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제목 : 18 세기 프랑스 기행 문학에 형상화된 동아시아와 조선 논문작성자 : 정은진 소속 : 프랑스 빠리 7 대학 18 세기 프랑스 서적 중 조선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저서로 장 바띠스뜨 뒤 알드 (Jean-Baptiste Du Halde, 1674-1743) 의 <중국제국과 타타르 통사 (Description de l empir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chinoise)> (1735), 아베 프레보 (l Abbé Prévost, 1697-1763) 의 <여행 통사 (Histoire générale des voyages)> (1748) 를 들 수 있다. 이 중 뒤 알드의 저서는 총 4 권 중 제 4 권의 423-430 쪽이 조선에 할애되었으며 아베 프레보의 저서는 총 20 권으로 제 6 권의 500-546 쪽에서 조선을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18 세기 당시의 프랑스의 상황을 언급하고, 이 작품들이 어떠한 경위로 빛을 보게 되었는지 또 조선에 대해 언급하게 되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18 세기 프랑스의 사회 정치적 배경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8 세기 유럽, 특히 프랑스는 이른바 계몽주의 철학 (Philosophie des Lumières) 의 시기이다. 1685 년 낭뜨 칙령 폐지과 그 후유증으로 인한 반종교적인 신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배타적인 태도에 반발한다는 의미 분위기에서 탄생된 이 사상은 과거의 형이상학적 추구를 거부하고 개인적인 경험과 사고를 바탕으로 한 세상의 이해 (entendement, understanding) 를 중시한다. 인간의 현세에서의 행복의 필요성을 인정함과 더불어 자연을 예찬하며, 이는 착한 미개인 (bon sauvage) 의 신화를 낳기도 한다. 또한 전반적으로 과학의 발전을 통한 인류의 진보를 믿는 경향이 널리 퍼지게 된다. 사전의 황금기라 불리는 18 세기에 간행된 디드로 (Diderot) 와 달랑베르 (d Alembert) 의 <백과사전 (Encyclopédie, 1751-1765)> 은 단순한 지식의 보고가 아니라 인간이 이성으로써 종교, 정치, 윤리 등을 통제하여 편견에서 벗어날 때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또한 볼떼르 같은 철학자에게 관용 (tolérance) 은 최고의 덕목이며 이러한 태도는 타문화에 대한 관심, 백과사전적 지식의 갈망 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6 세기에서 나온 세계주의자 (cosmopolites) 라는 말이 이 시기에 들어 일상화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Hazard, 247 쪽 참조). 타문화에 대한 관심과 예수회의 활동 예수회 (la Compagnie de Jésus) 는 1540 년 경 탄생되었다. 스페인인 성 프랑수와 크자비에 (Saint François-Xavier) 가 2 년 간의 체류 끝에 중국땅에서 사망한 것이 1552 년의 일이며 1560 년부터 몇몇 회원들이 마카오에 발을 딛는다.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이태리인으로서 포르투갈 선교회 소속) 는 1582 년부터 1610 년까지 중국에 체류한다.
프랑스 예수회는 17 세기 말이 되어서야 북경에 정착하는데 애초의 계기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루이 14 세의 바램에 따라 지리학의 대대적인 혁신이 일었는데 이를 위해 학술원의 학자들이 답사차 세계 곳곳에 파견되었다. 이 때 프랑스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중국와 인도에 보낼 사람을 찾던 중 선교를 위해 국경을 숱하게 넘나드는 예수회 회원들이 지목되었다. 당시 예수회는 정계에서 그리고 젊은 엘리트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들을 운영하는 등 프랑스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왕실과 콜베르 (Jean-Baptiste Colbert) 수상은 물론 이런 학술적인 필요 외에도 일찍이 식민지를 개척한 포르투갈이 약세를 보이는 틈을 타 새로운 무역 시장을 개척하고자 하는 야심을 갖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회 회원들의 파견은 다양한 동기들이 집결된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상인들과 더불어, 상인들의 선박을 이용한 천주교 선교사들을 16 세기 초부터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상부상조의 관계에 있었는데 이는 비록 서로의 동기는 상이했으나 이해관계가 같았기 때문이다. 상업과 종교의 결탁은 유럽의 중국 침투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Détrie, 81 쪽) 1. 사제들은 선교를 내세워 중국 문화를 배척하는 대신 진정한 호기심과 관심으로 접근하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중국어를 배우는 등 현지 생활에 동화되기도 하였다. 천문학 등에서 이들의 학식을 높이 산 강희제 ( 康 熙 帝, 재위 : 1662 ~ 1722) 시대가 북경에서의 예수회원 활동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다. 귀족 정치, 높은 학문, 현지 동화 (Vessière, 7 쪽) 2 로 요약되는 이들의 기본 노선은 이미 16 세기 마떼오 리치 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이유, 즉 현지의 풍습에 지나치게 관대한 나머지 교회의 규율을 거스르게 되어 예수회는 결국 본국 카톨릭 정부의 눈 밖에 나고 급기야 교황청은 1773 년 예수회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예수회 해체의 상황에 실제로는 이런 외부적인 원인 이외에도 좀 더 복잡한 요소들이 얽혀 있다. 역설적인 것은 백과사전적 지식을 추구하는 계몽주의가 중국에 대한 관심에 불을 지폈고 예수회 회원들이 그러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기여했다면, 예수회의 멸망에는 바로 그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이다. 예수회는 중국 등 외국에서는 타문화에 대한 관용을 외치면서도 프랑스 국내에서는 낭뜨 칙령의 폐지 및 이에 따른 개신교 신자들의 탄압 등 때에 배타적인 태도의 선두에 있었던 것이다. 볼떼르 (Voltaire) 같은 철학자들은 예수회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하였다. 여기에 예수회와 장세니스트들 (Jansénistes) 간의 분쟁도 한 몫 하였다. 뒤 알드의 <중국제국 및 타르타르 통사> 1674 년 빠리에서 태어난 장 바띠스뜨 뒤 알드는 예수회 회원으로서 루이 14 세의 고해 신부였던 르 뗄리에 (Michel Le Tellier) 의 비서이기도 했다. 극동에 관한 그의 저서가 가능하기까지에는 무엇보다도 현지에 체류 중인 예수회 선교사들이 제공하는 정보가 있었다. 대부분 학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무조건적인 포교가 아닌 현지인들의 삶에 가깝게 접근하는 방식을 취했던 이들이 보내오는 중국에 대한 감탄 섞인 보고서들을 엮어 출판하는 잡지가 1 세기 동안 존재했던 것이다.
뒤 알드는 1709 년부터 1743 년까지 <교훈적이고 신기한 서신들 (Lettres édifiantes et curieuses)> 이라는 이름의 이 간행물의 편집을 맡기도 했으니 유럽에 있으면서 극동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을 누구보다도 빨리 접하는 특권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이 서신들은 한 세기 동안 이국적인 디테일 뿐만 아니라 숱한 이미지와 아이디어를 제공함으로써 지식층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유럽은 스스로가 세계의 중심이 아님을 발견하였다. 유럽은 이제 비교점과 기준 등을 새로 만들어 스스로를 정의하게 되었다. 여느 여행 기록이 그러하듯 이 서신들은 과거의 구조를 파괴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 서신들을 통해 위기에 처한 서양의 의식 속에 상대성이라는 의미가 자리잡게 되었다 (Vassière, 18 쪽) 3. 뒤 알드는 빠리에서 책상머리에 앉아 18 세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중국 백과사전을 편찬해낸 것이다. 그가 집대성한 중국의 역사, 지리, 문화 등은 계몽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더불어 한반도의 독립된 지도를 비롯, 중국에 관한 미발표 지도 43 점을 최초로 발표하였다. 그를 놓고 볼떼르는 중국에 가보지 않고 중국어를 몰랐지만 동료들의 보고서에 의거하여 중국에 대한 전례없이 방대하고 훌륭한 묘사를 하였다 (Voltaire, 1160 쪽) 4 고 칭송하였다. 그의 저서는 바로 이듬해에 영어로도 번역 출간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더욱 컸다. 이후 발간된 중국에 관한 많은 저서들은 뒤 알드의 작업을 베낀 것이 많다. 뒤 알드의 목적은 예수회 회원들이 중국 문화에 대해 얼마나 개방적이었는가를 보여주고 그 같은 이해의 노력의 결실로서 중국에 대한 올바른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심어주고자 한 것이었다. 저자는 중국의 문화 및 자연 철학 원칙에 근거한 조화로운 사회의 메카니즘에 감탄한다. 총 4 권의 저서에서 뒤 알드는 중국 각 지방의 지리적 묘사 및 정치, 교육 시스템, 언어 체계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한편 실크와 자기 등에 관한 유럽인들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종교, 가족 제도, 풍습 등에 할애된 제 3 권에서는 중국의 과학과 의술에 대한 정보도 다루는데 중국 서적을 번역한 부분도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제 4 권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작성한 지도를 바탕으로 프랑스인 당빌 (Jean-Baptiste d Anville) 이 제작한 지도들을 포함하며 조선에 관한 30 여장의 증언을 담고 있다. 뒤 알드는 서문에서 유럽인들이 중국에 관심을 가진 것은 꽤 오래된 일이나 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고 소문만 무성했다고 지적한다. 중국을 여행한 예수회 선교사들 덕분에 마침내 사실들을 알게 되었지만 이들의 증언 중 엇갈리는 것들과 또 학식이 부족해 부정확한 부분 등을 본인이 정리하였고 이를 중국을 잘 아는 동료 신부에게 읽혀 그 진위를 확인한 뒤에 출판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주목할 점은 앞서 밝혔듯이 그가 조선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레지스 (Jean- Baptiste Régis, 1663(1664?)년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 이스트르 (Istres) 출생 1783 년 중국 사망) 라는 예수회 선교사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1698 년 중국으로 건너 간 레지스 신부는 40 여년 간 체류하면서 연구 및 포교 활동에 몸을 바쳤으며 특히 중국제국의 지도 작성 시 총책임을 맡았다. 이전에도 중국의 정확한 지리를 유럽에 알리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16 세기 말까지는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 지리학자들도 중국에 관해서는 거의 무지 상태에 있었으며 17 세기 중반에 마르띠니 (Martin Martini) 신부가 작성한 지도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중국의 지리 서적에서 찾은 정보에 빠리 관측소의 천문학자들이 사용하는 방식과
발달된 기기들을 통한 관측 등을 통해 정확성을 가하였고 그의 작업을 신임한 강희제의 후원으로 완성도가 뛰어난 지도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레지스 신부와 동료들은 중국제국 전도 작성이라는 방대한 작업을 위해 극동 지역까지 탐사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도 은둔의 왕국 조선의 국경을 넘지 못했다. 이들은 조선땅에 발을 들여놓지는 않지만 조선의 북쪽 국경선을 끝에서 끝까지 탐사한다. 이것 만으로도 조선이 섬이라는 그 때까지의 서양인들의 인식을 타파한 공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 조선에 관한 정보를 레지스 신부는 강희제가 조선국왕에게 파견한 타르타르인 영주에게서 듣고 중국 서적에서 얻는다. 뒤 알드 저서의 조선에 관련된 두 장( 章 ) 중 제 1 장의 제목은 레지스 신부의 회고록에 나온 조선 왕국에 대한 지리적 관찰 (Observations géographiques sur le royaume de Corée, tirées des mémoires du père Régis) 로 되어 있다. (참고로, 레지스신부가 조선에 관한 기록을 적을 당시는 1720 년 숙종 제위 마지막 해임을 밝혀 둔다.) 뒤 알드는 조선의 이름이 중국에서는 kao li 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는 레지스의 증언을 빌어 조선에 대한 기술이 어디까지나 전해 들은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반복 환기한다. 앞서도 밝혔지만 우리는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 토양에 대해 완벽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국경에서 본 바로는 남쪽 중국인들의 방식을 따라 아주 잘 경작되어 있었다. / 중국 황제의 명으로 수학 담당부의 하급 관리와 동행 여행한 한 타타르의 영주가 전해온 얘기로는 조선은 아름다운 나라이며 쌀, 밀, 조 등 삶에 필요한 것들을 풍부히 생산해낸다고 한다 (424 쪽) 5. 저자는 전해들은 정보들을 염두에 두고 북쪽 경계선을 측정하였다고 밝히고는 조선의 내부나 해안을 우리가 직접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지도가 완성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조선의 도시와 강의 상황들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나 방법이 없었던 만큼, 현재까지 발표된 지도들 중 최상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24 쪽) 6 고 덧붙인다. 산수에 대한 묘사 이후 조선인들의 가옥은 단층이며 상당히 허술한 건축물이라고 타타르인들에게 들었다 (425 쪽) 고 그 출처를 정직하게 밝히고 있다. 이들에게 조선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속국으로서 인식된다. 조선 민족은 요 시대 때부터 중국 민족에 종속되어 왔다 (432 쪽) 7. 조선의 외교 사절의 경우 조공을 바치는 봉신인 왕을 대표하기 때문에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상급 관리 심지어는 하급 관리들 앞에도 나서지 못한다. 체류하는 거처에 거의 갇히다시피 하는데 최소한 첫 의식이 있기까지는 그렇다. / 그 다음 외출이 허락되더라도 사람을 몇 명 따라 붙이는데 잘 모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서이다 (425 쪽) 8. 묘사에 있어서도 중국 문화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중국인 복장을 답습하고 있다 (425 쪽) 9. 범죄자를 벌할 때에 중국식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는 대신 ( ) (426 쪽) 10. 포교에 있어서도 주요 목표는 중국이며 조선은 덤으로 따라 붙는 나라이다. 과거에 몇몇 조선인들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일은 있으나 조선 땅에서 직접 포교 활동을 한 적은 없다. 안정된 방식으로 포교 활동을 하려면 중국 황제의 승락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 ). 그러나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중국이 교화되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조선과 타르타르의 개종은 시간 문제이다. 이 정도도 이 나라들은 중국에 의존하고 있으며 중국인을 떠받들고 있다 (426 쪽) 11. 레지스 신부 일행은 중국에서 실제로 조선인을 만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국 내에서는 중국 문자가 통용된다. 몇 년 전 우리를 만나러 온 사신은 글로써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는 또 공자의 가르침이 그의 나라에서 대단히 받들여지고 있으며 반면에 승려들은 멸시의 대상으로서 절간도 도시 외곽에만 지을 수 있도록 한다고 설명하였다 (426 쪽) 12. 이렇듯 여기저기서 단편적으로 모은 정보 외에 중국 서적에도 의존하고 있다. 중국의 고서적과 연대기 등을 살펴보면 조선이 아주 유서 깊은 나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426 쪽) 13 고 적고 있다. 2 부인 조선의 역사 개요 (Histoire abrégée de la Corée) 부분은 중국의 세 저서를 종합한 것이다. 중요한 부분은 그대로 번역을 했으며 정확성을 확신할 수 있는 연대기를 덧붙였다 (431 쪽) 14 고 명시되어 있다. 지리 및 역사의 건조한 기술이라고는 하지만 기행문적 성격이 강해 타문화에 대한 낯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을 엿볼 수도 있다. 가령, 고구려인은 부여족이다 (부여족은 동이족의 한 민족). 그들의 기원은 그들 말에 따르면 황당하다.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 민족들과 그들의 역사가들이 얼마나 순진한가를 보여준다. / 우상 숭배의 습관에 젖어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그럴 듯 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433 쪽) 15 라며 고구려 건국 설화인 주몽의 이야기를 옮긴다. 아베 프레보의 <여행 통사> 우리에게 소설 <마농 레스꼬 (Manon Lescault)>의 저자 아베 프레보로 알려진 앙뚜완 프랑스와 프레보 (Antoine François Prévost) 는 소설가이면서 역사학자였고 특히 번역가였다. 망명이라는 뜻의 exil 이라는 단어를 삽입하여 스스로 프레보 덱실 (Prévost d Exiles) 이라 명할 정도로 세계주의자 였다. 1697 년 프랑스 에스뎅 (Hesdin) 에서 탄생, 젊은 시절 예수회에서 학문을 쌓는다. 이후 군에 입대하였다가 다시 베네딕트회 회원이 되어 1726 년 사제 서품을 받는다. 동시에 철학 등 분야에서 깊은 학식을 쌓는다. 베네딕트회와의 불화로 위협을 받자 영국으로 도피하는데 이 때 쌓은 영어 실력으로 훗날 많은 번역을 하게 된다. 몇 차례의 스캔들 <마농 레스꼬>는 1731 년 출판 당시 스캔들을 일으켰으나 1733 년 큰 인기를 거둔다 에 이은 영국, 네델란드 등에서의 망명 생활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많은 저서를 낸다. 1734 년 교황의 사면을 받아 사제 및 저술가 생활을 하다 1763 년 사망한다. <여행 통사>의 경우 그 출판 경위가 뒤 알드의 저서보다 좀 더 복잡하다. 저술의 대상이 중국이 아닌 전 세계로 훨씬 더 방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표지에 적힌 부제는 다음과 같다 : 이름이 알려진 모든 나라에서 각기 다른 언어로 현재까지 출판된 모든 해상 및 지상 여행 기록을 모은 새로운 전집 (Nouvelle collection de toutes les relations de voyages par mer et par terre, qui ont été publiées jusqu à présent dans les différentes langues de toutes les nations connues). 과거의 여행에서 얻은 기록들을 집대성한 것인 만큼 저자의 이름도 제대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 중 1 권에서 7 권까지는 영국인 존 그린 (John Green) 의 <A New General Collection of
Voyages and Travels> (London, 1745-1747) 라는 작품을 아베 프레보가 번역한 것이다. 그린의 저서는 항해에 있어서의 영국인들의 우월성을 자축하고 탐험 여행의 상업적 유용성을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 또한 식민지사의 보고서 역할을 한다. 이 저서는 불어 뿐 아니라 네델란드어, 이탤리어, 스웨덴어, 러시아어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각 언어권 독자들의 정치적 상업적인 취향 및 관심사에 맞도록 번안되었다. 가령 영어판에는 바다를 정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해적에 대한 설명이 많이 나오는데 번역자들은 해적의 존재와 역사적인 현실을 존중하면서도 자국민들의 기대에 맞도록 즉 그 시대 각 나라의 정치적 외교적 입장이나 상업적인 기회주의에 따라 고쳐쓰기를 하고 있다. 이는 불어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Ellen Moerman 참조). 역자는 책 머리에 번역된 영어판 서문에 이은 일러두기 (avertissement)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역자 라고 만 서명하고 있음 에서 영국에서 책이 발간되는 순서에 따라 번역을 시작하였고 일러두기 를 쓰는 순간 첫 3 권을 이미 번역한 상태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불어본은 1746 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했다. 역자는 원작의 저자들이 저서 속에서 자신들의 나라인 영국에 가장 좋은 자리를 할애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외국 편집자들의 작업을 한 걸음 씩 따라 갈 수 밖에 없고 그들의 계획에 맞출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유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계획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들이 서문과 개론에서 예고한 것만 믿고 각 권이 출간되기를 기다려 번역을 하니 우리나라의 사고에 맞도록 그 순서를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xiv 쪽) 16 고 한다. 프레보는 이처럼 주간으로 발행되는 영어판을 바로 바로 받아보며 작업하였다. 그는 제 1 권이 다른 것만 못하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는 영국인 여행가들이 작성한 이 글들이 재미있는 이야기 보다는 유용한 정보들을 중심으로 저술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반대로 그 자신은 재미있는 이야기 에 치중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상인이었거나 항해 기술에 관심있었던 뱃사람들이었다. 영국 편집자들 자신도 이 부분의 내용이 특별히 흥미롭다기 보다는 저자들에 대한 예의로서 1 권에 넣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린의 저서를 번역하는 것으로 시작된 프레보의 작업은 곧 이어 더 큰 야심을 갖게 되어 프레보는 영어판을 그대로 번역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출처의 글들을 덧붙이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한편 벨렝 (Jacques-Nicolas Bellin) 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지도를 삽입하기도 하였다. 조선에 대한 부분은 그린의 저서에도 들어 있으나 여기에서도 그대로 번역을 하는 대신 다분히 각색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조선에 대한 서술을 시작하기 전 정보의 출처를 밝히는데 조선땅에 발을 들여놓은 서양인이 거의 없는 만큼 이 나라에 대한 정보가 아주 적다고 하면서 역시 레지스 신부의 기록과 그 기록을 발췌하여 실은 뒤 알드의 저서를 인용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조선인에 대한 평가도 이상적이랄 만치 긍정적인 점은 뒤 알드의 저서와 흡사하다. 조선인들은 일반적으로 신체가 당당하며 천성이 아주 부드럽다. 과학에 흥미를 갖고 있으며 무용과 음악을 즐긴다. 북쪽 지방 출신 남자들이 특히 혈기 왕성하며 훌륭한 무사들을 배출해낸다. 앞으로 언급하게 될 기자라는 인물이 법을 아주 잘 만들어 불륜이나 도적질이 존재하지 않았고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는다. 정부의 개혁으로 이러한 순수함을 좀 잃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다른 나라에 모범이 될 만 하다. 반면에
방탕한 여자들이 많으며 젊은이들의 풍습이 좀 지나치게 자유롭다 (503 쪽) 17. 불레스텍스는 계몽주의적 착한 미개인 이라는 이미지에 적합되는 묘사라고 지적하였다. 프레보는 중국의 입장에서 본 조선의 역사라는 점을 각주를 달아 환기하는 꼼꼼함을 보인다. 중국사에서 베낀 이 [조선] 역사는 조선의 역대왕과 사건들을 고루 다룬 역사가 아니며 중국과 관계가 있는 부분만 다룬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관한 유일한 저서인 만큼 그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506 쪽) 18. 저자는 이 외에도 <여행 통사>라는 제목에 걸맞게 앞서 조선에 관해 쓰인 거의 유일한 문서랄 수 있는 17 세기 <하멜 표류기>를 길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영어판에도 있다고 밝힌다. 영국인 번역가는 [<하멜 표류기> 속의 조선 묘사가] Palafox 나 타르타르 침략에 대한 다른 역사책에 나온 것과 거의 일치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인 것 같다고 하더라도 네델란드인의 기록 속에 지리에 관한 부분은 이의의 여지가 있다. 그가 바다에서 조선의 도읍으로 이동하는 여정의 도시 이름 등이 조선 전도의 것과 맞지 않으며 도읍의 이름 조차도 맞지 않는다. 조선 전도는 왕궁에 걸려 있는 것의 사본이며 이름도 거기에 적힌 이름들이기에 이는 더욱 황당하다. 이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라면 선교사들이 이 명칭들을 조선어가 아닌 중국어 발음으로 적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것이다. 실제로 두 나라는 언어는 다르지만 같은 문자를 사용한다 (517-518 쪽) 19. 고유 명사의 표기에 있어 조선인들은 가깝게 접한 하멜들의 표기가 시기적으로 최근의 것인 레지스 신부의 표기에 비해 더 우리말 발음에 가깝지만 전반적으로 사실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아 혼돈스럽다. 프레보는 네델란드인들이 조선땅에서 13 년간 겪은 우여곡절을 장장 17 쪽에 걸쳐 (제 2 장. 몇몇 네델란드인의 조선 여행기, 제주도 난파 및 조선에 대한 묘사 (Voyage de quelques Hollandois dans la Corée, avec une Relation du Pays & de leur Naufrage dans l Isle de Quelpaert). 517-534 쪽) 장문으로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풍습에 대한 저술에 있어서도 이들의 증언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13 년을 조선에 체류한 하멜의 진술은 훨씬 방대하고 자세하다. 무엇보다도 선교사들의 문체가 건조한 데 반해 진실성을 엿볼 수 있어 좋다 (518 쪽) 20. 출처가 상이한 이유로 조선에 대한 묘사에도 레지스 신부의 증언에서 비롯된 기술과는 더러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통역이 있었다고는 하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 난파하여 압류되어 살면서 숱하게 바뀌는 통치자들 밑에 온갖 고생을 하며 지낸 네델란드인들의 조선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수 많은 없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하멜은 주로 결혼, 장례, 여성들의 위상, 아동 교육, 언어 등에 관심을 갖고 서술하였는데 실제로 조선들의 성품은 부정적으로 풍습은 야만적으로 묘사된 것이 많다. 조선인들은 도둑질에 대한 성향이 강하고 사기성이 다분하여 조금도 신용할 수 없다. 그들은 속임수를 나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아 남을 속인 것을 자랑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거래에서 사기를 당한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기는 하다. 조선인들은 그 외에도 단순하고 순진하다. 그들은 외국인을 좋아하여 특히 중들이 그러하다 네델란드인들이 무슨 황당한 얘기를 해도 다 믿곤 했다. 조선인들은 또한 용기가 없고 성품이 나약하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왕을 살해하고 조선땅에서 저지른 살육의 현장과 오랑캐들이 얼음을 건너 쳐들어 왔을 때 고스란히 당한 일을 목격한 믿을 만한 증인들의 얘기를 들은 네델란드인들이 내린 결론이다. 이러한 혁명을 직접 본 Weltevree 에 의하면 적진에서 보다 숲 속에서 죽은
조선인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이 같은 비겁함을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악조건 속에 싸워야 했던 이들을 동정하였다. 몇 명의 유럽인들 폭풍에 밀려 조선 해안까지 밀려 왔을 때 약탈을 시도했던 조선인들은 쉽게 저지당하곤 하였다. 이들은 피를 무서워하여 길을 가다 피를 보면 도망을 한다 (535-536 쪽) 21. 오랑캐에게 정복당하기 전 무절제와 방탕이 조선을 지배하였다. 주민들의 유일한 소일거리는 그저 먹고 마시고 여자들과 온갖 종류의 과도한 행위들을 일삼는 것이었다 (536 쪽) 22. 조선인들의 세상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불완전하다. 조선의 학자들은 지구에 8 만 4 천개의 나라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은 이 같은 설을 믿지 않는다. 태양이 하루에 그 많은 나라들을 비춘다는 게 가능한가? 작은 섬 하나 하잘 것 없는 암초 하나도 일개 나라로 치지 않는 한 이라고 답한다. 네델란드인들이 몇몇 왕국의 이름을 대자 그들은 어느 도시나 마을의 이름인가 보다면서 웃었다. 실제로 조선인들의 해안에 대한 지식은 그들과 상거래가 있는 샴왕국을 넘지 않는다. 그들은 전 세계에 모두 12 개의 왕국 혹은 지역이 있고 이들은 모두 예전에는 중국에 조공을 내는 속국이었으나 오랑캐의 정복 이후 독립한 나라들이라고 믿는다 (540 쪽) 23. 저자는 조선인들의 종교가 과연 종교라고 할 만한 것인지 의문스럽다고 말한다. 주민들은 우상 앞에서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어보일 뿐 진정한 경외심은 엿볼 수 없다 (541 쪽) 24. 중국 사신에 대한 예우도 감시 만을 언급한 레지스 신부의 서술과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보인다. 조선 왕국은 중국 보다 먼저 조선을 정복한 동타르타르에 조공을 바친다. 일년에 세 차례 타르타르의 사신이 조공을 받으러 조선에 행차한다. 왕이 신하들을 모두 거느리고 직접 서울을 떠나 그를 맞이하여 숙소까지 인도한다. 그에 대한 예우는 왕 자신이 받는 예우 이상의 것이다. 음악가, 무용가, 곡예사들이 그가 가는 곳 마다 앞서 그의 흥을 돋군다. 그가 궁중에 머무는 동한 그의 숙소에서 궁궐까지 길 곳곳에는 10 내지 12 보 마다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다. 사신이 창으로 던지는 전언을 받아 임금께 전달하는 사람이 두 세 명 특별히 임명되어 임금은 매 시각 사신이 하는 일을 알 수 있다. 임금은 어떻게든 사신을 기쁘게 하여 중국 황실에 호의적인 보고를 하도록 한다 (543 쪽) 25. 계몽주의 시대의 정신을 이어 받아 시공을 불문하고 가능한 한 많은 여행 기록들을 바탕으로 하여 보편적인 지식을 구축한다는 취지로 쓰인 이 저서는 프레보의 번역을 거치면서 그의 소설가적 상상력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는 서술 방식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으로 단순한 묘사가 아닌 흥미진진한 탐험담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가 레지스 신부의 건조한 서술보다는 하멜팀이 겪은 우여곡절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도 그의 그런 소설가적 취향에 맞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뒤 알드가 레지스 신부의 기록에만 충실했던 것에 반해 프레보는 조선의 역사 및 지리 부분은 레지스 신부의 학식에 의거한 후 하멜의 표류 이야기를 대거 인용하고 그 뒤를 잇는 조선의 풍습 부분에 있어서도 네델란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일화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원문에 충실하기 보다는 원문의 아이디어를 고수하되 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번역자로서의 아베 프레보의 사뭇 진지하지 못한 태도는 당대에 퍼져있던 번역에 대한 생각과 번역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18 세기에는 번역 은 번역 이라기 보다는 번안 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생각은 무넹 (Georges Mounin) 의 유명한 표현을 빌어 부실한 미녀 (Belles infidèles), 즉 아름답지만 원문에 충실하지 않은 번역 으로 요약될 수 있다. 18 세기 번역가들은 무엇보다도 지식층 독자들의 취향을 만족시켜야 했다. 당시의 문법, 문체, 수사학의 규율을 따를 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 고전 같은 번역서들의 내용을 왜곡해야 했다. 번역 활동이 전 시대와는 달리 (사회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특별히 위신 있는 활동으로 여겨지지 않는 세기였다 (Oseki-Dépré, 34-35 쪽) 26. 덧붙여, 하멜의 증언의 경우 단어의 사용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지만 프레보가 크게 과장하거나 왜곡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을 잡아 먹는 악어가 강마다 득실거린다는 등 사실과 거리가 먼 부분들은 <하멜 표류기>를 출판한 네델란드인이 삽입한 것이다 (1992 년판 Frédéric Max 의 서문 참조, 17 쪽). 미지의 나라 조선에 대한 하멜의 증언은 당시 독자들의 큰 반향을 일으켜 여러 차례 인쇄되었으며 불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19 세기 중반까지 조선에 대한 거의 유일한 직접 증언으로 인식되고 있다. 결론 뒤 알드와 프레보의 저서가 발간, 수용되는 프랑스 현지의 정치, 사회적 상황 및, 타자의 해석에 있어서 당시 사조의 영향을 살펴보았다. 18 세기는 프랑스에서 계몽주의 시기로서, 미지 발견을 통해 스스로의 문화를 상대화하기 시작하며, 아직까지는 서양의 문화적 우월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 고질화되지 않은 시대이다. 식민지 야욕과 무관하지 않은 탐험의 시대이지만, 동시에 당시 프랑스에서는 중국을 모범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도까지 있었다. 뒤 알드의 저서는 예수회 회원들의 보고서 및 이들이 중국 강희제의 요청으로 작성한 지도 등을 종합한 것이며 아베 프레보의 저서는 전 시대의 다양한 탐험가들의 일지를 나라별로 정리한 것이다. 다양한 학식과 원주민의 풍물에 대한 호기심 및 비교적 타협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중국 황실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주민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예수회 회원들의 보고서는 당시 유럽 사회 전체에서 극동 지방에 대한 제일의 정보 출처였으며 그 자체로서도 오늘날까지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이들의 여행에 대한 간접 체험을 기록한 뒤 알드와 아베 프레보의 저서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타자에 대한 관심의 유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또한 이 두 저서에는 레지스 신부 등이 직접 증언은 아니나 청나라에서 조선인과 조선을 다녀온 사람들을 접하고 작성한 멀고 먼 조선의 지형과 조선인들의 순박한 기질 등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고 아베 프레보의 경우 조선의 교육 및 행정 체제가 다른 나라들에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등 대략적이나마 조선에 대한 언급이 담겨 있어 19 세기 후반기에 마침내 조선땅에 발을 디딘 여행가들의 저술이 소개되기 전까지 조선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787 년 항해 중 조선을 발견한 라 페루즈 (La Pérouse) 도 조선땅에 발을 들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문화 (culture) 의 반대의 의미로서의 자연 (nature) 에 가까운 민족, 그러나 동시에 서구의 발전된 나라들이 부러워할 만한 간단하고 효율적인 사회 운영 방식을 갖고 있는 나라로
인식되는 조선의 이미지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던 예수회 회원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뒤 알드, 프레보, 심지어는 레지스 신부에게도 조선은 결국 실제의 나라가 아닌 잠재적인 나라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듣고 읽은 정보를 바탕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세 사람 중 누구도 조선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세계를 알고자 하는 야심에서 비롯된 사실적 기행문과 더불어 황당무계한 상상의 나라에 대한 기술이 유행했던 시기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프레보의 <하멜 표류기> 인용에 대한 당시 독자들의 반응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하멜의 증언이 다른 어느 증언 보다도 사실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18 세기 독자들에게는 실제 존재하는 한 나라에 대한 정보라기 보다는 <걸리버 여행기> 식의 재미있는 이야기 쯤으로 읽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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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원문 1 «( ) avec les marchands et profitant de leurs navires, on retrouva aussi dès le début du XVIe siècle les missionnaires chrétiens. Les uns avaient besoin des autres car, si leurs objectifs n étaient pas communs, leurs intérêts, eux l étaient. Aussi la collusion du commerce et de la religion allait-elle être un des traits marquants de la pénétration européenne en Chine.» 2 «( ) une politique aristocratique, un haut niveau scientifique, une adaptation aux mœurs locales.» 3 «Ces lettres ont captivé pendant un siècle le public privé, en lui offrant non seulement des détails exotiques, mais une profusion d images et d idées. L Europe avait découvert qu elle n était pas le centre du monde. Elle cherchait à se définir en établissant des repères, des points de comparaison : comme toutes les relations de voyages, les Lettres ont largement contribué à l éclatement des structures anciennes. Elles développaient dans la conscience occidentale en crise le sens de la relativité.» 4 «( ) quoiqu il ne soit point sorti de Paris, et qu il n ait point su le chinois, a donné sur les mémoires de ses confrères, la plus ample et la meilleure description de l empire de la Chine qu on ait dans le monde.» 5 «Nous ne sommes point entrés dans le Royaume, comme j ai dit ailleurs, pour pouvoir parler avec une entière certitude de la nature des terres : mais ce que nous en avons vû sur les Frontières, est très bien cultivé à la manière des Chinois du midi. / Un Seigneur Tartare que l Empereur y a envoyé, suivi d un petit Mandarin du Tribunal des Mathématiques, nous a rapporté que le pays est bon, & qu il produit abondamment ce qui est nécessaire à la vie, du ris, du bled, du millet, & d autres grains.» 6 «Comme nous n avons point vû nous-mêmes le dedans du Royaume, ni la côte de la mer, nous n avons garde de donner cette Carte comme un Ouvrage fini, mais seulement comme le meilleur qui ait paru, personne n ayant eu la facilité, ni le moyen de s informer en détail de la situation des Villes, & du cours des Rivières.» 7 «Les Peuples de la Corée furent soûmis aux Chinois depuis Yao ( ).» 8 «Pour ce qui est des Ambassadeurs de Corée, comme ils représentent un Roi feudataire & tributaire, ils ne sont traitez qu avec une médiocre distinction : ils n ont point le pas devant les Grands, ni même devant les Mandarins du second rand. Ils sont comme enfermez dans la maison où on les loge, au moins jusqu aux premières cérémonies. / Lorsqu ensuite ils ont la liberté de sortir, on leur donne un nombre de personnes qui les accompagnent, bien moins pour leur faire honneur, que pour veiller à leur conduire.» 9 «Les Coréens sont vêtus à la manière Chinoise ( ).» 10 «Quand il s agit de punir un Criminel, on ne lui met pas un baillon à la bouche, selon ce qui se pratique à la Chine ( ).» 11 «On a jamais prêché la Religion Chrétienne dans la Corée, quoique quelques Coréens ayent été baptisez en différents tems à Péking. Pour le faire d une manière stable, il faudroit en avoir la permission de l Empereur de la Chine, chose plus difficile à obtenir que jamais ( ). / Mais il paroît certain que si par un miracle de la miséricorde de Dieu sur cette Nation, la Chine se faisoit Chrétienne, la conversion de la Corée & de la Tartarie ne seroit qu une affaire de peu d années. Telle est la dépendance où ces pays sont de la Chine, & l estime que les Nations voisines font des Chinois.» 12 «Les Lettres Chinoises sont ( ) en usage dans tout le Royaume : le dernier Envoyé qui vint nous voir il y a peu d années, le servit du pinceau pour nous faire entendre en Chinois ce qu il vouloit. Il nous dit que la doctrine de Confucius étoit parmi eux dans une grande estime, & qu on tenoit fort bas les Bonzez, à qui il n étoit permis de bâtir des Pagodes que hors des Villes.» 13 «La Corée est un Royaume très ancien, comme il est aisé de le montrer par les annales, & les plus anciens Livres de la Chine.» 14 «Dans les points essentiels, on s est contenté de traduire simplement, & on y a ajouté la Chronologie qu on croit être sure.» 15 «Les Kao kiuli étoient de la Race des Fou yu ( ) : (Ces Fou yu doivent être un Peuple de la Tartarie Orientale.) Leur origine, ainsi qu ils la racontent, est toute fabuleuse : ce que j en vais rapporter fera voir jusqu où va la crédulité de ces Peuples & de leurs Historiens. / Il est vrai que l idolâtrie donne quelque air de vraisemblance à ces sortes d extravagances ( ).» 16 «C est ici ( ) que je ne suis pas libre de cacher mes regrets sur la nécessité où je me trouve de suivre pas à pas des Compilateurs Etrangers, & de m assujettir servilement à leur plan. Non que je le condamne : mais n en connoissant que ce qu ils ont annoncé dans leur Préface & dans leur Introduction, je suis forcé d attendre la publication de chaque ( ) volume pour juger de l exécution, sans pouvoir espérer de faire jamais à l ordre général aucun changement qui convienne aux idées de ma Patrie.»
17 «Les Coréens sont généralement bien-faits & d un naturel fort doux. Ils ont du goût pour les sciences. Ils sont passionnés pour la danse & la musique. Leurs Provinces du Nord produisent les hommes les plus vigoureux du Royaume & les meilleurs soldats. Ki-tse, dont nous parlerons bien-tôt, avoit établi parmi eux de si bonnes loix, que l adultère & le vol y étoient inconnus. Les portes de leurs maisons ne se ferment jamais pendant la nuit. Quoique les révolutions de leur Gouvernement leur ayent fait perdre quelque chose de cette ancienne innocence, on peut encore les proposer pour modèle aux autres Nations. Mais leur Pays est rempli de femmes de débauche, & les jeunes gens des deux sexes y sont trop libres.» 18 «Cette Histoire, qui est tirée des Annales de la Chine, n est pas une Relation bien suivie des Affaires & des Rois de la Corée. Elle ne touche que ce qui a rapport à l Empire Chinois, mais comme c est l unique monument de la Corée qui soit connu, son importance oblige de ne la pas négliger.» 19 «Le Traducteur Anglois ( ) observe ( ) qu il ne sy trouve rien qui ne s accorde avec ce qu on lit dans Palafox & dans d autres Historiens de l invasion Tartare. Cependant quelqu apparence de vérité qu ait cette réflexion, à l égard des usages de la Corée & de la forme de son gouvernement, qui paroissent les mêmes qu à la Chine, il y a quelqu objection à faire contre la géographie de l Auteur Hollandais. Elle ne s accorde point avec la Carte de Corée pour les nombs des Villes ( ), dans la route que les Hollandois suivirent depuis la mer juqu à la Capitale du Royaume, ni pour celui de la Capitale même ; ce qui est d autant plus embarrassant, que cette Carte est une copie de celle qui est suspendue dans le Palais du Roi, & que les noms qu elle contient sont les noms indiqués. On ne peut répondre à cette difficulté qu en supposant que les Missionnaires ayent écrit ces noms en Chinois au lieu de les écrire en Coréen ; car les deux Nations emploient les mêmes caractères quoique leur langue soit différente.» 20 «Comme le séjour de l Auteur dans le Royaume de Corée fut d environ treize ans, il semble que sa Relation devoit être plus ample & plus détaillée. Mais on doit être content si l on y trouve les caractères de la vérité, sur-tout lorsque celle des Missionnaires est beaucoup plus sèche.» 21 «Les Corésiens ont tant de penchant pour le larcin & tant que disposition naturelle à tromper, qu on ne peut prendre la moindre confiance à leur caractère. Ils regardent si peu la fraude comme une infamie, qu ils se font une gloire d avoir dupé quelqu un. Cependant la Loi ordoenne des réparations pour ceux qui ont été trompés dans un marché. Ils sont d ailleurs simples & crédules. Les Hollandois auroient pû leur faire croire toutes sortes de fables, parce qu ils ont beaucoup d affection pour les Etrangers, sur-tout leurs Prêtres & leurs Moines. Ils sont d un naturel efféminé, sans aucun marque de courage. Du moins les Hollandois en prirent cette idée sur le récit de plusieurs personnes dignes de foi, qui avoient été témoins du carnage que les Japonois firent dans la Corée lorsqu ils en tuèrent le Roi, & de la manièr dont les Corésiens se laissèrent traiter par les Tartares, qui avoient passé sur la glace pour s emparer de leur Pays. Wettevri, qui avoit vû toutes ces révolutions, assuroit qu l en étoit mort beaucoup plus dans les bois que par les armes de l Ennemi. Loin d avoir honte de leur lâcheté, ils déplorent la condition de ceux qui sont obligés de combattre. On les a vûs souvent repoussés par une poignée d Européens, lorsqu ils vouloient piller un Vaisseau que la tempête avoit jetté sur leur Côte. Ils abhorrent le sang, jusqu à prendre la fuite lorsqu ils en apperçoivent dans leur chemin.» 22 «Avant que les Tartares eussent subjugué la Corée, on y voyoit regner l incontinence & la débauche. L unique occupation des Habitants étoit de boire, de manger & de se livrer à toutes sortes d excès avec les femmes.» 23 «La connaissance qu ils ont du Monde est fort imparfaite. Leurs Auteurs assurent que la Terre est composée de quatre-vingt-quatre mille Pays. Mais ces suppositions trouvent peu de crédit parmi les Habitants. «Il faudroit donc, disent-ils, compter pour un Pays la moindre Isle & le plus méprisable Ecueil, car peut-on s imaginer autrement que le Soleil suffise pour éclairer tant de régions en un seul jour?» Lorsque les Hollandois leur nommoient quelques Royaumes, ils se mettoient à rire, en leur disant que c étoit sans doute des Villes ou des Villages, parce que la connaissance qu ils ont des Côtes ne s étend point au-delà de Siam, où leur Commerce se borne. Ils sont persuadés en effet qu il n y a dans le Monde que douze Royaume, ou douze contrées, qui étoient autrefois soumises à la Chine & qui lui payoient un tribut ; mais qui ont secoué le joug depuis la conquête des Tartares, parce que ces nouveaux Maîtres n ont pas été capables de les contenir dans la soumission.» 24 «L Auteur doute si la Religion des Corésiens en mérite le nom. On vois faire au Peuple des grimaces ridicules devant leurs Idoles, mais avec peu de véritable respect.» 25 «Ce Royaume est tributaire des Tartares orientaux, qui en firent la conquête avant celle de la Chine. Ils y envoient trois fois chaque année un Ambassadeur, pour recevoir le tribut. A l arrivée de ce Ministre, le Roi sort de sa Capitale avec toutes sa cour pour le recevoir, & le conduit jusqu à son logement. Les honneurs qu on lui rend de toutes parts paroissent l emporter sur ceux qu on rend au Roi même. Il est précédé par des musiciens, des danseurs & des voltigeurs, qui s efforcent de l amuser. Pendant tout le
tems qu il passe à la Cour, toutes les rues, depuis son logement jusqu au Palais, sont bordées de soldats, à dix ou douze pieds de distance. On nomme deux ou trois personnes dont l unique emploi est de recevoir des notes écrites qu on leur jette par la fenêtre de l Ambassadeur, & de les porter au Roi, qui veut sçavoir à chaque moment de quoi ce Ministre est occupé. Il étudie tous les moyens de lui plaire, pour l engager à faire des récits favorables au grand Khan de la Chine.» 26 «( ) les traducteurs du XVIIIe siècle ont, entre autres choses, à satisfaire au goût du public lettré, devant non seulement se plier aux règles grammaticales, stylistiques, rhétoriques en vigueur dans leur siècle, mais aussi bien travestir le contenu des textes traduits, à savoir, les textes de l Antiquité grécoromaine. Il s agit d un siècle où la traduction n est plus l activité prestigieuse (socialement et artistiquement) qu elle a pu être durant les siècles antérie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