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획 오월 광주, 다시 제대로 불러야 할 노래들 / 김태호 박종철출판사 대표 <님을 위한 행진곡> 1983년. 전두환이 대통령이고 학교에 경찰이 진을 치고 있던 황 당한 시절이었다. 짧은 머리, 베이지색 면바지, 그와 비슷한 색깔의 얇은 점퍼, 당시 최고급이었던 프로스펙스의 짝퉁인 스펙스 운동화, 이런 차림의 짭새들 이 학교 곳곳에 무리를 지어 있었다. 지금이야 사람이 모이지 않아 못한다고 들었지만, 그때는 그래서 학교에서 집 회를 열 수가 없었다. 뭔가를 하려 하자마자 학생보다 많은 경찰과 교직원이 달려들어 해산시키고 연행했다. 그 해가 저물 무렵 학원자율화 라는 이름으로 정부는 몇 가지 조치를 발표했고, 이제 평상시에는 학교에 경찰이 머물지 않았다. 그 리하여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대자보의 등장이었다. 얼마 전 안녕 92 특별 기획
들하십니까? 라는 대자보가 한국 사회를 달군 것은 그 내용도 내용 이지만 시대에 어울리지 않은 방식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는 대자보가 지금의 SNS 못지않은 신속한 소통수단이었다. 아울러 교내에서 집회가 시작되었다. 수백 명이 참여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처음에는 학원자율화 조치의 기만적 성격을 알리고 그 대응 방 식을 찾는 것이 대자보와 집회의 주요 내용이었으나, 4월을 지나면서 학교는 온통 1980년 5월 광주 이야기였다. 1980년 당시 외국 언론에 실렸던 사진과 기사를 소개하는 대자보, 언제 어디서 얼마나 많은 사 람이 죽고 다쳤는지를 정리한 대자보, 미국과 한국의 정부는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하라고 주장하는 대자보. 사진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면서 거의 알 아볼 수 없게 된 사진을 보노라면, 아마도 원본 사진이나 실제보다 더 참혹했을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게 되었다. 가마니에 덮여 널브러 져 있는 주검들, 무릎이 꺾인 젊은이를 곤봉으로 내려치는 계엄군, 태극기로 덮은 어마어마한 수의 관. 광주나 근처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선배나 친구들은 요즘 잘 알려진 말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살아 있는 자의 죄책감. 이 감 정은 그때 그곳에 살지 않은 학생들에게 감염되었다. 1980년 광주에 서 벌어진 일, 학살의 주범이 현직 대통령이라는 사실, 이런 것만으 로도 운동에 뛰어들기에 충분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는 것은 앞서서 간 이들을 따를 산 자가 되기를 결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략 20년쯤 전부터인가? 노래가 그때 부른 것과 달라져 오월 광주, 다시 제대로 불러야 할 노래들 93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있다. 제목이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바뀐 것이야 두음법칙에 따른 것이니 그렇다 쳐도, 가사가 바뀐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끝없는 함성 이 아니라 뜨거운 함성, 앞서서 가나니 가 아니라 앞서서 나가니 로 부르고 있다. 민중의례 때마다 부르는 이 4천만 민중의 영원한 노래 가 달라져 있다. 들불야학, 박기순, 윤상원 전남대학교 76학번 박기순(1958년생). 광주 지역 최초의 위장 취업자 박기순은 1978년에 몇몇 동지와 들불야학을 만든다. 검정고 시 준비를 위한 야학 검야 가 아니라 노동자의 사회의식을 높이기 위한 노동야학 노야 였다. 그리고 박기순의 선배 윤상원(1950년 생, 71학번)이 있다. 은행원 생활을 접고 위장취업자가 된 그가 들불야학 에 합류한다. 그런데 박기순이 뜻밖의 사고로 사망한다. 윤상원은 1978년 12월 27일 일기에 영원 한 노동자의 벗 기순이가 죽던 날 이라고 썼 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 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우리의 가슴 속에 서 피어난다. 박기순(출처 : (사)들불열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들불야학은 광주와 전남 민중운동의 중심 이었고 1980년 5월 시민군의 기둥이었다. 윤상 94 특별 기획
원과 함께 도청에서 죽음을 맞은 박용준, 1980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 회장이었으며 1982년에 체포되어 50일 동안 옥중단식을 벌이다 사망 한 박관현, 그 밖에 신영일, 김영철, 박효선 등이 들불야학을 거쳐 간 투사들이다. 박기순의 뒤를 이어 들불야학을 책임지던 윤상원은 1980년 5월 에 광주시민민주투쟁협의회 대변인을 맡았 고, 항쟁의 상황을 알리는 투사회보 를 발행 했다. 그리고 5월 27일 계엄군 특공대와의 마 지막 전투에서 사망한다. 영화 화려한 휴가 의 주인공은 윤상원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박기순과 윤상원을 기억하는 동지들이 1982년 2월 20일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 을 치른다. 유해를 망월동 묘역에 합장한 이때 노 윤상원 (출처 : (사)들불열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래굿 넋풀이 빛의 결혼식 을 만든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굿의 마지막 곡이다. 노래는 그보다 일찍이 1981년 5월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서 만들 었다고 한다. 곡을 쓴 사람은 MBC 대학가요제에서 상을 탔으며 나 중에 음반 제작업체를 운영하게 되는 김종률이다. 노랫말은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으로 수감 중이던 백기완이 1980년 12월에 서대문 구치소에서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에서 일부를 따 김종률과 황석영이 함께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혼결혼식을 올려 준 동지들은 넋풀이 를 카세트테이프에 녹 오월 광주, 다시 제대로 불러야 할 노래들 95
1980년 5월 22일과 23일의 투사회보 (출처 :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음했고, 같은 해 민중극단 광대에서 넋풀이굿 을 공연하며 실황 음 반도 만들었다.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며 노래는 퍼져나갔다. 나도 형이 어디선가 구해 온 테이프로 그 공연을 들을 수 있었다. 곡 이름 은 생각나지 않지만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읊조리듯 잊지 모다 네 라고 노래하던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전두환 시절은 물론 그 뒤에도 한동안 사 실상 금지곡 이었다. 그러다가 1997년에 5 18이 국가기념일로 지 정되었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3년부터는 정부 주관 5 18 기념 식에서 이 노래가 제창되었다. 정권이 바뀌어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는 노래 제창이 본행사 프로그램이 아닌 식전행사 가운데 하나로 격 하되었고, 2010년에는 참가자 제창이 아닌 합창단 합창으로 바뀌었 다.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 취임 첫 해인 2013년에는 국가보훈처장이 96 특별 기획
별도의 기념곡을 만들겠다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2013년 5 월 5 18 아카이브 설립추진위원회 는 이 노래가 5 18 공식 기념 노래로 지정될 수 있도록 정부에 촉구하면서 이 노래의 유네스코 세 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국회는 이 노래를 5 18 공식 기념곡 지정을 의결했다. 하지만 아직도 국가보 훈처는 특정단체가 애국가 대신 부른 노래, 엄숙해야 할 정부 기념 식에서 주먹을 쥐고 흔들며 부르는 노래, 북한이 만든 영화 임을 위 한 교향시 의 배경 음악, 북한의 통일노래 100곡집 에 수록된 노래, 작사자 등의 행적과 관련해 논란이 있는 노래, 가사에 나오는 임 과 새날 에 논란이 있는 노래, 국가유공자 단체의 반대, 지정될 경우 국론분열 현상 발생 등 을 이유로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바로 부르기 노래를 만들 때의 악보를 보면, 뜨거운 함성 이 아니라 끝없는 함성 이 분명하며 앞-서서 나가니 가 아니라 앞-서서 가나니 가 분명하다. 그토록 여러 사람이 그토록 자주 부른 이 노래를 누가 언제부터 원래 가사와 다른 가사로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글을 준 비하며 다음과 같은 점은 확인할 수 있었다. 1987년 10월, 그러니까 1987년 6월항쟁이 있고 몇 달 뒤에 민중 문화운동연합이 학민사에서 낸 증보 노래모음집. 님을 위한 행진 오월 광주, 다시 제대로 불러야 할 노래들 97
5 18 아카이브 설립추진위원회 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공 개한 <님을 위한 행진 曲 > 최초 악보.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 php?id=120496.) 곡 141쪽에 실린 악보에는 최초의 가사로 되어 있다. (다만 최초 악 보와는 첫 음이 다르며, 네 번째 마디마다 음표와 쉼표의 구성이 다 르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떤 인쇄된 악보에서나 다 그렇다.) 책 제목과 달리 노래 제목은 임을 위한 행진곡 으로 되어 있으며, 백 기완 작시, 김종률 작곡 으로 밝히고 있다. 확인할 수 있었던 다른 인쇄된 악보는 1989년에 서울대 노래동 98 특별 기획
아리 메아리가 엮은 메아리 제9집 (새길) 158쪽에 있는 것이다. 여 기에는 노랫말이 달라져 있다. 뜨거운 함성 과 앞-서서 나가니 로 되어 있다. 2년 사이 언젠가부터 바뀐 가사로 불리게 된 것이리라. 이 노래를 만든 김종률은 2008년에 님을 위한 행진곡 이라는 앨 범을 제작했다. 거기에 실린 노래에서도 가사 몇몇 곳은 처음과 조금 다르지만 끝없는 함성 과 앞서서 가나니 는 지켜지고 있다. 어쨌든 앞서 말한 20년쯤 전에 나는 내가 아는 노래가 옳다고 생 각했다. 짧은 노래에서 뜨거운 이 맹세 와 함성 앞에 반복된다 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가? 산 자 에게 따르라 라고 말하는 사람이 라면 앞서서 나가니 를 넘어 앞서서 가나니 라고 외치는 것이 옳 지 않을까? 2000년 여름, 나는 청년진보당 정치연수원을 책임지고 있었다. (청년진보당은 나중에 이름을 사회당으로 바꾸었고, 사회당은 진보 신당과 합당했고, 그 당이 현재 노동당이다.) 정치연수원에서 주관하 는 간부학교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그 기회에 제대로 된 <님을 위 한 행진곡>을 퍼뜨리기로 했다. 이 노래가 바로 불리길 바라는 사람 은 나만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게다가 현재 좌파 안양지국장인 음악 선생님은 멋진 혼성4부합창곡으로 편곡도 하였다. 몇 차례 간부학교를 통해 제대로 된 가사를 꽤 많은 동지들에게 퍼뜨렸고 이를 발판으로 우리는 원래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운동 을 펼쳤다. 당 행사에서는 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 노랫말을 확인해 주고 바르게 부를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집회에 가면 우리는 소수였 오월 광주, 다시 제대로 불러야 할 노래들 99
다. 끝없는 함성 을 부를 때면 옆 사람 시선이 느껴졌다. 절정부에 나오는 앞서서 가나니 는 더 큰 목소리의 앞서서 나가니 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우리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이 노래를 정부 공식 행사에서 부르네 마네 하던 시절에 이 노래 를 지키자고 했던 사람이라면 그저 부르는 것을 넘어 애초의 정신과 뜻을 살린 노랫말도 지켜야 한다. 망월동에 화려한 새로운 묘역이 생 겼어도 구묘역을 고집하는 사람의 입에서는 끝없는 함성 과 앞서 서 가나니 라는 노랫말이 나와야 한다. <오월의 노래 2> <님을 위한 행진곡>이 예를 갖춘 자리에 어울리는 노래라면, 1980년 광주를 떠올리며 악으로 깡으로 부르는 노래로 <오월의 노 래 2>가 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로 시작하는 노래다. 이 노래가 2 인 것은 <오월의 노래>라는 제목의 상당히 서 정적인 노래가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곡에 대해 말하자면,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미셸 폴나레프Michel Polnareff라는 가수가 부른 <Qui A Tue Grand maman>이 거의 틀림없 다. 30대 중반 우연히 버스에서 그 외국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 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랬던 기억이 있다.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 평 화로운 시절을 살던 할머니가 불도저가 밀고 들어오며 개발이 진행 되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노래는 이 죽음이 사람들의 무심함 때문은 100 특별 기획
아닌지를 묻고 있다. <적기가>로 알려진 노래와 음정이 비슷한 곳이 몇몇 있지만, 이 샹송을 번안한 노래로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누가 가사를 붙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1980년대 초반과 중반,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상황은 아니나 스 크럼을 짠 채 경찰과 코앞에서 맞서게 될 때, 발을 구르며, 음정 따위 는 상관없이 목이 터져라 부르던 노래다. 그런 장면이 연출되지 않으 니 부를 기회가 없어진 것일까? 이제는 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아 마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아는 사람 가운데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은 반의반도 안 될 것이다. 이 노래 역시 앞서 언급한 노래책 두 권에 가사가 조금 다르게 적 혀 있다. 게다가 메아리 책에는 4절이 덧붙어져 있다. 내 기억에 어떤 때부터 4절이 더해졌는데, 그것이 두 책이 나온 사이인 모양이다. 어 떤 악보에도 없지만 4절에서는 피! 피! 피! 를 덧붙여 불렀다. 무질서하게 앉아 딴짓하다가 가끔 연단을 바라보는 요즈음 결 의대회 나 사수대회 가 아니라 붉은 피 가 솟음을 드러내는 현장 과 장면에 어울릴 <오월의 노래 2>. 이 노래를 다시 부를 때이다. 4절 끝까지. <광주 출전가> 1987년 6월 직전 전국의 구치소는 독립군 으로 넘쳐났다. (거 기서는 국가보안법이나 집시법을 위반하여 갇힌 사람들은 독립군, 오월 광주, 다시 제대로 불러야 할 노래들 101
나머지는 모두 도둑놈 이라 부른다.) 독립군은 규정상 독방에 수용 해야 하지만 방이 모자랐다. 당국으로서는 이들이 한 방에서 생활하 는 것을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하여 독립군 과 도둑놈 의 혼 거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괜히 독립군 인가? 독립군들은 도둑놈들을 의식화시키기 시작 한다. 투쟁을 조직하고 집회를 연다. 같은 시간에, 각자의 방에서, 문 에 달린 철창을 붙들고, 복도를 향해 선다. 얼굴은 마주하지 못하지 만 사회도 있고 순서에 따라 발언도 한다. 세상문제에 대한 정치 집 회이기도 하고, 부당한 재소자 처우 사례를 알리며 재소자 인권 탄 압하는 보안과장 깨져라 같은 구호도 외친다. 노래도 부른다. 그 즈음에 많이 불렀던 노래가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 무 등산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 로 시작하는 노래다. 그때 수감 생활을 했다면 웬만한 도둑놈 도 이 노래를 안다. 같은 방에 있던 재소자가 이 노래를 아무렇지 않게 흥얼거리던 것을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작년에 광주 출전가 가 제법 높은 순위의 검색어가 된 일이 있 다. 법능스님 입적. 2013년에 세수 53세이니, 1960년생이다. 속명 문성인, 예명 정세현, 전북대 국악과 출신, <광주 출전가>를 만든 사 람, 1993년 출가, 앨범 나 없어라 발매를 앞두고 입적, 출가한 후에 도 노래음반과 명상음반 발표, 이런 것들이 관련 내용이다. 이 노래는 만든 사람이 분명하다. 글 고규태, 곡 정세현. 어 떤 악보도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제목을 다르게 소개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고규태는 이 노래 제목이 <광주 출정가>가 아 닌 <광주 출전가>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http://blog.daum.net/ 102 특별 기획
seopyeong/1911834). 시민군이 계엄군과 맞서 싸우러 나가기 전 기운을 생각하며 훗 날 만든 노래다. 1987년 6월항쟁 때 전남도청으로 진출하려던 시민들 이 부르며 널리 알려졌다. 이 노래 역시 알려진 악보마다 가사와 곡이 조금씩 다르지만, 원 작자가 밝힌 악보와 가사가 있으니 논란의 여지는 없다 하겠다. 다시 불러야 할 그 노래들 1980년 광주에 빚을 졌고 그 광주의 자식 이고자 한 사람들이 만들고 부른 노래들, 이제 다시 불러야 한다. 그리고 바르게 불러야 한다. 세 곡의 악보를 싣는다. 2006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노래는 멀리멀리 라는 제목 으로 두 권짜리 노래 모음집을 냈다. 오타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그 노래집에 실린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도 이상하다. 상태가 좋지 않 지만, 앞서 언급한 악보들을 싣는다. 1980년 5월 광주를 기억하고 지키듯이 이 노래들을 옳게 부르고 퍼뜨려 지켜야 한다. 오월 광주, 다시 제대로 불러야 할 노래들 103
104 특별 기획 민중문화운동연합 편, 님을 위한 행진곡, 학민사, 1987년, 141쪽.
메아리 제9집, 1989년, 새길, 171쪽. 오월 광주, 다시 제대로 불러야 할 노래들 105
106 고규태 블로그 http://blog.daum.net/seopyeong/1911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