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그 후 이탈리아 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인가? 글. 최을영 작가 2013년 11월 27일, 세금포탈 혐의로 의원직 박탈을 앞두고 있는 이탈리아 전 총리 베를루스코니가 로마의 자택 앞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출처 : 뉴스1, 베를루스코니 정치생명 끝나는가, 2013년 11월 28일자) 42 사건, 그 후
Silvio Berlusconi 2012년 12월 정계 복귀를 선언한 이탈리아 전 총리 베를루스코니가 2013년 2월 총선을 앞두고 자신이 이끄는 자유국민당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출처 : 로이터, Possible Berlusconi comeback is nightmare for Merkel, 2013년 2월 19일자) 몰락? 이탈리아의 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가 드디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걸까? 이탈 리아 법원은 베를루스코니가 운영해온 미 디어그룹인 미디어셋의 세금 횡령 혐의에 대해 베를루스코니에게 2013년 10월 19일 징역 4년에 2년간의 공직활동을 금지한다 고 확정판결을 내렸다. 미성년자 성매매, 탈세, 부정부패 등의 온갖 추문에 휩싸이 면서도 정치생명을 이어갔던 베를루스코 니에 대한 확정판결이 나자 언론에서는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보 도하긴 했지만 여운을 남겼다. AP통신은 베를루스코니와 이제는 작별할 시간인 것 같다 면서도 정말 이것이 베를루스코 니의 마지막일까.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 다 고 보도했다. 왜 그랬을까? 베를루스코니가 워낙에 질 긴 정치생명을 자랑해왔기 때문이다. 2011 년 11월 이탈리아 경제 위기로 총리 자리에 서 물러났을 때 전 세계 언론은 베를루스코 니의 정치생명이 드디어 끝났다고 보도했 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뒤인 2013년 2월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자유국민당이 제 2당이 되면서 베를루스코니는 다시금 부 활했다. vol.129 Winter 2013 43
사건, 그 후 거대 언론제국의 힘 베를루스코니의 질긴 정치생명은 어디에 서 나올까? 이탈리아 민영 TV채널 4개 중 3개를 소유하고, 국영방송(RAI)을 실질적으 로 장악했던 미디어제국의 황제여서일까? 아니면 세계적인 프로축구구단 AC밀란의 소유주이자 이탈리아 3위 재력가이기 때문 일까? 모든 문제를 공산당 과 좌파 탓으로 돌리는 극우주의자 특유의 포퓰리즘과 선 동정치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미디어로 이탈리아 대중들을 현혹한 탓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다 합쳐진 결과일까?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 적인 것은 그가 핀인베스트(Fininvest)그 룹 총수인 미디어재벌이란 점이다. 1936 년 밀라노의 한 은행원의 아들로 태어난 베 를루스코니가 미디어산업에 뛰어들게 된 때는 1973년이다. 젊은 시절 무명가수로도 활동했던 베를루스코니는 1960년대 말 밀 라노 외곽 위성도시 건설 사업에 참여해 큰 돈을 벌었고 1973년 밀라노에 텔레밀라노 라는 지역방송국을 설립하며 미디어산업 에 진출한다. 1978년에는 미디어그룹인 핀 인베스트를 설립했다. 1980년에는 이탈리 아 3대 민영방송 중 가장 규모가 큰 카날5 를 설립했다. 1982년에는 이탈리아1 과 레 테4 를 사들여 이른바 미디어셋 이라는 민 영방송 독점체제를 완성했다. 이후 그는 일 간지 일 조르날레 와 이탈리아 최대 잡지 사인 파노라마, 최대 출판사인 몬다도리, 최대 광고대행사인 푸블리타리아, 영화 제작 및 배급사인 메두사필름 을 소유하기 에 이르렀다. 방송과 부동산, 출판, 광고, 영화, 슈퍼마켓 체인 사업에까지 손을 뻗쳐 젊은 시절 베를루스코니는 크루즈선과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했었다. (출처 : The observer, Silvio Berlusconi: a timeline, 2011년 11월 13일자) 44 사건, 그 후
Silvio Berlusconi 이탈리아 최대 재벌로 성장한 것이다. 베를루스코니가 이렇게 급속도로 미디 어독점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탈리아 정치권과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었 다. 1980년대 사회당의 베티노 크락시 총 리나 기독교민주당의 당수 안드레오티 등 부패 정치인들의 후원이 있었기에 베를루 스코니는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크락시는 1984년 10월 16일 이탈리아 법원이 민영방 송국의 폐쇄를 명령하자 10월 20일 영국 공 식방문 일정을 취소하고 민영방송국을 허 가하는 긴급법령을 통과시켰다. 나중에 검 찰은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한 회사의 해외 계좌에서 크락시의 계좌로 1,800만 달러가 넘어간 사실을 밝혀냈다. 미디어재벌에 의한 정치지배 1990년대 초 베를루스코니의 핀인베스트 그룹은 3개의 민영 TV방송국과 일간지, 주 간지, 영화제작사, 극장, 출판사, 프로축구 팀, 광고회사, 슈퍼마켓 체인 등 3백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연 70억 달러(약 5조 6 천억 원)의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던, 독일 베르텔스만에 이은 유럽 2위의 미디어재벌 이었다. 그러나 핀인베스트그룹은 1992년 19억 달러의 빚을 기록한 데 이어 1993년에 는 22억 달러의 빚이 있었다. 또 사회당 의 원들이 민영 방송사 수를 줄이라고 줄기차 게 요구하면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일 각에서는 베를루스코니가 정계에 진출한 이유가 핀인베스트그룹의 경영난을 해결 하고 사업상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 장하기도 한다. 1) 또 한편으로는 이탈리아 검찰에서 1992 년부터 진행하던 마니 폴리테(깨끗한 손) 로 자신을 보호해주던 베티노 크락시 등 의 정치인들이 실각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이권을 지켜야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 온다. 어찌됐든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 1월 26일, 이탈리아 국민들이 축구 국가대표 팀을 응원할 때 쓰던 구호인 포르차 이탈 리아 (Forza Italia, 전진 이탈리아)란 정 당을 창당하고 같은 해 3월 총선에서 승리 해 총리가 된다. 1994년 총선은 미디어정 치의 승리였다. 베를루스코니는 철저하게 TV유세에 집중했다. 반공 과 경제기적 재 현 을 내걸었던 그는 45%의 시청률을 기록 하던 자기 소유의 TV방송국 레테4 를 비롯 한 3개 방송국과, 이탈리아 최대 발행부수 를 자랑하는 잡지 파노라마 를 통해 경제 적인 피폐와 부패스캔들로 얼룩진 이탈리 아를 구해낼 구원자로서의 이미지를 각인 시켰다. 2) 그렇게 베를루스코니는 정치 입문 2개월 만에 이탈리아에 새로운 정치문화인 미디 어정치를 탄생시키며 화려하게 정계에 진 출했다. 1) <얼굴 : 이탈리아 최대 언론재벌 베를루스코니>, 한겨레, 1994년 3월 24일, 8면. 2) 강기석, <베를루스코니는 누구, 무명가수 등 전전 자수성가한 언론황제 >, 경향신문, 1994년 3월 30일, 4면. vol.129 Winter 2013 45
사건, 그 후 1994년 Forza Italia당을 창당한 베를루스코니(출처 : 로이터, Profile: Silvio Berlusconi, 2013년 9월 30일자) 사법부와의 악연 1994년 5월 11일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총 리가 된 베를루스코니는 개혁 을 내걸었으 나 첫 조각에서 무솔리니의 후예를 자처하 는 신파시스트정당 인사 5명을 포함시켜 안팎으로 우려 섞인 비판을 받았다. 2차대 전 이후 서유럽에서 파시스트정당 인사가 각료가 된 것은 이탈리아가 처음이었다. 또 하나 문제가 된 것이 사법부와의 껄끄러운 관계였다. 총선에 나설 때부터 베를루스코니는 이 탈리아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부정부패 혐의 때문이었다. 당시 밀라노의 치안판 사들은 베를루스코니가 1992년 프로축구 팀 AC밀란을 인수하면서 1천 4백만 프랑 (약 16억 원)의 뇌물을 뿌렸다는 혐의로 조사를 벌였다. 당시 베를루스코니는 골프 장 허가와 관련해 지방정부 관리에게 3백 50만 프랑의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었다. 3) 3) 주섭일, <이 기민당 연정 몰락 눈앞 총선 종반전 예측불허 대혼선>, 세계일보, 1994년 3월 13일, 4면. 46 사건, 그 후
Silvio Berlusconi 또 1994년 7월 23일 치안판사들은 핀인 베스트그룹의 세금포탈 혐의를 붙잡아 재 정책임자 2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하 고,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다. 그 리고 베를루스코니의 동생 파울로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 사건은 핀인베스 트그룹의 재정담당 이사가 세무신고를 하 면서 세무 관리에게 2억 리라(약 1억 원)의 뇌물을 줬다고 시인하면서 일파만파로 커 졌다. 결국 베를루스코니는 핀인베스트그 룹의 뇌물공여 사실을 시인했다. 자신은 뇌 물공여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단서를 달고 서 말이다. 사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복지예산 삭감에 반발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교 육개혁안에 반대하는 고등학생들의 전국 적인 시위로 베를루스코니는 고전했다. 더 구나 1994년 11월 22일 치안판사들이 핀인 베스트그룹 뇌물공여와 관련해 베를루스 코니를 내사하고 있다고 공표하고, 12월 6일 베를루스코니는 검찰에 출두해 조사 를 받았다.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고, 북부 동맹이 연정에서 발을 빼면서 연정은 깨져 가고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궁지에 몰렸 다. 그리고 1994년 12월 22일 스스로 사임 하며 짧은 첫 총리생활을 마감했다. 거세당한 언론 베를루스코니의 재기는 어려워보였다. 세 무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혐의에 대한 검 찰수사가 계속되었고, 1998년 7월 7일 법 원은 베를루스코니에게 징역 2년 9개월을 선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그 1994년 12월 22일 총리 사임을 선언하고 있는 베를루스코니 당시 모습(출처 : BBC, pictures: Berlusconi in politics, 2013년 8월 2일자) 는 풀려났고, 2001년 재기에 성공한다. 거 대한 미디어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서 말이 다. 2001년 5월 13일 치러진 총선에서 베를 루스코니가 이끄는 중도우파가 승리를 거 두었고 베를루스코니는 다시 총리에 등극 한다. 그리고 1994년과 같은 일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국영방송 라이 (RAI)를 장악하는 일이었다. 그는 2002년 2월 라이 이사 5명 가운데 3명을 자기 측근 으로 채워 라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자 신이 소유하고 있는 민영방송 3개를 합한 다면 이탈리아 시청자의 90% 이상이 베를 루스코니가 실질적으로 소유하거나 장악 한 TV를 시청하게 된 셈이다. 또 그는 자 신에게 유리한 법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2002년 3월 28일 이익상충법 이 의회를 통 과했다. 이 법안은 공직자도 경영에 참여 하지만 않는다면 기업을 소유하거나 주식 을 보유할 수 있다 는 것으로 베를루스코니 vol.129 Winter 2013 47
사건, 그 후 자신을 위한 법안이었다. 그리고 총리에게 국영방송 라이의 이사회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있어 베를루스코니의 방송장 악 음모라는 비판을 받았다. 4) 그리고 베를루스코니는 2003년 6월 국 가 5대 고위공직자(총리, 대통령, 상원의 장, 하원의장, 헌법재판소 의장)의 임기 중 면책특권을 보장하는 법률을 날치기로 밀 어붙여 통과시켰다. 비록 2004년 헌법재 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내려졌지만 베를루 스코니는 법망을 교묘히 피해갔다. 2006년 4월 총선에서 패배해 물러날 때 까지 베를루스코니는 언론을 옥죄었다. 이 탈리아의 한 언론인이 이탈리아 언론은 거 세당했다 고 말할 정도로 베를루스코니는 언론장악에 심혈을 기울였고, 선정적인 방 송으로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부채질했다. 베를루스코니가 집권하던 5년간 방송에 는 그의 얼굴이 쉴 새 없이 비쳐졌다. 얼마 나 많이 나왔는지 남편과 부모 얼굴도 몰라 보는 뇌질환 주부가 신문에 난 베를루스코 니의 얼굴만큼은 알아봤다는 사실이 과학 저널에 실리는, 쓴웃음 나는 상황이 발생하 기도 했다. 5) 그뿐 아니라 방송의 선정성도 눈에 띄게 늘어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디어셋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벨리나(velina) 란 여 성이다. 이탈리아어로 쇼걸 을 뜻하는 벨 리나가 방송에서 하는 일은 이런 것이었다. 미디어셋이 방송하는 <켈리 체 일칼치 오(Quelli Che Il Calcio)>라는 TV 프로 그램에서는 젊고 매력적인 여자들이 미니 스커트에 뾰족구두를 신고 출연해 남자 상 의를 다림질하는 경연을 벌인다. 출연한 여 자들은 별로 말도 하지 않고, 춤도 별로 추 지 않고, 옷도 거의 입지 않은 채 경연을 벌 인다. 그 다음 한 축구선수가 나타나 누가 다림질을 잘했는지 평가해 상을 준다. 이들 여성은 별로 특별한 것도 없는데 가슴과 허 벅지를 드러내고 공허한 웃음을 짓는다. 6) 이 프로그램은 궁극적으로 베를루스코니 의 정치를 돕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해 석이 지배적이다. 경향신문 의 설원태 선 임기자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베를루 스코니)는 이탈리아의 TV문화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검약과 절제를 중요시했던 가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한 미디어셋 방송사 홈페이지 캡쳐 (출처 : 미디어셋 홈페이지[www.mediaset.it]) 4) 김학준, <이탈리아 노-정 대격돌 예고>, 한겨레, 2002년 3월 29일, 10면. 5) 이본영, < 베를루스코니 쇼 막 내릴까>, 한겨레, 2006년 4월 10일, 9면. 6) 설원태, <그후 : 이탈리아 권력 언론 장악 베를루스코니>, 경향신문, 2009년 12월 23일, 26면에서 재인용. 48 사건, 그 후
Silvio Berlusconi 톨릭 전통을 권력 놀음과 성, 사치 등을 주 로 하는 문화로 타락시켰다고 타임은 평가 했다 고 말한다. 7) 거세당한 언론과, TV문화를 바꿔 자신 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베를루스코 니의 수완(?) 덕분에 베를루스코니는 1945 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5년 임기를 꽉 채운 최초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를 루스코니 재임기간 이탈리아의 경제는 추 락을 거듭했다. 2001년 총선 때 경제기적 을 실현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베를루스코 니 정권 하에서 이탈리아는 정부 부채액 세 계 3위, 유럽연합 내 실업률 2위, 그리고 제 로에 가까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물가 는 뛰어올랐고, 빈곤층의 상대적 박탈감도 심화됐다. 다시 살아나다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영원할 것 같던 베를 루스코니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2006년 4월 총선에서 로마노 프로디가 이끄는 중도좌파연합에 근소한 차로 패배하면서 베를루스코니 시 대는 이제 완전히 물러간 듯 보였다. 그러 나 프로디 총리가 20개월 만에 낙마하자 베 를루스코니는 2008년 4월 총선에서 승리 해 다시금 총리 자리에 올랐다. 세 번째 총리에 오른 뒤 그는 또다시 면책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2008년 7월 대 통령과 총리, 상 하원 의장 등 정부와 의 회 핵심인사 4명에 대해 불법행위가 있더 라도 재직 중 형사소추를 면제해주는 법안 이 통과된 것이다.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 혐의로 재판이 걸려있던 베를루스코니를 위한 법이었다. 이 법안은 2009년에 헌재 로부터 다시 위헌 판결을 받았지만 베를루 스코니는 최장 18개월 동안 총리와 내각 각 료의 재판출석의무를 자동적으로 면해주 는 또다른 법안으로 면책 특권을 이어가다 2011년 1월 다시금 위헌 판결을 받으며 정 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이 위기 역시 무사 히 지나갔지만 그는 2011년 11월 12일 이탈 리아에 경제 위기가 닥치자 총리에서 물러 나게 된다. 세계의 주요 언론은 이때 베를루스코니 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보도했다. 각종 망 언과 숱한 성추문, 스캔들과 게이트로 얼룩 졌던 베를루스코니의 악행이 속속 드러났 고, 그렇게 베를루스코니는 한 시대를 마감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라이의 전 사장 루 치아 아눈치아티는 죽은 당나귀를 조심하 라.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당신을 걷 어찰 것이다! 란 말로 베를루스코니의 복 귀를 점쳤다. 8) 이 말처럼 베를루스코니는 2013년 2월 총선에서 자신이 이끌던 자유국민당이 제2 7) 설원태, <그후 : 이탈리아 권력 언론 장악 베를루스코니>, 경향신문, 2009년 12월 23일, 26면. 8) 조홍민, <베를루스코니는 죽지 않았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주간경향, 2011년 11월 29일. vol.129 Winter 2013 49
사건, 그 후 2011년, 죽은 당나귀를 조심하라.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당신을 걷어찰 것이다! (Beware the dead donkey! He looks dead. Then he kicks you!)라고 말하며 베를루스코니의 복귀를 점쳤던 루치아 아눈치아티와 베를루스코니가 2013년 2월 아눈치아티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LEADER 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출처 : giornalettismo, Il triste show di Berlusconi a Leader dalla Annunziata, 2013년 2월 9일자) 당이 되면서 정계에 복귀한다. 베를루스코니의 정계 복귀에는 미디어셋 소속 방송의 힘이 컸다. 2월 총선을 두 달 앞두고 벌인 여론조사에서 자유국민당의 지지도는 17%에 지나지 않았지만 TV캠페 인을 시작하면서 지지도가 3% 올랐다. 하 지만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퇴위 뉴스, 2월 12일부터 16일까지 열리는 산레모 칸초네 축제에 시청자들의 관심이 쏠리면서 베를 루스코니의 지지도는 제자리에 머물렀다. 그래서 이탈리아 신문은 교황의 퇴위와 산 레모 축제가 베를루스코니의 선거를 망쳤 다고 빈정댔다. 9) 즉 뉴스의 초점이 분산된 덕분에 베를루 스코니의 자유국민당이 제1당이 되지 못한 것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이탈리아 국민의 9) 장행훈, <이탈리아 총선이 이탈리아와 유럽에 남긴 교훈>, 황해문화, 2013년 여름호, 258~259쪽. 50 사건, 그 후
Silvio Berlusconi 82%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TV를 통해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장담할 수 있겠다. 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바로 이런 미디어재벌의 정치지배를 뜻하는 베를루 상황이 베를루스코니의 질긴 정치생명을 스코니 현상 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 가능하게 만든 배경이다. 또 베를루스코니 다는 사실이다.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처럼 의 성공신화에 열광하고, 그를 선망하는 이 조셉 매카시의 매카시즘처럼 실비오 베를 탈리아 국민들의 동류의식도 베를루스코 루스코니가 현실에 구현시킨 베를루스코 니의 정치생명을 연장해준 힘이었다. 니 현상은 지금도 또 앞으로도 꾸준히 발 생할 여지가 충분하다. 죽은 당나귀 는 이 죽은 당나귀를 조심하라 탈리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언제 어디서 이렇게 다시 정계에 복귀했지만 베를루스 든 우리가 경계를 늦출 때 미디어재벌에 의 코니는 확정 판결로 사실상 정치생명이 끝 한 정치지배 혹은 미디어를 이용한 정치지 난 것처럼 보인다. 그 와중에도 베를루스코 배가 우리 엉덩이를 걷어찰지 모를 일이다. 니는 4년형을 1년으로 감형 받았고, 가택연 금 대신 사회봉사를 신청해 애완견 돌보기, 육아 봉사 등의 사회봉사명령을 받았다. 그 는 과연 몰락한 걸까? 정치생명은 끝난 걸 까? 누구도 호언장담할 수 없다. 그의 생존 능력과 그가 가진 미디어의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vol.129 Winter 2013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