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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12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13

달 빛 아 래 신 선 이 노 는, 월 하 성 마 을 1장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초승달을 닮은 바닷가마을 월하성( 月 河 城 )이 위치한 충청남도 서천군( 舒 川 郡 )은 육지로는 동쪽으로 부 여군( 扶 餘 郡 ), 북쪽으로 보령시( 保 寧 市 )와 접하고 남쪽은 금강( 錦 江 )을 경계로 전라북도 군산시( 群 山 市 ) 와 마주하고 있다. 해상( 海 上 )으로는 서쪽으로 서해와 닿아있으며 남으로는 고군산군도( 古 群 山 群 島 )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다. 행정구역상으로 서천군 서면( 西 面 ) 월호리( 月 湖 里 )에 속하며, 남쪽으로 바다에 접해있다. 월하성 마을이 위치한 지역은 백제에는 비중현( 比 衆 縣 )에 소속되었다가 신라에는 서림현( 西 林 縣 )의 비비현( 比 庇 縣 )에 소속되었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임천( 林 川 )의 비인현( 庇 仁 縣 ) 소속이 되었으며, 조 선 말 비인군( 庇 仁 郡 ) 서면 소속이 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옆 마을인 장동리( 長 洞 里 ), 호동리( 狐 洞 里 ), 화동리( 花 洞 里 )를 하나로 병합하는 과정에서 월하성과 호동의 앞글자를 따서 월호리라 하여 서천군 서면에 편입되었다. 이 때 호동리의 여우 狐 를 호수 湖 로 고쳐 지금의 행정구역명칭인 월 호리( 月 湖 里 )가 되었다. 현재 월호리는 행정리로 장동과 월하성으로 나뉜다. 연구가 이루어진 2009년 당 시 월하성 마을의 인구 통계는 다음과 같다. 2008년 기준 세대 남 여 외국인 계 52 123 109 1 233 월하성 이라는 마을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달 과 바다 에 관련된 이 야기가 많다. 초승달을 닮은 마을 해안과, 마을 앞 바다에 비친 달 그림자를 보고 신선이 반해 내려와 놀았 다는 전설에서 월하성( 月 河 城 )이라 부른다. 또한 마을 앞 해안가의 지형이 기러기의 날개처럼 굽어진 데에 1872년 조선후기지방지도(출처:규장각) 1864년 대동여지도(출처:규장각) 014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15

서 비롯하여 월아성(月鵝城)으로도 불렀다. 1864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를 보면 월하성 마을이 위치한 곳 에 월아산(月牙山)이 보인다. 이 곳은 현재 월하성 마을의 서쪽에 있는 옥녀봉으로 추측되는데, 바로 이 월 아산에서 월하성이 유래된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다. 호구총수 - 비인현(庇仁顯) 면 리 원호 전체인구 남 녀 서면 화동리(禾洞里) 해망리(海望里) 장동리(長洞里) 호동리(狐洞里) 알찬리(謁贊里) 어라성리(於羅城) 합전리(蛤田里) 선돌리(先乭里) 도둔동리(都屯洞里) 중리(中 里) 서리(西里) 남리(南里) 마량진리(馬梁鎭里) 연도리(烟島里) 부사문리(夫士門 里) 개야항리(介也項里) 신기리(新基里) 서동리(西洞里) 내월항리(內月項里) 외월 항리(外月項里) 주항동리(酒缸洞里) 봉하리(烽下里) 858 2,448 1,344 1,104 호구총수(戶口總數)는 정조13년(1789)의 전국의 호구수를 조사하여 정리해 놓은 인구통계자료이다. 군 (郡), 현(縣), 읍(邑), 면(面) 등 행정조직별로 원호(元戶) 및 인구수, 남녀의 수와 마을의 명칭 및 수를 기록했 다. 그 까닭에 당시 마을의 존재유무, 주변지역권 등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월하성 마을은 조선시대 말기 까지 비인현(庇仁縣)의 서면(西面)에 속해 있었으며, 비인현은 총 9책의 필사본 중에 제 4책에 수록되어 있다. 월하성은 1789년 호구총수에서 현재 월호리에 속한 장동(長洞), 호동(狐洞)과 같이 어라성(於羅城) 이라 는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다. 또한 서면에는 지금은 전라북도에 속한 연도(烟島), 개야도(介也島, 開也島) 도 속해 있어 바닷길을 통해 생활권이 근접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월하성은 고종 15년(1878)에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월하포(月下浦) 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한다. 원 산과 북청 등지의 수심을 측량하던 일본군함 천성호(天城號)가 비인현 월하포에 도착했다고 비인현감 홍용 주(洪用周)가 말한 것을 충청도관찰사 이명응(李明應)이 조정에 보고한다. 또한 열흘 후 보고에서 이명응은 일본군함이 월하포에 도착한 것을 전라, 충청도에 좋은 항구를 찾기 위함 이었다고 답한다.01 한국수산지에 도 월하성이 등장하는데, 월하성에서 어획하는 생선의 종류와 함께 월하성의 위치와 인구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있다. 내용을 보면 월하성은 동서 3정(丁)02, 남북 2정의 작은 만에 위치하며 8, 90마지기의 논과 100마지기의 밭이 있었다. 또한 약간의 황무지가 있지만 양호한 곳은 이미 개간되어 남은 땅이 적으며, 인 가 29호가 모래언덕에 모여 산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월하성의 예전 모습은 해안가에 위치해 항구가 있고, 농지가 적으며 어업을 주업으로 하는 작은 마을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외에 월하성에 대한 과거기록과 문헌자료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 서 연구자들은 조사지인 월하성 사람들의 과거생활과 그 변화, 그들의 일상과 그것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알 아가기 위해서는 구술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서 사료로 찾기 힘들었던 월하성 사람들의 옛 기 억에 남아있는 월하성 마을의 경관과 그것에 담긴 의미, 그리고 마을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밝히고자 한다. 01 忠淸道觀察使 李明應이 元山 北靑 等地를 測水하던 日本軍艦 天城號가 이 달 1日 庇仁縣 月下浦에 到着하였으며 縣監 洪用周가 問情하였음을 啓하다. 高宗實 錄 高宗 15年 8月 7日 忠淸道觀察使 李明應이 水軍虞候 李敎臣의 牒呈에 의하여 月下浦에 來泊한 日本船을 問情한 즉 自國에서 發行하기 前에 東萊府에 往復한 바 있다고 하다. 全羅 忠淸道로 하여금 바야흐로 良港을 찾고자 天城號가 發艦하니 兩道에 申飭하여 沿海에서 妨礙가 없도록 할 것을 啓하다. 承政院日記 高宗 15 年 8月 17日 郡勢一班(舒川郡) 1929년 (출처:종로도서관) 朝鮮五万分一地形圖 舒川(洪城八號) 1925년 (출처:종로도서관) 016 02 1丁은 109.091m이다.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17

가. 경관 속에 바라본 월하성 마을 월하성 전경 월하성은 마을에서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마을의 오른쪽에 옥녀봉이라 부르는 낮은 산이 할아버지당이 있 는 당산을 거쳐 뻗어 내려와 마을을 감싸는 형국을 이룬다. 마을 앞 바다에는 오른쪽에 띠섬, 왼쪽에는 쌍도 가 있고 그 사이에는 여( 礖 ) 라고 부르는 여러 개의 암초가 있다. 그리고 위로는 충청남도 보령시, 아래로는 전라북도 군산시, 금강의 하구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 월하성은 어업을 주 생업으로 하는 어촌마을로 바람이 생업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주민이 어부인 월하성 사람들에게 이로운 바람은 남풍인 마파람 으로 바다와 파도에 영향을 주 바람의 명칭 높바람 하늬바람 북 북 하늬바람 서 일반명칭 동 샛바람 서 월하성 동 높새바람 산바람 남 늦바람 남 내바람 달빛 아래 신선이 노는 월하성 마을(출처:서천신문 1993년 10월 20일자) 마파람 마파람 018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19

어 고기를 월하성 앞바다로 몰고 와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풍과 북풍은 마을 뒤의 산을 거쳐 불어오기 때문에 바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바람의 이름은 풍향에 따라 동풍을 높새바람, 동동남풍을 산바람, 동남풍을 내바람, 남풍을 마파람, 서남풍을 늦바람, 북서풍을 하늬바람 이라 부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바람의 명칭과 약간 다르다. 이러한 지리적 경관과 위치는 마을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쌍도의 이무기와 김총각 나도 인자 옛날 어른들한테 들은 얘긴데, 어느 해인가 홍수가 났어. 여기가 막 비가 와서 홍수가 났어. 홍수가 나며는 해변 가에 무언가 떠밀려와. 말하자면 인자 모냥 저 금강 상류부터 뭔가 떠밀려 오는 것이 있어. 헌 집도 떠밀려 오고, 죽은 돼지 도 떠밀려 오고. 말하자면 상류에서 떠밀려오는 그런 것이 있는데, 그런 것을 구경하려고 동네사람들이 바닷가에 나가는 거여. 큰 목나무. 이런 것도 있고 말이여. 가서 붙잡으면 내 것이 되야. 큰물, 홍수가 나며는 바닷가에 나가서 보는 거여. 그 런디 보니께 저 중바탕에 큰 목나무, 나무가 있는 거여. 떠밀려 와. 그러니께 인자 그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나무 그것 은 가지면 소득이 되는 거 아니여. 그런게, 그런게 그 이웃동네에 사는 김총각이라는 그 사람이 헤엄쳐서 가는 거여. 지가 는 장수이야기 라는 특징과 함께 월하성과 마을의 주변지형이 설명되어야 이해할 수 있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 그러나 먼 바다에 나가서 보면 물이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다. 월하성 주민 홍철표( 洪 喆 杓, 남, 1963년생)에 따르면 월하성에는 금강 하구에서 나온 물이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흘러든다. 특히 군산 쪽의 물이 월하성 쪽으로 많이 흘러드는데 최근 에는 쓰레기가 많이 유입되어 쓰레기 청소에 전라북도의 지원을 받는 일도 있었다. 이 말을 근거로 삼아 생각해 볼 때 주변에 큰 개천이나 강이 없는 마을주변 바닷가에 물건이 떠내려 와 사람들이 주으러 나왔 다는 부분은 월하성 앞바다의 해수의 흐름을 반영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즉 홍수가 나서 금강으로 떠내 려 온 물건이 시계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해류를 타고 북쪽인 월하성까지 흘러왔음을 이 이야기에서는 보 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흘러 온 물은 바닷물이 아니라 민물로, 바닷물과 물의 색깔이 다르다. 바닷물은 검고 짙은 색을 띠는 데 반해 민물은 옅은 하늘색을 띄며 비중의 차이로 인해 들어온 물이 빠질 때 까 지 섞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장마철이나 비가 많이 온 직후에 보인다고 하는데, 이러한 현상을 반영 한 이야기도 있다. 그걸 차지하려고. 헤엄쳐서 거진 가보니께 그게 통나무가 아니라 말하자면 용이여, 용. 용과 구렁이의 중간. 그런 큰 구렁 이가 말이지, 말하자면 수염이 나고 말이여, 용과 구렁이의 중간정도 되는, 뭐라 그러더라, 그것이여. 이무기. 이무기여. 그 러니까 김총각 이 사람이 확 돌아서서 도망 오는 거지. 그런데 그 이무기가 쫓아오는데, 물 속에서 사람하고 이무기하고 경쟁이 안 되지. 곧 잡혀먹게 생겼는데, 거기 바닷가의 사람들이 여럿 보고 있는데, 이무기가 사람을 못 잡는 거여. 보니까 그 사람이 헤엄치는게 아니라 널르드라는 거여. 이 김총각이. 그래서 이무기는 못 잡고 돌아가드라는 거여. 그러니께 알고 보니까 김총각이 겨드랑이에 날개가 들어와 있다는 거여. 그러니까 그게 위급상태니까 날개로 널르드라는 거여. 그래서 이무기가 못 잡았어. 그런데 옛날에는 기인, 이상한 장수가 나오면 나라에서 역적질한다고 막 없앴다는 거여. 그래서 집안 에서 문중회의를 해가지고 저 아를 살려놓으면 우리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다. 없애야 한다. 그래가지고서는 참 자고 있 쌍도와 띠섬의 뱀 이야기 김의환( 金 義 煥, 남, 1948년생) 이 쌍도가 큰 뱀이 어른들이 그러는데 띠섬이 암놈이 살고, 쌍도라는데 숫놈이 사는데, 달구질이라고 하려고 뱀이 서로 왔 다갔다 한데요. 때때에. 여기 앞에서 보면 물이 하얗게 되면 뱀이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고. 달구질이라고 숫놈이 암놈 만 나러 간다고 하고. 옛날에 우리 집이,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아냐면, 조그만한 오두막집이었는데 노인네들이 많이 왔다갔 다 했어요. 팔구십먹은 노인네들이. 해수의 흐름에 의해 비가 온 후 유입된 옅은 하늘색의 민물과 검고 짙은 바닷물이 섞이지 않아 두 가지 색을 띄게 된 바다를 뱀이 달구질하러 오간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온 직후 검은 바 는데, 김총각, 장사, 그 사람이 자고 있는데, 팔다리를 꽁꽁 묶어놓구서는 날개를 짤라버렸어. 그러니께 피가 솟구쳐서 막 천장까지 가고서, 도로 붙으려고 하더라, 날개가. 그래서 거기다 못 붙게 재를 뿌리고. 김총각은 죽었지. 죽었어. 그런데 인 자 그 이무기가 어디서 나왔느냐며는, 여기 쌍도가 있거든. 여기 보면 알어. 쌍도가 있어. 나는 솔머리 바닷가 동네에서 살 았기 때문에, 저기 참 큰 섬이 있는데, 그 큰 섬 도랑 밑에 웅덩이가, 시푸런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있어. 거기서 살았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직전에, 말하자면, 홍수가 나버리니까 바람 쐬로 밖에 나왔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디 그 이무기 가 인자 10년 공부 공을 들여서 하늘로 올라가려고 하는 판인디, 임신한 부인이 봐서 부정 타서 떨어져 죽었다는 그런 전 설이지. 전설. 옛날부터 내려오는 얘기여, 동네에서. 이 설화는 신기한 행적을 보이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영웅, 장수 이야기의 전형적인 흐름을 보 인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홍수가 나서 물건이 마을 앞바다에 떠내려 왔다는 부분에 집중해 보자. 월 하성 마을 주변에는 집이나 마을이 떠내려 올 만큼 큰 강도 없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큰 강인 금강은 월 하성보다 더 남쪽에 있는데 왜 이 이야기에서는 마을 앞에 헌 집이 떠내려 오고 죽은 돼지, 큰 나무 등이 내려왔다고 구술되는 것일까? 단순한 이야기 속의 허구, 상상력의 산물로 봐야 하는 것일까? 이 이야기 띄섬 그곳에 가고 싶다! (출처:서천신문 1997년 8월 15일자) 020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21

다 위 하얀 띠처럼 쌍도와 띠섬 사이에 물이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을 연구자는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띠 섬의 꼭대기에는 바위가 웅덩이처럼 파여 있다. 그 곳은 사리 때 보면 명주 묶음이 세 개가 들어갈 정도 로 깊다. 그 깊이를 두고 용이 살만큼 깊다고 해서 용정끝 이라 불렀다고 한다. 옥녀봉 이야기 김의환 그 높은 산이 옥녀봉이라고 부르는데 옛날 어른들은 옥녀상봉이라고 했어. 높을 상자를 써서. 예전에 비 안 오면 올라가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어. 정성들여 빌면 비가 온다고 해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기도 했어. 떡하고 밥하고 해 가지고. 산 닭 잡아가서 피를 내서 땅에다 파묻고. 그러면 비 오고. 용정끝 이야기 김의환 옛날 어른들 말씀에 용정끝이란 말이 있는데, 가면, 안에 보면, 거기가 지금 다 메꿔는 졌지만, 거기 보면, 파랗니 바위가 둠 (조사자: 언제까지 지냈죠?) 한 30년 전 까지. 옛날 어른들부터 지냈어. 벙메로 파져서, 물이 쪘을 때 보며는, 명주꾸리가 세 개가 들어갔데. 거기가 용이 산다고 해서 용정끝이라고 했데요. 지금도 한 사리 때, 아무리 사리 때도 거기 둠벙 안에는 물이 말로 늘어나요. 거기가 가문여라고 바로 띠섬 밑인데, 띠섬에서 이렇게 뻗어나온 연대 따로 떨어진 바위가 하나 있어요. 여기 가운데가 목정이가 나왔어. 여짝에 보면 네모낳게 둠벙이 있더라고. 거기에서 용이 살았다고. 마을 앞의 쌍도에도 이야기가 전해 온다. 쌍도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무인도인데, 같은 모양의 섬이 2개가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쌍도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옛날 쌍둥이를 둔 홀아비가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 나 죽자 아들 쌍둥이가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다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외에도 월하성에는 많은 자연지명이 전승되고 있다. 마을에 자연적으로 전승되는 지명에는 승적굴 (승적골), 민동굴(민동골), 알찬(알챙이, 알창이), 산손날, 장굴, 윷재(윗재), 살막금, 솟뜸, 윗 뜸, 아랫뜸, 도내뿔, 붓말(부멀고개) 등이 있다. 승적굴은 현재 서울시 서천연수원이 들어와 있는 위치를 말한다. 이곳에는 예전에 이화여대의 여 름별장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보다 더 이전에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큰 절이 있었다는 의 미에서 승적굴이라 부른다. 승적굴 김의환 지금 연수원 있는데 승적굴이라고 부르는데, 거기가 승적굴이 아니라 승절굴이라고, 절이 있었다고. 지금은 승적굴이라 고 하는데 원래 거기에 큰 절이 앉았었어. 그래서 승절굴이라고. 민동굴과 알찬, 산손날에는 지금은 마을사람들의 묘지가 있다. 민동굴과 산손날에는 대구서씨의 선산이 있으며, 알찬에는 경주최씨의 선산이 있다. 민동굴과 알찬에 대해 왜 이러한 이름을 붙었는지에 대한 유래 가 전해져 내려오지 않지만, 산손날에는 지형과 관련된 마을사람들의 신앙이 전해진다. 산손날과 동투 임경순( 任 京 順, 여, 1944년생) 내가 알기로는 언제고는 여기를 넘어가면 안 된다고 했어. 산손날을 넘어가면 안 된다고 했어. 여기 언덕을 산손날이라고 그랬어. 그래가지고 항시 동네를 돌아서 절리 상여가 나갔지 일리 나가는 일은 별로 없어. 쌍도의 전설어린 선도1리 마을(출처:서천신문 1997년 3월 15일자) (조사자: 상여가 여기를 넘어가면 안 됐다구요?) 응, 안 됐어. 외지서 오는 사람들이 차로 막 싣고 넘어가잖아. 옛날부터 거기는 넘어가면 안 된다. 넘어가면 옛날에 동투난다 고. 동투난다는 것이 어떤 악귀가 방해 부린다던가 그런 나쁜 전설이 있어.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려. 미신을 섬기는 사 비인현지( 庇 仁 縣 誌 )에는 옥녀봉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월하성 사람들에게 전승되는 이야기에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옥녀봉이라 부르는 산을 옛날 어른들은 높을 상( 上 ) 자를 써서 옥녀상봉( 玉 女 上 峰 )이라고 불렀다. 옥녀상봉이라 부른 이유는 이 근방에서 제일 높기 때문이 다. 옥녀봉에서 예전부터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는데, 정성들여 빌면 비가 온다고 해서 떡과 밥 을 많이 해 가지고 빌면 금방 비가 내렸다고 한다. 또한 산 닭을 잡아 가서 피를 내어 땅에 파묻기도 했 다고 한다. 람들 말이 동투여, 동투. 나가는 길 거기다 이런데다가 거리제라고 음식을 쩍 벌이고 귀신들한테 밥준다하고 그렇고 그랬어. 위의 자연지명은 길과 언덕뿐만 아니라 바다 속의 암초까지 붙어있는데 자맹이, 독배, 가문여, 목정이 등이 있 다. 이 지명의 유래 역시 알 수가 없으나, 바닷속 암초에 대해 자세한 지명이 붙은 것은 배를 발로 삼아 바다를 다니는 그들의 생업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90년대 초반으 로, 마을의 해안가가 태풍과 해일로 인해 손상된 뒤, 재정비하였다. 022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23

분말 알찬 장골 민동골 산손날 솟뜸 도내쁠 당산 할아버지당 옥녀봉 할머니당 장벌 승적굴 목여(목정) 가문여 두자맹이 자맹이 증뱅이 월하성의 자연지명과 위치 월하성 주변 바다 지형도 024 90년 우리동네 어떻게 달라지나 - 서면(출처:서천신문 1990년 2월 5일자)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25

월하성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월하성에 거주하지 않으면서 명당을 찾아 묘를 쓴 사람들이다. 월하성에는 순흥안씨, 도둔이씨 등 월하성 마을에 살지 않는 사람들의 묘가 있다. 이 중에서 도둔이씨는 도동이씨 라 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경주이씨의 일파로 주변 마을인 남촌 도둔리에 사는 이씨를 일컫는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도둔이씨와 말자지 바위 이야기 김의환( 金 義 煥, 남, 1948년생) 어른들 말씀이 도동 이씨가 산소가 있어요. 그런데 저기, 옛날, 저 보며는, 사람이 많잖아요. 지금도 옛날 어른들이 거기를 인 자. 참 옛날은 인제 절도 많았고 중이 지나가면서 보니까, 거기가 참, 말 그거를 안 자르면 이서방네가 벼슬을 해먹게 생겼더라 는 거여, 그게. 그래서 동네서 어려서부터 시키면 인자, 그러면 이씨네 시제를 남촌에서 여기로 다녔으니까. 그 때 이제 벼 슬을 뭘 했냐면, 지금으로 말하자면 감사, 뭐여, 군수정도 되는가본데요. 진사 벼슬인데, 지금 보면 군수나 뭐 이런 거. 가만히 보니까 오늘 아니면 큰 벼슬을 해 먹게 생겼으니까 지나가는 중하고 짰다 이거야. 벼슬 못 해 먹게. 중이 물었지. 이 사람들이 산소가 어떤 산소며 이런 거. 그래야 가서 이야기를 할게 아니야. 남촌을 가서 지나가면서 보니까 말 자지를 짤 라야지 안 짜르면 큰일 난다고. 그래서 그걸 잘랐데. 자기네 집안들 다 가가지고. 짜르고 나니 거기서 피가 나더래. 거기서. 어른들 이야기가. 그러니까 이서방네 그 뭔가 하면 보는 사람이 있었던가봐. 그 잘라서 우리 집안 망했다고. 그 빨리 붙여 89년 우리고장 5대 뉴스(출처:서천신문 1990년 1월 1일자) 야 한다고. 짜른게 붙나. 옛날 세멘이 그, 그 하얀 거 석회라나? 그거 그걸 갖고 와서 붙이려니 붙나? 그게 안 붙지. 그래가지고, 이맹기란 사람도 벼슬도 못 하고. 똑똑했던가벼. 옛날 사람이지, 말 타고 댕겼지. 옛날에 말 타고 댕기던 사람 이 누가 있어 말 타고 지나다니니? 벼슬한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하니까, 원님이 샘이 나서 원이 저 놈을 잡아들여라. 이맹 나. 월하성 마을의 시작 마을의 주요 성씨 홍두표( 洪 斗 杓, 남, 1932년생) 우리 부락이 어떻게 조성되었느냐 그 이야기를 조금 들은 것은 김홍서라 그랬어, 할아버지가. 항상. (조사자 : 김홍서요?) 기라는 사람을 잡아 들여라. 잡아들여서 떡 하니 무릎을 꿇여 놓고 앉혀놓으니까, 니가 벼슬 한다고, 시원찮은 거 해가지 고, 말을 타고 다니니까 도리상 안 맞는 일이다, 말여. 그러니까 이맹기란 사람이, 이맹기가 자기 말 타고 다니는데 누가 함 부로 뭐라 하느냐, 말여라라고 해서 원이 꼼짝을 못했단 말이여. 그런데 그 걸 짤라 먹고 그 후로부터 별 일을 못해먹고. 이 서방네 산소가 잘 지었데요. 누가 봐도. 그기가 잘 사는 집인데. (조사자: 샘 낸 사람은 누구죠?) 여러 사람이지. 남촌서도 그러지. 여기서도 그러지. 그걸 자르구서 벼슬도 못해먹고. 응, 그런게. 김가 하고 홍가하고 서가하고. 이 세 분이 들어와 가지고서, 마을을 개척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어. 충남 서천군 도둔리(중리) 이상하( 李 相 夏, 남, 1947년생) 월하성 마을은 김씨, 홍씨, 서씨, 최씨, 한씨, 이씨 등 여러 성씨로 이루어진 각성바지 마을이다. 마을사람 들은 경주김씨, 남양홍씨, 대구서씨의 순서로 마을에 들어왔다고 이야기하며, 현재에도 이 세 개의 성씨 가 마을에서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이들의 성씨가 어떠한 연유로 마을에 들어와 무엇을 하 고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월하성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성씨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마을의 서쪽에 있는 옥녀봉은 옥녀가 비단을 짜는 모양인 옥녀직금형( 玉 女 織 錦 形 )의 명당이라고 한다. 그래서 풍수지리 하는 사람들이나 기를 받으려는 무속인이 찾아오기도 한다. 연구자들이 머물던 2009년 7월에도 한밤중에 갑자기 징소리가 나서 선창가로 사진기와 녹음기를 챙겨 현장에 다다르면 무 속인들이 지전과 색동옷을 태우며 작은 굿을 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무속인 외에도, 명당인 7대 정승지지. 그 묘지가 7대 정승이 나온다고. 우리 첨의동 할아버지인데 7대 정승지지 이렇게, 이렇게 7개라는 거야. 어 렸을 때. 그리고 그 앞에가 여자의 자궁성분이 있고 또 심이 있어 남자의 성기. 그래서 녹을 치는. 그 잡은 게 큰. 깨져가지 고. 그게 점 자손을 많이 폐지 당했다는 게. 중이 잘라야지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잘랐는데 거기서 피가 났다고 해. 거기서 연결해야 된다고 해서 연결했는데 또 떨어졌어. 이맹기라고 그 진사가 나왔는데 28살에 팥죽 먹어서 죽었어. 선비들은 팥죽을 먹는데, 중앙부서에 있었는데, 친구들이 팥죽 을 먹여서, 독약타서 죽였어. 장가만 갔지 자식도 못 갖고 죽었어. 양자시켰어. 월토지. 그 분이 그 못을, 산소를 28살에 썼어. (조사자: 그렇게 보면 월하성까지 도둔이씨네 땅이었다고 봐야 하나요?) (우리 땅이) 만천평이 있었어. (서면에) 여덟동네가 있는데 우리 동네가 진짜고 월하성은 귀퉁이야. 나온 것은 우리가 차 지하고 귀퉁이야. 그래서 연수원 길로 길을 내 달라고 해서. 묘자리라는게 내룡 찾아 가는 거여. 연수원은 구탱이여. 026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27

우리할아버지가 돌림자가 기자이거든? 우리할아버지와 제종간이여. (조사자: 그럼 거의 한말사람이네요?) 그럼. 할아버지끼리 제종. (조사자: 그럼 저 말자지 잘린 것도 그 때, 일제시기 다 들어와서겠네요.) 그려. 위의 이야기는 월하성의 주산인 옥녀봉에 있는 말자지 바위를 두고 채록된 것으로 월하성 사람들과 주 변 마을과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월하성 사람의 입장에서 본 도둔이씨와의 관계 를 파악해 볼 수 있으며, 두 번째 이야기는 도둔이씨의 입장에서 본 월하성을 알아볼 수 있다. 위의 이야 기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옥녀봉에 도동(도둔) 이씨 산소가 있어 남촌에서 월하성으로 시제를 다녔다. 말자지가 잘리던 당 시, 구한말에 도둔 이씨는 진사벼슬을 했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군수 정도 되었고 위세가 대단해서 월하성 사람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 당시 이맹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머리가 좋았고 그 때에는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말을 타고 다녔다. 옛날에는 말을 타던 사람도 적었고, 벼슬을 하지 않는데도 말을 타고 다니자 이맹기가 벼슬을 한다는 소문이 났다. 이 소문을 들은 원님이 샘이 나서 이맹기를 잡아 들였 다. 잡아들여서 무릎을 꿇리어 앉혔다. 원님이 네가 벼슬한다고 헛소문을 내서 말을 타고 다니니까 도리 상 안 맞는 일이다 라고 말하자 이맹기가 이맹기가 자기 말 타고 다니는데 누가 함부로 뭐라 하느냐 고 말을 해서 원님이 꼼짝을 못했다. 그 정도로 도둔이씨의 위세가 세었다. 그 정도로 도둔이씨가 위세가 센 데에는 묘를 잘 써서 그렇다는 말이 있었다. 도둔이씨의 묘는 7 대 정승지지(政丞之地)라고 하여 암말의 자궁성분과 숫말의 성기가 있어 자손이 번창 할 자리라고 했다. 마을사람이 보니 숫말의 성기를 자르지 않으면 도둔이씨 중에서 또 누가 큰 벼슬을 할 것 같았다. 옛날 옥녀봉에 있는 도둔이씨(경주이씨) 묘 말자지 바위 전경 028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29

에는 절도 많고 중도 많아서, 지나가던 중과 마을사람들이 모의를 했다. 그래서 중이 남촌을 지나가면서 말 자지를 잘라야지 안 자르면 큰 일이 난다고 말해 도둔이씨의 집안에서는 말 자지를 잘라버렸다. 자르 고 나니 거기에서 피가 났다. 그런데 도둔이씨의 집 안에서도 풍수지리와 앞날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있 어, 말 자지를 잘라서 우리 집안 망했다. 그걸 빨리 붙여야 한다. 고 말했다. 당시는 시멘트가 아니라 하얀 석회가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와서 붙이려고 했으나 붙지 않았다. 이맹기는 진사(또는 중앙관료)가 되었 는데 28살에 친구들이 준 독약을 넣은 팥죽을 먹고 그만 죽었다. 그런데 그는 장가만 갔지 자식도 없었다 고 하며, 그 이후로 도둔이씨의 집안에서 큰 인물이 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의 시기는 주인공인 이맹기가 구술자(82세)의 할아버지와 제종 간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구한말 경으로 추정될 수 있다.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이며 진사 또는 중앙관료를 했다는 내용이 있어 조 선왕조실록 등 문헌자료를 찾아보았으나 이맹기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시대성 을 감안할 때 비교적 근래까지 도둔이씨는 월하성에 살지는 않았지만 월하성 사람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쳐왔던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진사벼슬을 했던 도둔이씨 사람들은 남촌에서 월하성으로 시제를 다녔고, 마을사람들에게 위세를 부려 월하성 사람들은 그들이 시키는 일은 모두 해야 했다. 그리고 월하성 사람들 은 도둔이씨 사람들이 더 높은 벼슬을 하게 되면 그들이 더욱 괴롭힐까 질투와 두려움의 마음을 가졌고, 중과 모의하여 좋은 기운의 상징인 말자지를 잘라버리게 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월하성 사람들과 주변 의 지역사에서 상호간에 어떠한 관련이 있었는지 알려줄 뿐 누가 각각의 성씨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떠한 연유로 월하성에 들어왔는지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마을의 입주시기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문자로 기록된 족보가 필요하다. 족보에는 사람의 생몰년도와 동시에 무덤의 위치와 이장( 移 葬 )여부가 표기되어 있어 언제 이들이 월하성 으로 입주해 왔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경주김씨의 족보는 김의환과 김상덕( 金 商 德, 남, 1968년생)이 가지고 있어 확인할 수 있었지만, 편찬과정에서 누락된 정보가 많아 이웃한 종천면 ( 鍾 川 面 )의 경주김씨 서천종친회 회장인 김만제( 金 萬 濟, 남, 1948년생)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경주 최씨의 족보는 최완수( 崔 完 洙, 남, 1935년생)에게 서, 대구서씨의 족보는 서태석( 徐 泰 錫, 남, 1930년 생)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양홍씨의 족 보는 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유실되고 항렬이 맞지 않아, 홍두표( 洪 斗 杓, 남, 1932년생)로부터 조부께 서 만든 가승을 구했다. 그러나 족보가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기입과정에서 잘못 되었을 수 있기 때문 에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따라서 족보와 함께 파 경주김씨 서천종친회 회장 김만제 악해야 할 것은 각 성씨의 무덤과 그 위치이다. 경주김씨 상촌공파 가계도 경주김씨( 慶 州 金 氏 ) 경주김씨는 마을에서 사실상 제일 먼저 들어왔다고 이야기되지만, 경주김씨의 족보에 따르면 김의환으로부터 위 로 4대조부터 월하성에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위로 4대조부터 무덤의 위치가 월하성으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 이다. 경주김씨의 무덤은 원래 옥녀봉에 있었는데 서울시 서천연수원을 건설하면서 2008년 옆 마을 호동으로 이 장했다. 호동에는 김의환 부친의 묘와 모친의 가묘가 있으며 옆에는 6대조까지의 납골묘가 있다. 모두가 옥녀봉에 묻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6대조부터 월하성에 살았다고 볼 수 있다. 대구서씨가 11대 이전에 들어왔지만 아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 반면, 경주김씨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대구서씨와 경주김씨 간의 거주지 위치와 생업의 차이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대구서씨의 경 우 민동굴과 알창이 쪽, 바닷가에서 약간 떨어져 산에 인접한 곳에 살았던 반면, 경주김씨는 바닷가 근처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주김씨들이 바닷가에 살면서 마을에서 거의 처음으로 어업에 종사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마을에서 전승되는 살막골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전설로 뒷받침된다. 21 世 22 世 23 世 24 世 25 世 26 世 27 世 28 世 29 世 철환 기환 상환 준환 두진 노완 상덕 진환 기현 노종 만희 상목 기영 동변 영환 기원 대구 장진 노신 인희 상기 영제 동화 덕환 주한 노건 명희 상곤 명제 주만 상건 광제 동현 완제 민정 언제 동일 동식 영희 상기 혜제 동교 벽진 노근 천희 난제 동민 준희 상식 민제 시명 상돈 충제 동각 상문 권제 노수 수옹 상렬 완제 수의 철옹 의건 동하 동인 030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31

띠섬 살막골의 유래 김의환( 金 義 煥, 남, 1948년생) 왜 살막골이라면 옛날에 우리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형제분이 거기서 살을 매 가지고서. 말하자면 거기다 막을 지 었어. 살막을. 가깝고 하니까. 여기는 동네란 건 지방 가고 없고. 이 양반들이 고기는 흔치, 고기를 나르려고 하니 힘이 든 다 이거야. 여기서 막은 많으니까 형제들이 집을 지었드래요. 그래서 나무 반하고 집을 지어서 물고기를 잡아다가 여기로 갖고 나와 서 여기는 가까우니까 여기서 들어와서 팔러 다니시고. 저기 저 뭐야, 그 때는 오진이라고 했는데 시장이 있었데요. 거기 로 팔러 다니시고 그랬다고 하더라고. 거기가 살막골이여, 살막골. 살막골은 김의환의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형제가 띠섬목에 살을 매었기 때문에 붙은 지명이다. 그 러나 원래 살던 곳과 살을 놓은 곳이 너무 멀어 띠섬목에 소나무를 베어다가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래 서. 그 곳을 살막골이라 불렀으며, 배를 타고 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에 종사했던 것이 아니라 바닷가에 서 소규모의 살을 만들어 지어 고기잡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지명은 살막금으 로 부른다. 띠섬 도둑이야기 김의환 띠섬서 그 도둑놈이 심하게 있었데. 거기가 섬이라도 가갖고 훔치러. 우리 할아버지가 그래도 얼마나 센지, 훔쳐가는 거, 대꼬장이라고 있어요. 돛 달고 다니는 거. 그게 얼마나 큰지. 그게 혼자 자빠뜨려 놓으면, 그 놈들이 다 도망가서 사람들이 서로 다 자빠뜨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보통 사람은 근력이 없어서 못 자빠뜨리니까. 그걸 사정없이 뉘여버리니까. 질겁 을 하고 가버렸지. 도둑놈이 그래서 안 왔다고. (조사자: 그 할아버지는 띠 섬에 살았던 거에요?) 살막금에서 바라본 쌍도 그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버지지. 할아버지지. 갖다 대접을 혀라. 그래가지고 막걸리를 두 되를 갖다가 드리니까 잡수더니 발로 돌을 그냥 끄떡끄떡하니께 원이 그러 이 이야기에서 경주김씨가 마을에 들어와서 처음에 했던 일이 살을 놓아 물고기를 잡았던 일임을 알 수 있으며 첫 거주지가 지금 살막골(살막금) 이라 불리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경주김씨들이 덩치가 크 고 힘이 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힘이 세다, 몸이 날래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더래요. 저 놈이 큰일을 혀도 할 놈인데, 힘도 장사고, 이 돌을 둥글려서 깨끗이 치우면 죄를 면해 줘야겠다해서, 우리 할아버지가 둥글려서 그 원의 앞에 있는 건물 앞에 있는 돌을 싹 다 치웠데요. 그래서 원이 뭐라고 하셨냐며는 과연 김 장군이다. 근력이 세고 돌을 둥글려서 다 띠었으니까. 그 술을 원을 시켜서 하인을 시켜서 먹기 싫도록 갖다 바쳐라. 해 갖고 저도 별명이 김장군이에요. 우리 할아버지 별명을 따라서. 그래서 비인이나 이런데 가도 월하성 김장군네집 가자 계란 훔친 김장군 김의환 하며는 택시기사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가지고 참 재미있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근력이 세고 하셨어요.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별명이 김장군이었어요. 그래가지고 그 배고픈 시절이라. 비인에 월명산, 거 기에 계란, 그 닭을 원이 많이 키우고 하니까. 그 계란을 훔쳐서 드시다가 그 원한테 들켜가지고 그랬는데. 그 원이 집 앞에가 돌이 많아가지고 자네가 김장군이라는 별명을 띠고 있는 과정에서 자네가 여기 있는 돌을 싹 치워주며는 그 죄 를 면해주겠다라고 했대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그 뭐, 근력 힘이 좋으시고 하니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우리 할아버지가 원, 그 분더러 일은 제가 전부 해 드릴 테니까, 돌 혀서 해 드릴 테니까, 술 좀 달라고. 그래가지고 그 막걸리. 그 놈을 작은되를 가져다 드리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시면서 이것 갖고는 안 맞는다고, 두 되를 달라 고. 그래가지고 원이 하인들을 시켜가지고 야, 김장군이라는 사람이 근력이 얼마나 센지는 몰라도 막걸리를 원하니까 기운 세다, 날래다는 인물의 성격은 김장군, 노루 라는 별명으로 압축되는데 이러한 별명은 김장군의 후 손에게 대를 이어 전한다. 김의환은 지금도 김장군 으로 불리며 그 집은 김장군집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한 할아버지가 산에서 나무를 베어 파는 일을 해서 노루 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별명은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김의환, 김의준( 金 義 俊, 남, 1960년생), 김의성( 金 義 成, 남, 1964년 생) 3형제는 큰 노루, 작은 노루, 막내노루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주로 둘째인 김의준을 노루 라고 마을 사람 들이 지칭한다. 032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33

살막금 전경 034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35

대구서씨 가계도 대구서씨( 大 邱 徐 氏 ) 월하성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성씨는 대구서씨인데 이는 대구서씨의 족보에 서태석으로부터 11대조부터 월하성에 들어왔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족보에 표기된 무덤의 위치 중에 월하성이라 직접적으로 표기된 곳은 없다. 그 런데 무덤의 위치로 민등곡( 民 登 谷 ), 알찬곡( 謁 贊 谷 )이라 표기된 곳이 나온다. 민등곡, 알찬곡이 현재 월하성에서 민동굴, 알창이로 불리는 지명임을 감안할 때 이곳에 그들의 무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곳에 대구서씨의 선산이 있으며, 17대조부터의 무덤이 있다. 17 世 문익 18 世 종등 19 世 명곡 20 世 기수 학수 의수 21 世 유신 22 世 경보 23 世 재순 인순 24 世 상국 상진 25 世 병구 병수 26 世 연덕 연규 연환 연권 연은 27 世 규석 은석 완석 태석 준석 양석 홍석 의석 우석 두석 인석 경석 순석 옥석 만석 성석 경예 경화 28 世 명원 남원 세원 재원 동원 숙자 영숙 영희 승원 영애 영순 영자 만원 명우 양원 장원 계원 염주 순원 복원 순미 미정 29 世 홍주환 동현 효정 036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37

남양홍씨( 南 陽 洪 氏 ) 가계도 남양홍씨( 南 陽 洪 氏 ) 남양홍씨의 경우도 가승을 따르면 6대조부터 들어와, 월하성에 들어 온 적어도 200년 이상이 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남향홍씨가 서천에 들어온 시기는 고려시대로 홍두표( 洪 斗 杓, 남, 1932년생)는 추측하였지만, 들어온 이후 10대조 간의 자료가 없다고 한다. 월하성으로 들어온 남양홍씨는 조운업에 종사하며, 망선을 운영했다고 한다. 도 둔리 정동마을의 김용규(남, 1913년생)도 월하성의 남양홍씨들이 재력이 있어 망선을 운영했었던 것 같다 말했다. 또한 홍이표( 洪 二 杓, 남, 1931년생)도 자신의 할아버지가 망선을 운영하였으며 먼 바다까지 나갔었다고 했다. 홍덕원 홍영원 병화 병수 병우 병 병세 경섭 예섭 정섭 관섭 계섭 차섭 재섭 재현 광도 재선 재문 재혁 재성 재곤 재만 종 종혁 종규 종안 종렬 종용 종달 종현 종대 종우 종영 종규 종우 순량 순대 순연 순국 순동 순관 순욱 순문 순필 순근 순권 순모 순남 순 순원 순덕 순권 순무 순동 순길 순명 순력 순양 순안 순복 순찬 순창 순영 순돈 순갑 순환 순화 월표 달표 춘표 만표 은숙 정표 장표 영표 문표 진표 창표 운표 성표 현표 표 차표 장표 홍표 안표 상표 명표 신표 표 연표 약표 점표 남표 영표 이표 일표 구표 동표 관표 길순 인숙 표 표 봉표 용표 창표 정화 두표 철표 운표 한표 완표 경표 표 성칠 성기 성출 성익 성 성권 성완 038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39

망선 홍이표( 洪 二 杓, 남, 1931년생) 옛날에 말하자면 우리 아버지 때 배를 해가지고는, 망선이라고.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망선을 지었는데, 배도 다 재산이 야. 그 때는 아주 부자로 살았더라고 하더라고. 우리 형제들 전에. (조사자: 그러니까 아저씨 할아버님이?)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홍이표는 망선을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그만두었다고 구술하였으므로 월하성에서 남양홍씨가 망선을 그만둔 것은 1930년대 이전으로 파악할 수 있다. 망선은 한국수산지( 韓 國 水 産 誌 )의 어구도해편에 간략히 적혀있는데, 한국수산지가 1909년에서 1911년 사이에 저술된 것을 감안하면, 월하성에서 망선을 운영하 던 시기는 1900년대 이전부터 1930년대 까지로 한정할 수 있다. 한국수산지 망선( 網 船 ) 강원도 북부, 함경도 연해 및 전라도 서북 등 각 도( 道 ) 연해에서 원래 사용한 원해포망으로 강원도 이북에서 도미, 청어, 삼치, 방 어, 전어를 잡고 전라도 서북에서는 조기, 민어, 준치, 갈치, 달강어, 방어 등을 어획하는데 사용한다. 어느 것이든 규모가 다소 크 며, 조선인의 어망으로는 발달한 것이다. 구조 - 그물의 재질은 일본산 면사를 사용하며 고기를 잡는 부분은 눈이 1촌, 양 날개 부분은 눈이 1촌 2분에서 2촌 2분에 이른 다. 물에 뜨는 부분은 가로 총 길이 120발, 망건 어포부 18발, 양익부는 점차 좁아져 그 끝은 12발이 된다. 부자는 참나무껍질 5, 6매를 겹쳐 직경 4촌 5분, 두께 3촌의 원형을 이룬다. 중앙에 구멍을 뚫어 부자망을 관통시킨다. 부자망은 칡껍질 3출기에 지름 1촌, 길이 120발이며 이것에 어포부는 1발에 7개를 넣고 양끝으로 갈 수록 점차 수가 적어져 1발에 4개의 부자를 부착한 다. 추는 200~300문의 중량인 자연석을 사용하며, 2, 3발에 1개를 넣는다. 사용법 - 넓이 1장 정도의 망선 1척과 넓이 6척 정도의 수선( 手 船 ) 1척을 사용하며, 망선에는 어부 12인, 수선에는 3,4인이 승 선한다. 그리고 원해[ 沖 合 ]에 나가 어군을 보고 그것을 포위한다. 망선에는 망의 交 又 部 로부터 어군의 遁 逸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 해 竿 을 해중에 집어넣거나 礫 石 을 투입해 어군을 어 포부로 몰아넣으면서 양익부에서 점차 망을 끌어당 겨 어포부에 닿게 한다. 이 사이 수선은 풍향 조류로 남양홍씨 묘 남양홍씨 가승 월호리( 月 湖 里 )가 표기된 족보 인해 망의 압박편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종부 자의 주위를 돌며 이것을 편다. 또 풍어 시는 어군을 위해 부자부의 침강시키는 양부자망을 보지한다. 기 타 어획물의 적재어군의 탐색 등을 하는 이러한 어망 망선은 주로 돈을 가부시키 03 하여 운영하였는데, 돈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 친분대로 운영했다. 농 촌의 부자들과 가부시키하면 먹고 쓰고 어장에 필요한 돈을 다 쓰고도 남은 돈을 갈라 먹을 수 있었다. 우 선 선원 반, 선주 반으로 가르고 선주의 몫을 다시 가부시키한 사람하고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말기에 조선을 방문한 외국 선교사나 군인들의 일기와 항해록에서도 이 시기보다 이른, 19세 은 해심 12심 내외의 장소에서 사용하며 1일 사용회 수는 5, 6회에 달한다. 망선의 조업방식(출처:한국수산지) 03 가부시키 는 일본어 かぶしき에서 비롯한 말로, 일본어 かぶしき는 주식, 주권, 주주권( 株 主 權 )의 의미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일정한 돈을 주식회사처럼 투자하 여 운영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040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41

기 초반의 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영국에서 1818년에 출판된 조선 서해안 및 류큐 제도 발견 항해기(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eo-Choo Island) 는 조선 서해안 및 오키나와 제도에 대한 항해기로 항해일지와 오키나와어의 어휘를 담고 있다. 이 항해기는 저자 바실 홀(Basil Hall) 04 이 항 해도중에 쓴 항해일지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1816년 2월 9일, 월리엄 애머스트(W.P. Amherst) 05 가 인솔하는 중국파견사절단은 영국의 프리깃함 교차하지 않았다. 돛대는 가느다란 대나무 대로 수직으로 갈라져 엮여 있었다. 바람이 없거나 돛을 이용하지 않을 때는, 돛배는 보기에 한낱 긴 막대기에 지나지 않는 엉성한 노( 櫓 )를 사용하여 움직였는데, 실제로는 충분히 효과적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끄트머리(고물)에 둥그스름하고 편편한 널조각(키: 배의 방향을 조정하는 기구)이 가죽끈으로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물 (뱃머리)은 윗부분이 사각형으로 수면에서는 비스듬히 작은 각도로 올라와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석탄바지선의 배 앞부분과 비슷하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길죽하게 나와 있었다. 배 널빤지는 모난 나무못으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우리들의 방식처 럼 반듯하지 않고 비스듬히 박아 넣었다. 10 06 알세스트 호와 슬루프함 07 라이러호에 탑승하여 영국을 떠낫다. 그 해 8월 9일 사절단은 서해에 면한 (중국의) 바이허( 白 河 ) 어귀에 상륙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절단을 수행한 알세스트 호와 라이러 호는 서해 동쪽의 조선연안을 향해 출항했다. 두 함정은 사절단을 이끄는 애머스트가 육로로 광둥( 廣 東 ) 에 돌아갈 때까지 중국에 머물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 동안 그 때 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정확한 정보가 없는 조선의 해역을 조사하기로 했다. 08 대청군도 09 에서 시작된 탐사는 남쪽으로 이어져 외연도를 거쳐 비인만으로 이어진다. 월하성의 앞바다는 지도상으로 비인만의 서쪽 끝부분에 속한다. 비인만은 바 실 홀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바실만( 灣 )이라 명명하며, 이 곳에서 조선인 관료를 만나는데, 이 때의 일은 조 선왕조실록의 순조대왕실록 16년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이 곳에서 바실 홀은 조선의 배에 대하여 기록하는 9월 7일 이 만( 灣 )을 나온 뒤 9월 6일, 7일 이틀 내내 섬 사이를 통과하여 서남으로 향했지만 주민들을 만나지 못했다. 사실 주민을 목격하긴 했지만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섬들을 지나갈 때 옹기종기 모여 앉아 우리들을 쳐다보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였다. 그리고 일종의 선미루( 船 尾 樓, 고물)에 열 두명 정도의 어부가 타고 있는 고깃배 몇 척을 본 적도 있는데 낚시 달린 낚싯줄이나 가끔은 그물로 분주히 고기를 잡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배 두척이 한데 묶여 있었다. 겉모양은 아우트리거(outrigger) 11 였는데, 닻을 내 려 고기를 잡을 때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노, 돛, 마스트를 그 위에 쌓아 올린 것 같았다. 이 배의 마스트는 테임즈 강의 바지선처럼 돛 대 꼭대기에서 배 끝까지 고팻줄로 내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게끔 되어 있었다. 12 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으며 위에서 언급한 망선과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망선은 주로 먼 바다에 나가서 어업을 했다. 주로 조기를 잡았는데, 조기는 가까운 곳 보다 먼 바다 1816년 9월 4일 (앞 부분 생략) 조선의 배는 중국의 배와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이물(뱃머리)과 고물(배꼬리)은 수직이 아니라 수면에서 약 30도 각도로 내밀 에서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조기의 이동을 따라 배를 이동하였으며 한 번 바다로 나가면 1, 2개월은 배에 서 보냈다. 봄에는 전라북도의 칠산바다 로 어업을 나갔다. 칠산바다는 전라북도 영궁관 백수면 앞바다의 7개의 섬에서부터 법성포 앞바다를 거쳐 위도, 곰소만, 고군산군도의 비안도에 이르는 해역을 이른다. 고 있었다. 모든 밧줄은, 풀어놓는 우리와는 달리 끄트머리가 접힌 채, 밧줄 물레의 릴(reel)과 배럴(barrel) 위에 돌돌 감겨 있 었고, 긴 띠를 매우 정교하게 꼬아서 만든 것이었다. 밧줄물레틀 양 끝 단에 손잡이가 달린 물레바퀴(물레의 살)가 2개 있었는데 손잡이 가지들을 잡고 여러 명이 한꺼번에 큰 힘을 가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닻줄에 붙어 있는 닻은 물에 가라앉는 검정색의 투박한 나무재질로 구부러진 팔꿈치 모양의 닻가지 2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닻가지(일명 닻혀)와 닻기둥(닻채)의 교차점에 돌맹 망선의 이동지역 홍이표 (조사자: 그러면 예전에 할아버지께서 망선하실 때 그 때가 한 얼마정도 전이에요? 지금으로부터?)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망선했다니께. 그런게, 왜 그러냐면 전라도 가며는 우도(위도)라고 있어. 우도. 우도에 가서 우리 아 이로 달아맨 것도 있었다. 긴 닻기둥과 닻가지가 닻꼭지 가까이에서 짧은 닻장과 엇끼어져 있었는데, 유럽식처럼 닻기둥 끝에서 04 바실 홀(Basil Hall, 1798. 12. 31) : 1798년 12월 31일, 후에 영국왕립학술원 총재가 된 제임스 홀 경의 둘째아들로 영국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1802년 학 업을 중도 포기하고 14세에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엄격하고 교훈적인 훈련과정을 거친 후 그리고 1808년 해군사관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 동인도에 파 견되어 3년간 복무한 다음, 봄베이에서 건조된 배를 지휘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애머스트사절단을 수행하기 위해 라이러 호를 타고 극동을 항해 한 후에 1817년 함장(post captain)으로 승진했다. 05 윌리엄 애머스트(William Pitt Amherst, 1773.1.14~1857.3.13) 영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 인도 총독을 지내며 제1차 버마전쟁을 일으켜 벵골지방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서머싯 출생. 1814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인도에 대한 무역독점이 폐지되자, 1816년 광둥무역을 직접 개선할 목적으로 특파사절로 베이징( 北 京 )에 파견 되었으나 청나라 황제를 알현( 謁 見 )할 때 삼궤구고두( 三 跪 九 叩 頭 :경의의 뜻으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9번 절하는 것)의 예를 거부하는 바람에 황제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1823~1827년 인도 총독으로 재임하던 중에는 제1차 버마전쟁을 일으켜 인도 벵골지방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상금 100만 파운드를 얻었으며, 1826년 백작( 伯 爵 )의 작위를 받았다. 1835년 캐나다 총독에 임명되었으나 그 직후의 개각으로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 하향( 下 鄕 )했다. 06 프리깃(frigate)함 : 상하 두 갑판에 포를 장비한 쾌속 범선. 07 슬루프(sloop)함 : 윗갑판에 함포를 정비한 소형 군함. 08 바실 홀(Basil Hall). 2003. 10일간의 조선 항해기. 김석중 옮김. 삶과 꿈. 17p. 09 원래 황해도 옹진군에 속했으나, 한국전쟁 후 경기도에 편입되었다가 지금은 다시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속하며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로 구성되어 있다. 10 위의 책. 53-55pp, 인용. 원문은 바실 홀. 2000. (근세동아세아서양어자료총서11)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eo-choo Island. 경인문화사. 43p. This cable in these boats is wound round a large reel or barrel; to the ends of which two wheels with handles are fitted, which enables a considerable number to apply their strength at the same moment. The anchor is made of a dark coloured, heavy wood, with a long shank and flukes, and a short stock crossing the former, near the crown of the anchor, and not at the end of the shank, as with us in Europe. The mat sails are divided into horizontal divisions by slender pieces of bamboo. When not under sail, the boats are moved by oars having a circular piece of wood tied to the end, and are steered by a large scull over the stern. The bow is square above, but rises from the water in a slope, making a small angle in the water, like the end of a coal barge, but overhanging more. The planks are fastened together by means of square tree-nails, which pass in a slanting direction through the plank, and not straight, as with us. 11 아우트리거: 뱃전에 붙인 쑥 내민 팔뚝 끝의 쇠몽둥이 또는 이런 노걸이를 단 배. 12 위의 책. 74p. 인용. 원문은 바실 홀. 2000. (근세동아세아서양어자료총서11)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eo-choo Island. 경인문화사. 57-58pp. From this bay we steered amongst the islands, during all the 6th and 7th, to the S. W. before the natives were met with again; we saw them indeed, but never got near enough to converse with them. They were frequently observed seated in groups watching us on the islands which we passed. We saw several fishing-boats, with a crew of about a dozen men crowded on a sort of poop. At a little distance these boats apeared to be formed of two vessels lashed together. This appearance we believe to be caused their having an outrigger on one side, on which their oars, sails, and masts are piled, in order probably to keep the boat clear when they are at anchor fishing. Their mast is lowered down and hoisted up by means of a strong table from the mast-head to the stern, as in the barges on the Thames. 042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43

해동지도 전라도 만경현 고군산군도(출처: 규장각) 삼한일람도 전라도 칠산바다(출처: 규장각) 버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고. 가보니까. 그 노인네들이 한 80살 100살 먹은 사람들이 니가 누구냐 하고 물어보면, 아무개라고 하니까, 수염이 이렇게 나가지고, 홍순구라고 하면, 우리 아버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고. 전라도 가니 까 우리 집에서 밥을 많이 먹었다는 거여, 이 사람들이. 노인네가 일러주더라고. 우들은 모르지. 대뜸은 노인네가 이야기 를 하는데 잊어버렸어. 노인네가 일러준 걸. (조사자: 망선 한 게 몇 년 전이라구요?) 이 양반 안 생겨났을 때니까 오래됐지. 잊어버렸지. 백 년 이상 넘었겠지. (조사자: 망선은 몇 명이나 탔데요?) 열명인가, 열아홉명인가 탔다고 해쌌데. (조사자: 우리 마을에도 망선이 있었어요?) 옛날에. (조사자: 몇 대나 있었어요?) 그 때는 다른 사람은 없고 우리만 있었던가봐. 그 때 밥 꽤나 먹고 살 때 머슴들 둘 씩 두고 살았다고 하니까. 부자였데. 홍이표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망선을 운영하였는데, 자신이 배를 타고 전라북도 위도에 가서 할아버 지의 성함을 물어보았을 때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김용규는 칠산바다에서 어업이 끝난 후에 는 평안남도의 어영도에 가서 조기를 잡았다고 말했다. 어영도나 칠산바다나, 고군산군도에는 2~3톤이 넘 는 망선만이 갈수 있었고, 월하성에는 홍이표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망선이 1척 밖에 없었다. 이 내용으로 보았을 때 경주김씨와 남양홍씨는 똑같이 어업일에 종사하였지만, 경주김씨는 소규모 어 살에 기반을 둔 연근해 영세어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남양홍씨는 대규모 자본에 기반 한 알세스트 호와 라이러 호의 항로 -조선 반도 서해안을 따라서(출처: 바실 홀. 2003. 10일간의 조선항해기. 김석중 옮김. 삶과 꿈) 양중( 洋 中 )어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044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45

경주최씨 충목공파 가계도 경주최씨( 慶 州 崔 氏 ) 경주최씨 족보상에는 최완수( 崔 完 洙, 남, 1935년생)로부터 3대조부터 월하성에 들어왔던 것으로 보이며, 여러 성씨 중에서 가장 늦다. 그러나 월하성에 있는 경주 최씨의 묘는 6대조부터 있기 때문에 그 이전으로 보아도 타 당하다. 경주최씨의 묘는 월하성에서 나가는 길 왼쪽에 있는데, 묘지가 있는 곳을 월하성에서는 윗재(윶재) 라고 일컫는 다. 원래부터 묘가 윗재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민동굴, 알창이, 띠섬 등에 선산이 있었고, 주로 띠섬에 묘를 썼다 고 한다. 띠섬은 경주최씨의 종산( 宗 山 )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원래부터 띠섬은 원래부터 경주최씨의 소유가 아 니고 국유지였지만 명당이라 하여 매장했다. 그러나 12~13년 전에 섬에서 전부 이장했다. 월하성 한 가운데, 최완수의 집 앞에는 최승기( 崔 承 基 ) 라는 사람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최승기( 崔 承 基, 남, 1865년생)는 최완수의 할아버지로 마을에서 훈장 역할을 맡아 마을사람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 사람의 제자 들이 세운 비석으로 보인다. 최완수의 집은 이 비석 바로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비석집 으로 통한다. 26 世 영배 27 世 명기 승기 28 世 종만 종복 종윤 종순 29 世 복수 을수 덕수 용수 삼수 돈수 재수 완수 홍수 형수 30 世 병술 미영 진영 진화 병기 병천 병성 병한 길자 숙미 병숙 병규 병철 병현 병국 병두 병석 병모 진희 병영 병호 병란 병미 병열 병훈 병문 병을 병진 병선 병섭 병혁 병덕 병녹 31 世 지혜 진목 현희 준목 성철 성목 상미 상목 상희 영목 정묵 경묵 창묵 046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47

접장 최완수( 崔 完 洙, 남, 1935년생) (조사자: 예전에 훈장하셨다는 분이 누구시죠?) 종자 승자(종승) 이신 분. 승자 기자(승기)하고. 두 분. (조사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접장이셨잖아요.) 할아버지 접장이었고 아버지 접장이었고. 접장은 거시기 말하는 선생님이지. (조사자: 접장이 뭐에요?) 접장은 학교가면 거시기 있지. 교장 말고 학교 안에 급장 있지. 급장을 접장이라 그래. (조사자: 반장이요?) 반장. 교원 선생님이 하려면 애들이 많잖아. 그래서 일러만 주고서 시키는 게 접장이라 그래. 학교도 없고 하면서 방에 앉아서 한 20명 놓고 가르쳤지. 그 때는 학교에 시골 많이 없었지. 왜정 때 학교 있었을까? 있어도 학교에서 애들이 못 베겨 내니까. 나중에는 한문도 못 가르쳤어. 경찰들이 와가지고. 밤에 막 숨어가지고 와서 방에서 숨어서 가르쳤지. (조사자: 무엇을 가르쳤어요?) 한글. 한문. (조사자: 왜 공부했어요?) 우리글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랬지. 알아야지 모를 수는 없잖여. 글을 모르면서 한국사람이라고 할 수 없잖여. 배우 려고 하니까 가르쳤지. 족보에 기술된 최승기 보부상자료집: 비람좌지사소임책( 庇 藍 左 支 社 所 任 冊 ) 에 기록된 접장 최승기 그런데 위의 최승기라는 인물은 민속학자 임동권( 任 東 權 )이 1986년 편집한 보부상자료집( 褓 負 商 資 料 集 ) 地 권에서 1910년에 기록된 비람좌지사소임책( 庇 藍 左 支 社 所 任 冊 ) 과 관련이 있다. 이 소임책에는 비인현 에 소속된 보부상의 명부가 나오는데 여기에 최승기의 이름이 등장한다. 13 최승기는 비인( 庇 仁 ) 월하( 月 下 ) 접장( 接 長 ) 최승기( 崔 承 基 ) 라고 기술되어 있다. 월하는 월하성을 가리키는 말로 1910년에 이 소임책이 기술되었고, 최완수의 할아버지인 최승기가 접장으로 불렸다는 것 을 감안할 때 이 책에 나온 최승기가 최완수의 할아버지로 추측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보부상문 서에 접장이라 표시된 점을 보아 보부상의 접장도 하면서 동시에 마을 훈장노릇도 했거나, 이 시기 보부 상의 역할이 변경되어 상인과는 전혀 관계없는 신분조직이 되어 이 조직의 접장을 했었을 수도 있다. 보 부상 등 월하성과 관련된 상인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어디에 어느 성씨가 살았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근래에 들어 언제 어느 성씨가 들어왔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집집마다 의 가옥조사가 필요하며, 이 조사를 통해 원래 거주지가 어디였는지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까지 모두 50여 가구 중에서 30가구의 조사를 마쳤으며 이 조사를 토대로 그린 지도는 다음과 같다. 13 임동권. 1986. 보부상자료집. 민속원. 341p. 최승기의 업적이 세겨진 비석을 설명하는 최완수 048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49

월하성 마을 성씨별 거주지 이동지도 1960~80년대 2009년 경주김씨 경주김씨 남양홍씨 남양홍씨 경주최씨 경주최씨 대구서씨 대구서씨 기타성씨 050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51

다. 주변지역과의 관계 월하성주민들은 육지와 가까운 섬을 중심으로 근해어업에 종사해 왔다. 월하성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내 려가면 고군산군도의 북쪽부분을 만난다. 월하성 주민들은 주로 이곳에서 어장을 꾸리기도 하였으며 때 에 따라서는 더 먼 바다로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바다에서 잡아 온 고기를 바다 위에서 바로 판매하거 나 육로를 통해 판매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와 같은 근해어업에 종사해 온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배의 종류와 어종 그리고 어업을 하는 장소 또한 달랐다. 이 장에서는 고기를 잡았던 장소와 그 판매경로에 대 해 다루기로 한다. 1) 어업 1930년대 이후 망선을 이용하는 어업은 끝났지만, 망선의 뒤를 이어 중선( 中 船 )이 등장한다. 다만 중선의 어장은 일제시기 후기에 들어 남쪽으로 흑산도까지 더 확대되었고 북으로는 압록강 유역까지도 나갔지 만 대개의 경우 연평도 지역에서의 집중적인 조업이 이루어졌다. 월하성에서는 홍만표( 洪 萬 杓, 남, 1950 년생) 부친이 중선 2대를 운영했었다고 전하지만 자세하게 기억하는 사람의 수가 적어 연구영역을 주변 마을에까지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중선의 어업기술( 技 術 )에 대한 설명은 다음 장에서 설명하며, 이 장에 서는 주변지역과의 관계 내에서 고기를 잡고 팔았던 방식에 대해 설명을 한정한다. 중선어업에 대해서는 마량리의 유치봉(남, 1936년생)이 가장 잘 설명해 주었다. 그는 중선 중 가장 큰 것은 8~10명, 작은 것은 6~7명이 탔으며, 적어도 6명은 타야했다고 말했다. 중선어업은 칠산에서 한식사리 를 보고, 곡우사리는 마량, 연도, 입하사리는 멍대(대천주변) 에서, 그 다음에 연평도 쪽으로 올라갔다. 중선어업도 망선과 유사하게 조기잡이를 주로 했다. 조기잡이는 한식사리에 나갔다가 곡우사리에 연 평도에 가서 망종사리까지 다녀오면 끝이 났다. 돛을 단 풍선( 風 船 ) 은 바람이 좋으면 연평도까지 3-4일 정도 걸리지만, 바람이 없으면 10일이 걸려도 못 갔다고 한다. 입춘사리, 경칩사리, 한식사리, 곡우사리가 있는데, 배가 클수록 조업을 일찍 시작했다. 보통 풍선들은 한식사리부터 시작했다. 입춘과 경칩사리에는 기계배들이나 나갈 수 있다. 입춘사리에는 북풍이 강하고 날이 춥기 때문에 잘 나가지 않았다. 바람이 없을 때에는 중선을 타고 일주일은 가야 연평도에 도착했다. 연평도로 나가기 전에는 쌀, 물, 나무(배 위에서 땔 나무)가 마량리에는 없기 때문에 외지에서 사거나 마을에 들어온 장사에게 사가지고 갔다. 배 위에서는 보리밥은 찧어야 하기 때문에 쌀밥 외에는 먹지 못하였으며 소금은 봄에는 별로 가지 고 다니지 않는다. 별로 덥지도 않기 때문에 젓갈 담을 용도로 2~3가마 정도만 실고 갔다. 초여름에는 소 비량이 많아 조금 더 싣고 간다. 연평도에 도착하면 제일 처음 하는 일이 어구를 넣는 일이었다. 연평도에 는 대한민국 중선은 다 모였다. 강원도 배는 잘 모르지만 경상도, 전라도에서 온 배들로 가득 찼다고 한다. 연평도까지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작은 배는 모이지 않았다. 연평도에 가면 2달간 연평도에서 살아야 한다. 중선은 사리 때만 조업을 하고 조금일 때는 놀기 때문에 4~5일씩 한 달에 10일씩 놀았으며, 쉬는 동안에는 배를 묶어놓고 그물 손질도 하고 놀기도 했다. 대한민국 술집은 연평도에 다 모여 있었다. 거기에는 술 마시기도 좋아서 무조건 가서 외상을 달라 고 하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 갚고 도망 오는 사람도 많은데, 용케 찾아서 외상을 받으러 온다고 했 다. 유치봉도 외상하고 안 갚고 와서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말했다. 서천에는 배는 셀 수도 없고, 중선도 수백 척이 넘었다. 내도둔부터 마량리 끝까지 차지할 정도의 해안이 있는데, 이 해안을 세 겹으로 배가 쌓 아도 둘 곳이 없을 정도였다. 어장을 내릴 때, 다른 배들은 고기 잡는 곳을 일러주지 않는데, 중선배는 고기 잡는 성과를 일러주 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도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없어 고기를 잡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중선배 들은 물어보러 다니다가 고기가 잘나는 곳으로 모여 조업하게 된다. 중선은 섬 주변에서 조업을 할 수가 없고, 좀 많이 떨어져 있어야 한다. 바다에도 골이 있어 그런 곳에 가서 어장을 해야 훨씬 잘 잡힌다. 갈치 도 조기와 마찬가지로 잡는다. 한국수산지 중선 조업장면 052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53

개야도 전경 배에는 그물을 걸어두는 질대가 둘이라서 하나는 왕대로 다른 하나는 참나무로 만들었다. 질대를 벌려서 6시간을 두었다가 6시간이 지나면 배를 옆으로 두고 질대를 옆에 찬다고 한다. 그러면 사람 6명이 손으로 질대를 잡아당긴다. 따라서 사람이 많을수록 질대가 길었으며, 중선은 질대가 하나라서 하루에 4 번(썰물, 밀물, 썰물, 밀물) 잡아당겼다고 한다. 그래서 잘 하면 하루에 한 배를 잡기도 하고 아주 운이 좋 으면 한 그물에 한 배를 잡기도 한다. 똑같이 어업을 하더라도 그물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아 공치는 수 도 많았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아주 편한 일이지만 바람이 불면 도망(철수) 치면 되었다. 멀리 나가는 중선 이외에도 월하성 가까운 바다에서 어업을 했던 소형어선도 있었다. 이들 배는 잔배 또는 주낙배 라고 불렀다. 잔배 또는 주낙배 는 1~2톤 이하의 작은 배였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근해의 개야도와 연도 부근에서 어업을 했다. 이 배들이 어획하는 것은 주로 대하( 大 蝦 )와 조기였다. 대 하는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서 어획하기 시작했다. 조기와 대하를 잡으러 마을에서 멀리 나가는 것은 봄 에만 하는데 개야도와 개야도 뒤 쪽의 부용도(비응도) 에서 어업을 진행했다. 개야도( 開 也 島 )는 개화도 ( 開 花 島 )라고도 하는데 1875년 연행일록 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개화도는 큰 도회지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업으로 자생하며 봄과 여름 사이에 상고선 14 이 운집하여 돈과 곡식이 산처럼 쌓 또한 조선후기 지방지도에도 간략히 표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야도는 호구가 55호, 인구는 233명이고 관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봄에는 여러 곳에서 온 어선이 정박한다. 섬의 뒤쪽에는 층 층이 쌓인 암석과 날카로운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앞에는 어장과 어살이 상투 튼 것처럼 펼쳐져 있다. 개야도와 부용도에 나가면 10일~15일 머무르다가 돌아왔으며 사리 때는 나갔다가 조금 때에 들 어 와 쉬었다고 한다. 섬에 머무를 때는 식량을 싣고 가서 숙식을 모두 배에서 해결했다. 또한 개야도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수산 이라고 하는 고기 집하장이 있었다고 하며 거대한 기선이 있어서 고기를 잡자마자 그 곳에서 매판을 했다고 전한다. 월하성 주민들은 조기를 잡기 위해 연도와 동백정 뒤쪽을 당일로 왕복하기도 했다. 근해에서도 동 백정 주변에 조기가 유난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가을에는 갈치를 잡기 위해 연도와 마량리 근해를 왕복 하며 어업을 했다. 15 이 시기 마을 앞바다에서는 어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연도에는 일본인이 운영했던 조합이 있어 연도사람들은 이를 어업조합 내지는 조합이라 지칭했다고 하며, 해방 전에는 충청 남도, 전라북도에 관계없이 전국에서 연도로 와 바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배가 많이 떠 있었다고 한다. 이고 사람들은 돈을 탕아처럼 쓴다. 14 장사할 물건을 싣고 다니는 배. 15 주위가 23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20권 충청도 비인현 054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55

연도에 왔던 배 배연길(남, 1926년생) (조사자:옛날에 일제강점 때 상고선 같은게 있었죠?) 예, 있었죠. 상고선이 있고 왜정 때는 도리시마라고 일본인들이 고기 잡은 것을 공출해갔지요. 도리시마라고 고기 잡으면 군산 싯가가 얼마면 그 싯가대로 주고 가져갔지. (조사자:여기도 그런 일제강점 때 그런 조합이라고 해야 되나요?) 그렇죠. 조합이라고 했지. (조사자:그 일본애들이 운영했어요?) 예, 일본애들이 운영했어요. (조사자:조합이름이 뭐였어요?) 어업조합이라고도 부르고, 조합이라고도 부르고. 다 그랬지요. (조사자:여기 충남에서도 이 쪽으로 오고 그랬어요?) 그렇지. 그전에는 충청남도, 전라북도 이런거 가리지 않고. 우리 작았을 때는 허가도 없이 그냥 통일해서 다녔어요. 전국 이 다 통일해서 다니고 그랬었는데, 몇년 전에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다 한지도 얼마 안 됐어요. 충청남도 사람들이 전라 (조사자:그러면 옛날에는 조기잡으로 많이 왔겠네요?) 속초에서부터 다 오구요, 해방 전에 왜정 때에는 통일 했지요. 말할 것 없이 다 여기와서 같이 자구. 그러다가 해방이 되면 서 삼팔선이 막히면서 꽉 막혀버렸지요. 이남서는 여기 와서 조기잡아가고 갈치 잡아가고 못 잡아가는 거 없이 다 있지. 옛날에 일제시대 때는 주로 잡는게 갈치하고 조기하고. 조구(조기)하고 주문지, 감포, 군영포, 나가시 했지. 유자망이 떠 다니는 거. 그런데 조구, 갈치, 주내, 장대 거의 안 걸리는 거 없이. 여기 다 대전에, 전라북도. 다 봄이면, 이런 축향기가 다 떠서 물이 안 보였어요. 지금은 하나도 안 오는 거에요.연도하면 유명해요. 저기 수산청 가서 물어보면 다 알거에요. (조사자:옛날에 일본애들이 주로 가져가던 고기가 뭐였어요?) 주로 가져가던게 광어, 병치, 갈치. 조구는 잘 안 가져 갔어요. 그리 좋은 뭐, 호보라고 있었어요. 그런거. 좋은 거는 다 가져 갔어요. 뒤미하며 삼치하며. 직접 일본인이 떼었어요. 받아가지고. 잡아서 사가지고 일본 가는 거에요. 얼음해가지고. (조사자:그럼 상고선이라는게 일본애들이?) 한국사람도 하고, 일본사람들도. 어째 고기가 공출해다가 상고선에서. (조사자:그럼 상고선에다 안 팔면 어디가서 파는데가 있었어요?) 상고선에서 안 팔면 군산 조합에 가서 팔지요. 연평도도 가면 연평조합에서. 안 받아주면 사매로 팔고 그랬어요. 북도 허가 얻으려면 어렵지요. 쪼끄만 배들. 큰배는 전국 허가가 있어서 마음대로 다녀요. 안강망도. 100톤짜리 이상은 다 다니는데, 그 이하는 구역이 있어요, 다. (조사자:지역허가가 있다는 거죠? 연안 허가겠네요!) 연안허가죠. 마을 앞바다에서 집중적으로 어업을 시작한 시기는 대략 1960년대부터로 보인다. 그렇지만 주요 돈벌이 가 되었던 조기와 갈치가 더 이상 잡히지 않거나, 판매처의 사정이 변화했다. 배가 작아져 먼 바다로 나가기 힘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어업과 관련된 허가가 생기면서 여러 규제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연도 전경 056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57

2) 판매경로 가) 객주와 수협 판매경로 또한 교통수단의 발달과 길의 확장 및 생성, 새로운 기관의 설립으로 인해 판매방식과 더불어 변화했다. 현재는 어업 후 그물에서 정리한 고기를 대부분 수협에 위탁판매를 한다. 그러나 1970년대 이 전까지 수협 외에 객주도 주요한 유통수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중선의 경우에는 조기나 갈치처럼 수요가 높은 고기를 잡은 경우 바다 위에서 바로 상고선에 팔기도 했다. 중선이 바다 위에서 고기를 많이 잡으면 기를 꽂아 놓았고, 상고선은 그 배가 만선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와 고기를 구매하였으며, 이렇게 구매한 고기를 포구에 나가서 팔았다. 상고선은 조합을 통해서가 아 니라 바다 위에서 어선으로부터 직접 생선을 받아갔다. 상고선은 강경, 임천, 부여에 가지고 가 직접 도매 로 팔았다. 그들은 군산 어판장에 판매를 하든지, 객주에게 팔든지 했다. 당시 객주와 어선(혹은 상고선)과 의 관계는 수협과는 남달랐다. 1950년대 중개수수료는 5%정도로 객주나 수협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객주 는 조합과 달리 상고선, 어선에게 잘 해주었다는 점이 달랐다. 객주는 어선에 뱃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객주와 조합에 대해 마량리의 유치봉은 보통 조합이 있는 곳에는 객주를 보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객주 는 강경이나 광천에나 있지, 섬이 있는 곳이나 조합이 있는 곳에서는 있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조 합이 객주가 있으면 주문을 못 받기 때문에 객주들을 괴롭혀 버티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객주는 상인들을 소개해 주고 구전( 口 錢 ) 16 을 받는다. 어업조합에 고기를 넘긴다는 것을 약관을 굴 린다 라고 표현하였으며, 조합은 생선을 팔 때 6할을 가지고, 새우젓은 5할을 가졌다고 한다. 객주는 조합 에 반절 정도만 갖기 때문에 객주에게 넘기는 것이 어민 입장에서는 더 유리하다. 또한 객주에게 가면 선 원들을 잘 먹여주었는데, 객주집에서도 먹을 때도 있지만, 여관이나 식당을 잡아주고 잘 먹여준다고 한 다. 또한 배를 나올 때에는 고사도 지내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고사 지내라고 고기, 술, 떡을 조금씩 사서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면 근해에서 어업 하는 많은 배들에게는 서면어업조합이 중요한 판로 가 되었다. 조선어업조합요람(조선어업조합중앙회편, 소화17년 1942년)은 서면어업조합과 해태양식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업의 상태 본 조합지 앞이 광원한 어장이기도 하고, 조합의 자력으로 아직 심해어업에 종사하는 것이 불가능해, 매년 어기에는 내지(일본) 및 경남 전남 기타 등지로부터 외래자에 의해 그것이 점유되어, 조합원은 근근히 종래부터의 연안천해어장 외에는 없는 실정이며, 금후 어법 및 어구의 개량 기타 시설을 만들어, 조합의 사명달성에 만진하는 계획 중에서, 현재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해태양식어업 본 조합 관내의 해태의 역사에 분명하지는 않지만, 마량리에서는 돌김이 100여 년 전부터 생산해 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것 이 생산액이 징수되는 물건이기에, 소화 7년까지는 기껏해야 그것의 산액이 100여원에 지나지 않았다. 해태의 양식은 소화8년 본도(충청남도) 수산회 및 본 조합에서 전라남도 무안군부터 해태죽통( 簾 篊 ) 30책의 이식을 행해 양식시 험의 결과 양호한 성과를 거두어 익년 소화9년부터 적극적으로 본업을 장려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최근 3년간 어획고 - 조선어업조합요람(조선어업조합중앙회편, 소화17년 1942년) 최근 3년간 어획고 소화13년 소화14년 소화15년 어업기 수량 금액 수량 금액 수량 금액 연승어업 437,000 貫 2,639,000 円 528,000 貫 3,623,000 円 615,000 貫 4,282,000 円 안강망어업 1,530,000 25,750,000 165,000 26,650,000 175,000 28,750,000 어살어업 580,000 13,730,000 605,000 13,880,000 650,000 15,800,000 건강망어업 6,300 867,000 95,000 15,000,000 合 計 42,119,000 45,020,000 63,832,000 공동시설 (1) 위탁판매사업 조합설립과 동시에 조합지구내 추요지( 樞 要 地 ) 3개소 공동판매중매인 선어를 지정해, 관할( 所 轄 )지구내의 생산품을 전부 걷어 모아( 取 纏 ) 입찰 혹은 지정가격방법에 의해 판매를 한다. 말린( 乾 ) 해태판매는 본조합사무소 공동판매소에서 집합검사를 마치고, 부산, 대전, 경성, 조선 북부( 北 鮮 ) 방면으로 발송 판매를 해 오는 현황이다. 그리고 본업개시 당시에는 일반 조합원의 이해가 부 연혁 본 조합의 소유지는 충청남도의 서남단에 위치한 반도지형이며, 남부는 비인만을 서북부는 무한한 황해에 접하며, 동부는 비인 족해, 또한 매매업의 개재에 의해 본사업의 목적달성에 적지 않은 곤란을 느꼈지만, 본 사업은 조합의 성쇠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기에 시종일관 이 목적달성에 전력을 경주한 결과 조합원에서도 점차 본사업의 유리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면을 경계로 8리를 포괄한다. 도둔리의 중앙 海 濱 에 조합사무소 공동판매소를 둔다. 본 조합에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대정 8년 10월 90일(1919년)부 조선총독의 인가를 얻어 설립한 것이며, 이 당시의 극히 유 치한 비인만에 생산 소량의 선어판매사업에 불과하여, 이 상태에서는 어업의 진전, 어민의 복리증진의 목적달성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심각히 인식하여, 조합에서는 급속한 진전을 기대해 어법의 개량, 어업자금의 대부고리채의 정리, 생산물의 판로개척 등 방 면에 걸쳐 연구시설을 세우고 함께 장려해 오늘에 이른다. (2) 어업금융사업 조합원의 어업자금 금융상황을 보면, 대부분은 그 자금난에 빠져, 그것이 달성에는 거의 고리채에 눌리는 예가 있고, 그리고 그 상태를 계속하는 것에는, 어촌유지는 근저부터 파양( 破 壤 )될 염려가 있기에, 소화 10년도부터 이것에 대한 대책으로 본 사업을 개시하여, 어업에 필요한 물품 혹은 현금을 어업경영이 확실한 조합원에 한해 저리대부( 低 利 貸 付 )해 위탁판매하게 하며, 이 회수 상황이 대단히 양호해 예상 이상의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16 소개료. 058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59

(3) 조합원 구휼 본 사업은 조합원의 불시의 재난에 대응해, 구제시설로 조합원 또는 그 가족에 어선 어구의 감소와 소실( 減 失 ), 파손, 부상, 질병사 망 등의 조난자에 대해 구휼금의 교부 및 무료치료( 施 療 )와 약을 주는( 給 藥 )의 방법으로 일반 조합원의 구호에 노력하고 있다. (4) 어장정리 조합원의 증가에 수반해, 해태죽통책( 篊 建 柵 ) 수에서도 점차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책 당 생산고는 매년 감산하는 경 향이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에 책의 난식밀식의 폐에 의한 것이며, 이 대책으로서 매년 사업계획예산에 경비를 계상해, 각 어장 에 걸쳐 풍파 및 조류의 방향을 조사하여, 홍건위치를 확정하고 일정표준에 의해 정리해서, 각 어장의 주요지점에 해태부착층을 드러내는 수심봉을 설치해 그것에 홍을 합치시킨다. 이와 함께 어장의 각 부락별 경계를 엄격히 정해 경계에 대한 부락민 간의 분쟁을 없애 해태증산을 노력한다. (5) 우량조합원표창 조합원 중 어업성적 우량해 다른 규범에 충족할 수 있는 자를 표창하는 것은 30명에 달한다. (6) 어촌진흥의 개황 어촌진흥은 농촌에 비해 다소 지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지리적 문화적 다양한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기인한 것이지만, 일면 에서는 어민의 기풍( 氣 風 ) 및 영업의 실태( 業 態 )가 역시 특이한 점이 있기 때문에, 본 조합에서는 소화 11년도 마량리(내도둔리) 에 진흥회 갱생지도부락을 설치했다. 그 설치당시는 부채액이 많은 부락민의 해태( 苔 ) 생활정도는 극히 저급한 것이었지만, 모 든 어가에 해양식업을 실시해 농밀( 濃 密 )한 지도를 한 결과, 현재에서는 부채를 완전히 정리하고 1호당 평균 31여원의 저축액 을 가지게 되었다. 나) 등짐장수 상고선에 파는 방식 외에도 상인들이 직접 마을로 들어와 고기를 받아다 파는 사례도 많았다. 고기를 받아다 파는 사람들로는 등짐장수와 잉꼴이 장수 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짐꾼으로서의 등짐장수는 조직으로서의 부상조직과는 차이가 있었다. 조선 말기에 월하성 마 을은 보상 조직과 부상 조직 모두에 관여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상조직은 주로 모시 유통을 담당하는 조직 이었으며, 부상 조직은 어물, 수철, 나무, 소금, 어망 등을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월하성 의 최승기도 부상절목에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어물을 유통시키던 부상조직은 상 인조직과는 전혀 관계없는 신분조직으로 변형되어 운영되었다. 또 보상조직 또한 모시를 담당하는 조직이라 기보다는 상인들의 광범위한 조직으로 바뀌었다. 근방 지역주민에 따르면, 보상과 부상 조직의 수장인 시채 영감(시재영감, 時 宰 令 監 ) 을 뽑는 행사도 1960년대까지 주요 시장을 중심으로 매년 행해졌다고 한다. 어물을 운반하는 등짐장수는 포구에서 생선을 받아 자기 집으로 돌아가 하루를 지내고, 첫 닭이 울 면 시장으로 나가 고기를 팔았다고 한다. 이들은 장사를 전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땅이 있고 농 사짓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 등짐장수는 지게를 지고 장마다 걸어서 다니기도 했지만 육상교통이 발달하 면서 리어카 등짐장수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등짐장수가 등장했다. 이들은 리어카나 자전거 뒤에 짐을 싣고 다녔는데 수레와 차가 나오면서 나중에는 삼륜차를 타고 다니는 등짐장수가 나오기도 했다. 등짐장수들은 수협을 통하기도 하고, 낚싯배에서 갈치 등을 직접 받아가기도 했다. 당시에는 수협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밤에 배가 들어온다든지 하면 조합직원들이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받아 가곤 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조합을 통하지 않으면 밀매라고 해서 큰 문제가 발생했다. 舒 川 保 寧 비 고 長 項 舒 川 場 吉 山 場 韓 山 場 新 場 庇 仁 場 板 橋 場 鍾 川 渡 摩 橋 麒 山 玉 浦 熊 川 艮 峙 珠 山 장항읍 수동리 서천면 군사리 서천면 삼산리 한산면 지현리 마산면 신장리 비인면 성내리 동 면 판교리 종천면 기산면 화양면 웅천면 大 昌 里 주산면 金 岩 里 增 補 文 獻 備 考 1770 林 園 經 濟 誌 1840 朝 鮮 の 市 場 1923 市 街 地 の 商 圈 1924 朝 鮮 の 市 場 經 濟 1926 舒 川 邑 誌 1920년 대말 X X X X X X 2, 7 X 2,7 2, 7 2, 7 2, 7 4, 9 X O 4, 9 4, 9 4, 9 1, 6 1, 6 X X 1, 6 1, 6 3, 8 3, 8 3,8 3, 8 3, 8 3, 8 3, 8 3, 8 거래 없음 2, 8 3, 8 3, 8 5, 10 5, 10 5,10 5, 10 5, 10 5, 10 1, 6 ( 鍾 川 ) 5, 10 ( 玉 浦 ) 4, 9 ( 大 川 市 ) 朝 鮮 の 市 場 1940 (거래액) 3, 8 17,040 2, 7 304,950 4, 9 97,240 1, 6 121,450 3, 8 100,120 4, 9 123,465 5, 10 400,150 1, 6 X X X X X X X X X X X 4, 9 O 4, 9 4, 9 X X 1, 6 O 1, 6 1, 6 X 2, 7 239,300 1, 6 16,250 서천, 보령의 5일장 (최신)국토구 역총람 1963년 3, 8 2, 7 4, 9 1, 6 3, 8 3, 8 5, 10 1, 6 ( 渡 摩 橋 ) 5, 10 ( 麒 山 ) 등짐장수들은 주로 판교장, 홍산장 등 멀리 있는 내륙시장을 다녔는데, 월하성에서 30리쯤 떨어진 통박골은 주변의 어물장수들이 지나가는 요지가 되었다. 통박골 주변에는 산을 넘기 전에 머물다가는 주 막이 많았다. 판교장에는 소시장이 커서 주변 지역 사람들은 판교장을 많이 다녔다. 그러나 월하성에는 소 가 없어 판교장의 소시장과는 관계가 없었다. 월하성 주민들에게 판교장은 어물장으로 유명하다. 등짐장 수는 서면 마량리, 도둔리, 월하성리에서 어물을 사 짊어지고 판교장에 가져다 팔았다. 4일 비인, 5일 판교 장, 6일날 간치장, 7일날 서천장, 웅천장, 8일날 대천장 장날에 맞춰서 물고기를 가지고 갔다. 서면에서 저 녁에 받아 밤새도록 판교장으로 가다가 주막에 들려 자고 다음날 들어가 팔았다. 주막은 남당리 통박골에 3개가 있었고 옆의 상좌리에도 하나가 있었다. 남당리 통박골에서 작은 둔대기, 큰 둔대기라 불리는 고개 를 넘어 10리 정도를 걸으면 판교장이 나온다. 장에 오는 사람들에게 직접 팔았다. 월하성에서 어물을 받 은 등짐장수들은 통박골을 통해 판교장으로 가는 길도 이용했지만 거리상 이보다는 비인장을 지나 산을 넘어 밤골을 통해 판교장으로 가는 길을 더 많이 이용했다. 2, 7 1, 6 060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61

판교에서 발견한 보부상 관련 비석들 홍일표( 洪 一 杓, 남, 1931년생)는 시장에 가서 생선을 파는 사람을 도매기 장사 라고 불렀으며 어촌 계가 생기고 고기를 주는 사람이 없어지자 등짐장수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등짐장수가 사라진 이후 그 빈 자리를 어업 일을 직접 하지는 않지만 머리에 어물을 지고 운반하는 아주머니들, 잉꼴이장수 들이 채웠 다. 생선을 떼어다 파는 일이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것 보다 더 많은 이윤이 남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 도 가난한 집의 부녀자들이 어물운반에 종사하기는 했지만, 여성노동력 전반에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것 은 대략 1960년도부터이며, 여성들이 더 이상 모시를 하지 않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 김분점(여, 1942년생)는 서른 살이 되기 전부터 비인장으로 고기를 이고 걸어서 팔러 다녔다. 잡은 물 고기나 조개로 젖을 담아 현재 서면초등학교 옆의 목안나달 에서 장사꾼에게 팔거나, 비인장에서 고기를 아 침에 일찍 팔고 마량에서 다시 사오기도 했다. 구매한 생선을 집에서 널어놨다가 다음날 또 팔러 나갔다고 한다. 여름에 큰 딸을 업고 머리에 진 생선을 팔러 가는 길은 힘들어서 꿈에 나올까 무섭다고 말했다. 고기 팔러 다니는 길 김분점(여, 1942년생) 웅천장이고 서천장이고 다 대녔지. 갖다 팔고서 남의 살은 고기를 가지고 온다. 그러면 한 다라이고서 여름에 뜨거운데. (조사자 :아침 몇 시에 나가야 되요?) 아침 여섯시나 그 때 나가서 팔고 와서, 또 와가지고 남의 것을 사갖고 오는 거야. 살은 걸. 살은 놈을 갖고 가려면 여름에 뜨겁기는 얼마나 뜨겁겠어. 이 신발을 다 벗어서 헝크에 지고 비인까지 여기서 30분 가가지고 차타고 갔어. 그 여기서 30분이 비인 나가려 면 이빠이, 한다라이 매고 얼마나 무겁겄어. 그래가지고 우리 큰 딸은 죽어도 안 하려고 하잖어. 다 몇 십 년 된 것이. 고기 한 다라 이, 어린애 업고서 가려면 오줌이 저려서 나와. 아이고 말도 말어. 갖은 고생 다 했어. 고생 많이 했어. 아이고, 꿈에 나올까. 비인장에 가면 자릿세를 내야 했는데, 이것을 지불해야 고기를 팔 수 있었다고 한다. 자리를 잡으면 돈을 받 으러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자리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1,500원을 지불했다. 지금도 자릿세 받으러 돌 아다니는 사람은 있는데 이렇게 걷힌 자릿세는 비인면의 소득이 된다고 한다. 고기는 썩기 때문에 빨리 팔아 야 하는데 못 팔면 버려야 하므로 부르는 것이 값이었고, 팔리지 않을 때는 염가로 팔 수 밖에 없었다. 서천읍지 (1920년대말)에 기록된 서천지역의 장시와 취급품목 명칭 위치 개 시 농산물 수산물 직 물 축 류 기 타 계 서천장 길산장 한산장 신 장 판교장 비인장 서천면 군사리 서천면 삼산리 한산면 지현리 마산면 신장리 동 면 판교리 비인면 성내리 2, 7 28,950 7,350 210,998 7,350 15,800 270,448 4, 9 14,280 5,870 2,280 0 850 23,280 1, 6 2,580 150 8,750 20 800 12,300 3, 8 20,187 15,407 302,683 27,639 415,733 781,648 5, 10 19,500 8,700 98,000 139,952 60,800 326,952 3, 8 40 50 280 0 30 670 계 85,537 37,527 623,992 174,961 494,282 1,415,298 팔군상업사에서 1908년 비인군수 강후원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기념비 판교상무우사에서 1910년에 두경 지태반, 도왈순이 세운 영위, 반수의 묘비 062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63

비인장 김분점 (조사자 :자리세를 얼마나 냈었는데요?) 그 때 돈으로 1500원 내야혀. (조사자 :그 때가 언제에요?) 그 때가 한 20년. 내가 서른 못 먹어서부터 그랬으니까. 40년 전이지. 자릿세 내야 고기를 팔어. (조사자 :자리도 목 좋은 자리가 있고 안 좋은 자리도 있는데 달라져요?) 아니다. 천오백원씩. (조사자 :그럼 빨리 가야 좋은 자리를 맡겠네요?) 그렇지. 모시 장연희(여, 1921년생) (조사자 : 할머니 예전에 이 동네에서 모시 했었어요?) 모시하고 명주도 하고 베도 하고 다 했지. 할 일 다 했지. 모시 혀서, 날아서 메서 짜고, 장에 가서 팔고 별거 있간? (조사자: 모시 키웠어요?) 장에 가서 사다 하고, 저 뚝 있는 데가 나고. 옛날에 못해먹고 살은 거니까. 지금 살기가 참 팔자 좋고 좋지만 옛날 사는 사 람들 고생 많이 했지. (조사자: 어디 장에서 모시를 사왔어요?) 인자, 장 비인장도 나고 서천장도 나고 대천장도 나고. 시장이면 나니까. 짜가지고 팔러두, 참 서천장, 판교장 그런데 다니며 팔고 그랬지. (조사자 :그럼 누구한테 자리세를 내는 거에요?) 거기 자릿세 받으러 다니는 애들이 있어. 지금도 비인장에도 있잖아. 자리세 받는 사람이 있어. (조사자 :안 내면 횡포부리고 그랬겠네요?) 그렇지. 한 바가지 뒤집어 엎어버리고 그러지. 그러니까 빨리 보내려면, 줘 보내버리지. 빨리 팔아야 되니까. 나는 고기 받 아다 팔러도 다니고, 바다도 다니다 닥치는 대로 했지. 태모시 구매 서숙자( 徐 淑 子, 여, 1938년생) 재배하는 데는 없고. 시장 가서 태모시라고 풀 껍질 말린 걸 사와. (조사자: 태모시는 어느 장에서 사오는 거에요?) 주로 판교장에 가서 많이 사오지. 거기 산골이라서 많이 하지. (조사자 :그럼 판교까지 가셨어요?) 판교도 갔지.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등불 켜서 잡고. 웅천장. 웅천장도 걸어가고. 판교장도 걸어가고. 판교장, 웅천장, 간재 장, 그런데 걸어가 봤지. 태모시 판매 김동수(남, 1928년생, 판교장에서 그릇점을 하고 있음) (조사자: 태모시 장사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태모시 장사는 시방 사람들이 많이 했어요. 월하성 주변에서는 웅천장(2, 7)과 서천장(2, 7)이 가장 컸지만 웅천장과 서천장은 각각 30리씩 떨어져 있기 때문에 3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비인장이 제일 가까워서 걸어서 1시간 정도면 걸어갔지만, 판교장 은 가장 멀어서 4시간 정도 걸렸으며 가려면 새벽 4시에 일어나 등불을 켜서 잡고 가야 했다. (조사자: 아, 여기 판교장 사람들이요?) 에. 어디서 오느냐며는 그거는 전라도, 전라, 남해 근방이지 아마? 거기서 그게 주산지여. 주산지에서, 거기서, 사다가 여기 서 소매하는 거지. 거기는 거시기라고 하거든요, 한 근이라는게 160문매라고 달아. (조사자: 문매가 어떤 건가요?) 다) 모시의 생산과 판매 월하성이 위치한 서천은 모시를 생산하던 저산팔읍 17 의 한 곳으로 주변의 서천장, 비인장, 판교장에서 모 시의 원료인 태모시를 구매하고 다 제조된 모시를 판매했다. 월하성의 주민들은 집집마다 모시를 했다고 전해지지만 모시 가격하락, 어업과 농업에서의 노동력 부족 등을 이유로 1960년대 초반 이후 더 이상 하 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시를 하려면 원료인 모시풀을 필요로 한다. 모시풀은 바닷가에 인접한 둑에서 많이 자라, 모시풀 이 나면 베어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시풀을 집집마다 베어다 사용했던 것은 아니고 모시풀을 파 는 장사꾼들이 밭에다 심어서 재배해 대량으로 장에서 팔았으며, 주로 이것을 사다가 모시를 짰다. 저울눈이지. 말하자면. 근데 그놈 갔다가 100매로다가 한 근을 팔거든. 같은 값에 160문매를 한 근으로 치고 여기는 100매 를 한 근으로 치고 차액을 따먹는 거지. (조사자: 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사왔어요? 남해에서? 기차를 가지고 갔나요? 아니면?) 기차로 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때는 짊어지고서 왔을 거야. 오랫동안 와요. 모시풀은 봄에 나서 8월까지 자란 것을 장사꾼들이 베어 말려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지고 올라와서 판 교장에서 소매로 팔았다. 전라남도와 경상도에서는 대량으로 태모시가 생산되었기 때문에 싼 가격에 대 량으로 구매해와 좀 더 비싼 가격을 받고 소매로 판매했다. 장터에서 판매되는 모시풀은 베어온 상태 그 대로가 아닌, 모시풀의 껍질을 말린 태모시였다. 태모시 3근이면 모시 1필을 만들 수 있었는데, 3근의 양 은 한 주먹 정도에 잡히는 정도라 한다. 17 저산팔읍은 저포 즉 모시가 생산되던 충청도의 여덟 개의 읍을 말하는 것으로 부여, 임천, 한산, 홍산, 서천, 비인, 남포, 정산을 말한다. 저포팔읍이라고도 한다. 064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65

모시 직조 과정 서숙자 모시. 사다가 물에다 담궜다 너는 거야. 막 불려서. 파래. 막. 널르면 바래잖아. 그러면 파란게 하얀해지잖아. 그러면 그놈을 조금씩 담궜다가 마루서 째는 거야. 입으로. 입으로 이빨하고 손으로 다 찢어. 한산모시라고 하잖여. 다 찢는 거야. 다 찢어 가지고 잇는 거야. 무릎팍에다. 입으로 훑어서. 전부 잇어서. 삼 삼는 거라고. 잇어서 또 날러 쨀라면. 쪽. 길게 해가지고. 참 바디라고 바늘구녕만한 바디가 있어요. 요만한 바디. 거기다 다 구녕을 껴갖고 또 메는 거야. 콩풀 메겨가지고. 콩 빻은 거 해가지고. 내적풀 피워가지고 입으로 뜨거운건데도 메겨요. 베 매는 거라고. 풀 메겨가지고 그것을 베 째가지고 매야 또 감는 것에다 감아가지고 짜는 거야. 그냥 해서 베틀에 올려놓고서는 쪼금씩 쪼끔씩 풀러가면서 짜는 거야. 바디라고 생긴 게 있고. 북이라고 뿌리를 감아서 날을 씨를 하는 거야. 북이라고 이만 컿네. 이렇게 이렇게, 이리갔다, 저리갔다, 잡아댕겨 가면서 짜는 거야. (조사자: 두 가지가 가장 유명했던 건가요?) 그렇지. (조사자: 제가 듣기로는 태모시와 필모시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렇지 필모시가 유명하지. 하여튼 필모시가 내일 장 서려면, 오늘부터 서기 시작하면, 이 근방에 사람 돌아다니지도 못할 정 도였어. (조사자: 필모시를 파는 사람이 많은 건가요?) 파는 사람이 많지. 파는 사람이 많고 한꺼번에 사는 사람은 오십필도 사고 백필도 사고 하니까. 파는 사람은 한 사람씩 가 져오니까. 파는 사람이 많지. (조사자: 그런 경우는 장사꾼이 사 가잖아요, 장사꾼은 여기 사람인가요? 다른데서 오는 사람인가요?) 다른데서 오는 사람이지. 모시를 직조하기 위해서는 우선 장에서 구매한 파란 태모시를 물에 담그었다가 널어 말려 햇볕으로 표백 시켜야 한다. 하얗게 변한 태모시를 마루에 앉아 입술과 치아, 손으로 쪼개고, 가늘게 쪼갠 모시 올을 연 결하는데, 두 올을 같이 잡고 허벅지나 무릎에 대고 비벼서 끊어지지 않도록 잇는다. 이 과정을 모시삼 기 라고 부른다. 삼은 모시를 열 가닥씩 모아 한 필 길이만큼 자르는 것을 모시날기 라고 하며 이 과정을 32회 반 복한다. 모아 진 모시의 표면에 콩가루와 소금을 풀어 만든 내적풀을 만들어 입으로 메기고 바디의 구멍 에 모시 올을 끼워 감아 베틀에 건다. 그 후 날을 실을 북에 감아 베틀에 올려놓고 좌우로 왔다갔다하며 조금씩 풀러 가며 짠다. 다 짠 후 틀에서 떼어내어 모시의 콩풀을 뺀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야만 한 필 의 옷감을 필모시라고 불렀다. 모시를 만드는 계절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겨울에도 하고 여름에도 했다. 주로 할머니들이 일 이 없으니 집안에서 모시풀을 삶고 째고 하여 실을 만들었고, 베를 짜는 일은 며느리나 딸들이 했다. 베 짜는 일은 밤에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날을 잡아서 해야 했으며 베 짜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은 한 필을 짜는 데 사흘이 걸리고, 못 짜는 사람은 5~6일이 걸린다고 한다. 모시를 완성하면 비인장, 한산장, 서천장 등지에 가져가 팔았다고 한다. 모시장은 새벽 3시에서 4 시 사이에 열렸는데 모시가 햇볕에 마르면 부스러지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 시간에 열린다고 도 했다. 직조한 모시 판매 김동수 (조사자: 어디 장에다 팔러 가요?) 주로 모시도 판교장에 많이 있다고. 지금도 한산 그런데는 모시 나고 그러잖아. 모시만 사는 사람이 있어 장사꾼이라고. (조사자: 모시장은 아침에 일찍 열린다는데?) 그렇지 새벽에 가지. (조사자: 필모시를 사간 사람들은 주로 어디 가서 팔러간다고 하던가요?) 그 사람들은 팔려며는 남해, 부산, 대구 이런데서 팔았어요. (조사자: 경상도에가서 파는 건가요?) 그렇지. 주로 모시를 선호하고 있는 데가 경상도 땅들이 많이 있어요. 우리 충청도 사람은 별로 안 입어요. 왜냐면 그게 시 원하고 좋긴한데, 말하자면 구찮아서. 하기가 힘들어. 금방 구기고 비 맞으면 헛가고. (조사자: 보관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입어. (조사자: 왜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입었나요?) 좋으니까 입지. 하여튼 비단이잖어. 우리로는 아주 좋은 비단이라고 하니까. (조사자: 이 쪽 사람은 주로 어떤 것을 입었나요?) 베를 많이 입었지. 삼베. (조사자: 가격은 어땠어요? 삼베하고 모시하고?) 그때 당시는 비단이랑 같았을 거여. 삼베도 비싸요. 필모시도 말하자면 모시도 비싸거든요. 장에는 모시만 전문적으로 구매하는 장사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모시만 매매했다고 한 다. 모시 1필에 3천원~5천원정도에 팔렸으며, 당시 쌀 한말이 5백원~천원이었다고 한다. 필모시를 산 장사꾼 은 이것을 그대로 팔지 않고 이것을 다시 이겨(표백해서) 서울이나 경상도 등지에 가져다가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월하성에서 모시를 제조하는 일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계속 되었다고 이야기되지만, 1960년 대 초반을 기점으로 점차 사라지게 된다. 1960년 초반에 마을 내에서 결혼한 서숙자(1937년생)의 경우 결 혼하기 전에는 바느질하고 베를 짜는 등 모시를 했는데, 시집을 오고 나니까 시집에서는 뱃일만 하고 모 시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 월하성으로 시집 온 임경순( 任 京 順, 여, 1944년생)의 경우 친정인 주산면 야룡리에서 조금 한 적은 있지만 여기로 시집와서는 모시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조사자: 주로 장에서 어떤 장사가 많이 이루어졌던 건가요? 일제시기에 할아버지 20살 무렵에.) 그 때는 소전이 유명했지. 또 필모시가 유명했고. 066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67

모시하던 시절 서숙자 옛날에 아가씨 때 모시 했지. 시집오니까 시집은 않더라고. 배만 하지 모시는 않더라고. 바느질하고 베 짜고 다 했지. 모시를 하지 않는 월하성 임경순( 任 京 順, 여, 1944년생) 여기는 모시 안 해. 여기는 모시하는 사람이 없어. 여기는 바닷가라 맨 배하니까 시간 있으면 조금 편한 사람이 고기 팔러 다니고. 나이 먹어서도, 우리 나이 먹어서도 다녔어. 나 시집와서도. 우리 시어머니도 60넘도록 고기장사 하시다가 돌아가 셨으니까. 그렇게 하고. 우리 때 여기서 모시하는 사람 없었어. 모시를 하지 않는 이유 김일점(여, 1931년생) (조사자: 원래 마을에서는 모시 안 했어요?) 원래 마을이 배만 갖고 살기 때문에 모시가 않터라고. 모시 가마니 그런 걸 안 터라고. (조사자: 예전서부터 안 했어요?) 전에는 칠지리로 넘어가는 길이 어둡고 월하성 사람들 외에는 다니지 않아 마을 노인들이 술먹고 넘어오 다가 넘어져서 얼어 죽기도 했다고 한다. 이 길은 나중에 택시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히면서 자동차를 이용해 장을 이동할 수 있게까지 되었다. 길이 가파르고 험하여 버스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1991, 2년 까 지 택시를 대절하여 생선장사를 다닌 경우도 있었다. 지도에서 11번은 칠지리 마을을 지나 사단 마을에 가면 비인면으로 들어가는 돌다리가 있는 곳이 다. 원래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물이 나가면 그냥 건널 수 있어 비인장까지 빨리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물이 들어오면 건널 수가 없어서 산 기슭을 따라 돌아서 비인장에 가야 했다. 하천의 상류쪽은 바닷물이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 이상 그냥 건너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지역은 염전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 염전은 나중에 논을 만들기도 하고, 양식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현재는 사매 라 하여 어업인 자신이 알음알음으로 판매하지 않는 경우, 항구에 있는 수협 위판장 에서 거래한다. 위판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은 월하성 주민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며 홍원항 수협위판장, 마량 수협위판장 등의 가까운 곳의 위판장 중에서 가장 가격을 많이 부른 곳에서 판매하고자 한다. 없었었어. 이 동네는 예전부터 남자들이 배 지어서 생활하고 여자들은 베 만들고 안 터라고. 저 비인면 사람들이 모시하고 가 마니짜고, 그런 거 하더라고. 그렇지. 어찌되었든 농사짓는 사람들은 모시하고 가마니짜고, 그랬어. 여기 사람들은 않 터라고. (조사자: 그러면 모시 안하며는 밭농사나 그런 거 하였어요?) 밭농사 하는 사람들은 밭농사 하고 밭 없는 사람들은 배만 갖고 사용하고. 01 02 모시를 하지 않는 이유 김정규(남, 1928년생. 비인장에서 녹취) (조사자: 왜 모시를 안 하게 되었어요?) 수입이 없잖어. 농촌에서는 일손이 모자라니까 부인들도 하루 일하러 가면 하루 4-5만원은 버는데 모시는 2만원도 못 벌 어요. 이게 모시가 없어진 것이 한 20년 이상, 모시가 많이 없어졌지. 그 옛날에는 시장에 추석 때 무렵이면 모시가 한 차 이상 나왔지. 모시로 쌀도 팔고 보리도 팔고. 모시 안하게 되면서 생활이 다른 거로 바꿔졌지. 이는 월하성의 생업이 어업이었기 때문에 모시를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모시가격의 하락으로 모시가 소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시를 그만둔 이후 여성들의 일은 잡아 온 고기 1 3 2 4 5 6 7 8 9 10 11 비인장 를 인근의 서천, 판교, 웅천, 비인장에서 팔거나 밭농사, 논농사에 투입되었다. 또한 모시가 없어지면서 김 양식을 하기도 했다. 라) 월하성에서 비인장 가는 길 1980년대까지 월하성 사람들이 비인장으로 다니던 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마을 입구에서 선도 리로 이어지는 길은 5-6년 전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도에서 2에서 11에 해당하는 길은 과거 칠지리 를 거쳐 비인장을 다니던 길로 비록 산림공사로 인해 파헤쳐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형태가 잘 남아있다. 이 길은 원래 매우 좁은 길이었는데 새마을 운동 때 리어카라도 다니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비인면 칠거 리의 길을 월하성 사람들이 구입해 확장했다. 그래서 아직까지 이곳의 토지는 마을 소유로 남아있다. 예 월하성에서 칠지리 거쳐 비인장 가는 길 068 달 모양의 해안을 따라, 월하성 0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