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와 동북아 평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홈페이지: www.peacekorea.org 최근 저서: 핵의 세계사(아카이브, 2012년) 1. 핵무기란 무엇인가? 핵은 그것이 무기이든, 발전이든,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공격이라는 특 징을 갖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발의 핵폭탄으로 20만명 이상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피폭자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며 그 후손들의 고통은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참사 역시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고, 또한 인간의 오감과 시공간을 초월해 인류에게 공포로 각인되고 있다. 이는 핵폐기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핵무기는 인류뿐만 아니라 지구 자체의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발명품이다. 미국의 클라우제비츠 라고 불리는 브로디(Bernard Brodie)가 1946년 원자 폭탄을 절대 무기 (absolute weapon) 이라고 불렀듯이, 핵무기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파괴력의 극치를 이 룬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 이라고 불렀지만, 핵의 시대 의 전쟁은 정치의 종언 을 의미할 뿐이다. 정치의 수단이라는 전쟁이, 그 전쟁의 수단으로 개발된 핵무기가 동원되는 순간, 전쟁을 통해 달성하려는 정치적 목표마저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핵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반지처럼, 인간을 공포에 몰아넣기도 하고 매 료시키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탐욕의 화신 골룸과 고노의 존재 스미골은 한 몸이 다. 핵의 두 얼굴은 과학과 윤리, 전쟁과 평화 라는 인류 사회의 오랜 양면성을 대표한다. 그 양면성은 국제정치에서도, 한 사람의 마음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국제체제인 핵확산금지조약(NPT)은 핵무기의 확산으로부터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자기 보호 본능의 반 영과 핵클럽의 문을 빨리 닫아 핵독점을 유지하려는 강대국들의 기만책이라는 두 얼굴 을 지닌다. 원자 폭탄의 아버지 로 불리는 오펜하이머는 핵실험을 하고 나서 나는 죽음, 세계 의 파괴자가 됐다 고 자책하면서 핵군축의 아버지 가 되고 싶어했다. 핵의 가장 심각한 양면성은 공포와 안전의 모순적 조합에 있다. 핵 억제론 으로 일컬어지는 핵무기에 의한 평화는 그 무기가 사용되는 순간 모두가 죽게 된다는 공포의 균형 에 기초 하고 있다. 인간이 너 죽고 나 죽고 모두가 죽게 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간 이성의 최저치에 대해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 체를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들고 계속 갖고 있으면서, 모두가 죽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야말로 인류사회가 직면한 지독한 역설이자 인간 이성 에 대한 모독 이다. 우리에게는 대소 봉쇄 정책의 설계자 정도로만 알려진 조지 케넌은 우리의 도덕적 지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자연으로부터 뽑아내는 데 성 공함으로써 인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고 한탄했다. 핵과 인간 의 위험천만한 동거를 꿰뚫은 표현이 아닐 수 없다.
2.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그리고 한국의 기억 공교롭게도 핵이라는 과학적 발견과 20세기 최악의 인재( 人 災 )인 2차 세계대전 발발은 조 우하고 만다. 당시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천재 과학자들의 신념은 한 가지로 모아졌다. 히 틀러가 갖기 전에 연합국이 먼저 가져야 한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면서 끝났다. 그러나 미국의 원폭 투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불가피 한 선택이 아니라 소련을 겨냥한 무력시위였다. 일본이 원폭을 맞아 항복을 했고, 그래서 조선도 해방될 수 있었다는 단편적인 역사 인식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불편한 진실 일 수 있다. 미국의 원폭 투하 배경과 의도에 대한 불균형적 이해와 조선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망각은 한국인의 핵무기에 대한 인식의 뿌리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무기와의 악연이 1945년부터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핵문제 의 시작점은 북핵 개발이 포착된 1989 년이나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 1993년부터로 간주된다. 한국이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의 피폭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물론이고 한국인들조차 이러한 사실 을 잘 모른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가 핵전쟁의 참화에 휩싸일 뻔 했던 것도 관심 밖에 있 어왔다. 미국이 1950년대 후반 일본에 배치된 핵무기를 한국으로 대거 이동시킨 배경 가운 데 하나도 한국인은 반대하지 않을 것 이라는 믿음에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인 핵무장 찬성 여론이 일본의 3-4배에 달할 정도로 높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미국의 원폭 투하가 일제 패망과 거의 관계가 없다면, 그리고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 징용-피폭-외면의 역사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한국인의 핵무기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3. 핵 시대의 첫 전쟁, 한국전쟁 핵 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전쟁도 완전히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핵을 통한 한국전 쟁의 조명은 이 전쟁에 대한 다양하고도 새로운 사실과 해석을 보여주게 된다. 몇 가지 질 문만 던져보자. 미국은 왜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했을까? 혹시 핵의 위력을 믿었던 것은 아닐까? 왜 스탈린은 마음을 바꿨을까? 그 역시 핵의 위력을 믿었던 것은 아닐까? 핵 보유국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결심한 마오쩌둥은 강심장 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미국의 핵 공격 움직임에 이승만과 김일성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미국의 핵 위협이 정전협정을 가 져온 힘이었을까?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기지 못하는 전쟁에 직면했던 미국이 핵을 사용 하지 않은, 혹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핵전략에는 어떤 변화 가 일어났고, 이것이 한반도를 비롯한 지구 지정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 가운데 하나가 트루먼과 스탈린의 핵의 위력에 대한 엇갈린 믿음에 이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핵의 위력을 믿은 트루먼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보면서 애치슨 라인 에서 한국을 제외시켰다. 마찬가지로 핵의 위력을 믿은 스탈린은 미국 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 한반도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오판했다. 핵의 위력을 맹 신한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 가능성이 거의 없다며 북진을 강행했고, 핵무기를 종이호랑이 로 간주한 마오쩌둥이 참전을 강행하면서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 이 되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트루먼이 원자탄 사용을 강하게 암시하자 영국의 애틀리 총리가 워싱턴으로 날 아간 것이나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인종차별주의를 들고 나온 것도 한국전쟁과 핵무기, 그리고 지구 지정학 사이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 순간이었다. 미국이 핵 사용을 암시하자 이를 정치선전 도구로 활용한 김일성과 미국이 핵 사용을 주저하자 이에 분개한 이승만의 모습을 통해서도 핵무기를 둘러싼 인간들의 다양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한국전쟁 종식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의 등장을 전후해 한국전쟁과 핵무기의 관계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의 전술 핵무기의 개발 생산, 공세적인 핵 정책을 채 택한 아이젠하워의 등장과 교착 상태에 빠진 정전 협상은 핵전쟁과 확전의 위험을 야기했 다. 아이젠하워는 정전 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마무리짓기 위해 노골적인 핵 위 협을 동원했고, 개성은 핵 공격의 1차 목표물이 되었다. 정전협정에 도달할 수 있었던 힘이 핵 위협에 있었다고 믿은 미국은 비핵국가였던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대량 보복 전략을 채택했고 이를 유럽으로 확대했다. 이에 맞서 북한은 전 국토의 요새화와 적 끌어안기 전략으로, 중국은 종이호랑이 에 올라타는 것으로 대응했다. 미국과 소련은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만들고 기상천외한 미사일을 선보이면서 상호 확증 파괴 를 향해 돌진했다. 한국전쟁 때 선보였던 미국의 핵 위협은 베트남 전쟁 때에도 재현 되었고, 베트남은 우공이산( 愚 公 移 山 ) 으로 맞섰다. 이는 핵 시대의 첫 전쟁 이었던 한국전 쟁이 이후 핵의 시대 에 얼마나 심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4. 한반도 핵문제의 이해 1950년대부터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반복적으로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 을 고려해왔고, 계획해왔으며, 위협해왔다. 친북좌파의 주장처럼 들리겠지만, 미국의 <AP> 통신이 비밀 해제된 미국 문서를 분석해 내 린 결론이다. 미국의 핵 위협은 북한에게 핵무기를 개발 보유할 구실을 주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 외무성 에서 핵군축 및 대북정책을 담당했던 미네 요시키가 이 통신을 통해 한 말이다. 불편한 진 실 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북핵 문제 해결의 실 마리를 찾긴 어렵다. 북핵 은 60년 넘게 누적되어온 한반도 문제의 '모순 덩어리'다. 핵문제를 북한 체제나 지도 자의 문제로 국한해서 바라보는 한, 문제 해결에 한 발짝도 다가설 수 없다. 냉전 병( 病 )을 앓아온 한반도 전체의 체질을 바꿀 때에 비로소 그 치유법을 모색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어려울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외교에서 시간의 중요성은 물리적인 길이가 아니라 화학적인 반응에 있다. 북핵 문제가 대단히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모든 고차 방정식 은 1차 방정식으로 환원된다. 스티브 잡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잡함의 궁극은 단순함에 있다. 반세기 넘게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한반도 문제의 궁극적 단순함이란, 바로
냉전 에 있다. 바로 이 단순함에 주목해 탈냉전을 향한 거보( 巨 步 )를 내딛을 때, 북핵 문제 해결의 문도 열리게 될 것이다. 5. 탈핵과 동북아 비핵지대를 위하여 탈핵 은 안보 정책에 있어서 핵무기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고 에너지 분야에서도 원전에 대한 의존을 줄여 이로부터 탈피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핵무기 폐기와 원전 폐기는 동전의 앞 뒤 관계에 있다. 현실적으로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 탈원전으로 가는 것은 어렵다. 원전 보유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여차하면 핵무장으로 가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원전이 있는 한, 핵무기 폐기도 어렵다. 원전을 가동한다는 것은 누 군가 핵무장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제안하는 탈핵 주권론 은 핵으로 인한 자유(freedom of nuclear) 에서 탈핵화를 안보 와 에너지 정책, 그리고 대외 정책의 핵심으로 삼는 핵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nuclear) 로의 발상의 전환을 일컫는다. 이는 타국의 간섭과 요구에 따라 자국의 권리 행사 가 제약받는다는 소극적 인식에서 벗어나, 탈핵을 한국의 정체성과 비전으로 삼으면서 이를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시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핵문제가 5대 강대국을 비롯한 핵보유국 사이의 문제만으로도, 또한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나라와 이를 저지하려는 국가들 사이의 문제만으로도, 아울러 원전 을 가동하고 있는 국가에게만 국한될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규모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소규모의 핵전쟁으로도 무고한 시민들과 주변 국가들, 그리고 미래 세대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 특히 강대국 간의 핵전쟁은 인류 문명과 지구 생태계의 절멸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를 예방하고 그 가능성을 없애는 것은 지구적 과제이자 주권 국가들의 숙제이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확인된 것처럼 원전 사고 역시 국경과 시간의 한계를 무색케 한다. 3대 핵무기 강대국과 수십개의 원전으로 둘러싸여 있 고,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으며, 북핵 문제에 직면해 있는 한국으로서는 이러한 관점 정 립이 더더욱 절실하다. 그렇다면 탈핵 주권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먼저 한국이 핵무기에 의한 안보 의존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그 구체적인 선언으로 북한의 핵 포기 시 미 국의 핵우산에서도 벗어나겠다는 입장을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자체적으로 우라늄 농 축 및 재처리 시설을 계속 보유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면, 북한에도 폐기 대상에 이들 프로그램을 포함시키도록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국제무대에서도 핵 무기 사용이나 핵무기 자체를 금지하는 국제조약 체결 움직임에 적극 동참할 필요도 있다. 아울러 일본과 함께 동북아 비핵 지대 논의를 주창하고 이를 주도하는 것 역시 한국의 탈 핵 외교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원전 정책도 독일처럼 시간표를 가지고 탈원전 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신규 원전 건설 계 획을 철회하고, 노후한 원전부터 가동 중단에 들어가 20-30년 후에는 모든 원전을 폐쇄하 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 과소비형 경제구조를 절약형으로 바꾸고 태양열
과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 분야를 적극 육성하면 큰 문제없이 에너지 구조 전환이 가능하다 는 것은 독일과 일본에서 입증되고 있다. 또한 원전 종사자들의 역할과 직업 전환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 많은 나라들이 탈원전 을 향해 가고 있는 만큼, 원전 해체 분야는 인류 사회 의 발전에 이바지하면서도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 아울러 국제재생에너지기구 와 같은 새로운 국제 체제를 구축해 지속 가능하고 재생 가능한 에너 지를 원자력의 대안으로서 지구화하는 것도 요구된다. 끝으로 동북아 비핵지대 문제이다. 바람직한 대안은 한반도(조선반도) 비핵화-동북아 비핵 지대-핵무기 없는 세계라는 세 수준의 비핵화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3박자 비핵화 를 추구 하는 것이다. 향후 한반도 핵문제 해결과 관련해 가장 큰 과제 가운데 하나는 한미일 3국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 와 북한이 주장하는 조선반도 비핵화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는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3박자 비핵화론 (triple time denuclearization)은 이러한 간극을 해소하 는데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한반도 비핵화 에 담겨 있지 않은 북한의 요구들, 즉 미국 의 확고한 대북 안전보장, 미국 핵무기의 남한 내 재배치 및 일시 통과 금지, 핵우산 철수 등은 동북아 비핵지대 및 핵무기 없는 세계 의 진전을 통해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기 때 문이다. 또한 한반도 비핵화 없이 동북아 비핵지대 및 핵무기 없는 세계를 실현한다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 세 수준의 비핵화는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