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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김한용 구술 녹취문 129 III. 광고사진가로서의 활동 김: 아아 최: 그리고 신진자동차 퍼브리카도 선생님이 찍으셨대요? 김: 예? 최: 신진자동차에서 나왔던 퍼브리카 김: 퍼브리카. 예, 맞습니다. 최: 요렇게, 요렇게 된 차 무드는 나와있다 할지라도 톤 변화가 약하다. 이렇게 결점 을 지적한 평을 임응식 선생님이 쓰셨는 데 그 평에 동의하시나요? 제6회 조일광고상을 수상한 <오리엔트 시계> 지면광고, 1969, 아이디어 이영희, 김: 아, 저 동의합니다. 저 임응식 씨라면 무 사진 김한용 조선일보 ( 광고대상 20년, 조건 지지파니까. 조선일보사, 1983) 최: 거 60년대 초반하구요, 거 60년대 후반에 최: 그 아이디어는 누가 주신 거예요? 가면 광고 이미지에서 사진이 차지하는 김: 그 아이디어는 부수언 씨. 비중이 어떻게 변화가 되나요? 최: 부수언 씨. 김: 그때는 게 우리 어머니를 해서 저 그땐 TBC에 우리 어머니가 거 또 테레비 한번 나갔어요. 에 누구냐? 김한용 씨 어머니다. 해서 야 잘 들리냐? 하는 표정인데 그래서, 그 덕에 또 제가, 또 단독으로 또 그 때 또 TBC에 또 효자로 한번 또 나갔죠. 두 번 나갔어, 그 관계로. 광고 관계 로. 어요. 최무룡 씨다 뭐 다 쓰고 시작했죠. 최: 그러니까 60년대 초반에는 여전히 광고 이미지 중에 전적으로 사진만을 쓰는 게 아니라, 일러 스트레이션도 쓰고 그랬었나요? 최: 그때는 대개 문자 광고였나요? 최: 신문광고인데 인제 그 김: 전부다 사진을 주로 많이 썼죠. 김: 테레비에서 인제 그 최: 처음부터 근데 사진의 양이 계속 증가했다 최: 한번 또 초대를 해 갖고 나왔던 김: 증가했다고 봐야죠. 김: 맞아요. 모델이 우리 어머니가 나갔으니까. 최: 증가한 만큼 광고사진가들의 수입도 점점 좋아졌다라고 봐도 되겠네요? 최: 당시 조일광고상 사진 분야 심사는 거의 다 임응식 선생님이 거의 전담하신 걸로 되어 있는데 김: 그렇습니다. 많이 좋아져요. 그리고 또 일반 공모전도 하고, 그래서 광고에 대한 이미지 상당히 이 68년 11월 17일자 신문(조선일보)53)에 실렸는데, 그게 인제 선생님이 찍은 사진인데, 결점을 얘기한 게 있더라구요. 뭐라고 했냐면요. 오리엔트 시계는... 뽑고나서, 조선일보, 1968. 11. 17 일류 배우들 많이 썼고. 톱스타는 거의 다 제가 썼습니다. 뭐 김진규 씨다 뭐다 안 쓴 사람이 없 김: 아, 신문광고였죠. 최: 제가 한번 그 기사를 검토해 보니까 임응식 선생님이 광고사진에 대한 결점을 지적하는 심사평 53) 개성있는 구도를, 5회 조일광고상을 김: 사진의 비중이 점점 좋아졌죠. 좋아지고 김: 그 당시 일러스트레이션은 별로, 별로죠. 그땐. 김: 그렇죠. 그럼 그렇지. 리카>, 1968, 사진 김한용 조선일보 ( V 광고대상 20년, 조선일보사, 1983) 최: 그 광고가 방송이 된 건 아니었죠? 요. 제5회 조일광고상을 수상한 <신진 퍼브 좋았어요. 그리고 우리는 또 여러가지 사회적으로 사진에 대해서 인식이 좋았거든요. 최: 그걸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기에는 좀 쉽지 않으실 것 같은데, 그때 광고사진가들의 사회적 지위 어떤 경제적인 상황은 어땠습니까? 김: 그렇죠. 뭐, 사회적 지위가 그래도 뭐 사진하는 사람이니까 디자인 하는 사람이 (사진하는 사 람) 자기가 어떻게 뭐 찍을 수 없잖아요? 뭐 예를 들면 저희 연구소 얘길 하자면, 그 미대 나온 김: 맞아요. 맞아요.(웃음) 친구가 예를 들면, 뭐 신문이나 외국 잡지 오려가지고 와서 이렇게 찍으면 어떻겠냐 물어 봐요. 최: 검은 부분이 커서 그러니까, 암부가 너무 커서 균형을 잃었고 그럼 나는 뭐 거 굉장히 반대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뭐 거 아이디어를 맨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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