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 S A L L A B O U T C H A N E L
Contents All about Coco Chanel All about Brand Chanel 1 샤넬의 로고에 관해 6 1 샤넬의 뮤즈들(칼 라거펠트의 뮤즈들) 2 가브리엘 코코 샤넬 6 -뮤즈란? 34 3 샤넬이란? 7-80년대~90년대 초 36 4 디자이너 샤넬이 되기까지 -90년대~00년대 초 38 - 어린 시절의 샤넬 8-00년대 중반~ 현재 39 - 조숙하고 예민했던 사춘기 12 2 샤넬의 시그니처 아이템 - 샤넬의 시작 14 -Little Black Dress 40 5 샤넬의 디자이너 시절 22 -Chanel No.5 Perfume 41 6 샤넬 연보 24 -Chanel 2.55 Bag 42 7 디자이너 샤넬로써의 업적 28 -Chanel Tweed Suit 43 8 샤넬의 연인 아서 카펠 29
All About Coco Chanel 5
샤넬의 로고에 관해 가브리엘 코코 샤넬 샤넬이란? 프랑스의 복식 디자이너 가브리엘 보네르 샤넬(Chanel, Gabrielle, 1926년에는 오늘날까지도 그 명성이 자자한 야회복 리틀 블랙 드 프랑스 소뮈르 태생. 별칭 코코Coco이다. 1883.8.19~1971.1.10 여)이 설립한 의류 브랜드. 레스 를 발표했다. 또한 같은 해에 스코틀랜드의 의상에서 영감 1910년 파리에서 여성 모자점을 열고 모자 디자이너로 활동하였 프랑스의 의류, 향수, 액세서리, 선글라스, 핸드백 등의 브랜드. 을 얻은 클래식 트위드 를 발표했다. 으나, 제 1차 세계대전 후 여성복 디자이너로 전향하였다. 1910년 가브리엘 샤넬이 설립했으며, 본사는 프랑스 파리 방돔 샤넬은 1939년에 쿠튀르 하우스의 문을 닫고 은퇴했으나 그녀의 향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모토로 하는 디자인 활동을 시작하여 광장에 있다. 수와 액세서리는 샤넬 부티크에서 계속 팔았다. 코르셋 등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 하우스 오브 샤넬(The House of Chanel-일반적으로 줄여서 샤넬 1954년에 71세의 나이로 패션계에 복귀한 그녀는 컬렉션을 통해 발 방하는 실마리를 만들었으며, 여성복에 저지라는 소재를 처음으 이라고 부름)의 설립자는 1883년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출생한 가브 표한 트위드 투피스로 재기에 성공했다. 1955년에는 2.55 란 이름 로 사용하였다. 리엘 샤넬이다. 코코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그녀는 1910년 파리의 의 퀼트 백을 출시하여 반향을 일으켰고 같은 해에 첫 번째 남성향 샤넬의 로고는 샤넬의 오너이자 창립자였던 코코 샤넬이 직접 디 자인 했다. 하나는 자신의 이름인 영문 CHANEL을 단순한 산세 리프체로 디자인한 워드마크다. 또 하나는 두 개의 C자가 대칭적 으로 놓인 로고다.(가브리엘 샤넬은 젊은 시절부터 Coco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개의 로고는 샤넬이 세계 패션계에 던진 화두와 이념을 잘 드러내 보인다. 먼저, 검정색과 흰색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색의 대비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개의 C자가 이루고 있는 완벽한 대칭성이다. 이는 여성을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옷으로 부터 해방시키려고 했던 샤넬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샤넬 의 로고는 향수와 화장품, 욕실용품에만 사용되었다. 이 상표들은 1925년에 정식 등록 되었다. 오늘 날 샤넬 슈트라고 불리는 카디건 스타일의 슈트를 발표하여 유명하게 되었다. 약 15년간 가게를 닫았으나 1954년 다시 문을 열었다. 장식이 생략된 옷의 본체에 브레드나 코드의 테두리를 붙이고, 당시에 는 보기 드문 크고 작은 색유리나 크리스털 글라스의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유행의 변천 속에서도 별로 변함이 없이 오늘 날에도 애용된다. 또, 그녀가 만든 향수 샤넬 No.5 도 유명하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모델의 모자 라는 암호명으로 나치스 첩 보원으로 활동하였음이 사후 20년이 지난 1995년에 확인되어 충 격을 주었다. 캉봉거리에 샤넬 모드 란 여성용 모자 가게를 열었다. 그녀의 모자가 프랑스의 유명 여배우들에 의해 명성을 얻게 되자 1913년에 프랑스의 도빌에 새 부티크를 열고 저지 소재를 이용한 여성 스포츠 웨어를 출시했다. 활동적이고 입기 편한 저지 옷은 코르셋과 페티코트에 얽매어 있던 여성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1915년에는 비아리츠에 그녀의 첫번째 쿠튀르 하우스를 열었다. 1921년에는 어네스트 보가 개발한 향수 넘버 파이브(No.5) 를 출 시하여 상류사회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어네스트 는 후에 No.22 키르 드 뤼시 가르데니아 부아 데 지르 등의 향수도 만들었다. 1924년에는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와 함께 향수와 뷰티 라인을 제조 판매하는 회사 라소시에트 데 파르풍 샤넬 을 설립했다. 수 오 드 투알레트 를 출시했다. 샤넬은 1971년에 사망 했으나 그녀의 사 후인 1978년에 기성복 프 레타 포르테 라인과 액세서리가 출시 되는 등, 그녀의 이름이 건재 함을 과시했다. 1983년에는 독일의 유명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가 샤넬의 수석 디 자이너 자리에 올랐다. 그는 대담, 완벽, 독특, 정열, 환상의 5가지 원칙을 세우고 샤넬의 변화를 시도했다. 1987년에는 샤넬의 첫 번째 시계가, 1999년에는 첫 번째 스킨케어 라인인 프레시지옹 이 출시되었다. 6 7
어린 시절의 샤넬 The Younger days of Chanel 샤넬의 본명은 가브리엘 샤넬 이다. 고된 일이 아니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이 성당에서 신부의 영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만, 어디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기질 탓 가브리엘 샤넬은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잔은 가브리엘을 낳기 위해 병원의 침대 세를 받는 종교적 전통이 있었다. 가족이 샤넬의 어머니와 아버지인 잔과 알베르는 이 더 컸다. 알베르는 이런저런 핑계를 의 작은 시골마을인 소뮈르의 한 병원에 위에서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 함께 아이의 탄생을 축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쥘리아와 가브리엘, 두 딸이 생겼음에도 대며 정식 결혼을 미루고만 있었다. 서 태어났다. 당시 병원의 운영을 맡고 있 러 댔다. 그러나 잔의 남편이자 태어날 아 행복한 삶을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불구하고 그때까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 그런 상황에서 나이 어린 새댁인 잔은 던 수녀들이 샤넬의 어머니인 잔 샤넬 이의 아버지인 알베르 샤넬 의 모습은 그러나 샤넬은 태어난 지 이틀 후에야 소 지 않은 사이였다. 장돌뱅이 장사꾼으로 우 마냥 남편을 기다리며 집안에만 틀어 의 곁에서 그녀의 출산을 도왔다. 수십 년 병원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 식을 전할 길이 없는 아버지도, 기운을 차 연히 잔을 사귀게 된 알베르는 잔의 부모 박혀 있을 수 없었다. 어린 딸을 데리고 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될 아기가 노릇을 하고 있던 수녀가 소리를 높여 말 리지 못한 어머니도, 가족 중 그 누구도 참 의 성화에 못 이겨 억지로 결혼을 약속하게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것이다. 잔은 막 태어나려는 순간이었지만 축복받은 탄 했다. 예쁜 딸아이에요. 힘겨운 산고 끝 석하지 않은 자리의 가운데 병원의 성당에서 되었던 것이다.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아 다녔다. 생이라고 할 수 는 없었다. 아기를 출산하 에 드디어 가브리엘 샤넬이 태어난 것이다. 영세를 받았다. 그러나 알베르는 처음부터 자유분방하고 그래서 샤넬을 낳기 전 날까지도 무심한 려는 갓 스무 살 산모 잔은 허약해질 대로 그러나 허약해진 몸으로 아기를 낳은 잔 아기를 축복해 주기 위해 영세에 반드시 무책임한 사내였다. 첫째 딸 쥘리아가 남편을 원망하며 힘겹고 고된 일을 할 허약해져 있었다. 가난한 살림살이 탓에 임 은 기뻐할 여력이 없었다. 그녀는 정신을 참석해야 하는 대부와 대모는 낯 모르는 태어났지만 그는 전혀 가정을 돌보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한 몸으로도 쉴 새 없이 일을 해 왔기 때문 잃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사람들이 대신해 주었다. 않았다. 장사를 핑계로 몇 달씩 소식을 샤넬이 태어나고 얼마 후 우여곡절 끝에 이었다. 그 동안 잔은 샤넬의 언니이자 첫째 수녀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 샤넬의 아버지인 알베르는 지방의 이곳 저곳을 끊고 집 밖으로 떠돌기 일쑤였다. 집밖으 알베르와 잔은 드디어 정식 결혼식을 올리 딸인 쥘리아를 둘러업고 시골 여관에서 힘겨 보며 수군거렸다. 아기 아버지는 도대체 떠돌며 장사를 하는 가난한 장돌뱅이였다. 로떠돌 때면 알베르는 제멋대로 지내며 방 고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알베 운 허드렛일을 했다. 임신한 몸으로 아이까 어디 있는 거지? 샤넬이 태어나던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딸 탕한 삶을 즐겼다. 그가 장돌뱅이라는 르의 태도는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 지 돌보며 청소와 빨래 등을 하는 것은 여간 대부분의 국민이 천주교를 믿는 프랑스에서는 이 태어난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어딘가를 직업을 택한 것은 가난 때문이기도 했지 지 않았다. 그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했고, 8 9
어린 시절의 샤넬 The Younger days of Chanel 아내와 두 딸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잔은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고된 노동과 무리한 지 않는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장례식은 더없이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씨 아버지 노릇을 하기 위해 다섯이나 되는 아 고 있던 그 수도원은 여학생 기숙 학교와 않았다. 그는 가족을 그저 자신의 자유로운 출산으로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불렀다. 그러나 어머니는 깨어나지 않았다. 속에 치러졌다. 이들을 돌보기로 결심할 리 만무했다. 고아원을 겸하고 있었다. 또한 브리브에는 삶을 옭아매는 족쇄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은 남편의 그늘에서 큰 소리로 부르며 흔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뒤 집으로 돌아온 샤넬의 아버지 알베 알베르는 이제 더 이상 무엇에도 얽매이지 알베르의 고모가 살고 있어 가끔 세 딸을 는 수년 동안 장사를 핑계로 제멋대로 집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남편의 경제적인 열두 살의 어린 샤넬은 그만 겁에 질려 울 르는 큰 충격에 사로잡혔다. 자기가 없는 않고 방랑자처럼 살고 싶은 바람뿐이었다. 돌봐 줄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을 떠나고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 무능력과 방탕한 기질, 자신과 아이들에 대 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샤넬의 어머니인 잔 사이에 아내가 죽어 이미 땅속에 묻혀버린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것은 너무나 무책임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1895 는 사이 샤넬에게는 세 명의 동생이 생겼 한 무관심, 때때로 폭발하는 분노와 폭력을 샤넬이 서른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그만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그가 받은 충 하고 이기적인 마음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년 3월 쥘리아와 가브리엘, 앙투아네트 세 다. 1885년 남동생 알퐁스가 태어났고, 1887 묵묵히 참고 견뎠다. 원래부터 순진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격은 아내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기로 결심했다. 알베르는 자신의 아이들 자매는 아버지가 모는 낡은 마차에 실려 오 년에는 여동생 앙투아네트가 태어났다. 그 순박하기만 한 시골 처녀였던 잔은 감히 샤넬이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나 혼자 이 다섯 아이를 어떻게 키운단 을 버렸다. 그렇다고 물론 길거리에 내버 바진에 있는 고아원을 겸한 수도원에 도착 리고 1893년 샤넬이 열 살이 되던 해에 막 가장인 남편에게 대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알베르는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말인가? 알베르는 모든 것이 그저 당혹스 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두 아들을 다른 가 했다. 검은 옷을 입은 수녀가 나와 그들을 내 남동생 뤼시앵이 태어났다. 알베르와 그녀가 정말 두려워한 것은 남편이 자신과 않았다. 역시 지방을 떠돌며 장사를 하고 러울 뿐이었다. 그는 이제 아내마저 잃은 정에 입양시키고, 세 딸을 고아원에 맡겼 맞았다. 세 자매는 침울하게 굳은 얼굴로 잔은 어느새 다섯 남매의 부모가 되었던 아이들을 버리고 완전히 떠나버리면 어쩌나 있던 터라 연락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난한 장돌뱅이 홀아비일 뿐이었다. 아내 다. 그는 어찌 되었든 아버지로서 어머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이내 마차 것이다. 하는 것이었다. 가난하고 힘겨운 살림을 어쨌든 그는 병든 아내를 곁에서 돌보지 않 가 살아 있을 때도 가정을 꾸리는 책임을 를 잃은 가련한 어린 자식들을 냉정하게 내 를 몰고 떠났다. 수도원의 커다란 문이 굳 그러나 그들 부부는 다섯 아이에게 행복한 꾸려 나가는 것보다 남편에게 버림받는 일 았으며, 아내의 죽음마저 지켜보지 않은 매 아내에게 떠맡기고 제멋대로 떠돌아다니 버린 것이었다. 게 닫혔다. 이후 세 자매는 다시는 아버지 가정을 꾸려 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버 을 더 두려워했던 것이다. 정한 남편이 되고 말았다. 잔은 자신이 낳 며 살아온 그였다. 결혼식마저 울며 겨자 알베르가 세 자매를 맡긴 곳은 브리브에서 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이제 정말 지 알베르의 책임이 컸다. 경 제 적 으 로 도 2월의 어느 추운 날 아침, 어머니의 방에 은 다섯 아이와 몇몇 친척만이 지켜보는 가 먹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토록 구속 받는 그리 멀지 않은 오바진이란 곳의 한 수도원 고아 아닌 고아가 되고 만 것이었다. 형 편 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인 들어선 샤넬은 누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운데 쓸쓸히 브리브의 한 묘지에 묻혔다. 것을 싫어했던 그가 이제 와서 제대로 된 이었다. 마리아 성심회의 수녀들이 운영하 10 11
조숙하고 예민했던 사춘기 The Younger days of Chanel 샤넬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오바진의 마 리아 성심회가 운영하는 수도원. 나는 열두 살 때 모든 걸 빼앗겼다는 사 실을 알았다. 그 때 나는 죽은 것이나 다 름 없었다. 어른이 된 후 샤넬은 그 시절에 대해 이렇 게 말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아버지에 의해서 고아원에 버려진 충격이 무척이나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죽은 것과 다름 없었다 는 말은 이후 수도원에서의 생활 이 샤넬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 나를 짐작하게 한다. 당시 샤넬은 열두 살이었다. 더 이상 철 모르는 어린 아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나 이였다. 더구나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 고 남동생들과 헤어지고, 아버지에게 버 림받은 상처를 가진 샤넬이 아니던가. 아 직 어른이 되려면 긴 세월이 남아 있었지 만, 조숙했던 샤넬은 이미 예민한 사춘기 로 접어들고 있었다. 구시대적 전통을 강조하던 수도원에서는 정숙한 여자로서 갖춰야 될 덕목들을 학생 들에게 교육시켰다. 수녀들은 무엇보다 인 내와 순종을 강조했다. 수도원 생활에 차츰 적응해 나가던 언니 쥘 리아와 여동생 앙투아네트와는 달리, 샤넬 은 당돌하고 반항적인 태도로 수녀들에게 꾸지람을 듣기 일쑤였다. 엄격하고 근엄한 수녀들이 보기에 샤넬은 제멋대로 굴며 겸 손을 모르는 아이였다. 샤넬은 다른 두 자매와는 달리 유독 자존심 이 세고 반항심이 강했다. 외출이 금지되어 있어 수도원 내에서만 생활할 수 밖에 없 는 처지였기도 했지만, 샤넬은 공상을 즐겼 고 미지의 먼 곳을 동경했다. 샤넬은 수도 원의 생활에서 자유에 대한 갈망과 깊은 외 로움을 느꼈다. 12 13
샤넬의 시작 The Greatest Start of Chanel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도레 산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고모들 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에티엔 발장을 따라 파리에서 북쪽으로 60 킬로미터 떨어진 콩피에뉴로 갔다. 사실 에티엔 발장이 물랭과 비시에서 가브리엘 의 수호천사 노릇을 했지만 그때까지 가브 리엘은 에티엔 발장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했다. 물론 발장은 가브리엘의 연인이 되어 있었다. 첫 번째 연인 두 사람은 과연 서로 어떤 점에 끌렸던 걸까? 두 사람을 묶어주었던 감정은 동지애였 다. 그는 그 사람과 함께라면 말 도둑질 도 하겠다 는 말이 딱 어울리는 형이었다. 에티엔 발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유머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가브리엘 도 마찬가지여서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가 심각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공통점은 둘 다 부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에티엔 발장의 부모는 직조산업의 메카 생 에티엔 출신으로, 가 업으로 물려받은 섬유 공장을 프랑스 최대 의 공장으로 키운 내로라하는 기업가였지 만 일찍 세상을 떠났고, 세 아들 자크 에 티엔 로베르에게 막대한 재산을 남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누가 가업을 이을 지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결국 막내 로베 르가 잇게 되었다. 뛰어난 비행사였던 맏 형 자크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고- 그는 제 1차 세계 대전 때 유명한 비행사 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에티엔 역시 가업 을 잇기에는 적당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 는 정말이지 재미없는 공장 경영자가 되 기에 적합한 기질이 아니었다. 모험을 즐 기며 넘쳐나는 열정을 승마에 쏟아 붓던 그는 1902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유 산의 대부분을 말 사육장 루아얄리외 에 투자하였다. 에티엔은 어린 시절부터 고분고분한 아이 가 아니었다. 그는 엄하기로 소문난 영국 의 포크스턴 기숙학교 출신이었지만. 그 곳에서 사냥이라는 취미만 배워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 뒤 고향인 샤토루에서 육군 이 된 에티엔은 동양어를 배우고 싶다는 말로 장군을 설득하여 곧 물랭의 기병대로 옮겨왔다. 하지만 물랭에도 인도어를 가 르쳐줄 선생님은 없었다. 그러니 물랭에 서 한 일은 오로지 말 타기뿐이었다. 약간 땅딸막한 체구에 콧수염을 기른 둥 근 얼굴, 낙천적인 이미지의 발장은 물랭 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젊은 귀족들 사 이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넉넉한 인심 과 유머, 개구쟁이 기질로 계급간의 벽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돈 많은 부르주아가 귀족들의 인정을 받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두 이방인 에티엔과 코코는 특이한, 하지 만 굉장히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었다. 내 세울 것 없는 날씬한 미모의 처녀와 돈 많 은 써니보이.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우선 가브리엘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브 리엘은 무작정 사랑에 빠지기에는 너무나 의심이 많았고 자신에게 몰두해 있었다. 그녀 옷 스타일을 달리하여 자신이 여느 귀부인이나 정부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그리고 에티 엔 역시 둘의 관계를 책임이 필요한 심각 한 관계로 발전시키고픈 마음은 없었다. 유명한 말 사육사의 미망인에게 말 사육 장이 딸린 성 루아얄리외 를 사들여 물 랭에서의 군 복무 기간 동안 수리 작업에 매달렸던 에티엔이 가브리엘에게 함께 루 아얄리외로 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에티 엔의 말투는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 누구를 책임지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 고 결심한 사람 특유의 가벼운 말투였다. 그는 결코 인생을 심각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가브리엘 역시 그래요, 같이 갈 게요 라고 흔쾌히 대답한 이유는 성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물론 훗날 가브리엘은 그때 일을 조금 다르게 묘사 했다. 나는 교습생이 필요 없나요? 하 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는 내 말을 자기 나 름대로 해석해서 아, 코코가 승마를 배우 14 15
샤넬의 시작 The Greatest Start of Chanel 고 싶어하는구나. 내가 데려가 주기를 바 라는구나. 내가 데려가 주기를 바라는구 문이다. 비참한 배경을 딛고 출세한 재능 있는 가수, 그녀의 원래 이름은 에밀리엔 한편 아름다운 에밀리엔은 몇 년 뒤 자신 이 사랑했던 영국인 기수 알렉 카터가 일 은 뭔가 기념비적인 일을 하고 싶어했다. 성은 아무런 변화 없이 세대를 걸쳐 전승 나. 그렇다면 좋아. 그녀를 데려가야지. 라고 생각했다지 뭐야. 그리고 그 생각을 행동에 옮겼지 라고 말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낭만적인 사랑 때문에 비시를 떠 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오페라 세라일 로부터의 유괴 에 나오는 멋진 아리아 같 지는 않았다. 그저 서로 잘 통한다고 느끼 고 함께 살면 이로울 거라는 판단에서 나 온 행동이었다. 에티엔 발장의 이런 결정은 부수적인 효 과를 가져왔다. 찰거머리 같은 에밀리엔 달랭송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 던 것이다. 에밀리엔은 인기 높은 가수로 에티엔을 위 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 했다. 그녀는 잡 지 가십란에 고정적으로 등장했는데, 기 자들은 그녀를 식충 식물로 묘사했다. 그 녀가 꽤 많은 정부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 앙드레였다. 에밀리엔의 비행을 밝히 에드몽드 샤를 루 의 글을 읽어보자. 에밀리엔의 희생물이 된 남자는 헤아릴 수가 없다. 젊은 백작 두 제만 해도 그녀 때문에 파멸의 길을 걷지 않았던가? 그렇게 에밀리엔의 마음을 사 로잡고자 했던 그는 제일 먼저 다이아몬드 목걸이 하나를 선물했고, 얼마 안 가 또 하 나를 주더니 마침내 가족의 패물이란 패물 은 몽땅 갖다 바쳤다. 결국 보다 못한 어머 니가 그를 콩고로 보내버렸는데, 거기서 설사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파리의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열여덟 명 의 기사들이 에밀리엔을 정복할 목적으로 협회를 결성하기까지 한 마당에 에티엔이 거리낌없이 그녀를 차버렸으니, 기수 클 럽의 청년들에게는 정말 멋지고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찍 세상을 등지자, 그를 위해 시를 지어바 침으로써 신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지금 어디에 누워 있나요? 어느 나무 곁에, 어느 산비탈에 누워있나요? 그대의 잘생긴 창백한 얼굴 을 어느 베개에 파묻고 있나요? 그대의 고 운 손은 어떤 이불 위에서 주먹을 꼭 쥐 고 있나요? 이렇게 그녀는 연모의 정을 이었다. 이제껏 살면서 거둔 성공이란 기껏해야 베 를린 속보 경마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것 이 전부인 에티엔과 가수로서의 꿈을 접은 가브리엘, 이 두 사람에게 루아얄리외 성 은 귀족의 자제로 성에서 태어나지 못했던 그들이 돈 이라는 수단을 통해 획득한 궁전 이었다. 당시에는 시민 신분으로 옛 귀족들의 역사적 공간에 사는 것이 너 무나도 멋진 일로 여겨졌다. 부르주아들 되는 커다란 집이었다. 변화라고는 복도 벽에 걸린 조상의 사진이 늘어나는 정도 가 전부인 그리고 신흥 갑부들이 애타 게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변치 않는 전 통이었다. 가브리엘이 증오했던 고아원 오바진과 마 찬가지로 루아얄리외도 처음에는 수도원 이었다. 그러던 것이 몇 백 년이 흐르는 동 안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거쳐 담쟁이가 드 리워지고, 새로 낸 창문들을 통해 따사로운 볕이 스며드는 멋진 성으로 탈바꿈하였다. 주변은 거대한 정원이었으며, 이어지는 숲 지대에는 노루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에티엔은 말 이외의 다른 동물들도 사육하 고 있었다. 나귀도 길렀고 원숭이도 한 마 리 있었다. 성 내부까지 속속들이 수리하 였지만 별다른 장식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루아얄리외의 분위기는 거의 수도원 같았다. 에티엔은 아기자기한 장 식품보다는 기술적인 편리함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성에는 여러 개의 현대식 부엌과 욕실이 구비되어 이를 본 가브리엘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가브리엘 샤넬에게 주어진 방은 성의 안주 인에게 어울리는 크고 화려한 침실이 아니 라 그리 화려하지 않은 곁방이었다. 그러 나 그녀는 별 불만이 없었다. 이런 사실 역 시 두 사람의 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을 말 해주는 증거였다. 그들은 예의범절을 따 지지 않고 감정에 대한 지나친 배려를 요 구하지 목적 공동체를 이뤘던 것이다. 루아얄리외에서 보낸 처음 몇 달 동안 샤 넬은 평소답지 않게 나태해져 있었다. 찾 아 헤매고 의심하던 지난 세월의 무게가 나태해져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물 질적인 안정을 누리게 되자 그녀는 지금 껏 수없이 방황하게 만들었다. 끈질긴 야 망의 모터를 꺼버렸다. 그녀의 이런 수동 16 17
샤넬의 시작 The Greatest Start of Chanel 적인 태도는 에티엔에게도 꽤 뜻밖의 일 이었는지, 그는 몇 십 년 뒤 당시를 이렇 후 길지 않았던 동화는 끝나고, 나는 다시 갈 곳 없는 고아가 되었지요. 었고, 일 년 뒤 동트는 새벽 그녀는 중요한 시합을 앞둔 순종 말들의 아침 훈련을 맡 커닝턴 가, 가바르톨로메오 가 등이 손에 꼽히는 사육장 소유주들이었다. 일요일 게 기억했다. 샤넬은 12시가 될 때까지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뒹굴었 다. 그러고 나면 밀크 커피를 마시며 삼류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 로 느끼는 안정감을 마음껏 누리던 도취 상태는 어쩌면 가벼운 우울증의 표현이 었는지도 모른다. 훗날 코코 샤넬은 발장의 은총에 힘입어 성의 안주인으로서 편안하게 생활했던 시 절에 대해 결코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지 않 았다. 샤넬은 폴 모랑 앞에서 스물다섯의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콩피에 뉴에 살았어요. M. B.를 따라갔었죠. 너 무 지루했어요. 그래서 하염없이 울었어 요. 그에게 비참했던 내 어린 시절의 이야 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렇게 일 년 동안 울었어요. 하지만 말을 타고 숲을 달릴 때 만은 너무도 행복했어요 그러나 얼마 이 정말이지 코코의 말은 검증과 수정 없 이는 진실을 알 수가 없다. 그 당시 코코의 나이는 열여섯이 아니라 스물다섯이었다. 어린아이가 아니라 인생의 기회가 다 지나 가버린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을, 가수 의 꿈이 수포로 돌아갔기에 더더욱 그랬을 성숙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스물 다섯의 그녀는 발장의 동료이자 정 부로서 아무런 가망도 없는 종속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탈 때면 다시 금 자신감에 불타올랐다. 가브리엘은 발 장과의 관계에 대해 입방아를 찧고 다니 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곳에 머물러야 할 정당한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승마 연습을 했다. 자 봐, 나는 정부가 아 니라 기수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 던 것이다. 어쨌든 에티엔은 샤넬의 재능 에 탄복하여 얼마 안 가 말 고삐를 넘겨주 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코코 샤넬은 시골 출신답게 전원적인 삶 을 사랑했다. 자연 속에서 말과 함께 했 던 루아 얄리외에서의 경험은 그녀로 하 여금 일생 동안 넓은 세상과 자연을 동경 하게 해주었다. 어쨌든 그녀는 나름대로 추억을 만들며 그 곳에서 귀족 사회를 배워나갔다. 이 때 배 운 승마 실력으로 그녀는 여든이 되어서 도 사람들에게 우아하고 바른 경마 기술 을 가르쳐주었으며, 그 때마다 뿌듯해 했 다. 그녀는 곧잘 말을 잘 타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깔아 뭉개 버리고 싶지 않은 달걀 을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아 있다고 상상하는 거야. 라고 말하곤 했다. 루아얄리외의 넓이는 반경 100킬로미터에 달했는데, 당시 그곳에 위치한 이름난 말 사육장은 모두 영국인 소유였다. 카터 가, 아침이면 에티엔은 경쟁자들과 함께 승마 경주를 하면서 갖가지 재주를 선보였다. 경주로는 파리 방향이었으나 시내까지 연 결되어 있지 않고 외곽에서 끝이 났다. 이 때까지 코코는 패션의 중심지 파리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파리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직접 가서 그곳의 창조적인 분위기에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아보지 는 못했던 것이다. 대신 파리에 살고 있는 에티엔 발장의 친 구들이 루아얄리외를 찾아왔다. 에티엔은 종종 성대한 파티를 열었는데, 그와 더불 어 말에 대해 이야기 하며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 고무 장화를 신고서 숲 이쪽 에서 저쪽까지 말을 타고 신나게 달릴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환영 받았다. 파리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았던 사람일지라도 에티엔은 늘 깨끗한 침대를 선사했다. 루 아얄리외는 다른 곳에서라면 절대 어울리 지 않았을 사람들이 모여 흥겹게 노는 장 소였으며, 예의 범절을 따지지 않는 낙원 이었다. 마음씨 좋은 에티엔의 파티는 주 말 내내 계속되어 아무 것도 모른 채 파리 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둔 남 편들에게는 엘도라도였다. 루아얄리외를 자주 찾았던 사람들 중엔 막 스 포이 남작도 끼여 있었다. 그는 겉보기 에 아름다운 아니타와 행복한 결혼 생활 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실은 이곳에 정부 인 수잔 오를랑디를 데리고 왔다. 수잔 오 를랑디는 가브리엘이 가장 혐오하는 늘 말 끔한 옷차림에 뽀얗게 분을 바르고 짙은 향 수를 뿌린 채 애인의 시중을 드는 여자였다. 가브리엘은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버림받지 않는 것,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남자 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정부란 낙인 찍힌 여자였다. 그 사 실을 코코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8 19
샤넬의 시작 The Greatest Start of Chanel 모두가 점잔을 빼는 시대에 결혼이나 존 경, 사회적 명망 따위는 꿈도 못 꾼 채, 영 루아얄리외에서 말의 몸무게를 재던 순간 들을 생각하면 그 당시 경주로를 거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도량이 넓은 발장은 스스럼 없이 에밀리 하나의 장점이 있었는데, 늘 좋은 향수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가브리엘로서는 원히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 는 존재였다. 모리스 카요와 마드무아젤 포르셰메도 왔 다. 이들은 가장 조용한 커플이었다. 선량 한 농부의 아들인 모리스는 말 전문의 자격으로 매번 초대되었다. 에티엔의 죽 마고우인 레옹 드 라보르드는 매번 파트 너가 바뀌었는데, 참석자들 중 유일하게 자동차를 갖고 있었다. 중요한 시합이 열릴 때면 말의 무게를 재 기 위해 경기 전에 말을 타고 저울에 오르 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것은 여성으로 서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최적의 기 회였다. 가브리엘 샤넬은 이런 기회를 통 해 여러 여성들을 관찰하면서 패션의 안 목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숙녀들의 패션 에 대한 반감을 바탕으로 전위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아, 전쟁이 터지기 전 때까지만 해도 19세기의 몰락은 전혀 예상 하지 못했어요. 아름다웠지만 극도로 타 락한 시절이었죠. 장식의 극치를 달리던 바로크 스타일의 마지막 호흡이 이어지고 있었지요. 경주로에 선 가브리엘은 곧 사람들의 주 목을 받았다. 앞서 말했듯, 다른 숙녀들이 그 때까지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주렁주 렁 매달고 등장했던 데 반해 가브리엘은 수수한 밀짚 모자를 썼던 것이다. 모자에 산더미 같은 장식물을 단 여자들은 이제 모두들 가브리엘을 흘끔거렸고 루아얄리 외에 출입하던 숙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브리엘에게 그녀가 쓴 것 같은 모자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샤넬이 처 음으로 유행을 선도하게 된 것이다. 재미 있는 점은 공교롭게도 앞서 말한 여 가수 에밀리엔 달랭송 덕분에 샤넬이 작은 엔을 다시금 루아얄리외의 파티에 초대했 고, 그곳에서 코코의 모자를 본 에밀리엔 은 그 모자를 쓰고 싶어했다. 그리고 에밀 리엔이 코코가 만들어준 모자를 쓰고 나타 나자, 온갖 신문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모 자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가브리엘은 에밀리엔 달랭송이 다시금 루 아얄리외에 합류한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 다. 질투심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가브 리엘과 에티엔은 애초부터 단둘만의 친밀 한 생활을 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사람들 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브리엘 은 나중에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 신랄 한 언변으로 당시 서른 세 살의 에밀리엔 에 대해 아주 짧고도 냉정한 평가를 내렸 다. 그녀는 나이 든 여자에요! 이보다 더 경멸스런 말은 없을 것이다. 가브리엘이 보기에 에밀리엔에겐 단 커다란 칭찬이었다. 체취를 풍기는 것을 몹시 싫어한 가브리엘에게 향수를 뿌린다 는 건 곧 게으름의 표시였다. 그래서 그녀 는 식사를 한 뒤 입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정향을 씹곤 했다. 루아얄리외 사람들은 매일같이 담쟁이 넝쿨로 휘감긴 베란다에서 등나무 의자 에 앉아 느긋한 아침 식사를 즐겼고, 열흘 마다 한 번씩 발행하는 경마 신문을 읽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럴 때면 가브리엘은 에 밀리엔이 하는 대로 따라 하기 일쑤였다. 사실 물랭에서 보아온 에밀리엔의 삶은 가브리엘에게 매력 그 자체로 다가왔던 것이다. 루아얄리외에서 가브리엘은 다 른 여성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데 열을 올 렸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차를 마시 고자 했으며-나중에 유명해진 뒤에는 차 보다 카페오레를 더 좋아했지만-에밀리 엔을 비롯한 사교계 여성들의 행동을 부 지런히 따라 했다. 게다가 루아얄리외에 서 접하는 그 시대의 패션, 특히 에밀리엔 달랭송의 패션은 가브리엘의 패션 교과서 나 다름 없었다. 사실 에밀리엔의 패션이 썩 마음에 든 것 은 아니었다. 에밀리엔은 나름대로 굉장 히 신경을 썼고 다른 사람들과 달라 보이 려고 노력했지만, 가브리엘의 눈에는 오 히려 어색해 보였다. 그에 반해 가브리엘 자신은 단순한 옷차림으로 세련미를 강조 했다. 수수한 흰색 셔츠와 변함없는 검정 나비 넥타이, 그리고 직선라인으로 재단 한 튼튼한 플란넬 치마. 10년쯤 지난 뒤에는 그런 옷차림이 아주 자연스러웠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 으로 받아들여졌다. 20 21
샤넬의 디자이너 시절 1913년에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샤넬은 제 현재 초상화는 파리의 올랑쥴리 미술관에서 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 치독일에 협력했다는 비난에 직면해 고국을 1955년 샤넬은 울 소재의 새로운 샤넬 슈트 1차 세계대전 발발후인 1915년에 <메종 드 전시 중이다. 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 탈출해 애인과 함께 전후 수년간 스위스의 를 발표했는데 미국에선 <과거 50여년간 큰 꾸뛰르>를 오픈했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 업투쟁을 벌였다. 로잔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 영향력을 가진 패션디자이너>로서 모드 오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 민스터 공작과 만난 샤넬은 공작의 보석애 샤넬은 이 충격으로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 이러한 경위로 현재도 샤넬은 <나치스에 혼 스카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었었다. 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 는 사업을 접기로 해 일시 은퇴했다. 이후 15 을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혐오감이 프랑스 1971년, 거주하던 파리의 리츠 호텔에서 콜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카펠과 얼 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년간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났다. 에선 강하다.1954년에 스위스 망명생활을 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87세로 사망했다. 마동안 결혼했던 샤넬은 1919년에 카펠이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40년에 프랑스 접고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방도므 광장이 그녀의 유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 사고로 사망하자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21 되기 시작했다. 이후 샤넬은 공작과 헤어져 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패전국 프랑스에 내려다보이는 리츠 호텔에 거주하면서 패션 일에 협력한 혐의와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년, 본점을 캉봉 31번지로 확장한 샤넬은 조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선 친독 계열의 비시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계로의 복귀를 꾀했다. 행위에 의해 프랑스의 고급묘지에 묻히는 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그녀들과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당시 프랑스인들 중에는 독일군에 대항해 샤넬의 2차대전 당시 언동에 강한 혐오감이 팽 것을 거부당하여 어쩔 수 없이 망명생활을 <No.5>, <No. 22>를 발표했다. 파산했다. 이에 샤넬은 불행한 사자자리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고문을 당하거나 배해 있던 당시 유럽에선 <매국노>라는 경멸 했던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되었다. 이 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인 피카소, 숙명을 가진 여자라 불리기도 했다. 목숨을 잃는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샤넬은 과 나치독일에 대한 혐오감이 전쟁이 끝난 후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1934년에 기업가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독일군 장교와 애인관계로 지내면서 그의 10여년간 샤넬의 발목을 잡아 위상이 약했다. 출연한 샤넬은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 비호아래 타락적인 생활을 보냈다. 이와 반대로 미국에서는 여성들의 사회진출 당시 마리 로랑생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 다.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했다. 1944년 샤를르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 과 맞물려 그녀의 참신한 패션은 열광적인 선 22 는데 샤넬은 이 초상화를 입수하지 못했다. 1939년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 과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자, 샤넬은 나 풍을 끌었다. 23
샤넬 연보 History of Chanel Since 1883 1910년 파리 캉봉 거리 21번지에 샤넬 모드 라는 모자 상점 오픈. 1883년 1895년 8월 19일, 프랑스 소뮈르에서 가난한 장돌뱅이 아버지와 어머니 잔 사이 에서 3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남. 지병으로 어머니 사망, 아버지에 의해 언니와 여동생과 함께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겨짐. 1912년 1913년 1914년 패션 잡지인 레 모드 에 소개되어 모자 디자이너로 주목 받기 시작. 카펠의 도움으로 휴양지인 도빌에 의상실 오픈하여 새로운 휴양지 패션을 선보임. 언니 쥘리아 사망.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1896년 1901년 수도원의 기숙학교에서 나이 어린 고모 아드리엔과 교유시작. 물랭으로 이주, 아드리엔과 함께 노트르담 종교 학교로 보내짐. 1915년 비아리츠에 세 번째 의상실 오픈. 시대를 반영하는 실용성과 단순함을 조화시킨 옷을 유행시킴. 1902년 물랭 시내의 생트마리 라는 의상실에 점원으로 취직. 의상실에서 생활하다 방을 얻어 독립. 1916년 저지 소재의 일자 주름 스커트가 매력적인 샤넬 슈미즈 드레스 라는 이 름으로 하퍼스 바자 에 소개됨. 1904년 물랭의 로통드 뮤직 홀에서 가수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 1917년 미시아 세르트와 친교. 그녀를 통해 당시 활동하던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소 개 받음. 이후 그들을 적극 지원함. 1905년 뮤직 홀에서 즐겨 불렀던 노래들로 인해 코코 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됨. 생트마리 에서 해고당함. 1918년 세계적인 패션지 보그 에 소개됨.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연인인 아서 카펠, 영국 여성과 결혼식을 올림. 1907년 1908년 에티엔 발장을 만나 경마에 심취 그의 별장이 있는 루아얄리외에서 생활. 첫 연인인 아서 카펠 만남, 모자 디자인 시작. 1919년 메종 샤넬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캉봉 거리 31번지로 의상실을 옮김. 아서 카펠 교통사고로 사망. 1909년 사업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파리로 감. 1920년 여동생 앙투아네트 사망. 비아리츠에서 러시아인 드미트리 대공을 만남. 24 25
샤넬 연보 1940년 독일 나치 외교관인 한스 군터 폰 딘클라게와 만남. 1921년 향수 샤넬 No.5 로 성공을 거둠. 1944년 제 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파리가 해방됨. 체포되어 조사받음. 1923년 1924년 가르손느 룩 의 유행과 함께 샤넬 스타일 정착. 장 콕토의 무대 의상 담당. 장 콕토의 무용극 <푸른 기차> 에서 인조 보석 장신구를 선보임. 1945년 1947년 스위스에서의 은둔 생활 시작. 오랜 법정 공방의 결과, 전 세계 샤넬 향수 판매 수익의 2퍼센트를 평생토 록 지급받게 됨. 1925년 웨스트 민스터 공작을 비롯한 영국 상류 사회 인사들과 교유. 1948년 자서전을 쓸 계획이 무산됨. 1926년 패션지 보그 에 리틀 블랙 드레스 의 성공 기사가 실림. 1950년 친구 미시아 세르트 사망. 1931년 스타일리스트 폴 이리브 만남. 할리우드 영화 의상 제작 요청 수락. 1953년 재기를 위해 작업에 몰두함. 1934년 1935년 1936년 5개의 빌딩을 소유하고 4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가로 성장. 폴 이리브, 심장마비로 사망. 작업장 파업 사태. 1954년 1957년 14년 만에 메종 샤넬 재오픈. 재기 패션쇼를 통해 새로운 의상들을 선보임. 미국 댈러스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라는 타이틀로 패션 오스카상 수상. 1939년 제 2차 세계 대전 발발. 은둔 생활에 들어감. 1971년 1월 19일, 파리 리츠 호텔에서 사망. 26 27
디자이너 샤넬로써의 업적 디자이너로서의 샤넬은 코르셋을 많이 이용 하던 1910~1920년대의 여성복에 대해 <왜 여 자들은 쓸모 없는 복장을 갖추어야 하나> 라 고 회의를 느껴 당시 애인이던 웨스트민스 터 공작의 고향이던 영국에서 신사복의 소 모델로서 샤넬의 옷을 입은 그녀의 영향에 의해 지금도 패션모델이 되려면 마른 편이 아름답다는 고정관념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그녀는 지난 20세기 전반에 걸쳐 세계 패션 의 흐름을 주도한 신화적인 인물로 평가 받 당시 여성들에게 그런 스타일은 일종의 관 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녀 고유의 복잡하지 않은 스타일의 져지 드 레스, 승마 자켓, 스웨터 그리고 바지는 여성 해방을 위한 일종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재를 여성에게 적용해 스포티하고 심플한 디 자인의 현대적 여성복인 <샤넬 슈트>를 만 들어냈다. 한편 샤넬 자신은 생전에 이러한 주장을 한 번도 밖에 내보인적이 없었지만 샤넬의 사 후에 <샤넬의 의상 제작엔 일관되게 남자 에 지배당하는 여성을 철저하게 배제하여 여자들의 마음을 해방시켰다>라고 선전되 기도 했다. 이 선전은 그녀의 사후 일부 페 미니스트들에 의해 위장된 것이라고 밝혀 지기도 했다. 는다. 몸을 꽉 조이던 코르셋과 무거워 보 이던 가식적인 헤어스타일 대신, 샤넬 스타 일(Chanel style)이라는 독창적인 시그니처 룩을 선보였다. 샤넬의 대표적인 아이템인 핸드백은 어깨 끈을 사용함으로 처음으로 여성을 손으로 드는 불편함에서 해방시켰고, 저지 소재의 짧은 스커트과 기존의 남성복에서 영감을 얻은 스포티한 수트 등은 걷는 방식이나 움 직이는 방식에 구애를 받던 20세기 초반의 여성들에게 새로운 자유를 부여했다. 28 또, 샤넬은 비교적 마른 체형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장식이 많은 옷 자체를 싫어했듯이, 29
샤넬의 연인 아서 카펠 샤넬의 연인 아서 카펠 그 남자(카펠)는 정말 미남이고 매력적이 었어. 단순히 잘생기고 멋진 것 이상의 남자 였지. 그 무관심한 태도와 초록빛 눈이 얼마 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지. 그는 고집 센 말에 올라타곤 했는데, 아주 강한 남자였어. 나는 그 남자에게 홀딱 빠지고 말았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각각 영국과 프랑스에 살고 있던 카펠이 샤넬과 처음 만난 것은 1908년 프랑스 피레네 부근에 있는 포 라 는 곳에서였다. 당시 샤넬은 몰이사냥을 위해 그곳을 찾은 에티엔 발장과 함께였다. 하지만 에티엔과 샤넬은 연인이나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 꼭 집어서 말하자면 샤넬이 에티엔에게 적당히 빌붙어 살고 있는 관계였다. 에티엔을 만나기 전 샤넬은 낮에는 재봉사 로 일하면서 밤에는 무급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며 손님들이 주는 팁을 챙겼다. 카페에 서 코코 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무급가수 샤넬은 어떻게든 자신이 속한 환경을 벗어 유한 손님이던 에티엔을 찾아갔던 것이다. 비록 아버지가 있긴 하지만 어렸을 때 어머 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고아원에서 자란 샤 넬은 훌륭한 귀족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강 력한 후원자나 튼튼한 배경이 있는 양갓집 아가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가난에 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돈이라면 넘칠 듯이 많은 에티엔 옆에서 자 신의 젊음과 여성이라는 점을 빌미로 애매 한 시간을 보내던 차였다. 물려받은 재산 덕분에 특별한 직업 없이 하 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살아가던 나이 지긋한 독신남자 에티엔은 일종의 신흥 부 르주아로 성격이 쾌활하고 친구들을 좋아 하는 호인이었다. 말( 馬 )을 너무나 좋아하 는 에티엔의 취미이자 주 업무는 경주용 말 을 키우는 것이었고 그 외에 남는 시간은 친 구들과 함께 파티를 하면서 보냈다. 경마 일정에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던 에티 엔을 따라 포 에 동행한 샤넬은 카펠에게 샤넬 뿐이 아니었다. 폴로 선수였던 카펠은 말을 다루는 데 뛰어났고, 이 점은 즉시 에 티엔의 흥미를 끌었다. 에티엔은 루아얄리외 라는 이름으로 불 리던 자신의 저택으로 카펠을 초대했다. 그 곳에서 소년 같은 미소를 지닌 채 보이 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카펠은 무급가수시절 을 떠올리게 만드는 코코 라는 별명을 지 우고 싶어 하던 샤넬과 재회하였고 두 사람 은 곧 사랑에 빠졌다. 카펠이 서른 살, 샤넬 이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출신에 대한 불완전함을 성공으로 극복하고 자 했던 카펠은 성공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이나 야심을 도울만한 인 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뉴캐슬이나 파리, 런던 등을 오가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루아 얄리외 저택을 자주 찾은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자꾸만 그의 눈에 밟히는 자존심 강한 여자, 샤넬 때문이었다. 카펠은 한 눈에 에티엔과 샤넬의 관계를 파 하여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곤 했다. 그때마 다 카펠은 그녀의 말을 그저 들어주었다. 그 는 샤넬의 거짓말이 그녀의 자존심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장돌뱅이를 아버지로 둔 샤넬의 어 린 시절은 비참했다. 어머니는 바람둥이 남 편을 일편단심 사랑했으나 버림 받다시피 한 끝에 과로로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샤넬은 고아원에 보내졌다. 샤넬의 아버지는 한 번도 고아원을 찾아오 지 않았고 살아있는 동안 두 번 다시 딸을 찾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은 기억 과 지독한 가난은 어린 샤넬에게 충격이었 고 그녀는 고아원에 있을 때부터 죽는 날까 지 어린 시절과 부모에 대해 끊임없이 거짓 말을 했다. 카펠은 변변치 못한 성장 과정 을 애써 숨기고 싶어 하는 샤넬의 모습을 통 해 성공으로 불완전한 출신을 감추고자 했 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영혼의 상처가 닮은 두 사람의 사랑은 운명 기고 싶은 그리고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자신의 상처를 알아차려준 사람과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결혼 가능성도 없고 뜨거운 애정도 없는 에티엔에게 계속 얹혀살기보다 한시라 도 빨리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다. 그녀 는 자신의 재능을 찾아 어떻게든 방법을 마 련해보고자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샤넬은 루아얄리외를 방문하는 손님들의 주문에 맞 춰 모자를 만들었다. 샤넬의 주 고객은 에티 엔의 파티에 참석하는 친구들이었고 그 중 에는 에티엔의 여자 친구도 있었다. 일을 해 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에티엔이 보기에 샤넬이 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은 심심풀이 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자를 만드는 것은 샤 넬에게는 절박한 일거리였다. 더구나 카펠과 사랑에 빠진 이후 샤넬은 더 욱 에티엔으로부터의 독립을 바랐다. 하지 만 그렇다고 카펠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 는 것은 원치 않았다. 카펠은 돈에 대한 샤 잘 알았기 때문에 그녀가 무능력한 여성이 었을 때는 친구의 여자로 얹혀사는 것을 그 저 지켜만 보았다. 하지만 샤넬이 가능성을 내보였을 때 카펠 은 단숨에 기회를 거머쥐었다. 샤넬은 자신이 디자인한 모자가 예상 외로 좋 은 반응을 얻으며 차차 주문이 늘어나자 디자 인을 아예 본격적인 직업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에티엔은 샤넬의 생각을 비난하며 사업 자금을 빌려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단 호하게 거절했다. 바로 그때 카펠이 나섰다. 그는 샤넬의 감 각과 재능에서 상업적인 가능성을 확신한다 며 그녀가 은행 대출을 받아 가게를 낼 수 있 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보증까지 서며 선뜻 투자했다. 샤넬은 에티엔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있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염원하던 경제적 자립을 이룰 기반을 마련했으며 마 침내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할 수 있었다. 30 나보고자 염치와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부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카펠에게 반한 것은 악했지만 샤넬은 자신의 위치나 과거에 대 과도 같았다. 세상으로부터 감추고 싶은, 숨 넬의 집착과 성공에 대한 열망을 누구보다 31
All About Brand Chanel 33
샤넬의 뮤즈들 -칼 라거펠트의 뮤즈들 뮤즈(Muse) 란? 예술가에게 어떠한 특유의 방식으로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inspire) 존재. 샤넬의 사후,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아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샤넬이라는 브랜드를 이끌어 온 것은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이다. 그렇지만 그는 변덕이 많은 디자이너로써, 수많 은 모델과 배우, 가수, 셀렙들이 뮤즈 역할을 자청하며 샤넬의 광고 모델이나 홍보에 나섰지 만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다수, 라거펠트는 매 시즌마다 모델을 교체하기로 유명하다. 이 페 이지에서 다루고자 하는 샤넬의 역대 뮤즈들은 100년이 넘는 샤넬의 브랜드 역사 중에서도 정 말 샤넬의 뮤즈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단언할 수 있는 역대 뮤즈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칼 라거펠트의 취향 샤넬의 뮤즈들의 기용에 있어서 샤넬의 사 후, 크리에이티브 디 렉터로써 샤넬을 이끌어온 칼 라거펠트의 취향이 적극적으로 반 영되곤 하였는데, 스타일에 따라 분류를 해보면 크게 네 스타일 의 여성들로 나뉜다. 칼 라거펠트는 샤넬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맞춰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한 여성들이거나, 혹은 고전적인 미의 기준으로 꼽히는 금 발의 우아한 백치미 여인이거나, 소녀스러운 외양을 강조한 모델 들을 주로 기용해왔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소년스러움과 여성의 미가 공존하는 톰 보이 스타일의 모델들을 기용하고 있는 데, 이 기준에 따라 역대 샤넬의 뮤즈들을 분류 해보고자 한다. 성숙한 여인의 이미지 금발, 백치미, 우아한 여인 소녀스러운 외양 톰보이 스타일 이네즈, 다리아, 크리스틴, 크리스티 클라우디아, 앰버 안젤라, 데본, 카렌 스텔라, 프레야, 사스키아, 아리조나 자신의 샤넬 쇼 피날레에 등장한 칼 라거펠트 34 35
샤넬의 뮤즈들 50년대 후반 ~ 70년대 초반 이네즈 드 라 프라상쥬 Ines de la Fressange, 1957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린다, 신디, 클라우디아, 크리스티, 나오미 등 으로 유명한 원조 슈퍼모델보다 이전 세대의 모델. 흑인 모델에겐 전설이라 일컫는 이만이나 파리 보그의 뮤즈이자, 제니스 디킨슨와 같은 세대에 활동한 모델. 칼과의 불화로 아주 오랫동안 같이 작업 하지 않다 몇 년 전 화해를 했는지 칼의 요청을 받아 샤넬 캠페인 에 등장함. 클라우디아 쉬퍼 Claudia Schiffer, 1970 샤넬 = 클라우디아 쉬퍼 라는 공식이 성립할 정도로 샤넬의 이 미지를 세우는데 크게 일조를 한 모델. 30년 가까이 혼자서 샤넬 캠 페인을 독점하다시피 함. 본래 처음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델 은 아니었으나 모델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정말 1년도 채 안 되어서), 칼 라거펠트와 샤넬 캠페인을 촬영하면서 일약 스타가 되 었음. 현재는 은퇴하였지만 모델 계에 아주 굵고 진한 획을 그은 슈퍼 모델 스텔라 테넌트 Stella Tennant, 1971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샤넬에도 새로운 변화가 찾아오게 되는 데, 바로 칼의 새로운 뮤즈 스텔라 테넌트 의 등장. 실제 영국 귀 족 출신으로, 故 이사벨라 블로우에 의해 발굴되어, 칼이 직접 발탁 한 샤넬의 모델. 90년대부터 꾸준히 칼의 사랑을 받으면서 최근까 지 샤넬 쇼에 나오고, 캠페인에도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슈퍼모델. 샤넬 패션 캠페인의 이네즈 클라우디아의 샤넬 패션 캠페인 스텔라의 샤넬 캠페인 36 37
샤넬의 뮤즈들 80년대 초반 ~ 현재 데본 아오키 Devon Aoki, 1982 안젤라 린드발 Angela lindvall, 1979 프레야 베하 에릭센 Freja Beha Erichsen, 1987 사스키아 드 브로우 Saskia De Brauw, 1981 샤넬(칼 라거펠트)의 몇 안 되는 동양 혼혈 모델, 데본 아오키. 우리 얼마 없는 미국 출신의 슈퍼 모델 중 한 명으로 2000년대에 들어와 칼 최근까지 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모델 프레야 베하. 현재 프레야가 떠난 샤넬의 새로운 뮤즈로 급 떠오르고 있는 사스 에겐 영화배우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데본은 90년대 중 이 가장 사랑했던 모델. 96년에 모델 계에 드문 히피 분위기를 풍기 현재 1년 동안의 긴 휴식에 들어갔기 때문에 지난 시즌은 칼이 키아 드 브로우. 프랑스 보그의 전 편집장이었던 카린 로이펠드가 후반의 스타라고 할 수 있는 톱 모델. 샤넬이 기용한 첫 동양인 모 며 독보적인 모델로 성장함. 프레야 대신 다른 모델들을 캠페인에 등장시킴. 마지막 이슈에서 발굴한 30살이 넘은 신인 모델. 델은 아니었지만(링 탄이라는 90년대 초반 동양인 모델이 먼저 샤 2000년대에는 지젤 - 카르멘 - 프랭키 - 안젤라 4인이 모델 계를 주 실제 본인의 직업은 건축 디자이너이나 모델로서 활동하면서 넬 런웨이, 캠페인을 접수), 샤넬과 칼 라거펠트의 유일한 동양인 뮤 름잡음. 모델 닷컴이 선정한 최초의 모델랭킹 1위로서, 못해본 캠페 영감을 얻는다고 함. 아주 뒤늦게 뜬 케이스로, 톰 보이를 사 즈이면서 역대 샤넬 최연소 모델(당시 16살). 모델로서 은퇴는 10여 인이란 없을 정도로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부터 작은 브랜드까지 모 랑하는 칼 라거펠트의 취향에 꼭 들어맞는 모델로 이미 크루 년이 넘었지만 몇 년 전 칼과의 친분으로 샤넬 쿠튀르 피날레를 장 두 섭렵한 최정상 급 모델. 즈, 아이웨어 캠페인을 포함 샤넬 메인라인 캠페인만 두 번째 식해서 화제가 됨. 진행 중인 모델. 데본의 패션 캠페인 포스터 안젤라의 샤넬 이미지 캠페인 포스터 최근 샤넬 행사에서의 프레야 베하 사스키아의 샤넬 이미지 캠페인 포스터 38 39
샤넬의 시그니처 아이템 1. Little Black Dress 샤넬의 시그니처 아이템 2. Chanel No. 5 Perfume 샤넬의 시그니처 아이템 리틀 블랙 드레스 샤넬 의 상징 컬러이기도 한 블랙컬러. 리틀 블 랙 드레스, 리틀 블랙 자켓 등 샤넬을 대표하는 클 래식엔 유난히 검정색이 많다.이 단순한 검정 드 레스가 대체 왜 유명한 거고, 혁신이냐고? 이 리 틀 블랙 드레스가 처음 나올 당시, 검정이란 색상 은 오직 죽음을 애도하는 용도의 색상으로 장례식 외의 장소에서 입는 것은 굉장한 실례였다. 하지 만 혁신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오로지 블랙 컬 러로만 이루어진 드레스를 최초로 세상에 내놓았 고, 처음에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사람들은 불 길한 검정색을 어떻게 드레스에 쓸 수 있냐며 분 샤넬 No.5의 광고 포스터. 샤넬의 시그니처 아이템 샤넬 No.5 향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향수이자 샤넬의 베스트 셀 러중 하나인 No.5 향수. 마릴린 먼로가 전 자기 전에 샤넬 No.5 만 걸쳐요 라고 말한 것으로 유 명하다. 이 향수의 이름이 No.5가 된 까닭은 당시 향수 제 조가를 소개 받은 코코 샤넬이 받아보았던 열 가 지 샘플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다섯 번째 샘플을 향수로 만들기로 하고, 이 때문에 단순히 샤넬의 첫 향수 이름은 No.5 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탄 생한 샤넬의 향수는 처음엔 VIP고객들을 위한 특 별 선물 이었으나, 반응이 워낙 폭발적이라 1921년 노했다. 하지만 샤넬의 감각은 옳았다. 당시 장식적인 유리병 일색이 정식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선보였고, 지금까지도 최근 샤넬 프레타 포르테에서 리틀 블랙 드레스의 다양한 활용. 사람들은 곧 클래식한 매력이 있는 블랙에 빠지게 되었고, 한 때 파리의 유니폼 이라 불릴 만큼 파 었던 향수병 디자인 중에서 삼플하고 독특한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던 샤넬 No.5 향수. 샤넬 하면 떠오르는 아이템 중 하나다. 리 사람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으며 결국 지금까지 도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클래식이 되버린, 샤 넬의 대표작이다. 40 41
샤넬의 시그니처 아이템 3. Chanel 2.55 Bag 샤넬의 시그니처 아이템 4. Tweed Suit 샤넬의 시그니처 아이템 샤넬 2.55 백 샤넬의 대표적인 백, 2.55백. 1955년 탄생한 샤넬 의 가장 유명하고, 클래식한 아이템으로 유명한 이 가방은 사실 지금 보자면 너무나 클래식한 디 자인이지만, 처음 출시될 당시엔 디자인적 혁신을 이룬 제품이다. 샤넬의 모든 아이템들이 그렇듯, 코코 샤넬은 실용성을 최고로 중시했다. 하지만 당시 여성들의 가방엔 지금의 토트 백 형식 의 가방 (긴 끈이 없고 짧은 손잡이만 있는) 디자인 밖에는 없었다. 때문에 여성들은 가방을 잃어버리 샤넬의 트위드 재킷. 샤넬의 시그니처 아이템 트위드 수트 리틀 블랙 드레스와 함께 샤넬의 대표 아이템으로 꼽히는 샤넬 수트, 특히 트위드로 짜여진 샤넬 수 트는 복식사에 전설로 남을 만큼 역사적 의미가 있 는 작품이기도 하다. 디자이너 코코 샤넬을 자신만의 샤넬 스타일 을 만들고 싶어했다. 거추장스럽고 금방 질리는 화려 한 스타일 대신, 고급스럽고 우아하면서도 실용적 인 옷을 선보이고 싶어했던 그녀는 트위드 재킷, 샤넬수트를 선보이기에 이른다. (당시에 여성들의 샤넬의 2.55 백. 기도 쉬웠고, 늘 한쪽 속엔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하 다 보니, 거추장스럽고 무거워 활동하기 불편하다 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샤넬은 가방을 어깨에 매고 편히 활동할 수 있도록 체인을 달기로 했다. 이윽고, 퀼팅 백에 체인을 달아 만든 첫 번째 가방 이 바로 이 2.55 백 이다. 1955년 2월 처음 출시된 가방은 출시 날짜를 따와2.55 백이 되었고, 지금까 외출복엔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치렁치렁한 드레 스자락+풍성한 볼륨의 실루엣이 대세였었다) 특 히 가슴과 힙이 작은 볼륨 없는 여성들의 몸도 아 름답게 커버해주기로 유명해서 가장 클래식하고, 샤넬을 대표하는 룩으로 꼽히고 있다. 지도 다양한 버전으로 나와 많은 여성과 심지어 남 직접 만든 트위드 재킷을 착용한 채 웃고 있는 코코 샤넬. 42 성들의 사랑도 받고 있다. 43
Designed by. SMVD 1012890 양소은 참고 문헌 코코 샤넬 : 내가 곧 스타일이다 / 카타리나 칠코프스키 지음 ; 유영미 옮김 (패션의 여왕) 코코 샤넬 개정판 / 이신조 지음. 사용 서체 - Cre choco - Nanum Brush Script Regular - Nanum Gothic OTF Regular - Yoon Gothic 520, 530, 540, 550 - Yoon Myeongjo 310 - Bickham Script Pro Regular - Letter Gothic Std Medium - Script MT Bold Regular - Stencil Std Bold - Vivaldi Italic 인쇄일 2013년 11월 19일 화요일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