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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文

Transcription:

137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25)박 병 섭* <목 차> 1. 머리말 2. 연합군 명령 제1호와 SCAPIN 677 3. 일본외무성의 영토 연구와 로비활동 4. 미국의 강화조약 초안 5. 미 일 협의와 미국의 최종 초안 6. 영연방국가들의 동향과 영국의 초안 7. 일본의 영국 초안에 대한 대응 및 독도 인식 8. 영 미 협의와 공동초안 9. 한 미 협의와 러스크서한 10. 강화조약과 SCAPIN, 독도의 해석 11. 맺음말 <국문초록> 패전국 일본의 영토는 포츠담 항복조항에 따라 혼슈( 本 州 ) 등 주요 4도 및 연합국이 결정하는 주변 도서로 규정됐다. 연합국최고사령관(SCAP) 총사령부(GHQ)는 일본정부에 대한 각서 SCAPIN 677에서 쿠릴제도 류큐( 琉 球 )제도 오가사와라( 小 笠 原 )제도 독도 등을 잠정적으로 일본에서 분리했다. 일본정부는 이들 분리된 일본 주변 도서들이 강화조약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취급되 도록, 1947년에 영토조서 4권을 작성해 미국에 제출했다. 그 중에서 일본이 중시한 섬은 인구 59만 명이 되는 류큐제도와 실향민문제가 심각한 북방4도이다. 한편 작은 독도 다이 토( 大 東 )제도 등은 영토조서(4)에 기술했지만 경제적인 가치가 거의 없고 일본인의 관심도 낮았으므로 거의 무시했다. 또한 언론계나 일본국회도 마찬가지며 강화조약 조인 직전까지 독도가 거론된 적은 없었다. * 일본 獨 島 = 竹 島 문제연구넷

138 獨 島 硏 究 제16호 미국은 미 소 냉전이 심각하게 되자 일본에 관대한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방향으로 전환 했다. 그러나 영토문제에 관해서는 포츠담 항복조건을 내세워 일관되게 일본에 엄하게 대했 다. 류큐 등 남서제도나 오가사와라 등 남방제도에 대해서는 전략적 판단에서 신탁통치를 시행하기로 결정하고, 영연방국가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다. 북방4도에 대해서는 전략 적 판단을 좀처럼 정하지 못했다. 독도에 대해서는 미국은 한국영토로 인정하고 있었으나, 1949년 말에 일본외무성의 영토조서나 전략적 판단을 중시해 일본영토로 변경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덜레스가 간략한 조약 초안을 작성했을 때에 독도 오키노토리시마 등 작은 섬은 무시했다. 한편, 영국은 전략적 판단에서 제주도 독도 등을 일본영토로 규정하는 제1차 초안을 만 들었으나, 최종 초안에서 이들을 일본영토에서 제외했다. 이 초안을 미국이 비밀리에 일본 에 보여주고 견해를 구했는데, 일본은 독도가 일본영토에서 제외된 것을 묵인했다. 그 후의 영 미 협의에서 독도는 간과되고, 강화조약에는 아무 것도 기술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영국 이 영 미 협의에서 제주도를 일본영토로 할 것을 제안했으나, 결국은 한국영토로 됐다. 1951년 9월 대일강화조약은 자유주의진영만으로 조인됐다. 일본에서는 강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영토에서 분리된다는 풍설 이 시마네현( 島 根 )에서 파다했다. 외무성은 '풍설'을 부정하고, 국회에서는 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 독도가 기술되지 않았으므로 일본영토로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조약법에 관한 빈협약 의 문언주의에 반하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통용될 리가 없으며, 한국정부에는 다른 논리로 영유권을 주장했다. 한편, 강화조약 발효에 따라 SCAPIN의 유효성이 일본의 일대 관삼사로 됐다. 만약 SCAPIN이 자동적으로 철폐된다면 SCAPIN 1033, 즉 맥아더라인이 사라지고 일본은 광 대한 어업 해역을 얻게 된다. 일본정부도 GHQ도 SCAPIN이 자동적으로 효력을 잃게 된다 고 보았는데 끝내 법적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따라서 독도 하보마이 시코탄 등을 일본에 서 분리한 SCAPIN 677의 규정은 강화조약에 의해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한국 및 러시아에 의한 이 섬들에 대한 통치가 합법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또한 SCAPIN 677에 기술된 독도의 귀속문제에 관해서는 조약법에 관한 빈협약 으로 볼 때, 조약 2조가 규정한 조선 에 독도를 포함할지의 여부가 관건이다. 조약 책정을 주도 한 영국은 독도가 포함된다고 보았으나, 미국은 한 미 협의의 과정에서 독도는 일본영토라 고 보고 양국의 견해가 엇갈렸다. 따라서 2조의 조선 은 독도를 포함할지의 여부에 대해서 는 아무 해석도 못한다. 그렇다면 강화조약은 독도에 관해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았던 것이 다. 주제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다케시마( 竹 島 ), 리앙쿠르암, 연합국최고사령관 (SCAP)총사령부(GHQ), SCAPIN 677, 치시마( 千 島 )제도, 덜레스

정정 쪽 장소 원문 정정 150 주33 [삭제] 155 주53 하보마이가 없고 하보마이(Walvis) 및 158 표1 08.07 03.23 165 주77 위의 책 外 務 省, 対 米 交 渉 166 L10 커뮤니티 커뮤니케 166 주82 ; 原 貴 美 恵 50 [삭제] 166 주83 상동. 상동; 原 貴 美 恵, 앞의 책, 50쪽. 171 L1 구나시리 시코탄 구나시리 에토로후 176 L2-3 자방지도 지방지도 182 L14 미국대사관 정치고문 187 L4 부적은 부족은 188 L2-4 하지만...않았다. [삭제]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39 1. 머리말 1) 1951년 9월 8일에 조인되고, 다음 해 4월 28일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아주 이례적인 조약이었다. 보통 강화조약이라 하면 첫째, 패 전국의 전쟁책임을 명확히 하고, 둘째, 패전국에 거액의 배상금을 부과하 고, 셋째, 패전국 영토의 일부를 할양하고, 넷째, 모든 교전국이 조약에 조 인한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탈리 아는 그런 관례에 따라 강화조약을 맺었다. 2) 그런데 대일강화조약에서는 첫째, 일본의 침략이나 전쟁책임을 문책하는 조항은 초기 초안에는 있었 지만 최종적으로 삭제되고, 둘째, 배상은 일본의 경제력이 충분치 않았던 것이 고려되어 많은 조인국들이 청구를 포기하고, 셋째, 일본영토는 쿠릴 (일본명 치시마 千 島 )제도가 일본에서 분리됐지만 귀속 국가가 명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할양이 아니고, (4)주요 교전국인 소련은 조인식에 참석했 으나 조인을 거부하고, 중국은 미국의 반대로 인해 조인식에 초대를 받지 못했다. 이처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은 전통적인 강화조약의 4대 특징 을 하나도 채우지 않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이례적인 강화조약은 일본 경제 부흥의 관점에서는 바람직한 것이었으나, 한편으로 오늘날까지 전쟁책임문제 3) 및 영토문제를 남겼다. 전통적인 강화조약에서는 영토 처분은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명확히 규 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대일강화조약에서는 훗날에 문제가 될 것을 알 면서도 영토 조항의 일부가 일부러 애매하게 규정됐다. 먼저 일본이 포기 1) 본고 1-4절은 朴 炳 渉, サンフランシスコ 講 和 条 約 と 千 島 竹 島 = 独 島 問 題 (1), 北 東 アジア 文 化 研 究 38 号 (2014)를 개정, 번역했다. 2) 太 田 修 二 つの 講 和 条 約 と 初 期 日 韓 交 渉 における 植 民 地 主 義, 歴 史 としての 日 韓 国 交 正 常 化, 法 政 大 学 出 版 局, 2011, 22쪽. 3) 일본수상 아베 신조( 安 倍 晋 三 )는 2013년 4월 23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침략 의 정의는 학계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정하지 않았다 라고 발언해 일본의 침략 을 의문시했다.

140 獨 島 硏 究 제16호 한 쿠릴제도는 귀속될 국가 및 쿠릴제도의 범위가 명시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과 러시아 양국 간에서 그 해석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양국 간 평화조약의 체결을 가로막고 있다. 다음에 독도(일본명 다케시마 竹 島 )는 초기 초안에서 귀속이 명시됐지만 최종적으로 조약에 아무 것도 기 재되지 않았으며, 제각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구 일본영토의 귀속 문제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선행연구로서 쓰 카모토 다키시( 塚 本 孝 ), 하라 기미에( 原 貴 美 恵 ), 정병준, 이석우 등의 연구 를 들 수 있다. 4) 이들 선행연구의 대부분은 일본 주변에서 문제가 된 섬 들, 쿠릴열도 류큐( 琉 球 )제도 독도 등을 개별적으로 논의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이들 주변 섬들은 모두 포괄적 으로 취급됐다. 이 과정에서는 울릉도, 제주도 등도 포함됐으며, 또한 각 각 섬들은 역사적 경위나 지정학적 위치, 섬의 크기, 전략적 중요도 등이 고려되어 처분이 검토됐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독도문제를 생각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독도는 쿠릴제도나 류큐제도에 비해 섬 크기 가 지극히 작은데다가 경제적인 가치가 거의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연합 군 및 일본에서 결코 다른 섬들과 동등하게 고려된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 로 경시됐다는 점이다. 이런 고려가 선행연구에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된 다. 본고에서는 일본 주변 도서들의 중요도를 고려해 독도 등 일본 주변 섬 들의 귀속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또한 일본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로비활 동 의 실상 등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당연히 제 주도 등도 검토 대상이 된다. 실제로 제주도는 영국의 제1차 초안에서 일 본영토로 규정되었다. 이에 관해 영국은 매우 부정확하고 엉성한 정보에 4) 塚 本 孝, 平 和 条 約 と 竹 島 ( 再 論 ), レファレンス 518 号, 1994.3; 原 貴 美 恵, サンフ ランシスコ 平 和 条 約 の 盲 点, 渓 水 社, 2005; 정병준, 독도 1947, 돌베개, 2010; 이 석우, 일본의 영토분쟁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인하대학교, 2003.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41 기초해 초안을 만들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5) 제주도 등이 조약 작성 과정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검증한다. 또한 일본 주변 도서의 귀속문 제를 통해 독도문제에 대한 함의를 찾는다. 본고에서 영어 Korea 는 일본 및 중국 문헌 6) 에 맞추어 조선 이라고 번 역한다. 2. 연합군 명령 제1호와 SCAPIN 677 1945년 패전국 일본의 영토는 포츠담선언에 따라, 혼슈( 本 州 ), 홋카이도 ( 北 海 道 ), 규슈( 九 州 ), 시코쿠( 四 国 ) 및 연합국이 결정할 여러 작은 섬에 한정된다.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에 연합국최고사령관(SCAP) 은 일본정부에 최초의 각서 SCAPIN 7) -1을 보내고, 이에 첨부한 일반명령 제1호 육군, 해군 을 지키도록 명했다. 일반명령 1항은 일본군은 미국 영 국 중국 소련 호주의 각 지휘관에 무조건항복을 명하는 것이며, 항복 하는 상대방은 지역별로 다음과 같이 지정됐다. 단 아래에서 일본의 부 대 는 일본국의 선임지휘관과 모든 육상, 해상, 항공 및 보조부대 의 약칭 이다. (a) 중국(만주 滿 州 를 제외함), 타이완( 臺 灣 ), 북위 16도 이북의 프랑스령 인도지나에 있는 일본의 부대 는 쟝졔스( 蒋 介 石 ) 원수에 투항해야 한다. 5) 정병준, 앞의 책, 570쪽. 6) 유미림, 우리 사료 속의 독도와 울릉도, 지식산업사, 2013, 325~335쪽. 7) SCAPIN 은 아래 자료에 의하면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Index Number 의 약칭이다. 따라서 표기 SCAPIN 677호 등은 잘못이다. GHQ/SCAP Records Box 757. Sheet No. AG(B)-04519 class No.032. 이 자료의 발 굴에 관해서는 유미림 씨의 교시를 받았음.

142 獨 島 硏 究 제16호 (b) 만주, 북위 38도 이북의 조선, 가라후토( 樺 太 ) 및 쿠릴제도에 있는 일본의 부대 는 소련 극동군 최고사령관에 투항해야 한다. (c) (1) (생략) (2) 보르네오, 영국령 뉴기니, 비스마르크제도 및 솔로몬제도에 있는 일본의 부대 는 호주 육군사령관에 투항해야 한다. (d) 일본국 위임 통치령, 오가사와라( 小 笠 原 )제도 및 태평양제도에 있는 일본의 부대 는 미국함대 최고사령관에 투항해야 한다. (e) 일본국 대본영( 大 本 営 )과 일본본토, 이에 인접한 여러 작은 섬들, 북 위 38도 이남의 조선, 류큐제도 및 필리핀에 있는 일본의 부대 는 미 국 태평양 육군부대 최고사령관에 투항해야 한다. 이 명령에 따라 일본군의 항복이 이루어졌는데, 이 일환으로 우리나라 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통치됐다. 한편 일본본토 및 주변 도서 등은 SCAP에 의해 일본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됐다. 사령관은 맥아더 (Douglas MacArther)이며 연합군 극동위원회(FEC) 지도하에 놓였다. FEC는 미 영 소 중 등 거부권을 가진 4개국에 호주 등이 참가해 11개국으로 1945년 12월에 발족됐다. 8) 위 명령에서 주목되는 것은 (b)의 가라후토(사할린)와 쿠릴제도다. 이 들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얄타비밀협정에 의해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가 하는 댓가의 하나로소련에 양도 혹은 인도된다고 결정된 섬들이다. SCAP 총사령부(GHQ)는 SCAPIN-1을 바탕으로 일본정부에 대해 행정권 분리각 서 SCAPIN 677을 내렸다. 9) 1946년 1월 29일에 수교된 이 각서는 제3조에 서 일본이 청일전쟁(1894년) 이후에 획득한 영토는 물론, 특히 아래 섬들 을 일본의 범위에서 정치상 및 행정상으로 잠정적으로 제외했다. 8) 다른 회원국은 홀란드 뉴질랜드 캐나다 프랑스 필리핀 인도이며, 훗날에 버마 파 키스탄이 참가했다. 9) SCAPIN 677의 제목은 약간의 외곽 지역을 정치상, 행정상으로 일본에서 분리 할 것에 관한 각서. 이는 아래 문헌에 의하면 GHQ 민정국이 작성했다고 한다. W. シーボルト, 日 本 占 領 外 交 の 回 想, 朝 日 新 聞 社, 1966, 217쪽; 정병준, 앞의 책, 228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43 <그림 1> SCAP(연합군최고사령관) 관할 구역, 일본 및 남조선 11) (a) 우쓰료 欝 陵 (울릉)도, 리앙쿠르암(다케시마 竹 島 ), 궬파트(사이슈 濟 州 제주)도. (b) 북위 30도 이남의 류큐(난세이 南 西 )제도(구치노시마 口 之 島 를 포함 함), 이즈( 伊 豆 ), 난포( 南 方 ), 보닌(오가사와라)과 볼케이노(가잔 火

144 獨 島 硏 究 제16호 山, 이오 硫 黄 )군도 및 다이토( 大 東 )군도와 파레체벨라(오키노도리시 마 沖 ノ 鳥 島 ), 마커스(미나미도리시마 南 鳥 島 ), 간지스(나카노도리시 마 中 ノ 鳥 島 ) 10) 등을 포함한 외곽 태평양제도. (c) 쿠릴(치시마)제도, 하보마이( 歯 舞 )군도(스이쇼 水 晶, 유리 勇 留, 아키 유리 秋 勇 留, 시보쓰 志 発, 다라쿠 多 楽 제도), 시코탄( 色 丹 )도. 위에서 (a)는 미국 태평양육군(AFPAC) 관할, (b)중에서 류큐제도는 AFPAC 관할, 나머지 태평양제도는 미국 태평양함대 관할, (c)는 소 련 극동군 관할하에 놓인 섬들이며, 이들은 SCAP이 통치할 수 없는 지역이다. 그런데 (c)에 구나시리( 國 後 ), 에토로후( 択 捉 ) 등의 이름이 없지만, 이들은 쿠릴제도에 포함된다고 해석된다. 여기에 하보마 이 시코탄이 쿠릴제도와 구별해 기술된 것은 중요하다. 연합군명 11) 령 제1호는 쿠릴제도를 소련이 점령할 것을 인정했으나, SCAPIN 677 은 하보마이 시코탄을 쿠릴제도와 구별하고, 일본 영역으로부터 분 리시켰다. 이는 SCAP이 얄타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하 보마이 시코탄에 대해 소련의 점령을 묵인했다고 해석된다. 이 SCAPIN 677을 바탕으로 SCAP의 관할 구역을 지도에 그린 것이 <그 림 1>이다. 이 지도를 SCAPIN 677 부속지도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SCAPIN 677에는 그런 기술이 없는데다가 지도 제작이 2월, 즉 SCAPIN 677 발령 후이기 때문에 그 견해는 마땅치 않는다. <그림 1>에서 TAKE 즉 독 도를 한국 영역으로 넣고 SCAP 관할로 그린 것이 주목된다. 본래 한국 영 역은 AFPAC 관할이며 재조선미국육군총사령부군정청(USAMGIK, 미군정 10) 아래 자료의 주2에 따르면 일본은 나카노토리시마를 1908년에 영토 편입했으나 실재하지 않으므로 1933년에 취소했다. Foreign Office, Japanese Government, Minor Islands Adjacent to Japan Proper Part IV, Minor Islands in the Pacific, Minor Islands in the Japanese Sea, 1947, p.1. 11) 신용하, 獨 島 領 有 權 資 料 의 探 求 제3권, 독도연구보전협회, 2000, 254쪽. 한국어 표기를 추가했음.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45 청으로 약칭)에 의해 통치됐다. 12) 그런데 맥아더가 SCAP과 AFPAC 사령관 을 겸임한 관계상 GHQ 각 부처는 한국에 있어서의 미군정에 관한 특정 문제에 대해 어느 시기까지 맥아더에 조언을 했다. 13) 그 사이에 <그림 1> 이 그려졌으므로 한국 영역이 SCAP 관할처럼 그려졌으나, 엄밀히 말하면 한국은 류큐와 같이 SCAP이 아닌 AFPAC, 1947년 1월 이후는 AFPAC을 개 편한 미국극동군(FECOM) 관할하에 있었다. 한편, 일본본토 등은 연합군 조직상으로는 SCAP 통치하에 있었으나, 미군 조직상은 AFPAC, 훗날에 FECOM 관할하에 있었다. 그 후 GHQ는 태평양함대 관할하에 있었던 이즈제도를 3월 22일에 SCAPIN 841에 의해 일본정부 관할로 했다. 이는 태평양함대가 이즈제도 를 실제로 통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정부의 반환 요청을 받아들인 것 이다. 한편 리앙쿠르암(독도)에 대해서는 일본 선박이 12마일 안에 들어 가거나, 승무원들이 상륙할 것을 SCAPIN 1033에 의해 금지했다. SCAPIN 1033은 일본의 어업 허가 구역을 정한 것이며 맥아더라인 이라고 불리는 데, 12마일의 규제는 1949년 9월에 SCAPIN 2046에 의해 3마일에 개정되었 다. 지도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독도를 한국영토로 보는 인식은 미 국 국무 육군 해군 3부조정위원회(SWNCC) 에서도 인정받았다. 1946년 6월 24일 위원회 기록 구 일본 지배하의 위임통치령 및 그 주변의 여러 소도에 대한 신탁통치 혹은 다른 처리 방법에 관한 정책 (SWNCC 59/1)에 리앙쿠르암(독도)이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14) 조선의 섬들: 카이로선언은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요청하고 있다. 제주 도, 거문도, 다즈레(울릉)도, 리앙쿠르암(다케시마) 및 기타 조선의 앞 12) 太 平 洋 美 國 陸 軍 總 司 令 部 布 告 第 1 號, 美 軍 政 廳 官 報, 원주문화사, 1991, 22쪽. 13) 조언을 한 시기는 天 川 晃 他 編, GHQ 日 本 占 領 史 第 2 巻, 日 本 図 書 センター, 1996, 72 쪽에 따르면 GHQ 민정국은 1947년 2월까지, 기타는 1948년 3월까지라고 한다. 14) 竹 内 猛, 独 島 問 題 固 有 の 領 土 論 の 歴 史 的 検 討 後 編, 私 家 版, 2013, 14쪽; 原 貴 美 恵, 前 掲 書, 2005, 42쪽.

146 獨 島 硏 究 제16호 바다에 있는 섬들은 조선의 일부로 생각되어야 하며, 역사상이나 행정 상으로도 조선의 일부이며 주로 조선인이 살고 있다. 미국 SWNCC 견해는 거의 미국정부의 통일견해라고 해도 무방하므로 미국정부는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한 것이다. SWNCC의 논거는 일본이 제국주의국가로서 영토 팽창을 시작한 청일전쟁(1894년) 당시의 자료에 있을 것이다. 이유는 미국은 1947년 3월의 강화조약 초안에서 볼 수 있듯 이 일본영토를 판단하는 기준을 청일전쟁 이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료로서 일본이나 영국의 수로 당국이 작성한 수로지나 해도가 특 히 중요하다. 일본 수로부는 독도를 조선수로지 (1894)에 리앙코루토열 암 이름으로 후술하는 바와 같이 기재하는 한편으로 일본 혼슈 서북 연 안을 다룬 일본수로지 제4권의 1897년판에는 기재하지 않고, 1907년판 에 처음으로 기재했다. 15) 1907년판은 일본정부가 1905년에 독도를 무주지 명목으로 일본영토로 편입하고 다케시마 라고 명명한 것을 반영한 것이 다. 그 전에는 1877년에 다케시마 마쓰시마( 松 島 )를 일본과 관계없다고 한 태정관 지령에 볼 수 있듯이 마쓰시마(독도)는 일본영토가 아니었 다. 16) 따라서 수로부가 1897년판 일본수로지 에 독도를 기재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1894년판 조선수로지 에 리앙코루토열암 은 이 열암은 서기 1849년에 프랑스 선박 리앙코루토호가 처음으로 이를 발견해 선박 이름을 따라 리앙코루토열암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라고 기재했는데, 이는 영국 수로지 China Pilot를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 LIANCOURT ROCKS 가 일본해 중의 조선 동남 연해의 섬 으로 기술됐다. 17) 영국 수로국도 일본 15) 堀 和 生, 1905 年 日 本 の 竹 島 領 土 編 入, 朝 鮮 史 研 究 会 論 文 集 24 巻, 1987, 106쪽. 16) 위의 논문, 104쪽. 17) China Pilot 4th edition, 1864, p.xi & p.563. 독도는 이 책 제2판(1858)에 처음으로 호넷 이름으로 기재됐으나, 제3판(1861) 이후 1905년 이전에 발간된 다른 판은 제4판의 기술과 거의 같다. 자세한 것은 다음 문헌을 참조. 이진명, 서양 자료로 본 독도, Pour l Analyse du Folklore (Paris), 1998, 51~55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47 수로부도 리앙코루토암(독도)을 한국 연해의 섬으로 인식한 것이다. 게다 가 일본 수로부의 지도 및 해도인데, 잘 알려져 있듯이 수로부는 그 전신 인 수로국이 발간한 지도 朝 鮮 東 海 岸 図 (1876)에서 독도를 러시아 이름 오리브차 및 메네라이초 이름으로 기재한 것을 비롯해, 해도 朝 鮮 全 岸 (1896)에서 리앙코루토암 이름으로 기재했다. 한편으로 수로부는 1905년 이전의 일본지도나 일본해도에는 독도를 기재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보더라도 수로부는 분명히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여러 자료의 인식이 SCAPIN 677이나 SWNCC 59/1에 반영됐다 고 보인다. 3. 일본외무성의 영토 연구와 로비활동 1946년 일본외무성은 연합국의 영토 처분의 개요가 각서 SCAPIN 677에 예시됐다고 보았다. 각서를 받은 2일 후 외무성 정무국은 대일강화조약에 관한 연구 시안을 작성해 연합국의 영토 처분을 다음과 같이 예상했다. 18) (1) 조선은 독립에 앞서 신탁통치가 시행된다. (2) 타이완 펑후( 澎 湖 )도 만주국은 지나( 支 那 ) 에 반환된다. (3) 남가라후토 치시마는 미 영 소 수뇌가 얄타협정에 따라 소련의 영유로 할 것을 합의했다. (4) 류큐 오가 사와라 가잔열도는 미국 병사의 피의 댓가로 얻은 섬으로서 미국이 보유 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고, 미국의 전략기지로 된다. 외무성은 이런 기 본 인식을 가지고 평화조약문제 연구 간사회( 幹 事 会 ) 제1회 연구(1~5월) 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9) (1) SCAPIN 677 중에 있는 아마미오시마( 奄 美 大 島 ) 및 이즈오시마( 伊 豆 大 島 )는 역사지리학적, 민족적으로 일본에 귀 18) 外 務 省, 日 本 外 交 文 書 サンフランシスコ 平 和 条 約 準 備 対 策 ( 準 備 対 策 と 略 す), 2006, 47~48쪽; 정병준, 앞의 책, 315~316쪽. 19) 外 務 省, 前 掲 準 備 対 策 2006, 95~96쪽; 정병준, 앞의 책, 316~317쪽.

148 獨 島 硏 究 제16호 속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과학적 자료에 의해 설득한다. (2) 류큐제도 는 미국의 신탁통치에 반대할 수 없으나, 가능성이 낮은 중국 영토로 하 는 방안에는 반대하고 최악의 경우라도 최종적인 결정은 인민투표로 한 다. (3) 일본은 치시마열도에 관한 얄타협정에 구속될 필요는 없다. 남가 라후토는 귀속의 결정을 인민투표로 하는 방식을 강구한다. (4) 이오도(가 잔열도)는 미국의 신탁통치에 반대할 수 없다. (5) 조선의 독립과 타이완 의 중국으로의 반환은 승인한다. 외무성은 이런 기본 방침을 세우고 더 자세한 연구는 제2차 연구 과제로 하고 조약국이 담당할 것을 결정했다. 그 후 제2차 연구가 진행됐는데, 영토에 관한 성과가 제목 평화조약과 일본영토 라는 보고서라고 생각된다. 20) 이 간단한 보고서는 영토 불확대 를 약속한 대서양헌장이나 카이로선언, 포츠담선언, 일본의 항복문서 등 을 분석하고 미국의 대일 정책을 검토하는 것이며, 개별 영토에 관한 구 체적인 연구는 없다. 개별 영토를 구체적으로 연구한 부처는 조사국 제3 과이며, 성과의 일부는 제7회 외무성기록공개(1982년) 중 대일강화조약 에 관한 본방의 준비 대책 관계, 영토문제(인구, 국적문제를 포함함) 에 밝혀졌다. 이 파일의 목차는 (1) 오가사와라군도 이오열도, (2) 다이토지 마 미나미도리시마 오키노도리시마, (3) 가라후토,, (4) 국적 문제, (5) 인구문제다. 21) 단 는 먹칠의 흔적이며, 이는 치시마 제도 류큐제도 다케시마 등의 제목으로 추측된다. 이런 자료의 작성 경 위에 관해 가와카미 겐조( 川 上 健 三 )는 오키타( 大 来 )와 함께 조사국 제3과 가와카미 겐조가 연구 조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그 초안을 바탕으로 당시의 하기와라( 萩 原 ) 조약국장 아래서 열심히 검토된 후에 Minor Islands Adjacent to Japan Proper 라는 표제로 일련의 영문 자료를 작성 했 다고 한다. 22) 이 영문의 영토조서는 1949년까지 다음 7권이 작성됐다. 23) 20) 外 務 省 外 交 記 録 B 4001-1 対 日 平 和 条 約 関 係 準 備 研 究 関 係 第 6 巻, MF 番 号 B -0008. 21) 外 務 省 外 交 記 録 B 4101-4 対 日 講 和 に 関 する 本 邦 の 準 備 対 策 関 係 一 件 領 土 問 題, MF 番 号 B -0010. 이 파일 표지에는 B.4.1.0.12 라고 쓰고 있다. 22) 川 上 健 三, 連 合 国 の 占 領 及 び 管 理 下 における 外 交, 日 本 外 交 史 第 26 巻, 鹿 島 平 和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49 (1) 치시마, 하보마이, 시코탄 (1946.11) (2) 류큐 및 남서제도 (1947.3) (3) 오가사와라 및 가잔열도 (상동) (4) 태평양 및 일본해의 제소도 (1947.6) (5) 가라후토 (1949.1) (6) 남치시마, 하보마이, 시코탄 (1949.4) (7) 쓰시마( 對 馬 ) (1949.7) 이 중에서 조서(1)~(3)은 아사카이 고이치로( 朝 海 浩 一 郎 )가 주일정치고 문(POLAD) 애치슨(Dean Acheson)에 국무부로 송부해줄 것을 부탁했다. 24) 아사카이는 애치슨과의 제6회 회담(1947.3.12)에서 조서(1)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물었더니, 애치슨은 별로 반응은 없다. 이런 자료는 참고가 된다 라고 대답했다. 미국의 반응이 호의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POLAD가 조서 (1)을 2월 26일에 국무부로 보냈으므로 아직 본격적인 반응이 없었던 것 이다. 본격적인 반응은 제7회 애치슨 아사카이 회담(7.3)에서 밝혀졌다. 이 회담에서 아사카이가 영토조서(2)를 수교했을 때에 애치슨은 이번 서 류는 를 취급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에 관한 최근 일본측 견해에 대해서는 단지 미국뿐만 아니라 기타 각국에서도 강력한 반응(reaction)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서류는 에 관한 사실의 기재 研 究 所, 1973, p.174. Minor Islands Adjacent to Japan Proper 라는 제목을 가진 조 서는 다음 4권이다. Part I, The Kurile Islands, The Habomais And Shikotan, Part II, Ryukyu and other Nansei Islands, Part III, The Bonin islands Group, the Volcano Island Group, Part IV, Minor Islands in the Pacific, Minor Islands in the Japanese Sea.. 23) 外 務 省, 日 本 外 交 文 書 平 和 条 約 の 締 結 に 関 する 調 書 ( 調 書 로 약칭) 第 1 冊, 2002, 676쪽; 西 村 熊 雄, サンフランシスコ 平 和 条 約, 日 本 外 交 史 第 27 巻, 鹿 島 平 和 研 究 所, 1971, 46쪽. 24) 朝 海 의 직함은 終 戦 連 絡 中 央 事 務 局 総 務 部 長. 아래 문헌에 의하면 외무성이 POLAD 에 조서들을 수교한 날짜는 조서(1)은 1947년 1월 28일, 조서(2)는 7월 3일, 조서 (3)은 7월 5일이라고 생각된다. 外 務 省, 初 期 対 日 占 領 政 策 朝 海 浩 一 郎 報 告 書 下 巻, 毎 日 新 聞 社, 1979, 7~8 14~15쪽; 竹 内 猛, 前 掲 書, 40~41쪽.

150 獨 島 硏 究 제16호 로 이해한다 라고 말했다. 25) 이 기록 중에 있는 는 외무성이 발간한 자료집에서 비밀로 한 글자다. 이 를 정병준은 배상 으로 해독했으 나, 26) 마이니치( 每 日 )신문사 昭 和 史 편집실은 영토 라고 해독했다. 27) 애치 슨은 외무성의 영토조서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조서는 일본이 영토 주장 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기재한 것으로 이해하고 조서를 받았던 것이 다. 이틀 후에 POLAD는 조서(2)의 복사 19부와 조서(3)을 복사를 포함해 20부 받았다. 28) 이들을 POLAD는 7월 14일에 국무부로 보냈다. 29) 이 직후 에 애치슨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후임을 시볼드(William J. Sebald)가 맡았다. 독도 울릉도를 포함한 조서(4)는 POLAD가 9월 23일에 원문과 헥 토그라프(hectograph)법에 의한 복사 20부를 국무부 북동아세아국으로 보 냈다. 30) 영토조서는 미국뿐만 아니라 호주에도 수교됐다. 4월 15일 아사카이는 맥매혼 볼(W. MacMahon Ball)과 회담을 가졌을 때 가지고 온 영토문제에 관한 설명 자료를 은밀히 수교했다 고 한다. 31) 이 회담 날짜로 보아 수교 된 조서는 (1)뿐이다. 32) 이때에 이미 조서(2)와 (3)은 완성되고 있었지만 POLAD에 아직 제출되지 않았으므로 호주에도 제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이들 중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는 영토조서는 (1)-(5), 5권이다. 33) 25) 外 務 省, 準 備 対 策, 168쪽. 26) 정병준, 앞의 책, 295쪽. 27) 外 務 省, 初 期 対 日 占 領 政 策 朝 海 浩 一 郎 報 告 書 下 巻, 14~15쪽; 竹 内 猛, 앞의 책, 40~41쪽. 28) 竹 内 猛, 앞의 책, 40~41쪽. 29) Records of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relating to the internal affairs of Japan, 1945-1946( 複 製 는 日 本 国 会 図 書 館, 請 求 記 号 SIJ-3, 릴 번호 6, 코마 번호 539). 30) ibid. 31) 西 村 熊 雄, 앞의 책, 29쪽; 竹 内 猛, 앞의 책, 40쪽. 32) 朝 日 新 聞 (1995.7.12)이 原 貴 美 恵 가 호주 공문서관에서 조서(1)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는데, 이 조서는 아사카이가 수교했다고 보도됐다. 33) Minor Islands Adjacent to Japan Proper, Part I, The Kurile Islands, The Habomais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51 현재 외무성에는 조서(3)과 (4)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34) 영토조서의 성격인데, 원래 일본정부는 강화조약의 여러 조건에 관해 자기 입장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35) 라고 인식하 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외무성은 영토 영유권 주장을 내세울 수 없었으며, 영토조서의 작성 방침을 그 지역이 과연 카이로선언이 말하는 조건에 해 당할지의 여부의 관점에서 그 지역의 발견, 영유 등의 연혁, 자연환경 및 경영 등에 관해 될 수 있는 한 객관적인 형태로 서술 하는 데 두었다. 36) 더욱이 POLAD가 경계심을 가지고 조서(2)~(3)을 받았으므로, 특히 독도를 포함한 조서(4)에서는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으며, 신중히 객관적인 자 료의 작성을 도모했을 것이다. 따라서 영토조서(4)를 가지고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의 로비활동 등을 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독도의 경우 외무성은 객관성을 어기고 리앙쿠르암(독도)을 일 본영토로 귀속시키려는 의도를 영토조서에 감추었다. 리앙쿠르암에 관한 설명은 1페이지 남짓한 짤막한 것이지만, 이 조서는 특기해야 할 일은 다 즈레(울릉도, 주)에는 조선 이름이 있지만, 리앙쿠르암에는 조선 이름이 없으며, 조선에서 작성된 지도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 다 37) 라고 적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리앙쿠르암이 獨 島 라고 표기된 것 은 조선수로지, 38) 지학잡지, 39) 시마네현지 40) 등 일본 자료에도 기 And Shikotan; 原 貴 美 恵, 앞의 책, 123쪽. 34) 외무성에 대해 영문의 영토조서(1)-(4)의 정보 공개를 신청했으니, (1)은 応 答 拒 否, (2)는 開 示, (3) 및 (4)는 不 開 示 ( 不 存 在 ) 라는 회답이 있었다(2010.12.24). 35) 川 上 健 三, 連 合 国 の 占 領 及 び 管 理 下 における 外 交, 171쪽. 36) 위의 책, 174쪽. 37) Minor Islands Adjacent to Japan Proper, Part IV, op. cit. p.9; Sung-hwa Cheong, op. cit., p.39. 38) 水 路 部, 朝 鮮 水 路 誌 第 二 改 版, 1907, 451쪽. 39) 田 中 阿 歌 麻 呂 隠 岐 國 竹 島 に 關 する 地 理 學 上 の 智 識, 地 學 雑 誌 210 號, 1906, 415쪽. 40) 島 根 県 教 育 會, 島 根 縣 誌 島 根 県 教 育 会, 1923, 690쪽; 박병섭, 한말 울릉도 독도 어업 -독도 영유권의 관점에서-, 한국해양수산개발원, 2009, 68~72쪽; 박병섭, 한말의 울릉도 어업과 독도 영유권 문제, 독도연구 8호, 2010, 113.

152 獨 島 硏 究 제16호 록되고 있었다. 41) 또한 리앙쿠르암은 대한제국칙령41호(1900년)에 석도 이름으로 울도군 소속으로 기록됐으며, 한국 고지도에는 애매하지만 우 산도 이름으로 그려져 있었다. 외무성은 이런 사실을 간과 혹은 의도적으 로 무시하고 영토조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리앙쿠르암에 관한 기술은 리 앙쿠르암이 일본 고유영토임을 간략하게 지적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 나, 42) 이는 앞에 쓴 사정을 생각하면 의문이며, 내용도 그렇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외무성은 단지 일본이 타국에 앞서 리앙쿠르암을 잘 알고 일본지 도나 지방 지지에 마쓰시마 이름으로 잘 기록됐다고 쓰고 있으나, 섬의 지배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1904년에 오키 주민들이 강치 잡이를 시작해 다음 해에 시마네현이 오키지청( 隱 岐 支 廳 )의 관할하로 했다고만 적었다. 즉 오래 전부터 일본이 리앙쿠르암을 지배했다고는 쓰지 않았다. 그 이유 는 저자 가와카미 겐조가 오키 도민이 17세기에 독도에서 강치 잡이를 했 던 역사를 몰랐으며, 독도에 대해 억지라도 고유영토 로 주장할만한 근거 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와카미가 17세기의 독도 어업을 알게 된 시기는 1950년대다. 한편, 울릉도를 조서(4)에 넣은 것에 대해 정병준은 독도뿐만 아니라 울릉도까지 일본의 부속 소도로 제시 했다고 보았으나, 43) 장박진은 울릉 도의 기술 자체는 영유 정당화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라고 보았다. 44) 그렇다면 한국 영토에 추호도 의문이 없는 울릉도를 외무성은 왜 영토조서에 넣었을까 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이유는 조서에 첨부된 지 도에 있다고 생각된다. 외무성은 일본에는 리앙쿠르암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 나가쿠보 세키스이( 長 久 保 赤 水 ) 일본여지노정전도 41) 朴 炳 渉, 明 治 時 代 の 欝 陵 島 漁 業 と 竹 島 = 独 島 問 題 (2), 北 東 アジア 文 化 研 究 32 号, 2010, 48~54쪽. 42) 장박진, 대일평화조약 형성과정에서 일본 정부의 영토 인식과 대응 분석, 영 토해양연구 1호, 2011, 40쪽. 43) 정병준, 앞의 책, 339쪽. 44) 장박진, 앞의 논문, 55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53 <그림 2> 일본외무성의 북방4도 설명도 50) ( 日 本 輿 地 路 程 全 図 ) (1775)의 부분도를 첨부했는데, 이 지도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체인 것처럼 그려졌다. 따라서 조서에 독도를 넣고 울릉도를 넣 지 않는다면 독도에 대한 영유 야욕이 드러나고 자료의 객관성이 문제될 수 있으며, 외무성의 방침에 어긋난다. 외무성 총무국장 오카자키 가쓰오 ( 岡 崎 勝 男 )가 강조한 것은 우리 측의 의견은 될 수 있는 한 포함시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그 사실에 관해서는 일일이 근거를 명확 하게 하고 학문적으로도 향기로운 것으로 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45) 이런 학문적인 향기를 담보로 외무성은 울릉도를 조서에 넣었다고 생각된다. 45) 川 上 健 三, 連 合 国 の 占 領 及 び 管 理 下 における 外 交, 174쪽.

154 獨 島 硏 究 제16호 일본외무성의 의도적인 작위는 영토조서(1)에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외 무성은 북방4도(구나시리 에토로후 하보마이 시코탄)에 관해 조서(1) 에서 <그림 2> 46) 와 같이 쿠릴제도 전체를 북쿠릴과 구나시리 에토로후 로 구성된 남쿠릴에 이분하는 한편, 하보마이제도를 포함한 네무로노구 니( 根 室 國 ) 및 시코탄을 흑색으로 그려, 시코탄이 마침 네무로노구니와 일체인 것처럼 그렸다. 이 자료를 발굴한 하라 기미에는 외무성 스스로 구나시리 에토로후는 치시마열도의 일부라고 인식한 것을 증명하는 자 료가 발견된 이상 이 문제(치시마의 범위, 주)에 관한 의논의 여지는 기본 적으로 소멸됐다 라고 주장하고, 북방4도 중 구나시리 에토로후만이 쿠 릴제도에 속한다고 보았다. 47) 그러나 하라는 시코탄이 치시마노구니( 千 島 國 ) 소속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48) 시코탄의 행정구획은 1869년에 에조지( 蝦 夷 地 )를 홋카이도로 개칭하고 11개국을 정했을 때에 네무로노구니 하나사키( 花 咲 )군 소속으로 되고, 1882년에 홋카이도에 현( 縣 )이 신설됐을 때에 네무로( 根 室 )현 네무로노구 니 소속으로 됐다. 그러나 1885년에는 네무로현 치시마노구니에 편입됐 다. 49) 즉 시코탄은 구나시리 에토로후와 같은 치시마노구니에 속하며 하보마이와는 다른 나라로 됐다. 시코탄의 편입은 북치시마에 사는 아니 누족을 시코탄에 강제로 1884년에 이주시켰던 일에 따른 조처다. 50) 그 후 도 시코탄은 구나시리 에토로후와 관계가 깊으며, 1930년경에는 섬의 생 명선이라 할 수 있는 해상교통로는 네무로로의 정기항로와 구나시리 에 토로후로의 임시항로의 두 노선이 열리고 있었다. 51) 이처럼 시코탄은 치 46) 原 貴 美 恵, 앞의 책, 123쪽. 한국어 표기를 추가했음. 47) 原 貴 美 恵, 앞의 책, 123쪽. 48) 原 貴 美 恵, 앞의 책, 123쪽. 49) 1885 年 1 月 6 日 太 政 官 布 告 第 1 号 根 室 縣 下 根 室 國 花 咲 郡 ノ 内 シコタン 島 自 今 千 島 國 ヘ 編 入 色 丹 郡 ト 称 ス. 50) 毎 日 新 聞 社, 対 日 平 和 条 約, 1952, 96쪽. 51) 寺 島 敏 治, 昭 和 十 年 代 前 半 期 における 南 千 島 三 島 六 か 村 の 村 実 態, 史 流 25 号, 1983, 41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55 시마노구니의 하나로 정착됐으므로 시코탄은 구나시리 에토로후와 함께 자주 남치시마 3도 라고 불렸다. 52) 이런 경위를 고려하면 외무성이 시코 탄을 구나시리 에토로후와 같은 그룹에 놓지 않고 하보마이와 같은 그룹 에 놓은 <그림 2>를 그린 것은 의도적인 작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외 무성은 얄타협정에서 쿠릴제도가 소련에 인도된다고 결정됐던 것을 고려 해, 시코탄을 일본에 남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본래는 남쿠릴에 속한 시코탄을 네무로노구니와 일체화하고 홋카이도 본도의 일부로 그린 지도 를 작성한 것 같다. 1950년에 들어가서 미국에서는 국무부와 군부와의 대립이 완화되어 대 일강화의 기운이 높아졌다. 9월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이 FEC 회 원국과 대일강화조약에 관한 교섭을 시작할 것을 발표하자 일본외무성은 그 대책인 A작업 을 시작했다. 이는 일본의 견해를 미국에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영토 관계에서는 앞의 영토조서(1), (7), (8)을 인용 문헌으로 하고, 치시마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중요한 섬인지 설명하고, 일찍이 러시 아가 일본영토라고 인정한 남치시마까지도 얄타협정 때문에 포기하는 것 의 부당성을 적었다. 또한 하보마이 시코탄은 치시마열도의 일부가 아님 은 미 영 양국의 수로지에서도 분명하며, 53) 연합국도 SCAPIN 677에서 두 섬을 분리하고 있으며, 본토의 일부이며 홋카이도( 北 海 道 ) 본토에서 지 척에 있는 이들 하보마이 시코탄을 박탈당하는 것은 민족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다 고 기록했다. 54) 이때도 시코탄이 구나시리 등과 같은 치시마 노구니에 속한다는 사실을 숨겼다. 다음에 류큐 등 남서제도에 관해서는 영토조서(2)를 인용 문헌으로 하 고, 이 제도 출신자들은 일본 각지에 다수 거주하고, 서로 교통하고 있으 며, 이 제도와 일본 각지는 일체화되고 있다 고 강조하고, 55) 신탁통치에 52) 상동; 南 千 島 の 一 万 余 名 根 室 の 収 容 所 で 血 の 叫 び 四 年 間, 読 売 新 聞 1949.12.15. 53) 영국 수로지 China Pilot 4th edition(1864)에는 하보마이가 없고 시코탄은 쿠릴 제도 안에 기재되고 있다. 54) 外 務 省, 日 本 外 交 文 書 平 和 条 約 の 締 結 に 関 する 調 書 第 1 冊, 2002, 652~653쪽.

156 獨 島 硏 究 제16호 반대해 일본이 여전히 보유할 의사를 강조했다. 또한 오가사와라제도 이 오제도(가잔열도)에 관해서는 조서(3)을 인용 문헌으로 하고, 일본에 귀속 해야 할 정당성을 설명해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에 배려해 군사상의 점에 관해서는 우리나라 자신의 안전보장의 관점에서도 미국 의 요망에 응해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이다 라는 견해를 밝혔다. 외무성은 이런 내용도 포함한 전체적인 대미진술서(안)를 1950년 10월에 작성했으 나, 수상 요시다 시게루( 吉 田 茂 )로부터 내용이 경세가( 経 世 家 )적 관점이 빠졌다고 엄한 비판을 받아, 56) 진술서는 미국에 제출되지 않았다. 그런데 진술서(안)에는 독도에 관한 기술이 없었다. 이 이유로 정병준 은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던 가능성을 고려했 으나, 57) 아마 외무성은 독도를 거의 무시했다고 생각된다. 외무성이 거론 하지 않았던 섬은 독도 외에도 조서(4)에 기술된 모든 섬, 즉 다이토제 도 미나미도리시마 오키노도리시마 울릉도 등이다. 이런 섬들은 일본 인의 관심도 섬의 중요성도 낮으며, 게다가 일본영토로 될 가망도 낮았 다. 따라서 외무성은 독도뿐만 아니라 조서(4)에 기록된 섬들을 거의 무시 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요시다의 비판에서 미루어 볼 때 대미교섭의 방침 을 확립하지 못했던 이 시기에 외무성은 영토에 관한 로비활동 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4. 미국의 강화조약 초안 대전 후 일본을 간접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미국은 1947년 1월경 국무 부에 대일조약작업단을 만들어 강화조약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당초 미 55) 위의 책, 654~655쪽. 56) 西 村 熊 雄, 앞의 책, 81쪽. 57) 정병준, 앞의 책, 321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57 국은 전통적인 강화조약 형식에 따라 일본의 전쟁책임을 명확히 하고 영 토의 일부를 할양 혹은 신탁통치할 조약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미 소 냉 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트루먼독트린(1947년)을 발표해 공산주의 봉쇄정책 을 채택하게 됐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일본을 징벌하기보다는 일본을 경 제적으로 발전시키고 미국진영에 끌어들여 공산주의의 방패로 삼을 방향 으로 방침을 전환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일조약 초안은 징벌적인 성격 으로부터 차차 관대한 것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 결과 1949년 11월 초안 에서는 일본이 짊어야 할 배상은 일본의 경제 발전을 막지 않도록 배려하 고, 일본의 침략이나 전쟁책임을 문책한 조항이 사라지고, 대신에 일본이 세계 평화 및 안보에 공헌하도록 규정했다. 동시에 강화 방식은 모든 참 전국이 참가할 전면강화에 집착하지 않고,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한 다수 강화 방식을 유력시했다. 한편 일본의 구 영토 처분인데 미국은 영토를 본래 나라에 귀속시키기 보다 얄타협정이나 미국의 국익, 소련에 대한 전략 등을 중시해 조약 초 안을 작성했다. 이 과정에서 SCAPIN 677에서 잠정적으로 일본 영역 밖으 로 된 섬들의 귀속에 대한 판단은 1951년 말까지 <표 1>과 같이 움직였다. 58) <표 1> 주요 미국 초안에서의 일본 주변 도서의 처분 59) 섬 이름 Liancourt 독도 (다케시마) Volcano, Bonin 가잔 오가사와라 Southern Kuriles 구나시리 에토로후 Lesser Kuriles 하보마이 시코탄 Ryukyu 류큐 (남서제도) 1947 03.19 일본 외 일본 외 일본 외 일본? 59) 일본 외 08.05 일본 일본 일본 58) <표 1>은 다음 문헌을 참고로 작성했다. 塚 本 孝, 米 国 務 省 の 対 日 平 和 条 約 草 案 と 北 方 領 土 問 題, レファレンス 482 号, 1991; 塚 本 孝, 前 掲 平 和 条 約 と 竹 島 ( 再 論 ) ; 原 貴 美 恵, 前 掲 書 ; 朴 炳 渉, サンフランシスコ 講 和 条 約 と 千 島 竹 島 = 独 島 問 題, 北 東 アジア 文 化 研 究 (1) 38 号, 2014. 59) 쓰카모토 다카시는 아래 논문에서 하보마이 시코탄을 일본 영역 외로 보았으나,

158 獨 島 硏 究 제16호 11.07 일본 외 1948 01.08 검토 중 검토 중 검토 중 1949 09.07 일본 일본 일본 외 11.02 일본 외 일본 외 12.29 일본 일본 1951 08.07 무 무 <표 1>에서 미군이 상당한 희생을 치르고 점령한 오가사와라 등 남방 제도는 미국의 전략 및 태평양의 안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며, 조약 초 안에서는 시종일관 일본 영역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미군이 막대한 희생 을 치르고 점령한 류큐제도는 국무부가 일시적으로 일본 영역으로 하려 고 했으나, 군부의 강한 반대를 받아 거의 일본 영역 외로 규정되었다. 초 안에서 귀속이 자주 변한 지역이 북방4도다. 국무부는 처음에는 쿠릴열도 를 소련에 인도한다는 얄타협정에 따라 구나시리 에토로후 두 섬을 일본 영역 외로 했으나, 때로는 소련에 대한 전략이나 역사적 경위, 일본의 이 익 등을 고려해 일본 영역으로 한다든지 자주 초안이 변했다. 게다가 하 보마이 시코탄의 경우는 두 섬이 쿠릴열도에 포함되느냐의 여부 문제가 있어 더욱 복잡한 경과를 가졌다. 이런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국무부는 법률고문관보 스노(Conrad E. Snow)는 피어리(Robert A. Fearey)가 작성한 북방4도에 관한 각서를 바탕 으로 법적인 검토를 했다. 이 결과를 보고서 남쿠릴제도와 시코탄제도 (1949.11.25)에서 (1) 구나시리 에토로후는 소련 영토로 된 일은 없지만, 1855년의 로일통호( 魯 日 通 好 )조약 및 1875년의 쿠릴 사할린 교환조약 등 쓰카모토가 아래 논문에서 인용한 원문은 일본은 소련에 대해 캄차카와 홋카이 도 사이에 있는 쿠릴열도를 완전한 주권과 함께 할양한다 이며, 이 쿠릴열도에 하보마이 시코탄을 포함할지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SCAPIN 677에서 쿠릴제도 와 하보마이 시코탄을 구별하고 있었으므로 두 섬이 쿠릴에 포함되지 않을 가능 성이 크다. 塚 本 孝, 米 国 務 省 の 対 日 平 和 条 約 草 案 と 北 方 領 土 問 題, 114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59 을 분석하면 구나시리 에토로후는 쿠릴열도에 포함된다, (2) 하보마이제 도는 정치적으로 치시마노구니가 아니라 네무로노구니에 속하고, 시코탄 은 편의상 남쿠릴제도에 편입됐으나, 두 섬은 쿠릴제도에 포함된다고는 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60) 스노는 시코탄이 치시마노구니에 속한다 는 것을 알면서도 쿠릴제도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는 정치적, 경제적, 행정적인 측면보다 지리학적 측면을 중시한 것으로 되는데, 이는 북방4도를 일본영토로 하기를 원했던 피어리 및 국무부의 분위기에 배려 했을지도 모른다. 국무부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12월 29일자 초안에서 하보마이 시코탄을 일본영토로, 구나시리 에토로후를 소련에 할양한다 고 규정했다. 다음은 독도문제인데, 미국의 조약 초안에서 독도는 1949년 11월까지 한국영토로 생각되고 왔다. 그러나 12월 29일 초안에서 독도는 갑자기 일 본영토로 변경됐다. 이렇게 급변한 이유는 잘 알려져 있듯이 POLAD 시볼 드 의견서의 영향 때문이다. 시볼드는 11월 초안을 보고 이 섬(리앙쿠르 암)에 대한 일본의 영토 주장은 오래되고 유효한 것으로 보이며, 이를 조 선 앞 바다에 위치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어렵다. 또한 안보적으로 고려할 때, 이 섬에 기상 및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것은 미국에도 이익이 결부 된 문제가 된다 라는 의견서를 국무부에 보냈다. 61) 시볼드가 일본의 영토 주장을 유효하다고 판단한 것은 그가 외무성에서 받은 영토조서(4)의 영 향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주목될 것은 시볼드가 영토의 귀속을 판단할 때 에 미국의 이익이나 안보문제를 고려했다는 사실이다. 시볼드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간단히 본다. 1949년 6월 미군은 한국에서 군사고문단을 제외하고 철수했다. 미국은 일찍이 케넌(George F. Kennan)에 의하면 아세아 대륙 부분은 미국에 있 어서 사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가능한 한 빨 60) United States,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FRUS) 1949, Vlo.7, p.905. 61) FRUS 1949, Vol.7, p.900; 塚 本 孝, 平 和 条 約 と 竹 島 ( 再 論 ), 41~42쪽.

160 獨 島 硏 究 제16호 리 철퇴해야 한다 라고 인식하고, 62) 한 미 상호방위원조협정은 맺었으나 상호방위조약은 맺지 않았다. 훗날에는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 일 본, 필리핀을 이는 라인으로 정한 앳치슨 라인 이 발표되고, 한국이 방위 선에서 제외됐다. 7월, 맥아더는 일본은 적화 동진의 방벽 이라고 말했는 데, 10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는 한편으로 한반도에서는 내전의 발발이 우려되고, 전토가 공산화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시국에 있어서 시볼드는 미국이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독도에 기상 및 레이더 기지를 설 치해 군사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으로 안정된 일본영토로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독도의 군사 이용은 이미 전례가 있 으며, 1947년에 SCAPIN 1778에 의해 미국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됐 다. 이 지정은 일본에 연락됐지만 한국에는 연락되지 않아, 다음 해에 제1 차 독도폭격사건을 일으켜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 사건을 중시한 한국과 도정부의 요청을 받아 폭격 연습은 중단됐지만, 후년에도 1951년에 SCAPIN 2160에 의해 다시 미군기의 폭격연습장으로 지정되는 등 독도는 군 사적인 가치가 있었다. 국무부는 일본과의 평화조약 초안에 대한 논평 63) 에 따르면 독도의 전략적 가치 등을 고려한 시볼드 제언을 받아들여서 초 안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삼았던 것이다. 이때에 국무부도 일본외무성 의 영토조서(4)를 참고로 한 듯하며 논평 에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다즈 레와는 달리, 다케시마에는 조선 이름이 없으며 조선이 한 번도 소유권을 주장한 바 없다 라고 기록했다. 국무부는 일본외무성 정보의 진위를 가리 지 않고, 또한 한국의 견해를 물을 것도 없이 초안에서 독도를 일본영토 로 바꾸었다. 이는 전략적인 안보문제를 중시한 결과 추가 조사의 필요성 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국무부가 진행 중인 조약 초안의 작성은 군부의 강한 반대로 난 62) 宮 里 政 玄, アメリカ 合 衆 国 政 府 と 対 日 講 和, サンフランシスコ 講 和,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86, 117쪽. 63) 塚 本 孝, 平 和 条 約 と 竹 島 ( 再 論 ), 44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61 항했다. 국무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1949.10) 등 국제정세를 감안해 동 아세아에서의 자유주의 진영의 강화를 위해 조기 강화를 이루고, 일본을 반공의 전선에 세울 것을 도모했다. 그러나 통합참모본부나 국방부 등 군 부는 일본에 있는 미군 기지를 제약 없이 사용하는 의도에서 강화는 시기 상조라고 반대하고 국무부의 조약 미치광이에 통렬한 비판 을 퍼부었 다. 64) 또한 소련문제에 대해서도 국무부는 소련의 조약 참가는 강화조약 의 성립을 어렵게 한다고 생각했으나, 군부는 의외로 일본의 안보에 있어 서 소련의 참가는 필요하다고 주장해 날카롭게 대립했다. 또한 국무부는 동맹국 사이에서도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1950.1)한 영국과 중국문제에 서 심각한 의견의 대립이 있었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4월에 감히 야당인 공화당원 덜레스(John F. Dulles)를 국무부 고문으로 임명해 대일강화조약 을 담당시켰다. 6월 덜레스는 일본을 방문해 GHQ 맥아더와 회담을 가졌 는데, 이 직후에 군부의 존슨, 브라드레 등도 일본을 방문해 맥아더와 회 담을 가졌다. 이런 회담을 통해 맥아더는 국무부와 군부의 대립을 완화시 켰다. 이런 노력 끝에 양자는 안보문제에 관해 대략 합의를 보았다. 그러 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정세는 크게 변했다. 한국을 방위선에서 제외한 미국은 결국은 유엔군의 중심이 되어 공산주의 진영과 싸우게 됐다. 이 결과 군부는 소련과의 협조를 포기하고, 소련의 조약 참가라는 조건을 철 회했다. 65) 한편 국무부는 일본의 재군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국무부 와 군부 사이의 이견 차가 좁게 되고, 강화조약 초안의 작성이 동력을 얻 게 됐다. 8월 7일 덜레스는 각국의 다양한 의견을 조정하기 쉽도록 간략한 초안 을 만들었다. 초안은 머리말에서 일본의 전쟁책임을 문책하지 않고, 오히 려 일본이 세계 평화나 안보에 기여할 것을 적었다. 이는 일본의 재군비 64) 宮 里 政 玄, 앞의 논문, 125쪽. 65) 위의 논문, 128쪽.

162 獨 島 硏 究 제16호 를 암시적으로 촉구한 것이다. 다음에 초안은 일본 주변 도서에 관해 일 본이 타이완, 펑후도,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쿠릴열도에 관해 미 영 중 소의 결정을 따를 것이나, 류큐 오가사와라 제도에 관해서는 유 엔에 의한 신탁통치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고 적었다. 66) 이 초안은 너무 간단했기 때문에 국무부 내부에서도 여러 의문이 생겼다. 8월 9일 피어리 는 영토문제에 관해 앨리슨(John M. Allison)에 보낸 각서에서 초안 6조에 볼케이노 마커스 파레체벨라 로사리오 등이 들어가지 않을지, 혹은 분 쟁을 일으킬 수 있는 쓰시마 리앙쿠르(독도)의 소속은 명백할지 등 의문 을 지적했다. 67) 이 섬들 중에서 미국의 관심이 깊은 남방제도는 훗날에 그 처분이 분명히 됐지만 쓰시마 독도는 그 후의 초안에도 기술되지 않 았다. 미국은 이 초안을 공표하는 대신에 초안의 기본 방침을 대일강화 7원 칙 으로 요약했다. 68) 7원칙 1항은 조약의 조인국을 제안되고 합의될 기 초 위에 평화를 정착시킬 의사를 가진 일본과 교전했던 일부 혹은 모든 국가들 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소련을 배제할 가능성을 드러낸 것이다. 6 항은 당사국은 예외를 제외하고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규정해, 일본에 관 대한 초안으로 할 방침을 분명히 했다. 3항은 영토문제인데, 일본국은 (a)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며, (b)류큐와 보닌( 小 笠 原 )에 대해 미국을 시정권자 로 하는 유엔의 신탁통치에 동의하며, (c)타이완 펑후도 남사할린 쿠 릴의 지위에 대한 영 소 미 중의 장래 결정을 수용하고, 조약이 발효 한 후 1년 이내에 아무런 결정이 없는 경우, 유엔총회가 결정한다고 규정 했다. 9월 트루먼 대통령이 대일강화조약 교섭의 개시를 국무부에 지시하자 덜레스는 7원칙 을 바탕으로 9월 하순부터 제5회 유엔총회 개회 중에 극 66) FRUS 1950, Vol.6, pp.1267~1268; 정병준, 앞의 책, 506쪽. 67) 각서의 영인은 이석우, 대일강화조약자료집, 동북아역사재단, 2006, 170쪽. 68) FRUS 1950, Vol.6, pp.1296~1297; 毎 日 新 聞 社, 앞의 책, 302~305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63 동위원회 회원국들과 개별적으로 교섭을 시작했다. 피어리의 각서(날짜 불명)에 따르면 호주정부는 7원칙 안의 영토문제에 관해 파라셀( 西 沙 諸 島 ) 볼케이노 마커스 이즈제도 등 구 일본영토의 처분에 관해 보다 정 확한 정보 를 요청했다. 69) 이에 대해 미국은 세토내해( 瀬 戸 内 海 ), 오키 ( 隠 岐 )열도, 사도( 佐 渡 ), 오쿠지리( 奥 尻 ), 레분( 礼 文 ), 리시리( 利 尻 ), 쓰시 마, 다케시마( 竹 島, 독도), 고토( 五 島 )열도, 류큐제도의 최북부, 이즈제도, 등은 모두 다 오랫동안 일본 것으로 인식되고 왔으며, 일본이 보유할 것 으로 생각된다. 류큐제도 중부 및 남부, 로사리오를 포함한 보닌, 볼케이 노 제도, 파레체벨라, 마커스는 미국을 시정권자로 하는 유엔 신탁통치하 에 놓일 것이다 라고 회답했다. 이때에 미국은 독도를 일본영토로 할 생 각이었다. 한편, 소련은 7원칙 에 반발했다. 소련은 영토문제에 관해 미국의 신탁 통치는 카이로선언 및 포츠담선언에 규정이 없는데, 그 근거는 무엇이냐 라고 미국을 힐문했다. 미국은 근거는 유엔헌장 77조, 점령지에 대한 신 탁통치제도 및 포츠담선언에 있는 우리들이 결정하는 제소도 에 있다고 회답했다. 70) 그러나, 미국 스스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이 근거는 약하며, 신탁통치의 방침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전략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5. 미 일 협의와 미국의 최종 초안 미국은 강화조약의 최종 초안을 결정하는데 앞서 일본의 의견을 듣기 위해 1951년 1월 덜레스 사절단이 도쿄( 東 京 )를 방문했다. 일본은 이에 대 비해 교섭 방침을 세우는 D작업 을 시작했다. 영토에 관한 교섭 방침은 69) FRUS 1950, Vol.6, p.1328; 塚 本 孝, 平 和 条 約 と 竹 島 ( 再 論 ), 45쪽. 70) 1950 年 11 月 20 日 付 ソ 連 覚 書 に 対 する 米 国 回 答 (1950.12.27), 앞의 책, 毎 日 新 聞 社, 306쪽.

164 獨 島 硏 究 제16호 일본은 미국의 어떠한 군사적 요구에도 응할 것이나 류큐 오가사와라제 도의 신탁통치는 재고를 바라며, 신탁통치를 피할 수 없을 경우는 일본도 공동 시정권자로 되고 싶다는 것 등이었다. 71) 이 요망에 대해 덜레스는 요시다와의 회담에서 국민감정은 잘 이해하지만, 항복조항에서 이미 결 정됐던 일이니, 이를 꺼내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마무리된 일로 생각하 시기를 바란다 라고 발언해 일본의 요망을 거부했다. 72) 미국은 초안 작성 에 있어서 일본 측 희망을 충분히 존중할 의향 을 가지고 있었으나, 73) 영 토문제에 관한한 교섭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강경한 자세였다. 이에 수상 요시다 및 외무성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74) 회담에서 일본의 재 군비를 요구하는 덜레스에 대해 완강한 태도를 보였던 요시다이지만, 영 토문제에 있어서는 반론은커녕, 며칠 후에 영토문제를 거론한 것은 내부 사정으로 말한 것이며 타의가 없음을 양해하시오. 75) 라고 덜레스뿐만 아 니라 맥아더에까지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요시다 발언이 계기가 되어 일본은 영토문제에 관해 미국에 무슨 요망을 한다든지 로비활동을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케 됐다. 한편, 미국은 일본에 배려해 류큐 남방제도의 신탁통치 대상을 북위 30도로부터 북위 29도 이남으로 변경할 것을 통고했다. 이로 인해 도카라 ( 吐 噶 喇 )열도는 분단이 해소되고 아울러 신탁통치를 면했다. 2월 8일에 양국은 결정 사항을 적은 가( 仮 ) 각서에 머리글자로 서명했다. 76) 이에 포 함되지 않았던 쿠릴제도문제에 관해서는 3월 14일에 미국에서 가 각서 에 관한 미국 측 수정 제안 이 있었으며, 소련이 대일강화조약에 서명할 71) 外 務 省, 調 書 第 2 冊, 149~150쪽; 정병준, 앞의 책, 624쪽. 72) 外 務 省, 調 書 第 2 冊, 158쪽. 73) 外 務 省, 調 書 第 1 冊, 771쪽. 74) 外 務 省, 調 書 第 2 冊, 38쪽. 75) 外 務 省, 日 本 外 交 文 書 サンフランシスコ 平 和 条 約 対 米 交 渉 ( 対 米 交 渉 로 약칭) 外 務 省, 2007, 255쪽. 76) 外 務 省, 調 書 第 2 冊, 268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65 것을 전제로 소련에 남사할린의 반환 및 쿠릴제도의 인도가 제안됐다. 일 본은 이것도 그냥 받아들였다. 77) 한편, 독도에 관해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과의 협의를 참고로 삼아 공식 초안을 3월 23일에 확정하 고 78) 관계 각국에 송부했다. 이때에 미국은 한국, 중화민국을 조약에 참 가시킬 것으로 예정하고 있었으므로 두 나라에도 초안을 송부했다. 또한 소련이 참가하지 않을 경우를 고려해, 남사할린과 쿠릴제도에 관한 영토 조항은 소련이 조약 당사자가 되면 유효하다고 19조에 규정했다. 한편 초 안에서 일찍이 피어리가 귀속을 염려한 섬들 가운데 미국의 국익이나 전 략에 직결되는 볼케이노 등은 조문에 기술됐지만, 관심도가 낮은 독도는 여전히 간과 혹은 무시됐다. 독도 외에도 다이토제도, 남지나해에 있는 파라셀(Paracel, 西 沙 )제도와 스프래틀리(Spratly, 南 沙 )제도 등도 간과 혹 은 무시됐다. 한국에 관련된 영토 조항은 일본국은 조선 타이완 펑후 제도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다 라고만 기술됐다. 6. 영연방국가들의 동향과 영국의 초안 일찍이 팍스 브리타니카 의 영광에 빛난 영국은 대전 후는 독일문제나 중동문제, 남 동남아문제 등의 처리에 바빴다. 이 때문에 당초 영국은 외 상 베빈(Ernest Bevin)은 대일강화조약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여론 의 관심도 낮았다. 79) 한편으로 영연방국가들 중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수 차례 받아 많은 피해를 입은 호주는 스스로를 태평양의 주요국 으로 위 77) 위의 책, 310~313쪽. 78) FRUS 1951, Vol.6, p.945; 塚 本 孝, 平 和 条 約 と 竹 島 ( 再 論 ), 45쪽. 79) 木 畑 洋 一, 対 日 講 和 とイギリスのアジア 政 策, サンフランシスコ 講 和,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86, 166쪽.

166 獨 島 硏 究 제16호 치시키고, 80) 태평양 안보문제, 일본문제, 한국문제 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호주는 연합군명령 제1호에 따라 영국령 뉴기니 등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던 것을 비롯해, 일본에는 점령군 병사를 파견하는 등 적극적으로 안보문제에서 활약했다. 또한 한국문제에 관해서는 미 영 중 소 4개국이 한국을 신탁통치로 한다는 모스크바회의 결정에 대 해 호주는 영국 대신 신탁통치 시정자가 되기를 영국과 합의한 일도 있었 다. 81) 호주를 비롯한 영연방국가들은 극동위원회의 반수 가까이를 차지 했으므로 대일강화조약문제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1947년 8월 영연방국가들은 호주의 강한 요청으로 캔버라에서 회의를 개최해 대일강화조약을 토론했다. 회의 마지막의 공동 커뮤니티에서 일 본의 재침략에 대한 보장의 필요성이 강조됐는데, 이 관점에서 영연방국 가들은 미국에 의한 류큐 보닌( 小 笠 原 )제도에 대한 전략적 신탁통치에 찬성했다. 82) 이런 판단에 볼 수 있듯이 영연방국가들은 구 일본영토 처분 에 있어서 전략적인 판단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이런 판단은 한국영토에 도 적용됐다. 캔버라회의에서는 제주도에 관해 조선의 불확실한 장차에 대한 관점에서 퀠파트(제주도, 주)는 인구가 조선인이라 할지라도 일본 통치하에 남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라는 의견이 있었다. 83) 이런 전략적인 관점은 다음 영연방회의, 즉 콜롬보회의(1950.1)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콜 롬보회의는 대일강화조약 작업위원회를 설치해 조약을 구체적으로 검토 할 것을 결정했다. 이 위원회의 검토 결과는 영국의 조약 초안에 반영됐 으며, 미국에도 보고서가 5월 17일에 송부됐다. 1950년 9월 영국은 미국에서 7원칙 을 받았던 것을 계기로 정부 안에 극동위원회를 설치해 조약 초안의 검토를 시작하고, 12월에는 초안의 총 80) 菊 池 努, オーストラリアの 対 日 講 和 外 交, サンフランシスコ 講 和,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86, 193쪽. 81) FRUS 1947, Vol.6, p.543. 82) FRUS 1947, Vol.6, p.533; 原 貴 美 恵, 앞의 책, 50쪽. 83) 상동.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67 설이나 청구권, 안보 등에 관한 주요 3문서를 작성했다. 84) 이들은 다음 해 에 런던에서 열린 영연방 수뇌회의에서 토론됐다. 영국외무성 극동국은 이때의 토론 내용도 고려해 전통적인 수법에 따른 제1차 초안을 2월 28일 에 작성했다.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해서는 군국주의 정권하의 일본이 독 일 및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의 일원이 되어 침략전쟁을 수행하고, 그리하 여 모든 연합국 및 협력국과 기타 유엔과 전쟁상태를 도발하였으며, 전쟁 에 대한 책임을 지니게 되었으므로 (이하 생략) 라고 문책하고 징벌적인 배상 조항을 규정했다. 한편 영토처분인데 일본 주변의 섬들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85) 6. 일본의 주권은 다음 선 (원문대로)으로 구획된 지역 내에 위치한 모든 도서, 인접 소도 및 암초에 대해 존속한다. 이 선에는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스이쇼, 유리, 아키지리, 시 보쓰, 오키 및 다라쿠제도, 하보마이제도, 구치노시마, 우쓰료(울릉) 도, 미앙쿠르암(다케시마), 퀠파트(시치 혹은 제주)도 및 시코탄을 포 함한다. 위에 묘사된 선은 현재 조약에 첨부된 지도(부록 1)에 좌표로 기입된 다. 선에 대해 지도와 문서상 기술 간에 차이가 있는 경우는 문서에 따른다. 7. 일본은 조선에 대한 모든 주권, 권리, 권원, 이권을 포기하고, (이하 생략) 8. 일본은 소련에 쿠릴제도와 일본이 예전에 지배했던 남사할린 및 하 보마이군도를 양도하고 부록에 쓰게 될 이들 영토에 관한 협정에 동 의한다. 9. (생략) 10. 일본은 류큐, 보닌, 볼케이노제도, 마커스에 대한 주권, 권리, 권원, 이권을 포기한다. 84) 細 谷 千 博, サンフランシスコ 講 和 への 道, 中 央 公 論 社, 1984, 97쪽. 85) British Foreign Office, Collection 371(F.O. 371로 약칭), 1951, Vol. 92532, FJ1022/97; 정병준, 앞의 책, 568~569쪽.

168 獨 島 硏 究 제16호 11. 일본은 이 조약이 발효하면 류큐, 보닌에 관해 미국이 유엔 신탁통 치 협정을 협의하려는 의도에 유의한다. 위에서 밑줄은 필자가 그었는데, 아키지리는 아키유리( 秋 勇 里 ), 미앙쿠 르암은 리앙쿠르암, 시치는 사이슈( 済 州 )의 잘못이다. 이 초안에서 제주 도 울릉도 독도가 일본영토로 규정된 것이 주목된다. 이에 관해 정병준 은 이 초안이 매우 부정확하고 엉성한 정보에 기초해 만들어졌음 이라고 주장했으나, 86) 캔버라회의 등 일련의 영연방회의 동향으로 미루어 볼 때 제주도 울릉도 독도를 일본영토로 한다는 규정은 영국의 전략적인 판 단이다. 이와 비슷한 전략적 판단에서 남방제도 및 류큐제도는 일본이 모 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조항(10)에 규정했다. 또한 (8)에서 일본은 쿠릴제 도 남사할린을 소련에 양도한다고 규정했는데 이는 얄타협정을 중시한 것이다. 단 (8)에서 하보마이군도를 소련에 양도한다는 조문은 (6)에서 스 이쇼( 水 晶 ), 유리( 勇 里 ), 아키지리, 시보쓰( 志 発 ), 다라쿠( 多 楽 )제도, 하보 마이제도를 일본영토로 한다는 조항과 모순된다. 이 잘못을 알았는지 (6) 에서 하보마이제도 및 시코탄에 누군가 나중에 하선을 그었다. 아마 (6)에 하보마이제도를 기입한 것을 잘못으로 인정한 듯하다. 또한 스이쇼, 유리, 아키유리, 시보쓰, 다라쿠제도는 하보마이제도에 포함되므로 조약 작성자 가 하보마이 제도의 범위를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이런 잘못을 수정한 것이 영국 외무성에서 작성한 2차 초안이다. 87) 이 번에 1차 초안에서 하보마이군도를 소련에 양도한다는 조항(8)은 변함이 없었다. 한편 (6)에서 로 되고 있었던 부분은 구체적으로 경도 위도 로 표시된 지점을 연결하는 선이 설명되고, 대신 선 안으로 기술된 섬들 의 이름이 삭제됐다. 이 결과 제주도 울릉도 독도 하보마이제도 시코 탄이 일본 영역에서 분리됐다. 이 결과에 관해 쓰카모토는 1차 초안에서 86) 정병준, 앞의 책, 570쪽. 87) F.O. 371, 1951, Vol. 92535, FJ1022/171; 정병준, 앞의 책, 572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69 섬 이름 <표 2> 1951년에 영국 초안에 기술된 도서의 귀속 Liancourt (Take is.) Volcano, Bonin Southern Kuriles 독도 남방제도 구나시리 에토로후 Lesser Kuriles 하보마이 시코탄 Ryukyu 류큐제도 1 次 2.28 일본 일본 외 일본 외 일본 외? 일본 외 2 次 3. 일본 외 일본 외 3 次 4.7 일본 독도가 일본영토로 된 것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2차 초안에서 독도 가 일본영토에서 제외된 것은 SCAPIN 677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라고 추 정했다. 88) 하지만 영국이 2차 초안 때에 한해 SCAPIN 677의 영향을 받았 다고 하는 근거는 없다. 여태까지 맥아더의 독재적인 행동에 반감을 가지 고 있었던 영국은 89) 초안의 영토조항을 작성할 때에 GHQ의 SCAPIN 문서 보다 자국의 수로지 등을 더 중시했을 것이다. 앞에 쓴 것처럼 영국은 수 로지에서 독도를 조선 연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하보마이 시코탄 이 초안에서 일본영토 밖으로 됐는데, 이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충분한 지식이 없는 채 결정된 것이다. 아마 수로지에서 쿠릴제도 에 구나시리 에토로후 시코탄 등이 들어가 있었으므로 90) 이에 따랐던 것 같다. 이 외 에 남방제도 류큐제도는 1차 초안과 같이 일본은 주권 등을 포기한다고 규정해 미국 초안보다 일본에 가혹했다. 영국외무성은 내각 각 부처 간의 조정을 마치고 4월 7일에 3차(최종) 초안을 작성했다. 이 2주일 전에 영국은 미국의 공식 초안을 받았지만 이 를 전혀 참고로 하지 않았다. 최종 초안은 전쟁책임을 문책하는 조항은 2 차 초안과 똑같다. 영토조항은 2차 초안의 경위도 및 선의 방향을 다소 변 88) 塚 本 孝, 平 和 条 約 と 竹 島 ( 再 論 ), 46쪽. 89) 細 谷 千 博, 앞의 책, 14쪽. 90) CHINA PILOT, op. cit, pp.546~547.

170 獨 島 硏 究 제16호 경해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91) 일본의 주권은 북위 30도에서 북서방향으로 대략 북위 33도 동경 128도 까지, 이어 제주도와 후쿠에지마( 福 江 島 ) 사이를 북진하여, 북동쪽으로 조선과 대마도 사이를 지나, 이 방향으로 계속해서 오키열도를 남동쪽 에 다케시마를 북서쪽에 두고 진행하여 혼슈 해안을 따라 선회하며, 이 어 북쪽으로 레분토의 가장자리를 지나, (중략) 구나시리를 제외하고 동 쪽에 선회하고, 동경 147도 5분에 있는 시코탄을 포함해 남서쪽 방향으 로 해안을 따라 남방군도로 향하고, 북위 29도 50분에 있는 소후암( 孀 婦 岩 )이 들어가도록 남쪽으로 선회하고, 혼슈 해안을 향하여 북서쪽으로 급선회하고, (중략) 야쿠시마( 屋 久 島 )를 포함해 구치노시마 및 북위 30 도 이남의 류큐제도를 제외하는 선으로 구획된 지역 내에 위치한 모든 도서, 인접도서 및 암초에 대해 존속한다. 위에 묘사된 선은 현재 조약에 첨부된 지도에 좌표로 기입되어 있다. 선에 대해 지도와 문서상 기술 간에 차이가 있는 경우, 문서에 따른다. 부속지도는 미국 공문서관에서 발견됐는데, 영국 공문서관에는 없는 듯하다. 92) 이 지도를 처음으로 공개한 정병준은 영토문제를 다룬 조항은 2차 초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보고 2차 초안의 부속지도와 동일한 지도가 최종 초안에도 사용됐다고 보았다. 93) 그러나 하보마이 시코탄은 최종 초안에서는 일본영토로 되고 있지만, 2차 초안에서는 선을 북위 43 도 25분에 있는 스이쇼지마와 홋카이도 사이의 고요마이( 珸 瑤 瑁 )해협을 지나고 선을 그어, 스이쇼지마 등 하보마이 제도를 일본영토 외로 했으 므로 최종 초안의 지도는 2차 초안의 지도와는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최종 초안에서는 대강 북위 30도 이남의 남서제도 남방제도 및 독도 91) F.O. 371, 1951, Vol. 92538, FJ1022/222; 정병준, 앞의 책, 574쪽. 92) 塚 本 孝, 平 和 条 約 と 竹 島 ( 再 論 ), 55쪽(주 38); 지도의 영인은 정병준, 앞의 책, 554 쪽. 이석우는 앞의 대일강화조약자료집 51쪽에서 같은 지도를 미국 초안 (1947.3.20)에 첨부된 지도로 보았으나, 근거는 없다. 93) 정병준, 앞의 책, 574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71 구나시리 시코탄 등이 일본영토 밖으로 됐다. 단 시코탄에 관해서는 이 번에도 간단한 보고서 94) 를 바탕으로 결정했다. 이 섬에 관한 본격적인 조 사는 주일 영국대표부에 의해 5월 21일에 최초로 이루어졌다. 대표부는 쿠릴열도의 역사나 하보마이 시코탄이 쿠릴열도에 들어갈지 등을 상세 히 조사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95) 이에 따르면 행정적으로 하보마이마을 이 있는 하나사기군은 네무로노구니에 속하지만, 시코탄마을이 있는 시 코탄군은 구나시리군 에토로후군 우룻푸군 등과 함께 치시마노구니에 속한다는 것을 밝혔다. 단 대표부는 시코탄이 얄타협정이 말하는 쿠릴열 도에 들어갈지의 여부 및 시코탄을 일본영토 밖으로 해야 할지 등의 문제 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영국은 최종 초안을 공식 초안으로 삼아 영연방국가들과 미국에 제시 했다. 그러나 일본 및 한국 등에는 제시하지 않았다. 7. 일본의 영국 초안에 대한 대응 및 독도 인식 1951년 4월 GHQ 맥아더가 갑자기 해임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일 본의 동요를 막기 위해 덜레스 일행이 일본을 방문해 17일부터 2차 협의 를 시작했다. 미국은 일주일 후에 워싱턴에서 영국과 협의를 예정하고 있 었다. 이에 대비해 미국은 영국의 공식 초안을 일본에 비밀리에 보여주고 의견을 구했다. 96) 이때에 미국정부는 가장 신뢰하고 있는 영국의 신의를 깰 정도로 일본에 친화적으로 되고 있었다. 일본외무성은 영국 초안에 대 한 견해를 정리하고, 외무차관 이구치 사다오( 井 口 貞 夫 )가 시볼드에 영 94) 영국외무성 조사국 밀워드(R. S. Milward)보고서(1950.10.27)의 영인은, F.O. 371, 1950, Vol. 83825, FJ10114/2. 95) F.O. 371, 1951, Vol.92551, FJ1022/452. 96) 外 務 省, 対 米 交 渉, 2007, 374쪽; 정병준, 앞의 책, 645쪽.

172 獨 島 硏 究 제16호 국의 평화조약안에 대한 우리 측 의견 을 제출했다. 이 견해서는 영국 초 안은 일본국민에 깊은 실망감을 안겨 준다고 혐오감을 나타내는 한편으 로 관대한 미국 초안을 선호해 미국 초안의 실현에 노력해 주시기를 진심 으로 희망한다고 적었다. 97) 영국 초안의 영토 조항에 대해서는 시코탄이 일본 영역에 속하는 것을 명시한 점은 환영한다 라고만 쓰고 독도를 일본 영역 밖으로 한 점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음 날 조약국장 니시 무라는 피어리와 회담을 가지고 영국 초안에 대해 일본정부의 견해를 구 두로 전했는데 영토 조항(제1조)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98) 제1조 영국 초안과 같이 경위도에 의한 상세한 규정 따위는 일본국민에 대해 영토의 상실감을 강하게 인상시키므로 감정상 좋지 않다. 수상은 부속 지도를 첨부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국민감정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 해 반대한다. 제1조는 일반적으로 미국 초안을 선호한다. 남서제도에 관해서도 영국 초안의 30도에 대해 미국 초안이 29도를 채용하고 있으므로 물론 미국 초안을 선호한다. 영국 초안에서 시코탄을 일본영토로 남을 것을 명기 한 것은 환영하며, 시코탄을 말했던 바에 장차 분의를 피하기 위해 하보 마이가 일본영토임을 명시하기 바란다. 이때에 일본정부는 영국 초안 1조 및 부속지도에서 독도가 일본영토 밖 으로 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는 독도에 관한 영국 초안을 일본이 묵인했다고 해석된다. 이 배경에는 일본국민의 독도에 대 한 의식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독도는 류큐나 치시마에 비해 중요도가 극도로 낮았다. 류큐 즉 오키나와( 沖 縄 県 )현은 1947년에는 59만 명이 살고 있었으므로 류큐의 중요도는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치시마는 근해가 세 계 3대 어장 의 하나로 인식될 만큼 수산자원이 풍부하며, 99) 더구나 소련 97) 外 務 省, 調 書 2, 2002, 626쪽; 정병준, 앞의 책, 647~648쪽. 98) 外 務 省, 対 米 交 渉, 397쪽; 정병준, 앞의 책, 650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73 의 북방4도 점령 탓으로 고향을 쫓겨난 남치시마의 1만여 명이 네무로의 수용소에서 피의 외침을 4년간 올리고 있었다. 100) 이 보도가 말하는 남 치시마 는 북방4도를 가리킨다. 이런 사정을 반영해, 중의원( 衆 議 院 )에서 1951년 3월에 하보마이제도 반환 간청에 관한 결의 가 채택됐다. 이런 섬 들에 반해 무인도인 독도의 중요도는 비교도 못할 만큼 낮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독도에서는 유일의 허가 어업인 강치 잡이가 오키도민에 의해 근근이 이루어지고 1930년대에는 매년 수십 마리를 잡았으나, 그것조차 1941년을 마지막으로 어업이 두절됐다. 101) 그런 섬에 대해 일본국민의 관 심이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섬들에 대한 관심도를 구체적으로 숫자로 본다. 외무성의 영토조 서에 기술된 일본 주변의 섬들이 영토문제로서 일본국회에서 논의된 건 수를 국회 회의록 검색 시스템 102) 에서 검색해 본다. 일본이 패전한 1945 년 8월부터 강화조약 조인까지 검색된 건수는 울릉도 가 전무, 다케시마 (독도) 가 2건, 다이토지마( 大 東 島 ) 가 7건, 미나미도리시마( 南 鳥 島 ) 오키 노도리시마( 沖 ノ 鳥 島 ) 가 9건이었는데, 치시마( 千 島 ) 는 약 230건, 오키나 와( 沖 縄 ) 류큐( 琉 球 ) 는 약 220건이었다. 울릉도 는 논외이지만 다케시마 의 2건은 너무나 적으며, 일본인의 관심은 치시마 류큐에 집중되고 있었 다. 게다가 국회에서의 논의 내용을 보면 일본인의 독도에 대한 인식이 명백히 드러난다. 많은 국회의원들은 SCAPIN에서 일본 영역 밖으로 된 일본 고유의 영토 를 수복하도록 정부는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발언 했는데, 고유의 영토 중에 남가라후토 를 넣어도 독도 를 넣지 않았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치바 사부로( 千 葉 三 郎 )는 치시마 오가사와라 류 큐는 역사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 103) 니시무라 에 99) 참의원( 参 議 院 ) 본회의(1948.7.4)에서의 니와 고로( 丹 羽 五 郎 ) 발언. 100) 読 売 新 聞 1949.12.15. 101) 朴 炳 渉, 竹 島 = 独 島 漁 業 の 歴 史 と 誤 解, 北 東 アジア 文 化 研 究 33 号, 2011, 23쪽. 102) http://kokkai.ndl.go.jp/. 103) 衆 議 院 本 会 議, 1951.5.10.

174 獨 島 硏 究 제16호 이이치( 西 村 栄 一 )는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인 치시마 남가라후토 오키 나와 및 오가사와라, 104) 고다이라 다다시( 小 平 忠 )는 고유의 영토인 남가 라후토 치시마 혹은 류큐 오가사와라, 105) 미우라 가즈오( 三 浦 一 雄 )는 우리나라의 민족적 고유영토인 남가라후토 치시마 하보마이 시코탄 등의 반환, 오가사와라군도 아마미오시마( 奄 美 大 島 ) 및 오키나와의 완전 주권의 회복 106) 이라고 발언해, 아무도 고유영토 중에 독도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처럼 일본에서 거의 다케시마 는 일본 고유의 영토 라고 생각 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독도 외에도 영토조서(4)에서 거론된 다이토지 마, 미나미토리시나, 오키노토리시마 등 모든 섬들은 거의 무시되고, 이들 을 고유영토 라고 주장한 자가 없었다. 이 섬들은 크기가 매우 작은데다 가, 당시는 거의 경제적인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관심을 모으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정부도 한국정부에 대한 일본정부견해(1) 107) 및 일본정부견해 (2) 108) 등에서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 라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일본정 부가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 라고 주장하게 된 시기는 1956년이며, 109) 그 이전에는 일본 전체가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 104) 参 議 院 平 和 条 約 及 び 日 米 安 全 保 障 条 約 特 別 委 員 会, 1951.11.26. 105) 衆 議 院 予 算 委 員 会, 1953.7.3. 106) 衆 議 院 本 会 議, 1953.6.17. 107) Japanese Government s Views Concerning Takeshima (1953.7.13), 외무부, 独 島 問 題 概 論 1954, pp.107~114(한국어), Annex pp.26~33(영어). 일문은 外 務 省 情 報 文 化 局, 記 事 資 料 竹 島 に 関 する 日 本 政 府 の 見 解 1953.7.14. 108) Views of the Japanese Government in Refutation of the Position Taken by the Korean Government in the Note Verbale of the Korean Mission in Japan, September 9, 1953, Concerning Territory over Takeshima (1954.2.10). 일문은 海 外 調 査 月 報 4-11, 1954.11. 109)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 重 光 葵 )가 중의원 본회의(1956.12.3)에서 다케시마가 일 본 고유의 영토임은 이미 역사상 분명한 일 이라고 발언한 것이 고유영토 론 의 시작이다. 현대송, 일본 국회에서의 독도논의에 대한 연구, 한국해양수산 개발원, 2007, 43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75 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그 당시 정치가의 논리는 일본 고유의 영토는 기 어이 주권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이었으므로, 고유의 영토라는 인식이 거 의 없는 독도 등에 대해서는 주권 회복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 은 왜 독도에 대해 일본 고유의 영토 라는 인식이 없었을까? 이유는 다른 섬들과 비교하면 뚜렷하다. 다른 고유영토 들은 유인도의 경우는 적어도 수 세기에 걸쳐 일본인 혹은 일본인에 동화된 아이누족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옛날에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제도의 경우는 1730년경 오가사와 라 사다토( 小 笠 原 貞 任 )의 영유 사기사건으로 일본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 고, 섬 이름이 오가사와라지마라고 명명됐다. 게다가 이 섬은 1785년에는 하야시 시헤이( 林 子 平 ) 삼국통란도설( 三 国 通 覧 図 説 ) 부속지도 三 國 接 壌 圖 에 일본영토로 그려졌다. 이 지도를 통해 일본뿐 만 아니라 프랑스 등에도 일본영토로 알려졌다. 이 지도 덕분에 일본은 19세기 중엽에 외국 과의 영유권 논쟁에 이겨, 여러 외국으로부터 일본영토로 인정받았다. 이 처럼 오가사와라지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 라고 불릴 만한 요소가 있었다. 이에 반해 독도는 1877년 태정관( 太 政 官 )지령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영토라고 생각되고 왔으므로 고유영토의 인식이 생길 리가 없었다. 이 때 문에 지리학자 다부치 도모히코( 田 淵 友 彦 )조차 양코도 이름으로 한국신 지리( 韓 国 新 地 理 ) 에 기술했으며, 독도가 1905년에 일본영토로 편입된 다 케시마 라는 인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강화조약 조인까지 독도를 일본영토로 혹은 시마네 현 소속으로 그린 관찬 일본전국지도는 1장도 없었다. 110) 시마네현 다케 시마문제연구회 후나수기 리키노부( 舩 杉 力 修 )의 면밀한 조사에 의하면 시마네현 혹은 오키도청이 제작한 지방지도 몇 장에 독도가 일본영토(내 지 內 地 )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111) 그러나 시마네현이 제작한 지도에서 110) 朴 炳 渉, 明 治 政 府 の 竹 島 = 独 島 認 識, 北 東 アジア 文 化 研 究 28 号, 2008, 41~43쪽. 111) 舩 杉 力 修, 絵 図 地 図 からみる 竹 島 (Ⅱ), 竹 島 問 題 に 関 する 調 査 研 究 ; 最 終 報 告 書, 島 根 県 竹 島 問 題 研 究 会, 2007, 160쪽.

176 獨 島 硏 究 제16호 독도를 그리지 않았던 지도도 많다. 112) 한편 후나수기에 의하면 정부기관 에서는 육군참모본부 육지측량부 동아여지도( 東 亜 輿 地 図 ) 시리즈의 자 방지도 마쓰에( 松 江 ) (1909)에 다케시마가 시마네현 오키에 소속한 것을 드러내는 기재 가 있는 것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후나수기가 거론한 육지측량부조차 1936년에는 육지측량부 발행지도 구역일람도 113) 에서 다케시마 를 조선 구역에 넣었던 것이다. 관찬 지도 외에도 다케시마 는 조선 소속이라는 이해가 일반적이며, 시바 가즈모리( 芝 葛 盛 ) 일본역사지 도, 114) 후지타 아키라 중등 일본역사지도 115) 등 많은 지도가 다케시마 를 조선 소속으로 다루었다. 다케시마 를 일본영토(내지)로 그린 지도는 후나수기에 따르면 겨우 야마가미 만지로( 山 上 万 次 郎 ) 최근 통합 제국지 도 116) 가 있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본인이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 토 라고 인식하기는커녕 일본영토(내지)로 인식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 다. 이런 인식이 반영됐는지 한일문제를 잘 아는 의원이 국회에서 강화조 약에 의해 독도는 일본에서 분리될 것이라는 전망을 말했다. 후쿠오카( 福 岡 )현에서 선출된 단 이노( 団 伊 能 )는 참의원 외무위원회(1951.2.15)에서 조약에 의해 독도가 어디에 귀속되느냐 라는 것에 대해서도 대단한 의문 이 있다. 이는 일본에서 분리된다고 할지라도 이는 어느 나라에 귀속될 지, 단 하나의 이도이므로 이런 문제도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112) 이상태, 일본 고지도가 증명하는 독도 영유권, 독도연구 15호, 2013, 87~93쪽. 113) 영인은 신용하, 독도, 보배로운 한국영토, 지식산업사, 1996, 178쪽; 愼 鏞 廈, 独 島 ( 竹 島 ), インター 出 版, 1997, 189쪽. 114) 芝 葛 盛, 日 本 歴 史 地 図 ( 明 治 書 院 )의 초판은 1922년이며, 이를 개정한 新 編 日 本 歴 史 地 図 1931년판은 文 部 省 檢 定 済 교과서로 됐다. 半 月 城 通 信, 竹 島 ( 独 島 ) と 固 有 領 土 の 認 識 No.62, 1999.7.25, http://www.han.org/a/half-moon/hm062.html. 115) 藤 田 明, 中 等 日 本 歴 史 地 図, 宝 文 館, 1912. 116) 山 上 万 次 郎, 最 近 統 合 帝 国 地 図 ( 文 部 省 検 定 済 ), 大 日 本 図 書, 1915; 舩 杉 力 修, 竹 島 の 日 本 地 図 についての 韓 国 側 報 道 に 対 する 反 論 (2), 島 嶼 研 究 第 3 巻 2 号, 2014, 116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77 발언했다. 단 발언의 핵심은 북방4도를 일본에 남기게 하고, 일본에서 분 리되는 류큐제도 남서제도는 북위 30도가 아니라 27도 30분을 경계로 해 야 한다는 것이며, 류큐제도 및 독도가 강화조약에 있어서 일본에서 분 리된다 는 것을 당연시한 것이다. 강화조약 조인까지 일본국회에서 다케시마 에 관한 발언이 2건 있었다 고 앞에 썼는데, 그 중 하나가 단 이노의 위 발언이며, 나머지 발언은 시 마네현에서 선출된 야마모토 도시나가( 山 本 利 寿 )의 발언이다. 야마모토 는 중의원 외무위원회(1951.2.6)에서 아마미오시마를 포함하고 있는 사쓰 난( 薩 南 )제도 혹은 치시마에 가까운 하보마이 시코탄, 이런 것이 단지 위 도의 관계나 기타에 의해 점령군 행정하에 놓여있다. 시마네현의 다케시 마 같은 것도 그런 것입니다 라고 발언해, 독도에 대해 그릇된 견해를 말 했다. 독도는 점령군의 행정하에 놓인 것이 아니라 독립된 한국의 행정하 에 놓였던 것이다. 야마모토 발언의 취지는 만일 치시마열도나 류큐열도 등 큰 곳 이 일본에서 분리될 경우에도 아마미오시마나 하보마이 시코탄 등은 주민을 위해서도 일본영토로 반환돼야 하며, 정부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케시마 는 말한 김에 나온 것뿐이며, 독도 영유권에 관 해 말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중요도가 낮은 독도에 대해서는 정계에서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자가 거의 없었으며, 관심도 매우 낮았다. 독도에 대한 관심도는 언론계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3대 신문인 아사히 ( 朝 日 ) 마이니치( 毎 日 ) 요미우리( 読 売 )신문 등에서 조약 조인까지 독도 에 관한 기사는 거의 찾을 수 없다. 겨우 아사히신문이 조약 체결을 위한 사절단이 출발한 다음날에 다케시마는 일본영토 라는 작은 기사를 실었 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이런 일본인의 관심도가 외무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독도는 외무성 평화조약의 체결에 관한 조서 117) 전 8책에 일체 기술되지 않았다. 117) 번각판은 外 務 省, 日 本 外 交 文 書 平 和 条 約 の 締 結 に 関 する 調 書 全 5 冊, 2002.

178 獨 島 硏 究 제16호 8. 영 미 협의와 공동초안 미국과 영국은 대일강화조약을 책정하기 위해 빈번히 회담을 가졌다. 1951년 2월 덜레스는 미 일 협의를 위해 도교로 갔을 때 주일 영국대표 개스코인(Alvary Gascoigne)과 회담을 가졌다. 3월 20일에는 미국의 앨리 슨(John M Allison)이 런던을 방문하고 영국과 회담을 가졌다. 양국의 교섭 에서 주목되는 영토문제는 쿠릴제도문제다. 영국은 3월 12일에 미국으로 보낸 각서에서 남사할린과 쿠릴제도는 얄타협정에 의해 소련에 할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18) 이에 대해 미국은 소련이 강화조약의 당사자가 된다 는 조건하에 동의했다. 단 쿠릴제도의 범위는 소련과 일본 사이의 조약에 서 결정한다든지 국제사법재판소의 재결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119) 이 주장은 중대하다. 종래의 강화조약에서는 영토문제는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엄밀히 결정되는 것이 통례였으나, 이 원칙을 스스로 깬 것이다. 영 미 양국은 이런 교섭을 하는 동안에 각각 독자적인 초안을 완성시 켰다. 각 초안은 조약문의 길이나 법적인 엄밀함 등이 너무나 대조적이었 을 뿐만 아니라 전쟁책임, 전쟁범죄인, 배상, 청구권, 중국의 대표권문제 등 중요사항에서 견해차가 너무 심했다. 영국 외상 이덴(Anthony Eden)은 미국 초안을 크레이지(crazy)라고 비난할 정도이며, 120) 양국의 초안을 통 합하고 공동 초안을 작성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로 보였다. 덜레스 도 필요하다면 영국을 배제하는 것도 고려했을 정도다. 121) 그러나 양국은 각각 자국의 속셈 혹은 사명감에서 공동 초안의 작성에 들어갔다. 4월 25 일부터의 워싱턴회의에서는 영국 초안에 있었던 일본의 전쟁책임을 문책 하는 조항은 삭제되고, 전문( 前 文 )은 거의 미국 초안대로 됐다. 영토 조항 118) FRUS 1951, Vol.6, Part 1, p.910. 119) ibid, p.922; 細 谷 千 博, 앞의 책, 211쪽. 120) 外 務 省, 対 米 交 渉, 440쪽; 장박진, 앞의 논문, 76쪽. 121) 정병준, 앞의 책, 524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79 은 영국 초안이 제시한 경위도로 일본 영역을 엄밀히 정하는 방식은 포기 됐다. 이 이유에 대해 미국은 훗날 뉴질랜드정부에 일본 주위로 연속선 을 그어 일본을 울타리로 감싸는 것처럼 보이는 심리적 불이익 을 지적하 고, 또한 하보마이문제를 거론하고 설명했다. 122) 심리적 불이익은 일본의 주장을 대변한 것이며, 최대의 이유는 하보마이문제다. 초안에서 경위도 를 지정하거나 부속지도를 첨부한다면 하보마이 시코탄이 쿠릴제도 안 에 들어갈지의 여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스노는 두 섬이 역사적으로 쿠릴제도의 일부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이를 초안에 명기 한다면 소련의 반발이 불가피하다. 이 때문에 미국은 소련이 하보마이 시코탄을 점령하고 있으므로 일본으로의 반환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 것이 현실적 123) 이라고 제안했다. 영국도 이에 동의했는데, 영 미 양국은 훗날에 영토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일본의 영토 범위를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했다. 이 결과 일본의 범위를 경위도로 명시하지 않고 지도도 첨부하지 않게 됐는데, 대신에 영국은 새 제안을 했다. 미국 측의 기록 4월 25~27일 회 의에서 미국과 영국에 의해 명시된 입장의 점검 목록 에 의하면, 영국은 일본과 조선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도서들을 특정한 명시에 의해 처분해 야만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미국 초안 3조의 조선 다음에 (제주도를 포함한) 이라는 구절을 삽입하는 방식일 수 있다 라고 한다. 124) 또한 이 회담에서 영국은 류큐의 범위를 북위 29도 이남으로 한다는 미국의 제안 을 받아들였다. 한편, 영국 기록을 보면 제1-3회 영 미회담 회의록에 제주도 에 관한 기사는 없고 27일에 열린 제4회 영 미회담은 회의록 자체가 보이지 않는 다. 아마 이때에 논의된 것 같다. 또한 제5-6회 회의록에도 제주도 의 기 122) FRUS 1951, Vol.6, Part 1, p.1060~1061; 塚 本 孝, 平 和 条 約 と 竹 島 ( 再 論 ), 47쪽. 123) FRUS 1951, Vol.6, Part 1, p.1114. 124) US NARA/694.001/4-2751, 영인은 이석우, 대일강화조약자료집, 211쪽.

180 獨 島 硏 究 제16호 술은 없으나, 제7회(5월 2일) 회의록에 양국 대표단은 일본이 주권을 포 기할 영역을 지정하는 것이 낫다고 합의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초안 3조 에 3도,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넣을 필요가 있다 라고 기록했다. 125) 이처럼 한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하는 섬들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졌음 에도 불구하고 독도는 간과되고 말았다. 이때에 특정된 3도인데, 제주도 는 호주가 일본영토로 규정하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영국은 이에 더해 울 릉도도 일본영토로 규정하는 제1차 초안을 작성한 일이 있었으므로 그런 논의를 끝내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거문도는 일찍이 영국 이 포트 해밀턴이라고 명명해 제2의 홍콩 을 위해 1885년부터 2년 가까 이 점거한 일이 있었던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126) 또한 미국에서는 앞에 쓴 것처럼 SWNCC 59/1에서 한국영토로 판단된 섬이었다. 이처럼 거문도 는 영 미 양국에 잘 알려진 섬이며, 한 일간에 위치한 대표적인 섬으로 꼽힐 수 있었기 때문에 특정됐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SWNCC뿐만 아니라 SCAPIN 677에도 기재된 리앙쿠르암(독도)은 거론되지 않았다. 영 미 회담에는 예전에 덜레스 초안에 리앙쿠르암이 누락된 것을 지적한 피어리가 매번 참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도 는 누락되고 말았다. 그 후의 영 미 회담에서도 독도는 거론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이유로 생각되는 것은 독도는 제주도에 비하면 작은 겨자씨 같은 존재이므로 간과 혹은 무시된 것이다. 피어리는 영 미 회담 일주일 전인 4월 21일에 일본외무성과 회담을 가지고 영국 초안에 관해 일본정부 의 견해를 구했는데, 이때에 독도는 거론되지 않았으므로 독도의 존재를 간과한 듯하다. 영 미 양국은 서로 간에 견해차가 심한 중요사항을 보류하고 영 미 공동 초안을 5월 3일에 작성했다. 127) 이 보류 사항들을 해결하고자 덜레 125) F.O. 371, 1951, Vol.92547, FJ1022/376; 塚 本 孝, 平 和 条 約 と 竹 島 ( 再 論 ), 47쪽. 126) 中 村 均, 韓 国 巨 文 島 にっぽん 村, 中 公 新 書, 1994, 51쪽. 127) FRUS 1951, Vol.6, Part 1, p.1024; 塚 本 孝, 平 和 条 約 と 竹 島 ( 再 論 ), 46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81 스 일행은 6월 4일에 런던을 방문하고 영국과 여러 난제를 논의했다. 양 국은 중요한 중국대표문제에서는 중화민국도 중화인민공화국도 조약 조 인 대상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동시에 한국도 배제했다. 영토관계에서는 일본이 포기할 타이완에 관해서는 귀속될 국가를 명시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에서도 강화조약의 원칙을 깬 것이다. 그런데 런던회의에서는 이미 합의된 제주도문제가 다시 거론됐다. 6월 5일 영국 외무차관보 데닝(E. Dening)은 조선의 일부로서 일본이 포기하 기로 된 제주도는 군사적인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제주도는 일본에 아주 가깝고, 또한 조선은 공산주의국가가 될지도 모른다 라고 발언했다. 128) 이는 한국전쟁의 전황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1951년 1월에 공산군에 의 해 다시 점거된 서울을 유엔군이 3월에 수복했지만, 4월에는 유엔군사령 관 맥아더가 해임되는 등 군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던 와중이다. 영국 제안에 대해 미국 대령 뱁콕(S. Babcock)은 조선 전체가 공산주의국가로 된다면 전략적 상황은 상당히 악화되지만 그 중에 제주 도가 한국의 일부인지 아닌지는 군사적으로 큰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해 제주도를 일본영토로 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 129) 이때에 덜레 스는 이 문제는 앞으로 소위원회에서 검토할 것을 제안하고 결론을 미루 었다. 덜레스는 영국의 제안에 일리가 있다고 보았을까? 그렇다면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한국전쟁의 전망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지금까지 영국에서 많은 양보를 얻었으므로 사 소한 문제에서는 양보할 속셈이었는지 모른다. 덜레스는 영국과의 협의 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세부조항에서 어느 정도는 양보할 것을 각오하 고 있었다. 하여간 이때에 제주도의 운명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결 국은 제주도를 일본영토로 한다는 영국의 제안은 승인되지 않아, 제주도 는 한국영토로 남았다. 128) F.O. 371, 1951, Vol.92554, FJ1022/518; 原 貴 美 恵, 앞의 책, 61쪽. 129) F.O. 371, 1951, Vol.92554, FJ1022/518.

182 獨 島 硏 究 제16호 영 미 양국 간의 현안문제는 런던에서 거의 해결되고, 영 미 공동초 안이 6월 14일에 개정됐다. 130) 이때에 프랑스의 지적을 받은 남지나해의 섬들이 추가되고, 131) 일본이 주권을 포기해야 할 영역은 초안 2조에서 다 음과 같이 규정되어 조인시의 조문이 됐다. (a)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하 는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다. (b) 일본은 타이완과 펑후도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 다. (c) 일본은 쿠릴제도 및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의 결과로 일본이 주권을 획득한 사할린의 일부 및 이에 인접한 섬들에 대한 모든 권 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다. (도중 생략) (f) 일본은 스프래틀리도와 파라셀제도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 을 포기한다. 새 공동초안에 대해 주일 미국대사관으로부터 다이토제도에 관해 문의 하는 전문이 7월 6일에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국무부는 영토조항에 하자가 없는지 재검토를 한 듯하며, 피어리는 지리전문관 보그스(Samuel W. Boggs)에게 공동초안에 관해 의견을 구했다. 보그스는 다이토제도에 관해 서는 공동초안에 후술하는 바와 같이 조문을 수정할 것을 권고하고, 132) 위 (f)에 관해서는 파라셀도 다음에 남지나해에 있는 모든 섬들 을 추가 할 것을 7월 13일에 권고했다. 동시에 독도에 관해서는 위 (a)에서 울릉도 다음에 리앙쿠르 를 추가할 것을 권고했다. 133) 보그스가 리앙쿠르에 언 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리앙쿠르가 다이토제도처럼 영 미 협의에 서 거론되지 않아 위 (a)에 하자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보 130) FRUS 1951, Vol.6, Part 1, p.1119~1133. 131) FRUS 1951, Vol.6, Part 1, p.1114. 132) 7월 13일자 보그스 각서 참조. 영인은 이석우, 대일강화조약자료집, 242쪽. 133) 보그스 각서의 영인은 이석우, 대일강화조약자료집, 243쪽.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제주도 쿠릴 류큐제도 183 그스가 리앙쿠르를 한국영토로 하기를 권고한 것은 1949년 초안에서 리 앙쿠르가 일본에서 분리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9년 말 초 안에서 리앙쿠르가 일본영토로 됐던 것을 확인한 보그스는 3일 후에 만 약 리앙쿠르를 조선으로 한다면 이라는 전제하에 울릉도 다음에 리앙쿠 르 를 추가할 것을 7월 16일에 권고했다. 134) 보그스의 권고 중 다이토제도와 남지나해의 섬에 관한 조항은 최종초 안에 반영됐으나, 독도만은 반영되지 않았다. 이 이유를 생각한다. 만약 보그스 권고대로 독도를 한국영토로 한다면 영국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 가 없지만, 1949년 말의 미국 초안을 수정하는 결과가 되므로 그럴만한 명분이나 근거가 필요하다. 반면에 독도를 일본영토로 한다면 영국의 양 해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미국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변경한 근거는 일본 외무성의 잘못된 영토조서와 독도의 군사적인 이용 가능성이었다. 군사 적으로 볼 때 한국전쟁 와중에 미국이 독도의 군사적인 가치를 중요시한 흔적은 없었다. 군사적인 가치가 낮다면 미국이 영국을 설득할 재료는 일 본외무성의 영토조서가 주로 되는데, 이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SCAPIN 677의 조문과의 견해차도 설명해야 할 것이니 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독도를 일본영토로 할지 한국영토로 할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 후의 개정 초안에서 독도에 관해 언 급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류큐제도와 남방제도에 대해서는 이들을 미국의 신탁통치하에 두는 것은 영 미 양국에 이론이 없었다. 문제는 주권을 어떻게 하느냐에 있었다. 일본에 징벌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영국은 안보상으로 일본 이 이 섬들에 대해 주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만 약 일본이 주권을 포기한다면 유엔으로부터 신탁통치의 승인을 얻지 않 는 한 미국이 류큐를 지배하는 근거는 없어진다. 한편 만약 일본이 주권 을 보유한다면 미국은 필요한 시설은 무엇이든 양도받을 수 있다 라고 주 134) 위의 책, 245~2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