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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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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39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이승일 김대호 정병욱 문영주 정태헌 허영란 김민영 지음

4 발간사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동북아 세 나라는 오랜 옛날부터 독자의 문화를 꽃피움과 동시에 여러 면에서 문화를 공유해왔습니다. 한자라는 문자의 공 유뿐만 아니라 사상, 예술, 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교류의 심화가 그것을 웅 변해주고 있습니다. 교류의 역사는 각 나라의 문화적 특수성과 자부심 때 문에 때때로 갈등의 면도 나타났습니다. 역사가 현재의 필요에 의해 재조명되면 상대방의 역사를 훼손하고 민족 적 자존심까지 상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동북아시아에서의 역사 갈등 등이 그 예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잘못된 역사인식과 문제점을 직시하며 종합적 연구 조사와 체계적인 정책 개발을 수행함으로써 올바른 역사 이해를 도모하고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설립되었습니다. 올바른 역사 이해야말로 동북아시아의 갈등을 해소하고 미래의 평화와 번영을 보장할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5 수 있는 관건임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됩니다. 이번에 간행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는 이러한 동 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의 하나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 방식에 대한 연구와 식민지 사회의 특징을 다룬 연구를 싣 고 있으며, 이 가운데 전자에 속하는 경성신사( 京 城 神 社 )와 일제의 조선 관 습조사 사업을 다룬 연구는 식민 지배자들의 조선사회 인식과 그것의 제 도화를 통해 식민지 지배의 성격을 고찰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편의 논문은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을 다루 고 있습니다. 식민지 사회의 특징을 다룬 나머지 네 편의 글은 [식민지 근대 화론]으로 불리기도 하는 경제성장론 식민지상의 인력개발론, 식민지 인식, 생활수준 향상론, 근현대사 인식을 분석한 논문입니다. 이번에 간행하는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는 2007년도 재단에서 지 원한 연구수행 성과물의 일부를 모은 것입니다. 이 연구 업적을 출간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우리 재단의 연구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여 훌륭한 학문적 결실을 연구총서로 내어놓게 된 여러 연구자들에게 축하와 함께 깊은 감사 의 말을 전합니다. 이러한 연구는 단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대응 차원 을 넘어 우리 학계의 학문적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학계의 학문적 역량이 동북아역사재단을 통하여 한층 높아지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와 같은 연구 성과가 더욱 알려지기를 바라 마 지않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성원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2008년 12월 12일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발간사

6 차례 책머리에 _ 10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이승일 I. 머리말 _ 13 II. 근대 일본 정부의 민사관례조사 사업 _ 16 III. 대한제국 법전조사국의 관습조사 사업 _ 22 IV.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법 제정과 조선 관습 _ 48 V. 조선민사령 제11조 [관습]과 법인화 _ 55 VI. 맺음말 _ 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김대호 경성신사의 운영과 한국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I. 머리말 _ 73 II. 경성신사의 초기 모습 - 남산대신궁의 설립과 경성의 초혼제 _ 78 III. 1910년대~1920년대 초반 경성신사의 운영과 씨자조직의 결성 _ 경성신사 운영 주체의 변화 _ 88 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7 2. 경성신사 씨자조직의 결성과 조선인 흡수 시도 좌절 _ 경성신사에서 지내는 여러 제사 _ 경성신사 마츠리의 시작과 확대 _ 신사의 운영 경비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발 _ 126 IV. 1920년대 중반~1930년대 초 경성신사의 확장과 조선인의 포섭 _ 조선신궁의 건립과 경성신사의 위상 조정 _ 경성신사의 적극적인 조선인 흡수 _ 국혼신의 합사 _ 경성신사의 경내 확장 _ 경성신사에 대한 기타 지원 _ 170 V. 맺음말 _ 174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정병욱 I. 1994년 역사학계의 토론회 - 문제의 소재 _ 성장이냐 손실이냐 _ 성장의 양면성과 해방 후 연속성 _ 개발의 주체와 관점 _ 또 다른 [문제의 소재] _ 194 II. 인력개발론의 변화 - 안병직을 중심으로 _ 사라진 것 - 왜곡과 계급의식 _ 새로운 것 - 소농사회론 _ 203 III. 단선적 기원론의 문제점 - 에커트를 중심으로 _ 205 IV. 최근의 비판을 보면서 - [자기개발]의 문제점과 대안 모색 _ 209 차례 7

8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문영주 I. 머리말 _ 215 II. 경제성장과 문명론 _ 식민지 경제의 성장지표 _ [탈민족 문명사]론 _ 224 III. 식민지 현실의 양면 _ 통계의 주관성 _ 경제성장의 이면 _ 229 IV. 맺음말 _ 235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정태헌 I. 머리말 - 근대주의 역사인식과 식민사학의 친연성 _ 245 II. 자본주의와 식민지자본주의의 차이 _ 근대국가, 자본주의 성립의 기본 조건 _ 국가 없는 자본주의, 식민지자본주의 _ 식민지 인식 부재의 경험, 전향과 동화 _ 257 III. 경제성장론 식민지상의 [근대문명론] - 국가인식의 결여 _ 국가와 민족을 배제한 [근대적 개인]론 _ 신고전파적 시장만능론 _ 변용된 정체성론@타율성론 _ 270 IV. 경제성장론의 허구적 대한민국 [정통론] - 국가론의 돌출 _ 276 V. 맺음말 _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9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허영란 생활과 경험이 없는 생활수준 논의의 한계 I. 머리말 _ 287 II. 생활수준 향상론의 함의 _ 289 III. 생활수준 비교의 거시적 기준 _ 293 IV. 생활수준 논쟁 _ 298 V. 거시적 추계와 역사적 사실성 _ 305 VI. 생활 속의 식민지 경험 _ 310 VII. 덧붙이는 말 _ 313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김민영 메이지광업(주)의 사례 I. 머리말 _ 319 II. 강제동원과 기업의 책임 _ 야마다 쇼지의 국가 및 기업 책임론 _ 고쇼 다다시의 기업 책임론 - 미불금과 공탁문제 _ 322 III. 메이지광업(주)의 강제동원과 기업 책임 _ 니시키 탄광의 강제동원 _ 히라야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 _ 해방 전후 히라야마 탄광의 조선인 강제동원 _ 337 IV. 맺음말 _ 347 Abstract 351 찾아보기 362 차례 9

10 책머리에 역사학은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로서 현실을 어떻 게 보고 그에 따른 문제의식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자문을 늘 하게 마 련이다. 19세기 말 이래 늘 그러했지만 특히 21세기 들어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적 환경이 쉽지 않다. 급격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비축해가는 중국의 신 ( 新 )중화주의 대두, 일본 사회의 고질적이고 뿌리 깊은 우익 내셔널리즘의 파고는 21세기 동북아의 미래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미국발 금융경제의 위기는 세계경제의 위기로 번져 외풍에 취약한 한국 경제 역시 짙은 위기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현실적으로 공존과 평 화의 역사학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가 아닐 수 없다. 20세 기 전반기 침략과 전쟁이 지배했던 동북아 역사의 실패를 통해 오늘과 내 일을 기획해야 하는 시점이다. 1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1 이 책은 2007년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연구를 하나로 묶어낸 성과이다. 게재된 7편의 논문은 일제 식민통치 방식에 대한 연구와 식민지 사회의 특징을 다룬 연구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전자에 속하 는 경성신사( 京 城 神 社 )와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을 다룬 연구는 식민 지배자들의 조선사회 인식과 그것의 제도화를 통해 식민지 지배의 성격을 고찰한 글들이다. 후자에 속하는 5편의 글은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불리 기도 하는 경제성장론, 식민지상의 인력개발론, 식민지 인식, 생활수준 향 상론, 근현대사 인식을 분석한 논문이다. 역사인식은 당연히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단순히 과거사 평가의 차이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결국 오늘과 내일의 동북아 평화에 반하는 식민지 시대 인식까지 거침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이 책의 연구들이 지향하는 바는 단순히 한국을 침략하고 수탈하고 전쟁에 동원한 일제의 만행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근대정신 에 입각해보더라도 인권과 평화, 민족자결 정신을 짓밟은 과거의 야만적 군 국주의 행위를 자발적으로 반성하고 조사하거나 인근 국가에 진정성을 갖 고 사과한 적이 없다. 제국과 식민이라는 20세기 전반기의 침략과 전쟁 경 험을 한일 양측이 모두 역사화하지 않는다면 공존과 평화를 지향해야 하 는 21세기 한일관계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이 책의 의의 역시 20세기 전반기의 불행한 한일관계를 현재로부터 역사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이를 통해 공존과 평화의 한일관계학을 정립하려는 시도라는 점에 있다. 이 책의 연구 지원에서부터 출판에 이르는 모든 수고를 안은 동북아역 사재단에 감사드린다. 2008년 11월 18일 필자들을 대표해서 정태헌 씀 책머리에 11

12 J a p a n e s e C o l o n i a l R u l e a n d { C o l o n i a l M o d e r n i t y }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이승일 국회기록보존소 기록연구사 I. 머리말 II. 근대 일본 정부의 민사관례조사 사업 III. 대한제국 법전조사국의 관습조사 사업 IV.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법 제정과 조선 관습 V. 조선민사령 제11조 [관습]과 법인화 VI. 맺음말

13 I. 머리말 이 연구의 목적은 1908~1910년 사이에 법전조사국( 法 典 調 査 局 )이 실시 한 한국 관습조사 사업의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일제에 의해 조사된 [관 습]의 성격을 밝히고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법 정책에는 어떻게 영향을 미 쳤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 이 당시의 관습조사 사업은 단순히 사회조사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고 한 국인에게 적용될 한국 법전 편찬을 위해서 수행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특히 관습조사 사업에 의하여 조사된 일부의 [관습]은 식 민지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법인( 法 認 )되었고 식민법 제정에서도 중 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재까지 통감부 시기의 관습조사 사업에 관한 연구는 역사학계에서 는 이루어진 바가 없고 법학계에서 현행 민법의 연혁을 조사하기 위하여 진행되었다. 법학계의 연구는 조선총독부가 1938년에 관습조사 사업을 모두 마치고 작성한 결과 보고서인 조선구관제도조사사업개요( 朝 鮮 舊 慣 制 度 調 査 事 業 槪 要 ) 와 예규( 例 規 ), 통첩( 通 牒 ), 조선고등법원판례 등 에 의존하고 있다. 이 자료들은 조선 관습에 대한 법전조사국과 조선총독 윤대성(1991a), 일제의 한국 관습조사 사업과 민사관습법, 논문집 13-1, 창 원대;윤대성(1991b), 日 帝 의 韓 國 慣 習 調 査 事 業 과 傳 貰 慣 習 法, 韓 國 法 史 學 論 叢 :박병호 교수 화갑기념(2), 박영사;윤대성(1992), 韓 國 不 動 産 ニ 關 スル 調 査 記 錄 의 연구, 논문집 14, 창원대학교;이상욱(1986), 韓 國 相 續 法 의 成 文 化 過 程, 경북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鄭 鍾 休 (1989), 韓 國 民 法 典 の 比 較 法 的 硏 究, 創 文 社 ;정긍식(2002), 韓 國 近 代 法 史 攷, 박영사; 朴 賢 洙 (1993), 日 帝 의 朝 鮮 調 査 에 관한 硏 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13

14 부의 최종적 결과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 관습이 조사되는 과정과 조사된 관습이 관습법으로 정립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에서는 관습조사 사업의 피조사자 규모를 알 수 없었고, 피조사자의 계층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기초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법전조사국 및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각종 조사사업의 객관성과 그 성격을 판단하기 어렵다. 이 연구에서는 관습조사 사업의 과정과 방법 등을 중심으로 한국 관 습조사 사업의 성격을 밝히고, 조사된 관습의 성격을 분석하도록 하겠다. 이를 위하여 대한제국의 사법제도 개혁과 한국 법전 편찬을 주도하였던 우메 겐지로[ 梅 謙 次 郞 ]의 입법 구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통감부가 추진하였던 한국 법전 편찬 구상은 조선이 완전 식민지로 편 입되면서 좌절되었으나 관습조사의 기법과 조선 관습의 민사법으로의 전 환 구상은 여전히 유효하였다. 이와 같은 통감부 시기의 민사법 구상은 조 선총독부의 초기 구관주의적( 舊 慣 主 義 的 ) 민사법 구상으로도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를 위해서는 새로운 사료( 史 料 )의 발굴과 해석이 필요 하다. 특히 한국 관습조사 사업을 비롯하여 1907년 이후 한국 사법제도 개편에 관한 주요 법령을 기안( 起 案 )한 우메 겐지로의 문서들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일본 법정대학( 法 政 大 學 )에 소장되어 있는 韓 國 立 法 事 業 擔 任 當 時 ニ 於 ケル 起 案 書 類 는 매우 방대한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기안서류에는 우메 겐지로가 직접 필사한 관습조사 문제를 비롯하여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우메 겐지로가 작성한 한국 정부의 각종 법률안 초안이 실려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사사항], [토지, 건물의 매매 교환 양여 전당에 관한 법률], [토지건물 소유권 증명규칙], [부동산법 요지], [재 판소 개량 의견 요지], [재판소의 구성], [한국에서의 재판제도 개정에 관한 1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5 비견], [사법권위임협약의 실시에 관한 비견], [법률조사국 관제], [통감부사 법청 관제] 등 모두 30건이 넘는 중요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서들 을 통하여 1906년부터 1910년 사이에 공포된 한국 정부의 법률 및 칙령 안들이 모두 우메 겐지로의 손에서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 메 겐지로가 작성한 법률안 초안과 공포된 법률안을 세밀히 비교 검토하 면 좀 더 유의미한 연구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선행 연구에서 이용하지 못한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소 장 관습조사보고서( 慣 習 調 査 報 告 書 ) 를 직접 이용하여 식민지 관습조사 사업의 구체적 양상을 살피고자 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1910년에 간행된 관습조사보고서 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으나, 1910년의 관습조사보 고서 는 전국 각지의 지역 조사보고서를 편찬한 결과이다. 따라서 각 지 역의 조사보고서와 비교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지역 조사보고서를 검토 하게 되면 조사기법과 피조사 대상자들의 사회적 신분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조사된 관습이 법적인 관습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전조사국에 의하여 조사된 관습은 식민지 이후에도 조선 민사령에서 일부 법인되었다. 그리고 조선민사령 제10조~제12조는 조선 관습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조선민사령 제11조와 제12조 등 의 조선 관습을 인정하는 조항이 어떻게 제정되었고, 또 그러한 인식은 어 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분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15

16 II. 근대 일본 정부의 민사관례조사 사업 일본 정부는 근대화를 추진하고 서구 열강과 대등한 국제적 지위를 획득 하기 위하여 시급히 추진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불평등한 조약관계를 철 회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일본 정부가 추진한 불평등조약 개정 교섭은 영 사재판권의 철폐와 관세 자주권의 회복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열강 들은 영사재판권 철폐 조건으로서 일본에 법전 편찬과 재판제도의 정비 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사법제도 개편과 근대적 법전 편찬에 국가적 역량을 투입하였다. 일본 정부의 근대적 법전 편찬의 노력은 1870년대 초 반부터 나타났다. 1870년(명치 3년) 10월 에토 신페이[ 江 藤 新 平 ]가 구미 열 강과 병립하여 영사재판권을 철폐하기 위하여, 태정관 제도국에 민법회 의를 설치하고 미쓰쿠리 린쇼[ 箕 作 麟 祥 ]가 번역한 프랑스 민법을 기초로 하여 민법 편찬을 개시하였다. 제도국이 1871년(명치 4년) 8월에 좌원( 左 院 )에 합병되기까지의 기간에 민법 결의 79개조가 성립하였는데, 그 내용 은 프랑스 민법 제1권 사권( 私 權 )의 향유, 상실 및 제2권 신분증서의 부분 에 해당하는 것이다. 민법 결의에서 중요한 내용은 신분증서 제도이다. 1871년에는 이미 호적법이 제정되어 대장성 호적료( 戶 籍 寮 ) 관할하에서 이른바 임신호적( 壬 申 戶 籍 )이 작성되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민법 결의의 牧 英 藤 原 明 久 편(1993), 日 本 法 制 史, 靑 林 書 院, 259~260쪽. 石 井 良 助 편@ 丘 秉 朔 역(1984), 일본의 근대화와 제도, 교학연구사, 210쪽. 牧 英 藤 原 明 久 편(1993), 앞의 책, 332쪽. 川 島 武 利 谷 信 義 (1958), 民 法 ( 上 ), 講 座 日 本 近 代 法 發 達 史, 勁 草 書 房, 6 쪽. 1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7 신분증서 제도는 국민을 [가( 家 )] 단위가 아니라 각 개인을 단위로 등록하 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의 현상에 비추어 지나치게 개인주 의적 성향이 심한 것으로 판명되어 일본 정부 내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 었다. 결국 1873년 10월에 에토 신페이가 실각하면서 이 법전 편찬 사업은 중단되었다. 이후에도 프랑스 민법전을 모방하여 민법 초안이 작성되기도 하였고 일본 전통의 관습을 반영한 민법전이 구상되는 등 다양한 시도들 이 있었다. 1875년에는 좌원이 폐지되어 민법전의 기초를 사법성이 담당하게 되 었다. 같은 해 8월에 사법성에 민법과가 설치되었고 특히 1876년 5월에 사 법성 고문이었던 힐(G. W. Hill)의 건의를 수용하여 민법전을 기초하기 위 한 준비 작업으로 일본 전역에 걸친 관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 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876년 5월에 지방관례취조국( 地 方 慣 例 取 調 局 )을 설치하여 이쿠타 구와시[ 生 田 精 ], 森 敬 斐 가 민사관례의 조사를 담당하도 록 하였다. 출장관이 조사결과를 보고하면 이쿠타 구와시, 森 敬 斐 가 이를 취사선택하여 항목별로 편찬하는 작업을 거쳐서 1877년 5월에 민사관 례유집( 民 事 慣 例 類 集 ) 이, 1880년에는 전국민사관례유집( 全 國 民 事 慣 例 類 集 ) 이 사법성 장판( 藏 版 )으로 간행되었다. 민사관례 조사와 함께 1876년(명치 9년) 6월부터 민법전의 조문 기초가 개시되었다. 이때 작성된 민법 초안은 사법경에게 제출되었는데, 프랑스 법 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시민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민적 井 ケ 田 良 治 外 (1982), 日 本 近 代 法 史, 法 律 文 化 社, 71~72쪽. 정긍식(2002), 앞의 책, 224쪽.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17

18 성향의 민법 초안은 결국 폐기되었다. 초안이 폐기된 후 다시 1880년에 원 로원 내에 민법편찬국이 설치되었다. 민법편찬국은 4개의 과가 있었다. 제 1과는 부아소나드(Boissonnade)가 지은 프랑스어 초안을 일본어로 번역 하는 것, 제2과는 편찬에 필요한 어휘의 편성, 즉 적당한 번역어를 창조하 는 것, 제3과는 법조의 일본문을 수정하는 것, 제4과는 일본의 관습을 조 사하는 등의 사무를 맡았다. 관습조사에 관해서는 이미 1878년(명치 11년) 초안 작성과 병행해서 일본 전국의 관습을 조사하게 하고 1877년에 민사 관례유집 을 출판하였으나 제4과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재산법에 대해서는 외국과의 거래 및 조약 개정의 필요와 국내에서 자 본주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태서주의( 泰 西 主 義, 서양주의)를 취하게 되 었고, 1876년 이래로 사법성의 외국인 고용인이었던 부아소나드에게 기초 를 의뢰하였다. 이에 반하여 신분법은 일본의 풍속과 습관에 근거해 제정 하기로 하여 일본인이 기초하기로 하였다. 부아소나드 중심의 민법전은 여러 차례 수정되어 1886년에 물권, 인권 및 제3편 제1부의 특정명의 획득법이 내각에 상정되었으나 초안의 상신과 동시에 민법편찬국이 폐지되어 그 사무는 사법성에 이관되었다. 이후 법 전 편찬은 법률취조위원회가 담당하여 결국은 이른바 [구민법( 舊 民 法 )]이 1893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구민법 내용이 당시 일본 사회의 수준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민주적, 급진적이었다고 비판받았고, 호즈미 노부신게 [ 穗 積 陳 重 ]는 {민법이 나와서 충효가 망한다}라고 하는 등 반대 의견이 강 하게 대두되었기 때문에 법전 편찬 논쟁을 거치면서 부아소나드 민법전은 김성수(1998), 日 本 民 法 立 法 過 程 에서 브와쏘나드에 관한 연구 序 說, 論 文 集 18집, 경찰대학, 1764~1765쪽. 1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9 결국 사장되었다. 결국 새로운 민법전은 독일 법전의 영향을 받아 제정되었다. 따라서 일 본의 근대 민법은 부아소나드로 대표되는 프랑스 민법과 독일 민법의 혼 합계수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약 5개월간 시행된 일본의 전국 적 민사관례조사( 民 事 慣 例 調 査 )와 상사관례조사( 商 事 慣 例 調 査 )의 결과가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본민사관례유집( 日 本 民 事 慣 例 類 集 ) 과 일본상사관례유집( 日 本 商 事 慣 例 類 集 ) 10 은 모두 사법성에서 편찬한 것으로 다키모토 세이이치[ 瀧 本 誠 一 ]가 교열을 하여 도쿄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은 해제, 범례, 본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범례에는 조사지역과 조사자, 진술자가 모 두 기록되어 있어서 근대 일본의 관습조사 사업의 양상과 그 내용을 파 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일본민사관례유집 11 해제에는 본서가 법전 편찬의 참고자료로 조사 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어, 구관조사의 결과가 일본 민법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민사관례 조사는 민법 편찬 관계 위원 이 각 부현에 순회 출장을 가서, 지방관이 미리 선정한 구관고례( 舊 慣 古 例 ) 에 암숙( 暗 熟 )한 민간의 고로( 古 老 )를 직접 면담하고, 민사관례에 대하여 위원이 일일이 그들에게 심문( 尋 問 )하여 얻은 결과를 찬집( 纂 輯 )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범례에서는 가장 중요한 조사지역의 선정 기준을 밝히고 있다. 인구 石 井 良 助 편@ 丘 秉 朔 역(1984), 앞의 책, 206~214쪽. 10 日 本 民 事 慣 例 類 集 과 日 本 商 事 慣 例 類 集 은 1880년(명치 13년)에 간행되었 으나 판매본이 아니었기 때문에 1932년에 재간행한 것이다. 11 司 法 省 (1932), 日 本 民 事 慣 例 類 集, 白 東 社.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19

20 가 많으면 관례도 역시 다양하기 때문에, 각국( 各 國 ) 구성( 舊 城 ) 소재의 군 ( 郡 ) 등 호구가 조밀한 지역에서 민사관례를 채록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신 현( 新 縣 )이 설치된 지역 및 개항지와 같이 현재 호구가 조밀하다고 하여도 여러 지방의 인민이 새롭게 모여서 구관고례가 없는 경우에는 생략하였다. 일본의 민사관례 조사지역은 인구가 조밀하다고 하여 선택된 것만이 아 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인구가 집중 거주하여 구관고례를 형성한 지역 이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홋카이도[ 北 海 道 ]는 2개 군만을 조사 하여 채록하였고, 오키나와[ 沖 繩 ]는 후일에 채록하기로 하여 당시 구관조 사에서는 생략하였다. 당시에 수행된 구관조사 방법의 한계도 지적하고 있다. 즉, 진술인은 조 사지역의 지방관이 고례에 암숙한 사람 중에서 미리 선정해두었으나 순회 위원이 1개 지방에 4~5일밖에는 체류( 滯 留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당 구관 의 사정을 완전히 파악하여 채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민사관례 조사가 매우 짧은 기간에 수행되었고 조사 인원과 피조사자(진술자)의 수도 매우 적었던 것과 관계가 있다. 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근대 일본의 민사관례 조사는 한국에 비해서 조사지역이 많았으나 상대적으로 조사기간은 짧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정부의 법전조사국에서는 모두 86개 군을 대상으로 약 2년 7개월간 진행 하였으나, 일본은 187개 군을 대상으로 1876년 5월에 시작해서 같은 해 11월에 종료하였으므로 약 7개월 동안 조사를 수행한 셈이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총 562명을 조사하였다. 조사대상 군이 모두 187 개 군이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보면 1개 군에 약 3명의 피조사자가 배정되 었음을 알 수 있다. 민사관례의 조사결과는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는데 조사보고서는 질문 2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1 표 1 _ 일본 민사관례 조사지역 및 진술자 상황 畿 內 東 海 道 東 山 道 總 數 國 數 5 國 數 1 國 數 7 郡 數 27 北 海 道 郡 數 2 西 海 道 郡 數 23 陳 述 人 數 60 陳 述 人 數 3 陳 述 人 數 44 國 數 21 國 數 11 國 數 3 郡 數 43 北 陸 道 郡 數 19 山 陰 道 郡 數 9 陳 述 人 數 141 陳 述 人 數 78 陳 述 人 數 31 國 數 12 國 數 2 國 數 12 郡 數 28 山 陽 道 郡 數 4 南 海 道 郡 數 32 陳 述 人 數 113 陳 述 人 數 10 陳 述 人 數 82 총 郡 數 187 총 陳 述 人 數 562 日 本 民 事 慣 例 類 集. 표 2 _ 일본민사관례유집 의 구성 제1편 인사 제2편 재산 제3편 계약 제1장 신분, 제2장 출산, 제3장 혼인, 제4장 死 去, 제5장 실종, 제6장 주소, 제7장 친족, 제8장 양자, 제9장 후견, 제10장 조합 제1장 재산의 소유, 제2장 家 産 相 續, 제3장 토지 제1장 계약의 諸 事, 제2장 의무의 證, 제3장 매매, 제4장 대차, 제5장 附 託, 제6장 書 質 入, 제7장 滿 得 免 除 사항을 적시하고 그에 대한 응답을 채록한 내용이 실려 있다. 채록의 끝부 분에는 반드시 채록한 지방의 명칭을 적시함으로써 어느 지방의 관례인지 를 분명히 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조사보고서의 체계는 프랑스 민법의 영향을 받은 법학제요방식 (Institutiones)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민법 논쟁을 거치면서 독일 민법의 영향을 받아 학설휘찬방식( 學 說 彙 纂 方 式, Digesta;Pandekten)으로 변형되 었다. 그리고 민법을 시행한 이후에는 가족법 분야에서 새로운 문제가 많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21

22 이 발생하여 1911년에 인사관례전집( 人 事 慣 例 全 集 ) 을 간행하였다. 상법 에 대해서도 민법과 마찬가지로 구관조사를 하고 이에 근거하여 상법전 을 기초하였다. 관습조사의 결과는 일본민사관례유집 과 함께 상사관 례유집 으로 간행되었다. 12 일본의 법전 편찬에서 구관조사가 차지하는 위치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민법전 편찬의 역사는 프랑스 민법과 독일 민법의 수용 과 정에서 참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법전의 경우에는 외국의 법전에 대 한 연구가 거의 없었으며 일본의 민법과 상법이 유일한 참고 법령이었다 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당시 한국 법전을 주도하였던 인물들이 모두 일본 인 사법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III. 대한제국 법전조사국의 관습조사 사업 한국에서의 근대적 사법제도 실시와 한국 법전 편찬은 일제의 식민정책 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일본은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드디 어 한국에 대한 직접적 간섭과 지배를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정부 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국에서의 우월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 며, 1905년에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사무를 일본 외무성이 감 리 지휘하고 일본의 외교 대표자가 한국의 신민과 국외 이익을 보호할 것 을 명시하였다. 13 이와 함께 과거 한국과 외국 열강이 맺은 조약의 실행을 일본 정부가 완수하는 대신에, 일본 정부의 중개 없이는 앞으로 어떠한 12 정긍식(2002), 앞의 책. 13 日 韓 協 約 ( ), 韓 國 倂 合 史 料 1권, 36~41쪽. 2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3 국제적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명시하였다. 을사조약은 한국의 조약체결권을 일본 정부가 행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향후 외국 열강이 한국 정부에 대하여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대하여 견제장치를 마 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국과 열강이 기왕에 맺었던 불평등조약을 곧바 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14 따라서 일본 정부는 외국 열강이 과거에 획득한 한국에서의 치외법권 및 협정세율 등에 관한 종전의 권리와 지위를 어떻 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점에 정책의 포커스를 맞추었다. 일본 정부가 한국과 서구 열강이 맺은 불평등조약을 철폐하려 한 이 유는 근대 일본의 조약 개정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본도 서구 열강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고 영사재판권을 인정하는 등 독립국으로서 의 역할이 제한된 적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근대화를 추진하고 서구 열 강과 대등한 국제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하여 시급히 추진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불평등한 조약관계를 철회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일본 정부가 추 진한 불평등조약 개정 교섭의 주안점은 영사재판권의 철폐와 관세 자주권 의 회복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열강들은 영사재판권 철폐 조건으로 서 일본에 법전 편찬, 재판제도의 정비를 요구하였고 15 이에 따라 명치 정 부는 사법제도 개편과 근대적 법전 편찬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과거의 경험을 그대로 활용하여 한국에도 적용하려 하였다. 우 선 치외법권과 관련해서는 근대적 사법제도를 한국에 공포하여 외국인에 대한 법권( 法 權 )을 장악하고, 세율에 관해서는 일본 정부와 열강 간의 조 14 日 韓 協 約 ( ), 韓 國 倂 合 史 料 1권, 36~41쪽. 15 牧 英 藤 原 明 久 편(1993), 앞의 책, 259~260쪽.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23

24 약 개정의 시기를 기다려서 필요한 협정을 체결하기로 하였다. 16 일본 정 부는 이미 체결된 한국과 외국과의 조약을 곧바로 부정하지는 못하였으 나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소멸시키려 하였으며, 1905년 이후 일본 정부의 대한정책은 한국에 대한 열강의 간섭을 부정하고 일본의 독점적 지배를 달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특히 치외법권 폐지의 문제는 한국의 독점적 지배를 위해서는 필수적 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한국의 사법제도 개혁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 이었다. 을사조약은 한국의 외교업무를 일본 정부가 행사한다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고 사법제도의 문제는 한국 내정에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 에, 을사조약 자체에 의해서는 사법제도 개혁을 위한 합법적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당시까지 일본 정부가 채택하고 있었던 일본인 고문을 통해서는 한국 내정을 변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일본의 침략 구상에 맞도록 한국 내정을 개편하기 위해서 통감부가 고 안한 것이 [시정개선협의회( 施 政 改 善 協 議 會 )]였다.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 는 통감으로 취임하고 곧바로 협의기구로서 [시정개선협의회]를 출범시켰 다. 시정개선협의회는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참석하고 한국 내각의 각 대 신들이 참여하는 비공식적인 기구였는데, 여기에서는 통감부의 개혁 구 상들을 한국 대신으로부터 추인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을사조약을 계기로 한국의 외부( 外 部 )가 폐지되고 대외업무를 통감부에서 직접 관장 하였기 때문에 시정개선협의회는 주로 한국 내정을 일본 주도로 전환하 는 기구였다고 볼 수 있다. 16 韓 國 保 護 權 確 立 ノ 件 (1905년 4월 8일 閣 議 決 定 ), 韓 國 倂 合 史 料 1권, 3~4 쪽. 2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5 한국의 사법제도를 일시에 개혁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곤란하 였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에 일본인 법무보좌관을 용빙( 傭 聘 ) 하고 부동산법조사회를 설치하여 부동산 관련 법규들을 정비하는 데 치 중하였다. 일본인 법무보좌관들은 한국의 주요 거점 재판소에 파견되어 한국인 지방관들의 지방재판에 조언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한국 의 지방관들은 일본인 법무보좌관들의 건의를 자신의 고유 업무인 재판 사무를 간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서로 간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법무보좌관에 의한 사법개혁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 제의 대한정책이 강경하게 변하면서 개편되었다. 1907년 일본 정부와 한 국 정부 사이에 새롭게 체결된 정미7조약에서 한국의 사법제도 개혁에 대 한 구체적인 내용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정미7조약을 근거로 1907년에 새로운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되었다. 재판소구성법 공포를 통한 사법과 행 정의 완전한 분리가 실현되었고, 17 새로운 재판소에서 필요한 한국 법전도 편찬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07년 12월 23일 법률 제8호 재판소구성 법, 법률 제9호 재판소구성법시행법, 법률 제10호 재판소설치법 등이 새 로 공포됨으로써 일본재판소 조직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여 한국에 도입 하였다. 1907년 재판소구성법의 특징은 기존의 관행이었던 관찰사 및 부 윤이 갖고 있던 재판권을 완전히 박탈했다는 점이다. 17 이와 함께 지방재판소 및 구재판소( 區 裁 判 所 )에 전임 판@검사를 두고, 지방관은 재판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구재판소에서는 판사 단독으 로 재판을 행하고, 공소원 및 대심원은 정수의 판사로 조직된 부( 部 )에서 17 日 韓 協 約 ( ), 韓 國 倂 合 史 料 2권, 634쪽; 日 韓 協 約 規 定 實 行 ニ 關 スル 覺 書 案 ノ 件 ( ), 韓 國 倂 合 史 料 2권, 627~629쪽.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25

26 합의하여 재판을 하도록 하였다. 18 새로운 재판소 조직에 따른 막대한 비 용과 법조 인력의 문제는 차관 도입과 일본인 사법관을 직접 임용함으로 써 해결하였다. 19 그리고 통감부는 1907년 12월 23일 재판소구성법을 새로 공포하면서 칙령 제60호로써 법전조사국 관제를 공포하고, 경복궁 내에 법전조사국 을 설치하였다. 20 법전조사국은 기존의 부동산법조사회와는 달리 한국의 민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및 부속 법령의 기안을 목적으로 설 치되었다 년 12월 31일에는 최병상( 崔 秉 相 ), 고정상( 高 鼎 相 ), 유진혁 ( 柳 鎭 爀 )과 일본인 平 木 勘 太 郞, 山 口 慶 一 등 8명이 임명되었고, 1908년 1 월 1일에는 구라토미 유자부로[ 倉 富 勇 三 郞 ]를 위원장에, 우메 겐지로를 고 문에 임명하고 김낙헌( 金 洛 憲 ), 유성준( 兪 星 濬 ), 마쓰데라 다케노[ 松 寺 竹 雄 ] 등을 위원으로 임명하여 체제를 갖추었다. 22 법전조사국 위원은 표 3과 같이 대부분 일본인 판검사 출신들로 충원되었다. 23 법전조사국 고문에 우메 겐지로가 임명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 다. 우메 겐지로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사법제도 개편과 민법전 편찬을 년 재판소구성법에 의해 설립된 재판소는 大 審 院, 控 訴 院, 지방재판소 및 區 재판소로 구성되었고, 3심제도를 채택하였다. 19 請 議 書 第 39 號 ( ), 法 部 大 臣 請 議 日 本 人 法 官 任 用 內 規 ( 奎 24565); 指 令 第 292 號 ( ), 內 閣 法 部 去 來 文 ( 奎 17763); 舊 韓 國 官 報 (융희 2년 5월 20일). 20 內 閣 往 復 文 ( 奎 17755) 년 12월 23일 칙령 제60호, 舊 韓 國 官 報 (융희원년 12월 26일). 22 정긍식(2000), 日 帝 의 慣 習 調 査 와 그 意 義, 改 譯 版 慣 習 調 査 報 告 書, 31쪽. 23 법전조사국관제는 梅 謙 次 郞 이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梅 謙 次 郞 文 書 에 는 法 典 調 査 局 官 制 와 法 律 調 査 局 官 制 가 함께 실려 있다. 2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7 표 3 _ 법전조사국 직원 1908 倉 富 勇 三 郞 1909 倉 富 勇 三 郞 위원 조사과 회계과 위원 사무관 서무과 조사과 회계과 松 寺 竹 雄, 安 住 時 太 郞 (법부서기관), 膳 鉦 次 郞 (검사), 國 分 三 亥 (검사), 中 村 竹 藏 (판사), 城 數 馬 (판사), 渡 邊 暢 (판사), 兪 星 濬 (법제국장), 金 洛 憲 (형사국장), 李 始 榮 (민사국장) 小 田 幹 治 郞 (사무관, 조사과장), 川 崎 萬 藏 (사무관보) 山 口 慶 一 (회계과장) 崔 秉 相, 高 鼎 相, 柳 鎭 爀, 平 木 勘 太 郞 (번역관보로 추측됨) 渡 邊 暢 (판사), 中 村 竹 藏 (판사), 城 數 馬 (판사), 膳 鉦 次 郞 (검사), 國 分 三 亥 (검사), 松 寺 竹 雄 (서기관), 安 住 時 太 郞 (서기관), 金 洛 憲 (형사국장), 李 始 榮 (민사국장), 兪 星 濬 (내각법제국장) 小 田 幹 治 郞 山 口 慶 一 (과장), 八 田 岩 吉, 室 井 德 三 郞 (이상 사무관보) 川 崎 萬 藏 (과장), 安 藤 靜, 平 木 勘 太 郞, 下 森 久 吉 (이상 사무관보), 최병상, 高 鼎 相, 柳 鎭 爀, 金 東 準, 方 漢 復, 丹 羽 賢 太 郞 (이상 번역관보) 山 口 慶 一 (과장), 川 原 信 義, 岩 谷 武 市, 中 州 政 美 (이상 사무관보) 舊 韓 國 官 報 ; 內 閣 往 復 文 (규( 奎 )17755). 추진하기 위하여 용빙한 인물이었다. 1906년에는 부동산법조사회 회장으 로서 한국의 토지관계법을 정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관 습조사 사업과 한국 정부의 각종 법령을 기안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 다. 우메 겐지로는 금후 제정해야 할 법률로 형법, 민법, 호적법, 변호사법, 토지이용법 등을 열거하였다. 이 중에서 민법에 대해서는 메모의 형식으 로 다음과 같이 개략적인 구상을 적어놓았다. 一. 당사자의 일방 또는 쌍방이 일본인 기타 외국인일 때는 일본 민법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토지에 관해서는 한국법에 의하고 신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27

28 표 4 _ 법전조사국의 내부 기구 부서 서무과 조사과 회계과 주요 업무 문서의 접수@발송@번역@편찬@보존에 관한 사항, 보고에 관한 사항, 직원의 신분 및 진퇴에 관한 사항 법령의 기안 재료수집에 관한 사항, 위원회에 관한 사항 예산 및 결산에 관한 사항, 경비의 수지에 관한 사항, 물품의 구입@ 사용@보관에 관한 사항, 사용인의 傭 入 에 관한 사항 法 典 調 査 局 分 課 規 程, 舊 韓 國 官 報 4081호( ). 분에 관해서는 본국법에 의하는 것을 본칙으로 할 것 一. 당사자 쌍방이 한국인일 때는 구관에 의할 것 一. 따라서 한국의 관습을 조사하고 간단한 민법을 제정할 것 24 일본 정부가 한국 사법제도 개혁의 빌미로 제시하였던 다양한 개혁구 상은 한국 정부의 독립국화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 롯한 통감부 사법관료가 추진한 한국 법전은,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국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일본인이 관계된 민사사건에 대해서는, 토지에 관한 법규를 제외하고 일본 민법을 적용하기로 하고 한국인 상호 간의 민 사사건에 대해서만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사자 쌍방이 한국인인 경우에만 한국 법전을 적용한다는 것은 한국에서의 주요 법권을 일본이 장악하고,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전조사국의 한국 관습조사 사업은 이와 같은 통감부의 대한정책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었다. 한국 관습조사 사업을 계획하였고 그 조사방 24 今 後 制 定 ヲ 要 スル 法 律, 梅 謙 次 郞 文 書 ( 日 本 法 政 大 學 所 藏 ). 2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9 법과 절차 등을 종합적으로 관장하였던 우메 겐지로는 관습조사의 범위 를 민사 및 상사관습으로 확정하고, 각 조사원이 다양한 관습을 취사선 택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개인의 주관을 피하고 통일적인 조사를 위해서 206개의 조사 항목을 작성하였다. 제1편 민법:총칙 20문, 물권 30문, 채권 54문, 친족 53문, 상속 23문 제2편 상법: 총칙 4문, 회사 1문, 상행위 11문, 手 形 (어음) 1문, 해상 9문 민법의 경우에는 180개 항, 상편의 경우에는 26개 항의 질문 사항이 만들어졌다. 상법 부분이 상대적으로 문항의 수가 적은데 그것은 1906년 부동산법조사회의 상거래와 관련한 관습조사와 법령의 정비가 일정하게 완료된 측면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본의 민사관례 조 사에서는 37개의 조사사항이 작성되어 그에 대한 답변이 작성되었다. 오 히려 한국의 관습조사 항목이 일본에 비해 많다. 한국은 일본 정부에게는 미지의 세계였기 때문에 조사해야 할 항목도 많았던 것이다. 이와 함께 관습조사 문제 범례를 만들어 각 질문에 대해 조사상 유의할 사항을 자세히 기록하고 이를 인쇄하여 조사원에게 소지 하도록 하였는데, 이 중에서 중요한 것만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본편 중에서 부동산법조사회에서 조사한 문제로서 대개 분명한 것 이 적지 않지만, 또 관습이 아닌 것으로 의문되는 것도 많기 때문에 만일 고려할 것이 있으면 이를 언급한다. 2 한국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관습에 대해서 대개 모든 문제를 망라하였을지라도 만약 본편에 언급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참고할 관습을 발견하면 반드시 조사한다.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29

30 3 법률 전문가가 아니면 법률문제와 덕의[ 德 義, 도덕 - 인용자]문제의 구별을 명확히 하는 자가 드물다. 고로 조사원은 특별히 이 구별에 유의하여 조사할 것을 요한다. 25 위 지침은 법률문제와 도덕문제를 구별하여 조사할 것을 강조하고 있 는데, 이것은 각 조사원들의 주관적 요소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규정 한 것으로 보인다. 관습조사의 목적이 민사법전 제정에 있었기 때문에 한 국의 보편적인 관습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우메 겐지로가 작성한 [조사문제]를 보면, 한국 관습에는 존재 하지 않는 개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한국 관습에는 일본 민법 적 의미의 [가독상속( 家 督 相 續 )], [가( 家 )], [은거( 隱 居 )], [씨( 氏 )], [거소( 居 所 )] 등의 개념이 없었지만, 조사문제에서는 이러한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하 였다. 이와 같이 한국 관습에 존재하지 않는 용어들을 사용한 것은 한국 관습과 일본 민법과의 이동( 異 同 )을 조사하여 일본 민법과 유사한 체제 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26 이에 대해 우메 겐지로는 다음과 같이 일본 민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조선 관습을 조사하는 이유를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명칭은 대부분 일본과 한국이 동일하지 않지만, 정확한 조사를 하기 위 해서는 일본의 명칭을 기초로 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하여 본편 중 고의로 일본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조사원은 한국의 명칭을 조 사하고 그 의의도 역시 가능한 한 정확히 조사하는 것을 요한다 法 典 調 査 局 (1908), 慣 習 調 査 問 題. 26 朝 鮮 總 督 府 中 樞 院 (1938), 朝 鮮 舊 慣 制 度 調 査 事 業 槪 要, 15쪽. 27 法 典 調 査 局 (1908), 앞의 책. 3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1 즉, 우메 겐지로를 비롯한 당시 일본인 조사자들은 한국 관습과 일본 민법 간의 개념상의 차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조사문항에서는 일본 민 법 용어를 사용하고, 그에 해당하는 한국 관습을 그대로 조사하는 방식 을 취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민사 관습조사는 조선 관습의 실체를 구명하는 것이 목 적이기는 하였지만, 조사기법 및 주체에 의해서 일본 민법적 개념이 투영 된 관습법이 형성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 을 채택한 것은 일본 민법과 한국 관습과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한국 관 습을 조사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후 제정될 한국 법전이 한국적 상황을 일정하게 반영하더라도 일본 민법전과 유사한 체제를 갖추도록 하 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법전조사국에서는 부동산법조사회와 마찬가지로 전적조사( 典 籍 調 査 ) 와 실지조사( 實 地 調 査 )를 병행하였는데, 전적조사에서는 조선의 법전류와 예법서, 각종 문기( 文 記 ) 등을 조사하였다. 법전조사국이 한국의 현행 관 습을 조사하려 했으면서도 조선 재래의 각종 법전류와 예서( 禮 書 ) 등을 조사한 이유는 당시 일부 관습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 있어서 과거 법규를 통하여 관습의 실체를 명확히 하고, 또 관습의 연원( 淵 源 )을 파악하여 규 범을 확정하려 했기 때문이다. 1910년 관습조사보고서 를 보면 문헌조사에 관계된 각종 문헌들을 확인할 수 있다. 관습조사보고서 는 경국대전, 대전회통 을 비롯한 조 선시대 법전류와 예서 및 각종 문서들을 나열하고 있다. 당시 부동산법조 사회에 참여한 바 있었던 아사미 린타로[ 淺 見 倫 太 郞 ]는 우메 겐지로에게 조선인에 대한 실지조사는 무익하고 실효가 없으므로, 구기문서( 舊 記 文 書 ) 조사를 선행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우메 겐지로는 기록에 대한 조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31

32 사를 생략하는 것은 아니라고 간단히 답변하였다. 28 아사미 린타로의 언 급을 통하여 당시 법전조사국이 문헌조사보다 실지조사를 중심으로 한 국 관습을 조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관습조사보고서 에 인용된 각종 법전과 문헌을 보면 아사미 린타로의 지적과 같이 미흡한 느낌이 있 다. 실제 조사한 문헌도 법전을 제외하면 4종에 지나지 않는다. 또 전체에 걸치는 것이 아니라 예서에 편중되어 있으며, 특히 청원서( 請 願 書 ), 소장( 訴 狀 ), 계약서( 契 約 書 ) 등 각종 서식을 수록한 유서필지( 儒 胥 必 知 ) 를 누락시 켰다. 법전의 경우 주요 법전을 조사하였으나, 변화하는 관습을 직접 반영 하는 수교( 受 敎 ) 등을 제외한 것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문서는 위에서 처럼 법령의 양식을 포함하여 71종, 이를 제외하면 59종을 수록하였는데, 이것만으로는 당시의 법률생활의 실태를 모두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 다. 29 또 표 3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법전조사국 직원들을 보면, 한국의 고문 헌들을 정리할 한국인 학자들의 참여가 없고, 한국인들은 번역관의 역할 에 그치고 있다. 그리고 관습조사 기간이 1908년 5월부터 1910년 9월까 지 2년 4개월이었기 때문에 치밀한 전적조사는 사실상 어렵지 않았나 생 각된다. 실지조사는 부동산법조사회와 동일한 방법이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 는데, 부동산법조사회에서는 일본인 이사관과 한국인 관찰사, 부윤, 고로 등에게 질문하고 답변한 것을 채록하는 방식을 취했다. 법전조사국의 조 28 淺 見 倫 太 郞 (1921), 朝 鮮 法 系 ノ 歷 史 的 硏 究, 法 學 協 會 雜 誌 39-8, 33~34 쪽. 29 정긍식(2002), 앞의 책, 239쪽. 3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3 사 방식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되어 있는 연구는 없으나, 국사편찬위원회 가 소장하고 있는 안성( 安 城 )지역 조사보고서를 통하여 법전조사국의 조 사방법을 확인할 수 있다. 안성지역 실지조사는 川 原 信 義 사무관보가 실 시하였고, 1908년 12월 8일부터 12월 27일까지 20일간 매일 3명씩 조사 하는 것을 원칙으로 조선인들을 직접 불러서 질문하고 그 응답을 채록하 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30 8일부터 27일까지 모두 60회에 걸쳐서 46명의 조선인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30 안성지역 조사를 통하여 관습조사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던 조선인들 의 계층 및 신분에 대해서 일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당시 한국 법전이 민사 와 상사를 통합한 [민상통일법전( 民 商 統 一 法 典 )] 형식 31 을 취하고 있었기 때 문에, 206개 질문 항목에 적절하게 응답할 수 있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 이 선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질문 사항 중에서 상사에 관한 것은 등 상업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하였고, 민사에 관한 것 중에서 친족 및 상속은 유교적 예제에 익숙하고 당시 인민들의 관습을 폭넓게 알고 있었던 군수, 면장, 이장, 중추원의관, 참봉, 사인( 士 人 ) 등에게 질문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09년도의 조사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함경남도 갑산지방 의 관습조사는 월 13일에 법전조사국 사무관보 下 森 久 吉 이 조사 하여 구라토미 유자부로에게 조사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범례에는 이 조사 가 1909년 9월 14일부터 10월 13일까지 30일 동안 함경남도 갑산군아( 甲 山 郡 衙 )에서 별지 기명( 記 名 )의 인원으로서 행한 것으로 나와 있다. 32 갑산 30 法 典 調 査 局 (1908), 앞의 책. 31 鄭 鍾 休 (1989), 앞의 책, 89~92쪽.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33

34 표 5 _ 안성지역 관습조사 응답자 신분 신 분 성 명 인원 횟수 齊 任 趙 鐘 億, 孫 永 根 (2회), 權 明 壽 3 4 客 主 金 成 五 (3회), 朴 舜 瑞, 朴 雲 三, 金 重 權 (2회) 4 7 商 金 天 浩, 朴 承 志 (2회), 鄭 士 弘, 朴 舜 若, 金 重 權, 張 敬 集, 朴 桂 琬, 柳 南 秀 8 9 農 崔 秉 純, 崔 元 溥, 李 龍 夏, 南 啓 恒 4 4 典 當 業 李 基 恒, 李 圭 琬 2 2 面 里 長 李 萃 榮, 權 鐘 大, 嚴 祐 永, 趙 秉 均, 趙 載 熙, 李 九 淳 (2회), 金 享 倍 7 8 郡 守 李 承 鉉 ( 前 ) 1 1 中 樞 院 議 官 鄭 耆 朝 ( 前, 2회), 金 重 權 ( 前 ), 金 泓 ( 前 ) 3 4 主 事 朴 勝 友 (2회), 李 瑢 儀 ( 前, 2회), 朴 弼 秉, 李 善 儀, 李 鎬 臣 5 7 正 尉 尹 錫 祐 ( 前 ) 1 1 參 奉 朴 泰 秉 ( 前, 2회), 李 源 世 ( 前, 2회) 2 4 士 人 洪 在 益 1 1 敎 員 崔 弘 燮 1 1 水 舂 主 朴 承 元 (2회) 1 2 敎 官 任 成 鎬 ( 前 ) 1 1 객주 및 문학박사 申 肅 熙 (3회) 1 3 出 身 李 旭 薰 1 1 합계 46명 60회 法 典 調 査 局, 調 査 報 告 書 (안성지역). 위 인물 중에서 客 主 와 商 의 김중권은 동일인물로, 중추원의관의 김중권은 다른 인물로 처 리하였음. 지역의 조사보고서 별지에는 모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에 는 별지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범례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 과 같다 法 典 調 査 局 (1909), 調 査 報 告 書. 3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5 <범례> 1 보고서를 일목요연하게 하기 위하여 기재하는 방식은 되도록 분류 주의( 分 類 主 義 )를 채용하고, 또한 보고서는 기억하지 못할 것을 우 려하여 조사한 그날로 매일매일 정리하여, 초고를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때로 문장이 되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오자, 탈자 도 가끔씩 있을 것이다. 진실로 부끄러움을 누를 수 없다. 2 조사할 때 응답위원들에게 조사의 중대함을 이해시키고, 동시에 그 응답을 신중하게 하기 위하여 문헌비고( 文 獻 備 考 ), 대전회통( 大 典 會 通 ), 대명률( 大 明 律 ) 등의 옛 문헌을 참조하는 노력을 했지 만, 보고서에는 이의 기재를 생략했다. 3 이름은 사실의 손님이며 명칭과 실질을 비교하면 관습의 진상을 살 필 수 있다. 그러므로 되도록 정확하게 듣고자 노력했다. 안성지역과 갑산지역의 조사 상황을 보면 약 20~30일이 걸렸으며, 대 개는 지방관아로 피조사자를 직접 불러서 조사를 하고 응답을 그대로 채 록하는 방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갑산지역의 범례를 통하여 보고서는 조사가 모두 완료된 이후에 작성한 것이 아니라 매일 응답한 결과를 정리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성과 갑산지역은 일반조사 지역으로서 조사문제 전체에 관해서 조 사하였는데, 법전조사국은 일반조사뿐만 아니라 특수사항에 관한 조사 를 위해서 9개 도 38개 지역 33 을 선정하여 특별조사를 실시하였다. 특히 안성지역 조사보고서는 조사문항의 전체 답변자 신분을 파악할 수 있지 만, 각 문항에 대해서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 선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공주( 公 州 )지역 조사보고서는 각 질문 사항에 관한 33 중복조사 지역 16개 지역을 포함한 것이다.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35

36 답변자 신분을 적시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어 안성지역 조사보고서의 문 제점을 보완할 수 있다. 우선 특수조사 지역은 조사문제 전체를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일부 특별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 사항만을 조 사하였기 때문에 조사의 범위, 대상, 기간에서 차이가 있었다. 법전조사국 사무관보인 平 木 勘 太 郞 은 1910년 4월 13일에 충청남도 공주지방의 소작 및 기타 관습에 대한 조사 명령을 받고, 4월 22일부터 28일까지 7일간 조사하였다. 일반조사에 비하면 조사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조사 항목 수의 차이 때문이었다. 일반조 사는 206개 항목 전체를 조사해야 하지만 특수조사는 1개 혹은 필요한 몇 개의 항목만을 조사했기 때문이다. 공주지방에서는 소작, 전질( 轉 質 ), 입회( 入 會 ), 어음 및 수형, 34 동사( 同 事 ), 영급전( 永 給 田 ), 계, 보( 洑 ) 등 8종류에 관한 관습을 조사하였다. 공주 지방의 관습조사는 주로 농업 및 상사( 商 事 ) 관습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 문에 응답자들은 대부분 농민@상인 등 직접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자들 로서 약 42명에 달하였다. 35 각 항목당 조사자 신분을 살펴보면, 조사문항과 직접 관련이 있는 생 업의 종사자이거나 이해관계가 있는 계층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작에 관해서 응답한 인물들의 사회적 계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응답자들은 34 於 音 과 手 形 은 유사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 다만, 어음의 경우에는 조선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것이지만, 手 形 은 [ 手 形 條 例 ]에 의해서 발행되었다는 차이 가 있다. 공주지역 조사 당시 手 形 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아직 발행@ 受 授 된 적이 없었고, 중국인 및 일본인이 이따금 발행할 뿐이었다. 法 典 調 査 局 (1910), 公 州 地 方 二 於 ケル 特 別 調 査 書 ( 中 B16BBE-6),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35 法 典 調 査 局 (1910), 위의 책. 3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7 표 6 _ 공주지역 조사 항목과 답변자 조사 항목 답변자 인원 소작 公 州 郡 主 事 李 正 鉉, 辰 頭 面 면장 大 依 鉉, 要 堂 面 면장 權 重 大, 城 頭 面 면장 吳 驎 善 4 轉 質 商 朴 星 七, 辛 乃 京, 典 當 局 閔 泳 善, 木 洞 面 면장 李 象 吉, 南 部 面 면장 朴 永 眞 5 入 會 (추정) (5) 어음 및 수형 南 部 面 班 竹 里 이장 金 德 仁, 東 部 江 景 里 이장 李 昌 淑, 포목상 成 周 桓, 商 朴 春 又, 郡 主 事 李 正 鉉 5 계 (추정) 5 同 事 公 州 읍내 상인 成 君 鎭, 同 金 用 佑, 同 金 壽 聖, 同 朴 元 直, 牛 井 面 면장 盧 榮 5 永 給 田 (추정) (5) 洑 牛 井 面 雲 山 里 면장 盧 榮, 牛 井 面 銅 川 里 이장 朴 魯 俊, 牛 井 面 丹 坪 里 면장 李 順 素, 牛 井 面 銅 川 里 金 化 實, 同 崔 孝 根, 同 8 卞 元 西, 同 吳 正 先, 洑 관리인 吳 鳳 洙 法 典 調 査 局 (1910), 公 州 地 方 二 於 ケル 特 別 調 査 書 ( 中 B16BBE-6). 위 도표에서는 入 會, 契, 영급전의 조사자가 나와 있지 않은데, 이 부분은 바로 위 질문 사항 의 답변자와 동일한 것으로 처리하였다. 면장이 대부분이고 주사가 1명이다. 당시에 면장 정도의 직책을 수행할 정도면 해당 지역에서도 일정한 규모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소작에 관해서는 지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응답이 기록되 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보( 洑 )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주로 이장, 면장이 피조사자로 채택되었고 보 관리인이 1명이다. 표 6을 보면 모든 관습에 걸쳐서 면장, 이장, 주사 등이 상대적으로 많 은 수를 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각종 분쟁에 관해서 일반인들 보다 쉽게 접할 수 있고 또 분쟁을 처리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37

38 한편, 공주에서 수행한 특별조사의 결과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조사보고서에는 {4월 26일 우정면( 牛 井 面 ) 면장 및 보의 관 리자 등을 소환하여 캐물어 보았지만 대강의 개요도 엿보아 알 수 없었 다. 그래서 다음 날 4월 27일 오전 7시부터 공주군 주사( 主 事 ) 오카다[ 岡 田 雅 尾 ]와 동행하여 공주읍에서 2리( 里 ) 30정( 町 )(헌병 分 遣 所 의 實 測 이정 표에 의함) 떨어진 곳에 있는 우정면 동천리( 銅 川 里 )에 가서 통천보( 通 天 洑 ) 의 관개( 灌 漑 )로써 전답을 경작하는 사람 중에 가장 이해관계가 많은 사 람, 또 그 마을에서 장로( 長 老 )로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을 소 환하였다.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대략 30정 떨어진 마곡면( 麻 谷 面 )에 있 는 통천보의 실지( 實 地 )를 답사하는 한편, 보에 대한 여러 가지 조사를 하 였다} 36 라는 대목이 있다. 이것은 특정 조사 항목에 대하여 법전조사국이 피조사자를 선정하는 방식과 조사의 기법을 일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 다. {통천보의 관개로써 전답을 경작하는 사람 중에 가장 이해관계가 많은 사람} 또 {그 마을에서 장로로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을 소 환}, {통천보의 실지를 답사}라는 표현은 조사 항목과 직접 이해관계가 있 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였고 오랜 경험이 있어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 정할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필요한 경우에는 실지 조사를 수행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사방법을 사용한 이유는 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일본인들도 파악하고 있었으나 보에 관한 한국의 관습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조선의 보에 대해서 체계적인 조사를 실시한 전남지 역 조사에서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전남지역의 보의 관습을 또다시 36 法 典 調 査 局 (1910), 앞의 책. 3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9 조사한 것은 이 지역에서 한국의 보 관습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으로 생 각된다. 표 7은 1910년 5월 25일부터 6월 26일까지 조선의 보에 관한 관 습을 조사한 것이다. 이 조사는 법전조사국 사무관보 岩 吙 武 市 가 작성하 여 7월 10일 구라토미 유자부로에게 제출한 것이다 공주지역의 보에 관한 관습에 관해서는 주로 면장과 이장을 조사하였 으나 전남지역 피조사자의 직업을 보면 농민, 주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 다. 보에 관해서는 농업을 하는 사람이 해당 관습의 내용을 가장 잘 파악 할 수 있기 때문에 선정하였고 주사의 경우에는 해당 지역에 대한 이해가 밝고 이해관계가 충돌할 경우 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에 관한 조 사는 전남 4개 지역, 모두 21명을 대상으로 33일간 진행되었다. 보에 관련 해서 매우 상세한 조사가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는 조사보고서이다. 한편, 영급전과 삼포( 蔘 圃 )에 관한 특별조사 보고서도 국사편찬위원회 표 7 _ 특별조사 항목: 洑 에 관한 관습조사 조사지역 직 업 성 명 조사지역 직 업 성 명 府 主 事 金 海 雄 농업 趙 由 錫 府 主 事 李 尙 黙 농업 朴 源 奎 전남 전남 士 商 公 員 金 仲 善 농업 池 應 鉉 務 安 府 光 州 郡 衙 농업 金 永 錫 농업 崔 敎 永 농업 朴 致 完 농업 趙 明 錫 농민 朴 潤 東 郡 主 事 金 孝 燦 前 主 事 吳 翔 學 농업 金 齊 俊 전남 지방위원 鄭 遇 卿 전남 농업 金 萬 拜 羅 州 郡 衙 농업 金 鳳 魯 順 天 郡 衙 농업 鄭 瑩 奎 상업 金 亨 俊 前 主 事 南 廷 學 상업 張 亨 允 洑 에 관한 관습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39

40 에 소장되어 있어 그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표 8은 삼포와 영급전에 관 한 특별조사를 한 것으로 이 표가 의미 있는 것은 매우 다양한 계층의 인 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각 지역의 관습조사보고서 를 통하여 당시 일제에 의하여 수록된 관 습이 매우 다양한 계층들의 답변을 채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반조사 사항에 관해서는 206개 항목에 관하여 답변할 수 있는 다양한 계층의 인 물들이 피조사자로 선정되었고, 특수조사의 경우에는 해당 관습이 발달 한 지역을 대상으로 직접 관련이 있는 계층의 인물들이 피조사자로 선정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이해관계인, 대하여 법 적인 분쟁을 다룰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혹은 경험자 등으로 구성되 표 8 _ 특별조사 항목: 蔘 圃 에 관한 보고(개성, 풍덕, 장단)( ) 조사지역 개성 ( 郡 衙 ) 풍덕 ( 郡 衙 ) 長 湍 ( 郡 衙 ) 피조사자 蔘 政 局 上 林 국장, 齊 藤 監 視 部 長, 기타 직원 朴 郡 守, 李 主 事, 馬 主 事, 기타 직원 蔘 業 組 合 員 孫 鳳 祥, 同 孔 聖 學, 同 姜 福 源, 同 金 圭 章, 同 金 瀅 植, 同 李 彦 周, 同 金 昌 玉, 商 業 會 議 所 員 黃 石 圭, 同 崔 聖 求, 同 秦 尙 炯, 同 鄭 在 勳, 同 林 鎭 文, 紳 士 李 健 爀, 同 金 祚 永, 同 姜 福 源, 同 金 慶 琬, 同 朴 圭 極, 漢 湖 農 工 銀 行 出 張 所 小 鹿 島 지점장 居 間 尹 東 圭 開 城 區 재판소 北 條 판사 재무서 閔 서장, 금융조합 佐 藤 이사 兪 郡 守, 同 申 郡 主 事 기타 직원 面 長 金 敢 植, 里 長 高 化 淳, 金 潤 榮, 池 汝 雲, 李 性 稷, 里 長 申 鉉 重, 面 長 李 庚 植, 申 興 均 李 郡 守 同 尹 郡 主 事, 面 長 鄭 善 好, 성균관 司 業 朴 晋 燮, 紳 士 朴 恒 黙, 頭 民 盧 在 厚, 面 長 金 準, 里 長 申 仁 均, 面 長 許 霧, 同 尹 命 學, 紳 士 柳 琻, 李 泰 榮, 財 務 署 上 部 主 事 4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41 어 있다. 이상의 조사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37 일반조사 지역은 우메 겐지로가 작성한 206개 질문 항목에 대하여 모 두 조사하여 그 결과를 채록한 것이고 특수조사 지역에서는 법전조사국 에서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일부 관습에 대해서만 조사한 점이 차이이다. 그리고 중복조사 지역은 일반조사와 특수조사를 모두 실 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사실상 일반조사 지역은 32개 지역과 16개 지역을 합하여 48개 지역이고, 특수조사 지역은 22개 지역과 16개 표 9 _ 특별조사 항목: 永 給 田 에 관한 관습조사 37 조사지역 피조사자 조사지역 피조사자 郡 衙 朴 郡 守, 李 主 事, 馬 主 事, 기타의 직원 蔘 業 調 査 員 孫 鳳 祥, 孔 聖 孝, 郡 衙 李 郡 守, 尹 郡 主 事 면장 鄭 善 好, 金 準, 許 霧, 尹 命 孝 李 泰 周, 金 奎 章 신사 朴 德 黙, 柳 滄, 李 泰 榮 開 成 商 業 會 議 所 員 黃 石 圭, 崔 聖 求, 秦 尙 烱, 鄭 在 勳, 朴 鎭 文 紳 士 李 健 爀, 金 祚 永, 姜 福 源, 長 湍 頭 民 盧 在 厚 里 長 申 仁 均 金 慶 琓, 吳 景 玉, 金 得 烱, 李 圭 弘, 姜 宗 錫, 朴 圭 植 거간 尹 東 圭 成 均 館 司 業 朴 晋 變 재무서 上 部 主 事 개성구재판소 此 條 判 事 郡 衙 兪 郡 守, 申 郡 主 事, 재무서 閔 署 長 기타 書 記 郡 衙 李 郡 主 事, 尹 五 榮, 愼 在 喊, 豊 德 面 長 金 敢 植, 高 化 淳, 金 潤 榮, 坡 州 朴 薰 陽, 趙 應 奎, 李 裕 奭, 李 泂 榮, 池 汝 雲, 李 性 稷, 申 鉉 重, 且 相 祖, 金 根 培, 安 東 奎 李 庚 植, 申 興 抣 永 給 田 에 관한 조사보고서(개성, 풍덕, 장단, 파주), 국사편찬위원회. 37 永 給 田 에 관해서는 1910년 5월 13일에 法 典 調 査 局 事 務 官 補 宝 井 裕 三 郞 이 倉 富 勇 三 郞 에게 보고하였다. 조사지역은 開 城, 豊 德, 長 湍, 坡 州 지방이다.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41

42 지역을 합하여 38개 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조사 지역은 해당 도 ( 道 )에서 지방의 중심지 중심으로 선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수조사 지역의 선정 기준은 조사대상 관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는 특수조사는 보, 삼포, 영급전 등 인데 조사지역은 각 관습이 대표적으로 활성화되어 있는 지역을 선택하 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특수조사 지역이 서로 중복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시간과 비용의 절약을 위하여 한 지역을 조사하면서 여러 관습을 동시에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안성과 공주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전국의 조사지역으로 확대하면, 일 반조사 지역 13개 도 32개 지역, 중복조사 지역 8개 도 16개 지역으로 2,208여 명의 조선인을 상대로 2,880회의 조사를 벌였던 것으로 추측된 다. 또 특수조사 지역은 9개 도 22개 지역, 중복조사 지역 8개 도 16개 지 역으로 모두 1,596명의 조선인을 상대로 조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 반조사와 특수조사를 모두 합하면 약 3,804명의 조선인을 상대로 실지조 사를 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38 피조사자의 사회적 계층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계층 은 군수, 면장, 이장, 주사( 主 事 ), 서기( 書 記 ), 두민( 頭 民 ), 신사( 紳 士 ), 삼업조 합원( 蔘 業 組 合 員 ), 거간, 판사, 재무서장, 금융조합이사, 은행관계자, 농업, 보 관리인, 제임, 객주, 상, 농, 전당업, 중추원의관, 참봉, 정위, 교원, 교관, 객주 및 문학박사 등 매우 다양하다. 이 중에서 군수, 면장, 이장, 주사 등 38 법전조사국의 조사보고서는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와 국회도서관 등에 소장되 어 있는데 일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慶 州 東 萊 昌 原 大 邱 調 査 書, 公 州 地 方 ニ 於 ケル 特 別 調 査 書, 大 邱 郡 ニ 於 ケル 調 査 報 告 書, 東 萊 郡 ニ 於 ケル 調 査 報 告 書, 調 査 報 告 書, 調 査 報 告 書 ( 東 萊 ). 4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43 이 가장 많은 수를 점하고 있고 농업, 상업 관련자가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조사지역을 전국적으로 살펴보면 표 10과 같다. 39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법전조사국은 1908년 5월 말부터 12월 말까지 경기도,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등 7개 도의 조사를 완료하 였고, 1909년에는 황해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강원도 조사를 완료하 표 10 _ 관습조사 지역 일반조사 지역 중복조사 지역 특수조사 지역 39 계 경기도 서울, 인천, 안성 개성, 수원 여주, 풍덕, 장단, 파주, 연천 10 황해도 해주, 황주 재령, 서흥, 안악, 봉산 6 평안남도 안주, 덕천 평양, 진남포 숙천 5 평안북도 강계, 영변 의주, 용천 정주 5 충청남도 예산, 온양, 은진 공주 강경, 연산 6 충청북도 충주, 청주, 영동 3 경상북도 상주, 안동 대구, 경주 성주, 포항 6 경상남도 진주 부산, 마산, 울산 밀양, 김해, 용남 7 전라남도 제주 광주, 목포 나주, 법성포, 순천 6 전라북도 남원 전주, 군산 금산 4 함경북도 경성, 경흥, 회령, 성진 4 함경남도 함흥, 원산, 갑산, 북청 4 강원도 춘천, 금성, 원주, 강릉 4 계 13개 도, 32개 지역 8개 도, 16개 지역 9개 도, 22개 지역 70 정긍식 역(2000), 改 譯 版 慣 習 調 査 報 告 書, 한국법제연구원. 39 특수조사는 특별조사가 필요한 관습이 대표적인 곳을 선정한 것으로 추정된 다. 예컨대 蔘 圃 에 관한 관습은 개성, 풍덕, 장단 등을 조사지역으로 선정하였 고 洑 에 관해서는 전남지역을 주로 조사 지역으로 선정하였다.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43

44 여, 전국적 조사사업은 일단 마무리하였다. 1910년에 들어와서는 재조사 가 필요한 사항 및 특히 상세한 조사를 요하는 사항에 대하여 이른바 [특 별조사]를 실시하였다. 40 각 지역의 조사활동은 모두 개별적으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법전 조사국 위원장인 구라토미 유자부로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1910년 9월 법전조사국의 폐지와 함께 조사활동을 중지하고, 10월에 잔무 정리 차원 에서 전국에서 취합한 각 지방의 관습조사보고서 에 채록된 관습을 분 석하여 한 권으로 된 관습조사보고서 를 최종적으로 착수하였다. 41 그리 고 1910년 12월에 구라토미 유자부로가 조사보고서를 [관습조사보고서] 라고 명명하여 데라우치[ 寺 內 ] 총독에게 보고하고 인쇄@배부하였다. 42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과 한국의 관습조사는 일정한 차이가 있 었다. 우선 조사 시기를 보면 일본의 경우에는 약 7개월 동안 수행하였으 나 한국은 2년 5개월간 지속되었다. 관습조사의 규모도 차이가 있다. 일 본은 모두 187개 군을 조사하였으나 한국은 일반조사, 특별조사, 중복조 사 지역을 모두 포함하여 86개 지역을 조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는 대개 1개 군당 3~4일 정도 조사하였으나 한국의 경우 에는 대략 20~30일 정도였다. 이렇게 일본 본국보다도 한국에 대한 관습조사의 규모가 컸던 이유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해가 높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일본 정부는 지방관례 조사를 일본인이 직접 수행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관례에 대한 40 특별조사보고서 및 상세한 조사를 위해 재조사한 보고서도 국사편찬위원회에 일부 소장되어 있다. 41 慣 習 調 査 報 告 書 凡 例. 42 朝 鮮 總 督 府 中 樞 院 (1938), 앞의 책, 19쪽. 4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45 이해도가 매우 높았으나 한국의 관습조사는 대한제국 정부가 수행한 것 이 아니라 법전조사국에 소속되어 있었던 일본인 조사관들에 의해서 수 행되었기 때문이다. 통감부 시기의 관습조사 사업은 한국인들의 관습을 조사하기 위해서 실시되었지만 조사 항목의 작성이나 한국 관습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태 도는 일본 민법적 개념을 기초로 진행되었다. 43 따라서 관습조사 사업에 의해 파악된 한국 관습은 일본인의 시각에서 조사되고 인식된 관습이었 다. 한국 민법전 편찬이 일본인에 의해서 주도되었기 때문에 일본 민법의 체제와 내용이 한국 관습에 투영된 형태로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관습조사보고서 에 나타난 관습은 [조선 재래의 관습]에 [일본 민법적 시각]이 일부 투영된 것이었다. 한편, 관습조사 사업은 근대적 기법으로 실시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전국적 관습조사였다는 점에서 법제사적 의미가 있다. 44 비록 관습조사 보고서 가 우메 겐지로를 비롯한 일본인들에 의해 조사되었고 조선 재래 의 문헌조사가 취약하기는 했지만, 조사기법 중에서 실지조사를 강조하였 으므로 대한제국 말기의 현행 관습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었다. 관습조사 보고서 는 [일본 민법적 시각과 한국 관습], [근대적 법전체제와 전근대적 관습법] 간의 긴장관계 속에서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에 기초하여 확립된 조선 관습은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일부 반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조사된 조선 관습은 한국 법전에 반영될 예정이었다. 45 원 43 物 權, 債 權, 能 力, 居 所, 住 所, 家 督 相 續, 後 見 등의 용어가 대표적이다. 44 심희기(1992), 書 評 國 譯 慣 習 調 査 報 告 書, 法 史 學 硏 究 13. 심희기도 관습 조사보고서 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평가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45 법전조사국이 기안한 법령으로는 刑 소송규칙,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 민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45

46 래 법전조사국이 추진했던 한국 법전은 민법과 상법을 하나의 법전으로 통합한 [민상통일법전]이었고, 이 법전을 기초로 형법, 호적법, 변호사법, 토지수용법 등을 제정할 예정이었다. 관습조사보고서 에서 확인된 조선 관습은 한국인들의 법률생활을 지배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통감부는 한국 법전으로 한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민형사 분쟁 을 처리할 계획이 없었다. 우메 겐지로는 한국 법전의 성격에 대해서 {당 사자 일방( 一 方 ) 또는 쌍방( 雙 方 )이 일본인 기타 외국인일 때는 일본 민법 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토지에 관해서는 한국법에 의하고 신분 법에 관해서는 본국법에 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할 것}, {당사자 쌍방이 한 국인일 때는 구관에 의존할 것}, {따라서 한국의 구관을 조사하고 간단한 민법을 제정할 것} 46 이라 하여 한국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 였다. 47 즉 한국 법전이 편찬되더라도 일본인과 외국인은 한국 법전이 아 니라 일본 민법에 의해 규율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벌어 지는 모든 민형사 분쟁을 한국 법전과 일본 민법이라는 이원체제로써 규 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우메 겐지로의 언급에 의해서 한국 법전의 제한적 성격을 알 수 있 사소송기한규칙,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시행세칙 및 민적법 등이 있다. 한편 민사소송법을 기초로 하고 1909년에 위원회를 개최하여 심의를 마쳤으나 좀 더 강구할 점이 있어서 成 案 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상법의 제정도 일본 상법의 규 정과 실제 관습과의 異 同 에 대하여 각 도에 걸쳐서 주요한 지역의 조사를 마쳤 지만 합병과 함께 기안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46 梅 謙 次 郞 (1909), 韓 國 の 法 律 制 度 に 就 て( 下 ), 東 京 經 濟 雜 誌 1514호, 796쪽 [ 鄭 鍾 休 (1989), 앞의 책, 42쪽 재인용]. 47 梅 謙 次 郞 (1910), 韓 國 の 合 邦 論 と 立 法 事 業, 國 際 法 雜 誌 8-9, 740쪽. 4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47 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추구했던 보호국화 정책에 입각한 법제정책의 핵심은 외국의 치외법권 철폐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법전 의 편찬도 이 목적에 영향을 받았다. 즉, 한국 독립을 형식상으로 유지하 면서도 치외법권을 철폐하여, 한국 내에서의 각종 법률사건에 대해서는 일본 민법과 한국 법전이 동시에 통용되도록 하였다. 즉, 한국 민법은 한 국인 사이의 분쟁에서만 규율하고, 한국인과 간의 분쟁에 서는 일본 민법을 적용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관습조사 사업으로부터 시작된 한국 법전 편찬 사업은 1910년 8월 29일에 한국 병합이 이루어면서 폐기되었다. 그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추진했던 보호국화 정책이 일본 정부에 의해서 부정되고, 일본의 대한정 책이 완전 식민지화 정책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독 립국 체제를 유지하면서 한국에서의 외국의 치외법권을 철폐한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 법전 편찬] 구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국 관 습조사 사업은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이후 식민지 법제정책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한 국 법전의 기본 원칙이었던 일본인 및 외국인의 민형사 분쟁에 관해서는 일본 민법을 적용하고, 한국인 상호 간의 분쟁에 국한하여 한국 법전을 적용한다는 것은, 한국 법전 폐기 이후에도 1910년 9월 조선민사령안( 朝 鮮 民 事 令 案 )에서 또다시 구현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진행됐던 약 4년 8개월간의 통감부를 통한 조 선 지배에서 일제는 조선사회의 구조와 관습, 정체 등에 대해서 상세히 파 악할 수 있었고 식민지화를 위한 기초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년 한국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식민정책 수립이 원활하게 진행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였다. 특히 재판제도와 민형법( 民 刑 法 ) 제정 과정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47

48 에서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국 정부와 식민법제에 대한 전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었는데,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와의 협의에서 상당한 정도로 조선 관습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갖고서 협상에 임했다. 당시 식민법제 의 제정을 담당하고 있던 인물들이 대개 4년 정도 한국의 사법행정에 참 여하거나 혹은 판검사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법제에서 조 선의 특수성이 일부 반영될 수 있었다. IV.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법 제정과 조선 관습 관습조사 사업은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정부가 한국 병합을 결 정하면서 그 성격이 전환되었다. 1909년 사법권 위탁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법부를 폐지하고 통감부재판소령을 공포하여, 한국의 재판제도는 소 멸되고 일본의 재판소가 한국에서 사법사무를 담당하는 체제로 전환되 었다. 이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와 우메 겐지로가 추진한 한국 법전의 편찬 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초기에는 법전 편찬을 위하여 관습조사 사업이 시행되었 으나, 한국 병합이 결정된 이후에도 여전히 관습조사는 필요하였다. 다만 식민지 조선의 관습조사 사업의 성격이나 규모가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 었다. 원래 조선총독부는 통감부 시기의 법 인식을 일부 계승하려 하였다. 조선총독부가 1910년 9월 무렵에 기안한 조선민사령(안)은 통감부 시기 의 법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보호국화 정책하에서의 한국 법 전 편찬은 일본인 및 외국인이 개입된 민사사건의 경우에는 일본 민법을, 쌍방이 한국인인 경우에는 구관을 적용한다는 입장이었다. 4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49 법전조사국에 의해서 조사된 관습은 관습조사보고서 에 수록됨으로 써 법원( 法 源 )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10년 8월에 한국이 병합되었으나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민사법을 일본 민법으로 이 식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관습이 법적 규범으로 활용될 가능성 이 높았다. 조선총독부는 통감부 시기의 민사법 제정의 원칙을 상당 부분 수용하려는 자세를 취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방침이 법제화된 것이 아래 의 1910년에 기안된 조선민사령안이다. 조선민사령( ) 제1조 민사에 관한 사항은 민법, 상법 및 그 부속 법률에 의한다. 제1조 부속 법률은 조선총독이 정한다. 제2조 부동산에 관한 권리에 관하여는 민법 제2편 의 규정에 의하 지 않고 종래의 예에 의한다. 제3조 조선인간( 朝 鮮 人 間 )의 민사에 관하여는 제1조의 규정에도 불구 하고 종래의 예에 의한다. 부칙( 附 則 ) 본령( 本 令 )은 일( 日 )부터 이를 시행한다. 48 위 조선민사령안은 1910년 9월 30일과 10월 1일에 공포된 조선총독 부관제 및 조선총독부재판소령과 함께 공포될 예정이었다. 조선총독부 재 판소를 새로 설치하고 재판소에서 재판에 필요한 민형사 법제를 공포하 려 했던 것이다 犯 罪 卽 決 例 民 事 爭 訟 調 停 ニ 關 スル 件 及 辯 護 士 規 則 ヲ 定 ム, 公 文 類 聚 (1-2A-011, 類 1108) ( 인터넷 홈페이지는 2003년 6 월 1일 당시의 주소임.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49

50 위 조선민사령은 통감부 시기와 유사한 방식으로 민사체제를 구축할 것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인에 대해서는 조선 관습을 적용한다는 취지와 조선인과 사이의 사법에 대해서는 일본 민법을 적 용한다는 취지는 1909년 일본칙령 제238호와 동일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 이라 할 수 있다. 제1조는 민법, 상법 및 부속 법률을 민법에 의거한다는 [일본 민법주의] 49 를 채택하고 있으나, 제3조에서 {조선인간의 민사에 관 하여 제1조 규정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예}에 의거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서 [종래의 예]는 1909년 일본 정부가 한국의 사법권을 탈취하면서 확립 한 민형사법제 원칙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조선인 상호 간의 민사사건에 관해서는 일본 민법이 아니라 조선의 관습 및 구한국법령에 기초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특히 위 조선민사령의 이유서에서는 {조선에서는 한국 병합 결과 민사 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내지의 예에 의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다 음의 사항은 예외로 한다}고 하여 1910년 9월 조선민사령안이 제1조에서 일본 민법 및 상법 의용( 依 用 ) 원칙과 더불어 조선적 특성을 식민지 법제 에 반영하려 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유서에서 예외로 들고 있는 것 은 모두 3가지 항목으로서 {1 토지에 관한 권리, 2 조선인의 친족 및 상 속, 3 조선인 사이에 있어서는 당분간 내지의 예에 의하는 것보다는 차라 리 종래 그대로 하는 것이 시의에 적절하다고 인정}하였다 [ 日 本 民 法 主 義 ]는 조선지역의 민사사건에 관해서 일본 민법을 依 用 한다는 [ 日 本 民 法 延 長 主 義 ]를 뜻하고, [ 朝 鮮 舊 慣 主 義 ]는 조선인 사이의 민사사건에 관해서 는 조선 관습을 적용한다는 [ 朝 鮮 舊 慣 溫 存 主 義 ]를 뜻한다. 50 犯 罪 卽 決 例 民 事 爭 訟 調 停 ニ 關 スル 件 及 辯 護 士 規 則 ヲ 定 ム, 公 文 類 聚 (1-2A-011, 類 1108) ( 5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51 1910년 9월의 조선민사령은 내용상으로는 우메 겐지로가 추진했던 한국 법전 구상을 일정하게 계승하는 것이다. 우메 겐지로가 구상했던 한 국 법전은 1 토지에 관해서는 한국법에 의하고, 2 신분법(친족 및 상속, 호 적)에 관해서는 본국법에 의하고, 3 한국인 상호 간의 분쟁에 대해서는 한국 법규를 적용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와 같은 민사체제는 당시 일 본 식민법제의 기본 원칙을 형성하고 있었다. 즉 1908년 8월 28일에 공포 된 대만민사령( 臺 灣 民 事 令 )에서도 동일한 원칙이 관철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민사령 제1조는 대만민사령 제1조와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고, 제2조 와 제3조도 거의 유사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년 9월의 조선 민사령안은 법제적으로 대만민사령과 동일한 내용으로서, 식민 초기 조선 총독부는 대만형 민사체제를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8년 대 만민사령과 1910년 9월의 조선민사령안은 조선인 및 대만인에게는 일본 민법 적용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관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는 점에서 서로 동일한 민사체제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 의 법적 지배에서 급격한 변동을 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 조선민사령은 1910년 9월 무렵에 조선총독부가 내각으로 제령안을 발송한 상태에서 폐안되었다. 1910년 9월의 조선민사령안은 각 의결정까지 이르지 못하고 법제국 심의과정에서 폐안되었지만, 식민 초기 조선총독부의 조선법제 방침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년 단계에서는 일본 정부가 더 이상 구관주의적 민사법 체제 년 8월 28일 律 令 제11호 臺 灣 民 事 令, 外 地 法 制 誌 4권, 149~150쪽.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51

52 를 유지할 의향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52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는 조선 관습을 식민법제에 어떻게 반영할 것 인가를 둘러싸고 갈등하였고 결국은 1912년에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가 일정하게 타협하여 새로운 만들었다. <1912년 조선민사령> 제1조 민사에 관한 사항은 본령 기타의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 우를 제외하고는 다음의 법률에 의함. (이하 생략) 53 제10조 조선인 상호 간의 법률행위에 대해서는 법령 중 공공의 질서에 관계없는 규정과 다른 관습이 있는 경우에는 그 관습에 의한다. 제11조 제1조의 법률 중 능력, 친족 및 상속에 관한 규정은 조선인에게 이를 적용하지 않는다. 제11조 조선인에 관한 전항의 사항에 대해서는 관습에 의한다. 제12조 부동산에 관한 물권의 종류 및 효력에 관해서는 제1조의 법률 에 정한 물권을 제외하고는 관습에 의한다 년의 원칙으로서 일본 본국의 민법, 상 법, 민사소송법, 형법, 형사소송법, 기타 일본의 현행법에 의하도록 하였지 만, 조선의 현상에 비추어 내지법에 의할 수 없는 것 또는 이것에 의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인정되는 것에 대해서는 적당한 예외 규정을 설치하거나 52 당시 제령은 조선총독의 상주 척식무대신 경유 내각 법제국 심의 각 의결정 내각총리대신 천황 재가 후 공포되었다. 53 일본 민법, 상법, 민법시행법, 상법시행법을 비롯하여 총 23개 법률을 나열하고 있다 년 3월 18일 制 令 제18호 朝 鮮 民 事 令. 5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53 또는 종래의 예( 例 )에 의하게 하였다. 55 원래 민사에 관해서 일본인에게 적 용하는 실체 법규는 영사재판 시대부터 일본 법에 의거해오고 있었기 때 문에 1912년의 조선민사령에서는 대체로 그 당시까지의 사실을 법적으 로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인에게 적용했던 실체 법규는 조선회사령 ( 朝 鮮 會 社 令 ), 이식제한령( 利 息 制 限 令 ), 수형조례( 手 形 條 例 ) 등이 있었을 뿐, 기타는 조선의 관습에 의한 것이 많았지만, 민법@상법@민사소송법 등 일 본 민법을 적용받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56 이와 같이 한국 병합 이후에도 조선지역 56 내에서의 각종 법률행위는 당사자에 따라서 적용하는 법규가 서로 달랐던 것을 1912년의 조선민사령에서는 일본인, 조선인 및 외국인 을 각각 구별 없이 동일한 법률로 규율하는 것을 일반적인 원칙으로 삼았 다. 57 조선의 법규를 통일하는 것에 대해서도 원래 일정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특히 조선에만 시행하기 위해 새롭게 법규를 제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또 조선을 위한 특별 법규를 설치하지 않고 내지 의 법규에 의준( 依 準 )하는 것도 역시 하나의 방법이다. 만약 내지와 조 선 사이에 비상한 사정의 차이가 있어서 절대로 내지의 법규에 의하기 어렵다면 처음부터 조선을 위해 특별 법규를 설치하지 않으면 안 되지 만 내지와 조선은 이와 같은 사정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신령( 新 令 )에 년 3월 22일 司 法 官 ニ 對 スル 訓 示, 朝 鮮 統 治 三 年 間 成 績 附 錄 總 督 諭 告 及 訓 示, 62쪽. 56 朝 鮮 施 政 方 針 及 施 設 經 營 ( ), 寺 內 正 毅 文 書. 57 朝 鮮 民 事 令 要 旨, 倉 富 勇 三 郞 文 書 ; 朝 鮮 民 事 令 ヲ 定 ム, 公 文 類 聚 第 三 十 六 編 明 治 四 十 五 年 ~ 大 正 元 年 第 十 六 卷 衛 人 獸 畜, 願 訴, 司 裁 判 所 ~ 刑 事. (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53

54 서는 민사형사도 대체로 내지의 법규에 의하고 그 법규 중에서 조선의 사정에 적합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에 한하여 특별 규정을 설치하였 다 년의 조선민사령은 1 조선과 내지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며, 2 조선의 특수한 사정이 있는 것은 특별 규정을 설치한다는 법 인식을 기초 로 제정된 것이었다. 위와 같은 원칙에 의해서 1910년 9월 조선민사령안 의 {조선인 상호 간에는 관습을 적용한다}는 방침이 부정되었고, 그 대신 에 조선과 일본과의 특수한 차이가 있는 것에 한정하여 특별 규정을 설치 하는 쪽으로 민사법이 확립되었다. 1912년의 조선민사령은 조선인 상호 간의 민사사건에 대해서도 일본 민법을 적용한다는 일본 민법주의가 관철되었다는 점에서, 1910년 9월의 조선민사령안에 비하여 관습의 적용 범위가 크게 축소되었다고 볼 수 있 다. 따라서 조선의 민사법제는 조선 독자의 특별법규 형태가 아니라 일본 의 민법을 그대로 의용하는 방식으로 결정되었고 의용 범위 내에서는 조 선과 일본의 법제는 동일한 내용을 갖게 되었다. 1910년 한국 병합 당시까지 일본의 식민지 민사법 원칙이던 구관주의 적 민사체제는 1912년에 일본 민법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조선민사령이 등장하면서 부정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본 민법과 조선 관습 간에 객 관적으로 차이가 있었던 능력, 친족, 상속, 부동산물권 등에 관해서는 일 본 민법이 아니라 조선의 구관을 적용하였고, 조선 재래 구관의 법제화는 특별법제의 작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관습법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을 58 朝 鮮 司 法 事 務 ニ 關 スル 新 制 度 ノ 梗 槪, 倉 富 勇 三 郞 文 書. 5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55 통해서 조선민사령 체제로 흡수되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조선민사령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의 조선인 법제정책이 민 법주의( 民 法 主 義 )를 근본 원칙으로 설정하고 조선 관습을 일부 영역에 국 한하여 법인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1912년의 조선민사령 체제는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서로 합의했 던 조선통치안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체제의 변화는 조선총독부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의 식민정책의 변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1912년의 조선민사령은 내용상으로는 제1조에서 일본 민법을 의용함으로써 일본 민법적 원리가 조선 법제의 기본 원칙으로서 확립되었으나, 조선민사령 제 10조~제12조 영역에서는 조선의 관습을 적용함으로써 구관주의도 일부 인정하였다. 따라서 조선민사령은 일본 민법주의적 원리와 조선 구관주의 적 원리가 서로 모순관계를 형성하면서 확립되어 있었다. 법제 형태상으 로는 일본 민법이 의용되는 범위에서는 성문법( 成 文 法 ) 체제를 확립하였 으며 또 한편으로는 조선 관습을 법인함으로써 관습법( 慣 習 法 ) 체제도 용 인( 容 認 )하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일본 민법과 조선 관습이 병존하는 이 원적 체제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59 V. 조선민사령 제11조 [관습]과 법인화 1912년의 조선민사령에서 민사에 관한 사항은 제1조 규정에 의하여 민 59 대만민사령의 경우에도 폭넓은 관습주의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민사 령과 같은 일본 민법 - 관습법 체제는 일본의 식민법제의 특징으로서 자리 잡 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55

56 등의 실체법과 민사소송법, 인사소송수속법, 비송사건수속법 등 의 절차법의 규정에 의거할 것을 밝혔다. 절차법과 관련해서 조선민사령 은 일본 법령과 다른 특별 규정을 설치하였고, 실체법에서도 조선 관습의 효력을 인정하는 예외 조항을 설치하였다. 즉, 조선인 상호 간의 법률행위 에 대해서는 법령 중 공공의 질서에 관한 규정과 다른 관습이 있는 경우 에는 관습에 의거할 수 있도록 하였고(제10조), 등에 관 해서는 조선 관습에 의거하도록 하였다(제11조). 그리고 일본 민법상의 물 권과 더불어 관습법상의 부동산물권도 동시에 인정하였다(제12조). 그러 나 조선민사령 제10조부터 제12조까지의 관습은 적용 범위와 대상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민사령 제10조는 {조선인 상호 간의 법률행위에 대해서는 법령 중 공공의 질서에 관계없는 규정과 다른 관습이 있는 경우에는 그 관습}에 의거하도록 하였는데, 우선 제10조의 관습은 조선인 상호 간의 법률행위 에 국한하여 적용되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인과 외국인의 법률행위 및 이 들과 조선인 사이의 법률행위에는 관습이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제10조 의 규정은 공공의 질서에 관계되는 법규, 60 즉 강행법규에 위배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임의법규에 관련된 행위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60 공공의 질서에 관한 법규는 당사자 의사 유무를 불문하고 준수되기 때문에 강 행법규이다. 관습법은 원칙적으로는 공공의 질서와 관련되지 않는 법규이지만, 조선의 친족 및 상속에 관한 관습법은 주로 강행법에 속한다. 공공의 질서에 관 련되지 않는 법규는 任 意 法 規 이고, 임의법규는 各 人 이 그것을 따르고 따르지 않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고 任 意 이다. 즉 법률행위에 있어서 임의법과 다른 의 사를 표시하고 그 의사에 따라서 결정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任 意 法 이라 부른 다. 近 見 繁 造 (1924), 朝 鮮 戶 籍 法 規 詳 解, 87~88쪽. 5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57 표시한 의사가 법률 규정과 똑같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법 해석을 엄격히 하면, 강행법규가 존재하는 부분에서는 관습법규는 존재 하지 않거나 혹은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 법적 효 력을 갖고 있었던 조선 관습 중에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등 의 강행법규에 속하는 규정을 조선에 적용하게 되면, 이 법규가 적용되는 부분에 관해서 조선의 관습은 법적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61 조선민사령 제10조는 일본 민법 제92조 규정 62 에 상당하는 것으로 강행법규를 보완 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법례 제2조에 의하면 공공의 질서 또는 선량한 풍속에 반( 反 )하지 않는 관습은 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인정 되는 사항 및 법령의 규정이 없는 사항에 관해서는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 상호 간의 법률행위에 관한 관습 가운데 법령 중 공공의 질서와 관련되지 않는 규정, 즉 임의규정과 다른 관습 및 선량 한 풍속에 반하지 않는 관습은 법원( 法 源 )으로 인정되었다. 63 또 조선민사령 제11조에서 능력, 친족 및 상속에 관한 규정은 일본 민 법을 조선인에게 적용하지 않고 조선 관습에 의할 것을 규정하였다. 조선 민사령에서는 제1조와 제11조를 병존시킴으로써, 제11조 영역에 관해서 조선 관습법을 민족적 속인법( 屬 人 法 )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제1조에서 규정했던 민법 기타 법률의 사항에 관한 규정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에게 적용되는 것이었고, 조선인과 일본인이 관계된 법률관계에 있어서도 61 近 見 繁 造 (1924), 위의 책, 88쪽. 62 일본 민법 제92조는 당사자가 관습에 의한다는 의사를 가지는 경우에 한하여 관습에 依 할 수 있다는 취지를 정한 것이다. 63 吉 田 平 治 郞 (1923), 朝 鮮 に 於 ける 慣 習 と 民 事 法 規 との 關 係, 司 法 協 會 雜 誌 2 권 4호, 4~5쪽.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57

58 제10조와 달리 조선 관습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선 관습법 중 에서 친족 및 상속에 관한 영역은 모두 공공의 질서에 관한 강행규정이기 때문에, 제10조와 달리 각 당사자들이 조선 관습법과 다른 법률행위를 하 면 그 행위는 무효가 된다. 위 조선민사령 제10조~제11조의 관습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제령과 동일한 효력을 부여받았고, 민사령의 주요 내용인 민법, 상법, 기타의 법령 중 관습과 상이한 임의법규의 적용을 배척하고 이러한 규정에 앞서 적용 되었다. 64 제10조는 강행법규를 보완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제11조 영역은 공공의 질서에 관한 강행법규에 속하기 때문에 조선 관습이 당사 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법적 효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민사령 제11조는 친족 및 상속에 관한 실체적 내용을 규 정했던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조선 관습을 법원으로 인정했다는 의미 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법적 효력을 갖는 관습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확 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와 같이 조선민사령에서의 특례조항은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조선 관습의 실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요구하였 다. 원래 관습이란 성문의 형식을 띠는 것이 아니라 불문( 不 文 )의 형식을 띠고 있고, 또 사회적 감정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이 대단 히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65 조선민사령 제11조는 조선인의 관해서 관습에 의한다는 것만을 명시하고 있을 뿐, 관습법이 형성되는 방 식과 확정의 주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해 법인 된 관습은 관습조사보고서 에 서술되어 있는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 왜 64 吉 田 平 治 郞 (1923), 위의 글, 4~5쪽. 65 南 雲 幸 吉 (1935), 現 行 朝 鮮 親 族 相 續 法 類 集 : 喜 頭 兵 一 의 序, 1~2쪽. 5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59 냐하면 관습조사보고서 에 서술되어 있는 조선 재래의 관습이 재판소와 조선총독부의 각종 통첩 및 회답( 回 答 ) 등 다양한 경로와 방식에 의해서 관습법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관습조사보고서 는 비록 일본인들이 일본 민법적 개념을 기초로 조 사한 것이었지만, 한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 단위로 한국인들의 각종 관습 을 실지조사@전적조사를 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현행 관습을 일정하게 반 영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습조사 사업이 일본의 식민정책의 일 환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일본 민법적 개념의 투영은 불가피했다. 일 본 민법과 조선 관습의 유착@결합은 1909년 민적법( 民 籍 法 )에서 확립된 일본식 호적제도에서 비롯되었다. 관습조사보고서 를 발행하면서 일제 는 1909년 민적법을 현행 법령으로 취급하여 조선의 친족제도와 상속제 도를 재해석함으로써, 일부 영역에 있어서는 조선 관습도 아니면서 일본 민법도 아닌 이 양자가 서로 결합된 [식민지적 관습법]을 창출하였다. 그리고 관습법인( 慣 習 法 認 )의 주체 역시 조선총독부 당국이었기 때문 에 일본 민법적 시각이 투영된 관습법의 성격을 일부 갖고 있었다. 66 대만 의 왕타이셩[ 王 泰 升 ]도 식민지 시기 대만의 관습법이 청( 淸 ) 통치시기의 관습규범과는 달랐다고 언급하고 있고, 그 이유를 총독부 법원에 의한 관습법 정립이라는 시각에서 해석하고 있는데 67 이와 같은 해석은 한국 법사학계와 매우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에 정립된 관습법은 총독부 행정당국 및 사법당국 66 이상욱(1986), 앞의 글; 鄭 鍾 休 (1989), 앞의 책;박병호(1992), 일제하의 가족 정책과 관습법 형성과정, 법학 33-2, 서울대학교;정긍식(2002), 앞의 책. 67 王 泰 升 (1999), 臺 灣 日 治 時 期 的 法 律 改 革, 聯 經.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59

60 의 법적 승인 및 규제에 기인하는 것과 더불어 사회 변동에 따른 관습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관습은 규제에 의해서만 정립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당시의 사회적 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이 다. 68 일본 민법 개념에 의한 변형이라는 구도뿐만 아니라,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전통적 관습법 체제가 근대적 법전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의 변형도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즉, 조선 재래의 모든 관습이 법적 효 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당시의 법적 신념과도 부합해야 한다. 일본 법례 제2조에는 {공공의 질서 또는 선량한 풍속에 반하지 않는 관 습}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갖도록 하였는데, 조선민 사령에서의 관습도 역시 공공의 질서 및 선량한 풍속이라는 제한을 받았 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모든 관습이 보편성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특정 지방에서 관습으로 유지되고 있던 것이 다른 지방에서는 관습으로 인정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각 지역의 조사보고서들을 취합 하여 하나의 관습조사보고서 를 발행하는 과정에서 각 지역 간의 관습 의 충돌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이 경우 조선총독부는 각 지방의 관습 68 조선사회의 변화를 수용하여 관습법 및 성문법규를 변경한 대표적 사례는 협 의이혼 및 재판상 이혼의 관습법 정립과 조선부동산등기령의 개정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논문 참조. 이승일(1999a), 日 帝 時 代 親 族 慣 習 의 변화와 朝 鮮 民 事 令 개정에 관한 연구 - 朝 鮮 民 事 令 제11조 제2차 개정안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33, 한양대학교;이승일(1999b), 식민지 조선의 次 養 子 연구, 역사와현실 34;이승일(2000), 일제 식민지시기 宗 中 財 産 과 [ 朝 鮮 不 動 産 登 記 令, 사학연구 61, 한국사학회. 6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61 과 고문헌( 古 文 獻 )을 고려하여 전국적 성격을 띠거나 혹은 문헌적 연원이 있는 관습을 채택하였다. 관습조사보고서 는 그 자체가 관습법을 선명( 宣 明 )하지는 않았으나 법원의 판결 및 총독부 통첩, 회답을 결정하는 데 1차적으로 참고사항이 되었다. 실제로 재판소 판례 및 통첩, 회답 등을 살펴보면 대부분 관습조 사보고서 를 인용하여 결정하고 있다. 그러나 관습조사보고서 에 수록된 관습은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될 법원( 法 源 )으로서의 관습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시 관습의 법적 승인 과정, 즉 법인의 절차가 필요하다. 69 조사 된 관습이 법원으로 인정되는 법인화 과정을 살펴보면 식민시기에 정립된 관습법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수 있다. 조선민사령 제11조와 관련하여 분쟁이 있을 경우에, 법적 규범력을 띨 수 있는 것은 크게 4가지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 정무총감, 법무 국장이 발( 發 )하는 통첩 및 회답에 의한 방식이다. 재판 혹은 민적( 民 籍 ) 사무에서 관습법의 내용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 정무총감 및 법무국장의 명의로 관습법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방식이다. 법무국장은 조선총독의 입법권을 대행하고 법원 등을 감독하였고, 70 정무총감은 조 선총독을 보좌하여 조선총독부 전반에 걸쳐 책임을 지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회답과 통첩은 관습에 관한 조선총독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 관습에 관해서 포괄적인 입장 표명이 필요한 것은 관통첩 ( 官 通 牒 )의 형식으로 발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민적 사무에 관해서는 각종 통첩 및 회답이 직접 효력을 발할 수 있었고, 재판장의 조회에 따른 69 정긍식(2002), 앞의 책, 234쪽. 70 정광현(1967), 韓 國 家 族 法 硏 究, 서울대학교 출판부, 24쪽.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61

62 회답이라면 재판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둘째, 각 조사국 기관장의 회답이다. 조사국 기관장의 회답이 직접적 으로 법적 성격을 부여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관습조사보고서 와 유사 하게 관습법 해석에서 1차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재판소 및 민적 담당자가 각종 조사기관장에게 조회하는 경우 재판소 판결과 민적 처리 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셋째, 조선고등법원의 판결이다. 조선고등법원은 최종심 재판소로서 법 해석의 통일, 민형사 재판의 조화, 법과 사회규범과의 조화 등에 관한 의견을 표시하는데, 고등법원의 의사표시는 사실상 하급심을 구속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고등법원의 판결은 하급심 법원이 판결해야 할 길을 제 시하기 때문에 사회의 규범, 특히 조선 역시 여기에 확인 된다고도 볼 수 있다. 71 고등법원은 조선총독부재판소 체제에서는 최종심 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판결 자체가 관습법을 선명하고 있었다. 고등법원 의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관습조사보고서 를 비 롯하여 정무총감, 사법부장관 및 조사국 기관장의 등이었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미쳤다. 넷째, 각종 심사회 심의( 審 議 ) 및 결의( 決 議 )에 의한 것이 있다. 1910년 대에는 일반적으로 조선총독부 당국이 직접 관습법을 선명하는 방식이었 다면,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각종 심사회 결의가 나타나고 있다. 구관 심사회( 舊 慣 審 査 會 ), 구관급제도조사위원회( 舊 慣 及 制 度 調 査 委 員 會 ), 72 조선 71 朝 鮮 總 督 府 法 務 局 (1936), 朝 鮮 の 司 法 制 度, 29쪽. 72 취조국@참사관실@중추원 등이 조선 관습을 조사하는 기관이었다면, 舊 慣 審 査 會 와 舊 慣 及 制 度 調 査 委 員 會 는 기존에 조사했던 조선 관습을 새롭게 審 議 하 고 결정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朝 鮮 總 督 府 中 樞 院, 慣 習 及 制 度 調 査 沿 革 起 稿 6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63 고등법원판례조사회, 사법협회, 호적협회 등의 결의도 관습법을 선명하는 기능을 하였다. 각종 심의 및 결의는 1920년대 새로 신관습법( 新 慣 習 法 )을 정립하거나 특정한 목적에 의해서 조선 관습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을 경 우에 사용되었다. 위에서 나열한 관습법인의 방식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재판소 판결에 의해서 회답 및 통첩이 영향을 받거나 혹은 회답 및 통첩에 의해 서 재판소 판결이 영향을 받는 등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관습법이 정립되고 있었다. 일부 연구에서는 정무총감, 법무국장 등의 회답 및 통첩 과 각종 결의, 재판소 판결 등의 우열을 갖고서 관습법 변경에 관한 조선 총독부의 입장을 설명하는 연구들이 있다. 73 그러나 관습법 내용의 차이 가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기관의 우열을 가지고 설명할 수는 없다. 관습 법의 내용이 서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조선총독부의 관습법 정책의 변 화 혹은 조선 관습의 자생적 변화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74 예컨대, 초기 관습조사에서는 협의이혼 및 재판상 이혼을 부정하였으나 재판소 및 사법부장관 회답에서는 인정하는 경향을 띠기 시작하였고, 이와 같은 재판소 입장을 1921년 구관급제도조사위원회에서 는 다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양호주( 養 戶 主 ) 75 파양을 둘러싸고 정 狀 況. 73 정광현(1967), 앞의 책;이상욱(1986), 앞의 글;정긍식(2002), 앞의 책. 74 정광현은 舊 慣 及 制 度 調 査 委 員 會 결의가 정무총감 및 법무국장의 회답 또는 통첩을 변경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 예로 1921년에 미혼 남자의 분가를 인 정하지 않는 결의가 있었지만 그 이전인 1916년과 1917년 사법부장관의 회 답에서는 미혼 남자의 분가를 인정했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정광현 (1967), 앞의 책, 24쪽.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63

64 무총감, 재판소가 75 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76 관제상으로 보면 정무총 감의 회답이 관습법 내용으로 채택되어야 했지만, 1910년대 정무총감과 재판소는 서로 다른 내용의 관습법을 발하였고, 결국은 조선고등법원의 판결로써 양호주 파양 금지를 관습법으로 채택하였다. 77 조선 관습에서는 친족법상의 개념으로서 호주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호주와 양자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없었던 반면에, 일본 민법에서는 호주 지위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호주와 일반 양자 사이에는 법적 차이가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은 관습법 정립은 조선 관 습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혹은 일본 민법적 개념과 조선 관습법을 어떻 게 융합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의 관습법을 선명하는 방식은 재판소의 판결, 통첩, 회답, 결의 등 다양하였지만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리고 각 방식에서의 차이 및 시대 흐름에 따른 조선총독부의 입장 전환은 각 방식의 우열에 의해서 결 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관습법 정책의 변화 및 조선 관습의 내재적 변화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또 조 선총독부의 법제정책의 변화와 더불어 관습법이 갖는 가변적 성격에서 비롯되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으로 인하여, 조선의 관습법은 조선 재래의 전통적 성격과 더불어 관제적+식민지적+근대적 성격을 동 75 養 戶 主 는 호주 지위를 획득한 양자를 의미한다. 76 이승일(1999a), 앞의 글. 77 정긍식 역(2000), 개역판 관습조사보고서 ; 1912년 12월 11일 政 務 總 監 回 答, 民 事 慣 習 回 答 彙 集, 114쪽; 1923년 1월 25일 舊 慣 及 制 度 調 査 委 員 會 決 議, 民 事 慣 習 回 答 彙 集, 附, 50쪽; 1933년 5월 19일 朝 鮮 高 等 法 院 判 決, 司 法 協 會 雜 誌 12권 6호, 82쪽. 6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65 시에 내포하게 되었던 것이다. VI. 맺음말 식민지 시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정립된 관습법은 관습이 조사되고 법인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격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식민지 관습법의 성격은 조사 단계와 법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법전조사국에 의해 조사되고 관습조사보고서 에 수록된 관습 의 성격을 구명하는 단계이다. 법전조사국은 문헌조사와 실지조사를 병 행하였으나 실지조사가 중심이었다. 실지조사는 질문 사항에 관하여 한 국인의 답변을 채록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이때 조사된 관습은 대한 제국기 한국인들의 현행 관습을 주로 반영하고 있었다. 문헌조사는 현행 관습이 명확하지 않거나 관습의 연원을 파악하기 위해서 실시된 것으로 조선의 각종 법전류와 예서( 禮 書 ) 등을 참고하였다. 따라서 관습조사보 고서 에 수록된 관습은 과거 법전에 의해 규제된 것도 일부 나타나고 있 다. 한편으로 관습조사 사업이 일본 민법 개념을 기초로 진행되었기 때문 에 조선 관습과 일본 민법은 서로 유착@결합하여 제3의 [식민지적 관습법] 을 창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 관습과 일본 민법의 유착은 1909 년에 공포된 민적법에서 일본식 호적제도를 채택하면서 강화되었다. 일본 본국과 조선의 관습조사 사업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조사 시기를 보면 일본의 경우에는 약 7개월 동안 수행 하였으나 한국은 2년 5개월간 지속되었다. 관습조사의 규모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일본은 모두 187개 군을 조사하였으나 한국은 일반조사, 특별조 사, 중복조사 지역을 모두 포함하여 86개 지역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일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65

66 본의 경우에는 대개 1개 군당 3~4일 정도 조사하였으나 한국의 경우에 는 대략 20~30일 정도였다. 피조사자의 규모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관습조사 사업 에서는 일반조사 지역 13개 도 32개 지역, 중복조사 지역 8개 도 16개 지 역으로 2,208여 명의 조선인을 상대로 2,880회의 조사를 벌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특수조사 지역은 9개 도 22개 지역, 중복조사 지역 8 개 도 16개 지역으로 모두 1,596명의 조선인을 상대로 조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조사와 특수조사를 모두 합하면 약 3,804명의 조선인을 상 대로 실지조사를 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경우에는 모두 562명 을 조사하여 1개 군당 3~4명 정도를 조사하였다. 피조사자의 사회적 계층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 본국의 피조사자 계층은 파악할 수 없으나 조선의 경우에 확인된 계층은 군수, 면장, 이장, 주사, 서기, 두민, 신사, 삼업조합원, 거간, 판사, 재무서장, 금융조합이사, 은행관계자, 농업, 보 관리인, 제임, 객주, 상, 농, 전당업, 중추원의관, 참봉, 정위, 교원, 교관, 객주 및 문학박사 등 매우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 다. 이 중에서 군수, 면장, 이장, 주사 등이 가장 많은 수를 점하고 있고 농 업, 상업 관련자도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일본 본국보다도 한국에 대한 관습조사의 규모가 컸던 이유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해가 높지 않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일본 정부는 지방관례 조사를 직접 일본인이 수행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관례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았으나 한국의 관습조사는 대한제국 정부가 수행한 것 이 아니라 법전조사국에 소속되어 있었던 일본인 조사관들에 의해서 수 행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관습조사보고서 에 수록된 관습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법인되 6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67 는 과정을 구명하는 단계이다. 조선총독부는 관습조사보고서 의 관습을 기초로 관습법을 정립한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따라서 1910년대의 관 습법은 관습조사보고서 의 관습 인식에 규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총 독부는 거치면서 관습법을 일부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그것은 1 조선 관습의 자생적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 관습은 고 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 말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조선사회의 변동에 의해서 스스로 변화하고 있었다. 1910년대 일부 조선 관습은 구 관습과 신관습으로 분화되고 있었으며, 조선총독부는 구관습을 부정하 고 신관습에 법적 효력을 부여함으로써 조선 관습의 자생적 근대화를 반 영하기도 하였다. 2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초기 관습의 법인화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조 선 관습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식민지 초기 조선 관습 이 일본 민법으로 완전히 대체되지 않은 것은 이와 같은 관습 법인화 정 책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한편 1912년 조선민사령 제정을 계기로 조선 관 습이 법인되었지만, 법인화의 주체가 조선총독부 당국이었기 때문에 일본 민법 개념과 조선 관습과의 결합은 불가피하였고, 특히 1920년대 이후 동 화주의 정책에 의해서 일본 민법적 내용도 아니고 순수한 조선 관습도 아 닌, 이 양자가 결합된 [식민지 관습법]의 창출이 심화되었다. 3 조선총독부는 법인( 法 認 )과 관습법 재해석을 통하여 식민지 관습법 을 정립하였으나 1920년대부터는 조선민사령 제11조 개정을 통하여 일본 민법을 직접 이식하기도 하였다. 1921@1922년 조선민사령 제11조 개정안 은 외형상으로는 일본 민법 이식이었으나 그 내용은 이미 1910년대 조선 관습이 스스로 변화하였거나 조선총독부의 관습법 정책에 의하여 법인@ 규제되었던 것만을 채택한 것이었다. 조선민사령 제11조 개정 방식을 통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67

68 한 일본 민법의 강제 이식은 1939년에 본격화되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식민지 시기 조선의 관습은 성 격을 띠고 있었다. 조선 재래의 관습을 그대로 법인한 경우도 있었고, 일 본 민법 개념을 도입하여 조선의 관습을 하였다. 또한 조선 관습의 자생적 변화를 반영한 경우도 있었다. 요컨대 조선 관습은 조선 재래의 성격은 물론 식민지적 성격과 근대적 성격이 결합된 매우 중 층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관습의 등장은 당시 관습이 처해 있 던 조선사회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향후 조선 관습은 조선사회의 변화 및 조선총독부의 법제정책에 따라서 변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6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69 참고문헌 慶 州 東 萊 昌 原 大 邱 調 査 書. 公 州 地 方 ニ 於 ケル 特 別 調 査 書. 慣 習 及 制 度 調 査 沿 革 草 起 稿 狀 況. 慣 習 ニ 關 スル 照 會 回 答 綴. 舊 慣 審 査 委 員 會 議 案 原 稿. 舊 慣 審 査 委 員 會 誌. 舊 慣 審 査 委 員 會 會 議 錄. 舊 慣 審 査 委 員 會 會 議 案 原 稿. 大 邱 郡 ニ 於 ケル 調 査 報 告 書. 調 査 報 告 書 (갑산지역). 調 査 報 告 書 ( 東 萊 ). 朝 鮮 舊 慣 及 制 度 沿 革 ノ 調 査. 內 部 警 務 局 (1910), 民 籍 事 務 槪 要. 法 典 調 査 局 (1909), 慣 習 調 査 問 題. 王 泰 升 (1999), 臺 灣 日 治 時 期 的 法 律 改 革, 聯 經. 이승일(2008), 조선총독부 법제정책 - 일제의 식민통치와 조선민사령, 역사비평사. 정긍식(2002), 韓 國 近 代 法 史 攷, 박영사. 朝 鮮 總 督 府 (1910), 慣 習 調 査 報 告 書 ;정긍식(2000), 改 譯 版 慣 習 調 査 報 告 書, 법제연구원. 朝 鮮 總 督 府, 朝 鮮 總 督 府 參 事 官 分 室 關 係 書 類 ( 一 ). 朝 鮮 總 督 府 中 樞 院 (1938), 民 事 慣 習 回 答 彙 集. 朝 鮮 總 督 府 中 樞 院 (1938), 朝 鮮 舊 慣 制 度 調 査 事 業 槪 要. 朝 鮮 總 督 府 中 樞 院, 慣 習 及 制 度 調 査 計 劃. 김창록(1989), 식민지 피지배기 법제의 기초, 법제연구 8. 일제의 조선 관습조사 사업 활동과 식민지 법 인식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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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J a p a n e s e C o l o n i a l R u l e a n d C o l o n i a l M o d e r n i t y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 경성신사의 운영과 한국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I. 머리말 II. 경성신사의 초기 모습 - 남산대신궁의 설립과 경성의 초혼제 III. 1910년대~1920년대 초반 경성신사의 운영과 씨자조직의 결성 IV. 1920년대 중반~1930년대 초 경성신사의 확장과 조선인의 포섭 V. 맺음말

73 I. 머리말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 중의 하나가 조선신궁( 朝 鮮 神 宮 ) 의 큰 돌계단 앞에서 강제로 참배하고 있는 조선인의 모습이다. 식 민지 조선인들은 일본의 국가신도( 國 家 神 道 ) 를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국가신도의 근간을 이루는 신사( 神 社 )에 대한 정책( 政 策 )은 근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종교적 특질을 어느 정책보다도 명확히 드러낸다. 신 사정책에 대한 연구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주제이기 때 문에,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훌륭한 연구 성과가 많이 이루어졌다. 한국 내의 연구는 주로 신사참배 강요와 종교 탄압이라는 종교사적인 측면을 다루거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신사정책의 관계를 밝히는 데 주력 하고 있다. 대표적인 연구자로 손정목, 김승태, 최석영, 김대호, 안종철 등 朝 鮮 神 宮 은 1925년 6월 27일 內 閣 告 示 제6호로 社 號 가 [ 朝 鮮 神 社 ]에서 [ 朝 鮮 神 宮 ]으로 개칭되었다. 여기서는 편의상 朝 鮮 神 宮 으로 표기한다. 國 家 神 道 란 좁게는 일본 제국주의 국가가 관리하고 國 家 法 令 에 의해 다른 神 道 와는 구별되어 行 政 의 대상이 되었던 神 社 神 道 를 말하고, 넓게는 皇 室 神 道 와 神 社 神 道 를 결합한 [ 國 敎 ]적 지위에 있었던 神 道 를 말한다. 또한 1868년 일 본의 明 治 維 新 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기까지 國 家 의 이데올로 기적 기초가 되었던 宗 敎 를 말하기도 한다. 國 家 神 道 라는 용어가 일반화된 직 접적인 계기는 일본의 패전 후 聯 合 國 軍 總 司 令 部 (GHQ)가 일본 정부에게 명 령한 神 道 指 令 (1945년 12월 15일)이었다. 거기서 { 國 家 神 道 란 日 本 政 府 의 法 令 에 의해 宗 派 神 道 혹은 敎 派 神 道 와 구별되어진 一 派 를 말한다}고 하고 있다 [ 國 學 院 大 學 日 本 文 化 硏 究 所 (1999), 神 道 辭 典, 東 京 : 弘 文 堂, 120쪽, 129~ 130쪽]. 본 논문에서는 [ 國 家 神 道 ]를 [일본의 國 敎 적 지위에 있는 神 道 ]라는 넓 은 뜻으로 사용한다.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73

74 이 있다. 최근에 김승태가 분산되어 있는 각종 종교에 대한 연구를 국가 신도와 결합하고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이고 있으나 국가신도에 대 한 연구가 미흡하여 각 개별 종교의 역사와 신사 관련 정책을 시기 순으 로 나열하는 것에 그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안종철 역시 신사참배 강요 과정에 대한 자세한 연구 성과를 발표했지만 선교사와 기독교에 대 한 정책을 분석하면서 다루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치우치며 신사정책 자 체에 대한 분석이 부족한 점이 있다. 한석희( 韓 晳 曦 )의 기념비적인 연구 성과 이후 주춤하던 일본 연구자 들의 활동이 최근 매우 활발하다. 구라타 마사히코[ 藏 田 雅 彦 ], 아오노 마 사아키[ 靑 野 正 明 ], 아오이 아키히토[ 靑 井 哲 人 ], 야마구치 고이치[ 山 口 公 一 ], 스가 고우지[ 管 浩 二 ]가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발표하였다. 특히 아오이 이들의 주요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손정목(1982), 한국개항기 도시사회경제사 연구, 일지사;손정목(1990), 日 帝 强 占 期 都 市 計 劃 硏 究, 일지사;손정목(1996), 일제강점기 都 市 社 會 相 연 구, 일지사;김승태(1987), 日 本 神 道 의 침투와 [ 神 社 問 題 ], 韓 國 史 論 16,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김승태(2000), 1930년대 일제 의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神 社 참배 강요와 폐교 전말, 한국근현대사연구 제 14집;김승태(2007),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과 神 社,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 255회 학술발표회 발표문;최석영(1997), 일제의 동화이데올로기의 창출, 서 경문화사;최석영(1999), 일제하 무속론과 식민지 권력, 서경문화사;김대호 (2004), 1910~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朝 鮮 神 宮 건립과 운영, 한국사론 50집;안종철(2008),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과 한미관계, 1931~ 1948, 서울대학교 문학박사 학위논문. 韓 晳 曦 (1988), 日 本 の 朝 鮮 支 配 と 宗 敎 政 策, 東 京 : 未 來 社 [김승태 역(1990), 일제의 종교침략사, 기독교문사]. 이들의 주요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7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75 아키히토는 신사를 도시공간적 문제로 접근하고 있으며, 야마구치 고이치 는 신사정책을 [국민통합]의 과정으로 살펴보고 있고, 스가 고우지는 신도 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매우 주목할 만하지만 모두 국가 신도문제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연구 성과를 보 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 신사나 신사참배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의 사회와 신사의 관계, 기존 종교 와의 관계는 거의 다루지 못하고 있으며, 한국인들의 대응에 대한 관심은 매우 미흡하며 한국사적인 맥락에서 국가신도 문제를 다루지 않아 상당 히 피상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이처럼 이들 연구는 크게 신사참배 강요와 같이 특정 주제에 치우치거 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전시체제기와 같이 특정 시기에 치우쳐져 있어 일 제시대 신사의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이를 관통하는 신사정책의 큰 틀을 제시하는 데는 부족한 점이 있다. 특히 단순히 신사참배 강요와 저 항으로 끝나는 기존의 신사정책에 대한 이해는 종교사, 특히 기독교사에 藏 田 雅 彦 (1991), 天 皇 制 國 家 の 朝 鮮 植 民 地 支 配 と 文 宗 敎 政 策, 朝 鮮 史 硏 究 會 論 文 集 第 29 集, 東 京 : 朝 鮮 史 硏 究 會 ; 靑 野 正 明 (1996), 朝 鮮 總 督 府 の 神 社 政 策 年 代 を 中 心 に, 朝 鮮 學 報 160집, 天 理 大 學 校 朝 鮮 學 會 ; 山 口 公 一 (1998), 戰 時 期 朝 鮮 總 督 府 の 神 社 政 策 - [ 國 民 運 動 ]を 中 心 に, 朝 鮮 史 硏 究 會 論 文 集 第 36 集, 東 京 : 朝 鮮 史 硏 究 會 ; 山 口 公 一 (2006), 植 民 地 朝 鮮 にお ける 神 社 政 策 と 朝 鮮 社 會, 一 橋 大 學 大 學 院 社 會 學 硏 究 所 박사학위 논문; 靑 井 哲 人 (1999), 朝 鮮 の 居 留 地 奉 齋 神 社 と 朝 鮮 總 督 府 の 神 社 政 策 - [ 勝 地 ]としての 神 社 境 內 の 形 成 およびその 變 容 と 持 續, 朝 鮮 學 報 172집, 朝 鮮 學 會 ; 靑 井 哲 人 (2005), 植 民 地 神 社 と 帝 國 日 本, 吉 川 弘 文 館 ; 管 浩 二 (1999), [ 朝 鮮 神 宮 御 祭 神 論 爭 ] 再 解 釋 の 試 み - 神 社 の[ 土 着 性 ]とモダニズムの 視 點 から, 宗 敎 と 社 會 5; 管 浩 二 (2004), 日 本 統 治 下 の 海 外 神 社 - 朝 鮮 神 宮, 臺 灣 神 社 と 祭 神, 弘 文 堂.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75

76 종속된 신사정책에 대한 연구로 치우치게 되어, 신사정책이 일제의 통치 정책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문 제들은 그 중요성에 비해 그동안 소홀했던, 아니 거의 전무했던 [신사] 자 체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 논문에서는 천황제( 天 皇 制 ) 이데올로기와 신사제도( 神 社 制 度 ), 특히 조선의 신사제도가 결합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한일( 韓 日 )을 막론 하고 이전의 연구에서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신사가 항상 같은 방식으 로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신사가 시기에 따라 변화함을 보여주 지 못했다. 따라서 1930년대 이후 조선에서 나타난 신사의 성격을 그 이 전 시기로 소급하고 있다. 1910~1920년대 조선 내 각 신사의 운영, 변천 과정, 사회적 의미 등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조선의 신사는 재조선 일본 인, 조선총독부, 일본 정부, 신사 관계자, 조선인 등 다양한 역학관계에서 만들어졌다. 또한 한국 내 신사는 신사 자체의 강한 종교성과 조선이라는 지역적 특성, 그를 둘러싼 다양한 역학관계로 인해 조선총독부의 종교정 책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면이 많다. 따라서 개개의 신사의 구체적인 활 동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통해서 조선 내 신사가 일본 제국주의하의 조선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밝힐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본 연구는 일제시대 재조선 일본인들이 가장 많 이 살았던 경성의 대표적인 신사, 경성신사( 京 城 神 社 )를 통해 일제의 신사 정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더구나 경성이라는 지역은 구체적 靑 井 哲 人 은 도시공간적 문제로 접근하며 京 城 神 社 에 대한 뛰어난 연구 성과를 축적했다[ 靑 井 哲 人 (2005), 앞의 책]. 그러나 그는 每 日 申 報, 京 城 日 報 등과 같은 당시 신문자료나 각 문제가 일어났던 그 당시의 사료는 거의 이용하지 않 고 1932년경에 京 城 神 社 에서 만든 京 城 神 社 御 由 緖 記 등과 같은 정리 자료 7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77 인 신사정책의 쟁점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났던 지역이다. 같은 서울 남산 에 존재했던 기존의 거류민 신사를 대표하는 경성신사와 한국의 모든 신 사의 최고 정점에 있었던 조선신궁( 朝 鮮 神 宮 )의 관계는 일제의 식민지 신 사정책의 다양한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번 연구를 통해 조선인만을 대상 으로 한 기존의 신사정책 연구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를 대상으로 하 는 신사정책으로 그 영역을 확장시킬 수가 있다. 특히 1910~1920년대 경성신사의 정착 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한국 내에 신사가 어떻게 정착되었고, 또 그 신사에 어떤 사람들이 관련되고 어 떻게 운영되었는지, 한 사회 내에서 무슨 역할을 하였는지가 드러날 것이 다. 더 나아가 신사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식민지인 에게 강요하기 위하여 만든 시설인지? 또한 그러한 시설을 통해 천황제 이 데올로기를 보급하는 것이 가능했는지? 가능했다면 어느 정도 수준까지 가능했는지? 어떤 방법과 어떤 과정을 거쳐 그것이 가능했는지? 정책 당 국자들은 그것을 실현 가능하다고 믿었는지? 구체적인 정책과 현실과의 괴리는 어떠했는지? 신사 보급의 목적은 한국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일 본인 때문이었는지? 또 신사는 일본인들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 었는지 등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여기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이를 통 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사에 대한 이미지가 과거에 실존했던 신사의 그 림자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경 성이라는 공간 안에서 일제시대 신사를 둘러싼 관계망들을 보다 풍부하 게 그려내어, 일제시대 신사가 현실 속에 발현되던 구체적인 모습들을 살 를 통해 京 城 神 社 를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 시기마다 혼란스럽고 복잡했 던 논의와 현실들의 흐름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77

78 필 수 있을 것이다. II. 경성신사의 초기 모습-남산대신궁 의 설립과 경성의 초혼제 식민지 시기 이전부터 한국에는 일본인 거류민들이 세운 소규모의 신사 가 있었다. 이들 신사는 대개 공원에서 전망이 좋은 곳에 세워졌고 그 공 원에는 벚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한국이 식민지가 되었을 때 거류민들이 만든 신사는 총 16개, 요배소는 4개 있었다. 경성신사 역시 이러한 거류 민들이 중심이 되어 자발적으로 만든 신사인 [남산대신궁( 南 山 大 神 宮 )]에 서 시작되었다. 비록 명칭은 거창하지만 처음에는 조그마한 요배소 정도 南 山 大 神 宮 또는 南 山 太 神 宮 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는 南 山 大 神 宮 으로 통일 한다. 靑 井 哲 人 (1999), 앞의 글. 이하 1910년 이전의 南 山 大 神 宮, 경성의 초혼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였 다. 필요한 경우 따로 (주)로 명기하겠다. 京 城 居 留 民 團 役 所 (1912), 京 城 發 達 史, 京 城 居 留 民 團 役 所, 446~451쪽; 京 城 府 (1936), 京 城 府 史 제2권; 橫 田 康 (1926), 朝 鮮 神 宮 紀, 國 際 情 報 社 ; 北 川 吉 昭 (1934), 山 口 太 兵 衛 翁, 山 口 太 兵 衛 翁 表 彰 會 ; 萩 森 茂 編 著 (1930), 朝 鮮 の 都 市 ( 京 城 仁 川 ) ; 淸 柳 綱 太 郞 著 ( ), 最 近 京 城 案 內, 朝 鮮 硏 究 會 ; 淸 柳 綱 太 郞 著, 朝 鮮 硏 究 會 編 ( ), 大 京 城, 朝 鮮 硏 究 會 ; 岡 田 貢 編 (1941), 京 城 の 沿 革 と 史 蹟, 京 城 府 ; 京 城 府 敎 育 會 ( ), 京 城 案 內, 京 城 府 敎 育 會 ; 岡 良 助 (1915), 京 城 繁 昌 記, 博 文 社, 88~91쪽; 白 寬 洙 ( ), 京 城 便 覽, 弘 文 社 ; 有 賀 信 一 郞 (1933), 大 京 城, 朝 鮮 每 日 新 聞 社 出 版 部, 96쪽; 川 端 源 太 郞 ( ), 京 城 と 內 地 人, 日 韓 書 房 ; 京 城 府 7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79 에 불과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1884년 한성 성내에 일본공사관이 설치되면서 1885년부 터 공식적으로 서울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로 남산 북쪽 기슭에 살았고 이 일대를 [왜성대( 倭 城 臺 )]라고 불렀다. 10 그들에게는 한국이라는 낯선 곳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일종의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시설이 필요했다.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이 신사를 만들려는 시도는 1892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인 거류민회의원( 居 留 民 會 議 員 ) 야마 구치 다베에[ 山 口 太 兵 衛 ], 모모타 구마키치[ 百 田 熊 吉 ], 다와라 도라마츠[ 田 原 虎 松 ] 등 11 이 신사를 만들고자 기부금을 모집했으나 얼마 안 되어 계획 을 미루었다. 당시 서울에 살고 있는 일본인은 715명에 지나지 않아 자금 을 모으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1896~1897년에 야마구치 다베에 등은 다시 경성과 인천의 유지들에 게서 기부금을 걷어 비로소 신사 창립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이렇 게 자금이 모이게 된 이유는 그 당시 서울에 살던 일본인이 1,734명으로 1892년 당시보다 훨씬 증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신사 건립은 바로 추진되지 못했다. 신사를 건립할 부지가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 모타 구마키치가 수정( 壽 町 ) 1정목 소재의 토지 300평을 신사 부지로 기 부했지만 땅이 낮고 축축해서 신사를 짓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敎 育 會 ( ), 京 城 案 內, 京 城 府 敎 育 會 ; 漢 陽 公 園 開 式, 大 韓 每 日 申 報 ( ). 10 손정목(1982), 앞의 책, 163~166쪽. 11 일본인 성명은 가능한 한 정확한 발음을 확인하였으나, 찾을 수 없는 경우 日 本 姓 名 よみふり 辭 典 ( 日 外 アリシエ ツ 社 ) 및 웹에서 가장 대표적인 읽기 방 식을 찾아 표기하였다.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79

80 이때 신사 부지로 떠오른 것이 바로 왜성대공원이었다. 1897년 3월 가 토[ 加 藤 增 雄 ] 일본공사가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남산 북쪽 기슭 일 대를 일본인 공원으로 만들기 위하여 조선 정부와 교섭을 하여 영구차지 ( 永 久 借 地 )의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일본인 거류민회에서 제1기 경영비 300엔을 올리고 점차 공원을 정비하여 휴식소, 분수가 있는 연못, 음악당 등을 신설하고 벚나무 600여 그루를 심었다. 이 공원을 일본인들은 왜성 대공원, 혹은 남산공원 12 이라고 불렀다. 1904년 거류민단역소( 居 留 民 團 役 所 )는 왜성대공원 대지규칙( 貸 地 規 則 )을 발포하고, 1905년에는 일본영사 관원, 일본거류민역( 日 本 居 留 民 役 ) 직원, 한성부 직원이 입회하여 남산공원 경계를 정하였다. 13 이렇게 왜성대공원은 [공공의 시설]이라는 명목하에 건립되지만, 사실 은 일본의 토지이권 획득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공원의 경우 면세혜택을 받을 수 있고, 다른 국가의 간섭도 적었기 때문 이다. 일본은 이러한 공원에 자신들만의 종교적 시설인 [신사]를 설치하곤 했다. 산이나 언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원에는 대부분 신사가 건립되 었다. 경성, 부산( 釜 山 ), 원산( 元 山 ), 인천( 仁 川 ), 군산( 群 山 ), 마산( 馬 山 ), 대구 ( 大 邱 ), 전주( 全 州 ), 광주( 光 州 ) 등 전국에서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다 흔히 南 山 公 園 을 漢 陽 公 園 과 동일시하고 있지만 남산공원이란 넓게는 남산의 모든 수림을 말하고, 좁게는 京 城 神 社 가 있는 倭 城 臺 公 園 을 의미한다. 1910년 에 한양공원이 설립되기 전까지 남산공원이란 대개 왜성대공원을 의미했다. 또 한 한양공원 설립 후에도 한양공원과 대비해서 사용할 경우는 남산공원이란 왜성대공원 쪽을 지시했다. 13 손정목(1982), 앞의 책, 163~166쪽. 14 여기에 대해서는 靑 井 哲 人 의 연구가 주목할 만하다. 靑 井 哲 人 (1999), 앞의 글. 8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81 신사 건립을 준비해온 일본 유지들은 일본영사 아키즈키 사쓰오[ 秋 月 左 都 夫 ] 및 거류민총대와 의논하여 새롭게 획득한 왜성대공원에 신사를 건립한 후 이 신사를 거류민단체에 인계하여 공설의 사전( 社 殿 )으로 운영 하기로 결정했다. 거류민회의 결의에 따라 야마구치 다베에가 1898년 5월 이세신궁( 伊 勢 神 宮 )이 있는 이세로 가서 경성에서 분신( 分 神 )을 모실 수 있 게 해달라고 청원했으나 쉽게 허가를 받지 못하다가 갖은 애청을 하여 어 렵게 신사에 모실 신령으로서 제1호 다이마[ 太 麻 ], 신경( 神 鏡 ) 및 [어의( 御 衣 )]를 수여받고, [신궤( 神 櫃 )]에 담아서 7월 상순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경 성 거류민총대는 직접 인천에 나와 이를 맞이하였고 당일 물길로 용산( 龍 山 )에 가져갔다. 용산에는 아키즈키[ 秋 月 ] 영사가 직접 나와 사전( 社 殿 )이 완성될 때까지 이것들을 일본영사관에 보관하였다. 또한 미야케 오미[ 三 宅 意 美 ]가 신직( 神 職 )을 맡아 봉안식을 행하고 수시로 참배하였다. 이세신궁 동량( 棟 梁 ) 나카가와 키요에몬[ 中 川 淸 榮 門 ]의 소개로 15 이세 신궁 내궁동량( 內 宮 棟 梁 ) 가즈야 마타에몬[ 多 彌 又 衛 門 ], 외궁동량( 外 宮 棟 梁 ) 가즈야 에이에몬[ 多 彌 榮 衛 門 ] 형제가 신사의 신전을 신축하였다. 재료 는 이세신궁 내궁을 재건할 때 쓰는 재료를 사용하고 지붕을 이는 띠[ 茅 ] 는 아사마[ 朝 熊 ]산에서 나온 것을 사용하는 등 심혈을 기울여 10월 중순 이세신궁 본전( 本 殿 )의 100분의 12 크기로 정식( 正 式 )의 사전( 社 殿 )을 건 축하였다. 사전이 모두 만들어지자 상동식( 上 棟 式 )을 거행하고, 11월 2일 靑 井 哲 人 은 仁 川 神 社 (당시는 仁 川 大 神 宮 )를 중심으로 거류민들이 세운 神 社 가 공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혀내었다. 그는 神 社 의 다수가 공원이었다 는 점에 주목하여, 이러한 공원지, 즉 경내지의 획득은 일제의 조선 강점 이전 영토적 이권 확장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15 長 野 末 喜 (1932), 京 城 の 面 影, 內 外 事 情 社, 121~122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81

82 밤 12시를 기해 영사관의 임시 봉안소에서 새로 만들어진 사전으로 옮기 는 이어식( 移 御 式 )을 마치고, 11월 3일 봉안대제( 奉 安 大 祭 )를 거행했다. 이 후 미야케 오미가 전임으로 신직으로서 종사하고, 매년 1월 1일 원시제( 元 始 祭 ), 2월 11일 기원절( 紀 元 節 ), 9월 24일 신궁대제전( 神 宮 大 祭 典 ), 11월 3 일 천장절( 天 長 節 )에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사를 [남산대신궁] 이라고 불렀다. 1902년에는 남산대신궁에 부속 신사인 텐만궁[ 天 滿 宮 ]이 창립되었다. 텐만궁은 학문의 신으로 일본인들이 널리 믿는 스가와라 미치자네[ 菅 原 道 眞 ]를 모신 신사이다 년 8월에는 일본인 거류민들의 상수원을 확 보하기 위하여 공사비 4,707원 85전을 들여 남산대신궁 아래 저수지를 만 들었다. 이 저수지는 [신천( 神 泉 )]이라고 불렸으며, 저수지의 물은 1908년 대한수도회사로부터 급수를 받게 될 때까지 일본인 거류민의 음료수로 급수되었다 년 4월 1일 거류민총대역장( 居 留 民 總 代 役 場 )을 거류민역소로, 거류 민 총대를 거류민장( 居 留 民 長 )으로 개칭하였고, 1905년 3월 8일 법령 제 41호 [거류민단법]이 실시되어 1906년 2월에 경성에 거류민단이 설치되었 지만, 남산대신궁이 거류민들의 공공시설로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는 것 에는 변함이 없었다. 1906년 8월 15일부 경성이사청( 京 城 理 事 廳 ) 고시 제 23호에서 {경성 남산 북면 일대 지역 안에 장충단( 獎 忠 壇 ), 체신성( 遞 信 省 ), 16 川 端 源 太 郞 ( ), 앞의 책, 97쪽; 京 城 神 社 地 鎭 祭, 每 日 申 報 ( ); 岩 下 傳 四 郞 (1941), 大 陸 神 社 大 觀, 大 陸 神 道 聯 盟, 322쪽; 淸 柳 綱 太 郞 著, 朝 鮮 硏 究 會 編 ( ), 앞의 책, 209~213쪽; 淸 柳 綱 太 郞 著 ( ), 앞의 책, 220~225쪽. 17 경성부(1938), 경성부상수도개요, 1~2쪽. 8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83 주차군사령부( 駐 箚 軍 司 令 部 ), 통감부의 각 소속지, 왜성대, 일본공원 및 민 유지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경성공원( 京 城 公 園 )으로 한다}고 했고, 경성 이사청에서 이를 관리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일본공원이란 남산 대신궁이 있는 왜성대공원으로 당시 경성 거류민단에서 경영하고 있었다. 이로써 일본인들은 남산 북측을 [공원]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 마음대로 관리하였다. 더구나 왜성대공원 서쪽에 이어지는 남산 기슭 일대의 땅에 도 주목하여 [한일공동공원( 韓 日 共 同 公 園 )]을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이 땅 을 무상으로 영구히 빌려 1908년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10년 5월 29 일 한양공원( 漢 陽 公 園 )을 만들어 일본 거류민단에서 경영하였다. 18 후에 이 한양공원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신사인 조선신궁이 들어서며, 남산은 신사들로 가득 채워졌다. 이처럼 남산대신궁은 일본인 거류민 유지들의 요구, 거류민회(거류민단) 와 영사관의 지원하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남산대신궁의 건립은 단순히 일본인 거류민들의 개인적인 종교적 신앙 여부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거류민 사회의 요구와 정치적 필요성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물이었다. 개 인적인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신사가 거류민회의 공공의 시설로 이용되고 여기에 영사관은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남산대신궁에 경성 주재 각 공사, 영사는 물론 한국에 온 일본인 고관은 반드시 참배하 였고,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신사의 공식적인 제사에는 항상 통감을 비롯한 고관들이 참배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고 하였다. 19 또한 일본 황실 18 손정목(1982), 앞의 책, 163~166쪽. 19 京 城 神 社 御 由 緖 記. 경성신사에 경성부에 제출한 서류로 1932년 6월 29일자 접수인이 찍혀 있다. 현재 국가기록원 소장으로 [ 國 幣 社 關 係 綴 ]에 섞여 있다(이 하 京 城 神 社 由 緖 記 로 약칭).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83

84 에서도 1907년 10월 황태자(후에 大 正 天 皇 ) 및 아리스가와노미야[ 有 栖 川 宮 ( 守 正 王 )], 1909년 7월 나시모토노미야[ 梨 本 宮 ( 威 仁 親 王 )]와 비( 妃 )가 신사 를 방문하여 폐백( 幣 帛 )을 바치는 등 규모에 비해 상당한 위상을 가진 신 사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내 신사의 총진수인 관폐대사( 官 幣 大 社 ) 조선신 궁이 1925년에야 만들어졌던 것을 고려하면 그동안 남산대신궁(경성신사) 이 일종의 관사에 가까운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남산대신궁이 거류민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일본인들의 초혼제( 招 魂 祭 )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남산대신궁이 만들어지자 그동안 서울의 일 본인 거류민들이 지내던 각종 제례의식도 남산대신궁의 행사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서울에서 죽은 일본인들의 초혼제를 지내고 있었다. 1885년에는 갑신정변으로 죽은 이소바야시[ 磯 林 ] 대위( 大 尉 ) 이하 40명 을, 다음해부터는 임오군란에서 죽은 호리모토[ 堀 本 ] 중위( 中 尉 ) 이하 14 명도 함께 제사 지냈다. 이 초혼제는 갑신정변 기념일인 12월 6일에 지내 다가 날씨가 춥고 제사 지내기 힘들어지자 1905년부터는 야스쿠니신사 [ 靖 國 神 社 ] 제전일인 5월 6일로 제사일을 변경하였다. 죽은 사람과 관계 깊 은 사람들이 주로 제사를 담당하다가 1887년 총대역장을 설치한 이후에 는 거류지( 居 留 地 ) 제전( 祭 典 )으로 정하고 역장( 役 場 ) 내에서 초혼제를 거행 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특별히 임시대제( 臨 時 大 祭 )를 집행하였 다. 1896년에는 청일전쟁에 죽은 전사자들을 합사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자는 여론이 일어 기부금 약 3천여 원을 모아, 1899년 왜성대공원 에 [갑오전승기념비( 甲 午 戰 勝 紀 念 碑 )]를 건립하여 매년 기념비 앞에서 제사 를 지냈다. 1908년부터 경성 거류민단민장( 京 城 居 留 民 團 民 長 )을 제주( 祭 主 ) 로 정하고, 1907년 한국 군대 해산으로 인한 전투에서 죽은 경찰관들도 합사하고 기념비 뒤쪽 광장을 제장( 祭 場 )으로 사용했다. 20 이러한 민단 초 8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85 혼제는 20 관민이 공동으로 운영하다가 1908년부터는 민단이 주최하여 경 비는 민단비로만 지출하기로 하고, 관민( 官 民 ) 일반이 참배하는 형식이 되 었다. 1898년 남산대신궁을 건립하여 신직을 상설한 후 남산대신궁 신직 이 제사를 주재하고, 조선에 온 각 교파신도 신직이 거기에 참열하였다. 이처럼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불안감을 느끼던 일본 거류민들은 여 러 사건으로 조선에서 죽은 일본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초혼제를 지내 기 시작했다. 이 초혼제는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 내에 살아 있는 자신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오직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군인] 만이 신이 될 수 있었던 데 반해, 21 경성의 초혼제는 [조선에서 죽은 일본인]이 위령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경성의 초혼제는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을 장악하게 되면서, 점차 야스쿠니신사의 체제 안으로 포섭되었다. 자신을 안정시키기 위한 초혼제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신들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제사가 되었다. 경성의 초혼제는 신도적인 방식으로만 집행된 것이 아니라 불교와 결 합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경성신사의 초혼제가 기본적으로 위령제( 慰 년대 중반 왜성대공원의 모습을 간단히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왜성대공 원 입구 壇 上 에는 청일전쟁 후 일본인 거류민이 건립한 甲 午 戰 勝 紀 念 碑 가 있었 다. 音 樂 堂 (1928년 朽 廢 하여 철폐)은 팔각형의 작은 집이었고, 그 주변에는 분 수대가 있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가의 小 松 은 1909년 일본 황실의 梨 本 宮 ( 守 正 王 )이 직접 심은 것이었다. 공원 좌측에는 京 城 神 社 가 있고, 神 社 앞에는 淸 泉 이 있어 용출하는 물은 작은 연못으로 흘러 들어갔다. 21 야스쿠니[ 靖 國 ] 신사를 둘러싼 일본 내 초혼제의 성격에 관해서는 大 江 志 乃 夫 著, 양현혜@이규태 譯 (2001), 야스쿠니 神 社 ( 靖 國 神 社 ), 小 花 에서 많이 참고하 였다.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85

86 靈 祭 )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불교적 장례의식, 특히 정토종( 淨 土 宗 )적인 성격을 많이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22 경성의 초혼제는 처음에 는 야스쿠니신사 아래 포함되는 제의( 祭 儀 )가 아니었지만,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면서 그 성격이 변화하였던 것이다. 일제시기 경성신사의 초혼제에 서도 여전히 불교와 결합된 제례행위 방식을 유지하지만, 일본 거류민 초 기의 정신적 불안을 위로하던 기능을 상실하고 형식적인 제의가 되어갔 다. 이처럼 경성에 살던 일본인들은 정신적인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각 종 장치가 필요했고, 초혼제라는 위령의 공간은 거류민 사회 공공 영역의 정서적 측면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초혼제라는 종 교적 공간을 흡수한 남산대신궁의 건립은 단순히 개인적인 욕망을 넘어 선 거류민 사회의 요구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남산대신궁의 설립은 당시 서울에 살던 일본인들의 종교적 욕망에서 시작되어 거류민 사회의 정신적 안정에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초 기 거류민 신사는 일제시대의 신사에 비해 종교적 성격을 강하게 지녔고 신앙의 대상이 굉장히 중요했다. 그런데 경성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므로 어느 특정 지역의 신을 모시기는 힘들었다. 23 종교적, 지역적 갈등을 최소화하며 그들의 공통분모로 여겨진 것이 이세신궁의 아마테라 스[ 天 照 大 神 ] 24 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세신궁을 중심으로 22 일본인들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神 道 에 부족한 사후세계 관념을 불교(특히 淨 土 眞 宗 )로 대체하는 것에 대해서는 阿 滿 利 麿 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阿 滿 利 麿 저, 鄭 灐 역(2000), 일본인은 왜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가, 예문서원. 23 小 笠 原 省 三 (1953), 海 外 神 社 史, 4쪽. 小 笠 原 省 三 은 거류지의 상황을 출신지 가 다른 복합사회라고 묘사했다. 24 아마테라스[ 天 照 大 神 ]는 天 照 大 御 神, 天 照 皇 大 神, 日 神 등으로도 불린다. 아마 8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87 신사 체계가 완비되고 있었다. 여기서 아마테라스란 그들이 일본에서 믿 어왔던 신들처럼 특정한 기복의 대상이었다기보다는 일본인으로서 기댈 수 있는 신앙적 존재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25 거류민 유지들이 남산대신궁을 이세신궁을 본떠 만들고 아마테라스 를 제신으로 삼는 데 뜻이 모아졌던 것은 당시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해할 수 있을 것이다. 26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러한 정신적 안정을 요구한 다는 점에서 특정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사보다는 일본인의 정체 성을 보장하는 일종의 무채색에 가까운 신사가 만들어졌다. 물론 이러한 거류민들이 만든 사적인 신사는 사실상 일본 내 공적인 신사제도의 외곽 에 존재하는 것으로, 일종의 요배소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볼 수 있 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사후세계의 관념이 정립되지 않은 신도에서 아 마테라스를 신사의 제신( 祭 神 )으로 택한 것은 개개인이 가진 종교적 욕망 을 아마테라스라는 무정형의 공간으로 포섭시키는 이데올로기적인 장치 가 가능해지는 조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 테라스는 자연신인 태양신이자 황실의 선조신이라는 이중성을 지닌 최고 권위 를 가진 신이다. 또한 일본의 신화에서 국토를 낳은 이자나기( 伊 邪 那 岐, 伊 奘 諾 ), 이자나미( 伊 邪 那 美, 伊 奘 冉 )의 자식인 아마테라스는 국토와 형제인 동시에 황실의 선조가 된다. 따라서 일본의 국토와 주권자가 모두 아마테라스에서 완 결성을 가지게 된다. 25 전통적인 일본의 신들은 매우 다양하여 각 신들마다 자신이 맡고 있는 신적 능 력이 있었다. 村 岡 典 嗣 저, 박규태 역(1998), 일본신도사, 예문사. 26 靑 井 哲 人 (2005), 앞의 책, 153쪽. 그는 1915년 이전 요배소를 제외한 25개 사 중 아마테라스를 제사 지내는 경우가 20사로 압도적으로 많다고 했다. 그는 재 조 일본인, 적어도 유력자 사이에서 아마테라스가 구심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 다고 보고 있다.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87

88 다. 즉 신사라는 것은 식민지인들에게 일본의식을 강요하기 위한 초월적 도구로서, 또 일본인 개개인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도입되었다기보다는 일 본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의미를 지녔고, 일본인 사회의 정신 적 구심점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III. 1910년대~1920년대 초반 경성신사의 운영과 씨자조직의 결성 1. 경성신사 운영 주체의 변화 1910년 한국이 강점되면서 남산대신궁에도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 했다. 일본인 거류민만의 시설이었던 남산대신궁이 경성부( 京 城 府 ), 나아 가 경기도의 신사가 된 것이었다. 1913년 남산대신궁은 경성신사로 명칭 을 변경하고 경성 시내를 도는 마츠리 27 를 시작하였다. 경성신사는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1914년 경성부에 인계되었다가 1915년 새롭게 만들어 진 씨자( 氏 子 )조직 28 에서 운영하게 되었고, 1916년 조선총독부가 경성신 사를 공식적으로 인가하였다. 따라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크게 경성 주재 일본인 유지에서 거류민회, 거류민총대역장, 거류민단으로 변한 경성 신사의 운영주체는 1914년 경성부를 거쳐 1916년 민간조직인 씨자조직으 로 변해갔다. 이렇듯 운영주체의 변화와 더불어 경성신사라는 큰 틀의 변 27 마츠리[ 祭 ]란 신이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와 이때 벌어지는 각종 축축 행사를 말한다. 28 氏 子 [우지코]란 쉽게 말하면 특정 神 社 에 소속된 신앙조직의 一 員 이다. 8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89 화가 1913년에 시작되었다. 1912년 12월 경성신사의 신직 미야케 오미가 사임하면서 황전강구소 [ 皇 典 講 究 所 ]의 추천을 받아 황전강구소 직원 학정( 學 正 ) 야무라 요리히사 [ 谷 村 賴 尙 ] 29 를 새로운 신직으로 초빙하였다. 당시 남산대신궁의 신전은 세 월이 지나면서 낡아서 개축할 필요가 있었다. 남산대신궁 개수는 1912년 도 예산에서 5천 원을 적립하였고, 총독부에 보조금을 요청하였지만 인 정되지 않아 거류민단에서 매달 약간의 돈을 적립하였다. 이 돈으로 거류 민단 민장 고죠 게도[ 古 城 菅 堂 ]는 미리 거류민회의 협찬을 받아 1913년 5 월 31일부터 배전( 拜 殿 )을 새로 만들고 경내의 확장에 착수하고, 8월 26 일 준공하였다.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겼던 신령을 본전에 다시 모시면서 성 대한 제사[ 遷 座 祭 ]를 하고 16년간 남산대신궁이라 했던 사호( 社 號 )를 경성 신사로 개칭하였다. 30 9월 25일 민단역소에서 거류민회를 개최하여 이후 로는 이세신궁의 항례제 당일, 즉 10월 17일에 영구히 항례대제( 恒 例 大 祭 ) 를 집행하기로 하고, 1913년 제1회 대제전( 大 祭 典 )을 거행하기로 했다. 특 히 정천궁제( 正 遷 宮 祭 )를 겸해 대제전을 집행하기로 하고, 협의회원으로 다카하시 아야노스케[ 高 橋 章 之 助 ], 마쓰다 미호[ 增 田 三 穗 ], 신스이 기요시 29 야무라 요리히사[ 谷 村 賴 尙 ]는 1878년에 태어났다. 國 學 院 大 學 에 입학하여 神 道 를 배우고, 早 稻 田 대학 법정과를 졸업하였다. 실업계에 잠시 머물렀고. 皇 典 講 究 所, 國 學 院 大 學 의 강사를 맡았고, 古 典 祭 式 을 연구했다. 1912년 조선총독 부의 초빙에 의해 조선에 와서 副 祭 官 으로서 明 治 天 皇 의 大 葬 遙 拜 式 을 행하 고, 12월 경성민단에서 초빙하여 京 城 神 社 신직으로 다시 왔다[ 朝 鮮 公 論 社 편 찬(1917), 紳 士 明 鑑, 조선공론사, 208쪽]. 그의 아들인 谷 村 幸 彦 도 京 城 神 社 와 관계를 가진다. 谷 村 幸 彦 은 京 城 神 社 가 國 幣 社 가 된 1937년, 京 城 神 社 에서 명예직을 맡았다( 조선총독부 직원록 ). 30 京 城 府 史 제3권, 176~179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89

90 [ 深 水 淸 ], 가네히사 레이조우[ 兼 古 禮 藏 ] 등의 의원을 천거하고, 31 민회 폐 회 후 바로 대제 준비 협의위원회를 열었다. 32 거류민회는 경성신사의 이러한 변화에 적극 동조하였다. 이미 거류민 단에서 신사를 개축할 돈을 적립하고 있었고, 게다가 1913년 당시 거류민 회에서는 여러 가지 안건이 쏟아져 나왔는데, 33 거류민회에서 그 중 채택 한 것은 단지 [(남산)대신궁 대제(10. 17)를 장중히 시행하는 건]과 [경성과 용산 부근 관유지( 官 有 地 ) 차지료( 借 地 料 )의 납기를 개정하는 건] 2건뿐이 었던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34 또한 이를 전후해서 돌도리이[ 石 鳥 居 ], 돌울타리[ 石 玉 垣 ], 석등[ 石 燈 籠 ] 등 특별한 기부가 있었다. 35 경성신사 축제는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조선인들의 눈에 일본인들 31 인물들의 성만 나와 있어, 이름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를 통해 추정함. 32 京 城 府 史 제2권, 907~908쪽, 910쪽. 한편 萩 森 茂 는 당시 京 城 神 社 가 2월에 기공해서 8월에 준공했다고 하고 있으나 오류로 보인다. 萩 森 茂 編 著 (1930), 앞 의 책, 24~29쪽. 33 당시 안건은 다음과 같았다. 1. 助 役 增 員 의 건 2. 의용소방조에 篤 志 援 助 團 을 附 置 하는 건 3. 경성학원에 보조금 연액 600원을 下 附 하는 건 4. 大 神 宮 대제(10. 17)를 장중히 시행하는 건 5. 藝 妓 중개 및 작부세를 低 減 하는 건 6. 경성과 용산 부근 관유지의 차지료 납기를 개정하는 건 7. 창기 감세의 건 8. 孝 昌 園 을 공원으로 차입하는 건 34 京 城 府 史 제2권, 907~908쪽, 910쪽. 35 京 城 神 社 由 緖 記. 9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91 의 마츠리는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지만,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서로 단합 하여 정신적인 안정을 취하게 하는 중요한 이벤트였던 것이다. 1920년대 초반 경성신사 신직이었던 가네미츠 소우지[ 金 光 慥 爾 ]는 해외신사( 海 外 神 社 )의 일은 어려웠고, 신기( 神 祇 )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어린아이가 아닌 조선인들을 새로 백지로 만드는 일부터 해야 했고,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통치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본인 중에는 자비 를 털어서 1922년 2월부터 약 2년간 氏 神 と 氏 子 라는 잡지를 3천 부씩 만들어 배포한 적도 있었지만, 진실로 신앙심을 높인 것은 미코시[ 神 輿 ] 36 를 끄는 행사였다고 했다. 37 이러한 미코시를 끄는 가을제사(마츠리)로 상 징되는 일제시대 경성신사의 모습은 1913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 시 경성신사의 마츠리는 해외 제일이라고 알려졌다. 38 경성신사의 마츠리 행렬은 1박 2일에 걸쳐 남산 경성신사에서 용산에 들렀다 오는 것이었다. 용산에 마츠리 행렬이 간 이유는 신령이 가장 먼저 상륙한 지점이 용산이 었다는 점과 당시 용산 거류민단에서는 별도로 모시는 신사가 없기 때문 이었다 미코시[ 神 輿 ]란 神 社 에 안치된 神 을 옮길 때 사용하는 교통수단을 말한다. 神 輿 의 기원은 794년 奈 良 東 大 寺 의 大 佛 을 건립했을 때, 宇 佐 八 幡 宮 의 神 體 를 태워서 운반한 것에서 기인한다. 神 輿 의 모양은 일정하지 않고 사각형이나 육 각형 등 다양하고, 구조도 복잡하고 매우 화려하다. 제사 때 神 輿 에 神 體 를 태 워서 神 社 의 氏 子 들이 사는 곳을 도는 것을 神 幸, 또는 神 輿 渡 御 라고 한다. 神 幸 할 때 일부러 神 輿 를 흔들기도 하며 神 威 를 강조한다. 37 金 光 慥 爾 (1953), 對 鮮 所 感, 小 笠 原 省 三, 海 外 神 社 史 上 卷, 東 京 : 海 外 神 社 史 編 纂 會, 533쪽. 38 京 城 神 社 由 緖 記. 39 京 城 府 史 제3권, 176~179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91

92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경성신사는 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914년 3 월 거류민단이 폐지되고 4월 부제가 시행되면서 민단 관련 업무 및 재산 이 경성부와 학교조합으로 인계되었다. 이때 민단이 맡고 있던 왜성대공 원의 사무와 경성신사의 운영은 경성부에서 맡게 되었다. 40 당시 경성신 사를 일본인 측에서 독립적인 단체를 조직하여 경영할 것인지 아니면 학 교조합에서 경영하게 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으나, 조선인을 제외 하고 일본인만으로 경성신사를 경영하는 것이 [일선동화( 日 鮮 同 化 )]의 취지 에 배치되기 때문에 공공사업의 하나로서 경성부에서 경영하기로 한 것 40 京 城 府 史 제2권, 949~951쪽. 경성부에 인계된 사항 중 공원과 神 社 에 관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인계 건물> 소재 건평(단위:평) 적요 한양공원 番 人 小 屋 朝 鮮 家 記 念 堂 대신궁 사무소 음악당 왜성대공원 能 樂 堂 창고 番 人 小 屋 京 城 神 社 附 屬 창고 왜성대공원 京 城 神 社 <기금> 구별 금액(단위: 円 ) 적요 大 神 宮 기금 은행기금 위생 기금 大 神 宮 社 殿 조영비 적립금 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93 이었다. 경성부에서는 부협의회원( 府 協 議 會 員 )의 협찬을 통해 경성신사의 경비를 일반부비( 一 般 府 費 )에서 지출하였다. 41 또한 당시 경성신사를 경성 부의 공공사업으로 만든 이유로는 1913년 10월 항례대제에 이왕가(구한 국황실)에서 폐백을 바치고 대배( 代 拜 )를 하고, 조선인 유지들 역시 참배하 였던 것도 중요했다. 이렇듯 신사는 [일선동화]의 취지에 부합되고 충군애 국의 정신을 함양하고, 경신( 敬 神 )의 미풍을 양성하는 데 가장 우량한 것 이라는 인식하에 경성신사는 형식적, 제도적으로 일본인 거류민의 신사 에서 조선인, 일본인을 포함해 경성에 사는 사람 모두의 씨신( 氏 神 ) 42 으로 <설비> 소재 수량 평수 적요 소재 수량 평수 적요 한양공원 휴식소 京 城 神 社 構 內 1 井 戶 1 기념비 1 基 목조 大 鳥 居 왜성대공원 휴식소 3개 석조 大 鳥 居 한양공원 공동변소 1 對 石 臺 陶 器 등롱 왜성대공원 공동변소 1 對 石 燈 籠 小 1 기념비 1 對 대리석 등롱 480 間 水 道 鐵 管 1 對 석등롱 大 溜 地 1개 자연석 水 洗 鉢 분수지 底 煉 瓦 叩 1 對 銅 製 春 日 등롱 소 한양, 왜성대공원 공동 벤치 1 式 天 滿 宮 石 造 祠 및 玉 垣 41 京 城 府 史 제3권, 179~181쪽. 42 氏 神 [우지가미]이란 한 氏 族 의 조상신에서 그 의미가 점차 확장되어 한 지역의 수호신, 나아가 그 신을 모시는 신사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93

94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경성신사 씨자조직의 결성과 조선인 흡수 시도 좌절 경성부에서 경성신사를 직접 운영하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조선총 독부가 신사에 대한 운영방침을 씨자조직에 의한 운영으로 결정했기 때 문이었다. 1915년 8월 16일 신사사원규칙( 神 社 寺 院 規 則, 조선총독부령 제82 호)과 포교규칙( 布 敎 規 則, 조선총독부령 제83호)이 발포되었다. 포교규칙은 종교 일반에 대한 규칙으로 교파신도( 敎 派 神 道 ), 불교( 佛 敎 ), 기독교( 基 督 敎 )만을 공인종교( 公 認 宗 敎 )로 인정하고 이외는 유사종교( 類 似 宗 敎 )로 구 분하였다. 포교규칙으로 각종 종교활동은 조선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했 고, 포교관리자는 총독이 임명하고, 자세한 신고서류를 제출하고, 포교자 명부, 신도 수와 신도의 증감을 신고해야 했다. 신사사원규칙은 한국 내의 신사를 정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사사원 규칙으로 신사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숭경자총대( 崇 敬 者 總 代 )를 3명 이상 선출하고, 신사에 신직을 두어야 했다. 그동안 자발적으로 민간에서 만들어졌던 신사는 일정한 요건을 갖춰 조선총독에게 인허를 받아야 했다. 이는 신사의 남발을 방지하여 [국가의 종사( 宗 祀 )]인 신사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씨자조직을 두어 이를 운영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이 렇게 허가받은 신사의 신직은 국가가 임명하는 관리로 대우하며, 및 기타 규정이 법으로 명시되어 있었고, 신사 관련 운영 및 각 종 의식도 법규로 정해져 있었다. 이로써 기존의 신사는 부분적으로나마 43 阿 部 辰 之 助 (1918), 大 陸 之 京 城, 京 城 調 査 會, 197쪽. 9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95 일본의 신사체제 안에 포섭되었고 신사로서 일정한 설비를 갖추고 각종 제사나 운영을 법에 따라 집행해야 했고, 조선총독부도 이러한 신사들을 일원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44 이러한 신사사원규칙의 제정과 신사의 정비는 일본 본국의 신사 정리 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일본 내무성은 청일전쟁 후 1900년 4월 사사국 ( 社 寺 局 )을 [신사국]과 [종교국]으로 분할하고, 신사국을 중심으로 1906~ 1910년대 초 일련의 신사 정리를 진행하였다. 신사에 걸맞은 내용, 체제, 봉 사체제, 유지기반을 가지지 않은 신사는 합병하는 방식으로 군소 신사를 중심으로 한 통폐합이 강제로 이루어져 전국의 신사는 약 19만에서 약 11 만으로 줄어들었다. 지방제도의 변화에 따라 하나의 행정촌에 하나의 신사 를 두고 그 행정촌은 그 신사의 숭경구역으로 정하고 그 주민이 그 신사의 숭경자, 즉 씨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신사와 지역사회의 결합을 견고히 하여 신사를 통해 국민 강화를 진전시키며 지방행정을 정비하여갔다 년의 신사사원규칙에서 드러나는 조선총독부의 신사정책 역시 이러한 일본 본국의 신사 정리 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식민지는 본국의 법령이 바로 적용되는 대상도 아니었을뿐더러 식 민지의 신사는 일본 본국의 신사와는 현실적으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 기 때문에 식민지의 상황에 맞게 신사사원규칙이 만들어졌다. 즉 일본 본 국의 신사정책이 무수히 많은 신사를 각 행정구역에 대응시키며 수를 줄 여나가고 정리해간 것에 비해, 한국에서는 신사 수도 매우 적었을뿐더러 그 시설도 매우 미비하고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인적 기반도 적고, 또 신사 44 김대호(2004), 앞의 글, 313~318쪽. 45 靑 井 哲 人 (2005), 앞의 책, 65~67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95

96 에 대한 사회적 동의도 얻기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신사에 대한 일정한 기 준을 정하고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인적 기반을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졌 다. 또한 당시 신사사원규칙은 부제( 府 制 )의 실시라고 하는 지방제도의 개 편, 특히 신사가 중점적으로 있는 행정적인 공간의 재편이 이루어졌으므 로 이에 맞춰 일본의 신사제도를 일부분 도입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신사는 일본의 신사와 비슷하지만 계층적으로 정리된 일본 본국의 사격제도 46 에는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신사( 神 祠 )라는 것이다. 1917년에는 [신사( 神 祠 )에 관한 건( 件 )] 47 을 통 46 일본의 근대 社 格 제도는 1871년 太 政 官 布 告 에 기반하여 만들어졌다. 이것에 따라 神 社 의 格 을 크게 官 社 와 諸 社 로 나눴다. 官 社 는 官 幣 의 大 中 小 社, 國 幣 의 大 中 小 社 가 있었다. 官 幣 社 는 神 祇 官 이, 國 幣 社 는 地 方 官 이 제사를 지냈다. 諸 社 는 府 社, 藩 社, 縣 社, 鄕 社, 村 社 가 있었으며, 이에 속하지 않는 것을 無 格 社 라고 했다. 같은 해 藩 이 소멸하면서 藩 社 도 자연히 없어졌다. 1872년 官 幣 社, 國 幣 社 로 분류할 수 없는 神 社 로서 別 格 官 幣 社 가 만들어졌다. 官 社 의 서열 은 官 幣 大 社, 國 幣 大 社, 官 幣 中 社, 國 幣 中 社, 官 幣 小 社, 國 幣 小 社, 別 格 官 幣 社 순이었다. 官 幣 社, 國 幣 社 라고 하여도 모두 官 社 로 실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 었고, 官 幣 社 는 일본 皇 室 ( 宮 內 省 )에서 幣 帛 料 (공물)를 지출하는 神 社 로 보통 天 皇 및 그 친족, 공신이 모셔지고, 國 幣 社 는 國 庫 로부터 幣 帛 料 를 지출하는 神 社 로 보통 지방의 유력한 신을 모시는 점이 달랐다. 또한 伊 勢 神 宮 은 특별히 神 宮 이라고 불러 이상의 분류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계속해서 많은 神 社 가 새롭 게 사격을 가지게 되고( 列 格 되고), 昇 格 되기도 하였다. 1945년 이 제도는 폐지 되었는데, 당시 220여 개의 神 社 가 官 社 에 열격되어 있었다. 國 學 院 大 學 日 本 文 化 硏 究 所 (1999), 앞의 책, 121~128쪽; 阿 部 正 路 著, 裵 正 雄 譯 註 (2000), 神 社 文 化 를 모르고 日 本 文 化 를 말할 수 있는가?, 도서출판 계명, 136~142쪽. 47 神 祠 에 관한 件 은 1917년 3월 조선총독부령 제21호로 공포되었다. 神 社 의 격식에 맞지 않는 것을 [ 神 祠 ]라고 하여 따로 허가한 것이다. [ 神 祠 ]라는 말은 조 선에만 있는 것으로, 이와 비슷한 것으로 臺 灣 에 [ 祠 ]가 있다. 神 社 의 [존엄]을 9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97 해서 신사는 아니지만 공중의 참배를 유도하기 위하여 신기( 神 祇 )를 모시 는 곳, 즉 설비나 운영에 부족한 점이 있는 신사를 [신사( 神 祠 )]라고 하여 신사( 神 社 )의 형식적 요건을 대폭 완화한 새로운 형식의 신사를 만들어, 간소하게 신사를 건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신사( 神 祠 )에 관한 규칙 을 정하는 건(1917년 3월 內 秘 제71호)에서 정무총감은 각 도장관에게 신사 ( 神 祠 )란 장래 신사( 神 社 )를 만들기 위한 과도적인 시설 48 로 신사( 神 祠 )의 남설을 피하고 신사( 神 祠 )의 명칭은 모시는 신의 명칭을 붙인 보통명사를 선택하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아마테라스[ 天 照 皇 大 神 ]를 모시면 신메이신 사[ 神 明 神 祠 ], 혼다와케[ 譽 田 別 命 ]를 모시면 하치만신사[ 八 幡 神 祠 ]라고 하 는 식으로 정하도록 하고 그 신사( 神 祠 )가 소재한 군, 면 등의 명칭을 붙이 지 않도록 주의시키고 있다. 49 이는 신사( 神 祠 )는 신사( 神 社 )와 달리 지방행정구역과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1936년 8월 새롭게 바뀐 신사( 神 社 )규칙에서 주의할 것을 알리기 위하여 내무국장이 각 도지사에게 내린 통첩에서 [신 해치지 않으면서 간소히 神 社 와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일례로 神 社 의 경우 崇 敬 者 總 代 3명 이상 필요한 데 반해, 神 祠 는 단지 1명만 있으면 가능했다. 이러한 神 祠 도 1936년 8월 이후에는 總 代 3명을 두고 總 代 會 를 설치 해야 했지만, 이는 조선총독부가 國 幣 社 를 만드는 등 본격적으로 神 社 제도를 운영한 이후의 일이다 년 10월 내무국장 통첩. 神 社 의 시설 개설에 관한 건 에서도 神 祠 는 神 社 로 승격할 것을 전제로 설치된 것이므로 점차 神 社 로 승격하도록 독려하기 바 란다고 밝히고 있다. 49 神 祠 에 관한 규칙을 정하는 건[1917년 3월 內 秘 제71호. 각 도장관에 대한 정 무총감통첩, 朝 鮮 神 職 會 (1937), 朝 鮮 神 社 法 令 輯 覽, 帝 國 地 方 行 政 學 會 朝 鮮 本 部, 282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97

98 사( 神 社 )에 관한 법령의 시행에 관한 건] 50 을 보면 새롭게 바뀐 조항 중에 [숭경구역은 부읍면의 구역과 일치하도록 하는 방침]도 특별히 사정을 살 펴 둘 이상의 부읍면에 걸치거나 부읍면의 일부로 정하는 것도 논의할 수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기존의 행정구역이 식민지의 기존 현실을 무 시하고 행정편의적으로 구획된 것에 대한 조치이기도 하지만, 결국 이전 까지 한국에서의 신사 인허의 기본 방침은 행정구역과 일치하는 것이었 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렇게 신사사원규칙으로 인허를 받은 신사 역시 시설도 미비하고 전임 신직도 없는 경우가 상당수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51 더구나 신사의 숭경구역과 행정구역이 일치해야 한다는 내규 때문인지 그 지역에 공인 신사가 존재 하는 경우 자체적으로 신사를 만들고도 공인 신사( 神 社 )나 신사( 神 祠 )로 허가받지 않고 계속 운영하는 경우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52 경성신사는 이러한 한국 내의 신사정책의 가장 기준이 되는 대표적인 신사였다. 아니 도리어 한국 내의 신사정책은 경성신사를 모델로 삼아 만 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총독부가 씨자조직을 중심으로 한 신사정책을 운영하고자 한 것은 일본 내의 신사정책의 영향을 받아 한국 에 새로운 신사제도를 이식시키려는 계획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한국 내 신사에서 진행되고 있던 씨자조직 결성의 움직임을 흡수하려는 정책의 50 內 秘 제89호( ) 각 도지사에게 내무국장 통첩[ 朝 鮮 神 職 會 (1937), 앞의 책, 39~53쪽] 년 10월 내무국장 통첩. 神 社 의 시설 개설에 관한 건. 52 서울 용산에 있던 加 藤 神 社 나 노량진에 있던 漢 江 神 社 의 경우 상당한 규모와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神 社 로 공인받지 못하고 존재하다 1934년에야 神 祠 로 창립한다. 뒤에서 기타 서울의 神 社 를 다룰 때 기술하겠다. 9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99 일환이기도 했다. 특히 씨자조직을 통해서 일본인만의 신앙 대상인 신사 에 조선인들을 흡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1914년 거류민단이 폐지되며 부제가 시행되자 경성부에 인계되었던 경성신사는 1915년 씨자 단체가 만들어지자 그해 7월 씨자 단체에 인계 되었다. 경성신사가 경성부로 인계된 것이 일본 내의 신사 정리를 모방하 여 1차적으로 속지적( 屬 地 的 )으로 경성부 일원의 신사로 만든 것이라면, 씨자 단체로의 인계는 행정구역 내의 사람을 모두 숭경자 조직, 즉 씨자조 직으로 전환하여 신사와 행정구역과 지역민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이로써 경성신사는 일본인들의 신사에서 형식적, 제도적으로 조선인을 포함한 경성의 진수( 鎭 守 ) 53 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신사사원규칙이 발포(1915년 8월 16일)되기 두 달 전인, 1915년 6월 8 일 경성부협의회원( 京 城 府 協 議 會 員 ), 학교조합회의원( 學 校 組 合 會 議 員 ), 경성 의 유지들은 경성신사 씨자조직의 발기인이 되어 조약을 정하고, 씨자총 대( 氏 子 總 代 ) 및 정내씨자총대( 町 內 氏 子 總 代 )를 지명 결정했다. 매일신보 ( 每 日 申 報 ) 6월 24일자 기사에 따르면 6월 24일 오후 1시에 일본인 정내 씨자총대 80명이, 25일 오후 1시에는 조선인 측 60명이 회합을 따로 가져 20여 명의 씨자총대를 임명하고 이사장( 理 事 長 )은 일본인 1명, 이사는 일 본인 4명, 조선인 2명을 선출하기로 했는데 약간의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4 매일신보 6월 25일자 기사에서는 6월 24일에 경성신사 씨자 총대로 일본인 씨자총대 12명, 조선인 씨자총대 8명을 가나야[ 金 谷 ] 부윤 53 진수( 鎭 守 )란 한 지역을 수호하는 신을 모시는 신사를 의미한다. 54 氏 子 總 代 協 議, 每 日 申 報 ( ); 氏 子 理 事 互 選, 每 日 申 報 ( ).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99

100 이 지명하여 결정하고 그날 오후 1시부터 학교조합 회의장에서 총대회를 열고 이사장 1명, 이사 5명을 뽑았다고 한다. 당시 지명된 조선인 씨자총 대는 백인기( 白 寅 基 ), 박제빈( 朴 齊 斌 ), 한상룡( 韓 相 龍 ), 조진태( 趙 鎭 泰 ), 안상 호( 安 商 浩 ), 예종석( 芮 宗 錫 ), 김용제( 金 鎔 濟 ), 김한규( 金 漢 奎 ) 등 8인, 일본인 씨자총대는 와다 츠네이치[ 和 田 常 市 ], 55 와타나베 고로( 渡 邊 五 郞 ), 다나카 한시로[ 田 中 半 四 郞 ], 나카무라 사이조[ 中 村 再 造 ], 구기모토 도지로[ 釘 本 藤 次 郞 ], 야마구치 다베에[ 山 口 太 兵 衛 ], 덴니치 츠네지로[ 天 日 常 次 郞 ], 오오와 다 요지로[ 大 和 與 次 郞 ], 모리 가쓰지[ 森 勝 次 ], 세키 시게타로( 關 繁 太 郞 ), 마 쓰다 미호, 고죠 게도 등 12인이었으며 56 당시 이사장은 나카무라 사이조 였다. 57 이상으로 보아 6월 25일에 조선인 측에서 따로 회합을 가지지 않 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조선인들만으로 씨자관련 회합을 거행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내씨자총대, 특히 조선 인 정내씨자총대의 경우 경성부협의회원, 학교조합회의원, 경성의 유지 등 으로 구성된 경성신사 씨자조직 발기인이 일방적으로 지명한 것으로 보이 며, 조선인 정내씨자총대 회합은 사실상 무산되거나 혹은 무산될 위기에 있었다고 판단하여 일본인 정내씨자총대 회합을 전체 정내씨자총대 회합 으로 변경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씨자총대를 가나야 부윤이 지명하였다는 점에서도 씨자총대란 사실상 경성부협의회원, 학교조합회 55 원 자료에는 和 田 常 吉 이라고 적혀 있으나 다른 인물들과의 수준이나 경성부에 서 차지한 위치 등을 고려할 때 商 業 會 議 所 議 員, 商 業 會 議 所 會 頭, 居 留 民 會 總 代 등을 역임한 和 田 常 市 의 오타로 보인다. 56 京 城 神 社 氏 子 總 代, 每 日 申 報 ( ). 57 京 城 日 報 ( ), 京 城 神 社 氏 子 總 代 會 에서 전직 위원장 中 村 再 造 라는 표현이 나온다. 10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01 의원, 경성의 유지 등으로 구성된 경성신사 발기인과 중첩될 가능성이 높 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구성된 경성신사 씨자총대들은 7월 1일 경성신사의 신 앞에서 봉고제( 奉 告 祭 )를 거행하였다. 58 이로써 한국 내에서 최초로 경성에 씨자 조직이 결성된 것이었다. 이러한 씨자조직의 결성은 {충군애국의 정신을 함양하고, 경신의 미풍을 양성하는 데 좋은 것으로 신사와 씨자의 접촉 을 밀접히 하는 당초의 취지를 관철하는 것}이기도 했다. 59 여기에는 일본인만의 신앙 대상이었던 경성신사를 씨자조직을 통해 경성의 구석구석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도 내재해 있었다. 즉 하 나의 공인된 신사를 통해서 지역의 신사를 정비하고 이를 조선인에게까 지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씨자 단체는 원칙적으로는 신사가 있는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가입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겉으로는 경성부에서 민간조직인 씨자조직으로 운영권을 넘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국 의 지방행정과 신사의 정비 과정에 민간 영역을 흡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사에 대해 일정 공감대 속에 균질화된 일본 본국과 달리 식 민지의 [민]들은 비균질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불일치하고 대립하기도 한 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신사에 관해서 [민]이라는 것은 사실 일관된 대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씨자조직에 조선인을 포섭하고 흡수하는 것은 경성신사가 진정한 경성부의 씨신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 수 요건이었으므로, 조선인들을 씨자조직에 흡수하는 데 많은 주의를 기 58 氏 子 總 代 協 議, 每 日 申 報 ( ); 氏 子 理 事 互 選, 每 日 申 報 ( ). 59 阿 部 辰 之 助 (1918), 앞의 책, 197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01

102 울이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당시 조선인 씨자총대는 사실상 명예 직에 가까운 것이었다. 씨자단체가 설립되자 1915년 8월 경성부에서는 경성신사의 재산을 씨 자조직에 인계하였고, 제전과 기타 소요 경비는 1915년 7월부터 씨자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단 조선인 측은 당분간 될 수 있는 한 근소한 부담만 을 맡게 하였다. 즉 조선인이 씨자여도 매호( 每 戶 )로부터 강제로 징수하 는 것은 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계 획과는 달리 조선인들에게서 상당 부분의 돈을 강제로 징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사 유지경비는 먼저 씨자총대가 경성부 내 유지로부터 기부금 을 받고, 그것을 공제한 나머지를 각 정동( 町 洞 ) 빈부의 정도에 따라 할당 하여 정내씨자총대가 해당 정동 내 유지와 합의하여 씨자로부터 갹출하 기로 하였다. 경성부에서는 씨자조직에 의한 신사 경영은 조선에서 처음 이고 거기다 재정의 기초가 갑자기 확립될 수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씨자 단체에 보조금 500원을 지급하였다. 단 {예산 결산을 총대회에 제출하기 20일 전에 부( 府 )의 승인을 얻을 것, 예산의 성립, 결산의 인정을 완료했을 때는 바로 부에 보고할 것, 보조금의 20분의 1은 기본금에 넣을 것} 등의 조건으로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60 더불어 그 이전까지 함께 운영하던 경 내지와 공원은 이제 재산과 운영 면에서 완전히 분리하도록 했다. 공원은 공적 시설이자 유원지로 경성부에서 운영하고, 신사는 국가의 종사이자 의례적 시설로서 씨자조직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공간적 으로 이 둘은 서로 구별이 되지 않고 혼동되는 경우가 많았다 京 城 府 史 제3권, 179~181쪽; 氏 子 總 代 協 議, 每 日 申 報 ( ); 氏 子 理 事 互 選, 每 日 申 報 ( ). 10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03 경성신사 61 역시 신사사원규칙에 따라 경성신사의 창립자를 경성신사 신직 야무라 요리히사로 하고 그 외 69명을 숭경자 대표로 하여 신사 창 립( 創 立 )을 청원하였고, 1916년 5월 22일 인가를 받았다. 이때 허가받은 경성신사규정( 京 城 神 社 規 定 )과 경성신사씨자규약( 京 城 神 社 氏 子 規 約 )의 주 요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이 규칙은 1916년 7월 10일부터 시행되었다 경성신사는 씨자에 의해 유지되고, 씨자 구역은 경성부 내 일원으로 하고 그것을 4구( 區 )로 나눈다. 2. 예제( 例 祭 )는 매년 10월 17일, 18일로 한다. 3. 경성신사에 대총대 20명(각 구 5명, 그 중 1명은 조선인), 각 정( 町 ) 에 씨자총대 1명과 평의원 약간을 두고 임기는 3년으로 한다. 4. 대총대는 씨자총대에서 선거하고, 씨자총대는 각 정 씨자에서 선거 하고, 평의원은 씨자총대가 추천한다. 5. 대총대, 씨자총대, 평의원은 명예직이며, 단 실비는 지급한다. 6. 대총대 중에서 당번간사( 當 番 幹 事 ) 5인을 두고, 그 안에서 1명을 간 사장( 幹 事 長 )으로 한다. 간사장은 매년 항례대제를 맡은 구역 내의 대총대가 맡는다. 8. 씨자총대는 직접 씨자에 관계된 사항 및 항례대제 집행에 관한 사 무를 담당하고, 예산에서 정해진 분담 갹출금( 醵 出 金 )을 걷어 지정 된 기일 안에 납부한다. 9. 경성신사의 유지에 관한 경비는 기본재산에서 생기는 수입, 공진금, 기부금, 기타 일체의 사입금 및 씨자 갹출금으로 충당한다 년 10월 내무국장 통첩. 神 社 의 시설 개설에 관한 건 에서 神 社 경내와 공원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고, 그 구별을 분명히 하여 경내가 遊 園 化 되지 않도 록 할 것을 주의 주고 있다. 62 京 城 府 史 제3권, 181~186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03

104 10. 경성신사의 제사 및 제일을 정한다. 11. 경성신사의 신직으로 사사( 社 司 ) 1인과 사장( 社 掌 ) 약간 명을 둔 다. 12. 이 규약을 시행할 때의 씨자총대 및 정내씨자총대는 부윤( 府 尹 )이 지명한다. 이 규약은 1915년에 씨자단체를 조직할 때 만든 규정을 좀 더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것은 3번 항목이다. 이 항목은 조선인 을 씨자에 반드시 포함시키되 그것도 씨자조직의 최상층인 대총대로 임 명하는 것으로 조선인을 씨자조직에 포섭하려는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11번 항목은 1916년 7월 10일에 이 규약을 실행할 때 씨자총대를 경성부 윤이 지명한다는 것으로, 1915년에 이미 만들어진 씨자조직을 경성부윤 이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렇게 경성신사가 새로 인가를 받은 후인 1916년 9월 각 정마다 1명 씩 씨자총대를 선거한 결과, 일본인 총대 67명, 조선인 측 총대 38인, 총 105명 63 의 씨자총대를 새로 선출하였다. 이들 씨자총대는 9월 15일 상업 회의소에 모여 씨자총대회의를 개최했다. 기존 이사장 나카무라 사이조 가 좌장이 된 씨자총대회의에서 씨자대총대를 선출했는데, 경성을 3구로 나누고, 용산을 하나의 구로 하여 각 구마다 5명씩, 총 20명의 씨자대총 대를 선출했다. 각 구마다 1명씩 조선인을 대총대로 뽑았다. 제1구 씨자대 총대는 쓰카자키 요시타로[ 塚 崎 由 太 郞 ], 고다케 다케지[ 小 竹 武 次 ], 다무라 요시지로[ 田 村 義 次 郞 ], 야마자키 시카조우[ 山 崎 鹿 藏 ], 김용제, 제2구는 슈 키치 토미타로[ 秋 吉 富 太 郞 ], 야마구치 다베에, 구기모토 도지로, 죠 로쿠타 63 每 日 申 報 ( ), 氏 子 總 代 소집 에서는 107명이라고 한다. 10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05 [ 城 六 太 ], 김한규, 제3구는 덴니치 츠네지로, 아라이 도라타로[ 新 井 虎 太 郞 ], 가와무라 센지로[ 河 村 千 治 郞 ], 오가키 다케오[ 大 垣 丈 夫 ], 예종석, 제4구 용 산지역은 9월 18일 씨자대총대를 선출했으나 선출된 인물을 확인할 수 없다. 새로 만들어진 신사 규정에 따라 올해 당번은 제3구로 하고 덴니치 츠네지로, 아라이 도라타로, 가와무라 센지로, 오가키 다케오, 예종석이 간사에 당선되었고 이를 승낙하였다. 64 이상 경성 3구 중 조선인 씨자대총대는 제1구 김용제, 제2구 김한규, 제3구는 예종석으로 모두 1915년에 씨자총대로 임명되었던 인물들이었 으며, 일본인 씨자대총대 구기모토 도지로, 야마구치 다베에, 덴니치 츠네 지로도 1915년에 씨자총대였던 인물들임을 볼 때 1916년의 씨자조직이 이전의 씨자조직을 상당수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성신사 씨자조직은 1916년 9월 28일에 만들어지 는 경성의 정동총대( 町 洞 總 代 ) 조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경성부에서 는 경성신사 씨자제도 등을 참고로 경성부 내 187개의 정동을 133구로 나누어 정동총대 설치구역을 정했다. 65 이는 경성신사의 씨자조직이 전 ( 全 ) 경성을 포괄하는 것이었고, 이 조직을 실제로 운영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씨자총대와 정동총대가 상당수 동일해서 구역만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운영 인원도 상당 부분 흡수한 것이었다. 66 아오이 아키히토 64 京 城 神 社 氏 子 總 代 會, 京 城 日 報 ( ); 氏 子 總 代 소집, 每 日 申 報 ( ); 氏 子 총대 총회, 每 日 申 報 ( ). 원문에는 河 村 千 次 郞 이라고 되어 있으나 河 村 千 治 郞 의 오자이다. 65 京 城 府 史, 327~329쪽. 66 京 城 神 社 의 氏 子 總 代 와 町 洞 總 代 의 대략적인 관계에 관해서는 서현주와 靑 井 哲 人 의 연구를 참조하였다. 서현주(2001), 京 城 府 의 町 總 代 와 町 會, 서울학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05

106 는 1918년 大 陸 之 京 城 의 자료에 따라 정내씨자총대와 정동총대의 관계 를 분석했는데 둘 사이에는 동일 인물이 많았다고 하였다. 단, 일본인 총 대가 많은 정( 町 ) 지역에서는 56퍼센트, 조선인들이 많은 동( 洞 ) 지역에서 는 20퍼센트로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하며 신사 운영이 활발한 곳일수록 정동총대와 정내씨자총대가 일치할 가능성이 높고 신사활동과 일반생활 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67 씨자총대의 주요 임무 중의 하나가 씨자로부터 신사 운영에 대한 갹출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는 것 을 생각하면 조선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서의 씨자총대는 사실상 명 예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씨자총대의 임기는 규정상 3년이지만 중간에 바뀌는 경우도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 10월 2일에 발간된 大 陸 之 京 城 에는 당시의 경성신사 씨자 구역과 씨자총대가 자세히 나와 있다. 68 여기 에 당시의 신문자료를 좀 더 추가하여 1918년의 씨자총대 조직을 살펴보 고자 한다. 앞 기록과 마찬가지로 서울은 4개 구로 나뉘어 있었다. 제1구 는 서울 동쪽( 倭 城 臺 町, 壽 町, 本 町 3 丁 目, 永 樂 町 2 丁 目, 鍾 路 3 丁 目, 樂 園 洞, 嘉 會 洞 以 東 )이며, 제2구는 서울 중부 일대로 동( 東 )으로는 제1구와 경계하 고 서( 西 )쪽으로는 욱정( 旭 町 ) 1정목, 남대문통( 南 大 門 通 ) 1, 2정목, 견지( 堅 志 ), 공평( 公 平 ), 안국동( 安 國 洞 )에 접하는 지역이었다. 제3구는 서울 서부 일대로 동으로는 제2구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고, 제4구는 신구 용산 일대 연구 제16호, 서울시립대학교부설 서울학연구소; 靑 井 哲 人 (1999), 앞의 글. 67 靑 井 哲 人 (1999), 앞의 글, 102~103쪽. 68 阿 部 辰 之 助 (1918), 앞의 책, 205~209쪽; 靑 井 哲 人 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氏 子 조직과 정동총대의 관계에 주목하여 의미 있는 분석을 시도하였다. 단 논문에 서 구체적인 인물에 대해 다루지 않았다. 靑 井 哲 人 (1999), 앞의 글, 98~105쪽. 10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07 및 마포였다. 씨자조직은 상담역( 相 談 役 )과 대총대, 씨자총대로 이루어졌으며, 경성 신사 규정에 따르면 씨자총대 중에서 씨자대총대를 뽑아야 하지만 실제 구성인원을 살펴보면 대총대가 씨자총대가 아닌 경우도 존재하였다. 상 담역은 와다 츠네이치, 한상룡, 나카무라 사이조(씨자총대), 고죠 게도, 조 중응( 趙 重 應 ), 싯코 이타로[ 執 行 猪 太 郞 ], 모리 가쓰지(1915년 씨자총대), 세 키 시게타로(1915년 씨자총대)였다. 제1구의 대총대는 이강혁( 李 康 爀 ), 다무 라 요시지로(씨자총대), 쓰카자키 요시타로, 야마자키 시카조우(씨자총대), 미네오 오토사부로[ 峯 尾 音 三 郞 ] 69 였다. 씨자총대는 33명으로 이중 조선인 은 김재욱( 金 在 旭, 光 熙 町 2), 최성식( 崔 聖 植, 觀 水 洞 ), 박승기( 朴 承 虁, 禮 智 鍾 路 4), 70 김성기( 金 聖 璂, 樂 園 洞 ), 이원영( 李 源 永, 翼 善 雲 泥 臥 龍 洞 ), 오 동찬( 吳 東 贊, 苑 桂 洞 ), 반준식( 潘 峻 植, 蓮 池 洞 ), 김기환( 金 基 煥, 崇 一 崇 二 洞 ), 홍명수( 洪 命 脩, 崇 三 崇 四 洞 ), 임공진( 林 公 鎭, 蓮 建 洞 ), 이윤혁( 李 爀, 孝 悌 忠 信 洞 ), 71 권계덕( 權 啓 德, 鍾 路 通 6), 홍순창( 洪 淳 昌, 昌 信 洞 ), 이인 기( 李 仁 基, 崇 仁 洞 ) 14명 72 이었다. 제2구의 대총대는 구기모토 도지로, 야 마구치 다베에(1916년 씨자총대), 슈키치 토미타로(씨자총대), 김한규, 죠 로 쿠타였다. 씨자총대는 총 12명으로 이중 조선인은 이석모( 李 碩 謀, 長 橋 69 大 陸 之 京 城 에는 빠져 있음.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大 祭 幹 事 人 決 定 기사 참조. 70 大 陸 之 京 城 에는 朴 承 變 라고 적혀 있으나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大 祭 幹 事 人 決 定 기사와 氏 子 총대의 명망 등을 고려하여 수정하였다. 71 大 陸 之 京 城 에는 이라고 인쇄되어 있는데 潤 의 오자로 보임. 72 京 城 神 社 大 祭 幹 事 人 決 定, 每 日 申 報 ( )에 따르면 史 一 煥 도 제1구 의 氏 子 총대로 나와 있으나 大 陸 之 京 城 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07

108 水 下 洞 ) 1명이었다. 제3구의 대총대는 이병숙( 李 秉 淑 ), 오가키 다케오(씨자 총대, 학교조합회의원), 가와무라 센지로(씨자총대, 학교조합회의원), 덴니치 츠 네지로, 아라이 도라타로이었다. 씨자총대는 33명으로 조선인은 유병필( 劉 秉 珌, 淸 進 洞 ), 김정국( 金 鼎 國, 光 化 門 通 ), 임필원( 林 弼 遠, 通 玉 仁 洞 ), 정군서 ( 鄭 君 瑞, 新 橋 淸 雲 洞 ), 한석진( 韓 錫 振, 西 大 門 通 1, 2), 권봉주( 權 鳳 珠, 唐 珠 內 資 洞 ), 김문호( 金 文 鎬, 需 昌 洞 ), 정창환( 鄭 暢 煥, 弼 雲 洞 ), 이종모( 李 鍾 模, 哈 洞 ), 노두승( 盧 斗 承, 西 界 洞 ), 임진환( 林 震 煥, 竹 添 町 3), 김정호( 金 晶 鎬, 橋 北 洞 ), 박용규( 朴 容 奎, 紅 把 洞 ) 등 13명이었다. 제4구의 대총대는 이시하라 이 소지로[ 石 原 磯 次 郞, 1919년 씨자총대], 73 가네히사 레이조우[ 兼 古 禮 藏, 씨자 총대], 오오와다 요지로[ 大 和 與 次 郞 ], 마쓰모토 야조[ 松 本 彌 三 ], 최사영( 崔 思 永 )이었다. 씨자총대는 24명으로 조선인은 강영순( 姜 永 順, 桃 花 洞 ) 1명이 었다. 1916년 씨자조직의 대총대와 비교하면 제1구는 1918년에는 고다케 다케지, 김용제 대신에 이강혁( 李 康 爀 ), 미네오 오토사부로가 대총대에 들 어가 있고 제2구는 1918년과 동일하며, 제3구는 예종석 대신에 이병숙이 들어갔다. 제4구는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다. 1918년의 씨자조직에 참 가한 한상룡, 조중응, 이강혁, 박승기, 홍순창, 사일환, 김한규, 이병숙, 유병 필, 최사영과 1918년에는 빠진 예종석이 모두 현재까지 밝혀진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대정친목회의 간부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74 참고로 1915년의 씨자총대 20명 중 1918년에 상담역에 모리 가쓰지, 세키 시게타로, 와다 츠네이치, 나카무라 사이조, 한상룡, 씨자대총대에 73 京 城 神 社 祭 협의, 每 日 申 報 ( ). 74 장신(2007), 대정친목회와 내선융화운동, 대동문화연구 60,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소, 361~392쪽. 10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09 마쓰다 미호, 고죠 게도 등 총 7명이 포함되어 있어 여전히 1915년의 씨 자조직의 큰 틀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대 후반의 씨자조 직은 주로 일본인이 많이 사는 정( 町 ) 지역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조선인 지역은 씨자총대만 임명한 채 형식상으로만 편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뒤에 서 살펴보겠지만 조선인들이 경성신사 운영금 모집에 상당히 반발하고 있 었고 씨자조직에 대한 관념도 없었으며 참여하던 조선인들도 3@1운동을 계기로 대폭 감소하여 1920년대 초반에는 조선인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일본인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경성신사에서 발간한 氏 神 と 氏 子 년 7월호를 통해 1920년대 초반 경성신사 씨자조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3년 말로 상임간사, 대총대, 총대의 임기가 만료되어 1923년 7월 새로운 간사, 대총대, 총대를 선출하였다 년 이전의 상임간사는 오가키 다케오, 미가미 유타카[ 三 上 豊 ], 죠 75 氏 神 と 氏 子 는 1920년대 초반 京 城 神 社 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일 차 사료이다. 京 城 神 社 사무소에서 발행한 잡지로 1923년 2월 26일 인가를 받 았고, 현재 1924년 1, 3, 7, 8월호가 남아 있다. 1924년 3월호가 제14호이다. 국 사편찬위원회에서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다. 편집 겸 발행인 金 光 慥 爾 는 京 城 神 社 의 신직으로, 1922년 2월부터 약 2년간 氏 神 と 氏 子 라는 잡지를 3천 부 씩 만들어 배포한 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1923년의 착오이다. 金 光 慥 爾 (1953), 앞의 글, 533쪽. 76 京 城 神 社 규정에 따르면 이들의 임기는 3년씩이므로 1916년 제1차 氏 子 총대 이후 새로 선출하는 총대는 1919년, 1922년에 각각 선출해야 하는데, 1923년 말에 임기가 만료되어 새로운 총대를 뽑는다는 것으로 보아 중간에 氏 子 총대 의 선출이 미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氏 子 총대의 선거가 미루어졌을 가능성도 고려해볼 수 있다.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09

110 로쿠타, 이시하라 이소지로였다. 새로 뽑힌 씨자총대 및 임원들은 다음과 같다. 제1구 씨자총대는 아카오기 고우사부로[ 赤 荻 興 三 郞 ], 안도 시즈카 [ 安 藤 靜 ], 다나카 가스케[ 田 中 嘉 助 ], 다케가미 야스이치[ 武 上 安 一 ]였고, 제2 구는 고바야시 토우에몬[ 小 林 藤 右 衛 門 ], 고모리 도라키치[ 小 森 虎 吉 ], 나카 오 게이키치[ 中 尾 啓 吉 ], 마쓰다 미호였으며, 제3구는 고스기 긴파치[ 小 杉 謹 八 ], 고바야시 겐로쿠[ 小 林 源 六 ], 고에즈카 쇼타[ 肥 塚 正 太 ], 니시자키 겐 타로[ 西 崎 源 太 郞 ]였고, 제4구는 가네히사 레이조우, 사이가 모토카츠[ 雜 賀 元 勝 ], 오오와다 요지로, 후지다 야스노신[ 藤 田 安 之 進 ]이었다. 상임간사는 다케가미 야스이치, 마쓰다 미호, 고에즈카 쇼타, 오오와다 요지로이었고, 상임간사장은 고에즈카 쇼타가 맡았고 회계간사는 다케가미 야스이치이 었다. 상담역은 오가키 다케오, 미가미 유카타, 죠 로쿠타, 이시하라 이소 지로, 아라이 하츠타로[ 荒 井 初 太 郞 ], 와타나베 테이치로[ 渡 邊 定 一 郞 ], 소가 쓰토무[ 曾 我 勉 ], 구기모토 도지로, 가와무라 센지로, 다카이 겐지[ 高 井 建 次 ], 마쓰모토 야조, 한익교( 韓 翼 敎 )로 주로 전임 씨자대총대가 많이 맡았 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1923년경에는 한익교를 제외하고 완전히 조선인이 씨자조직에서 배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인이 배제되던 씨자조직이 다시 경성신사 씨자조직으로 편입된 것은 1926년이 었다 市 秋 弘 (1943), 京 城 神 社 奉 仕 事 務 摘 要, 小 笠 原 省 三, 海 外 神 社 史 上 卷, 東 京 : 海 外 神 社 史 編 纂 會, 451~456쪽에서 재인용. 京 城 府 史 에서도 정동총대는 京 城 神 社 氏 子 조직을 참고하여 제도화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京 城 府 史, 제3권, 327~328쪽). 11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11 3. 경성신사에서 지내는 여러 제사 경성신사에서는 많은 제사가 행해졌다. 정해진 제사로는 세단제( 歲 旦 祭, 1 월 1일), 원시제( 元 始 祭, 1월 3일), 기원절제( 紀 元 節 祭, 2월 11일), 기년제( 祈 年 祭, 2월 17일), 섭사( 攝 社 ) 텐만궁제[ 天 滿 宮 祭, 2월 25일], 짐무천황제요배[ 神 武 天 皇 祭 遙 拜, 4월 3일], 오오하라이[ 大 祓, 6월 30일], 메이지천황제[ 明 治 天 皇 祭, 7월 30일], 일한병합기념일제( 日 韓 倂 合 記 念 日 祭, 8월 29일), 천장절제( 天 長 節 祭, 8월 31일), 예제( 例 祭, 10월 17일, 18일), 신상제( 新 嘗 祭, 11월 23일), 진좌 기념일제( 鎭 坐 記 念 日 祭, 11월 3일), 오오하라이[ 大 祓, 12월 31일], 오공제( 五 供 祭, 매일), 월차제( 月 次 祭, 매월 1일, 15일, 17일), 절분제( 節 分 祭, 당일), 천장절축 일제( 天 長 節 祝 日 祭, 당일), 추계황령제요배식( 秋 季 皇 靈 祭 遙 拜 式, 당일), 춘계황 령제요배식( 春 季 皇 靈 祭 遙 拜 式, 당일)이 있었다. 78 이러한 제사에는 정무총 감이나 도장관( 道 長 官 )이 주로 참가하고, 조선총독, 순종, 고종은 보통 대 리를 참석시키고 제물을 바쳤다. 관국폐사( 官 國 幣 社 )도 아닌 무격사( 無 格 社 )인 경성신사가 한국 내에 공식적인 사격을 갖춘 신사가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조선총독부나 경기도, 경성부의 중요 종교 의식을 치르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경성신사 관계자들은 경성신사가 국폐사의 역할을 해왔다고 주장하곤 했다. 79 일례로 경성신사에서는 씨자조직이 결성된 이후인 1916년 10월 1일 조선시정기념제( 朝 鮮 始 政 記 念 祭 )를 집행하였고, 이 제전에는 정무총감 등 78 京 城 府 史 제3권, 183~185쪽. 79 せめて 県 社 にても 京 城 神 事 を 昇 格, 京 城 日 報 6575호( 석간), 2 면; 京 城 神 事 を 國 幣 社 に, 京 城 日 報 6595호( ), 3면.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11

112 조선총독부의 주요 관료가 참가하였다. 이어서 신임( 新 任 ) 씨자총대 취임 봉고식( 奉 告 式 )이 열렸고, 종교적인 행사로 전염병[ 惡 疫 ] 방지 축도( 祝 禱 ) 도 있었다. 80 이처럼 씨자조직이라는 민간조직으로 운영되게 된 경성신사 에서는 여러 가지 제전이 행해졌다. 특히 매년 10월 1일 조선시정기념제 를 지낸다는 것은 경성신사의 역할을 확연히 보여주는 것이며, 정무총감 이 참석한다는 것은 경성신사를 매우 높게 대우한 것이다. 경성신사유서 기( 京 城 神 社 由 緖 記 ) (1932)에서 시정기념일제는 {당 신사의 유서 깊은 제사 로서 1910년 10월 1일 일한병합을 기념하여 매년 이왕( 李 王 ) 전하, 이강공 ( 李 堈 公 ) 전하, 이우공( 李 鍝 公 ) 전하 및 총독, 정무총감 등께서 특별히 폐백 료를 봉헌하며, 각 관민 다수가 참열한다}고 하였다 년 시정기념일 제의 경우에도 이왕가( 李 王 家 )에서 이강공이 사자를 보내고, 경기도지사, 경성부윤, 이시구로[ 石 黑 ] 지방과장, 경성부청 직원, 정총대 등이 참배하고 있다. 82 또한 임시로 행하는 제사도 매우 많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략하자 일본의 전국신직회( 全 國 神 職 會 )에서는 전국 각 신사 가 모두 [평화극복국위현양 출정군대 건전 기원( 平 和 克 復 國 威 顯 揚 出 征 軍 隊 健 全 祈 願 )]의 제전을 행하기로 결의하여 경성신사에서도 1918년 8월 25일 에 경성재주( 京 城 在 住 ) 응소군인( 應 召 軍 人 )을 위하여 무운장구를 기원하 는 임시제를 치르기도 했다. 83 특히 일본 황실의 안녕, 기우제, 전염병 방 80 京 城 神 社 제전, 每 日 申 報 ( ). 81 氏 神 と 氏 子, 1924년 1월호에 실린 氏 子 연중행사약력 에서도 10월 1일 조선 총독부 시정기념일이 행사일로 적혀 있다. 82 京 城 神 社 の 始 政 紀 念 祭, 京 城 日 報 ( ), 2면. 83 京 城 神 社 의 임시제, 每 日 申 報 ( ). 11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13 지, 초혼제 등 기원기복( 祈 願 祈 福 )과 같은 종교성이 짙은 것이 많았다 년 8월 19일에는 경기도장관과 경성부윤이 참가한 기우제가 경성신 사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년 11월 23일에는 경성신사 진좌 20주년 기념제가 열려 부적, 수찰 등을 나눠주었다. 86 이외에도 경성신사가 담당한 또 하나의 중요한 종교적 의례로는 경성 부 초혼제가 있다. 초혼제에는 경성의 각 불교 관계자가 참여하고, 제주는 경성부윤이 맡았다. 또한 제식 중에는 불교적 행위인 게송을 하고, 회향 문( 回 向 文 ) 87 을 읽기도 했다. 이어서 문무 관리, 관공서 직원, 순직자 유족, 일본 적십자사원, 애국부인회원 및 경성부인회원, 군대의 각 단체 또는 대 표자, 재향군인회 또는 대표자, 경찰관 단체 또는 대표자, 관공사립학교 생도직원의 배례가 있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초혼제는 이전 경성 거 류민단 시절부터 행해지던 것으로 경성신사 자체의 행사라기보다는 경성 지역을 망라한 위령제 행사였다. 따라서 불교 관계자가 참석하여 신사와 84 京 城 神 社 의 祈 禱,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제전,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제전, 每 日 申 報 ( ); 招 魂 祭 典 시행,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의 임시제, 每 日 申 報 ( ). 85 京 城 神 社 의 祈 雨 祭, 每 日 申 報 ( ). 86 京 城 神 社 二 十 年 記 念 祭, 每 日 申 報 ( ). 87 回 向 (えこう)이란 자기가 쌓은 공덕으로 다른 사람의 성불을 비는 것을 말한 다. 죽은 사람의 성불을 구하는 행위를 말하기도 한다. 淨 土 眞 宗 에서 아미타불 의 본원에 기대 정토에 사는 것을 바라거나[ 往 相 廻 向 ] 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 을 구제한다[ 還 相 廻 向 ]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삶의 시작은 神 社 에서, 죽음의 안식은 절(특히 정토종 계통)에서 구한다는 인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종교관에 대해서는 阿 滿 利 麿 의 글에 잘 실려 있다. 阿 滿 利 麿 저, 鄭 灐 역(2000), 앞의 책.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13

114 사찰이 결합된 제식의 모습을 보이고, 참열원의 면모를 보더라도 부윤, 관 리, 여러 단체들이 적극 가담하고 있다. 88 이처럼 남산대신궁 시절 경성에 서 죽은 사람들을 제사하며 자신들의 불안감을 달래던 일본인만의 제의 가 이제는 조선인들을 포함한 경성부의 공식적인 제의로 되었다. 하지만 그 초혼제에는 당시 죽은 조선인이나 다른 외국인들은 모두 제외되었다. 경성신사에서는 이러한 경성부 초혼제 외에도 경찰국초혼제( 警 察 局 招 魂 祭 ), 철도국초혼제( 鐵 道 局 招 魂 祭 ), 경기도 관내 대소 임시 특수 제사를 모 두 지냈다. 89 또한 경성신사에서는 신전결혼식( 神 前 結 婚 式 ), 기원 등과 같은 각종 사 적인 의식도 치러졌다. 특히 신전결혼식은 경성부의 씨자들과 긴밀히 관 련을 맺는 중요한 행사이며, 경성신사의 중요한 재원이기도 했다. 신전결 혼식 90 이란 말 그대로 [신 앞에서] 집행되어 [장래 견고히 국조( 國 祖 )를 믿 88 招 魂 祭 典 시행, 每 日 申 報 ( ). 89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 90 신전결혼식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萩 森 茂 編 著 (1930), 앞의 책, 24~29쪽]. 1. 일동 식장 參 進 2. 修 祓 ( 祓 主 는 祓 詞 를 아뢰고, 御 帳 臺, 神 饌, 玉 串, 齋 員, 신랑신부, 참열자의 순서로 修 祓 ) 3. 御 幌 (휘장)을 들어올림 4. 降 神 式 ( 警 蹕, 일동 平 伏 ) 5. 神 饌 을 바침( 傳 供 ) 6. 祝 詞 를 아룀( 齋 主, 일동 平 伏 ) 7. 誓 詞 를 아룀(신랑신부를 대신해서 媒 約 人 이 아룀) 8. 神 酒 拜 戴 ( 齋 主 가 일어나서 神 酒 를 子 에 담는다) 9. 交 盃 9. (1) 夫 婦 의 盃 11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15 고 부부의 도에 배반하지 않고 가정을 가지런히 하며 자손의 번창을 계 획하여 선조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것으로 가( 家 )를 위하여 국( 國 )을 위 하여 진실로 서언한 일이 뇌리에 각인되기 때문]에 좋은 결혼생활을 이룰 수 있으며, [식민지에서 일본 국민성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선전되었다. 즉 신전결혼식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일본 민족의 충량한 신민으로서 행해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취급하였다. 또한 신전결혼식은 신에게 내는 헌금(신사에 따라 다르지만 최저 10원)만 내면 되므로 매우 저렴하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년 11~12월 두 달 동안 11쌍의 부부, 1917년에는 45쌍의 부부, 1918년 1~5월, 다섯 달 동안 21쌍의 부부가 신전결혼식을 행했다. 1917년 경성신사에서 954원 54전의 공사비를 들여 92 사무소를 증축한 것도 바로 신전결혼식을 행하기에 사무소가 좁아 설비를 확충한 것이었다 년은 일본인에게는 [대액년]이었다. 한재, 수재, 전염병(콜 레라) 창궐 등 일본인들은 이러한 현상에 불안해했다. 또한 경성 본정( 本 町 )의 일본 상인들은 여러 가지 악재를 신의 힘으로 풀어보려는 듯이 100 여 원을 모아 경성신사에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에는 사이토 마코토 9. (2) 親 子 및 親 族 의 盃 10. 玉 串 을 奉 奠 함( 齋 主, 新 夫 婦 이하 順 位 ) 11. 神 饌 을 치움 12. 昇 神 式 ( 警 蹕, 일동 平 伏 ) 13. 御 幌 (휘장)을 내림 14. 일동 자리에서 물러남 91 萩 森 茂 編 著 (1930), 앞의 책, 24~29쪽. 92 神 社 大 總 代 會, 每 日 申 報 ( ). 93 阿 部 辰 之 助 (1918), 앞의 책, 203~205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15

116 [ 齋 藤 實 ] 총독의 [경성신사유래( 京 城 神 社 由 來 )]라는 제액( 題 額 ) 휘호와 구도 소헤이[ 工 藤 壯 平 ] 총무과장( 總 務 課 長 )이 쓴 경성신사의 유래기를 새겼다. 특히 유래기의 말미에는 {한국 병합 후는 내지인과 조선인과의 차별이 없 이 모두 신덕( 神 德 )을 입게 하여 크게 국력을 증가하고 국운을 발전하기를 지극히 바란다}라며 경성신사에 설립에 대한 바람을 적고 있다 경성신사 마츠리의 시작과 확대 1920년대 초반 경성신사 신직이었던 가네미츠 소우지가 진실로 신앙심을 높인 것은 미코시[ 神 輿 ]를 끄는 행사였다고 한 것처럼 경성신사의 가을제 사는 당시 경성의 가을 풍경에 빠지지 않는 요소였고, 당시 경성신사의 가을제사는 해외 제일이라고 칭해지기도 했다. 95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 는 남산 일대와 용산을 잇는 이 축제는 일본인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향 수를 다스리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위세를 떨치는 것이었다. 이 러한 이방인들의 축제는 조선인들에게는 굉장히 낯설고도 볼 만한 구경거 리이기도 했다. 미코시와 각종 행렬이 움직이는 이러한 마츠리는 1913년부터 시작되 었다. 남산대신궁에서 경성신사로 새롭게 이름을 바꾼 후 1913년부터 일 반적인 신사처럼 매년 제일( 祭 日 )에 신령이 상륙한 용산에 미코시를 보내 는 [도어식( 渡 御 式 )]을 하기로 했다. 일본인 거류민단에서는 오사카[ 大 阪 ]에 사람을 보내 미코시 및 부속품을 구했다. 새롭게 개수한 신전에서 10월 94 京 城 神 社 에 記 念 碑, 每 日 申 報 ( ). 95 京 城 神 社 由 緖 記. 11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17 17일 정천궁식( 正 遷 宮 式 )을 거행했다. 10월 16일, 17일 이틀간 열리는 경성 신사 대제를 봉축하기 위하여 경성의 각 부( 部 )는 각 방곡( 坊 曲 )에서 2명 씩(40방, 80명), 각 면( 面 )은 각 동( 洞 )에서 2명씩(103동, 206명) 참배하도록 하고, 각 부면장( 部 面 長 )은 주석서기( 主 席 書 記 ) 1명씩 동행하여 미코시를 호종하도록 했다. 또한 조선인에게도 국기를 게양하게 했다. 이왕가에서도 경성신사에 폐백을 바치고 대배( 代 拜 )를 하였다. 미코시는 16일 경성신사 본사에서 출발하여 남대문 정거장을 거쳐 용산으로 가서 하룻밤 머무른 후 다시 경성신사로 돌아왔다. 이때 미코시가 하룻밤 머무르는 장소[ 旅 所 ] 는 용산 철도구내( 鐵 道 構 內 )에 만든 임시시설로, 경성 거류민단 오카다[ 岡 田 ] 토목주임이 직접 출장하여 설비를 갖추었다. 각 정의 일본인들은 여러 장식을 하고 산거옥대( 山 車 屋 臺 ) 96 를 끌며 여흥을 즐겼고, 일본 예기( 藝 妓 ) 중권번( 中 券 番 )과 경성권번( 京 城 券 番 ) 97 이 참가하여 흥을 돋웠다. 이러한 기생들의 행렬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으로 미코시 운반 행사에서 빠 질 수 없는 행사였다. 경성 거류민단 민장은 직접 미코시를 받들었다. 행 사 접수는 매일신보사에서 대행했다. 또한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동물 원, 식물원, 박물원과 경복궁( 景 福 宮 )을 무료로 관람하게 하였다 屋 臺 란 축제 때 步 調 를 맞춰 천천히 끌고 다니는 수레(이 경우 山 車 라고도 한 다), 또는 지붕이 있는 춤추는 무대를 말한다. 그 모양이나 무대에서 행하는 행 사의 내용에 따라 門 形 小 屋 臺, 花 屋 臺, 蛇 船 屋 臺, 子 屋 臺, 大 阪 式 屋 臺, 囃 子 屋 臺 등 많은 종류의 屋 臺 가 있다. 97 [ 券 番 ]이란 기생 조합으로, 소위 포주업자들의 조합조직이다. 검번( 檢 番 ) 또는 권반( 券 班 )이라고도 한다[ 川 村 湊 저, 유재순 역(2002), 말하는 꽃 妓 生, 소담 출판사, 168~170쪽, 177~178쪽]. 본문에서 나오는 경성권번은 조선인 권번이 아닌 일본인 권번이다. 98 神 社 祭 典 과 天 長 節,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大 祭 彙 報, 每 日 申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17

118 1914년 경성신사의 대제일은 10월 16~18일로 늘어났다. 16일에는 전 야제를 하고, 17일은 기존대로 대제가 치러졌고, 17~18일 이틀간 미코시 의 도어가 행해졌다. 대제위원 총장은 가나야[ 金 谷 充 ] 경성부윤이었고, 데 라우치 마사타케[ 寺 內 正 毅 ] 총독, 야마가타[ 山 縣 ] 정무총감과 각부 장관의 참배가 있었으며, 이왕직( 李 王 職 ) 장관 민병석이 고종과 순종을 대신하여 참배하였다. 가나야 경성부윤은 제복을 입고 직접 미코시를 모시기도 하 였다. 당시 신여경위계( 神 輿 警 衛 系 ) 중 조선인은 신여공봉자( 神 輿 供 奉 者 ) 대 표인 조진태( 趙 鎭 泰 ), 신여경위계( 神 輿 警 衛 系 ) 4반에 백완혁( 白 完 爀 ), 백인기 ( 白 寅 基 ), 박제빈( 朴 齊 斌 ), 유병련( 柳 秉 璉 ), 이석모( 李 碩 模 ), 한상룡, 엄달환( 嚴 達 煥 ), 홍충현( 洪 忠 鉉 ), 조진태, 정영두( 鄭 永 斗 ), 장두현( 張 斗 鉉 ), 안상호( 安 商 浩 ), 최경순( 崔 敬 淳 ), 김용제, 김진옥( 金 鎭 玉 ), 김한규, 김용집( 金 用 集 ), 주성 근( 株 性 根 ), 예종석이었다. 1915년 최초의 조선인 씨자총대 백인기, 박제빈, 한상룡, 조진태, 안상호, 예종석, 김용제, 김한규, 예종석 등 8인이 모두 포 함되어 있다. 99 이렇게 경성신사 제사 행사의 기본적인 모습이 만들어졌 다. 10월 17일 대제는 1938년 10월 18일로 변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유지 되었고, 100 미코시를 운반하는 장소는 점점 확대되며 지속되었다. 경성신사의 씨자조직이 처음 결성된 1915년에는 경성에서 시정오년 기 報 ( ); 神 社 大 祭 와 鮮 人, 神 輿 警 護 係 日 割,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大 祭 와 旅 所,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大 祭 彙 報, 每 日 申 報 ( ). 99 京 城 神 社 大 祭,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大 祭,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의 大 祭, 每 日 申 報 ( ). 100 聖 戰 氣 分 이 濃 厚 한 京 城 神 社 의 秋 祭, 每 日 申 報 ( ); 自 肅 緊 張 의 銃 後 京 城 神 社 恒 例 大 祭, 每 日 申 報 ( ). 11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19 념 조선물산공진회가 개최되었으므로 공진회 포상수여식을 거행하는 10 월 17일을 중간으로 하여 10월 16, 17, 18일 사흘간 경성신사 추계대제가 거행되었다. 이번 경성신사 추계대제는 이전까지 관리가 담당하던 신사대 제를 씨자들이 처음으로 직접 거행하였다. 16일은 전야제를 치르고, 17일 에 대제를 거행한 후 미코시를 용산 철도구내의 숙박지로 출행하고 18일 에 미코시가 경성신사로 돌아오는 일순이었다. 대제 중에는 경성신사표 ( 京 城 神 社 標 )를 그린 대제등( 大 提 燈 )을 세우고, 씨자총대 이하 300여 명의 제전위원( 祭 典 委 員 )과 일본 예기들이 행렬에 참가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불꽃을 쏘아 올리는 등 화려한 축제를 하였지만 공진회로 인해 예상과는 달리 크게 흥행하지는 않았다 월 16일 천황 즉위 후 처음 하는 신상 제( 新 嘗 祭 )인 대상제( 大 嘗 祭 )가 경성신사에서 열려 야마가타 정무총감이 타마구시[ 玉 串 ]를 바치고, 이어서 고종, 순종, 이강공, 이준공( 李 埈 公 )의 대 리 역시 타마구시를 바쳤다 년 9월 30일에 열린 씨자총대회에서는 오가키 다케오 간사장이 의장을 맡고 야무라 요리히사 신관의 설명으로 여러 가지 사항을 의결하 였다. 제전일은 1915년과 같이 10월 16일 전야제, 17일 대제식( 大 祭 式 ) 및 미코시 발행( 發 幸 ), 18일 미코시 환어( 還 御 )를 하기로 하였다. 이어서 대제 실무는 경성의 제3구 씨자위원이 맡기로 하였다. 또한 신행( 神 幸 ) 코스와 행렬 순은 전 해와 같이 하기로 하고, 미코시가 하루 머무르는 여소는 용 101 京 城 神 社 秋 季 大 祭 執 行,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大 祭, 每 日 申 報 ( ); 大 盛 況 될 神 社 의 秋 祭, 每 日 申 報 ( ); 秋 祭 와 미증유의 煙 火, 每 日 申 報 ( ); 秋 季 대제, 每 日 申 報 ( ). 102 大 嘗 祭 日 의 京 城 神 社, 每 日 申 報 ( ).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19

120 산으로 정했다(그림 1 참조). 또한 각 정에서 미코시를 봉축하기 위하여 고 장제등(高長提燈) 1대 또는 정명기(町名旗)를 만들어 행렬에 더하기로 했 그림1_ 경성신사 미코시 행렬 코스(1916년)[京城 精密地圖(1993, 三重出版社)에 京城神社의 秋祭, 每日申報 ( ) 기사를 참조하여 작성함]. 12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21 고, 각 정의 여흥은 성대하게 거행하고 각 가정에서는 마땅한 신에게 제 물을 바쳐 내지( 內 地 )에 있는 씨신과 같이 봉축하도록 했다. 또한 제례 당 일은 경성과 용산을 왕복하는 지방승차권의 임금 할인을 당국에 청원하 기도 하였다. 이처럼 제례행사를 위하여 공공요금의 할인까지 요구할 정 도로 경성신사의 행사는 공적인 성격을 띠었다. 대제기간 동안 경성신사 에는 일본 기생의 춤과 노래, 일본인의 씨름 등이 개최되었고, 밤에는 동 아( 東 亞 ) 연초회사 및 각 정에서 헌납한 폭죽으로 불꽃놀이를 하였다. 또 한 경성의 일본인 측 [화류계]에서는 경성권번이 이전처럼 꽃수레를 만들 어 가지고 시내를 돌고, 17일에는 45명의 일본 기생이 변복을 한 채 미코 시의 뒤를 따르고 밤에는 축하행사를 하며, 이외에도 중권번, 신권번 등의 기생단도 참가하였다 년에는 큰 변화 없이 10월 16~18일 3일 동 안 이전과 같은 행사가 이루어졌다 년 경성신사 대제의 당번구는 영락정대로( 永 樂 町 大 路 ) 이동( 以 東 ) 신정( 新 町 ) 방면(제1구)이었다. 대제위원 총장( 總 長 )은 씨자대총대 미네오 오토사부로, 동( 同 ) 부장 씨자대총대 다무라 요시지로, 동( 同 ) 씨자대총대 야마자키 시카조우였다. 대제위원 5명 중에는 씨자대총대 쓰카자키 요시 타로 외에 4명이 조선인이었는데, 씨자대총대 이강혁 외에 박승기, 씨자총 대 홍순창, 사일환 105 이 참가하였다. 106 이번 대제에는 하세가와[ 長 谷 川 ] 총 103 神 社 氏 子 總 會, 每 日 申 報 ( ); 氏 子 總 代 소집,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의 秋 祭,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의 추제, 금년에 는 대성황, 每 日 申 報 ( ). 104 京 城 神 社 大 祭, 每 日 申 報 ( ). 105 史 一 煥 은 1913년 초 일제가 김린@ 柳 一 宣 등 친일 기독교인들을 매수하여 維 新 會 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일본YMCA에 소속시키는 공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21

122 독, 고지마 소지로[ 兒 島 惣 次 郞 ] 경무총장, 시오자와 요시오[ 鹽 澤 義 夫 ] 경무 부장, 이완용( 李 完 用 ), 가나야 경성부윤, 각 학교 생도 직원 기타 관민 이하 참배원이 타마구시를 바치고 신전( 神 前 )에 배례하며 신의( 神 儀 )를 미코시 에 옮겼다. 이때에도 거리에는 헌등( 獻 燈 )이 달리고, 각 정에서는 옥대( 屋 臺 ) 행렬이 있었다. 또한 일본 예기들이 조직한 경성권번과 중권번과 신권 번 외에도 조선인들이 조직한 한성권번, 경화권번, 대정권번, 한남권번이 참가하였다. 이날 행렬 중 가장 화려한 것은 대정권번과 한남권번의 기생 들의 행렬로 구경꾼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 이전까지는 참가하지 않던 조선 기생들이 적극적으로 참 가한 것으로 보아 이 즈음 조선기생조합이 권번으로 정비되었으리라 생각 된다. 조선인 권번이 참가한 이유가 일본인 권번을 모방한 것인지, 행정당 국 등의 압력이 있었는지, 아니면 일종의 선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단한 호응을 얻었던 것만은 틀림없으며, 이는 조선인들이 미코시 도어 행사에 대규모로 적극적으로 참가한 최초의 행위였다. 특히 1920년에는 조선 기 생 100여 명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108 기생의 숫자가 더 늘었을 것으로 생 각되는 1931년에 조선 기생이 모두 535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당시 매우 작을 벌였을 때 참가했던 친일 기독교인이다. 106 阿 部 辰 之 助 (1918), 앞의 책, 205~206쪽 참조. 107 京 城 神 社 大 祭,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大 祭,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大 祭 幹 事 人 決 定,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의 추기 대제는 금일 장엄히 거행된다. 경쟁적인 各 町 의 여흥은 매우 굉장하다,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대제. 총독 이하 참배, 鳳 輦 을 옹위하는 彩 旗, 숭엄한 전야제, 每 日 申 報 ( ). 108 京 城 神 社 還 御 의 京 城, 每 日 申 報 ( ). 12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23 많은 기생들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년 가을대제에는 인해 조선 내 신사 유지에 어려움 이 있었으나, 경성신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라며 [평화 의 제1년 대제]라 하여 오히려 미코시 코스를 확대하여 명치정( 明 治 町 )을 새로 포함하고, 조선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등의 회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이전보다 더욱 성대하게 행해졌다. 또한 이번 대 제행사 당번구인 용산지역에서는 경성과 경쟁하듯이 더욱 화려한 준비를 했다. 경성신사의 미코시가 용산으로 올 때 용산 미생정( 彌 生 町 )에서는 용 산 삼각지에 있던 이나리신사[ 稻 荷 神 社, 1910년대 중반 창립]의 미코시를 가 지고 남대문까지 마중하러 가고, 신구( 新 舊 ) 용산의 10여 정마다 각각 5 명 이상을 뽑아 가장행렬단을 조직하였다. 이왕직에서도 무토[ 武 藤 ] 제사 과장( 祭 祀 課 長 )이 큰 도움을 주었고, 이전처럼 제사 당일 순종[ 李 王 ], 이강 공, 이우공이 제물을 바쳤다. 특히 이번은 복장을 갖춘 취라치 인이 조선군악을 합주하여 미코시 앞에 서서 갔다. 용산, 진고개, 신정( 新 町 ) 등 지로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로 길이 찼고, 동물원, 명승지 등을 찾아가서 하루의 제일을 이용하여 노는 사람도 많았다. 3@1운동으로 인해 반일감정 이 넘치는 조선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경성신사의 성대한 대제를 통해 신의 가호 아래 자신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3@1운동 직후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국 내 다른 신사에 비해 경성신사에서 대제가 거창하게 행해질 수 있었던 것은 경성신사에는 잘 정비된 씨자조직이 있었고, 경성 내에는 많은 일본인이 살고 있었기 때문 109 川 村 湊 저, 유재순 역(2002), 앞의 책, 178쪽. 110 취라치[ 吹 螺 赤 ]. 조선시대 군대에서 소라를 불던 취타수이다(국립국어원).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23

124 이다. 게다가 경성부에서 경성신사에 상당한 지원을 하였고, 이왕가나 친 일 조선인들도 경성신사의 제전에 많은 참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동 이후 경성신사에서도 조선인을 형식적으로나마 씨자조직에 흡수하 려던 태도를 버리고 경성신사의 대제를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하기 시작했 고 행사 자체는 더욱 화려해졌다. 111 물론 조선인들은 이러한 마츠리가 단순히 일본인들만의 축제라는 것 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는 경성신사의 축제를 일본인들이 경성 시가 남쪽 자신들의 거주지 거리거리에 등불을 달고 괴상한 종이 오 라기를 늘어뜨리며 112 번화한 놀이를 하는 풍속으로 진고개를 비롯하여 황금정, 남대문통에는 신등을 달아 매우 번화하였으며 오후에는 미코시 를 구경하러 몰리는 사람들이 길에 넘친다고 묘사하고 있다. 113 그러나 이 러한 일본인들의 흥겨운 축제를 보는 조선인들의 심정은 씁쓸했다. 같은 시기 개벽 은 물가 하락과 금융 긴축 등 경성의 경제 상황이 유례없는 불 황임에도 경성신사 대제는 작년 이상으로 성황을 이루어 헌등( 軒 燈 ), 행등 ( 行 燈 ), 산거( 山 車 ), 옥대( 屋 臺 ) 등의 행렬이 조선인 시가인 종로통을 빽빽하 게 지나갔다며, 전에는 조선인 시가를 그렇게 통행하지 않던 것을 금년부 년대 초반 京 城 神 社 관련 기사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 사지만 신사의 마츠리가 1910년대 후반의 흐름을 이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京 城 神 社 의 元 旦 祭,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의 節 分 祭 執 行,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의 祈 年 祭,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還 御 의 京 城, 每 日 申 報 ( ); 京 城 神 社 의 例 年 祭 는 再 昨 日 盛 大 히 執 行, 每 日 申 報 ( ). 112 京 城 神 社 大 祭 ( 寫 ), 동아일보 ( ). 113 京 城 神 社 大 祭, 작금 량일동안에, 동아일보 ( ), 3면. 12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25 터는 특별히 {굉성( 宏 盛 )한 행렬을 지으며 종로를 압과( 壓 過 )}하는 것도 또 한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일종의 {재경( 在 京 ) 일본인 민중시위( 日 本 人 民 衆 示 威 )}로 보아도 틀리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행렬 의 주요 인원을 제외하고 줄 끌고 노래하는 사람은 거의 일본인 상점복을 입은 한국 사람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114 조선인과 일본인의 축제에 대한 입장이 다른 이상 이러한 마츠리 행렬 을 둘러싸고 다툼이 벌어지곤 했다. 조선인들에게 이러한 마츠리 행렬은 신성한 행위라기보다는 단순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종 종 전차에서 창밖으로 미코시를 내려다보곤 했다. 이러한 행위는 일본인 들에게는 상당히 불쾌하게 여겨졌다. 1918년 축제를 준비하면서 경성신사 의 한 제전위원은 1917년에 전차에서 미코시를 내려다보는 불경이 있었 는데, 이러한 불경스러운 행위는 없어야 하며, 비록 조선에서는 내려다보 는 것은 상관없다지만 미코시 행렬은 내려다보지 말 것을 주의 주고 있다. 더불어 경신( 敬 神 ), 즉 조상을 공경하는 것은 예부터 일본과 조선 모두의 생활의 제일 근본이니 신행( 神 行 )에 대해 불경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 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말하였다. 115 전차 외에도 미코시가 통행할 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지 않도록 하라는 주의사항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만 약 이층 유리창 같은 곳에서 얼굴을 내밀고 내려다보면 행렬은 곧 정지될 것이며 따라서 소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116 실제로 1922년에는 경 성신사 대제에 참가하였다 돌아가는 일본인들이 종로통을 지나갈 때 동 114 [ 開 闢 ] 之 動 中 靜 觀, 개벽 제29호( ). 115 京 城 神 社 의 大 祭 거행 순서, 每 日 申 報 ( ). 116 京 城 神 社 의 秋 祭, 每 日 申 報 ( ).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25

126 아부인상회에 있는 점원이 이층에서 내려다보았다가 술 취한 일본인들이 상점 유리창을 부수고 신사 대제 행렬을 이층에서 구경하는 것은 무례하 다며 점원을 폭행하려 해서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 상회 의 사람은 {일본의 풍속을 알지 못하는 여자들이 이층에서 내려다보았기 로 그다지 잘못이 아니요 또 그들의 행렬은 그들이 존엄하게 생각하는 미 코시도 아니었는데 이와 같이 폭행함은 만만부당한 일이오. 경찰서에서도 이와 같이 난폭한 무리를 그저 내어버려둠은 불가한 줄로 생각하오}라며 그들의 행위에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신사의 운영 경비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발 미코시 행렬에 드러난 조선인들과의 갈등은 조선인들이 가진 신사에 대 한 불만이 겉으로 표출된 것이기도 했다. 조선인이 신사에 대해 가진 본 질적인 불만은 신사 경비를 조선인들에게서 강제로 징수하는 데 있었다. 신사 운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영 경비의 획득이었다. 씨자조직이 경성신사의 운영을 맡으면서 신사를 예산에 따라 차질 없이 운영하는 책 임을 지게 되었다. 씨자총대가 처음 운영한 1915년 경성신사의 세입결산 을 살펴보면 공진금 500원, 신찬 폐백료 349.3원, 사입금 1, 원, 씨 자 갹출금 2, 원, 잡수입 20.11원으로 총 4, 원이었다. 118 이 처럼 경성신사의 주요 수입은 씨자 갹출금이었고 이를 모집하는 것은 경 성신사 씨자총대의 주된 임무였다. 신사 유지경비는 먼저 씨자총대가 경 117 京 城 神 社 大 祭 餘 興 으로 暴 行, 동아일보 ( ), 3면. 118 神 社 氏 子 총회, 每 日 申 報 ( ). 12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27 성부 내 유지로부터 기부금을 받고, 그것을 공제한 나머지를 각 정동( 町 洞 ) 빈부의 정도에 따라 할당하여 정내씨자총대가 해당 정동 내 유지와 합의하여 씨자로부터 갹출하기로 하였다. 119 경성신사가 인가된 후 처음인 1916년도 예산은 1916년 9월 15일 열린 씨자총대총회에서 6804원으로 가결되었다. 120 경성신사의 1916년도 결산 총회를 살펴보면 1917년 8월 29일 오가키 다케오의 집에서 개최하였고, 총수입 7291원 50전, 지출 7282원 36전으로 잔금이 9원 14전이었다 년에는 1월 15일에 대총대회를 열고, 사무소 증축, 기타 제 경비 결산 을 보고하고 각 정( 町 ) 갹금( 醵 金 ) 방법을 협정하였다. 지출금은 총 5309 원 49전으로 봉거( 鳳 車 ) 및 부속기구 장속( 裝 束 ) 신조비( 新 造 費 ) 3359원 70전, 사무소 증축 공사비 954원 54전, 봉거 및 부속품 하조( 荷 造 ) 및 운 임 495원 25전, 용산 여소( 龍 山 旅 所 ) 공사비 500원 등이었다. 각 정 갹출 금(총 5450원)은 제1구 1508원, 제2구 1788원, 제3구 1180원, 제4구 974원 을 분담 갹출하기로 하고 그 지출금은 지난해의 지출에 따라 은행에서 잠 시 차입하고, 이자 관계상 이후 2개월 내에 갹출하여 갚기로 결정했다. 122 당초 경성신사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씨자단체를 만들어 공동으로 경 영할 계획이었지만 일본인과 달리 조선인들에게는 씨자에 대한 관념이 존 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내 주민 모두에게 이 비용을 강제로 징수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강하게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대해 씨 119 氏 子 總 代 協 議, 每 日 申 報 ( ); 氏 子 理 事 互 選, 每 日 申 報 ( ). 120 氏 子 總 代 총회, 每 日 申 報 ( ). 121 京 城 神 社 결산, 每 日 申 報 ( ). 122 神 社 大 總 代 會, 每 日 申 報 ( ).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27

128 자조직은 합의단체라며 씨자가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은 모두 개인의 자 유의지이고 결코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며 양해를 시켰다 년 처음으로 씨자조직으로 운영되었을 때 일본인들은 1호( 戶 )에 15전씩으로 빈부( 貧 富 )의 차이 없이 징수하다가 1916년에 이것이 불공평 하다 하여 새로 학교조합비를 표준으로 하여 1,600원을 1, 2, 3등의 3계급 으로 구별하여 부과하여 모집하고, 모자란 금액은 이왕직, 기타 주된 귀 족으로부터 징수하고 일반 조선인에게는 징수하지 않기로 하였다. 124 이처 럼 고종이나 순종이 때때로 경성신사에 하사금을 보낸 것도 일종의 관례 이며 중요한 재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25 그러나 조선인에게 신사 운영 경비를 강제로 징수하는 것은 당분간 피 하겠다는 계획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일본인만으로는 신사 경비를 충당하 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자발적으로 참여시키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18년 매일신보 에는 다 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독자 제씨 중에는 경성신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 대제를 거 행한다는데 무슨 까닭으로 반드시 매 호에 얼마큼씩이라도 부비를 부 담시키는지 도무지 그 인연과 내력을 모르는 까닭에 아무 뜻 없는 돈 을 부담하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대체 신사라는 것은 자세히 알고자 하면 불가불 신도( 神 道 )라든지 또 내지의 여러 가 지 신사의 내력을 낱낱이 연구하여 보아야 할 일이오 또 민족사상( 民 123 京 城 府 史 제3권, 179~181쪽. 124 京 城 神 社 社 費, 每 日 申 報 ( ). 125 京 城 神 社 에 賜 金, 每 日 申 報 ( ). 12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29 族 思 想 )에도 큰 관계가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전국에 산재한 관 폐대사( 官 幣 大 社 ) 이하 여러 신사 중에 가장 수효도 많고 또 가장 중 요한 것은 조신( 祖 神 )과 씨신( 氏 神 )이다. 경성신사는 곧 우리 경 성시민의 씨신이다. 그러면 씨자 되는 우리는 만공( 滿 空 )의 열성과 환 희로 이 제일( 祭 日 )을 지내지 않으면 안 된다. 1년 행사 중에 가장 중요 한 것의 하나가 될 것은 분명하다. 씨신이라 함은 곧 조신 또는 기주신 ( 基 主 神 )을 뜻하는 말이오, 또 그 지방의 경신( 敬 神 )의 초점이 되는 신 을 말함이다. 그러한즉 씨자라 함은 그 지방이나 그 동네에 거주하는 사람을 말함이요 또 그 신을 숭경하는 사람을 말함이다. 126 앞서 신사 조직에 가입하는 것은 마음대로라고 한 것과는 매우 다른 표현이다. 사실 씨신은 혈연적인 공통성을 매개로 하는 것이므로 지역적 인 공동체에 기반한 터주신[ 基 主 神 ]보다는 혈연적 성격의 조상신[ 祖 神 ]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지역적인 성격을 가진 산토신( 産 土 神 )과 혈연적 성격을 가진 씨신의 경계가 모호해져 사실상 씨신으로 흡수 되었다. 이처럼 확장된 [씨신]사상을 조선적인 조상신, 터주신 사상과 연결 시켜 조선인들이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씨신에 대 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그 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씨자 로 삼아 경비를 걷고, 그 씨신을 숭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은 조선인에 게는 부당한 것이었다. 이는 일본의 전통사상, 특히 종교를 단순히 일본인 의 입장에서 한국에 강제로 적용한 것이었다. 여기서 신도가 조선에 강요 될 때 드러나는 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지역적 특수성을 강조하지만 땅 126 부분적으로 어색한 말투만 읽기 쉽게 고쳤다. {[ 神 과 神 社 와 大 祭 ] 어떠한 것인 가를 알아야 한다. 가장 공경하는 뜻으로 정성껏 거행하라}, 每 日 申 報 ( ).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29

130 에는 각각의 신이 있다는 일본적 신앙과 연결시켜 그 지역이 가진 본래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일본인 스스로가 부여하고 이해하는 [상상의] 특수성 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조선의 민족성, 지역성은 배제되고 일본에 의해 이해되고 상상된 특수성을 강요하고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인들에게 이러한 궤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윤치호는 {서울 주민들이 서울의 일본 신사, 즉 대신궁 때문에 7천 원의 부담을 떠 안게 되었다. 이 중 5,500원은 일본인들이 떠맡고, 1,500원은 조선인들에 게서 뜯어내기로 되어 있다. 신도는 일본적 색채가 너무 강해서 일본인이 아닌 다음에야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조선인들에게 하등의 관심 도 없는 종교를 위하여 돈을 내라고 강요한다면, 양심의 자유가 보장된다 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27 그러나 이후 한국 내 신사들이 조선인들에게 강제로 돈을 걷 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후 반일감정이 상승한 분위기 속 에서 조선인들에게 신사 운영 경비를 걷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 이었다. 민족적 각성을 통해 조선인들이 신사 경비를 내는 것을 거부한 경 우도 상당히 있을 것이고, 친일 인사 역시 숫제 돈을 걷거나 낼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19년 5월 도쿄에서 개최된 전국신직회에서 야무라 요리히사 경성신사 궁사( 宮 司 )는 수원, 개성, 춘천, 전주, 광주 등의 신사는 거주하는 일본인이 조선인에 비교하면 매우 적어 신사 유지비도 조선인 편에서 걷어내는 돈이 대부분이었는데 인해 조선인 이 걷어내는 돈이 갑자기 감소하여 신사의 유지가 곤란하여 그 중에는 마 127 윤치호일기 ( 수요일). 13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31 침내 폐지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한 곳도 있다고 할 정도였다. 128 경성신사도 다른 신사보다 사정은 나은 편이지만 재정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경성신사 사무소에서 1923~1924년경 약 2년간 발간되었 던 氏 神 と 氏 子 도 우송비는 경성신사 통신비에서 지급되었지만 인쇄비 약 500원의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폐간되었다. 氏 神 と 氏 子 1924년 7월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1년간 수입은 겨우 약 33원으로 그 중 잡지 구독료는 8원이고 기부금도 15원에 지나지 않았다. 1년분 구독료가 1원이 었으니 잡지 구독료를 내는 사람이 겨우 8명이었던 것으로, 당시 가네미 츠 소우지의 회고 129 에 따르면 3천 부씩 반포했다고 하니 무료 배포와 다 름없었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후대의 기록이지만 1935년의 내무국장 통첩 에서도 공인 신사 중에 조만간 전임 신직을 두기로 하고 허가를 받았으나 설립 후 오랜 시일이 경과되었지만 겸무( 兼 務 ) 신직으로 예제( 例 祭 )만 집행 하며 예제 이외의 공식제사(1914년 칙령 제10호 관국폐사 이하 신사제사령)를 집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며 신사의 개선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또 한 경내지와 공원도 구별이 명확하지 않아 혼동되며 신사의 기본재산 조 성도 미비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130 이로 미루어 3@1운동 직후에는 일정한 기준을 갖춘 공인 신사라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 처해 있었 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내에 있던 신사들이 결국 기댈 곳은 총독부와 같은 관의 지원이었다. 앞서 간단히 언급했지만 1919년 5월 도쿄에서 개최된 전국신 128 神 社 유지 곤란, 每 日 申 報 ( ). 129 金 光 慥 爾 (1953), 앞의 글, 533쪽 년 10월 내무국장 통첩. 神 社 의 시설 개설에 관한 건.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31

132 직회에서 야무라 요리히사 경성신사 궁사는 조선에 대한 공인 신사의 유 지보존 방법을 논의할 것을 제안하고 이에 대하여 만장일치로 총독부에 적당한 보호방법을 청원하기로 했다. 야무라 요리히사는 조선신직회의 이 사로서 도쿄 전국신직회 회의에 파견 온 것이었다. 그 후 다시 조선신직회 의 평의원회( 平 議 員 會 )를 개최하고 그 결의로써 평양신사의 마쓰오[ 松 尾 正 技 ], 인천신사의 우에하라[ 上 原 堅 一 ], 경성신사의 야무라 요리히사 세 사 람 131 이 총독부에 출두하여 내무부 사와다[ 澤 田 豊 文 ] 제일과장( 第 一 課 長 ) 을 찾아가서 진정하였다. 경성신사 야무라 요리히사 궁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유지보존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조금을 국고로부터 지 출하는 것이 목하( 目 下 )의 문제이다. 전도( 全 道 )의 신사 경비는 현재 그 지방유지가 내는 돈을 쓰는데 새전( 賽 錢 )의 수입은 아주 적고 지난 번 소요(3@1운동) 이래로 조선인이 내는 돈이 없어서 내선인( 內 鮮 人 ) 이 공동으로 유지할 신사도 유지하기가 곤란하다. 내지인에게는 신사 를 씨자가 봉사하는 것이라는 고래의 습관이 있는데 조선인에게 이 내 지의 습관을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여서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이외에는 기부를 받지 않기로 되어 신사 예산에 다소 어려움 이 있다. 국가풍교( 國 家 風 敎 )의 연원으로 모시는 신사를 의미 있게 하 기 위하여 요즈음 조선의 각 신사의 공통 기본재산으로 10만 원가량 을 국고로부터 지출하여 그 이익을 나누어 확정적 유지비로 해달라고 총독부에도 청원한다. 내지( 內 地 )에는 관국폐사 공통자금제도가 있어 서 비상히 좋은 줄로 생각한다 한글로 적힌 神 職 이름은 朝 鮮 公 論 社 편찬(1917), 앞의 책, 423~424쪽과 氏 神 と 氏 子 1924년 8월호를 참고하여 적었다. 132 神 社 유지 곤란, 每 日 申 報 ( ). 될 수 있는 한 본문의 말투를 살리 13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33 이렇듯 조선 신사 관련자들은 후에 조선인들의 기부가 적어 신사 유지가 곤란하여, 일본 본국의 관국폐사 지원제와 같이 조선에서도 신사 공통의 재산, 보조금을 총독부에서 지원받으려고 했다. 야무라 요리 히사 궁사는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돈만을 받았다고 하지만, 경성신사만 보더라도 예산을 정한 후에 그 금액을 미리 은행에서 대출받고, 후에 각 구역마다 정해진 금액을 갹출하여 갚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아, 사실상 강 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본다. 또한 조선신직회에서는 이러한 한국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19 년 7월 12~14일 3일간 경성신사 사무소에서 제6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총회에서 결의된 사항은 국전강구회( 國 典 講 究 會 ) 설립, 조선 내의 공인 신 사 공통기본재산제도( 共 通 基 本 財 産 制 度 )의 설정 및 국고( 國 庫 )로부터 보조 청원, 신궁대마( 神 宮 大 麻 ) 반포, 신사의 사격 및 폐백 공진사( 供 進 使 )제도 청원, 황도강습회( 皇 道 講 習 會 ) 개최 등에 관한 것이었다. 또 조선인 갹출금 징수, 신사 유지에 관한 연구, 사제( 私 祭 ) 취급에 관한 연구, 경신( 敬 神 )사상 및 시대사상에 순응시키는 방안, 봉사( 奉 仕 )상 참고 사항, 각 지방에 있는 각종 단체와 신사와의 연락( 連 絡 )에 관해 연구하였다. 또한 1918년부터 조 선총독부로부터 1천 원의 보조금을 받아 행하는 황도강습회의 운영 방침 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133 특히 사격의 제정 및 폐백료 공진, 지방비를 되, 어색한 부분만 읽기 쉽게 고쳤다. 133 조선총독부에서는 1918년에서 1932년까지 매년 약 1천원을 [ 神 職 講 習 會 補 助 ]항목(임시부의 補 助 費 항목에 속함)으로 지급하였다. 1933년에는 [임시부의 補 助 費 항목]에 神 社 관련 항목이 존재하지 않는다. 1934년부터는 [ 神 職 講 習 會 補 助 ] 항목이 사라지고, [ 朝 鮮 神 宮 奉 贊 會 보조] 항목이 나타나는 것으로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33

134 보조받는 일과 조선인들에게 신사정신을 전하는 것은 조선신직회에서 매 년 힘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1924년 6월 22~23일에 열린 조선신직회 총 회에서도 전자는 재청원하기로 가결하고, 후자는 연구 숙제로 남기고 있 다. 134 황도강습회는 1918년 9월 제1회 강습회를 개최하고 신사제식( 神 社 祭 式 ) 기타 학과를 강습하였는데, 계속해서 1919년 7월 15일부터 12일간 경 성구락부( 京 城 俱 樂 部 )에서 강습회를 개최하고 제식과( 祭 式 科 )를 주로 하고 기타 축사( 祝 詞 ), 조도( 調 度 ), 장식( 裝 飾 ), 신사법규 등의 학과를 강습하기 로 계획하고, 제식과 강사로는 신궁황학관( 神 宮 皇 學 館 ) 산토[ 三 東 ] 조교수 를 초빙하고 또 명사를 초빙하여 학외( 學 外 ) 강연을 하기로 했다 년에는 8월 23일~9월 3일까지 조선신직회 주최로 목포, 광주, 전주, 군산, 대전, 인천, 경성, 대구, 진해, 부산을 순회하며 황도강습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강사는 도쿄제국 대학교수 다나카 요시오[ 田 中 義 能 ]로, 강의 내용 은 [인류 최고의 목적과 국가의 장래]였다. 136 이처럼 조선신직회는 일본과 같이 공통기본재산의 설정 및 국고로부 터의 보조, 더 나아가 신사의 사격을 정해 폐백 공진사제도를 만들고, 또 한 신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신사상을 퍼뜨리고 일제가 지배하고 있 보아 이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 朝 鮮 神 宮 奉 贊 會 보조]는 액수도 매우 커서, 1934년에는 1만 3,500원, 1935년에는 2만 500원이 지급되었다. 조선총독부관 보 1691호( );674호( );1271호( );1861호( );2161호( );호외( ) 참조. 134 氏 神 と 氏 子 1924년 8월호, 3쪽. 135 全 鮮 神 職 會 總 會. 講 習 會 도 개최, 每 日 申 報 ( ). 136 氏 神 と 氏 子 1924년 7월호, 12쪽. 13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35 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시대사상에 순응케 해야 한다고 여겼다. 구체적 인 실천방안으로는 황도강습회를 통해 신도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우 수한 신직을 양성하고, 신사와 각종 단체의 결합을 강화하여 신사의 활 동을 보다 능동적으로 행하려고 했다. IV. 1920년대 중반~1930년대 초 경성신사의 확장과 조선인의 포섭 1. 조선신궁의 건립과 경성신사의 위상 조정 경성신사는 경성부민의 씨신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수도라는 경성의 지역 적 특성상 경성을 대표하는 신사인 동시에 한국을 대표하는 신사로서 일 종의 관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의 총진수로서 관폐대 사 조선신궁이 경성신사와 같은 남산에 세워지는 것은 경성신사가 가지 는 기존의 위상을 흔드는 것이고 심지어는 경성신사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신궁의 건립이 착착 진행하면서 경성신사의 위상에 대한 문제가 직접적으로 고려되기 시작했다. 137 이 문제는 조선신궁의 부지에서 비롯했 다. 1915년 조선신궁은 부지를 경성신사가 있는 남산공원으로 결정하였 다. 이때 경성신사를 한양공원이나 적당한 장소로 옮겨 존립시키거나 조 선신궁에 합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조선신궁이 {경성만의 씨신이 아니라 조선 13도의 수호신( 守 護 神 )인고로 내선인( 內 鮮 人 )이 모두 동일하 137 朝 鮮 神 宮 의 건립과 운영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김대호(2004), 앞의 글 참조.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35

136 게 이 씨자가 될 것}이라며 경성신사를 합사하여 {조선 전체의 씨신이 되 는 동시에 경성부민의 씨신으로 신사( 神 事 )를 행한다}는 것이다. 138 즉 조 선신궁에 경성신사를 합친다는 것은 사실상 경성신사를 없애고 조선신 궁이 그 역할을 한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조선신궁의 예산 획득이 1918년에 이루어지고 건립이 늦어지는 동안 1915년 경성신사가 씨자조직 을 만들고 1916년 인가를 받으면서 경성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자 경성신 사를 폐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139 그런 와중에 남산공원에 조선신궁을 짓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게 되자 조선신궁의 부지를 한양공원으로 옮기게 되어 경성신사는 자리를 옮길 필요 없이 존립하게 되었다. 140 하지만 조선신궁과 경성신사가 같은 남산에 있게 된 것은 다르지 않았다. 또한 1919년 7월 조선신궁의 제신( 祭 神 )이 메이지천황과 아마테라스로 결정되면서, 이미 아마테라스를 모시고 있던 경성신사는 더욱 심각한 존폐의 소지를 안게 되었다. 1925년 조선신궁이 거의 완성될 무렵 경성신사가 조선신궁에 합사되 리라는 소문이 다시 퍼졌다. 1925년 9월 1일 경성신사의 씨자총대들은 우마노[ 馬 野 ] 경성부윤을 만나 조선의 모든 대신궁(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신 사)들이 10월 17일을 예제일( 例 祭 日 )로 한다면서 조선신궁의 제전일과 동 일하여도 경성신사의 예제일은 변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41 이렇듯 경 성신사 관계자들은 경성신사의 존립과 위상에 대해서 매우 걱정하고 있 138 朝 鮮 神 社 新 造 營 計 劃, 每 日 申 報 ( ). 139 朝 鮮 神 社 社 格, 每 日 申 報 ( ); 朝 鮮 神 社 社 格 及 位 置, 京 城 日 報 ( ). 140 김대호(2004), 앞의 글. 141 京 城 神 社 例 祭 日 을 朝 鮮 神 宮 과 合 倂 說, 每 日 申 報 ( ). 13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37 그림 2 _ 경 성신사와 조선신궁의 위치도(1932년 기준)[ 大京城全圖 (1934, 경성부 토목과)의 부 분을 선택하여 편집 가공함] 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조선총독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 에 발생한 오해였다. 1925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신궁 예제일을 결정할 때도 경성신사의 폐지는 전혀 언급이 없고 단지 경성신사의 제례일과 조 선신궁 제례일을 어떤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인가가 주된 관심이었다. 예 제일을 결정할 때는 조선신궁의 신인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이세신궁의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37

138 신상제일( 神 嘗 祭 日 ), 또 다른 신인 메이지천황을 모시는 메이지신궁[ 明 治 神 宮 ]의 예제일, [병합 기념일] 등을 특별히 고려하였다. 게다가 경성부민의 진수로 모셔지는 경성신사와의 관계도 특별히 신중히 고려하였다. 내무국 장이 경성신사에 정식으로 의향을 조회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신궁의 예 제일에 관한 방안은 크게 4가지였다. 첫째, 가을에 날을 잡는다면 경성신사의 예제일을 봄으로 바꾸고 10 월 17일 또는 11월 3일로 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1월 3일은 한국의 기 후가 점점 추워지고 한편으로는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축일이므 로 10월 17일이 가장 적당하다는 안이었다. 둘째, 봄으로 선택한다면, 제 신과 관계 깊은 날이 없으므로 벚꽃이 만발하는 5월 5일로 하는 것이었 다. 셋째, 10월 17일로 하고 경성신사 예제일도 동일하게 하는 것으로, 이 안이 이치상 무리가 없고 부민으로서도 두 신사의 제사에 봉사할 수 있 어 정신상 좋으며, 시간을 변경하면 제전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도 좋고 제사도 성대하게 되는 좋은 방안이라고 하였다. 넷째, 10월 17일 조선신궁 예제, 18일 경성신사 예제로 연속해서 하는 것으로 이것도 좋은 방책으로 보았다. 즉 조선총독부 측에서는 경성신사의 폐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 었다. 1925년 6월 경성신사 예제일을 기존대로 17일, 18일(미코시 이동)로 유지한 채 조선신궁 예제일을 17일로 결정한 것은 경성신사와 조선신궁 을 연계하여 성대한 가을제사를 행하려 한 것이었다. 142 현실적으로는 조 142 手 塚 道 男 (1953), 朝 鮮 神 宮 御 鎭 坐 前 後 の 記, 海 外 神 社 史 上 卷, 東 京 : 海 外 神 社 史 編 纂 會, 440~441쪽. 참고로 비록 例 祭 는 아니지만 朝 鮮 神 宮 이 진좌 한 후인 1927년 1월 1일 오후 6시까지 朝 鮮 神 宮 除 夜 歲 旦 祭 에 1만 6771 명, 京 城 神 社 의 歲 旦 祭 에 1만 4155명이 참배하였다. 京 城 神 社 에서는 오후 6시 13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39 선신궁의 예제일에 경성신사의 예제일이 흡수되었다기보다는 신사의 축 제, 분위기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은 경성신사의 항례대제와 미코시 행렬, 즉 마츠리였다. 이는 경성신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권위를 계속해서 유 지시키겠다는 총독부 측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측 으로서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한국에 적응한 신사를 굳이 폐지할 필요가 없었고, 경성신사 관계자들의 반발도 꽤 거셌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볼 것이 조선신궁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입장이었 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에 유일하게 사격( 社 格 )을 가진 관사( 官 社 ), 관폐대 사 조선신궁을 종교적 성향이 강한 일반 신사와 분리하여 국가의례를 담 당하는 [국가의 종사( 宗 祀 )], 공공의 설비]로서 취급하고자 하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1925년 10월 29일 이쿠타[ 生 田 淸 三 郞 ] 내무국장( 內 務 局 長 ) 이 내린 관폐대사의 이름으로 기원, 기도, 결혼식 같은 종교적 행위는 피 하라는 명령이다. 이에 대해 다카마츠[ 高 松 四 郞 ] 조선신궁 궁사가 내무국 장에게 항의하자 내무국장은 {신사로 사상을 선도한다고 하는 것은 시대 착오( 時 代 錯 誤 )이고, 조선신궁의 창건 역시 시대착오인데, 이에 이르렀으므 로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143 내무국장이 이와 같이 답변한 것은 그들 역시 조선신궁이 가진 한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3천 명의 참배자가 더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朝 鮮 神 宮 과 京 城 神 社 는 지 리적으로 매우 가깝기 때문에 참배객 중 상당수는 두 神 社 를 동시에 방문했 을 것으로 보인다[ 참배자로 번화한 社 頭 의 元 旦, 京 城 日 報 ( )]. 朝 鮮 神 宮 과 京 城 神 社 의 例 祭 는 이보다 훨씬 많은 참가자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 된다. 143 조선고등비밀( 鮮 高 秘 ) 제3029호( ), 朝 鮮 神 宮 祈 願 祈 禱 에 관한 것 [ 手 塚 道 男 (1953), 앞의 글, 448~449쪽에서 재인용].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39

140 즉 신사가 가진 종교성과 그것이 일본인만의 전유물이라는 사실은 부정 할 수 없었던 것이다. 144 당시 식민지 신사 유치에 많은 힘을 기울이던 신도 관련자 오가사와라 [ 小 笠 原 省 三 ]는 조선신궁은 조선 전토의 씨신이지만 실제로는 총독부 관리 가 공적으로 참배하는 신사, 즉 총독부의 신사이며, 경성신사는 경성 전 부민( 府 民 )을 씨자로 하는 경성의 씨신이며 부민의 깊은 신앙에 의해 유 지되는 신사, 즉 경성부민의 신사라고 하였다. 145 오랫동안 경성신사 씨자 총대를 맡았던 경성신사 관계자 구기모토 도지로는 {조선신궁은 반도진 호( 半 島 鎭 護 )의 대신( 大 神 )으로 숭앙하고 경성신사는 부민 수호의 친신( 親 神 )으로 숭경하며, 부민 일상의 행사(결혼식, 자녀가 태어났을 때 신사에 참배 하는 것 등)는 신궁에서 하지 말고 전처럼 경성신사에서 하는 편이 씨신을 모시는 씨자로서 진실로 지당한 것이며 조선신궁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라고 하였다. 146 경성이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오랜 역사로 인해 사실상 한 국을 대표하는 관사와 지역 신사의 역할이 모호하게 혼합되어 있던 경성 신사가 이제 조선신궁이 들어서면서 경성부의 지역 신사로서 그 위상을 확립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경성신사에서는 조선신궁 이후 새롭게 위상을 정리하며 그에 걸맞게 신사의 체제를 정비해야 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서서 이를 주도한 인 물이 바로 새롭게 경성신사 사장( 社 掌 )이 된 이치 아키히로[ 市 秋 弘 ] 147 였 144 김대호(2004), 앞의 글, 343~344쪽. 145 小 笠 原 省 三 (1933), 海 外 の 神 社, 神 道 評 論 社, 188~189쪽, 192쪽. 146 釘 本 藤 次 郞 ( ), 有 難 き 極 み, 橫 田 康 편저, 朝 鮮 神 宮 紀, 京 城 : 國 際 情 報 社 년 일본 兵 庫 縣 출신으로 1895년 3월 고향에서 八 幡 神 社 社 司 가 되 14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41 다. 그는 1925년 10월 16일 내무성 신사국( 神 社 局 )의 위촉으로 경성신사 사장이 되었는데, 그가 신사를 맡은 시기는 조선신궁 진좌제(1925년 10월 15일)와 최초의 예제(10월 17일)가 시행되고 경성신사의 가을 마츠리가 시 행되는 급변의 시기였다. 새로운 사장 이치 아키히로는 바로 경성신사에 조선인을 포함시켜 신사를 중심으로 한 [내선일체]를 구현해야 한다고 주 장했다. 그는 처음에는 2년간만 사장을 맡기로 했으나 이후 1943년 10월 까지 경성신사의 사장(이후 궁사)을 맡으면서 경성신사를 명실상부하게 조 선인과 일본인이 모시는 경성의 씨신으로 만들고자 시도하였다. 148 즉 그 는 경성신사에 닥친 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경성신사를 진정한 경성 의 진수( 鎭 守 )로 만드는 것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다. 그를 비롯한 경성신사 측에서 우선 시도한 것은 바로 경성부의 수호신 인 경성신사의 위상을 법적으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경성신사는 비록 한국 내에서는 공인 신사지만 일본 신사제도 내에서 바라보면 사격이 없는 무격 사나 다름없었다. 1926년 2월 경성신사 씨자총대들은 경성신사가 조선신 궁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그동안 국폐사라고 할 정도로 많은 일을 맡아왔 다며 경성부의 수호신으로서 현사( 縣 社 )로라도 승격( 昇 格 )시켜달라고 출원 하였다. 4월의 한 기사에 따르면 경성신사 씨자총대들이 국폐대사로 해줄 것을 신청했는데, 조선총독부 측에서는 해당 법규가 없어 허가를 지연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149 고, 1902년 1월 伊 弉 諾 神 社 禰 宜, 1905년 長 田 神 社 禰 宜 를 거쳤다[ 朝 鮮 人 事 興 信 錄, 朝 鮮 新 聞 社, 1935(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 ID:NIKH. DB-im_215_01083)]. 148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 149 せめて 県 社 にても 京 城 神 事 を 昇 格, 京 城 日 報 6575호( 석간), 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41

142 그러나 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였다. 한국에 조선신궁 이외에 사 격을 지닌 관사가 들어서는 것은 1936년 8월에 이르러서였다. 당시 조선총 독부에서는 1도 1국폐사의 계획을 세우고 전국의 신사 중에서 경성신사와 부산의 용두산신사를 우선적으로 국폐소사( 國 幣 小 社 )로 승격시켰다. 이 역 시 경성신사의 청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따른 결과였 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1926년 당시 조선총독부는 현재 존재하는 조선신 궁마저도 부담스러워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관사를 더 이상 건립 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신궁은 관폐대사, 즉 관사( 官 社 )이므로 한국 내의 다른 신사와 달리 일본의 사격제 도 내에 포섭된 것이었고, 따라서 비록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신궁을 운영 하지만 그 창립과 제신 등에 관한 문제는 일본의 내무성, 궁내성 등과 논 의를 해야만 했고 내각의 고시로 창립되어 멋대로 조선총독부에서 통제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이렇게 경성신사의 시도가 현실적으로 무산되어간 것과 더불어 조선 신궁의 존재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게 경성신사를 위협했다. 총독부에서 제한을 했지만 조선신궁에서 사제( 私 祭 )를 지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대표적인 사제인 신전결혼식은 창립된 첫해인 1925년에는 10~12월 동 안 8건, 1926년 42건, 1927년 63건, 1928년 104건, 1929년 115건, 1930년 133건, 1931년 120건, 1932년 151건, 1933년 208건, 1934년 250건, 1935 년 244건, 1936년 327건, 1937년 343건, 1940년 451건, 1941년 735건, 1942년 884건 등 매년 260여 건을 조선신궁에서 거행하였다. 150 조선신 면; 京 城 神 事 を 國 幣 社 に, 京 城 日 報 6595호( ), 3면. 150 昭 和 四 年 の 朝 鮮 神 宮, 昭 和 六 年 の 朝 鮮 神 宮, 昭 和 七 年 朝 鮮 神 宮 年 報, 14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43 궁 신직이나 신사 관계자들의 강한 반발에 조선총독부 측에서 일정 부분 물러서며 방관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해 경성신사 측에서는 조선신 궁을 진좌할 때 조선신궁에서는 신전결혼은 취급하지 않겠다고 성명하였 는데 진좌 후 조선신궁에서 신전결혼식을 취급하고 있다며 당국에 이것 을 중지시켜줄 것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151 경성신사가 이렇게 조선신궁의 신전결혼에 대해 강한 반발을 가진 것 은 경성신사의 위상과도 관련 있지만 무엇보다 신전결혼이 바로 경성신사 의 재정과 크게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경성신사의 유지비가 씨자의 갹출 외에 신전결혼에서 가장 많이 나오던 당시 상황에서 종래 경성신사에서 취급하던 신전결혼이 점점 감소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경성신사의 운영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152 따라서 경성신사는 생존의 위기를 느끼고 조 선신궁의 신전결혼식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선 신궁의 신전결혼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153 昭 和 九 年 朝 鮮 神 宮 年 報, 昭 和 十 年 朝 鮮 神 宮 年 報, 昭 和 十 二 年 朝 鮮 神 宮 年 報, 昭 和 十 七 年 朝 鮮 神 宮 年 報. 151 神 前 結 婚 を 止 めて 貰 ひたい, 京 城 日 報 ( 석간), 3면. 152 神 前 結 婚 のお 株 をぜび 京 城 神 社 へ, 京 城 日 報 ( 석간), 2면. 153 시기가 달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1942년 京 城 神 社 에서 거행된 신전결 혼식은 800건이었다. 이는 같은 시기 朝 鮮 神 宮 이 행한 884건과 별 차이가 없 다. 참고로 당시 京 城 神 社 에서 결혼한 조선인은 약 250건에 해당한다.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43

144 2. 경성신사의 적극적인 조선인 흡수 이치 아키히로가 부임 직후 처음으로 맡은 1925년 가을 경성신사 대제는 조선신궁 진좌식과 함께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 가을대제에 는 중국인들도 다수 참가하고, 이전까지 행사에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던 조선인들도 [농자천하지대본( 農 者 天 下 之 大 本 )]이란 깃발을 걸고 농촌의 풍 물놀이를 하였다. 154 이치 아키히로에게 다양한 민족이 섞인 축제 풍경은 굉장히 큰 감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1926년 3월, 경성신사 씨자총대회의에서는 이번 가을 경성신사 대제 의 미코시 행렬이 명실상부하게 경성의 수호신답게 조선인 거주지도 통과 하기로 결정하였다. 155 앞서 살펴보았듯이 2월에는 경성신사를 현사 또는 국폐대사로 승격해달라고 출원하기도 했다. 또한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3 월경 경성신사 경내 대확장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미코시의 행렬보다, 높은 사격보다, 웅장한 건물보다 더 중요 한 것은 바로 사람, 즉 신을 믿는 사람, 씨자였다. 당시 경성신사는 사실상 일본인만의 반쪽짜리 신사에 지나지 않았다. 신사를 중심으로 한 [내선일 체]의 구현을 주장하는 이치 아키히로에게 경성신사가 진정한 경성의 진 수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바로 3@1운동 이후 배제되었던 조선인들을 다시 흡수하여 경성의 모든 부민을 씨자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154 진좌제후 최초인 금일의 大 祭 儀. 16일 京 城 神 社 전야제, 每 日 申 報 ( ); 지나인의 大 蛇 행렬. 京 城 神 社 의 鳳 輦 幸 啓, 每 日 申 報 ( ); 지나인 東 洋 劇 隊 의 삼국지 무사 행렬, 의미심원한 農 夫 행렬, 每 日 申 報 ( ). 155 せめて 県 社 にても 京 城 神 社 を 昇 格, 京 城 日 報 6575호( 석간), 2면. 14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45 치 아키히로는 3월 156 씨자총대회의 동의를 얻어 기존에 일본인만을 씨자 로 하였던 것을 조선인 120개 정회총대( 町 會 總 代 )에 도움을 청해 조선인 을 씨자로 편입하여 [내선일체]의 씨자단체를 만들었다. 157 일본인 각 정을 4개의 구로 나누고, 각 구 소속 각 정동마다 씨자총대 1인과 각 정 평의원 전부를 신사위원으로 하고 각 구에 2명씩 세화계( 世 貨 係 )를 선출하여 그 들을 간사로 삼아 신사 씨자를 총람하였다. 또한 새롭게 조선인 각 정동연 합회( 町 洞 聯 合 會 )를 제5구로 하여 씨자조직에 편입하였다. 일본인들은 지 역적인 단위로 구분되었고 조선인들은 민족적 단위로 하나의 구가 만들 어졌던 것이다. 즉 기존의 일본인 씨자조직에 조선인들 모두를 묶어 지역 을 넘어 민족별로 편제한 것이었다. 1932년 경성신사의 씨자조직에서 세 화계 10명 중 조선인 2명, 상담역 69명 중 조선인 18명, 씨자총대 177명 중 조선인 78명, 신사위원 1,345명 중 조선인 303명, 총 1,601명 중 조선 156 京 城 神 社 由 緖 記 (1932년)에서는 3월로 표기되어 있으며 市 秋 弘 이 기록한 京 城 神 社 奉 仕 事 務 摘 要 (1943년 8월 기록/1953년 인쇄)에는 9월로 적혀 있 다. 京 城 神 社 由 緖 記 가 시기적으로 더 앞설뿐더러 손으로 직접 써서 경성부 에 제출한 공식문서이며, 앞서 살펴보았듯이 1926년 2~4월경 京 城 神 社 를 현 사 또는 國 幣 大 社 로 승격시켜달라는 청원을 하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3월경 京 城 神 社 경내 대확장 계획을 세우므로 이와 함께 조선인 氏 子 를 흡수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9월의 경우는 10 월 대제 준비가 벌써 시작되므로 조선인을 氏 子 조직에 흡수하는 것을 논하기 에 적당하지 않다. 단, 1926년 10월 가을 대제부터 조선인 거리(안국동 일대)를 마츠리 행렬이 지나게 되므로 이와 관련하여 9월에 조선인을 氏 子 조직에 흡수 할 것이 논의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미 3월에 神 輿 행렬이 조선인 거주 지를 통과하기로 결정하면서 논의되었을 가능성도 크므로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京 城 神 社 의 조선인 氏 子 흡수는 3월로 보는 것이 옳다. 157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에서 재인용.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45

146 인 401명이었다. 158 이로써 경성신사 씨자조직은 크게 확대되어 경성의 모 든 지역과 모든 부민을 아우르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비록 활동은 미미했지만 지역유지를 통한 임의 적인 행정보조기관인 정동총대제도가 어느 정도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1925년부터 경성부에서는 정동총대를 초대하여 매년 정동총대회 혹은 정동총대통상타합회( 町 洞 總 代 通 常 打 合 會 )를 개최하였고, 1922년부터는 정 동총대들을 횡적으로 결합시킨 조직도 등장했다. 또한 1926년 말 경성부 에서 조선인 공동묘지를 신설하려고 했을 때 조선인 정동총대 연합회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구성원의 사적인 이해관계 실현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159 경성신사에서 씨자조직을 조선인에게까지 확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이러한 정동총대 조직, 특히 조선인 정동총대 연합회 조 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동총대 연합회 자체를 하나의 구로 취급한 것은 단순히 개별적인 일반 조선인 거주자들을 흡수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정동총대 연합회의 중심인 조선인 유지들을 경성신사의 씨자라는 [명예스 러운] 자리에 포함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조선총독 부에서 주장하던 [내선융화( 內 鮮 融 和 )]라는 선전구호와도 맥락을 같이하 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인을 씨자조직에 포함시킨 후 경성신사의 조선인 흡수전략은 더 욱 가속화되었다. 1926년 가을제사에는 계획대로 미코시가 처음으로 안 국동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지났다. 160 이전까지 배제되고 있던 조선인 지 158 京 城 神 社 由 緖 記. 159 서현주(2001), 앞의 글. 160 京 城 神 社 秋 まつり, 京 城 日 報 ( ); 明 るい 電 飾 門, 京 城 日 報 ( ); 京 城 神 社 전야제 집행. 전 도시 시끌벅적, 京 城 日 報 (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47 역에 미코시를 운반한 것은 조선인들에게 성대한 경성신사 미코시 운반 행사를 보여주어 관심을 유도하고, 조선인들이 진실로 씨자조직에 포함되 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조선인 씨자조직에 참가하는 조선인 유지들을 배 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1926년 10월 1일 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신청 사가 준공되고 10월 30일에는 덕수궁 앞에 경성부청이 들어서면서 서울 북쪽의 도시 지형에 큰 변화가 생긴 것도 미코시 행렬이 안국동 일대, 즉 서울 북쪽까지 확대된 주요 이유일 것이다. 1927년부터는 미코시 도어식을 정비하여 창덕궁 앞, 조선총독부 앞에 서 미코시를 멈추는 관례를 시작하고, 조선인 씨자의 발의로 조선풍속 감 사행렬을 추가했다. 161 창덕궁 앞에서 미코시를 멈춰 조선의 구황실( 舊 皇 室 )을 존중하고 구황실과 경성신사가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처럼 보이고 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왁자지껄한 경성신사의 미코시 행렬이 조용한 왕 궁 앞에 서 있는 것은 실제로는 경성신사의 신덕( 神 德 )을 과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조선풍속 감사행렬을 끼워넣어 조선인들을 경성신사 제사 행사에 조직적으로 참가시키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1931년에는 경성신사 최초로 씨자구역 제5구, 즉 조선인만 으로 대제를 집행했다. 당시 씨자총대는 80인으로, 수개월 동안 정동연합 회에서 여러 차례 총회를 열어 위원장 전성욱( 全 聖 旭 ), 부위원장 백낙삼( 白 樂 三 ) 또는 이동혁( 李 東 爀 ), 설비계장 예종석, 어기물계장( 御 器 物 係 長 ) 박기 ); 드디어 오늘 밤 마츠리의 막이 열림, 京 城 日 報 ( ); 太 鼓 를 치고, 흥을 돋구는 巡 幸, 京 城 日 報 ( ); 神 輿, 남산으로 還 御, 京 城 日 報 ( ). 161 市 秋 弘 (1943), 앞의 글; 京 城 神 社 恒 例 大 祭, 모든 준비 착착 진척, 每 日 申 報 ( ).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47

148 그림 3 _ 경 성신사 미코시 행렬 코스(1931년)[京城精密地圖 (1933, 三重出版社)에 朝鮮色 농후할 古典的 慶祝행 렬, 每日申報 ( ) 기사를 참조하여 작성함]. 14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49 홍( 朴 基 鴻 ) 등이 대제를 준비하였다. 162 이들은 [내선융화]의 일단으로 조 선인 측에서 순일본식의 제례를 차질 없이 집행해야 한다며 약 300인의 계원( 係 員 )들이 일제히 흰 옷깃의 검은 상의를 만들고 열심히 연습을 행했 다. 163 또한 대제위원들이 기존의 신발과 달리 조선의 버선에 흰 신을 갖 추고, 경축 조선 행렬의 등롱과 나졸( 羅 卒 )이 늘어서고, 조선군악을 연주 162 이번 대제를 운영한 조선인 간부는 다음과 같다[ 京 城 神 社 恒 例 大 祭, 모든 준 비 착착 진척, 每 日 申 報 ( )]. 단, 괄호 안의 한글은 정확히 인식한 것이고, 는 인쇄가 모호하여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는 그마저도 불가능한 것이다. 부위원장의 경우 每 日 申 報 에 서는 白 樂 三 이라 하지만, 海 外 神 社 史 에서는 李 東 赫 이라 한다[ 小 笠 原 省 三 (1953), 앞의 책, 186쪽]. - 委 員 長 : 全 聖 旭 - 副 委 員 長 : 白 樂 三 (백 삼) 또는 李 東 赫 - 御 先 導 係 長 : 太 - 御 先 導 副 係 長 : 朴 疇 明 (박 명), 金, 金 敬 熙 - 御 警 護 係 長 : 梁 在 昶 ( 재 ) - 御 警 護 副 係 長 : 朴 昇 (박 ), 鄭 仁 好, 金 永 漢, 洪 在 昌, 尹 星 鉉 (윤성 ) - 行 列 係 長 : 李 東 爀 - 行 列 副 係 長 : 鄭 圭 煥, 劉 永 烈, 李 - 賄 係 長 : 高 濟 - 賄 副 係 長 : 張, 朴 辰 榮 (박 영) - 設 備 係 長 : 芮 宗 錫 - 設 備 副 係 長 : 張 基 鴻, 李 仁, 洪 殷 柱 ( 은주) - 御 器 物 係 長 : 朴 基 鴻 - 御 器 物 副 係 長 : 仁 成, 趙 仁 鎬, 崔 翰 宇 163 アッと 云 はせる 朝 鮮 人 側 の 珍 趣 向 例 年 にない 盛 大 な 京 城 神 社 恒 例 大 祭, 京 城 日 報 8580호( 석간), 7면,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49

150 하며 진행하는 등 상당히 조선 색이 농후한 행사였다. 조선인 측에서도 여러 대의 옥대가 나왔다. 164 대제위원장 전성욱은 {경성신사의 신직들이 내선융화는 먼저 씨신의 경내( 境 內 )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는데 이번에 몸소 체험}했고, {신사는 신성한 공존공영( 共 存 共 榮 )의 전당( 殿 堂 )으로 민족정신의 원동력을 양성 하는 일대영장( 一 大 靈 場 )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대제위원장의 복장이 내지의 고등관제복( 高 等 官 制 服 )이어서 꺼렸지만 막상 입고 보니 경 성부민의 대표 제일인이 되어 옥대에 오른 것 같았다}고 하였다. 165 또한 그의 친구, 선배가 제전 봉사에 의해 병기( 病 氣 )가 완쾌되는 기적적 사실 을 보았다는 개인적인 종교 체험을 토로하기도 했다. 166 이로 보아 경성신 사의 대제는 친일 조선인들을 흡수하는 강한 힘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 은 이전까지 소외되었던 감정을 경성신사의 제전을 통해서 해소하였던 것 이다. 이로써 경성신사는 씨자조직에서도 조선인들을 흡수한 데 이어, 실 질적인 제전에서도 조선인을 참여시켜 사실상 조선식 신사로서 완결된 모 습을 보였다. 그런데 당시 이동혁은 {조선인들이 열심히 일했던 것은 이전 에 조선국혼신( 朝 鮮 國 魂 神 )을 배사( 配 祀 )해서 조선인의 열망을 달성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67 이동혁이 말한 [조선국혼신]이 무엇이기에 그 신을 164 京 城 神 社 恒 例 大 祭, 모든 준비 착착 진척, 每 日 申 報 ( ); 朝 鮮 色 농후할 古 典 的 慶 祝 행렬, 每 日 申 報 ( ); 長 安 大 街 골골마다 大 祭 기분이 充 溢, 每 日 申 報 ( ); 前 夜 祭 장엄히 거행, 今 朝 神 輦 御 進, 每 日 申 報 ( ); 小 笠 原 省 三 (1953), 앞의 책, 186쪽. 165 京 城 神 社 の 例 祭 に 朝 鮮 人 の 熱 誠 なる 奉 仕, 皇 國 時 報 ( )[ 小 笠 原 省 三 (1953), 앞의 책, 186~187쪽에서 재인용]. 166 小 笠 原 省 三 (1953), 앞의 책, 190쪽. 15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51 모셔서 조선인의 열망을 달성했다고 하는 것일까? 국혼신의 합사 [국혼신]이라는 신은 식민지에 신사를 보급하기 위하여 새롭게 만든 신이 었다. 1925년 봄 신도 관계자들은 조선신궁에 단군( 檀 君 )을 합사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단군이란 존재는 조선인들의 일부만 이 믿는 신이며 자신들이 지고하게 여기는 조선신궁의 신, 즉 아마테라스 와 메이지천황과는 격이 맞지 않다며 단군을 조선신궁에 함께 모시는 것 을 반대했다. 이러한 반대의 이면에는 이후 각성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것을 꺼리는 마음도 존재했다. 이때 일본의 신도 관 계자들이 단군 대신에 다시 들고 나온 것이 바로 [국혼신]이었다. 국혼신 이란 땅에는 신령이 있다는 일본 신도( 神 道 )논리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토 지신이었다. 즉 한국이라는 땅이 있는 이상 그 땅에는 신령이 있을 것인데 그 신의 이름을 모르니 땅의 신, 즉 국혼신이라고 부르자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각 왕조의 시조나 건국 유공자들도 모두 이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따라서 국혼신은 특정한 신이라기보다는 어떤 지역, 특히 일본적 인 신들의 세계에서 벗어난 지역, 즉 식민지와 같이 일본 외부의 특정 지 역을 일본의 신도체제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만들어진, 일본인의 눈에만 보이는 망상의 절름발이 신이었다. 물론 조선총독부 측에서는 이 러한 신도 관계자들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京 城 神 社 の 例 祭 に 朝 鮮 人 の 熱 誠 なる 奉 仕, 皇 國 時 報 ( )[ 小 笠 原 省 三 (1953), 앞의 책, 186~187쪽에서 재인용].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51

152 앞서 언급했듯이 경성신사는 이미 아마테라스라는 신을 모시고 있었 다. 그런데 일본인들의 보편신에 가까운 아마테라스의 존재만으로는 새롭 게 경성부의 진수( 鎭 守 )가 된 경성신사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을 포함한 모 든 경성부민의 지역적인 신앙심을 결집시키는 데는 뭔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의 신도 관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 고장을 번영시켜주고 지켜주는 우리 고장만의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태껏 일본인들 은 그 신이 뭔지를 모르고 있었다. 무언지 모르는 채울 수 없는 허전함 속 에 있던 일본인들의 아련한 갈증을 단번에 해소시켜주는 존재가 나타났 다. 그것이 바로 [거시기], 즉 국혼신이었던 것이다 년 8월 경성신사에서는 신으로 모시던 아마테라스 외에 국혼신 을 경성신사에 추가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경성신사의 제신문제( 祭 神 問 題 ) 현지조사( 現 地 調 査 )를 위하여 조선총독부에 의뢰하여 내무성( 內 務 省 ) 신사국( 神 社 局 ) 고증관( 考 證 官 ) 미야지 나오이치[ 宮 地 直 一 ]를 초빙하였다. 미야지는 조사를 마친 후 조선총독에게 경성신사에 국혼신을 1좌( 座 ), 오 나무치[ 大 己 貴 命 ] 小 彦 名 命 ] 170 를 1좌로 하여 아마테라 168 朝 鮮 神 宮 祭 神 논쟁과 國 魂 神 의 창출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김대호(2004), 앞의 글 참조. 169 주로 大 己 貴 神 ( 日 本 書 紀 ), 大 穴 牟 遲 神 ( 古 事 記 )이라고 표기되며, [오나무치 (노가미)]라고 읽는다. 여기서는 大 己 貴 命 [오나무치(노미코토)]으로 적혀 있다. 大 國 主 神 [오오쿠니누시]의 異 稱 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大 己 貴 命 은 小 彦 名 命 과 같이 국토(특히 出 雲 지방)를 조성한 신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農 耕 神 적 성격이 강하다. 170 小 彦 名 命 ( 日 本 書 紀 ), 小 名 毘 古 那 神 ( 古 事 記 )이라고 쓰여 있으며, [스쿠나히 코나(노미코노)] 또는 [스쿠나히코나(노가미)]라고 읽는다. 小 彦 名 命 은 大 己 貴 命 과 함께 일본 국토를 만든 신으로, 보통 두 신이 한 쌍으로 등장하고, 두 신 15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53 스 좌우에 모셔야 한다고 보고했다.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경성신사에 국 혼신과 오나무치, 스쿠나히코나를 더하면 신위( 神 威 )를 더욱 빛낼 것이라 고 하였다. 그는 국혼신은 오랜 옛날에 {반도( 半 島 )를 개발경영( 開 發 經 營 )} 을 하여 {금일( 今 日 )의 융운( 隆 運 )을 이루는 기초를 확고히 하신 대신( 大 神 )}이라며 그 신은 유우랴쿠천황[ 雄 略 天 皇 ] 시절 백제에서 제사 지내던 [건방신( 建 邦 神 )]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나무치, 스쿠나히코나는 신대( 神 代 )에 천하를 경영하고 국토를 크게 만드신 공적이 있고 모든 이가 그 은혜를 입은 [국작신( 國 作 神 )]으로 모두가 숭경하여, 이 삼신( 三 神 )은 국 토의 [수리고성( 修 理 固 成 )에 관한 기본 신격( 基 本 神 格 )]에 해당한다고 하였 다. 171 당시 경성신사의 제신 선정을 둘러싸고 많은 풍문이 돌았던 것으로 보 인다. 오사카아사히신문[ 大 阪 朝 日 新 聞 ] 은 경성신사에 두 신을 합사한다 는데, 한 신은 국진신( 國 津 神 )으로 조선과 가장 관계가 있던 스사노오[ 素 盞 鳴 尊 ], 이타케루[ 五 十 猛 命 ] 두 신을 1주( 柱 )로 하고, 다른 신은 조선의 조 상신 단군과 단군 외에 5신( 箕 子, 신라@백제@고려@조선의 신)을 1주로 모신 다고 하며, 한국의 신사에서 한국의 신을 제사 지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이라며 조선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였다. 172 국진신 중 스사노오는 신화( 神 話 )에서 아마테라스의 동생으로 일본에 내려올 때 한 이 협력하여 농경과 의료를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小 彦 名 命 은 바다를 통한 개 척과 관련이 있는 신이다. 小 彦 名 命 이나 小 彦 名 神 의 차이는 없고 뒤의 경칭만 바꾼 것으로 보인다. 171 岩 下 傳 四 郞 (1941), 앞의 책, 92~93쪽. 172 朝 鮮 の 祖 先 神, 檀 君 を 京 城 神 社 に 合 祀 する, 大 阪 朝 日 新 聞 ( )(국사 편찬위원회 신문스크랩자료 ID:NIKH.DB-np_sc_1929_03_09_0070).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53

154 국에 들렀다 갔다는 신으로 흔히 단군과 동일시 되곤 하는 신이다. 조선 신궁에 단군을 합사하자는 주장이 나올 때도 스사노오는 단군과 같다는 것이 단군 합사론의 주된 근거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따라서 위에서 나 온 국진신은 국혼신을 잘못 안 것으로 보이며 당시 스사노오와 동일시되 곤 했던 단군을 굳이 또 조선의 신으로 따로 모신다고 하는 것 역시 국혼 신을 둘러싼 복잡한 논의 속에서 잘못 전해들은 것으로 보인다. 경성신사에서는 1929년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 제신 아마테라스 외 에 [반도개발의 시조( 始 祖 )] 국혼대신 외 2신(오나무치, 스쿠나히코나)을 합 사하기 위하여 경성신사 사장 이치 아키히로가 9월 24일 밤 12시 북한산 정상에서 강신식( 降 神 式 )을 거행하고, 9월 25일 오전에 옛 사전( 社 殿 )에서 합병제( 合 倂 祭 )를 치르고 저녁에 신축한 본전에서 천좌제( 遷 座 祭 )를 집행 하였다. 이로써 경성신사의 제신은 아마테라스를 1좌, 국혼대신을 1좌, 오 나무치와 스쿠나히코나를 합쳐 1좌로 하여, 총 3좌 4신이 모셔졌다. 173 이 때 국혼신은 국혼대신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국혼대신은 경성신사에서 직접 하늘에서 모셔온 신으로 일본 신도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산에 내려 왔다. 즉 이전까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을 새롭게 만든 것이었다. 국혼대신은 조선이라는 [지역성]에 기반한 조선의 신이었기에 앞서 이동혁 이 말한 것처럼 흔히 [조선국혼신]이라고 불렀다. 조선신궁에 국혼신 합사 를 주장했던 신도 관계자 오가사와라는 {경성신사는 조선국혼신의 합사 에 의해 명실공히 경성 전 부민의 씨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岩 下 傳 四 郞 (1941), 앞의 책, 91~94쪽, 319~322쪽;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 ~456쪽. 174 小 笠 原 省 三 (1933), 앞의 책, 183쪽. 15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55 그러나 조선총독부에서는 [국혼신]을 [조선국혼신]으로 부르는 것을 굉 장히 꺼리고 있었다. 1934년 내무국장은 각 도지사에게 神 社, 神 祠 의 제 신 중 국혼신을 모실 때 특히 [조선]이라는 문자를 더해 [조선국혼신]으로 부르는 것은 허가하지 않는다는 통첩을 보냈다. 1932년 경성신사에서 경 성부에 제출한 경성신사유서기 에서 제신 항목의 조선국혼신에서 [조선] 이 지워져 있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175 조선총독부가 [조선]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을 허가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1936년 8월 한국의 신사제도에 큰 변화가 생겨 경성신사가 국 폐소사가 되었을 당시 조선총독부 내무국장이 각 도지사에 보낸 통첩에 서 신사의 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처리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제신( 祭 神 )에 대해 종종 조선에서 예부터 전해오는 신격( 神 格 )을 모시 기를 희망하는 경향이 있어 적당한 신격에 대해 연구하여 이번 국폐소 사 경성신사, 용두산신사의 제신으로서 국혼대신에게 국폐를 바치게 한 것은 이러한 실정을 살펴 조선에서의 국토( 國 土 ) 고성( 固 成 )의 근본 신격으로서 모신 것에 다름 아니므로, 지금 조선인이 신앙의 대상으로 서 조선에서의 신격을 모시기를 희망하는 경우는 국혼대신을 제신으 로서 취급할 것. 단 이 경우에도 아마테라스[ 天 照 大 神 ]와 합사하여 2 주( 柱 )를 주신( 主 神 )으로 할 것. 176 즉 국혼대신이란 특정한 신이라기보다는 [국토 고성의 근본 신격], 쉽게 175 祭 神 의 호칭에 관한 건 1934년 10월. 각 도지사에 대한 내무국장 통첩[ 朝 鮮 神 職 會 (1937), 앞의 책, 243쪽]. 176 神 社 에 관한 법령의 시행에 관한 건[ 內 秘 제89호. 각 도지사에게 내 무국장 통첩[ 朝 鮮 神 職 會 (1937), 앞의 책, 39~53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55

156 표 1 _ 조선에서 국혼신을 모신 신사의 제신 社 格 地 域 社 名 國 魂 大 神 天 照 大 神 明 治 天 皇 素 戔 鳴 尊 國 幣 小 社 경기도 京 城 神 社 國 幣 小 社 강원도 江 原 神 社 國 幣 小 社 경상남도 龍 頭 山 神 社 國 幣 小 社 경상북도 大 邱 神 社 國 幣 小 社 전라남도 光 州 神 社 國 幣 小 社 전라북도 全 州 神 社 國 幣 小 社 평안남도 平 壤 神 社 國 幣 小 社 함경남도 咸 興 神 社 道 供 進 社 경상북도 金 泉 神 社 道 供 進 社 황해도 海 州 神 社 邑 供 進 社 강원도 江 陵 神 社 강원도 原 州 神 社 경상북도 慶 州 神 社 전라남도 麗 水 神 社 황해도 延 安 神 社 황해도 安 岳 神 社 기타 합계 비고 춘천 神 社 에서 佐 藤 弘 毅 (1998), 戰 前 の 海 外 神 社 一 覽 II - 朝 關 東 滿 洲 中 華 民 國, 神 社 本 廳 敎 學 硏 究 所 紀 要 3 號. 개칭 말하면 토지신 정도에 해당하는 보통명사인 것이다. 또한 국혼대신을 모 실 경우에는 반드시 아마테라스와 짝을 지어 모시도록 되어 있었다. 표 1 을 보면 이 지시가 어김없이 지켜졌음을 잘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국혼대신은 홀로 모셔진 경우는 없고 항상 아마테라스라 는 일본 최고의 신과 함께 짝으로 존재하였다. 이는 국혼대신이 내포한 불 완전성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이다. 이러한 국혼신은 중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물론 중국에 모셔진 국혼 신 역시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도 질서 안에서 그 지역의 토지신을 마 15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57 음대로 상상하고 부르는 이름인 것이다. 따라서 국혼신은 신도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개념이었으므로 행정 당국자들보다는 신도 관계 자들이 더 선호하던 개념이었다. 일본 외무성( 外 務 省 )에서는 중국에서 국 혼신을 모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신도 관련기구인 황전강구소 의 [해외신사협회( 海 外 神 社 協 會 )]와 신사국의 주장으로 점차 외무성 동아 국( 東 亞 局 )의 사토[ 佐 藤 ], 네미치[ 根 道 ] 두 과장( 課 長 )이 설득되어 중일전쟁 이후에는 중국 내 신사규칙을 정비하여 국혼신을 모시도록 하였다. 당시 중국에 있는 신사에 국혼신이 봉재하게 된 것은 해외신사협회가 이미 국 혼신에 대해 많은 정비를 한 조선의 신사 관련자들을 모아 연구하고 추진 한 결과였다. 177 이렇듯 경성신사의 국혼신 봉재를 통해 조선인 씨자들을 흡수할 수 있는 [정당한] 논리를 만들 수 있었다. 신사의 신들이 [내선융화]를 이루었 으므로 조선인들도 씨자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로써 경성신 사에서는 조선의 [지역성]을 토대로 한 침투의 논리를 가지게 되었다. 4. 경성신사의 경내 확장 1920년대 후반 경성신사는 사격을 요청하고 씨자조직에 조선인 조직을 흡수하고 국혼신을 모시면서, 동시에 경성신사의 시설 및 경내 확장을 꾀 했다. 1910년대 경성부의 인구는 25만 명 전후였고 1921년경부터 매년 1 만여 명씩 숫자가 늘어 1925년에는 약 30만 명에 달하며 인구는 점점 더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178 경성신사도 이러한 경성의 변화와 더불어 기 177 小 笠 原 省 三 (1953), 앞의 책, 29~30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57

158 존의 낡고 좁은 사전을 확대하고 경내지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년 8월 신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큰 도리이[ 大 鳥 居 ]를 동대문 밖 채석장에서 캐온 높이 28척, 지름 2척 3촌의 석재로 만들었다 년 3월에는 경성신사 씨자총대회가 경내를 확장하고 신전을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10만 원의 예산으로 신명조( 神 明 造 ) 180 로 단층집에 동 즙( 銅 葺 )으로 개축하기로 하고, 씨자총대 및 정내 평의원 중에서 신축위 원, 서무, 회계, 기부의 4계( 係 ) 위원을 뽑아 9월까지 기부 모집을 마치고 기부금을 모은 다음 공사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181 그런데 1926년 5월에 사이토 조선총독이 비공식적으로 도미다[ 富 田 儀 作 ]를 통해 경성신사 조영 을 그만둘 것을 총대장 및 주임신직에게 교섭하여 왔지만 경성신사 측에 서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년에는 경성신사의 사전 신부지의 선정에 관한 문제가 발생했다. 옛 경성신사의 위쪽으로 정해진 새로운 부지 중에서, 그 부지의 윗부분(즉 남산 방면)에 두느냐, 아니면 아랫부분(즉 시가지 방면)에 두느냐 하는 것이 었다. 당시 신사 건축 최고의 권위자로 도쿄 대학교수이자 메이지신궁@조 선신궁 설계자였던 이토 쥬타[ 伊 東 忠 太 ]에게 이 문제를 위촉했지만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당시 경성신사와 가까운 아래쪽 부지로 결정 했다. 183 이토 쥬타는 두 후보지를 분석하고 {민중적으로 하기에는 전방 178 京 城 府 史 부록 경성부호구표. 179 氏 神 と 氏 子, 1924년 8월호, 3쪽. 180 神 社 건축의 한 양식. 伊 勢 神 宮 의 신전이 대표적임. 181 京 城 神 社 改 築, 京 城 日 報 ( ). 182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 183 市 秋 弘 (1943), 앞의 글. 15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59 ( 前 方 )으로 나오는 편이 좋다}, 즉 아래쪽에 두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이 결정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184 이때 이토 쥬타가 말한 [민 중적]이란 의미는 [관( 官 )]과 대비되는 [민( 民 )]이라기보다는 접근의 편의성 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경성신사 측에서는 그 후 예산을 20만 원으로 변경하고, 25만 원의 기 부금을 얻어 1928년 5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제신 증사( 增 祀 )문 제로 잠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자금 부족보다는 신사의 건축 양식 이 흔히 모시는 신과 크게 관련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제신 문제가 어 느 정도 일단락되자 다시 산을 깎고 계곡을 메워 신전( 神 殿 ), 폐전( 幣 殿 ), 배전( 拜 殿 ), 신찬소( 神 饌 所 ), 수수사( 手 水 舍 ), 참집소( 參 集 所 ), 사무소( 事 務 所 ) 등 중요 건물을 완성하여 1929년 9월 25일 신전제( 新 殿 祭 )를 거행했 다. 185 처음 계획과는 달리 신전은 일본 헤이안조[ 平 安 朝 ]의 양식으로 일 본 교토[ 京 都 ]의 가모신사[ 加 茂 神 社 ]와 동일한 형식으로, 신전은 류조( 流 造 ), 186 배전( 拜 殿 )은 입모옥조( 入 母 屋 造 ) 187 양식이었다. 재료는 내전( 內 殿 ) 에 일본 기소[ 木 曾 ]의 회나무[ 檜 木 ], 배전에 압록강의 홍송( 紅 松 ), 지붕은 동즙을 사용하였다 월 24일 새롭게 한국에 강림한 국혼대신을 비롯 184 上 澤 啓 二 ( ), 京 城 神 社 の 設 計 に 就 て, 朝 鮮 と 建 築 제4집 제12호; 靑 井 哲 人 (2005), 앞의 책, 247쪽에서 재인용함. 185 京 城 神 社 由 緖 記 ; 市 秋 弘 (1943), 앞의 글. 186 神 社 건축 양식. 맞배지붕 형태. 지붕의 앞면이 뒷면보다 긺. 187 팔작지붕 형태의 건축양식. 188 長 野 末 喜 (1932), 앞의 책, 123쪽. 여기서는 [ 木 檜 ]라고 적혀 있지만, 내용상 지 명으로 보여 木 曾 으로 고쳤다. 木 曾 은 長 野 현에 있는 지명으로, 유명한 목재의 산지이다. 朝 鮮 神 宮 正 殿 을 건축할 당시에도 木 曾 의 檜 材 를 사용하였다.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59

160 한 경성신사의 신들은 9월 25일 새로운 신전에 모셔졌다. 이러한 공사들 을 거치며 경성신사는 창립 이래 점차 확장되었다. 1915년에는 평 으로 1915년 7월 허가를 받고 섭사( 攝 社 ) 텐만궁을 창립하여 평이 증가하였다. 1928년 5월 당시에는 총 평수 4,590평이었으며 1932년에는 본사 경내는 6,315평(그 중 1,725평은 경내 편입 수속 중)으로 신전 6평, 배전 29.33평이었다. 189 또한 경성신사 본사를 건립할 당시 논의되던 위쪽 지역 에는 경성신사의 섭사 이나리사( 稻 荷 社 )가 세워졌고, 구경성신사 사지에 는 섭사 하치만사[ 八 幡 社, 宇 佐 八 幡 宮 ]가 진좌되었다 년 9월 17일 철도국의 허가를 받고 개간하여 면전 800평을 설정하고 용산 문평산( 文 平 山 )에 영구적인 여소, 즉 미코시가 하루 머무는 시설을 만들기로 계획하 고 신전, 중문( 中 門 ), 옥원( 玉 垣 ), 도리이[ 鳥 居 ], 석등롱, 사호표( 社 號 標 ), 숙 위사( 宿 衛 舍 ) 등을 설치하기로 하여, 년에 신전, 숙위사는 가을대 제를 전후해서 완성되었다. 192 이렇듯 경성신사는 섭사들을 갖추며 경성을 대표하는 신사로 자리잡 아갔다. 경성신사 경내에는 텐만궁, 하치만궁[ 八 幡 宮 ( 宇 佐 八 幡 社 )], 이나리 사[ 稻 荷 社 ( 伏 見 稻 荷 社 )], 노기신사[ 乃 木 神 社 ]가 있었다. 이중 텐만궁, 하치만 189 京 城 神 社 由 緖 記 ; 小 笠 原 省 三 (1933), 앞의 책, 181~182쪽. 190 市 秋 弘 (1943), 앞의 글; 京 城 神 社 由 緖 記. 191 위와 같음. 市 秋 弘 의 1943년 기록에 따르면 [1930년 10월]에 용산 여소 [900평] 을 만들기로 계획하였다고 하여 다소 차이가 있지만, 京 城 神 社 由 緖 記 (1932) 의 기록이 시기가 가깝고 경성부에 직접 적어서 제출한 것이므로 좀 더 정확 하리라 생각하여 京 城 神 社 由 緖 記 의 기록에 따랐다. 단 京 城 神 社 由 緖 記 가 작성된 이후 좀 더 면적이 확장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192 京 城 神 社 恒 例 大 祭, 모든 준비 착착 진척, 每 日 申 報 ( ). 16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61 그림 4 _ 京城神社 배치도( 京城神社御由緖記 의 [京城神社境內圖]를 편집함). 궁, 이나리사는 경성신사의 섭사였고, 노기신사는 경성신사의 경내사이 면서 실질적으로 조선신궁의 섭사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193 현재에도 텐 만궁의 천신(天神) 신앙, 하치만궁의 하치만 신앙, 이나리사의 이나리 신 앙194 과 더불어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경성신사 본사의 이세 신앙과 관련 193 市秋弘(1943), 앞의 글, 쪽에서 재인용. 194 天滿宮에서 모시는 天神 菅原道眞은 학문과 문화의 신으로 일본 내에서도 稻 荷 신앙과 함께 가장 인기가 있다. 八幡神은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무사의 수 호신이 된 이래 전국에 퍼졌고 불교와도 섞여 八幡大菩薩이라고 부르며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이다. 稻荷 신앙은 일본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신앙으로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61

162 된 신사는 일본 전체 신사 수의 3분의 2 이상을 점한다. 195 이처럼 경성신 사는 텐만궁, 하치만궁, 이나리사라는 섭사를 통해 일본인들의 신사 신앙 을 큰 차질 없이 흡수할 수 있었다. 텐만궁은 경성 거류민단 시절인 1902년 4월 25일(또는 5월 25일) 창립 된 것으로 제신은 스가와라 미치자네[ 菅 原 道 眞 ]였다. 섭사 중에서 가장 오 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1915년 12월 확장공사를 하였다. 196 텐만궁과 관련된 경성의 행사로는 텐만시[ 天 滿 市 ]라는 봄철 대할인 판매가 있었다. 이는 1924년부터 경성의 일본인 상인들이 조선인 상인들과 합쳐 4월 24~ 여우상과 붉은 鳥 居 가 상징이며 稻 荷 大 明 神 은 상공민의 신, 농경의 신이다. 박 규태(2005), 일본의 神 社, 살림, 24~26쪽 년 현재 일본의 神 社 는 총 8만 1,304개소로 전체 분사의 수는 14만 개소 에 이른다. 天 滿 宮 의 분사는 1만 1천 개, 宇 佐 八 幡 宮 의 분사는 1만 5,600개( 石 淸 水 八 幡 宮 의 분사는 2만 5천 개), 伏 見 稻 荷 社 의 분사는 3만 2천 개로 총 5 만 8,600개가 있고 더욱이 京 城 神 社 는 창립 당시부터 그 성격이 사실상 伊 勢 神 宮 의 분사에 가까운 것을 고려하면, 현재 伊 勢 神 宮 의 분사는 1만 8천 개이 므로 한 神 社 에서 京 城 神 社 와 같이 여러 섭사를 두는 경우가 있어 전체의 분 사 수가 14만 개소에 이르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들 신앙이 얼마나 널리 퍼 져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박규태(2005), 앞의 책, 20~27쪽. 196 川 端 源 太 郞 ( ), 앞의 책, 97쪽; 京 城 神 社 地 鎭 祭, 每 日 申 報 ( ); 岩 下 傳 四 郞 (1941), 앞의 책, 322쪽; 淸 柳 綱 太 郞 著, 朝 鮮 硏 究 會 編 ( ), 앞의 책, 209~213쪽; 淸 柳 綱 太 郞 ( ), 앞의 책, 220~ 225쪽; 京 城 神 社 由 緖 記 에서는 1915년 7월 허가를 받아 섭사 텐만궁을 창립 했다고 하나, 이는 공사의 허가를 받았다는 의미이거나 아니면 그전까지 南 山 大 神 宮 과 텐만궁이 따로 존재하다가 1914년 南 山 大 神 宮 이 京 城 神 社 가 되고 1915년 氏 子 조직이 만들어지면서 그해 7월 텐만궁을 京 城 神 社 의 섭사로 흡수 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6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63 그림 5 _ 天 滿 市 의 포스터[비고: 京 城 の 年 中 行 事 天 滿 市 物 語 (하) 京 城 全 市 의 大 市, 京 城 日 報 6607호( 석간), 2면]. 그림 6 _ 天 滿 市 경품 天 神 像 과 소 장식품[비 고: 京 城 の 年 中 行 事 天 滿 市 物 語 ( 上 ) 天 神 樣 ニコニコ, 京 城 日 報 6606호 ( 석간), 2면]. 25일 텐만궁 제례에 맞춰 기획한 행사이다. 처음에 일본인 상공조합연합 회에서 봄철 대할인 판매의 명칭으로 텐만궁을 본떠 텐만시라고 했을 때 조선인들은 도대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한국 상인 들이 호응하지 않아 이들을 참가시키는 데 많이 고생했다고 한다. 텐만시 에는 1925년 당시 1,300여 가맹점이 참가하였고 구매금액 1원마다 복권 한 장을 주었다. 이 복권은 꽝이 없는 것으로 25개의 금제 천신상( 天 神 像 ) 과 25개의 은제 소[ 牛 ] 장식품을 비롯하여 기타 약 15만 개의 물품이 준비 되어 있었다. 이 복권은 텐만궁의 교환소에서 교환되었다. 이 중 특히 금 제의 천신과 은제의 소 장식은 조선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63

164 년 당시 텐만시가 열린 3일간 모두 10만 장의 복권이 나갔는데 특히 종로 에는 10여 만 명의 인파가 몰려 6만 장의 복권이 나갔다. 이러한 성황에 놀란 한국 상인들이 다음 해부터 더 적극적으로 이 행사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 복권을 교환하러 가는 사람들 때문에 텐만궁에 참배하여 새전 을 바치는 금액이 평소의 5~6배에 달해 3일간에 약 700~800원을 모았 다고 한다. 197 이나리사는 원래 용산 삼각지에 있던 신사로 1910년대 중반 창립되었 다. 1929년 12월 25일 허가를 받아 경성신사 섭사가 되었다. 1931년 6월 13일(또는 1930년 6월 30일) 경성신사 경내에 후시미이나리사[ 伏 見 稻 荷 社 ] 를 창립하고, 용산 삼각지에서 옮겨와 진좌제( 鎭 坐 祭 )를 거행하였다. 예제 일은 매년 6월 13일이고 제신은 우카노미타마[ 倉 稻 魂 神 ], 사루타히코[ 猿 田 彦 命 ], 오미야노메[ 大 宮 女 命 ]였다. 198 경성신사에서는 이 이나리사를 통해 조선인 무녀( 巫 女 )들을 흡수하고자 하였다. 1934년부터 경성신사에서는 가을대제 후일제( 後 日 祭 )를 조선제( 朝 鮮 祭 )로 하여 조선무자( 朝 鮮 巫 子 ) 수 백 인, 부인( 婦 人 ) 수천 명을 모아 기생연예회 등을 관람시켜 축제의 기분 을 만끽하게 하고, 이나리 신앙 199 과 관계 깊은 매달 오( 午 )의 날에는 무자 197 京 城 の 年 中 行 事 天 滿 市 物 語 ( 上 ) 天 神 樣 ニコニコ, 京 城 日 報, 6606호( 석간), 2면; 京 城 の 年 中 行 事 天 滿 市 物 語 (하) 京 城 全 市 의 大 市, 京 城 日 報, 6607호( 석간), 2면. 198 市 秋 弘 (1943), 京 城 神 社 奉 仕 事 務 摘 要 [ 小 笠 原 省 三 (1953), 앞의 책, 451~456 쪽에서 재인용]; 岩 下 傳 四 郞 (1941), 앞의 책, 322쪽; 大 祭 와 용산의 의식, 每 日 申 報 ( ). 199 稻 荷 信 仰 이란 식물, 농경 등 모든 산업에 관한 신앙 외에 터주신 등의 여러 의 미가 혼합된 신앙이다. 稻 荷 信 仰 은 봄에 山 神 이 내려와 田 神 이 되고 가을에는 산으로 돌아간다는 일본 전국에 존재하는 민간신앙과 결합한 것이었다. 稻 荷 16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65 다수의 참열자에게 경성신사 경내의 각사( 各 社 )를 돌며 예배하는 습관을 교육시켰다. 이렇게 이나리사를 중심으로 [내선일체]의 신앙을 모으려는 방안은 1937년에 들어 경성신사에 일본 본국의 관폐대사 후시미이나리 신사 부속 강사( 講 社 )(신앙조직) 조선지부( 朝 鮮 支 部 )를 설치하면서 더욱 조 직적으로 되었다. 1938년도부터는 이나리강사 조선무자 집단 200명으로 국방부인회도하분회( 國 防 婦 人 會 稻 荷 分 會 )를 조직하였고, 이 단체는 국방부 인회 중 유일한 조선인 부인회로 군대위문, 출정군인 송영 등에 참가하였 다. 200 이는 1930년대에 들어 조선의 민간신앙에 대한 연구가 늘어나고 신 도와의 관련성을 모색하면서, 1935년 조선총독부의 [심전개발( 心 田 開 發 )] 信 仰 에서 여우가 신의 사자로 취급되는 것은 山 神 이 田 神 이 되려고 산에서 내 려올 때, 말을 타고 여우를 데리고 내려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여우가 계 시를 하는 동물로 생각되어 呪 術 者 나 巫 女, 祈 禱 家 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이 러한 稻 荷 信 仰 은 일본 전국에 분포하며 신봉자가 가장 많은 민간신앙 형태이 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神 社 로는 伏 見 稻 荷 大 社 가 있다. 稻 荷 는 역사적으로 는 벼의 穀 靈 인 우카노미다마노가미[ 宇 迦 之 御 魂 神 ]와 불교(밀교)에서 신비적 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지던 다지니천[ 茶 枳 尼 天, 吒 枳 尼 天 ]이 습합한 신 이다. 이 神 은 진언종, 밀교와 결합되었고, 平 安 후기에 稻 荷 의 본체는 여우라 고 믿어지면서 급속히 신앙이 보급되었다. 室 町 시대에는 상공업의 발전과 함께 도시에서 복과 덕의 신으로 모시는 것이 유행했다. 江 戶 시대에는 稻 荷 를 正 一 位 의 최고 神 階 라 여겨, [ 正 一 位 稻 荷 大 明 神 ]이란 깃발을 세워 稻 荷 社 가 성대 하게 세워졌다. 國 學 院 大 學 日 本 文 化 硏 究 所 (1999), 앞의 책, 319~320쪽; 村 上 重 良 저, 최길성 역(1989), 일본의 종교, 예전출판사; 村 岡 典 嗣 저, 박규태 역 (1998), 앞의 책. 200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에서 재인용; 南 山 稻 荷 神 社 大 祭, 每 日 申 報 ( ).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65

166 정책에서 조선의 민간신앙을 본격적으로 이용하였던 것과 관계가 있다. 201 경성신사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민간신앙을 신사에 흡수하려는 정 책을 펴기에 앞서 1934년에 이미 신사신앙에 조선의 무속( 巫 俗 )을 흡수 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성신사에서 조선무녀들을 포섭하는 방식은 일본 의 대표적인 민간신앙인 이나리 신앙을 통해 조선의 민간신앙을 흡수하 는 종교적인 방식이었다. 따라서 1935년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민간신앙 을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1936년 신사제도 개혁 이후 특히 소규모의 신사( 神 祠 ) 건립을 통해서 신사 신앙을 확산시키는 데 민간신앙을 이용했 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즉 조선총독부의 민간신앙 이용 목적이 신사를 통 해 민심을 교화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경성신사에서 무녀들을 포섭하 는 목적은 신도의 종교성을 공유하고 보급하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무녀를 통해서 조선인들에게 신도정신을 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무녀들 역시 경성신사에 소속됨으로써 불안한 자신들의 지위에 안정 을 도모할 수 있었기에 적극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치만궁은 1929년 12월 25일 허가를 받아 잠시 경성신사 본사( 本 社 ) 구전지( 舊 殿 地 )에 진좌한 후, 1931년 4월 본전, 폐전, 배전을 신축하고 천 좌제( 遷 座 祭 )를 거행하였다. 매년 8월 15일이 예제일이고, 제신은 혼다와 케[ 譽 田 別 命 ], 히메[ 比 賣 神 ], 오타라시히메[ 大 帶 姬 命 ]였다. 이는 경성부에 사 년대 무속에 대한 연구와 조선총독부에서 [ 心 田 開 發 ]의 일환으로 巫 俗 을 이용하려 한 것에 대해서는 徐 鍾 珍 과 최석영의 연구가 있고, [심전개발]정책 일 반에 대해서는 韓 亘 熙 의 연구가 있다. 徐 鍾 珍 (2000), 1930 年 代 朝 鮮 における 宇 垣 一 成 總 督 の 植 民 地 政 策, 早 稻 田 政 治 公 法 硏 究 第 65 號 ;최석영(1999), 앞의 책; 韓 亘 熙 (1995), 년 日 帝 의 [ 心 田 開 發 ]정책과 성격, 서울대학 교 석사학위 논문. 16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67 는 오이타현[ 大 分 縣 ] 사람들이 고향의 우사하치만[ 宇 佐 八 幡 ]에 대한 신앙 을 연장한 것이었다. 202 이외에도 경성신사 경내에 있던 노기신사는 매년 9월 13일에 노기 마 레스케[ 乃 木 希 典, 1849~1912]에 대한 위령제를 하던 것에서 발전한 것이었 다. 노기 마레스케는 흔히 노기 장군, 노기 대장으로 불리는 일본의 군인 으로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1여단장으로 종군하고 러일전쟁에서는 제3군 사령관으로서 여순( 旅 順 ) 공격을 지휘했던 인물로 당시 그 전투에서 두 아들 가쓰스케[ 勝 典 ], 야스스케[ 保 典 ]가 전사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의 영 웅으로, 메이지천황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 날 자신의 부인과 함께 자 결하며 메이지천황에 대한 충성을 드러내었다. 그와 메이지천황과의 관계 를 고려하여 메이지천황을 모시는 조선신궁 옆에 노기신사를 만들어 모 시자는 여론이 일어, 1932년 9월 노기신사건설회[ 乃 木 神 社 建 設 會 ]가 조직 되었다. 기부금을 낸 사람은 30만 명이었고, 자금 6만 5천 원을 모았다. 신 사 부지는 경성신사 안 벚꽃 골짜기로 선정했다. 1933년 9월에 공사를 시 작하여 1934년 4월부터 사전을 건설하고 1934년 9월 13일 진좌식을 집행 하였다. 예제일은 9월 13일이었고, 제신은 노기 마레스케와 그의 부인 시 즈코[ 靜 子 ]였다. 1936년 보물관( 寶 物 館 ) 및 숙위사를 완성하였다. 이 보물 관은 건설회 이사장 및 조선노기회장의 알선으로 노기의 친족에게 유물 을 받고 노기와 관계 깊은 관료로부터 휘호( 揮 毫 ) 등을 얻어 완성되어 각 대제마다 공개하여 일반인에게 [정신교육]을 하는 기관으로 삼았다. 이 노 기신사는 비록 경성신사 경내에 존재했지만 건립 목적에서와 같이 의미상 202 小 笠 原 省 三 (1953), 앞의 책, 34~35쪽;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 岩 下 傳 四 郞 (1941), 앞의 책, 322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67

168 으로는 조선신궁의 섭사였다고 할 수 있다. 203 경성신사 이외에도 경성에는 다른 신사들이 존재하였다. 그 중 대표적 인 것이 가토신사[ 加 藤 神 社 ]와 한강신사( 漢 江 神 社 )였다. 가토신사는 용산 을 대표하는 신사로 용산 원정( 元 町 ) 문평산( 文 平 山 ) 근처에 있었고, 임진 왜란 때의 일본군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 加 藤 淸 正 ]가 제신이었다. 1914년 12월 일본 구마모토시[ 熊 本 市 ]의 가토신사에서 분령( 分 靈 )해 왔고 1930년 대 당시 책임자는 다케시타[ 竹 下 眞 美 ]였다. 204 가토신사는 1920년대부터 경성신사의 미코시가 용산에 갔을 때 머무르는 장소가 되었고 1930년 경 성신사가 새롭게 만든 여소는 가토신사 옆이었다. 205 한강신사, 즉 일명 웅진신사( 熊 津 神 社 )는 노량진( 鷺 梁 津 ) 흑석리( 黑 石 里 ) 에 있었다. 제신은 스가와라 미치자네[ 管 原 道 眞 ], 미야야지다케[ 宮 地 岳 太 神 宮 ( 宮 地 嶽 神 )], 코토히라[ 金 刀 比 羅 神 ( 琴 平 太 神 宮 )]의 3신으로 시키 신타로[ 志 岐 信 太 郞 ]가 신전을 건립하고, 1912년 10월 정천식( 正 遷 式 )을 행했다. 신사 경내의 넓이는 1만 9천 평(또는 1천 9백 평)이고, 제일은 5월 4일, 11월 3일 (또는 10월 4일)이었다. 섭사( 攝 社 )로는 이나리신사, 시키신사[ 志 岐 神 社 ], 시 신신사[ 矢 心 神 社 ]가 있었다 朝 鮮 乃 木 神 社 建 設 會 (1936), 朝 鮮 乃 木 神 社 獻 詠 集, 69~70쪽;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에서 재인용; 岩 下 傳 四 郞 (1941), 앞의 책, 322쪽. 204 萩 森 茂 編 著 (1930), 앞의 책, 24~29쪽; 有 賀 信 一 郞 (1933), 앞의 책, 96쪽; 京 城 府 敎 育 會 ( ), 앞의 책, 112쪽; 長 野 末 喜 (1932), 앞의 책, 123쪽; 川 端 源 太 郞 ( ), 앞의 책, 97쪽. 205 대경성정밀도 (1940),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문헌자료실(화한서분류) 軸 용산 부분 참조; 京 城 神 社 恒 例 大 祭, 모든 준비 착착 진척, 每 日 申 報 ( ); 自 肅 緊 張 의 銃 後 京 城 神 社 恒 例 大 祭, 每 日 申 報 ( );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에서 재인용. 16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69 그 이외에도 여러 기록으로 보아 산코신사[ 三 光 神 社, 倭 城 台, 설립]는 1910년대까지, 에비스신사[ 惠 比 須 神 社, 大 平 路 1정목]는 1920년대에 잠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나리신사는 경성신사 섭사 이나 리사 외에도 욱정( 旭 町 ) 성신원( 成 身 院 ) 경내, 대화정( 大 和 町 ) 3정목( 丁 目 ), 신정( 新 町 ), 용산 원정 1정목, 남미창정( 南 米 倉 町 ) 성벽통( 城 壁 通 ) 등 여러 곳에 있었다. 207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 지역에 한 신사를 둔다는 조선총독부의 내부방침으로 이들 신사는 공식적으로 인가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한 동안 비공식적 신사로 존재하다가 일부는 신사( 神 祠 )로 인가를 받는 경 우도 있었다. 가토신사의 경우 1934년 4월 11일에, 한강신사의 경우 1934 년 5월 9일에 신사( 神 祠 )로서 인가를 받았다. 208 이외에도 서울에는 아마 테라스를 모시는 여러 곳의 신명신사( 神 明 神 祠 )가 있었다. 경성부 영등포 206 대경성정밀도 (1940),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문헌자료실(화한서분류) 軸 黑 石 町 부분 참조; 萩 森 茂 編 著 (1930), 앞의 책, 24~29쪽; 有 賀 信 一 郞 (1933), 앞의 책, 96쪽; 京 城 府 敎 育 會 ( ), 앞의 책, 112쪽; 長 野 末 喜 (1932), 앞의 책, 123쪽; 川 端 源 太 郞 ( ), 앞의 책, 97쪽; 藤 井 龜 若 (1926), 京 城 の 光 華, 朝 鮮 事 情 調 査 會, 217쪽. 207 萩 森 茂 編 著 (1930), 앞의 책, 24~29쪽; 有 賀 信 一 郞 (1933), 앞의 책, 96쪽; 京 城 府 敎 育 會 ( ), 앞의 책, 112쪽; 長 野 末 喜 (1932), 앞의 책, 123쪽; 川 端 源 太 郞 ( ), 앞의 책, 97쪽. 208 岩 下 傳 四 郞 (1941), 앞의 책, 329쪽; 漢 江 神 社 의 경우 大 陸 神 社 大 觀 에서는 제신이 天 照 大 神 으로 되어 있는데 神 祠 로 인가받을 때 제신을 바꾼 것이라기 보다는 오타로 보인다. 天 照 大 神 을 모시는 神 社 는 神 明 神 祠 로 부르라는 내규 가 있었기 때문이다[ 神 祠 에 관한 규칙을 정하는 건(1917년 3월 內 秘 제71호. 각 도장관에 대한 정무총감 통첩, 조선 神 社 법령집람, 282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69

170 정( 永 登 浦 町, 창립), 용두정( 龍 頭 町, 창립), 신길정( 新 吉 町, 軻 遇 突 智 神 도 모심 창립), 이태원정( 梨 泰 院 町, 메이지천황도 모심 창립)에 신명신사가 존재하고 있었다. 5. 경성신사에 대한 기타 지원 이렇게 경성신사가 시설 면에서 완비를 갖추는 등 발전을 하는 데에는 앞 서 말한 것처럼 신사 조직의 정비 이외에도 여러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경성부에서 일정 부분 보조금이 나가고 있었고 때로는 직접적인 경 비 지원을 하기도 했다. 1926년 가을대제에 경성부에서는 각 정동이 여러 전식( 電 飾 )을 하는 비용을 줄여주고자 경성전기회사( 京 城 電 氣 會 社 )에 공 사비를 할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경성전기회사에서 15일에는 10등( 燈 ) 이내의 공사비 1원 50전을 1원으로 할인하고, 또 100등 이상의 공사비는 10등까지 80전으로 한다고 회답해왔기 때문에 부에서는 이것을 각 정동 총대에게 통지했다. 또한 가을제사에 참가하기를 희망하는 단체는 본정서 ( 本 町 署 )에 행사를 신청하였다. 또한 가을제사의 중심지를 맡고 있는 본정 서에서는 사고 방지를 위하여 전 서원( 署 員 )이 출동하였다. 209 이처럼 경성 신사의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기 위하여 경성부에서는 많은 지원을 아끼 지 않았다. 또한 조선 구황실이나 일본 황실의 지원을 종종 받았다. 앞서 보았듯 209 京 城 神 社 秋 まつり, 京 城 日 報 ( ); 明 るい 電 飾 門, 京 城 日 報 ( ); 京 城 神 社 전야제 집행, 京 城 日 報 ( ); 太 鼓 를 치 고, 흥을 돋구는 巡 幸, 京 城 日 報 ( ); 神 輿, 남산으로 還 御, 京 城 日 報 ( ). 17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71 이 경성신사의 제사에 이왕(순종)을 비롯해 이강공(의친왕), 이우공이 자 주 대배를 하고 폐백을 바치기도 했다. 또한 일본 황실에서도 1907년 10 월 황태자(후에 大 正 天 皇 )와 아리스가와노미야[ 有 栖 川 宮 ], 1909년 7월 나시 모토노미야[ 梨 本 宮 ]와 부인, 1914년 아사카노미야[ 朝 香 宮 ], 히가시쿠니노미 야[ 東 久 邇 宮 ]가 방문했었다. 그 이후 1926년에는 간인노미야[ 閑 院 宮 ]가 방 문했고, 경성신사에 국혼대신을 모신 직후인 1929년 10월 23일에는 이왕 (영친왕)이 하사금 200원을 내렸고, 1932년 6월에는 경성신사 큰 도리이 액자에 사호( 社 號 )를 적어주기도 했다 년 11월에는 쇼와천황[ 昭 和 天 皇 ]의 즉위식이 있고, 천황 즉위 후 처음으로 하는 신상제인 대상제( 大 嘗 祭 )도 있었기 때문에 이해 가을대제는 어느 때보다도 시끌벅적했다. 지 방에서 경성으로 제사 행사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2만 명에 가까웠고, 경성 시내는 각종 행사로 사람들로 북적이며 여흥을 즐겼다. 이때 다카마 츠노미야[ 高 松 宮 ( 宣 仁 親 王 )]가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조선신궁을 참배 하고 직접 소나무를 심고, 경성신사에서 미코시가 돌아오는 것을 맞이했 다 년 4월 16일 다카마츠노미야가 공사를 대부분 마친 경성신사 신경 내 [다이쇼천황어주필기념비[ 大 正 天 皇 御 駐 蹕 記 念 碑 ]] 앞에 소나무를 심었다. 1929년 7월 15일에는 일본 황실에서 내탕금 500원( 圓 )을 하사했 다. 특히 일본 황실에서 일본 본국 밖의 신사에 하사금을 내린 것은 전례 없는 일이고, 또 사격이 없는 신사( 神 社 )에는 하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210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에서 재인용; 京 城 神 社 由 緖 記. 211 秋 祭 를 축하하는 各 町 의 공연, 京 城 日 報 ( ); 가을의 大 祭, 京 城 日 報 ( ); 가을의 大 祭, 京 城 日 報 ( ); 가을대제 마 침, 京 城 日 報 ( ).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71

172 특별한 대우를 한 것이었다. 212 이처럼 일본 황실 인물( 親 王 )이 자주 방 문하고, 황실에서 하사금을 내리는 등 경성신사에 대해 일본 황실에서도 많은 지원을 하였다. 또한 경성신사는 신사의 최정점인 이세신궁에서도 많은 지원을 받았 다. 1930년 10월 5일 이세신궁의 식년천궁( 式 年 遷 宮 ) 후 남은 고전재( 古 殿 材 )를 받아 경성신사의 사전 안의 도구나 제전용구( 祭 典 用 具 )를 만들고, 1931년 8월에는 이세신궁의 옛 신보( 神 寶 )를 받고 9월 1일 봉고제를 치렀 다. 213 식년천궁이란 20년에 한 번씩 이세신궁의 정전을 비롯하여 모든 전 사( 殿 舍 ), 장신구, 신보 등을 새로 바꾸는 것으로, 1929년 10월에는 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치러졌다. 214 옛 장신구나 신보는 해외신사에 나누어줬 는데, 조선의 경우는 1931년 8월 조선신궁, 경성신사, 인천신사( 仁 川 神 社 ), 대구신사( 大 邱 神 社 ), 평양신사( 平 壤 神 社 ), 용두산신사에, 1932년 1월에는 청주신사( 淸 州 神 社 ) 외 15사, 10월에는 개성신사( 開 城 神 社 ) 외 3사에 기증 되었다. 경성신사에 내려진 신보는 9월 1일 조선총독부에서 장엄한 전달 식을 거행하였고 이를 가지고 경성부윤, 도지사 대리 이하 관민 다수가 참 가한 가운데 봉납봉고제( 奉 納 奉 告 祭 )를 집행하였다. 당시 받은 신보는 금 동조어태도( 金 銅 造 御 太 刀 ), 재어궁( 梓 御 弓 ), 금어인( 錦 御 靱 ), 어순( 御 楯 ) (이상 이세신궁 신보), 어경( 御 鏡, 別 宮 月 讀 荒 御 魂 宮 의 장식품)이었다. 게다가 식년천 궁 후 걷어들인 각종 목재와 목판을 내려주어 그것으로 말사( 末 社 ) 하치 만궁 및 텐만궁 등의 내전에 사용하였다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에서 재인용; 京 城 神 社 由 緖 記. 213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에서 재인용. 214 國 學 院 大 學 日 本 文 化 硏 究 所 (1999), 앞의 책, 232~234쪽. 215 京 城 神 社 由 緖 記. 17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73 이렇듯 이세신궁의 물건을 각 신사에 전달하는 행위는 굉장히 종교 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신궁을 설계한 이토 쥬타는 식년천궁 의식을 통해서 신적 체험을 경험하며 국체에 대한 자긍심을 느꼈다고 했 다. 216 만주( 滿 洲 ) 봉천신사( 奉 天 神 社 ) 궁사는 1931년 8월 21일 신궁사청 ( 神 宮 司 廳 )에게서 받은 신보 봉고제를 치렀는데, 특히 신보 중에는 국가가 전쟁을 일으켰을 때 신위를 드러낸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 있었는데, 이는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할 것을 예언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전사들의 사기가 급증했다고 했다. 217 이러한 각 방면의 지원을 받으면서 경성신사는 1930년대 들어서도 계 속 발전을 하였다. 1931년에는 신사방화단( 神 社 防 火 團 )을 조직하였고, 이 후 이 조직은 신사 직원 및 수위 외에 45명의 요원으로 본정경방단( 本 町 警 防 團 ) 신사분단( 神 社 分 團 )으로 조직되었다. 1933년도부터 가정제사인쇄 물( 家 庭 祭 祀 印 刷 物 ) 및 신배사( 神 拜 詞 )를 무료로 씨자 및 참배자에게 배부 하고, 이세신궁의 가미다나[ 神 棚 ]를 반포하였다. 신궁대마( 神 宮 大 麻 )는 경 기도 전체에 반포했지만 1935년 경기도봉재회( 京 畿 道 奉 齋 會 )가 설치된 후 에는 경성부 내에 한해서 반포하였는데 1943년 8월까지 7만 가정에 배포 하였다. 또한 앞서 서술했듯이 1934년부터는 조선무녀를 경성신사에 포섭 하는 활동을 하였고, 1934년 9월부터 3년간 조선신직회( 朝 鮮 神 職 會 ) 사무 소를 경성신사에 두었고, 경성신사 사장이 부회장을 맡아 조선신직회 잡 지 도리이[ 鳥 居 ] 를 발행하고, 경성신사 신기일보( 京 城 神 社 神 祇 日 報 ) 를 매호 7천 호씩 발행하여 발행관계자 및 출정군인에게 우송하였다. 1936년 216 伊 東 忠 太 (1942), 日 本 建 築 の 硏 究 ( 下 ), 龍 吟 社, 230쪽. 217 小 笠 原 省 三 (1953), 앞의 책, 13~14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73

174 에는 다시 조선인 씨자들이 중심이 되어 경성신사 대제를 거행하였다. 경 성신사 사장 이치 아키히로는 경성신사를 이렇게 조직해 나가는 데 만족 을 느꼈는지, 1934년 내무성에서 일본 내지의 관폐대사 궁사로 전임( 轉 任 ) 하라고 교섭해왔으나 거부하였다. 이후 경성신사는 경성의 급격한 인구 증가와 팽창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1943년 궁사에서 물러나는 이치 아키 히로는 자신이 있는 동안의 경성신사의 발전을 다음과 같이 회술하였다. 1925년 신사 예산은 사입금 1만 2천 원, 씨자 갹출금 6,500원으로 총 1만 8,500원이었는데 1943년에는 사입금 12만 원, 씨자 갹출금 6만 원, 총 18 만 원으로 거의 10배 가량 증가했다. 신사의 재정도 증가하여 전국 210사 의 관국폐사 중 10위 안에 든다고 자부하였다. 씨자조직 역시 1925년 35 만 경성부민 중 일본인 13개 정회( 町 會 )에 10만 정도의 씨자를 4구로 나 누고 상임총대 8명, 정( 町 )씨자총대 82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943년에는 120만 경성부민, 즉 일본인과 조선인이 모두 씨자가 되어 280개 정회를 모두 9개로 나눠 상임총대 280명, 정( 町 ) 역원 5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조 선인의 씨자 갹출금 부담도 편입 당초에는 일본인에 비해 5 대 1에 지나 지 않았으나 1941년부터는 2 대 1이 되고, 점차 동률로 인상하고 있다고 하였다. 218 V. 맺음말 경성신사는 일본인 거류민들이 세운 남산대신궁이라는 조그만 거류민 신사에서 시작되었다. 남산대신궁은 경성에 거류하던 일본인들의 개인적 218 市 秋 弘 (1943), 앞의 글, 451~456쪽에서 재인용. 17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75 인 종교적 욕망과 거류민 사회의 정신적 안정을 위한 공동체적 요구에 대 해 거류민 단체와 재경성 일본영사관 측의 지원으로 설립되어 공공의 시 설로 운영되었다. 남산대신궁은 거류민 사회의 정신적 안정을 유지시키는 초혼제와 같은 제의를 흡수하면서, 일본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존재이 자 일본인 사회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남 산대신궁은 왜성대공원에 세워졌는데, 이는 일본인들이 공원이라는 명목 으로 한국의 토지를 약탈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910년대 초반 대신궁은 경성신사로 확장되면서 씨자조직을 결성하며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까지 경성 [일부]에 거류하는 일본인만의 신사가 이젠 경성부 전 지역을 아우르는 신사가 되면서 시작 되었다. 1914년 부제( 府 制 )가 시작되면서 경성신사는 일본인 거류민단에 서 경성부로 이관되었고, 1915년 경성부는 경성신사를 경성신사의 씨자 조직에 다시 이관하였다. 명실상부하게 경성부의 신사가 되기 위하여 새 롭게 만들어진 씨자조직에 조선인들을 흡수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 시 씨자조직에 들어간 조선인들은 씨자총대라는 일종의 명예직을 맡은 이 른바 지역유지들이었고, 일반적인 조선인들은 씨자라는 명목으로 경성신 사 운영의 부담을 지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이러한 와중에 벌어진 경성신사에서는 조선인들을 씨자조직에서 완전히 배제해버 리고 일본인만의 신사로 운영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이 벌인 종교적 행사인 마츠리는 자신들의 우월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는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1920년대 중반 조선신궁이 만들어지면서 경성신사는 그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성신사는 이러한 위기를 명실상부한 경성의 신사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는 방식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경성신사에 걸맞은 사격으로 승격해줄 것을 요구하고 그동안 배제되었던 조선인들을 정동총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75

176 대연합회라는 조직을 통해 흡수하였다. 또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공 통으로 신앙할 수 있는 존재로 국혼신이라는 새로운 신을 만들어냈다. 이 국혼신은 일종의 토지신으로 일본인들의 신도체제 내에서 상상된 가공의 신이었고 이 신을 통해 신도 논리를 조선인에게 강요하였다. 이러한 내적 인 변화와 더불어 경성신사의 경내를 확장하고 건물을 새로 지으며 외형 적 확대를 꾀했다. 이러한 외형적 확대는 경성신사가 텐만궁, 하치만궁, 이 나리사, 노기신사 등의 부속 신사를 흡수하며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렇게 위상을 정립한 경성신사는 1930년대 말 국폐사가 되면서 일본 신사체계 의 중추를 담당하였다. 1945년 한국 내에는 신사 82개, 소규모의 신사인 신사( 神 祠 ) 1,141개 가 있었다. 이 중 관폐대사는 조선신궁과 부여신궁 2개, 국폐소사는 경성 신사@용두산신사@대구신사@평양신사@광주신사@강원신사@전주신사@ 함흥신사 등 8개가 있었다. 그 외에 도, 부, 읍에서 공진금을 바치는 도공 진사가 7개, 부공진사 7개, 읍공진사 17개가 있었고, 나머지 42개는 이러 한 사격이 없었다. 219 사격이 없는 신사가 42곳이나 되었던 것은 그 신사 들이 부공진사나 읍공진사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만큼 시설이나 재정, 숭경자 등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1935년의 내무국장 통첩에서도 공인 신 사 중에 조만간 전임 신직을 두기로 하고 허가를 받았으나 설립 후 오랜 시일이 경과되었지만 겸무 신직으로 예제만 집행하며 예제 이외의 공식 제사(1914년 칙령 제10호 관국폐사 이하 신사 제사령)를 집행하지 못하는 경 219 靑 井 哲 人 (2005), 앞의 책, 79쪽; 山 口 公 一 (1998), 앞의 글; 佐 藤 弘 毅 (1998), 戰 前 の 海 外 神 社 一 覽 Ⅱ- 朝 關 東 滿 洲 中 華 民 國, 神 社 本 廳 敎 學 硏 究 所 紀 要 3 號. 17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77 우가 있다며 신사의 개선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220 또한 조선총독부가 1936년 1도 1국폐사의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충청북도, 황해도, 평안북도, 함경북도 등 4개 도에는 국폐사가 생기지 못했다. 이는 그 지역의 신사가 그만한 위상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경성신사는 1910~1920년대를 거치면서 지역사회에 강 하게 뿌리를 내리며 그 위상을 높이고 있었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적 지원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수위도시( 首 位 都 市 )라는 경성이라는 지역 적 특수성과 경성에 살고 있던 많은 일본인들의 힘, 이를 둘러싼 한국인 들과의 관계를 경성신사가 상당히 잘 엮어갔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들 어서면 경성신사를 비롯한 한국 내 신사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총 독부 측은 이전의 방침에서 전환하여 신사를 비롯한 신도에 더 많은 긍정 적인 관심과 지원을 보내게 되었다. 1936년 8월에는 신사제도의 대개혁이 일어나면서 경성신사는 부산의 용두산신사와 더불어 국폐소사가 되었다. 이전부터 조선 내 신사 신직들이 바라던 관국폐사 제도가 조선에 적용된 것이다. 그리고 1930년대 말부터는 신도가 일상생활에까지 적극적으로 강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에도 경성신사는 매우 잘 적응하였다. 단, 그 적응과정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식일 수밖에 없다. 경성신사에 대한 기초적인 사실( 史 實 )들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하고, 신도에 대한 여러 가지 부연설명이 들어가서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보다 깊이 있는 논증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단지 이 글이 신사 관련 문제를 신 220 神 社 에 관한 법령의 시행에 관한 건( 內 秘 제89호. 각 도지사에게 내 무국장 통첩)[ 朝 鮮 神 職 會 (1937), 朝 鮮 神 社 法 令 輯 覽, 帝 國 地 方 行 政 學 會 朝 鮮 本 部, 39~53쪽]. 1910년대~1930년대 초 경성신사와 지역사회의 관계 177

178 사참배 저항이라는 협소한 문제로 취급하던 기존의 경향에서 더 나아가 일제의 종교정책 일반, 나아가 일제의 식민지 통치 일반으로 확장하여 일 제시대사의 본질을 좀 더 확실히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식민지 조선의 신사에 대한 연구는 단지 식민 본국 일본과 식민 지 조선의 관계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만, 사할린, 만주, 중국 등 일본 이 강제로 점령했던 지역의 신사에 대한 연구와도 긴밀히 관련을 맺어 동 아시아의 근대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적인] 축을 이해 하고 설명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부족한 점은 이후의 연구를 통해서 보충하고자 한다. 17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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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J a p a n e s e C o l o n i a l R u l e a n d C o l o n i a l M o d e r n i t y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정병욱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I. 1994년 역사학계의 토론회 - 문제의 소재 II. 인력개발론의 변화 - 안병직을 중심으로 III. 단선적 기원론의 문제점 - 에커트를 중심으로 IV. 최근의 비판을 보면서 - [자기개발]의 문제점과 대안 모색

187 I. 1994년 역사학계의 토론회 - 문제의 소재 필자가 처음 인력개발론 을 뚜렷이 인지한 것은 1994년 역사와 현실 12 호에 실린 토론:식민지 사회론의 제문제 를 읽으면서였다. 사회자(지수 걸)는 토론을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80년대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르네상스 시기]였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 밖으로 사회주의권의 몰락,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새로운 재편, 안으로 경제의 양적 급팽창, 민 족민주운동의 급감퇴로 {1980년대의 일제시대사 연구 성과들은 학문적 경제학에서 통상 말하는 [인적 자본(human capital)]은 자본의 개념을 물적 자본에 한정시키거나 모든 노동력을 동질적으로 볼 경우 경제성장이나 소득 격차를 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60년대 이래 도입한 개념이다. 이제 인적 자본을 경제성장의 중요 요소로 간주하게 되었지만, 실증 적으로 인적 자본을 측정하는 데 많은 난점이 있다. 현재 국민의 평균 교육연 수, 각급학교 등록률, 교육 재정 등이 지표로 사용되고 있다[김경근( ), 인적 자본과 교육, 가족의 형성 및 경제성장, 한국교육재정경제학회, 교육재 정경제연구 4-2;김진영(2003), 교육열의 경제적 분석, 한국경제교육학회, 경제교육연구 10-1;이종화@김선빈(1995), 한국의 인적 자본 추계(1963~ 1993), 한국국제경제학회, 국제경제연구 1-2]. 본고에서 다루는 인력개발론 도 인적 자본론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방법이나 적용 방식은 차이가 있다. 인력개발론은 대상이 독립국이 아니고 자료가 없어서 그런지 계급별, 직급별 인원수 파악 수준이며 인과관계도 서술 차원에서 추정한다. 한편 한국의 인적 자본 축적과정을 통시적으로 고찰한 서찬수에 의하면 일제시기 인적 자본 축 적은 1945~1975년에 비해 낮은 수준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 인적 자본 축적의 배경으로 {개방교육의 실시, 문화적 전통, 농지개혁의 기여, 外 援 의 역할}을 꼽 았다. 徐 贊 洙 ( ), 韓 國 의 人 的 資 本 蓄 積 過 程 과 그 要 因, 國 際 經 商 論 叢 5.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187

188 설명력이나 대중적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최근 등장한 [개발과 착취 론], [맨파워 성장론] 등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학문적 척박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동안 말할 때마다 파행성, 수탈성, 폭력성을 외쳤는데 {근현대 사의 구조적 비극성을 연구자들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논증하였는가} 묻 는다면 대답은 [옹색]하다. 이 토론에서 인력개발론은 [맨파워 성장론의 허구성]이란 소제목 아래 다뤄졌다. 사회자는 {인적 자원의 개발, 즉 일제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제시 기에 기업가의 경영능력, 관료의 국가관리 능력, 노동자의 향상되었다는 [맨파워 성장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당시로서 나 올 만한 얘기는 다 나온 것 같은데 [성장이냐 손실이냐], [성장의 양면성과 해방 후 연속성], [개발의 주체와 관점]의 문제로 나눠 정리해보겠다. 1. 성장이냐 손실이냐 토론자의 의견은 [부분 부정]론 I, [부분 부정]론 II, [맨파워 손실]론 또는 [종합 부정]론 으로 나눠볼 수 있다. 6), 토론:식민지 사회론 의 제문제, 역사와 현실 12, 68~69쪽. 강창일( ), 위의 글, 98쪽, {인적 개발과 기술 축적, 1930년대 중하급 테 크노크라트 성장은 인정하지만 관료는 주체성을 상실한 굴종적 인간군이다}. 정재정( ), 앞의 글, 99쪽,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만한 경험과 기술 체 득, 일부 중간관리자로의 성장을 인정하나 식민지 노동구조를 깰 정도는 아니 었고 차별이 존재했다. 전쟁 말기의 성장은 비상시기 현상이다}. 지수걸( ), 앞의 글, 100~101쪽, {일제시기 식민지 사회는 열심히 일하 고 저축해도 삶의 질이 향상될 가능성이 별로 없던 사회로 자본주의 재생산을 18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89 [부분 부정]론 동일한 기준이나 차원에서 인정과 부 정을 말하지 않는다. 인정하는 부분은 주로 부정하는 부분 은 관련되었다. 인력개발론이나 경제성장론에 대한 역사 학계의 가장 보편적인 인식 방법이다. {양적으로는 인정하겠지만 질적으 로는 문제가 있다}는 식인데 박정희 시대를 {개발은 인정하는데 독재는 문 제}라고 인식하는 것과 유사하다. 양을 측정하는 방식만큼 납득하거나 공 유할 만한 질의 측정 방식은 있는가? 질만큼 양도 중요한 것은 아닐까? 양 과 질, 그 상호관계에 대해 너무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박정희 시기의 개발과 독재가 그러하듯이, 인정하는 양적 부분과 부정하는 질적 부분은 동전의 앞뒷면이 아닐까? [맨파워 손실]론을 전면 부정론이라 하지 않고 [종합 부정]론이라 한 것 은 개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해볼 때 개발보다는 손실이 많았다 는 비중의 문제, 전체 역사상의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각 계급의 생 존 논리적 대응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 민족해방운동의 무용성 이나 부정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는 언급 도 개발의 과대평가와 그로 인해 전체 역사상이 왜곡될 위험을 지적한 것이다. 일제시기에 식민 지배 탓에 한국인이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얼마이고, 사망한 자는 몇이나 될 까? 머릿수와 시간을 계산해볼 필요가 있다. 언제부턴가 수탈을 얘기하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언제 우리가 수탈이나 피 해를 구체적, 체계적으로 연구해본 적이 있는지 의문이다. 원활히 하는 인간군 형성에 회의적이다. 일 잘하는 사람은 감옥이나 공동산으 로 갔다는 말은 엄청난 맨파워 손실을 의미한다. 진정한 재능은 썩히고 왜곡된 재능은 습득했다}. 지수걸( ), 앞의 글, 110쪽.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189

190 [맨파워 손실]론은 인력개발론의 정곡을 찌른 것일까? 뒤에서 보듯이 인력개발론, 나아가 경제성장론은 당시 비중이나 일제시기 전체 역사상보 다는 현재성, 즉 [비록 그것이 일부였더라도 현재 보기에 중요한 점]을 추 구하는 주장이다. 경제성장론자들은 이 점에서 민족해방운동 연구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쉽게 당파성이나 가치관의 문제로 넘어가지 말고 생 각해보자. 역사 연구에서 현재성이 불가피하더라도 지나치면 과거에 대한 현재의 폭력이 된다. 어디까지가 탐구이고 어느 선을 넘으면 폭력일까? 타 당하고 납득할 만한 기준이 필요하다. 다른 과제도 있다. 토론자들도 인정하듯이 해방 후 한국 사회를 주조 한 것은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아니라 일제시기에 개발한 또는 개발된 인 력들이다. 민족해방운동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중요한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필요하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제는 민족해방운동 실패의 역사도 성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경제성장론이나 인력개발론에 즉자 적으로 맞서 손실의 크기나 민족해방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해 방 후 역사를 감안하면 현실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라 보기 어렵다. 이런 성찰의 과정에서 민족해방운동론이나 경제성장론과 달리 해방 전후의 역 사상을 포착할 수 있는 제3의 지점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2. 성장의 양면성과 해방 후 연속성 인력개발론에 대한 정형화된 비판 방식이 성장에는 긍정적인 측면만이 아 니라 부정적 측면도 있으며 이러한 부정적 요소도 해방 이후로 이어졌다 이미 토론회에서 이런 관점이 제시됐다. 정태헌( ), 앞의 글, 31~32쪽. 19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91 는 설명이다. 토론자들이 말하는 부정적 요소는 이렇다. 주체성을 상실한 굴종적 인간군, 황국신민의 자질, 자본가의 정상배적 성격, 수동성, 반민 족성, 매판성, 10 권력과의 유착, 공정한 경쟁보다 독점을 좋아하는 안이한 습성, 폭력적 노무관리, 개발독재형의 경제개발정책을 선호하는 반민주적 성향, 11 나아가 해방 이후 각종 비민주적 억압체제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정신구조와 사회풍토도 식민지 유산으로 지적한다. 12 부정적 요소는 비주 체성과 비민주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연속 여부와 관련하여 토론자들은 인력개발론이 주장하는 연속은 일 부 부정하면서 13 위에서 지적한 부정성의 연속을 함께 봐야 한단다. {해방 전후사의 연결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플러스적인 측면 이외에 마이너스 측면도 살펴야 하고, 또 단절의 모습도 균형 있게 이야기해야 한다.} 14 양면성과 연속성에 관한 논의는 토론자들의 현대사, 현재 한국 사회에 강창일( ), 앞의 글, 67쪽, 98쪽, 해방 후 폭력적인 억압체제와 연결. 비민 주적 관료제, 억압적 법체계, 권위주의 체제와 사회형성의 인적 토대로 봄.. 강창일( ), 앞의 글, 67쪽;지수걸( ), 앞의 글, 100쪽. 10 정태헌( ), 앞의 글, 26쪽, 32쪽, 한국 자본주의의 취약성, 대외의존성, 부 패성, 천민성과 연결. 11 정재정( ), 앞의 글, 101쪽, 자주적인 민족국가와 자립적인 국민경제의 걸림돌로 봄). 12 강창일( ), 앞의 글, 67쪽. 13 강창일( ), 앞의 글, 99쪽, 해방 후 공장가동이 중단된 것은 경영자와 기 술자가 없었기 때문이다;정재정( ), 앞의 글, 109쪽, 태평양전쟁과 한국 전쟁 기간에 식민지 자본주의의 생산력적 기초가 상당 부분 파괴되었고 1950 ~1960년대 기술 도입은 주로 미국 유학생에 의한 것이다. 14 정재정( ), 앞의 글, 101쪽, 109쪽.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191

192 대한 비판의식이 투영된 것이다. 어디까지가 식민지 사회에서 체득한 부정 성이고, 설사 체득했더라도 해방 이후 그것이 다시 발아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지, 같은 부정성이라도 예를 들면 대외의존성 일제시기와 해방 이후에는 차이가 없는 것인지 등등 여러 의문이 꼬리를 문다. 또한 주체성 과 민주성은 개체의 속성이라기보다는 개체 간의 관계 문제가 아닐까? 그 렇다면 현대사 또는 현재의 비주체성, 비민주성이 일제시기와 유사하다고 해서 마치 사람을 통해 그런 속성이 전파된 것처럼 해석하기보다는 양 시 기에 그런 부정성이 표출되는 구조, 조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분석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해석이나 비판이 아닐까. 같은 근대라도 분명 양자 사이 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며, 이를 밝히는 것은 한국에서 주체성과 민주성의 행로를 해명하는 길이리라. 또한 인력개발론이 긍정의 연속론을 주장했다면 토론자들은 부정의 연 속론을 주장하거나 그런 측면도 함께 보자고 주장하는데, 자신들이 간주 하는 현재의 선이나 악이 일제시기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점에서 모두 단선 적 기원론의 속성을 지닌다. 단선적 기원론의 문제는 III장에서 다루겠다. 3. 개발의 주체와 관점 경제성장론이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한국인의 주체성이다. 기존의 수탈 사나 제국주의사가 한국인 없는 한국사를 만들었다며 한국인의 주체적 대응에 주목한다. 인력개발론에서도 한국인 주체의 자기개발을 강조한다. 한 토론자도 {일제가 조선인을 가르치고 성장시켰다는 주장과 일제의 의 도와 관계없이 혹은 식민지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이 주체적으로 어려움을 뚫고 노하우를 배워나갔다는 주장은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 19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93 다}고 한다. 15 이에 대해 사회자는 문제 있는 견해라며 인력개발론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 필요하다고 했다. 16 전면적인 비판이란 결론에서 제시한 [계급적 관점에서 문제를 보는 것]인 듯하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다는 지적 17 에 대해서도 자칫 [무원칙한 양시양비론으로 전화될 우려] 가 있다며 [원칙과 가치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인력개발론 이 {공장기숙사 생활을 통한 규칙적인 생활습관, 단체생활 규율 습득, 학 습과 경험을 통한 기술능력 향상 등 테크노크라트 측면을 거론하면서도 노동운동 등 대중운동이나 독립을 찾는 투쟁을 통해 자립적 인간으로 깨 어나는 민주적 훈련 같은 보다 상위의 가치 개념은 전혀 거론하지 않는 편향성이 있다}며 {테크니컬한 수준의 실용주의적 현실인식 경향}을 비판 했다. 18 계급적 관점, 아니 좀 더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관점에 선 원칙과 가치체계를 요구하였다. 필자가 처음 인력개발론 문제에 개입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균 형]에 의해 얼버무리는 것보다 상호 입장을 분명히 하고 상호 경쟁하는 것 이 생산적이라 전제한 뒤, 인력개발론이 한국인의 자기개발을 말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자본가를 주체로 내세우고 성장은 자본가 의 자본 축적에 적합한 인간군 형성을 의미하며, 역사학계의 민중주체론 과 대비시켰다. 19 대중적 글쓰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998년이란 시점 15 정재정( ), 앞의 글, 99쪽. 16 지수걸( ), 앞의 글, 100쪽. 17 정재정( ), 앞의 글, 101쪽. 18 정태헌( ), 앞의 글, 101~102쪽. 19 정병욱( ), 역사의 주체를 묻는다: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을 둘러싸고, 역사비평 1998년 여름호(통권 43호).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193

194 에 자본가와 민중이란 거친 구분 틀로 편 가르기 하는 식의 전개는 단순 하고 안이했다. 다만 이런 당파성, 계급성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 는지 주체의 문제는 다소 [선언적]이라며 주체들의 여러 식민지 경험 탐구 를 실마리로 제시하며, 이를 위해 전근대와 근대를 잇는 내적 흐름의 파 악, 경험의 장으로서 일상생활의 다양한 층위 연구(일상 차원에서 삶의 실체 로서 파악), 기원론적 접근방식 탈피를 제언했다 또 다른 문제의 소재 역사학계에서는 요새 식민지 근대화론, 경제성장론과 관련해서 논란되는 점은 이미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 때 모두 지적되었다는 소리가 있다. 인력개발론의 문제점도 앞서 본 1994년 토론회 때 거의 다 짚었으며 이후 역사학계의 비판은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1997년 탈근대의 입장에서 [규율권력론]이 제시되었는데, 경제성장론과 달리 근대 의 어둠(규율권력)과 그 연속성에 주목하였다. 21 근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만, 근대의 보편성을 과도하게 적용하다 보니 한국적 상황은 사라지고 대안은 더 묘연해진 것 같다. 이미 오래전에 문제점이 거의 다 지적되었고 [올바른] 노선이 제시되었 는데도 오늘날 인력개발론이나 경제성장론의 생산력에 비해 역사학계는 거의 불모지대이다. 이는 그간 양측에서 이 주제와 관련해 간행한 책 수 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20 정병욱( ), 위의 글, 240~241쪽. 21 편저(1997), 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사. 19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95 경제성장론을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가치로 받들고 있는 듯 하다. 1994년 토론회 때 사회자가 한 말, {학문적 설명력이나 대중적 설득 력을 잃어가고 있다}, {학문적 척박성}, {근현대사의 구조적 비극성을 연구 자들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논증하였는가}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우리는 1994년의 토론회에서 인력개발론이 갖는 [문제의 소재]만이 아니라 역사 학계의 [문제의 소재]도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위의 토론회나 필자의 경험으로 보건대 학 술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일단 당파성을 괄호 안에 집어넣고(당파성을 버리 자는 것이 아니다) 당파성에 종속되지 않는 방법과 기준으로 서로의 주장 이 갖는 타당성과 설득력을 검증해보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당파성을 내세우는 풍토에서는 {지나치게 히스테릭한 반응}, 22 따로 따로 궐기대회 수준의 토론회 아니면 침묵이 있을 따름이다. 세상에 10년 반짝하는 르네 상스는 없다. 도그마가 하나둘씩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근대와 근대 너머 를 잇는 르네상스 시기가 아닐까? 가교를 놓기 위해 자세를 가다듬고 무 엇이 필요한지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22 정재정( ), 앞의 글, 109쪽.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195

196 II. 인력개발론의 변화 - 안병직을 중심으로 1. 사라진 것 - 왜곡과 계급의식 이 장에서는 그간 인력개발론의 변모를 주로 안병직의 두 글 23 을 중심으 로 살펴보면서 생각할 점을 제시해보겠다. 두 논문을 비교해보면 1989년에 있었던 많은 유보 조항이 2005년에 는 개설적인 글이라서 그런지 사라졌다. 24 대표적인 것이 왜곡과 계급의식 이다. 1989년 논문에는 1930년대 조선인 노동자계급이 {왜곡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질적으로 성장하는가}를 밝히겠다며 {조선인 노동자계급 의 질적 성장을 밝힘에 있어서는 그 계급의식의 성장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나, 여기서는 계급의식 성장의 전제로서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 자 본에 포섭되면서 어떻게 근대적 계급으로서 형성되는가 하는 경제 과정 을 밝힘에 한정한다}고 했다. 25 분석 끝에 안병직이 도달한 결론은 {조선 인 노동자의 계급의식의 성장은 강조하지만 노동력의 질적 발전은 부정} 하는 제국주의 침략 비판 연구보다는 {조선인 노동력의 질적 발전을 강 23 안병직(1989), 植 民 地 朝 鮮 의 雇 用 構 造 에 관한 硏 究 년대의 工 業 化 를 중심으로, 近 代 朝 鮮 의 經 濟 構 造, 比 峰 出 版 社 ;안병직( ), キャッチ@ アップ 過 程 としての 韓 國 經 濟 成 長 史, 歷 史 學 硏 究 두 논문이 비교하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1989년 것은 자료에 즉한 세부 연 구이고 2005년 것은 개설적인 글이다. 1989년 것에 상응할 만한 논자의 최근 세부 연구가 없기 때문에, 대략적인 흐름만을 파악하려 한다. 25 안병직(1989), 앞의 글, 393쪽. 19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97 조}하는 경제성장론 26 에 가깝다고 자평한다. {그러나 양자 간에는 그 질 적 발전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필자(안병직-인용자)는 식민지 공업화 과정에 있어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질적으로는 발전하지만 식민지 적 왜곡성 때문에 그것은 일본인 노동자들의 그것과 동일해질 수가 없다 는 것이다. 즉 양자 간에는 식민지 체제에 대한 인식이 다른 것이다. 이러 한 식민지적 왜곡성은 조선인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 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점에서 그 식민지적 왜곡성은 조선인 노동자 들의 계급의식의 성장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 다. 조선인 노동자의 양적 성장을 가지고 그 계급의식의 성장지표로 곧장 직결시키는 것은 아마 옳지 못할 것이다.} {질적 발전의 왜곡성, 즉 식민지 공업화에 있어서 조선인 노동자계급의 질적 한계는 식민지 자본주의가 해 방 후의 한국에 있어서의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로 바로 접속될 수 없는 노 동력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년이면 논자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폐기하고 중진 자본주의 론을 주창하면서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의 한 계기로 {값싸고 풍부한 양 26 이때 안병직이 말하는 경제성장론은 G. R. Saxonhouse(1981), 戰 間 期 におけ る 朝 鮮 人 勞 動 者, 中 村 隆 英 編, 戦 間 期 の 日 本 経 済 分 析, 山 川 出 版 社 를 말한 다. 색슨하우스는 학계의 통설과 달리 1930~1940년대 노동자, 기술자, 경영자 로서 조선인의 참여가 증가하였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분석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 없이는 조선에 경제발전의 길은 없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며, 또 한 조선의 식민지 경험을 1961년 이후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과 연관 지으려 는 難 題 를 다루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385~387쪽). 그런데 안병직은 색슨하 우스의 주장을 해방 후 한국의 경제성장과 연관 지었다[안병직(1989), 앞의 글, 390~391쪽]. 27 안병직(1989), 앞의 글, 427~429쪽.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197

198 질의 노동력}을 강조하던 시점인데, 28 실증 논문에서는 왜곡과 계급의식 문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1993년 단계에 이르면 여전히 왜곡 문제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계급 의식]이란 단어는 사라진다. {조선인 노동력의 질적 발전은 아직도 초보 적인 수준으로서 일본인의 고급의 기술과 기능을 보좌하는 정도의 것이 었으며, 또 그러했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수적으로 크게 증가할 수 있었 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점이 바로 세계자본주의에 포섭되는 과정에 서 선진자본주의로부터 배워 공업화를 경험하게 되는 식민지 경제 혹은 NIEs(신흥공업경제국)의 특질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인 노동력의 질적 발전은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민지적 차별제도하에서 이루어 졌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차별제도란 학교교 육이나 직업훈련에 있어서의 기회 참여의 차별과 황국신민화의 강요를 가 리킨다. 이러한 차별제도하에서 조선인 노동력이 비록 식민지 체제 하에서 그 질적 향상을 거듭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상적 발전을 하리라 고 기대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식민지 체제의 체제 모순 이 증폭되어가고 있었기 때문 여기서 우리는 식민지적 모순이 어떤 식으로든지 해소되지 않으면 조선인 노동력의 질적 발전은 기대될 수 없 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질적 발전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식 민지 체제에 대한 저항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독자적 전개의 길을 발견하 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저개발제국이 자립적 자본주의 경제를 전개함에 있어서 이룩해야 할 역사적 과제일 것이다.} 안병직( ), 중진 자본주의론으로서 한국 경제, 사상문예운동 2호, 풀빛. 19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199 1993년의 논문에서 식민지 차별을 강조하며 1989년에 비해 노동력의 질적 발전을 말하는 어조를 낮춘 것으로 볼 때 [계급의식]이란 단어는 사 라졌지만 그 의미는 [질적 발전]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아 울러 1989년의 글에서는 노동력의 발전 정도를 볼 때 해방 이후와 접속 이 불가능하다고 얘기한 반면 1993년의 글에서는 NIEs의 특질이 아닐까 라고 추정했다 년으로 건너뛰면 [왜곡]도 [질적 발전]도 사라진다. 다양한 업종 에서 공장 노동자가 증가하였고, 산업 분야에 관계없이 숙련공과 기능공 의 성장을 말하며, 특히 전시기의 기술훈련을 강조한다. 30 그것도 자신의 1993년 논문을 근거로 인용하였는데, 자신이 달았던 그 많은 유보 조항은 보이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경향은 이미 1995년 역사학대회에서 나타났다. 그는 {식민지 체제하에서 한국민이 근대적인 가 등의 제 계급으로 변신한다는 의미에 있어서 자기개발}을 강조하면서 노동자 계층의 증가, 성장을 말하는데 이전 논문에서 보이는 유보 조항은 발견되지 않는다. 31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하나는 과문해서 그런지 몰라도 1980년대 말, 29 안병직(1993), [국민직업능력신고령] 자료의 분석, 近 代 朝 鮮 工 業 化 의 硏 究 ~1945년, 일조각, 262~263쪽. 그는 조선인이 기능자 및 기술자로 향상 되기 위해서는 {기술 천시의 전통적 관념, 식민지 당국의 차별적 교육정책 및 조선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의 부정}이라는 {3중의 벽}을 뛰어넘어야 했다고 본 다(223쪽). 30 안병직( ), 앞의 글, 13~14쪽. 31 안병직( ), 韓 國 에 있어서의 經 濟 發 展 과 近 代 史 硏 究, 第 38 回 全 國 歷 史 學 大 會 發 表 要 旨, 128쪽, 134~135쪽.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199

200 1990년대 초 그 많은 유보 조항을 사족으로 만들어버릴 새로운 연구나 자료가 나온 것 같지 않은데, 이런 단순화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일제 시기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보통 [왜곡]에 주목하는데 [왜곡에도 불구하 고]라는 탁견은 어디서 기원할까? 2005년의 다음 얘기를 통해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경제사에서 (전전과 전후는 - 인용자) 경제성장 주체의 교대라는 단절적 측면도 있지만 시장경제 시스템이라는 연속적 측면도 있다. 그 중에서 어느 측면을 고찰 하느냐는 연구자의 현재적 입장에 따라서 선택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전전의 식민지 경제사를 경제성장사의 시각에서 관찰하려는 것은 필자의 한국 근현대사 경제사에 대한 현재적 입장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입장은 식민지 경제사의 수탈적 측면을 부정하거나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식민지 경제사를 고찰함에 수탈사적 측면보다도 성장사적 측면을 고찰하 는 것이 중진국으로부터 선진국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는 한국 현대경 제사의 과제 수행에 유용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32 현실에서 시장경제 가, 자본주의가 승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자신감의 반영인 듯하 다. 반면에 현재 역사학의 실패는 일제시기 연구 자체보다는 [그렇지 않다] 는, 적어도 [그런 식으로는 선진국으로 이행할 수 없다]는 현실 분석과 전 망의 결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또 다른 의문은 노동자의 계급의식이나 질적 발전에 관한 것이다. 교과 서적으로 말해서 노동자의 성장에는 객관적 조건(숙련도, 노동과정, 산업의 유기적 관련성 등)과 주체적 조건(착취와 억압에 대한 자각과 의식의 발전, 조직 화 등)이 있을 터인데, 위에서 보듯이 안병직은 양자 간의 불일치를 [왜곡] 32 안병직( ), 앞의 글, 6쪽. 20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01 을 통해 설명하다가 나중에는 주체적 조건을 객관적 조건에 희석시켜버린 다. 객관적 조건에만 주목하는 것이 (한국인) 주체를 강조하는 시각이 될 수 있을까? {질적 발전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식민지 체제에 대한 저 항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독자적 전개의 길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 며 이것이 바로 {저개발제국이 자립적 자본주의 경제를 전개함에 있어서 이룩해야 할 역사적 과제}라고 주장한다. 33 독자적 전개의 길이란 무엇일 까.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이 되는 것 외에 그 구체적인 길은 제시되지 않 았다.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 또는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의 불일치, 아 니면 미흡한 질적 성장을 논리적으로 해결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담담히 역사적 현실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사실 인력개발론의 내용이 담긴 안 병직, 박순원, 정재정, 모스코비치, 색슨하우스 등의 자료에 즉한 연구 성 과는 1930년대 이후, 특히 일제 말기 노동자층의 다양한 분화(비숙련공과 숙련공, 기술자와 기능자, 노무자와 관리자) 또는 그 조짐을 보여준다는 면에 서 새로운 연구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부 조선인 노동자의 성장은 박순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동자층의 [불균형], [복합 다양성] 34 의 정도를 높였을 것이다. 이는 해방 이후 정세 변화와 맞물리면서 공장 또 는 직장 내 정치를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된다. 보통 좌우의 대립, 미군정 의 정책이 주요 변수로 설정되는데 주체의 입장에서 노동자의 분화도 큰 변수로 작용하였다. 조선식산은행의 경우 해방 직후 [접수위원회]를 둘러 33 주 28 참조. 34 박순원(2006), 식민지 공업 성장과 한국 노동계급의 성장, 한국의 식민지 근 대성 로빈슨 엮음, 도면회 옮김), 삼인.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201

202 싸고 한국인 직원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송인상은 이를 우익 대 좌 익, 실력파 대 비실력파의 갈등으로 파악했다. 35 여기서 [실력]을 숙련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 좀 더 검토해야겠지만, 해방 직후 숙련자나 실력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이 있었고, 일본인의 공백을 메우기 위 해 급히 승진할 가능성이 높았던 전자는 자신의 식민지 경험(숙련, 실력)을 과장하기 십상이었으며, 대부분 자신의 상승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미군 가까웠다. 더 많은 직장의 사례를 검토해봐야겠지만 36 노동자 전체로 볼 때 식민지 말기 객관적 조건의 호전이 주체적 조건을 파괴하는, 즉 계급으로서 동일한 이해기반을 허무는 역할을 하였던 것은 아닐까? 노 동자/노동력의 성장이 꼭 계급의식의 성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오히 려 가로막을 수도 있다. 인력개발론이 말하는 일제 말기 한국인 노동자의 성장은 과장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성장한 자들의 해방 후 역할은 그 비 중에 비해 컸다. 35 정병욱(2004), 한국근대금융연구, 역사비평사, 428쪽. 36 미군정이 보기에 조선식산은행과 같이 주요 기업이었던 삼척시멘트 공장에서 도 해방 이후 재건 과정에서 갈등이 있었고 좌익이 세가 많았음에도 미 군정의 개입으로 우익 쪽이 득세했다. 이 과정에 해방 이후 바로 사무직으로 승 진한 숙련자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숙련자 중에서도 좌 익 성향으로 분류되었던 오병호는 직장을 떠나야 했다. 박순원(1994), 日 帝 下 朝 鮮 人 熟 練 勞 動 者 의 形 成 ;오노다[ 小 野 田 ]시멘트 勝 湖 里 공장의 事 例, 국사 편찬위원회 편, 國 史 館 論 叢 51 참조. 20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03 2. 새로운 것 - 소농사회론 왜곡, 계급의식은 버린 반면에 인력개발의 전제로 추가된 것이 소농사회 (론)이다. 캐치업 이론에 의하면 저개발국의 경제성장 조건 중 하나가 저 개발국에 선진국의 [성장 잠재력을 흡수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회적 능력의 배양기( 培 養 基 )로 소농사회를 지목한다. 37 안병직은 나카무라 사토루와 미야지마 히로시의 연구를 인용하여 {사회 적 능력은 자립성이 높은 소농경영으로부터 육성된 것은 아닌가라고 이 해되고 있다}, {자립적 소농경영이란 농민 스스로 형성한 공동체와 농촌시 장을 통해서 자립적 경영을 행하는 경영체를 말한다}고 한다. 38 이러한 소 농사회로부터 기업가, 근대적 농민, 노동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력개발론은 주체성과 내발성을 획득했지만, 이것이 증명 가 능한 주장인지 모르겠다. 아마 사회적 능력은 자립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경영방식만이 아니라 소유관계까지 포함할 때 과연 소농이 자립적인지, 자립적이라도 그것이 소농의 속성인지 관계의 속성인지, 또한 자본주의화 를 겪으면서 각 주체가 그 속성을 발휘하거나 간직했다는 증거가 있는지 의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소농경영의 자립성이란 자기착취의 강도에 의해 좌우된다. 혹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전통이 아닐까? 여하튼 근면한 사 람들이 비록 계급은 여럿으로 나뉘었지만 힘을 합쳐 자본주의를 이룩했 다는 신화로 들린다. 안병직이 인용하는 나카무라 사토루의 소농사회론은 동북아시아 자 37 안병직( ), 앞의 글, 8~9쪽. 38 안병직( ), 앞의 글, 11쪽.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203

204 본주의 형성의 한 특징으로 15~16세기에 출현하기 시작한 소농경영 발 달에 주목한 것이다. 소농사회론 이외에도 유형론, 아시 아 역내 경제 네트워크론, 식민지 자본주의, 전제국가형 근대화론 등이 동 아시아 자본주의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나카무라 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소농사회를 흡사 옛날 자본주의 발전을 논할 때 의 매뉴팩처처럼 사용하고 있다. 서구와 동북아시아에 안정적 소농사회가 출현했고 그 가운데 일본, 중국, 한국 순으로 소농사회가 발달했으며 그것 이 이후 자본주의 발달의 차이를 가져왔다고 한다. 39 이미 나카무라 본인 이 마르크스의 매뉴팩처론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구체적인 역사과 정에서는 적당한 개념이 아니라고 한 적이 있다. 40 나카무라 사토루가 힌트를 얻었다는 미야지마 히로시는 소농사회가 인구의 급속한 증가와 농업기술의 변혁을 전제로 17세기경 동아시아에 확 립되었고, 촌락 및 같은 사회구조, 집권층과 국가지배 구조, 사상에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전통]이 20세기에도 부단히 재생 되거나 때로는 강화되었다고 한다. 미야지마의 소농사회론은 자본주의 형 성이나 인력개발의 배양기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관념적인 [근대와 전근대]라는 구분과 다른 [소농사회 이전과 이후]라는 구분을 제 시한 것이다. 일종의 [근대] 또는 근대 인식을 상대화하는 작업이며 전통 과 근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나카무라 사토루 지음, 정안기 옮김(2005), 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 혜안, 1장 참조. 40 中 村 哲 安 秉 直 譯 (1991), 세계자본주의와 이행의 이론, 비봉출판사, 7장 참 조. 41 宮 嶋 博 史 (1994), 東 アジア 小 農 社 會 の 形 成, 長 期 社 會 變 動, 東 京 大 學 出 版 會. 20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05 III. 단선적 기원론의 문제점-에커트를 중심으로 인력개발론을 주장하는 외국학자로서 칼 모스코비치, 게리 R. 색슨하우 스, 카터 에커트 등이 자주 거론된다. 이 장에서는 주로 카터 에커트를 중 심으로 인력개발론이 갖는 단선적 기원 인식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겠다. II장이 주로 노동자에 관한 것이라면 이 장은 테크노크라트 에 관한 것이다. 42 카터 에커트는 식민지 말기 조선의 란 글 43 에서 1937~1945년간 전쟁기 공업화의 유산이 1950~1960년대 경제 부 흥과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전쟁과 일본의 만주 지배는 한국인에 게 출세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남한의 급속한 발전을 낳은 주요 사회세력이 이 시기를 거치며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미 제국의 후예 (1991)에서 고창 김씨가의 기업 활동을 분석하며 해방 전후의 연속을 주장했는데, 이 논문에서는 기업가에서 노동자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층의 연속상을 제시하고 있다. 1960~1970년대 주요 사회세력이 식민지 말기에서 기원한다는 주장 은 자연연령상 당연한 이야기다. 문제는 연속의 확인이 아니라 그 내용과 42 이하 카터 에커트에 관한 내용은 정병욱( ), 에커트 교수의 [식민지 말기 조선의 비판, 교수신문 389호를 것이다. 43 Carter J. Eckert(1996), {Total War, Industrialization, and social change in late colonial Korea,} Peter Duus, Ramon H. Myers & Mark R. Peattie, eds., The Japanese Wartime Empire, 1931~1945, Princeton Univ. Press[박지향 외 편(2006),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205

206 성격이다. 에커트는 식민지 시기의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연구가 많이 되었으니 기존 연구가 간과한 긍정적 측면을 조명한다고 했다. 에커트식의 단선적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식민지 경험에 대한 과대평가가 더러 있다. 조선식산은행에서 한 국인이 [은행관리직]의 3분의 1을 차지하였고 1944년경 [고위직] 비율이 40~45퍼센트로 상승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가 인용한 칼 모스코비치의 연구에 의하면 3분의 1은 [은행관리직]이 아니라 정규 직 원을 총칭하는 것이며 40~45퍼센트는 [고위직]이 아니라 신규 채용자 중 상층 학력자인 [대졸자]를 의미한다. 44 신규 채용자 중 한국인 대졸자가 고 위직에 오를 가능성은 있으나 일본인 대졸자에 비해 그 비율이 낮았으며, 가능하더라도 10년쯤 뒤의 일이다. 칼 모스코비치는 1943년 한국인 간부 직(대리 이상)은 7.9퍼센트, 미확인분을 모두 한국인으로 간주해도 19퍼센 트에 불과하다고 했다. 45 또한 전시기에 한국인 채용이 증가하고 승진 기 회가 늘었다는 [전쟁의 역설]을 강조하는데, 여전히 한국인의 최고 지위는 44 Karl Moskowitz(1979), The Employees of Japanese Banks in Colonial Korea, Harvard University Ph. D. Thesis, p. 290, pp. 391~ Karl Moskowitz(1979), p 한국에서 칼 모스코비치의 연구 수용 경로와 방식 자체도 탐구거리다. 칼 모스코비치는 민족 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하지 않 았으며 식민지 경험을 과대평가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는 논문 곳곳에서 경험 과 그 한계를 문헌 사료와 인터뷰를 통해 실증하였고 그 분석은 지금도 빛이 바 래지 않는다. 다만 결론의 말미에서 식민지 경험과 해방 이후 경제성장을 연결 시켰는데, 이후 그의 논문은 주로 결론의 이 부분만 집중 조명을 받았다. 모스 코비치의 논문은 한국에서 인력개발론을 소개하거나 연구사를 정리할 때 항상 거론되는데, 한국인이 민족 차별을 받지 않은 예로, 심하게는 에커트가 곡해한 부분을 재인용하여 한국인의 놀라운 성장을 증명하는 예로 쓰인다. 20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07 2~3류 지점장이었고, 중요 업무에 접근하지 못했다. 발전 단계가 다른 식 민지 조선과 일본의 동일시기 증가율을 비교하여 전자의 높은 성장을 강 조하는 방식도 과대 해석의 여지가 있다. 둘째, 식민지 경험에 대한 파악이 일면적이다. 주로 산업화에 유용한 도구적, 기능적 측면에만 주목해 출세의 경로가 중요하지 어떤 삶의 방식 과 가치를 체득했는가는 문제 삼지 않는다. 일면적 파악은 해방 이후 경제 성장과 연결 짓기는 편리하겠지만 연속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이해를 가 로막는다. 조선식산은행원들은 실무경험 외에도 가족주의적 경영, 권력 의존, 국가주의, 통제에 익숙했으며, 일부는 그것을 내면의 가치로 받아들 였다. 46 이를 감안하지 않으면 해방 직후 무책임한 자금 유용, 정실거래, 한때 경제성장의 견인차이자 정경유착의 대명사였던 한국산업은행의 양 면성을 이해하기 힘들다. 셋째, 식민지 기원과 전쟁의 역설을 강조한 반면 해방과 그 후 요인을 경시한다. 식민지기에 성장의 기원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 나 가능태일 뿐이다. 현실태로 전환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보다 해방이 었다. 울분으로 술독에 빠져 지내던 지방지점 주임이 해방 이후 이사와 은 행장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시기 학력이나 실무경험이 아 니라 해방으로 일본인이 퇴각함에 따라 발생한 인력 공백 때문이었다. 또 한 식민지 말기에 사업을 개시한 자본가라 하더라도 해방 이후 성장하기 위해서는 미국 중심의 경제권 재편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한 미국 등이 지원하는 각종 교육원조금이 국내의 인적 자본 축적을 위해 투입되 46 정병욱( ), 한국인의 식민지 경험과 근대주체 형성 - 조선식산은행원 을 중심으로, 역사문제연구 11 참조.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207

208 었으며, 미국 유학 및 국내 배출자의 역할이 점차 증대되었다. 47 긍정성이 든 부정성이든 그 자체보다는 해방 이후 재생되는 구조와 조건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한국 현대사는 식민지 시기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산물이다. 넷째, 인적 측면의 연속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구조적 요인은 간과되기 쉽다. 식민지 시기 소수의 한국인 엘리트가 해방 후 성장할 수 있었던 것 은 다수의 한국인을 배제한 식민지적 교육 및 취업 구조 덕택이 컸다. 이 런 구조의 귀결로 소수 엘리트는 해방 이후 별다른 경쟁 없이 우월한 지 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해방 후 활약이 크면 클수록 그만 큼 식민지 시기 인적 성장이 빈약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 예 로 1920년생인 백선엽은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5사단 장, 1950년 제1군단장을 거쳐 33세인 1952년에 2군단장을 거쳐 육군참모 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물론 전시이기는 하지만 일제시기에 한국 인 장교가 꾸준히 많이 육성되었다면 33세의 참모총장이 가능한 일이겠 는가? 또한 에커트의 연속론은 식민지와 독립국의 차이가 주의 깊게 고려되 지 않았다. 그러나 이 차이는 주체의 행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식산 은행원은 대부분 성취욕이 강하고 일종의 엘리트의식을 가진 자들이나 식민지 시기에는 개인적 성취(취직)와 사회적, 민족적 평판(부일협력)의 불 일치로 곤혹스러워했다. 해방은 이러한 곤경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제공 하였다. 이들이 [국가건설의 대업]에 열심이었던 것은 이러한 평판의 불일 치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47 서찬수( ), 앞의 글, 20~21쪽;허수열(2005),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 무, 262쪽. 20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09 일제시기에 형성된 인간군의 부정적인 측면, 즉 기술 치중, 종속성, 천 민성, 무책임 등을 지적하는 부정의 연속론은 긍정의 연속론에 대항하여 일제시기 경험과 그 유산을 판단하는 데 하나의 균형점을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그 자체도 기원론으로서 식민지 경험의 특정 부분을 과장하거나 축소하면서 기원론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어쩌면 역사 연구에서 기원론은 숙명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지속적으 로 기원론, 특히 결과론적 단선적 인식을 경계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보 다 단선적 기원론이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빈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실현되지 않은, 사라지거나 패배한, 현재에 침잠돼버린 과거의 다양한 가 능성은 현재를 상대화하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소중한 재료이다. IV. 최근의 비판을 보면서-[자기개발]의 문제점과 대안 모색 허수열은 개발 없는 개발 에서 일제시기 교육과 기술을 검토하였는데 인 력개발론적인 연구에 대해 1 내적 발전의 흐름 간과, 2 [자기개발]의 흐 름 간과, 3식민지 경험의 과장(해방 이후 요인 간과)을 지적하였다. 48 충분 히 공감하는 바이지만 2[자기개발]에 대해서는 주의할 점이 있다. 주지하 다시피 경제성장론이나 인력개발론을 비판하는 논리 중 하나가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에 대한 [민중 기여론]인데, 이때 꼭 거론되는 민중의 교육열 이 [자기개발]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앞서 보았듯이 인력개발론이 한국인 주체를 내세우며 줄곧 강조하는 것이 [자기개발]이며, 조선후기 교 육열까지 거론한다. 서로 비판하면서도 [자기개발]이란 점에서는 공감하는 48 허수열(2005), 위의 책, 제4장 참조.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209

210 셈인데, 이는 안이한 아닐까? 이제 민중의 교육열 도 문제 삼아야 할 시점이 아닐까? 교육열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또한 자기개발 강조와 그에 대한 동조는 결국 사회나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여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부추기는 실력양성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인력개발론의 문제의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역사에서 자본주 의의 발달에 도움이 되는 인간은 언제부터 생겨났는가]이다.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력개발론을 비판하는 여러 주장을 보면 {도움이 안 되었다}, {식민지기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를 맴돈다. 그다 지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벗어난 것 같지 않다. 비판이 인력개발론에 매 몰되어서는 곤란하다. 궁극적으로는 인력개발론의 질문을 인간의 관점으 로 전환시켜야 한다. {한국인의 삶의 역사에 자본주의는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국인이 자본주의와 맺는 관계의 특성 은 무엇인가.} 이럴 때 생업에 열중하여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소농의 평 온함, 긍지, 미의식과 자본주의화에 따른 그 상실이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인력개발론이 한국사에서 한국인 주체를 강조하고 내적 흐름과 연결 시키려는 시도 자체는 본받을 만하다. 내적 흐름에 대한 탐구야말로 근대 를 상대화시키는 주요 방법이 아닐까. 미야지마의 소농사회처럼 여러 주 제나 기구를 통해 근대 이전부터 근대까지를 연결시켜 해석해보는 작업 이 필요하다. 소농사회, 가족주의, 교육열, 과거제, 사회 이동과 지배체제 는 하나의 세트로 작동하며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새롭게 되어 생명을 이어가는 것 같다. 21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11 참고문헌 Moskowitz, Karl(1979), The Employees of Japanese Banks in Colonial Korea, Harvard University Ph. D. Thesis. Saxonhouse, G. R.(1981), 戰 間 期 における 朝 鮮 人 勞 動 者, 中 村 隆 英 編, 戦 間 期 の 日 本 経 済 分 析, 山 川 出 版 社. Eckert, Carter J.(1996), {Total War, Industrialization, and social change in late colonial Korea,} Duus Peter, Myers, Ramon H. & Peattie, Mark R., eds., The Japanese Wartime Empire, 1931~1945, Princeton Univ. Press[박 지향 외 편(2006),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宮 嶋 博 史 (1994), 東 アジア 小 農 社 會 の 形 成, 長 期 社 會 變 動, 東 京 大 學 出 版 會. 김경근( ), 인적 자본과 교육, 가족의 형성 및 경제성장, 한국교육재정경제 학회, 교육재정경제연구 4-2. 편저(1997), 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사. 김진영(2003), 교육열의 경제적 분석, 한국경제교육학회, 경제교육연구 나카무라 사토루 지음, 정안기 옮김(2005), 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 혜 안. 박순원(1994), 日 帝 下 朝 鮮 人 熟 練 勞 動 者 의 形 成 ;오노다[ 小 野 田 ]시멘트 勝 湖 里 공장의 事 例, 국사편찬위원회 편, 國 史 館 論 叢 51. 박순원(2006), 식민지 공업 성장과 한국 노동계급의 성장, 한국의 식민지 근대 성 로빈슨 엮음, 도면회 옮김), 삼인. 서찬수( ), 韓 國 의 人 的 資 本 蓄 積 過 程 과 그 要 因, 國 際 經 商 論 叢 5. 안병직( ), 중진자본주의론으로서 한국경제, 사상문예운동 2호, 풀빛. 안병직(1989), 植 民 地 朝 鮮 의 雇 用 構 造 에 관한 硏 究 년대의 工 業 化 를 중심 으로, 近 代 朝 鮮 의 經 濟 構 造 ( 安 秉 李 大 中 村 梶 村 秀 樹 編 ), 비 봉출판사. 안병직(1993), 국민직업능력신고령 자료의 분석, 近 代 朝 鮮 工 業 化 의 硏 究 ~1945년 ( 安 秉 中 村 哲 共 編 ), 일조각. 경제성장론의 [인력개발] 인식 비판 211

212 안병직( ), 韓 國 에 있어서의 經 濟 發 展 과 近 代 史 硏 究, 第 38 回 全 國 歷 史 學 大 會 發 表 要 旨. 안병직( ), 過 程 としての 韓 國 經 濟 成 長 史, 歷 史 學 硏 究 會 編, 歷 史 學 硏 究 802. 한국의 인적 자본 추계(1963~1993), 한국국제경제학회, 국제경제연구 1-2. 정병욱( ), 역사의 주체를 묻는다: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을 둘러싸고, 역사 비평 1998년 여름호(통권 43호). 정병욱( ), 한국인의 식민지 경험과 근대주체 형성 - 조선식산은행원을 중 심으로, 역사문제연구 11. 정병욱(2004), 한국근대금융연구, 역사비평사. 정병욱( ), 에커트 교수의 식민지 말기 조선의 총력전@공업화@사회변 화 비판, 교수신문 389호. 中 村 哲 安 秉 直 譯 (1991), 세계자본주의와 이행의 이론, 비봉출판사. 지수걸@강창일@정태헌@정재정@박찬승@이승렬( ), 토론:식민지 사회론의 제문제, 역사와현실 12. 허수열(2005),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21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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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J a p a n e s e C o l o n i a l R u l e a n d C o l o n i a l M o d e r n i t y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문영주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I. 머리말 II. 경제성장과 문명론 III. 식민지 현실의 양면 IV. 맺음말

215 I. 머리말 1980년대 후반은 세계사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현실사회주의 몰락은 자본주의의 승리와 그 지속성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실로 인식되었다. 이 와 함께 한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초래했다. 즉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선진과 후진의 계열화된 종속 적 체제를 기반으로 동시대 공간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순서 에 따라 후진이 선진으로 발전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자본 주의가 역사 발전의 최후 단계이며, 시장경제 체제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 고의 문명이라는 주장을 낳았다. 세계사의 격변은 한국의 역사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 경제의 선 진화가 당면한 역사적 과제라는 현재성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사를 재해 석할 것을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등장하였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시기에 자본주의적 경제 변화, 즉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단순한 주 장을 넘어서, 일제시기에 진행된 근대화가 한국 근대화의 역사적 기원이 라고 주장한다. 또한 일제시기 근대화는 조선후기와는 단절된 이식된 근 대화로서 서구의 충격과 일제의 식민정책이 핵심 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제시기 형성된 근대적 제도와 인적 자본의 개발이 해방 후 한국 고도성장의 역사적 배경이라고 주장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역사인식은 현실사회주의 몰락을 통해 자본주의가 역사 발전의 최후 단계라고 주장 하는 시장주의자들의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사학 극복을 목표로 정립된 내재적 발전론의 [자본주의 맹아론]과 [식민지 수탈 론]을 근저에서 비판한다. 내재적 발전론은 과잉된 민족주의 때문에 객관 적 사실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현실적 과제도 제시하지 못하는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15

216 역사인식으로 평가되었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의 논쟁에는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 는 인식론의 첨예한 대립이 내재되어 있다. 논쟁은 식민지 경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지 공업화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었다. 식민지 수탈론은 토지조사사업의 수탈 성과 식민지 공업화의 식민지성을 강조하였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토지조 사사업을 통해 근대적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었으며, 식민지 공업화는 식민 지 내부의 자본조달과 분업체계의 형성, 근대적 인적 자본으로서의 조선 인의 개발이라는 측면을 강조하였다. 식민지 경제에 대한 인식 차이는 식민지 경제가 조선후기와 대한제 국, 그리고 해방 후와 어떠한 방식의 연속성과 단절성을 가진 시기인가라 는 한국 근현대사 전체의 역사상에 대한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식민지 수 탈론은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의 성장과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을 자주 적 근대화 개혁으로서 높게 평가한다. 그리고 일제시기를 조선인의 자주 적 근대화가 왜곡당하고 수탈당하는 단절의 시기로 인식한다. 이에 반해 식민지 근대화론은 조선후기의 자본주의 맹아론을 서구의 자본주의 이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을 정리한 최근의 주요 저서와 문헌은 다음과 같다. 정연 태(2007), 20세기 전반기 사회경제적 변화의 의미, 한국사 시민강좌 40, 일 조각;이헌창(2007), 한국사 파악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점, 한국사 시 민강좌 40, 일조각;김낙년(2006a), 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재론, 해방 전후 사의 재인식 1, 책세상;강진아(2006), 제국주의시대와 동아시아의 경제적 근 대화, 역사학보 제194집;박섭(2004), 식민지기 한국의 경제성장;제국주 의 정책과 식민지민의 상호작용,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 백산서당; 정태헌(2004), 연구사를 통해 본 경제성장론 식민지상의 대두배경과 문제점,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 백산서당. 21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17 행 이론을 역사적 맥락을 사상한 채 적용시켰다고 비판한다. 일제시기의 근대화는 서구적 근대의 충격과 근대적 제도를 효율적으로 적용시킨 식 민 지배에 의해 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일제시기와 해방 후의 연속성 문 제에 대해서도, 식민지 수탈론은 자주적 근대화 노력의 회복이라는 측면 에서의 단절성과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대외의존성, 내부적인 비민주성 과 폭력성이라는 측면에서의 부정적 연속성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식민 지 근대화론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식민지 물적 유산의 상실을 인정하면 서도, 개발된 인적 자본과 근대적 경제제도의 경로의존성을 강조한다. 논쟁 과정에서 식민지 수탈론은 식민 지배의 부당성과 식민사학의 반 민족적인 경향을 비판하기 위해 정립했던 [원시적 수탈론]을 일정하게 극 복했다. 한국사의 자주적 근대화 방향과 일제시기의 근대적 변화 양상의 관련성, 서구적 근대와 식민지에 이식된 식민지 근대와의 차별성, 전통에 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형성된 식민지 근대가 한국인에게 미친 영향 등이 고찰되었다. 이러한 연구 동향은 식민지 근대의 보편적 측면인 근대성과 이러한 근대성이 식민지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특수 성으로서의 식민지성을 총체적으로 해명해보려는 시도이다. 이 글의 목적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일제시기 경제 변화를 [근대적] 경제성장으로 인식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경제성장론을 비판적 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비판적 검토의 대상은 최근 경제성장 사학의 방법 론에 근거하여 출간된 일련의 저작물들이다. 이와 함께 경제 대표적인 시리즈물로는 다음과 같은 책이 있다. 안병직 편(2001), 韓 國 經 濟 成 長 史 -예비적 고찰, 서울대학교 출판부;이영훈 편(2004), 수량 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서울대학교 출판부;이대근 외(2005), 새로운 한국 경제발전사-조선후기에서 20세기 고도성장까지, 나남출판;김낙년 편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17

218 성장 사학을 바탕으로 경제 영역을 넘어 일제시기의 성격과 의미를 역사 적으로 해석하려고 기획된 출판물도 검토하였다. II장에서는 경제성장론 이 추계한 일제시기 [근대적] 성장지표, 이를 기반으로 주장된 식민지 경 제의 역사적 성격,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방법론과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성장 사학과 [탈민족 문명사론]을 검토하였다. III장에서는 경제성장론 이 제시한 성장지표의 실증적 정확성 문제를 먼저 검토하고, 추계된 성장 지표로 식민지 경제를 해석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 였다. II. 경제성장과 문명론 1. 식민지 경제의 성장지표 2006년에 출간된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의 편자는 이 책의 특징 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 하나는 [식민지기의 경제실태를 수량적으로 드러 내는 데 역점을 둔 실증적 연구]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통념과 다른 발견이나 주장이 많아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는 논쟁적인 책]이라는 것이 다. 책은 일제시기 경제통계를 유엔이 권고하는 국민계정체계(System of (2006b),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서울대학교 출판부. [경제성장론]의 역사인식하에서 기획된 엮음 (2006),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책세상과 이 책의 대중판이라고 할 수 있 는 이영훈(2007),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을 검토하였다. 두 권으로 구성된 앞의 책 전체가 아니라, [경제성장론]과 관련된 기획의도 글과 논문이 비판적 검 토대상이다. 21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19 National Accounts, SNA)에 맞추어 국민계정 통계를 추계하였다. 위와 같 은 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식민지기와 해방 후 한국은행의 현행 국민계통 통계를 일관성 있게 연결하여 100년에 가까운 장기 통계를 구축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일제시기 경제 변화를 구체적인 수치로 드러내기 위한 추계작업은 이 전에도 시도되었다. 이 책은 선행연구의 추계작업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자료나 추계방법에서 몇 가지 개선을 시도하였다. 개선 내용은 1기존 연 구에서 활용되지 못한 1차 자료의 발굴과 활용, 2통계 조사방법의 변경, 일부 통계자료의 낮은 커버리지(coverage) 문제, 과소신고 또는 중복 게재 등의 문제를 검토하고 필요한 보완, 3기존 연구와 달리 국내총생산(GDP) 과 그에 대한 지출(GDE) 추계를 모두 제시하고, 두 추계의 정합성이 유지 될 수 있도록 추계방법을 개선, 4디플레이터의 추계도 현재 유엔이 권고 하는 가장 이상적인 지수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위와 같이 자료나 추계방법을 바탕으로 이 책이 일제시기 통계자료를 국민계정체계에 맞추어 추계한 경제성장 지표는 다음과 같다 ~194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7%, 인구증가율은 1.3%였 다. 광공업과 전기 건설업의 성장(연평균 성장률 9%)이 이를 주도하 국민계정체계는 국민경제 전체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모든 경제주체들 의 경제활동 결과 및 국민경제 전체의 자산과 부채상황을 정리한 회계기준 및 체계이다[한국은행(2005), 우리나라의 국민계정체계 ]. 대표적인 연구로는 Suh Sang-Chul(1978), Growth and Structural in the Korea Economy 1910~1940, Harvard University Press와 溝 口 敏 梅 村 又 次 編 (1988), 舊 日 本 植 民 地 經 濟 統 計 推 計 と 分 析, 東 洋 經 濟 新 報 社 가 있다.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19

220 였고 서비스업(5%)이 그 뒤를 이었다. 2 이와 같은 경제성장의 결과 경제구조의 변화도 빨랐다. 농업은 이 시기 68%에서 41%로 비중이 낮아진 반면, 광공업은 5%에서 19% 로 높아졌다. 3 지출 면에서는 무역과 함께 투자의 증가가 성장을 주도한 것으로 나 타났다. 무역의존도는 초기의 20%에서 1930년대 말에 60%에 달하 였고, 투자율도 같은 시기에 5%에서 14%로 높아졌다. 4 민간소비지출은 연평균 3.3%로 증가하였는데, 인구증가율을 감안한 1인당 증가율은 1.9%로 추계되었다. (번호와 줄 띄어쓰기는 필자) 추계된 성장지표에 의해 일제시기 경제 변화를 요약하면, 경제의 양적 성장(연 3.7%의 경제성장), 경제구조의 질적 변화(광공업, 무역 비중이 높아지 는 경제구조), 1인당 소비지출의 증가(연 1.9%의 증가)이다. 즉 일제시기 경제 성장 경제구조 변화 1인당 소득의 증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추계된 성장지표는 일제시기 경제 변화를 인구증가율을 상회하는 경제 성장률을 개념화한 [근대적 경제성장(modern economic growth)]으로 파악 하는 실증적 자료이다. 같은 책에 수록되어 있는 논문 경제성장@소득분 배@구조 변화 는 일제시기 [근대적 경제성장]의 성격을 매디슨(Maddison) 의 저작을 인용하여 [대사건]으로 평가하였다 ~1950년의 세계 전체 김낙년 편(2006b), 앞의 책, vi. 쿠즈네츠(S. Kuznets)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1인당 생산의 지속적 성장 (sustained grow th)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근대적 경제성장(modern e conom ic g row t h)이라고 불렀다. 근대적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S. Kuznets(1966), Modern Economic Growth, Yale University press, 제1장 및 제2장 참조[이상 내용은 허수열(2005), 개발없는 개발 - 일제하, 조선경제 개 발의 현상과 본질, 은행나무, 19쪽에서 인용]. 22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21 의 1인당 생산 증가율은 한국의 절반에도 미치는 못하는 연 0.91퍼센트에 불과했으며, 같은 시기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서의 1인당 생산은 연 0.02 퍼센트의 속도로 하락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20세기 후반에 남한이 세계에서 8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룩한 나라의 하나였던 것처럼, 세계 대공황 이 휩쓸고 지나간 20세기 전반에 식민지 조선은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고 도성장을 이룩한 지역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20세기 초에 진행된 근 대적 경제성장은 이전에는 한국 역사에서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대사 건이었다. 위 논문은 근대적 경제성장의 시작을 갑오개혁 이후라고 추정한다. 근 대문명의 충격과 이에 자극받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근대적 경제성장의 배 경이었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근대적 경제성장은 식민지 지배 이후 빨 라졌다고 추정한다. 위 논문이 식민지 지배가 근대적 경제성장의 원동력 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근거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1876년 개항을 계기로 선진 생산기술의 전파를 가로막는 장벽들 이 철거되기 시작했는데, 1910년 합병은 이 장벽들을 거의 완전히 무너 뜨렸다. 식민지 지배와 함께 외국인(특히 일본인)들의 대조선 투자에 따르는 정치적 위험(political risk)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자본 유입이 증가했을 것이다. 또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자본 이동뿐 아니라 노 동력 이동도 급격히 확대되었다. 특히 일본인 기술자와 숙련 노동자들 의 조선 유입, 조선인 노동자들의 일본 이민을 통해 기술전파 속도는 8 인용된 저작은 Angus Maddison(2001), The World Economy:A Millennial Perspective, Paris:OECD이다. 차명수(2006), 경제성장@소득분배@구조 변화, 한국의 경제성장 1910~ 1945, 서울대학교 출판부, 316쪽.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21

222 더욱 빨라졌을 것이다. 식민지기 무역은 완전한 자유무역이 이루어지 던 개항기에 비해서 보호무역주의적이었지만, 1950, 1960, 1970년의 남 한에 비해서는 훨씬 자유무역주의적이었다. 둘째, 조선총독부는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도입하고, 근대적 재정통화제 도를 확립했다. 아울러 철도, 도로, 항만, 교통, 통신 설비를 확충해 나갔 다. 이런 정책들은 시장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자원 배분을 효율화하고 기술 습득 및 개발을 자극함으로써 경제성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총독부는 세율 인상을 통한 세수 확대, 일본 자본시 장에서의 자본 도입을 통해 공공투자를 늘려나갔는데, 이는 총 투자 율을 올림으로써 경제성장에 기여했다. 10 위 논문은 [근대적 경제성장]의 중요한 요인을 근대문명의 충격과 이 식(기술 전파, 자유무역주의, 근대적 토지소유권, 근대적 재정통화제도, 자본 도입 등)으로 파악한다. 책의 편자는 식민지기에 나타난 경제 현상을 분석하여 이해하는 일과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일은 다른 차원의 문제 라고 주장한다. 즉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은 일제가 한국민의 의지에 반하 여 주권을 침탈한 데 있는 것으로, 예컨대 이 시기 경제적 성과의 좋고 나 쁨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식민 지배의 부당성 은 비판하지만, 경제성장은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다. 그러나 부당하게 주권을 침탈한 주체도 조선총독부였고, 근대적 경제 성장의 기반을 조성한 것도 조선총독부였다는 점에서 두 현상을 분리해 이해하는 방식은 편의적이기는 하지만 모순적이다. 지배를 위한 성장으로 비판하든지, 아니면 성장을 위한 지배로 긍정해야 할 것이다. 경제성장론 은 후자의 입장에서 일제시기를 인식한다. 10 차명수(2006), 위의 글, 338~339쪽. 22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23 한편 일제시기 [근대적] 경제성장은 식민지의 경제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기 경제성장은 조선후기 이래의 한국 경제사에서 그 의미가 부여된다. [근대적 경제성장]을 주어로 이 책이 제시한 [기존의 통 념에 도전하는 논쟁적인] 역사상은 다음과 같다. 1 조선후기에 관해서는 이와 같은 수준의 추계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지표로 보는 한 19세기 조선 경제는 정체되어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2 1인당 소득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을 근대적 경제성장이라 이해한다면, 식민지기 또는 그 직전의 어느 시기부터 근대적 경제성 장이 시작한 것으로 생각한다. 3 다만 그 과정은 1940~1950년대의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 등 정 치@사회적 격변으로 인해 일시 후퇴 또는 중단되었다가 년대 이후 가속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1 (번호와 줄 띄어쓰기 는 필자) 근대적 경제성장의 기점을 [식민지 또는 그 직전의 어느 시기]로 잡고 있고, 1940~1950년대 경제성장의 일시적 후퇴와 중단을 언급하고 있지 만, 전체적인 흐름은 [조선후기 경제정체 일제시기 근대적 경제성장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즉 일제시기 [근대적 경제 성장]은 조선후기 경제정체를 극복한 성장이었으며, 동시에 해방 후 고도 성장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상은 [기존의 통념]인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으로서의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 자주적 근대화의 왜곡으로서 일제의 폭력 11 김낙년 편(2006b), 앞의 책, vi.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23

224 적 식민 지배와 수탈을 강조하는 식민지 수탈론]과는 정반대의 역사상이 다. [경제성장론]이 [근대적 성장]을 강조하는 역사인식이라면, [기존의 통 념]은 [근대화의 주체]를 강조하는 역사인식이며 당연히 민족문제를 중요 하게 생각한다. 2. [탈민족 문명사]론 경제성장론의 일제시기 성장지표 추계나 성장 원동력으로서 근대문명의 이식 강조는 경제성장 사학의 연구방법론에 따른 것이다. 경제성장 사학 은 노동, 자본, 경영능력과 같은 투입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결합해서 얼 마만큼의 산출을 얻었으며 그렇게 해서 전반적 생활수준은 어떻게 달라 지게 되었는가를 구명하려는 연구 관심 이라고 정의된다. 제시한 한국 경 제사의 연구과제는 1경제성장과 구조 변화를 양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장기 통계 데이터의 정비, 2시장경제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는 제도적 장 치가 어떻게 형성되어왔는가를 고찰, 3정부 개입이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구명하는 것이다. 12 경제성장론의 일제시기 성장 지표 추계는 첫 번째 연구과제의 수행을 의미한다. 나머지 두 가지 연구과 제는 추계된 통계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한 다양한 요인 중에 서 시장경제와 정부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제를 고찰하는 이유는 시장경제 제도가 이제까지 알려진 어 떤 제도보다도 생산요소를 효율적으로 조직하여 근대적 경제성장을 가능 하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한국 경제성장의 원인과 성격을 12 안병직 편(2001), 앞의 책, 서문. 22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25 파악하기 위한 필수적 과제로 평가되었다. 세 번째 과제로 제기된 정부 개 입 문제는 식민지 지배를 경험한 후진국은 근대적 경제성장의 조건이 자생 적으로 형성되기보다는 외부의 충격에 의하여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경제성장 사학은 한국 경제사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성장사가 제대로 서술되지 못한 이유는 기존 연구의 다수가 민족적 또는 계급적 모순을 밝히는 데만 관심을 집중해왔기 때문 이라고 진단하였다. 특히 식민지 경제를 고찰할 때, 일제의 지배정책과 저 항이라는 대립구도가 강조되어, 경제성장사의 보편적 개념이 활용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성장론이 [근대적 경제성장] 개념으로 일제 시기 경제 변화를 분석하는 이유는 일제의 지배정책과 저항이라는 대항 구도 속에서 식민지 경제를 파악하는 기존 연구의 이데올로기적 왜곡과 편향을 바로잡기 위한 지적 충동이라는 것이다. 13 지적 충동은 기존의 민족주의 역사학에 기반한 내재적 발전론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탈민족 문명사의 관점]으로 이어진 다. 이 관점은 대한민국 선진화 모델로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보장하는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정당성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려는 현실적 목적과 연 관되어 있다. 2007년에 출간된 대한민국 이야기 는 서유럽에 기원한 근 대문명의 수용과 이에 의한 문명사의 대전환이 20세기 한국을 [빈곤과 질 병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켰음을 강조한다. 수용된 근대문명의 경제 영역 은 자유시장경제이다 이대근 외(2005), 앞의 책, 총론. 14 이영훈(2007), 앞의 책.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25

226 이 관점에서 문명사는 이기적 본성의 합리적 인간(homo economicus, 호모 에코노미쿠스)을 출발점으로 한다. 이러한 인간을 둘러싼 가족과 친족 의 역사, 마을과 단체의 역사, 사유재산과 화폐의 역사, 재분배와 시장의 역사, 문학과 예술과 사상의 역사가 진행된다. 그리고 국가는 문명의 상징 이다. 국가는 이해관계와 사상을 달리하는 인간 집단이, 즉 서로 다투고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넓은 범위에서 하나의 평화로운 질서로 통합 되는 기제이다. 따라서 국가가 없거나 해체된 상태는 야만이며, 야만의 극 복으로서 문명은 국가와 더불어 성립한다. 15 이러한 문명론은 보편성을 가진 가치중립적 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의 구체적인 맥 락에서 이러한 보편성을 적용하면,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이 활동하는 자 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와 이를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국가를 중심으로 역사가 인식될 개연성이 높다. 요약하면, 경제성장론은 경제성장사의 보편적 개념으로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고찰하는 역사인식이다. 20세기 한국 경제사의 전개과정을 근 대적 경제성장의 토대인 자유시장경제의 형성, 정착, 확장으로 이해한다. 근대적 경제성장의 지표는 자유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식이다. 경제성장론의 현재적 과제는 근대적 경제성장을 지속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시장경제의 수립이다. 경제성장론은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식민지기에 시장경제 체제가 이식 정착되었으며, 이승만 정권은 시장경제 체제를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지켜냈으며, 박정희 정권은 수출 공업화 전략을 통해 세계자본주의 체제로 시장경제 체제를 확장시켰다고 15 이영훈(2006), 왜 다시 해방 전후사인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55~56쪽. 22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27 이해하는 것 같다. 그리고 현재는 시장경제 원칙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를 수용하고 이에 적응할 경우, 선진 자본주의로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 한다. III. 식민지 현실의 양면 1. 통계의 주관성 경제성장론이 일제시기 경제 변화를 개념화해서 제시한 근대적 경제성장 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추계된 성장지표의 정확성과 관련된 실증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추계된 성장 지표가 식민지 경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의 편자는 이 책의 성장지표 추계방 식에 몇 가지 한계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즉 1통계 공백기인 1941~1952년을 언급하고, 이 책의 성장지표 추계 대상 시기가 1910~ 1940년이라는 점, 2식민지기 통계와 해방 후 한국은행 통계의 중요한 차 이로 통계조사의 커버리지가 한반도 전체와 남한으로 다르다는 점, 3증 가율이나 구성비, 나아가 각종 1인당 지표의 경우에는 해방 전후의 비교 에 큰 문제가 없지만, 인구 센서스가 1925년 처음 실시되어 그 이전 시기 의 인구를 추계하여 1인당 지표를 산출하였다는 점, 4식민지기의 추계치 속에는 조선 거주 일본인의 경제활동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등이다 김낙년 편(2006b), 앞의 책, 머리말.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27

228 통계 추계의 정확성은 1910년대 성장지표의 정확성 문제로 요약된다 년대 성장지표를 어떻게 추계하느냐에 따라 일제시기 경제성장률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1910년대 성장지표가 낮게 추계되면 전체 성장률은 높아지고, 반대로 높게 추계되면 전체 성장률은 낮아진다. 특히 인구추계 의 정확성은 일제시기 경제성장을 [근대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의 문 제와 직결된다. 인구추계를 어떻게 산출하느냐에 따라 1인당 국내총생산, 1인당 소비지출, 1인당 식량소비량 등의 추계가 급변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통계는 실증적 지식에 근거하여 사회와 그 구성원을 통치 하려는 근대국가의 통치방식의 토대이자 산물이다. 그 핵심을 이루는 것 은 인구통계와 경제통계이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에서의 통계조사와 통계 자료는 식민지 통치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된 지식 또는 정보의 형식이자 그 통치활동의 산물이다. 18 이것은 통계의 수와 표라는 객관적 중립적인 외관이 결코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렇기 때문에 현실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합리적 추계가 필요할 것이다. 통계가 작성되는 시점의 역사적 맥락과 작성 주체의 주관적 의지를 비판 적으로 접근하는 치밀함이 필요하다. 19 관점을 떠나 식민지 경제에서 이 17 이 글에서는 성장지표의 추계와 산정에 대한 실증을 둘러싼 논쟁은 생략한 다. 이미 여러 지면을 통해 이 문제가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장지표의 실 증 문제와 인식 문제를 제기한 대표적 글로는 허수열(2006),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의 식민지 경제에 대한 인식오류, 역사비평 75가 있다. 또한 허수열 (2005), 앞의 책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서이다. 18 식민권력과 통계 - 조선총독부의 통계체계와 센서스, 서울대학교 출판부, 3~4쪽. 19 통계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숫자를 산출했는가? 누가 이 숫자를 산출했고 그들은 어떤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가? 그 현상은 어떤 측정을 22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29 루어진 양적 성장의 총량을 파악하는 것은 식민지 경제사 연구를 하는 데 중요한 기초 작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으로서의 논쟁적인 통계가 아니라 공공재로 이용될 수 있는 신뢰도 높은 통계가 추계되어야 한다. 이 런 측면에서 경제성장론은 1910년대 성장지표 추계방식과 산출된 지표에 대한 비판을 검토하고, 추계 과정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 2. 경제성장의 이면 다음으로 검토한 문제는 국민경제 규모를 파악하는 국민계정체계를 기준 으로 일제시기 경제 변화를 수량화하는 방식의 타당성이다. 국민계정체계 에 의한 성장지표 추계는 장기 통계 작성에는 효율적인 방법일 수는 있겠 지만, 식민지 경제 현실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가장 큰 한계는 근 대국가와는 달리 민족 차별을 지배의 동력으로 삼고 있는 식민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국민계정체계에서 추계 대상인 [국민] 은 거주자 기준이다. 거주자의 기준은 법률상의 국적 기준이 아니라 당시 조선에 이익의 중심(center of interest)을 두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보통 1 년 이상 거주하여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외국인은 거주자로 분류된다. 따 사용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다른 게 측정될 수 있었는가? 통계가 적절하게 해석 이 되었는가? 통계 논쟁을 벌이고 있다면 양쪽이 그 문제에서 어떤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가? 그러한 이해관계가 그들이 통계를 사용할 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 그 통계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며, 서로 다른 숫자를 사용하는 방식에서의 차이는 무엇인가? 등을 살 펴보는 것이다[조엘 베스트 저, 노혜숙 옮김(2003), 통계라는 이름의 거짓말, 무우수, 178~179쪽].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29

230 라서 당시 조선에 거주하고 있었던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의 경제활동도 국민계정에 포함된다. 20 그러나 국민경제의 외국인과 식민지 경제의 지배민족은 질적으로 다 른 존재이다. 식민지의 민족 차별과 불평등은 정치적 주권의 박탈과 참여 의 배제에만 한정되지 않고, 지배민족이 생산수단, 유통과정, 분배방식을 독점하고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시기 [근대적 경제성장]은 자본을 축적한 일본인 자본가와 저임금 조선인 노동자의 결합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 성장률은 다시 민족별 성장 속도의 차이를 확대시킨다. 따라서 식민지기 경제 영역에서 작동되었던 민족 차별과 이로부터 발 생하는 식민지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32년에 출간된 수자조선연구 ( 數 字 朝 鮮 硏 究 ) 는 관세문제를 통해 조선 경제의 [식민지] 특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關 稅 는 첫제 國 家 의 財 政 收 入 을 目 的 한 것이나 둘제는 國 內 의 産 業 振 興 을 目 的 하는 租 稅 임으로 國 民 經 濟 上 으로 보아 極 히 重 大 한 地 位 에 잇다. 朝 鮮 의 關 稅 는 輸 入 稅, 移 入 稅 二 種 으로 노뉘여 잇는바 前 者 는 外 國 品 後 者 는 日 本 品 에 對 하야 過 徵 하는 것이다. 昭 和 四 年 ( 一 九 二 九 年 ) 朝 鮮 對 外 地 의 輸 移 入 稅 額 을 보면 實 로 四 億 二 千 三 百 餘 萬 圓 [ 四 億 三 千 三 百 餘 萬 圓 이 맞음-필자]의 巨 額 에 達 하엿는바 그 가운대 輸 入 總 額 一 億 一 千 八 百 二 十 三 萬 餘 圓 (이 가운대도 日 本 産 輸 入 額 一 百 十 六 萬 餘 圓 이 包 含 됨)으로서 總 額 에 二 五 % 五 에 지 나지 못하며 移 入 品 總 額 은 三 億 一 千 五 百 三 十 二 萬 餘 圓 으로서 七 四 % 五 를 占 하게 되엿스니 關 門 通 過 流 入 品 中 日 本 品 은 文 字 와 가티 그 大 20 김낙년 편(2006b), 앞의 책, 국민계정, 276쪽. 23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31 宗 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輸 移 入 總 額 의 겨오 二 五 % 五 을 占 하는 輸 入 品 의 關 稅 가 七 百 八 十 八 萬 餘 圓 의 巨 額 이오 그 七 四 % 五 를 占 한 移 入 品 의 關 稅 는 겨 오 二 百 八 十 三 萬 餘 圓 에 不 過 하게 되야 稅 額 은 全 然 顚 倒 되엿스니 이 는 關 稅 에 植 民 地 的 特 質 이 具 現 된 까닭이엇다. 萬 若 朝 鮮 을 國 民 經 濟 의 一 單 位 로 삼엇다면 朝 鮮 關 稅 는 莫 大 한 收 入 을 어더(그때는 移 入 稅 와 輸 入 稅 의 實 質 的 區 別 이 업서지고 모다 輸 入 稅 稅 率 로 바들 터이니까) 人 民 의 다른 負 擔 을 넉넉히 輕 減 할 수 잇 섯슬 것이다. 21 수입세와 이입세로 구분되는 관세제도, 1929년 현재 수@이입품 중에 서 일본산 제품이 가장 많은 액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중관 세제도에 의해 관세가 제대로 부과되지 못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위의 논 거에 의하면, 무역량 증가는 성장지표로 추계되지만, 이원적인 식민지 관 세체계 때문에 조선 경제가 당하는 불이익은 추계에 반영되지 않는다. 물론 식민지 경제의 성격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원적인 관세제도하에 서 이입되는 일본산 제품의 종류와 성격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원론적으 로 수입 생산재의 낮은 관세율은 국민경제의 성장을 추동할 수 있는 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조점은 일제시기의 양적 경제 변화만을 확 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는 성장했으며, 시장경제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한국사는 문명사의 대전환을 겪고 있었다는 해석이 식 민지에서 작동되는 경제 메커니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애써 외면하려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경제성장론의 성장지표는 일제시기 경제 변화를 근대적 경제 21 李 如 金 世 鎔 共 著 (1932), 數 字 朝 鮮 硏 究 第 三 輯, 世 光 社, 49~50쪽.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31

232 성장으로만 인식하게 한다. 민족 불평등의 식민지 현실은 사라지고 근대 적 시장경제만이 남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일본 제국주의가 왜 조선을 식민 지로 지배하고 상당한 자본을 투자하여 근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조선총독부 세출의 확대는 성장지표로 추계되지만, 성장지표는 조선총독부가 재정을 확대하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아 래 인용문은 이러한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 國 費 ( 中 央 歲 出 地 方 歲 出 )는 왜 膨 脹 되엿나? 그 第 一 原 因 은 植 民 地 內 의 資 本 主 義 가 發 達 되여 貨 幣 의 價 値 가 低 下 ( 卽 物 價 의 高 騰 )된 까닭이거니와 第 二 의 原 因 은 새로히 加 屬 된 植 民 地 內 에 本 國 의 統 治 權 을 確 立 하는 대 必 要 한 諸 工 作 例 하면 鐵 道 監 獄 裁 判 所 警 察 署 各 種 行 政 官 廳 及 郵 便 所 等 新 設 及 改 革 과 밋 이에 相 應 히 配 置 된 人 員 의 莫 大 한 人 件 費 와 또 日 本 文 化 를 普 及 식히는대 必 要 한 學 校 의 新 設 과 빗산 日 本 人 敎 員 의 採 用 에도 國 費 는 작고 늘기 始 作 하엿다. 그리고 張 次 以 下 에 詳 說 하겟거니와 日 本 人 側 經 營 에 對 한 寬 大 한 保 護 獎 勵 費 와 또 原 料 植 民 地 로서의 朝 鮮 의 殖 産 興 業 에 關 한 諸 新 規 建 設 에 必 要 한 費 用 等 은 모다 國 費 를 增 殖 식힌 重 要 한 歲 出 이엇다. 22 인용문에서 재정지출이 확대된 이유를 1식민지 내 자본주의 발전, 2식민지 내 통치권 확립을 위한 비용 증가, 3조선 거주 일본인에 대한 보호와 조선을 원료 식민지로 건설하는 비용을 들고 있다. 정리하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재정지출이 확대되었고, 그 결과 외형상 첫 번째 이유로 제시된 식민지 자본주의 발전이 나타났다고 볼 수 22 李 如 金 世 鎔 共 著 (1932), 위의 책, 43~44쪽. 23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33 있다. 이런 측면에서 경제성장론의 성장지표에 의한 일제시기 경제 변화 에 대한 해석은 식민지 내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 다. 식민지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식민지 지배자의 의도, 목적, 그 과정에서 작동되는 민족 차별과 불평등 구조의 문제를 고찰할 수 없다. 즉 국민계정체계에 맞추어 추계된 성장지표는 무엇보다도 일본인과 조선 인의 민족 구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식민지 경제의 가장 큰 특징인 민족 차별과 불평등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 다음 인용문은 자본에서 나타 난 식민지 경제성장의 민족 차별과 불평등 실태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朝 鮮 의 資 本 主 義 - 植 民 地 의 資 本 主 義 -는 一 九 00 年 (이제로부터 三 十 一 年 前 朝 鮮 에 鐵 道 敷 設 되는 해)으로부터 萌 芽 가 트기 始 作 하야 一 九 一 0 年 ( 隆 熙 四 年 )부터는 劃 期 的 高 速 度 로 成 長 育 成 되엿다. 過 去 二 十 年 間 朝 鮮 人 會 社 數 의 增 加 速 度 는 日 本 人 側 그것보다도 오 히려 빠른 것을 알 수 잇스나 實 質 的 資 本 增 大 의 速 度 는 그것보다 훨 신 떠러적 잇는 것을 보는 터임으로 朝 鮮 人 側 資 本 活 動 은 表 面 으로는 꽤 빨리 늘어온 셈이나 裡 面 으로 그 實 質 的 內 容 에 잇서서는 甚 히 貧 弱 한 것을 알 수 잇다. 卽 日 本 人 의 資 本 은 明 治 四 四 年 [1911년-인용자]으로부터 公 稱 資 本 이 十 七 倍 를 거러왓는대 朝 鮮 인의 資 本 은 五 倍 를 거러왓스니 朝 鮮 人 資 本 은 停 止 狀 態 에 잇고 日 本 人 資 本 만 十 二 倍 를 거러나간 셈이 되며 그리 고 日 本 人 拂 込 資 本 金 은 十 五 倍 를 거러갓는대 朝 鮮 人 의 그것은 단 七 倍 를 거러갓슨 즉 相 殺 하면 朝 鮮 人 資 本 은 停 止 狀 態 에 잇고 日 本 人 資 本 만 八 倍 를 거러간 셈이 된다 李 如 金 世 鎔 共 著 (1932), 앞의 책, 35~37쪽.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33

234 인용문은 1910년 이후 식민지 자본주의의 획기적 성장을 인정한다. 성 장 과정에서 조선인 회사 수가 일본인 회사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것 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인용문이 주목한 점은 성장의 표면이 아니라 이 면이다. 즉 조선인 자본의 성장 속도는 그 자체만 보면 빠른 속도이지만, 일본인 자본과 비교할 때 거의 [정지 상태]라는 것이다. 또한 아래 인용문 은 자본에서뿐만 아니라, 노동에서 나타난 식민지 경제성장의 민족 차별 과 불평등 실태를 말해준다. 上 表 ( 昭 和 六 年 [1931년-인용자] 刊 朝 鮮 統 計 年 報 에 依 하야 採 算 함-저 자)에 依 하야 一 般 勞 動 二 十 五 種 勞 賃 의 平 均 을 보면 日 本 人 은 二 圓 九 十 錢 이오 朝 鮮 人 은 一 圓 七 十 六 錢 이며 中 國 人 은 一 圓 六 十 錢 으로서 賃 銀 高 低 의 上 中 下 는 스사로 判 明 되여 잇다. 그러나 이가튼 勞 賃 은 各 民 族 의 一 般 勞 動 者 가 實 際 에 잇서서 平 均 的 으로 밧고 잇는 줄 알어서는 큰 錯 誤 이다. 왜 그러냐 하면 勞 動 者 가 實 際 로 分 配 밧고 잇는 勞 賃 은 一 職 業 平 均 勞 賃 에다가 該 業 勞 動 者 數 를 乘 한 뒤 그 積 들의 合 計 를 어더 總 勞 動 者 數 爻 로 除 한 商 이 아니고 보 면 아닌 까닭이다. 그럼으로 上 述 한 民 族 別 平 均 勞 賃 이란 것은 勞 賃 을 다못 民 族 別 로 보 아 그 高 低 差 別 을 알고저 하는데만 效 用 이 잇슬뿐이다. 朝 鮮 人 勞 動 者 가운대는 最 低 賃 勞 動 을 業 으로 하는 普 通 人 夫 만이 全 朝 鮮 人 勞 動 者 數 爻 의 二 二 %( 鐵 道 協 會 調 査 數 字 에서 計 算 함)에 達 하나 日 本 人 勞 動 者 가운대는 그 數 爻 가 그 全 數 에 二 %에 지나지 못하니( 中 國 勞 動 者 中 에는 二 四 %) 이것으로 보아도 各 民 族 勞 動 者 一 般 에게 實 際 로 分 配 되는 勞 賃 은 全 然 上 述 한 民 族 別 勞 賃 額 과 다를 것이 아닌가. 즉 朝 鮮 人 勞 動 者 中 에 熟 練 勞 動 者 가 적은 것 만큼 그 一 般 勞 賃 實 收 額 은 사뭇 低 下 되며 日 本 人 과 中 國 人 은 不 熟 練 勞 動 者 가 적은 것 만큼 이와 反 對 의 結 果 를 지을 것은 明 白 하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35 위 24 인용문은 식민지 노동자 임금의 민족별 차이를 수치를 통해 설명한 다. 저임금의 미숙련 노동자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많고, 고임금 숙련 노동 자에는 일본인 노동자가 많은 식민지 노동구조의 특징도 언급하고 있다. 양적 성장지표는 식민지에서도 자본주의 경제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경제가 성장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로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제 시기 경제의 역사성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민족별 성장지표와 지역경제의 성장지표가 동시에 작성될 필요가 있다. 식민지 경제의 민족별 차이를 강 조하는 것은 민족주의의 과잉이거나,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을 정당화하 는 해석의 차원이 아니다. 민족별 차이와 불평등은 식민지 경제의 객관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차별의 정도를 파악하는 작업은 20세기 한국 자본주 의 형성기에 해당하는 식민지 자본주의가 어떤 자본주의였는가를 살펴보 는 것이다. IV. 맺음말 경제성장론이 기존 역사학계에 미친 영향은 크다. 일제시기 경제의 양적 성장을 실증하고 한국인의 적응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근대적 경제제도 가 해방 전후에 연속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음을 살폈다. 또한 서구적 근 대의 충격과 수용이 한국 근대와 한국 자본주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다 시 고찰하도록 촉구하였다. 25 이러한 측면은 자주적 근대라는 틀로서 경 24 李 如 金 世 鎔 共 著 (1932), 앞의 책, 78~79쪽. 25 조석곤(2006),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 성과의 비판적 수용을 위한 제언, 역사 비평 통권 75(여름호).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35

236 제성장론을 비판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국 자본주의를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은 그 주체를 내부에서 찾 느냐 외부에서 찾느냐, 그리고 그 시기를 조선후기로 보느냐 식민지로 보 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주체의 문제로 한국 자본주의를 설명 하려는 문제의식은 다음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 보인다. 첫 번째 는 식민지 자본주의의 전체 역사상을 그려내기 어렵다. 식민지에서 한국 인의 경제생활은 식민지 자본주의 구조하에서 진행되었다. 따라서 식민 지 자본주의의 양적, 질적 성격을 바탕으로 한국인의 삶을 고찰해야 한 다. 민족 차별이나 불평등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해석된 가치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임을 논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주체에 대한 집착은 세계사 적으로 서구적 근대의 충격과 이의 수용을 통해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한 부분으로 성립된 식민지 자본주의의 역사성을 간과할 가능성이 높다. 한 반도 지역 내부에서의 근대화나 자본주의화는 세계자본주의 체제 성립 과정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자생성과 민족의 문제가 논의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역사학의 현재성이라는 측면에서 내재적 근대화의 강조는 한국 자본주의의 비판적 검토와 대안 모색을 어렵게 할 수 있다. 식민사학 의 정체성이나 타율성론 극복을 목적으로 한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식민 지 수탈론]은 역사학의 시대적 과제를 충실하게 수행한 역사인식이다. 그 러나 세계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더 이상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으로 평 가받지 않는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을 고려하면, 역사학의 시대적 과제는 이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근대화의 주체 문제와 더불어 이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적 모순을 검토하고 그 대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23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37 따라서 [경제성장론]의 비판은 현실의 한국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의미 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26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자 유시장경제체제가 유일한 길이 아닐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요구된다. 이러 한 문제의식에서 재화와 서비스의 양적 증가를 의미하는 [성장] 개념과 성 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의 성립으로서의 [개발] 개념과 인간의 자유 확대 를 의미하는 [발전] 개념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27 한국 자본주의 전개과정을 보면 경제성장과 이를 위한 개발은 진행되 었지만, 성장과 개발이 곧 발전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시기에는 정 치적 주권 자체가 박탈당한 상태여서 한국인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는 상 황이었다. 이런 모순적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일제가 시도한 민족말살 동화주의처럼 한국인 모두 일본인이 되거나, 아니면 독립과 해방을 쟁취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은 인간의 자유를 확대 하기 위한 투쟁으로서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해방 후의 자본 주의 전개과정도 성장과 개발이 있었지만, 발전은 제한되어 있었다. 경제성장과 개발이 자유로서의 발전의 바탕이 되는 모델이 모색될 필 요가 있다. 이를 위해 시장주도 자본주의 이외의 다양한 모델이 검토되 고 그 대안을 살펴보아야 한다. 28 대안의 모색 과정에서 자유로서의 발전 26 이승렬(2007), [식민지 근대론]과 민족주의, 역사비평 80호(2007년 가을 20주년 특집호);김성보(2007), 탈중심의 세계사 인식과 한국근현대사 성찰, 역사비평 80호(2007년 가을 20주년 특집호);정병욱(2007), 근대를 다시 읽는다 를 읽고, 역사비평 80호(2007년 가을 20주년 특집호). 27 아미티아 센 저, 박우희 옮김(2001), 자유로서의 발전, 세종연구원. 28 시장-주도자본주의, 국가 - 주도자본주의, 협상형 또는 협의제적 자본주의 축적을 사적 자본의 소유주에게 규제 없이, 제약 없이 맡길 것인가 아니면 소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37

238 을 위한 민족주의, 근대국가의 현실적 필요성이 재정립되어야 한다. 또한 자유로서의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경제성장과 개발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 가라는 문제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경제성장 논쟁에 있어서 중심 문제는 사회적 힘과 특권으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누가 통치하며, 누가 보상을 받 고, 누가 대가를 치르며, 누구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며,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구체적인 대안 모델의 제시는 역사학 연구 영역을 뛰어넘는 과제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20세기 한국의 근대와 자본주의 형성, 전개과정을 자유로서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왜 경제성장이 사회구성원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 했는가를 해명하는 가운데 대안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 형성과정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형성될 수 있었던 충격과 이를 수용할 수 있었던 내적 조건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 다. 동아시아 자본주의 전개과정은 서구적 자본주의를 따라잡는 과정이 었다. 일본이 가장 빨랐고, 한국과 중국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 차원에서 공유된 내적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 서 [소농사회론]과 이에 바탕한 [동아시아 자본주의 형성사론]은 자본주의 적 근대 비판의 전망으로서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29 유주의 역할을 다른 집단, 예를 들어 국가와 같은 정치기관이나 노동조합과 같 은 사적인 기관의 역할로 보충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대체할 것인가. 29 동아시아 자본주의 형성사론을 검토할 때 주의할 점은 이 논의가 일본을 중심 으로 한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적 근대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이 논의에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소농 사회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 자본주의 형성사론 과 관련된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호리 사토루 편저(2007), 23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39 한국 자본주의 전개과정은 서구와 달리 위로부터의 개혁과 이 개혁을 주도한 [정부]의 존재가 부각된다. 대한제국, 조선총독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로 이어지는 강력한 [정부]의 연속성은 20세기 한국 자본주의가 정 부 주도 자본주의의 한 유형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식민지 자 본주의에서 조선총독부가 수행한 역할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30 식민지는 다른 어느 사회보다 강력한 권력이 작동하는 정치공간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지금까지 일제시기 경제성장 논쟁에서 조선총독부의 역할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조선총독부는 경제조건을 창출하고 경제정책을 수단으 로 경제과정을 주도하였다. 또한 일제시기 경제성장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성장지표가 추계될 필요가 있다. 31 그리고 자본주의 근 일본 자본주의와 - 제국주의하의 경제변동, 전통과현대;나카무라 엮고 지음(2007),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 일조각; 中 村 哲 저, 박섭 편저(2005), 동아시아 근대경제의 형성과 발전, 신서원. 30 박명규(2005), 1910년대 식민통치기구의 형성과 성격, 한국 근대사회와 문 화II 년대 식민통치정책과 한국 사회의 변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필자 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식민지하에서 작동하던 권력을 근대국가의 권력과 비교하면 크게 두 가지 시각이 있다. 하나는 식민지 시대에는 국가가 부 재했다는 국가부재론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권력체 자체가 독특한 유형의 국가 로 파악할 수 있다는 식민국가론이다. 국가부재론은 조선총독부를 근대국가의 기본적 형식이라고 할 법적, 제도적 권력의 구심체라기보다 군대나 경찰로 상 징되는 강압적 폭력의 현지관리청으로 이해된다. 이에 비해 식민국가론은 식민 지라 권력 부재의 상태 또는 무정부상태와 동일시될 수 없고 오히려 매우 정교 한 권력과 지배가 관철되는 체제로 파악한다. 식민국가론은 자본주의 국가론 적 식민국가, 발전국가론적 식민국가, 사회문화적 헤게모니 식민국가로 구분된 다. 그리고 식민 지배하에서의 권력 유형을 식민국가, 식민정보, 식민독재, 내부 식민지로 구분하였다. 필자는 조선총독부를 식민독재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39

240 대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을 모색했던 다양한 층위의 시도를 역사적으로 복원하고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율을 이용한 빈궁지수, 국내총생산과 노동시간 을 이용한 시간당 국내총생산, 자본의 소유주에게 돌아가는 국민소득 비율인 자본소득비율,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드러내는 차별지수가 추계될 필요가 있다. 24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41 참고문헌 Kuznets, S.(1966), Modern Economic Growth, Yale University. Maddison, Angus(2001), The World Economy:A Millennial Perspective, Paris:OECD. Suh Sang-Chul(1978), Growth and Structural in the Korea Economy 1910~ 1940, Harvard University Press. WEIL, DAVID N., 옮김(2006), 경제성장, 시그마프레스. 강진아(2006), 제국주의 시대와 동아시아의 경제적 근대화, 역사학보 제194집. 溝 口 敏 梅 村 又 次 編 (1988), 舊 日 本 植 民 地 經 濟 統 計 推 計 と 分 析, 東 洋 經 濟 新 報 社. 김낙년(2003), 일제하 한국 경제, 해남. 김낙년(2006), 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재론,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김낙년 편(2006),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서울대학교 출판부. 김성보(2007), 탈중심의 세계사 인식과 한국 근현대사 성찰, 역사비평 80호 (2007년 가을 20주년 특집호). 나카무라 사토루@박섭 엮고 지음(2007),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 일 조각. 나카무라 사토루[ 中 村 哲 ] 저, 정안기 옮김(2005), 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 성, 혜안. 데이빗 코우츠 저, 이영철 옮김(2003), 현대 자본주의의 유형, 문학과지성사. 박만섭 엮음(2005), 경제학, 더 넓은 지평을 향하여, 이투신서. 박명규@서호철(2003), 식민권력과 통계 - 조선총독부의 통계체계와 센서스, 서울 대학교 출판부. 박섭(2004), 식민지기 한국의 경제성장;제국주의 정책과 식민지민의 상호작용,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 백산서당. 박지향@김철@김일영@이영훈 엮음(2006),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2, 책세상.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41

242 아미티아 센 저, 박우희 옮김(2001), 자유로서의 발전, 세종연구원. 안병직 편(2001), 韓 國 經 濟 成 長 史 - 예비적 고찰, 서울대학교 출판부. 윌리엄 번스타인 저, 김현구 옮김(2005), 부의 탄생, 시아출판사. 이대근 외(2005), 새로운 한국 경제발전사 - 조선후기에서 20세기 고도성장까지, 나남출판. 이승렬(2007), [식민지 근대론]과 민족주의, 역사비평 80호(2007년 가을 20주 년 특집호). 李 如 金 世 鎔 共 著 (1932), 數 字 朝 鮮 硏 究 第 三 輯, 世 光 社. 이영훈 편(2004),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이영훈(2007),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이헌창(2007), 한국사 파악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점, 한국사 시민강좌 40, 일조각. 정병욱(2007), 근대를 다시 읽는다 를 읽고, 역사비평 80호(2007년 가을 20 주년 특집호). 정연태(2007), 20세기 전반기 사회경제적 변화의 의미, 한국사 시민강좌 40, 일 조각. 정태헌(2004), 연구사를 통해 본 경제성장론 식민지상의 대두배경과 문제점, 식 민지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 백산서당. 조석곤(2006),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 성과의 비판적 수용을 위한 제언, 역사비 평 통권 75호(2006년 여름). 조엘 베스트 저, 노혜숙 옮김(2003), 통계라는 이름의 거짓말, 무우수. 中 村 편저(2005), 동아시아 근대경제의 형성과 발전, 신서원. 찰스 P. 킨들버거 저, 주경철 역(2004), 경제강대국 흥망사 1500~1990, 까치. 한국은행(2005), 우리나라의 국민계정체계. 허수열(2005), 개발 없는 개발 - 일제하 조선 경제개발의 현상과 본질, 은행나무. 허수열(2006),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의 식민지 경제에 대한 인식오류, 역사비 평 75. 호리 가즈오 저, 주익종 옮김(2003), 한국 근대의 공업화 - 일본 자본주의와의 관 계, 전통과현대. 24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43 호리 사토루 편저(2007), 일본 자본주의와 - 제국주 의하의 경제변동, 전통과현대. [경제성장론]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 243

244 J a p a n e s e C o l o n i a l R u l e a n d C o l o n i a l M o d e r n i t y 경제성장론 1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I. 머리말 - 근대주의 역사인식과 식민사학의 친연성 II. 자본주의와 식민지자본주의의 차이 III. 경제성장론 식민지상의 [근대문명론] - 국가인식의 결여 IV. 경제성장론의 허구적 대한민국 [정통론] - 국가론의 돌출 V. 맺음말

245 I. 머리말- 근대주의 역사인식과 식민사학의 친연성 한국 근현대사 인식에서 근대주의의 폐해는 적지 않다. 근대주의란 근대 역사의 전개과정을 단선적, 양적 선후관계로 설정하고 근대를 양적인 경 제성장으로 제한한 채 하여간 서양 근대를 성취하자는 인식을 말한다. 근 대화의 주체는 생략한 채 모방의 대상으로 설정한 근대의 원형에 주관적 으로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의 실천적 구체성 속에 서는 정작 근대의 핵심인 민주화 문제나 근대국가 주권의 문제 등 근대의 내실을 채우는 과제 등에 대한 인식은 극히 취약하다. 1 근대주의는 제국주의의 위력과 폭력으로 [문명]에 대한 해석을 독점한 서구 근대를 기준으로 한 사물 인식을 수용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식민사학의 정체성론, 타율성론 역시 서구 근대의 기준을 교조적으로 적 용하고 피식민지 구성원들 역시 비주체적으로 수용한 근대주의의 산물이 었다. 유럽의 역사를 [보편사]로 설정하면서 수반된 아시아 또는 한국사에 대한 [특수성]론은 이 지역에서 [발전]의 싹이나 변화가 불가능했다는 숙명 론처럼 각인되었다. 근대는 제국주의 국가(구성원)뿐 아니라 피침략 지역 1 [식민지 근대화론] 당사자들은 한때 [침략-개발론]으로 자칭하면서 [개발을 통한 착취]를 강조하기도 했지만 기본 논거나 실제 관심은 개발과 경제성장에 집중되 었고 침략 또는 수탈 개념은 수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신들이 강조하는 [경제 성장론] 개념이 논지의 핵심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사실 관행적으로 사용하곤 하는 [식민지 근대화] 개념이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근대화 정책을 수행한 현 상을 지적하는 의미라면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실제로 당사자들은 식민지 근 대화론이 {오늘날 한국 현대문명의 제도적 기초가 그 과정에서 닦였음을 강조 하는} 시각이라고 강조한다. 이하 [경제성장론]으로 지칭한다.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45

246 의 구성원들이 하여간 좇아야 할 대상으로 주입되었다. 따라서 근대의 침 략은 문명화 - 자본주의화를 위해 불가피했던 과정이었고 궁극적으로 침 략의 실체는 부정된다. 식민지 경제를 보는 시각에서도 근대주의의 잔영은 일제시기 이래 좌 와 우를 막론하고 마르크시스트의 (반)봉건론, 계몽주의적 사회개량론, 1980년대의 식민지반봉건 사회구성체론 등에 이르기까지 깊이 배어 있 었다. 이러한 각층의 식민지상은 제국주의가 식민지 사회에서 의도적으로 봉건제를 온존@강화시킨다는 제국주의 이중성론과 원시적 수탈론 을 근 간으로 한 근대주의의 파편을 공통적으로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제시기 당대에는 식민지자본주의를 토대로 한 식민지적 근대의 본질은 물론 구조적인 수탈 문제를 간과함으로써 주관적 인식이 일제 지배의 실상을 보지 못함에 따라 실천적 인식론적 한계에 부딪혀 동 화 또는 전향으로 귀결된 경우가 많았다. 이는 민족운동 진영의 좌와 우 양자 모두에게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1990년대 들어 이러한 현상이 재현되었다. 식민지반봉건 사회구성체 론자들이 {자본주의화는 불가능했다}는 기존의 관성과 정반대로 {하여간 당시의 논쟁에 대해서는 정태헌(1987), 최근의 식민지 시대 사회구성체론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역사비평 창간호 참조. 원시적 수탈론은 일제가 {하여간 하여간 빼앗아갔다}는 식의 일제시기 이래의 전통적 식민지상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인식으로는 전근대의 지배 복속과 질적 으로 구분되는 근대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의 구체적 실상에 대한 이해나 과 학적 분석이 어렵다. 세계사적으로 근대가 식민지 사회에서 드러낸 객관적 양 상보다 주체적으로 이룬 근대만이 근대라는 주관적 관념에 경도되어 정작 현실 의 식민지자본주의, 식민지적 근대의 실체를 부정한다. 이에 대해서는 정태헌(2007), 한국의 식민지적 근대의 성찰, 선인, 서장 참조. 24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47 자본주의는 발전했다}는 경제성장론으로 쉽게 전화된 것이다. 이는 식민 지적 근대화 - 자본주의화 실체에 대한 주관적 부정이 일정 시점에 이르 러 거꾸로 근대화 현상에 매몰된 동일한 인식론적 모순에 따른 동일한 결 과였다. 즉 1930~1940년대와 1990년대라는 시점의 차이를 떠나 동일한 인식론적 모순, 동일한 청산 논리의 반복이었다. 본고는 경제성장론 식민지상의 사상적 연원과 특징, 그리고 현재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분석 대상이 되는 글은 경제성장론 관련 연구서와 논 문, 그리고 최근에 출판한 이른바 대안교과서 등이 중심이 될 것이다. 서 술은 자본주의와 국가 없는 식민지자본주의의 질적 차이를 논하는 것에 서 출발한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국가인식이 철 저하게 결여된 가운데 근대문명화 과정으로 보던 것에서 해방 후에는 반 북론에 기대어 철저한 국가론자로 기울어지는 역사인식 모순의 원인도 드러날 것이다. 동시에 국가 문제, 근대 민주주의 실현의 주체, 경제성장의 실질적 배경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점검해볼 것이다. 교과서포럼(2008),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기파랑. 이에 대해서는 역사 비평 2008년 여름호에 세 개의 서평이 게재되었다. 주진오, 뉴라이트의 식민 사관 부활 프로젝트 ;박찬승, 식민지 근대화론에 매몰된 식민지 시기 서술 ; 홍석률, [대안교과서]의 난감한 역설.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47

248 II. 자본주의와 식민지자본주의의 차이 1. 근대국가, 자본주의 성립의 기본 조건 경제성장론은 {일제의 한국 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 적 억압 체제였다}고 형식적으로 언급하지만 실제로는 {근대문명을 학습하 고 실천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 적되는 시기}였음을 강조한다. 국가 주권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어렵고 식민 지배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능력이 축적되었다 는 전도된 논리를 아무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이들이 말하는 근대문명이란 경제적 측면에서는 시장경제를 말한다. 근대문명의 개념이 작위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틀은 국가, 시장경제, 민주화의 상호관계 와 대립을 통한 균형 추구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근대사회의 중요한 특징 으로서 자본주의 경제의 행위 주체는 크게 개인(가계), 기업, 정부(국가)로 구성된다. 개인은 상품 소비자로서 그리고 고용 노동자로서 높고 낮음을 떠나 임금을 매개로 기업과 관련을 맺는다. 따라서 시장경제하에서 개인 과 기업은 임금을 둘러싸고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론적으로 (근대)국가는 양자의 조정 역할을 한다. 물 론 현실적으로 국가의 역할은 사회의 민주화 수준에 따라 질적 측면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국가는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화 수준이 낮을 때 개인보다 기업의 이해관계를 뒷받침하는 데 기울어졌고 그에 상응하는 대 교과서포럼(2008), 앞의 책, 78쪽. 이하 본문에서 ( ) 안의 숫자는 이 책의 쪽 수를 뜻하며 별도의 각주는 생략한다. 24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49 내외적 경제정책을 수립 시행한다. 각 차원에서 민주화가 일정하게 제도화 되고 생산력이 높아지게 되면 헌법에 규정된 형식논리를 따라 이해관계의 균형추 역할을 하도록 압박을 받게 된다. 적어도 그러한 외양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국가가 기본적으로 자본가계급의 이 해관계를 대변한다 하더라도 생산력의 발전과 민주화의 진전은 국가를 최 대한 중립적인 위치로 끌어내고자 한다. 국가의 주권이 구성원(국민)에게 있다는 명제는 단순히 명분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현실 국가권력이 주요하게 기반하는 [민]의 범주는 사회의 민 주화 수준에 따라 재벌일 수도, 기업(부르주아) 일반일 수도, 폭넓은 시민 사회일 수도 있다. 그만큼 국가가 정상적인 권력 유지를 위해 의식해야 하 는 [민]의 폭은 가변성이 대단히 넓다. 국가는 인류사를 돌아볼 때 절대적 권력체에서 출발했지만, 근대사회에 접어들어 구성원의 사회의식 수준과 각 계층의 이해관계에 조응하면서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 상대적 권력체 로 전환되어갔다. 이처럼 국가권력의 형식과 내용은 바뀌어갔지만, 근대 자본주의 경제 를 논할 때 국가의 존재 자체는 필수 전제조건이었다. 자본주의 경제가 성 립하려면 자본가(기업가)와 시장경제 외에 근대국가라는 틀이 반드시 전 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에서 (근대)국가가 결정적 역할을 한 다는 너무나 자명한 명제를 종종 간과하곤 한다. 중세 유럽의 분산된 각 지역을 시장과 상품의 힘을 통해 하나로 묶어낸 원초적 물리력은 근대국 가였다. 기업은 이러한 국가의 무력과 권위를 배경으로 비로소 자신의 힘을 발 휘할 수 있었다. 영국의 우월한 경쟁력은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자유무역 론으로, 독일의 열등한 경쟁력은 리스트 경제학의 보호무역론으로 나타났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49

250 다. 각국마다 경제력의 특수성에 조응한 질적 차이를 보였던 국가의 경제 정책은 해당 국가 내 기업가의 이해관계와 경제 상황을 직접 반영한 것이 었다. 시기와 조건에 따라 국가와 기업의 상호 역학관계는 달랐지만, 자본 주의 기업이 국가 없이 구성원에 대하여 리더십을 발휘하 고 축적 구조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힘을 바탕으로 일국 내에서 일정하 게 자기완결성을 추구하면서 출발했다. 자본주의 경제가 서구에서든 어디 에서든 방임된 시장경제하에서 전개된 경우는 없었다. 자국 내 산업이나 계급 간의 이해관계 조정, 대외 경제정책 수행에서 국가는 필수적이었고, 특히 수정자본주의를 거치면서 그 역할은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요 컨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국가의 산업정책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조 건이었다. 선별적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현 선진국 대부분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서구 자본주의는 그러한 국가의 힘을 바탕으로 밖으로 침략의 길에 나섰다. 근대 제국주의는 이렇 게 시작되었다. 이들 각국의 개별 기업이나 개인들은 국가권력의 힘을 바 탕으로 밖으로 진출 - 침략의 길을 택하면서 타민족, 타국가나 그 구성원 에 대한 지배력과 소득을 높일 수 있었다. 형식과 외양은 많이 바뀌었지만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다. 오늘날 어떠한 글로벌 기업도 기업 자체의 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기업주가 속한 국가의 힘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글로벌 기업의 힘을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가장 강한 보호주의 경제정책을 유지했던 나라는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장하준 저, 이종태@황혜선 역(2006), 국가의 역할, 부키, 220 쪽. 25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51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신고전파-신자유주의 경제학에서는 세계화 진척 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일국의 독자적 산업정책이 어렵고 또 바람직스럽 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내 경제에서 국가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경 제정책이 설정될 때 비로소 세계화 경제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다. 즉 자본은 국경 없이 자유롭게 이동하지만, 이를 결정하는 주체인 자본가의 국적이 어디인가는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기업가의 자본 축적 수준 역시 기업가가 속한 국가의 정책 환경에 절대적 영향을 받는다. 물론 각국의 이러한 경제정책 수립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국가 별 힘의 강약이라는 변수가 있지만, 자신들을 뒷받침해줄 국가(주권)가 전 제되지 않은 채 기업가 [일반]의 자본 축적을 논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은 중세시대의 장애요인을 극복한 근대적 시 장경제 체제에서 비롯되었지만 민주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지속적인 성장 과 발전이 가능했다. 생산력과 민주화의 양자 관계를 선후의 순차적인 발 전 단계로 추상화시켜 생산력 발전 이후에 민주화가 성취된다는 기계적 이고 교조적인 논리는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전혀 조응하지 않는다. 실제 의 역사에서 두 범주는 서로 어우러지는 상호작용 속에서 양자의 성취가 비로소 가능했다. 오늘날 질곡을 걷고 있지만 해방 후 반세기 동안 한국 의 경제성장이 두드러지게 된 이면에 기나긴 민주화투쟁을 제외하고 설명 할 수 없다. 즉 권력의 독점과 배제 경향을 띠게 마련인 국가의 성격과 국 가권력을 둘러싼 내외 환경이 바뀌어가면서 생산력과 민주화의 순환논리 가 정착되어간 것이다. 이 역시 물론 국가주권을 회복한 이후의 일이었다. 국가의 경제정책은 기업과 개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사회의 민주화 수준에 조응하여 기업과 개인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분명해지고 책 임의식도 커질 수밖에 없다. 식민지 지배를 경험했던 전후 독립국도 대외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51

252 적으로 점차 국가의 주권 행사 역량을 키우면서 대내적으로도 구성원에 대한 책임의식을 키워갔다. 196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과 축적이 가능했 던 것은 비록 종속성을 지녔더라도 일차적으로 국가주권을 회복한 가운 데 분단국가의 부실한 내용을 채우면서 성장해 간 민주적 사회 분위기를 의식한 국가권력이 능동적, 수동적으로 대응하면서 경제정책을 실행한 결 과였다. 즉 {일제시대의 기업환경과 오늘날의 기업환경을 서로 비교해본다 면, 식민지 체제의 청산, 즉 독립이라는 것이 기업 발전에도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 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2. 국가 없는 자본주의, 식민지자본주의 이처럼 자본주의 경제의 성립조건에 대한 원론적 인식을 재확인하는 것 은 식민지 지배하 조선의 자본주의 경제 특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 기 때문이다. 현실의 자본주의 경제는 국가권력을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이론경제학은 국가 범주를 배제한 추상적 자본주의 세계를 다룬다. 그러 나 이 세계는 식민지자본주의의 실제 세계와 차원이 전혀 다르다. 유감스 럽지만 경제성장론의 근대경제학은 이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시야가 없다. 따라서 식민지자본주의를 이해하는 합리적인 분석 틀이나 방법론도 제 시할 수 없다. 국가주권의 문제와 민족운동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들어설 여지가 없다. 먼저 잘못된 개념을 사용하는 예를 들어보자. 조선총독부를 [식민정 허수열(2007), 식민지 유산과 한국 경제, 식민지 경제사의 쟁점과 과제, 민 족문제연구소 학술토론회, 20쪽. 25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53 부]로 칭하면서 국가의 기능을 수행했다거나 나아가서 조선총독부의 독재 를 국가주권을 갖게 된 이후인 박정희 정부의 독재와 비견하는 시각을 들 수 있다. 정부란 넓게는 입법, 사법, 행정의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를 모 두 포함하며, 좁게는 행정부를 지칭한다. 식민지 지배를 받는 동안 조선인 각계각층의 이해관계(민의)를 대변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입법부나 행정부 (국가)는 조선사회에서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조선총독 부 식민통치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즉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회에서 행정부 개념에 조응하는 기능을 수행 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한반도 주민의 의사를 반영하거나 그 권한을 위임 받은 존재가 아니었다. 식민통치를 총괄하는 조선총독은 일본 대장 가운데서 선임되었고 일본 왕에 직속되어 조선 주둔 일본 을 통솔했다. 조선인과 조선사회에 대한 폭력과 무력을 상징하는 기구일 뿐이었다. 기본적인 정무는 일본 총리대신을 거쳐 일본 왕에게 재가를 받 았다. 주요 사안에 대해 일본 제국의회에서 심의가 이루어진 조선총독부 업무는 일본 정부의 통제와 명령하에 이루어졌다. 궁극적으로 조선총독 은 임명권자인 일본 왕, 또는 일본 정부에게 책임을 지는 직위였다. 조선 인 기업이나 조선인 일반의 여론을 의식하거나 어떤 책임을 질 필요도 없 었다. 물론 식민통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조선사회의 의견을 제한적으 로 수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의무는 없었다. 조선에서 시행되는 식민정책의 골간 역시 조선총독 임명권자인 일본 왕과 일본 정부의 침략정책과 전쟁 확대 의도에 맞춰 이루어졌다. 조선총 독은 이러한 골격에 맞춰 제한된 수준의 행정적 [독자성]을 행사하는 존재 였다. 한반도 구성원을 대표하는 권한을 가진 것도, 대외적 주권 행사기구 도 아니었다. 즉 조선총독부는 [공권력에 의한 공적 통치행위] 9 주체가 아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53

254 니었다. 무력에 기반한 외래 권력이었을 뿐, 정해진 절차에 의해 한반도 구 성원의 주권을 대리하고 이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공적] 주체가 결코 아니었다. 9 이러한 권력구조하에서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 경제는 자본주의적 시 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식민지자본주의란 이처럼 식민지 사회에서 자국의 기업가를 뒷받침할 국가권력이 없는 가운데 운영되는 자본주의의 현상과 특징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개념이다. 즉 자본 축적 기구 확보를 위해 자본 가계급이 장악해야 할 국가 수립이 압살된 채 일본 제국주의 정부와 일본 자본이 조선사회의 경제 운영과 정책 결정의 주체가 된 경제체제를 말한 다. 조선인 기업가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제도적 통로 가 없는 식민지자본주의 체제하의 틈새시장에서 활동 영역을 찾는 수동 적 존재였다. 경제성장론은 영국(서유럽)의 이행과정에서 도출한 근대 이행의 지표 를 거론하면서 국민적 시장경제의 성립, 사유재산제도 성립, 합리적 개인 의 영리 추구, 사회와 국가의 분리 등을 나열한다. 10 그런데 정작 가장 핵 심적인 근대국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다.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공적 통 치행위]를 수행하는 근대국가로 상정된다. 개항이 가져다준 수출시장을 배경으로 조성된 지주의 축적 기반이 근대적 산업구조를 형성하는 토대 가 되려면 국가의 주권과 정책 시행 문제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조선에서 식민지자본주의 체제가 성립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물리 9 이영훈(2007),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73쪽. 10 이영훈(1996), 韓 國 史 에 있어서 近 代 로의 移 行 과 特 質, 經 濟 史 學 21, 75~ 77쪽. 25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55 적 폭력과 더불어 가장 효율적 수탈체제인 자본주의 제도를 이식하면서 부터였다.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 자본의 편의를 위해 일본 제국주의가 주 체가 된 제도 정비가 이루어짐에 따라 그 이전의 조선사회 내에서 변화를 꾀했던 내재적인 모색은 식민지자본주의 제도에 편입되거나 폐지되었다. 근대 이전에는 문화와 역사가 각 지역별로, 각 나라별로 형성되어갔다. 이 렇듯 근대 이전은 [다름]이 [병존하는 세계]였고, 새로운 변화를 지향하는 [탈중세]의 모습 역시 달랐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서 이러한 [다름]은 부 정되었다. 근대는 자신의 제도와 관행을 침략 지역에 이식하면서 제도와 가치관의 균일화, 즉 [세계화]를 요구했다. 이식된 근대는 침략 지역에서 [이 전에] 이루어지고 있던 변화의 과정을 일소하거나 이식된 제도의 편의에 맞게 재편했다. 제국주의의 편의에 맞지 않는 것은 오리엔탈리즘 정서를 기반으로 없어져야 할 낙후된 대상으로 규정했다. 경제성장론에서처럼 국가가 부재하고 사회 각 차원에서 민주화 모색이 철저하게 봉쇄된 상황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 자본의 편의를 위해 조 성된 시장경제를 부각시켜 근대문명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나 현실적으로나 성립되기 어렵다. 식민지적 근대는 식민지자본주의를 토대로, 세계사적으로 근대가 형 성되면서 유럽과 북미 이외의 지역에서 형성된 사회를 특징적으로 드러낸 개념이다. 식민지적 근대사회에서도 식민정책과 제국주의 자본운동에 필 요한 인간군의 효율적인 동원을 위해 전근대의 리적인 인식체계 대신 이성과 합리성이 이식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 기 문화와 역사에 대한 열등의식, 민족의식과 철학을 배제한 기능적 교육 이 수반된다. 만성화된 각종 차별에 조선인들은 저항하면서도 수용하는 이중성을 보인 가운데 정체성,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점차 파괴되어갔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55

256 다. 그리고 근대성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민주화를 위한 교육과 훈련을 가 질 기회가 각 분야에서 봉쇄되었고 민주적 정치 지도자도 양성되기 어려 웠다. 사회문화적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훼손은 민주화를 생각 할 겨를조차 앗아갔다. 이 점은 이후에도 식민지적 근대를 극복 하는 데 큰 장애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11 이처럼 식민지자본주의를 토대로 한 식민지적 근대사회에 대한 일제 의 경제적 지배는 개발 - 수탈 12 방식의 외양을 띠었다. 13 전근대의 지배방 식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제국주의의 개발 - 수탈을 동반한 식민지적 근 대는 근대의 원형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근대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서구 사회에서 근대의 원형을 충족시킬 수 있는 범주가 존재할 수 있었던 외부 환경은 바로 대치 국면에서 식민지적 근대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었다. 결국 식민지적 근대의 지양 과정은 근대의 원형을 추구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사적으로 근대의 모순을 지양하는 단초가 된다 정태헌(2007), 앞의 책, 44~45쪽. 12 일제시기 이래 오늘에 이르는 동안 식민지상은 원시적 수탈론, 식민사학의 논 리를 사실상 답습한 경제성장론 외에 본고에서 언급하는 식민지자본주의론(개 발 - 수탈론) 등 세 범주로 구분된다. 13 이와 달리 허수열은 개발의 실체 자체를 회의적으로 본다. {일제시대의 근대적 경제성장은 1932~1937년간의 5년간에 한정되고, 근대적 경제성장의 본격적 전개는 1960년대 이후였다}고 강조한다[허수열(2005), 개발 없는 개발, 은행 나무, 19쪽]. 즉 주권국가를 세운 지 20년 지나서야 근대적 경제성장이 비로소 시작되었지만 일제시대 개발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체제가 붕괴되면서 1950년대 초반 1인당 소득수준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와 비슷한 수준이 되어버렸고 1970년대까지 보릿고개는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었다는 것이다. 14 사실 서구 기준에 의한 근대(성) 지표를 따라 근대주의를 원론적으로 적용한다 25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57 3. 식민지 인식 부재의 경험, 전향과 동화 근대는 지양해야 할 모순과 수용해야 할 내용을 함께 지녔다. 이 때문에 근대가 식민지 사회에 관철될 때의 현상과 본질에 대한 인식이 정확해야 한다. 그러나 일제 지배하에서 사회주의자건 자본주의적 계몽주의자건 양자를 구분해서 인식한 경우는 드물었다. 결국 근대주의로 환원되었고 식민사학으로의 귀의가 귀결점이었다. 일제 지배하의 마르크시스트들은 국가와 민족 문제의 중요성을 간과 하고 이를 계급문제로 치환하는 [국제주의]적 인식의 관성에 구속되어 있 었다. 이들의 조선 경제 인식은 제국주의 이중성론과 교조적 (반)봉건론 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결국 식민사학으로 귀의(전향) 했다. 이는 바로 1990년대 이후 경제성장론의 사상적 궤적을 볼 수 있는 전철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봉건파에 속하는 인정식 15 의 경우 [토지조사사업] 이후 [일층 면 (반)식민지 지배를 겪고 여전히 제도적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은 많은 비서 구 지역은 근대사회로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근대사회로 인식하고 이들 지 역의 근대가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본격화되었다고 할 때에는 시대 구분의 복합 적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 근대사를 개항을 계기로 설명할 때도, 개항 이전까 지 새로움을 모색했던 한국사의 내재적 움직임이 사후 개념으로서 근대를 의 미하든, 독자적인 [탈중세] 성격을 띤 것이든, 침략의 근대에 의해 재편되면서 식 민지적 근대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전제된다. 15 인정식에 대해서는 정태헌(2007), 앞의 책, 153~154쪽; 李 秀 日 (1998), 일제말 기 社 會 主 義 者 의 轉 向 論 :인정식을 중심으로, 國 史 館 論 叢 97 참조. 인정식 이나 뒤에 거론하는 박극채, 윤행중 등이 당시의 마르크시스트 학자를 대표하 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학술적] 논리의 모순이 드러내는 [현실인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57

258 강화]된 농촌의 [봉건성은 독점자본과 결합하여] [반봉건적 농촌관계]를 [더욱 강고하게] 하여 여기에서 [동양농업의 정체성]이 비롯된다고 인식했 다. 근대적 토지소유는 [지주 - 차지농업자 - 임금노동자란 3분할제에 기 초]해야 한다는 단선적 근대주의의 교조적 잔영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윤 축적의 범주를 [원론적]으로 차지농에게만 설정하고 이들이 영세성, 분산 성, 고율지대 때문에 성장하지 못한다는 농업 정체론을 제기했다. 그 결과 식민지자본주의하 식민지지주제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결국 전 시증산을 위한 일제의 농업 재편성 정책을 두고 [농업생산의 사회적 환경 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농업 정체의 근간인 반봉건성을 제거하는 [획 기적인 의의]를 부여하기에 이른다. 16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마르크시스트인 백남운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 17 이러한 현실 인식은 결국 전향으로 귀결 식]의 귀결점을 드러내기 위해 예로 든 것이다. 인정식의 주장은 당시 마르크시 스트 경제학자들에게 비판 대상이었고 해방 후 스스로 기존 이론을 폐기했다. 인정식의 봉건론은 조선 공산주의자들 운동론에서 보면 [비주류]였고 오히려 박문규, 박문병 등의 반봉건론이 [주류]인 셈이었다. 그러나 코민테른 12월 테 제 이후 소유관계의 근대적, 생산방식의 봉건적 모순이 반봉건성이라는 [주류] 의 인식 역시 봉건론이나 제국주의 이중성론의 본질적 한계를 벗어난 것은 아 니었다. 16 이상은 印 貞 植 (1940), 朝 鮮 の 農 村 機 構, 白 楊 社 참조. 17 백남운에 대해서는 방기중(1992), 한국근현대 사상사 연구 @40년대 백 남운의 학문과 정치경제사상, 역사비평사 참조. 일제시기 대부분의 마르크시 스트들이 교조적 봉건론과 계급론을 벗어나지 못한 것에 비추어 보면 백남운 의 연구는 독보적이었다. 식민지자본주의론(개발-수탈론)으로 일제시기 경제 를 보는 시각의 연원은 사실 백남운의 문제의식으로 소급할 수 있다. 기본적으 로 자본운동의 구조 속에서 식민지 경제를 인식한 백남운의 연구는 당대에 식 민사학의 정체성론을 논리적, 실증적으로 [거의] 벗어난 군계일학이었다. 그리 25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59 되었다. 1930년대 식민농정은 급진화, 전국화하는 농민운동을 체제 내로 흡수 하고 이전까지의 지주 중심 포섭 정책을 넘어 전 농민을 대상으로 한 황 민화 정책의 기반 조성을 위해 일대 전환을 보였다. 18 그러나 좌와 우를 떠나 이러한 식민농정 전환의 배경과 본질을 제대로 주목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제국주의 지배가 결코 봉건제 유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 현실을 외 면한 전통적 봉건론에 얽매인 결과였다. 일제 침략전쟁과 민족문제에 대 한 취약한 인식, 제국주의 이중성론 - 봉건론에 매몰된 가운데 자신들이 설정한 반( 反 )봉건 과제의 위상과 내용이 분명하게 설정되지 못할 때 타도 대상인 조선총독부가 [반( 反 )봉건운동]을 진행하는 기이한 현상에 논리적, 실천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당연히 식민정책 인식에서 일대 혼돈을 불 러왔다. 결국 일제가 전시 [계획경제]을 추진하는 변화된 환경은 화해할 수 없 는 두 논리가 접합하는 배경이 되었다. 즉 국가 없는 자본주의화=식민지 자본주의를 근대문명화로 각인시킨 (일본)국가주의적 식민사학의 구체적 고 한국사 시대 구분이나 조선후기 사회 변화와 [봉건제 해체] 과정에서 검출한 자본주의 맹아론, [이식자본주의]론으로서의 식민지 경제 인식 등은 여전히 주 목할 만하다. 농업문제에 대해서도 [봉건유제가 지배적]이지만 [농업 자본주의화 과정의 필연성], 즉 미곡상품화의 주체인 대지주(농장) 경영의 자본주의화 경향 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자작농 창정계획에 대 해서도 {소작쟁의 완화책으로서 농민 회유책으로서 농촌에 보수적 세력을 부 식하는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는 당시의 운동가나 이 론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시각이었다. 18 이에 관해서는 정태헌(1991), 1930년대 식민지 농업정책의 성격 전환에 관한 연구, 일제 말 조선사회와 민족해방운동, 일송정 참조.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59

260 침략성은, 국가와 민족 문제를 계급문제로 대체한 마르크시스트의 추상 적 계급론을 동화시켰다. 민족문제를 탈각한 계급 인식이 일제 지배의 본 질을 간과하고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경로로 나아간 것이다. 이러한 혼돈은 윤행중이나 박극채에게서도 드러난다. 윤행중은 [경제 신체제]가 생산수단 공유, 공익 원리, 국가의 계획으로 이루어졌다면서 [통 제경제에서 계획경제로의 전환이라는 세계사적 보편성의 과정]으로 이해 했다. [공익 우선의 원리]를 통해 평화적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면서도 전쟁이 세계자본주의의 [계획경제적 자본주의]화 과정을 촉진 한다고 인식했다. 박극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치의 정책이 [계급대립의 사회]를 [민족협동체의 사회]로 개조했다고 평가했다. [국책]에 순응했던 일 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영향을 받아 [경제신체제]를 [국민경제 간 자유 무역]에서 [블록경제에 의한 통제적 자유무역]으로, 그리고 [자급자족적 요 구에 적응하는 시장조직으로서 광역경제]로 변화하는 과정, 즉 광역경제 를 국민경제를 넘어선 대안으로 인식했다 년대 이후 좌우 모두가 드러냈던 식민지 인식의 논리적 모순과 실 천적 파탄은 해방 후 깊은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분단과 전쟁의 질 곡 속에서 단선적 근대주의는 반공반북론과 동일시되는 강고한 이데올로 기 역할을 했다. 현실 경제는 자유시장 체제로 운영되지 않았지만 공산주 의 북한에 대응하는 자본주의는 근대로 설정되었다. 식민지 지배의 여파 였던 경제난 속에서 과거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극복하며 어떤 논리 위에 서 국가를 건설한다는 문제의식은 약했다. 추구해야 할 근대의 내용과 한 19 윤행중과 박극채에 관해서는 홍종욱(2007), 해방을 전후한 경제통제론의 전 개 - 박극채@윤행중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64 참조. 26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61 계, 나아가서 식민지적 근대에 대한 인식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공반북 논리가 전부였던 상황에서, 이는 향후의 과제로 남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더 이상의 고민 여지를 제거한 원시적 수탈론으로 식민지 경제 상이 안착하는 배경이 되었다. 원시적 수탈론은 1980년대 중반 식민지반봉건 사회구성체론으로 총 결되었다. 주체적으로 이룩한 근대만 근대로 봐야 한다는 관념에 따라 식 민지자본주의와 식민지적 근대사회의 본질 규명을 못한 일제하 마르크시 즘이나 근대주의적 계몽주의의 봉건론에 내재된 인식론적 모순이 그대로 답습되었다. 선진국 중심 사관을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독자적 국민경제 만 자본주의라고 설정하고 이와 다르게 나타난 현상을 자본운동의 보편 적 범주와 구분하여 봉건성으로 규정한 것도 전통적 제국주의 이중성론 의 반복으로서 사실상 서구 근대를 추수하는 근대주의의 연장선 위에 있 었다. 식민지반봉건 사회구성체론은 1990년대 들어 경제성장론으로 전화되었 다. {하여간 일제가 빼앗아갔다}는 원시적 수탈론은 냉전체제 붕괴와 한국 경제성장의 성과를 배경으로 일제시기에도 {하여간 자본주의는 발전했다} 는 경제성장론으로 얼굴을 바꾸었다. 그리고 일제하의 경험이 1960년대 한 국 경제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전화는 기존의 입장이 바뀐 것이 아니라 당연한 귀결점이었다. 내재되어 있던 단선적 근대주의 경 향이 시대적 환경에 따라 최악의 논리로 부각된 것이었다.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61

262 III. 경제성장론 식민지상의 [근대문명론] - 국가인식의 결여 1. 국가와 민족을 배제한 [근대적 개인]론 경제성장론 역사인식의 큰 특징은 일제시기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국가, 나아가서 민족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부정하다가, 해방 이후에 대해서는 돌출적으로 국가론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일제시기에 대한 역사상의 특 징은 민족과 국가의 문제를 배제한 채 개인을 부각시킨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거론할 때 필수적인 국가주권과 주권국가가 취하는 (경제)정책의 중요성은 시야에 없다. 나아가 한국 근대사 인식도 나라를 빼앗겼다는 [낡은 민족주의] 감정에서 벗어나 문명화 관점으로 전 환할 것을 강조한다. 즉 {20세기에 들어 구래의 조선인이 일제의 식민지 억압을 받으면서 발견한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에 불과한 민족보다 {더 본질적이고 실체적 인 역사의 단위}는 [개별 인간]이라는 것이다. {본성이 자유이고 분별력 있 는 이기심인 인간 개체}들이 {상호 경쟁하면서 또 상호 협동하면서 건설 해가는 생산과 시장과 신뢰와 법치}가 [진정한 역사]이고 [문명사]라는 것 이다. {화해가 불가능한 계급관계는 일반 민중들의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뿐이다. 나아가서 조선왕조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차별받은 주민이라면 왕조의 멸망을 기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고 [협력자]는 주로 [구래의 중인 신분에서] 나왔고 [농촌사회는 중인 출신의 신흥지주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하면서 외래 권력에 긍정적 의미 부여를 한다. 나아가서 갑 오경장 때 공식적으로 폐지된 신분제를 두고 식민지 지배를 통해 신분제 가 해체되었고 {일제라는 새로운 지배자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백정 26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63 신분은 죄다 사라지고} 조선의 관습과 무관한 외래 {권력은 차별의 해소 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는 무리한 주장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20 일본인 들에 의한 민족적 차별은 당연히 이들의 시야에 없다. 어쩌면 좇아야 할 대상이 가하는 차별은 받아들일 수 있다거나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으 로도 이해된다. 개별 인간의 정체성과 주체를 강조하기 위한 단계로서 개별 인간을 억 압하는 권력체에 대한 저항 또는 부정 의식은 없다. 망해야 마땅한 무능 한 대한제국에 대해 부정하듯이 일제의 지배와 권력에 대해서도 철저하 게 부정할 수 있어야 이러한 주장이 적어도 형식논리적으로 성립 가능하 다. 이들의 논리는 물론 그렇지 않다. 침략을 침략으로 보지 않고, 조선총 독부 체제하의 조선인을 자유로운 개인으로 설정하는 것은 시장경제를 근대문명으로 강조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무능한 대한제국이 없어진 것은 문명화 관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고 그것을 구성원들이 환영했다고 강변하기 위해 [탈정치적 개인]을 부각시키 는 것이지 일관된 논리적 연관을 갖는 것은 아니다. 창조적 변화가 있을 수 없는 왕과 양반의 나라였을 뿐 백성의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왕 조-대한제국은 망해 마땅하다고 치자. 대한제국만 백성의 나라가 아니었 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 지배의 주체였던 [대일본제국] 역시 천황의 나라였 고 귀족의 나라였다. 근대문명에 대한 망상에 가까운 주관과 편견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많은 본질적인 문제를 지나치게 한다. 마치 그들이 그토록 주장 하는바, 즉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할 인간군이 국가주권을 유지한 상 20 이상은 이영훈(2007), 앞의 책, 20~21쪽, 87쪽, 99쪽, 318쪽.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63

264 태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을까. 회복해야 할 대상으로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에 실질적인 관심이 전혀 없는 상 황에서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근대국가를 이끌어갈 인간군이 만들어진다 는 주장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몰가치성 실제로는 침략을 근대문명으로 포장하는 반인륜적인 역사인식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경제성장론이 개인을 부각시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억압 틀로서 거 론하고 그에 의해 희생된 소수자 또는 개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담론과 흡사하다. 실제로 이들은 푸코의 논의를 수용한 연구 가 제시하는 근대적 규율을 예로 들기도 한다. 21 그러나 여타의 규율 관 련 연구가 근대적 규율이 개인을 억압, 통제한다는 문제의식을 지닌 것과 달리, 철저하게 근대주의를 추수하는 이들의 초점은 식민지 지배기간의 근대성 자체에 있다. 그런 점에서 탈근대론자들의 그것과는 방점이 분명 히 다르다. 또 경제성장론은 탈근대론과 입장이 {별로 다르지 않다}고 강조한다. {식민지성과 근대성을 긴밀히 관련된 것으로 인식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 하고 있기 때문} 22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강변과 달리 경제성장론과 탈근 대론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면 식민지성에 대한 고찰이 취약하다는 점이 다. 즉 탈근대론이 근대건 식민지적 근대건 동일하게 근대 자체의 폭력성 (폭력적 근대화의 그림자)을 강조하고 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경제 21 이들의 [교과서]에서는 {한국인에게 가해진 새로운 규율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를 위한 것들이지만, 근대사회의 규율로서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정신문화에 점 차 내면화되어갔다}면서 {근대국가는 국가가 추구하는 군사력과 시장이 요구 하는 노동력을 담당할 규율된 신체를 필요로 하였다}(104쪽)고 서술하고 있다. 22 김낙연(2007), [식민지 근대화] 재론, 경제사학 43, 179쪽. 26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65 성장론은 그러한 문제의식 자체를 건너뛴 채 근대란 원래 폭력적이고 억 압적이라는 당연시하는 규정이 앞선다. 철저한 근대주의자들이기 때문이 다. 경제성장론은 이처럼 필요에 따라 [비학문적]으로 입론근거가 상이한 탈근대론이 자신들과 같다고 강변한다. 23 여기에는 탈근대론자들의 불분명한 문제의식도 한 원인이 된다. 자기 완결성이 없는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구체적이고 정확해야 한다. 민족 (주의)과 국가를 넘어서야 한다는 추상적 [선언]보다 현실적으로 더 중요하 고 의미 있는 것은 그러한 모순을 안은 근대의 국가를 구성원들의 힘으로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의식에 있다. 사실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이미 20세기 전반기에 전개된 적이 있다. 일제시기 사회주의자들은 민족과 국가를 넘기 위해 국제주의 를 수용했지만 현실의 사회주의 이념이나 정책은 국가와 민족의 벽을 넘 어설 수 없었다. 20세기 전반기까지 풍미했던 아나키스트들 가운데 상당 수가 극우적 경향으로 전화되어간 행로 역시 추상적 관념이 빚어낸 귀결 점을 잘 보여준다. 먼저 식민지에서 근대 극복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구체성에 서 출발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은 결국 국가 건 설을 지향하는 것이다. 탈근대론 시각에서는 이 또한 근대라고 비판하겠 지만, 해방과 국가 건설의 과제와 근대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서로 초점이 다르다. 모든 근대가 식민지 근대라는 수사어로는 근대가 불러온 식민지 모순을 해결할 방도를 찾기 어렵고 결국 식민지 지배를 수용함으 로써 더 큰 권력에 귀의하는 결과를 불러온다 경제성장론은 정치행위를 하듯 [편 만들기] 언술을 종종 한다. 일제의 토지수탈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65

266 2. 신고전파적 시장만능론 경제성장론의 식민지상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시장 기능 절대론을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식민지 사회에 적용한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 지배라는 현실과 상실된 국가주권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이념형의 이론에 따라 현실을 재단하는 순수함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거대한 제국 주의 침략을 문명화로 옹호한다는 점에서 이중성을 지닌다. 이 시기를 언 급할 때 이들이 거듭 반복하는 근대문명이란 바로 시장경제를 가리킨다.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이란 합리적 개인 사이의 거래를 총 체적으로 일컫는 개념이다. 소비자와 공급자의 합리적 결정, 즉 수요곡선 과 공급곡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균형이 이루어진다는 [탈정치적] 세계이 다. 양적, 질적으로 영세 소자본이 경제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독 점도 과점도 없는 그림과 같은 세계이다. 그래서 각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적으로는 조화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세계이 다. 교환만 존재할 뿐 수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고전파 경제학이 현실 을 보는 주관적인 눈은 비유컨대 그 어느 논리보다 철저하게 [탈민족적]이 고 [탈국가적]이다. 경제성장론의 입장에서 탈근대론의 출현은 한 줄기 빛 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현실의 시장 세계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주관적으로 설정한 방 론을 부정하는 선행연구로 자신들과 입론 근거가 다른 裵 英 淳 ( 韓 末 日 帝 初 期 의 土 地 調 査 와 地 稅 改 正 에 關 한 硏 究,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1987) 의 논지를 자신들과 같다고 강변하거나[ 金 鴻 植 外 (1997), 朝 鮮 土 地 調 査 事 業 의 硏 究, 민음사, 30쪽]. 입장이 전혀 다른 정진성의 연구가 자신들의 [위안부] 인식을 뒷받침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교과서포럼(2008), 앞의 책, 93쪽]. 26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67 식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처절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었다. 경제적 강자에 의한 약자의 흡수 병합의 과정이었다. 경제적 강자가 국가의 권력 과 정책에 영향을 미치거나 때에 따라서는 직접적인 이익을 반영하는 정 책을 시행했다. 국가의 무력을 동원한 대외 침략정책 또한 그러한 일환이 었다. 시장은 만인에게 공평할 수 없다. 사실은 그것이 시장 본래의 법칙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켜 이해하자는, 현실을 외면 하는 성립 불가능한 주장을 한다. 즉 현실에 토대를 둔 과학을 추구하기 보다 [이념적]인 시장만능론으로 현실을 인위적으로 재단하려고 한다. 일 제에 의해 시장이 도입되었고 시장에서의 행위는 경제인의 자발적 행위이 므로 수탈의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식민지성은 지배체제 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수탈일 뿐, 시장경제 체제는 이러한 수 탈적 정치체제와 무관하다는 24 과감한 주장을 한다. 시장에 대한 절대적 가치 부여는 특정 세력이나 특정한 부르주아의 이 해관계를 반영하는 논리이다. 작은 정부를 주장하고 국가의 정책 결정과 수행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는 [순수한] 경제논리가 이념형으로는 존재 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현실 경제 운영에서는 국가 의 힘을 수반하면서도, 신고전파 경제학의 세계는 시장이라는 이념을 동 원하여 내부의 모순을 덮는다. 이 세계에서 제국주의나 식민지, 수탈 개념 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관적 논리에 의해 세상은 평화롭고 협동적 이라고 자위한다. 그러나 신고전파 경제학은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 해 세상의 모든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없애자는 철학적 수준까지 도달한 24 김낙연(2007), 앞의 글, 159~165쪽.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67

268 적이 없다. 사실 도달할 수도 없다. 그것이 허구적 논리이고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특정한 국가나 특정한 자본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논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국가는 시장경제를 제도적으로 설계하고 운영하는 주체 이다. 경제성장론은 이 점을 간과한 채 [자유로운] 시장경제하에서 조선인 의 성장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식민지성 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문 제를 회피하고 이를 시장으로 대체하는 동어반복이 이들의 글에서는 끝 없이 반복된다. 하여간 조선총독부는 시장친화적 경제제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오로지 시장경제를 매개로 일제시기와 해방 후가 자연스럽게 동 일선상에서 연결된다. 25 단순하고 속 편한 논리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지나가는 언급에 불과하지만 [자산계급의 민주주 의가 결여되었다는 점] 26 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자 본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놓은 시장경제에서 일방적으로 활보한 주체는 당연히 일본 자본이었다. 누가 절대적으로 우월한 힘을 바탕으로 시장을 전유할 수 있었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전체적으로 조선인 자본은 틈새 시장을 노리는 수준이었다. 조선인의 국가가 있었다면 이런 현상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조선인들이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놓은 시 25 일제시기 한국인들은 일본이 도입한 시장경제를 통해 경제생활 양식을 체득한 뛰어난 학습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나아가 식민지 시대 실력 양성의 이념은 (1960년대 공업화에서) 민족중흥의 이념으로 계승되어 일본을 통해 배운다는 실력 양성의 방식은 더 넓게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을 통해 배우는 것으로 계승되었다고 한다. 주익종(2008), 대군의 척후, 푸른역사, 8장. 26 이영훈(2000), 韓 國 市 場 經 濟 와 民 主 主 義 의 歷 史 的 特 質, 韓 國 開 發 硏 究 院, 50쪽. 26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69 장에서 살기 위해, 또는 돈을 벌기 위해 적응하는 것은 당연했다. 수동적 으로 적응하는 것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주체가 되어 리더십을 발휘 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의 차이는 현격하다. 어디에 방점을 두어야 할까? 시장이 조선인에게도 열려 있었다는 사실만 강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현실을 도외시한 이념적 시장만능론이다. 마치 조선인의 국가가 있었다면 이런 시장의 형성도 학습도 불가능했다는 전제, 즉 가정은 경제성장론자 들에게는 신념에 가깝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는 이들도 언급하는 [지주 부르주아의 주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해방 후 [지도받는 자본주의] 27 가 가능했던 것도 국가주권의 회복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제국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인간 본성, 즉 자유에 반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자유시장을 만들어줬다는 [문명사의 대전환]을 가져온 식민지 지배하에서 자유는 없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혼란스럽게 개념이 남발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들에게 전혀 혼란 스럽지 않다. 이들의 제국주의 비판은 무의미한 수사어이기 때문이다. 한 반도의 영구병합을 목적으로 한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에서 {한갓 수탈이 나 자행하여 민심을 잃는} 28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여기서 전가의 보도처럼 줄기차게 거론하는 논리가 일제의 [토지수탈 40퍼센트 론]에 대한 반박이다. 조선에서 거래 관행에 익숙하지 못해 토지의 구매와 집적에 장애를 느 낀 이들은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인이었다. 이 때문에 일제가 [합방]을 전 후하여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그 [성과] 중 하나가 27 이영훈(2000), 앞의 책, 86쪽. 28 이영훈(2007), 앞의 책, 84쪽.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69

270 광무양전 때까지 유지된 일본인(외국인)의 토지 소유금지 조항 해제였다.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총독부 권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제환경을 제공했다. 해방 후 남한에서 일본인 소유농지(신한 공사)가 26.9만 정보(경작지의 12.3퍼센트)나 되었고, 신한공사 경지의 52퍼 센트가 기름지고 수익성 높은 전라도에 집중되었다. 29 그만큼 조선인 중 소지주들이 몰락한 셈이었다. 이러한 경제환경과 결과를 가능하게 한 시 발점이 바로 토지조사사업이었다. 경제논리는 시장을 통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식민지 환경과 식민정책에 규정된 범주 안에서 제약되어 있다. 토 지조사사업으로 경작권, 개간권, 도지권, 입회권 등 여러 권리가 부정되 었다. 대한제국 황실 소유지가 조선총독부 소유인 [국유지]로 전환되었고, [임야조사사업]으로 전국 임야의 60퍼센트가 [국유림]이 되었다. [국유화] 된 토지나 임야의 상당 부분은 불하를 통해 소유로 넘어갔다. 그러나 경제성장론은 조선총독부의 임야정책이 {임야의 사적 관리 주체를 창출하여 산림녹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시행되었다}고 극 찬하는 데 주력한다. 3. 변용된 식민사학은 오리엔탈리즘 문명관을 기초로 침략을 근대문명의 시혜로 강 조하고 약탈과 학살을 은폐한다. 그리고 이는 세계사적으로 근대가 전개 되면서 비서구 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인식하는 근대역사학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정립되었다. 부르주아 사학이건, 마르크시스트 사학이건 근대역 29 김기원(1990), 미군정기의 경제구조, 푸른산, 26~28쪽. 27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71 사학의 발전 단계론이 드러낸 공통점은 유럽에서만 존재했던 봉건[제도] 가 없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정체성론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다. 발전 단계론의 일률적, 교조적 적용은 [다름]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침 략을 문명적 시혜로 부각시켰다. 마르크시즘도 이러한 아시아적 특수성론 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적유물론은 역사발전 단계를 제도의 유 무에 초점을 두는 도그마에 빠짐으로써 부정의 대상인 자본주의 - 제국 주의 침략논리에 결과적으로 부응한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봉건 개념이나 인식을 현상적 제도에 두기보다 지방권력의 고착성과 중앙권력의 제한성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중세로 이해할 수 있는 사회의 보편적 특징이었다. 개별 인간을 포함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의 실질적 장 악이 가능해진 것은 어느 지역에서건 근대에 들어와서였다. 그런데 모든 제도는 정치사회적 조건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탈중세 방식도 여러 경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앞세운 유럽의 근대 가 세계화하면서 근대 이전 비서구 지역의 역사와 문화는 낙후되고 버려 야 할 대상으로 규정되었다. 침략과 살육, 약탈, 구성원의 정체성 파괴 등 은 사소한 것이었고 문명화 과정의 부산물에 불과했다. 한국사에 대한 일본인의 식민사학적 인식은 19세기 말경부터 시작되 었고 그 근간은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이었다. 30 후쿠다 도쿠조[ 福 田 德 三 ] 가 1904년에 출간한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 는 교환@유통에 입각 한 경제발전 단계론에 따라 한국은 봉건제도 형성 이전의 단계로서 일본 의 후지와라[ 藤 原 ]시대(9세기 말~12세기)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토지소 30 이하 일본인 학자들의 식민사학은 강진철(1986), 일제관학자가 본 한국사의 정체성과 그 이론, 한국사학 7, 정신문화연구원 참조.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71

272 유 관념의 부재, 봉건제도 결여, 화폐유통의 부재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 한 정체성을 벗어나는 길은 외부의 자극, 즉 [전래적인] [다른 경제단위의 발전된 경제조직을 갖는 문화에 동화]되어 [일본의 힘에 의해 성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쿠쇼 이와오[ 黑 正 巖 ]의 조선 경제조직과 봉건제도 ( 경제사논고 의 3 장, 1923)는 봉건제도 결여론을 구체화했다. 1920년 당시 한국 경제가 시 ( 市 ) 중심의 지방경제인 [도시경제의 일변태]로서 상설상업의 중요도는 극 히 희박하다고 봤다. [주시( 週 市 )]의 역사는 길지만 {이천 년래로 거의 진화 의 형적이} 없어 {양반들은 공물( 貢 物 )로서 상납되는 재화의 공급을 받아, 굳이 교환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지방 농촌에서는 수령@이속들의 주 구로 생산의 잉여가 거의 수탈되는 형편이어서 농민들 사이에서 교환경제 가 발달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경성제대 교수 시카타 히로시[ 四 方 博 ]는 후쿠다나 고쿠쇼와 달리 생산 양식 구조를 통해 정체성을 강조했다. 즉 개항 당시 [자본 축적도], [기업적 정신에 충만된 계급도], [대규모 생산을 감당할 수 있는 계기도 기술도] 없 었던 [한국은 외래 자본주의의 자극을 통해] 자본주의가 실현되었다. 자 본 축적이 불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봉건제도 결여 외에도 [이조의 특 수한 사회조직과 지도정신]과 [유교적 의식세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유 물론자인 모리다니 가츠미[ 森 谷 克 己 ]는 봉건제 결여론을 수정하여 [고구려 이래 이씨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대의 국가적 체제]를 [미숙한 봉건주 의가 혼입]된 [정체]된 [전제적@관료주의적 국가]라고 강조했다. 일본은 [다 른 동양제국과는 달리, 무비( 無 比 )의 국체]와 [민족적인 순수성을 보유하고 우수하며, 또 봉건체제의 완성]을 이룬 [예외]적 존재였다. 결국 일본을 종 주로 삼는 팔굉일우 정신에 입각해서 구미 제국주의의 쇠사슬을 끊고 해 27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73 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성장론의 역사인식은 이러한 식민사학의 기본 틀을 계승하고 있 다. 일본 자본에 의해 자본주의가 전개되어 근대적 계급이 고 한국 자본주의는 일본 자본의 영향하에서 점을 강조 한다. 일본식 제도 이식을 근대 기준으로 설정하고 [합방] 이전 한국사의 모든 역사적 행위는 무의미했다. 한국 중세사의 {국가적 토지소유가 그 자 체로는 근대법적 형식으로 전환되기가 지극히 곤란했던 그 자신의 역사 적 운명}으로서 탈중세를 꾀하던 한국사의 내적 동인 역시 부정한다. 광무양전은 일본인들과 달리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익숙해 별 무리가 없던 토지의 거래, 상속 등 소유권 이동의 관행을 대한제국의 필요에 맞게 새롭게 법제화하려던 시도였다. 그러나 일제는 자신들에게 편리하고 익숙 한 일본식 제도를 이식하기 위해 새로운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했다. 조선 사회에서 새로움을 지향한 내재적 추동력이 없었다거나 새로운 전화가 불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시도나 움직임이 일본식 제도 이식을 위 해 부정되거나 재편되는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자본주의 맹아론이 과장되었다는 것과 경제성장론 역사상이 맞느냐 하는 문제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세계에서 자생적으 로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는 영국이 유일하다. 나머지 국가는 모두 후발 국으로서 외부(먼저 산업화한 나라)와의 접촉과 대응을 통해 산업화에 성 공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 하기 위해 한국도 영국처럼 자생적 싹이 트고 있었다는 주장보다, 전통사 회 가운데 정체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고 타율적으로 근대화하지 않은 나라가 영국 말고 어디 있냐고 반문했어야 옳았다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 다. 31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73

274 이영훈이 31 초기에 주장했던 토지국유론은 실증적으로 정선되지 못한 것으로서 전통적 식민사관의 그것을 답습한 것이었다. 이후 일제의 [토지 조사사업] 때 신고만으로도 행정처리가 가능했을 만큼 이미 관행화되었 던 조선시대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면서 새로 부각시킨 논리가 소농론이 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존재했다는 소농은 전근대와 근대의 접합점으 로서 조선사회 내부에서 근대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내적 조건이라는 것 이다. 즉 소농사회는 근대로의 이행 동력이 없기에 외부에서 전달되어야 하는데 식민지 지배를 통해 가능했고 소농사회는 이를 수용할 수 있는 32 [수동적 존재]로서 그 존재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농사회론의 타 당성 여부를 떠나 일본의 소농은 물론 예외적 존재였다. 전통적 식민사학 이 일본사에 대해서는 역사발전의 [일반성]을, 한국 등 다른 아시아사에 대해서는 [특수성]을 강조했던 것과 차이가 없는 점도 비슷하다. 설명의 일 관성이 없는 것이다. 최근에 경제성장론은 19세기 [위기론] 33 을 거론한다. 19세기 조선사회 는 인구와 장시의 수가 감소하고 토지 생산성이 감소하는 장기추세를 보 였는데 조선왕조는 이를 수습하지 못하여 결국 식민지화할 수밖에 없었 다는 것이다. U자 곡선을 그리는 19세기 [위기론]은 식민지 지배의 불가피 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인위적 가설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에 따르면 1950 년대에 이르러서야 1750년대의 생산성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실로 어이없 는 결론이 나온다. 전통사회에서 토지 생산성과 생활수준의 하락은 조선 31 우대형(2007), 조선 전통사회의 경제적 유산, 식민지 경제사의 쟁점과 과제, 민족문제연구소 학술토론회, 27쪽. 32 이영훈(2002), 조선후기 이래 소농사회의 전개와 의의, 역사와 현실 이영훈 편(2004),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27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75 사회만의 현상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발견되는 전통사회 순환 파동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 34 경제성장론의 식민사학 계승은 당연히 식민지 지배의 시혜론, 또는 옹 호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교과서]를 표방한 책을 내고 이런 사실을 청소 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35 침략의 과거사를 정리하고 평화의 동북아를 구축해야 하는 때인 21세기에 들어, 이들의 [교과서]는 객관적 34 19세기 위기론에 대한 문제점은 우대형(2007), 앞의 글, 27~30쪽 참조. 한편 [위기론]의 주장과 달리 19세기 후반에 토지 생산성의 급격한 감소가 미약했 다는 사례도 있다[ 토론:조선후기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와 현실 45(2002), 74쪽의 김건태 토론 참조]. 우대형은 19세기에 생산성 하락의 폭은 20퍼센트 전후인 것으로 본다. 35 몇 가지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총독부 재정은 적자구조였고, 일본에서 공 채를 발행하여 적자를 메웠다. 임야정책은 산림녹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시행 되었다. 쌀은 증산량보다 수출량이 적다. 조선총독부가 교육에 힘써 식민지 말 기의 취학률은 40퍼센트를 넘었다. 일본군 위안부는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이 대부분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집과 알선에 응한 사람도 많았다. 의료개선으로 유아사망률이 크게 낮아졌다. 경성방직과 화신은 일본인 기업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도시의 발전도 있었다. 공업 화에 따라 산업구조가 점차 고도화되었다[교과서포럼(2008), 앞의 책, 83~105 쪽]. 이에 대한 비판은 주진오와 박찬승의 앞의 글을 참조할 것. 재정과 관련해서 짧은 지적을 한다면 조선총독부는 적자공채를 발행한 적이 없다. 보충금의 규모나 성격 또는 용도에 대해서는 다른 연구에서 이미 밝혀졌 다[정태헌(1996), 일제의 경제정책과 조선사회, 역사비평사]. 거의 고정액으 로 매년 유입된 보충금은 조선 재정으로 돈을 준다는 [정치적 시혜] 의미가 컸 지만 일본인 관리의 수당[ 加 俸 ]에 소요되었다. 조선인 차별정책인 보충금 폐지 론이 대두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보충금의 대세입 비중은 1942년에 1.6퍼센트 에 불과했다.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75

276 사실에 대한 수많은 오류, 오자 등은 논외로 치더라도 [식민사관으로의 복 귀], [타율성론으로의 회귀]를 통해 [일본 교과서를 방불케] 하는 36 서술로 점철되어 있다. 36 IV. 경제성장론의 허구적 대한민국 [정통론] - 국가론의 돌출 경제성장론은 일제시기까지에 대해서는 국가 - 민족 문제를 배제한 채 신 고전파 경제학의 세계가 강조하는 시장경제를 부각시키고 이를 통해 해방 후 시기와 연결시키고자 한다. 반면에 해방 후에는 당혹스러우리만치 돌출 적으로 [애국적] 국가론자로 변신한다. 물론 {천황을 위해 죽겠다는 맹세의 정신세계}가 대한민국을 [충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필연]이고 그에 대해 아무 의문도 없는 의식 수준으로 어떻게 {국가는 자유의 최후의 보루}라 는 37 개념이 도출될 수 있는지 이들의 설명만으로는 알 도리가 없다. 대한민국, 나아가서 [정통성론]을 운위하는 논리가 정합적이기 위해서 는 당연히 일제시기의 국가주권 회복운동이 일차적 관심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를 [문명화] 과정으로 보는 역사인식으로는 근원 적으로 국가주권의 회복 문제에 관심을 갖기 어렵다. 실제로 애초의 [교과 서 시안]에서는 민족운동(독립운동)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었다. 또 그것이 경제성장론 역사인식의 논리에 충실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교과서]에 는 민족운동 부분이 작위적으로 편입되었지만 자신들의 기본논리에 맞지 36 주진오(2008), 앞의 글, 305~312쪽. 37 이영훈(2007), 앞의 책, 10쪽, 181쪽. 27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77 않기 때문에 논리적 부정합성이나 불협화음이 당연히 속출한다. 먼저 [민족주의 계급운동]이라는 상식적이지 않은 개념으로 공산주의 운동, 신간회,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한데 묶어 설명한다. 반면에 대한 민국 법통의 근간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이승만에 대해서만은 곳곳에서 영웅적으로 서술하면서 박스까지 설정하여 각별하게 설명하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일제가 [집중적으로 탄 압]했기 때문에 [민족독립운동에서], [높은 평판]을 얻었다고 한다(122쪽).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분파의 [갈등]을 강조한다(131쪽). 실제로는 임정 내 에 여러 세력이 모였고, 임정 계열과 화북조선독립동맹 사이에 연합(연대) 이 모색되었으며 건국동맹도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 연합을 모색했다. 다 양한 이념에 따라 분파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데 이를 두고 연합을 추구했 던 주체들의 노력을 도외시한 채 [갈등]으로 격하시킨다. 결국 일제하 시기를 두고 [최후의 보루]인 국가주권을 찾기 위한 독립 운동의 의의나 한계를 평가하기보다 대다수 조선인은 식민지 지배에 체념 적으로 순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정리한다. {많은 한국인은 점차 독 립의 희망을 잃어갔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함으로써 {차별에서 벗 어날 것으로 기대}하면서 {전시체제에 참여}했으며 {광기 어린 전시체제 에 저항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132쪽). 이러한 서술에는 상황론과 독 립불능론, 나아가서 친일 불가피론으로 친일행위를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결국 일제시기는 경제성장론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항일운 동가들만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보도통제가 극심했던 전시체제하에서 비밀결사가 국내 곳곳에 서 조직되었고 공장에서의 태업, 거부와 입산활동, 유언비어의 유포 등 다양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1945년 7월에는 부민관 폭파사건도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77

278 일어났다. 건국동맹 등 지하운동체는 해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교과서]는 이처럼 어려운 조건에서 전개된 투쟁은 도외시하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 다. 결국 한반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에 순응하거나 타협하는 것만이 현 실적인 길이라고 가르치려고 하는 셈이다. 이는 경제성장론이 그토록 강 조하는 [문명화] 과정의 [학습]에 조응하는 길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이 길이 정도였다. 그런데 [하여간] 해방이 되었고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이제는 [건국의 주인 만들기]에 주력한다. 이로써 {전통 문명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역사 적 계보}를 잇는 [개화파]가 [주도]했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문명개화론에 젖 어 있던 개화파의 대부분은 식민지 시기에 친일, 타협의 길을 걸었다. 그러 나 [교과서]는 이승만 노선을 {이동휘, 이상재, 안창호, 김구, 김규식, 박용만, 박은식, 신채호, 김성수}(149쪽) 등 사상적 계보가 다른 이들과 뒤섞는다. 물 론 [문명화] 과정인 일제 지배를 거슬러 반문명적일 수밖에 없는 무장투쟁이 나 좌파, 심지어는 여운형 같은 이도 여기에서 배제된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라는 문명을 선택했고 발전시켰다. 반면에 북한 은 {전통 문명과 외래 문명의 융합}(149쪽)에서 이탈한 존재였다. 따라서 [정통성]은 대한민국에 있으며 향후 통일도 {대한민국의 이념에 입각}(144 쪽)한 흡수통일이어야 한다. 38도선은 단순히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자유, 인권, 시장 등 인류 보편의 가치가 미국군을 따라 한반도에 상 륙한 북방한계}선이었다(137쪽)는 것이다. 이처럼 경제성장론의 대한민국 [정통론]의 근간은 반북론에 서 있다. 자신의 고유한 지적 자산이나 역사의식은 취약하다. 그리고 보수의 기치 를 걸고 적대적 반북론을 내걸면서 오늘의 현실정치에 나서기도 한다. 남 북관계를 어떻게 조율하는 것이 한반도, 아니 한국의 사회구성원들에게 27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79 이익이 되는가는 고려하지 않는다. 사회통합 능력과 리더십이 취약한 한 국 보수의 천박함과 사상적 빈곤함을 그대로 반영한다. [대한민국 주인 만들기] 작업은 자신들이 [만든 주인]의 과거를 윤색해 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서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 력했던 친일파는 모두 배제되었다}(143쪽)고 [선언]한다. 물론 [교과서]는 임 정 계열이나 중도 좌우파, 그리고 좌익 대부분이 제헌의회에 참여하지 않 은 사실과 독립운동가 절대 다수가 건국 과정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전혀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일제 경찰과 군에 몸담은 자들은 제헌의회 의원으 로 나올 필요도 없이 이미 대한민국의 군과 경찰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 다. 행정부, 사법부 공무원들 가운데 친일행적자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이다. 인위적으로 [주인]의 과거가 깨끗하다고 [선언]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친 일파 청산이 {자력으로 해방을 맞지 못하였다는 엄연한 역사적 제약 앞 에서 실현될 수 없는 꿈에 불과}했고 사실상 친일파 문제가 거론되는 것 을 부정하기 위한 무의미한 수사어인 {정신혁명으로서의 친일청산}론 38 이 더 정직하게 들린다. 결국 적극적 친일행위까지 두둔하기에 이른다. 일제 말기에 비교적 좋은 직업이었던 교사직을 팽개치고 항일세력을 토벌하는 [대일본제국]의 [황군]이 되어 출세하려 했던 적극적 친일행위는 {군인이 되고픈 평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40년 만주국 군관학교에 입학}(186 쪽)했다는 평가로 두둔한다. [근대문명]의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인권도 북한에 대해서만 편향적으 로 적용되는 반북용이다. 한국 정부가 납치자 송환을 위해 {북한 정부에 38 이영훈(2007), 앞의 책, 264~266쪽.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79

280 어떠한 요구도 한 적이 없다}(61쪽)고 한탄한다. 이때 적용되는 인권 개념 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를 구분해야 한다 면서 박스까지 만들어 기술하는 일제의 지배에 수반한 야만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반면에 {대부분 무지했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들이 {큰 돈벌이} {꾐에 빠져}(93쪽) 따라갔다는 식으로 서술한다. 피해자 당사 자들이 증언하는 강제연행, 인신매매, 유괴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실제로 [색시장사]는 [그 시대의 상식]이었고 위안부 여성들이 큰돈을 번 사례를 길게 나열하면서 그것이 일본군 위안부를 바라볼 때의 사실이라 고 강변한다. 39 경제성장론은 오로지 [경제가 성장하면 민주주의고 통일이고 간에 모 든 문제들이 해소]되고 [진보한다]고 강조한다. 1950년대의 부정부패 역시 {오로지 경제성장만으로 치유될 수 있는 역사의 업보}(290쪽)로 이해한다. 속류적 유물론이라고 해야 할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이승만이나 국가권력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 이 아니다. 미국의 시혜 때문도 아니다. 전후 미국의 지배권 아래 있던 나 라 가운데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함께 이룬 나라는 한국뿐이었다. 누가 주 체가 되어 대한민국의 내용을 채우고 시장경제의 실질을 충족시키고 민주 화가 진척되었는가에 대해서 균형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경제성장론은 대한민국의 [승리] 역사를 만든 민주화운동과 분단 극복에 대한 문제의식 이 전혀 없다. 권위주의 체제가 급속한 산업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기회비 용이었다고 강조하지만 기회비용을 청산하기 위한 민주화운동에 대한 애 정은 없다. 모든 평가는 오로지 북한과 비교하는 것에서 머무른다. 자신 39 이영훈(2007), 앞의 책, 131~135쪽. 28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81 의 것이 없다. 그만큼 실질적인 정체성이 없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의 [성공] 을 거론하는 유일한 지렛대는 반북론이다. V. 맺음말 근대의 내용 중에는 침략과 억압과 더불어 개인, 인권 등 중요한 개념도 동 반한다. 그런 점에서 근대주의가 근대를 있는 그대로 추구한다는 [원칙]과 진정성이 따른다면 큰 의미가 있고 파장을 미칠 수 있다. 근대를 좇는 과 정에서 이를 어렵게 하는 내외 상황에 대해 숙고하는 기회를 통해 식민지 적 근대와 세계사적 근대의 모순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의 근대주의는 근대를 양적 경제성장으로 제한하면서 정작 근대의 주요 내용인 민주화에는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었다. 근대의 내용을 채우는 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국제환경을 보는 인식도 불구적이었다. 경제성장론은 시장만능론에 매몰되어 있을 뿐, 시장경제를 제도적하 고 설계하고 운영하는 주체가 국가라는 역사적 사실은 누락한다. 그리고 식민지 지배하에서도 자유로운 시장경제하에서 조선인의 자발적인 경제 적 성장이 가능했다는 논의를 부각시킨다. 국가주권을 상실한 일제시기 를 바라볼 때 가장 근본적인 국가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부정하고 이를 간 단하게 시장으로 대체한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논리를 일제시기를 대상으 로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전도된 주관적 역사상이 객관 적 사실에 맞다고 강변한다. 근대는 식민지적 근대를 동반함으로써 온전히 존재할 수 있었다. 이러 한 근대는 식민지적 근대를 근대문명으로 각인시키려고 했고 여전히 그 영향력은 강하다. 그러나 식민지적 근대를 지양하는 시도는 근대의 원형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81

282 회복에 머무르지 않는다. 결국 세계사적으로 근대를 넘어서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된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 과정은 무수한 굴곡을 거치면서 한 세기 이상 지속된 고투였다. 근대의 본질에 조응하는 [자유시장]의 내용을 채우는 과정 자체도 국 가권력의 의지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권력과 부의 속성상 그럴 수도 없 었다. 민주화를 통해 높아진 생산력과 열린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수동적으로 대응해야 했던 결과였다. 겪으면 서 집권세력은 국가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성장한 민의식에 조응해 야 했다. 국가가 반공반북론만으로 권력 유지가 어렵게 되었을 때 경제 건 설을 표방하고 확산되어가는 민의식을 흡수하려고 한 것이다. 근대화는 산업화와 동일시되었다. 현상만 본다면 일제시기의 그것과 다름없는 구호였다. 그러나 내부 축적을 동반한 경제성장은 대외종속적 한계 속에서도 일차적으로 국가를 회복한 조건에서, 권력이 민을 의식하 여 경제정책을 수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196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과 축적은 분단국가의 부실한 내용을 채우려는 민주적 사회 분 위기를 의식한 국가권력이 수동적으로 대응하면서 경제정책을 실행한 결 과였다. 국가의 [정통성]은 권력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구성원이 만들어가 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화가 제도화되고 경제력이 높아지자 이러한 상황에 [불법편 승]한 경제성장론의 근대주의가 반북론에 의지하여 침략을 근대문명으로 각인시키려는 식민사학과 친연성을 갖는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자본주의 승리론과 반북론 이외에 자신의 정체성에 기초한 논리를 세우지 못한 한 국의 자칭 보수우익은 구태의연한 반북론을 기반으로 이제는 식민사학까 지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국가와 민족을 전면에 내세우게 마련인 우익의 논 28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83 리는 국가와 민족을 부정하는 식민사학과 어울릴 수 없건만 이를 근대문 명으로 받아들이는 한국 우익의 사상적 빈곤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 IMF 이후 몰아친 신자유주의 분위기 속에서 북핵문제로 악화된 북미, 북일 관 계의 환경은 반북론에 편승한 경제성장론 역사인식의 서식처가 되고 있다. 필자는 오래전에 경제성장론의 역사인식과 역사서술을 두고 학문적으 로 논쟁 가능한 범주에 있지 않다고 40 주장한 바 있다. 그럼에도 재론하는 이유는 이제 이들이 자칭 보수우익의 얼굴을 하면서 정치운동을 하고 한반 도, 아니 대한민국과 그 구성원의 안녕과 평화를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치열한 사상전]을 표방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는 일본국가주의에 기대 면서 출발하여 국가와 민족을 부정하고 내적 동인을 부정하던 반민족적] 논리가 [애국]을 자처하는 변신을 시도한 것에 불과하다. 41 대한민국 [정통론]은 작위적인 [주인 만들기]와 [선언]으로 채워지는 것 이 아니다. 적대적 반북론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 의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대한민국 건국사는 여러 각도 에서 구성원의 성장하는 의식에 조응하여 더욱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 한민국이 건국 전후 시기의 여러 문제점을 내부적으로 소화할 때 비로소 [정통론]의 기반이 굳어지는 것이다. 40 정태헌(1997), 수탈론의 속에 사라진 식민지, 창작과 비평 여름호. 41 그런 점에서 건국사에 대한 {비판의 자유가 끝까지 보호되어야 할 헌법적 가치 인지에 대해 저는 회의적}[이영훈(2007), 앞의 책, 282~283쪽]이라는 주장은 오히려 [반국가적 역사]인식의 소유자인 이영훈 자신에게 돌려야 할지 모른다.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83

284 참고문헌 강진철(1986), 일제관학자가 본 한국사의 정체성과 그 이론, 한국사학 7, 정신문 화연구원. 교과서포럼(2008), 대안교과서 한국 기파랑. 김건태 외(2002), 토론:조선후기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와현실 45, 한 국역사연구회. 김기원(1990), 미군정기의 경제구조, 푸른산. 김낙연(2007), [식민지 근대화] 재론, 경제사학 43, 경제사학회. 李 秀 日 (1998), 일제말기 社 會 主 義 者 의 轉 向 論 :인정식을 중심으로, 國 史 館 論 叢 97. 방기중(1992), 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 @1940년대 백남운의 학문과 정치경 제사상, 역사비평사. 우대형(2007), 조선 전통사회의 경제적 유산, 식민지 경제사의 쟁점과 과제, 민 족문제연구소 학술토론회. 이영훈(1996), 韓 國 史 에 있어서 近 代 로의 移 行 과 特 質, 經 濟 史 學 21. 이영훈(2002), 조선후기 이래 소농사회의 전개와 의의, 역사와현실 45, 한국역 사연구회 이영훈 편(2004),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이영훈(2007),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정태헌(1987), 최근의 식민지시대 사회구성체론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역사비 평 창간호. 정태헌(1991), 1930년대 식민지 농업정책의 성격 전환에 관한 연구, 일제말 조선 사회와 민족해방운동, 일송정. 정태헌(1997), 수탈론의 속류화@형해화 속에 사라진 식민지, 창작과 비평 여름 호, 창작과 비평사. 정태헌(2007), 한국의 식민지적 근대 성찰, 선인. 주익종(2008), 대군의 척후, 푸른역사. 28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85 허수열(2005),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허수열(2007), 식민지유산과 한국경제, 식민지경제사의 쟁점과 과제, 민족문제 연구소 학술토론회. 홍종욱(2007), 해방을 전후한 경제통제론의 전개 - 박극채@윤행중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64, 한국역사연구회. 경제성장론 역사상의 연원과 모순된 근현대사 인식 285

286 J a p a n e s e C o l o n i a l R u l e a n d C o l o n i a l M o d e r n i t y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 생활과 경험이 없는 생활수준 논의의 한계 허영란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조교수 I. 머리말 II. 생활수준 향상론의 함의 III. 생활수준 비교의 거시적 기준 IV. 생활수준 논쟁 V. 거시적 추계와 역사적 사실성 VI. 생활 속의 식민지 경험 VII. 덧붙이는 말

287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함께 일하도록 권유를 받은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조선인들은 셈을 치르는 걸 돕는 것 외에는 아무런 할 일이 없다는 걸 절감해야 했다. 조선 속 담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 속담을 이 렇게 고쳐야 할 것 같다. {떡을 해주고 굿을 본 후 무당이 그 떡을 먹는 걸 본다}. ( 윤치호일기, 1933년 5월 9일) I. 머리말 사회변혁론 논쟁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던 식민지 시기 한국 사회의 역사 적 성격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 후반 이후 크게 변형되었다. 그 정도와 의미를 둘러싸고는 이견이 있지만, 학계에서는 식민지 시기에 이루어진 [근대화], 특히 근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진전에 대해서는 대체로 인정하 게 되었다. 논점은 식민지 시기에 진행된 [근대(화)]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 인가로 옮겨갔다. 좁게는 식민지 시기에 이루어진 경제성장의 정도, 그 과 실의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둘러싼 논쟁으로 나타났으며, 넓게는 식민지 시기의 경제성장 및 식민지 근대에 대한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평 가와 전망을 둘러싼 논쟁으로 나아가고 있다. 단순한 [식민지 시혜론]이나 [식민지 수탈론]의 지양을 전제로, 최근 논 란이 되고 있는 주요 논점을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식민지 시기에 이루어진 근대화의 의미를 주로 경제부문의 양적 변동에 국한시 키면서, 공업화 내지 경제성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추동한 목적 과 의도가 효과적인 수탈에 있었기 때문에 왜곡된 성장에 불과하다는 비 판이 역사학계에서 제기하는 중요한 논점 가운데 하나이다. 1 둘째로 이 시 기의 개발은 [일본인들의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개발]이었기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287

288 때문에 1 그러한 경제성장에 의해 조선인들의 처지가 향상되거나 좀 더 인 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비판 역시 강력하게 제기되 었다. 이런 관점의 대극에 있는 것으로, 경제통계를 통해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된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을 강 조하면서, {오늘날 한국 현대문명의 제도적 기초가 그 과정에서 닦였}다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 역시 논란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마지막 으로, 식민지 근대의 형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근대의 한 전형으로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핵심 과제라고 보는 탈 근대적 관점을 들 수 있다. 이 관점은 수탈론이나 식민지 근대화론 모두 를 비판하면서 근대를 넘어서고자 하는 근대 규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시적 사론의 격전장이 되고 있는 식민지 시기, 일 반 민중들의 생활은 어떠했을까. 얼핏 보기에는 이것에 대해서도 역시 초 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민중의 이미지에서부터 댄스 홀에서 현대성을 구현하는 모던걸, 모던보이의 이미지까지 극단적이다. 그 러나 [이미지] 자체가 생활은 아니다. 비록 식민지 시기의 생활을 있었던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당시 사람들의 경험, 정서, 감정, 일 1 {일제강점기의 [공업화]는 그 결과를 가지고 따질 것이 아니라 그 목적과 의도 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따져야 한다. (중략) 결과적으로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식민지적 수탈이 목적인 한 그 성장이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한 성장과 개발에 불과하다.}[이만열(2007),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 푸른역사, 567 쪽]. 허수열(2005), 개발없는 개발, 은행나무, 333~338쪽. 교과서포럼(2008),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기파랑, 96쪽. 윤해동(2007),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휴머니스트, 51~53쪽. 28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89 상에 접근하려는 노력은 가능하고 의미도 있다. 그러한 한국인의 생활을 논의하면서, 식민지라는 조건에 모든 원인과 결과를 귀속시키는 환원론도 문제이겠지만 [삶의 질]이라는 기준을 배제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단편적 이기는 하지만 대표적 [친일파] 윤치호의 일기에서 보이듯 식민지 주민의 내면에는 삶에서 경험하는 중층적인 모순들이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위에서 정리한 논쟁 자체보다는 당시 조선인들의 생활 세 계에 접근해가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생활수준 향상론을 비판적으로 검 토할 것이다. 생활이야말로 경험의 토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뒤집어 서 말해보면, 총소득을 인구 수로 나눈 평균소득의 액수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 [생활] 내지 [생활수준]이 어디까지이며, 생활의 주체인 식민지 주 민들의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살펴보고 자 한다. II. 생활수준 향상론의 함의 1970년대 이래 신흥공업국으로 급성장한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가져온 역사적 기원을 설명하는 데서 출발한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지 공업화 론과 경제성장론을 거쳐 생활수준 향상론으로 [진화]했다. 식민지 자본주 의화론, 식민지 공업화론, 식민지 산업화론 등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 이 분야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식민지 시기 경제 영역의 변화를 관찰하는 데 주력했다. 나아가 오늘날 한국에서 [성공적인] 자본주의화가 가능하게 된 기반을 역사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주된 연구 목 표였다. 5 그러나 최근 발표되고 있는 식민지 생활수준 향상 논의는 식민 지 경험이 후대에 초래한 결과나 효과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식민지 시기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289

290 [당대의 삶]에 대한 적극적 평가라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논의와는 성격이 다르다. 5 물론 기존의 경제성장 사학도 단순한 기원론을 벗어나 식민지에서 이 루어진 자본주의 발달의 양상과 특질을 연구하고 그것을 촉진하는 제도 적 장치의 형성이나 이식을 고찰해왔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식민지 시기 에 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경제성장의 전사 ( 前 史 )에 대한 연구로 상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문제와 같은 정치적 차원을 주요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에 대해 [경제를 동태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방법적 분리]로 설명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당시의 생활수준 향상을 이야기하면서, {1인당 소득 과 소비, 인간생활의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인 의식주와 교육, 여가의 충족 정도} 등의 기준에서 볼 때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 으며 {이것은 근대 경제성장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그 파도에 휩쓸려갈 수 밖에 없던 조선인들의 생활도 경제성장의 영향과 혜택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이 식민지 시기 당대의 실질적인 생활 수준에 대한 평가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나친 민족주의적 편견이 식민지 시기의 경제 변화를 객관적으로 파 5 조석곤은 식민지 근대화론이, 망국에 이르게 한 조선사회의 내적 요인이 무엇 이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식민지 시기는 어떤 관련을 갖는지를 질문함으로 써 기존 역사학(여기서는 내재적 발전론)의 인식 틀에서는 수용될 수 없었던 금기를 깨뜨렸다고 자평하였다. 조석곤(2006),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 성과의 비판적 수용을 위한 제언, 역사비평 75, 60쪽. 김낙년(2003), 일제하 한국 경제, 해남, 14~16쪽. 주익종(2006), 식민지 시기의 생활수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143쪽. 29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91 악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또 경제 변화를 동태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민족문제를 [일단] 경제적 차원과 분리하는 것 역시 방법 적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문제를 다시 해석하려면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연결고리를 배치해야 한다. 그런데 타당한 매개 없 이 수량적 경제성장을 조선인의 생활의 향상과 직결시키 는 것은 민족주의적 편견만큼이나 선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다. 한반도 내에서 이루어진 생산의 총량, 그것을 토대로 산출되는 소득의 총량이 증 가한 것을 생활의 향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생활] 자체에 대한 별도 의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 제기되고 있는 생활수준 향상론은 전체 조선인의 생활에 대한 포괄적인 관찰과 이해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생활의 특정 부면, 구체적 으로는 의식주와 관련된 물질적 생활만을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식 민지 시기 전반에 대한 일관된 자료의 부족과 방법론적 한계로 인해 생활 수준과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을 충분히 분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수 량적인 경제성장을 생활의 질적 개선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만일 그들이 말하는 생활수준 향상이 조선 내 1인당 실질 평균 소득이나 실질 평균소비의 증가를 가리킨다면, 그것은 사실상 동어반복 에 지나지 않는다. 비식민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식민지에서도 자본주의 발 달은 일반적으로 (특정 시기에 인구가 예외적으로 증가하지 않는다면) 실질 평 균소득과 실질 평균소비의 증가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1인당 평균의 증가가 실질적인 생활수준으로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이 그러한 [경제적 번영]을 향유했는지 파 악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만일 사회적 불균등이 평균을 갉아먹 을 정도로 심화되었다면 대다수 하층민의 생활은 상대적으로는 물론이고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291

292 심지어 절대적으로도 악화될 수 있다. 이것이 [1인당 평균]의 계산법이 갖 는 한계이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를 일방적인 착취 - 피착취의 관계로 파악하 는 관점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외부로부터의 자 본 투하나 제도 이식이 식민지에 자본주의를 형성@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다는 사실도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착취 - 피착취의 관계 대신에 이식 - 수용의 일방적 관계를 집어넣는 것 역시 문제이기는 마찬가 지이다. 이식과 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수용자 측의 주체적 변수 를 배제시키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 의해 이 식된 자본주의만을 강조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넘어서서, 조선과 대만, 중국 등 {각 지역이 어떻게 근대를 수용했는가를 보다 내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고 그 상관관계를 비교해야 한다는 지적에 새삼스럽게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식민 지배 양식의 유형과 식민 지배([수탈])의 효율성 사이에 일반화가 가능한 어떠한 상관관계를 정식화하기 어렵다는 지적 역시 일찍이 제기 된 바 있다. 각 식민지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과 제국 강진아(2007), 제국주의 시대와 동아시아의 경제적 근대화 - 식민지 근대화론 의 재고와 전망, 역사학보 194, 396쪽. 박사명(1996), 식민지 사회의 계급 형성: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역사적 비교, 동남아시아연구 4, 23쪽. 이 글에서 필자는 [국가 독점을 통한 직접적 수탈], [자유무역을 통한 간접적 수탈] 또는 [수탈 양식], [수탈의 효율성]과 같이 [수탈] 이라는 용어를 [식민 지배]와 사실상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식민 지배 가 식민지 주민의 의사에 반해서 제국주의의 이익 추구를 위해 강요된 것이라 는 의미에서, 식민 지배를 포괄적 의미의 [수탈]로 파악한 것이다. 29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93 주의의 전략적 선택에 의해 수립된 식민 지배 정책과의 역동적 관계 속에 서, 식민 지배의 구체적 양식이나 식민지 사회의 변화가 전개되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식민 지배 양식의 한 유형에 해당하는 식민지 공업화나 경 제성장이라는 현상은, 식민 지배의 효율성 내지 식민 지배의 본질적 목표 와 성격을 평가하는 데 대해 어떤 일반화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 다. 그런데 생활수준 향상론은 과감하게도 그것을 식민 지배에 대한 일반 화된 평가 기준으로 선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III. 생활수준 비교의 거시적 기준 생활수준에 관한 연구는 경제사에서 가장 고전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이 다. 경제의 장기적인 성장과 정체, 그 원인에 대한 분석이 경제사의 일차 적 연구 대상이라면 그러한 경제성장이 사회구성원들의 복리에 어떠한 결 과를 가져오는가 역시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10 그러므로 경제 사가들의 연구가 식민지 시기 경제성장에 대한 논의에서 생활수준 논의 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여기서 생활수준에 대한 관심이 구성원들의 복리, 즉 [생활의 질]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해둘 필요가 있겠다. 생활수준은 특정 사회의 전통에 의해 다르게 경험된다. 또 생활수준은 다양한 요소들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그 것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적합한 여러 지표들을 고려해야 한다. 더 욱이 한 측면의 개선이 다른 측면의 악화로 나타나는 등 다양한 지표들 10 길인성(1997), 식민지 조선과 생활수준 논쟁, 서강경제논집 26, 1쪽.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293

294 의 관계에 의해 서로 충돌하는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 예컨대 위생수준 의 향상으로 유아사망률이 낮아져 인구가 증가한 것은 긍정적으로 해석 될 수 있지만, 인구 증가로 인해 과잉인구 간의 경쟁으로 노동조건과 소 득구조가 악화된다면 생활수준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기준이 되는 지표에 따라, 집단이나 계층에 따라, 상충되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생활수준의 개선이나 악화에 관한 판단을 내릴 때는 특별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런데 생활수준을 보여주는 미시적 지표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한 사회의 생활수준을 논할 때 전제하게 되는 [거시적 준거기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경제성장사가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사 회 변동을 일차적인 관찰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미시적인 지표들의 타 당성을 검토하는 것 못지않게 생활수준 논의의 인식론적 함의를 이해하 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생활수준 비교의 거시적 인 준거는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하나는 종적인 비교, 즉 식민지 이 전 시기와의 비교이다. 조선후기까지의 사정과 비교할 때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횡적인 비교, 즉 같은 기간 다른 국가, 다른 지역과의 비교이다. 일본의 또 다른 식민지인 대만 혹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여타 식민지와 비교할 때 식민지 조선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이다. 생활수준 향상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일단 종적인 비교, 즉 시계열 적 비교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차명수의 글을 빌려 종적인 기준에 입 각한 경제성장론과 생활수준 향상론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8, 19세기에는 전근대적 정부의 취약성으로 인해 수리시 설이 퇴락하고 그로 인해 농업생산성이 지속적으로 저하했다. 그 결과 29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95 임금과 지대가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생활수준 역시 전반적으로 악화 되었다. 이러한 추세적 하강은 1900년경 일본에서 새로운 볍씨가 도입 되고 일본인들에 의해 수리시설이 재건 확충되면서 중단되고 상승 국 면으로 반전했다. 농업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지대가 상승했지만, 근대 적 공공의료 도입으로 사망률이 감소하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함 으로써 소득분배는 불평등해졌다. 그러나 생산성의 지속적인 상승으 로 우리나라는 정체의 세계를 떠나 인구 증가와 생활수준의 향상을 동시에 성취하는 근대적 경제성장의 세계로 진입했다. 11 취약한 전근대적 정부와 안정적인 식민 정부가 대비되고 생산성의 지 속적 저하와 지속적 상승이 대조를 이루는 등, 외관상으로는 낯익은 조 선사회 정체성론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경제통계의 장기 추계 를 구체적인 근거로 제시하고 있으므로, 그 타당성 여부를 평가하기 위해 서는 그러한 추세와 원인에 대한 설명이 적절한지를 다각도에서 검토해보 아야 할 것이다. 각론으로 들어가보면 그러한 계량적 결과를 해석할 때는 대단히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부역을 예로 들어보면, 식 민지 시기에 광범하게 이루어진 부역을 일반 주민의 소득추계에 포함시키 고 있다. 그 이유는 부역에 동원될 경우 국가로부터 임금을 받고 그 임금 을 모두 세금으로 납부하는 것과 같다고 파악한 까닭이다. 12 부역 규모를 일관되게 추정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지만 그것은 일단 논외로 하고, 부역 을 임금으로 환산하여 거시적 소득추계에 포함시키면 소득 총량의 증가, 11 차명수(2001), 우리 나라의 생활수준, 1700~2000, 한국 경제성장사 - 예비 적 고찰, 서울대학교 출판부, 3~23쪽. 12 박이택(2001), 식민지기 건설업과 상업 소득추계, 한국 경제성장사 - 예비적 고찰, 서울대학교 출판부, 133~136쪽.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295

296 나아가 1인당 소득액의 증가로 나타나게 된다. 심할 경우, 주민들이 부역 에 많이 동원될수록 임금소득은 증가하고 생활수준은 향상된다는 비현 실적 결론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생산성의 지속적인 상승]으로 [인구 증가와 생활수준의 향상을 동시에 성취]했다는 주장 역시 성급하다. 인구 증가율을 앞지르는 생산성 상승을 장기 추계로 제시할 수 있더라도, 그것을 생활수준 향상과 직결시 키려면 단위 기간 내의 평균 상승률 등 추가적인 검토가 덧붙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지 시기의 생활수준 향상론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길인성은 이 시기의 소득수준 증가를 인정하면서도 시기별로 굴곡이 심 하고 소득 증가가 1930년대의 일정한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이유 로 그 성장률의 의미를 평가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13 두 번째로 횡적인 비교를 보면, 주익종은 매디슨(Maddison)의 자료 를 사용하여 1912년~1939년 사이 조선의 1인당 소득 증가율 2.3퍼센트 가 같은 시기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결코 낮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 하고 있다. 14 그러나 허수열은 이러한 주익종의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했 다. 2.3퍼센트의 1인당 소득 증가율을 추계하면서 기준으로 삼은 대상 연 도는 1913~1939년이지만, 그것과 비교 대상이 된 매디슨 자료는 1913~ 1950년 사이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두 추계 사이의 비교 대상 시 기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만일 추계에서 누락된 1940년대의 수치를 정 확하게 포함시킬 경우 조선의 1인당 소득 증가율은 현저히 감소할 것이라 13 길인성(1997), 앞의 글, 20쪽. 14 주익종(2006), 앞의 글, 111~112쪽. 29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97 고 지적하고 있다. 15 생활수준 논의에서 사용되고 있는 통계가, 정작 생활수준이 가장 악화 되고 후대 사람들에게 강렬한 식민지 경험을 각인시켰던 1940년대를 포 함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당대의 생활수준 논의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 리는 주요 요인이다. 차명수는 식민지 시기에 시작된 근대적 경제성장은 제2차 세계대전,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 등을 겪는 과정에서 중단되었다가 1960년대 중엽에 다시 시작되었다고 본다 년대에 집중된 경제성장 과 20여 년의 비정상적 중단(생산성 하락), 이어서 재개된 성장이라는 구도 속에서 식민지 시기의 생활수준 향상을 논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 스럽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식민지 시기 생활수준 향상론은 18~19세기의 생 산성 및 생활수준 하락과 대비되는 현상이자, 같은 기간 여타 외국의 사 정과도 대비되는 현상으로서,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상대적인 의미의 [향 상]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안정적이고 근대적인 식민권력과 외부의 자본 투하이다. 17 이런 관점에 따 르면 생활수준 향상론은 [제국주의 시혜론]의 맥락과 겹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 점 때문인지, 식민권력 및 식민정책 중심의 관점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인의 자기개발]이라는 것을 하위 요소로 설정하기도 한다. 18 양 적 성장의 요인을 식민정책에서 찾기보다 식민지 사회의 주체적 요인에서 15 허수열(2006),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의 식민지 경제에 대한 인식 오류, 역 사비평 75, 180~182쪽. 16 차명수(2001), 앞의 글, 22쪽. 17 차명수(2001), 앞의 글, 22쪽. 18 김낙년(2003), 앞의 책, 11쪽.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297

298 찾고자 한다는 지적 19 역시 그러한 인식을 보여준다. {식민지 개발은 식민 지 정부와 식민지 주민의 합작품}이라며 식민정책의 대상이 되는 식민지 주민의 [기여]에 주목하기도 한다. 20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총론과 각론에 서 외인론과 내인론이 긴밀한 연계를 갖지 못한 채 혼재되어 있다. 21 IV. 생활수준 논쟁 자본주의적 산업화 초기 단계를 대상으로 한 생활수준 논쟁도 역시 경제 사의 고전적인 주제이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기를 대상으로 생활수준 논 쟁이 전개되었는데, 18~19세기에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악화 또는 정 체 상태에 있었다는 비관론과 반대로 개선되었다고 주장하는 낙관론 사 이의 대립과 논쟁이 그것이다. 22 이러한 논쟁을 거치면서 생활수준의 정의 와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들에 대한 논의가 발전했지만, 여기서는 개 괄적인 항목을 소개하는 데 그칠 것이다. 경제학계 내부에서도 생활수준을 경제적 후생이나 효용과 같은 개념 19 조석곤(2006), 앞의 글, 62쪽. 20 박섭(2004), 식민지기 한국의 경제성장:제국주의 정책과 식민지민의 상호작 용,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 백산서당. 21 여러 연구자들이 조금씩 다른 수준으로 식민지 근대화를 말하고 있는 상황에 서, 가장 적극적으로 생활수준 향상론을 주창하고 있는 주익종이나 차명수는 식민지 주민의 내적 기여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다. 따라서 여러 연구자들의 입론을 상호보완적으로 설정하고 해석하는 것이 반드시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 사이의 차이를 연구자들 사이의 이견으로 보고 단절 적으로 이해하는 관점도 필요하다. 22 길인성(1997), 앞의 글, 2쪽. 29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299 으로만 보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이 없지 않다. 환경이나 치안, 문화 등 생 활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들이 경제적 가치평가에는 포함되지 않 기 때문이다. 참정권과 같은 정치적 자율성도 마찬가지로 배제되는 요소 들이다. 따라서 아래에서 소개하는 지표들은 가장 일차적이면서도 개량 가능한 것일 뿐 생활수준 논의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 선 지적해두어야 한다. 생활수준의 지표는 크게 경제변수와 비경제변수로 나뉜다. 경제변수로 는 실질임금, 1인당 실질소득, 1인당 실질 소비지출액을 들 수 있다. 비경제 변수는 화폐로 산정되지 않아 임금 혹은 소득수준에 반영되지는 않지만 생활수준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되는 요인들인데, 건강(영양상태, 질 병 감염률)과 수명(평균수명, 사망률), 환경, 여가, 교육수준(초등학교 취학률, 문자해득률)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23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의 영향으로 생활수준 문제가 새로 주목을 받고 있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경제사 분야에서는 이미 적지 않은 논의가 이루 어져왔다. 자칫 모든 생활수준 논의를 식민지 근대화론과 직결시키기 쉬 우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이미 상당히 구체적으로 생활수준 논의가 이루 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자율성의 박탈과 생활의 위기로 압축할 수 있는 일반적인 식민지 인식과 크게 충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24 여 23 길인성(1997), 앞의 글, 3~6쪽. 24 주요 연구의 요지는 길인성의 논문을 토대로 요약 정리했다. 참고로 여기서 인 용하고 있는 주요 연구를 소개해둔다. 尾 高 惶 之 助 (1998), 日 帝 通 治 下 におけ る 臺 朝 鮮 の 勞 動 經 濟, 溝 口 敏 梅 村 又 次 編, 舊 植 民 地 經 濟 統 計, 東 洋 經 濟 新 報 社 ;Kimura Mitsuhiko(1993), {Standards of Living in Colonial Koera:Did the Masses Become Worse Off or Better Off Under Japanese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299

300 기서는 기존에 경제사 분야에서 논의되어온 생활수준 관련 연구를 참고 하면서, 낙성대 경제연구소의 장기 통계를 토대로 한 최근 연구에서 달라 진 점이나 새로 더 진행된 점이 무엇인지를 검토할 것이다. 이것을 통해 경 제사학계 내부에서 상반된 해석이 나오게 된 연원을 추론해보고자 한다. 기존 연구에서 이루어진 생활수준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숙련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제조업 부문과 같이 추세적으로 상승하는 경향을 보인 반면 조선인 노동자들의 압도적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비숙 련노동자와 농업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수준이 1910년대의 임금수준을 초과하지 못하는 정체 양상을 보였다. 공업화가 진행된 1930년대에 실질임금이 하락하였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과잉노동 력 혹은 노동의 무제한적 공급 때문이라는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농업임 금 역시 장기적으로 하락 추세를 보였다. 특정 시점의 생활수준은 1인당 소득보다는 소비지출에 잘 반영된다. 미조구치 히데유키[ 溝 口 敏 行 ]와 데라사키 야스히로[ 寺 崎 康 博 ]는 1970년대 와 1980년대에 각각 수행한 연구에서 조선의 1인당 실질 소비지출 증가 율을 1.12퍼센트와 0.97퍼센트로 산정했는데, 시기별로는 증가율의 변동 폭이 크다. 1910년대 이후 1930년대 초까지 소비는 뚜렷한 증가가 없이 정체를 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Rule?,} Journal of Economic History 53; 溝 口 敏 行 (1975), 臺 朝 鮮 の 經 濟 成 長, 岩 波 書 店 ; 寺 崎 康 博 (1984), 植 民 地 時 代 の 朝 鮮 における 個 人 消 費 支 出 の 推 計, 1913~1937, 長 崎 大 學 敎 養 學 部 紀 要 24; 寺 崎 康 博 (1988), 臺 朝 鮮 の 消 費 水 準, 溝 口 敏 梅 村 又 次 編, 舊 植 民 地 經 濟 統 計, 東 洋 經 濟 新 報 社 ;Suh, Sang-Chul(1978), Growth and Structural Physical in the Korean Economy 1910~1940, Harvard University Press. 30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01 1913~1937년 기간에 총 소비지출의 연평균 증가율은 0.97퍼센트로 추계되었으나 식료품에 대한 실질 소비지출은 연평균 0.56퍼센트 증가했 다. 내적으로는 191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대부분의 기간에 거의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감소했다. 그 가운데 쌀이 점하는 비중은 급 격히 하락했다. 또한 담배나 주류에 대한 지출이 증가했기 때문에 식료품 지출 증가는 실제 영양상태 개선을 과대평가할 가능성이 크다. 결론적으 로 주요 식품에 대해 지출한 1인당 실질소비액은 1920년대 후반에 현저히 감소했다. 이 감소분은 1930년대 후반 실질 소비지출의 상당한 증가가 발 생하는 시기에도 만회되지 않는 듯하다. 영양상태와 관련해서는, 쌀 소비 량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며 다른 곡물에 의해서 충분히 보충되지 못했다.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쌀 외에 보리, 조, 콩 등을 소비하는 것을 전제로 보면 1930년대 중반까지 하락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소비의 증가나 영양상태의 개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염병 통제 강화 등 공공보건의 개선으로 평균수명이 연장되었다. 또한 사망률 감소 로 인구가 급증하여 실질소득 감소의 원인을 제공했다. 소득수준에 크게 의존하는 영양상태가 신장에도 영향을 주므로, 신장 은 영양상태, 소득, 소비지출의 대리변수로 취급될 수 있다. 나아가 노동강 도, 질병조건, 환경적 요인 등도 반영한다. 1920년대 말 출생자 이후 신장 감소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1940년대 말 출생자까지 이어지는데, 식민 지 시기 후반기의 영양상태 악화가 신장의 감소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초등학교 취학률이 증가했지만 그것은 교육수준 향상을 과대평 가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과거 서당, 기타 사립교육 기관에서 행해지던 교육이 취학률 집계에는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글 문자해득률은 상 당한 향상을 보이는데 취학률 증가와 같이 현저한 변화는 아니다. 더욱이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301

302 교육을 위해 다른 재화를 희생해야 할 경우 교육에 대한 소비로 인해 현 재의 생활이 위축되므로, 교육수준 향상을 생활수준 향상의 근거로 직결 시키기 어렵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기존 연구 가운데 생활수준이 절대적으로 악화되 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는 없다. 대체로 뚜렷한 변화가 없는 정체 상태였다 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당시의 경제적 [성장]에 비추어볼 때 그러한 정체론 은 사실상의 비관적 해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적 조건 및 조건을 고려한 분석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반면 주익종의 연구를 토대로 생활수준 향상론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25 식민지 시기에 민족 간 분배가 더 불평등해졌지만, 전체 평균소득이 증 가하는 가운데 조선인의 1인당 실질소득은 증가했다. 실질소비는 식민지 시기 전 기간에 걸쳐 큰 기복 없이 증가했다. 1인당 소비지출의 연간 증가 율 1.94퍼센트는 같은 기간 중 일본에서의 증가율 1.50퍼센트, 대만에서 의 증가율 1.11퍼센트보다 높은 것이다. 그러한 소비 증가에 따라 엥겔계 수 저하라는 패턴이 조선에도 나타났다. 영양상태와 관련해서는, 전체 식료품비가 증가하는 가운데 그 구성에 변화가 나타났다. 곡물류 비중이 77퍼센트에서 56퍼센트로 감소했고 그 밖의 식료품 비중이 증가했다. 현행 교과서에는 42퍼센트 감소한 것으로 25 주익종, 식민지 시기의 생활수준 [원출처는 이대근 편(2005), 새로운 한국 경 제발전사 - 조선후기에서 20세기 고도성장까지, 나남];주익종(2006), 민간소 비지출의 추계,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서울대학교 출판부. 두 논문의 품목별 소비지출 증가율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통계를 조정한 것으로 보 인다. 30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03 되어 있지만 1인당 곡물소비량은 12퍼센트 가량 감소했다. 소비 증가로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8퍼센트 감소했으나, 여타 식품 소비 가 급증했다. 1인당 육류 소비는 1.2배, 소채 과실은 2.6배, 어패류는 3.3 배, 장류는 1.5배, 기타 가공식품은 1.6배 증가했다. 따라서 보강된 칼로 리를 더하면 1인당 총 칼로리 섭취량은 거의 감소하지 않았다. 신장의 추 이에 대해서는 결론을 낼 수 없다. 그러나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은 감소하 지 않았다. 1인당 식품 소비 및 영양 섭취량이 줄어 1930년대에 신장이 줄 었다는 길인성의 주장은 잘못이다. 더욱이 신장 감소와 소득 증가는 공업 화의 초기 국면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초등학교 취학률이 증가 했고 한글 문자해득률이 향상되었다. 교육을 위한 지출을 소비에서 빼야 할 이유는 없다. 즉 생활수준 향상론에 따르면, 식민지 시기에 1인당 소득 과 소비지출이 증가했고, 총 칼로리 섭취량은 감소하지 않았으며, 교육수 준은 향상되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가해진 비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인당 국 내총생산은 1960년대가 되어야 그 이전 낮은 소득수준에서의 정체 상 태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한다. 한국의 근대적 경제성장은 1960년대 이후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이다. 26 더욱이 전체적인 통계 과정에 서 1910년대 추계치를 과소평가함으로 인해 이후의 성장률 등이 과장되 었다. 27 그리고 1913~1939년 사이의 1인당 소득증가율을, 1913~1950년 26 허수열(2006), 앞의 글, 175~178쪽. 허수열은 [근대적 경제성장]의 개념에 쿠즈 네츠(S. Kuznets)의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그 내용은 첫째 인구의 급속한 성장, 둘째 1인당 생산의 지속적인 성장이다. 27 이것에 대해서는 허수열 이전에도 길인성 등이 지적한 바 있다. 길인성(1997), 앞의 글, 12쪽.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303

304 사이의 1인당 소득증가율을 계산한 매디슨의 자료와 무매개적으로 비교 해서는 안 된다. 비교의 대상 시기가 다를뿐더러, 한국의 소득 상황이 극 도로 악화된 1940년대를 배제한 비교는 객관적일 수 없다. 또한 통계자료 의 부족으로 인해 조선인 노동자의 실질임금에 대해 증가나 감소를 말하 기 어렵다. 따라서 전체 대중의 소득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28 또한 교과서의 쌀 소비량 감소율이 과장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조선 총독부의 통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또 식료품 소비구성이 달라졌기 때문에 1인당 곡물 소비량이 줄었어도 감 자, 고구마, 어패류, 육류 등의 소비가 증가하면서 칼로리 섭취량이 감소하 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그 증가 속도는 매우 완만했고 1910년대와 1930 년대 말을 제외하면 큰 변화가 없었다. 당시의 인구 급증을 감안하면 개 선을 말하기 어렵다. 29 이처럼 생활수준에 대해 악화론과 개선론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30 거시적 차원의 수량적 경제성장이나 식민지 자본주의의 전개 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연구자는 없다. 다만 경제성장의 정도를 어떻게 평 가할지, 시기별로 심하게 나타나는 변동 폭을 어떻게 해석할지, 그러한 양 적 성장의 결과가 어떻게 분배되었는지를 둘러싸고 주요 논점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절대적 수탈과 절대적 개발의 교착이 아니라 어떤 자본주의, 어떤 개발이냐로 논점은 이동해 있다. 28 허수열(2006), 앞의 글, 193~194쪽. 29 허수열(2006), 앞의 글, 194~202쪽. 30 주익종(2006), 앞의 글, 142쪽. 30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05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수량적인 면에서 최근의 장기 경제통계가 기 존 연구에서 이루어진 생활수준 논쟁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할 정도의 논 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 식민지 경제개발의 장기 추이를 각 부문별로 구 체화하고 일원화했다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그러한 추세만을 가지고는 생활문제에 대해 보다 진전된 논의를 펼치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기존의 연구를 결정적으로 수정하거나 뒤집을 정도로 생활수준의 향상을 명시적 으로 보여주는 통계적 결과를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V. 거시적 추계와 역사적 사실성 허수열의 작업을 제외하면 장기 경제통계 자체에 대한 [실증적] 비판은 활 발한 편이 아니다. 식민지 근대화를 주장하는 연구의 총론이나 각론의 논 지에 대해 비판적이라 하더라도 역사학계에서 근거를 제시 하며 생산적으로 내적 비판을 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역사적 사실성과 주체들의 경험을 연구의 토대로 삼는 역사학적 접 근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생산적 토론을 위한 비판적 입론을 제시할 수 있다. 거시적인 장기 경제통계는 방법적으로 정치적 차원을 배제하고 있다. 따라서 통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민족문제나 지역문제, 젠더문제 등 정치적 차원과 연결시키기 위한 매개항이 요구된다. 경제성 장 추계 자체를 둘러싸고도 타당성 논란이 있지만, 그러한 {1인당 소득 혹 은 소비지출에 의한 생활수준 분석은 소득분배상의 중요한 변화가 없다 는 전제 위에서 혹은 타 자료에 의한 보완이 충실하게 이루어질 때에 타 당한 방법}이 될 수 있다. 31 소득 분배구조에 대한 고려 없이 1인당 평균소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305

306 득 증가를 생활수준의 향상과 무매개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사회의 구 조적 불균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는 잘못된 해석이다. 31 대다수 연구자들은 조선인 대중(하층민)의 생활수준에 대해서는 유보 적이다. 그것은 식민지 시기에 이루어진 경제성장, 소득 증가, 소비 증가의 [성격]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과 생활수준 향상은 단순한 비례관계에 있지 않다.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은 조선인의 경제생활과 구 분된다. 조선이라는 지역경제에서 설령 조선인의 경제 영역을 별도로 추출 해낼 수 있다 하더라도 다시 계층과 계급이라는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연구는 불평등 문제를 의식하고 있다. 대 개 추론을 바탕으로 결론에 이르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김낙년의 다 음 견해를 들 수 있다. 그는 1911~1940년 사이에 민간소비지출은 연평균 3.3퍼센트 증가했다고 보았다. 인구 증가를 감안한 1인당 증가율은 1.9퍼 센트이다. 이러한 추계에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경제활동이 포함되 어 있다. 이 기간에 민족 간, 계층 간 소득 격차가 벌어져 불평등이 심해졌 지만, 조선인의 1인당 평균소득 역시 늘어난 것으로 추론된다. 조선인으 로 한정할 경우 성장과 구조 변화의 속도가 평균 수치에 비해 느려지겠지 만 조선인 또한 이러한 변화과정에서 예외로 남겨진 것은 아니었다. 또 그 는 이 시기에 나타난 경제 현상을 분석하여 이해하는 일과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일은 차원이 다른 문제로,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은 일 제가 한국인의 의지에 반하여 주권을 침탈한 데 있는 것이지, 경제적 성과 의 좋고 나쁨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의견을 덧붙이고 있 다 길인성(1997), 앞의 글, 4쪽. 30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07 32 생활수준 향상론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분배문제에 대한 설명은 대 체로 이와 유사하다. 주익종 역시 비슷하게 정리하고 있다. 실질임금의 경 우, 도시 숙련 노동자군의 실질임금은 상승했지만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 은 정체했다. 다수를 이루는 한쪽이 정체, 소수인 다른 한쪽이 증가했으 므로 전체적으로는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이 미약하게나마 상승했다. 계층 간 소득분배가 악화되어 비숙련 노동자 대중은 경제성장의 효과를 제대 로 누리지 못했지만, 그들의 생활수준이 악화되었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 다. 그저 개선이 없는 정체 상태일 뿐이었다. 숙련노동자와 농림어업 자영 업주까지 포함한 전체 대중의 소득수준은 향상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 이다. 33 비록 절대적 수탈론을 비판하기 위한 주장이라 하더라도, 소득의 절대 액이 감소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두 [향상]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은 지나치 다. 조선인이 획득한 소득의 총량(조선인 1인당 평균소득)이 증가했다는 것 을 인정하더라도 민족 내의 계층 간 분배문제를 섣불리 추론하는 것은 문 제가 있다. 조선인 하층민에 대한 소득분배는 악화, 정체, 상대적 저분배, 평균수준의 향상 등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양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사 회에서 소득분배의 악화나 정체는 물론이고 소득의 상대적 저분배와 그 로 인한 박탈감의 확대 역시 하층민의 복리를 심대하게 저해하는 것이다.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나타나는 1인당 평균소득의 증가와 분배의 불 균등 심화가 비단 식민지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면, 식민지 시기 조선의 생활수준 논쟁은 19세기 영국 노동사학계의 논쟁과 동일한 것이 32 김낙년 편(2006),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서울대학교 출판부, 6~7쪽. 33 주익종(2006), 앞의 글, 123~124쪽.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307

308 라는 의미일까. 만일 {비숙련 노동자 집단의 소득 향상이 뚜렷하지 않았 던 것은, 전통 조선사회가 근대세계에 개방되어 근대사회로 재편되는 과 정에서 나타난, 근대 경제성장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라고 본다면 34 여기 에 식민지적 모순, 즉 민족문제가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비록 분석적 필요 때문이라 하더라도 민족적 차원을 배제하고 조선이 라는 [지역경제]의 관점 35 에서 도출된 거시적 추계에서 (식민지에서 민족문제와 계층문제는 중첩된다)를 반영하기 위한 계기를 찾기 는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수량적 추계를 제시하되 동시에 {민족문제 역 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첨언하는 이분법에 다시 갇히게 된다. 전체 대 중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해도 조선인의 만족도가 높아진 것은 아 니}며 {조선인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는 식이라면, 36 - 생 활수준 - 행복도를 관련시키지도 못한 채 여전히 개발론과 수탈론의 동어 반복에 멈추어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자주 지적되는 것이지만, 과소평가된 1910년대의 수치를 기준치로 삼 아 1939년까지만을 대상으로 산출한 통계수치는 식민지 시기의 물량적 성장수치를 과장할 위험성이 있다. 여기서 1940년대를 제외한 이유는 이 시기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기 때문이지만,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시 기였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그렇더라도 1940년대가 식민지 경험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 식민지 주민의 처지에서 보면 평시든 전시든 생활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34 주익종(2006), 앞의 글, 128쪽. 35 김낙년(2003), 앞의 책, 16~17쪽. 36 주익종(2006), 앞의 글, 144쪽. 30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09 식민지 시기 민중생활에 대한 일반적 관찰에서 언제나 지적되는 것은 [농촌의 빈곤화] 문제이다. 37 그것이 구시대의 유산 때문인지 혹은 일제 식 민지 통치의 결과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적어도 [농촌의 절망적인 상태]는 당시의 언론보도나 외부의 관찰자료에서 거듭 확인된다. 1920~ 1930년대에 광범하게 나타난 해외 이민 역시 그런 농촌 사정을 방증한다. 농민들의 이주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는 능동적 선택이라기보다는 현상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농촌의 생활조건이 직접적인 배출요인으로 작 용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생활수준도 마찬가지로 하락했다. 임금은 증 가하더라도 생활비의 증가가 그것을 초과할 경우 물질적 생활수준의 하 락을 피할 수 없다. 38 자율성이나 자치에의 참여라는 보다 고양된 권리의 결 여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상과 같은 식민지 대중의 빈곤문제는 생 활수준의 향상을 말하는 연구가 현실적 기반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 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다소간 인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식 민지 시기 농촌이 비참한 빈곤 상태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한 {빈곤 의 직접적 원인은 영세한 소작지와 높은 소작료에 있지만, 근본 원인은 급 속한 인구 증가에 따른 농촌 과잉인구의 축적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39 그렇다면 일단 인구 증가와 생활수준 향상을 동시에 성취했 다는 주장 40 을 식민지 시기에 한정시켜서는 직접 적용하기 어렵다는 단서 37 정연태(2006), 태평양전쟁기 미국의 복안적 시각과 한국 사회 인식, 한국사 연구 134, 283~285쪽. 38 정연태(2006), 위의 글. 39 교과서포럼(2008), 앞의 책, 98쪽. 40 차명수(2001), 앞의 글.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309

310 를 붙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직접적 원인]과 [근본 원인]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접어두더라도, 식민지 지주제, 급속한 인구 증 가와 산업화의 지체 등으로 인해 농촌의 빈곤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셈이다. 제도화된 교육 기회의 증가나 문자해독률 향상을 생활수준 문제와 연 결시켜 파악할 경우에는 교육의 내용과 성격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초등학교 진학률이 향상된 대신에, 공식적인 학교 교육에서 자신 의 문화적 배경이나 정체성을 부정하는 교육을 받고 심지어 조선어 사용 을 금지 당한다면, 그러한 교육 기회의 증대를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직결 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은 그간의 식민지 연구가 민족주의적 강박 때 문에 현실의 변화를 도외시했다는 비판의식을 기저에 깔고 있다. 민족이 라는 유기체를 역사의 주체이자 가치로서 선험적으로 전제하였기 때문에 식민지 시기의 근대화(경제성장)를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근대화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지만 생활수준 향상론 이 민족주의 비판에 집중한 나머지 식민지 시기를 살았던 당대 사람들의 [산 경험]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우기 어렵다. VI. 생활 속의 식민지 경험 오늘날 일본인에게 신사참배는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 고 해서 지금의 이미지를 기준으로 [신사참배도 괜찮지 않은가]라고 하는 것은 식민지에서 신사참배라는 사건이 갖고 있었던 폭력적인 측면을 망 각하는 것일 수 있다. 41 이것은 과거의 여러 사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 31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11 다. 오늘날 일본어 학습이 정치적 함의를 갖지 않는다고 해서 식민지 시기 의 일본어 교육을 단순한 외국어 교육으로 볼 수는 없다. 특정한 시기의 구체적인 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통계수치처럼 무매개적인 것이 아니다. 흔 히 일본의 동화교육을 받은 지식인일수록 역설적으로 민족의식이 더 강 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교육의 효과라기보다는 현실의 효과이다. 41 식민지 시기의 경제 변동은 물리적이고 군사적인 식민주의와 정신적이 고 문화적인 식민주의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폭력은 식 민지 주민의 삶을 재편했고, 식민지는 제국을 위해, 지방은 도시를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42 물질적인 생활조건은 총체적인 만족감을 좌우하 는 중요한 객관적 조건이다. 그러나 당대의 생활을 논할 때는 조심스러워 야 한다. 수량적 경제 변화의 [성격]을 파악하는 문제는 조선인 대중이 일 상적인 생활 속에서 식민지 근대를 어떻게 경험했는가 하는 문제로 연결 된다. 소득 증가에 따라 소비에서 식료품비 비중이 낮아지고 의복비나 교 등 근대 경제성장의 패턴이 식민지 조선에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갖는 당대적 의미, 특히 생활의 주체들에게 경험된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역사적 사실성을 주장하기 어렵다. 경성의 백화점 쇼윈도를 매개로 이루어진 식민지 주민의 근대 체험을 단순히 생활수준이나 소비수준의 향상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 그것은 대 체로 호기심과 경외감, 박탈감이 섞여 있는 혼성적인 체험이었다. 더욱이 도시지역에 퇴적되고 있던 하층민과 빈민에게 생존의 터전인 도시는 근대 41 고마고메 다케시(2007), 식민지에서의 신사참배,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 산 처럼. 42 하루투니언(2006), 역사의 요동 - 근대성,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 휴머니스트, 153~154쪽.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311

312 를 향유하는 공간일 수만은 없었다. 물론 식민지 시기의 대도시에는 그러 한 대중문화와 소비자원을 향유하는 계층이 출현했다. 그러나 그들조차 도 조선인 거주지 및 상가와 구분되어 있으면서 상권이 집중되는 경성의 [혼마치]에서 이방인처럼 근대를 경험했다. 하물며 조선인의 7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는 상황에서 지방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조선인 농민에게 그것은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비지론( 飛 地 論 )]처럼 식민지 근대가 조선인과 무관했다 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경험의 방식과 내용이 그만큼 혼성적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식민지 주민은 일상 속에서 식 민지 근대와 매우 깊은 관련을 갖지만 그 관계가 복합적이기 때문에 그러 한 경험의 해석이 식민지 근대에 대한 해명작업이 되는, 그러한 경험이다. 그간 식민지 근대와 관련해서, 자본주의적 대중소비와 도시성의 형성 을 제시하는 연구가 적지 않게 산출되었다. 기존 연구가 식민지와 근대를 기계적으로 대립시켰던 데 반해 이 연구들은 식민지 역시 근대성이 형성 되고 재생산되는 하나의 조건이라는 점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 다. 생활수준과 소비수준 논의가 거시적 추계를 토대로 하여 별 변수를 가미한 미시적 해석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처럼, 한국에서 진행 된 식민지 근대의 성격과 재생산구조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연구는 식민지나 제국주의 일반의 분석에 머무르지 말고, 일 본이라는 제국주의가 구사한 식민통치, 한국이라는 식민지가 체험한 경 제 변화와 식민지 근대를 구체적으로 해명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어떤 경제성장, 어떤 지배, 어떤 차별, 어떤 변화였는가가 현안 이다. 그래서 경제적 변화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로 해석해야 한다. 그것은 타당한 매개고리와 분석 수위들을 구체적으로 31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13 설정해서 식민지 근대를 주체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과정이다. 제국주의나 민족적 차별, 식민지 근대화나 경제성장과 같은 개념들은 효과적인 분석 적 개념이 되기 어렵다. 거시적인 지표와 미시적인 현상, 양적 변동과 질적 해석을 연결시키기 위한 분석 수준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VII. 덧붙이는 말 앞에서도 잠깐 거론했지만, 이 논문을 마무리하던 중 생활수준 향상론에 서 적지 않은 변화를 발견했다. 2008년 상반기에 출판된 교과서포럼의 이 른바 대안 교과서 에서는 식민지 조선인의 생활수준을 다음과 같이 정 리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에 1인당 열량 섭취가 줄었다고 단언할 수 없을 뿐만 아니 라, 엥겔계수가 하락한 것이나 1890~1920년대에 태어난 조선인들의 키 가 1~2센티미터 커진 것은 생활수준의 개선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인 전 계층의 생활수준이 개선된 것은 결코 아니었}고 {주로 도시부의 상공 업자, 기술자, 숙련 노동자와 농촌부의 지주, 자작농의 상층 계층에 한정 된 개선}으로 {도시의 비숙련 노동자, 농촌의 하층 빈농과 농업 노동자의 생활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43 비록 이런저런 단서를 붙이고 있지만, 생활수준 향상론을 다수의 조선인에게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스 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활수준 향상론을 더 이상 자기 완결적 입론으로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쌀은 일본에 수탈된 것이 아니라 경제논리에 따라 일본으로 43 교과서포럼(2008), 앞의 책, 98쪽.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313

314 수출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인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소득은 증가하 였다} 44 는 진술을 통해서, 식민지 근대화론에서는 [수탈]이라는 개념을 폭 력적이고 직접적인 강탈에 국한해서 극도로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조선인에게 참정권이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식 민지 시기 일제의 통치는 엄연히 [법치주의]의 외형을 취하고 있었다. [사회 에 불안을 야기한] 독립운동가들을 근대적 재판제도를 통해서 처벌한다 고 해서 식민 지배의 폭력성이 사라진다고 할 수 있을까. 극단적인 수탈론 만큼이나 극단적인 근대화론 역시 역사적 현실을 인식하는 데 매우 무력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또다시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44 교과서포럼(2008), 앞의 책. 31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15 참고문헌 <단행본> 강만길(2004),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 선인. 교과서포럼(2008), 대안교과서 한국 기파랑. 김낙년(2003), 일제하 한국 경제, 해남. 김낙년 편(2006),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서울대학교 출판부. 김상태 편역(2001), 윤치호일기 1916~1943, 역사비평사. 편저(1997), 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사. 박섭(2001), 식민지의 경제 변동:한국과 인도, 문학과지성사. 미즈노 나오키 편(2007),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 산처럼. 로빈슨 편(2006),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 삼인. 안병직(2001), 한국 경제성장사 - 예비적 고찰, 서울대학교 출판부. 역사문제연구소 편(1996),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 비판, 역사비평사. 위르겐 오스터함멜(2006), 식민주의, 역사비평사. 윤해동(2007),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휴머니스트. 이대근(2005), 새로운 한국 경제발전사 - 조선후기에서 20세기 고도성장까지, 나 남. 이만열(2007),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 푸른역사. 이영훈(2007),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정근식@공제욱 편(2006), 식민지의 일상, 지배와 균열, 문화과학사. 하루투니언(2006), 역사의 요동 - 근대성,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 휴머니스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박섭(2004),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 백산서당. 허수열(2005), 개발 없는 개발 - 일제하 조선경제 개발의 현상과 본질, 은행나무.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315

316 <논문> 강진아(2007), 제국주의시대와 동아시아의 경제적 근대화 - 식민지 근대화론의 재고와 전망, 역사학보 194. 길인성(1997), 식민지 조선과 생활수준 논쟁, 서강경제논집 26. 김낙년(2006), 일제하 조선인의 생활수준은 악화되었을까, 역사비평 77. 김동노(1998), 식민지 시대의 근대적 수탈과 수탈을 통한 근대화, 창작과비평 99. 김인걸(1997), 1960, 70년대 [내재적 발전론]과 한국사학, 김용섭 교수 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간행위원회 편, 한국사 인식과 역사이론 1, 지식산업사. 날라니 타네자(1995),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성격 비교, 역사비평 30(1995년 봄). 미야지 가즈오(1996), 프랑스와 알제리:식민지 경험의 사례, 한국중동학회 16. 박사명(1996), 식민지 사회의 계급형성: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역사적 비교, 동 남아시아연구 4. 박섭(2005), 식민지기 한국 농업의 신추계 및 기존 추계와의 비교@검토 1910~ 1944, 경제사학 39. 배성준(1995),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한다 년대 일제의 조선공업화론 비 판, 역사비평, 1995년 봄호. 유봉철(1971), 일제하의 국민생활수준, 일제하 민족연구총서 5:일제하의 민족 생활사,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이홍락(1997), 내적 발전론 비판에 대한 반비판, 역사비평 39. 정병욱(1998), 역사의 주체를 묻는다: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을 둘러싸고, 역사비 평, 1998년 여름. 정연태(1995),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한다 년대 일제의 식민농정에 대한 재검토, 역사비평, 1995년 봄. 정연태(1999),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의 비판과 신근대사론의 모색, 창작과비평 103. 정연태(2006), 태평양전쟁기 미국의 복안적 시각과 한국 사회 인식, 한국사연 구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17 조석곤(1998),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 재검토, 동향과 전망 38. 조석곤(2006),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 성과의 비판적 수용을 위한 제언, 역사비 평 75. 주익종(2006), 식민지 시기의 생활수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최성진(2006), 식민지기 신장 변화와 생활수준, 경제사학 40. 허수열(2006),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의 식민지 경제에 대한 인식 오류, 역사비 평 75. 생활수준 향상론 비판 317

318 J a p a n e s e C o l o n i a l R u l e a n d C o l o n i a l M o d e r n i t y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 메이지광업(주)의 사례 김민영 군산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I. 머리말 II. 강제동원과 기업의 책임 III. 메이지광업(주)의 강제동원과 기업 책임 IV. 맺음말

319 I. 머리말 식민지 시대 조선인에 대한 강제동원 문제는 문헌 및 현장 조사, 증언 수 집 등 사실(fact) 확인 차원에서 출발하여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역시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주제는 전후처리 및 보상 문제일 것이다. 물론 이 와 관련하여 일본 정부는 1988년부터 대만의 구일본병 전몰자에게 일률 적으로 조위금을 전달한 것을 포함하여, 사할린 거주 한국인의 귀국 여비 의 일부를 부담하였고, 1991년부터는 재한 피폭자의 의료비로 기금을 마 련한 바 있다. 하지만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각종 미불금, 군사우편저금, 보험금과 유 골송환을 비롯하여 군인, 군속, 노무자, 군위안부 등에 대한 총괄적인 전 대해서는 여전히 이렇다 할 조치가 마련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으로 강제동원의 범주인 모집, 관알 선, 징용에 대한 일본 정부와 기업 측의 입장이다. 즉 일본 정부는 그 가 운데 모집, 관알선에 대해 {개인과 기업 간의 자유계약에 의한 계약노동으 로, 결국 이를 전시하의 해외출가 노동으로 파악한 나머지 통상의 고용노 동자에 불과하다}는 입장이고, 징용에 대해서는 {국민징용령이라는 법률 오히려 일본 정부는 그 진상 규명을 뒷전에 둔 채 이른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우호기금(국민기금)]으로 피해자들을 유혹하며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 기도 했다. 다만 우리 정부에 의해 실시되고 있는 [군위안부]를 위한 생활안정 지원과 [강제 동원]의 피해와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 및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자]에 대한 지원 등이 이루어지고 있어 향후 그 추이가 주목된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19

320 의 적용에 의한 [일본제국신민의 의무]로서 당시 일본인에게도 동일하게 부과된 부담이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당시 실질적인 강제동원의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었고 그 저임 금의 수혜자였던 일본 기업은 {전쟁이라는 비상사태에서 있을 수 있는 일 로, 다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그 책임에 대해 일관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연구사적 공백을 메우는 것은 물 론, 21세기 동아시아의 정립을 위한 이론적 지침을 제시하기 위해 강제동원 관련 기업의 책임 문제를 다시 되묻고자 한다. 특히 1939 년부터 1945년까지 30여 차례 이상 조선인 노동자를 동원(1945년 3월 31 일 현재 조선인 재적인원 4,864명)했던 대표적 탄광회사인 야스카와[ 安 川 ] 재 벌계인 메이지[ 明 治 ]광업(주) 산하 10개 탄광(메이지, 아카이케[ 赤 池 ], 도요쿠 니[ 豊 國 ], 히라야마[ 平 山 ], 다카다[ 高 田 ], 니시키[ 西 杵 ], 다테야마[ 立 山 ], 쇼와[ 昭 和 ], 쇼로[ 庶 路 ], 가미우시[ 上 芦 別 ]) 가운데 규슈[ 九 州 ] 지역 니시키와 히라야 먀 탄광을 중심으로 그 실태와 함께 기업 책임 문제를 시론적으로 제기하 고자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1910년의 [한일합방]에 의한 조선인=일본 국민이라는 법 적 지위상태를 합법화 정당화한 논리로서, 우리 민족으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발상이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후자의 경우 징용은 말할 것도 없이 모 집, 관알선에 의한 강제동원도 자유의사에 의한 정상적인 고용계약은 결코 아 니었고, 또한 이를 가지고 노동력 징발의 폭력성을 은폐할 수 없으며, 이는 어 디까지나 일제침략을 합법화, 정당화하는 기만의 논리로밖에 인식할 수 없다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32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21 II. 강제동원과 기업의 책임 1. 야마다 쇼지의 국가 및 기업 책임론 강제동원에 대한 기업 책임의 대표적 논자인 야마다 쇼지[ 山 田 昭 次 ]에 의 하면 조선인 강제동원, 강제노동은 기본적으로 일본 내 자본의 요구에 의 하여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가 자본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움직인 것만은 아니지만, 치안대책에 대한 예견과, 조선총독부로 대변된 재조선 일본 자본의 조선인 노동력 확보 요구 등도 염두에 넣은, 총자본 으로서의 배려 없이 조선인 단행될 수 없었다는 것 이다. 특히 초기 강제동원 정책에서는 이 두 가지에 대한 배려를 위해 연 행 수와 연행 산업분야가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조선인 강제동원을 요구한 것은 기업이었을 뿐 아니라, 그 절차 인 [모집], [알선], [징용]이 모두 국가에 대한 기업의 신청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므로 명백히 기업은 조선인 출발점에 있어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그는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일본의 국가와 기업은 조선인 강제동원, 강제노동의 역사를 은폐하고, 한일협정의 체결에 임하 여 그로 인한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애매하게 하고, 회피하여 그 전후( 戰 後 ) 책임은 전전( 戰 前 ) 책임과 똑같이 무겁다는 논지를 펴고 있다. 山 田 昭 古 庄 樋 口 雄 一 (2005), 朝 鮮 人 戰 時 勞 動 動 員, 岩 波 書 店.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21

322 2. 고쇼 다다시의 기업 책임론 -미불금과 공탁문제 야마다 쇼지와 함께 강제동원의 기업 책임을 실증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고쇼 다다시[ 古 庄 正 ]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인한 노동에 대해 일본 정부와 기업들의 [전후처리] 경과, 즉 [재일본 조선인 연 맹]의 보상 요구와 미불금 위탁 요구를 관련시켜 매우 실증적으로 검토하 고 있다. 물론 공탁금의 총액이 얼마 정도가 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본 정부 가 미불금의 공탁에 대해 채권자인 조선인 노동자에게 아무런 통지를 하 지 않았으며, 공탁 후 10년이 경과했을 때 채권자로부터 환부 요구가 없었 다고 하여 공탁금의 시효를 일방적으로 소멸시킨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분 명히 되묻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이후 미불금 문제는 {해결됐다}면서 공탁제도의 취지상 마땅히 인정해야 할 관계자에 의한 공탁보고서의 열 람 청구조차 거부하고 있으며, 또한 강제동원 노동자를 고용했던 기업들 은 {채무는 변제가 끝났다}, {미불금은 전후 법무국에 공탁하고 민간기업 채무는 이행했다}는 등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현실임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古 庄 正 (1968), 在 日 朝 鮮 人 勞 動 者 の 賠 償 要 求 と 政 府 および 資 本 家 團 體 の 對 應, 社 會 科 學 討 究 31-2, 早 稻 田 大 學 ; 古 庄 正 (1992), 朝 鮮 人 强 制 連 行 問 題 の 企 業 責 任, 經 濟 學 論 集 24-2, 駒 澤 大 學 經 濟 學 會 ; 古 庄 正 (1993a), 日 本 製 鐵 株 式 會 社 の 朝 鮮 人 强 制 連 行 と 戰 後 處 理 - 朝 鮮 人 勞 務 者 關 係 を 主 な 素 材 として, 經 濟 學 論 集, 25-1, 駒 澤 大 學 經 濟 學 會 ; 古 庄 正 (1993b), 强 制 連 行 の 企 業 責 任 - 徵 兵 された 朝 鮮 人 は 訴 える, 創 史 社 참고. 32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23 III. 메이지광업(주)의 강제동원과 기업 책임 1. 니시키 탄광의 강제동원 일본 규슈 사가[ 佐 賀 ]현에서도 폐산이 가장 늦었던 메이지 니시키 탄광주 식회사의 조선인 강제동원과 관련해서는 경영서무 사료가 남아있다. 이 들은 무엇보다 당시 석탄통제회의 관계 서류를 통해 1940년대 일본 석탄 산업의 노동 사정과 니시키 탄광의 노무동원을 분석하는 데는 더없이 귀 중한 자료들이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을 요약하자면 첫째, 1940년대의 일본 석 탄산업의 노동 사정을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시켜볼 때, [조선인 노동자 이입 경비의 상승], [계약 만기자의 귀선]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조선 내 상대적 과잉인구의 고갈과 상호작 용에 의해, 그때까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왔 던 일본 석탄산업의 노동력 충족이 더 한층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한편에서는 일요일 폐지, 노무대책의 쇄신 등의 노동 강화와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급여 증액의 검토, 조선인에 대 한 가족수당 지급의 검토, 만기자에 대한 [정착 장려] 등이 논의되고 있었 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인 노동자의 동원정책 가운데 중요한 사실은 그 때까지의 [관알선] 방식에서 [징용] 방식으로 정책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佐 賀 縣 明 治 鑛 業 ( 株 ) 西 杵 炭 鑛 의 경영서무 자료는 佐 賀 大 學 經 濟 學 部 가 소장 하고 있다. 이 자료의 해설에 대해서는 長 野 坪 內 安 衛 (1990), 石 炭 史 참고.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23

324 셋째, 또한 조선인 노동자의 [정착]에 대해 근로보국대, 강제동원 조선 인 노동자, 여자근로정신대, 학도근로보국대 등의 노동력 동원과 함께, 근 로보국대의 동원기간 연장,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정착 강제, 기능 광원의 등이 검토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니시키 탄광은 1943년부터 1944년에 걸쳐 138명의 조선인 노동 자를 강제동원하고 있는데 본사인 메이지광업(주)의 회사사(표 1 참조)에 나 와 있는 해방 직전 조선인 노동자 수 135명과도 대체로 일치하는 수치이다. 즉 1944년에 니시키 탄광은 출탄량 14만 5203톤을 달성하는데, 이는 1955년의 16만 700톤을 제외하면, 1935년 개광에서 1956년 폐광에 이르 는 기간 동안 최고의 생산량이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이를 위해 조 선인 노동자는 물론, 근로보국대 외에도 [정신대], 홋카이도[ 北 海 道 ] 및 회 표 1 _ 1945년 초 메이지광업(주)의 재적광원 수(단위:명) 구 분 일본인 장기 노동자 조선인 근보대원, 단기 노동자 포로 계 赤 池 3,394 1, ,934 豊 國 1, ,976 平 山 ,911 高 田 ,722 西 杵 ,093 立 山 昭 和 ,358 庶 路 上 芦 別 계 8,520 (56.0퍼센트) 4,864 (31.9) 1,429 (9.4퍼센트) 392 (2.7퍼센트) 15,205 (100.0퍼센트) 1945년 3월 말 현재. 明 治 鑛 業 株 式 會 社 (1957), 社 史, 明 治 鑛 業 株 式 會 社 社 史 編 纂 委 員 會, 175쪽. 32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25 사의 [전환광부], 학생, 천리교의 관계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1943년부터 1944년에 걸쳐 최소 2회, 138명을 강제동원하고 있었다. 2. 히라야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 1) 1940년대 초의 탄광 노무 상황 먼저 조선인 노무동원 방식과 관련하여 [모집] 방식으로부터 당] 방식으로 이행하는 시기인 1942년 즈음, 일본의 메이지광업(주) 가운 데에서도 특히 조선인 노동자를 대량 모집하여 사용한 히라야먀 탄광의 기업 측 자료를 중심으로, 당시 조선인 노동자의 상황 및 생활실태를 살펴볼 수 있다. 1939년 9월, [모집]방식으로 개시되어 이후 본격적으로 확대된 이른바 여기에서 이행기라 함은 [모집] 방식( ~ )에서 방식 ( ~ )으로의 전환기를 말한다. 하지만 실제 관알선 방식에 의한 조선인 노무동원은 1942년 4월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검토하는 시 기는 [모집]과 [관알선]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혼재하는 과도기이다. 이에 대해서 는 前 田 一 ( ), 特 殊 勞 務 者 の 勞 務 管 理, 山 海 堂 出 版 部 참조. 또한 이전 시기 석탄광업연합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모집] 방식에 의한 조선인 노무 동원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 김민영( ), 1940 年 代 初, 日 本 石 炭 鑛 業 聯 合 會 所 屬 炭 鑛 의 朝 鮮 人 勞 動 者 募 集 狀 況 - 肥 筑 地 區 ( 福 岡, 佐 賀, 長 崎 )를 中 心 으로, 한국동서경제연구 제8집, 한국동서경제학회. 이 경우 자료의 객관성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당시 탄광의 자료를 적절 한 사료 비판을 통해 재검토해야 함은 물론이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25

326 [조선인 노무동원]은 당초 조선인도 상황을 명확히 알지 못했고, 특히 그 해 조선 남부의 대흉작, 기업 측의 모집조건의 과대한 선전, 지역( 道 )이나 경찰 관계기관 등의 강제도 있어 응모자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에 동원되었던 사람들로부터 노동 현장이나 노동조건 등의 실정이 전해짐에 따라 응모자의 숫자는 급격히 감소해갔다. 한편 기업 측에서는 1941년 12월 태평양의 아시아 지역 전체로 전선 이 확대된 이래, 일본 국내의 노동력 부족을 타개하고, 국가 및 군부의 요 구와 기업 자체의 이윤 추구를 위해 조선에서의 노동력 확보가 한층 중요 해졌다. 따라서 기업은 보다 효율적으로 조선 내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국가의 권위, 권력을 이용하는 것을 희망했다. 기업은 조선 내에서의 전면 적인 국민징용령의 발동을 희망했지만, 총독부의 조선 내 노무동원 계획, 군부의 동원 계획, 조선 민중의 저항 강화 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실 시를 뒤로 했다. 결국 노무동원은 국가의 행정조직을 이용하고, 그 말단기 구인 읍면사무소, 경찰주재소에서 직접 행하도록 하는 [관알선@할당] 방 식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10 특히 당시 모집 방식은 모집 개시로부터 송출 완료까지 장시간이 걸리 기 때문에, 기업 측에는 경비의 증대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한층 공권력 의 발동을 요청하게 되었고, 1942년 2월 이후 이른바 [관알선@할당] 방식 에 의한 노무동원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1 또한 1941년 11월경이 되면 1939년부터 당초 2년 [계약]으로 모집된 守 屋 敬 彦 (1996), アジア 太 平 洋 戰 爭 下 の 朝 鮮 人 强 制 連 行 と 遺 家 族 援 護, 道 都 大 學 紀 要 社 會 敎 養 學 部 第 15 號, 95쪽. 10 守 屋 敬 彦 (1996), 위의 글, 95쪽. 11 守 屋 敬 彦 (1996), 앞의 글, 84쪽. 32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27 조선인 노동자들은 만기가 되는데, 이에 일본의 각 탄광은 계약만기 조선 인 노동자들에 대해 [재계약]을 종용하며 [정착]을 독려하였다. 아울러 재 계약자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대우를 고려한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즉 50 엔을 한도로 수당 등을 고려케 하였고, 1개월의 기간 내에 조선의 고향에 다녀오게 하였으며, 그 비용으로 20엔을 한도로 사용케 했다. 그러나 여기 에서 [재계약의 정착 독려]라 했지만 실제로는 [정착 강제] 내지는 [재계약 강제]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12 그런데 이 문제는 식민지 시대 [조선인의 강제동원과 기업의 책임]이라 는 각도에서 볼 때, 이른바 [강제성]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게 해명 되어야 할 부분이다. 주지하듯이 조선인 노동자의 노무동원은 이른바 [계 약기간]이 2년으로 되어 있었다. 13 그러나 1차적으로 조선인 노동자의 노 무동원 계약이 만료되는 1941년 가을부터 일본의 각 사업소, 특히 탄광 업계는 재계약 또는 기간 연장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또한 후생성과 사단 법인 중앙협화회를 중심으로 각 성 관계자와 민간 관계업자 간에 [정착독 려반]이 조직되어 사실상 재계약이 [강제]되고 있었다 예규철 자료 半 島 人 契 約 滿 期 者 取 扱 에 關 한 件 ( ). 이 문제에 대 한 보다 본격적인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古 庄 正 (1992), 앞의 글 참조. 13 조선인 노동자의 [정착] 문제와 함께, [계약]이 자유계약이었는지 아니면 강제성 이 수반되었는지의 여부 역시 노무동원의 성격을 판가름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에 대해 할애하고, 향후 보다 많은 연구의 천 착이 필요한 과제로 남겨두고 싶다. 14 朴 慶 植 (1978), 朝 鮮 人 强 制 連 行 の 記 錄, 未 來 社, 53쪽. 물론 [재계약의 강제] 문 제는 노동력 부족이 더욱 심각해지는 1944년 후반에 이르면 한층 강압적으로 전개되었고, 결과적으로 이 문제 등에 연유하여 조선인 노동자의 저항과 분규 가 다발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古 庄 正 (1992), 앞의 글, 99~102쪽을 참조.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27

328 또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재계약] 문제는 노동력의 확보라는 측면에 서뿐 아니라, 모집비의 절감이라는 기업 측의 이해와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즉 새롭게 시작된 방식에 의하여 조선인 노동자를 동원하는 경우에는, 조선 현지로부터 관할 군까지의 이송비, 읍면 단계의 부대비용 및 군 집결까지의 인건비 등이 절약되어 결과적으로 기업 측으 로서는 경비가 절감되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15 이처럼 재계약의 강제문 제는 조선인 노무동원의 강제적 성격을 아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일본 탄광의 노동 사정은 더욱 핍박 해져가고 있었으며,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노무동원은 이후 과도적 통제 방식으로부터 본격적 통제 방식으로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 문제와 관련하여, 1940년대 일본 석탄산업의 석탄통제사의 측면에서 기존의 석탄광업연합회가 석탄통제회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대 해서도 검토가 필요하다. 즉 해방 전 일본의 석탄산업에 있어서 통제회는, 일본의 전시경제체제가 심각해지면서 생겨난 것으로, 종래의 자치적 통제 단체인 [석탄광업연합회]가 1941년 이후 [석탄통제회]로 바뀐 것이다(석탄 통제회 통제규정의 고시는 1942년 2월 20일이었음). 16 그 설립 사정에 대해서는 15 守 屋 敬 彦 (1996), 앞의 글, 108쪽 참조. 16 석탄업에서 자치적 통제가 일본 전국적 조직으로 확산된 것은 1921년 10월, 전 국의 주요 생산업자의 합의에 의해 석탄광업연합회가 결성되면서부터다. 석탄 광업연합회는 송탄기준량을 매년 정해 저탄량 등에 비추어 제한율을 두어 이 를 조절량으로 하고, 이를 동일 구성원인 각 지방의 석탄광업회 또는 소규모의 광업조합에 할당, 각 지방조직은 이를 다시 산하의 여러 탄광에 할당했다. 연 합회는 대규모 탄광을 중심으로 하는 카르텔로서, 筑 豊, 北 海 道, 常 磐, 宇 部 및 32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29 석탄국가통제사( 石 炭 國 家 統 制 史 ) 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탄가( 炭 價 ), 배탄( 配 炭 ) 면에서는 이미 일본 석탄이 일면적 통제하에 있다 하더라도, 생산상의 통제에 기초하지 않으면, 석탄가 통제도 무너 지고 말 것이다. 결국 석탄업에 있어서도, 석탄광업자를 강제적으로 가 입시켜, 생산상의 제조건을 조정하는 통제기구가 필요하다. 더구나 국 가의 계획에 따라 생산으로부터 배탄에 이르기까지 장악할 수 있는 기 구로서 일원화하지 않으면 석탄통제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17 따라서 종래의 [석탄광업연합회]와 [석탄통제회]의 통제 방식 및 그 구 체적인 변화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당시의 정황을 아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금후의 과제로 남 겨두고자 한다. 2) 히라야마 탄광 조선인 노동자의 1940년대 초 노동 상황 및 생활실태 (1) 강제동원 및 노동 상황 그러면 [조선인 노동자모집고입원서( 朝 鮮 人 勞 動 者 募 集 雇 入 願 書 )](자료 21)와 [조선인노무자이입알선신청서( 朝 鮮 人 勞 務 者 移 入 斡 旋 申 請 書 )](자료 11) 등의 자료를 통해 이 시기 히라야마 탄광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 및 노동 肥 筑 의 각 석탄광업회가 단체로서 가맹하는 외에 광업회의 조직이 없는 지방 의 10개 탄광은 단독회원(추천탄광)으로 가맹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김민 영( ), 앞의 글 참조. 17 北 海 道 炭 鑛 汽 船 株 式 會 社 (1958), 石 炭 國 家 統 制 史, 301~347쪽.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29

330 표 2 _ 1941년도 히라야마 광업소의 석탄 생산 및 노동 사정 구 분 생산실적 및 인원 ~ 석탄의 생산 실적 215,642 屯 ~ 석탄의 생산 예정 244,420 屯 ~ 석탄의 증산량 28,778 屯 1941년 6월 말 인원 1,441 人 1941년도의 예정량 생산에 필요한 인원 2,040 人 부족 인원 599 人 <자료 21>에서 작성. 상황을 살펴보자. 이 자료들은 년 7월부터 1942년 3월까지의 것으 로, 여기에는 조선인 노동자의 모집 이유 및 취업시간, 임금 등에 관한 내 용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조선인 노동자를 모집하고자 했던 이유를 보면 표 2에서 보듯이 1941년 6월 말 히라야먀 탄광의 전체 재적광부 수는 1,441명으로 남자 1,340명, 여자 101명이었는데, 조선인 노동자는 393명(남자 292명, 여자 101 명)으로 전체의 27.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19 특히 여자 갱부는 모두 조선인이어서 주목된다. 아무튼 당시 히라야먀 탄광은 부족 인원 599명 18 당시 明 治 鑛 業 株 式 會 社 平 山 炭 鑛 은 그 주소가 일본 福 岡 縣 嘉 穗 郡 桂 川 町 大 字 士 師 2343번지로 되어 있다(자료 21 및 자료 11 참조). 또한 이 시기는 아직 [모집] 방식에 의해 조선인 노동자가 노무동원되고 있을 때로, 구체적인 인솔 관 계 서류는 <자료 14>가 참고로 된다. 19 <자료 22> 참조. 메이지광업(주) 히라야마 탄광은 1939년 12월부터 1945년 3 월까지 25차례에 걸쳐 조선인 노동자를 노무동원하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표 7> 참조. 33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31 가운데 450명을 조선인 노동자의 이입을 통해 보충할 계획이었다. 당시 일본 탄광의 노동자 이동 상황을 보면, 퇴직자가 증가하는 가운 데 전쟁에 따른 응소자의 증가, 전직, 농촌 복귀 등이 속출하고 있었으며, 이에 반해 보충은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석탄의 예상 생산 량 달성 불가능은 말할 것도 없이, 점차 생산량이 줄어들 상황이었다. 이 러한 취지에서 광업소는 조선인의 모집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인 노동자가 종사해야 할 사업의 종류는 채탄부, 굴진부, 지 주부 등이었다. 여기에서 채탄부는 주로 석탄의 채굴에 종사하는 것으로, 수십 명이 공동 작업을 통해 석탄을 생산하므로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쉽 게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또한 굴진부는 채탄 준비를 위해 갱도의 굴진 작업을 하고, 지주부는 갱도의 수선 유지 및 채탄 장소 의 발판을 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0 당시 일본의 탄광노동에서는 엄격한 위계제가 적용되고 있었다. 근대 적인 자본주의 기업에서 위계제의 성립은 대규모 조직을 관리하기 위한 노무 관리체계로서, 각 직무에 따라 역할과 권한이 분할되어 노동자를 체 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식으로 성립되었다. 하지만 식민지하 일본 탄 광의 위계제는 내부의 권위를 위임하고 규칙에 따라 절차를 밟아나가는 합리적인 성격은 배제된 채, 작업장 내부의 차이를 극대화 하여 조선인 노동자를 분할 지배하는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위계제의 조 직에서 조선인 남녀 노동자는 늘 말단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당시 일본의 탄광 측이 요구하는 조선인 노동자의 성별 및 연령을 보면, 만 18세 이상 40세까지의 남자로서 노동에 잘 임할 수 있는 건강한 자로 명시 되어 있었다. 21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둔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31

332 아무튼 1941년 후반 히라야마 탄광은 부족 인원 599명 가운데 450명 을 조선인 노동자의 이입을 통해 보충할 계획이었는데, 이는 있는 노동자들로 가급적 가족 있는 경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내역은 제2기 150명, 제3기 150명, 제4기 150명으로 되어 있다(표 3 참조). 또한 모집 구역 및 모집 기간, 모집 방법을 보면, 우선 모집 구역은 경상남 도, 경상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외에 새롭게 강원 도, 경기도 등지가 추가되어 가히 남부지방을 총망라하고 있었다. 모집 방 법은 조선 현지에 [모집 종사자]를 두고 허가를 얻어 모집에 종사하는 방 식이었다. 22 표 3 _ 히라야마 광업소의 조선인 노동자 이입 총수 및 재적 수(단위:명) 구 분 이입 총수 현 재적 수 비 고 전라남도 년 12월 이입, 1차 충청남도 년 3월 이입, 2차 경상북도 년 8월 이입, 3차 전라남도 년 1월 이입, 4차 충청남도 년 3월 이입, 5차 경상남도 년 7월 이입, 6차 경 기 도 년 1월 이입, 7차 계 1, 년 말~1942년 1월의 통계임. <자료 11>에서 작성. 22 앞에서 보았듯이 일반적으로 [모집 종사자]라는 용어는 1940년 4월부터 [노무 보도원] 제도로 바뀌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과도기적으로 [모집 종사자]라는 용 어가 그대로 쓰이고 있다. 33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33 노동자의 인솔 및 보호 방법을 보면 모집 종사자와의 연락하에 응모자 가 상당수일 때에는 조선어를 아는 노무계원 및 협화회 간사 1명을 파견 하도록 되어 있었고, 인솔에 있어서는 연락선(일본의 下 關 - 麗 水 를 연결하던 배)을 이용해 시모노세키[ 下 關 ]에 도착한 후 철도편을 이용하여 이송할 계획이었다. 23 또한 자료에는 인솔자의 이름, 신분 및 생년월일이 기재되어 있는데, 모 두 5명으로 그 가운데 1명은 광업소의 노무계원이었다. 당시 광업소 측은 실제 인솔에 있어서 지역경찰서에 적당한 협화회 간부의 알선을 의뢰했으 나, 이 지역에 조선인 노동자 [이입모집] 광산이 많고, 또한 협화회 간부 수 가 적어 부득이 인물을 교체하였으며, 인솔자에 대한 비용 일체는 사업주 가 부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24 조선인노무자이입알선신청서 (자료번호 11)는 히라야마 탄광에서 작성 한 실제의 알선 신청서로, 년도 이 탄광의 석탄 생산 및 노동 사정 을 알 수 있다[1941년에 비해 다소간의 변동이 있음(표 4 참조)]. 결국 1942년 1월 말 현재 히라야마 탄광의 노동자 재적 수는 1,429명 23 이에 대해서는 주 39를 참조. 24 <자료 9> 참조. 25 당시 알선신청서는 5통을 작성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는 각각 국민직업지도 소, 경찰서, 직업과, 특고과, 후생성에 보내졌다. <자료 7> 朝 鮮 人 勞 務 者 內 地 移 入 事 務 取 扱 指 示 事 項 을 참조. 여기에는 조선인 노무자의 노무동원 사무와 관 련하여 [이입]의 요령 및 절차가 소상히 나타나 있다. 또한 알선 신청서의 기재 요령 및 관계서류에 대해서는 <자료 10> 朝 鮮 人 勞 務 者 移 入 雇 傭 員 ( 斡 旋 申 請 書 ) 記 載 要 領 을 참조. 여기에는 이입 조선인 노무자 인솔 증명서, 이입 조선 인 노무자 근로 상황 보고, 이입 조선인 노무자 출동기간 연장원, 이입 조선 인 노무자 취업장 변경원, 이입 조선인 노무자 轉 雇 傭 願 등이 나타나 있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33

334 으로 이는 표 4 및 표 5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재적노동자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 총수는 322명으로 전체 광부수의 22.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노동자의 대부분이 갱내부였음을 감안하여 갱내부 비율을 보면, 조선인 노동자는 거의 3할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히라야마 탄광은 1939년 말부터 1942년 1월까지 전라남도, 충 표 4 _ 1942년도 히라야마 광업소의 석탄 생산 및 노동 사정 구 분 생산실적 및 인원 ~ 석탄의 생산 실적 230,000 屯 ~ 석탄의 생산 예정 77,000 屯 ~ 석탄의 증산량 12,500 屯 1942년 1월 말 인원 1,429 人 1942년도 예정량의 생산에 필요한 인원 2,040 人 부족 인원 611 人 <자료 11>에서 작성. 표 5 _ 히라야마 탄광의 노동자 구성(단위:명) 구 분 조 선 인 현 재 원 수 일 본 인 계 갱내 갱외 합계 남 315(29.7퍼센트) 747(70.3퍼센트) 녀 - - 남 7(1.9퍼센트) 264(71.9퍼센트) 녀 - 96(26.2퍼센트) 남 322(22.5퍼센트) 1,011(70.8퍼센트) 녀 - 96(6.7퍼센트) 41,062(100.0퍼센트) 367(100.0퍼센트) 1,429(100.0퍼센트) 1941년 말 자료임. <자료번호 11>에서 작성. 33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35 청남북도, 경상북도, 26 경기도 등 전국에서 7차례에 걸쳐 1,051명을 [이입] 하고 있으며, 1942년 1월 말 현재 재적 수는 316명이었다(표 3 참조). 27 특히 1942년 1월 제7차로 경기도 지역에서 이입된 조선인 노동자의 내 력에 대해서는 표 6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메 이지광업 계열 탄광이 1941년 11월, 12월에 모집 허가를 받은 내용이 나 타나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히라야마 광업소는 경기도의 시흥과 부천에서 200명의 조선인 노무동원을 허가받았음을 알 수 있다. 28 하지만 앞의 표 3에서 보듯이 실제 이입된 노동자는 119명이었다. 26 [예규철] 자료에는 제6차 이입의 대상지가 경남으로 나타나 있으나, 昭 和 二 十 年 月 起 半 島 人 移 入 狀 況 調 査 表 綴 에는 경북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半 島 人 關 係 雜 書 類 綴 ( ~ ) (자료번호 明 治 일본 九 州 대 학 석탄자료연구센터 소장) 참조. 27 이를 보면 재적원 수는 전체 노무동원 노동자의 30퍼센트 수준으로, 가히 7할 에 가까운 숫자가 도망 내지 송환 등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노무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이동문제, 특히 도망자의 문제 또한 당시 일본의 산업 계, 특히 석탄업계에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연 구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다. 28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인솔자는 8명으로 모두 탄광의 노무계원이었으며, 모집 허가 200명을 1941년 12월 1일부터 12월 말일에 걸쳐 모집하고 있었다. 특히 모집 대상지는 경기도 지역으로 인솔 경로를 보면, 우선 노무계원들은 일 본에서 關 釜 連 絡 船 [일본의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왕래하는 배-인용자]을 타고 부산에 내려 경기도로 향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인솔 시는 모집지에서 철 도로 부산에 도착해 博 釜 連 絡 船 [일본의 博 多 와 부산을 왕래하는 배-인용자] 으로 博 多 에 상륙한 뒤, 鹿 兒 島 本 線 을 타 原 田 역에서 내려 筑 豊 線 으로 갈아 탄 뒤 桂 川 역에서 하차하여 당일 히라야마 탄광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자료 14> 移 住 朝 鮮 人 引 率 證 明 書 に 關 する 件 ( ) 참조.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35

336 표 6 _ 조선인 노동자의 모집지 허가 사항(규슈 지역) (1941년 11월, 12월분) 경기도 전남 전북 충남 충북 경남 경북 구분 인 군 인 군 인 군 인 군 인 군 인 군 인 군 計 원 명 원 명 원 명 원 명 원 명 원 명 원 명 明 治 赤 池 100 고성 100 明 治 明 治 200 곡성 보성 100 明 治 平 山 200 시흥 부천 200 明 治 豊 國 ( )는 신청 중인 경우임. 例 規 綴 에서 재인용. 즉 1942년 초 히라야마 탄광은 부족 인원 611명 가운데 325명을 조 선인 노동자의 이입을 통해 보충할 계획이었으며, 결국 이 노동자를 알선 받게 되는데, 그 내역은 표 4와 같다. 그리고 그 알선 내역을 보면, 1942년 2월에 150명, 3월에 175명으로 나타나 있다(표 3 참조). 한편 당시 히라야마 광업소의 [취업안내] 자료 등을 통해 조선인 노동 자의 생활실태를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즉 취업시간, 휴게시간, 휴 일 및 야간작업에 관한 사항과 임금 및 숙사, 식사비용, 기타 일상생활에 필요한 비용의 부담에 관한 사항, 저금 및 근로의 장려에 관한 사항, 복리 시설 및 보도방법, 왕복여비 부담에 관한 사항(상이, 질병 또는 사망에 의하 여 부형 기타 친지의 왕복에 필요한 경비), 제재사항, 고용기간 및 해고에 관한 사항, 상이 질병 및 사망의 경우에 있어서 부조구제에 관한 사항, 가족 초 청에 필요한 여비의 부담 방법 등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37 식민지 시대 일본의 탄광에 노무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에게는 확실 히 부당한 대한 학대, 엄한 노무 관 리, 민족차별, 황국신민화의 강행 등이 뒤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기 업 측의 자료를 분석해보면, 및 질병 및 사망 등이 일정한 메커니즘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향후 노무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들의 생활상의 제문제 등에 대해서는 보다 엄밀한 실증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해방 전후 히라야마 탄광의 조선인 강제동원 여기에서는 [반도인관계서류철( 半 島 人 關 係 書 類 綴 )( ~ )]을 검토 함으로써, 해방 전후 일본 탄광의 정황과 조선인 노동자의 고용상태를 실 증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30 조선인 강제동원과 관련하여 1944년경에는 조선인의 징용제가 시행된 것이 특기할 만하다. 요컨대 [군수회사법]에 의한 및 [공장 사업관리령]에 의한 등에 대해 조선인의 징용이 인정되어, 1944년 8월 각의에서 결정된 반도인( 半 島 人 ) 노무자( 勞 務 者 )의 이입( 移 入 ) 에 관한 건( 件 )에 따라 9월부터는 [이입] 노동자에게 일반징용령이 적용된 것이다. 29 김민영(1998), 해방 전 일본탄광의 한국인 노동자(1941~1942) - 평산광업소 의 예규철 자료를 중심으로, 국제지역연구 제2권 1호, 국제지역학회 참조. 30 자료는 明 治 鑛 業 株 式 會 社 平 山 鑛 業 所 舊 藏 資 料 로 현재 일본 九 州 大 學 의 석 탄연구자료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37

338 따라서 일본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비율은, 모집 방식의 말기인 1941 년 말에는 일본 전국 평균 15.4퍼센트였고, 관알선이 개시된 1942년도에 는 27퍼센트, 더욱이 징용령이 적용된 1944년도에는 32퍼센트에 달했다. 하지만 갱내부에서 차지하는 조선인 노동자의 비율은 이를 훨씬 상회했 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히라야마 탄광은 1939년 [전시 노무동원]을 개시 한 이래, 25차례에 걸쳐 연인원 3천여 명을 상회하는 조선인 노동자를 동 원하여(표 7 참조), 31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3월 말에 903명의 조선인 탄 광부를 재적시키고 있던 대표적 광업소이다. 32 따라서 1945년 3월 말 당시 히라야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비율은 38.7퍼센트로서 다른 소속 탄광을 상회하고 있었다. 또한 히라야마 탄광 에는 포로 197명이 재적하고 있었는데, 이는 구성비로 볼 때 10.3퍼센트 에 달하는 수치다. 33 이 탄광은 1939년 12월부터 1945년 3월까지의 25차 31 실제 이입 조선인 노동자 수는 3,115명에서 3,242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32 이와 관련하여 전후 1957년에 明 治 鑛 業 ( 株 )에서 발행된 社 史 에는 1945년 3 월 말 현재 메이지 히라야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가 740명 재적하고 있는 것 으로 나타나 있다[ 明 治 鑛 業 株 式 會 社 (1957), 社 史, 明 治 鑛 業 株 式 會 社 社 史 編 纂 委 員 會 ]. 또한 半 島 人 關 係 雜 書 類 綴 ( ~ ) 에는 766명 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당시 메이지 히라야마 탄광에서 기록한 서류철인 例 規 綴 에는 같은 시기 903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재적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결국 정황으로 보아 당시 히라야마 탄광에서 직접 작성한 자료인 例 規 綴 에 나타나 있는 903명이 실제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33 식민지 시대 일본 본토의 포로 총수는 1944년 5월에 2만 828명이었고, 1945년 8월에는 3만 2481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1945년 7월 당시 일본 내 탄광노 33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39 례에 걸쳐 연인원 3천여 명을 상회하는 조선인 노동자를 이입하여 사용하 였다. 이 기간 중 초기의 모집 및 비롯하여 징용 방식 등 모든 방법으로 조선인 노동자를 이입하였던 것이다(표 7 참조). 지역을 보면, 강원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지역을 총망라하고 있었 으나 특히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경기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동원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황해도와 사할린 전환광부까지 이입시켜 사용하였다. 또한 이렇게 동원한 3천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 가운데 특히 잔류자가 적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노무동원 이후 도 주 등의 방법에 의해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이동하였음을 말하여주고 있 을 뿐 아니라, 그만큼 열악한 노동조건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히라야마 탄광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 상황을 보면, 철저한 노무 관 리와 노동 통제가 이루어졌다. 즉 1945년 해방 직전에 실시된 노무 관리 조사표에 의하면, 34 특히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관리상의 주안점이 잘 나 타나 있다. 이를 소개하면, {결전하 황국신민( 決 戰 下 皇 國 臣 民 )으로서 군국 ( 君 國 )에 순사( 殉 死 )할 의용봉공( 義 勇 奉 公 )의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단체 동자 가운데 포로의 비율은 3퍼센트에 이르고 있었다. 주지하듯이 당시 포로의 취로는 국제조약상 위법이었다. 그럼에도 저임금구조에 강제 편입된 포로는 열 악한 노동조건에서 노동을 강요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 포로들 은 당시 중국인이나 조선인들과 같은 식민지 노동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우위의 노동조건에 위치하고 있었다. 김민영(1995), 일제의 조선인 노동력 수탈 연구, 한울, 116~117쪽. 34 <자료 12-1> 移 入 半 島 人 勞 務 管 理 調 査 依 賴 의 件 ( ) 및 <자료 12-2> 移 入 半 島 勞 務 管 理 調 査 表 ( ), 平 山 炭 鑛 의 勞 務 管 理 調 査 表 ( ) 참조.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39

340 표 7 _ 히라야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 경과 구 분 연 도 인원 (명) 지 역 잔류자 (명) 비 고 1차 전 남 17 모 집 2차 충 남 31 3차 경 북 16 4차 전 남 82 5차 충 남 41 6차 경남(북) 25 7차 경기도 모집, 관알선 과도기 8차 경기도 41 관알선 9차 충 북 41 10차 전 남 27 11차 전 북 45 12차 경기도 13차 황해도 37 14차 전 남 48 15차 충 북 31 16차 충 남 17차 전 남 18차 전 북 19차 충 남 20차 강원, 충북 21차 사할린 전환자 22차 경기도 징 용 23차 경기도 24차 경 북 25차 경 북 7~11차 잔류자는 429명, 12~15차 잔류자는 227명, 14차~20차 잔류자는 283명임. 각 표에서 재구성. 34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41 생활의 규율을 익혀, 환경순응( 環 境 順 應 )의 생활훈련 및 방첩( 防 諜 ), 나아 가 식료 부족에 의한 식생활의 교정( 矯 正 ), 저축심의 환기( 喚 起 ), 위생의 향 상을 도모하고 일본인 광원과의 친목을 돈독히 하도록 정착지도( 定 着 指 導 )에 노력하고, 비약적 총후생산( 銃 後 生 産 )에 정신( 挺 身 )케 함}이라 되어 있다. 또한 [노무관리연구회]까지 만들어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노무 관리 및 노동 통제를 치밀하게 실시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아무튼 해방 직전 히라야마 탄광의 광부 현황을 보면 표 8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갱내부가 1,259명, 갱외부가 756명으로 합계 2,015명이었다. 그 비율을 보면 갱내부가 62.5퍼센트, 갱외부가 37.5퍼센트였다. 전체 노 동자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는 763명으로 40퍼센트대에 육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 노동자의 갱내부 비율은 특히 높아 49.9퍼센트였다. 반면 조선인 노동자의 갱외부 비율은 17.7퍼센트였다. 이를 통해 해방 직전 히 라야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는 특히 갱내부로 활동했으며, 그 비율이 전 체 갱내부의 50퍼센트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조선인 노동자는 [요( 寮 )]라고 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각각 명칭이 부여되고 있었다(표 9 참조). 각 기숙사에는 요장 및 통역원으로서 지도원이 있었고, 이와 함께 취사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었다. 특히 기숙 표 8 _ 해방 직전 히라야마 탄광의 광부 현황(단위:명) 일 본인 기왕 조선인 이입 조선인 구분 남자 여자 남자 여자 가족 단신 갱내 갱외 <자료 12>에서 재작성.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41

342 표 9 _ 조선인 노동자의 기숙사 현황(단위:명, 퍼센트) 구분 출신지 현재 수 도주 수 출근율 지도원 취사 갱내 갱외 일본인 조선인 남자 여자 讓 和 寮 충 남 振 興 寮 충 북 興 亞 寮 전 북 信 和 寮 경 북 八 紘 寮 경 기 協 和 寮 전 남 계 지도원은 요장 및 통역. 도주수는 최근 3개월간의 월간 숫자임. <자료 12>에서 재작성. 사는 각 출신지별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는 이입 당시 각 출신지별로 동 원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통제상의 용이라는 고려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표 10에서 보듯이 작업시간은 하루 평균 10~12시간 이루어지 고 있었으며, 숙소에서 채굴 현장인 막장까지 이동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 은 30~40분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채굴 현장의 실내온도는 27도로 나 표 10 _ 히라야마 탄광의 노동자 작업조건 작업시간 채굴 현장까지의 시간 현장의 온도 현장의 습도 10~12시간 30~40분 27도 80~85퍼센트 <자료 12>에서 재작성. 342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43 표 11 _ 히라야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수입관계(갱내 직접부 기준) (단위:엔) 구 분 월수입 ( 円 ) 공 제 금 식비 적립 강제저금 각종 보험금 기타 송금 잔금 반년 미만 년 미만 년 미만 <자료 12>에서 재작성. 타나 있는데, 조사 시점이 여름이고 습도 또한 80~85퍼센트로 높았음을 감안하면 매우 열악한 작업환경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갱내에서 직접 생산에 참가한 보통 노동자를 기준으로 해방 직전 조 선인 노동자의 수입관계를 보면(표 11 참조), 우선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는 연수별로 수입이 달랐는데, 채탄 경험이 반년 미만인 노동자의 월수가 엔이었음에 비해 3년 미만의 노동자는 엔이었다. 하지만 식 비, 적립금, 강제저금, 각종 보험금, 기타 등의 명목으로 공제가 되었고, 또 한 조선에 있는 가족 친지들에게 송금을 하였기 때문에 남은 돈은 그다 지 많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35 한편 여기에서 해방 이후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미불임금 및 이에 따 른 공탁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이후 일본의 탄광 현장 35 이처럼 당시 탄광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일시에 많은 돈을 줌으로써 도망의 유인 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또한 이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영업자금으로 유용함 으로써 전시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자금원의 일부이기도 했다. 특히 도망자의 돈은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미불금 등을 운용자금의 일부로 활용하 고 있었다. 古 庄 正 (1992), 앞의 글, 36~38쪽.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43

344 에서는 귀국하는 조선인 노동자의 미지불 급여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 며, 36 이후에도 후생성 노정국장이 지방장관에게 보낸 통첩 등을 통해, 37 미불임금에 대한 조치 사항이 거듭 시달되고 있었다. 예컨대 1946년 말 메이지광업(주) 경리부장(가와카미 도시오[ 河 上 俊 夫 ]) 은 히라야마 탄광을 비롯하여 각 소속 탄광에 재차 조선인 노동자 등의 미불임금에 대한 처리 관련 통첩을 보내고 있다. 38 히라야마 탄광은 실제로 1947년 2월 3일 이즈카[ 飯 塚 ]공탁국에 유가 증권만 공탁을 완료하였는데, 39 그 내용을 보면 40 유가증권의 권면액은 1 만 4570엔으로 국고채권(증제2호) 및 보국채권@저축채권(증제1호) 등이었 다. 41 또한 적법한 위임 없이 제3자에 인도할 수 없었다(미처리금은 35만 2470엔 19전( 錢 ), 미불노동자 수는 1,151명이었음). 이처럼 미처리한 사유는 금 융상의 어려움으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보관예금통장을 보면, 통장 액면 액은 3천 엔을 넘고 있었으며(3,298엔 16전), 저금 종별은 우편저금이었고, 보관 사유는 수취인 도주와 소재 불명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상과 관련하여 실제 이 시기 히라야마 탄광에서 귀국하는 조선인 노동자의 미불 급여에 관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 표 12이다. 즉 527명분 36 <자료 29-2>의 <표 1> 歸 鮮 半 島 人 給 與 未 濟 에 關 한 調 査 ( ) 및 <표 2>의 歸 鮮 半 島 人 給 與 未 濟 에 關 한 調 査 表 참조. 37 <자료 30-1> 朝 鮮 人 勞 務 者 等 에 對 한 未 拂 金 其 他 에 關 한 件 ( ) 참조. 38 <자료 31-1> 朝 鮮 人, 中 國 人 勞 務 者 等 에 對 한 未 拂 金 의 件 ( ) 참조. 39 <자료 34-2> 朝 鮮 人 勞 務 者 等 에 對 한 未 拂 金 其 他 에 對 하여( ) 참조. 40 <자료 34-3> 朝 鮮 人 勞 務 者 等 에 對 한 未 拂 金 其 他 에 關 한 件 ( ) 참조. 41 기타 미불금 및 공탁에 관해서는 <자료 32-2> 朝 鮮 人 勞 務 者 未 拂 金 處 置 에 關 한 件 ( ) 및 <자료 34-1> 朝 鮮 人 勞 務 者 等 에 對 한 未 拂 金 其 他 에 對 하여( ) 참조. 34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45 표 12 _ 히라야마 탄광 조선인의 미불 급여 상황 종별 인원 금액(엔) 비 고 미불금 치거금 , 임금 및 저금 가족수당 기본보급 252 2, 기간 연장 수당 78 23, 기간 재연장 수당 , 가족위문금 , 통제회 특별 수당 , 후생연금 48, 일반원호금 14 3, 합계 , 조선 근로동원 원호회 회비 미지불금 7, <자료 31-2>에서 재작성. 의 임금 및 저금으로서 이른바 치거금으로 놓여 있던 금액은 22만 엔을 넘고 있었으며(22만 1698엔), 기타 금액을 합하면 40만 엔에 이르고 있었 다[기본보급금 252명분 엔, 기간 연장 수당(78명) 2만 3400엔, 기간 재연 장 수당(227명) 1만 3312엔, 가족위문금(223명) 4만 1600엔, 통제회 특별수당(204 명) 3만 엔, 후생연금 4만 엔, 일반원호금(14명) 엔 등으로 총계 1,525명분 39만 엔]. 하지만 이와 별도로 히라야마 광업소는 조 선근로동원원호회의 회비 미납금도 있었다(7509엔에 이르고 있었음) 이처럼 식민지 시대의 일본의 광산이나 공장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에 대한 미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45

346 이처럼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한 재일 조선인의 여러 문제와 함께 현재 에도 공탁 상태로 남아 있는 미불임금은 물론 방치되거나 송환되고 있지 못한 유골 문제 등 많은 문제가 과제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43 아울러 이 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물론 해당 기업에 대해 명백히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이상에서 해방 전후 일본 탄광의 정황과 특히 히라야마 광업소 조선 인 노동자의 고용상태를 둘러싼 여러 문제를 실증적으로 살펴보았다. 하 지만 자료들이 어디까지나 주로 관청 등으로부터의 통첩이나 요청 등을 중심으로 한 것들로, 이에 대해 기업 측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등에 대해 불임금은 전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일본 법무국에 공탁되어 있다. 통상공탁 은 10년이 시효이지만, 조선인의 공탁에 대해서는 법무성이 [시효에 의한 수속 을 밟지 못하도록]이라는 通 達 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것이다. 한 조사단에 의하면 적어도 33만인분, 약 5천 만엔(물가환산액으로 1995년 현재 약 2,900억 엔)의 공탁금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당 시 조선인 노동자들의 공탁금이라는 것은, 해방 후 조선인 징용공의 미불임금 을 회사가 법무국에 공탁했던 것으로, 이는 이후 시효 만료라는 이유로 일본의 국고로 환수되었던 돈이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이에 대한 공탁명부 및 공탁금 을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피공탁자 또한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김 민영(1995), 앞의 글 참조. 43 메이지광업(주) 산하 개별 탄광의 강제동원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들의 피해실 태 등을 조사한 결과(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협조로 열람 한 자료임)가 참고로 됨. 동북아역사재단에 제출된 보고서의 부록[2. 메이지( 明 治 )광업( 株 )계열 탄광 강제동원 피해자 자료 열람 결과] 참조. 자료 296건[불일 치 1건(후쿠시마의 다른 탄광) 제외]을 검토한 결과, 후유장애 3건, 행방불명 11건, 사망 15건 등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피해인정(생존) 120건, 피해인정(사 망) 147건에 해당되었음. 346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47 서는 추가적인 개별 자료의 발굴과 연구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히라야마 탄광의 경우에는, 소화17년8월기이입 조선인노무자송금공( 昭 和 17 年 8 月 起 移 入 朝 鮮 人 勞 務 者 送 金 控 ), 소화19년정 착관계서철( 昭 和 19 年 定 着 關 係 書 綴 ), 정착장려금지급원부( 定 着 奬 勵 金 支 給 原 簿 ) 등이 남아 있으므로 급여, 정착 장려금 등이 어떠한 형태로 지불되 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소화20년반도인해고품의 부( 昭 和 20 年 半 島 人 解 雇 稟 議 簿 ), 소화20 年 11월기갱내부해고부( 昭 和 20 年 11 月 起 坑 內 夫 解 雇 簿 ) 등을 통해서는 당시 핍박했던 일본에서의 탄광 노동력 수급관계 등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아울러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종합 적으로 향후 학제적 공동연구 등을 통해 지속적인 관심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IV.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식민지 시대 조선인에 대한 강제동원을 요구한 것은 기업이었을 뿐 아니라 [모집], [관알선], [징용]이 모두 국가에 대한 기업 의 신청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즉 기업은 명백히 조선인 강제연행@강제 노동의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국가 역시 기본적으로는 기업의 요구에 따라 강제연행@강제노 동 정책을 형성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경찰관과 관리, 내무성 경보국 관리와 [내선]경찰 등 전문적 기술관료와, 그 외곽단체인 협화회를 포용하고 있는 국가가 아니면, 치안대책과 조선 농촌의 노동력 공급 등에 대한 예측을 하면서 강제연행@강제노동 정책을 구체적으로 집행할 수 없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47

348 었을 것이다. 더구나 전쟁 말기가 되면 될수록 조선인 에 대한 국가의 강권적 역할이 비대화하였다. 바로 거기에 기업과 구별해 야 할 국가 독자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업이 요망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기업도 그 책임을 공 유하고 있다. 또한 기업은 기업 내부에서의 학대와 차별에 대한 책임도, 협 화회와 협력하여 기업 내부에서의 조선인 관리방식을 만들어 보급시킨 국 가와 함께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본의 국가와 기업이 조선인 강제동 원의 역사를 은폐하고, 한일협정의 체결에 임하여 그 피해자에 대한 보상 을 애매하게 하고, 회피하였기 때문이다. 그 전후 책임은 전전 책임과 똑 같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특히 개별 기업의 책임을 되물어야 할 것이다. 메이지광업은 식민지 시대 일본 기타큐슈[ 北 九 州 ] 지역 최대의 기업 집 단을 이룬 야쓰가와계[ 安 川 財 閥 ]의 기반회사로, 자세한 자료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다. 특히 메이지 히라야마 광업소는 1939년 이른바 [전 시 노무동원]을 개시한 이래, 실로 25차례에 걸쳐 연인원 3,242명의 조선 인 노동자를 [집단 이입]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1939년 이른바 [강제동원]이 개시된 이래, 메이지광업이 발간한 사사 ( 社 史 ) 에도 그 숫자의 일부가 나와 있는 것처럼, 1945년 3월 말 현재 메이 지광업 산하 탄광에서 최소한 7,864명이 재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 었다, 이는 전체 광부 수의 31.9퍼센트에 이르는 숫자이다. 특히 아카이케 탄광에는 1,969명이 재적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규슈의 히라 야마와 홋카이도의 쇼와 탄광에는 각각 197명, 195명 등 포로를 노동자 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식민지 시대 일본의 탄광에 노무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에게는 확실히 348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49 부당한 대한 학대, 엄한 노무 관리, 민족 차별, 황국신민화의 강행 등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는 메이지광업 (주)에서도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또한 메이지광업(주) 산하 개별 탄광의 강제동원 피해자 가운데 생존 자들의 피해실태 등을 조사한 결과를 검토한 결과, 후유장애 3건, 행방불 명 11건, 사망 15건 등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피해인정(생존) 120건, 피해인정(사망) 147건에 해당되었다. 이처럼 해방 이후 여러 정황으로 귀국하지 못한 재일 조선인의 문제 와 현재에도 공탁 상태로 남아 있는 미불임금, 유골 송환 문제 등 많은 문 제가 과제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히라야마 탄광의 경우 미불임금 등 일 부 자료가 확인되었는데, 최근 진행되고 있는 공탁금 관련 한일 간 협의 결과에 따라 추가 자료가 확보되면 별도의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니시키와 히라야마 탄광의 경우를 살펴보았지만 기타 탄광의 개 별 사례를 모아 메이지광업 전체의 기업 책임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 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서는 향후의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개별 기업의 책임 349

350 참고문헌 古 庄 正 (1968), 在 日 朝 鮮 人 勞 動 者 の 賠 償 要 求 と 政 府 および 資 本 家 團 體 の 對 應, 社 會 科 學 討 究 31-2, 早 稻 田 大 學. 古 庄 正 (1992), 朝 鮮 人 强 制 連 行 問 題 の 企 業 責 任, 經 濟 學 論 集 24-2, 駒 澤 大 學 經 濟 學 會. 古 庄 正 (1993), 日 本 製 鐵 株 式 會 社 の 朝 鮮 人 强 制 連 行 と 戰 後 處 理 - 朝 鮮 人 勞 務 者 關 係 を 主 な 素 材 として, 經 濟 學 論 集 25-1, 駒 澤 大 學 經 濟 學 會. 古 庄 正 (1993), 强 制 連 行 の 企 業 責 任 - 徵 兵 された 朝 鮮 人 は 訴 える, 創 史 社. 김민영(1994), 1940년대 일본 석탄산업의 노동 사정과 조선인 노동자의 [집단이 입, 경제사학 제18호, 경제사학회. 김민영(1995), 일제의 조선인 노동력 수탈 연구, 한울. 김민영( ), 1940 年 代 初, 日 本 石 炭 鑛 業 聯 合 會 所 屬 炭 鑛 의 朝 鮮 人 勞 動 者 募 集 狀 況 - 肥 筑 地 區 ( 福 岡, 佐 賀, 長 崎 )를 中 心 으로, 한국동서경제연구 제8집, 한국동서경제학회. 김민영(1998), 해방 전 일본 탄광의 한국인 노동자(1941~1942) - 평산광업소의 예규철 자료를 중심으로, 국제지역연구 제2권 1호, 국제지역학회. 김민영(1998), 해방 전후 일본 탄광의 정황과 조선인 노동자의 고용상태 - 평산탄 광의 반도인관계잡서류철 ( ~ ) 검토, 경제사학 제25 호, 경제사학회. 明 治 鑛 業 株 式 會 社 (1957), 社 史, 明 治 鑛 業 株 式 會 社 社 史 編 纂 委 員 會. 朴 慶 植 (1978), 朝 鮮 人 强 制 連 行 の 記 錄, 未 來 社. 北 海 道 炭 鑛 汽 船 株 式 會 社 (1958), 石 炭 國 家 統 制 史. 山 田 昭 古 庄 樋 口 雄 一 (2005), 朝 鮮 人 戰 時 勞 動 動 員, 岩 波 書 店. 守 屋 敬 彦 (1996), アジア 太 平 洋 戰 爭 下 の 朝 鮮 人 强 制 連 行 と 遺 家 族 援 護, 道 都 大 學 紀 要 社 會 敎 養 學 部 第 15 號. 長 野 坪 內 安 衛 (1990), 石 炭 史. 前 田 一 ( ), 特 殊 勞 務 者 の 勞 務 管 理, 山 海 堂 出 版 部. 350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51 Abstract Japanese Colonial Rule and Colonial Modernity The Japanese Imperial Authorities Survey Project of Korean Traditional Customs, and the nature of the Customary Law of the Colonized region Lee, Seungil The Customary law established by the Japanese Governor General of Chosun during the Occupation period, came to feature some various characteristics during the process of custom survey projects and legal validations. The Japanese authorities conducted text researches and regional surveys, but invested much more efforts into the latter. Regional surveys were comprised of interview sessions with the Koreans, so the interviewed materials were quite adequately mirroring the contemporary living habits or customs of the Korean public at the time, of the Daehan Empire Abstract 351

352 period. But the terminology utilized in the survey sessions was from the Japanese Civil law, and subsequently a creation of a hybrid between the Chosun customs and the Japanese Civil law ensued, featuring elements from both sides. In other words, a Customary law of a colonized land was being established in the process. The customs surveyed by the Investigation authorities (the Beobjeon Josa-guk) were inventoried in the Customs Survey Report, then went through a process of legal validation under the authority of the Japanese Governor General of Chosun, and were finally established in the form of a formal Customary Law. Due to the principles laid out by the Governor General itself, during the 1910s the Customary law was still strictly based upon the surveyed elements of the Chosun customs. Yet during the 1910s and 1920s the Governor General was forced to revise some of the contents of the Customary law because the customs and habits of the Chosun people were going through some changes themselves, due to the social changes of the ending days of the Daehan empire and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Part of the Chosun customs was showing some divergence into so-called {new} customs and {old} ones. The Governor General also had to adjust the legal regulations to address such changes, and chose to neglect the old customs while legally validating the new ones, accepting the new qualities which came out in the modernization process of Chosun customs. 352 Japanese Colonial Rule and {Colonial Modernity}

353 Yet at the same time, even when the Chosun customs were first legally validated by the enactment of the Chosun Civil Codes (the Chosun Minsa-ryeong/조선민사령) in 1912, the authority which validated all this was the Japanese Governor General of Chosun, so a merging between some concepts from the Japanese Civil law and elements from the Chosun customs was an inevitable, given fact. And also due to the Japanese authorities] policy of assimilation, a Customary law of a colonized land, which was not quite Japanese Civil law in nature and not quite an embodiment of Chosun customs in contents, was created. As a result, the nature of the Chosun Customary Law became a little bit complicated, featuring traditional qualities, colony traits and modern properties all at the same time. While there were cases in which the traditional Chosun customs were legally validated in its original form and contents, there were also cases in which such forms or concepts were documented in altered shape and form because of the introduction of the Japanese Civil law elements. And at the same time the Law itself was also being updated to match the changes which were happening within Chosun customs and habits. Such a complicated nature of the Customary law was also mirroring the contemporary situation of Chosun at the time as well. Later on, the Customary law of Chosun continued to be subjective to changes happened inside the Chosun society and the legal demands from the Governor General]s policies. Abstract 353

354 keywords _ the Survey project of Traditional Customs, Customary Law, the Chosun Civil Code, the Japanese Civil Law, statute law, modernity A Study on relations between Gyeongseong Jinja ( 京 城 神 社 ) and Community in 1910s to early 1930s Kim, Daeho Gyeongseong Jinja ( 京 城 神 社 ) was established for Japanese residents on a small scale at Park ( 倭 城 台 公 園 ). This showed that Japanese Emperor plundered Korean territory. The Rite for the souls of dead ( 招 魂 祭 ) was held at the Park in those days. Gyeongseong Jinja had been extended since early 1910s and then the parishioner organization worked systematically. Especially, Japanese religious event ( 祭 ) was held to show off their superiority and emphasized their identity. The operating expenses of Gyeongseong Jinja were imposed on the Korean people. However Japanes Emperor failed to joint them in the religious system. Since Joseon Singung ( 朝 鮮 神 宮 ) was established in the mid-1920s, the power of Gyeongseong Jinja consolidate in terms of religion. Gyeongseong Jinja was trying to absorb the Korean people by some means or other. At the end of the 1930s, Gyeongseong Jinja 354 Japanese Colonial Rule and {Colonial Modernity}

355 became the center of religious shrine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keywords _ Gyeongseong Jinja( 京 城 神 社 ), Joseon Singung( 朝 鮮 神 宮 ), Government-General of Joseon( 朝 鮮 總 督 府 ), Namsan( 南 山 ), Seoul, Ujiko( 氏 子 ), Ujikosoudai( 氏 子 總 代 ), Matsuri( 祭 ), Policy of religion, Kunitama( 國 魂 神 ), Amateras( 天 照 天 神 ) A Criticism on theory of manpower development in the Economic growth argument Chung, Byungwook The recognition of the colonial distortion and class consciousness disappeared and the peasant-society theory appeared in the theory of manpower development. But peasant-society theory is nothing but guess and is short of evidence up to now. The theory of manpower development is based on the origin-consciousness that the good and bed of the presentday Korea have its origins in colonial period. But the origin- consciousness has several problems. First, It overestimates colonial experience. Second, It only looks at one side of colonial experiences. Third, It gives emphasis to colonial origins and the paradox of war (Pacific War), however makes light of Liberation and Abstract 355

356 factors after liberation. Fourthly, It put a stress on human factor, but thinks little of structural factor. keywords _ Economic Growth, Manpower Developrment, Originconsciousness, Colonial Experience A Critical Review about Colony Recognition of the Ecomomic Growth Argument Mun, Youngjoo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critically to review the economic growth argument. The Economic growth argument recognizes colonial economic change as modern economic growth. and The Economic growth argument recognizes colonial economic growth as the origins of economic growth in South Korea. Likewise, The Economic growth argument is history recognition that The 20th century korean economic history is the formation, settlement, extension of a free market economy System as a foundation of modern economic growth. The Economic growth argument studied growth indicators of the colonial economic according to the System of National Accounts (SNA). The System of National Accounts are a efficient means of the writing a long-term statistics. However, there are limits as a way 356 Japanese Colonial Rule and {Colonial Modernity}

357 to understand of the colonial economy reality. Ethnic discrimination and inequality growth of the colonial reality vanishes. Only the modern free market economy System remain. Therefore, The Economic growth argument is missing the Universalism of ignoring historical context. Because of this, the purpose and intention of pushing colonial economic growth of the Japanese imperialism can not understand. keywords _ Economic Growth Argument, modern economic growth, free market economy system, Ethnic discrimination, development as freedom The Origin of Historical Recognition on the Economic Growth and Contradictory Recognition in Modern history Jung, Taehern As democratization is systematized and the economic strength rises the modernism of the economic growth theory which was taken an illegal occasion reveals its intrinsic attribute which takes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colonial historical science in order to make an aggression carving a seal as a modern civilization depending on the theory of Anti-North Korea. Abstract 357

358 In a historical recognition on the economic growth theory they stress a market is a modern civilization, while they disregard the fact that the subject to design and run the market economy is a nation, and also they argue that Chosun people was able to grow of economy under the colonial rule. They were fundamentally indifferent to issues for restoration of a nation]s sovereignty. But the reason why the Korean economy showed an economic growth with an inside accumulation is that the state power have sense of the people, so that they had to establish an economic policy under conditions of restoration of a nation]s sovereignty firstly though the nation is under some limitation of a foreign subordinate relationship. The national legitimacy is not itself of existence of power but members make it. And the members in the process of such matter have an identity. The Korean legitimacy can not be established as the theory of Anti-North Korea but can be established as its own. For the sake of it, the Korean legitimacy, the history on the founding of Korea has to be critically examined from different angles thoroughly to meet a grown cognition of the members. We do not form the foundation of the theory of Korean legitimacy until we would solve an internal struggle for several problems before and after the founding of Korea. keywords _ economic growth theory, capitalism, colonial capitalism, nation, market, new classic 358 Japanese Colonial Rule and {Colonial Modernity}

359 A Criticism on the Argument about the Improvement of Living Standard Hur, Youngran The theory of colonial modernization, which started from the theory of growth origin in Korean economy, has passed by the theory of colonial industrialization and that of economic growth and {evolved} into the {theory of improvement of living standard.} The previous study focused on observing the quantitative changes to the economic areas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strived to confirm the human resources and physical foundation that made Korea]s successful capitalization today possible in a historical sense. Emerging in recent years, the {theory of improvement of living standard} doesn]t discuss the results or effects of colonial experiences on the later generations but makes an active evaluation of the people]s lives during the colonial times. Physical living conditions are the objective conditions that decide the overall satisfaction of human beings. Considering the complexity of human experiences, however, any discussions about life should keep in mind all the areas including politics, economy, and culture and reflect relative criteria as well as absolute ones. In that vein, identifying an increase to the GDP per capita or the Abstract 359

360 amount of consumption per capita with the {improvement of living standard} is an attempt to ignore those changes and a mere repetition of the same words representing quantitative economic changes. It]s critical to make careful observations about how the total growth is allocated to the members of the society and what kind of impacts the social conditions that brought about the results have on their lives. One can talk about the changes to living standard only when their experiences as the subject can be reproduced through them. keywords _ colonial modernization, colonial modernity, modernization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eory of colonial exploitaion, theory of improvement of living standard, colonial experiences Forced Mobilization of Koreans under the Japanese Imperialism and Responsibility of Corporations - Meiji Mine(Co.) Kim, Minyoung There are many researches that had dealt with forced mobilization under the colonial period, which was started from 360 Japanese Colonial Rule and {Colonial Modernity}

361 conformation of facts with documents and testimony, but the most important and ultimate issue might be a {redress and reparation.} I had analyzed the corporations] responsibility and the real state theoretically and empirically centering around 10 coal mines managed by Meiji Mine(Co.) which was a representative business group in Yaskawa in Kyushu and had mobilized Korean labors over 30 times, especially, from 1939 to 1945 (till 31st, March, 1945, there were 4,864 Koreans). Additionally, I could confirm that the corporations had intended to prepare for the foundation of resources for the war by plundering a large quantity from colony labors, because they were faced with insufficiency of labors due to maintenance of lowwaged structure of Japanese capitalism which was collapsing, and mobilization for the war. Hereafter, it is necessary for the research of individual corporations that they have to take action to compensate that labor. keywords _ forced mobilization, responsibility of corporations, redress and reparation, recruits, allocations by government, drafts Abstract 361

362 찾아보기 교과서 278, 304 구 관급제도조사위원회( 舊 慣 及 制 度 調 査 委 員 會 ) 62 ㄱ 구관심사회( 舊 慣 審 査 會 ) 62 국가신도( 國 家 神 道 ) 73 국 민계정체계(System of National Accounts, 가토신사 168 강 제동원 319~324, 329, 348, 349 강제연행 337, 347 개발 237 개별 인간 262 거시적인 장기 경제통계 305 경성공원( 京 城 公 園 ) 83 경성부청 147 경 성신사( 京 城 神 社 ) 76~78, 88~93, 98, 100~104, 109, 112, 113, 116, 118, 119, 121, 123 경 제성장론 217, 247, 248, 252, 254, 255, 257, 261, 264~266, 268, 273~276, 280, 281, 283, 289, 294 SNA) 218 국폐소사( 國 幣 小 社 ) 142 국혼대신 155, 156 국혼신( 國 魂 神 ) 150~152, 153~157, 176 군위안부 319 권번( 券 番 ) 117, 121, 122 근대자본주의 287 근 대적 경제성장(m o d e r n e c o n o m i c groeth) 220, 222 근대주의 245, 246, 257 근로보국대 324 기업책입 322, 349 ㄴ 공탁 344 공탁금 349 관습 30 관습법 31 관습조사 사업 13, 28 관습조사보고서 44, 59 관알선 319, 323, 326, 328, 338, 339 남산공원 80, 135 남 산대신궁( 南 山 大 神 宮 ) 78, 82, 84~89, 116, 174 노기신사 160, 167, 176 노무자 319 농업정체론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63 농촌의 빈곤화 309 능력 56 ㄷ 법무보좌관 25 법전조사국 26 보상 319 부동산법조사회 25, 26 부아소나드(Boissonnade) 18 단군( 檀 君 ) 151, 153, 154 단선적 기원론 205, 206, 209 대안교과서 247, 313 대정친목회 108 불평등조약 23 비지론( 飛 地 論 ) 312 ㅅ 데라사키 야스히로[ 寺 崎 康 博 ] 300 ㅁ 사법권 위탁조약 운동 109, 115 상속 56 마르크시스트 246, 257, 260 마츠리[ 祭 ] 88, 91, 116, 139, 141, 175 메디슨(Maddison) 296 메이지천황 136, 137, 151, 167 모집 319, 325, 347 미불금 319, 322 미조구치 히데유키[ 溝 口 敏 行 ] 300 민사관례유집( 民 事 慣 例 類 集 ) 17 민족 차별 230 ㅂ 생활수준 293, 304~306 생활수준 논쟁 298 생 활수준 향상론 289, 291, 293, 294, 296, 297, 307, 313 성장 237 소농사회 210 소농사회론 203, 204 시장만능론 267, 269, 280 시정개선협의회( 施 政 改 善 協 議 會 ) 24 시정오년 기념 조선물산진흥공진회 118 식민지 경험 206, 207 식민지 공업화 293 반북론 278, 281, 283 발전 237 식민지 공업화론 289 식민지 근대화론 215, 288, 289, 292, 310 찾아보기 363

364 식민지 수탈론 215, 287 식민지 시혜론 287 식 민지 자본주의 235, 252, 254~256, 292 ㅈ 210 신고전파 경제학 266, 267 신사( 神 祠 ) 96, 97, 98, 169 신사사원규칙( 神 社 寺 院 規 則 ) 94~96 신사참배 73, 310 신전결혼식( 神 前 結 婚 式 ) 114, 115, 142 실지조사( 實 地 調 査 ) 31 씨자( 氏 子 )조직 88, 98, 99 씨 자총대 99~109, 118, 126, 141, 144, 145, 147, 159, 175 씨자총대회 104, 144, 145 ㅇ 자기개발 209 자본주의 경제 248, 249 자유로서의 발전 238 재판소구성법 25 재판소구성법시행법 25 재판소설치법 25 전국민사관례유집( 全 國 民 事 慣 例 類 集 ) 17 전국신직회 130 전적조사( 典 籍 調 査 ) 31 전후 책임 348 전후처리 319 절대적 수탈론 307 아마테라스 86, 87, 136, 137, 151~153, 156 야스쿠니신사 84~85 엥겔계수 313 영사재판권 16 왜성대공원 80, 83, 92, 175 용두산신사 142 원시적 수탈론 261 이나리사 160~162, 164, 165, 176 이세신궁 172 이토 히로부미 24 인 력개발론 188~196, 201~203, 205, 209, 정동연합회 145 정동총대( 町 洞 總 代 ) 105, 106, 146 정미 7조약 25 정체성론 245, 271, 273 정통론 278, 283 정통성론 276 제국주의 시혜론 297 조선구관제도조사사업개요 13 조선민사령 52 조선민사령안 49 조 선신궁( 朝 鮮 神 宮 ) 73, 77, 84, 135, 136, 364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365 138~142, 151, 154, 175, 176 ㅍ 조선신직회 132, 133, 134 조선인의 자기개발 297 조선총독부 239, 252~254, 268, 270, 304 조선총독부 신청사 147 징용 319, 321, 323, 339, 347 포교규칙( 布 敎 規 則 ) 94 포스트모던 담론 264 ㅎ ㅊ 하치만궁 160~162, 166, 172, 176 하치만사 160 창덕궁 147 천황제( 天 皇 制 ) 이데올로기 76, 77 초혼제( 招 魂 祭 ) 84~86, 113 치외법권 23 친족 56 ㅌ 한강신사 168 한국 법전 22, 46, 47 한양공원( 漢 陽 公 園 ) 83, 135, 136 헤이그 밀사사건 25 황도강습회( 皇 道 講 習 會 ) 133~135 황전강구소 157 타율성론 245, 271, 273, 탈근대론 264~266 탈민족 문명사 225 텐만궁 160~162, 164, 172, 176 텐만시 162, 163 토지조사사업 269, 273, 274 통감부재판소 48 찾아보기 365

366

367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39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적 근대 초판 제1쇄 인쇄 2008년 12월 31일 초판 제1쇄 발행 2009년 1월 9일 지은이 이승일, 김대호, 정병욱, 문영주, 정태헌, 허영란, 김민영 펴낸이 김용덕 펴낸곳 동북아역사재단 등 록 호(2004년 10월 18일) 주 소 서울시 서대문구 의주로 77 임광빌딩 전 화 팩 스 c 동북아역사재단, 2008 ISBN * 이 책의 출판권 및 저작권은 동북아역사재단이 가지고 있습니다. *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어떤 형태나 어떤 방법으로도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 책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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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제 정 1973. 2. 28 개 정 2010. 3. 19 定 款 삼성전기주식회사 http://www.sem.samsung.com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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