그 공적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하고 자기 임의로 그것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능력 있 는 자가 가려진 채로 있을 수 없고, 능력이 떨어지는 자가 겉치레만으로 있을 수도 없으 며 칭찬받는 자라고 하여 천거될 수 없고, 비방당한 자라고 하여 물러나게 하는 일이 없 으며 군주와 신하 사이에 구별이 분명해져서 통치 질서가 잘 잡혀 나갈 것입니다. 따라서 군주는 법에 비추어 일을 처단하면 됩니다.17) 14) 15) 16) 17) 王先慎은 公行을 公法으로 읽으며, 孫蜀丞과 陳奇猷는 公道로 읽는다. 陳奇猷, 韓非子新校注 (上海 : 上海古籍出版社, 2000), 94쪽. 韓非子 有度, 今若以譽進能, 則臣離上而下比周; 若以黨舉官, 則民務交而不求用於法 故官之 失能者其國亂 以譽為賞, 以毀為罰也, 則好賞惡罰之人, 釋公行 行私術 比周以相為也 忘主外 交, 以進其與, 則其下所以為上者薄矣 交眾與多, 外內朋黨, 雖有大過, 其蔽多矣 임림달과 설희홍은 전국 시대에 행해졌던 관료임용 방법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초빙(招聘), 다 른 사람에 의한 추천, 자기 추천이 그것들이다. 任立达, 薛希洪, 中国古代官吏考选制度史 (靑岛 市 : 靑岛出版社, 2003), 24쪽. 특히 그들은 세 단계에 의한 관료 임용이 齊의 管仲에 의해 시 작되었으며 후에 秦과 楚도 그 정책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그 세 단계는, 첫째 자신의 지역에서 추천을 받음, 두 번째 군주가 그를 등용할 지를 결정하기 위해 직접 면접, 마 지막으로 관직을 부여받고 그가 속한 부서의 수장에 의해 검증을 받는다. 같은 책, 47쪽 참조. 韓非子 有度, 故明主使法擇人, 不自舉也; 使法量功, 不自度也 能者不可弊, 敗者不可飾, 譽
韓非子 의 법(法)과 술(術)의 관계 재조명 / 양 순 자 17 군주는 개인적인 판단이나 호오에 따라 관료들을 등용하지 말고 법에 따라 관리를 임 용해야 한다. 군주는 오로지 법에 의지할 때에만 자의적인 임용을 피할 수 있다. 위의 예들에서 법 이라는 글자를 일반적으로 해석되어지는 법조문을 갖춘 법률체계 (law)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한비자가 군주가 관료를 등용할 때 구체적이고 공표화된 법 률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비자는 유도 에서 제 시한 법의 두 가지 목적, 즉 관료들을 등용하고, 공로를 판단하기 위해서(故明主使法擇人, 不自舉也; 使法量功, 不自度也 ) 다른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러므로 모든 신하들은 그 의견을 말로 진술하며, 군주는 그 진술한 말에 일을 맡겨 주 고 그 맡긴 일의 성과를 요구한다. 또한 그 성과가 맡긴 일에 걸맞고 맡긴 일이 그 진술 한 말과 걸맞으면 상을 주고, 그 성과가 맡긴 일과 맞지 않고 맡긴 일이 그 진술한 말과 맟지 않으면 벌을 준다. 현명한 군주의 도는 신하로 하여금 자기 의견을 진술하게 하여 그 말이 실제 성과와 일치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18) 주도(主道) 의 위 구절은 군주가 관료들에게 어떻게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지 설명하 고 있다. 군주는 신하들의 제안에 따라 임무를 부여하고 그 임무와 실제 행한 업적의 일 치를 평가해야 한다. 이병(二柄) 편은 형명참동 이라는 용어로 이 과정을 요약한다. 군주가 간신을 막기 위해 그 실적과 명목이 일치하는가를 살핀다는 것은 신하가 진술한 말과 실제 일한 성과를 가리킨다.19) 남의 신하된 자가 어떤 일에 대하여 자기 의견을 진 술하면 군주는 진술한 말에 걸맞는 일을 맡겨 주고 오로지 그 일에 맞추어 성과를 요구한 다. 20) 명(名) 은 신하가 진술한 말을 가리키며, 형(形) 은 신하가 실제 일한 성과를 뜻한다. 군주는 신하가 진술한 말에 걸맞는 일을 맡겨 주고 오로지 그 일에 맞추어 성과를 요구 한다. 성과가 그 일과 들어맞고 일이 그 말과 들어맞으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내린다. 예컨대 어느 직명을 가진 관리가 그 직명에 따라서 실적을 거두고 있는가 어떤 가를 검토하는 것이 형명참동이다.21) 한비자는 형명참동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8) 19) 20) 者不能進, 非者弗能退, 則君臣之間明辨而易治, 故主讎法則可也 진기유는 孫子書를 따라서 수 (讎)를 용(用)으로 읽는다. 陳奇猷, 韓非子新校注, 99쪽. 韓非子 主道, 故群臣陳其言, 君以其言授其事, 事以責其功 功當其事, 事當其言則賞; 功不當 其事, 事不當其言則誅 明君之道, 臣不陳言而不當 진기유는 異는 與로 읽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陳奇猷, 韓非子新校注, 127쪽. 韓非子 二柄, 人主將欲禁姦, 則審合者, 言異事也 為人臣者陳而言, 君以其言授之事, 專以其 事責其功 功當其事, 事當其言, 則賞; 功不當其事, 事不當其言, 則罰
18 군주의 도는 조용히 물러앉는 것을 귀중한 보배로 여기는 것이다. 군주는 정사를 스스로 맡아하지 않고 그 일이 잘되고 못된 것만을 분간하며, 계략을 스스로 짜내지 않고 복과 재앙의 조짐만을 알아낸다. 그러므로 군주가 말하지 않아도 신하가 잘 응하며, 약조를 하 지 않아도 일이 잘 진척된다. 신하가 이미 말로 응해오면 그 약조로 한쪽 계( 契) 를 잡아두 고, 이미 그 일이 진척되면 약조한 또 한쪽의 부( 符) 를 손에 쥐어 든다. 부와 계가 맞추어 지는 데가 상과 벌이 시작되는 곳이다. 22) 여기에서는 형명참동의 과정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신하가 어떤 제안을 하 면 군주는 그것에 따라 계(契)를 작성하고, 신하가 그에 따른 일을 이루어내면 부(符)를 작성한다. 계와 부가 일치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내린다. 다시 말해 군주의 도는 조용히 물러앉아 형명참동 여부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형명참동은 군주가 재능 있는 인재를 등용할 때 적용해야 하는 추상적인 원칙 이지 구체적인 법조문이 아니다. 이것은 군주가 명령을 내리고 신하들이 따라야 할 행동 의 표준이 아니다. 형명참동 과정에서 신하의 제안(名)이 그 과정을 주도하며, 후에 실제 업무로써 드러난다. 형명참동 과정에서 상벌의 수여 기준은 군주의 명령이 아니라, 신하 들의 제안, 부여된 임무, 실제 일한 성과 등의 합일 여부이다. 한비자 의 세 편, 즉 유도, 주도, 이병 에서 보였듯이, 형명참동은 법이 관료임 용과 관련되어 사용된 용례에서 법의 운용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형명참동은 상군 서 에서처럼 인재를 등용하고 진급시키기 위해 제시된 구체적인 규칙이 아니고, 추상적 인 원칙에 가깝다. 형명참동의 원칙은 상세하게 문서화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공표화 되는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군주가 관료들을 등용할 때 그들의 말을 듣 고, 임무를 부여하고, 업적을 평가하는 원칙을 말할 뿐이다. 이 때 법 이라는 글자는 성 21) 22) 크릴(H. G. Creel)은 형명(刑名)을 수행(performance)과 관직명(official title)이라고 번역하는데 반 해 메이크햄(John Makeham)은 형을 형태와 기준(form and standard), 명을 연설, 선언, 요구 (speech, declaration, claim)로 해석한다. 필자는 메이크햄의 명의 해석에는 동의하지만, 그의 형 의 해석에는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한나라 이전에 형(刑)이라는 글자는 후대의 形과 型으로 쓰 여진 것들을 대변한다. 形은 형태의 의미를 지니고, 型은 유형(pattern), 기준(standard), 모델 (model)의 의미를 지닌다. 결과적으로 刑은 형태(form)와 기준(standard)의 의미 모두 가지고, 한 비자의 형명참동에서는 완성된 일의 형태, 그리고 원래 제안의 유효성을 검토할 기준 의 의 미를 지닌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한비자의 형명참동이론에서는 세 가지 요소, 제안, 업무, 성취 등이 상벌수여의 기준이 된다고 본다. 형만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 아니라, 세요소의 일치 여부가 기준이 된다고 생각된다. H. G. Creel, Shen Pu-hai: A Chinese Political Philosopher of the Fourth Century B.C.; John Makeham, Name and Actuality in early Chinese thought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4), 67-83쪽과 166-169쪽. 韓非子 主道, 人主之道, 靜退以為寶 不自操事而知拙與巧, 不自計慮而知福與咎 是以不言 而 善應, 不約而善增 言已應則執其契, 事已增則操其符 符契之所合, 賞罰之所生也
韓非子 의 법(法)과 술(術)의 관계 재조명 / 양 순 자 19 문법보다는 행정술 의 의미에 가깝다. 형명참동에서 명은 신하가 군주에게 바치는 제안이며, 군주는 그 제안을 듣는 입장이 다. 그러나 군주는 단지 듣는 위치에 있는 것만은 아니고, 형명참동이 실제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비자의 술 이론은 군주가 신하의 말을 듣는 과정 에서 취해야 할 태도를 제시하는데, 그 과정에서 술과 법과의 관계를 드러내준다. 군주는 신하들에게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서 누구의 제안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적절한 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신하들의 업적을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 충분 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군주는 형명참동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의 판단에 의지해야 한다. 한비자는 내저설상(內儲說上) 편에서 군주가 형명참동을 실행하면 서 취해야 할 술(術)을 설명한다. 군주가 사용하여야 할 술이 일곱 가지 있다...일곱 가지 술이란 첫째, 많은 증거를 모아 대조해보는 일이다. 둘째, 죄지은 자에게 반드시 벌을 내려 위엄을 내세워 보이는 일이다. 셋째, 공적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수여하여 그의 재능을 충분히 다하게 하는 일이다. 넷째, 하나하나 말을 들어서 그 실적을 추궁하는 일이다. 다섯째, 의아스런 명령을 내려 당황하게 만들고 거짓으로 일을 시킨다. 여섯째, 알면서 모르는 척하며 질문하는 일이다. 일곱째, 말을 일부러 뒤집어서 반대로 해 보이는 일이다. 이 일곱 가지야말로 군주가 사용 하여 할 것이다.23) 첫째, 군주는 그가 보고 들은 것을 대조해보아야 한다. 만약 군주가 듣는 데 있어 문 호를 하나로 정하면 신하가 군주의 귀와 눈을 가리고 막게 될 것이다.24) 둘째,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예외 없이 벌을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령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 다.25) 셋째, 상과 칭찬을 후하게 틀림없이 내려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아랫사람이 목숨을 바쳐 그들의 재능을 발휘할 것이다.26) 넷째, 신하들의 의견을 하나하나 들어서 판 단하면 어리석은 사람과 영리한 사람을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27) 다섯째, 자주 만나보고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면서 임용을 하지 않으면 간악한 자는 바로 사슴처럼 흩어져 버리 며, 사람에게 일을 시키면서 다른 일을 엉뚱하게 질문하면 사적으로 자신을 팔 수 없게 23) 24) 25) 26) 27) 韓非子 內儲說上, 主之所用也七術,. 七術 一曰 眾端參觀, 二曰 必罰明威, 三曰 信 賞盡能, 四曰 一聽責下, 五曰 疑詔詭使, 六曰 挾知而問, 七曰 倒言反事 此七者, 主之所用 也 위와 같음. 參觀一: 觀聽不參則誠不聞, 聽有門戶則臣壅塞 위와 같음. 必罰二: 愛多者則法不立, 威寡者則下侵上 是以刑罰不必則禁令不行... 위와 같음. 賞譽三: 賞譽薄而謾者, 下不用也, 賞譽厚而信者下輕死 위와 같음. 一聽四: 一聽則智愚不分, 責下則人臣不參
20 된다.28) 여섯째, 아는 것을 묻어 두고 질문하면 모르던 것도 알게 되며 한 가지 사물을 깊이 탐구하여 알게 되면 숨겨진 많은 것들이 모두 드러난다.29) 일곱째, 뒤바꿔 말하고 반대 행동을 하여 그것으로 의심스런 것을 시험해보면 간악한 일의 실정을 알게 된다.30) 한비자가 비록 일곱 가지 술을 형명참동을 실행하는 방편이라고 규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일곱 가지 술의 기능은 형명참동의 기능과 유사하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상벌을 부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상벌의 정확성은 군주의 권위를 확립시켜 줄 것이며 능력 있는 자로 하여금 그들의 재능을 다 발휘하도록 권장할 것이다. 첫 번째, 여섯 번 째, 일곱 번째는 군주가 신하들의 말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 가에 관한 것이다. 그는 신하 들의 말이 실제 상황에 적절한지를 파악해야 하며,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알아내기 위해 정보를 조작해야 한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신하들의 실제 업무 성과를 판단하는 것 과 관련된 것이다. 군주는 능력 있는 자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그들이 실제 이룬 업적을 판단해야 하며, 서로 잘못을 덮어주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내저설상 의 술은 형명 참동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법 이라는 글자는 한비자 에서 일반 백성들이 지켜야 하는 법조문의 성 격을 띤 실정법의 의미 외에 군주가 관료들을 등용하고 평가할 때 사용하는 추상적인 방 법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그 법을 실행하는 원칙은 형명참동 이다. 형명참동을 실행하기 위해서 군주는 신하들이 제출한 제안 중에서 어떤 상황에 가장 걸맞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제안에 따라 임무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임무의 완수 여부에 따라 상과 벌을 내리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제대로 완수하기 위해서 군주는 능력 있는 자와 무능력한 자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능력 있는 자가 자신의 의견을 제안할 수 있도록 권장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술은 법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이라 볼 수 있다. 28) 29) 30) 위와 같음. 詭使五: 數見久待而不任, 姦則鹿散 使人問他則不鬻私 위와 같음. 挾智六: 挾智而問, 則不智者至; 深智一物, 眾隱皆變 위와 같음. 倒言七: 倒言反事以嘗所疑則姦情得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崔 振 默 (서울대) 目 次 머리말 Ⅰ. 程 과 관련된 算題의 해석 Ⅱ. 생산과 노동의 기준, 물품의 소모율 맺음말 머리말 장가산한간 算數書 는 69개의 산수문제로 이루어진 죽간인데, 九章算術 보다 빠른 것으로 알려져 그 동안 학계에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결론은 이 산수서 가 순수한 산수문제집이 아니라 당시 매우 현실적인 산술계산과 관련된 실용 산수문제집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羨除는 형태에 관해서는 다소 논쟁은 있지만, 당시 墳 墓 조성에 필요한 실제적인 흙의 양과 노동량을 계산하기 위한 문제였다든지,1) 誤卷이나 租誤卷은 토지에 부과한 租의 과소 혹은 과대징수의 경우 이를 시정하는 문제였다는 점 에서 현실성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 자주 지적되고 있다. 산수서 를 조세의 징수, 토목 공사, 수공업, 금전거래 등 算數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하급관리의 실무지침서 내지는 讀本으로 보는 것도2)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 산수서 의 많은 산제들의 제목은 그러한 실용성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런데 산수서 의 현실성은 이 외에 程 字가 나타나는 算題의 분석을 통해서 더욱 분명해질 수 있는 것 같다. 程 은 본래 민의 일상생활을 규정하여 통제하는 國法과는 1) 2) 張家山漢簡 算數書 硏究會編, 漢簡 算數書 -- 中國最古の數學書, 朋友書店, 2006,(이하 硏 究會編, 算數書 로 약함) p.56 pp.34-35. 郭書春, 試論 算數書 的理論貢獻與編纂, 法國漢學 6, 中華書局, 2002.
22 다른 개념으로 官에서 수행하는 어떤 작업이나 管理하는 품목의 기술적 표준을 제시한 원칙으로 판단된다. 산수서 의 程 에 대해 彭浩는 물가책정이나 물품개량과 관련된 일 종의 법률규정으로 보았고,3) 整理小組는 관부수공업 生産定額의 법률규정 으로 보았 다.4) 그러나 吉村昌之는 법령은 아니고 무언가의 기준을 표시하는 것으로 추정하면서, 工人들의 근무나 노동에서의 최저기준량보다는 더 넓은 개념으로 당연히 되어야 할 量을 가름하기 위한 規準値를 보인다고 하였다.5) 이러한 연구들의 해석은 程 자체가 법적 구 속력을 갖는 것인지 아닌지의 관해 다소의 표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規程 이라고 본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사실상 산수서 이전부터 程 은 法이나 律 혹은 令보다는 하위개념으로 어떤 기준이나 표준을 의미하는 경우에 자주 사용되었 다. 문헌상에서 보면 漢에 귀의한 후 計相 을 역임한 張蒼이 章程을 定 하였다는 표현 이나6) 雲夢秦簡에서 工人程에서의 程 은 확실히 이러한 예에 속한다. 특히 九章算術 에서도 程 은 작업량의 기준으로 사용된 흔적이 강하다.7) 이러한 용례의 검토를 보면 程 을 律令으로 보기는 어렵고 작업량, 생산, 기술상의 기준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 한 것 같다. 그런데 산수서 에는 정 에 관한 산제가 적어도 6개 이상 포함되어 있고, 직접 정 자가 들어있지 않아도 정 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산제도 적지 않다. 이하 이 러한 산제의 분석을 통해 당시 생산과 기술상의 표준정도를 통해 고대사회의 일면을 살 펴보고자 한다. Ⅰ. 程 과 관련된 算題의 해석 1. 程 字가 포함된 산제 A) 일반 곡식에 관한 규정(정화) ① 규정에 말하기를 껍질 벗기지 않은 벼와 기장[禾黍] 1섬은 겉곡식 16과 2/3말에 3) 4) 5) 6) 7) 彭浩, 張家山漢簡 算數書 注釋, 科學出版社, 2001. 張家山漢墓竹簡(247號墓)整理小組, 張家山漢墓竹簡(247號墓), 文物出版社, 2006, p.141. 吉村昌之, 算數書 に見おえる 程 について, 張家山漢簡 算數書 の綜合的硏究, pp.176-177. 漢書 卷1, 高帝紀下. 如淳은 여기에서 (각 도량형단위에 해당하는) 權衡丈尺斗斛의 平法이 다 라고 注하고 있지만, 顔師古는 程은 法式이다(程, 法式也) 라고 해석하고 있다. 안사고는 또 다른 곳에서 程은 作業의 부과량이다(程者 作之課也, 漢書 景十三王傳) 라고 주석하고 있기 도 하다. 宋杰, 九章算術 與漢代社會經濟,首都師範大學出版社, 1994, pp.1-6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 崔 振 默 23 해당한다. 이를 절구질하여 현미(여미) 1섬을 만들면 현미 1섬은 착미(현미를 백미로 만 들기 전 한 단계 더 도정한 쌀로 추정됨, 즉 백미의 전단계) 9말에 해당하며, 착미 9말은 백미[훼미] 8말에 해당한다. 왕(王), ② 규정에 말하기를 벼 1섬은 조 20말에 해당하고, 이를 절구질하여 쌀 10말을 만들면 백미[훼미]가 된다. 정미[精細米, 찬미]로는 6과 2/3말 이 된다. 보리 10말은 보릿가루 3말이 된다. ③ 규정에 말하기를 보리, 콩, 팥, 참깨는 15말이 1섬이며, 백미[훼미], 착미를 주는 자는 10말을 1섬으로 한다. 8) ( 程禾, 程曰: 禾黍一石爲粟十六斗泰(大)半斗, 舂之爲糲米一石, 糲米一石爲糳米九斗, 糳米[ 九] 斗爲毁( 毇) 米八斗. 王 程曰: 稻禾一石爲粟廿斗, 舂之爲米十斗爲毁( 毇) 粲米六斗泰(大)半斗. 麥十斗[ 爲] 䵂三斗. 程曰: 麥ㆍ菽ㆍ荅ㆍ麻十五斗一石, 稟毁( 毇)< 糳> 者, 以十斗爲一石.) 구장산술 程禾 조와 똑같은 이 산제에서 정 은 세 차례 나오지만, 내용상으로 보 면 실제는 다섯 개의 정 이 있다고 보여진다. 모두 곡식간의 환산비율인데 연구에 의하 며 곡물의 도정정도에 따른 환산비율이 두 가지 다른 계통이 존재했다고 본다. ① 禾黍- (禾)粟-糲米-糳米-毇米이고 그 비율은 粟부터 50 : 30 : 27 : 24였고, ② 稻禾-(稻)粟-毁米- 粲米이고 그 비율은 粟부터 6 : 3 : 2 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장의 겉곡식[禾粟]과 벼 의 겉곡식[稻粟]의 환산비율은 5 : 6이 되는데, 산제 粟爲米 에서 5 : 4로 제시하고 있 는 것과는 모순이다. 산제 粟爲米 가 5 : 6으로 수정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여하튼 여 기서 정 이 주는 정보는 각종 곡식간의 환산기준이라는 점이다. 이 산제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복잡한 도정과정이다. 속-여미-착미-훼미로 이어지는 도정과정은 九章 算術 에서는 없던 毇米가 등장한다는 점이 다르다. 九章算術 에는 그 대신 粺米가 존재 하는데, 여기서 패미, 훼미, 착미는 비슷한 도정임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시기와 지역에 따른 도정과정상의 차이가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닌가 추정된다. 현대 도정에서 현미와 백 미의 두 단계 도정을 감안한다면 이 시기 세 단계 도정의 세밀함을 엿볼 수 있다. B) 전조(田租)의 징수규정(취정) ① 규정에 따라 10보²(평방보)에 전조(田租) 1말을 거두는데, 지금 그것을 건조시킨 것 이 8되라면, 몇 보²이 되어야 1말이 되겠는가? 얻어진 답은 12와 1/2보²이다. 풀이법에 말 하기를 8되를 나눗수(제수)로 삼고, 1말의 보수(步數)를 10배하여 나뉨수(피제수)로 하여 나눠주면 보수를 단위로 하는 결과를 얻는다 고하였다. ② 규정에 따르면 37보²에 전조 8) 鄒大海, 從 算數書 和秦簡看上古糧米的比率, 自然科學史硏究 22-4, 2003 참조. 한편 算數書 및 雲夢睡虎地秦簡, 이 산제는 雲夢睡虎地秦簡 倉律 과 거의 유사하다. 한편 九章算 術 說文解字 등에 나오는 도정정도에 따른 곡식 환산비율은 硏究會編, 算數書, p.56을 참 조하라.
24 (田租)로 조(좁쌀) 19말 7되를 거둔다면 몇 보에 1말이 되겠는가? 얻어진 답은 밭을 35와 79/197보² 줄인다면 1말이 된다. ③ 규정에 따라 5보²에 (전조) 1말을 거두는데 지금 그것 을 건조시킨 것이 1말 1되었는데, 밭을 줄여 1말이 되게 하려고 한다. 얻어진 답에 말하 기를 5/11보²이다. 풀이법에 말하기를 1말을 되의 수를 바꿔 5보²으로 곱하여[이것을 나 뉨수로 한다] 11로 나눠주면 결과를 얻는다 고 하였다. ( 取程 ①取程十步一斗, 今乾之八升, 問幾何步一斗. 問9)得田< 曰> 10): 十二步半一斗. 術曰: 八 升者爲法, 直(置)一升< 斗> 步數而十之[ 爲實], 如法一步. 竟11), ②程卅七步得禾十九斗七升, 問 幾何步一斗. 得曰: 減田十< 卅> 一< 五> 步有( 又)[一百] 九十七分步七十九步而一斗.12) ③取程五 步一斗, 今乾之一斗一升, 欲減田令一斗 得曰: 減田十一分步五. 術曰: 以一斗一升數乘五步 [ 爲實], 令十一而一[ 爲法]) ( ①, ②, ③ 번호는 필자가 임의로 붙인 것임) 이 산제는 乾字의 해석 여하에 따라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만약 건이 위의 해석대로 마른(건조한) 의 의미라면 이 산제는 당시 전조의 징수에서 습기가 있는 것과 마른 것 두 종류의 징수방법이 있었거나, 식량생산에서 습한 것과 건조한 것을 나눠 생산량을 파 악하는 기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그렇다면 문헌사료에는 없던 새로운 사 실일 수 있고, 당시 식량생산과정의 흥미로운 일면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 乾字를 실제 나 사실상 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는데,13) 그렇다면 전조징수의 규정과 현실 상 징수의 오차의 문제로 귀결하게 된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위의 減田도 田의 감소가 아니라 실제보수가 규정된 보수보다 적어진 것 즉 식량에 대응되는 보수의 오차로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산제(取枲程, 耗租)들에서 건조시킨 작물의 문제가 등장 하기 때문에 이 산제 역시 건조의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여하튼 정을 기준 내지는 표준으로 본다면 ① - ③은 각기 다른 작물을 재배했을 때 거둘 수 있는 田租의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C) 삼베 징수규정(취시정) 삼베 징수규정에 따르면 (마전) 10보²(평방보)에서 (삼베는) 둘레길이 30치를 한 묶음으 9) 10) 11) 12) 13) 問; 다른 산제와 비교할 때 이 問 자는 필요없는 衍字인 것 같다. 문맥상 田은 曰로 보아야 한다. 竟은 取의 誤字이거나 衍文으로 볼 수 있지만, 혹은 取와 같은 뜻으로 보기도 한다. 이 구절의 해석은 불명확하여 계산한다면 분모 79는 24의 잘못이라고 釋文이 주장하고 있으나 신뢰하기 어렵다. 다만 그 산출근거는 37-(37 10 197)=35와 24/197이다. 胡憶濤, 張家山漢簡 算數書 整理硏究, 重慶, 西南大學碩士學位論文, 2006, Pp.43-44. 乾을 건 조로 해석한다면 ③은 건조시킨 후 오히려 한 되가 많아지는 이상한 현상이 생기게 되므로 이 것을 말린다는 의미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 崔 振 默 25 로 하는데 지금 건조한 후의 둘레길이가 28치이다. (만약 건조한 후의 삼베의 둘레길이 가 30치였다면) 몇 보²이 있어야 한 묶음인가? 풀이법에 말하기를 건조한 마의 둘레길이를 제곱하여 나눗수로 삼고, 생마의 둘레길 이를 제곱했던 것에 (생마 1묶음당의 평방보수를 곱해서 나뉨수로 삼아서 나눠주면, 한 묶음에 11과 47/98보²이라는 결과를 얻게 된다.14) ( 取枲程. 取枲程十步三韋( 圍) 束一, 今乾之廿八寸, 問幾何步一束. 術曰: 乾自乘爲法, 生自乘有 ( 又) 以生一束步數乘之爲一實, 實如法得十一步有(又)九十八分步四十七而一束.) 枲는 麻로 해석되는데, 마는 곡물로는 참깨[芝麻]로도 사용되지만 여기에서는 삼베로 번역해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산제의 정 은 단위면적당 삼베의 생산표준을 제시하 고 있는 셈이다. 또한 생마와 건마와의 생산비율의 차이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D) 의사 규정에 말하기를 의사가 병을 치료한다면 60산을 얻는데 20산 정(程)...60을 얻었으면 얼마를 부(負)는 어느 정도가 되는가? 말하기를 부는 17과 11/269산이다. 그 풀이법에 말하기를 지금 얻었던 산을 나눗수로 하고 60에 부산(負算)을 곱하여 나뉨수 로 한다. ( 醫. 程曰: 醫治病者得六十筭(算) 負廿筭(算) 程 弗 得六十而負幾何 曰: 負十七 筭( 算) 二百六十九分算十一. 其術曰: 以今得筭( 算) 爲法, 令六十乘負筭( 算) 爲實.) 탈루가 많아 해독이 불명한 이 산제는 의사의 진료단가를 말하는 것 같아 이전의 문헌 에 볼 수 없었던 신자료로 판단되기도 한다. 그러나 負의 의미가 불명확하여 명쾌하게 해독하기 어렵다. 다만 負算이 치료행위과정에서 소용되는 포인트라면, 이 산제는 실제 치료행위에서 얻어지는 포인트가 負를 반영하여 규정상의 포인트로 환산하는 기록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15) 따라서 이 수치들을 의사의 근무평정을 위해 사용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기에서의 정 이 의료행위를 행할 때의 어떤 규준이라 는 점이고, 당시 치료행위도 이러한 규준의 제한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E) 전조(田租)의 소모량(모조) 모조(耗租), 즉 전조가 소모되었다는 것은 생산은 많았는데 건조하면 적어진 것을 말한 14) 15) 이 산제의 수식은 다음과 같다. 10 π (30/2)² π (28/2)²=11과 47/98(보²) 硏究會編, 算數書, p.86.
26 다. 말하기를 징수규정에 (전조를) 7과 1/4보²에 1말씩 거뒀다가, 지금 건조시켜보니 7과 1/3되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1말을 얻을 보²(평방보)수를 구하려고 한다. 풀이법에 말하 기를 10되를 두고서 7과 1/4보²을 곱하여 [나뉨수로 하고, (이것을 건조시킨 후의 수)7과 1/3되를 나눗수로 하여] 나누면 결과를 얻는다 고 하였다. 답에 말하기를 9와 39/44보² 에 1말이다 라고 하였다. 다른 물건에 대한 규정에서도 이와 같이 한다. ( 耗租. 耗租產多乾少, 曰: 取程七步四分步[ 一] 一斗, 今乾之七升少半升, 欲求一斗步數. 術曰: 直( 置) 十升以乘七斗< 步> 四分步 [爲實, 七升步半升爲法], 如乾成一數也. 曰: 九步四十四分步 卅九而一斗. 程它物如此.) 여기에서는 田租의 소모량이 등장한다. 이 때의 耗를 秏(벼의 일종)로 보아 일종의 稻 계통의 작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算數書 전체의 분위기를 보면 소모의 뜻으로 이해 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이 산제에서 取程은 7과 1/4보²에 1말씩 거뒀다 는 것이고, 이것은 B)의 산제와 같이 어떤 작물의 징수규정인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 구절에 程 它物如此 는 이 산제의 계산법이 일반적인 원칙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F) 죽간을 만드는 규정(정죽) 규정에서 말하기를 지름이 8치짜리 대나무로 3자짜리 죽간 183개를 만들 수 있다 고 하였다. 지금 9치짜리 대나무로 죽간을 만든다면 몇 개나 만들 수 있겠는가? (답에) 말하 기를 205와 7/8개가 된다 고 하였다. 풀이법에 말하기를 8치를 나눗수로 삼는다 고 하 였다. 규정에 말하기를 (지름이) 8치짜리 대나무 한 개로 1자 5치짜리 죽간 366개를 만들 수 있다 고 하였다. 지금 이 대나무로 1자 6치짜리 죽간을 만든다면 몇 개나 만들 수 있 겠는가? (답에) 말하기를 343과 1/8개가 된다 고 하였다. 풀이법에 말하기를 16치를 나눗수로 삼는다 고 하였다. ( 程竹. 程曰: 竹大八寸者爲三尺簡百八十三, 今以九寸竹爲簡, 簡當幾何 曰: 爲二百五簡八分 簡七. 術曰: 以八寸爲法. 程曰: 八寸竹一箇爲尺五寸簡三百六十六. 今欲以此竹爲尺六寸簡, 簡 當幾何 曰: 爲三百廿< 四十> 三[ 簡] 八分簡一. 術曰: 以十六寸爲法.) 이 산제의 두 개의 풀이법은 이 상태 그대로는 모두 불완전하다. 나눗수(除數)로 삼는 다는 말 뒤에 당연히 나뉨수 즉 被除數에 관한 언급이 있고 實如法而一 같은 나눗셈을 하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등장해야 할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하튼 원문은 이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는 점은 다소 의문이다. 이 산제의 계산법은 비례식이기 때문에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 崔 振 默 27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일정한 재료로 죽간을 만드는 방법을 말하면서, 그 표준으 로 지름이 8치짜리 대나무로 3자짜리 죽간 183개를 만들 수 있다 고 하였는데, 이 규 정대로라면 만들어진 죽간의 전체길이는 549자 즉 12736.8 (1자를 23.2 로 계산)가 된 다. 그렇다면 대나무 전체 길이를 넉넉하게 10m로 추정한다면 대략 대나무 원통을 12-3 등분하여 죽간을 가공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실제 그렇게 원통을 자르기 어렵기 때문 에 원통을 6등분하고 각 등분마다 2쪽의 죽간을 가공했거나, 4등분하고 각 등분마다 3쪽 의 죽간을 가공했다고 보는 편이 나은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너비 3-4.5 정도, 길이 70 의 죽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죽간의 길이 70 는 출토죽간에 보이는 당시 관문 서의 형식과 잘 맞지 않을 수 있는데, 아래 1자 5치나 1자 6치의 죽간은 35-37 가 되어 통용되는 죽간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여하튼 그 자체 매우 정교한 기술였다고 판단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정 은 길이가 줄어들고 죽간의 숫자가 늘어났으므로 사실 상 첫 번째 정과 같은 것이다. 확실히 이 산제는 기술의 표준을 제시하고 있는 예이다. G) 대그릇[竹籠] 만들기 (노당) 규정에 말하기를 하루에 대나무 60그루를 벌목하고 하루에 대그릇 15개를 만드는데, 대나무 한 그루로 대그릇 셋을 만들 수 있다 고 한다. 지금 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대나무를 벌목해서 대그릇까지 만들게 한다면 하루에 몇 개나 만들 수 있겠는가? (답에) 말하기를 대그릇 13과 3/4개를 만든다 고 하였다. 풀이법에 말하기를 60을 나눗수로 삼 고 55에 15를 곱한 것을 나뉨수로 삼는다 고 하였다. ( 盧唐.16) 程曰: 一日伐竹六十箇, 一日爲盧唐十五, 一竹爲三盧唐. 欲令一人自伐竹, 因爲盧唐, 一日爲幾何 曰: 爲十三 盧唐四分之三. 術曰: 以六十爲法, 以五十五乘十五爲實.) 이 산제의 제목 노당은 대그릇으로 해석했는데, 어떠한 형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더 구나 문제와 술문 및 해답간에도 잘 맞지 않는다. 계산에 의하면 (60 15) (60+5)=13과 11/13이 되어 정답이라고 한 13과 3/4와는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 이것은 아마도 초사자 가 피제수중의 60을 55로 쓰고 제수중의 65를 60으로 썼을 때 비로소 가능하지만, 왜 그 렇게 써야 했는지 당연히 의문이다. 그런데 작업 첫째 날에만 주목한다면 다음과 같은 계산이 가능해진다. 대그릇을 15개 만든다면 대나무는 하루에 5개 필요하고, 이 5개의 대나무만을 벤다면 하루에 1-5/60=55/60日의 시간이 남게 된다. 또한 대그릇을 한 개 만 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1/15日이므로 남는 시간에 만들어지는 대나무는 (하루중 남은 시 간) (한개의 대그릇을 만드는 시간), 즉 (55/60) (1/15)=13과 3/4가 되어 술문과 일치하 16) 정리소조가 竹籠으로 해석했던데 비해, Dauben은 주걱, 국자 정도로 이해했다.
28 게 되는 것이다.17) 여기에서의 정 은 명백히 一日 勞役의 기준과 작업의 표준을 제시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雲夢秦簡 工人程에서 제시되는 하루의 표준적인 노동량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분업화하지 않고 오히려 복수의 공정을 한 사람에게 맡긴 다는 전제가 당시 현실에서 등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의심스럽고, 一日爲盧唐十五, 一竹爲三盧唐 의 의미가 최대한 그렇게 만든다는 것인지, 평균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 인지도 불분명하다. 이에 대해 일부 주석가들이 이를 가능한 최대 로 번역하였던 점을 고려하면18) 최대작업량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H) 깃털을 단 화살(우시) 규정에 따르면 한 사람이 하루에 화살을 30개 다듬고 깃털을 20개 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 화살을 다듬고 깃털까지 달게 한다면, 하루에 몇 개 나 만들 수 있는가? ( 羽矢. 程: 一人一日爲矢卅ㆍ羽矢廿. 今欲令一人爲矢且羽之, 一日爲幾何 曰: 爲十二. 術曰: 并( 並) 矢ㆍ羽以爲法, 以矢ㆍ羽相乘爲實.) 화살 끝부분의 깃털은 당시 화살의 비행속도와 각도 등을 고려하여 정확히 목표에 도 달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적 장치였다. 당시 羽矢에는 鍭矢, 殺矢, 兵矢 田矢, 茀矢 등 여러 종류의 화살이 존재했는데, 무게중심은 鍭矢, 茀矢가 3분하여 앞뒤 1:2의 비율이 었고, 兵矢 田矢는 앞뒤 2: 3으로 5분하였고, 殺矢는 7분하여 앞뒤 3: 4의 비율이었다. 이 모든 화살은 전체 길이를 5분할 경우 깃털부분이 1이 된다.19) 이 산제에서 정 은 화살 을 다듬고 깃털을 달아 하나의 완성된 화살을 만드는 표준작업량을 제시한 것이다. 2. 程 으로 추정되는 산제 산수서 의 문제나 해답에 제시되는 숫자는 평범한 정수가 아니라 기억하거나 표기하 기도 복잡한 매우 특이한 분수나 정수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예컨대 銅毛의 정답 11과 91/144銖, 程竹에서의 343과 1/8, 醫에서의 17과 11/269, 賈鹽에서의 103과 95/430전, 耗租에서의 9와 39/44, 取枲程에서 11과 47/98, 특히 耗 條에서는 겉곡식의 수 치가 여러 개의 매우 복잡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17) 18) 19) 산수서 가 단순히 산 田村 誠, 算數書 中の3つの算題について, 張家山漢簡 算數書 の綜合的硏究, p.52. Joseph W. Dauben, Suan Shu Shu 算數書; A Book on Numbers and Computations, Arch. Hist. Exact Sci. 62, 2008, p.147. 周禮 考工記 卷下, 矢人制矢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 崔 振 默 29 수 연습용의 참고도서였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사항이다. 단지 계산만을 위해 복잡한 수 의 사칙연산을 유도했다는 것은 오히려 계산 때문에 수학원리의 이해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치들은 현실에서 직면한 수치와 문제들이 만들어낸 실제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여지도 있는 것 같다. 구장산술 일 부 산제 역시 국가가 어떤 工事를 진행하기 전에 미리 공정의 규모와 필요한 노동력, 시 간 등을 계산하고 추진했던 흔적으로 추정하고 있기도 하므로20) 산수서 에서도 그런 가 능성을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칙연산 법칙에 관한 산제도 적지 않고 구장산술 등 다른 전통수학저작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수의 성질을 논한 순수한 산제도 없는 것 은 아니다.21) 그럼에도 산수서 에 반영된 각종 물가나 식량생산, 田租 등이 역사적 상황과 상당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고,22) 위의 정 도 당시의 생산과 작업 및 기술 의 표준화와 관련된다는 점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하 구체적으로 정 이라는 단어는 사 용하지 않았지만, 정 으로 추정되는 몇몇 산제를 검토를 통해 현실상황과의 관련성을 확인해 보자. I) 겉곡식은 3 평방보에 한 말, 보리는 4 평방보에 한 말, 팥은 5 평방보에 한 말 (禾三步一 斗, 麥四步一斗, 荅五步一斗; 并租) J) 겉곡식 한 섬을 받아 절구질하면 8 말 8 되가 된다.(稟粟一石舂之爲八斗八升; 舂粟) K) 동전을 주조할 때 ( 구리) 한 섬에 7 근 8 량이 소모된다.( 鑄銅一石耗七斤八兩; 銅耗) L) 역마 두필이 하루에 꼴과 볏짚을 모두 2 섬 소비하는데, 꼴 3, 볏짚 2 의 비율로 한다. ( 傳馬日二匹共芻稿二石, 令芻三而稿二; 傳馬) M) 밭 24 평방보에 稅를 부과하는데 8 평방보에 한 말씩 3 말이 매겨졌다.( 稅田廿四步, 八步 一斗, 租三斗; 稅田) N) 밭 1 무에 대한 田租는 10 평방보당 한 말씩 부과하면, 무릇 2 섬 4 말이 된다.(田一畝租 之十步一斗, 凡租二石四斗; 租誤券) O) 겉곡식 한 섬에 12 와 1/3 되가 소모된다.(粟一石秏一斗二升少半升; 秏23)) P) 겉곡식의 체적 2700 입방촌이면 한 섬이다.( ㆍ二尺七寸而一石; 旋粟) Q) 칠 한 말에 물 세 말을 합치면 최대포화상태의 용액이 된다 ( 漆一斗飮水三斗而極; 飮 漆) 20) 21) 22) 23) 宋杰, 九章算術 與漢代社會經濟, pp.101-102. 增減分 增分者, 增其子; 減分者, 增其母. 이 산제에는 다른 산제와 달리 實例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葉玉英, 論張家山漢簡 算數書 的經濟史料價値,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1. 秏는 稻계통의 한 품종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耗로 보아 소모 의 의미로 해석했 다.
30 R) 쌀 1 단위와 겉곡식 2 단위를 합해서 10 말을 도정하면 7 말 ⅓되가 나온다.(有米一石ㆍ 粟一石, 并提之; 米粟幷) S) 너비 22 촌짜리 비단의 값은 길이 10 촌에 23 전이다. (繒幅廣廿二寸, 袤十寸, 價廿三錢.; 繒幅) 위의 예시로 든 산제의 일반적인 형식은 지금(今) 이나 지금 가 있다면(今有) 의 형태의 문제가 시작되기 전에 다소 추상적인 명제가 나오는 경우이다. 이외 다른 산제도 金價 등의 각종 물가, 이자율 등을 반영하는 산제들이 있는데, 이는 시기에 따른 변동성 이 강하고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표준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위의 예시들은 각기 생산이나 작업 혹은 물품의 소모율을 반영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위의 예 시중 P)에 대해 부연 설명한다면 이는 지상에 쌓아둔 겉곡식의 체적을 환산하는 문제로 볼 수 있다. 무게나 부피단위로 모두 한 섬[一石]이 쓰였고, 겉곡식은 1석=2700입방촌이 라고 보는 일종의 規程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24) 구장산술 商功章의 委粟術에 程粟一斛積二尺七寸, 其米一斛積一尺六寸五分寸之一, 其菽荅麻麥一斛皆二尺四寸十分寸之 三 이라고 되어 있어 각기 곡물에 따라 체적이 달라짐을 서술하기 있기 때문에, 여기에 서 묵점(ㆍ)역시 程 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I) - R)까지의 산제들을 표로 정리하면 다 음과 같다. <표 1> 程 으로 추정되는 산제들 번호 품 명 I) 겉곡식,보리,팥의 租비율 J) 겉곡식의 절구질 정 으로 추정되는 내용 소모율 3 : 4 : 5 (一斗) 1石당 8.8(斗) K) 구리의 소모량 1石당 7근 8량 L) 역마의 소비량 꼴+볏집=2, 비율 3:2 M) 稅의 양 N) 밭의 田租 비고 같은 단위면적 11.3% 6.25% 8평방보당 3말 10평방보당 1斗 O) 겉곡식 소모량 1石당 12와 1/3升 P) 겉곡식의 체적(1섬) 1석= 2700입방촌 Q) 칠의 최대포화용액비율 칠 1斗, 물 3斗 S) 비단의 판매단위 2척 2촌 B)의 ①과 유사 1.2% R) 쌀과 겉곡식의 병산도정(1:2) 10斗당 7斗1/3 24) 矢崎武人, 算數書 中の ㆍ 二尺七寸而一石 と 漢書 律曆志, 究, p.161. 이년율령 과 동일 張家山漢簡 算數書 の綜合的硏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 崔 振 默 31 Ⅱ. 생산과 노동의 기준, 물품의 소모율 이상에서 제시된 각종 정 (규정)이 당시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를 검토하기 위해 우선 농업생산과 田租의 문제를 살펴보자. 전조 징수 규정은 B)에서 ① 10보²에 田租 1말 ② 37보²에 田租로 조(좁쌀) 19말 7되 ③ 5보²에 田租 1말, E)에서는 (田 租를) 7과 1/4보²에 1말, M) 8평방보당 3말, N) 10평방보당 1말 을 거둔다고 한다. 여기에서 B) ①과 ③은 두 배의 차이가 있으므로 각기 다른 작물이거나 생산력이 차이 있는 토지로 이해하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렵고, 반면 N)은 같은 작물이나 조건으로 이해 해도 좋을 것 같다. ②에 구체적 작물이 제시된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여하튼 B)를 일단 1畝(240步 大畝, 1 240, 15 16 혹은 20 12)로 환산한다면 각기 ① 24말, ② 128되 ③ 48말의 田租를 내야 하는 것이 된다. 세율을 1/10세로 계산한다고 해도 생산량 은 ① 24石, ② 1280되 ③ 48石이 되므로 당시 평균 畝당 생산량을 훨씬 초과하고 있다. 진한대 畝당 생산량을 평균 3-4石으로 잡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25) 이러한 수치는 결코 현실적이지 않다. 다만 水利田이나 區種法이 시행된 경우 각기 10석 내지 13석이 생산된 다는 지적도 있다.26) 그렇더라도 이 수치는 최고 조건의 최고 생산량을 적용해도 너무 터무니없기 때문에 계산을 위한 설정된 假設의 수치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면 이 규정을 당시의 생산량으로 이해한다면27) 기존의 학설과 크게 배치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수치를 납득할 수는 있기는 하다. B)① 24말, B)② 12.8말 B)③ 48 말, E) 33말, M) 90말이 생산량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 은 당시 생산의 기준이었 을 가능성이 있고, B)①의 取程十步一斗 는 규정은 10평방보에 한 말을 생산하는 것이 다 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명백히 N)은 田租의 의미로 이해할 수밖에 없고, N)과 같이 十步一斗 의 단락이 들어있는 B)①도 전조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점이 해명되지 않은 난제인데, 정 의 의미를 고려하면 단순히 계산상의 가설도 아닌 것은 분명하며 오히려 작물의 종류에 따른 생산량의 차이로 보아야 할 지도 모른 다.28) 또는 지주에게 내는 고율의 田租였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한편 또 다른 문제는 步를 단위로 田租를 계산하는 방식인데, 畝를 기준으로 전체 田租가 산정하기 전, 그 하위개념에 해당하는 程 을 기준으로 전조 산정의 근거를 만들었던 것으로 이해된 25) 26) 27) 28) 林甘泉 主編, 中國經濟通史(秦漢經濟卷, 上), 經濟日報出版社, 1999, p.243. 寧可, 有關漢代農業生産的幾個數字, 北京師院學報,1980-3, pp.80-81. 葉玉英, 論張家山漢簡 算數書 的經濟史料價値, pp.43-44. 구장산술 쇠분장의 18제에 今有田一畝 收粟六升太半升 에서 6과 2/3는 일반 田地의 생산량 과 稅率을 고려하면 대체로 현실과 부합하므로 田租로 추정한다. (宋杰, 九章算術 與漢代社 會經濟 )
32 다. 산수서 에 이 방식이 널리 존재하는 것을 보면 당시 이런 방식이 현실적이었던 것 같다. 즉 程 은 律보다 하위의 세부단위의 기준 등에서 사용된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 다. 한편 벼의 도정과정과 관련된 것은 A), I), J), O) 등 인데, 벼의 가공과정과 그 과정에 서 발생하는 손실율을 각 단계 米의 교환비율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정 을 통해 제시 한 이 손실율은 현대 도정과정에서 표준으로 제시하는 현백율(89-92%) 등과 거의 차이가 없다. 산수서 를 포함한 각종 문헌상의 등장하는 도정과정상의 米의 명칭에는 앞에서 제시한 것 이외에도 御米와 糈米가 추가되는데 御米는 황제에게 진상하는 가장 가공이 잘 된 쌀이고, 서미는 신에게 제사용으로 사용하는 쌀이다. 따라서 이들 쌀은 다른 것에 비해 가장 낮은 비율로 책정되고, 도정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당시 도정의 세분화와 분류는 신분사회에서의 소비생활의 차등을 반영하 는 측면이 강한 것 같다. 糲米도 배불리 먹지 못한다 ( 韓氏外傳 )는 표현도 이러한 방 증이다. 아마도 도정 첫 단계의 쌀인 여미는 군인이나 일반인들의 식량이었을 것이다. F), G), H) 세 개의 산제는 노동의 표준을 제시하는 1일 작업량들의 예시이다. 각종 수 공업생산에서는 개인의 숙련도 및 능력에 따른 생산량과 속도의 차이, 계절에 따른 하루 노동량의 편차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정한 생산효율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이 1일 노동량을 규정해놓을 필요성이 많았을 것이다. 기물제작 등 각종 물품을 활용하는 기술분야에서는 원재료의 소모율을 설정해놓는 것 이 제품의 품질 및 일정한 생산량을 유지하고 생산과정에서의 나태함 등을 막는 효율성 이 있었을 것이다. K), L), Q) 등이 이러한 산제들인데 우선 K)는 동전주조에서의 구리 의 소모율을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고고학 발굴에 의해 현존하는 오수전이 직 경은 2.5-2.6, 무게는 대략 3.5-4g으로 알려졌는데,29) 이 수치를 K)에 적용해 보자. 1석 은 1920량30)인데 소모되는 양이 7근 8량(120량)이므로 남은 구리는 1800량이 된다. 이것 은 다시 43,200銖(1량=24수)가 되는데 단순히 오수전이므로 5로 나눈다면 8,640개의 동전 이 생산되어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현존 오수전의 알려진 중량으로 계산한다면, 1수 =0.7g으로 하면 43,200수는 30,240g이 된다. 이를 3.5g으로 나누면 정확하게 8,640개가 된다. 따라서 당시 오수전은 3.5g이 표준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5g이상의 오수 전은 과잉이고 그 이하는 과소가 되는 것이다. S)는 비단의 판매단위로 이년율령 에서 비단을 파는데 2척 2촌에 미달하는 것은 몰 수한다 는 조항과 함께 고려하면 당시 비단판매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 29) 30) 張之恒 主編, 中國考古學通論, 南京大學出版社, 1995, p.266. 1石=4鈞, 1균=30斤, 1근=16兩, 1량=24銖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 崔 振 默 33 다. C)의 (삼베는) 둘레길이 30치를 한 묶음 으로 한다는 언급도 단위의 제시로 보여진 다. 동시에 수학적 기준도 등장하여 以圜材方나 以方材圜에서 5로 7을 나눈다 는 것은 7/5=1.4 즉 2를 의미하는 것이며, π를 단순히 3으로 계산하는 일, P)처럼 도량형의 단 위 등의 기준이 제시되어 있어 당시의 기술적 수준을 가름하게 해 준다. 맺음말 雲夢龍崗秦簡 에는 遺程, 敗程등의 표현이 등장하는데 遺程은 租賦의 수량을 채우지 못했을 때, 敗程은 租賦의 질량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31) 또 한 田租를 布로 환산하는 비율을 정한 규정으로 추정되는 租布程 등의 용어도 출현한다. 이러한 용례를 종합적으로 검토한다면 중국 고대 각종 물품의 품질과 수량, 노동량과 생 산력의 표준, 도량형의 기준 등 사회의 세밀한 면들을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 다. 31) 劉信芳, 梁柱 編著, 雲夢龍崗秦簡, 科學出版社, 1997, p.38.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 道敎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趙 晟 佑(서울대) 序 論 目 次 Ⅰ. 五石에 의한 鎭墓 Ⅱ. 鉛人과 殃의 처리 Ⅲ. 道敎의 새로운 五石 餘論 序 論 陝西省과 河南省의 關中 지역에서 발굴된 後漢 시기의 묘와 敦煌 지역에서 발굴된 魏 晉十六國初期의 묘에서는 높이 15-20cm 가량의 陶甁이 꾸준히 발견되어 왔다. 이들 陶甁 의 표면에는 衣物疏나 買地券과는 다른, 鎭墓文으로 통칭되는 일종의 매장문서가 적혀 있다. 鎭墓文은 보통 墓主 아무개가 모년 모월 모일에 사망하여 매장하니 묘를 관장하는 地下의 신들은 墓主를 저승으로 착오 없이 이송하라는 내용의 일종의 행정문서 형식을 띠고 있으며 아울러 형벌로 점철된 암울한 저승에서 墓主가 조금이라도 나은 처우를 받 을 것, 墓主를 위해 冢墓를 安鎭할 것, 死者인 墓主와 生人인 가족 및 후손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는 존재들이니 서로 간여하지 않을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鎭墓文의 내용은 後漢에서 魏晉에 이르는 시기의 중국사회의 宗敎的 心態를 보 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鎭墓文에 보이는 종교적 관념들과 天師道나 太平道와 같은 초기의 道敎와의 관계에 대하여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 결 과 天師道나 太平道와 같은 初期 道敎는 鎭墓文을 낳은 민간의 종교 전통을 상당 부분 계승하였음이 밝혀졌다.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발견되어 온 새로운 鎭墓文들을 풍부하게 활용하여 鎭墓文에 보이는 종교전통과 天師道를 等値하는 시각도 제기되었으나 鎭墓文을
36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종교적 관념이나 행태는 天師道가 등장하기 이전의 선행 단계라고 보는 것이 아직까지는 일반적인 이해이다. 鎭墓文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衣物疏나 買地券 등의 다른 종류의 매장 문서와의 계통적, 내용적 비교검토가 필요할 뿐 아니라, 鎭墓文이 발견된 墓의 피장자의 계층적 배경은 물론, 鎭墓文이 발굴된 墓葬이 집중되어 있는 後漢代의 關中地域과 魏晉 代의 敦煌地域의 특수한 地域文化의 가능성, 鎭墓文을 통해 엿볼 수 있는 冥界의 行政體 系, 鎭墓文을 사용하는 葬送儀禮와 유교적 喪葬儀禮와의 관계 등 多岐한 문제들이 해명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전에, 우선 이 글은 鎭 墓文의 기본적인 목적, 즉 死者를 위한 冢墓의 安鎭 과 生人을 위한 殃禍의 제거를 중심 으로 鎭墓文의 종교적인 특징을 검토하고, 이러한 鎭墓文의 특징들이 도교에서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I. 五石에 의한 鎭墓 後漢代 鎭墓文은 대부분 死者와 生人이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는 존재들임을 강조하면 서 양자를 격리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死者의 安寧을 기원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死者와 生人간의 분리를 강조하는 이러한 태도는 실상 형벌로 점철된 암울한 저 승으로 이관된 死者의 일에 살아 있는 가족과 후손이 연루되어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 을 막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陝西咸陽敎育學 院 2號 漢墓에서 발견된 永平 3年(60) 紀年의 鎭墓文은 鎭墓 행위를 담당한 종교인이 묘 를 만들기 위한 토지를 확보하고 후손을 위해 사자의 묘를 만드는 행위가 殃禍를 제거하 고 후손을 이롭게 하며, 死者가 저승에서 처벌받지 않고 아울러 死者로 인해 生人이 피 해를 입는 일도 없게 하려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鎭墓文이 적힌 陶甁을 묘 안에 매장하는 것 자체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임은 분명한데, 이 鎭墓文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五石이라는 다섯 종류의 광물을 사용하여 冢墓安寧 을 도모한다고 한다. 아울러 五石이 曾靑, 丹砂, 雄黃, 礜石, 慈石의 다섯 가지임을 전부 밝히고 있는 것 도 이 鎭墓文이 가지는 자료적 가치라고 할 수 있으나, 한 가지 더 특기할 것은 이 문장 이 적혀 있는 鎭墓甁 내부에서 실제로 雄黃과 曾靑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들 五石에 관해 언급하고 있거나 나아가 실제로 五石(의 일부)를 담고 있는 鎭墓甁의 사례들 중 보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묘 안에서 다수의 鎭墓甁이 발견되는 경 우인데, 이는 복수의 鎭墓甁을 사용하여 보다 체계적인 형태로 묘 내부를 주술적으로 봉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 / 趙 晟 佑 37 인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의도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洛陽 李屯鄕 後漢墓이다. 五石의 사용을 언급하는 鎭墓甁이 남북 방향으로 조성된 墓의 主室의 구석 네 곳, 즉 東北, 東南, 西南, 西北에 1건 씩 배치되어 있었다. 鎭墓文에 서 五石의 사용을 명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비슷한 방식으로 鎭墓甁이 배치되어 있는 사 례로는 河南省 靈寶縣 張灣 漢墓의 5號 墓를 들 수 있다. 이 경우 主室의 네 구석 뿐 아 니라 중앙까지 포함하여 다섯 곳에 鎭墓甁이 두어져 있었다. 太淸石璧記 에서 曾靑, 丹砂, 雄黃, 礜石, 慈石의 五石이 각각 순서대로 동, 남, 중앙, 서, 북의 五方과 청, 적, 황, 백, 흑의 五色에 상응하는 煉丹術의 중요한 재료로 등장하고 있으므로 後漢代 鎭墓文에서 보이는 五石 및 실제로 발견된 일부 광물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五石-五方-五行의 유기적인 상응관계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기 대하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기존의 발굴 사례들 중 五石의 배치가 정확 하게 五行說五方의 방위에 맞추어진 것이 소수에 속한다. 다만, 적어도 五石을 다섯 방위 에 배치하여 墓 내부의 공간을 주술적으로 보호하려는 관념이 존재하였다는 점은 인정해 야 할 것 같다. 다음 장에서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관념은 후대에 道敎에서 鎭墓를 위해 다른 형태의 五石을 사용하는 것과도 무관하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鎭墓를 위해 五石이 사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五石의 용도는 丹藥의 제조일 것이고, 실제로 五石 이라는 용어가 붙은 다양한 처방이 존재한다. 鎭墓文에서 五石을 神藥이라고 지칭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묘에 사용하는 五石 은 醫藥 전통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 은 死者를 안치하는 공간을 安鎭 하는 행위에 왜 특수한 종료의 藥材를 사용했는지가 되는데, 중국전통의학의 藥 이라고 하는 것이 근대의학의 藥劑와 동일한 성질의 것이 아 님을 상기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전자가 주술적 효과를 지닌 것으로 믿어졌던 재료들을 포함하는 경우도 많고, 그러한 재료로 만들어진 藥 은 적지 않은 경우 病因을 鬼邪 등의 外鬼에 귀인하고 이들에 대처하기 위한 것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五石 중에는 丹砂, 즉 朱砂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丹砂가 辟邪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관념은 本草學의 고전인 神農本草經 에서도 丹砂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를 殺精魅邪惡鬼 라고 소개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데, 五石 중의 雄黃에도 전통적으로 辟邪의 기능이 있다고 믿어졌고, 礜石 또한 마찬가지 효력을 가진 물질로 간주되는 등, 五石을 이루는 물질들의 기본적인 속성 중 하나가 辟 邪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辟邪 祈禳의 효능을 가진 五石을 주요 방향을 향해 배치 한 것은 묘의 내부를 주술적으로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첫머리에 소개 한 陝西咸陽敎育學院 2號 漢墓의 鎭墓文에서 명시하듯 五石은 기본적으로 冢墓安寧 을
38 위한 도구로, 鎭墓文의 내용이 효과적으로 실현될 것을 보조하는 장치였던 것이다. Ⅱ. 鉛人과 殃의 처리 그런데 鎭墓文의 중요한 목적 중 다른 한 가지가 死者로 인해 발생하는 殃禍가 生人에 게 미치지 않게 하는 것임을 상기하면 五石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할이 부여된 것은 아니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西安 和平門外 4號 墓에서는 初平 4年(194) 紀年의 鎭墓 文과 함께 礜石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발견되었는데, 이 鎭墓文은 五石의 精으로 冢墓를 安鎭하고 子孫들을 이롭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山西 臨猗 後漢墓에서 출토된 延熹 9年 (166) 鎭墓甁의 문장은 五石 전체가 아니라 雄黃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雄黃의 기능이 墓 主의 子孫을 위하여 殃禍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五石의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 潼關吊橋의 楊震 家族墓群 2號墓의 鎭墓文은 간결한 단서를 제시 한다. 中央雄黃, 利子孫, 安土. 라는 단 한 줄로 五石 중의 雄黃의 기능이 자손을 이롭게 하고 墓를 安鎭하는 두 가지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결국 五石의 기능이 제 I 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死者인 墓主를 위하여 墓를 安鎭하는 것, 그리고 그 외에도 殃禍를 막아 墓主의 살아 있는 가족과 후손을 이롭게 하는 것임을 극도로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이다. 五石에 대한 언급 없이도 墓主의 살아 있는 가족과 후손을 위하여 殃禍를 禳除한다는 다소 막연한 표현을 사용하는 後漢代의 鎭墓文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五石을 언급하거 나 혹은 五石 이외의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일견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으로도 보이 는 이 방법은 殃禍를 墓主의 가족과 후손의 거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다른 곳 혹은 다 른 사람에게로 옮기는 것이다. 殃咎를 千里 밖의 타향으로 멀리 보내라는 표현도 종종 보이고, 심지어는 관계없는 제삼자에게 轉移하라는 표현도 확인된다. 이러한 태도는 敦煌 에서 발견된 魏晉代 鎭墓文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과반수가 殃咎를 移轉하여 멀리 他鄕으로 보내라는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殃禍를 먼 곳으로 轉移하라는 내용을 담은 敦煌의 魏晉代 鎭墓文들은 일반적으 로 鎭墓文이 적혀 있는 甁과 아울러 五穀과 鉛人을 부장함으로써 墓主의 살아 있는 가족 과 후손에게 殃禍가 일어나는 것을 막겠다는 내용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五穀을 부장하 는 것은 後漢代 鎭墓文에서 墓主가 부장된 곡식을 가지고 저승의 세역에 충당하라는 것 과 동일한 취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알려져 있는 사례 자체 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後漢代의 사례는 우선 墓主가 그 곡식으로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 / 趙 晟 佑 39 조세를 납부할 것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표면에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墓主는 이승에서 살아 있는 동안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하의 명계에서도 조세를 납부해야 하고 그렇 게 하지 않을 경우 처벌받게 될 것이라는 관념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사자가 명 계에서 처벌받는다는 것 자체도 그 가족과 후손들에게 반가운 일일 수 없지만 궁극적으 로 그들에게 더 큰 관심사는 墓主가 처벌을 받게 되더라도 자신들에게 그 영향이 미치지 않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墓主로 인해 일어날 殃禍를 불특정의 제삼자에게 떠넘기거 나 먼 지역으로 보내라고 직접적으로 기원하는 것과 비교하면 간접적인 조치이기는 하지 만 墓主가 저승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五穀을 부장하는 것 역시 동일한 사고방식에서 비 롯된 조치인 것이다. 鉛人도 기본적으로 五穀과 동일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매우 단순한 형태 의 납인형인 鉛人의 사용은 이미 後漢代 鎭墓文 중에도 墓主 대신 저승에서 노동을 제공 할 代理者로 등장하고 있다. 이 역시 일차적으로는 墓主가 저승에서 겪게 될 고초를 덜 어주기 위한 예비조치임에는 틀림없으나 궁극적으로는 墓主가 노역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승의 가족이나 후손을 저승으로 불러들여 괴로움을 덜고자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墓主를 대신하여 힘든 노동을 감당하기 위 해 부장된 대리자가 鉛人인 것이다. 그런데 敦煌의 魏晉代 鎭墓文들은 後漢代 鎭墓文들 과 같이 이러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우선 死者를 배려하면서 生人 측의 우려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五穀과 鉛人이 지상의 生人을 위한 器物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 이다. 3세기말부터 4세기초에 집중되어 있는 敦煌의 魏晉 鎭墓文은 1-2세기의 後漢代 鎭墓文 과 비교해 볼 때, 墓主보다 生人들의 안위에 치중하는 경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심 지어 死者인 墓主를 노골적으로 재앙의 근원으로 지목하면서 저승에서 墓主 자신이 받게 될 형벌이나 고통스러운 처우는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으로 받아들이되 이로 인하여 남 아 있는 가족을 괴롭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명령조차 보이는 것이다. 敦煌의 魏晉 鎭 墓文에서 보이는 이러한 편향성을 시대적 변화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敦煌 지역에 국한된 특수한 성향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敦煌의 魏晉代 鎭墓文 발굴 사례들이 陝西 河南의 關中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된 後漢代 鎭墓文 사례들 에 비해 수적으로 풍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지닌 후자에 비해 오히 려 획일적인 형식과 내용을 보여준다는 한계가 있고, 아울러 지리적으로 中原 지역과 격 절되어 있는 敦煌의 지리적 위치 또한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아울러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3세기 말부터 4세기초에 집중되어 있는 敦煌의 魏晉代 鎭墓文에서 보이는 일부 성향은 사실 그 단초가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後漢代 진묘문에서 확인된다는
40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生과 死를 엄격하게 분리하고 저승에서 死者가 겪을 고통을 덜어주며 死者로 인한 殃禍 때문에 生人이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을 도모하는 後漢代 鎭墓文의 균형 감을 生人의 보호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敦煌의 魏晉代 鎭墓文에서 찾아보기는 어렵 다. 그러나 魏晉代 鎭墓文의 이러한 경향은 어느 정도 後漢代 鎭墓文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고, 死者와 生人을 모두 배려하고 있는 後漢代 鎭墓文의 궁극적인 목적도 어떤 의미 에서는 결국 죽음으로 인한 일체의 부정적인 영향에서 死者의 가족과 후손을 보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저승으로 이관된 뒤에 벌어질 상황에 死者를 방치하는 듯한 敦 煌의 魏晉 鎭墓文에 비하면 後漢代 鎭墓文은 저승에서 死者가 고생하지 않도록 대신 형 벌을 받을 인형 기물이나 鉛人을 부장하고 혹은 묘 안에 五石을 배치하는 등 死者를 위 한 조치를 여러 가지 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死者를 위해 배려하는 한편 生과 死의 영역이 서로 다르다고 누차 강조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근본 취지가 生人의 영역에서 死者 및 그와 관련된 일체의 영향을 제거해 내보내는 데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하의 명계로 옮겨진 死者에 대한 본격적인 구원은 道敎와 佛敎가 死者를 구제하는 방법을 제시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Ⅲ. 道敎의 새로운 五石 後漢代 鎭墓文과 유사한 道敎의 의례문서로 上章儀禮에 쓰이는 章奏가 종종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8세기 초의 도사 朱法滿이 쓴 要修科儀戒律鈔 의 卷15와 16에 보이는 道 士의 葬送儀禮 규정에는 後漢代 鎭墓文과 매우 유사한 형식의 道士移文 이라 불리는 매 장문서가 등장한다. 朱法滿이 제시하는 도사의 장례 절차는 사실 유교식 장례절차와 그 다지 다를 것이 없다. 중요한 차이라고 하면 입관에 즈음하여 上章儀禮가 한 번 행해진 다는 점, 喪服을 입고 哭을 하는 것이 혈연의 가족이 아니라 師承關係로 맺어진 도사들 이라는 점, 정해진 날에 유교식 제사가 아니라 도교식 齋를 지낸다는 점 정도이다. 後漢 鎭墓文과 형식 상 공통점이 많기는 道士移文 이 보여주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 은 殃禍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鎭墓文에서 다루는 殃禍의 처리가 道敎에서 쓰는 移文 에서는 불필요함을 의미한다. 殃禍의 방지나 轉移까지 함께 다루어야 했던 後 漢魏晉 鎭墓文과 달리 道敎의 移文 에서 殃禍를 다루지 않는 것은 上章儀禮나 符呪 등 殃禍에 대응하는 다른 방법이 이미 등장했기 때문이다. 鎭墓文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朱法滿의 要修科儀戒律鈔 卷15-16의 내용에서 눈길을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 / 趙 晟 佑 41 끄는 것은 五石 의 사용이다. 朱法滿이 말하는 五石의 사용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현 행본 道藏에 수록되어 있는 生尸經 )에 보인다. 현행본 太上洞玄靈寶滅度五練生尸妙經 (CT369/HY369, 이하 五練 五練生尸經 의 도입부는 元始天尊이 저승의 감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死魂들을 구제하라고 동서남북과 중앙의 天帝들을 비롯한 여러 신들에게 명하 자 각 天帝들이 死者의 시신을 잘 보호하라고 다시 해당 방위의 하급 신령들에게 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어지는 내용은 死者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덤의 동, 남, 서, 북 과 중앙에 묻는 다섯 가지 색의 이른바 五石, 五石에 새겨 넣는 天文, 그리고 이 五石 을 묻을 때 행해야 하는 의례에 대한 설명이다. 五石에 새겨 넣는 天文 의 전반부는 大字 혹은 玉字 라 불리는, 쉽게 해독할 수 없 는 특이한 字體의 문장으로 해당 방위의 氣가 응집하여 나타난 형상이라고 하며, 후반부 는 해당 방위의 天帝가 하급 신령들에게 내리는 告 형식의 문서로 그 내용은 五練生尸 經 의 도입부에서 天帝들이 하급 신령들에게 내리는 명령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상급 자가 하급자에게 업무 지시를 告 하고 如律令 으로 종결하는 漢代 行政文書 양식이나 後漢代 鎭墓文의 골격과도 유사하다. 東方天文의 경우 업무 내용은 크게 보아 后土에 의 탁한 墓主의 시신이 億劫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살피고 관리할 것, 그리고 泰 山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던 墓主의 魂을 석방하여 천상으로 올려 보내 잘 보살필 것의 두 가지인데, 이를 東方天帝가 元始天尊의 符命을 받들어 하급 신령들에게 告下하니 하 급 신령들은 이 일을 元始盟眞舊典女靑文과 같이 처리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새 겨진 五石을 준비하면 이 의례를 담당한 도사는 도교의 上章儀禮에 따라 黃繒章을 올리 고 五石을 묘에 묻게 된다. 五鍊生尸經 의 설명대로 만들어진 도교의 五石도 불완전하게나마 발견된 사례가 알려 져 있다. 대부분 唐代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보존상태가 불완전하거나 墓主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예외적으로 훼손이 적은 사례들은 이들이 五鍊生 尸經 의 내용을 그대로 따른 것들임을 보여주고, 특히 死者의 신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례는 武三思, 韋后의 어머니 崔氏, 玄宗의 손녀인 淸源縣主 등이다. 일견, 五鍊生尸經 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五石은 후한대 진묘문에서 보이는 五 石과 별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후자는 鎭墓甁 안에 넣어져 기능하도록 되어 있는 다섯 가지 종류의 광물이고, 전자는 이른바 天文을 새긴 다섯 가지 종류의 석판이 므로 재료와 사용 방법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後漢代 鎭墓文의 五石이 각 방향에서 辟 邪의 기능을 하기 위한 것, 다시 말해 외부의 邪鬼가 무덤 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처럼, 五練生尸經 의 五石도 각 방향의 天帝의 명으로 墓主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42 餘論 序論에서 제기했던 것처럼 鎭墓文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鎭墓文의 내용 뿐 아니 라 鎭墓文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검토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 글은 五石과 殃 의 문제를 중심으로 鎭墓文의 종교적인 특징을 검토하고 이러한 특징이 道敎에서 어떠한 형태로 계승되어 나타나는지를 간략하게 다루는 데 그쳤다. 그러나 鎭墓文이 신들로 이 루어진 관료 행정 기구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일종의 행정문서임을 상기하면 鎭墓文에 보이는 天帝, 黃帝, 黃神, 北斗 등 상급 신격을 비롯하여 蒿里父老, 丘丞, 墓伯, 墓門亭長 등 상대적으로 위계가 낮은 地下의 신들에 대한 검토는 물론이고, 행정문서로서의 성격 도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鎭墓文에 보이는 민간의 종교 전통과 道敎 사이의 연속성을 감안하면 역시 일종의 行政文書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道敎의 儀禮文 書와의 형식상의, 내용상의 비교 검토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墓誌銘의 분석을 중심으로 최 진 열(동덕여대) 目 次 Ⅰ. 문제제기 Ⅱ. 離宮 行宮과 府兵 배치 Ⅲ. 巡幸 장소와 府兵의 동원 Ⅳ. 결론 Ⅰ. 문제제기 황제들의 巡幸은 목적에 상관없이 관리들과 병사들, 巡行 예정 지역의 지방관과 백성 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기존에 巡幸에 대한 연구가 적었던 것은 巡幸에 대한 자료가 적었기 때문이다. 唐代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遊幸,1) 皇帝 행차의 행렬이나 禮儀,2) 皇帝가 머무르던 行宮 離宮,3) 高宗과 武則天의 葉縣 巡狩,4) 太宗의 靈州 행차와 이민족 지배,5) 閱武 講武 참관6) 등을 다룬 연구가 있지만 다른 연구 주제에 비해 연구성과가 많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唐代 巡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1) 2) 3) 4) 5) 6) 拜根興, 試論唐代帝王的巡幸, 南都學壇(哲學社會科學版) 第 17卷, 1997-1, 1997. 김호, 唐 前期 皇帝 行幸의 威儀, 中國古中世史硏究 20, 2008, 433-446쪽; 趙芳軍, 唐代御 駕出行禮儀述論, 濮陽職業技術學院學報 21-2, 2008, 115왼쪽-117오른쪽. 介永强, 關中唐代行宮考, 中國歷史地理論叢 3, 2000; 同氏, 唐代行宮考逸, 中國歷史地理 論叢 16-2, 2001; 同氏, 唐代行宮三題, 唐都學刊 17(總第70期), 2001; 同氏, 唐代行宮文化 透視, 陝西師範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30-1, 2001; 穆渭生, 唐玉華宮興衰考略, 西北大學 學報(哲學社會科學版) 34-4, 2004; 祁遠虎, 離宮ㆍ行宮辨, 西安文理學院學報(社會科學版) 13-2, 2010. 潘民中, 唐高宗ㆍ武皇后兩度冬狩葉縣探微, 平頂山學院學報 22-3, 2007. 艾尙連, 唐太宗靈州之行與漠北羈縻府州的建立, 民族硏究 1997-6, 1997. 丸橋充拓, 唐宋變革期の軍禮と秩序, 東洋史硏究 64-3, 2005.
44 기존 연구에서 순행 횟수나 巡幸期間에 대해 관심이 소홀했기 때문이다. 먼저 唐 전체, 唐前期, 唐後期로 나누어 巡幸頻度와 巡幸期間을 살펴보자. <표 1> 唐代 순행 빈도와 기간 순행 빈도 시대 기간 행 차 순행 기간 순 행 행 차 순 행 (년) 순행횟수연평균횟수순행횟수연평균횟수 총추산일 연평균 총추산일 연평균 14,254 102.5 13,682 98.4 唐前期 139 237 1.71 140 1.01 14,422 103.8 13,852 99.7 唐後期 151 101 0.67 19 0.13 4,680 31.0 18 0.12 18,934 65.3 13,700 47.2 唐 전체 290 338 1.17 159 0.55 19,102 65.9 13,870 47.8 출전 舊唐書 와 新唐書 本紀; 1998); 資治通鑑 唐紀 ; 唐會要 (王溥(宋)撰,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冊府元龜 (王欽若(宋) 等編纂, 周勛初 等校訂, 鳳凰出版社, 2006) 卷113 帝王部 巡幸門2, 1232-1240쪽 및 卷114 巡幸門3 1242-1243쪽, 卷115 籍田門 1254-1256쪽, 卷115 蒐狩門, 1258-1261쪽. <표 1>에서 먼저 唐代 전체의 수치를 보면, 행차 7)의 경우 연평균 1.17회, 순행 8)은 0.55회였다. 또 연평균 행차 기간은 약 66일, 연평균 순행 기간은 약 48일이었다. 행 차 와 순행 의 빈도보다 唐代 皇帝들이 연평균 최소 48일, 최대 66일 동안 都城 밖에 행 차하거나 체류했다는 수치를 보면 唐代 巡幸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표 1>의 통계 수치 가운데 행차 와 순행 빈도 및 기간을 唐前期와 唐後期로 나눠 보면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행차 와 순행 의 빈도를 비교하면, 唐前期 연평 균 행차 와 순행 의 빈도는 1.71회와 1.01회였다. 반면 唐後期에는 각각 0.67회와 0.13회 로 격감하였다. 다음으로 기간을 살펴보자. 唐前期 행차 기간은 최소 14,254일, 최대 14,422일로 추산 되며, 이를 연수로 바꾸면 각각 40.3년과 40.8년이다. 즉 唐前期의 약 29% 혹은 29.3%의 기간 동안 황제들이 각지를 행차 하는데 보냈다는 뜻이다. 같은 기간 순행 기간은 최 소 13,609일, 최대 13,779일로 추산되며, 각각 38.4년과 38.9년이고 唐前期의 27.7%에서 28%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高宗 永淳元年(682) 四月 乙酉日(6. 4)부터 中宗 神龍 2년(706) 十月 己卯日(11. 18)까지 4,751일 동안 洛陽과 인근 지역에 머물렀다(長安 7) 8) 본고에서 행차 는 皇帝의 親征과 蒙塵, 都城에서 하루 일정의 이동과 왕복을 포함한 皇帝의 都 城 밖 이동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본고에서 순행 은 皇帝의 親征과 蒙塵, 都城에서 하루 일정의 이동과 왕복을 제외한 皇帝들의 이동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45 행차 기간 제외). 이를 합산하면 행차 의 경우 최소 19,005일(53.7년), 최대 19,173일(54.2 년)이다. 즉 唐前期의 皇帝들은 최소 38.6%에서 최고 39%의 기간 동안 都城인 長安 밖 에서 체류했다는 뜻이다. 이어서 唐前期 皇帝들이 주요 巡幸 장소에서 보낸 기간을 살펴보자. <표 2> 唐前期 皇帝별 순행 지역 체류 기간 九成宮 기타 피 華淸宮(驪山 기타 온 피서궁 온천궁 행차 (추 순행 (추 (萬年宮) 서궁 溫湯) 천궁 합계 합계 산)기간 산)기간 1 1 458 454 高祖 9 5 5 462 459 760(30.6%) 986 114 50 1,100 50 2,928 2,481 太宗 32 790(32.1%) (39.7%) (4.6%) (2%) (44.3%) (2%) 2,904 2,458 7,736 1,230 1,230 [3,262(66.8%)] (25.2%) 17 29 (25.2%) 41 4,880 4,880 高宗 35 7,723 1,290 (0.3%) (0.6%) 1,290 (0.8%) 4,968 4,968 [3,272(65.9%)] (26%) (26%) +232 +232 (+22.6%) (+22.6%) 4 1,040 1,028 武則天 21 4 +246 +246 (0.4%) 1,063 1,051 (+23.4%) (+23.4%) 12(18.5% 12(18.5% 107 65 中宗 6 /29.3%) /29.3%) 83 41 睿宗 3 1(100%) 1(100%) 6 1 1,191 3,307(69.3%) 1,135(23.8%) (25%) 4,835 4,773 玄宗 45 56(1.1%) 3,347(68.7%) 1,196(24.5%) 1,252 4,936 4,874 (25.7%) 11,875 2,216 1,216 2,562 1,300 89 14,254 13,682 (54.1%) (16.2%) (8.9%) (18.7%) (9.5%) (0.7%/0. 합계 14,422 13,852 11,949 2,276 1,281 2,636 1,365 6%) (54.1%) (16.4%) (9.2%) (19%) (9.9%) 1회 평 742.2 171 24 균 746.8 176 25 33.5년 6.3년 3.4년 7.2년 3.7년 40.3년 38.6년 연환산 0.3년 33.8년 6.4년 3.6년 7.4년 3.9년 40.7년 39.1년 비고 1. 출전 : 舊唐書 와 新唐書 本紀; 資治通鑑 唐紀 ; 唐會要 ; 冊府元龜 卷113 帝王部 巡幸門 2, 1232-1240면 및 卷114 巡幸門3 1242-1243면, 卷115 籍田門 1254-1256면, 卷115 蒐狩門 1258-1261면. 2. 단위 : 특별한 단위가 기재되지 않은 경우 일(日)임. 3. 숫자 가운데 + 는 그 숫자의 최소값을 의미함. 皇帝 재위 기간 洛陽 <표 2>에서 高宗이 洛陽에 체류한 기간이 高宗의 행차 혹은 순행 추산기간보다 길 다. 이는 高宗이 永淳元年(682)에 洛陽으로 행차한 후 죽을 때까지 洛陽에 머물렀기 때문
46 이다. 高宗 재위 시기부터 권력을 잡았던 武則天이 중국 최초의 여황제가 되었다가 말년 에 張柬之 등의 쿠데타를 폐위된 후 中宗이 다시 복위하여 神龍 2년(706) 十月에 長安에 환도할 때까지 약 24년 동안 唐과 武周의 여러 皇帝들은 洛陽에 머물렀다. 심지어 武則 天이 즉위한 이후 洛陽의 명칭을 東都에서 神都로 바꾸어 사실상 武周의 수도가 되었 다.9) <표 2>에서는 체류 기간에 주목하여 고종이 洛陽으로 옮긴 이후 죽을 때까지의 기 간을 체류기간으로 보았다. 만약 長安에서 洛陽으로 갔던 기간만 포함하고 洛陽 체류 기 간을 제외하면 3,262일과 3,272일로 줄어든다. <표 2>에서는 이 통계수치를 괄호 안에 병기하였다. <표 2>를 보면 皇帝별 편차는 있지만, 洛陽과 九成宮, 華淸宮에 머물렀던 기간이 길었 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唐前期 각 지역에 체류한 기간을 햇수로 환산한 부분이 주목된 다. 예컨대 16회에 걸친 唐前期 皇帝들의 洛陽 행차 혹은 체류 기간은 모두 11,875일 혹 은 11,949일이었다. 물론 이 가운데 貞觀 11년과 15년 등 長安과 洛陽의 왕래 기간까지 포함한 경우도 존재하므로 위의 수치는 洛陽 체류의 최대값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음력 의 1년이 354일이므로 唐前期 皇帝들은 洛陽에서 최대 33.5년 혹은 33.8년을 보냈다. 高 祖부터 玄宗까지 139년 동안, 즉 唐前期의 24.1% 혹은 24.3%의 시간을 洛陽을 오가는데 보냈다. 또 1회 평균 743일 혹은 747일을 洛陽에서 머물렀다. 이밖에 九成宮 체류 기간 은 唐前期 139년의 4.5%혹은 4.6%의 시간에 해당한다. <표 6>을 보면 太宗과 高宗이 한번 九成宮에 체류했던 평균기간은 약 171일 혹은 176일이며, 太宗과 高宗이 九成 宮에 행차한 해에만 한정하면 1년의 약 절반을 九成宮에서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華淸宮의 경우, 唐前期 황제들의 華淸宮 체류기간은 1,216일(3.4년) 혹은 1,281일(3.6년) 이었다. 이는 唐前期의 2.4% 혹은 2.6%였다. 이처럼 唐前期 황제들이 長安 이외에 洛陽 九成宮 華淸宮 등지에 자주 행차하고 오 랫동안 체류하면 都城 방어와 政變의 방지, 太子의 都城 잔류와 監國 문제, 잔류하는 官 員과 隨行官員의 선정, 행정업무의 처리, 皇帝 일행의 경호와 물자 제공, 皇帝의 이용 도 로 개보수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 가운데 필자는 皇帝의 경호 문제에 주목하였다. 주지하듯이, 唐前期에는 병농일치의 府兵制가 실시되었다. 그런데 唐前期 자 주 그리고 오랫동안 都城 밖에 행차하거나 체류하는 皇帝를 경호하기 위해 府兵들의 동 원 문제가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행연구에서는 府兵들이 都城인 長安 혹은 副都인 洛陽에만 番上10)한다고 보고 거리와 부담율 등을 계산하였다.11) 선행연구에서 巡幸의 경 9) 10) 朴漢濟, 隋唐代 洛陽의 都城構造와 그 性格- 中世的 都城構造의 終焉-, 中國古中世史硏究 22, 2009, 368-370쪽. 高昌 吐魯番文書를 분석한 선행연구에 따르면 番上 혹은 上番 이 都城에 가서 宿衛하는 것뿐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47 우를 간과한 것은 유감이지만, 府兵들이 皇帝들의 巡幸에 참가했던 예를 발견하기 어려 운 자료의 한계 탓도 컸다. 필자는 唐代 墓誌銘을 읽다가 折衝府 將領들이 皇帝들의 巡幸을 수행했던 기록을 접하 게 되었다. 折衝府의 장관인 折衝都尉와 차관인 果毅都尉, 別將 등이 皇帝의 巡幸을 隨從 했다면 휘하 府兵들 역시 巡幸을 따라갔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이들의 墓誌銘은 府 兵들의 동원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墓誌銘의 자료를 분석 하여 唐前期 皇帝 巡幸이 府兵의 동원과 배치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離宮 行宮과 府兵 배치 唐代 府兵制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가 府兵의 都城 혹은 宮城 번상과 부담의 균등화 문제였다. 선행연구에서는 府兵들이 長安 혹은 洛陽으로 번상한다고 보고 각 折衝府와 都城간의 거리, 부담 문제를 계산하였다.12) 한편 府兵의 지리적 분포, 折衝府가 있는 州 의 戶口 丁數와 折衝府의 수 혹은 府兵의 수의 관계를 살펴본 연구가 있다. 이에 따르 면 折衝府는 주로 長安과 京畿 지역, 혹은 이와 가까운 太原 河中 河南(洛陽)에 집중한 추세가 뚜렷하다.13) 또 반란과 이민족 토벌에 折衝府가 동원이 된 사례를 분석하여 折衝 府가 존재한 州와 稅役을 부담한 州가 지역적으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지역적 블록을 형성하고 折衝府의 유무와 상관없이 균등한 부담이 각 州에 부과되었다고 보기도 한 11) 12) 13) 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지역으로 가서 근무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한다(金羨珉, 出 土文書를 통해 본 唐代의 府兵-西州地域을 中心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학위논문, 1994.10, 144-165쪽; 孟憲實, 唐代府兵 番上 新解, 歷史硏究 2007-2, 2007, 69-77쪽). 그러나 본고에서 사용하는 番上 은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처럼 府兵들이 수도인 長安과 副都인 洛陽의 宮城 皇城 都城을 지키기 위해 파견되는 행위로 정의하겠다. 대표적인 연구로는 布目潮渢, 唐代衛士番上の負担, 布目潮渢中國史論集, 東京: 汲古書院, 2003-2004(原載 山本博士還曆記念東洋史論叢, 山川出版社, 1972), 293-304쪽; 石田勇作, 唐府 兵負担攷-律令法規からみたる-, 上智史學 24, 1979, 67위쪽-73아래쪽; 布目潮渢, 唐代衛士番 上の負担再論-石田勇作氏の 唐府兵負担攷 を讀みて-, 布目潮渢中國史論集, 東京: 汲古書院, 2003-2004(原載 立命館文學 418-421合倂號, 1980), 306-327쪽; 石田勇作, 唐府兵負担について の再考, 日野開三郞博士頌壽記念論集-中國社會 制度 文化史の諸問題, 中國書店, 1987, 252 위쪽-266아래쪽 등이 있다. 布目潮渢, 唐代衛士番上の負担, 293-304쪽; 石田勇作, 唐府兵負担攷-律令法規からみたる-, 67 위쪽-73아래쪽; 布目潮渢, 唐代衛士番上の負担再論-石田勇作氏の 唐府兵負担攷 を讀みて-, 306-327쪽; 石田勇作, 唐府兵負担についての再考, 252위쪽-266아래쪽. 谷霽光, 府兵制度考釋,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78, 153-158쪽; 菊池英夫, 唐折衝府の分布問 題に關する一解釋, 東洋史硏究 27-2, 1968, 2-10쪽.
48 다.14) 최근에는 天聖令을 분석하여 唐代의 軍役이 兩都 關中 河東 西北邊이 주로 맡 았던 府兵宿衛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山東 關東 지역의 州府에서 防人邊戍를 담당하여 軍役 부담의 지역 분담 구조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5) 선행연구에서 府兵의 番上 부담 일수와 지역적 안배 등을 고려할 때 皇帝들의 행차 문 제를 간과하였다. 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唐代에는 행차 횟수가 평균 1.17회, 순행 횟 수는 평균 0.55회였다. 唐前期로 한정하면 이 수치는 1.71회와 1.01회로 증가한다. 또 唐 前期 연평균 행차 기간은 최소 102.5일에서 최대 103.8일, 연평균 순행 기간은 최소 98.4일에서 최대 99.7일로 추산된다. 게다가 皇帝에 따라 행차 장소가 다르긴 하지만 洛 陽 九成宮 華淸宮 등에서 자주 그리고 오래 머물렀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결과와 달리 府兵들이 都城 혹은 宮城으로 番上한다고 가정한 후 논지를 전개하는 것은 이러한 唐代 황제들의 행차 와 순행 의 빈도와 기간을 간과한 것이다. 게다가 皇帝들의 이동 중간에 머무를 行宮과 避暑 避寒 등을 목적으로 장기 체류할 곳에 세운 離宮이16) 여러 곳에 존 재하기 때문에17) 都城의 宮城과 皇城뿐만 아니라 行宮과 離宮의 방어 문제도 府兵의 番 上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折衝府의 지역적 분포가 行宮 혹은 離宮의 방어와 관련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折衝府와 離宮 行宮이 존재하는 州의 折衝府와 離宮 行宮 수를 비교해 보았다. <표 3>에서 인용한 각 府 州의 折衝府 숫자는 新唐書 地理志 를 인용하였다. 최근 까지 각종 墓誌銘 등 금석문의 고증을 통해 新唐書 地理志 에 보이지 않는 折衝府들 이 확인되었다.18) 이러한 연구 결과를 신뢰한다면 墓誌銘의 출토에 따라 折衝府의 총계 14) 15) 16) 17) 18) 山內敏輝, 唐前半期の軍防體制と府兵制-軍府州と非軍府州の地域差を中心として-, 龍谷史壇 103 104合刊號, 1994, 197-229쪽. 渡邊信一郞, 唐代前期における農民の軍役負担, 京都府立大學學術報告 人文 社會 55, 2003, 1위쪽-11아래쪽. 離宮과 行宮의 개념은 祁遠虎, 離宮ㆍ行宮辨, 西安文理學院學報(社會科學版) 13-2, 2010, 4왼 -8왼쪽. 嚴耕望, 唐代長安洛陽道譯程述, 唐史硏究叢稿, 香港: 新亞硏究所出版, 1969, 599-606쪽; 介永 强, 關中唐代行宮考, 中國歷史地理論叢 3, 2000, 197-212쪽; 介永强, 唐代行宮考逸, 中國 歷史地理論叢 16-2, 2001, 78-82쪽; 介永强, 唐代行宮三題, 唐都學刊 17(總第70期), 2001, 21왼쪽-22오른쪽; 吳宏岐, 西安歷史地理硏究, 105-116쪽; 吳宏岐, 隋唐行宮制度與宮廷革命, 陝西師範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37-3, 2008, 21왼쪽-22오른쪽; 祁遠虎, 離宮ㆍ行宮辨, 西安 文理學院學報(社會科學版) 13-2, 2010, 7왼쪽. 勞經原, 唐折衝府考, 7593-7629쪽; 羅振玉, 唐折衝府考補, 7631-7640쪽; 同氏, 唐折衝府考補 拾遺, 7641-7642쪽; 谷霽光, 唐折衝府考校補, 7643-7660쪽(이상 二十五史補編 (二十五史刊行 委員會 編, 中華書局, 1995)에 수록); 谷霽光, <唐折衝府考>拾補, 禹貢 3 4, 1935; 張沛, 昭 陵碑石中的唐折衝府考, 文博 1995-1, 1995, 37왼쪽-40쪽; 周曉薇, 唐折衝府考校補拾遺, 中 國歷史地理論叢 1995-3, 1995, 129-138쪽; 周曉薇, 唐折衝府考校補拾遺再讀, 中國歷史地理論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府州名 京兆府(京兆郡) 華州(華陰郡) 同州(馮翊郡) 商州(上洛郡) 鳳翔府(岐州, 扶 風郡) 邠州(新平郡) 隴州(汧陽郡) 涇州(保定郡) 原州(平涼郡) 寧州(彭原郡) 慶州(順化郡) 鄜州(洛交郡) 坊州(中部郡) 丹州(咸寧郡) 延州(延安郡) 靈州(靈武郡) 鹽州(五原郡) 夏州(朔方軍) 綏州(上郡) 折衝府 <표 3> 唐代 折衝府와 離宮 行宮 분포 離宮ㆍ 수 行宮 131 10 20 26 2 3 2 13 3 13 4 6 2 11 8 11 5 5 7 5 1 2 4 河南府(河南郡) 39 汝州(臨汝郡) 4 1 14 府州名 晉州(平陽郡) 絳州(絳郡) 慈州(文城郡) 隰州(大寧郡) 太原府(太原郡) 汾州(西河郡) 沁州(陽城郡) 遼州(樂平郡) 嵐州(樓煩郡) 石州(昌化郡) 忻州(定襄郡) 代州(雁門郡) 潞州(上黨郡) 澤州(高平郡) 懷州(河內郡) 易州(上谷郡) 幽州(范陽郡) 平州(北平郡) 嬀州(嬀川郡) 薊州(漁陽郡) 江陵府(荊州, 折衝府 수 離宮ㆍ 行宮 33 3 6 12 2 3 1 2 4 3 1 5 2 9 14 1 2 1 1 1 2 1 江陵郡) 陝州(陝郡) 15 3 夔州(雲安郡) 1 虢州(弘農郡) 4 1 襄州(襄陽郡) 1 兗州(魯郡) 1 均州(武當郡) 1 1 金州(漢陰郡) 1 河中府(河東郡) 33 범례 1. 출전 : 舊唐書 地理志 ; 新唐書 地理志 ; 梁方仲,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80, 78-95쪽. 2 興元府(梁州, 漢中郡) 鳳州(河池郡) 成州(同谷郡) 扶州(同昌郡) 15 18 府州名 秦州(天水郡) 渭州(隴西郡) 蘭州(金城郡) 洮州(臨洮郡) 岷州(和政郡) 疊州(合川郡) 宕州(懷道郡) 涼州(武威郡) 沙州(敦煌郡) 瓜州(晉昌郡) 揚州(廣陵郡) 和州(歷陽郡) 安州(安陸郡) 越州(會稽郡) 潭州(長沙郡) 成都府(益州, 蜀郡) 彭州(濛陽郡) 折衝府 수 49 離宮ㆍ 行宮 1 1 1 2 6 4 2 1 3 1 2 6 3 1 4 1 1 1 1 3 2 蜀州(唐安郡) 3 漢州(德陽郡) 1 邛州(臨邛郡) 1 廣州(南海郡) 2 中國歷代戶口ㆍ田地ㆍ田賦統計, 2. 비고 1) 口數의 貞觀 은 舊唐書 地理志 에 기록된 貞觀 13년 호구 통계수치, 天寶 는 新唐書 地理志 에 기록된 天寶元年 통계수치임. 2) 折衝府의 병력은 1,200인, 1,000인, 800인의 세 등급으로 나뉘지만 본 표에서는 1,000인으 로 계산하였음. 叢 1997-3, 1997, 59-60쪽; 周曉薇, 唐折衝府考校補拾遺三讀, 中國歷史地理論叢 16-3, 2001, 61-66쪽; 張沛, 唐折衝府匯考, 西安: 三秦出版社, 2003, 23-449쪽; 客洪剛, 唐折衝府補考, 中 國歷史地理論叢 23-4, 2008, 142왼쪽-148오른쪽. 기타 折衝府 고증에 대한 연구사 정리는 胡戟 등 主編, 二十世紀唐硏究,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2, 122왼쪽-124왼쪽 참조.
50 와 府 州의 折衝府 숫자가 달라진다. 그러나 가장 최근 연구가 2003년이기 때문에 그 이후 새로 확인된 折衝府가 반영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折衝府 수의 可變性을 新唐書 고려하여 본고의 <표 3>에서는 최소값에 해당하는 地理志 의 折衝府 숫자를 인용하였다. <표 3>에서 府 州의 折衝府 숫자와 아울러 離宮 行宮의 수를 비교해 보면, 折衝府가 있는 지역에 離宮 行宮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行宮이 있는 府 州에는 대부분 折 衝府가 존재하였다.19) 특히 관할구역 안에 離宮 혹은 行宮이 3개 이상 존재했던 府 州 의 折衝府는 10개 이상이었다. 京兆府 華州 岐州 河南府 陝州가 이에 해당한다. 이 통계수치의 비교만을 보면 離宮 行宮과 折衝府의 배치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 인다. 이러한 관계가 우연일 수도 있으므로 다른 자료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 離宮 行宮의 분포 지역 가운데 京兆府(長安)와 河南府(洛陽)의 교통로 선상에 위치한 점이 눈에 띤다. 즉 두 府와 그 사이에 있는 華州 陝州 虢州에 離宮 行宮과 折衝府가 밀접하였다. 長安에서 출발하여 華州와 陝州를 통과하거나 崤山 北道에서 澠池와 新 安을 거쳐 洛陽에 도달하거나 崤山 南道에서 永寧 福昌 壽安을 거쳐 洛陽에 이어 지는 교통로가 있었다.20) 隋唐 皇帝들은 長安과 洛陽 왕래의 편의를 위해 이 사이에 遊龍宮 神臺宮 瓊岳宮 金城宮 軒遊宮 桃源宮 陝城宮 綉嶺宮 芳桂宮 崎岫 宮 蘭峰宮 福昌宮 蘭昌宮 顯仁宮 連昌宮 興泰宮 莎冊宮 등 行宮 10여개의 別館을 세웠다. 학자에 따라 이를 兩京道行宮 이라 명명하기도 한다.21) 그런데 長安과 洛陽 사이에 왜 行宮이 필요했던 것일까? 필자는 唐前期 皇帝들이 長安 과 洛陽을 오가는데 걸린 기간을 조사하여 표로 정리해 보았다. <표 4> 長安-洛陽 사이의 거리 시 기 太宗 貞觀 11년(637) 2월 甲子-3월 丁亥 太宗 貞觀 12년(638) 2월 乙卯-閏2월 丙戌 太宗 貞觀 15년(641) 11월 壬申-12월 戊子 太宗 貞觀 18년(644) 10월 甲寅-11월 壬寅(舊)/壬申(通) 19) 20) 21) 巡幸 지역 長安 顯仁宮 洛陽 洛陽 長安 洛陽 長安 澠池(己巳) 洛陽宮 기 간 24일 32일 17일 49일(舊)/19일 (通) 介永强은 泰山이 위치한 兗州에 奉高宮이 존재했다고 고증했다(介永强, 唐代行宮考逸, 中國 歷史地理論叢 16-2, 2001, 81-82쪽). 唐代 泰山 封禪이 2회에 불과하므로 奉高宮은 상설 離宮 혹은 行宮이라기보다 임시로 설치한 궁전으로 봐야 할 것이다. 嚴耕望, 唐代長安洛陽道譯程述, 唐史硏究叢稿, 香港: 新亞硏究所出版, 1969, 599-606쪽. 介永强, 唐代行宮三題, 唐都學刊 17(總第70期), 2001, 22왼쪽; 祁遠虎, 離宮ㆍ行宮辨, 西 安文理學院學報(社會科學版) 13-2, 2010, 7왼쪽.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高宗 顯慶 2년(657) 1월 庚寅(舊)/壬寅(新ㆍ通)-2월 辛酉 高宗 3년(658) 2월 丁巳-甲戌 高宗 顯慶 4년(659) 閏10월 戊寅-戊戌 高宗 龍朔 2년(662) 3월 甲申(舊)/甲午(通)-4월 庚申朔 高宗 咸亨 2년(671) 1월 乙巳-甲子 高宗 咸亨 3년(672) 10월 壬戌-11월 甲辰 高宗 上元元年(674) 11월 丙午朔-戊辰 高宗 儀鳳元年(676) 閏3월 庚寅-4월 戊申 高宗 永淳元年(682) 4월 丙寅-乙酉 武則天 長安元年(701) 10월 壬寅-辛酉 武則天 長安 3년(703) 10월 丙寅-乙酉 中宗 神龍 2년(706) 10월 己卯-戊戌 玄宗 開元 5년(717) 1월 辛亥-2월 甲戌 玄宗 開元 6년(718) 10월 丙申-11월 辛卯 玄宗 開元 10년(722) 1월 丁巳-2월 戊寅 玄宗 開元 12년(724) 11월 庚申-戊寅 玄宗 開元 15년(727) 閏9월 庚申-10월 己卯 玄宗 開元 19년(731) 10월 丙申-11월 丙辰 玄宗 開元 22년(734) 1월 己巳-己丑 玄宗 開元 24년(736) 10월 戌申-丁丑(舊)/丁卯(新ㆍ通) 長安 洛陽 평균 출전 舊唐書 와 新唐書 本紀; 資治通鑑 唐紀. 長安 洛陽 洛陽 長安 長安 洛陽 洛陽 河北縣 蒲州 同 州 長安 長安 東都 東都 長安 長安 東都 東都 長安 長安 東都 神都 長安 長安 神都 東都 長安 長安 東都 東都 長安 長安 東都 長安 華陰 東都 東都 長安 長安 東都 長安 東都 東都 長安 51 32일/20일 18일 21일 37일/27일 20일 43일 23일 19일 20일 20일 20일 20일 24일 56일 22일 19일 20일 21일 21일 30일/20일 26.2일/23.6 <표 4>를 보면 長安에서 洛陽까지, 혹은 그 역순으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26.2 일 혹은 23.6일이다. 두 개의 수치가 존재하는 이유는 舊唐書 와 新唐書 의 本紀 기사 가운데 巡幸 기간에 대한 날짜가 달리 표기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貞觀 18년(644)과 顯慶 2년(657), 高宗 咸亨 3년(672), 開元 6년(718)의 長安과 洛陽 사이를 가는데 걸린 시 간(편도)이 좀 길었던 것을 감안하면 평균보다 최빈값이 실상에 부합할 것이다. 두 곳을 가는데 걸리는 기간은 20일이 6회 혹은 8회( 新唐書 와 資治通鑑 의 기록에 의함), 21 일이 3회, 19일이 2회 혹은 3회였다. 長安과 洛陽을 가는 편도노선은 20일 정도 걸린다 고 볼 수 있다. 元和郡縣圖志 에 따르면 長安과 洛陽 사이의 거리는 850里이다. 唐六 典 의 규정에 따라22) 말을 타면 하루에 70里를 가면 13일, 걷거나 노새를 이용하여 50리 를 간다면 17일이 걸렸다. 北周 宣帝가 大象元年(579)에 직접 驛馬를 몰고 하루 300里의 속도로 4皇后와 文武侍衛 수백인을 데리고 洛陽으로 간 예가 있지만,23) 이는 특수한 예 22) 23) 唐六典 (李林甫 等撰, 陳仲夫 點校, 北京: 中華書局, 1992; 2005년 重印) 卷3 尙書戶部 度支 郎中條, 80쪽, 凡陸行之程: 馬日七十里, 步及驢五十里, 車三十里. 水行之程, 舟之重者, 溯河日三 十里, 江四十里, 餘水四十五里, 空舟溯河四十里, 江五十里, 餘水六十里. 周書 卷7 宣帝紀 大象元年(579)十二月條, 122쪽, 乙丑, 行幸洛陽. 帝親御驛馬, 日行三百里. 四皇后及文武侍纫數百人, 嵭乘驛以從. 仍令四后方駕齊驅, 或有先後, 便加譴責, 人馬頓仆相屬. 己
52 이다. 唐六典 에 기록된 하루에 가야 하는 거리와 唐前期 皇帝가 長安과 洛陽을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비교하면, 후자가 약간 느리기는 하지만 중간에 쉬어갔던 시간을 고려 하면 규정에 맞는 정상적인 이동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長安과 洛陽을 가는 편도노선의 시간이 20일 전후이므로 皇帝 일행이 묵을 숙 소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아래 <지도 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行宮이 주로 교통로에 위치한 것도 皇帝의 잦은 長安-洛陽 이동과 관련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도 1> 唐代 行宮 離宮의 분포 범례 1. 출전 : 祁遠虎, 離宮ㆍ行宮辨, 西安文理學院學報(社會科學版) 13-2, 2010, 7왼쪽, 圖1 隋唐時期兩京周圍的離宮分布與兩京道上行宮分布示意圖; 필자 일부 수정. 2. 기호설명 : 수도 行宮과 離宮 長安 洛陽 교통로 皇帝들이 長安과 洛陽 사이를 오갈 때 皇帝 일행을 호위할 목적으로 府兵을 포함한 군 인들이 당연히 行宮과 교통로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墓誌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王崇禮는 左領軍衛에 속하는 河南府 金谷府折衝都尉였으며, 玄宗의 洛陽 순행을 扈 從하였다. 그런데 그가 玄宗의 洛陽 순행을 따라 다니던 도중 開元 19년(731) 十月 二十 四日(11. 27)에 新豐에서 병들어 죽었다.24) 현직 折衝都尉였던 王崇禮가 新豐縣에서 죽었 다는 기록으로 보아 河南府 金谷府 府兵들이 長安의 宮城을 지키도록 차출되었다가 玄宗 24) 卯, 還宮. 王崇禮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5), 489아래쪽, 至開元十 九年三月一日, 遷至明威將軍ㆍ守左領軍衛河南府金谷府折衝都尉ㆍ上柱國. (중략) 以開元十有 九年從駕東都, 寢疾. 十月卄四日薨於新豐, 享年五十有九. 이하 墓誌銘은 姓名+墓誌 로 약칭한 다.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53 의 洛陽 행차를 扈從했거나 長安에서 洛陽으로 가는 행렬을 호위하도록 임시로 차출되어 長安 인근 지역으로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25) 어떤 경우이건 河南府(洛陽)의 金谷府의 府兵들이 玄宗의 洛陽 행차를 扈從하는 임무를 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皇帝가 長安과 洛陽 사이를 지나지 않을 때에도 府兵을 배치할까? 위에서 언 급한 長安-洛陽의 교통로 주변뿐만 아니라 太宗과 高宗의 여름 휴양지였던 九成宮과 長 安 사이에도 行宮과 離宮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26) 皇帝들이 자주 찾지는 않더라고 명 색이 궁전인만큼 최소한의 수비병력을 남겨놓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玉華宮에 있었던 魏德과 九成宮에 따라간 邢思賢의 墓誌銘에서 이러한 예가 발견된다. 鄜州 洛安府의 果毅都尉였던 王德은 永徽元年(650)에 坊州 宜春縣에 위치한 玉華宮27) 의 山第에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28) 그런데 鄜州 洛安府에 있어야 할 王德이 玉華 宮에서 죽었다는 기록을 보면 王德이 玉華宮에서 근무하기 위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 다. 그런데 당시 皇帝인 高宗이 玉華宮에 행차한 기록이 없다. 즉 太宗 貞觀 22년(648)의 玉華宮 행차가 처음이자 마지막 행차였고29) 永徽 2년(651)에 佛寺로 바뀌었다.30) 따라서 魏德이 皇帝의 巡行과 상관없이 당시 玉華宮을 지키는 일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 고 玉華宮은 魏德의 근무지인 鄜州는 坊州의 북쪽에 있었던 州였다. 鄜州 洛安府의 府兵 은 玉華宮이 위치한 坊州와 가까운 지역이었기 때문에 玉華宮 수비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孟憲實은 法苑珠林 第65篇 債負篇 感應緣 에 나오는 唐代 小說에서 校尉 李氏가 潞州에서 衛州로 가서 근무했던 행위를 上番 이라 칭했음을 지적하여 上番 혹은 番上이 都城 혹은 궁전 宿衛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31) 소설이긴 하지만 府兵이 25) 26) 27) 28) 29) 30) 山內敏輝도 折衝府 將領(折衝都尉 果毅都尉 등)이 전쟁에 해당 折衝府의 府兵을 동원하였다고 보고 전쟁에 折衝府의 동원 혹은 배치를 분석하였다(山內敏輝, 唐前半期の軍防體制と府兵制-軍 府州と非軍府州の地域差を中心として-, 209-218쪽). 따라서 折衝府 將領의 위치는 해당 折衝府 府兵의 이동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嚴耕望, 唐代長安洛陽道譯程述, 唐史硏究叢稿, 香港: 新亞硏究所出版, 1969, 599-606쪽; 介永 强, 關中唐代行宮考, 中國歷史地理論叢 3, 2000, 197-212쪽; 介永强, 唐代行宮考逸, 中國 歷史地理論叢 16-2, 2001, 78-82쪽; 介永强, 唐代行宮三題, 唐都學刊 17(總第70期), 2001, 21왼쪽-22오른쪽; 吳宏岐, 西安歷史地理硏究, 105-116쪽; 吳宏岐, 隋唐行宮制度與宮廷革命, 陝西師範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37-3, 2008, 21왼쪽-22오른쪽; 祁遠虎, 離宮ㆍ行宮辨, 西安 文理學院學報(社會科學版) 13-2, 2010, 7왼쪽. 舊唐書 卷38 地理志 1 關內道 坊州條, 1401쪽, 宜君: 舊屬宜州. 貞觀十七年廢, 二十年復置, 屬雍州, 管玉華宮. 魏德墓誌, 全唐文補遺 第五輯, 108위쪽, 貞觀十八年, 轉任鄜州洛安府果毅. (중략) 以永 徽元年歲次庚戌九月卄六日, 薨於玉華宮之山第, 春秋六十有七. 舊唐書 卷3 太宗紀 下 貞觀二十二年條, 61쪽, [二月]乙亥, 幸玉華宮, 乙卯, 賜所經高年篤疾粟 帛有差. 己卯, 蒐于華原. 十月癸亥, 至自玉華宮. 舊唐書 卷4 高宗紀 上 永徽二年條, 69 쪽, 九月癸巳, 改九成宮為萬年宮, 廢玉華宮以為佛寺.
54 都城이 아닌 인근 州에 파견 나가 근무했던 것은 鄜州 洛安府의 府兵이 坊州 宜春縣에 있던 玉華宮을 지켰던 것과 유사하다. 王德墓誌銘 과 法苑珠林 의 예에서 당시 府兵들 이 都城이 아닌 다른 곳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관행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邢思賢의 예를 살펴보자. 邢思賢은 涇州 純德府折衝都尉에 임명된 후 九成宮留 守를 명령 받았다.32) 이는 涇州 純德府 府兵이 九成宮 방어에 동원되었음을 뜻한다. 墓誌 銘에 邢思賢이 九成宮을 留守하게 된 구체적인 시간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邢思賢이 長安에 番上하러 왔다가 皇帝의 행차를 따라 九成宮에 간 것인지, 皇帝의 행차와 상관없 이 九成宮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33) 그렇다고 해도 이 기사 에서 邢思賢은 純德府折衝都尉로서 純德府의 府兵을 이끌고 九成宮으로 와서 九成宮 방 어를 지휘했음은 분명하다. 涇州는 岐州의 북쪽에 위치한 州였으므로 九成宮의 수비에 九成宮과 가까운 지역의 折衝府 府兵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 3>에서 알 수 있듯이 岐州에는 13개의 折衝府가 있었다. 당시 岐州가 都督府의 治 所인 州가 아니었음에도 주변에서 都督府 소재지였던 秦州(6개), 原州(2개), 鄜州(11개)보 다 折衝府의 수가 많았다. 唐代 都督이 관할 都督府의 군사를 지휘했느냐의 문제에 대해 이견이 있지만, 都督府의 治所가 없었던 岐州의 折衝府 수가 주변의 都督府 治所가 있던 州의 折衝府 수보다 많다는 점은 특이하다. 岐州가 수도 長安이 위치한 京兆府의 서쪽에 위치하여 수도 방어를 위해 당연히 많은 折衝府와 府兵을 배치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岐 州에 太宗과 高宗이 여름에 자주 행차했던 九成宮이 있었고, 邢思賢의 예처럼 이웃한 涇 州의 折衝府에서 九成宮에 주둔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점을 보면, 岐州와 이웃한 州에 배 치된 折衝府는 京兆府의 방어와 함께 離宮인 九成宮의 방어도 고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九成宮 방어와 수비의 중요성은 突厥의 君主氏族이었던 阿史那結社率이 貞觀 13년(639) 九成宮에서 太宗을 암살하려고 기도했던 예에서도 확인된다. 結社率은 太宗의 九成宮 행 차에 따라 갔다가 몰래 突厥人 40여인을 규합하여 太宗의 침소를 공격했으며 衛士 수십 명이 죽었다. 이때 折衝都尉 孫武開가 병사를 이끌고 힘을 다해 격퇴하여 結社率의 무리 를 물리쳤고, 결국 結社率 일당을 잡아 죽일 수 있었다.34) 이 기사에서 孫武開가 어떤 31) 32) 33) 孟憲實, 唐代府兵 番上 新解, 75쪽. 邢思賢墓誌, 唐代墓誌彙編 (周紹良 主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2) 開元013, 1160쪽, 初 任趙王府執仗, 遷左衛長上, 除歸政府左果毅長上, 檢校左金吾衛郎將, 授忠武將軍行右領軍衛涇州純 德府折衝都尉上柱國, 奉勑九成宮留守, 又充京故城使. ; 邢思賢墓誌, 全唐文補遺 第五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8), 317위쪽. 離宮別館, 允副宸衷; 上林禁苑, 無虧警衛. 이란 구절( 邢思賢墓誌, 唐代墓誌彙編 (周紹良 主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2) 開元013, 1160쪽)은 邢思賢이 離宮(九成宮)과 上林苑 호위에 충실 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邢思賢이 長安의 宮城과 離宮의 호위에 모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55 州에 속한 折衝都尉인지 언급이 없으나 府兵들이 九成宮을 결사적으로 방어하였고 도망 가는 結社率 일당을 사로잡아 죽였던 것으로 보아 九成宮 일대의 방어망이 촘촘했을 것 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 기사에서 九成宮 방어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으며, 이는 九 成宮이 위치한 岐州에 주변의 다른 州보다 많은 折衝府가 배치되었던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魏德과 邢思賢의 墓誌銘을 통해 당시 離宮을 수비하기 위해 인근의 州에서 府兵이 파 견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府兵들이 都城 이외의 지역을 수비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예이다. 折衝府 將領은 아니지만 千牛衛將軍 兼檢校太子右衛率 龐同本은 乾陵의 宿衛를 맡았고 長壽 2년(693)에 宿衛所에서 병에 걸려 69세의 나이에 留守所에서 사망하였다.35) 문맥상 宿衛所와 留守所는 乾陵을 지칭한다. 이는 龐同本이 府兵도 지휘했을 것이므로 府兵이 陵墓 지키기에 동원되었음을 보여준다. Ⅲ. 巡幸 장소와 府兵의 동원 2장에서는 涇州와 鄜州의 折衝府 府兵들이 九成宮과 玉華宮같은 고정된 離宮을 방어하 기 위해 배치되었음을 살펴보았다. 唐前期 皇帝들이 洛陽 九成宮 華淸宮 등 여러 지역 을 장기간 체류했음은 1장에서 간단히 언급하였다. 이처럼 唐前期 皇帝들의 잦은 행차는 府兵의 배치에도 영향을 주었음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검증하기 앞서 府兵들의 番上 규정을 살펴보자. 新唐書 兵志, 府兵條에 따르면 都城으로부터 500里 안쪽에 있는 折衝府의 府兵은 5番, 1,000里 안쪽의 折衝府의 府兵은 7番, 1,500里까지는 8番, 2,000二千里까지 10番, 이외는 12番이었고, 番上기간은 모두 1개월이었다.36) 唐六典 에 따르면 100里 밖의 지역은 5番, 500里 밖의 지역은 7番, 34) 35) 36) 舊唐書 卷194上 突厥傳 上, 5161쪽, 突利弟結社率, 貞觀初入朝, 歷位中郎將. 十三年, 從幸九 成宮, 陰結部落得四十餘人, 并擁賀邏鶻, 相與夜犯御營, 踰第四重幕, 引弓亂發, 殺衛士數十人. 折 衝孫武開率兵奮擊, 乃退, 北走渡渭水, 欲奔其部落. 尋皆捕而斬之, 詔原賀邏鶻, 流于嶺外. ; 新唐 書 卷215上 突厥傳 上, 6039쪽, 帝幸九成宮, 突利弟結社率以郎將宿衛, 陰結種人謀反, 劫賀邏 鶻北還, 謂其黨曰: 我聞晉王丁夜得辟仗出, 我乘間突進, 可犯行在. 是夕, 大風冥, 王不出, 結社率 恐謀漏, 即射中營, 譟而殺人, 衛士等共擊之, 乃走, 殺廄人盜馬, 欲度渭, 徼邏禽斬之, 赦賀邏鶻, 投 嶺外. ) 龐同本墓誌, 全唐文補遺 第七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2000), 328위쪽, 迺召入授左 千牛衛將軍ㆍ兼檢校太子右衛率. (중략) 委卿乾陵宿衛, 兪往欽哉. 至長壽二年, 遘疾於宿衛所. 至其年八月四日, 凶於留守所, 春秋六十有九. 新唐書 卷50 兵志, 府兵條, 1326쪽, 凡當宿衛者番上, 兵部以遠近給番, 五百里為五番, 千里七
56 1,000里 밖의 지역은 8番이며 각각 1개월 동안 番上하였다. 반면 2,000里 밖의 지역은 9 番이며, 2,000里 미만 지역의 두 배의 기간을 番上하였다.37) 여기에서 5番은 1년 동안 府 兵을 다섯으로 나누어 조를 짜서 교대로 番上한다는 뜻이다. 新唐書 와 문에는 거리의 기준 장소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대부분 都城으로 본다. 唐六典 의 원 都城과의 거리에 따른 番上 횟수를 다룬 위의 규정과는 별도로 唐六典 의 다른 기록 에는 諸衛와 率府三衛는 京兆府와 河南府, 蒲州 同州 華州 岐州 陝州 懷州 汝州 鄭州 출신은 番上하고 나머지 州 출신은 納資로 대신하였다.38) 또 開元 11년의 규정을 보면 京兆府와 蒲州 同州 岐州 華의 府兵과 白丁, 潞州의 長從兵을 합한 12萬을 長從宿衛 로 칭하고 2番으로 나누어 番上하도록 하였다.39) 또 唐會要 에 따르면 開元 11년(723) 兵部 尙書 張說의 주청으로 長從宿衛를 설치하고 開元 13년에는 彉騎로 改稱하여 12衛에 分屬 시켰다.40) 이어서 天寶 8載(749) 折衝府에 발급했던 魚書의 발급을 중지하였다. 天寶 말 년에는 折衝府에는 명목상의 兵額만 존재하였고 군사와 무기, 식량 등의 사무는 모두 방 기되었다.41) 즉 府兵制는 開元 11년 長從宿衛 설치 이후 天寶 8載 折衝府를 무력화할 때 동안 공백이 존재하였다. 또 長從宿衛 즉 彉騎의 설치는 지방의 折衝府와 중앙의 12衛府 의 관계를 단절시켜 府兵制의 근간을 해체하는 효과가 있었음이 지적되기도 한다.42) 그러나 墓誌銘에는 위에서 살펴본 府兵들의 番上을 지역적으로 제한한 규정이 지켜지 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 예들이 있다. 예컨대 于遂古墓誌 에 따르면 于遂古는 調露初 와 永淳元年 洛陽 행차 때 長安을 留守하도록 명령받았다. 특히 調露初에는 金吾衛永平 37) 38) 39) 40) 41) 42) 番, 一千五百里八番, 二千里十番, 外為十二番, 皆一月上. 唐六典 卷5 尙書兵部 兵部郎中條, 156쪽, 凡三年一簡點, 戍丁而入, 六十而免, 量其遠邇以定 番第(細注: 百里外五番, 五百里外七番, 一千里外八番, 各一月上; 二千里外九番, 倍其月上. 若征行 之鎮守者, 免番而遣之.). 唐六典 卷5 尙書兵部 兵部郎中條, 153쪽, 凡諸衛及率府三衛貫京兆ㆍ河南ㆍ蒲ㆍ同ㆍ華ㆍ岐 ㆍ陝ㆍ懷ㆍ汝ㆍ鄭等州, 皆令番上, 餘州皆納資而已. 新唐書 卷50 兵志, 彉騎條 1326-1327쪽, [開元]十一年, 取京兆ㆍ蒲ㆍ同ㆍ岐ㆍ華府兵及白丁, 而益以潞州長從兵, 共十二萬, 號 長從宿衛, 歲二番, 命尚書左丞蕭嵩與州吏共選. 여기에서 都城 과의 거리에 따른 番上 규정과 모순이 된다는 점에서 玄宗 시기의 것이며 唐初의 府兵 番上의 상황은 아닐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蒙曼, 唐代前期北衙禁軍制度硏究, 北京: 中央民族大學出版 社, 2005, 34쪽). 唐會要 (王溥(宋)撰,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8) 卷72 府兵條, 1538쪽, 十一年十一月二十日, 兵部尚書張說置長從宿衛兵十萬人於南衙, 簡京兆ㆍ蒲ㆍ同ㆍ岐等州府兵及白丁, 准尺八例, 一年兩 番, 州縣更不得雜使役. 仍令尚書左丞蕭嵩與本州長官同揀擇以聞. 至十三年二月二十一日, 始名 彉 騎, 分隸十二衛. 唐會要 卷72 府兵條, 1538쪽, 天寶八載五月九日, 停折衝上府下魚書, 以無兵可交. 至末年, 折衝 府但有兵額, 其軍士ㆍ戎器ㆍ六駄鍋幕糗糧並廢. 渡邊信一郞, 唐代前期における農民の軍役負担, 京都府立大學學術報告 人文 社會 55, 2003, 7위-7아래쪽 및 19쪽의 주) 7 참조.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府左果毅都尉의 직책으로 長安에 주둔하였다.43) 新唐書 57 地理志 에 따르면 永平府는 坊州에 속한 折衝府이다.44) 坊州는 위의 두 기록에 포함되지 않는 州이다. 또 馮思順墓 誌 에 따르면 馮思順 역시 天寶 12載(753) 겨울에 玄宗이 華淸宮으로 행차할 때 右金吾 衛五原郡鹽川府折衝都尉의 직함으로 장안에 남아 器械 수리 관장하였으며, 玄宗이 돌아 온 후 游擊將軍에 임명되었다.45) 五原郡은 鹽州이며 오르도스 지방에 설치된 지방행정구 역이었다. 五原郡(鹽州) 역시 坊州처럼 番上에 참여해야 하는 州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 라 百濟遺民 難元慶의 墓誌銘에 따르면 難元慶은 行檀州白 府右果毅都尉46)와 夏州寧朔 府左果毅都尉일 때47) 中書省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48) 檀州와 夏州는 북변에 있는 州 였다. 于遂古 馮思順 難元慶의 墓誌銘의 기록을 보면 開元 11년과 13년의 조치 이후, 특히 折衝府의 기능이 정지된 天寶年間 이후에도 唐六典 과 新唐書 에서 番上하도록 규정된 長安과 洛陽의 인근 州가 아닌 坊州 鹽州(五原郡) 檀州 夏州에서도 都城에 番 上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에서 長安 宿衛番上의 예를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각지의 折衝府의 府兵들이 황제들 의 巡幸에도 따라갔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물음의 답은 각종 墓誌銘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斛斯正則墓誌銘 에는 斛斯正則이 太宗의 巡幸을 자주 따 라다녔음을 기록하였다. 예컨대 隋煬帝부터 太宗 시기에 활동했던 斛斯正則은 貞觀 18년 43) 44) 45) 46) 47) 48) 于遂古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周紹良 趙超 主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1) 聖曆019, 374쪽, 以功授上柱國ㆍ游擊將軍, 轉金吾衛永平府左果毅都尉. 調露初歲, 駕幸神都, 奉勅於京留守. 永淳元年, 皇幸洛, 又奉勅留京, 兼知禁禦. ; 于遂古墓誌, 全唐文補遺 第三輯(吳鋼 主編, 西 安: 三秦出版社, 1996), 30아래쪽-31위쪽, 以功授上柱國ㆍ游擊將軍, 轉金吾衛永平府左果毅都尉. 調露初歲, 駕幸神都, 奉勅於京留守. 永淳元年, 天皇幸洛, 又奉勅留京, 兼知禁禦. 新唐書 卷37 地理志 1 關內道 坊州中部郡條, 970쪽, 坊州中部郡, 上. 武德二年析鄜州之中部 ㆍ鄜城置. 土貢 龍鬚席ㆍ枲ㆍ弦麻. 戶二萬二千四百五十八, 口十二萬二百八. 縣四(有府五, 曰杏城 ㆍ仁里ㆍ思臣ㆍ永平ㆍ安臺). 馮思順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天寶091, 648쪽, 至天寶十二載, 又轉授五原郡鹽川府折衝. 自 微至著, 卌餘年, 不離羽林, 忠勤上下, 守正嚴恪, 出入徇公. 天十二冬, 駕幸華淸宮, 公留後知修器 械. 鑾輿還京, 特詔改授游擊將軍. ; 馮思順墓誌, 全唐文補遺 第五輯, 397아래쪽. 新唐書 地理志 에 따르면 檀州에는 折衝府가 없었다( 新唐書 卷39 地理志 3 河北道 檀州 條, 1022 쪽, 檀州密雲郡, 本安樂郡, 天寶元年更名. 戶六千六十四, 口三萬二百四十六. 縣 二. ). 일단 墓誌銘의 기록대로 본문에 기록하였다. 원문은 夏州 朔府左果毅都尉 로 朔 字 앞의 글자가 누락되었으나, 新唐書 地理志 에 따르 면 夏州에는 寧朔府와 順化府라는 折衝府가 존재하였다( 新唐書 卷37 地理志 1 關內道 夏州 條, 973쪽, 夏州朔方郡, 中都督府. 縣三(細注: 有府二, 曰寧朔ㆍ順化). 따라서 朔 字 앞의 누락된 글자는 寧 字임을 알 수 있다. 본문에는 이에 따라 寧朔府로 표기하였다. 難元慶墓誌, 全唐文補遺 第六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9), 421위쪽, 尋 游擊將 軍ㆍ行檀州白 府右果毅ㆍ直中書省. 雖司雄衛, 恒理文軒, 俄轉夏州 朔府左果毅都尉ㆍ直中書省 內供奉.
58 (644)에 洛陽宮, 21년(647)에 靈武, 23년(649)에 翠微宮 행차를 扈從하였다.49) 또 墓誌銘 에 따르면 貞觀 22년(650) 당시 右監門中郞將 上柱國이었던 斛斯正則의 夫人 姚氏가 玉 華宮에서 죽었다.50) 그런데 이 해에 太宗이 二月부터 十月까지 玉華宮에 머물러 있었으 므로51) 斛斯正則과 姚氏 부부가 玉華宮 행차를 따라 갔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斛 斯正則 자신은 咸亨元年(670) 五月 二十四日에 九成宮에서 병으로 죽었다.52) 高宗은 같은 해 四月부터 八月까지 九成宮에 갔다가 長安으로 돌아왔기 때문에53) 斛斯正則은 右監門 衛大將軍의 직책으로 高宗의 九成宮 행차를 扈從했음을 보여준다. 斛斯正則은 右監門衛 中郞將과 右監門衛大將軍의 직책으로 太宗과 高宗의 여러 巡幸 지역을 扈從하였다. 谷霽 光의 고증에 따르면 左右衛에 속한 折衝府는 關內 河東 河南 河北 隴右 劍南 諸道 에, 左右驍衛 소속 折衝府는 京兆 河東 河南 江南 山南 諸道, 左右武衛 소속 折衝府 는 京兆 河東 河南 山南 諸道에 속해 있었다. 즉 각 衛는 다양한 지역의 折衝府를 통 할하였다.54) 따라서 右監門衛에도 여러 折衝府의 府兵들이 소속되었을 것이므로 斛斯正 則의 巡幸 扈從에 折衝府의 府兵이 동원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斛斯正則墓誌銘 에서 구체적인 折衝府 명칭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折衝府 연구를 통해 折衝府 府兵이 太宗과 高宗의 巡幸을 扈從했을 것이라는 방증에 치 우쳤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면 구체적인 折衝府가 거론된 예들을 찾아보자. 張德墓 誌銘 에 따르면 張德의 아들 張榮崇은 河南府洛泉府別將으로서 宿衛와 皇帝의 행차를 扈 從하였다.55) 반면 여러 折衝府의 果毅都尉와 折衝都尉를 전전한 高德의 墓誌銘은 張德 49) 50) 51) 52) 53) 54) 55) 斛斯正則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咸亨005, 187쪽, [貞觀]十八年, 從幸洛陽宮. 仍屬鳥夷恃嶮, 狼顧不賓. 卽從龍麾, 恭聞豹略. 旣成功於拉朽, 且命賞以疇庸, 卽以勳授右監門中郞將, 累加上 柱國. 卄一年, 從幸靈武. 卄三年, 又從幸翠微宮. ; 斛斯正則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吳鋼 主 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5), 232위쪽; 斛斯正則墓誌銘, 全唐文新編 20(周紹良 主編,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2000), 14266쪽. 斛斯正則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 233위쪽, (夫人吳興郡君吳興姚氏)以貞觀卄二年卄七日, 終于玉華宮之館舍, 時年五十有五. 舊唐書 卷3 太宗紀 下 貞觀二十二年條, 61쪽, [二月]乙亥, 幸玉華宮, 乙卯, 賜所經高年篤疾粟 帛有差. 己卯, 蒐于華原. 十月癸亥, 至自玉華宮. ; 新唐書 卷2 太宗紀 貞觀二十二年條, 47쪽, [二月]乙亥, 幸玉華宮. 己卯, 獵于華原 十月癸丑, 至自玉華宮. 斛斯正則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 232아래쪽, 粤以咸亨元年五月卄四日, 遘疾薨于九成宮之 第, 春秋八十有一. 舊唐書 卷5 高宗紀 下 咸亨元年條, 94-95쪽, [夏四月]庚午, 幸九成宮. 雍州大雨雹. 八月 甲子, 至自九成宮. ; 新唐書 卷3 高宗紀 咸亨元年條, 68쪽, [夏四月]庚午, 如九成宮. [八月]丁巳, 至自九成宮. 勞經原, 唐折衝府考, 7593-7629쪽; 羅振玉, 唐折衝府考補, 7631-7640쪽; 同氏, 唐折衝府考補 拾遺, 7641-7642쪽; 谷霽光, 唐折衝府考校補, 7643-7660쪽; 同氏, 府兵制度考釋, 159-160쪽. 唐故右龍武軍將軍淸河縣公張公墓誌銘幷序(張德墓誌), 全唐文補遺 第七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2000), 388위쪽, 小子榮崇, 任左威衛河南府洛泉府別將. 並留宿衛, 扈從警蹕.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59 墓誌銘보다 折衝府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이다. 아래에서 高德이 玄宗의 행차를 扈從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 皇帝께서 노고를 생각하셔서 [ 府君(高德) 에게] 平州 白楊鎭將에 除授하셨다. 이어 鄜州의 龍交府와 岐州의 杜陽府의 果毅都尉로 임명되었고, 이어 陝州의 萬歲府, 絳州의 長平府와 正平府, 懷州의 懷仁府, 同州의 洪泉府 등 5 府의 折衝都尉로 옮겼으며, 右武衛翊府郎將으로 발탁되었고, 定遠將軍 右龍武軍翊府中郞 賜紫金魚袋 長上 上柱國 內帶弓箭으로 승진하였다. 府君은 비록 外府의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禁營에서 봉직하였고, 鑾輿의 行幸과 鳳扆의 巡 遊, 校獵과 사냥, 遊幸 때마다 府君은 늘 에 있었으며, 皇帝의 주위에서 侍奉하였다. 56) 위의 인용문의 밑줄 친 부분을 보면 高德이 外府의 鎭將, 果毅都尉, 折衝都尉 등의 직 책을 맡았지만 禁營에서 근무하였고 行幸과 校獵을 따라다녔음을 알 수 있다. 즉 高德이 근무했던 鄜州 岐州 陝州 絳州 懷州 同州의 7개 折衝府가 行幸 호위에 차출되었음 을 보여준다. 高德이 사망한 때가 天寶元年(742)이었기 때문에57) 高德은 玄宗 開元年間의 각종 행차를 따라다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玄宗은 華淸宮(新豐 溫湯)에 열흘 안팎의 짧은 기간 동안 체류하기도 하였지만, 開元 5년(717) 正月 辛亥日(2. 25)부터 6년(718) 十一月 辛卯日(11. 27)까지 671일 동안 洛陽에 체류하는 등 洛陽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太原과 泰山을 방문하였으며, 開 元年間에는 溫泉宮(華淸宮)에 약 1-4 개월 동안 체류하였다. 高德은 주로 開元年間에 활 동하였기 때문에 주로 장기간의 洛陽 체류와 泰山 封禪에도 扈從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高德 휘하의 7개 折衝府 府兵의 동원 문제와 부담은 어땠는지 살펴보자. 折衝府 龍交府 56) 57) 折衝府 소속 州 鄜州 <표 5> 高德 휘하 折衝府 府兵의 番上 동원의 경우의 수 折衝府-長安 거리 477里(5番) 도달기간 9/10일 折衝府-洛陽 거리 959里(7番) 도달기간 14/20일 折衝府-泰山 거리/기간 거리 2,562里(12番) 도달기간 37/52일 高德墓誌, 唐代墓誌彙編 天寶008, 1536쪽, 聖恩念勞, 授平州白楊鎭將, 轉鄜州之龍交ㆍ岐州 之杜陽兩府果毅, 俄遷陝州之萬歲ㆍ絳州之長平ㆍ正平, 懷州之懷仁ㆍ同州之洪泉等五府折衝, 擢授 右武衛翊府郎將, 招授定遠將軍ㆍ右龍武軍翊府中郞ㆍ賜紫金魚袋ㆍ長上ㆍ上柱國ㆍ內帶弓箭. 府君 雖官授外府, 而身奉禁營, 每鑾輿行幸, 鳳扆巡遊, 校獵從禽, 盤遊縱賞, 府君常在, 親近供奉. ; 唐故右龍武軍翊府中郞將高府君墓誌銘幷序(高德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吳鋼 主編, 西安: 三 秦出版社, 1995), 528위쪽. 高德墓誌, 1536쪽, 以天寶元年二月 九日終于東京道政里之私第, 春秋六十有七. ; 唐故右龍武 軍翊府中郞將高府君墓誌銘幷序(高德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5), 528위쪽.
60 杜陽府 萬歲府 長平府 正平府 懷仁府 洪泉府 岐州 陝州 絳州 絳州 懷州 同州 310里(5番) 510里(7番) 590里(7番) 590里(7番) 1,010里(8番) 250里(7番) 비고 1. 출전 : 高德墓誌, 5/7일 1,170里(8番) 8/11일 9/12일 9/12일 15/21일 4/5일 350里(5番) 480里(5番) 480里(5番) 150里(5番) 650里(5番) 唐代墓誌彙編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5), 528위쪽 2,395里(12番) 17/24일 1,520里(10番) 5/7일 1,650里(10番) 7/10일 1,650里(10番) 7/10일 1,320里(8番) 3/3일 9/13일 2,335里(12番)/1,820里 天寶008, 1536쪽 및 2. 여러 州와 長安 洛陽, 기타 행차 지역간의 거리 출전: 35/48일 22/31일 24/33일 24/33일 19/27일 34/47일 (26/37일) (10番) 全唐文補遺 第二輯(吳鋼 元和郡縣圖志 上 卷2 關內道 2 同州條, 36쪽; 卷2 關內道 2 鳳翔府(岐州)條, 40쪽; 卷3 關內道 3 鄜州條, 70쪽; 卷6 河南道 2 陝州條, 156쪽; 卷12 河東道 1 絳州條, 330쪽; 卷16 河北道 1 懷州條, 444쪽; 卷10 河南 道 6, 兗州條, 264쪽 및 267쪽. 3. 거리 ( )의 番은 新唐書 와 唐六典 의 기록에 따라 산출한 것임. 4. 鄜州 岐州는 長安과 洛陽을 거쳐 泰山에 도달했다고 보고 거리를 계산하였고, 陝州 絳 州 懷州는 洛陽을 거쳐 泰山까지 도달했다고 보고 거리를 산출하였다. 同州와 泰山까지의 거 리는 두 개의 수치를 병렬하였다. 첫 번째 숫자는 長安과 洛陽을 모두 경유한 경우, 두 번째 숫자는 長安을 거치지 않고 洛陽을 경유한 경우이다. 5. 도달거리는 唐六典 의 기록에 따라 말을 타고 갔을 때와 걸어서 혹은 노새를 타고 갔을 경우로 나누어 표시함( 唐六典 (李林甫 等撰, 陳仲夫 點校, 北京: 中華書局, 1992; 2005년 重 印) 卷3 尙書戶部 度支郎中條, 80쪽, 凡陸行之程: 馬日七十里, 步及驢五十里, 車三十里. 水 行之程, 舟之重者, 溯河日三十里, 江四十里, 餘水四十五里, 空舟溯河四十里, 江五十里, 餘水六十 里. ). <표 5>는 7개의 折衝府의 府兵이 長安, 洛陽, 泰山 중 적어도 한 곳의 巡幸에 동원되 었다고 보고 折衝府와 각 동원 배치 지역의 거리를 계산한 것이다. 玄宗의 주요 행차지 역이었던 華淸宮은 元和郡縣圖志 에 長安과의 거리가 기록되지 않아 계산에서 제외하였 다. <표 5>에 따르면 7개의 折衝府가 위치한 6개 州는 長安까지 최소 250里, 최대 1,010里 의 거리에 있었다. 즉 折衝府와 長安까지의 거리에 따라 5-8番으로 나누어 해당 折衝府 의 府兵이 番上해야 했다. 府兵들이 玄宗의 華淸宮 행차에 동원되었을 경우라면 折衝府 와 華淸宮 사이의 거리는 折衝府와 長安 사이의 거리보다 조금 길다고 보면 되며, 府兵 의 番數는 동일할 것이다. 또 7개 折衝府와 洛陽 사이의 거리는 최소 150里, 최대 1,170 里의 거리에 있었다. 新唐書 와 唐六典 의 규정에 따르면 陝州 萬歲府, 絳州 長平府와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61 正平府, 懷州의 懷仁府, 同州의 洪泉府가 5番, 鄜州의 龍交府가 7番, 岐州의 杜陽府가 8 番이었다. 즉 府兵들은 1년에 5 7 8개 조로 나누어 교대로 洛陽으로 가야 했다. 최악의 경우 7개의 折衝府 가운데 泰山에 동원되는 折衝府가 있었다면, 해당 府兵은 최소 1,320里, 최대 2,562里 떨어진 곳까지 가야 했다. 이는 거리상 8番에서 12番에 해당 하며 최빈값은 10番이다. 즉 7개 折衝府의 府兵이 泰山 封禪에 동원되었다면 1년에 8개 혹은 10개, 12개의 조로 나누어 번갈아 泰山까지 가야 했다는 뜻이다. <표 5>에서 행차 혹은 巡幸 지역이 명확히 언급되지 않았던 高德의 경우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 따라 행차 지역까지의 거리와 番數를 계산하였다. 7개의 折衝府 府兵들이 長安에 番上갈 경우 최소 4 5일에서 최대 15 21일이 걸렸다.58) 그런데 7개 折衝府 府 兵들이 玄宗의 洛陽 행차를 따랐갔다고 한다면, 洛陽과 가장 가까운 懷州 懷仁府의 府兵 은 洛陽까지 가는데 고작 3일밖에 안 걸렸지만, 岐州 杜陽府의 府兵들은 17 24일이 걸 렸다. 또 만약 7개 折衝府 府兵 가운데 懷州의 懷仁府 府兵이 玄宗의 泰山 封禪을 扈從 했으면 가장 짧은 19 27일의 이동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鄜州 龍交府 府兵이 泰山 封禪 을 따라갔다면 37 52일이 걸렸다. 한달 간의 근무를 위해 최소 한 달에서 최대 세 달까 지 折衝府와 巡幸 지역을 왕복하는 것은 번거롭고 시간과 경제적으로 부담이 컸을 것이 다. 史書에는 皇帝의 巡幸을 扈從하는 府兵들의 부담에 대한 규정은 없다. 다만 府兵들이 전쟁이나 사신으로 파견되어 2番의 기간을 경과하면 후에 2番을 면제하는 唐六典 卷5 尙書兵部 兵部郎中條의 細注의 규정59)이 이와 유사한 상황이므로 원용될 수 있을 것이 다. 이 규정을 황제의 장기간 행차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府兵들은 2달 이상 洛陽 등지에서 근무하고 2番의 기간을 면제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玄宗의 洛陽 체류가 2-3년에 걸친 장기간이었기 때문에 6개 州의 府兵들이 교대로 洛陽으로 番 上해야 했다. 또 玄宗이 泰山 封禪에 소요된 시간은 69일이며,60) 洛陽 체류까지 계산하 면 1090일이 걸렸으므로, 7개 折衝府가 開元 12년(724)부터 15년(727)까지 진행된 玄宗의 洛陽 행차와 泰山 封禪에 동원되었다면 역시 2달 이상 洛陽 혹은 泰山 封禪에 동원되고 2番의 기간을 면제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開元年間 전반기 華淸宮 행차 기간은 10 여 일에 불과하였으므로, 7개 折衝府 府兵들이 초과근무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58) 59) 60) 앞의 숫자는 말타고 갈 때, 뒤의 숫자는 걸어가거나 노새를 타고 갈 때 걸리는 기간이다. 그리 고 왕복이 아닌 편도 기간이다. 본문에서 별도의 언급이 없더라도 이와 같다. 唐六典 卷5 尙書兵部 兵部郎中條, 156쪽, 凡衛士各立名簿, 具三年已來征防若差遣, 仍定優劣 爲三等, 每年正月十日送本府印訖, 仍錄一通送本衛, 若有差ㆍ行ㆍ上番, 折沖府據簿而發之(細注: 若征行及使經兩番已上者, 免兩番, 兩番已上者並二番. 其不免番, 還日即當番者, 免上番.). 舊唐書 卷8 玄宗紀 上 開元十三年條, 188-189쪽.
62 어쨌든 高德이 속했던 7개 折衝府 府兵은 玄宗이 어느 곳으로 행차할 때 扈從하느냐에 따라 부담이 달라졌다. 高德의 墓誌銘에서는 구체적인 巡幸 지역을 알 수 없었지만, 6州의 7개 折衝府 府兵들 이 수도 長安에 番上하거나 玄宗의 巡幸을 扈從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순행지역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玄宗의 주요 순행 지역이었던 洛陽과 泰山 등으로 가정한 후 거리와 교대 조건(番數), 해당 지역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산출하여 추정 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豆善富 등의 墓誌銘에는 구체적인 巡幸 지역이 언급되었다. 아래 <표 6>을 살펴보자. <표 6> 折衝府 將領의 巡幸 수행 지역 折衝府 巡幸 扈從 折衝府-長 折衝府-洛陽 소속 州 豆善富 武城府左果毅都尉 絳州 游擊將軍 行右衛 扶風郡 李懷 扶風郡積善府左果 (岐州) 毅都尉 이름 직책 桓義成 六軍府折衝都尉 朱保 昭武校尉 寧州高 望府折衝都尉 蒲州 寧州 지역 泰山 安 거리 590里(7番) 泰山 310里(5番) 1,170里(8番) 泰山 320里(5番) 高祖獻陵 거리 480里(5番) 1,650里 585里(5番) 太宗昭陵 - 折衝都尉 비고 1. 墓誌銘의 출전은 다음과 같다: 邢思賢墓誌, 도달기간 10番 24/33일 2,085里 10番(9番) 30/42일 2,075里 10番(9番) 30/42일 2,405里 10番(9番) 35/49일 7番 8/12일 551里 中宗定陵 王崇禮 軍衛河南府金谷府 河南府 東都(新豐) 850里(7番) 番數 2,340里 10番(9番) 34/47일 高宗乾陵 456里(5番) 1,030里(8番) 睿宗橋陵 明威將軍 守左領 折衝府-巡幸地 거리 601里 7番 9/13일 616里 7番 9/13일 711里 7番 11/15일 726里 7番 11/15일 850里(7 番)? 7番 13/17일? 唐代墓誌彙編 (周紹良 主編, 上海: 上 海古籍出版社, 1992) 開元013, 1160쪽 및 全唐文補遺 第五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8), 317위쪽; 豆善富墓誌, 唐代墓誌彙編 三秦出版社, 1997), 441아래쪽; 開元534, 1523쪽; 全唐文補遺 第四輯(吳鋼 主編, 西安: 全唐文新編 (周紹良 主編,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2000) 22, 15173 쪽; 李懷墓誌, 唐代墓誌彙編, 天寶064, 1575쪽 및 全唐文補遺 第一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 版社, 1994), 156아래쪽-157위쪽; 桓義成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天寶039, 609쪽(周紹良 趙超 主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1); 朱保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天寶038, 608쪽; 王崇禮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 489아래쪽; 魏德墓誌, 全唐文補遺 第五輯, 108위쪽. 2. 여러 州와 長安 洛陽, 기타 행차 지역간의 거리 출전: 元和郡縣圖志 上(北京: 中華書局,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63 2005) 卷3 關內道 3 涇州條, 56쪽; 卷12 河東道 1 絳州條, 330쪽; 卷2 關內道 2 鳳翔府(岐 州)條, 40쪽; 卷12 河東道 1 蒲州條, 325족; 卷3 關內道 3 寧州條, 65쪽; 卷5 河南道 1, 河 南府條, 130쪽; 卷2 關內道 2 鳳翔府(岐州) 九成宮條, 42쪽; 卷10 河南道 6, 兗州條, 264쪽 및 267쪽; 卷1 關內道 1 京兆府 三原縣條, 7 8쪽; 卷1 關內道 1 京兆府 醴泉縣條, 8쪽; 卷1 關內道 1 京兆府 奉天縣條, 9쪽; 卷1 關內道 1 京兆府 奉先縣條, 9쪽. 3. 거리 ( )의 番은 新唐書 와 唐六典 의 기록에 따라 산출한 것임( 新唐書 卷50 兵志, 府兵條, 1326쪽, 凡當宿衛者番上, 兵部以遠近給番, 五百里為五番, 千里七番, 一千五百里八番, 二千里十番, 外為十二番, 皆一月上. ); 唐六典 卷5 尙書兵部 兵部郎中條, 156쪽, 凡三年一 筒點, 戍丁而入, 六十而免, 量其遠邇以定番第(細注: 百里外五番, 五百里外七番, 一千里外八番, 各一月上; 二千里外九番, 倍其月上. 若征行之鎮守者, 免番而遣之.). 4. 折衝府-巡幸地 거리가 두 개로 표시된 난은 첫 번째 숫자는 長安을 거치지 않고 洛陽을 경 유한 경우, 두 번째 숫자는 長安과 洛陽을 모두 경유한 경우이다. <표 6>에서 알 수 있듯이 絳州 岐州 蒲州 寧州 河南府의 折衝府 將領들(折衝都 尉 果毅都尉 別將)이 皇帝의 행차를 扈從했거나 行宮을 留守하였다. 折衝府의 將領들이 휘하 府兵을 인솔했을 것이므로 위에서 언급된 1府 4州의 6개 折衝府 府兵도 巡幸地나 行宮에 가서 경호의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즉, 위의 표는 府兵의 番上 혹은 배치를 파악 하는데 도움이 된다. <표 6>에서 開元 13년(725) 泰山 封禪에 참여한 豆善富 李懷 桓義成의 경우 泰山까 지의 거리를 알 수 있다. 豆善富는 絳州 武城府左果毅都尉,61) 李懷는 右衛扶風郡積善府左 果毅都尉,62) 桓義成은 蒲州 六軍府折衝都尉63)의 직책으로 泰山 封禪을 扈從하였다. 泰山 封禪은 洛陽에서 출발한 기간까지 포함하면 開元 13년(725) 十月 辛酉日부터 十二月 己 巳日까지 69일이나 걸렸다.64) 또 泰山 封禪은 開元 12년(724) 十一月 庚申日65) 혹은 庚 61) 62) 63) 64) 豆善富墓誌, 唐代墓誌彙編 開元534, 1523쪽, 君以岳牧子解 檢校 軍事, 又以 方不靜, 朝廷徵任, 擢授潞州銅鞮府左果毅都尉, 加游擊將軍, 兵 臨西戎, 亟戰超勝, 授上柱國, 轉絳 州武城府左果毅都尉. 開元十三年中, 扈從東封, 禮畢加忠武將軍, 進絳州 府折衝都尉. ; 豆善富 墓誌, 全唐文補遺 第四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7), 441아래쪽; 豆善富墓誌, 全 唐文新編 22(周紹良 主編,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2000), 15173쪽. 李懷墓誌, 唐代墓誌彙編 天寶064, 1575쪽, 拜游擊將軍行右衛扶風郡積善府左果毅仍留長上. 聖主封禪, 加宣威將軍, 改左威衛河南洛汭府折衝. 俄加壯武將軍, 授左領軍衛翊府右郎將. 未盈五考, 加忠武將軍, 授左龍武軍翊府中郞將, 擧其要也. 仍留東京左屯營檢校. ; 李懷墓誌, 全唐文補遺 第一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4), 156아래쪽-157위쪽. 桓義成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天寶039, 609쪽, 忠公用譽, 狀跡彰聞, 遷蒲州六軍府折衝都尉. 扈鑾輿封岱岳. 覃恩廣被, 勳品增榮, 加寧遠將軍, 攝本衛郎將. 舊唐書 卷8 玄宗紀 上 開元十三年條, 188-189쪽, [冬十月]辛酉, 東封泰山, 發自東都. 十 一月丙戌, 至兗州岱宗頓. 丁亥, 致齋於行宮. 己丑, 日南至, 備法駕登山, 仗纫羅列嶽下百餘里. 詔行 從留於谷口, 上與宰臣ㆍ禮官昇山. 庚寅, 祀昊天上帝於上壇, 有司祀五帝百神于下壇. 禮畢, 藏玉冊
64 午日66)부터 15년 十月 己卯日까지 1100일 혹은 1090일 동안 지속된 洛陽 체류의 일부였 다. 즉 玄宗은 長安 洛陽 泰山 洛陽 長安 의 순서로 약 3년에 해당하는 기간을 長 安 이외의 지역에서 보냈다. 豆善富 李懷 桓義成이 어디부터 玄宗의 행차를 따라다녔는지는 墓誌銘의 기록만으로 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洛陽에서 출발할 때부터 따라갔다고 하면, 그들의 지 휘를 받는 府兵들은 각각 絳州 岐州(扶風郡) 蒲州에서 일단 洛陽에 도착한 후 泰山 封 禪 행렬에 참가하였을 것이다. 折衝府에서 洛陽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도 중간에 府兵들의 교대가 필요하였다. 가장 거리가 짧은 絳州 武城府의 府兵들이 교대로 泰山 封禪에 참여 했다면 絳州에서 泰山까지 최소 24일(말타고 갈 경우), 최대 33일이 걸렸다. 반면 岐州 (扶風郡)와 蒲州는 泰山과의 거리가 2,000里가 넘었다. 李懷가 지휘하는 岐州(扶風郡)의 積善府 府兵들이 교대로 泰山 封禪에 참여했다면 岐州에서 泰山까지 가는데 말타고 30일 혹은 34일, 걸어서(혹은 노새 타고) 42일 혹은 47일이나 걸렸다. 또 桓義成이 지휘하는 蒲州의 六軍府 府兵들이 泰山 封禪에 교대로 참여했다면 최소 30일 혹은 35일(말타고 가 는 경우), 최대 42일 혹은 49일(도보 혹은 노새 타고 가는 경우)이 걸렸다. 이처럼 모두 2-4달이 걸리는 泰山까지 왕복하고 1-2달을 泰山에서 근무해야 하는 府兵들의 부담이 컸 음은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朱保墓誌銘 에 따르면 朱保는 비교적 가까운 五陵 행차에 참여하였다.67) 舊唐 書 에 따르면 玄宗은 開元 17년(729) 十一月 辛卯日(11. 29)부터 戊申日(12. 16)까지 18일 동안 橋陵 定陵 獻陵 昭陵 乾陵을 참배하였다.68) 즉 朱保는 이때 寧州高望府折衝都 尉의 직함으로 玄宗의 五陵 참배를 隨從하여 右領軍衛左郎將으로 승진하였다.69) 이때 朱 保를 따라 五陵 참배에 참여한 高望府의 府兵들은 寧州에서 11일 혹은 15일 걸려 처음 65) 66) 67) 68) 69) 於封祀壇之石侠, 然後燔柴. 燎發, 戝臣稱萬歲, 傳呼自山頂至嶽下, 震動山谷. 上還齋宮, 慶雲見, 日 抱戴. 辛卯, 祀皇地祇於社首, 藏玉冊於石侠, 如封祀壇之禮. 壬辰, 御帳殿受朝賀, 大赦天下, 流人未 還者放還. 內外官三品已上賜爵一等, 四品已下賜一階, 登山官封賜一階, 褒聖侯量才與處分. 封泰山 神為天齊王, 禮秩加三公一等, 近山十里, 禁其樵採. 賜酺七日. 侍中源乾曜為尚書左丞相兼侍中, 中 書令張說為尚書右丞相兼中書令. 甲午, 發岱嶽. 丙申, 幸孔子宅, 親設奠祭. 舊唐書 卷8 玄宗紀 上 開元十二年條, 187쪽, 冬十一月庚申, 幸東都, 至華陰, 上制岳廟文, 勒 之于石, 立于祠南之道周. 戊寅, 至自東都. 新唐書 卷5 玄宗紀 開元十二年條, 131쪽, 十一月庚午, 如東都. 朱保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周紹良 趙超 主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1) 天寶038, 608 쪽, 公忠以奉國, 勤以立功, 至開 四月, 內除昭武校尉ㆍ寧州高望府折衝. 勇冠蒙輪, 藝聞穿札. 十 四中府, 十 上府, 折卄二, 主上親謁五陵, 授右領軍衛左郎將, 賜紫金魚袋. 舊唐書 卷8 玄宗紀 上 開元十七年條, 194쪽, 十一月庚申, 親饗九廟. 辛卯, 發京師. 丙申, 謁 橋陵. 上望陵涕泣, 左右並哀感. 制奉先縣同赤縣, 以所管萬三百戶供陵寢, 三府兵馬供宿纫, 曲赦縣 內大辟罪已下. 戊戌, 謁定陵. 己亥, 謁獻陵. 壬寅, 謁昭陵. 乙巳, 謁乾陵. 戊申, 車駕還宮. 朱保墓誌, 608쪽.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65 의 참배 지역인 橋陵까지 가야 했다. <표 6> 마지막 란의 王崇禮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河南府 金谷府折衝都尉였으며, 玄 宗의 洛陽 순행을 扈從하던 도중 開元 19년(731) 十月 二十四日(11. 27)에 新豐에서 병들 어 죽었다.70) 당시 玄宗은 開元 19년(731) 十月 丙申日(11. 24)에 長安을 출발하여 十一 月 丙辰日(12. 14)에 洛陽에 도착하였다.71) 이 기사에서 河南府 소속인 金谷府의 府兵들 이 開元 19년 玄宗의 洛陽 행차를 호위하기 위해 洛陽에서 長安 혹은 新豐縣으로 파견되 었음을 알 수 있다. 즉 金谷府의 府兵들은 洛陽에서 長安까지 13일 혹은 17일이나 걸리 는 850里의 길을 갔다가 玄宗의 행렬을 扈從하여 다시 洛陽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때 長 安에서 洛陽까지 가는데 21일이 걸렸으므로, 長安에 番上한 府兵의 경우 長安과 洛陽 사 이에서 복무기간인 한 달이 끝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때의 巡幸에 참가하여 복무기간 인 한 달을 넘겨서 근무하는 府兵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에 대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府兵의 從軍과 외교사신 호송에 참여했을 때의 규정을 따른 다면 추가로 한 달을 복무하고 다음 番上을 면제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상으로 高德 豆善富 李懷 桓義成 朱保 王崇禮의 墓誌銘을 분석하여 府兵들이 玄宗의 巡幸을 扈從하였음을 입증하였다. 주로 關中과 河南府(洛陽), 河東道에 있던 折衝 府의 府兵들을 자신들과 가까운 지역의 巡幸을 따라가기도 했지만 편도로 20-30일이나 걸리는 먼곳까지 교대로 가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이처럼 府兵들의 番上 규정과 부담에 대한 실제 상황이 다를 수 있다. 즉 玄宗의 여러 지역 행차, 특히 洛陽과 太原, 泰山 행 차에 따라 다닌 府兵들은 都城과의 거리에 따라 교대로 番上한다는 新唐書 와 唐六典 의 규정과 달리 자신들이 속한 折衝府에서 都城보다 더 먼 곳을 오가며 行役, 巡幸의 扈 從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府兵들에게는 이처럼 바뀐 상황에 맞는 공평한 行役 규정이 필 요했을 것이다. 현재의 자료에는 이에 대한 규정이 없지만 皇帝들의 巡幸이 府兵들의 番 上과 行役에 영향을 주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Ⅳ. 결론 본문에서는 唐前期 府兵의 동원과 배치가 皇帝들의 巡幸에 영향을 받았음을 논증하였 다. 먼저 魏德과 邢思賢의 墓誌銘에서 살펴본 것처럼 折衝府의 府兵들은 九成宮이나 玉 70) 71) 王崇禮墓誌, 489아래쪽. 舊唐書 卷8 玄宗紀 上 開元十九年條, 197쪽, 冬十月丙申, 幸東都. 十一月丙辰, 至自東 都.
66 華宮같은 離宮에 주둔하여 지켰다. 여기에 동원된 府兵들은 해당 장소와 가까운 州의 折 衝府 출신이었다. 이는 병력의 배치에 지리와 교통이라는 요인을 감안했음을 시사한다. 또 府兵이 九成宮이나 玉華宮같은 離宮에 배치되었던 예를 보면 더욱 중요한 長安과 洛 陽 사이의 교통로에 위치한 行宮에도 府兵들이 평상시에도 배치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唐代 墓誌銘을 분석하여 각 지역의 折衝府 府兵들이 皇帝의 巡幸을 扈從하였 음을 입증하였다. 이는 高德 豆善富 李懷 桓義成 朱保 王崇禮의 墓誌銘에서 확인된 다. <표 5> 唐代 折衝府와 離宮 行宮 분포에서 行宮이 많았던 지역에 折衝府의 수가 많 았던 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離宮 行宮의 방어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기존의 府兵制 연구에서 府兵들의 宿衛番上만을 고려하여 거리에 따른 府兵들의 부담 문제를 추산하였다.72) 그러나 府兵들이 宿衛番上뿐만 아니라 皇帝의 巡幸을 扈從했던 것 이 확인되는 이상 府兵들의 부담 문제는 巡幸을 고려하여 再考해야 한다. 본문에서는 몇 개의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았다. 府兵들이 離宮과 陵墓 수비에 동원될 때, 折衝 府와 해당 지역의 거리가 고려되어 가까운 곳에 있는 折衝府가 동원되었다. 반면 皇帝들 의 巡幸에 동원된 折衝府는 折衝府와 순행지역의 遠近 여부가 고려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開元 13년(725) 玄宗의 泰山 封禪을 扈從했던 府兵들은 絳州와 蒲州처럼 河東道 에 속한 折衝府도 있었지만, 岐州처럼 關隴(關內道)에 있던 折衝府도 있었다. 이처럼 府兵들이 都城보다 먼 곳에 행차하는 皇帝 일행을 호위하는 임무, 즉 行役은 몹시 고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巡幸의 行役을 꺼려하여 衛士들이 일으킨 소란도 있었 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新唐書 太宗紀 에는 太宗이 貞觀 15년(641) 正月 辛巳日에 洛陽宮으로 행차하다가 溫湯에 머물렀을 때 衛士 崔卿과 刁文懿가 謀反하여 伏 誅되었다고 기록하였다.73) 모반의 동기와 과정이 자세히 기록된 資治通鑑 에 따르면 衛 士 崔卿과 刁文懿가 行役을 꺼려 太宗을 놀라게 하면 행차를 그치게 할 수 있다고 생각 하였다. 이에 그들은 밤에 行宮으로 화살을 쏘았고 이 가운데 다섯 대의 화살이 寢庭에 까지 날라갔다. 이에 두 사람은 大逆으로 논죄되어 처형되었다.74) 崔卿과 刁文懿가 어느 州의 府兵인지 新唐書 와 資治通鑑 에서는 밝히고 있지 않으나 衛士들의 반란은 府兵 들이 行役에 대해 부담을 느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72) 73) 74) 布目潮渢, 唐代衛士番上の負担, 293-304쪽; 石田勇作, 唐府兵負担攷-律令法規からみたる-, 67 위쪽-73아래쪽; 布目潮渢, 唐代衛士番上の負担再論-石田勇作氏の 唐府兵負担攷 を讀みて-, 306-327쪽; 石田勇作, 唐府兵負担についての再考, 252위쪽-266아래쪽. 新唐書 卷2 太宗紀 貞觀十五年條, 40쪽, 十五年正月辛巳, 如洛陽宮, 次溫湯. 衛士崔卿ㆍ刁 文懿謀反, 伏誅. 資治通鑑 卷196 唐紀 12 太宗貞觀十五年正月條, 6165쪽, 上將幸洛陽, 命皇太子監國, 留右僕 射高士廉輔之. 辛巳, 行及溫湯. 衛士崔卿ㆍ刁文懿憚於行役, 冀上驚而止, 乃夜射行宮, 矢及寢庭者 五; 皆以大逆論.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67 본고에서는 府兵들이 皇帝의 巡幸을 扈從하거나 皇帝가 머물거나 잠재적으로 머무르게 될 離宮 혹은 行宮을 수비하는데 동원되었음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都城에의 宿衛番上보 다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府兵들의 부담을 덜거나 균등하게 하기 위해 어떤 규 정이 있었는지 밝히지 못했다. 현존하는 唐代 문헌에 이와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기 때 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府兵의 부담 문제와 折衝府의 지역적 배치 문제에도 唐前期 皇帝 들의 巡幸이 고려되어야 함을 환기했다는 점에서 본 논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또 부수적으로 天寶年間 府兵制가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이 시기 규정된 지역 이외의 折衝府 府兵이 長安에 宿衛하러 파견되었음을 밝혔다. 이는 규정과 실제 행정의 집행에 괴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唐代 藩鎭의 攝職 李 永 哲 (嶺南大) 目 次 Ⅰ. 序論 Ⅱ. 藩鎭의 幕職官 辟召와 攝職 Ⅲ. 攝職의 性格 Ⅳ. 結論 Ⅰ. 序論 唐代 藩鎭에서 藩帥를 보좌하여 藩鎭의 행정을 담당했던 다수의 文人을 가리켜 幕職官 이라 한다. 幕職官은 辟召를 이용하여 선발되었고, 藩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후 幕職官이 官僚로 진출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승인한 冬薦制가 실시되자, 막직관 은 번진에서 뿐만 아니라 관료사회에서도 점차 중요해졌다. 막직관이 官界로 진출하는 새로운 수단이 되었고, 官僚들에게는 玄宗이후 실시된 待選期間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 고, 官資를 쌓아 승진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唐 朝廷은 幕職官 辟召 過程, 선발 인원 및 俸料까지 관여하여, 幕職官을 朝廷의 의도대로 조정하여 번진 행정을 간섭 하려 했다. 朝廷이 이와 같은 태도를 보였던 것은 긍극적으로 번진을 견제하여 중앙집권 적 지배체제를 강화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幕職官에 대한 연구는 초기에는 주로 幕職官 구성과 선발 방식인 辟召 문제를 중심으 로 幕職官과 官僚制와의 연관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1) 幕職官 벽소가 唐朝의 人事政策 과 藩鎭對策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규명하기 위해서였다. 1990년 이후 최근의 연구는 1) 嚴耕望, 唐代方鎭使府僚佐考 : 唐代府州僚佐考 ( 唐史硏究叢稿, 新亞硏究所, 1969.); 愛宏元, 唐代後半における社會變質の一考察 ( 東方學報 42., 1971.): 唐代鄕貢進士と鄕貢明經 ( 東方 學報 45.; 礪波護, 中世貴族制の崩壞と辟召制 : 唐代使院と僚佐と辟召制 ( 唐代政治社會史硏 究, 同朋社, 1986.); 張國剛ㆍ楊志玖, 唐代藩鎭使府辟署制度 ( 唐代藩鎭硏究, 河南敎育出版社, 1987.); 寧欣, 唐代選官制度 (文津出版社, 1995.).
70 中國에서 公刊된 墓誌銘 등의 石刻史料를 활용하여 벽소제와 막직관 제도의 구체적인 실 태를 분석하여,2) 개별 번진의 幕職官 구성을 분석하여 번진 벽소가 唐 후기 신흥계층의 官界進出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일반적 견해가 재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제 기하였다. 本稿는 幕職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攝職을 살펴보려 한다. 攝職은 職銜 앞에 攝 字를 쓰는 攝職은 그 동안 많은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도 없으며, 전론이 발표된 것 도 없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攝職을 벽소 과정에서 임명대기자의 신분을 표시하는 직위3) 또는 奏請을 통하지 않고 선발된 非正職의 직위4)라고 보았다. 그러나 憲宗 元和 12年 (817) 세워진 徐州의 使院新修石㡖記 와 穆宗 長慶 2年 세워진 晉州의 慶唐觀李寰謁眞 廟題記 의 기록을 보면 攝職이 단순한 임명대기자를 표시하는 것이라거나 上聞과 관계없 는 非正直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또한 번진에 攝職이 광범위하게 존 재했으며, 관행적인 제도처럼 설치되고 있음을 볼 때 攝職에 대해 새롭게 연구가 되어져 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Ⅱ. 藩鎭의 幕職官 辟召와 攝職 唐代 藩鎭은 절도사 輔佐役인 幕職官을 辟召를 이용하여 선발하였다. 前漢에서 公卿郡 守들이 屬僚를 선발했던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辟召는 隋文帝가 開皇 15年 (595) 選擧制度를 시행하여 모든 관직을 조정에서 임명하게 되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 다. 隋의 제도를 계승하였던 唐도 관리를 임용할 때 벽소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隋 唐時期 벽소가 폐지되긴 했지만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馬端任의 말처럼 隋唐시 2) 3) 4) 盧建榮, 中晩唐藩鎭文職幕僚職位的探討 -以徐州節度區爲例- ( 第2屆 國際唐代學術會議論文集 下., 文津出版社, 1993.); 戴偉華, 唐方鎭文職僚佐考 (天津古籍出版社, 1994.); 王德權, 中晩唐使 府僚佐昇遷之硏究 ( 國立中正大學學報 5-1., 1994.); 石雲濤, 唐代幕府制度硏究 (中國, 社會科 學出版社, 2003.); 渡邊孝, 中晩唐朝における官人の幕職官入仕とその背景 (松本肇ㆍ川合康三 編 中唐文學の視角, 創文社, 1996.) : 唐後半期の藩鎭辟召制についての再檢討 -淮南 浙西藩鎭に おける幕職官の人的構成などを手がかりに- ( 東洋史硏究 60-1., 2001.) : 唐代藩鎭における下級 幕職官について ( 中國史學 11., 2001.). : 松浦典弘, 唐代後半期の人事における幕職官の位置 ( 古代文化 50-11., 1998.); 金宗燮, 唐五代 幕職官 任用方式과 役割 ( 東洋史學硏究 71., 2000.). 日野開三郞, 支那中世の軍閥 ( 日野開三郞 東洋史學論集 第1卷. 唐代藩鎭の支配體制, 三一書房, 1981.) p.89.; 礪波護, 唐代使院と僚佐と辟召制 ( 唐代政治社會史硏究, 同朋社, 1986.). p.100. 石雲濤, 唐代幕府制度硏究,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3. p.248.
唐代 藩鎭의 攝職 / 李 永 哲 71 기 관리 선발이 대부분 科目으로부터 나왔으나, 때에 따라 辟署도 시행되었다. 그러나 馬 端任은 벽소가 정기적으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규정이 동일하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高宗 咸亨 3年(672) 5月 11日에 辟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勅令을 내려 中書門下의 兩省 供奉官 및 尙書省 御史臺의 現任郞官, 御史는 이후 諸使가 使(職)에 奏請할 수 없 다. 5)고 하였다. 唐代 辟召와 관련된 규정으로 이 보다 앞선 경우를 찾을 수 없다. 唐은 초기부터 율령체제가 지닌 행정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使職을 설치하였다.6) 高 祖 때부터 慰撫大使ㆍ按撫大使ㆍ巡省大使ㆍ黜陟大使ㆍ觀風俗使 등이 설치되었다. 예상치 못한 사무가 발생하여 율령관제 내에 담당할 부서가 없으면 使職을 임시로 설치하여 사 무를 처리하였던 것이다. 令外官이었던 使職은 省ㆍ臺ㆍ寺ㆍ監의 長官職을 帶하여 官資 를 표시했고, 屬僚는 조정이 命을 내려 차출하거나 벽소를 통해 스스로 선발하였다.7) 당 시 使職은 朝廷 官僚 중에서 屬僚를 벽소했는데, 위의 勅은 이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 한 것이다. 唐代 使職이 屬僚를 선발하는데 이용되었던 辟召는 中宗朝에서 玄宗朝 초기에 藩鎭과 採訪使 설치를 계기로 내용이나 범위 등에서 빠르게 발전하였다.8) 開元 21年(733) 玄宗 은 全國을 15道로 나누고, 採訪處置使를 설치하였다. 이 때 설치한 採訪使는 判官ㆍ支使 ㆍ推官을 補佐役으로 벽소할 수 있었다. 이후 節度使도 이를 답습하여 幕職官을 辟召하 였다.9) 採訪使와 節度使는 임시적 성격이 강했던 이전의 使職과는 달리 固定的, 恒久的 으로 설치되었다.10) 이전의 使職은 정해진 사무가 처리되면 罷해졌고, 동시에 屬僚도 원 래의 職務로 되돌아갔지만, 採訪使와 節度使의 屬僚는 벽소이후 辟召한 주체와 운명을 같이 해야 했다. 고정적이고 항구적인 성격이 강한 번진이 막직관을 벽소로 선발하면서 벽소의 형식과 범위에 있어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 벽소 과정이 정교해졌다. 唐代 辟召 는 일정한 절차에 따라 문서를 통해 이루어 졌다.11) 벽소 과정에 만들어 진 文書는 牒이 5) 6) 7) 8) 9) 10) 11) 唐會要 卷78. 諸使 中. 諸使雜錄 上. : 高宗 咸亨 3年 中略 其年五月十一 日勅 中書門下兩 省供奉官及尙書省御史臺現任郞官御史 自今以後 請使不得奏請任使 永爲常式. 薛明扬, 论唐代使职的功能与社会作用 ( 復旦大学学报 1990年 1期.) 二十二史考異 58. 職官志. : 案節度採訪觀察團練經略招討諸使皆無品秩 故常帶省臺寺監長官銜 以寄官資之崇卑 其屬僚或出朝命 或自辟擧. 失野主稅, 使制度の發生について ( 史學硏究 12-2., 1940.). 通典 卷32. 職官 14. 總論州佐.; 採訪使有判官二人 支使二人 推官一人 皆使自辟召 然後上聞. 其未奉報者稱攝. 이에 注를 달아 其節度防禦等使僚佐之例 亦如之. 라 하였다. 唐國史補 下. 道. : 開元以前 有事于外則命使臣 否則止. 自置八節度十採訪 始有座以爲使. 唐代 節度 觀察 諸使는 寮佐에서 州郡의 掾屬에 이르기까지 辟召하여 설치하였다. 牒語는 모두 四六을 이용하였는데 대략 告詞와 같았다. 辟召過程의 文書樣式에 대해서는 中村裕一이 唐代官 文書硏究 第 4章. その他の文書(中文出版社, 1991.)) pp.288-294.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참
72 라 했으며, 牒은 告身의 制詞나 勅詞와 같은 형식인 四六體로 작성되었다.12) 다음으로 벽소의 범위가 이전에 비해 광범위해졌다. 德宗 貞元 2年(786)에 5月 28日에 기존의 규정인 中書門下 兩省 供奉官 및 現任郞官 御史 등은 諸司 諸使가 奏請하여 使 (府)職에 임명할 수 없다 13)에 모두 出身人 및 六品以下 正員官을 주청할 수 있다. 14)는 자격에 대한 제한 규정이 추가되었다. 出身人과 6品 이하 관원 으로 벽소 자격을 제한하 고 있는 것은 이미 이 규정보다 광범위한 범위에서 벽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전제 로 한다. 安史의 亂이 발생하였을 때 玄宗은 절도사들에게 막직관뿐 만 아니라 지방관까 지 벽소할 수 있는 권한을 내려주었다.15) 반란 때문에 王朝의 인사기능이 제대로 작동하 지 못하여 반란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후 代宗 大曆 14年(779) 에 이르면 協律郞 沈旣濟에 의해 번진에서 실시하고 있는 벽소를 주현관을 선발하는 방 법으로 시행하자는 주장16)이 제기 될 정도로 번진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17) 또한 辟召制는 德宗 貞元 年間 이후 공식적으로 律令官制와 연결되어 官界로 나가는 새로운 하나의 방법이 될 정도로 발전하였다. 貞元 9年 2月 德宗은 막직관을 대상으로 冬薦을 실시하여 막직관에게 官界로 진출할 수 있는 공식적인 통로를 열어주었다.18) 막 직관을 포함하여 冬薦制를 운용되면서 幕職官을 선발하는 辟召制는 관료로 진출할 수 있 는 방법의 하나가 되었다. 막직관이 동천의 대상이 되자 官僚보다 改轉 기간이 짧았던 막직관은 資歷을 빠르게 쌓을 수 있었기 때문에 陞進에 유리하였다.19) 막직관이 改轉하 기 위해서는 元和 3年(808)에는 3考가 필요했으나 元和 7年(812)에는 授官日을 기준으로 12) 13) 14) 15) 16) 17) 18) 19) 조하라. 容齋三筆 卷16. 唐世辟寮佐有詞 : 唐世節度觀察諸使辟置僚佐以至州郡差掾屬 牒語皆用四六 大 略如告詞. 李商隱樊南甲乙集 顧雲編稿 羅隱湘南雜稿 皆有之. 唐會要 卷54. 省號 上. 中書省. 貞元二年五月二十八日勅 中書門下兩省供奉官及尙書省御史臺現 任郞官御史等 自今以後 諸司諸使竝不得奏請任使 仍永爲常式. 冊府元龜 卷716. 幕府府 總序. : 皆奏請有出身人及六品以下正員官爲之 唯兩省供奉尙書省御史 臺現任郞官不得奏請 其辟署未有官者謂之攝.. 全唐文 卷366. 賈至, 玄宗幸普安郡制 : 其諸路本節度採訪支度防禦使虢王巨等 幷衣前充使 其 署官屬及本路郡縣官 幷各任便自簡擇. 資治通鑑 卷226. 代宗 大曆 14年 8月條.; 今諸道節度都團練觀察租庸等使 自判官部將以下 皆使 自擇 縱其間或有情故 大擧其例 十猶七全. 則辟吏之法 已試於今 但未及於州縣耳. 利害之理 較然 可觀. 嚮令諸使僚佐盡受於選曹 則安能方鎭隅之重 理財賦之殷乎. : 通典 卷18. 選擧 6. 雜議論 下. : 其六品以下 或僚佐之屬 許州府辟用. 鄭炳俊, 唐代 藩鎭의 州縣官 任用 ( 東洋史學硏究 54., 1996.), pp.19-31. 冊府元龜 卷630. 銓選部 條制門. 德宗 貞元 9年 12月制. : 自今後 應諸色使行軍司馬判官書紀參謀支 使推官等使罷者 與是簡較試五品以下 不合於吏部選集 並任准罷使郞官御史例冬集季聞奏. 冊府元龜 卷631. 銓選部 條制門. 憲宗 元和 2年 5月 中書門下奏. : 諸使副使行軍司馬判官參謀 掌書記支使推官巡官等有勅充職掌擧簡較五品以上官臺省官三考與改轉 餘官四考與改.
唐代 藩鎭의 攝職 / 李 永 哲 73 30個月이 필요했다.20) 반면 조정 관료는 3-4考의 기간21)이 필요했다. 개전에 필요한 기 간이 짧았던 막직관은 조정 관료보다 陞進에 필요한 資歷을 상승시키기가 용이하였기 때 문에 唐의 관료들에 의해 막직관 就任이 승진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22) 따라서 貞元 年 間 冬薦制가 실시되자 辟召는 官界로 나가는 官途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23) 唐代 藩鎭은 다양한 막직관을 선발하여 막부를 구성하였지만, 그 정확한 구성은 알 수 없다. 다만 舊唐書 ㆍ 通典 ㆍ 新唐書 의 기록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唐代 藩鎭에는 副 使 1명, 行軍司馬 1명, 判官 1명, 掌書記 1명, 推官 1명, 參謀, 巡官 1명, 同節度副使 10 명, 館驛巡官 4명, 衙推 1명, 隨軍 4명, 要籍 1명, 逐要 1명, 親事 1명, 府院法直官 1명 등 의 막직이 있었다. 藩鎭의 막직관 구성은 節度使가 다른 使職을 겸직할 때마다 확대될 수 있었다. 절도사가 다른 使職을 兼職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唐代 藩鎭의 使府 구성은 방대하고 복잡했다.24) 20) 21) 22) 23) 24) 舊唐書 卷15. 憲宗紀 元和 7年 8月 戌申條. :制 諸州府五品已上官替後 委本道長官量其才行 官 業 資歷 每年冬季一度聞薦. 其罷使郎官 御史 許朝臣每年冬季准此聞薦. 諸使府參佐 檢校官 從元 授官月日計 如是五品已上官及臺省官 經三十箇月外 任與轉改 餘官經三十六箇月奏轉改. 如未經考 便有事故及停替官 本限之外更加十箇月.即任申奏. 唐大詔令集 卷70. 德宗 貞元 6年 南郊赦.; 唐大詔令集 卷70. 敬宗 寶曆元年 正月 南郊赦. 幕職官 勤務를 통해 官資를 상승시켜 성공적인 陞進을 이루었던 例는 舊唐書 列傳만 보아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事例는 舊唐書 卷114. 裴茙傳.; 舊唐書 卷117. 嚴武傳.; 舊唐 書 卷118. 元載傳:; 舊唐書 卷118. 楊炎傳.; 舊唐書 卷119. 崔巖傳.; 舊唐書 卷122. 李叔 明傳.; 舊唐書 卷122. 崔漢衡傳.; 舊唐書 卷123. 班宏傳.; 舊唐書 卷125. 張鎰傳.; 舊唐書 卷125. 劉渾傳.; 舊唐書 卷126. 陳遊少傳.; 舊唐書 卷127. 喬琳傳.; 舊唐書 卷128. 段實秀 傳.; 舊唐書 卷129. 韓滉傳.; 舊唐書 卷130. 李泌傳.; 舊唐書 卷130. 李元平傳.; 舊唐書 卷132. 李芃傳. 舊唐書 卷134. 馬燧傳.; 舊唐書 卷134. 馬炫傳.; 舊唐書 卷135. 裴延齡傳.; 舊唐書 卷135. 李實傳.; 舊唐書 卷135. 盧紀傳.; 舊唐書 卷136. 齊映傳.; 舊唐書 卷136. 劉 贊傳.; 舊唐書 卷137. 劉太眞傳.; 舊唐書 卷137. 崔元翰傳.; 舊唐書 卷140. 盧群傳.; 舊唐 書 卷145. 董晉傳.; 舊唐書 卷147. 從牧傳.; 舊唐書 卷148. 權德輿傳.; 舊唐書 卷149. 于敖 傳.; 舊唐書 卷150. 高參傳.; 舊唐書 卷153. 段平中傳.; 舊唐書 卷153. 姚南中傳.; 舊唐書 卷155. 竇庠傳.; 舊唐書 卷155. 竇牟傳.; 舊唐書 卷160. 韓愈傳.; 舊唐書 卷163. 崔鉉傳.; 舊唐書 卷163. 王 質傳.; 舊唐書 卷163. 盧簡辭傳.; 舊唐書 卷163. 盧簡能傳.; 舊唐書 卷 163. 盧簡求傳.; 舊唐書 卷163. 盧弘正傳.; 舊唐書 卷163. 盧知猷傳.; 舊唐書 卷164. 王起 傳.; 舊唐書 卷165. 劉公綽傳.; 舊唐書 卷165. 劉璧傳.; 舊唐書 卷165. 劉玼傳.; 舊唐書 卷165. 劉公權傳.; 舊唐書 卷166. 白行簡傳.; 舊唐書 卷166. 白敏中傳.; 舊唐書 卷168. 馮宿 傳.; 舊唐書 卷172. 牛傑傳.; 舊唐書 卷173. 李回傳.; 舊唐書 卷174. 李德裕傳.; 舊唐書 卷176. 李宗閔傳.; 舊唐書 卷177. 崔球傳.; 舊唐書 卷177. 楊收傳.; 舊唐書 卷177. 楊發傳.; 舊唐書 卷177. 杜審權傳.; 舊唐書 卷177. 杜讓能傳.; 舊唐書 卷178. 張이傳.; 舊唐書 卷 178. 王徽傳.; 舊唐書 卷178. 趙光逢傳.; 舊唐書 卷178. 鄭畋傳.; 舊唐書 卷179. 孔緯傳.)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鄭炳俊, 唐後期 吏部銓選과 官途의 多邊化 ( 新羅의 人材養成과 選拔, 慶州, 新羅文化硏究所, 1998.). 新唐書 卷49下. 百官 4下. 外官條. :節度使 副大使知節度事 行軍司馬 副使 判官 支使 掌書記
74 이러한 막직관은 설치할 수 있는 범위를 의미할 뿐 반듯이 설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 다. 번진의 사정에 따라 설치 인원은 유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憲宗 元和 12年(817) 9월 12일 徐州 武寧(感化)軍에서 使院을 新修하고, 이를 기념하여 徐州의 막직관들이 府 庭의 南端에 石幢를 세웠다. 石幢의 문장 말미에 使院을 新修하는 과정에 참여한 徐州의 幕職官들이 연명하였다. 金紫光祿大夫檢校尙書左僕射使持節徐州諸軍事兼徐州刺史御史大夫充武寧軍節度 都營田 等州觀察處置等使上柱國襲岐國公食實封七百五十戶李愿 攝觀察副使高瑀 行軍司馬李進賢 攝營田副使劉元鼎 侍御史內供奉節度判官譚藩 觀察判 寮 支度 營田判官何授 郭行餘 節度參謀趙季黃 節度掌書記王參元 張勝 觀察推官 張仲擧 攝觀察推官鄭據 節度巡官閻顔 攝節度巡官獨 巡官 攝支度巡官鄭翶 營田巡官攝支度推官吳植 ( 金石萃編 卷107, 使院新修石㡖記 ) 또한 穆宗 長慶 3年(823) 3月 18日 晉州에서는 觀察使府의 文武職 屬僚들이 觀察使인 李寰이 慶唐觀을 拜謁하자 같이 참여하고, 이를 기념하여 碑를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당 시 李寰과 같이 慶唐觀에 참여하였던 文武 속료들과 地方官 및 지방 出身人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觀察判官將仕郞試大理評事武恭 推官 巡官 衙推各一人 同節度副使十人 館驛巡官四人 府院法直官 要籍 逐要親事各一人 隨軍四 人. 節度使封郡王 則有奏記一人 兼觀察使 又有判官 支使 推官 巡官 衙推各一人. 又兼安撫使 則 有副使 判官各一人. 兼支度 營田 招討 經略使 則有副使 判官各一人. 支度使復有遣運判官 巡官各 一人.
唐代 藩鎭의 攝職 / 李 永 哲 75 觀察支使試宏文館校書郞賀拔惎 觀察推官給事郞試大理評事兼監察御史賜緋魚袋盧撫 攝團練判官朝散大夫前殿中侍御史內供奉蕭齊 攝觀察推官宣德郞試太府寺丞賜緋魚袋王文簡 攝觀察巡官宣德郞試司農寺主簿魏元膺 攝觀察巡官宣德郞前守幽州錄事參軍蕭存古 奉義郞前絳州萬泉縣令從矩鄕貢進士方郢 前鄕貢明經方回 前鄕貢明經方參 從矩等 侍從禮謁 尊客 ( 以下 武職은 省略) ( 八瓊室金石補正 卷65. 慶唐觀李寰謁眞廟題記 ) 위의 徐州와 晉州의 막직관 명단은 唐代 節度使府와 觀察使府의 使府 구성을 잘 보여 준다.25) 이 명단이 당시 徐州와 晉州의 전체 막직관 구성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副使에 서 巡官에 이르는 일반적으로 正式의 幕職官26)이라 부르는 막직관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이다. 使院新修石㡖記 와 慶唐觀李寰謁眞廟題記 를 작성할 당시는 正式의 幕職官만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徐州에서 前任 節度使였던 王紹(806-811 재직)가 鄭公鎰을 節 度隨軍에 임명하였던 것27)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巡官 이하의 下級의 幕職28)은 연명 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武寧軍 使府를 구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使院新 修石㡖記 에 보이는 것 보다는 방대했을 것이다. 徐州와 晉州의 幕職官 명단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섭직이다. 직위 앞에 攝 자를 쓰 고 있는 攝職이 徐州의 경우 15職 18명의 막직관 중에서 적어도 6職 6명이며, 晉州의 경 우 7명의 막직관 중에 4명이나 될 정도로 비중이 상당하다. 또한 徐州의 경우 연명의 형 식으로 보아 많게는 7職 8명일 가능성도 있다. 마모된 부분이 있는 支度 營田判官 何 授와 郭行餘는 아마 支度判官과 營田判官을 兼하거나 營田判官을 攝하고 있는 것으로 보 25) 26) 27) 28) 使院新修石㡖記 와 慶唐觀李寰謁眞廟題記 에 기록된 명단은 礪波護가 唐代政治史硏究 (同朋 舍, 1986)에서 節度使府와 觀察使府의 막직 구성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사용한 이래 많은 연구 자들에 의해 이용되었다. 本 稿 역시 礪波護의 책에서 再인용하였다. 冊府元龜 卷716. 幕府府 總序. :則天長壽中有經略使 睿宗景雲後有節度使 肅宗至德後有觀察使 明皇天寶後有團練防禦使. 節度使之屬有副使一人行軍司馬一人判官二人掌書記一人參謀無員隨軍四 人 觀察使有判官支使 經略使有判官等員. 其後節度觀察使防禦團練皆有推官巡官之職兼度支營田招 討使者又有度支營田等判官 自是正爲幕府之職. 隋唐五代墓誌滙編 洛陽 卷13冊 鄭芬及夫人胡氏合葬墓誌 : 公鎰卽先府君之嗣子也 中略 俄轉 徐泗節度隨軍 下級의 幕職官에 대해서는 渡邊孝의 論文( 唐代藩鎭における下級幕職官について ( 中國史學 11., 2001.)을 참조하라.
76 인다. 아니면 高瑀와 誤植이 연명한 형식과 같이 何授와 郭行餘도 營田判官을 攝하고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Ⅲ. 攝職의 性格 徐州와 晉州의 使府 구성으로 보아 唐代 번진에는 상당한 수의 攝職이 존재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번진에 설치되어 있었던 攝職은 과연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 며, 왜 설치하였던 것일까? 먼저 攝職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 존의 攝職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벽소 과정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직위라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는 日野開三郞 과 礪波護 兩氏에 의해 제기되었다. 日野開三郞은 幕職官으로 벽소된 자가 아직 중앙으 로부터 그 官에 상당하는 品階를 받지 못한 경우 이를 攝官이라 하여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29)고 하였다. 礪波護는 通典 總論州佐條30)와 雲麓漫鈔 의 기사31)를 근거로 使 院新修石㡖記 의 撰者인 高瑀의 例를 들어 攝職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高瑀는 撰者 로서는 支度副使로 신분을 표시하고 있으나 연명에는 攝節度副使의 신분으로 참여하였 다. 礪波護는 이를 절도사인 李愿이 高瑀를 節度副使로 승격시켜 중앙에 보고했으나 중 앙으로부터 승인하는 사령장이 아직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비석이 세워졌기 때문이라 하였다. 벽소는 辟主가 먼저 선발하고 그 결과를 중앙에 보고하여 승인받는 과정으로 이 루어졌다. 선발하고 중앙으로부터 승인이 내려지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적 공백이 존재했 다. 礪波護의 견해에 따르면 이 시간적 공백기에 辟召된 자는 임명대기자라는 일시적 신 분을 攝職으로 표시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攝職은 절차상의 직위이기 때문 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 중앙이 승인하면 正式의 막직관으로 변화하게 되고, 중앙이 거부 하면 막직관으로 취임하지 못하여 저절로 소멸되는 직위인 셈이다. 둘째, 奏請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비공식적인 權攝의 방식으로 선발한 막직관을 가리 킨다는 견해이다. 이는 石雲濤에 의해 제시되었다. 石雲濤는 번진이 중앙에서 정한 벽소 자격 규정을 어기지 않으면서 선발할 수 있는 非正職의 막직으로 2종류가 있다고 하면 29) 30) 31) 日野開三郞, 支那中世の軍閥 ( 日野開三郞 東洋史學論集 第1卷. 唐代藩鎭の支配體制, 三一書房, 1981.) p.89. 通典 卷32. 總論州佐條. : 採訪使有判官 中略 皆使自辟召 然後上聞. 其未奉報者 稱攝. 雲麓漫鈔 卷4. : 選人之制 始於唐. 自中葉以來 藩鎭自辟召 謂之版授. 時號假版官 言未授王命 假攝之耳.
唐代 藩鎭의 攝職 / 李 永 哲 77 서, 하나는 驅使ㆍ逐要ㆍ隨軍ㆍ要籍 등의 下級幕職官이며, 또 다른 하나가 攝職이라 하였 다. 그는 攝 에는 非正式任命 또는 임시로 대리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杜牧의 崔郾行狀 의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였다.32) 石雲濤는 攝職은 上聞과 관계없는 것이기, 때문에 벽소 과정을 奏請 이나 表爲 또는 奏爲 라 하지 않고 受署 라 표현하였다고 하였다.33) 이상의 攝職에 대한 2가지 견해는 일시적으로 설치된 단기직이라는 점은 일치하나, 그 성격에 대해선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나는 攝職이 공식적 벽소 과정에서 임 시로 지니게 되는 공식적 직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非공식적인 방식을 통해 선발된 非공식적, 非정직의 직위라는 입장이다. 이 두 견해 모두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攝職이 중앙으로부터 승인이 떨어지기 이전 일시적으로 보유한 임명대기자이거 나, 주청을 거치지 않고 선발한 것을 가리킨다면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帶職을 설명하기 힘들다. 慶唐觀李寰謁眞廟題記 에 있는 명단은 幕職과 帶職을 병기하였다. 그 중 攝職인 자는 攝團練判官 朝散大夫 前殿中侍御史 內供奉 蕭齊ㆍ攝觀察推官 宣德郞 試太府寺丞賜 緋魚袋 王文簡ㆍ攝觀察巡官 宣德郞 試司農寺主簿 魏元膺ㆍ攝觀察巡官 宣德郞 前守幽州錄 事參軍 蕭存古 4명이다. 石雲濤의 주장처럼 攝職이 上聞과 관계없는 직위라 한다면 이들 은 帶職을 보유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礪波護나 日野開三郞의 주장처럼 攝職이 중앙으 로부터 승인이 도착하기 이전 상태 표시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帶職을 보유하고 있는 것 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晉州의 幕職官들이 보유한 帶職이 이전 벽소를 통해 승인된 것 이거나 현재 승인을 요청한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전 벽소를 통해 승인된 帶職을 승 인을 기다리고 있는 攝職과 병기한다거나, 승인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攝職 으로 표시하여 명확히 하면서 승인을 기다리는 帶職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 다고 하겠다. 둘째, 攝職이 奏請과 관계없는 非정직의 직책이라 한다면, 왜 徐州는 正職에 있던 인물 을 非정직인 攝職에 임명했던 것일까? 使院新修石㡖記 에 연명한 徐州의 幕職官 중에 高瑀와 誤植은 이미 正職인 支度副使와 營田巡官에 임명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攝 觀察副使와 攝支度推官에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벽소하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攝職이 임명대기자 신분을 표시하는 것이라면 이후 正職으로 연결되었는지 의심스럽다. 다시 말해서 使院新修石㡖記 에 연명한 支度副使攝觀察副使 高瑀는 支度副 使에서 觀察副使로, 營田巡官攝支度推官 吳植은 營田巡官에서 支度推官으로 옮겨가기 위 32) 33) 樊川文集 卷14. 杜牧 唐故銀靑光祿大夫檢校禮部尙書御史大夫充浙江西道都團練觀察處置等使上 柱國淸河郡開國公食邑二千戶贈吏部尙書崔公行狀 : 貞元十二年中第 十六年平判入等 授集賢殿校 書 陝虢觀察使崔公琮愿公爲賓 而不樂之 挈辭載幣 使者數返 公徐爲起之 且曰 不關上聞 攝職可 也. 受署爲觀察巡官. 石雲濤, 唐代幕府制度硏究,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3. p.248.
78 해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승인이 내려와 正職에 취임하였는지 의심 스럽다. 憲宗 元和 4年 (809) 淮西節度使 吳少誠은 병이 나자 申州刺史 吳少陽을 불러 攝節度 副使로 假署(偽署)해서 留務와 군사를 총괄하게 하였다.34) 또한 代宗 大曆 11年(776) 涇 原節度使 馬璘도 병이 심해져 업무를 담당할 수 없게 되자 行軍司馬 兼 都知兵馬使 段秀 實을 攝節度副使 兼 左廂兵馬使로 奏請하여 留務를 맡겼다.35) 2 경우의 攝職은 절도사에 게 유고가 발생하여 생긴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이다. 두 번진에서 攝職을 설치하는 과정을 보면 淮西의 경우는 僞署, 涇原의 경우는 請 이라 하였다. 淮西의 경우는 奏請의 과정이 없고, 涇原의 경우는 奏請을 통해 攝職을 설 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淮西의 경우는 吳少陽이 도착했을 때 節度使 吳少誠 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僞署 의 방식으로 攝職을 설치 했던 것으로,36) 攝職이 奏請과 관계없는 직책이었다면 僞署 라 표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正職으로 전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吳少陽과 段秀實 모두 攝職으로 留務를 담당하던 시기에 전임 절도사가 모두 사망하여 절도사가 되었다. 涇原에서 절도사에게 유고가 생겼을 때 行軍司馬를 불러 굳이 攝節度副使로 삼아 유무 를 담당하게 하였던 것은 막직관의 직무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幕職官은 명확 하지는 않지만 일정 부분 직무가 분담되어 있었다. 節度副使는 藩帥를 補佐하고, 行軍司 馬는 번진의 法令을 담당하였다.37) 節度使에게 유고가 생기면 節度副使가 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로 보아 번진은 管內에 특정한 사무가 발생했을 때 攝職을 설치하여 처 리를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번진은 막직뿐만 아니라, 관내 지방관에게 유고가 발생하거 나 결원이 생기면 攝職을 설치하여 幕職으로 하여금 지방관을 攝하게 하여 관할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唐代 藩鎭에는 앞에서 살펴본 徐州나 晉州처럼 攝職이 광범위하게 존재했고, 攝職 설 치가 관행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인정되는 제도처럼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武宗 34) 35) 36) 37) 舊唐書 卷145. 吳少陽傳. : 及少誠病亟 家僮單于熊兒者 偽以少誠意取少陽至 時少誠已不知人 乃偽署少陽攝副使 知軍州事.; 新唐書 卷214. 吳少陽傳 : 少誠病亟 家奴單于熊兒矯召少陽至 攝 副使 總軍事. 舊唐書 卷128. 段秀實傳. : 璘思其績用 又奏行軍司馬 兼都知兵馬使. 中略 十一年 (馬)璘疾甚 不能視事 請秀實攝節度副使兼左廂兵馬使. 舊唐書 卷145. 吳少陽傳. : 及少誠病亟 家僮單于熊兒者 偽以少誠意取少陽至 時少誠已不知人 乃偽署少陽攝副使 知軍州事. 通典 卷32. 職官 14. 節度府之僚佐條. : 有副使一人 副貳使 行軍司馬一人 申習法令 判官二人 分判倉兵騎胄四曹事 副使及行軍司馬通署 掌書記一人 掌表奏書檄 參謀無員 或一人或二人 參議謀 劃 隨軍四人 分使出入.
唐代 藩鎭의 攝職 / 李 永 哲 79 會昌 5年(845) 9月 中書門下는 번진의 벽소할 수 있는 인원을 줄일 것을 건의하면서 상 주 말미에 正職 外 攝職設置를 禁하길 命하시 라고 하였다.38) 正職 外 攝職設置를 禁하 길 命하시라는 것으로 보아 각 번진에서 攝職을 일반적으로 또는 관행적으로 설치했다고 하겠다. 상주문에는 攝職을 正職의 막직관 이외 인원이라 하였다. 中書門下는 위 上奏文 앞에 각 번진마다 설치할 수 있는 幕職官의 數와 대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39) 중서 문하는 각 번진의 사정에 따라 막직관을 적게는 1명에서 많게는 8명까지 定員을 제시하 였다. 이 때 중서문하가 제시한 幕職이 正職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외는 攝職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藩鎭마다 正職과 攝職이 달랐다고 하겠다. 雲南判官의 경우 西川에서는 正 職으로 설치 할 수 있지만, 雲南과 가까운 다른 번진에서는 雲南과 관련한 사무가 발생 했을 때 正職으로 설치하지 못하고 攝職으로 설치해야 했다고 하겠다. 武宗 會昌 5年 (845) 9月 中書門下의 상주의 기록은 元和 12年(817)에 세워진 徐州의 使院新修石㡖記 의 연명에 나타난 幕府의 구성과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使院新修石㡖記 에 연명 한 막직관은 15職으로, 이 중 正職은 8職이며 攝職이 7인이다. 中書門下는 徐州가 이전 까지 8명을 설치했는데, 6명으로 줄여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당시 徐州는 員額이 차있 는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인원은 攝職으로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正職 外 攝職設置를 禁하길 命하시 라는 것으로 보아 섭직을 설치할 때도 일정 한 격식이 있었다고 하겠다. 희종은 출신자의 벽소를 다음과 같이 제한하였다 이후 進士에 及第하여 2 년이 지나야 諸道藩鎭과 戶部의 度支 鹽鐵 및 京師에 있는 諸司가 奏請할 수 있다. 만약 奏官( 할 수 있는 資格)에 미치지 못하면 限內에 攝職의 자리가 있으 38) 39) 唐會要 卷79. 諸使 下. 諸使雜錄 下. 會昌 5年 9月 中書門下 奏. :臣等商量須據舊額多少 難於 一例停減 今據本鎭額量減 數亦非少 仍望令正職外不得更置攝職 仍令御史臺及出使郞官御史 專加 察訪 勅旨依奏. 唐會要 卷79. 諸使 下. 諸使雜錄 下. 會昌 5年 9月 中書門下 奏. : 諸道判官員額 西川本有十二 員 望留八員 節度副使判官掌書記觀察判官支使推官雲南判官巡官 淮南河東 舊額各除向前職額外 淮南留營田判官 河東留留守判官 幽州淄靑 舊額各有九員 望各留七員 幽州 除向前職額外 留盧龍 軍節度推官 淄靑 除向前職額外 留押新羅渤海兩藩巡官 山南東道鄭滑河陽京南汴州昭儀鎭州易定鄆 州魏博滄州陳許徐州兗海鳳翔山南西道東川涇原邠寧河中嶺南已上 舊各有八員 望各留六員 節度副 使判官掌書記推官觀察判官支使 振武靈夏益州鄜坊 舊各有八員 緣邊土地貧 望各五員 節度副使判 官掌書記推官觀察判官 浙東浙西宣歙湖南江西鄂岳福建 以上 舊各有六員 望各有五員 團練副使判 官觀察判官支使推官 黔中 舊有十員 望各留六員 經略副使判官招討判官觀察判官支度鹽鐵判官 東 都留守陝府 舊有五員 並望不減 天德 舊有三員 亦望不減 同州 舊有四員 商州兩員 並望不減 防禦 副使 莘州泗州 各有兩員 並望不減 楚州壽州 各有三員 壽州 望減團練副使一員 楚州 望減營田巡 官一員 汝州鹽州隴州 舊各有一員 望不減 桂管 舊有六員 望減防禦巡官一員 容管 舊有五員 望減 招討巡官一員 延州 舊有兩員 亦望減防禦推官一員 樓煩龍陂 舊各有兩員 望各減巡官一員 右奉聖 旨令 商量減諸道判官 約以六員爲額者
80 면 牒에 따라 攝하라.40) 出身者의 벽소자격을 거론하면서 攝職이 거론되고 있다. 자격이 되지 않더라도 攝職의 자리가 있다면 辟召할 수 있었다. 위의 기록을 통해 섭직에 대해 몇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다. 우선 限內有攝職處 라는 것으로 보아 섭직을 충당해야 하는 자리가 있었다고 하겠 다. 임명을 一任隨牒攝 이라는 것으로 보아 벽소가 牒 에 의해 攝 의 방식을 통해 이루 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牒은 번진에서 이루어지는 벽소과정의 문서양식을 가리키는데,41) 崖州의 韋執誼의 벽소과정에서도 보이듯이,42) 攝職의 임명도 正職의 幕職과 마찬가지로 문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또한 攝職을 선발할 때는 攝 이라는 방식43)에 따라 선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을 통해 번진들이 攝職을 설치한 이유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唐은 安史의 亂 이 발생하자 행정과 인사의 효율성을 위해 번진에 辟召權을 인정하였으나, 亂이 끝난 후 부터 藩鎭의 벽소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唐은 代宗 大曆 年間(766-779)부터 막직관 인 원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大曆 12年(777) 4月과 5월에 잇달아 中書侍郞 楊綰과 중서문하 가 막직관 인원을 줄일 것을 건의하였다.44) 中書門下는 구체적인 員數까지 제시하면서 감원을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중앙에서 봉료를 지급하는 막직관의 범위까지 정하여45) 번진에 대해 재정적 압박을 가하였다. 攝職은 중앙에서 俸料를 지급하는 대상이 아니었 을 것이다. 때문에 번진이 攝職을 설치하려면 俸料는 번진 재정으로 충당을 해야 했다. 40) 41) 42) 43) 44) 45) 全唐文 卷89. 僖宗 南郊赦文 : 自今以後 進士及第 幷須滿二周年後 諸道藩鎭及戶部度支 鹽鐵及 在京諸司方得奏請. 如未及奏官 限內有攝職處 一任隨牒攝. 中村裕一, 唐代官文書硏究 第 4章. その他の文書, (中文出版社, 1991.) p.290. 容齊三筆 卷16. 唐世辟寮佐有詞 : 唐世節度觀察諸使辟置僚佐以至州郡差掾屬 牒語皆用四六 大 略如告詞. 李肇國史補 載崖州差故相韋執誼攝軍事衙推 亦有其文. 張東光, 唐代的內供奉官 ( 社會科學輯刊 2005年 第 1期.(總第 156期)) : 張東光은 古代 官員은 正式의 任命 外에 많은 편법적 형식에 따라 임용이 이루어졌는데, 唐代에는 行, 守, 兼, 檢校, 知, 判, 試, 攝, 內供奉 등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內供奉을 제외하고 그 방식이 어떠한 절차 에 따라 이루어졌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新唐書 卷142. 楊綰傳. :時諸州悉帶團練使 綰奏 刺史自有持節諸軍事以掌軍旅 司馬 古司武 所 以副軍 即今副使 司兵參軍 今團練判官. 官號重複 可罷天下團練 守捉使. 詔可. 又減諸道觀察判官 員之半. : 唐會要 卷78. 諸使 中. 諸使雜錄 上. 附 奏薦 大曆12年 5月 10日 中書門下狀奏. : 諸州團練守捉使 請一切並停. 中略 諸道觀察都團練使判官各置一人 支使一人 推官一人 餘並 停. 冊府元龜 卷506. 邦計部 俸祿 2. 大曆 12年(777) 5月 中書門下奏. : 得蘇州刺史兼御史大夫知臺 事李涵 東都河南江淮山南等都轉運使吏部尙書兼御史大夫劉晏 戶部侍郞專判度支韓滉等狀 釐革諸 道觀察使都團練使及判官料錢等 觀察使都如兼使不在加給限 中略 都團練副使每月錢八十貫文雜 給准時價不得過三十貫文 觀察判官與都團練判官每月料錢五十貫文 支使每月料錢四十貫文 推官每 月料錢三十貫文 巡官准觀察推官例 以上每員每月雜給准時價不得過二十貫文 下略.
唐代 藩鎭의 攝職 / 李 永 哲 81 俸料 규정은 번진 재정과 연계되어있어 벽소 인원을 감축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憲宗 元和 元年(806) 7月에 이르면 지방행정을 간소화하기 위해 節度使가 支度營田使 兼職을 금지하였다.46) 더불어 元和 2年(807)에 諸道諸使의 막직관에 대한 改轉規定을 만들 어,47) 德宗 시기에 시작된 冬薦制와 연계시켰다. 다시 文宗 開成 4年(839) 6月에 중서문하 는 行軍司馬와 參謀가 冗官이라는 이유를 들어 폐지하게 하고, 2명을 설치하던 判官을 1 명으로 감원할 것을 건의하였다. 대신 職의 폐지와 축소로 인해 감원된 인원들을 冬薦에 따르게 하여 조정 관료로 끌어들이도록 하였다.48) 武宗 會昌 5年(845) 9月에는 번진의 상 황에 따라 막직관 정원을 조정한 구체적인 규정이 만들어졌다.49) 이 규정에 따르면 唐은 諸道 判官의 정원을 6명으로 보았지만, 이 역시 本鎭의 員額을 減해도 수가 역시 작지 않 다 는 것으로 보아 이후 지속적으로 감원하려 했다고 하겠다. 중앙에서 지속적으로 번진 이 설치할 수 있는 인원을 감축한 것과는 반대로 번진의 행정량은 점차 늘어났다.50) 따라 서 기존의 막직관으로 행정을 수행하기 힘들게 되면 번진은 攝職을 설치하여 처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설치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攝 자를 직위 앞에 正 職과 구분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正職이 아닌 攝職은 중앙에서 俸料를 지급하는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설치해야 하는 이유가 사라지게 되면 폐치되었을 것이다. Ⅳ. 結論 이상에서 唐代 藩鎭의 攝職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전의 연구에서는 攝職을 벽소된 後 중앙으로부터 승인을 기다리는 임명대기자 신분 또는 중앙에 대해 주청의 과정을 거치지 46) 47) 48) 49) 50) 全唐文 卷60. 罷諸道節度使兼支度營田使詔 唐會要 卷81. 考上. 元和 2年 5月條 : 中書門下擧今年正月勅文上言 國家故事於中書置具員溥 中略 諸道及諸司副使 行軍司馬 判官 參謀 掌書記 支使 推官 巡官等 有勅充職掌 帶檢校五品已 上官 及臺省官 三考與改轉餘官 四考餘改轉. 唐會要 卷79. 諸使 下. 諸使雜錄 下. 文宗 開成 4年 6月 中書門下奏. : 諸道節度使參佐 自副使 至巡官 共七員 觀察使從事 又在數內 雖大藩雄鎭 有籍才能 而邊鄙遐方 豈易供級 況行軍之號 本 繁出使 參謀之職 尤是冗官 其行軍司馬及參謀 望勒停省 見人如本道有相當職員 任奏請改轉 其餘 官序稍高者 許隨表赴京 到日 量才獎授 郞御史以下 各令冬薦 節度判官舊額 雖本兩員 近日諸道 起今已後 望以一員爲定 其課科等 本是供軍數內 戶部不可更收 勅旨依奏 註60)와 같음. 李勤明, 五代宋初 胥吏存在形態의 變化와 그 性格 -胥吏制度의 確立過程과 關聯하여-,( 東洋史 學硏究 40., 1992.) 참조.
82 않고 선발한 短期의 非정직의 신분이라 하였다. 攝職은 憲宗 元和 12年의 徐州와 穆宗 長慶 2年의 晉州 使院의 幕職官 구성을 통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 다. 또한 元和 4年 (809) 淮西에서 吳少陽을 攝節度副使로 假署한 것과 代宗 大曆 11年 (776) 涇原에서 行軍司馬 兼 都知兵馬使 段秀實을 攝節度副使 兼 左廂兵馬使로 奏請하였 던 것을 통해 攝職이 기존의 주장과는 다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攝職은 攝 이라는 방식을 통해 선발했던 자체로서 단독의 직책으로 보이며, 벽소 과정 도 正職의 막직관과 마찬가지로 문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攝職은 帶職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의 승인을 통해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중앙으로부터 봉료를 지 급받았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藩鎭이 攝職을 설치했던 것은 중앙이 지속적으로 막 직관 인원을 줄이고 俸料를 지급하는 막직관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이 막직 관 인원을 줄였던 것과는 반대로 번진에서는 행정량이 점차 증가하였다. 번진은 기존의 막직관으로 처리하기 힘들어 지거나, 절도사에게 유고가 발생하여 留務를 담당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면 攝職을 설치하여 처리하였다. 藩鎭에서 攝職은 武宗 會昌 年間 에 이르면 관행적인 제도처럼 설치되었다. 그렇지만 攝職은 藩鎭의 財政에 의해 운영되 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운영하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설치 목적이 달성되면 廢置 하는 短期로 설치된 직책이었다고 하겠다.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 연구 春秋 에 대한 기본인식과 三傳의 활용을 중심으로 홍 승 태(한국외대 역사문화연구소) 目 次 1. 春秋 의 해석과 春秋 三傳의 활용문제 2. 당대 춘추학의 기본인식과 해석방법의 변화: 담조 조광 육순의 춘추학 3. 송대 춘추학의 정치성과 방법론적 특징 1. 春秋 의 해석과 春秋 三傳의 활용문제 春秋 는 孔子가 편수한 儒家의 주요 經典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춘추 魯나라 隱公 元年(기원전 722년)에서 哀公 14年(기원전 481년)까지 약 240여 년 동안 춘추열국의 전 쟁과 회맹 등 주요 정치적 대사를 기록하고 있는 편년체 史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記 述이 지나치게 간략하고 의미가 함축적일 뿐만 아니라 춘추 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설본 (전수본) 즉, 큰 난제는 左氏, 公羊, 穀梁 등 이른바 春秋三傳1)이 존재하였다. 춘추학의 가장 춘추 경전이 사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간략한 記事로부터 공자가 춘추 를 저술한 의도와 大義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춘추 해설본인 三傳은 공통점도 있지만 그 내용이 서로 다르기도 하다. 1) 춘추 삼전의 특징과 장단점에 대해 史記 와 漢書 그리고 陸德明의 經典釋文序錄 등에 의하면, 春秋 에는 세 가지 解說本(傳 授本)이 있다. 한 가지는 左氏春秋 로 秦代이전의 文字로 쓰여져 漢書 藝文志 에서는 春 秋古經 라고 불렀다. 다른 두 가지가 바로 公羊 과 穀梁 인데, 두 해설본 모두 口傳의 방식 으로 전해지다가 漢代에 와서야 문자로 기록되었다. 때문에 公羊 과 穀梁 은 今文 라고 부르 고, 先秦時期의 문자로 기록된 左氏 는 古文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해설본은 대 체로 비슷하긴 하지만 큰 차이도 존재한다. 예컨대, 魯襄公21年의 기재를 보면, 公羊 과 穀梁 에는 각각 11월 庚子에 孔子가 태어났다(十有一月庚子, 孔子生), 庚子에 孔子가 태어났다(庚 子, 孔子生) 라고 기록된 반면, 左氏 에서 이 記事를 찾아볼 수 없다. 楊伯峻 春秋左傳注 (中 華書局 2000년 7월판) 제5쪽 참조.
84 南宋의 朱熹(1130~1200)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左氏 는 일찍이 國史를 보고 그 사실을 고찰하는 데는 대단히 정밀했다. 그러나 그 大 義를 알 수가 없어서 오직 극히 일부분에 따라서 그 뜻을 이해할 수밖에 없으니 종종 講 學할 수가 없었다. 公羊 과 穀梁 은 사실의 고찰에는 매우 疏略되어 있지만, 그 義理는 ) 에 따라서 經典의 의미가 나오는 것이지만, 오히려 훌륭했다. 이 양자( 좌씨와 공양곡량 전해지는 것에 너무 많은 말들이 있어서 모두 國史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2) 三 傳에 대해 말하면, 左氏 는 史學이며 公羊 과 穀梁 은 經學이다. 사학은 역사사실을 기 록하는데 상세하지만, 그 道理 상에는 편차가 있다. 경학은 그 義理 상에는 그 공헌한 바 가 있지만, 記事에는 많은 오류가 있다. 3) 여기서 말하는 춘추 의 大義 혹은 義理란 經世大法으로 君臣 父子 兄弟 夫婦의 諸 關係, 華夷의 구분, 上下尊貴의 구별 등을 밝히는 정치의 원칙이자 윤리강령을 말한다. 특히 尊王攘夷 大一統 尊君抑臣 등의 원칙은 중앙집권강화와 주변 이민족에 대한 정책에 이념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때문에 춘추 는 다른 경전에 비해 현실정치에 대 한 지도적 계도적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經學으로써 春秋學의 목적은 경전에 대한 해석 에 집중되지만, 공자가 왜 춘추 를 편수했으며, 춘추 의 대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역대 시대별 춘추학자들이 집중해야 했던 문제였다. 이는 춘추 에 대한 기본 인식에 관 한 것이며, 춘추 를 연구하는 방법론적 특징을 결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 였다. 즉, 春秋學史에서 춘추 를 하나의 史書로 인식하고 이에 집중할 경우 三傳 가운데 左氏 를 선택하여 연구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춘추대의를 보다 강조하여 현실정치에 반 영하고자 할 때는 주로 公羊 이나 穀梁 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 삼전의 장단점을 상호 보완하여 절충적으로 활용하는 방법 역시 춘추학의 대표적 방법론이다. 본고는 唐 중기부터 시작된 춘추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새로운 방법론의 대두에 주 목하고 이러한 경학의 특징이 宋代에 이르러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했는가를 다루고 있 다. 특히 唐의 啖助 趙匡 陸淳의 방법론이 宋代 春秋學에 미친 영향과 그 특징을 중심으 로 고찰하고자 한다. 2) 3) 朱子語類 권83 春秋綱領 : 左氏 曾見國史, 考事頗精, 只是不知大義, 專去小處理會, 往往不 曾講學. 公 穀 考事甚疏, 然義理却精. 二人乃是經生, 傳得許多說話, 往往都不曾見國史. 中華書 局 1999년 6월판 제2151쪽~2152쪽. 같은 책, 권83: 以三傳言之, 左氏 是史學, 公 穀 是經學. 史學者記得事却詳, 於道理上便差; 經學者於義理上有功, 然記事多誤. 제2152쪽.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 연구 / 홍 승 태 85 2. 당대 춘추학의 기본인식과 해석방법의 변화: 담조 조광 육순의 춘추학 당대 전기 춘추 경전에 대한 인식은 春秋 와 左傳 을 동일시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春秋 는 대부분 左傳 을 지칭했다. 이는 춘추 를 일종의 역사서로 보 는 경향 때문이다. 唐初 당 태종의 詔令에 따라 孔穎達 등이 易 禮記 春秋 가운데 春秋 는 (661~721)는 五經正義 즉 詩 書 등 유가의 다섯 가지 경전에 대한 주해작업을 진행했는데, 이 春秋左傳正義 로 편수하였다. 또한 당대 저명 史學家인 劉知幾 公羊 과 穀梁 에 대해 회의적이며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을 저술한 그는 역사적 관점에 春秋 를 이해하고 접근했다. 史通 정체 경향을 보이던 당대 춘추학은 啖助 趙匡 陸淳 등 中唐 시기의 대표 학자들에 의 해 새로운 변화가 주도되었다. 사제관계이기도 한 세 인물의 춘추학사에서의 공헌은 춘 추 경전 본래의 뜻에 접근하기 위해 三傳의 장단점을 균형적으로 취사 절충하려한 시도 에 있었다. 담조(724~770)는 춘추 三傳이 각각 며, 삼전의 장단점을 상호 보완해야 만이 다. 즉 춘추 의 原義에 접근하는 데는 모두 실패했으 춘추 의 본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 좌씨 에서 소략되거나 정밀한 부분을 고찰하고 공양 과 곡량 의 장단점을 분 별해야 하며, 상호 극단적인 차이가 있는 부분을 제거하고 미진한 부분을 상호 보완한다 면 본의에 밝게 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4) 春秋集傳纂例 에서 담조는 나는 三傳을 상세하게 고찰하여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였다. 또한 前代 학자들의 註釋을 종합하 기도 했으며, 내 자신의 관점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기도 했다. 5)고 진술하였다. 여기 서 주목할 말한 것은 三傳의 취사와 절충적 방법 이외에도 前代 학자들의 註釋을 참고하 고 나아가 자신의 관점에서 해설을 덧붙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방법은 孔穎達 등의 五經正義 이래로 줄곧 춘추 를 좌씨 로 이해했던 당대 전기 춘추학의 경향과 다른 새 로운 인식과 방법이었다. 특히 춘추 에 대한 기본인식에서 나는 춘추 가 시대의 폐단 을 구제하고 예의질서가 薄弱해지는 것을 개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6)는 원칙을 분명하 게 밝히고 있다. 이는 춘추 를 단지 춘추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편년체 史書로만 보지 않고, 역사사실 이면에 내포된 春秋大義가 시대를 초원해 여전히 현실정치에 대한 지도 4) 5) 6) 代國子陸博士進集注春秋表 : 考 左氏 之疏密, 辨 公 穀 之善否, 務去異端, 用明本意, 助或未 盡, 敢讓當仁. 春秋集傳纂例 권1 啖氏集傳注義 春秋集傳纂例 권1 春秋宗指議第一 : 予以爲 春秋 者, 救時之弊, 革禮之薄.
86 적 의의를 갖는다는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趙匡 역시 공자가 춘추 를 편수한 목적과 의도는 王道를 밝히는 데 있었으며(明王道), 때문에 춘추 는 救世 의 목적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춘추 가 마치 사람의 병을 치유하는 침이나 약과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몸에 비유해 본다면, 춘추 가 만약 養生의 법이라면 병을 예방할 수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병이 이미 생겼다면, 양생의 책 그 자체가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실제로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침과 약일 뿐이다. 그러므로 춘추 는 역시 세 상을 치유하는 침과 약인 셈이다. 7) 이렇게 춘추 를 經世致用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는 그가 처했던 정치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唐 玄宗 天寶연간(742~756) 번진 절도사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중앙은 점차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황제의 지위와 권 위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으며, 安史의 난(755~762)이 폭발하면서 당왕조는 쇠퇴의 길 로 접어들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山東과 河北일대의 번진할거의 형세는 더욱 가속화 되었고, 안으로 宦官의 득세는 朝廷의 정치를 더욱 문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실은 唐 肅宗과 代宗시기에 살았던 조광 자신의 춘추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러한 경향은 춘추학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宋代 학자들에게도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 가 운데 하나이며, 역시 송대 춘추학에 미친 영향이기도 하다. 四庫全書 는 二程의 말을 인용해 春秋集傳纂例 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론하였다. 이전 다른 春秋家들보다 뛰어난 점은 異端을 몰아내고 정통을 열어놓은 공로였다. 三傳 의 편중됨을 버리고 春秋 經文의 본래 뜻을 밝히고자 했는데, 이는 실제로 宋人들의 앞 길을 인도해 주었다. 8) 南宋의 장서가이자 서지학자인 陳振孫은 直齋書錄解題 에서 漢 儒이래 春秋 를 말하는 사람들은 三傳을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 여겼지만, 三傳 이외에 탁월한 식견이 천년 후에도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啖助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 공로는 사라질 수 없다. 9)고 높이 평가하였다. 淸代 경학가 皮錫瑞(1850~1908)는 經學通論 에서 春秋 三傳을 두루 종합하여 채용한 것은 啖助부터 시작되었으며 근래 三傳을 종합 하여 한 권으로 저서로 만든 것은 唐 陸淳의 春秋簒例 에서 시작되었다. 육순은 담조와 조광의 학설에 근원을 두었으며, 삼전을 두루 채용하고 취사ㆍ선택하여 한 권으로 합하 였다. (삼전의) 각 부문을 通學으로 변화시킨것은 춘추경학의 일대 변화였으며, 춘추학을 7) 8) 9) 春秋集傳纂例 권1: 喩之一身, 則養生之法, 所以防病, 病旣作矣, 則養生之書不能治也, 治之者 在針藥耳. 故 春秋 者, 亦世之針藥也. 四庫全書 春秋集傳纂例 : 程子則稱其絶出諸家 有攘異端開正途之功 蓋合傳求經 實導宋人之 先路. 直齋書錄解題 권2: 漢儒以來, 言 春秋 者惟宗三傳, 三傳之外, 能卓然有見于千載之後者, 自啖 氏始, 不可沒也.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 연구 / 홍 승 태 87 연구하는 宋儒들 모두 이 일파에 속한다. 10) 이상의 평가로부터 알 수 있듯이 당 중기부 터 시작된 춘추학의 인식과 방법의 변화는 송대에 영향을 주었다. 첫째, 章句 해석에 치 중하는 훈고학적 방법에서 내재적 의미구조를 파악하는 해석으로의 전환이다. 당 중기 이전까지 춘추학 연구는 대부분 글자 해석위주의 훈고학적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 지만, 담조 조광 육순 등의 학자들로부터 새로운 해석과 방법이 시도되었다. 특히 三傳을 절충적으로 취사 선택하는 방법을 채택했는데, 이는 이전의 춘추학이 오직 삼전 가운데 하나에만 선택하여 연구하는 전통적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특히 담조는 이전 학자들의 주석을 참고로 삼전과 더불어 모두 춘추 경전을 해석하는 데 활용하였다. 또한 전대 학 자들의 해설을 수집하고 그 가운데 타당한 부분을 적절하게 선택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해설을 덧붙인 점 또한 이 시기 춘추학의 방법론적 특징이다. 3. 송대 춘추학의 정치성과 방법론적 특징 당 중기부터 시작된 춘추학의 변화는 송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경학사의 범위에서 宋 代 학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한 경전이 바로 春秋 이다. 宋史 藝文志 의 통계에 의하 면, 經典類 총 1304部 가운데 春秋 는 240部로 가장 많았고, 易 이 230部로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었다.11) 또한 역대로 보아, 春秋 를 講說한 학자가 兩宋에 가장 많았다.12) 이처럼 春秋學이 宋代에 흥성했던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春秋 가 다른 儒家經典에 비해서 현실정치의 요구와 직접적으로 부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思辨的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易 이 哲學的이고 春秋 는 일종의 政治 敎科書 로서 君主에게 유가적 통 치이념의 大綱을 제공하고, 儒家的 소양을 지닌 관료들을 통해 그 理想을 현실정치에 실 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經典이었기 때문이다. 五代時期의 장기적인 정치적 혼란을 거쳐 건국한 宋朝에게 안으로 중앙집권의 강화와 밖으로는 주변국의 대한 대응이라는 정치적 요구는 10) 11) 12) 春秋 에 내포된 이른바 尊王 과 攘夷 라는 大義와 정면으로 부합되는 것이었 經學通論 권4 春秋 : 春秋 雜采三傳, 自啖助始. 今世所傳合三傳爲一書者, 自唐陸淳 春秋 纂例 始. 淳本啖助 趙匡之說, 雜采三傳, 以意去取, 合爲一書, 變專門爲通學, 是春秋經學一大變. 宋儒治春秋學者, 皆此一派. 經典類 총 1304부 13608권 가운데 春秋 는 240부 2799권에 달하고 있고, 그 다음으로 易 230부 1740권, 小學 206부 1572권, 禮 113부 1399권, 樂 111부 1007권, 詩 82부 1120 권, 論語 73부 579권, 書 60부 802부 經解 58부 753권, 孝經 23부 35권 등이다. 宋史 卷202 志 第155 藝文 1. 四庫全書總目提要 券29, 日講春秋解義 條.
88 다. 때문에 宋代 春秋家들은 이러한 春秋大義에 입각해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 比喩 의 방식으로 현실정치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해석가 자신이 처한 현실정치의 상황을 반 영하여 春秋 에 대한 재해석과 비판을 진행했는데, 북송 孫復(992~1057)의 微 와 남송 胡安國(1074~1138)의 胡氏春秋傳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春秋尊王發 이들은 송대 춘추학이 가지고 있는 특질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宋初 三先 生 가운데 한 명인 孫復은 그의 저서 春秋尊王發微 를 통해서 尊王 과 攘夷 의 대의 가운데 尊王 의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북송 중기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제도적 정비가 절실했던 宋朝에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의 방법론은 당말 啖助, 趙匡, 陸淳 등의 춘추가들을 계승한 것이지만, 三傳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 송대 춘추학의 선도적 영 향을 미쳤다. 兩宋의 五朝를 경험한 胡安國은 북송의 멸망과 靖康의 치욕 을 목격하면서 尊王 의 기초 위에 攘夷 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였다. 이 역시 남송 초, 송조가 직면했던 대내외적 현실을 반영했던 것인데, 淸儒 王夫之는 胡氏春秋傳 에 대해 尊王과 攘夷의 대의를 저술해 高宗에게 알리고 세상에 전해지게 했다. 이는 人心을 바로 잡고, 靖康의 치욕을 씻으며, (송조로 하여금) 建炎의 衰落으로부터 일으키고자 한 것이니, 진실로 당 시의 龜鑑이었다. 13)고 평가하였다. 송대 춘추가들에게 春秋 는 역사고증을 필요로 하는 史書라기보다는 여전히 간략한 역사사실에 함축된 유가적 정치이념 즉 尊王 과 攘夷 를 표달하는 經書로서의 의미가 더욱 컸다. 즉, 春秋 는 君父를 尊崇하고, 반란의 적을 토벌하며, 邪說을 배격하고, 人 心을 바로 잡으며, 中華로 오랑캐를 제어하는 經世의 大法 14)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春秋 大義는 이른바 尊王 과 攘夷 로 함축되는데, 尊王은 군주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중앙집 권의 강화를 의미하며, 攘夷는 왜구의 침략을 제어하는 것을 의미했다. 唐末 五代에 藩 鎭勢力이 强盛하고, 빈번한 왕조의 교체와 이에 따른 극도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은 宋朝 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무엇보다 송조는 개국 초부터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한 정치 적 제도적 조치를 취했는데, 春秋 에 내포된 尊王攘夷 는 이러한 현실에 가장 잘 부합 되었다. 바꿔 말해 송조의 대 내외정책에 대한 이념적 근거를 제공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대 중기부터 시작한 春秋三傳에 대한 선택적 절충적 방법은 송대 춘추가들에 게 보편적으로 활용되었다.(표1/2 참조) 春秋 를 주해한 좌씨 공양 곡량 등의 三 傳이 모두 그 자체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러한 결함 자체 가 송대 춘추가들의 다양한 방법론과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三傳에 대한 13) 14) 王夫之, 宋論 臺灣里仁書局 1985년 2월판 제184쪽. 春秋胡氏傳 春秋傳序 吉林出版集團 2005년 5월판 제5쪽.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 연구 / 홍 승 태 89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채용의 방식과 파격은 한편으론 송대 疑經思潮를 반영하는 것이지 만,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송조가 직면한 대내외적 정치현실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춘추학은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朱 熹는 胡氏春秋傳 에 대해 牽强附會 15)라고 비판했고, 四庫全書總目提要 에서는 胡安 國이 당시 현실의 문제에 격한 느낌을 가지고서 종종 春秋 를 빗대어 그 의미를 전달 했다. 따라서 그 하나 하나를 經典의 원래 의미에 부합시킬 필요는 없다 16)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春秋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정치적 의도와 목적에 의한 저술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실, 胡安 國은 春秋 를 史外傳心의 要典 17)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역사사실을 넘어 聖人의 뜻 을 전달하는 儒家의 經典이란 의미이다. 즉, 그는 春秋 가 역사고증을 요구하는 史內 의 斷代史가 아니라 史外 로 春秋大義를 밝히는 聖經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 춘추대의 를 표달하는 방법과 그 내용에 있어서는 송대 춘추가들마다 차이가 있었고, 춘추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했던 것이다. <표 1> 北宋 주요 춘추학자의 春秋三傳 활용표 저자 歐陽修 孫 復 周堯卿 서명 春秋三傳의 취사와 절충 學者不信經而信傳, 不信孔子而信三子 春秋或問 春秋尊王發微 春秋說 讀春秋者, 可以三隅反矣 不取三傳注, 其言簡而義詳 大約本于陸淳, 而增新義 至三傳之異同, 均有所不取 曰 聖人之意豈二致耶 據三傳注疏及啖趙之學, 缺者以己意釋之 王 晳 春秋皇綱論 胡 瑗 春秋口義 以 谷梁 為主 融會三傳, 取其長義 春秋權衡 平三傳之得失, 然後集眾說, 斷以己意 春秋意林 等 知經而不廢傳, 亦不盡從傳, 據義考例, 以折衷之 兼取三家而折衷其是 旁考啖 趙 陸淳諸家之義, 劉 敞 출처 春秋論 經義考 宋史 儒林傳 宋史 儒林傳 玉海 春秋經社要義 直齋書錄解題 經義考 而推演明復 朱長文 春秋通志 王 當 春秋釋 等 議論純正, 文辭簡古, 于經傳多所發明 經義考 沈 括 春秋機括 取丘明所著二書, 用司馬遷 史記 法 張 根 春秋指南 專以編年, 旁通該括諸國之事 略舉要義, 多所發明 文獻通考 春秋臣傳 以人類事, 凡二百五人, 附而名者又三百九也 經義考 之言, 頗系之以自得之說 春秋通志 序 直齋書錄解題 鄭 昂 孫 覺 春秋經解 多主 谷梁 之說, 而參 左氏 公羊 宋元學案 轍 春秋集解 事本 左氏, 不得已乃取二傳 直齋書錄解題 蘇 程 15) 16) 17) 頤 春秋傳序 左氏 不可全信, 而 公羊 谷梁 又次於 左氏 朱子語類 권83, 中華書局 1999년 6월판 제2155쪽. 四庫全書總目提要 : 感激時事, 往往借 春秋 以寓意, 不必一一悉合於經旨. 春秋胡氏傳 春秋傳序 吉林出版集團 2005년 5월판 제4쪽. 河南程氏遺書
90 朱 臨 春秋統例 吳 孜 春秋折衷 유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唐 啖助의 春秋統例 와 서 명이 같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유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唐 陳岳의 春秋折衷論 과 서명이 같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排比事實為儷句蒙求之類也 據經傳歲月為表首敘周魯繼以齊晉秦宋衛陳蔡曹鄭呉楚越之國 春秋集傳 乃集三傳之說, 刪為一書 郡齋讀書志 經義考 春秋要論 等 春秋集議略論 左氏多記事, 公 谷專解經 然考之有得失 辨三傳諸家得失, 及采陳岳折衷 經義考 玉海 副 春秋三傳同字 經有例法, 一家所至, 較然重輕 文獻通考 文濟道 楊彥齡 左氏綱領 左氏春秋年表 王 沿 賈昌朝 李堯俞 丁 杜 崇文總目 諤 春秋會義 集三十余家, 成一書, 其後仍斷以己意 郡齋讀書志 王 乘 余安行 春秋統解 推明筆法, 得其大旨 歷代名臣奏議 劉 弇 春秋講義 黎 錞 春秋經解 其書為經觧者, 言以經解經也 其後又為統論附焉 朱 振 春秋指要 等 不拘類例, 專取經意 春秋新傳 采三傳及孫復四家書, 參以己意為之 經義考 左氏 公 穀, 其大致不必一一盡同 龍雲集 文獻通考 經義考 <표 2> 南宋 주요 춘추학자의 春秋三傳 활용표 劉 許 저자 絢 翰 羅從彥 胡安國 葉夢得 江 琦 張九成 蕭 楚 崔子方 張大亨 康 既 胡 寧 呂本中 高 闶 劉 朔 陳傅良 呂祖謙 張 洽 魏了翁 李明復 黃仲炎 蔡 沆 趙鵬飛 呂大圭 王應麟 家鉉翁 鄧名世 서명 春秋傳 襄陵春秋集傳 春秋三傳의 취사와 절충 祖于程氏, 專以孔孟之言斷經意 舍經而信傳, 則是得枝葉而忘本也; 棄傳而觀經, 則是去甘石 梁溪集 書襄陵春 春秋指歸 胡氏春秋傳 石林春秋 等 之書而窺天也, 二者胥失, 餘患此久矣 春秋 之揜於傳 注也, 猶鑒揜於塵 事按 左氏, 義取 公羊 谷梁 之精 酌三家求史與經 春秋講義 依 春秋 事例, 而發揮 孟子 之義 春秋辨疑 等 출처 宋元學案 獨研究春秋之旨, 裒古今傳注, 參挍取捨 秋集傳後 豫章文集 斐然集 直齋書錄解題 經義考 春秋經辨 自漢唐以來, 春秋專門, (蕭)楚獨以經授 江西通志 春秋邦典 取周官而折衷焉, 以暢孔子不說之意 經義考 春秋經解 等 春秋通訓 春秋通旨 春秋解 等 息齋春秋集注 春秋比事 春秋後傳 左氏傳說 等 春秋集注 春秋要義 春秋集義 春秋通說 春秋五論 等 春秋集筌 春秋五論 等 春秋三傳會考 春秋傳詳說 春秋四譜 辨三傳之是非, 而傳以日月為例 丘明(左氏)因事發凡 大概本諸程氏 胡氏蓋多取之, 欲觀正傳 直齋書錄解題 春秋通訓 後序 經義考 自三傳而下, 集諸家之說, 其所擇頗精 呂氏春秋集解 即經類事以見其始末, 可以舍傳而獨考 春秋比事 序 其學專本程氏, 序文可見 通二傳于 左氏, 以其所書, 證其所不書 取 左氏 之文, 分別為十九目 集諸家之長, 而折衷於至當 專取丘明(左氏)之傳, 以釋孔氏之經 取惇頤以下十七家, 乃定其先後, 審其精粗 彼三傳者, 不知其紀事皆以為戒也 自左氏 公 穀以來, 傳注者無慮百家, 往往辭舛意詭 三傳固無足據, 舍傳從經 三傳要皆失實, 失之多者, 莫如 公羊 三傳皆有得於經而有失焉 三傳之是者取焉, 否則參稽眾說而求其是 考三傳同異往往發諸儒所未及 直齋書錄解題 左氏傳輔注 序 四庫全書總目 春秋集注 序 春秋要義 春秋集義 春秋通說 序 經義考 春秋經筌 序 春秋或問 跋 困學紀聞 春秋傳詳說 序 經義考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 연구 / 홍 승 태 高元之 春秋義宗 凡三百餘家, 訂其指歸, 刪其不合者, 會稡為一書 攻媿集 劉 夙 範士衡 春秋講義 劉公 講義 一以聖筆為據依 閩中理學淵源考 趙 黃 瞻 震 春秋經解義例 春秋本末 等 讀春秋 先之 左氏 而不合, 則求之 公 穀 春秋一經, 其說曼衍, 皆傳注害之 是則非以義理求聖經, 反以聖經釋凡例也 景迂生集 江西通志 黃氏日抄 91
당송시기 妾의 생활 夫妾관계의 계약적 특성을 중심으로 최 해 별(이화여대) 目 次 머리말 一. 표현방식의 차이: 娶妾, 納妾, 買妾 二. 夫妾 관계의 성립 과정: 계약적 특성의 강화 三. 당송시기 첩의 신분적 변화: 그 유동성 에 대하여 餘論: 妾과 婢(女使) 경계의 모호화 머리말 당률의 규정에 의하면 가정에서의 첩과 비는 신분적으로 볼 때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당률은 以婢爲妾 을 금지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1) 이렇듯 비와 첩의 신분적 차이는 확 실한 듯 보이는데, 남송 시기 사람들의 언설 속에서, 그 신분적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 전형적인 예로 유극장은 전현승의 첩인 유씨와 그 아들의 여사인 추국 사이의 재산 분쟁에 관한 판례문에서, 이 둘을 두고 止是兩個所生母耳 라고 하여 그 경계가 불분명함을 드러내고 있다.2) 송대 첩과 비의 경계의 불분명함은 기존의 연구자들의 토론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 데, 이브레이는 송대 첩의 지위는 노비에 가깝다고 지적한 바 있다.3) 본 논문에서는 당 1) 唐律疏議 卷一三 諸以妻為妾 條, 中華書局, 1983년, 256 257쪽. 中華書局, 2002년, 251 256쪽. Patricia Buckley Ebrey, Concubines in Song China, Journal of Family History 11, 1986, pp.1-24 2) 清明集 卷八 繼絕子孫止得財產四分之一, 3)
94 송시기 첩이 夫(主君)4)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중심으로 가정에서의 첩의 위치 및 그 생 활상(像)을 토론해 보고자하며, 이를 통해 당송시기 특히 송대 첩과 비(여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향에 대한 부분적 설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당송 사회의 소위 雇傭契約 의 발전은, 첩이 남주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송 시기 고용 계약에서의 여성과 관련된 기존의 토론은 주로 婢, 女使에 대한 토론에 집중해 있었다. 그러나 이시기 첩 역시 점차 계약의 형식으로 주군에게 고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본 논문은 고용 계약적 특징의 강화가 당송시기 첩의 생활에 어떤 영향 미쳤는지, 또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고용 계약 이라고 하는 것은 현대적 의미의 고용계약과 분명한 차 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송대의 雇婢 성격을 토론한 한 연구에서는, 송대의 雇 는 고용 과 다르며 매매 에 더 가깝다고 지적했다.5) 그러나 당시 雇婢가 고용이냐 매매냐 라는 양자택일 식 토론에 제한되면 정태적 관찰에 머무르게 된다. 연구자에게 더욱 필요 한 것은, 당시 비녀가 가정에 들어오는 방식이 어떠한 새로운 경향의 변화를 보이고 있 고, 이 변화가 어떤 요소를 통해 드러나는지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첩에 대한 토론에 있어서도, 첩이 주군과 관계 맺는 방식에 어떤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어 떤 요소를 통해 이 경향이 드러나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당, 송대의 첩에 관한 연구는 이미 많이 이루어졌지만,6) 비교사적 시각으로 당송시기의 변화에 대한 조명은 부족하다.7) 필자는 당송시기 첩의 처지에 대한 비교를 통해 당송시기 사회의 변화가 첩의 생활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자 한다. 본고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뉘는 데, 먼저 당송시기 첩을 들이는 것에 대한 표현 방식의 차이를 살핀 연후, 첩을 들이는 과 정을 추적하며, 마지막으로 송대 가정에서의 첩의 유동적 특징을 토론하고자 한다. 4) 5) 6) 7) 소위 夫妾 관계라고 하는 것은 첩과 남자 주인의 관계를 의미하며, 夫 를 남 주인, 혹은 당송 시기의 표현으로 主君 이라 하기도 한다. 그 적절한 용어에 있어서는 충분한 토론이 필요하다. 桂始馨, 宋代雇婢性質淺析, 史學月刊 2005年第4期, 30쪽. Patricia Ebrey, Concubines in Sung China, Journal of Family History 11, 1986, pp.1-24; The Inner Quarters: Marriage and the Lives of Chinese Women in the Sung Perio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pp.217-234; 焦杰 唐代的姬妾及其社会地位, 陕西师范大学学报 1996年 第2期, 109-114쪽; 姚平 唐代女性的生命历程, 2005年, 144 172쪽. 이 외에 최근 석 사학위 논문으로, 张琰琰 唐代妾侍问题研究 (中山大学硕士学位论文, 2004年)와 吕永 宋代的 妾问题研究 (安徽师范大学硕士学位论文, 2007年) 등이 있다. 당송시기의 변화를 조명한 토론은 부족하며, 송원시기의 첩에 대한 토론으로는 Beverly Bossler 의 宋元墓誌中的 妾 在家庭中的意義及其歷史變化 가 있다. (2003年 10月, 대만 臺北東吳大學 에서 개최된 宋代墓誌史料的文本分析與實證運用 國際學術研討會 논문집) 그러나 이 논문은 주 로 모친으로서의 첩에 대한 토론에 집중하여, 첩과 주군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부족 하다.
당송시기 妾의 생활 / 최 해 별 95 一. 표현방식의 차이: 娶妾, 納妾, 買妾 기존의 첩과 관련된 연구에서는 주로 첩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칭호에 대해 분석을 진 행했다. 여기에서는 주로 첩을 들이는 행위에 대한 표현 방식, 즉 서술어 부분 娶, 納, 買, 雇 등의 변화를 살피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서술어의 변화가 첩에 대한 당 시 사람들의 태도나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즉 똑같이 매매의 방식으로 첩을 들였다 하더라도 그 서술어가 다를 수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각종 사료에서 보이는 표현 방식을 고찰 할 때, 우선 그 사료의 유형을 주의해야 하는 데, 법률 조항, 묘지명, 필기소설 등, 서로 다른 종류의 사료에서 나타나는 표현 방식은 서로 다르다. 당대 법률에서 첩과 관련된 규정을 언급할 때는 주로 買 자를 썼다. 아마도 법률에서 첩의 신분상의 특징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률은 妾通買賣 라 언급하고 있 고,8) 同姓 의 결혼을 금지하는 조항에서는 買妾不知其姓, 則卜之 9)라고 하였다. 그러나 묘지명, 필기 소설 등을 보면, 買 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대 첩의 묘지명 에서는 주로 納妾 이라 썼다. 천보 년간의 故美人李二娘墓誌銘 의 기록을 보면, 李氏 者, 王公之美人也 王公好奇賞異, 求聘納焉 10)라고 하였다. 大中 년간 (847-860)의 前監察御史歸仁晦의 첩 지씨의 묘지명을 보면, 予以開成元年納支氏, 以備紉針之役 11)라 하였고, 咸通 년간(861 874)의 唐張氏墓記 를 보면 咸通五年, 有劉異自鳳翔節度使移 鎮于許, 始面張氏 八年, 納而貯於別館 12)라 하였다. 당대 필기 소설을 보면, 역시 納 자로 묘사하고 있다. 梁襄陽杜嶷新納一妾 13), (柳)元 公為西川從事, 嘗納一姬 14)라고 하였다. 어떤 경우, 娶妾 이라고 쓰기도 했다.15) 이렇듯 당대 개인들의 저작에서는 買妾 이라는 표현을 찾아보기 어렵다. 신분을 규정하거나 규 범적인 내용을 언급하는 법률의 경우, 주로 매 자를 쓰지만, 구체적인 한 개인의 첩을 들이는 행위에 관해서는 매 자로 표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8) 唐律疏議 卷一三 諸以妻為妾, 256쪽. 262쪽. 10) 唐代墓誌彙編續集 天寶061 故美人李二娘墓誌銘, 625쪽. 11) 唐代墓誌彙編 大中076 缺題, 2307쪽. 12) 唐代墓誌彙編續集 咸通096 唐張氏墓記, 1108쪽. 13) 太平廣記 卷一二九 杜嶷妾, 中華書局, 1995년, 913쪽. 14) (唐)趙璘 因話錄 卷三, 唐五代筆記小說大觀, 上海古籍出版社, 2000年, 851쪽. 15) (唐)張讀 宣室志 卷三 有吳生者, 江南人 嘗游會稽, 娶劉氏女為妾, 唐五代筆記小說大 觀, 1008쪽. 太平廣記 卷二七二 杜蘭香 杜蘭香降張碩 碩妻無子, 取妾,2144쪽. 9) 唐律疏議 卷一四 諸同姓為婚者,
96 현재 남아 있는 송대 망첩 묘지명 은 그 수가 많지 않다. 송대 망첩 묘지명에는 역시 納 자가 보인다. 예를 들면, 嘉定十五年(1222)에 세상을 떠난 曹彥約의 妾 王氏의 墓誌銘 을 보면 昌谷居士曹某之妾王氏, 居士納王氏 16)라 하였으며, 또 劉克莊이 첩 陳氏를 위해 쓴 묘지명을 보면, 그는 처가 죽은 후 재혼하지 않았고, 이에 先親魏國為余納之 17) 라는 기록이 나온다. 묘지명과 다르게 송대 필기 소설을 보면, 거의 모두 買 자를 사용하고 있다. 政和 (1111 1118) 初, 建州 貢士 黃崇은 母既亡, 父年過六十, 買妾有娠,18) 淳熙二年(1175) 甌寧人 范斗南은 買一妾, 寵之 19), 興元統制潘璋은 在臨安時, 買一妾 20), 徐州人 竇公邁 은 靖康中買一妾 21)이라 했다. 夷堅志 는 대부분 買 자로 묘사하고 있고 納妾 이라 는 표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외에 사대부들도 그의 저술에서 그대로 매첩 이라 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 朱熹 역시 行狀을 쓸 때 매첩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22) 또, 송대 馮京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풍경의 부친은 아들이 없어 그 처가 친히 그에 게 돈을 주며 첩을 사라고 권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의 매첩 행위를 묘 사할 때, 及至京師, 買一妾, 立劵償錢矣 라 쓰고 있다.23) 물론 이 기록 자체는 후대인 들에 의해 꾸며진 내용이지만,24) 특별히 첩을 들이는 과정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서사방 식을 반영하고 있어 주목할 만 하다. 문맥상 여기에서 계약을 맺고 금액을 지불하는 과 정을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이며, 저자 역시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려는 의도 는 없어 보인다. 그저 立劵償錢 이라는 말로 매첩 의 과정이 순조롭게 끝났음을 표현하 고자 한 것 같다. 立劵償錢 은 당시 매첩 행위에 대한 서사 방식으로 立券 의 제도화 정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첩을 들이는 행위를 표현할 때 송대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매 자를 사용했다. 물론 상 술한 두 망첩묘지명에는 납 자를 썼지만, 이는 묘지명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고, 어느 정 도 그녀들의 가정에서의 위치 또는 그들에 대한 주군의 태도 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 曹彥約 昌穀集 卷二〇 王氏壙銘, 文淵閣四庫全書本 劉克莊 後村先生大全集 卷一六一 山甫生母, 四部叢刊本 18) 夷堅志 丁志卷五 三士問相, 573쪽. 19) 夷堅志 支丁卷八 范斗南妾, 中華書局, 1029쪽. 20) 夷堅志 支庚卷六 潘統制妾, 1179쪽. 21) 夷堅志 乙志卷三 竇氏妾父, 205쪽. 22) 朱熹 晦庵先生朱文公文集 卷九五下 少師保信軍節度使魏國公致仕贈太保張公行狀下 初娶楊 國夫人樂氏, 旬日被命召, 即造朝, 及為侍從, 或以公盛年, 勸買妾 公曰 國事如此, 太夫人在遠, 吾何心及此 遂終身不置妾, 四部叢刊本. 23) 羅大經 鶴林玉露 乙編卷四 馮三元, 中華書局, 1997年, 192쪽. 24) 鄧小南 剪不斷, 理還亂 有關馮京家世的 拼織, 黃寬重主編 基調與變奏 七至二十世紀的中 國 ①, 臺灣政大歷史系等出版, 2008年, 183 184쪽. 16) 17)
당송시기 妾의 생활 / 최 해 별 97 겠다. 결론적으로 당송시기 개인들의 저작을 보면, 비록 개별적이고 다양한 예외가 있긴 하 지만, 대체로 납첩 에서 매첩 으로 변화되는 추세를 찾아낼 수 있다. 송대로 올수록 매 첩 의 표현이 많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무엇인가? 이러한 표현 방식의 변화는 가정에 서의 첩의 생활의 변화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 것인가? 二. 夫妾 관계의 성립 과정: 계약적 특성의 강화 첩을 들이는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한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25) 본 논문 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첩을 들이는 과정에서 나타난 기한을 정하는 경향 및 중개인의 역 할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론을 함으로써 첩과 주군의 관계에서 나타난 계약적 특징들 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왕의 연구자들은 첩을 들일 때 買妾과 雇妾(典妾)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는데, 이러한 토론 방식은 마치 置妾에 있어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존재하 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필자는 매첩과 고첩이 완전히 다른 병존하는 방식이라기보다 고 첩은 매첩과정에서 기한을 정하는 현상이 발전함에 따라 나타나는, 일종의 매첩 방식의 구체적 발전 추세라 파악하고자 한다. 1. 첩을 들일 때 기한을 정하는 추세 첩을 들일 때 기한을 정하는 사례는 당대에 이미 나타난다. 新唐書 李德裕의 전에 는 蜀人多鬻女為人妾, 德裕為著科約 凡十三而上, 執三年勞; 下者, 五歲; 及期則歸之父 母 26)라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어떤 배경 하에 당송 시기 기한을 두는 경향이 나타났는 지 살피고자 한다. 이덕유가 위와 같은 규정을 정하게 된 주된 의도는 어린 여성들이 혼기에 이르면 결혼 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이 첩으로 팔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 다. 여기서 기한을 정하는 것은 일종의 팔려나가는 어린 여자 아이들을 구제하는 대책으 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으로, 태평광기 의 기록을 보면, 강릉의 어느 士子는 첩에게 5년의 양식을 제공 25) 吕永 宋代的妾问题研究, 安徽师范大学硕士学位论文, 2007年, 9-14쪽. 中華書局, 1997년, 5332쪽. 26) 新唐書 卷一八 李德裕傳,
98 할 것을 약속하고, 5년 이내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도 좋다고 했 다. 5년 후 그가 돌아오지 않자, 첩은 전임 자사의 첩이 되었다.27) 5년의 약속은 아마도 당시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았고, 게다가 앞으로의 상황도 예측할 수 없어 정해놓은 기 간이었을 것이다. 기한을 정하는 현상과 관련하여 상술한 歸仁晦의 妾 支氏의 墓志를 보면, 開成원년 (836) 귀인회는 지씨를 첩으로 맞았다. 묘지명에서는 그에게 紉針之役 을 맡기기 위함이 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에 귀인회가 정처를 맞자 첩 지씨는 본가로 돌아갔다.28) 주군이 정식 혼인을 한 후에 첩이 본가로 돌아가는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이는 주군이 정식 처를 맞을 때, 원래 있었던 첩의 귀속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당시 현실 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당시 사람들은 첩을 맞을 때 일정 정도 기 한에 대한 약속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러한 기간은 구체적으로 연한을 정해놓은 것은 아니며 처를 들이기 전까지 정도의 잠재적 기한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사한 상황은 필기소설에서도 보인다. 竇凝은 박릉 최씨와 결혼을 하는데, 혼약의 조 건 중 하나가 현재의 첩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竇凝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결국 잔인 한 방법으로 첩을 죽이고 혼례를 올린다.29) 비슷한 사례는 남송 시기 필기소설에서도 보 인다.30) 이렇듯 정처를 맞을 때 첩의 귀속문제가 자주 남자들을 난처하게 했으므로, 첩을 들일 때 기한을 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남송 시기에 이르면 기한을 정하는 현상이 더욱 보편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夷堅志 한 이야기를 보면, 전 형주통판 손조청은 吳知閣의 집에서 세 명의 첩이 다시 팔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주부와 함께 첩을 사기 위해 중개인을 찾았다. 우선, 원문에서 세 명의 여성에 대해, 한 사람은 可補半年, 彼二人則在吳宅未久, 當立三年券 라고 언급된 것을 보면,31) 이 세 명의 첩은 매매를 통해 혹은 다른 경로로 오씨 집에 들 어갔고 다시 내다 팔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나 혹은 현실 에서 첩은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는 그런 존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한을 상의하는 일은 액수를 논하여 계약을 쓸 때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손씨와 정씨가 어느 첩을 살 것인지 최종 결정을 내릴 때 가장 크게 고려했던 요소는 그녀들의 고용 가능한 기한이었다. 또, 계약 기한의 長短은 이미 가격을 결정하는 주된 요소가 되 27) 太平廣記 卷一六八 氣義三 江陵士子, 1224쪽. 28) 唐代墓誌彙編 大中076 缺題 予以開成元年納支氏, 以備紉針之役, 由是育五男二女 二子少女 不幸早世 予 以禮娶鄭夫人, 而支氏以 乞歸養于其父母家, 至是 卒, 2307쪽. 29) 太平廣記 卷一三〇 竇凝妾, 919쪽. 30) 夷堅志 補卷一〇 朱天錫, 1641쪽. 31) 夷堅志 補志卷八 鄭主簿, 1620 1621쪽.
당송시기 妾의 생활 / 최 해 별 99 었으며, 이는 당시 매첩 계약에서 기한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첩의 기한과 관련하여 周密 癸辛雜識 別集卷下 銀花 의 기록은 중요하다. 경원 6년 (1200), 고문호가 67세가 되던 해 은화를 첩으로 맞았는데 그저 탕약을 수발들게 할 목 적이었다. 그 후 하씨(은화)는 고문호의 첩으로 11년을 살았다. 처음 3년은 매월 미 1곡 씩을 받았고, 그 후 8년에 대해서는 고문호가 그녀에게 관회 1080관을 주고자 했다. 그 리고 편지를 써서 이를 증명하고자 했다.32) 이 사료에 대해서는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지 만 주로 주군과 첩의 관계 및 고용 금액에 대한 문제에 국한돼 있다. 필자는 첩의 기한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자 한다. 고문호는 67세 첩 하씨를 맞았는데, 당초 계약의 기한은 3 년이었다. 그가 70세 되던 해 기한이 다 되어 하씨의 모친이 그를 찾아와 다시 계약을 맺었고, 3년 후에 그 모친이 다시 왔다. 그리하여 고씨는 은화에게 매년 錢百千 을 주기 로 약속했고, 하씨는 가정 경오 년간까지 11년 첩살이를 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당초 고문호가 하씨를 첩으로 고용할 때 기한을 3년으로 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하씨는 계속 남아 있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고용 된 첩이었지만, 쌍방이 함께 생활한 후 모두 만족하면, 고용의 기한은 이미 그 의의를 상 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 번째로 하씨의 모친이 와서 상의를 할 때에는 명확한 기한 을 정하지 않게 되었다. 고문호는 銀花素有盼盼燕子樓之志, 而勢亦不容留 라고 언급했 는데, 처음에는 고용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 기한을 다시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스 럽게 주군의 집에 남아 함께 생활하는 첩의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하씨 역시 기간마다 받는 돈에 대해 亦不願時時來請, 亦不肯逐年請也 라고 한 것을 보면, 그녀가 피고용인 의 신분에서 점차 전통적 의미의 혹은 정식적인 첩의 신분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정 경오년(1210)이 되면 고문호는 勢亦不容留 를 알고, 하씨가 본가로 갈 때 가져갈 以千緡為奩具之資 를 준비하며, 이를 위해 先書此為照 했던 것이다. 11년을 함께 생활했고, 주군 고문호가 죽지 않았는데도 첩 하씨는 본가로 가야했다. 우리는 고문호가 하씨를 계속 머무르게 할 수 없었던 소위 그 勢 가 혹 고씨의 집안사람들의 반대와 관 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씨가 가산을 쓰려고 했을 때, 여러 번 아들과의 상 의를 거쳤고, 고씨가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집안사람들의 妄有興詞 를 대비해 하씨에게 편지를 써 증거로 삼게 했고, 편지의 말미에서 은화가 고씨 집안의 돈을 함부로 쓰지 않 았고, 아껴 생활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고씨 집안사람들이 하씨에 대해 어떤 태 도를 가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즉 그들은 하씨가 고문호의 첩이 됨으로써 일어날 수 있 32) 周密 癸辛雜識 別集卷下 銀花, 中華書局, 1997년, 272 274쪽.
100 는 가산의 유실을 걱정했던 것 같다. 우리는 다시금 당초 고씨가 첩을 맞으면서 왜 기한 을 두었는지 그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하씨가 소위 정식 첩 이면 재산의 계승에 있어서 분쟁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하씨의 입장 에서 보면, 기한을 정한 그 계약은 현실에서 비교적 실효성을 가지고 실천되었으며, 하씨 본인이 고씨 집에 남고자 해도 어쩔 수 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 본인이 기 한이 정해진 고용된 첩의 신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사례는 고용된 첩이 주군의 집에서 처해질 수 있는 불안정한 위치를 잘 설명해준다. 2. 중개인의 역할: 媒人? 혹은 牙人? 당송 시기 첩을 들이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중개인의 역할이 다. 당대 첩을 들이는 과정에 대한 서사에서 중개, 아인에 대한 표현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매파에 대한 언급은 있다. 開元五年(717), 邠王 李守가 渤海郡高氏를 禮로서 娶하 여 첩으로 맞았는데 묘지명에서는 고씨가 좋은 집안 출신이라 특별히 托媒氏而委禽, 備 少姜之盛典. 33)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현재 당대 일반 보통 남성들이 매첩을 할 때, 媒人을 통했는지, 아인을 통했는 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송대로 오면, 특별히 남송 시대에는 매첩은 주로 아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買妾이든 賣妾이든 모두 牙人, 牙儈를 통했다. 상술한 손조청과 정주부 의 이야기가 전형적이다.34) 어떤 경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이미 합의를 보았는데도 아 인을 불러 계약을 쓰기도 했다.35) 쌍방이 합의를 보았는데도 여전히 아인을 불러 계약서 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첩에 문제가 있다고 느낄 때, 가장 우선적으로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이 첩을 살 때 아 인을 통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흥 연간에 촉 지역이 기근이 들었을 때 志 行은 유민이었던 첩을 샀는데, 그 친구 羅가 첩이 괴이함을 깨닫고, 渠來時經女儈否 今安在 라고 물었다. 그리고 遂付於儈而取其直 36) 계약서를 쓸 때, 아인을 통하는 주된 목적은 바로 첩에게 문제가 있을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다. 아인의 역할은 교역이 제대로 될 수 있도록 보증을 해주는 것과 문제가 있을 시 해결을 돕도록 하는 것에 있었 다. 첩과 관련하여 문제가 발생할 때, 당시 사람들은 그 처리 과정에서 반드시 매매 시 있 33) 唐代墓誌彙編續集 開元146 大唐邠王故細人渤海郡高氏墓誌之銘, 34) 夷堅志 補志卷八 鄭主簿, 1620 1621쪽. 35) 夷堅志 補卷二二 王千一姐, 1754 1755쪽. 36) 夷堅志 丙志卷二 羅赤腳, 375쪽. 553 554쪽.
당송시기 妾의 생활 / 최 해 별 101 었던 아인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마지막 첩의 거처를 정할 때, 부모에게 되돌려 줄 때도 아인을 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37) 관 역시 민간의 매첩과정에서의 아인의 역할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송대 첩의 매매 과정에서 중개의 역할은 매우 중요해 보이며, 그 주된 기능은 매파라 는 의미보다는 차라리 아인에 가까웠다. 이는 송대 첩을 들이는 과정이 점점 노비나 여 사의 매매 방식과 다르지 않게 됨을 보여주며 아인의 역할 역시 노비 매매 시 아인이 할 수 있는 역할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이 외에 아인의 역할이 커진다는 것은 송대 매첩 의 과정이 점점 더 세밀해지고 규정화되는 경향을 띤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三. 당송시기 첩의 신분적 변화: 그 유동성에 대하여 당대의 첩은 첩이 되면 평생 한 주군의 첩으로 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면, 송의 경 우는 그렇지 않은 듯 보이며, 주군이 자주 바뀌는 경우도 보편적이었다. 이는 아마도 상 술한 기한의 문제와 관계있는 것으로 필자는 송대 첩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을 유동성 이라 표현하고자 한다. 송대 첩의 유동성은 아래 몇 가지 방면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첫째, 당송 시기 주군이 친히 망첩을 위해 쓴 묘지명은 그 남아 있는 수량으로 볼 때 아주 큰 차이가 보인다. 陳尚君은 관련 논문에서 현재 남아 있는 당대 망첩 묘지명은 19 건이라 언급했고,38) 이외에 필자가 5건을 더 찾을 수 있어, 대략 24건 이상이 남아 있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송대의 경우를 보면 현재 필자가 찾을 수 있는 주군이 직접 쓴 망첩 묘지명은 5건에 불과했다.39) 서로 다른 시기 어떠한 배경 하에서 이런 결과가 나오 게 되었을까? 먼저 주군이 첩에게 묘지명을 써줄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생각해 보자. 망인에게 묘지명을 써주는 것은 망자에 대한 애도를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아마도 주군에게 온 이후 죽을 때까지 주군과 함께 생활해 온 첩이, 묘지명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송대 상당수의 첩은 기한을 두고 고용 되어 여러 번 매매가 되는 것 37) 夷堅志 三志辛卷七 舒榷貨妾, 38) 39) 1434 1435쪽. 陳尚君 唐代的亡妻與亡妾墓誌 附錄二 亡妾墓誌一覽, 中華文史論叢 2006年第2期, 78 80 쪽. 蘇軾 東坡全集 卷八九 朝雲墓誌銘 ; 周必大 文忠集 卷三六 芸香志 ; 曹彥約 昌穀集 卷 二〇 王氏壙銘 ; 劉克莊 後村先生大全集 卷一六一 山甫生母 ; 古志石華 卷二八 楚通叔 妾朱氏墓誌銘, 宋代石刻文獻全編 第二冊, 23쪽.
102 이 보편적이었다. 이는 중 상층 집안의 첩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첩의 유동성이 커지면 서 망첩 묘지명의 수량은 크게 감소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남성들의 첩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첩의 유동성이 커 지면서 첩에 대한 주군의 태도도 변할 것이고, 첩을 정식 가족 구성원으로 생각하기보다 는 임시로 있는 가기나 비녀에 더 가깝게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첩에게 묘 지명을 써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첩으로 지낸 적이 있는 여성들의 묘지 명이 대부분 본인 소생의 아들에 의해 쓰여 진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40) 당대를 보면, 시비(侍婢)에게 써준 묘지명도 있다.41) 이외에 상술한 바 있는 지씨는 以备纫针之役 으로 들어온 여성이어서 이 역시 시비에 가까운 신분이었지만, 게다가 정 처가 들어온 후 본가로 돌아간 첩이었지만, 여전히 묘지명을 남길 수 있었다.42) 또 유망 중에 첩이 된 여성에게도 묘지명을 써주었고,43) 기녀 출신의 첩 역시 묘지명을 남겼다.44) 이는 확실히 당대의 첩이 송 대의 첩과 그 처지가 달랐음을 보여준다. 둘째, 당송시기 관원들이 임직을 위해 지방으로 가거나 유배를 가게 되는 경우 그 지 역에서 첩을 들이기도 했다. 이 경우에 주군이 그 지역을 떠날 때의 첩의 귀속 문제를 토론해 볼 수 있겠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당송 간의 차이가 보인다. 예를 들면, 당 함통 연간에, 유이는 풍상절도사에서 許 지역으로 옮겼는데 그 지역에서 장씨를 첩으로 맞았 다. 그 후 낙양에서 머물고, 장안에서 관직에 임하고, 형남에 이르기까지 장씨는 계속 유 이를 따랐다.45) 이 외에도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有吳生者, 江南人 嘗游會稽, 娶劉 氏女為妾 後數年, 吳生出宰於雁門郡, 與劉氏偕之官. 46) 주군이 가는 곳에 첩은 따라 갔 고, 이런 상황은 당대 비교적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송대 상관 기록들을 보면 상황이 조금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龐元英 談 藪 의 기록을 보면, 沈詹事는 균주로 폄적되어 갈 때 첩을 샀다. 균주에서 7년을 살았는 데, 돌아올 무렵 그는 첩을 그 부모에게로 돌려보냈다.47) 이는 어떤 의미에서 송대의 사 앞에서 언급한 Beverly Bossler 의 宋元墓誌中的 妾 在家庭中的意義及其歷史變化 는 묘지명을 통해 송원시기 가정에서의 첩의 지위 및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살폈는데, 주된 토론은 모친으 로서의 첩을 위주로 하였다. 41) 唐代墓誌彙編 大中048 唐故穎川陳氏墓記, 2285쪽. 42) 唐代墓誌彙編 大中076 缺題, 2307쪽. 43) 唐代墓誌彙編續集 大和043 唐故章四娘墓誌銘, 914쪽. 44) 唐代墓誌彙編 大和071 渤海嚴氏墓誌, 2148頁; 唐代墓誌彙編續集 鹹通028 唐故張氏夫人 墓誌銘, 1055쪽. 45) 唐代墓誌彙編續集 鹹通096 唐張氏墓記 : 有劉異自鳳翔節度使移鎮于許, 始面張氏 八年, 納而 貯於別館 從余罷許憩於洛, 官於朝 十一年, 又從余出鎮荊南, 1108쪽. 46) 張讀 宣室志 卷三, 唐五代筆記小說大觀, 1008쪽. 47) 龐元英 談藪, 明刻 說郛 卷三五, 說郛三種 第四冊, 上海古籍影印本, 1988年, 1632쪽. 40)
당송시기 妾의 생활 / 최 해 별 103 회적 배경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매첩에서 기한이 정해지는 것이 보편화 되 면서 첩을 부모에게 돌려보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셋째, 당에서 송에 이르는 시기 첩의 유동성이 확대 되는 것은 법률 규정에서도 드러 난다. 당송 법률에서는 처첩의 擅去 죄에 대해 처벌 규정을 두고 있는데,48) 周顯德五年 (958)의 칙을 보면 두 가지 방면에서의 변화가 보인다.49) 하나는 妻擅去 에 대한 처벌이 가중되었고, 다른 하나는 처, 첩에 대해 따로 처벌을 시행하여 첩은 처에 비해 减一等 되었다. 첩의 도망죄에 대해 관방은 더욱 느슨한 처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 남편 에 대한 처, 첩의 죄와 관련한 처벌 규정에서, 오직 擅去 죄에서만 처첩을 구분하여 처 벌하는 규정이 보인다. 이는 당시 가정에서의 첩의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며, 그 유동적 특징이 강해졌다는 것을 방증한다. 송대 첩의 유동 은 근친 간에도 가능했다. 법률규정에는 첩의 전 주군의 근친이 그녀 를 다시 첩으로 삼는 것을 금지했다.50) 그러나 이규정은 북송 초기를 반영하는 것이고, 북송 중, 후기에 이르면 현실 생활에서 이와 같은 상황은 번번이 일어났다.51) 근친간의 첩의 유동은 남송대에도 흔히 보인다.52)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법률 규정에 상관없이 현실 속에서는 근친 간에도 돈을 주고받는 것을 통해 첩의 유동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더더욱 당시 사람들이 첩을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보지 않았음을 반영 한다. 이외에 첩의 유동성은 첩에 대한 주군의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사람들은 첩이 다 른 이에게 재가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떤 경우 주군이 직접 첩의 재가를 준비해 주기도 했고, 이것이 마음을 표현하는 한 방식이었다. 상술한 은화의 예가 대표적이다. 첩의 유동성이 강해지면서 첩에 대한 주군의 태도 역시 개방적으로 되 었는데, 이는 그들이 첩을 총애하는 구체적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당대 주군 은 가족성원으로서 첩을 대했다. 망첩에게 묘지명을 써줌으로써 그의 애도의 마음을 드 러냈고, 이는 그들의 첩을 총애하는 한 방식이었다. 이러한 첩에 대한 마음을 나타내는 방식은 어느 정도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48) 唐律疏議 卷一四 戶婚 諸犯義絕者 條, 宋刑統 卷一四 戶婚律 諸犯義絕者 條. 妻擅去者徒三年, 因而改嫁 者流三千里, 妾各減一等 娶者並與同罪 如不知其有夫者不坐, 娶而後知者減一等 並離 之, 224 225쪽. 50) 宋刑統 卷一四 戶婚律 諸嘗為袒免親之妻而嫁娶者 條, 諸嘗為袒免親之妻而嫁娶者, 各杖一 百; 緦麻及舅甥妻, 徒一年; 小功以上, 以奸論 妾, 各減二等 並離之, 220쪽. 51) 蘇轍 龍川略志 卷四, 中華書局, 1997年, 20쪽. 52) 夷堅志 丙志卷一五 虞孟文妾, 491쪽. 49) 宋刑統 卷一四 戶婚律 諸犯義絕者 條: 周顯德五年七月七日敕條,
104 첩의 유동성이 커지면서 어떤 여성들은 첩으로서 이러한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려 했다. 특별히 첩으로 지내면서 얻은 부를 이용해 다른 이의 정처가 되는 방법을 택하기 도 했다. 즉 더욱 안정된 생활환경을 직접 찾을 수 있었다. 고문호의 첩 하씨처럼, 주군 의 집을 떠날 때 적지 않은 돈을 얻은 경우 이러한 더 나은 생활환경으로 선택할 수 있 는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또, 夷堅志 의 다른 한 예를 보면, 왕씨의 첩은 資裝三百千 金 을 충분히 활용하여 다른 이의 후처가 되었다.53) 비슷한 사례는 적지 않다.54) 그러나 현실에서 첩인 여성이 이러한 재력을 갖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리를 해보면, 당송 시기 첩을 들이는 과정에서 계약적 특징은 점점 더 강해진다. 당 송 사료의 기록에서 첩을 들이는 것에 대한 서술어 娶, 納, 買의 분석을 통해 이 변화가 초래한 주군의 첩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었다. 첩을 들일 때 기한을 정하는 것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고, 송대가 되면 매우 보편화 된다. 이에 첩을 들이 는 과정에서 쌍방은 더욱 계약을 중시하였으며, 아인의 역할은 (매파의 역할이 아닌) 더 욱 중요해져 매첩 과정에서 반드시 아인을 통하여 계약을 맺었고, 이를 통해 교역의 순 조로운 진행을 보장받고자 했다. 이러한 변화는 첩의 유동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이 는 법률 규정이나 현실 생활 모든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첩의 유동적 성격이 강해짐 에 따라 재력이 있는 첩들은 이를 활용하여 유리한 환경을 쟁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 부분 이러한 조건이 되지 않는 첩들은 불안정한 생활환경 속에 처하게 되었다. 결론적으 로 계약적 요소의 강화는 당시 첩의 생활을 더욱 유동적으로 만들었고, 이는 첩인 여성 들에게 일종의 새로운 기회로 다가 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에서의 첩의 지 위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변화는 첩의 개별적인 처지를 더욱 다양하게 만들고 첩의 생존 유형을 더욱 다양하게 했다는 점이다. 송대에는 유극장의 첩 진씨와 같이 전 통적 첩의 유형에 속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계약적 특징이 나타나면서 여성들은 종 종 기한을 두고 첩으로 고용되는 상황에 놓여 기한에 따라 보수를 받게 되는데 이러한 유형의 첩은 종종 비녀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계약적 특징이 강화되는 상황은 한편으로 경제적 및 여러 조건이 되는 첩들에게는 자신의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의 확대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첩과 비녀의 신분상의 경계 를 더욱 모호하게 하는 현상을 낳기도 했다. 53) 夷堅志 三補 夢前妻相責, 1807쪽. 200쪽. 54) 夷堅志 乙志卷二 莫小孺人,
당송시기 妾의 생활 / 최 해 별 105 餘論: 妾과 婢(女使) 경계의 모호화 송대 첩과 비(여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향은 첩과 주군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계약 관계적 특징이 강화되고 이로 인해 첩의 유동성이 강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즉 송대 비, 여사는 당대와 달리 양인 신분이며, 주로 계약의 형식으로 구성이 되고, 당송시기 첩은 원래 양인 신분인데다가, 송대에 이르러 첩 또한 계약의 형식으로 고용되는 성질이 강해지면서, 이렇게 양자의 법적 신분이 동일해지고, 고용이라는, 계약 을 통하는 형식도 비슷해지면서 양자가 현실 생활에서 갖게 되는 처지가 점점 비슷해지 는 것이 아닌지 추정해 볼 수 있다. 필자가 첫머리에서 언급한 유극장의 가산분쟁을 처리한 한 판결문을 다시 보면,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양자의 경계의 모호해짐을 확인할 수 있다. 유극장은 劉氏, 丞之 側室, 秋菊, 登仕之女使, 昔也, 行有尊卑, 人有麤細, 愛有等差, 今丞與登仕皆已矣, 止是兩個 所生母耳 55) 그의 눈에는 주군,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첩이나 여사는 소생의 자녀가 있는 경우 그 신분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며 모두 일정한 재산계승권이 있 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서 양자의 行有尊卑 는 이미 과거지사가 돼버 렸다. 송대 첩을 고용할 때 사용했던 실물 계약서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첩의 계약서의 실 제 형태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다행히도 송말 원초의 女子, 男子를 고용했던 계약서 형식 을 볼 수 있는데, 元泰定元年(1324) 판각하여 출간된 적이 있는 新編事文類要啟劄青錢 은 당시 민간에서 통용되고 있던 각종 문서의 양식을 모아 놓았는데, 그 중 고용계약서 양식이 수록되어 있다. 여자의 경우 雇女子書式 이라 하였고 제목자체에서 雇妾 이라고 명시하지 않았지만 내용은 첩의 고용과 다름없었다.56) 이 계약서 양식의 제목과 내용을 보면 雇女子 는 雇妾 과 실제 크게 다르지 않다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지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남송 후기 비, 여사, 첩의 경계가 점점 더 모호해짐을 방증한다. 그러나 현실생활에서의 또 다른 측면에서 비(여사) 그리고 첩의 일정한 구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먼저, 당사자 간의 인식에서 양자의 구분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또 양자 는 모두 계약의 형식으로 고용되었지만, 그 지불 가격 즉 身錢, 雇直 방면에서 여전히 큰 차가 있었다.57) 55) 清明集 卷八 繼絕子孫止得財產四分之一, 251 256쪽. 四庫全書存目叢書 第171冊, 869쪽. 이외에 仁井田陞 唐宋法律文书の研究 (동경대학출판회, 1983년, 445쪽)에서도 內閣文庫藏本 新編 事文類聚啟劄青錢 를 인용하고 있다. 56) 新編事文類要啟劄青錢 卷一一外集 公私必要,
106 확실히 현실에서 첩과 비(여사)의 처지가 모호해짐과 동시에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송대에 이르면 그들 양자 간의 차이를 결 정하는 중요한 요인들이 그들의 서로 다른 법적 신분에서 오는 것이기보다 더 많은 부분 이 그들의 개별적인, 서로 다른, 현실적인 조건에서 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용 시의 처지(여성난민, 가정 배경), 가정 안에서의 지위(그들이 담당하고 있는 가사일의 성질, 자 녀의 유무, 주군의 태도 등), 특수한 재능이나 출중한 외모 등. 당송시기 계약관계의 발전은 하층여성들의 지위를 더욱 유동적으로 만들었고, 이러한 유동성은 그들의 생활에 매우 다층적인 의미를 가져,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기도 했 지만,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압력이 될 수 있었다. 이 유동성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우리 는 송대 첩과 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57) 桂始馨 宋代女口買賣探研, 湖北大學碩士學位論文, 2005年, 18 23쪽.
오대시기 거란과의 전쟁과 외교 전쟁과 외교가 민간신앙의 전개에 미친 영향 김 상 범(한국외대) 目 次 Ⅰ. 머리글 Ⅱ. 戰神의 탄생과 성장 Ⅲ. 陳果仁 信仰의 확산과 江南政權의 경쟁 Ⅰ. 머리글 이 글은 오대십국시기 급박하게 전개된 전쟁과 외교라는 외부적 충격이 중국 사회문화 에 미친 파급에 대하여 민간신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오대 (907~960)는 분열의 시대 였다. 6세기말이래로 300여 년간 유지되어온 수당통일제국이 와해되면서 53년간의 대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제국이 여러 정치세력으로 분열되어 전쟁이 그칠 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거란 사타 탕구트 등 이민족 세력까지 중국의 정 세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어느 시기보다도 복잡한 외교전이 전개되었다. 오대는 전환 의 시대 였다. 당대 후반기이래로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전개되어온 새로운 변 화가 완결성을 가진 정치적 단위의 해체로 인해 더욱 가속도를 내게 된다. 기존의 구체 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구조가 배태되는 과정 속에,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심대한 변화가 발생하는데, 安史의 난 을 전후로 回紇과 吐蕃의 강세로 균열의 조짐을 보였던 중국 중 심적 외교질서가 沙陀와 契丹의 부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시기 북방민족의 개입과 중국 제 왕조 간에 전개된 복잡한 외교관계와 전쟁은 송대이후 새로운 국제관계 와 국제질서가 태동하는 시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의 내적인 변화와 발전 에도 적지 않은 파급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전쟁과 외교가 복잡하게 엉키는 가운데, 동아시아 각국 간에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고, 새로운 차원의 변화와 성장이 전개되었는데 그 중심에 거란이 위치하고 있었다.
108 거란과 오대국가사이에 벌어진 전쟁과 외교관계에 관한 선행연구 가운데, 지금까지 연 구가 가장 많이 진척된 분야는 역시 燕雲16주의 할양 을 둘러싼 문제이다. 거란과 중국 간의 직접적인 접촉은 耶律德光시기에 남진정책을 채택하면서 본격화된다. 8부족을 통합 하고 주변민족을 차례로 복속시킨 耶律阿保機의 위업을 계승한 야율덕광은 後唐에 鎭州, 定州, 幽州 등 황하이북 세 주의 할양을 요구하였다. 비록 후당의 庄宗과 明宗은 북변 수 비를 강화하며 일시적으로 거란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여세를 몰아 태원절도사 석경당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후당정권은 결국 멸망하게 된 다. 중원왕조의 교체에 있어서 배후 역할을 한 거란은 그 대가로 後晉정권으로부터 16州 를 할양받는다. 영토할양과 더불어 주목되는 것은 석경당이 매년 貢帛 30만 필을 바치고 兒皇帝 를 칭하기로 약조함으로써, 중국 중심적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북방민족과 한족왕 조와의 관계가 역전되는 결정적인 시단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족왕조와 북방민족 간의 외교적 위상 변화가 1004년에 체결되는 전연지맹 훨씬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전개된 것 임을 반증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최근 오대시기 민족융합과 관련된 일련의 연구도 주목된다. 거란에 의한 화북지역 점 령이 당대후반기이래 胡化가 심했던 이 지역 인구의 대거 남하를 야기함으로써, 사타족 정권하에서 자연스레 종족적 융합이 진척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연구가 발표되었 다. 또한 거란이 팽창하면서 다양한 종족을 아우르는 제국으로 성장해 가는데 주목하여 요의 종족정책과 사민정책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종족융합문제와 인 구정책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일부연구가 중국정부의 다민족 통합국가론 에 견강부 회하는 짜 맞추기식 연구로 진행되고 있는 점은 아쉽다. 이밖에 거란의 중원전략과 이를 둘러싼 거란조정 내부의 파벌형성문제, 互市 교역의 확대, 전쟁으로 인한 漢人의 귀화문제 등 다양한 주제가 토론되고 있지만, 거란의 국제관 계를 오대정권과의 和戰에 한정시키지 않고, 십국정권을 포함한 다원적 관계 속에서 파 악하려는 연구 또한 주목된다. 거란의 외교 전략에 대해서 姚從吾는 일찌감치 遠交近攻 策이라고 정의한바 있다. 거란은 남진정책을 채택한 뒤로 화북왕조들과 교전상태에 들어 가자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십국세력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915년 오월의 錢鏐가 사절단을 파견한 이래 거란은 줄곧 오월과의 관계를 중시했는데, 이를 통해 화북왕조를 양면에서 압박하였고 동시에 사치품과 향료를 위시한 남양 무역품의 획득에도 이용하였다. 거란과 십국정권과의 관계는 930~40년대에 정점에 이르는데, 吳越은 한때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浙江省 義鳥縣에서는 會同十 年, 建 이라는 요의 연호가 새겨진 眞如寺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오월이 遼의 正朔을 받 아들였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거란과 남당과의 관계는 특히 중요한데, 거란은 국경을
오대시기 거란과의 전쟁과 외교 / 김 상 범 109 맞대고 있던 화북정권을 양방향에서 압박하기 위해서 시종 남당과의 관계에 심혈을 기울 였으며, 때로는 양국관계를 형제관계 즉 평등한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외교의 격을 둘러 싸고 後晋과 남당사이의 미묘한 분쟁거리를 조성하기도 했다. 거란과 남당의 긴밀한 관 계를 견제하기 위해서 화북정권 또한 다양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며 적극 대처했는데, 오 월과 기타 십국과의 연횡을 통해 거란과 남당세력에 대처하면서 강남에서는 오월과 남당 을 축으로 복잡한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분열의 시대, 전환의 시대 로 요약할 수 있는 오대시기에는 복잡한 정국을 반영하듯 전쟁 과 외교 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 다수의 연구는 급박하게 전개되던 외부적 상황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이러 한 외부의 충격과 변화가 중국사회 내부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 글에서는 전쟁과 외교가 복잡하게 얽힌 전란의 국면이 중국사회내부에 미친 영향을 특히 중국인의 신앙적 정서에 미친 영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론해 보겠다. 먼저 거란과 화북정권간의 경쟁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강남상황 특히 오월과 남당간의 관계 변화에 대해 살펴보겠다. 다음으로는 강남지역이 워낙 민간사묘신앙의 전통이 유구할 뿐 아니라, 당대 후반기 이래로 이지역의 민간사묘신앙이 지역사회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지역신앙 으로 발전해 가는 사회문화적 변화에 주목하여, 전쟁과 외교가 반복되는 긴박한 국면이 민간신앙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겠다. 특히 오월과 남당의 전력이 맞물리던 접 경지역인 절서일대의 陳果仁신앙 이 戰神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 착목하여 오월과 남 당의 경쟁구도가 진과인신앙의 출현과 성장배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진과인 신앙에 대하여 두 왕조는 어떤 입장을 보였고, 향후 민간신앙의 확산과 전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에 대해 검토해 보겠다. Ⅱ. 戰神의 탄생과 성장 당말 오대시기에 常州ㆍ潤州ㆍ杭州ㆍ睦州ㆍ蘇州 등 강남 절서일대에서 넓은 신앙권을 형성했던 祠廟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陳果仁 사묘를 들 수 있다. 진과인은 상주 출신 으로 수말당초의 혼란기에 지방할거세력이었던 沈法興의 수하에 들어가 主力戰將으로 활 약한 바 있다. 후에 심법흥과 내분이 생겨 독살되었는데,1) 상주 일대의 지역민들에 의해 1) 舊唐書 卷56, pp.2272~2273.
110 숭배되다가 당말부터는 신앙권이 점차 확대되면서 절서를 대표하는 지역신 가운데 하나 로 부상하였다. 그렇다면 진과인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지역신으로 부상했고 후에 戰神으 로 성장한 것일까? 隋書 ㆍ 舊唐書 ㆍ 新唐書 에 별도의 열전이 설정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생전의 영 향력이나 지명도는 그리 높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死後에는 절서전역을 아우르는 大神으 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지방지에 보이는 몇몇 廟記 에서는, 사료의 성격을 반영하 듯 뛰어난 인품으로 지역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에 사후에 지역민들이 그를 연민하여 입묘한 뒤 제사를 받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忠孝ㆍ文武ㆍ信義ㆍ謀辨을 진과인 생전의 八絶이라고 거론하며 이를 기리기 위해 조정에 상주를 올려 垂拱元年 (685)에 마침내 大殿이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 하지만 대규모 음사철폐가 단행된 수공년간의 전후 정황과 당시 음사를 판별하는 기준을 감안해 볼 때, 진과인신에게만 국 가에서 특별히 묘우를 세워주는 내용은 그대로 믿기 어려우며, 그 해석 또한 지극히 유 교적인 것이어서 후대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초 입묘는 이와는 다른 원리에 의 해 훨씬 소형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진과인이 심법흥에 게 배반을 당해 독살되었다는 것이다.3) 이러한 죽음을 당하게 되면 厲鬼가 되는데, 이들 은 일반적으로 解寃儀式이나 再安葬ㆍ冥婚 등을 통해 정상적인 사후세계로 돌아오게 되 지만, 비교적 강력한 영력을 지니고 불안정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소수의 여귀에 대해서 는 좀 더 전문적으로 그들을 방어할 수 있는 의례나 제사가 필요하다. 宮川尙志는 田豐 ㆍ鄧艾ㆍ項羽ㆍ蔣子文 등이 위진남북조시기 이래 부상한 대표적인 여귀신앙이라고 지적 한 바 있다.4) 그렇다면 사료에 묘사된 진과인의 죽음을 볼 때 진과인도 유교적인 신보다 는 전형적인 厲鬼에 가깝지 않을까? 위진남북조 시기에 시작되어 당말 오대까지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蔣子文 신앙은 厲鬼 2) 3) 4) 郡人以帝忠孝ㆍ文武ㆍ信義ㆍ謀辨八絕, 奏於朝, 即帝兵仗庫立祠. 垂拱元年, 始創大殿. 乾武(符)四 年, 封忠烈公. 咸淳毗陵志, p.3072. 禮記 祭法篇에는 왕은 7祀를 지내는데 그 대상 가운데 후사 없이 죽은 泰厲가 있고, 제후는 5사 가운데 公厲가 있으며, 대부는 3사 가운데 族厲가 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들은 각각 후 사가 없어 사후에 의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도처를 방황하며 화를 입히는 것인데,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제사를 올려 위로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禮記 卷 46, 祭法 ( 十三經註疎本, 801 802쪽). 孔穎達은 이에 대해 고대에 제왕ㆍ제후ㆍ대부 등이 후사가 없는 것은 원래부터 자식이 존재하지 않았기보다는 정적에 의해 살해된 경우가 적지 않 았기 때문이며, 여귀는 횡사하거나 피살된 冤魂을 포함한다고 해석하였다. 즉 고대인들에게 여 귀는 후사가 없는 사람뿐 아니라 橫死ㆍ寃死 등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은 원혼를 통칭한다는 것 이다.厲鬼생성에 관해서는 林富士의 孤魂與鬼雄的世界 (臺北:臺北縣立文化中心, 1995), pp.11~19쪽 참조. 宮川尙志, 民間の巫祝道と祠廟の信仰, pp.196 231쪽.
오대시기 거란과의 전쟁과 외교 / 김 상 범 111 숭배로 시작되어 결국 국가에서 공인하는 최고권위의 신으로 승격해 가는데, 동일한 장 군류의 여귀라는 점에서 참고할 만한 하다. 설화에 의하면, 장자문은 죽은 지 몇 년 뒤 갑자기 현신하여 지역수호신이 되려고 하니 사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라고 요구한 바 있 다. 명령을 위반할 시에는 주민들의 귀에 벌레를 넣고, 대화재를 일으켜 도시를 태워버리 겠다고 경고를 하기도 했다.5) 이러한 설화는 당연히 巫祝들에 의해 날조된 것인데, 厲鬼 가 질병과 환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제사를 받들어 위로해야 한다는 민중들의 집체적인 잠재의식 이용한 것이다. 사실 단속적으로 진행된 음사철폐를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부첨되었을 유교적 언사들 을 제거하고 나면, 진과인 사묘도 이와 비슷한 성장곡선을 그렸을 가능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독살을 당한 진과인의 원혼이 과거 勇力을 겸비했던 猛將出身답게 향촌 곳곳을 떠돌며 무서운 질병이나 재앙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주민들의 우환의식을 이용해, 상주주변의 무축들이 진과인의 원혼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입묘를 주도하고 주 민들을 끌어들이면서 점차 기도도량으로 발전시켰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말기에 이르면 진과인 숭배는 점차 常州지역의 지역신앙으로 성장하면서 국가권력 의 주목을 받게 된다. 太和7년(833)에는 현령 高榮이 상주 진과인의 東第에 세워졌던 사 묘에서 기풍제를 주재했는데, 후에 좋은 결과를 얻게 되자 묘우를 증축해주었다는 기사 가 확인된다. 점차 주변지역으로 제사권역을 확대해 갔는데, 無錫縣에 別廟가 설립된 후6) 기타 절서의 大神들이 이 시기에 빠른 확장추세를 보이는 것처럼 상주 州界 마저 월경하여 절서 전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보인다. 사료에 상주, 윤주에서 유행했다는 언 급7)처럼 처음에는 북쪽의 윤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는 丹徒縣 縣治 부근에도 진과인 묘가 건립되었다. 顧雲의 廟記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진과인묘도 차차 영험을 드 러내면서 윤주지역사회의 주요한 민간신앙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다가 자연재해와 같은 비상사태 때에는 지방정부가 이곳에서 방재제사를 주도할 정도로 공신력을 갖게 되었 5) 6) 7) 干寶의 搜神記 에 보이는 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蔣子文者, 廣陵人也. 嗜酒好色, 挑達無 度. 常自謂己骨淸, 死當爲神. 漢末爲秣陵尉, 逐賊至鍾山下, 賊擊傷額, 因解綬縛之, 有頃遂死. 及吳 先主之初, 其故吏見子文於道, 乘白馬, 執白羽, 從如平生. 見者驚走. 文追之, 謂曰: 我當爲此土地 神, 以福爾下民. 爾可宣告百姓, 爲我立祠. 不爾有大咎. 是歲夏, 大疫, 百姓竊相恐動, 頗有竊祠之 者矣. 文又下巫祝: 吾將大啓祐孫氏, 宜爲我立祠. 不爾, 將使蟲入人耳爲災. 俄而小蟲如塵虻, 入 耳皆死, 醫不能治. 百姓愈恐. 孫主未之信也. 又下巫祝: 若不祠我, 將又以大火爲災. 昰歲, 火災大 發, 一日數十處. 火及公宮. 議者以爲鬼有所歸, 乃不爲厲, 宜有以撫之. 於昰使使者封子文爲中都侯, 次弟子緖爲長水校尉, 皆加印綬. 爲立廟堂. 轉號鍾山爲蔣山, 今建康東北蔣山是也. 自昰災厲止息, 百姓遂大事之. 無錫志, p.2250. 吳郡志 권12, pp.167~168.
112 다.8) 어쨌든 진과인의 사묘는 처음에는 상주에 처음 세워졌던 本廟를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고향, 분묘 그리고 생전의 행적지 등 신화와 관련된 곳곳에 別廟가 설치되었고, 점차 縣 界와 州界까지 뛰어넘어 절서전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당말 오대시기 에 국가의 사묘정책은 기본적으로 사묘신앙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데, 강제적인 음사철폐 사례가 확연히 줄어들고, 사묘에 대한 改修조치와 分封을 통해 사 묘를 공인하는 조치가 증가한다. 진과인신앙도 이와 비슷한 성장궤도를 보여주는데, 僖宗 乾符4年(877)이래로 忠烈公, 感應侯, 忠烈王, 武烈帝 등 사묘에 대한 국가의 공인과 지지 를 의미하는 봉호를 연달아 하사받았으며,9) 봉호의 격식에 맞추어 상응하는 묘우에 대한 개수조치도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앞 기사에서 확인되듯이 주로 재해에 영험을 발휘했던 진과인신 戰神으로 재탄생하는 것은 언제일까? 이러한 변화는 당말 농민반란과 무관하지 않은데, 乾符2年(875) 鎭海軍이 반란을 일으켜 王郢이 연해를 따라 睦州지역을 공격해 오자 節度觀察處置使가 진과인 신께 陰助를 기구했고, 후 에 응답이 있자 睦州 郭南門근방에 묘우를 세워주고 정부에 봉호하사를 상신했다고 한다.10) 常州 前蕭里에 소재한 별묘관련기사에서도 僖宗 乾符4年(877)에 黃巢의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때 갑자기 안개 속에서 紅衣巨人이 출현해 적을 퇴각시키자 이를 기리기 위해 묘우를 중 건했다는 내용이 전한다.11) 전란기 지역사회는 기층공동체를 지켜줄 수 있는 수호신을 필요로 했을 것인데, 과거 재앙으로부터 지역사회를 구해주던 진과인 신은 이제 반란군 으로부터 지역공동체를 보호해주는 戰神으로 재탄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화는 절서 각 지의 지역사회로 유포되었고 오대십국의 전란기에 진과인신앙의 확산을 더욱 가속화시키 면서 그 위상도 제고시켰다. Ⅲ. 陳果仁 信仰의 확산과 江南政權의 경쟁 이처럼 당말이래로 진과인신이 戰神의 형상으로 浙西 大神으로 성장하게 되자 당 멸망 이후 이곳에 수립되는 10국 지방정권들은 진과인 신앙에 깊은 관심을 표하게 된다. 더군 8) 9) 10) 11) 嘉定鎭江志, p.2378. 咸淳毗陵志, p.3072. 淳熙嚴州圖經, p.4327. 咸淳毗陵志, p.3072. 당초 진과인 사망 했을 때 부인이 東第를 도관(崇仙觀)에 기부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前蕭里에 위치한 묘우는 황소난 때 신이 음조해 묘우가 중건되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唐末, 巢賊犯境, 人望靈, 煙中有紅衣巨人, 賊懼而遁, 道士鄧子成為築祠焉. 咸淳毗陵志, p.3073.
오대시기 거란과의 전쟁과 외교 / 김 상 범 113 다나 토호와 富商을 중심으로 형성된 토착세력인 항주팔도를 기반으로 성립한 오월정권은 지역정권인 만큼 지역민간신앙을 더욱 중시하였다. 여기서 오월정권이 蘇州에 세운 南雙 廟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盤門 서편에 있었던 南雙廟는 오자서와 진과인신을 함께 모시 는 사묘인데, 반문이 소주성 八門12) 가운데 남쪽에 위치한데다가 두 명의 神主를 모시기 때문에 남쌍묘로 명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대 초에 오월의 전씨정권이 常州와 潤州를 잠시 정복한 뒤 의도적으로 진과인신의 신주를 소주로 모셔와 오자서 신과 동일한 사묘 에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13) 十國春秋 는 이 때를 武肅王 錢鏐가 도교에 심취해 연 호를 개정하는 天寶元年(908)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전류는 진과인신이 陰兵을 동원해 오 월군을 도왔다며 감사의 報祀를 올렸고 梁에 봉호하사를 요청함과 더불어 모든 주마다 진과인 묘를 세울 것을 명령했다.14) 十國春秋 와 馬氏 南唐書 後梁 開平4년(910), 진과 인 신이 또 다시 오의 침공으로부터 오월을 음조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오월 錢氏政權은 진과 인신 뿐 아니라 병란으로부터 보호한다며 태백묘도 성내로 이전하고 季子를 이에 배식한 바 있다.15)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당시 후량과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거 란-오 세력에 대항하던 오월정권은 당말이래 지역민들에게 광범위하게 숭배되던 오태백, 계찰, 오자서, 진과인등 절서지역신을 국가제사차원으로 승격시켜 적극적으로 보호했던 것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오월정권에 의해 전신으로 받들어지던 진과인 신이 오를 계승한 남당 정권에 의해서도 숭배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保大13년(952) 남당과 오월이 교 전시에 갑자기 비바람이 치고 어두워지더니만 黑牛가 출현해 남당군을 도왔다는 영적이 전한다. 12) 13) 14) 15) 白居易가 소주자사로 재직 시에 남긴 시 가운데 당대 소주의 도시정황을 반영해주는 내용이 많 이 남아있다. 그 가운데 9월 9일 重陽節에 쓴 시에는 반쯤취해 난간에 기대 일어나 사방을 바 라보니, 七堰 八門 六十坊이 한눈에 들어온다(半酣憑檻起四顧, 七堰八門六十坊) 는 내용이 보인다. 당시 소주 성안에는 수로가 동서로 3개, 남북으로 4개가 뻗쳐있어서 8문중에는 육문 뿐 아니라 수문도 포함된다. 伊原弘 江南におけ都市形變の變遷-宋平江圖解析作業, 宋代の社會 と文化 宋代史硏究會硏究報告 第1集, 昭和58年 6月, 東京: 汲古書院, pp.297~303. 원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南雙廟, 在盤門裏城之西隅. 二廟: 左英烈王 伍員也, 右福順王隋陳果仁 也. 果仁又稱武烈帝. 或云五代初, 常潤尙屬淮南, 仁果廟在常潤間. 錢氏得常潤遂移廟於蘇. 吳 郡志 권12, p.167~168. 蔡京의 南雙廟記 에 보이는 관련내용은 다음과 같다: 或言故隋將陳果仁, 嘗以陰兵助錢氏伐淮 冦有功, 錢氏崇報之. 請於梁朝封福順王. 又使諸郡皆爲建廟. 則福順之號爲果仁無疑. ( 南雙廟記 는 吳郡志 권12, p.167~168과 송대 鄭虎臣 편찬한 呉都文粹 등에 전한다.) 十國春秋 의 주석은 南雙廟記 의 내용을 상당부분 참조했는데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仁果常以陰兵, 助王, 王崇報之, 請封于梁. 且令諸州皆立廟. 蔡京 京南雙廟記 作福順賢德王, 他書又作福順武徳王. 十國春秋 권78 吳越2 武肅王世家 (下). 吳郡圖經續紀, p.652. 吳郡志, 권12, pp.167~168.
114 당시 10국 정권은 오월과 남당의 사례에 보이듯이 인근의 정권과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 기 때문에, 지역성을 부각하고 지역민을 단결을 고취할 필요가 있었다. 당말 오대에 이르 러 누차에 걸쳐 진과인신에 대한 책봉과 사묘의 중수가 이루어지는 것은, 진과인의 사묘 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유력자와 재지세력의 신앙적 정서를 존중해줌과 더불어 실제적 인 優惠措置를 통해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당시 절서지역민들은 그들의 공동체를 전란으로부터 지켜준 진과인신을 이들을 가장 중요한 지역수호신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신주에 대한 보호와 현창은 전란이 그치지 않던 비상시국에 있어서 는 지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단결을 고취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송- 서하 전쟁 원인 분석 兪 垣 濬(경희대) 目 次 1. 머리말 2. 송-서하 전쟁사 연구에 대한 시각 검토 3. 송-서하의 초기 관계와 충돌 원인 4. 맺음말 1. 머리말 9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였다. 비록 華夷의 엄격한 구 별이 약화되었다고는 하지만 隋唐제국의 국제질서는 隋唐을 중심으로 주변 국가가 배열 되는 동심원적인 안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안사의 난을 계기로 중원왕조 중 심의 책봉질서가 형해화되면서 점차 주변의 제 국가와 민족들이 중원왕조의 역사 전개에 적극 개입하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원왕조와 북방왕조 사이에 힘의 역전이 발생하면서 그 중심축이 점차 북방왕조로 이전하기 시작해 결국에는 요와 여진이 새로운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은 여러 국가 간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불안정성이 크게 확대되면서 장기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처럼 새롭게 형성된 국제질서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론이 여러 가지로 제시되었다. 우선 중원왕조의 대외 인식의 근간을 이룬 華夷論 에 주목하고 그 구체적인 적용 사례를 분석하려는 시도가 가장 대표적이며, 요 송 금을 중심으로 주변국가와의 관 계를 다양한 연동관계 안에서 파악하여야 한다는 陳寅恪의 連環性 개념, 당말 이후 중 원왕조의 특징을 財政國家 로 파악하고 대외관계를 설명하려는 宮崎市定의 견해 등이 그것이다. 또 최근에는 南詔 大理를 비롯해 角廝囉 정권 등 그동안 소홀하게 다뤄왔던 국가까지 이 시대의 주역으로 수용하고 그 관계를 보다 다각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도
116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9 13세기 동아시아는 隋唐제국의 국제질서에 필적할만한 새로운 질서를 창출 하지 못한 채 여러 국가 간의 복잡한 상호 관계 속에서 유지되었기 때문에 그 경향성을 일정한 경향과 유형으로 일반화하기는 쉽지 않다. 또 당시의 다핵화된 국제정세를 동아 시아사적 시각에서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송 요, 송 금을 중심으로 한 이원론적 접근 방 식을 택하는 연구자들이 절대 다수인 점도 국제질서의 패러다임을 찾기 힘들게 만든 요 인의 하나이다.1) 그 결과 대외관계에 관련된 중요 사안에 대해서 전문적이고 미시적인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반 특징을 관통하는 포괄적 해석의 틀은 아직 제시되지 못한 실정이다. 이처럼 9 13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해석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찾는 여러 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정형화하기 어렵게 만든 가장 대표적인 요인의 하나가 바 로 西夏다. 서하(1038 1227)는 비록 요 송 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규모의 국 가로서 이들 3국의 안위 자체를 위협할 정도가 못되었고, 형식적으로는 이들 3국에 신복 하는 형편이었지만, 요 송 금 역시 서하를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였다. 그리고 요 송 양국 간의 외교적, 군사적 모순을 최대한 이용하여 독자 적인 활동 공간을 확보하고 실크로드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200여 년 동안 동아시 아 정세의 불안정성을 극대화한 국가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2) 따라서 이 시대의 다극체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하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서하에 대한 사료가 매우 영성한데다가 남아 있는 사료도 거의 전적으 1) 2) 황소의 난 때 사타족이 참전하면서 더욱 더 위세를 떨친 사타족은 후당과 후진을 건국하면서 중원의 정치에 주역으로 자리잡게 된다. 따라서 사타족의 역할을 빼놓고는 오대의 정치사를 논 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으며, 특히 석경당에 의해 연운16주를 요에 할양한 사건은 송대사에 있 어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송조의 건국과 동시에 이 시대를 한족과 북방 민족과의 관계사로 인식하는 기존의 시작에는 일부 조정이 필요하다. 특히 송조 건국 당시 대 다수 사람들은 송조 역시 또 하나의 단기 정권이 출현한 것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 라서 송조의 통일과 장기 지속을 당연한 사건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초단기정권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통일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좀 더 상세하고 합리적인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중원에 대해 정치 군사적 개입을 서슴치 않았던 북방민족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송조 또한 이들에 대해 어떤 외교정책을 취하였는지 를 분석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다. 이 점은 원대에 辽史 宋史 金史 를 편찬하면서 별도의 西夏史 를 만들지 않고 辽史 의 西夏传, 宋史 의 夏国传, 金史 의 西夏外纪 으로 처리한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는 서하 가 이들 3개국에 필적할 만하지 못하다고 간주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서하를 傳 이나 紀로 간략하게 처리하기에는 국력이나 역사적 비중이 너무 컸다. 이처럼 서하는 독립된 사서 편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전으로 처리하기도 애매한 국가였다. 아무튼 실 체에 어울리지 않게 傳과 紀로 처리한 결과 서하사는 상대적으로 가장 소략하게 다뤄졌고, 상 당 부분 파악하기 힘든 상태로 남아있다.
송-서하 전쟁 원인 분석 / 兪 垣 濬 117 로 송측의 것이며, 그 내용도 거의 대부분 전쟁사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이는 서하와 요의 동맹관계가 송에 대한 가장 큰 압력이었고, 송으로서는 요와의 직 접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압력 고리를 타파하는 것이 대서하정책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역으로 서하를 통해 송을 견제하는 것이 요의 대송정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면을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송-서하 전쟁에 대한 분석은 서하사 연구의 출발점이 자 핵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송-서하 전쟁사 사료의 절대 다수가 송조의 입장에서 작성된 것이어서 이 문제 에 대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검토를 진행하는 것이 송-서하 전쟁사 연구의 또 다른 숙 제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치 못한 상태이다. 송-서하 전쟁사에 관한 새로운 사 료 발굴의 가능성은 거의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고, 송 측의 자료 또한 李燾의 續資治通 鑑長編 을 제외하고는 1차 사료라고 할 만한 것이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3) 하지만 상황이 열악할수록 기존 사료의 작성 배경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새로운 단서를 찾 아야 한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4) 2. 송-서하 전쟁사 연구에 대한 시각 검토 10 13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의 중심축은 북송-요, 남송-금의 남북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심축은 상호 전면전이라는 치열한 각축전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형 성된 균형을 각기 전연의 맹약 과 소흥화의 라는 형식을 통해 공식화되었고 장기간에 걸친 휴전과 평화국면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송과 서하는 엄청난 국력 차에도 불구하고 3) 4) 송-서하 전쟁사 연구 성과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는 李华瑞의 宋夏关系史 이다. 李华瑞는 쌍방의 군사적 충돌 외에도 지휘체계, 병력배치, 장비보급 등 북송의 정치 매카니즘에 초점을 맞춰 사료적 한계를 넘어서 양국의 전쟁사를 연구 분석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화 서는 續資治通鑑長編 을 제외한 다른 사료는 엄격한 고증을 통과하기 힘들었다고 밝히고 사실 상 長編 에 의존하여 서술함으로써 저자 자신도 시인하듯 송조 일방의 시각에서 탈피하기 힘 든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石家莊, 河北人民出版社, 1998)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송의 사료 대부분이 대서하전 패배 요인 분석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패전의 가장 큰 요인은 전선 지휘관의 잘못이 대부분이지만 송조의 경우에 는 군 지휘관에 대한 과도한 견제 등 제도적 문제점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제 도적 요인에 대한 언급은 군 통수권자인 황제의 권력에 대한 도전과 다름없고, 문신관료의 정 치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어서 상당 부분 드러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송대에 만연 한 중앙권력에 대한 기휘 부분을 보다 심도 있게 파헤치고, 문신관료와 무인의 관계, 중앙과 지 방의 입장 등 군권 행사와 관련한 세부적 사항을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 며, 신 구법당의 당쟁과 관련한 사료 왜곡 등도 유의하여 분석할 부분이다.
118 시종 적절한 균형점을 찾지 못해 전쟁과 화의가 계속 반복되는 등 불안정한 국면을 유지 하였다. 양국은 982년 李繼遷의 저항을 시작으로 금이 陝西路를 점령하여 지리적으로 단 절될 때까지 근 150년 가운데 3/4 이상의 시간을 교전과 적대 상태로 보냈다. 따라서 송서하 관계는 전쟁과 화의의 불연속선을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작은 변방국가 서하가 송이란 거대 제국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독특한 형태로 전개되었 다. 송-서하 관계는 神宗이 夏国自祖宗以来为西方巨患历八十年, 朝廷倾天下之力, 竭四方财 用以供馈饷, 尚日夜惴惴然, 惟恐其盗边也. 라고 한탄한 데서 잘 드러나듯이 송이 가장 부 담스러워한 존재는 요가 아니라 오히려 서하였다는 점이 일찍부터 양국 관계의 가장 큰 특징으로 간주되어 왔다.5) 따라서 서하의 거듭된 공세 원인과 함께 그것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송-서하 전쟁사는 물론이고 양국 관계사 연구의 중점이 었다. 하지만 서하의 입장에서 보면 요가 서하를 압박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을 치루기도 했지만 송을 능가하는 국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던 요가 오히려 서하의 존립에 결정적인 위협이나 손실을 안겨주는 존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서하의 존망과 관련된 가장 큰 위협 요인은 바로 송이었다. 李繼遷에서 李德明을 거쳐 李元昊에 이르기까지 3대 동안 서하는 송조의 압박을 극복하고 자신의 독립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해야 했으며, 많은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송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전략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미묘한 힘의 균형을 유지 파괴하게 한 요인의 분석이 향후 송-서하 전 쟁사 연구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또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양국 관 계에 관한 개별적 사안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당시 국제관계라는 한 차원 높은 문제와 긴밀하게 연동되어야 할 것이다.6) 그러면 송-서하 전쟁사에 관한 연구는 어떤 문제의식 을 갖고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필자의 생각으로 華夷論 은 가장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분석 방법이지만 그 효용성은 5) 6) 廖隆盛은 송대사에 대한 평가가 외교 군사 방면에 대한 혹평과 사회 경제 방면에 대한 극찬으 로 확연하게 갈린다면서 이민족의 군사적 압박 속에서 어떻게 사회경제적 발전을 달성할 수 있 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송대사 연구의 주요 과제라고 지적하였다.(廖隆盛, 自序, 國際貿易 戰爭, 臺北, 萬卷樓, 2002) 요는 송태종의 공세를 꺾고 승세를 타서 얼마든지 송조를 공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989 년에 군대를 원대 복귀시킨 뒤 방어에 치중하게 하였다. 그리고 992년 80만을 동원하여 고려 공략에 나섰는데, 이처럼 요의 전략목표가 고려 정복으로 바뀌면서 송은 비로소 숨 돌릴 틈을 얻게 되었고 서하에 대한 적극적인 공략에도 나설 수 있었다. 이처럼 요-송관계의 주요 변수로 요-고려관계가 작용하였다.
송-서하 전쟁 원인 분석 / 兪 垣 濬 119 여전할 뿐 아니라 그 폭을 더욱 확대하고 보다 정밀하게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 각한다. 왜냐하면 화이론은 각자의 인식과 주어진 환경 등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송인이 지니고 있던 모든 대외인식의 기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중원왕조와 북 방왕조와의 관계에서만 적용된 개념이 아니라 요 금 등 자신이 중심국가라고 자처하는 국가마다 다소 변형된 형태일지언정 화이론을 모두 수용하고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측면 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화이론은 중원왕조가 북방왕조를 바라보는 고유한 시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당시대인의 보편적 인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화이론이 중원왕조 이외의 국가 관계에서도 어떻게 변용되고 다층적으로 활용되었는지를 밝히는 노력이 진 행되어야 다핵 다층으로 이루어진 이 시대의 특징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중원왕조와 주변국가와의 외교적 접근방법 가운데 가장 전통적인 것은 以夷制夷 전 략이다.7) 다자간 외교관계가 전개되면 될수록 각국은 자신들의 입장에 가장 유용한 이이 제이 전략을 수립하고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국가 사이에서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많은 탐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동상이몽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군사동맹으로 가시화하기에는 상당한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자국의 이익이 철저하게 우선시되는 국제관계에서 양국의 이해가 완전히 일 치되고 신뢰가 조성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이이제이 전략 은 일종의 분위기 조성용이었지 실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제이는 끊임없이 모색되었다. 심지어는 송-금동맹과 송몽고동맹처럼 송조의 멸망을 자초한 치명적인 결정도 이이제이 전략 차원에서 두 차례나 실행되었을 정도였다.8) 송조가 이처럼 이이제이 전략을 끈질기게 모색한 것은 건국 초 감행한 對遼전쟁의 실패와 점증한 요의 군사적 압력 속에서 독자적 생존을 모색하기 힘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교적 절충과 타협은 외교정책의 최대 과제일 수밖에 없었고, 이이제이 전략은 군사 외교적 압력을 감소시켜줄 수 있는 방안 가운데 투자 대비 효과가 가장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7) 8) 廖隆盛은 당시 다자간 외교에서 이이제이는 가장 전통적이며 전형적인 외교적 모델로서 송의 대외정책은 태종의 對遼개전 시기를 제외하고는 본질적으로 以夷制夷라는 전통적 방식에서 벗 어난 일이 없었으며, 이 점은 요나 서하 등 당시 각국 모두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이아제이 정책은 송-서하 관계 분석의 대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廖隆盛, 宋太宗的 聯夷攻遼外交及其二次北伐, 國際貿易戰爭 ) 송 태종의 聯夷攻遼 정책은 송조 以夷制夷 정책의 효시로서 송-금동맹과 송-몽고동맹 외에도 仁宗 慶曆년간에는 以遼制夏를, 真宗 仁宗 神宗은 聯吐蕃制西夏 정책을 추진하였다. 심지어는 남북송 교체기에 아무런 실질적 유인 수단도 없고, 현실성도 없었지만 금을 견제하기 위해 서 하를 끌어드리려는 외교적 노력이 경주되기도 했다.
120 하지만 이이제이는 아무래도 화이론과 마찬가지로 중원왕조와 상대국가 간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개념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 따라서 보다 포괄적이며 상대적인 連環性 의 개념이 다자간 외교관계에 대한 유기적 접근 개념으로 더욱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송-서하 전쟁사 연구를 위한 보다 구체적인 시각 가운데 검토해 봐야 할 사안 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송태조와 태종의 통일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과 복안이다. 둘째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차지한 송태종의 개인적 입장과 그것에 따른 문제점이다. 셋째는 송태종의 대요전쟁 패전에 따른 대외정책의 변화이다. 넷째는 대서하전쟁의 승리 를 불가능하게 한 송조 내부의 매카니즘에 대한 분석이다. 다섯째는 서하의 대송 전쟁의 궁극적 목적과 전략에 대한 분석이다. 여섯째는 송-서하 전쟁에 대한 요의 입장이다. 송태조와 태종 형제는 漢 唐의 부활을 꿈꾸면서 연경과 서경을 자신의 영토에 다시 포 함시키리를 강력하게 희망하였으며,9) 송의 건국 이전에 이미 요가 점유하고 있던 이 지 역 명칭을 굳이 당대의 연운16주 로 표기함으로써 요의 통치 자체를 시종 부인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하고 있던 제국의 구체적 영역은 漢 唐과 달리 매우 축소된 것이었 다. 그 가운데 서북지역만 살펴보면 우선 당조의 출발점이자 주요 경영 대상이었던 秦陇 지방, 즉 河西走廊 朔方 지역에 대해서 송은 처음부터 통일의 대상이라고 여기지 않았으 며, 그들이 서부국경으로 간주한 지역은 오대이래 유지되어 온 秦州 靈州 夏州를 잇는 지역이었다. 이는 建隆3년(962), 尚书左丞 高防이 秦州 지사가 되어 올린 상주문에서 自 渭而北则属诸戎, 自渭而南则为吾有 10)라고 한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 은 태종을 비롯한 후대 황제들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송의 대서하전쟁은 기 존의 국경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지 영토를 확장하려는 공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아 니었다. 그리고 이계천이 송군과의 거듭된 전쟁에서 승전을 거두며 강성해진 것은 그 자 신의 군사적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송조가 이 지역에 대한 명 확한 전략을 갖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11) 둘째,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차지한 송태종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급급해 건국기 황제가 취해야 할 원대한 계획의 수립과 추진 대신 공적의 수립을 위 해 조급했고, 지나치게 강경한 조치를 남발하였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北漢을 격파 9) 10) 11) 송태조에게 一统太平 이란 존호를 올리려고 하자 연경과 서경 일대를 회복하지 못하였기 때문 에 부적절하다고 사양한 것에서 그의 영토의식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长编, 卷3, 建隆3년 6월 辛卯. 이화서는 송 태조와 태종의 통일 에 대한 구도가 漢 唐과 달리 매우 폭이 좁아 서북지역을 포 함하고 있지 않았음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런 인식이 서북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경영전략이 부재한 원인이며, 서하와 하서회랑 등에 대한 정책이 임기응변에 그치게 된 요인이라고 강조하 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기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당연히 곤란했다.
송-서하 전쟁 원인 분석 / 兪 垣 濬 121 하고 난 뒤 모든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요 공략을 서두르다가 高梁河에서 대패한 것이다. 이러한 송태종의 모습은 태조와 매우 대조적이다. 송태조는 북방의 요에 대해서 는 매우 신중하게 대하였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河东이 契丹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 지역을 차지하게 되면 契丹으로 인한 전란을 우리가 치러야 한다, 따라 서 일단 북한을 그대로 두어 우리의 병풍으로 삼고 이후 우리가 부유해지면 그 때 차지 하는 것이 좋다. 12)고 할 정도였다. 송태조가 요와 북한에 대해 신중하게 대한 것은 신생 송조의 실력이 그들만 못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전략적 우선순위에 따른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는데, 아무튼 이는 무모하고 졸속적인 대요전쟁을 주도했던 태종 과 명확한 대비를 이룬다. 바로 이점이 송-서하관계가 송태종대에 들어와서 급속도로 악 화된 중요한 원인이다. 셋째, 송태종의 대요전쟁 패전에 따른 대외정책의 변화이다. 태종의 대요전쟁 패전은 태종대의 일시적 부진이나 후유증으로 끝나지 않았다. 태종은 패전의 후유증으로 개인적 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 매우 곤경에 처했으며, 길게는 송조의 만성적 積貧積弱 을 초래 한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13) 과도한 공세의 후유증에 시달린 송태종은 말년에 들어 역으 로 대외정책에 대해 극도로 보수적인 정책을 취하였고, 심지어는 治国在乎修德, 四夷當 置度外, 置于度外, 存而勿论 이라고 유언을 남기며 대외문제에 대한 방임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 송태종이 남긴 각종 후유증으로 인해 宋眞宗은 천하의 창생을 위해 굴욕을 참는 것이 마땅하다 며 즉위 초 국정을 안정시키는데 급급하여 서하와 조속히 화의를 체 결하는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넷째, 송조의 군사적 부진은 군부의 발호를 방지하는데 최우선을 둔 송조의 정치 군사 제도와 경제문화적 발전에 따른 주변 국가에 대한 우월감이 맹목적인 자만과 폐쇄적 태 도를 지니게 하였고, 특히 성리학의 도덕지상주의가 현실을 왜곡하게 하였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다섯째와 여섯째 과제는 보다 구체적인 자료의 분석을 통해서 향후 보완해 야 할 부분인데, 특히 요 송 서하의 상황에 대해 모두 해박해야 하는 부담을 안겨주는 과제이기도 하다. 12) 13) 王稱, 东都事略, 卷23, 孟昶传 论赞. 張其凡은 積貧積弱으로 대표되는 송대의 거의 모든 구조적 문제점이 태종의 대요전쟁 패전과 그에 따른 후유증이라고 강조하였다.(張其凡, 宋代政治軍事論稿, 合肥, 安徽人民出版社, 2009)
122 3. 송-서하의 초기 관계와 충돌 원인 송태조는 건국 직후 남중국 통일에 주력하기 위해 요를 비롯한 서북방 제 세력을 인정 하고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유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요와의 무역을 허용하는 한편 전마 의 공급지인 河西柱廊의 回紇과 土蕃과도 우호적인 정책을 폈고, 이들 역시 말무역의 이 익 등으로 송조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夏州(陝西省 橫山縣) 銀州(陝西省 米脂縣) 綏州(陝 西省 綏德縣) 宥州(陝西省 靖邊縣) 靜州(陝西省 米脂縣) 등 현 陝北 5개 주를 다스리고 있던 定難軍節度使 李彛殷에게도 太尉직을 하사하고 기존의 통치권을 모두 인정하였다. 李彛殷 역시 五代 각 왕조에게 그러하였듯이 송에 대해 신복을 표방하고 표문을 올려 태 조의 즉위를 축하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송 건국 당시, 서북부 국경은 현 山西 陝西 內蒙古의 交界地인 黄河 河曲의 豐州에서 시작해서 서남쪽으로 府州 麟州 夏州를 거쳐 靈州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宋太祖는 국경 지역에 대해 매우 느슨한 羈縻政策을 채택하여 각 지역 유력자의 해당지역 지역장관직 세습을 허용하는 등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또 한편으로는 14명의 지휘 관을 이 지역에 주둔하게 하여 국경지대의 안정을 도모하였다.14) 그리고 군 지휘관에 대 한 권한 축소와 감시 체계 구축 등 군에 대한 강력한 개혁조치를 시행한 것과 달리 국경 을 수비하는 지휘관에 대해서는 상당한 예외조항을 두고 우대함으로써 현장에서 적극적 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15) 그 결과 서북지방 제 세력들이 송과 우호관계를 맺고 靈州와 河西柱廊을 잇는 무역로가 창통하는 등 국경지역 안정에 성공하였다.16) 태 종 즉위 후에도 양측 관계는 여전히 우호적이어서 太平興國2년(977) 태종이 北漢을 친정 하였을 때는 李光睿의 아들 李繼筠은 銀州刺史 李光遠과 綏州刺史 李光憲을 파견하여 호 응케 할 정도였다.17)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太平興國7년(982) 5월, 夏州 등지를 통치하던 定難軍節度使 李繼 14) 15) 16) 17) 李华瑞, 宋夏关系史, pp.15 16. 송태조는 汴京에 남은 지휘관 가족에 대한 후대해 주었고, 군 지휘관 관할 州縣 榷場에서 거둔 수익을 回图贸易의 자본으로 활용하도록 해주었을 뿐 아니라 관련 세금까지 면제해 주었다. 또 용맹한 자들을 선발하여 지휘관의 친위대로 삼는 행위와 관할 부대에 대한 상당 수준의 임의 처결권도 인정해 주는 등 오대의 전례를 거의 다 인정해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그 결 과 국경지역의 군 지휘관은 풍족한 재정적 뒷받침을 바탕으로 군을 양성하고 첩자를 파견하여 적의 동정을 파악하는 등 적극적인 대응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李燾, 續資治通鑑長編, 卷17, 开寶9年 11月 庚午) 967년 李彛殷이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은 李光睿는 北漢의 吳堡砦를 공략하고 砦主 侯遇를 사로 잡아 송에 보내기도 하였다.( 宋史, 卷453, 夏國 ) 宋史, 卷453, 夏國
송-서하 전쟁 원인 분석 / 兪 垣 濬 123 捧의 입조와 이에 대한 태종의 부적절한 조치를 계기로 일대 파탄을 맞게 되었다. 송태 조를 살해하고 즉위했다는 강한 의혹 속에서 권력을 장악한 송태종은 조속히 자신의 정 치적 기반을 구축하고 정통성을 확보하여야 했다. 하지만 건국한지 오래되지 않은 신흥 국가에서 국가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정책 대신 황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충 강화하고 권위를 제고하는데만 정책의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그 후유증은 상당히 심각하였다. 통치자로서의 정통성 결여는 태종으로 하여금 가시적인 공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조급증 과 함께 태조가 채택한 정책에 대한 과도한 부정과 수정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 히 자신에 대한 군의 충성심에 의구심을 갖을 수밖에 없었던 태종은 국경 지역 지휘관의 재량권을 대폭 삭감하는 등 통수체계의 일사분란함을 특히 강조하였다. 회도무역 독점권 을 비롯해 牙兵 혁파 등의 조치가 신속하게 취하여졌음은 물론이고, 羈縻政策의 그늘 안 에 있었던 제 세력의 기득권을 전면 부인하고 자신의 통치에 절대 순응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때 4대에 걸쳐 입조한 일이 없던 李繼捧이 갑자기 송에 입조하고 관할 지역을 송 에 헌납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런 돌발 사태가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 지 이론이 있기는 하지만18) 아마도 태종은 이계봉정권이 송조의 중앙집권에 역행하는 할 거정권이며 또한 이민족정권이기 때문에 더욱 서둘러 대응책을 강구하였던 결과가 아닌 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송태조도 이룩하지 못한 커다란 공적을 수립하여 자신의 통치 정 당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송태종은 太平興國4년(979) 北漢을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燕京 공략에 나섰다가 오히려 高梁河에서 참패를 당하고 겨우 살아 돌아옴으로써 엄청난 정치 적 곤경에 처하였다.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이 전개되자 송태종은 대외정책에 있어서 더 욱 경직된 자세를 견지하였다. 송태종은 이계봉이 汴京 거주와 헌지에 동의하자마자 서둘러 관리를 파견하여 관할 주 현을 접수하는 동시에 이계봉의 緦麻이상의 친척을 모두 汴京으로 강제 이주하게 했고, 綏州刺史 李克憲과 銀州子史 李克文의 병권도 박탈하고 입조할 것을 강요하였다.19) 이계 18) 19) 이계봉의 입조와 헌지 요인에 대해서는 3종의 각기 다른 해석이 있다. 첫째, 내부 권력투쟁에서 수세에 처한 이계봉이 그 타개책으로 송조에 귀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이것을 당항족 전 체의 의사로 오인한 태종이 이계봉과 그 일족의 변경 이주를 허용하면서 관할 주현을 헌납하도 록 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이계봉의 입조는 송조와의 우호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거나 지지 를 획득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는데, 태종은 이를 이계봉 관할 지역의 접수를 위한 호기로 간주하고 헌납을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송 측의 기록과 달리 이계봉 의 입조와 헌지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고 송조의 오랜 음모와 강압의 결과이며, 당항인 내부의 갈등 역시 송조가 개입의 이유로 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李华瑞, 宋夏关系史, p.19; 吳天墀, 西夏史稿,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pp.13 14) 태종은 이계봉에 대한 처리를 太平兴国3年(978) 4월 陳洪進이 泉州와 漳州 관할 14개县을 들어
124 봉을 비롯해 당항의 집권세력 모두를 인질로 억류하려는 송태종의 강압적 조치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송태종은 이계봉의 문제를 陳洪進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인식하였음 은 물론 심지어는 이계봉을 항복한 北漢 군주 劉繼元과 같이 대접하였다. 이계봉을 항복 한 유계원과 동격으로 놓고 일종의 포로로 대접한 것은 태종이 당항의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그들의 민심을 얻는데 실패하였음을 말해주며, 이계봉의 친송정책을 효율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항족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이들이 李繼遷을 중심으로 뭉치게 함은 물론 나아가 그들의 독립을 촉진하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夏州 蕃落使였던 17세의 이계천은 변경으로 이주하라는 태종의 강압적인 조치에 반발 하여 조부 李彛興의 초상을 꺼내들고 정권의 부흥을 호소하며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러 한 행동이 호소력 있었음은 이계천의 반발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인지, 그리고 송조가 어떠한 오류를 범하였으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을 취해야 하는지를 역으로 설명해준다. 하지만 이계천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송태종은 거의 개의치 않 았고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다. 雍熙1년(984) 9월에 夏州 知事 尹憲과 巡檢使 曹光實이 이계천의 주둔지 斤澤을 야간에 습격하여 500여명을 살해하고 400여개의 텐트를 불태웠 고, 이계천의 모친과 아내를 포로로 잡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계천은 겨우 달아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다시 재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듬해인 雍熙2년(985) 2월, 이계천은 투항을 한다고 속여 巡檢使 曹光實을 살해하였 고, 송태종은 대노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다시 濁輪川에서 이계천을 격파하였다. 이에 일 대 125개 부족이 송에 투항하자 이계천은 요로 가서 夏國王으로 책봉 받고 義成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강력한 지지 세력을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송의 주력군과의 결전 을 회피하고 철저하게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채택함으로써 송군은 효과적으로 이계천을 제압하기가 힘들었다. 그 결과 태종 재위기간 서북지방은 송군과 이계천 군과의 지속적 인 충돌로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송조는 이계천을 무력으로 제거하는데 실패하자 당항족 내부의 갈등을 극대화하는 한편 각종 유화책을 병행하여 이계천의 투항을 유도하 였다. 하지만 이계천은 송조에 투항할 의사가 있음을 거듭 밝히면서도 실제로는 계속 군 사적 저항과 세력 확대에 주력하는 등 교묘하게 대처하였다. 결국 송태종은 雍熙2년(985) 이계봉을 崇信節度使, 李克憲을 道州防禦使, 李克文을 博 州防禦使로 임명하여 귀환시켰으나 이미 정치적 설득력을 상실한 뒤여서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요와의 전쟁에서 거듭 참패하였던 태종으로서는 이계천에게 후한 대접 을 하더라도 관계를 정상화시키고 싶었지만 명목상의 신복조차도 거부하는 이계천의 거 투항한 일과 5월에 錢俶이 吳越을 들어 투항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고 심사숙고함이 없이 서 둘렀던 것으로 보인다.
송-서하 전쟁 원인 분석 / 兪 垣 濬 125 듭된 도발에 몹시 자존심을 상해 결국 淳化5년(994) 5월과 至道2년(996) 4월에 대군을 파견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지도3년(997)에도 대군을 파견하려고 했으나 자신의 사 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송진종이 즉위하던 무렵 이계천은 靈州에 대해 맹공을 하고 있어 영주를 방어할 것인 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진종으로서는 처음 마주친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당시 송조에는 영주를 굳게 방어하고 주변 세력을 경제적 이익을 통해 군사동맹을 맺어 이계천을 제압하자는 견해, 둘째는 서한이 흉노세력을 우회 공격한 것을 본받아 하서지 역을 점유하여 견제하자는 견해가 있었다. 셋째는 영주를 포기하자는 견해였다. 이 가운 데 둘은 토번과 동맹을 맺자는 것인데, 토번을 신뢰할 수 없었던 진종으로서는 수용은 하되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결국은 포기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결국 고립된 영주는 함평5년(1002) 3월 함락됨으로써 송은 서하주랑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 다. 4. 맺음말 연운지역을 회복하여 당조의 부흥을 이룩한다는 데는 송태조와 태종 형제의 견해가 일 치하였지만 서북지방의 경영에 대해서는 둘 다 원대한 구상이 없었다. 단 송태조는 신생 송조의 국력과 군사력을 고려하여 서북지역의 제 세력에 대해 온화한 削蕃 내지는 유화 정책을 추진하여 안정을 달성한데 비해 송태종은 지나치게 조급하고 강압적인 정책을 추 진함으로써 오히려 李繼遷의 반발과 서하의 독립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송조는 요와의 전면전을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서북지방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을 세울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계천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송조로서는 이 지역과의 왕래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조 치를 취하지 못하였고, 단공2년(989)에는 국경무역을 금지시킴으로써 당항족에 대한 경제 적 봉쇄조치에 나섰다. 송태종은 불법적 계승에 따른 문제점을 극복하고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오월 과 북한을 통합하는데 서둘렀을 뿐 아니라 연운회복을 명분으로 요와의 친정을 주도하였 지만 오히려 거듭된 패전으로 인해 정치적 위상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군사적 열세는 패배주의의 만연으로 이어져 淳化년간부터 송조는 매우 보수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 다. 결국 태종은 淳化5년(994)에 夏州가 사막 깊숙한 곳에 위치한 본래부터 간웅이 웅거 하던 곳 이라는 것을 구실로 하주성곽을 허물고 그곳 주민들을 綏州와 銀州 등지로 이
126 주 시키도록 하였고 至道2년(996) 이계천이 靈州를 공격하자 靈州 방어를 포기할 정도로 위축되었다. 반대로 이계천은 요의 지지를 획득하여 송태종을 압박하는 뛰어난 지략을 발휘함으로써 일거에 정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송은 서하를 군사적으로 제압할 능력이 없는데다가 요의 군사적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세폐의 제공을 통해 안정을 유지하는 유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 지만 천조 의 위신 때문에 서하에 대한 강경론은 항상 잠복해 있었다. 서하를 동격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정서는 늘 팽배했고, 무역 통제를 통해서도 이들을 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만연하여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서하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서하에 대해 정치적으로 인정하기 싫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우월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서하에 대한 송의 정책은 비교적 강경한 편이었다. 즉 송조는 군사 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즉시 군대를 동원한 압박 내지는 점령을 추구하였고,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무역 봉쇄를 통한 경제적 압박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경제적 통제방식은 군사적 충돌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용했지만 양국 의 충돌을 야기한 군사적 우열의 문제는 손대지 못한 채 현상만 미봉한다는 점에서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송조의 이러한 외교정책은 상시적 불안정 요인을 지 니고 있다. 단 이러한 정책이 송 요간 120년 가까운 장기 평화를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세폐의 규모가 양국 군사적 불균형을 조정하는 적합한 규모였다고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반면 송 서하 관계의 군사적 불균형을 조정하기에 견 25만필은 다소 부족하였을지 도 모른다.
北宋 神宗朝의 對外交易 政策과 高麗 金 榮 濟(檀國大 歷史學科) 宋代의 海上貿易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著書와 論文들이 나와 있다. 이 같은 연구 축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北宋 神宗朝의 對外交易 정책과 高麗와의 關係이다. 北宋 神宗朝에 宰相 王安石이 新法을 실시하여 富 國强兵을 추구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神宗朝 新法黨 정부가 對外交易에 대해서 도 그에 걸맞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주된 이유는 종래의 연구가 宋代 初期 中國과 外國 사이의 海上交易을 잘못 이해했 던 것에 기인한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唐中期 이후 진행된 私貿易의 발달이라는 延長線 에서 宋代의 海上貿易에 대해 논의를 전개해 왔다. 그래서 宋朝가 초기부터 다른 모든 지역에 대해서는 海商의 자유로운 渡航을 허용하고 있었지만, 당시 遼와 宋은 敵對關係 에 있었고, 나아가 高麗가 遼와 修交하고 있었기 때문에, 兩國에 대해서만은 編勅 을 통 해 自國海商의 渡航을 금지했던 것으로 해석해 왔다. 그런데 北宋 初中期에 시행된 嘉祐編勅 과 慶曆以前의 編勅 에 따르면, 南蕃 으로 가는 자에 대한 銅錢의 휴대량을 규정하고 있고, 그 밖의 國家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 다. 만일 宋朝가 초기부터 遼나 高麗를 제외하고, 나머지 국가들에 대해서 宋商의 해외도 항을 전면적으로 개방하고 있었다면, 굳이 南蕃 에 한해서만 銅錢의 휴대량을 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료에 근거한다면 宋初 宋商이 도항할 수 있었던 나라는 南蕃 으로 제한되어 있었다고 해석된다. 宋朝는 太宗朝에 京師에 榷易院을 설치하거나(976년), 그 뒤 이어서 沿邊地域을 대상으 로 三設法(茶, 鹽, 香藥)을 실시하기도 했다(995년). 한편 南蕃地域은 香藥을 비롯하여 犀 角, 象牙의 産地이다. 이 같은 배경에서 볼 때 宋初에 南蕃에 한하여 宋商의 도항을 허용 한 것은 皇室消費도 있겠지만, 당면한 專賣收入과 邊餉을 해결하기 위한 香藥 구입과 밀 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宋朝는 초기에 宋商의 渡航을 南蕃 지역에 한정시 킴으로써 海上貿易에 대해서 사실상 규제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宋朝의 방침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宋商은 高麗를 비롯해 日本, 심지어
128 는 遼에까지 도항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로 인해 宋朝는 수차례 編勅 을 제정하여 宋商이 高麗나 遼에 도항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對外交易은 海商이 속한 域內經濟 나 財政收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까닭으로 中央政府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地 方官廳은 公憑을 발급하면서까지 海商의 渡航을 공공연히 지원하고 있었다. 종래 한국사 연구자들은 高麗時代에 들어와 高麗海商의 대외활동이 단절된 것으로 추정해 왔으나, 中 國側 사료를 보면 編勅 施行期에 高麗商人들도 南中國에 빈번히 오고 있었다. 그런데 宋朝는 神宗朝에 들어와 市舶體制를 본격적으로 정비하고 있다. 먼저 기존의 市 舶港口인 廣州나 明州에 대한 管理監督 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市舶使의 位階를 높여 지 방 州郡의 장관이 密貿易하는 것에 제동을 걸었다. 또 市舶港口는 아니지만, 登州港을 폐 쇄하여 아예 민간선박들이 山東半島 以北의 바다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에 이르렀다. 또 神宗朝에 들어와 官僚들은 密貿易 商人에 대해 法으로 단속하고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그들을 市舶體制라는 공개적인 시스템 안으로 끌어넣기를 주문하였다. 이 같은 배경으로 인해 宋朝는 神宗朝부터 종래의 폐쇄적인 海上交易 政策을 포기하고 開放 政策으로 전환하였다. 그래서 神宗의 元豊2년(1079)과 3년에 각각 高麗나 日本에 도항하 는 것을 처음으로 허용했다. 그리고 元豊8年(1085)의 勅을 보면, 海商으로 하여금 오직 大遼國과 登州 및 萊州에 가서는 안 된다고 명하고 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서는 高麗나 日本 이외의 다른 國家에 대해서도 宋商의 渡航을 허용했다고 하겠다. 따라서 宋初에는 南蕃에 한해서만 宋商의 도항을 허용했으나, 神宗朝 元豊年間에 이르러 宋朝는 이러한 방침을 바꾸어 渡航할 수 있는 국가를 開放했던 것이다. 그런데 哲宗의 元祐5년(1090)에 이르러, 蘇軾은 慶曆編勅 과 嘉祐編勅 으로 되돌아가 기를 촉구하며, 아울러 宋商의 高麗渡航을 금지하자고 주장했고 이것이 시행되었다. 종래 연구자들은 이를 두고 宋商의 高麗渡航만이 다시 금지된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 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사료가 주목된다. 徽宗의 崇寧4년(1105) 6월 兩浙路 市舶司가 宋商 李充에게 발행한 公憑이 日本에 남아 있는데, 그 勘會 부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 록하고 있다. 舊市舶法 은 商客에게 비록 三佛齊에 가는 것은 허용했으나, 高麗, 日本, 大食 諸蕃에 가 는 것은 법으로 금하여 허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北界나 交趾를 제외하고, 여태까지 中國에 害가 되지 않았던 나라에 대해 모두 갈 수 있도록 한다. 이 崇寧4년의 公憑에서는 자국의 宋商으로 하여금 北界와 交趾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 든 나라에 갈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公憑에 따르면 舊市舶法 에서는 三佛
北宋 神宗朝의 對外交易 政策과 高麗 / 金 榮 濟 129 齊를 제외하고, 高麗, 日本, 大食諸蕃에 도항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에 나타나는 舊市舶法 이 어느 시기의 것일까 하는 점이다. 위의 崇寧4년(1105)의 公憑에서는 宋商의 高麗渡航을 허용하고 있다. 한편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元祐5년(1090) 蘇軾은 宋商의 高麗渡航을 금지하자고 주장하였고, 이것 이 시행되었다. 그런데 4년 뒤인 哲宗의 紹聖元年(1094) 윤4월에 宋朝는 다시 宋商의 高 麗渡航을 허용하였다. 그러므로 高麗渡航 허용에 주목할 경우, 崇寧公憑은 바로 직전에 해당하는 哲宗의 紹聖元年 윤4월의 방침에 따른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할 때 崇寧公憑에 서 말하는 舊市舶法 이란 哲宗의 元祐5년에서 紹聖元年 윤4월 사이의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 蘇軾은 慶曆과 嘉祐編勅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으므로, 崇寧公憑에서 나 타나는 舊市舶法 이란 다름 아닌 宋初의 市舶法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哲宗의 元祐5년(1090)에 이르러 宋朝는 다시 高麗渡航을 전면 금지하고 舊市 舶法 으로 회귀하였다. 이는 神宗朝의 開放政策인 이른바 元豊市舶法 을 모두 폐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때 高麗 뿐만 아니라, 日本과 其他의 국가에 도항하는 것까지도 모 두 금지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哲宗의 紹聖元年(1094) 윤4월에 다시 高麗渡航을 허용하고 있으므로, 이때 舊市舶法 을 폐기하고 또 다시 元豊市舶法 을 채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崇寧4년의 公憑에서는 北界와 交趾를 제외하고, 宋에 위협이 되지 않는 모든 나 라에 宋商이 도항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交趾가 새로이 등장하고 있으므로, 哲宗의 紹聖元年 윤4월 以後나 아니면 徽宗朝 初期에 新市舶法 을 만들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 다. 그렇지만 이 新市舶法 도 開放政策을 채용하고 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元豊市舶法 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詔勅의 時期 神宗朝 以後 渡航許容國 元祐5年 紹聖元年 三佛齊 元豊年間 紹聖元年 以後 崇寧年間 市舶法 高麗, 日本, (大食) 元豊市舶法 高麗, 日本, 大食 元豊市舶法 모든 國家(北界와 交趾 除外) 舊市舶法 新市舶法(元豊市舶法) 위의 <表>를 보면 神宗朝 이후 宋商에 대한 渡航 許容國은 묘하게도 新法黨과 舊法黨 執權時期에 따라 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元豊年間과 元祐年間은 각각 新法黨과 舊法 黨이 執權하고 있던 시기이다. 그리고 紹聖元年(1094)은 哲宗이 親政을 시작하는 시기로 이때 新法黨 人士들도 복귀하던 시기이다. 나아가 徽宗代 崇寧年間은 新法黨이 執權하던
130 시기이다. 이처럼 市舶法의 變化와 執權黨은 서로 一致하고 있다. 宋初 王朝政府는 自國 海商으로 하여금 오직 南蕃에 대해서만 갈수 있도록 했다. 그런 데 神宗의 元豊2년(1079)에 이르러 宋商의 高麗 渡航을 시작으로, 그 이듬해 日本, 元豊8 년에 大遼國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 대해서도 개방하였다. 또 徽宗代에도 역시 遼와 交 趾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도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開放的인 對外交易 정책을 立案하고 實行에 옮긴 것은 공히 新法黨 정부라 할 수 있다. 舊法黨 執權時期인 哲宗의 元祐年間에 蘇軾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高麗를 비판하였 다.① 海商 徐戩처럼 高麗에 밀항한 뒤 마음대로 僧侶를 태우고 오는 경우가 있다. ② 海 商 王應昇처럼 高麗를 통해 遼에 密航하는 무리가 많다. ③ 海商이 공공연히 高麗使節을 태우고 오고 있다. ④ 高麗의 入貢으로 인해 地方經費 지출이 너무 많으며 주민에게도 큰 피해를 주고 있다. ⑤ 高麗使節은 契丹을 대신해 宋을 염탐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 여기서 ④와 ⑤는 宋과 高麗 사이의 修交에 관한 것이지만, ①, ②, ③은 모 두 宋商의 高麗渡航을 허용한 것과 관련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에서 주목되는 점은 新法黨 정부가 對外開放 政策을 시도 한 첫 번째 國家가 다름 아닌 高麗라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서 蘇軾이 왜 집요하게 高麗 를 비판하고 있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新法黨이 對外開放 政策을 적용한 첫 단추 가 高麗였다. 그러므로 蘇軾이 高麗를 비판한다는 것은 곧 新法黨의 對外政策을 비판하 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蘇軾을 비롯한 舊法黨 人士들이 高麗를 비판한 배경 에는 新法黨의 對外交易 開放政策이 한 原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蘇軾은 高麗를 비판함으로써 新法黨의 對外開放 政策을 全面的으로 修正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元祐5년(1090)부터 舊市舶法 體制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哲宗의 親政과 함께 新法黨 人士들이 복귀하면서, 다시 元豊市舶法 體制로 돌아섰다. 따라서 新 法黨과 舊法黨은 對外交易 政策에 있어서도 서로 對立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10 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이 근 명(한국외대) 目 次 머리말 Ⅰ. 북송 초기의 對李朝 정책과 儂智高의 반란 Ⅱ. 神宗 시기의 정책 변환과 베트남 정벌 Ⅲ. 송-베트남 사이 경계 획정 문제와 그 결말 머리말 베트남이 오랜 시간에 걸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것은 939년의 일 이었다. 당시 중국은 오대의 혼란이 지속되고 있는 시기였다. 중국의 정복 상태에서 벗어 나 최초의 독립 왕조를 세웠던 吳權(응오 꾸옌)은, 중국 10국 정권 가운데 하나였던 南漢 의 간섭을 뿌리치고 吳(응오) 왕조를 건립하였다. 이렇게 중국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다 해도 베트남 독립왕조가 걸어가야 할 길은 험 난하였다. 1000년 이상에 달하는 기간 지속되었던 중국의 지배로 인해 베트남 사회에는 중국의 영향이 너무 깊숙이 침투해 있었고, 이에 따라 토착 사회에도 중국과 연계된 세 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각 정치 집단 사이의 경쟁과 지역 간 대립도 치열하였다. 939년 吳 왕조가 성립된 이래 1009년 李朝가 들어서서 비로소 베트남을 안정적을 지배 하게 되기까지, 베트남에는 十二使君의 동란시대, 鄭(딘) 왕조의 시대, 前黎(띠엔 레)의 시대 등으로 격변을 겪어야 했다. 중국은 이러한 베트남의 독립과 정치적 변천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간여하고자 했다. 吳權의 독립 작업도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南漢으로부터 파견되어 온 대규모 군대를 물리친 연후에야 성공할 수 있었다. 鄭 왕조 후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前
132 黎 왕조가 들어설 때에도 중국 세력의 간섭은 지속되었다. 980년 前黎 왕조의 黎桓(레 호안)이 왕조를 개창했을 때 北宋의 太宗은 대군을 파견하여 베트남을 복속시키고자 했 다. 10세기 베트남 제정권의 건국 작업은 그 자체 중국의 견제와 간섭을 극복하는 지난 한 사업이기도 했다. 송 태종의 베트남 정벌이 실패로 끝난 후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한 동안 평온한 관 계가 지속된다. 그 사이 약간의 곡절이 있고 소규모의 분쟁과 전투는 있었으나, 이전에 비교하면 양국 간에는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책봉-조공 관계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친선 관계는 11세기 후반 북송에 왕안석 정권이 수립되어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변한다. 접경 지역의 분쟁이 잦아지고 양측 사이 긴장이 고조되어 가다가 마침내 그러한 대립이 1075년에 이르러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북송의 태종 이래 송조의 베트남에 대한 정책은 어떠한 성격을 띄었던 것일까? 신종 시대에 발 생하는 전쟁은 어떠한 전후 배경에서 촉발된 것이었을까? Ⅰ. 북송 초기의 對李朝 정책과 儂智高의 반란 980년 건립된 前黎朝는 개국 황제인 黎桓(레 호안)이 재위 24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여환은 셋째 아들 龍鉞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이를 확고 히 하지 못한 채 사망하자 여러 아들들 사이에 계승분쟁이 발생했다. 우여곡절 끝에 龍 越이 간신히 등극하였지만, 그는 즉위 사흘 만에 아우인 龍鋌에 의해 살해되었다. 龍鋌의 통치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는 향락에 탐닉하며 잔학하게 통치하였으나 제위에 오른 지 4년만인 1009년에 사망하였다. 이로부터 얼마 후 군권을 장악한 李公蘊이 관료 와 승려들의 지위를 얻어 황제가 되었다. 그가 바로 李朝의 태조이다. 이로써 前黎朝는 30년만에 멸망하였다. 李朝의 태조는 곧바로 북송에 사자를 파견하여 책봉을 요청하였다. 북송 조정에서는 이 문제의 처리를 둘러싸고 약간의 논란이 벌어졌다. 交阯와 접경하며 일선에서 그 관련 문제를 직접 처리하고 있던 廣西轉運使 何亮은 大中祥符 3년(1010) 2월, 李公蘊은 龍鋌 의 최측근으로서 가장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黎氏를 배반하고 새 왕조를 개창하였으니 인준해서는 안 된다. 고 주장하였다.1) 이러한 주청을 받은 진종 역시, 龍鋌이 不義하였 다 하나 李公蘊은 더 심하다. 고 말하였으나, 베트남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고 그대로 이 1) 續資治通鑑長編 (이하 長編 이라 약칭함) 권 73, 眞宗 大中祥符 3년 2월 癸巳.
10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 이 근 명 133 공온의 즉위를 인준하였다.2) 태종 시기까지만 해도 송조는 적극적으로 베트남을 정벌하여 병합하려는 의도를 지니 고 있었다. 이는 黎桓이 前黎朝를 건립하였을 때 출정하는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 다. 太平興國 5년(980) 여환이 즉위하였을 때 태종은 그에 대한 책봉을 거부하며, 당송 교체기의 혼란을 이용하여 떨어져 나간 속지이니 강역 안으로 재흡수해야 한다 3)고 말하 고 있다. 또 당시 베트남 전쟁을 총지휘하였던 侯仁寶는, 交阯의 내란은 천혜의 기회이 며 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 4)고 말한 바 있다. 베트남은 오랫 동안 중국에 복속되어 있다 가 당말 오대의 혼란에 휩싸여 있을 때 떨어져 나간 존재이니 다시 정복하여 원상복구해 야 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태종 시기에 시도된 베트남 정벌전쟁은 그 총사령관이 侯仁寶가 전사할 정도로 참담하게 실패하였고 이후에는 재차 베트남에 대한 정벌의 논의가 대두되지 않았다. 오 히려 현실을 인정하고 베트남과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정책 기조는 이후 眞宗과 仁宗 시대를 통해 지속되었다. 당시 베트남과 북송의 접경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단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것은 양국 접경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이었다. 북송과 李朝 베 트남은 공히 이들에 대해 招撫와 經略에 공을 들였다. 특히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廣源州 일대에 거주하는 儂氏 세력이었다. 이들의 거주지역인 廣源州는 金銀의 산지였다. 이에 주목하여 송조와 베트남은 광원주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기도하였다. 접경 일 대의 소수민족은 베트남, 송 양국의 압박을 받으며 한편으로 양국의 영역을 향해 反攻하 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베트남, 송 양국이 모두 광원주 일대를 향해 경쟁하였다 해도, 眞宗 시대의 宋은 베트남에 비해 현저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한 양국 사이의 충돌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大中祥符 7년(1014)에 있었 던 사건이다. 이해 12월 베트남 측이 廣西의 欽州와 如洪寨를 습격하여 人畜을 약탈해 갔다. 이는 베트남 관할 하의 소수민족(狄獠)가 죄를 짓고 欽州로 도망쳐 오자, 知欽州가 如洪寨에서 이들 소수 민족을 맞아 성대히 대우해주었던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사실 이 조정에 보고되자 眞宗은, 향후 베트남 영역의 소수민족들을 誘召하여 공연히 사단을 만들지 말라. 고 지시하고 있다.5) 송의 진종은 베트남에 대해 극히 유화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2) 3) 4) 5) 李公蘊은 大中祥符 3년(1010) 2월 檢校太傅ㆍ充靜海軍節度觀察處置等使ㆍ安南都護로서 交阯郡 王에 봉해진다. 宋會要輯稿 蕃夷 4 交阯 蕃夷 4之29. 安南志略 권2, 太宗 太平興國 5년 5월 征交阯詔. 위와 같음. 위의 책, 蠻夷 4之31.
134 이듬 해인 大中祥符 8년(1015) 12월에는 베트남 측 蘇茂州의 소수민족이 欽州 安遠縣 을 침략하여 人畜을 약탈하였다. 하지만 이때 역시 조정에서는 광서로 전운사에게 詔令 을 내려 방어만을 명령하고 있을 뿐이다.6) 1022년 眞宗이 작고하고 仁宗이 즉위하였다. 진종시대의 유화적인 대 베트남 정책은 인종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조 베트남과 북송 사이에는 인종의 즉위 이후 5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측의 북부 변경지역에 대한 공 략과 팽창은 중단되지 않았다. 진종 天聖 6년(1022) 4월 베트남의 북부 진출은 중국 영 역으로까지 확대되어 邕州의 북송 군대와 교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송측에서는 邕 州의 權寨主까지 전사하였다. 이때 李朝의 태조(李公蘊)은 북송에 入貢하면서도 한편으로 는 子弟 및 사위를 시켜 침공을 지속하였다.7) 5월에 들어서도 베트남측의 공략은 멎지 않았다. 이러한 사태 전개에 송조는 어쩔 수 없이 강경한 자세를 취하였다. 베트남에 대 해, 약탈해간 人戶를 반환하지 않으면 邕州의 군대를 출동시켜 정벌을 진행시킬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베트남측은 이러한 압박에 베트남측은 굴복하여 송측 영역에 대 한 공략을 중지하였다.8) 이조의 베트남에서는 이 직후인 1028년 太祖 李公蘊이 죽고 이후 상당 기간의 계승분 쟁을 거쳐 德政(佛瑪)이 즉위하였다. 바로 2대 황제인 太宗이다. 태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한동안 북송과 군사적인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다 북송의 인종 景祐 元年(1036) 이후 역시 국경지대의 소수민족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베트남 북방 변경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이 빈번히 국경을 넘어 송측의 변경지역 을 약탈하였던 것은, 베트남의 적극적인 북방 경영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측의 기록에 의하면, 順天 18년(1027) 李朝의 太祖 李公蘊이 황태자인 佛瑪(德政) 에게 명하여 북방의 변경지역인 七源州를 토벌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9) 태조가 사망 후 에는 七源州 정벌의 장본인인 李德政이 帝位에 올랐다. 따라서 李朝의 태종 시대가 되면 북방 소수민족 거주지에 대한 공략이 더욱 활발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베트남 북부 접경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에 대한 李朝의 공략,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소수민 족의 동요는, 儂智高의 난이란 문제를 야기하고, 이는 북송과 이조 베트남 양측에 큰 파 장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베트남의 지배를 받고 있던 廣源州의 儂氏는, 李朝의 북부 변경지역에 대한 압박과 통 6) 7) 8) 9) 長編 권 85, 眞宗 大中祥符 8년 12월 己亥. 위의 책, 권106, 仁宗 天聖 6년 4월 庚午. 宋會要 蕃夷 4 交阯 蕃夷 4之32. 大越史記全書 (이하 全書 라 약칭함) 順天 18년 條.
10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 이 근 명 135 제가 강화되며 동요를 일으켰다. 이러한 불안과 동요는 1038년 儂存福이 李朝 베트남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발전하였다.10) 儂存福은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 이듬해인 1039년 정월 칭제하고 국호를 長生國이라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 반란은 이조 태종의 진 압으로 말미암아 무참히 실패하였다. 농존복과 그 아들 智聰은 李朝의 정벌군에 의해 생 포되어 수도로 압송된 다음 斬刑에 처해졌다. 이때 농존복의 또다른 아들 儂智高는 모친 阿儂과 함께 이조 진압군을 피해 도망하였 다가 까오방 지역으로 돌아와 재차 반란을 일으키고 국호를 大曆國이라 하였다. 이조의 태종은 곧바로 농지고에 대해서도 토벌을 단행하여 농지고를 생포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농지고의 부친 농존복과 형 농지총이 처형된 것을 불쌍히 여겨 사면해 주었다. 뿐만 아 니라 1043년 이조의 태종은 농지고에게 廣源州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하였고, 이에 따라 농지고는 이조 중앙정부에 조공을 바치며 복속하였다. 농지고는 광원주를 기반으로 하여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 갔다. 1040년대 말엽이 되면 인근 지역인 思琅州 및 四洞 도 그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대략 현재의 중국 및 베트남 접경 지역이 그의 영향 아 래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세력 확대를 기반으로 그는 1048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태 전개에 송 조정은 당황하였다. 10월에 이르러 농지고가, 邕州와 桂州 등 7州의 절도사 직위를 내려주면 투항하겠다. 11)는 의사를 전달해오자 인종은 그것을 들어 주고자 하는 의향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樞密副使인 梁適은, 만일 그렇게 하면 兩廣 지 방은 조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12)라고 말하여 인종의 생각을 돌렸다. 이 러한 과정을 거쳐 10월에 樞密副使 狄靑을 宣撫使로 파견하여 농지고 난을 진압하는 것 이 결정되었다. 송 조정의 농지고에 대한 토벌 방침이 결정되자, 이조 베트남은 이를 지원하겠다는 의 사를 전달해 왔다. 12월의 일이었다. 知桂州 余靖은, 이를 받아들여 향후에도 儂氏와 李 朝 베트남으로 하여금 서로 대립하는 형세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 13)고 말했다. 하지만 狄靑은, 交阯의 도움을 받아들이게 되면 蠻夷들이 향후 송을 가벼이 여겨 쉽게 이반할 것 14)이라 말하며 반대했다. 조정은 狄靑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狄靑의 토벌군은 이듬해인 皇祐 5년(1053) 정월 농지고에 대한 공략에 착수하여 불과 10) 11) 12) 13) 14) 농존복 및 농지고의 반란에 대해서는, 皇宋通鑑長編紀事本末 권50, 廣源蠻叛 ; 山本達郞 編, 앞서 든 ベトナム中國關係史 pp,34 37; 呂士朋, 앞서 든 宋代之中越關係, pp.279 285 참 조. 위와 같음. 위와 같음. 太平治迹統類 권10, 仁宗平儂智高, 皇祐 4년 12월 朝. 위와 같음.
136 10일만에 완전히 토벌하였다. 농지고는 狄靑의 진압군이 압박해 오자 邕州로 후퇴하였다 가 崑崙關 전투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후 야간에 옹주성을 방화하고 大理國으로 숨 어들어갔다. 余靖은 농지고의 모친 阿儂과 동쟁인 智光, 아들인 繼宗ㆍ繼封 등을 생포하 였다. 또 대리국으로 사신을 보내 피신한 농지고의 압송을 요구하였다. 농지고는 이 직후 대리국에서 살해되어 그 시신이 송에 보내졌다. 송 조정은 농지고의 모친과 동생, 아들들 을 모두 주살하였다. Ⅱ. 神宗 시기의 정책 변환과 베트남 정벌 治平 4년(1067) 정월, 북송 제5대 황제 英宗이 붕어하고 이어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 그가 바로 神宗이다. 당시 神宗은 약관 20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이후 元豊 8년(1085) 38 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20년 가까이 帝位에 있으면서 王安石(1021 1086)을 발탁하여 이 른바 新法 혹은 變法이라 불리는 대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이러한 신종 시대를 통해 북송의 대 베트남 정책은 이전까지와는 전연 다른 면모를 취 하게 된다. 신종과 왕안석이 대외 정벌을 통해 공업을 이루고 송조의 국세를 떨치고자 하는 강렬한 염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종은 황제로 즉위한 이후 국정의 대대적인 쇄신을 이루고자 했다. 그는 황제 등극 직후인 治平 4년 윤3월에 內外의 文武 群臣들에게 下命하여 內政과 邊防을 위시한 국정 전반에 대한 숨김 없는 직언을 구했다.15) 그의 이러한 內外 臣僚에 대한 개혁의 자문은, 나아가 재정수지의 절감방안과 재정책의 개선방향,16) 전반적인 治道의 방향과 변경의 군 사문제17)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상들에게 수시로 행해졌다. 하지만 이러한 神宗의 적극적인 모색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유력한 대신들은 그의 개혁의지에 부응하지 못하거 나, 아니면 그들이 제시한 方略이 전연 신종의 의도에 부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 蘇轍(1039 1112)은 훗날, ( 신종황제는) 처음 즉위한 때 萬事를 經營하여 海內를 바로잡고 四夷를 제압하려는 뜻을 15) 16) 17) 長編 권209, 英宗 治平 4年 閏3月 庚子. 長編拾補 권3上, 神宗 熙寧 元年 6월 丙寅. 이때 神宗은 司馬光과 滕甫에게 명하여, 看詳裁 減國用制度 하도록 했다. 예컨대 熙寧 元年(1068) 神宗은 富弼에게 治道와 邊事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있으며( 宋史 권 313, 富弼傳 ), 이듬 해 7월에는 文彦博에게 邊防久遠備禦之策을 묻고 있다( 長編拾補 권5, 神宗 熙寧 2년 7월 乙丑).
10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 이 근 명 137 지녔습니다. ( 하지만) 老臣과 宿將들은 팔를 끼고 서로 바라만 보았습니다.18) 라고 회고하고 있다. 신종은 국정의 개혁과 이를 바탕으로 거란과 서하를 제압하고자 하 는 강렬한 열의를 지녔으나, 주변의 신료들로부터 전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한동 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仁宗 이래의 老臣이었던 富弼(1004 1083)은 신종이 자신 의 주된 관심사인 邊事에 대해 자문하자, 폐하께서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으니 마땅 히 德과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원컨대 20년간 兵을 입에 올리지 마소서 라고 대답할 정도였다.19) 이러한 상황에서 神宗이 국정개혁을 추진할 대안으로서 선택한 인물이, 당시 朝野에서 명망을 얻고 있었던 王安石이었다. 이렇게 신종이 王安石을 발탁하는 저간의 사정에 대 해, 明末淸初의 인물 王夫之는, 神宗에게는 暢言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는데, 國政을 맡은 大臣들은 그 뜻을 헤아려 더불 어 잘 도모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그리하여 王安石이 이를 타고 나아갔다. 神宗은 처 음 즉위했을 때 文彦博에게 이르기를, 兵을 길러 邊境을 막기 위해서는 府庫가 충실해야 만 한다 고 했다. 이는 安石이 이끈 것이 아니다. 그 뜻이 정해진 것이 오래였다.20) 라고 말하고 있다. 신종 시기 추진되는 왕안석의 신법에는 다양한 성격과 측면이 있으나, 그 중심된 지향 가운데 하나가 국력을 충일히 하여 당시의 수세적이고 굴욕적인 대외관 계를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희녕 4년(1071), 신종은 蕭注를 知桂州에 임명하였다. 그는 嘉祐 5년(1060) 안남 정벌 을 주장하였다가 인종으로부터 責降된 인물이었다. 신종은 蕭注가 부임하기 이전 面對하 며 그에게 안남 정벌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는, 1060년 당시는 溪洞兵이 一當十이었고 무장도 우수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같지 않다. 교지인이 不滿萬이란 말도 망언이다. 고 답하였다. 이전과는 달리 교지 정벌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로 변모해 있었다. 신종은 희녕 6년(1073) 沈起를 蕭注 대신 知桂州로 임명하였다. 그는 부임한 이후 恩靖州의 儂善美를 招納하고 경계지역에 성채 구축하는 등 교지 정벌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의 대 교지 정책은 殺人以千數 交人震憂 라 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沈起는 희녕 8년(1075) 18) 19) 20) 蘇轍集, 欒城集 권47, 進御集表. 宋史 권313, 富弼傳. 남송시대의 인물인 葉適(1150 1223)이, 弼初執政 更張之意過于范韓 至作相 乃以一切堅守無所施爲爲是 雖如琦之微有改作 亦不能從也 ( 習學記言序目 권48, 皇朝文 鑑 2 奏疏 )라고 평하듯, 富弼은 본시 時弊에 대한 개혁의지가 강한 인물이었으나 神宗 무렵 이 되면 철저한 무사안일론자가 되어 있었다. 王夫之, 宋論 권6, 神宗 2.
138 劉彛로 교체되었다. 유이는 조정에 攻取의 계획이 있다고 판단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교 지에 대한 전쟁을 준비해 나갔다. 溪洞에 관원 파견하여 土丁을 모집하였으며 이들을 保 伍 결성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또 鹽運을 핑계로 어부를 모아 水戰 훈련을 하였다. 知 邕州 蘇緘은 劉彛에게 서신을 보내 이러한 조치의 중지 요구하고, 交人에게 전쟁을 일으 킬 명분을 주지 말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劉彛는 도리어 상주하여 蘇緘을 탄핵하였다. 양인이 대립하자 북송 조정은 유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조정에서는 蘇緘에게 邊事를 말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이처럼 송측에서 전쟁을 위한 준비를 진행시켜 가자 1075년 11월 위협을 느낀 교지가 먼저 송에 대해 先攻을 해왔다. 교지는 欽州와 廉州를 함락시키고 옹주로 진격하였다. 이 에 지옹주 소함은 廂禁卒을 모두 합하여 2,800명 편성하고, 이밖에 수백명의 사졸 모집 하여 대비에 나섰다. 하지만 1076년 정월, 옹주성은 42일만에 함락되고 소함 및 그 가속 은 모두 사망하였다. 교지병은 이때 吏卒民丁 5만여명 살해항여 이들 시체로 강을 메웠 다고 한다. 교지의 군대는 옹주성을 약탈한 후 철수하였다. 교지의 침공이 있자 송은 곧바로 교지에 대한 반공을 준비하여 趙卨을 安撫使로 하고 李憲을 副使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조설과 이헌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였다. 당시 재상 왕 안석은 안남 정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반면 추밀사 吳充은 이에 반대하고고 있었다. 신 종은 조설 대신 郭逵를 안무사로 임명하였다. 곽규의 임용은 吳充의 추천에 따른 것이었 다. 교지 정벌군은 1076년 7월에 정벌군은 桂州 도착하여 10월부터 교지 영내로 진군하였 다. 12월에는 곽규의 본대도 안남 영역으로 진군하였다. 교전이 벌어지자 베트남측은 코 끼리를 앞세우고 저항하였으나, 송측 군대는 强弩를 발사하고 巨刀로 象鼻를 베며 전투 하여 베트남의 전열을 무너트렸다. 송의 정벌군은 진군을 지속하여 12월 21일 富良江에 도착하였다. 안남은 전함 400척을 모두 남안에 정박시키고 송군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송 측은 수군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교지군과 접전을 벌였다. 부양강 전투는 치열하 게 전개되었으나 그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양측 군대의 피해는 막심하였다. 송측의 기록에 의하면 적이 대패하여 강에 떨어져 죽은 자가 不可勝數였다. 이로 인해 부양강이 3일간이나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 고 적고 있다. 부양강 전투 직후 송은 더 이상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리 만큼 심대한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九軍食盡矣 凡兵之在行者十萬 夫二十餘萬 冒暑涉瘴 死亡過半 存者皆病瘁 라는 상 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베트남 역시 송의 대대적인 정벌에 장기간 맞설 수는 없었다. 결 국 부양강의 전투 이후 베트남이 割地를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하자, 곽규의 군대는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전투를 종결짓고 철수하였다. 본대가 베트남 영역으로 진군한 지 채
10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 이 근 명 139 한 달도 되지 않은, 1076년 12월 말의 시점이었다. Ⅲ. 송-베트남 사이 경계 획정 문제와 그 결말 1076년의 전쟁으로 이조 베트남이 송측에 할양한 지역은 蘇茂(하이 닌), 思琅州(하랑 및 쯩칸푸 일대), 門州(나찬), 諒州(랑썬), 廣源州의 5州였다. 곽규의 군대가 귀환하자 희 녕 10년(1077) 2월 재상 吳充 등은 上表하여 안남의 평정을 축하하였다. 그 사이 왕안석 은 사직하고 금릉으로 낙향한 상태였다. 신종은 廣源州를 順州로 개칭하는 등 5주를 정 식 판도로 편입하였다. 아울러 베트남 仁宗에게 下詔하여, 自今依舊入貢 所有克復州縣 已令安撫使 各遣人劃定疆界 無輒侵犯. 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앞서 곽규는 광원주 등에 금은 坑冶를 설치하자고 주청하였다. 농씨의 거주지인 광원주는 당시 중요한 금 산지였다. 또 광서 宣撫使는 이들 지역의 개척을 위해 罪人을 쓰자고 주청하고 있다. 신종은 이들 주장을 모두 받아들였다. 하지만 베트남으로부터 새로 획득한 5주의 땅은 송으로서 너무도 남방에 치우친 변경 이었다. 현지의 습속이나 풍토도 익숙치 않았다. 1076년 여름, 신종은 知桂州 趙卨, 광서 전운사 李平一, 광서전운부사 苗時中 등에게, 决里順州久逺可與不可固守 如何即不損國威 及經久兵力財費 得免勞之 를 자문하고 있다. 5주의 땅을 송의 영역으로 편입하고 불과 반 년이 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1078년 정월 이조 베트남의 인종(李乾德)이 송에 견사하여 5주의 賜 還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신종은, 候進奉人到闕 别降疆事處分 이라 대답하고 있다. 적 극적인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것이다. 이후 송 조정에서는 이들 지역의 반환여부를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이 전개되었다. 현지의 관료들, 특히 1076년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그 반환의 논의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송에게 있어 5주의 관할은 심대한 부담이었다. 당시 順州에는 戍兵 3000인이 파견되어야 했는데 그 가운데 매년 10에 5, 6이 사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제 까지나 지속시킬 수는 없었다. 신종은, 乾徳犯順 故興師討罪 逵等不能討滅 垂成而還. 今 順州荒逺瘴癘之地 朝廷得之未為利 豈可自驅戍兵 投之瘴土? 一夫不獲 朕尚閔之 况使十損 五六邪? 라는 탄식을 하고 있다. 광서 전운부사 苗時中 역시 順州所築堡寨 深在賊境 饋 運阻絶 戍卒死者十常八九 不如棄之. 然廣源州 舊隸邕管覊縻 本非交阯有也. 라고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 결국 송조는 廣源州 및 기타 점령 주현을 되돌려 주기로 결정하였다. 1078년 9월 교지에서 方物을 조공하며 광원주 등의 반환을 요청하자, 신종은 邕州 欽
140 州 廉州의 포로를 반환하면 鑛源州 蘇茂州 機桹縣 등을 돌려주겠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신임 광서 경략안무사겸 지계주 曾布로 하여금 반환의 조치를 담당케 하였다. 위신과 체 면을 위해 먼저 邕州 欽州 廉州의 포로를 받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1079년 10월 안남으 로부터 포로 221인이 송환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그 직후 順州 등을 폐지하는 조령을 내리고 이조 베트남에 4주(廣源 蘇茂 門 思琅) 1현(諒州 機榔)을 반환하였다.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八陣合變圖說 을 중심으로 홍 을 표(강원대 사학과 박사과정) 目 次 Ⅰ. 서론 Ⅱ. 陣法의 發源과 傳繼 Ⅲ. 諸家의 陣圖와 陣說 Ⅳ. 龍正의 八陣合變圖說 Ⅴ. 결론 Ⅰ. 서론 朱元璋이 明의 건국에 성공 할 수 있었던 것은 元末 국정의 피폐로 야기된 사회의 혼 란한 틈바구니 속에서 경쟁자들을 극복하며 이민족을 몰아냈기 때문이지, 그의 농민군들 이 칭기즈 칸의 군대와 같이 강력했기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규부대를 훈련시켜 본 경험이 없었던 주원장의 군사사상은 이후 명의 국방정책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는 후대의 황제들에게 강력한 군사력이란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육성된다는 것을 인식 시켜 주거나, 국방을 공고히 할 수 있는 대안도 제시해 주지 못하면서, 역으로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정책만 추진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기가 저하된 무신들은 병법이나 무예의 연마는 물론 진법을 통한 군사 훈련조차 등한시 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고, 土木之變1)과 庚戌之變2)에서 그 문제점이 1) 2) 正統14년(1449), 英宗이 50만 대군을 이끌고 蒙古 韃靼 추장 也先을 토벌하였으나 전멸에 가까 운 참패를 당하고 영종은 포로가 되었던 戰役이다. 百卷本 中國全史 所收, 毛佩琦 王莉 著 中 國明代軍事史, 人民出版社, 1994, 72 75쪽. 嘉靖29년(1550) 6월, 俺答의 군대가 북경을 침략해 8일간 약탈하고 돌아갔지만 명군은 이렇다 할 저항을 못했던 사건. 百卷本 中國全史 所收, 毛佩琦 王莉 著 中國明代軍事史, 人民出版社, 1994, 83 87쪽.
142 표출되기도 하였지만, 명 왕조는 선왕의 유지를 바꾸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병부상 서 馬文升3)은 <兵書를 간행하여 將材를 양성하자>는 상소를 올리며 우리 조정은 병서 를 기밀시하여 배우는 것을 금지 시켰기에 인재들은 감히 학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장수 될 만한 재목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며 병서를 간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부 할 수 있게 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무너진 군대의 기강은 명이 망할 때까지 회복하기 어려 웠다. 武宗 정덕 3년 10월에 사천의 보령 사람 藍廷瑞와 鄢本恕가 漢中에서 반란을 일으켜 군현을 노략질 했지만 관군은 이를 제압할 수 없었다. 명나라 조정은 우부도어사 任俊을 사천의 순무로 임명하여 토벌하도록 했으나, 여의치 못하자 정덕 5년 3월에 형부상서 洪 鍾을 좌도어사 겸 총독으로 임명하여 사천과 섬서 호광 하남 등 네 省의 軍務를 총괄 해 적당들을 토벌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홍종은 조정에 표를 올려 누명을 쓰고 파직된 섬서 순무도어사 藍章4)을 복직시켜 사천으로 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남장이 사천순무에 부임하자 병법에 밝은 龍正5)을 초빙하였다고 한다. 용정은 침체된 관군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도적을 토벌하기 위한 방안을 제갈량의 팔진 법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제갈량이 夔州 瞿塘縣 南一里 魚腹浦에 포진했던 壘石 배치도를 그려다 관청 안에 작은 돌로 재현해 놓고 연구하여 八陣合變圖說 (이후 도설 로 약칭)을 저술하였고, 이 방법으로 관군을 훈련시켜 한중 일대의 반란세력을 평정하였 다고 한다. 이 글은 이때 저술된 도설 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중국 전통 진법이 창안되어 전습된 과정을 돌아보고, 명대 용정과 趙本學6) 등으로 대표 3) 4) 5) 6) 马文升(1426 1510)은 明朝의 大臣으로 字는 负图, 號는 约斋이다. 钧州(지금의 河南 禹州市)사 람으로 景泰에 进士가 되었고 이후 御史에 제수 받았다. 一生의 업적이 현저하여 代宗 朱祁 钰 英宗 朱祁镇 宪宗 朱见深 孝宋 朱祐樘 武宋 朱厚照 등을 섬기며 兵部尙書 등을 역임하 였기에 후세 사람들은 五朝元老 马文升이라 한다. 여기서는 그가 올린 <爲 刊印武書, 以作養將 材事 疏>를 말한다. 百度百科, http://www.baidu.com/. 2010. 6. 10 검색(이하 인명의 출처는 같다). 蓝章(1453 1526)의 字는 文绣, 號는 大嶗山翁이다. 成化 20년에 进士가 되어 婺源과 潜山의 县令 이 되었고 贵州监察御史 浙江巡撫 山西太仆寺少卿大理寺右廷尉 등을 거쳐 正德 원년에 都察 院左佥都御史가 되었으나 刘瑾의 미움을 사 下狱되었다가 抚州의 通判으로 귀양 갔다. 劉瑾이 실 각하자 다시 발탁되어 陝西의 巡抚가 된 뒤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南京刑部右侍郎에 승진하여 네 가지 정책을 건의했지만 채택되지 않자 正德 12년(1517)에 세 차례 상소를 올려 굳이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國朝列卿記 中文大辭典 8권, 161쪽). 龍正의 行狀記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필자는 藍章과 동일 인물로 그의 別號 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趙本學(1478 1544)의 본명은 赵世郁으로 本学은 字이다. 號는 虚舟로 宋 太祖 赵匡胤의 후예 인 赵子先의 직계 자손으로 俞大猷의 스승이다. 易学와 军事에 뛰어나 赵注孙子兵法 과 韬钤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 홍 을 표 143 되는 진법 연구가들의 진론을 통하여 팔진법에 접근해 가면서 그것이 軍事史에 어떤 의 미가 있는지 찾아보고자 하였다. Ⅱ. 陣法의 發源과 傳繼 고대 진법이 출현한 배경은 역사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운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진법 과 관련된 문헌들에 의하면 진법은 黃帝와 風后7)가 창안하였다 는 설이 보편적으로 인 식되어 왔다. 한 예로 漢書 <藝文志> 兵家類 陰陽16家에 黃帝十六篇 <圖三卷>과 風 后十三篇 <圖二卷>의 기록은 황제와 풍후가 창안한 陣圖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 고 있다. 진법은 황제 이후에도 계속된 전쟁과 더불어 발전하여 그 형태도 수많은 종류가 있었 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布陣 방법을 전해주는 문헌은 찾기 어렵고 이름만 전해지는 것도 많지 않다. 기원전 707년 周桓王과 鄭莊公이 격전했던 繻葛에서 高渠彌8)가 창안한 魚麗 陣은 전차와 보병을 혼합한 전법으로 중국 전쟁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춘추시 대의 진법은 管仲內政陣圖와 司馬法握奇營圖, 孫武子乘之陣圖가, 秦漢의 진법은 垓下五軍 陣 등이 武備志 에 수록되어 있다. 팔진이란 명칭은 銀雀山에서 출토된 孫臏의 병법9)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후한서 에 는 竇憲10)이 흉노를 격파할 때 팔진법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진법의 원전이라 하 握奇經 에는 漢의 승상 公孫宏11)의 팔진 해설이 전해지고 있어 이것이 오래 전부터 는 사용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蜀漢의 제갈량은 기존의 팔진법을 혁신하여 크게 명성을 떨치며 중국 5000년 전쟁사 에서 최고의 병법가로 꼽히고 있는 孫子와 吳子도 하지 못한 혁신적인 자취를 남겼다 12) 7) 8) 9) 10) 11) 12) 内外篇 을 지었는데, 赵注孙子兵法 은 일본에서 번역 출판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다. 중국 고대 임금인 黃帝를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린 여섯 신하 중의 한 사람이다. 指南車를 발명하 고 중국 최초의 군사학 서적으로 알려진 握奇經 을 비롯한 병법 13편, 圖 3권, 孤虛 20권을 저술 했다고 한다. 춘추시대 鄭나라의 명장. 繻葛의 전쟁은 BC707년에 周桓王과 鄭莊公이 격전했던 싸움이다. 이에 대해서는 孫臏 撰, 李丙鎬 譯, 孫臏兵法, 지혜의 샘, 1998. 을 참고 할 것. 竇憲( 92)의 字는 伯度, 扶風 平陵(지금의 陝西 咸陽) 사람이다. 竇融의 曾孫으로 흉노를 격 파한 東漢의 장군이다. 公孫宏(BC199 BC120)은 公孫弘이라고도 한다. 字는 季, 齐의 菑川薛 사람이다. 中國軍史科學, 中國軍事通史 7卷, 中國軍史科學院, 2005, 435쪽 : 推子八陣, 不在孫 吳 孫子 吳起所不曾有的創新內容.
144 고 한다. 그의 팔진은 이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일부가 활용되거나 연구되었다. 晉의 武帝는 陳勰13)에게 제갈량의 진법을 배우게 했고, 馬隆14)은 팔진법으로 凉州의 樹 機能을 평정하였으며, 唐의 李靖은 六花陣으로 흉노를 토벌했는데, 그는 자신의 진법도 제갈량의 팔진법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술한 진법들은 당 이후부터 실 전되었기에 후대에서는 이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간헐적으로 있어 왔다. 明代는 어느 시기보다 병서의 저술과 편찬이 많아 중국 전통병서와 진법이 총정리된 시기라 할 수 있다. 명장 兪大猷의 스승인 趙本學은 赤卒十二星으로 진법의 변화를 설명 한 바 있고, 戚繼光은 鴛鴦陣으로 왜구를 격퇴하였다. 척계광의 紀效新書 는 임진왜란 당시 朝鮮에 도입되어 군사훈련의 지침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명말에 王鳴鶴15)이 쓴 登壇必究 와 병법서의 백과사전 격인 茅元儀16)의 武備志 등에도 다수의 진법이 수록되 어 있다. Ⅲ. 諸家의 陣圖와 陣說 팔진법은 용정 이외에도 적지 않은 인물들이 연구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 실전되 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문헌으로 전해지는 몇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1. 八陣의 變陣 문헌상 가장 오래된 陣圖는 태백음경 을 쓴 唐 李筌17)의 것으로 <그림 1>과 같다. 그는 팔진을 여덟 개의 형태로 나누어 좌로부터 天覆陣, 地載陣, 風揚陣, 雲垂陣과 龍 飛 虎翼 鳥翔 蛇蟠 등으로 표현했지만 운용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이 때문에 훗날 宋 神宗이나 조본학 安命老 등으로부터 어린애가 장난친 것 같다는 평 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유는 다르게 보았다. 그는 태백음경 의 진법은 四方이 正이 되 13) 14) 15) 16) 17) 晉書 에 이름이 보이지만 傳이나 行狀記가 없다. 馬隆(??)의 字는 孝興. 東平 平陸 사람으로 삼국시대 曹操의 무관이었으나 나중에 西晉에서 벼슬하여 涼州의 반란을 평정하였고 涼州의 鎮守를 십 여 년간 수행하였다. 王鳴鶴(??)은 명나라 南直隸 山阳(지금의 江苏省 淮安) 사람이다. 대략 명나라 후기 嘉靖에서 萬曆년간 사이에 생존했던 인물로 추정하며 登壇必究 를 써서 군사 분야에 탁월한 공헌을 하 였다. 茅元儀(1594 1640)의 字는 止生이고, 號는 石民으로 절강성 歸安(지금의 절강성 吳興) 사람이 다. 명대의 대장이자 문학가 茅坤의 손자로 1621년에 武備志 240권을 완성하였다. 兵書 太白陰經 을 지은 唐 初期의 인물이라 하나 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 홍 을 표 <그림 1> 李筌의 八變陣 145 출처 : 中國兵書集成 고 四隅가 奇가 되었다 라고 하며 이 진법의 가치를 인정한 바 있다. 또한 진의 명칭이 나 형태는 도설 의 8개 진형과도 유사하여 용정이 이 진도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볼 수 있다. 태백음경 과 같이 陣圖만 그려 놓고 구체적인 운용방법을 생략한 현상은 이후의 진법 서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점이다. 이 때문에 진법을 배우고자 하는 후학들은 막 연하게 되었다. 이전 외에 진도를 그린 唐代의 인물은 獨孤及18)과 裵緖19)가 있으며 그들의 진도는 무경총요 에 수록되어 있다. 배서는 孫武의 포진법이라 하며 <그림 2>와 같이 8개의 진 <그림 2> 裵緖의 八變陣 출처 : 中國兵書集成 형을 제시한 바 있다. 이 그림은 외형과 내면의 의미를 복합시킨 진형이다. 조본학과 안명노는 이 역시 볼 것 없다고 폄하했지만, 분석해 본 바에 의하면 어느 진이든 정돈된 方陣의 형태로 질서 를 유지하며 변화를 가능케 하였기에 산만한 것 같지만 절제가 있다. 또한 이를 통하여 고대의 진형을 추연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明의 조본학은 <그림 3>과 같은 적졸십이성을 이용하여 진법의 변화를 설명하였다. 위와 같은 형태는 팔진법이 아니라도 동서고금의 공통된 전투대형이었다. 이들을 현대 18) 19) 獨孤及(725 777)의 字는 至之이며 河南 洛陽 사람으로 唐朝의 산문가이다. 裵緖(??)의 이름은 여러 진법서에서 볼 수 있지만 行狀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146 <그림 3> 趙本學의 八變陣 출처 : 屬武經總要 식 군사용어로 표현해 보면, 좌측 적졸12성 의 우측으로부터 圓陣 稜陣 左右梯隊 右 角形 左角形 後角形 前角形 등으로 불린다. 2. 八陣의 合陣 풍후나 제갈량의 八陣圖는 문헌으로 전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후세에서는 연구자들 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표현하였다. 그들 중 8 8=64의 방진으로 그린 10개를 가려 다음 과 같이 제시해 보았다. <그림 6> 李靖 慈號王氏 正義 通鑑의 八陣圖 출처 : 武備志, 演機新編 <그림 4>의 왼쪽은 이정의 것이라 하는데 팔진을 6진으로 변형시켰다. 그 우측에 있 는 자호왕씨의 진도는 衝 衡 軸 風 雲으로만 구성하였고, 正義의 진은 네 모서리에 풍진과 운진을 두고 충 형 축을 전후좌우로 안배하였으며, 통감의 배치는 정의의 배치 와 유사하지만 중앙을 확장시켜 전체의 진을 앞뒤로 삼분하였다.20) <그림 5>의 왼쪽에 있는 장엽의 진도는 地軸을 전후로 신장시켜 좌우를 강화했다. 이 는 학익진과 같이 좌우로 전개하기 위한 사전 포진으로 보인다. 두 번째 조본학의 진세 20) 慈湖王氏 正義 通鑑이란 명칭은 볼 수 없었다. 屬武經總要 등에 수록되어 있지만 행장기나 語源은 찾아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 홍 을 표 147 <그림 7> 張燁 趙本學 戚繼光 王鳴鶴의 八陣圖 출처 : 武備志, 演機新編 는 6개 부대씩 결속하여 팔방을 에워싸고 있지만 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충 형 축 풍 운이 어디에 배치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척계광이나 왕명학의 배치는 정의와 통 감과 같은 방식을 택하면서 자기 특성대로 변형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정과 조본학을 제 외한 다른 진들은 모두 宋 慈湖王氏의 배치를 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諸家의 대표적인 포진법이라 할 수 있는 이상 8개의 진도들은 공통적으로 天地風雲이 란 4개의 正陣만을 표현하고 龍虎鳥蛇라는 奇陣을 명시하지 않고 있어 팔진은 네 개의 正陣과 네 개의 奇陣으로 이루어진다 는 악기경 의 설명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서 팔진 의 실체는 네 개의 正陣 뿐이고 奇陣은 변화를 위한 가상진지인 것이다. 필자는 이 진도들이 갖는 의미를 제갈량의 팔진법에 얼마만큼 접근 했느냐 라는 것 보다는 변화의 다양성에서 찾고자 하였다. 진법의 묘리는 고정된 배치보다는 변화에 있 기 때문이다. Ⅳ. 龍正의 八陣合變圖說 용정의 도설 은 제갈량의 팔진법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그때 까지 막연하게 인식되었던 팔진에 대한 개념을 정립 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1. 八陣의 合說 1) 八陣總圖 <그림 6>은 용정이 그린 팔진도의 총체적인 모습이고, <그림 7>은 이것을 보기 쉽게
148 재도식한 것이다. <그림 7> 八陣 部隊 配置圖 <그림 6> 龍正의 八陣圖 출처 : 中國兵書集成 이에 대한 도설 의 설명에 따르면, 제갈량은 우주의 섭리에 따라 팔진을 만들었지만 黃帝와 風后의 비법을 이어 받은 것이지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어복포에 가로 세로가 모두 8로 된 누석을 쌓은 것은, 天衡 地軸 天前衝 天後衝 地前衝 地後衝과 風과 雲 등이라 한다. 여기서 風과 雲이라 하는 것은 진의 이름이고 64라 하는 것은 진 의 多 寡가 相乘하는 수이다. 陣을 설치하는 데는 방향이 있고, 배치되는 위치도 정해져 있다. 遊兵 24진은 64본진의 후방에 위치하여 却月陣이라 부르기도 하는 間隊로, 팔진의 후방을 호위하다가 유사시 신속하게 적과 접전하여 승리를 취한다21)라고 하였다. 2) 衝 衡 軸과 風 雲 遊 부대를 戰陣으로 편성하려면 이에 따른 조직이 필요하다. 악기경 에서는 그 구성요소 를 衝 衡 軸과 風 雲 遊의 6개로 보고 있었고22) 용정 역시 그 견해에 따르고 있었 21) 22) 龍正, 八陣合變圖說, 中國兵書集成 40冊所收, 中國 解放軍出版社, 影印, 1993, 3쪽 : 昔者, 漢之諸葛大名, 垂於宇宙, 而成于八陣者. 居多諸葛之八陣, 昉于黃帝風后, 而實得心法, 非專推演 也. 故, 其壘石于沙, 縱橫皆八, 其曰天衡 地軸 天前衝後衝 地前衝後衝與. 夫曰風曰雲者, 陣之名也. 六十有四者, 陣之多寡 相乘數也. 布之各有其方, 列之各有其位. 遊兵二十四陣, 在六十 四之後, 名曰却月陣, 開闔作止, 間隊與八陣, 皆同下營之際, 環衛於後, 出入神速, 應敵取勝者, 此總 圖之合歟. 風后, 握機經, 文淵閣 四庫全書 726冊, 臺灣: 商務印書館 影印, 子部 32卷, 1984, 3 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