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李 根 浩 * 105) Ⅰ. 머리말 Ⅱ. 戊 申 亂 과 憂 嶺 南 說 Ⅲ. 以 嶺 南 治 嶺 南, 독자성에 토대한 통치 원칙 제시 Ⅳ. 鄒 魯 之 鄕 복원을 위한 교학 기구의 정비 Ⅴ. 상징물 및 기록의 정비 Ⅵ. 맺음말 국문초록 이 글은 영조대 무신란 이후 경상감사들이 행했던 제반 수습책을 검토 한 글이다. 영남 지역은 17세기 후반 이래 중앙 정치에 진출이 차단되면 서, 이에 따른 불만들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를 간파한 중앙 조정에서는 노론과 소론 공히 調 用 論 을 내세우며 이들을 자파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 였다. 이런 중에 무신란이 발발함으로써 영남 지역은 예의주시되었고, 무 신란 진압후에는 憂 嶺 南 說 이 제기되며 이후에도 여전히 주목받았다. 무신란 이후 처음으로 경상 감사에 제수된 朴 文 秀 는 지역내 인사의 搜 訪 을 비롯해 중앙 정부의 뜻을 효유하여 민심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그리 고 한편으로는 以 嶺 南 治 嶺 南 이라는 영남 통치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이 원칙은 趙 顯 命 이 언급한 바와 같이 영남 지역은 다른 지역과 다르므로 위 * 국민대학교 강사 / 전자우편 lhk1117@paran.com 149
제17호 (2010) 세나 위령 등으로 통치할 수가 없으며 그보다는 향촌내 長 者 를 통한 통치 방식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영남은 영남인의 손에 맡겨야지 조정에서 개입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또한 노론들의 영남 공략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밖에 교학기구의 정비를 통해 鄒 魯 之 鄕 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조현 명의 경우 養 士 節 目 을 제정, 이것이 조정에서 勸 學 節 目 으로 반포되었다. 박문수나 조현명 등 소론계열 내지 탕평파가 주로 관 주도의 향촌 교육 정비에 주력한 반면 노론계열의 경우는 서원에 주목, 이를 통해 절의를 선양하고자 하였으며 나아가 해당 지역에 자파 세력을 扶 植 시키려고 하였 다. 이밖에도 경상감사들은 < 平 嶺 南 碑 >나 <영해명륜당중수기>, <곽망우모 의록발>의 작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신란을 상징하는 기념물 혹은 역사 적인 기록을 통해서 민심의 순화를 도모하였다. 주제어 -------------------------------------------------------------------------------- 英 祖 代, 戊 申 亂, 憂 嶺 南 說, 以 嶺 南 治 嶺 南, 嶺 南 의 獨 自 性, 勸 學 節 目, 金 尙 憲 書 院, 곽망우모의록발, 평영남비 150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1. 머리말 영조 4년에 발생한 戊 申 亂 은 조선조 건국 이래 미증유의 정치적 변란 이었다. 청주에서 李 麟 佐 가, 영남에서 鄭 希 良 李 熊 佐 曺 聖 佐 등이, 호남에 서 朴 弼 顯 이, 경기에서는 權 瑞 麟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킨 무신란은 난의 주도 세력 규모에서 이전까지 있었던 변란과 크게 달랐다. 더구나 평안병사 李 思 晟 과 총융사 金 重 器, 금군별장 南 泰 徵 등 당대 주요 무신의 가담 사실은 더욱 심각한 국가적 위기로 인식되었다. 한편 난의 전개과정에서 영남 지역은 국왕 영조를 비롯해 당국자들에게 특별하게 주목받았다. 난의 초기부터 영남 지역 인물들의 연루설이 제기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安 東 등 이른바 上 道 지역은 가담하지 않 은 사실이 드러나기는 하였으나, 평소 영남 지역을 예의 주시하던 당국자 들의 입장에서 이곳은 특별한 관심이 아닐 수 없었다. 영남 지역에 대한 관심은 무신란 진압 이후에도 여전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에서는 지방관의 파견에서부터 신중을 기하면서 그들의 역할에 상당 한 기대를 하였다. 예를 들어 무신란 직후 경상감사에 제수된 朴 文 秀 에게 내린 교서에서, 큰 변란을 겪은 뒤 어루만져 복종케 하고 安 集 시키는 것 이 하루라도 급하게 되었다 1) 라고 하면서, 당시 영남 지역이 안고 있던 문제점으로 민심의 동요와 공사 저축의 탕진을 비롯해 風 敎 의 쇠퇴 등을 들고 있다. 무신란 이후 영남 지역에 파견된 지방관의 역할은 일상적인 업무 이외에 동요된 민심을 수습하고 풍교를 바로잡는 등의 역할이 기대 되었다. 지금까지 연구에서 무신란 이후 경상감사의 동향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 였다. 다만 중앙의 입장에서 對 嶺 南 施 策 을 전반적으로 언급하면서 경상감 1) 承 政 院 日 記 제660책, 영조 4년 4월 17일( 丁 酉 ), 敎 慶 尙 監 司 朴 文 秀 書 (이하 承 政 院 日 記 는 국사편찬위원회 http://sjw.history.go.kr를 활용하였음을 밝혀 둔다). 151
제17호 (2010) 사의 시책을 거론한 연구 2) 가 있다. 또한 趙 顯 命 의 勸 學 節 目 을 비롯해 樂 育 齋 과 관련한 교육정책에 대해 여러 연구가 제출되었고, 3) 무신란 이후 중앙의 憂 嶺 南 說 과 함께 영조 14년 이른바 金 尙 憲 書 院 건립 문제를 다 룬 연구 4) 등이 있을 뿐이다. 아래에서는 이상 선학들의 연구를 참조하면서 무신란 이후 경상감사를 역임한 인물들이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직면해 어떻게 대처하였는가를 그 들이 시행한 제반 시책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감사의 통상 적인 업무 수행 전반을 논하기 보다는 무신란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관련 된 부분을 중심으로 설명되어질 것이다. 먼저 이 시기 영남에 대한 인식 을 보여주는 憂 嶺 南 說 에 대해 검토한 뒤 지방관들이 행했던 몇 가지 시 책을 검토하겠다. 이에 대한 검토는 무신란 이후 영남 지역에 대한 상황 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아울러 조선시대 지방관은 중앙의 국왕 을 대신해 한 지역을 책임지던 관리인 점을 감안해볼 때 중앙의 대영남시 책을 이해하는 한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李 源 鈞, 英 祖 戊 申 亂 에 對 하여- 嶺 南 의 鄭 希 亮 亂 을 中 心 으로-, 釜 大 史 學 2, 부산대학교 사학회, 1971. 3) 이와 관련해서는 아래의 연구가 참조된다. 鄭 萬 祚, 朝 鮮 後 期 의 鄕 村 敎 學 振 興 論 에 대한 檢 討 - 地 方 官 의 興 學 策 을 중심으로 -, 韓 國 學 論 叢 10, 1988. 張 仁 鎭, 慶 尙 監 營 의 樂 育 齋 敎 育 에 대하여, 漢 文 學 硏 究 8, 1992. 金 武 鎭, 조선후기 영남지역의 교육문화, 啓 明 史 學 10, 1999. 김대식, 귀록( 歸 鹿 ) 조현명( 趙 顯 命 )의 훈장제( 訓 長 制 ) 시행과 그 변용, 韓 國 敎 育 史 學 29, 2007. 채휘균, 조선후기 영남 낙육재( 樂 育 齋 ) 연구-관련된 인물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 교육철학 36, 2008. 4) 鄭 萬 祚, 英 祖 14 年 安 東 金 尙 憲 書 院 建 立 是 非 -- 蕩 平 下 老 少 論 紛 爭 의 一 端 -, 韓 國 學 硏 究 1, 동덕여대 한국학연구소, 1982( 朝 鮮 時 代 書 院 硏 究, 집문당, 1997 재수록). 152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2. 戊 申 亂 과 憂 嶺 南 說 조선시대 영남은 지리적으로는 한반도내 8도 가운데 가장 큰 지역이며, 동시에 강원도와 양호의 요충이고,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서 경제 적으로도 풍요로운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5) 더하여 인재의 府 庫 라 칭해 지면서 조선조 이래 많은 인재를 배출했던 지역이다. 그러나 17세기, 특 히 숙종대 갑술환국 이후 李 玄 逸 로 대표되는 영남 남인은 名 義 罪 人 이라 는 굴레를 쓰게 되면서 중앙 정치로의 진출이 거의 차단되었다. 물론 이 후에도 개별적으로 중앙 관직에 진출하는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근래 급제자가 100여인에 이르는데도 조용되지 못한다 6) 라는 표 현이나, 만약 관직에 진출해도 겨우 얻게 되는 것이 縣 에 그치거나 겨우 出 六 하는데 그친다는 진술 7)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영남 지역 인사 들의 진출은 제한적이었다. 이에 따라 불만이 노정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상정된다. 폐고된지 오래되어 인정이 억울하게 여긴다 8) 는 표현은 이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영남 지역의 이 같은 상황을 중앙에서는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위무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영조 초 일부 관료들 사이에서 영 남은 다스리기 어려운 곳의 한 곳으로 지칭되었다. 9) 그렇다고 이들을 완 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미 국초부터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특히 고려조의 安 珦 鄭 夢 周 를 비롯해 조선조의 鄭 汝 昌 金 宏 弼 李 彦 迪 李 滉 등 문묘종사 인물을 배출한 지역으로 崇 儒 重 道 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조정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10) 5) 承 政 院 日 記 595책, 영조 원년 6월 16일(임오), 敎 慶 尙 道 觀 察 使 趙 榮 福 書 참 고. 6) 承 政 院 日 記 579책, 영조 즉위년 11월 20일(경신). 7) 承 政 院 日 記 616책, 영조 2년 5월 13일(갑진). 8) 承 政 院 日 記 593책, 영조 원년 5월 20일(정사). 9) 承 政 院 日 記 595책, 영조 원년 6월 16일(임오), 上 曰 物 衆 地 大 素 稱 難 治. 10) 承 政 院 日 記 616책, 영조 2년 5월 13일(갑진). 153
제17호 (2010) 한편 여기에는 정치적 고려가 내포되어 있었다. 즉 公 論 政 治 를 지향하 는 조선 사회에서 각 붕당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의 조성을 위해 지방 에 자파 지지세력을 扶 植 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쟁이 격 심해지는 숙종조 이후 더 심해졌으며, 숙종조 院 宇 의 疊 設 현상이 심해진 것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1) 이러한 현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더구나 영조대 초반 조정에서 노론에 비해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소론 계열 내지 탕평파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더욱 영남을 자파 세 력으로 확보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영남에 대한 위무책이나 調 用 論 은 그 결과라 하겠다. 영조 3년 이른바 丁 未 換 局 이후 소론세력이 다시 중앙에 진출한 뒤 이 조판서를 맡았던 吳 命 恒 이 같은 해 7월 13일 희정당에서 있었던 召 對 에 참석하였다. 이때 오명항은 영남을 인재의 부고라 칭하며 한때 名 公 巨 卿 의 대부분이 영남에서 나왔으나 지금은 오직 羅 學 川 만이 문신 당상으로 있고, 옥당에 趙 德 隣 등 몇 사람만 있을 뿐, 대개는 通 淸 하지 못하고 있으 니 어찌 원망이 심하지 않겠는가 반문하며 폭넓은 수용을 요청한 바 있었 다. 12) 이밖에도 영조 3년 9월 9일 소론계 정언 金 尙 星 역시 상소를 제출 하여 영남의 적체된 인재의 搜 訪 및 수용을 청하였고, 13) 무신란이 발발한 영조 4년 1월 20일에는 이조판서 이태좌가, 국가가 영남을 버린 지 오래 되었다고 하며 특별하게 수용할 것을 요청한 바 있다. 14) 소론들의 이같은 주장의 근저에는 영남 지역을 위무함과 동시에 영남 지역을 자파의 동조 세력으로 확보하려는 의도가 내재된 것이라 하겠다. 이는 노론계 일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영조초 閔 鎭 遠 은 영 남 지역을 인재의 부고라 칭하면서도, 근래에는 예전에 미치지는 못하지 11) 이에 대해서는, 薛 錫 圭, 肅 宗 朝 院 宇 動 向 과 朋 黨 의 社 會 的 基 盤, 國 史 館 論 叢 34, 1992 참조. 12) 承 政 院 日 記 641책, 영조 3년 7월 13일(정묘). 13) 承 政 院 日 記 645책, 영조 3년 9월 9일(임술). 14) 承 政 院 日 記 654책, 영조 4년 1월 30일(신사). 154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만 명현 및 고가의 자손들이 많은데 국가에서 수용하지 않아 廢 錮 된지 오 래되어 인정이 억울하게 여깁니다 15) 라며 영남인의 수용을 요청하면서 銓 曹 에서 인재를 추천할 때 영남 지역 인사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주석[ 懸 註 ]을 달아 구별하도록 하였다. 민진원의 이같은 주장은 그의 정치적 위 상과 관련해서 주목된다. 민진원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동생이며 당대 노론를 대표하는 인물 이었다. 영조는 즉위 직후 소론 주도의 정국 속에서 즉위한 지 2개월 후 민진원의 特 放 을 지시하였다. 민진원의 특방은 이후 그 동안 소외되었던 노론들의 출사 계기가 되었다. 영조는 민진원의 특방과 관련해서 노론의 여망을 따른 것이지만 동시에 國 事 를 위한 것이라 한 바 있다. 여기서 국 사를 위한 것이란 자신을 도와 체제 안정 및 왕권의 안정에 노력해달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런 때문인지 민진원은 출사 직후 소론의 선별적 수 용을 청하기도 한 바 있다. 16) 앞서 언급한 영남인의 수용 역시 그 일환으 로 파악된다. 동시에 민진원의 의도는 소론 세력과 마찬 가지로 영남 지 역을 회유하여 자파의 동조세력으로 확보하려 하였음을 배제할 수는 없겠 다. 민진원의 이같은 주장이 제시되며 영남인의 수용이 논의되던 와중에 李 宜 顯 같은 인물은 이같은 영남인에 대한 우대가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 에 대한 차별 대우라 하면서 서북인도 함께 수용할 것을 권하는 경우 17) 도 있기는 하였지만 그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이같은 각 붕당의 영남 인재 수용 논의는 결국 이들 지역에 대한 세의 확장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영조 5년 당시 경상감사 박문수 는 상소에서, 영조 1년 이후 도내에서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심해져 마치 물과 불 같다고 하는 표현을 하고 있다. 18) 이는 영조 초반의 정국 상황과 15) 承 政 院 日 記 593책, 영조 원년 5월 20일(정사) 16) 영조 즉위 초 민진원의 동향에 대해서는 이근호, 英 祖 代 蕩 平 派 의 國 政 運 營 論 硏 究, 국민대 박사논문, 2002, pp32~35 참조. 17) 承 政 院 日 記 593책, 영조 원년 5월 20일(정사) 18) 承 政 院 日 記 680책, 영조 5년 3월 15일(기미) 155
제17호 (2010) 맞물려 영남 지역에 대한 각 당의 경쟁에 따른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용론이라 위무론은 무신란을 경험하면서 이른바 憂 嶺 南 說 로 표현되었다. 19) 조정에서 영남인의 등용이 논의되고 정책으로 가시화되던 상황에서 무신란이 발발하였다. 영남 지역의 동향에 대해 조정에서는 상 당히 예의 주시하였다. 영조 4년 3월 14일 崔 奎 瑞 의 고변으로 무신란 발 발 사실을 알게된 뒤 20) 이어 3월 16일 陽 城 人 金 重 萬 의 고변에서 權 瑞 龍 등과 영남이 내응하고 있음이 언급되었다. 21) 이른바 우영남설 이 현실화 된 것으로, 김중만의 고변이 있던 다음 날 吳 命 恒 은 영남이 실로 우려된 다 22) 고 하면서 어사로 영남 지역에서 출입하여 사정을 잘 아는 박문수 를 승격시켜 감사로 삼자고 제안하였다. 이런 우려는 무신란 전개 과정에서, 조정에서 영남 지역 인사 가운데 명망이 있는 자를 召 募 使 에 제수하여 이들로 하여금 민심의 수습에 참여 하도록 한 상황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당시 소모사에 제수된 인물은 李 衡 祥 과 趙 德 麟, 그리고 黃 翼 再 였다. 그러나 이형상 등의 소모사 제수에 대해 당시 노론들은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예를 들어 영조 4년 3월 19일 이형 상과 조덕린을 소모사에 제수하는 諭 書 가 내려지자 조도빈은 이들의 소모 사 차출을 반대하였는데 오히려 나쁜 마음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홍치중 역시 사람의 인심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이들의 소 모사 제수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혹시 있을 상황을 위해 이병태는 소모사 는 안무사의 명령에 따르게 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23) 무신란 진압을 주도하던 소론에 의해 이형상 등이 소모사에 제수되었으나, 노론측에서는 이들의 동향에 대해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19) 憂 嶺 南 說 에 대해서는 鄭 萬 祚, 앞의 논문, 1982( 조선시대 서원연구, 집 문당, 1997 재수록, 본고에서는 주로 본서에 수록된 논문을 참고함)에서 이 미 언급된 바 있어 참고된다. 20) 英 祖 實 錄 권16, 4년 3월 14일(갑자). 21) 英 祖 實 錄 권16, 4년 3월 16일(병인). 22) 承 政 院 日 記 658책, 영조 4년 3월 17일(정묘). 23) 承 政 院 日 記 616책, 영조 4년 3월 20일(경오). 156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무신란이 진압된 후 우영남설 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른바 영남 지역에 대한 우려설은 다양한 복선이 내재된 표현이었다. 즉 영남 지역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해당 지역 에 대한 적극적인 위무가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다만 이런 인식이 별개 의 층위라고는 할 수 없다. 영남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감시 및 통 제와 위무가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같은 우 영남설 은 주로 소론 내지 탕평파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는데, 이는 중앙의 정국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우영남설 이 본격적으로 제기되던 영 조 9년 이후에는 경종조 辛 壬 獄 事 과정에서 화를 당한 노론 4대신의 신원 및 옥사의 飜 案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증폭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쟁의 흐름은 영조 16년 노론측 주장의 승리로 이어지게 되어 결국 조정내 노론의 정치적 우위가 결정되었다. 24) 따라서 소론의 입 장에서 본다면 세를 확장하는 작업이 더욱 필요했던 것이고 이때 우영남 설 을 활용, 영남 인재의 조용 내지는 被 罪 者 의 신원을 주장하였다. 3. 以 嶺 南 治 嶺 南, 독자성에 토대한 통치 원칙 제시 무신란 이후 조정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경상감사의 선임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는데, 25) 고심에 찬 선택 과정에서 무신란 진압 후 처음으로 감사에 제수된 인물이 박문수였다. 박문수는 영조 3년 정미환국 직후 세 자시강원사서로 조정에 다시 들어와 이후 사헌부지평을 역임하는 가운데 같은 해 10월 조태억의 추천으로 嶺 南 安 集 御 史 에 차출된 바 있다. 영남에 도착한 박문수는 다음 해인 영조 4년 1월 15일부터 2월 7일까지 안동, 2 24) 이 시기 정국 상황에 대해서는, 정만조.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재 정립 - 소론탕평에서 노론탕평으로의 전환 -. 역사학보 111. 1986을 참조. 25) 承 政 院 日 記 707책, 영조 6년 5월 17일(갑신), 戊 申 後 專 意 於 嶺 南. 157
제17호 (2010) 월 7일부터 2월 14일까지 예안과 봉화 영천 순흥, 그리고 2월 15일에는 단양을 거쳐 3월 9일 서울에 입성하였다. 26) 박문수는 영남에서 임지에 도착하기 전 송인명에게 들었던 상주의 金 弘 壽 와 韓 世 弘 을 방문하였고, 안동에서는 權 榘 李 栽 등 도내 명망이 있는 인사를 방문하였다. 또한 학식 이 뛰어나다고 하는 鄭 重 元 을 찾았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문상하 고자 그의 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정중원은 후일 무신란 때 안음과 거창 등지에서 거병한 정희량의 부친으로, 이 일로 박문수는 곤경에 처하 자 어찌 정희량이 흉악하고 참담한 마음을 먹었는지 알았겠는가라고 국왕 앞에서 변명하기도 하였다. 27) 이처럼 박문수는 어사로 영남에 파견되어 인재를 搜 訪 하고 윤리와 기강을 부식시켰으며 민폐의 근원을 변통하였고, 무단 침탈하는 자를 법으로 처벌하는 등의 성과를 거둔 바 있었다. 이어 박문수는 영조 4년에는 영남 지역의 변통에 대한 방안을 종합적 으로 제출하면서 명현의 후예와 독실한 군자, 그리고 小 民 들을 권면하여 발탁해서 수용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다. 당시 박문수의 구체적인 활동 양상을 더 이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인재를 수방했다는 기록이나 윤강 을 부식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영남 지역, 특히 좌도 지역 의 동향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28) 박문수는 또한 무신란 당시 사로도순문사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활동하던 중 죽산에서 이인좌 등 을 제압한 뒤 영남의 안음과 거창 등지로 내려가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 다. 이런 활동 때문인지 영조 4년 4월 14일 무신란 직후 사망한 黃 璿 의 뒤 를 이어 감사를 선임할 때, 당시 尹 容 과 朴 師 洙 가 거론되었으나 윤용의 경우 정세가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박사수는 어버이의 상으로 새로운 적임자를 물색해야만 하였다. 이때 국왕은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며, 이전 부터 박문수를 경상감사에 제수하려고 했으므로 이제 그를 경상감사로, 26) 承 政 院 日 記 680책, 영조 5년 3월 6일(경술). 27) 承 政 院 日 記 666책, 영조 4년 7월 17일(병인). 28) 박문수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의 연보인 朴 忠 憲 公 年 譜 에 의거함. 158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李 宗 城 을 어사로 차출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 에 대해 李 光 佐 와 李 台 佐 가 신중론을 피력하였으나 대부분 동의하여 결국 박문수가 경상감사로 선임되기에 이르렀다. 29) 경상 감사에 부임한 박문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양반과 父 老 들을 모 아놓고 효유하였으며, 혹은 白 日 場 이 열려 선비들이 많이 모이면 나아가 역시 조정의 입장을 천명하는 등 영남 지역 민심의 진정에 주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張 萬 一 등 무신란 잔여 세력을 소탕하는데도 주력하였 다. 30) 또한 영남내 명가의 후예 및 유력 인사의 추천도 이어져 함양 지역 鄭 汝 昌 후손 및 합천 지역 강대수 후손의 조용 등을 요청한 바 있다. 한편 영조 4년 7월 15일, 마침 무신란 진압에 대한 공으로 공신 책록 을 한 뒤 행해진 회맹제 참석을 위해 서울에 올라와 있던 경상감사 박문 수는 국왕을 인견하였다. 이 인견 자리에서 박문수는 영남 지역과 관련해 서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당시 인견에서 박문수는 조정에서 무신란 이래 매번 영남이 우려된다고 한다고 전제하고는, 겉으로만 본다면 반란 세력 이 대부분 영남에서 나왔기에 의심하고 우려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하며, 영남은 우려할 일이 없다고 하면서 만 약 의심할 일이 있으면 자신이 올라 왔겠는가 라고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박문수는 자신의 이같은 주장이 타당하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자 신이 서울로 올라오면서 만난 노론측 유척기 역시 동조했다고 하였다. 아 울러 무신란 때 안동 등 上 道 에서 반란세력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쉽게 적 을 섬멸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31) 박문수의 이상과 같은 발언은 의외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특히 무신란 이후 박문수를 비롯한 소론계열 인사들이 주로 우영남설 을 제기 하였는데, 박문수의 경우 경상감사 재직시에는 그와 다른 내용으로 발언 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우영남설 의 정치성을 확인 29) 承 政 院 日 記 659책, 영조 4년 4월 14일(갑오). 30) 承 政 院 日 記 666책, 영조 4년 7월 15일(갑자). 31) 위와 같음. 159
제17호 (2010) 하게 해주는 것이다. 영남이 우려될 것이 없다는 발언은 비단 박문수에 그치지 않고, 영남에 어사로 파견되었던 李 宗 城 의 발언에서도 역시 같은 내용이 언급되었다. 즉 영조 4년 9월 11일 慶 尙 道 別 遣 御 史 로 파견되었다 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이종성이 국왕과 면대하였다. 당시 이 자리에서 이종성은 지금 조정에서 영남에 대해 아직도 우려할 것이 남아 있다고 하 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 영남은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자신 하였다. 다만 그는 上 道 의 안동과 예안 등지는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는 按 撫 使 朴 師 洙 가 무신란의 역모를 안동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 다 라고 한 발언 때문이라고 하면서 별도의 변통책이 필요할 것을 역설한 바 있다. 32) 이렇게 영남에 우려할 것이 없다고 발언을 한 박문수는 같은 자리에서 계속해 영남 지역 통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발언을 하였다. 즉 같은 자 리에서 이른바 以 嶺 南 治 嶺 南 이라는 논리로 통치 원칙을 제시하면서, 영 남은 다른 지역과는 다르므로 만약 국가에서 威 令 으로 다스리려고 하면 성과를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앞서 영남은 우려될 것이 없다고 한 발언은 바로 이 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로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즉 영남으로서 영남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영남에 대한 우려설이 불식되어야 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박문수가 주장한 이영남치영남 설의 구체적인 시행방법은 무 엇일까? 이에 대해서 박문수의 더 이상 진술이 없어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이와 비슷한 취지에서 박문수의 뒤를 이어 영조 6년 6월 3일부터 영조 8년 9월 3일까지 경상감사를 역임한 탕평파 趙 顯 命 의 발언이 주목된다. 조현명은 경상감사로 추천될 때 홍치중으로부터 지금 의 영남은 조현명이 아니면 진압할 수 없다 33) 고 지목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조현명의 경우도 앞서 박문수가 제시한 원칙에 동조하였는데, 영조 32) 承 政 院 日 記 670책, 영조 4년 9월 11일(무오). 33) 承 政 院 日 記 707책, 영조 6년 5월 30일(정유). 160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11년 5월 26일 희정당에서 있었던 召 對 에 참석해서는, 영남 지역을 勢 에 따라 유리하게 인도해야 한다[ 因 其 勢 而 利 導 之 ] 라 하면서 독자성에 근 거하여 통치해야 할 것이라고 후임으로 파견된 閔 應 洙 에게 제시했다고 하 였다. 그러면서 영남에는 아직도 선현의 유풍이 남아 있어 다른 도와 다 르고, 여러 현 중에는 반드시 한 명의 大 儒 가 있다고 하면서 이로써 본다 면 아직까지 尙 儒 의 습속을 숭상함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34) 조현명이 제시한 방법은 위에서 언급한 大 儒 내지는 長 者 를 통해서 지 방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조현명은 경상감사를 마치고 올라온 직후인 영조 9년 1월 13일 희정당에 서 국왕을 인견할 때 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인견 자리에서 조현명 은 영남의 풍속은 다른 지역과 다르다고 하면서, 대개 영남은 오래전부터 많은 명현을 배출한 지역으로 1 鄕 혹은 1 面 에 반드시 長 者 가 있어 이들이 대소의 시비를 결정한 뒤에야 비로소 따른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자리 에서 조현명은 金 聖 鐸 과 成 以 洪 李 萬 敷 등을 추천한 바 있다. 35) 같은 자 리에서 경상감사를 역임한 바 있는 박문수는 이에 동조하면서 영남 인재 를 조용하면 후일에 의지할 바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조현명의 지적은 영남 지역은 다른 지역과는 다르므로 조정이나 지방관의 위세를 통해서 통치하기 보다는 향촌내 長 者 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적으로 파악 된다. 실제로 영조 11년 2월 국왕 영조는 辭 陛 하는 경상감사 閔 應 洙 에게 金 聖 鐸 을 거론하면서 자신이 그를 잊지 않고 있다는 말을 전하도록 하고 그 에게 벼슬길에 나오도록 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다. 김성탁은 그로부터 2 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4월에 金 在 魯 의 천거가 있었으며, 다음 달인 윤4 월에 증광문과전시 급제자 42인에 포함되었다. 그러자 국왕은 김성탁을 특별히 불러 어제를 내리는 특전을 베풀었으며, 곧 이어 그에게 지평을 34) 承 政 院 日 記 801책, 영조 11년 5월 26일(을축). 35) 承 政 院 日 記 754책, 영조 9년 1월 13일(을미). 161
제17호 (2010) 제수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36)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소대석상 에서 호조판서 이정제는 영남 사람들이 지금 크게 흥기하고 있으며, 김 성탁의 下 去 후에는 더욱 흥기하는 것이 배가 되었다 37) 고 말하고 있다. 박문수와 조현명 등이 주장하는 영남으로서 영남을 다스린다는 것은 바로 이같은 운영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조현명이 지적한 장자를 통한 통치 방식이 아마도 박문수가 지적한 영남으로서 영남을 통치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달리 표현하면 영남은 영남인의 손에 맡겨야지 조정에서 개 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역내 명망 있는 인사에 대한 搜 訪 이나 중앙에 추천하는 것은 아마도 이를 위한 일련의 과정 가운데 하나였을 것 으로 파악된다. 결국 박문수나 조현명의 주장은 영남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통치 원칙 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적으로 생각된다. 이는 호남 및 호서 지역하고 도 다른 영남의 특수한 지역성을 고려한 통치 전략을 제시한 것이었다. 한편 여기서 추가로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이 박문수나 조현명 등 소론계 내지 탕평파가 노린 정치적 의도이다. 아마도 이같은 주장은 다른 한편으 로는 노론측의 영남 지역 공략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무신란이 비록 오명항을 비롯해 조현명, 박문수 등 소론계 및 탕평파의 노력에 의해서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난의 주도세력 상당수가 소론 계열이어서 소론측이 완전히 혐의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 황에서 노론측에 대한 공격이 가세화될 것이며, 더하여 노론측의 영남 지 역 공략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에 박문수나 조현명은 이 점을 원 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이 같은 발언을 한 것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즉 영남은 영남으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원칙은 노론 세력의 진출을 차단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었다. 36) 英 祖 實 錄 권40, 11년 2월 29일(경오) 및 같은 권 4월 4일(갑진). 윤4월 13일(임오), 윤4월 19일(무자) 참조 37) 承 政 院 日 記 801책, 영조 11년 5월 26일(을축). 162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4. 鄒 魯 之 鄕 복원을 위한 교학기구의 정비 영조 15년 황경원은 경상감사로 내려가는 鄭 益 河 에게 주는 送 序 에서, 당시 영남 지역의 습속을 질박하고 어리석으며 교만하고 편벽되[ 樸 愚 敖 僻 ] 면서 橫 議 에 빠져 있다고 하였다. 38) 여기서 황경원이 지적한 내용의 옮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생략한다. 다만 황경원의 지적을 통해서 당국자 들은 당시 영남 지역에 관찰사의 교화에 대한 책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함 을 역설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선에서 그치고자 한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포폄 기준 가운데 하나로, 興 學 校 가 들어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조항은 일차적으로 국가에 필요한 인재의 육성이라 는 점에 중점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해당 지역에 대한 교화의 책임을 강조하는 지침이기도 하였다. 더욱 추로지향 으로 일컬어지던 영 남 지역은 무신란의 여파로 평소의 순박하고 질박한 풍속이 무너져서 예 의로 이끄는 것이 시급하였다. 39) 이때 역시 먼저 주목되는 것이 교학기구 의 정비였다. 무신란 직후에 경상감사에 제수된 박문수는 영남이 안고 있던 각종 민 폐에 대한 이정과 함께 감사 재직시 도내 교육의 진흥을 위해 주력한 바 있다. 그가 취한 방법은 면훈장 유생 무사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면훈장에 대해서는 각자의 교육 성과를 기록한 장부를 도회관에 올리도록 하고는 그 성적에 따라 상벌을 부과하는 제도를 시행하였고, 유생에 대해 서는 순력에 맞추어 유생들을 모아놓고 고시하여 성적에 따라 상을 주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주목되는 것은 무사에 대해서 상벌 제도를 시 행했다는 점인데, 장교와 무사들을 불러 모아 놓고 試 射 를 행한 뒤 성적 에 따라 상벌을 주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40) 박문수의 이같은 시책은 평소 38) 黃 景 源, 江 漢 集 卷 7, 序 送 鄭 義 州 益 河 觀 察 嶺 南 序 (이하 문집 자료는 한국 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을 활용하였다). 39) 承 政 院 日 記 660책, 영조 4년 4월 17일(정유), 敎 慶 尙 監 司 朴 文 秀 書 條 參 照. 40) 朴 忠 憲 公 年 譜 己 酉 條. 163
제17호 (2010) 文 獻 邦 으로 알려져 있던 영남 지역의 복원을 위한 것이었다. 박문수에 이어 무신란 뒤 영남 지역 교학기구의 정비에 전기를 마련한 인물이 조현명이었다. 경상감사를 역임한 조현명은 영조 10년 역시 경상 도관찰사에 재직하고 있던 김재로에게 재직시의 상황을 설명하기를, 3년 간 지방을 통치하면서 주력한 것은 䌤 縫 하고 調 解 한 것 밖에 없다고 하 면서 이로 인해 특별히 쓰거나 독특한 정사는 없지만 진압한 공은 양보할 수 없으며 그 뒤 5년간 점차 消 融 의 이치가 있었다고 자평한 바 있다. 그 러면서 그는 자신이 관찰사 재직시 추진했던 勸 學 과 浦 項 設 倉 2가지 일을 계속해서 시행하면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권하고 있다. 41) 그가 거 론한 것 가운데 하나인 권학은 자신의 주도로 이루어진 勸 學 節 目 의 반포 를 말하는 것으로, 도내 교학기구의 정비를 통해서 인심의 교화를 추진했 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조치였다. 조현명은 영조 8년 그가 영남감사로 재직시에 이른바 養 士 節 目 을 조정 에 상신하였다. 42) 조현명이 양사절목을 제정한 이유는 근년 이래 敎 術 이 밝지 못하여 선비의 습속이 크게 무너져서, 經 術 이 과거 공부로 전락하고, 과거 공부가 黨 論 으로 전락해서 향촌에는 좋은 습속이 없으며 많은 선비 들이 괴상한 행동을 한다 43) 는 이유에서 였다. 더하여 사림의 습속은 더 욱 비루해지고 향리에는 揖 讓 의 풍조가 없어졌으며, 산림에는 藏 修 하는 선비들이 줄어드는 등 당시 영남 사회는 많은 문제점을 않고 있었다고 파 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의 역할은 단지 錢 穀 과 甲 兵 簿 書 期 會 에 그 쳐서는 곤란하므로 자신이 양사절목을 제정했음을 밝히고 있다. 조현명의 양사절목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감사에 의한 일방적인 절 목 제정이 아니고 영남지역의 지역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41) 趙 顯 命, 歸 鹿 集 권13, 書 與 嶺 伯 金 ( 在 魯 ) 書. 42) 이 양사절목에 대해서는, 鄭 萬 祚, 朝 鮮 後 期 의 鄕 村 敎 學 振 興 論 에 대한 檢 討 - 地 方 官 의 興 學 策 을 중심으로-, 韓 國 學 論 叢 10, 1988, 131~135면에서 자세하게 분석된 바 있어 참고하였다. 43) 趙 顯 命, 歸 鹿 集 卷 6, 疏 條 上 養 士 節 目 疏, 近 年 以 來 敎 術 不 明 士 習 大 壞 經 術 降 爲 科 學 科 學 降 爲 黨 論 鄕 無 善 俗 多 士 乖 行. 164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즉 조현명은 양사절목을 완성한 뒤 당시 영남의 유림계를 대표하던 인물 인 李 光 庭 44) 李 萬 敷 45) 李 槾 46) 등에게 자문과 교열 등을 부탁하였다. 이들 과의 논의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 를 들어 이만부의 경우 樂 育 齋 거재유생의 정원에 대한 논의라든지, 樂 育 齋 節 目 을 제정해서 보내는 등 47) 당대 경상지역 명유들과 교감을 이룬 상 태에서 절목이 제정되었다고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서 조현명은 반드시 土 風, 즉 지역의 풍토를 고려하여 통치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하 였다. 48) 따라서 이때 제정되어 반포된 권학절목은 중앙의 입장을 대변하 는 조현명을 중심으로 지방의 민심을 함께 고려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이 점은 앞서 언급한 영남 지역의 통치 원칙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 하 겠다. 즉 지방 통치에서의 독자성 고려라는 측면이 결국은 토풍이 전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국왕인 영조에게 건의,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어 勸 學 節 目 으로 반포된 조현명의 양사절목 은 훈장의 선정, 생도의 선발, 교육의 담당, 교재와 학습방법, 평가 등을 내용으로 총 14개항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따르면, 교학기구가 道 ( 樂 育 齋 )- 邑 ( 鄕 校 ; 都 訓 長 校 任, 居 齋 儒 生 )- 面 ( 書 院 山 堂 ; 面 訓 長, 各 面 學 徒 )라는 체제로 구상되었다. 또한 교육 내용에서도 경서를 위주 로 하되 과거 공부도 겸하도록 하였고, 삼강행실도 및 이륜행실도의 강독 을 항례화한 점도 주목되는 점이다. 그리고 교육의 대상은, 읍의 향교 거 재유생은 15세 이상의 사족 자제로 한정하였고, 면의 서원과 산당에는 이 와는 달리 사족과 中 庶 를 구별하지 않았다. 조현명의 권학절목은 교육 내 용의 변화나 행정 조직과 학교 제도를 결부시켜 관학을 부활하고자 하였 44) 趙 顯 命, 歸 鹿 集 卷 13, 書 與 李 進 士 光 庭 書. 45) 趙 顯 命, 歸 鹿 集 卷 13, 書 答 李 參 奉 萬 敷 書. 46) 趙 顯 命, 歸 鹿 集 卷 13, 書 與 李 學 生 槾 書. 47) 李 萬 敷, 息 山 先 生 續 集 卷 4, 書, 答 趙 時 晦. 48) 趙 顯 命, 歸 鹿 集 卷 6, 疏 條 上 養 士 節 目 疏 에서 趙 顯 命 은 大 抵 爲 治 之 道 必 因 其 土 風 所 宜 而 利 導 之 라 하여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통치 방법을 모색하 고 있다. 이는 양사절목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165
제17호 (2010) 던 점 등을 비롯해 17세기 후반 이후 국가의 교화 대상이 面 단위까지 하 향화하는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의미가 찾아진다. 49) 이 점은 앞서 박문수가 면훈장을 주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조현명의 권학절목에서 주목되는 것은 면과는 달리 읍의 교육 대 상을 사족으로 한정하고 있는 점 역시 주목된다. 면 단위에서 신분을 가 리지 않고 교육을 하고 있으나 상위의 읍 단위에 이르게 되면 주로 사족 으로 한정하고 있었다. 결국 권학절목의 제정 목적이 사족 자제들의 교육 에 주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서 조현명이 절목 제정의 이유로 제시한 것에서도 드러나는 것으로 사림의 습속을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 었다. 후일 조현명은 박문수가 禮 樂 을 修 擧 했기에 자신은 이를 이어서 학 교를 修 明 하였으며 이를 통해 사대부의 마음을 진압하는데 주력하였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음 50) 은 이를 말한다. 조현명이 이처럼 영남 지역에서 권학절목을 시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평소 鄒 魯 之 鄕 으로 불리던 영남 지역의 문풍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런 문풍이 있었기에 영남 지역을 다스릴 때는 예악으로써 다스려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학교 관련 시책을 시행함으로써 사대부의 마음을 다스리고 자 하였다고 하였다. 그 스스로 인정하듯이 이는 영남 지역이기에 이런 시책이 가능했던 것이며, 호남 지역 같으면 추로지향 이 아니어서 갑자기 학교 관련 시책을 시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호남감사로 내려가서는 주로 錢 穀 관련 업무에 치중했다고 자인하였다. 51) 이 역시 영 남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시책이라고 하겠다. 당시 영남에 대한 이같은 대책과 관련해서 비교되어 거론되던 지역이 호남이었다. 영조 11년 5월 26일 소대석상에서 각도의 구관당상들이 참석해서 지방 통치와 관련된 논 의를 하였다. 논의과정에서 호남구관당상 金 取 魯 가 호남과 영남의 풍속이 같지 않으므로 因 其 勢 而 利 導 之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자, 영조는 그렇 49) 鄭 萬 祚, 앞의 논문, 1988, p132. 50) 承 政 院 日 記 787책, 영조 10년 9월 18일(경인). 51) 위와 같음. 166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다면 영남은 문학으로써 다스리고 호남은 左 道 즉 이단으로 다스릴 것이 냐고 반문하였다. 그러자 같은 자리에 참석하였던 李 瑜 는 호남은 정여립 이후 습속이 좌도를 숭상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호남의 경우는 因 其 勢 而 利 導 之 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심지어 宋 眞 明 같은 이는 산천과 풍토가 모두 이단을 숭상하는 형세라고까지 하였다. 결국 이때의 논의는 영조의 웃음으로 마무리되면서 적당한 감사의 선발 논의로 이어졌다. 52) 한편 이같은 경상감사의 교학기구의 정비와 관련해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이 서원에 대한 시책이었다. 이 시기 국가의 서원정책을 비롯해 金 尙 憲 書 院 건립 문제를 비롯한 경상 지역의 서원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정리된 바 있어 53) 상론을 피한다. 다만 여기서는 경상감사로서 서원에 주목한 兪 拓 基 의 예를 통해서 지방관의 대서원시책을 살펴보는 것으로 한정한다. 무신란 이후 경상 지역에서 서원 문제와 관련한 초미의 관심사는 金 尙 憲 書 院 건립 문제였다. 김상헌서원과 관련된 이가 영조 2년~영조 3년과 영 조 13년~영조 14년 두 차례 걸쳐 감사를 역임한 유척기였다. 영조대 노 론내 중요한 정치적 위상을 가졌던 유척기는 앞선 영조 2년 경상감사 재 직시 당시 예안 유생이 李 珥 의 서원을, 영일의 유생이 宋 時 烈 의 影 堂 을 건립하려고 청원하자 이에 불허한 적이 있었다. 반면 안동에서 김상헌서 원을 건립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동조하였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서원이 건립되지는 않았다. 당시 유척기는 이이의 서원이나 송시열의 영당을 건 립하는 것과 김상헌의 서원을 세우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김상헌의 貫 鄕 이 안동이기 때문으로 아무런 혐의될 것이 없다고 하 였다. 이런 상황에서 무신란이 발발하였다. 그러자 안동의 인심과 士 風 이 붕 괴되어 타락하였고, 分 을 범하고 위를 능욕하는 일이 빈번해져 가히 놀랍 고 해괴하게 되었다 고 하였다. 따라서 이같은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절 52) 承 政 院 日 記 801책, 영조 11년 5월 26일(을축). 53) 이 시기 서원 문제에 대해서는 鄭 萬 祚, 朝 鮮 時 代 書 院 硏 究, 집문당, 1997을 참조. 167
제17호 (2010) 의를 숭상함으로써 忠 을 권면하는 것만이 급선무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 침 거창에 무신란 때 반란군과 대적하다가 사망한 李 述 原 을 기리는 사우 가 건립되게 되었으니 안동에 김상헌 서원을 세우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유척기는 안동을 관향으로 하는 김상헌서 원을 세움으로써 그가 보여주었던 절의를 선양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大 都 會 인 安 東 을 새롭게 하려는[ 作 新 ] 의도였던 것이었다. 54) 다만 여기서 새롭게 하려는 것의 의도는 물론 기존 언급된 바와 같이 안 동을 비롯한 경상 지역에 노론 세력의 부식을 의도한 것이었다. 이같은 兪 拓 基 의 서원 시책은 관권의 개입을 통한 향촌 교육의 정상화 를 모색한 박문수나 조현명의 그것과 차이가 있던 것으로, 정치적 입장에 따른 교육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확인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정치적 우위에 있던 노론측이 서원을 통해 자파세력을 부식하는 것과 는 달리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대개 조현명이나 박문 수 등 탕평파 내지 소론계는 서원훼철을 주장한 바 있다. 55) 아울러 조현 명 등이 관주도 교학기구의 정비를 주장하게 된데에는 그들이 갖고 있던 人 才 觀 과 관련된다. 즉 인재 선발에는 다양한 기준이 있겠으나, 조선의 경 우는 德 과 才 를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이른바 德 才 論 이라 명명되는 이 논 의는 역사적으로 오랜 연원이 있던 논쟁으로, 조현명의 경우 賢 與 才 是 取 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조선조에서 특히 17세기에 弘 文 錄 이 중시되 고 吏 郞 이나 翰 薦 의 自 薦 制 가 시행되며 山 林 이 중시되는 것은 德 이 인재 선발의 중요한 기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조대 탕평책하에서는 오 히려 이 점이 黨 弊 로 인식되었으며, 탕평을 통해 破 朋 黨 을 이루고자 하였 던 趙 顯 命 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德 과 才 54) 이상 金 尙 憲 書 院 과 관련된 兪 拓 基 의 동향에 대해서는 兪 拓 基, 知 守 齋 集 卷 3, 疏 辭 戶 曹 判 書 仍 請 改 建 安 東 書 院 疏 및 같은 책 권11, 墓 誌, 渼 陰 老 人 自 識 에 의거함. 55) 이 시기 서원정책의 양상에 대해선, 정만조. 영조 17년의 祠 院 毁 撤. 한 국학논총 9. 1987가 참고됨. 168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를 병행하는 인재 진용을 추진하였는데, 실은 그동안 소홀하게 취급되었 던 재능을 갖춘 인재의 진용을 의도한 것이었다. 56) 박문수나 조현명의 교학 기구 정비와 함께 주목되는 것이 안동부사 윤 광소가 추진한 향음주례의 복원이었다. 윤광소가 비록 영남 감사는 아니 었지만 그가 취한 시책은 의미있는 것이기에 부기한다. 鄕 飮 酒 禮 는 대부 분의 의례가 그러하듯이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 의식과 그 희생물을 향유 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의례는 개인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거나 정체성 혹은 동질성을 인식하고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질서를 함으로써 사회적 통합을 이루려는 체계를 말한다. 이점에서 향음주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행되었던 향음주례는 지방민들이 참여하여 술잔을 돌리면서 獻 爵 을 하며 장유의 질서를 바로잡는 기능하는 의례였 다. 57) 이같은 향음주례에 대해서는 조선조 이래 향촌사회 안정화 차원에서 시 행이 논의되었고, 특히 16세기 중반 경 사림세력들에 의해서 그 실시가 강하게 주장되었으며, 이후 지역에 따라 간헐적으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본고의 대상 시기인 영조대 경우 역시 향음주례의 시행에 대해서 조정 차 원에서 논의되기도 하여, 영조 14년 12월 召 對 시에 국왕은 鄕 中 에서 향음 주례의 실시 여부에 대해서 신하들에게 문의하였는데, 이 때 참석하였던 참찬관 朴 聖 輅 는 시행되는 곳이 있기도 하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국왕은 전교를 내려 먼저 예기 의 내가 鄕 飮 酒 를 보니 왕도를 실천하는 것이 아주 쉬움을 알겠다 라는 말을 언급한 뒤 향음주례의 뜻이 친목을 권장하 고 凌 犯 을 징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諸 道 에 하유하여 시행하도록 권한 바 있다. 이것은 지역내 풍습의 교정을 위한 것으로, 안동지역에서도 윤광 소가 이를 시행한 바 있다. 윤광소는 영조 27년 2월 안동부사에 제수된 인물로, 그는 부임 직후 당 56) 이근호. 趙 顯 命 의 現 實 認 識 과 國 政 運 營 論, 韓 國 思 想 史 學 32. 2009, pp353~359. 57) 이수덕, 鄕 飮 酒 禮 의 起 源 과 形 成, 大 丘 史 學 83. 2006. 169
제17호 (2010) 대 영남 사회에 문풍이 쇠퇴함을 지적하고는 이어서 충효와 정렬자를 방 문하여 이를 포창하는 등의 교화에 진력하였다. 그리고는 周 公 의 유작이 라는 향음주례와 향사례가 유명무실해짐을 한탄하면서 이를 시행하였다. 윤광소는 가을과 겨울 한가한 날을 택일하여 향교의 대성전 옆에 유생들 을 향음주례를 시행하였으며, 예를 마친 뒤에는 노소의 순서에 따라 잔을 돌렸다. 그리고는 참석했던 사람들이 각각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두루 마리를 제작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두루마리에 대해서 이광정이 서문을 작성하였는데, 이광정은 서문에서 향음주례의 시행으로 백성들에 대한 교 화가 이루어졌다고 기록한 바 있다. 58) 후일 李 山 斗 는 이때의 향음주례 시 행으로 30년내 추락한 예법과 문교가 진작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5. 상징물 및 기록의 정비 무신란은 조선에 엄청난 파급을 불러온 정치적 변란이었다. 이 와중에 서 국가에 충절을 다하다가 죽은 이가 있는 반면 반란군에 참여하여 만고 의 역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이같은 미증유의 변 란에 대한 기억을 재생시킴으로써, 경각심을 갖게할 필요가 있었다. 최근 이같은 기억의 재생을 대한 관심이 증대하는 가운데 의미를 전달하는 매 개체인 상징에 대해서 이를 정치생활사 의 차원에서 주목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는 연구가 있어 주목된다. 59) 기억은 자연발생적이기보다는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집단의 보편적 정당성 확립을 위해 인공적으로 구축된 측면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인공적인 방식이 주로 상징이나 기념비 등과 같은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기에 이런 기억을 문화적 기억이라고 한다. 60) 58) 李 光 庭, 訥 隱 集 권7, 序 鄕 飮 酒 詩 卷 序. 59) 김성윤, 조선시대 정치생활사 연구의 현황과 전망, 영남학 13, 2008. 60) 알라이다 아스만 지음 변학수 백설자 채현숙 옮김, 기억의 공간, 경북대학 교 출판부, 2003에 의거함. 170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이같은 점은 무신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신란 이후 지방관들은 무신란을 비롯한 정치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기억의 재생을 통해 흐트 러진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이런 경우 먼저 주목되는 것이 조현명의 동향이다. 조현명은 경상감사 재직시 < 永 川 滄 州 鄕 賢 祠 贊 >, < 寧 海 明 倫 堂 重 修 記 >, < 郭 忘 憂 募 義 錄 跋 > 등을 작성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 은 <곽망우모의록발>이다. 발문에 따르면 조현명이 발문을 작성하게 된 계기는 현풍 지역의 곽원갑이 선조인 곽재우의 <용사모의록>을 가지고 와서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문서에는 <화왕산성동고록>이 부기되어 있었다. 이 문서는 정유재란 때 성을 지키면서 응모한 인명록으로, 이를 본 조현명은 홍의장군이 백마를 타고 지휘하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았다 고 하면서 발문을 작성하였다. 61) 다만 이 문서가 주목되는 것은 그것이 경상우도의 현풍과 관련된 것이 라는 점이다. 당시 당국자들은 영남 지역을 義 城 을 기준으로 위 지역은 상도로, 아래는 하도라 하였으며 62), 무신란 때 하도에 해당되는 안음과 거창 등지에서 정희량 등이 거병하였기에 하도는 습속이 불순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현명이 하도 지역인 현풍의 곽재우 관 련 문서에 발문을 쓴 것은 주목되는 일이다. 물론 이를 감사의 일상적인 행위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하도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곽재우에 대한 기억을 재생시킴으로써 지역민들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었 음을 부정할 수 없다. 조현명은 이밖에도 <영해명륜당중수기>를 찬하였는 데, 이는 당시 영해지역으로 친구 정내주가 부임하였기 때문이었다. 조현 명은 중수기에서 당론의 습성이 깊어져서 사람의 심술이 나빠지고 선비의 풍조가 점점 쇠퇴하였다고 하면서 친구가 부임하여 교화의 뜻을 실천하기 를 바라고 있었다. 63) 조현명과 함께 무신란 상징물과 관련되어 주목되는 감사가 노론계 鄭 益 61) 趙 顯 命, 歸 鹿 集 卷 18, 跋, 郭 忘 憂 募 義 錄 跋. 62) 承 政 院 日 記 608책, 영조 2년 1월 10일(신축), 63) 趙 顯 命, 歸 鹿 集 卷 18, 記, 寧 海 明 倫 堂 重 修 記. 171
제17호 (2010) 河 이다. 정익하는 영조 15년 9월부터 영조 17년 3월까지 경상감사에 재 직했던 인물이었다. 정익하는 경상감사 재직시, 무신란 때 반란군 진압 후 사망한 黃 璿 을 기리는 작업을 하였다. 무신란 후 황선을 기리는 작업은 愍 忠 祠 의 건립으로 시작되었다. 민충사는 영조 17년 도내 士 民 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각자 자금을 염출하여 사우를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그 런데 건립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당시 경상감사가 정익하였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익하가 감사로 부임할 때 황경원이 송서문을 작 성하였는데, 황경원은 민충사의 주인공인 황선의 조카가 되는 인물이다. 이같은 상황으로 볼 때 정익하는 황선의 襃 獎 에 공감했을 것이고, 따라서 정익하는 아마도 부임한 뒤 도내 사민들이 민충사를 건립하는데 상당 부 분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영조 17년 3월 5일 정익하는 상소를 올려 민충사의 復 戶 를 청한 바 있 는데, 이때 그는 상소에서 영남은 임진왜란부터 무신란에 이르기까지 충 신 의사가 왕실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전제하고는 이와 관련해서 경주 의 李 述 原 사우, 해인사의 휴정 사우, 노량의 이순신 사우, 촉석의 김천일 사우, 동래의 송상현 사우, 현풍의 곽재우 사웅 등이 있다고 하였다. 이어 민충사를 거론하면서 황선 사후 부로들이 그의 은혜를 잊지 못하 고 士 女 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그의 사우 앞에 나오지 않은 촌로들이 없다고 하면서 이런 곳에서 제수를 사비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 하며 10결에 대해 복호를 요청하였다. 이 같은 요청에 대해 좌의정 송 인명은 10결의 복호는 불가하다고 하면서도 관에서 제수를 지급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반면 우의정 조현명이 서원의 건립을 금지하 고 있는 이때에 사우의 건립을 허가할 수 없다고 하며 이를 반대하여 결 국 사우를 세울 때의 도신은 추고당하고 수령은 파직당하였다. 64) 당시는 함경도 북청의 이항복 서원에 이광좌를 추배하는 문제가 계기가 되어 서원 훼철이 단행되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조현명의 이 같은 발언은 64) 承 政 院 日 記 제929책, 영조 17년 3월 5일(경오). 172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당시의 정책 추진 속에서 제기된 발언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대구를 비롯 한 영남 지역에 노론세의 확산을 막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한다. 황선에 대해서 소론측 일부에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일이 있었 다. 무신란을 진압한 뒤인 영조 4년 4월 19일 선정전에서 오명항 등이 입 시하였다. 이 자리에서 오명항은 황선의 몇 가지 실책을 언급하였다. 무신 란 당시 사로도순문사 오명항과 종사관 박문수가 이인좌 등을 진압한 뒤 경상도 안음에 도착하였을 때 상의해서 문자로 위유하는 일을 당시 경상 감사 황선에게 일임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황선은 이들의 의도와는 달 리 慰 諭 文 에 失 志 之 徒 라는 표현을 넣음으로써 어수선한 영남 민심을 자 극할 수가 있었다. 이에 오명항 등은 자신들이 다시 글을 지어 반포하였 다. 아울러 황선은 군사를 움직일 때는 밀부를 합한 뒤에 하는 관례를 깨 고 군관을 보내 군사를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65) 이처럼 오명항을 비롯한 박문수 등 소론들은 황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더구나 당시 서 원에 대한 금압책이 시행되던 당시였으므로 조현명은 정익하의 요청에 대 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였다. 결국 민충사는 훼철되고 그 자리에 단을 설치하고는 돌에다 공적을 새 겨 기념하다가 정조 4년 平 嶺 南 碑 를 세우게 되었고, 민충사는 철종 연간 박규수 등에 의해서 중건되기에 이르렀다. 66) 민충사의 건립 과정을 비롯 해 복호에 대한 논란 등에서 물론 노론과 소론의 보이지 않는 경쟁을 확 인할 수 있지만 이런 민충사의 건립과 훼철, 그리고 단의 설치와 평영남 비의 건립은 무신란에 대한 상징적인 기념물로써 이 지역 정서에 작용하 게 되었을 것이다. 65) 承 政 院 日 記 제660책, 영조 4년 4월 19일(기해). 66) 朴 珪 壽, 瓛 齋 集 卷 4, 大 邱 愍 忠 祠 重 建 記. 173
제17호 (2010) 6. 맺음말 이상에서 무신란 이후 영남 지역 지방관, 특히 경상감사들이 행했던 제 반 시책을 검토하였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영남 지역은 17세기 후반 이래 중앙 정치에 진출이 차단되면서, 이에 따른 불만들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를 간파한 중앙 조정에서는 노론과 소론 공히 調 用 論 을 내세우며 이들을 자파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런 와중에 무신란이 발발함으로써 영남 지역은 예의 주시되었으며, 무 신란 진압 이후에도 憂 嶺 南 說 로 나타난 바와 같이 여전히 주목받는 곳이 되었다. 따라서 중앙에서는 지방관의 선임에서부터 신중을 기하였으며, 이 렇게 선임된 지방관에게는 중요한 역할이 기대되었다. 무신란 이후 처음 으로 경상 감사에 제수된 朴 文 秀 는 지역내 인사의 搜 訪 을 비롯해 중앙 정 부의 뜻을 효유하여 민심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以 嶺 南 治 嶺 南 이라는 영남 통치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이 원칙은 趙 顯 命 이 부 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영남 지역은 다른 지역과 다르므로 위세나 위령 등으로 통치할 수가 없으며 그보다는 향촌내 長 者 를 통한 통치 방식이 필 요함을 역설한 것이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영남은 영남인의 손에 맡겨 야지 조정에서 개입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또한 노론들의 영남 공략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밖에 교학기구의 정비를 통해 鄒 魯 之 鄕 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조현 명의 경우 養 士 節 目 을 제정, 이것이 조정에서 勸 學 節 目 으로 반포되었다. 절목의 제정 과정에서 조현명은 영남 지역 名 儒 들과 교감을 형성하였는데, 이는 土 風 을 고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문수나 조현명 등 소론계열 내지 탕평파가 주로 관 주도의 향촌 교육 정비에 주력한 반면 노론계열의 경우 는 서원에 주목, 이를 통해 절의를 선양하고자 하였으며 나아가 해당 지 역에 자파 세력을 扶 植 시키려고 하였다. 이밖에도 경상감사들은 <평영남 비>나 <영해명륜당중수기>, <곽망우모의록발>의 작성에서 보는 바와 같 174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이 무신란을 상징하는 기념물 혹은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 민심의 순화 를 도모하였다. 한편 이상에서 살펴본 무신란 이후 경상감사의 민심수습책은 당대 중앙 의 정국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政 派 的 이해 관계가 반영된 것이었 다. 그러나 관학의 정비와 같은 시책은 당대의 시대적인 흐림 속에서 추 진되었다는데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또한 이들이 제시했던 以 嶺 南 治 嶺 南 이라는 통치 원칙은 어찌 보면 영남 지역의 독특한 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따른 영남 지역의 동향에 대해서는 향후 과제로 남겨 놓겠다. 이 논문은 2010년 4월 30일( 金 )에 투고 완료되어 2010년 5월 15일( 土 )부터 5월 25일( 火 )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0년 6월 1일( 火 )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된 논문임. 175
제17호 (2010) 참고문헌 1. 사료 英 祖 實 錄 承 政 院 日 記 朴 忠 憲 公 年 譜 朴 珪 壽, 瓛 齋 集 兪 拓 基, 知 守 齋 集 李 光 庭, 訥 隱 集 李 萬 敷, 息 山 先 生 續 集 趙 顯 命, 歸 鹿 集 黃 景 源, 江 漢 集 2. 논저 김성윤, 조선시대 정치생활사 연구의 현황과 전망, 영남학 13, 2008, pp265-300. 薛 錫 圭, 肅 宗 朝 院 宇 動 向 과 朋 黨 의 社 會 的 基 盤, 國 史 館 論 叢 34, 1992. 알라이다 아스만 지음 변학수 백설자 채현숙 옮김, 기억의 공간, 경북대학 교 출판부, 2003. 이근호, 趙 顯 命 의 現 實 認 識 과 國 政 運 營 論, 韓 國 思 想 史 學 32, 한국사상 사학회, 2009. pp333-364. 이근호, 英 祖 代 蕩 平 派 의 國 政 運 營 論 硏 究, 국민대 박사논문, 2002, 이수덕, 鄕 飮 酒 禮 의 起 源 과 形 成, 大 丘 史 學 83. 2006. pp167-191. 鄭 萬 祚, 歸 鹿 趙 顯 命 硏 究 ; 그의 蕩 平 論 을 中 心 으로, 韓 國 學 論 叢 8, 국 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86, 125-155. 176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鄭 萬 祚, 英 祖 14 年 安 東 金 尙 憲 書 院 建 立 是 非 -- 蕩 平 下 老 少 論 紛 爭 의 一 端 -, 韓 國 學 硏 究 1, 동덕여대 한국학연구소, 1982( 朝 鮮 時 代 書 院 硏 究, 집문당, 1997 재수록). 鄭 萬 祚. 영조 17년의 祠 院 毁 撤. 한국학논총 9. 1987, pp91-122. 鄭 萬 祚, 朝 鮮 後 期 의 鄕 村 敎 學 振 興 論 에 대한 檢 討 - 地 方 官 의 興 學 策 을 중심 으로-, 韓 國 學 論 叢 10, 1988, pp127-152. 鄭 萬 祚, 朝 鮮 時 代 書 院 硏 究, 집문당, 1997. 鄭 萬 祚.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재정립 - 소론탕평에서 노론탕평 으로의 전환 -. 역사학보 111. 1986, pp63-111. 177
제17호 (2010) Abstract Since Yeongjodae( 英 祖 代 ) Musinnan( 戊 申 亂 ) Kyongsang Province governor's control policy Lee, Geun-ho This is writing that Kyongsang Province governors review all control policy that did since Yeongjodae Musinnan. As Yongnam( 嶺 南 ) districts area cut-off advance in ever since center politics latter half of 17th century, complaints by this were built. And this in center settlement that do penetration all Nonons and Sonon logic that must use because appoint suggest and these tried to give a definite report by influence who follow suit oneself. By Musinnan happens doing this way Yongnam districts area courtesy stare, and 'Which Yongnam districts is worried opinion( 憂 嶺 南 說 )' was brought and still got attention after after Musinnan suppression. Appointed Parkmunsu( 朴 文 秀 ) informs central government's meaning including that visit person in area and made efforts in stability of popular feelings to Kyongsang Province governor for the first time since Musinnan. And on the one hand, presented principle of 'As Yongnam districts, rule Yongnam districts( 以 嶺 南 治 嶺 南 )' Yongnam districts rule. As this principle refers to Johyeonmyeong( 趙 顯 命 ), Yongnam districts area enforced other areas and that can not administer by power or coercive command and need rule method through older person in country than him because differ. For this, if express differently Yongnam districts 178
英 祖 代 戊 申 亂 이후 慶 尙 監 司 의 收 拾 策 ( 李 根 浩 ) leave in Yongnam districts person's hand it was that need not to intervene in central government. This point was to intercept also Yongnam districts attack of Nonon plain. Beside, through education utensil's maintenance, wished to reconstruct 'Hometown of Confucius and Mencius( 鄒 魯 之 鄕 )'. Establish Yangsajeolmok in the case of Johyeonmyeong, this was distributed to Gwonhakjeolmok in central government. While Bakmunsu or Johyeonmyeong etc. Sonon order and Tangpyeongpa ( 蕩 平 派 ) makes efforts in country education maintenance of government office leading mainly, Nonon order's occasion tried to implant influence that wished to observe in lecture-hall, enhance integrity through this and goes forward and follows suit to oneself in relevant area. Beside, Kyongsang Province governors planned refinement of popular feelings through souvenir or historic recording that symbolize Musinnan as governors see in creat. Key Words: Yeongjodae, Musinnan, Kyongsang Province, Yongnam districts is worried opinion, As Yongnam districts, rule Yongnam districts, Individuality of Yongnam districts,, Gwonhakjeolmok 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