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ivation of animals and plants and The fusion of Nomad-Han(胡漢) agriculture appearing in Qimimyaoshu Choi, Duk-kyung (Pusan National University) 齊民要術 에 보이는 動植物의 배양과 胡漢 農業文化의 融合 崔德卿 (부산대 사학과) Abstract Qimimyaoshu is valued as a book which has compiled in itself all the agricultural textbooks of ancient China. The compilation of agricultural textbooks represent that the compilation of agricultural techniques and agricultural skills have been compiled altogether. The remarkable thing is why the agricultural textbooks like those have been written in Houwei dynasty, the northern kingdom of the middle of 6th century. Huwei was a dynasty in which the cultures of Nomad and han were coexisting, in that it itself had succeeded to the orthodox dysnasty of Northern Wei. In that point it can be expected that Qimimyaoshu, a agricultural textbook published at that time, would also be containing much of Nomad-han culture, well supported by the fact that the textbook shows evidences of valuing pasturage and various local products which are not produced in China, to say nothing of the fermented food like doenjang. Usually the existing studies on Qimimyaoshu had been done from the view of the dissemination of dry-field farming. Recently, with the study outcome that the fusion policy of Nomad-han in Weijin age has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cwiacity and internationality of the Suitang culture, the agricultural historical understanding suffered a change too. If Qimimyaoshu is a agricultural textbook published being based on the circumstances of the coexistence of Nomad-han in The Wei, Jin, 277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it brought, going through the Suitang dynasties and taking advantage of the dissemination of the Chinese character culture and the political and military power, a new change to the established agriculture and dietary culture of China, and again to those of minority races. So every country came to reinforced the traditional agricultural techniques of locality, and Qimimyaoshu came to be widely applied across the dynasties and regions, presented itself as a good example for agricultural textbook to each dynasty being also applied to the rice farming method, which altogether formed the reason for the lasting survival power of Qimimyaoshu. From this point of view Qimimyaoshu can be taken as a agricultural textbook created by the minority races around at the same time also, rather than by the Huabei(華北) people solely and simply, and its another feature is that it brought a new situation to the agriculture of East Asia with its repeated dissemination to every area after publication. Especially Qimimyaoshu introduces about 150 kinds of local products outside China, beyond the traditional life zone of Han race in the middlestream and downstream of the Yellow River. Of course the number of overlapping items is not small, but they are all raising crops or wild plants which came from the regions of minority race, and some crops have the character "胡"(Nomad) as the first letter of their names, making evident that they came from the minority races of the western and northern areas. Additionally, the breeds of cattle and the secondary agricultural process method by them appearing in Qimimyaoshu shows that Qimimyaoshu was born as a agricultural encyclopedia which covers various cultural backgrounds and made the agriculture of Nomad-han be merged into "多元一體"(the unification of the plurals) and be settled as the agriculture of the midlands. In other words, Qimimyaoshu came to be seen again from a certain point of view of cultural history that the local interchange of industry and culture through the publication of Qimimyaoshu newly create local cultures. 278
This thesis examined the real state of the raising crops of the Huabei region by investigating the agricultural skills of the inland, together with the animals and plants and their other names of the outside world by investigating again every kind of the literature which had actually been referred to, finding as its outcome the trace that there were efforts to actively introduce and import the local products from the outside in The Wei, Jin,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Hence its rooting in the Huabei region of different ecological circumstances, and its modification of the conditions of "天地人"(the Sky, the Land, and Nomad-man beings) for the mutual combination. It was just because of the capacity of agricultural textbooks like that, that Qimimyaoshu came to be widely applied all across the East Asian countries afterward and it was because of Nomad-han's fusional character Qimimyaoshu had, that the countries around could also write agricultural textbooks on its basis. On this point it can be asserted that Qimimyaoshu shows the way of communication between cultures from the angle of economy as well as the political fusion of Nomad-han. It even makes possible the agricultural historical proving of the political and economic problems of the formation of East Asian cultures. 1. 서론 齊民要術 을 통해본 소수민족의 중국과학발전에 대한 공헌 이나 호한 음식문화의 융합 에 관련된 연구성과는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해준다. 그리고 齊民要術 의 끝에는 五穀果蓏菜茹 非中國物産者 라는 항목이 별도로 추가되어 있다. 이것은 황하 중하류의 漢族 전통 생활지역을 넘어선, 이른바 非中國지역의 물산 150여 종을 소개한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기존에 존재했던 것도 적지 않지만, 이들은 모두 소수민족지역에서 들어온 재배작물이거나 야생식물이며, 어떤 작물은 胡 자를 첫머리에 사용하여 그 명칭만 보아도 西, 北方 및 남방지역에서 들어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본고는 우선 齊民要術 에 등장하는 비중국적인 산물과 함께 인접 국가나 소수민족을 통해 중원으로 유입된 진귀한 산물과 그 이동 경위와 정착과정을 279
살펴보고, 나아가 北朝시대 農牧業의 변천과 2차 식품가공방식을 통해 나타난 農牧 문화의 성격도 밝혀보고자 한다. 이것은 문화교류의 결과 새로운 농업문화를 창출했다는 관점에서 齊民要術 을 다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위진남북조시대의 각종 산물과 物候자료, 재배물산 및 그 특성, 育種 및 引種방식, 그리고 경작방식과 각종 가공기술 등이 좋은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民族간의 교류와 식물의 유입 1) 齊民要術 의 농작물과 非中國物産 齊民要術 의 내용은 10卷 92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가장 먼저 기술한 것이 바로 농업생산에 관련된 내용이다. 기술된 곡물의 순서를 보면 穀, 黍穄, 粱秫, 大豆, 小豆, 麻, 大小麥, 水稻, 旱稻, 胡麻 등의 順이다. 그런데 서술 자수와 비중은 다소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이들 작물에 관한 穀(48%), 大小麥(11.3%), 水稻(10.9%), 大豆(7.3%), 黍穄(6.5%), 小豆(4.3%), 旱稻,(3.6%), 麻子(3.3%), 胡麻(2.7%), 粱秫(2%)의 순으로 기술 순서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여기에 만약 大小豆를 합하여 계산하면 그 비중이 11.6%가 되어 2위가 될 정도로 중시되었으며, 아울러 농작물의 90% 전후가 旱田作物이었던 것도 위진남북조시대 농업구조상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중 大豆의 비중은 주목된다. 그리고 마지막 卷10에는 五穀 果蓏 菜茹非中國物産者 라고 하여 이전 황하유역에는 재배하지 않았던 식물의 기술지식까지 제시하고 있는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과 결부하여 농업문화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齊民要術 이 단순히 過去文字의 기록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당시에 口傳하는 전설, 타인의 경험은 물론, 저자 賈思勰이 직접 경험한 내용까지 총결하여 집필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위진 남북조 초기단계에는 잦은 동란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특히 후술하는 바와 같이 한말 이후 지속된 한랭 건조한 기후로 인하여 농업환경이 위축되었던 것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농민들은 대체할 양식을 찾아 나섰을 것이고, 官府 역시 농민으로 하여금 양식 이외 자연계에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敎民 하는 정책이 있었을 것이다. 齊民要術 은 그러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듯 非中國物産 의 교류는 이미 先秦시대부터 중원정부가 夷蠻戎狄, 즉 東南과 西北지역과 서로 충돌과 교통하면서 시작되었으며, 특히 한 무제가 張騫을 280
서역으로 파견하고, 그 후 宣帝 神爵 2년(B.C.60) 龜玆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여 서역의 남북 두 길을 관리하면서 서방세계와의 접촉이 잦아졌다. 그런가 하면 진시황은 趙佗가 세운 南越國을 정복하고, 그 곳에 군현을 설치했으며, 한 高祖 11년(B.C.196)에 陸賈를 남월에 파견하여 조타를 남월왕에 봉하고 藩國으로 삼으면서 남방지역과의 정치, 문화적 교류가 급진전되었다. 그로 인해 다양한 異國의 물산이 서, 북부나 남방지역을 통해 전래되게 된다. 齊民要術 의 非中國物産 은 바로 그간의 胡漢의 소통을 잘 말해주는 것이며, 표3 은 이와 더불어 南方草木狀 과 南方草物狀 에 등장하는 진귀한 남방산 과일과 수목을 대비한 것이다. 이들은 지역마다 다소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동북지역은 大豆와 이 와 관련된 豉와 豆醬 등의 발효식품에 관심이 많았던 것에 반해, 서북지역 으로부터는 각종 채소와 과일이 많이 들어왔으며, 북부지역에서는 유목민족 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馬, 羊과 같은 가축과 食肉飮酪 이 주로 도입되고, 남방의 경우 젓갈 같은 해산물과 열대성 초목과 과일이 많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수민족의 물산과 습속이 어떤 과정을 거쳐 중원에 이식되고, 그것이 장기적인 생명력을 갖게 되었을까? 이것은 실증적인 검토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지만 간단하게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齊民要術 에 소개되고 있는 곡물과 채소류를 보면, 大豆의 경우 원산지는 동북지역의 戎菽 에서 출발하며, 때문에 그들이 순화한 대두를 胡豆라고도 칭했는데, 이를 管子 戒篇에 의하면 齊桓公이 천하에 보급( 布之天下 )하였다고 한다. 水稻 역시 남방 百越계 先民이 순화한 것인데, 齊民要術 에는 이 외에도 蟬鳴稻, 盖下白稻 을 소개하고, 그들의 파종 및 수확시기와 더불어 다른 적지 않은 남방의 수도품종을 제시하고 있다. 그 외에도 漢 武帝때 張騫을 파견하여 많은 서역과 서북지역의 진귀한 물산을 수입했으며, 楚葵, 越瓜, 西域之蒜, 南夷之姜, 胡椒, 胡芹 등도 서역에서 중원으로 수입된 대표적인 果菜들이다. 이들은 대개 전쟁이나 물자교역 등 직접 인간이 매개하여 전래한 것도 있지만, 공납이나 상사들의 방식이나 환경조건의 변동에 따른 자연스런 전래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281
2) 남방지역과의 교류와 진기한 草木, 과일의 유입 南方이나 서역을 통해 內地로 올라오게 된 물산의 경로는 南方草木狀 이나 남북조시대의 문헌 속에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한대에 찬술된 三輔黃圖 에는 甘泉宮 남쪽에 昆明池에 靈波殿이 있어 桂를 기둥으로 하였는데, 바람이 불면 그 향기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이 桂 역시 合浦, 交趾 등 남방에서 생산된 물산으로 이미 중원으로 옮겨와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흰 꽃에 붉은 열매가 달리는 橘도 漢 武帝 때부터 交趾에서 제공되었는데, 특 기할 점은 남월지역에 秩2百石인 橘官長 1인을 배치하여 御橘을 공납했다는 점 이다. 吳 黃武(222~228) 중에도 交趾太守 士燮이 귤 17개가 달린 가지를 가지 고 와서 헌납하며 상서롭고 기이하다고 말하자 群臣들이 모두 축하한 것을 보면 이후에도 줄곧 귤이 중국 내지로 공급되었음을 말해준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헌납 또는 공납을 받은 남방과일을 흉노의 선우나 외교사절에게 제공하고 있다 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三輔黃圖 에는 漢무제 元鼎6년(기원전111년), 南越을 정복하 고 扶荔宮을 건설하면서 가져온 甘蕉와 같은 진귀한 異木을 심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合浦 동쪽 200里에 杉 한 그루가 있는데, 漢 安帝 永初5년(111년) 봄 에 낙엽이 바람을 따라 낙양성으로 들어왔는데, 그 잎의 크기가 보통의 杉보다 수 십 배나 컸다는 것은 杉이 내지로 옮겨져 재배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수목이 중원으로 이식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漢 武帝 때의 上林園의 건설 (B.C.137)이다. 상림원을 만들면서 군신들에게 각종 과실수와 진귀한 수종을 헌납하도록 구체적으로 지시하였다. 이때 신하들이 2천여 종의 수목을 헌납했 다. 그 후에도 계속 중원지역으로 유입되었는데, 西晉의 泰康 연간에는 유독 남 방국가와의 교류가 많았음을 南方草木狀 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그리고 晉代에는 大秦(동로마)을 통해서도 진귀한 물품이 적지 않고 유입되었 다. 太康5년(284)에는 大秦를 통해 鉤緣子 10缶가 헌납되었는데, 武帝는 3缶를 王愷에게 하사하여 그 珍味를 맛보게 했는데, (그는) 石崇에게 이것을 자랑하고 있다. 이듬해 한대 司馬相如의 노래에도 등장하는 諸蔗가 扶南에서 抱香履와 함 께 공납되고 있다. 洛陽伽藍記 에 등장하는 국가는 대개 인도지역, 서역 및 남방지역으로 구분된다. 주목할 점은 북위 세종 때 축성된 永明寺 의 기록에 의하면, 축성 때 각국에서 온 서역과 남방지역에서 온 사문들이 3천명에 달했으며, 그들 상호간의 풍습은 현저하게 달랐다고 한다. 그 중 승려 보리발타(菩提拔陀)의 282
기행이 주목된다. 그는 말레이반도에서 미얀마를 거쳐 캄보디아로 들어와 다시 챰 왕국을 통해 梁나라로 들어와서 낙양으로 들어왔다. 그에 의하면 남방의 여러 나라들은 이미 西域, 大秦, 安息, 身毒 등의 나라들과 서로 왕래하며 지낸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교류는 승려뿐이 아니었다. 낙양의 龍華寺 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吳지역이나 동쪽 오랑캐지역에서 귀순하거나 서쪽 大秦國에서는 隊商이나 行商들이 변경으로 몰려들어왔으며, 그들은 중국의 풍토와 습속을 좋아하여 정착한 자가 헤아릴 수 없었고, 귀화한 백성들도 萬餘家에 달했다고 한다. 이주민들은 처음부터 중원의 습속에 거부감이 없던 자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생활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극복했을 것이다. 특히 武帝 이후 서역, 인도는 물론이고 남방과의 적극적인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살필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위진시대에는 국가의 통치기구를 이용한 藩國과의 지속적인 교류뿐만 아니라 洛陽伽藍記 에서 보듯 남방의 불교 승려, 서역 상인 및 주변국가의 귀순자 등이 적극적인 문화전달의 교량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지역의 物産이 중원지역에 이식되기 위해서는 그에 알맞은 생태조건이 갖추어 졌음을 의미한다. 기후나 토양과 같은 풍토조건을 인위적으로 제공했거나 동식물의 생물학적 개량을 시도했을 것이다. 흔히 전한말 이후 기후의 갑작스런 한랭화로 인 해 전한보다 기온이 급강했다는 지적을 본다면 남방의 물산이 조건의 변화 없이 북 쪽에서 생장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남방의 산물이 중원지역으로 이식되었던 것을 보면 생물학적 변이나 강렬한 사회적 요구와 같은 특별한 조건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3. 畜牧業의 변천과 農牧文化의 교류 위진남북조시대 진귀한 초목과 과일은 남방에서 받은 영향이 컸다면, 북방유목민족의 영향을 가장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生畜業의 변화이다. 실제 6세기 齊民要術 단계에 이르면, 농서에 주요하게 소개된 牲畜은 牛, 馬, 驢, 騾, 羊, 猪, 鷄, 鵝, 鴨, 養魚 등으로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재미있는 것은 선진시대에 비하여 驢, 騾, 鵝, 鴨 등은 증가한 반면, 犬(狗)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북방 유목민족과 관련된 가축과 늪이나 호수에서 주로 생장하는 漁獵은 늘었지만, 선진, 진한시기 중원 농경민의 주된 단백질원으로 작용했던 犬이 주요 가축에 포함되지 않고 농서에서 사라졌다는 의미이다. 제민요술 에 의하면 동물 원료로 만든 식품 중 羊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장 283
많아 39종으로 1/3을 점한데, 반해 狗를 원료로 한 식품은 오직 한 가지이며, 그것도 이전 남방인의 식물과 요리를 소개한 食經 을 인용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제민요술 속에는 유목적인 의식이 적지 않게 작용했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北齊의 제도에 百姓家에 生兩男者 賞羊五口 하거나 황제가 大臣에게 羊을 하사 하여 그 뜻을 기릴 정도로 羊은 賞賜의 대상으로도 이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北朝에서 唐대까지 심지어 羊, 馬 등의 생축을 賦稅징수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생축이 羊, 猪를 대비할 때 養羊의 지위가 상승했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기존의 농경중심의 산업구조가 변화되었음을 말해준다. 游修齡은 제민요술 에 등장하는 가축들의 비중을 통계로서 제시하고 있는데, 馬의 수는 전축목수의 45.5%, 羊은 25.75%, 牛는 鷄, 鵝, 鴨과 마찬가지로 겨우 6.06%를 점하고 猪는 겨우 3.93%를 점했다고 한다. 북방의 목축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된 馬와 羊을 합하면 71.2%를 점한다는 사실은 당시의 산업구조의 지향이 목축업 중심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중원에 胡族이 常住하면서 한편으로는 유목적인 문화가 정착하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동물성 산품을 제공하는 목축 못지않게 농경을 더욱 중시하고 있는 모습을 제민요술 와 기타 문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재차 농업을 중시하게 된 것은 그 자체가 유목보다 우수하거나 선진화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중원이라는 자연환경 속에서 유목이 적합한 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선비족 정권이 장기화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이전 動亂의 시대와는 다른 사회적 변화가 생기면서 기존의 생산방식으로는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대처할 수 없어 농업이 재차 중시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무튼 제민요술 에서는 農牧이 모두 당시 중요한 산업으로 중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飮食 가공기술의 전파와 生活文化의 변모 胡族의 남화로 인하여 변화된 사회적인 변화는 생산구조의 변화를 야기했으며, 이것은 또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생활문화와 습관의 변화를 초래했다는 것은 齊民要術 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우선 북방민족의 일상음식이 牛羊肉과 같은 肉食위주에서 五穀雜糧과 채소과일 등으로 변모되었으며, 음료인 釀造원료 역시 이전과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주로 果酒와 奶酒 중심이었는데, 농경화가 진행되면서 釀造된 술을 마시고 한족의 양조기술을 익혀 곡물양조를 제조하기도 했다. 게다가 음식가공방식에서의 변화도 살필 수 있다. 당시 牛羊肉을 가공할 때 米와 284
麵을 가미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외에도 烤炙法에서도 변화가 나타나 齊民要術 炙法에 의하면 21종의 炙法 중에 중요한 특징은 그 원료가 牛 羊이 28.6%를 점한다. 기타 가축, 가금, 水産類가 71.4%를 점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炙法이 당시 크게 발전하여 원료가 牛 羊에 머물지 않고 魚類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졌음 의미한다. 그리고 齊民要術 에는 이제까지 漢族의 문화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胡族의 乳酪제품, 餠食제품, 烹飪기술 등 식품의 저장, 가공 및 조리법이 별도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 특기할 점이다. 뿐만 아니라 酒, 麴, 黃蒸, 鹽을 가미하여 발효하거나, 豆醬을 가미하여 직접 저미는 방법 역시 지금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특히 콩을 이용한 作豉法, 豆 肉과 魚 및 楡子 등을 이용한 作醬法, 그리고 橘, 白梅 같은 재료와 물고기나 猪肉을 이용한 젓갈 담구는 방식(魚鮓法) 등을 보면 齊民要術 의 식품 속에는 胡漢을 넘어 남방 및 동북지역 등의 요소들이 잘 융합되어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餠法에 꿀과 밀가루를 섞어 胡餠鑪에 넣어 익혀 만든 것은 분명 서역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한편 남하하여 농경화한 胡族의 양식은 주로 黍, 粟, 麥, 稻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 용도는 대개 밥과 煮肉의 配料로 사용되거나 식품발효나 釀酒用으로 사용했다. 특히 齊民要術 에는 14종의 黍를 원료로 해서 釀酒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주곡 작물 이외에도 齊民要術 에는 십 여 종의 다양한 과일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제민요술 에는 이런 과일들에 대한 시장가격이나 수익을 제시되지 않고 있다. 당시 소농민이 과수를 심는 것은 부업적인 성격보다는 자신의 양식을 助糧 하거나 더욱 중요한 것은 시장에서 五穀과 바꾸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雜說 편에 보이는 四民月令 의 내용에는 곡물과 직물에 대해 糴, 糶, 收, 賣, 買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농민과 시장과 관계를 밝히고 있다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뿐만 아니라 유목민족들이 남쪽에 내려오면서 목축과 그와 관련된 생산기술도 같이 전파했다. 그 결과 漢人들은 점차 고기를 굽고, 펠트로 만든 장막을 이용하 고 우유로 음료를 삼는 호족들의 풍속에 익숙해져 갔던 것이다. 그리고 민족간의 동화는 언제나 쌍방향으로 진행되었다. 胡人이 한화하는 동 시에 漢人이 호화하는 것이다. 한인은 긴 시간에 걸쳐 생산활동과 생활을 하면 서 자연적으로 호인의 풍습을 흡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한서 五行志에는 "靈帝가 胡服, 胡帳, 胡床, 胡坐, 胡飯, 胡箜篌, 胡笛, 胡舞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285
한다. 황제가 좋아하니까 자연 귀족들도 따라하게 되었고, 한인들이 호화의 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오호 십육국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胡床"으로 호인들이 발명했던 다리가 높은 의자이다. 그때 까지 중원지방의 漢人들은 한대 화상석의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바닥 에 끓어 앉거나 양반자세로 앉았다. '胡床'이란 불리는 의자를 사용하면서 비로 소 바닥에 앉아 생활하는 습관이 점차 변하였다. 뿐만 아니라 胡歌, 胡樂, 호무, 胡戱의 유행은 기존 문화에 새로운 활력과 색 채를 첨가하였다. 북방 한족 자제 사이에서도 호족 언어를 배우는 것이 당대 유 행의 첨단이었으며, 한어 속에는 胡虜의 음이 섞이게 되었다. 한인의 胡化는 정 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 침투하여, 민족적 차이를 줄임으로써 선비족이 건립한 북위가 북방을 통일하는 데 그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선비족이 세운 後魏(東魏)는 胡漢이 정치적으로 융합했을 뿐 아니라 식생활의 음식소재나 조리방식, 저장 및 가공방식 등에 까지 각 지역의 문화를 수용 하여 융합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민요술 은 민족을 뛰어넘은 농서이며, 조리서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런 독자성 때문에 지금도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5. 胡漢文化의 융합에 따른 齊民要術 의 등장과 農業文化 魏晋시대에 인구감소와 농지의 황폐화로 인해 토지가 방대한 草場으로 변환 것과 상반되게 점차 인구의 회복과 함께 더욱 증가하면서 토지황폐화와 전쟁으로 인한 식량부족사태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토지가 개간되면서 점차 목축업 공간인 草地가 없어진 데 그 원인이 있다. 이 때문에 생산력을 提高하면서 단위당 생산력이 높은 쪽으로 산업구조가 변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4세기 무렵 동북 서부지역의 농업발전은 慕容鮮卑의 역할이 컸다. 처음 모용 선비가 遼西로 진입했을 때는 목축과 수렵을 생업으로 했다. 그러나 점차 주변 의 宇文部, 고구려, 부여 및 漢族의 유민을 수용하면서 躬耕于野 하여 요서지 역의 농업개발을 도모했다. 이를 뒷받침할 고고학적 자료로서 최근 3세기 말에 서 4세기 중엽 遼寧 서북부의 北票喇嘛洞 大凌河유역에서 최근 발굴된 木棺 및 石棺墓에서 陶器, 銅器 및 金銀器와 더불어 철기가 대량 출토되었다. 특히 6세 기 초 선비족이 漢化된 北燕정권을 건립하면서 農桑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농 업에 게으른 자는 戮하고 力田者를 포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선비족을 비롯하여 북아시아 유목민들이 빠른 시일 내에 경작활동에 286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전적으로 漢人에 의해서만 농 업을 습득한 것으로 보기는 곤란하다. 유목민들이 일찍부터 스텝로드를 통해 서 역으로부터 청동기, 철기, 마차와 전술 등을 수용했던 사례를 생각해보면, 카자 흐초원의 유목민으로부터 농경기술을 유입했을 가능성도 가정해 볼 수 있을 것 이다. 동북지역의 고구려 역시 漢 중기 이후에 중원의 전쟁 또는 무역이 빈번해지면 서 철제 농구류가 많이 출토되고 있는 점에서 반농 반렵적인 생활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兩唐書 高麗傳 에 의하면 李勣이 요동성에서 糧十萬石 을 획득한 것을 보면 고구려의 농업생산이 장족의 발전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인접한 沃沮 역시 五穀재배가 적합하고 농사도 잘 했다는 것을 보 면 비슷한 시기 주변지역의 농업 발달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6세기 제민요술 에 농업을 목축의 앞에 기재하거나 牛가 다른 동물보다 앞서 기재되고 있는 것은 농경의 중요성이 목축보다 컸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種植業의 비중 또한 목축업보다 높아 79.09% 대 20.98%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선비족이 상대적으로 농업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齊民要術 에 등장하는 각 지역의 작물과 농업기술이 중원지역으로 들어오면서 특별히 강조한 점은 바로 天時, 地利와 勞動力, 즉 天地人 3才의 결합이다. 農時에 입각하여 근면한 경작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齊民要術 에는 각지의 부족한 부분을 교육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九眞과 廬江에 牛耕을 보급하거나 돈황에 耬犁를 보급하여 생산력을 제고했는가 하면, 호남성 桂陽과 江南지역에는 뽕나무를 기르고 누에치기를 가르치고, 五原에는 삼과 모시를 재배하도록 가르쳐 방직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생산영역을 개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齊民要術 에는 경영관리면에서 앞의 天時地利 의 원칙과 더불어 우량품종을 선종할 것과 精耕細作의 원칙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생산공구도 지역의 실정에 맞게 변화시켰다는 점도 주목된다. 예컨대 牛耕犁가 遼東지역에서는 그 지역에 적합한 遼東犁로 변모되었음을 제민요술 에는 지적하고 있다. 같은 이유로 외부에서 중원지역으로 들어온 작물 역시 분명 화북지역의 환경과 풍토에 맞게 유전학적으로 품종이 변형되었거나 재배기술이 변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齊民要術 이 지닌 이같은 농목업의 포괄성과 정경세작의 방식은 이후 남방의 江南농업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음이 남송 때 발간된 陳旉農書 (1149)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그리고 近代 직전까지 齊民要術 의 농법이 287
한중일과 베트남의 농서에 지속적으로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은 이 農書가 갖는 이상과 같은 독특한 작용과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齊民要術 은 동아시아 농업문화를 재창출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했음을 알 수 있다. 6. 남북 식물의 배양법과 동아시아 농업의 기초 農牧간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문화를 교류하거나 호한 문화의 융합과 같이 상호 적극적인 노력으로 쉽게 융화를 이룬 것도 있지만, 외부에서 이식된 진귀한 초목이 기후조건이 상이한 북쪽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재배될 수 있었을까? 三輔黃圖 에는 이러한 어려움을 잘 지적하고 있다. 즉, 漢 武帝 元鼎6년 (B.C.111년)에 南越을 정복하고 기념으로 荔支의 이름에서 따 扶荔宮을 건립했 다. 交趾에서 100그루를 가져와 정원에 이식했지만, 한 그루도 살지 못했다. 황 제는 이를 애석하게 생각했다. 옮겨 심은 荔支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말라 죽으면 지키는 관리가 죽음에 연좌되는데, 이미 그들이 수 십 인이었다. 끝내 생장하지 못하자 심기를 포기하고 그 열매는 세공을 받았다. 이것 역시 傳送者가 길에서 지쳐서 죽기도 하여 生民들에게 엄청난 고민꺼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前漢 말기 이후 隋 초기까지는 기후가 한랭 건조하여 오늘날보다 0.5~1도 낮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후조건과는 별개로 齊民要術, 南方草木狀 및 南方草物狀 에는 非중국물산이 다수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한말 이후 남북조를 거치면서 이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 또한 적극적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가장 일반적인 묘목 배양법은 씨를 묘판에 파종하여 묘종을 옮겨 심어 번식시키는 實生法이다. 揷梨篇에는 야생의 苗種과 옮겨 심지 않은 實生苗는 결실이 늦다. 그만큼 양질의 번식은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齊民要術 에 소개된 번식기술 중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접붙이와 같은 기술이다. 齊民要術 揷梨篇에는 상호 성질이 유사한 목질을 선택하는 것에서 비롯하여 접붙이는 시기 및 위치와 구체적인 방법, 나아가 접붙이는 쌍방의 수목 종류와 그 관리방법까지 잘 명시된 것을 보면 오랜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연후에 동종의 품질개선을 위해서나 전혀 다른 과실수에서 접을 붙여 양질의 과일을 생산해내는 방식을 고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崔寔은 정월부터 2월에 걸쳐 나무의 가지를 쳐내고, 2월부터 3월에는 나무 가지를 흙으로 묻어준다 고 하여 휘묻이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 외 種桃柰篇에는 栽 라고 하여 꺾꽂이도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방식은 288
뿌리와 줄기의 재생능력이 강한 식물에 채용되어 齊民要術 에도 石榴, 白楊, 柳에 많이 이용하고, 桃나 梨에는 채용하지 않고 있다. 洩根法 은 사과나무 둘레에 구덩이를 파고 뿌리끝(根頭)을 드러나게 하면 거기에서 根蘖이 싹터 나오게 하여 이를 옮겨 심는 방식이다. 齊民要術 의 파종방식에는 種 과 栽 가 있다. 根蘖, 휘묻이나 野生苗는 모두 스스로 새로운 묘목을 배태했다는 점에서 齊民要術 에서는 이를 栽 라고 했다. 그러나 꺾꽂이의 경우, 재료가 단순한 가지나 뿌리이며, 그 자체 그루터기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栽 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에 반해 種 은 대개 곡물이나 椒와 같이 씨앗을 토양에 파종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재료가 얻기 쉽고 기술이 간단한 白楊과 柳의 꺾꽂이를 種 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櫻桃의 경우 만일 옮겨심는 과정에서 음양이 바뀌면 살기도 힘들고, 비록 살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이런 과실수는 음지에서 생장하는 성질이 있어 과수원 근처에 옮겨 양지에 이식하게 되면 살아나기 어렵다고 하여 서로 환경이 다른 수목을 옮겨 심을 때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漢 武帝가 張騫을 파견하여 大宛에서 포도씨를 얻어다가 離宮에 심어 관리할 때, 10월 중에 구덩이를 파고 포도 덩굴을 두둘 말아서 모두 묻어 2월 중에 다시 덩굴을 꺼내어 펴고 시렁에 올려 받혀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種棗篇에 의하면 다양한 종류의 棗 가운데 평소 맛이 좋은 대추씨를 골라 남겼다가 심고, 대추나무가 잎이 나기 시작하면 옮겨 심는다 고 하여 과실수의 품종개량을 도모했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張騫이 서역에서 가져왔다는 安石榴는 심는 방법은 또 다르다. 3월 초순에 가지를 구해 1척반 정도로 잘라 길이로 자라서 8 9개를 흙을 다져 채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남북의 교류와 소통은 수목에 머물지 않고 장강이남에서 일반화된 양어와 소택지에서 재배되고 있는 각종 순채[蓴], 연뿌리[藕], 蓮, 가시연[芡], 세발 마름[芰] 등의 재배에 대한 사실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齊民要術 의 곳곳에도 농작물뿐 아리라 樹木의 풍토조건을 감안하여 적절한 시기와 토양의 적합성 여부를 타져 재배하고 있는 상황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경험과 합리성은 전통적인 作物뿐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草木에도 적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노력이 각 소수민족에서 이전, 유입된 식물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중원지역에도 다양한 동식물이 근거를 마련하는데 주효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289
7. 결론 진한 통일제국의 중국문화는 농업 중심적이고, 지역간의 개방성보다 통일성에 주목하였기 때문에 보수성이 강했던 반면, 수당제국의 문화는 흔히 포괄적이고 華夷를 아우르는 세계성을 지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계기를 제공한 것이 바로 후한중기 이후 등장한 호족의 남화와 정주과정포괄적이북방민족의 화북지역 에서의 정착이 장기화되면서 그들의 문화를 토대로 장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아갈턠득해나갔는데, 그것이 바로 양보, 타협과 변화였던 것이다. 胡漢문화가 대립하는 정점기에 편찬된 제민요술 은 단순한 농서가 아니라 南北의 農牧문화를 통일적으로 흡수하여 시대의 요구에 맞게 농업과 농업문화를 재정비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제민요술 의 농업문화가 이후 동아시아 각국에 널리 전파되어 활용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남북문화에 대한 포용성이 농서 속에 잘 남아있기 때문 이며, 인근 국가에서도 이를 근간으로 농서를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제민요 술 이 지닌 북방과 남방 물산에 대한 수용과 융합적인 성격 때문일 것이다. 이 런 점에서 齊民要術 은 정치적인 호한의 융합을 넘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양문화가 어떻게 교류했는가는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제민요술 은 이러한 융합을 통해 진일보한 농업문화를 창출하고자 했던 것이 다. 이후 다시 제민요술 을 공유하면서 각 민족은 자국의 농업문화를 제고하 였던 것이다. 이것은 동아시아문화의 형성이라는 정치경제사의 문제를 농업사적 으로도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본 연구를 통해 농업사가 과거처럼 생산기술을 발달을 통한 생산력이 나 그로 인해 수반된 생산관계와 소득의 여부만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농업문 화사란 영역을 통해 지역공동체 문화의 생성과 변용에 농업적 교류가 어떤 작용 을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검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다. 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