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 洋 史 學 會 秋季硏究發表會 일시: 2010 년 10 월 30 일 ( 토 ) 장소: 고려대학교 서관(문과대학) 주최 : 동양사학회 주관 : 고려대학교 사학과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후원 : 동북아역사재단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東洋史學會 2010 秋季硏究發表會 日程 전체 일정 참가자 등록: 9:30~10:00 (서관3층) 오 전 발 표: 10:00~12:00 (서관3층) 점 심 시 간: 12:00~14:00 오 후 발 표: 14:00~17:00 (서관3층) 우호 동양사학 저작상 시상: 17:10~17:30 (서관317) 학회 리셉션: 17:30~18:30 (우산골) 분과별 발표 일정 中國古代史 장소 : 서관 314A호 오전사회 : 김병준(한림대) 박봉주(서울대) :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양순자(고려대) : 한비자의 法과 術의 관계 재조명 오후사회 : 정하현(공주대) 토론 : 이명화(한양대) 토론 : 임병덕(충북대) 최진묵(서울대) : 張家山 漢簡 算數書의 程 과 중국고대 기술과 생산의 표준화 토론 : 김진우(고려대)
中國中世史 장소 : 서관 314B호 오전사회 : 최재영(서울대) 오후사회 : 김종섭(서울시립대) 조성우(서울대) :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 - 道敎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토론 : 김선민(연세대) 최진열(동덕여대) :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墓誌銘의 분석을 중심으로 이영철(영남대) : 唐代 藩鎭의 攝職 토론 : 김호(고려대) 토론 : 정병준(동국대) 홍승태(한국외대 역사문화연구소) :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연구 -<春秋>에 대한 기본인식과 三傳의 활용을 중심으로- 토론 : 김석우(원광대) 宋遼金元史 장소 : 서관 316A호 오전사회 : 김위현(명지대) 오후사회 : 김용완(충남대) 최해별(이화여대) : 당송시기 妾의 생활 - 夫妾 관계의 계약적 특성을 중심으로 김상범(한국외국어대) : 五代 시기 거란과의 전쟁과 외교 유원준(경희대) : 송-서하간 전쟁의 발발 배경과 그 성격 김영제(단국대) : 북송 神宗朝의 대외 교역정책과 高麗 토론 : 조복현(충남대) 토론 : 박지훈(경기대) 토론 : 오원경(숙명여대) 토론 : 나영남(한국외대) 이근명(한국외국어대) : 10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토론 : 육정임(경희대)
明淸史 장소 : 서관 307호 오전사회 : 서인범(동국대) 오후사회 : 정철웅(명지대) 홍을표(강원대) :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 八陣合變圖說을 중심으로 토론 : 강원묵(육군사관학교) 이민호(한국한의학연구원) : 淸代 懷慶藥商 의 對外進出과 商業네트워크 김문기(부경대) : 17세기 中國과 朝鮮의 小氷期 기후변동 토론 : 정혜중(이화여대) 토론 : 염정섭(한림대) 송요후(인천대) : 南通, 昆山, 蘇州 지역의 破血湖 儀式 에 대해 김선민(고려대) : 雍正帝의 동북 변경 통치 中國近現代史 토론 : 이경룡(세종대) 토론 : 송미령(전북대) 장소 : 서관 317호 오전사회 : 이은자(전북대) 오후사회 : 유용태(서울대) 박정현(고려대) : 19세기 말 조선의 중국인 거류지와 운영체제 토론: 이옥련(인하대) 손승희(인천대) : 중국민주동맹의 좌절과 선택: 국공내전시기 제3세력의 독자성 모색 토론: 이재령(단국대) 오병수(성균관대) : 냉전시기 호적과 중국의 반공적 자유주의 천성림(한남대) :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동향과 과제 토론: 조경란(연세대) 토론: 이성이(서울여대)
日本史 장소 : 서관 316B호 오전사회 : 남기학(한림대) 오후사회 : 함동주(이화여대) 김선민(숙명여대) : 聖스러움과 女帝 - 善德과 皇極의 즉위배경- 토론 : 김은숙(교원대) 김영(한국외대) : 장군 미나모토 요리이에(源賴家)와 겐지장군관(源氏將軍觀) 최은석(한국해양수산개발원) : 일본 근세의 도시와 재해 토론 : 신미나(고려대) - 막부의 사후대책에 초점을 맞추어 이수진(연세대) : 전간기 일본의 산파와 출산정치 김민규(동북아역사재단) : 脫亞論 讀法 토론 : 윤유숙(동북아역사재단) 토론 : 이은경(서울대) 토론 : 방광석(성균관대)
目 次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박 봉 주 1 韓非子 의 법(法)과 술(術)의 관계 재조명 양 순 자 13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최 진 묵 21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 道敎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조 성 우 35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墓誌銘의 분석을 중심으로 최 진 열 43 唐代 藩鎭의 攝職 이 영 철 69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 연구 春秋 에 대한 기본인식과 三傳의 활용을 중심으로 홍 승 태 83 당송시기 妾의 생활 夫妾관계의 계약적 특성을 중심으로 최 해 별 93 오대시기 거란과의 전쟁과 외교 전쟁과 외교가 민간신앙의 전개에 미친 영향 김 상 범 107 송-서하 전쟁 원인 분석 유 원 준 115 北宋 神宗朝의 對外交易 政策과 高麗 김 영 제 127 10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이 근 명 131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八陣合變圖說 을 중심으로 홍 을 표 141 淸代 懷慶藥商 의 對外進出과 商業네트워크 協盛全 과 杜盛興 을 중심으로 이 민 호 153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김 문 기 165
江蘇省 南通, 蘇州 및 昆山 지역 一帶의 破血湖 儀式에 관하여 송 요 후 181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김 선 민 193 19세기 말 조선의 중국인 居留地와 운영체제 박 정 현 221 중국민주동맹의 좌절과 선택 국공내전시기 제3세력의 독자성 모색 손 승 희 229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현황과 과제 천 성 림 241 聖스러움과 女帝 善德과 皇極의 즉위배경 김 선 민 263 장군 미나모토 요리이에(源頼家)와 겐지장군관(源氏将軍観) 김 영 273 일본 근세의 도시와 재해 막부의 초기 대응을 중심으로 一 최 은 석 283 전간기(戰間期) 일본의 산파와 출산정치 이 수 진 295 脫亞論 (1885年) 讀法 김 민 규 305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박봉주(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目 次 머리말 Ⅰ. <<楚辭>> 초지역의 巫歌 Ⅱ. 巫와 巫儀의 대한 素描 Ⅲ. 楚地域의 巫俗의 神들 맺음말 머리말 春秋戰國時代의 다수 지역문화 계열 중에서도 長江 이남 문화권을 대표하는 楚文化圈 의 문화 사회적 특징과 세부 내용들은 최근 2 30년 동안 滿開한 해당 지역의 풍부한 고고학 연구 성과 및 그를 활용한 문헌사료의 보다 정밀한 분석 등으로 인해 많은 부분 이 새롭게 규명되었다. 楚國 강역 곳곳에서 출토된 풍부한 簡牘 帛書 帛畵 및 각종 副 葬品 등으로 인해 전국시대 초나라의 통치체제와 행정제도 및 諸子思想 自然哲學 宇宙 觀 등 다양한 내용들이 재조명되었고, 그로 인해 楚文化의 면모도 더욱 다각적으로 밝혀 지게 되었다. 초지역의 諸子思想 自然哲學 宇宙觀 등은 그 자체로도 관심 대상이지만, 북방 中原 文化圈 齊魯文化圈 秦文化圈과 남방 楚文化圈 吳越文化圈 등의 차이와 각각의 특수성 을 부각시켜 戰國時代 지역문화의 다원성을 명료하게 그리는 데에도 유용한 소재가 된 다. 또한 동일한 문제 의식 하에 전국시대 초지역에서 巫俗的 呪術的 기풍과 종교적 신화적 세계관이 여타 지역보다 오래도록 강하게 온존된 점이 계속 지적되어 왔다. 그러 나 이런 류의 지적은 楚地에 巫風 淫祀가 성행하였다 1)는 식의 단편적 결과적 서술에 1) ① <<楚辭章句>> <九歌序>, 昔楚國南郢之邑, 沅 湘之間, 其俗信鬼而好祠. 祠, 一作祀. ② <<漢書>> <地理志曰>, 楚有江漢川澤山林之饒 信巫鬼, 重淫祀.
2 그칠 뿐, 정작 초의 巫風과 淫祀의 세부 내용과 실체를 專論한 연구 성과는 의외로 많지 않다. 출토 자료 중에서도 초지역의 토착 신앙과 巫俗에 관련된 내용은 諸子思想 등에 비하면 빈약한 편이다. 토착 신앙과 민간 巫俗 등은 해당 지역문화의 (타지역과의 교류가 본격화되기 이전의) 고유성과 순수성을 보다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지역문화의 이해와 관련해 검토할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초지역의 민간 무속 신앙에 관해서는 <<詩經>>과 함께 중국 고대의 양 대 시가집으로 꼽히는 <<楚辭>>에 상당히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따라서 본고는 <<楚辭>>를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楚文化圈 영역 내에서 출토된 다수의 帛書 簡牘 殘片 및 각종 초문화 관련 文物들을 접목시키면서 전국시대 초지역의 巫俗과 관련 의식 등을 대략적으로 소묘해 보고자 한다. Ⅰ. <<楚辭>> 초지역의 巫歌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분석하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지만, 楚 辭의 경우 문학 양식 및 작품 내용을 뜻하는 辭 와 지역성을 상징하는 楚 를 따로 분리 하기 힘들 정도로, 楚辭 는 고대 초지역과 불가분의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남방 초지역 의 방언을 다량 채용하였고, 초지역의 풍속을 상세히 반영하였으며, 초지역의 山川과 物 産, 기후 등을 묘사하였고, 楚聲을 사용하여 (<<詩經>>과 구별되는) 독특한 운율과 성조 를 지니는 등(<<宋文鑑>> <翼騷序>, 屈宋諸騷, 皆書楚語, 作楚聲, 紀楚地, 名楚物, 故可 謂之楚辭.) 다른 지역 문화권에서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해당 지역의 문화적 개 성과 풍취를 온전히 담고 있다. 주지하듯 북방의 <<詩經>>과 남방의 <<楚辭>>를 대비시 켜 각각의 제작 환경, 형식, 작품성, 내용 등을 비교한 諸說은 예로부터 분분하였으나,2) <<詩經>>이 북방의 다수 列國과 諸文化圈 중 어느 하나에 전적으로 대응되지 않는 것과 2) 대체로 아래와 같이 비교하는 것이 일반적인 듯하다. <<詩經>> 제 작 黃河 유역의 북방 지역에서 春秋時代에 환경 주로 저술됨. 華夏族의 평민 작자 중심. 4언 위주 短詩. 短句 音調 重疊, 詠嘆 형식 반복. 작 품 性情을 구속하고 근신하며, 표현이 質朴 성 하고 사실적임 人事와 실생활에 관한 온화하고 평민적 내용 내용 <<楚辭>> 長江 유역의 남방 지역에서 戰國時代에 주 로 저술됨. 荊蠻 귀족 시인 중심. 6언 위주 長詩. 長句騈語. 직접적 서술 위 주. 자유분방하고 美麗하며 낭만적임. 신화 전설 중심. 귀족적이고 열렬함.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 박 봉 주 3 는 대조적으로, <<楚辭>>는 일찍부터 초지역 초문화와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되었다. 따 라서 초문화와 관련해 반드시 검토해야 할 자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기존에는 楚辭의 문학적 완성에 크게 기여한 屈原의 憂國忠情의 詩心에 경도된 나머지 <<楚辭>> 전체를(굴원의 작품은 물론 그의 작품이 아닌 것까지도) 忠君 愛國 덕목을 고 취하는 유가적 교훈시처럼 인식하고 존중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어서 그 속에 담긴 초 지역의 민간 신앙, 巫俗 巫儀에 관한 내용들을 다소 간과하였다. 지역사 연구가 활성화 됨에 따라 <<楚辭>>의 문학적 美麗함, 애국충정의 정서 외에도 초문화의 고유성을 전하 는 부분, 즉 전국시대 초지역의 민간 신앙과 巫俗을 반영하는 내용들을 재조명하게 되었 다. 특히 <<楚辭>>의 효시인 <九歌>가 기원전 5 3세기 무렵 남방의 荊蠻 지역에서 유 전된 민간 巫歌 내지 민간 戀歌(순수한 연가라기보다는 연가 양식을 띈 무가임)를 채 록 정리한 작품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와 관련하여 楚辭의 辭 를 <<易經>>의 각 辭(卦辭 爻辭 象辭 繫辭), 종 갑골문의 卜辭 및 祭辭 祝辭 告辭 哀辭 弔辭 등과 동일한 의미의 神語性 글로 파악하게 되었다.3) 적어도 <九歌>만큼은 전국시대까지 초 지역에서 대대로 전승된 신에게 바쳐진 巫歌들, 즉 이 지역의 巫가 각종 巫儀에서 숭배 대상인 신령을 위해 부른 노래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초지역의 토착 巫俗文化를 대표하 는 작품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이런 성격은 <九歌>만이 아니라 굴원의 작 품과 後人이 擬作이라 추정되는 <招魂>, <大招>, <遠遊>, <卜居>, <漁夫> 등에서도 부분 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楚辭는 초지역 초문화의 색채와 개성을 강하게 담은 남방 문학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楚辭의 범위는 지역문화적 성격을 보존하던 전국시대 前漢 초기, 초지역 출 신의 屈原 宋玉 淮南小山 嚴忌 등이 지은 작품들로 한정해야 할 것이다.4) (즉 굴원의 <離騷>, <九章> 9편, <天問>, 宋玉의 <九辯>, <招魂>, 淮南小山의 <招隱士>, 嚴忌의 <哀 時命>와 미상의 楚人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招魂>, <大招>, <遠遊>, <卜居>, <漁夫> 등 이다. 현재 王逸本 <<楚辭章句>>에 정리된 <惜誓>, <七諫> 등 漢代의 작품들은 楚辭體 를 계승한 漢賦로 파악되는 경향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楚辭>> 諸篇에 반 영된 巫俗 巫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3) 4) ① <<楚辭>> <離騷>, 跪敷衽以陳 辭 兮, 耿吾旣得此中正. ② <<楚辭>> <抽思>, 玆歷情以陳辭 兮, 蓀詳聾而不聞 與美人抽怨兮, 幷日夜而無正. 憍吾以其美好兮, 敖朕辭而不聽. <<史記>> <屈原列傳>, 屈原旣死之後, 楚有宋玉 唐勒 景差之徒者, 皆好辭而以賦見稱.
4 Ⅱ. 巫와 巫儀의 대한 素描 원시시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민간의 巫儀 내지 祭儀는 크게 迎神(=請神) 娛神(혹은 祭神) 送神의 3단계로 이루어진다. 儒敎의 禮經 禮書 등에 정리된 규범적 체계로서의 祭禮는 이보다 몇 단계로 세분되지만, 원시시대부터 후대까지 관행적 사실적 질서로서 행해진 민간 巫儀 내지 祭儀는 대략 이 정도로 구분될 듯하다. 巫儀의 주재자인 巫는 각 단계에 해당하는 巫歌를 읊조리고 巫樂을 연주하며 巫舞(淨潔舞 迎神舞=請神舞 本舞= 娛神舞 送神舞)를 추어 의식의 열기를 고조시키면서 점차 無我境 상태로 몰입하여 신과 합일됨을 지향한다. <<楚辭>>의 다수 편에서는 이러한 민간 巫俗 巫儀의 일련의 진행 과정이 곳곳에서 散見되는데, 이는 여타의 문헌 사료와 출토 자료에서는 보기 힘든 <<楚辭>>만의 특징이 며, 그 중에서도 특히 <九歌> 11편에 핵심 내용들이 집중되어 있다. 11편은 <東皇太一>, <雲中君>, <湘君>, <湘夫人>, <大司命>, <少司命>, <東君>, <河伯>, <山鬼>, <國殤>, <禮 魂>인데, 이들은 초지역의 토착 天神 地祗 人鬼들로서 최고신이자 天帝인 東皇太一(太 一神), 月神인 雲中君, 湘水를 다스리는 남신인 湘君, 湘水를 다스리는 여신인 湘夫人, 인 간의 壽命을 관장하는 大司命, 유아의 壽命을 관장하는 少司命, 태양신인 東君, 강의 신 河伯, 산의 정령인 山鬼, 순국 영령들인 國殤, (무사히 일생을 마친) 여느 영혼들을 뜻하 는 禮魂 등이다. 각 편은 해당 신령에게 바치는 巫儀의 진행 과정을 (편마다 가감 장단 의 차이는 있지만) 迎神 娛神(혹은 祭神) 送神의 단계에 따라 묘사하고 있다. 迎神 娛 神의 중간에 (迎神의 결과로) 降神하는 광경이 美麗하고 장엄하게 묘사되기도 한다. 이처 럼 <九歌>의 각 편들을 통해 해당 신령들이 전국시대 초지역의 민간 신앙과 무속 의식 의 대상이 된 사실과, 관련 무속 의식의 대강의 절차를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巫儀에서는 巫 1인이 의식을 주관하는 儀巫 내지 祭巫가 되어 獨唱 獨舞하 지만, 때로는 2인의 巫가 1인은 神巫(신령 역할을 담당하는 巫)로, 1인은 儀巫(의식을 주 관하는 巫)로 분장하여 번갈아서 唱 舞하며, 부분적으로 群唱 群舞가 동원되기도 한다. 東皇太一 河伯 山鬼에게 바치는 巫儀에서는 儀巫가 독창 독무하고, 湘君 湘夫人 大 司命에게 바치는 巫儀에서는 2巫가 번갈아 唱 舞하며, 雲中君 少司命에게 바치는 무의 에서는 의무가 독창하고 신무가 독무한다. 또한 東君에 대한 무의에서는 태양으로 분한 神巫와 群巫가 번갈아 唱 舞한다. 대체로 남신에게 바치는 무의는 女巫가 주재하고 여 신에게 바치는 무의는 男巫가 주재하는데, 이러한 異性의 神 巫 간의 교류는 때때로 남 녀의 연애나 밀회로 은유 각색되기도 한다. 남신인 湘君, 여신인 湘夫人, 여성적 성격의 山鬼에게 바치는 무의를 각각 여무 남무 여무가 주재하면서 그 과정이 마치 남녀의 戀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 박 봉 주 5 事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장치인 동시에, 巫儀에 戱劇的 성 격을 부여하여 일종의 巫劇 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九歌> 각 편에 수록된 11신령에 대한 무속 의식의 진행 절차 및 주요 특성을 표로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신령 東皇太一 雲中君 湘君 湘夫人 大司命 少司命 東君 河伯 山鬼 國殤 禮魂 神格 太一神-天神 月神-天神 水神-地祗 水神-地祗 人鬼 人鬼 日神-天神 水神-地祗 山神-地祗 人鬼 人鬼 巫 儀巫 1인 神武 儀巫 神武 儀巫 神武 儀巫 神武 儀巫 神武 儀巫 神武 群巫 儀巫 1인 神武 儀巫 巫儀 절차 迎神 娛神 送神 獨唱 獨舞 儀巫 獨唱 神武 獨舞 合唱 合舞 合唱 合舞 合唱 合舞 儀巫 獨唱 神武 獨舞 合唱 合舞 獨唱 獨舞 巫歌 合唱 巫舞 合舞 비고 娛神 절차 매우 상세함 남녀 戀事처럼 각색됨 남녀 戀事처럼 각색됨 戀詩 양식을 차용함. 娛神 절차 매우 상세함. 남녀 戀事처럼 각색됨 ( ) 鎭魂歌적 성격. ( ) 鎭魂歌적 성격 * <國殤>은 迎神 送神 절차는 생략된 채 전투 장면 묘사를 통해 순국 영령들( 國殤 )의 넋을 위 로하는 내용으로, 순국 영령들에 대한 鎭魂은 넓은 의미에서 娛神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이 다. 여느 영혼들에 대한 鎭魂을 다룬 <禮魂>은 迎神 娛神 절차가 생략된 채 소략하게 送神 위 주로만 구성된다. (<禮魂> 편에 대해서는 楚辭의 종결 어구인 亂辭 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이하에서 迎神 娛神(혹은 祭神) 送神의 각 단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1. 淨潔 告辭와 迎神 특정 신령에게 바치는 무속 의식은 해당 신령의 지상 강림을 유도하는 迎神 절차로부 터 시작된다. 迎神에는 巫가 신령을 영접하는 행위 그 자체뿐 아니라, 이와 관련된 巫儀 의 제반 준비 과정 및 영신 결과 신령이 강림하는 장면까지가 앞 뒤로 포함되어 함께 묘 사되기도 한다. 巫儀를 주재하게 된 巫는 迎神 전에 심신의 정결성을 신령에게 고하는 巫辭를 읊고 그 를 입증하는 淨潔舞를 추는데, 이는 신과 인간을 매개하고 巫儀를 주관하는 巫에게 있어 서 심신의 정결성이야말로 필수 조건인 때문이다. 특히 신내림을 받은 降神巫에 비해 世 襲巫는 淨潔의 告辭가 더욱 중시되었는데, <<楚辭>>의 <九歌>와 기타 제편에는 관련 내 용들이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淨潔 告辭에는 종종 무의를 준비하는 절차, 즉 祭壇 祭殿을 정비하고 祭品을 진설하며 巫服을 구비하는 등의 행위들도 함께 연계되어 묘사되
6 기도 한다. (또한 淨潔 告辭는 11신령에 대한 의식뿐 아니라 <<楚辭>> 전반을 관통하는 詩作의 영적 동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楚辭>> 제편에는 江離(暖海의 얕고 맑은 물에서 나는 향초), 揭車, 瓊芳, 菌桂(계수 나무의 일종), 杜若, 杜衡, 木蘭(=木蓮), 麋蕪(궁궁이), 芳芷, 芳香, 白芷, 薜荔(줄사철나무), 山椒, 石蘭, 蓀(창포의 일종), 宿莽(宿根草. 겨울에도 죽지 않는 향초), 申椒(山椒의 일종), 辛夷(백목련), 女羅, 留夷, 幽蘭, 荃(石菖蒲의 일종), 秋蘭(가을에 연보라빛 꽃이 피는 향 초), 辟芷(숲 속에서 나는 향초), 蕙茝(蕙草와 白芷), 蕙草 등 다양한 香草와 香木들이 계 속 등장하며, 巫가 이들로 沐浴齋戒하고 이들을 몸에 지녀 정결함을 유지한다는 내용이 곳곳에서 散見된다. 굴원의 작품이자 <<楚辭>>의 대표작으로도 꼽히는 <離騷>에는 굴원 이 자신의 생애와 가계를 구술하면서 세습무5)의 후예인 사실을 顯彰하는 내용이 두드러 지며, 아울러 무의 정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香草 靈草 등으로 몸을 깨끗이 하는 한편, 은나라의 神巫였던 巫咸을 비롯한 선대의 뛰어난 巫師들을 귀감 삼아 속세의 비루 함에 물들지 않고 정신적 고결함을 지키고자 다짐하는 내용들이 반복된다.-6) 이로부터 屈原이 초지역의 세습무라는 정체성에 입각해 楚辭 작품을 창작하고, 선대로부터 전승된 민간 巫歌(<九歌>)들을 채록하여 수준 높고 유려한 楚辭體로 改作 增刪한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정결성의 巫辭를 신에게 고하고 淨潔舞를 추는 절차는 유교의 규범화된 祭 禮에서는 齋戒에 대응될 것이며, 이와 연계된 무의의 준비 과정은 陳設 排設 등에 대응 될 것이다. 심신의 정결성을 고한 다음 巫는 신을 영접하게 되는데, <九歌> 11편에는 國殤과 禮魂 을 제외한 9신령의 迎神 장면이 아래와 같이 다채롭게 묘사되고 있다. ① 東皇太一 : 吉日兮辰良, 穆將愉兮上皇. 撫長劍兮玉珥, 璆鏘鳴兮琳琅. 瑤席兮玉瑱, 盍將把 兮瓊芳. 蕙肴蒸兮蘭藉, 奠桂酒兮椒漿. ② 雲中君 : 浴蘭湯兮沐芳, 華采衣兮若英. 靈連蜷兮旣留, 爛昭昭兮未央. 蹇將憺兮壽宮, 與日 月兮齊光. ③ 湘君 : 君不行兮夷猶, 蹇誰留兮中洲, 美要眇兮宜修, 沛吾乘兮桂舟. 令沅湘兮無波, 使江水 兮安流 望夫君兮未來, 吹參差兮誰思 ④ 湘夫人 : 帝子降兮北渚, 目眇眇兮愁予. 嫋嫋兮秋風, 洞庭波兮木葉下 ( 중략) 白玉兮爲 5) 6) <離騷>에서의 屈原의 자칭인 靈均 은 초지역의 세습 巫師를 지칭하며, 楚 懷王에 대한 별칭인 靈修 는 무의 수장인 師巫長을 뜻한다. 기타 靈氛, 靈保(=神巫. 특정 신으로 분장한 무당) 등의 호칭도 발견된다. <離騷>, 帝高陽之苗裔兮, 朕皇考曰伯庸. 攝提貞于孟陬兮, 惟庚寅吾以降. 皇覽揆余初度兮, 肇錫余 以嘉名. 名余曰正則兮, 字余曰靈均. 紛吾旣有此內美兮, 又重之以脩能. 扈江離與辟芷兮, 紉秋蘭以 爲佩. 汩余若將不及兮, 恐年歲之不吾與. 朝搴阰之木蘭兮, 夕攬洲之宿莽.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 박 봉 주 7 鎭, 疏石蘭兮爲芳. 芷葺兮荷屋, 繚之兮杜衡. 合百草兮實庭, 建芳馨兮廡門. ⑤ 大司命 : 廣開兮天門, 紛吾乘兮玄雲. 令飄風兮先驅, 使涷雨兮灑塵. 君迴翔兮以下, 踰空桑 兮從女. 紛總總兮九州, 何壽夭兮在予 高飛兮安翔, 乘淸氣兮御陰陽. 吾與君兮齋速, 導帝 之兮九坑. ⑥ 少司命 : 秋蘭兮麋蕪, 羅生兮堂下. 綠葉兮素枝, 芳菲菲兮襲予. 夫人自有兮美子, 蓀何以兮 愁苦 ⑦ 東君 : 暾將出兮東方, 照吾檻兮扶桑. 撫余馬兮安驅, 夜皎皎兮旣明. ⑧ 河伯 : 與女遊兮九河, 衝風起兮橫波. ⑨ 山鬼 : 若有人兮山之阿, 被薜荔兮帶女羅. 旣含睇兮又宜笑, 子慕予兮善窈窕. 영신에 보답하여 신령이 강림하는 장면은 <湘君>, <湘夫人>, <大司命>, <少司命>, <東 君>, <河伯>, <山鬼> 편에 묘사되고 있는데, 이들을 통해 초지역 민간 신앙의 숭배 대상 이 된 신령들의 위풍당당한 모습과 그들에 대한 민중들의 흠모 숭배의 양상을 간접적으 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남녀신에 대한 숭배의 정서가 연애시의 형태로 표현된 점 등은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2. 娛神 무는 영접한 신령을 즐겁게 하기 위해[ 娛神 ] 아름다운 巫服을 입고 長劍 佩玉 玉 珥 玉瑱 琳琅 등의 聖物을 고루 갖추어 의식의 화려함과 위엄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멋지게 장식한 祭壇이나 祭殿에 각종 香草와 祭物을 陳設하여 신에게 바치면서 娛神의 巫辭를 읊조리고 娛神의 樂舞를 연주하며 다양한 遊戱를 벌임으로써, 신과 인간이 합일 되는 無我境의 축제의 장을 연출한다. <九歌>의 11신령 중에서 東皇太一, 大司命, 少司命, 東君, 山鬼에게 바치는 의식에 娛 神 절차가 포함되며 다른 의식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東皇太一과 山鬼에게 바치는 娛神 절차가 특히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① 東皇太一 : 揚枹兮拊鼓, 疏緩節兮安歌, 陳竽瑟兮浩倡. 靈偃蹇兮姣服, 芳菲菲兮滿堂. 五音 紛兮繁會, 君欣欣兮樂康. (娛神 절차를 거행하자 신령이 기뻐했다고[ 君欣欣 ] 한다.) ② 山鬼 : 表獨立兮山之上, 雲容容兮而在下. 杳冥冥兮羌晝晦, 東風飄兮神靈雨. 留靈脩兮憺忘 歸, 歲旣晏兮孰華予. 采三秀兮於山間, 石磊磊兮葛蔓蔓. 怨公子兮悵忘歸, 君思我兮不得閒. 山中人兮芳杜若, 飮石泉兮蔭松柏. 君思我兮然疑作. 한편 <湘君>, <湘夫人>, <河伯> 편에서는 巫가 신령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남성을 멀 리서 흠모하는 여성의 마음으로 은유해서 표현하고 있는데, 상세한 경위는 추적할 길이
8 없지만 혹시 오신 절차가 민간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남녀의 연애사나 戀心으로 각색되고 전환된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娛神 절차는 원시 巫俗에서는 대단히 중시된 듯하고 그를 통해 무속 의식을 공동체 축 제의 장으로 승화시키려 한 듯하지만, 유교의 규범화된 祭禮에서는 즐거움과 흥겨움을 중시하는 민간의 오신 절차는 대부분 수용되지 못하였고, 대신 경건하고 엄숙하며 儀禮 와 격식을 중시하는 祭祖 祭神의 절차로 정착되고 전형화되었다. 예컨대 원시 무속에서 상용되던 빠르고 경쾌한 음악(鼓樂 등 타악기 중심 편성) 대신, 느리고 조용한 현악기 중 심 편성의 雅樂으로 대체되고, 迎神 娛神 절차에서 진행된 신과 무의 교류 교감을 남 녀 戀事에 비유하여 巫劇처럼 전개시키는 방식 등은 사라지게 되었다. <<楚辭>> <九歌> 등에 반영된 娛神 장면들은 아직까지 원시 무속적 전통을 간직한 단계의 민간 신앙과 관 련 의식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전해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3. 送神과 天界 幻遊 신령을 즐겁게 하여 神 人 공동 축제의 장이 벌어진 다음에는 신령을 天界로 되돌려 보내는 送神 절차를 거행하였다. 送神은 迎神이나 娛神에 비해 간략하게 진행되는 것이 보통인데, 이와 관련하여 <雲中君>, <湘君>, <湘夫人>, <大司命>, <少司命>, <東君>, <河 伯>, <山鬼>, <禮魂> 편에 送神 절차가 묘사되고 있다. 특히 湘夫人과 河伯의 送神은 분 량이 길 뿐 아니라 내용 자체도 단순한 送神이라기보다는 신령이 (되돌아 가는 과정에 서) 天界를 幻遊 歷遊하거나 혹은 巫가 신령과 하나되어 천계를 유람하고 逍遙하는 장 면을 상상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편들도 보다 짧고 간략하긴 하지만, (신령이 나 巫의) 천계 환유(혹은 그를 상상함)을 암시하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① 雲中君 : 覽冀州兮有餘, 橫四海兮焉窮. 思夫君兮太息, 極勞心兮忡忡. ② 湘君 : 桂櫂兮蘭枻, 斲冰兮積雪. 采薜荔兮水中, 搴芙蓉兮木末. 心不同兮媒勞, 恩不甚兮輕 絶. 石瀨兮淺淺, 飛龍兮翩翩 (중략) 聊逍遙兮容與. ③ 湘夫人 : 捐余袂兮江中, 遺余褋兮醴浦. 搴汀洲兮杜若, 將以遺兮遠者. 時不可兮驟得, 聊逍 遙兮容與. ④ 大司命 : 乘龍兮轔轔, 高駝兮沖天. 結桂枝兮延佇, 羌愈思兮愁人. 愁人兮柰何, 願若今兮無 虧. 固人命兮有當, 孰離合兮可爲. ⑤ 少司命 : 孔蓋兮翠旍, 登九天兮撫彗星. 竦長劍兮擁幼艾, 蓀獨宜兮爲民正. ⑥ 東君 : 靑雲衣兮白霓裳, 擧長矢兮射天狼. 操余弧兮反淪降, 援北斗兮酌桂漿. 撰余轡兮高駝 翔, 杳冥冥兮以東行. ⑦ 河伯 : 與女遊兮河之渚, 流澌紛兮將來下. 子交手兮東行, 送美人兮南浦. 波滔滔兮來迎, 魚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 박 봉 주 9 鱗鱗兮媵予. ⑧ 山鬼 : 雷塡塡兮雨冥冥, 猿啾啾兮又夜鳴. 風颯颯兮木蕭蕭, 思公子兮徒離憂. ⑨ 禮魂 : 成禮兮會鼓, 傳芭兮代舞, 姱女倡兮容與. 春蘭兮秋菊, 長無絶兮終古. 이처럼 送神 절차를 묘사하면서 神 巫, 神 人 합일의 천계 환유를 연결시킨 구성을 통해 당시 초지역의 巫俗 신앙에서 숭배된 신령들의 모습과 그들이 거주하는 天界의 풍 경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초지역의 민간 신앙과 상고 神話에 관련된 내 용을 부분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九歌>의 구성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굴원의 <離騷>, <九章> 9편과 <天問>, 작자 미상의 <遠遊>, <招魂>, <大招> 등에서도 無我 상태로 羽化登天하여 天界 를 幻遊 歷遊하는 장면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九歌> 외의 편들의 천계 환유는 巫儀 의 연장선상에서 神 巫가 합일되어 피안의 세계를 유람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속세 에서의 개인적 불운, 세속 정치에 대한 환멸과 우국충정의 비통함을 극복하고 승화시켜 심신의 정결함과 영혼의 구원을 얻고 永生을 추구하려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민간 巫俗 巫儀의 送神 절차와도 연관성을 지니는 羽化登天과 天界 幻遊 歷遊에의 염원은 초지역에서 출토된 文物 자료를 통해서도 그 실체가 확인된다. 楚國 墓葬 및 楚 係 墓葬에 다수 副葬된 漆木製의 虎座飛鳥 像, 虎座鳥架鼓 像, 長沙 지역 楚墓에서 발견 된 두 건의 人物龍鳳 帛畵 등이 登天에의 염원을 표현한 대표적인 실물 자료이다. 虎座 와 鳳鳥는 각각 大風과 吉祥風을 관장하는 風神을 상징하며 鹿角은 祥瑞를 상징한다. 이 조각상은 묘주의 수호신 겸 천계로의 등천 시에 혼백의 인도신으로 삼기 위해 제작된 듯 하다. 楚人들은 이같은 실물상을 제작하여 혼백의 안전하고 편안한 등천과 천계 환유 및 永生을 보장하려 한 듯하다. (曾侯乙墓에서 출토된 立鶴鹿角像은 그 변형으로 추정된다.) 한편 1942년 2월 長沙 陳家大山 楚墓에서 발견된 人物龍鳳帛畵는 細腰女人이 龍鳳이 이 끄는 人魂舟를 타고 登天하는 모습을 묘사한 帛畵이고, 1942년 9월 長沙 子彈庫에서 출 토된 人物御龍帛畵는 귀족 남자가 龍舟를 타고 등천하는 광경을 그린 帛畵로서, 이들도 각각 등천에의 염원을 표현하고 묘주의 편안한 내세와 永生을 보장하고자 한 것이다. Ⅲ. 楚地域의 巫俗의 神들 상술한 것처럼 <<楚辭>>에는 전국시대 초지역의 토착 巫俗과 巫儀에 관한 내용이 풍 부하게 담긴 동시에, 巫俗 巫儀의 대상인 토착 신령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天界에 대한
10 묘사도 적지 않다. 초지역의 巫俗의 神들과 天界에 관련된 내용은 출토 자료와 文物에서 도 유사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하 상호 연관시켜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楚辭>> <九歌>에는 전국시대까지 초지역 민간에서 숭배되던 11신령 東皇太 一, 雲中君, 湘君, 湘夫人, 大司命, 少司命, 東君, 河伯, 山鬼, 國殤, 禮魂 의 존재가 확인 되는데, 이들 중 東皇太一, 雲中君, 湘君, 湘夫人, 東君 등은 <<楚辭>>에서만 발견된다. 東皇太一은 초지역의 최고신으로 추정되는데, 東皇 은 초지역 사람들이 조상신으로 숭배 한 顓頊 高陽氏의 별칭으로 추정되고, 太一은 남방 계통에서 숭배된 天帝로서 타지역 출 토 자료에서도 종종 확인된다. 그렇다면 東皇太一은 조상신과 지상신을 겸한 신격인 동 시에, 顓頊 高陽氏가 火神인 것과 연계되어 화신 내지 태양신으로서의 성격도 겸비했을 가능성이 있다. 東皇太一이 조상신 겸 天帝이자 태양신까지를 겸한 복합적인 신격인 데 비해 東君은 순수한 태양신으로 추정되며 동군에게 바치는 巫儀 장면에서 확인되듯이 태 양의 천상 운행을 인격신적 관점에서 객관화시켜 묘사한 점이 특이하다. 특히 중국 상고 신화 체계에서 (기타 문화권에 비해 상당히) 빈약한 편인 태양신격과 관련된 내용이 초 지역 문헌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중국 신화의 지역성 및 그 전승 과정과 관련하여 주목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대체로 <九歌>의 신들은 동황태일을 제외하면 天體와 자연을 관 장하는 自然神이 많으며, 湘君 湘夫人처럼 지역성을 강하게 띈 신령도 포함된다. <<楚辭>>의 다른 편에서는 五方의 神인 五帝, 즉 동방의 신인 太皥, 서방의 신인 少 昊, 남방의 신인 炎帝, 북방의 신인 顓頊, 중앙의 신인 黃帝 등에 관해 묘사하고 있고, 이 외에도 陽侯(파도의 신), 豊隆(구름의 신, 雲師), 西皇(서쪽 하늘의 신), 蓐收(가을의 신), 湘靈(湘水의 신), 祝融(불의 신, 남쪽의 신), 海若(바다의 신), 馮夷(水神), 宓妃(洛水의 여신, 伏羲氏의 딸), 句芒(동방과 봄을 다스리는 鳥身人面의 신), 飛廉(風神), 玄冥(북방의 신), 黔嬴(造化의 신), 康回(共工) 등 다양한 신령들이 확인된다. 신령뿐 아니라 重華(帝舜 의 별칭), 赤松子(神農 때의 雨師), 巫咸(은나라 때의 神巫) 등 선대의 賢君 賢臣 神巫 등의 영령과 조우하거나 조우하려는 염원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들 신령과 영령들이 거 주하는 天界에 위치한 崑崙, 縣圃(천제의 정원), 瑤之圃(천계에 있는 玉樹의 밭), 九疑山 (帝舜 등 여러 신령이 있는 산), 淸源(바람의 근원지인 北海) 등 신령한 장소에 대한 묘 사도 비교적 풍부하다. 이들 역시 초지역의 상고 민간 신화의 구조와 내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한편 1942년 長沙 子彈庫 楚墓에서 발굴된 帛書의 사방 둘레에는 12월의 月令을 관장 하는 듯한 12신상이 그려져 있고 각각의 주위에는 12월의 禁忌를 짧게 정리한 12단의 단문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아마도 12신상은 초지역의 민간 신앙에 기원을 둔 월령신들 이 아닌가 추측되는데, 이 추측이 맞다면 이것은 전국시대 楚國 月令을 반영하는 (현재
戰國時代 楚地域의 巫俗과 巫儀 / 박 봉 주 11 로서는) 거의 유일한 출토 자료이며, 따라서 戰國 齊의 月令인 管子 의 玄宮, 玄宮圖 와 戰國 秦의 월령인 呂氏春秋 十二紀 에 비견될 만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長沙 馬王堆에서 출토된 帛書의 <神祗圖>(일명 <太一將行圖>)에는 太一 神과 휘하의 3龍 및 그를 호위하는 雨師, 雷公과 軍神으로 추정되는 4人의 武弟子들이 그려져 있다. 12신상과 태일신 휘하 諸神들의 그림 및 관련 설명은 초지역 민간 신앙의 汎神觀的, 주술적 면모 를 이해하는 데에도 참고할 만하다. 대체로 <<楚辭>>에서 묘사된 신령들과 天界의 모습은 사실적 구체적이어서 후대의 諸子書나 출토 자료에 다분히 관념화 추상화되어 등장하는 신령 天界 天象 우주 등 의 구조와는 구별된다. 예컨대 <<郭店楚簡>> <太一生水> 편은 우주 만물의 근원인 太一 의 만물 생육 작용을 水와 연계시켜 아래와 같은 다단계의 우주 생성론을 제시하였다. 이 경우의 태일은 인격신과는 거리가 먼, 우주만물의 근원자이자 섭리자로서 상당히 哲理化된 성격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민간 무속 신앙에서는 인격신적 天帝로 숭배되고 巫儀의 대상이 되었던 태일(혹은 동황태일)이 諸子思想에서는 自派의 관점에 따라 관념 화 이론화의 대상으로 인식 변용되는 과정을 함께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이한 내용은 신령적 혹은 근원자적 존재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그같은 이론화 철리화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민간 巫俗 신앙 상태에서의 신령들의 모습과 그들 에 대한 무속 의식의 양상을 확인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맺음말 지금까지 <<楚辭>>를 중심으로 戰國時代 楚地域에서 통행된 민간 巫俗 巫儀에 관련 된 내용들을 검토하였고, 그 숭배 대상이 된 신령들에 대해서도 관련 자료들을 원용하면
12 서 살펴보았다. 그를 통해 漢代 儒敎에 의해 정립된 규범적 체계가 아닌, 그 이전부터 민 간에서 관행적으로 통용된 사실적 질서로서의 민간 祭儀 내지 巫儀의 구체적인 면모와 巫俗 신령들의 모습을 추적할 수 있었다. 관행적 사실적 질서는 규범적 체계에 일부 영향을 미치고 후대에는 역으로 규범적 체 계를 일부 수용하기도 한 사실을 비추어 볼 때 후대의 禮經 禮書에 정리된 유교 祭禮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전대의 민간 巫俗과 巫儀에 대해 관심을 지닐 필요 가 있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상고의 민간 巫俗 巫儀에 대한 내용을 전하는 문헌 사료와 출토 자료가 둘다 부족한 상황에서 <<楚辭>>는 (문학 작품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내용들을 전달해주는 듯하다. 동시에 전국시대 지역문화와 지 역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참고가 될 듯하다. 이런 관점에서 초지역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기존에 방계 내지 간접적인 자료로 인식되어 소극적으 로만 원용되었던 문헌들에 대해서도 가능하고 필요하다면 출토 자료와 연계시켜 보다 적 극적으로 검토하고 활용하려는 시도와 노력이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韓非子 의 법(法)과 술( 術) 의 관계 재조명 양 순 자(고려대) 한비자 정치 이론에서 법과 술은 세와 더불어 중요한 통치 도구로 알려져 왔다. 일반 적으로 학자들은 한비자의 법은 관료들이 일반 백성을 다스리는 법률 또는 형벌인 반면 에 술은 군주가 신하들을 관리하는 술수로 본다.1) 이런 견해는 韓非子 定法 편에 근 거를 두고 있는데, 한비자는 그 편에서 상앙을 법의 이론가로, 신불해를 술의 주창자로 제시한다. 지금 신불해는 술을 말하고 공손앙은 법을 주장한다. 술이란 것은 능력에 맞추어 관직을 주고, 관직에 따라 실적을 추궁하며 살생하는 권병을 손에 들고 여러 신하들의 능력을 시 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군주가 장악하는 것이다. 법이란 것은 내건 명령이 관청에 명시되 고 형벌은 반드시 민의 마음속에 새겨지며 상은 법을 삼가는 자에게 있고 벌은 명령을 어 기는 자에게 가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신하가 모범으로 삼을 바이다. 군주에게 술이 없으 면 윗자리에서 눈이 가려지고 신하에게 법이 없으면 아래에서 어지러워진다. 이것은 하나 도 없을 수 없이 모두 제왕이 갖출 조건들이다.2) 한비자는 상앙의 법과 신불해의 술은 군주가 통치하기 위한 필수조건들이라고 주장한 다. 법은 군주의 명령이 관청에 명시되고 보관되어 관료들이 백성들을 다스릴 때 사용하 는 것이며, 술은 군주가 관료들을 등용하고 평가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위 구절만으로 보면 법은 성문법적인 법률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며 술은 술수의 의미가 강하다. 상앙 의 법과 신불해의 술은 한비자가 그의 정치 철학을 형성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 로 알려져 왔다. 1) 2) 王邦雄, 韓非子的哲學 (臺北 : 東大圖書公司 : 總經銷 三民書局, 1977), 147-165쪽과 179-204쪽; 鄭良樹. 韓非之著述及思想 (台北: 臺灣學生書局, 1993), 472-492쪽. 韓非子 定法, 今申不害言術, 而公孫鞅為法 術者, 因任而授官, 循名而責實, 操殺生之柄, 課 群臣之能者也, 此人主之所執也 法者, 憲令著於官府, 刑罰必於民心, 賞存乎慎法, 而罰加乎姦令者 也, 此臣之所師也 君無術則弊於上, 臣無法則亂於下, 此不可一無, 皆帝王之具也
14 그러나 중국 고대 저작에서 법 이라는 글자는 법률, 법조문이라는 의미 이외에 다양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장현근과 크릴(H. G. Creel)이 지적한 것처럼 법 은 명사로서 모 델, 기준, 규칙 등을 의미하고, 동사로서는 본받다 등을 뜻한다.3) 그라함(A. C. Graham)과 슈왈츠(Benjamin Schwartz)는 기본적으로 크릴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한비자 에서 법 이라는 글자는 광범위한 의미의 모범(model) 또는 기준(standard)의 의미로 쓰였 다고 주장한다.4) 또한 한비자 사상에서 술 이라는 글자는 일반적으로 군주독재를 강화하 기 위한 일종의 정치책략술로 폄하되는 경향이 있는데, 크릴은 술 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즉 그는 신불해의 사상을 논하면서, 신불해의 주요 사상인 술은 관료체 제를 다스리는 행정술(administrative technique or statecraft) 로 파악한다.5) 이와 같이 법 / 술 은 중국 고대 정치 철학에서 법률/술수라는 의미 외에 다양한 함의 를 가지고 있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이 관점에 동의하면서, 한비자 사상에서 그들이 어떻 게 쓰였는지 분석해보고, 그들의 관계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한비자 에서 법이 관리가 일반 백성을 다스릴 때 기준으로 삼는 성문화된 법률의 의미로만 쓰였는지, 또한 술은 군주가 신하들을 부릴 때 사용하는 권모술수인지를 분석해 볼 것이다. 아래에 서 밝히겠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한비자 사상에서 법은 성문법이외에 군주가 관료를 등 용하고 평가하는 방법과도 관련이 있다. 즉 법은 국가 내의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법 률의 의미와 관료체계를 다스리는 행정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술 은 두 번째 의미의 법을 잘 운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방법을 뜻한다. 필자는 정법 편 이외에 한비 자 의 다른 편들을 살펴봄으로써 논의를 전개해나가고자 한다. 한비자 에서 법 이라는 글자가 성문화된 법률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보여준 연구 는 많으므로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 논의하도록 하겠다. 이때의 법은 서양의 law 개념과 3) 4) 5) 장현근, 선진정치사상에서 법 의 의미 한국정치학회보 제27집 2-2호(1994), 75-96쪽; H. G. Creel, Shen Pu-hai: A Chinese Political Philosopher of the Fourth Century B.C.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4), 92-120쪽 참조. Benjamin Schwartz, The World of Thought in Ancient China (Cambridge, Mass.: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84), 321-349쪽; A. C. Graham, Disputers of the Tao (La Salle, Ill. : Open Court, 1989), 273-8쪽. H. G. Creel, Shen Pu-hai: A Chinese Political Philosopher of the Fourth Century B.C. 참조. 크 릴은 신불해를 중국 관료주의 체계를 세운 최초의 사상가로 평가한다. 신불해의 사상에 관한 다른 자료는 陳復, 申子的思想 (台北: 唐山出版社, 1997)을 참조. 또한 김영태는 한비자의 술 을 관리의 임용과 인사제도와 연관해서 재해석하고 있다. 김영태, 韓非의 術論 硏究, 철학논 구 제21집(1993). 그는 한비의 술론을 參觀, 信賞必罰權, 刑名이론의 측면에서 분석함으로써, 한비의 술이 관리의 임용과 인사제도와 연관이 있음을 밝혔다. 또한 그는 한비의 법과 술은 밀 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법은 술론에서 이미 언급된 상벌만을 통해 臣民 을 동시에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즉 법은 분명하게 대중에게 공표된 것이고 術은 은밀하게 행사되는 것으로 법과 술을 구별한다.
韓非子 의 법(法)과 술(術)의 관계 재조명 / 양 순 자 15 유사한 의미로 쓰인다. 법(law)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일 반적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된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내린 일반적인 명령으로 그 것을 어길 경우에는 처벌을 받는 사회 규범 을 법이라고 정의한다.6) 한비자 에서도 법 이라는 글자가 위의 정의에 들어맞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법은 군주의 명령 이며7)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성 을 띤다.8) 법은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신분이 높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9) 그리고 공식적으로 새로운 법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일 관되게 적용되는 항상성 을 가진다.10) 만약 군주가 일관된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국가 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11) 또한 법은 일반 백성들까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한다.12)) 특히 한비자는 법의 명확성 을 강조하는데, 신하들이 자신 들의 이익을 위하여 법을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13) 다른 한편, 한비자 에는 법이라는 글자를 법조문을 갖춘 법률 체계로 해석하기에 불 명확한 예들이 있다. 즉 법이라는 글자가 공표성, 성문화, 구체적인 규율 등등의 속성을 지니지 않는 경우들이 보인다. 그보다는 법이 군주가 관료들을 채용하고 평가하는 방법 의 의미로 쓰일 때가 있다. 다음은 유도(有度) 편의 한 구절이다. 이제 만약 칭찬을 근거로 능력자라 하여 등용한다면 신하는 위로부터 이탈하여 아래로 자 기들끼리 패거리를 만들 것입니다. 만약 또 파당관계를 가지고 관계를 등용한다면 백성들 6) 7) 8) 9) 10) 11) 12) 13) 이상돈, 법학입문 (파주: 법문사, 2005), 6쪽; Edward Adamson Hoebel, The law of primitive man; a study in comparative legal dynamic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4), 28쪽 참조. 韓非子 飾邪, 君之立法, 以為是也. 韓非子 有度, 故以法治國, 舉措而已矣 法不阿貴, 繩不撓曲 法之所加, 智者弗能辭, 勇者弗 敢爭 刑過不避大臣, 賞善不遺匹夫 故矯上之失, 詰下之邪, 治亂決繆, 絀羨齊非, 一民之軌, 莫如 法 다만 군주는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한비자의 정치이론은 법에 의한 다스림 (rule by law)이지 법치(rule of law)라고 할 수 없다. 韓非子 飾邪, 語曰 家有常業, 雖饑不餓 國有常法, 雖危不亡 夫舍常法而從私意, 則臣 下飾於智能, 臣下飾於智能則法禁不立矣 是妄意之道行, 治國之道廢也 治國之道, 去害法者, 則不 惑於智能 不矯於名譽矣 韓非子 心度, 故治民無常, 唯治為法 法與時轉則治, 故聖人之治民也, 法與時移而禁與能 變 韓非子 八說, 書約而弟子辯, 法省而民訟簡 是以聖人之書必著論, 明主之法必詳事 盡思慮, 揣得失, 智者之所難也; 無思無慮, 挈前言而責後功, 愚者之所易也 明主慮愚者之所易, 以責智者之 所難, 故智慮力勞不用而國治也 韓非子 難三, 人之不事衡石者, 非貞廉而遠利也, 石不能為人多少, 衡不能為人輕重, 求索不能 得, 故人不事也 明主之國, 官不敢枉法, 吏不敢為私, 貨賂不行, 是境內之事盡如衡石也 此其臣有 姦者必知, 知者必誅
16 은 사적인 교제에만 힘을 쓰고 법에 의한 임용은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관리들 중에 능력자가 없게 되면 그 나라는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칭찬받는다 하여 상을 주고 비 방당한다 하여 벌을 준다면 상을 좋아하고 벌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공도를 버리고14) 사리 쪽으로 수작을 부려 작당해서 서로 감싸줄 것입니다. 군주를 잊고 바깥과의 교제에만 힘 써 자기 패거리만을 추천하려고 든다면 윗자리를 위한 아랫사람들의 충정이 엷어질 것입 니다. 교제가 넓고 패거리가 많아져 조정 안팎에 파당이 만들어진다면 비록 큰 잘못을 저 질렀다고 하여도 그것이 은폐되어 모르게 되는 경우가 많아질 것입니다.15) 한비자는 추천제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드러낸다.16) 그는 만약 군주가 근거 없는 명성 이나 비방에 의해 관료들을 등용한다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지적한다. 어떤 사람에 대한 칭찬은 그가 뚜렷한 업적이 없을지라도 같은 패거리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만 들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방 또한 잘못이 없을지라도 정적(政敵)들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 한비자는 만약 군주가 그런 근거 없는 칭찬이나 비방에 의해 관료들을 다스린 다면, 신하들은 사적인 관계를 맺는 데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며, 법에 의한 임용은 구하 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한비자는 법 이라는 글자를 관료들을 등용하는 맥락 에서 사용하고 있다. 한비자는 유도 편의 다른 부분에서도 군주가 법에 따라서 관료들을 등용하고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는 법이 사람을 고르도록 하고 자기 임의로 등용하지 않으며 또한 법이 그 공적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하고 자기 임의로 그것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능력 있 는 자가 가려진 채로 있을 수 없고, 능력이 떨어지는 자가 겉치레만으로 있을 수도 없으 며 칭찬받는 자라고 하여 천거될 수 없고, 비방당한 자라고 하여 물러나게 하는 일이 없 으며 군주와 신하 사이에 구별이 분명해져서 통치 질서가 잘 잡혀 나갈 것입니다. 따라서 군주는 법에 비추어 일을 처단하면 됩니다.17) 14) 15) 16) 17) 王先慎은 公行을 公法으로 읽으며, 孫蜀丞과 陳奇猷는 公道로 읽는다. 陳奇猷, 韓非子新校注 (上海 : 上海古籍出版社, 2000), 94쪽. 韓非子 有度, 今若以譽進能, 則臣離上而下比周; 若以黨舉官, 則民務交而不求用於法 故官之 失能者其國亂 以譽為賞, 以毀為罰也, 則好賞惡罰之人, 釋公行 行私術 比周以相為也 忘主外 交, 以進其與, 則其下所以為上者薄矣 交眾與多, 外內朋黨, 雖有大過, 其蔽多矣 임림달과 설희홍은 전국 시대에 행해졌던 관료임용 방법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초빙(招聘), 다 른 사람에 의한 추천, 자기 추천이 그것들이다. 任立达, 薛希洪, 中国古代官吏考选制度史 (靑岛 市 : 靑岛出版社, 2003), 24쪽. 특히 그들은 세 단계에 의한 관료 임용이 齊의 管仲에 의해 시 작되었으며 후에 秦과 楚도 그 정책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그 세 단계는, 첫째 자신의 지역에서 추천을 받음, 두 번째 군주가 그를 등용할 지를 결정하기 위해 직접 면접, 마 지막으로 관직을 부여받고 그가 속한 부서의 수장에 의해 검증을 받는다. 같은 책, 47쪽 참조. 韓非子 有度, 故明主使法擇人, 不自舉也; 使法量功, 不自度也 能者不可弊, 敗者不可飾, 譽
韓非子 의 법(法)과 술(術)의 관계 재조명 / 양 순 자 17 군주는 개인적인 판단이나 호오에 따라 관료들을 등용하지 말고 법에 따라 관리를 임 용해야 한다. 군주는 오로지 법에 의지할 때에만 자의적인 임용을 피할 수 있다. 위의 예들에서 법 이라는 글자를 일반적으로 해석되어지는 법조문을 갖춘 법률체계 (law)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한비자가 군주가 관료를 등용할 때 구체적이고 공표화된 법 률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비자는 유도 에서 제 시한 법의 두 가지 목적, 즉 관료들을 등용하고, 공로를 판단하기 위해서(故明主使法擇人, 不自舉也; 使法量功, 不自度也 ) 다른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러므로 모든 신하들은 그 의견을 말로 진술하며, 군주는 그 진술한 말에 일을 맡겨 주 고 그 맡긴 일의 성과를 요구한다. 또한 그 성과가 맡긴 일에 걸맞고 맡긴 일이 그 진술 한 말과 걸맞으면 상을 주고, 그 성과가 맡긴 일과 맞지 않고 맡긴 일이 그 진술한 말과 맟지 않으면 벌을 준다. 현명한 군주의 도는 신하로 하여금 자기 의견을 진술하게 하여 그 말이 실제 성과와 일치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18) 주도(主道) 의 위 구절은 군주가 관료들에게 어떻게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지 설명하 고 있다. 군주는 신하들의 제안에 따라 임무를 부여하고 그 임무와 실제 행한 업적의 일 치를 평가해야 한다. 이병(二柄) 편은 형명참동 이라는 용어로 이 과정을 요약한다. 군주가 간신을 막기 위해 그 실적과 명목이 일치하는가를 살핀다는 것은 신하가 진술한 말과 실제 일한 성과를 가리킨다.19) 남의 신하된 자가 어떤 일에 대하여 자기 의견을 진 술하면 군주는 진술한 말에 걸맞는 일을 맡겨 주고 오로지 그 일에 맞추어 성과를 요구한 다. 20) 명(名) 은 신하가 진술한 말을 가리키며, 형(形) 은 신하가 실제 일한 성과를 뜻한다. 군주는 신하가 진술한 말에 걸맞는 일을 맡겨 주고 오로지 그 일에 맞추어 성과를 요구 한다. 성과가 그 일과 들어맞고 일이 그 말과 들어맞으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내린다. 예컨대 어느 직명을 가진 관리가 그 직명에 따라서 실적을 거두고 있는가 어떤 가를 검토하는 것이 형명참동이다.21) 한비자는 형명참동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8) 19) 20) 者不能進, 非者弗能退, 則君臣之間明辨而易治, 故主讎法則可也 진기유는 孫子書를 따라서 수 (讎)를 용(用)으로 읽는다. 陳奇猷, 韓非子新校注, 99쪽. 韓非子 主道, 故群臣陳其言, 君以其言授其事, 事以責其功 功當其事, 事當其言則賞; 功不當 其事, 事不當其言則誅 明君之道, 臣不陳言而不當 진기유는 異는 與로 읽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陳奇猷, 韓非子新校注, 127쪽. 韓非子 二柄, 人主將欲禁姦, 則審合者, 言異事也 為人臣者陳而言, 君以其言授之事, 專以其 事責其功 功當其事, 事當其言, 則賞; 功不當其事, 事不當其言, 則罰
18 군주의 도는 조용히 물러앉는 것을 귀중한 보배로 여기는 것이다. 군주는 정사를 스스로 맡아하지 않고 그 일이 잘되고 못된 것만을 분간하며, 계략을 스스로 짜내지 않고 복과 재앙의 조짐만을 알아낸다. 그러므로 군주가 말하지 않아도 신하가 잘 응하며, 약조를 하 지 않아도 일이 잘 진척된다. 신하가 이미 말로 응해오면 그 약조로 한쪽 계( 契) 를 잡아두 고, 이미 그 일이 진척되면 약조한 또 한쪽의 부( 符) 를 손에 쥐어 든다. 부와 계가 맞추어 지는 데가 상과 벌이 시작되는 곳이다. 22) 여기에서는 형명참동의 과정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신하가 어떤 제안을 하 면 군주는 그것에 따라 계(契)를 작성하고, 신하가 그에 따른 일을 이루어내면 부(符)를 작성한다. 계와 부가 일치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내린다. 다시 말해 군주의 도는 조용히 물러앉아 형명참동 여부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형명참동은 군주가 재능 있는 인재를 등용할 때 적용해야 하는 추상적인 원칙 이지 구체적인 법조문이 아니다. 이것은 군주가 명령을 내리고 신하들이 따라야 할 행동 의 표준이 아니다. 형명참동 과정에서 신하의 제안(名)이 그 과정을 주도하며, 후에 실제 업무로써 드러난다. 형명참동 과정에서 상벌의 수여 기준은 군주의 명령이 아니라, 신하 들의 제안, 부여된 임무, 실제 일한 성과 등의 합일 여부이다. 한비자 의 세 편, 즉 유도, 주도, 이병 에서 보였듯이, 형명참동은 법이 관료임 용과 관련되어 사용된 용례에서 법의 운용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형명참동은 상군 서 에서처럼 인재를 등용하고 진급시키기 위해 제시된 구체적인 규칙이 아니고, 추상적 인 원칙에 가깝다. 형명참동의 원칙은 상세하게 문서화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공표화 되는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군주가 관료들을 등용할 때 그들의 말을 듣 고, 임무를 부여하고, 업적을 평가하는 원칙을 말할 뿐이다. 이 때 법 이라는 글자는 성 21) 22) 크릴(H. G. Creel)은 형명(刑名)을 수행(performance)과 관직명(official title)이라고 번역하는데 반 해 메이크햄(John Makeham)은 형을 형태와 기준(form and standard), 명을 연설, 선언, 요구 (speech, declaration, claim)로 해석한다. 필자는 메이크햄의 명의 해석에는 동의하지만, 그의 형 의 해석에는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한나라 이전에 형(刑)이라는 글자는 후대의 形과 型으로 쓰 여진 것들을 대변한다. 形은 형태의 의미를 지니고, 型은 유형(pattern), 기준(standard), 모델 (model)의 의미를 지닌다. 결과적으로 刑은 형태(form)와 기준(standard)의 의미 모두 가지고, 한 비자의 형명참동에서는 완성된 일의 형태, 그리고 원래 제안의 유효성을 검토할 기준 의 의 미를 지닌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한비자의 형명참동이론에서는 세 가지 요소, 제안, 업무, 성취 등이 상벌수여의 기준이 된다고 본다. 형만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 아니라, 세요소의 일치 여부가 기준이 된다고 생각된다. H. G. Creel, Shen Pu-hai: A Chinese Political Philosopher of the Fourth Century B.C.; John Makeham, Name and Actuality in early Chinese thought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4), 67-83쪽과 166-169쪽. 韓非子 主道, 人主之道, 靜退以為寶 不自操事而知拙與巧, 不自計慮而知福與咎 是以不言 而 善應, 不約而善增 言已應則執其契, 事已增則操其符 符契之所合, 賞罰之所生也
韓非子 의 법(法)과 술(術)의 관계 재조명 / 양 순 자 19 문법보다는 행정술 의 의미에 가깝다. 형명참동에서 명은 신하가 군주에게 바치는 제안이며, 군주는 그 제안을 듣는 입장이 다. 그러나 군주는 단지 듣는 위치에 있는 것만은 아니고, 형명참동이 실제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비자의 술 이론은 군주가 신하의 말을 듣는 과정 에서 취해야 할 태도를 제시하는데, 그 과정에서 술과 법과의 관계를 드러내준다. 군주는 신하들에게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서 누구의 제안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적절한 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신하들의 업적을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 충분 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군주는 형명참동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의 판단에 의지해야 한다. 한비자는 내저설상(內儲說上) 편에서 군주가 형명참동을 실행하면 서 취해야 할 술(術)을 설명한다. 군주가 사용하여야 할 술이 일곱 가지 있다...일곱 가지 술이란 첫째, 많은 증거를 모아 대조해보는 일이다. 둘째, 죄지은 자에게 반드시 벌을 내려 위엄을 내세워 보이는 일이다. 셋째, 공적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수여하여 그의 재능을 충분히 다하게 하는 일이다. 넷째, 하나하나 말을 들어서 그 실적을 추궁하는 일이다. 다섯째, 의아스런 명령을 내려 당황하게 만들고 거짓으로 일을 시킨다. 여섯째, 알면서 모르는 척하며 질문하는 일이다. 일곱째, 말을 일부러 뒤집어서 반대로 해 보이는 일이다. 이 일곱 가지야말로 군주가 사용 하여 할 것이다.23) 첫째, 군주는 그가 보고 들은 것을 대조해보아야 한다. 만약 군주가 듣는 데 있어 문 호를 하나로 정하면 신하가 군주의 귀와 눈을 가리고 막게 될 것이다.24) 둘째,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예외 없이 벌을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령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 다.25) 셋째, 상과 칭찬을 후하게 틀림없이 내려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아랫사람이 목숨을 바쳐 그들의 재능을 발휘할 것이다.26) 넷째, 신하들의 의견을 하나하나 들어서 판 단하면 어리석은 사람과 영리한 사람을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27) 다섯째, 자주 만나보고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면서 임용을 하지 않으면 간악한 자는 바로 사슴처럼 흩어져 버리 며, 사람에게 일을 시키면서 다른 일을 엉뚱하게 질문하면 사적으로 자신을 팔 수 없게 23) 24) 25) 26) 27) 韓非子 內儲說上, 主之所用也七術,. 七術 一曰 眾端參觀, 二曰 必罰明威, 三曰 信 賞盡能, 四曰 一聽責下, 五曰 疑詔詭使, 六曰 挾知而問, 七曰 倒言反事 此七者, 主之所用 也 위와 같음. 參觀一: 觀聽不參則誠不聞, 聽有門戶則臣壅塞 위와 같음. 必罰二: 愛多者則法不立, 威寡者則下侵上 是以刑罰不必則禁令不行... 위와 같음. 賞譽三: 賞譽薄而謾者, 下不用也, 賞譽厚而信者下輕死 위와 같음. 一聽四: 一聽則智愚不分, 責下則人臣不參
20 된다.28) 여섯째, 아는 것을 묻어 두고 질문하면 모르던 것도 알게 되며 한 가지 사물을 깊이 탐구하여 알게 되면 숨겨진 많은 것들이 모두 드러난다.29) 일곱째, 뒤바꿔 말하고 반대 행동을 하여 그것으로 의심스런 것을 시험해보면 간악한 일의 실정을 알게 된다.30) 한비자가 비록 일곱 가지 술을 형명참동을 실행하는 방편이라고 규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일곱 가지 술의 기능은 형명참동의 기능과 유사하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상벌을 부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상벌의 정확성은 군주의 권위를 확립시켜 줄 것이며 능력 있는 자로 하여금 그들의 재능을 다 발휘하도록 권장할 것이다. 첫 번째, 여섯 번 째, 일곱 번째는 군주가 신하들의 말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 가에 관한 것이다. 그는 신하 들의 말이 실제 상황에 적절한지를 파악해야 하며,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알아내기 위해 정보를 조작해야 한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신하들의 실제 업무 성과를 판단하는 것 과 관련된 것이다. 군주는 능력 있는 자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그들이 실제 이룬 업적을 판단해야 하며, 서로 잘못을 덮어주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내저설상 의 술은 형명 참동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법 이라는 글자는 한비자 에서 일반 백성들이 지켜야 하는 법조문의 성 격을 띤 실정법의 의미 외에 군주가 관료들을 등용하고 평가할 때 사용하는 추상적인 방 법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그 법을 실행하는 원칙은 형명참동 이다. 형명참동을 실행하기 위해서 군주는 신하들이 제출한 제안 중에서 어떤 상황에 가장 걸맞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제안에 따라 임무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임무의 완수 여부에 따라 상과 벌을 내리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제대로 완수하기 위해서 군주는 능력 있는 자와 무능력한 자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능력 있는 자가 자신의 의견을 제안할 수 있도록 권장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술은 법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이라 볼 수 있다. 28) 29) 30) 위와 같음. 詭使五: 數見久待而不任, 姦則鹿散 使人問他則不鬻私 위와 같음. 挾智六: 挾智而問, 則不智者至; 深智一物, 眾隱皆變 위와 같음. 倒言七: 倒言反事以嘗所疑則姦情得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崔 振 默 (서울대) 目 次 머리말 Ⅰ. 程 과 관련된 算題의 해석 Ⅱ. 생산과 노동의 기준, 물품의 소모율 맺음말 머리말 장가산한간 算數書 는 69개의 산수문제로 이루어진 죽간인데, 九章算術 보다 빠른 것으로 알려져 그 동안 학계에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결론은 이 산수서 가 순수한 산수문제집이 아니라 당시 매우 현실적인 산술계산과 관련된 실용 산수문제집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羨除는 형태에 관해서는 다소 논쟁은 있지만, 당시 墳 墓 조성에 필요한 실제적인 흙의 양과 노동량을 계산하기 위한 문제였다든지,1) 誤卷이나 租誤卷은 토지에 부과한 租의 과소 혹은 과대징수의 경우 이를 시정하는 문제였다는 점 에서 현실성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 자주 지적되고 있다. 산수서 를 조세의 징수, 토목 공사, 수공업, 금전거래 등 算數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하급관리의 실무지침서 내지는 讀本으로 보는 것도2)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 산수서 의 많은 산제들의 제목은 그러한 실용성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런데 산수서 의 현실성은 이 외에 程 字가 나타나는 算題의 분석을 통해서 더욱 분명해질 수 있는 것 같다. 程 은 본래 민의 일상생활을 규정하여 통제하는 國法과는 1) 2) 張家山漢簡 算數書 硏究會編, 漢簡 算數書 -- 中國最古の數學書, 朋友書店, 2006,(이하 硏 究會編, 算數書 로 약함) p.56 pp.34-35. 郭書春, 試論 算數書 的理論貢獻與編纂, 法國漢學 6, 中華書局, 2002.
22 다른 개념으로 官에서 수행하는 어떤 작업이나 管理하는 품목의 기술적 표준을 제시한 원칙으로 판단된다. 산수서 의 程 에 대해 彭浩는 물가책정이나 물품개량과 관련된 일 종의 법률규정으로 보았고,3) 整理小組는 관부수공업 生産定額의 법률규정 으로 보았 다.4) 그러나 吉村昌之는 법령은 아니고 무언가의 기준을 표시하는 것으로 추정하면서, 工人들의 근무나 노동에서의 최저기준량보다는 더 넓은 개념으로 당연히 되어야 할 量을 가름하기 위한 規準値를 보인다고 하였다.5) 이러한 연구들의 해석은 程 자체가 법적 구 속력을 갖는 것인지 아닌지의 관해 다소의 표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規程 이라고 본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사실상 산수서 이전부터 程 은 法이나 律 혹은 令보다는 하위개념으로 어떤 기준이나 표준을 의미하는 경우에 자주 사용되었 다. 문헌상에서 보면 漢에 귀의한 후 計相 을 역임한 張蒼이 章程을 定 하였다는 표현 이나6) 雲夢秦簡에서 工人程에서의 程 은 확실히 이러한 예에 속한다. 특히 九章算術 에서도 程 은 작업량의 기준으로 사용된 흔적이 강하다.7) 이러한 용례의 검토를 보면 程 을 律令으로 보기는 어렵고 작업량, 생산, 기술상의 기준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 한 것 같다. 그런데 산수서 에는 정 에 관한 산제가 적어도 6개 이상 포함되어 있고, 직접 정 자가 들어있지 않아도 정 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산제도 적지 않다. 이하 이 러한 산제의 분석을 통해 당시 생산과 기술상의 표준정도를 통해 고대사회의 일면을 살 펴보고자 한다. Ⅰ. 程 과 관련된 算題의 해석 1. 程 字가 포함된 산제 A) 일반 곡식에 관한 규정(정화) ① 규정에 말하기를 껍질 벗기지 않은 벼와 기장[禾黍] 1섬은 겉곡식 16과 2/3말에 3) 4) 5) 6) 7) 彭浩, 張家山漢簡 算數書 注釋, 科學出版社, 2001. 張家山漢墓竹簡(247號墓)整理小組, 張家山漢墓竹簡(247號墓), 文物出版社, 2006, p.141. 吉村昌之, 算數書 に見おえる 程 について, 張家山漢簡 算數書 の綜合的硏究, pp.176-177. 漢書 卷1, 高帝紀下. 如淳은 여기에서 (각 도량형단위에 해당하는) 權衡丈尺斗斛의 平法이 다 라고 注하고 있지만, 顔師古는 程은 法式이다(程, 法式也) 라고 해석하고 있다. 안사고는 또 다른 곳에서 程은 作業의 부과량이다(程者 作之課也, 漢書 景十三王傳) 라고 주석하고 있기 도 하다. 宋杰, 九章算術 與漢代社會經濟,首都師範大學出版社, 1994, pp.1-6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 崔 振 默 23 해당한다. 이를 절구질하여 현미(여미) 1섬을 만들면 현미 1섬은 착미(현미를 백미로 만 들기 전 한 단계 더 도정한 쌀로 추정됨, 즉 백미의 전단계) 9말에 해당하며, 착미 9말은 백미[훼미] 8말에 해당한다. 왕(王), ② 규정에 말하기를 벼 1섬은 조 20말에 해당하고, 이를 절구질하여 쌀 10말을 만들면 백미[훼미]가 된다. 정미[精細米, 찬미]로는 6과 2/3말 이 된다. 보리 10말은 보릿가루 3말이 된다. ③ 규정에 말하기를 보리, 콩, 팥, 참깨는 15말이 1섬이며, 백미[훼미], 착미를 주는 자는 10말을 1섬으로 한다. 8) ( 程禾, 程曰: 禾黍一石爲粟十六斗泰(大)半斗, 舂之爲糲米一石, 糲米一石爲糳米九斗, 糳米[ 九] 斗爲毁( 毇) 米八斗. 王 程曰: 稻禾一石爲粟廿斗, 舂之爲米十斗爲毁( 毇) 粲米六斗泰(大)半斗. 麥十斗[ 爲] 䵂三斗. 程曰: 麥ㆍ菽ㆍ荅ㆍ麻十五斗一石, 稟毁( 毇)< 糳> 者, 以十斗爲一石.) 구장산술 程禾 조와 똑같은 이 산제에서 정 은 세 차례 나오지만, 내용상으로 보 면 실제는 다섯 개의 정 이 있다고 보여진다. 모두 곡식간의 환산비율인데 연구에 의하 며 곡물의 도정정도에 따른 환산비율이 두 가지 다른 계통이 존재했다고 본다. ① 禾黍- (禾)粟-糲米-糳米-毇米이고 그 비율은 粟부터 50 : 30 : 27 : 24였고, ② 稻禾-(稻)粟-毁米- 粲米이고 그 비율은 粟부터 6 : 3 : 2 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장의 겉곡식[禾粟]과 벼 의 겉곡식[稻粟]의 환산비율은 5 : 6이 되는데, 산제 粟爲米 에서 5 : 4로 제시하고 있 는 것과는 모순이다. 산제 粟爲米 가 5 : 6으로 수정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여하튼 여 기서 정 이 주는 정보는 각종 곡식간의 환산기준이라는 점이다. 이 산제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복잡한 도정과정이다. 속-여미-착미-훼미로 이어지는 도정과정은 九章 算術 에서는 없던 毇米가 등장한다는 점이 다르다. 九章算術 에는 그 대신 粺米가 존재 하는데, 여기서 패미, 훼미, 착미는 비슷한 도정임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시기와 지역에 따른 도정과정상의 차이가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닌가 추정된다. 현대 도정에서 현미와 백 미의 두 단계 도정을 감안한다면 이 시기 세 단계 도정의 세밀함을 엿볼 수 있다. B) 전조(田租)의 징수규정(취정) ① 규정에 따라 10보²(평방보)에 전조(田租) 1말을 거두는데, 지금 그것을 건조시킨 것 이 8되라면, 몇 보²이 되어야 1말이 되겠는가? 얻어진 답은 12와 1/2보²이다. 풀이법에 말 하기를 8되를 나눗수(제수)로 삼고, 1말의 보수(步數)를 10배하여 나뉨수(피제수)로 하여 나눠주면 보수를 단위로 하는 결과를 얻는다 고하였다. ② 규정에 따르면 37보²에 전조 8) 鄒大海, 從 算數書 和秦簡看上古糧米的比率, 自然科學史硏究 22-4, 2003 참조. 한편 算數書 및 雲夢睡虎地秦簡, 이 산제는 雲夢睡虎地秦簡 倉律 과 거의 유사하다. 한편 九章算 術 說文解字 등에 나오는 도정정도에 따른 곡식 환산비율은 硏究會編, 算數書, p.56을 참 조하라.
24 (田租)로 조(좁쌀) 19말 7되를 거둔다면 몇 보에 1말이 되겠는가? 얻어진 답은 밭을 35와 79/197보² 줄인다면 1말이 된다. ③ 규정에 따라 5보²에 (전조) 1말을 거두는데 지금 그것 을 건조시킨 것이 1말 1되었는데, 밭을 줄여 1말이 되게 하려고 한다. 얻어진 답에 말하 기를 5/11보²이다. 풀이법에 말하기를 1말을 되의 수를 바꿔 5보²으로 곱하여[이것을 나 뉨수로 한다] 11로 나눠주면 결과를 얻는다 고 하였다. ( 取程 ①取程十步一斗, 今乾之八升, 問幾何步一斗. 問9)得田< 曰> 10): 十二步半一斗. 術曰: 八 升者爲法, 直(置)一升< 斗> 步數而十之[ 爲實], 如法一步. 竟11), ②程卅七步得禾十九斗七升, 問 幾何步一斗. 得曰: 減田十< 卅> 一< 五> 步有( 又)[一百] 九十七分步七十九步而一斗.12) ③取程五 步一斗, 今乾之一斗一升, 欲減田令一斗 得曰: 減田十一分步五. 術曰: 以一斗一升數乘五步 [ 爲實], 令十一而一[ 爲法]) ( ①, ②, ③ 번호는 필자가 임의로 붙인 것임) 이 산제는 乾字의 해석 여하에 따라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만약 건이 위의 해석대로 마른(건조한) 의 의미라면 이 산제는 당시 전조의 징수에서 습기가 있는 것과 마른 것 두 종류의 징수방법이 있었거나, 식량생산에서 습한 것과 건조한 것을 나눠 생산량을 파 악하는 기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그렇다면 문헌사료에는 없던 새로운 사 실일 수 있고, 당시 식량생산과정의 흥미로운 일면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 乾字를 실제 나 사실상 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는데,13) 그렇다면 전조징수의 규정과 현실 상 징수의 오차의 문제로 귀결하게 된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위의 減田도 田의 감소가 아니라 실제보수가 규정된 보수보다 적어진 것 즉 식량에 대응되는 보수의 오차로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산제(取枲程, 耗租)들에서 건조시킨 작물의 문제가 등장 하기 때문에 이 산제 역시 건조의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여하튼 정을 기준 내지는 표준으로 본다면 ① - ③은 각기 다른 작물을 재배했을 때 거둘 수 있는 田租의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C) 삼베 징수규정(취시정) 삼베 징수규정에 따르면 (마전) 10보²(평방보)에서 (삼베는) 둘레길이 30치를 한 묶음으 9) 10) 11) 12) 13) 問; 다른 산제와 비교할 때 이 問 자는 필요없는 衍字인 것 같다. 문맥상 田은 曰로 보아야 한다. 竟은 取의 誤字이거나 衍文으로 볼 수 있지만, 혹은 取와 같은 뜻으로 보기도 한다. 이 구절의 해석은 불명확하여 계산한다면 분모 79는 24의 잘못이라고 釋文이 주장하고 있으나 신뢰하기 어렵다. 다만 그 산출근거는 37-(37 10 197)=35와 24/197이다. 胡憶濤, 張家山漢簡 算數書 整理硏究, 重慶, 西南大學碩士學位論文, 2006, Pp.43-44. 乾을 건 조로 해석한다면 ③은 건조시킨 후 오히려 한 되가 많아지는 이상한 현상이 생기게 되므로 이 것을 말린다는 의미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 崔 振 默 25 로 하는데 지금 건조한 후의 둘레길이가 28치이다. (만약 건조한 후의 삼베의 둘레길이 가 30치였다면) 몇 보²이 있어야 한 묶음인가? 풀이법에 말하기를 건조한 마의 둘레길이를 제곱하여 나눗수로 삼고, 생마의 둘레길 이를 제곱했던 것에 (생마 1묶음당의 평방보수를 곱해서 나뉨수로 삼아서 나눠주면, 한 묶음에 11과 47/98보²이라는 결과를 얻게 된다.14) ( 取枲程. 取枲程十步三韋( 圍) 束一, 今乾之廿八寸, 問幾何步一束. 術曰: 乾自乘爲法, 生自乘有 ( 又) 以生一束步數乘之爲一實, 實如法得十一步有(又)九十八分步四十七而一束.) 枲는 麻로 해석되는데, 마는 곡물로는 참깨[芝麻]로도 사용되지만 여기에서는 삼베로 번역해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산제의 정 은 단위면적당 삼베의 생산표준을 제시하 고 있는 셈이다. 또한 생마와 건마와의 생산비율의 차이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D) 의사 규정에 말하기를 의사가 병을 치료한다면 60산을 얻는데 20산 정(程)...60을 얻었으면 얼마를 부(負)는 어느 정도가 되는가? 말하기를 부는 17과 11/269산이다. 그 풀이법에 말하기를 지금 얻었던 산을 나눗수로 하고 60에 부산(負算)을 곱하여 나뉨수 로 한다. ( 醫. 程曰: 醫治病者得六十筭(算) 負廿筭(算) 程 弗 得六十而負幾何 曰: 負十七 筭( 算) 二百六十九分算十一. 其術曰: 以今得筭( 算) 爲法, 令六十乘負筭( 算) 爲實.) 탈루가 많아 해독이 불명한 이 산제는 의사의 진료단가를 말하는 것 같아 이전의 문헌 에 볼 수 없었던 신자료로 판단되기도 한다. 그러나 負의 의미가 불명확하여 명쾌하게 해독하기 어렵다. 다만 負算이 치료행위과정에서 소용되는 포인트라면, 이 산제는 실제 치료행위에서 얻어지는 포인트가 負를 반영하여 규정상의 포인트로 환산하는 기록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15) 따라서 이 수치들을 의사의 근무평정을 위해 사용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기에서의 정 이 의료행위를 행할 때의 어떤 규준이라 는 점이고, 당시 치료행위도 이러한 규준의 제한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E) 전조(田租)의 소모량(모조) 모조(耗租), 즉 전조가 소모되었다는 것은 생산은 많았는데 건조하면 적어진 것을 말한 14) 15) 이 산제의 수식은 다음과 같다. 10 π (30/2)² π (28/2)²=11과 47/98(보²) 硏究會編, 算數書, p.86.
26 다. 말하기를 징수규정에 (전조를) 7과 1/4보²에 1말씩 거뒀다가, 지금 건조시켜보니 7과 1/3되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1말을 얻을 보²(평방보)수를 구하려고 한다. 풀이법에 말하 기를 10되를 두고서 7과 1/4보²을 곱하여 [나뉨수로 하고, (이것을 건조시킨 후의 수)7과 1/3되를 나눗수로 하여] 나누면 결과를 얻는다 고 하였다. 답에 말하기를 9와 39/44보² 에 1말이다 라고 하였다. 다른 물건에 대한 규정에서도 이와 같이 한다. ( 耗租. 耗租產多乾少, 曰: 取程七步四分步[ 一] 一斗, 今乾之七升少半升, 欲求一斗步數. 術曰: 直( 置) 十升以乘七斗< 步> 四分步 [爲實, 七升步半升爲法], 如乾成一數也. 曰: 九步四十四分步 卅九而一斗. 程它物如此.) 여기에서는 田租의 소모량이 등장한다. 이 때의 耗를 秏(벼의 일종)로 보아 일종의 稻 계통의 작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算數書 전체의 분위기를 보면 소모의 뜻으로 이해 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이 산제에서 取程은 7과 1/4보²에 1말씩 거뒀다 는 것이고, 이것은 B)의 산제와 같이 어떤 작물의 징수규정인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 구절에 程 它物如此 는 이 산제의 계산법이 일반적인 원칙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F) 죽간을 만드는 규정(정죽) 규정에서 말하기를 지름이 8치짜리 대나무로 3자짜리 죽간 183개를 만들 수 있다 고 하였다. 지금 9치짜리 대나무로 죽간을 만든다면 몇 개나 만들 수 있겠는가? (답에) 말하 기를 205와 7/8개가 된다 고 하였다. 풀이법에 말하기를 8치를 나눗수로 삼는다 고 하 였다. 규정에 말하기를 (지름이) 8치짜리 대나무 한 개로 1자 5치짜리 죽간 366개를 만들 수 있다 고 하였다. 지금 이 대나무로 1자 6치짜리 죽간을 만든다면 몇 개나 만들 수 있 겠는가? (답에) 말하기를 343과 1/8개가 된다 고 하였다. 풀이법에 말하기를 16치를 나눗수로 삼는다 고 하였다. ( 程竹. 程曰: 竹大八寸者爲三尺簡百八十三, 今以九寸竹爲簡, 簡當幾何 曰: 爲二百五簡八分 簡七. 術曰: 以八寸爲法. 程曰: 八寸竹一箇爲尺五寸簡三百六十六. 今欲以此竹爲尺六寸簡, 簡 當幾何 曰: 爲三百廿< 四十> 三[ 簡] 八分簡一. 術曰: 以十六寸爲法.) 이 산제의 두 개의 풀이법은 이 상태 그대로는 모두 불완전하다. 나눗수(除數)로 삼는 다는 말 뒤에 당연히 나뉨수 즉 被除數에 관한 언급이 있고 實如法而一 같은 나눗셈을 하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등장해야 할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하튼 원문은 이 자체로 완결되어 있다는 점은 다소 의문이다. 이 산제의 계산법은 비례식이기 때문에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 崔 振 默 27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일정한 재료로 죽간을 만드는 방법을 말하면서, 그 표준으 로 지름이 8치짜리 대나무로 3자짜리 죽간 183개를 만들 수 있다 고 하였는데, 이 규 정대로라면 만들어진 죽간의 전체길이는 549자 즉 12736.8 (1자를 23.2 로 계산)가 된 다. 그렇다면 대나무 전체 길이를 넉넉하게 10m로 추정한다면 대략 대나무 원통을 12-3 등분하여 죽간을 가공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실제 그렇게 원통을 자르기 어렵기 때문 에 원통을 6등분하고 각 등분마다 2쪽의 죽간을 가공했거나, 4등분하고 각 등분마다 3쪽 의 죽간을 가공했다고 보는 편이 나은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너비 3-4.5 정도, 길이 70 의 죽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죽간의 길이 70 는 출토죽간에 보이는 당시 관문 서의 형식과 잘 맞지 않을 수 있는데, 아래 1자 5치나 1자 6치의 죽간은 35-37 가 되어 통용되는 죽간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여하튼 그 자체 매우 정교한 기술였다고 판단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정 은 길이가 줄어들고 죽간의 숫자가 늘어났으므로 사실 상 첫 번째 정과 같은 것이다. 확실히 이 산제는 기술의 표준을 제시하고 있는 예이다. G) 대그릇[竹籠] 만들기 (노당) 규정에 말하기를 하루에 대나무 60그루를 벌목하고 하루에 대그릇 15개를 만드는데, 대나무 한 그루로 대그릇 셋을 만들 수 있다 고 한다. 지금 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대나무를 벌목해서 대그릇까지 만들게 한다면 하루에 몇 개나 만들 수 있겠는가? (답에) 말하기를 대그릇 13과 3/4개를 만든다 고 하였다. 풀이법에 말하기를 60을 나눗수로 삼 고 55에 15를 곱한 것을 나뉨수로 삼는다 고 하였다. ( 盧唐.16) 程曰: 一日伐竹六十箇, 一日爲盧唐十五, 一竹爲三盧唐. 欲令一人自伐竹, 因爲盧唐, 一日爲幾何 曰: 爲十三 盧唐四分之三. 術曰: 以六十爲法, 以五十五乘十五爲實.) 이 산제의 제목 노당은 대그릇으로 해석했는데, 어떠한 형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더 구나 문제와 술문 및 해답간에도 잘 맞지 않는다. 계산에 의하면 (60 15) (60+5)=13과 11/13이 되어 정답이라고 한 13과 3/4와는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 이것은 아마도 초사자 가 피제수중의 60을 55로 쓰고 제수중의 65를 60으로 썼을 때 비로소 가능하지만, 왜 그 렇게 써야 했는지 당연히 의문이다. 그런데 작업 첫째 날에만 주목한다면 다음과 같은 계산이 가능해진다. 대그릇을 15개 만든다면 대나무는 하루에 5개 필요하고, 이 5개의 대나무만을 벤다면 하루에 1-5/60=55/60日의 시간이 남게 된다. 또한 대그릇을 한 개 만 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1/15日이므로 남는 시간에 만들어지는 대나무는 (하루중 남은 시 간) (한개의 대그릇을 만드는 시간), 즉 (55/60) (1/15)=13과 3/4가 되어 술문과 일치하 16) 정리소조가 竹籠으로 해석했던데 비해, Dauben은 주걱, 국자 정도로 이해했다.
28 게 되는 것이다.17) 여기에서의 정 은 명백히 一日 勞役의 기준과 작업의 표준을 제시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雲夢秦簡 工人程에서 제시되는 하루의 표준적인 노동량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분업화하지 않고 오히려 복수의 공정을 한 사람에게 맡긴 다는 전제가 당시 현실에서 등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의심스럽고, 一日爲盧唐十五, 一竹爲三盧唐 의 의미가 최대한 그렇게 만든다는 것인지, 평균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 인지도 불분명하다. 이에 대해 일부 주석가들이 이를 가능한 최대 로 번역하였던 점을 고려하면18) 최대작업량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H) 깃털을 단 화살(우시) 규정에 따르면 한 사람이 하루에 화살을 30개 다듬고 깃털을 20개 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 화살을 다듬고 깃털까지 달게 한다면, 하루에 몇 개 나 만들 수 있는가? ( 羽矢. 程: 一人一日爲矢卅ㆍ羽矢廿. 今欲令一人爲矢且羽之, 一日爲幾何 曰: 爲十二. 術曰: 并( 並) 矢ㆍ羽以爲法, 以矢ㆍ羽相乘爲實.) 화살 끝부분의 깃털은 당시 화살의 비행속도와 각도 등을 고려하여 정확히 목표에 도 달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적 장치였다. 당시 羽矢에는 鍭矢, 殺矢, 兵矢 田矢, 茀矢 등 여러 종류의 화살이 존재했는데, 무게중심은 鍭矢, 茀矢가 3분하여 앞뒤 1:2의 비율이 었고, 兵矢 田矢는 앞뒤 2: 3으로 5분하였고, 殺矢는 7분하여 앞뒤 3: 4의 비율이었다. 이 모든 화살은 전체 길이를 5분할 경우 깃털부분이 1이 된다.19) 이 산제에서 정 은 화살 을 다듬고 깃털을 달아 하나의 완성된 화살을 만드는 표준작업량을 제시한 것이다. 2. 程 으로 추정되는 산제 산수서 의 문제나 해답에 제시되는 숫자는 평범한 정수가 아니라 기억하거나 표기하 기도 복잡한 매우 특이한 분수나 정수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예컨대 銅毛의 정답 11과 91/144銖, 程竹에서의 343과 1/8, 醫에서의 17과 11/269, 賈鹽에서의 103과 95/430전, 耗租에서의 9와 39/44, 取枲程에서 11과 47/98, 특히 耗 條에서는 겉곡식의 수 치가 여러 개의 매우 복잡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17) 18) 19) 산수서 가 단순히 산 田村 誠, 算數書 中の3つの算題について, 張家山漢簡 算數書 の綜合的硏究, p.52. Joseph W. Dauben, Suan Shu Shu 算數書; A Book on Numbers and Computations, Arch. Hist. Exact Sci. 62, 2008, p.147. 周禮 考工記 卷下, 矢人制矢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 崔 振 默 29 수 연습용의 참고도서였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사항이다. 단지 계산만을 위해 복잡한 수 의 사칙연산을 유도했다는 것은 오히려 계산 때문에 수학원리의 이해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치들은 현실에서 직면한 수치와 문제들이 만들어낸 실제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여지도 있는 것 같다. 구장산술 일 부 산제 역시 국가가 어떤 工事를 진행하기 전에 미리 공정의 규모와 필요한 노동력, 시 간 등을 계산하고 추진했던 흔적으로 추정하고 있기도 하므로20) 산수서 에서도 그런 가 능성을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칙연산 법칙에 관한 산제도 적지 않고 구장산술 등 다른 전통수학저작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수의 성질을 논한 순수한 산제도 없는 것 은 아니다.21) 그럼에도 산수서 에 반영된 각종 물가나 식량생산, 田租 등이 역사적 상황과 상당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고,22) 위의 정 도 당시의 생산과 작업 및 기술 의 표준화와 관련된다는 점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하 구체적으로 정 이라는 단어는 사 용하지 않았지만, 정 으로 추정되는 몇몇 산제를 검토를 통해 현실상황과의 관련성을 확인해 보자. I) 겉곡식은 3 평방보에 한 말, 보리는 4 평방보에 한 말, 팥은 5 평방보에 한 말 (禾三步一 斗, 麥四步一斗, 荅五步一斗; 并租) J) 겉곡식 한 섬을 받아 절구질하면 8 말 8 되가 된다.(稟粟一石舂之爲八斗八升; 舂粟) K) 동전을 주조할 때 ( 구리) 한 섬에 7 근 8 량이 소모된다.( 鑄銅一石耗七斤八兩; 銅耗) L) 역마 두필이 하루에 꼴과 볏짚을 모두 2 섬 소비하는데, 꼴 3, 볏짚 2 의 비율로 한다. ( 傳馬日二匹共芻稿二石, 令芻三而稿二; 傳馬) M) 밭 24 평방보에 稅를 부과하는데 8 평방보에 한 말씩 3 말이 매겨졌다.( 稅田廿四步, 八步 一斗, 租三斗; 稅田) N) 밭 1 무에 대한 田租는 10 평방보당 한 말씩 부과하면, 무릇 2 섬 4 말이 된다.(田一畝租 之十步一斗, 凡租二石四斗; 租誤券) O) 겉곡식 한 섬에 12 와 1/3 되가 소모된다.(粟一石秏一斗二升少半升; 秏23)) P) 겉곡식의 체적 2700 입방촌이면 한 섬이다.( ㆍ二尺七寸而一石; 旋粟) Q) 칠 한 말에 물 세 말을 합치면 최대포화상태의 용액이 된다 ( 漆一斗飮水三斗而極; 飮 漆) 20) 21) 22) 23) 宋杰, 九章算術 與漢代社會經濟, pp.101-102. 增減分 增分者, 增其子; 減分者, 增其母. 이 산제에는 다른 산제와 달리 實例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葉玉英, 論張家山漢簡 算數書 的經濟史料價値,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1. 秏는 稻계통의 한 품종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耗로 보아 소모 의 의미로 해석했 다.
30 R) 쌀 1 단위와 겉곡식 2 단위를 합해서 10 말을 도정하면 7 말 ⅓되가 나온다.(有米一石ㆍ 粟一石, 并提之; 米粟幷) S) 너비 22 촌짜리 비단의 값은 길이 10 촌에 23 전이다. (繒幅廣廿二寸, 袤十寸, 價廿三錢.; 繒幅) 위의 예시로 든 산제의 일반적인 형식은 지금(今) 이나 지금 가 있다면(今有) 의 형태의 문제가 시작되기 전에 다소 추상적인 명제가 나오는 경우이다. 이외 다른 산제도 金價 등의 각종 물가, 이자율 등을 반영하는 산제들이 있는데, 이는 시기에 따른 변동성 이 강하고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표준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위의 예시들은 각기 생산이나 작업 혹은 물품의 소모율을 반영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위의 예 시중 P)에 대해 부연 설명한다면 이는 지상에 쌓아둔 겉곡식의 체적을 환산하는 문제로 볼 수 있다. 무게나 부피단위로 모두 한 섬[一石]이 쓰였고, 겉곡식은 1석=2700입방촌이 라고 보는 일종의 規程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24) 구장산술 商功章의 委粟術에 程粟一斛積二尺七寸, 其米一斛積一尺六寸五分寸之一, 其菽荅麻麥一斛皆二尺四寸十分寸之 三 이라고 되어 있어 각기 곡물에 따라 체적이 달라짐을 서술하기 있기 때문에, 여기에 서 묵점(ㆍ)역시 程 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I) - R)까지의 산제들을 표로 정리하면 다 음과 같다. <표 1> 程 으로 추정되는 산제들 번호 품 명 I) 겉곡식,보리,팥의 租비율 J) 겉곡식의 절구질 정 으로 추정되는 내용 소모율 3 : 4 : 5 (一斗) 1石당 8.8(斗) K) 구리의 소모량 1石당 7근 8량 L) 역마의 소비량 꼴+볏집=2, 비율 3:2 M) 稅의 양 N) 밭의 田租 비고 같은 단위면적 11.3% 6.25% 8평방보당 3말 10평방보당 1斗 O) 겉곡식 소모량 1石당 12와 1/3升 P) 겉곡식의 체적(1섬) 1석= 2700입방촌 Q) 칠의 최대포화용액비율 칠 1斗, 물 3斗 S) 비단의 판매단위 2척 2촌 B)의 ①과 유사 1.2% R) 쌀과 겉곡식의 병산도정(1:2) 10斗당 7斗1/3 24) 矢崎武人, 算數書 中の ㆍ 二尺七寸而一石 と 漢書 律曆志, 究, p.161. 이년율령 과 동일 張家山漢簡 算數書 の綜合的硏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 崔 振 默 31 Ⅱ. 생산과 노동의 기준, 물품의 소모율 이상에서 제시된 각종 정 (규정)이 당시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를 검토하기 위해 우선 농업생산과 田租의 문제를 살펴보자. 전조 징수 규정은 B)에서 ① 10보²에 田租 1말 ② 37보²에 田租로 조(좁쌀) 19말 7되 ③ 5보²에 田租 1말, E)에서는 (田 租를) 7과 1/4보²에 1말, M) 8평방보당 3말, N) 10평방보당 1말 을 거둔다고 한다. 여기에서 B) ①과 ③은 두 배의 차이가 있으므로 각기 다른 작물이거나 생산력이 차이 있는 토지로 이해하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렵고, 반면 N)은 같은 작물이나 조건으로 이해 해도 좋을 것 같다. ②에 구체적 작물이 제시된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여하튼 B)를 일단 1畝(240步 大畝, 1 240, 15 16 혹은 20 12)로 환산한다면 각기 ① 24말, ② 128되 ③ 48말의 田租를 내야 하는 것이 된다. 세율을 1/10세로 계산한다고 해도 생산량 은 ① 24石, ② 1280되 ③ 48石이 되므로 당시 평균 畝당 생산량을 훨씬 초과하고 있다. 진한대 畝당 생산량을 평균 3-4石으로 잡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25) 이러한 수치는 결코 현실적이지 않다. 다만 水利田이나 區種法이 시행된 경우 각기 10석 내지 13석이 생산된 다는 지적도 있다.26) 그렇더라도 이 수치는 최고 조건의 최고 생산량을 적용해도 너무 터무니없기 때문에 계산을 위한 설정된 假設의 수치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면 이 규정을 당시의 생산량으로 이해한다면27) 기존의 학설과 크게 배치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수치를 납득할 수는 있기는 하다. B)① 24말, B)② 12.8말 B)③ 48 말, E) 33말, M) 90말이 생산량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 은 당시 생산의 기준이었 을 가능성이 있고, B)①의 取程十步一斗 는 규정은 10평방보에 한 말을 생산하는 것이 다 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명백히 N)은 田租의 의미로 이해할 수밖에 없고, N)과 같이 十步一斗 의 단락이 들어있는 B)①도 전조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점이 해명되지 않은 난제인데, 정 의 의미를 고려하면 단순히 계산상의 가설도 아닌 것은 분명하며 오히려 작물의 종류에 따른 생산량의 차이로 보아야 할 지도 모른 다.28) 또는 지주에게 내는 고율의 田租였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한편 또 다른 문제는 步를 단위로 田租를 계산하는 방식인데, 畝를 기준으로 전체 田租가 산정하기 전, 그 하위개념에 해당하는 程 을 기준으로 전조 산정의 근거를 만들었던 것으로 이해된 25) 26) 27) 28) 林甘泉 主編, 中國經濟通史(秦漢經濟卷, 上), 經濟日報出版社, 1999, p.243. 寧可, 有關漢代農業生産的幾個數字, 北京師院學報,1980-3, pp.80-81. 葉玉英, 論張家山漢簡 算數書 的經濟史料價値, pp.43-44. 구장산술 쇠분장의 18제에 今有田一畝 收粟六升太半升 에서 6과 2/3는 일반 田地의 생산량 과 稅率을 고려하면 대체로 현실과 부합하므로 田租로 추정한다. (宋杰, 九章算術 與漢代社 會經濟 )
32 다. 산수서 에 이 방식이 널리 존재하는 것을 보면 당시 이런 방식이 현실적이었던 것 같다. 즉 程 은 律보다 하위의 세부단위의 기준 등에서 사용된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 다. 한편 벼의 도정과정과 관련된 것은 A), I), J), O) 등 인데, 벼의 가공과정과 그 과정에 서 발생하는 손실율을 각 단계 米의 교환비율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정 을 통해 제시 한 이 손실율은 현대 도정과정에서 표준으로 제시하는 현백율(89-92%) 등과 거의 차이가 없다. 산수서 를 포함한 각종 문헌상의 등장하는 도정과정상의 米의 명칭에는 앞에서 제시한 것 이외에도 御米와 糈米가 추가되는데 御米는 황제에게 진상하는 가장 가공이 잘 된 쌀이고, 서미는 신에게 제사용으로 사용하는 쌀이다. 따라서 이들 쌀은 다른 것에 비해 가장 낮은 비율로 책정되고, 도정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당시 도정의 세분화와 분류는 신분사회에서의 소비생활의 차등을 반영하 는 측면이 강한 것 같다. 糲米도 배불리 먹지 못한다 ( 韓氏外傳 )는 표현도 이러한 방 증이다. 아마도 도정 첫 단계의 쌀인 여미는 군인이나 일반인들의 식량이었을 것이다. F), G), H) 세 개의 산제는 노동의 표준을 제시하는 1일 작업량들의 예시이다. 각종 수 공업생산에서는 개인의 숙련도 및 능력에 따른 생산량과 속도의 차이, 계절에 따른 하루 노동량의 편차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정한 생산효율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이 1일 노동량을 규정해놓을 필요성이 많았을 것이다. 기물제작 등 각종 물품을 활용하는 기술분야에서는 원재료의 소모율을 설정해놓는 것 이 제품의 품질 및 일정한 생산량을 유지하고 생산과정에서의 나태함 등을 막는 효율성 이 있었을 것이다. K), L), Q) 등이 이러한 산제들인데 우선 K)는 동전주조에서의 구리 의 소모율을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고고학 발굴에 의해 현존하는 오수전이 직 경은 2.5-2.6, 무게는 대략 3.5-4g으로 알려졌는데,29) 이 수치를 K)에 적용해 보자. 1석 은 1920량30)인데 소모되는 양이 7근 8량(120량)이므로 남은 구리는 1800량이 된다. 이것 은 다시 43,200銖(1량=24수)가 되는데 단순히 오수전이므로 5로 나눈다면 8,640개의 동전 이 생산되어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현존 오수전의 알려진 중량으로 계산한다면, 1수 =0.7g으로 하면 43,200수는 30,240g이 된다. 이를 3.5g으로 나누면 정확하게 8,640개가 된다. 따라서 당시 오수전은 3.5g이 표준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5g이상의 오수 전은 과잉이고 그 이하는 과소가 되는 것이다. S)는 비단의 판매단위로 이년율령 에서 비단을 파는데 2척 2촌에 미달하는 것은 몰 수한다 는 조항과 함께 고려하면 당시 비단판매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 29) 30) 張之恒 主編, 中國考古學通論, 南京大學出版社, 1995, p.266. 1石=4鈞, 1균=30斤, 1근=16兩, 1량=24銖
張家山漢簡 算數書 의 程 과 中國古代 생산과 기술의 표준화 / 崔 振 默 33 다. C)의 (삼베는) 둘레길이 30치를 한 묶음 으로 한다는 언급도 단위의 제시로 보여진 다. 동시에 수학적 기준도 등장하여 以圜材方나 以方材圜에서 5로 7을 나눈다 는 것은 7/5=1.4 즉 2를 의미하는 것이며, π를 단순히 3으로 계산하는 일, P)처럼 도량형의 단 위 등의 기준이 제시되어 있어 당시의 기술적 수준을 가름하게 해 준다. 맺음말 雲夢龍崗秦簡 에는 遺程, 敗程등의 표현이 등장하는데 遺程은 租賦의 수량을 채우지 못했을 때, 敗程은 租賦의 질량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31) 또 한 田租를 布로 환산하는 비율을 정한 규정으로 추정되는 租布程 등의 용어도 출현한다. 이러한 용례를 종합적으로 검토한다면 중국 고대 각종 물품의 품질과 수량, 노동량과 생 산력의 표준, 도량형의 기준 등 사회의 세밀한 면들을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 다. 31) 劉信芳, 梁柱 編著, 雲夢龍崗秦簡, 科學出版社, 1997, p.38.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 道敎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趙 晟 佑(서울대) 序 論 目 次 Ⅰ. 五石에 의한 鎭墓 Ⅱ. 鉛人과 殃의 처리 Ⅲ. 道敎의 새로운 五石 餘論 序 論 陝西省과 河南省의 關中 지역에서 발굴된 後漢 시기의 묘와 敦煌 지역에서 발굴된 魏 晉十六國初期의 묘에서는 높이 15-20cm 가량의 陶甁이 꾸준히 발견되어 왔다. 이들 陶甁 의 표면에는 衣物疏나 買地券과는 다른, 鎭墓文으로 통칭되는 일종의 매장문서가 적혀 있다. 鎭墓文은 보통 墓主 아무개가 모년 모월 모일에 사망하여 매장하니 묘를 관장하는 地下의 신들은 墓主를 저승으로 착오 없이 이송하라는 내용의 일종의 행정문서 형식을 띠고 있으며 아울러 형벌로 점철된 암울한 저승에서 墓主가 조금이라도 나은 처우를 받 을 것, 墓主를 위해 冢墓를 安鎭할 것, 死者인 墓主와 生人인 가족 및 후손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는 존재들이니 서로 간여하지 않을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鎭墓文의 내용은 後漢에서 魏晉에 이르는 시기의 중국사회의 宗敎的 心態를 보 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鎭墓文에 보이는 종교적 관념들과 天師道나 太平道와 같은 초기의 道敎와의 관계에 대하여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 결 과 天師道나 太平道와 같은 初期 道敎는 鎭墓文을 낳은 민간의 종교 전통을 상당 부분 계승하였음이 밝혀졌다.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발견되어 온 새로운 鎭墓文들을 풍부하게 활용하여 鎭墓文에 보이는 종교전통과 天師道를 等値하는 시각도 제기되었으나 鎭墓文을
36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종교적 관념이나 행태는 天師道가 등장하기 이전의 선행 단계라고 보는 것이 아직까지는 일반적인 이해이다. 鎭墓文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衣物疏나 買地券 등의 다른 종류의 매장 문서와의 계통적, 내용적 비교검토가 필요할 뿐 아니라, 鎭墓文이 발견된 墓의 피장자의 계층적 배경은 물론, 鎭墓文이 발굴된 墓葬이 집중되어 있는 後漢代의 關中地域과 魏晉 代의 敦煌地域의 특수한 地域文化의 가능성, 鎭墓文을 통해 엿볼 수 있는 冥界의 行政體 系, 鎭墓文을 사용하는 葬送儀禮와 유교적 喪葬儀禮와의 관계 등 多岐한 문제들이 해명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전에, 우선 이 글은 鎭 墓文의 기본적인 목적, 즉 死者를 위한 冢墓의 安鎭 과 生人을 위한 殃禍의 제거를 중심 으로 鎭墓文의 종교적인 특징을 검토하고, 이러한 鎭墓文의 특징들이 도교에서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I. 五石에 의한 鎭墓 後漢代 鎭墓文은 대부분 死者와 生人이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하는 존재들임을 강조하면 서 양자를 격리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死者의 安寧을 기원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死者와 生人간의 분리를 강조하는 이러한 태도는 실상 형벌로 점철된 암울한 저 승으로 이관된 死者의 일에 살아 있는 가족과 후손이 연루되어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 을 막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陝西咸陽敎育學 院 2號 漢墓에서 발견된 永平 3年(60) 紀年의 鎭墓文은 鎭墓 행위를 담당한 종교인이 묘 를 만들기 위한 토지를 확보하고 후손을 위해 사자의 묘를 만드는 행위가 殃禍를 제거하 고 후손을 이롭게 하며, 死者가 저승에서 처벌받지 않고 아울러 死者로 인해 生人이 피 해를 입는 일도 없게 하려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鎭墓文이 적힌 陶甁을 묘 안에 매장하는 것 자체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임은 분명한데, 이 鎭墓文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五石이라는 다섯 종류의 광물을 사용하여 冢墓安寧 을 도모한다고 한다. 아울러 五石이 曾靑, 丹砂, 雄黃, 礜石, 慈石의 다섯 가지임을 전부 밝히고 있는 것 도 이 鎭墓文이 가지는 자료적 가치라고 할 수 있으나, 한 가지 더 특기할 것은 이 문장 이 적혀 있는 鎭墓甁 내부에서 실제로 雄黃과 曾靑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들 五石에 관해 언급하고 있거나 나아가 실제로 五石(의 일부)를 담고 있는 鎭墓甁의 사례들 중 보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의 묘 안에서 다수의 鎭墓甁이 발견되는 경 우인데, 이는 복수의 鎭墓甁을 사용하여 보다 체계적인 형태로 묘 내부를 주술적으로 봉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 / 趙 晟 佑 37 인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의도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洛陽 李屯鄕 後漢墓이다. 五石의 사용을 언급하는 鎭墓甁이 남북 방향으로 조성된 墓의 主室의 구석 네 곳, 즉 東北, 東南, 西南, 西北에 1건 씩 배치되어 있었다. 鎭墓文에 서 五石의 사용을 명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비슷한 방식으로 鎭墓甁이 배치되어 있는 사 례로는 河南省 靈寶縣 張灣 漢墓의 5號 墓를 들 수 있다. 이 경우 主室의 네 구석 뿐 아 니라 중앙까지 포함하여 다섯 곳에 鎭墓甁이 두어져 있었다. 太淸石璧記 에서 曾靑, 丹砂, 雄黃, 礜石, 慈石의 五石이 각각 순서대로 동, 남, 중앙, 서, 북의 五方과 청, 적, 황, 백, 흑의 五色에 상응하는 煉丹術의 중요한 재료로 등장하고 있으므로 後漢代 鎭墓文에서 보이는 五石 및 실제로 발견된 일부 광물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五石-五方-五行의 유기적인 상응관계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기 대하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기존의 발굴 사례들 중 五石의 배치가 정확 하게 五行說五方의 방위에 맞추어진 것이 소수에 속한다. 다만, 적어도 五石을 다섯 방위 에 배치하여 墓 내부의 공간을 주술적으로 보호하려는 관념이 존재하였다는 점은 인정해 야 할 것 같다. 다음 장에서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관념은 후대에 道敎에서 鎭墓를 위해 다른 형태의 五石을 사용하는 것과도 무관하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鎭墓를 위해 五石이 사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五石의 용도는 丹藥의 제조일 것이고, 실제로 五石 이라는 용어가 붙은 다양한 처방이 존재한다. 鎭墓文에서 五石을 神藥이라고 지칭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묘에 사용하는 五石 은 醫藥 전통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 은 死者를 안치하는 공간을 安鎭 하는 행위에 왜 특수한 종료의 藥材를 사용했는지가 되는데, 중국전통의학의 藥 이라고 하는 것이 근대의학의 藥劑와 동일한 성질의 것이 아 님을 상기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전자가 주술적 효과를 지닌 것으로 믿어졌던 재료들을 포함하는 경우도 많고, 그러한 재료로 만들어진 藥 은 적지 않은 경우 病因을 鬼邪 등의 外鬼에 귀인하고 이들에 대처하기 위한 것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五石 중에는 丹砂, 즉 朱砂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丹砂가 辟邪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관념은 本草學의 고전인 神農本草經 에서도 丹砂의 중요한 특질 중 하나를 殺精魅邪惡鬼 라고 소개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데, 五石 중의 雄黃에도 전통적으로 辟邪의 기능이 있다고 믿어졌고, 礜石 또한 마찬가지 효력을 가진 물질로 간주되는 등, 五石을 이루는 물질들의 기본적인 속성 중 하나가 辟 邪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辟邪 祈禳의 효능을 가진 五石을 주요 방향을 향해 배치 한 것은 묘의 내부를 주술적으로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첫머리에 소개 한 陝西咸陽敎育學院 2號 漢墓의 鎭墓文에서 명시하듯 五石은 기본적으로 冢墓安寧 을
38 위한 도구로, 鎭墓文의 내용이 효과적으로 실현될 것을 보조하는 장치였던 것이다. Ⅱ. 鉛人과 殃의 처리 그런데 鎭墓文의 중요한 목적 중 다른 한 가지가 死者로 인해 발생하는 殃禍가 生人에 게 미치지 않게 하는 것임을 상기하면 五石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할이 부여된 것은 아니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西安 和平門外 4號 墓에서는 初平 4年(194) 紀年의 鎭墓 文과 함께 礜石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발견되었는데, 이 鎭墓文은 五石의 精으로 冢墓를 安鎭하고 子孫들을 이롭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山西 臨猗 後漢墓에서 출토된 延熹 9年 (166) 鎭墓甁의 문장은 五石 전체가 아니라 雄黃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雄黃의 기능이 墓 主의 子孫을 위하여 殃禍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五石의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 潼關吊橋의 楊震 家族墓群 2號墓의 鎭墓文은 간결한 단서를 제시 한다. 中央雄黃, 利子孫, 安土. 라는 단 한 줄로 五石 중의 雄黃의 기능이 자손을 이롭게 하고 墓를 安鎭하는 두 가지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결국 五石의 기능이 제 I 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死者인 墓主를 위하여 墓를 安鎭하는 것, 그리고 그 외에도 殃禍를 막아 墓主의 살아 있는 가족과 후손을 이롭게 하는 것임을 극도로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이다. 五石에 대한 언급 없이도 墓主의 살아 있는 가족과 후손을 위하여 殃禍를 禳除한다는 다소 막연한 표현을 사용하는 後漢代의 鎭墓文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五石을 언급하거 나 혹은 五石 이외의 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일견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으로도 보이 는 이 방법은 殃禍를 墓主의 가족과 후손의 거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다른 곳 혹은 다 른 사람에게로 옮기는 것이다. 殃咎를 千里 밖의 타향으로 멀리 보내라는 표현도 종종 보이고, 심지어는 관계없는 제삼자에게 轉移하라는 표현도 확인된다. 이러한 태도는 敦煌 에서 발견된 魏晉代 鎭墓文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과반수가 殃咎를 移轉하여 멀리 他鄕으로 보내라는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殃禍를 먼 곳으로 轉移하라는 내용을 담은 敦煌의 魏晉代 鎭墓文들은 일반적으 로 鎭墓文이 적혀 있는 甁과 아울러 五穀과 鉛人을 부장함으로써 墓主의 살아 있는 가족 과 후손에게 殃禍가 일어나는 것을 막겠다는 내용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五穀을 부장하 는 것은 後漢代 鎭墓文에서 墓主가 부장된 곡식을 가지고 저승의 세역에 충당하라는 것 과 동일한 취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알려져 있는 사례 자체 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後漢代의 사례는 우선 墓主가 그 곡식으로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 / 趙 晟 佑 39 조세를 납부할 것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표면에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墓主는 이승에서 살아 있는 동안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하의 명계에서도 조세를 납부해야 하고 그렇 게 하지 않을 경우 처벌받게 될 것이라는 관념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사자가 명 계에서 처벌받는다는 것 자체도 그 가족과 후손들에게 반가운 일일 수 없지만 궁극적으 로 그들에게 더 큰 관심사는 墓主가 처벌을 받게 되더라도 자신들에게 그 영향이 미치지 않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墓主로 인해 일어날 殃禍를 불특정의 제삼자에게 떠넘기거 나 먼 지역으로 보내라고 직접적으로 기원하는 것과 비교하면 간접적인 조치이기는 하지 만 墓主가 저승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五穀을 부장하는 것 역시 동일한 사고방식에서 비 롯된 조치인 것이다. 鉛人도 기본적으로 五穀과 동일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매우 단순한 형태 의 납인형인 鉛人의 사용은 이미 後漢代 鎭墓文 중에도 墓主 대신 저승에서 노동을 제공 할 代理者로 등장하고 있다. 이 역시 일차적으로는 墓主가 저승에서 겪게 될 고초를 덜 어주기 위한 예비조치임에는 틀림없으나 궁극적으로는 墓主가 노역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승의 가족이나 후손을 저승으로 불러들여 괴로움을 덜고자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墓主를 대신하여 힘든 노동을 감당하기 위 해 부장된 대리자가 鉛人인 것이다. 그런데 敦煌의 魏晉代 鎭墓文들은 後漢代 鎭墓文들 과 같이 이러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우선 死者를 배려하면서 生人 측의 우려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五穀과 鉛人이 지상의 生人을 위한 器物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 이다. 3세기말부터 4세기초에 집중되어 있는 敦煌의 魏晉 鎭墓文은 1-2세기의 後漢代 鎭墓文 과 비교해 볼 때, 墓主보다 生人들의 안위에 치중하는 경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심 지어 死者인 墓主를 노골적으로 재앙의 근원으로 지목하면서 저승에서 墓主 자신이 받게 될 형벌이나 고통스러운 처우는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으로 받아들이되 이로 인하여 남 아 있는 가족을 괴롭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명령조차 보이는 것이다. 敦煌의 魏晉 鎭 墓文에서 보이는 이러한 편향성을 시대적 변화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敦煌 지역에 국한된 특수한 성향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敦煌의 魏晉代 鎭墓文 발굴 사례들이 陝西 河南의 關中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된 後漢代 鎭墓文 사례들 에 비해 수적으로 풍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지닌 후자에 비해 오히 려 획일적인 형식과 내용을 보여준다는 한계가 있고, 아울러 지리적으로 中原 지역과 격 절되어 있는 敦煌의 지리적 위치 또한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아울러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3세기 말부터 4세기초에 집중되어 있는 敦煌의 魏晉代 鎭墓文에서 보이는 일부 성향은 사실 그 단초가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後漢代 진묘문에서 확인된다는
40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生과 死를 엄격하게 분리하고 저승에서 死者가 겪을 고통을 덜어주며 死者로 인한 殃禍 때문에 生人이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을 도모하는 後漢代 鎭墓文의 균형 감을 生人의 보호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敦煌의 魏晉代 鎭墓文에서 찾아보기는 어렵 다. 그러나 魏晉代 鎭墓文의 이러한 경향은 어느 정도 後漢代 鎭墓文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고, 死者와 生人을 모두 배려하고 있는 後漢代 鎭墓文의 궁극적인 목적도 어떤 의미 에서는 결국 죽음으로 인한 일체의 부정적인 영향에서 死者의 가족과 후손을 보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저승으로 이관된 뒤에 벌어질 상황에 死者를 방치하는 듯한 敦 煌의 魏晉 鎭墓文에 비하면 後漢代 鎭墓文은 저승에서 死者가 고생하지 않도록 대신 형 벌을 받을 인형 기물이나 鉛人을 부장하고 혹은 묘 안에 五石을 배치하는 등 死者를 위 한 조치를 여러 가지 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死者를 위해 배려하는 한편 生과 死의 영역이 서로 다르다고 누차 강조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근본 취지가 生人의 영역에서 死者 및 그와 관련된 일체의 영향을 제거해 내보내는 데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하의 명계로 옮겨진 死者에 대한 본격적인 구원은 道敎와 佛敎가 死者를 구제하는 방법을 제시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Ⅲ. 道敎의 새로운 五石 後漢代 鎭墓文과 유사한 道敎의 의례문서로 上章儀禮에 쓰이는 章奏가 종종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8세기 초의 도사 朱法滿이 쓴 要修科儀戒律鈔 의 卷15와 16에 보이는 道 士의 葬送儀禮 규정에는 後漢代 鎭墓文과 매우 유사한 형식의 道士移文 이라 불리는 매 장문서가 등장한다. 朱法滿이 제시하는 도사의 장례 절차는 사실 유교식 장례절차와 그 다지 다를 것이 없다. 중요한 차이라고 하면 입관에 즈음하여 上章儀禮가 한 번 행해진 다는 점, 喪服을 입고 哭을 하는 것이 혈연의 가족이 아니라 師承關係로 맺어진 도사들 이라는 점, 정해진 날에 유교식 제사가 아니라 도교식 齋를 지낸다는 점 정도이다. 後漢 鎭墓文과 형식 상 공통점이 많기는 道士移文 이 보여주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 은 殃禍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鎭墓文에서 다루는 殃禍의 처리가 道敎에서 쓰는 移文 에서는 불필요함을 의미한다. 殃禍의 방지나 轉移까지 함께 다루어야 했던 後 漢魏晉 鎭墓文과 달리 道敎의 移文 에서 殃禍를 다루지 않는 것은 上章儀禮나 符呪 등 殃禍에 대응하는 다른 방법이 이미 등장했기 때문이다. 鎭墓文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朱法滿의 要修科儀戒律鈔 卷15-16의 내용에서 눈길을
後漢魏晉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 / 趙 晟 佑 41 끄는 것은 五石 의 사용이다. 朱法滿이 말하는 五石의 사용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현 행본 道藏에 수록되어 있는 生尸經 )에 보인다. 현행본 太上洞玄靈寶滅度五練生尸妙經 (CT369/HY369, 이하 五練 五練生尸經 의 도입부는 元始天尊이 저승의 감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死魂들을 구제하라고 동서남북과 중앙의 天帝들을 비롯한 여러 신들에게 명하 자 각 天帝들이 死者의 시신을 잘 보호하라고 다시 해당 방위의 하급 신령들에게 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어지는 내용은 死者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덤의 동, 남, 서, 북 과 중앙에 묻는 다섯 가지 색의 이른바 五石, 五石에 새겨 넣는 天文, 그리고 이 五石 을 묻을 때 행해야 하는 의례에 대한 설명이다. 五石에 새겨 넣는 天文 의 전반부는 大字 혹은 玉字 라 불리는, 쉽게 해독할 수 없 는 특이한 字體의 문장으로 해당 방위의 氣가 응집하여 나타난 형상이라고 하며, 후반부 는 해당 방위의 天帝가 하급 신령들에게 내리는 告 형식의 문서로 그 내용은 五練生尸 經 의 도입부에서 天帝들이 하급 신령들에게 내리는 명령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상급 자가 하급자에게 업무 지시를 告 하고 如律令 으로 종결하는 漢代 行政文書 양식이나 後漢代 鎭墓文의 골격과도 유사하다. 東方天文의 경우 업무 내용은 크게 보아 后土에 의 탁한 墓主의 시신이 億劫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살피고 관리할 것, 그리고 泰 山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던 墓主의 魂을 석방하여 천상으로 올려 보내 잘 보살필 것의 두 가지인데, 이를 東方天帝가 元始天尊의 符命을 받들어 하급 신령들에게 告下하니 하 급 신령들은 이 일을 元始盟眞舊典女靑文과 같이 처리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새 겨진 五石을 준비하면 이 의례를 담당한 도사는 도교의 上章儀禮에 따라 黃繒章을 올리 고 五石을 묘에 묻게 된다. 五鍊生尸經 의 설명대로 만들어진 도교의 五石도 불완전하게나마 발견된 사례가 알려 져 있다. 대부분 唐代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보존상태가 불완전하거나 墓主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예외적으로 훼손이 적은 사례들은 이들이 五鍊生 尸經 의 내용을 그대로 따른 것들임을 보여주고, 특히 死者의 신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례는 武三思, 韋后의 어머니 崔氏, 玄宗의 손녀인 淸源縣主 등이다. 일견, 五鍊生尸經 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五石은 후한대 진묘문에서 보이는 五 石과 별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후자는 鎭墓甁 안에 넣어져 기능하도록 되어 있는 다섯 가지 종류의 광물이고, 전자는 이른바 天文을 새긴 다섯 가지 종류의 석판이 므로 재료와 사용 방법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後漢代 鎭墓文의 五石이 각 방향에서 辟 邪의 기능을 하기 위한 것, 다시 말해 외부의 邪鬼가 무덤 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처럼, 五練生尸經 의 五石도 각 방향의 天帝의 명으로 墓主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42 餘論 序論에서 제기했던 것처럼 鎭墓文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鎭墓文의 내용 뿐 아니 라 鎭墓文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검토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 글은 五石과 殃 의 문제를 중심으로 鎭墓文의 종교적인 특징을 검토하고 이러한 특징이 道敎에서 어떠한 형태로 계승되어 나타나는지를 간략하게 다루는 데 그쳤다. 그러나 鎭墓文이 신들로 이 루어진 관료 행정 기구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일종의 행정문서임을 상기하면 鎭墓文에 보이는 天帝, 黃帝, 黃神, 北斗 등 상급 신격을 비롯하여 蒿里父老, 丘丞, 墓伯, 墓門亭長 등 상대적으로 위계가 낮은 地下의 신들에 대한 검토는 물론이고, 행정문서로서의 성격 도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鎭墓文에 보이는 민간의 종교 전통과 道敎 사이의 연속성을 감안하면 역시 일종의 行政文書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道敎의 儀禮文 書와의 형식상의, 내용상의 비교 검토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墓誌銘의 분석을 중심으로 최 진 열(동덕여대) 目 次 Ⅰ. 문제제기 Ⅱ. 離宮 行宮과 府兵 배치 Ⅲ. 巡幸 장소와 府兵의 동원 Ⅳ. 결론 Ⅰ. 문제제기 황제들의 巡幸은 목적에 상관없이 관리들과 병사들, 巡行 예정 지역의 지방관과 백성 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기존에 巡幸에 대한 연구가 적었던 것은 巡幸에 대한 자료가 적었기 때문이다. 唐代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遊幸,1) 皇帝 행차의 행렬이나 禮儀,2) 皇帝가 머무르던 行宮 離宮,3) 高宗과 武則天의 葉縣 巡狩,4) 太宗의 靈州 행차와 이민족 지배,5) 閱武 講武 참관6) 등을 다룬 연구가 있지만 다른 연구 주제에 비해 연구성과가 많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唐代 巡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1) 2) 3) 4) 5) 6) 拜根興, 試論唐代帝王的巡幸, 南都學壇(哲學社會科學版) 第 17卷, 1997-1, 1997. 김호, 唐 前期 皇帝 行幸의 威儀, 中國古中世史硏究 20, 2008, 433-446쪽; 趙芳軍, 唐代御 駕出行禮儀述論, 濮陽職業技術學院學報 21-2, 2008, 115왼쪽-117오른쪽. 介永强, 關中唐代行宮考, 中國歷史地理論叢 3, 2000; 同氏, 唐代行宮考逸, 中國歷史地理 論叢 16-2, 2001; 同氏, 唐代行宮三題, 唐都學刊 17(總第70期), 2001; 同氏, 唐代行宮文化 透視, 陝西師範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30-1, 2001; 穆渭生, 唐玉華宮興衰考略, 西北大學 學報(哲學社會科學版) 34-4, 2004; 祁遠虎, 離宮ㆍ行宮辨, 西安文理學院學報(社會科學版) 13-2, 2010. 潘民中, 唐高宗ㆍ武皇后兩度冬狩葉縣探微, 平頂山學院學報 22-3, 2007. 艾尙連, 唐太宗靈州之行與漠北羈縻府州的建立, 民族硏究 1997-6, 1997. 丸橋充拓, 唐宋變革期の軍禮と秩序, 東洋史硏究 64-3, 2005.
44 기존 연구에서 순행 횟수나 巡幸期間에 대해 관심이 소홀했기 때문이다. 먼저 唐 전체, 唐前期, 唐後期로 나누어 巡幸頻度와 巡幸期間을 살펴보자. <표 1> 唐代 순행 빈도와 기간 순행 빈도 시대 기간 행 차 순행 기간 순 행 행 차 순 행 (년) 순행횟수연평균횟수순행횟수연평균횟수 총추산일 연평균 총추산일 연평균 14,254 102.5 13,682 98.4 唐前期 139 237 1.71 140 1.01 14,422 103.8 13,852 99.7 唐後期 151 101 0.67 19 0.13 4,680 31.0 18 0.12 18,934 65.3 13,700 47.2 唐 전체 290 338 1.17 159 0.55 19,102 65.9 13,870 47.8 출전 舊唐書 와 新唐書 本紀; 1998); 資治通鑑 唐紀 ; 唐會要 (王溥(宋)撰,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冊府元龜 (王欽若(宋) 等編纂, 周勛初 等校訂, 鳳凰出版社, 2006) 卷113 帝王部 巡幸門2, 1232-1240쪽 및 卷114 巡幸門3 1242-1243쪽, 卷115 籍田門 1254-1256쪽, 卷115 蒐狩門, 1258-1261쪽. <표 1>에서 먼저 唐代 전체의 수치를 보면, 행차 7)의 경우 연평균 1.17회, 순행 8)은 0.55회였다. 또 연평균 행차 기간은 약 66일, 연평균 순행 기간은 약 48일이었다. 행 차 와 순행 의 빈도보다 唐代 皇帝들이 연평균 최소 48일, 최대 66일 동안 都城 밖에 행 차하거나 체류했다는 수치를 보면 唐代 巡幸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표 1>의 통계 수치 가운데 행차 와 순행 빈도 및 기간을 唐前期와 唐後期로 나눠 보면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행차 와 순행 의 빈도를 비교하면, 唐前期 연평 균 행차 와 순행 의 빈도는 1.71회와 1.01회였다. 반면 唐後期에는 각각 0.67회와 0.13회 로 격감하였다. 다음으로 기간을 살펴보자. 唐前期 행차 기간은 최소 14,254일, 최대 14,422일로 추산 되며, 이를 연수로 바꾸면 각각 40.3년과 40.8년이다. 즉 唐前期의 약 29% 혹은 29.3%의 기간 동안 황제들이 각지를 행차 하는데 보냈다는 뜻이다. 같은 기간 순행 기간은 최 소 13,609일, 최대 13,779일로 추산되며, 각각 38.4년과 38.9년이고 唐前期의 27.7%에서 28%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高宗 永淳元年(682) 四月 乙酉日(6. 4)부터 中宗 神龍 2년(706) 十月 己卯日(11. 18)까지 4,751일 동안 洛陽과 인근 지역에 머물렀다(長安 7) 8) 본고에서 행차 는 皇帝의 親征과 蒙塵, 都城에서 하루 일정의 이동과 왕복을 포함한 皇帝의 都 城 밖 이동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본고에서 순행 은 皇帝의 親征과 蒙塵, 都城에서 하루 일정의 이동과 왕복을 제외한 皇帝들의 이동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45 행차 기간 제외). 이를 합산하면 행차 의 경우 최소 19,005일(53.7년), 최대 19,173일(54.2 년)이다. 즉 唐前期의 皇帝들은 최소 38.6%에서 최고 39%의 기간 동안 都城인 長安 밖 에서 체류했다는 뜻이다. 이어서 唐前期 皇帝들이 주요 巡幸 장소에서 보낸 기간을 살펴보자. <표 2> 唐前期 皇帝별 순행 지역 체류 기간 九成宮 기타 피 華淸宮(驪山 기타 온 피서궁 온천궁 행차 (추 순행 (추 (萬年宮) 서궁 溫湯) 천궁 합계 합계 산)기간 산)기간 1 1 458 454 高祖 9 5 5 462 459 760(30.6%) 986 114 50 1,100 50 2,928 2,481 太宗 32 790(32.1%) (39.7%) (4.6%) (2%) (44.3%) (2%) 2,904 2,458 7,736 1,230 1,230 [3,262(66.8%)] (25.2%) 17 29 (25.2%) 41 4,880 4,880 高宗 35 7,723 1,290 (0.3%) (0.6%) 1,290 (0.8%) 4,968 4,968 [3,272(65.9%)] (26%) (26%) +232 +232 (+22.6%) (+22.6%) 4 1,040 1,028 武則天 21 4 +246 +246 (0.4%) 1,063 1,051 (+23.4%) (+23.4%) 12(18.5% 12(18.5% 107 65 中宗 6 /29.3%) /29.3%) 83 41 睿宗 3 1(100%) 1(100%) 6 1 1,191 3,307(69.3%) 1,135(23.8%) (25%) 4,835 4,773 玄宗 45 56(1.1%) 3,347(68.7%) 1,196(24.5%) 1,252 4,936 4,874 (25.7%) 11,875 2,216 1,216 2,562 1,300 89 14,254 13,682 (54.1%) (16.2%) (8.9%) (18.7%) (9.5%) (0.7%/0. 합계 14,422 13,852 11,949 2,276 1,281 2,636 1,365 6%) (54.1%) (16.4%) (9.2%) (19%) (9.9%) 1회 평 742.2 171 24 균 746.8 176 25 33.5년 6.3년 3.4년 7.2년 3.7년 40.3년 38.6년 연환산 0.3년 33.8년 6.4년 3.6년 7.4년 3.9년 40.7년 39.1년 비고 1. 출전 : 舊唐書 와 新唐書 本紀; 資治通鑑 唐紀 ; 唐會要 ; 冊府元龜 卷113 帝王部 巡幸門 2, 1232-1240면 및 卷114 巡幸門3 1242-1243면, 卷115 籍田門 1254-1256면, 卷115 蒐狩門 1258-1261면. 2. 단위 : 특별한 단위가 기재되지 않은 경우 일(日)임. 3. 숫자 가운데 + 는 그 숫자의 최소값을 의미함. 皇帝 재위 기간 洛陽 <표 2>에서 高宗이 洛陽에 체류한 기간이 高宗의 행차 혹은 순행 추산기간보다 길 다. 이는 高宗이 永淳元年(682)에 洛陽으로 행차한 후 죽을 때까지 洛陽에 머물렀기 때문
46 이다. 高宗 재위 시기부터 권력을 잡았던 武則天이 중국 최초의 여황제가 되었다가 말년 에 張柬之 등의 쿠데타를 폐위된 후 中宗이 다시 복위하여 神龍 2년(706) 十月에 長安에 환도할 때까지 약 24년 동안 唐과 武周의 여러 皇帝들은 洛陽에 머물렀다. 심지어 武則 天이 즉위한 이후 洛陽의 명칭을 東都에서 神都로 바꾸어 사실상 武周의 수도가 되었 다.9) <표 2>에서는 체류 기간에 주목하여 고종이 洛陽으로 옮긴 이후 죽을 때까지의 기 간을 체류기간으로 보았다. 만약 長安에서 洛陽으로 갔던 기간만 포함하고 洛陽 체류 기 간을 제외하면 3,262일과 3,272일로 줄어든다. <표 2>에서는 이 통계수치를 괄호 안에 병기하였다. <표 2>를 보면 皇帝별 편차는 있지만, 洛陽과 九成宮, 華淸宮에 머물렀던 기간이 길었 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唐前期 각 지역에 체류한 기간을 햇수로 환산한 부분이 주목된 다. 예컨대 16회에 걸친 唐前期 皇帝들의 洛陽 행차 혹은 체류 기간은 모두 11,875일 혹 은 11,949일이었다. 물론 이 가운데 貞觀 11년과 15년 등 長安과 洛陽의 왕래 기간까지 포함한 경우도 존재하므로 위의 수치는 洛陽 체류의 최대값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음력 의 1년이 354일이므로 唐前期 皇帝들은 洛陽에서 최대 33.5년 혹은 33.8년을 보냈다. 高 祖부터 玄宗까지 139년 동안, 즉 唐前期의 24.1% 혹은 24.3%의 시간을 洛陽을 오가는데 보냈다. 또 1회 평균 743일 혹은 747일을 洛陽에서 머물렀다. 이밖에 九成宮 체류 기간 은 唐前期 139년의 4.5%혹은 4.6%의 시간에 해당한다. <표 6>을 보면 太宗과 高宗이 한번 九成宮에 체류했던 평균기간은 약 171일 혹은 176일이며, 太宗과 高宗이 九成 宮에 행차한 해에만 한정하면 1년의 약 절반을 九成宮에서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華淸宮의 경우, 唐前期 황제들의 華淸宮 체류기간은 1,216일(3.4년) 혹은 1,281일(3.6년) 이었다. 이는 唐前期의 2.4% 혹은 2.6%였다. 이처럼 唐前期 황제들이 長安 이외에 洛陽 九成宮 華淸宮 등지에 자주 행차하고 오 랫동안 체류하면 都城 방어와 政變의 방지, 太子의 都城 잔류와 監國 문제, 잔류하는 官 員과 隨行官員의 선정, 행정업무의 처리, 皇帝 일행의 경호와 물자 제공, 皇帝의 이용 도 로 개보수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 가운데 필자는 皇帝의 경호 문제에 주목하였다. 주지하듯이, 唐前期에는 병농일치의 府兵制가 실시되었다. 그런데 唐前期 자 주 그리고 오랫동안 都城 밖에 행차하거나 체류하는 皇帝를 경호하기 위해 府兵들의 동 원 문제가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행연구에서는 府兵들이 都城인 長安 혹은 副都인 洛陽에만 番上10)한다고 보고 거리와 부담율 등을 계산하였다.11) 선행연구에서 巡幸의 경 9) 10) 朴漢濟, 隋唐代 洛陽의 都城構造와 그 性格- 中世的 都城構造의 終焉-, 中國古中世史硏究 22, 2009, 368-370쪽. 高昌 吐魯番文書를 분석한 선행연구에 따르면 番上 혹은 上番 이 都城에 가서 宿衛하는 것뿐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47 우를 간과한 것은 유감이지만, 府兵들이 皇帝들의 巡幸에 참가했던 예를 발견하기 어려 운 자료의 한계 탓도 컸다. 필자는 唐代 墓誌銘을 읽다가 折衝府 將領들이 皇帝들의 巡幸을 수행했던 기록을 접하 게 되었다. 折衝府의 장관인 折衝都尉와 차관인 果毅都尉, 別將 등이 皇帝의 巡幸을 隨從 했다면 휘하 府兵들 역시 巡幸을 따라갔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이들의 墓誌銘은 府 兵들의 동원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墓誌銘의 자료를 분석 하여 唐前期 皇帝 巡幸이 府兵의 동원과 배치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離宮 行宮과 府兵 배치 唐代 府兵制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가 府兵의 都城 혹은 宮城 번상과 부담의 균등화 문제였다. 선행연구에서는 府兵들이 長安 혹은 洛陽으로 번상한다고 보고 각 折衝府와 都城간의 거리, 부담 문제를 계산하였다.12) 한편 府兵의 지리적 분포, 折衝府가 있는 州 의 戶口 丁數와 折衝府의 수 혹은 府兵의 수의 관계를 살펴본 연구가 있다. 이에 따르 면 折衝府는 주로 長安과 京畿 지역, 혹은 이와 가까운 太原 河中 河南(洛陽)에 집중한 추세가 뚜렷하다.13) 또 반란과 이민족 토벌에 折衝府가 동원이 된 사례를 분석하여 折衝 府가 존재한 州와 稅役을 부담한 州가 지역적으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지역적 블록을 형성하고 折衝府의 유무와 상관없이 균등한 부담이 각 州에 부과되었다고 보기도 한 11) 12) 13) 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지역으로 가서 근무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한다(金羨珉, 出 土文書를 통해 본 唐代의 府兵-西州地域을 中心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학위논문, 1994.10, 144-165쪽; 孟憲實, 唐代府兵 番上 新解, 歷史硏究 2007-2, 2007, 69-77쪽). 그러나 본고에서 사용하는 番上 은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처럼 府兵들이 수도인 長安과 副都인 洛陽의 宮城 皇城 都城을 지키기 위해 파견되는 행위로 정의하겠다. 대표적인 연구로는 布目潮渢, 唐代衛士番上の負担, 布目潮渢中國史論集, 東京: 汲古書院, 2003-2004(原載 山本博士還曆記念東洋史論叢, 山川出版社, 1972), 293-304쪽; 石田勇作, 唐府 兵負担攷-律令法規からみたる-, 上智史學 24, 1979, 67위쪽-73아래쪽; 布目潮渢, 唐代衛士番 上の負担再論-石田勇作氏の 唐府兵負担攷 を讀みて-, 布目潮渢中國史論集, 東京: 汲古書院, 2003-2004(原載 立命館文學 418-421合倂號, 1980), 306-327쪽; 石田勇作, 唐府兵負担について の再考, 日野開三郞博士頌壽記念論集-中國社會 制度 文化史の諸問題, 中國書店, 1987, 252 위쪽-266아래쪽 등이 있다. 布目潮渢, 唐代衛士番上の負担, 293-304쪽; 石田勇作, 唐府兵負担攷-律令法規からみたる-, 67 위쪽-73아래쪽; 布目潮渢, 唐代衛士番上の負担再論-石田勇作氏の 唐府兵負担攷 を讀みて-, 306-327쪽; 石田勇作, 唐府兵負担についての再考, 252위쪽-266아래쪽. 谷霽光, 府兵制度考釋,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78, 153-158쪽; 菊池英夫, 唐折衝府の分布問 題に關する一解釋, 東洋史硏究 27-2, 1968, 2-10쪽.
48 다.14) 최근에는 天聖令을 분석하여 唐代의 軍役이 兩都 關中 河東 西北邊이 주로 맡 았던 府兵宿衛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山東 關東 지역의 州府에서 防人邊戍를 담당하여 軍役 부담의 지역 분담 구조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5) 선행연구에서 府兵의 番上 부담 일수와 지역적 안배 등을 고려할 때 皇帝들의 행차 문 제를 간과하였다. 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唐代에는 행차 횟수가 평균 1.17회, 순행 횟 수는 평균 0.55회였다. 唐前期로 한정하면 이 수치는 1.71회와 1.01회로 증가한다. 또 唐 前期 연평균 행차 기간은 최소 102.5일에서 최대 103.8일, 연평균 순행 기간은 최소 98.4일에서 최대 99.7일로 추산된다. 게다가 皇帝에 따라 행차 장소가 다르긴 하지만 洛 陽 九成宮 華淸宮 등에서 자주 그리고 오래 머물렀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결과와 달리 府兵들이 都城 혹은 宮城으로 番上한다고 가정한 후 논지를 전개하는 것은 이러한 唐代 황제들의 행차 와 순행 의 빈도와 기간을 간과한 것이다. 게다가 皇帝들의 이동 중간에 머무를 行宮과 避暑 避寒 등을 목적으로 장기 체류할 곳에 세운 離宮이16) 여러 곳에 존 재하기 때문에17) 都城의 宮城과 皇城뿐만 아니라 行宮과 離宮의 방어 문제도 府兵의 番 上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折衝府의 지역적 분포가 行宮 혹은 離宮의 방어와 관련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折衝府와 離宮 行宮이 존재하는 州의 折衝府와 離宮 行宮 수를 비교해 보았다. <표 3>에서 인용한 각 府 州의 折衝府 숫자는 新唐書 地理志 를 인용하였다. 최근 까지 각종 墓誌銘 등 금석문의 고증을 통해 新唐書 地理志 에 보이지 않는 折衝府들 이 확인되었다.18) 이러한 연구 결과를 신뢰한다면 墓誌銘의 출토에 따라 折衝府의 총계 14) 15) 16) 17) 18) 山內敏輝, 唐前半期の軍防體制と府兵制-軍府州と非軍府州の地域差を中心として-, 龍谷史壇 103 104合刊號, 1994, 197-229쪽. 渡邊信一郞, 唐代前期における農民の軍役負担, 京都府立大學學術報告 人文 社會 55, 2003, 1위쪽-11아래쪽. 離宮과 行宮의 개념은 祁遠虎, 離宮ㆍ行宮辨, 西安文理學院學報(社會科學版) 13-2, 2010, 4왼 -8왼쪽. 嚴耕望, 唐代長安洛陽道譯程述, 唐史硏究叢稿, 香港: 新亞硏究所出版, 1969, 599-606쪽; 介永 强, 關中唐代行宮考, 中國歷史地理論叢 3, 2000, 197-212쪽; 介永强, 唐代行宮考逸, 中國 歷史地理論叢 16-2, 2001, 78-82쪽; 介永强, 唐代行宮三題, 唐都學刊 17(總第70期), 2001, 21왼쪽-22오른쪽; 吳宏岐, 西安歷史地理硏究, 105-116쪽; 吳宏岐, 隋唐行宮制度與宮廷革命, 陝西師範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37-3, 2008, 21왼쪽-22오른쪽; 祁遠虎, 離宮ㆍ行宮辨, 西安 文理學院學報(社會科學版) 13-2, 2010, 7왼쪽. 勞經原, 唐折衝府考, 7593-7629쪽; 羅振玉, 唐折衝府考補, 7631-7640쪽; 同氏, 唐折衝府考補 拾遺, 7641-7642쪽; 谷霽光, 唐折衝府考校補, 7643-7660쪽(이상 二十五史補編 (二十五史刊行 委員會 編, 中華書局, 1995)에 수록); 谷霽光, <唐折衝府考>拾補, 禹貢 3 4, 1935; 張沛, 昭 陵碑石中的唐折衝府考, 文博 1995-1, 1995, 37왼쪽-40쪽; 周曉薇, 唐折衝府考校補拾遺, 中 國歷史地理論叢 1995-3, 1995, 129-138쪽; 周曉薇, 唐折衝府考校補拾遺再讀, 中國歷史地理論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府州名 京兆府(京兆郡) 華州(華陰郡) 同州(馮翊郡) 商州(上洛郡) 鳳翔府(岐州, 扶 風郡) 邠州(新平郡) 隴州(汧陽郡) 涇州(保定郡) 原州(平涼郡) 寧州(彭原郡) 慶州(順化郡) 鄜州(洛交郡) 坊州(中部郡) 丹州(咸寧郡) 延州(延安郡) 靈州(靈武郡) 鹽州(五原郡) 夏州(朔方軍) 綏州(上郡) 折衝府 <표 3> 唐代 折衝府와 離宮 行宮 분포 離宮ㆍ 수 行宮 131 10 20 26 2 3 2 13 3 13 4 6 2 11 8 11 5 5 7 5 1 2 4 河南府(河南郡) 39 汝州(臨汝郡) 4 1 14 府州名 晉州(平陽郡) 絳州(絳郡) 慈州(文城郡) 隰州(大寧郡) 太原府(太原郡) 汾州(西河郡) 沁州(陽城郡) 遼州(樂平郡) 嵐州(樓煩郡) 石州(昌化郡) 忻州(定襄郡) 代州(雁門郡) 潞州(上黨郡) 澤州(高平郡) 懷州(河內郡) 易州(上谷郡) 幽州(范陽郡) 平州(北平郡) 嬀州(嬀川郡) 薊州(漁陽郡) 江陵府(荊州, 折衝府 수 離宮ㆍ 行宮 33 3 6 12 2 3 1 2 4 3 1 5 2 9 14 1 2 1 1 1 2 1 江陵郡) 陝州(陝郡) 15 3 夔州(雲安郡) 1 虢州(弘農郡) 4 1 襄州(襄陽郡) 1 兗州(魯郡) 1 均州(武當郡) 1 1 金州(漢陰郡) 1 河中府(河東郡) 33 범례 1. 출전 : 舊唐書 地理志 ; 新唐書 地理志 ; 梁方仲,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80, 78-95쪽. 2 興元府(梁州, 漢中郡) 鳳州(河池郡) 成州(同谷郡) 扶州(同昌郡) 15 18 府州名 秦州(天水郡) 渭州(隴西郡) 蘭州(金城郡) 洮州(臨洮郡) 岷州(和政郡) 疊州(合川郡) 宕州(懷道郡) 涼州(武威郡) 沙州(敦煌郡) 瓜州(晉昌郡) 揚州(廣陵郡) 和州(歷陽郡) 安州(安陸郡) 越州(會稽郡) 潭州(長沙郡) 成都府(益州, 蜀郡) 彭州(濛陽郡) 折衝府 수 49 離宮ㆍ 行宮 1 1 1 2 6 4 2 1 3 1 2 6 3 1 4 1 1 1 1 3 2 蜀州(唐安郡) 3 漢州(德陽郡) 1 邛州(臨邛郡) 1 廣州(南海郡) 2 中國歷代戶口ㆍ田地ㆍ田賦統計, 2. 비고 1) 口數의 貞觀 은 舊唐書 地理志 에 기록된 貞觀 13년 호구 통계수치, 天寶 는 新唐書 地理志 에 기록된 天寶元年 통계수치임. 2) 折衝府의 병력은 1,200인, 1,000인, 800인의 세 등급으로 나뉘지만 본 표에서는 1,000인으 로 계산하였음. 叢 1997-3, 1997, 59-60쪽; 周曉薇, 唐折衝府考校補拾遺三讀, 中國歷史地理論叢 16-3, 2001, 61-66쪽; 張沛, 唐折衝府匯考, 西安: 三秦出版社, 2003, 23-449쪽; 客洪剛, 唐折衝府補考, 中 國歷史地理論叢 23-4, 2008, 142왼쪽-148오른쪽. 기타 折衝府 고증에 대한 연구사 정리는 胡戟 등 主編, 二十世紀唐硏究,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2, 122왼쪽-124왼쪽 참조.
50 와 府 州의 折衝府 숫자가 달라진다. 그러나 가장 최근 연구가 2003년이기 때문에 그 이후 새로 확인된 折衝府가 반영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折衝府 수의 可變性을 新唐書 고려하여 본고의 <표 3>에서는 최소값에 해당하는 地理志 의 折衝府 숫자를 인용하였다. <표 3>에서 府 州의 折衝府 숫자와 아울러 離宮 行宮의 수를 비교해 보면, 折衝府가 있는 지역에 離宮 行宮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行宮이 있는 府 州에는 대부분 折 衝府가 존재하였다.19) 특히 관할구역 안에 離宮 혹은 行宮이 3개 이상 존재했던 府 州 의 折衝府는 10개 이상이었다. 京兆府 華州 岐州 河南府 陝州가 이에 해당한다. 이 통계수치의 비교만을 보면 離宮 行宮과 折衝府의 배치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 인다. 이러한 관계가 우연일 수도 있으므로 다른 자료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 離宮 行宮의 분포 지역 가운데 京兆府(長安)와 河南府(洛陽)의 교통로 선상에 위치한 점이 눈에 띤다. 즉 두 府와 그 사이에 있는 華州 陝州 虢州에 離宮 行宮과 折衝府가 밀접하였다. 長安에서 출발하여 華州와 陝州를 통과하거나 崤山 北道에서 澠池와 新 安을 거쳐 洛陽에 도달하거나 崤山 南道에서 永寧 福昌 壽安을 거쳐 洛陽에 이어 지는 교통로가 있었다.20) 隋唐 皇帝들은 長安과 洛陽 왕래의 편의를 위해 이 사이에 遊龍宮 神臺宮 瓊岳宮 金城宮 軒遊宮 桃源宮 陝城宮 綉嶺宮 芳桂宮 崎岫 宮 蘭峰宮 福昌宮 蘭昌宮 顯仁宮 連昌宮 興泰宮 莎冊宮 등 行宮 10여개의 別館을 세웠다. 학자에 따라 이를 兩京道行宮 이라 명명하기도 한다.21) 그런데 長安과 洛陽 사이에 왜 行宮이 필요했던 것일까? 필자는 唐前期 皇帝들이 長安 과 洛陽을 오가는데 걸린 기간을 조사하여 표로 정리해 보았다. <표 4> 長安-洛陽 사이의 거리 시 기 太宗 貞觀 11년(637) 2월 甲子-3월 丁亥 太宗 貞觀 12년(638) 2월 乙卯-閏2월 丙戌 太宗 貞觀 15년(641) 11월 壬申-12월 戊子 太宗 貞觀 18년(644) 10월 甲寅-11월 壬寅(舊)/壬申(通) 19) 20) 21) 巡幸 지역 長安 顯仁宮 洛陽 洛陽 長安 洛陽 長安 澠池(己巳) 洛陽宮 기 간 24일 32일 17일 49일(舊)/19일 (通) 介永强은 泰山이 위치한 兗州에 奉高宮이 존재했다고 고증했다(介永强, 唐代行宮考逸, 中國 歷史地理論叢 16-2, 2001, 81-82쪽). 唐代 泰山 封禪이 2회에 불과하므로 奉高宮은 상설 離宮 혹은 行宮이라기보다 임시로 설치한 궁전으로 봐야 할 것이다. 嚴耕望, 唐代長安洛陽道譯程述, 唐史硏究叢稿, 香港: 新亞硏究所出版, 1969, 599-606쪽. 介永强, 唐代行宮三題, 唐都學刊 17(總第70期), 2001, 22왼쪽; 祁遠虎, 離宮ㆍ行宮辨, 西 安文理學院學報(社會科學版) 13-2, 2010, 7왼쪽.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高宗 顯慶 2년(657) 1월 庚寅(舊)/壬寅(新ㆍ通)-2월 辛酉 高宗 3년(658) 2월 丁巳-甲戌 高宗 顯慶 4년(659) 閏10월 戊寅-戊戌 高宗 龍朔 2년(662) 3월 甲申(舊)/甲午(通)-4월 庚申朔 高宗 咸亨 2년(671) 1월 乙巳-甲子 高宗 咸亨 3년(672) 10월 壬戌-11월 甲辰 高宗 上元元年(674) 11월 丙午朔-戊辰 高宗 儀鳳元年(676) 閏3월 庚寅-4월 戊申 高宗 永淳元年(682) 4월 丙寅-乙酉 武則天 長安元年(701) 10월 壬寅-辛酉 武則天 長安 3년(703) 10월 丙寅-乙酉 中宗 神龍 2년(706) 10월 己卯-戊戌 玄宗 開元 5년(717) 1월 辛亥-2월 甲戌 玄宗 開元 6년(718) 10월 丙申-11월 辛卯 玄宗 開元 10년(722) 1월 丁巳-2월 戊寅 玄宗 開元 12년(724) 11월 庚申-戊寅 玄宗 開元 15년(727) 閏9월 庚申-10월 己卯 玄宗 開元 19년(731) 10월 丙申-11월 丙辰 玄宗 開元 22년(734) 1월 己巳-己丑 玄宗 開元 24년(736) 10월 戌申-丁丑(舊)/丁卯(新ㆍ通) 長安 洛陽 평균 출전 舊唐書 와 新唐書 本紀; 資治通鑑 唐紀. 長安 洛陽 洛陽 長安 長安 洛陽 洛陽 河北縣 蒲州 同 州 長安 長安 東都 東都 長安 長安 東都 東都 長安 長安 東都 神都 長安 長安 神都 東都 長安 長安 東都 東都 長安 長安 東都 長安 華陰 東都 東都 長安 長安 東都 長安 東都 東都 長安 51 32일/20일 18일 21일 37일/27일 20일 43일 23일 19일 20일 20일 20일 20일 24일 56일 22일 19일 20일 21일 21일 30일/20일 26.2일/23.6 <표 4>를 보면 長安에서 洛陽까지, 혹은 그 역순으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26.2 일 혹은 23.6일이다. 두 개의 수치가 존재하는 이유는 舊唐書 와 新唐書 의 本紀 기사 가운데 巡幸 기간에 대한 날짜가 달리 표기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貞觀 18년(644)과 顯慶 2년(657), 高宗 咸亨 3년(672), 開元 6년(718)의 長安과 洛陽 사이를 가는데 걸린 시 간(편도)이 좀 길었던 것을 감안하면 평균보다 최빈값이 실상에 부합할 것이다. 두 곳을 가는데 걸리는 기간은 20일이 6회 혹은 8회( 新唐書 와 資治通鑑 의 기록에 의함), 21 일이 3회, 19일이 2회 혹은 3회였다. 長安과 洛陽을 가는 편도노선은 20일 정도 걸린다 고 볼 수 있다. 元和郡縣圖志 에 따르면 長安과 洛陽 사이의 거리는 850里이다. 唐六 典 의 규정에 따라22) 말을 타면 하루에 70里를 가면 13일, 걷거나 노새를 이용하여 50리 를 간다면 17일이 걸렸다. 北周 宣帝가 大象元年(579)에 직접 驛馬를 몰고 하루 300里의 속도로 4皇后와 文武侍衛 수백인을 데리고 洛陽으로 간 예가 있지만,23) 이는 특수한 예 22) 23) 唐六典 (李林甫 等撰, 陳仲夫 點校, 北京: 中華書局, 1992; 2005년 重印) 卷3 尙書戶部 度支 郎中條, 80쪽, 凡陸行之程: 馬日七十里, 步及驢五十里, 車三十里. 水行之程, 舟之重者, 溯河日三 十里, 江四十里, 餘水四十五里, 空舟溯河四十里, 江五十里, 餘水六十里. 周書 卷7 宣帝紀 大象元年(579)十二月條, 122쪽, 乙丑, 行幸洛陽. 帝親御驛馬, 日行三百里. 四皇后及文武侍纫數百人, 嵭乘驛以從. 仍令四后方駕齊驅, 或有先後, 便加譴責, 人馬頓仆相屬. 己
52 이다. 唐六典 에 기록된 하루에 가야 하는 거리와 唐前期 皇帝가 長安과 洛陽을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비교하면, 후자가 약간 느리기는 하지만 중간에 쉬어갔던 시간을 고려 하면 규정에 맞는 정상적인 이동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長安과 洛陽을 가는 편도노선의 시간이 20일 전후이므로 皇帝 일행이 묵을 숙 소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아래 <지도 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行宮이 주로 교통로에 위치한 것도 皇帝의 잦은 長安-洛陽 이동과 관련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도 1> 唐代 行宮 離宮의 분포 범례 1. 출전 : 祁遠虎, 離宮ㆍ行宮辨, 西安文理學院學報(社會科學版) 13-2, 2010, 7왼쪽, 圖1 隋唐時期兩京周圍的離宮分布與兩京道上行宮分布示意圖; 필자 일부 수정. 2. 기호설명 : 수도 行宮과 離宮 長安 洛陽 교통로 皇帝들이 長安과 洛陽 사이를 오갈 때 皇帝 일행을 호위할 목적으로 府兵을 포함한 군 인들이 당연히 行宮과 교통로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墓誌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王崇禮는 左領軍衛에 속하는 河南府 金谷府折衝都尉였으며, 玄宗의 洛陽 순행을 扈 從하였다. 그런데 그가 玄宗의 洛陽 순행을 따라 다니던 도중 開元 19년(731) 十月 二十 四日(11. 27)에 新豐에서 병들어 죽었다.24) 현직 折衝都尉였던 王崇禮가 新豐縣에서 죽었 다는 기록으로 보아 河南府 金谷府 府兵들이 長安의 宮城을 지키도록 차출되었다가 玄宗 24) 卯, 還宮. 王崇禮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5), 489아래쪽, 至開元十 九年三月一日, 遷至明威將軍ㆍ守左領軍衛河南府金谷府折衝都尉ㆍ上柱國. (중략) 以開元十有 九年從駕東都, 寢疾. 十月卄四日薨於新豐, 享年五十有九. 이하 墓誌銘은 姓名+墓誌 로 약칭한 다.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53 의 洛陽 행차를 扈從했거나 長安에서 洛陽으로 가는 행렬을 호위하도록 임시로 차출되어 長安 인근 지역으로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25) 어떤 경우이건 河南府(洛陽)의 金谷府의 府兵들이 玄宗의 洛陽 행차를 扈從하는 임무를 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皇帝가 長安과 洛陽 사이를 지나지 않을 때에도 府兵을 배치할까? 위에서 언 급한 長安-洛陽의 교통로 주변뿐만 아니라 太宗과 高宗의 여름 휴양지였던 九成宮과 長 安 사이에도 行宮과 離宮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26) 皇帝들이 자주 찾지는 않더라고 명 색이 궁전인만큼 최소한의 수비병력을 남겨놓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玉華宮에 있었던 魏德과 九成宮에 따라간 邢思賢의 墓誌銘에서 이러한 예가 발견된다. 鄜州 洛安府의 果毅都尉였던 王德은 永徽元年(650)에 坊州 宜春縣에 위치한 玉華宮27) 의 山第에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28) 그런데 鄜州 洛安府에 있어야 할 王德이 玉華 宮에서 죽었다는 기록을 보면 王德이 玉華宮에서 근무하기 위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 다. 그런데 당시 皇帝인 高宗이 玉華宮에 행차한 기록이 없다. 즉 太宗 貞觀 22년(648)의 玉華宮 행차가 처음이자 마지막 행차였고29) 永徽 2년(651)에 佛寺로 바뀌었다.30) 따라서 魏德이 皇帝의 巡行과 상관없이 당시 玉華宮을 지키는 일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 고 玉華宮은 魏德의 근무지인 鄜州는 坊州의 북쪽에 있었던 州였다. 鄜州 洛安府의 府兵 은 玉華宮이 위치한 坊州와 가까운 지역이었기 때문에 玉華宮 수비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孟憲實은 法苑珠林 第65篇 債負篇 感應緣 에 나오는 唐代 小說에서 校尉 李氏가 潞州에서 衛州로 가서 근무했던 행위를 上番 이라 칭했음을 지적하여 上番 혹은 番上이 都城 혹은 궁전 宿衛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31) 소설이긴 하지만 府兵이 25) 26) 27) 28) 29) 30) 山內敏輝도 折衝府 將領(折衝都尉 果毅都尉 등)이 전쟁에 해당 折衝府의 府兵을 동원하였다고 보고 전쟁에 折衝府의 동원 혹은 배치를 분석하였다(山內敏輝, 唐前半期の軍防體制と府兵制-軍 府州と非軍府州の地域差を中心として-, 209-218쪽). 따라서 折衝府 將領의 위치는 해당 折衝府 府兵의 이동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嚴耕望, 唐代長安洛陽道譯程述, 唐史硏究叢稿, 香港: 新亞硏究所出版, 1969, 599-606쪽; 介永 强, 關中唐代行宮考, 中國歷史地理論叢 3, 2000, 197-212쪽; 介永强, 唐代行宮考逸, 中國 歷史地理論叢 16-2, 2001, 78-82쪽; 介永强, 唐代行宮三題, 唐都學刊 17(總第70期), 2001, 21왼쪽-22오른쪽; 吳宏岐, 西安歷史地理硏究, 105-116쪽; 吳宏岐, 隋唐行宮制度與宮廷革命, 陝西師範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37-3, 2008, 21왼쪽-22오른쪽; 祁遠虎, 離宮ㆍ行宮辨, 西安 文理學院學報(社會科學版) 13-2, 2010, 7왼쪽. 舊唐書 卷38 地理志 1 關內道 坊州條, 1401쪽, 宜君: 舊屬宜州. 貞觀十七年廢, 二十年復置, 屬雍州, 管玉華宮. 魏德墓誌, 全唐文補遺 第五輯, 108위쪽, 貞觀十八年, 轉任鄜州洛安府果毅. (중략) 以永 徽元年歲次庚戌九月卄六日, 薨於玉華宮之山第, 春秋六十有七. 舊唐書 卷3 太宗紀 下 貞觀二十二年條, 61쪽, [二月]乙亥, 幸玉華宮, 乙卯, 賜所經高年篤疾粟 帛有差. 己卯, 蒐于華原. 十月癸亥, 至自玉華宮. 舊唐書 卷4 高宗紀 上 永徽二年條, 69 쪽, 九月癸巳, 改九成宮為萬年宮, 廢玉華宮以為佛寺.
54 都城이 아닌 인근 州에 파견 나가 근무했던 것은 鄜州 洛安府의 府兵이 坊州 宜春縣에 있던 玉華宮을 지켰던 것과 유사하다. 王德墓誌銘 과 法苑珠林 의 예에서 당시 府兵들 이 都城이 아닌 다른 곳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관행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邢思賢의 예를 살펴보자. 邢思賢은 涇州 純德府折衝都尉에 임명된 후 九成宮留 守를 명령 받았다.32) 이는 涇州 純德府 府兵이 九成宮 방어에 동원되었음을 뜻한다. 墓誌 銘에 邢思賢이 九成宮을 留守하게 된 구체적인 시간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邢思賢이 長安에 番上하러 왔다가 皇帝의 행차를 따라 九成宮에 간 것인지, 皇帝의 행차와 상관없 이 九成宮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33) 그렇다고 해도 이 기사 에서 邢思賢은 純德府折衝都尉로서 純德府의 府兵을 이끌고 九成宮으로 와서 九成宮 방 어를 지휘했음은 분명하다. 涇州는 岐州의 북쪽에 위치한 州였으므로 九成宮의 수비에 九成宮과 가까운 지역의 折衝府 府兵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 3>에서 알 수 있듯이 岐州에는 13개의 折衝府가 있었다. 당시 岐州가 都督府의 治 所인 州가 아니었음에도 주변에서 都督府 소재지였던 秦州(6개), 原州(2개), 鄜州(11개)보 다 折衝府의 수가 많았다. 唐代 都督이 관할 都督府의 군사를 지휘했느냐의 문제에 대해 이견이 있지만, 都督府의 治所가 없었던 岐州의 折衝府 수가 주변의 都督府 治所가 있던 州의 折衝府 수보다 많다는 점은 특이하다. 岐州가 수도 長安이 위치한 京兆府의 서쪽에 위치하여 수도 방어를 위해 당연히 많은 折衝府와 府兵을 배치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岐 州에 太宗과 高宗이 여름에 자주 행차했던 九成宮이 있었고, 邢思賢의 예처럼 이웃한 涇 州의 折衝府에서 九成宮에 주둔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점을 보면, 岐州와 이웃한 州에 배 치된 折衝府는 京兆府의 방어와 함께 離宮인 九成宮의 방어도 고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九成宮 방어와 수비의 중요성은 突厥의 君主氏族이었던 阿史那結社率이 貞觀 13년(639) 九成宮에서 太宗을 암살하려고 기도했던 예에서도 확인된다. 結社率은 太宗의 九成宮 행 차에 따라 갔다가 몰래 突厥人 40여인을 규합하여 太宗의 침소를 공격했으며 衛士 수십 명이 죽었다. 이때 折衝都尉 孫武開가 병사를 이끌고 힘을 다해 격퇴하여 結社率의 무리 를 물리쳤고, 결국 結社率 일당을 잡아 죽일 수 있었다.34) 이 기사에서 孫武開가 어떤 31) 32) 33) 孟憲實, 唐代府兵 番上 新解, 75쪽. 邢思賢墓誌, 唐代墓誌彙編 (周紹良 主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2) 開元013, 1160쪽, 初 任趙王府執仗, 遷左衛長上, 除歸政府左果毅長上, 檢校左金吾衛郎將, 授忠武將軍行右領軍衛涇州純 德府折衝都尉上柱國, 奉勑九成宮留守, 又充京故城使. ; 邢思賢墓誌, 全唐文補遺 第五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8), 317위쪽. 離宮別館, 允副宸衷; 上林禁苑, 無虧警衛. 이란 구절( 邢思賢墓誌, 唐代墓誌彙編 (周紹良 主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2) 開元013, 1160쪽)은 邢思賢이 離宮(九成宮)과 上林苑 호위에 충실 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즉 邢思賢이 長安의 宮城과 離宮의 호위에 모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55 州에 속한 折衝都尉인지 언급이 없으나 府兵들이 九成宮을 결사적으로 방어하였고 도망 가는 結社率 일당을 사로잡아 죽였던 것으로 보아 九成宮 일대의 방어망이 촘촘했을 것 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이 기사에서 九成宮 방어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으며, 이는 九 成宮이 위치한 岐州에 주변의 다른 州보다 많은 折衝府가 배치되었던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魏德과 邢思賢의 墓誌銘을 통해 당시 離宮을 수비하기 위해 인근의 州에서 府兵이 파 견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府兵들이 都城 이외의 지역을 수비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예이다. 折衝府 將領은 아니지만 千牛衛將軍 兼檢校太子右衛率 龐同本은 乾陵의 宿衛를 맡았고 長壽 2년(693)에 宿衛所에서 병에 걸려 69세의 나이에 留守所에서 사망하였다.35) 문맥상 宿衛所와 留守所는 乾陵을 지칭한다. 이는 龐同本이 府兵도 지휘했을 것이므로 府兵이 陵墓 지키기에 동원되었음을 보여준다. Ⅲ. 巡幸 장소와 府兵의 동원 2장에서는 涇州와 鄜州의 折衝府 府兵들이 九成宮과 玉華宮같은 고정된 離宮을 방어하 기 위해 배치되었음을 살펴보았다. 唐前期 皇帝들이 洛陽 九成宮 華淸宮 등 여러 지역 을 장기간 체류했음은 1장에서 간단히 언급하였다. 이처럼 唐前期 皇帝들의 잦은 행차는 府兵의 배치에도 영향을 주었음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검증하기 앞서 府兵들의 番上 규정을 살펴보자. 新唐書 兵志, 府兵條에 따르면 都城으로부터 500里 안쪽에 있는 折衝府의 府兵은 5番, 1,000里 안쪽의 折衝府의 府兵은 7番, 1,500里까지는 8番, 2,000二千里까지 10番, 이외는 12番이었고, 番上기간은 모두 1개월이었다.36) 唐六典 에 따르면 100里 밖의 지역은 5番, 500里 밖의 지역은 7番, 34) 35) 36) 舊唐書 卷194上 突厥傳 上, 5161쪽, 突利弟結社率, 貞觀初入朝, 歷位中郎將. 十三年, 從幸九 成宮, 陰結部落得四十餘人, 并擁賀邏鶻, 相與夜犯御營, 踰第四重幕, 引弓亂發, 殺衛士數十人. 折 衝孫武開率兵奮擊, 乃退, 北走渡渭水, 欲奔其部落. 尋皆捕而斬之, 詔原賀邏鶻, 流于嶺外. ; 新唐 書 卷215上 突厥傳 上, 6039쪽, 帝幸九成宮, 突利弟結社率以郎將宿衛, 陰結種人謀反, 劫賀邏 鶻北還, 謂其黨曰: 我聞晉王丁夜得辟仗出, 我乘間突進, 可犯行在. 是夕, 大風冥, 王不出, 結社率 恐謀漏, 即射中營, 譟而殺人, 衛士等共擊之, 乃走, 殺廄人盜馬, 欲度渭, 徼邏禽斬之, 赦賀邏鶻, 投 嶺外. ) 龐同本墓誌, 全唐文補遺 第七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2000), 328위쪽, 迺召入授左 千牛衛將軍ㆍ兼檢校太子右衛率. (중략) 委卿乾陵宿衛, 兪往欽哉. 至長壽二年, 遘疾於宿衛所. 至其年八月四日, 凶於留守所, 春秋六十有九. 新唐書 卷50 兵志, 府兵條, 1326쪽, 凡當宿衛者番上, 兵部以遠近給番, 五百里為五番, 千里七
56 1,000里 밖의 지역은 8番이며 각각 1개월 동안 番上하였다. 반면 2,000里 밖의 지역은 9 番이며, 2,000里 미만 지역의 두 배의 기간을 番上하였다.37) 여기에서 5番은 1년 동안 府 兵을 다섯으로 나누어 조를 짜서 교대로 番上한다는 뜻이다. 新唐書 와 문에는 거리의 기준 장소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대부분 都城으로 본다. 唐六典 의 원 都城과의 거리에 따른 番上 횟수를 다룬 위의 규정과는 별도로 唐六典 의 다른 기록 에는 諸衛와 率府三衛는 京兆府와 河南府, 蒲州 同州 華州 岐州 陝州 懷州 汝州 鄭州 출신은 番上하고 나머지 州 출신은 納資로 대신하였다.38) 또 開元 11년의 규정을 보면 京兆府와 蒲州 同州 岐州 華의 府兵과 白丁, 潞州의 長從兵을 합한 12萬을 長從宿衛 로 칭하고 2番으로 나누어 番上하도록 하였다.39) 또 唐會要 에 따르면 開元 11년(723) 兵部 尙書 張說의 주청으로 長從宿衛를 설치하고 開元 13년에는 彉騎로 改稱하여 12衛에 分屬 시켰다.40) 이어서 天寶 8載(749) 折衝府에 발급했던 魚書의 발급을 중지하였다. 天寶 말 년에는 折衝府에는 명목상의 兵額만 존재하였고 군사와 무기, 식량 등의 사무는 모두 방 기되었다.41) 즉 府兵制는 開元 11년 長從宿衛 설치 이후 天寶 8載 折衝府를 무력화할 때 동안 공백이 존재하였다. 또 長從宿衛 즉 彉騎의 설치는 지방의 折衝府와 중앙의 12衛府 의 관계를 단절시켜 府兵制의 근간을 해체하는 효과가 있었음이 지적되기도 한다.42) 그러나 墓誌銘에는 위에서 살펴본 府兵들의 番上을 지역적으로 제한한 규정이 지켜지 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 예들이 있다. 예컨대 于遂古墓誌 에 따르면 于遂古는 調露初 와 永淳元年 洛陽 행차 때 長安을 留守하도록 명령받았다. 특히 調露初에는 金吾衛永平 37) 38) 39) 40) 41) 42) 番, 一千五百里八番, 二千里十番, 外為十二番, 皆一月上. 唐六典 卷5 尙書兵部 兵部郎中條, 156쪽, 凡三年一簡點, 戍丁而入, 六十而免, 量其遠邇以定 番第(細注: 百里外五番, 五百里外七番, 一千里外八番, 各一月上; 二千里外九番, 倍其月上. 若征行 之鎮守者, 免番而遣之.). 唐六典 卷5 尙書兵部 兵部郎中條, 153쪽, 凡諸衛及率府三衛貫京兆ㆍ河南ㆍ蒲ㆍ同ㆍ華ㆍ岐 ㆍ陝ㆍ懷ㆍ汝ㆍ鄭等州, 皆令番上, 餘州皆納資而已. 新唐書 卷50 兵志, 彉騎條 1326-1327쪽, [開元]十一年, 取京兆ㆍ蒲ㆍ同ㆍ岐ㆍ華府兵及白丁, 而益以潞州長從兵, 共十二萬, 號 長從宿衛, 歲二番, 命尚書左丞蕭嵩與州吏共選. 여기에서 都城 과의 거리에 따른 番上 규정과 모순이 된다는 점에서 玄宗 시기의 것이며 唐初의 府兵 番上의 상황은 아닐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蒙曼, 唐代前期北衙禁軍制度硏究, 北京: 中央民族大學出版 社, 2005, 34쪽). 唐會要 (王溥(宋)撰,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98) 卷72 府兵條, 1538쪽, 十一年十一月二十日, 兵部尚書張說置長從宿衛兵十萬人於南衙, 簡京兆ㆍ蒲ㆍ同ㆍ岐等州府兵及白丁, 准尺八例, 一年兩 番, 州縣更不得雜使役. 仍令尚書左丞蕭嵩與本州長官同揀擇以聞. 至十三年二月二十一日, 始名 彉 騎, 分隸十二衛. 唐會要 卷72 府兵條, 1538쪽, 天寶八載五月九日, 停折衝上府下魚書, 以無兵可交. 至末年, 折衝 府但有兵額, 其軍士ㆍ戎器ㆍ六駄鍋幕糗糧並廢. 渡邊信一郞, 唐代前期における農民の軍役負担, 京都府立大學學術報告 人文 社會 55, 2003, 7위-7아래쪽 및 19쪽의 주) 7 참조.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府左果毅都尉의 직책으로 長安에 주둔하였다.43) 新唐書 57 地理志 에 따르면 永平府는 坊州에 속한 折衝府이다.44) 坊州는 위의 두 기록에 포함되지 않는 州이다. 또 馮思順墓 誌 에 따르면 馮思順 역시 天寶 12載(753) 겨울에 玄宗이 華淸宮으로 행차할 때 右金吾 衛五原郡鹽川府折衝都尉의 직함으로 장안에 남아 器械 수리 관장하였으며, 玄宗이 돌아 온 후 游擊將軍에 임명되었다.45) 五原郡은 鹽州이며 오르도스 지방에 설치된 지방행정구 역이었다. 五原郡(鹽州) 역시 坊州처럼 番上에 참여해야 하는 州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 라 百濟遺民 難元慶의 墓誌銘에 따르면 難元慶은 行檀州白 府右果毅都尉46)와 夏州寧朔 府左果毅都尉일 때47) 中書省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48) 檀州와 夏州는 북변에 있는 州 였다. 于遂古 馮思順 難元慶의 墓誌銘의 기록을 보면 開元 11년과 13년의 조치 이후, 특히 折衝府의 기능이 정지된 天寶年間 이후에도 唐六典 과 新唐書 에서 番上하도록 규정된 長安과 洛陽의 인근 州가 아닌 坊州 鹽州(五原郡) 檀州 夏州에서도 都城에 番 上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에서 長安 宿衛番上의 예를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각지의 折衝府의 府兵들이 황제들 의 巡幸에도 따라갔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물음의 답은 각종 墓誌銘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斛斯正則墓誌銘 에는 斛斯正則이 太宗의 巡幸을 자주 따 라다녔음을 기록하였다. 예컨대 隋煬帝부터 太宗 시기에 활동했던 斛斯正則은 貞觀 18년 43) 44) 45) 46) 47) 48) 于遂古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周紹良 趙超 主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1) 聖曆019, 374쪽, 以功授上柱國ㆍ游擊將軍, 轉金吾衛永平府左果毅都尉. 調露初歲, 駕幸神都, 奉勅於京留守. 永淳元年, 皇幸洛, 又奉勅留京, 兼知禁禦. ; 于遂古墓誌, 全唐文補遺 第三輯(吳鋼 主編, 西 安: 三秦出版社, 1996), 30아래쪽-31위쪽, 以功授上柱國ㆍ游擊將軍, 轉金吾衛永平府左果毅都尉. 調露初歲, 駕幸神都, 奉勅於京留守. 永淳元年, 天皇幸洛, 又奉勅留京, 兼知禁禦. 新唐書 卷37 地理志 1 關內道 坊州中部郡條, 970쪽, 坊州中部郡, 上. 武德二年析鄜州之中部 ㆍ鄜城置. 土貢 龍鬚席ㆍ枲ㆍ弦麻. 戶二萬二千四百五十八, 口十二萬二百八. 縣四(有府五, 曰杏城 ㆍ仁里ㆍ思臣ㆍ永平ㆍ安臺). 馮思順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天寶091, 648쪽, 至天寶十二載, 又轉授五原郡鹽川府折衝. 自 微至著, 卌餘年, 不離羽林, 忠勤上下, 守正嚴恪, 出入徇公. 天十二冬, 駕幸華淸宮, 公留後知修器 械. 鑾輿還京, 特詔改授游擊將軍. ; 馮思順墓誌, 全唐文補遺 第五輯, 397아래쪽. 新唐書 地理志 에 따르면 檀州에는 折衝府가 없었다( 新唐書 卷39 地理志 3 河北道 檀州 條, 1022 쪽, 檀州密雲郡, 本安樂郡, 天寶元年更名. 戶六千六十四, 口三萬二百四十六. 縣 二. ). 일단 墓誌銘의 기록대로 본문에 기록하였다. 원문은 夏州 朔府左果毅都尉 로 朔 字 앞의 글자가 누락되었으나, 新唐書 地理志 에 따르 면 夏州에는 寧朔府와 順化府라는 折衝府가 존재하였다( 新唐書 卷37 地理志 1 關內道 夏州 條, 973쪽, 夏州朔方郡, 中都督府. 縣三(細注: 有府二, 曰寧朔ㆍ順化). 따라서 朔 字 앞의 누락된 글자는 寧 字임을 알 수 있다. 본문에는 이에 따라 寧朔府로 표기하였다. 難元慶墓誌, 全唐文補遺 第六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9), 421위쪽, 尋 游擊將 軍ㆍ行檀州白 府右果毅ㆍ直中書省. 雖司雄衛, 恒理文軒, 俄轉夏州 朔府左果毅都尉ㆍ直中書省 內供奉.
58 (644)에 洛陽宮, 21년(647)에 靈武, 23년(649)에 翠微宮 행차를 扈從하였다.49) 또 墓誌銘 에 따르면 貞觀 22년(650) 당시 右監門中郞將 上柱國이었던 斛斯正則의 夫人 姚氏가 玉 華宮에서 죽었다.50) 그런데 이 해에 太宗이 二月부터 十月까지 玉華宮에 머물러 있었으 므로51) 斛斯正則과 姚氏 부부가 玉華宮 행차를 따라 갔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斛 斯正則 자신은 咸亨元年(670) 五月 二十四日에 九成宮에서 병으로 죽었다.52) 高宗은 같은 해 四月부터 八月까지 九成宮에 갔다가 長安으로 돌아왔기 때문에53) 斛斯正則은 右監門 衛大將軍의 직책으로 高宗의 九成宮 행차를 扈從했음을 보여준다. 斛斯正則은 右監門衛 中郞將과 右監門衛大將軍의 직책으로 太宗과 高宗의 여러 巡幸 지역을 扈從하였다. 谷霽 光의 고증에 따르면 左右衛에 속한 折衝府는 關內 河東 河南 河北 隴右 劍南 諸道 에, 左右驍衛 소속 折衝府는 京兆 河東 河南 江南 山南 諸道, 左右武衛 소속 折衝府 는 京兆 河東 河南 山南 諸道에 속해 있었다. 즉 각 衛는 다양한 지역의 折衝府를 통 할하였다.54) 따라서 右監門衛에도 여러 折衝府의 府兵들이 소속되었을 것이므로 斛斯正 則의 巡幸 扈從에 折衝府의 府兵이 동원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斛斯正則墓誌銘 에서 구체적인 折衝府 명칭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折衝府 연구를 통해 折衝府 府兵이 太宗과 高宗의 巡幸을 扈從했을 것이라는 방증에 치 우쳤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면 구체적인 折衝府가 거론된 예들을 찾아보자. 張德墓 誌銘 에 따르면 張德의 아들 張榮崇은 河南府洛泉府別將으로서 宿衛와 皇帝의 행차를 扈 從하였다.55) 반면 여러 折衝府의 果毅都尉와 折衝都尉를 전전한 高德의 墓誌銘은 張德 49) 50) 51) 52) 53) 54) 55) 斛斯正則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咸亨005, 187쪽, [貞觀]十八年, 從幸洛陽宮. 仍屬鳥夷恃嶮, 狼顧不賓. 卽從龍麾, 恭聞豹略. 旣成功於拉朽, 且命賞以疇庸, 卽以勳授右監門中郞將, 累加上 柱國. 卄一年, 從幸靈武. 卄三年, 又從幸翠微宮. ; 斛斯正則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吳鋼 主 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5), 232위쪽; 斛斯正則墓誌銘, 全唐文新編 20(周紹良 主編,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2000), 14266쪽. 斛斯正則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 233위쪽, (夫人吳興郡君吳興姚氏)以貞觀卄二年卄七日, 終于玉華宮之館舍, 時年五十有五. 舊唐書 卷3 太宗紀 下 貞觀二十二年條, 61쪽, [二月]乙亥, 幸玉華宮, 乙卯, 賜所經高年篤疾粟 帛有差. 己卯, 蒐于華原. 十月癸亥, 至自玉華宮. ; 新唐書 卷2 太宗紀 貞觀二十二年條, 47쪽, [二月]乙亥, 幸玉華宮. 己卯, 獵于華原 十月癸丑, 至自玉華宮. 斛斯正則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 232아래쪽, 粤以咸亨元年五月卄四日, 遘疾薨于九成宮之 第, 春秋八十有一. 舊唐書 卷5 高宗紀 下 咸亨元年條, 94-95쪽, [夏四月]庚午, 幸九成宮. 雍州大雨雹. 八月 甲子, 至自九成宮. ; 新唐書 卷3 高宗紀 咸亨元年條, 68쪽, [夏四月]庚午, 如九成宮. [八月]丁巳, 至自九成宮. 勞經原, 唐折衝府考, 7593-7629쪽; 羅振玉, 唐折衝府考補, 7631-7640쪽; 同氏, 唐折衝府考補 拾遺, 7641-7642쪽; 谷霽光, 唐折衝府考校補, 7643-7660쪽; 同氏, 府兵制度考釋, 159-160쪽. 唐故右龍武軍將軍淸河縣公張公墓誌銘幷序(張德墓誌), 全唐文補遺 第七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2000), 388위쪽, 小子榮崇, 任左威衛河南府洛泉府別將. 並留宿衛, 扈從警蹕.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59 墓誌銘보다 折衝府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이다. 아래에서 高德이 玄宗의 행차를 扈從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 皇帝께서 노고를 생각하셔서 [ 府君(高德) 에게] 平州 白楊鎭將에 除授하셨다. 이어 鄜州의 龍交府와 岐州의 杜陽府의 果毅都尉로 임명되었고, 이어 陝州의 萬歲府, 絳州의 長平府와 正平府, 懷州의 懷仁府, 同州의 洪泉府 등 5 府의 折衝都尉로 옮겼으며, 右武衛翊府郎將으로 발탁되었고, 定遠將軍 右龍武軍翊府中郞 賜紫金魚袋 長上 上柱國 內帶弓箭으로 승진하였다. 府君은 비록 外府의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禁營에서 봉직하였고, 鑾輿의 行幸과 鳳扆의 巡 遊, 校獵과 사냥, 遊幸 때마다 府君은 늘 에 있었으며, 皇帝의 주위에서 侍奉하였다. 56) 위의 인용문의 밑줄 친 부분을 보면 高德이 外府의 鎭將, 果毅都尉, 折衝都尉 등의 직 책을 맡았지만 禁營에서 근무하였고 行幸과 校獵을 따라다녔음을 알 수 있다. 즉 高德이 근무했던 鄜州 岐州 陝州 絳州 懷州 同州의 7개 折衝府가 行幸 호위에 차출되었음 을 보여준다. 高德이 사망한 때가 天寶元年(742)이었기 때문에57) 高德은 玄宗 開元年間의 각종 행차를 따라다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玄宗은 華淸宮(新豐 溫湯)에 열흘 안팎의 짧은 기간 동안 체류하기도 하였지만, 開元 5년(717) 正月 辛亥日(2. 25)부터 6년(718) 十一月 辛卯日(11. 27)까지 671일 동안 洛陽에 체류하는 등 洛陽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太原과 泰山을 방문하였으며, 開 元年間에는 溫泉宮(華淸宮)에 약 1-4 개월 동안 체류하였다. 高德은 주로 開元年間에 활 동하였기 때문에 주로 장기간의 洛陽 체류와 泰山 封禪에도 扈從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高德 휘하의 7개 折衝府 府兵의 동원 문제와 부담은 어땠는지 살펴보자. 折衝府 龍交府 56) 57) 折衝府 소속 州 鄜州 <표 5> 高德 휘하 折衝府 府兵의 番上 동원의 경우의 수 折衝府-長安 거리 477里(5番) 도달기간 9/10일 折衝府-洛陽 거리 959里(7番) 도달기간 14/20일 折衝府-泰山 거리/기간 거리 2,562里(12番) 도달기간 37/52일 高德墓誌, 唐代墓誌彙編 天寶008, 1536쪽, 聖恩念勞, 授平州白楊鎭將, 轉鄜州之龍交ㆍ岐州 之杜陽兩府果毅, 俄遷陝州之萬歲ㆍ絳州之長平ㆍ正平, 懷州之懷仁ㆍ同州之洪泉等五府折衝, 擢授 右武衛翊府郎將, 招授定遠將軍ㆍ右龍武軍翊府中郞ㆍ賜紫金魚袋ㆍ長上ㆍ上柱國ㆍ內帶弓箭. 府君 雖官授外府, 而身奉禁營, 每鑾輿行幸, 鳳扆巡遊, 校獵從禽, 盤遊縱賞, 府君常在, 親近供奉. ; 唐故右龍武軍翊府中郞將高府君墓誌銘幷序(高德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吳鋼 主編, 西安: 三 秦出版社, 1995), 528위쪽. 高德墓誌, 1536쪽, 以天寶元年二月 九日終于東京道政里之私第, 春秋六十有七. ; 唐故右龍武 軍翊府中郞將高府君墓誌銘幷序(高德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5), 528위쪽.
60 杜陽府 萬歲府 長平府 正平府 懷仁府 洪泉府 岐州 陝州 絳州 絳州 懷州 同州 310里(5番) 510里(7番) 590里(7番) 590里(7番) 1,010里(8番) 250里(7番) 비고 1. 출전 : 高德墓誌, 5/7일 1,170里(8番) 8/11일 9/12일 9/12일 15/21일 4/5일 350里(5番) 480里(5番) 480里(5番) 150里(5番) 650里(5番) 唐代墓誌彙編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5), 528위쪽 2,395里(12番) 17/24일 1,520里(10番) 5/7일 1,650里(10番) 7/10일 1,650里(10番) 7/10일 1,320里(8番) 3/3일 9/13일 2,335里(12番)/1,820里 天寶008, 1536쪽 및 2. 여러 州와 長安 洛陽, 기타 행차 지역간의 거리 출전: 35/48일 22/31일 24/33일 24/33일 19/27일 34/47일 (26/37일) (10番) 全唐文補遺 第二輯(吳鋼 元和郡縣圖志 上 卷2 關內道 2 同州條, 36쪽; 卷2 關內道 2 鳳翔府(岐州)條, 40쪽; 卷3 關內道 3 鄜州條, 70쪽; 卷6 河南道 2 陝州條, 156쪽; 卷12 河東道 1 絳州條, 330쪽; 卷16 河北道 1 懷州條, 444쪽; 卷10 河南 道 6, 兗州條, 264쪽 및 267쪽. 3. 거리 ( )의 番은 新唐書 와 唐六典 의 기록에 따라 산출한 것임. 4. 鄜州 岐州는 長安과 洛陽을 거쳐 泰山에 도달했다고 보고 거리를 계산하였고, 陝州 絳 州 懷州는 洛陽을 거쳐 泰山까지 도달했다고 보고 거리를 산출하였다. 同州와 泰山까지의 거 리는 두 개의 수치를 병렬하였다. 첫 번째 숫자는 長安과 洛陽을 모두 경유한 경우, 두 번째 숫자는 長安을 거치지 않고 洛陽을 경유한 경우이다. 5. 도달거리는 唐六典 의 기록에 따라 말을 타고 갔을 때와 걸어서 혹은 노새를 타고 갔을 경우로 나누어 표시함( 唐六典 (李林甫 等撰, 陳仲夫 點校, 北京: 中華書局, 1992; 2005년 重 印) 卷3 尙書戶部 度支郎中條, 80쪽, 凡陸行之程: 馬日七十里, 步及驢五十里, 車三十里. 水 行之程, 舟之重者, 溯河日三十里, 江四十里, 餘水四十五里, 空舟溯河四十里, 江五十里, 餘水六十 里. ). <표 5>는 7개의 折衝府의 府兵이 長安, 洛陽, 泰山 중 적어도 한 곳의 巡幸에 동원되 었다고 보고 折衝府와 각 동원 배치 지역의 거리를 계산한 것이다. 玄宗의 주요 행차지 역이었던 華淸宮은 元和郡縣圖志 에 長安과의 거리가 기록되지 않아 계산에서 제외하였 다. <표 5>에 따르면 7개의 折衝府가 위치한 6개 州는 長安까지 최소 250里, 최대 1,010里 의 거리에 있었다. 즉 折衝府와 長安까지의 거리에 따라 5-8番으로 나누어 해당 折衝府 의 府兵이 番上해야 했다. 府兵들이 玄宗의 華淸宮 행차에 동원되었을 경우라면 折衝府 와 華淸宮 사이의 거리는 折衝府와 長安 사이의 거리보다 조금 길다고 보면 되며, 府兵 의 番數는 동일할 것이다. 또 7개 折衝府와 洛陽 사이의 거리는 최소 150里, 최대 1,170 里의 거리에 있었다. 新唐書 와 唐六典 의 규정에 따르면 陝州 萬歲府, 絳州 長平府와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61 正平府, 懷州의 懷仁府, 同州의 洪泉府가 5番, 鄜州의 龍交府가 7番, 岐州의 杜陽府가 8 番이었다. 즉 府兵들은 1년에 5 7 8개 조로 나누어 교대로 洛陽으로 가야 했다. 최악의 경우 7개의 折衝府 가운데 泰山에 동원되는 折衝府가 있었다면, 해당 府兵은 최소 1,320里, 최대 2,562里 떨어진 곳까지 가야 했다. 이는 거리상 8番에서 12番에 해당 하며 최빈값은 10番이다. 즉 7개 折衝府의 府兵이 泰山 封禪에 동원되었다면 1년에 8개 혹은 10개, 12개의 조로 나누어 번갈아 泰山까지 가야 했다는 뜻이다. <표 5>에서 행차 혹은 巡幸 지역이 명확히 언급되지 않았던 高德의 경우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 따라 행차 지역까지의 거리와 番數를 계산하였다. 7개의 折衝府 府兵들이 長安에 番上갈 경우 최소 4 5일에서 최대 15 21일이 걸렸다.58) 그런데 7개 折衝府 府 兵들이 玄宗의 洛陽 행차를 따랐갔다고 한다면, 洛陽과 가장 가까운 懷州 懷仁府의 府兵 은 洛陽까지 가는데 고작 3일밖에 안 걸렸지만, 岐州 杜陽府의 府兵들은 17 24일이 걸 렸다. 또 만약 7개 折衝府 府兵 가운데 懷州의 懷仁府 府兵이 玄宗의 泰山 封禪을 扈從 했으면 가장 짧은 19 27일의 이동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鄜州 龍交府 府兵이 泰山 封禪 을 따라갔다면 37 52일이 걸렸다. 한달 간의 근무를 위해 최소 한 달에서 최대 세 달까 지 折衝府와 巡幸 지역을 왕복하는 것은 번거롭고 시간과 경제적으로 부담이 컸을 것이 다. 史書에는 皇帝의 巡幸을 扈從하는 府兵들의 부담에 대한 규정은 없다. 다만 府兵들이 전쟁이나 사신으로 파견되어 2番의 기간을 경과하면 후에 2番을 면제하는 唐六典 卷5 尙書兵部 兵部郎中條의 細注의 규정59)이 이와 유사한 상황이므로 원용될 수 있을 것이 다. 이 규정을 황제의 장기간 행차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府兵들은 2달 이상 洛陽 등지에서 근무하고 2番의 기간을 면제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玄宗의 洛陽 체류가 2-3년에 걸친 장기간이었기 때문에 6개 州의 府兵들이 교대로 洛陽으로 番 上해야 했다. 또 玄宗이 泰山 封禪에 소요된 시간은 69일이며,60) 洛陽 체류까지 계산하 면 1090일이 걸렸으므로, 7개 折衝府가 開元 12년(724)부터 15년(727)까지 진행된 玄宗의 洛陽 행차와 泰山 封禪에 동원되었다면 역시 2달 이상 洛陽 혹은 泰山 封禪에 동원되고 2番의 기간을 면제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開元年間 전반기 華淸宮 행차 기간은 10 여 일에 불과하였으므로, 7개 折衝府 府兵들이 초과근무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58) 59) 60) 앞의 숫자는 말타고 갈 때, 뒤의 숫자는 걸어가거나 노새를 타고 갈 때 걸리는 기간이다. 그리 고 왕복이 아닌 편도 기간이다. 본문에서 별도의 언급이 없더라도 이와 같다. 唐六典 卷5 尙書兵部 兵部郎中條, 156쪽, 凡衛士各立名簿, 具三年已來征防若差遣, 仍定優劣 爲三等, 每年正月十日送本府印訖, 仍錄一通送本衛, 若有差ㆍ行ㆍ上番, 折沖府據簿而發之(細注: 若征行及使經兩番已上者, 免兩番, 兩番已上者並二番. 其不免番, 還日即當番者, 免上番.). 舊唐書 卷8 玄宗紀 上 開元十三年條, 188-189쪽.
62 어쨌든 高德이 속했던 7개 折衝府 府兵은 玄宗이 어느 곳으로 행차할 때 扈從하느냐에 따라 부담이 달라졌다. 高德의 墓誌銘에서는 구체적인 巡幸 지역을 알 수 없었지만, 6州의 7개 折衝府 府兵들 이 수도 長安에 番上하거나 玄宗의 巡幸을 扈從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순행지역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玄宗의 주요 순행 지역이었던 洛陽과 泰山 등으로 가정한 후 거리와 교대 조건(番數), 해당 지역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산출하여 추정 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豆善富 등의 墓誌銘에는 구체적인 巡幸 지역이 언급되었다. 아래 <표 6>을 살펴보자. <표 6> 折衝府 將領의 巡幸 수행 지역 折衝府 巡幸 扈從 折衝府-長 折衝府-洛陽 소속 州 豆善富 武城府左果毅都尉 絳州 游擊將軍 行右衛 扶風郡 李懷 扶風郡積善府左果 (岐州) 毅都尉 이름 직책 桓義成 六軍府折衝都尉 朱保 昭武校尉 寧州高 望府折衝都尉 蒲州 寧州 지역 泰山 安 거리 590里(7番) 泰山 310里(5番) 1,170里(8番) 泰山 320里(5番) 高祖獻陵 거리 480里(5番) 1,650里 585里(5番) 太宗昭陵 - 折衝都尉 비고 1. 墓誌銘의 출전은 다음과 같다: 邢思賢墓誌, 도달기간 10番 24/33일 2,085里 10番(9番) 30/42일 2,075里 10番(9番) 30/42일 2,405里 10番(9番) 35/49일 7番 8/12일 551里 中宗定陵 王崇禮 軍衛河南府金谷府 河南府 東都(新豐) 850里(7番) 番數 2,340里 10番(9番) 34/47일 高宗乾陵 456里(5番) 1,030里(8番) 睿宗橋陵 明威將軍 守左領 折衝府-巡幸地 거리 601里 7番 9/13일 616里 7番 9/13일 711里 7番 11/15일 726里 7番 11/15일 850里(7 番)? 7番 13/17일? 唐代墓誌彙編 (周紹良 主編, 上海: 上 海古籍出版社, 1992) 開元013, 1160쪽 및 全唐文補遺 第五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8), 317위쪽; 豆善富墓誌, 唐代墓誌彙編 三秦出版社, 1997), 441아래쪽; 開元534, 1523쪽; 全唐文補遺 第四輯(吳鋼 主編, 西安: 全唐文新編 (周紹良 主編,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2000) 22, 15173 쪽; 李懷墓誌, 唐代墓誌彙編, 天寶064, 1575쪽 및 全唐文補遺 第一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 版社, 1994), 156아래쪽-157위쪽; 桓義成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天寶039, 609쪽(周紹良 趙超 主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1); 朱保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天寶038, 608쪽; 王崇禮墓誌, 全唐文補遺 第二輯, 489아래쪽; 魏德墓誌, 全唐文補遺 第五輯, 108위쪽. 2. 여러 州와 長安 洛陽, 기타 행차 지역간의 거리 출전: 元和郡縣圖志 上(北京: 中華書局,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63 2005) 卷3 關內道 3 涇州條, 56쪽; 卷12 河東道 1 絳州條, 330쪽; 卷2 關內道 2 鳳翔府(岐 州)條, 40쪽; 卷12 河東道 1 蒲州條, 325족; 卷3 關內道 3 寧州條, 65쪽; 卷5 河南道 1, 河 南府條, 130쪽; 卷2 關內道 2 鳳翔府(岐州) 九成宮條, 42쪽; 卷10 河南道 6, 兗州條, 264쪽 및 267쪽; 卷1 關內道 1 京兆府 三原縣條, 7 8쪽; 卷1 關內道 1 京兆府 醴泉縣條, 8쪽; 卷1 關內道 1 京兆府 奉天縣條, 9쪽; 卷1 關內道 1 京兆府 奉先縣條, 9쪽. 3. 거리 ( )의 番은 新唐書 와 唐六典 의 기록에 따라 산출한 것임( 新唐書 卷50 兵志, 府兵條, 1326쪽, 凡當宿衛者番上, 兵部以遠近給番, 五百里為五番, 千里七番, 一千五百里八番, 二千里十番, 外為十二番, 皆一月上. ); 唐六典 卷5 尙書兵部 兵部郎中條, 156쪽, 凡三年一 筒點, 戍丁而入, 六十而免, 量其遠邇以定番第(細注: 百里外五番, 五百里外七番, 一千里外八番, 各一月上; 二千里外九番, 倍其月上. 若征行之鎮守者, 免番而遣之.). 4. 折衝府-巡幸地 거리가 두 개로 표시된 난은 첫 번째 숫자는 長安을 거치지 않고 洛陽을 경 유한 경우, 두 번째 숫자는 長安과 洛陽을 모두 경유한 경우이다. <표 6>에서 알 수 있듯이 絳州 岐州 蒲州 寧州 河南府의 折衝府 將領들(折衝都 尉 果毅都尉 別將)이 皇帝의 행차를 扈從했거나 行宮을 留守하였다. 折衝府의 將領들이 휘하 府兵을 인솔했을 것이므로 위에서 언급된 1府 4州의 6개 折衝府 府兵도 巡幸地나 行宮에 가서 경호의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즉, 위의 표는 府兵의 番上 혹은 배치를 파악 하는데 도움이 된다. <표 6>에서 開元 13년(725) 泰山 封禪에 참여한 豆善富 李懷 桓義成의 경우 泰山까 지의 거리를 알 수 있다. 豆善富는 絳州 武城府左果毅都尉,61) 李懷는 右衛扶風郡積善府左 果毅都尉,62) 桓義成은 蒲州 六軍府折衝都尉63)의 직책으로 泰山 封禪을 扈從하였다. 泰山 封禪은 洛陽에서 출발한 기간까지 포함하면 開元 13년(725) 十月 辛酉日부터 十二月 己 巳日까지 69일이나 걸렸다.64) 또 泰山 封禪은 開元 12년(724) 十一月 庚申日65) 혹은 庚 61) 62) 63) 64) 豆善富墓誌, 唐代墓誌彙編 開元534, 1523쪽, 君以岳牧子解 檢校 軍事, 又以 方不靜, 朝廷徵任, 擢授潞州銅鞮府左果毅都尉, 加游擊將軍, 兵 臨西戎, 亟戰超勝, 授上柱國, 轉絳 州武城府左果毅都尉. 開元十三年中, 扈從東封, 禮畢加忠武將軍, 進絳州 府折衝都尉. ; 豆善富 墓誌, 全唐文補遺 第四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7), 441아래쪽; 豆善富墓誌, 全 唐文新編 22(周紹良 主編,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2000), 15173쪽. 李懷墓誌, 唐代墓誌彙編 天寶064, 1575쪽, 拜游擊將軍行右衛扶風郡積善府左果毅仍留長上. 聖主封禪, 加宣威將軍, 改左威衛河南洛汭府折衝. 俄加壯武將軍, 授左領軍衛翊府右郎將. 未盈五考, 加忠武將軍, 授左龍武軍翊府中郞將, 擧其要也. 仍留東京左屯營檢校. ; 李懷墓誌, 全唐文補遺 第一輯(吳鋼 主編, 西安: 三秦出版社, 1994), 156아래쪽-157위쪽. 桓義成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天寶039, 609쪽, 忠公用譽, 狀跡彰聞, 遷蒲州六軍府折衝都尉. 扈鑾輿封岱岳. 覃恩廣被, 勳品增榮, 加寧遠將軍, 攝本衛郎將. 舊唐書 卷8 玄宗紀 上 開元十三年條, 188-189쪽, [冬十月]辛酉, 東封泰山, 發自東都. 十 一月丙戌, 至兗州岱宗頓. 丁亥, 致齋於行宮. 己丑, 日南至, 備法駕登山, 仗纫羅列嶽下百餘里. 詔行 從留於谷口, 上與宰臣ㆍ禮官昇山. 庚寅, 祀昊天上帝於上壇, 有司祀五帝百神于下壇. 禮畢, 藏玉冊
64 午日66)부터 15년 十月 己卯日까지 1100일 혹은 1090일 동안 지속된 洛陽 체류의 일부였 다. 즉 玄宗은 長安 洛陽 泰山 洛陽 長安 의 순서로 약 3년에 해당하는 기간을 長 安 이외의 지역에서 보냈다. 豆善富 李懷 桓義成이 어디부터 玄宗의 행차를 따라다녔는지는 墓誌銘의 기록만으로 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洛陽에서 출발할 때부터 따라갔다고 하면, 그들의 지 휘를 받는 府兵들은 각각 絳州 岐州(扶風郡) 蒲州에서 일단 洛陽에 도착한 후 泰山 封 禪 행렬에 참가하였을 것이다. 折衝府에서 洛陽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도 중간에 府兵들의 교대가 필요하였다. 가장 거리가 짧은 絳州 武城府의 府兵들이 교대로 泰山 封禪에 참여 했다면 絳州에서 泰山까지 최소 24일(말타고 갈 경우), 최대 33일이 걸렸다. 반면 岐州 (扶風郡)와 蒲州는 泰山과의 거리가 2,000里가 넘었다. 李懷가 지휘하는 岐州(扶風郡)의 積善府 府兵들이 교대로 泰山 封禪에 참여했다면 岐州에서 泰山까지 가는데 말타고 30일 혹은 34일, 걸어서(혹은 노새 타고) 42일 혹은 47일이나 걸렸다. 또 桓義成이 지휘하는 蒲州의 六軍府 府兵들이 泰山 封禪에 교대로 참여했다면 최소 30일 혹은 35일(말타고 가 는 경우), 최대 42일 혹은 49일(도보 혹은 노새 타고 가는 경우)이 걸렸다. 이처럼 모두 2-4달이 걸리는 泰山까지 왕복하고 1-2달을 泰山에서 근무해야 하는 府兵들의 부담이 컸 음은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朱保墓誌銘 에 따르면 朱保는 비교적 가까운 五陵 행차에 참여하였다.67) 舊唐 書 에 따르면 玄宗은 開元 17년(729) 十一月 辛卯日(11. 29)부터 戊申日(12. 16)까지 18일 동안 橋陵 定陵 獻陵 昭陵 乾陵을 참배하였다.68) 즉 朱保는 이때 寧州高望府折衝都 尉의 직함으로 玄宗의 五陵 참배를 隨從하여 右領軍衛左郎將으로 승진하였다.69) 이때 朱 保를 따라 五陵 참배에 참여한 高望府의 府兵들은 寧州에서 11일 혹은 15일 걸려 처음 65) 66) 67) 68) 69) 於封祀壇之石侠, 然後燔柴. 燎發, 戝臣稱萬歲, 傳呼自山頂至嶽下, 震動山谷. 上還齋宮, 慶雲見, 日 抱戴. 辛卯, 祀皇地祇於社首, 藏玉冊於石侠, 如封祀壇之禮. 壬辰, 御帳殿受朝賀, 大赦天下, 流人未 還者放還. 內外官三品已上賜爵一等, 四品已下賜一階, 登山官封賜一階, 褒聖侯量才與處分. 封泰山 神為天齊王, 禮秩加三公一等, 近山十里, 禁其樵採. 賜酺七日. 侍中源乾曜為尚書左丞相兼侍中, 中 書令張說為尚書右丞相兼中書令. 甲午, 發岱嶽. 丙申, 幸孔子宅, 親設奠祭. 舊唐書 卷8 玄宗紀 上 開元十二年條, 187쪽, 冬十一月庚申, 幸東都, 至華陰, 上制岳廟文, 勒 之于石, 立于祠南之道周. 戊寅, 至自東都. 新唐書 卷5 玄宗紀 開元十二年條, 131쪽, 十一月庚午, 如東都. 朱保墓誌, 唐代墓誌彙編續集 (周紹良 趙超 主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1) 天寶038, 608 쪽, 公忠以奉國, 勤以立功, 至開 四月, 內除昭武校尉ㆍ寧州高望府折衝. 勇冠蒙輪, 藝聞穿札. 十 四中府, 十 上府, 折卄二, 主上親謁五陵, 授右領軍衛左郎將, 賜紫金魚袋. 舊唐書 卷8 玄宗紀 上 開元十七年條, 194쪽, 十一月庚申, 親饗九廟. 辛卯, 發京師. 丙申, 謁 橋陵. 上望陵涕泣, 左右並哀感. 制奉先縣同赤縣, 以所管萬三百戶供陵寢, 三府兵馬供宿纫, 曲赦縣 內大辟罪已下. 戊戌, 謁定陵. 己亥, 謁獻陵. 壬寅, 謁昭陵. 乙巳, 謁乾陵. 戊申, 車駕還宮. 朱保墓誌, 608쪽.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65 의 참배 지역인 橋陵까지 가야 했다. <표 6> 마지막 란의 王崇禮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河南府 金谷府折衝都尉였으며, 玄 宗의 洛陽 순행을 扈從하던 도중 開元 19년(731) 十月 二十四日(11. 27)에 新豐에서 병들 어 죽었다.70) 당시 玄宗은 開元 19년(731) 十月 丙申日(11. 24)에 長安을 출발하여 十一 月 丙辰日(12. 14)에 洛陽에 도착하였다.71) 이 기사에서 河南府 소속인 金谷府의 府兵들 이 開元 19년 玄宗의 洛陽 행차를 호위하기 위해 洛陽에서 長安 혹은 新豐縣으로 파견되 었음을 알 수 있다. 즉 金谷府의 府兵들은 洛陽에서 長安까지 13일 혹은 17일이나 걸리 는 850里의 길을 갔다가 玄宗의 행렬을 扈從하여 다시 洛陽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때 長 安에서 洛陽까지 가는데 21일이 걸렸으므로, 長安에 番上한 府兵의 경우 長安과 洛陽 사 이에서 복무기간인 한 달이 끝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때의 巡幸에 참가하여 복무기간 인 한 달을 넘겨서 근무하는 府兵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에 대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府兵의 從軍과 외교사신 호송에 참여했을 때의 규정을 따른 다면 추가로 한 달을 복무하고 다음 番上을 면제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상으로 高德 豆善富 李懷 桓義成 朱保 王崇禮의 墓誌銘을 분석하여 府兵들이 玄宗의 巡幸을 扈從하였음을 입증하였다. 주로 關中과 河南府(洛陽), 河東道에 있던 折衝 府의 府兵들을 자신들과 가까운 지역의 巡幸을 따라가기도 했지만 편도로 20-30일이나 걸리는 먼곳까지 교대로 가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이처럼 府兵들의 番上 규정과 부담에 대한 실제 상황이 다를 수 있다. 즉 玄宗의 여러 지역 행차, 특히 洛陽과 太原, 泰山 행 차에 따라 다닌 府兵들은 都城과의 거리에 따라 교대로 番上한다는 新唐書 와 唐六典 의 규정과 달리 자신들이 속한 折衝府에서 都城보다 더 먼 곳을 오가며 行役, 巡幸의 扈 從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府兵들에게는 이처럼 바뀐 상황에 맞는 공평한 行役 규정이 필 요했을 것이다. 현재의 자료에는 이에 대한 규정이 없지만 皇帝들의 巡幸이 府兵들의 番 上과 行役에 영향을 주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Ⅳ. 결론 본문에서는 唐前期 府兵의 동원과 배치가 皇帝들의 巡幸에 영향을 받았음을 논증하였 다. 먼저 魏德과 邢思賢의 墓誌銘에서 살펴본 것처럼 折衝府의 府兵들은 九成宮이나 玉 70) 71) 王崇禮墓誌, 489아래쪽. 舊唐書 卷8 玄宗紀 上 開元十九年條, 197쪽, 冬十月丙申, 幸東都. 十一月丙辰, 至自東 都.
66 華宮같은 離宮에 주둔하여 지켰다. 여기에 동원된 府兵들은 해당 장소와 가까운 州의 折 衝府 출신이었다. 이는 병력의 배치에 지리와 교통이라는 요인을 감안했음을 시사한다. 또 府兵이 九成宮이나 玉華宮같은 離宮에 배치되었던 예를 보면 더욱 중요한 長安과 洛 陽 사이의 교통로에 위치한 行宮에도 府兵들이 평상시에도 배치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唐代 墓誌銘을 분석하여 각 지역의 折衝府 府兵들이 皇帝의 巡幸을 扈從하였 음을 입증하였다. 이는 高德 豆善富 李懷 桓義成 朱保 王崇禮의 墓誌銘에서 확인된 다. <표 5> 唐代 折衝府와 離宮 行宮 분포에서 行宮이 많았던 지역에 折衝府의 수가 많 았던 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離宮 行宮의 방어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기존의 府兵制 연구에서 府兵들의 宿衛番上만을 고려하여 거리에 따른 府兵들의 부담 문제를 추산하였다.72) 그러나 府兵들이 宿衛番上뿐만 아니라 皇帝의 巡幸을 扈從했던 것 이 확인되는 이상 府兵들의 부담 문제는 巡幸을 고려하여 再考해야 한다. 본문에서는 몇 개의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았다. 府兵들이 離宮과 陵墓 수비에 동원될 때, 折衝 府와 해당 지역의 거리가 고려되어 가까운 곳에 있는 折衝府가 동원되었다. 반면 皇帝들 의 巡幸에 동원된 折衝府는 折衝府와 순행지역의 遠近 여부가 고려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開元 13년(725) 玄宗의 泰山 封禪을 扈從했던 府兵들은 絳州와 蒲州처럼 河東道 에 속한 折衝府도 있었지만, 岐州처럼 關隴(關內道)에 있던 折衝府도 있었다. 이처럼 府兵들이 都城보다 먼 곳에 행차하는 皇帝 일행을 호위하는 임무, 즉 行役은 몹시 고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巡幸의 行役을 꺼려하여 衛士들이 일으킨 소란도 있었 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新唐書 太宗紀 에는 太宗이 貞觀 15년(641) 正月 辛巳日에 洛陽宮으로 행차하다가 溫湯에 머물렀을 때 衛士 崔卿과 刁文懿가 謀反하여 伏 誅되었다고 기록하였다.73) 모반의 동기와 과정이 자세히 기록된 資治通鑑 에 따르면 衛 士 崔卿과 刁文懿가 行役을 꺼려 太宗을 놀라게 하면 행차를 그치게 할 수 있다고 생각 하였다. 이에 그들은 밤에 行宮으로 화살을 쏘았고 이 가운데 다섯 대의 화살이 寢庭에 까지 날라갔다. 이에 두 사람은 大逆으로 논죄되어 처형되었다.74) 崔卿과 刁文懿가 어느 州의 府兵인지 新唐書 와 資治通鑑 에서는 밝히고 있지 않으나 衛士들의 반란은 府兵 들이 行役에 대해 부담을 느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72) 73) 74) 布目潮渢, 唐代衛士番上の負担, 293-304쪽; 石田勇作, 唐府兵負担攷-律令法規からみたる-, 67 위쪽-73아래쪽; 布目潮渢, 唐代衛士番上の負担再論-石田勇作氏の 唐府兵負担攷 を讀みて-, 306-327쪽; 石田勇作, 唐府兵負担についての再考, 252위쪽-266아래쪽. 新唐書 卷2 太宗紀 貞觀十五年條, 40쪽, 十五年正月辛巳, 如洛陽宮, 次溫湯. 衛士崔卿ㆍ刁 文懿謀反, 伏誅. 資治通鑑 卷196 唐紀 12 太宗貞觀十五年正月條, 6165쪽, 上將幸洛陽, 命皇太子監國, 留右僕 射高士廉輔之. 辛巳, 行及溫湯. 衛士崔卿ㆍ刁文懿憚於行役, 冀上驚而止, 乃夜射行宮, 矢及寢庭者 五; 皆以大逆論.
唐前期 皇帝 巡幸과 府兵의 동원 / 최 진 열 67 본고에서는 府兵들이 皇帝의 巡幸을 扈從하거나 皇帝가 머물거나 잠재적으로 머무르게 될 離宮 혹은 行宮을 수비하는데 동원되었음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都城에의 宿衛番上보 다 더 많은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府兵들의 부담을 덜거나 균등하게 하기 위해 어떤 규 정이 있었는지 밝히지 못했다. 현존하는 唐代 문헌에 이와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기 때 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府兵의 부담 문제와 折衝府의 지역적 배치 문제에도 唐前期 皇帝 들의 巡幸이 고려되어야 함을 환기했다는 점에서 본 논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또 부수적으로 天寶年間 府兵制가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이 시기 규정된 지역 이외의 折衝府 府兵이 長安에 宿衛하러 파견되었음을 밝혔다. 이는 규정과 실제 행정의 집행에 괴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唐代 藩鎭의 攝職 李 永 哲 (嶺南大) 目 次 Ⅰ. 序論 Ⅱ. 藩鎭의 幕職官 辟召와 攝職 Ⅲ. 攝職의 性格 Ⅳ. 結論 Ⅰ. 序論 唐代 藩鎭에서 藩帥를 보좌하여 藩鎭의 행정을 담당했던 다수의 文人을 가리켜 幕職官 이라 한다. 幕職官은 辟召를 이용하여 선발되었고, 藩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후 幕職官이 官僚로 진출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승인한 冬薦制가 실시되자, 막직관 은 번진에서 뿐만 아니라 관료사회에서도 점차 중요해졌다. 막직관이 官界로 진출하는 새로운 수단이 되었고, 官僚들에게는 玄宗이후 실시된 待選期間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 고, 官資를 쌓아 승진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唐 朝廷은 幕職官 辟召 過程, 선발 인원 및 俸料까지 관여하여, 幕職官을 朝廷의 의도대로 조정하여 번진 행정을 간섭 하려 했다. 朝廷이 이와 같은 태도를 보였던 것은 긍극적으로 번진을 견제하여 중앙집권 적 지배체제를 강화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幕職官에 대한 연구는 초기에는 주로 幕職官 구성과 선발 방식인 辟召 문제를 중심으 로 幕職官과 官僚制와의 연관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1) 幕職官 벽소가 唐朝의 人事政策 과 藩鎭對策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규명하기 위해서였다. 1990년 이후 최근의 연구는 1) 嚴耕望, 唐代方鎭使府僚佐考 : 唐代府州僚佐考 ( 唐史硏究叢稿, 新亞硏究所, 1969.); 愛宏元, 唐代後半における社會變質の一考察 ( 東方學報 42., 1971.): 唐代鄕貢進士と鄕貢明經 ( 東方 學報 45.; 礪波護, 中世貴族制の崩壞と辟召制 : 唐代使院と僚佐と辟召制 ( 唐代政治社會史硏 究, 同朋社, 1986.); 張國剛ㆍ楊志玖, 唐代藩鎭使府辟署制度 ( 唐代藩鎭硏究, 河南敎育出版社, 1987.); 寧欣, 唐代選官制度 (文津出版社, 1995.).
70 中國에서 公刊된 墓誌銘 등의 石刻史料를 활용하여 벽소제와 막직관 제도의 구체적인 실 태를 분석하여,2) 개별 번진의 幕職官 구성을 분석하여 번진 벽소가 唐 후기 신흥계층의 官界進出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일반적 견해가 재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제 기하였다. 本稿는 幕職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攝職을 살펴보려 한다. 攝職은 職銜 앞에 攝 字를 쓰는 攝職은 그 동안 많은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도 없으며, 전론이 발표된 것 도 없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攝職을 벽소 과정에서 임명대기자의 신분을 표시하는 직위3) 또는 奏請을 통하지 않고 선발된 非正職의 직위4)라고 보았다. 그러나 憲宗 元和 12年 (817) 세워진 徐州의 使院新修石㡖記 와 穆宗 長慶 2年 세워진 晉州의 慶唐觀李寰謁眞 廟題記 의 기록을 보면 攝職이 단순한 임명대기자를 표시하는 것이라거나 上聞과 관계없 는 非正直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또한 번진에 攝職이 광범위하게 존 재했으며, 관행적인 제도처럼 설치되고 있음을 볼 때 攝職에 대해 새롭게 연구가 되어져 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Ⅱ. 藩鎭의 幕職官 辟召와 攝職 唐代 藩鎭은 절도사 輔佐役인 幕職官을 辟召를 이용하여 선발하였다. 前漢에서 公卿郡 守들이 屬僚를 선발했던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辟召는 隋文帝가 開皇 15年 (595) 選擧制度를 시행하여 모든 관직을 조정에서 임명하게 되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 다. 隋의 제도를 계승하였던 唐도 관리를 임용할 때 벽소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隋 唐時期 벽소가 폐지되긴 했지만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馬端任의 말처럼 隋唐시 2) 3) 4) 盧建榮, 中晩唐藩鎭文職幕僚職位的探討 -以徐州節度區爲例- ( 第2屆 國際唐代學術會議論文集 下., 文津出版社, 1993.); 戴偉華, 唐方鎭文職僚佐考 (天津古籍出版社, 1994.); 王德權, 中晩唐使 府僚佐昇遷之硏究 ( 國立中正大學學報 5-1., 1994.); 石雲濤, 唐代幕府制度硏究 (中國, 社會科 學出版社, 2003.); 渡邊孝, 中晩唐朝における官人の幕職官入仕とその背景 (松本肇ㆍ川合康三 編 中唐文學の視角, 創文社, 1996.) : 唐後半期の藩鎭辟召制についての再檢討 -淮南 浙西藩鎭に おける幕職官の人的構成などを手がかりに- ( 東洋史硏究 60-1., 2001.) : 唐代藩鎭における下級 幕職官について ( 中國史學 11., 2001.). : 松浦典弘, 唐代後半期の人事における幕職官の位置 ( 古代文化 50-11., 1998.); 金宗燮, 唐五代 幕職官 任用方式과 役割 ( 東洋史學硏究 71., 2000.). 日野開三郞, 支那中世の軍閥 ( 日野開三郞 東洋史學論集 第1卷. 唐代藩鎭の支配體制, 三一書房, 1981.) p.89.; 礪波護, 唐代使院と僚佐と辟召制 ( 唐代政治社會史硏究, 同朋社, 1986.). p.100. 石雲濤, 唐代幕府制度硏究,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3. p.248.
唐代 藩鎭의 攝職 / 李 永 哲 71 기 관리 선발이 대부분 科目으로부터 나왔으나, 때에 따라 辟署도 시행되었다. 그러나 馬 端任은 벽소가 정기적으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규정이 동일하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高宗 咸亨 3年(672) 5月 11日에 辟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勅令을 내려 中書門下의 兩省 供奉官 및 尙書省 御史臺의 現任郞官, 御史는 이후 諸使가 使(職)에 奏請할 수 없 다. 5)고 하였다. 唐代 辟召와 관련된 규정으로 이 보다 앞선 경우를 찾을 수 없다. 唐은 초기부터 율령체제가 지닌 행정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使職을 설치하였다.6) 高 祖 때부터 慰撫大使ㆍ按撫大使ㆍ巡省大使ㆍ黜陟大使ㆍ觀風俗使 등이 설치되었다. 예상치 못한 사무가 발생하여 율령관제 내에 담당할 부서가 없으면 使職을 임시로 설치하여 사 무를 처리하였던 것이다. 令外官이었던 使職은 省ㆍ臺ㆍ寺ㆍ監의 長官職을 帶하여 官資 를 표시했고, 屬僚는 조정이 命을 내려 차출하거나 벽소를 통해 스스로 선발하였다.7) 당 시 使職은 朝廷 官僚 중에서 屬僚를 벽소했는데, 위의 勅은 이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 한 것이다. 唐代 使職이 屬僚를 선발하는데 이용되었던 辟召는 中宗朝에서 玄宗朝 초기에 藩鎭과 採訪使 설치를 계기로 내용이나 범위 등에서 빠르게 발전하였다.8) 開元 21年(733) 玄宗 은 全國을 15道로 나누고, 採訪處置使를 설치하였다. 이 때 설치한 採訪使는 判官ㆍ支使 ㆍ推官을 補佐役으로 벽소할 수 있었다. 이후 節度使도 이를 답습하여 幕職官을 辟召하 였다.9) 採訪使와 節度使는 임시적 성격이 강했던 이전의 使職과는 달리 固定的, 恒久的 으로 설치되었다.10) 이전의 使職은 정해진 사무가 처리되면 罷해졌고, 동시에 屬僚도 원 래의 職務로 되돌아갔지만, 採訪使와 節度使의 屬僚는 벽소이후 辟召한 주체와 운명을 같이 해야 했다. 고정적이고 항구적인 성격이 강한 번진이 막직관을 벽소로 선발하면서 벽소의 형식과 범위에 있어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형식적인 면에서 벽소 과정이 정교해졌다. 唐代 辟召 는 일정한 절차에 따라 문서를 통해 이루어 졌다.11) 벽소 과정에 만들어 진 文書는 牒이 5) 6) 7) 8) 9) 10) 11) 唐會要 卷78. 諸使 中. 諸使雜錄 上. : 高宗 咸亨 3年 中略 其年五月十一 日勅 中書門下兩 省供奉官及尙書省御史臺現任郞官御史 自今以後 請使不得奏請任使 永爲常式. 薛明扬, 论唐代使职的功能与社会作用 ( 復旦大学学报 1990年 1期.) 二十二史考異 58. 職官志. : 案節度採訪觀察團練經略招討諸使皆無品秩 故常帶省臺寺監長官銜 以寄官資之崇卑 其屬僚或出朝命 或自辟擧. 失野主稅, 使制度の發生について ( 史學硏究 12-2., 1940.). 通典 卷32. 職官 14. 總論州佐.; 採訪使有判官二人 支使二人 推官一人 皆使自辟召 然後上聞. 其未奉報者稱攝. 이에 注를 달아 其節度防禦等使僚佐之例 亦如之. 라 하였다. 唐國史補 下. 道. : 開元以前 有事于外則命使臣 否則止. 自置八節度十採訪 始有座以爲使. 唐代 節度 觀察 諸使는 寮佐에서 州郡의 掾屬에 이르기까지 辟召하여 설치하였다. 牒語는 모두 四六을 이용하였는데 대략 告詞와 같았다. 辟召過程의 文書樣式에 대해서는 中村裕一이 唐代官 文書硏究 第 4章. その他の文書(中文出版社, 1991.)) pp.288-294.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참
72 라 했으며, 牒은 告身의 制詞나 勅詞와 같은 형식인 四六體로 작성되었다.12) 다음으로 벽소의 범위가 이전에 비해 광범위해졌다. 德宗 貞元 2年(786)에 5月 28日에 기존의 규정인 中書門下 兩省 供奉官 및 現任郞官 御史 등은 諸司 諸使가 奏請하여 使 (府)職에 임명할 수 없다 13)에 모두 出身人 및 六品以下 正員官을 주청할 수 있다. 14)는 자격에 대한 제한 규정이 추가되었다. 出身人과 6品 이하 관원 으로 벽소 자격을 제한하 고 있는 것은 이미 이 규정보다 광범위한 범위에서 벽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전제 로 한다. 安史의 亂이 발생하였을 때 玄宗은 절도사들에게 막직관뿐 만 아니라 지방관까 지 벽소할 수 있는 권한을 내려주었다.15) 반란 때문에 王朝의 인사기능이 제대로 작동하 지 못하여 반란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후 代宗 大曆 14年(779) 에 이르면 協律郞 沈旣濟에 의해 번진에서 실시하고 있는 벽소를 주현관을 선발하는 방 법으로 시행하자는 주장16)이 제기 될 정도로 번진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17) 또한 辟召制는 德宗 貞元 年間 이후 공식적으로 律令官制와 연결되어 官界로 나가는 새로운 하나의 방법이 될 정도로 발전하였다. 貞元 9年 2月 德宗은 막직관을 대상으로 冬薦을 실시하여 막직관에게 官界로 진출할 수 있는 공식적인 통로를 열어주었다.18) 막 직관을 포함하여 冬薦制를 운용되면서 幕職官을 선발하는 辟召制는 관료로 진출할 수 있 는 방법의 하나가 되었다. 막직관이 동천의 대상이 되자 官僚보다 改轉 기간이 짧았던 막직관은 資歷을 빠르게 쌓을 수 있었기 때문에 陞進에 유리하였다.19) 막직관이 改轉하 기 위해서는 元和 3年(808)에는 3考가 필요했으나 元和 7年(812)에는 授官日을 기준으로 12) 13) 14) 15) 16) 17) 18) 19) 조하라. 容齋三筆 卷16. 唐世辟寮佐有詞 : 唐世節度觀察諸使辟置僚佐以至州郡差掾屬 牒語皆用四六 大 略如告詞. 李商隱樊南甲乙集 顧雲編稿 羅隱湘南雜稿 皆有之. 唐會要 卷54. 省號 上. 中書省. 貞元二年五月二十八日勅 中書門下兩省供奉官及尙書省御史臺現 任郞官御史等 自今以後 諸司諸使竝不得奏請任使 仍永爲常式. 冊府元龜 卷716. 幕府府 總序. : 皆奏請有出身人及六品以下正員官爲之 唯兩省供奉尙書省御史 臺現任郞官不得奏請 其辟署未有官者謂之攝.. 全唐文 卷366. 賈至, 玄宗幸普安郡制 : 其諸路本節度採訪支度防禦使虢王巨等 幷衣前充使 其 署官屬及本路郡縣官 幷各任便自簡擇. 資治通鑑 卷226. 代宗 大曆 14年 8月條.; 今諸道節度都團練觀察租庸等使 自判官部將以下 皆使 自擇 縱其間或有情故 大擧其例 十猶七全. 則辟吏之法 已試於今 但未及於州縣耳. 利害之理 較然 可觀. 嚮令諸使僚佐盡受於選曹 則安能方鎭隅之重 理財賦之殷乎. : 通典 卷18. 選擧 6. 雜議論 下. : 其六品以下 或僚佐之屬 許州府辟用. 鄭炳俊, 唐代 藩鎭의 州縣官 任用 ( 東洋史學硏究 54., 1996.), pp.19-31. 冊府元龜 卷630. 銓選部 條制門. 德宗 貞元 9年 12月制. : 自今後 應諸色使行軍司馬判官書紀參謀支 使推官等使罷者 與是簡較試五品以下 不合於吏部選集 並任准罷使郞官御史例冬集季聞奏. 冊府元龜 卷631. 銓選部 條制門. 憲宗 元和 2年 5月 中書門下奏. : 諸使副使行軍司馬判官參謀 掌書記支使推官巡官等有勅充職掌擧簡較五品以上官臺省官三考與改轉 餘官四考與改.
唐代 藩鎭의 攝職 / 李 永 哲 73 30個月이 필요했다.20) 반면 조정 관료는 3-4考의 기간21)이 필요했다. 개전에 필요한 기 간이 짧았던 막직관은 조정 관료보다 陞進에 필요한 資歷을 상승시키기가 용이하였기 때 문에 唐의 관료들에 의해 막직관 就任이 승진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22) 따라서 貞元 年 間 冬薦制가 실시되자 辟召는 官界로 나가는 官途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23) 唐代 藩鎭은 다양한 막직관을 선발하여 막부를 구성하였지만, 그 정확한 구성은 알 수 없다. 다만 舊唐書 ㆍ 通典 ㆍ 新唐書 의 기록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唐代 藩鎭에는 副 使 1명, 行軍司馬 1명, 判官 1명, 掌書記 1명, 推官 1명, 參謀, 巡官 1명, 同節度副使 10 명, 館驛巡官 4명, 衙推 1명, 隨軍 4명, 要籍 1명, 逐要 1명, 親事 1명, 府院法直官 1명 등 의 막직이 있었다. 藩鎭의 막직관 구성은 節度使가 다른 使職을 겸직할 때마다 확대될 수 있었다. 절도사가 다른 使職을 兼職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唐代 藩鎭의 使府 구성은 방대하고 복잡했다.24) 20) 21) 22) 23) 24) 舊唐書 卷15. 憲宗紀 元和 7年 8月 戌申條. :制 諸州府五品已上官替後 委本道長官量其才行 官 業 資歷 每年冬季一度聞薦. 其罷使郎官 御史 許朝臣每年冬季准此聞薦. 諸使府參佐 檢校官 從元 授官月日計 如是五品已上官及臺省官 經三十箇月外 任與轉改 餘官經三十六箇月奏轉改. 如未經考 便有事故及停替官 本限之外更加十箇月.即任申奏. 唐大詔令集 卷70. 德宗 貞元 6年 南郊赦.; 唐大詔令集 卷70. 敬宗 寶曆元年 正月 南郊赦. 幕職官 勤務를 통해 官資를 상승시켜 성공적인 陞進을 이루었던 例는 舊唐書 列傳만 보아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事例는 舊唐書 卷114. 裴茙傳.; 舊唐書 卷117. 嚴武傳.; 舊唐 書 卷118. 元載傳:; 舊唐書 卷118. 楊炎傳.; 舊唐書 卷119. 崔巖傳.; 舊唐書 卷122. 李叔 明傳.; 舊唐書 卷122. 崔漢衡傳.; 舊唐書 卷123. 班宏傳.; 舊唐書 卷125. 張鎰傳.; 舊唐書 卷125. 劉渾傳.; 舊唐書 卷126. 陳遊少傳.; 舊唐書 卷127. 喬琳傳.; 舊唐書 卷128. 段實秀 傳.; 舊唐書 卷129. 韓滉傳.; 舊唐書 卷130. 李泌傳.; 舊唐書 卷130. 李元平傳.; 舊唐書 卷132. 李芃傳. 舊唐書 卷134. 馬燧傳.; 舊唐書 卷134. 馬炫傳.; 舊唐書 卷135. 裴延齡傳.; 舊唐書 卷135. 李實傳.; 舊唐書 卷135. 盧紀傳.; 舊唐書 卷136. 齊映傳.; 舊唐書 卷136. 劉 贊傳.; 舊唐書 卷137. 劉太眞傳.; 舊唐書 卷137. 崔元翰傳.; 舊唐書 卷140. 盧群傳.; 舊唐 書 卷145. 董晉傳.; 舊唐書 卷147. 從牧傳.; 舊唐書 卷148. 權德輿傳.; 舊唐書 卷149. 于敖 傳.; 舊唐書 卷150. 高參傳.; 舊唐書 卷153. 段平中傳.; 舊唐書 卷153. 姚南中傳.; 舊唐書 卷155. 竇庠傳.; 舊唐書 卷155. 竇牟傳.; 舊唐書 卷160. 韓愈傳.; 舊唐書 卷163. 崔鉉傳.; 舊唐書 卷163. 王 質傳.; 舊唐書 卷163. 盧簡辭傳.; 舊唐書 卷163. 盧簡能傳.; 舊唐書 卷 163. 盧簡求傳.; 舊唐書 卷163. 盧弘正傳.; 舊唐書 卷163. 盧知猷傳.; 舊唐書 卷164. 王起 傳.; 舊唐書 卷165. 劉公綽傳.; 舊唐書 卷165. 劉璧傳.; 舊唐書 卷165. 劉玼傳.; 舊唐書 卷165. 劉公權傳.; 舊唐書 卷166. 白行簡傳.; 舊唐書 卷166. 白敏中傳.; 舊唐書 卷168. 馮宿 傳.; 舊唐書 卷172. 牛傑傳.; 舊唐書 卷173. 李回傳.; 舊唐書 卷174. 李德裕傳.; 舊唐書 卷176. 李宗閔傳.; 舊唐書 卷177. 崔球傳.; 舊唐書 卷177. 楊收傳.; 舊唐書 卷177. 楊發傳.; 舊唐書 卷177. 杜審權傳.; 舊唐書 卷177. 杜讓能傳.; 舊唐書 卷178. 張이傳.; 舊唐書 卷 178. 王徽傳.; 舊唐書 卷178. 趙光逢傳.; 舊唐書 卷178. 鄭畋傳.; 舊唐書 卷179. 孔緯傳.)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鄭炳俊, 唐後期 吏部銓選과 官途의 多邊化 ( 新羅의 人材養成과 選拔, 慶州, 新羅文化硏究所, 1998.). 新唐書 卷49下. 百官 4下. 外官條. :節度使 副大使知節度事 行軍司馬 副使 判官 支使 掌書記
74 이러한 막직관은 설치할 수 있는 범위를 의미할 뿐 반듯이 설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 다. 번진의 사정에 따라 설치 인원은 유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憲宗 元和 12年(817) 9월 12일 徐州 武寧(感化)軍에서 使院을 新修하고, 이를 기념하여 徐州의 막직관들이 府 庭의 南端에 石幢를 세웠다. 石幢의 문장 말미에 使院을 新修하는 과정에 참여한 徐州의 幕職官들이 연명하였다. 金紫光祿大夫檢校尙書左僕射使持節徐州諸軍事兼徐州刺史御史大夫充武寧軍節度 都營田 等州觀察處置等使上柱國襲岐國公食實封七百五十戶李愿 攝觀察副使高瑀 行軍司馬李進賢 攝營田副使劉元鼎 侍御史內供奉節度判官譚藩 觀察判 寮 支度 營田判官何授 郭行餘 節度參謀趙季黃 節度掌書記王參元 張勝 觀察推官 張仲擧 攝觀察推官鄭據 節度巡官閻顔 攝節度巡官獨 巡官 攝支度巡官鄭翶 營田巡官攝支度推官吳植 ( 金石萃編 卷107, 使院新修石㡖記 ) 또한 穆宗 長慶 3年(823) 3月 18日 晉州에서는 觀察使府의 文武職 屬僚들이 觀察使인 李寰이 慶唐觀을 拜謁하자 같이 참여하고, 이를 기념하여 碑를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당 시 李寰과 같이 慶唐觀에 참여하였던 文武 속료들과 地方官 및 지방 出身人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觀察判官將仕郞試大理評事武恭 推官 巡官 衙推各一人 同節度副使十人 館驛巡官四人 府院法直官 要籍 逐要親事各一人 隨軍四 人. 節度使封郡王 則有奏記一人 兼觀察使 又有判官 支使 推官 巡官 衙推各一人. 又兼安撫使 則 有副使 判官各一人. 兼支度 營田 招討 經略使 則有副使 判官各一人. 支度使復有遣運判官 巡官各 一人.
唐代 藩鎭의 攝職 / 李 永 哲 75 觀察支使試宏文館校書郞賀拔惎 觀察推官給事郞試大理評事兼監察御史賜緋魚袋盧撫 攝團練判官朝散大夫前殿中侍御史內供奉蕭齊 攝觀察推官宣德郞試太府寺丞賜緋魚袋王文簡 攝觀察巡官宣德郞試司農寺主簿魏元膺 攝觀察巡官宣德郞前守幽州錄事參軍蕭存古 奉義郞前絳州萬泉縣令從矩鄕貢進士方郢 前鄕貢明經方回 前鄕貢明經方參 從矩等 侍從禮謁 尊客 ( 以下 武職은 省略) ( 八瓊室金石補正 卷65. 慶唐觀李寰謁眞廟題記 ) 위의 徐州와 晉州의 막직관 명단은 唐代 節度使府와 觀察使府의 使府 구성을 잘 보여 준다.25) 이 명단이 당시 徐州와 晉州의 전체 막직관 구성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副使에 서 巡官에 이르는 일반적으로 正式의 幕職官26)이라 부르는 막직관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이다. 使院新修石㡖記 와 慶唐觀李寰謁眞廟題記 를 작성할 당시는 正式의 幕職官만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徐州에서 前任 節度使였던 王紹(806-811 재직)가 鄭公鎰을 節 度隨軍에 임명하였던 것27)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巡官 이하의 下級의 幕職28)은 연명 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武寧軍 使府를 구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使院新 修石㡖記 에 보이는 것 보다는 방대했을 것이다. 徐州와 晉州의 幕職官 명단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섭직이다. 직위 앞에 攝 자를 쓰 고 있는 攝職이 徐州의 경우 15職 18명의 막직관 중에서 적어도 6職 6명이며, 晉州의 경 우 7명의 막직관 중에 4명이나 될 정도로 비중이 상당하다. 또한 徐州의 경우 연명의 형 식으로 보아 많게는 7職 8명일 가능성도 있다. 마모된 부분이 있는 支度 營田判官 何 授와 郭行餘는 아마 支度判官과 營田判官을 兼하거나 營田判官을 攝하고 있는 것으로 보 25) 26) 27) 28) 使院新修石㡖記 와 慶唐觀李寰謁眞廟題記 에 기록된 명단은 礪波護가 唐代政治史硏究 (同朋 舍, 1986)에서 節度使府와 觀察使府의 막직 구성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사용한 이래 많은 연구 자들에 의해 이용되었다. 本 稿 역시 礪波護의 책에서 再인용하였다. 冊府元龜 卷716. 幕府府 總序. :則天長壽中有經略使 睿宗景雲後有節度使 肅宗至德後有觀察使 明皇天寶後有團練防禦使. 節度使之屬有副使一人行軍司馬一人判官二人掌書記一人參謀無員隨軍四 人 觀察使有判官支使 經略使有判官等員. 其後節度觀察使防禦團練皆有推官巡官之職兼度支營田招 討使者又有度支營田等判官 自是正爲幕府之職. 隋唐五代墓誌滙編 洛陽 卷13冊 鄭芬及夫人胡氏合葬墓誌 : 公鎰卽先府君之嗣子也 中略 俄轉 徐泗節度隨軍 下級의 幕職官에 대해서는 渡邊孝의 論文( 唐代藩鎭における下級幕職官について ( 中國史學 11., 2001.)을 참조하라.
76 인다. 아니면 高瑀와 誤植이 연명한 형식과 같이 何授와 郭行餘도 營田判官을 攝하고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Ⅲ. 攝職의 性格 徐州와 晉州의 使府 구성으로 보아 唐代 번진에는 상당한 수의 攝職이 존재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번진에 설치되어 있었던 攝職은 과연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 며, 왜 설치하였던 것일까? 먼저 攝職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 존의 攝職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벽소 과정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직위라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는 日野開三郞 과 礪波護 兩氏에 의해 제기되었다. 日野開三郞은 幕職官으로 벽소된 자가 아직 중앙으 로부터 그 官에 상당하는 品階를 받지 못한 경우 이를 攝官이라 하여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29)고 하였다. 礪波護는 通典 總論州佐條30)와 雲麓漫鈔 의 기사31)를 근거로 使 院新修石㡖記 의 撰者인 高瑀의 例를 들어 攝職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高瑀는 撰者 로서는 支度副使로 신분을 표시하고 있으나 연명에는 攝節度副使의 신분으로 참여하였 다. 礪波護는 이를 절도사인 李愿이 高瑀를 節度副使로 승격시켜 중앙에 보고했으나 중 앙으로부터 승인하는 사령장이 아직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비석이 세워졌기 때문이라 하였다. 벽소는 辟主가 먼저 선발하고 그 결과를 중앙에 보고하여 승인받는 과정으로 이 루어졌다. 선발하고 중앙으로부터 승인이 내려지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적 공백이 존재했 다. 礪波護의 견해에 따르면 이 시간적 공백기에 辟召된 자는 임명대기자라는 일시적 신 분을 攝職으로 표시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攝職은 절차상의 직위이기 때문 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 중앙이 승인하면 正式의 막직관으로 변화하게 되고, 중앙이 거부 하면 막직관으로 취임하지 못하여 저절로 소멸되는 직위인 셈이다. 둘째, 奏請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비공식적인 權攝의 방식으로 선발한 막직관을 가리 킨다는 견해이다. 이는 石雲濤에 의해 제시되었다. 石雲濤는 번진이 중앙에서 정한 벽소 자격 규정을 어기지 않으면서 선발할 수 있는 非正職의 막직으로 2종류가 있다고 하면 29) 30) 31) 日野開三郞, 支那中世の軍閥 ( 日野開三郞 東洋史學論集 第1卷. 唐代藩鎭の支配體制, 三一書房, 1981.) p.89. 通典 卷32. 總論州佐條. : 採訪使有判官 中略 皆使自辟召 然後上聞. 其未奉報者 稱攝. 雲麓漫鈔 卷4. : 選人之制 始於唐. 自中葉以來 藩鎭自辟召 謂之版授. 時號假版官 言未授王命 假攝之耳.
唐代 藩鎭의 攝職 / 李 永 哲 77 서, 하나는 驅使ㆍ逐要ㆍ隨軍ㆍ要籍 등의 下級幕職官이며, 또 다른 하나가 攝職이라 하였 다. 그는 攝 에는 非正式任命 또는 임시로 대리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杜牧의 崔郾行狀 의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였다.32) 石雲濤는 攝職은 上聞과 관계없는 것이기, 때문에 벽소 과정을 奏請 이나 表爲 또는 奏爲 라 하지 않고 受署 라 표현하였다고 하였다.33) 이상의 攝職에 대한 2가지 견해는 일시적으로 설치된 단기직이라는 점은 일치하나, 그 성격에 대해선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나는 攝職이 공식적 벽소 과정에서 임 시로 지니게 되는 공식적 직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非공식적인 방식을 통해 선발된 非공식적, 非정직의 직위라는 입장이다. 이 두 견해 모두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攝職이 중앙으로부터 승인이 떨어지기 이전 일시적으로 보유한 임명대기자이거 나, 주청을 거치지 않고 선발한 것을 가리킨다면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帶職을 설명하기 힘들다. 慶唐觀李寰謁眞廟題記 에 있는 명단은 幕職과 帶職을 병기하였다. 그 중 攝職인 자는 攝團練判官 朝散大夫 前殿中侍御史 內供奉 蕭齊ㆍ攝觀察推官 宣德郞 試太府寺丞賜 緋魚袋 王文簡ㆍ攝觀察巡官 宣德郞 試司農寺主簿 魏元膺ㆍ攝觀察巡官 宣德郞 前守幽州錄 事參軍 蕭存古 4명이다. 石雲濤의 주장처럼 攝職이 上聞과 관계없는 직위라 한다면 이들 은 帶職을 보유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礪波護나 日野開三郞의 주장처럼 攝職이 중앙으 로부터 승인이 도착하기 이전 상태 표시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帶職을 보유하고 있는 것 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晉州의 幕職官들이 보유한 帶職이 이전 벽소를 통해 승인된 것 이거나 현재 승인을 요청한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전 벽소를 통해 승인된 帶職을 승 인을 기다리고 있는 攝職과 병기한다거나, 승인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攝職 으로 표시하여 명확히 하면서 승인을 기다리는 帶職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 다고 하겠다. 둘째, 攝職이 奏請과 관계없는 非정직의 직책이라 한다면, 왜 徐州는 正職에 있던 인물 을 非정직인 攝職에 임명했던 것일까? 使院新修石㡖記 에 연명한 徐州의 幕職官 중에 高瑀와 誤植은 이미 正職인 支度副使와 營田巡官에 임명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攝 觀察副使와 攝支度推官에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벽소하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攝職이 임명대기자 신분을 표시하는 것이라면 이후 正職으로 연결되었는지 의심스럽다. 다시 말해서 使院新修石㡖記 에 연명한 支度副使攝觀察副使 高瑀는 支度副 使에서 觀察副使로, 營田巡官攝支度推官 吳植은 營田巡官에서 支度推官으로 옮겨가기 위 32) 33) 樊川文集 卷14. 杜牧 唐故銀靑光祿大夫檢校禮部尙書御史大夫充浙江西道都團練觀察處置等使上 柱國淸河郡開國公食邑二千戶贈吏部尙書崔公行狀 : 貞元十二年中第 十六年平判入等 授集賢殿校 書 陝虢觀察使崔公琮愿公爲賓 而不樂之 挈辭載幣 使者數返 公徐爲起之 且曰 不關上聞 攝職可 也. 受署爲觀察巡官. 石雲濤, 唐代幕府制度硏究,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3. p.248.
78 해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승인이 내려와 正職에 취임하였는지 의심 스럽다. 憲宗 元和 4年 (809) 淮西節度使 吳少誠은 병이 나자 申州刺史 吳少陽을 불러 攝節度 副使로 假署(偽署)해서 留務와 군사를 총괄하게 하였다.34) 또한 代宗 大曆 11年(776) 涇 原節度使 馬璘도 병이 심해져 업무를 담당할 수 없게 되자 行軍司馬 兼 都知兵馬使 段秀 實을 攝節度副使 兼 左廂兵馬使로 奏請하여 留務를 맡겼다.35) 2 경우의 攝職은 절도사에 게 유고가 발생하여 생긴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이다. 두 번진에서 攝職을 설치하는 과정을 보면 淮西의 경우는 僞署, 涇原의 경우는 請 이라 하였다. 淮西의 경우는 奏請의 과정이 없고, 涇原의 경우는 奏請을 통해 攝職을 설 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淮西의 경우는 吳少陽이 도착했을 때 節度使 吳少誠 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僞署 의 방식으로 攝職을 설치 했던 것으로,36) 攝職이 奏請과 관계없는 직책이었다면 僞署 라 표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正職으로 전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吳少陽과 段秀實 모두 攝職으로 留務를 담당하던 시기에 전임 절도사가 모두 사망하여 절도사가 되었다. 涇原에서 절도사에게 유고가 생겼을 때 行軍司馬를 불러 굳이 攝節度副使로 삼아 유무 를 담당하게 하였던 것은 막직관의 직무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幕職官은 명확 하지는 않지만 일정 부분 직무가 분담되어 있었다. 節度副使는 藩帥를 補佐하고, 行軍司 馬는 번진의 法令을 담당하였다.37) 節度使에게 유고가 생기면 節度副使가 대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로 보아 번진은 管內에 특정한 사무가 발생했을 때 攝職을 설치하여 처 리를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번진은 막직뿐만 아니라, 관내 지방관에게 유고가 발생하거 나 결원이 생기면 攝職을 설치하여 幕職으로 하여금 지방관을 攝하게 하여 관할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唐代 藩鎭에는 앞에서 살펴본 徐州나 晉州처럼 攝職이 광범위하게 존재했고, 攝職 설 치가 관행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인정되는 제도처럼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武宗 34) 35) 36) 37) 舊唐書 卷145. 吳少陽傳. : 及少誠病亟 家僮單于熊兒者 偽以少誠意取少陽至 時少誠已不知人 乃偽署少陽攝副使 知軍州事.; 新唐書 卷214. 吳少陽傳 : 少誠病亟 家奴單于熊兒矯召少陽至 攝 副使 總軍事. 舊唐書 卷128. 段秀實傳. : 璘思其績用 又奏行軍司馬 兼都知兵馬使. 中略 十一年 (馬)璘疾甚 不能視事 請秀實攝節度副使兼左廂兵馬使. 舊唐書 卷145. 吳少陽傳. : 及少誠病亟 家僮單于熊兒者 偽以少誠意取少陽至 時少誠已不知人 乃偽署少陽攝副使 知軍州事. 通典 卷32. 職官 14. 節度府之僚佐條. : 有副使一人 副貳使 行軍司馬一人 申習法令 判官二人 分判倉兵騎胄四曹事 副使及行軍司馬通署 掌書記一人 掌表奏書檄 參謀無員 或一人或二人 參議謀 劃 隨軍四人 分使出入.
唐代 藩鎭의 攝職 / 李 永 哲 79 會昌 5年(845) 9月 中書門下는 번진의 벽소할 수 있는 인원을 줄일 것을 건의하면서 상 주 말미에 正職 外 攝職設置를 禁하길 命하시 라고 하였다.38) 正職 外 攝職設置를 禁하 길 命하시라는 것으로 보아 각 번진에서 攝職을 일반적으로 또는 관행적으로 설치했다고 하겠다. 상주문에는 攝職을 正職의 막직관 이외 인원이라 하였다. 中書門下는 위 上奏文 앞에 각 번진마다 설치할 수 있는 幕職官의 數와 대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39) 중서 문하는 각 번진의 사정에 따라 막직관을 적게는 1명에서 많게는 8명까지 定員을 제시하 였다. 이 때 중서문하가 제시한 幕職이 正職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외는 攝職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藩鎭마다 正職과 攝職이 달랐다고 하겠다. 雲南判官의 경우 西川에서는 正 職으로 설치 할 수 있지만, 雲南과 가까운 다른 번진에서는 雲南과 관련한 사무가 발생 했을 때 正職으로 설치하지 못하고 攝職으로 설치해야 했다고 하겠다. 武宗 會昌 5年 (845) 9月 中書門下의 상주의 기록은 元和 12年(817)에 세워진 徐州의 使院新修石㡖記 의 연명에 나타난 幕府의 구성과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使院新修石㡖記 에 연명 한 막직관은 15職으로, 이 중 正職은 8職이며 攝職이 7인이다. 中書門下는 徐州가 이전 까지 8명을 설치했는데, 6명으로 줄여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당시 徐州는 員額이 차있 는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인원은 攝職으로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正職 外 攝職設置를 禁하길 命하시 라는 것으로 보아 섭직을 설치할 때도 일정 한 격식이 있었다고 하겠다. 희종은 출신자의 벽소를 다음과 같이 제한하였다 이후 進士에 及第하여 2 년이 지나야 諸道藩鎭과 戶部의 度支 鹽鐵 및 京師에 있는 諸司가 奏請할 수 있다. 만약 奏官( 할 수 있는 資格)에 미치지 못하면 限內에 攝職의 자리가 있으 38) 39) 唐會要 卷79. 諸使 下. 諸使雜錄 下. 會昌 5年 9月 中書門下 奏. :臣等商量須據舊額多少 難於 一例停減 今據本鎭額量減 數亦非少 仍望令正職外不得更置攝職 仍令御史臺及出使郞官御史 專加 察訪 勅旨依奏. 唐會要 卷79. 諸使 下. 諸使雜錄 下. 會昌 5年 9月 中書門下 奏. : 諸道判官員額 西川本有十二 員 望留八員 節度副使判官掌書記觀察判官支使推官雲南判官巡官 淮南河東 舊額各除向前職額外 淮南留營田判官 河東留留守判官 幽州淄靑 舊額各有九員 望各留七員 幽州 除向前職額外 留盧龍 軍節度推官 淄靑 除向前職額外 留押新羅渤海兩藩巡官 山南東道鄭滑河陽京南汴州昭儀鎭州易定鄆 州魏博滄州陳許徐州兗海鳳翔山南西道東川涇原邠寧河中嶺南已上 舊各有八員 望各留六員 節度副 使判官掌書記推官觀察判官支使 振武靈夏益州鄜坊 舊各有八員 緣邊土地貧 望各五員 節度副使判 官掌書記推官觀察判官 浙東浙西宣歙湖南江西鄂岳福建 以上 舊各有六員 望各有五員 團練副使判 官觀察判官支使推官 黔中 舊有十員 望各留六員 經略副使判官招討判官觀察判官支度鹽鐵判官 東 都留守陝府 舊有五員 並望不減 天德 舊有三員 亦望不減 同州 舊有四員 商州兩員 並望不減 防禦 副使 莘州泗州 各有兩員 並望不減 楚州壽州 各有三員 壽州 望減團練副使一員 楚州 望減營田巡 官一員 汝州鹽州隴州 舊各有一員 望不減 桂管 舊有六員 望減防禦巡官一員 容管 舊有五員 望減 招討巡官一員 延州 舊有兩員 亦望減防禦推官一員 樓煩龍陂 舊各有兩員 望各減巡官一員 右奉聖 旨令 商量減諸道判官 約以六員爲額者
80 면 牒에 따라 攝하라.40) 出身者의 벽소자격을 거론하면서 攝職이 거론되고 있다. 자격이 되지 않더라도 攝職의 자리가 있다면 辟召할 수 있었다. 위의 기록을 통해 섭직에 대해 몇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다. 우선 限內有攝職處 라는 것으로 보아 섭직을 충당해야 하는 자리가 있었다고 하겠 다. 임명을 一任隨牒攝 이라는 것으로 보아 벽소가 牒 에 의해 攝 의 방식을 통해 이루 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牒은 번진에서 이루어지는 벽소과정의 문서양식을 가리키는데,41) 崖州의 韋執誼의 벽소과정에서도 보이듯이,42) 攝職의 임명도 正職의 幕職과 마찬가지로 문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또한 攝職을 선발할 때는 攝 이라는 방식43)에 따라 선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을 통해 번진들이 攝職을 설치한 이유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唐은 安史의 亂 이 발생하자 행정과 인사의 효율성을 위해 번진에 辟召權을 인정하였으나, 亂이 끝난 후 부터 藩鎭의 벽소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唐은 代宗 大曆 年間(766-779)부터 막직관 인 원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大曆 12年(777) 4月과 5월에 잇달아 中書侍郞 楊綰과 중서문하 가 막직관 인원을 줄일 것을 건의하였다.44) 中書門下는 구체적인 員數까지 제시하면서 감원을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중앙에서 봉료를 지급하는 막직관의 범위까지 정하여45) 번진에 대해 재정적 압박을 가하였다. 攝職은 중앙에서 俸料를 지급하는 대상이 아니었 을 것이다. 때문에 번진이 攝職을 설치하려면 俸料는 번진 재정으로 충당을 해야 했다. 40) 41) 42) 43) 44) 45) 全唐文 卷89. 僖宗 南郊赦文 : 自今以後 進士及第 幷須滿二周年後 諸道藩鎭及戶部度支 鹽鐵及 在京諸司方得奏請. 如未及奏官 限內有攝職處 一任隨牒攝. 中村裕一, 唐代官文書硏究 第 4章. その他の文書, (中文出版社, 1991.) p.290. 容齊三筆 卷16. 唐世辟寮佐有詞 : 唐世節度觀察諸使辟置僚佐以至州郡差掾屬 牒語皆用四六 大 略如告詞. 李肇國史補 載崖州差故相韋執誼攝軍事衙推 亦有其文. 張東光, 唐代的內供奉官 ( 社會科學輯刊 2005年 第 1期.(總第 156期)) : 張東光은 古代 官員은 正式의 任命 外에 많은 편법적 형식에 따라 임용이 이루어졌는데, 唐代에는 行, 守, 兼, 檢校, 知, 判, 試, 攝, 內供奉 등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內供奉을 제외하고 그 방식이 어떠한 절차 에 따라 이루어졌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新唐書 卷142. 楊綰傳. :時諸州悉帶團練使 綰奏 刺史自有持節諸軍事以掌軍旅 司馬 古司武 所 以副軍 即今副使 司兵參軍 今團練判官. 官號重複 可罷天下團練 守捉使. 詔可. 又減諸道觀察判官 員之半. : 唐會要 卷78. 諸使 中. 諸使雜錄 上. 附 奏薦 大曆12年 5月 10日 中書門下狀奏. : 諸州團練守捉使 請一切並停. 中略 諸道觀察都團練使判官各置一人 支使一人 推官一人 餘並 停. 冊府元龜 卷506. 邦計部 俸祿 2. 大曆 12年(777) 5月 中書門下奏. : 得蘇州刺史兼御史大夫知臺 事李涵 東都河南江淮山南等都轉運使吏部尙書兼御史大夫劉晏 戶部侍郞專判度支韓滉等狀 釐革諸 道觀察使都團練使及判官料錢等 觀察使都如兼使不在加給限 中略 都團練副使每月錢八十貫文雜 給准時價不得過三十貫文 觀察判官與都團練判官每月料錢五十貫文 支使每月料錢四十貫文 推官每 月料錢三十貫文 巡官准觀察推官例 以上每員每月雜給准時價不得過二十貫文 下略.
唐代 藩鎭의 攝職 / 李 永 哲 81 俸料 규정은 번진 재정과 연계되어있어 벽소 인원을 감축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憲宗 元和 元年(806) 7月에 이르면 지방행정을 간소화하기 위해 節度使가 支度營田使 兼職을 금지하였다.46) 더불어 元和 2年(807)에 諸道諸使의 막직관에 대한 改轉規定을 만들 어,47) 德宗 시기에 시작된 冬薦制와 연계시켰다. 다시 文宗 開成 4年(839) 6月에 중서문하 는 行軍司馬와 參謀가 冗官이라는 이유를 들어 폐지하게 하고, 2명을 설치하던 判官을 1 명으로 감원할 것을 건의하였다. 대신 職의 폐지와 축소로 인해 감원된 인원들을 冬薦에 따르게 하여 조정 관료로 끌어들이도록 하였다.48) 武宗 會昌 5年(845) 9月에는 번진의 상 황에 따라 막직관 정원을 조정한 구체적인 규정이 만들어졌다.49) 이 규정에 따르면 唐은 諸道 判官의 정원을 6명으로 보았지만, 이 역시 本鎭의 員額을 減해도 수가 역시 작지 않 다 는 것으로 보아 이후 지속적으로 감원하려 했다고 하겠다. 중앙에서 지속적으로 번진 이 설치할 수 있는 인원을 감축한 것과는 반대로 번진의 행정량은 점차 늘어났다.50) 따라 서 기존의 막직관으로 행정을 수행하기 힘들게 되면 번진은 攝職을 설치하여 처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설치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攝 자를 직위 앞에 正 職과 구분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正職이 아닌 攝職은 중앙에서 俸料를 지급하는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설치해야 하는 이유가 사라지게 되면 폐치되었을 것이다. Ⅳ. 結論 이상에서 唐代 藩鎭의 攝職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전의 연구에서는 攝職을 벽소된 後 중앙으로부터 승인을 기다리는 임명대기자 신분 또는 중앙에 대해 주청의 과정을 거치지 46) 47) 48) 49) 50) 全唐文 卷60. 罷諸道節度使兼支度營田使詔 唐會要 卷81. 考上. 元和 2年 5月條 : 中書門下擧今年正月勅文上言 國家故事於中書置具員溥 中略 諸道及諸司副使 行軍司馬 判官 參謀 掌書記 支使 推官 巡官等 有勅充職掌 帶檢校五品已 上官 及臺省官 三考與改轉餘官 四考餘改轉. 唐會要 卷79. 諸使 下. 諸使雜錄 下. 文宗 開成 4年 6月 中書門下奏. : 諸道節度使參佐 自副使 至巡官 共七員 觀察使從事 又在數內 雖大藩雄鎭 有籍才能 而邊鄙遐方 豈易供級 況行軍之號 本 繁出使 參謀之職 尤是冗官 其行軍司馬及參謀 望勒停省 見人如本道有相當職員 任奏請改轉 其餘 官序稍高者 許隨表赴京 到日 量才獎授 郞御史以下 各令冬薦 節度判官舊額 雖本兩員 近日諸道 起今已後 望以一員爲定 其課科等 本是供軍數內 戶部不可更收 勅旨依奏 註60)와 같음. 李勤明, 五代宋初 胥吏存在形態의 變化와 그 性格 -胥吏制度의 確立過程과 關聯하여-,( 東洋史 學硏究 40., 1992.) 참조.
82 않고 선발한 短期의 非정직의 신분이라 하였다. 攝職은 憲宗 元和 12年의 徐州와 穆宗 長慶 2年의 晉州 使院의 幕職官 구성을 통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 다. 또한 元和 4年 (809) 淮西에서 吳少陽을 攝節度副使로 假署한 것과 代宗 大曆 11年 (776) 涇原에서 行軍司馬 兼 都知兵馬使 段秀實을 攝節度副使 兼 左廂兵馬使로 奏請하였 던 것을 통해 攝職이 기존의 주장과는 다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攝職은 攝 이라는 방식을 통해 선발했던 자체로서 단독의 직책으로 보이며, 벽소 과정 도 正職의 막직관과 마찬가지로 문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攝職은 帶職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의 승인을 통해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중앙으로부터 봉료를 지 급받았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藩鎭이 攝職을 설치했던 것은 중앙이 지속적으로 막 직관 인원을 줄이고 俸料를 지급하는 막직관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이 막직 관 인원을 줄였던 것과는 반대로 번진에서는 행정량이 점차 증가하였다. 번진은 기존의 막직관으로 처리하기 힘들어 지거나, 절도사에게 유고가 발생하여 留務를 담당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면 攝職을 설치하여 처리하였다. 藩鎭에서 攝職은 武宗 會昌 年間 에 이르면 관행적인 제도처럼 설치되었다. 그렇지만 攝職은 藩鎭의 財政에 의해 운영되 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운영하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설치 목적이 달성되면 廢置 하는 短期로 설치된 직책이었다고 하겠다.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 연구 春秋 에 대한 기본인식과 三傳의 활용을 중심으로 홍 승 태(한국외대 역사문화연구소) 目 次 1. 春秋 의 해석과 春秋 三傳의 활용문제 2. 당대 춘추학의 기본인식과 해석방법의 변화: 담조 조광 육순의 춘추학 3. 송대 춘추학의 정치성과 방법론적 특징 1. 春秋 의 해석과 春秋 三傳의 활용문제 春秋 는 孔子가 편수한 儒家의 주요 經典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춘추 魯나라 隱公 元年(기원전 722년)에서 哀公 14年(기원전 481년)까지 약 240여 년 동안 춘추열국의 전 쟁과 회맹 등 주요 정치적 대사를 기록하고 있는 편년체 史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記 述이 지나치게 간략하고 의미가 함축적일 뿐만 아니라 춘추 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설본 (전수본) 즉, 큰 난제는 左氏, 公羊, 穀梁 등 이른바 春秋三傳1)이 존재하였다. 춘추학의 가장 춘추 경전이 사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간략한 記事로부터 공자가 춘추 를 저술한 의도와 大義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춘추 해설본인 三傳은 공통점도 있지만 그 내용이 서로 다르기도 하다. 1) 춘추 삼전의 특징과 장단점에 대해 史記 와 漢書 그리고 陸德明의 經典釋文序錄 등에 의하면, 春秋 에는 세 가지 解說本(傳 授本)이 있다. 한 가지는 左氏春秋 로 秦代이전의 文字로 쓰여져 漢書 藝文志 에서는 春 秋古經 라고 불렀다. 다른 두 가지가 바로 公羊 과 穀梁 인데, 두 해설본 모두 口傳의 방식 으로 전해지다가 漢代에 와서야 문자로 기록되었다. 때문에 公羊 과 穀梁 은 今文 라고 부르 고, 先秦時期의 문자로 기록된 左氏 는 古文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해설본은 대 체로 비슷하긴 하지만 큰 차이도 존재한다. 예컨대, 魯襄公21年의 기재를 보면, 公羊 과 穀梁 에는 각각 11월 庚子에 孔子가 태어났다(十有一月庚子, 孔子生), 庚子에 孔子가 태어났다(庚 子, 孔子生) 라고 기록된 반면, 左氏 에서 이 記事를 찾아볼 수 없다. 楊伯峻 春秋左傳注 (中 華書局 2000년 7월판) 제5쪽 참조.
84 南宋의 朱熹(1130~1200)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左氏 는 일찍이 國史를 보고 그 사실을 고찰하는 데는 대단히 정밀했다. 그러나 그 大 義를 알 수가 없어서 오직 극히 일부분에 따라서 그 뜻을 이해할 수밖에 없으니 종종 講 學할 수가 없었다. 公羊 과 穀梁 은 사실의 고찰에는 매우 疏略되어 있지만, 그 義理는 ) 에 따라서 經典의 의미가 나오는 것이지만, 오히려 훌륭했다. 이 양자( 좌씨와 공양곡량 전해지는 것에 너무 많은 말들이 있어서 모두 國史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2) 三 傳에 대해 말하면, 左氏 는 史學이며 公羊 과 穀梁 은 經學이다. 사학은 역사사실을 기 록하는데 상세하지만, 그 道理 상에는 편차가 있다. 경학은 그 義理 상에는 그 공헌한 바 가 있지만, 記事에는 많은 오류가 있다. 3) 여기서 말하는 춘추 의 大義 혹은 義理란 經世大法으로 君臣 父子 兄弟 夫婦의 諸 關係, 華夷의 구분, 上下尊貴의 구별 등을 밝히는 정치의 원칙이자 윤리강령을 말한다. 특히 尊王攘夷 大一統 尊君抑臣 등의 원칙은 중앙집권강화와 주변 이민족에 대한 정책에 이념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때문에 춘추 는 다른 경전에 비해 현실정치에 대 한 지도적 계도적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經學으로써 春秋學의 목적은 경전에 대한 해석 에 집중되지만, 공자가 왜 춘추 를 편수했으며, 춘추 의 대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역대 시대별 춘추학자들이 집중해야 했던 문제였다. 이는 춘추 에 대한 기본 인식에 관 한 것이며, 춘추 를 연구하는 방법론적 특징을 결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 였다. 즉, 春秋學史에서 춘추 를 하나의 史書로 인식하고 이에 집중할 경우 三傳 가운데 左氏 를 선택하여 연구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춘추대의를 보다 강조하여 현실정치에 반 영하고자 할 때는 주로 公羊 이나 穀梁 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 삼전의 장단점을 상호 보완하여 절충적으로 활용하는 방법 역시 춘추학의 대표적 방법론이다. 본고는 唐 중기부터 시작된 춘추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새로운 방법론의 대두에 주 목하고 이러한 경학의 특징이 宋代에 이르러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했는가를 다루고 있 다. 특히 唐의 啖助 趙匡 陸淳의 방법론이 宋代 春秋學에 미친 영향과 그 특징을 중심으 로 고찰하고자 한다. 2) 3) 朱子語類 권83 春秋綱領 : 左氏 曾見國史, 考事頗精, 只是不知大義, 專去小處理會, 往往不 曾講學. 公 穀 考事甚疏, 然義理却精. 二人乃是經生, 傳得許多說話, 往往都不曾見國史. 中華書 局 1999년 6월판 제2151쪽~2152쪽. 같은 책, 권83: 以三傳言之, 左氏 是史學, 公 穀 是經學. 史學者記得事却詳, 於道理上便差; 經學者於義理上有功, 然記事多誤. 제2152쪽.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 연구 / 홍 승 태 85 2. 당대 춘추학의 기본인식과 해석방법의 변화: 담조 조광 육순의 춘추학 당대 전기 춘추 경전에 대한 인식은 春秋 와 左傳 을 동일시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春秋 는 대부분 左傳 을 지칭했다. 이는 춘추 를 일종의 역사서로 보 는 경향 때문이다. 唐初 당 태종의 詔令에 따라 孔穎達 등이 易 禮記 春秋 가운데 春秋 는 (661~721)는 五經正義 즉 詩 書 등 유가의 다섯 가지 경전에 대한 주해작업을 진행했는데, 이 春秋左傳正義 로 편수하였다. 또한 당대 저명 史學家인 劉知幾 公羊 과 穀梁 에 대해 회의적이며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을 저술한 그는 역사적 관점에 春秋 를 이해하고 접근했다. 史通 정체 경향을 보이던 당대 춘추학은 啖助 趙匡 陸淳 등 中唐 시기의 대표 학자들에 의 해 새로운 변화가 주도되었다. 사제관계이기도 한 세 인물의 춘추학사에서의 공헌은 춘 추 경전 본래의 뜻에 접근하기 위해 三傳의 장단점을 균형적으로 취사 절충하려한 시도 에 있었다. 담조(724~770)는 춘추 三傳이 각각 며, 삼전의 장단점을 상호 보완해야 만이 다. 즉 춘추 의 原義에 접근하는 데는 모두 실패했으 춘추 의 본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 좌씨 에서 소략되거나 정밀한 부분을 고찰하고 공양 과 곡량 의 장단점을 분 별해야 하며, 상호 극단적인 차이가 있는 부분을 제거하고 미진한 부분을 상호 보완한다 면 본의에 밝게 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4) 春秋集傳纂例 에서 담조는 나는 三傳을 상세하게 고찰하여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였다. 또한 前代 학자들의 註釋을 종합하 기도 했으며, 내 자신의 관점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기도 했다. 5)고 진술하였다. 여기 서 주목할 말한 것은 三傳의 취사와 절충적 방법 이외에도 前代 학자들의 註釋을 참고하 고 나아가 자신의 관점에서 해설을 덧붙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방법은 孔穎達 등의 五經正義 이래로 줄곧 춘추 를 좌씨 로 이해했던 당대 전기 춘추학의 경향과 다른 새 로운 인식과 방법이었다. 특히 춘추 에 대한 기본인식에서 나는 춘추 가 시대의 폐단 을 구제하고 예의질서가 薄弱해지는 것을 개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6)는 원칙을 분명하 게 밝히고 있다. 이는 춘추 를 단지 춘추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편년체 史書로만 보지 않고, 역사사실 이면에 내포된 春秋大義가 시대를 초원해 여전히 현실정치에 대한 지도 4) 5) 6) 代國子陸博士進集注春秋表 : 考 左氏 之疏密, 辨 公 穀 之善否, 務去異端, 用明本意, 助或未 盡, 敢讓當仁. 春秋集傳纂例 권1 啖氏集傳注義 春秋集傳纂例 권1 春秋宗指議第一 : 予以爲 春秋 者, 救時之弊, 革禮之薄.
86 적 의의를 갖는다는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趙匡 역시 공자가 춘추 를 편수한 목적과 의도는 王道를 밝히는 데 있었으며(明王道), 때문에 춘추 는 救世 의 목적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춘추 가 마치 사람의 병을 치유하는 침이나 약과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몸에 비유해 본다면, 춘추 가 만약 養生의 법이라면 병을 예방할 수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병이 이미 생겼다면, 양생의 책 그 자체가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실제로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침과 약일 뿐이다. 그러므로 춘추 는 역시 세 상을 치유하는 침과 약인 셈이다. 7) 이렇게 춘추 를 經世致用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는 그가 처했던 정치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唐 玄宗 天寶연간(742~756) 번진 절도사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중앙은 점차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황제의 지위와 권 위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으며, 安史의 난(755~762)이 폭발하면서 당왕조는 쇠퇴의 길 로 접어들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山東과 河北일대의 번진할거의 형세는 더욱 가속화 되었고, 안으로 宦官의 득세는 朝廷의 정치를 더욱 문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실은 唐 肅宗과 代宗시기에 살았던 조광 자신의 춘추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러한 경향은 춘추학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宋代 학자들에게도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 가 운데 하나이며, 역시 송대 춘추학에 미친 영향이기도 하다. 四庫全書 는 二程의 말을 인용해 春秋集傳纂例 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론하였다. 이전 다른 春秋家들보다 뛰어난 점은 異端을 몰아내고 정통을 열어놓은 공로였다. 三傳 의 편중됨을 버리고 春秋 經文의 본래 뜻을 밝히고자 했는데, 이는 실제로 宋人들의 앞 길을 인도해 주었다. 8) 南宋의 장서가이자 서지학자인 陳振孫은 直齋書錄解題 에서 漢 儒이래 春秋 를 말하는 사람들은 三傳을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 여겼지만, 三傳 이외에 탁월한 식견이 천년 후에도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啖助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 공로는 사라질 수 없다. 9)고 높이 평가하였다. 淸代 경학가 皮錫瑞(1850~1908)는 經學通論 에서 春秋 三傳을 두루 종합하여 채용한 것은 啖助부터 시작되었으며 근래 三傳을 종합 하여 한 권으로 저서로 만든 것은 唐 陸淳의 春秋簒例 에서 시작되었다. 육순은 담조와 조광의 학설에 근원을 두었으며, 삼전을 두루 채용하고 취사ㆍ선택하여 한 권으로 합하 였다. (삼전의) 각 부문을 通學으로 변화시킨것은 춘추경학의 일대 변화였으며, 춘추학을 7) 8) 9) 春秋集傳纂例 권1: 喩之一身, 則養生之法, 所以防病, 病旣作矣, 則養生之書不能治也, 治之者 在針藥耳. 故 春秋 者, 亦世之針藥也. 四庫全書 春秋集傳纂例 : 程子則稱其絶出諸家 有攘異端開正途之功 蓋合傳求經 實導宋人之 先路. 直齋書錄解題 권2: 漢儒以來, 言 春秋 者惟宗三傳, 三傳之外, 能卓然有見于千載之後者, 自啖 氏始, 不可沒也.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 연구 / 홍 승 태 87 연구하는 宋儒들 모두 이 일파에 속한다. 10) 이상의 평가로부터 알 수 있듯이 당 중기부 터 시작된 춘추학의 인식과 방법의 변화는 송대에 영향을 주었다. 첫째, 章句 해석에 치 중하는 훈고학적 방법에서 내재적 의미구조를 파악하는 해석으로의 전환이다. 당 중기 이전까지 춘추학 연구는 대부분 글자 해석위주의 훈고학적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 지만, 담조 조광 육순 등의 학자들로부터 새로운 해석과 방법이 시도되었다. 특히 三傳을 절충적으로 취사 선택하는 방법을 채택했는데, 이는 이전의 춘추학이 오직 삼전 가운데 하나에만 선택하여 연구하는 전통적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특히 담조는 이전 학자들의 주석을 참고로 삼전과 더불어 모두 춘추 경전을 해석하는 데 활용하였다. 또한 전대 학 자들의 해설을 수집하고 그 가운데 타당한 부분을 적절하게 선택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해설을 덧붙인 점 또한 이 시기 춘추학의 방법론적 특징이다. 3. 송대 춘추학의 정치성과 방법론적 특징 당 중기부터 시작된 춘추학의 변화는 송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경학사의 범위에서 宋 代 학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한 경전이 바로 春秋 이다. 宋史 藝文志 의 통계에 의하 면, 經典類 총 1304部 가운데 春秋 는 240部로 가장 많았고, 易 이 230部로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었다.11) 또한 역대로 보아, 春秋 를 講說한 학자가 兩宋에 가장 많았다.12) 이처럼 春秋學이 宋代에 흥성했던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春秋 가 다른 儒家經典에 비해서 현실정치의 요구와 직접적으로 부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思辨的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易 이 哲學的이고 春秋 는 일종의 政治 敎科書 로서 君主에게 유가적 통 치이념의 大綱을 제공하고, 儒家的 소양을 지닌 관료들을 통해 그 理想을 현실정치에 실 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經典이었기 때문이다. 五代時期의 장기적인 정치적 혼란을 거쳐 건국한 宋朝에게 안으로 중앙집권의 강화와 밖으로는 주변국의 대한 대응이라는 정치적 요구는 10) 11) 12) 春秋 에 내포된 이른바 尊王 과 攘夷 라는 大義와 정면으로 부합되는 것이었 經學通論 권4 春秋 : 春秋 雜采三傳, 自啖助始. 今世所傳合三傳爲一書者, 自唐陸淳 春秋 纂例 始. 淳本啖助 趙匡之說, 雜采三傳, 以意去取, 合爲一書, 變專門爲通學, 是春秋經學一大變. 宋儒治春秋學者, 皆此一派. 經典類 총 1304부 13608권 가운데 春秋 는 240부 2799권에 달하고 있고, 그 다음으로 易 230부 1740권, 小學 206부 1572권, 禮 113부 1399권, 樂 111부 1007권, 詩 82부 1120 권, 論語 73부 579권, 書 60부 802부 經解 58부 753권, 孝經 23부 35권 등이다. 宋史 卷202 志 第155 藝文 1. 四庫全書總目提要 券29, 日講春秋解義 條.
88 다. 때문에 宋代 春秋家들은 이러한 春秋大義에 입각해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 比喩 의 방식으로 현실정치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해석가 자신이 처한 현실정치의 상황을 반 영하여 春秋 에 대한 재해석과 비판을 진행했는데, 북송 孫復(992~1057)의 微 와 남송 胡安國(1074~1138)의 胡氏春秋傳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春秋尊王發 이들은 송대 춘추학이 가지고 있는 특질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宋初 三先 生 가운데 한 명인 孫復은 그의 저서 春秋尊王發微 를 통해서 尊王 과 攘夷 의 대의 가운데 尊王 의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북송 중기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제도적 정비가 절실했던 宋朝에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의 방법론은 당말 啖助, 趙匡, 陸淳 등의 춘추가들을 계승한 것이지만, 三傳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 송대 춘추학의 선도적 영 향을 미쳤다. 兩宋의 五朝를 경험한 胡安國은 북송의 멸망과 靖康의 치욕 을 목격하면서 尊王 의 기초 위에 攘夷 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였다. 이 역시 남송 초, 송조가 직면했던 대내외적 현실을 반영했던 것인데, 淸儒 王夫之는 胡氏春秋傳 에 대해 尊王과 攘夷의 대의를 저술해 高宗에게 알리고 세상에 전해지게 했다. 이는 人心을 바로 잡고, 靖康의 치욕을 씻으며, (송조로 하여금) 建炎의 衰落으로부터 일으키고자 한 것이니, 진실로 당 시의 龜鑑이었다. 13)고 평가하였다. 송대 춘추가들에게 春秋 는 역사고증을 필요로 하는 史書라기보다는 여전히 간략한 역사사실에 함축된 유가적 정치이념 즉 尊王 과 攘夷 를 표달하는 經書로서의 의미가 더욱 컸다. 즉, 春秋 는 君父를 尊崇하고, 반란의 적을 토벌하며, 邪說을 배격하고, 人 心을 바로 잡으며, 中華로 오랑캐를 제어하는 經世의 大法 14)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春秋 大義는 이른바 尊王 과 攘夷 로 함축되는데, 尊王은 군주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중앙집 권의 강화를 의미하며, 攘夷는 왜구의 침략을 제어하는 것을 의미했다. 唐末 五代에 藩 鎭勢力이 强盛하고, 빈번한 왕조의 교체와 이에 따른 극도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은 宋朝 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무엇보다 송조는 개국 초부터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한 정치 적 제도적 조치를 취했는데, 春秋 에 내포된 尊王攘夷 는 이러한 현실에 가장 잘 부합 되었다. 바꿔 말해 송조의 대 내외정책에 대한 이념적 근거를 제공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대 중기부터 시작한 春秋三傳에 대한 선택적 절충적 방법은 송대 춘추가들에 게 보편적으로 활용되었다.(표1/2 참조) 春秋 를 주해한 좌씨 공양 곡량 등의 三 傳이 모두 그 자체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러한 결함 자체 가 송대 춘추가들의 다양한 방법론과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三傳에 대한 13) 14) 王夫之, 宋論 臺灣里仁書局 1985년 2월판 제184쪽. 春秋胡氏傳 春秋傳序 吉林出版集團 2005년 5월판 제5쪽.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 연구 / 홍 승 태 89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채용의 방식과 파격은 한편으론 송대 疑經思潮를 반영하는 것이지 만,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송조가 직면한 대내외적 정치현실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춘추학은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朱 熹는 胡氏春秋傳 에 대해 牽强附會 15)라고 비판했고, 四庫全書總目提要 에서는 胡安 國이 당시 현실의 문제에 격한 느낌을 가지고서 종종 春秋 를 빗대어 그 의미를 전달 했다. 따라서 그 하나 하나를 經典의 원래 의미에 부합시킬 필요는 없다 16)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春秋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정치적 의도와 목적에 의한 저술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실, 胡安 國은 春秋 를 史外傳心의 要典 17)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역사사실을 넘어 聖人의 뜻 을 전달하는 儒家의 經典이란 의미이다. 즉, 그는 春秋 가 역사고증을 요구하는 史內 의 斷代史가 아니라 史外 로 春秋大義를 밝히는 聖經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 춘추대의 를 표달하는 방법과 그 내용에 있어서는 송대 춘추가들마다 차이가 있었고, 춘추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했던 것이다. <표 1> 北宋 주요 춘추학자의 春秋三傳 활용표 저자 歐陽修 孫 復 周堯卿 서명 春秋三傳의 취사와 절충 學者不信經而信傳, 不信孔子而信三子 春秋或問 春秋尊王發微 春秋說 讀春秋者, 可以三隅反矣 不取三傳注, 其言簡而義詳 大約本于陸淳, 而增新義 至三傳之異同, 均有所不取 曰 聖人之意豈二致耶 據三傳注疏及啖趙之學, 缺者以己意釋之 王 晳 春秋皇綱論 胡 瑗 春秋口義 以 谷梁 為主 融會三傳, 取其長義 春秋權衡 平三傳之得失, 然後集眾說, 斷以己意 春秋意林 等 知經而不廢傳, 亦不盡從傳, 據義考例, 以折衷之 兼取三家而折衷其是 旁考啖 趙 陸淳諸家之義, 劉 敞 출처 春秋論 經義考 宋史 儒林傳 宋史 儒林傳 玉海 春秋經社要義 直齋書錄解題 經義考 而推演明復 朱長文 春秋通志 王 當 春秋釋 等 議論純正, 文辭簡古, 于經傳多所發明 經義考 沈 括 春秋機括 取丘明所著二書, 用司馬遷 史記 法 張 根 春秋指南 專以編年, 旁通該括諸國之事 略舉要義, 多所發明 文獻通考 春秋臣傳 以人類事, 凡二百五人, 附而名者又三百九也 經義考 之言, 頗系之以自得之說 春秋通志 序 直齋書錄解題 鄭 昂 孫 覺 春秋經解 多主 谷梁 之說, 而參 左氏 公羊 宋元學案 轍 春秋集解 事本 左氏, 不得已乃取二傳 直齋書錄解題 蘇 程 15) 16) 17) 頤 春秋傳序 左氏 不可全信, 而 公羊 谷梁 又次於 左氏 朱子語類 권83, 中華書局 1999년 6월판 제2155쪽. 四庫全書總目提要 : 感激時事, 往往借 春秋 以寓意, 不必一一悉合於經旨. 春秋胡氏傳 春秋傳序 吉林出版集團 2005년 5월판 제4쪽. 河南程氏遺書
90 朱 臨 春秋統例 吳 孜 春秋折衷 유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唐 啖助의 春秋統例 와 서 명이 같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유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唐 陳岳의 春秋折衷論 과 서명이 같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排比事實為儷句蒙求之類也 據經傳歲月為表首敘周魯繼以齊晉秦宋衛陳蔡曹鄭呉楚越之國 春秋集傳 乃集三傳之說, 刪為一書 郡齋讀書志 經義考 春秋要論 等 春秋集議略論 左氏多記事, 公 谷專解經 然考之有得失 辨三傳諸家得失, 及采陳岳折衷 經義考 玉海 副 春秋三傳同字 經有例法, 一家所至, 較然重輕 文獻通考 文濟道 楊彥齡 左氏綱領 左氏春秋年表 王 沿 賈昌朝 李堯俞 丁 杜 崇文總目 諤 春秋會義 集三十余家, 成一書, 其後仍斷以己意 郡齋讀書志 王 乘 余安行 春秋統解 推明筆法, 得其大旨 歷代名臣奏議 劉 弇 春秋講義 黎 錞 春秋經解 其書為經觧者, 言以經解經也 其後又為統論附焉 朱 振 春秋指要 等 不拘類例, 專取經意 春秋新傳 采三傳及孫復四家書, 參以己意為之 經義考 左氏 公 穀, 其大致不必一一盡同 龍雲集 文獻通考 經義考 <표 2> 南宋 주요 춘추학자의 春秋三傳 활용표 劉 許 저자 絢 翰 羅從彥 胡安國 葉夢得 江 琦 張九成 蕭 楚 崔子方 張大亨 康 既 胡 寧 呂本中 高 闶 劉 朔 陳傅良 呂祖謙 張 洽 魏了翁 李明復 黃仲炎 蔡 沆 趙鵬飛 呂大圭 王應麟 家鉉翁 鄧名世 서명 春秋傳 襄陵春秋集傳 春秋三傳의 취사와 절충 祖于程氏, 專以孔孟之言斷經意 舍經而信傳, 則是得枝葉而忘本也; 棄傳而觀經, 則是去甘石 梁溪集 書襄陵春 春秋指歸 胡氏春秋傳 石林春秋 等 之書而窺天也, 二者胥失, 餘患此久矣 春秋 之揜於傳 注也, 猶鑒揜於塵 事按 左氏, 義取 公羊 谷梁 之精 酌三家求史與經 春秋講義 依 春秋 事例, 而發揮 孟子 之義 春秋辨疑 等 출처 宋元學案 獨研究春秋之旨, 裒古今傳注, 參挍取捨 秋集傳後 豫章文集 斐然集 直齋書錄解題 經義考 春秋經辨 自漢唐以來, 春秋專門, (蕭)楚獨以經授 江西通志 春秋邦典 取周官而折衷焉, 以暢孔子不說之意 經義考 春秋經解 等 春秋通訓 春秋通旨 春秋解 等 息齋春秋集注 春秋比事 春秋後傳 左氏傳說 等 春秋集注 春秋要義 春秋集義 春秋通說 春秋五論 等 春秋集筌 春秋五論 等 春秋三傳會考 春秋傳詳說 春秋四譜 辨三傳之是非, 而傳以日月為例 丘明(左氏)因事發凡 大概本諸程氏 胡氏蓋多取之, 欲觀正傳 直齋書錄解題 春秋通訓 後序 經義考 自三傳而下, 集諸家之說, 其所擇頗精 呂氏春秋集解 即經類事以見其始末, 可以舍傳而獨考 春秋比事 序 其學專本程氏, 序文可見 通二傳于 左氏, 以其所書, 證其所不書 取 左氏 之文, 分別為十九目 集諸家之長, 而折衷於至當 專取丘明(左氏)之傳, 以釋孔氏之經 取惇頤以下十七家, 乃定其先後, 審其精粗 彼三傳者, 不知其紀事皆以為戒也 自左氏 公 穀以來, 傳注者無慮百家, 往往辭舛意詭 三傳固無足據, 舍傳從經 三傳要皆失實, 失之多者, 莫如 公羊 三傳皆有得於經而有失焉 三傳之是者取焉, 否則參稽眾說而求其是 考三傳同異往往發諸儒所未及 直齋書錄解題 左氏傳輔注 序 四庫全書總目 春秋集注 序 春秋要義 春秋集義 春秋通說 序 經義考 春秋經筌 序 春秋或問 跋 困學紀聞 春秋傳詳說 序 經義考
唐宋 春秋學의 방법론 비교 연구 / 홍 승 태 高元之 春秋義宗 凡三百餘家, 訂其指歸, 刪其不合者, 會稡為一書 攻媿集 劉 夙 範士衡 春秋講義 劉公 講義 一以聖筆為據依 閩中理學淵源考 趙 黃 瞻 震 春秋經解義例 春秋本末 等 讀春秋 先之 左氏 而不合, 則求之 公 穀 春秋一經, 其說曼衍, 皆傳注害之 是則非以義理求聖經, 反以聖經釋凡例也 景迂生集 江西通志 黃氏日抄 91
당송시기 妾의 생활 夫妾관계의 계약적 특성을 중심으로 최 해 별(이화여대) 目 次 머리말 一. 표현방식의 차이: 娶妾, 納妾, 買妾 二. 夫妾 관계의 성립 과정: 계약적 특성의 강화 三. 당송시기 첩의 신분적 변화: 그 유동성 에 대하여 餘論: 妾과 婢(女使) 경계의 모호화 머리말 당률의 규정에 의하면 가정에서의 첩과 비는 신분적으로 볼 때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당률은 以婢爲妾 을 금지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1) 이렇듯 비와 첩의 신분적 차이는 확 실한 듯 보이는데, 남송 시기 사람들의 언설 속에서, 그 신분적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 전형적인 예로 유극장은 전현승의 첩인 유씨와 그 아들의 여사인 추국 사이의 재산 분쟁에 관한 판례문에서, 이 둘을 두고 止是兩個所生母耳 라고 하여 그 경계가 불분명함을 드러내고 있다.2) 송대 첩과 비의 경계의 불분명함은 기존의 연구자들의 토론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 데, 이브레이는 송대 첩의 지위는 노비에 가깝다고 지적한 바 있다.3) 본 논문에서는 당 1) 唐律疏議 卷一三 諸以妻為妾 條, 中華書局, 1983년, 256 257쪽. 中華書局, 2002년, 251 256쪽. Patricia Buckley Ebrey, Concubines in Song China, Journal of Family History 11, 1986, pp.1-24 2) 清明集 卷八 繼絕子孫止得財產四分之一, 3)
94 송시기 첩이 夫(主君)4)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중심으로 가정에서의 첩의 위치 및 그 생 활상(像)을 토론해 보고자하며, 이를 통해 당송시기 특히 송대 첩과 비(여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향에 대한 부분적 설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당송 사회의 소위 雇傭契約 의 발전은, 첩이 남주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송 시기 고용 계약에서의 여성과 관련된 기존의 토론은 주로 婢, 女使에 대한 토론에 집중해 있었다. 그러나 이시기 첩 역시 점차 계약의 형식으로 주군에게 고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본 논문은 고용 계약적 특징의 강화가 당송시기 첩의 생활에 어떤 영향 미쳤는지, 또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고용 계약 이라고 하는 것은 현대적 의미의 고용계약과 분명한 차 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송대의 雇婢 성격을 토론한 한 연구에서는, 송대의 雇 는 고용 과 다르며 매매 에 더 가깝다고 지적했다.5) 그러나 당시 雇婢가 고용이냐 매매냐 라는 양자택일 식 토론에 제한되면 정태적 관찰에 머무르게 된다. 연구자에게 더욱 필요 한 것은, 당시 비녀가 가정에 들어오는 방식이 어떠한 새로운 경향의 변화를 보이고 있 고, 이 변화가 어떤 요소를 통해 드러나는지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첩에 대한 토론에 있어서도, 첩이 주군과 관계 맺는 방식에 어떤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어 떤 요소를 통해 이 경향이 드러나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당, 송대의 첩에 관한 연구는 이미 많이 이루어졌지만,6) 비교사적 시각으로 당송시기의 변화에 대한 조명은 부족하다.7) 필자는 당송시기 첩의 처지에 대한 비교를 통해 당송시기 사회의 변화가 첩의 생활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자 한다. 본고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뉘는 데, 먼저 당송시기 첩을 들이는 것에 대한 표현 방식의 차이를 살핀 연후, 첩을 들이는 과 정을 추적하며, 마지막으로 송대 가정에서의 첩의 유동적 특징을 토론하고자 한다. 4) 5) 6) 7) 소위 夫妾 관계라고 하는 것은 첩과 남자 주인의 관계를 의미하며, 夫 를 남 주인, 혹은 당송 시기의 표현으로 主君 이라 하기도 한다. 그 적절한 용어에 있어서는 충분한 토론이 필요하다. 桂始馨, 宋代雇婢性質淺析, 史學月刊 2005年第4期, 30쪽. Patricia Ebrey, Concubines in Sung China, Journal of Family History 11, 1986, pp.1-24; The Inner Quarters: Marriage and the Lives of Chinese Women in the Sung Perio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pp.217-234; 焦杰 唐代的姬妾及其社会地位, 陕西师范大学学报 1996年 第2期, 109-114쪽; 姚平 唐代女性的生命历程, 2005年, 144 172쪽. 이 외에 최근 석 사학위 논문으로, 张琰琰 唐代妾侍问题研究 (中山大学硕士学位论文, 2004年)와 吕永 宋代的 妾问题研究 (安徽师范大学硕士学位论文, 2007年) 등이 있다. 당송시기의 변화를 조명한 토론은 부족하며, 송원시기의 첩에 대한 토론으로는 Beverly Bossler 의 宋元墓誌中的 妾 在家庭中的意義及其歷史變化 가 있다. (2003年 10月, 대만 臺北東吳大學 에서 개최된 宋代墓誌史料的文本分析與實證運用 國際學術研討會 논문집) 그러나 이 논문은 주 로 모친으로서의 첩에 대한 토론에 집중하여, 첩과 주군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부족 하다.
당송시기 妾의 생활 / 최 해 별 95 一. 표현방식의 차이: 娶妾, 納妾, 買妾 기존의 첩과 관련된 연구에서는 주로 첩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칭호에 대해 분석을 진 행했다. 여기에서는 주로 첩을 들이는 행위에 대한 표현 방식, 즉 서술어 부분 娶, 納, 買, 雇 등의 변화를 살피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서술어의 변화가 첩에 대한 당 시 사람들의 태도나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즉 똑같이 매매의 방식으로 첩을 들였다 하더라도 그 서술어가 다를 수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각종 사료에서 보이는 표현 방식을 고찰 할 때, 우선 그 사료의 유형을 주의해야 하는 데, 법률 조항, 묘지명, 필기소설 등, 서로 다른 종류의 사료에서 나타나는 표현 방식은 서로 다르다. 당대 법률에서 첩과 관련된 규정을 언급할 때는 주로 買 자를 썼다. 아마도 법률에서 첩의 신분상의 특징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률은 妾通買賣 라 언급하고 있 고,8) 同姓 의 결혼을 금지하는 조항에서는 買妾不知其姓, 則卜之 9)라고 하였다. 그러나 묘지명, 필기 소설 등을 보면, 買 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대 첩의 묘지명 에서는 주로 納妾 이라 썼다. 천보 년간의 故美人李二娘墓誌銘 의 기록을 보면, 李氏 者, 王公之美人也 王公好奇賞異, 求聘納焉 10)라고 하였다. 大中 년간 (847-860)의 前監察御史歸仁晦의 첩 지씨의 묘지명을 보면, 予以開成元年納支氏, 以備紉針之役 11)라 하였고, 咸通 년간(861 874)의 唐張氏墓記 를 보면 咸通五年, 有劉異自鳳翔節度使移 鎮于許, 始面張氏 八年, 納而貯於別館 12)라 하였다. 당대 필기 소설을 보면, 역시 納 자로 묘사하고 있다. 梁襄陽杜嶷新納一妾 13), (柳)元 公為西川從事, 嘗納一姬 14)라고 하였다. 어떤 경우, 娶妾 이라고 쓰기도 했다.15) 이렇듯 당대 개인들의 저작에서는 買妾 이라는 표현을 찾아보기 어렵다. 신분을 규정하거나 규 범적인 내용을 언급하는 법률의 경우, 주로 매 자를 쓰지만, 구체적인 한 개인의 첩을 들이는 행위에 관해서는 매 자로 표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8) 唐律疏議 卷一三 諸以妻為妾, 256쪽. 262쪽. 10) 唐代墓誌彙編續集 天寶061 故美人李二娘墓誌銘, 625쪽. 11) 唐代墓誌彙編 大中076 缺題, 2307쪽. 12) 唐代墓誌彙編續集 咸通096 唐張氏墓記, 1108쪽. 13) 太平廣記 卷一二九 杜嶷妾, 中華書局, 1995년, 913쪽. 14) (唐)趙璘 因話錄 卷三, 唐五代筆記小說大觀, 上海古籍出版社, 2000年, 851쪽. 15) (唐)張讀 宣室志 卷三 有吳生者, 江南人 嘗游會稽, 娶劉氏女為妾, 唐五代筆記小說大 觀, 1008쪽. 太平廣記 卷二七二 杜蘭香 杜蘭香降張碩 碩妻無子, 取妾,2144쪽. 9) 唐律疏議 卷一四 諸同姓為婚者,
96 현재 남아 있는 송대 망첩 묘지명 은 그 수가 많지 않다. 송대 망첩 묘지명에는 역시 納 자가 보인다. 예를 들면, 嘉定十五年(1222)에 세상을 떠난 曹彥約의 妾 王氏의 墓誌銘 을 보면 昌谷居士曹某之妾王氏, 居士納王氏 16)라 하였으며, 또 劉克莊이 첩 陳氏를 위해 쓴 묘지명을 보면, 그는 처가 죽은 후 재혼하지 않았고, 이에 先親魏國為余納之 17) 라는 기록이 나온다. 묘지명과 다르게 송대 필기 소설을 보면, 거의 모두 買 자를 사용하고 있다. 政和 (1111 1118) 初, 建州 貢士 黃崇은 母既亡, 父年過六十, 買妾有娠,18) 淳熙二年(1175) 甌寧人 范斗南은 買一妾, 寵之 19), 興元統制潘璋은 在臨安時, 買一妾 20), 徐州人 竇公邁 은 靖康中買一妾 21)이라 했다. 夷堅志 는 대부분 買 자로 묘사하고 있고 納妾 이라 는 표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외에 사대부들도 그의 저술에서 그대로 매첩 이라 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 朱熹 역시 行狀을 쓸 때 매첩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22) 또, 송대 馮京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풍경의 부친은 아들이 없어 그 처가 친히 그에 게 돈을 주며 첩을 사라고 권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의 매첩 행위를 묘 사할 때, 及至京師, 買一妾, 立劵償錢矣 라 쓰고 있다.23) 물론 이 기록 자체는 후대인 들에 의해 꾸며진 내용이지만,24) 특별히 첩을 들이는 과정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서사방 식을 반영하고 있어 주목할 만 하다. 문맥상 여기에서 계약을 맺고 금액을 지불하는 과 정을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이며, 저자 역시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려는 의도 는 없어 보인다. 그저 立劵償錢 이라는 말로 매첩 의 과정이 순조롭게 끝났음을 표현하 고자 한 것 같다. 立劵償錢 은 당시 매첩 행위에 대한 서사 방식으로 立券 의 제도화 정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첩을 들이는 행위를 표현할 때 송대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매 자를 사용했다. 물론 상 술한 두 망첩묘지명에는 납 자를 썼지만, 이는 묘지명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고, 어느 정 도 그녀들의 가정에서의 위치 또는 그들에 대한 주군의 태도 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 曹彥約 昌穀集 卷二〇 王氏壙銘, 文淵閣四庫全書本 劉克莊 後村先生大全集 卷一六一 山甫生母, 四部叢刊本 18) 夷堅志 丁志卷五 三士問相, 573쪽. 19) 夷堅志 支丁卷八 范斗南妾, 中華書局, 1029쪽. 20) 夷堅志 支庚卷六 潘統制妾, 1179쪽. 21) 夷堅志 乙志卷三 竇氏妾父, 205쪽. 22) 朱熹 晦庵先生朱文公文集 卷九五下 少師保信軍節度使魏國公致仕贈太保張公行狀下 初娶楊 國夫人樂氏, 旬日被命召, 即造朝, 及為侍從, 或以公盛年, 勸買妾 公曰 國事如此, 太夫人在遠, 吾何心及此 遂終身不置妾, 四部叢刊本. 23) 羅大經 鶴林玉露 乙編卷四 馮三元, 中華書局, 1997年, 192쪽. 24) 鄧小南 剪不斷, 理還亂 有關馮京家世的 拼織, 黃寬重主編 基調與變奏 七至二十世紀的中 國 ①, 臺灣政大歷史系等出版, 2008年, 183 184쪽. 16) 17)
당송시기 妾의 생활 / 최 해 별 97 겠다. 결론적으로 당송시기 개인들의 저작을 보면, 비록 개별적이고 다양한 예외가 있긴 하 지만, 대체로 납첩 에서 매첩 으로 변화되는 추세를 찾아낼 수 있다. 송대로 올수록 매 첩 의 표현이 많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무엇인가? 이러한 표현 방식의 변화는 가정에 서의 첩의 생활의 변화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 것인가? 二. 夫妾 관계의 성립 과정: 계약적 특성의 강화 첩을 들이는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한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25) 본 논문 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첩을 들이는 과정에서 나타난 기한을 정하는 경향 및 중개인의 역 할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론을 함으로써 첩과 주군의 관계에서 나타난 계약적 특징들 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왕의 연구자들은 첩을 들일 때 買妾과 雇妾(典妾)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는데, 이러한 토론 방식은 마치 置妾에 있어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존재하 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필자는 매첩과 고첩이 완전히 다른 병존하는 방식이라기보다 고 첩은 매첩과정에서 기한을 정하는 현상이 발전함에 따라 나타나는, 일종의 매첩 방식의 구체적 발전 추세라 파악하고자 한다. 1. 첩을 들일 때 기한을 정하는 추세 첩을 들일 때 기한을 정하는 사례는 당대에 이미 나타난다. 新唐書 李德裕의 전에 는 蜀人多鬻女為人妾, 德裕為著科約 凡十三而上, 執三年勞; 下者, 五歲; 及期則歸之父 母 26)라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어떤 배경 하에 당송 시기 기한을 두는 경향이 나타났는 지 살피고자 한다. 이덕유가 위와 같은 규정을 정하게 된 주된 의도는 어린 여성들이 혼기에 이르면 결혼 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이 첩으로 팔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 다. 여기서 기한을 정하는 것은 일종의 팔려나가는 어린 여자 아이들을 구제하는 대책으 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으로, 태평광기 의 기록을 보면, 강릉의 어느 士子는 첩에게 5년의 양식을 제공 25) 吕永 宋代的妾问题研究, 安徽师范大学硕士学位论文, 2007年, 9-14쪽. 中華書局, 1997년, 5332쪽. 26) 新唐書 卷一八 李德裕傳,
98 할 것을 약속하고, 5년 이내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도 좋다고 했 다. 5년 후 그가 돌아오지 않자, 첩은 전임 자사의 첩이 되었다.27) 5년의 약속은 아마도 당시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았고, 게다가 앞으로의 상황도 예측할 수 없어 정해놓은 기 간이었을 것이다. 기한을 정하는 현상과 관련하여 상술한 歸仁晦의 妾 支氏의 墓志를 보면, 開成원년 (836) 귀인회는 지씨를 첩으로 맞았다. 묘지명에서는 그에게 紉針之役 을 맡기기 위함이 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에 귀인회가 정처를 맞자 첩 지씨는 본가로 돌아갔다.28) 주군이 정식 혼인을 한 후에 첩이 본가로 돌아가는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이는 주군이 정식 처를 맞을 때, 원래 있었던 첩의 귀속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당시 현실 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당시 사람들은 첩을 맞을 때 일정 정도 기 한에 대한 약속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러한 기간은 구체적으로 연한을 정해놓은 것은 아니며 처를 들이기 전까지 정도의 잠재적 기한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사한 상황은 필기소설에서도 보인다. 竇凝은 박릉 최씨와 결혼을 하는데, 혼약의 조 건 중 하나가 현재의 첩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竇凝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결국 잔인 한 방법으로 첩을 죽이고 혼례를 올린다.29) 비슷한 사례는 남송 시기 필기소설에서도 보 인다.30) 이렇듯 정처를 맞을 때 첩의 귀속문제가 자주 남자들을 난처하게 했으므로, 첩을 들일 때 기한을 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남송 시기에 이르면 기한을 정하는 현상이 더욱 보편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夷堅志 한 이야기를 보면, 전 형주통판 손조청은 吳知閣의 집에서 세 명의 첩이 다시 팔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주부와 함께 첩을 사기 위해 중개인을 찾았다. 우선, 원문에서 세 명의 여성에 대해, 한 사람은 可補半年, 彼二人則在吳宅未久, 當立三年券 라고 언급된 것을 보면,31) 이 세 명의 첩은 매매를 통해 혹은 다른 경로로 오씨 집에 들 어갔고 다시 내다 팔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나 혹은 현실 에서 첩은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는 그런 존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한을 상의하는 일은 액수를 논하여 계약을 쓸 때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손씨와 정씨가 어느 첩을 살 것인지 최종 결정을 내릴 때 가장 크게 고려했던 요소는 그녀들의 고용 가능한 기한이었다. 또, 계약 기한의 長短은 이미 가격을 결정하는 주된 요소가 되 27) 太平廣記 卷一六八 氣義三 江陵士子, 1224쪽. 28) 唐代墓誌彙編 大中076 缺題 予以開成元年納支氏, 以備紉針之役, 由是育五男二女 二子少女 不幸早世 予 以禮娶鄭夫人, 而支氏以 乞歸養于其父母家, 至是 卒, 2307쪽. 29) 太平廣記 卷一三〇 竇凝妾, 919쪽. 30) 夷堅志 補卷一〇 朱天錫, 1641쪽. 31) 夷堅志 補志卷八 鄭主簿, 1620 1621쪽.
당송시기 妾의 생활 / 최 해 별 99 었으며, 이는 당시 매첩 계약에서 기한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첩의 기한과 관련하여 周密 癸辛雜識 別集卷下 銀花 의 기록은 중요하다. 경원 6년 (1200), 고문호가 67세가 되던 해 은화를 첩으로 맞았는데 그저 탕약을 수발들게 할 목 적이었다. 그 후 하씨(은화)는 고문호의 첩으로 11년을 살았다. 처음 3년은 매월 미 1곡 씩을 받았고, 그 후 8년에 대해서는 고문호가 그녀에게 관회 1080관을 주고자 했다. 그 리고 편지를 써서 이를 증명하고자 했다.32) 이 사료에 대해서는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지 만 주로 주군과 첩의 관계 및 고용 금액에 대한 문제에 국한돼 있다. 필자는 첩의 기한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자 한다. 고문호는 67세 첩 하씨를 맞았는데, 당초 계약의 기한은 3 년이었다. 그가 70세 되던 해 기한이 다 되어 하씨의 모친이 그를 찾아와 다시 계약을 맺었고, 3년 후에 그 모친이 다시 왔다. 그리하여 고씨는 은화에게 매년 錢百千 을 주기 로 약속했고, 하씨는 가정 경오 년간까지 11년 첩살이를 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당초 고문호가 하씨를 첩으로 고용할 때 기한을 3년으로 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하씨는 계속 남아 있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고용 된 첩이었지만, 쌍방이 함께 생활한 후 모두 만족하면, 고용의 기한은 이미 그 의의를 상 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 번째로 하씨의 모친이 와서 상의를 할 때에는 명확한 기한 을 정하지 않게 되었다. 고문호는 銀花素有盼盼燕子樓之志, 而勢亦不容留 라고 언급했 는데, 처음에는 고용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 기한을 다시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스 럽게 주군의 집에 남아 함께 생활하는 첩의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하씨 역시 기간마다 받는 돈에 대해 亦不願時時來請, 亦不肯逐年請也 라고 한 것을 보면, 그녀가 피고용인 의 신분에서 점차 전통적 의미의 혹은 정식적인 첩의 신분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정 경오년(1210)이 되면 고문호는 勢亦不容留 를 알고, 하씨가 본가로 갈 때 가져갈 以千緡為奩具之資 를 준비하며, 이를 위해 先書此為照 했던 것이다. 11년을 함께 생활했고, 주군 고문호가 죽지 않았는데도 첩 하씨는 본가로 가야했다. 우리는 고문호가 하씨를 계속 머무르게 할 수 없었던 소위 그 勢 가 혹 고씨의 집안사람들의 반대와 관 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씨가 가산을 쓰려고 했을 때, 여러 번 아들과의 상 의를 거쳤고, 고씨가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집안사람들의 妄有興詞 를 대비해 하씨에게 편지를 써 증거로 삼게 했고, 편지의 말미에서 은화가 고씨 집안의 돈을 함부로 쓰지 않 았고, 아껴 생활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고씨 집안사람들이 하씨에 대해 어떤 태 도를 가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즉 그들은 하씨가 고문호의 첩이 됨으로써 일어날 수 있 32) 周密 癸辛雜識 別集卷下 銀花, 中華書局, 1997년, 272 274쪽.
100 는 가산의 유실을 걱정했던 것 같다. 우리는 다시금 당초 고씨가 첩을 맞으면서 왜 기한 을 두었는지 그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하씨가 소위 정식 첩 이면 재산의 계승에 있어서 분쟁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하씨의 입장 에서 보면, 기한을 정한 그 계약은 현실에서 비교적 실효성을 가지고 실천되었으며, 하씨 본인이 고씨 집에 남고자 해도 어쩔 수 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 본인이 기 한이 정해진 고용된 첩의 신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사례는 고용된 첩이 주군의 집에서 처해질 수 있는 불안정한 위치를 잘 설명해준다. 2. 중개인의 역할: 媒人? 혹은 牙人? 당송 시기 첩을 들이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중개인의 역할이 다. 당대 첩을 들이는 과정에 대한 서사에서 중개, 아인에 대한 표현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매파에 대한 언급은 있다. 開元五年(717), 邠王 李守가 渤海郡高氏를 禮로서 娶하 여 첩으로 맞았는데 묘지명에서는 고씨가 좋은 집안 출신이라 특별히 托媒氏而委禽, 備 少姜之盛典. 33)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현재 당대 일반 보통 남성들이 매첩을 할 때, 媒人을 통했는지, 아인을 통했는 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송대로 오면, 특별히 남송 시대에는 매첩은 주로 아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買妾이든 賣妾이든 모두 牙人, 牙儈를 통했다. 상술한 손조청과 정주부 의 이야기가 전형적이다.34) 어떤 경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이미 합의를 보았는데도 아 인을 불러 계약을 쓰기도 했다.35) 쌍방이 합의를 보았는데도 여전히 아인을 불러 계약서 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첩에 문제가 있다고 느낄 때, 가장 우선적으로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이 첩을 살 때 아 인을 통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흥 연간에 촉 지역이 기근이 들었을 때 志 行은 유민이었던 첩을 샀는데, 그 친구 羅가 첩이 괴이함을 깨닫고, 渠來時經女儈否 今安在 라고 물었다. 그리고 遂付於儈而取其直 36) 계약서를 쓸 때, 아인을 통하는 주된 목적은 바로 첩에게 문제가 있을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다. 아인의 역할은 교역이 제대로 될 수 있도록 보증을 해주는 것과 문제가 있을 시 해결을 돕도록 하는 것에 있었 다. 첩과 관련하여 문제가 발생할 때, 당시 사람들은 그 처리 과정에서 반드시 매매 시 있 33) 唐代墓誌彙編續集 開元146 大唐邠王故細人渤海郡高氏墓誌之銘, 34) 夷堅志 補志卷八 鄭主簿, 1620 1621쪽. 35) 夷堅志 補卷二二 王千一姐, 1754 1755쪽. 36) 夷堅志 丙志卷二 羅赤腳, 375쪽. 553 554쪽.
당송시기 妾의 생활 / 최 해 별 101 었던 아인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마지막 첩의 거처를 정할 때, 부모에게 되돌려 줄 때도 아인을 통하는 것을 볼 수 있다.37) 관 역시 민간의 매첩과정에서의 아인의 역할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송대 첩의 매매 과정에서 중개의 역할은 매우 중요해 보이며, 그 주된 기능은 매파라 는 의미보다는 차라리 아인에 가까웠다. 이는 송대 첩을 들이는 과정이 점점 노비나 여 사의 매매 방식과 다르지 않게 됨을 보여주며 아인의 역할 역시 노비 매매 시 아인이 할 수 있는 역할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이 외에 아인의 역할이 커진다는 것은 송대 매첩 의 과정이 점점 더 세밀해지고 규정화되는 경향을 띤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三. 당송시기 첩의 신분적 변화: 그 유동성에 대하여 당대의 첩은 첩이 되면 평생 한 주군의 첩으로 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면, 송의 경 우는 그렇지 않은 듯 보이며, 주군이 자주 바뀌는 경우도 보편적이었다. 이는 아마도 상 술한 기한의 문제와 관계있는 것으로 필자는 송대 첩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을 유동성 이라 표현하고자 한다. 송대 첩의 유동성은 아래 몇 가지 방면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첫째, 당송 시기 주군이 친히 망첩을 위해 쓴 묘지명은 그 남아 있는 수량으로 볼 때 아주 큰 차이가 보인다. 陳尚君은 관련 논문에서 현재 남아 있는 당대 망첩 묘지명은 19 건이라 언급했고,38) 이외에 필자가 5건을 더 찾을 수 있어, 대략 24건 이상이 남아 있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송대의 경우를 보면 현재 필자가 찾을 수 있는 주군이 직접 쓴 망첩 묘지명은 5건에 불과했다.39) 서로 다른 시기 어떠한 배경 하에서 이런 결과가 나오 게 되었을까? 먼저 주군이 첩에게 묘지명을 써줄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생각해 보자. 망인에게 묘지명을 써주는 것은 망자에 대한 애도를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아마도 주군에게 온 이후 죽을 때까지 주군과 함께 생활해 온 첩이, 묘지명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송대 상당수의 첩은 기한을 두고 고용 되어 여러 번 매매가 되는 것 37) 夷堅志 三志辛卷七 舒榷貨妾, 38) 39) 1434 1435쪽. 陳尚君 唐代的亡妻與亡妾墓誌 附錄二 亡妾墓誌一覽, 中華文史論叢 2006年第2期, 78 80 쪽. 蘇軾 東坡全集 卷八九 朝雲墓誌銘 ; 周必大 文忠集 卷三六 芸香志 ; 曹彥約 昌穀集 卷 二〇 王氏壙銘 ; 劉克莊 後村先生大全集 卷一六一 山甫生母 ; 古志石華 卷二八 楚通叔 妾朱氏墓誌銘, 宋代石刻文獻全編 第二冊, 23쪽.
102 이 보편적이었다. 이는 중 상층 집안의 첩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첩의 유동성이 커지면 서 망첩 묘지명의 수량은 크게 감소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남성들의 첩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첩의 유동성이 커 지면서 첩에 대한 주군의 태도도 변할 것이고, 첩을 정식 가족 구성원으로 생각하기보다 는 임시로 있는 가기나 비녀에 더 가깝게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첩에게 묘 지명을 써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첩으로 지낸 적이 있는 여성들의 묘지 명이 대부분 본인 소생의 아들에 의해 쓰여 진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40) 당대를 보면, 시비(侍婢)에게 써준 묘지명도 있다.41) 이외에 상술한 바 있는 지씨는 以备纫针之役 으로 들어온 여성이어서 이 역시 시비에 가까운 신분이었지만, 게다가 정 처가 들어온 후 본가로 돌아간 첩이었지만, 여전히 묘지명을 남길 수 있었다.42) 또 유망 중에 첩이 된 여성에게도 묘지명을 써주었고,43) 기녀 출신의 첩 역시 묘지명을 남겼다.44) 이는 확실히 당대의 첩이 송 대의 첩과 그 처지가 달랐음을 보여준다. 둘째, 당송시기 관원들이 임직을 위해 지방으로 가거나 유배를 가게 되는 경우 그 지 역에서 첩을 들이기도 했다. 이 경우에 주군이 그 지역을 떠날 때의 첩의 귀속 문제를 토론해 볼 수 있겠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당송 간의 차이가 보인다. 예를 들면, 당 함통 연간에, 유이는 풍상절도사에서 許 지역으로 옮겼는데 그 지역에서 장씨를 첩으로 맞았 다. 그 후 낙양에서 머물고, 장안에서 관직에 임하고, 형남에 이르기까지 장씨는 계속 유 이를 따랐다.45) 이 외에도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有吳生者, 江南人 嘗游會稽, 娶劉 氏女為妾 後數年, 吳生出宰於雁門郡, 與劉氏偕之官. 46) 주군이 가는 곳에 첩은 따라 갔 고, 이런 상황은 당대 비교적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송대 상관 기록들을 보면 상황이 조금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龐元英 談 藪 의 기록을 보면, 沈詹事는 균주로 폄적되어 갈 때 첩을 샀다. 균주에서 7년을 살았는 데, 돌아올 무렵 그는 첩을 그 부모에게로 돌려보냈다.47) 이는 어떤 의미에서 송대의 사 앞에서 언급한 Beverly Bossler 의 宋元墓誌中的 妾 在家庭中的意義及其歷史變化 는 묘지명을 통해 송원시기 가정에서의 첩의 지위 및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살폈는데, 주된 토론은 모친으 로서의 첩을 위주로 하였다. 41) 唐代墓誌彙編 大中048 唐故穎川陳氏墓記, 2285쪽. 42) 唐代墓誌彙編 大中076 缺題, 2307쪽. 43) 唐代墓誌彙編續集 大和043 唐故章四娘墓誌銘, 914쪽. 44) 唐代墓誌彙編 大和071 渤海嚴氏墓誌, 2148頁; 唐代墓誌彙編續集 鹹通028 唐故張氏夫人 墓誌銘, 1055쪽. 45) 唐代墓誌彙編續集 鹹通096 唐張氏墓記 : 有劉異自鳳翔節度使移鎮于許, 始面張氏 八年, 納而 貯於別館 從余罷許憩於洛, 官於朝 十一年, 又從余出鎮荊南, 1108쪽. 46) 張讀 宣室志 卷三, 唐五代筆記小說大觀, 1008쪽. 47) 龐元英 談藪, 明刻 說郛 卷三五, 說郛三種 第四冊, 上海古籍影印本, 1988年, 1632쪽. 40)
당송시기 妾의 생활 / 최 해 별 103 회적 배경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매첩에서 기한이 정해지는 것이 보편화 되 면서 첩을 부모에게 돌려보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셋째, 당에서 송에 이르는 시기 첩의 유동성이 확대 되는 것은 법률 규정에서도 드러 난다. 당송 법률에서는 처첩의 擅去 죄에 대해 처벌 규정을 두고 있는데,48) 周顯德五年 (958)의 칙을 보면 두 가지 방면에서의 변화가 보인다.49) 하나는 妻擅去 에 대한 처벌이 가중되었고, 다른 하나는 처, 첩에 대해 따로 처벌을 시행하여 첩은 처에 비해 减一等 되었다. 첩의 도망죄에 대해 관방은 더욱 느슨한 처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 남편 에 대한 처, 첩의 죄와 관련한 처벌 규정에서, 오직 擅去 죄에서만 처첩을 구분하여 처 벌하는 규정이 보인다. 이는 당시 가정에서의 첩의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며, 그 유동적 특징이 강해졌다는 것을 방증한다. 송대 첩의 유동 은 근친 간에도 가능했다. 법률규정에는 첩의 전 주군의 근친이 그녀 를 다시 첩으로 삼는 것을 금지했다.50) 그러나 이규정은 북송 초기를 반영하는 것이고, 북송 중, 후기에 이르면 현실 생활에서 이와 같은 상황은 번번이 일어났다.51) 근친간의 첩의 유동은 남송대에도 흔히 보인다.52)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법률 규정에 상관없이 현실 속에서는 근친 간에도 돈을 주고받는 것을 통해 첩의 유동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더더욱 당시 사람들이 첩을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보지 않았음을 반영 한다. 이외에 첩의 유동성은 첩에 대한 주군의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사람들은 첩이 다 른 이에게 재가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떤 경우 주군이 직접 첩의 재가를 준비해 주기도 했고, 이것이 마음을 표현하는 한 방식이었다. 상술한 은화의 예가 대표적이다. 첩의 유동성이 강해지면서 첩에 대한 주군의 태도 역시 개방적으로 되 었는데, 이는 그들이 첩을 총애하는 구체적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당대 주군 은 가족성원으로서 첩을 대했다. 망첩에게 묘지명을 써줌으로써 그의 애도의 마음을 드 러냈고, 이는 그들의 첩을 총애하는 한 방식이었다. 이러한 첩에 대한 마음을 나타내는 방식은 어느 정도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48) 唐律疏議 卷一四 戶婚 諸犯義絕者 條, 宋刑統 卷一四 戶婚律 諸犯義絕者 條. 妻擅去者徒三年, 因而改嫁 者流三千里, 妾各減一等 娶者並與同罪 如不知其有夫者不坐, 娶而後知者減一等 並離 之, 224 225쪽. 50) 宋刑統 卷一四 戶婚律 諸嘗為袒免親之妻而嫁娶者 條, 諸嘗為袒免親之妻而嫁娶者, 各杖一 百; 緦麻及舅甥妻, 徒一年; 小功以上, 以奸論 妾, 各減二等 並離之, 220쪽. 51) 蘇轍 龍川略志 卷四, 中華書局, 1997年, 20쪽. 52) 夷堅志 丙志卷一五 虞孟文妾, 491쪽. 49) 宋刑統 卷一四 戶婚律 諸犯義絕者 條: 周顯德五年七月七日敕條,
104 첩의 유동성이 커지면서 어떤 여성들은 첩으로서 이러한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려 했다. 특별히 첩으로 지내면서 얻은 부를 이용해 다른 이의 정처가 되는 방법을 택하기 도 했다. 즉 더욱 안정된 생활환경을 직접 찾을 수 있었다. 고문호의 첩 하씨처럼, 주군 의 집을 떠날 때 적지 않은 돈을 얻은 경우 이러한 더 나은 생활환경으로 선택할 수 있 는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또, 夷堅志 의 다른 한 예를 보면, 왕씨의 첩은 資裝三百千 金 을 충분히 활용하여 다른 이의 후처가 되었다.53) 비슷한 사례는 적지 않다.54) 그러나 현실에서 첩인 여성이 이러한 재력을 갖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리를 해보면, 당송 시기 첩을 들이는 과정에서 계약적 특징은 점점 더 강해진다. 당 송 사료의 기록에서 첩을 들이는 것에 대한 서술어 娶, 納, 買의 분석을 통해 이 변화가 초래한 주군의 첩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었다. 첩을 들일 때 기한을 정하는 것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고, 송대가 되면 매우 보편화 된다. 이에 첩을 들이 는 과정에서 쌍방은 더욱 계약을 중시하였으며, 아인의 역할은 (매파의 역할이 아닌) 더 욱 중요해져 매첩 과정에서 반드시 아인을 통하여 계약을 맺었고, 이를 통해 교역의 순 조로운 진행을 보장받고자 했다. 이러한 변화는 첩의 유동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이 는 법률 규정이나 현실 생활 모든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첩의 유동적 성격이 강해짐 에 따라 재력이 있는 첩들은 이를 활용하여 유리한 환경을 쟁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 부분 이러한 조건이 되지 않는 첩들은 불안정한 생활환경 속에 처하게 되었다. 결론적으 로 계약적 요소의 강화는 당시 첩의 생활을 더욱 유동적으로 만들었고, 이는 첩인 여성 들에게 일종의 새로운 기회로 다가 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에서의 첩의 지 위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변화는 첩의 개별적인 처지를 더욱 다양하게 만들고 첩의 생존 유형을 더욱 다양하게 했다는 점이다. 송대에는 유극장의 첩 진씨와 같이 전 통적 첩의 유형에 속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계약적 특징이 나타나면서 여성들은 종 종 기한을 두고 첩으로 고용되는 상황에 놓여 기한에 따라 보수를 받게 되는데 이러한 유형의 첩은 종종 비녀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계약적 특징이 강화되는 상황은 한편으로 경제적 및 여러 조건이 되는 첩들에게는 자신의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의 확대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첩과 비녀의 신분상의 경계 를 더욱 모호하게 하는 현상을 낳기도 했다. 53) 夷堅志 三補 夢前妻相責, 1807쪽. 200쪽. 54) 夷堅志 乙志卷二 莫小孺人,
당송시기 妾의 생활 / 최 해 별 105 餘論: 妾과 婢(女使) 경계의 모호화 송대 첩과 비(여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향은 첩과 주군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계약 관계적 특징이 강화되고 이로 인해 첩의 유동성이 강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즉 송대 비, 여사는 당대와 달리 양인 신분이며, 주로 계약의 형식으로 구성이 되고, 당송시기 첩은 원래 양인 신분인데다가, 송대에 이르러 첩 또한 계약의 형식으로 고용되는 성질이 강해지면서, 이렇게 양자의 법적 신분이 동일해지고, 고용이라는, 계약 을 통하는 형식도 비슷해지면서 양자가 현실 생활에서 갖게 되는 처지가 점점 비슷해지 는 것이 아닌지 추정해 볼 수 있다. 필자가 첫머리에서 언급한 유극장의 가산분쟁을 처리한 한 판결문을 다시 보면,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양자의 경계의 모호해짐을 확인할 수 있다. 유극장은 劉氏, 丞之 側室, 秋菊, 登仕之女使, 昔也, 行有尊卑, 人有麤細, 愛有等差, 今丞與登仕皆已矣, 止是兩個 所生母耳 55) 그의 눈에는 주군,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첩이나 여사는 소생의 자녀가 있는 경우 그 신분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며 모두 일정한 재산계승권이 있 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서 양자의 行有尊卑 는 이미 과거지사가 돼버 렸다. 송대 첩을 고용할 때 사용했던 실물 계약서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첩의 계약서의 실 제 형태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다행히도 송말 원초의 女子, 男子를 고용했던 계약서 형식 을 볼 수 있는데, 元泰定元年(1324) 판각하여 출간된 적이 있는 新編事文類要啟劄青錢 은 당시 민간에서 통용되고 있던 각종 문서의 양식을 모아 놓았는데, 그 중 고용계약서 양식이 수록되어 있다. 여자의 경우 雇女子書式 이라 하였고 제목자체에서 雇妾 이라고 명시하지 않았지만 내용은 첩의 고용과 다름없었다.56) 이 계약서 양식의 제목과 내용을 보면 雇女子 는 雇妾 과 실제 크게 다르지 않다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지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남송 후기 비, 여사, 첩의 경계가 점점 더 모호해짐을 방증한다. 그러나 현실생활에서의 또 다른 측면에서 비(여사) 그리고 첩의 일정한 구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먼저, 당사자 간의 인식에서 양자의 구분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또 양자 는 모두 계약의 형식으로 고용되었지만, 그 지불 가격 즉 身錢, 雇直 방면에서 여전히 큰 차가 있었다.57) 55) 清明集 卷八 繼絕子孫止得財產四分之一, 251 256쪽. 四庫全書存目叢書 第171冊, 869쪽. 이외에 仁井田陞 唐宋法律文书の研究 (동경대학출판회, 1983년, 445쪽)에서도 內閣文庫藏本 新編 事文類聚啟劄青錢 를 인용하고 있다. 56) 新編事文類要啟劄青錢 卷一一外集 公私必要,
106 확실히 현실에서 첩과 비(여사)의 처지가 모호해짐과 동시에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송대에 이르면 그들 양자 간의 차이를 결 정하는 중요한 요인들이 그들의 서로 다른 법적 신분에서 오는 것이기보다 더 많은 부분 이 그들의 개별적인, 서로 다른, 현실적인 조건에서 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용 시의 처지(여성난민, 가정 배경), 가정 안에서의 지위(그들이 담당하고 있는 가사일의 성질, 자 녀의 유무, 주군의 태도 등), 특수한 재능이나 출중한 외모 등. 당송시기 계약관계의 발전은 하층여성들의 지위를 더욱 유동적으로 만들었고, 이러한 유동성은 그들의 생활에 매우 다층적인 의미를 가져,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기도 했 지만,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압력이 될 수 있었다. 이 유동성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우리 는 송대 첩과 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57) 桂始馨 宋代女口買賣探研, 湖北大學碩士學位論文, 2005年, 18 23쪽.
오대시기 거란과의 전쟁과 외교 전쟁과 외교가 민간신앙의 전개에 미친 영향 김 상 범(한국외대) 目 次 Ⅰ. 머리글 Ⅱ. 戰神의 탄생과 성장 Ⅲ. 陳果仁 信仰의 확산과 江南政權의 경쟁 Ⅰ. 머리글 이 글은 오대십국시기 급박하게 전개된 전쟁과 외교라는 외부적 충격이 중국 사회문화 에 미친 파급에 대하여 민간신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오대 (907~960)는 분열의 시대 였다. 6세기말이래로 300여 년간 유지되어온 수당통일제국이 와해되면서 53년간의 대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제국이 여러 정치세력으로 분열되어 전쟁이 그칠 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거란 사타 탕구트 등 이민족 세력까지 중국의 정 세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어느 시기보다도 복잡한 외교전이 전개되었다. 오대는 전환 의 시대 였다. 당대 후반기이래로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전개되어온 새로운 변 화가 완결성을 가진 정치적 단위의 해체로 인해 더욱 가속도를 내게 된다. 기존의 구체 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구조가 배태되는 과정 속에,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심대한 변화가 발생하는데, 安史의 난 을 전후로 回紇과 吐蕃의 강세로 균열의 조짐을 보였던 중국 중 심적 외교질서가 沙陀와 契丹의 부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시기 북방민족의 개입과 중국 제 왕조 간에 전개된 복잡한 외교관계와 전쟁은 송대이후 새로운 국제관계 와 국제질서가 태동하는 시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의 내적인 변화와 발전 에도 적지 않은 파급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전쟁과 외교가 복잡하게 엉키는 가운데, 동아시아 각국 간에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고, 새로운 차원의 변화와 성장이 전개되었는데 그 중심에 거란이 위치하고 있었다.
108 거란과 오대국가사이에 벌어진 전쟁과 외교관계에 관한 선행연구 가운데, 지금까지 연 구가 가장 많이 진척된 분야는 역시 燕雲16주의 할양 을 둘러싼 문제이다. 거란과 중국 간의 직접적인 접촉은 耶律德光시기에 남진정책을 채택하면서 본격화된다. 8부족을 통합 하고 주변민족을 차례로 복속시킨 耶律阿保機의 위업을 계승한 야율덕광은 後唐에 鎭州, 定州, 幽州 등 황하이북 세 주의 할양을 요구하였다. 비록 후당의 庄宗과 明宗은 북변 수 비를 강화하며 일시적으로 거란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여세를 몰아 태원절도사 석경당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후당정권은 결국 멸망하게 된 다. 중원왕조의 교체에 있어서 배후 역할을 한 거란은 그 대가로 後晉정권으로부터 16州 를 할양받는다. 영토할양과 더불어 주목되는 것은 석경당이 매년 貢帛 30만 필을 바치고 兒皇帝 를 칭하기로 약조함으로써, 중국 중심적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북방민족과 한족왕 조와의 관계가 역전되는 결정적인 시단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족왕조와 북방민족 간의 외교적 위상 변화가 1004년에 체결되는 전연지맹 훨씬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전개된 것 임을 반증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최근 오대시기 민족융합과 관련된 일련의 연구도 주목된다. 거란에 의한 화북지역 점 령이 당대후반기이래 胡化가 심했던 이 지역 인구의 대거 남하를 야기함으로써, 사타족 정권하에서 자연스레 종족적 융합이 진척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연구가 발표되었 다. 또한 거란이 팽창하면서 다양한 종족을 아우르는 제국으로 성장해 가는데 주목하여 요의 종족정책과 사민정책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종족융합문제와 인 구정책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일부연구가 중국정부의 다민족 통합국가론 에 견강부 회하는 짜 맞추기식 연구로 진행되고 있는 점은 아쉽다. 이밖에 거란의 중원전략과 이를 둘러싼 거란조정 내부의 파벌형성문제, 互市 교역의 확대, 전쟁으로 인한 漢人의 귀화문제 등 다양한 주제가 토론되고 있지만, 거란의 국제관 계를 오대정권과의 和戰에 한정시키지 않고, 십국정권을 포함한 다원적 관계 속에서 파 악하려는 연구 또한 주목된다. 거란의 외교 전략에 대해서 姚從吾는 일찌감치 遠交近攻 策이라고 정의한바 있다. 거란은 남진정책을 채택한 뒤로 화북왕조들과 교전상태에 들어 가자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십국세력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915년 오월의 錢鏐가 사절단을 파견한 이래 거란은 줄곧 오월과의 관계를 중시했는데, 이를 통해 화북왕조를 양면에서 압박하였고 동시에 사치품과 향료를 위시한 남양 무역품의 획득에도 이용하였다. 거란과 십국정권과의 관계는 930~40년대에 정점에 이르는데, 吳越은 한때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浙江省 義鳥縣에서는 會同十 年, 建 이라는 요의 연호가 새겨진 眞如寺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오월이 遼의 正朔을 받 아들였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거란과 남당과의 관계는 특히 중요한데, 거란은 국경을
오대시기 거란과의 전쟁과 외교 / 김 상 범 109 맞대고 있던 화북정권을 양방향에서 압박하기 위해서 시종 남당과의 관계에 심혈을 기울 였으며, 때로는 양국관계를 형제관계 즉 평등한 관계로 설정함으로써, 외교의 격을 둘러 싸고 後晋과 남당사이의 미묘한 분쟁거리를 조성하기도 했다. 거란과 남당의 긴밀한 관 계를 견제하기 위해서 화북정권 또한 다양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며 적극 대처했는데, 오 월과 기타 십국과의 연횡을 통해 거란과 남당세력에 대처하면서 강남에서는 오월과 남당 을 축으로 복잡한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분열의 시대, 전환의 시대 로 요약할 수 있는 오대시기에는 복잡한 정국을 반영하듯 전쟁 과 외교 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 다수의 연구는 급박하게 전개되던 외부적 상황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이러 한 외부의 충격과 변화가 중국사회 내부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 글에서는 전쟁과 외교가 복잡하게 얽힌 전란의 국면이 중국사회내부에 미친 영향을 특히 중국인의 신앙적 정서에 미친 영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론해 보겠다. 먼저 거란과 화북정권간의 경쟁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강남상황 특히 오월과 남당간의 관계 변화에 대해 살펴보겠다. 다음으로는 강남지역이 워낙 민간사묘신앙의 전통이 유구할 뿐 아니라, 당대 후반기 이래로 이지역의 민간사묘신앙이 지역사회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지역신앙 으로 발전해 가는 사회문화적 변화에 주목하여, 전쟁과 외교가 반복되는 긴박한 국면이 민간신앙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겠다. 특히 오월과 남당의 전력이 맞물리던 접 경지역인 절서일대의 陳果仁신앙 이 戰神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 착목하여 오월과 남 당의 경쟁구도가 진과인신앙의 출현과 성장배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진과인 신앙에 대하여 두 왕조는 어떤 입장을 보였고, 향후 민간신앙의 확산과 전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에 대해 검토해 보겠다. Ⅱ. 戰神의 탄생과 성장 당말 오대시기에 常州ㆍ潤州ㆍ杭州ㆍ睦州ㆍ蘇州 등 강남 절서일대에서 넓은 신앙권을 형성했던 祠廟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陳果仁 사묘를 들 수 있다. 진과인은 상주 출신 으로 수말당초의 혼란기에 지방할거세력이었던 沈法興의 수하에 들어가 主力戰將으로 활 약한 바 있다. 후에 심법흥과 내분이 생겨 독살되었는데,1) 상주 일대의 지역민들에 의해 1) 舊唐書 卷56, pp.2272~2273.
110 숭배되다가 당말부터는 신앙권이 점차 확대되면서 절서를 대표하는 지역신 가운데 하나 로 부상하였다. 그렇다면 진과인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지역신으로 부상했고 후에 戰神으 로 성장한 것일까? 隋書 ㆍ 舊唐書 ㆍ 新唐書 에 별도의 열전이 설정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생전의 영 향력이나 지명도는 그리 높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死後에는 절서전역을 아우르는 大神으 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지방지에 보이는 몇몇 廟記 에서는, 사료의 성격을 반영하 듯 뛰어난 인품으로 지역사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에 사후에 지역민들이 그를 연민하여 입묘한 뒤 제사를 받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忠孝ㆍ文武ㆍ信義ㆍ謀辨을 진과인 생전의 八絶이라고 거론하며 이를 기리기 위해 조정에 상주를 올려 垂拱元年 (685)에 마침내 大殿이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 하지만 대규모 음사철폐가 단행된 수공년간의 전후 정황과 당시 음사를 판별하는 기준을 감안해 볼 때, 진과인신에게만 국 가에서 특별히 묘우를 세워주는 내용은 그대로 믿기 어려우며, 그 해석 또한 지극히 유 교적인 것이어서 후대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초 입묘는 이와는 다른 원리에 의 해 훨씬 소형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진과인이 심법흥에 게 배반을 당해 독살되었다는 것이다.3) 이러한 죽음을 당하게 되면 厲鬼가 되는데, 이들 은 일반적으로 解寃儀式이나 再安葬ㆍ冥婚 등을 통해 정상적인 사후세계로 돌아오게 되 지만, 비교적 강력한 영력을 지니고 불안정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소수의 여귀에 대해서 는 좀 더 전문적으로 그들을 방어할 수 있는 의례나 제사가 필요하다. 宮川尙志는 田豐 ㆍ鄧艾ㆍ項羽ㆍ蔣子文 등이 위진남북조시기 이래 부상한 대표적인 여귀신앙이라고 지적 한 바 있다.4) 그렇다면 사료에 묘사된 진과인의 죽음을 볼 때 진과인도 유교적인 신보다 는 전형적인 厲鬼에 가깝지 않을까? 위진남북조 시기에 시작되어 당말 오대까지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蔣子文 신앙은 厲鬼 2) 3) 4) 郡人以帝忠孝ㆍ文武ㆍ信義ㆍ謀辨八絕, 奏於朝, 即帝兵仗庫立祠. 垂拱元年, 始創大殿. 乾武(符)四 年, 封忠烈公. 咸淳毗陵志, p.3072. 禮記 祭法篇에는 왕은 7祀를 지내는데 그 대상 가운데 후사 없이 죽은 泰厲가 있고, 제후는 5사 가운데 公厲가 있으며, 대부는 3사 가운데 族厲가 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들은 각각 후 사가 없어 사후에 의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도처를 방황하며 화를 입히는 것인데,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제사를 올려 위로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禮記 卷 46, 祭法 ( 十三經註疎本, 801 802쪽). 孔穎達은 이에 대해 고대에 제왕ㆍ제후ㆍ대부 등이 후사가 없는 것은 원래부터 자식이 존재하지 않았기보다는 정적에 의해 살해된 경우가 적지 않 았기 때문이며, 여귀는 횡사하거나 피살된 冤魂을 포함한다고 해석하였다. 즉 고대인들에게 여 귀는 후사가 없는 사람뿐 아니라 橫死ㆍ寃死 등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은 원혼를 통칭한다는 것 이다.厲鬼생성에 관해서는 林富士의 孤魂與鬼雄的世界 (臺北:臺北縣立文化中心, 1995), pp.11~19쪽 참조. 宮川尙志, 民間の巫祝道と祠廟の信仰, pp.196 231쪽.
오대시기 거란과의 전쟁과 외교 / 김 상 범 111 숭배로 시작되어 결국 국가에서 공인하는 최고권위의 신으로 승격해 가는데, 동일한 장 군류의 여귀라는 점에서 참고할 만한 하다. 설화에 의하면, 장자문은 죽은 지 몇 년 뒤 갑자기 현신하여 지역수호신이 되려고 하니 사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라고 요구한 바 있 다. 명령을 위반할 시에는 주민들의 귀에 벌레를 넣고, 대화재를 일으켜 도시를 태워버리 겠다고 경고를 하기도 했다.5) 이러한 설화는 당연히 巫祝들에 의해 날조된 것인데, 厲鬼 가 질병과 환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제사를 받들어 위로해야 한다는 민중들의 집체적인 잠재의식 이용한 것이다. 사실 단속적으로 진행된 음사철폐를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부첨되었을 유교적 언사들 을 제거하고 나면, 진과인 사묘도 이와 비슷한 성장곡선을 그렸을 가능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독살을 당한 진과인의 원혼이 과거 勇力을 겸비했던 猛將出身답게 향촌 곳곳을 떠돌며 무서운 질병이나 재앙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주민들의 우환의식을 이용해, 상주주변의 무축들이 진과인의 원혼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입묘를 주도하고 주 민들을 끌어들이면서 점차 기도도량으로 발전시켰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말기에 이르면 진과인 숭배는 점차 常州지역의 지역신앙으로 성장하면서 국가권력 의 주목을 받게 된다. 太和7년(833)에는 현령 高榮이 상주 진과인의 東第에 세워졌던 사 묘에서 기풍제를 주재했는데, 후에 좋은 결과를 얻게 되자 묘우를 증축해주었다는 기사 가 확인된다. 점차 주변지역으로 제사권역을 확대해 갔는데, 無錫縣에 別廟가 설립된 후6) 기타 절서의 大神들이 이 시기에 빠른 확장추세를 보이는 것처럼 상주 州界 마저 월경하여 절서 전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보인다. 사료에 상주, 윤주에서 유행했다는 언 급7)처럼 처음에는 북쪽의 윤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는 丹徒縣 縣治 부근에도 진과인 묘가 건립되었다. 顧雲의 廟記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진과인묘도 차차 영험을 드 러내면서 윤주지역사회의 주요한 민간신앙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다가 자연재해와 같은 비상사태 때에는 지방정부가 이곳에서 방재제사를 주도할 정도로 공신력을 갖게 되었 5) 6) 7) 干寶의 搜神記 에 보이는 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蔣子文者, 廣陵人也. 嗜酒好色, 挑達無 度. 常自謂己骨淸, 死當爲神. 漢末爲秣陵尉, 逐賊至鍾山下, 賊擊傷額, 因解綬縛之, 有頃遂死. 及吳 先主之初, 其故吏見子文於道, 乘白馬, 執白羽, 從如平生. 見者驚走. 文追之, 謂曰: 我當爲此土地 神, 以福爾下民. 爾可宣告百姓, 爲我立祠. 不爾有大咎. 是歲夏, 大疫, 百姓竊相恐動, 頗有竊祠之 者矣. 文又下巫祝: 吾將大啓祐孫氏, 宜爲我立祠. 不爾, 將使蟲入人耳爲災. 俄而小蟲如塵虻, 入 耳皆死, 醫不能治. 百姓愈恐. 孫主未之信也. 又下巫祝: 若不祠我, 將又以大火爲災. 昰歲, 火災大 發, 一日數十處. 火及公宮. 議者以爲鬼有所歸, 乃不爲厲, 宜有以撫之. 於昰使使者封子文爲中都侯, 次弟子緖爲長水校尉, 皆加印綬. 爲立廟堂. 轉號鍾山爲蔣山, 今建康東北蔣山是也. 自昰災厲止息, 百姓遂大事之. 無錫志, p.2250. 吳郡志 권12, pp.167~168.
112 다.8) 어쨌든 진과인의 사묘는 처음에는 상주에 처음 세워졌던 本廟를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고향, 분묘 그리고 생전의 행적지 등 신화와 관련된 곳곳에 別廟가 설치되었고, 점차 縣 界와 州界까지 뛰어넘어 절서전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당말 오대시기 에 국가의 사묘정책은 기본적으로 사묘신앙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데, 강제적인 음사철폐 사례가 확연히 줄어들고, 사묘에 대한 改修조치와 分封을 통해 사 묘를 공인하는 조치가 증가한다. 진과인신앙도 이와 비슷한 성장궤도를 보여주는데, 僖宗 乾符4年(877)이래로 忠烈公, 感應侯, 忠烈王, 武烈帝 등 사묘에 대한 국가의 공인과 지지 를 의미하는 봉호를 연달아 하사받았으며,9) 봉호의 격식에 맞추어 상응하는 묘우에 대한 개수조치도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앞 기사에서 확인되듯이 주로 재해에 영험을 발휘했던 진과인신 戰神으로 재탄생하는 것은 언제일까? 이러한 변화는 당말 농민반란과 무관하지 않은데, 乾符2年(875) 鎭海軍이 반란을 일으켜 王郢이 연해를 따라 睦州지역을 공격해 오자 節度觀察處置使가 진과인 신께 陰助를 기구했고, 후 에 응답이 있자 睦州 郭南門근방에 묘우를 세워주고 정부에 봉호하사를 상신했다고 한다.10) 常州 前蕭里에 소재한 별묘관련기사에서도 僖宗 乾符4年(877)에 黃巢의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때 갑자기 안개 속에서 紅衣巨人이 출현해 적을 퇴각시키자 이를 기리기 위해 묘우를 중 건했다는 내용이 전한다.11) 전란기 지역사회는 기층공동체를 지켜줄 수 있는 수호신을 필요로 했을 것인데, 과거 재앙으로부터 지역사회를 구해주던 진과인 신은 이제 반란군 으로부터 지역공동체를 보호해주는 戰神으로 재탄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화는 절서 각 지의 지역사회로 유포되었고 오대십국의 전란기에 진과인신앙의 확산을 더욱 가속화시키 면서 그 위상도 제고시켰다. Ⅲ. 陳果仁 信仰의 확산과 江南政權의 경쟁 이처럼 당말이래로 진과인신이 戰神의 형상으로 浙西 大神으로 성장하게 되자 당 멸망 이후 이곳에 수립되는 10국 지방정권들은 진과인 신앙에 깊은 관심을 표하게 된다. 더군 8) 9) 10) 11) 嘉定鎭江志, p.2378. 咸淳毗陵志, p.3072. 淳熙嚴州圖經, p.4327. 咸淳毗陵志, p.3072. 당초 진과인 사망 했을 때 부인이 東第를 도관(崇仙觀)에 기부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前蕭里에 위치한 묘우는 황소난 때 신이 음조해 묘우가 중건되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唐末, 巢賊犯境, 人望靈, 煙中有紅衣巨人, 賊懼而遁, 道士鄧子成為築祠焉. 咸淳毗陵志, p.3073.
오대시기 거란과의 전쟁과 외교 / 김 상 범 113 다나 토호와 富商을 중심으로 형성된 토착세력인 항주팔도를 기반으로 성립한 오월정권은 지역정권인 만큼 지역민간신앙을 더욱 중시하였다. 여기서 오월정권이 蘇州에 세운 南雙 廟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盤門 서편에 있었던 南雙廟는 오자서와 진과인신을 함께 모시 는 사묘인데, 반문이 소주성 八門12) 가운데 남쪽에 위치한데다가 두 명의 神主를 모시기 때문에 남쌍묘로 명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대 초에 오월의 전씨정권이 常州와 潤州를 잠시 정복한 뒤 의도적으로 진과인신의 신주를 소주로 모셔와 오자서 신과 동일한 사묘 에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13) 十國春秋 는 이 때를 武肅王 錢鏐가 도교에 심취해 연 호를 개정하는 天寶元年(908)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전류는 진과인신이 陰兵을 동원해 오 월군을 도왔다며 감사의 報祀를 올렸고 梁에 봉호하사를 요청함과 더불어 모든 주마다 진과인 묘를 세울 것을 명령했다.14) 十國春秋 와 馬氏 南唐書 後梁 開平4년(910), 진과 인 신이 또 다시 오의 침공으로부터 오월을 음조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오월 錢氏政權은 진과 인신 뿐 아니라 병란으로부터 보호한다며 태백묘도 성내로 이전하고 季子를 이에 배식한 바 있다.15)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당시 후량과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거 란-오 세력에 대항하던 오월정권은 당말이래 지역민들에게 광범위하게 숭배되던 오태백, 계찰, 오자서, 진과인등 절서지역신을 국가제사차원으로 승격시켜 적극적으로 보호했던 것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오월정권에 의해 전신으로 받들어지던 진과인 신이 오를 계승한 남당 정권에 의해서도 숭배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保大13년(952) 남당과 오월이 교 전시에 갑자기 비바람이 치고 어두워지더니만 黑牛가 출현해 남당군을 도왔다는 영적이 전한다. 12) 13) 14) 15) 白居易가 소주자사로 재직 시에 남긴 시 가운데 당대 소주의 도시정황을 반영해주는 내용이 많 이 남아있다. 그 가운데 9월 9일 重陽節에 쓴 시에는 반쯤취해 난간에 기대 일어나 사방을 바 라보니, 七堰 八門 六十坊이 한눈에 들어온다(半酣憑檻起四顧, 七堰八門六十坊) 는 내용이 보인다. 당시 소주 성안에는 수로가 동서로 3개, 남북으로 4개가 뻗쳐있어서 8문중에는 육문 뿐 아니라 수문도 포함된다. 伊原弘 江南におけ都市形變の變遷-宋平江圖解析作業, 宋代の社會 と文化 宋代史硏究會硏究報告 第1集, 昭和58年 6月, 東京: 汲古書院, pp.297~303. 원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南雙廟, 在盤門裏城之西隅. 二廟: 左英烈王 伍員也, 右福順王隋陳果仁 也. 果仁又稱武烈帝. 或云五代初, 常潤尙屬淮南, 仁果廟在常潤間. 錢氏得常潤遂移廟於蘇. 吳 郡志 권12, p.167~168. 蔡京의 南雙廟記 에 보이는 관련내용은 다음과 같다: 或言故隋將陳果仁, 嘗以陰兵助錢氏伐淮 冦有功, 錢氏崇報之. 請於梁朝封福順王. 又使諸郡皆爲建廟. 則福順之號爲果仁無疑. ( 南雙廟記 는 吳郡志 권12, p.167~168과 송대 鄭虎臣 편찬한 呉都文粹 등에 전한다.) 十國春秋 의 주석은 南雙廟記 의 내용을 상당부분 참조했는데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仁果常以陰兵, 助王, 王崇報之, 請封于梁. 且令諸州皆立廟. 蔡京 京南雙廟記 作福順賢德王, 他書又作福順武徳王. 十國春秋 권78 吳越2 武肅王世家 (下). 吳郡圖經續紀, p.652. 吳郡志, 권12, pp.167~168.
114 당시 10국 정권은 오월과 남당의 사례에 보이듯이 인근의 정권과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 기 때문에, 지역성을 부각하고 지역민을 단결을 고취할 필요가 있었다. 당말 오대에 이르 러 누차에 걸쳐 진과인신에 대한 책봉과 사묘의 중수가 이루어지는 것은, 진과인의 사묘 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유력자와 재지세력의 신앙적 정서를 존중해줌과 더불어 실제적 인 優惠措置를 통해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당시 절서지역민들은 그들의 공동체를 전란으로부터 지켜준 진과인신을 이들을 가장 중요한 지역수호신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신주에 대한 보호와 현창은 전란이 그치지 않던 비상시국에 있어서 는 지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단결을 고취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송- 서하 전쟁 원인 분석 兪 垣 濬(경희대) 目 次 1. 머리말 2. 송-서하 전쟁사 연구에 대한 시각 검토 3. 송-서하의 초기 관계와 충돌 원인 4. 맺음말 1. 머리말 9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였다. 비록 華夷의 엄격한 구 별이 약화되었다고는 하지만 隋唐제국의 국제질서는 隋唐을 중심으로 주변 국가가 배열 되는 동심원적인 안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안사의 난을 계기로 중원왕조 중 심의 책봉질서가 형해화되면서 점차 주변의 제 국가와 민족들이 중원왕조의 역사 전개에 적극 개입하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원왕조와 북방왕조 사이에 힘의 역전이 발생하면서 그 중심축이 점차 북방왕조로 이전하기 시작해 결국에는 요와 여진이 새로운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은 여러 국가 간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불안정성이 크게 확대되면서 장기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처럼 새롭게 형성된 국제질서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론이 여러 가지로 제시되었다. 우선 중원왕조의 대외 인식의 근간을 이룬 華夷論 에 주목하고 그 구체적인 적용 사례를 분석하려는 시도가 가장 대표적이며, 요 송 금을 중심으로 주변국가와의 관 계를 다양한 연동관계 안에서 파악하여야 한다는 陳寅恪의 連環性 개념, 당말 이후 중 원왕조의 특징을 財政國家 로 파악하고 대외관계를 설명하려는 宮崎市定의 견해 등이 그것이다. 또 최근에는 南詔 大理를 비롯해 角廝囉 정권 등 그동안 소홀하게 다뤄왔던 국가까지 이 시대의 주역으로 수용하고 그 관계를 보다 다각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도
116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9 13세기 동아시아는 隋唐제국의 국제질서에 필적할만한 새로운 질서를 창출 하지 못한 채 여러 국가 간의 복잡한 상호 관계 속에서 유지되었기 때문에 그 경향성을 일정한 경향과 유형으로 일반화하기는 쉽지 않다. 또 당시의 다핵화된 국제정세를 동아 시아사적 시각에서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송 요, 송 금을 중심으로 한 이원론적 접근 방 식을 택하는 연구자들이 절대 다수인 점도 국제질서의 패러다임을 찾기 힘들게 만든 요 인의 하나이다.1) 그 결과 대외관계에 관련된 중요 사안에 대해서 전문적이고 미시적인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반 특징을 관통하는 포괄적 해석의 틀은 아직 제시되지 못한 실정이다. 이처럼 9 13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해석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찾는 여러 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정형화하기 어렵게 만든 가장 대표적인 요인의 하나가 바 로 西夏다. 서하(1038 1227)는 비록 요 송 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규모의 국 가로서 이들 3국의 안위 자체를 위협할 정도가 못되었고, 형식적으로는 이들 3국에 신복 하는 형편이었지만, 요 송 금 역시 서하를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였다. 그리고 요 송 양국 간의 외교적, 군사적 모순을 최대한 이용하여 독자 적인 활동 공간을 확보하고 실크로드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200여 년 동안 동아시 아 정세의 불안정성을 극대화한 국가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2) 따라서 이 시대의 다극체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하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서하에 대한 사료가 매우 영성한데다가 남아 있는 사료도 거의 전적으 1) 2) 황소의 난 때 사타족이 참전하면서 더욱 더 위세를 떨친 사타족은 후당과 후진을 건국하면서 중원의 정치에 주역으로 자리잡게 된다. 따라서 사타족의 역할을 빼놓고는 오대의 정치사를 논 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으며, 특히 석경당에 의해 연운16주를 요에 할양한 사건은 송대사에 있 어서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송조의 건국과 동시에 이 시대를 한족과 북방 민족과의 관계사로 인식하는 기존의 시작에는 일부 조정이 필요하다. 특히 송조 건국 당시 대 다수 사람들은 송조 역시 또 하나의 단기 정권이 출현한 것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 라서 송조의 통일과 장기 지속을 당연한 사건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초단기정권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통일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좀 더 상세하고 합리적인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중원에 대해 정치 군사적 개입을 서슴치 않았던 북방민족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송조 또한 이들에 대해 어떤 외교정책을 취하였는지 를 분석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다. 이 점은 원대에 辽史 宋史 金史 를 편찬하면서 별도의 西夏史 를 만들지 않고 辽史 의 西夏传, 宋史 의 夏国传, 金史 의 西夏外纪 으로 처리한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는 서하 가 이들 3개국에 필적할 만하지 못하다고 간주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서하를 傳 이나 紀로 간략하게 처리하기에는 국력이나 역사적 비중이 너무 컸다. 이처럼 서하는 독립된 사서 편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전으로 처리하기도 애매한 국가였다. 아무튼 실 체에 어울리지 않게 傳과 紀로 처리한 결과 서하사는 상대적으로 가장 소략하게 다뤄졌고, 상 당 부분 파악하기 힘든 상태로 남아있다.
송-서하 전쟁 원인 분석 / 兪 垣 濬 117 로 송측의 것이며, 그 내용도 거의 대부분 전쟁사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이는 서하와 요의 동맹관계가 송에 대한 가장 큰 압력이었고, 송으로서는 요와의 직 접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압력 고리를 타파하는 것이 대서하정책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역으로 서하를 통해 송을 견제하는 것이 요의 대송정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면을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송-서하 전쟁에 대한 분석은 서하사 연구의 출발점이 자 핵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송-서하 전쟁사 사료의 절대 다수가 송조의 입장에서 작성된 것이어서 이 문제 에 대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검토를 진행하는 것이 송-서하 전쟁사 연구의 또 다른 숙 제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치 못한 상태이다. 송-서하 전쟁사에 관한 새로운 사 료 발굴의 가능성은 거의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고, 송 측의 자료 또한 李燾의 續資治通 鑑長編 을 제외하고는 1차 사료라고 할 만한 것이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3) 하지만 상황이 열악할수록 기존 사료의 작성 배경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새로운 단서를 찾 아야 한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4) 2. 송-서하 전쟁사 연구에 대한 시각 검토 10 13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의 중심축은 북송-요, 남송-금의 남북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심축은 상호 전면전이라는 치열한 각축전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형 성된 균형을 각기 전연의 맹약 과 소흥화의 라는 형식을 통해 공식화되었고 장기간에 걸친 휴전과 평화국면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송과 서하는 엄청난 국력 차에도 불구하고 3) 4) 송-서하 전쟁사 연구 성과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는 李华瑞의 宋夏关系史 이다. 李华瑞는 쌍방의 군사적 충돌 외에도 지휘체계, 병력배치, 장비보급 등 북송의 정치 매카니즘에 초점을 맞춰 사료적 한계를 넘어서 양국의 전쟁사를 연구 분석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화 서는 續資治通鑑長編 을 제외한 다른 사료는 엄격한 고증을 통과하기 힘들었다고 밝히고 사실 상 長編 에 의존하여 서술함으로써 저자 자신도 시인하듯 송조 일방의 시각에서 탈피하기 힘 든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石家莊, 河北人民出版社, 1998)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송의 사료 대부분이 대서하전 패배 요인 분석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패전의 가장 큰 요인은 전선 지휘관의 잘못이 대부분이지만 송조의 경우에 는 군 지휘관에 대한 과도한 견제 등 제도적 문제점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제 도적 요인에 대한 언급은 군 통수권자인 황제의 권력에 대한 도전과 다름없고, 문신관료의 정 치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어서 상당 부분 드러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송대에 만연 한 중앙권력에 대한 기휘 부분을 보다 심도 있게 파헤치고, 문신관료와 무인의 관계, 중앙과 지 방의 입장 등 군권 행사와 관련한 세부적 사항을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 며, 신 구법당의 당쟁과 관련한 사료 왜곡 등도 유의하여 분석할 부분이다.
118 시종 적절한 균형점을 찾지 못해 전쟁과 화의가 계속 반복되는 등 불안정한 국면을 유지 하였다. 양국은 982년 李繼遷의 저항을 시작으로 금이 陝西路를 점령하여 지리적으로 단 절될 때까지 근 150년 가운데 3/4 이상의 시간을 교전과 적대 상태로 보냈다. 따라서 송서하 관계는 전쟁과 화의의 불연속선을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작은 변방국가 서하가 송이란 거대 제국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독특한 형태로 전개되었 다. 송-서하 관계는 神宗이 夏国自祖宗以来为西方巨患历八十年, 朝廷倾天下之力, 竭四方财 用以供馈饷, 尚日夜惴惴然, 惟恐其盗边也. 라고 한탄한 데서 잘 드러나듯이 송이 가장 부 담스러워한 존재는 요가 아니라 오히려 서하였다는 점이 일찍부터 양국 관계의 가장 큰 특징으로 간주되어 왔다.5) 따라서 서하의 거듭된 공세 원인과 함께 그것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송-서하 전쟁사는 물론이고 양국 관계사 연구의 중점이 었다. 하지만 서하의 입장에서 보면 요가 서하를 압박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을 치루기도 했지만 송을 능가하는 국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던 요가 오히려 서하의 존립에 결정적인 위협이나 손실을 안겨주는 존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서하의 존망과 관련된 가장 큰 위협 요인은 바로 송이었다. 李繼遷에서 李德明을 거쳐 李元昊에 이르기까지 3대 동안 서하는 송조의 압박을 극복하고 자신의 독립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해야 했으며, 많은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송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전략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미묘한 힘의 균형을 유지 파괴하게 한 요인의 분석이 향후 송-서하 전 쟁사 연구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또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양국 관 계에 관한 개별적 사안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당시 국제관계라는 한 차원 높은 문제와 긴밀하게 연동되어야 할 것이다.6) 그러면 송-서하 전쟁사에 관한 연구는 어떤 문제의식 을 갖고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필자의 생각으로 華夷論 은 가장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분석 방법이지만 그 효용성은 5) 6) 廖隆盛은 송대사에 대한 평가가 외교 군사 방면에 대한 혹평과 사회 경제 방면에 대한 극찬으 로 확연하게 갈린다면서 이민족의 군사적 압박 속에서 어떻게 사회경제적 발전을 달성할 수 있 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송대사 연구의 주요 과제라고 지적하였다.(廖隆盛, 自序, 國際貿易 戰爭, 臺北, 萬卷樓, 2002) 요는 송태종의 공세를 꺾고 승세를 타서 얼마든지 송조를 공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989 년에 군대를 원대 복귀시킨 뒤 방어에 치중하게 하였다. 그리고 992년 80만을 동원하여 고려 공략에 나섰는데, 이처럼 요의 전략목표가 고려 정복으로 바뀌면서 송은 비로소 숨 돌릴 틈을 얻게 되었고 서하에 대한 적극적인 공략에도 나설 수 있었다. 이처럼 요-송관계의 주요 변수로 요-고려관계가 작용하였다.
송-서하 전쟁 원인 분석 / 兪 垣 濬 119 여전할 뿐 아니라 그 폭을 더욱 확대하고 보다 정밀하게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 각한다. 왜냐하면 화이론은 각자의 인식과 주어진 환경 등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송인이 지니고 있던 모든 대외인식의 기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중원왕조와 북 방왕조와의 관계에서만 적용된 개념이 아니라 요 금 등 자신이 중심국가라고 자처하는 국가마다 다소 변형된 형태일지언정 화이론을 모두 수용하고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측면 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화이론은 중원왕조가 북방왕조를 바라보는 고유한 시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당시대인의 보편적 인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화이론이 중원왕조 이외의 국가 관계에서도 어떻게 변용되고 다층적으로 활용되었는지를 밝히는 노력이 진 행되어야 다핵 다층으로 이루어진 이 시대의 특징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중원왕조와 주변국가와의 외교적 접근방법 가운데 가장 전통적인 것은 以夷制夷 전 략이다.7) 다자간 외교관계가 전개되면 될수록 각국은 자신들의 입장에 가장 유용한 이이 제이 전략을 수립하고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에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국가 사이에서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많은 탐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동상이몽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군사동맹으로 가시화하기에는 상당한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자국의 이익이 철저하게 우선시되는 국제관계에서 양국의 이해가 완전히 일 치되고 신뢰가 조성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이이제이 전략 은 일종의 분위기 조성용이었지 실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제이는 끊임없이 모색되었다. 심지어는 송-금동맹과 송몽고동맹처럼 송조의 멸망을 자초한 치명적인 결정도 이이제이 전략 차원에서 두 차례나 실행되었을 정도였다.8) 송조가 이처럼 이이제이 전략을 끈질기게 모색한 것은 건국 초 감행한 對遼전쟁의 실패와 점증한 요의 군사적 압력 속에서 독자적 생존을 모색하기 힘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교적 절충과 타협은 외교정책의 최대 과제일 수밖에 없었고, 이이제이 전략은 군사 외교적 압력을 감소시켜줄 수 있는 방안 가운데 투자 대비 효과가 가장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7) 8) 廖隆盛은 당시 다자간 외교에서 이이제이는 가장 전통적이며 전형적인 외교적 모델로서 송의 대외정책은 태종의 對遼개전 시기를 제외하고는 본질적으로 以夷制夷라는 전통적 방식에서 벗 어난 일이 없었으며, 이 점은 요나 서하 등 당시 각국 모두 마찬가지였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이아제이 정책은 송-서하 관계 분석의 대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廖隆盛, 宋太宗的 聯夷攻遼外交及其二次北伐, 國際貿易戰爭 ) 송 태종의 聯夷攻遼 정책은 송조 以夷制夷 정책의 효시로서 송-금동맹과 송-몽고동맹 외에도 仁宗 慶曆년간에는 以遼制夏를, 真宗 仁宗 神宗은 聯吐蕃制西夏 정책을 추진하였다. 심지어는 남북송 교체기에 아무런 실질적 유인 수단도 없고, 현실성도 없었지만 금을 견제하기 위해 서 하를 끌어드리려는 외교적 노력이 경주되기도 했다.
120 하지만 이이제이는 아무래도 화이론과 마찬가지로 중원왕조와 상대국가 간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개념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 따라서 보다 포괄적이며 상대적인 連環性 의 개념이 다자간 외교관계에 대한 유기적 접근 개념으로 더욱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송-서하 전쟁사 연구를 위한 보다 구체적인 시각 가운데 검토해 봐야 할 사안 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송태조와 태종의 통일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과 복안이다. 둘째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차지한 송태종의 개인적 입장과 그것에 따른 문제점이다. 셋째는 송태종의 대요전쟁 패전에 따른 대외정책의 변화이다. 넷째는 대서하전쟁의 승리 를 불가능하게 한 송조 내부의 매카니즘에 대한 분석이다. 다섯째는 서하의 대송 전쟁의 궁극적 목적과 전략에 대한 분석이다. 여섯째는 송-서하 전쟁에 대한 요의 입장이다. 송태조와 태종 형제는 漢 唐의 부활을 꿈꾸면서 연경과 서경을 자신의 영토에 다시 포 함시키리를 강력하게 희망하였으며,9) 송의 건국 이전에 이미 요가 점유하고 있던 이 지 역 명칭을 굳이 당대의 연운16주 로 표기함으로써 요의 통치 자체를 시종 부인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하고 있던 제국의 구체적 영역은 漢 唐과 달리 매우 축소된 것이었 다. 그 가운데 서북지역만 살펴보면 우선 당조의 출발점이자 주요 경영 대상이었던 秦陇 지방, 즉 河西走廊 朔方 지역에 대해서 송은 처음부터 통일의 대상이라고 여기지 않았으 며, 그들이 서부국경으로 간주한 지역은 오대이래 유지되어 온 秦州 靈州 夏州를 잇는 지역이었다. 이는 建隆3년(962), 尚书左丞 高防이 秦州 지사가 되어 올린 상주문에서 自 渭而北则属诸戎, 自渭而南则为吾有 10)라고 한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 은 태종을 비롯한 후대 황제들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송의 대서하전쟁은 기 존의 국경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지 영토를 확장하려는 공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아 니었다. 그리고 이계천이 송군과의 거듭된 전쟁에서 승전을 거두며 강성해진 것은 그 자 신의 군사적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송조가 이 지역에 대한 명 확한 전략을 갖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11) 둘째,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차지한 송태종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급급해 건국기 황제가 취해야 할 원대한 계획의 수립과 추진 대신 공적의 수립을 위 해 조급했고, 지나치게 강경한 조치를 남발하였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北漢을 격파 9) 10) 11) 송태조에게 一统太平 이란 존호를 올리려고 하자 연경과 서경 일대를 회복하지 못하였기 때문 에 부적절하다고 사양한 것에서 그의 영토의식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长编, 卷3, 建隆3년 6월 辛卯. 이화서는 송 태조와 태종의 통일 에 대한 구도가 漢 唐과 달리 매우 폭이 좁아 서북지역을 포 함하고 있지 않았음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런 인식이 서북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경영전략이 부재한 원인이며, 서하와 하서회랑 등에 대한 정책이 임기응변에 그치게 된 요인이라고 강조하 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기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당연히 곤란했다.
송-서하 전쟁 원인 분석 / 兪 垣 濬 121 하고 난 뒤 모든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요 공략을 서두르다가 高梁河에서 대패한 것이다. 이러한 송태종의 모습은 태조와 매우 대조적이다. 송태조는 북방의 요에 대해서 는 매우 신중하게 대하였음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河东이 契丹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 지역을 차지하게 되면 契丹으로 인한 전란을 우리가 치러야 한다, 따라 서 일단 북한을 그대로 두어 우리의 병풍으로 삼고 이후 우리가 부유해지면 그 때 차지 하는 것이 좋다. 12)고 할 정도였다. 송태조가 요와 북한에 대해 신중하게 대한 것은 신생 송조의 실력이 그들만 못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전략적 우선순위에 따른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는데, 아무튼 이는 무모하고 졸속적인 대요전쟁을 주도했던 태종 과 명확한 대비를 이룬다. 바로 이점이 송-서하관계가 송태종대에 들어와서 급속도로 악 화된 중요한 원인이다. 셋째, 송태종의 대요전쟁 패전에 따른 대외정책의 변화이다. 태종의 대요전쟁 패전은 태종대의 일시적 부진이나 후유증으로 끝나지 않았다. 태종은 패전의 후유증으로 개인적 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 매우 곤경에 처했으며, 길게는 송조의 만성적 積貧積弱 을 초래 한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13) 과도한 공세의 후유증에 시달린 송태종은 말년에 들어 역으 로 대외정책에 대해 극도로 보수적인 정책을 취하였고, 심지어는 治国在乎修德, 四夷當 置度外, 置于度外, 存而勿论 이라고 유언을 남기며 대외문제에 대한 방임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 송태종이 남긴 각종 후유증으로 인해 宋眞宗은 천하의 창생을 위해 굴욕을 참는 것이 마땅하다 며 즉위 초 국정을 안정시키는데 급급하여 서하와 조속히 화의를 체 결하는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넷째, 송조의 군사적 부진은 군부의 발호를 방지하는데 최우선을 둔 송조의 정치 군사 제도와 경제문화적 발전에 따른 주변 국가에 대한 우월감이 맹목적인 자만과 폐쇄적 태 도를 지니게 하였고, 특히 성리학의 도덕지상주의가 현실을 왜곡하게 하였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다섯째와 여섯째 과제는 보다 구체적인 자료의 분석을 통해서 향후 보완해 야 할 부분인데, 특히 요 송 서하의 상황에 대해 모두 해박해야 하는 부담을 안겨주는 과제이기도 하다. 12) 13) 王稱, 东都事略, 卷23, 孟昶传 论赞. 張其凡은 積貧積弱으로 대표되는 송대의 거의 모든 구조적 문제점이 태종의 대요전쟁 패전과 그에 따른 후유증이라고 강조하였다.(張其凡, 宋代政治軍事論稿, 合肥, 安徽人民出版社, 2009)
122 3. 송-서하의 초기 관계와 충돌 원인 송태조는 건국 직후 남중국 통일에 주력하기 위해 요를 비롯한 서북방 제 세력을 인정 하고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유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요와의 무역을 허용하는 한편 전마 의 공급지인 河西柱廊의 回紇과 土蕃과도 우호적인 정책을 폈고, 이들 역시 말무역의 이 익 등으로 송조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夏州(陝西省 橫山縣) 銀州(陝西省 米脂縣) 綏州(陝 西省 綏德縣) 宥州(陝西省 靖邊縣) 靜州(陝西省 米脂縣) 등 현 陝北 5개 주를 다스리고 있던 定難軍節度使 李彛殷에게도 太尉직을 하사하고 기존의 통치권을 모두 인정하였다. 李彛殷 역시 五代 각 왕조에게 그러하였듯이 송에 대해 신복을 표방하고 표문을 올려 태 조의 즉위를 축하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송 건국 당시, 서북부 국경은 현 山西 陝西 內蒙古의 交界地인 黄河 河曲의 豐州에서 시작해서 서남쪽으로 府州 麟州 夏州를 거쳐 靈州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宋太祖는 국경 지역에 대해 매우 느슨한 羈縻政策을 채택하여 각 지역 유력자의 해당지역 지역장관직 세습을 허용하는 등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또 한편으로는 14명의 지휘 관을 이 지역에 주둔하게 하여 국경지대의 안정을 도모하였다.14) 그리고 군 지휘관에 대 한 권한 축소와 감시 체계 구축 등 군에 대한 강력한 개혁조치를 시행한 것과 달리 국경 을 수비하는 지휘관에 대해서는 상당한 예외조항을 두고 우대함으로써 현장에서 적극적 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15) 그 결과 서북지방 제 세력들이 송과 우호관계를 맺고 靈州와 河西柱廊을 잇는 무역로가 창통하는 등 국경지역 안정에 성공하였다.16) 태 종 즉위 후에도 양측 관계는 여전히 우호적이어서 太平興國2년(977) 태종이 北漢을 친정 하였을 때는 李光睿의 아들 李繼筠은 銀州刺史 李光遠과 綏州刺史 李光憲을 파견하여 호 응케 할 정도였다.17)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太平興國7년(982) 5월, 夏州 등지를 통치하던 定難軍節度使 李繼 14) 15) 16) 17) 李华瑞, 宋夏关系史, pp.15 16. 송태조는 汴京에 남은 지휘관 가족에 대한 후대해 주었고, 군 지휘관 관할 州縣 榷場에서 거둔 수익을 回图贸易의 자본으로 활용하도록 해주었을 뿐 아니라 관련 세금까지 면제해 주었다. 또 용맹한 자들을 선발하여 지휘관의 친위대로 삼는 행위와 관할 부대에 대한 상당 수준의 임의 처결권도 인정해 주는 등 오대의 전례를 거의 다 인정해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그 결 과 국경지역의 군 지휘관은 풍족한 재정적 뒷받침을 바탕으로 군을 양성하고 첩자를 파견하여 적의 동정을 파악하는 등 적극적인 대응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李燾, 續資治通鑑長編, 卷17, 开寶9年 11月 庚午) 967년 李彛殷이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은 李光睿는 北漢의 吳堡砦를 공략하고 砦主 侯遇를 사로 잡아 송에 보내기도 하였다.( 宋史, 卷453, 夏國 ) 宋史, 卷453, 夏國
송-서하 전쟁 원인 분석 / 兪 垣 濬 123 捧의 입조와 이에 대한 태종의 부적절한 조치를 계기로 일대 파탄을 맞게 되었다. 송태 조를 살해하고 즉위했다는 강한 의혹 속에서 권력을 장악한 송태종은 조속히 자신의 정 치적 기반을 구축하고 정통성을 확보하여야 했다. 하지만 건국한지 오래되지 않은 신흥 국가에서 국가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정책 대신 황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충 강화하고 권위를 제고하는데만 정책의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그 후유증은 상당히 심각하였다. 통치자로서의 정통성 결여는 태종으로 하여금 가시적인 공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조급증 과 함께 태조가 채택한 정책에 대한 과도한 부정과 수정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 히 자신에 대한 군의 충성심에 의구심을 갖을 수밖에 없었던 태종은 국경 지역 지휘관의 재량권을 대폭 삭감하는 등 통수체계의 일사분란함을 특히 강조하였다. 회도무역 독점권 을 비롯해 牙兵 혁파 등의 조치가 신속하게 취하여졌음은 물론이고, 羈縻政策의 그늘 안 에 있었던 제 세력의 기득권을 전면 부인하고 자신의 통치에 절대 순응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때 4대에 걸쳐 입조한 일이 없던 李繼捧이 갑자기 송에 입조하고 관할 지역을 송 에 헌납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런 돌발 사태가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 지 이론이 있기는 하지만18) 아마도 태종은 이계봉정권이 송조의 중앙집권에 역행하는 할 거정권이며 또한 이민족정권이기 때문에 더욱 서둘러 대응책을 강구하였던 결과가 아닌 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송태조도 이룩하지 못한 커다란 공적을 수립하여 자신의 통치 정 당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송태종은 太平興國4년(979) 北漢을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燕京 공략에 나섰다가 오히려 高梁河에서 참패를 당하고 겨우 살아 돌아옴으로써 엄청난 정치 적 곤경에 처하였다.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이 전개되자 송태종은 대외정책에 있어서 더 욱 경직된 자세를 견지하였다. 송태종은 이계봉이 汴京 거주와 헌지에 동의하자마자 서둘러 관리를 파견하여 관할 주 현을 접수하는 동시에 이계봉의 緦麻이상의 친척을 모두 汴京으로 강제 이주하게 했고, 綏州刺史 李克憲과 銀州子史 李克文의 병권도 박탈하고 입조할 것을 강요하였다.19) 이계 18) 19) 이계봉의 입조와 헌지 요인에 대해서는 3종의 각기 다른 해석이 있다. 첫째, 내부 권력투쟁에서 수세에 처한 이계봉이 그 타개책으로 송조에 귀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이것을 당항족 전 체의 의사로 오인한 태종이 이계봉과 그 일족의 변경 이주를 허용하면서 관할 주현을 헌납하도 록 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이계봉의 입조는 송조와의 우호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거나 지지 를 획득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는데, 태종은 이를 이계봉 관할 지역의 접수를 위한 호기로 간주하고 헌납을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송 측의 기록과 달리 이계봉 의 입조와 헌지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고 송조의 오랜 음모와 강압의 결과이며, 당항인 내부의 갈등 역시 송조가 개입의 이유로 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李华瑞, 宋夏关系史, p.19; 吳天墀, 西夏史稿,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pp.13 14) 태종은 이계봉에 대한 처리를 太平兴国3年(978) 4월 陳洪進이 泉州와 漳州 관할 14개县을 들어
124 봉을 비롯해 당항의 집권세력 모두를 인질로 억류하려는 송태종의 강압적 조치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송태종은 이계봉의 문제를 陳洪進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인식하였음 은 물론 심지어는 이계봉을 항복한 北漢 군주 劉繼元과 같이 대접하였다. 이계봉을 항복 한 유계원과 동격으로 놓고 일종의 포로로 대접한 것은 태종이 당항의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그들의 민심을 얻는데 실패하였음을 말해주며, 이계봉의 친송정책을 효율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항족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이들이 李繼遷을 중심으로 뭉치게 함은 물론 나아가 그들의 독립을 촉진하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夏州 蕃落使였던 17세의 이계천은 변경으로 이주하라는 태종의 강압적인 조치에 반발 하여 조부 李彛興의 초상을 꺼내들고 정권의 부흥을 호소하며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러 한 행동이 호소력 있었음은 이계천의 반발이 어떤 성격을 지닌 것인지, 그리고 송조가 어떠한 오류를 범하였으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을 취해야 하는지를 역으로 설명해준다. 하지만 이계천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송태종은 거의 개의치 않 았고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다. 雍熙1년(984) 9월에 夏州 知事 尹憲과 巡檢使 曹光實이 이계천의 주둔지 斤澤을 야간에 습격하여 500여명을 살해하고 400여개의 텐트를 불태웠 고, 이계천의 모친과 아내를 포로로 잡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계천은 겨우 달아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다시 재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듬해인 雍熙2년(985) 2월, 이계천은 투항을 한다고 속여 巡檢使 曹光實을 살해하였 고, 송태종은 대노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다시 濁輪川에서 이계천을 격파하였다. 이에 일 대 125개 부족이 송에 투항하자 이계천은 요로 가서 夏國王으로 책봉 받고 義成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강력한 지지 세력을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송의 주력군과의 결전 을 회피하고 철저하게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채택함으로써 송군은 효과적으로 이계천을 제압하기가 힘들었다. 그 결과 태종 재위기간 서북지방은 송군과 이계천 군과의 지속적 인 충돌로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송조는 이계천을 무력으로 제거하는데 실패하자 당항족 내부의 갈등을 극대화하는 한편 각종 유화책을 병행하여 이계천의 투항을 유도하 였다. 하지만 이계천은 송조에 투항할 의사가 있음을 거듭 밝히면서도 실제로는 계속 군 사적 저항과 세력 확대에 주력하는 등 교묘하게 대처하였다. 결국 송태종은 雍熙2년(985) 이계봉을 崇信節度使, 李克憲을 道州防禦使, 李克文을 博 州防禦使로 임명하여 귀환시켰으나 이미 정치적 설득력을 상실한 뒤여서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요와의 전쟁에서 거듭 참패하였던 태종으로서는 이계천에게 후한 대접 을 하더라도 관계를 정상화시키고 싶었지만 명목상의 신복조차도 거부하는 이계천의 거 투항한 일과 5월에 錢俶이 吳越을 들어 투항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고 심사숙고함이 없이 서 둘렀던 것으로 보인다.
송-서하 전쟁 원인 분석 / 兪 垣 濬 125 듭된 도발에 몹시 자존심을 상해 결국 淳化5년(994) 5월과 至道2년(996) 4월에 대군을 파견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지도3년(997)에도 대군을 파견하려고 했으나 자신의 사 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송진종이 즉위하던 무렵 이계천은 靈州에 대해 맹공을 하고 있어 영주를 방어할 것인 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진종으로서는 처음 마주친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당시 송조에는 영주를 굳게 방어하고 주변 세력을 경제적 이익을 통해 군사동맹을 맺어 이계천을 제압하자는 견해, 둘째는 서한이 흉노세력을 우회 공격한 것을 본받아 하서지 역을 점유하여 견제하자는 견해가 있었다. 셋째는 영주를 포기하자는 견해였다. 이 가운 데 둘은 토번과 동맹을 맺자는 것인데, 토번을 신뢰할 수 없었던 진종으로서는 수용은 하되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결국은 포기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결국 고립된 영주는 함평5년(1002) 3월 함락됨으로써 송은 서하주랑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 다. 4. 맺음말 연운지역을 회복하여 당조의 부흥을 이룩한다는 데는 송태조와 태종 형제의 견해가 일 치하였지만 서북지방의 경영에 대해서는 둘 다 원대한 구상이 없었다. 단 송태조는 신생 송조의 국력과 군사력을 고려하여 서북지역의 제 세력에 대해 온화한 削蕃 내지는 유화 정책을 추진하여 안정을 달성한데 비해 송태종은 지나치게 조급하고 강압적인 정책을 추 진함으로써 오히려 李繼遷의 반발과 서하의 독립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송조는 요와의 전면전을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서북지방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을 세울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계천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송조로서는 이 지역과의 왕래를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조 치를 취하지 못하였고, 단공2년(989)에는 국경무역을 금지시킴으로써 당항족에 대한 경제 적 봉쇄조치에 나섰다. 송태종은 불법적 계승에 따른 문제점을 극복하고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오월 과 북한을 통합하는데 서둘렀을 뿐 아니라 연운회복을 명분으로 요와의 친정을 주도하였 지만 오히려 거듭된 패전으로 인해 정치적 위상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군사적 열세는 패배주의의 만연으로 이어져 淳化년간부터 송조는 매우 보수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 다. 결국 태종은 淳化5년(994)에 夏州가 사막 깊숙한 곳에 위치한 본래부터 간웅이 웅거 하던 곳 이라는 것을 구실로 하주성곽을 허물고 그곳 주민들을 綏州와 銀州 등지로 이
126 주 시키도록 하였고 至道2년(996) 이계천이 靈州를 공격하자 靈州 방어를 포기할 정도로 위축되었다. 반대로 이계천은 요의 지지를 획득하여 송태종을 압박하는 뛰어난 지략을 발휘함으로써 일거에 정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송은 서하를 군사적으로 제압할 능력이 없는데다가 요의 군사적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세폐의 제공을 통해 안정을 유지하는 유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 지만 천조 의 위신 때문에 서하에 대한 강경론은 항상 잠복해 있었다. 서하를 동격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정서는 늘 팽배했고, 무역 통제를 통해서도 이들을 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만연하여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서하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서하에 대해 정치적으로 인정하기 싫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우월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서하에 대한 송의 정책은 비교적 강경한 편이었다. 즉 송조는 군사 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즉시 군대를 동원한 압박 내지는 점령을 추구하였고,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무역 봉쇄를 통한 경제적 압박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경제적 통제방식은 군사적 충돌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용했지만 양국 의 충돌을 야기한 군사적 우열의 문제는 손대지 못한 채 현상만 미봉한다는 점에서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송조의 이러한 외교정책은 상시적 불안정 요인을 지 니고 있다. 단 이러한 정책이 송 요간 120년 가까운 장기 평화를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세폐의 규모가 양국 군사적 불균형을 조정하는 적합한 규모였다고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반면 송 서하 관계의 군사적 불균형을 조정하기에 견 25만필은 다소 부족하였을지 도 모른다.
北宋 神宗朝의 對外交易 政策과 高麗 金 榮 濟(檀國大 歷史學科) 宋代의 海上貿易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著書와 論文들이 나와 있다. 이 같은 연구 축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北宋 神宗朝의 對外交易 정책과 高麗와의 關係이다. 北宋 神宗朝에 宰相 王安石이 新法을 실시하여 富 國强兵을 추구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神宗朝 新法黨 정부가 對外交易에 대해서 도 그에 걸맞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주된 이유는 종래의 연구가 宋代 初期 中國과 外國 사이의 海上交易을 잘못 이해했 던 것에 기인한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唐中期 이후 진행된 私貿易의 발달이라는 延長線 에서 宋代의 海上貿易에 대해 논의를 전개해 왔다. 그래서 宋朝가 초기부터 다른 모든 지역에 대해서는 海商의 자유로운 渡航을 허용하고 있었지만, 당시 遼와 宋은 敵對關係 에 있었고, 나아가 高麗가 遼와 修交하고 있었기 때문에, 兩國에 대해서만은 編勅 을 통 해 自國海商의 渡航을 금지했던 것으로 해석해 왔다. 그런데 北宋 初中期에 시행된 嘉祐編勅 과 慶曆以前의 編勅 에 따르면, 南蕃 으로 가는 자에 대한 銅錢의 휴대량을 규정하고 있고, 그 밖의 國家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 다. 만일 宋朝가 초기부터 遼나 高麗를 제외하고, 나머지 국가들에 대해서 宋商의 해외도 항을 전면적으로 개방하고 있었다면, 굳이 南蕃 에 한해서만 銅錢의 휴대량을 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료에 근거한다면 宋初 宋商이 도항할 수 있었던 나라는 南蕃 으로 제한되어 있었다고 해석된다. 宋朝는 太宗朝에 京師에 榷易院을 설치하거나(976년), 그 뒤 이어서 沿邊地域을 대상으 로 三設法(茶, 鹽, 香藥)을 실시하기도 했다(995년). 한편 南蕃地域은 香藥을 비롯하여 犀 角, 象牙의 産地이다. 이 같은 배경에서 볼 때 宋初에 南蕃에 한하여 宋商의 도항을 허용 한 것은 皇室消費도 있겠지만, 당면한 專賣收入과 邊餉을 해결하기 위한 香藥 구입과 밀 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宋朝는 초기에 宋商의 渡航을 南蕃 지역에 한정시 킴으로써 海上貿易에 대해서 사실상 규제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宋朝의 방침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宋商은 高麗를 비롯해 日本, 심지어
128 는 遼에까지 도항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로 인해 宋朝는 수차례 編勅 을 제정하여 宋商이 高麗나 遼에 도항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對外交易은 海商이 속한 域內經濟 나 財政收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까닭으로 中央政府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地 方官廳은 公憑을 발급하면서까지 海商의 渡航을 공공연히 지원하고 있었다. 종래 한국사 연구자들은 高麗時代에 들어와 高麗海商의 대외활동이 단절된 것으로 추정해 왔으나, 中 國側 사료를 보면 編勅 施行期에 高麗商人들도 南中國에 빈번히 오고 있었다. 그런데 宋朝는 神宗朝에 들어와 市舶體制를 본격적으로 정비하고 있다. 먼저 기존의 市 舶港口인 廣州나 明州에 대한 管理監督 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市舶使의 位階를 높여 지 방 州郡의 장관이 密貿易하는 것에 제동을 걸었다. 또 市舶港口는 아니지만, 登州港을 폐 쇄하여 아예 민간선박들이 山東半島 以北의 바다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기에 이르렀다. 또 神宗朝에 들어와 官僚들은 密貿易 商人에 대해 法으로 단속하고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그들을 市舶體制라는 공개적인 시스템 안으로 끌어넣기를 주문하였다. 이 같은 배경으로 인해 宋朝는 神宗朝부터 종래의 폐쇄적인 海上交易 政策을 포기하고 開放 政策으로 전환하였다. 그래서 神宗의 元豊2년(1079)과 3년에 각각 高麗나 日本에 도항하 는 것을 처음으로 허용했다. 그리고 元豊8年(1085)의 勅을 보면, 海商으로 하여금 오직 大遼國과 登州 및 萊州에 가서는 안 된다고 명하고 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서는 高麗나 日本 이외의 다른 國家에 대해서도 宋商의 渡航을 허용했다고 하겠다. 따라서 宋初에는 南蕃에 한해서만 宋商의 도항을 허용했으나, 神宗朝 元豊年間에 이르러 宋朝는 이러한 방침을 바꾸어 渡航할 수 있는 국가를 開放했던 것이다. 그런데 哲宗의 元祐5년(1090)에 이르러, 蘇軾은 慶曆編勅 과 嘉祐編勅 으로 되돌아가 기를 촉구하며, 아울러 宋商의 高麗渡航을 금지하자고 주장했고 이것이 시행되었다. 종래 연구자들은 이를 두고 宋商의 高麗渡航만이 다시 금지된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 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사료가 주목된다. 徽宗의 崇寧4년(1105) 6월 兩浙路 市舶司가 宋商 李充에게 발행한 公憑이 日本에 남아 있는데, 그 勘會 부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 록하고 있다. 舊市舶法 은 商客에게 비록 三佛齊에 가는 것은 허용했으나, 高麗, 日本, 大食 諸蕃에 가 는 것은 법으로 금하여 허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北界나 交趾를 제외하고, 여태까지 中國에 害가 되지 않았던 나라에 대해 모두 갈 수 있도록 한다. 이 崇寧4년의 公憑에서는 자국의 宋商으로 하여금 北界와 交趾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 든 나라에 갈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公憑에 따르면 舊市舶法 에서는 三佛
北宋 神宗朝의 對外交易 政策과 高麗 / 金 榮 濟 129 齊를 제외하고, 高麗, 日本, 大食諸蕃에 도항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에 나타나는 舊市舶法 이 어느 시기의 것일까 하는 점이다. 위의 崇寧4년(1105)의 公憑에서는 宋商의 高麗渡航을 허용하고 있다. 한편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元祐5년(1090) 蘇軾은 宋商의 高麗渡航을 금지하자고 주장하였고, 이것 이 시행되었다. 그런데 4년 뒤인 哲宗의 紹聖元年(1094) 윤4월에 宋朝는 다시 宋商의 高 麗渡航을 허용하였다. 그러므로 高麗渡航 허용에 주목할 경우, 崇寧公憑은 바로 직전에 해당하는 哲宗의 紹聖元年 윤4월의 방침에 따른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할 때 崇寧公憑에 서 말하는 舊市舶法 이란 哲宗의 元祐5년에서 紹聖元年 윤4월 사이의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 蘇軾은 慶曆과 嘉祐編勅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으므로, 崇寧公憑에서 나 타나는 舊市舶法 이란 다름 아닌 宋初의 市舶法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哲宗의 元祐5년(1090)에 이르러 宋朝는 다시 高麗渡航을 전면 금지하고 舊市 舶法 으로 회귀하였다. 이는 神宗朝의 開放政策인 이른바 元豊市舶法 을 모두 폐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때 高麗 뿐만 아니라, 日本과 其他의 국가에 도항하는 것까지도 모 두 금지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哲宗의 紹聖元年(1094) 윤4월에 다시 高麗渡航을 허용하고 있으므로, 이때 舊市舶法 을 폐기하고 또 다시 元豊市舶法 을 채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崇寧4년의 公憑에서는 北界와 交趾를 제외하고, 宋에 위협이 되지 않는 모든 나 라에 宋商이 도항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交趾가 새로이 등장하고 있으므로, 哲宗의 紹聖元年 윤4월 以後나 아니면 徽宗朝 初期에 新市舶法 을 만들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 다. 그렇지만 이 新市舶法 도 開放政策을 채용하고 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元豊市舶法 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詔勅의 時期 神宗朝 以後 渡航許容國 元祐5年 紹聖元年 三佛齊 元豊年間 紹聖元年 以後 崇寧年間 市舶法 高麗, 日本, (大食) 元豊市舶法 高麗, 日本, 大食 元豊市舶法 모든 國家(北界와 交趾 除外) 舊市舶法 新市舶法(元豊市舶法) 위의 <表>를 보면 神宗朝 이후 宋商에 대한 渡航 許容國은 묘하게도 新法黨과 舊法黨 執權時期에 따라 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元豊年間과 元祐年間은 각각 新法黨과 舊法 黨이 執權하고 있던 시기이다. 그리고 紹聖元年(1094)은 哲宗이 親政을 시작하는 시기로 이때 新法黨 人士들도 복귀하던 시기이다. 나아가 徽宗代 崇寧年間은 新法黨이 執權하던
130 시기이다. 이처럼 市舶法의 變化와 執權黨은 서로 一致하고 있다. 宋初 王朝政府는 自國 海商으로 하여금 오직 南蕃에 대해서만 갈수 있도록 했다. 그런 데 神宗의 元豊2년(1079)에 이르러 宋商의 高麗 渡航을 시작으로, 그 이듬해 日本, 元豊8 년에 大遼國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 대해서도 개방하였다. 또 徽宗代에도 역시 遼와 交 趾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도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開放的인 對外交易 정책을 立案하고 實行에 옮긴 것은 공히 新法黨 정부라 할 수 있다. 舊法黨 執權時期인 哲宗의 元祐年間에 蘇軾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高麗를 비판하였 다.① 海商 徐戩처럼 高麗에 밀항한 뒤 마음대로 僧侶를 태우고 오는 경우가 있다. ② 海 商 王應昇처럼 高麗를 통해 遼에 密航하는 무리가 많다. ③ 海商이 공공연히 高麗使節을 태우고 오고 있다. ④ 高麗의 入貢으로 인해 地方經費 지출이 너무 많으며 주민에게도 큰 피해를 주고 있다. ⑤ 高麗使節은 契丹을 대신해 宋을 염탐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 여기서 ④와 ⑤는 宋과 高麗 사이의 修交에 관한 것이지만, ①, ②, ③은 모 두 宋商의 高麗渡航을 허용한 것과 관련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에서 주목되는 점은 新法黨 정부가 對外開放 政策을 시도 한 첫 번째 國家가 다름 아닌 高麗라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서 蘇軾이 왜 집요하게 高麗 를 비판하고 있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新法黨이 對外開放 政策을 적용한 첫 단추 가 高麗였다. 그러므로 蘇軾이 高麗를 비판한다는 것은 곧 新法黨의 對外政策을 비판하 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蘇軾을 비롯한 舊法黨 人士들이 高麗를 비판한 배경 에는 新法黨의 對外交易 開放政策이 한 原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蘇軾은 高麗를 비판함으로써 新法黨의 對外開放 政策을 全面的으로 修正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元祐5년(1090)부터 舊市舶法 體制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哲宗의 親政과 함께 新法黨 人士들이 복귀하면서, 다시 元豊市舶法 體制로 돌아섰다. 따라서 新 法黨과 舊法黨은 對外交易 政策에 있어서도 서로 對立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10 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이 근 명(한국외대) 目 次 머리말 Ⅰ. 북송 초기의 對李朝 정책과 儂智高의 반란 Ⅱ. 神宗 시기의 정책 변환과 베트남 정벌 Ⅲ. 송-베트남 사이 경계 획정 문제와 그 결말 머리말 베트남이 오랜 시간에 걸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것은 939년의 일 이었다. 당시 중국은 오대의 혼란이 지속되고 있는 시기였다. 중국의 정복 상태에서 벗어 나 최초의 독립 왕조를 세웠던 吳權(응오 꾸옌)은, 중국 10국 정권 가운데 하나였던 南漢 의 간섭을 뿌리치고 吳(응오) 왕조를 건립하였다. 이렇게 중국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다 해도 베트남 독립왕조가 걸어가야 할 길은 험 난하였다. 1000년 이상에 달하는 기간 지속되었던 중국의 지배로 인해 베트남 사회에는 중국의 영향이 너무 깊숙이 침투해 있었고, 이에 따라 토착 사회에도 중국과 연계된 세 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각 정치 집단 사이의 경쟁과 지역 간 대립도 치열하였다. 939년 吳 왕조가 성립된 이래 1009년 李朝가 들어서서 비로소 베트남을 안정적을 지배 하게 되기까지, 베트남에는 十二使君의 동란시대, 鄭(딘) 왕조의 시대, 前黎(띠엔 레)의 시대 등으로 격변을 겪어야 했다. 중국은 이러한 베트남의 독립과 정치적 변천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간여하고자 했다. 吳權의 독립 작업도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南漢으로부터 파견되어 온 대규모 군대를 물리친 연후에야 성공할 수 있었다. 鄭 왕조 후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前
132 黎 왕조가 들어설 때에도 중국 세력의 간섭은 지속되었다. 980년 前黎 왕조의 黎桓(레 호안)이 왕조를 개창했을 때 北宋의 太宗은 대군을 파견하여 베트남을 복속시키고자 했 다. 10세기 베트남 제정권의 건국 작업은 그 자체 중국의 견제와 간섭을 극복하는 지난 한 사업이기도 했다. 송 태종의 베트남 정벌이 실패로 끝난 후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한 동안 평온한 관 계가 지속된다. 그 사이 약간의 곡절이 있고 소규모의 분쟁과 전투는 있었으나, 이전에 비교하면 양국 간에는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책봉-조공 관계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친선 관계는 11세기 후반 북송에 왕안석 정권이 수립되어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변한다. 접경 지역의 분쟁이 잦아지고 양측 사이 긴장이 고조되어 가다가 마침내 그러한 대립이 1075년에 이르러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북송의 태종 이래 송조의 베트남에 대한 정책은 어떠한 성격을 띄었던 것일까? 신종 시대에 발 생하는 전쟁은 어떠한 전후 배경에서 촉발된 것이었을까? Ⅰ. 북송 초기의 對李朝 정책과 儂智高의 반란 980년 건립된 前黎朝는 개국 황제인 黎桓(레 호안)이 재위 24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여환은 셋째 아들 龍鉞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이를 확고 히 하지 못한 채 사망하자 여러 아들들 사이에 계승분쟁이 발생했다. 우여곡절 끝에 龍 越이 간신히 등극하였지만, 그는 즉위 사흘 만에 아우인 龍鋌에 의해 살해되었다. 龍鋌의 통치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는 향락에 탐닉하며 잔학하게 통치하였으나 제위에 오른 지 4년만인 1009년에 사망하였다. 이로부터 얼마 후 군권을 장악한 李公蘊이 관료 와 승려들의 지위를 얻어 황제가 되었다. 그가 바로 李朝의 태조이다. 이로써 前黎朝는 30년만에 멸망하였다. 李朝의 태조는 곧바로 북송에 사자를 파견하여 책봉을 요청하였다. 북송 조정에서는 이 문제의 처리를 둘러싸고 약간의 논란이 벌어졌다. 交阯와 접경하며 일선에서 그 관련 문제를 직접 처리하고 있던 廣西轉運使 何亮은 大中祥符 3년(1010) 2월, 李公蘊은 龍鋌 의 최측근으로서 가장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黎氏를 배반하고 새 왕조를 개창하였으니 인준해서는 안 된다. 고 주장하였다.1) 이러한 주청을 받은 진종 역시, 龍鋌이 不義하였 다 하나 李公蘊은 더 심하다. 고 말하였으나, 베트남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고 그대로 이 1) 續資治通鑑長編 (이하 長編 이라 약칭함) 권 73, 眞宗 大中祥符 3년 2월 癸巳.
10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 이 근 명 133 공온의 즉위를 인준하였다.2) 태종 시기까지만 해도 송조는 적극적으로 베트남을 정벌하여 병합하려는 의도를 지니 고 있었다. 이는 黎桓이 前黎朝를 건립하였을 때 출정하는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 다. 太平興國 5년(980) 여환이 즉위하였을 때 태종은 그에 대한 책봉을 거부하며, 당송 교체기의 혼란을 이용하여 떨어져 나간 속지이니 강역 안으로 재흡수해야 한다 3)고 말하 고 있다. 또 당시 베트남 전쟁을 총지휘하였던 侯仁寶는, 交阯의 내란은 천혜의 기회이 며 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 4)고 말한 바 있다. 베트남은 오랫 동안 중국에 복속되어 있다 가 당말 오대의 혼란에 휩싸여 있을 때 떨어져 나간 존재이니 다시 정복하여 원상복구해 야 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태종 시기에 시도된 베트남 정벌전쟁은 그 총사령관이 侯仁寶가 전사할 정도로 참담하게 실패하였고 이후에는 재차 베트남에 대한 정벌의 논의가 대두되지 않았다. 오 히려 현실을 인정하고 베트남과 우호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정책 기조는 이후 眞宗과 仁宗 시대를 통해 지속되었다. 당시 베트남과 북송의 접경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단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것은 양국 접경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이었다. 북송과 李朝 베 트남은 공히 이들에 대해 招撫와 經略에 공을 들였다. 특히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廣源州 일대에 거주하는 儂氏 세력이었다. 이들의 거주지역인 廣源州는 金銀의 산지였다. 이에 주목하여 송조와 베트남은 광원주 일대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기도하였다. 접경 일 대의 소수민족은 베트남, 송 양국의 압박을 받으며 한편으로 양국의 영역을 향해 反攻하 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베트남, 송 양국이 모두 광원주 일대를 향해 경쟁하였다 해도, 眞宗 시대의 宋은 베트남에 비해 현저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한 양국 사이의 충돌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大中祥符 7년(1014)에 있었 던 사건이다. 이해 12월 베트남 측이 廣西의 欽州와 如洪寨를 습격하여 人畜을 약탈해 갔다. 이는 베트남 관할 하의 소수민족(狄獠)가 죄를 짓고 欽州로 도망쳐 오자, 知欽州가 如洪寨에서 이들 소수 민족을 맞아 성대히 대우해주었던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사실 이 조정에 보고되자 眞宗은, 향후 베트남 영역의 소수민족들을 誘召하여 공연히 사단을 만들지 말라. 고 지시하고 있다.5) 송의 진종은 베트남에 대해 극히 유화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2) 3) 4) 5) 李公蘊은 大中祥符 3년(1010) 2월 檢校太傅ㆍ充靜海軍節度觀察處置等使ㆍ安南都護로서 交阯郡 王에 봉해진다. 宋會要輯稿 蕃夷 4 交阯 蕃夷 4之29. 安南志略 권2, 太宗 太平興國 5년 5월 征交阯詔. 위와 같음. 위의 책, 蠻夷 4之31.
134 이듬 해인 大中祥符 8년(1015) 12월에는 베트남 측 蘇茂州의 소수민족이 欽州 安遠縣 을 침략하여 人畜을 약탈하였다. 하지만 이때 역시 조정에서는 광서로 전운사에게 詔令 을 내려 방어만을 명령하고 있을 뿐이다.6) 1022년 眞宗이 작고하고 仁宗이 즉위하였다. 진종시대의 유화적인 대 베트남 정책은 인종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조 베트남과 북송 사이에는 인종의 즉위 이후 5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측의 북부 변경지역에 대한 공 략과 팽창은 중단되지 않았다. 진종 天聖 6년(1022) 4월 베트남의 북부 진출은 중국 영 역으로까지 확대되어 邕州의 북송 군대와 교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송측에서는 邕 州의 權寨主까지 전사하였다. 이때 李朝의 태조(李公蘊)은 북송에 入貢하면서도 한편으로 는 子弟 및 사위를 시켜 침공을 지속하였다.7) 5월에 들어서도 베트남측의 공략은 멎지 않았다. 이러한 사태 전개에 송조는 어쩔 수 없이 강경한 자세를 취하였다. 베트남에 대 해, 약탈해간 人戶를 반환하지 않으면 邕州의 군대를 출동시켜 정벌을 진행시킬 것이라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베트남측은 이러한 압박에 베트남측은 굴복하여 송측 영역에 대 한 공략을 중지하였다.8) 이조의 베트남에서는 이 직후인 1028년 太祖 李公蘊이 죽고 이후 상당 기간의 계승분 쟁을 거쳐 德政(佛瑪)이 즉위하였다. 바로 2대 황제인 太宗이다. 태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한동안 북송과 군사적인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다 북송의 인종 景祐 元年(1036) 이후 역시 국경지대의 소수민족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베트남 북방 변경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이 빈번히 국경을 넘어 송측의 변경지역 을 약탈하였던 것은, 베트남의 적극적인 북방 경영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측의 기록에 의하면, 順天 18년(1027) 李朝의 太祖 李公蘊이 황태자인 佛瑪(德政) 에게 명하여 북방의 변경지역인 七源州를 토벌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9) 태조가 사망 후 에는 七源州 정벌의 장본인인 李德政이 帝位에 올랐다. 따라서 李朝의 태종 시대가 되면 북방 소수민족 거주지에 대한 공략이 더욱 활발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베트남 북부 접경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에 대한 李朝의 공략,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소수민 족의 동요는, 儂智高의 난이란 문제를 야기하고, 이는 북송과 이조 베트남 양측에 큰 파 장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베트남의 지배를 받고 있던 廣源州의 儂氏는, 李朝의 북부 변경지역에 대한 압박과 통 6) 7) 8) 9) 長編 권 85, 眞宗 大中祥符 8년 12월 己亥. 위의 책, 권106, 仁宗 天聖 6년 4월 庚午. 宋會要 蕃夷 4 交阯 蕃夷 4之32. 大越史記全書 (이하 全書 라 약칭함) 順天 18년 條.
10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 이 근 명 135 제가 강화되며 동요를 일으켰다. 이러한 불안과 동요는 1038년 儂存福이 李朝 베트남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발전하였다.10) 儂存福은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 이듬해인 1039년 정월 칭제하고 국호를 長生國이라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 반란은 이조 태종의 진 압으로 말미암아 무참히 실패하였다. 농존복과 그 아들 智聰은 李朝의 정벌군에 의해 생 포되어 수도로 압송된 다음 斬刑에 처해졌다. 이때 농존복의 또다른 아들 儂智高는 모친 阿儂과 함께 이조 진압군을 피해 도망하였 다가 까오방 지역으로 돌아와 재차 반란을 일으키고 국호를 大曆國이라 하였다. 이조의 태종은 곧바로 농지고에 대해서도 토벌을 단행하여 농지고를 생포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농지고의 부친 농존복과 형 농지총이 처형된 것을 불쌍히 여겨 사면해 주었다. 뿐만 아 니라 1043년 이조의 태종은 농지고에게 廣源州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하였고, 이에 따라 농지고는 이조 중앙정부에 조공을 바치며 복속하였다. 농지고는 광원주를 기반으로 하여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 갔다. 1040년대 말엽이 되면 인근 지역인 思琅州 및 四洞 도 그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대략 현재의 중국 및 베트남 접경 지역이 그의 영향 아 래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세력 확대를 기반으로 그는 1048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태 전개에 송 조정은 당황하였다. 10월에 이르러 농지고가, 邕州와 桂州 등 7州의 절도사 직위를 내려주면 투항하겠다. 11)는 의사를 전달해오자 인종은 그것을 들어 주고자 하는 의향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樞密副使인 梁適은, 만일 그렇게 하면 兩廣 지 방은 조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12)라고 말하여 인종의 생각을 돌렸다. 이 러한 과정을 거쳐 10월에 樞密副使 狄靑을 宣撫使로 파견하여 농지고 난을 진압하는 것 이 결정되었다. 송 조정의 농지고에 대한 토벌 방침이 결정되자, 이조 베트남은 이를 지원하겠다는 의 사를 전달해 왔다. 12월의 일이었다. 知桂州 余靖은, 이를 받아들여 향후에도 儂氏와 李 朝 베트남으로 하여금 서로 대립하는 형세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 13)고 말했다. 하지만 狄靑은, 交阯의 도움을 받아들이게 되면 蠻夷들이 향후 송을 가벼이 여겨 쉽게 이반할 것 14)이라 말하며 반대했다. 조정은 狄靑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狄靑의 토벌군은 이듬해인 皇祐 5년(1053) 정월 농지고에 대한 공략에 착수하여 불과 10) 11) 12) 13) 14) 농존복 및 농지고의 반란에 대해서는, 皇宋通鑑長編紀事本末 권50, 廣源蠻叛 ; 山本達郞 編, 앞서 든 ベトナム中國關係史 pp,34 37; 呂士朋, 앞서 든 宋代之中越關係, pp.279 285 참 조. 위와 같음. 위와 같음. 太平治迹統類 권10, 仁宗平儂智高, 皇祐 4년 12월 朝. 위와 같음.
136 10일만에 완전히 토벌하였다. 농지고는 狄靑의 진압군이 압박해 오자 邕州로 후퇴하였다 가 崑崙關 전투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후 야간에 옹주성을 방화하고 大理國으로 숨 어들어갔다. 余靖은 농지고의 모친 阿儂과 동쟁인 智光, 아들인 繼宗ㆍ繼封 등을 생포하 였다. 또 대리국으로 사신을 보내 피신한 농지고의 압송을 요구하였다. 농지고는 이 직후 대리국에서 살해되어 그 시신이 송에 보내졌다. 송 조정은 농지고의 모친과 동생, 아들들 을 모두 주살하였다. Ⅱ. 神宗 시기의 정책 변환과 베트남 정벌 治平 4년(1067) 정월, 북송 제5대 황제 英宗이 붕어하고 이어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 그가 바로 神宗이다. 당시 神宗은 약관 20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이후 元豊 8년(1085) 38 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20년 가까이 帝位에 있으면서 王安石(1021 1086)을 발탁하여 이 른바 新法 혹은 變法이라 불리는 대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이러한 신종 시대를 통해 북송의 대 베트남 정책은 이전까지와는 전연 다른 면모를 취 하게 된다. 신종과 왕안석이 대외 정벌을 통해 공업을 이루고 송조의 국세를 떨치고자 하는 강렬한 염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종은 황제로 즉위한 이후 국정의 대대적인 쇄신을 이루고자 했다. 그는 황제 등극 직후인 治平 4년 윤3월에 內外의 文武 群臣들에게 下命하여 內政과 邊防을 위시한 국정 전반에 대한 숨김 없는 직언을 구했다.15) 그의 이러한 內外 臣僚에 대한 개혁의 자문은, 나아가 재정수지의 절감방안과 재정책의 개선방향,16) 전반적인 治道의 방향과 변경의 군 사문제17)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상들에게 수시로 행해졌다. 하지만 이러한 神宗의 적극적인 모색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유력한 대신들은 그의 개혁의지에 부응하지 못하거 나, 아니면 그들이 제시한 方略이 전연 신종의 의도에 부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 蘇轍(1039 1112)은 훗날, ( 신종황제는) 처음 즉위한 때 萬事를 經營하여 海內를 바로잡고 四夷를 제압하려는 뜻을 15) 16) 17) 長編 권209, 英宗 治平 4年 閏3月 庚子. 長編拾補 권3上, 神宗 熙寧 元年 6월 丙寅. 이때 神宗은 司馬光과 滕甫에게 명하여, 看詳裁 減國用制度 하도록 했다. 예컨대 熙寧 元年(1068) 神宗은 富弼에게 治道와 邊事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있으며( 宋史 권 313, 富弼傳 ), 이듬 해 7월에는 文彦博에게 邊防久遠備禦之策을 묻고 있다( 長編拾補 권5, 神宗 熙寧 2년 7월 乙丑).
10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 이 근 명 137 지녔습니다. ( 하지만) 老臣과 宿將들은 팔를 끼고 서로 바라만 보았습니다.18) 라고 회고하고 있다. 신종은 국정의 개혁과 이를 바탕으로 거란과 서하를 제압하고자 하 는 강렬한 열의를 지녔으나, 주변의 신료들로부터 전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한동 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仁宗 이래의 老臣이었던 富弼(1004 1083)은 신종이 자신 의 주된 관심사인 邊事에 대해 자문하자, 폐하께서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으니 마땅 히 德과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원컨대 20년간 兵을 입에 올리지 마소서 라고 대답할 정도였다.19) 이러한 상황에서 神宗이 국정개혁을 추진할 대안으로서 선택한 인물이, 당시 朝野에서 명망을 얻고 있었던 王安石이었다. 이렇게 신종이 王安石을 발탁하는 저간의 사정에 대 해, 明末淸初의 인물 王夫之는, 神宗에게는 暢言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는데, 國政을 맡은 大臣들은 그 뜻을 헤아려 더불 어 잘 도모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그리하여 王安石이 이를 타고 나아갔다. 神宗은 처 음 즉위했을 때 文彦博에게 이르기를, 兵을 길러 邊境을 막기 위해서는 府庫가 충실해야 만 한다 고 했다. 이는 安石이 이끈 것이 아니다. 그 뜻이 정해진 것이 오래였다.20) 라고 말하고 있다. 신종 시기 추진되는 왕안석의 신법에는 다양한 성격과 측면이 있으나, 그 중심된 지향 가운데 하나가 국력을 충일히 하여 당시의 수세적이고 굴욕적인 대외관 계를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희녕 4년(1071), 신종은 蕭注를 知桂州에 임명하였다. 그는 嘉祐 5년(1060) 안남 정벌 을 주장하였다가 인종으로부터 責降된 인물이었다. 신종은 蕭注가 부임하기 이전 面對하 며 그에게 안남 정벌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는, 1060년 당시는 溪洞兵이 一當十이었고 무장도 우수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같지 않다. 교지인이 不滿萬이란 말도 망언이다. 고 답하였다. 이전과는 달리 교지 정벌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로 변모해 있었다. 신종은 희녕 6년(1073) 沈起를 蕭注 대신 知桂州로 임명하였다. 그는 부임한 이후 恩靖州의 儂善美를 招納하고 경계지역에 성채 구축하는 등 교지 정벌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의 대 교지 정책은 殺人以千數 交人震憂 라 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沈起는 희녕 8년(1075) 18) 19) 20) 蘇轍集, 欒城集 권47, 進御集表. 宋史 권313, 富弼傳. 남송시대의 인물인 葉適(1150 1223)이, 弼初執政 更張之意過于范韓 至作相 乃以一切堅守無所施爲爲是 雖如琦之微有改作 亦不能從也 ( 習學記言序目 권48, 皇朝文 鑑 2 奏疏 )라고 평하듯, 富弼은 본시 時弊에 대한 개혁의지가 강한 인물이었으나 神宗 무렵 이 되면 철저한 무사안일론자가 되어 있었다. 王夫之, 宋論 권6, 神宗 2.
138 劉彛로 교체되었다. 유이는 조정에 攻取의 계획이 있다고 판단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교 지에 대한 전쟁을 준비해 나갔다. 溪洞에 관원 파견하여 土丁을 모집하였으며 이들을 保 伍 결성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또 鹽運을 핑계로 어부를 모아 水戰 훈련을 하였다. 知 邕州 蘇緘은 劉彛에게 서신을 보내 이러한 조치의 중지 요구하고, 交人에게 전쟁을 일으 킬 명분을 주지 말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劉彛는 도리어 상주하여 蘇緘을 탄핵하였다. 양인이 대립하자 북송 조정은 유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조정에서는 蘇緘에게 邊事를 말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이처럼 송측에서 전쟁을 위한 준비를 진행시켜 가자 1075년 11월 위협을 느낀 교지가 먼저 송에 대해 先攻을 해왔다. 교지는 欽州와 廉州를 함락시키고 옹주로 진격하였다. 이 에 지옹주 소함은 廂禁卒을 모두 합하여 2,800명 편성하고, 이밖에 수백명의 사졸 모집 하여 대비에 나섰다. 하지만 1076년 정월, 옹주성은 42일만에 함락되고 소함 및 그 가속 은 모두 사망하였다. 교지병은 이때 吏卒民丁 5만여명 살해항여 이들 시체로 강을 메웠 다고 한다. 교지의 군대는 옹주성을 약탈한 후 철수하였다. 교지의 침공이 있자 송은 곧바로 교지에 대한 반공을 준비하여 趙卨을 安撫使로 하고 李憲을 副使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조설과 이헌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였다. 당시 재상 왕 안석은 안남 정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반면 추밀사 吳充은 이에 반대하고고 있었다. 신 종은 조설 대신 郭逵를 안무사로 임명하였다. 곽규의 임용은 吳充의 추천에 따른 것이었 다. 교지 정벌군은 1076년 7월에 정벌군은 桂州 도착하여 10월부터 교지 영내로 진군하였 다. 12월에는 곽규의 본대도 안남 영역으로 진군하였다. 교전이 벌어지자 베트남측은 코 끼리를 앞세우고 저항하였으나, 송측 군대는 强弩를 발사하고 巨刀로 象鼻를 베며 전투 하여 베트남의 전열을 무너트렸다. 송의 정벌군은 진군을 지속하여 12월 21일 富良江에 도착하였다. 안남은 전함 400척을 모두 남안에 정박시키고 송군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송 측은 수군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로 교지군과 접전을 벌였다. 부양강 전투는 치열하 게 전개되었으나 그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양측 군대의 피해는 막심하였다. 송측의 기록에 의하면 적이 대패하여 강에 떨어져 죽은 자가 不可勝數였다. 이로 인해 부양강이 3일간이나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 고 적고 있다. 부양강 전투 직후 송은 더 이상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리 만큼 심대한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九軍食盡矣 凡兵之在行者十萬 夫二十餘萬 冒暑涉瘴 死亡過半 存者皆病瘁 라는 상 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베트남 역시 송의 대대적인 정벌에 장기간 맞설 수는 없었다. 결 국 부양강의 전투 이후 베트남이 割地를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하자, 곽규의 군대는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전투를 종결짓고 철수하였다. 본대가 베트남 영역으로 진군한 지 채
10세기 후반 송-베트남 사이의 전쟁과 외교 교섭 / 이 근 명 139 한 달도 되지 않은, 1076년 12월 말의 시점이었다. Ⅲ. 송-베트남 사이 경계 획정 문제와 그 결말 1076년의 전쟁으로 이조 베트남이 송측에 할양한 지역은 蘇茂(하이 닌), 思琅州(하랑 및 쯩칸푸 일대), 門州(나찬), 諒州(랑썬), 廣源州의 5州였다. 곽규의 군대가 귀환하자 희 녕 10년(1077) 2월 재상 吳充 등은 上表하여 안남의 평정을 축하하였다. 그 사이 왕안석 은 사직하고 금릉으로 낙향한 상태였다. 신종은 廣源州를 順州로 개칭하는 등 5주를 정 식 판도로 편입하였다. 아울러 베트남 仁宗에게 下詔하여, 自今依舊入貢 所有克復州縣 已令安撫使 各遣人劃定疆界 無輒侵犯. 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앞서 곽규는 광원주 등에 금은 坑冶를 설치하자고 주청하였다. 농씨의 거주지인 광원주는 당시 중요한 금 산지였다. 또 광서 宣撫使는 이들 지역의 개척을 위해 罪人을 쓰자고 주청하고 있다. 신종은 이들 주장을 모두 받아들였다. 하지만 베트남으로부터 새로 획득한 5주의 땅은 송으로서 너무도 남방에 치우친 변경 이었다. 현지의 습속이나 풍토도 익숙치 않았다. 1076년 여름, 신종은 知桂州 趙卨, 광서 전운사 李平一, 광서전운부사 苗時中 등에게, 决里順州久逺可與不可固守 如何即不損國威 及經久兵力財費 得免勞之 를 자문하고 있다. 5주의 땅을 송의 영역으로 편입하고 불과 반 년이 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1078년 정월 이조 베트남의 인종(李乾德)이 송에 견사하여 5주의 賜 還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신종은, 候進奉人到闕 别降疆事處分 이라 대답하고 있다. 적 극적인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것이다. 이후 송 조정에서는 이들 지역의 반환여부를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이 전개되었다. 현지의 관료들, 특히 1076년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그 반환의 논의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송에게 있어 5주의 관할은 심대한 부담이었다. 당시 順州에는 戍兵 3000인이 파견되어야 했는데 그 가운데 매년 10에 5, 6이 사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제 까지나 지속시킬 수는 없었다. 신종은, 乾徳犯順 故興師討罪 逵等不能討滅 垂成而還. 今 順州荒逺瘴癘之地 朝廷得之未為利 豈可自驅戍兵 投之瘴土? 一夫不獲 朕尚閔之 况使十損 五六邪? 라는 탄식을 하고 있다. 광서 전운부사 苗時中 역시 順州所築堡寨 深在賊境 饋 運阻絶 戍卒死者十常八九 不如棄之. 然廣源州 舊隸邕管覊縻 本非交阯有也. 라고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 결국 송조는 廣源州 및 기타 점령 주현을 되돌려 주기로 결정하였다. 1078년 9월 교지에서 方物을 조공하며 광원주 등의 반환을 요청하자, 신종은 邕州 欽
140 州 廉州의 포로를 반환하면 鑛源州 蘇茂州 機桹縣 등을 돌려주겠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신임 광서 경략안무사겸 지계주 曾布로 하여금 반환의 조치를 담당케 하였다. 위신과 체 면을 위해 먼저 邕州 欽州 廉州의 포로를 받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1079년 10월 안남으 로부터 포로 221인이 송환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그 직후 順州 등을 폐지하는 조령을 내리고 이조 베트남에 4주(廣源 蘇茂 門 思琅) 1현(諒州 機榔)을 반환하였다.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八陣合變圖說 을 중심으로 홍 을 표(강원대 사학과 박사과정) 目 次 Ⅰ. 서론 Ⅱ. 陣法의 發源과 傳繼 Ⅲ. 諸家의 陣圖와 陣說 Ⅳ. 龍正의 八陣合變圖說 Ⅴ. 결론 Ⅰ. 서론 朱元璋이 明의 건국에 성공 할 수 있었던 것은 元末 국정의 피폐로 야기된 사회의 혼 란한 틈바구니 속에서 경쟁자들을 극복하며 이민족을 몰아냈기 때문이지, 그의 농민군들 이 칭기즈 칸의 군대와 같이 강력했기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규부대를 훈련시켜 본 경험이 없었던 주원장의 군사사상은 이후 명의 국방정책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는 후대의 황제들에게 강력한 군사력이란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육성된다는 것을 인식 시켜 주거나, 국방을 공고히 할 수 있는 대안도 제시해 주지 못하면서, 역으로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정책만 추진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기가 저하된 무신들은 병법이나 무예의 연마는 물론 진법을 통한 군사 훈련조차 등한시 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고, 土木之變1)과 庚戌之變2)에서 그 문제점이 1) 2) 正統14년(1449), 英宗이 50만 대군을 이끌고 蒙古 韃靼 추장 也先을 토벌하였으나 전멸에 가까 운 참패를 당하고 영종은 포로가 되었던 戰役이다. 百卷本 中國全史 所收, 毛佩琦 王莉 著 中 國明代軍事史, 人民出版社, 1994, 72 75쪽. 嘉靖29년(1550) 6월, 俺答의 군대가 북경을 침략해 8일간 약탈하고 돌아갔지만 명군은 이렇다 할 저항을 못했던 사건. 百卷本 中國全史 所收, 毛佩琦 王莉 著 中國明代軍事史, 人民出版社, 1994, 83 87쪽.
142 표출되기도 하였지만, 명 왕조는 선왕의 유지를 바꾸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병부상 서 馬文升3)은 <兵書를 간행하여 將材를 양성하자>는 상소를 올리며 우리 조정은 병서 를 기밀시하여 배우는 것을 금지 시켰기에 인재들은 감히 학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장수 될 만한 재목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며 병서를 간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부 할 수 있게 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무너진 군대의 기강은 명이 망할 때까지 회복하기 어려 웠다. 武宗 정덕 3년 10월에 사천의 보령 사람 藍廷瑞와 鄢本恕가 漢中에서 반란을 일으켜 군현을 노략질 했지만 관군은 이를 제압할 수 없었다. 명나라 조정은 우부도어사 任俊을 사천의 순무로 임명하여 토벌하도록 했으나, 여의치 못하자 정덕 5년 3월에 형부상서 洪 鍾을 좌도어사 겸 총독으로 임명하여 사천과 섬서 호광 하남 등 네 省의 軍務를 총괄 해 적당들을 토벌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홍종은 조정에 표를 올려 누명을 쓰고 파직된 섬서 순무도어사 藍章4)을 복직시켜 사천으로 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남장이 사천순무에 부임하자 병법에 밝은 龍正5)을 초빙하였다고 한다. 용정은 침체된 관군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도적을 토벌하기 위한 방안을 제갈량의 팔진 법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제갈량이 夔州 瞿塘縣 南一里 魚腹浦에 포진했던 壘石 배치도를 그려다 관청 안에 작은 돌로 재현해 놓고 연구하여 八陣合變圖說 (이후 도설 로 약칭)을 저술하였고, 이 방법으로 관군을 훈련시켜 한중 일대의 반란세력을 평정하였 다고 한다. 이 글은 이때 저술된 도설 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중국 전통 진법이 창안되어 전습된 과정을 돌아보고, 명대 용정과 趙本學6) 등으로 대표 3) 4) 5) 6) 马文升(1426 1510)은 明朝의 大臣으로 字는 负图, 號는 约斋이다. 钧州(지금의 河南 禹州市)사 람으로 景泰에 进士가 되었고 이후 御史에 제수 받았다. 一生의 업적이 현저하여 代宗 朱祁 钰 英宗 朱祁镇 宪宗 朱见深 孝宋 朱祐樘 武宋 朱厚照 등을 섬기며 兵部尙書 등을 역임하 였기에 후세 사람들은 五朝元老 马文升이라 한다. 여기서는 그가 올린 <爲 刊印武書, 以作養將 材事 疏>를 말한다. 百度百科, http://www.baidu.com/. 2010. 6. 10 검색(이하 인명의 출처는 같다). 蓝章(1453 1526)의 字는 文绣, 號는 大嶗山翁이다. 成化 20년에 进士가 되어 婺源과 潜山의 县令 이 되었고 贵州监察御史 浙江巡撫 山西太仆寺少卿大理寺右廷尉 등을 거쳐 正德 원년에 都察 院左佥都御史가 되었으나 刘瑾의 미움을 사 下狱되었다가 抚州의 通判으로 귀양 갔다. 劉瑾이 실 각하자 다시 발탁되어 陝西의 巡抚가 된 뒤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南京刑部右侍郎에 승진하여 네 가지 정책을 건의했지만 채택되지 않자 正德 12년(1517)에 세 차례 상소를 올려 굳이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國朝列卿記 中文大辭典 8권, 161쪽). 龍正의 行狀記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필자는 藍章과 동일 인물로 그의 別號 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趙本學(1478 1544)의 본명은 赵世郁으로 本学은 字이다. 號는 虚舟로 宋 太祖 赵匡胤의 후예 인 赵子先의 직계 자손으로 俞大猷의 스승이다. 易学와 军事에 뛰어나 赵注孙子兵法 과 韬钤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 홍 을 표 143 되는 진법 연구가들의 진론을 통하여 팔진법에 접근해 가면서 그것이 軍事史에 어떤 의 미가 있는지 찾아보고자 하였다. Ⅱ. 陣法의 發源과 傳繼 고대 진법이 출현한 배경은 역사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운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진법 과 관련된 문헌들에 의하면 진법은 黃帝와 風后7)가 창안하였다 는 설이 보편적으로 인 식되어 왔다. 한 예로 漢書 <藝文志> 兵家類 陰陽16家에 黃帝十六篇 <圖三卷>과 風 后十三篇 <圖二卷>의 기록은 황제와 풍후가 창안한 陣圖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 고 있다. 진법은 황제 이후에도 계속된 전쟁과 더불어 발전하여 그 형태도 수많은 종류가 있었 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布陣 방법을 전해주는 문헌은 찾기 어렵고 이름만 전해지는 것도 많지 않다. 기원전 707년 周桓王과 鄭莊公이 격전했던 繻葛에서 高渠彌8)가 창안한 魚麗 陣은 전차와 보병을 혼합한 전법으로 중국 전쟁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춘추시 대의 진법은 管仲內政陣圖와 司馬法握奇營圖, 孫武子乘之陣圖가, 秦漢의 진법은 垓下五軍 陣 등이 武備志 에 수록되어 있다. 팔진이란 명칭은 銀雀山에서 출토된 孫臏의 병법9)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후한서 에 는 竇憲10)이 흉노를 격파할 때 팔진법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진법의 원전이라 하 握奇經 에는 漢의 승상 公孫宏11)의 팔진 해설이 전해지고 있어 이것이 오래 전부터 는 사용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蜀漢의 제갈량은 기존의 팔진법을 혁신하여 크게 명성을 떨치며 중국 5000년 전쟁사 에서 최고의 병법가로 꼽히고 있는 孫子와 吳子도 하지 못한 혁신적인 자취를 남겼다 12) 7) 8) 9) 10) 11) 12) 内外篇 을 지었는데, 赵注孙子兵法 은 일본에서 번역 출판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다. 중국 고대 임금인 黃帝를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린 여섯 신하 중의 한 사람이다. 指南車를 발명하 고 중국 최초의 군사학 서적으로 알려진 握奇經 을 비롯한 병법 13편, 圖 3권, 孤虛 20권을 저술 했다고 한다. 춘추시대 鄭나라의 명장. 繻葛의 전쟁은 BC707년에 周桓王과 鄭莊公이 격전했던 싸움이다. 이에 대해서는 孫臏 撰, 李丙鎬 譯, 孫臏兵法, 지혜의 샘, 1998. 을 참고 할 것. 竇憲( 92)의 字는 伯度, 扶風 平陵(지금의 陝西 咸陽) 사람이다. 竇融의 曾孫으로 흉노를 격 파한 東漢의 장군이다. 公孫宏(BC199 BC120)은 公孫弘이라고도 한다. 字는 季, 齐의 菑川薛 사람이다. 中國軍史科學, 中國軍事通史 7卷, 中國軍史科學院, 2005, 435쪽 : 推子八陣, 不在孫 吳 孫子 吳起所不曾有的創新內容.
144 고 한다. 그의 팔진은 이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일부가 활용되거나 연구되었다. 晉의 武帝는 陳勰13)에게 제갈량의 진법을 배우게 했고, 馬隆14)은 팔진법으로 凉州의 樹 機能을 평정하였으며, 唐의 李靖은 六花陣으로 흉노를 토벌했는데, 그는 자신의 진법도 제갈량의 팔진법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술한 진법들은 당 이후부터 실 전되었기에 후대에서는 이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간헐적으로 있어 왔다. 明代는 어느 시기보다 병서의 저술과 편찬이 많아 중국 전통병서와 진법이 총정리된 시기라 할 수 있다. 명장 兪大猷의 스승인 趙本學은 赤卒十二星으로 진법의 변화를 설명 한 바 있고, 戚繼光은 鴛鴦陣으로 왜구를 격퇴하였다. 척계광의 紀效新書 는 임진왜란 당시 朝鮮에 도입되어 군사훈련의 지침서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명말에 王鳴鶴15)이 쓴 登壇必究 와 병법서의 백과사전 격인 茅元儀16)의 武備志 등에도 다수의 진법이 수록되 어 있다. Ⅲ. 諸家의 陣圖와 陣說 팔진법은 용정 이외에도 적지 않은 인물들이 연구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 실전되 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문헌으로 전해지는 몇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1. 八陣의 變陣 문헌상 가장 오래된 陣圖는 태백음경 을 쓴 唐 李筌17)의 것으로 <그림 1>과 같다. 그는 팔진을 여덟 개의 형태로 나누어 좌로부터 天覆陣, 地載陣, 風揚陣, 雲垂陣과 龍 飛 虎翼 鳥翔 蛇蟠 등으로 표현했지만 운용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이 때문에 훗날 宋 神宗이나 조본학 安命老 등으로부터 어린애가 장난친 것 같다는 평 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유는 다르게 보았다. 그는 태백음경 의 진법은 四方이 正이 되 13) 14) 15) 16) 17) 晉書 에 이름이 보이지만 傳이나 行狀記가 없다. 馬隆(??)의 字는 孝興. 東平 平陸 사람으로 삼국시대 曹操의 무관이었으나 나중에 西晉에서 벼슬하여 涼州의 반란을 평정하였고 涼州의 鎮守를 십 여 년간 수행하였다. 王鳴鶴(??)은 명나라 南直隸 山阳(지금의 江苏省 淮安) 사람이다. 대략 명나라 후기 嘉靖에서 萬曆년간 사이에 생존했던 인물로 추정하며 登壇必究 를 써서 군사 분야에 탁월한 공헌을 하 였다. 茅元儀(1594 1640)의 字는 止生이고, 號는 石民으로 절강성 歸安(지금의 절강성 吳興) 사람이 다. 명대의 대장이자 문학가 茅坤의 손자로 1621년에 武備志 240권을 완성하였다. 兵書 太白陰經 을 지은 唐 初期의 인물이라 하나 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 홍 을 표 <그림 1> 李筌의 八變陣 145 출처 : 中國兵書集成 고 四隅가 奇가 되었다 라고 하며 이 진법의 가치를 인정한 바 있다. 또한 진의 명칭이 나 형태는 도설 의 8개 진형과도 유사하여 용정이 이 진도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볼 수 있다. 태백음경 과 같이 陣圖만 그려 놓고 구체적인 운용방법을 생략한 현상은 이후의 진법 서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점이다. 이 때문에 진법을 배우고자 하는 후학들은 막 연하게 되었다. 이전 외에 진도를 그린 唐代의 인물은 獨孤及18)과 裵緖19)가 있으며 그들의 진도는 무경총요 에 수록되어 있다. 배서는 孫武의 포진법이라 하며 <그림 2>와 같이 8개의 진 <그림 2> 裵緖의 八變陣 출처 : 中國兵書集成 형을 제시한 바 있다. 이 그림은 외형과 내면의 의미를 복합시킨 진형이다. 조본학과 안명노는 이 역시 볼 것 없다고 폄하했지만, 분석해 본 바에 의하면 어느 진이든 정돈된 方陣의 형태로 질서 를 유지하며 변화를 가능케 하였기에 산만한 것 같지만 절제가 있다. 또한 이를 통하여 고대의 진형을 추연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明의 조본학은 <그림 3>과 같은 적졸십이성을 이용하여 진법의 변화를 설명하였다. 위와 같은 형태는 팔진법이 아니라도 동서고금의 공통된 전투대형이었다. 이들을 현대 18) 19) 獨孤及(725 777)의 字는 至之이며 河南 洛陽 사람으로 唐朝의 산문가이다. 裵緖(??)의 이름은 여러 진법서에서 볼 수 있지만 行狀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146 <그림 3> 趙本學의 八變陣 출처 : 屬武經總要 식 군사용어로 표현해 보면, 좌측 적졸12성 의 우측으로부터 圓陣 稜陣 左右梯隊 右 角形 左角形 後角形 前角形 등으로 불린다. 2. 八陣의 合陣 풍후나 제갈량의 八陣圖는 문헌으로 전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후세에서는 연구자들 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표현하였다. 그들 중 8 8=64의 방진으로 그린 10개를 가려 다음 과 같이 제시해 보았다. <그림 6> 李靖 慈號王氏 正義 通鑑의 八陣圖 출처 : 武備志, 演機新編 <그림 4>의 왼쪽은 이정의 것이라 하는데 팔진을 6진으로 변형시켰다. 그 우측에 있 는 자호왕씨의 진도는 衝 衡 軸 風 雲으로만 구성하였고, 正義의 진은 네 모서리에 풍진과 운진을 두고 충 형 축을 전후좌우로 안배하였으며, 통감의 배치는 정의의 배치 와 유사하지만 중앙을 확장시켜 전체의 진을 앞뒤로 삼분하였다.20) <그림 5>의 왼쪽에 있는 장엽의 진도는 地軸을 전후로 신장시켜 좌우를 강화했다. 이 는 학익진과 같이 좌우로 전개하기 위한 사전 포진으로 보인다. 두 번째 조본학의 진세 20) 慈湖王氏 正義 通鑑이란 명칭은 볼 수 없었다. 屬武經總要 등에 수록되어 있지만 행장기나 語源은 찾아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 홍 을 표 147 <그림 7> 張燁 趙本學 戚繼光 王鳴鶴의 八陣圖 출처 : 武備志, 演機新編 는 6개 부대씩 결속하여 팔방을 에워싸고 있지만 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충 형 축 풍 운이 어디에 배치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척계광이나 왕명학의 배치는 정의와 통 감과 같은 방식을 택하면서 자기 특성대로 변형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정과 조본학을 제 외한 다른 진들은 모두 宋 慈湖王氏의 배치를 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諸家의 대표적인 포진법이라 할 수 있는 이상 8개의 진도들은 공통적으로 天地風雲이 란 4개의 正陣만을 표현하고 龍虎鳥蛇라는 奇陣을 명시하지 않고 있어 팔진은 네 개의 正陣과 네 개의 奇陣으로 이루어진다 는 악기경 의 설명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서 팔진 의 실체는 네 개의 正陣 뿐이고 奇陣은 변화를 위한 가상진지인 것이다. 필자는 이 진도들이 갖는 의미를 제갈량의 팔진법에 얼마만큼 접근 했느냐 라는 것 보다는 변화의 다양성에서 찾고자 하였다. 진법의 묘리는 고정된 배치보다는 변화에 있 기 때문이다. Ⅳ. 龍正의 八陣合變圖說 용정의 도설 은 제갈량의 팔진법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그때 까지 막연하게 인식되었던 팔진에 대한 개념을 정립 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1. 八陣의 合說 1) 八陣總圖 <그림 6>은 용정이 그린 팔진도의 총체적인 모습이고, <그림 7>은 이것을 보기 쉽게
148 재도식한 것이다. <그림 7> 八陣 部隊 配置圖 <그림 6> 龍正의 八陣圖 출처 : 中國兵書集成 이에 대한 도설 의 설명에 따르면, 제갈량은 우주의 섭리에 따라 팔진을 만들었지만 黃帝와 風后의 비법을 이어 받은 것이지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어복포에 가로 세로가 모두 8로 된 누석을 쌓은 것은, 天衡 地軸 天前衝 天後衝 地前衝 地後衝과 風과 雲 등이라 한다. 여기서 風과 雲이라 하는 것은 진의 이름이고 64라 하는 것은 진 의 多 寡가 相乘하는 수이다. 陣을 설치하는 데는 방향이 있고, 배치되는 위치도 정해져 있다. 遊兵 24진은 64본진의 후방에 위치하여 却月陣이라 부르기도 하는 間隊로, 팔진의 후방을 호위하다가 유사시 신속하게 적과 접전하여 승리를 취한다21)라고 하였다. 2) 衝 衡 軸과 風 雲 遊 부대를 戰陣으로 편성하려면 이에 따른 조직이 필요하다. 악기경 에서는 그 구성요소 를 衝 衡 軸과 風 雲 遊의 6개로 보고 있었고22) 용정 역시 그 견해에 따르고 있었 21) 22) 龍正, 八陣合變圖說, 中國兵書集成 40冊所收, 中國 解放軍出版社, 影印, 1993, 3쪽 : 昔者, 漢之諸葛大名, 垂於宇宙, 而成于八陣者. 居多諸葛之八陣, 昉于黃帝風后, 而實得心法, 非專推演 也. 故, 其壘石于沙, 縱橫皆八, 其曰天衡 地軸 天前衝後衝 地前衝後衝與. 夫曰風曰雲者, 陣之名也. 六十有四者, 陣之多寡 相乘數也. 布之各有其方, 列之各有其位. 遊兵二十四陣, 在六十 四之後, 名曰却月陣, 開闔作止, 間隊與八陣, 皆同下營之際, 環衛於後, 出入神速, 應敵取勝者, 此總 圖之合歟. 風后, 握機經, 文淵閣 四庫全書 726冊, 臺灣: 商務印書館 影印, 子部 32卷, 1984, 3 4쪽.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 홍 을 표 149 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았다. (1) 적진 돌파부대 : 衝 衝은 충격행동을 이용한 공격부대로 종심작전을 하며 목책이나 방패로 급조한 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편성하였다. 이들의 주력 장비는 충차 또는 녹각거라 하여 <그림 <그림 8> 衝車와 鹿角車 출처 : 中文大辭典 握奇圖說 8>과 같이 인력으로 움직이는 수레를 사 용하였다. 말을 사용할 경우 적의 공격에 먼저 쓰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척계광은 원앙진을 만들며 수레 대신 籐牌를 사용 하였다. (2) 좌우 협공부대 : 衡 衡이란 수레의 앞부분을 가로 지르는 나무로 높낮이의 변동을 뜻한다. 이 부대는 전방 에 위치한 奇가 되어 충이 개척한 통로를 따라 적진에 들어가 좌우로 분산해 적을 협공 하거나 포위하였다. 현대전술로 보면 전차부대에 의해 돌파된 적진에서 전과확대를 하는 기계화보병부대와 유사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3) 정면 고착부대 : 軸 軸이란 두 바퀴를 가로로 관통하여 움직이지 않는 굴대와 같이 내곽에 위치하여 正이 되었다. 충과 형이 적진을 돌파하면 적도 역시 아군을 돌파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래서 지축으로 전투부대 <그림 9> 5단계 戰法 의 중심축을 유지하면서 적의 공격을 견고하게 차단시 킨다. 이러한 충 형 축은 一陣, 二廣, 三挾, 四圍, 五取 라는 5단계 전법23)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것을 <그림 9>와 같이 표현해 보았다. (4) 예비대 : 風陣 주력인 충 형 축이 작전할 때 적의 증원부대가 투입되면 역전될 수 있다. 그래서 예 23) 洪乙杓, 고대 陣法의 원리, 軍史 제75號,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0, 250 251쪽.
150 기치 않은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된 부대가 풍진으로 보인다. 이 풍진은 전차나 기 병으로 구성되어 신속한 기동력으로 작전지역에 투입될 수 있었기에 최전방에서 작전하 는 天陣 즉, 衝과 衡을 지원하였다. (5) 후속증원부대 : 雲陣 운진도 풍진과 유사한 역할을 하도록 편성한 부대이다. 다만 이 운진은 풍진에 비해 기동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주로 地陣을 지원하였다. 오늘날의 중장비 부대와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6) 특수임무부대 : 遊軍 용정은 유군이 없다면 어떻게 창졸간에 발생한 상황에 대처하며 승리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진법을 운용하려면 반드시 유군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유군은 수색정찰 대나 특공부대와 같이 본진의 후방을 엄호하거나 적을 교란하며 취약한 부대를 증원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였다. 이상과 같이 살펴 본 바에 의하면 팔진전법의 요체는 천 형 축으로 1단계 작전을 시 도하고, 풍 운으로 2단계 작전을 한 뒤, 유군을 이용한 3단계 작전으로 전세를 종결하였 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八陣의 變說 도설 에 의하면 팔진은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여 天覆과 地載로 나누고, 좌우를 구분 하여 風揚과 雲垂로 나누며, 전후와 四隅로 구분하여 龍飛와 虎翼, 鳥翔과 蛇蟠으로 나누 니 이것이 팔진의 변화이다 라고 했는데 그 형태는 <그림 10>과 같다. <그림 10> 팔진의 변화 출처 : 中國兵書集成 <그림 10>을 보면 용정의 도설 은 방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공격력을 도출하기 위해 운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위 도식들은 대부분 산개되어 방어형 태로는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원칙에서 전투력은 한 곳에 집중시켜야 강력한 파
明 中期의 八陣論 분석 / 홍 을 표 151 괴력이 발생되는데 왜 분산시켰을까? 그 이치를 합죽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접혀진 상태로는 바람을 일으키기 어렵지만 활짝 펴게 되면 접힌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바람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무작정 병력을 집중시키면 충분한 전투력이 발휘되기 어렵 기 때문에 팔진의 합변 을 통하여 강력한 전투력을 도출해 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진법이 명의 전쟁사에서 활용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서론에서 밝 힌 바와 같이 武將들의 관심 부족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이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明의 사직을 지켜주지 못했다. Ⅴ. 결론 明代 陣法論의 특징은 송대와 같이 국가적 차원의 연구보다는 개인에 의한 제갈량 팔 진법 복원에 치중되었다는 점에 있다. 예로부터 진법이나 작전계획은 軍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 망을 좌우 할 수 있는 기밀사항이라 그것을 창안한 개인이 죽거나 국가가 망하면 더불어 死藏되는 경우가 많았다. 제갈량의 팔진법 역시 그가 죽고 촉이 망하자 대부분 역사 속 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明代의 용정과 諸家들은 문헌으로 남아 있지 않은 제갈량의 진법을 복원하고자 악기경 이나 태백음경 등의 병서를 참고하며 어복포의 누석을 연구해 일 말의 결실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용정이 제갈량의 팔진법을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는 단언할 수 없지만, 그의 저술은 중국에서 간행된 登壇必究 와 武備志 등의 병서에 수록되었고, 조선에서는 紀效新書 를 간행할 때 포함시켰으며 演機新編 이나 握奇圖 說 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용정에 대하여 중국 병학사에서 빛나는 위업을 이루어 낸 인물 이라 하면서 라 孫子兵法, 將苑, 八陣合變圖說 은 고대 진법의 압권 일 뿐만 아니 紀效新書 와 함께 불후의 가치가 있다 24)는 평가가 나오기도 하 였다. 특히 근간 제갈촌에서 발굴되었다는 팔진도25)는 무비지 의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 하고 있어 용정을 비롯한 제가의 연구가 비교적 정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 국의 軍事史에서 용정이 세운 전공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지만 그의 저술은 중국의 兵 24) 25) http://baike.baidu.com/view/1355401.html 2010. 7. 26검색.: 龙正在中国兵学史上并不是赫赫有名的 大牌人物, 但其 八阵图合变说, 却是一部不折不扣关于古代阵法的压卷之作. 传世名著百部, 将 其收入, 與 孙子兵法, 诸葛亮 将苑, 戚继光 练兵实纪, 同列, 既是肯定此书的不朽价值. 北京科技報 2007. 7. 10. http://blogearth.org/trackback.php.2010. 7. 27검색.
152 學史에 한 획을 긋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팔진은 인체의 구조와 같이 天 은 양 팔, 地 는 두 다리, 風 과 衝 衡 은 좌우의 손, 雲 과 軸 은 좌우의 발로 비유 할 수도 있었다. 이를 이용한 전투 방법은 먼저 衝隊 가 衝車 또는 鹿角車로 적진에 뚫고 들어가면, 후속한 衡隊가 좌우로 산개하여 적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軸隊는 견제하였다. 風 雲陣은 적의 좌우를 협공하거나 배후를 차단하 였고, 遊軍은 기동작전을 펼쳤는데 이것은 무술에서 팔 다리로 싸우는 방법과 다르지 않았다. 진법의 원리는 한마디로 그물과 덫 의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적을 공격할 수 있지만 적은 나를 공격할 수 없게 하면서 걸려든 적은 빠져나갈 수 없게 작전하였음 을 추정해 볼 수 있었다. 진법의 효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적이 예측하지 못한 방법으 로 섬멸할 수 있다는 전투효과이며, 둘째는 이 진법을 연습하기 위해서 수많은 반복 숙 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육훈련의 효과이다. 고대의 팔진법은 공격위주로 창안된 것이지만 唐의 李筌과 宋의 曾公亮 등에 의해 방 어목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차 실전에 운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더구나 明代 중 후기부터 화약병기가 발전하게 되자 제가들이 연구한 밀집방진은 더욱 무용지물화 되었다. 그러나 진법은 강력한 공격전법이지 방어진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현대전에서 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 보고 명대 용정 등에 의해서 논의 되었던 팔진법을 분석 하고자 하였으나 필자의 한계로 인하여 그 문고리조차 잡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언젠가 는 누군가에 의해 그 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淸代 懷慶藥商 의 對外進出과 商業네트워크 協盛全 과 杜盛興 을 중심으로 이 민 호(한국한의학연구원) 目 次 Ⅰ. 서론 Ⅱ. 懷慶府의 地理環境과 懷帮 Ⅲ. 懷帮 의 對外進出과 商業네트워크의 형성 Ⅳ. 결론 Ⅰ. 서론 藥材業은 明 中期 이래 경제성장과 건강에 대한 인식제고 및 의약지식의 보급 등의 영 향으로 크게 성장했다. 이는 明政府가 납입징세칙례를 정할 때 중요한 상품을 크게 8가 지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 하나로 약재류가 포함되어 있고, 北京 등 대도시의 중요한 업 종 가운데 하나로 약재업을 거론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淸 中期의 康 熙年間부터 淸末ㆍ民國初까지는 전통 중국 약업의 전성기로 四大藥都 혹은 10大 藥市 로 불리는 專業藥市가 전국적으로 활성화되었고, 이들 약시를 배경으로 한 약상들의 활 약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시의 약상들은 지연 과 혈연 에 근거하여 대도시와 전업 약시를 중심으로 地域藥帮 을 결성하고, 會館 을 건립ㆍ운영하면서 결속을 다지기도 했 다. 河南省 북부 懷慶府 출신 약상들이 결성한 懷帮 은 약재를 전문적으로 취급한 대표적 인 약상 조직이다. 懷慶藥商 은 晋商 이나 徽商 처럼 큰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소위 4大懷藥 을 무기로 祁州와 禹州 등 주요 약시에서 13帮 의 하나로 활동했고, 禹州 와 天津, 漢口 등에 懷帮會館 을 건립할 만큼 약재 교역과 관련하여 중요한 발자취를 남 겼다.
154 懷帮 의 활동이 거의 전 중국에 미쳤고, 또한 일회성이 아닌 상당 기간 존속하였으며, 심지어 현재까지 그 명맥이 이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그에 대한 연구는 상 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그것은 이들 활동에 대한 자료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있지만, 다 른 거대 상인집단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淸代 상업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던 전문 약상집단인 懷帮 의 활동상을 규명함으로써 이 시기 地域藥帮 의 일면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懷帮 의 발원지인 懷慶府의 자연지리 환경의 특수성을 통해 약상집단의 형성을 검토하 고자 한다. 明ㆍ淸代 크게 활동했던 다른 상방과 마찬가지로 懷帮 역시 일상생활을 유 지하기 어려운 환경과 지역 특산품의 존재 가 商帮 탄생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밝 히고, 또한 주변의 거대 상인집단인 山西商人과의 관계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 協盛全 과 杜盛興 으로 대표되는 懷慶藥商 의 대외진출과 상업네트워크의 형성을 통해 그들의 활동영역과 경영상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懷慶藥商이 진출했던 대도 시와 약시 등에 건립된 懷帮會館 의 운영 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 한다. Ⅱ. 懷慶府의 地理環境과 懷帮 懷慶府는 토지가 비옥하고 교통(특히 수로)이 잘 발달되어 있어 小江南 으로 칭해졌 다. 이와 관련 大明一統志 에서는 태행산이 북쪽에 위치해 있고, 沁河가 동남으로 흐르 고 황하를 끼고 있어 배와 수레가 모두 모이니 陸海라 한다. 고 했다. 또 여름철 수위가 높아지는 시기에는 黃河에서 거슬러 올라와 懷慶府城의 北關까지 연결되었고, 또 丹河가 남동쪽으로 修武城南에 이른 다음 동으로 흘러 獲嘉縣을 지나 衛河를 통해 운하와 연결 되는데, 雍正5年 獲嘉知縣이 丹河의 폭을 넓혀 운수가 점차 편리해졌으며, 직접 天津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교통 환경을 유지하고 자연재해 예방을 위해 明ㆍ淸代에 는 沁河와 丹河에 대한 지속적인 수리사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비교적 비옥한 토지가 많았던 懷慶府는 明 中期 이전까지는 주로 농업 경영을 통해 부 를 창출했다. 하지만 과중한 부세와 급격한 인구증가 및 자연재해, 그리고 전국적인 상품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이 지역의 경제 지형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즉 명초 개간 이래 각 지의 농업생산력이 회복되어 식량 생산이 점차 증가하였으나 부세 또한 과중하여 河南 北部의 諸郡은 토지가 협소한데 비해 賦稅는 重한데 懷慶보다 더한 곳이 없다. 고 할 정 도였다. 또한 明ㆍ淸代 지방지 기재에 의하면 黃河의 물길이 바뀌면서(改道) 懷慶府의 수 재로 인한 피해가 대단히 심했는데, 특히 溫縣, 原武, 陽武지구의 토지가 점차 척박해지
淸代 懷慶藥商 의 對外進出과 商業네트워크 / 이 민 호 155 면서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열악해졌다. 북쪽의 태행산과 황하 유역의 비옥한 토지를 지닌 懷慶府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약재가 생산되고 있어 天然藥庫 로 불리기도 했다. 이와 관련 道光武陟縣志 에는 河北 지역은 토질이 매우 비옥한데, 특히 沁ㆍ濟 사이는 약초 재배에 적당하여 利를 추구하는 사람들 이 마침내 곡물 대신 다른 작물(약초)를 재배한다. 武陟縣은 河內, 溫, 孟縣에 비해 적다 고 하나 열에 한 둘은 된다. 고 했으니, 최소한 10 20%의 사람들이 주곡작물 대신 경제 작물인 약초를 재배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생사되는 약재의 종류는 正德懷慶府志 에 총 49종이 거론될 정도로 다양 하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熊膽, 地黃, 牛膝, 菊花, 山藥, 紫菀, 車前, 百合, 知母, 皁角, 防 風, 天門冬, 山楂, 蒼朮, 葛根, 地骨皮, 遠志, 桔梗, 黃芩, 荊芥, 何首烏 등이 있는데, 이 중 소위 4大懷藥 으로 불리는 地黃ㆍ牛膝ㆍ菊花ㆍ山藥이 특히 유명하다. 한편 淸代 懷慶府에서 상인이 많이 배출된 요인을 山西商人과의 관계에서 찾기도 한 다. 지리적으로 懷慶府는 산서상인이 남하할 경우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지역에 위치하 고 있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더욱이 明ㆍ淸代 懷慶人의 다수는 산서지역으로부터 이민자였다. 또한 山西商人은 河南省에서 활발한 상업활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河南 懷慶府와 山西 의 澤潞地區는 주요 생산품이 달라 상호 교역하였다. 즉 澤潞地區는 동쪽에 태행산이 있 고, 남쪽에 王屋山이 있어 산지 구릉지대에 속하는데 인구에 비해 당지에서 생산되는 식 량은 부족한 편이다. 따라서 이 지역 상인들은 당지의 풍부한 煤鐵資源과 河南 懷慶, 衛 輝지구의 식량을 매개로 교역하였으니 山西商人의 상업경영 전통이 懷慶府 사람들의 사 상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Ⅲ. 懷帮 의 對外進出과 商業네트워크의 형성 1. 懷慶藥商의 쌍두마차- 協盛全 과 杜盛興 (1) 協盛全 懷慶藥商을 대표하는 상호인 協盛全 을 창시한 인물은 李國順이다. 그의 선조는 明初 洪武25年(1392) 山西省 洪洞縣에서 현재의 博愛縣 李洼村으로 이주했다. 이후 明末에 劉 村李氏의 시조인 李倜이 九錦, 九絹, 九絲, 九綢 4명의 아들을 데리고 현재 李氏宗祠가 있는 博愛縣 劉村으로 이사했다. 처음에는 당지의 大戶인 皇甫家의 소작농으로 농사를
156 짓다가, 후에 獨輪車를 이용하여 天津에 懷藥을 운반해주면서 자본을 축적하여 본격적으 로 상업에 진출하였다. 그는 劉村에 토지를 구입하는 것 외에 淸化鎭(현 博愛縣)에 藥行 을 개설하고, 상호를 李全順이라 했다. 그 후 九絲의 아들 國順에 이르러 상호를 協盛 全 으로 바꾸었다. 協盛全 의 실제적인 창시자인 李國順은 懷藥加工技術을 익혀 加工作坊을 세우고 경영 규모를 점차 확대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 分店를 설치하였다. 그는 水系를 따라 지역을 나누어 관리하였는데 예를 들면 贛江 水系의 吉安, 樟樹, 南昌, 九江, 湘江 水系의 長沙, 湘潭, 衡陽, 漢江 水系의 漢中, 安康, 光化, 長江을 따라 重慶, 宜昌, 漢口, 上海, 岷江 水 系의 松州, 茂州, 灌縣, 黃河와 淮水 유역의 開封, 鄭州, 禹州, 海河 水系의 北京, 天津이 있었고, 기타 山西의 長治와 遼寧의 牛庄에도 진출하였다. 協盛全 의 전성기에는 점원이 수 천 명에 달하기도 했는데, 특히 太平天國 시기 남ㆍ 북간 교류가 원활하지 않아 약가가 폭등하자 이를 이용하여 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즉 당시 남방에서는 懷藥의 가격이 폭등하고, 南藥의 판매가 부진하여 적체되는 반면, 북방 에서는 역으로 南藥의 품귀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協盛全 은 漢口에 쌓아놓았던 懷藥을 고가로 판매하고, 남방 각 분점에 지시하여 저가로 대량의 南藥을 매입하도록 했다. 이후 政局이 안정을 찾고 남북의 교통이 회복되자 남방의 약재를 신속히 북방으로 운반하여 북경, 천진 등에 판매하고, 아울러 남북방의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의 파산한 藥店 40餘 家를 사들여 전국 각지에 分店이 100가를 초과하였다. 이를 계기로 각지의 協盛全 은 크 게 번성하였는데 특히 漢口의 協盛全 은 全記巷 을 점용하고, 약재는 산처럼 쌓아두고 있었으며, 자본금은 백은 100만량에 달했다고 한다. (2) 杜盛興 杜盛興 은 본래 이 상호를 창시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의 선조는 洪武年間 (1368-1398) 山西省 洪洞縣으로부터 오늘날의 博愛縣 塢庄村으로 이주하였다. 처음 약재 업에 뛰어들었을 때 杜氏는 매우 가난했는데, 그는 회약을 수레로 운반해 상인에게 넘겨 주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康熙年間(1662-1722) 河北 祁州藥市에서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한 달간의 회기로 약재교역대회가 진행되는 시기에 그는 家人을 데리고 수레에 회약을 싣고 가서 약재를 넘겼다. 그 후 고용주가 그에게 자금을 지원해주자 고 향인 博愛縣 塢庄村과 祁州에서 4大懷藥 을 경영하는 藥材行을 열고 상호를 杜盛興 이 라 했다. 杜盛興 이 전국 각지로 활동영역을 넓혀가면서 점차 대상호로 성장하였는데, 거기에는 전국 분점에 대한 효과적인 관리와 지역 네트워크 형성을 통한 원활한 약재 공급 등 몇
淸代 懷慶藥商 의 對外進出과 商業네트워크 / 이 민 호 157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먼저 杜盛興 에서는 總店에 總經理 1인, 司賬 2-3인, 學徒 20-30인을 두고, 分店에는 管事 1인과 司賬 1-2인, 學徒 10-20인을 두고 관리했다. 점원들 에게 지급하는 임금은 계절마다 1년에 4번 각 분점의 규정에 근거하여 지불하였는데, 만 약 잘못을 저지른 徒工이나 店員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바로 해고하거나 급료 지급 을 정지하지 않고, 근신하면서 잘못을 바로잡도록 했으며, 고인이 된 점원에 대해서는 오 늘날의 위로금과 유사한 陰俸 을 지급하였다. 영업 측면에서는 不賣次品, 不謀暴利 의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하였고, 전국 각지의 杜盛興 분점에서 同質同價로 거래하게 함으 로써 오늘날의 연쇄점 경영과 유사한 성격을 보여준다. 杜盛興 은 상호의 세력이 커지면서 道光年間(1821-1850) 무렵부터는 전통적인 4大懷 藥 외에도 麝香, 朱砂, 黃芪, 黨參 등으로 경영 품목을 확대하였는데, 懷慶府에서 생산되 지 않는 이들 약재를 원활히 공급받기 위해 산지에도 약행을 설치하고 전국적인 네트워 크를 형성하였다. 즉 四川 灌縣에는 麝香 전문 약행을, 甘肅 臨洮와 陝西 雙石鋪에는 黨 參 전문 약행을, 湖南 常德에는 朱砂 전문 약행을, 山西 太原에는 黃芪 전문 약행을 두었 다. 그들의 영업 범위 역시 성내의 한계를 넘어 北京, 天津, 牛庄, 濟南, 上海, 杭州, 武 漢, 廣州 그리고 홍콩까지 진출하였다. 2. 懷帮 의 對外進出經路 懷慶藥商은 약재집산지인 懷慶府에서 동서남북의 길을 따라 전국 각지로 진출하였는 데, 특히 남쪽으로 향하는 상인이 가장 많았다. 이들은 懷慶府를 출발하여 黃河와 汜水를 경유하여 禹州에 이른 다음 社旗를 거쳐 唐河ㆍ襄河를 통해 남쪽으로 武漢, 長沙, 廣州, 홍콩까지 진출하였다. 이 중 禹州와 武漢은 회약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중간 집산지로 이 두 지역에 건립된 회방회관의 규모 역시 가장 컸다. 당시 懷慶藥商이 주로 수로를 통해 대외진출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외지로 나가 경영함을 跑水 라 했 고, 회경약상의 주요 활동 무대 가운데 한 곳인 사천 松州(現松潘)에서 회상을 水客 이 라고 칭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懷慶藥商이 懷慶府에서 출발하여 중국 각지의 대도시와 전업약시로의 진출경로를 天下水陸路程 을 참고하여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 다.
158 <표 1> 懷慶藥商의 對外進出經路 구분 출발지 1 懷慶 2 3 懷慶 懷慶 4 懷慶 5 懷慶 6 懷慶 7 8 9 10 11 12 13 14 懷慶 懷慶 懷慶 懷慶 懷慶 懷慶 懷慶 懷慶 경유지 管城 祥符(開封) 杞縣 柘城(或 祥符 陳留 杞縣 寧陵 歸德) 鄭州 祥符 歸德 鳳陽 滁州 南京 蘇州 昆山 鄭州 祥符 商丘 鳳陽 南京 蘇州 嘉興 鄭州 祥符 杞縣 歸德 永城 宿州 鳳陽 定遠 廬州 府 桐城 太湖 九江 南昌 樟樹 臨江 鄭州 許州 羅山 麻城 武昌 岳州 長沙 衡州 永州 桂林 梧州 德慶 肇慶 武陟 鄭州 襄城 南陽 光化(或 南陽 新野 襄陽) 武陟 鄭州 襄城 南陽 襄陽 荊州 涪州 茂州 松潘 孟津 洛陽 靈寶 渭南 西安 咸陽 寶鷄 漢州 新都 孟縣 洛陽 靈寶 潼關 西安 寶鷄 鳳縣 褒城 武陟 鄭州 裕州 南陽 鄧州 光化 均州 鄖陽 白河 孟津 洛陽 靈寶 渭南 西安 鳳翔 秦州 寧遠 鞏昌 新鄕 彰德 邯鄲 涿州 北京 山海關 廣寧 澤州 長子 武鄕 新鄕 衛輝 彰德 邯鄲 趙州 保定 霸州 도착지 亳州 上海 杭州 吉安 廣州 光化ㆍ 襄陽 重慶 成都 漢中 安康 臨洮 牛庄 太原 天津 3. 주요 활동 무대 (1) 禹州 河南 禹州(현 禹州市)는 伏牛山 東麓, 許州(현 許昌市) 以西 70里 지점에 위치하여 교 통이 편리하고 약재 자원이 풍부하다. 일찍이 大禹의 도읍지였고, 天下의 名都 로 상업 이 번성했던 禹州는 淸 中期 四大藥都 로 명성을 얻었고, 河北 祁州와 더불어 北祁州, 南禹州 로 칭해지기도 했다. 가장 이른 시기 禹州 藥業에 발을 들여놓은 외지상인은 산서상인이었다. 그들은 康熙 年間(1662-1722) 우주에 운집하여 성내 서북 지역에 山西會館 을 세웠다. 이들의 뒤를 이어 懷慶藥商도 康熙年間부터 이곳에 진출하여 屈同仁, 協盛全 등 懷藥商號가 개업 하기 시작했다. 이후 禹州에 진출한 회경약상이 많아지고, 상방간 경쟁이 치열해지자 懷 帮 을 결성하고 이에 대응하였다. 당시 懷帮 은 禹州13帮 중에서도 그 영향력이 상당했 는데, 이는 禹州城 內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懷帮會館의 규모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淸代 懷慶藥商 의 對外進出과 商業네트워크 / 이 민 호 159 이 회관은 道光年間(1821-1850)에 세우기 시작하여 同治11年(1872) 3月 완성한 것으로 당 시 懷慶府 출신으로 우주에서 약업에 종사하던 거상들이 출자하여 세운 것이다. 대표인 물은 屈肯堂을 경영하던 趙永溫이며, 그와 함께 했던 9명의 會首 명단이 회관 大殿에 새 겨져 있다. 이후 同治13年(1874) 戱樓를 세우는 등 회관 부속건물의 증축과 수리가 民國 年間까지 지속되었다. 禹州13帮會館 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회관은 남ㆍ북간 길이 120m, 동서 폭 78m 총면적 9,360 로, 내부에는 照壁, 山門, 戱樓, 鐘ㆍ鼓樓, 左右廊房, 大殿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건축적으로도 뛰어나 十三帮一大片, 不如懷帮一座殿 이라 는 찬사를 듣기도 하였다. (2) 祁州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祁州는 중국에서 유명한 약재 집산지로 天下第一藥市, 혹은 四大藥都之首 로 칭해지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明ㆍ淸 이래 중국 약재 시장의 중 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른 시기부터 祁州에 진출했던 懷慶藥商은 祁州13帮 의 일 원으로 4대 회약과 사향 등을 거래하였다. 懷帮 이 祁州13帮 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同治4年(1865) 祁州藥王廟 내에 건립된 河南彰德府武安縣合帮新立碑 비문에 객상들이 화물을 가지고 와서 판매하는데, 각 省 별로 이루어졌으며, 성마다 帮을 만드니 13帮이 되었다 고 하면서 關東帮, 陝西帮, 山西帮, 山東帮, 京通衛帮, 古北口帮, 西北口帮, 懷帮, 亳州帮, 寧波帮, 江西帮, 廣帮, 彰武帮 등 13帮이 열거되고 있는 가운데 懷帮 이 포함되 어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祁州 懷帮 의 會首는 杜盛興 경리로 4大懷藥 외에도 외지의 도지약재를 경영하여 북 경, 상해, 소주, 항주 약국에도 판매했다. 杜盛興 이 祁州에서 약업에 종사하기 시작한 것은 康熙年間(1662-1722)부터인데, 특히 杜盛興 에서 만든 사향제품은 杜 자를 새겨 북 경 동인당에 가장 많이 판매됐다. 杜盛興 은 同治年間(1862-1874) 祁州藥王廟를 수리할 때 자금을 출자하였는데, 77냥을 기부하여 懷帮 가운데 가장 많은 액수를 기록했다. 協盛全 경리 또한 방의 회수로 활동했으며, 協 자를 새긴 약이 매우 많았으며, 주사 전 매권을 얻는 한편 인삼, 황기 등 북방과 관동 지역의 약재도 취급했다. (3) 天津 天津은 지세가 평탄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남북 무역의 중추로 淸 中期부터 무역 중개 지로서 중요성이 점차 커졌다. 일찍부터 4大懷藥 을 중심으로 이곳에서 활동했던 懷慶藥 商은 同治年間(1862-1874)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예를 들면 同德藥行은 회약무역을 내지 에서 홍콩까지 확대하였으니 홍콩에 분장을 설치하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브랜드를 가지
160 고 제약하여 회약의 판매시장을 해외까지 확장하였다. 同治7年(1868)에는 天津의 회경상인 張連堂, 劉相茂 등 30여가의 상호가 발기하여 紅 橋區 小伙巷과 曲店街 교차지점 동쪽에 懷慶會館을 건립하였는데, 30여간에 달하는 방과 戱樓를 지닌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였다고 하니 그들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4) 樟樹 中國 江西省 중부에 위치한 樟樹鎭은 臨江府 淸江縣 소속으로 강서성을 광통하는 贛江 과 호남 강서의 경계지역에서 발원하여 강서 중부를 동북쪽으로 흐르는 袁河의 합류 지 점에 위치하고 있다.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 잡은 장수진은 중국 남방 약재 집산과 가공 ㆍ포제의 발상지로 藥墟, 藥市, 藥碼頭 등으로 칭해졌으며, 10大 藥市 가운데 하나 이자 河北 祁州와 더불어 남 북의 양대 약시로 거론되기도 했다. 樟樹藥市는 明末 淸初 최전성기에 약 200여가에 달하는 약상이 있었고, 道光初의 경 우 樟樹鎭의 居民 12,163명 가운데 약업 종사자는 30% 이상이었는데, 제약 전업 기술자 도 200-300명이나 되었다. 많은 경우 전체 인구의 약 80%가 약업에 종사하였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수의 약상 가운데 3/4은 본지 상인이었고, 1/4은 안휘와 하남 등 객상이었다. 懷慶藥商은 이곳 장수 약시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상호는 協盛全 藥棧이었다. 4大懷藥 가운데 하나인 지황을 전문적으로 취급한 協盛全 은 樟樹 地黃市 場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다. 樟樹의 三皇宮街에 위치해 있었던 協盛全 은 외성 출신 약 상으로는 자금력도 크고, 독자 형식으로 점포를 경영하였다. (5) 漢口 漢口는 武漢의 3진 가운데 하나로 長江과 漢水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하여 그 형세가 商務에 적당하다. 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수륙교통이 발달하여 본성은 물론이고 외지상 인의 출입이 잦았던 상업도시였다. 약재업은 淸初 시인이 한구의 상업활동을 우후죽순에 비유하면서 영향력 있는 八大行 중 하나로 거론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 다. 회경약상의 진출은 明末 崇禎年間 漢口 漢正街 保壽橋 부근에서 懷慶府 출신 약농이 당지에서 생산된 지황, 산약 및 기타 약재를 가져와 판매하면서 시작됐다. 그들은 懷慶府 를 출발하여 汜水를 경유하여 禹州에 이른 다음 社旗를 거쳐 唐河ㆍ襄河를 통해 남쪽으 로 한구에 도착하였다. 초기 진출자의 성공적인 상업 활동의 영향으로 더 많은 상인들이
淸代 懷慶藥商 의 對外進出과 商業네트워크 / 이 민 호 161 모여들기 시작해 3개의 전문적인 藥棧, 즉 忠興棧, 三合公, 三成公이 영업하였다. 이후 사 업이 더욱 번창하자 공동출자로 회관을 세우고 상방을 조직하였으니 懷帮 은 한구에서 가장 먼저 조직된 藥帮 이었다. 懷慶府 河內縣, 武陟縣, 溫縣, 孟縣 출신 약상들이 중심이 된 懷帮 은 康熙28年(1689) 약 25무의 토지를 매입하여 懷慶會館을 건립하였다. 당시 회방 은 藥房一巷, 藥房二巷, 藥房大巷, 懷安里 등에서 약재를 거래하였는데 특히 대상호인 協盛全 이 점용한 거리를 全記巷, 杜盛興 이 점용한 거리를 杜家巷 이라 했다. 이들 상호는 4大懷藥과 더불어 사향을 취급하여 자본을 확충하였다. 또한 이곳의 회경약상은 매년 2회에 걸쳐 약재교역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4大懷藥의 지명도를 높여나갔다. 4. 懷帮會館 의 건립과 운영 明 中期 이후 시작된 地域商帮의 결성은 중국 상업 경영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변화이 자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상품경제의 발전에 따라 외지로 진출하여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 들의 수적 증대에 따라 경쟁이 점차 심화되자, 동향 출신자를 중심으로 한 상방 결성이 활성화되었다. 중국 각지에서 활동했던 懷慶府 소속 상인들도 대체로 康熙年間에 이르러 상방을 결성하고, 회관을 건립ㆍ운영함으로써 결속을 강화하였다. 당시 懷帮 이 진출했던 도시들 중에서는 河南省 내의 禹州, 開封, 周口와 省外의 北京, 天津, 濟南, 亳州, 光化(現 湖北 老河口), 襄樊, 漢口 成都, 西安, 太原, 澤州(現 晋城) 등지에 會館이 존재했다. 懷帮會館 은 상품경제가 발달한 城鎭, 특히 약재집산지에 많이 건립되었으니, 禹州, 亳 州, 漢口 등은 당대의 대표적인 약재 시장이 있던 곳이다. 해당 지역에 客居하고 있던 懷 慶府 소속 상인이 공동으로 출자하여 회관을 건립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제고하고 자신들의 경영 발전을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懷帮 의 帮規에는 그들이 가진 독특한 기술은 단지 회경인에게만 전수하고 외부에 대해서는 철저한 비밀유지를 강 조하였다. 회경상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藥商은 다른 행업에 종사하는 상 인들에 비해 자금력이 풍부하고, 일처리도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편이었기에 기타 잡화를 취급하는 상인들도 이에 가입하기를 희망했다. 그들이 상방에 들어오고자 했던 것은 객 잔에 거주하는 대신 장기간 懷慶會館 에 거주하면서 각종 정보수집은 물론 경비를 절감 하는 효과도 함께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2 <표 2> 淸代 각지에 건립된 懷帮會官 목록 회관명칭 지역 懷帮會官 禹州城 西北 禹州13帮會館 上同 覃懷會館 河南省 周口 沙河 北岸 迎水寺 覃懷會館 河南 開封 懷慶會館 武漢市 橋口區 新 武漢 循禮門內(현 安街) 覃懷中州會館 漢口 郭家巷 懷慶會館 天津 紅橋區 小伙 巷과 曲店街 교차 지점 동쪽 懷慶會館 北京 潘家河沿西 懷慶會館 懷慶會館 北京 紅線胡同3號 亳州 老花市 懷慶會館 懷慶會館 覃懷會館 미상 미상 미상 창건시기 참여자 비고 同治11年 屈肯堂( 趙永溫) 同治13年(1874) 戱樓 축조, (1872) 3月 과 9명의 회수 민국년간까지 증축 수리 同治10年 郭廣德, 連文中 禹州13帮 공동출자 (1871) 등 10인 미상 미상 嘉慶17年 開封의 懷慶商 (1813) 四聖會館으로도 칭함 人 康熙28年 懷慶藥商 賈椿 乾隆年間 重修時에 覃懷藥 (1689) 미상 同治7年 (1868) 同治3年 園, 陳荊山 漢口의 懷慶商 人 懷慶藥商 張連 王廟로 개명 河南覃懷草帽公所 覃懷中 州公所 乾隆 4 4 年 ( 1 7 7 9 ) 覃懷中州會館으로 개명 堂, 劉相茂 등 30餘家 (1864) 이 미상 전 미상 미상 미상 미상 光緖10年 湖北 光化縣 新盛 老河口 懷慶藥 光緖10年(1884) 光化縣志 (1884) 이 街東 商 에 회관 위치 기재 전 湖北 樊城 晏公廟 襄陽의 회경상 미상 와 邵家巷 사이 인 吳縣의 회경상 江蘇省 吳縣 미상 인 西安 미상 미상 근거자료 무 成都 미상 미상 근거자료 무 上海 미상 미상 근거자료 무
淸代 懷慶藥商 의 對外進出과 商業네트워크 / 이 민 호 163 Ⅳ. 결론 淸 中期 이래 대도시와 약재교류시장을 중심으로 크게 활동한 懷慶藥商 의 형성과 성 장은 시대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그들도 다른 상방과 마찬가지로 인구압력과 과중한 부 세로 인한 어려움을 상업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다른 한편 그들의 상업 활동에는 山西商 人의 전통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協盛全 과 杜盛興 과 같은 대상호가 모두 明初 산서지역으로부터의 이주민의 후예이고, 懷慶府가 산서상인이 남하할 때 경유지이며, 河內를 비롯한 河南省 각지에서 산서상인이 크게 활동하고 있었 던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明 中期부터 4大懷藥 을 경영하면서 출현한 懷慶藥商은 淸 中期에 접어들면서 대도시 및 전국 주요 약재시장까지 경영 범위를 확대하였는데, 이들이 대외적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건강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의약지식의 보급 등으로 촉발된 약재업의 성장 속에 지역특산품인 4大懷藥 은 물론이고 외지의 우수한 약재도 광범위하게 취급함으로써 전국의 주요 藥帮 가운데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들은 또한 약재의 공급에만 그치지 않고 약재가공에까지 범위를 확장하였고, 활동영역도 하남성내는 물론이고 전국 주요도시와 심지어 국외까지 진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 다. 또한 協盛全 과 杜盛興 의 예에서와 같이 각지에 분점을 개설하고 전국적인 상업네트 워크를 형성함으로써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協盛全 이 水系를 따라 분점을 관리 하고, 정국변화를 잘 읽고 판매와 수급을 조절함으로써 세를 확장하고, 杜盛興 또한 4 대회약 외에 산지에 직접 약행을 설치하여 약재를 원활하게 공급받은 사실은 이들이 각 지의 상업네트워크를 잘 활용하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상품경제가 비교적 덜 발달한 하남지역에서 발원하였기 때문에 하남 본성보다 외지에서 경영 활동이 더욱 번성하였다. 懷慶藥商의 경영활동은 淸代 中ㆍ後期 전국 각 지의 큰 약재시장과 北京, 天津, 漢口 등 대도시로 확대하였고, 그 중 일부는 국외에까지 분호를 설립하였으며, 해외무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들은 특히 잘 발달된 수로를 통해 대외진출을 시도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懷慶藥商 은 그들이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다른 상방과 마찬가지로 외지에서 상 방을 결성하고 회관을 건립ㆍ운영함으로써 그들의 사회적 지명도를 높이고, 경쟁력을 키 워나갔다. 한편 그들은 대규모 상방과 달리 국가권력과의 연계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청 정부가 점차 와해되는 시기에도 여전히 활동하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민국 시기 군벌세 력의 대두와 외국자본의 침투, 서약의 전입 등으로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17 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金 文 基 (釜慶大) 目 次 머리말 Ⅰ. 17세기 기후연구와 시기구분 Ⅱ. 기후변동의 동시성Ⅰ: 서늘한 여름들 Ⅲ. 기후변동의 동시성Ⅱ: 혹한의 겨울들 맺음말 머리말 1655년 1월 북경에 있던 談遷은 고향인 절강성 북부의 바다가 결빙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다. 1654-55년의 겨울 중국에서는 黃河와 淮水가 얼어붙고 강소성 북부의 바다마저 결빙했다. 太湖와 黃浦가 꽁꽁 얼어붙은 이때의 혹한으로 아열 대과수인 감귤이 동사했다. 조선에서는 1655년 봄에 강원도 삼척과 강릉의 바닷물이 얼 어붙었다. 템스 강은 1500~1900년의 400년 동안 적어도 23차례의 완전결빙이 있었다. 1654-55년의 겨울도 그 하나였다. 뉴잉글랜드지방의 앞 바다는 한 달 동안 얼어 있었다. 談遷이 경험했던 겨울의 혹한은 전 지구적인 소빙기(Little Ice Age) 현상의 하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한 것이 소빙기의 동시성 이다. 이 글은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에 대한 비교를 통해 17세기 기후변동이 동아시아 역사 전개에 미친 영향과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동시성 이라는 관점에서, 중국과 조선 의 소빙기에 대한 비교는 17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데 유용한 정보 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비교검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 후변동은 지구사적인 관점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동 아시아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재구성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166 Ⅰ. 17세기 기후연구와 시기구분 1) 중국과 한국의 소빙기 연구 1960년대에 램(H. H. Lamb) 등의 기후학 자들이 본격적으로 기후의 역사를 연구한 이래로 소빙기에 대한 자연과학적 성과들은 방대하게 축적되었다. 역사학에서는 라뒤리 (Ladurie)의 연구가 단연 돋보인다. 빙하의 진퇴와 포도 수확일에 대한 통계를 통해 소 빙기를 증명한 그의 연구는 이미 고전이 되 었다. 볼프강 베링어(Wolfgang Behringer)는 미술, 음악, 신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영향을 미쳤음을 주장한다. 영미권에서의 소빙기 연구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역사인문학에서도 상당히 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의 기후변동에 대한 연구는 竺可楨에 의해 정립되었다. 竺可楨은 지난 5천년 동안 각각 4차례의 온난기와 한랭기가 있었으며, 소빙기는 제4차 한랭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후의 연구는 竺可楨의 테제에 대한 계승과 보완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역사학에서도 농업생산, 물가, 재해와 기근, 인구 등 폭 넓은 논의를 진행되고 있다. 일본의 학자들은 古日記, 나이테, 벚꽃의 개화, 화산폭발 등의 분석을 통해 소빙기의 존재를 증명해왔다. 일본에서 소빙기에 대한 연구의 특징은 기근연구와 밀접하게 관련되 어 있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은 에도시대 기근의 주된 원인이 소빙기로 인한 냉해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학계에서 소빙기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진전되지 않은 듯하다. 한국학계에서 소빙기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초 나종일에 의해 유럽의 17세기 위기론 이 소개되면서 시작되었다. 기후학자인 김연옥에 의해 초보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본격적 인 연구는 1990년대 이태진에 의해 시작되어, 이후에 박근필과 김연희가 연구를 진행했다. 16~17세기의 사회 경제를 다루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소빙기를 전제로 삼고 있다. 17세기 동아시아연구에서 소빙기의 중요성을 먼저 제기했던 것은 영미권의 연구자들이 었다. 그들은 17세기 위기론(Seventeenth-Century Crisis) 을 적극 수용하여, 소빙기가 명 청교체의 중요한 한 배경이었음을 지적했다. 대표적인 연구자는 윌리엄 애트웰(William S. Atwell)과 로버트 마르크스(Robert B. Marks)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영미권의 역 사학자들에게 조선의 기후변동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연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 金 文 基 167 구의 가장 큰 문제는 사료의 근접성 일 것이다. 소빙기 연구에서 조선의 기록문화는 매 우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동아시아 전체의 기후변동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 시기구분에 대한 비교 검토 연구자들의 소빙기에 대한 인식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것은 그것이 언제 시작되어 언 제 끝났는가하는 시기구분의 문제이다. 소빙기의 기간에 대한 규정은 소빙기에 대한 기 본적인 인식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서는 중국, 일본, 한국학계에서는 소빙기의 기간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다양한 연구들을 종합했다. < 표 1> 중국 기후연구에서 명청시대 한랭 온난 시기구분 연구자 지역 竺可楨 周翔學 米紅 제1차 한랭기 제1차 온난기 제2차 한랭기 제2차 온난기 제3 차 한랭기 전역 1470~1520 1550~1600 1620~1720 1720~1830 1840~1890 1458~1552 1557~1599 1600~1720 1721~1820 1840~1880 1880~ 1500~1550 1551~1600 1601~1720 1721~1830 1831~1900 1901~1950 1450~1510 1510~1560 1560~1690 1690~1790 1790~1890 1450 s~1510's 劉昭民 張丕遠 龔高法 李明啓 靳鶴齡 張洪 王紹武 葉瑾琳 龔道溢 王紹武 王日升 鄭景雲 鄭斯中 王紹武 張德二 張偉强 黃鎭國 蔡文娟 殷淑然 龔高法 華北 1560's~1690's 1380's~1540's 1550's~1690's 1700's~1790's 1800's~1860's 1550~1579 華東 1470~1520 1520~1620 1621~1700 1701~1820 1821~1890 熱帶 1485~1527 1528~1605 1606~1767 1768~1835 1835~1897 1451~1500 1501~1570 1571~1730 1731~1830 1831~1910 1491~1540 1541~1620 1621~1720 1721~1830 1831~1900 關中(凍災) 1916~1945 1790's~1890's 山東 柑橘凍害 온난기 1620~1679 1870's~1940's 1810~1919 1891~1950 1901~1979 出典: 竺可楨, 中國近五千年來氣候變遷的初步硏究, 考古學報, 1972-1; 周翔鶴 米紅, 明淸時期中國的氣候和糧食生産, 中國社會經濟史硏究, 1998-4; 劉昭民, 中國歷史上氣候之變遷, 臺灣商務印書館, 1992; 龔高法 張丕源, 氣候寒暖變化及 其對農業生産的影響, 紀念科學者竺可楨論文集, 北京科學普及出版社, 1982; 李明啓 靳鶴齡 張洪, 小氷期氣候的硏究進展, 中國沙漠, 2005-5; 王紹武 葉瑾琳 龔道溢, 中國小氷期的氣候, 第四紀硏究, 1998-1; 王紹武 王日升, 1470年以來我 國華東四季年平均氣溫變化的硏究, 氣象學報 48-1, 1990; 鄭景雲 鄭斯中, 中國歷史時期寒冷寒旱澇狀況分析, 地理學報, 1993-4; 王紹武, 公元1380 年以來我國華北氣溫序列的重建, 中國科學, 1990-5; 張德二 朱淑灡, 近五百年我國南部冬季溫 度狀況的初步分析, 全國氣候變化學術討論會文集(1978), 科學出版社, 1981; 張偉强 黃鎭國, 中國熱帶的小氷期及其環境效應, 地理學報, 2000-6; 蔡文娟 殷淑然, 明淸小氷期關中地區凍災硏究, 干旱資源與環境, 2009-3; 龔高法, 氣候變化的影 響 (張丕元 主編, 中國歷史氣候變化, 山東科學出版社, 1992). 參考: 王業鍵 黃瑩珏, 淸代中國氣候變遷 自然災害與糧價的初步考察, 中國經濟史硏究, 1999-1, p.9 < 표1>; 滿志敏, 明淸 時期的氣候冷暖變化 ( 中國歷史時期氣候變化硏究, 山東敎育出版社, 2009), p.282 <表 9.7>
168 <표 1>은 중국의 기후연구에서 명청시대의 한랭, 온난의 시기구분을 정리한 것이다. 연구의 표준적인 모델을 제시한 것은 竺可楨이었다. 竺可楨은 명청시대에 3차례의 한랭 기와 2차례의 온난기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劉紹民을 비롯한 다른 대부분의 연구들도 일 정한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크게는 이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역적인 연 구에서는 많은 차이가 난다. < 표2> 일본의 소빙기 시기구분 前島郁雄 제1 소빙기 (元和 寬永小氷期) 제1 소간빙기 제2 소빙기 (元祿 寶永小氷期) 제2 소간빙기 제3소빙기 (寬政 天保小氷期) 1610~1650 1650~1690 1690~1740 1740~1780 1780~1880 매우 한랭 온난 1690~1720 매우 한랭 1720~1740 한랭 온난 1780~1820 한랭 1820~1850 매우 한랭 1850~1880 한랭 前島郁雄, 歷史時代の氣候復元: 特に小氷期の氣候について, 地學雜誌 93-7, 1984, p.417 <第2表> 일본 에도시대의 7 대 기근: ①寬永大飢饉(1641~1643), ②延寶大飢饉(1674~1677), ③元祿大飢饉(1699~1704), ④享保大飢 饉(1732), ⑤寶曆大飢饉(1753~1764), ⑥天明大飢饉(1782~1787), ⑦天保大飢饉(1831~1837) 일본의 경우 지리학 등 자연과학 방면에서 소빙기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축적되었다. <표 2>는 일본에서 소빙기 시기구분이다. 前島郁雄은 160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급격한 기온 하강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1900년까지의 기후변동을 3차례의 소빙기와 2차례의 소 간빙기로 나누었다.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17세기의 기후에 대한 인식이다. 1690년대를 제외하고 17세기 후반은 온난했던 것이 된다. 적어도 중국사의 연구와 비교하면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17세기 후반 중국과 조선의 기록을 확인하면 이 문제는 좀 더 검토 되어야 할 것이다. < 표 3> 한국의 소빙기 시기구분 한랭기 시기구분 김연옥 ①1551~1650, ②1701~1750, ③1801~1900 이태진 ①1501~1750 김연희 ①1511~1560, ②1641~1740, ③1800~1850 박원규 비고 ①1684~1693, ②1838~1847, ③1903~1912 1636~1989 년의 7~8 월 고기후 ①1807~1816, ②1835~1844, ③1903~1912 1770~1989 년의 4~5 월 고기후 김연옥, 한국의 소빙기 기후: 역사기후학적 접근일 일시론, 지리학과 지리교육 14, 1984; 김연옥, 조선 시대의 기후환경: 사료분석을 중심으로, 지리학 논총 14, 1987; 이태진, 소빙기(1500~1750) 천변재이 연구와 조선왕조실록 : global history의 한 장, 역사학보 149, 1996; 김연희, 조선시대의 기후와 농업변동에 관한 연구, 경북대학교 경제학 석사학위논문, 1996; 최종남 류근배 박원규, 아한대 침엽수립 연륜연대기를 이용한 중부산간지역의 고기후복원, 한 국제4 기학회 6-1, 1992 최종남 류근배 박원규의 연구는 1636~1989년은 7~8월, 1770~1989 년은 4~5 월의 고기후를 연구했다. 한국에서 전체적인 소빙기 기후변동에 대해서 직접적인 연구를 진행한 연구자는 의외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 金 文 基 169 로 적다. 김연옥은 ①1551~1650, ②1701~1750, ③1801~1900년을 한랭기로 설정했다. 17 세기 후반인 1651~1700년을 온난했던 시기로 인식하고 있는 점은 위의 일본연구와 일치 한다. 조선의 풍부한 사료에서 확인하면 이것이 오류임은 분명하다. 이태진은 조선왕조 실록 의 天變災異에 대한 통계를 바탕으로 한국의 소빙기를 1501~1750년의 250년으로 설정했다. 다만 소빙기 동안 한랭, 온난의 파동성을 제대로 규명해내지 못했다. 김연희는 ①1511~1560, ②1641~1740, ③1800~1850을 한랭기로 설정했다. 17세기 전반을 한랭기로 보는 이태진의 연구, 17세기 후반을 온난기로 보는 김연옥의 연구와는 다른 결과이다. 그 렇지만 통계의 기준과 방법에 문제가 보인다. < 표 4> 동아시아 3 국의 소빙기 시기 구분에 대한 이해 竺可楨 周翔學 張丕遠 劉昭民 李明啓 王紹武 王紹武 중국 ( 華北) 鄭景雲 1401~1500 1501~1600 제1 한랭기 1470-1520 ( 華東) 張偉强 ( 關中) 龔高法 ( 柑橘) 제1 한랭기 제2 온난기 1550~1579 1580~1619 제1 한랭기 1470~1520 제1 온난기 1521~1620 제1 한랭기 1485~1527 제1 온난기 1528~1605 제1 온난기 1501~1570 제1 한랭기 1491~1540 일본 前島郁雄 김연옥 이태진 한국 김연희 박연규 제2 한랭기 1610~1720 제2 한랭기 1600~1720 제2 차 한랭기 1560~1690 제2 차 한랭기 1560's~1690's 한랭기 1550's~1690's 제1 온난기 1470~1549 제1 한랭기 1451~1500 제2 한랭기 1620~1720 제1 온난기 1551~1600 제1 온난기 1557~1599 온난기 1380's~1540's ( 熱帶) 蔡文娟 제1 온난기 1550~1600 제1 한랭기 1500~1550 제1 한랭기 1458~1552 제1 차 한랭기 제1 차 온난기 1450~1510 1510~1560 제1 차 한랭기 제1 차 온난기 1450 s~1510's 1520 s~1550's ( 山東) 王紹武 1601~1700 제1 한랭기 1511~1560 1800~1900 제2 온난기 1720~1830 제2 온난기 1721~1830 제2 온난기 1721~1820 제2 차 온난기 1690~1790 제2 차 온난기 1700's~1790's 온난기 1700's~1790's 제2 한랭기 1620~1679 제2 한랭기 1621~1700 제2 한랭기 1606~1767 제2 한랭기 1571~1730 제1 온난기 1541~1620 1701-1800 제2 한랭기 1621~1720 제3 한랭기 1840~1890 제3 한랭기 1831~1900 제3 한랭기 1840~1880 제3 차 한랭기 1790~1890 제3 차 한랭기 1790's~1890's 한랭기 1800's~1860's 제3 온난기 1680~1809 제3 한랭기 1810~1919 제2 온난기 1701~1820 제3 한랭기 1821~1890 제2 온난기 1768~1835 제3 한랭기 1835~1897 제2 온난기 1731~1830 제3 한랭기 1831~1910 제2 온난기 1721~1830 제3 한랭기 1831~1900 제1소빙 기 제1 소간빙기 제2 소빙기 제2 소간빙기 1610~165 1650~1690 1690~1740 1740~1780 0 제1 기소빙기 제2 기소빙기 1551~1650 1701~1750 소빙기 1501~1750 제2 한랭기 1641~1740 1684~ 1693 제3 소빙기 1780~1880 제3 기소빙기 1801~1900 제3 한랭기 1800~1850 1807~1816 1835~1847 소빙기의 시작을 살펴보면 중국학계에서는 1380년대 혹은 1550년대도 있지만, 대체로
170 1450년~1500년 사이로 보고 있다. 한국학계에서는 1500년, 1511년, 1551년으로 설정하여 일치하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차이를 보인다. 일본의 前島郁雄은 1610년대로 설 정하고 있는데,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소빙기의 끝에 대해서는 1870~1900년까지 차이는 있지만 19세기 후반이라는 점에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16세기 후반의 경우 중국 대부분의 학자들은 온난기로 해석하고 있지만, 일부는 한랭 기로 보고 있다. 김연옥 이태진은 한랭기로 보고 있지만 김연희는 온난기로 설정했다. 17세기 전반은 1610년 혹은 1620년대부터 한랭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김연옥과 이태진은 전체를 한랭기로 설정한 반면, 김연희는 1640년까지 온난기로 보고 있다. 17세 기 후반은 대부분의 연구자가 한랭했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 한다. 다만 前島郁雄과 김 연옥만이 온난기로 설정했다. 중국 연구자 중에는 1680년, 1690년에 온난기로 접어들었 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동아시아 3국은 공간적으로 비교적 인접한 지역임에도 소빙기의 기간에 대한 인식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17세기 한국의 소빙기는 인접한 중국, 일본과 과연 달랐는가? 앞 으로 연구에서 이러한 동시성 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조선왕조실록 를 비 롯한 조선시대의 풍부한 사료들은 소빙기에 대한 세계적인 기록들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 다. Ⅱ. 기후변동의 동시성Ⅰ: 서늘한 여름들 1) 화산폭발 태양활동과 하계 한랭현상 동아시아에서 소빙기의 지구적인 동시성이 어떻게 나타났을까? 애트 웰은 단기간의 지구적인 기후변동 의 원인으로 화산폭발, 태양활동, ENSO에 주목하고, 화산먼지베일지 수(VEI), 빙핵, 나이테 등의 증거들 을 종합하여 1200~1699년까지 동아 시아의 기후변동을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관찰했다. 그가 근거로 삼았던 과학자들의 성과 들 중심으로 애트웰의 논의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이에 대한 내 의견을 덧붙인다.1) 그림 1) William S. Atwell, Volcanism and Short-Term Climate Change in East Asian and World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 金 文 基 171 은 북반구의 수목 나이테들에 대한 통계를 통해 화산폭발이 북반부의 여름 기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하는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표 5>는 지난 600년간 여름이 가장 한랭 < 표 5> 북반구 나이테를 통해본 지난 600 년(1401~2000) 했던 30년을 나타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동안 하계 한랭화 17세기에 한랭화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는 사실이다. 총 11년이 집중되어 있고, 특히 17세기 후반에는 7년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 은 19세기 전반으로 모두 6년이 있다. 1810 년대는 탐보라 화산의 폭발(1815)로 인한 장 기적인 여름이 없었던 해 가 주목된다. 애트웰은 1200~1699년까지 화산활동과 기 후변동의 상관관계를 밝히기 위한 사례연구 로 5시기에 주목했다.2) 애트웰이 주목한 것 은 15세기 중반으로, 1444~1465년의 여름이 매우 한랭했음을 지적한다. 유럽은 추운 날 세기 1401 1450 1451 1500 1501 1550 1551 1600 1601 1650 햇수 3 1 0 1 4 하계 한랭화 연도(순위) 1446, 1448, 1453④ 1495 1587 1601①, 1641③, 1642, 1643 1666, 1667, 1669, 1675⑧, 1651 1700 7 1695⑥, 1698⑨, 1699 1701 1750 2 1740, 1742 1751 1800 1 1783 1816②, 1817⑤, 1818, 1819, 1801 1850 6 1836, 1837 1851 1900 1 1884 1901 1950 3 1912⑦, 1968, 1978 1951 2000 1 1992 <표>는 K.R. Briffa et al., Ibid, 1998, p.450 <Table1> 의 지 난 600 년 동안 가장 한랭했던 여름으로 기록된 30년을 재편집 했다. 년도 뒤의 숫자는 순위이다. 씨로 각종 재해에 시달렸다. 비잔틴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 멸망(1453)한 것이 이때였다. 중국, 조선, 일본에서는 기근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중국 남부의 반란과 몽골의 침입이 격화되었고, 조선에서는 계유정난이 발생했다. 이 기간을 살펴보면 인상적인 한랭화현상이 목격된다. 3번째로 한랭했던 1453-54년은 회수와 태호가 결빙했으며, 감귤이 동사했다. 강소성 북부의 바다는 40리나 결빙했다. 조 선의 경우 1453년 여름의 한랭화 현상이 눈에 띈다. 그렇다면 중국의 소빙기 연구에서 15세기 중반은 어떤 의미일까? 중국에서는 제1차 한랭기의 시점을 대체로 1470~1500년 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시작을 1450년 혹은 그 이전으로 조정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애트웰이 다음으로 주목한 것은 1584~1610년대이다. 이 기간 동안 유럽뿐만 아니라 러 시아, 오스만제국,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등에서도 혹독한 날씨와 기근, 폭동을 경 험했다. 일본에서는 1584~1610년 사이에 흉작과 기근이 각지에서 발생했다. 조선은 1584, 1593, 1594, 1608년의 기근을 경험했다. 중국이 재해와 기근으로 악화일로를 걷게 되면서 2) History, C.1200~1699, Journal of World History 12-1, 2001; K. R. Briffa, P.D. Jones, F.H. Schweingrube & T.J. Osborn, Influence of volcanic eruptions on Northern Hemisphere summer temperature over the past 600 years, Nature 393, 1998. 애트웰이 주목한 5시기는 1225~1233년, 1256~1262년, 1444~1465년, 1584~1610년, 1636~1644년 인데, 13세기는 소빙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므로 후자의 3사례만을 살핀다.
172 내부적인 반란과 몽골, 여진, 베트남이 침략해 왔다. 가장 한랭했던 1601년은 강남에서도 한여름에 눈이 내리고, 화북지역에 여름 된서리로 흉작이 초래되었다. 조선에서도 4월 남부지역에서 눈이 내렸던 사실이 발견된다. 임진왜 란 중이던 1593~1594년의 기근도 주목된다. 전쟁과 맞물려 카니발리즘이 공공연하게 자 행될 정도로 극심했다. 임진왜란이 있었던 이 기간에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한랭 한 기후가 지배했던 것이다. 중국의 시기구분에서 1584~1610년은 제1차 온난기에서 제2차 한랭기로 전환되는 시기 이다. 다른 입장도 있지만 대체로 온난기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애트웰의 주장은 대치 된다. 강남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늦어도 1570년대 후반부터 한랭화 현상이 빈번하게 나 오고 있었다.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소빙기 시기구분을 다시 검증해 봐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2) 이상저온과 기근 17세기의 하계의 이상저온현상에 대 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그림은 북 반구의 17세기 여름 기온변화 부분을 뽑은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1600년 대 초반, 1640년대 전반, 1660년대 후 반에서 1670년대 중반, 1690년대 후반 의 여름이 특히 한랭했던 것으로 나타 난다. 애트웰은 17세기 전반인 1584~1610과 1636~1644년의 두 기간에 주목했다. 후자는 화 산폭발로 인해 하계 한랭한 기후가 현저했던 기간이다. 그 중에서 1641~1643년이 가장 극심했다. 중국 북부지역은 가뭄, 기근, 역병이 연이어 발생하여, 화중으로 확대되었다. 명조의 군사력은 붕괴되었고, 여진족의 침입은 격화되었다. 일본에서는 이상저온현상으로 寬永대기근이 발생했다. 애트웰은 이러한 한랭한 날씨와 경제적 위기가 동아시아와 유럽 뿐만 아니라 러시아, 인도, 남부아시아, 북동부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등에서도 동시에 발 생했음을 지적했다. 나는 1640~1642년까지 강남의 대기근을 분석한 글에서 당시 기후현상의 세계적 동시 성을 강조한 바 있다. 소멸되어 가던 농민반란이 대반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대기근 상황 때문이었다. 명조의 멸망을 결정지은 1640~1642년의 대기근은 소빙기 기후변동이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 金 文 基 173 동아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7세기에는 1640년대 전반 외에도 1660년대 후반에서 1670년대 중반, 1690년대 후반 에 현저한 기후한랭화 현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애트웰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 하지 않았다. 17세기 후반이 가장 한랭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큰 의문이다. 1660년대와 1670년대를 살펴보면 중국과 조선에서 한랭화 현상이 현저했다. 중국에서는 한여름에 사 람이 동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열대인 강남에서는 20년 동안 한여름에 눈이 내린 햇수 만 13년이었다. 조선에서는 이상저온 현상이 없었던 해가 거의 없었다. 현종대의 경신대 기근(1670~1671)은 이러한 배경에서 발생했다. 같은 1670년, 중국은 여름에 눈이 내리고 겨울에는 아열대의 강과 호수가 되었다. 여기에 수재와 한재가 겹치면서 화북과 강남을 중심으로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다. 劉昭民은 三藩의 난(1673~1681)이 발생한 것도 이러 한 이상저온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延寶大飢饉 (1674~1677)이 발생했다. 가뭄, 홍수, 태풍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당시 서늘한 여름과 추 운 겨울이 지속되는 한랭한 기후였음은 분명하다. 1690년대는 소빙기의 한랭한 기후 중에서도 정점에 달했던 시기로 보고 있다. 1690년 대 중 후반의 한랭화는 조선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숙종대의 을병대기근(1695~1699) 이 이때 발생했다. 당시 사망자는 400여 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3~33%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일한 시기 중국 화북지역은 하계 반년 동안 된서리가 자주 내려 수확을 어 렵게 했다. 山西가 특히 심했는데 1694년부터 1698년까지 기근이 연이어 발생했다. 일본 에서도 냉해로 1695~1696년 元祿大飢饉이 발생했고, 1699~1704년이 특히 심했다. 유럽에 서 1690년대는 가장 한랭했던 시기였다. 프랑스에서는 1693~1694년의 기근과 역병으로 1/10의 인구가 사망했다. 흉작과 기근은 핀란드, 스코틀랜드, 뉴잉글랜드 등 유럽과 아메 리카에서도 발견된다. 17세기 후반의 이상저온현상은 동아시아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애 트웰이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결국 조선 의 중요성을 간과했기 때문으로 보인 다. 그가 이용하는 조선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다. 조선의 풍부한 소빙기 자료를 확인했다면 동아시아의 17세기 위기 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도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 다. 물론 17세기 기근들의 원인을 이상기후 때문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럼에도 이들 기근이 일어났을 때 한랭한 기후현상이 그 배경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기근 이 보이는 동시성 은 17세기 동아시아의 역사가 지구적인 기후의 파동에서 그다지 자유 롭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174 Ⅲ. 기후변동의 동시성Ⅱ: 혹한의 겨울들 1) 템스 강, 강남 호수, 동해의 결빙 소빙기 동안 동아시아의 혹한의 겨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영국의 템스 강, 중국 아열대 강과 호수의 결빙, 조선 동해의 결빙에 대한 기록을 통해 겨울 중 에서도 특히 매서웠던 혹한의 겨울들을 비교해 보자. < 표 6> 템스 강, 중국 아열대의 강 호수 바다, 조선 동해의 결빙 중국 바다 및 아열대 강과 호수 영국 템 기간 한수 회수 스 강 강남의 강과 호수 파양 동정호 1401 1450 1501 1550 1551 1600 1601 1650 1453-54(태) 1476-77(태) 1651 1700 1501-02(전 묘) 1505-06 1503-04(태) 1513-14 1509-10(태 황) 1536-37 1512-13(태) 1513-14(태) 1568(태) 1564-65 1578-79(태 전) 1594-95 1580-81(태) 1581-82(태) 1607-08 1620-21 1636-37(황) 1634-35 1648-49 1654-55 1662-63 1665-66 1676-77 1683-84 1694-95 조선 동해 1416(漢) 1449-10(漢) 1407-08 1434-35 1451 1500 바다 1654-55(태 황) 1655-56(황) 1665-66(태) 1676-77(황) 1683-84(태 황) 1690-91(황) 1691-92(황) 1694-95(황) 1700-01(태) 1701 1751 1708-09 1715-16 1739-40 1751 1800 1775-76 1761-62(태 황) 1794-95 1589-90(湖) 1596-97(湖) 1600-01(運) 1601-02 1609-10 1610-11 1635-36 1453-54(淮) 1493-94(漢) 소 산동) 1564-65(淮) 1570(鄱) 1578-79(淮) 1554-55(함경 -10~1) 1563-64(직예) 1564-65(강원 -1) 1598-99(함경 -1~2) 1501-02(漢) 1502-03(漢) 1510(洞) 1513-14(洞 鄱) 1518-19(漢) 1520-21(漢) 1529(漢) 1550-51(淮) 1453-54(강 1493-94(강소) 1619-20(淮) 1620-21(洞 漢) 1639-40(淮) 1653-54(洞 漢 淮) 1651-52, 1653-54 1666-67 1670-71 1689-90 1660-61(洞 漢) 1666-67(淮) 1654-55 1670-71(鄱 漢 淮) 1671(淮) 1690-91(洞 鄱 (절강 강소) 1670-71(강소) 1654-55(강원 -1~2) 1658-59 (강원 윤3.10보고) 1696-97(함경 -1~2) 漢 淮) 1691-92(漢) 1702-03 1719-20 1725-26 1740-41(湖) 1762-63(湖) 1766-67 1708-09 (강원 동해 -12~1) 1715-16(淮) 1720(淮) 1709(강원 -6) 1742-43(함경 -12) 1790(洞) 1776-77(산동) 李福源, 海氷歌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 金 文 基 175 1795-96(湖) 1830(漢) 1809-10(산동) 1809-1810 1840-41(鄱) 1814-15(산동) (함경, -12~1) 1845-46 1845(淮) 1861-62(鄱) 1864-65(漢) 1865-66(鄱 漢) 1856-57 1861-62(태 황) 1 87 3-7 4 ( 尙 1871(漢) 湖) 1873-74(漢) 1892-93(강소) 1877-78(태) 1851 1900 1878-79 1877-78(洞 漢) 1892-93(태 황) 1880-81 1886-87(漢) 1892-93(漢) 1899-00(漢) 템스 강의 완전결빙 기록은 H. H. Lamb, Ibid, 1977, pp.568~570의 < 표> 에서 정리했다. 1813-14 년을 마지막으로 이후에 템스 강의 완전한 결빙이 보이지 않는 것은 런던교(London Bridge)가 다시 세워지면서 강의 흐름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 다. Ian Currie는 이 기간 동안 위의 완전결빙 을 포함한 템스 강의 유명한 결빙의 예로 1309-10, 1363-64, 1407-08, 1433-34, 1506, 1515, 1536-37, 1564, 1607-08, 1621, 1635, 1648-49, 1655, 1662, 1666-67, 1677, 1683-84, 1688-89, 1691, 1695, 1709, 1715-16, 1728-29, 1739-40, 1762-63, 1767-68, 1776, 1783-84, 1788-89, 1795, 1796, 1807-08, 1811, 1813-14, 1819-20, 1826, 1829-30, 1838, 1844-45, 1853-54, 1855, 1867, 1878-79, 1880, 1881, 1890, 1895년을 들고 있다. Ian Currie, Frosts, Freezes and Fairs: Chronicles of the Frozen Thames and Harsh Winters in Britain since 100AD, Frosted Earth, 1996, pp.3~29. 중국 아열대 강과 호수의 결빙은 竺可楨, 中國近五千年來氣候變遷的初步硏究, 考古學報, 1972-1, p.179 <표4> 를 참조했지 만, 많은 부분은 中國三千年氣象記錄總集 및 강남의 方志, 문집 등에서 새롭게 발굴한 것이다. 회수, 한수, 동정호, 파양호의 경우 단순히 江氷, 河氷, 湖氷 등으로만 기록된 것은 제외하고, 강과 호수의 이름이 분명이 드러난 경우만 대상으로 했다. 실제로는 이들 강과 호수의 결빙은 더욱 많았을 것이다. 겨울의 표시가 1607-08 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은 1607 년 말과 1608 년 초에 걸친 겨울 이라는 의미이다. 동계 半年 은 서로 연이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연도만으로 표시할 경우 혼란을 조래한다. 竺可楨은 태호 결빙의 사례로 1454 년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1454년 초의 일인지 혹은 1454년 말의 일인지 확실치 않다. 기록을 확인하면 1653-54년 겨울, 곧 1654 년 초의 일이었다. 이런 불분명함은 실제로 竺可楨의 연구에서 보이고 있다. 竺可楨은 漢水의 결빙 사례로 1620년과 1621 년을 각각 들고 있는데, 사료를 확인하면 이것은 1620-21 년 겨울 의 일이었다. 사료에는 연도가 달리 표현되었지만 실제로는 같은 겨울 이었 다. 다만 <표>안에서 1568(태) 와 같이 이러한 표시가 없는 경우는 竺可楨이 인용한 典據를 확인하지 못해, 이것이 1567-78년 의 겨울인지 혹은 1578-79년의 겨울인지 확정할 수 없는 경우이다. 강남의 강과 호수 중 태 =太湖, 황 = 黃浦, 전 = 澱湖, 묘 =泖湖를 나타낸다. 竺可楨의 연구는 太湖, 鄱陽湖, 洞庭湖, 漢水, 淮河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黃浦, 澱湖, 泖湖의 결빙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1509-10, 1512-13, 1513-14, 1580-81, 1581-82, 1636-37, 1655-55, 1676-77, 1690-91, 1691-92, 1694-95, 1809-10 년의 결빙 기록이 새롭게 추가된 부분이다. 다만 전호 묘호는 모 두 松江府에 속한 것으로, 황포와 결빙 기록이 겹칠 때는 황포만을 남겼다. 강남의 강과 호수 의 의 기록은 태호, 황포, 전호, 묘호의 결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단지 江, 河, 湖, 運河 의 결빙으로 표현되어 있는 경우이다. 이들 대부분은 舟楫不通 으로 표현될 정도의 혹한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비록 기록에는 없지만 太湖나 黃浦와 같은 큰 강과 호수들도 결빙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光緖 烏程縣志 卷27에는 正德 12 년(1517) 大寒 太湖 氷 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正德 8 년(1513)의 일이다. 강희 39년(1700) 의 태호 결빙에 대해서는 太湖備考, 光緖 烏程縣志, 同治 湖州府志 등에서 기록하고 있지만, 강희 29년(1690)의 일일 가능 성이 있다. 다만 江南織造李煦奏摺 에는 12월 大雪과 하류 결빙에 대한 기록이 있어 보류해 둔다. 중국 바다의 결빙은 明史, 北游錄, 中國三千年氣象記錄總集 에서 정리했는데, 1892 년 기록은 滿志敏, 앞의 책, p.258을 참고했다. 조선 동해의 결빙은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木齋先生文集, 老峰先生文集, 晩沙稿, 雙溪遺稿 에서 확인 했다. 1801 1850 1813-14 1809-10(황) 1840-41 영국 템스 강의 결빙은 유럽 소빙기의 혹한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사례이다. 템스 강은 1401~1900년 사이에 모두 23차례의 완전 결빙이 있었다. 그 중에 17세기 후 반이 6회로 가장 빈번했다. 17세기 전반이 4회, 16세기와 18세기 전반이 3회로 나타난다.
176 완전결빙에서 보면 17세기가 총 10회로 절대적인 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혹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열대 강, 호수, 바다의 결빙이다. 소빙기 동안 한수, 회수 및 동정호, 파양호, 태호는 여러 차례 결빙했다. 1670년과 1690년의 혹 한 때는 양자강마저 얼어붙었다. 광동, 광서, 운남에서 눈과 서리, 강과 하천의 결빙은 17 세기에는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한파로 아열대작물들이 직접적인 동해를 입었다. 강남의 태호와 황포는 1401~1900년 동안 총 26회의 결빙 햇수를 보인다. 그 중 17세기 후반이 9회로 가장 많다. 다음으로 회수, 한수, 파양호, 동정호의 결빙기록을 보 면 19세기 후반이 9회, 16세기 전반이 8회, 17세기 후반이 7회의 햇수를 보인다. 대체로 19세기 후반이 가장 빈번했다. 다만 한수를 제외하면 오히려 17세기 후반이 더 빈번하다. 바다의 결빙은 혹한의 극단적인 상황을 잘 드러낸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바다의 결 빙은 매우 드문 일이다. 아열대인 강소, 절강 앞바다의 결빙은 총 5차례가 보인다. 1453-54년은 4번째로 한랭했던 여름이 있었던 해이다. 1654-55년 겨울은 談遷이 경험했 던 그것이다. 1670-71년 겨울의 혹한에 대해서도 경신대기근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살펴 보았다. 17세기 동안 조선에서 강과 호수의 결빙, 폭설이 내리는 겨울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하계 이상저온현상에 비해서 겨울의 혹한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13년 동안(1653~1666) 조선에 머물렀던 하멜은 강진에 있었을 때 겨울풍경을 이 렇게 묘사했다. 겨울에는 강이 단단히 얼기도 하는데 이때는 얼음 위로 쉽게 여행할 수 있다. 그리고 조 선의 겨울에는, 우리가 1662 년에 산중의 어떤 절에 머무를 때처럼 굉장히 많은 눈이 내린 다. 이때 집과 나무들이 눈으로 덮여 있어서 다른 집에 가려면 눈 속으로 통하는 굴을 파 야 한다. 그가 경험했다는 1662년의 남부지역 폭설에 대한 기록은 실록 에서는 찾을 수 없다. 보고체제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겨울의 폭설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혹한을 잘 보여주는 것이 동해의 결빙이다. 조선시대에 동해의 결빙은 9차례 보인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 후반에 3번, 18세기 전반에 2번, 19세기 전반에 1번이다. 효종 6년(1655) 3월, 강원도 바닷물이 3일 동안 결빙했다는 소식은 조정을 놀라게 했다. 그로부터 꼭 4년 뒤에 이 소식을 다시 들어야 했다. 인상적인 것은 1708-09년 겨울이다. 강원도 바닷물은 한 달 넘게 50리나 얼어붙었고, 그 해 한여름에도 바닷물이 얼었다. 서 해는 어떠했을까? 기록을 확인할 때 서북해는 잦은 결빙과 浮氷으로 선박의 운행이 자유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 金 文 基 177 롭지 못했다. 영국의 템스 강, 중국 아열대의 강과 호수 바다, 조선 동해의 결빙은 소빙기의 혹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럽의 경우에도 17세기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연해는 물론이고 지중해의 바다가 결빙된 사례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이런 사실들은 17세기 겨울이 지금 보다 훨씬 한랭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2) 打氷詞와 海氷歌: 혹한의 풍경들 소빙기 동안 템스 강의 결빙은 영국인들 에게도 매우 인상적인 일이었다. 템스 강이 결빙되었을 때 얼어붙은 강위에는 이른바 빙상시장(Frost Fair) 이 열렸다. 전형적인 모 습이 17세기 후반인 1683-84년 겨울이었다. 얼어붙은 강위에는 칸막이 상점들이 늘어 서고 사람들이 각종 오락을 즐기는 축제가 벌어졌다. 대영제국의 경이로움 이야말로 당시 그들이 느낀 혹한의 겨울풍경을 잘 대변해 준다. 중국에서도 아열대의 강과 호수가 결빙되었을 때 人馬가 그 위를 걸어 다녔다. 템스 강에 빙상시장이 열리던 그 겨울에 중국의 태호도 한 달이나 얼어붙어 사람들은 얼음을 밟고서 다녔다. 조선의 겨울 모습도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멜은 1654년 11월 한강의 결빙에 대해서 2~3백 마리 정도의 짐을 실은 말들이 줄을 지어 건너다닐 수 있 었다 고 묘사했다. 템스 강의 빙상시장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배를 끌고 다니는 모습이다. 얼어붙 은 강에서 얼음을 깨고 배를 끌고 가는 풍경은 중국에서도 흔한 일인데, 17세기에는 아 열대지역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17세기 후반 葉方標와 陸世儀는 각각 打氷 詞, 打氷辭 를 지어 당시 얼음을 깨고 배를 끌고 가는 어려움과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 했다. 1690-91년의 혹한 때 査愼行은 이러한 시도를 장차 사람의 힘으로 하늘과 겨루려 는 것이라며 그 무모함을 노래했다. 아열대지역인 강남에서 얼음을 깨고서라도 배를 운 행하려는 打氷 의 풍경이야말로 17세기 후반 혹독한 소빙기의 겨울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흥미롭게도 조선에는 바다의 결빙을 노래한 海氷歌 가 보인다. 18세기 李 福源(1719~1792)은 함경도의 圓山港口 30리가 얼어붙은 광경을 노래했다. 이들 기록은 동
178 아시아 소빙기의 겨울풍경을 보다 풍성하게 보여주고 있다. 3) 동계 혹한의 영향력 눈에 덮인 산하와 꽁꽁 얼어붙은 강, 살을 에는 매서운 추위. 이러한 혹한이 빈번했던 17세기의 겨울은 동아시아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소빙기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하계 이상저온이 가져오는 농업적 피해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지만 혹한의 겨울들이 초 래하는 사회, 경제적 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먼저 농업적인 영향부터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혹한의 겨울은 병충을 죽이고 地溫을 유지하게 하여 보리와 밀의 성장에는 도움을 준다. 이런 이유로 겨울의 大雪을 瑞雪 이 라고 하여 반기고 있다. 대설은 풍년의 조짐이었고, 겨울이 춥지 않은 것은 오히려 문제 가 되었다. 그러나 동계반년의 극심한 혹한은 경우가 다르다. 17세기의 기록들을 보면 극 심한 혹한으로 보리와 밀이 얼어 죽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중국의 경우 혹한은 감귤 을 비롯한 아열대 과수들의 생장에 치명적이었다. 남방의 복건, 광동, 운남에서도 荔枝, 龍眼, 檳榔이 자주 凍害을 입었다. 열대에 속하는 海南島에서 檳榔이 얼어 죽는 모습은 17세기 겨울의 혹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겨울의 폭설과 혹한은 동물과 인간의 생존에도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동계반년에 아 열대지역에서도 새나 짐승은 물론이고 강과 호수의 물고기가 동사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 다. 17세기 동안의 잦은 혹한은 인간의 생존에도 영향을 미쳤다. 혹한으로 인한 동사자는 강남, 강서, 호남, 복건, 광동 등 아열대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조선에서도 동사자가 종종 발생했다. 조정에서 병사들의 동사를 막기 위해 솜옷 등의 피복을 지급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飢民이나 죄수들에 대해서도 방한 대책이 중요하게 논의되었다. 혹한의 겨울이 빈번했던 17세기, 추위를 극복하기 위한 의복과 연료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 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경제에 미친 영향이다. 강과 호수가 결빙되면 수로교통이 마비 된다. 수로교통의 마비는 지역적인 사항에 머물지 않는다. 중국과 조선은 漕運체제를 통 해 곡물을 수도로 운송했다. 이런 상황에서 때 강과 운하의 이른 결빙은 국가경제유통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겨울이 되면 한강이 결빙되고, 경기도에 연한 강화도 바다와 서북해에 얼 음덩이가 형성되어 선박의 운행을 방해했다. 이로 인해 漕運船이 제때에 운송을 완료하 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중국에서도 강과 운하가 일찍 결빙되는 일이 발생하자, 漕運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갑작스런 혹한은 漕運의 기한을 지키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소빙기 기후변동 / 金 文 基 179 다. 강희제는 1678년 뜻하지 않은 결빙으로 인해 기한을 맞추지 못한 경우는 처분을 면 제한다는 조치를 내렸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책의 하나는 바로 打氷 이었지만, 실효를 거두기 어려웠다. 강과 운하의 결빙에 따른 조운의 문제는 옹정 연간에도 집중적인 논의 가 진행되었고,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주목할 만한 것은 군사적인 부분이다. 17세기 전반 後金과 대치하고 있던 조선에 있어 압록강의 결빙야말로 군사적인 침략의 신호탄이었다. 合氷의 시기가 임박했으니 兵火가 반드시 멀지 않았다 라는 광해군의 말은 동계 혹한이 가지는 군사적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당시 조선의 방어체제는 압록강의 결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정묘호란을 전후해서는 압록강의 결빙에 맞추어 下三道 병사를 국경으로 진주시켰다가, 봄이 되어 압록강이 풀리면 다시 歸農 시켰다. 압록강 결빙에 맞추어 군사들을 모았다가, 압록강이 풀리면 돌려보내는 방법이었다. 이처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한겨울에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병자호란에서 압록강을 건넌 청의 병사들은 단지 5일 만에 한양을 위협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한 배경에는 겨울의 매서운 추위로 인한 강들의 결빙이 있었다. 당시 어느 강까지 결빙되었 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본대인 淸太宗이 임진강을 넘어올 때는 얼어붙은 강위 를 그대로 통과했다. 조선에 있어 17세기 겨울의 혹한은 후금의 침략에 있어 무엇보다 큰 위협이었던 것이다. 후금이 중국 腹地 를 침략할 때도 겨울을 끼고 있었던 사례가 많다. 入關 전에 후금 은 5차례에 걸쳐 화북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했다.3) 그 중 제2차, 제3차를 제외하 면 모두 겨울을 끼고 있다. 제4차와 제5차는 北直隸에서 산동남부까지 깊숙이 공격해 왔다. 산동을 침공했을 때는 하나같이 한겨울이었다. 대체로 초겨울에 침공하여 한겨울에 약탈하고 봄이 되면 돌아가는 형국이다. 이 기간은 화북의 운하와 강이 결빙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鐵騎 로 상징되는 청군의 기동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것은 강과 운하가 얼어붙은 겨울이었을 것이다. 후금의 화북에 대한 침공이 격화되고 있던 시기에, 겨울의 혹한은 농민반란이 확대되 는 과정에도 얼굴을 내밀고 있다. 鄭廉은 1633-34년 겨울, 거센 물결로 좀체 얼지 않는 용문 아래쪽의 황하가 결빙되어 농민반란군이 황하를 건너 하남에 진출함으로써 농민반 란이 사방으로 확대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파슨스(James Bunyan Parsons)도 이 해 겨울의 황하결빙이 농민반란의 남방진출을 완성하여, 황하와 양자장사이 중국의 3) 제1차: 숭정 2년(1629) 11월~5월, 제2차: 숭정 7년(1634) 5월~윤8월, 제3차: 숭정 9년(1636) 6 월~7월, 제4차: 숭정 11년(1638) 9월~1월. 제5차; 숭정 15년(1642) 11월~5월. 제3차는 새로 성립 한 청조의 위세를 과시하고 탐색하려는 것이었다.
180 광대한 중앙지역이 반란의 주요무대가 되었다고 했다. 뜻하지 않은 혹한이 농민반란의 확대를 좀 더 일찍 불러온 것이다. 이처럼 동계의 혹한은 농업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국가경제, 군사전쟁 등 다양한 형태 로 동아시아 역사전개에 영향을 미쳤다. 지금까지 소빙기 연구는 지나치게 농업에 한정 된 경제적인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소빙기는 17세기를 살았 던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의복, 사상, 신앙 등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소빙기의 영향에 대해서 보다 폭 넓은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맺음말 1660년 겨울, 雲南에는 백여 마리가 무리를 이루는 새떼가 나타났다. 그곳 사람들에게 낯설었던 이들 기러기 떼는 그 이후 매년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풍광은 단순히 새롭고 진기한 볼거리에 지나칠 문제는 아니다. 인식하던, 그렇지 못하던 그들을 둘러싼 생태환 경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는 공간적으로 훨씬 더 넓은 동아시아, 혹은 지구적인 변화들의 일부분일 가능성이 많다. 기후가 변한다는 것은 순환하는 생태리듬이 변화하는 것이며, 때로는 생태환경의 지도 자체를 바꾼다. 인간의 역사는 이러한 변화들 위에서 진행되어 왔다. 역사의 그림을 그리 는 연구자들이 주인공인 인간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 공인 인간은 변화하는 생태리듬과 생태환경에 응전하고 적응하면서 살아왔다. 그림의 배 경은 주인공의 실체를 훨씬 뚜렷하게 돋우어준다. 17세기는 그림의 배경에 새로운 변화 들이 많았던 시대였다. 주인공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 배경에 관심을 기울 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江蘇省 南通, 蘇州 및 昆山 지역 一帶의 破血湖 儀式에 관하여 宋 堯 厚(인천대 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目 次 Ⅰ. 서언 Ⅱ. 역사적 배경 Ⅲ. 江蘇省 南通, 蘇州 및 昆山 지역 一帶의 破血湖 儀式 Ⅳ. 破血湖 儀式의 사회ㆍ경제적 배경 Ⅰ. 서언 중국에서는 血盆齋라는 儀式이 있다. 이것은 사망한 기혼 여성들은 운명적으로 지옥에 피가 담겨 있는 연못인 血湖에 떨어져 고통을 받게 된다는 믿음에서 사망한 모친의 영혼 이 혈호에 떨어지는 벌로부터 구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儀式을 위해 사용된 경전을 포괄 적 명칭(the generic name)으로 血盆經이라 한다면, 여기에는 그러한 儀式的 용도로 쓰인 것만이 아니라 혈호지옥에 들어가야 할 여성들의 구원을 위해 만들어진 다양한 민간 종 교의 경전들도 포함시킬 수 있다. 혈분경은 印度에서 전래된 불교 문화의 일부인 目連 이야기가 중국적인 요소를 수용하면서 중국적 고유의 특성을 가진 것으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미 10세기 초 이후부터 12세기에 걸쳐 불교에서 먼저 출현해, 僞經인 佛說大藏正敎血盆經 으로 형성되고, 뒤에 도교와 민간종교에서 다양한 종류와 내용의 혈 분경들이 나타났다. 필자는 이미 역사 문헌상의 연구를 통해 혈분경의 출현 시기를 추정 하고, 그 이후에 있어서 혈분경의 전개 과정을 불교ㆍ도교와 민간종교라는 측면에서 추 구함으로써, 혈분재나 혈분경이 개항 이후까지도 면면하게 행해져 왔다는 것을 보여주었 다. 필자가 지금까지 확인한 혈분재 및 혈분경과 관련된 기존의 연구와 현장에서의 사례에
182 대한 조사 등을 통해, 다양한 혈분경과 이를 근거로 한 儀式이 오랜 기간에 걸쳐 지금까 지 행하여져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볼 때, 혈분재는 불교, 도교, 그리고 민간종교들에서 행해졌으며, 지역적으로도 중국 전역에 걸쳐 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竺法護(A.D.265-316)가 한문으로 번역한 盂蘭盆經이 이 의식과 관련이 있으나, 이 경전에서는 血湖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盂蘭盆會는 目連說話와 관계가 있고, 지역마 다 다양한 목련설화와 目連戱가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목련희나 목련설화가 혈분경이 나 혈분재와의 관계를 보이는 것은 혈분경(혈분재)가 지역적으로 널리 유포되었음을 시 사하고 적어도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 그와 관련된 것들이 깊이 잠재되어 있을 것이라 추 측하게 한다. 문헌 연구를 통해 아주 최근까지도 혈분경이 念誦되고 그 의식이 행해져 왔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특히, 江蘇省 南通, 蘇州 및 昆山 지역에 대한 현장조사를 통해 중국 사회에 서 혈분경이나 혈분재의 전통이 아직도 이들 지역에 살아남아 널리 행해지고 있다는 것 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의식들은 지역은 물론이고 그것을 수행하는 자들이 불교 승려인지 또는 어떠한 도교의 班子나 廟도 없이 불교협회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무리들 (釋敎道士),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자들인가에 따라 다양함을 보이고, 念誦되는 經典들도 매우 다양함을 확인할 수 있다. 儀式이 종교문화의 역동성을 잘 드러내주는 활동이라고 할 때,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정부가 개혁ㆍ개방 정책을 취한 이래, 경제가 발전하면서 오늘날 이러한 儀式들이 널리 그리고 다소 사치스럽다고 할 정도로 행해지고 있는 상황 은, 그것이 민중들의 심적 욕구와 관련이 있다고 볼 때, 그 내포하고 있는 사회, 경제적 의미와 더불어서 여러 가지 측면해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Ⅱ. 역사적 배경 烏斯道의 春草齋集 卷5 先兄春風先生行狀 : 선생은 10여 세가 되었을 때, 和尙이 자식으로서 3년간 육식을 하지 않는 血盆齋를 행할 수 있으면 모친의 죄를 免하게 할 수 있 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즉시 魚肉을 먹지 않았다. 父母가 그 독서하는데 기력이 약함을 염려 해서 막았으나 끝까지 명령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친의 죄과를 보상하 는데 勞苦를 마다하지 않았다. 1281년 都昌縣(江西省)에서 杜萬一이 白蓮會亂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서 元 정부는 江 南 지역에 白蓮會와 같은 結社들과, 五公符 推背圖 血盆 및 모든 금지된 天文圖를 비 롯해 많은 左道亂正之術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江蘇省 南通, 蘇州 및 昆山 지역 一帶의 破血湖 儀式에 관하여 / 宋 堯 厚 183 Soymié씨는 그의 논문에서, 淸代 嘉慶12년(1807)의 서문이 있는 暗室燈 에 血湖大懺 에 관한 말이 나오고 明初의 고위 관리였던 劉伯溫, 즉 劉基 (1311-1375)와 관련된 것들 을 인용하고 있다. 明末 江西 출신인 湯顯祖(1550-1616)의 南柯記 에서는 모친에 대한 구원을 위해 血盆 經을 발간해 널리 배포해야 한다는 것과 血盆齋가 궁극적 목적인 지옥의 혈호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는 것을 면하도록 하는 것 외에, 모친이 현세에 살아 있는 동안, 이 의식을 통해 地神과 天聖之處를 더럽힘으로써 올 수 있는 재앙을 면하고 福도 증진시키며, 질병 을 줄이고 목숨을 연장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1866년에 楊文會(1837-1911)에 의해 세워진 金陵刻經處에서 데, 여기에는 佛說大藏正敎血盆經 이 실려 있다. 民國19년에 나온 禪門日誦 이 출판되었는 大藏血盆經 은 上海佛經流通處에서 발행한 것으로, 내용도 다소 길 고 寶卷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 Henry Doré는 불교 교리에서, 아이를 낳다 죽은 여성과 자녀를 가진 뒤 여러 해 뒤에 죽은 결혼한 여성은 血湖地獄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그들은 그곳으로부터 구원될 희망이 없으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 그들이 그곳에서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즉 세계의 종말까지 더러움 속에 빠진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불교 승려와 도교의 道士에게 호소하는 것이며, 그들에게는 부적 문구들로 그들을 구원 할 능력이 주어져 있다고 한다 : 사망한 여성의 모습을 대강 그리고 그 그림의 발치에는 그 녀의 八字가 쓰여져 있다. 이 그림은 寺院의 鐘에 붙여지는데, 이 종을 침으로써 (몸을 흔들 리게 해서; 필자 주) 사망한 영혼이 잠겨 있는 진흙과 피의 못으로부터 점차 빠져 나온다는 것이다. 이윽고 혈호를 건너기 위해 종이로 만든 배(紙船)를 태우는데, 이것은 못에서 빠져 나 온 여인의 영혼을 배에 태워 뭍으로 건네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들은 血湖 에 대해 엄청난 공포를 갖고 있으며, 한 가족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비용을 아끼지 않고 불교 승려와 도교의 도사를 초청해 혈호 로부터 지체 없이 모친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염원을 하도록 한 다. 이 경우 江南의 부유한 자들은 이러한 儀式을 여러 차례 수행하거나, 또는 공식적으로 脫 喪하기 전에 최소한 한 번은 대규모로 의식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특히 불교의식의 경우 佛 說大藏正敎血盆尊經 이 의식이 진행되는 중에 아이를 낳다 죽은 여성들만이 아니라, 아이를 낳은 모든 여성들을 혈호 에서 구원하기 위해 불태워졌다고 한다. 江蘇省 海州의 도교 도사 인 道奶奶 노파들은 민간에서의 血湖池 신앙을 이용해서, 沭陽縣 塔山 기슭에 있는 진흙의 늪 을 아이를 낳다 죽거나 자녀를 낳은 부녀들이 떨어지는 血湖라고 했다. 道奶奶들은 塔山의 늪지에 가서 크게 소리치며 나무판들을 두들겼다. 그런 의식을 마친 후에 死者의 친척들은 늪 속의 진흙을 막대기로 휘저어 찾으면서 그곳으로부터 불행한 여성의 영혼을 구해 올린다고
184 생각했다. 의식이 끝나면 道奶奶들에게 사례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儀式을 做會라고 불렀 다. 1942년 興亞院 華中連絡部는 藤本智董, 小野兵衛가 주관한 調査인 中支における民間 信仰の實情 을 출판했는데, 그 책의 제7장 31절에서는, 江蘇 北部(徐州 東部와 海州 일 대)의 민간신앙결사를 기록했다. 그곳에서, 佛僧과 道士의 人數는 기타 지역에 비해 적고 大量의 道奶奶 가 존재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Henry Doré의 조사 기록과 일치하고 있 다. 道奶奶 는 곧 늙은 여인, 노부인(老太婆)으로, 민중은 그녀를 仙奶奶, 香頭, 老 妈妈子 라 존칭했다. 그들은 대부분이 육식을 했고, 단지 일부분이 채식하고 葱蒜을 禁食 했는데, 後者에는 永久 채식자가 있었으며, 고정된 날에만 채식을 하는 자가 있었다. 藤 本智董, 小野兵衛는, 道奶奶 즉 道女는 분명히 白蓮敎ㆍ秘敎와 관계가 있다 고 생각했으 나, 이들 여인의 대부분은 결혼을 했고, 驅鬼 와 사람들의 질병에 대한 치료 를 통해 糊口했다고 한다. Robert Ferris Fitch(1873-1954)는 浙江省 杭州의 한 지역에서의 혈호지옥에 대한 관습 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의 끝에 또 다른 입구가 있는데, 牛頭馬面이 지키고 있다. 이들은 고문을 가하는 귀신들로, 이들의 뒤에 血湖의 방(血湖地獄)이 있다. 여기에는 출 산 중에 죽은 여성들이 떨어져 고통을 당한다고 한다. 방의 오른쪽에 못의 女神이 있고 왼쪽에 돌로 쌓은 못과 함께 몇몇의 鬼들이 들어올 죄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왜 출산의 의무를 다한 여성들이 그곳에 떨어져야 하는 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은데, 그것은 그들의 어쩔 수 없는 불행이고 道士들은 그들을 벗어나게 할 수단을 갖고 있다. 이들을 영적으 로 구원하기 위해 큰 鐘이 마련되어 있다. 儀式이 치러지기 위해서는 여성의 머리칼의 일부와 신발과 같은 의류 몇 점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들 물건들을 돈과 함께 큰 종에 갖다 놓고 향을 태우고 종을 친다. 종을 치는 것은 여성들이 못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 한 것이다. 劉煥林은 자신의 출생지인 澄(江陰)의 서부 농촌 지역에서 幼年 시절에 보고 들었던 몇 가지 戱劇을 소개하면서, 그 중에 하나로 僧道戱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구체적 인 의식의 절차는 제시되고 있지 않지만, 오늘날의 破血湖 儀式과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농민들 사이에는 여성의 월경이나 출산으로 인한 출혈에 대해 어떠 한 의식을 갖고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Karl Ludvig Reichelt는 불교 승려들에 의해 수행된 盂蘭盆會의 儀式의 과정 중에 破 地獄 과 破血湖 하는 순서가 있었고 특히 破血湖 를 통해 큰 피의 못에 깊이 빠져 고문 을 당하는 여성들의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보이고 있다. 米田祐太郞의 生活習慣南支那篇 (昭和16년): 작자가 중국에 있었던 당시 수집한 단편
江蘇省 南通, 蘇州 및 昆山 지역 一帶의 破血湖 儀式에 관하여 / 宋 堯 厚 185 적인 견문들을 수록해 놓았다. 그 중에 血の池地獄 가 나온다. 아이를 낳다가 죽은(産死) 婦人은 血池地獄에 떨어진다고 하며, 그것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讀經한다든가, 遠隔地에서 죽은 靈을 자신의 집에 불러 맞이한다든가, 生前에 너무 많이 藥을 복용한 자는, 亡靈이 藥王의 罰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赦免시키기 위해 藥王에게 哀願 祈禱한다. Ⅲ. 江蘇省 南通, 蘇州 및 昆山 지역 一帶의 破血湖 儀式 1. 지역적 배경 2010년 6월 28일부터 7월 6일에 걸쳐 주로 南通市와 苏州, 昆山 一帶의 鄕鎭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破血湖 儀式에 대해 현지 조사를 수행하였다. 如皋市 九华镇, 南通市 刘 桥镇, 陈桥乡, 苏州 胜蒲镇, 昆山市 一帶에서 현재 직업으로서 儀式을 집행하고 있는 道 士들을 만나 면담을 하고, 특히 如皋市 九华镇에서는 破血湖 儀式을 직접 보고 많은 사 진과 영상을 취재하였다. 南通의 지리적 위치는 注意할 만하다. 如皋와 南通 지역은 양자강 북쪽의 三角形 모양 을 하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이 지역은 양자강의 가장 하류 쪽에 위치해 강의 폭이 가 장 넓고 바닷가에 가까워 苏通大桥(苏州-南通) 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교통이 아주 불편 해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水災가 거의 없어 안정된 생활을 유지함으로써 전통이 많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은 苏中 이라고 불렸다. 실제로 南通의 九华镇을 방문했을 때, 이 지역은 개발이 안 된 농촌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南 京 지역 학생들의 인식에도 南通하면 낙후된 지역이라는 인상이 떠오른다고 할 정도이 다. 南通市 平潮镇, 陈桥乡 지역에 거주하는 職業道士들을 우리 일행에게 소개한 楊 는 南通話는 대단히 독특한 方言으로, 이것도 매우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데, 古音이 아주 많다. 南通의 方言 속에 융합되어 있는 것은 모두 古音이다 라고 한 것도 그 만큼 이 지역이 안정되고 현대화 과정 속에서도 개발이 늦게 시작됨으로 해서 전통이 아주 잘 보존되어 있음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이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지역은 상황이 더 심각해서 보통 苏北 이라 불린다고 한다. 苏北 지역은 黃河改道로 水災가 많았고, 현재도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昆山 이나 苏州 등의 江南 지역에 비해 경제적 수준의 차이가 극심하고 한다. 昆山市 张蒲镇 의 경우, 이 지역은 농촌지역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변모되어 완전히 도시화되었다고 한 다. 이 일대가 대규모 工團地域임을 알 수 있었다. 韓國, 臺灣을 비롯한 외국 기업체들이
186 유치되어 있다고 했다. 도로가 넓고 깨끗하고 개개 공장의 규모도 크고 산뜻하며, 굴뚝에 서 심한 연기가 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이 일대의 공단은 주로 전자 제품을 비롯한 하 이테크 관련 산업체들이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이와 비교해 南通 지역은 주로 섬유와 관 련된 공장들이 많았다. 필자는 上海에서 南通으로 들어갔는데, 해안 지역일대에 造船所가 많이 있는 것으로 봐서 南通의 해안 일대에서는 조선업이 발달하고, 이제 차츰 이 지역 에 대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南通과 苏州ㆍ昆山 일대의 破 血湖 儀式에 대한 현지 조사는, 그 儀式 자체에 대한 조사에서 나아가, 개혁ㆍ개방 이후 都市化 등으로 인한 개발이 과연 민간종교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如皋市 九华镇에서의 破血湖 儀式에 대한 調査報告 2010년 6월 30일(水) 9시 반 경에 현장에 도착했다. 儀式은 이미 7시 반경부터 시작되 었다고 한다. 시끄럽게 북소리, 꽹가리, 심벌즈 소리가 들려왔다. 갖가지 의식을 위한 장 치들이 큰 길 입구부터 主家의 집으로 들어가는 밭에 낸 길 양쪽에 화려하고 어지럽게 배치되어 있었다[사진119-130. 134,136-40]. 처음 보는 것이라 시끄러운 소리와 장식물 등 의 크기로 다소 압도될 정도였다. 刘平 교수와 唐金林 道士의 소개로 主家의 主人과 인 사하고 명함을 건넸다. 道士들 중에 唐 도사를 비롯한 그곳에 모인 도사들을 초청한 擔 當者(老板) 沙楊軍이 있었다[사진192,193]. 그리고, 여러 장비들, 예를 들면, 모자, 복장 등 그 외의 다양한 장비들을 정리하고 있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 담당자의 부인이라 했다. 老板은 현재 35세로 17세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악기; 178,179][203,209; 沙楊軍, 부인, 齋主, 唐도사, 刘平教授] 165, 167, 堂屋(본채) 내에서의 배치를 보면[사진141-152], 본채의 중간에서 오른 쪽에 걸쳐 牌位 앞에 세 개의 사각탁자를 놓고 위에는 떡, 과자, 과일, 육류 등의 음식물은 물론 프라스 틱으로 된 다양한 장난감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자동차, 자전거 등등). 제일 앞의 탁자 아래에는 拜墊(점: 매트, 깔개, 방석)을 놓아, 오시는 손님이 磕頭할 때 쓰는 것으로 하고 있다. 大門 안의 왼쪽에는 한 개의 사각탁자를 배치하는데, 한 명의 전문 念經人이 탁자 옆 에 앉아 하루 종일 목탁을 두드리며 念經하는 것이다. 탁자 위에는 위패 모양의 붉은 긴 사각형의 종이 두 장이 나란히 붙여져 있는데, 그 중 왼쪽의 것은 나중에 破血湖 의식에 서 배에 실린 것과 같았다. 이들 道士들은 각각 자신들이 담당하고 있는 일들이 있었고 그 중요성에 따라 등급이
江蘇省 南通, 蘇州 및 昆山 지역 一帶의 破血湖 儀式에 관하여 / 宋 堯 厚 187 매겨져 있었다. 이들 각자의 일은 연극의 배역과 같았고, 악기 연주, 경전 읽기, 唱하기 등 다양하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 職事는 그들이 앉 아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텐트 안에 붙여져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사진161]. < 破血湖 儀式을 행하는 집안 사람들과의 對談> ① 母親 81 세에 사망. 오늘의 儀式은 五ㆍ七齋 齋主의 성명 : 李鐸. 獨子. 61 세 ----- 婦人 黃美英 두 아들을 둠. 현재 부인과 농업에 종사. 300 畝 정도의 토지를 경작. 첫째 아들: 40 세. 농업에 종사. 딸 하나를 두고 있음. 둘째 아들: 33 세. 대학 졸업. 南通市 政府에 근무( 공무원). 아들 하나를 둠. ② 이 儀式을 위해 전부 10,000 위안을 사용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道士班子에게 2,000 위 안. 紙人ㆍ紙馬(扎库) 제작자에서 2,000 위안. 出殡 때 고용한 道士들 7 명에게 800 위안 등. 그리고 이번 도사들이 10 명이 고용되었고 2,000 위안. [10 개의 사각 桌子가 배설되어 있고 점심 때와 저녁 때 각각 두 차례씩 손님을 맞았으므 로, 모두 40 桌子에 손님을 맞은 것이 되었다. 사각 탁자 한 면에 성인이 2 명씩 앉을 수 있으므로, 한 탁자에 8 명이 앉을 수 있었고, 최대한 320 명(아마도 그 이상)의 손님을 맞았 을 것으로 생각됨. 음식은 아주 고급이었다.(10-12 个菜)] ③ 왜 破血湖 儀式을 하는가? : 우선 부모에게 孝敬하고, 어머니의 懺悔와 改罪를 위한 것이다. 아이를 낳고 월경을 할 때 나오는 더러운 것( 피) 이 玉皇大帝를 觸犯하였다. 그래 서 모친은 血湖地獄에 떨어졌다. 이곳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한다. ④ 目連戱에 대해 아는가? : 이 집안의 인척이 되는 노인은 目連救母 를 언급하며, 이 희곡은 실제로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⑤ 비용은 어떻게 조달하는가? 마을 사람들이 부조는 하지 않는가? : 비용은 전부 아들 들이 마련. 친구, 마을 사람의 份子钱(추렴; 毕怀文君은 이 돈의 성격이 出人情 이라고 해 서 내야 될 돈 이라고 하였다) 이 80-100 위안이다. ⑥ 正荐 과 함께 附荐 이 있는가? : 할 수는 있는데, 현재는 없다. ⑦ 모친의 삶에 대해 회고해 줄 수 있는가? : 이에 대해 질문했으나, 당시 상황이 답변 을 얻기가 어려웠다. 오전 10 시 경이었는데, 마을 사람들과 인척들이 곧 식사를 할 것으로 식탁이 차려지고 있어서 답변을 듣지 못했다. ⑧ 이 정도의 규모의 道士班子 집단(10 명) 을 고용해 아침 7 시 30 분부터 다음날 새벽2 시까 지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儀式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전날 唐 道士는 나를 主賓으 로 생각해 자신이 돈을 들여 100 위안을 李鐸씨에게 부조금을 내겠다고 했다. 다음날 그 돈을 齋主에게 건넸을 때, 齋主는 그 돈을 사양하고 그 뜻만 받겠다고 하고 돌려주었다. 그리고, 齋主는 나의 그러한 것이 하늘나라에 가신( 지옥에서 구원을 받으신) 어머니를 기 쁘시게 할 것 이라고 하였다. < 沙 老板과의 對談> 질문: 하나의 儀式을 행하는 團員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188 답: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老板이 일일이 접촉해 하나의 단원을 구성하게 된다. 질문: 구성 인원은 최대한 얼마까지 되는가? 답: 많을 경우 40 명이 되는 때도 있다. 일반적 으로 10 명 정도 이고 적으면 8 명이다(따라서 오늘의 儀式 행사는 대체로 일반적인 수준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질문: 이 행사에서 사용되고 있는 큰 심벌즈나 북은 전수받은 것인가? 답: 전부 購入한 것이다. < 唐金林이 진술한 破血湖 儀式의 과정> 1) 开坛 2) 开经 3) 吹打 4) 划十字 5) 早课 6) 取水 7) 午饭 8) 吹打 9) 念 经( 玉皇经)10) 申文 11) 表文 12) ( 三七을 지나면서 남녀가 달라짐) 女- 破血湖; 男- 破地獄 13) 晚饭 14) 吹打 15) 招神文 16) 玉皇表 16) (五七을 지나서)渡桥 18) 上台 위의 儀式 내용을 보면, 불교과 관련된 경전들은 전혀 念誦되고 있지 않다. 때로, 釋敎 道士라는 班子들이 儀式을 치루는 경우, 道士의 의복을 입고, 和尙의 經을 念하는 경우가 있는다. 이들은 불교와 도교가 결합한 셈이라 하겠다. 그러나, 唐金林과 沙 老板은 正一 派에 속하며 道觀과도 연계가 있다고 하였다. 南通의 道敎는 正一派 위주이며, 대부분 民 間에 散居하며 齋儀로써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고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破血湖 儀式을 수행하는 시기는 각 戶主가 작정한 바에 따르므로, 가정마다 다르다. 어떤 가정은 三七日 에 破血湖를 하고, 어떤 가정은 五七日 에 破血湖를 한다. 그러나 모두 結經 하기까지의 內에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경우는 사람이 살아 있는 때에 하 는데, 이것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참고로 사람이 죽은 후 49일은, 7개의 칠일 로 이 루어져 있다. 일반 가정에서는 비교적 三七, 五七, 六七 과 終七 을 중시한다. 그 가운데 六七 은 죽은 자의 딸이 실행한다. 終七 의 마지막 날에는 結經 한다. 이른바, 結經 內라는 것은 곧 사람이 죽은 후 49일 內라는 것이다. 破血湖 齋會는 일반적으 로 三七 혹은 五七 에 행한다. 이날 전체 儀式 중에서, 위의 12)에 있는 破血湖의 구체적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후 4시부터, 바로 앞의 儀式에 이어 破血湖 儀式이 시작되었다. 약 한 시간 동안 진 행된 이 儀式은 唐 도사와 沙 老板이 함께 했는데 唐 도사가 거의 주관하였다. 전체적으 로 봤을 때, 沙 老板보다는 唐 도사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다. 그가 진행한 의식의 내용은 전체 의식의 진행 흐름을 고려할 때, 이전의 의식들에 비해 다소 까다로운 것이었고 가 장 중요하고 이날의 전체 儀式 과정에서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그것 들을 아주 잘 소화해 냄으로 해서 그 나름대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것 같았다. 다소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아마도, 여러 도사들 중에서도 老板 이외에는 都講大法師의 역할
江蘇省 南通, 蘇州 및 昆山 지역 一帶의 破血湖 儀式에 관하여 / 宋 堯 厚 189 이 매우 중요해 보였다. 집 안마당 한가운데 사각탁자가 하나 놓여 있다. 그 위에는 도교의 銅製 神像이 중앙 에 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祭器들, 칼, 誥文들(이것은 나중에 齋主인 아들과 며느 리의 划十字 를 받기 위해 앞쪽으로 펼쳐져 사인할 부분만 보이게 펼쳐져 있다)이 놓여 있다. 그리고 탁자 아래의 각 四面에 동일한 圖案의 종이가 대나무로 만든 사각형의 연 모양으로 세워져 있다. 이것은 血湖城 城壁을 상징하는 것이다. 탁자 옆에는 生天台 (갈대ㆍ종이를 써서 만들고, 사다리 모양)가 놓여 있다.[사진289] 破血湖 儀式을 위한 이러한 준비가 완료된 뒤에, 제일 먼저 하는 것이 刺血이다. 都講 大法師인 唐金林이 綉花針(수 놓는 바늘)을 써서 齋主의 無名指를 찔러 피를 내고(刺血) 그 피를 붓에 찍어 誥文들에서 자신의 이름 밑에 十 字를 그리게 하는데 이것을 划字라 한다. 며느리는 死者가 친히 낳지 않았으므로, 바늘로 찔러 피를 내지 않고 단지 역시 무 릎을 꿇고 아들의 피가 묻은 붓으로 十 字를 그리게 했다[영상25]. 이름들의 한 중간 위 에는 儀式을 행하는 날짜와 함께 告下報恩 또는 報恩 이라고 써 있어, 이 의식이 모 친의 은혜를 보다 분명하게 느끼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약간의 준비하는 시간 이 흐른 뒤에, 齋主와 며느리가 무릎을 꿇고 향을 들고 종이배의 앞뒤의 끈을 붙잡고 있 다. 老板이 등장해 血湖科[사진82이후의 것; 사진222]를 念經했다. 피리를 불고 세 번째 사람이 작은 香을 2번 올리고 무릎을 꿇고 절을 했는데, 머리로 叩頭하는 형식을 보였다. 齋主나 며느리는 모두 웃는 얼굴이며 장난기가 있어 보였다. 唐 도사가 血湖科을 念經 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계속 무릎을 꿇고 있다. 唐 도사가 무릎을 꿇고 念經을 하고 나 서, 沙 老板이 誥文[誥文은 영상25과 사진273-278; 281-285]을 하나 하나 읽은 다음, 봉투 에 담아 한 곳에 모았다가 紙馬, 紙人 인형들과 함께 모아 태우도록 가져가게 하고 그 뒤에 종이배를 들고 祭壇을 몇 바퀴 돌았다. 종이배 안에는 작은 신발과 의류 몇 점이 들어 있었다[사진 286, 287, 291]. 그와 함께 긴 종이봉투가 실려 있는데, 그 위에는 세로로 星光主照言念 預修血湖妙經 塡還受生錢財 信女李母姜氏本叩元辰 이라고 적혀 있다. 預修血湖妙經 은 啓建預修血湖藏經圓滿功德文憑一道 (사진274)라는 誥文과 관련되는 것으로, 血湖拔罪妙經乙藏 을 5048번 읽어야 하는데, 한 번 읽은 것으 로, 그 경전 한 권을 읽은 것으로 해서, 5048권을 읽는다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沙楊 軍(老板)이 대표로 책임을 지고 다른 道士들과 함께 집에서 성실하게 읽겠다는 것을 약
190 속한 誥文으로 생각된다. 또한 塡還受生錢財 는 啓建塡還受生錢財圓滿功德文憑一道 라 는 誥文(사진276-278)과 관련된다. 이야기에 의거하면, 사람이 세상에서 향유하는 錢財는, 일찍이 이미 그 사람의 前世에 이미 액수가 정해져 있어, 陰世(저 세상)로부터 가불해서 입체해 쓰고, 사람이 死後에 저승(陰府)에 들어가 이 채무를 말끔하게 갚아야 하는 것인 데, 이것을 還受生 이라 부르며, 저승에서 이 일을 주관하는 官員은 曹官 이라 불리기 때문에, 還受生 儀式 중에 啓建塡還受生錢財圓滿功德文憑一道 은 曹官 에게 보고해 돈을 갚는 것으로 처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太上五鬪受生經 을 읽음으로써 공덕을 쌓 는 것으로 하고 있다. 齋主들은 이 배의 船首와 船尾에 각각 붉은 색 끈을 묶고 앞뒤로 잡고서 老板과 唐 道士의 움직임에 따라 돌다 서다를 반복했다. 아마도 배 안에 들어 있 는 신발과 옷들은 모친의 영혼이 배를 타고 血湖池를 건너는 과정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 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에, 넓이가 萬丈이나 되고, 紅水의 물결이 사납고, 더러운 기운이 하늘로 솟구치는 상상의 血湖池를 배를 끌고 지나면서 어머니를 대신해서 血水를 마시는 것이다. 돌기를 멈춘 후, 다시 아들과 며느리는 무릎을 꿇고 唐 도사는 血湖科를 읽는다. 사람 들이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었다. 唐 도사 대 신에 沙 老板이 잠깐 念經했다. 다시 唐 도사가 念經하는 중에 사람들은 자꾸 모여들었 다. 다시 며느리와 齋主가 돌기 시작했다. 탁자에 있던 경전들로 봐서 血湖科를 먼저 읽 고 나서 懷胎經[사진 222,223이후의 것]을 읽는 것 같았다. 한 여성이 붉은 血水가 담긴 그릇을 갖고 나와 탁자 밑에 놓았다. 다시 老板이 念經했 다. 唐 도사가 간단한 의식을 하고 땅바닥에 무슨 글자를 씀과 동시에 칼로 탁자 아래의 특이한 圖案이 그려진 연 모양의 종이( 血湖城 城壁을 상징)의 한 가운데를 찢으면, 한 여자가 나와 그 찢어진 곳으로 그릇을 넣고 血水를 떠서 齋主에게 마시게 하면, 齋主는 마시고 동전(실제 돈임)을 탁자 밑에 설탕물을 바치고 있는 판에 넣었다. 며느리도 마찬 가지로 마시고 동전을 던져 놓는다. 이러한 것이 사방의 모든 것을 다 할 때까지 계속되 었다. 이 의식으로 한 면의 성벽을 깨뜨릴 때마다 폭죽을 터뜨렸다. 특히, 네 번째 종이 를 찢었을 때에는, 설탕물 그릇 전체를 꺼내 齋主와 며느리가 다 마시게 했다. 이 설탕물 그릇은 血湖를 상징하며 그 물을 모두 다 마셔 말려 버림으로써 모친을 구원함을 의미하 였다[영상27의 4:20부분]. 왜냐하면, 원래 사망한 후 혈호에 빠져 고통을 당하는 여성의 영혼들이 전부 그 더러운 血水를 모두 마셔야 구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무릎을 꿇고, 마지막으로 이미 사각 탁자의 정면 밑에 준비해 놓았던 鉢(여기에 는 재(灰)가 담겨 있고, 이미 조치를 해서 단번에 깰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을 唐 도사가 중심이 되어 칼을 곧게 세워 단번에 깨 버렸다. 여기에 아들과 며느리가 돈(실제
江蘇省 南通, 蘇州 및 昆山 지역 一帶의 破血湖 儀式에 관하여 / 宋 堯 厚 191 지폐)을 던져 넣었다(나중에 이 돈들은 도사를 보조하는 사람이 전부 수거해 갔다). 이것 으로 모든 破血湖 儀式이 끝났다. 이때가 대체로 오후 5시경이었다. 鉢은 여기에서는 地 獄을 상징하며 이것을 깸으로써, 지옥으로부터 모친을 天上으로 超度한 것이 된다. 刘平 교수는, 佛敎儀式에서는 저울대(铁杖)로 鉢을 부순다고 했다[영상27-33]. 이후에도 儀式은 계속 진행되어 내일 새벽 2시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破血湖, 破地獄 儀式이 끝난 후, 집 앞마당을 들어가는 길과 마당의 연결 지점에 祭壇이 설치되었다. 사 각 탁자에는 촛불과 香, 여러 祭器가 놓어 있고 밑에는 절을 하는 무릎깔개(拜墊(점)) 위 에 紙錢(100위안짜리 묶음들)의 묶음들이 있다. 여기에는 저녁 식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 중에서 친척들이 참배한다고 했다[사진 304, 309, 310]. Ⅳ. 破血湖 儀式의 사회ㆍ경제적 배경 破血湖 儀式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Henry Doré가 언급한 이후, 강남 지역에서 血盆 齋로서 행해져 왔다는 것이 빈번하게 보고되어 왔다. 필자가 현지의 도사들과의 談話를 통해, 이 의식은 공산화한 이후, 특히 문화대혁명부터 1980년대까지 봉건미신이라고 박해 를 받으면서도 은밀하게 행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경제적 발전에 따라, 道士들에 의해 민간인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면서 南 通, 蘇州, 昆山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의식은 많은 상징적 인 과정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각각의 과정에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중에 는 자녀들이 報恩을 통해 모친을 血湖에서의 고통으로부터 구하고 궁극적으로는 靈的으 로 구원한다(救母生天)는 종교적 의미가 깊이 내재되어 있다. 20세기 초 선교사들의 조롱 과 공산주의 지배 하에서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 민간종교 의식이 지금까지 존속해 갈 수 있었던 근거는 이 점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道士라는 직업의 사회적 지위의 저하와 배우는데 있어서의 어려움, 산업화와 도시화 등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이 직업을 기피하게 하고, 따라서 1천년에 걸쳐 이어온 맥이 끊 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의 부활로 민중들 사이에서 이러한 의식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정부는 늘 邪敎가 민간종교에 개입되는 것 을 두려워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으며, 지방 정부마다, 통제의 강도가 다르긴 하지 만, 그 나름의 민간종교 행사를 통제하는 방침을 갖고 있다. 이러한 破血湖 儀式은 현재 중국에서 민간종교와 관련된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작은 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金 宣 旼(고려대) 目 次 Ⅰ. 머리말 Ⅱ. 유조변과 카룬 Ⅲ. 내외의 격리 Ⅳ. 기인과 범월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옹정5년 (영조3년, 1727년) 4월 21일 조선의 의주부윤 李成龍은 조정에 급히 보고를 올렸다. 이달 11일 밤 의주 통군정의 煙軍과 파졸들의 보고에 따르면 청국인 수백명이 馬尙船 40여 척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강가로 줄지어 올라와 시장을 열고 있었습 니다 라고 했습니다. 저는 바로 訓導 鄭萬濟를 파견하여 이들을 엄히 단속하게 하고, 아 울러 봉황성에 문서를 보내 월경인들을 체포해야 할 장소를 알렸습니다. 그날 밤 무수히 많은 선박들이 강을 거슬러 올라와 섬에 정박하여 크게 불을 피우니, 그 세력의 강성함 이 말로 가르쳐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연변의 여러 보에 알려 방어하게 하고, 또한 급히 훈도를 파견하여 사실대로 봉황성에 통보하였습니다. 이미 순검인의 보 고를 받은 봉황성 성장은 관병 60명을 파견하고, 또한 저의 府[의주부]도 범인들을 체포 하는데 협조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선박을 조달하고 관병을 보내었습니 다. 범인들은 자신들의 죄가 무거운 것을 알고 살길을 도모하여 극력 저항했고, 이 과정 에서 우리측[小邦] 格軍이 상해를 입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5명 남짓 되었습니다. 체포 한 자는 29인 뿐이었고 나머지는 도주했습니다. 이달 22일에 봉황성에서 다시 갑군 20명 과 세 곳의 순검인 80명을 파견하여 잔당을 수색하였습니다. 범인들은 상황이 절박해지 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 숲속으로 흩어져 숨어버렸기 때문에 한 사람도 잡지 못했습
194 니다. 순검소에서 그들의 선박과 양화를 찾아내어 그 물건들을 살펴보니 산동ㆍ산서의 잠채인과 잠상인들의 것이었습니다. 1) 조선은 사건의 전말을 청조에 즉각 보고하고 사안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小邦은 上國 과 인접하고 있는 까닭에 언제나 이러저러한 범월의 우환을 근심해 왔습니다. 앞서 내린 금령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奸民의 潛越이 근래 더욱 심해져 이와 같은 일에 1) 本年四月二十一日, 義州府尹李成龍馳啓, 本月十一日夕, 統軍亭煙軍及把卒等來告, 上國人數百名 乘馬尙四十餘隻, 自開市場, 前江陸續上來云, 卽送訓導鄭萬濟等於巡檢人處, 責以申明約束, 嚴加禁 遏之意, 又使文報鳳凰以爲追捕之地矣, 其野鷄鳴上頂, 許多船隻遍江而上, 止泊島中狼藉放火, 其勢 甚張有不可以言語諭止者, 卽飭沿邊諸堡準備防遏, 而急送訓導, 悉擧事實, 馳通鳳城之際, 城長先已 聞巡檢人所報, 發遣官兵六十名, 督令本府同力緝捕, 本府亦調船隻格軍, 接應官兵, 一齊前進, 犯越 人等, 自知罪重, 必死反生驁逆之計, 奮力持杖棍打官兵抗戰之際, 小邦格軍被傷溺死者至於五名之 多, 所捕犯越人之二十九名, 餘盡逃去. 本月二十二日, 又自鳳城續送甲軍二十名, 餘三處巡檢人合八 十餘名, 搜捕其餘黨, 則渠輩計窮勢迫, 棄船上岸, 散落逃躱於巖谷草樹之間, 無一人就擒, 只得收聚 其船隻糧貨於巡檢所, 而檢其物貨, 係是山東山西潛採潛商之類云. 回咨, 同文彙考 原編 卷61, 犯越, 20b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78).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195 이르렀으니, 실로 전례없는 큰 사건입니다. 이는 大朝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나 小邦 이 어찌 다시 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 이어 조선은 범월자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요구했다. 강변에서 일어나는 범월사건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수백명이 수십척의 배를 타고 넘어와서 상국의 관병을 해치고 소방의 격군을 살해하는 이번 일과 같은 경우가 어 디 있었겠습니까? 만약 이번에 바로잡지 않으면 훗날의 근심은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입 니다. 3) 조선의 보고를 접한 청의 관리들은 옹정 5년 5월 20일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출했다. 조선은 땅이 중국과 가깝고 대대로 충성해왔으니 이는 我朝가 인의로 가르치 기를 내지의 신민을 대하는 것과 같게 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봉황성에 거주하는 民人 孫光宗이 주도하여 수백명을 모아 관군에게 뇌물을 주고 변구를 몰래 벗어나 조선에 가 서 채삼하고 조선인을 사로잡아 살해하였으니, 그 정황이 심히 악독합니다. 변구를 지켜 야 할 관군은 간악한 무리를 체포하고 심문해야 할 책임이 있으니 마땅히 엄히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옹정 3년, 4년, 5년에 사사로이 뇌물을 받고 비적 수백명을 풀어주어 변구를 벗어나 채삼하다가 조선인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法紀를 어긴 것이 큽니다. 이번 사건은 외국인민을 구금하고 살해한 사건입니다. 이어 관리 2인을 현 장에 파견하여 범월자를 체포하고 아울러 이들에게 뇌물을 받고 변구 밖으로 빠져나가도 록 방조한 관병들도 심문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청국의 사람들이 범월하여 조선 땅에서 사람을 해치거나 인삼을 몰래 채취하는 등 사고를 일으킬 경우 조선국왕은 청 황제의 명 으로 이들을 체포할 수 있었다. 청국의 범월인들이 저항할 경우에 대비하여 조선 관병에 게는 이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내지 간민의 범월을 방지하고 조선에게 天 朝 의 은덕을 보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4) 2) 3) 4) 小邦境接上國, 每慮彼此犯越之患, 前後禁令非不嚴明, 而潛越奸細比來尤甚至於今事, 則實是前所 未有之變, 大朝雖已洞悉, 而小邦亦安得不更陳其事狀乎. 回咨, 同文彙考 原編 卷61, 犯越, 20b. 得此竊念, 沿邊犯越之患, 自前雖或有之, 而亦豈有數百人名, 累十船隻蔽江犯越, 略無顧憚卒, 至格 打上國之官兵, 殺害小邦之格軍者, 如今日事乎. 若此不已日後之慮, 必有難言者. 回咨, 同文彙 考 原編 卷61, 犯越, 21a-21b. 該臣等議得, 朝鮮地近中國, 世效忠誠, 是以我朝仁育義撫, 與內地臣民原無歧視, (중략) 今據尹泰 奏稱, 鳳凰城居住之民人 孫鐵嘴卽孫光宗爲首, 聚衆數百, 賄賂官軍, 偸越邊口, 前往朝鮮採蔘, 擒殺 朝鮮之人, 情由甚屬可惡, 至鎭守邊口之官軍, 專司査拿奸究之責, 理應嚴加防範, 乃於雍正三年四年 五年, 私受賄賂, 縱放匪類數百人出口偸刨人蔘, 以致擒殺朝鮮之人, 大干法紀, 事關擒殺外國人民之 案, 伏乞, 皇上遣大臣二員前往, 將現獲盜犯與受賄放出口之官兵, 逐一嚴審定擬具奏, 其未獲各犯, 交與奉天將軍府尹, 嚴行緝拿, 仍行文朝鮮國王, 嗣後如有匪人聚黨妄行越境前往朝鮮, 刦殺生事偸刨 人蔘者, 令該國王遵旨卽行擒拿, 拒捕者卽行殺戮, 則奸徒不敢越境生事, 而朝鮮竝戴天朝懷遠之恩, 於無旣矣. 原奏, 同文彙考 原編 卷61, 犯越, 19a-20a.
196 후에 이른바 郭連進(郭兼金)5) 사건 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결국 기인을 포함한 범인 9인을 斬刑 또는 絞刑에 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郭連進 일행이 이 지역에 서 일어난 범월사건의 마지막 주인공은 아니었다. 옹정5년 이후에도 기인과 민인이 연루 된 범월사건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옹정제가 유조변 일대 六邊을 관리하기 위해 특별 히 관리를 파견하고 그와 수시로 연락을 취했다는 사실은 청조가 성경지역에서 일어나는 범월을 단속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옹정제와 변경의 관 리들이 주고받은 奏摺과 硃批를 보면 청조의 대조선 정책이 성경지역을 통치하고 관리하 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변민들이 조선과의 경계를 침범하는 일은 결국 성경지역 변경일대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이 다. 따라서 郭連進 사건에 대한 옹정제와 청 관리들의 논의과정은 청조의 변경인식과 대 조선 정책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郭連進 사건과 옹정년간 발생한 유사한 범월사건을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것이다. 첫째, 성경지역 통치의 핵심은 유조변 관리를 통한 지리적ㆍ민족적 격리였음을 설명할 것이다. 청 황실의 입관 후 만주족은 다수의 한인에 둘러싸여 생활하면서 점차 자신들의 차별적인 문화적 특징을 상실해갔다. 황실의 권위를 위해 만주족 본연의 문화 를 유지해야 했던 청조에게 성경은 만주족 문화의 타락하지 않은 원형을 상징하는 곳이 었다. 성경지역은 황실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이다.6) 發祥之地의 보호를 위해 청조가 택 한 방법은 물리적 경계를 세워 이 지역을 외부와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입관 직후부터 청조는 명대 遼東邊墻을 기초로 성경 유조변을 수축하기 시작했다.7) 유조변은 만주족ㆍ 한인ㆍ몽고족의 거주지를 분할하고 행정구역을 구획하여 청의 민족격리정책을 보다 효과 5) 6) 7) 이 사건을 언급한 두 사료에서 범인의 이름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조선측 자료인 同文彙考 는 郭連進 으로 칭한 반면, 滿文檔案을 漢文으로 번역한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은 그의 이름을 郭兼金 으로 번역했다. 人名 표기에서는 漢文資料의 기록이 더 정확하기 때문에 本稿 는 郭連進 으로 칭한다. 한편 李花子는 이 사건을 의주사건 으로 명명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 화자, 朝淸國境問題硏究 (서울: 집문당, 2008년), 190-193. Christopher M. Isset, State, Peasant, and Merchant in Qing Manchuria, 1644 1862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7), 24-29. 청대 만주족 황실과 동북변경의 관계에 주목한 연구로는 Robert H.G. Lee, The Manchurian Frontier in Ch'ing Histor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0); Mark C. Elliott, The Limits of Tartary: Manchuria in Imperial and National Geographies,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59:3 (August 2000); 丘凡眞, 淸代 滿洲 地域 行 政體制의 變化 - 駐防體制 에서 州縣體制 로-, 동북아논총 14호 (2006년). 청대 동북지역에 대한 최근 중국학계의 연구는 다음과 같다. 佟冬 主編, 中國東北史 제4권,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1999年; 李治亨 主編, 東北通史, 鄭州: 中州古籍出版社, 2003年; 張士 尊, 淸代東北移民與社會變遷: 1644-1911, 長春: 吉林人民出版社, 2003年; 張杰ㆍ張丹卉, 淸代 東北邊疆的滿族 1644-1840, 瀋陽: 遼寧民族出版社, 2005年; 丁海斌ㆍ時義, 淸代陪都盛京硏究,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7年,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197 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었다.8) 유조변에 일정한 수의 변문을 설치하 여 안 과 밖 을 구분하고 사람들의 왕래를 통제함으로써 유조변 밖의 토지와 자연자원 을 황실이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만주족의 발상지지를 보존할 수 있 었다. 본고는 또한 황제의 주비와 지방관의 주접을 분석하여 성경일대 변경통치에서 이 와 같은 내외 격리의 원칙이 지역의 경제적 개발보다 우선시되었음을 지적할 것이다. 지 방관이 변문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대신 상인들의 왕래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자고 제안했을 때 옹정제가 이를 거부했던 이유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청조가 유조변 일대의 경제적 발전보다 내외 격리를 통한 변경의 안정을 더 중요시했음을 설명 할 것이다. 둘째, 본고는 郭連進 사건 을 분석함으로써 청조의 민족격리정책에서 기인이 차지하 는 역할을 강조할 것이다. 유조변이 동북에서 민족격리정책을 위한 물리적 장치였다면 기인은 이를 체화하고 실현할 주체였다. 청이 중원을 정복한 후 팔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한인과 구별되어 기인으로 여겨졌다. 이들은 국가의 근간으로서 청 황실을 보위하고 만 주족의 강건한 법도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에 대한 대가로 청조는 기인의 복지를 위 해 막대한 재정을 투자했고 이들이 법적ㆍ사회적 특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 지 않았다.9) 따라서 기인들이 황실의 기대를 저버렸을 때 그 실망감은 더욱 컸다. 유조 변을 지켜야 할 기인들이 지역의 민인들과 공모하여 범월에 동조하고 있다는 보고에 옹 정제는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만약 이들이 내외의 분리를 어지럽히고 심지어 황실 재산인 인삼을 불법적으로 채취한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기인의 범월은 청조 가 동북변경에서 시행하려 하는 민족분리정책의 근간을 위협하는 행위이자 황실을 보위 해야 할 집단이 오히려 황실의 이익을 침해한 범죄였기 때문이었다. 셋째, 본고는 청조의 성경일대 변경관리가 조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이를 옹정제의 영토인식과 관련하여 분석할 것이다. 사건의 해결과 범월 방지를 위해 청 조는 조선에게 협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등한 외교적 관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 었다. 청의 요구는 조선에게 藩邦으로서 上國을 섬기는 의무를 다하라는 전통적인 조공 8) 9) 柳條邊의 설치 목적과 관련하여 張杰과 張丹卉은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柳條邊을 설치한 이 유가 東北지역에 封禁을 실시하기 위한 것으로 잘못 이해해왔다고 주장한다. 柳條邊의 건설은 실제로 遼東의 招民開墾과 같은 시기에 진행되었고, 동북으로의 인구유입을 막기 위한 것은 아 니었다. 邊門을 지키는 官兵은 왕래하는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등록하게 했을 뿐 그 외에 다른 禁令은 없었던 것을 보면 順治-康熙年間에 설치된 柳條邊의 건설은 동북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封禁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張杰ㆍ張丹卉, 淸代東北邊疆的滿族 1644-1840 (瀋 陽: 遼寧民族出版社, 2005), 296-297쪽. 이화자 역시 유조변의 설치와 봉금정책과의 관계에 대한 중국학계의 논쟁을 소개한다. 이화자, 朝淸國境問題硏究 (서울: 집문당, 2008), 66-68. 마크 엘리엇 저, 이훈ㆍ김선민 역, 만주족의 청제국, 서울: 푸른역사, 2009년.
198 책봉관계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수백명의 내지인이 여러 해 동안 국경을 넘어 조선 땅 에서 채삼해오다가 마침내 조선의 관병을 살상했다는 것은 실제로 인접국과의 관계를 크 게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옹정제에게 조선은 外國이면서 동시에 藩邦이었 다. 郭連進의 범월은 내지의 백성이 외국의 병사를 살해한 사건이었지만, 또한 번방의 국 왕이 범인을 단속하여 상국을 섬겨야 하는 본연의 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일어난 사건이기도 했다. 본고는 옹정제의 諭旨를 분석하여 그가 조선을 제국의 외부이면서 동 시에 일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지적할 것이다. 조선이 외국이자 동시에 번방, 즉 청 제 국의 일부라는 청조의 인식은 근대적 외교관계에서 보면 모순적이지만 전통적인 조공책 봉관계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지적하고, 이를 통해 변경과 외국에 대해 청조가 중층적 경계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드러낼 것이다.10) Ⅱ. 유조변과 카룬 성경 유조변은 盛京邊墻 혹은 老邊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실제로 명대의 요동변장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으로,11) 순치 초년에 수축하기 시작하여 순치18년(1661년)에 완성되었 다. 성경변장은 威遠堡를 중심으로 다시 東段과 西段으로 갈라졌다. 동단은 봉황성 이남 의 바다에서 시작하여 북상하여 開原 동북의 威遠堡에 이르렀고, 서단은 威遠堡에서 서 남쪽으로 내려가 山海關에 닿았다. 총길이가 1900여리에 달하는 성경변장에는 모두 17개 의 邊門이 세워졌다. 한편 강희9년(1670년)부터 강희20년(1681년)에 걸쳐 길림지역에도 유조변이 건설되었다. 길림지역의 유조변은 新邊이라 불렸는데, 서쪽 끝이 위원보에 접했 다. 山海關, 威遠堡, 鳳凰城, 法特哈 네 지점으로 이어지는 청대 유조변은 전체적으로 사 10) 11) 중화제국의 공간과 관련하여 이성규는 內境 - 外境, 中華 - 外夷 를 구분하여 정복왕조의 정통 성과 제국의 공간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러한 구분은 外境 에서 內境 으로 진입하여 外夷 에서 中華 로 변모한 청조의 변경인식과 대외관계를 이해하는데 좋은 참고가 된다. 또한 제국 의 공간과 영토에 대한 인식이 언제나 단선적이지는 않았음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본고가 주장 하는 청조의 重層的 영토인식 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李成珪, 中華帝國의 膨脹 과 縮小: 그 理念과 實題, 歷史學報 186집 (2005년). 명대의 요동변장은 몽고 우랑하이와 여진 각부의 침입에 대비하여 건축된 것으로, 요하유역의 변장, 요서변장, 요동 동부변장의 세부분으로 나뉘어 축조되었다. 요하유역의 변장은 영락년간 에 廣寧에서 開原까지 건설되었는데, 두 지점을 직선으로 이은 것이 아니라 가운데가 움푹 파 여 凹자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요서변장은 정통년간에 축조되어 산해관에서 廣寧까지 연결되 었다. 요동 동부변장은 성화년간에 撫順에서 압록강 인근에까지 건설되었다. 張杰ㆍ張丹卉, 淸 代東北邊疆的滿族 1644-1840 (瀋陽: 遼寧民族出版社, 2005), 297쪽. 명대 요동변墻의 축조배경 에 대해서는 남의현, 明代遼東支配政策硏究 245-262 (춘천: 강원대학교 출판부, 2008).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199 람 人 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성경 유조변과 길림 유조변은 모두 흙으로 제방을 쌓 고 그 위에 버드나무 울타리를 세운 것으로, 흙담의 높이는 높은 곳은 3-4척, 낮은 곳은 1-2척으로 지역마다 달랐고 통일된 규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흙담 위에 5척 간격으로 버드나무 가지를 세 개씩 꽂고 가지와 가지 사이는 다시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해 가로로 엮어서 서로 연결했다.12) 청조가 입관 직후 성경에 유조변을 설치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군사적 필요성 때문이었 다. 만력47년(1619년) 누르하치가 동으로는 바다에 닿고 서로는 명과의 요동 경계에 이 르며, 북으로는 몽고 코르친(Korchin) 부족이 사는 嫩江에 미치고 남으로는 조선과의 국 경과 만나는 곳 에 이르렀다고 했을 때,13) 그가 말한 遼東境界 는 撫順에서 압록강까지 이어진 요동의 동부변장을 가리킨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르후(薩爾湖) 전투까지도 누르 하치의 세력범위는 요동 동부변장 밖이었고, 따라서 요동 변장은 여진족의 침입으로부터 명의 한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天命6년에 이르러 누르하치가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고 遼河 동쪽지역을 점령하면서 여진족 세력이 점차 요동변장 안으로 들어오게 되 었다. 그 결과 요동에서 여진족과 한인의 세력관계 역시 역전되었다. 과거 요동변장이 여 진족의 침입으로부터 명을 보호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만주족이 요동변장을 활용하여 외부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했던 것이다. 청은 대체로 명대 요동변장을 계승 하기는 하였지만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명대 요동변장에 포함되지 않았던 遼河 套 지역이 청대 유조변 안으로 들어오면서 과거 凹 모양이었던 변장이 직선의 유조변으 로 바뀌었다. 또한 撫順에서 威遠堡까지의 선이 동쪽으로 확장되어 명대에는 요동변장 밖에 있던 撫順, 淸原, 新賓 일대가 청대에는 유조변 안으로 포함되었다. 그 결과 청조는 산해관 밖의 三京(興京, 東京, 盛京) 및 三陵(永陵, 福陵, 昭陵)을 모두 유조변 안으로 포 함시켜 發祥之地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14) 청대 유조변의 또 다른 기능은 이 지역의 민족들을 서로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동북일 대에는 농경ㆍ유목ㆍ수렵 등 서로 다른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민족들이 혼재하고 있었다. 농경에 종사하는 한인들은 대체로 요동 남부의 요하 유역에, 수렵생활을 주로 하는 여진 족은 요동 북부의 장백산 일대나 흑룡강 인근에, 유목생활을 하는 몽고족은 요하유역에 서 바이칼 호에 이르는 서부에 모여 살았다. 홍타이지 이래 청과 몽고족의 연맹관계가 12) 13) 14) 佟冬 主編, 中國東北史 제4권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1999년), 1389-1390쪽; 李治亨 主編, 東 北通史 (鄭州: 中州古籍出版社, 2003년), 489-490쪽; 張杰ㆍ張丹卉, 淸代東北邊疆的滿族 1644-1840 (瀋陽: 遼寧民族出版社, 2005), 295-296쪽; 이화자, 朝淸國境問題硏究 (서울: 집문 당, 2008), 62-64. 太祖高皇帝實錄, 권6, 31b-32a (天命 四年 八月 己巳). 張杰ㆍ張丹卉, 淸代東北邊疆的滿族 1644-1840 (瀋陽: 遼寧民族出版社, 2005), 297-301.
200 강화되면서 명대 요동변장의 서쪽선은 군사적 의미가 크게 약화되었다. 청초 성경변장 안에는 주로 한인과 만주족이 거주하고 변장 밖에는 몽고족이 살았지만, 서로 경계가 분 명하지는 않았다. 순치년간에도 유조변 밖에서 토지를 경작하는 만주족이 상당수 있었는 데, 만주족이 변장 밖에서 토지를 경작할 경우 邊口를 출입하는 것이 번잡했고 변장 밖 의 몽고족과 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이에 순치18년(1661년) 청조는 유조변을 서 쪽으로 확장하여 만주족 소유의 토지를 모두 변장 안으로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盛京 邊外에 거주하는 莊村은 모두 邊內로 이주하라. 錦州 안쪽과 山海關 바깥쪽으로 邊界(柳 條邊)을 확장하라. 15) 유조변의 설치와 확장을 통해 성경변장의 서단은 유목생활을 하는 몽고족과 농경생활을 하는 만주족 및 한인을 구분하는 일종의 경계선이 되었다. 유조변 을 설치하여 청조는 서로 다른 민족의 접촉을 최소화하여 갈등의 소지를 제거하고자 했 던 것이다. 이후 강희10년(1671년), 14년(1675년), 18년(1679년), 25년(1686년), 36년(1697 년)에 걸쳐 유조변은 각각 서쪽과 북쪽으로 계속 확장되었다.16) 유조변은 또한 盛京ㆍ吉林ㆍ동몽골의 거주지를 행정적으로 구분해주기도 했다. 위원보 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성경변장의 西段은 성경장군과 몽고 각부를 나누는 경계였고, 위 원보에서 봉황성에 이르는 동단은 성경장군과 영고탑장군을 나누는 경계였다. 위원보에 서 法特哈에 이르는 新邊은 영고탑장군과 몽고 각부를 분리하는 경계선이었다. 山海關 밖 동쪽으로 일곱 개의 邊門을 설치하였으니, 邊門 밖은 몽골 부족에 속한다. 일곱 邊門 에서 동남쪽으로 鳳凰城에 이르기까지 여섯 邊門(을 설치하였으니), 이는 封天과 寧古塔 의 경계이다. 17) 유조변 서북부의 초원지대는 몽고족의 목장이었고, 유조변 동북부의 삼 림지역은 수렵에 종사하는 만주족, 다구르, 오로촌, 허저 등 여러 부족의 거주지였다. 유 조변 동남부에는 황실의 田莊, 팔기관병의 旗地, 한인의 농토가 산재해 있었다. 유조변은 이처럼 성경장군ㆍ길림장군ㆍ동몽골 각 연맹의 행정구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던 것이 다. 15) 16) 17) 諭兵部, 盛京邊外居住莊村, 俱著移居邊內. 其錦州以內, 山海關以外, 應展邊界. 著議奏. 淸聖祖 實錄 (北京: 中華書局, 1986년), 卷5, 22b-23a (順治18年 12月 壬申). 佟冬 主編, 中國東北史 제4권 (長春: 吉林文史出版社, 1999년), 1394-1395; 張杰ㆍ張丹卉, 淸 代東北邊疆的滿族 1644-1840 (瀋陽: 遼寧民族出版社, 2005), 301. 이 구절은 원래 工部가 올린 제본의 일부이다. 건륭제는 변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일대의 정 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工部의 지적에 동의했다. 工部等部議覆, 巡察御史和其衷, 條奏盛京事 宜. 一, 重邊疆以資防範. 山海關外, 迤東一帶, 共設七邊門, 邊門外, 係各蒙古部落. 七邊之東南, 直 接鳳凰城, 為六邊, 乃奉天寧古塔分界, 應加意整飭. 令總理大臣, 輪流查閱, 該管官員, 更番巡視. 又 熊岳所屬旅順海口, 設水師營官兵, 為奉天南面保障, 日久廢弛. 並不勤加操練, 實力巡哨, 軍裝器械, 半皆朽壞, 應行稽查, 等語. 淸高宗實錄 (北京: 中華書局, 1986년), 卷243, 10b-11a (乾隆10年 6 月 甲子).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201 유조변이 內外 를 구별하고 만주족의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 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유조변은 邊外의 풍부한 자연자원을 청 황실이 독점할 수 있게 보호해주는 장치였다. 성경변장 동단 밖에는 人蔘, 貂皮, 鹿茸, 東珠 등 특산물이 생산되 었고, 황실의 陵寢ㆍ牧場ㆍ圍場ㆍ蔘場 등도 대부분 유조변장 밖에 있었다. 특산물을 독점 하기 위해 황실은 邊外의 산삼 채취장이나 東珠가 생산되는 하천 등지 주변에 封堆를 쌓 고 이 지역을 금구로 지정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했다. 柳條邊 밖에 圍場을 설치하 여 황제의 巡行과 射獵에 대비하고, 그곳의 삼림과 생물은 외부에 개방하지 않는다. 18) 유조변 밖의 삼림과 강가에서 생산되는 東珠, 人蔘, 貂皮 등은 모두 황실에 바치는 특산 물이었다. 따라서 鳳凰城에서 山海關까지, 開原에서 薩林 窩哩까지, 沿邊에 柳條邊을 설 치하여 금지된 삼림에 사사로이 출입하는 것은 금지 했다.19) 또한 금구에서는 한인이 거 주하면서 농지를 경작하거나 기타 목축이나 수렵을 위해 접근하는 것을 엄금했다.20) 청 황실의 동북변경에 대한 인식은 건륭제가 남긴 시 柳條邊 에서 잘 드러난다. 西로 장성에 접하고 東으로 바다에 닿으니, 柳條로 변방을 굳게 하고 內外를 구분하며 요새를 막지 않고 변경을 지키니, 또한 성 쌓기로 백성을 피로하게 하지 않는다. 취해도 끝없이 山木이 많으니, 나무심어 사람의 통행을 제한하며 盛京과 吉林의 경계를 나누고, 몽고인이 담당하여 엄하게 誰何한다. 文王의 苑囿가 70 리인데, 圍場은 어찌 그 몇 배뿐이겠는가. 방어와 통제가 옛 제도 같아, 줄을 엮어 禁令을 보이는 것으로 족하다. 내 와서 말 채찍질해 변방 동쪽을 돌아보니, 높이가 넘어갈 정도로 낮아 통할 수 있고, 사슴이 왕래하여 때로 잡을 수 있으니, ( 柳條를) 설치했지만 설치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뜻은 통제하는 데 있으나 세밀하지 않아 18) 19) 20) 且於柳條邊外之地, 設置圍場, 以備巡幸射獵, 其地林奔叢生, 不準開闢, 而養息牧場. 奉天通志 ( 東北史志 제2부, 6권, 北京: 全國圖書館文獻縮微復制中心, 2004년), 卷107, 1a. 鳳凰城至山海關, 開原邊至薩林窩哩, 沿邊設有柳條邊墻, 不得私入禁山. 大淸會典事例, 卷233, 20. 李治亨 主編, 東北通史 (鄭州: 中州古籍出版社, 2003년), 490-491쪽.
202 前人의 법을 後人이 지키는 것이니, 金城湯池 만년의 청나라가 어찌 구구한 이 버드나무에 달려 있겠는가.21) 邊外로의 출입을 통제하고 감독하는 것은 邊門에서 담당했다. 유조변의 요충지에 설치 된 변문에는 팔기관병이 거주하면서 변장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유조변 동단에는 가장 북쪽의 위원보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英額, 旺淸(汪淸), 鹻廠(碱敞), 靉陽(靉哈), 鳳凰城의 여섯 개 변문이 설치되었다.22) 성경변장 서단에는 위원보에서 시작하여 동남으로 法庫, 彰武臺, 白土廠, 淸河, 九宮臺, 松嶺子, 新臺, 梨樹溝, 白石嘴, 鳴水堂의 열 개 변문이 설 치되었다. 盛京邊墻 동단의 변문은 盛京兵部侍郞이 관할하고 盛京將軍이 이를 겸관한 반 면, 서단의 변문은 錦州 副都統, 義州 城戍衛, 廣寧 防守衛, 開原 城戍衛가 나누어 관할했 다. 각 변문에는 章京 1인과 防禦 1인이 함께 배치되었는데, 봉황성 변문에서는 章京 1 인이 홀로 병사를 거느렸다.23) 변문에 파견된 章京은 盛京五部의 文職 司員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배치하고 2년마다 교대하게 한 반면, 防禦는 성경장군에 소속된 방어나 驍 騎校 가운데 선발하여 파견하고 3년마다 교체했다. 각 변문에는 만주팔기 6명과 한군팔 기 25명이 주둔했으나 건륭6년(1741년) 50명으로 늘어났다.24) 동단의 변문 가운데 그 모습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은 것은 아마도 조선사행이 정기적 으로 출입한 봉황성 변문일 것이다. 봉황성 변문은 봉황성 산자락에 세워졌는데, 木柵을 심어 담을 만들고 중간에 문을 만들어 열쇠를 채워놓고 변문의 章京이 관리했다. 강희51 년(1712년) 金昌業은 변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柵門은 草屋으로 지어져 풀을 덮 었다. (중략) 문 안에 있는 城將의 처소, 酒食店, 民居를 합쳐서 모두 10여 호였는데 모두 풀로 덮은 것이었다. 25) 이를 보면 변문 자체는 매우 단순한 구조물이었던 것으로 짐작 21) 22) 23) 24) 西接長城東屬海, 柳條結邊畫內外, 不關阨塞守藩籬, 更匪舂築勞民憊. 取之不盡山木多, 植援因以 限人過, 盛京吉林各分界, 蒙古執役嚴誰何. 譬之文囿七十裏, 圍場豈止逾倍蓰, 周防節制存古風, 結 繩示禁斯足矣. 我來策馬循邊東, 高可逾越疏可通, 麋鹿來往外時獲, 其設還與不設同. 意存制具細何 有, 前人之法後人守, 金湯鞏固萬年清, 詎系區區此樹柳. 欽定盛京通志 권13, 3a-b ( 文淵閣四庫 全書, 臺北: 臺灣商務印書館, 1983). 건륭제는 1754년(건륭19) 7월 초5일 承德에서 출발하여 내 몽고를 거쳐 바로 吉林으로 갔다. 가는 길에 수렵을 거행하고 이 시를 남겼다. 欽定盛京通志 에는 興京邊門과 旺淸邊門을 분리하고 있으나 두 변문의 위치는 모두 在興京城 東南三十里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 이 둘은 같은 것으로 보인다. 欽定盛京通志 권51, 16a, 17a. 그러나 이것이 봉황성 변문에 대한 관리가 소홀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봉황성에는 八旗駐防 이 설치되어 城守尉 1인, 巴勒瑚 佐領 1인, 驍騎校 1인, 滿洲防禦 8인, 滿洲驍騎校 7인, 蒙古驍 騎校 1인, 筆帖式 1인, 委官 4인이 주둔하고 있었다. 欽定盛京通志 권51, 10a-b. 欽定盛京通志 권51, 16a-22a; 구범진, 19세기 盛京 東邊外 山場의 管理와 朝ㆍ淸 公同會哨, 史林 32호 (2009년), 265-266쪽.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203 된다. 변문과 변문 사이에는 유조변을 따라 墩臺를 설치했는데, 각 변문에 세워진 돈대의 수는 둘인 경우도 있고 다섯인 경우도 있었다. 대략 1리마다 臺丁 한명이 파견되었으니, 성경변장 서단과 동단에 모두 2,100여명의 臺丁이 배정된 것으로 보인다. 대정에게는 유 조변의 흙담과 해자를 관리하는 임무가 주어졌다.26) 카룬은 동북의 邊內와 邊外를 감독하기 위해 청조가 변문과 함께 설치했던 제도였다. 한자로 卡倫 혹은 卡路로 표기하는 카룬은 만주어로 哨所를 뜻했다. 동북지방의 카룬 가 운데 흑룡강 상류인 아르군 강 유역에 새워진 변경 카룬은 주로 國界를 방어하고 변경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던 반면, 내지 카룬은 주로 유조변 바깥의 요충지에 세워져 불법적인 인삼채취나 수렵활동을 단속하고 금지구역에 사사로이 거주하는 流民들을 체포 하는 임무를 맡았다.27) 내지 카룬은 유조변보다 나중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유조변만으로 는 유민과 인삼채취자[刨夫]의 불법적인 출입을 통제할 수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腰牌와 印票를 지닌 자만 성명을 확인하고 입산을 허락했으며 표를 지닌 포부라도 지정된 산림에 가서 인삼을 채취하지 않을 경우 체포하고 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사로이 인삼을 매매하 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상인이나 관병이 곡식ㆍ솥ㆍ布疋을 가져다가 포부에게 몰래 팔아 서 이들의 불법적인 채삼을 돕는 것도 단속의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사로이 인삼을 재배하여 판매하는 일을 단속하는 것도 카룬의 임무였다. 다시 말해 내지 카룬의 주요임 무는 변외에 설치된 황실위장의 자연자원을 민인의 접근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28) Ⅲ. 내외의 격리 옹정제는 즉위 직후부터 유조변과 카룬이 성경일대 변경의 관리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 25) 26) 27) 28) 金昌業, 老稼齋燕行日記 (1712), 임기중 편, 燕行錄全集 (서울: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32:372-373. 光緖淸會典事例 권232. 佟冬 主編, 中國東北史 제4권, 1391-1392쪽. 佟冬 主編, 中國東北史 제4권, 1400-1401쪽. 건륭40년대까지 유조변 동단의 카룬은 英額, 旺淸(汪淸), 鹻廠(碱敞), 靉陽(靉哈), 鳳凰城 邊門에 서 관할하였고, 변내에 18개, 변외에 19개로 총 37개가 설치되었다. 각 카룬에는 관원 1인과 병 사 10인이 배치되었지만 이들은 카룬에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변내 카룬에는 10월 1일부 터 이듬해 4월 1일까지, 변외 카룬에는 4월 1일부터 10월 1일까지 주둔했다. 英額門 관할 카룬 에는 開原 城戍衛, 汪淸門 관할 카룬에는 興京 城戍衛, 碱敞門 관할 카룬에는 遼陽 城戍衛, 靉 陽門과 鳳凰門 관할 카룬에는 봉황성 성수위가 각각 관병을 파견했다. 靉陽門 관할 카룬에서는 임무 교대주기가 한 달이었던 반면, 다른 카룬에서는 두달마다 교대되었다. 欽定盛京通志 권 51, 16a-19a; 각 변문과 카룬의 관할관계에 대해서는 구범진, 19세기 盛京 東邊外 山場의 管理 와 朝ㆍ淸 公同會哨, 267쪽의 표 참조.
204 과 동시에 유조변 일대에서 범월을 근절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옹정제가 동북변방 관리를 위해 특별히 파견한 都察院 左副都御使 永福는 현지에서 자신 이 직접 목격한 사건과 지방관리들의 사건처리에 대해 황제에게 수시로 보고했다.29) 그 가 올린 상주에는 성경일대 변경지역의 중요성과 효과적인 관리방향이 간단하지만 분명 하게 제시되어 있다. 威遠堡門은 吉林, 寧古塔, 黑龍江 등지의 大路로 이어져 있습니다. 鳳凰城門은 조선국과 인접해 있습니다. 英額, 旺淸( 汪淸), 鹻廠(碱敞), 靉陽(靉哈) 등 邊門의 밖은 모두 圍場이거 나 官蔘採取地區입니다. 따라서 邊門臺站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邊門에 거주하는 臺 站의 驛丁ㆍ旗人ㆍ民人ㆍ打牲의 수가 매우 많으니, 허점을 찾아 邊門을 벗어나 몰래 採蔘 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관리감독에 능한 자를 선발해야 邊門臺站에 도 움이 될 것입니다. 30) 그러나 뒤에서 보이듯이, 그가 말한 盛京八旗兵丁 가운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고 관리감독에 능한 賢良한 자를 선발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경 일대 불법채삼과 범월 실태는 지방관에 의해서도 보고되었다. 옹정원년 8월 초4 일 황제가 접한 보고는 다음과 같다. 사사로이 인삼을 채취하는 자들은 무리를 지어 깊 은 산속에 들어가는데, 그 중에는 길을 잃어 굶어죽거나, 야수의 공격으로 다치거나, 인 삼을 두고 다투다가 서로 傷害를 입히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이는 人命과 관련된 일 이므로 일찍이 入山을 금하는 명령[封山]을 내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官兵이 감 시한다고 하나 매년 사사로이 인삼을 채취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는 감시가 철 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삼을 私採하는 자들은 모두 興京[汪淸], 碱廠, 靉哈, 英額, 威 遠堡의 다섯 개 문에서 潛入합니다. 매 문에는 겨우 員 한사람과 兵丁 30인이 배치되어 파수하고 있습니다. 병정 가운데 장군아문과 城守尉 아문에 문서를 전달하고 방범을 하 는 자들을 제외하면 전부 20명이 190여리를 지키고 있으니 일일이 감시하기가 어렵습니 다. 따라서 私採者들이 매년 전과같이 邊門을 몰래 넘고 있으며, 流犯 역시 邊門을 통해 29) 30) 永福이 위원보 등 六邊의 章京으로 補放된 것은 옹정원년 10월 11일이었다. 옹정제는 즉위 직 후부터 동북변경의 관리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盛京兵部侍郞永福奏請補放邊門章京摺 (雍 正6年9月初2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下, 1660. 査得, 威遠堡門連接通往吉林寧古塔黑龍江等處之大道; 鳳凰城門與朝鮮國接壤; 英額ㆍ汪淸ㆍ碱敞 ㆍ靉哈等邊門外, 皆爲圍場及官蔘挖採之地, 邊門臺站所率甚重. 沿邊門所居住之臺站驛丁旗民打牲 之人, 甚爲繁雜, 尋隙出邊, 偸採人蔘之事無法禁絶. 必得善于管飭之人, 于邊臺方有濟益. (중략) 于 盛京八旗兵丁內, 挑選弓馬嫻熟, 善于管飭之賢良, 補爲臺站領催, 任職三年. 盛京兵部侍郞永福奏 請補任臺站領催摺 (雍正6年4月26日), 中國第一歷史檔案館 譯編,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下 (合肥: 黃山書社, 1998), 1630.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205 잠입합니다. 31) 불법채삼자를 근절하기 위해 변문 사이에 병사를 추가 배치하여 방어를 강화하자는 의 견이 제시되자, 옹정제는 奉天將軍 唐保住(Tangbooju)에게 이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탕 보오주 역시 불법적으로 변외에 잠입하는 자들을 색출하는 일이 難望함을 인정했다. 邊 外의 輝發과 三屯 등지는 원래 카룬을 설치하지 않고 매년 官兵을 파견하여 관리했습니 다. (중략) 그러나 비록 꼼꼼히 초소하고 禁令을 엄히 한다고 해도 인삼의 막대한 이익을 따라 天津이나 山東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거나, 혹은 山海關을 나와 盛京과 烏拉 지방에 와서 衣食을 도모하려는 자들이 邊界를 벗어나니, 하나하나 추적할 방법이 없습 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일을 감행하는 자도 있습니다. 32) 아울러 탕보오주는 유조변의 관리상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山海關 동북 70리에 위치 한 嘴子山에서 鳳凰城의 柳條邊까지는 모두 1800여리입니다. 邊關에 大門이 12곳, 小門 이 3곳이며, 大門마다 각각 章京 1인, 筆帖式 1인, 領催 1인, 兵丁 30명이 배치되어 있고, 小門에는 각각 門叟 2명, 筆帖式 1명, 兵丁 10명이 파수하고 있습니다. 또한 臺丁은 1리 마다 한명씩 파견하니 모두 1500여명이 있습니다. 邊門의 간격은 10-20리인데, 경작할만 한 토지가 있으면 20-30인 정도를 배치합니다. 두 邊門 사이에는 2-5개 정도의 臺를 설 치합니다. 각 邊門은 모두 邊墻을 세우고 도랑을 파서 지키게 하고, 邊門의 官兵으로 하 여금 불시에 각자의 관할구역을 순사하여 사사로이 출입하는 자들을 엄히 단속하게 합니 다. 해당 城守尉 역시 官兵을 거느리고 순찰합니다. (중략) 山海關에서 法庫邊門까지는 1100여리로 그 사이에 대소의 邊門이 10곳 있습니다. 이 지역의 邊門에는 오직 몽고인들 만이 무역하러 왕래할 수 있습니다. 威遠堡 남쪽에서 英額, 汪淸, 碱廠, 靉哈, 鳳凰城의 柳條邊은 700리입니다. 邊門마다 官兵을 설치하여 파수하고 臺丁은 1리마다 한명을 파견 하니, 모두 600명이 됩니다. 두 邊門 사이에는 2-5개 정도의 臺를 설치하여 그 곳에 주둔 하여 순찰하며, 邊門의 官兵은 불시에 각자 소속지를 순찰하고, 해당 城守尉 역시 官兵을 31) 32) 査私採人蔘者, 成群結伙前往深山密林之中, 其中因迷路餓斃, 或遭野獸傷害, 或爲爭人蔘相互殘害 者甚衆. 此因關係人命, 特曾下令封山. 雖有官兵踩緝, 每年私採人蔘之人仍然不絶. 此盖爲關隘不嚴 所致也. 所有私採人蔘之人皆由興京ㆍ碱廠ㆍ靉哈ㆍ英額ㆍ威遠堡五門潛入. 其每邊門只設員一人ㆍ 兵丁三十人把守. 兵丁扣除給將軍衙門ㆍ城守尉衙門遞送文書及防哨者外, 所餘二十名兵丁防守一白 九十餘里, 難以一一巡査到. 故而私採人蔘者每年仍舊偸越邊門, 流犯亦由邊界門潛入而回. 盛京將 軍唐保住等奏議邊門添兵嚴防私採人蔘摺 (雍正元年9月初10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上, 325-326. 臣等會議得, 査邊外輝發ㆍ三屯等地, 原未設卡倫, 每年皆派官兵尋踪. 後因停採官蔘, 爲嚴緝私採 人蔘之人, 遵旨自輝發城至三屯河以東二三十里地方, 由盛京官兵安哨. 自輝發城河西至松花江, 由烏 拉吉林官兵安哨. 雖然密哨嚴禁, 但因人蔘利大, 自天眞ㆍ山東坐船渡海而來, 或出山海關到盛京烏拉 等地來, 謀衣食之人偸偸出邊, 無法一一緝拿. 尙有鋌而走險舍命而行者, 盛京將軍唐保住等奏議邊 門添兵嚴防私採人蔘摺 (雍正元年9月初10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上, 326.
206 거느리고 순찰합니다. 33) 이처럼 현재 변구를 지키는 관병의 수가 적지 않고, 범월자를 60인 이상 체포하는 관 병에게는 상을 지급하기로 하였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탕보오주의 결론이었다. 옹정제는 병사를 추가 배치할 필요가 없다는 탕보오주의 의견을 수용하는 대신 변구에 대한 감독을 더욱 철저히 할 것을 지시했다. 邊口에서의 犯越[踩迹]은 山海關과 盛京처 럼 엄격하게 방비되지 않고 있다. 어쨌든 너희들이 마음을 다하여 수색하지 않으면 비록 神仙이 내려온다 해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 일은 전적으로 너희 지방관원이 마음을 다하는 데 있을 뿐이다. 34) 유조변 관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불법적인 왕래만이 아니었다. 합법적으로 출입하는 자들, 특히 상인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통제할 것인가 역시 중요한 문제였다. 옹정2년 정월 18일 永福은 유조변을 출입하는 상인들이 매우 많다고 보고했다. 威遠堡의 邊門은 곧 吉林烏拉, 打牲烏拉, 寧古塔, 白都訥, 齊齊哈爾, 黑龍江으로 통하는 갈림길입니다. 비 단, 布疋, 차, 마른 과일, 白米, 밀가루, 煙草 등 일체의 화물은 모두 남쪽의 성과 바다에 서 배타고 온 상인이나 山海關 내의 民人, 本地의 백성들이 盛京의 점포로 운반해 오는 것입니다. 비단과 布疋은 4-5필의 말이 끄는 큰 수레에 실어오고, 쌀과 밀가루는 말 한 필이 끄는 작은 수레에 실어 威遠堡 밖으로 나가 吉林烏拉나 寧古塔에 가서 무역합니다. 수레를 재촉하여 法庫邊門으로 나가 몽고를 거쳐 齊齊哈爾와 黑龍江에서 무역하는 상인 들도 있습니다. 대략 그 규모를 계산해 보면, 매년 이 두 邊門으로 나가 무역하는 貨車는 2-3천량에 달합니다. 35) 33) 34) 35) 又査自山海關東北七十里處之嘴子山至鳳凰城之柳條邊, 共計一千八百餘里. 邊關大門十二座ㆍ小門 三座, 大門每座設章京一名ㆍ筆帖式一名ㆍ領催一名ㆍ兵丁三十名. 小門每座設門叟二名ㆍ筆帖式一 名ㆍ兵丁十名把守外, 臺丁按一里多地攤派一人, 共計一千五百餘名, 沿邊間隔十里二十里于可開墾 之田, 分別安置二三十人不等, 二邊門之間設臺二三四五個不等, 各邊門皆令栓欄挖泃防守. 邊門官兵 不時巡査各自轄區, 嚴緝私自出入之人. 該城守尉亦率領官兵巡査. 此等邊門兵丁唯行文城守尉, 且爲 輾轉遞送, 竝無其他遠差. 自山海關至法庫邊門爲一千一百餘里, 其間大小邊門十座. 此等邊門由蒙古 人往來貿易不議外. 威遠堡以南至英額ㆍ汪淸ㆍ碱廠ㆍ靉哈ㆍ鳳凰城至柳條邊, 有七百餘里, 每門設 官兵把守, 臺丁以一里多地, 攤派一人而計, 共有六百餘名, 二邊門間設臺二三四五個不等, 駐地巡査, 邊門官兵亦不時嚴査各自屬地, 該城守尉亦率官兵巡察. 目下守御官兵臺丁人已不少. 盛京將軍唐 保住等奏議邊門添兵嚴防私採人蔘摺 (雍正元年9月初10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上, 326. 與其在邊口踩迹, 不如在山海關盛京嚴防. 不拘如何, 你等若不竭誠苦心積慮緝拿, 雖神仙來亦不行. 此全在于你等地方臣員通同實心效力耳. 盛京將軍唐保住等奏議邊門添兵嚴防私採人蔘摺 (雍正元 年9月初10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上, 326. 竊臣看得, 夫威遠堡邊門者, 乃至吉林烏拉ㆍ打牲烏拉ㆍ寧古塔ㆍ白都訥ㆍ齊齊哈爾ㆍ黑龍江之通衢. 凡爲綢緞布疋茶葉干果白米面粉煙草等一應貨物, 皆有南省海船商人, 山海關內地民, 本地之人運至 盛京貨店卸貨, 其綢緞布疋等物, 裝載于四五匹馬拉大車上, 其米面等物, 卽裝載于單馬拉小車上, 出 威遠堡邊門至吉林烏拉, 寧古塔等地貿易. 亦有商人驅赶貨車出法庫邊門, 途經蒙古至齊齊哈爾, 黑龍 江貿易. 約摸估算, 每年自此二門出去貿易之貨車不下二三千兩. 都察院左副都御使永福奏請說稅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207 그러나 상인들의 출입은 합법적인 경우에도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많은 불편을 초래하고 있었다. 定例를 살펴보면 旗人의 경우 만약 관직에 오르거나, 戶를 옮 기거나, 결혼하는 일이 있으면, 奉天將軍衙門에 보고하고, 協領은 이를 盛京兵部에 咨文 하여 票引을 지급하여 邊門을 출입하게 합니다. 商人의 경우 承德縣에 行文합니다. 承德 縣에서 保擧하고 府尹이 검토한 후 다시 盛京兵部에 咨文을 전하면 票引을 발급합니다. 이에 따라서 각성의 상인들은 이곳에 이르러 保擧할 사람을 구하고 두세번씩 行文하느라 오랜 시간을 소비하게 되고, (상인의 통행과 관련한) 衙役들의 비리를 근절하기가 어려워 집니다. 상인들이 票引을 지니고 邊門을 통과할 때 不肖한 領催나 被甲들이 금지품목을 조사한다는 핑계로 물건을 빼앗습니다. 또한 吉林烏拉의 카룬 병정들은 싸움을 일으켜 상인들이 큰 손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36) 화물을 변문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상인들은 일 종의 통행세를 지급해야 했고 이를 둘러싼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票引이 없는 貨車가 뇌물을 주고 변문을 나갈 수 있는 이른바 爲打口子 라는 오랜 악습이 있어서, 큰 수레 는 3량 5전, 작은 수레는 2량을 받고 통과시켰다. 法庫 변문 역시 표인이 없는 화차는 검색을 통과하려면 이와 같은 통행세를 지급해야했다. 그 결과 변문의 章京은 악폐를 부 추기고, 領催ㆍ被甲ㆍ현지의 무뢰배들은 이를 빌미로 변문의 章京을 협박하여 온갖 폐단 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었다.37) 이에 永福이 제안한 해결책은 변문을 통과하는 화물에 대 해 일정한 세금을 부과하자는 것이었다. 신이 생각건대 盛京과 吉林烏拉는 곧 我朝의 發祥之地로 그 관계됨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만약 상인들로 하여금 이 지역에 직접 들어갈 수 있게 한다면 화물이 많이 모여들게 될 것이며 地方 또한 충족될 것입니다. 地方이 충족되면 本地에 있는 官兵들의 생계에도 또 한 이익이 될 것입니다. 생각건대 威遠堡 邊門에서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 한 이런 폐단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旗人이 坐官ㆍ遷戶할 경우에는 정례대로 將軍衙門에서 呈 文하여 盛京兵部에서 票引을 발급하게 하되 화물을 가지고 邊門을 나가지 못하게 하십시 36) 37) 課于威遠堡等邊門摺 (雍正2年正月18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上, 614. 照査定例, 凡爲旗人若有坐官遷戶嫁娶之事, 俱行呈文奉天將軍衙門, 協領公擧, 咨行盛京兵部, 領 取票引出邊. 若系商人, 卽行呈文承德縣, 而由承德縣保擧呈文府尹, 府尹査核之後, 轉咨盛京兵部, 由司呈堂, 頒給票引. 如此以來, 或各省商人到處央人保擧, 或再三核査行文, 極費時日, 且又難以杜 絶衙役侵擾. 商人携帶票引經過邊門時, 不肖領催被甲等, 借以盘査違禁物品, 從中尅扣, 又有吉林烏 拉卡倫兵丁截擾, 可見商人破費頗多. 都察院左副都御使永福奏請說稅課于威遠堡等邊門摺 (雍正2 年正月18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上, 614. 自臣抵達盛京后査訪得, 此地有一陋規惡習, 旣無票引貨車, 可以行賄于邊門而出, 謂之爲打口子, 其大車可取三兩五錢銀, 小車可取二兩銀. 凡出法庫邊門之無票引貨車, 亦仿此面行之. 邊門章京無 弊, 而領催被甲及本地光棍等, 以此爲口實, 加以脅迫邊門章京, 從而滋生種種情弊者, 皆始于此也. 都察院左副都御使永福奏請說稅課于威遠堡等邊門摺 (雍正2年正月18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 譯 上, 614-615.
208 오. 旗人이나 백성[ 民人] 을 막론하고 화물을 휴대하고 威遠堡나 法庫邊門을 벗어나 무역하 러 가는 경우 큰 수레는 은 2 량을 징수하고 작은 수레는 1 량을 징수하십시오. 상인의 차 량이 돌아오면, 만약 吉林烏拉 지역의 특산이나 화물을 싣고 邊門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는 금지물품을 제외하고 山海關 稅課의 예에 따라 징수하십시오. 그 나머지 邊門으로 貨車가 출입하는 것은 금지하십시오. 邊門의 章京 등은 不法採蔘자를 체포하고 邊門을 수비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니 다른 委員으로 하여금 징세를 관리하게 하십시오. (중략) 이렇게 한다 면 國庫가 증가하고 오랜 폐단이 근절될 것입니다. 38) 그러나 永福의 세금 징수 제안을 옹정제는 일거에 거부했다. (세금 징수) 이 일은 결 코 불가하다. (효과는) 미미하면서 백성들의 마음만 잃게 될 것이니 무익하다. 황제는 또한 위원보 외에 다른 변문의 출입을 통제하자는 의견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을 초 래할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39) 永福의 제안과 이에 대한 옹정제의 반응은 변경통치의 목적과 관련하여 지방관과 황실 이 서로 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크리스토퍼 이셋(Christopher Isset)이 지적하듯이 동북지역에서 황실의 재산을 보호하고 만주족의 배타적 공간을 유지하려는 청조의 정책은 민간관리들의 행정 이데올로기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18세기 중반 이래 중국 북부에서 식량난이 심각해졌을 때에도 황실이 만주와 몽고에 대한 봉금정책을 계속 유지했기 때문에 지방관들은 토지를 찾아 만주로 이주한 모든 불법적인 이주자들을 내지로 돌려보내고 이 지역을 계속 봉쇄해야 했다. 지방관들은 토지를 얻고자 하는 농민 들에게 동북지역을 개방하고자 했으나 황실의 조치로 만주에 대한 봉금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40) 이와 관련하여 이셋은 청조의 변경정책을 결정짓는 것은 전략적ㆍ재정적 고려 였다고 주장한다. 한인의 이주와 식민은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토지세원을 창출하지만 단 기적으로는 행정과 통치를 위한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기 때문에 국가는 세수ㆍ안전ㆍ통 38) 39) 40) 微臣竊惟, 夫盛京吉林烏拉者, 乃我朝發祥之地, 關係至爲重要. 若能商人得以直通該地, 則貨物運 集者多, 而且地方得以充足. 地方充足, 則對本地官兵生計頗有裨益. 臣經再三思慮, 若不說稅課于威 遠堡邊門, 則難淸除情弊. 伏乞皇上叡鑒, 恩准臣之所請施行. 其旗人坐官遷戶等事, 仍准照例呈文將 軍衙門, 以轉咨盛京兵部頒給票引, 但不准來帶貨物出邊. 不論旗人百姓, 凡有帶貨物出威遠堡法庫邊 門前往貿易者, 其大車徵稅銀二兩, 小車徵稅銀一兩. 商人車輛返回時, 若載有吉林烏拉等地特産貨物 進入邊門者, 除嚴禁携帶禁運貨物者外, 亦照山海關稅課例徵稅之. 擬嚴禁貨車出入其餘邊門. 邊門章 京等職任于緝拿偸挖人蔘, 守衛邊門之責, 宜另委員管理徵稅之事. (중략) 倘或一旦如此酌情變通, 非但國幣增加, 亦可淸除積弊. 都察院左副都御使永福奏請說稅課于威遠堡等邊門摺 (雍正2年正月 18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上, 615. 此事萬不可. 卑微而失衆心, 于事無益. 不可. 必致許多于衆不便之艱難境地. 都察院左副都御使 永福奏請說稅課于威遠堡等邊門摺 (雍正2年正月18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上, 615. Christopher M. Isset, State, Peasant, and Merchant in Qing Manchuria, 1644 1862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7), 8-9.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209 제의 측면에서 변경개발의 손익을 계산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정치경제적 고려가 동북지역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17세기 이래 청조는 동북의 지역경제와 세수가 부양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 국가의 행정력을 확장했고 이 지역 통제를 위해 필 요한 자금은 모두 내지에서 조달되었다. 황실의 이해를 지키기 위해서는 동북지역의 재 정 자립은 청조에게 중요한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41) 永福이 제안한 것처럼 변경의 상업유통을 촉진시켜 세수를 증대할 것인가, 아니면 옹 정제의 주장처럼 민인의 접근을 차단하여 변경을 보호할 것인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청 대 변경의 정치경제(the political economy of Qing frontier zone)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인 식한 제임스 밀워드(James Millward)의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변경지역에서 행정과 방어 비용이 증가하는 것은 청조로서는 진퇴양난의 오랜 고민거리였다. 변경을 간접통치할 경 우 외부의 침입이나 지역민의 폭동에 취약해 질 수 있었다. 반면 변경을 강력하게 통치 하기 위해 관리와 병사를 주둔시킬 경우 세금을 징수해서 비용을 충당해야 했고, 세금징 수는 지역민의 불만과 불안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이런 문제는 변경만이 아니라 중국 전역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특히 변경의 경우 양자의 균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한인의 이주가 증가하고 그에 대한 징수를 강화하는 것은 변경지역에 대한 청조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한 인의 정착은 청조의 민족구분정책을 위협하고 비한족 토착민과의 갈등을 초래할 수 있었 다.42) 威遠堡 邊門에서 세금을 수취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永福이 행정적 편의에 따라 변 경통치의 강화를 주장하는 지방 행정관의 입장이었다면, 옹정제는 정치적 논리에 의해 변경에 대한 출입을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민족분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만주족 황제의 모 습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Ⅳ. 기인과 범월 변구의 범월자들 가운데 기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청조가 그토록 강조 한 滿洲族의 法道 라는 것이 현실 속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옹 정제는 즉위 직후부터 기인들이 불법적인 채삼과 범월에 개입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아야 41) 42) Isset, 앞의 책, 31. James A. Millward, New Perspectives on the Qing Frontier, Gail Hershatter et al eds., Remapping China: Fissures in Historical Terrai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6), 125.
210 했다. 옹정원년(1723년) 12월 18일 刑部尙書 勵廷儀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불법채삼으로 체포된 94명 가운데 旗人이 32명에 달했다. 당시 盛京兵部侍郞 마진타이(Majintai)의 보고 에 따르면 11월 초8일 무렵 영고탑장군인 종실의 바사이(Basai)는 몰래 인삼을 채취한 범 인 李先章 등 총 94인을 체포하여 解送하였다. 이 범인들 가운데 기인(gūsai niyalma)는 32인, 내지의 민인(dorgi ba i irgen)은 62인이었다.43) 체포된 범인들 가운데 首犯 18은 양 쪽 아킬레스건을 모두 절단하고 從犯 76인은 한쪽만 절단한 후, 기인 32인은 각각 所屬 地로, 민인 64인은 原籍地로 송부되었다.44) 기인이나 민인이나, 불법채삼자로 체포되면 걸을 수 없는 불구가 되는 형벌을 받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나라의 근간인 기인들이 범월에 개입하고 있다는 보고는 변문 업무를 총관하는 永福 을 통해 계속 전해졌다. 永福은 성경장군아문에서 처리중인 사건에 대해 황제에게 보고 했는데, 여기에는 興京의 변문 밖을 넘어간 佐領 笵溥과 領催 吳靈阿 등이 획득한 인삼 을 사사로이 나누어 갖고 체포한 범인을 마음대로 풀어준 일, 包衣 養蜂 領催 劉元開 등 이 인삼을 불법채취한 일, 打牲人 色額里, 黃瑛 등이 상인 郭舟 등으로부터 사사로이 인 삼과 초피를 받고 변문 안으로 몰래 운반해 들여온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45) 이에 대해 옹정제는 威遠堡 등 여섯 개 변문 지방은 도망자들이 불법적으로 인삼을 채취하는 일이 극도로 어지럽게 행해지고 있다 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 滿洲 등은 모든 일을 힘써 행하여 모두 漢軍이나 漢人보다 倍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恩典 따위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 이 일은 실로 지극히 그릇된 악습이다. 46) 43) 44) 45) 46) te mukden i beidere jurgan i ashan i amban Majintai, omšon biyai ice jakūn i jergi inenggi jurgan i bithe isinara onggolo, ninggutai jiyanggiyūn uksun i Basai sei baci jafafi benjihe hūlahame orhode gurume baha weilengge niyalma Li Siyan Jang sei juwan uyun mukūn i dorgi Wang Lung Zi, Yen Da nimeme buceheci tulgiyen uheri uyunju duin weilengge niyalma be jurgan de benjihebi.. baicaci, weilengge niyalma dorgi tesu ba i kūsai niyalma jūsin juwe, dorgi ba i irgen ninju juwe. 宮中檔雍正朝奏摺, 제29집 [滿文諭摺 제2집], (臺北: 國立故宮博物院, 1980), 310-311. dalafi yabuha Li Siyan Jang ni jergi juwan jakūn niyalma be, gemu kooli songkoi juwe ergi borbo be faitaki, ilhi niyalma Li Da i jergi nadanju ninggun niyalma be, gemu kooli songkoi emu ergi borbo be faitaki. erei dorgi gūsin juwe gūsai niyalma be, gemu giyamulame amasi unggifi, meni meni harangga bade afabufi bargiyakini, ninju juwe irgen be giyamulame meni meni da bade benefi bargiyakini. 宮中檔雍正朝奏摺, 제29집, 311-312. 이 만문주접의 한문번 역은 刑部尙書勵廷儀等奏陳審擬刨蔘人犯摺 (雍正元年12月18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上, 576에 있다. 盛京兵部侍郞永福奏請補任臺站領催摺 (雍正6年4月26日), 雍正朝滿文硃批奏折全譯 下, 1630. 我滿洲等, 凡遇效力行走, 皆比漢軍漢人倍加勤奮, 但不能見銀錢, 此乃一極壞之惡習. (중략) 威 遠堡等六邊門地方, 逃人等偸挖人蔘, 極爲混亂. 都察院左副都御使永福奏報會同審理欽交人蔘案 件摺 (雍正2年正月18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上, 613. 기인의 불법채삼은 옹정년간 초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211 옹정년간 발생한 기인의 범월 사건 가운데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 바로 郭連進 사건이었다. 청국의 불법채삼人 수백명이 범월하여 조선을 침범하고 급기야 조선병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 사건은 봉황성 성수위 伯席屯의 呈報를 통해 봉천장군 尹泰(Yentai) 에게 전달되었다. 尹泰의 주청으로 사건을 검토하게 된 和碩怡親王 등은 강희년간의 선 례에서 해결책을 찾아야했다. 강희50년(1711년) 당시 성경장군 嵩祝이 해적을 체포하자 강희제는 다음과 같은 유지를 내렸다. 이 해적들은 지방관병을 살해하고 나머지는 배를 타고 도주했다. 아마도 조선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만약 [이들이] 그곳[조 선]으로 도주하여 멋대로 노략질을 해댄다면, 조선인들은 이유도 모른 채 天朝의 사람이 니 어찌할 수 없다 고 생각하고 적들의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니, 이는 짐이 실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近海 各處의 방어지역에 속히 驛站을 통해 諭旨를 전달하라. 47) 강희51년(1712년) 禮部에서 조선으로 가는 선박을 엄금할 것을 주청했을 때도 강희제 는 엄격한 단속을 명했다. 조선과의 변경일대와 근해지역에서 불법적으로 사냥과 어업을 하는 자가 있을 경우 성경장군은 연해의 지방관에게 교부하여 엄히 체포하고 조기에 사 태를 막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또한 금령을 어기고 8-9척의 선박이 떼지어 바다로 나가 조선에서 漁業하는 것은 곧 도적질 이니, 이들은 조선에서 체포하여 처형하고, 생포한 자는 청으로 해송하라고 명령했다. (이들이) 天朝의 백성이라 해서 감싸거나 지체해서는 안될 것 이라는 말도 덧붙여졌다.48) 강희61년에는 어업도중 조선에 표류한 청인은 表文 47) 48) 기에 걸쳐 계속 등장한다. 옹정2년 2월 13일에도 성경 양황기 소속의 기인이 연루된 사건이 발 생했고 같은 해 9월 28일에도 영액문과 왕청 인근에서 盜蔘하던 자들이 체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上, 668-669, 943-944. 康熙五十年, 原任盛京將軍嵩祝, 將剿捕海賊之處具奏, 奉旨, 這海賊被地方官兵殺傷, 餘俱乘舟逃 遁, 恐朝鮮未必知之, 倘逃往彼處肆行搶掠, 朝鮮人不知其故, 謂係天朝之人不肯動手, 徒受賊人之害 矣, 朕實不忍, 著將近海各處小心防備之處, 速由驛遞傳諭. 原奏, 同文彙考 原編 卷61, 犯越, 18a. 한편 欽定大淸會典事例 는 비슷한 내용을 강희49년의 일로 소개하고 있다. 강희49년 해 적을 소탕하여 잔당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니, 조선에서 그 사정을 알지 못하고 대국의 사람이라 하여 감히 방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침입을 당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연해지방에서 힘써 방어 할 것을 조선국왕에게 신칙하였다. 欽定大淸會典事例, 권511 4a ( 續修四庫全書, 上海: 上海 古籍出版社, 1995). 康熙五十一年, 禮部奏請嚴禁朝鮮行舟, 奉旨, 朝鮮邊疆近海之處, 有偸往捕魚者, 著盛京將軍交與 沿海地方官, 嚴行査拿早已禁止, 今仍違禁妄行, 八九隻船會集, 出海往朝鮮魚採, 此卽係盜賊矣, 嗣 後此等往朝鮮魚採者, 著伊國卽行追拿殺戮, 生擒者昨速解送, 勿因天朝之人遂懷遲矣. 原奏, 同 文彙考 原編 卷61, 犯越, 18b. 비슷한 내용이 欽定大淸會典事例 에도 수록되어 있으나 역시 한 해 빠른 기사로 되어 있다. 康熙50년 朝鮮과 奉天府의 金州, 復州, 海州, 蓋州는 땅이 서로 가까우니 성경장군과 봉천부윤에게 명하여 연해의 거주민들이 조선 근해에 가서 漁業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라. 만약 다른 지방의 魚採人들이 조선영내에 들어가더라도 체포하여 해송하라. 만 약 금령을 어기고 魚採하는 자를 체포하지 못했을 경우 엄히 치죄할 것이다. 欽定大淸會典事 例, 권511, 4a.
212 을 소지하고 사고를 일으키지 않은 경우에만 송환될 수 있었다. 만약 표문을 소지하지 않고 사고를 일으킨 경우에는 조선에서 조선의 법률에 따라 처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이런 지시를 남용하지 말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이는 모두 짐의 諭旨를 받 들어 행하는 것이지, 그들[조선]로 하여금 감히 大國의 백성을 사사로이 治罪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49) 번방의 국왕이 상국의 백성을 체포하고 처벌하는 것은 오로지 황제의 윤허를 받았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월경채삼 사건에서는 범인이 청인인가 조선인인가에 따라 사건 조사의 장소와 방식이 달라지기도 했다. 강희19년, 24년, 30년 조선인이 사사로이 강을 건너와 나무를 베고 인 삼을 캐고 조총으로 사람을 상해하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청의 관리 두 사람이 파견되어 봉황성에서 조선관리와 회동하여 함께 조사했다.50) 그러나 郭連進 사건의 범인 들은 모두 청인이었으므로 조사방식이 같을 수는 없었다. 和碩怡親王은 이들을 모두 성 경으로 이송하여 조사하라고 건의했다. 이번 사건의 범인들은 모두 內地의 사람들이니, 지금 28인은 盛京으로 拿送하고, 이 범인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사로이 [邊口를] 벗어나 게 한 官兵은 將軍과 侍郞에게 넘겨 엄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십시오. 조선에 물어야 할 일이 있으면 (將軍과 侍郞으로 하여금) 行文하여 묻게 하십시오. 51) 한편 사건의 범인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범월을 최초로 보고했던 봉황성 성수 위 伯席屯 역시 사건에 연루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伯席屯은 변경을 지키는 관원 [封疆 要員]의 신분으로 인삼 사채자들에게 은 천냥을 받고 변계를 빠져나가게 방조한 것이었 다. 伯席屯 본인은 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에게 은을 준 상인 高尙仁과 이들을 伯席 49) 50) 51) 嗣後漂風船隻人內, 有票文而未生事, 照舊令其送來, 若無票文妄行生事者, 朝鮮卽照伊律懲戒治罪. 此皆遵奉朕旨所行, 竝非伊敢將大國之人私行治罪. 原奏, 同文彙考 原編 卷61, 犯越, 18b-19a. 欽定大淸會典事例 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강희56년 앞으로 內地의 백성이 조선에 표류하였 을 경우 만약 表文이 있고 사고를 일으키지 않은 자는 예에 따라 回送하라. 만약 표문이 없고 사사로이 월강하여 사건을 일으킨 자라면 조선국왕이 체포하여 그 나라의 국법에 따라 조사하 고 (청의) 禮部에 자문을 보내어 황제의 聖旨를 청하라. 欽定大淸會典事例, 권511, 5b. 康熙51년 조선 근해에서 魚採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일찍이 엄히 신칙하였다. 지금 아직도 조 선의 변계에 가서 魚採하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곧 海賊이다. 앞으로는 조선으로 하여금 곧 체포하게 하라. 만약 생포하면 곧 해송하고 (중국의) 내지인이라는 이유로 지체해서는 안된다. 또한 조선의 백성이 월강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인삼 등 물건을 약탈하면 관리를 봉황성에 파견 하여 조선의 陪臣과 회동하여 범인을 심문하게 하고 조선국왕에게 교부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 라. 欽定大淸會典事例, 권511 4a-b. 康熙十九年, 二十四年, 三十年, 朝鮮國人曾私自越江伐木採蔘, 用鳥銃傷人搶奪行兇, 各案俱差大 臣二員, 前往朝鮮國及鳳凰城等處會審在案, 今此各犯俱係內地人, 將現在二十八人拿送盛京, 應將現 獲人犯受賄私放犯人之官兵, 則交與將軍侍郞嚴査定擬具奏, 如有應問朝鮮之事, 令伊等行文詢問. 通文館志 卷10 紀年續編, 9a-9b; 국역통문관지 2 (서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208-209.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213 屯에게 소개한 領催 吳里와 達色, 그리고 伯席屯의 家人 優三은 이미 사실을 자백한 상 태였다.52) 또한 郭廉金과 함께 사건을 주모한 孫鐵嘴(孫光宗)은 이번 뿐만 아니라 과거에 도 봉황성 성수위에게 뇌물을 준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53) 조정에는 범월을 방조한 이 들 관병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이 범인들은 邊口를 몰래 벗어나 무리를 지어 흉악한 짓을 벌였으니 法道를 어김이 심합니다. 그 이유는 모두 邊口를 지키는 官升들이 평소 태만하고 사사로이 뇌물을 받고, 그들의 上司 역시 태만하여 이를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뇌물을 받은 官升과 이를 察知하지 못한 관리들은 이미 革職되었으니 奉天將軍 에 보내어 엄중한 조사를 받게 하십시오. 54) 이로써 수백명의 내지인이 여러 해 동안 국경을 넘어 조선 땅에서 채삼해오다가 마침 내 조선인을 살상하는 지경이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변경관리에 힘써야 할 청의 관병들 이 오히려 뇌물을 받고 민간인이 변구를 벗어나도록 방조해 온 것이 드러났다. 범인들에 대한 조사가 완결되기도 전인 옹정5년 11월 16일, 황제의 관료들은 변방 관리를 시급히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력이 불분명하고 확인할 引票가 없는 자는 사사로이 변구 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매년 변구를 출입하는 자의 수는 계절별로 冊을 만들어 보고 하게 하고 범인들이 변구를 벗어나 무리를 짓지 못하게 하라고 주장했다. 만약 변구의 관리가 引票를 확인하지 않거나 뇌물을 받고 출입을 어지럽힐 경우, 관할 상사는 이들을 모두 색출하여 보고하고 해당 將軍ㆍ督撫ㆍ提鎭은 이들을 형부로 보내어 엄벌에 처해야 했다. 만약 장군ㆍ독무ㆍ제진이 서로 비호하며 조사하지 않고 규찰을 엄히 하지 않아 범 인들이 월경하여 사고를 일으킨 것이 발각되면, 이들은 庇護하여 失察한 죄 에 따라 처 벌될 것이었다. 이렇게 한다면 關口의 단속이 강화되어 內地의 奸民들이 사사로이 越境 하여 遠邦을 어지럽히지 못할 것 이라는 것이 청 관리들의 생각이었다.55) 52) 53) 54) 55) 竊臣等欽惟, 鳳凰城之城守尉伯席屯係封疆要員, 特派駐防海口要地, 竟索要私販人蔘者千兩餘銀後 放行, 深是有干法紀. 今伯席屯雖不認罪, 但給伯席屯銀兩之人高尙仁, 中間人吳里, 達色及其家人優 三等均皆供出實情, 供認不諱, 由此可見, 案情屬實. 盛京將軍尹禮布等奏請別摺具奏伯席屯犯法摺 (雍正5年10月初10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下, 1521. 且郭廉金供出之叫孫鐵嘴之孫光宗供認: 雍正三四年, 行賄鳳凰城城守尉. 再給與伯席屯銀兩之開店 房人高尙仁, 原說會領催吳禮ㆍ達塞ㆍ伯席屯之家人憂三等皆給伯席屯銀兩是實, 等語. 盛京將軍 尹禮布等奏請嚴審鳳凰城城守尉伯席屯摺 (雍正5年10月初10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下, 1522. 是各犯偸越邊口聚衆行兇, 甚屬不法, 揆厥所由, 皆守口官升, 平日怠玩廢弛徇私賄縱, 該管上司漫 無覺察所致. 除受賄官軍幷失察之該管官, 已經革職鎖拿交餘奉天將軍等嚴審, 其未獲人犯旣係山東 山西籍貫, 行文各該督撫, 作速嚴拿解送奉天, 究審治罪以示懲戒外. 原奏, 同文彙考 原編 卷 61, 犯越, 23b. 如有來歷不明無印票可驗者, 槪不許私放出口, 每年將出口人數, 按季造冊申報取具, 竝無匪類出口 印甘各結, 倘守口官不驗明印票, 及私受賄賂任其混行出入, 該管官一經察出卽行詳報, 該管將軍督撫 提鎭, 題參交刑部嚴行治罪, 若該管將軍督撫提鎭, 通同徇庇不行査參及稽察不嚴, 以致匪類越境生事
214 한편 청의 관병과 민인이 공모하여 변계를 이탈하고 조선병사의 인명을 해친 일에 대 해 옹정제는 조선 역시 책임이 있다고 꾸짖었다. 비난의 근거는 조선이 청의 번방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과거에 聖祖仁皇帝께서는 조선국왕에게 諭旨를 내려 만약 도적들이 그대의 나라에 가서 약탈할 경우 국왕은 곧 이들을 체포하여 주살하고 생존자는 解送하라 고 명하셨다. 朕이 즉위한 이래 또한 諭旨를 내려 만약 표류한 선박의 사람들 가운데 票 없이 사고를 일으 키는 자는 국왕은 곧 그대의 법칙에 따라 治罪하라 고 명하고 여러 차례 諭旨를 내려 설 명했다. 지금 內地의 도적들은 각처의 逮捕와 禁約이 엄격해지면서 숨을 곳이 없어짐에 따라 몰래 외국으로 도망쳐 생명을 구걸하려 하고 있다. 조선의 국왕은 이미 藩封의 서열 에 들어있으니 마땅히 朝廷[ 청조]를 위해 도적을 사로잡아 백성을 편히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물며 聖祖仁皇帝와 朕이 여러 차례 諭旨를 내렸거늘, 국왕이 유약하고 무능하여 諭旨를 받들지 못하고 內地의 범인들로 하여금 조선을 종적을 숨겨 죄를 피하는 곳 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러한 폐단은 결코 지속되어서는 안될 것이니, 앞으로 만약 비적들이 越境하여 사고를 일으키는데도 조선이 이들을 잡지 못하여 법망을 벗어나게 할 경우, 국 왕은 조선의 巡檢관리들의 죄를 논하여 다스리고, [淸의] 禮部는 조선의 국왕을 藩王으로 써 諭旨를 받들어 행하여 도적을 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한 죄 로 다스려야 할 것 이다. 56) 이 유지에서 흥미로운 점은 조선이 외국이면서 동시에 번방으로 설명되고 있는 점이 다. 이는 청 제국 내에서도 주체의 위치에 따라 경계에 대한 인식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금령을 어기고 불법을 자행하는 변방의 도적 들에게 조선은 국가의 법망을 피할 수 있 는 외국이었다. 반면 제국의 통치를 위해 변경을 안정시켜야 할 중앙의 황제에게 조선은 朝廷 을 보좌해야 할 번방이었다. 다시 말해 郭連進과 같은 많은 변경민들에게 조선은 청과 분리된 외국이었지만, 제국을 경영하는 옹정제에게 조선은 황제의 은덕이 미치는 천하의 일부분이었다. 조선은 변경에서 보면 외국이었지만 중앙에서 보면 번방, 즉 제국 56) 發覺之日, 將將軍等均照徇庇失察例, 分別嚴加議處, 如是則關口嚴謐, 內地奸徒自不得私行偸越, 滋 擾遠邦. 原奏, 同文彙考 原編 卷61, 犯越, 23b-24a. 粤在昔年, 聖祖仁皇帝特頒諭旨與朝鮮國王, 倘有盜賊前往伊國刦掠, 著該國王卽行追拿殺戮生擒解 送, 自朕卽位以來, 又降諭旨, 若漂風船隻人內, 有無票妄行生事者, 著該國王卽照伊律懲戒治罪, 屢 次諭旨甚明, 今內地盜竊之輩, 因各處捕緝禁約甚嚴, 無處可以藏匿, 是以潛逃外國苟且偸生, 該國王 旣列藩封, 當爲朝廷盡捕盜安民之職, 況奉聖祖仁皇帝及朕諄諄諭旨, 而該國王柔懦無能遵奉, 轉使內 地犯法之人, 恃朝鮮以爲潛踪避罪之地, 此風斷不可長, 嗣後倘有匪類越境生事, 而朝鮮不能擒獲以致 漏網者, 著該國王將伊國防迅之員題參治罪, 該部將該國王一倂議處, 以爲藩王不能遵旨奉行捕盜安 民者之戒. 原奏, 同文彙考 原編 卷61, 犯越, 24b-25a. 옹정제가 조선에 보낸 諭旨는 다음에 도 소개되어 있다. 通文館志 卷10 紀年續編, 9b-10a; 국역통문관지 2, 209-210.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215 의 일부였다. 이 유지는 또한 옹정제가 제국의 경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유조 변을 세워 내외를 구분하면서도 유조변의 안과 밖을 모두 제국의 영토로 여기는 것처럼, 비록 조선국왕으로 하여금 조선의 법으로 조선의 백성을 통치하게 한다 해도 그는 황제 의 冊封을 받은 신하였다. 유조변도 경계이고 조선과의 국경도 경계였다. 옹정제에게 청 제국의 경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경계는 모두 제국 안에 있는 것들 이었다. 각각의 경계는 제국 내에서 각기 다른 위상과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그 위치에 따라 황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와 강도도 달라졌다. 여러 개의 경계가 중첩되어 제국 을 이루고, 황제의 은덕은 중앙에서 변경으로, 다시 번방으로 차례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성경장군 覺羅伊禮布(Gioro ilibu)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관련 범인들에 대한 심문조사 에 착수했다. 조사 결과 郭連進은 본래 山海衛의 民人으로, 옹정4년 무렵 봉황성으로 건 너와 鑲紅旗의 旗人 周五의 집에서 머무르던 중 인근의 사람들과 인삼을 불법채취하기로 모의했다. 이들이 周五와 孫光宗에게 가을이 지난 후 돌아와서 인삼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보아, 재력이 있는 周五와 孫光宗이 郭連進 일행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대신 불법 채취한 인삼의 일부를 받기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郭連進 일행은 陽河를 따라 邊口 밖 으로 나가 인삼을 채취하고 나중에 周五와 孫光宗에게 인삼 4전을 건네주었다. 옹정5년 4월 10일, 이들은 다시 불법채삼을 위해 200여명을 규합하여 배를 타고 陽河에서 바다로 나갔다. 당시 이들은 돼지고기와 술을 사다가 초소의 章京 德爾得에게 주었으나 德爾得 은 이들을 내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被甲 劉柱와 四格이 은 100량을 주면 내보내주 겠다고 접근해오자 이들은 劉柱와 四格에게 은 95량과 구슬 하나를 주고 변구를 빠져나 갔다. 범인들은 莽牛哨 인근에서 조선 순검인에게 붙잡히자 조선인 7인을 구타하고 달아 났다가 체포된 것이었다.57) 郭連進과 함께 공모한 王大才는 山西人으로, 雍正5년에 산동 인 王四와 不法採蔘을 모의하고 각각 은 5전을 모아 순검하는 被甲 顧宗祥의 부친인 顧 三에게 건네주었다. 이들은 50명을 규합하여 배로 艾哈河를 거쳐 莽牛哨로 나갔는데, 조 선 순검의 저지를 받자 郭連進의 지시 하에 조선인들을 구타하여 물에 빠뜨렸다고 진술 했다.58) 57) 郭連進供, 我係山海衛民, 於雍正四年間到了鳳凰城, 在鑲紅旗人周五家居主, 會著一個姓劉的, 一 個姓趙的, 兩個姓王的, 我們五人商量要偸刨人蔘, 向周五孫光宗等說, 定秋後回來給蔘四錢, 我們隨 從陽河出去刨蔘後回來, 周五孫光宗向我們要蔘時, 我們每人湊了人蔘四錢給了. 雍正五年四月初十 日, 我們又偸刨人蔘去, 紏約了二百餘人, 各坐船從陽河進海, 到了馬四峽地方, 我們買了猪酒, 送給 巡哨章京德爾得求, 他時巡哨章京不允, 隨有巡哨的被甲劉柱, 四格求向我說, 你們給我一百兩銀子, 我們放你過去, 如此說是, 我們湊了九十五兩銀子, 一個 紬給他們, 就將我們放過去了, 莽牛哨地方 遇著高麗巡哨的人, 不放我們過去, 我率領王祥, 姜克俊, 姜守儉, 李澤, 范克勝, 孫洪超, 王大才, 拿 住七個高麗人綑了, 是實. 粘單, 同文彙考 原編 卷61, 犯越, 27a-27b.
216 변문에서의 출입을 감시하고 범월자를 단속해야 할 기인 병사들의 부정과 부패는 심각 한 상태였다. 領催는 돈을 받고 邊外의 蔘場에서 인삼을 채취하도록 민인을 내보내 주었 고, 이 사실을 알아낸 章京은 領催에게 돈을 뜯어내려 했다. 郭連進 일행과 내통한 王廷 佐는 湯包城臺의 領催로, 옹정3년 12월 孫光宗에게 은 400량을 받고 인삼채취권인 官票 를 구해주기로 약속했다. 王廷佐는 章京 巴海를 따라 위원보에 관표를 받으러 갔으나 구 하지 못하고 말았다. 관표를 기다리던 孫光宗이 찾아와 소동을 피우자 조급해진 王廷佐 는 이들을 변구 밖으로 내보내 인삼을 캘 수 있게 해주었다. 한편 章京 巴海는 중개인 惠和尙을 王廷佐에게 보내어 墓를 수리하는데 필요한 은 40량을 내라고 요구했다.59) 또 한 鑲白旗 馮秉忠 佐領 휘하의 領催 王宗彦은 옹정4년 6월 초4일에 艾哈河을 순찰하다가 孫光宗 일행이 배를 타고 변구를 벗어나 인삼을 캐러 가는 것을 발견했는데, 孫光宗 일 행이 은 500량을 주면서 풀어달라고 하자 이에 응했다. 그는 뇌물로 받은 은을 순검소의 被甲 王重功 등 9인에게 47량씩 나누어주고 본인은 70량을 챙겼다고 자백했다.60) 옹정6년 11월 11일 刑部는 題本을 올려 범인의 처벌을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무리를 이끌고 인삼을 캐면서 순검하는 병정을 구타한 首犯 郭連進은 斬首하고, 從犯으로 협력 한 王祥, 姜克俊, 姜守儉, 李澤, 范克勝, 孫洪超, 王大才는 絞首해야 합니다. 從犯이되 협 력하지 않은 盧明禮 등 10인은 廣西의 풍토병 있는 지역[煙瘴]으로 보내고, 王二 등 9인 은 廣東으로 보내어 병사들의 노비로 삼아야 합니다. 銀 400량을 받은 領催 王廷佐는 無祿人이 법을 어기고 은 120량을 은닉한 경우 絞首한다 는 조항에 따라 絞首해야 합니 다. 은을 받았으되 120량에 미치지 않은 委署 驍騎校 領催 德爾得, 閑散 四格, 被甲 劉柱 등은 加號 2개월과 鞭 100대에 처하며 領催와 被甲에서 革去해야 합니다. 關口를 지키는 被甲 廣寧撓, 領催 王文祥 등은 杖 100대와 徒 3년에 처해야 하나 이들은 모두 旗人이므 로 각각 加號 40일과 鞭 100대로 감형하고 領催와 被甲에서 革退해야 합니다. 61) 형부의 58) 59) 60) 61) 王大才供, 我係山西民, 雍正五年有山東民王四約我偸刨人蔘去, 向我們每人要銀五錢, 給了巡哨被 甲顧宗祥的父親顧三, 我們五十餘人各坐了船, 艾哈河出去到了莽牛哨, 有高麗巡哨的人攔阻我們, 郭 連進喝令我們打, 我同王祥等赶着高麗們打時, 掉在江裏, 是實. 粘單, 同文彙考 原編 卷61, 犯 越, 28a. 王廷佐供, 我係湯包城臺領催, 雍正三年十二月內, 孫光宗等來求我, 替他門領刨蔘官票, 給銀四百 兩, 我依允回了, 章京巴海將我們帶到威遠堡起票去, 因票未得, 孫光宗向我炒閙, 我着了急, 將他們 放出邊去, 是實. 章京巴海領催王文斗俱不知道, 後巴海差惠和尙來說, 要修廟給了銀四十兩, 下剩銀 一百六十兩布十包, 我賣得二百兩俱使用了. 粘單, 同文彙考 原編 卷61, 犯越, 30a-30b. 王宗彦供, 我係鑲白旗馮秉忠佐領下領催, 雍正四年六月初四日, 我往艾哈河巡哨去, 孫光宗等坐着 船, 要從我們哨裏出去偸刨人蔘, 我率領被甲等將孫光宗等拿獲, 他們給我銀五百兩, 將他們放了, 是 實. 所得銀子我分給巡哨的被甲王重功等九人, 每人四十七兩, 我只得銀七十兩. 粘單, 同文彙考 原編 卷61, 犯越, 30b-31a. 應如該將軍所題, 將率衆刨蔘綑打巡哨兵丁爲首之郭連進, 依官司差人捕獲罪人聚衆, 中途打奪因以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217 제본을 받은 지 3일후 황제는 郭連進은 斬하고, 王祥, 姜克俊, 姜守儉, 李澤, 范克勝, 孫 洪超, 王大才, 王廷佐는 絞하라 는 최종판결을 내렸다.62) 뇌물을 받고 변방을 어지럽혔음에도 불구하고 旗人은 여전히 나라의 근간 으로 보호 되었다. 죄질이 나쁘고 수수한 뇌물의 액수가 컸던 王廷佐는 죽음을 면하지 못했지만, 나 머지는 감형되어 기인의 특권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63) 뇌물을 요구했던 章京 巴海 역시 처벌의 칼날을 피했다. 봉천장군은 형부에 올린 보고서에서 巴海가 관할지역의 병 정들을 단속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王廷佐가 은을 받고 사사로이 사람들을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 중개인을 보내어 은을 요구했으므로 마땅히 그를 혁직하고 加號 2개월과 鞭 100대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巴海의 모친이 직접 형부로 찾아와 아들 巴海 는 범인들이 변구를 빠져나간 사실을 알지 못했고 은을 받은 적도 없다고 탄원하자, 형 부는 巴海의 죄에 대해서는 다시 심의할 것을 제안했다.64) 巴海가 기인이 아니었다면 결 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62) 63) 64) 殺人及聚至十人爲首者, 斬監候律, 應擬斬監候秋後處決. 爲從下手之王祥, 姜克俊, 姜守儉, 李澤, 范克勝, 孫洪超, 王大才, 俱各依捕獲罪人, 中途打奪下手者, 絞監候律, 應擬絞監候秋後處決. 爲從 竝未下手之盧明禮 (중략) 照例發往廣西煙瘴地方當差. 王二 (중략) 照例發往廣東煙瘴地方當差. 得 銀四百兩之領催王廷佐, 合依無祿人枉法臟銀一百二十兩者, 絞監候律, 應擬絞監候秋後處決. 得銀未 至一百二十兩之委署驍騎校領催德爾得, 閑散四格, 被甲劉柱 (중략) 加號兩個月鞭一百革去領催被 甲. 把守關塞之被甲廣寧撓 (중략) 俱合依越度緣邊關塞把守之人知而故縱者, 杖一百徒三年律, 應杖 一百徒三年, 俱係旗人, 各折責加號四十日鞭一百, 革退領催被甲. 粘單, 同文彙考 原編 卷61, 犯越, 32a-33a. 該將軍所稱, 管艾哈變章京主事巴海, 不嚴行管約該管兵丁, 聞知王廷佐得銀將人私放出邊, 差惠和 尙指稱修廟, 向王廷佐要銀四十兩, 情由可惡, 應將巴海革職加號兩個月鞭一百, 等語. 今據巴海之母 寡婦赴部呈稱, 王廷佐受賄將郭連進等偸放出邊, 我兒子巴海竝不知道, 亦不曾指稱修廟差惠和尙向 伊索銀, 如果我子巴海指修廟要銀是實, 惠和尙何難與我子質對卽行逃走, 且嚴訊我子亦竝沒有承認 的口供, 止據王廷佐一面之詞, 將我子揆擬革職枷責之罪, 實屬寃抑等情. 査疎內巴海竝無承認口供, 惠和尙嚴拿質審, 明確巴海果否知情, 有無要銀之處, 訊明按律治罪, 具題到日再議. 粘單, 同文 彙考 原編 卷61, 犯越, 33b-34a. 기인의 법적 특권과 감형의 사례에 대해서는 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299-303. 당시 威遠堡 등 유조변 일대의 六邊을 관할하던 盛京兵部侍郞 永福은 巴海가 城守尉와 암중에 서로 결탁하여 이익을 꾀했으며 巴海와 같은 탐관오리는 하루도 유임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했 다. 대신 그는 성경병부의 원외랑으로 하여금 靉陽邊門을 관리하게 해달라고 황제에게 주청했 다. 그에 따르면 邊門 밖은 모두 관방의 採蔘地이며 조선의 邊界와 매우 가까우니, 그 관계됨 이 매우 중요하여 (담당자를) 오랫동안 空席으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邊門外俱爲官方採蔘之地, 與朝鮮邊界甚近, 關係重大, 不可空缺太久). 盛京兵部侍郞永福奏請補放靉陽邊門章京摺, 雍正 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下, 1541.
218 Ⅴ. 맺음말 郭連進 일당이 처벌된 후에도 기인들이 민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범월을 방조하는 사례 는 끊이지 않았다. 옹정6년 4월 26일 永福의 보고는 변방의 관원들 가운데 범월과 관련 되어 처벌된 자들의 여러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英額門 郎中 소속 臺站 領催들은 성수위에게 뇌물을 주고 圍場 안에서 몰래 사냥을 하다가 붙잡혔다. 愛哈門 臺站의 領催 는 봉황성 성수위 伯席屯과 愛哈門 章京 巴海에게 뇌물을 받고 인삼 사채자들을 몰래 出 邊시킨 일로 조사를 받았다. 한편 汪淸門 郎中 소속 臺站 領催들은 자신들이 직접 변구 를 벗어나 사냥하고 인삼을 채취한 일로 조사를 받았다. 汪淸 臺站의 領催는 은을 받고 사람을 내보내준 일로 혁직되었다.65) 기인들이 직접 유조변 밖으로 월경하여 수렵ㆍ채집 하거나 민인에게 뇌물을 받고 출변을 방조하는 일이 이처럼 만연했던 것이다. 청인들이 인삼을 사채하다가 조선으로 넘어가는 일 역시 계속되었다. 郭連進 일당이 중죄에 처해진 얼마 후 山東人 蔣大 일행이 강에서 배를 타고 경계를 넘어 인삼을 채취 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永福은 경계를 넘어 채삼하는 자들은 변외에 서 불법채삼하다가 적발된 자들보다 죄가 더 무겁다는 것을 강조했다. 지난번 境界를 넘어 조선국의 境界로 들어가 일을 일으킨 郭連進 일당 6인은 모두 체포되어 重罪에 처 해졌습니다. 이번에 山東人 蔣大 등 역시 강에서 배를 타고 경계를 넘어 인삼을 채취한 무리입니다. 그 죄질이 나쁘니 인삼을 불법채취한 예로 사건을 완결해서는 불가합니다. 바라건대 山東民人 蔣大 등 6인을 盛京에 交付하여 심사하여 重罪로 다스려서 경계를 넘 어 법도를 어기는 무리들에게 귀감을 삼하야 할 것입니다. 옹정제는 永福의 의견이 매 우 훌륭하다고 칭찬했다.66) 옹정제와 永福이 주고받은 주접은 이들이 청 제국의 경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 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들에게 內外 의 분리는 상대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제국 내에는 여러 단계의 內境 과 外境 이 공존하고 있었다. 산해관을 중심으로 보면 산해관 안의 내지는 내경 이고 산해관 밖은 외경 에 해당했다. 그러나 산해관 밖 외경 은 성경 유조 변을 중심으로 다시 내경 과 외경 으로 나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유조변의 변내는 내 경 으로, 변외는 외경 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변외의 외경 역시 압록강과 두만강을 65) 66) 盛京兵部侍郞永福奏請補任臺站領催摺(雍正6年4月26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下, 1630. 査得, 昔日越界偸往朝鮮國界滋事之郭連金等六人, 俱被拿審從重治罪矣. 玆山東民人蔣大等, 仍爲 由江乘船越界挖蔘之徒, 情殊可惡, 不可卽照偸挖人蔘之例了結. 伏乞皇帝明鑑, 將山東民人蔣大等六 人, 交該部嚴審, 從重懲處, 俾使越界不法之徒以爲儆戒. 옹정제의 주비는 다음과 같다. 此奏殊 屬可嘉, 交該部詳審擬罪, 具本以奏. 盛京兵部侍郞永福奏請將越界挖蔘之人從重治罪摺 (雍正6年5 月28日), 雍正朝滿文硃批奏摺全譯 下, 1635-1636.
雍正帝의 동북변경 통치 / 金 宣 旼 219 중심으로 다시 내외 로 구분되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쪽이 제국의 내경 이라면 남 쪽은 제국의 외경 으로 번방인 조선이 있었다. 옹정제와 그의 관리들은 이처럼 청 제국 내부에 여러 개의 경계가 공존한다는 중층적 경계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의 영향력은 이 모든 경계를 넘어 천하에 골고루 미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느 곳 이든 경계를 어기고 마음대로 넘나드는 것은 금령을 어지럽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 러나 각각의 경계는 제국 내에서 서로 다른 위상을 갖고 있었다. 유조변의 경계를 넘나 드는 것이 내외의 구분을 어기고 황실의 재산을 해치는 일이라면, 조선 국경을 넘어가는 것은 번방을 침입하는 행동이었다. 다시 말해 산해관과 성경 유조변이 만주족과 한족의 분리를 상징하는 경계선이었다면, 압록강과 두만강은 천조와 번방을 가르는 경계선이었 다. 각각의 경계가 제국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다른 것처럼, 어느 경계를 침범했느냐에 따 라 처벌의 수위도 달라져야했다. 분명 조선은 번방이자 외국으로서 청의 내지인들이 마 음대로 출입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제국 내의 경계는 이처럼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채 공존하고 있었다.
19 세기 말 조선의 중국인 居留地와 운영체제 박 정 현(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HK연구교수) 目 次 서론 1. 조선의 중국인 거류지 설치 2. 조선의 중국인 거류지 운영방식 3. 순사청을 통해 본 청의 조선 지배방식 결론 서론 18세기 후반까지 조선의 중국의 관심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강화도조약 체결 뒤 조선 과 일본의 교역이 시작되자 중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국가와의 조약 체결을 적 극적으로 주선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종주권에 대 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청이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면서 서양과 같은 권리를 조선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청은 조선에 대해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경제적 이익을 위해 조계의 설정을 요구했다. 그 결과 조선에는 인천ㆍ부산ㆍ원산에 청의 조계 가 설치되었고, 한성에는 거류가 허용되었다. 청은 조계의 유지와 질서를 위해 조계 내 거류지회를 운영하고 조계경찰을 운영했다. 청은 조선에서 한성에 가장 먼저 진출했고, 한성에서 화상이 상업활동을 시작했다. 하지 만 조선 내 화상들은 조선상인과 갈등을 일으켰고, 이러한 갈등은 청상인에 대한 공격으 로 나타났다. 이에 청은 거류민 보호를 위해 일본 조계 경찰을 모방하여 한성에 거류민 을 보호하기위한 방범조직을 운영했는데 이것이 巡査廳이었다. 청의 조선 조계에 관해서는 일부 연구가 있지만, 조계의 운영방식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또한 한성에 설치되었던 순사청에 관해서는 일부 언급만 있고 연구가 전혀 없다. 순사청에 관한 언급은 일본의 경성부사 에 언급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정도이
222 다. 조계에 관한 세밀한 연구인 손정목의 연구도 일본의 조계를 중심으로 서술하여 청의 조계 설치과정이나 운영방식에 대해서는 연구가 소략하다. 19세기 말 조선에 설치된 중 국인 거류지와 순사청의 역할과 구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개항기 조선과 중국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청의 조선에 대한 지배체제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 움을 줄 수 있다. 본고에서는 조선에 설치된 중국인 거류지의 설치과정과 운영방식을 살 펴보고, 순사청의 역할을 통해 청의 조선 지배방식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조선의 중국인 거류지 설치 동아시아의 근대는 불평등 조약으로 시작되었다. 전통적인 조공체제에서 근대 조약체 제로 이행은 외세에 의해 강제되었고, 그 상징이 개항장과 租界였다. 조계는 근대 이후 외세가 조선에 침략하면서 자국민의 안전과 통상을 위해 설치했던 전용 거류지였다. 조 계는 외국인과 조선인이 교류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동아시아 3국이 쇄국에서 개항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1) 낡은 관행으로 행해져 오던 무역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조 약상 규정에 의해 개항장을 설정하고, 2) 여기에서 치외법권과 조약 상대국인의 거주 통 상을 허용했으며, 3) 쇄국 아래 설정되었던 폐쇄된 외국인 거주ㆍ무역장소 대신 외국인 의 거주를 위한 조계를 설정하는 것이 하나의 정식처럼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종전까지의 방관적ㆍ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인 대조선 정책을 실시했다. 그 결과 종전의 의례적인 종주권을 버리고, 종주권을 합리화시 키고, 동시에 근대적인 통상관계 條規도 마련해 이권경쟁의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고 했 다. 이에 1882년 8월 23일(10월 4일) 조선과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했다. 장정 체결 뒤, 이홍장은 총판조선상무위원으로 陳樹棠을 파견했다. 진수당이 조선에서 해야 할 가장 선결 문제는 조선에서 상무를 개척하고, 이를 위해 조계지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중 국상인 德興號가 일본 조계지역에서 상점을 열려고 했다가 쫓겨난 사건을 계기로 진수당 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4조의 규정에 의거하여 주요 개항지에 일본과 같이 조계 를 설치해줄 것을 조선정부에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청의 끈질긴 요구로 1884년 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맺고 조계지 설정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일본조계 서편의 약 5,000평을 획득했다. 1884년 인천 조계를 얻어낸 진수당은 이어 부산ㆍ원산 등에도 조계를 설정하기 위해 교섭을 벌였지만 조선정부의 거부로 이루지 못한 채, 1885년 본국 으로 귀임했다. 이후 부임한 원세개에 의해 1887년 부산에, 1889년 원산에 중국 조계가
19세기 말 조선의 중국인 居留地와 운영체제 / 박 정 현 223 설치되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4조의 규정에 의거하여 청은 인천ㆍ부산ㆍ원산의 각 개항 장에 그들의 專管租界를 갖게 되었고, 漢城에서도 다른 나라보다 먼저 상민들이 거주ㆍ 통상하게 되었다. 한성에는 조계나 외국인 거류지역이 설정되지 않았지만, 청국에서 임오 군란 진압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하고, 이때 군대와 같이 들어온 청의 군역상인 40여 명 이 조선에 거주하면서 이를 빌미로 각국에서 균등한 혜택을 요구하면서 외국인이 거주하 게 되었다. 중국인은 한성 거류 초기부터 도성 안에 분산 주둔하고 있던 2,000명이 넘는 청군의 보호 아래 거주ㆍ영업 등에 별로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조선인과 다름없는 자유 를 누릴 수 있었다. 조선에서 화상들은 한성과 조계를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영위했다. 조계는 중국인들이 조선에서 활동을 확대하는 거점 구실을 했다. 예를 들어 동순태의 경우 한성 외에 인천 에 지점을 두었고, 상해와도 연결되었다. 원산 조계의 경우 훈춘-원산-인천/한성-상해-나 가사키를 연결하는 화교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화교의 네트워크를 통해 중국인 상인들은 조선 내지에도 활동 범위를 넓혔다. 2. 조선의 중국인 거류지 운영방식 조선에 설치된 조계의 선행사례인 중국의 경우, 조계가 설정되면 영사관을 설치하고 영사의 지휘 아래 납세자 회의에서 조계의 운영을 규정을 마련하여 입법기관의 역할을 했다. 또한 조계에는 독자적인 행정기구인 工部局과 조계 경찰국인 巡捕房이 있었다. 조 계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영사재판권이 행사되었으며, 독자적으로 법원을 운영했다. 조계 에서는 자체적인 무장으로 의용대와 파견군이 조계의 안위를 담당했다. 조선의 청 조계에는 紳董公司를 설치해서 조계의 입법과 행정업무를 관장했다. 신동공 사는 法人으로 인정되어, 각종 계약을 체결할 때, **신동공사라는 단체의 명의를 사용했 다. 신동공사에 대한 소송은 조선 외부대신과 한성 주재 해당 국가 공사로 구성된 법정 에서 이루어졌다. 신동공사는 조계내의 모든 문제를 논의했다. 특히 지세의 수취와 사용, 지세의 결정 등의 문제가 주로 논의되었다. 조계 내 문제는 각국 공사와 조선 외부가 최 종 책임을 졌다. 청 조계 내 기관과 조직에 대한 규정은 신동공사가 설치되었다는 것 외 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청 조계 내 조직과 기관은 각국 조계의 기관과 조직을 원용했기 때문에 이것을 살펴보면 청 조계의 운영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조계 내 紳董公司의 구성은 조선의 해당 지방 監理 또는 이에 상당한 지위를 가진 조
224 선 관료, 해당 국가의 지역 주재 영사, 등록 지주 가운데 선거로 선출된 3인 이하의 議 員으로 구성되었다. 의원의 피선거권은 등록 지주에 한해 주어졌고, 지주라 하더라도 지 조부과금과 諸稅를 완납하지 않았을 때는 피선거권이 없었다. 신동공사에서는 규칙을 제 정하여 조계 내 질서를 유지했다. 조계 내 도로 수리 등의 공사는 신동공사뿐만 아니라 조선정부에서도 분담했다. 그래서 도로 수리를 할 때에는 반드시 조선 관리와 협의했다. 신동공사는 조선 정부를 대신해서 조계의 지세를 징수하기도 했다. 신동공사는 조계 내에 청사를 신축하고, 하부 기구로 외국인 출납 관리, 조계경찰을 설 치했다. 신동공사는 조계 내 치안을 위해 상당수의 조계경찰을 유지했다. 조계경찰은 조 계 지역 내에서 불법 행위를 하는 자를 체포ㆍ구금했으며, 직권으로 이를 처벌하는 수속 을 했다. 인천의 각국조계 신동공사 청사에는 각국 경찰청사와 감옥이 설치되어 외국인 서장 아래 일본인 3명, 중국인 1명의 巡捕가 고용되어 있었다. 청은 조계의 행정과 치안 을 위해 신동공사 외에 화상의 동향단체인 회관을 적극 활용했다. 조계의 신동공사는 조 선의 지방관이면서 무역을 감독하는 監理와 협조 아래 조계 행정ㆍ치안을 유지했고, 감 리아문의 순포와 협력하여 질서를 유지했다. 조선 내 조계는 중국 조계와 달리 배타적인 행정지역이 아니라 외국인 거류자를 위한 특별 행정구역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독립적으 로 존재할 수 없었고, 조선 관리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조계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조계설정국의 행정권이 전적으로 행사되는가, 아니면 행정 권이 부분적으로 미치는가에 따라 Concession과 Settlement로 구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 다. <각국조계장정>에는 원문에 영문으로는 Settlement, 일본문으로는 居留地, 한문으로는 租界로 표기되었다. 원래 거류지와 조계(Concession)는 구분되고, 그 가운데 토지법률 관 계에서 엄격하게 구별해야 하지만, 많은 경우 동의어로 혼용하고 있다. 仁川府史 에서도 인천의 중국인 거류지는 Concession보다는 Settlement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청국 조계는 중국인 거류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특히 한성은 조계가 정식으로 설정되지 않았고, 중국인이 조선인과 잡거하고 있었다. 조선 거주 중국인에 대해서는 조 계 내외를 막론하고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이 관철되기는 했지만, 조선의 치안기관과 공 동으로 치안을 유지하고 독자적인 경찰기구를 설치하지는 않았다. 청은 조선에 조계를 설치하기는 했지만, 조선에 대한 실질적 지배를 관철시키는 기구 가 아니라 서구 열강의 예를 따라 조선에서 경제적 이익을 확대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했 다. 따라서 청은 정치적으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기는 했지만, 조선에 대한 실질 적 지배권을 확립하지 못했고, 이에 대한 구상도 전무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말 조선의 중국인 居留地와 운영체제 / 박 정 현 225 3. 순사청을 통해 본 청의 조선 지배방식 인천ㆍ부산ㆍ원산과 달리 한성은 조계가 정식으로 설정되지 않았고, 중국인이 조선인 과 잡거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한성에 외국인 거류지역이 설정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 미를 가진다. 특히 조계가 설정되고 이 조계가 어떤 형태로 운영되었는가는 조계의 성격 을 규정하는데 중요하다. 조선의 조계에는 독자적인 경찰력이나 공무국과 같은 행정기관 이 존재하지 않았다. 청국 조계의 경우 영사관 주도로 華商 대표로 구성된 紳董公司에서 행정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기는 했지만, 조선에 치안과 행정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었다. 갑신정변 이전 청과 일본은 조선에 파견된 군대를 동원하여 자국 상인들은 보호 했다. 천진조약 체결 뒤 양국 군대가 철수하고 원세개는 조선에서 국왕에 버금가는 위세 를 자랑했지만 조선에 실질적인 압력을 가하거나 청국 상인 보호를 위한 무장력은 없었 다. 조선 거주 중국인에 대해서는 조계 내외를 막론하고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이 관철되 기는 했지만, 조선의 치안기관과 공동으로 치안을 유지하고 독자적인 경찰기구를 설치하 지는 않았다. 따라서 국내 거의 대부분의 논문에서 한성의 巡査廳과 稽査局을 청의 경찰 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현재 한국의 거의 모든 연구는 巡査廳에 관한 기술에 서 한국의 연구자들은 모두 京城府史 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京城府 史 는 인용근거도 없고 巡査廳은 경찰서로, 稽査局은 파출소로 기술했다. 이것은 순사청 과 계사국에 대해 잘못 이해했거나, 의도적인 왜곡으로 보인다. 이러한 잘못은 기본적으 로 순사청과 계사국에 관한 자료가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순사청의 성격과 역할은 순사청의 설치 과정과 업무를 보면 청의 경찰기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순사청 설치는 중국상인이 한성에 거주하면서 상업활동을 했던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외국상인들의 한성 開棧(상점 개설)은 조선에서 가장 유력 한 위치에 있었던 한성상인의 상업활동을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로 조선 상인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조선상인과 중국상인의 갈등이 높아지면서, 조선인의 중국인에 대한 인식도 나빠져 중 국인에 대한 공격이 증가했다. 한성의 일본인 상가는 남산 아래 泥峴에 집중되어 있고, 巡捕 수명을 파견하여 방범과 경비를 하고 있어 도난과 방화 등의 사건을 방지하기 쉬웠 다. 하지만 중국인 상가는 정해진 곳에 상가를 개설하지 않고 각각 편리한 대로 개설하 여 산재되어 있었다. 한편 한성은 치안이 불안했다. 병졸들이 야간에 순찰을 했지만 거의 유명무실했다. 조선은 중국 산동지방과 아주 가까워 산동지방에 기근이 들면 실업 유민이 생계를 위
226 해 조선으로 많이 건너왔다. 이들 불법 유민에 대해 조선 지방관과 청에서 단속을 했지 만, 근절시키는 것을 불가능했다. 이에 조선에 오는 중국 유민들이 점차 늘어났다. 한성 내외 상가는 80여가에 불과하지만 匠人, 手藝, 영세 등짐장수 등은 이미 오백 수십여 명 에 이를 정도였다. 그 가운데에는 도둑이나 비적의 무리도 섞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7년 겨울 하룻밤에 화상 점포 4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3명이 죽 었다. 1888년 5월 2일에는 서문 내 同興號에서 밤에 화재가 발생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 했고, 5월 6일 밤 2시 경에는 남문 내 상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모두 증거 가 없어 조선 비적의 행위인지 중국인의 소행인지 알 수 없었다. 한성에는 조선 巡夜兵 이 있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고 숫자도 부족해서 상인들이 밤마다 불안해했다. 청에서는 조선 비적에 의한 화상 공격과 중국인 유민의 범법행위에 대처해야 했다. 이 에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군대를 파견해서 순찰 방비하여 화상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 다. 하지만 이홍장은 군대 파견에 반대하고 대신 巡査로 방범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暫 擬創辦漢城巡査條規>를 내려 보내 순사제도의 자세한 내용을 규정했다. 원세개는 龍山商 務委員에게 명령하여 巡査委員을 설치하여 상인 보호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순사위원은 먼저 남문 내와 동문 내 두 궁궐(덕수궁과 창덕궁 일대) 일대 중국 상인이 집거해 있는 지역을 각각 南市와 東市와 西市로 나누고 서북 일대 산재, 고립되어 있던 상가 10여 곳 을 南市와 東市로 이주시켰다. 한성의 화상들은 처음에는 경비 염출을 꺼려하여 순사 창설에 반대했지만, 계속 방화 와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불안하여 상무총서의 권유를 따라 1889년 5월 20일 순사청을 개설했다. 순사청의 업무는 1) 방범, 2) 화재 예방, 3) 분쟁 해결, 4) 가로 정리 등 크게 4가지였다. 순차는 조선인 비적으로부터 중국상인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지만, 아울러 중국인 유민을 단속하고 색출하는 것도 중요 임무였다. 순차는 중국 거류민을 보 호하는 동시에 감시ㆍ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순사청과 함께 파출소로 불렸던 稽査局은 해관조직의 일부로 항구에서 선박의 화물을 조사하고 밀수 방지를 전담하는 기관이었다. 당시 조선에 稽査局이란 조직이 설치되었는 지는 의문이다. 청의 기관에 조선에 설치되었으면, 반드시 組織章程이 있어야 하는데 순 사청 장정에도 계사국에 관한 조항은 없고, 따로 조선과 청의 기록에 계사국을 설치했다 는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다. 京城府史 의 내용에 따르면, 계사국을 마포에 설치했고 도 선장을 관리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유추해보면 1887년 설치되었던 마포의 해 관분국일 가능성이 높다.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노력 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실질적 지배를 위한 구체적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다. 청의 시
19세기 말 조선의 중국인 居留地와 운영체제 / 박 정 현 227 야는 양무운동 차원의 근대화에 머물러 있었다. 청은 조선에 조계를 설치하고 한성에 중 국인 거류지를 확보하고, 화상을 적극 보호했지만, 이는 일본이나 서구 열강을 모방해서 실행하는 수준이었다. 청은 정치적으로 종주국 관념으로 조선에 압력을 가했지만, 조선 지배를 위한 실질적 기구나 수단은 거의 없었다. 조계를 설치한 뒤, 조계 내 행정기구도 서양 국가를 모방해서 설치했다. 치외법권과 영 사재판권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이것도 서구 열강 수준이었다. 임오군란 뒤 청 군대가 한 성에 주둔하면서 실질적 지배를 했지만, 천진조약 뒤에는 실질적 지배수단이 전무했다. 국내 연구자들은 천진조약 뒤 청이 경찰서를 설치하고 군대를 대신해서 여전히 조선에 경찰력을 통한 지배력을 유지했다고 보고 있지만 실제로 청은 조선에 대한 실질적 강제 수단이 전혀 없었다. 물론 조선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조선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파견 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영향력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실질적 지배수단은 되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실질적 지배를 위해 군대 파견을 계속 요청했지만, 이홍장은 서구 열강과의 관계 때문에 조선에 대한 실질 지배를 원하지 않았 다. 천진조약 이후 청이 조선에서 여전히 우월적 지위에 있을 수 있던 이유는 국제적인 묵인과 서구열강의 현상 유지 욕구 때문에 가능했다. 결론 조선의 청국 조계는 중국인 거류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특히 漢城에는 조계가 정식으로 설정되지 않았고, 중국인이 조선인과 잡거하고 있었다. 조선 거주 중국인에 대 해서는 조계 내외를 막론하고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이 관철되기는 했지만, 조선의 치안 기관과 공동으로 치안을 유지하고 독자적인 경찰기구를 설치하지는 않았다. 청은 조선에 조계를 설치하고 한성에 중국인 거류지를 확보하고, 화상을 적극 보호했지만, 이는 일본 이나 서양을 모방해서 실행하는 수준이었다. 청은 정치적으로 종주국 관념으로 조선에 압력을 가했지만, 조선 지배를 위한 실질적 기구나 수단은 거의 없었다. 국내 연구자들은 천진조약 뒤 청이 경찰서를 설치하고 군대를 대신해서 여전히 조선에 경찰력을 통한 지배력을 유지했다고 보고 있지만 실제로 청은 조선에 대한 실질적 강제 수단이 전혀 없었다. 물론 조선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조선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파견 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영향력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실질적 지배수단은 되지 못했다. 천진조약 이후 청이 조선에서 여전히 우월적 지위에 있을 수 있던 이유는 국제적인 묵인과 서구열강의 현상 유지 욕구 때문에 가능했다. 청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
228 을 유지하고 더욱 강화하려고 했지만, 청은 조선에 자신의 제국주의적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비전이나 실질적 수단을 가지지 못했다.
중국민주동맹의 좌절과 선택 국공내전시기 제3 세력의 독자성 모색 손 승 희(인천대) 目 次 머리말 1. 국공 충돌의 조정자로서의 인식과 역할 2. 조직력 강화와 중간노선론 에 대한 회의 3. 민주ㆍ평화에서 민주ㆍ혁명으로 결론: 民盟의 한계를 겸론하여 머리말 중국민주동맹이 활동했던 1940년대는 그 어느 시기보다 중국헌정사에서나 근현대사상 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중국이 민주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일당독재는 강화되었고 지식인들과 공산당 등 반국민당 세력에 대한 탄압은 극심했다. 이에 민주적인 지식인들은 국공 양당의 대립을 완화시키고 국공 내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국민당도 공산당도 아닌 제3세력밖에 없다고 인식하게 되었 다. 그러나 그 역할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국공의 대립이 첨예화함에 따라 민주동맹은 국공 양측으로 흡수되어 버리고 역사평가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나타나고 있지만 서구의 다당제를 수용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시종일관 부정적이다. 그러나 정치체제의 개혁이라는 면에서 중국정부가 수용할 수 있는 방안을 오래전부터 모색해왔고 그것은 民主黨派의 기능강화 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즉 중국공산당의 국가에 대한 영도적 지위는 유지하면서 민 주당파와의 多黨合作 혹은 政治協商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러한 형태를 중 국 특색의 사회주의 정당체제 라고 부르며 서구 민주주의와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있다. 다당합작제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각 당파 각계 대표에 의한 연합정부의 형태
230 를 취하고 있었던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 때 참여했던 민주당파 중 1940년 대 역사적으로 가장 큰 역할과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 중국민주동맹(이하 民盟)이었다. 1940년대 民盟과 마찬가지로 현 중국의 다당합작제에서 민주당파의 주요한 역할은 집권 당에 대한 견제와 감독이다. 그러나 아무리 중국이 민주당파와의 다당합작제를 강화한다 고 해도 민주당파의 정치적 지위와 역할 및 다당합작제에 대한 구체적인 법적 규정이 없 는 한, 이러한 민주당파 본연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1) 그런 점 에서 민주당파의 역할과 기능이 더욱 확대되어 어느 정도의 독자성이 확립하게 되기를 기대하며 1940년대 民盟의 역할과 의의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民盟 내부에는 서로 다른 사상적 배경을 가진 정파들이 존재했고 그들의 민중에 대한 이해와 국가건설 방안도 분명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결집을 이루게 되었던 것은 인권과 민주를 보장하는 정부만이 국가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라고 하는 공감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의 절대 단결이 필요했고 국공의 정치 적 사상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그들뿐이라는 자기 인식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은 양당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이었다. 이러한 임무를 담당하기 위 해서는 民盟의 독자성을 견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民盟의 설립 자체가 국공 양당을 조 정하기 위한 사명을 우선으로 했고 국공과는 달리 일관되게 민주와 평화적 방식에 의한 국가건설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民盟의 독자성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을 역사의 주체로 파악하여 그와의 관련성 속에서 제3세력을 파악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중국의 경우, 제3세력이 견지하 고자 했던 독자성이나 중재자로서의 중간역할은 경시되고 중공의 동맹자, 혹은 조력자로 서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서구나 일본, 대만의 연구는 제3세력을 자유 주의와 동일시하여 근대 지식인들이 근대중국 사회에서 만들어 갔던 자유주의 혹은 민주 주의의 전통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연구가 다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와는 다른 경향 을 보였던 民盟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다. 또한 기존의 연구는 중국의 제3세력이 실패한 원인을 제3세력의 나약함, 혹은 조직의 방만함 등 제3세력 자체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2) 그러나 중국의 제3세력의 실패를 그들 자체에서만 구할 것이 아니라 국내외 정세, 특히 미소의 대립과 미국의 對華정책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 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 2) 문흥호, 中國 民主黨派의 政治的 機能과 多黨合作, 중국의 시장화 개혁과 정당체제, 1997. p.38. Edmund S. K. Fung, In Search of Chinese Democracy-Civil Opposition in Nationalist China, 1929-1949,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p.238-240.
중국민주동맹의 좌절과 선택 / 손 승 희 231 따라서 본고에서는 국민당이나 공산당과의 관련성에서 탈피하여 民盟 자체와 그 독자 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미소의 대립, 미국의 대화정책 등 국내외 정세의 변화와 그 에 따른 民盟과의 상관관계를 고려하고자 한다. 우선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국공 충돌의 조정자로서의 인식과 역할을 살펴보고 자체 조직력과 대중 역량 강화에 대한 인식의 변 화, 그리고 民盟이 가장 중시했던 민주 와 평화 라는 문제에서 평화 가 후퇴하고 혁명 주장으로 전환되는 인식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국공 충돌의 조정자로서의 인식과 역할 1) 중국민주동맹의 성립과 독자성 확립 노력 환남사변을 전후로 1941년 봄 각 당파의 대표 鄕村建設派의 梁漱溟, 職業敎育派의 黃 炎培, 中國靑年黨의 左舜生, 國家社會黨의 張君勱, 第3黨의 章伯鈞, 丘哲 등이 중경에서 국공에 대한 제3자적 성격을 가진 중국민주정단동맹을 설립했다.(1944년에는 중국민주동 맹으로 개칭) 1945년10월에는 임시전국대표대회를 열고 民盟의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民 盟은 민주가 실행되지 않으면 어떠한 정치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民盟은 민 주의 실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세계의 조류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 계의 모든 국가가 반드시 민주국가가 되어야 하며 중국도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 다.3) 그런데 이러한 민주 를 중국에서 실현시키는 것을 民盟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1946년1월10일 국제사회에서 美蘇의 긴장이 완화된 가운데 정치협상회의(이하 정협)가 개최되었다. 정협에서 다루어진 주요 안건은 각 당파간의 이해가 상충되었기 때문에 적 지 않은 논란이 있었지만, 결과는 양보와 조정으로 합의에 성공했다. 정협결의의 가장 중 요한 정신은 정협에 참여했던 각 당파가 평등 합법적 지위로 연합정부를 조직함으로써 단결과 통일의 목적을 달성하고 이를 통해 중국의 민주헌정을 실현한다는 데에 있었다.4) 그러나 정협회의 결과는 국민당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1946년3월에 열린 국민당 제6 회2중전회에서 정협의 결의내용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民盟의 비판과 주장은 격렬했다. 民盟은 내전 반대와 정협결의의 실행을 촉 구했다. 정협의 운용방식은 각계각층의 의견을 반영하여 각 당파가 평등하게 협의하는 민주적인 방식이었다. 따라서 정협은 民盟이 일관되게 추진했던 이상적인 정치형태였던 3) 4) 臨時全國代表大會政治報告, 中國民主同盟歷史文獻(1941-1949), p.72. 中國民主同盟對時局宣言(1947.4.25), 中國民主同盟歷史文獻(1941-1949), p.320.
232 것이다. 民盟은 정협에 참석했던 각 당파는 반드시 정협의 결의사항을 준수할 의무가 있 고 정협결의에 의거하여 민주적인 절차와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가건설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 국공의 무력충돌 방지였 고 民盟의 독립성과 중립성의 유지였다. 그러나 그 방향은 국가의 평화와 통일, 단결과 민주로 나아가는 것이었으며 시비곡직을 떠난 절대적인 중립을 의미하는 것을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도 민주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것이었다.5) 民盟은 평화와 민주를 쟁 취하는 것을 최대의 임무로 삼고 있었고 중간파의 입장에서 끝까지 정치협상 결의 실현 을 위해 분투할 것을 천명했다.6) 2) 내전반대와 정협결의 촉구 따라서 民盟이 당시 상황에서 추진했던 것은 내전반대, 정부개조, 국민대회 소집문제 등 정협결의 촉구에 집중되었다. 民盟은 모든 협상을 하기 전에 국공의 내전은 즉각 중 지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그래서 民盟은 일체의 중국 내부의 문제는 군사적으로만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정치적인 협상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 북문제를 둘러싸고 국공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民盟은 국공 양당의 조정자로서 그 역할을 자각하였고 조정공작을 활발하게 전개했다.7) 이들의 의견은 반드시 정전을 해야 하며 군사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정치문제도 포함시키며, 이것을 항구적인 정전으로 이끌 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민당은 한편으로는 내전을 발동하고, 한편으로는 담판을 제의하는 등 이중성을 드러냈다. 동북에서의 내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1946년 8월말 국민당정부는 갑자기 정부 조직(국민정부위원회)의 개조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5인 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의했고, 10 월에는 국민당이 단독 결정으로 11월 12일에 국민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국민정부 위원회를 개조하는 것은 정치민주화의 문제인데, 이미 합의를 본 정협을 소집하여 각당 파의 대표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형태가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국민당이나 공산당은 국공 양당 혹은 마샬이 참여하는 군사담판을 중시하고 제3세력을 소외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民盟이 추구했던 것은 국민당과 공산당만의 군사 적 담판이 아니라 각 당파의 대표가 민의를 대변하고, 군사 문제뿐이 아니라 정치, 경제 5) 6) 7) 臨時全國代表大會政治報告(1945.10.11), 中國民主同盟歷史文獻(1941-1949), p.71. 勗赴京的同盟同志們, 光明報 新5號(1946.10.28); 黃藥眠, 堅持政協決議的立場, 光明報 新5 號 (1946.10.28). 中國民主同盟發言人對東北問題發表談話 (1946.2.23), 中國民主同盟歷史文獻(1941-1949), 文史 資料出版社, 1983.4, p.146; 華商報 (1946.2.25).
중국민주동맹의 좌절과 선택 / 손 승 희 233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협상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民盟은 첨예한 국공의 충돌을 완화시키고 국가의 방향을 민주와 평화의 방향으로 인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10월21일 정부의 초청으로 民盟과 기타 당파의 정협대표가 모여 국공 조정과 국민대회문제를 논의 했지만 결국 합의를 보지 못하고 조정은 실패하게 되었다. 民盟이 국공 조정에 실패한 후 각계의 관심은 民盟의 국민대회 참여 여부에 집중되었다. 국민당은 民盟을 국민대회 에 끌어들여 민주 의 명분을 충실히 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民盟은 국민대 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국민당 단독 결정에 의해 소집된 국민대회는 정협결의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었고 정협결의의 절차를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民盟이 국민들의 신 뢰를 얻고 민주 평화 건국의 지렛대로서 기대를 받고 있던 이유는 바로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民盟의 정체성과 정당성이 획득되는 것 이었다. 2. 조직력 강화와 중간노선론 에 대한 회의 1) 조정 실패 인정과 자체 조직력 강화 인식 民盟과 공산당을 배제한 채 국민당에 의한 국민대회가 개최되었고 헌법이 통과되었다. 또한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하여 국민당의 독재와 민주인사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1946년12월23일 民盟2중전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民盟은 국공 조정 의 임무가 실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8) 民盟 성립 당시, 국공 양당을 조정하 여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통일 건국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는 장기적인 준비는 아니었다. 民盟의 역할은 과도기적이며 일시적인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연합정부가 구성되면 평화와 민주를 이끌어갈 초석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전망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국공의 대결이 내전으로 치닫자 民盟은 더 이상 조정 이라는 것이 실효성이 없다고 인 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民盟은 국공 충돌의 해결에 대해 여전히 낙관적인 전망을 버리지 않았다. 현재 비록 民盟의 조정작업은 실패했지만 이것은 단지 일시적인 것이므로 국공 양당이 전장에서 우위를 결정하도록 잠시 내버려두자는 것이다. 결국 양당이 전쟁에 지 쳐서 반드시 협상의 장으로 돌아올 것이고 분열에서 단결로 전환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 라서 그 때를 대비하여 조직력을 강화하고 인민의 역량을 최대한 결집시킬 필요가 있었 다. 民盟이 단순히 국공 양당을 조정하기 위한 당파 연합체라는 실체에서 벗어나서 독립 8) 胡愈之, 民盟二中全會與國內局勢, 光明報 新12號(1947.1.8).
234 적인 정치단체, 혹은 정당으로서의 조직과 역량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이다. 民盟의 2중전회는 바로 그러한 준비를 선언한 것이었다. 실제로 지식인들의 연합체 에 불과했던 民盟이 국공 조정은 장기적인 시각과 노력, 그리고 민주의 대결집이 필요하 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국공 조정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民 盟이 양당 사이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民盟이 국민대회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독립적인 입장과 조정자로서의 신분을 견지하기 위해서 였다. 오직 초연하고 독립적인 제3자의 입장에 서야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정쟁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 다.9) 2) 지식인들의 對美 인식 그러나 현실에서는 국공 내전이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내전은 단지 중국만의 국내 문 제가 아니었고 미소의 대결이 국공 내전과 맞물리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특히 미 국의 對華정책은 국공내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947년1월 마샬이 국공 조 정 실패 후 중국을 떠나면서 성명을 발표했는데 전적으로 국민당을 지지한다는 내용이었 다. 뿐만 아니라 마샬은 자유주의자가 결합하여 장개석을 도와준다면 통일된 정부가 조 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民盟은 마샬을 비판했다. 民盟은 중국의 내전 확대는 주로 駐華미군의 국민 당정부에 대한 협조와 미국정부의 군사와 재정 원조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다.10) 民盟은 중국의 평화와 민주가 단지 중국인들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고 반드시 미국 과 소련 등 국제관계 속에서의 해결이 관건이라고 인식했다. 중국의 내전이 국제사회의 영향을 상당히 받고 있다는 인식은 民盟 지식인뿐이 아니라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중국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미국이 중국을 진정한 민주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압박해주기를 원했다.11) 그들은 미국이 자유와 민주를 중국에 이식시 켜 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중국이 평화적으로 국가 건설을 하게 될 경우 미국의 경제적인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12) 그러므로 장개석의 지도하에 자유주의자들의 결집을 주문한 마샬의 성명은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이 중간노선 을 주 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국공내전을 피할 수 있는 방편으로 중 9) 10) 11) 12) 張瀾先生在上海各人民團體歡迎茶會講演詞, 光明報 新11號(1946.12.31). 美軍駐華沒有威脅世界和平嗎?, 光明報 新5號(1946.10.2); 對馬歇爾聲明發表書面意見, 光明 報 新13號(1947.1.18); 中國不是美國附庸, 華商報 (1947.1.15); 美對華軍事干涉引起廣泛不滿, 華商報 (1946.12.26). 儲安平, 我們對于美國的感覺, 觀察 第1卷第11期(1946. 11.9). 張東蓀, 美國對華與中國自處, 觀察 第2卷第6期(1947.4.5)(원출처: 文匯報 1947.3.30).
중국민주동맹의 좌절과 선택 / 손 승 희 235 간노선의 결집을 주장했다. 3) 중간노선론 에 대한 회의 중간노선 논쟁은 우선 제3방면 의 입장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1946 년12월 文匯報 에 제3방면은 중립이 없다 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제3방면 의 입장은 중 립 이 없고 오직 是非 만이 있다고 선언했다.13) 이에 대해 다수의 지식인들이 제3세력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면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 과정에서 施復亮의 중간파의 정 치노선 이라는 제목의 사설이 게재되면서 본격적인 중간노선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중간 노선 논쟁은 民盟에 대한 이제까지의 평가와 제3세력의 나아갈 방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民盟을 비롯한 제3세력 내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중간노선을 주장한 지식인은 施復亮, 張東蓀, 錢端升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정협노선 의 회복을 촉구하고 중간계층의 정치역량을 강화하고 결집해야 한다는 것을 피력했다. 이들은 중간계층은 독자적인 제3방면 의 역량이므로 국공 양당과는 다른 독자적인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간노선을 결집하여 강력한 역량으로 성장한다면 국공 사이에게 중립을 유지하면서 평화와 민주의 길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 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들은 국공의 문제를 국내 문제로 한정하지 않고 미소의 대립과도 연계시켜 사고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각각 극단을 달리고 있고 거기에다 미국과 소련 이 극단으로 가게 된다면 인류와 문화가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며 중국은 그 비극의 무 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세계의 안위와 전인류의 존망이 중국에 달려 있다고 인식 했던 것이다. 따라서 국공 사이에서는 제3세력이 조정하여 평화를 도모하고 미소의 중간 에는 중국이 제3자의 역할을 담당하여 세계의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중간 노선은 국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미소의 대립을 완화하여 세계의 평화까 지 도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15) 그러므로 이들은 이제까 지 해왔던 것처럼 民盟이 제3세력의 중심이 되어 역량을 더욱 강화하고 독립적인 위치에 서 국공간의 평화를 도모하여 정협노선이 실현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民盟 및 기타 제3세력 지식인들은 제3방면 과 중간노선 에 대해 회의적인 시 각을 보였다. 대표적인 사람은 馬敍倫, 平心, 鄧初民 등으로 공산당측에 가까운 인사들이 었다.16) 이들은 文匯報 나 民盟의 기관지 光明報 를 통해 제3방면 과 중간노선을 비판했 13) 14) 15) 16) 社評: 第三方面沒有中立, 文匯報 (1946.12.22). 張東蓀, 美國對華與中國自處, 觀察 第2卷第6期(1947.4.5)(원출처: 文匯報 1947.3.30). 施復亮, 再論中間派的政治路線-兼答平心先生, 文匯報 (1947.4.13). 鄧初民은 구국회 회원이자 民盟의 중앙위원이었고 馬敍倫와 平心은 모두 민주촉진회의 회원이
236 다. 이들은 중간노선이라고 해서 특별히 무슨 제3자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 다. 이들은 정협결의안이 국민당에 의해 전복된 이후 정치상황은 민주 와 반민주 의 양 방면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제3방면 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7) 이러한 民盟의 중간 노선에 대한 회의적인 관점은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8) 民盟의 중간노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이제까지 民盟이 견지해왔던 국공 양당 사이의 독립적이고 중립적 인 입장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3. 민주ㆍ평화에서 민주ㆍ혁명으로 1) 혁명으로의 전환과 자유주의 비판 1947년10월27월 국민당정부가 民盟을 불법단체라고 선포했다. 이로써 民盟은 이제까지 견지해왔던 공개적인 활동과 합법적인 방법에 의한 민주와 평화의 쟁취라는 기본원칙을 견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民盟의 목표와 의도가 좌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상해에 있던 民盟 총부가 해산을 선포하자 沈鈞儒, 史良 등 일부 반대자들이 홍콩으로 가서 1948년1월 民盟3중전회를 소집하고 民盟의 새로운 노선과 정책을 확정했다. 民盟 3 중전회에서는 민주 는 여전히 견지하되 평화 를 일단 보류하고 공산당과 합작하여 국민 당 세력에 대한 혁명에 나설 것을 선포했다. 民盟은 국민당의 독재정권 하에서는 평화적 이며 합법적인 공개 정치투쟁은 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진정 평화와 민주를 실현하려 한 다면 장개석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19) 이로써 民盟의 3중전회는 이제까지 견지해왔던 평화와 민주, 합법적이며 공개적인 노선을 포기한 것이 었다. 이는 중간노선 종결의 선포였고 民盟의 정체성에 대한 중대한 변화를 의미했다. 국민당정권에 의한 民盟의 불법화와 이에 따른 民盟의 혁명노선 선언은 지식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1948년 지식계의 자유주의 논쟁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다시 불붙은 중간노선 논쟁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1946년말에서 1947년까지진행되었던 중 간노선 논쟁은 중간역량, 즉 제3세력의 국공 양당에 대한 독자성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17) 18) 19) 었다. 馬敍倫, 再論第三方面與民主陣線幷質民主同盟, 文匯報 (1946.12.29); 鄧初民, 民主同盟與第三 方面(上), 文匯報 (1947.1.10); 鄧初民, 民主同盟與第三方面(下), 文匯報 (1947.1.11); 鄧初民, 再論中間路線問題, 光明報 新22號 (1947.7.19). 鄧初民, 論民主與反民主的鬪爭, 光明報 新19號(1947.5.31). 中國民主同盟今後組織工作計劃 (1948.1.5 1회3중전회에서 통과됨), 中國民主同盟歷史文獻 (1941-1949), p.370; 民盟新總部首次招待記者宣布中間路線完結, 華商報 (1948.2.30).
중국민주동맹의 좌절과 선택 / 손 승 희 237 둘러싼 논쟁이었다면, 1948년의 논쟁은 제3세력이 이미 분열되어 국민당을 옹호하는 자 유주의자들과 공산당을 배경으로 하는 民盟 사이의 논쟁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民盟이 3 중전회에서 혁명노선으로 전환을 선언한 것에 대한 일종의 지식계의 반응이었다. 공산당 세력의 확대를 우려한 자유주의 경향의 지식인들이 중간노선의 결집을 옹호하며 자유주 의를 제창했던 것이다. 자유주의 논쟁은 미국의 對華정책과도 관계있다. 주화미국대사 스 튜어트가 1947년12월말, 1948년2월 두 차례 자유주의자가 결집하여 국민당의 장개석을 지지할 것을 제안했고 이것은 지식인들 사이의 자유주의 논쟁의 불씨가 되었기 때문이 다.20)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국민당 통치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공산당보 다는 국민당 통치를 선호했다. 공산당의 통치는 근본적으로 자유를 부인하고 더욱 전제 적일 것이라는 생각이21)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 지배적이었다. 자유주의자들에겐 공산당 통치를 반대한다면 국민당 통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 자 유와 민주, 평화를 사랑하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서 국민당을 견제하게 되 기를 희망했다. 미국이 중국의 자유주의자의 결집을 옹호했던 것은 미국에 우호적인 자 유주의자들의 단결과 결집을 통해 장개석 정권의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民盟 이 비합법화되자 국민당은 民盟을 대신할 다른 중간파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새로운 중 간파는 반드시 국민당을 지지해야 하며 국민당의 체제 안에서 국민당에 대한 조언을 아 끼지 않아야 했다. 그럼으로써 국민당이 이미 일당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연합의 정치형 태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국민당은 청년 당과 민사당 뿐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을 결집하여 국민당을 지지하 게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民盟 지식인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주의운동 을 제창하는 목적과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냈다.22) 자유주의 제창으로 촉발된 논쟁 은 제3세력 내부의 분열을 기정사실화했다. 자유주의자들이 제창한 중간노선론은 국공의 내전과 미소의 대립을 완화시켜 중국이 미국의 반소기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선택한 대안이었지만 이미 그 의미는 희석되고 있었던 것이다. 20) 21) 22) 社評: 自由主義者的信念-闢妥協, 騎牆, 中間路線, 大公報 (1948.1.10); 唐蘭, 我們有沒有中間 路線, 大公報 (1948.1.13); 施復亮, 論自由主義者的道路, 觀察 第3卷第22期(1948.1.24); 黃 藥眠, 自由主義底批判, 光明報 新1卷第1期(1948.3.1); 鄧初民, 答施復亮先生論 中間路線 兼 論 自由主義者的道路, 光明報 新1卷第3期(1948.4.1). 楊人楩, 自由主義者往何處去?, 觀察 第2卷第11期(1947.5.10); 儲安平, 中國的政局, 觀察 第2卷第2期(1947.3.8); 施復亮, 論自由主義者的道路, 觀察 第3卷第22期(1948.1.24). 黃藥眠, 自由主義底批判, 光明報 新1卷第1期(1948.3.1).
238 2) 신정협 지지와 제3 세력의 분열 중간노선을 둘러싼 제3세력 지식인의 분화는 곧 民盟의 본질에 대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民盟은 이미 혁명시기가 도래했으며 혁명의 주체는 다수 인민이고 이를 영도 하는 것은 공산당이라는 것을 분명히 선언했다. 더 이상 중간노선이 중간파를 대표하거 나 대변할 수 없고 대다수의 중간계층은 이미 혁명의 민주 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기존 의 정협노선은 이미 평화적인 민주를 실현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주의자들 은 민족민주혁명 통일전선에 합류하여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23) 뿐만 아니라 民盟은 1948년5월1일 모택동이 제안한 신정협회의를 지지했다.24) 국민당이 民盟을 제도권 밖으로 밀어내고 새로운 제3방면 을 추구하자 이에 대한 民 盟의 선택은 국민당 중심의 정협노선 지지에서 공산당 중심의 새로운 정협노선의 지지였 다. 이는 제3세력이 국민당을 배경으로 하는 제3방면 과 공산당을 지지하는 제3방면 으 로의 분열했음을 의미했다. 民盟의 이러한 결정에는 당시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의 패퇴 가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듯하다. 1947년 가을부터 중공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결정 적인 승리를 하게 되었다. 국제관계에서도 미소의 대립이 점차 첨예화되었고 국공 내전 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 중공을 소련이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냉전의 시작이었 다. 중국의 정치상황이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民盟은 혁명 이 곧 민주 를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상황은 바뀌었다. 중화인민 공화국 성립 후 1949년12월 民盟 4중전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民盟은 공산당의 지도권 을 인정했다. 이것은 중공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의미했다. 이는 民盟이 중공과 평등한 관 계의 당파라는 그 본연의 성격과 독립성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결론: 民盟의 한계를 겸론하여 民盟이 민주와 평화의 방법으로 국가 건설을 하겠다고 했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은 民盟 성립 당시의 民盟의 성격과도 상당 정도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 다. 民盟은 정권을 획득하여 자신들의 정치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정당과는 성격이 달랐다. 民盟은 국공 양당 사이에서 이들을 조정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하 23) 24) 李伯球, 僞自由分子與眞自由分子的兩條道路, 光明報 新1卷第3期(1948.4.1). 本盟致全國各民主黨派各人民團體各報館墍全國同胞書, 光明報 新1卷第8期(1948.6.16); 社論: 我們贊同迅速召開新政協, 光明報 新1卷第8期; 沈志遠, 展開新政協運動, 光明報 新1卷第8期 (1948.6.16).
중국민주동맹의 좌절과 선택 / 손 승 희 239 기 위한 과도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정권 획득에 목적을 둔 것이 아 니었기 때문에 국공 양당 중의 우세한 세력을 지지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국가를 건설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民盟이 국공 양당 사이에서는 독립적으로 균형추 역할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국민당으로부터 불법화된 후 공산당과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독자성을 견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民盟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民盟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民盟이 당시 국제정세 특히 미소의 대립과 미국의 對華정책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미소관계의 악화에 따라 국 공 양당 사이의 관계도 급속도로 악화되었다.25) 1948년 들어서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 어 공산당이 국민당보다 우세를 점하게 되자 소련은 적극적으로 중공을 지지하게 되었 다. 따라서 民盟이 제아무리 독자성을 지키고 국공 양당 사이의 조정의 역할을 담당한다 고 하더라도 미소가 각각 국민당과 공산당을 지지하고 내전을 획책하고 있는 한 民盟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중간노선의 제창은 국공내전과 미소의 대 립을 피해 중국의 평화와 인류의 평화를 실현하고자 고심했던 중국 지식인의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견지할 수 없을 만큼 국제사회는 변화하고 있었다. 그 어떤 논리보다 강한 냉전의 논리가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25) 楊奎松, 美蘇冷戰的起源及對中國革命的影響, 歷史硏究, 1999年 第5期, p.21.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현황과 과제 천 성 림(한남대) 目 次 1. 머리글 2. 한국에서의 여성사 연구 배경 3. 한국에서의 중국여성사연구의 흐름 4. 중국여성사 연구 상황 5. 앞으로의 과제 1. 머리글 구미,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女性史는 사회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 다. 中國女性史 연구는 199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 연구 主題와 시간적 범위 모두가 협소한 상황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구미, 일본, 대만 등지의 연구와 어느 정도 共時性 을 갖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본고에서는 한국에서의 중국여성사 연구의 배경과 흐름을 간단히 개관한 뒤 그 성과와 과제를 살펴 본다. 2. 한국에서의 여성사 연구 배경 한국에서 여성사는 知的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성사연구가 등장한 배 경을 알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와 여성의 관계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歐美의 여성운동과 여성사연구가 1960년대 후반 反戰運動이나 黑人民權運動 등 사회운 동의 자극을 받아 발전한 것과 유사하게, 한국에서 여성사에 대한 관심은 1970-80년대 대학을 휩쓴 反軍部獨裁 및 民主化運動과 함께 발생하였다. 특히 1980年代初에는 民衆을
242 歷史의 主體로 보는 民衆史觀이 유행하면서, 여성도 민중과 마찬가지로 역사에서 배제되 어 온 마이너리티라고 하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政治史에서 과거에 무시되었던 집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정당화되어 여성도 중요한 연구 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한국에서 여성문제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억압당하고 있는 피지배자 의 하나라고 하는 계급의 문제이기도 했다. 사회문제가 해결되어야 여성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는 시대적 과제는 여성만의 역사를 따로 연구하는 것이 知的遊戱 라고 비판받 게 만들었다. 이는 사회개혁의 신념을 갖고 여성, 특히 하층계급 여성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여성과 남성의 차이 및 여성의 경험이 논의되는 일은 거의 없었던 톰슨 (E.P.Thomson) 등 영국의 新社會史學派의 경향과 유사하다. 한국에서 여성사가 본격적인 연구주제로 부상하는 것은 민주화가 어느 정도 달성된 1980년대 후반 이후의 일이다. 대학 시절 不平等한 社會現實에 대한 분노와 사회개혁의 신념을 갖고 歷史學을 전공했던 그들은 대학원 진학 후, 혹은 사회활동을 하면서 여성문 제가 民族, 民主, 階級과 같은 巨大언설로 還元될 수 없는 독자성을 갖고 있으며 역사를 통해 여성의 固有한 경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들에게 여 성사란 女性의 視點에 서서 여성에게 가해진 모든 차별과 억압의 근원을 찾아내고 문제 를 제기하며 變革에 기여한다 고 하는 실천적인 학문이었다. 그러나 이 실천성 은 연구 자들로 하여금 한국여성사, 특히 한국근대여성사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또한 남북분단이 라고 하는 현실은 연구자로 하여금 민족주의를 극복하기 어렵게 했다. 사실 중국현대사는 독재정권에 반발하는 한편,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1970-80년대 한 국의 청년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또 중국과 여성, 구체적으로 사회주의혁명과 여성해방 은 민주화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가능성 이었다. 그러나 실천지향의 학문태 도, 자국사중심주의, 그리고 냉전에 의한 사료접근의 한계 등으로 인해 金稔子를 제외하 고는 1990년대 후반까지도 중국여성사 분야의 연구자는 거의 없었다.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가 구미, 일본, 대만, 중국 등에 비해 20년 정도 뒤처지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여 기에 있다.1) 1) 2002년, 한국에서 개최된 여성사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한 학자는 한국학계의 연구수준은 중 국본토는 물론 일본, 대만에 비해서도 20년 정도 뒤처져 있다 고 참관기를 남겼다고 한다. 通 過中国婦女看中国歴史国際学術研討会(釜山)参加記, 中国女性史研究 12,2003 参照.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현황과 과제 / 천 성 림 243 3. 한국에서의 중국여성사연구의 흐름 한국에서의 중국여성사 연구의 흐름을 世代에 따라 나누어 보면 金稔子, 李洋子 등으 로 대표되는 제1세대(1970-80년대), 尹慧英, 千聖林, 金貞和 등의 제2세대(1990년대-2000 년대 초), 그리고 李宣坭, 池賢淑, 陳姃湲, 尹美英, 愈蓮實, 張粹芝 등 제3세대(2000년대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세대의 연구 경향은 당시 中國 臺灣 香港과 마찬가지로 人 物硏究와 여성운동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政治史와 革命史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1990 년대 이후 한국에서의 中國史연구는 脫政治, 脫國民國家의 生活史나 微視史를 추구하는 연구가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경향은 女性史 연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활약하고 있는 제2세대는 70,80년대의 激動期에 대학을 다닌 자들로 원래는 政治史, 思 想史를 전공했다가 각자의 문제의식을 갖고 90년대 이후 여성사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연구는 사회사 혹은 思想史와 社會史를 결합한 新文化史의 경향이 강하다. 또한 학창시 절의 지적 분위기와 사회운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여성주의 역사학의 실천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제3세대는 국내적으로 학문상의 禁忌 가 많이 解除되고 국외적으로는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자료수집 등에서 유리해진 연구여건을 바탕으로 연구 주제를 확대하고 있 다. 그들 중에는 台湾 日本 中國 등지에서 학위를 취득한 자가 많아 앞으로 학술교류 의 활성화가 기대된다. 제1세대가 政治史 중심이고 제2세대가 社會史, 思想思 중심이라면 제3세대는 主題의 多元化가 특징인데, 그 중에서도 國家와 女性의 拮抗 예컨대 避妊, 人口政策, 娼妓 政策 등을 통해 본 섹슈얼리티의 통제에 관한 연구가 눈에 띈다. 이상의 世代구획은 중국근현대여성사에 한정된 것이며 전근대 여성사 연구는 女性觀과 여성의 법률상의 지위, 사회경제적 역할과 지위에 관한 토론에 집중해 있지만 공간적, 시 간적으로 연구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또한 단순히 여성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한 정된 사료에서나마 여성의 주체적 행위를 탐색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아쉬운 것은 각 세대간에 학문적 계승관계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제1세대의 대표적인 두 학자는 소통 없이 개별적으로 연구를 진행했으며 두 학자의 연구성과는 제2세대에 거 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2) 제2세대와 제3세대의 관계 또한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더욱 아 쉬운 것은 최근들어 중국여성사 전공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韓國史나 西洋史 에 비해 비교적 女性史에 保守的인 한국의 東洋史學界는 2006년 2월에 아시아 역사상의 女性:經濟活動을 중심으로 라는 주제로 워크샵을 개최했으며 그로부터 4년전인 2002년에 2) 다만 제2세대 중 대표적인 국내파인 池賢淑은 제1세대의 金稔子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244 는 중국사학회 주최로 여성을 통해 본 中國史 라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아 마도 이때가 한국에서의 중국여성사연구의 피크였을 것이며 그후로 오히려 연구자가 줄 어들고 있다. 3)이처럼 韓國에서의 中國女性史연구는 상당히 게토화((ghettoization)해 있고 일반 중국역사학계로부터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부터 살펴 볼 그간의 연 구성과를 보면 고립 속에서도 점진적인 발전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4. 중국여성사 연구 상황 한국에서의 중국여성사의 연구현황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박사를 취득한 陳姃湲(2005) 과 李宣坭(2006)의 훌륭한 리뷰가 있다.4) 전체를 논하기는 어려우므로 여기서는 주로 지 난 20년동안 한국에서 발표된 논문 중 비교적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주제를 소개하려고 한다. 필요한 경우 전근대시기도 포함하며 문학 사회학 등 관련 학문분야의 연구성과 및 한국 이외의 관련연구성과도 언급한다. (1) 女性觀, 女性論 言說의 권력이 젠더, 즉 사회적 性差를 구성한다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아 한 국의 중국여성사 연구도 단순히 여성의 경험을 복원하는 것을 넘어, 여성을 구성하는 다 양한 언설을 분석하는 연구들이 많았다. 또한 사료를 여성의 시점으로 다시 읽는다든가 결을 거슬러 읽기(reading against the grain) 를 통해 역사상의 여성의 주체적이고 능동적 인 모습을 그려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상사적 어프로치라 그런지 남성학자의 참가가 많은 영역이기도 하다. 김염자는 이미 1960년대에 고대의 열녀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 듯 수절 등 윤리도덕적 관념이 아니라 문재와 재변에 뛰어난 여성들을 의미했다 고 했 다. 이성규(2005)는 역사서 중의 의로운 계모상 혹은 악독한 계모상은 유교윤리가 요구하 는 효자와 열녀를 현창하기 위해 조작되었다고 보았다. 김정화(2002)는 사기에 기록된 악 녀 또는 요부의 전형으로 묘사된 여성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여성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 곡된 인식을 찾았다. 3) 4) 한국에서의 西洋女性史 또한 1980-90년대에 각광받는 분야로 인식되었고 그 시기 많은 연구자 들이 이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했었지만 2000년대 이후 점점 줄어들고 있다. 陳姃湲, 補論 近代中國婦女與東亞世界, 從東亞看近代中國婦女敎育:知識份子對 賢妻養母 的改 造, 臺北:稻鄕出版社,2005; 李宣坭,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현황과 과제, 여성과 역사 6,2006. 李宣坭의 논문을 제외하고 중국여성사 연구 성과를 소개한 글이 한국에는 아직 없다.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현황과 과제 / 천 성 림 245 중국에서 유교의 국교화는 前漢시대이지만 그것이 중국인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것은 시민사회가 발달하고 관료제도가 확립하는 宋代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일률적인 것은 아니고 계층 연령 지역에 따라 여성의 생활방식과 지위에는 차이가 있었다. 박지훈(2002) 은 북송대의 理學者들과 司馬光의 家範, 袁采의 袁氏世範 중의 여성관을 분석, 유교 질서가 강화되어 가는 시기인 송대에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열려진 것보다 훨씬 자유로운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주체적인 삶의 경향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權賢珠(2005)는 古代에 성립하여 宋代에 세련화된 女子無才便是德 이라는 관념은 明代 에 이르러 貞節=婦德이라는 논리와 서로 맞물리면서 제도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로 시 고(Dorothy Ko)의 주장처럼, 明淸시대에 유행한 여자는 글재주가 없는 것이 덕(女子 無才便是德) 이라는 말은 뒤집어 해석하면 오히려 당시 많은 여성들이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이며 나아가서는 이를 두려워하는 남성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李卓 吾의 女性觀 및 女弟子들과의 知的交流에 대한 申龍澈(1984)의 연구는 도로시 고의 주장 에 무게를 더해준다. 도로시 고의 연구는 史料의 偏食, 즉 일부 상층 여성의 작품을 통해 女性文化 를 증명했다고 하는 점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抑壓의 含意를 추구하지 않았 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근대인의 시선으로 과거의 여성을 재단하는 것이 서 구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제3세계 여성을 재단하는 것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示唆해준다. 위드머(Ellen Widmer), 만(Susan Mann) 등 미국의 중국여성사연구자들은 최근 명청교 체기의 문학재녀들의 네트워크라든가 삼대에 걸친 여성의 가족사연구를 통해 전통과 근 대를 단절시키기보다 장기지속적으로 파악했다. 최근의 한국에서의 한국여성사연구도 지 금까지 주로 조선시대 여성의 婦德, 守節 등에 관심을 보인 것을 벗어나 조선초기의 여 성지식인 및 그녀들의 저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그 결과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 이 등에 한정되어 있던 여성인물을 탈피해 任允摯堂, 姜静一堂, 貞夫人安東張氏 등에 대 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근대중국지식인의 여성관으로는 鄭觀應, 宋恕, 王韜, 陳叫, 陳熾, 등 早期變法派의 惡習 改革, 纏足禁止, 女性敎育振興에 대한 의론을 검토한 김경혜(2005), 그리고 康有爲의 大同 書 보이는 여성해방사상을 분석한 윤미영(2008), 태평천국의 남녀분리정책을 통해 태평천 국 지도부의 젠더관을 고찰한 최진규(2006), 아나키스트들의 젠더관(2005)을 분석한 조세 현의 연구가 있다. 조세현, 최진규 등 남성학자들은 여성해방론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중국의 혁명사상에서 남성과 여성이 어떻게 규정되고 또 역할을 부여받는가 하는 젠더화 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近代 家父長制가 성립하면서 男女間의 性役割을 고정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특히 강조 된 것 중 하나가 母性이었다. 2000년을 전후해 10년간 한국에서는 母性을 둘러싸고 활발
246 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1999년에는 學際間 연구인 母性의 談論과 現實 5)이 출판되었고, 모성의 신화를 반박하는 책들이 번역되는 한편에서 2002년, 한국을 방문하여 모성을 통 해 여성들이 경험하는 동일화라든가 남에게 베푸는 헌신적인 열정이 빚어낸 신비로운 체 험들을 경험하는 남성은 극히 드물다 며 여성은 이제 더 이상 평등에 집착하기보다 여성 성의 가치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주장에 共鳴하기도 했다. 이때 를 전후해 한국의 페미니즘도 남녀간의 무조건 평등보다는 차이를 강조하면서 모성이나 보살핌 등 여성의 고유한 경험에서 여성적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하는 여성주의의 한 흐 름이 형성되었다. 이에 더해 여성의 경험은 계급 인종 민족 종교 문화 지역에 따라 차이 가 있으며 따라서 일반화는 피해야 한다고 하는 인식이 대두하기도 했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男尊女卑 가 전통사회의 큰 틀이며 기본원칙이었던 것은 분명하지 만 법률보다 관습이 앞섰고 이에 더해 法律의 儒家化 에 따라 孝 와 長幼有序 의 윤리 가 男尊女卑를 압도했고 이로인해 강력한 母權 현상이 출현할 수 있었다. 金貞和(2004) 는 중국역사상 유교적 가족주의에 나타난 강요된 모성과 母后의 攝政과 같은 강력한 母 權至上主義의 예를 살펴보았다. 千聖林(2003, 2004)은 1920년대 중국 지식인들로 하여금 모성이라는 주제에 몰두하게 만들었던 엘렌 케이(Ellen Key)의 영향과 이 시기 중국지식 인들의 母性談論을 분석하였다. 아울러 모성의 拒否 라 할 수 있는 獨身女性問題도 母性 主義의 연장선상에서 고찰하였다. 그녀는 중국의 母性主義가 母以子貴 라고 하는 전근대 의 유교적 모성주의와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의 영향을 받은 서구근대의 優生學이 결합된 것이라고 보았다. 근대의 모성주의는 현모양처주의와 비슷한 내용을 갖고 있는데, 1990년대를 전후해 일 본에서는 동아시아의 가부장제비교와 일본의 양처현모사상을 둘러싸고 많은 연구가 이루 어졌다. 한국에서도 지현숙, 홍양희 등 여러 연구자들은 현모양처는 유교적 전통의 여성 관이 아니라 일본을 경유해 중국, 한국에 전해진 근대국민국가 프로젝트 라고 하는 小山 靜子, 瀨地山角 등 일본 연구자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한국 출신으로 일본, 대만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陳姃湲은 중국사에 한정하지 않고 동아시아적 시점으로 현처양모주의의 기원과 전파를 연구했다.6) 그녀는 현모양처주의가 근대서구에 기원을 갖는, 19세기말 일본 신여성의 형상이었지만 점차 전통적 여성관으로 변모하는데 그 이유는 下田歌子, 服部宇之吉 등 중국여성교육에 적극 개입했던 일본인들 이 교육을 통해 근대서구문명에 대항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30년대 중국의 婦 女回家 논쟁을 고찰한 池賢淑(2003)은 이 논쟁이 일본의 만주 침략과 국내의 복잡한 정 5) 6) 나남출판사. 아쉽게도 이 책에는 한국과 일본, 서구에서의 모성문제만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은 중국어와 일본어로 출판되었지만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현황과 과제 / 천 성 림 247 세, 경제불황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중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이상적 여성국민상 가정에서는 훌륭한 내조자이고 필요할 때는 국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신현모양처 에 대한 토론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말 구미 학계를 지배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여성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앤 스 콧(Joan Scott)은 포스트구조주의 혹은 해체주의 방법론을 통해 젠더의 역사를 연구할 것 을 제기하여 논쟁을 가열시켰다. 性이나 整體性이 고정되고 불변하는 어떤 본질적인 것 이 아니라는 관점을 받아들인 페미니즘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여성 이 구성되는 방 식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중국여성사에 적용하여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는 발로(Tani Barlow) 로, 그녀는 잡지 Position 및 일련의 저술7)에서 언어와 논술분석을 통해 근대 중국에서 여성이 구성 되는 방식 및 근대성과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千聖林은 여성이 가진 生理的, 文化的 가치가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는 가운데 중국에 서 여성 이 구성되었던 1920년대 中國思想界를 性史 의 著者인 張競生을 비롯해 章錫琛, 周建人 등 지식인들의 戀愛와 性 담론을 통해 분석했다. 李宣坭(1999)는 貞操論爭과 新性 道德論爭을 통해 1920년대 중국 여성해방론을 槪觀했고 비교문학 전공의 安哉姸(2010)은 婦女雜誌 를 텍스트로 하여 1920년대 중국인의 新女性과 연애담론을 고찰하였다. 연애 문제는 신여성과 관련해 한국여성사뿐 아니라 문학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논의된 주제였다. (2) 經濟活動과 職業 기존의 남성 중심, 지배층 중심의 역사를 여성의 視點으로 다시 쓰기 위해서는 기록을 전혀 남기지 못한 하위주체 (subaltern) 의 역사에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에서 1970년대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심화되고 그것이 본격적으로 표출된 시기였다. 여성노동자들 의 생존권투쟁이 빈발하는 사회상황에서 여성노동자에 대한 관심도 대두하는데 그 스타 트를 끊은 것은 李效再 등,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社會學者들이었다. 1980년대에 民衆史 學이 유행하면서 한국근대여성사 연구자들도 이 분야에 적극 뛰어들게 되는데 주로 식민 지 치하 여성노동자의 노동상황과 노동운동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러한 연구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근대적 노동과정을 조선에 移植하고 그와 함께 여성노동력을 착취하는 일본 특유의 가부장적 방식을 식민지 조선에서 적극 재창출하였으며 이러한 차별관행이 이후 7) Gender Politics in Modern China:Writing and Feminism(Duke University press, 1993); The Question of Women in Chinese Feminism, (Duke University press, 2004)
248 한국에서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제반 차별구조의 원형을 구성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 다. 1990년대에 활발했던 新女性 硏究의 연장선으로 보이는데 韓國史 연구자들이 2000년 대 들어 와 개척하기 시작한 분야 중 하나는 티켓걸, 엘리베이터걸, 데파트걸, 카페 여급 등 산업화와 도시화, 상업의 확대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근대 여성 서비스직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에 대한 것이다. 전근대 한국여성사 연구자들도 여성의 경제활동과 관련해 많은 연구성과를 내놓았다. 최근 歐美 臺灣, 日本의 중국근대여성사 연구 또한 이전의 女 工, 娼妓 중심에서 이러한 근대적 직업여성으로 관심이 확대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국경 을 초월하는 여성사 연구 영역의 共時性 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의 女性勞動者에 대한 연구는 선구적 업적이라 할 수 있는 小野和子의 舊中國に おける女工哀史 (1978) 이후 1990년대까지 일본과 구미 지역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 다. 각각 上海와 天津의 女性勞動者를 다룬 호니그(Honig)와 허세터(Hershatter)의 연구는 아래로부터의 역사(history from below) 를 강조하는 新社會史, 그리고 1970년대 구미의 女性主義 歷史學의 주요 쟁점의 하나였던 姉妹愛(sisterhood) 등 女性文化의 가치와 한 계 등을 동시에 담은 것이다. 한국에서의 중국근대 여성노동자사에 대한 전문적 연구는 千聖林의 것이 거의 유일하 다.(1997) 그녀의 女性史연구는 社會主義女性解放論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고 자연히 하층여성 특히 여성노동자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연구는 女性主義歷史 學의 초기 특징, 즉 여성을 受動的被害者로 묘사하고 남녀불평등 체제하의 여성의 고통 을 드러내는 수준에 그친 경향이 있었다. 여성들의 고유한 경험, 主動的 행위 등에 관심 을 갖게 되면서 이후 그녀는 저서(2005)를 통해 기존의 결점을 보완하였다. 여성노동운동에 관한 것으로는 權賢珠의 논문이 있는데(1999) 그녀는 여성노동자가 주 체세력으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中共의 지도력을 지나치게 강조한 기존의 연구를 극복하 고 罷業을 통해 여성노동자 자신의 역량이 강화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한국의 동양사학회는 2006년 아시아 역사상의 여성:경제활동 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학회 창립 이후 최초로 여성사를 주제로 한 위크샵을 개최했다. 중국사에서는 尹 在碩, 陸貞任, 千聖林 세 사람이 발표하였다. 尹在碩(2006)은 張家山漢簡 二年律令에 의거해, 先秦부터 漢代까지 비록 규범상 여성 은 가부장권에 종속된 피동적 존재였지만 현실에서는 여성이 戶外의 농업노동이나 상업, 기타 직업에 종사했으며 또한 규정상 여성의 私財蓄積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지 참금 또는 여성이 조성한 가산처분권을 갖는 등 경제력을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여성 이 가계계승자, 戶主가 될 수 있는 규정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는 國家가 家內에서의 여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현황과 과제 / 천 성 림 249 성의 경제활동을 인정하는 것이 가족을 기반으로 한 사회의 基層질서 옹호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陸貞任(2006)은 宋代 유교질서의 강화를 통한 여성지위의 弱化가 性別分業으로 인해 과거 여성들이 주로 담당해 온 紡織業에서의 사회적 역할 감소와 관계가 있다고 하면서 경제적 기여도와 여성지위의 상관성을 입증해주었다. 그녀는 그 전에 쓴 논문들을 통해 宋代 여성은 지참금, 絶戶의 재산상속, 家産分割 같은 제도를 통해 중국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 유리한 관습적 법률적 재산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 바 있다. 千聖林(2006)은 醫師와 看護士, 敎師, 女傭, 女招待, 警察 등 근대 이후 등장한 다양한 임금노동자들의 등장배경과 노동상황을 개관하고 비록 낮은 직업의식, 성별분업과 여성 노동의 周緣化, 노동시장의 협소 등 한계도 있었고 여성의 노동에 대한 남성들에 의한 부정적 시선과 사회적 逆風 도 거셌지만 여성의 직업진출과 경제활동의 증가가 가정에 서 여성의 지위를 제고하고 사회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초래했다고 결론지었다. 여기서의 逆風 이란 바로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는 시점에서 여성을 종속적 지위로 되돌리 고자 하는 남녀역할구분, 즉 젠더화 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상승 욕구 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유교이념을 공고히 주입하는 것은 漢代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金秉駿은(1993)방직업을 통해 漢代 여성의 권력이 강화되는 면모를 밝혀내는 한편에서 이같은 여성의 경제적 역할 증대가 전통적 가부장적 질서를 해칠게 될 것을 우려한 국가 권력이 예교질서를 이용해 여성을 가부장권 하에 종속시키면서 동시에 여성노동력을 효 율적으로 課徵하려 했다고 하여 여성의 경제력과 이념의 상관성을 고찰하고 있다. 이명 화(2005)는 전한초기 漢律에 보이는 호의 계승권에 女와 奴婢가 포함되어 있는 것에 주 목한다. 그러나 女戶라고 하는 것은 한시적이고 불안정한 것으로, 호를 대상으로 분배와 징수가 이루어지는 수전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호구의 단절을 방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를 위한 정책적인 고려에서 여호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한다. 이처럼 진한대 여성의 지위를 둘러싸고 여러 관점에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윤재석,김 병준 그리고 이명화 등이 시기 여성들은 戶主가 되거나 私産을 소유하거나 하는 등 대체 로 다른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고 보는 데 반해 임병덕은 진한대 여성의 지위는 노예주에 예속된 노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는 고대여성의 지 위를 높이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지만 雲夢秦簡 二年律令 등을 통해 이 시기 여성의 법적 지위를 고찰한 최근의 논문에서는 진한대의 결혼한 여성이 시집의 범죄뿐 아니라 친정의 범죄에도 연좌되었던 사례를 들어 시댁 혹은 가장권의 상대적 약 화와 모권의 상대적 강함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는 지적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250 (3) 人物硏究, 기타 人物硏究 한국에서 중국여성사연구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점하는 것은 역시 특별한 인물에 대한 것으로 그 중에는 女性名士라든가 貢獻史 등 아직 보충사 의 수준을 넘지 못한 것도 있 다. 사료의 제약으로 인한 것이겠지만 근대 이전 중국여성에 관한 연구는 태후 등 권력 자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근대 이후 여성으로는 秋瑾과 宋慶齡에 관한 것이 가장 많 다. 송경령연구는 일본과 중국에서 매우 왕성한데, 한국의 대표적인 송경령연구자인 이양 자는 일련의 연구를 통해 중국현대사에서의 송경령의 역할, 송경령이 손문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방식, 何香凝과 함께 최종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택하게 되는 사상적 정치 적인 계기를 검토해 왔다. 그녀의 정년퇴임기념논집인 中國近代化를 이끈 걸출한 인물 들 은 한국인의 시점으로 씌어진 근대중국 여성인물논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는 秋瑾과 宋慶齡뿐 아니라 宋美齡, 何香凝, 鄧潁超, 許廣平, 氷心, 向警予, 康克淸, 江淸, 丁 玲등이 포함되어 있다. 신여성에 관한 연구는 군위안부와 함께 1990년대 이후 한국 근대 여성사연구에서 활 발히 논의된 주제 중 하나였는데8) 국민혁명기 여성운동이 갖는, 혁명에 대한 종속성을 지적한 선학들의 연구에서 한걸음 나아가 여성운동이 혁명에 종속할수밖에 없었던 상황 에 관심을 두어 온 윤혜영은 허광평 등 그녀가 대표적인 중국의 신여성 으로 지목한 일 련의 인물에 관한 연구를 연속해서 발표했다. 쉬광핑:루쉰의 사랑, 중국의 자랑 (2008)에 서는 魯迅의 그늘에 가려진 여인이 아니라 남성이 주입한 가치를 내면화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이용한 적극적 행위자 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윤 혜영이 지적한 대로 애국에 자리를 내준 여권 은 허광평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여성 지도자의 다수가 피하기 어려웠던 딜레마 였다. 그 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청말의 아나 키스트 何震도, 배만민족주의 혁명가 秋瑾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선이는 연안시기 丁玲 의 작품에 대한 다시 읽기를 통해 근대의 산물인 여성주의가 중국에서 탄생하는 과정, 그리고 중국의 여성주의가 계급투쟁과 민족혁명이라는 대과제 속에서 어떤 길을 걸었는 지 탐색하였다. 그녀는 당시 중국이 처한 어려움 속에서 여성주의가 걸었던 길은 중공 수립 이후 여성주의가 안게 되는 많은 문제를 낳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② 敎育 8) 新女性의 自由戀愛論, 新女性과 家父長制, 新女性과 社會主義, 新女性과 近代性, 新女性敎育論, 專門職進出과 사회적 지위, 新女性談論分析, 小說 속의 新女性像, 新女性의 性格, 女性主體 形成 過程 등을 둘러싸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현황과 과제 / 천 성 림 251 그 어떤 개혁도 교육개혁만큼 원대함과 중요함을 갖지 못하기 때문일까? 한국근대의 여성교육은 이미 1950년대 말 한국여성문화논총 등을 통해 가장 일찍부터 연구되어 온 분야이다. 여성고등교육의 강조와 학교설립이 외세의 충격 속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성관의변화에 따른 여성교육론의 내용, 학교설립과 운용, 교과서 내용 분석이 중심이 되었다. 사회변혁을 갈구하고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하는 1970년대의 시대정신과 결부해 이후에도 계속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이에 비해 한국의 중국여성교육사연구는 극히 저조하다. 여성교육의 制度化와 實狀에 대한 金裕利와 權賢珠, 早期變法派의 改革論을 다루는 가운데 간단히 여성교육론을 언급 한 金慶惠, 淸末에서 五四運動期까지 일본과 미국에 유학한 중국여성의 사례를 비교, 분 석한 鄭惠仲 그리고 교과서분석을 통해 南京국민정부의 理想的 女性 公民像을 끌어낸 池 賢淑의 연구 정도가 있다.9) 1930년대 이미 程謫凡이 지적했듯이 중국에서 여자교육은 남 자교육과 분리되고 이원화된 특수영역 이었다. 앞으로 젠더적 시각에 의한 연구가 필요 할 것이다. ③ 性 性売買 性매매는 사회에서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보여주는 하나의 指標이다. 娼妓史와 같은 通史類를 제외하고 女性主義的 視點으로 중국여성의 性과 매매춘을 연 구한 것은 한국은 물론 구미, 일본에서도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여기에는 1997년 출 판된 허세터의 상해의 창기에 대한 연구가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10) 1960년대 말 미국 의 사회운동에 자극받아 中國女性史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하는 그녀는 이 책에서 女性主 義를 견지하면서도 포스트구조주의의 세례를 받아 지식인 및 국가의 창기에 대한 태도를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다. 한국에서 이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는 2006년 발표한 張粹芝의 석사학위논문 (2006)이 거의 유일한 것이다.11)그녀는 1950년대 禁娼사업 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보여 준 여성해방의 관점과 실천방식을 보기 위해 이 연구를 시작했지만 미공개 공문서를 접 한 뒤 禁娼사업의 본질은 기녀 및 性산업에 대한 계급적 정의에 따른 것이며 이 정의에 9) 10) 11) 김유리, 清末의 女子教育制度와 그 實狀, 중국사연구 20, 2002; 권현주, 中国近代女子育制 度成立에 관한 연구, 梨花女大 碩士論文, 1993; 정혜중, 청말민초 중국여성의 일본 미국유학, 이화사학연구 39, 2009; 지현숙, 여성국민 만들기로서의 남경정부 시기 중학교과서, 동 양사학연구 83, 2003; 지현숙, 남경정부시기 공민교과서에 나타난 여성공민상, 중국사연구 20, 2002. Dangerous Pleasures: Prostitution and Modernity in Twentieth-Century Shanghai 중국문학 전공자인 任佑卿(2005)의 논문도 있다.
252 의하면 성별인식이나 부녀정책과의 연관성은 찾기 어렵다고 본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그녀는 건국 이후 禁娼 종료까지 관철된 계급인식과 작동방식을 통해 여성해방을 계급해 방에 종속시킨 중국공산당의 논리를 규명하려 했다. 이는 국가정책과 관련해 성차가 얼 마나 복잡하고 다양하게 구성되면서 여성과 남성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분석한 점에 의 의가 있다. 그런데 국가의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 개입은 근대 민족주의 프로젝트 의 하나로, 이미 중화민국시기의 衛生行政, 助産制度, 人口政策(生育統制) 등에도 보이고 있다. 兪蓮實은 上海와 北京을 중심으로 民國時期 산아제한 단체와 의료기구가 근대적 피임 의료의 보급에서 담당한 역할, 그리고 피임의 의료화가 여성의 신체와 출산에 미친 영향을 서술하고 있다. 辛圭煥(2006, 2008)은 동아시아에서의 助産制度의 성립을, 李宣坭 는(2007)는 戰後 한국과 중국에서 행해진 인구정책의 국내외적 배경 및 그것이 양국 여 성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비교했다. 그녀는 한국에서는 산아제한정책이 국가의 경제발전 정책의 일환으로 적극 시행되었던 반면 중국에서는 맬서스이론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보아 수용될 수 없었다고 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性지배가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곳은 戰場이다. 그러나 여성 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와 재산이며 그것을 침해하는 것은 당사자 여성에 대한 凌辱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능욕당한 여성이 속하는 남성 집단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된다는 가부장제의 논리는 오랜 기간 피해 여성을 침묵시켰다. 하지만 1990년대 초기부터 제기된 일제 전쟁 시기 군대 위안부문제가 이후 세계적인 이슈로 부 상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한국에서는 韓國挺身隊硏究所 와 韓國挺身隊問題對策協議會 의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일본군 위안부 정책의 본질, 군위안부의 실태 및 특 성, 실상과 진상 등에 관해 많은 연구를 축적했다. 강제로 끌려간 군 위안부들의 증언집 들이 발간되었고, 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귀국 후의 삶과 후유증에 관한 연구들도 다수 나왔다. 군위안부 연구는 證言과 口述史를 종래의 實證史學에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과제도 제시하였고 여성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인종과 계 급에 따라 여성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여기에는 서구의 脫식 민주의, 그리고 1999년 한국에 번역된 上野鶴晶子의 내셔널리즘과 젠더 12)같은 저술이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아쉽게도 한국의 中國近代女性史 연구 가운데 군위안부문제와 관련한 것은 없다. 다만 車瓊愛(2009)가 戰爭見聞錄과 전쟁관련 문서 등을 통해 淸日戰爭과 義和團戰爭 그리고 12)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李宣坭 翻訳(1999), 내셔널리즘과 젠더, 朴鐘哲出版社.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현황과 과제 / 천 성 림 253 露日戰爭 시기 戰場에서의 매춘여성의 공급 경로와 3대 전쟁 시기 軍當局의 軍慰安所 운 영 및 성병관리 실태를 분석하였다. 한편 군위안부 연구는 민족주의와 페미니즘 논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한국여성학회는 1994년, 학회탄생 10주년기념에서 한국 페미니즘의 현대적 과제 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개최했는데 이때부터 민족주의는 가부장적이며 여성을 억압하는 또 하나의 도구 라고 지적되기 시작했다. 즉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은 서로 대립된다고 보고 사실상 페미니즘의 민족주의로부터의 결별을 요구했다. 한국문학 전공자들 간에서 특히 그러했다. 이에 대해 사회학자, 역사학자들의 입장은 달랐다. 한국의 페미니즘은 민족주 의를 거부할수록 민족국가내에서 여성이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여 식민지, 탈식 민지국가의 페미니즘은 민족주의운동과 그 담론에 개입할 여지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 다. 중국문학 전공의 임우경은 남성주도적 여성해방론을 비판하고 국가와 여성을 지나치게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신계몽주의 가 오사기의 반전통주의와 마찬 가지로 오히려 여성을 타자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末次玲子는 20세기 아시아 국가에 서 여성해방 중에서도 특히 중국은 정치-정권주도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고 했는데 천성림은 그 사례의 하나로 1930년대 국민당우파의 여성운동을 대상으로 삼아 그녀들이 유교를 재해석하는 방식을 통해 민족주의운동에 동참했고 이렇게 하여 국민으로서의 권 리를 확대하려 했다고 보았다. 5. 앞으로의 과제 한국에서의 중국여성사 연구는 여전히 부족하다. 독자적 연구동향이라 할 만한 것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주된 쟁점이나 의제도 없었다. 기타의 중국사연구 분야도 별반 다 를 바 없지만 그 중에는 한국에서 발표되었다고 하는 점을 제외하면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도 많다. 역사학계의 보수적 풍토가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여성에 관한 연구는 있어도 女性主義 시점으로 씌어진 것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女性史 연구의 기초가 되는 史料集이나 史料解題 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높은 수준의 통사나 전문 저술도 거의 없 다. 시간적으로는 漢代와 宋代, 그리고 民國時期에 집중해 있고 공간적으로는 대도시에 집중해 있다. 농촌여성, 노동여성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아래로부터의 역사 가 여성 사연구를 자극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다소 실망스러운 현상이다.
254 무엇보다도 한국에는 아직 일본의 中國女性史硏究, 대만의 近代中國婦女史硏究 와 같은 중국여성 관련 전문 학술지와 연구단체가 없다.13) 여성사 관련 학술지는 1994년 창 간된 여성과 역사 가 유일한 것인데 거기에 실린 논문은 대부분 한국여성사에 관한 것 으로, 창간 이래 지금까지 중국여성사 관련 논문은 2편에 불과했다. 이는 아직도 한국의 학계가 중국여성사를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14) 요컨대 한국에서 여성사, 특히 중국여성사는 역사학계 전체에서 여전히 주변적이고 특 수한 위치, 이른바 격리된 상태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생각할 때 필자는 그간의 한국의 중국여성사연구를 결코 낮게 평가해서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별 차이는 없지만, 여성을 歷史연구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는다면 역 사의 全體上은 구축될 수 없다고 하는 여성사 연구자들의 호소에 대해 여전히 무관심으 로 일관하는 남성학자가 대부분인 현실이다. 그들은 여성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 을 버리고 사회사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한다. 여성사가 사회사의 한 분과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한국의 많은 여성사학자들이 거부해 왔지만 필자는 여성의 자주성을 상실하지 않는 한도에서 전략적 통합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방법으로 젠더사를 주장하고 싶다. 젠 더적 관점을 통한 역사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남성과 더불어 여성의 역사까지 모두 포 괄하는 더욱 완전한 형태의 역사를 추구하는 데 있다. 기존의 역사를 보완하거나 기존의 역사에 여성의 역사를 덧붙이는 차원의 여성사가 아닌,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한 논의가 다채롭게 포함된 진정한 性의 역사를 완성하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앞으로 한국의 중 국여성사가 추구해야 할 과제를 들어 본다. 下層女性에 관한 연구 전술했듯 사회적 마이너리티에 대한 관심이 한국에서 여성사를 觸發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여전히 소수의 상층 엘리트여성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농촌여성, 노동여성 에 대한 연구는 극히 부족하다. 진정 全體史 를 추구한다면 소수의 여성을 통해 여성의 역사경험을 대표하기보다 農婦, 女工, 女傭, 童養息 나아가 新女性의 피해자가 되었던 舊 女性까지도 연구의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 ② 他学問과의 疎通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統攝 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한국의 저명한 사회생물학 13) 14) 다만 中國女性史와 中國現代文學研究者의 소모임인 中國女性文化硏究會 가 있다. 현재 婦女雜 誌 강독과 분석의 모임을 갖고 있다. 일찍이 陳姃媛도 이러한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陳姃湲(2005) 참조.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현황과 과제 / 천 성 림 255 자인 崔載天교수가 영어의 consilience 를 번역한 것으로 학문간의 소통 을 의미한다. 이 에 따라 女性史에 대해서도 문학, 철학, 사회학, 생물학, 의학 등 기타 학문과의 學際間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현재까지 주목할 만한 성과는 별로 많지 않았다. 필자는 그 이유 중 하나가 학문간의 統攝 에 여성 만 있고 역사 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그 주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앞으로 한국의 女性史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女性史 이외의, 다른 학문영역의 分析方法과 成果를 적극 끌어들어야 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경제사적 분석방법은 여전히 有效할 것이다. ③ 移住女性의 경험 최근 한국에서는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帝國과 植民地에 대한 연구도 증가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구와 비서구, 제국과 식민지간의 문화간 상호교 류와 영향, 문화전이에 대한 연구가 증가하고 있다. 女性史와 관련해서는 식민지 朝鮮에 서 살았던 일본여성의 경험에 대한 연구가 막 개시되었고15) 미국에 이주한 中國女性에 대한 연구도 있다.16) 이런 연구는 제국과 (半)식민지를 둘러싼 역사해석에서 유럽제국중 심의 일방성을 극복하고 근대사에서 상호교류와 영향을 주목한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 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女性史 연구자의 국제적 協力과 連帶가 절실히 요구된다. 15) 16) 윤정란 (2008), 안태윤 (2009) 金延珍, 19世紀末, 20世紀初, 美國內 中國 移民女性과 家族, 美國史硏究 15,1994
256 부록 韓国의 中国女性史 研究目錄 A.学位論文(發表年度順. 韓国出身 외국박사 포함) 金稔子(1964), 古代中國의 女性倫理觀: 後漢書 列女傳을 중심으로, 梨花女子大学校 碩士 論文. 何桂玲(1976), 近代中國의 女性運動에 對한 考察(, 檀國大学校碩士論文. 金稔子(1983), 中共의 婦女運動에 관한 研究:創党期에서 大躍進까지, 西江大學校 博士論 文. 李渙鎬(1984), 太平天國의 女性活動에 對한 考察, 慶熙大学校碩士論文. 尹美英(1992), 秋瑾의 女性解放運動에 대한 一考察), 淑明女子大學校 碩士論文. 池賢淑(1992), 向警予의 女性運動論과 国民革命論의 形成, 延世大學校 碩士論文. 権賢珠(1993), 中国近代女子育制度成立에 관한 研究, 梨花女子大學校 碩士論文. 李陽子(1993), 宋慶齡硏究:政治社會活動과 그 思想을 중심으로, 嶺南大学校博士論文. 韓承希(1995), 太平天國女性政策의 理想과 實踐, 淑明女子大學校 碩士論文. 金仁淑(1996), 魏晉士風과 女性観의 変化,檀国大学校 博士論文. 尹美英(1997), 淸末民初婦女解放運動硏究,北京師範大學博士論文. 李垠姈(1997), 五四運動期의 女性解放運動에 關한 一考察, 淑明女子大学校碩士論文. 李美景(1999), 中國女性의 法的 地位에 關한 研究, 啟明大学校碩士論文. 李宣坭,(2001), 中國におけるフェミニズムの成立とその展開:丁玲の作品活動を中心に,東 京外国語大博士論文. 石美子(2002), 秋瑾의 女性解放運動과 思想,慶北大學校 碩士論文. 金寶培(2002), 宋代 家政經濟에 있어 女性의 役割과 影響 誠信女子大學校女 碩士論文. 兪蓮実(2002), 淸末民初女性運動의 展開:革命運動과 女性運動의 關係를 중심으로,全南大 学校 碩士論文, 池賢淑(2002), 南京国民政府의 国民統合과 女性:新賢母良妻教育을 중심으로,梨花女子大 学校 博士論文,2002. 陳姃湲(2003), 近代中国における伝統的女性像の変遷: 賢妻良母 論をめぐつて),東京大学博 士論文. 남유선(2003), 1930年代, 中國女性運動과 玲瓏 雜誌, 檀国大学校 碩士論文. 禹成淑(2003), 名公書判清明集 을 통해 본 宋代女性의 再婚과 財産問題), 慶北大学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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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스러움과 女帝 善德과 皇極의 즉위배경 김 선 민(숙명여대) 目 次 1. 들어가며 2. 女帝에 대한 편견 3. 聖祖皇姑 와 皇祖母尊 (1) 善德의 즉위 (2) 皇極의 즉위 4. 맺음말 1. 들어가며 7세기 한일 양국에는 몇 가지 공통되는 역사적 현상이 발생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 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한반도 삼국과 일본에서 거의 동시기에 지배층의 권력투쟁으 로 야기된 大亂, 그리고 女帝의 출현을 들 수 있다. 女帝의 경우는 690년 唐에서도 則天 大聖皇帝가 즉위하여 동아시아 삼국의 공통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고 대 동아시아 삼국에 전례가 없던 女帝가 즉위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 히 7세기 한반도와 일본의 경우 긴박하게 전개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왕권의 강력한 리더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공통적으로 女帝가 출현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특 이한 현상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제를 둘러싼 諸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7세 기뿐만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 역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에서는 女帝의 즉위를 男系에 의한 왕위계승이 보편적 이고 절대적이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존재로서만 이해되어 왔다. 그래 서 女帝를 형식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그들의 역할을 축소 내지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
264 했다. 그러나 당시 女帝가 특수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는가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우선 일본의 경우에는 女帝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하는 법 규정이 이미 고대 율령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養老繼嗣令1皇兄弟條의 本注에는 천황의 兄弟와 皇子는 모두 親王이라 한다 (女帝의 자식도 같다) 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大寶令의 주석서인 古記 에도 인용되 어 있는 本注로 大寶令의 단계에서도 女帝에 관한 규정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8세기 초 대보령의 단계에서 女帝의 즉위를 전제로 아들과 형제를 왕위계승 의 가능성이 있는 친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 은 명백하게 女帝의 實子를 즉위 가능한 親王, 內親王으로 우대하고, 女系의 왕위계승까 지도 승인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1) 한편 신라의 경우에도 善德대의 다양한 업적 과 善德 사후 眞德이 무난하게 계승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女帝가 불가피한 경우 에만 즉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회적 통념이 성립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크다고 하겠 다. 그러므로 근대 이후 女帝否定論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男系주의는 동아시아 고유의 전통이라는 인식과 女帝는 특수한 존재라는 통설적 견해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본고에서는 7세기 중반 한반도 삼국에서 최초로 출현한 女帝인 善德과 乙巳의 變으로 촉발된 대화개신과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일본 고대국가 형성의 획기적 시기에 卽位와 동 시에 최초의 重祚를 실현한 皇極의 경우를 그들이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과 그들이 추구 했던 고대 국가상 등을 비교해서 검토하려고 한다. 이 같은 작업은 고대 女帝의 문제를 새롭게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비교사적 관점에서 고대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기초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2. 女帝에 대한 편견 기존의 연구에서는 女帝의 즉위배경으로 영적 우월성에 근거한 무녀적 성격과 男系에 의 한 계승이 불가능 할 경우 왕위계승을 위해 불가피하게 중계자로서 즉위가 가능했다는 중계 자론이 女帝 문제에 대한 중요한 접근방식으로서 인식되어 왔다. 前者는 三國志 魏志 倭人傳 에 등장하는 卑弥呼와 日本書紀 의 神功皇后의 전설을 原型으로 하여 고대의 女 帝들은 무녀적 속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즉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司祭, 그리고 祈雨, 祥瑞와 같은 天變災異와 관련된 종교적 성향 내지 역할을 가 진 女帝를 모두 무녀라고 규정하는 것은 논리의 단순화 내지 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왜 1) 仁藤敦史, 女帝の世紀, 角川書店, 2006.
聖스러움과 女帝 / 김 선 민 265 냐하면 무녀는 신과 영혼을 몸소 받아드려 신령의 표현과 의사를 전하는 것이다. 게다가 女帝들의 공통된 특징을 무녀이라고 단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後者는 続日本紀 에 서 元正천황을 中天皇 으로 기술하고 ナカツスメラミコト 로 訓讀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女帝를 천황과 천황을 중계하는 존재로 파악했다.2) 이 같은 중계자론은 논리적으로 체계화 되어 推古 皇極 斉明과 즉위를 요청받았던 春日山田皇女, 倭姬의 공통된 특징이 모두 천 황, 혹은 천황이 될 수 있었던 者의 女息으로 모두 황태후였던 점에 착목하여 왕위계승이 곤란한 사정이 있을 때 중계자로서 先帝 또는 前帝의 황후가 즉위하는 관행이 있었다고 이 해하고, 그것이 女帝의 본래 모습이라고 하였다.3) 그러나 이 같은 중계자론은 독신이었던 元正이 草壁皇子와 元明천황의 女息인 점, 그리고 孝謙이 聖武천황과 元明천황의 女息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모든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것이 라고 볼 수 없다. 특히 중계자론의 중요한 결함은 왕위를 중계하는 역할적인 것이 아니라 왕 위의 중계가 女帝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 해서 왕위계승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중계성이 부여되는 것은 男帝 女帝라는 성별역할분담 을 바탕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중계자론의 한계는 중계자이기 때문이 아 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중계 라는 성차별을 전제로 했다는 것에 있다. 또한 왕위계승 순위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았던 전근대 왕위계승방식은 각 시대와 시기에 따라 왕권구조와 국 가형태의 변화에 의해 규정되고, 역사적으로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천황이 중계 자로서의 일면을 가졌다하더라도 그 의미와 의의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4) 최근에는 소위 젠더문제가 인문 사회과학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페러다임으로 주 목받으면서 女帝가 결코 특수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력과 역할 면에서도 기본적으로 男帝 와 동등했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소위 < 性差를 전제로 하지 않는 女帝론>의 등장이 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女帝의 즉위는 성별을 넘어서 동일세대 내의 왕위계승의 원칙과 집정 능력이 중시되었다는 世代內繼承 論을 들 수 있다. 世代內繼承 論에서는 7 세기 女帝의 즉 위가 가능했던 것은 동일세대내의 왕위계승의 원칙과 집정능력이 중시되어 성별은 그렇게 중 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5) 그리고 왕위계승자격을 가진 皇子들의 분쟁으로 왕권 내부의 위기가 심각해 질 때는 왕위계승의 범위 밖에서 분쟁을 조정하는 제3의 입장에 있었던 인격과 통치능력을 겸비한 オホキサキ(大后) 가 大王에 추천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6) 하지만 < 性差를 전제로 하지 않는 女帝론>은 종래의 < 女帝不執政論> 의 안티테제로서 주창 2) 3) 4) 5) 6) 喜田貞吉, 中天皇考 喜田貞吉著作集 第13券, 講.談社, 1981년. 井上光貞, 古代の女帝 日本古代國家の硏究, 岩波書店, 1965년 荒木敏夫, 可能性としての女帝, 靑木書店,1990년. 大平聰, 日本古代王權繼承試論 歷史評論 429, 1986년. 荒木敏夫, 前揭書
266 된 것으로 어디까지나 종래의 논의의 문제점을 추출하여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채용된 하나의 시점이고,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 性差를 전제로 하지 않는 女帝론> 에 입각해서 논리를 전개해 나아가다 보면 女帝가 男帝와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연구의 궁 극적인 도달점이 되므로 새로운 논의의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없다고 힐 수 있다.7) 이러 한 가설이 가지는 맹점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대에 즉위한 女帝의 즉위사정, 왕권의 구조와 변화 등을 고대국가의 형성과정 속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문 제라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근대 이후 女帝否定論에 중요한 근거가 된 男系주의와 女帝의 즉위를 특수하 고 예외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통설적 견해는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왕권의 변화과정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 없이 편견과 선입관 속에서 女帝의 문제를 단 순하게 논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고 하겠다. 3. 聖祖皇姑 와 皇祖母尊 (1) 善德의 즉위 사료-(1) 三國史記 新羅本紀 善德王 善德王立 諱德曼 眞平王長女也 母 金氏摩 { 摩耶} 夫人 德曼性寬仁明敏 王薨 無子 國人立 德曼 上號聖祖皇姑 前王時 得自唐來牡丹花圖幷花子 以示德曼 德曼曰 此 { 花雖絶 艶} { 必是無香} 氣 王笑曰 爾何以 { 知之} { 對曰} { 圖花無蜂蝶} { 故知} 之 大抵女有國色 { 男隨之} { 花有香氣} { 蜂蝶隨之} 故也 此花絶艶 而圖畵又無蜂蝶 是必無香花 種植之 果如所言 其先識如此 사료-(1)에 의하면 善德은 진평왕의 장녀로 왕이 후계자가 될 아들이 없이 죽자 國人 들의 추대로 즉위했고, 그녀가 추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관인(寬仁)하고 사리에 밝고 민첩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아울러서 善德이 왕위를 계승할 만한 능력이 있는 인물임을 唐에서 가져온 모란 꽃씨와 꽃그림에 대한 예지력을 통해 설화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 내용은 善德의 즉위사정을 이해하려고 할 때 많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 어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먼저 진평왕이 아들이 없어 國人들이 상의 끝에 善德을 추대했다는 부분이다. 三國遺 事 에도 善德이 즉위한 것은 聖骨의 남성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만약 두 7) 遠山美都男, 古代日本の女帝とキサキ, 角川書店, 2005.
聖스러움과 女帝 / 김 선 민 267 사료를 종합해서 이해하면 聖骨의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국인들이 할 수 없이 성골의 여 성이었던 善德을 추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善德은 왕위계승의 자격 이 없는데도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그리고 자기의지와는 상관없이 추대되었다. 이것은 당시 왕은 聖骨만이 즉위할 수 있다는 원칙이 이미 확립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 다. 이에 대해서는 聖骨이 실제 사료 상에 나타나는 것은 無梁和尙碑文(897)이 처음이므 로, 성골이란 후대에 추존된 것이라는 견해가 대두되어 사료의 신빙성에 문제가 제기되 었다.8) 그리고 고려시대 이후 善德에 대한 평가 기사는 대부분 그의 즉위를 正道에서 벗 어난 부정적인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三國史記 는 善德여왕 16년 간의 역사를 서술한 마지막에서 < 신라가 여자를 모셔 세워 왕위에 처하게 했으니 진실 로 난세의 일이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서경 에 말하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 하고 역경 에는 약한 도야지가 껑충거리고 뛰어 논다 했으니, 그것은 가히 하 지 않아야 할 경계인 것이다>라고 善德 즉위의 그릇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러 한 것을 고려하면 성골의 남성이 부재해서 善德이 즉위했다는 三國史記, 三國遺事 의 기술은 오히려 善德 즉위의 부당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당시 聖骨 男性즉위법은 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보여 진다. 여하튼 국인에 의한 추대는 善德의 왕위 계승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함축성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왕위계승에 있어서 국인이 참여하는 경우는 왕위의 계승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 그리고 新王을 옹립하려는 세력이 있을 때 한한다는 것이다.9) 먼저 모란꽃 그림 이야기는 설화적 색체가 강하지만 三國史記 진평왕 43(621)에 < 왕 이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니 高祖가 고서와 그림병풍 및 채색비단 300단을 보냈 다>는 기사로 보아 사실성이 크다고 하겠다. 한편 그녀의 즉위에 국인들이 그녀에게 聖 祖皇姑 라는 존호를 올렸다는 것이다. 위년에 올린 듯이 기술하고 있지만, 三國史記 는 善德에게 聖祖皇姑 라는 칭호를 즉 新唐書 新羅傳에는 그것이 정관9년(善德4년)의 사실 로 기록되어,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은 뒤 국인들이 왕을 그렇게 尊號하였다고 되어 있 다.10) 이것은 먼저 국인들은 善德여왕을 옹립하였지만,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자 그들은 더욱 善德 계위의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해서 존호를 올렸고, 이러한 사실의 裏面에는 善 德4년까지도 왕권에 대한 불안감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사정이 내재되어 있다.11)는 견해 8) 9) 10) 11) 아마 武烈王대에 진덕 이전의 왕에 대해서 聖骨을 추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 武 田幸男, 新羅骨品制の再檢討, 東洋文化硏究所紀 要, 67, 1975, 신종원, 신라 오대산 사적과 성덕왕의 즉위배경 최영희선생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탐구당, 1987. 遣使者冊善德襲父封 國人號聖祖皇姑 신종원, 삼국유사 새로 읽기 (1), 일지사, 2004.
268 가 있다. 하지만 왕권이 불안정했다는 이유로 존호의 봉정이 善德4년이라고 단정하는 것 은 타당하지 않다. 그 이유는 新唐書 新羅傳의 책봉기사와 존호의 봉정기사가 반드시 인 과관계에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聖祖皇姑 는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기존의 연구에서는 聖祖皇姑 을 <聖祖의 皇姑>로 이분하여 <강력한 통치력을 구사했던 위대한 진평왕의 딸 善德>으로 이해하고, 혹은 <신성한 조선의 황통을 이은 여인>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같은 견해는 善德이 지닌 聖스러움이 혈통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 은 인식은 善德의 치세를 지배하는 중요한 접근방식으로서 인식되어 왔다. 만약 혈통에 대한 字句를 간과한 채 이 존호를 이해하면, 신성함은 곧 종교적의미로 풀이되고, 따라서 善德의 무녀적 성격을 말하게 된다는 지적12)도 일리 있지만 聖스러움이라는 것은 그 자 체로 완결된 고고한 가치가 아니라 타자와의 교환 내지는 공유의 가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입증되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어 내는 가 치인 것이며, 마치 투시력과 같은 통찰, 판단력을 통해서 어떠한 결합이나 연대 관계를 만들어 내는 관념인 것을 감안하면 혈통적 요인이라기보다는 사람의 作人됨과 연관이 깊 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아무튼 聖祖皇姑 이라는 존호를 받은 신라 의 왕은 善德이 유일하고, 이 존호는 통치자로서의 善德에 대한 사회적 정서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聖스러움은 그녀가 통치자로서의 명분과 역할에 사회적 합 의를 이끌어 내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모란꽃 그림에 대한 설 화와 국인들이 올렸다는 聖祖皇姑 라는 존호는 善德이 왕위를 계승할만한 능력의 소지 자임을 암시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료-(2) 三國史記 新羅本紀 善德王十六年春正月條 毗曇廉宗等 謂女主不能善理 因謀叛擧兵 不克 八日{ 月} 王薨 諡曰善德 葬于狼山[ 唐書 云 貞觀二十一年卒 通鑑 云 二十五{ 二} 年卒 以本史考之 通鑑 誤也] 사료-(2)는 647년 毗曇, 廉宗이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며 반역을 꾀하여 군 사를 일으켰는데 그들은 이기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 善德이 죽었고, 狼山 남쪽에 葬事지 냈다는 것이다. 三國遺事 善德왕지기삼사 에는 善德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는 내 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 죽을 것이다. 그때 나를 도리천 가운데에 묻어라> 했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지 몰라 물으니 <狼山의 남쪽>이라 했다고 한다. 과연 그달 그날에 이르니 여왕이 죽으므로 狼山 12) 井上秀雄, 新羅政治體制의 變遷過程 新羅史基礎硏究 1974.
聖스러움과 女帝 / 김 선 민 269 의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것이다. 그 후 문무왕대에 무덤 아래에 四天王寺를 세웠다는 것 이다. 狼山은 원래 선령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신령한 공간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리 고 聖骨의 聖 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사료는 善德여왕이 곧 도리천 女 라는 말이 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여 刹(帝)利鍾 이라고도 하였다. 찰리종 또는 도리천 女 인 善德여왕이 聖祖皇姑 라고 불리었을 때, 그녀의 祖先은 당 연히 찰리종이며 도리천 출신이 된다. 善德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을 보면, 그는 天使로 부터 上皇 이 내려준 玉帶를 받았다.13) 진평왕과 善德여왕이 불교적 神聖족이라는 관념 은 당대의 국력을 기울인 佛事에서도 드러난다. 찰(제)리 즉 크샤트리아는 원래 인도의 王者 및 武士 계급이자, 불교의 神聖族 관념인 것이다. 찰리종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또 하나의 天竺이다. 인도의 우주관을 그대로 신라 에 설정하게 된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서울, 경주, 狼山을 須彌山으로 비정하였다. 이곳은 神遊林 이 있는 곳으로서 불교 전래 이전부터 신성시되던 산이었고, 경주의 鎭山이기도 하다. 재래의 신들이 노닐던 낭산이 불교의 天神들이 常主하는 산으로 변한 것이다. 이제 찰리종 왕이 死後 돌아갈 곳은 낭산 위의 하늘 즉 도리천일 수밖에 없다. 善德여왕 자신 이 이곳에 장사지내 달라고 遺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葬地의 선택은 이미 당 대에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2) 皇極의 즉위 사료-(3) 日本書紀 皇極即位前紀 天豐財重日 重日此云伊柯之比 足姬天皇 渟中倉太珠敷天皇曾孫 押坂彦人大兄皇子孫 茅渟王女也 母曰吉備姬王 天皇順考古道而爲政也 息長足日廣額天皇二年立爲皇后 사료-(4) 日本書紀 齊明天皇卽位前紀 天豐財重日足姬天皇 初適於橘豐日天皇之孫高向王 而生漢皇子 後適於息長足日廣額天皇 而生二男 一女 二年立爲皇后 見息長足日廣額天皇紀 十三年冬十月 息長足日廣額 天皇崩 明年正月 皇后卽天皇位 改元四年六月 讓位於天萬豐日天皇 稱天豐財重日 足姬天皇 曰皇祖母尊 天萬豐日天皇 後五年十月崩 사료-(5)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八月甲申朔條 天皇幸南淵河上 跪拜四方 仰天而祈 卽雷大雨 遂雨五日 溥潤天下 或本云 五日連 雨 九穀登熟 於是 天下百姓俱稱萬歲曰至德天皇皇 13) 삼국유사, 紀異第一, 天賜玉帶條.
270 사료-(3),(4)에 의하면 皇極은 敏達천황의 증손녀로서 이름이 寶皇女이다. 그녀는 用明 천황의 손자 高向王과 결혼하여 漢皇子를 낳았다고 한다. 그 후 敏達천황의 손자인 舒明 천황과 재혼하였고. 629년 서명이 천황으로 즉위하자 이듬해에 서명천황의 황후가 된 것 이다. 그리고 641년 10월 서명천황이 사망한 후 642년 1월 천황으로 즉위했다. 寶皇女는 서명천황과의 사이에서 中大兄皇子(天智천황)과 間人皇女(孝德천황황후), 大海人皇子(天武 천황)을 낳았다. 결국 서명천황이 사망했을 때 그녀는 서명천황의 아들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위한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皇極 즉위의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우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蘇我氏에 의해 옹립되었다는 것 이다. 둘째는 왕위계승자격을 가진 皇子들의 분쟁으로 왕권 내부의 위기가 심각할 때는 オ ホキサキ(大后) 가 大王에 추천된 전례를 따라 즉위했다는 것이다. 前者는 당시 왜국 내부 에 서명천황의 사후 왕위를 놓고 성덕태자의 장남 山背大兄王을 지지하는 세력과 서명천 황과 蘇我馬子의 딸 法提朗媛 사이에서 낳은 古人大兄皇子를 옹립하려는 세력이 대립하 였는데. 당시 大臣이었던 蘇我蝦夷는 山背大兄王의 즉위를 반대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古人大兄황자를 추대하려면 많은 반발을 무릅써야 했으므로 절충안으로서 서명천 황의 황후 보황녀를 추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주류의 茅淀王과 같은 왕족을 아버지 로 둔 皇極에게는 본래 왕위계승의 자격이 없었다는 것과 皇極은 자기의사와는 상관없이 옹립된 형식적인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後者는 推古의 경우처럼 왕위계승의 범위 밖에서 분쟁을 조정하는 제3의 입장에 있었던 인격과 통치를 겸비한 オホキサキ (大后) 였던 皇極이 즉위했다는 것이다. 먼저 사료-(5)는 皇極원년 3월부터 4월에 걸쳐 長雨가 내렸지만, 6월에 들어서서 大旱 이 발생하여, 村村의 祝部에 의한 殺牛祭祀가 효과가 없었다. 또한 蘇我大臣이 百濟大寺 에서 많은 승려에게 讀經을 시키고, 스스로 향을 피워 비를 기원하였지만 그 마저 효과 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8월 皇極이 南淵의 河上에서 四方拜를 올리자 大雨로 연결 되어 5일간 비가 내려서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며 皇極을 칭송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 목되는 것은 日本書紀 가 祈雨에 관한 서술을 村村의 祝部 (民間 巫俗), 蘇我大臣(仏教), 皇極천황 (天神 제사)의 3그룹으로 나누어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종합해 보면 하 급 종교자의 주술적 방법, 정권의 최고 실력자였던 蘇我大臣의 불법도 효과가 없고, 단지 女帝 자신의 기우만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皇極의 기우는 지배자의 덕정에 하늘이 보답 한다는 陰陽道의 天人相關 사상을 매개로 체계화 된 것이다. 아울러서 사료-(3)의 皇極 이 古道 에 順考해서 政事를 돌보아서 至德의 天皇으로 묘사된 것은 皇極이 천신을 제 사지내고, 천문과 지리에 능통해 당시 사회적 정서에 부합하고 통치자로서의 중요한 덕
聖스러움과 女帝 / 김 선 민 271 목을 갖추었다는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설화적 색채가 강해서 日 本書紀 의 편자가 蘇我氏를 폄하려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추측되어 기사의 신빙성에 는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日本書紀 에는 서명조 이후 皇極과 蘇我氏, 그리 고 蘇我氏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上宮家, 그리고 蘇我氏의 일관된 친백제 정책에 반대하 는 惠日 등의 견당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반대세력과 격렬한 세력다툼의 양상을 天變災異 내지 祥瑞기사를 통해 서술하고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을 참작하면 사료-(5)는 蘇我氏의 전황에 속에서 왕권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는 皇極의 의지를 잘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불교로 무장한 蘇我氏에 전통의 陰陽道의 天人相關 사상으로 맞서고 있는 점에서 감지된다. 또한 이들 간의 항쟁이 노골적으로 들어나는 皇極기 이후 상서재이에 관한 기 사들이 급증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皇極의 통찰력과 예지력을 무녀적 성격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녀는 신과 영혼을 몸소 받아드려 신령의 표현과 의사를 전하 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한편 645년 皇極이 효덕에게 양위한 날에 그녀는 皇祖母尊 의 尊號를 헌정 받았다. 皇祖母尊 은 祖母 혹은 그것 이상의 皇統상의 女性尊長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遠山美都男은 皇祖母尊 의 의미를 皇祖母尊 의 皇 은 天皇의 화훈인 ス メラミコト의 スメ이기 때문에 이것은 명백하게 천황호의 성립 후에 추가된 수사로 원래 는 王母 로 표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祖母 의 의미는 일반의 할머니 의 뜻하는 것 이 아니라 양친을 포함한 선조 전반을 의미하는 祖 (オヤ)에 母 字를 첨자하는 것에 의해서 모친인 것을 특정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尊 은 神 혹은 그에 준하는 인격에 대한 존칭이다. 이것은 그녀가 孝德의 상위에 존재한다는 표현으로 효덕천황에 대한 양 위를 계기로 군신들의 추대에 의한 새로운 천황이 즉위하는 예는 日本書紀 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이는 왕위계승에 선왕의 의지가 중요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14)그러나 이 같 은 인식은 聖의 문제를 혈통적인 요소에 국한해서 그 의미를 왜곡시키고 축소시키는 결 과를 초래한다. 皇極의 통찰력과 예지력에 의거한 집정능력을 함께 포함해서 이 문제를 생각하면 皇祖母尊 의 의미는 사뭇 달라질 수 있다. 한편 藤氏家傳 에는 齊明期에 복속한 蝦夷에 관한 기사를 보면 <須彌山의 像을 飛鳥 寺의 서쪽에 만들어라>, <甘櫥岳의 川上에 須彌山을 만들어 陸奧와 越의 蝦夷에게 饗宴 을 베풀어라 > 등 蝦夷의 歸服에 관련해서 須彌山이 자주 등장한다. 須彌山은 불교적 세 계관을 상징하는 것으로 세계, 우주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특히 飛鳥寺의 서쪽은 효덕기 에 의례의 장소로서 자주 사용되는 곳으로 예를 들면 효덕의 즉위 때에는 皇極과 황태자 14) 遠山美都男, 前揭書.
272 와 군신들을 모아놓고 맹약을 거행한 장소이다. 따라서 복속의례와 관계가 있는 장소이 다. 여기에 齊明은 須彌山의 像을 만들고 복속의례를 친히 거행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의례의 공간에 설치된 것이 須彌山이다. 이것은 단순히 권위의 상징이 아니 라, 대왕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을 표현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같은 須彌山 造營을 포 함하여 <興事>를 좋아했다는 皇極은 일련의 토목공사 등에서 女帝像을 명확하게 드러낸 다고 하겠다. 즉 皇極은 새로운 고대 국가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서 정치전반에 적극적 으로 개입했다. 어쩌면 皇極이백제 멸망 후 백제구원의 선두에서 지휘한 것도 내외에 왕 권의 권위를 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구상은 皇極이 推古로부터 계승 된 飛鳥라는 도시공간의 창조, 건설에 매진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皇極의 이 같은 구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皇極이 추구했던 왕권의 강화책은 당시 왜국이 해결해야 할 최우선의 정치적 과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15) 4.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7세기 중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대변혁 기에 등장한 善德과 皇極은 왕위계승의 자격이 없는데도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그리고 자기의지와는 상관없 이 추대된 형식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의 즉위는 절박한 시대 상황 속에서 국난의 극복과 왕권의 안정을 위한 새로운 국가건설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적 임자로서 사회적 합의에 의해 실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善德은 신라불국토설로 대표 되는 불교의 힘을 통해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 내고 국가의 자주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에 비해 皇極(除名)은 須彌山 造營과 飛鳥라는 도시공간의 창조와 같은 토목 공사 등 을 통해 왕권의 권위를 확보하고, 蝦夷의 정벌, 그리고 백제구원을 통해 왕권의 국제적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善德과 皇極은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혈통의 신성함 과 그들의 신비한 통찰력과 예지력 이 조화된 聖스러움을 사회적 통합의 수단으로 삼았 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헌정 받은 聖祖皇姑 와 皇祖母尊 이라는尊號가 이 같은 당시 의 사정을 증명하는 상징이라고 하겠다. 통치자의 중요한 능력이자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15) 遠山美都男, 前揭書.
장군 미나모토 요리이에( 源頼家) 와 겐지장군관( 源氏将軍観) 김 영(한국외대) 目 次 서론 1. 요리이에와 히키씨(比企氏) 2. 요리이에와 와다씨(和田氏) 3. 요리이에와 미우라씨(三浦氏) 결론 서론 미나모토 요리이에는 가마쿠라 막부 2대 장군이다. 최근의 장군가에 대한 연구는 겐지 장군에서 섭가장군, 친왕장군으로 확대되면서 장군가 구성의 특징과 가족 구성원의 면면 이 밝혀지고 있다.1) 그러나 겐지장군에 대한 연구의 축적에 비해 요리이에의 경우 정치 적 패자로서의 평가 이외에 혼인과 자녀관계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찾아 볼 수 없 다. 가마쿠라 막부의 역사가 호조씨의 역사로 전환되면서 호조씨에 의해 제거된 요리이 에의 의미가 축소되었으며, 이러한 배경이 사료적 한계와 연구자의 낮은 관심으로 이어 졌기 때문일 것이다. 장군 요리이에의 처와 자녀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家 구성을 명확히 할 수 있다면 가마쿠라 장군가의 전체상을 파악하는데 의미를 갖는다고 판단된다.2) 싯켄(執権)정치 도쿠소(得宗) 전제정치를 통해 막부권력을 독점하는 호조씨에게 요리 1) 2) 青山幹哉, 鎌倉将軍の三つの姓 年報中世史 13(1988) 野口実, 竹御所小論ー鎌倉幕府政治史における再評価ー 青山史学 13(1992) 菊地大樹, 宗尊親王の王孫と大覚寺統の諸段階 歴史学研究 747(2001 김영, 源氏将軍家の継承と摂家将軍家 한국일본학회 55-2(2003) 김영, 鎌倉幕府 장군가의 계승과 源氏将軍観, 동양사학연구 90(2005) 김영, 미나모토 요리이에 家 의 정치적 의미 일본어문학 43(2008)
274 이에 사네토모(実朝) 장군기는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통해 형성되었던 고케닌 사회의 정 치 질서를 재편성하고 호조씨를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구상을 실현시키는 출발점이 다. 9대까지 이어지는 장군가의 역사에서 겐지장군은 3대로 단절된다. 그러나 겐지가 장 군이라는 관념(겐지장군관源氏将軍観)은 초대장군 요리토모기에 형성되어 가마쿠라 후기 까지 고케닌(御家人) 사회에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재생산되었다는 점은 선행연구에서 지 적되었다.3) 그렇다면 호조씨에 의해 배제된 요리이에의 家 가 고케닌 사회 권위의 상징 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이들을 옹립하려는 세력은 존재했는지 반호조씨 세력과의 연관성을 검토하는 것은 겐지장군관의 전개양상을 이해하는 적절한 방법이 될 것이다. 나아가 호조씨 스스로는 겐지장군관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했는지도 검토해 보고자 한 다. 한편 반호조씨 세력의 정치논리 뿐 아니라 호조씨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던 고케 닌의 의식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겐지의 혈통이 단절되고 호조씨 권력기반이 강 화 될수록 호조씨와 결합하여 정치적 지위를 높이려는 고케닌은 많아질 것이다. 그러한 고케닌들은 호조씨와 어떠한 형태로 관계를 맺고자 했는지, 그들에게 호조씨는 겐지장군 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의 권위를 창출하게 되는지 싯켄 도키요리(時頼)시기까지 범위를 확대하여 고찰해 보려고 한다. 1. 요리이에와 히키씨(比企氏) 요리이에는 요리토모의 사후 正治1년(1199) 2월 가마쿠라도노(鎌倉殿)에 오른다. 그러 나 어머니 호조 마사코(北条政子)와 호조씨에 의해 정치에서 배제되고 4월에는 13인 중 신에 의한 합의제가 시행되었다. 요리이에가 정치적으로 배제되는 배경에는 호조씨와 요 리이에의 처가인 히키씨의 막부 내 권력 장악을 위한 대립이 존재한다. 寿永1년(1182) 7월 요시카즈의 딸인 와카사노쓰보네가 요리이에의 처가 되고 두 사람 사이에 요리이에의 장자 이치만(一幡)이 태어난다. 이치만은 요리이에의 병환이 위급해지 는 建仁3년(1202) 장자로서 소령을 상속받지만 단독상속이 아닌 사네토모와의 분할상속 이 이루어져 히키씨와 호조씨가 대립하게 되는 히키의 난이 발생한다. 吾妻鏡 에 의하면 관서 38개국의 地頭職이 사네토모에게 상속되고, 관동 28개국의 地 頭職과 惣守護職이 장자 이치만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사네토모와의 분할상속에 불만 3) 青山幹哉, 鎌倉将軍の三つの姓 年報中世史 13(1988) 川合康, 源氏将軍と武士社会 歴史を読み直す8武士とは何だろうか 朝日新聞社(1994)
장군 미나모토 요리이에(源頼家)와 겐지장군관(源氏将軍観) / 김 영 275 을 품은 히키 요시카즈가 반역을 꾀해 사네토모와 호조씨를 제거하려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히키씨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히키씨 일족은 이치만의 거처를 방화하고 자살 하였으며 이치만 역시 방화를 벗어나지 못해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기 록하는 愚菅抄 에 의하면 히키씨의 권력강화에 불안을 느낀 호조 도키마사가 요시카즈 를 불러들여 살해했으며, 이치만은 어미니와 탈츨하지만 11월에 호조 요시도키가 살해되 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리이에도 이즈의 슈젠지에 유폐되고 다음해 요시도키에게 살해된다. 히키씨는 요리이에를 통해 장군가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호조씨도 겐지장 군가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강화하려고 한다. 겐지장군가의 외척이라는 동일한 조건을 갖 는 히키씨의 정치적 성장을 호조씨는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오카다 세이치는 호 조씨가 장악한 싯켄 의 지위가 본래부터 호조씨가 세습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 시기 호 조씨 권력의 불안정을 지적하고 있다.4) 장군가와의 혼인관계를 독점하고 있지 못한 상태 에서 권력기반을 보강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으며, 히키의 난이 호조씨의 정치력을 확 립시키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요리이에와 와다씨(和田氏) (1) 와다 요시모리(和田義盛) 와 和田合戦 와다 요시모리는 미우라씨의 서자가(庶子家)이다. 요리토모 거병에 처음부터 동참하여 헤이케 추토에 공을 세웠으며, 고케닌 통제를 위해 사무라이도코로(侍所)가 설치되자 초 대 별당(別当)에 임명되었다. 요리토모의 큰 신임을 얻어 建久1년(1190)에 左衛門尉에 임 명되어 막부 내 지위뿐 아니라 관직면에서도 미우라씨 본가를 능가하는 출세를 하였다. 요리토모 사후에도 막부 창설의 공신이며 장로로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였던 인물이다. 建保1년(1213) 2월 15일 호조 요시도키(北条義時)를 암살하려는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 다. 吾妻鏡 에 의하면 이때 체포된 安念法師를 통해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는데, 요리이 에의 아들을 大将軍 으로 삼아 호조씨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이 사건의 주모자는 이 4) 岡田清一, 執権制の確立と建保合戦 日本中世の諸相, 吉川弘文館(1989) 永井晋는 요리토모 사후 권력을 장악한 것은 호조씨가 아니라 가지와라 가게도키와 히키 요시 카즈였다고 보고 히키의 난을 호조씨의 구테타로 이해하고 있다( 比企氏の乱の基礎的考察 ー 吾妻鏡 建仁三年九月二日条と 愚菅抄 の再検討からー 埼玉地方史 37(1997), 北条氏と三浦氏 のつながりを読む 三浦一族研究 11(2007)).
276 즈미 지카히라(泉親平)이지만, 와다 요시모리의 아들인 와다 요시나오(和田義直) 와다 요 시시게(和田義重), 조카인 와다 다네나가 (和田胤長)등이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이 발각되고 와다 요시모리는 장군 사네토모에게 아들과 조카의 사면을 요청한다. 이에 사네토모는 요시모리의 막부에 대한 공을 인정하여 두 아들의 죄를 사면해주지만, 조카 다네나가는 장본인이라 칭하여 유배시키고, 그의 가옥을 몰수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요시모리가 원한을 품게 되어 5월 요시모리가 막부를 공격하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和田合戦(建保合戦)이다. 그러나 明月記 北条九代記 의 기록에 의하면 막부측은 이미 2월 사건의 장본인을 와 다 요시모리로 의심하고 있었으며, 결국 막부가 요시모리를 도발하여 5월의 사건으로까 지 확대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5) 요시모리가 막부에 불만을 품기 시작한 것은 이미 承元3년(1209) 시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요시모리는 사네토모에게 가즈사(上総)의 국 사(国司)에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나 사네토모는 요시모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호조씨는 도키마사가 正治2년(1200) 4월 遠江守 요시토키가 元久1년(1204)년 相模守에 임명되는 등 겐지 일족과 조정 출신의 귀족관료들에게 제한되어있던 수령(5위이상)의 지 위를 손에 넣고 일반 고케닌 보다 한등급 위의 입장을 구축하고 있었다. 노구치 미노루 (野口実)는 와다 요시모리가 이미 수령으로서의 지위를 회득한 호조씨와 동등한 스테이 터스 획득 의사를 표시한 것이라 평가하고 있다.6) 막부의 중신 요시모리는 호조씨 최대 견제의 대상이었으며 호조씨의 치밀한 계획 하에 和田合戦이 발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에이지쓰(栄実) 와 와다씨 와다씨의 반막부 움직임에 大将軍 으로 옹립되었던 인물은 미나모토 요리이에의 아들 에이지쓰(栄実)이다. 에이지쓰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지만, 吾妻鏡 尊卑文脈 등에 의하면 어머니가 쇼칸호쿄(昌寛法橋)의 딸임을 알 수 있다. 吾妻鏡 에 쇼칸호쿄는 成勝寺執行 로, 승려였던 그는 요리토모와 밀접하게 정치적 움직임을 보인 다. 養和1년(1181) 요리토모의 장녀 오히메(大姫)의 거처를 건축하기 위한 담당자로 등장 한 쇼칸호쿄는 이후 요리토모의 명을 받들어 시행하는 奉行으로서의 역할을 수차례 수행 하고 있다. 헤이케(平家) 추토와 오슈갓센(奥州合戦)에도 참전하였던 쇼칸호쿄는 요리토모 와 밀접했던 인물로 요리이에의 혼인도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 5) 6) 松島周一, 和田合戦の展開と鎌倉幕府の権力状況 日本歴史 515号(1991) 野口実, 承久の乱と三浦一族 三浦一族研究 3(1999)
장군 미나모토 요리이에(源頼家)와 겐지장군관(源氏将軍観) / 김 영 277 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에이지쓰는 1213년 9월 마사코의 조치로 출가하여 교토에 거주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1214년 11월 와다 요시모리의 잔당이 재차 에이지쓰를 중심으 로 역모를 꾀한 사건이 발각되자, 막부의 공격을 받은 에이지쓰는 자살을 하였다. 막부의 중신 와다씨의 멸망 과정에서 요리이에의 아들이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와다의 난에 가담한 인물 중에는 시나노(信濃)의 주민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2 월 사건의 주모자 泉親平를 비롯하여 一村次郎近村 籠山次郎 保科次郎 栗沢太郎父 子 青沢太郎父子 青栗四郎 青栗七郎이 시나노의 주민으로 되어있다. 이들 시나노 주 민과 와다씨의 관계에 대해서는 石井進에 의해 검토가 이루어졌다.7) 시나노는 히키 요시 카즈가 슈고(守護)직을 맡고 있는 지역이었다. 또한 겐포갓센의 동조자 중에는 히키 요시 카즈의 장인 渋谷刑部丞兼忠의 아들로 추측되는 兼守도 포함되어 있다. 히키의 난으로 히키씨가 멸망하고 요시카즈의 처첩(妻妾)과 두 살의 아들은 인연이 있어 와다 요시모 리에게 맡겨졌다고 되어 있다. 히키씨의 난에서 요시모리는 요시도키군으로 행동하지만, 히키씨 잔존세력과 와다씨의 연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와다씨가 추대한 것이 에 이지쓰라는 점은 이들 반호조씨 세력의 결합이 겐지장군관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요리이 에와 아들들은 겐지장군관의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요시모리의 사무라이도 코로 별당직을 요시도키가 장악하면서 싯켄체제 성립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평 가할 수 있다. 3. 요리이에와 미우라씨(三浦氏) (1) 구교(公暁) 와 미우라 요시무라( 三浦義村) 承久1년(1219) 1월 27일 鶴ヶ岡八幡宮에 참배하는 사네토모가 구교에게 살해당하는 사 건이 발생한다. 구교는 가모 시게나가(賀茂六郎重長) 딸인 쓰지도노(辻殿)와 요리이에 사 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요리이에의 사망 후 구교의 행적을 살펴보면, 建永1년(1207) 6월 에 마사코의 거처에서 하카마기(袴着)의식을 치루고, 10월에는 사네토모의 양자가 되지만 建暦1년(1211) 9월 출가하여 교토로 상경하였다.8) 결국 建保5년(1217) 6월 鶴ヶ岡八幡宮 7) 8) 比企一族と信濃 そして北陸道 信濃の歴史と文化の研究 黒板周平先生の喜寿を祝う会(1990) 五味文彦는 구교의 출가를 장군계승라인으로부터의 배재로 이해하고 있다( 聖 媒 縁 日本 女性生活史 中世 東京大学出版会(1990)).
278 의 별당이 되어 가마쿠라로 돌아와 사네토모를 살해한 것이다. 사네토모를 살해한 구교 는 곧바로 미우라 요시무라에세 자신의 장군옹립을 위해 움직여 줄 것을 요청하는 사자 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요시무라는 아버지 요리이에와의 관계를 떠올리며 구교에게 동정 의 뜻을 표하나 결국 요시토키에게 밀고하여 구교의 목을 벤다. 吾妻鏡 는 요시무라의 아들인 駒若丸(후에 光村)가 구교의 제자였으므로 구교가 요시무라를 의지하였다고 기록 하고 있다. 그러나 구교와 요시무라의 사이는 더욱 밀접하다. 요시무라가 구교의 유모 집안이었던 것이다. 당시 유모가 단순한 양육에 그치지 않고 유모 부부와 그 집안이 성장한 이후에 도 후견인이 되어 정치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관행을 고려하면, 구교와 요시 무라 사이의 연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에 주목하여 구교의 사네토모 살해 를 사주한 것이 요시무라 자신이었다는 해석도 제시되고 있다.9) 호조씨 체제에 적극 협 조하며 막부 내 지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는 미우라씨지만 이 시기부터 호조씨 타도 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호조씨와의 긴밀함은 당분간 유지되지만, 결국 宝治1년 (1247) 호조씨에 반기를 들다 일족이 멸망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미우라씨와 호조씨는 치 밀하고 복잡한 정치 속에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젠교(禅暁) 와 미우라 다네요시( 三浦胤義) 한편, 和田合戦의 결과 사망한 에이지쓰에게는 젠교라는 동생이 있다. 承久1년(1219) 1 월 27일 사네토모가 구교에게 살해 된 후 당시 교토에 거주하고 있던 젠교는 2월 가마 쿠라에 귀향하였다( 光台院御室伝 ). 젠교의 귀향은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공석인 장군 계승문제와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해 4월 젠교는 교토에서 모반에 동의하였다는 이유로 호조 요시토키에게 살해되는 것이다( 仁和寺日記 承久記 ). 젠교 를 장군으로 옹립하려는 세력이 있었고, 이에 위기를 느낀 호조씨가 젠교를 제거한 것으 로 판단할 수 있다. 지금까지 확인되는 요리이에의 4명의 아들은 모두 반호조씨 세력과 결합하였으며 장군 옹립사건에 연루되어 살해되었다. 반호조씨 세력에게 겐지장군과의 결합은 가장 유효한 반호조씨 논리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에이지쓰와 젠교의 어머니 쇼칸호쿄의 딸은 요리이에의 사후 재혼한다. 재혼상대 는 미우라 다네요시(三浦胤義), 미우라 요리무라의 동생이다. 미우라 다네요시는 쇼칸호 쿄의 딸과의 사이에 胤連 兼義 등 자녀를 두었다.10) 미우라 다네요시는 에이지쓰와 젠 9) 10) 野口実, 執権体制下の三浦氏 三浦氏の研究 岩波書店(2008) 上杉孝良, 承久記 私考ー三浦胤義の子供 処刑の事についてー 三浦一族研究 3(1999)
장군 미나모토 요리이에(源頼家)와 겐지장군관(源氏将軍観) / 김 영 279 교의 죽음으로 반 막부 성향을 강하게 보이며 大番役을 위해 상경하여 그대로 교토에 머 물렀다고 한다( 承久軍記物語 ). 1221년 조큐의 난이 발생하자, 다네요시는 적극적으로 조정 측에 서게 되고 고토바(上鳥羽)상황의 뜻에 따라 미우라 요시무라를 조정 측으로 끌어들이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요시무라는 동생 다네요시의 행동을 요시도키에게 고 한 후 막부 군으로 아들 야스무라와 함께 교토로 진격하였다. 막부 군과 대치하던 다네 요시와 아들 다네쓰라(胤連) 가네요시(兼義)는 자살하였다. 다네요시는 젠교의 옹립을 통 해 정치적 지위 향상을 도모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3) 미우라씨와 호조씨의 관계 미우라씨는 源家累代家人 으로 자칭할 정도로 겐지장군가와 조상대대로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미우라 요시무라, 와다 요시모리가 이름에 義 자(通字)를 사용하는 것은 겐지 장군가와 공통성을 갖는다. 미우라 다메쓰구(三浦為継)가 後三年の役에 미나모토 요시이 에(源義家)를 따라 종군하여 전공을 세우게 되면서 적자 요시쓰구(義継)의 元服에 미나모 토 요시이에가 烏帽子親가 되어 義 자를 하사하였다.11) 미우라 요시아키(三浦義明)의 딸 은 미나모토 요시토모(三浦義朝)와 결혼하여 미나모토 요시히라(義平)를 낳아 겐지의 외 척이 되었으며( 平治物語 ) 미나모토 요리토모 거병에 즉각 동참하면서 막부 창설의 공 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사망하자 호조씨 정치노선에 적극 부응하는 태도를 취하 게 된다. 요리이에의 친정이 정지되고 설치된 13인 중신합의제에서 미우라 요시즈미(三 浦義澄)와 와다 요시모리는 주요 구성원이 되었으며 가지와라 가게도키(梶原景時) 멸망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히키의 난과 和田合戦의 중심역할을 하였다.12) 요시모리 멸망을 이끄 는 요시무라의 행동은 미우라의 개는 친구를 먹어치운다 ( 古今著聞集 )고 평가될 정도 였으며 承久の乱에서는 동생 다네요시(胤義)를 적으로 돌리며 막부를 위해 공을 세운다. 이러한 미우라씨의 정치적 입장은 호조씨와의 혼인 烏帽子관계를 통해 보강되었다. 建仁2년(1202) 8월에는 미우라 요시무라의 딸(후에 矢部禅尼)과 호조 야스도키(北条泰時) 가 혼인을 하여 두 사람 사이에 도키우지(時氏)가 태어난다. 또한 요시무라의 아들 야스 무라(泰村)는 야스도키와 烏帽子관계를 맺고 야스도키로부터 이름의 泰 자를 받았다. 야 스도키와 矢部禅尼 사이의 딸은 야스무라의 처가 되었다. 야스무라의 이복동생인 마사무 라(政村)와 요시무라도 烏帽子관계로 마사무라의 村 은 요시무라로부터 받은 이름이다. 11) 12) 鈴木かほる 縁組にみる三浦氏の盛衰 三浦一族研究 創刊号(1998) 요시모리에게는 미우라 일족의 가독권을 위협하는 서자가를 제거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野口実, 執権体制下の三浦氏 三浦氏の研究, 岩波書店(2008))
280 미우라씨가 멸망하기 직전인 宝治1년 5월 6일에는 야스무라의 아들 駒石丸를 도키요리의 양자로 삼을 것을 약속하고 있다. 겐지장군가와 맺었던 혼인 烏帽子관계를 호조씨를 대 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유력 고케닌 미우라씨를 적으로 돌릴 수 없었던 호조씨의 의도도 강하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承久1년(1219) 11월 요시무라는 駿河守에 임명되어 호조씨 이외의 고케닌으로는 처음 으로 국사에 임명되었다. 貞応3년(1224) 6월 싯켄 요시도키가 사망하고 이가씨(伊賀氏)사 건13)이 발생하였을 때 이가씨는 요시무라의 힘을 빌리려하였다. 결국 마사코가 요시무라 를 설득하여 야스도키가 싯켄의 지위를 계승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지만 요시무 라의 막부 내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미우라씨가 호조씨와 맺었던 혼인 烏帽子 관계가 점차 의미를 상실하는 것으 로 보여진다. 야스도키와 혼인한 요시무라의 딸은 도키우지를 낳고 사하라 모리쓰라(佐原 盛連)와 재혼하였으며(1235년), 도키우지가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야스무라와 결 혼한 야스도키의 딸도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1236년). 延応1년(1239)년 막부 창건 당시 의 유력 고케닌이었던 요시무라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새롭게 두각을 나타내는 세력이 아 다치씨(安達氏)이다. 도키우지가 아다치 가게모리(安達景盛)의 딸(松下禅尼)과 혼인하여 쓰네도키(経時) 도키요리(時頼)를 낳아 호조씨 외척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미우라씨와 사 이가 나빴던 아다치씨 가게모리가 도키요리를 부추켜 미우라씨 제거를 획책하게 되는 것 이다. 이렇게 발생하는 宝治合戦은 (1247) 섭가장군 후지와라 요리쓰네가 교토로 추방되 는 일련의 반 도쿠소(得宗) 움직임 속에 일어난 사건이다.14) 미우라 야스무라는 동생 미 쓰무라(光村)와 함께 일족을 이끌고 호조씨에 대항하나 미우라 일족은 미나모토 요리토 모의 法華堂에 숨어들어 최후를 맞이하였다. 미우라씨의 최후는 겐지장군관의 상징성을 떠올리게 한다. 宝治合戦은 도쿠소 전제정치를 성립시키는 도키요리의 권력을 부동의 것으로 만드는 사건이었다.15) 이미 호조씨와의 혼인관계는 고케닌사회에서 겐지장군과의 그것과도 같은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3) 14) 15) 요시도키의 후실인 伊賀氏가 아들인 政村를 싯켄으로 삼고 사위 一条実雅를 장군으로 세우려는 했던 사건. 요시무라가 사주했다는 설도 있다. 미우라 요시무라가 슈고로 있던 土佐国의 知行国主가 九条道家였으며, 미우라씨는 섭관가와 사 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野口実, 執権体制下の三浦氏 三浦氏の研究 岩波書 店(2008)). 村井章介, 執権政治の特質 日本史研究 261(1994)
장군 미나모토 요리이에(源頼家)와 겐지장군관(源氏将軍観) / 김 영 281 결론 호조씨는 고케닌이 겐지장군가와 직접 결합하는 것을 차단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 다. 그렇지만 겐지장군을 통한 정통성 확보는 호조씨 자신에게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사 네토모가 사망하고 섭관가 출신의 후지와라 요리쓰네(藤原頼経)가 5대 장군에 오르는데 요리쓰네는 寛喜2년(1230) 12월 요리이에의 딸인 다케노고쇼(竹御所)와 혼인하였다. 요리 이에의 네 아들이 호조씨에 의해 살해되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다케노고쇼(竹御所)를 통 해 섭가장군에게 겐지장군의 권위를 부여하면서 막부를 이끌어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호 조씨와 반호조씨 세력이 겐지장군관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반 복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겐지장군관은 호조씨와 반호조씨 모두에게 중요한 정치논 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호조씨 권력기반이 강화되면서 호조씨는 섭가장군, 친왕장군과 직접적인 혼인 관계를 맺게 된다.16) 호조씨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으며 겐지장군의 권위의 상징성이 약 해지는 가운데 호조씨 스스로가 고케닌 사회의 권위를 창출하는 존재로 성장하였다고 평 가할 수 있을 것이다. 16) 섭가장군 후지와라 요리쓰그(藤原頼嗣)는 도키요리의 여동생 히와다히메(桧皮姫)와 혼인하고, 친 왕장군 무네타카(宗尊)의 정실 고노에 사이시(近衛宰子)는 도키요리와 양자관계를 맺고 있다.
일본 근세의 도시와 재해 막부의 초기 대응을 중심으로 一 최 은 석(한국해양수산개발원) 目 次 Ⅰ. 들어가며 Ⅱ. 1657년 화재의 개요 Ⅲ. 막부의 대응 Ⅳ. 권력 측의 위기감과 도시의 재해 Ⅴ. 맺음말 Ⅰ. 들어가며 1657년(明曆 3) 1월 18일에 발생하여 이틀 동안 에도 시중을 휘감아 최소 3만명 이상 의 사망재를 낸 메이레키의 대화재(明曆の大火, 이하 1657년 대화재)는 그 구체적인 내용 이 이미 충분히 탐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1) 특히 본래 사사지(寺社地)와 무가지(武 家地)가 도시 중심부에 집중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인지(町人地)와 빽빽하게 맞물려 있던 에도의 공간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꾼 계기로 주목되어 왔다. 이 화재의 결과로 일부 사원과 요시와라 같은 유곽이 도시의 외연부로 이전되었고 불씨가 각 정(町)을 넘나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화지(除火地)가 설정되었으며, 무가는 도시 외연부와 근교 농촌 지 역에 별도의 저택 즉 시모야시키(下屋敷)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제화지는 보통 광장(廣小路)을 형성하여 민중들의 일상적 상업 활동의 새로운 터전이 되어 갔으며 근교 농촌의 시모야시키는 해당 지역의 도시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는다.2) 1) 2) 黑木喬, 明曆の大火 (講談社, 1977)가 대표적인 성과이다. 화재로 인한 에도 도시 공간의 변화에 대해서는 玉井哲雄, 江戶 失われた都市空間を讀む (平 凡社, 1986); 黑木喬, 明暦の大火 前後における屋敷移動 地方史硏究 28(5) (1978); 黑木喬, 明暦の大火 前後における寺社および町屋の移動 地方史硏究 29(5) (1979); 田中麻衣ㆍ吉田 悅造, 明暦大火前後における江戸の土地利用變化 東京學藝大學 紀要 人文社會科學系 II 61
284 그런데, 화재 직후에 막부가 보인 행보가 의미하는 바에 관해서는 그다지 추급되지 않 았다 할 수 있다.3) 막부의 구제 활동에 대한 언급은 이미 있지만, 당시의 여러 정책 수 단 중에서 막부가 동원할 수 있었음에도 동원하지 않은 수단, 막부가 재해의 한가운데서 가장 심각하게 고려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 각한다. 본 발표에서는 1657년 대화재의 양상과 막부의 대응을 살피고, 이 화재와 마찬 가지로 도시 기능의 마비를 불러일으킨 1787년 에도 소요나 1855년 대화재 때의 경우와 대비하여 공통점과 상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바꿔 말하자면 위기 관리(crisis management)의 필요에 직면한 막부의 행태를 살핌으로써 도시 행정에 대한, 나아가 스스 로의 권력/권위의 존재양식에 대한 막부의 시선의 일단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하, 1787년 에도 도시 소요와 1855년 대지진에 관해서는 이미 일본에서 연구도 많이 나와 있고 필자 또한 미흡하나마 소묘를 행한 바 있기에 그 상세를 최대한 생략하고 본 발표에서는 1657년의 사례를 상대적으로 상세히 다루려 한다.4) 이 화재의 경과와 직후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는 대부분 동경시사고(東京市史稿) 에 수록되어 있다. 본 발표에서는 이들과 아울러 구제편 제1권과 산업편 제5권 무사시아부미(むさしあぶみ) 를 주요 전거로 쓰면서, 먼저 화재의 양상과 막부의 대응을 살피고, 1787년 및 1855년의 사례에 견주어 그 성격을 살펴보기로 한다. Ⅱ. 1657년 화재의 개요 柳營日次記 에 따르면 1월 18일 오후 2시 경에 혼고 6정목의 혼묘지(本妙寺)에서 불 이 나서 때마침 불어온 강한 바람을 타고 혼고, 간다, 히가시혼간지를 지나 무코지마, 레 이간지, 핫쵸보리 방면을 덮쳐 지역 일대를 소실시켜 다수의 사망자를 냈다. 19일 오전 3) 4) (2010)를 참조할 수 있다. 에도의 광장에서 펼쳐진 민중 세계는 小林信也의 논문이 대표적이다. 小林信也, 江戸町方の廣小路における店舖営業と助成地経営 史學雜誌 106(6) (1997). 1787년의 에도 도시 소요(天明の江戸打ちこわし)의 경우 정회소(町會所)에 의한 하층민 구제의 제도화라는 지속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로 이어졌기에 막부의 도시사회 인식을 묻는 연구들도 나 왔지만[吉田伸之, 江戶町會所金貸付について(一) 史學雜誌 86(1) (1977); 吉田伸之, 江戶町 會所金貸付について(二) 史學雜誌 86(2) (1977)], 그와 같은 제도적 결과를 낳지 못 한 1657 년 대화재 때의 구제책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1657년 대화재 의 연구가 공간 구조 변화와 소화 조직(火消し)이라는 가시적 변화에 집중된 것도 그와 궤를 같이 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졸고, 1787년 에도 도시 소요의 제양상 일본공간 제2호(논형, 2008); 졸고, 재해와 도시사 회 - 1855년 대지진과 에도 일본공간 제7호 (논형, 2010)
일본 근세의 도시와 재해 / 최 은 석 285 10시 즈음에는 무코마치(向町)까지 모두 타서 아사쿠사미쓰케(淺草見付)5)와 바쿠로정(馬 喰町)까지의 소실 지역에서 5, 6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같은 날 정오경에는 신타카죠 정(新鷹匠町)에서 불이 일어나 여전히 강한 바람을 타고 에도 중심부를 훑어가며 주요 다이묘들의 저택을 소실시켰다. 불길은 오후 1시경에 에도성 천수각으로 들어가 혼마루 및 니노마루를 휘감았고 오후 4시경에 쇼군은 니시노마루로 옮겨가야만 했다. 이 즈음에 고지마치(麹町)에서 불이 일어나 무가 저택의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불길은 자정 무렵에 는 시바(芝)까지 번져간 뒤에 비로소 가라앉았다.6) 이 화재로 인한 피해 상황은 한 사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만 석 이상 다이묘의 가 옥 160채가 소실되고 54채가 잔존했으며, 무가 각 조(組)의 가옥 680채가 소실되었고, 정 옥(町屋)은 편정(片町) 기준으로 800정(町)이 소실되었는데 이는 길이로 따지면 4만 8천 칸(間, 약 87.36킬로미터)에 해당된다. 그 외에 주인을 알 수 없는 정옥의 수가 약 830채 를 헤아렸고 다리는 모두 불타고 고후쿠정(呉服町)의 잇코쿠바시(一石橋)와 아사쿠사바시 (淺草橋)만 남았다. 인명 피해는 약 3만 7천명을 헤아렸다고 한다.7) 그러나 인명 피해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 바, 1월 23일부터 정봉행이 53일 간에 걸쳐 모은 사체의 수가 63,430여 구에 달한 것을 보면 사상자 수를 10만 이상으로 잡은 사료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8) 한편, 막부 및 무가 측의 소화 조직이 기능한 흔적은 사료에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 때까지의 소방 조직으로 흔히 언급되는 다이묘 소방조직(大名火消し)이란 것은 그 실태 상 에도성을 중심으로 에도의 구획을 나누어 각 다이묘가 소방에 임한다는 정도의 느슨 한 것이었으며, 시중의 화재를 진화하는 것은 인근 각 정(町)에 그 책임이 일임되었다.9) 5) 6) 7) 8) 9) 미쓰케(見付, 見附)는 에도성의 내호(內濠)와 외호(外濠)에 설치된, 적의 침공을 탐지하기 위한 경비용 성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에도성 36 미쓰케라 일컬어지지만 실제로는 92개의의 성 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柳營日次記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p.253 255. 19일의 상황에 대한 기술은 각 사료별로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고지마치에서 먼저 불이 일어나 에도성으로 옮겨 붙었다는 설도 있다. 天亨吾妻鑑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256. 이 사료에는 쇼군이 니시노마루로 옮겨갈 때의 모 습이 기술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쇼군은 보행중(步行衆)이 멘 가마에 올라 타 근습(近習)들 을 대동하고 이동했다고 한다. 上杉年譜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277. 東京市史稿 에 수록된 다른 사료들이 제시하는 수 치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사망자 수는 10만 이상이라 기록하는 사료도 있는 등, 일정 하지 않다. 이 중 주인을 알 수 없는 마치야(家主不知町屋)라는 것은 다른 사료에는 是ハ町中 ニテ親子兄弟モ焼 主ナキヤシキ 로 설명되어 있다. 즉, 가족이 모두 사망하여 주인조차 알 수 없는 집이란 뜻이 된다. 玉露叢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279. 元延實錄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280. 특히 에코인의 기록에 都計十萬八千餘人 이라 되어 있다는 점은 사망자 수를 10만명 이상으로 보는 설에 힘을 실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관련하여,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 하에서 막부의 주요 관심사가 에도성과 치안 질서 유지
286 따라서 1657년 대화재 정도의 규모로 화재가 발생할 경우 이처럼 느슨한 조직이 제 기 능을 못한 것은 납득이 가는 일일 것이다. 아울러, 화재가 일어난 1657년 1월에 막부는 촉서(觸書)를 내어 불을 지른 자나 계책을 내고 나쁜 짓을 의뢰한 자가 있다면 이를 신 고할 것 과 이에 대한 포상금으로 금 20매를 내건다는 것을 고찰(高札)을 세워 알리게 했다.10) 그러나 사료를 보는 한, 이에 상응하는 결과는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화재 원인을 추구하는 다른 노력을 한 흔적도 파악되지 않는다. Ⅲ. 막부의 대응 1. 17 세기 전반 막부의 재해 대응 17세기 전반의 막부의 갖가지 시중 구제책을 화재시에 국한하지 않고 통괄해서 보면, 주된 것으로는 ① 미곡의 할인 판매 ② 구소옥(救小屋) 설치 ③ 금은의 하사를 들 수 있 다. 에도 막부의 정치생명이 끝날 때까지 이들 세 가지 수단은 재해시의 구제책은 물론 이고 널리 민심을 위무하는 주요한 방법으로 계속 동원되었다. 미곡의 할인판매는 흉년 으로 인해 도시 내의 미곡 가격이 급등했을 때 이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채용되었는데, 이른 예로서는 1636년(寬永 13) 7월에 소판(小判) 1량에 쌀 1석 1두로 미곡가가 등귀한 데 대응하기 위해 막부가 오쿠라(御藏)에 비축하고 있던 쌀을 풀어서 쵸닌 1인당 쌀 1두 1승 한도로, 소판(小判) 1량에 쌀 1석 8두의 가격으로 판매한 것을 볼 수 있다.11) 구소옥 은 이 시기에 국한시켜 말하자면 대체로 에도 이외 지역에서 기근 등의 이유로 유입되어 들어온 사람들을 일시 수용하는 용도로 동원되었다. 가설 건물을 지어 사람들을 수용하 10) 11) 에 집중되어 시중 전체를 아우르는 소방 조직의 부재가 필연적이었음이 지적되기도 한다. ウィ リアム W. ケリイ, 江戸における放火 鵜川馨 ジェイムス L. マックレイン ジョン M. メリ マン編 江戸とパリ (岩田書院, 1995) p.447. 御觸書寬保集成 1431. 1657년 대화재는 상사병을 앓은 끝에 죽은 처자의 振袖를 혼묘지에서 태웠을 때의 불씨로 불이 일어났다고 하여 흔히 振袖火事 라 불리지만, 이는 후세의 전설일 뿐이고 실상 사료에서 파악되는 화재 원인은 없다. 뿐만 아니라 막부가 이 화재의 원인을 적극 적으로 추급한 흔적도 사료에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따라서 화재 원인을 두고 유이 쇼세쓰 잔 당 혹은 죄수들의 방화설, 아베 다다아키 저택에서 일어난 불을 혼묘지가 대신 뒤집어 썼다는 음모설 등이 유포되어 있다. 실상은 이제 와서 알 수 없지만, 중죄에 해당되는 실화, 방화의 원 인을 추급하지 않은 막부의 태도에 의문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억측에 지나지 않지만, 사료에 나온 막부의 행동과 당시 정황을 보면 막부로서는 이토록 큰 화재를 겪은 뒤에 그 원인을 추급 할 여력이나 실마리조차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寬永饑民錄 東京市史稿 救濟編 1, p.72.
일본 근세의 도시와 재해 / 최 은 석 287 고 식량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금은의 하사가 있는데, 화재가 발생하면 막부는 어김없이 대체로 금은을 베풀었다.12) 1612년(慶長 17)에는 도이 도시카쓰(土井利勝)의 집에서 불이 나 가옥이 손 실되자 보전금으로 금 1,000량을 주고13) 1621년(元和 7)에는 화재에 조우한 다이묘들에 게 은자를 주는 등,14) 화재시마다 무가 측에는 막부의 건축 지원금이 하사된 것으로 보 인다. 재해시의 복구 지원금은 무가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1632년(寬永 9)의 화재시 막부 의 은자 하사 목록에 화재 피해를 입은 여러 무가와 더불어 (은자) 140관목, 두 정옥에 게(兩町屋へ) 라는 문구가 보이는 것이 한 예가 될 것이다.15) 1637년(寬永 14)에는 화재 피해를 입은 정년기(町年寄) 3인에게 금 500량 씩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6) 그런데, 막부 정치의 초기에 금은의 하사는 단지 재해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1634년(寬永 11) 9월에 에도 쵸닌들에 대해 대대적으로 행해진 은자 의 하사는, 쇼군 이에미쓰가 교토에서 귀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막부는 에도의 쵸닌들을 에도성 앞으로 불러모아 오오테문(大手門) 앞에서 은자를 나눠주었다. 에도에 정착한지 20년 이상 된 자에게는 은 5매, 그보다 짧은 자에게는 3매가 하사되었 다. 이때 하사한 은자의 총액은 5천 관목에 달했으며, 쇼군은 에도성의 성루에서 이 광경 을 지켜 보았다. 아울러, 이에미쓰가 아직 교토에 있을 때에는 교토 시중의 35,419명에게 은 5,000관목을 풀어서 공가와 무가를 통틀어 전례가 없는 일 이라는 환호를 받았다고 도 전한다.17) 12) 13) 14) 15) 16) 17) 이와 관련하여 이에야스가 에도에 새로 성을 구축한 뒤 슨푸로 돌아갈 때 노중들을 불러모은 앞에서 히데타다에게 말한 내용이 전해진다. 그에 따르면, 당시 이에야스는 금 15만매를 에도 성 앞으로 남기면서 그 주된 용도로서 ① 군사용 ② 화재시 에도성 및 성하(城下)의 귀천 만민 이 거소(居所)로 곤혹을 겪지 않게 하는 용도 ③ 흉작일 때 사령(私領) 영주의 구제 활동 보조 를 꼽았다고 한다( 駿河土産 東京市史稿 救濟編 1, p.25). 이 중 ②번이 본 발표에 연관이 있을 것인데, 이는 단지 거소의 재건 문제가 아니라 곤란을 겪게 되므로 이를 진휼(賑恤)하기 위해 라고 하여 전반적인 구제 활동을 언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東照宮御實紀附錄 東京市史稿 救濟編 1, p.27). 慶長萬治覺書 東京市史稿 救濟編 1, p.35. 東武實錄 東京市史稿 救濟編 1, p.41. 寬永日記 東京市史稿 救濟編 1, pp.48~50. 御用達頂人由緖書 東京市史稿 救濟編 1, p.75f. 이 1,500량의 금자가 일반 쵸닌에까지 전달 되었는지는 사료상 파악이 되지 않지만 에도의 도시 행정이 정봉행(町奉行)-정년기-정명주(町名 主)-쵸닌=가옥주-임차인이라는 계통을 따라 행해지고, 막부가 상대한 것은 보통은 정년기에 국 한되었음을 생각할 때 이 하사금이 행정 계통을 따라 쵸닌에까지 전해졌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는 없을 것이다. 大猷院殿御實紀 東京市史稿 救濟編 1, pp.68~69. 같은 사료에서, 에도 시중에 베푼 은자에 대해 정착 후 20년이 지난 자에게는 5매, 그보다 짧은 자에게는 3매, 그리고 기타 はしばしの もの 에게는 2매씩을 주었다는 설도 소개되고 있다. 이 はしばしのもの 의 실태를 여기서 확
288 막부가 에도 쵸닌의 생활과 연관을 맺는 방식 중 하나가 바로 금은의 하사였으며 이는 평상시든 비상시든 막부의 위광을 보여주고 쵸닌의 충성을 담보하는 것, 즉 막부의 정당 성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금은의 하사가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기 4년 전으로 막부의 지배가 아직 그 기 초를 확실히 다지지 못한 때에 이뤄졌다는 것도 이런 정당성의 확립이란 면에서 고려할 만하다.18) 2. 대화재 직후의 조치들 1657년의 대화재는 이상과 같은 막부의 전통적인 방책들이 한계에 부딪히는 상황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에도성이 완성된 것은 간에이 연간(1624 1643)으로 간주되고 있는 바, 도시의 틀이 완성된지 불과 십여년만에 에도성을 비롯해 무가지와 정인지, 사사 지를 이틀에 걸쳐 모조리 휘감은 대화재가 안긴 물질적, 정신적 충격은 파멸적이었으리 라는 점은 쉬이 예상할 수 있다. 에도성에까지 화재가 번져 소장하고 있던 금이 녹아 버 리고, 이전에 쵸닌의 일상적 경제활동을 영위하는데 보조적 역할을 하는 정도였던 금은 의 하사도 당사자인 쵸닌이 심각한 물적, 인적 손실을 받은 상황에서는 그 효과가 제한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재 직후에 막부가 에도 시중을 대상으로 행한 것은 시신의 수습과 음식의 제공, 그 리고 미곡가 억제였다. 시신을 모으는 것은 정봉행 지휘 하에 비인두(非人頭) 구루마 젠 시치(車善七)와 시바(芝)의 마쓰에몬(松右衛門)이 담당했다.19) 이들이 모은 시체는 우시지 마(牛島)로 옮겨졌는데 그 자리에 공양탑을 세우고 절을 세워 조죠지(增上寺)의 승려를 18) 19) 정짓기는 힘들지만, 정착 기간에 따라 구분된 자들을 정식의 쵸닌 즉 주택 소지자로 보면 이들 은 임차인에 상당하지 않을까도 생각된다. 당시에도 이미 에도 이외 지역으로부터 에도로 유입 하여 비인(非人)이 되는 등 사회의 저층에 편입되는 된 자들이 있었지만, 막부는 이들에 대해서 는 본국으로의 귀환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무가에 대해서는 금은 하사와 더불어 봉록의 증액도 주요한 수단이었다. 무가의 봉록 증액은 무사들의 궁핍화에 대한 대응을 명목으로 1633년(寬永 10)에 대규모로 행해졌으며 1634년(寬永 11)과 1635년(寬永 12), 1642년(寬永 19)에도 시행되었다. 1634년 2월에는 1,000석 이하의 무사 들에 대해 각각 200석 씩을 가증했고 석고가 없는 무사들에게는 신규로 2백석 씩을 부여했다. 2월 7일의 경우 에도성 오오히로마에 이들을 모아 한 명씩 쇼군 앞에 나서서 가증을 언도하는 목록의 송독을 듣게 했다 ( 寬永御日記 東京市史稿 救濟編 1, pp.51 60). 1635년 이후의 가 증은 후다이 다이묘나 막부 직속 군사 조직의 조두(組頭)를 대상으로 했으며, 그 규모는 각자에 대해, 일부 200 300표(俵) 가증의 예도 있지만, 보통은 400석 이상이었으며 특히 다이묘들은 4,000석, 5,000석을 넘나들었다 ( 大猷院殿御實紀 寬永日記 東京市史稿 救濟編 1, pp.61~68) 흔히 비인(非人) 조직은 예다(穢多) 조직의 하위에 위치하여 비인두 구루마 젠시치는 예다의 수 장인 단자에몬(彈左衛門)의 지시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교호 연간의 쟁론을 거치 면서 정착된 것으로, 이 시기에는 비인두가 정봉행의 직접 지시를 받고 있다.
일본 근세의 도시와 재해 / 최 은 석 289 주지로 삼아 에코인(回向院)이라 했다.20) 화재가 끝난 직후인 1월 20일은 전날까지의 강한 바람이 잦아들고 눈이 내리기 시작 했기에 추위 속에 동사하는 이재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막부는 이 날부터 니혼바시(日 本橋)를 기준으로 남쪽을 나이토 다다오키(内藤帯刀忠興), 이시카와 노리유키(石川主殿頭 憲之)에게, 북쪽을 로쿠고 마사하루(六郷伊賀守政晴), 마쓰라 시게노부(松浦肥前守鎮信) 등 네 명의 다이묘에게 맡겨 아사쿠사의 쌀을 매일 1,000표(俵)씩 내어 죽을 끓여 나눠주 게끔 했다.21) 애초에 29일까지로 예정되어 있던 이 세교(施行)22)에는 수만명의 상인들이 몰려와 변변한 식기도 없이 기와 파편이나 이 나간 그릇에 죽을 담아갔다고 기록되어 있 다.23) 29일 당일이 되자 2월 2일까지로 세교가 연장되었고,24) 다시 2월 4일에는 2월 12 일까지로 연장되었으며 나이토 등 네 명의 무사는 15일에 에도성에 가서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고 쇼군을 알현했다.25) 이러한 구제는 막부에 의해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에도 성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화재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덜 입은 다이묘들에 의해서도 행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26) 아울러, 1월 21일에는 화재를 틈타 금 1부에 5, 6승 즉 1량 기준으로 2두를 조금 넘는 수준으로 치솟은 쌀값의 가격 상한을 1량 당 7두로 억제 하라는 명령을 정봉행에 내렸다.27) 2월 10일에 금은의 하사가 이뤄지긴 하지만, 이 시기에 막부가 진행한 시중 구제책은 이 외에 별달리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 기간에 막부가 힘을 쏟은 것은 오히려 도시 시설의 재정비와 무가의 구제 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월 하순에 에도의 20) 21) 22) 23) 24) 25) 26) 27) 玉露叢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283. 이렇게 생긴 에코인은 이후 대대로 무연고자의 공양을 맡게 된다. 嚴有院殿御實紀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288. 보시 를 뜻하는 불교용어로, 재해시 등에 식료의 제공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였다. 시행 과 구별하기 위해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적음. 뿌리가 불교용어이긴 하지만 현재의 일본사 연구에 서 기타하라 이토코를 제외하면 그 종교적 색채는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다. 北原絲子, 地震の 社會史 (講談社, 2000) 제2부 災害と救濟 를 참조. 天享吾妻鑑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289. 비슷한 기술은 이 사건을 기록한 むさしあぶみ 등 다른 사료들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죽을 받으러 온 사람들은 상인 기민(飢民) 기인(飢 人) 등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 중 상인 이란 말이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천착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明曆日記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289. 柳營日次記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290. 여기서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세교가 막부의 도시 행정 조직을 따라 행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이묘 소방조직처럼 이 역시도 다이묘들에게 에 도의 각 구획을 분담시켜 위임시키고 있으며, 무사시아부미 의 문면을 보면 막부의 세교와 에 도성 서측 다이묘들의 세교는 병행하여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むさしあぶみ 日本隨筆大成 제3기 6, p.404. 柳營日次記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p.298. 당시의 쌀값을 기록한 것은, 伊達治家記錄 東 京市史稿 産業編 5, p.299.
290 여러 교량을 복구하라는 명이 나왔고 아직 시중 사람들에 대한 세교가 행해지고 있던 2 월 9일에는 10만석 이하의 다이묘, 하타모토에 대해 복구비 명목으로 금은의 하사가 이 뤄졌다. 1만석 이하의 무가에 대해서는 은 100관 내지 300관, 1만석 이상에 대해서는 석 고에 따라 금을 차등 지급했으며, 에도의 금은 화재로 인해 모조리 녹아 버렸기에 오사 카나 슨푸에서 인수하라는 말도 덧붙여졌다.28) 막부는 에도 시중 사람들에 대해서도 2월 10일에 금 15만량을 하사했다.29) 대량의 인명 피해가 나온 상황에서 불과 보름 여만에, 다른 구제책 없이 건축비 명목 으로 금자를 하사한 것인데, 금자 하사와 미곡가 억제만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층이 당시 에도 시중 사람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할지 여부는 아직 판 단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현존 사료의 대부분이 무가에 대한 물적 지원에 할당되어 있으 며 시중 구제책에서도 다이묘에 상당 부분 역할이 전가되어 있는 등, 이 시기 막부의 시 선이 에도 시중의 구제보다는 권력 기반의 정비를 향해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후대의 재해 대책과는 또 다른, 17세기 중엽 막부의 고유한 문제의식 또는 모종의 위기감을 읽어낼 수 있지는 않을까. Ⅳ. 권력 측의 위기감과 도시의 재해 1. 권력 붕괴의 위기감 1657년이란 해는, 유이 쇼세츠(油比正雪)의 란(1651)으로부터 6년, 죠오(承應)의 변 (1652)으로부터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며, 사회 또한 1년 안에 서너번씩이나 칼과 창이 튀어나오고 아래사람에 이르기까지 칼을 차고 다니며 웅성거려 시끄러운 분 위기였다.30) 다시 말해서, 막부의 권력 기반이 아직 공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 전체가 전국의 분위기 속에 잠겨 있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일어난 대화재는 단지 화재 중에 좀 큰 것이 아니라 모종의 공포 혹은 위기감을 낳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으며, 화재가 일어 나자 다이묘, 하타모토 및 민상(民商)에 이르기까지, 이 불은 반역인이 저지른 짓임에 틀림없다 고 수군대던 것은 이리 보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31) 정권이 성립 28) 29) 30) 31) 柳營日次記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p.341 342. 柳營日次記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342. 구체적인 전달 경로나 액수 분할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정년기에 일괄 위임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八十翁疇昔話 日本隨筆大成 제2기 4, p.156. 嚴有院殿御實紀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259.
일본 근세의 도시와 재해 / 최 은 석 291 되고 채 두 세대가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에도 시중을 휘감은 불길이, 권력 측이 내심 버리지 못 하고 있던 권력 붕괴의 공포를 자극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쇼군이 니시노마루로 옮겨간 다음에 에도성 안에서 쇼군의 거처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사카이 다다카쓰(酒井讃岐守忠勝), 마쓰다이라 노 부쓰나(松平伊豆守信綱), 이이 나오타카(伊井掃部頭直孝)가 각각 쇼군이 자신의 근거지로 이동하여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아베 다다아키(阿部豊後守忠 秋)는 이에 반대하여 천하의 주인된 이가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 되며 에도성이 다 타버 려도 山里の御庭 로 옮겨간다면 그곳은 광활한 공터이니 위험하지 않을 것이고, 설령 비상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야심을 품은 자들이 움직인다면(覬覦の擧動) 한 두명의 다이 묘에게 명하여 베어 죽이는데 어려울 것이 없다고 논했다고 한다. 쇼군이 이에 동의함으 로써 쇼군의 거처 문제가 결론을 봤다는 것이다.32) 한편으로, 화재 발생과 더불어 막부는 참근교대의 중지 및 보류를 명했는데, 이와 관련 해서도 권력 측의 위기감을 드러내는 대목이 있다. 도쿠가와 요리노부[紀伊賴宣]가 마쓰 다이라 노부쓰나(松平信綱)를 불러, 에도에 이 정도 재해가 일어났으면 인심이 어느 방향 으로 갈지 헤아리기 힘드니 각 번에 내려간 다이묘들도 모두 에도로 불러모아야 하는 법 인데 어째서 아직 기일도 차지 않은 다이묘들을 지방으로 돌려 보냈는가 따져물었다. 이 에 대해 노부쓰나의 대답은, 만일 역의(逆意)를 품은 자가 있다면 막부의 모든 세력이 에 도에 모여 있어서는 오히려 곤란하고 각 다이묘가 지방 거점에 자리잡고 있어야 비상시 에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33) 이로부터, 에도 시중이 재로 바뀌어 가고 있던 당시에 막각의 눈길은 반역의 가능성으 로 쏠려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화재가 끝나자마자 1월 20일에 서원번(書院番)과 소성조(小姓組)의 무사를 오사카까지에 이르는 각 역참에 파견하여, 부내(府內)에 이틀동 안 대화재가 있었지만 쇼군이 무사함을 알리도록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34) 그리고 이는, 이미 막부가 경험한 적이 있는 구소옥 등의 직접적인 구제 방책 이 별반 동원되지 않고 시중 구제가 다이묘들에게 일임되는 등, 에도 시중의 구제가 막 각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점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2. 변전(變轉) 하는 위기감 32) 33) 34) 嚴有院殿御實紀 p.276. 嚴有院殿御實紀 嚴有院殿御實紀 포 및 순찰 강화가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259; 德川十五代史 東京市史稿 産業編 5, 東京市史稿 救濟編 1, p.134.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292. 같은 시기에 에도 시중에 대해서는 방화범 체 자주 명해졌다. 東京市史稿 産業編 5, pp.293, 301 302.
292 에도의 도시 기능이 마비된 것은 1657년 대화재의 사례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후 시기 의 주요한 것으로서 1787(天明 7)년 5월 20일에 에도에서 발생하여 약 나흘 간 계속된 도시 소요와, 1855년 10월 2일에 발생하여 적어도 4천 여 명의 사망자를 낸 1855년의 대 지진을 들 수 있는데, 전자는 자연재해는 아니지만 도시 기능의 마비라는 점에서 보면 1657년 대화재나 1855년 대지진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35) 막부가 이 두 건의 사건에 대해 동원한 방책은 그 외양만 보면 1657년 혹은 그 이전 과의 공통점이 뚜렷이 드러난다. 즉, 금전 하사, 세교, (1657년에는 안 나타났지만) 구소 옥의 설치 등의 수단으로 시중 구제에 나서는 것, 그리고 도시 행정에 관해서 막부가 전 체를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민간 및 여타 세력의 힘을 비는 것 등이다. 그러나 그 상세를 보면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첫째는, 금전 하사나 세교의 범위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1657년에는 대상이 특정되지는 않았지만, 복구 비용이라는 명목으 로 금은을 하사한 데서 에도 시중의 쵸닌을 지원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데 반해서, 18세기 말 이후로는 널리 시중의 사람들 전원 특히 빈민을 중점적인 지 원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그 초점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일용(日用) 혹은 그 날 벌 어 그 날 먹고 사는 사람들(其の日稼ぎの者) 을 중핵으로 하는 임차인의 세계가 막부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시 행정에 관해서도, 1657년에 여러 다이묘의 조력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1787년 에도 최종적인 구제책으로서의 미곡 공급은, 타 다이묘는 아닐지언정 관동군대(關東郡代) 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것이 그로부터 4년 뒤 관동군대를 세습하던 이나씨(伊奈氏)의 개 역(改易)을 거쳐 1855년에 이르면 정봉행이라는 막부 본연의 도시 행정 기구가 시중 구 제를 전담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787년을 분기점으로 시중 상인들 이 구제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 것도 간과할 수가 없다. 즉 막부가 붕괴할 때까 지도 비상시의 도시 행정은 막부의 정규 행정조직만으로는 지탱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 었으나, 그 파트너는 타 다이묘 관동군대 상인으로 변화한 것이다. 다음으로, 1657년에 군사적 시각에서 재해를 마주보던 막부의 태도는 자취를 감추고 19세기에 이르면 이데올로기 통제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1787년의 경우 황표지(黃 35) 소요의 전체 경과에 대해서는 山田忠雄, 天明の江戶打ちこわし-蜂起前後の動向 史學 362(2-3) (1963); 竹內誠, 天明の江戶打ちこわしの實態 德川林政史硏究紀要 昭和45年度 (1971) 등이 고전적인 정리로 간주되며, 岩田浩太郞, 打ちこわしと民衆世界 日本都市史入門 II 町 (東京大學出版會, 1990)은 그간의 연구를 종합하고 이른바 민중적 정당성 을 추구한 것 으로 꼽힌다. 국문으로는 전게 졸고 1787년 에도 도시 소요의 제양상 에서 그 진행과정을 소 묘했다. 1855년 대지진에 관해서는 北原絲子, 地震の社會史 (講談社, 2000)가 대표적인 연구 성과이다. 국문으로는 졸고, 재해와 도시사회 - 1855년 대지진과 에도 에서 이와 관련하여 구 제의 현상과 나마즈에(鯰繪)를 다뤘다.
일본 근세의 도시와 재해 / 최 은 석 293 表紙)에 대한 단속이, 1855년에는 메기 그림(鯰繪) 및 가와라반(瓦版)에 대한 단속이 이뤄 졌으나, 1657년에는 그와 같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17세기 초 이래 금은 하사 같은 동일한 수단이 반복적으로 동원되고 있는 한편으로 구 제의 대상과 내용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에도막부 3세기를 통해서 막부의 관심 혹은 달리 말하자면 위기감의 대상이 변해 갔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중 반의 권력 붕괴의 공포가 사라진 자리에 18세기 후반이 되면 빈민들이 초래하는 무질서 가 도시의 질서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자리잡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17세기 중반의, 권력 그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비하면 그 강도가 약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막부의 전체 권력 질서 속에서 변화 하는 시선이 도시 행정에 반영되고, 도시의 변화하는 양상이 막부의 행정에 반영되는 상 호작용의 일단을 이와 같은 구제책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Ⅴ. 맺음말 이상, 미흡하나마 본 발표에서는 1657년 화재의 양상을 개관하고 17세기 전반기 막부 의 구제책의 대강을 훑은 다음, 화재 당시 막부의 위기감이 향한 곳은 반역의 가능성에 있었음을 언급했다. 1657년 당시의 막부가 시중 구제에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를 명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시중 인민의 구제에 막부가 고심한 흔적은 현존 사료에서는 그다 지 찾아볼 수가 없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100년의 공백이 메워져야 정확 한 언급이 가능하겠지만, 막부 권력/권위의 유지에 도시 내의 빈민, 무력이 아닌 언설의 힘이 위협적일 수 있다는 인식이 등장한 이후에야 에도시대 후기와 같은 구제 및 재해시 의 사후 대책들이 나왔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시기적으로 연속 되는 상세한 탐구는 본 발표 이후의 과제로 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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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간기(戰間期) 일본의 산파와 출산정치 이 수 진(연세대 사학과) 目 次 Ⅰ. 머리말 Ⅱ. 전간기의 사회변동과 출산의 의료화 Ⅲ. 산파법 제정을 둘러싼 출산정치 Ⅳ. 맺음말 Ⅰ. 머리말 본고의 목적은 전간기 일본에서 진행된 출산의 의료화 경향에 의해 산파1)의 조산영역 이 축소되어 가는 과정을 복합적인 사회구조의 변화와 다양한 주체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전전(戰前)까지 주로 자택에서 이루어졌던 분만은 1960년대 이후, 병원 분만을 중심으로 한 미국식 조산제도가 도입되면서 시설분만, 의사분만 중심으로 변화했 다. 그러나 조산주체와 분만장소 등의 인적ㆍ물적 변화, 출산 전(全)과정에 대한 지식 및 기술의 발달은 외부적 충격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근대 일본이 부국강병ㆍ건민양성의 기 치 하에 위생적인 출산을 보급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산파 양성에 주력했던 1920년대에 변화의 단초는 이미 싹트고 있었다. 메이지 말기 이후, 활발하게 양성되기 시작한 산파는 근대 일본의 출산 동향에서 복합 적인 성격을 띤 조산주체였다. 산파들은 안전한 분만을 위한 의학지식과 도구, 위생관념 등 근대적 요소를 도입하여 개업산파로 활동하거나 병원, 산원 등의 시설에서 조산업을 1) 1874년에 제정된 의제(醫制) 제정으로, 산파는 근대적 산과학(産科學)에 정통하고 국가가 정 한 조산실습 규정을 모두 이수하여 면허를 취득한 자 로 규정되었다. 1899년에 제정된 산파규 칙(産婆規則), 산파명부등록규칙(産婆名簿登錄規則) 및 산파시험규칙(産婆試驗規則) 에 의해 국가의 제도적 규정이 완비된 후, 산파는 1947년까지 공인된 형태로 존재했다. 전후(戰後) 일본 에서는 GHQ의 지도하에 산파규칙 개정이 이루어져 기존의 명칭은 조산부(助産婦) 로 변경되 었으며 보건부ㆍ조산부ㆍ간호부법(保健婦助産婦看護婦法) 의 제정과 함께 여러 의료직능집단 이 하나의 범주로 통합되었다.
296 수행했다. 특히 전간기(戰間期)의 각종 사회사업에서 산파는 위생적인 출산을 사회 하층 부에 보급하는 한편, 사회사업을 매개로 한 국가의 인구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러나 법적으로 산파가 담당할 수 있는 조산범위는 정상분만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이상 분만에 대한 일체의 치료권은 의사의 시술 영역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산부인과 의사들은 안전한 출산을 위한 전문가로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나갔으며 출산에 관한 지식의 대중화와 사회보험을 통한 의료사회화는 일반 산모들을 의사에게 유인하는 촉진 제로 기능했다. 산파를 통한 자택분만율 뿐만 아니라 의사의 조산참여와 시설분만율 역 시 증가 경향을 보였던 전간기의 시대상은 조산주체의 범주에서 산파가 지니는 모순적인 입장을 대변한다.2) 산파 의 출현과 쇠퇴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차를 두고 진행된 이유는 무엇인가? 본고 는 이 같은 문제의식을 출산의 의료화(medicalization of childbirth), 전간기 일본, 출산 정치 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출산의 의료화 는 출산에 관한 지식 과 기술이 전문화, 과학화, 세분화 되면서 출산의 전 과정이 의학적으로 해석되고 산모와 태아의 신체가 지속적으로 관리되는 방식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산부인과학, 해부학, 병 리학, 식품영양학, 정신과학을 포함한 지식 과 초음파, 제왕절개, 각종 약물주사 등의 기 술 은 안전한 출산 을 명목으로 동원되는 출산의료의 총체이다. 이러한 의료화 경향은 전간기 일본의 사회상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과 쌀소동을 거치며 규범화ㆍ체계화되기 시작한 인구정치, 국가주도의 각종 사회사업과 구호정책 등을 통해 사회 하층부로 침투해가는 위생적 조산관습, 산부인과학의 발달과 의사의 조산참여율 증가, 출산에 관한 과학적 지식의 대중화 등 출산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변화들은 전후(戰後)에 급격화한 의료화 양상의 신호탄이었다. 이러한 의료화 과정이 조산주체로서 산파가 갖는 위치를 잠식해가는 양상은 사적 영역 에 놓여 있었던 생식이 제도, 지식, 매체 등의 공적 영역으로 소환되는 과정과 연동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근대적인 출산의 속성을 출산정치 라는 개념으로 압축하여 살펴볼 것이다. 출산정치 는 근대적인 생식이 공공 영역에서 작동해 왔다는 기존 연구의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출산의 사회적인 경향이 단지 국가의 일방적인 통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2) 산파의 쇠퇴에 주목한 소수의 연구들은 이러한 복합적인 권력관계 에 다가서는 계기를 마련했 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갖는다. 산파의 활동영역 축소 혹은 그 쇠퇴의 기원을 전간기의 사회상 안에서 찾는 연구로는 줄리 루소(Julie M. Rousseau)[1998]와 오오데 하루에(大出春江)[2006]1) 등이 있다. 두 연구자는 공통적으로 정부가 주도한 사회사업, 그리고 조산영역을 둘러싼 의사와 의 경쟁에서 산파가 쇠퇴하게 된 계기를 발견한다. Julie M. Rousseau, Enduring Labors: The New Midwife and the Modern Culture of Childbearing in Early Twentieth Century Japan, Ph.D.diss., Columbia University, 1998; 大出春江, 病院出産の成立と加速: 正常産をめぐる攻防と 産師法制定運動を中心として, 大妻女子大学人間関係学部紀要 第7号, 2005.
전간기(戰間期) 일본의 산파와 출산정치 / 이 수 진 297 아니라 여러 주체들이 통제, 경합(競合), 선택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정치적 산물임을 강 조하려는 의도를 함의한다. 요컨대 출산정치 란 정부를 비롯해 산파, 의사, 산모 등 다양 한 주체들이 출산을 공적으로 통제, 해석, 쟁점화하며 상호 길항하는 정치과정을 뜻한다. Ⅱ. 전간기의 사회변동과 출산의 의료화 1. 조산구료사업의 확산 1918년의 쌀소동 이후, 정부는 자혜(慈惠)나 감화(感化)라는 기존의 대응책으로는 빈곤 과 민중의 불만을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빈곤의 원인과 책임의 소재를 사회적 차원 에서 논의하는 한층 적극적인 사회정책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역시 정부로 하여금 사회사업으로 전환케 한 동기로 작용했다. 즉, 국 내외적인 사회주의의 발흥, 노동쟁의의 확대 등으로 인해 정부가 치안유지책으로 꺼내든 것이 소위 사회사업 이었다. 이후, 사회사업은 이성에 근거한 과학적 구제, 사회의 복 리증진을 목적 으로 하는 한층 넓은 범위 의 구제사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사회정책의 실질을 재편해 나갔다. 사회사업의 형식면에서 중앙ㆍ지방 행정기구가 재편ㆍ신설되는 한편, 내용 면에서 정 부가 역점을 두어 실시했던 사업 중 대표적인 것이 아동보호사업이었다. 이는 일본인 사 망률 상승의 주원인으로 결핵과 함께 1세 미만의 유아(乳兒)사망이 대두3)하면서 국가적 으로 아동에 관한 보건위생상의 개선이 절실히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동보호사업의 피보호 대상은 초생아ㆍ유유아(乳幼兒)ㆍ학령아동 및 의무교육종료 후의 수년간까지의 세대를 포괄했을 뿐 아니라, 모성(母性) 및 임산부까지 광의의 아동보호대상으로 간주했 다.4) 내무성 보건위생조사회(保健衛生調査會)는 1921년 보건과(保健課)에 임산부 및 아 동위생에 관한 사항(妊産婦及児童衛生に関する事項) 을 부가하여 해당 방면에 관한 사업 을 본격화했다. 1920년대 이후 사회연대책임 으로서의 아동보호문제를 주관하는 사회사업시설이 각 지역별로 증가추세를 보였다. 그중에서 임산부보호 상담소와 산원 및 파견산파 등은 빈 산부(貧産婦) 에게 위생적인 조산과 의료혜택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조산구료 수행기관으 로 기능했다. 조산구료사업은 임산부 본인의 신체보다 제2의 국민 인 아동의 건강을 담 3) 4) 新村 拓, 日本医療史, 東京: 吉川弘文館, 2006, 263쪽. 氏原佐蔵, 妊産婦及児童保健に関する社会的施設, 東京: 大日本私立衛生会, 1922, 1 2쪽.
298 보하는 신체로서의 의미를 임산부에게 투영했다. 아동에 대한 사회사업방면의 관심은 이 미 요람을 넘어 자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산구료사업을 통해서 조산 및 출산과 관련한 의료보호를 담당하는 의료주체는 주로 의사나 산파였다. 특히 위생적 조산기술을 습득한 산파의 경우, 조산구료를 수행하는 데 적임자였다. 영리 목적의 개업산파 중에서 일부는 중앙ㆍ지방의 사회사업 행정기구 재편 이후 진행된 조산구료사업에서 조산업무를 담당했다. 한편, 시설조산을 제공하는 공ㆍ사 설 산원은 193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며 무료 혹은 염가로 자택분만을 돕는 공 ㆍ사설 산파 역시 1930년에는 370명 내외까지 증가하였다.5) 이에 따라 산원 및 기타 조 산구료시설을 통해 이루어지는 시설분만과 면허산파를 통한 위생적 자택분만이 차츰 증가하기 시작했다. 임산부 보호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소위 출산의 사회화 로 부터 시설분만방식, 근대적 조산학 및 조산기술을 도입한 출산의 의료화 가 배태되어 나 갔던 것이다. 그러나 출산의 의료화, 특히 분만장소의 변화는 왕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개업산파 의 영리활동을 제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병ㆍ산원에서 분만하는 임산부가 증가할수 록 개업산파의 도움을 받아 자택분만하는 임산부의 수는 감소한 것이다. 특히 대도시를 중심으로 산파 1인당 조산율이 감소했는데 이는 산파가 대도시로 집중하는 경향과 더불 어 산부의 병ㆍ산원 이용수가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사업은 임산부로 하여금 시설분 만에 대한 접근성을 증가시키는데 이바지한 한편, 개업산파들의 영리를 축소함으로서 그 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2. 사회보험의 조산료 보장 일본 최초의 사회보험제도인 건강보험법 (1927.1.1 시행)은 광업법(鑛業法) (1905) 및 공장법(工場法) (1911)의 적용을 받는 피고용자와 주무대신이 허가하는 특정 사업의 피 고용자를 대상으로 질병ㆍ부상ㆍ사망ㆍ분만요양을 보장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보험법 시 행에 앞서 일본의사회(日本醫師會)는 자신들의 영리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환자가 의사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단체자유선택주의 와 진료보수의 급여(給與) 방식 등에 관한 일체의 요구조건을 정부 측과 합의했다. 그 배경에는 보험의(保險醫)의 진료보수가 기존의 관행 요금보다 낮게 책정될 수 있다는 의사회 측의 우려가 작용했다. 그러나 건강보험법 시행을 앞두고 불만을 제기했던 단체는 의사회뿐이 아니었다. 조 산구료는 산파의 영리활동 역시 제약했는데, 산파의 경우 진료보수에 관한 사전계약을 5) 厚生省五十年史編集委員会, 厚生省五十年史 資料編, 東京: 厚生問題研究会, 1988, 848 849쪽.
전간기(戰間期) 일본의 산파와 출산정치 / 이 수 진 299 마친 의사에 비해 더욱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보험법을 통해 보험의로 지정된 의 사의 경우, 진료보수에 관한 계약에 따라 의사회가 의료에 관한 자체감독의 권한을 소유 했으며 의사에 대한 진료보수는 해당 회(會) 측에서 일괄 지불하는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산파는 정부와 계약을 체결할 중앙조직의 부재로 인해 분만에 관한 자체감독의 권한을 갖지 못한 실정이었다. 건강보험법 시행 이후 더욱 확대될 의료 사회화가 자신들의 영리적 활동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가시화되자 일부 지방 산파회 측에서는 연합 산파회 를 설립하여 건강보험법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정부와의 교섭단체로서의 자격을 획 득하기 위한 지방 산파회의 노력은 1927년 5월 12일 대일본산파회(大日本産婆會)의 설 립6)으로 귀결되었다. 산파회의 설립 배경에 건강보험법 조항 개정이라는 동기가 크게 작용했던 만큼, 산파회 설립 이후 본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한층 조직화된 움직임이 계 속되었다. 그러나 산파회의 보험법 개정요구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게다가 건강보험법 에서 규정하는 조산보수 규정이 일반 조산료의 시세까지 하향 평준화시키는 요소로 작용 하면서 보험법의 여파는 개업산파의 경제활동을 한층 위축시켰다. 3. 산과학 지식의 대중화 출산과 함께 여성의 병리에 관한 전반적인 현상을 다루는 산부인과학 이 대학을 중심 으로 전문 분과학의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한 메이지 중기의 흐름은 다이쇼기에 들어 일 본 독자의 산과 이론을 주창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산부인과학 이론의 전문화가 진행 될수록 여성의 신체는 물론, 태아의 출생 과정까지도 과학적으로 예측 가능한 분석대상 으로 구체화되었다. 출산에 관한 지식의 확장 및 전문화는 비단 낳는 출산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1922년 산아조절운동의 주창자인 마가릿 생어(Margaret Sanger)의 일본방 문을 계기로 촉발된 피임 에 관한 논의는 전문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줄곧 도마 위에 오 른 소재였다. 산부인과학 영역에서도 의사 개인의 피임에 관한 찬부(贊否)여부를 떠나 피 임법 수용ㆍ개발이 이루어졌다. 출산의 전반적인 영역에 관한 산부인과학의 지식이 전문적인 의학의 영역을 구축해 나 갈수록, 대중이 그러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 역시 확대되어갔다. 정부가 주도한 생활개선운동(生活改善運動)은 출산에 관한 지식의 필요성을 대중에게 보급하는 사회적 기반을 조성했다. 1차 대전 이후 지속된 국가적 규모의 생활난을 각 가정의 생활개선을 6) 丸岡秀子 外 編, 1981, 126쪽. 日本婦人問題資料集成 第10巻 近代日本婦人問題年表, 東京: ドメス出版,
300 통해 해결하려는 정부의 의도는 각종 전람회에서 제공되는 가시적인 생활 모델을 통해 관철되었다. 한편, 출산에 관한 새로운 지식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통로는 출판물을 통해 지속적으 로 유지되었다. 다이쇼기 이후 대중 출판물이 증가하는 한편, 식자(識者) 능력을 갖춘 신 중간층 여성 독자가 증가함에 따라 부인잡지는 가정생활에 관한 실용ㆍ과학적 정보를 여 성들이 용이하게 수용할 수 있는 통로로 기능했다. 특히 안전한 출산 에 대한 공포, 과 학적ㆍ의학적 지식의 필요성이 대중잡지를 통해 보급되면서 지식을 갖춘 의사 의 권위 도 함께 보급되었다. 권위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일부 임산부들을 산파가 아닌, 의사를 찾게 하는 유인책으 로 작용했다. 의사의 정규분만에 대한 조산참여가 증가하면서 일부 현에서는 영리적인 조산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산파들이 의사의 산파겸업 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정규조산에 대한 산파의 독점적 권리를 요구하는 일부 산파들의 목소리는 산부인과 의사 의 조산활동 증가를 방증한다. Ⅲ. 산파법 제정을 둘러싼 출산정치 1. 대일본산파회의 결성과 산파법 제정운동 대일본산파회는 출산의 의료화 를 싹틔운 복합적인 사회변화를 마주한 가운데 산파들 은 조산료의 하향평준화에 따른 경제적 압력뿐 아니라 조산 영역에서 차츰 밀려나기 시 작한 자신들의 위상을 복구시켜야 함을 인식했다. 이에 건강보험법 문제를 포괄하여 산파의 조산영역을 보호하고 그 위상을 향상시키기 위한 입법 운동이 대일본산파회를 중 심으로 일어났다. 산파법 제정운동이 그것으로, 1930년대 이후 본격화된 대일본산파회의 입법 운동은 산파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인 동시에 산파가 처한 직업적인 위기를 고스란히 대변하는 증표였다. 대일본산파회는 기존의 산파규칙 이 당대의 조산 수요상황이나 의료 기술 수준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산파법을 작성했다. 대일본산파회가 산파법을 공식적으로 의회에 제출한 것은 1931년이 최초로, 제59회 제국의회에 산사법안(産師法 案) 을 제출했다. 산사법안 에서 명시된 각 규정들은 기존의 산파규칙 이 산파가 수행 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산파회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였다. 특히 산파의 지식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격조건을 엄격하게 개정해야 한다는 요구는
전간기(戰間期) 일본의 산파와 출산정치 / 이 수 진 301 산부인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산파가 의료지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현 상인식에서 제기되었다. 또한 위생협력단체로서의 효율적인 기능을 위해서는 단체의 법 인화가 필수적이라는 요구가 제기되었다.7) 그러한 요구 이면에는 건강보험법 이나 구 호법 시행과정에서 산파의 영리활동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다는 문제의식이 존재했다. 당시 산파는 지방 산파회-지방장관, 산파 개인-지방장관 단위로 계약을 맺었을 뿐 조산에 관한 감독권은 갖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에 대일본산파회는 단체를 법인화시 켜 의사회, 치과의사회와 동일한 권한을 소유해야 한다 8)는 입장을 견지하며 영리를 보 장하고자 했다. 아이를 받는(取り上げる) 역할에 머무른 구산파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사회적 편견 을 탈피하기 위하여 교육 요건을 강화하고, 의사회와 동등한 법률적 권한을 갖는 직업 단체를 지향했던 움직임은 산파 스스로 의료적인 위계를 감지하고 있었음을 대변한다. 구산파와 의사 사이에서 후자로의 지향을 도모한 산파회는 이러한 방향성을 산파 지위 의 향상 9)으로 명시했다. 이는 출산의 의료화 에 대응하여 산파의 조산활동영역과 경제 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2. 치료권 논쟁과 조산의료의 위계 그런데 산파법 제정운동을 통해 재정의된 산파의 위상은 단체 내부에서조차 단일한 요 구로 수렴되지 않았다. 즉, 산파의 역할과 위상을 어느 범위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관해 산파회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제64회 제국의회 중의원회의에 산사법안 과 조산 사법안(助産師法案) 이 동시에 제출되었다. 두 법안의 대립이 특히 극심했던 부분은 산파 의 법률적인 조산영역에 관한 문제였다. 산사법안 과 달리 조산사법안 의 경우, 기존 규칙에서 제한되었던 일부 치료권을 산파에게 합법적으로 허용하도록 요구했다. 산파의 시술범위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는가에 관한 문제는 의사의 의료영역과도 불가분한 문 제였으므로 예외적인 치료권의 항시적 승인 요구는 법안 심의과정에서 큰 논란이 되었 다. 그러나 조산사법안 측이 무조건적으로 산파에게 치료권을 허용하도록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산파의 치료권을 합법화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더욱 강했던 주체는 대일본산파 회의 개업산파들이었다. 도쿄부 산파회장 쓰게 아이코(柘植愛子)는 산파가 분만에 관한 7) 8) 9) 第59回 帝国議会 衆議院 河川法中改正法律案外十件 委員会議録(速記) 第1回 (1931.3.24). 제국 의회 회의록 검색시스템(帝国議会会議録検索システム, http://teikokugikai-i.ndl.go.jp) 참조. 第65回 帝国議会 衆議院 産師法案外三件 委員会議録(速記) 第6回 (1934.3.8). 위의 자료(1931.3.24).
302 모든 권한을 소유하지 못하는 상황의 불합리함을 개정하는 것이 법 제정의 가장 큰 목적 임을 강조했으나 의회에 상정된 법안에서는 이러한 요구가 삭제되었다. 이는 의사의 반 대가 관철되었기 때문이었다. 산사법과 조산사법이라는 표면적인 분기에 내재한 산파와 의사 간의 심층적 분기는 결국 산파의 치료권을 불허하는 산사법안 이 주류 의견으로 채택됨에 따라 산파를 의료화된 출산영역의 문 밖에 여전히 방치하고 있었다. 3. 정부의 조산정책과 운동의 좌절 대일본산파회 측의 산파법 제정운동이 연례행사처럼 일어났던 상황이 증명하듯이 산파 법 제정운동에 관한 정부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산파와 의사의 조산 가능 범위 를 엄격하게 분리하여 산파의 치료권을 인정하지 않는 시각은 정부가 원칙적으로 고수해 온 방침이었다. 무산파촌 비율에 관한 통계근거를 통해 산파보급률을 향상시키는 문제가 우선임을 고수한 태도는 당시 정부가 어떠한 조산의료방침을 통해 산파법 제정 문제에 접근했는가를 암시한다. 즉 산파의 자격조건을 강화하게 되면 산파보급에 차질이 빚어진 다는 것이었다. 무산파촌의 존재는 낮은 산파보급률보다는 산파의 보급률이 지역적으로 불균형한 상황 에 기인한 문제였다. 특히 도농 간 격차의 심화는 메이지 정부 이래 지속되어 온 근대적 ㆍ위생적 조산보급이 여전히 요원한 과제임을 증명했다. 개업산파의 도시집중이 심화된 가장 큰 원인은 지역별 조산료의 불균형이었다. 지역별 불균형 문제 해소를 위해 산파회 에 대한 정부의 경제적 보조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제기되기도 했으나 경제적 보조에 대 한 정부의 관심은 산파보다는 임산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산구호의 전국적인 보급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산파의 자격조건을 필요 이상으로 향상시켜 조산료가 증가할 경우, 일반민중의 의료보호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 출산의 사회화 비용을 산파에게 떠맡긴 채 근대적ㆍ위생적 출산을 보급시키는데 초점 을 맞춰 왔던 정부의 조산방침은 대일본산파회의 산파법 제정운동에도 번번이 제동을 걸 었다. 예방적 아동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사업의 전개 과정에서 산파는 임산부 보호를 담당하는 주요 인력으로 기능했으며 산파를 매개로 한 저렴한 조산료 는 그러한 보호사업의 지속성을 뒷받침한 기제였다. 이러한 정부 방침은 임산부 보호사업에 참여하 든, 참여하지 않든 간에 산파의 영리적 이익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기능했으며 대일본 산파회의 입법운동 역시 좌절시켰다.
전간기(戰間期) 일본의 산파와 출산정치 / 이 수 진 303 Ⅳ. 맺음말 아시아ㆍ태평양전쟁의 개전 이후, 산파의 역할은 전간기에 비해 한층 국가중심적인 방 향성 안에서 규정되었다. 건병건민(健兵健民) 양성의 근간이 되는 출산문제는 한층 통합 적이고 국가 중심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출산 이라는 문제가 사회적이고 정치 적인 범주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 즉 출산 에 대한 통제, 전문화, 공론화가 진행되었 다는 측면에서 전간기와 전시기를 관통하는 일련의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같은 공통성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 앞에서 제시한 출산정치 는 두 시기를 거쳐 일관된 방향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건강한 아동양성의 기치 하에 사회 저변까지 출 산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이 침투하는 한편, 의료지식ㆍ기술영역의 전문가집단이었던 의사를 중심으로 출산은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자 경제활동의 영역으로 치환되었다. 대중 들은 출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하기 시작했으나 그들의 언어는 대부분 정부의 제도, 전문가집단이 생산한 지식을 통해 걸러진, 제한된 의미의 출산이었다. 전통과 근대의 모 호한 위치에서 조산수행자로 기능했던 산파들은 그러한 변화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 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지위가 서서히 축소되어가는 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정부의 사회 정책과 인구통제,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들이 획득해나간 의료적 권위와 경제적 이익은 저렴한 여성 노동력인 동시에 의료적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산파라는 존재 위에서 가능 했던 것들이었다. 출산정치, 그것은 출산 의 영역에서 소수의 권력주체만이 기획자(企 劃者)가 되고 다수가 주변화 되는 과정임을, 산파의 역사는 대변하고 있다.
脫亞論 (1885 年) 讀法 目 次 金 旼 奎(동북아역사재단) Ⅰ. 프롤로그 Ⅱ. 탈아론 Ⅲ. 탈아론 전후 Ⅳ. 탈아론 을 둘러싼 소송 후쿠자와와 소송. 지덴 Ⅴ. 에필로그 백 권의 만국공법은 수문( 數門)의 대포를 못 쫓으며 화친조약을 몇 차례 맺어도 탄약 한 상자에 못 미친다. 대포라든가 탄약은 도리에 맞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 라 도리라고도 할 수 없는 도리를 위한 기계인 것이다. [ 후쿠자와, 1876 년] 武에 의해 양국( 지나, 조선)을 보호하고 文에 의해 유도하여, 신속하게 우리나라의 예에 따라 최근의 문명에 들어가게끔 해야 한다. 혹 부득이한 경우에는 무력으로 협박하여 진보케 하는 것도 가능하다. [후쿠자와, 1881 년] (중국과) 전쟁을 일으켜 동양의 늙어 썩어빠진 커다란 나무( 老大朽木) 를 한방에 쓰 러뜨릴 수밖에는 없다. [ 후쿠자와, 1882 년] 약한 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자는 똑같이 오명을 면치 못할 것인 즉, 우리들은 진 정한 마음에서 아시아 동방의 악우를 사절하는 바이다. [후쿠자와, 1885 년] 조선인민을 위해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 [ 후쿠자와, 1885 년] 청일전쟁 등 관민일치의 승리, 유쾌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목숨이 붙어있기에 이런 것을 보고 듣는구나. 먼저 죽은 동지인 친구들이 불쌍하 다. 오호 (그들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싶어 나는 매번 울었다. [ 후쿠자와, 1899 년] 탈아론은 후쿠자와가 갑신정변의 쿠데타로 조선의 민주화가 잘 진척되지 않아 낙 담해 우울한 기분이었을 때 쓴 예외적인 문장이다. [ 문부성 교과서조사관, 1993 년]
306 Ⅰ. 프롤로그 탈아론 (이하 생략)은 갑신정변(1884년 12월) 실패 후, 그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가 1885년 3월 16일에 자신이 운영하던 신 지지신포(時事新報) 에 발표한 논설문인데,1) 문사철의 인문학은 물론 정치, 경제, 사 문 회의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그처럼 빈번히 거론되고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그리 흔치 않 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는 일본의 對美와 對中 정책을 둘러싸고도 탈아 즉 친 미냐, 혹은 入亞(정확히는 歸亞?) 즉 친중(과 친한)이냐의 문제와 맞물려 거론되고 있음 은 물론, 심지어는 사이버 전쟁 을 둘러싼 문제에까지 이 탈아론이 거론되고 있는 지경 에 달하고 있으니 그렇다.2) 탈아론이 주목받아 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우선 그 제 목이 갖는 파괴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일본은 청일전쟁과 중일전쟁은 물론 對 서방을 상대로 태평양전쟁(15년 전쟁)까지 치른 세계역사 사상 보기 드문 파괴력 을 지 닌 나라로 일본이 어느 쪽으로 脫 하고 入 하느냐에 따라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국제 관계에 있어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 의 판도가 크게 달리지기 때문이다. 또 제목도 제목이려니와 그 내용과 함께 그것이 갖는 함의에 대한 평가 역시 연구자들에 따라 상당 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탈아론은 후쿠자와가 그의 지론이었던 對淸 개전론의 불발에 따른 한 반동이었으며, 청과 조선을 일본을 포함한 열강이 분할토록 해야 한다는 아시아 침략론을 분명히 밝힌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3) 이와는 달리, 최근 중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일본 측 좌장인 키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는 탈아론을 동양의 악우 와의 교제는 사절하고, 이웃나라인 때문 에 특별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으로 사귀어야 한다 는 것을 말한 짧은 논설 로, 탈아라는 말도 제목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아, 당시, 특별한 주목을 끌었던 것도 아 니어서, 이 논문이 뜻하는 바는 조선 학생을 비호하고 있던 후쿠자와가 친일파를 통한 1) 2) 3) 福沢諭吉全集 第10卷, 岩波書店, 238-240쪽. 탈아 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후쿠자와 가 아니고, 당시 영국 주재 요코하마세이킨(橫濱正金)은행 런던 지점장이기도 했으며 특별통신 원이기도 했던 히노하라 쇼조(日原昌造)가 쓴 일본은 동양의 나라여서는 안 된다 라는 논설에 서였다고 한다. 田中正俊, 近代日本と朝鮮ㆍ中国(一, 福澤諭吉, 河出書房, 1984, 142쪽. 후 쿠자와 유키치의 갑신정변 관여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 金旼奎, 福澤諭吉과 朝鮮開化 派: 그의 對朝鮮觀과 개화파에 대한 원조를 중심으로(1885년 초까지), 實學思想, 1991, 163 쪽. 大月隆寛, サイバー戦争に反日法強硬韓国に産声を上げた新脱亜論, 正論 383, 2004. 今永清二, 福沢諭吉の思想形成 勁草書房, 1979, 209쪽; 金旼奎, 福澤諭吉과 朝鮮開化派, 163 쪽.
脫亞論 (1885年) 讀法 / 金 旼 奎 307 조선 개혁이 좌절되었다는 고백 으로 특별히 강경한 아시아 외교를 말했던 것은 아니었 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4) 그러니까 키타오카에 따르면, 탈아론이라는 것은 당시 조선 개혁 에 관심을 가지고 열 을 올리고 있었던 후쿠자와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에 대한 좌절을 토로한 것 일 뿐, 아시아 즉 조선과 청에 대해 강한 외교책을 사용하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다. 즉, 이후의 대조선ㆍ대중국 침략 을 꾀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탈아론을 그저 탈아론이라는 한 논문에만 국한시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평가 하여 후쿠자와에 대한 인물 평가와 분리시켜버리는 키타오카式의 평가가 횡행하고 있다 는 점이다. 예컨대 원로 일본근대사학자 반노 준지(坂野潤治)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그 탈아론 의 평판이 아주 나빴던 주요한 원인 이 바로 후쿠자와의 과대망상적인 레토릭 에 있었다 5)고 주장함으로써 후쿠자와의 침략적 사고와 의도를 교묘히 은폐하고 있으며, 또 후쿠자와가 설립한 케이오기주쿠(慶應義塾) 출신의 젊은 학자 역시 탈아론이 후쿠자 와의 사상의 도달점에서 쓰이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상황론으로서 한 번 쓴 문장에 지 나지 않는 것 6)이라 하여 후쿠자와를 교묘히 변명하고 있다. 그러한 논란은 논문 그 자체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후쿠자와 유키치라고 하는 한 사상 가에 대한 총괄적 평가의 문제와도 상당히 밀접히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다. 메이지 초기 일본의 정치ㆍ사회의 변혁의 불가피성을 포착한 문명의 엔지니어 7)라거나, 혹은 19세기 일본의 가장 중요한 근대주의자 8)라고 평가되고 심지어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 에게서 철학을 사사한 일본의 저명한 철학자 타나카 오오도오(田中王堂, 1868-1932, 본 명; 喜一)는 일본 현대생활의 창조자 인 후쿠자와를 이해하지 않는 한 도저히 현대생활 은 감상할 수 없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9) 반면, 후쿠자와는 일본이 중국과 조선에 가혹한 이권 요구를 주장한 근대 천황제 국 가의 사상적 첨병 역할 10)을 했던 인물이라고도 평가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는 중간 지 4) 5) 6) 7) 8) 9) 北岡伸一, 近代日中関係の発端, 第一期 日中歴史共同研究 報告書 2010, 22-23쪽. http://www.mofa.go.jp/mofaj/area/china/pdfs/rekishi_kk_j-2.pdf 坂野潤治, 脱亜論 再考 NHK 日本と朝鮮半島2000年 プロジェクト編著, 日本と朝鮮半島2000 年 下, NHK出版, 2010, 224쪽. 都倉武之, 福沢諭吉の西洋文明認識論 特に朝鮮問題との関連から, 1910年 - 그 以前 100年: 韓國과 日本의 西洋文明 受容 (韓日文化交流基金ㆍ東北亞歷史財團 공동주최, 韓日國際學術會議 자료집, 2010.6.11~13), 109쪽. Hirakawa Sukehiro (trans., by Bob Tadashi Wakabayashi), Japan s turn to the West,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Volume 5: The nineteenth Century, 1989, p.460. Marius B. Jansen, The Making of Modern Japan,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Massachusetts / London), 2000, p.322. 田中喜一, 福澤諭吉, 実業之世界社, 1915, 5쪽.
308 점 을 취해 그가 내셔널리즘이라고 하더라도 코쿠타이(國體)에 탐닉치 않는 내셔널리스트 이며, 리베럴리스트라 하더라도 주의(主義)에 경직되지 않은 리베럴리스트였다고 평하고 있다.11) 본고에서 탈아론을 새삼 거론하는 이유는 일본이 패전 후 탈아론에 대한 평가를 둘러 싸고 시대의 요청에 따라 또 학자들의 사관이나 (정권과의) 이해관계에 의해 사뭇 다른 평가를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러한 상반된 평가는 후에 본문에서 상세히 다루 겠지만,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서의 탈아론 인용과 기술의 적부를 놓고 소송으로까지 비화하거나, 최근의 중일역사공동연구의 결과 보고서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어, 한중 양자 간의 역사공동연구뿐 아니라 한일ㆍ한중일의 앞으로의 역사공동연구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주지하다시피 탈아론의 평가를 둘러싼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들은 바로 일본 과 거사에 대한 평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현재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 내지는 협력체 조성이라든가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의 전(前) 단 계로 아시아 공통 통화(通貨) 12)의 주조(鑄造)마저 주장하는 단계에까지 와있는 판국에, 일본의 탈아 를 역설했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 최고액권 초상화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서 우려가 배가(倍加)되는 때문이다. 탈아론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과거사 혹은 역사의 문제 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적어도 한중일 3국의 현재와 미래의 정치ㆍ경제ㆍ사회 및 문화 등 제반 영역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는 상당히 민감한 사안으로 그에 관한 정확한 인식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하,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탈아론에 대해 담론해 본다. II. 탈아론 III. 탈아론 전후 IV. 탈아론 을 둘러싼 소송 후쿠자와와 소송. 지덴. V. 에필로그 10) 11) 12) ひろたまさき, 福沢諭吉, 朝日新聞社, 1976, 225쪽. 横松 宗, 福沢諭吉 中津からの出発, 朝日新聞社, 1991, 196쪽. 大西義久, アジア共通通貨:実現への道しるべ, 蒼蒼社,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