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연구사의 책과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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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록연구사의 책과 영화 이야기 아나스타샤

2 소개글 기록연구사 이숙경의 책과 영화에 관한 글 모음

3 목차 김제동은 왜 이 말에 깨달음을 얻었을까? 9 직장에서 실수했을 때 바로 사과하지 말라고? 13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이거나 줄일 수 있다고?! 17 대선후보의 거짓말, 5초면 알 수 있다 22 철학은 늑대로부터 시작되었다 26 알레르기 있다고 수당? 이런 나라도 다 있네 31 한중일 역사전쟁의 해답, '발칸'에서 배워라 36 광해군이 개혁군주라고? 40 봉준호가 묻는다. 경찰은 그때 무얼 하고 있었나. 45 음식물 쓰레기보다 약간 더 나은 미국산 햄버거? 50 반복된 집단학살, 하나님도 가해자였다? 55

4 유럽도 몰랐던 나일강의 발원지가 조선의 지도에? 61 뿌리깊은 종기에는 돼지 똥이 특효? 65 열 명의 멋진 언니들과 함께 이 밤을 70 에너지도 셀프서비스 되나요? 74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우표 속에도 담겼네 78 돈을 먹고 살 수는 없잖아 83 5천만원으로 다락방 있는 목조주택을... 이건 기적 87 부인이 무서워? 수천 년 동안 이런 남편은 없었다. 93 니들이 돈 맛을 알아? 98 돼지 귀, 코, 고슴도치... 이게 다 먹는 거라니까요 103 열일곱, 너도 늙는다 107

5 공정무역인증제도, 정말 공정할까? 113 보는 것만 믿지 마라, 정치는 마술이다 117 토론 피하는 정치인들... 이 책 읽고 정신 차리세요 121 아련한 첫사랑...아니, 늙어가는 첫사랑 125 '복수해줄게 부탁 들어줘'...수렁에 빠진 남자 130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비결, 해파리에게 배워 134 농사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 138 제임스 본드와 국회의원, 사는 법은 똑같다. 142 배 나온 아저씨와 스트립걸의 동거, 뻔하다고요? 147 금, 많다고 좋다는 편견은 버려~ 151 진짜 테러범은 도대체 누구일까? 155

6 늘 불안한 당신...가끔 별을 보긴 해? 160 가카, 사람 물로 보다가 큰코다쳐요 164 옆 사람은 잘도 먹는 청양고추, 왜 나는 매울까? 168 <마이웨이>, 소재는 괜찮은데 스토리가 아쉽네 172 오렌지? 어륀지? 헤매지 말고 이 책 보세요 177 부드럽고 아름다운 몰락을 위하여 181 정의사회 구현? 너나 잘 하세요~ 185 일이 즐겁다는 직딩은 왜 하나도 없을까? 188 닥치고 읽으라니까 192 얌마, 도완득!...이럴 줄 몰랐다. 196 미술과 과학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

7 용서를 강요하지 마세요 206 도끼에 찍히고도 행복한 이유 210 발에 땀나게 춤춰요. 지구가 살아나요. 214 소녀 가슴에 뛰어든 소년, 참 설레네. 218 거품 물고 쓰러진 그녀, '손' 때문이었다. 222 우연과 반복의 공간, 북촌으로의 여행 227 다이내믹 코리아는 어디 있나요? 231 버킷 리스트 작성해 보실래요 235 푸르른 소금밭에서 길을 잃다 240 전설의 세계, 아가르타를 아시나요? 244 인류의 멸망은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248

8 '학살'의 대명사 나치, 그 원조는 미국이었다 253 생각없이 보라는 영화... 마지막 자막에 '헉' 257 목구멍 속에 박힌 칼, 당신은 어떻게 빼낼 텐가 262

9 01 김제동은 왜 이 말에 깨달음을 얻었을까?

10 김제동은 왜 이 말에 깨달음을 얻었을까? :37 하승창의 <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능력이 세계 꼴찌일까?> 단지 지능이 조금 모자란다는 이유로 짓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힌 지적장애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7번방의 선물>이 관객수 천백만 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휴먼코미디에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낸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불합리한 사회적 구조와 편견 속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갖지 못한 우리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반성심리 때문 아니었을까? 넘 어진 사람이 있으면 일으켜 도와주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은 이제 고릿적 이야기다. 오히려 못 본 척 지나치는 게 상책인 시대가 되었다. 바 로 용구(류승룡 분)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오늘날을 이른바 '불신, 불안, 불통, 불행'으로 점철된 '4불의 시대'라고 한다. 믿음은 사라지고, 소통은 안 되고 그래서 불안하고, 불행한 시대 가 오늘날이다. 뉴스란을 들여다보면 하루에도 몇 건씩 자살 소식이 들린다. 모두들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며, 미래를 불안하게 여기는 시대 가 바로 지금이다. 그렇다면 이 불안하고 불행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방법이 있긴 한 걸까? 이 답 답한 물음에 해답을 제시하는 책이 있다. 바로 <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능력이 세계 꼴 찌일까?>(이하 <왜 우리는>)(상상너머)이다. 사람들이 불안하고 불행한 이유는 소통이 안 되고 믿지 못하여 혼자의 세계에 갇힌 탓이니 더불어 마음을 열고 사는 것이 정답이 다. <왜 우리는>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이자 행동하는 양심이라 불리는 12명의 멘토들 이 불신과 불통의 시대에 불안과 불행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바로 이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한 네 명의 강연과 이학영, 송호창 국회의원을 비롯한 여덟 명의 대담을 시민운동가 하승창이 엮고 정리했다. <왜 우리는>은 이들의 깊이 있는 사유와 인문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분석하고 해법을 제시한다. 그동안 우리가 확고부동하게 믿고 있던 가치관 이었던 '소유의 시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전하는 <왜 우리는>을 통해 혼자만의 세상이 아닌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능력이 세계 꼴찌일 까?> c 상상너머 고 자란다는 것이다. 국격은 경제력이 아니라 신뢰로 높이는 것 첫 번째 강연자로 나선 박원순 서울시장은 불신의 시대를 돌아보며 신뢰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신뢰야말로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가장 큰 자산이며, 그 신뢰는 바로 용기를 먹 김제동은 왜 이 말에 깨달음을 얻었을까? 10

11 그 예로 들려주는 것이 바로 지난 2011년 노르웨이 폭탄 테러 희생자 추도식에서 총리가 한 연설이다. 노르웨이 총리는 추도사에서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입니다"라고 말했다. 천안함 침몰사건에서도 보았지만, 우리나라라면 당연히 "강경 대응하겠다"라거나 "발본색원하겠다"라고 했겠지만, 노르웨이 총리는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적 발언을 지양하고 가장 본원적인 '인간애'와 '개방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박 시장은 이처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과 신념을 잃지 않고, 사회 전반에 증오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는 총리의 말에 힘입어 노르웨이 국민들이 하나가 되어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쳐부수자"와 같이 즉각적인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말보다, 당장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인간애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말고 확대하 자"라는 사회지도층의 말이 훨씬 용감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용기가 우리 사회의 신뢰를 장기적으로 회복시켜주며, 생면 부지의 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하는 일을 막기 위한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박시장은 힘주어 말한다. 신뢰는 용기를 먹고 자라며 한 사회에서 구성원 간의 신뢰는 이를 통해 쌓이고, 또 국격은 이렇게 해서 높여가는 것이라는 박 시장의 이야기 는 마치 경제력이 국격이라고 굳건히 믿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하다. ' 맛있게 드세요' 가 아니라 ' 맛 보아주세요' 지난 25일 대통령 취임식 취임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과 '행복'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굳이 취임사에서 행복이란 말을 강조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그것은 아마도 이 시대가 그만큼 불행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불행할까? 방송인 김제동이 진단하는 불행의 이유는 사람들이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불확 실한 미래 때문에 전전긍긍 하느라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고 불행하다는 얘기로, 그는 이것을 남녀 간의 사랑에 빗대어 얘기한다. 사랑하는 것은 내 마음이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상대의 마음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안달복달하는 것이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즐겁게 하고, 내 힘을 벗어난 나머지는 기꺼이 놓아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날 쫓아다니면 스토커라고 욕하면서도, 반대로 나의 사랑을 저쪽에서 외면하면 내 순정을 몰라준 다고 원망을 한다. 이에 대해 김제동은 고백은 하되 결정은 그쪽에다가 맡겨두라고 간단명쾌하게 말한다. 상대의 마음을 강요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는 걸 인정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야 불안을 걷어낼 수 있고, 내가 불행 하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식사 때가 되면 흔히들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잘못이다. 템플스테이에서 김제동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시는 분은 '맛있게 드세요'가 아니라 '맛 보아주세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모든 사람이 부처'라고 생각하며 정성껏 음식을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몫이지만, 그 음식을 먹고 맛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은 상대방의 몫이므로 강요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이 말에서 김제동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왜 우리는>에는 지나친 경쟁과 물질주의에 빠져 힘들고 어려운 이 시대를 나 혼자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함께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여러 멘토들의 고민과 해답들이 담겨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삶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안정된 삶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를 정치 목적으로 삼는 이학영 의원의 고민 김제동은 왜 이 말에 깨달음을 얻었을까? 11

12 이나, "따뜻한 피자보다 안전한 피자가 더 맛있다"고 얘기하는 청년유니온 1기 위원장을 지낸 김영경의 고민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우리 사회에는 나에게 적용하는 기준과 남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다르고,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논어에 나오듯이 ' 己 所 不 欲 勿 施 於 人 (기소불욕물시어인)'한다면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가 훨씬 수월하고 즐겁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능력이 세계 꼴찌일까?>, 하승창 엮고 씀, 상상너머 펴냄, 2012년 11월, 14,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김제동은 왜 이 말에 깨달음을 얻었을까? 12

13 02 직장에서 실수했을 때 바로 사과하지 말라고?

14 직장에서 실수했을 때 바로 사과하지 말라고? :24 프랭크 파트노이의 <속도의 배신> 한국 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빨리빨리 문화'다. 무슨 일이든 '빨리 빨리'를 빼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딛고 초고속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된 배경에는 이런 '빨리빨리 문화'가 긍정적으로 작용한 면도 있겠지만, 한국인들은 급해도 너무 급하다. 화장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바지 지퍼부터 내리고, 볼 일이 끝난 후 지퍼를 채 다 올리기도 전에 화장실 문을 나서는 남성분들 때문에 민망한 경우를 겪는 건 예삿일이다. 한국인의 이런 급한 성격을 부추기듯 TV는 물론 영화관과 거리 곳곳에서도 '빠름~ 빠름~'을 부르짖는다. 물론 '빨리 빨리'의 추구가 한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산업화시대를 지나오며 '현대는 속도전'이라는 말이 전 세계를 몰아쳤다. 빠른 것은 느린 것에 비해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며 더 많은 이익을 보장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빠른 것이 정답일까? '빠름 빠름'을 외치며 속도전으로 밀어붙인 '4대강 사업'은 22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었지만 총체적 부실로 판명 났고, 곳곳에서 그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다. '사고 공화국'의 오명을 안겼던 90년대의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백화점 사고 역시 '빨리빨리 문화'가 만들어낸 대 표적인 예다. "모레 해도 되는 일을 왜 내일까지 끝낸단 말인가?"라고 비판하던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불만처럼 도대체 왜 우리는 기다림과 늦춤, 미 직장에서 실수했을 때 바로 사과하지 말라고? 14

15 룸을 모른단 말인가. 공자는 논어에서 '욕속즉부달( 欲 速 則 不 達 )' 즉 '빨리 하고자 하면 도달하지 못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프랭크 파트노이의 <속도의 배신>(추수밭 펴냄)은 제목 그대로 빠른 속도가 성실과 효율의 상징이며 이익과 성공을 보장한다는 일반의 믿음 을 배신한다. 즉 느린 건 게으름과 비능률의 표상이며 손해와 패배로 이어진다는 생각에 반기를 든 것이다. 2004년 <전염성 탐욕>(필맥 펴냄)으로 월가의 위기를 예견했던, 미국 샌디에이고대 법학 경제학 교수이자 금융 전문가인 저자는 의사결정과 시간을 다룬 심리학, 행동경제학, 신경과학, 법, 금융,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 성과를 분석한다. 그리고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늦춤'과 '미룸'의 가치를 새롭게 조망한다. 원제 <WAIT-THE ART AND SCIENCE OF DELAY>가 말해주듯 이 책은 늦춤의 기술과 과학을 통찰한다. 저자는 빠름을 추구하는 속도전의 시대에 오히려 늦추고 미루는 것이 의사결정에서 더 현명한 선택 이라고 주장한다. 사과는 ' 늦춤의 미학' ', 미루는 것이 정답이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즉시 사과를 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잘못을 하면 즉시 사과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아니란다. 복잡한 지 하철에서 타인의 발을 밟는 것처럼 의도가 전혀 없는 단순한 실수가 아닌 이상, 사과는 즉시하면 안 된다. 사과에도 타이밍이 있기 때문이다. 사과는 늦춤의 미학이다.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 잘못을 하거나 직장에서 다시 주워 담고 싶은 말 실수를 저질렀을 때의 교훈은, 오늘이 아닌 내일, 또는 지금 당장이 아닌 몇 시간 후에 사과를 한다면 피해를 입은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상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사과를 늦추어서 친구나 친척, 동료가 반응하고 느낌을 말할 기회를 가지며 내 후회를 들어 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하는 것보다는 미루는 것이 정답이다. (본문 186쪽). 잘못을 한 후 즉시 사과를 하는 것은 사과의 효과가 떨어지고 부정직해 보일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몇 시간이든 혹은 며칠이든 얼마간 의 시간이 흐른 뒤 사과하는 것이 더 진정성 있고, 사과 받는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사과는 즉시 하는 것보다 늦추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곧바로 사과하는 것보다는 타이밍을 생각해 봐야 한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의 말을 들은 후, 잠시 멈추고 언 제, 어떻게 다음 단계를 취할지 생각한 다음, 정황을 설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시간을 가진 후 가능하면 가장 늦게, 미안하다고 사 과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너무 뜨겁거나 차갑지 않고 따뜻하게!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은 생산성과 효율성에 강박관념이 있기 때문에 미루는 것을 싫어하고, 심지어 미룸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그 래서 항상 책상 앞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와 같은 격언을 붙여두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하지만 이런 부지런함에 대한 강박관념이 항상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고대 이집트와 로마인들은 오히려 미루는 것을 유용하고 현명한 일로 여겼다고 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18세기 중반까지도 미루는 것을 문 제시하는 것은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명사들 중에는 상습적으로 할 일을 미뤘던 사람들이 많은데, 아우구스티누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애 거사 크리스티,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대표적인 예다. 그들은 서둘러서 일을 빨리 끝내기보다는 미룸을 통해서 스트레스나 다른 문제를 겪지 않고 많은 훌륭한 일들을 성취해 낼 수 있었다고 한 다.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여, 저를 정갈하게 해 주소서. 그러나 오늘 당장은 아니 되옵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에서 미룸은 항상 있어 왔으며, 어떤 학자들은 미룸을 인간 본성의 중심에 깊이 자리한 현상으로 파악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직장에서 실수했을 때 바로 사과하지 말라고? 15

16 러니 새해를 맞아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가며 바삐 살아갈 한 해의 계획을 세웠다면 자신에게 이야기해 볼 일이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미룰 수 있는 한 미루어라... 느림 속에서 나타나는 ' 혁신' 심리학자인 짐바르도와 보이드는 인간에 대해 '메가헤르츠의 시대에 사는 헤르츠의 기계가 되었다'고 말한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태양의 움 직임에 따라 일을 하던 시절과 달리, '60분=1시간'이라는 인위적인 단위가 하루를 분할하게 되면서, 시간은 인간의 행동을 조직화하고, 효율 성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을 통제하게 되었다. 효율성이란 정해진 시간 내에 빨리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대개 효율성의 추구는 속도주의와 단기성과주의로 나타난다. 그러나 뉴턴의 만유 인력의 법칙도, 팀 버너스 리의 월드 와이드 웹도 어느 날 문득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다가 혹은 친구들과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불현듯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아니다. 저자는 대부분의 위대한 아이디어는 어렸을 때의 강박적인 행동에서 비롯되며, 무작위로 충돌하고 부정 출발을 하는 확장된 사춘기를 지나, 마침내 처음 뿌리를 내린 때부터 수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꽃을 피운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 바둑의 최강자 이세돌이 은퇴를 선 언하면서 남긴 이야기는 사뭇 가슴에 남는다. 한국 바둑계가 바둑의 무한한 길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어린 꿈나무들의 창의력이나 가능성을 살리지 못하고, 마치 입시처럼 단기간의 성적향 상을 위한 주입식 교육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그의 쓴소리는 비단 바둑계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저자는 늦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심오하고도 근본적인 인간 조건 중 하나이며, 늦춤에 관한 질문은 실존적이라고 말한다. 삶은 시간과 대 항하는 경주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능을 뛰어넘어 시계를 멈추고 현재 내가 무엇을, 왜 하는지 파악하고 이해한다면 삶은 더욱 풍부해진다고 말한다. 유속이 빠른 강에는 고기가 살기 어렵다. 고기가 살기 위해선 바위도 있고 수초도 있어 멈추고 쉴 수 있어야 한다. 하니 눈앞의 이익과 현실 을 좇아 너무 바쁘게 서둘기보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느리게 가는 건 어떨까. 덧붙이는 글 <속도의 배신>, 프랭크 파트노이 지음, 강수희 옮김, 추수밭 펴냄, 2013년 1월, 1만 5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직장에서 실수했을 때 바로 사과하지 말라고? 16

17 03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이거나 줄일 수 있다고?!

18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이거나 줄일 수 있다고?! :22 [서평] 스티브 테일러의 <제2의 시간> 지난 연말 '멘붕'을 경험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지난 5년을 간신히 지나왔는데, 5년이라는 긴 시간을 또 어떻게 보내 나'라는 것이다. 최근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점도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디 가나' 하는 것이었다. 똑같은 시간인데도 어 떤 순간에는 시간이 화살처럼 흘러가고, 어떤 순간에는 거북이처럼 지나간다. 왜 그럴까? 왜 순간순간 시간의 속도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과연 시간이란 무엇이며, 정말 시간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해답을 주는 책이 있다. 바로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심리학 교수 스티브 테일러가 쓴 <제2의 시간>이다. <제2의 시간>은 생활 속에서 의 인식과 경험을 중심으로 시간을 분석한 '시간에 관한 심리분석서'이다. 그러나 단순히 인식에 따라 시간을 다르게 느끼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제2의 시간>은 시간에 대한 심리적 분석을 통해 본질 적으로는 시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법을 탐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심리학은 물론 인류학, 물리학, 철학, 문학, 초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적 접근을 통해 시간에 대해 다각적으로 조망한다. 흔히 말하듯이 시간이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차원적인 시간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고 저 자는 말한다. 시간은 늘일 수도 줄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시간을 초월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제2의 시간>은 기억에 불과한 과거, 예상에 불과한 미래 대신 온전히 현재에 집중하는 삶을 살기를 권한다.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이거나 줄일 수 있다고?! 18

19 시간은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 지금 이 순간,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거나 혹은 너무 더디 흐른다고 시비 걸고 싶은가? 그렇다면 시간에 시비를 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 태를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속도와 중력에 따라 우주의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증명처럼 심리적 시간 역시 정보처리 과정과 자아 상태에 따라 시간은 빨리 흐를 수도, 느리게 흐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심리적 시간을 '제2의 시간'이라 말하는데, 여기에는 5가지 법칙이 있다. 시간은 첫째, 나이가 들수록 빨리 흐른다. 둘째, 새로 운 경험과 환경에 놓이면 천천히 흐른다. 셋째, 몰입하면 빨리 흐른다. 넷째, 몰입하지 못하면 천천히 흐른다. 다섯째, '의식하는 정신' 또는 평소의 자아가 사라지면 시간은 천천히 흐르거나 아예 멈춘다고 느끼는 것이다. 19세기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한 사람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느끼는 일정 기간의 시간의 길이는 인생 자체의 총 길이에 따라 변한다 고 했다. 즉 열 살 아이에게 1년은 살아온 삶의 10분의 1이고, 쉰 살 사람에게는 50분의 1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 아이에 비해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영국의 심리학자 존 웨어든은 시간이 빨라진다는 생각은 기억이 만들어낸 과거의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과거의 시기는 기억 속에서 작아지는 반면, 많은 일이 일어났던 시기는 확대된다는 것이다. 결국 시간의 가속이란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경험에 대한 인식과 관련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직선적 관점의 시간개념을 버리는 것이 행복 오늘날 우리들은 '세상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세상과 함께 시간이 시작되었고 세상이 끝나면 시간도 끝난다'는 기독교적인 시간개념이 일 반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개념은 지극히 일차원적이며, 역사적으로도 극히 일부만이 가진 개념이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는 시간을 이러한 직선적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 사람은 2500만 년마다 윤회를 한다며 2500만 년 뒤에 다시 만나자는 말이 아련하게 가슴에 남았던 소설 <은비령>에서처럼 불교에서는 윤회를 통해 시간이 순환되는 것으로 인식한다. 남미의 마야족 역시 세상은 계속되는 순환에 따라 창조되고 멸망하기를 반복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에는 아예 시간이란 것을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나바호족과 호피족에게는 아예 시간이라는 단어가 없고, 과거형, 현재형, 미래형과 같은 동사의 시제 자체가 없다고 한다. 이들에게 시간은 그저 삶의 리듬의 일부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시간을 인식하지 않으니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과 일체가 되어 편안하게 살아간다. 반면에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는 서양식 시간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와 미래에 매여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도록 한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작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잊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일원적 시간개념을 가진 유럽 사람들을 모노크론이라고 부른다. 모노크론은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해야 하고, 그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다음 할 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모든 신경을 집중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호피족, 나바호족과 같은 폴리크론은 어떤 일을 끝내야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순간순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시간에 구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원론적 시간개념을 탈피해서 내면을 변화시키고 정신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끝없이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하며,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이거나 줄일 수 있다고?! 19

20 강한 자아로 인한 분리된 느낌과 이중성이 없어져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해? 시간이 직선처럼 일원적으로 흐르지 않고 순환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가능하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한다는 주장은 어떤가? 쉽게 납득이 되는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떠올려 보면 그리 어려운 개념만도 아닌 것 같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속도와 중력에 대해 상대성을 띠며 사건의 발생에는 정해진 순서가 없다고 했다. 즉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두 가지 사 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속도에 따라 시간차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 물리학에서는 우주가 4차원의 시공간 에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다는 말 자체가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모든 과거와 미래는 지금 여기 현재와 나란히 존재하고 있으며, 4차원의 시간과 공간에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개념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교수인 로저 펜로즈는 '우리에게는 단지 정적으로 고정된 시공간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우주의 사건이 펼쳐질 뿐'이라고 말했다. 즉 시간이 흐른다는 가정과 시간은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로 나뉜다는 가정은 그 어떤 물리학 연구에서도 증명된 바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뒤로도 갈 수 있다고 믿는 물리학자도 많으며, 블랙홀과 같은 거대한 물질에 의해 우주의 구조가 산산조각 났을 때 생기는 시 간과 공간의 통로, 즉 웜홀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오늘날 양자물리학에서는 사건의 흐름이 뒤에서 앞으로 흐를 수도 있다고 본다. 결국 시간의 흐름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적인 상태의 각 순간이 있고, 이 순간이 지나면 다른 순간이 오는 순서가 있기에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고 느낄 뿐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곳은 오직 하나, 우리 ' 생각' 안에서일 뿐 칸트 역시 객관적인 시간이란 없으며, 시간은 정리된 삶을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분류법'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즉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인식의 편리함'을 위한 도구로 개념화해 우리에게 짐을 지웠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곳은 오직 하나, 우리의 생각 안에서일 뿐이 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시간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 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의지에 따라 조절할 수 있기에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할 수도, 천천히 흐르게 할 수도 있고, 또 인생 을 길게 살 수도, 짧게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나 미래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 추상이며 실제로는 오로지 하나의 시점인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시간이 오든 가든 아쉬워할 일이 전혀 없다. 분명한 것은 영원히 계속되며 끝나지 않는 현실은 오로지 현 재 뿐이란 점이다. 현재는 한번 왔다가 섬광처럼 사라지는 덧없는 순간의 연속이 아니라 빛나고 의미 있는 순간의 지속이다. 따라서 지나가버린 과거에 매여 괴 로워하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허비할 시간은 없다. 우리가 속한 유일한 시간인 지금 이 순간을 느끼고 즐기며 최선을 하는 것, 그 것이 진정한 시간정복자의 삶이다. 카르페 디엠!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이거나 줄일 수 있다고?! 20

21 <오마이뉴스> 게재 덧붙이는 글 <제2의 시간> 스티브 테일러 씀, 정나리아 옮김, 용오름 펴냄, 2012년 12월, 1만3000원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이거나 줄일 수 있다고?! 21

22 04 대선후보의 거짓말,, 5초면 알 수 있다

23 대선후보의 거짓말,, 5초면 알 수 있다 :50 CIA 전문가들이 전하는 거짓말의 모든 것 <거짓말의 심리학> 대학 들어와 처음 사귀었던 사람이 어느 날 "너를 사랑하지만 넌 내겐 너무 벅차.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라고 말하며 헤어지자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땐 순진한 마음에 나의 어떤 점이 잘못이었을까를 고민했지만, 만약 그 순간 내게 상대의 말과 행동에서 거짓을 탐지하는 기술 이 있었더라면 나의 고민은 달라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고 그의 말은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할 때,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것이 진실인지 혹은 거짓인지 판별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어리숙하게 사기나 거짓말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을 까. 일단 누군가가 "난 정직한 사람입니다",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성격상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난 항상 옳은 일만 하려고 노력합니 다"라고 말한다면 두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워 그의 말과 행동에서 또 다른 징후를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말은 거의 대부분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CIA(미국 중앙정보국)에서 거짓말 수사를 수십 년 간 담당해온 거짓말 탐지 전문가들은 이런 말들이야말로 자신의 거짓말을 상대가 믿도록 설득할 때 하는 가장 흔한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난 약속을 반드시 지킵니다"라는 말 속에는 자신을 신용 있는 사람으로 포장함으 로써 밝히지 말아야 할 거짓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거짓말을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바로 그러한 기술과 비법을 알려주는 책이 나왔다. CIA 베 테랑 수사관들인 필립 휴스턴, 수잔 카니세로, 마이클 플로이드와 NSA(미국 국가안보국)의 돈 테넌트는 <거짓말의 심리학>(추수밭)을 통해 그들이 현장에서 익힌 거짓말 탐지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거짓말의 심리학>은 거짓말 탐지를 방해하는 장애물로부터 거짓말의 징후와 증거, 그리고 거짓말을 탐지하는 방법, 거짓을 실토하게 하는 기술 등 아주 실질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마치 책을 다 읽고 나면 거짓말에 관한 전문가가 된 듯 다른 사람들의 말을 분석하 게 하는 묘한 재미와 흥미로움을 안겨준다. 대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며 온 나라가 말의 홍수에 떠내려가기 일보직전이다. 각 진영 간 공약에서부터 비방, 유언비어에 이르기까지 온 갖 말들이 그야말로 물밀듯이 쏟아지고 있다. 이 많은 말들 중에 어느 말이 참말이고 어느 말이 거짓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거짓말 의 심리학>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 설마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야' 라는 믿음을 깨라 살다보면 누군가의 말을 의심해야 할 순간이 꼭 있다. 가볍게는 숙제를 다 했 다는 어린 아들의 말부터, 신뢰를 부르짖는 정치가의 말까지. 그런데 누군가를 의심한다는 건 보통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 대선후보의 거짓말, 5초면 알 수 있다 23

24 들은 어려서부터 남을 의심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으며, 심지어 의심하는 것 은 죄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설마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야'라는 믿음이 거짓말 탐지 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순수한 마음을 악용한다. 대개 사람들은 '선의의 거짓말'을 포함해 하루 평균 열 번 이상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통해 난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 각하면 더 쉽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의심받는 순간 일단 발뺌부터 하고 본다. 자신 의 입으로 직접 '내 회사다'라고 말하는 동영상이 있어도, '내가 대표이사다'라 며 직접 건네준 명함이 있어도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기만 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고, 무고한 시민을 갈취해 뺏은 장물이 있어도 잡아떼기만 하면 신뢰를 중시하는 정치인으로 대통령을 꿈꿀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설마 대통령 하려는 사람 이 거짓말 하겠어?'라는 어리석은 믿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눈과 귀 를 막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도 아니라고 발뺌만 하면 그냥 믿어줄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는 아니었던 것이 다. <거짓말의 심리학> 표지 c 추수밭 관련사진보기 그렇다면 거짓말 탐지기를 쓰면 어떨까. 흔히들 생각하듯이 거짓말 탐지기가 족집게처럼 거짓말을 잡아내주지 않을까. 그런데 아니란다. 저자 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거짓말을 단번에 척척 알아낼 수 있는 기계 같은 건 없다고 한다. 거짓말 탐지기는 거짓말을 탐지하는 것이 아니 라, 자극에 따른 인체의 생리적 변화를 측정하는 기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거짓말 탐지기를 통해 조사관의 질문을 받았을 때 피의자에게 나타나는 생리적 변화를 보고서 조사관이 분석 능력과 대인 관계 기술을 동원해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를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짓말 탐지기가 거짓말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 탐지는 어디까지나 조사관의 탐지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상대의 거짓말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조사관이 질문을 던지고 상대가 답을 하기까지 최초의 5초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 5초 인가? 사람은 말하는 것보다 열 배는 빠른 속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5초가 지나면 이미 거짓말을 생각해서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 다. 따라서 저자들의 경험으로 볼 때 처음 5초 이내에 나타나는 행동이 자극(조사관의 질문)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질문을 받은 5초 이내에 고정점이 이동한다거나 차림새를 정돈하거나, 혹은 상대의 질문을 반복하는 등의 행동이 포착되었다면 그것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증 거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무의식적인 행동... 이것이 거짓말의 신호다 또한 거짓말을 할 때는 한 가지의 징후만 나타나지는 않는다고 한다. 말이든, 행동이든 둘 이상의 징후가 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저 자들은 '클러스터'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대답을 하면서 옷매무새를 고친다거나, 머리칼을 만진다거나 하면 이는 거짓말의 징후라는 것이다. 대선후보의 거짓말, 5초면 알 수 있다 24

25 이처럼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거짓의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거짓의 신호는 매우 여러 가지인데 몇 가 지만 보면, 첫째는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정말로 몰라서 대답을 바로 못할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5초의 원칙이 적용 되고 클러스터가 작동하는 것이다. 둘째는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해 분명하게 부정하지 않는 점이다. 간단히 아니라고 대답하면 될 것을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 냐',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는 등의 관련 없는 다른 말을 하거나, 혹은 애매모호하게 대답한다면 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외에도 질문에 대답하기를 꺼리거나, 대답을 거부하는 행동도 거짓의 신호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또한 상대의 질문을 반복해서 하거나 일 관되지 않은 진술 역시 거짓의 신호로 볼 수 있다. 특히 질문에 대해 화를 내며 공격하는 것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명백 한 신호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질문과 관련 없는 부적절한 질문을 하거나, 지나치게 짧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상세하게 대답하거나 혹은 과도하게 정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 도 거짓의 신호에 속한다. 그리고 예전 청문회에서 많이 보았던 것처럼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혹은 '신에게 맹세하건데', '성경에 대고 맹세하 건데' 등의 종교를 앞세우는 진술도 대표적인 거짓의 신호 중 하나이다. 이쯤 되면 문득 대선후보 토론회의 동영상을 다시 돌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세금 냈냐는 질문에 동문서답을 하고, 질문에 지나 치게 화를 내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나는 약속을 잘 지킨다'거나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라고 굳이 말하지 않는 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니까. 남에게 신뢰를 받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내 입으로 '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강조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 못 믿을 구석이 많을수록, 신 뢰할 수 없는 사람일수록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는 법이다. 자신에게 신뢰가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신뢰를 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 게 말이라도 해야 스스로 안심이 되니까. 이처럼 <거짓말의 심리학>은 스파이를 잡거나 사건의 범인을 잡는 데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 적용가능하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예전에 심문했던 모든 용의자를 하나하나 다시 심문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한 빌 브래튼 전 뉴욕 경찰청장의 추천사처럼 <거짓말의 심리 학>에 나오는 거짓말 탐지 기술은 잘 익히고 있으면 꽤나 유용할 듯하다. 자, 그럼 이제 눈과 귀를 크게 하고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건 어떨까 오마이뉴스 게재 덧붙이는 글 <거짓말의 심리학>, 필립 휴스턴 수잔 카니세로 마이클 플로이드 돈 테넌트 지음, 박인균 옮김, 추수밭 펴냄, 2013년 1월, 14,000원 대선후보의 거짓말, 5초면 알 수 있다 25

26 05 철학은 늑대로부터 시작되었다

27 철학은 늑대로부터 시작되었다 :51 마크 롤랜즈의 <철학자와 늑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가치는 잴 수도 거래할 수도 없다.' '가끔은 하늘이 두 동강 나도 옳은 것은 해야 한다.' 폐부를 푹 찔러 오는 울림이 있는 이 말들은 누가 했을까? 시인? 웅변가? 아니면 대선주자? 믿기지 않겠지만, 이 멋진 말의 주인공은 늑대 다.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느니 하는 표현은 지금부터 이야기하게 될 늑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늑대에게 이런 표현을 쓴 것 이 잘못이다. 늑대는 결코 음흉하지도, 잔인하지도 않다. 그것은 그저 인간의 특성일 뿐이다. 웨일스어로 '왕'이라는 의미의 브레닌은 철학교수에게 철학을, 그것도 제대로 된 철 학을 가르친 늑대다. <철학자와 늑대>(추수밭)는 늑대인 브레닌에게 철학과 인생을 배운 철학교수가 브레닌을 통해 깨닫게 된 사랑과 죽음, 행복 그리고 인간의 본질 에 대해 성찰한 책으로, 출간 후 전 유럽을 늑대앓이에 빠뜨렸다. 저자는 마이애미 대학교의 철학교수이자 대중철학서 <SF철학>, <내가 아는 모든 것은 TV에서 배웠다> 등으로 유명한 철학자 마크 롤랜즈다. <철학자와 늑대>는 늑 대를 개로 둔갑시켜 데리고 다니는 음흉한 철학자 롤랜즈와 실존과 본질의 혼란을 야기하는 우아한 늑대 브레닌의 11년간의 동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삶의 의미를, 인간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또 어떻게 처신 해야 하는지를 늑대인 브레닌에게 배웠다고 고백한다. 브레닌의 삶은 저자의 삶 구 석구석에 파고들어 어우러졌고, 저자는 자신의 존재를 브레닌과의 관계 속에서 이 해하고 정의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철학자와 늑대> <내 안의 유인원>을 쓴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철학자와 늑대>를 읽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관한 회고록 같다'고 평했다. 한 마리 동물이 이토록 깊은 성찰을 이끌어 낸 데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다. 또한 철학자 존 그레이는 '인간 자신에 대 한 시각을 재평가하게 만드는 역사적 철학서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했다. c 추수밭 저자에게 브레닌은 반려동물이 아니었다. 당연히 애완동물은 더더욱 아니다. 브레 닌은 저자의 형제였다. 브레닌이 없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며, 브레닌보다 더 훌륭한 형은 없을 것이라 저자 는 확신한다. 철학이 사라진 시대라지만, 늑대가 전해주는 삶의 철학이 깊은 울림으로 전해지는 책, <철학자와 늑대>를 만나보자. 강의실에서 하울링을 철학은 늑대로부터 시작되었다 27

28 나도 개를, 특히 큰 개를 무척 좋아하지만, 늑대를 집에서 키운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늑대를 실제로 본 적도 없지만 말 이다. 이러한 성향은 저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개와 함께 살았던 저자는 '96% 새끼 늑대 판매'라는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에서 생후 6주된 진짜 늑대를 만난다. 보송보송한 털에 꿀처럼 노란 눈, 모난 데 하나 없이 동글동글한 모습에 반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새끼 늑대를 입양하고 만다. 그가 바 로 브레닌이다. 그러나 그토록 귀여운 모습과 달리 브레닌은 집에 오자마자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브레닌을 혼자 둘 수 없었던 저자는 심지어 강의실마저도 브레닌과 동행하는 사이가 된다. 문득 강의실에서 들려오는 브레닌의 하울링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매 순간, 매 장소를 함께 해야 했기에 저자는 브레닌 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개를 훈련할 때 사람들은 두 가지의 오류를 범하는데, 하나는 훈련을 동물과의 기싸움으 로 여긴다는 것과 또 하나는 보상을 통해 훈련하려 한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복종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동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동물을 훈련시킬 때 특히 늑대를 훈련시킬 때는 어떤 상황에서도 명령에 굴복해야 하는 지배적이며 자의적인 권위가 아니라, 세상이 늑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 상황을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에게도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인간이 늑대보다 우월해? 늑대는 말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이해하기도 쉽다. 늑대들이 못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늑대는 문명사회에 맞지 않는 것이다. 늑대도 개도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본문 88쪽) 흔히 다른 동물들보다 덩치가 크지도, 그렇다고 힘이 세지도, 빠르지도 않은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큰 뇌에서 비롯된 지능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때의 지능은 역학적 지능이 아니라 사회적 지능이다. 사회적 동물의 뇌는 일반적으로 혼자 생활하는 동물의 뇌보 다 크다고 한다. 왜 그럴까? 역학적 지능은 사물 간의 관계만 이해하면 되지만, 사회적 동물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타인이 자기를 속이는 것을 알아챌 정도의 지능이 필요하고, 또 속지 않으려면 속일 줄도 알아야 한다. 또한 사회 속에서 특정 구성원을 이용해 다 른 구성원에 대항하려면 계략을 꾸밀 줄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장류의 사회적 지능의 핵심은 속임수와 계략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늑대과보다 높은 지능을 말할 때 그것은 상대적 우월성 이다. 즉 영장류는 늑대보다 계략과 속임수에 더 능하며, 지능의 차이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인류의 과학적 예술적 지능은 속임수와 계략의 피해자가 되기보다 가해자가 되고자 하는 진화의 부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악의 평범성,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철학은 늑대로부터 시작되었다 28

29 달려오던 SUV 자동차와 부딪치고도 멀쩡했던 브레닌이 아일랜드의 소목장에 쳐놓은 전기담장에 살짝 닿은 후 전기라면 기겁을 하게 된 일 을 떠올리며 저자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순수, 창조, 자유의 가치 속에 숨겨진 인간의 사악함을 알고 싶다면 하버드대학 의 심리학자들이 개발한 전기왕복상자를 보라고 말한다. 이 전기왕복상자는 한쪽 구획에 개를 넣고 바닥에 강한 전기충격을 주어 개가 본능적으로 울타리를 뛰어넘어 반대편으로 가게 하는 실험이 다. 실험이 반복될수록 울타리의 높이는 높아지고 간혹 양편에 모두 전기가 흐르기도 한다. 개는 전기충격을 피해 반대편으로 뛰어오르지만 결국은 전기가 흐르는 바닥에서 감전에 괴로워하며 고통 받는다. 이러한 일이 10~12일 정도 반복되면 개는 더 이상 충격에 저항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실험을 통해 개를 고문한 학자들은 이후 존경과 부 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우울증의 원인인 절망의 반복학습에 대한 모델을 증명하기 위해 30년 이상 사용되었던 이 실험은 그 후 헛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저자는 인간이 밑에 깔린 추악한 모습보다는 화려하게 빛나는 동기에만 주의를 빼앗긴 나머지 세상의 악을 보지 못한다고 갈파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주의가 분산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악은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일반적이며 진부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악은 의외로 평범한 것이라는 말에 절대 공감한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가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칸트는 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정확히 말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말하자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안 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악의 보편성을 능력의 부재라는 관점에서 논한다면 이는 매우 편리한 변명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실제 벌어진 상황을 불가항력이라고 하면 죄를 모면하게 되지만, 그렇게 쉽게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군사 쿠데타와 유신 그리고 독재가 당시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저 면죄부를 위한 변명일 뿐인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초래하는 대부분의 악행이 악한 동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 인식적 의무를 다하지 않은 의지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인간이 동기라는 가면에 지나치게 큰 가중치를 두고 그 속에 추악한 진실을 숨기고 있다면, 그 가면부터 벗겨야 인간의 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는 것이다. 11년의 동거 후 브레닌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브레닌의 부재는 저자에게 더 깊은 사유와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삶에서 중요한 것 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순간 순간들이라고 말한다. 이 순간의 그림자 속에서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바로 그 순간들이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철학은 늑대로부터 시작되었다 29

30 어떠한 모습이나 어떤 형태를 하고 있든 간에 자신이 이 우주가 생산해 낸 가치 있는 피조물이라면, 바로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준 것이 바로 늑대였다고 이야기한다. 깊어가는 가을날 떨어지는 낙 엽 속에서 늑대가 전해주는 삶의 의미를 사유하여 지내보는 건 어떨까 <오마이뉴스> 게재 덧붙이는 글 <철학자와 늑대>,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추수밭 펴냄, 2012년 10월, 1만5000원 철학은 늑대로부터 시작되었다 30

31 06 알레르기 있다고 수당? 이런 나라도 다 있네

32 알레르기 있다고 수당? 이런 나라도 다 있네 :03 박선민의 <스웨덴을 가다 - 복지국가 여행기> 슈퍼마켓에서 술을 팔지 않는 나라. 술집이 있긴 하지만 술 한 잔 값이 너무 비싸서 취하도록 마실 수 없는 나라. 이슬람 국가 이야기가 아 니다. 세계 최고의 복지수준과 소득수준을 자랑하는 북유럽의 강국 스웨덴 이야기다. 술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면 벌써 난리가 났겠지 만, 정부에 의한 스웨덴의 이런 강력한 알코올 통제정책은 백년이 넘었다고 한다. 재미난 것은 이 금주운동이 시민의식을 성숙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정치운동이 더욱 발전했다고 하면 믿어지시는가. 그리고 이 금주운동을 이끈 사민당(스웨덴사회민주노동당)은 1930년대 이후 장기 집권하면서 지금과 같은 스웨덴의 복지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알다시피 스웨덴 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스웨덴의 복지체계를 부러워하면서도 '복지'라는 말만 나오면 '나라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떠올릴까. 작년 8월 서울 시 무상급식 논쟁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만약 복지가 정말로 '망국병'이라면 어떻게 스웨덴은 망하지 않고 그야말로 천국과도 같은 사회체계 를 갖게 되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올 연말 대선의 화두가 '경제민주화'와 '복지'라는 점이다. 망국의 주범으로 거론되던 복지가 대선의 화두가 되었다. 그것도 보 수여당에서.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어떤 복지체계를 구축하느냐는 것이다. 이 점에서 스웨덴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평등의 가치를 실 현하고, 보편적 복지를 70년 넘게 지속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니까. 이런 스웨덴의 복지시스템에 대해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책이 나왔다. <스웨덴을 가다-복지국가 여행기>(후마니타스)이다. 저자는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을 처음 으로 배출한 2004년 이후 지금까지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박선민이 다. 저자는 평등과 연대와 합의의 정신이 살아 있는 스웨덴에서 한국 사회의 미 래를 찾고 싶었다고 한다. 복지는 망국의 지름길이 아니라 오히려 상생의 길임을 스웨덴은 보여준다. 스웨 덴이라고 부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 복지를 실현하고 있는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다. 특히 대선 주자들이 이 책을 꼭 읽고, 스웨덴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대한민국 의 내일을 그려볼 수 있으면 좋겠다. ' 성장' 만을 보며 달려온 지금 우리는 행복한가 먼저 스웨덴의 정체를 밝히고 가자. 스웨덴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자유민주 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국가다. 즉 자본가의 생산수단 소유를 인정하다는 면에서는 '자본주의'이지만, 분배의 정의를 제도적으로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책표지 알레르기 있다고 수당? 이런 나라도 다 있네 32

33 는 '사회주의'인 것이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절충형이라고 볼 수 있다. c 후마니타스 1920~1930년대 격렬한 노사분쟁을 겪은 스웨덴전국노동조합총연맹(LO)과 고용주협회는 1938년 살트셰바덴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노사는 기 업의 경영권과 노조의 파업권을 상호 인정하고, 노사분쟁 사항은 국가의 개입 없이 노사 간 자율적 협의를 통해 해결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합의 정신은 현재까지 굳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970년 어린 여공들이 하루 종일 햇볕 한번 못 보고 환기도 안 되는 먼지 가득한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에 항의해 근로조건개선을 요구하다 분신한 전태일 열사, 대량 해고사태 이후 23명이 목숨이 끊은 쌍용자동차와 35m 고공 크레인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309일을 투쟁한 한진중 공업 사태를 비롯한 우리나라 노사관계와는 너무도 다른 면을 보여준다. 협력은커녕, 자본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기업은 사설경비용역업체를 동원해 노조원이기 전에 직원이었던 이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노조 를 파괴하고, 정부는 이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이처럼 인간적 가치, 삶의 질을 모두 무시한 채, '성장'만을 외치며 달려온 지금, 1인당 GDP가 2만 달러를 넘었지만 그래서 오늘날 우리 사회는 행복해졌는가? 아이는 낳기만 하세요, 국가가 키웁니다 나라가 잘 살아야 국민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국민이 행복해야 나라도 편안하다는 것을 스웨덴은 보여준다. 혹시라도 국민이 힘든 점은 없는 지 세심하게 살펴주고, 불편한 곳이 찾아 고쳐주는 것이 국가의 임무라고 말하는 듯하다. 육아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맘이 많아지자 육아는 부모만의 일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전체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성 평등 국가인 스웨덴에는 남자 화장실에도 '아기 기저귀 갈이대'가 있다. 동성 간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물론 부모의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아이의 복지는 사회가 책임진다. 비혼모, 동거부부, 동성부부에 관계없이 누구든 자녀를 키우며 사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사회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의료의 나라 스웨덴. c Susanne Kronholm/Johner 알레르기 있다고 수당? 이런 나라도 다 있네 33

34 성별에 관계없이 자원이 공평하게 배분되고, 동일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스웨덴의 원칙이다. 이는 아동 장애인 빈곤층 등 사회적 약자 모두에게 적용된다. 스웨덴은 1937년 출산 수당, 1948년 아동 수당, 1947년 기초 연금을 소득 조사 없이 모든 대상자에게 정액 지급하는 복지 제도를 도입했다. 출산 시 부모에게 각각 240일의 육아 휴가를 주는 것은 물론 아이를 출산하면 국가에서 매달 1050크로나(약 17만원)을 16세까지 지급하고, 16세가 되면 '학업 보조금'으로 이름을 바꿔 같은 금액을 20세까지 지급한다. 자녀가 많을수록 아동 수당은 많아진다. 아동 수당은 1926년 뉴 질랜드가 최초로 제도화한 이래 년대에 많은 나라들이 도입했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복지 선진국인 유럽 국가들은 물론,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까지 아동 수당 도입이 확산되고 있으며, 현재 전 세계적 90개 국이 아동 수당 제도를 시행 중이다. OECD 국가 중 아동 수당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나라는 미국, 터키, 멕시코 그리고 우리나라뿐이라는 사실은 복지가 돈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는 씁쓸함을 남긴다. ' 안 받고 만다' 는 장애인 등급제? 우리나라의 장애인 등급제는 선별적 복지 제도의 행정 편의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장애 등급이 낮아지면 제공받는 복지 서비스도 줄어들기 때문에 내가 '중증' 장애임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그 얼마 되지 않는 복지 혜택을 누리려면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 '내 장애가 얼마나 중증인지', '내가 얼마나 학대를 당했는지', '내가 얼마나 일할 능력이 없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인간의 자존감을 바닥에 떨어 뜨리는 이런 방식들은 '안 받고 만다'는 결심을 이끄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이런 것을 제대로 된 복지 제도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보편 적 복지가 해답이다. (본문 215쪽) 우리나라와 달리 스웨덴에서는 알레르기나 천식으로도 수당을 받을 수 있다. 스웨덴은 우리나라처럼 장애를 등급을 매겨 구분하지 않고, 일 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일할 능력이 50퍼센트냐 혹은 70퍼센트냐를 따져서 정한다고 한다. 따라서 알레르기나 천식이 심해 일할 능력이 떨 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수당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스웨덴이 1994년 이래 '장애인handikappad'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스웨덴에서는 '장애인'이라는 말 대신 '기 능적 손상을 입은 사람' 혹은 '기능이 저하된 사람funktionshindard'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다리를 다쳐 다리를 쓸 수 없다면 그것은 다리의 기능이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장애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는 노력이다. 그렇다보니 장애 분류도 매우 포괄적이다. 알레르기, 천식도 장애의 일종이고, 읽기 쓰기 장애도 장애다. 장애 원인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 든, 노령에 의한 것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장애를 가진 '개인'이 아니라, 장애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개선해 누구나 삶을 영위 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스웨덴에서는 개별적 특성을 고려해 장애를 판정하기에 우리나라처럼 장애 등급을 정하는 일정한 기준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처럼 선별적 복지 정책을 시행했을 때는 대상자가 아닌 사람을 '골라내야' 하므로 객관적인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지만 스웨 덴과 같이 보편적 복지 정책을 시행할 경우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스웨덴 복지정책이 실패라고? 알레르기 있다고 수당? 이런 나라도 다 있네 34

35 이런 스웨덴의 복지체계를 구축한 사민당은 1915년에 제1정당이 되어 1920년에 총리를 내고, 1932년 단독 집권에 성공한 이후 1976년과 1991년 단 두 번을 제외 하고는 계속 정권을 잡아왔지만 2006년과 2010년 연이어 총선에서 보수 우파연합 에 패배했다. 이를 두고 한국 보수 언론들은 '북유럽 복지국가의 실패'라며 기사를 내보냈다. 스웨덴 국민들이 '복지보다 효율'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보수 언론의 분석처럼 스웨덴이 복지제도를 축소하고 있으 며, 사민당의 쇠락과 더불어 사회민주주의는 이제 실패한 것일까? 아니다. 답은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나라 보수언론의 바람(?)과는 달리 우파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한 것은 사민당보다 오히려 더 좌파적인 정책을 내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 스웨덴 사람들의 분석이다. 스웨덴의 국기 c 한승호 우파 연합을 주도한 보수당은 '새로운 노동자당'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저소득층의 세금 인하를 약속했고, 이에 국민들은 "보수당이 사민당 보다 더 노동자당답다"라며 보수당을 지지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좌우파의 집권 여부와 상관없이 복지 제도는 계속 유지될 것이며, 복지와 경제는 동반 성장한다는 것이 좌우를 막론하고 내린 결론이라는 것이다. 경제민주화가 대세이다 보니 박근혜 후보마저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하지만 박근혜식 경제민주화는 결국 '줄푸세'의 다른 이름이다(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 포장만 경제민주화라고 한다고 무엇이 달라질 게 없는 것이다. 증세를 이야기하 지 않는, 특히 부자증세와 같은 스웨덴식 누진 적용이 없다면, 박근혜 후보의 복지론은 공허한 메아리로 울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스웨덴을 가다 - 복지국가 여행기>, 박선민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2012년 10월, 1만3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알레르기 있다고 수당? 이런 나라도 다 있네 35

36 07 한중일 역사전쟁의 해답,, '발칸' 발칸'에서 배워라

37 한중일 역사전쟁의 해답,, '발칸' 발칸'에서 배워라 :54 이종헌의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 유행은 패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행에도 유행이 있다. 요즘 떠오르는 여행 경향은 '다크 투어리즘'이다. '다크 투어리즘'이란 비극적 역사 현장이나 재난이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삶에 교훈을 얻고, 그 속에서 성찰하고 배움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교훈여행'인 셈 이다. 아름답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돌아보거나, 풍광 멋진 곳을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비극의 현장을 타산지석으로 삶과 역사에 대해 사유하는 여 행도 의미 있지 않을까.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소울메이트)(이하 낭만의 길 야만의 길)은 바로 그런 여행의 표본을 보 여주고 있다. <연합뉴스> 기자를 지내고, 세계 4대 통신사 중 하나라는 미국 < UPI > 통신의 서울지국장과 특파원으로 일하며 북한과 국제정세를 연구하 고 있는 저자 이종헌은 국제정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한반도 문제를 올바르게 풀어나가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틈틈이 세계 곳 곳을 여행하고 있다고 한다. 한중일 역사전쟁의 해답, '발칸'에서 배워라 37

38 그런 그가 이번에 선택한 여행지는 그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중동을 '새 발의 피'로 만들어버리는 발칸반도와 동유럽이다. 19세기 이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했던 곳. 저자는 음울한 역사의 현장에서 전쟁과 종교, 인간을 생각하고 또 한반도 를 생각한다. 민족주의를 앞세운 채 영토를 둘러싸고 한중일 삼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갈등을 빚고 있는 요즘, <낭만의 길 야만의 길>은 점점 커져가는 동북아시아의 이 갈등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그리고 '평화'와 '공존'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한다. ' 집단적 증오' 를 교육하는 집단적 기억은 안 돼 베오그라드 중앙역에서 쭉 뻗은 대로 양편에 나토가 폭격한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절대로 잊지 말자'라는 의미에서란다. 무엇을 잊지 말 자는 것일까? 자신들의 악행은 애써 감춘 채, 자신들이 입은 피해만 부각시키고 후세들에게 그것을 '기억'시키기 위해 이 흉측한 건물들을 그 대로 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흉측한 건물을 보며 자신들이 입은 상처만 생각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친다면, 그 후세 들이 가진 '집단적 기억'은 엄청난 증오를 생산할 것이고, 이 지역에서 분쟁이 재발하는 일은 시간문제일 수밖에 없다.(본문 136~137쪽)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어 중 하나는 '집단적 기억'이다. 저자는 상처에 대한 '기억'이 종교와 민족이라는 기재로 '집단화'되고, 그 '집단적 기 억'이 정치적 수요에 의해 '정치적 증오'로 발전하고, 그것이 교육 메커니즘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20세기 최악의 야만이 발칸에서 발생 했다고 설명한다. 자기 종교나 민족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의 종교와 민족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과 적대감을 부추김으로써 '인종청소'와 같 은 반인륜적 범죄가 조장되었다는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 발칸반도의 맹주를 자처하던 세르비아는 1990년대 초 연방이 해체되자 보 스니아와 코소보에서 '인종청소'라는 이름으로 무슬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가 남의 상처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들의 상처만 기억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은 세르비아와 닮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주축국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아시아 각국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던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끝끝내 사과 하지 않고 원폭으로 인한 자신들의 피해만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고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집단적 기억 이 결코 집단적 증오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겠다고 집단적 기억을 교육한다면 피가 피를 부르는 야만의 악 순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발칸의 역사는 보여준다. 자원 없는 나라에는 무관심한 국제사회의 ' 냉정' 그런데 보스니아와 코소보 등지에서 수십만 명이 '인종청소'로 학살당할 동안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라 크에서는 확인되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WMD)를 제거해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명분으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반대 시위에도 아랑 곳 않고 신속하게 병력을 투입하던 '세계의 경찰' 미국이 아닌가. 이유는 석유가 나는 이라크와 달리 발칸반도에서는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사실 보스니아 전쟁은 국제사회의 무 관심과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저자는 말한다. 유엔이 '안전지역'으로 지정한 스레브레니차에서 공식적으로만 8000명 이상의 보스니아인들이 학살당한 것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한중일 역사전쟁의 해답, '발칸'에서 배워라 38

39 수십만 명의 집단학살에도 보고만 있던 미국은 결국 보스니아에서 미국인 한 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뒤늦게 개입한다. 미국 에게는 수십만 보스니아인들의 목숨보다는 한 명의 미국인 목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그런데 이런 뒤늦은 개입마저도 야만적 폭력을 징계하기 위해서나 인도적 차원이 아니라 '전략적 계산'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재선을 앞둔 클린턴 대통령은 위대한 미국의 힘을 국민에게 보여줄 외교적 성과가 필요했고, 한편으론 사회주의의 틀을 벗고 상승 중인 러시아가 전 통적 강세지역인 발칸반도로 돌아오는 것을 견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국제사회의 무관심속에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보스니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시리아다. 독재정권 에 항거해 일어난 시리아 내전에서 지난해 3월부터 지금까지 3만3000명 이상의 시리아 시민들이 죽었다. 시리아에서도 보스니아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외교적 수사만 반복할 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다. 매장량 세계 9 위의 주요 산유국인 리비아에서와는 매우 다른 양상이다. 이것이 자원을 보유하지 못한 나라가 겪는 운명이고, 국제사회가 안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라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정말 '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 만 배워야 할까 독도와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이어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중일 사이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동북아시아 국가 간의 갈등은 동시다발적 정권교체기와 맞물려 민족주의가 득세하면서 '세력 쟁탈전'으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각국의 정치인들은 갈등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민족주의를 교묘히 이용해 오히려 동북아시아에서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만 배운다"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처럼 우리는 정말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일까. 평화와 공존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민족주의에 함몰된 집단적 기억과 증오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발칸의 역사를 정녕 보지 못한 것일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하고 있지만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백만 명의 소중한 목숨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은 발칸반도 를 여행하며 저자는 '역사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라고 말한다. '다크 투어리즘'을 통해 깊이 있는 역사 인식에 한 발 더 다가가고 있는 <낭만의 길 야만의 길>은 사건과 연대 중심의 역사공부가 아니라 인 간이 담긴 역사공부를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나 이해 없이, 사건과 연대를 줄줄 외우는 것이 역사공부라고 착각 하는 이들에게 <낭만의 길 야만의 길>은 '이것이 진정한 역사공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 이종헌 씀, 소울메이트 펴냄, 2012년 9월, 501쪽, 1만9500원 <오마이뉴스> 게재 한중일 역사전쟁의 해답, '발칸'에서 배워라 39

40 08 광해군이 개혁군주라고?

41 광해군이 개혁군주라고? :46 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최근 개봉작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비롯해서 광해군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요즘은 마치 광해군이 개혁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데 재 미난 것은 19세기까지 폐모살제( 廢 母 殺 弟 )의 폭군으로 평가받았던 광해군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주적 실용주의 외교를 추진한 개혁군주로 극적 반전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21세기인 지금도 광해군은 건재하다. 심지어 광해군을 '민족 화해와 통일의 거울' 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해결할 지혜를 줄 수 있는 인물'로 평가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광해군 평가에 대한 이러한 반전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그리고 과연 이러한 평가가 옳은 것일까?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의 저자인 전주대 사학과의 오항녕 교수는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광해군을 개혁군주로 평가하는 흐름 에 반기를 든다.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혼자서 과감히 '아니오'를 말하겠다는 것이다. 뭇매를 맞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는 왜 '아니오'의 광해군이 개혁군주라고? 41

42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일까. 오항녕 교수는 학문은 다수결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철저한 고증과 전거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한다. 국가기록원에 근무하면서 누 구보다 기록관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컸던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기록과 문헌들을 비교, 분석해서 광해군을 평가한다. 저자에 따르면 광해군에 대한 평가의 반전은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 간사를 지낸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키치( 稻 葉 岩 吉 )가 1933년 펴낸 < 광해군시대의 만선( 滿 鮮 )관계>란 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나바가 광해군을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군주'라고 평가한 것 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나바의 해석은 이병도를 거쳐 20세기 후반 진보와 보수를 떠나 남북한 역사학계 모두에서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러한 평가는 조선 문명의 경험은 무시한 채, 모든 사회가 근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근대주의 역사학에서 비롯되었다. 문제는 인조반정으로 그 근대로 나아갈 길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인조반정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결과, 광해군이 재평가받으며 부활할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평가 의 잣대가 근대주의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듯이 근대주의가 결코 보편적인 것도, 반드시 지향해야 할 가치도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 다. 따라서 근대주의의 잣대를 걷고 보면 광해군이 즉위했던 15년의 세월은 민생 회복, 사회 통합, 재정 확보, 군비 확충, 문화 발전 등 어느 하 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는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실패한 역사를 또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광해군 시대를 제대 로 바라보고 오늘의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승자의 역사는 없다 먼저 광해군을 개혁군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논리 중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일기>를 쓴 사람들이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이들이기 때문에 '승자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역사 기록에 관점 이 개입되긴 하지만, 전적으로 승자의 역사라는 건 없다고 말한다. '누가 편찬했기 때문에 그 사료를 믿을 수가 없다'가 아니라, '어떤 이유로 믿을 수 없다'고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료 비판을 하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실록 편찬은 그 과정이 엄격하기 때문에 단순히 승자라고 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기술할 수는 없다는 것 이다. 실록은 왕이 살아있을 당시의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와 각종 공문서를 추려서 초고를 만들고 '초초( 初 草 )-중초( 中 草 )-정초( 正 草 )'를 거쳐 편 찬된다. 특히 <광해군일기>는 중초본( 中 草 本 )과 정초본( 正 草 本 )이 모두 남아 있어서 원래 기록에서 어떤 기록을 첨삭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또한 이나바를 비롯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높이 평가하는 연구자들도 모두 논거로 삼는 연구 자료가 <광해군일기>라는 점에서 <광해군일기> 는 광해군을 비판할 수 있는 자료는 물론 광해군을 추앙할 수 있는 자료도 동시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문제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자료를 해석하고 평가하는가'의 차이 아닐까. 대동법으로 민생안정? 오히려 방납 커넥션에 힘실어 줘 조선 최고의 세제개혁으로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주어 민생안정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대동법.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 광해군이 개혁군주라고? 42

43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서 시범 시행되었던 대동법을 광해군은 의욕적으로 추진했지만 양반 지주들의 반대로 실패했다는 것이 일반 적인 통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일전에 신하들을 인견했을 때, 승지 유공량이 대략 선혜청 작미( 作 米 )의 일은 불편한 점이 많아 영구히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당초 나 의 생각에도 대동법은 사실 시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겼으나, 본청이 백성을 위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기에 우선 그 말을 따라 행할 수 있 는지의 여부를 시험해보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유공량의 말을 들으니 심히 두려운 생각이 든다. (중략) (본문 131쪽) 광해군이 유공량을 비롯한 북인들의 대동법 반대 의견에 동조하면서 한 말이다.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사실 광해군은 처음부터 대동법을 적 극적으로 추진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원익의 주장에 마지못해 시행은 했지만, 이마저도 이원익이 유배를 가면서 흐 지부지되다가 결국 채 1년도 안 되어 폐지 여부가 논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광해군이 그런 태도를 취한 이유는 바로 자신의 최측근들이 방납으로 부를 축적한 양반 지주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당시 방납 은 이미 고질적인 것이었고, 방납을 둘러싼 이해관계는 왕실과 권력층에 촘촘히 얽혀 있었는데, 문제는 그들이 바로 광해군의 지지 기반이었 던 것이다. 따라서 흔히 얘기되는 것처럼 광해군의 대동법 시행 의지에 맞선 방납배들의 저항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와 반대로 광해군이 측근들의 이 익을 위해 민생에는 눈감고 대동법을 거부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측근 비리가 문제인 것이다. 더 이상의 토목공사는 아니 되무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삽질'로 인한 민생파탄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광해군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왕권강화라는 일반적 해석으로 어 물쩍 넘기지만, 저자는 광해군 집권기 동안 계속된 궁궐공사를 광해군 최대의 실정 중 하나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 궁궐공사로 인해 가뜩 이나 어려웠던 전란 이후 백성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인조반정 후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교서에 두 번째로 거론한 것도 바로 이 토목공사에 대한 것이다.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 고 두 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공사를 10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라고 교서는 적고 있다. 물론 임진왜란 동안 불타버린 궁궐을 다시 지 어 왕조의 위엄을 세우겠다는 뜻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전쟁으로 피폐한 백성들의 삶은 생각하지 않고 궁궐공사에만 올인하다시피 집착했던 것이다. 문제는 모든 토목공사가 그러 하듯이 궁궐공사 역시 한두 푼의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지 않은가. 막대한 재정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할까. 답은 뻔하다. 백성을 쥐어짤 수밖에. 4결당 1필을 거두던 결포를 1결당 1필씩 거두는 방안이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원래 4결당 1필을 거두는 것도 평상시 전세의 25퍼센트 인상이 었다. 그러니까 1결당 1필씩 거둔다는 말은 25퍼센트가 아니라 100퍼센트 인상이 추진됐던 것이다. 결국 조삼모사( 朝 三 暮 四 ), 1결당 1포를 두 번에 걸쳐 거두자는 의견, 혹 2결당 1포나 3결당 1포를 거두는 것이 무방하다는 의견,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복정하는 것이 무방하다는 의견 이 제출됐다. 광해군은 이중 가장 세금이 무거운 방안, 즉 1결당 1필을 거둬 쓰라고 전교했다. (본문 292쪽) <광해군일기>에 나오는 광해군 9년(1617)과 11년 기록을 통해 저자가 계산한 바로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궁궐 공사비로 전체 국가 예산의 15~25% 정도가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 국가 예산으로 본다면 이 정도 예산규모는 교육비나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과 같다 는 것이다. 결국 광해군은 궁궐공사를 위해 국방을 포기한다. 광해군 11년, 후금이 한창 요동에서 기세를 올리던 그 때, 광해군은 국방을 든든히 하는 대신 군량미와 군기를 만들 정철까지 빼내서 궁궐공 광해군이 개혁군주라고? 43

44 사에 사용하기에 이른다. 백성들을 쥐어짜고, 관직을 팔고, 공명첩을 팔고, 죄지은 이의 죄도 팔고, 군량미까지 빼서 그야말로 온 나라의 재정 을 탈탈 털어서 한 것이 바로 궁궐공사였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그를 개혁군주라 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이 실용이었을까. 정치인들은 자신이 불리할 때 흔히 '역사의 평가에 맡긴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의 평가란 어쩌면 '프로크루테스의 침대'가 아닐까. 광해군 이 개혁군주였는지, 폭군이었는지는 그 당시에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하긴 그 시대에 살았던들 알겠는가. 같은 유 신시대를 살았어도 서로 인식들이 다르니.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말한다. 인조반정 이후 사람들은 다시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고. 반정은 그들이 선택한 행위이기도 했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그러므로 선택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것처럼 그 시절 사람들도 하루 하루 삶을 이어갔을 것이라고. 결국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 시절을 견디고 살아온 이름모를 백성들이라는 것. 바로 우리라는 이야기다. 덧붙이는 글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오항녕 지음, 너머북스 펴냄, 2012년 9월, 1만7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광해군이 개혁군주라고? 44

45 09 봉준호가 묻는다. 경찰은 그때 무얼 하고 있었나.

46 봉준호가 묻는다. 경찰은 그때 무얼 하고 있었나 :05 [서평] 강성률의 <감독들 12> 영화 좀 본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좋아하는 배우를 보려고 영화를 보면 초짜, 좋아하는 장르를 따라 영화를 보면 중짜, 감독이 좋아서 영화를 보면 '영화광'이라 부른다고 한다. 문득 나는 초짤까, 중짤까, 광일까 궁금해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그때그때 마음에 끌리는 영화를 보았지, 감독이나 배우, 장르를 골라서 보지는 않은 것이다. 최근 김기덕 감독이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피에타>로 황금사자상을 받으면서 우리나라 영화에 관한 관심과 위 상이 한층 커지고 높아졌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로 평가받는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상영된 이후 약 100년의 세월 동안 한국 영화는 무한한 발전을 거듭해왔다. 한국 영화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 감독의 힘이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하지만, 그 매혹 봉준호가 묻는다. 경찰은 그때 무얼 하고 있었나. 46

47 적인 각각의 악기들의 음색을 하나로 모아 하모니를 이루게 하는 것은 지휘자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의 처 음과 끝도 모두 감독에게서 나온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 영화를 이끌어가는 열두 명의 감독들을 조망한 강성률 교수의 <감독들 12>(이야기쟁이낙타)는 현재 시점에서 매우 의 미가 있다고 하겠다. 한국 영화의 지평을 넓혀 천만 관객의 시대로 이끌고,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제패하게 한 장본인이 바로 이 감독들이 아닌가. <감독들 12>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열두 명의 감독들-이창동, 봉준호, 박찬욱, 강제규, 강우석, 장훈, 이정향, 허진호, 홍상수, 임상수, 김대 우, 김동원-과 그들의 작품세계를 살펴보고 있다. 영화를 통해 이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 사회 속에서 영화가 어떤 함의와 문제의 식을 느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는 질문이다'라고 정의하는 저자는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가 관객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그 영화는 결코 좋은 영화가 아니라 고 말한다. 흔히들 질문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관객에게 질문을 던져 관객들이 스스로 그 질문의 답을 하 도록 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문학을 공부하다 영화로 전향한 저자는 십여 년 영화평론을 하면서 다져진 필력과 날카롭고 예리한 시각으로 영화와 감독을 분석하고 설명한 다. 같은 영화를 보았음에도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마다 참 다르다. 책을 읽는 동안 '어, 왜 나는 놓쳤지'하는 장면들이나 '아, 이건 이렇 게 해석이 되네'하는 식의 저자와의 비교가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살인의 추억>을 통해 봉준호가 묻고 싶었던 것 영화 <괴물>을 만든 봉준호 감독은 저자의 표현으로는 현미경을 든 영화 사회학자다. 그는 마치 현미경을 들고 들여다보듯이 우리 사회를 들 여다본다. 그의 영화는 매우 사실적이고 치밀하다. 한 장면 한 장면 허투루 놓치는 법이 없다. 그의 별명이 '봉테일'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세밀하게 들여다보면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치안이 가장 엄격했던 시대에 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고 아직까지 범인이 검거되지 않은, 부조리한 상황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반공 훈련 때문에 등화관제를 실시하던 그 시간에 오히려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아 살인이 일어난 이 역설을 영화는 두 눈으로 보게 한다. (본문 42쪽) 봉준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살인의 추억>은 1988년이라는 경찰력이 막강했던 시대에, 약간이라도 범죄 유발의 기미가 보이면 여지없이 잡아 서 무지막지한 교육을 했던 그 시대에, 어떻게 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할 수 있었는지, 그 많은 경찰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묻고 있다. 살인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시위 진압 때문에 막지 못하는 경찰. 결국, 경찰은 살인을 막지도, 범인을 잡지도 못한다. 경찰력 은 그저 정통성이 없는 정권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제공될 뿐이다. 따라서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에서 진짜로 다루려는 것은 연쇄 살인 사건 이라는 스릴러가 아니라 국가 중심 이데올로기의 허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빈틈을 헤집고 싸우고 갈등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 철저히 개인과 그리고 그의 나약한 가족들이라는 점이다. 그의 영화에서 국가는 오히려 개인의 문제 해결을 방해하는 존재다. 봉준호는 영화에서 엘리트나 사회지도층을 구성하는 잘난 인물들이 아니라, 하자가 있고 나약하며 보잘것없는 이들이 함께하면서 서로 도와 주거나, 도움을 받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그것이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봉준호는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봉준호의 영화가 흥행이나 비평에서 모두 호평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 봉준호가 묻는다. 경찰은 그때 무얼 하고 있었나. 47

48 강우석, 대중적 촉수 가진 ' 미다스의 손' '... 어딘가 불편하고 찝찝 한국 영화계의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는 강우석에 대해 저자는 매우 날카로운 대중적 촉수를 지니고 있는 감독이라고 평한다. 지금까지 총 관객 3000만 명을 돌파한 유일한 감독이 바로 강우석이기 때문이다. 50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이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강우석의 영화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을뿐더러 매우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강우석 영화가 지니고 있는 이데 올로기 때문이다. 대중영화의 유쾌함이 아니라 대중영화의 틀 속에 담겨 있는 강우석의 이데올로기가 위험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우석의 영화는 무엇이 어떻게 위험할까? 먼저 <한반도>에서 드러난, 전쟁도 불사하는 극단적 민족주의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강우석은 남한에 널리 퍼져 있는 반일 정서를 매우 극 단적으로 그리고 몹시 나쁜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두 번째는 <실미도>나 <공공의 적>에서 보인, 매우 그럴듯하게 포장된 국가주의 때문이다. <공공의 적>은 겉으로는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인 패륜아를 민중의 지팡이 경찰이 응징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마치 국가는 나쁜 놈을 마구 때려서 한마디로 패서라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사회시스템을 개선하기보다는 그저 국가의 이름으로 사회악을 때려잡자는 매우 선동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강우석이 지닌 놀라운 흥행적 촉수에도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한다. 대중영화에는 정치적 윤리가 있어야 한다. 식민과 분단, 전쟁을 겪은 한국 사람에게 국가주의나 민족주의가 과격한 형태로 나타날 경우 매우 위험한 것이 되고, 이미 경험한 바도 있다. 그럼에도 강우석의 영화는 그것을 반복하고 부추긴다는 것이다. 어떤 영화를 옹호한다는 것은 그 영화 속에 들어 있는 세계관에 동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강우석의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한 편의 영화가 단지 한 편의 영화에 그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나는 강우석의 영화를 옹호하지 않 는다. 아니, 옹호할 수가 없다. (본문 131쪽) 영화가 밝아지려면 사회가 먼저 밝아져야 외피만 보면 그동안 한국 영화는 무한한 발전을 거듭해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은 매우 우울하거나 부정적이 거나 현실을 회피하고 있다. 영화가 사회를 반영한다면, 아니 영화가 사회적 집단 무의식의 안테나라면, 지금 우리 사회는 무척이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거나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장 가깝게 영화계만 보더라도 그렇다. 최근 개봉한 <광해, 왕이 된 남자>나 그전 개봉작 <도둑들>과 같은 영화가 국내 최대 배급사를 등에 업고 스크린을 싹쓸이하는 동안, 힘들게 만들어진 다른 영화들은 상영관을 찾지 못하거나 교차 상영을 할 수밖에 없는 직접적인 피해를 보고 있다. 작품성의 고하를 떠나 자본에 따라 영화의 명암이 엇갈리는 것이다. 이런 상업주의적 영화풍토에서는 어떤 문화적 다양성도 기대할 수가 없 다. 이것은 비단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사회 구조적 문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따라서 저자는 말한다. 영화는 단지 집단 무의식의 안테나일 뿐이라서 영화가 밝아지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가 밝아져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현실의 재현인 영화에서 현실이 어두운데 영화만 밝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연말 대선을 앞두고 후보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공약들을 발표하고 있다. 부디 이런 공약들이 그저 말로만 그치는 공약( 空 約 )이 아니기를, 그래서 밝은 영화를 자주 볼 수 있는 세상이 봉준호가 묻는다. 경찰은 그때 무얼 하고 있었나. 48

49 되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감독들 12>, 강성률 지음, 이야기쟁이낙타 펴냄, 2012년 8월, 1만 6천원 <오마이뉴스> 게재 봉준호가 묻는다. 경찰은 그때 무얼 하고 있었나. 49

50 10 음식물 쓰레기보다 약간 더 나은 미국산 햄버거?

51 음식물 쓰레기보다 약간 더 나은 미국산 햄버거? :56 [서평] 하비 리벤스테인의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비타민D 부족하면 뇌경색 발병', '녹차가 기억력도 향상시킨다' 등 텔레비전 뉴스를 보 다보면 수많은 음식에 관한 기사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그 내용이 기존 의 인식을 뒤집는 것들도 있다. 유기농 식품이 영양소 함유량에 있어 일반식품보다 나을 게 없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는 며칠 전 기사만 보더라도 그렇다. 유기농 식품이 몸에 좋다는 일반적 인식을 깬 이 기사에서 사람들은 도대체 뭐가 맞는 지 혼란을 겪게 되고, 유기농 식품을 사던 사람들이라면 향후 식품을 선택할 때 선택에 변화를 가질 수도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 '그 연구결과라는 것이 모두 정확한 것 이냐' 혹은 '뉴스 기사가 연구결과를 정확하게 보도했느냐'라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순한 아이디어 내지는 정보 제공에 그칠 수도 있지만, 사안이 심각할 경우 많은 사람들에게 큰 파장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결과가 정확한 것인지, 뉴스 기사가 연구결과를 정확하게 보도했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정부당국의 대 응정책이 적절했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하비 리벤스테인의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지식트리)에는 이처럼 일반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음식에 관한 여러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다. 음식을 두고 벌어지는 한 판 의 전쟁과도 같은 이야기들, 즉 각종 연구나 언론기사, 정부정책 등이 어떻게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하고 그것을 이용해 왔는지의 역사가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에 나타나 있 다.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표지 c 지식트리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실제 그 공포라는 것이 알고 보면 대부분 전혀 사실무근이거나 적어도 지나치게 과장된 것들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음 식에 관한 공포가 조장되고 유포되었을까? 저자는 음식에 대한 공포의 이면에는 그러한 불안감을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 고 주장한다. 그리고 거대 자본들이 그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밝힌다. 식품에 관한 공포는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와 그 연구결과를 왜곡한 언론보도, 그 리고 이에 편승한 정부 당국과 거대 식품업체들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식품 공포가 미국 최고의 과학, 의학, 정부 전문가들의 든든 한 후원을 등에 업고 공식적으로 확산돼 온 공포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 맥마스터대학 역사학 명예교수로 <식탁의 혁명> <풍요의 역설> 등을 집필한 하비 리벤스테인은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를 통해 거대 자본과 그 이해관계자들이 음식과 건강을 담보로 어떻게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며 이득을 챙겨왔는지 낱낱이 밝히고 있다. ' 장티푸스의 원흉' 우유, 캠페인 통해 ' 완전식품' 으로 거듭나다 음식물 쓰레기보다 약간 더 나은 미국산 햄버거? 51

52 단백질, 지방, 미네랄 등 모든 영양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고 해서 '완전식품'으로 불리는 우유. 그런데 우유는 원래 몸에 좋은 것으로 인식되 고, 많은 사람들이 먹었을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우유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완전식품으로 인식되기까지는 매우 험난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19세기만 하더라도 도시민들이 마셨던 우유는 대부분 증류주 양조장의 자극적인 폐수를 먹고 자란 병약한 소에서 짜낸, 맛없는 상한 우유였 다고 한다. 당연히 우유에 대한 선호도도 낮았다. 더구나 1880~90년대에 걸쳐 미국 전역에서 장티푸스가 기승을 부리자 우유가 그 원인으로 지목되며 온갖 비난의 화살을 맞게 된다. <뉴욕타임스>는 "매년 수천 명에 달하는 영유아의 사망뿐 아니라 수 년간의 고통 속에 수만 명이 죽어나가는 폐결핵의 원인이 젖소의 우유 때문"이라고 보도했다.(본문 36쪽) 과학자들은 몇 가지 연구를 통해 장티푸스균이 우유 공급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결론지었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각종 언론들은 이것을 확 대재생산 하면서 우유를 각종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나섰다. 심지어 공중보건 전문가들조차도 우유가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합세한 것이 다. 그후 저온살균 처리가 개발되면서 우유는 비로소 세균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벗게 된다. 저온살균 처리 시설이 의무화되면서 우유업체들은 판 매량을 늘리기 위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인다. 포스터, 홍보물, 연극, 노래는 물론 '건강요정'이라는 스토리 메이킹을 통해 드디어 우유는 '완 전식품'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완전식품으로 변신한 우유를 위해 심지어 우유업체들은 뉴욕시장까지 설득해 '우유주간'을 선포하고 이 기간 동안 시장과 시 보건위원들은 매일 점심시간에 1리터의 우유를 마시는 시범까지 보여 우유에 대한 믿음을 확인시킨다. 마치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며 청와대에서 몸소 시식하는 우리네 대통령의 모습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도축장 찌꺼기를 햄버거용 패티로 만들어 원가절감 이처럼 대대적인 캠페인을 통해 '가장 위험한 식품'에서 '완전식품'으로 탈바꿈한 우유와 달리, 2008년 촛불시위에 불을 붙이며 우리나라를 뜨 겁게 달구었던 미국의 쇠고기는 또 다른 양상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미국인들은 태생적으로 쇠고기를 갈구하는 민족'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쇠고기를 너무나 사랑하는 미국인들은 그 어떤 외부 환경이나 굴하지 않고 꿋꿋한 쇠고기 사랑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한 육가공업체의 막강한 로비력과 정부의 뒷받침으로 쇠고 기에 관해 제기되는 그 어떤 불편한 진실도 쇠고기 소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 이야기이고, 미국인처럼 쇠고기에 환장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밝힌 미국산 쇠고기에 얽힌 실상을 알고 나면 더 이상 버거킹이나 맥도날드의 햄버거를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평범한 소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고, 청와 대를 지키는 분들이나 식품업체 관계자들의 생각은 또 다르겠지만. 미국에서 쇠고기에 관한 공포는 1898년 12월, 쿠바에서 육군 사령관을 지냈던 넬슨 마일스 장군의 내부 고발에서 시작된다. 마일스 장군은 쿠바 주둔 당시 자신의 부대에 공급된 쇠고기 중 상당수가 화학 약품 처리된 불량 쇠고기였다며 진상 조사를 요구하고, 결과는 마일스 장군 의 예상대로였다. 사람들은 쿠바에서 벌어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총탄에 맞아 죽은 미군보다 상한 쇠고기를 먹고 죽은 미군이 더 많다고 생각했으며, 마일스 음식물 쓰레기보다 약간 더 나은 미국산 햄버거? 52

53 장군 역시 그렇게 말했다. 업튼 싱클레어는 <정글>이란 소설과 각종 기고문을 통해 당시 도축장의 열악한 환경을 폭로한다. 쥐와 쥐약 묻힌 빵, 그리고 쇠고기가 함께 뒤섞여 호퍼에 실리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생고기는 거의 안전하다고 볼 수 없었다. 부패가 진행 되면 쿠바에서처럼 이를 감추기 위해 붕사를 이용해 처리하곤 했다.(본문 85쪽) 싱클레어가 미국 전역에 공급되는 쇠고기 대부분을 가공 처리하던 시카고 도축장의 열악한 환경을 폭로한 대목이다. 그러나 마일스 장군이나 싱클레어의 이런 폭로에 사람들은 경악하긴 했지만 놀랍게도 미국에서 쇠고기 또는 다른 육류 소비가 크게 줄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저자는 밝힌다. 당시 치위생사들은 "햄버거는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 것보다 약간 더 나은 것일 뿐"이라고 경고했으며, <뉴욕타임스>는 코니아일랜드에 공급 되는 비엔나소시지가 호텔에서 나오는 고기 내장과 쓰레기 부산물들로 만들어진 '가장 부패한 음식'이라는 기사도 실었지만, 이 역시 쇠고기 소비량에는 별 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일단 먹어보고 문제 있으면 리콜' '... 정말 편리한 발상 문제는 싱클레어의 폭로 이후 약 백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도 쇠고기와 관련한 미국의 상황은 별로 나아진 점이 없다는 것이다. 2001년 탐사 저널리스트 에릭 쉴로서가 <패스트푸드 제국 : 미국 음식의 어두운 이면>이라는 책을 통해 정부의 개입을 촉구했지만 오히려 더욱 막강해진 육가공 업체들의 강력하고도 조직적인 정치적 영향력만 확인했을 뿐이라고 한다. 2002년 발명가 엘든 로스는 애완동물의 사료와 오일을 만드는데 사용되던 도축장의 버려진 패티 찌꺼기를 분쇄육으로 가공하는 방법을 개발 해 정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의 회사 비프 프로덕트는 원심 분리기를 이용해 지방에서 단백질 잔여물을 분리하고, 이를 통해 생산된 분쇄 육처럼 생긴 물질을 암모니아 가스로 처리해 0157:H7과 살모넬라 병원균을 제거했다. 이 제품은 60파운드 단위로 냉동 포장해 쇠고기 원가 절감 방안을 모색 중이던 학교 급식, 교도소, 카그릴, 맥도날드, 버거킹 및 많은 소매점으로 팔려나갔다.(본문 109쪽) 2007년 한 해 동안 0157:H7 대장균으로 인해 21회의 쇠고기 리콜이 단행됐지만 적발되지 않은 사례는 여전히 많았다. 전문가들은 2007년 2500만 파운드 이상의 오염된 쇠고기가 미국 시장에서 판매됐을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이 수치는 2008년 2월, 자체 검역을 통해서가 아니 라 동물 애호회에 등 떠밀린 농무부가 캘리포니아 사육장에서 생산된 쇠고기 잔여분에 대해 리콜 명령을 내린 양이 무려 1억4300만 파운드에 달했다는 데 비하면 얼마되지 않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사육장은 2006년 2월부터 식품 공급망에 합류한 업체였는데, 동물 애호회가 이곳을 직접 방문해 질병에 걸려 걷지도 못하는 이른바 '다우너 소'의 도축 과정을 생생하게 촬영했다. '다우너 소'는 도축 직전 며칠을 박테리아에 피부를 노출시킨 채 배설물로 범벅이 된 사육장에서 보내기 때문에 대장균 감염 위험이 매우 높았다. 당시 이 회사가 생산하는 3700만 톤의 분쇄육은 학교 급식용 햄버거, 타코, 칠리로 가공되었으며, 제너럴 밀스, 네슬레, 콘아그라, 하인즈 등 거의 대부분의 주요 식품업체들도 이 제품을 사용했다.(본문 108쪽) 현실이 이 지경임에도 미국은 쇠고기에 관해서 '이상없다 내지는 이상이 있으면 리콜한다'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일단 먹어보고 문제가 없 으면 다행이고, 문제가 있으면 리콜 조치하면 된다는 정말 편리한 발상 아닌가. 2011년 1월, 미국은 양당 합의하에 FDA가 식품 생산과 관련해 리콜 명령과 관리 감독이라는 새로운 권한을 갖는다는 법을 통과시켰지만, 여 기서 중요한 사실은 쇠고기와 육류는 대폭 강화된 정부의 관리 감독을 교묘히 피해 여전히 FDA가 아닌 농무부의 친절한 보호를 받게 된다 는 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를 위한 전국민적 촛불시위을 이명박 정부는 반미운동과 정치적 선동으로 몰고 갔다.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정치적 선동으로 몰고갔던 정부는 오늘도 미국이 전하는 '안전하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국민에게 전달하며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보다 약간 더 나은 미국산 햄버거? 53

54 올들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호주산을 앞지르며 국내시장 점유율 1위에 복귀했다고 한다. 청와대 시식회까지 연 이명박 정부의 노력이 이제 서야 결실을 본 것일까? 그런데 정녕 이 쇠고기들이 안전할까? 정부가 발표하는 '안전하다'는 검사결과를 믿어도 좋은 것인지도 의심스럽기 만 하다. 덧붙이는 글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씀, 김지향 옮김, 지식트리 펴냄, 2012년 8월, 1만4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음식물 쓰레기보다 약간 더 나은 미국산 햄버거? 54

55 11 반복된 집단학살, 하나님도 가해자였다?

56 반복된 집단학살, 하나님도 가해자였다? :53 [서평] 존 도커의 <폭력의 기원>, 피해자가 가해자 되는 악순환 계속 돼 조직폭력, 학교폭력, 용역폭력, 성폭력, 가정폭력 등 요즘 우리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이슈들은 하나같이 폭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왜 인간은 폭력을 사용할까? 인간 본성에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런 폭력의 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 는 폭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948년 국제연합의 '집단 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에서 라파엘 렘킨에 의해 최초로 정의된 제노사이드(Genocide)는 집 단학살을 뜻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전멸시키려는 목적으로 자행하였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 판 이후 국제연합은 집단 학살을 국제법에서 규정하는 CPPCG에 동의하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독일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했던 유대인들이 전후에는 학살자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현대 이스라엘과 시온주의는 식민지화와 정복 그리고 제노사이드로 이어지는 오래된 역사를 현대에 와서 그대로 보여주었다. 역사적으로 집단학살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환되는 것 은 성경에도 등장하는 낯설지 않은 일들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 인문학 연구센터의 연구전담 교수로 제노사이드를 연구해온 존 도커는 <폭력의 기원>(알마)을 통해 폭력 중에서도 집단 간의 폭력에 주목하고, 폭력의 기원을 탐구하고자 한다. 저자는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는 원인을 되도록 먼 곳에서부터 찾기 위해 '인간 이전'의 역사까지 더듬는다. 성경의 <출애굽기><여호수아서><사사기>와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타키투스의 저작들과 셰익스피어와 흄, 리오타르, 들뢰즈의 저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전들과 영장류동물학, 진화론, 세계 역사를 두루 살펴 제노사이드와 정치철학 등을 분석한다. 그리고 저자는 인류의 역사가 유일신교와 다신교를 막론하고 신이 허락한 정복, 식 민화, 제국 건설, 민주주의와 제국의 치명적 결합 그리고 혁명, 대학살, 고문, 신체 절단, 잔학 행위 등이 자행되어 온 전쟁과 제노사이드로 물든 폭력의 역사라고 말한 다. 저자는 재난과 재앙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중 요한 순간들을 탐구하고, 그래서 치열하고 명확한 인식에 도달할 때에만 폭력에 대 한 대안이 떠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폭력이 난무하고 폭력적 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폭력에 대한 대안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침팬지 사회-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발견된 ' 제노사이드' <폭력의 기원> 겉표지 c 알마 관련사진보기 반복된 집단학살, 하나님도 가해자였다? 56

57 그렇다면 폭력을 행하는 건 인간만이 가진 특성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지금까지 연구에 의한 일반적인 통념은 정교한 지성 을 갖춘 인간만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희생자의 고통을 극대화시켜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기거나 거기에 무관심할 수 있기 때문에 잔학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침팬지 연구를 진행해온 제인 구달에 따르면 폭력에 있어서 인간과 다른 영장류의 차이를 확신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 이유는 침팬지 역시 잔학 행위를 저지르고, 어느 정도는 욕망과 감정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동정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줄도 알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오랜 종단연구(장기간의 시간 흐름에 따른 변화를 관찰하는 연구)를 통해 구달은 침팬지 공동체가 두 집단으로 나눠지면서 침팬지들이 '폭력 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는 장면을 목격했다. 구달에 따르면 침팬지들이 특정한 상황에 닥치면 같은 종족을 죽이거나 심지어 잡아먹기도 한다 는 충격적인 행동특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구달의 분석은 제노사이드란 한 집단의 필수적인 생존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도하는 다양한 행위의 통합 계획을 의미한다는 라파엘 렘킨 의 논의와 일치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제노사이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가해자들이 폭력을 즐길 뿐 아니라 극단적인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폭력에 끌린다는 점이다. 댄 스톤의 논문 '관습 위반으로서의 제노사이드'에 따르면 캄보디아와 르완다 사태, 난징의 강간, 밀라이 학살의 경우처럼 현대의 제노사이드 와 대량 학살은 인류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관습을 위반한 폭력이었다. 살인 혹은 살인에 대한 기대 심리를 포함한 폭력의 향유이자 잔혹극 그 자체로서, 가해자는 난교 파티가 연상될 정도로 폭력 행위를 즐긴다. (본문 53쪽) 이에 대해 발터 벤야민은 역사의 문명인과 야만인은 영원히 공존한다고 했으며, 저자는 결국 평범한 일반인들도 제노사이드와 대량 학살을 저지를 수 있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전범 아이히만을 보며 아렌트 는 악한 일을 행한 인간은 평범할 수 있으나 악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고 말한다. 흔히 제노사이드와 같은 잔학 행위는 힘으로 다른 나라 혹은 집단을 제압하는 제국주의 국가에서나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아 테네처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는 제노사이드와 같은 잔학 행위에 가담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 음은 착각이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이러한 일반적인 믿음을 가차 없이 깨뜨려버린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식 민지를 개척하는 제국이나 초대국을 건설하는 민주주의 민족국가가 그런 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특히 더 높다고 이야기한다고 저자는 말한 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을 꽃피웠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 페리클레스가 숭배한 것은 근대에 들어 '지배민족'이나 '인종민주주의'로 인식했던 것 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투키디데스는 특정 집단이 우월하다는 개념에 기반을 둔 권위주의적 체제는 필연적으로 정치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지적했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아이러니한 역사의 악순환 반복된 집단학살, 하나님도 가해자였다? 57

58 유대인들과 포로들이 나치에 의해 강제로 수감돼 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감방과 그 둘레로 처진 고압 철책선들 c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주말의 명화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 <십계>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여호와의 명으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을 찾아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사람들은 히브리인에 감정이입되어 그들이 박해를 벗어 나 새로운 땅에 무사히 안착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가 그들의 피해자학이나 제노사이드적 측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고대 히브 리인들이 가나안에서 저지르는 제노사이드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멸망한 트로이를 탈출한 트로이인들이 로마를 정복하며 행하 는 파괴행위는 전형적인 피해자학의 서사를 보여준다. 피해자학의 서사란 자신들이 과거에 당한 구속, 박해, 고통의 경험으로 그들이 나중에 저지르게 되는 폭력, 정복, 파괴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 을 말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는 제노사이드를 저지른 인간과 함께 신 또한 제노사이드에 대해 결코 무죄일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호수아서>를 읽으면 오로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욕구와 야망에만 관심을 보이는 신의 도덕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신은 자신이 파 괴한 민족이나 파괴 행위를 도운 민족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고, 자신을 유일신으로 섬기겠다고 판단한 사람들에게서 파괴를 통해 충성심을 확보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여호수아서>에 등장한 신은 가장 강력한 모습으로, 그렇기에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제노사이드 가해 자의 한 명으로 그려진다. 렘킨의 개요를 참고하면, <여호수아서>에서 신, 여호수아, 히브리인은 모든 죄목에서 제노사이드에 대해 유죄다. (본문 186~187쪽) 저자는 이러한 피해자학의 서사를 담은 텍스트가 서양 역사에서 작용하고 수용하고 마침내 복잡하게 얽히면서 윤리적 참사의 전형이 되었다 고 말한다. 도덕적 자각의 측면에서 보면, 이집트에서 억압과 박해를 받았던 히브리인이나 그리스에 의해 고통받았던 트로이인은 그들의 고 통과 박해에서 아무런 교훈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복된 집단학살, 하나님도 가해자였다? 58

59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고통 받았으면서도 다른 도시, 다른 민족, 다른 땅을 침략하고 파괴하고 불태우고 복속시키고 노예로 삼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기본적인 자각조차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현대의 시온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시온주의자들은 홀로코스트를 겪었으면서도 여러 민족들이 우호적으로 살면서 정치적 조직을 공유하고 서로의 좋은 점을 배우며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시각을 지녀야겠다는 단 하나의 역사적 교훈조차 얻지 못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 법원은 지난 8월 28일, 2003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시위를 벌이다 이스라엘군 불도저에 압사당한 미국 활동가 레이첼 코리 사건에 대해 "이스라엘군과 사법시스템은 정당하다"며 레이첼 코리의 가족이 제기한 소송을 기각했다. 그리고 또 다른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이란 핵 시설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중동 지역에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고 한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에서 "폭력의 실천은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변화시키지만, 더 폭력적인 세계로 변화시킬 가능 성이 가장 크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이 인간을 학살하고, 살아갈 근거와 문화를 파괴하는 행위는 이제 종식되어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불천노 불이과( 不 遷 怒 不 二 過 )' 즉 '자신의 분노를 남에게 옮기지 말고 잘못을 두 번 반복하지 말라' 하였다. 이 세상이 남의 허물과 잘못을 '눈에는 눈'으로 갚는 것이 아니 라, '반면교사( 反 面 敎 師 )'로 삼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폭력의 기원>, 존 도커 지음, 신예정 옮김, 알마 펴냄, 2012년 8월, 1만7500원 <오마이뉴스> 게재 반복된 집단학살, 하나님도 가해자였다? 59

60 12 유럽도 몰랐던 나일강의 발원지가 조선의 지도에?

61 유럽도 몰랐던 나일강의 발원지가 조선의 지도에? :50 [서평] 지도에 새겨진 2,000년 문명의 기억을 따라가는 <문명의 기억, 지도> 초등학교 때 방학숙제로 '우리 동네 지도 그리기'를 한 기억이 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동 네의 지도를 막상 그리려고 보니 꽤 막막했다. 우선 동네 범위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정해야 할지, 무엇을 중심으로 그려야 할지, 또 얼마만큼 축소시켜야 할지 등 지도그리기는 생각보다 쉽 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동네에 대해 잘 아는 것이다. 결국 숙제는 지도라기보다는 약도 수준에서 끝이 났지만, 이때의 경험이 지도와 지리에 대해 흥 미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각종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 겨우 동네 지도 를 그리는 것만 해도 어려운데, 교통도 발달하지 않고, 지식도 정보도 많지 않았던 수백, 수천 년 전에는 어땠을까. <문명의< 기억, 지도> 표지 사진 c 중앙북스 관련사진보기 지도를 그리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고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지도는 꼭 필요한 도구였 다는 것이다. 1만 4천여 년 전 구석기인들은 사냥터에서 동굴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돌에다 선으로 표시했다. 또한 남태평양 마셜 제도의 원주민들은 광활한 바다 한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 야자나무 막대기 와 작은 돌멩이, 조개껍질을 엮어서 섬과 섬 사이의 바닷길을 표시하는 '스틱차트'를 만들었다. 이처럼 생존을 위해 만들어졌던 지도는 이제 맛집 찾기, 지하철 노선도, 놀이동산 안내도까지 다양한 목적을 위한 지리정보를 제공한다. 그런 데 지도가 이처럼 단순한 지리 정보만을 기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지도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사연들이 숨겨져 있고, 인류의 오랜 상상력과 호기심, 가치관과 철학, 종교와 문화 등이 살아서 꿈틀대고 있다고 말하는 책이 있다. 바로 <문명의 기억, 지도>(중앙북스)이다. <문명의 기억, 지도>는 지도에 숨겨진 기나긴 역사의 기억들에 관한 책으로, 지난 3월 KBS 1TV에서 방송된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책으 로 엮은 것이다. 방송을 보지는 못했지만 다큐멘터리의 특성대로 책 역시 기록을 통해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형식이 무척 흥미롭다. 하나의 지도 안에는 그 지도를 탄생시킨 사회의 역사, 문화, 삶의 모습들이 숨어있고, 따라서 지도를 이해하는 일은 지도 속에 숨겨진 사회의 면면들을 이해하고 해석해내는 일과도 같다고 <문명의 기억, 지도>는 말한다. <문명의 기억, 지도>는 지도 위에 아로새겨진 인류의 역사를 찾 아 나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유럽도 몰랐던 아프리카의 모습을 조선은 알고 있었다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 최초로 희망봉 발견'.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줄을 그어 가며 열심히 외웠던 대목이다.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최 유럽도 몰랐던 나일강의 발원지가 조선의 지도에? 61

62 초로 희망봉을 발견했다는 말인즉슨 1488년 전까지는 외부인들 중 아무도 아프리카의 최남단까지 가 본 사람이 없고, 당연히 온전한 아프리 카의 모습을 아는 사람도, 그것을 나타낸 지도도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아니다.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하기 이전에 온전한 아프리카의 모습을 담은 지도가 있다. 그것도 바르톨로뮤 디아스보다 약 80년도 더 전인 1402년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 一 疆 理 歷 代 國 都 之 圖 )>. 이 지도엔 아프리카가 하나의 대륙으로 정 확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기원전 279년에 건설되어 1326년 지진으로 영원히 전설로 묻혀버린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의 모습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중세 유럽에서 탄생한 가장 뛰어난 지도로 손꼽히는 <카탈루냐 세계지도>도 그리지 못한 아프리카의 모습을 조선의 지도가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문명의 기억, 지도>의 1부 '달의 산'은 바로 조선의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어떻게 유럽의 지도도 담아내지 못한 아프리카의 모습 을 담아낼 수 있었는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표시된 나일 강의 발원지 '달의 산'에 대한 인류 최초의 기억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 다. 첩보활동의 기본은 지도 작성 그런데 매우 유감스럽게도 현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한국이 아닌 일본의 류코쿠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카탈루냐 세계지도> 역 시 스페인이 아닌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중이다. 왜 지도는 원래 만들어진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관되고 있을까? 그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지도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지>의 클라이맥스이자 아시아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로 손꼽히는 '적벽대전'을 영화화한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 2 : 최후의 결전>을 생각해보자.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모인 적벽에서 영웅들 못지않은 기개를 지녔던 여인이 한 명 있다. 바로 오나라 손권의 누이동생이자 공주 인 상향. 그녀는 대담무쌍하게도 조조의 진영에 첩자로 침입해 속옷에 조조진영의 지형도를 그려와 승리에 기여한다. 아마도 상향이 그려온 지형도가 없었더라면 조조군에 맞선 오, 촉 연합군의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첩보활동의 주임무 중 하나는 적의 지리정보 를 캐오는 것이었다. 1880년대 일본 역시 대륙 진출을 앞두고 참모본부 소속의 장교들을 조선으로 보내 한반도의 지도를 그리게 했다. 일본이 이렇게 몰래 제작한 지도에는 한반도의 지형은 물론 도로, 교량, 각 지역의 호수와 전답 정보까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도는 일본이 세계의 열강들로부터 배운 가장 큰 무기였다고 <문명의 기억, 지도>는 말한다. 지도를 가진 자가 더 넓은 땅을 차지하고 더 많은 부를 획득할 수 있기에 지도를 손에 넣기 위한 세계 각국의 쟁탈전은 치열했고, 일본 역시 제국주의의 야욕을 실현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이 지도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는 외국에서 빼가지 못하도록 국가차원에서 관리 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건 좀 아쉽네 지도 속에 숨겨진 문명의 흔적과 기억을 찾아 아프리카, 히말라야를 비롯한 전 세계를 누비며 긴 시간을 취재한 결과물인 <문명의 기억, 지 도>는 구성원들의 흘린 땀방울만큼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었으며 또 유익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오류가 보여 조금 아쉽기도 하다. 유럽도 몰랐던 나일강의 발원지가 조선의 지도에? 62

63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 것은 1488년이다. 유럽은 이 위대한 발견이 있었던 1488년이 지나서야 지도 위에 아프리카를 하나의 대륙으로 온전히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유럽이 아프리카를 발견하기 무려 80여 년 전에 조선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탄생시킨 셈 이다. 아프리카에 관한 최초의 기억, 그 기억을 가진 나라는 조선이었다. (본문 39쪽) <프라 마우로 지도>가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아프리카 대륙이 온전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지도가 완성된 것은 1459년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모습을 알지 못했다. 유럽이 아프리카 대륙의 온전한 형태를 알게 된 것은 1488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 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 이후부터다. 그런데 이보다 30여 년 전의 지도인 <프라 마우로 지도>에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까지 그려 져 있는 것이다. (본문 228쪽) 1부 '달의 산' 편에서 1488년 이전에 아프리카를 온전한 형태로 그린 지도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만 언급될 뿐 <프라 마우로 지도>에 관 한 언급은 없었는데, 3부 '프레스터 존' 편에서는 온전한 아프리카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지도로 1459년에 만들어진 <프라 마우로 지도>를 말 한 것은 조선의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강조하고 싶었던 탓일까. 2000여 년 전 중국을 최초로 찾은 서양인은 고대 로마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166년 후한의 수도였던 허난 성 河 ( 南 城 의 뤄양 洛 陽 에 처음으 로 도착했다. <후한서> 제86권에는 고대 로마 제국의 사신들이 바닷길을 따라 베트남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내용이 비교적 상세히 쓰 여 있다. 2000여 년 전에 머나먼 나라 로마에서 어떻게 바다를 건너 중국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지도에 있다. 중국을 찾고자 했던 로마인들의 오랜 여정 끝에 완성된 한 장의 지도. 그것은 당시 존재하던 어떤 지도들과도 비교가 안 되는 위대한 세계지도였다. (본문 105쪽) 1900여 년 전 알렉산드리아에서 탄생한 한 장의 세계지도. 이것은 고대 인류가 그린 가장 위대한 세계지도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당시 그 누구도 그리지 못한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바다의 길을 그려냈다. 이 위대한 세계지도는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을 까? (본문 109) 2000년 전에 그려진 이 한 장의 지도로 훗날 인류는 아시아 너머의 더 큰 세상을 보게 되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주고, 새로운 세상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준 지도. 인류가 지도 위에 또 하나의 대륙을 그려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의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본문 159쪽) 2부 '프톨레마이오스' 편은 2000여 년 전 로마인들이 중국을 최초로 찾은 이후, 프톨레마이오스가 세계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는 내용인데, 본문 105쪽의 기술은 지도가 있었기에 마치 중국으로의 항해가 가능했다는 것처럼 약간은 애매모호하다. 지도가 그려진 시기를 언급하는 대 목도 어떤 구절에서는 2000년 전이라고 했다가 또 어떤 구절에서는 1900년 전으로 서술하는 등 일관적이지 않아 좀 더 세심한 퇴고가 필요하 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쉽게 볼 수 없는 각 나라의 박물관에 소장된 진귀한 지도들을 찾아 <문명의 기억, 지도> 제작팀이 쏟았을 노력과 정열, 애착을 생각 한다면 이런 아주 미미하고 사소한 실수를 알아본 것이 미안할 정도다. 덧붙이는 글 <문명의 기억, 지도>, KBS 문명의 기억, 지도 제작팀 지음, 중앙북스 펴냄, 2012년 7월, 16,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유럽도 몰랐던 나일강의 발원지가 조선의 지도에? 63

64 13 뿌리깊은 종기에는 돼지 똥이 특효?

65 뿌리깊은 종기에는 돼지 똥이 특효? :05 [서평] 방성혜의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7월 말 왼쪽 광대뼈와 코 사이에 뭔가 나면서 붓기 시작하더니 이튿날에는 눈까지 부어올랐다. 벌레에 물렸나 싶어 곧 가라앉으려니 생각했 는데 다음 날이 되니 더욱 부어올라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피부과를 갔더니 의학용어로 '표피낭종', 심각하지 않은 일종의 종양이라고 한다. 더 쉽게 말하면 종기인 셈이다. 심각하지 않다고는 했지만 병원치료를 하고 거의 한 달이 된 지금까지도 얼굴 가운데 붉은 멍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면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다. 생긴 부위가 얼굴인지라 특히나 신경이 쓰이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종기. 그 종기에 관한 책이 나왔다. 한의사 방성혜가 쓴 <조선, 종 기와 사투를 벌이다>이다. 종기가 별것 아니라는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종기와 사투를 벌인다는 책 제목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조선의 27명 왕들 중 12명이 종기로 고 생했고, 그중에는 종기 때문에 죽은 왕들도 있었다니 비장할 수밖에. 그런데 종기로 죽을 수도 있다니, 이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다. 흉터 가 좀 남더라도 곪으면 짜고 약 바르면 낫는 것이 종기 아닌가. 더구나 온갖 좋은 약재는 다 쓸 수 있는 왕이 종기로 죽다니 이건 좀 충격적 이다. 뿌리깊은 종기에는 돼지 똥이 특효? 65

66 저자의 말에 따르면 과거 우리 민족을 가장 괴롭혔던 질병이 바로 종기였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 집집마다 고약은 상비약이기도 했 다. 종기는 피부에만 나는 것도 아니었다. 피부에 생길 수도 있고, 오장육부의 내장에도 생길 수 있다. 림프선이 곪으면 림프절염이 되고, 관 절에 고름이 차면 관절염이 되며, 뼈가 썩으면 골수염이 된다. 그리고 장부( 臟 腑, 오장육부)가 썩으면 암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고도 대단한 병들을 단지 종기라고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종 기에 걸렸다'는 것은 마치 오늘날 '암에 걸렸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조선 의료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종기와 맞선 처절한 싸움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나라에서는 종기를 잘 치료하는 의사를 육성하고자 노력했고, 그의 의술이 사장되지 않도록 후학을 양성하고 문헌을 저술하는 데 힘을 쏟았 으며, 때로는 종기를 전문으로 치료하는 관청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종기 치료에 대한 국가적 노력이 실로 지극했던 것이다.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종기를 앓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2부는 종기를 치료한 이야기, 3부는 종 기를 치료하고자 치열하게 살다 간 의사들에 관한 이야기, 4부는 종기 치료에 쓰인 도구와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은 한의학 전공자가 아니라도 이해하기 쉽고 재미나면서도 종기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유익하고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화내지 마세요, 그러다 ' 종기' 생겨요 중종, 광해군, 숙종, 경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화병으로 인한 종기를 앓았다는 점이다. 화병은 글자 그대로 심장에 화( 火 )가 쌓인 것이 풀리지 못해서 생기는데, 이렇게 화 때문에 생기는 병의 특징은 인체 상부에 생긴다고 한다.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고 불은 항상 위로 타오 르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화( 火 )가 종기를 일으키는 원리를 <동의보감>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화열( 火 熱 )이 침범하면 끓어올라 빨리 돌다가 병의 기운을 만나게 되 면 한곳에 몰려 체액이 끈적해져서 담( 痰 )과 음( 飮 )이 되는데, 이것이 혈맥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혈맥이 탁해져서 종기가 된다."(본문 77쪽) 중종이 앓았던 협옹( 脅 癰 )은 옆구리 부위에 생긴 종기를 말한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협옹은 간( 肝 )과 심( 心 )에 화( 火 )가 성( 盛 )하여 생긴다 고 한다. 죄 없는 조강지처를 쫓아내야 했던 슬픔, 반정공신들에 대한 분노, 끊임없이 세력다툼을 벌이는 훈구세력에 대한 울분, 사림세력에 대한 염증 등이 쌓여 중종에게 협옹이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숙종은 간농양을 앓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간농양이란 간에 고름이 생긴 것을 말한다. 담석으로 담관이 막히면 담즙(쓸개즙)이 흐르지 못하 게 되고 여기서 세균이 증식해 곪으면 간농양으로 이어지는데 한의학에서는 간옹( 肝 癰 )이라고 하며, 용어 그대로 간( 肝 )에 생긴 화농성 종기 ( 癰 )라는 뜻이다. 숙종은 다혈질이고 급한 성정을 지녔는데 이러한 다혈질 성격은 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간은 분노의 장부( 臟 腑 )로, 다혈질인 사람은 분노가 잘 쌓이고, 분노가 쌓일수록 간이 병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같은 숙종의 성정이 간을 병들게 만든 한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난치성 종기 ' 정창' 치료법, 어미돼지 똥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주인 빌 게이츠 재단이 가난한 국가에 적합한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 '화장실 재발명 박람회'를 개최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중 눈길이 가는 화장실이 극초단파에너지를 사용해 배설물을 전기로 바꾸는 화장실이었다. 한마디로 똥이 전기로 탈바꿈하는 순간 뿌리깊은 종기에는 돼지 똥이 특효? 66

67 아닌가.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똥이 전기가 아니라 약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인간에게 유익한 미생물을 먹을 수 있는 형태로 가 공하는 프로바이오틱스의 일종인데, 건강한 사람이나 갓난아이의 대변 혹은 건강한 가축의 분변을 받아 물에 희석하여 찌꺼기는 걸러내고 맑 은 액만 받아 치료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변을 약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에는 세종 때 편찬된 <향약집성방( 鄕 藥 集 成 方 )>도 있다. <향약집성방>에는 피부 표면으로 보이는 면적은 좁은데 그 뿌리가 깊숙이 박혀 있어 치료하기가 무척 어려운 정창이라는 난치성 종기에 대해 이런 내용이 기록 되어 있다고 한다. "정창의 뿌리가 복부까지 퍼지려고 할 때에는 어미돼지의 분변을 물과 섞어 즙을 짜낸 후 1-2홉을 복용하면 낫는다."(본문 329쪽) 즉 정창의 독기가 장부에 위치한 복부까지 퍼지는 위급한 상황에는 돼지 변을 물과 섞어 즙을 내어 복용하라는 것이다. 변을 이용한 이 치료 법에 대한 기록이 조선 초기부터 중기, 말기의 한의학 문헌에 고루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변 여과액이 위급한 상황의 응급 소염 항생 제로서 실제로 효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골든타임>의 최인혁이 조선시대에도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의학드라마 <골든타임>에 많은 사람들이 씁쓸한 공감을 표현하고 있다.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를 서로 자기 과 가 아니라며 미루던 의사들이 높으신 분의 전화 한통에 180도 돌변하고, 의식 불명의 환자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 "얼굴 도장 찍었으니 포커 나 한 판 하자"며 농지거리를 한다. 의사라는 직업에서 사람의 목숨을 살린다는 사명감은 볼 수 없고, 돈벌이와 출세의 도구로 삼는 장사꾼의 모습만이 보이는 오늘날 의학계에 서 인간적이면서 참다운 의료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최인혁은 별종이다. 그런데 이런 최인혁과 같은 인물이 조선시대에도 있었으니, 조광일이 다. '침술의 숨은 달인'이라는 의미의 '침은( 鍼 隱 )'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조광일은 종기를 침으로 치료하는 기술이 뛰어났는데 조광일 역시 최인혁처럼 보통 의사들과는 정반대 행보를 보였다. 지위가 높은 벼슬아치의 집에는 아예 발을 디디지 않았고, 고관 현작( 高 官 顯 爵 )들의 왕진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돈 없고 힘없는 백성들의 병만 치료했다고 한다. 이유는 권세 있는 집에는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가려는 의원들이 많을 것이므 로, 자신은 오직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만 치료하겠다는 것이다. 요즘 현실에서 조광일이나 최인혁 같은 의사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이겠 으나, 누구나 바라는 것이 또한 이런 의사들에게 진료받는 것 아니겠는가.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을 중심으로 각종 의학서와 문헌들을 통해 우리 역사 속에 자리한 종기를 살펴보고 있다. 종기가 생기면 오염된 세포를 파괴하고 그곳에 새로운 세포가 재생되도록 해야 하는 것, 이른바 파괴와 재건이 가장 기본적 이면서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치료법이 통하지 않아 때로 왕조의 역사가 흔들리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살다보면 여기저기서 종기처럼 사회를 어지럽히는 일들이 생겨난다. 조금 붓다가 곧 가라앉는 것이 있는가 하면 곪을 대로 곪아서 손쓰기도 어려운 지 경에 이르는 일도 있다. 뿌리깊은 종기에는 돼지 똥이 특효? 67

68 훌륭한 치종의( 治 腫 醫 )가 곪고 썩은 뼈와 살을 도려내어 종기를 치료하듯이, 곪고 썩은 세상의 종기를 치료할 능력 있고 훌륭한 우리나라의 치종의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말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방성혜 지음, 시대의창 펴냄, 2012년 7월, 15,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뿌리깊은 종기에는 돼지 똥이 특효? 68

69 14 열 명의 멋진 언니들과 함께 이 밤을

70 열 명의 멋진 언니들과 함께 이 밤을 :26 [서평] 이화경의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 줄 듯 말 듯한 마음,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태도, 할 듯 안 할 듯 엉거주춤한 고백으로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남자. 사실상 까도남(까칠하고 도도한 남자)들의 원조 격인 매력남 미스터 다아시를 탄생시킨 <오만과 편견>의 저자 제인 오스틴은 첫 사랑에 실패한 후 평생을 혼자 살았 다. 그리고 생이라는 캄캄한 숲 속을 헤쳐 나갈 때 필요한 것은 자립의 등불이라고 믿으며 여섯 살 연하남의 청혼을 과감히 거절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는 박인환의 시에 등장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버지니아 울프는 아들들은 명문대학에 보내면서도 딸들은 집에 가둬놓는 가부장적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녀의 꿈은 제 손으로 돈 을 벌어 헌책방에서 읽고 싶었던 책을 한 아름 사고, 원없이 글을 쓸 수 있는 원고지와 잉크를 사는 것이었다. 인생이 힘들고 고달플 때, 외롭고 쓸쓸할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며 울고 싶을 때 사람들은 나보다 더 힘들었거나 더 외로웠거나 더 고통스 러웠던 누군가와 얘기 나누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나는 이랬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받기를 바란다. 여기 열 명의 언니들이 있다. 인생의 쓴맛, 조직의 쓴맛을 확실히 보고도 기죽지 않는 언니들. 그리고 주체적으로 뜨겁게 인생을 살다 간 멋 진 언니들. 제인 오스틴, 조르주 상드, 실비아 플라스, 프랑수아즈 사강, 버지니아 울프, 잉게보르크 바흐만, 로자 룩셈부르크, 수전 손택, 한 나 아렌트, 시몬 드 보부아르가 바로 그들이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향해 제대로 한 방씩을 날린 멋진 언니들. 나는 이들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 19세기에서 21세기까지, 급변하는 역사의 한 가운데서 세상을 향해 주저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이들의 삶은 무척이나 극적이면서도 매혹적이다. 소설가이자 광주대 문예창작과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이화경 교수는 젊은 날 힘들고 방황할 때 역사상 가장 지적이고 매혹적인 이 열 명 의 여류작가들의 삶에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었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웅진 지식하우스)는 이화경 교수가 이 열 명의 작가들과 교감하고 소통한 기록이다. 외롭고 울적할 때,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절망스러울 때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를 읽다 보면 땅을 차고 뛰어 올라 세상을 좀 더 치열하고 용기 있게 살아 가야겠다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혁명의 현장에서 죽기를 소원한 로자 룩셈부르크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에 이름을 올린 열 명의 언니들 모두 인생에 대 한 깊이 있는 사유와 강한 자존감을 가졌지만 그 중 가장 강한 카리스마와 강 렬한 인상으로 내게 다가온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다. 혁명의 상징 체 게바라 못지않은 강한 혁명가로 각인된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섯 살 때 골수 결핵에 걸린 후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갖게 됐지만, 고통과 병마와 고독은 오히려 그녀에게 날카로운 지성과 예민한 감성을 갖게 했다. 열 명의 멋진 언니들과 함께 이 밤을 70

71 이미 중학생 시절에 순진한 문학 소녀에서 펜을 칼처럼 휘두를 정치 행동가로 진로를 바꾸고 '모욕당하고 공격당한 사람들과의 연대는 절대적인 명령이자 실 존적인 필연'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사회주의자로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육 체적 장애를 딛고 운명과 대결하며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나 아간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는 각오를 끝까지 고수하는 로자,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조국이며, 자유 평등 박애 앞에 서 어떤 국경선도 인정하지 않았던 로자의 모습에선 매혹을 넘어 불온함마저 느껴진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젊어서는 누구나 혁명가로 살고 싶다가도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면 쪼그라든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비해 그녀의 모습은 두렵기 조차하다며 저자는 고개를 떨군다. "한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토로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꿈꾸었던 20대들은 이 제 보잘것없는 중년의 삶을 확 바꿔줄 로또 대박을 꿈꾼다. 더러는 한때나마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 책표지 c 웅진 지식하우스 관련사진보기 혁명가였고 왕년의 투사였던 이들은 권력으로 향하는 길로 일찌감치 들어섰다. 더러는 의회 의석에 한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진정한 뚜벅이들을 만나기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힘들어졌다. 혁명이라니, 개혁도 어려운 판에. 내 코가 석자인데 수정이라니, 개량이라니. 그저 현상유지만 해도 감사할 판국에."(본문 198~199쪽)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1961년 4월 11일 예루살렘의 지방 법정에서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게토로 이주시킨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진행됐 다. 방청객들은 잔악하기 이를 데 없는 끔찍한 괴물이 아니라 너무도 평범한 남자가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경 악했다. "그는 '이기면 훈장을 받고 패배하면 교수형에 처해질' 행위들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1995년 7월 18일에 검찰은 "성 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이유로 광주 학살의 책임자인 전두환, 노태우를 불기소처분했다.)"(본문 237쪽)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는 이데올로기적 맹신이나 악독한 동기가 한 인간을 악마로 만들기도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음, 즉 무사유야말로 악마적인 심연에 쉽게 빠져들게 하는 것임을 통찰했다. 아이히만에게 양심이란 명령받은 일을 수행하지 않을 때 느끼는 가 책일 뿐이었기에 유대인을 학살했던 죄의식이나 가책은 전혀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재판을 통해 한나 아렌트는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간이라면 목숨 걸고 사유해야 한다는 진실을 담은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 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저술한다. 그녀는 악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악한 일을 행한 인간이 '평범할 수' 있으며, '우리 안 에 아이히만'이 존재하며 무사유가 악과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가 전하는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최근 안산 SJM 공장에서 일어난 노조원 폭행사건을 계기로 컨택터스를 비롯한 용역업 체들의 용역폭력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특히 용역 아르바이트로 투입됐던 한 대학생의 인터뷰 기사가 떠올랐다. '비난은 자신들이 아닌 용역업체가 받아야 한다'며, 자신은 다음 학기 등록금을 버는 것이 더 절실하다고 말하던 그 대학생에게서 문득 한나 아렌트의 무사유야말로 악마적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존재한다는 말이 무섭도록 섬뜩하게 다가왔다. 열 명의 멋진 언니들과 함께 이 밤을 71

72 "아이히만은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악행을 저지를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 기가 무엇을 저질렀는지를 결코 깨닫지 못한 인간에 불과했다."(본문 24쪽) 내 속에 있는 아이히만이 존재를 나타내지 않도록 깊이 있게 사유하고 고민하며 살라는 한나 아렌트의 일갈을 들리는 듯하다. 열 명의 언니 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내 삶을 일깨운다. 열 명의 언니들과의 만남은 뜨뜻미지근하게 살아온 내 삶에 뜨거움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 좋은 계기였던 것 같다. 덧붙이는 글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 (이화경 씀 웅진지식하우스 만3800원) <오마이뉴스> 게재 열 명의 멋진 언니들과 함께 이 밤을 72

73 15 에너지도 셀프서비스 되나요?

74 에너지도 셀프서비스 되나요? :35 [서평] 제러미 리프킨의 <3차 산업혁명> 인도에서는 지난 30일 대규모 블랙아웃이 발생하여 6억여 명의 사람들이 이틀 동안 폭염 속에서 전기 없이 살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연 일 이어지는 기록적인 폭염에 전력사용량이 급증하면서 곳곳에서 정전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따른 정부 대책은 에너지 절약과 에너지 사용을 효율적으로 하라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에너지 부족사태가 에너지 절약만으로 해결될 수 있냐 하는 것이다.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는 줄어들지 않고, 이로 인한 지구온난화는 세계 곳곳에 재앙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만약 청정한 에너지를 각자 스스로 만들어 쓰고, 남는 에너지를 이웃과 공유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식당에 서 물을 셀프서비스 하듯이, 에너지도 셀프서비스가 된다면 획기적이지 않을까? 바로 이것이 세계적인 석학 제러미 리프킨이 제시하는 새로운 시대의 에너지 사용 모습이다.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에 의존하던 시대가 가고, 인터그리드를 통해 공유된 녹색에너지로 밝히는 세상이 우리가 가야할 새로운 시대의 모습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엔트로피>, <육식의 종말>, <소유의 종말>, <수소 혁명>, <유러피언 드림>, <공감의 시대>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통해 이미 대중들에게도 친숙하다. <3차 산업혁 명>(민음사)은 이러한 제러미 리프킨의 이전 저작들에서 드러났던 생각들이 집약되어 미래 사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상 거대한 경제혁명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새로운 에너지 체계와 결합할 때 발생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속 가능한 녹색에너지 시대로의 이행, 그리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정치, 사회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저자는 3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녹색에너지가 가져올 3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희망차다. 그 이유는 누구에게나 열려있기 때문이다. 자본과 자원에서 중앙집권적이고 통제 중심적이었던 1, 2차 산업혁명 시대와 달리 3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1, 2차 산업혁명에서 소외되었던 지구상의 극빈국들도 자본의 분산과 협업을 통해 새로운 시대로 도약할 가능성이 있다는 저자의 말 에서 미래에 대한 비전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에너지도 셀프서비스 되나요? 74

75 에너지도 민주화가 될까요? 연말 대선을 앞두고 경제 민주화가 화두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는 복지국가의 구축이 경제 민주화의 목적이라면 그 중심 에는 에너지가 들어가야 할 것이다. 저자는 에너지 체제가 문명의 성격을 결정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문명의 조직 방식, 상업 및 무역의 결 실에 대한 분배방식, 정치권력의 행사 방식, 사회적 관계의 관리 방식 등을 에너지 체제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21세기는 에너지 생산 및 분배의 통제 중심이 화석연료에 기반한 중앙집권형 거대 에너지기업 중심에서, 거주지에서 직접 재생 가능 에너지 를 생산하고 잉여분은 에너지 정보 공유체를 통해 교환하는 수백만의 소규모 생산자 중심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에너지 민 주화이다. 3차 산업혁명은 거대 권력이 소유했던 화석연료가 아니라 분산형 재생 가능 에너지 즉 태양력, 풍력, 수력, 지열, 바이오매스, 조력 등 어디서나 얻을 수 있고 대부분 공짜나 다름없는 에너지를 중심으로 조직된다. 재생 가능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분산성이기 때문에 위계 서열식 지휘 통제 메커니즘과 맞지 않고 협업 메커니즘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 다. 이 새로운 수평적 에너지 체제는 향후 거기서 증식되어 나올 수많은 경제활동에 대한 조직구조 모델을 확립한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분 산성과 협업성이 클수록 생성되는 부의 분배 또한 당연히 더욱 분산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대립 관계 는 공급자와 사용자의 협업 관계로 대체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전통적 시장구조에 기초해 지적 소유권을 엄격히 통제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리눅스 같은 부류의 등장에 대비하지 못했고, 브리태니커나 컬럼비아와 같은 백과사전 업체들은 위키피디아의 출현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네트워크로 음악, 영상, 의학, 여행 정보 등 수천 가지의 관심사를 공유한다. 15년도 안 되는 기간에 수백만 명 내지 수억 명의 회원을 보유한 수만 개의 소셜 미디어 네트 워크들이 꽃피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든 영역에 걸쳐 지식을 공유하고 창조와 혁신을 자극하는 새로운 분산 협업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자의 이 런 전망은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소유에서 공유와 접근으로 고전 경제이론은 시장에서 소유물을 교환하는 것이 경제활동을 부추기고 번영을 창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여긴다. 이것이 자본주 의의 핵심이고, 이러한 특성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역사의 대부분 기간에 인류는 수렵채집과 사냥을 하며 공동생활을 했고 자연의 부를 이용할 수 있는 즉시 소비해 왔다. 잉여 곡물 저장과 가축이라는 형태를 통한 소유물 개념은 기원전 1만 년경 농업 시대가 시작하면서 나타났지만 농업이 출현하고 나서도 소유 물은 개인소유라기보다 공동소유의 개념에 가까웠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땅을 사고판다는 개념은 영국 튜더 왕조 시대에 인클로저 법령 이 확립되고 나서야 자리를 잡았다고 하니 소유개념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짧은 기간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사유재산과 소유의 개념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내 것 대 네 것'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게 했다. 그 러나 3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욕구나 경제활동을 지배하는 가정에 관하여 완전히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3차 산업혁명의 분산적이고 협업적인 특성은 시장의 사유재산 관계를 중시했던 과거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제고하게 만든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분산과 협업이 특징인 경제에서는 글로벌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접근 권리가 시장에서 사유재산을 보유할 권리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2011년 1월과 2월 이집트에서 권위주의적 지배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셜 미디어의 힘이었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젊 은이들이 주도한 거리시위는 중동 지역 곳곳에서 독재정부의 몰락을 가져왔다. 에너지도 셀프서비스 되나요? 75

76 요즘은 판권이 살아 있는 신간의 내용을 챕터별로 인터넷에 무료 공개하는 출판사와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주요 신문과 잡지들은 자사 의 기사 콘텐츠를 온라인에 무료 공개한다. 소유권보다 접근권이 중요해지고, 리스, 렌탈, 타임셰어(time-share), 보유 계약 등을 활용한 비 즈니스 모델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보편권 접근권을 확립하고 지구상 모든 인류에게 글로벌 공유 생활권에 속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면 사회적 교류 범위는 엄청나 게 넓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권리 확립을 위한 개인적, 집단적 노력들이 과거에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만큼 중요해질 것이라 말한다. 깨끗한 부자를 꿈꾸며 작년 3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보며 세계는 원전의 위험성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했었다. 이후 독일은 2022년, 스위스는 2034년까지 원전을 모두 폐쇄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EU는 재생 가능 에너지를 통한 3차 산업혁명에 대한 공식 지지를 선언하고 가장 앞서 나가고 있다. 그러나 EU가 재생 가능 에너지를 이야기할 때 우리나라는 '원전르네상스'를 천명했다. 삼척 원전 건설 계획을 비롯하여 2030년까지 총 38기 의 원전을 건설할 예정이라고 한다. 원전의 위험성이나 기후변화 등은 차지하고 비용 대 효용을 따지더라도 원전건설이 결코 경제적이지 않 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왜 원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데이비드 캘러핸이 얘기한 '더러운 부자'들 때문이 아닐까? 데이비드 캘러핸은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평론에서 3차 산업혁 명의 첨단 기술 정보산업을 통해 새롭게 부자가 된 '깨끗한 부자'에 비해 2차 산업혁명의 환경 오염적인 채굴 산업으로 부자가 된 '더러운 부 자'들이 점점 쇠퇴하는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2차 산업혁명의 오랜 수호자들은 줄어드는 영향력의 끝자락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3차 산업혁명의 젊은 기업가들은 세계를 위한 수평적이고 지속 가능한 경제 전략을 발전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저자는 이 싸움의 결과에 따라 앞으로 누가 21세기 글로벌 경제를 좌우할지 결정될 것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한다. "업계와 정부는 20년 후에 어디에 있고 싶은가? 쇠락하는 2차 산업혁명의 에너지, 기술, 인프라 체계에 갇히길 원하는가? 아니면 떠오르는 3 차 산업혁명의 에너지, 기술, 인프라 체계로 이행 중이길 원하는가?" (본문 187쪽) 20년 후 우리는 어디에 서 있을까? 지금처럼 4대강 토목사업을 녹색성장으로 포장하는 일 따위를 계속한다면 녹색성장이 아니라 녹색오염에 물들 뿐이다. MB는 진정한 녹색에너지 체제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기반으로 하는 얄팍한 말속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3차 산업혁명>,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민음사 펴냄, 2012년 5월, 20,000원 <오마이뉴스> 게제 에너지도 셀프서비스 되나요? 76

77 16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우표 속에도 담겼네

78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우표 속에도 담겼네 :57 [서평] 나이토 요스케의 <우표, 역사를 부치다> 우편요금을 냈다는 증거로 붙이는 우표에는 그저 무궁화나 비둘기가 그려져 있는 것이 다 인줄 알았다. 편지를 붙이거나 받을 때 우표를 유 심히 본 일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데 우표 그림이 무궁화나 비둘기만 있는 것은 아니고 우표의 역할도 단지 우편요금의 수취 증명만은 아니 었다. 우표는 만들어진 당시의 정치, 사회적 정책과 이데올로기 같은 메시지를 담은 미디어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우편학자 나 이토 요스케의 <우표, 역사를 부치다>를 통해서다. <우표, 역사를 부치다>는 우표라는 기록물을 통해 20세기 현대사를 되짚어 보는 책이다. 저자는 우취(philately) 즉 우표 수집이나 연구와 달리, 편지나 엽서에 붙은 우표와 찍힌 소인 등을 분석해 우표가 만들어지고 통용된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밝혀내는 학문을 우편학이라고 정의한다. 우표박물관 부관장을 맡으며 우표와 인연을 맺게 된 저자는 우표와 우편물을 통해 역사나 국제 정치를 해독하는 우편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제창했다. 우표는 원칙적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발행된 만큼 거기에는 국가의 정치적 견해나 정책, 이데올로기 등이 자연스레 담겨 있게 마련이라는 것 이 저자의 생각이다. 실제로 많은 국가가 전시에 국민의 사기를 높이는 방안으로 우표나 엽서를 발행하거나,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국가 행 사 시 기념우표를 발행해 선전하기도 하였다. 또한 역사상 주요 사건이나 인물이 우표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해당 국가의 역사관이 그대로 우표에 투영되는 것이다. '232개 우표가 담은 역사의 의문'이라는 부제를 단 <우표, 역사를 부치다>는 북한, 베트남, 이란, 쿠바, 소련, 필리핀, 일본, 이라크 등 여덟 나라의 우표를 통해 20세기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이들은 모두 20세기 들어 미국과 전쟁을 했거나 혹은 미국 제국주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나라들이다. '미국의 세기'라고 부를 만큼 미 국은 20세기에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강력한 패권을 휘둘렀지만, 그 강력한 패권만큼 세계 곳곳에서 격렬한 반미주의의 불꽃도 뜨겁게 타올랐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우표 속에도 담겼네 78

79 다. <우표, 역사를 부치다>는 이들 8개 나라에서 미국이 어떤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고, 그 나라의 반미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우표라는 작은 종이를 통해 당대의 정치, 경제 및 생활상을 비롯한 문화 전반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표, 역사를 부치다>는 매우 새 롭고도 흥미로운 책이다. 한반도에 원폭을? 해방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1970년대까지 북한의 우표 속에 나타난 미국의 모습을 보는 것도 무척 흥미롭다. 북한이 미국을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부터다. 1946년 3월 북한임시인민위원회가 발행한 최초의 북한 우표를 보면 다른 아무런 문구도 없이 단지 '조선우표'라는 말만 인쇄되어 있다. 남한 이 여전히 일본 식민지시대의 우표를 사용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한은 독자적인 우표를 발행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보름 만에 북한은 서울을 점령하고 이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하게 된다. 우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 방기념'이란 문구와 함께 서울 정부청사에 북한 국기가 꽂혀있는 그림이 들어 있다. 저자는 전시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보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우표를 발행한 점으로 보아 북한이 우표발행을 사전에 준비했고 바로 이것 이 북한의 남침을 증명하는 자료라고 밝힌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북한을 제압하기 위해 한반도에 원자폭탄을 투하 하려 했다는 사실을 우편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이 시작되고 잇따른 패배로 유엔군이 한반도 동남부까지 밀려나자 미국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패퇴시켰던 것처럼 원폭을 사용해 전세 를 단숨에 역전시키려 했다. 사회주의 진영은 이러한 미국의 의도를 우려했고, 이에 폴란드는 핵무기 사용을 반대하는 편지봉투를 제작한다. "우리는 모든 핵무기 사용을 금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을 최초로 사용한 정부는 전쟁 범죄국으로 국제사회의 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폴란 드에서 발행한 편지 봉투에 스탬프로 찍혀 있다. (본문 55쪽) 결국 원폭 투하는 없었지만 전 세계에 불러올 재앙은 상관없이 '어떤 전쟁 에서든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말에서 미국 제 국주의의 본성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하마터면 한반도가 원자폭탄에 초토화되는 아찔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섬 뜩하기까지 하다. 폴란드에서 발행한 핵무기 사용 반대 스탬프가 찍힌 편지봉투 (본문 56쪽) c 나이토 요스케 꼼수의 원조, 미국 미국은 항상 자신들은 결코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며 식민지를 탐하지 않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숭고한 프런티어 정신을 말하는 서 부 개척의 다른 말이 원주민 학살과 땅뺏기에 지나지 않았듯 미국의 민주주의란 결국 미국식 꼼수의 정수를 보여준 제국주의의 발현이었다. 미국은 항상 식민 상태에서 독립하려는 나라들에게 자신들이 독립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것처럼 연출한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미국의 꼼수 다. 쿠바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겉으로는 자유를 추구하며 싸우는 쿠바인들을 응원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미국의 이익 유지를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우표 속에도 담겼네 79

80 위해서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고 스페인이 나간 자리를 결국 그들이 차지했다. "메인 호를 잊지 말자"는 슬로건이 적혀 있는 애국봉투(본문 160쪽) c 나이토 요스케 마치 천안함 사건을 연상시키는, 왜곡과 과장 그리고 조작으로 만들어진 메인호 사건을 통해 미국 내 여론을 선동하고, '메인호를 잊지 말 자!'라는 슬로건을 적은 애국봉투를 만들어 전쟁에 대한 지지를 끌어낸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 독립군의 혁명정부를 인정하고 쿠바를 식민지 화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미국은 쿠바에서 군정을 실시한다. 거의 유사한 꼼수가 필리핀에서도 펼쳐진다. 필리핀에서 스페인을 몰아내기 위해 필리핀의 독립투쟁을 이끈 혁명정부를 후원하는 듯한 제스 처를 취하지만 결국 스페인이 떠난 자리를 차지한 건 미국이었다. '우애적 동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미국의 필리핀 식민통치가 시작된 것이 다.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덮기 위해 빈 라덴 사냥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귀환한 무자헤딘의 투쟁을 오사마 빈 라덴이 지원하면서 미국은 빈 라덴을 요주의 테 러 위협 인물로 지목한다. 그리고 1998년 8월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미국 대사관 폭파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주모자로 빈 라덴을 지목하고 빈 라덴 사냥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이 당시 클린턴 정부의 빈 라덴 사냥에 대해 저자는 클린턴이 탄핵 직전에 이른 자신의 섹스 스캔들을 무마시키고 미국 언론과 국민 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꼼수였다고 말한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물론 국제사회도 미국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그 증거로 저자 는 바로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우표를 증거로 제시한다. 그루지아의 아브하지아 우편 당국 이름으로 발행된 뒤 전 세계에서 매매가 이루어진 이 우 표는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을 보는 세계의 시선과 반응을 드러내는 흥미로운 사례라고 저자 는 말한다. 얼마 전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정치권 이슈를 무마시키기 위해 국내를 대표 하는 MC들의 소환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뭔가 크게 덮어야할 것이 있을 때 관심을 돌릴 만한 다른 사건을 써먹는다는 음모론이 여기 서도 보이는 것이다. 이런 음모론의 성행은 그만큼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뜻일 것이 다.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우표 속에도 담겼네 80

81 책을 갈무리하며 저자는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던 20세기에 '반미'는 하나의 시대정신이자 어 쩔 수 없이 택하게 되는 정치노선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21세기 우표는 어떤 시대정신을 가지고 무엇을 기록하고 기억할지 궁금하다고 말한 다. 마찬가지로 12월 대선을 앞두고 각종 말들이 무성한 2012년 우리는 어떤 시대정신을 가 지고 무엇을 생각하고 기록하며 12월을 맞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우표, 역사를 부치다>, 나이토 요스케 지음, 안은미 옮김, 정은문고 펴냄, 2012년 6월 클린턴과 그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백악관 인턴직원 모니카 르윈스키를 희화화한 우표(본문 300쪽) c 나이토 요스케 <오마이뉴스> 게재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우표 속에도 담겼네 81

82 17 돈을 먹고 살 수는 없잖아

83 돈을 먹고 살 수는 없잖아 :32 [서평] 북미 원주민이 전하는 삶의 지혜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누구나 행복을 꿈꾸지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지는 않는다. 그저 돈이 많으면, 지위가 높으면 행복할 것이라 섣부른 예단을 한다. 그리고 남보다 잘살기 위해서 하늘 한번 바라볼 여유도 없이 무한경쟁 속에 몸을 내던진 다. 그런데 아파트 평수가 늘어나도, 월급이 올라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먹을수록 허기를 느끼는 그리스 신화의 에리직톤처럼 오히려 더 부 족함을 느낀다. 영국의 신경제재단(NEF)이 전 세계 151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코스타리카가 2009년에 이어 1위를 차 지했고, 우리나라는 63위, 전 세계 국내총생산 1위 국가 미국은 105위였다. 순위만 놓고 본다면 행복은 결코 경제력 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행복지수 상위권 나라들은 모두 국가 경제순위가 낮은 나라들이다. 그러니 까 물질적 풍요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아등바등 돈을 버는데, 돈이 많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의 지점은 여기다. 돈을 먹고 살 수는 없잖아 83

84 행복에 대한 답을 북미 원주민 ' 크리족' 의 삶에서 찾는다 위베르 망시옹은 이 질문의 답을 북미 원주민 크리족의 삶에서 찾는다. 대형 로펌의 변호사로 풍요롭게 살았던 위베르 망시옹은 세상의 북쪽 끝이라는 북아메리카 대륙 최북단 북퀘벡에서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원주민 크리족을 만나면서 삶이 변한다. 그가 원주민 출신의 스테파니 벨랑제와 함께 쓴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흐름출판)는 크리족이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이해하는 눈을 통 해 오늘날 물질문명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자연에 순응하고 대지의 온 생명과 교감 하며 느끼는 진정한 행복과 평온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지식과 정보는 넘쳐나지만, 지혜는 부족한 시대다. 저자들은 "세상은 정복하라고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데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지혜가 있던가. 그런 의미에서 '북미 최후의 인디언이 천 년을 넘어 전한 마지막 지혜'라는 부제가 마음에 와 닿는다. "자, 당신이 그렇게 똑똑하다면 과연 누가 더 지혜로운지, 더 행복한지 한번 맞춰보십시오. 쉴 새 없이 일해야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사 람이 행복합니까, 마음껏 쉬면서 사냥과 낚시를 즐기고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구해 사는 사람이 행복합니까?" ('프롤로그' 중에서) 원주민인 믹맥족 추장이 선교사로 온 르 클레르 신부에게 묻는 말이다.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의 행복을 꿈꾸며 24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가며 일에 매진한다. 늘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내일이 되면 또 오늘인 것을 어떻게 할까. 마치 영원히 과녁에 닿을 수 없는 제논의 역설처럼 말이다. 욕망을 던지고 내려오지 않으면 결국은 쳇바퀴 속에서 계속 맴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생은 끝나지 않는 시련이며, 늘 물질과 대립한다. 이 를 알고 있었던 크리족을 비롯한 원주민들은 소유에 무관심하다. 물건에 집착하지 않고, 먹을 것은 배고픈 자의 것으로 생각하며 먹을 것이 있을 때는 반드시 다른 사람과 나눈다. "원주민들은 저축이 무엇인지, 부동산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소유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다"고 저자들은 이 야기한다. 모든 두려움의 근원은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고 당연히 상실의 두려움도 그들에게는 없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전 <수타니파타>는 번뇌의 근원을 탐( 貪 ), 진( 瞋 ), 치( 痴 ), 만( 慢 ), 의( 疑 ) 라고 한다. 그 중 첫 번째가 탐( 貪 ), 즉 욕망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모든 욕망의 대상에는 두려움이 있으니 이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셨다. 바로 크리족의 삶 처럼 말이다. 돌도, 물도, 사냥감도... 모든 것을 존중하는 삶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 "감히 너 따위가"라는 말이 마치 공식처럼 빠지지 않고 나온다. 자신은 한없이 높이면서 상대를 무시하는 이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드라마에 나온다는 것은 존중과 배려가 없는 우리 사회를 바로 보여주는 것만 같아 볼 때마다 마음이 언짢다. 사람을 존중 하지 않는데 세상에 무엇인들 존중할까. 세상 모든 것이 균형이고 관계이며, 조화라고 생각하는 크리족은 주변의 모든 것을 존중한다. 살아있는 생물뿐만 아니라 생명이 없는 무생물 도 마찬가지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이나 물, 산도 섣불리 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체 환경에 즉각적인 영 향을 주고 그로 인해 균형이 깨지면 생존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돈을 먹고 살 수는 없잖아 84

85 "모든 것이 연결된 영혼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원인의 세계와 관계 맺는 것이고, 자연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결과의 세계를 대 면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의 행동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그렇기에 인간의 행동은 실존하는 세계 전체와 조화를 유지해야 하 고, 따라서 하고 싶은 걸 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가. 지난 7일 세계 습지 관련 비정부기구(NGO)들로 구성된 세 계습지네트워크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세계습지상(The Wetland Globe Awards)' 시상식에서 한국의 4대강 사업을 최악의 습 지 파괴 사업으로 선정하고 '회색습지상'을 수여하였다. 지금으로부터 3만 년 전에 바다 쪽으로 흐른 용암이 굳어서 생성된 폭이 1.2km나 되는 제주도의 구럼비 바위 주위는 붉은발말똥게, 맹꽁이 등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여 유네스코에 의해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재 보호구역 및 절대보전지역으로 지정되기도 했 다. 그런 구럼비 바위를 우리는 어떻게 했나.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 이유로 갈가리 찢어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퀘벡전력공사 회장에게 수력발전을 위한 댐 건설은 물의 정령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것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가 부딪힌 문제의 본질이다. 이 질문은 간단하면서도 직설적이고 충격적이다. 답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한다." (본문 197쪽) 저자들은 풀의 노래를 들으려면 발치에 풀이 있어야 하고, 자연의 화려한 오케스트라에 먼저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 이유 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혜를 넓히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야생의 자연,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자연은 보존되어야 하며 그것이 인간의 영혼을 구제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풀의 노래를 망치 소리로 바꾸고, 자연의 오케스트라를 폭약 발파소리로 간단히 치환해버리며, 지혜를 넓히는 것보다는 주머니를 채 우는 것이 더 중요한 이명박 정부는 또한번 우리를 슬프게 했다. 지난달 20일 한국수자원공사는 그동안 4대강 사업을 비판해온 박창근 관동 대 교수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자연과 교감을 나누고 자연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는 이명박 대통령은 여름휴가지로 4대강을 추천하며 오늘 도 4대강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4대강 여행사 사장'이라는 말까지 듣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크리족 추장의 잠언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마지막 강이 더럽혀진 후에야,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후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돈을 먹고 살 수는 없 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위베르 망시옹, 스테파니 벨랑제 지음, 권지현 옮김, 흐름출판 펴냄, , 12,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돈을 먹고 살 수는 없잖아 85

86 18 5천만원으로 다락방 있는 목조주택을... 이건 기적

87 5천만원으로 다락방 있는 목조주택을... 이건 기적 :39 [서평] 송성영의 <모두가 기적 같은 일> 누구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어한다. 아니면 바다가 보이는 낮은 언덕에 빨강머리 앤의 '초록지붕집'처럼 다락방이 있는 목조집은 어떨까. 마당에는 살구나무, 석류나무, 풀꽃들 사이로 순박하게 생긴 개가 뛰어다니고, 집 앞 논에는 파랗게 자란 벼 사이로 우렁이가 마실을 다니는 집. 상상만 해도 가슴 뛰는 흐뭇한 풍경 아닌가. 이런 집을 5000만 원에 짓는다면? 그건 기적이겠지. 그런데 진짜 기적이 일어났다. 5000만 원으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 땅을 사고, 그 땅에 다 락방이 있는 목조집을 지었다. 마당엔 살구나무, 석류나무도 있고 목줄 없는 개도 뛰어다닌다. 기적의 주인공은 <모두가 기적 같은 일>(오마 이북)의 저자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송성영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치열한 경쟁 속에 사는 도시생활자들에게 이런 집은 꿈이자 이상이지만 누구도 쉽게 용기내지는 못한 다. 왜? 도시를 떠나면 왠지 낙오되었다는 소외감과 함께 무엇을 먹고 살 것인지, 애들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걱정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 테니까. 따라서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차지하듯이 용기 있는 자가 평화와 행복도 얻는 법이다. 바쁜 도시 생활에서 돈 버느라 행복할 시간이 없었다 는, 그래서 덜 벌더라도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송성영은 과감히 도시 생활을 접고 공주 인근의 시골에서 글쓰는 농부로 십여 년을 살았다. 그런데 집 뒤로 호남고속철도 개발이 추진되면서 그 곳에서의 생활을 접고 새로운 터를 찾아야 했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은 저자 송성영 5천만원으로 다락방 있는 목조주택을... 이건 기적 87

88 과 가족들이 새로운 터를 찾고, 그 터에 집을 짓고 그리고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느리지만 여유롭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고있다. 저자는 책에서 '적게 번 만큼 불안하고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돈과 성공 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돈이 많지 않아도, 세상이 말하는 성공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풍요롭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마 느끼게 될 것이다. 돈이 많을수록 고민도 커진다 단표누항( 簞 瓢 陋 巷 )이란 말이 있다. <논어>의 '옹야'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제자인 안회의 청빈한 삶을 칭찬하며 한 말인데, 소박한 시골 살 림이지만 그 속에서 올바른 인간의 도를 추구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안빈낙도의 모습을 이르는 말이다. 즉 가난하게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 지 않고 오히려 여유를 즐기며 마음 편히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돈에 가치를 두지 않아야 한다.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 하고, 돈이 없어서 문제지 많은 건 문제가 아니라고 여긴다. 그런데 오히려 돈이 많으면 그 돈의 양만큼 고민의 양도 커지는 것 아닐까. 저자 는 없던 돈이 생김으로 고생길로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놈의 돈이 생기는 바람에 고생길로 접어든 셈이었습니다. 돈이 없었다면 비싼 땅이고 싼 땅이고 찾 아 나설 이유가 없었습니다. 정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날 이유도 없었습니다. 돈이라는 게 인간을 얼마나 속박하는지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차마 그것을 물리치지 못한 채 업보처럼 들쳐 메고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를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여는 글' 중에서) 고생의 시작은 헌 외양간을 수리해 만든 공간에서 아내가 동네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면서 모은 돈 3000만 원이었다. 거기에 예전에 누군 5천만원으로 다락방 있는 목조주택을... 이건 기적 88

89 가에게 빌려주었던 돈 2000만 원이 보태지면서 마련된 5000만 원을 들고 평생 살 집을 지을 땅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찾아낸 곳이 전라남도 고흥의 바닷가 마을이다. 생면부지의 고흥에 터를 잡고 집을 짓는 과정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땀 흘려 살다 보면 하늘 이 다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그의 믿음대로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거짓말처럼 어디선가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고, 집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 짓는 것임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저자는 돈에 대해 '돈은 불붙이면 타는 종이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소비에 무감각해지는 것이고, 불필요한 소비에 익숙해진다는 건 자본의 수 렁에 깊이 빠져든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본의 수렁에 빠지면 어떤 형태로든 고통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고 일갈한다. 그러니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는 말처럼 돈이 오든 가든 무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나무를 베지 않았는데도 때마침 땔나무가 굴러들어 왔듯이, 땀 흘리며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산다면 빈자리를 채울 뭔가 생기리라 믿습니다. 밥벌이가 있다는 것은 언젠가 밥벌이가 끊길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밥벌이가 없다는 것은 곧 밥벌이가 생기리라는 것이니까 요.(본문 297쪽) 학교에 좀 늦으면 어때, 바다가 이렇게 보석 같은데 저자에게는 연년생인 아들이 둘 있다. 큰애는 고1이고, 둘째는 중3이다. 저자의 교육관 역시 보통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다. 그는 항상 등교하 는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고 와'가 아니라 '잘 놀다 와'라고 얘기한다. 학교에 늦는다고 걸음을 재촉하는 아들에겐 '그럼 뛰어가자'가 아 니라 '좀 늦으면 어때. 바다가 이렇게 보석 같은데'라고 말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집을 떠나게 된 큰아들에게 그는 '고등학교에서 대학 가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리고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둘째를 보면서는 고등학교에 가면 오로지 대학입시 하나에 매달려야 하는데, 진학을 포기하고 나니 그 애에 게 할 일이 참 많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5천만원으로 다락방 있는 목조주택을... 이건 기적 89

90 대학에 못 가면 마치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 여기는 부모들이 대부분인데 고등학교조차 가지 않겠다는 아들 편을 드는 부모라니, 부모 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 아니냐고 눈흘김을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입시 경쟁에 시달리며 3년을 보내는 대신 이것저것 하 고 싶은 일을 해보면서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오히려 인생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저자 역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때로 고통스럽겠지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즐거울 것이고 덤으로 주변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주게 될 것이라는 말로 믿음을 표현한다. 아이들의 인권을 존중하면 아이들 역시 누군가의 인권을 존중하게 될 것이고, 자유로움을 가르치면 자유롭게 살 것입니다. 하지만 매질과 욕 설로 억압하며 가르치면 그만큼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억압하게 될 것입니다. 친구들과 경쟁하라 강요하면 세상에 나가서도 경쟁심에 얽 매여 살아갈 것입니다. 누군가를 억압하고 상처 입히며 살아가는 길이 사람의 길이 아니라 돼지 같은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는 이미 그 길에 익숙해져 벗어나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본문 쪽) 욕심을 내려 놓으며 얼마 전 성적을 비관한 고등학생이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다. 아무개 시중은행의 지점장은 실적 압박에 따른 괴로움을 못 이기고 역시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선택했다. 이제 겨우 십몇 년을 산 아이에게도, 남들이 부러워할 지위에 있는 중년에게도 삶은 왜 그렇게 힘든 것이었을까? 그것은 우리 사회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배려하는 인간적 삶보다는 오직 숫자로만 평가하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동물 적 삶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시험 성적에 목숨을 거는 아이들에게 친구는 경쟁자일 뿐이며, 실적을 두고 승진을 다투어야 하는 동료는 더 이 상 동료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경쟁을 배우고 자란 아이는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밀리면 그게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컸으니 다 5천만원으로 다락방 있는 목조주택을... 이건 기적 90

91 른 생각은 하지 못하고 결국엔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이다.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마음을 풀어 놓으면 세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름다 움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를 읽노라면 마치 온돌방에 누운 것처럼 따뜻하고 훈훈하다. 그 이유는 주먹을 쥐면 손 안에 아무것도 없으나 손을 펴 면 세상이 내 것이라는 말처럼 비우고 사는 삶의 넉넉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문득 올 여름휴가는 털보 아저씨와 매력적인 까만 털을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곰순이가 사는 고흥의 바닷가 민박집에서 느림과 비움의 미학을 배우며 보내면 어떨까 싶다. 덧붙이는 글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송성영 씀, 오마이북 펴냄, 2012년 6월, 1만3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5천만원으로 다락방 있는 목조주택을... 이건 기적 91

92 19 부인이 무서워? 수천 년 동안 이런 남편은 없었다.

93 부인이 무서워? 수천 년 동안 이런 남편은 없었다 :04 [서평] 매릴린 옐롬의 <아내의 역사>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남편 두현은 결혼생활이 감옥처럼 느껴지지만 아내 정인이 무서워 정작 이혼의 '이'자도 못 꺼내는 소심한 남 편이다. 구약시대 이후 수천 년 동안 이런 남편은 없었다. 고대에는 아내가 남편의 재산이었고, 중세에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합법적이 었으며, 오랜 시간 아내의 위상이란 그저 출산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남자는 강하고 적극적이어야 하며, 여성은 약하고 수동적이어야 한다. 여성이 지녀야 할 가장 바람직한 덕성은 친절함이다. 여성은 남편이 아 내에게 가하는 부당한 일과 잘못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일찌감치 배워야 한다. (<아내의 역사> 본문 229쪽) 이것이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에밀>에서 말한, 남성과 남성이 만들어낸 법률과 제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바라본 바람직 한 아내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세상이 많이 변한 지금까지도 남자들은 머릿속에 이런 여성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만약 루소 가 환생해서 두현과 정인을 본다면 기함하고 까무러치지 않을까. 그들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 남성 중심의 헤게모니가 제대로 뒤집어졌으니 말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미셸 클레이만 젠더 연구소에 재직 하고 있는 사회문화사의 대가이자 저명한 원로 여성학자 매릴린 옐롬은 <아내의 역사>(책과함께)를 통해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 부인이 무서워? 수천 년 동안 이런 남편은 없었다. 93

94 의 아내 이브에서부터 현대의 아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내들을 불러낸다. 그리고 결혼과 성( 性 )에 대한 관념을 비롯하여 아내로서의 삶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이야기한다. 50쪽이 넘는 주석과 참고문헌 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아내의 역사>는 성경에서부터 잡지 <코스모폴리탄>까지, 공적 기록뿐 아니라 일기, 편지, 회고록과 구술기록을 비롯한 방대한 기록물을 통해 과거 여인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더욱이 <아내의 역사>는 역사에 족적을 남긴 뛰어난 여인들뿐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아내들을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깊다. 아쉬운 점 이라면 세상의 아내가 서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진대 <아내의 역사>가 서양, 그 중에서도 주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일부 서유럽의 아내들 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마치 여성의 지위를 비롯한 세상의 변화를 우리가 이끌어왔다는 식의 서유럽 중심주의적 사고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서양과는 관습, 제 도, 도덕이 사뭇 달랐던 동양의 아내들에 대한 역사를 함께 살펴볼 수 있었다면 더욱 흥미진진했을 텐데 말이다. 결혼은 선택, 이혼은 필수인 시대... 과거에는?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결혼하지 않는 것은 결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이혼하는 것은 인내력이 부족하기 때 문이고, 재혼하는 것은 기억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결혼 문화를 꼬집는 우스갯소리다. 요즘에는 '결혼은 선택, 이혼는 필수'라는 말도 있지만, 과거에는 어땠을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결혼형태가 남녀 간의 결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결코 아내와만 성관계를 맺지는 않았 다. 남편은 아내 외에 첩, 남녀 노예, 남창과 매춘부, 그리고 남녀 애인 등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와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다만 공식적 으로 유일한 금단의 열매는 다른 시민의 아내였다고 한다. 또한 유대교에서는 종족번식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방법이 결혼이라고 믿었다. 반면 초기 기독교는 결혼보다 독신을 높이 평가했다. 아내나 남편을 얻는 것이 하느님과 결합하는 좀 더 근원적인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성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신의 계율을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시대의 엘리트들에게 이혼은 일상다반사였다. 이혼의 이유도 다양했다. 남자의 경우 자식을 낳아줄 여자를 얻기 위해서 이혼했다. 출세를 위해 이혼하는 경우도 아주 흔한 일이었다. 실제로 폼페이우스나 안토니우스 같은 거물 정치인들은 결혼을 다섯 번이나 했다고 하니, 그 누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욕할 수 있을까. 결국 풍속이 문란해지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간통 및 혼외정사에 관한 율리우스 법'이란 법을 공표했다. 괘씸한 것은, 남편은 아내의 간통 에 대해 기소할 수 있지만 아내는 남편의 간통죄에 대해 형사고발할 권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남자에게만 특권을 부여하고 피해자가 아내일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 불평등한 법이었다. 중세의 결혼은 남자가 공식적으로 아내의 주인임을 확인하는 제도였다. 농민계급에서 결혼은 두 사람이 공동의 생존을 위해 자원을 함께 모 으고자 하는 일종의 경제적 계약이었다. 신부는 최소한 침대와 젖소 또는 가재도구 등을 지참금으로 가져와야 했고, 남편은 거처를 제공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렇다면 농부에게 결혼은 그저 경제적 계약이 전부였을까? 물론 아니다. 남녀가 만나는데 서로에 대한 관심이 어찌 없었을까. 오늘날 연예 인들의 결혼 발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혼전임신은 중세에도 흔한 일이었다. 단지 주변의 시선은 달랐다. '임신이 혼수'라는 말이 널리 퍼 부인이 무서워? 수천 년 동안 이런 남편은 없었다. 94

95 져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혼전임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따가운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중세에는 여자가 수태함으로써 불임이 아님을 증명한 후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사생아를 낳아도 그다지 비난받지는 않았다. 물론 상류층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어쨌든 혼전임신보다는 오히려 피임이나 중절 성교, 임신 중절이 죄악 으로 여겨졌다. 중세 교회가 성적 쾌락은 죄악으로 간주했더라도 출산은 장려했기 때문이리라. 프랑스 인권선언에 여성은 없다 남성의 권력에 억압된 삶을 살아왔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변 화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미국 독립혁명을 거치면서이다. 미국의 제2대 대 통령 존 애덤스의 아내 애버게일 애덤스는 모든 여성의 행복을 지상의 법률 로 보장해야 한다며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특별법 제정 을 주장한다. 독립혁명 중 정치의식이 싹튼 여성들은 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 다. 어떤 경우에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이혼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미국 독립혁명의 바람은 유럽 대륙의 프랑스로 옮겨갔다. 그런데 인간의 자 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선언했다고 배워왔던 '프랑스 인권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 알고 보니 사기였다. 인권선언의 제1조는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 있어 평등하게 태어나 존재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공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이다. 그 런데 기혼, 미혼, 사별, 재산의 유무를 막론하고 여성은 이 인권선언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1791년 국민의회 의원들은 선언한다. 그럼 여성은 인간이 아닌가? 씁쓸한 대목이다. 프랑스 인권선언에서조차 제외되었던 여성의 인권은 그 후 200년 동안 많은 이들의 노력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하는 여성 의 비율이 늘어나면서 여성들이 주부로서 가정에만 매이지 않게 되었다. 남 편에게 의존하고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전통적인 아내상은 더 이상 이상적 인 아내상이 아니다. 과거에 비해 여성의 발언권이 커지고 누구든 제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게 되었지만, 오늘날 여성들은 아내로서의 삶을 어떻게 느낄까? "여 자라서 행복해요"라는 광고 카피처럼 실제로도 행복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오늘날 역시 아내로 살아가는 일이 과거와 비교하여 결코 녹록 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아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직은 덜 성숙한 이 시대의 남성들이 자신의 아내가 슈퍼우먼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내가 바깥에서 사회활동을 통 해 돈도 벌면서 한편으로는 전통적 아내의 모습처럼 집안 일 역시 잘 하기를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독신이 다"라는 농담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사회가 새로운 아내상을 만들기 위해 출산의 고통을 치러야 한다 해도 대중들은 '가련한 여성'의 죽음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 한다" 부인이 무서워? 수천 년 동안 이런 남편은 없었다. 95

96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역사는 만들어진다. 그것이 지난 수천년간 우리가 보아온 역 사 아닌가. 저자가 본문 중에서 말한 것처럼, 한 사회를 사원에 새겨진 부조나 정부 문서에 기록된 공식적인 얼굴로 판단하는 것과, 여성들이 자신이 느 끼고 경험한 바를 주관적으로 기록한 시, 편지 일기 회고록 등에 나타난 그 사회의 맨 얼굴을 보고 평가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런 점에 서 <아내의 역사>는 수천 년 아내들의 맨 얼굴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하고 흥미로웠다. 덧붙이는 글 <아내의 역사> 매릴린 옐롬 씀, 이호영 옮김, 책과함께 펴냄, 2012년 5월 <오마이뉴스> 게재 부인이 무서워? 수천 년 동안 이런 남편은 없었다. 96

97 20 니들이 돈 맛을 알아?

98 니들이 돈 맛을 알아? :43 [리뷰]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 망망대해에 쪽배를 타고 누운 노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니들이 게맛을 알아?"라고 하던 CF 광고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망망대해 가 아니라 집 안에서도 길을 잃을 것만 같은 대저택에서,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60억 원을 손쉽게 200조 원으로 둔갑시키는 절대 신공을 자랑하는 강호의 고수들이 "니들이 돈 맛을 알아?"라며 음흉한 웃음을 흘린다. 2010년 <하녀>에 이어 2회 연속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공식초청 받으며 대한민국 대표 감독으로 우뚝 선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 이야 기다.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를 시작으로 <그때 그 사람들>(2005), <오래된 정원>(2006), <하녀>(2010) 등을 거쳐 <돈의 맛>에 이르기까지 임상 수 감독은 영화를 통해 짙은 사회비판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일반론적 사회 비판에 그쳤던 2005년 이전 작품들에 비해 <그때 그 사람들> <오래된 정원>은 우리나라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굵직한 역 사적 사건에 대해, 그리고 <하녀>와 <하녀>의 속편이라 해도 무방한 <돈의 맛>은 신귀족 계층인 재벌에 대해 구체성을 띤 날 선 비판을 가하 고 있다. 니들이 돈 맛을 알아? 98

99 아들보다 어리다는 김강우(주영작 역)와 파격적인 정사장면을 소화하며 최고의 연기력을 보인 65세 윤여정(백금옥 역)의 투혼을 바탕으로 칸 영화제의 각종 상에 대한 수상 기대와 함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돈의 맛>. 영화를 보다 보면 뉴스를 통해 익히 보았던 사건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돈의 맛보다는 오히려 맛깔 진 조롱과 비판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원 없이 펑펑 썼지... 근데 그게 모욕적이더라고, 모욕!"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의 주영작은 우리나라 최고 재벌기업 회장의 비서실장 이다. 속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부럽기만 하겠지만, 실상 그의 역할은 하인이 나 다름없다. <하녀>에서 하녀였던 은이(전도연 분)보다 스펙이 나아졌다는 것 뿐, 재벌이 보기엔 그 역시 돈으로 얼마든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하인 에 불과하다. 서울대 출신의 그가 하는 일이라곤 창고에 쌓인 돈다발을 가방에 담아 권력 자에게 전달하고, 미국 로비스트가 딴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약점을 잡기 위 해 담을 넘어가 방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는 따위의 일들이다. 심지어 회장 부인의 성희롱을 넘어 강간에도 '가만 있어'라는 한 마디에 가만 있어야만 한 다. 왜? 돈 때문이다. 돈이 아니라면 식스팩을 자랑하는 근육질의 젊은 남자가 예순이 넘은 늙고 마른 여자에게 저항 한 번 못하고 몸을 내주는 수모를 당 하지는 않았으리라. 돈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어느 순간 물신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돈 가진 자들은 마치 그 물신의 대리인 인 양 돈으로 세상을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 생각하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올 수 있는 말이 바로 원빈이 했던 "얼마면 돼?"인 것이다. '사랑도 팔고 사는 속이고 속는 세상'이란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 탈세혐의로 구치소에 갇혀 있는 아들을 빼내기 위해 검찰총장에게 줄 뒷돈을 가방에 담는 영작에게 윤 회장(백윤식 분)은 "몇 다발 챙겨. 누 구나 다 그래. 돈 맛이나 좀 봐"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영작에게 돈 맛을 보라던 윤회장은 그 돈의 맛이 모욕적이었다고 말한다. "돈, 원 없이 펑펑 썼지. 근데 그게 그렇게 모욕적이더라고, 모욕!" 그렇다면 윤 회장에게 돈 맛은 왜 그렇게 모욕적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땀 흘려 일해서 벌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뿐만 아니라 잘 쓰지 않 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달 꼬박 일해서 받는 100만 원의 봉급은 고맙고 소중하다. 그리고 그 중의 만 원 혹은 2만 원을 아껴서 기부할 때 느끼는 돈의 맛은 참으로 보람되고 기쁘다. 하지만 윤 회장은 땀 흘려 돈을 벌어본 적도 없고, 그 돈을 보람되게 써본 적은 더더욱 없다. 권력자들에게 뒷돈을 찔러주고, 불법과 편법을 동원하고, 없는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짜내어 불린 돈에서 참된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카메라 앞에서는 겸손의 가면을 쓰지만 뒤돌아서는 "우리 없는 한국이 상상되냐"라고 말하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니들이 돈 맛을 알아? 99

100 "세금 한 푼 안 들이고 할아버지한테 받은 돈 60억 원으로 200조짜리 그룹을 통째로 물려받는 건데. 미국적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되지? 한국 에서는 괜찮아. 결국은 다 돼. 법이든 법조인이든 다 할아버지 손아귀에 있거든." 재벌 3세 윤철(온주완 분)의 주식 변칙 증여는 삼성전자 이재용 사장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정말로 괜찮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지난 2009년 대법원은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통한 삼성의 경영권 편법 승계에 대해 무죄 판결했다. 10만 원을 훔치면 도둑으로 잡히지만 200조는 단위가 커서 계산이 안 되는지 도둑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유는 한 가지다. "뱃 속에 아귀들이 사는지 먹어도 먹어도 더 먹으려 해. 찌끄러기 돈으로 부자 되는 것도 아닌데, 판사, 검사, 기자, 교수 나부랭이들까지 왜 들 그렇게 난리인지." 백금옥의 말처럼 부스러기를 얻어먹기 때문이다.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들 명단이 공개되고 '떡검', '삼성장학생' 등의 신조어까지 생 겼다. 그럼에도 문제는 준 쪽과 받은 쪽 모두 지금껏 아무런 문제없이 편안히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는 '삼성이 이 나라에 기여한 게 얼만데'라며 눈 감고, 여전히 삼성에 열광하고 있다. 사람들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직원들이 죽어나가도 내 자식이 아니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쌍용차에서 해고당한 사람들이 투신을 하고 혹 독한 트라우마에 시달려도 내 가족이 아니기에 모른 척한다. 우리 모두가 돈 맛에 중독된 재벌들의 행태를 눈 감고 살짝 맛본 돈에 기꺼이 중독되고 싶은 주영작은 아닐까. " 돈을 많이 가지는 것보다 모욕을 덜 당하는 삶이 행복" 니들이 돈 맛을 알아? 100

101 신동엽 시인은 그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라고 썼다. 그런데 한국 방정환재단이 발표한 '2011 한국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국제 비교'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고등학교 3학년생들 중 가장 많은 수치인 26%가 행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라고 답했다. 어린 학생들에게마저 돈은 하늘이고, 삶의 가치이고, 행복의 기준이 되어버린 것일까. 일평생 돈의 노예로 살았던 윤 회장은 관 속에 들어가 서야 웃는다. 살아서는 끊을 수 없었던 돈의 중독에서 벗어나게 되어 기뻤던 것일까. 윤 회장의 죽음을 본 영작은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곳을 나가서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라는 금옥의 말에 "숨 좀 쉬어보려구요. 이곳에 있을 때 거의 질식 전이었거든요"라고 말 한다. 옷이 벗겨지고 몸이 만져져도 대꾸 한 마디 할 수 없었던 영작에게 돈을 버리자 자존감이 살아난 것이다. 말대꾸를 할 수 있는 평등한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임상수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돈을 많이 가지는 것보다 모욕을 덜 당하는 삶이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모욕을 주는 이들 보다 우리보다 더 모욕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일까. 돈 때문에 더 이상 모욕받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영작 의 용기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재벌의 민낯을 제대로 드러낸 <돈의 맛>.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권력에 대한 조롱과 비판으로 가득한 이 영화를 진짜 재벌들은 어떻게 볼 까? 그런데 보기는 할까? 새삼 궁금해진다 <오마이뉴스> 게재 니들이 돈 맛을 알아? 101

102 21 돼지 귀, 코, 고슴도치... 이게 다 먹는 거라니까요

103 돼지 귀, 코, 고슴도치... 이게 다 먹는 거라니까요 :03 [서평] 우에하라 요시히로의 <차별받은 식탁> '돼지 코 맛'은 대체 어떨까? 콧물이 묻어 있지는 않을까? 고슴도치 요리는 맛이 있을까? 이렇게 얘기하니 마치 몬도가네(혐오성 식품을 먹 는 등 비정상적인 식생활) 같지만 이것들은 모두 '소울푸드'다. 소울푸드는 미국 흑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으로 1960년대 흑인 차별에 저항하 며, 그들 고유의 음악을 '소울뮤직'이라고 한 것처럼, 고유의 음식을 '소울푸드'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니까 소울푸드는 사회에서 차별 받고 핍박 받아온 사람들만의 독자적인 음식이라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남들이 먹지 않고 버린 것 을 가지고 나름의 음식문화를 만들어 낸 하층민들의 음식인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순대나 곱창, 혹은 닭발 같은 것이 바로 소울푸드 아닐 까. 지금으로부터 30년 전만 해도 일본의 부락은 차별과 빈곤, 따돌림에 시달리던 빈민촌이었다. 부락민들은 일반인들이 먹지 않던 재료를 가지 고 '아부라카스'(내장튀김), '후쿠'(소의 폐 튀김), '사이보시'(육포), '고우고리'(고기 양갱) 등을 만들어 먹었고, 그것이 지금은 일본의 소울푸 드가 되었다고 한다. 부락민 출신으로 차별을 받으며 이런 음식들을 먹고 자란 우에하라 요시히로는 차별이라는 정치적 주제를 음식을 통해 조망했다. 그것이 바 로 <차별받은 식탁>(우에하라 요시히로 저, 어크로스 펴냄)이다. 후쿠오카의 내장찌개 집에서 '이것이 바로 일본의 소울푸드다'라는 문구를 본 후, 차별받아온 사람들의 독자적인 음식문화에 대한 취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돼지 귀, 코, 고슴도치... 이게 다 먹는 거라니까요 103

104 일본 뿐 아니라 미국, 브라질, 네팔, 불가리아, 이라크 등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차별받은 사람들의 음식들을 찾아다닌다. <차별받은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은 모두 일반 사람들이 먹지 않고 버리거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식재료를 사용한 재활용의 음식이며, 차별과 빈곤, 박해 속에 서 피어난 창조적이고 저항적인 음식들이다. 흑인 노예들 눈물 담겨 있는 ' 프라이드 치킨의 진실' 요즘은 잘 가지 않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가끔 친구들과 쇼핑 후 배가 고플 때면 꼭 들르던 곳이 있었다. 문 앞에 작달막한 할아버지가 빙 그레 웃으며 서 있는 그 곳,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낸 닭고기를 손으로 뜯어 입에 넣을 때 느껴지던 그 고소한 맛이란. 그런데 놀랍게도 이 프라이드 치킨이 미국의 대표적인 소울푸드라고 한다. 햄버거와 더불어 미국 백인음식을 상징하는 것인 줄 알았던 프라이드 치킨이 흑인들의 소울푸드라니, 새로운 사실이다. 구운 닭(로스트 치킨) 은 백인 음식인데 튀긴 닭은 흑인 음식이라는 이해 안 되는 이야기. 도대체 구운 닭과 튀긴 닭 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백인 농장주가 내다버린 닭 날개나 발, 목 등을 흑인 노예들이 먹기 쉽게 튀겨서 먹은 거예요. 기름에 바싹 튀기면 뼈까지 부드러워지니, 백 인들이 버리는 이 부위들도 뼈째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거죠. 또 굽는 것보다 번거롭지도 않고 배도 더 든든해지고 말이에요." (본문 20쪽) 그러니까 닭의 허벅지나 가슴살처럼 먹기 좋고 부드러운 부위는 백인 농장주들이 구워서 먹고, 나머지 먹지 않았던 날개나 발, 목과 같이 뼈 가 많은 부위를 노예들이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튀겨 먹은 데서 유래한 것이 프라이드 치킨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 <헬프>에서 처럼 흑인 노예들이 백인 가정의 요리를 주로 맡아 하면서 자신들이 먹던 대로 살코기도 튀겨서 요리해 식탁에 내 놓으면서 백인들의 입맛이 여기에 길들여졌고, 결국 프라이드 치킨은 남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요리가 된 것이다. ' 글로벌' 한 음식 족발, 이 정도였어? 우리나라 여자들이 좋아하는 대표적 음식 중 하나인 족발을 사실 나는 이십 대 중반까지도 먹지 않았다. 왜? 이상하니까. 발을, 그것도 돼지 의 발을 먹는다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그런데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이 족발이 알고 보니 우리만 먹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세계화를 좋아 하다 보니 족발마저도 글로벌했던 것이다. 미국에도 일본에도 그리고 브라질에도 있는 이 '돼지발 요리'. 물론 조리법은 약간씩 다르겠지만 어쨌든 신기한 일이다. 미국식 족발의 이름 은 말 그대로 돼지발이라는 뜻의 '포크피트'다. 흑인들 말고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는 포크피트는 우리의 족발처럼 갈색이 아니라 하 얀 색깔의 약간 시큼한 맛이 나며 먹기 쉽게 한 입 크기로 잘라져 나온다고 한다. 일본의 족발은 오키나와 향토 요리로 우리나라 족발과 비슷하게 뼈째 잘라서 무나 다시마 등을 넣어 함께 삶는 것으로 이름은 '아시테비 치'이다. 그리고 브라질에는 '페이조아다'가 있다. 페이조아다는 브라질의 대표적인 소울푸드로 흑인들이 백인들이 먹지 않는 돼지의 발과 귀, 코, 내장 등을 콩과 함께 삶아 만든 일종의 섞어찌개라 볼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예전에는 아무도 먹지 않던 버려진 식재료로 만들었던 페이조아다가 지금은 국민적 요리가 되면서 그 값이 많이 비싸져 오히려 가난한 흑인들은 먹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돼지 한 마리에서 얻을 수 있는 귀나 코, 발의 수가 한정되어 있고 그 양도 다른 부위에 비해 적다 보니 빚어진 현상이다. 우리나라 족발 역시 사람들이 많이 먹다보니 가격이 비싸지고, 그마저도 공급이 부족하니 헝가리나 폴란드와 같은 유럽에서 수입해온 돼지발 을 족발에 쓰고 있지 않은가. 돼지발 요리가 이처럼 세계적일 줄은 미처 몰랐는데, 세계 어디서나 차별받은 식탁의 모습에는 공통점이 있는 돼지 귀, 코, 고슴도치... 이게 다 먹는 거라니까요 104

105 것 같다. 음습한 차별 넘치는 21세기 세기... 차별없는 식탁을 꿈꾼다 그렇다면 프라이드 치킨이 세계적인 음식이 되고 페이조아다가 국민음식이 되었다고 차별이 없어졌을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과거에는 드러 내놓고 차별했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게 차별하는 정도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진정한 공정이나 평등이 아니라 정치적 배려에 의한 차별, 대놓고 표현하지 않는 음습한 차별로 바뀐 것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세계의 차별받은 음식들을 만나다 보니 우리의 차별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진다. 해방과 6 25 전쟁을 겪으며 우리나라에서 신분에 따른 차 별은 사라졌지만 자본주의의 발달과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생겨난 빈부 격차에 따른 차별, 특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과거 신분제 못 지않게 우리를 옥죄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비정규직이 과거 노예제도나 신분제 차별과 다르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비정규직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노동시간이나 근로조건 등에서 심각한 차별을 받으며 항상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한다. 일례로 최근 대구시 초 중 고교에 근무하는 360여 명의 비정규직 사서들이 대량 해고의 위기를 맞고 있다. 대구시교육청이 내년부터 초 중 고교 사서 인건비 지원을 전액 삭감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사서를 없애고 사서 교사를 정규직 으로 채용할 계획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해고는 한꺼번에 하면서 정규직 사서교사 채용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 과 정규직 사서교사 채용 예산 마련 방침은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론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이유로 360여 명의 비정규직 사서를 하루아 침에 실직자로 내몰겠다는 이야기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안중근 선생의 말이 아니더라도 독서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럼에도 애초에 학생들의 독서지도 사서를 비정규직으로 채용한 것부터가 잘못인데 이제와 이마저도 해고하겠다는 대구시교육청은 정말 교육을 하겠다는 것 인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들 비정규직 사서들의 차별받은 식탁에 차려질 눈물 어린 음식은 어떤 맛일지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또 한 번 꿈꾼다. 차별 없는 세상을. 덧붙이는 글 <차별받은 식탁>, 우에하라 요시히로 지음, 황선종 옮김, 어크로스 펴냄, 2012년 4월, 1만2천원 <오마이뉴스> 게재 돼지 귀, 코, 고슴도치... 이게 다 먹는 거라니까요 105

106 22 열일곱, 너도 늙는다

107 열일곱, 너도 늙는다 :59 [리뷰] 정지우 감독의 <은교> 일흔 노인과 열일곱 소녀 그리고 삼십 대 남자의 삼각관계, 전라와 성기노출도 불사한 파격적인 정사장면들로 19금 판정을 받으며 많은 이들 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정지우 감독의 영화 <은교>가 지난 4월 26일 개봉했다. 박범신 작가의 동명소설 <은교>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은교> 는 한국판 <로리타>가 아니냐는 등 개봉 전부터 숱한 논란의 말들을 낳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본 <은교>에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외설은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철학적이고 풍부한 사유가 돋보이는 영화라는 게 중론이다. <은교>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와 생명 가진 것이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늙음에 대한 서글프고 쓸쓸한 소회이며, 가 질 수 없는 것에의 욕망을 간직한 삶에 대한 안타까운 눈짓이었다. 1999년 영화 <해피엔드>로 애정과 욕망, 집착, 살의와 같은 인간 본원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던 정지우 감독은 <은교>를 통해 인간 존재 론에 대한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파격적이되 노골적이지 않고, 때로는 몽환적이면서도 현실감 있게 표현하였다. 정지우 감독 특유의 깊이 있는 심리묘사와 아름다운 영상미가 돋보이는 <은교>는 가슴에는 욕망을 품고 등에는 생로병사를 지고 살아가야 하 는 인간의 존재를 슬프고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는 감성어린 영화다. 열일곱, 너도 늙는다 107

108 늙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등 굽은 노인이 혼자 앉아서 식사를 한다. 정갈하지만 적막한 집안은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 식탁엔 차렸다고 할 것도 없이 딱딱하게 굳어 물에 만 밥과 김치 하나가 전부다. 표정 없이 기계적으로 먹는 밥은 그저 외로운 목숨을 연명하는 수단으로 보일 뿐이 다. 노인의 이름은 이적요( 李 寂 寥, 박해일 분). 그의 시는 교과서에 실리고, 아직 살아 있음에도 문학관 건립이 추진될 만큼 추앙받는 국민시인이 다. 하지만 식탁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선 그가 위대한 시인이라는 것도, 이적요라는 이름을 건 문학관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도 의미가 없 어 보인다. '적요( 寂 寥 )'라는 이름처럼 그저 외롭고 쓸쓸한 노인일 뿐이다. 죽음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초라하고 불쌍해 보이는 노인. 늙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이 얼마나 공평한 자연의 법칙인가. 그리고 얼마나 서글픈 원칙인가. 예전 언젠가에는 그의 몸에도 청춘의 생기가 있었으리라. 하얗고 미끈한 피부를 감싸는 탱탱한 근육이 그에게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제 늙 어버린 몸에는 주름과 검버섯만이 동반자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힘없이 쪼그라든 그의 상징과 함께. 자신의 벗은 몸을 거울로 비춰보는 시 인의 눈빛은 쓸쓸하고 허망하다. 노인의 사랑은 더러운 스캔들? 그런 어느날 고목에 날아든 작은 새처럼 환한 빛으로 은교(김고은 분)가 시인의 삶에 들어온다. 은교는 연둣빛으로 물오른 느티나무처럼 싱 그럽고 아름답다. 젊음의 생기가 온몸에서 느껴지는 은교는 이적요의 죽어 있던 청춘에 대한 갈망과 생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이적요 는 그런 감성을 글로 풀어 단편소설 <은교>를 완성한다. 서양 속담 중에 '흰 눈이 지붕을 덮었다고 집 안의 벽난로가 타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마치 사랑이 청춘의 전유물인 양 생각하며 노인의 성이나 사랑을 노망 내지는 주책이라고 몰아붙인다. 하지만 젊음이 사라진다고 사랑의 감정도 사라질까? 몸이 늙는다고 욕 열일곱, 너도 늙는다 108

109 망도 같이 늙어버릴까? 그렇지 않다. 지기 전의 꽃이 더 향기가 진하고, 꺼지기 전의 불꽃이 더 밝고 환한 것처럼 인간의 욕망 또한 그러하다. 이미 안드레아스 드레 센 감독의 <우리도 사랑한다>나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에서 보지 않았던가. '사랑=젊음'이 아니며 '늙음=추함'이 아닌데 왜 우리는 늙 어서는 인간 본연의 감정인 사랑조차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김무열 분)는 스승의 그런 갈망을 더러운 스캔들이라 매도한다. 별의 시적 의미를 깨닫는 데 십 년 걸린 공대 출신 지 우. 공장에서 나온 수많은 거울과 엄마의 생일 선물 거울이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는 그에게 이적요는 그저 어린 소녀를 탐하는 추한 욕망을 가진 노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질투는 나의 힘 지우는 은교가 싫다. 그에게 은교는 마치 엄마 사랑을 빼앗아간 동생 같다. 그래서 엄마 몰래 동생 허벅지를 꼬집는 아이처럼 은교를 대한다. 십여 년을 이적요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지만 자기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시의 의미를 은교가 이해하는 것이 그는 싫다. 은교의 젊음에 대한 이적요의 동경도 그는 이해할 수가 없다. 문학적 감수성도, 순수한 인간성도 없는 지우가 가진 것이라곤 아직은 늙음이 드리워지지 않은 젊은 육체뿐이다. 스승의 모든 것을 따라했지 만 천부적 재능까지 따라할 수는 없었던 지우는 세경 주는 심정으로 써주었다는 이적요의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끝내는 이적요의 소설 <은교>를 훔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여 '이상문학상'을 타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적요의 '도적놈'이라는 질책에도 거울이 다 같은 거울이라고 말할 때처럼 지우는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지 못한다. 도둑질이 나쁜 짓 이라는 것보다 자신의 합리화가 우선이다. 마치 부산의 누구처럼. 그리고 마침내는 스승의 욕망까지도 훔친다. 엄마의 보물을 훔쳐낸 아이처 럼 스승이 마음 속으로만 품었던 보물을 죄의식도 없이 훔쳐버린다. 그것이 지우에게는 스승이 가진 천재성에 대한 그리고 스승의 관심을 빼앗아간 은교에 대한 질투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지우가 슬프다. 늙은 이적요의 처지고 쪼그라든 성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이적요의 껍데기일 수밖에 없는 서지우의 젊음이 더 슬픈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잘 가라 열일곱, 너도 늙는다 열일곱, 너도 늙는다 109

110 적막하기는 했지만 정갈했던 이적요의 집은 이제 없다. 식탁엔 파리가 들끓고 바닥엔 온통 소줏병들이 흩어져 있다. 사람 떠난 폐가 같다. 안 개꽃을 들고 온 은교가 서재 한 구석 간이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이적요를 본다. 그러나 등 돌리고 누운 이적요는 은교의 마지막 뒷모습 조차 볼 수가 없다. 멀어지는 은교의 발소리를 들으며 깊은 슬픔을 담아 나즈막히 내뱉는 한 마디. "잘 가라, 은교야," 나는 늙지 않을 거라는 착각을 하며 산다. 열일곱의 나는 마흔의 나를 생각하지 못했다. 마흔의 나는 또 일흔의 나를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 나 오늘도 나는 열일곱에서 하루가 더 멀어졌고 일흔에는 하루가 더 가까워졌다. 문득 "또 하루 멀어져간다"로 시작해서 "매일 이별하며 살 고 있구나"로 끝나는 김광석의 노래가 생각났다. 특히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라는 대목에서는 눈물이 났다. 세상에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 아무리 오지 말라고 밀어내어도 제 발로 찾아오는 것, 이 세상에서 노력 없이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늙음이라 고 한다. 노인은 모든 젊은이의 미래다. 잘 가라. 아름다운 나의 청춘아 <오마이뉴스> 게재 열일곱, 너도 늙는다 110

111 23 공정무역인증제도, 정말 공정할까?

112 공정무역인증제도, 정말 공정할까? :54 [서평] 코너 우드먼의 <나는 세계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 여행을 하는 목적이나 동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삶에 지치고 일상에 찌들려 몸과 마음을 편안히 쉬게 할 목적으로 여행을 하는 이도 있을 것 이고, 혹은 문화적, 지적 세례를 받기 위해 여행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오지여행처럼 새로운 문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여행 목적으 로 삼는 이도 있다. 코너 우드먼은 기차 안에서 마신 커피 잔에 새겨진 글을 보고 여행을 결심한다. 커피 잔에는 '당신이 마신 이 커피가 우간다 부사망가 주민 들의 삶의 질을 높여줍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제3세계 생산자와 공정한 거래를 약속합니다'라는 공정무역재단 로고와 슬로건 이 적혀 있었다. 언제부턴가 공정무역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소비자들 사이에서 의식 있는 행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커피 마실 때나 물건 살 때 조금 비싸더라도 공정무역제품을 사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가끔은 궁금하다. 공정무역은 진짜로 공정하며 내가 마신 이 커피가 정말 원생산 자에게 도움이 될까? 나의 이런 궁금증을 코너 우드먼이 해결해 주었다. 런던 금융가에서 잘 나가던 애널리스트였던 코너 우드먼은 고액연봉자 신분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세계일주를 시작했다. 그 경험을 책으로 썼 고, 그의 첫 번째 책 <나는 세계일주로 경제를 배웠다>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콩고, 니카라과, 중국, 아프가니 스탄 등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 9개국을 목숨을 걸고 누볐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공정무역의 과정을 역추적하는 것이다. 코너 우드먼은 그의 새 책 <나는 세계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를 '죽어라 일하 는데도 점점 가난해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대기업과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오늘도 그 들이 만든 물건을 구입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뭘까? 왜 가난한 사람은 죽어라 일을 해도 계속 가난하며,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코너 우드먼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는 이번 여행을 통해 사업과 윤리가 양립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실해졌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있음을 알았 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알게 된 모두가 잘사는 세상으로 가는 길은 뭘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더러운 세상 공정무역인증제도, 정말 공정할까? 112

113 열일곱 살 소년 에두아르드는 니카라과의 미스키토 제도에서 바다가재를 잡는다. 바다가재를 잡으려면 심해로 삼사십 미터 이상 잠수해 들어 가야 한다. 그러나 에두아르드를 비롯한 잠수부들에게는 바람이 새는 마우스피스가 연결된 공기통 외엔 그 어떤 안전장치도 없다. 결국 사고 로 죽거나 몇 년 되지 않아 잠수병으로 절름발이가 되는 것이 이들의 미래다. 그러면 잠수로 바다가재를 잡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그물로 잡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물 값이 비싸 가난한 이들로써는 엄두를 내 지 못한다. 결국 죽음이나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잠수를 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잡힌 바다가재는 싼 값에 미국의 대기업으로 팔려나가 다시 비싼 값에 우리 식탁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기업들은 잠수가 매우 위험하며, 잠수부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하기 쉽다는 것을 모를까? 그렇지 않다. 다만 자신들의 이 익을 위해 모른 척 할 뿐이다. 만약 이 기업들이 구매단가를 높여주고, 잠수가 아닌 그물로만 잡은 바다가재를 산다고 하면 니카라과의 에두 아르드는 어린 나이에 죽음의 위험에 내몰리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이들 기업은 자신들은 항상 고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기업문화로 널리 인정받으며, 이 바다가재는 윤리적인 상품이라고 광 고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여기서만 일어날까? 아니, 세계 도처에서 아주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콩고의 주석 광산에서도, 라오스의 고무 농 장에서도, 중국의 휴대전화 생산 공장에서도 매일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심지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직원들이 백혈병으로 죽어 나가는데도 나 몰라라 하는 삼성은 얼 마나 열심히 '또 하나의 가족'을 외쳤으며, 함께 일하던 직원들을 해고와 죽음으로 내몬 쌍용차는 또 얼마나 윤리경영을 입에 담았던가. 이처럼 우리가 입고, 신고, 먹고, 소비하는 대부분의 제품이 이렇게 누군가의 목숨을 건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다.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풍요 로운 해안에 사는 에두아르드가 죽어라 일을 해도 바다가재는커녕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한다는 점이다. 곰이 아무리 열심히 재주를 넘어도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것이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공정무역인증제도의 불편한 진실 "우리는 마케팅 수단이 필요했고, 그쪽은 공정 무역을 대표할 만한 상품이 필요했죠. '여기 확실한 공정무역제품이 있습니다. 사세요!'라고 말 이죠. 그들 덕분에 돈을 많이 번 건 사실입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그쪽에서 로고 사용료 를 너무 많이 요구했습니다. 그 규정이 말도 안 되는 것이었어요. 처음엔 2퍼센트라고 했다가, 좀 있다가, 3퍼센트, 또 금방 4퍼센트를 달라고 했습니다. 얼굴이 어떻게 그리 확 변하는지." (본문 72쪽) 공정무역재단 초창기를 함께했던 1세대 윤리적 초콜릿 사업가이자 그린 앤 블랙스의 공동 설립자인 크레이그 샘즈의 말이다. 노예와 다름없 는 어린이의 노동을 착취하는 카카오나 커피 농장의 실상이 널리 알려지고 의식 있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공정무역이 조명을 받기 시작했 다. 그린 앤 블랙스는 벨리즈의 농부들을 설득하여 카카오 재배방식을 유기농으로 전환하여 유기농 초콜릿을 전문으로 생산했던 회사로, 1991년 에 공정무역재단이 자신의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찾아낸 첫 인증업체였다. 그런데 문제는 공정무역재단이 로고 사용료를 기업으로부터 받고, 다시 그 돈으로 자신들의 마케팅 활동을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공정무역재단으로서는 많은 기업과 계약하여 고객을 끌어들이는 것뿐 아니라,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브랜드와 제휴를 맺어 소비자들에 게 공정무역 로고를 알리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러다보니 공정무역재단이 제휴 업체로 영세 기업보다는 대기업을 선호하게 되고, 영리를 우 선으로 하는 농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점점 더 많이 보증하게 되었다. 또한 대기업은 공정무역을 새로운 마케팅의 일환으로 인식했다. 기업들은 윤리적 제품이 장사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자사 제품에 '올바른' 로고 를 붙이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이다. 열대 우림을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며 노동자와 아동을 착취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맥도날드는 이런 이미 지를 지우기 위해 윤리적으로 인증 받은 커피를 판매하면서 매장의 모든 커피 컵에 열대 우림 동맹 로고를 붙여 자신들이 윤리적임을 광고했 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족'을 광고하는 삼성이 전혀 가족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것처럼 대기업들의 이런 새로운 윤리적 이상이 얼마나 진 실한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공정무역의 진실은 윤리적이고 싶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이용한 또 하나의 마케팅에 지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공정무역재단 역시 기업화되어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 만들기 윤리적 상품을 인증해 주는 조직들은 농부들이 협동조합과 거래하면서 협동조합이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문제는 조합 의 이익이 농부의 이익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탄자니아 오레라 마을의 커피 생산 농부들은 지역협동조합인 킬리만자로 주민 협동조합(KNCU) 대신 영국의 영세 기업인 에시컬 어딕션과 직접 거래한다. 에시컬 어딕션은 비록 공정무역인증을 받지는 못하지만 품질이 좋은 오레라 마을 커피를 최고급 커피 시장에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낸다. 그 리고 그 혜택은 농부들에게 직접 돌아간다. 농부들은 투자를 통해 매년 더 좋은 커피를 더 많이 거래함으로써 나날이 더 발전해가는 것이다. 공정무역인증제도, 정말 공정할까? 113

114 에시컬 어딕션의 데이브와 이안은 공정무역인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에게 돈을 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 중에 농부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한 푼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 중 요합니다. 단순히 올바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해서가 아니에요. 저희는 칭찬도 바라지 않고, 스티커도 필요 없어요. 다만 사업을 잘 하고 싶은 거죠. 그 말은 이익을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건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관계가 계속되려면 모든 사람이 이익을 봐야 합니 다. 바로 이 원칙이 지속 가능한 큰 그림이죠." (본문 76~77쪽) 코너 우드먼 역시 궁극의 해결책은 윤리적인 신뢰감을 브랜드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지, 자신이 하는 일을 인증해 줄 집단을 찾아 스탬프를 받아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생산자와 판매자 그리고 소비자가 모두 함께 이익을 볼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그럼 지금껏 돈을 더 주고 공정무역제품을 산 나는 뻘짓을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공정무역제품이 건전하고 윤리적인 소비가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비록 대기업의 마케팅 수단이 되고, 혹은 인증을 위한 인증이 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제3세계의 가난한 소작농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계속 늘려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대기업은 스스로 착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적인 커피 체인점 스타벅스가 딱정벌레 추출 색소 사용을 중단한 것도 바로 이 러한 이유에서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장바구니에 윤리적 상품을 담음으로써 대기업을 압박할 수 있고 기업의 운영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 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업들이 더욱 책임있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소비자들이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삼성의 휴대전화, 노트북을 쓰는 소비 자들이 자신들의 휴대전화의 생산환경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낸다면 지금껏 삼성 공장에서 일하다 건강과 생명을 잃고 고통받아온 이들의 아픔을 삼성이 계속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결국 책임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나는 세계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 코너 우드먼 지음, 홍선영 옮김, 갤리온 펴냄, 2012년, 1만4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공정무역인증제도, 정말 공정할까? 114

115 24 보는 것만 믿지 마라, 정치는 마술이다

116 보는 것만 믿지 마라, 정치는 마술이다 :59 [서평]] <왜 < 뇌는 착각에 빠질까 - 뇌과학이 들려주는 속임수의 원리>를 읽고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후고 폰 호프만슈탈은 '정치는 마술이다'고 했다. 이번 4 11 총선을 보니 그 말은 지극히 맞는 것 같다. 마치 없던 코끼리가 튀어나오고, 자유의 여신상이 사라지는 마술처럼 각종 이슈와 현안들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나타나며 눈과 마음을 현혹 하고 속인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마술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어렸을 때 TV에 나온 유리겔라를 보고 초능력자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결국은 초능력이 아니라 마술, 그저 눈속임이었음이 밝혀졌다. 하 지만 그의 진짜 초능력은 숟가락 구부리기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의 마술이 진짜라고 믿게 하는 능력이 아닐까? 우리는 마술이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는다. 그리고 속는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는 매우 뛰어난 마술사가 아닐까? 마술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관객 마음을 예측하며 움직인다는 것인데, 유권자의 심리를 읽고 잘 이용한다는 점에서 박근혜는 뛰어난 마술사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우리의 뇌는 이렇게 눈을 뻔히 뜨고 있으면서도 속는 것일까? <왜 뇌는 착각에 빠질까 - 뇌과학이 들려주는 속임수의 원리>는 마술의 신경과학을 다룬 최초의 책으로 저자들은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다. 저자들은 마술의 속임수에 빠진 사람들의 뇌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왜 인간의 마음이 속임수에 그토록 취약한지, 또 인간존재에서 '기 만'이 얼마나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하는지 알려주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마술사가 어떻게 우리 뇌를 해킹하는지 이해함으로써 그와 동일한 인지 트릭이 광고전략이나 기업협상, 정치 또는 기타 다양한 인간관계 속 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는 것만 믿지 마라, 정치는 마술이다 116

117 보이는 것을 믿지 마라 "검은색 무대 위, 오직 불빛을 받는 마술사만이 보인다. 마술사가 바닥에 놓여있던 흰 천을 들어 펼치자 의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천으로 의 자를 덮고 다시 펼치면 젊은 남자가 앉아 있다. 마술사가 칼로 젊은 남자의 목을 베자 피도 한 방울 흐르지 않는데, 남자의 목이 달아나고 몸만 남는다. 남자의 잘린 목을 들고 있던 마술사가 남자의 손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비켜서자 머리가 제자리에 가 있다." 이것은 마술사들이 가장 흔히 이용하는 트릭 중 하나인 착시를 이용한 마술이다. 착시란 현실세계와 맞지 않는 주관적인 시지각을 뜻하는 것 이다. 있지 않은 것을 보거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도 하고, 실제와 다른 것을 볼 수도 있다. 착시가 일어나면 보고 있는 대상의 물리적인 특성이 지각과 모순을 빚는다. 한마디로 실제대로 보이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예측하는 기계라는 점이다. 뇌는 현실에 대한 정신적 시뮬레이션, 즉 의식을 형성하기 위해 어마어마 한 분량의 이야기를 꾸며낸다. 즉 뇌는 시각적으로나 그 밖의 다른 양식으로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전 체험과 기억들에 근거를 두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리라고 기대하는 바에 따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이 체험하는 모든 것은 시뮬레이션으로 의식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충실하게 재현한다고 느끼는 것 역시 뇌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착각 이다. 한 마디로 '뇌의 실체는 거짓말쟁이'라고 저자들은 이야기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뇌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뇌의 거짓말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것이 눈이다. 시각계는 근사치, 추측, 예측과 같은 것들에 의존해 주어진 순간에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장면을 구성하는 상당히 진화된 그러나 조잡한 회로에 가깝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각 눈의 망막에 단순한 이차원적 상이 맺히는데도 세계를 3차원적인 것으로 지각할 만큼 우리 눈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인간의 한쪽 눈은 겨우 1메가 픽셀 카메라 한 대에 해당하며, 결국 풍부한 시각적 체험이란 것은 뇌가 채워 넣는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낸 착시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술사들은 이러한 시각계 특성들을 트릭에서 끊임없이 활용한다. 앞의 마술은 검은 배경을 바탕으로 검은 천 을 조작함으로써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게 하는 대비를 이용한 착시다. 따라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있는 것이 모두 사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손에 붕대를 감고,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최대 한 불쌍한 표정으로 '이번에는 100석을 채우기도 어려울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마술사가 상자에 들어간 금발미녀를 톱으로 반 토 막 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진실을 외면하는 거짓 본능 "무대 위에 오른 마술사가 이야기한다. "제가 동전을 꺼낸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그는 머리 위로 오른손을 높이 들고 공중에서 반짝이는 은전을 집어 왼손에 들고 있던 놋쇠 양동이에 동전을 떨어뜨린다. 땡그랑 소리가 나고, 그는 계속해서 은전을 공중에서 집어 땡그랑, 땡그랑 떨어뜨린다. 이상하게도 은전은 여기저기서 계속해서 나온다." 이 마술은 구두쇠의 꿈이라고 불리는 고전적인 마술이라고 한다. 이 마술이 가능한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믿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믿으려 고 하는 인간의 성향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마술을 저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마술사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가정하려는 것이 관찰자의 자연스러운 성향입니다. 사람들은 반복이 실은 반복이 아닐 때도 당연히 반 복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보는 것만 믿지 마라, 정치는 마술이다 117

118 이것은 세상 속에서 패턴을 발견하려고 하며 그러한 패턴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때는 심지어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인간의 강박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즉 인간은 보이는 진실보다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마술사는 이러한 인과관계 를 추론하려는 사람들의 본능을 그저 쪽쪽 빨아먹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인간의 이런 성향은 이번 선거에서도 아주 잘 증명되었다. 문도리코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명백한 표절행위를 한 문대성은 새누리당의 옷을 입고 부산에서 당선되었다. '지적 도둑질'이라는 보이는 진실보다는 '그래도 새누리당인데...'라는 보이지 않는 착각을 김용민의 막말이라는 주 의분산 효과와 함께 마술사가 적절하게 이용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총선이 끝난 후 '선거의 여왕'이 돌아왔다고 각종 언론에서는 떠들고 있다. 물론 이 언론들이 선거라는 마술에서 한 몫을 단단히 했음은 부인 할 수 없다. 사람들의 지각을 교란시키고, 주의를 분산시켜 마술사가 눈속임을 확실히 하는 보조역할을 충실히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술의 법칙 중 하나는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똑같은 방법으로는 속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뇌가 감각잔상을 만들고, 기억은 오류가 있으며, 종종 빗나가는 예측을 해서 태 생적으로 잘 속는 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매번 속지는 않는다. 하여 선거의 여왕이 다음 번에도 뛰어난 마술을 선보일 수 있을지는 자못 기 대가 되는 대목이다. 덧붙이는 글 <왜 뇌는 착각에 빠질까 - 뇌과학이 들려주는 속임수의 원리>, 스티븐 매크닉, 수사나 마르티네스 콘데, 산드라 블레이크 지 음, 오혜경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2012년 3월, 15,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보는 것만 믿지 마라, 정치는 마술이다 118

119 25 토론 피하는 정치인들... 이 책 읽고 정신 차리세요

120 토론 피하는 정치인들... 이 책 읽고 정신 차리세요 :52 [서평]]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방송 토론과 관련한 사고가 연일 터지면서 새누리당이 토론 공포증에 걸릴 지경이다. 지난 3일 방송된 MBC <100분 토론>에 참가한 조동원 새누리당 홍보기획본부장은 총선특집으로 꾸며진 토론회에서 한 정당의 대표로 참가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황당무계한 답변과 무 논리로 일관했다. 방송이 방영되고 그는 인터넷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또한 새누리당 이상돈 비상대책위 위원은 지난 4일 밤 방송된 tvn <백지연의 끝장토론>에서 토론 도중 퇴장했다(새누리당은 이에 관련해 '사 전에 이미 협의된 내용이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새누리당 박선희 안산 상록갑 후보 역시 지난달 31일 열린 전해철 민주통합당 후보와의 토론에서 공통질의서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토론 도중 자리를 떴다. 그밖에 새누리당 강남을 김종훈 후보, 새누리당 경남 김해시을 김태호 후보, 새누리당 창원시 의창구 박성호 후보 등은 이유 같지 않은 이유 를 들어 방송 토론을 거부하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방송 토론은 잘 활용하면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지만, 잘못하면 그 동안 쌓아놓은 점수까지 깎아먹을 수 있기 때문에 토론에 약한 후보들로서는 방송 토론이 여간 부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토론은 자신의 주장을 얼마나 논리정연하고 일관성 있게 펼쳐 상대와 듣는 이를 설득시키느냐가 관건이다. 그런데 여기 토론이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새누리당에게 '한 수 가르쳐 줄까'라고 할 것 같은 이들이 있다. 논리라면 논리, 토론이라면 토론에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 토론 피하는 정치인들... 이 책 읽고 정신 차리세요 120

121 을 두 사람,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는 천재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칼 포퍼가 만났다. 부지깽이를 내려놓고 나가버린 비트겐슈타인 1946년 10월 25일, 노벨문학상을 받은 위대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을 비롯해 당대 최고의 지성들인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청중으로 모인 자리에서 벌인 그들의 토론. 결과는 어땠을까. 숨 막히는 설전이 벌어졌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희대의 토론은 불과 십분 만 에 비트겐슈타인이 손에 들었던 부지깽이를 내려놓고 회의실을 나가버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박선희 후보나 이상돈 비대위원이 토론 도중에 나가버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비트겐슈타인은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항 상 같이 있는 이들을 압도하는 뛰어난 카리스마와 천재성을 지닌, 전 세계 지성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최고의 철학자가 아니던 가. 그렇다면 그들이 만났던 10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존 에이디노의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은 제목 그대로 이 기막힌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기 막힌 것은 그 10분 동안 벌어진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스캔들을 바탕으로, 때로는 소설처럼 때로는 다큐멘터리처럼, 또는 철학서처럼 두 사람 의 삶과 철학사상을 아주 재미있고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과 포퍼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만약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들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버리고 철학공부를 한다면? 솔직히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본다. 그런 데 오스트리아 최대의 철강회사를 소유한 대재벌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왕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가까울 만큼 검소한 삶을 살았다. "가파르고 높은 산을 올라가려면, 무거운 배낭은 산기슭에 놔두고 출발해야 한다." 이렇게 말할 만큼 비트겐슈타인에게 부는 무거운 짐일 뿐이었던 것이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말 그대로 '폭풍 카리스마'를 지닌 천재였다. 관심을 가지는 분야는 무엇이든 독창적이고 탁월한 업적을 이뤄냈다. 수많은 추종세력들은 눈을 반짝이며 비트겐슈타인의 뒤를 따랐고, 철학 논문이나 저서뿐만 아니라 많은 문학 예술 작품 속에도 끊임없이 비트겐슈타인은 등장했다.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는 비트겐슈타인에 비하면 포퍼는 상대적으로 초라했다. 아버지가 변호사였던 포퍼의 집안은 중산층이긴 했으나 포퍼 가 대학 갈 무렵엔 집안이 망해서 대학등록금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고, 어느 곳에 가든 그 즉시 사람들을 압도한 비트겐슈타인에 비해 포 퍼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포퍼는 끊임없이 비트겐슈타인을 의식하고 그를 눌러 이기고 싶어 했다. 마치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르의 심정이 이러하지 않았을 까. 문제는 모차르트가 전혀 살리에르를 경쟁자로 인식하지 않았듯, 비트겐슈타인 역시 전혀 포퍼를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저 포퍼 혼자서 평생을 비트겐슈타인을 의식하며 보냈던 것이다. 철학적 문제는 존재하는가 1946년 10월 25일 저녁, 케임브리지 대학 모럴 사이언스 클럽의 주간 정례 모임. 초청연사는 포퍼였다. 모임은 늘 모럴 사이언스 클럽의 좌장 인 비트겐슈타인이 이끌었다. 비트겐슈타인과 포퍼는 둘 다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계 출신이다. 그러나 동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았지만 그들 은 그 날의 만남이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포퍼는 이날 비트겐슈타인을 자극할 마음을 먹고 왔고, 어쩌면 그의 작전대로 비트겐슈타인은 제대로 걸려든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저자는 추 측한다. 왜냐하면 포퍼에게는 열두 살 많은 비트겐슈타인이 이미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정점에 서 있는 거성으로 반드시 넘어야 하고, 또 넘고 싶은 거대한 벽이자 산이였기 때문이다. 이날의 주제는 '철학적 문제는 존재하는가'였다. 지극히 추상적인 이 문제 때문에 격한 말다툼을 벌이고 심지어 그 중 한 사람은 부지깽이까 지 집어 들었단다. 그것도 추종자들의 존경을 넘어 추앙을 받는 대철학자가 말이다. 문득 이런 지적인 것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부럽다는 생 각이 든다. 지금은 찾아보려 해도 볼 수 없는 낯설지만 그리운 풍경. 예전에 96학번의 후배 하나가 자신은 대학생활에 많이 실망했다고 얘기 한 적이 있다. 이유인즉슨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오 던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학생회를 비롯한 대학사회가 지극히 생활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유치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아이폰과 갤럭시S를 두고는 논쟁하지만 누가 철학적 문제로 논쟁을 하는가. 선거철이라 이슈도 많고 논쟁도 많지만, 그 누가 인간 삶 의 본원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비트겐슈타인과 포퍼는 문명, 과학, 문화의 근본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 심원한 영향을 미친 철학자들이다. 단순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스캔들로 읽힐 수 있는 이들의 만남과 논쟁이 사무실 밖 네거리에서 들려오는 선거 유세 확성기 소음 속에서 더욱 그립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순수한 지적에의 열망 때문에? '근원적인 것에 대한 열정 없이 문화가 가능할 까'라는 역자의 물음이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듯 부는 바람처럼 내 마음속에 휘몰아친다. 토론 피하는 정치인들... 이 책 읽고 정신 차리세요 121

122 덧붙이는 글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데이비드 에드먼즈 존 에이디노 씀 김태환 옮김 옥당 만7900원) <오마이뉴스> 게재 토론 피하는 정치인들... 이 책 읽고 정신 차리세요 122

123 26 아련한 첫사랑......아니, 늙어가는 첫사랑

124 아련한 첫사랑......아니, 늙어가는 첫사랑 :43 [리뷰]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 임금 체면에도 불구하고 첫사랑 때문에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던 이훤(<해를 품은 달>, 김수현)이 장안의 모든 여심을 흔들었다면, 요즘 장안의 모든 남심은 긴 생머리 흩날리며 귀에 이어폰을 살포시 꽂아주던 서연(<건축학개론>, 배수지)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 영화를 본 남자 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내 얘기라고 말하는 <건축학개론>. 사람들에겐 모두 한번은 다시 돌아가 보고픈 과거가 있다. 그 순간은 첫사랑을 만나던 그 때가 아닐까? 세상 많은 말들 중에 첫사랑이라는 세 글자만큼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는 단어가 또 있을까? 그래서일까? TV든 영화든 요즘 가장 뜨거운 소재가 바로 이 '첫사랑'인 것 같다.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봄비처럼 촉촉히 마음을 적시며, <해를 품은 달>에 이어 첫사랑의 감성에 불을 당기고 있는 <건축학개론>. 2009년 <불 신지옥>을 연출하며 새로운 공포영화의 문을 연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이 지난 22일 개봉 후 5일 만에 80만 관객을 동원하며 봄철 극장 가에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아련한 첫사랑...아니, 늙어가는 첫사랑 124

125 모두가 '내 얘기 같다'는 공감백배의 첫사랑 영화. 그런데 나는 왜 아련하기보다는 씁쓸하고 우울한 걸까? 패기 없고 옹졸하던 스무 살의 내 모습과 속물로 나이 들어가는 오늘의 내 모습이 마치 초상화처럼 다가오기 때문일까? 영화 속 그들의 모습과 현실 속 나의 모습이 너무 닮 아서 오히려 더 씁쓸한 이 영화, <건축학개론> 강남 압서방에 무너진 강북 순진남? 과거 언젠가 서울에서는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 "아직도 단독주택에 사세요?"라는 말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유행한 때가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당근과 채찍을 손에 쥔 정부의 개발정책에 따라 대규모 아파트단지 조성, 도로 포장 등 개발된 강남은 어느새 이남과 이북 이 상의 괴리감으로 대한민국에 자리하게 되었다. '강남특별시'라고까지 불리며, 사회 지도층의 50%이상이 살고 있지만 지난해 8월 24일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이미 보았듯이 사회정의나 보 편적 복지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더 관심을 보여 눈총을 받는 곳. 강남은 그 이름만으로도 힘없는 서민들에게 위축감과 자괴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 되었다. 명문대 건축과에 막 입학한 순진무구한 서울 촌놈 승민(이제훈)에게 강남의 개포동은 심리적으로 아주 먼 곳이다. 승민은 '건축학개론' 수업 을 함께 들으며 좋아하게 된 서연과 버스를 타고 자신에게 가장 먼 곳 개포동을 찾아간다. 정릉 시장통에서 국밥집을 하는 엄마와 허름한 한 옥집에 사는 승민에게 강남의 고층 아파트는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인 것이다. 승민은 서연을 좋아하지만 표현하지 못한다. 승민은 서연이 키 크고, 잘 생긴, 강남 압서방(압구정동 서초동 방배동)파 선배에게 마음이 있 다고 오해하고 있다. 소심한 승민은 결국 좋아한다 말 한마디 못하고, 자신의 오해가 사실인지 오해인지도 확인하지 못한 채 서연을 마음에 서 밀어내 버린다. 강북의 서민출신인 승민에게 압서방으로 규정된 강남의 부잣집 선배는 도전조차 해 볼 수 없는 극복불가능한 산인 것이다. 그런데 스무 살 젊음의 특권인 무모한 용기도, 패기도 없이, 강남이란 간판에 말 한 마디 못하고 밀려버린 이 우울한 청춘을 향해 모든 남정네들이 다 자기 이야기라고 한다. 입고 있던 티셔츠가 게스가 아닌 짝퉁이라 창피하고, 시장에서 국밥 파는 엄마가 부끄러워 외면해 버리며, 좋아하는 여자가 술취해 다른 남 자의 부축을 받고 있어도 한발 나서지도 못하는 이 소심하고 찌질한 청춘이 아련하다고? 글쎄 나는 우울하기만 하다. 제주처녀에서 개포동 사모님으로 돌아온 첫사랑 서연 밤샘 야근을 하고 땀에 절은 듯한 후줄근한 와이셔츠 차림으로 눈을 비비던 찰나 '청담동 며느리' 스타일로 나타난 서연(한가인)을 승민(엄태 웅)은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한다. 풋풋하고 청순했던 스무 살 서연 대신 명품 매장에서 금방 나온듯한 고급스런 분위기의 서른 다섯 살 서연 이 서 있었던 것이다. 전공이 피아노이면서도 피아니스트가 아닌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던 서연은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지자 의사와 결혼한다. 그리고 이혼 후 받 은 위자료를 가지고 제주도에 집을 짓기 위해 승민을 찾아 온 것이다. '어디 살아?' 하고 묻는 승민에게 서연은 '개포동'이라고 대답한다. 스 무 살적 승민에게 가장 멀게 느껴졌던 곳 개포동에 이제 서연이 사는 것이다. "나 너무 속물스럽지. 그렇지만 나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 버티면 버틸수록 더 많이 받아낼 수 있대. 이만큼 버틴 대가로 제주도에 집도 짓잖 아." 아련한 첫사랑...아니, 늙어가는 첫사랑 125

126 스무 살 승민의 마음을 온통 가져갔던 당차고 똑똑했던 서연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제주도 학원출신'이라 부르던 서울내기들의 왕따 쯤은 쉬이 무시해 버리던 제주처녀 서연. 소심하고 찌질했던 스무 살 승민의 모습만큼 15년의 세월과 함께 개포동 사모님의 모습으로 돌아온 서연 의 모습은 우울하기만 하다. 그러고도 남는 우울함 제주도의 헌 집을 다듬고 고치기 시작하면서 승민과 서연의 스무 살적 기억도 다시 지어진다. 밑그림을 그리고 벽돌을 올리면서 단장되어 가 는 옛집의 모습처럼 미숙함과 오해 속에서 헝클어진 지나간 시간들이 정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아쉽고 안타깝고 서글 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첫사랑이 원래 잘 안 되라고 첫사랑이지, 잘 되면 그게 첫사랑이냐? 마지막 사랑이지." 승민의 친구 납득이(조정석)의 말처럼 모든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첫사랑이다. 그리고 또 하나 진리는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는 것이다. 긴 머리 찰랑이며 마음을 온통 사로잡던 첫사랑의 얼굴도, 혼자 이별하고 아파하며 울고불고 했던 그 시절도 결국 시간과 함께 모두 잊힌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과 더불어 우리도 늙어갈 것이다. 하여 병든 아버지를 바라보는 서연의 눈빛에, 자신이 미국으로 떠난 후 혼자 남을 어머 니를 걱정하며 바라보는 승민의 애잔한 눈빛에 더 마음이 아프고 쓸쓸해지는 것이다. 그 모습들이 결국에는 언젠가 맞이해야 할 우리의 모습 이기에. 이처럼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에 대한 아련함보다는 첫사랑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우울하고 쓸쓸함이 더 기억에 남는 영화다. 엔딩 크 레딧이 다 올라가고도 한참동안 귓가에 맴돌던 전람회의 노래 <기억의 습작>처럼, 미숙한 습작들로 채워진 우리의 삶을 쓸쓸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영화 <건축학개론>이다. 아련한 첫사랑...아니, 늙어가는 첫사랑 126

127 <오마이뉴스> 게재 아련한 첫사랑...아니, 늙어가는 첫사랑 127

128 27 '복수해줄게 부탁 들어줘'... '...수렁에 빠진 남자

129 '복수해줄게 부탁 들어줘'... '...수렁에 빠진 남자 :59 [리뷰] 로저 도널드슨 감독의 <저스티스> 시중에 돈이 많으면 화폐가치가 하락하듯이, 너무 남발되어 가치가 퇴색해버린 개념 중 하나가 정의( 正 義 )라는 말이 아닐까. 너도 나도 정의 를 말한다. 심지어 학살자조차 정의를 부르짖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사회이념은 '정의사회 구현', 30년이 지나자 이번엔 사기꾼이 '공정사 회'를 떠들었다. 문제는 그들에겐 그 어떤 정의도 공정도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 정의를 부르짖는 또 한 명의 남자가 있다. 정상적인 사법제도를 통해서는 정의를 찾을 수 없다고, 그래서 스스로 정의를 세우겠다고 해 결사를 자처하는 이 남자. 그런데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단테스 피크>(1997), <리크루트>(2003), <뱅크잡>(2008) 등 을 감독한 로저 도널드슨의 새 영화 <저스티스>가 던지는 물음이다. 고등학교 교사로 아름다운 아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윌 제라드(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어느날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첼리스트인 아내 로 라(재뉴어리 존스)가 연습을 끝내고 귀가하던 중 치한으로부터 끔찍한 폭행과 함께 강간을 당한 것이다. 분노로 괴로워하는 제라드 앞에 사 이먼(가이 피어스)이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로라를 그렇게 만든 자를 알고 있으니 대신 복수를 해서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제안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후에 자신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 선택은 제라드의 몫이다. 아무리 나쁜 짓을 했다고 해도 누군가의 죽음을 사주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제라드는 이성보다는 감정의 손을 든다. 밤길이 걱정되는 미국이 선진국? 영화의 배경은 뉴올리언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쓸고 간 후 생지옥의 모습을 보여준 그곳이다. 당시 미국은 루이지애나 일대 를 강타한 카트리나로 인해 1천800여 명이 숨지고, 1천800억 달러 이 상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문제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심각했 다. 인간애와 이성이 사라진 약육강식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사태수습에서 일순위가 되어야 할 인명구조보다도 치안유지에 인력 을 돌려야 할 만큼 약탈, 살인, 방화, 강간이 이어졌고, 이웃 간의 정 이나 친절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당시 뉴올리언스의 시장이었던 레 이 내긴은 회고담에서 밝혔다. 카타리나 이후 뉴올리언즈의 자살률은 50%나 높아졌다고 한다. 세계 제일의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고작 3등급 태풍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이웃나라 쿠바와 확연히 차이 나는 대목이다. '복수해줄게 부탁 들어줘'...수렁에 빠진 남자 129

130 경제로만 본다면 미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가난한 쿠바지만 쿠 바에는 1년에 몇 번씩 찾아오는 카트리나보다 더 강력한 태풍에도 끄덕없는 신속하고 안전한 방재시스템은 물론 인간애가 있다. 문제는 뉴올리언즈의 정신적 공황상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는 점이다. 영화는 그러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연일 이어지 는 살인과 폭력 앞에 경찰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정부가 시민들의 안 전을 보장해 줄 수 없다. 시민들조차 그게 뉴올리언즈라고 체념한다. 영화라고 하지만 밤길을 걱정해야만 하는 나라를 과연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까? 영화 포스터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것이 정의? 결국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팔 수 밖에 없다. 영화에서 암호로 쓰인 '헝그리 래빗 점프스(배고픈 토끼가 뛴다)'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닌가. 정의를 누가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하고자 하는 자가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는. 따라서 멀리 있는 법보다 주먹이 가까이 있기에 기 꺼이 스스로 주먹을 쥐고 나섰을 뿐이라는 것이 사이먼의 논리다. "우린 그저 정의를 원하는 평범한 시민들일 뿐이오" 라고 사이먼은 말한다. 하지만 무엇이 정의란 말인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 로 꼭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이 정의인가? 6개월 후, 윌과 로라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다. 사이먼이 약속을 지키라 며 윌을 찾아온 것이다. 그 역시 누군가를 위해 대리 복수를 하라는 것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조직은 이렇게 뉴올리언즈를 지배한다. 한순간 분노로 대리 복수에 고개를 끄덕였던 이들이 이제는 대리 복수의 볼모로 살인자가 되어 조직에 한 발씩을 담그게 된 것이다. 절망의 순간에 '세상에 정의는 어디에 있나'하며 터뜨렸던 분노가 정의를 더욱 먼 곳으로 보내버렸을 뿐이다. 정의를 원했지만 오히려 정의를 죽이는 꼴이 된 것이다. 정의란 사회적인 합의인 법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한다. 복수는 그저 복수일 따름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논리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복수가 정 의로 둔갑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인간애와 이성을 갖춘 인간이 추구하는 정의인 것이다. 영화는 선택의 순간에 자신의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함 으로써 인과되는 범죄의 악순환을 보여준다. <저스티스>는 이처럼 진지하고 묵직한 주제를 가지고 관객들의 보다 깊이 있는 고민을 의도하였으나 실상 영화는 그다지 짜임새 있게 잘 만 들어진 것 같지 않다. 영화가 의도했던 것에 비해 결말은 너무 평범하고 소박하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름 반전을 주 긴 했지만 치밀하지 못한 구성을 메우기에는 지극히 미약하다. 결국 <저스티스>는 골든 라즈베리상 3월 셋째주 최악의 영화에 선정되었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고군분투도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영화는 그저 고수익을 미끼로 대학생들을 꼬드기는 불법 다단계조직처럼 정의를 미끼로 불의를 퍼뜨리는 집단을 통해 진정한 정의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런데 이 모습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복수해줄게 부탁 들어줘'...수렁에 빠진 남자 130

131 영화 <저스티스>의 한 장면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베트남을 비롯하여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였지만 그들의 목적이 진정 말그대로 세계의 평화와 안녕과 정의구현이었던가. 세계 평화를 운운하며 이란의 핵을 문제 삼고 있지만 세계에서 핵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미국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니 진정한 세계평화를 위한다면 모여앉아 핵 안보를 논의할 일이 아니라 핵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서야 하지 않을까? 참혹한 후 쿠시마가 보내는 눈물의 메시지를 뒤로 한 채 아직도 원전 르네상스에 목매고 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핵의 정의( 正 義 )는 도대체 무엇이냐 고? <오마이뉴스> 게재 '복수해줄게 부탁 들어줘'...수렁에 빠진 남자 131

132 28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비결, 해파리에게 배워

133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비결, 해파리에게 배워 :53 [서평] 크리스 임피의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1971년에 태어나 만 40년과 10개월째를 살고 있는 내게 137억년이란 우주의 나이는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 시간이다. 내가 만약 운이 좋아 천수를 누린다면 아마 백수까지는 살 수 있으리라. 설령 그렇다 한들 어떻게 그것을 앞으로도 1조에 몇 승을 곱한 시간동안 존재할 우주의 시간에 비할 수 있을까? 그러니 어쩌면 채 백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세상의 끝을 이야기한다는 건 아이러니일 수도 있겠다. 공자는 '아직 삶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삶을 다 알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은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시작이 있었으니 분명 끝도 있을 것이고 그 끝이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 생명이 다하는 것처럼 우 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물론이려니와 우주도 끝을 맞으리라. 애리조나 대학교의 천문학과 교수이며 우주생물학을 연구하는 크리스 임피는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박병철 옮김, 시공사 펴냄)에서 언젠 가는 일어나게 될 지구와 은하와 우주를 포함한 모든 것의 끝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끝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끝으로 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그러기 위해 먼저 생명의 진화부터 이야기한다. 그가 펼쳐놓은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색에서부터 우주를 향한 과학적 성과와 우주론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의 내용은 실로 방대하다. 생물학과 물리학, 화학, 천문학은 물론 철학과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의 지식은 놀라울 따름이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이해하기 쉽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비결, 해파리에게 배워 133

134 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놓은 저자의 글 솜씨 또한 놀랍다.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일반적으로 생명체는 생로병사를 겪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모든 생명체가 그러할까? 북해에 사는 새 '리치 스페트럴'은 시간이 지나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말단 소체에 있다. 말단 소체란 염색체를 둘러싸고 있는 반복형 DNA 덩어리인데 일종의 '소모형 정보저 장소'로서 이것이 모두 소모되면 세포는 더 이상 분열할 수 없게 되어 죽는다. 그런데 리치 스페트럴은 나이를 먹을수록 말단 소체가 길어진 다는 것이다. 또 100살이 넘은 거북이의 간, 허파, 신장 등의 상태는 10살짜리 어린 거북이의 장기와 거의 같다고 한다. 거북이는 신진대사를 스스로 조절 할 수 있어서, 병에 걸리거나 상위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만 않으면 죽지 않는다고 한다. 볼락과 철갑상어, 바닷가재도 늙은 개체와 젊은 개 체의 차이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몸집이 크고 활동이 왕성해진다. 몸길이 6mm에 80~90개의 촉수와 붉은 내장을 갖고 있는 투명한 해파리 '투리톱시스 누트리쿨라'는 성적으로 성숙한 단계에 이르면 삶의 주 기를 거꾸로 역행하여 어린 개체로 되돌아가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이 과정은 무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 해 파리는 영원히 사는 셈이라는 것이다. 아직 과학자들은 노화를 초래하는 생물학적 과정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보듯이 노화가 모든 생명체에 나타나는 현상 도 아니며, 불가피한 현상도 아니라는 것이다. 노화가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 특성인지 아니면 잘못된 결함으로 나타난 결과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니 투리톱시스 누트리쿨라 해파리나 거북이, 볼락, 철갑상어, 바닷가재와 같은 생명체와 노화를 관장하는 유전자를 면밀히 분석하면 어쩌 면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영원히 사는 것은 좋은 것일까? 우주는 하나일까? 지금껏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공간은 우주이며, 우주는 유일하다고 생각되어왔다. 그런데 과연 우주가 정말로 하나밖에 없을까? 만약에 우 주가 하나가 아닌 여러 개 있다면 어떨까? 이연걸이 주연을 했던 영화 <더 원>(2001)에는 세상에는 125개의 우주가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 래서 우주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125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저 공상과학영화라고 생각했던 이 영화는 알고 보니 '다중우주론'이라는 우주물리학의 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 다중우 주는 끈 이론을 배경으로 한다. 우리는 현재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으로 이루어진 4차원의 시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끈 이론은 우주의 시공간이 11차원이라고 주장한다. 끈 이론은 엄청난 수의 우주를 예견하는데 그것이 '다중우주'이다. 다중우주에는 물리적 상태가 각기 다른 우주들이 엄청나게 많이 존재하는 데,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수많은 우주 중 하나이며, 우리는 우연히 생명체에 우호적인 우주에서 살게 된 것 뿐이라는 것이다. 놀랍지 않 은가?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은하수의 변방에서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존의 지구 중심적 우주관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것만큼이나 파격적이다. 그러나 당시에 아무도 믿지 않았던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듯 다중우주론 역시 당장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사실여부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좀 오랜 시간이 걸릴 뿐이다.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비결, 해파리에게 배워 134

135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리학 이론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으며, 이론이 예측한 모든 것을 검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충분한 관측과 충분한 예측 및 검증을 통해서 그 이론이 옳다는 심증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본문 359쪽) 그래서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내용이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결국에는 추론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밝히고 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 때 가장 큰 흥미를 느낀다고도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크기도 알지 못한다. 현재 관측 가능한 우주에만 500억 개의 은하가 존재한다고 하니, 그 무수한 은하 중 하나의 은하에, 또 그 은하속에 딸린 무수히 많은 별들 중 지구라는 조그만 별에 사는 인간의 눈으로 이 무한대의 우주 속에서 펼쳐지는 영 속의 시간에 대해 얘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저자 역시 '마술 같은 사건으로 가득 찬 우주에서 마지막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라는 말로 책을 끝맺는다. 우리 에게는 우주의 마지막보다 중요한 오늘의 할일들이 있으니 말이다. 과학서인데 책장을 덮을 때는 왠지 철학적 깨우침을 얻은 것 같은 이 책 은 그래서 흥미롭기 그지없다. 덧붙이는 글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박병철 옮김, 시공사 펴냄, , 18,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비결, 해파리에게 배워 135

136 29 농사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

137 농사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 :46 [서평] 톰 스탠디지의 <식량의 세계사> 2004년부터 시행된 주 5일제 근무. 일주일에 5일 일하고 이틀을 쉬는 이 제도의 시행에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했다. 그런데 만약 일주일에 이 틀 일하고 5일을 쉴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럼에도 먹고 사는 것에 걱정이 없다면 그야말로 즐겁지 않을까? 문제는 이틀 일하고 5일 쉴 수 있 는 이 흐뭇한 시스템을 아주 오래 전에 인류가 마다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노동시간당 식량 생산량으로 볼 때 수렵채집이 농사보다 효율이 훨씬 높았다고 한다. 더구나 1만 4000년 전 수렵채집민의 남성 평균 신장이 175센티미터, 여성 165센티미터로 인류가 이 고대 수렵채집민 정도의 신장을 회복한 것이 겨우 현대에 들어서였다고 하니 영양면에서도 월등 나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인류학자의 말처럼 정말로 '농사의 채택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였을까? <역사 한잔 하실까요?>, <19세기 인터넷 텔레그래 프 이야기>의 저자이자 <이코노미스트>의 편집자로 역사 교양서의 새로운 전범을 만들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톰 스탠디지. 그런 그가 식 량이 인류 역사의 변화과정을 주도해왔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중요한 순간마다 식량이라는 '보이지 않는 포크'가 인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것이다. 톰 스 탠디지의 <식량의 세계사>는 인간이 농작물을 발명했다는 도발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식량을 무기로 한 현대의 정치적, 이념적 문제까지 식량 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를 조망하고 있다. 옥수수, 쌀, 밀이 인간의 발명품이라고? 톰 스탠디지는 농민이 인간에게는 유용하지만 자연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 는 것들을 만들어냈다고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식물과 동물이 인간의 목적 에 알맞게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동식물은 인간의 창조물이었고, 새로운 형태의 식량을 생산하는데 사용되는 신중히 고안된 도구였다고 주장 한다. 옥수수는 인간이 일련의 무작위적인 유전적 변이를 일으킨 결과로 탄생했으 며, 한때는 보통의 풀이었지만 지금은 야생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기묘하고 도 거대한 돌연변이로 변하고 말았다. 옥수수는 멕시코 토착종인 테오신트라 는 야생초의 후손이다. 이 두 가지 식물은 전혀 다른 외관을 지니고 있지만,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변화하는 데는 그저 몇 번의 유전적 변이만으로 충분 했다. (본문 20쪽) 아스텍족에 의한 유전적 조작과정이 없었다면 옥수수를 기반으로 하는 아메 리카 대륙의 거대 문명은 결코 수립되지 않았을 거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농사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 137

138 또한 옥수수뿐 아니라 밀과 쌀 같은 곡물 역시 좀 더 편리하고 풍부한 식료 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바람직한 돌연변이를 확산시킨 인간의 선택 과정의 결 과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책 표지 c 웅진 지식하우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점차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창조물에 의존하게 되고, 그 창조물 역시 인간에게 의지하게 되면서 더욱 안정적이고 풍부한 식량 공급을 보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농사는 인류에게 새로운 생활 방식은 물론이고 이 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 기반을 제공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당근은 원래 주황색?...?...자연산은 없다 몸에 좋다고 아침마다 갈아먹는 당근 주스. 그런데 당근의 색깔은 처음부터 오렌지색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이것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것 이다. 당근은 본래 흰색 아니면 보라색인데, 단맛이 더 나도록 네덜란드의 원예학자들이 오라녜 공 빌렘 1세를 위해 오렌지색 당근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식량 가운데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산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거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부분의 식량은 선택적 품종 개량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옥수수, 소, 닭은 자연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으며, 인간의 간섭 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에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류에게 가치있어 보이는 식물과 동물은 대부분 초기 농민이 수천 년 전에 일찌감치 길들인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에 길들여진 식물과 동물을 자연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오해하고, 현대적인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한 개선 노력에 수많은 비판을 가하며 심 지어 공포를 드러내기까지 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앞서 보았듯이 유전공학은 무려 1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기술 분야에서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성과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 제초제에 저항력을 지닌 옥수수가 자연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옥수수라는 농작물 자체가 자연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는 것이다. 지역식품이 환경에 좋다는 착각은 버려 많은 사람들이 '지역 식품(로컬 푸드)'은 환경에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식량을 멀리까지 수송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때문에 기후 변화가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착각이다. 저자는 이러한 견해가 일면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고 말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지역 생산물이 다른 나라의 생산물보다 환경에 오히려 더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 소비자의 입장에서 영국에서 생산한 토마토와 에스파냐에서 수입한 토마토 중 어느 것을 사는 것이 더 환경에 좋다고 생각할까? 영국산이라고 생각하 겠지만 실은 아니다. 정답은 에스파냐산이다. 이유는 영국에서 토마토를 재배하려면 난방 장치가 된 온실이 있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이 에스파냐에서 토마토를 재배해 영국으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또한 운송의 방법에 따라서도 차이 가 난다. 1갤런의 연료로 식품 1톤을 수송할 때, 대형 선박의 경우에는 약 1300킬로미터를 운송할 수 있지만, 기차는 약 300킬로미터, 트럭은 약 100킬 농사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 138

139 로미터, 승용차는 약 30킬로미터를 운송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식품 무게를 기준으로 따져보면, 식품이 상점이나 시장까지 운반되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보다는 소비자가 상점이나 시장 까지 자동차를 운전해 오가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이 오히려 더 많은 셈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 식품이 곧 좋은 식품이라는 주 장은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라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식량은 무기다 1924년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거창한 목표의 산업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산업화 프로그램으로 인해 당시 주요 곡물수출 국이었던 소련은 반세기가 채 지나기 전에 세계 최대의 곡물수입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식량 부족이 결국 소련의 붕괴를 가 져왔다고 톰 스탠디지는 말한다. "어제는 식량 문제 때문에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회의가 열렸다. (...) 더 정확히 말해서 빵이었다. (...) 모스크바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서는 빵을 사기 위한 줄이 늘어섰다. (...) 우리는 해외에서 빵을 사오기 위한 현금과 차관을 찾기 위해 바닥까지 긁어보았다. 하지만 더 이 상 가치 있는 차관이 없었고 (...) " (본문 268쪽 - 고르바초프의 한 보좌관의 일기 중) 식량을 이용해서 사회주의의 이념적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했던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 역시 실패의 원인은 식량 때문이었다. 또한 짐바브웨 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는 식량을 무기로 선거를 조작하고 정권을 장악해 왔다. 톰 스탠디지는 전쟁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하고 효과적인 무 기는 검도 총도 원자폭탄도 아닌 바로 식량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굶주림은 전투보다 더 자주 군대를 물리치며, 배고픔은 검보다 더 잔인무도하다"라는 로마의 군사전략가 베게티우스의 말을 인용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최후의 순간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식량의 자급이다. 그런데 다음 달 3월 15일이면 우리의 식량주권을 미국에 내어 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다. 식량 자급률이 26.9%(그중 쌀을 제외할 경우 4.5%에 불과)로 세계 최하위권인 우리나라가 농사를 짓지 않고도 과연 국민의 생존권을 확보할 수 있을까? 선택재인 자동차를 팔기 위해 생존을 위한 필수재인 식량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농자천하지대본( 農 者 天 下 之 大 本 )'을 말씀 하던 조상들은 도대체 무어라 이야기할까?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드골은 식량을 자급할 때부터 진정한 독립이라고 했는데, 투기자본들이 점령하고 있는 국제 곡물시장에서 식량주권을 포기한 우리나라는 과연 독립국이라 할 수 있을까? 다가올 날들이 심히 걱정된다. 덧붙이는 글 <식량의 세계사>, 톰 스탠디지 지음, 박중서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12, 16,800원 <오마이 뉴스> 게재 농사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 139

140 30 제임스 본드와 국회의원, 사는 법은 똑같다.

141 제임스 본드와 국회의원, 사는 법은 똑같다 :47 [리뷰]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지금까지 영화 속 첩보원들은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본드('007' 시리즈)와 제이슨 본('본' 시리즈), 에단 헌트('미션 임파서 블' 시리즈)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화려한 액션과 잘생긴 얼굴, 뛰어난 두뇌로 보는 이들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첩보영화라 하면 대개 이런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나와 화려한 액션에 대박 재미를 안겨줄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그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 영화가 있다. 기발한 신제품이나 본드걸과의 달콤한 로맨스는 없더라도 적어도 화끈한 액션은 있을 줄 알았다. 제이슨 본 정도는 아니라도 근육 빵빵하고 싸움 잘하는 누군가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흔한 액션 장면도, 눈길을 확 사로잡는 장면도 없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게리 올드먼, 콜린 퍼스, 톰 하디, 베네딕트 컴버배치, 시아란 힌즈, 존 허트, 마크 스트롱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 출동한 영화 <팅커 테 일러 솔저 스파이> 이야기다. 지난 2월 9일 개봉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마치 '명품배우 종합선물세트'처럼 연기력으로 승부한다는 배우들만 모아놓았다. 도대체 어떤 영화기에 이 쟁쟁한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을까? 2008년 <렛미인>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이 연출한 <팅 제임스 본드와 국회의원, 사는 법은 똑같다. 141

142 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스파이 소설의 대가로 손꼽히는 존 르 카레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였다. 1970년대 말 영국 BBC에서 드라마 시리즈로 만들어 인기를 모았으며, 영국 정보부 내에서 활동한 소련의 이중간첩이라는 충격적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화려한 날들은 가고... 한때 모든 여인네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말, '내 안에 너 있다.' 그러나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정보기관에서 이 말은 바로 스파이, 첩자가 있다는 말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영화는 냉전시대를 지나 화해 분위기(데탕트)가 무르익던 1973년 영국의 비밀 정보 국(암호명 서커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커스 수뇌부에 침투한 소련의 이중스파이를 찾아내기 위해 서커스의 국장 컨트롤(존 허트 분)은 헝가리 작전을 지시하지만, 작전이 실패하 면서 사임하게 되고 컨트롤의 오른팔인 스마일리(게리 올드먼 분) 역시 함께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컨트롤은 지병으로 사망하고 정 부 당국에 의해 스마일리는 비밀리에 스파이를 찾는 임무를 맡게 된다. 영화는 스마일리의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복잡하게 오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른바 미 소를 중심으로 한 냉전이란 시대적 상 황은 정보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분명한 적이 있고, 그 적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한껏 드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마일리의 기억 속 화려하고 은성한 크리스마스 풍경은 그런 분위기를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화려했던 지난날은 갔다. 큰 존재감 없이 미 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 버린 1970년대 영국의 모 습은 우울하기만 하다. 서커스의 최고 수뇌부 회의 자리에서 로이(암호명 솔저, 시아란 힌즈 분)가 내뱉는 대사에는 자존감을 잃어가는 당시 영국의 우울하고 쓸쓸한 소회가 잘 드러나 있다. "지난 25년간 우린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고군분투 해왔어요. 우리는 25년간 제3차 대전을 막아온 유일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옛 영광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의 외침일 뿐이다. 정보국의 현실 역시 조국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데탕트가 가져온 미 소 간 의 화해 분위기는 미국의 CIA와 소련의 KGB 사이에 낀 그들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민은 날로 깊어지게 되었다. 제임스 본드와 국회의원, 사는 법은 똑같다. 142

143 스파이, 그 쓸쓸함에 대하여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무겁고 음울한 잿빛 분위기는 이런 시대상황을 잘 드러낸다. 따라서 '나만 잘 났다'를 외치며 온갖 화려한 액션과 기교 로 잔뜩 멋을 부리는 허세 가득한 제임스 본드는 이 영화에 없다. 지극히 현실적인 스파이만 있을 뿐이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철저히 혼 자인 존재로 유령처럼 존재하는 스파이. 스마일리는 그런 스파이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스마일리의 외모, 걸음걸이, 눈빛, 표정이 보여주는 쓸쓸함이 스파이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듯 하다. 평범한 듯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하는 서글픈 존재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짙은 뿔테 안경과 회색 코트 속에 가려진 스마일리는 너무 평범해 사람들 속에 있어도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것이 스파이다. 존재가 알려지는 순간 스파이로서의 가치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스파이는 쓸쓸하다. 같은 공간에서 웃고 떠들며 수십 년을 동료로 보낸 이들에게도 철저히 자신을 감추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도 조직의 일부라 눈치도 봐야 하고, 줄도 서야 한다. 인생의 절반은 줄서기다. 지하철을 탈 때, 엘리베이터를 탈 때, 심지어 화장실을 갈 때도 줄을 잘 서야 하니, 스파이라고 예외이기야 하겠는 가. 줄을 잘못 서서 망한 대표적인 사람이 토비(암호명 스파이, 다비드 덴시크 분)이다. 서커스의 국장인 컨트롤에 의해 발탁되었지만 토비는 컨트롤이 아닌 퍼시(암호명 팅커, 토비 존스 분)에게로 줄을 섰다. 비행장에서 스마일리는 토비에게 말한다. "자넨 줄을 잘못 섰어"라고. 그 모습에서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합종연횡하며 줄서기에 여념 없는 우리 정치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대의나 신념과 상관없는 줄서기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보인다. 영화는 마치 러시안 룰렛을 하듯 이 시종일관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네티즌 평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호불호가 분명한 영화다.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처럼 동적인 액션을 즐기는 이라 면 고개를 돌리겠지만, 분위기나 미세한 소리, 추리력 등을 통해 느껴지는 정적인 긴장감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충분히 이 영화의 매력에 제임스 본드와 국회의원, 사는 법은 똑같다. 143

144 빠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 정보국에 복귀한 스마일리가 수뇌부 6명이 회의하던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다. 그런데 카메라를 향해 보내는 그의 야릇한 미소 에서 왜 문득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가 생각나는 걸까? 영화는 끝났지만 스마일리의 그 미소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미묘한 파장을 남기며 뇌리에 남는다 <오마이뉴스> 게재 제임스 본드와 국회의원, 사는 법은 똑같다. 144

145 31 배 나온 아저씨와 스트립걸의 동거, 뻔하다고요?

146 배 나온 아저씨와 스트립걸의 동거, 뻔하다고요? :04 [리뷰] 제이크 스콧 감독의 <웰컴 투 마이 하트> 아내가 있는 중년의 배 나온 아저씨와 어리디 어린 십대 스트립걸이 동거를 시작했다.. ' 혹시 19금?' 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엉큼 을 지나 너무 음험하다. 물론 시절이 하수상하니 어찌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으나 상상은 거기까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파격적일 것 같은 이들의 동거는 그러나 의외의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영화 <웰컴 투 마이 하트>는 얼핏 보면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실은 따뜻하고 감동적인 인간애 가득한 드라 마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처로 인해 아픈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다. 계속 아플 뿐이다. 특히 마음의 상처는 가만히 앉아 시간만 간다고 해서 치유되지 않는다. 8년 전 사고로 딸을 잃은 더그와 로이스 부부 그리고 다섯 살 때 부모를 잃고 스트립쇼와 매춘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열여섯 살 말로리. 서로 만날 일조차 없을 것 같은 이들이 만나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진다.. <웰컴< 투 마이 하트>는 낯선 이들이 만나 가슴을 열고 소통하며 서로의 상실과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제26회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후보에 오르며,, LA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 밀라노 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 웰컴 투 마이 하트>는 <블레이드 러너>< ><글래디에이터> 등을 연출한 영국의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아들인 제이크 스콧 감독 작 배 나온 아저씨와 스트립걸의 동거, 뻔하다고요? 146

147 품이다. 이 영화를 통해 제이크 스콧 감독은 탄탄한 연출력을 선보이며 부전자전을 과시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트와일라잇>의 벨라와는 전혀 딴 판인 거칠고 도발적인 스트립걸 말로리로 파격을 시도했으며, 미드 <소프라노스>에서 토니 소프라노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던 연기파 배우 제임스 갠돌피니가 더그 역을 맡았다. 과연 이들은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세상과 마주하게 될 수 있을까? 난 아직 살아있다구... 천하의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처럼 꿈에서도 아니고,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자신의 무덤을 본다면 어떤 심정일까? 딸이 죽은 후 집안에서만 지내는 아내 로이스( 멜리사 레오 분) 와 소원한 더그( 제임스 갠돌피니 분) 는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만났던 비비안이 죽 자 그녀의 무덤을 찾는다. 허무한 눈빛으로 비비안의 묘지를 바라보다 근처에 있는 딸의 묘지로 발길을 돌린 더그는 깜짝 놀란다. 딸의 무덤 앞에 ' 라일리 부부의 묘' 가 있는 것이다. 묘비에는 ' 아빠 더글라스, 엄마 로이스' 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진 자신의 묘에 충격을 받은 더그는 집에 돌아와 로이스에게 소리친다.. ' 난 죽지 않았어. 난 아직 살아있다구' 그러나 이 말은 아내 로이스에게라기보다 마치 자신에게 소리치는 것처럼 들린다. 같은 아픔과 상처를 가졌으면서도 서로 보듬고 소통하지 못한 채,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고, 삶에 대한 의지도 애착도 없이 그저 숨만 쉬며 시간을 보내온 자신에 대한 책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흐르지 못하면 물이 썩듯이 사람도 소통하지 않으면 고인 물과 같이 된다. 같은 침대를 쓰면서도 등을 돌리고 눕는 더그와 마치 거실에 놓인 꽃병속의 꽃처럼 창문을 통해서만 밖을 보는 로이스. 이들의 삶은 말 그대로 죽은 삶이다. 그래서 ' 난 아직 살아있다 구' 하고 외치는 더그의 목소리가 더 애처롭고 절절하게 느껴진다. 난 당신들 딸이 아니야 건축박람회 참석차 뉴올리언스에 온 더그가 우연히 들어가게 된 스트립바에서 만난 말로리( 크리스틴 스튜어트 분). 마치 <정글북> 의 모글리처럼 사람의 교육을 받은 흔적이 없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거친 스트립 세계에서 몸을 통해 배운 것이 전부다. 더그는 그런 말로리가 측은하다. 그저 보살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한편 당분간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더그의 일방적인 전화 통보를 받은 로이스는 남편을 찾아 딸이 죽은 후 처음으로 집밖으로 나선다. 그러나 불안하던 그녀의 외출은 뜻밖에도 성공적이다. 늘 복용하던 우울증 약을 먹지 않아도 불안하거나 우울하지 않다. 오히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타인과의 소통이 주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기쁜 마음으로 남편과 해후하지만 남편의 곁엔 어린 스트립걸 말로리가 있다. 그러나 로이스는 남편을 두고 돌아올 수가 없다. 결 국 셋이 한 집에서 지내는 기괴한 동거가 시작된다. 딸을 잃은 부부와 부모를 잃은 소녀. 이들에게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할 수 있 을까 자못 궁금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할 리는 없다. 모글리가 인간세계로 들어왔을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감정이 말로리에게도 생기지 않을 까? 결국 말로리는 ' 난 당신들 딸이 아니야' 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말로리가 벗어놓은 굽 높은 스트립 구두에서 그녀가 돌아갈 곳이 과거의 세계는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배 나온 아저씨와 스트립걸의 동거, 뻔하다고요? 147

148 "We lc o me to the Rile ys " 집으로 돌아온 더그와 로이스의 삶은 이전과 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초겨울 을씨년스럽던 분위기는 사라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따뜻함이 집안을 감싼다. 정원의 쓰레기통을 옮기던 더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말로리다. 더그는 손가락으로 로이스에게 그게 말 로리의 전화임을 알린다. 말로리는 더그가 비비안에게 주려고 샀던 여행가방을 들고 터미널에 있다.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더그는 말한다. " 우리는 항상 여기 있어." 현관 앞에 그저 무심히 걸려있던 "We lc o me to the Rile ys "란" 팻말이 진정성있게 가슴에 와 닿는 순 간이다. 영화의 원제목이기도 한 "We lc o me to the Rile ys "가" 객석을 향해 웰컴을 외치고 있는 듯하다. 영화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이들이 서로를 기억하고 마음에 담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냐고 말하 는 듯하다. 오히려 그래서 가족이라는 뻔한 결말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한 방을 먹인다. 굳이 가족이라는 형태로 묶지 않아도 마 음에서 마음으로 흐르는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 소통하라." 자기만의 상처와 아픔에 빠져있지 말고, 소통하라는 것이다. 지난 4년간 우리 사회의 화두 역시 소통( ( 疏 通 ) 이었다. 대통령과 국민이, 선생님과 아이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소통하지 않았다. 소통하지 않는 사회, 그 결 과는 비참하리만치 참혹했다. 이제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진정으로 다가가 소통해야 하지 않을까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게재 배 나온 아저씨와 스트립걸의 동거, 뻔하다고요? 148

149 32 금, 많다고 좋다는 편견은 버려~

150 금, 많다고 좋다는 편견은 버려~ :58 [서평] 루안총샤오의 <금의 전쟁, 세계 경제는 왜 금을 원하는가?> 이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찬란히 빛나는 아침 햇빛'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Aurumdm. 인류 역사에서 이 황금만큼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은 금속이 있었을까? 모든 귀하고 좋은 것에는 황금이라는 말을 붙였다. 황금연휴, 황금비율, 황금들녘처럼. 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최고의 예우를 받은 황금은 부귀영화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우리네 풍습 중에는 아이가 태어나 돌이 되면 건강하게 자 라 부자가 되라는 의미로 금반지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 돌에 금반지를 선물하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다. 왜? 금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한국물가협회에 따르면 2012년 2월 1일 현재 서울 소매가 기준으로 금 한 돈의 가격이 27만2800원이라고 한다. 2001년 9 11 테러 이전 온스 당 300달러에 못 미치던 국제 금 가격은 이제 1750달러까지 치솟았다. 십년 전에 비해 무려 여섯 배 가까이 뛴 것이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니란다. 삼천 달러, 심지어 만 달러까지 오를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통상적으로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할 때, 통화가치가 요동칠 때, 특히 달러화 가치가 떨어질 때,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릴 때, 전쟁이 발 발할 때, 약탈이 횡행할 때 금값이 오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금 펀드에 돈이 몰리고 금 테크에 관심들이 많다. 그렇다면 금값을 이렇게 폭 등하게 만든 배경과 원인은 무엇이며 앞으로의 전망은 어떻게 될까? 중국의 경제 칼럼니스트이자 경영 컨설턴트인 루안총샤오는 <금의 전쟁, 세계 경제는 왜 금을 원하는가?>에서 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를 조망하고 있다. 국가경제에서 금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및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라 금을 중심으로 한 제도 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 왔는지를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하고 있다. 후춧가루 가격이 황금가격과 같다고? 금, 많다고 좋다는 편견은 버려~ 150

151 고대 이집트 투탕카멘의 황금가면에서 알 수 있듯이 장신구로서 부귀와 권위를 상징하던 황금은 무역의 발달과 더불어 화폐로 사용되기 시작 하였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세계 최초로 금화를 주조하였고 여기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오늘날 세계 각지의 화폐에 자민족의 '국부급' 인물을 새겨 넣는 풍습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돌고 돈다고 해서 돈이라 한 것처럼, 서양 사람들 역시 화폐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물처럼 흘러 다시 돌아오는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1400년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유럽인들은 중국이나 인도의 향료와 비단을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중국인이나 인도인은 유럽의 물건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서양의 금 은이 동양으로 들어가기만 할 뿐 나오지 않았고 따라서 유럽인들은 동양의 물건을 사오기 위해 더 많은 금과 은이 필 요했다. 금과 은이 부족해지자 여러 곳에서 다시 물물교환이 시작되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후춧가루의 가격이 같은 무게의 황금과 맞먹을 정 도였다고 한다. 결국 금 은 부족현상은 새로운 세계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고, 이것이 신대륙 정복으로 이어졌다. 애덤 스미스는 "탐험가와 정복자를 신대륙 으로 이끈 것은 바로 '종교화된 황금에 대한 갈망'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간 금과 은은 기존의 경제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과유불급, 금이 넘치니 독이 되네 유럽은 유입된 금 은으로 넘쳐났지만, 이렇게 넘쳐나는 금과 은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 다. 사람들은 금과 은이 안락한 생활을 보장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농업, 목축, 어업의 실제 생산량이 증가해야 부가 늘어 나는데 현실은 경제의 이런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무시한 것이다. 스페인은 아메리카로부터 들여 온 금과 은을 생산 자본을 확대하는 데 이용한 것이 아니라 주로 다른 나라의 상품을 소비하는데 이용했다. 이러한 행위는 오늘날의 미국과 매우 흡사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은 매년 무역적자를 기록하면서 중국과 다른 나라에서 생산한 완제품을 대량으로 수입해 소비한다는 것이다. 단지 스페인은 진짜 금과 은으로 소비했지만, 미국은 각종 금융파생상품에 힘입어 조폐기에서 마구 찍어내는 달러로 구매력을 늘리고 있는 것이다. 실물 경제가 죽어 있는데, 시중에 도는 돈이 많으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1세기도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스페인의 밀 가격은 3배가 올랐고, 화폐 구매력은 80%나 하락하면서 가격혁명이 일어났다. 가격혁명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지주와 노동자, 즉 봉건 지주와 농민의 지위는 하락하고, 자본가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상승했다. 또 한 농업의 형태 또한 변화했는데 과거의 생존형 농업이 전문화된 상업성 농업으로 변화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럽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달러는 그저 녹색 종이일 뿐 1971년 닉슨 대통령의 금 태환 정지 선언으로 금은 오랜 세월 누렸던 영광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처럼 달러가 이제는 금과 연계되지 않자 문제가 생겼다. 바로 미국 중앙은행이 자국 거시경제 상황에 따라 달러정책을 수립해 알게 모르게 달러 환율이 세계 무역과 투자에 막 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전 세계의 달러 공급량은 수십 배 증가하였고 평균 인플레이션 수준은 과거 인류가 겪었던 모든 인플레이션의 합을 능가하게 되었 다. 홍수처럼 불어난 달러 때문에 수시로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금융경제와 실물경제의 괴리가 심각해졌으며 이로써 인류의 진정한 경제성장 속도는 눈에 띄게 완만해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더구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따른 막대한 지출, 1980년대 이후 발행한 기한이 만료된 각종 국채, 점점 불어나는 이자 지출 등으로 인해 미국은 마치 카드 돌려막기 하듯이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해 기존의 국채를 대신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미국은 주식시장과 채권시 장을 구제하기 위해 결과는 고려하지 않고 금리를 6%에서 1%로 내렸다. 하락한 금리로 인해 달러의 신용대출이 폭증하고 달러가 전 세계적으로 범람하는 재난이 발생했다. 결국 그 재난은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터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마침내 사람들은 달러가 그저 녹색 무늬가 찍혀 있는 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 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다시 금으로? 달러화의 가치하락은 더 이상 특별한 예측이 아닌 매일 발생하는 누수와도 같은 현상이지만 일단 재방이 붕괴하면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외환보유액 중 일부를 금이나 은으로 전환해 위험을 대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금과 은이 부를 가장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노아의 방주라고 주장한다. 한 나라의 화폐를 세계화폐로 삼는 현행의 국제 화폐체계는 화폐의 남발을 가져오게 되며, 이것이 이번 금융위기 발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 이자 근 30년 동안 세계 금융위기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 제도적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한국은행도 뒤늦게 금 매입 금, 많다고 좋다는 편견은 버려~ 151

152 에 나섰다. 한국은행은 지난 6~7월 외환보유액으로 국제 금시장에서 금 25t을 사들였다고 한다. 1998년 4월 IMF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에서 모인 금반지 팔찌 등으로 3t을 사들인 이후 13년 3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금본위제가 국제통화질서에서 퇴출당한 지 40년이 지난 현재 금이 다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재기를 꿈꾸고 있는 셈이다. 세계 경제위기 상황에서 달러 혹은 유로화가 세계적인 지불수단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황금이 다시 한번 최후 중재자로서 제 역할 을 발휘할 것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주식도 불안하고 부동산도 걱정인데 경제의 흐름을 잘 못 읽겠다면 금을 통해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경 제현상을 진단한 이 책이 사뭇 유용할 듯하다. 덧붙이는 글 <금의 전쟁, 세계 경제는 왜 금을 원하는가?>, 루안총샤오 지음, 정영선 옮김, 평단 펴냄, 2012, 18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금, 많다고 좋다는 편견은 버려~ 152

153 33 진짜 테러범은 도대체 누구일까?

154 진짜 테러범은 도대체 누구일까? :47 [리뷰]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를 거쳐 미시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대학교수. 이 정도 이력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말하는 엄친아 중에 엄친아가 아닌가? 그렇게 똑똑하고 공부 잘한 엘리트의 인생이 어느 날 꼬이기 시작했다. 잘 나가던 대학교수에서 연일 신문과 뉴스의 일면을 장식하는 테러범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07년 1월 대학교수였던 한 남자가 석궁을 들고 판사의 집을 찾아가 테러한 사건이 벌어졌다. 사법부에서는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조사도 하기 전에 사법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엄중처벌을 주장했다. 뉴스를 통 해 이미 잘 알려진, 그러나 정작 사건의 본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이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정지영 감독의 <부러진 화살>이다. <남부군>(1990)과 <하얀전쟁>(1992)의 정지영 감독이 <까>(1998) 이후 13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 <부러진 화살>이다. 지난 18일 개봉 이후 일주일 만에 손익분기점인 50만 명을 훌쩍 지나 누적관객수 100만을 넘기며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짙은 사회성을 바탕으로 위트와 재미까지 더했으 니 흥행은 더 말해 무엇할까. 이른바 석궁 테러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가 교수지 위 확인 소송에서 잇따라 패소하자, 2007년 항소심 재판장이었던 박홍우 부장판 사(현 의정부지법원장)를 집 앞에서 석궁으로 쏜 혐의(살인미수)로 기소된 사건 이다. 재판의 공판내용을 중심으로 한 법정극인 영화는 지금 인터넷을 중심으로 팩트와 픽션 사이에서 논란이 뜨겁다. 그깟 원칙이 대체 뭐라고... 수학자라는 직업이 말해주듯 원칙이 무엇보다 중요한 김경호(김명호 역, 안성기 분) 교수는 그 원칙 때문에 꼴통으로 찍히고 범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5년 영화 <부러진 화살> 포스터. c 아우라픽처스 부러진 화살 대학교 본고사 수학문제의 오류 사실을 지적하면서부터 일은 시작된다. 문제 자체가 오류였기에 해당 문제를 모두 맞다고 하거나 아니면 아 예 채점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학은 학교의 명예를 운운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일을 덮었고, 대신 문제를 제기했던 김 교수는 해교 행위를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어제까지 동료였고 함께 술을 마셨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부딪치자 다 같이 협력하여 그를 꼴통으로 몰아붙였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원칙은 이렇게 무너져 내렸다. 진짜 테러범은 도대체 누구일까? 154

155 어느 광고는 남들이 모두 '예'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용기를 말하지만, 우리 사회가 어디 그런 용기를 용기로 인정해 주는 사 회였던가?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아닌 대학에서 그것도 교수들이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은 채 비겁하게 '자기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어'라고 비꼬며 동료를 왕따시키고 매장시킬 수 있는 사회가 여기 아닌가. 학교폭력과 집단 따돌림 같은 청소년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되어도 이렇다 할 해결책이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 아닌가. 어른들조차 원칙보 다 이해관계가 중요하고 정의보다는 야합이 우선이기에 청소년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명분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남들 다 어기는 그 깟 원칙이 뭐라고 김 교수는 자신이 그렇게 힘들게 쌓아 온 기득권을 버렸을까? 아름다운 법과 개판인 재판 영화 <부러진 화살>의 한 장면 c 아우리 픽쳐스 안성기 구치소에 갇힌 김 교수가 박준 변호사(박훈 역, 박원상 분)와 첫 대면한 자리에서 나눈 법에 대한 정의는 사뭇 감동적이다. 변호사는 "법은 쓰레기다"라고 소리치는데 정작 김 교수는 "법은 아름답다. 문제가 정확하면 답이 정확한 수학처럼 법은 정확하다"라고 말한다. 상식 없는 세 상에 원칙으로 맞선 수학자의 아름다운 이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실제 재판은 수학자의 법 개념처럼 아름답지 못했다. 법대로, 원칙대로만 해달라고 아무리 요청해도 칼자루를 쥔 판사들은 법대로 하 지 않았다. 결론을 이미 내놓고 요식행위로 하는 재판에서 결코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질 리 없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피해자의 증거조작 의 혹을 제기하며 조사를 요청하지만 판사들은 모두 이를 묵살하고 만다. 김 교수는 판사를 향해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며 분노를 표출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에는 전문가가 없으며 오직 사기꾼만이 전문 가'라고 일갈한다. 사법부가 스스로 법 정의를 무너뜨림으로써 함께 권위도 무너뜨린 것이다. 이것이 팩트이든 픽션이든 이런 문제제기가 된 것만으로도 우리나라 사법부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진짜 테러범은 도대체 누구일까? 155

156 그리고 이 영화의 문제제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사법부를 향해 날선 비판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우리나라 사법체계에 대한 국민 들의 불신을 반증하는 것 아닌가. '법 위에 사람 없고 법 아래 사람 없다'라는 법 정의는 이미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 계에 눌려 압사당한 개념이 아닌가 말이다. 누가 테러범인가 영화 <부러진 화살> c 아우라 픽처스 부러진 화살 따라서 팩트와 픽션을 따지기 이전에 법의 존재이유를 묻고 싶다. 법은 '수'( 水 ) '치'( ) '거'( 去 )의 3자가 합쳐진 것( 法 )이라고 한다. 여기 서 '수'는 공평함을, '치'는 정의실현을, '거'는 악을 제거하는, 응징적인 강제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법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정의를 실 현함에 있어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조율하려는 목적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가 그렇게 떠들던 '법치주의'와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는 권력의 최상부에서부터 지켜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지난 4년간 목도 해왔다. 권력지향적 정치검찰이 휘두른 칼에 전직 대통령은 벼랑에서 몸을 던져야 했지만, 살아 있는 권력의 비리와 부정에는 눈을 감아 버 리지 않았던가. 이것이 공평한 법치주의의 현실이었다. 재판 중인 사건의 당사자가 무기를 들고 판사를 찾아간 것은 물론 잘못이다. 하지만 문제는 '오죽하면 그랬겠냐'라는 피고의 입장에 대부분이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점이다. 원칙을 무시한 대학, 공평한 정의실현은 안중에 없이 일방적인 사법부, 그런 기득권층의 오만함을 인정하고 받 아준 이 사회, 진정한 테러범은 김경호 교수가 아니라 오히려 이들이 아닐까? 실화 사건이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억울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자면 정치권을 포함한 경찰, 검찰, 사법부 와 같이 법을 다루는 집단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크고 깊은 상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정되지 않는다면 외부의 힘을 통해서라도 개혁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깊은 영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오마이뉴스> 게재 진짜 테러범은 도대체 누구일까? 156

157 34 늘 불안한 당신......가끔 별을 보긴 해?

158 늘 불안한 당신......가끔 별을 보긴 해? :55 [서평] 알랭 드 보통의 <불안> 불안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친구 중 하나는 '인생의 절반은 불안이고, 나머지 절반은 근심'이라는 꽤나 그럴듯하면서도 서글픈 말 을 하였다. 어쩌면 인생은 불안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관속에 들어가는 날까지 불안을 친구삼아 가야하는 것은 아닐지, 불안하기 그 지없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아랍의 속담이라는 이 말은 독일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 제목이자 <자우림> 멤버 김윤아의 노래 제목 이기도 하다. 즉, 불안은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인간의 영혼을 갉아 먹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불안은 치명적이면서도 위험한 감정이다. 그 런데 불안이라는 이 감정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분석한 책이 있다. 바로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다. <책은 도끼다>에서 저자 박웅현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으면 덜 불안해진다고 이 책을 소개했다. 불 안을 해부한 이 책을 통해 자신이 하는 행동을 이해하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자신의 감정에 당황하지 않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 이라고 박웅현은 설명하였다. 알랭 드 보통에게 '90년대식 스탕달' 혹은 '닥터 러브'라는 별명을 갖게 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우리는 사랑일까><너를 사랑한다는 건 늘 불안한 당신...가끔 별을 보긴 해? 158

159 >, 이 사랑의 3부작이 일상적이지만 개인적이지 않은 보편적 방식으로 사랑을 분석한 것처럼, <불안> 역시 일상적이지만 개인적이지 않고 보 편적인 방식으로 불안을 분석하고 있다. <불안>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여러 종류의 불안 가운데서도 특히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불안을 집중 탐구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사 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결정되고, 또 그것이 자신의 자아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죄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불안할까?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 생기는 원인을 사랑결핍과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이라는 사회적 관계와 현상에서 찾고 있다. 그 중 능력주의가 왜 불안을 야기하는지 그의 견해를 보자.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법에서 능력주의 원리가 승리를 거두면서 비록 속도나 진지성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서양의 모든 정부가 평등한 기회 를 장려했고, 대표적인 것이 1870년 영국에서 시행한 경쟁시험을 통한 공무원 선발 제도의 도입이었다. 선진국에서는 멍청이를 능력 있는 사 람으로 대체하는 것이 고용 개혁의 주요한 목표가 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러자 능력과 세속적 지위 사이에 신뢰할 만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늘어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능력주의가 나 타나기 이전까지는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부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존중 받을 자격이 있으며, 세상의 지위 는 신이 보기에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고 부자는 파렴치하다고 인식되었으나 능력주의가 시대적 사명이 되면서 이러한 인식이 깨지기 시작 했다.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난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었지만, 능력주의 시대가 되면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왜 가난한지를 고민하며 거기에 답을 해야 하는 더 모질고 괴로운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적 능력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어떤 영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제 '불운하다'고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라고 묘사되었다. 따라 서 빈자들은 이제 부자들의 자선과 죄책감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자수성가한 강건한 개인들의 눈에는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자수성 가한 사람들은 자신의 저택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들이 떠나온 가난한 무리를 가엾게 여기는 척하며 악어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 다. (본문 109쪽) 즉,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되었다고 알랭 드 보통은 이야기한다. 학교건 직장이건 심지어 가 정에서마저도 능력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 오늘날에는 전통사회에서처럼 뿌린 대로 거두고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 여기며 사는 마음 편한 곳은 이제 없는 것이다. 능력주의와 더불어 불확실성 또한 현대 사회에서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성취하는 것보다도 태어날 때 얻는 신분이 중요했다. 즉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냐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지위는 세습적인 신분보다는 급속하게 움직이는 무자비한 경제 내에서 거두는 성과에 따라 달라졌다. 따라서 가변적인 조직 피라미드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끝없는 욕망이 불안을 낳게 되었다고 보통은 말한다. 알랭 드 보통은 한 마디로 '불안은 현대 야망의 하녀'라고 정의하고 있다. 돈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많은 나라가 부자 나라 그렇다면 불안은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을 달래는 해법으로 철학과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안을 들고 있다. 먼저 늘 불안한 당신...가끔 별을 보긴 해? 159

160 불안의 실체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예술과 예술작품을 통해 그러한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고 한다. 영국의 미술 평론가이가 사회사상가였던 러스킨의 삶에 대한 견해를 보자. 러스킨은 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적 관점을 버리고 "삶"에 기초 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러스킨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 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러스킨은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고 말하였다.(본문 250쪽) 즉, 돈이 없다고 인생이 불안하고 불행한 것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보고도 아무 느낌도, 감흥도 없는 것이 진짜 가난하고 불행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어버린,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가치를 잃어버린 이 사회에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랄프 왈도 에 머슨은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살고,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먹고, 쓰느냐 하는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념에 맞추다 보면 얼굴에 서서히 '우둔한 표정'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고귀한 사람은 "나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하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라는 금언에 따라야 한다고 하 였다. 에머슨과 같은 이러한 보헤미안적 삶의 태도 역시 사회적 관계 속에서 기인하는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불안>은 제목과 다르게 읽다 보면 마음에 공감과 위로를 주고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부추기는 나날이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사람들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불안에 잠식당하고 있다. 삶의 속도를 조금이 라도 늦추고 러스킨의 말처럼 밤하늘의 별 밑에서 경이감을 맛볼 수 있다면 인생이 지금처럼 불안하기만 하겠는가. '일상의 철학자'라는 표현 만큼이나 철학적이고 의미있는 알랭 드 보통의 글은 불안으로 가득 찬 삶에 쉼표가 되어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은행나무 펴냄, , 14,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늘 불안한 당신...가끔 별을 보긴 해? 160

161 35 가카, 사람 물로 보다가 큰코다쳐요

162 가카, 사람 물로 보다가 큰코다쳐요 :47 [서평] 김규종 교수의 <노자의 눈에 비친 공자> <뿌리깊은 나무>의 이도 식으로 표현하자면 '세상이 지랄'같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는 집권여당인 한나라당 의원의 비서가 선거관리위원회 의 누리집을 디도스(DDoS) 공격하고(문제를 처음 제기한 <나는 꼼수다>에서는 '디도스 공격은 들러리일 뿐이고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있 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당의 전당대회는 돈봉투로 오염됐으며, 가장 순수해야 할 학교에는 조폭 수준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삶은 또 얼마나 팍팍한가. 치솟는 물가와 전셋값은 살벌하기 그지없고, 88만 원 세대의 비애는 '거마 대학생'이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기업형 슈퍼마켓(SSM)으로 인해 살갑던 동네 가게들이 문 닫은 자리에는 애꿎은 전단만이 나뒹굴고 있다. 거리로 나서면 무질서가 횡행한다. 신호무시, 불법 유턴(U턴), 불법 좌회전은 예삿일이고, 차에 질세라 아무데서나 무단 횡단하는 사람들 과 아랑곳없이 거리에 침을 뱉고 쓰레기를 버리는 무개념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어디를 둘러봐도 무엇 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다. 보고 있노라면 멀미가 날 지경이다. 마치 '이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식이다.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어지럽고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이런 답답한 마음에 손에 잡은 책은 김규종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의 <노자의 눈에 비친 공자>(역락 펴냄)였다.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기를 살았던 공자와 노자라면 지금 시대와 다르다 해도 이런 총체적 난국에서 살아가는 데 대한 답을 주지 않을까 하 는 일말의 기대감이 일었다. 책을 덮고 난 후 마음이 한결 평온해졌다. 하지만 뭔가 세상에 대한 결의가 생긴다. 세상이 온통 어지럽다고 해 도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휘청거리지 않고, 똑바로 살아가리라는 결의. <노자의 눈에 비친 공자>는 오늘날 이 힘들고 팍팍한 세상에서 노자와 공자가 어떻게 수용되고 이해될 수 있는지를 깊이 있고, 폭넓은 시각 으로 바라보고 있다. 저자인 김규종 교수는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교수임에도 인문 고전에 대한 조예가 깊다. 그는 학문의 전당이 아닌 직업 학교화된 오늘날 대학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준비해야 할지를 다룬 <대학생으로 살아남기>를 비 가카, 사람 물로 보다가 큰코다쳐요 162

163 롯해, 영화와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 <문학교수, 영화 속으로 들어가다> <기생충이 없었으면 섹스도 없었다> 등을 집필하기도 했다. <노자의 눈에 비친 공자>는 일반인이 읽고 이해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렵고 버거운 <논어>와 <도덕경>이라는 고전을 인문학자인 저자의 방식대 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풍부한 독서를 통해 다져진 지식과 내공으로, 행간에 숨은 뜻은 물론 그것을 확장시켜 현실을 보는 눈을 가지게끔 하는 저자의 공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좋은 통치자와 나쁜 통치자 지난해, G20 홍보 포스터에 쥐그림을 그린 대학 강사에게 200만 원의 벌금형이 선고됐다. 저자와 사람들은 대부분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반응 이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했다고 해서 처벌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의 공안부가 수사 했다는 것 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노자는 도덕경 제17장에서 "태상( 太 上 ), 하지유지( 下 知 有 之 ). 기차( 其 次 ), 친이예지( 親 而 譽 之 ). 기차( 其 次 ), 외지( 畏 之 ). 기차( 其 次 ), 모지( 侮 之 ). 신부족언( 信 不 足 焉 ), 유불신언( 有 不 信 焉 ). 공성사수( 功 成 事 遂 ), 백성개위아자연( 百 姓 皆 謂 我 自 然 )"이라 해 지도자와 백성에 관한 혜안이 번 뜩이는 글을 남겼다. 최고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 알고, 그 다음은 친밀함을 느끼고 그 사람을 찬양하며, 그 다음은 두려워하고, 그 다음은 비 웃게 되는데 그것은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도 통치자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가장 좋은 통치는 백성들이 통치자의 존재에 관심을 갖지 않고도 충분히 잘 사는 것이다.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가 바로 그런 시대였 다. 그다음 단계는 백성들이 통치자를 좋아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이 압제와 억압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 는 것이고, 가장 나쁜 통치는 백성들이 통치자를 비웃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파렴치함과 부도덕, 허위의식과 부당성으로 무장한 지배자가 도덕성과 사회윤리, 사회정의를 요구한다면 국민들이 어떻 게 반응하겠는가. 코웃음을 치거나, 그자의 별명을 부르거나, 손사래를 치거나, 욕을 해대기 십상일 것."(본문 중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해 봐서 잘 안다는 '그분'이 입만 열면 부르짖는 '법치'와 '공정사회'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그러니 노자의 구분대로라면 쥐그림만 그려도 공안부가 수사에 나서는 지금 시대는 가장 하급 아니겠는가? ' 물' 을 물로 보지마 그렇다면 이렇게 어려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좋을까? 노자는 상선약수( 上 善 若 水 ), 즉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흔히 사람 을 얕보고 무시할 때 '나를 물로 보지마'라고 하기도 한다. 노자는 왜 하필 물을 주목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도덕경에 나오는 또 다른 말 인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하고 단단한 것을 이긴다'라는 '유약승강강( 柔 弱 勝 剛 强 )'을 들어 설명한다. 물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약한 존재지만, 물을 이겨낼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세상 만물을 포용하지만, 그런 까닭에 만물을 파괴 할 수 있는 것 또한 물이다. 낙수가 바위를 뚫고, 한 방울의 물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듯, 물은 가장 낮은 곳을 흐르면서도 가장 큰 힘을 가 지고 있다. 우리는 몇 번의 쓰나미를 보면서 물의 위력은 이미 확인하지 않았는가. 물은 장애물을 만나면 그것을 극복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며, 자신의 깊은 내면의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유유자 가카, 사람 물로 보다가 큰코다쳐요 163

164 적한다. 그러니 물처럼 부드럽고, 물처럼 강하게, '꼼수'를 부리지도 않고 참고 기다리며, 때가 오면 기회를 놓치지 않는 물의 본성을 따라가 는 삶은 어떤가?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쓴 독일의 희곡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만 배운다"라는 말을 했 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구한 말 조선은 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을 통해 이권을 하나씩 둘씩 넘겨주다 결국 주권까지 넘겨 준 역사가 있다. 조약을 이끈 자들이 그 대가로 호의호식할 동안 식민지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영화 <마이웨이>의 준식이나 종대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그때의 전철을 밟고 있지는 않은가? 사법부의 판사들조차 고개를 흔드는 한미FTA 불평등 조약이 국민들의 반대에도 집권여당의 날치기 처리로 통과되고, 현 정권은 마지막 잔치 를 위해 국민 모두의 재산인 철도 공항과 같은 공공재의 민영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브레히트의 말처럼 우리는 정말 역사 속에서 배운 것이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물이 돼야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그동안의 부드럽고 유약했던 물의 모습이 아니라 둑을 허물고 쏟아져 나오는 거친 쓰나미가 돼 국민을 기만하고 무시한 이들에게 준엄한 심판과 위력 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노자의 눈에 비친 공자> (김규종 씀 역락 원) <오마이뉴스> 게재 가카, 사람 물로 보다가 큰코다쳐요 164

165 36 옆 사람은 잘도 먹는 청양고추, 왜 나는 매울까?

166 옆 사람은 잘도 먹는 청양고추, 왜 나는 매울까? :40 [서평] 린다 시비텔로의 <음식에 담긴 문화 요리에 담긴 역사> 고급 이탈리아 음식점에서나 맛볼 수 있다는 '오소 부꼬'는 '구멍 뚫린 뼈'라는 뜻으로 송아지 정강이 부분으로 요리하는 밀라노 전통음식이 다. 더 상세히 말하자면 송아지 정강이뼈의 골수가 주된 재료로, 뼈 속을 채우는 부드러운 젤라틴질의 조직인 골수를 먹기 위한 요리이다. 우 리나라에서 사골을 푹 우려내서 먹는 것과도 일면 비슷하다. 그렇다면 동물의 골수를 먹는 식습관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고대의 생활 쓰레기를 연구한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초기 원시인의 식습관 이 오늘날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원시인들은 짐승의 뼈를 깨뜨려서 그 속에 든 골수를 파먹었는데, 그 이유가 고기가 없어서가 아 니라 오늘날 우리처럼 골수를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의 창자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기생충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원시인이나 현대인이나 그 오랜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비슷한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인 것이다. 재미난 일이다. 린다 시비텔로의 <음식에 담긴 문화 요리에 담긴 역사>는 이처럼 흥미롭고 유익한 정보와 지식으로 가득 찬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 류가 걸어온 역사와 우리의 식탁을 통시적이면서도 공시적인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음식이 복잡다단하게 뒤섞인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인류가 겪어온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묶어서 다양한 음식문화 와 전통들이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전해주고 있다. 이 책에 차려진 열 가지 코스를 다 돌고 나면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와 음식을 맛있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청양고추의 매운 맛을 좋아한다면 미맹 매운 음식에 약한 나는 음식점에서 어쩌다 잘못 청양고추를 입에 대기라도 하면 한 십분 동안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가슴에 통증과 함 께 어지럼증을 느끼고 심박수가 빨라지는 고통 속에서 헤매게 된다.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옆 자리에서는 더 매운 고추를 달라는 사람이 있 옆 사람은 잘도 먹는 청양고추, 왜 나는 매울까? 166

167 다. 어째서 이렇게 다를까? 무엇 때문에 내가 엄청 맵다고 느끼는 걸 다른 사람들은 별로 맵다고 느끼지 않는 걸까? 이유는 '미뢰'라고 하는 혀 의 세포에 있단다. 맛은 해부학적으로 구별될 수 있어서 과학자들은 미각이 있는 사람과 미각이 없는 사람으로 크게 나눈다. 당신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는 혀 에 얼마나 많은 미뢰( 味 蕾 )가 있는지에 달려있고 이는 유전적인 지배를 받는다. 미맹( 味 盲 )인 사람들은 미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숫자가 적 어서 감귤류나 브로콜리의 쓴맛을 강하게 인지하지 못하여 매운 고추를 먹으면서도 별로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미각을 가진 사람들은 미뢰 가 많아서 쓴맛과 단맛에 아주 예민하고 지방과 탄산 같은 감각에도 아주 예민하다. 그중에서도 아주 탁월한 미각을 가진 사람들의 혀는 미 뢰로 뒤덮여있고 극도로 예민하다. (본문 17~18쪽) 결국 혀의 세포가 너무 발달해 있어서 매운 맛을 잘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매운 맛은 잘 먹는 사람과 못 먹는 사람이 뚜렷하지만, 달콤한 것은 누구나 좋아한다. 특히 고대 그리스 음식은 달콤한 것이 많았고, 그리스인들은 달콤한 과일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부드럽고 달콤한 무화과가 왜 이를 상하게 만드는지'라고 기록할 정도로 그리스인들은 충치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중세 사람들은 충치로 이가 아플 때 설탕을 먹었다고 한다. 중세에는 약제사들이 설탕을 치통 치료제로 팔았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 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지만 이처럼 예전에는 오늘날의 상식과 다른 점들이 많았다. 문명의 이미지를 안고 있는 유럽에서 불과 이, 삼백 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마찬가지로 놀랄 일 아닌가. 태양왕이 손가락으로 식사를? 서양의 식탁에서 반드시 필요한 도구인 포크는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포크는 상류층에서만 사용하도록 엄격히 제 한되었고, 금이나 은 또는 크리스털로 세공된 포크도 있었다고 한다. 영국만 하더라도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까지도 포크는 사용되지 않았다. 엄청난 대식가로 소문난 태양왕 루이 14세도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이미 1세기 전에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카테리나에 의해 포크가 전해졌지만 여전히 손가락으로 식사를 했다는 것이다. 포크질이 서툴러서 음식을 잘 떨어뜨렸기 때문에 포크가 보급된 이후에도 오랜 동안 사람들은 여전히 손가락으로 음식을 먹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포크와 나이프로 우아하게 칼질하는 유럽인들의 식사법이 보편화된 것은 실상은 이백 년이 채 못 된 셈이다. 동양에서 젓가 락 사용이 보편화된 것이 중국 한나라 때라는 기록과 비교한다면 유럽에서 포크 사용이 일반화된 것은 동양보다 매우 늦은 최근의 일인 것이 다.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 외에도 이 책에는 주방장의 긴 모자에는 주름이 100개 있는데, 이것은 훌륭한 요리사라면 계란 요리법을 100개는 알고 있어야 함을 상징한다거나 아즈텍 제국에서는 카카오빈이 화폐의 역할을 했다는 것 같은 단편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콜럼버스에 의한 아메리카 정복이 그 지역의 식생과 자연환경, 식습관, 문화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사회 문화사적인 이야기 등이 세밀하게 기술되어 있다. <음식에 담긴 문화 요리에 담긴 역사>는 선사시대부터 인류 문명의 태동이 된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그리스, 로마, 그리고 이슬람 세계와 아메리카의 고대 제국들은 물론 중세,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저명한 요리사들은 물론 요리 레시피까지 아우르며 다문화적이고 다민족적 인, 또한 거시적이면서 미시적인 접근도 빼놓지 않았다. 음식과 함께 세계사 공부를 하고 싶다면 이 책은 아주 흥미롭고 유용할 듯하다. 옆 사람은 잘도 먹는 청양고추, 왜 나는 매울까? 167

168 덧붙이는 글 <음식에 담긴 문화 요리에 담긴 역사>, 린다 시비텔로 지음, 최정희 이영미 김소영 옮김, 대가 펴냄, 472쪽,2만2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옆 사람은 잘도 먹는 청양고추, 왜 나는 매울까? 168

169 37 <마이웨이>, 소재는 괜찮은데 스토리가 아쉽네

170 <마이웨이>, 소재는 괜찮은데 스토리가 아쉽네 :34 [영화리뷰] 전쟁의 비극 다룬 강제규 감독의 블록버스터 영화 <마이웨이> <마이웨이>, 소재는 괜찮은데 스토리가 아쉽네 170

171 내 꿈은 대구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 평양을 지나 만주,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의 끝자락인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까지 가보는 것이다. 조국 이 분단된 지금이야 언제 이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하 나로 연결된 세계를 만난다는 것이.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70년도 더 전인 일제강점기에 그 길을 간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상상 속에서처럼 행복한 여행길이 아니라 포 탄이 터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이었다. 조선, 몽골, 소련, 독일을 거쳐 프랑스의 노르망디까지 가는 동안 일본군에서 소련군으로, 그리고 또 독일군으로 군복을 세 번이나 바꿔 입으며 전장을 누벼야 했던 징그럽도록 비극적인 운명과 함께 말이다. 지난 12월 21일 개봉한 영화 <마이웨이>는 이처럼 전쟁의 비극을 극의 중심에 두고 있다. 흥행의 귀재라는 강제규 감독 작품이다.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하여 <쉬리>를 거쳐 천만 관객의 신화를 쓴 <태극기 휘날리며>를 연출한 강제규 감독이 7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 <마이웨이>를 들고 돌아왔다.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 던져진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 그리고 진한 인간애를 그리고 있는 <마이웨이>는 순수 제작비만 280억 원이 투입된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다. 그러나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는 대작임에 분명한데 흥행전선에는 빨간 불이 들어왔다. 13일 만에 400만 명을 돌 파한 <미션 임파서블4>와 <셜록홈즈: 그림자 게임>에 밀려 박스오피스 3위로 내려앉고 만 것이다. 결승선까지 아직 갈 길이 먼데 무엇이 <마이웨이>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마이 웨이>가 이대로 강제규 감독의 나만의 마이 웨이로 끝나고 말지, 뒷심을 발휘하여 기사회생할 수 있을지는 아직 두고 볼 일이겠지만, 이대로라면 손익 분기점이라는 천만까지는 힘들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던 민초의 삶 기록한 <마이웨이>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감동실화'라는 포스터 카피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미국 국립기록청(The National Archives)에 보존되어 있는 2차 세계대전 기록 중 노르망디에서 연합군 포로로 잡힌 독일 군복을 입은 동양인의 사진과 그에 대 한 짧은 기록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독일 군복을 입은 그는 조선인이었다. 무슨 사연으로 조선인이 독일 군복을 입고 노르망디에 있었는지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미군의 포로 조사 과정에서 찍힌 이 한 장의 사진이 소재가 되어 2005년 SBS에서는 <노르망디의 코리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고, 여기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가 조정래는 <사람의 탈>을, 이재익은 <아버지의 길>을, 김병인은 <디데이>이라는 소설을 쓴다. 그리고 <마이 웨 이>는 그 중 김병인의 <디데이>를 원작으로 제작되었다. 비록 낡은 사진이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이 주는 의미는 매우 크다. 공식적인 역사가 기억하지 않았던 일반 민중의 비극적 삶을 찾아내고 기억 하도록 만든 것이다. 흔히들 역사의 수레바퀴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기만 할 뿐 그 수레바퀴에 깔려 울부짖는 민중의 삶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기록이다. 그래서 기록하고 그 기록을 보존하는 것은 중요하다. 준식(장동건 분)이나 종대(김인권 분)를 비롯한 많은 조선의 민초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어느 날 전쟁 속으로 던져졌고, 또 그 속에서 무참히 죽어갔다. 역사의 희생양 이 되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던 이들의 삶을 다시 기억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가치가 있다. 공감과 감동의 부재로 이어진 스토리 부재는 아쉬워 <마이웨이>, 소재는 괜찮은데 스토리가 아쉽네 171

172 하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다. 영화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뿐이었다. 정작 영화는 다소 지 루하다. 너무 긴 전투장면들과 한국과 일본 최고의 미남배우라는 장동건과 오다기리 조의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이 오히려 영화를 보는 데는 방해가 됐다. 살이 터지고 피가 나고, 검뎅이가 묻어도 그들은 너무 잘 생겼다. 한 마디로 얼굴에 리얼리티가 없다. 어릴 적부터 달리기를 유난히 잘 하던 두 사람이 있었다. 경쟁심은 필수다. 식민지 시대에 지배민인 일본인과 피지배민인 조선인으로 만난 것부터 이들의 사이가 좋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러던 중 타츠오(오다기리 조 분) 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준식의 아버지는 맞아 서 초죽음이 된다. 더군다나 올림픽 출전권을 두고 열린 마라톤에서 승부조작으로 준식은 1등을 뺏기게 되고, 그로 인해 준식과 친구들은 군 대에 강제 징집당하게 된다. 드디어 두 사람이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전쟁에서 다시 만나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기며 별 다른 대립과정도 없이 지배와 피지배, 조국의 현실 등을 떠나서 가 슴벅찬 우정을 쌓게 된다. 이것이 스토리의 전부다. 영화의 지향점은 오로지 두 사람의 우정에 맞춰져 있다. 종래에는 한국과 일본이 과거의 해묵은 감정을 걷고 손을 맞잡고 가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만이 남는다. 두 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세 번에 걸친 그 참혹하고 잔인한 전투 장면들을 두 눈 질끈 감으면서 참으며 봐야 했던 이유가 결국 잘 생긴 두 사람의 화해와 우정의 과정을 보기 위해서였다는건 너무 식상하고 피상적이지 않은가. 다시 말해, <마이웨이>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의 백성이 남의 나라에 끌려가서 총알받이로 내몰려야 하는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이 없 다. 미국을 포함하여 일본이나 독일, 소련의 제국주의가 전쟁 속에서 인간을 어떻게 도구화하여 희생양으로 삼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다. 현실 속 모습은 영화적 이상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래서 오히려 관객들은 몰입되지 않는 두 사람의 우정보다는 종대에서 안똔으로, 그리고 죽어가는 순간에야 순박했던 종대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김인권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눈보라치는 혹한의 시베리아에서도 밤마다 수용소 안을 달리는, 마치 박제된 것 같은 준식의 변함 없이 성실하고 착한 성품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친구마저 배반하는 인간적인 종대가, 안똔이 더 가슴에 와닿는 것이다. <마이웨이>, 소재는 괜찮은데 스토리가 아쉽네 172

173 영화는 준식과 타츠오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 하나가 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한국과 일본이 서로에게 희망이 되기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해를 지날수록 더욱 교묘하고 집요해지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과 20년 동안 1002회 진행된 일본군 위 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사죄와 피해 배상을 촉구하는 수요집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일본의 모습은 이런 영화적 이상을 무색하게 만든다. 부디 새해에는 동북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다같이 노력하는 해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며 2011년을 보낸다 <오마이뉴스> 게재 <마이웨이>, 소재는 괜찮은데 스토리가 아쉽네 173

174 38 오렌지? 어륀지? 헤매지 말고 이 책 보세요

175 오렌지? 어륀지? 헤매지 말고 이 책 보세요 :03 [' 지못미' 올해의 책2]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이란 책에 허영심은 신이 인간에게 준 미덕이란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인지 알뜰하고 소박한 나에게도 허영심이 좀 있다. 남들 하나씩은 다 갖고 있다는 ' 똥' 가방이나 ' 넬' 가방을 향한 불타는 욕망은 아니다. 패셔니스트가 외모의 꾀죄 죄함을 못 참듯이 나는 내 머리 속의 꾀죄죄함을 못 참는다. 그래서 나의 허영심은 가방이 아니라 책방에서 본색을 드러낸다. 책방을 기웃거릴 때는 불타는 구매욕에 마구 사로잡힌다. 그 구매욕으로 찾 아낸 올해 나의 명품은 타밈 안사리가 쓴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란 책이다. 올 한 해 이슬람 세계는 그 어느 곳보다도 변화무쌍하고 격렬했다.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에서 촉발된 '아랍의 봄'은 30년이 넘도록 철권통치를 유지해온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리비아의 카다피를 비롯한 장기 독 재정권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아랍 여러 나라에 민주화 열풍을 일으켰다. 또한 9 11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알 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었고, 9년여를 끌어온 이라크 전쟁이 종전을 맞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 하면 테러를 먼저 떠올리고, 부르카나 히잡으로 상징되는 여성차별과 억압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진짜 그럴까? 내게 이슬람은 과격하고 호전적인 이미지보다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과 <천일야화>로 기억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 계인데, 왜 이슬람이 세계의 화약고로 동네북이 됐을까, 사뭇 궁금했다. 그때 마침 눈에 들어온 것이 제목부터 남다른 이 책, 바로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이다. 그동안 길들여졌던 서구의 시각에서 본 세계사 가 아니라, 이슬람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사라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슬람은 인류 문명을 이끌어 온 거대한 한 축임 오렌지? 어륀지? 헤매지 말고 이 책 보세요 175

176 에 틀림없다. 추천사를 보니 책에 대한 찬사 또한 대단하다. <식량 전쟁 : 배부른 제국과 굶주리는 세계>를 쓴 라즈 파텔이 이 책을 '이슬람공포증을 치료 하는 완벽한 해독제'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내 궁금증의 치료제도 될 수 있을 듯하다.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 누가 지어낸 말이야? 저자부터 살펴보자면 타밈 안사리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의 유서 깊은 이슬람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카불 대학교의 교수였고, 어머니는 아프가니스탄 남자와 결혼해 그곳에 정착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선은 지극히 중립적이다. 타밈이 들려주는 이슬람 초기의 이야기는 마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처럼 재미나고 구수하다. 그 러나 현대로 올수록 현 이슬람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치부까지도 드러내면서 편향되지 않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세계사를 통찰한다. 무 엇보다도 그 점이 매우 흥미롭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슬람은 전 세계 인구의 1/5이 넘는 13억 명의 신도를 가진 종교이다. 그야말로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종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슬람의 교세가 이처럼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른바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라는 이슬람의 강압적인 종교전파 방식 때문이었다고 학 교에서 배웠던 기억이 난다. 죽음과 믿음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이슬람은 결코 폭력적이지도,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이 슬람 제국은 정복한 지역에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큰 저항 없이 서로 공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용이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오히려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왜곡된 말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것은 십자군전쟁 패배 후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 기감을 조성하기 위해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말에서 유래한다. 그후 아퀴나스의 이 말은 마치 이슬람의 본질이 폭력에 기초한 것처 럼 왜곡되어 무비판적으로 우리에게 이식된 것이다. 그 결과 이슬람은 폭력적인 종교로 비춰졌으며, 급기야는 이러한 호전성이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과 분쟁, 폭력의 화근이 된다 는 식의 논리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서구문명의 우월성과 유럽중심주의를 강조하고 그들의 지배논리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어져 온 것이다. " 세상이 부패했지만 네가 변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믿음의 강요는 오히려 그리스도교에서 훨씬 심했다. 아메리카를 정복한 유럽인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라. 길을 가다보면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를 외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올해 초에는 조계사 경내에서 예수를 믿으라며 소란을 피웠던 목사와 신도들도 있었다. 타 종교에 대한 배려와 관용을 떠나서 나는 진짜로 궁금하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인지. 그런데 만약 그렇게 해서 갈 수 있는 천국이라면 난 전혀 가고 싶지 않다. 거기서 "서울시를 봉헌하겠다"던 분을 다시 만난다면 이미 그곳은 천국이 아닐 테니까. 많은 종교가 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부패했지만 너는 탈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슬람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부 패했지만 네가 변화시킬 수 있다." (본문 105쪽) 오렌지? 어륀지? 헤매지 말고 이 책 보세요 176

177 탈출과 변화,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쪽이 더 매력적이다. 혼자 탈출해서 잘 살라고 유혹하는 것보다 고생되더라도 함께 노력해서 변화시키자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고 도덕적이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가 잘 몰랐던 이슬람의 공 동체 의식이다. 서구 시각으로 이슬람 세계를 재단하지 말라 9 11 직후 부시는 테러리스트들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며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고 그 후에는 대량살상무기를 핑계삼아 이 라크를 사담 후세인의 독재로부터 민주화시키겠다고 전쟁을 일으켰다. 오사마 빈 라덴과 사담 후세인은 죽었고 전쟁은 끝났지만 상황은 달라 진 게 없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저자는 서구의 시각으로 이슬람의 세계를 재단하지 말 것을 얘기한다. 공동체 중심의 삶을 살아온 무슬림에게 개인주의적 자유와 민주주의는 전통과 문화를 어지럽히는 이질적인 제도일 뿐이며, 무슬림이 혁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상적인 이슬람 공 동체라는 것이다. 서구 중심의 세계사를 기준으로 삼아온 우리에게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볼 것을 이야기한다. 엄이도종( 掩 耳 盜 鐘,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 식으로 미국을 향해서만 모든 촉을 열고 있는 이 나라 위정자들에게 이 책은 마치 '오렌지'와 '어륀지' 사이에 서 헤매지 말고 '한국인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그려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두껍긴 해도 상당히 재미있고 진도도 잘 나가는 이 책, 지난했던 한 해의 마지막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은 이들에게 적극 강추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타밈 안사리 씀, 류한원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2011년 8월, 607쪽, 2만8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오렌지? 어륀지? 헤매지 말고 이 책 보세요 177

178 39 부드럽고 아름다운 몰락을 위하여

179 부드럽고 아름다운 몰락을 위하여 :10 [서평] 요시다 타로의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에너지 사용량이 급증하자 정부가 전기와 가스, 석유 등 에너지 자원 수급 현황을 수시로 챙기는 태스크포스(TF)팀을 가 동했다. 지난 9월 15일 발생한 대규모 정전사태로 거리의 교통신호등이 꺼지고, 은행의 ATM 기기가 정지되며, 병원에서는 수술도중 멈추어 야 하는 등 나라 전체가 일대 혼란을 겪었다. 물질문명이 가져다 준 편리함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갑작스런 정전은 재앙과도 같았다. 생활의 많은 부분을, 아니 거의 대부분을 화석연 료로부터 얻는 에너지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특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석유,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는 화수분이 아니다. 언 젠가는 고갈될 것이고 그 시점은 점점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자나 깨나 '성장'을 외치며 산업화를 추진한 오늘날 인류의 모습은 마치 그리스 신화의 에뤼시크톤을 떠올리게 한다. 먹어도 먹어도 밀려드는 허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의 몸마저 뜯어먹어야 했던 신화 속 인물. 자신의 몸과 같은 지구를 파먹고 사는 인류의 모습은 현대의 에뤼시크톤 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비참한 파경을 피할 수 있을까?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의 저자 요시다 타로는 쿠바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의 저자이기도 한 요시다 타로는 일본의 대표적인 생태농업 운동가이자 쿠바 전문가이다. 저자는 부디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반성장' 혹은 '몰 락'만이 물질에 의존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부드러운 몰락을 위하여 옥스퍼드 대학의 요르크 프리드리히스 교수는 '현재의 공업사회가 무너지고, 자유무역이 붕괴하는 것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피해를 최소 화하여 부드럽게 몰락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쿠바가 바로 '부드러운 몰락'에 성공한 '몰락 선진국'이라고 이야기한다. 쿠바가 이렇게 몰락에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인 연대와 전통적인 지식의 부활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쿠바는 미국 의 경제봉쇄와 소련권 붕괴로 인한 석유 공급 중단의 위기를 겪었으나, 저성장 순환형 사회로 방향을 튼 이후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이 꼽은 지구상에서 지속가능한 개발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해온 일본의 대표적 강성 우파였던 나카타니 이와오가 참회의 글로 쓴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에서 이상적 모델로 든 나라 역시 쿠바였다. 쿠바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사람들이 존엄을 가지고 살 수 있는 나라의 모범을 보이며 다른 여러 나라 들에게 하나의 힌트가 되고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쿠바의 교훈은 세계적으로 중요하다. 생태학적으로 본다면 지구는 경제봉쇄에 처한 쿠바보다도 닫힌 체계(closed system)이다. 이용 가능 한 에너지도 한정되어 물질자원은 유한하다. 에너지와 물질자원의 한계에 직면한 때에 쿠바는 기초적인 사회복지를 무시하지 않고 지속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대담한 정책을 선택했다. 우리는 앞으로 쿠바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본문 36쪽) 부드럽고 아름다운 몰락을 위하여 179

180 포스트 석유시대에 대처하는 방법 프랑스의 정치경제학자 세르주 라투슈는 '경제 성장을 이루며 에너지를 펑펑 쓰며 살아도 더 이상 사람들은 행복해지지 않는다. 더 검소한 생활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쿠바는 1997년 창설된 교육부의 '에너지 절약 프로그램'으로 학교의 거의 모든 수 업에서 에너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지리과목에서는 다양한 재생가능 에너지원과 장래 그것을 적용하는 법을 배우고, 생물과목에서는 발전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배운다. 사회 과목에서는 우리가 어떤 재생가능 에너지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신문이나 잡지로 조사하고, 클럽활동에서도 에너지와 환경문제에 관한 의식 부여가 이루어진다. 마치 세뇌하듯 에너지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70칼로리의 옥수수통조림 1개를 생산하는데 2,790칼로리의 에너지가 소비된다고 한다. 옥수수는 더 이상 태양이 기르는 것이 아니라 석유가 기르는 것이 되었다. 영속농업 또는 지속농업이라 불리는 쿠바의 퍼머컬쳐(permanent와 agriculture의 합성어)는 도시 내 가정의 옥상이나 베란다 등 좁은 공간을 이용해 식량을 생산하는 새로운 농법으로 단순한 유기농업을 넘어 지속가능한 사회 체제를 지향한다. 석유와 농약에 의존하던 농업이 전체의 70%를 차지하고, 화학비료의 95%를 수입에 의존하던 쿠바는 소련권이 붕괴하자 농업생산이 60%이하 로 급락하게 된다. 이 위기의 순간에 유기농업으로 전환을 꾀하면서 쿠바는 바이오농약, 지렁이 퇴비, 우경 등의 독특한 농법을 사용하게 된 다. 그리고 고육책으로 시작하게 된 농민이 스스로 품종 개량에 참여하는 농민 참여형 종자개량 프로그램이 성공한다. 투입되는 농약과 화학비 료, 연료를 생각하면 저투입형 농법에 적합하도록 개량된 품종이 생산 효율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쿠바는 에너지 절약 과 환경보호는 물론 멸종으로부터 생물다양성을 지켜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강력한 허리케인에도 무너지지 않는 나라 2005년 미국은 루이지애나 일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1천800여명이 숨지고, 1천800억 달러 이상의 재산 피해를 입는 사상 최 악의 비극을 겪었다. 세계 제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피해규모가 크고 상황이 처참했다. 당시 뉴올리언스의 시장이었던 레이 내긴은 <카트리나의 비밀(Katrina's secrets;storms after storm>이란 책에서 '카트리나가 닥쳤을 당 시 우리 이웃들은 이웃간 정이나 친절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문제들도 많았지만 이런 점들도 카트리나를 아주 견디기 어려운 경험으로 만들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지구온난화로 허리케인 발생이 늘어나고 위력도 점점 강력해지고 있다. 산이 무너지고, 집이 부서지며, 거리는 잠기고, 전염병이 만연하는 등 허리케인으로 인한 피해 역시 커지고 있다. 하지만 유엔도 인정하는 방재 선진국인 쿠바는 카리브해에 위치해 허리케인의 타격을 많이 받으 면서도, 사상자가 거의 나오지 않을뿐더러 피해 지역 복구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 이것은 사회적 격차를 줄여야 피해도 줄일 수 있다는 쿠바의 방재 체계 덕분이라고 한다. 카트리나보다 더 강력한 허리케인의 내습을 몇 번 씩 받으면서도 미국과 달리 사상자가 거의 전무에 가까웠던 이유는 주민의 자발적인 대피와 그것을 지원하는 정부의 방재 체계 그리고 사회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서로 돕는 연대의식의 힘에 있다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쿠바는 최저 9년간의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18~25세의 젊은이 절반이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하지만 교육비는 대학원까지 무료이다. '반값 등록금' 실현을 위해 오늘도 대학생들이 거리에서 투쟁하고 있는 한국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또한 100개국 이상의 가난한 개발도상국도 지원하고 있다. 선진국들도 이 지원 프로젝트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몰락을 위하여 180

181 분명히 쿠바는 경제적으로는 미국이나 일본, 한국을 따라올 수 없다. 하지만 1990년대의 심각한 경제위기도 연대의 정신으로 극복하고, 재정 위기 가운데서도 중단 없는 사회복지제도를 유지해 온 쿠바는 평등과 연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중시로 몰락선진국으로서 건투하고 있다. 이것이 쿠바의 힘이고 일본이 닮고자 하는 쿠바의 모습이라고 한다. 저자는 서구사회 번영의 쇼윈도 역할을 끝낸 일본은 이제 쇠퇴해가지 않 을 수 없다고 진단한다. 피크오일이라고 하는 환경 제약을 생각하면 점점 몰락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날개 없이 수직하강하며 추락하느냐, 천천히 연착륙해서 부드럽게 몰락하느냐의 문제에서 쿠바는 몰락선진국으로서 훌륭한 모범사례가 되고 있다 <오마이뉴스> 게재 덧붙이는 글 요시다 타로 지음/ 송제훈 옮김/ 서해문집 펴냄/ 15,000원 부드럽고 아름다운 몰락을 위하여 181

182 40 정의사회 구현? 너나 잘 하세요~

183 정의사회 구현? 너나 잘 하세요~ :00 [리뷰] 진가신 감독의 <무협>... '무를 버린 은둔고수' vs. '그를 쫓는 CSI' 여자들이 신데렐라 류의 로맨스에 빠질 때, 남자들은 식스팩을 자랑하며 쌍절곤을 휘두르는 무협 이야기에 빠진다. 목욕탕에서 등에 문신 새 긴 사람만 봐도 슬금슬금 피해야 하는 현실과는 달리 무림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감정이 이입된 아바타가 대나무 사이를 날아다니고 몸무게 세 배쯤 더 나가 보이는 거구도 쉽게 쓰러뜨리기 때문이다. 무림의 세계에는 항상 정의와 불의가 공존한다. 주인공은 의롭지만 외롭고 고독하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무술은 최고지만 불의의 화신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끝끝내 불의의 화신을 무너뜨리고 무림을 평정한다(아~ 이 단순한 권선징악의 구조에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빠졌던가). 그런데 이번 무협은 새롭다. 기존 무협의 구조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던지 철학과 과학을 보탰다. 우연과 운명, 업과 같은 불가의 연기설 도 깔고, 1980년대 파출소 문 앞에서 고생 많았던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법 정신도 넣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은 더 있어 보인다. <금지옥엽>(1994), <첨밀밀>(1996), <퍼햅스 러브>(2005) 등 로맨스 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진가신 감독의 영화 <무협> 이야기다. 지난 11월 17 일 개봉한 <무협>은 '무( 武 )를 버린 은둔고수' 대 '그를 쫓는 과학수사관'이라는 타이틀로 흥미를 북돋운다. 무협 이야기에 과학수사관이라, 뭔가 색다르다. 그런데 그 색다름이 관객을 불러들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제는 중국 액션 영화의 대명사가 된 견자단을 비롯해서 금성무, 탕웨이 등의 화 려한 출연진과 남자들이 환장하는 '무협'이라는 소재에도 영화관에 사람이 없다. 나름 색다르고 재미도 있는 이 영화, 무엇이 문제일까?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너나 잘 하세요 1917년 중국 운남성의 류씨 집성 마을에 강도가 나타났다. 마을의 제지공인 어수룩한 류진시(견자단)가 우연히 흉악한 강도를 한 명도 아니 고 둘씩이나 맨손으로 잡는다. 마을사람들은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라고 말한다. 강도들은 죽고 그는 일약 마을을 구한 영웅으로 등극하지만 사건을 수사하던 바이쥬(금성무)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사람들의 만류와 눈총에도 바이쥬는 법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일념으로 류진시의 뒤를 캐기 시작한다. 그리고 CSI(과학수사대)를 뺨치는 과학 적 논리로 류진시가 어수룩함으로 위장한 절대무공의 고수임을 확신한다. 평범한 촌부로 살고 싶어 이름도, 고향도, 부모도 버린 류진시의 무( 武 )와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기에 정체를 밝혀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는 바이쥬의 협( 俠 )은 그렇게 충돌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고민에 빠진다.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국 최초의 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1900년대 초반의 중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방군벌의 난립으로 극도의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는,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경찰도 판사도 모두 돈 있고 힘 있는 자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정의사회 구현? 너나 잘 하세요~ 183

184 바이쥬마저도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법과 정의에 대해 회의하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류진시가 바이쥬를 끝까지 믿어 준 반면, 바이 쥬는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류진시의 믿음을 저버린다. 협( 俠 )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로 인해 마을은 피할 수 없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정의를 위해 필요했던 법이 오히려 정의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판매 부수 백만 부를 훌쩍 넘기며 밀리언셀러 반열에 오른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 사회를 강타했다. 부패하고 불공정한 정 권이 공정사회를 부르짖고, 친재벌 부자 권력자가 친서민을 외치는 어이없는 현실이 국민들로 하여금 정의에 열광하게 한 것이다. 작은 약속, 작은 믿음조차 쉽게 내버리는 이들이 대의와 정의를 떠벌리는 행태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다. '너나 잘 하세요' 소수민족 외면하는 불편한 중국의 민족융화론 중국에는 공식적으로만 55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그러나 실제는 통계에 잡히지 않은 더 많은 소수민족들이 존재한다. 11세기에서 13세기 송, 요, 금과 함께 위세를 떨쳤던 '서하'라는 나라로 기억되는 탕구트족은 칭기즈칸의 몽고족에 의해 철저히 학살당했다. <무협>에서 악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72파'가 바로 이 탕구트족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가슴에 품고 자신들의 피와 풍습 을 지키며 살아온 것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류씨 마을에서 정체를 숨기고 십 년을 살아온 류진시는 '72파'의 2인자로 살인을 일삼았던 탕롱이 란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부모도, 형제도, 이름도 버렸다. 어두웠던 과거를 잊고, 선하고 사람답게 아내(탕웨이)와 두 아들과 그저 농사짓고 종이 만드는 일을 하며 평범하게 살고자 한다. 그의 의지는 완강하다. 과거와의 절연을 위해 스스로 팔까지 잘랐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부모 마저도 칼로 대적해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진시를 보는 것이 왠지 불편하다. 그것은 마치 영화가 탕구트족과 같은 소 수민족을 악의 화신으로 묘사하면서 소수민족들이 스스로의 민족 정체성을 버리고, 한족과의 융합을 통해 선한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얘 기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의 철권통치에 항의해 티베트 독립과 종교자유를 외치며 분신한 티베트 승려들이 지난 3월부터 지금까지 최소 11명, 그 중 6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청나라 때 중국의 통치하에 들어간 위구르 역시 2009년 7월 수도 우루무치에서 일어난 대규모 항쟁을 비롯하여 끊임 없이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영화는 이런 소수민족의 문제는 슬그머니 덮고 중국 중심, 한족 중심의 융화만을 강조하는 듯보인다. 가족과 마을의 평화라는 그럴듯한 명분 을 내세워 류진시로 하여금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고 부모마저도 칼로 대립하게 하는 이 영화의 근저에 깔린 중화중심주의를 단순한 권선징악 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카메라가 지나는 곳곳마다 액자 속 그림처럼 아름다운 운남성의 풍광도, 뛰어난 연기력을 자랑하는 멋진 출연진도, 결국 영화의 본질을 넘어 설 수는 없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중국이 집안 단속에 나서는 듯한 인상을 이 영화에서 받았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오마이뉴스> 게재 정의사회 구현? 너나 잘 하세요~ 184

185 41 일이 즐겁다는 직딩은 왜 하나도 없을까?

186 일이 즐겁다는 직딩은 왜 하나도 없을까? :12 [서평] 에르스트 프리드리히의 <굿 워크>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본문 19쪽) 알베르 카뮈의 이 말이 나를 사로잡았다. 노동을 하는데 영혼이 있어야 한다는 이 멋진 말에서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1936)가 떠올랐다. <모던 타임즈>는 1930년대 산업사회 속에서 기계화되어 가는 인간과 물질문명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코미디로 묘사된 영화다. 영화 속에서 찰리 채플린은 하루 종일 컨베이어 벨트라인에 서서 지극히 단순한 나사 조이는 일을 한다. 거기에는 인간적이거나 창조적인 일 체의 행위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기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하게 움직이면 된다. 결국 찰리는 카뮈의 말처럼 '영혼 없는 노동'으로 인 해 강박증에 사로잡히게 되고 정신병원에까지 간다. 이른바 포드주의로 상징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인간은 <모던 타임즈>에 표현된 것처럼 오로지 생산성과 능률성 향상이라는 목표를 위해 공 장에 돌아가는 기계의 부품처럼 취급되어왔다. 개성은 무시되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이 개발하고 발전시킨 기계에 인간이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굿 워크>의 저자 E. F. 슈마허가 천착한 문제는 이처럼 '무한한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현대 산업주의 체제 하에서 행해지는 비인간적인 노동, 파괴되는 자연과 자원고갈, 기계에의 종속과 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라는 것이었다. 일이 즐겁다는 직딩은 왜 하나도 없을까? 186

187 스물 두 살의 나이에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가 된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실천적 사상가였던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문장을 통해 현대의 기술과 물질주의에 근원적 회의감을 던지며, 인류문명에게 '생각의 대전환'을 촉구했다. <굿 워크>는 슈마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1977년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펼친 강연내용을 묶은 책이다. 여기에는 현대 기술문명과 산업사 회를 비판하며 좋은 노동과 좋은 교육에 천착했던 슈마허의 사상적 성찰과 이를 위한 실천적 탐구가 담겨 있다. 풍선은 계속 커질까? 자연에서는 세포 하나가 계속해서 커지지 않습니다. 성장의 필요성이 생기면 분열하여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냅니다. (본문 134쪽) 그러나 인간사회는 예외다.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무한성장에 대한 안타까울 정도의 간절한 희구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조 그맣던 풍선이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좋아서 바람을 계속 불어 넣는다고 풍선이 무한히 커지지는 않는다. 결국은 더 커지는 것 이 아니라 터지고 만다. 풍선과 마찬가지로 슈마허는 현대 산업사회가 끝없는 성장을 목표로 추구하기에 파국이 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기술을 바탕으로 한 산업사회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 때문이다. 슈마허는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네 가지로 지적하는데, 그것 은 모든 것이 점점 더 커지고, 더 복잡해지며, 더 자본집약적이고, 더 폭력적이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규모의 경제학이 모든 것에서 '더 크게'를 외치고 있다. 동네 구멍가게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 수퍼마켓에 밀려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다. 심지어 두부, 콩나물마저도 대기업이 판다. '크게 더 크게'를 지향하면서 정작 근로자 개인은 더욱 더 작아지는 추세이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대기업의 부당한 노동처우에도 찍소리 못 하고, 비정규 시간제 일자리라도 군소리 없이 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칼바람 맞으며 거리를 헤매야 할 테니까. 2년 전 구조조정으로 2009년 4월부터 현재까지 총 18명의 쌍용차 해직근로자와 그 가족이 스트레스성 질환과 자살로 사망했다. 노동자를, 국 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자 현대 산업사회가 낳은 비극이다. 나를 찾아가는 좋은 노동은 어디에... 실업은 늘고 있는데, 실업자들은 자동으로 고도의 자본집약적 일자리로 흡수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언제까지 '고도 Godot'를 기다릴 수 없으며, '고도'는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부의 조치만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두 발로 일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야 합니다." (본문 109~110쪽) 슈마허는 현대 과학기술은 너무나 복잡하고, 자본집약적이며, 규모가 거대해서 약자들에게 삶의 지혜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약자들의 삶을 파 괴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현대 문명이 낳은 이 중대한 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슈마허는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또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이들과 협력하기 위해 인간은 노동을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젊은이들에게 먼저 좋은 노동과 나쁜 노동을 구별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들에게 나쁜 노동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을 기계나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지겹고, 무의미하며, 신경만 괴롭히는 멍청한 일을 젊은이들이 거부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는 것이다. 일이 즐겁다는 직딩은 왜 하나도 없을까? 187

188 그래서 노동이란 삶의 즐거움이자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노동은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점을 젊은이들에게 가르 쳐야 한다고 슈마허는 말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노동이 즐거움이 되고 있는가? 나쁜 노동을 권하고 나쁜 일자리를 양산하 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껏 노동자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며 성장만을 부르짖어 온 이 나라 정부가 또다시 한나라당의 날치기 처리로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을 통과시키면서 절망을 주고 있다. 노동유연화라는 거창한 논리를 내세우지만, 자유무역협정의 본질은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권리 를 빼앗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고, 언제든 해고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시장은 우리를 소비자로만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열장에 늘어놓고 파는 상품으로 만듭니다.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삶은 결코 내 삶 내 인생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꼭두각시를 파는 상점이 있다면 우리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풍경일 겁니다.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중) 언제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자본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진정한 내 삶을 찾아가는 좋은 노동을 할 수 있을지, 허무하고 씁쓸하게 날치기로 통과되어 버린 한미 FTA를 보며 분노한 마음으로 <굿 워크>의 책장을 덮는다. 덧붙이는 글 E. F. 슈마허 씀, 박혜영 옮김, 느린걸음 펴냄, 2011년 10월, 265쪽, 1만5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일이 즐겁다는 직딩은 왜 하나도 없을까? 188

189 42 닥치고 읽으라니까

190 닥치고 읽으라니까 :04 [서평]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가 발간 한 달 만에 21만 부가 팔렸다. 통상 1만 부 팔리기가 어려운 정치 관련 서적으로는 이례적인 일이다. 저자 김어준은 요즘 장안의 화제인 팟캐스트 라디오 방송 <나는 꼼수다>로 가장 핫한 인물이 되고 있다. 방송과 출판의 주제로 정치가 이처럼 뜨 겁게 사람들에게 등장한 일이 있었던가? 도대체 무엇이 <나는 꼼수다>와 <닥치고 정치>에 이토록 열광하게 하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정치라고 한다.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공자는 <논어> '안연편'에서 양식을 족하게 하고, 병력을 족하게 하고, 백성이 신뢰하게 하는 것, 그것이 정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정치는 공자가 말한 그러한 모습인가? 지난 11월 10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땅으로 내려왔다. 309일만이다. 고공의 바닷가 크레인 위에서 겨울,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다시 겨울을 맞는 긴 시간이다. 여자 혼자서 1년 가까운 시간을 35미터 상공에 매달려 지낼 수밖에 없도록 내몬 이 나라 정치행태는 우울하기 짝이 없다. 꽃다운 젊은 청춘들이 등록금 때문에 자살을 한다. 밥도 제때 못 먹고 잠도 못자며 밤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도 등록금 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그럼에도 권력의 최고 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꾸 자기가 해 봐서 아는데 노력이 부족하고 무능해서라고 한다. 이게 정 말 개인의 노력 부족이나 무능 때문일까? 세상이 정말 이래도 되나? 닥치고 읽으라니까 190

191 '상위 20%가 전체 소득의 80%를 차지한다'는 '20대 80법칙'은 이제 '10대 90'으로 부의 편중이 더욱 공고히 고착화되고 있다. 그래서 생각한 다. 세상이 변했으면 좋겠다, 다함께 잘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어쭙잖은 좌빨'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도대 체 좌파는 뭐고 우파는 뭘까? 그저 함께 잘 살자는 건데 왜 무슨 말만 하면 좌, 우를 들이댈까? 궁금하다면 읽어야 한다. 닥치고 읽어야 한 다. 그리고 생각을 빨리 바꾸어야 한다. 변화의 씨앗 작년에 타계한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진정으로 변화를 원한다면,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행동을 보여줘야 하고, 비폭력적이더라 도 어떤 식으로든 저항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젊은 학생들에게 그러한 생각을 쏟아내면 그게 씨를 맺어 작은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인했다고 하였다.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나 <나는 꼼수다>는 우리나라 정치변화의 씨앗이다. 우리는 하워드 진의 경험적 변화를 이미 지난 서울시장 보 궐선거에서 확인하였다. 김어준은 정곡을 찌르는 통찰력과 번뜩이는 혜안으로 사람들 속에 억눌려있던 변화에 대한 열망과 가능성을 끄집어 냈다. <닥치고 정치>는 잘 몰랐거나 실체가 잡히지 않는 어렵고도 애매모호한 정치 경제적 사안들을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함으로써 이 나 라 권력층의 본질과 그들의 부조리를 사람들이 깨달아 분노하게 한다. 93세의 노인인 스테판 에셀이 젊은이들을 향해 외치는 '분노하라'는 일 갈과 대면하는 지점이다. 분노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책임이고,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라고 스테판 에셀은 말한다. 도곡동 땅과 다스, BBK, 옵셔널벤처스가 어떻게 서로 얽혀있으며 그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재용과 에버랜드가 어떻게 국민을 속이고 사기를 쳤는지, 정부와 언론이 그에 대해 어떻게 맞장구를 쳤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부도덕에 분노하고 적극적인 참여로 그 분노를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 국 민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혁명의 시작 뉴스의 진짜 힘은 뭔가를 다루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다뤄야 마땅한 뉴스를 다루지 않는 데 있는 거거든. 다루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그런 게 진짜 권력이지. (<닥치고 정치> 본문 301쪽) 조중동을 비롯한 기존 메이저급 언론들이 자신들의 이해와 정치논리에 매몰되어 언론으로서의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이러한 기존의 구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구조에 맞부딪쳐 그것을 깨거나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버려야 한다. 김어준은 후자의 방법을 택한다. 그리고 거대 담론에 매몰되지 말 것을, 물리적인 구조만 구조가 아님을 설파한다. 인터넷과 SNS와 스마트폰 결합의 본질을 간파한 <나는 꼼수다>가 어떻게 혁명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새로운 메시지 유통 구조를 확보하여 진보의 프레임을 확장하고 싶다는 김어준은 <닥치고 정치>에서 "탱크로 밀어야만 혁명이 아니야. 기득의 구조가 뒤집힐 수 있으면 다 혁명이야"라고 말한다. 11월 16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세계 최초로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온라인 1인 취임식을 가졌다. 그리고 박 시장은 "1%가 99%를 지배하는 승 자가 독식해 다수가 불행해지는 현상은 우리가 원하는 미래의 사회가 아니다"라며 "시민 여러분께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가실 수 있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취임사에서 약속했다. 닥치고 읽으라니까 191

192 바로 이런 것이 혁명이 아닐까? 기존의 틀을 깨고 변화와 소통을 모색하는 박 시장의 모습에서 문득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시민 필독서 로 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희망사항이지만. 그래서 아직 잠자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을 깨워 변화의 큰 흐름에 동참시키고 싶다. "밥줄 때문에 입을 다물면 스스로 자괴감 들어. 우울해져. 자존이 낮아져. 위축돼. 외면하고 싶어.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건, 위로야. 쫄지 마! 떠들어도 돼, 씨바." (<닥치고 정치> 본문 306쪽) 자신은 우파도 좌파도 아닌 그저 본능주의자라고 밝힌 김어준의 얘기를 들으며, 밥줄 때문에 쫄지 말고 당당하게 할 말 하는 시대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는 희망찬 기대를 한다. 김어준의 말대로 시국이 아주 엄중하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 닥치고 이 책을 한 번쯤은 꼭 읽었으면 좋겠다. 닥치고 읽으라니까... <닥치고 정치>,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푸른 숲 펴냄, , 13,500원 <오마이뉴스> 게재 닥치고 읽으라니까 192

193 43 "얌마, 도완득!"...!"...이럴 줄 몰랐다.

194 "얌마, 도완득!"...!"...이럴 줄 몰랐다 :06 이한 감독의 영화 <완득이>를 보고 입만 열었다 하면 욕이고, 학생들은 자습시켜놓고 자기는 교탁에 엎드려 침 흘리며 자는 선생과 수업시간에 학교 담을 넘고,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학생이 있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기는커녕 인생이 꼬여버렸다'고 생각하는,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상한 조합의 선생과 학생이 뭉쳐 사고를 냈다. 개봉 19일 만에 250만 명을 돌파한 영화 <완득이>의 선생 똥주(김윤석 분)와 제자 완득이(유아인 분)의 이야기이다. 영화 <완득이>는 지난 10 월 20일 개봉 이후 3주 연속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이제는 SNS 입소문을 타고 장기 흥행을 향한 질주 본능을 드러내고 있다. 올 상반기 극장가를 강타했던 <써니>와 지난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최종병기 활>에 이은 또 하나의 대박 조짐이 <완득이>에게서 감지된다. <완득이>는 이미 책으로 70만 부가 판매된 김려령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영화 <연애소설> 이한 감독의 작품이다. <완득이>는 다문화 가정 장애인 이주 노동자 등 소외 계층의 빈곤과 교육 청소년 문제 등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이슈와 문 얌마, 도완득!...이럴 줄 몰랐다. 194

195 제들을 정확히 짚어내면서도 어둡거나 무겁지 않다. 되레 이런 문제들을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완득이가 반항아라고? 백범 김구, 만해 한용운처럼 유명한 사람들은 다 갖고 있다는 호를 가진 학생이 있다. 담임선생이 부르는 그의 호는 '얌마'. 그의 이름은 도완 득이다. 공부는 말등(꼴등), 툭 하면 싸움질, 집은 가난하고, 아버지는 장애를 갖고 있다. 게다가 어머니까지 안 계신 완벽한 불우소년이다. 게다가 담임선생 동주 일명 '똥주'는 한창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년의 아픈 곳을 대놓고 푹푹 찌른다. "가난한 게 쪽팔리냐? 쪽팔린다고 생각하는 게 쪽팔리는 거다." 기초생활 수급대상자 앞으로 나오는 수급품을 가져가지 않는 완득이에게 수급품을 챙겨주며 담임선생 동주가 하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받은 수급품의 거의 절반은 동주의 몫이기도 하다. 완득이와 이웃사촌인 동주는 심심하면 '얌마 도완득'하고 불러 '햇반 하나 던져'를 외친다. 이 정도면 반항 할만도 하다. 그래서 반항한다. 완득이의 반항은 동주가 던지라는 햇반을 엉뚱한 방향으로 던지고(결국 자기가 주우러 가지 만), 매일 교회에 가서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거다. "똥주 좀 꼭 죽여주세요"라고. 그리고 '가출합니다'란 쪽지를 쓰고 가출도 한다. 말 그대로 집을 나갔다가 두세 시간 만에 돌아온다. 가출 쪽지는 결국 자신이 발견한다. 이처럼 완득이의 반항은 소심하고 귀엽다. 완득이는 반항아라 하기엔 마음이 너무 여리고 착하다. 가난하고 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부끄러워 하기보다는 안쓰러워하는 완득이, 이런 완득이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역지사지를 말하는 영화 <완득이> 얌마, 도완득!...이럴 줄 몰랐다. 195

196 사사건건 완득이를 괴롭히는 '똥주'선생은 어느 날 완득이에게 필리 핀인인 어머니가 있음을 알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던 완득이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와 왜 헤어졌느냐'고 묻는다. 아 버지는 자신이 일하는 카바레 사람들이 어머니를 하녀처럼 대하는 것이 싫었다고 답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 나라가 가난해서 그렇지. 그 나라에서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야." 지난 11월 7일 <노컷뉴스>에서 읽은 외국인 노동자에 관한 기사(노 예가 된 사람들)가 생각난다. 네팔에서 교수였지만 수입이 적어 고 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온 그는 손톱이 빠지고 허리를 펼 수 없을 만큼 힘든 노동 때문에 이직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장은 이직을 허 가하지 않고 임금을 체불하며 쓰레기장 같은 컨테이너 상자에 그를 두 달째 감금했다는 내용이었다. 영화 속 동주에게는 이런 사장과 같은 아버지가 있다. 옥탑방에 살 고, 워낙 후줄근하게 다녀서 가난한 줄 알았던 동주의 아버지는 불 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해 부려 먹다 그들이 다쳐도 치료비 한 푼 안 주는 악덕 공장주다. 영화 <완득이> 중 완득이의 엄마(이자스민 분) 동주는 그런 아버지를 고발하고, 그 아버지는 또 갈 곳 없는 외국 인 노동자들을 재워주고 먹여준 동주를 고발한다. 사회 선생인 동 주가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계급과 빈부를 만들었다'는 칼 마르크스 의 자본주의 이론을 설명하는 수업시간, 형사들이 들이닥친다. 아이 러니한 삶의 단면이다. 2010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는 100만 명이 넘는 외국인 이주민들이 살고 있다. 대부분은 동남아시아 등에서 취업 혹은 국제결혼으로 '코리 안 드림'을 이루기 위해 온 이들이다. 이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수백 년 동안 '공자 왈 맹자 왈' 했지만, 역지사지( 易 地 思 之 )를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너무 많다. 제2, 제3의 완득이와 동주선생을 기대한다 완득이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영화가 어둡거나 무거워야 하는데 <완득이>는 이런 편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며 유쾌하고 흐뭇하다. "일등과 말등, 이건 무슨 조합이냐?" 유치장에 함께 나타난 완득이와 윤하(강별 분)를 보며 동주가 하는 말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일등과 꼴 등은 그렇게 사춘기의 풋풋한 마음을 주고받는다. 대학은 무조건 가야 하고,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면 수능에 포함되지 않는 과목 따위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국 영 수만 중요하고, 나머지는 들러리'라는 식의 기계화된 학교 풍경에 영화는 일침을 가한다. "대학 안 가도 돼. 대학만 대학이 아니야. 세상이 다 대학이야." 얌마, 도완득!...이럴 줄 몰랐다. 196

197 이처럼 동주는 자신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세상의 편견을 깨며 신념을 실현한다. 동주는 전 재산을 털어 교회를 산다. 그리고 이곳 을 외국인 노동자와 다문화가정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만든다. 이름 하여 ' 神 (신)나는 문화센터'다. 이곳은 동주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희망적인 미래를 위한 공간이다. 영화의 마지막, 동주가 옆집의 무협작가 호정에게 연애편지를 끼운 책 한 권을 건넨다. 머레이 북친의 책 <휴머니즘의 옹호>다. '인류의 희망 적인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할 것은 휴머니즘'이라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순간이다. 가난이 행복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불행하지는 않다. <완득이>는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 어뒀다는 점에서 행복한 영화다. 완득이가 킥복싱 시합에서 죽도록 얻어맞고도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 때 문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교실이 붕괴하고 있다고 걱정한다. 세상에 이런 완득이와 동주선생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오마이 뉴스> 게재 얌마, 도완득!...이럴 줄 몰랐다. 197

198 44 미술과 과학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9 미술과 과학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29 박우찬의 미술, 과학을 탐하다 를 읽고 16세기 독일의 사상가였던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는 미술가와 과학자는 같은 별에서 태어난 형제 같은 존재지만, 미술가는 창조적이고 환상 적인 성격을 지닌 반면 과학자는 이성적이라는 주장을 폄으로써 '감성적인 미술과 이성적인 과학'이라는 이분법적 이론의 뿌리를 제공했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미술과 과학은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미술은 미술이고 과학은 과학일 뿐, 너무 다른 이 둘이 무슨 연관이 있으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미술이 과학을 탐하다니, 책 제목이 자극적이다. 문득 '이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호기심이 생긴다. 알프레드 크로스비는 수량화 혁명 에서 13세기 중반까지도 다른 대륙에 현저하게 뒤처져 있던 유럽이 세계를 주름잡는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게 된 것은 '과학과 기술' 덕분이었다고 주장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사고의 확장은 물론 시 공간에 대한 개념을 질적, 양적으로 변화시켰고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미술은 변화하는 시대마다 늘 새로운 꿈을 꾸었고, 그러한 미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과학적 사고와 장치가 필요했다. 미술, 과학을 탐하다 는 이처럼 시대마다 늘 새로운 꿈을 꾸는 미술이, 과학과의 관계를 통해 그 꿈을 어떻게 실현해 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술의 전당 큐레이터를 지낸 저자 박우찬은 청소년은 물론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미술과 과학 사이의 관계를 쉽고 재미나 게 설명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참 못 그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유가 과학을 잘 몰라서였던 것 같다. 물론 과학을 잘 안다고 해서 모두 그림을 잘 그리진 않겠지만 이 둘 사이에 펼쳐진 상관관계가 흥미롭다. 미술과 마술은 점 하나 차이 기원전 2만 년경,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탄생한 미술의 최대 꿈은 박진감 넘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차원 의 현실을 이차원의 평면에 그리는 것은 아주 오랜 동안 거의 불가능한 요원한 꿈으로 여겨졌다. 15세기 초, 2만년 미술의 꿈을 마술처럼 이룬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사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화가였던 마사초는 프레스코화 <성 삼 위일체>에서 공간의 깊이를 표현하면서 사실적인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로 인정받게 된다. 르네상스 이전의 화가들은 화면 공간을 길이와 폭이라는 이차원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했으나, 마사초는 화면을 현실 공간과 똑같이 길이와 폭 외에 깊이를 더하여 삼차원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근법이다. 뒤러의 <원근법 연습>을 보면 그리드를 통해 모델의 정확한 위치와 좌표를 확인하여 스케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이 간단한 측량 장 치가 2만 년 동안 닫혀있던 서양 사실주의 미술의 문을 열어준 마술과도 같은 과학적 장치였던 것이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발명한 원근법은 수학적으로 공간과 물체를 측량하는 단순한 방법이었지만, 이것의 발명으로 현실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차원의 화면 공간에 옮겨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본문 36쪽) 미술과 과학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9

200 카이로스큐로, 빛에 대한 연구 콜린 퍼스와 스칼렛 요한슨이 주연했던 영화로도 익숙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의 대가 베르메르의 작품이다. 누군가 불렀는지 살짝 돌아보는 소녀의 표정이 보는 이들을 빠져 들게 하는 그림이다. 촉촉한 눈망울과 부드러운 뺨, 살짝 벌린 입술의 소녀는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이토록 매혹적인 이 그림의 비밀은 카이로스큐로라는 명암법에 있다. 17세기 미술은 물체의 질감 표현에 굉장한 관심을 가졌고 매우 촉각적인 그림을 그렸다. 세계에서 그림 값이 가장 비싸다는 화가 카라바조가 발명한 카이로스큐로는 물체의 입체감을 강조하기 위해 빛과 그림자를 표현하는 기법이 다. 그러나 단순히 물체의 밝고 어두움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카이로스큐로는 빛의 방사, 흡수, 반사, 그림자, 역광 등 광학을 연구하여 물체의 질감과 촉감, 부피 그리고 나아가 정신과 심리까지를 표현하 는 것을 말한다. 즉 카이로스큐로는 한마디로 17세기 미술의 꿈을 이루게 한 만병통치약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17~18세기 서양의 박진감 넘치는 사실적인 미술은 전적으로 카라바조가 발명한 카이로스큐로라 불리는 빛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 덕 분이었다고 설명한다. 구( ( 球 )와) 원통, 원뿔로 이루어진 자연 현대미술은 어렵다. 도무지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 전문가들에게도 현대 추상미술은 마치 수수께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 든다. 그런데 도대체 이 그림 같지 않은 추상미술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답은 현대 추상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폴 세잔에게서 찾을 수 있다. 세잔은 형태의 본질을 알기 위해 정물대의 사과가 썩어 문드러질 때 까지 관찰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랜 관찰 끝에 마침내 세잔은 모든 자연이 구( 球 )와 원통, 원뿔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상이나 개념을 기본적인 요소로 단순화시키는 환원에 따라,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불필요한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 가면 모든 형태가 구( 球 )와 원통과 원뿔로 귀결된다는 세잔의 단순한 듯 보이는 이 발견으로부터 현대미술이 시작되었다. 세잔의 형태 분석은 미술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는 피카소에게 이어졌고, 피카소는 세잔이 단순화시킨 구, 원통, 원뿔을 마치 도끼로 깎아내듯 다듬어 육면체의 둔탁한 큐브로 만들어버렸다. 피카소의 이 큐브는 추상미술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피카소가 만든 큐브를 완전 기하학 도형으로 만들어 평면으로 단순화시키면 몬드리안의 추상미술이 된다. 즉 세잔의 그림에서 두 단계, 피카 소의 그림에서 한 단계를 더 나아가면 추상미술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을 만나면서 미술은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미술은 한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만들어낸 시대적 산물이다. 따라서 르네상 스 이후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사회의 변화폭이 컸던 서양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미술양식이 등장하고 발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카메라와 컴퓨터가 이미지를 포착하고 재현하고 변조하기 시작하면서 미술과 과학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오늘날 미술의 과학화와 과학의 미술화속에서 미술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갈지 심히 궁금해진다. 미술과 과학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0

201 <오마이뉴스>게재 미술, 과학을 탐하다 박우찬, 소울, , 14000원 미술과 과학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

202 45 용서를 강요하지 마세요

203 용서를 강요하지 마세요 :53 <리뷰> 이정향 감독의 <오늘>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이 세 마디는 용서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말이다. 용서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과 참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용 서받을 사람의 반성과 참회가 없는 용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용서인가? 9년 만에 돌아온 이정향 감독이 던지는 화두다. 청순미의 상징이었던 심은하를 배우 심은하로 각인시켜준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과 400만 관객의 기록적인 흥행과 함께 국내외 각종 영화제에서 갈채를 받은 <집으로>로 영화계 대표 여성감독으로 우뚝 선 이정향 감독. 여성감독 특유의 섬세함과 탁월한 연출력으로 단 두 편의 영화로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던 이정향 감독이 긴 침묵을 깨고 9년 만에 새 영화 <오늘>로 돌아왔다. 그녀가 던지는 화두는 용서 다. 영화 <오늘>은 용서 라는 도덕적, 종교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과 함께 사형 제도, 아동학대, 청소년 범죄 등 우리 사회전반의 문제점에 대해 다루고 있다. 누구를 위한 용서인가 용서와 화해는 종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최고의 도덕 가치이다. 그러나 용서는 일방적인 수혜가 아니라 쌍방의 소통이 되어야 한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받고자 하는 이의 진심어린 반성이 있어야 한다. 영화는 정의에 기초를 두지 않는 용서는 죄악이라고 말 한다.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로 생일날 약혼자를 잃은 다큐멘터리 PD 다혜(송혜교)는 가해범이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에 용서해주면 잘못을 뉘우치 고 학교로 돌아가 다시 열심히 살 거라는 가해 소년의 부모와 주위 성당 사람들의 설득에 따라 그를 용서하고 탄원서를 써준다. 그러나 용서만 해 주면 잘 살 것이라는 믿음과 달리 자신의 용서가 또 다른 살인의 단초가 되었음을 알고 다혜는 자신의 용서에 대해 회의하 기 시작한다. 내겐 용서하지 않을 자유도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내게 그걸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다혜는 자신이 강요된 용서의 희생자였음을 깨닫는다. 용서가 미덕으로 생각되는 현실에서 모두가 상처 입은 이에게 용서하라고만 할 뿐 그 상처와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카톨릭, 개신교 등의 종교도 용서하라고만 할 뿐 용서의 진정한 의미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 다. 도대체 용서를 위한 용서인지, 누구를 위한 용서인지 의문이 생긴다. 용서할 수 있어요. 반성하기만 한다면... 다혜의 집에 찾아든 친구 지석(송창의)의 동생 지민(남지현)은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미국 명문대에 합격한 수재지만 어릴 때부터 아버 용서를 강요하지 마세요 203

204 지의 상습적 폭행과 이를 방관하는 엄마, 아버지를 닮아 점점 폭력적이 되어가는 오빠 등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갖 고 있다. 오늘날 가정 내 아동학대는 심각한 사회문제의 하나이다. 아동학대의 77.5%가 가정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가해자의 83.4%는 부모들이다. 범 죄심리학에서는 아동학대를 영혼살인(Soul Murder)'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지민은 자기가 왜 맞는지 이유를 알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아버지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만 한다면 용서할 수 있다고 무자비한 폭력 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말한다. 그러나 남의 죄를 판단하는 판사인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인정도 반성도 사과도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잘못을 저질러도 반성하지 않게 되었다. 36년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에 부역하며 민족을 배반했던 친일파들은 해 방이후 지금까지 조국과 민족에 그 어떤 반성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잘 살고 있다. 너희의 용서 따윈 필요 없다는 듯이.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이들 역시 지금까지 그 어떤 반성도 사과도 없다. 장관이 되겠다고 청문회에 나온 이들도, 불법으로 아들 에게 땅을 증여하려던 분도 모두가 자신의 범법 행위를 변명으로 일관할 뿐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 이다. 사형제 폐지가 용서는 아니다. 사형제 폐지운동에 동참해 달라는 수녀의 부탁에 범죄로 딸을 잃은 어머니는 단호히 거부한다. 자신은 딸을 잃고 그 일로 이혼까지 하게 되 었는데, 가해범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모범수로 감형되어 마음 편히 지내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아들이 유괴되어 살해당한 후 신애(전도연)는 종교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교회에 나가지 만,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 며 평안한 범인의 말에 더욱 깊은 상처를 받는다. 이처럼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 고통스럽고 불안한 삶을 살아야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면서 사고에 혼란이 생긴다. 우리나라의 형사법 체계 는 피해자의 인권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사형제 폐지에 대한 논의가 갑자기 가해자에 대한 지나친 온정주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된다. 마치 영화가 사형제를 폐지 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형제 폐지가 살인범에 대한 용서는 분명히 아니다. 사형제 폐지는 벌을 주지 말고, 단죄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형이라는 인간의 신체에 직접적인 생명을 끊어버리는 이런 야만적 형 벌을 없애자는 얘기다. 그것이 절대로 단죄를 않거나, 범죄를 억지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쓴 공지영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살인를 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똑같은 벌을 내린다는 것은 우 리 모두가 살인범이 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형은 또 다른 살인일 뿐인 것이다. 오늘을 소중하게... 언제나 너와 함께할 거야. 어제 죽은 이가 살고 싶었던 내일이 오늘이래. 그러니까 매일매일 소중히 생각하면서 살자. 오늘처럼. 이정향 감독은 인터뷰에서 매일 분노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이 조금이나마 위로받기를 원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항상 마음의 중심부를 차지했던 분노를 마음의 한 켠으로 좀 밀어놓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용서를 강요하지 마세요 204

205 싶었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이들에게 무조건 용서만이 최선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영화는 얘기한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 마음속의 고통을 이해 하고자 한다면 섣부른 충고보다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 갈 수 있는 시간과 배려가 필요하며, 일방적인 용서가 문제의 해결책은 아니라고 말한 다. <오늘>에서 송혜교는 성숙하고 절제된 내면연기로 청춘스타에서 배우로 거듭나 깊은 울림을 남겨주었고, 발랄하지만 상처 가득한 지민 역의 남지현 역시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영화는 다소 무겁고 어둡지만 깊이 있는 주제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오마이뉴스> 게재 용서를 강요하지 마세요 205

206 46 도끼에 찍히고도 행복한 이유

207 도끼에 찍히고도 행복한 이유 :24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 아침 밥상에 올라온 콩나물국. 씹을 때마다 줄기가 톡톡 터지면서 입안으로 퍼지는 물기가 싱그럽다. 버스정류장에서 본 은행나무. 나란히 서 있어도 성질 급한 놈은 벌써 노랗게 숨이 넘어가고 느긋한 놈은 아직 초록이 성성하다. 거미줄에 맺힌 이슬의 아름다움에도 눈길이 간다. 무 심히 지나쳤던 모든 것에 눈길이 간다. 김훈과 조르바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자 모든 것이 새롭고 놀랍다. 감동을 잘 받는다는 것은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한다. < 책은 도끼다> 제목부터 살벌한 이 책은 이렇게 무심했던 일상에 작은 파문을 가져왔다. 그런데 도끼를 생각하면 무언가를 찍어버리겠다는 굳 은 다짐으로 날이 바짝 서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 무엇을 찍을 것인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저자는 고독과 불안이라는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을 잘 표현한 <변신>을 쓴 카프카의 말을 들려준다. 즉, 책은 얼어붙은 우리의 감성을 깨뜨 리고 잠자던 세포를 일깨우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살벌함과 달리 저자는 아주 조곤조곤하고 친밀감 있는 목소리로 책 제대로 읽는 법을 이야기한다. 저자 박웅현은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등 인문학적 깊이가 있는 광고카피로 유명한 광고인이다. 저자는 자신이 쓴 카피의 바탕이 책이었고, 책이 얼어붙은 자신의 감성을 깨뜨리고 잠자던 세포를 깨우는 도끼였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의 머릿속 도끼질의 흔적을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진행한 강독회를 책으로 묶은 것이 바로 <책은 도끼다>이다. 이철수에서 시작하여 김훈과 알랭 드 보통, 오스카 와일드, 고은, 미셸 투르니에, 밀란 쿤데라, 니코스 카잔차키스, 김화영, 카뮈, 톨스토이, 손철주, 오주석 등 스물 네 명의 만만치 않은 대가들의 작품들을 '들여다보기'라는 저자 특유의 독법으로 해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살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지 '읽었다'에만 방점을 찍었을 뿐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들었다. 저자는 그렇게 내 머리에 도끼질을 했다. 이번엔 그의 도끼에 제대로 찍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 천천히 들여다보기 첫 번째 추천 책은 판화로 시를 쓴다는 이철수의 판화집이다. 이철수의 판화그림은 간결하고 단아한 그림에 선가( 禪 家 )의 시구같은 짧은 글 이 어우러져 현대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저자는 이철수의 책이 평소에 못 보던 것을 보게 해 주고, 인간 중심의 시선을 돌려 자연과 만물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 주었 다고 한다. 도끼에 찍히고도 행복한 이유 207

208 꽃 보내고 보니, / 놓고 가신 / 작은 선물 / 향기로운 / 열매 <본문 24쪽> 누구나 꽃이 지면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꽃이 두고 간 선물이라는 이철수의 시선. 저자는 이 판화그림을 본 후로는 열매를 보게 되면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아, 이 자리에 꽃이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본문 32쪽> 시보다도 아름다운 이 구절은 최인훈의 <광장>에 나온다. 저자는 최인훈이 소설을 시처럼 쓴다고 감탄한다. 그리고 최인훈과 완벽히 반대 시 선에 서 있는 김훈을 이야기한다. 유려한 최인훈의 문장을 읽다 사실적인 글쓰기를 추구하는 김훈의 문장을 읽으면 마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지하 20층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현기증을 느낀다고 한다. 김훈의 글은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눌러서 읽어야 한다. 줄을 치고 또 쳐도 마음을 흔드는 새로운 문장들이 넘쳐나는 것이 김훈의 글이다. 저자는 김훈이 미쳤다고 말한다. <자전거 여행>에 쓴 된장과 인간과 냉이의 삼각 치정관계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기막 힌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봄이 되어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면 나도 냉이와 된장 사이에 낀 삼각 치정관계의 주인공이 될 터이다. 같은 꽃을 보아도 '아, 예쁘네'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마음을 열고 물어보고 따져보고 알아보고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김훈이 그 렇다. 김훈은 삶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서 발견하라고 한다. 현재를 즐겨라. 카르페 디엠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본문 192쪽>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카르페 디엠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중해 문학의 특성 중 하나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현재에 집중하라. 순간을 살아라'라는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구절에서 유래했다. 실존주의 문학에서 많이 나타나는 철학이기도 하다. 카르페 디엠을 실천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이다. 조르바는 물레질에 거추장스럽다고 손가락을 자르고, 산두 리(악기)를 배우기 위해 모아둔 결혼자금을 털어 산두리를 사서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조르바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로운 감탄의 대상 이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그는 소리친다.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본문 197쪽> 지나간 어제를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는 일 따위는 조르바의 머릿속에 없다. 순간을 사랑하고 모든 것에 감탄하는 매력적인 인물이 조르바이다. 오늘이 행복하면 평생이 행복하다. 이것을 느끼는데 필요한 것은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참을 수 없이 무거운 밀란 쿤데라 1990년대 초 밀란 쿤데라는 일종의 유행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지나가고 난 자리를 밀란 쿤데라가 이어받았다. 대학생 들 사이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제목이 보이도록 손에 들고 다니던 장식품의 일종이기도 했다. 그런데 들고 다니기엔 가벼웠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읽고 이해하기에는 무거웠다. 아무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읽어야 도끼에 찍히고도 행복한 이유 208

209 한다는 심리적 압박에 쫓기며 마지막 장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저자 역시 '읽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읽게 되었지만,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밑줄 쳐지는 양이 많아지고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학창시절 어렵다고 느껴졌던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박웅현이라는 사람의 설명을 통해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무거움과 가벼움, 의미와 무의미, 영혼과 육체, 운명과 우연, 영원과 순간 같은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문제를 토마스와 테레사, 사비나와 프란츠 네 명의 사랑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성과 사랑, 정치와 역사, 신학과 철학까지 아우르고 있는 이 소설이 주는 감동의 무게는 제목과 달리 결코 가볍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책은 도끼다>를 통해 저자는 스물 네 명의 작가와 마흔 두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언급한 책을 모두 따지면 예순 네 권이 다. 이 많은 책들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말한다. 책을 왜 읽는냐, 읽고 나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게 많아지고, 인생이 풍요로워진 다고 한다. 저자는 어떻게 하면 자동차 달리는 속도가 아니라 잔디가 자라는 속도로 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숨 쉬는 속도가 바닷가 파도치는 속도와 한 호흡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은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지만 정작 봄은 우리집 매화나무에 걸려있었다는 시구처럼 행복은 먼데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노라 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톨스토이와 카뮈, 김훈과 조르바의 안내를 받아 생겨났다고 한다. 박웅현의 도끼질은 즐겁고 유쾌하고 행복하다. 이 가을, 책이라는 도끼로 머릿속 감수성을 깨 보는 건 어떨까 <오마이뉴스> 게재 도끼에 찍히고도 행복한 이유 209

210 47 발에 땀나게 춤춰요. 지구가 살아나요.

211 발에 땀나게 춤춰요. 지구가 살아나요 :27 [서평] <이기적 이타주의자> 사람의 무늬 펴냄, 앨런 패닝턴 지음, 김선아 옮김, 2011, 15,000원 지금 어떤 커피 마시고 있나요? [서평] <이기적 이타주의자> 사람의 무늬 펴냄, 앨런 패닝턴 지음, 김선아 옮김, 2011, 15,000원 여러분은 지금 어떤 커피를 마시고 있나요? 상쾌한 아침을 열어 주는 모닝커피 한잔에서 혹시 안데스 커피농부의 눈물을 보고 있지는 않나 요?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가 커피농가에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거래하여 윤리적인 상거래를 지향하는 커피인지, 친환경 생산방식으로 재배 된 커피인지 확인하고 마신다면 당신은 이기적 이타주의자입니다. '이기적 이타주의'라는 용어는 형용모순이다. 이기적이란 말과 이타적이라는 상반되는 개념의 단어가 하나로 결합했다. 일반적으로 이기적이 라 함은 자신의 필요나 욕구를 타인의 필요나 욕구보다 우선시하는 행동을 말한다. 또한 이타적은 의도적으로 타인의 복지나 이해 또는 공공 발에 땀나게 춤춰요. 지구가 살아나요. 211

212 라 함은 자신의 필요나 욕구를 타인의 필요나 욕구보다 우선시하는 행동을 말한다. 또한 이타적은 의도적으로 타인의 복지나 이해 또는 공공 의 이해를 추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이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어떻게 결합하게 되었을까? <이기적 이타주의자>의 저자 앨런 패닝턴은 오늘날의 소비자들이 과거와는 다른 소비 형태를 가지고 있음에 주목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만을 위해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의 소비자들이 자신만을 위한 '과시적 소비형태'를 보였다면 21세기의 소비자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소비를 하면서도 그것이 환경과 생태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을 돕는 소비인지를 고려한다. 이것이 바로 이기적 이타주의자 의 모습이다. 앨런 패닝턴은 인구 통계학적 측면과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나타난 몇 가지 커다란 변화가 21세기를 만들어갈 것이며, 이런 변화들은 서로 결 합하고 병행되어 매우 다른 행동양식과 생활양식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21세기에 우리가 맞닥뜨린 도전은 나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하고 싶은 것과 윤리적, 도덕적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쓰레기의 주범, 포장을 벗기자 포장이 근사한 선물을 받으면 일단 기분이 좋다. 그런데 포장을 풀어서 버리려고 하면 무척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꽃을 선물 받을 때 는 더욱 그러하다. 꽃만으로도 예쁜데, 화려한 포장지가 이중 삼중으로 둘러져 있고 게다가 은박지에 리본까지 달려 있으면 대략 난감해진다. 이 많은 쓰레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과자를 사먹다 보면 포장 안에 포장 그리고 그 안에 포장이 또 있는 걸 보게 된다. 마치 러시아의 전통인형 '마뜨료쉬까'를 보는 듯하 다. 비싼 과자 값의 절반이 포장지에 할애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처럼 소비의 시대는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 난 양의 쓰레기를 만들어냈다. 포장으로 인해 넘쳐나는 쓰레기를 막기 위해 포장술의 대가들이 사는 일본에서는 재활용이 가능한 보자기 포장법이 유행하고 있다. 소비자의 새로운 가치관이 "기쁜 일이 있으니 축하하고 정말 재미있게 놀고 싶지만, 개인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환경에 피해를 미치는 원인을 제공하고 싶지는 않아"로 표현될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사전 재활용(Pre c yc ling)의 실천 플라스틱 생수병은 매년 280억 개 이상 생산되는데 그 중 86퍼센트가 폐기처분되고 있다. 플라스틱 생수병의 생산은 2500만 톤에 이르는 온 실가스를 발생시키고, 생수병에 사용되는 비용은 1천억 달러 규모에 이른다. <본문 168쪽> 결론은 병에 든 생수가 환경 파괴의 중요한 원인이 되며, 다른 곳에 더 잘 쓰일 수 있는 자금을 낭비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건을 버 리는 시점이 아니라 구매하는 시점에서부터 사려 깊어야 하며, 이러한 개념의 필요성을 설명하고자 고안된 새로운 단어가 사전 재활용 (Precycling)이다. 사전 재활용은 소비를 줄일 것과 물건을 재활용할 것, 그리고 어떤 물건을 사기 전에 그것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볼 것을 촉 구하는 개념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이쯤 되면 슈퍼에서 별 생각 없이 손쉽게 사먹던 생수가 다시 보이게 된다. 그리고 내 손에 들려있 는 생수를 보면서 일종의 죄책감이 느끼게 된다. 소와 경쟁하는 인간, 살을 빼서 지구를 지키자 발에 땀나게 춤춰요. 지구가 살아나요. 212

213 미국농무부는 고기 1파운드를 생산하려면 곡물 7파운드가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즉 인간은 이제 옥수수와 콩을 차지하기 위해 소와 경쟁해야 하며, 곡물을 재배하기보다는 소에게 풀을 먹일 권리가 있는 농부들과도 경쟁하게 된 것이다. <본문 159 ~ 160쪽>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부유해지면서 음식에 대한 수요도 다양해지고 늘어났다. 그러나 식량생산량은 소비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UN은 1960년에 1인당 경작 가능한 농지가 1.1에이커였다고 추정했으나 2000년에 이 수치는 거의 절반으로 감소했고, 2030년이 되면 1인당 농지는 0.5에이커나 그 이하로 다시 줄어들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부의 증가로 식량소비가 늘어나면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비만 인구의 증가이다. 영국 런던의 후생의학교 연구에 따르면, 뚱뚱한 사람 은 마른 사람보다 이산화탄소를 1인당 연간 1톤 이상 많이 배출한다고 한다. 식량소비를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움직이는 것은 기름을 왕창 잡아먹는 차를 운전하고 달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실가스 발생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식량 생산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식량을 많이 소비하게 하는 비만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하게 지구 온난화에 한몫을 하는 주범이라고 저자는 얘기한다. 그러니 자, 오늘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 체중을 줄이고 다이어트 를 시작함이 어떨지... 그리고 지구를 구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결심했다면 이런 방법은 어떨까? 홍콩의 캘리포니아 피트니스센터는 러닝머신 등 운동기구를 사용함으로써 발전된 에너지로 시설 내 조명을 켠다. 또 런던의 댄스 클럽들도 이와 동일하게 댄스 플로어를 발전용도로 활용한다고 한다. 다이어트도 하고 전기도 소모하지 않는 일석이조의 방법이다. 이처럼 미래에는 화석연료를 태워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필요한 동력을 스스로 발전해서 써야 할 것이라고 저자는 예측하고 있다. 나와 남을 동시에 생각하는 삶 작년 언젠가 문화방송사의 <일요일 일요일 밤에> 코너 중 '단비'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깨끗한 물이 없어 하루 4500명이 죽어가는 아 프리카 잠비아에 우물을 파주는 프로젝트였다. 텔레비전의 예능방송도 마냥 의미 없이 웃고 떠들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지구촌의 이웃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프로그램으로 방송이 진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변화하는 소비자 의식 중 하나는 이처럼 타인을 돕는 것에서 삶의 가치를 느끼고 자아실현을 한다는 것이다. 손꼽아 기다리던 휴가를 가지만 나만을 위한 휴가가 아니라 타인을 돕는 봉사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기적 이타주의자들의 선택은 봉사를 통해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또 한 편으로는 자신의 자아실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거양득의 휴가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비자의 사고가 변해가고 있다. 저자는 행복의 법칙으로 "당신이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어라."라고 말한 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기욕립이립인( 己 欲 立 而 立 人 ) 기욕달이달인( 己 欲 達 而 達 人 )'이라 하여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을 먼저 세워주고, 자신이 이르려고 하면 남을 먼저 이르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인( 仁 )을 실천하는 방법, 즉 이타적인 삶을 사는 방법이다. <이기적 이타주의자>를 읽으며 한번 생각해보자.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오마이뉴스> 게재 발에 땀나게 춤춰요. 지구가 살아나요. 213

214 48 소녀 가슴에 뛰어든 소년, 참 설레네.

215 소녀 가슴에 뛰어든 소년, 참 설레네 :25 <리뷰> 미야자키 고로 감독의 <코쿠리코 언덕에서> 첫사랑이라는 단어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묻혀 있을까. 슬프지 않은데도 눈물이 날 것 같고 가만히 있는데도 심장이 팔딱팔딱 설레며 아련해지는 이 말.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게 추억이 된다는 옛 말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학창시절 내 마음 전부를 흔들었던 첫사랑의 아련함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스튜디오 지브리의 신작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꼭 봐야 할 것 같다. 9월 29일 개봉한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두말이 필요 없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기획과 각본을 맡고, 그 아들인 미 야자키 고로가 감독했다. 일본에서는 지난 7월 16일 개봉해 관객들의 높은 입소문으로 꾸준히 흥행하여 2011년 일본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 마치 상반기 우리나라 영화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80년대 우리 언니들의 이야기 <써니>와 같은 양상이다. 그동안 미야자키 하야오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고도화한 인간 문명이 자연과 소통하지 못하고 스스로 파괴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인간이 잃어버린 순수한 세계의 모습을 판타지로 그려내,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상상하도록 하는 애니메이션을 주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아들과 함께 만든 이번 영화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마도 70년 자신의 인생에서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추억하며 사람의 마음속 깊 이 깔린 본원적 감성을 건드린다. 순수와 열정으로 가득 찼던 풋풋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 소중한 게 무엇이었는지 세대를 아울러 음미해 보는 듯하다. 깃발을 올리는 소녀의 가슴에 뛰어든 소년 동경올림픽이 열리기 한 해 전인 1963년, 요코하마 항구 인근 언덕에서 하숙집 코쿠리코 를 운영하는 열여섯 살 소녀 우미가 주인공이다. 우미는 항해 중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깃발을 걸어놓으면 아빠가 길 잃지 않고 집에 올 것 이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매일 아침 바다를 향해 깃발을 올린다. 그리고 매일 그 깃발을 보는 건 우미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열일곱 살의 소년 슌이다. 교지 편집장인 슌은 어느날 교지에 소녀는 매일 깃발을 올린다 라는 제목의 시를 싣는다. 우미는 이 시를 읽고 마음속에 생기는 미묘한 동요를 느끼게 된다. 낡은 것을 부수고 새 것으로 바꾸자는 1960년대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학교의 오래된 동아리 건물 카르티에 라탱 이 철거의 위기를 맞는다. 슌은 학생 동아리 건물 철거에 반대하며 전통수호의 기치를 내걸고 건물에서 연못으로 뛰어내리는 퍼포먼스를 실행한다. 파란 하늘을 등지고 연못으로 뛰어내린 슌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우미에게 손을 내민다. 슌이 뛰어내린 곳은 마치 연못이 아니라 우미의 가슴이었던 것 같 다. 소녀 가슴에 뛰어든 소년, 참 설레네. 215

216 이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 시기에 진입하기 직전으로 전후 일본을 부흥시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야했던 시대였다. 과거의 잔재를 산업 화 라는 이름으로 모두 없애기 시작하던 때다. 낡은 것은 모두 버려야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낡은 것이 없어져야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시기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우미와 슌은 철거를 앞둔 카르티에 라탱 을 지켜내고자 함께 노력하며 사랑의 감정을 키 운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선 카르티에 라탱 본래 카르티에 라탱은 프랑스 학문의 중심지로 오랫동안 예술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이기도 하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까지 학생과 교 수가 수업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라틴어를 사용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기원은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257년 프랑스 최초 로 지어진 소르본 대학을 비롯하여 1485~1500년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클뤼니 박물관, 루이 15세의 명으로 세워진 팡테온 등이 이 구역에 자 리하고 있다. 영화에서 낡았다는 이유로 철거의 위기를 맞는 학생 동아리 건물의 이름이 카르티에 라탱 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새로움, 발전 이란 것이 어느날 갑자기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지혜와 지식이 쌓여 문화가 되고, 전통이 되며 그것 이 다시 새로움으로 선순환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공자께서는 <논어>에서 온고이지신( 溫 故 而 知 新 ) 이라 하지 않으셨을까. 과거 우리도 새마을운동과 개발이란 이름으로 낡은 것은 무조건 버리고 새로운 것만이 좋다고 몸부림 하던 때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낡은 것=전통=악이고, 새 것=근대화=선이라는 이분법적인 정책으로 수천 년 이어온 우리의 전통을 우리 손으로 없애게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우 리의 전통가옥인 한옥, 초가집 등은 사라졌고, 서낭당과 같은 고유신앙은 미신으로 치부되었으며, 그 외 많은 문화유산과 전통과 정신이 사라 져 버렸다. 지금도 4대강 공사로 낙단보의 마애불이 훼손되고, 제주도에서는 해군기지 건설로 '구럼비바위' 등 문화재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지 않은가. 생성시기가 3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1.2km나 되는 용암바위이자 이 곳 주민들이 대대손손 제사를 지냈던 민속신앙의 터 전이 이 달이 지나기 전에 폭약에 의해 발파되고, 굴삭기에 의해 조각조각 부서질지 모를 일이다. 영화에서 우미와 슌은 낡았지만 역사와 추억이 깃든 건물을 지키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보존운동을 시작한다. 한 건물을 허무는 것은 과거에 산 사람들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철거에 반대하며 낡은 건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예쁜 색깔까지 칠하여 그야말로 온고이지신의 모습을 보여 소녀 가슴에 뛰어든 소년, 참 설레네. 216

217 준다. 학교의 이사장이 왜 건물을 지키고 싶으냐고 묻자 우미는 좋아하니까요 라고 간명하게 대답한다. 천천히 좀 갑시다 영화는 새로움만 추구하며 너무 빨리 바뀌고 변하는 세상에 대해 좀 천천히 가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자고 나면 새로운 건물이 솟아있고, 돌아서면 없던 길이 뚫려 있는 속도전의 시대에 책상 속 오래된 사진첩과 일기장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고 있는 것 같다. 먼지 쌓인 과년도의 시험 문제지를 차곡차곡 모아 그 기출문제를 추려서 족보를 만드는 슌을 인터넷 문제은행에서 기출문제 내려받기를 하는 요즘 아이 들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휴대전화와 전자메일로 언제 어디서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요즘 사람들은 밤새워 쓴 편지를 수줍게 건네주던 그 때의 아날로그적인 정서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순원의 소나기 나 예민의 노래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 를 들을 때 가슴속으로 전해지는 따뜻 하고 아련한 마음은 누구나 그리워한다. <코쿠리코의 언덕에서>는 소재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림과 색감, 작업방식까지 모두 '낡은 것'을 추구했다. 3D가 대세인 요즘에 전통적인 2D 셀 애니메이션을 고집하는 스튜디오 지브리에게서는 그래서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실사를 보는 듯한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그림체와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은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그렸다고 하는 크레파스로 그린 듯한 스케치 기법의 포스 터는 따뜻한 정서가 물씬 묻어난다. 테시마 아오이가 부른 주제가를 우리나라에서는 정엽이 불러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 이별의 여름 - 코쿠리코 언덕에서(Summer of Farewells From Up On Poppy Hill) 를 들으며 추억에 젖어보는 것도 올 가을을 낭만적으로 보내기에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오마이 뉴스> 게재 소녀 가슴에 뛰어든 소년, 참 설레네. 217

218 49 거품 물고 쓰러진 그녀,, '손'' 때문이었다.

219 거품 물고 쓰러진 그녀,, '손'' 때문이었다 :12 [리뷰]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 "시나리오 잘 읽어보고 손 꼭 씻도록 해"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맷 데이먼에게 전화로 한 이야기라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자마자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씻었다. 비누로 뽀 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씻고 가급적 수도꼭지를 만지지 않으려고 물을 몇 번이나 끼얹은 후 손등으로 눌러 잠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것도 망설여졌다. 타고난 뒤에도 옆 사람과 몸이 닿지 않게 뚝 떨어져 섰다. 전염병이라는 의미의 <컨테이젼 Contagion>은 제목 그대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간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을 다루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가 사스(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SARS), 조류독감(Avian Influenza, AI), 신종플루((H1N1) 등의 전염병을 겪은 탓으로 영화는 더 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컨테이젼>의 제작진과 출연진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1989년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트 래픽>(2000), <에린 브로코비치>(2000), <오션스 일레븐>(2001), <체: 파트 투>(2008) 등을 만든 스티븐 소더버그가 연출하고 <불편한 진실 >(2006), <본 얼티메이텀>(2007) 등의 시나리오를 쓴 스코트 Z 번스가 시나리오를 맡았다. 그리고 맷 데이먼이 이 두 사람과 <인포먼트>(2009)에 이어 다시 한번 작품을 함께 하였다. 영화에는 맷 데이먼 외에도 기네스 펠트로, 주드 로, 케이트 윈슬렛, 마리옹 꼬띠아르, 로렌스 피시번과 같은 최고의 배우들이 모였다. 이 사람들이 같은 영화에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영 화는 무게감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정작 영화의 주인공은 이들은 아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전염병의 주범인 바이러스다. 영화는 시종일관 이들 유명배우를 비롯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전염시키는 바이러스를 추적한다. 거품 물고 쓰러진 그녀, '손' 때문이었다. 219

220 1명에서 10억으로 전염되는데 불과 120일! '둘째 날'이라는 자막과 함께 베스(기네스 펠트로)가 공항에서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카메라는 그녀보다는 그 녀의 주변을 이리저리 빠르게 잡아낸다. 카메라가 포착하고 싶은 대상은 그녀가 아닌 다른 무엇인 것 같다. 홍콩으로 출장 갔다 돌아온 베스 는 고열과 기침을 동반한 감기 증상을 보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숨이 멎는다. 그리고 그녀와 포옹한 그녀의 아들 역시 똑같은 증상을 보이다 세상을 떠난다. 베스의 남편 미치(맷 데이먼)는 이유도 모른 채 단 며칠 만에 아내와 어린 아들의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 상황에 처한다. 그런데 비슷한 시각 런던, 시카고, 도쿄, 홍콩 등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똑같 은 증상으로 죽어간다. 의학계에서는 이처럼 환자 한 명으로 인한 재감염 수를 '재생수'라고 부른다. 1명에서 2명, 2명에서 4명, 4명에서 16명... 바이러스는 기하급수 적으로 전염되므로 한 명에서 10억 명에게 전염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30번의 재생을 거쳐 불과 120일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이렇게 원인모를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감염자를 속출시키고,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의 질병통제센터(CDC)는 비상사태를 맞는다. 공포가 인류를 무너뜨린다. 치료백신은 개발되지 않고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으로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는 상황이 이어지자 도시는 급속도로 무너진다. 식량을 배급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재고가 바닥나자, 식량을 싣고 있던 트럭을 습격한다. 그러나 트럭이 빈 것을 알자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 여 앞서 배급받은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식량을 빼앗는다. 병이 오기도 전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재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숨어있던 본성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마 치 이리떼처럼 변한 사람들의 약탈이 곳곳에서 이어지고 순식간에 도시기능이 무너져 치안부재 상황을 맞게 된다. 인간의 나약한 이성, 두려 움에 빠진 인간의 공격적인 군중심리의 전형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또한 정부가 특정 제약회사의 이익을 위해 피해를 키우고 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며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트리는 블로그 저널리스트 앨런 (주드 로)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 불안을 더욱 조장하고, 그 불안에 기생하여 이익을 편취한다. 공포에 이성이 잠 거품 물고 쓰러진 그녀, '손' 때문이었다. 220

221 식당하는 사람들과 공포 바이러스를 확산시켜 돈을 버는 자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영화는 무섭도록 현실적이다. 기네스 펠트로나 케이트 윈슬렛이라고 해서 봐 주지 않는다. 영화는 그들의 죽음에 어떤 감상적인 요소도 집어 넣지 않는다. 침몰하는 배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드라마틱한 장면(타이타닉)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컨테이젼>은 일반적인 재난영화가 보여주는 영웅의 등장도, 영화적인 감동도 없다. 영웅이 사라졌다. 영웅이 사라진 영화는 다소 밋밋할 수도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길들여진 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많은 유명한 배우들이 한꺼 번에 나오는데 그들 중에 나를 따르라하고 나서는 이가 없다는 건 어딘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영웅이 없기에 영화 는 더욱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다. 등장인물들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인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아내와 아들을 잃은 미치(맷 데이먼)는 가족을 잃은 슬픔보다는 살아남 은 딸을 바이러스로부터 지키는 현실적인 문제가 더 크다. '본시리즈'에서처럼 그가 뭔가 해 주겠지 하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한 국가의 질병을 관리하는 질병통제센터의 수장인 치버박사(로렌스 피시번) 역시 통행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사랑하는 여자를 먼저 피난시 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더구나 세계보건기구의 홍콩지부 직원은 백신을 먼저 받으려고 바이러스 감염경로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오랑테스 박사(마리옹 꼬띠아르)를 납치해서 억류하기까지 한다. 한 명의 뛰어난 주인공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에 익숙하다면 <컨테이젼>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무척 치밀하 다. 각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때로는 분리하고 때로는 재조합하면서 산만하지 않고 나름의 무게감을 가지면서 하나의 메시지로 몰아가는 감독 의 능력이 단연 돋보인다. 문제는 인간 영화는 인간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볼 수 있는 모든 형태를 보여준다. 정확한 사태파악에는 관심 없고 인기를 위해 정치적으로만 해결하려는 주지사를 비롯한 행정가들, 안전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업을 하는 간호사들, 혼란을 돈벌이에 이용하는 사람들, 이성을 잃고 집단광 거품 물고 쓰러진 그녀, '손' 때문이었다. 221

222 기에 빠지는 사람들, 그리고 미어스 박사(케이트 윈슬렛)와 같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고귀하게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까지. 내내 현실감을 유지하던 영화의 결론은 충격적이다. 베스가 중역으로 있는 회사의 중장비가 무성한 열대우림에서 숲을 망가뜨리고 쓰러진 나 무에서 날아오른 박쥐의 분비물에서 시작된 바이러스가 돼지를 거쳐 결국 베스의 죽음은 물론 전 세계를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가는 부메랑이 된다는 설정은 '인과응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면서 섬뜩하기까지 하다. 과거 국지적인 질병에 머물렀던 바이러스들이 교통수단과 기술의 발달로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지고, 공장형 축사에서 대량 사육되면서 면역 력이 약해진 소, 돼지, 닭과 같은 가축에게 옮겨진 바이러스가 불특정다수를 향해 무작위로 재앙의 씨앗을 퍼뜨리며, 이 와중에 결합과 변이 가 자유로운 바이러스들이 가축들에게 남용된 항생제에 내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하여 변종바이러스로 재탄생하고 있다. 소더버그 감독은 "관객이 이 영화를 허구가 아닌 현실로 느끼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단지 추상적으로 '아, 이런 건 영화야. 현실성이 없어'라 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저런 상황에 닥쳤을 때 이렇게 행동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하면 더 좋을 텐데'하고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정말로 영화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취재한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를 보고난 뒤에도 누군가와 악수하고 대화하는 것에, 버스와 지하철에서 손잡이와 문고리를 잡는 것에 거리낌 없다면 당신은 간이 크 거나 지극히 무신경한 사람이다. 특히 공공장소에서는 기침을 조심하시라 <오마이뉴스> 게재 거품 물고 쓰러진 그녀, '손' 때문이었다. 222

223 50 우연과 반복의 공간, 북촌으로의 여행

224 우연과 반복의 공간, 북촌으로의 여행 :15 [리뷰] 홍상수 감독의 열두 번째 영화 <북촌방향> 빨간색 바탕에 살짝 흘려쓴듯한 타이포그라피가 화면 가득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올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 과 벤쿠버, 시체스 등 각종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이끌어낸 바 있는 홍상수 감독의 열두 번째 영화 <북촌방향>이다. 12라는 숫자에는 꽤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고대인들에게 12는 '전부' 혹은 '극한'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래서 올림푸스 12신은 꼭 12명의 신 이 아니라 모든 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대의 12지파도 마찬가지다. 12는 우주와 사람의 순환적 운명을 상징하는 수라고 한다. 그래서 1년은 열두 달, 하루는 열두 시간씩 두 번 반복된다. 불교에서는 12연기설 로 인간의 윤회를 설명한다. <북촌방향>은 그래서 더 재미나다.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열두 번째 영화에서 이전 작품을 모두 아우르면서 우 연과 반복을 통한 순환적 운명의 삶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하는 듯하다. 반복 안국역 인근 헌법재판소 앞 교차로에서 시작한 영화는 같은 장소에서 끝을 맺는다. 마치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판화그림들 같다. 돌고 돌아서 결국 제자리로 오는 뫼비우스의 띠, 끝없이 돌고 도는 폭포, 계속해서 올라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계단처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일 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 속의 시간 역시 단선적이지 않다. 똑같은 음절이 되풀이되는 캐논처럼 사건은 반복되고 이야기는 북촌을 떠다닌다. 어젠지 오늘인지 낮 인지 밤인지 모호한 시간 속에서 딱히 사건이랄 것도 없는 일상이 반복된다. 똑같은 술집, 똑같은 멤버, 똑같은 얘기. 마치 끊임없이 반복되 고 있는 게 인생이라고 역설하는 것 같다. 전직 영화감독이자 현재는 지방대 교수로 있는 성준(유준상)과 성준의 선배 영호(김상중), 영호의 후배 보람(송선미) 그리고 성준의 옛 애인 을 닮은 술집주인 예전(김보경)이 영화의 주요인물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예의 그러하듯 술을 마시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쉴 새없이 이야기가 오간다. 그 속에 약간의 차이와 미묘한 변화가 있을 뿐이다. 보르헤스는 단편 <음모>에서 "운명은 반복되고, 변형되고, 병립하기도 하면서 계속 확장된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 나아가서 우주의 모든 현상들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비록 변형되고 확장된 형태이지만, 결국 반복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북촌방향> 역시 그러하다. 우연 "오늘 참 신기했어요. 제가 네 사람을 만났는데, 그것도 우연히 길거리에서. 한 사람은 영화감독, 한 사람은 영화제작자, 한 사람은 영화음악 하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가르치는 학생이에요. 다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이에요. 신기하지요? 그것도 모두 20분 안에 일어난 일이 라니까요!" 우연과 반복의 공간, 북촌으로의 여행 224

225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에요. 우연은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니까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우연에 둘러싸이고 접하고 스쳐가지만, 결국 우리 가 기억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들의 점들뿐이니까요." 보람(송선미)은 술을 마시다 그날 자신의 우연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성준(유준상)은 우연으로 가득 찬 우주의 원리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들은 하나의 우연은 대단치 않게 생각하지만 우연이 반복될 때는 그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고 기 억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기 전 우연히 성준은 보람이 말한 사람들을 차례대로 만난다. 다만 마직막이 학생이 아니라 자신의 팬이라는 사진 찍는 여자(고 현정)로 바뀌었을 뿐. 이처럼 이야기는 인과관계 대신 우연이란 매듭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막연히 모호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가능 성의 활로를 열어두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인연들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구성이 흥미롭다. 모호성 흑백화면은 시간의 모호성을 강화시키고 기억의 혼란을 초래한다. <오! 수정>(2000)이후 홍상수 감독의 두 번째 흑백영화 <북촌방향>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이게 하루의 일인지, 여러 날의 일인지, 같은 시간대에 일어난 일인지, 각각 다른 에피소드가 섞인 것인지, 데자뷰는 아 니었는지 의심스럽고 헷갈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늘상 있었던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마치 소설에서처럼 일상의 자잘한 것은 모두 잊고 큰 덩어리만 기억한다. 우리의 기억이란 늘 그렇게 혼돈과 미로 속 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북촌방향>의 주요 공간적 배경이 되고 있는 술집 이름이 '소설'이고, 성준의 옛 애인을 닮은 술집 주인의 이름이 '예전'인 것은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북촌방향>에서는 시간의 경계가 꼬여버리고, 일상과 비일상, 실재와 가상,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영화 속에서 성준의 첫 영화의 배우였던 중원역의 김의성은 실제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주연을 했고, 영화속에서 영호가 얘기하듯 베 트남에서 사업하다 망하고 돌아와 살이 많이 쪘다. 성준의 옛 애인 경진은 '소설'의 주인 예전(김보경, 1인 2역)의 모습으로 겹쳐진다. 경진이 예전인지 예전이 경진인지 모호하다. 음식을 사러 나간 예전을 성준이 따라가서 키스를 할 때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예전이 두 번째는 느닷없이 "오빠! 헤어지고 오는 거지요? 나한테?" 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준이 예전과 섹스를 끝내고 "난 네가 누군지 알 것 같다"고 말하자 예전은 "누군지 모를 텐데"라고 말한다. 이 여자는 도대 체 누구인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9)로 홍상수 감독과 처음 인연을 맺은 유준상은 <북촌 방향>에서 전직 영화 감독역할로 홍상수표 찌질남의 대를 잇 고 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기에 유준상의 실제 모습이 찌질하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스럽기도 하다. 영화는 재미나다. 소위 먹물들의 찌질 한 일상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들의 찌질한 일상을 보며 킥킥거리고 웃는 순간에도, 머릿속은 들뢰즈와 보르헤스를 비롯해서 반복, 차이, 시간, 우연, 기억, 재현과 같은 철학개념들을 찾아 바삐 움직인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손에 잡히는 건 없다. 이 영화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모든 감각적 행위들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 같다.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그게 홍상수표 영화의 매력이 아닐까. 성준이 낮술을 함께 마신 영화과 학생들에게 "따라하지 좀 마", "따라오지 마"라고 외치며 도망치는 장면은 누군가의 작품을 모방하는 그래서 특색없는 영화들이 양산되는 상황에 대한 비판인 것 같다. 또 자신은 누군가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는 상황은 영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마지막 장면에서 성준의 어색한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연과 반복의 공간, 북촌으로의 여행 225

226 북촌의 눈 내리는 어느 날의 풍경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풀어낸 듯한 <북촌방향>을 보노라니 문득 눈 내리는 겨울이 그립다. 지난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보름여 동안 촬영했다는데 흑백의 풍경에 침잠한 북촌 모습이 아주 정겹다 <오마이뉴스> 게재 우연과 반복의 공간, 북촌으로의 여행 226

227 51 다이내믹 코리아는 어디 있나요?

228 다이내믹 코리아는 어디 있나요? :01 [서평] <다이내믹 코리아를 찾아서> '다이내믹 코리아'는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만든 영문 슬로건이다. 주한 외국인, 상주 외신, 재외공관 및 정부 기관을 비롯하여 KBS의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까지 반영하여 선정했다고 한다. 역 동적이고 긍정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국가 이미지를 심고자 했으며, 외국인들에 게 한국의 잠재력을 잘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사전 참고) 그런데 다이내믹 코리아는 도대체 어떤 코리아일까? 역동적인 한국은 어떤 모습인 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칠팔십년 대의 산업현장이 떠오르기 도 하고, 물건들이 산적해 있는 항만의 컨테이너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데 수출 만 많이 한다고 다이내믹 코리아가 될까. 이런 모습은 단지 단편적인 하나의 현상 일 뿐이고 이것으로 역동적인 한국의 모습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각기 다른 분야를 전공한 대학 교수들이 다이내믹한 코리아를 찾아서 대한 민국의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살펴보면서 다가올 미래를 기획한 서책이 있다. 바로 <다이내믹 코리아를 찾아서>이다. 대표저자인 경북대의 김규종 교수를 비롯 한 13인의 대학교수들이 각자 자신의 분야 혹은 관심 있는 주제를 가지고 과거와 현재의 한국을 분석하여 미래의 발전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김규종 교수는 서문에서 우리의 지난날을 온전하게 기억하고, 명징하게 분석하여, 다가올 날을 예비하려는 것이 이 책의 출간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서책은 단순히 경제지표나 산업통계 등을 통해 우리나라의 미래모습을 설계하지는 않는 다. 그런 가시적인 것보다는 오리엔탈리즘, 다문화주의, 문명교류, 통일문제, 장자 연 사건과 재벌세습 등 사회 각 분야의 현상들을 통해 우리가 나아갈 바를 찾고자 한다. <다이내믹 코리아를 찾아서> 책 표지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이들에게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통달하고자 하면 남도 통달하게 해주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 논어의 말씀이다. 우리가 진정 세계시민이자 선진국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보다 조금 못한 사람들에게도 그럴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주어 야 한다. (줄임) 따라서 코리안 드림은 소극적인 면에서는 상호이해와 상호존중을 의미하며, 적극적인 면에서는 대외원조 확대와 다문화 확산 을 통한 상호소통을 뜻한다고 할 것이다. - 본문 33쪽 2010년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이주민 수가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영화 <깊고 푸른 밤>(1985)이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미국으로 불법이민을 떠난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이제는 동남아시아와 중국 등지에서 코리안 드림을 찾아 한국으로 노동자들이 몰려들고 있 다이내믹 코리아는 어디 있나요? 228

229 다. 육상효 감독의 <방가? 방가!>(2010)는 이런 이주노동자 문제를 코믹하지만 현실감 있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과연 한국은 그들에게 경제 적인 안정과 성공의 꿈을 실현해줄 나라인가?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맨 처음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와 '잘못했어요. 제발 때리지 마세요.' 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중소기업이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외국인 노동자들은 국내 산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우 리의 시선과 태도는 차갑기 그지없으며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다. 이에 대해 김규종 교수는 코리안 드림의 핵심은 대한민국과 한국인을 의지하려는 지구촌 시민에게 최대의 기회와 가능성을 베푸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소중한 가족의 일원이고, 인류의 미래를 짊어질 문화와 예술과 역사와 철학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망각하 지 말기를 부탁하고 있다. 그리고 편협한 국수주의와 애국주의가 아니라 세계시민주의로 최대한 열린 가슴으로 우리와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미국의 아류 한국 극복하기 2010년 8월 18일 경향신문의 '미국박사만 있는 국책연구소'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정부 산하기관 경제연구소의 박사급 연구위원들의 대다수가 미국에서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조사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전 세계의 동향을 객관적이고 주체적으로 분석하지 못하고 미국 편향의 획 일주의를 불러온다는 데서 우려되는 점이다. 한때 어느 분은 오렌지를 어륀쥐로 발음해야 한다며 영어교육을 강조하기도 했다. 현대 한국문화는 미국문화의 아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모든 분야의 모델은 미국에서 나오고, 미국이 보는 세계, 심 지어 미국이 보는 한국이 우리의 세계이자 한국이 된다. 미국에서 인정하는 한국만이 진정한 한국이 된다. 그래서 한국사나 한국어나 한국문 화의 연구자들도 미국에 가고, 그 분야 극소수 미국인의 평가를 애타게 고대하는 경향이 있다. - 본문 50쪽 박홍규 영남대 교수는 언제나 미국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한국에 대해 과거에는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못해 그럴 수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수량적 경제력이 세계 10위권 전후임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인 자기안목을 가지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더 미국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 점에 대해 심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박 교수는 오리엔탈리즘의 틀 속에서 굳어진 서양숭배나 서양절대주의에서 벗어나 서양의 지적 전통에 대한 철 저한 비판을 통한 자유-자치-자연의 존중에 근거한 새로운 주체적이고 진보적인 변화의 창조를 주장한다. 그리고 참된 문화상대주의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고 판단을 바꾸며 자기문화를 바꾸어나갈 가능성을 키우기를 바란다. 현대판 노예제 사회에 대한 일갈 이득재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장자연 사건과 재벌 세습 문제'를 통해 한국사회의 야만성과 후진성을 폭로하고 우리사회의 반성과 변화를 촉 구하고 있다. 이 교수는 장자연 성 상납, MBC <PD수첩>의 검찰스폰서 폭로, 연예인 스폰서 성 상납문제, 연예인 X파일 사건 등 한국 사회 에 성과 연관된 문제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궁극적으로 한국 사회가 사람장사를 부추기는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한국 사회가 급격하게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노동자를 사고파는 물건으로 생각하는 구조가 정착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점점 더 굳 어지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이교수는 보고 있다. 즉 낮에는 노동자가 매매상품으로 밤에는 여자가 성매매상품으로 거래되는 거대한 시장이 한국 사회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뒷면에 양육강식, 유전무죄, 지배와 복종, 주인과 노예의 원리들이 뒤섞여 작동하게 하는 권력의 음란성이 숨어있다고 이교수는 주장한다. 한국 사회가 정치적인 민주화의 과정에 있으면서도 도대체 세상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세습에 의해 유지 다이내믹 코리아는 어디 있나요? 229

230 보존되는 '가족유사성의 구조'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교수는 말한다. 이교수는 국가나 기업이 해야 할 몫을 가족에게 전가하는 '가족이 희망'이라는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죽을병에 걸려도 산재신청이 안 되는 것은 삼성이 그 문제를 가족의 문제로 바라보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은폐시키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사회에 형성된 구조적인 재벌 세습의 문제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한다. 인형 안에 인형이 들어가 있고 상자 안에 상자가 들어가 있는 이러한 세습구조의 가족적 유사성과 그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권력 망과 치외법권 지대에서, 장자연 자살 사건은 그야말로 아무 일도 아니다. 여러 개의 세습구조가 다층 구조를 이루어 근친상간적인 네 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이 음란한 법적인 공백 지대 안에서는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고 어떤 불법도 가능하다. -본문 173쪽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협력기구의 일원으로 도약했고, 1987년 이후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끈질기게 이뤄온 만만찮은 저력을 가진 대한민국. 그러나 아직 우리는 갈 길이 멀다. 20대 80의 치명적인 소득불균형, 나날이 심화되는 지역불균형과 세대 간의 단절, 점점 더 멀어지는 통일의 가능성 등을 극복해야 한다. <다이내믹 코리아를 찾아서>는 이런 모든 문제를 원점에서부터 사유하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전면적으로 모색하는데 유용한 서책이 될 듯 하다. 덧붙이는 글 <다이내믹 코리아를 찾아서>(김규종 외, 경북대학교 출판부, 2011년, 15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다이내믹 코리아는 어디 있나요? 230

231 52 버킷 리스트 작성해 보실래요

232 버킷 리스트 작성해 보실래요 :57 삶과 죽음을 사유하게 하는 드라마 <여인의 향기>... SBS 주말드라마 <여인의 향기>가 9월 11일 마지막 회를 맞아 소아암 환우들을 위한 특별한 콘서트를 연 다. 사진은 <여인의 향기> 속 한 장면. 전라남도 보성에 있는 대원사는 벚꽃길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소담스러운 절 풍경도 여느 사찰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 절 입구에 티벳 박물관이 있다. 티벳의 불교와 예술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입관체험이다. 평소 죽음을 잊고 사는 사람 들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삶을 더 의미있게 살라는 뜻인 것 같다. 지금 인터넷에서는 이연재 구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연재(김선아)와 어린 시절 상처를 안고 무기력한 삶을 살아오던 지욱(이동욱)의 조건 없는 무한사랑을 그린 드라마 <여인의 향기> 얘기다. 오늘(9월 11일) 마지막회를 방송하는 <여인의 향기>에서 여주인공 연재가 죽지 않고 오래 행복하게 살도록 해달라는 것이 시청자들의 바람이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죽는 것은 조금은 식상한 뻔한 스토리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공감을 얻는 것은 여느 드라마와 달리 죽음을 어 느 한 순간에 일어나는 불행이 아니라 깊이있게 사유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담낭암으로 시한부를 선고받은 연재 가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실천해 나가는 모습은 죽음을 새롭게 생각하게 한다. 버킷 리스트 작성해 보실래요 232

233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 SBS <여인의 향기>의 이연재(김선아 분)는 여행사의 평범한 직원으로 살다가 어느 날 담낭암 판정을 받 고 살날이 6개월 정도 남은 시한부 인생이 된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단지 현재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죽음을 먼 세상의 이야기로 치부하고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뿐. 삶의 옆에 항상 죽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산다. 그리고 죽음을 아주 낯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삶의 또 다른 형태이다. 드라마에서 연재가 시한부임을 알게 된 지욱은 헤어짐을 결심한다. 그러나 서로를 잊지 못하던 둘은 연재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다시 만 난다. 그리고 그녀를 잊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 지욱은 연재가 교통사고의 위험에 처하자 자신의 차로 마주오던 차를 들이받고 연재를 구한 다. 그 순간 지욱은 깨닫는다. 자신이 연재보다 먼저 죽을 수 있음을. 지금 영화관에 상영중인 애니메이션 <별을 쫓는 아이> 역시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삶도 죽음도 큰 흐름의 일부 라는 지하세계 노인의 말이나 삶은 그렇게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는 삶과 죽음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달라이 라마는 '죽음은 낡은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평소에 죽음을 미리 준비해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편안히 맞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재의 버킷 리스트는 그래서 의미 있다. 살아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가장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하면서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나만의 삶이 아니 라 주변 사람들과 이 사회와 얽힌 관계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던 봉사활동도 하고, 자신의 이기심으로 망친 엄마의 재혼도 다시 추진한다. 그리고 그 중 하루에 한 번씩 엄마를 웃게 하기는 가슴 찡한 부분이다.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소중하지만 또 그만큼 소홀히 대하는 사람도 엄마인 것 같다. 엄마에게 잘 해야겠 다는 생각을 새삼 일깨워준 공감백배 부분이다. 버킷 리스트 작성해 보실래요 233

234 버킷리스트 작성하기 SBS 드라마 <여인의 향기>에서 김선아와 이동욱은 아르헨티나의 전통 춤 탱고를 선보였다. 내 삶이 한 달 혹은 육 개월 남았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무엇을 가장 하고 싶고, 무엇을 해야 할까? 모건 프리먼과 잭 니콜슨이 주연한 영화 <버킷 리스트 : 죽기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2007) 역시 갑작스런 병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두 사람이 죽기 전에 버킷 리스트를 실천해 나 가는 모습이 나온다. 죽음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돌아보고 남은 시간동안 하고 싶던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꼭 병으로 시한부를 선고받아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일까? 교통사고를 당해 내가 연재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지욱의 말처럼 죽음을 준비도 하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과 이별해야 하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평소 삶과 죽음에 대 한 사유와 죽음이 다가왔을 때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다. 꼭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이 아니라도 누구나 자신의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 진지하게 내 삶이 육 개월 남았 다고 가정하고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보자. 내 삶을 돌아보고 나와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그리고 이 사회 속에서 나를 생각해보 자.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내 삶이 육 개월 남았다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누군가와 다투고 짜증낼 시간이 있을까. 인생이 무료하다고 투덜거릴 시간이 있을까. 그 시간에 보다 의미 있는 일, 가치 있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소중한 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좀 더 느끼고 향유하려고 하지 않을까. 제발 살아달라는 친구 은석에게 연재는 말한다. 버킷 리스트 작성해 보실래요 234

235 "나 살 거야, 죽을 때까지 열심히 살 거야."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불로초를 찾아 수만 리를 헤맨 진시황도 오십이 못 되어 죽었다. 세상 모든 것은 죽는다. 단지 누가 먼저 죽고 누가 나중에 죽는가의 차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흔히들 오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가는 것은 순서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준비는 삶의 시간이 제한돼 있음에 유념하면서 지금 자 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돌아보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연재의 지난 3개월이 그녀의 삶 에서 가장 빛나고 소중했던 것처럼. 오늘 밤 연재는 죽을 수도 있다. 혹은 시청자들의 바람대로 지금은 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죽겠지. 나는 이제 내 삶의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 볼 참이다. 그리고 하나씩 실천해 보려고 한다. 그러면 연재의 마지막 3개월이 그러했듯이 내 삶이 더 따뜻하고 뜻 깊고 의 미 있을 것 같다 오마이뉴스 게재 버킷 리스트 작성해 보실래요 235

236 53 푸르른 소금밭에서 길을 잃다

237 푸르른 소금밭에서 길을 잃다 :30 [리뷰] 이현승 감독의 <푸른 소금> 요리의 기본은 간이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가지고 먹음직스럽게 데코레이션을 잘 했다 해도 간이 맞지 않으면 그 요리는 잘 되었다 할 수 없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게 딱 맞게 간 된 음식을 먹으면 흐뭇하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간 잘된 영화는 보는 이를 흐뭇하게 한다. 탄탄한 서사구조에 적절한 긴장미, 거기에 아름다운 영상미까지 가미된다면 금상첨화다. <그대안의 블루>(1992),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1995), <시월애>(2000) 등을 통해 독특한 영상미학을 선보여온 이현승 감독의 최근작 <푸른 소금>은 좋은 재료를 가지고 먹음직스럽게 데코레이션 되었다. 이현승 감독 특유의 세련되고 화려한 영상미를 자랑한다. 그런데 숟가락을 들 고 맛을 본 순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이 맛은 뭐지? 개봉 첫 주 관객 수 36만 명의 박스 오피스 성적을 거둔 <푸른 소금>은 500개가 넘는 스크린에서 거둔 성적치고는 다소 저조하다. 송강호라 는 걸출한 배우와 떠오르는 샛별 신세경이 주연하고 천정명, 김민준을 비롯하여 이경영, 윤여정, 이종혁, 오달수, 김뢰하 등 내노라하는 배우 들이 양념으로 간을 맞추었지만 영화는 어쩐지 심심하고 맛이 없다. 서사가 사라진 화려한 영상미의 잔치 <그대안의 블루>를 시작으로 이현승 감독은 매 영화마다 푸른색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푸른색은 우울하고 쓸쓸하다. 짙푸른 인디고와 코발트 블루는 우울을 넘어 불안하고 슬프고 처연하기까지 하다. 피카소는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을 비롯한 청색시대 작품들을 통 해 짙은 인디고와 코발트 블루로 불안감과 슬픔을 표현하였다. 전직 조폭과 그를 죽이기 위해 고용된 암살자라는 남여 주인공의 관계는 우울하다. 더구나 사랑이든 우정이든 연민이든 그들 사이에 서로를 향한 감정이 생긴다면 그것은 우울함을 넘어 처연한 슬픔이 된다. 그러나 치고이네르바이젠의 바이올린처럼 처절하고 긴박해야 할 긴장감이 푸른빛에 멜랑콜리하게 녹아 버렸다. 아름다운 영상에 잠식되어 이야기가 사라진 영화는 간이 안 된 요리 같다. 전설적인 조폭으로 이름을 떨쳤던 두헌(송강호)과 그를 감시하다 결국 죽여야 하는 운명에 놓인 세빈(신세경). 그리고 그들 사이에 싹튼 애매모호한 정체불명의 감정이 영화를 끌고 가는 이야기의 전부다. 폭력조직의 연합체인 칠각계의 후계자로 지목될 만큼 전설적인 조폭이었던 두헌이 어떤 사연으로 폭력계에서 손을 씻고 부산으로 내려와 요 리를 배우고 식당을 하려고 하는지, 한때 비공인 아시아신기록까지 세운 사격선수였던 세빈은 왜 가족도 없이 혼자서 조폭에게 시달림을 당 하며 청부살인까지 해야 하는지 영화는 말이 없다. 다채로운 사랑의 빛깔 사랑과 사람은 받침 하나 차이다. 사랑이란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네모진 미음 받침을 둥근 이응으로 바꾸듯 자신의 각진 마음을 둥글게 다 듬어 상대를 끌어안는 일과 같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상대를 위해 맞추어 가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르른 소금밭에서 길을 잃다 237

238 두헌과 세빈의 마음은 뭘까? 인간관계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 니가 생각하는 사랑이 붉은 색이라면 자주색도 있고, 푸른색도 있고, 흰색도 있고, 검은색도 있고... 엄 청나게 많은 색깔이 있어. 원조교제를 하느냐는 애꾸(천정명)의 물음에 두헌은 이렇게 답한다. 두헌은 자신의 감정이 붉은색인지 푸른색인지 밝히지 않는다. 대신 행동 한다. 그녀가 입을 촌스러운 파란색 원피스와 그의 거실에서 신을 덧신을 사고, 생전 먹지 않던 달달한 카라멜 마끼아또를 함께 마시고, 그녀 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세빈의 친구 은정을 찾아 나선다. 노을이 지는 코발트빛 하늘과 염전. 가만히 서 있는 남자와 남자를 향해 총구를 겨눈 여자. 두 사람의 실루엣과 물 위에 비쳐진 그림자. 마치 데칼코마니를 보는 듯하다. 접었다 펴면 똑같아지는 미술작품처럼 두헌과 세빈은 서로에게 데칼코마니 같은 존재는 아닐까? 붉음과 푸름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때늦은 깨달음 세상에는 세 가지 금이 있다. 황금, 소금,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황금을 가장 좋아하지만 황금은 혼자서만 빛이 난다. 그러나 소금은 혼자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녹여 다른 재료의 맛을 살린다. 그리고 지금 두헌과 세빈은 소중한 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푸른 소금>이 되었다. <푸른 소금>의 영문제목인 hindsight는 foresight와 반대로 지나고 나서 뒤늦게 깨닫는 것, 즉 때늦은 지혜를 말한다. 자신의 감정은 붉은색 이 아니라고 하지만 세빈을 바라보던 두헌의 쓸쓸한 눈빛 속에 숨어있던 사랑을 때늦게 확인하는 것. 그것이 <푸른 소금>이 말하고 싶었던 hindsight는 아니었을까. 이현승 감독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하지만, 너무 많거나 적으면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소금처럼, 푸른 색 역시 밝음과 어두움을 동 시에 담고 있는 이중적인 색깔이다. <푸른 소금>은 한 가지로 규정되지 않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사랑의 감정을 의미한다." 라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감독의 이력이 말해주듯 빼어난 영상미는 뮤직비디오를 방불케 하고 장면 장면은 스틸사진을 찍어놓은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영상미가 아름답다해도 120분 동안 뮤직비디오를 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결국 조밀하지 못한 서사구조는 캐스팅에 한껏 공을 들인 화려한 조연들의 개성도 살리지 못한 채 푸르른 소금밭에서 헤매다 길을 잃었다. 푸르른 소금밭에서 길을 잃다 238

239 오마이뉴스 게재 푸르른 소금밭에서 길을 잃다 239

240 54 전설의 세계, 아가르타를 아시나요?

241 전설의 세계, 아가르타를 아시나요? :24 [리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별을 쫓는 아이> 유난히 비가 많이 와서 별을 볼 날이 많지 않았던 올 여름의 끝자락에 별처럼 다가온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 이션 <별을 쫓는 아이>이다. <별의 목소리>(2002)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초속 5센티미터>(2007)를 거치며 특유의 서정적이고 감 성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로 불리며 차세대 일본 애니메이션을 이끌어갈 천재 감독으로 평 가받고 있다. 영화 <별을 쫓는 아이>는 외로운 소녀 아스나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났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지하세계로부터 온 소년 슌과 이별한 후,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의 세계 '아가르타'에서 겪는 신비한 모험과 판타지를 그리고 있다. 영화는 일본의 창조신화와 그리스 신화, 아즈텍 과 마야 신화 등 세계 곳곳에 전해지는 다양한 신화를 바탕으로 한 뛰어난 서사와 따뜻하고도 화려한 색채감, 그리고 가슴을 울리는 서정성 을 보여준다. 빛의 마술사라 불리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유려하고 아름다운 배경화면 속에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신과 인간, 기억과 망각이라는 어렵 고도 심오한 철학적 문제를 섬세하고 깊이있게 그려냈다. 거기에 가슴깊이 파고드는 아름다운 음악까지 어우러진 영화가 바로 <별을 쫓는 아 이>이다. 만남과 헤어짐, 삶과 죽음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준 무선 전파기와 반짝이는 광석을 통해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음악을 듣게 된 아스나는 어느날 슌을 만난다. 별이 없 는 지하세계 아가르타에서 별을 보러 지상으로 온 슌에게 아스나는 처음으로 가슴떨림을 느낀다. 그러나 슌은 내일 다시 만나자는 아스나를 향해 "너를 축복할께. 어떻게든 살아줘"란 말을 남기고 밤하늘 가득 펼쳐진 은하수를 향해 손을 뻗치며 절벽에서 떨어진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회자정리( 會 者 定 離 )라 했던가.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를 잃어버리거나 소중한 누군가와 헤어질 수밖에 없다. 세상에 영원불멸한 것은 없음을 알아가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닐까. 하지만 아스나는 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죽음도 삶의 일부라고 말했 지만,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담담했던 엄마가 오열하던 모습을 떠올린다. 이별이란 누구에게나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헤어짐을 인정하지 못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담임선생의 출산휴가로 임시로 부임한 모리사키 선생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한다. 그래서 죽 은 이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아가르타를 찾아간다. 어떻게든 죽은 아내를 다시 살리겠다는 그는 삶도 죽음도 큰 흐름의 일부라는 아마우롯 마을의 만나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이자 축복이다 전설의 세계, 아가르타를 아시나요? 241

242 애니메이션 <별을 쫓는 아이>의 한 장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 와타나베는 '죽음은 삶의 대극( 對 極 )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라고 말 한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중심이고 느닷없이 다가오는 죽음이 낯설고 힘겨운 불청객이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삶의 옆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죽음 역시 삶의 또 다른 형태임을. 아스나는 자신이 이 여행을 왜 시작했는지 알지 못했다. 모리사키 선생이 "넌 왜 이 험난한 여행을 하니?"라고 물었을 때도 그 답을 알지 못 했다. 일행과 떨어져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아스나는 그 물음의 답을 찾는다. "내가 왜 여행을 했을까? 난 그냥, 외로웠던 거였어. 그래서 여행을 하고 싶었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그래, 이 마음이야'라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인간은 본원적으로 고독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닌 가. 겉으로는 씩씩했지만 아스나는 외로웠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간호사로 일하는 엄마는 늘 바빠 아스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리고 처음 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던 슌을 잃었다. 슌의 동생 신은 슌을 잊지 못하는 아스나에게 말한다. "상실을 받아들여. 그것이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야." "그래도 이별이 축복이 되는 때가 있지 않을까?" 여행을 마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스나는 깨닫는다.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하고, 삶은 죽음을 기약하기에 더욱 의미 있다는 것을. 소녀 의 외로운 감수성에서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전설의 세계, 아가르타를 아시나요? 242

243 애니메이션 <별을 쫓는 아이>의 한 장면. 어른이 된다는 건 상실과 이별의 의미를 알아간다는 뜻이다. 아스나의 엄마가 허공을 향해 내뿜는 담배 연기에 묻어있는 깊은 한숨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모리사키 선생은 결국 한쪽 눈을 잃는다. 아가르타의 끝 피나스테라에서 죽은 아내를 다시 만나지만 결국 그녀를 되살리진 못한다.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 지하세계로 내려갔던 오르페우스가 결국 혼자 돌아와야 했던 것처 럼.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인터뷰에서 "어른은 아이의 연장선 위에 있을 뿐,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어른이란 현실에 없습니다, 일본은 1980 년대 이후 공동체의 가치가 무너지면서 어른이 어른이 될 필요가 없는 사회가 됐습니다, 어린아이인 채로 늙어가도 상관없다는 분위기가 된 거죠" 라고 말했다. <별을 쫓는 아이>에서 아스나가 멀고 험한 여행을 통해 죽음을 이해하고 이별을 받아들이며 성숙해지는 반면, 모리사키는 몸만 어른일 뿐 정 신적으로는 어른이 되지 못한다. <별을 쫓는 아이>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그래서 객석의 관객들은 더 깊숙이 영화에 빠져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결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인생을 깊이있게 고민하는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다. <별을 쫓는 아이>는 지나치게 무겁 지는 않지만 <천공의 성 라퓨타>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토토로> 등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밝고 쾌활함은 없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흐르던 "Hello Goodbye and Hello"의 잔향과 함께 밤하늘 가득 펼쳐진 별들을 향해 손을 뻗던 슌의 모습이 오 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금. 오마이뉴스 게재 전설의 세계, 아가르타를 아시나요? 243

244 55 인류의 멸망은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245 인류의 멸망은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53 [리뷰]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의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 연구팀이 동물의 지능한계를 알아보기 위해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쳤다고 한다. 100여 개의 단어를 가르치고 이 단 어들을 결합하여 수화를 통해 어떤 의사표현을 하는지 알아본 실험에서 침팬지가 맨 처음으로 한 말은 "Let me out(나를 놓아줘)"이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인간과 침팬지는 유전적으로 98.4퍼센트가 똑같으며 약 500만 년 전에 공통 조상에서 분리되어 독자적 진화의 길을 걸어왔다고 추정된다. 이 것은 얼룩말과 말의 유전적 차이보다도 작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작은 차이의 결과는 실로 엄청나다. 어린 시절 토요일, 일요일이면 졸린 눈을 비벼가며 밤늦게까지 기다려 MBC의 <주말의 명화>나 KBS의 <명화극장>에서 방영했던 영화를 보 았던 기억이 난다. <혹성탈출> 역시 그 때 보았던 많은 영화 중 한 편이었다. 영화 <벤허>의 주인공이었던 찰턴 헤스턴이 유인원이 지배하는 혹성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결국 그 곳이 지구였음을 깨닫고는 "맙소사 돌아왔 어. 내 고향이야. 여긴 지구였어. 정말 전쟁을 일으켰군. 이 미친놈들, 결국 지구를 날렸어! 저주한다! 모두 지옥으로 꺼져!"라고 했던 마지막 반전대사가 아주 인상적이었던 영화다. 최근 개봉한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은 프랑크 J. 샤프너 감독의 1968년 작 <혹성탈출(Planet of the Apes)>을 비롯한 7편 시리즈의 프리퀄(원작 이전의 일을 다룬 것)이라 할 수 있다. 찰턴 헤스턴의 <혹성탈출>이 인류의 멸망원인으로 핵무 기를 얘기했다면 최근작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인간의 면역체계를 교란시키는 바이러스의 감염을 다루고 있다. 몇 편의 단편을 거쳐 <탈옥자(Escapist)>로 데뷔한 신예감독 루퍼트 와이어트가 메가폰을 잡았다. <아바타>, <반지의 제왕> 등을 탄생시킨 웨타 디지털의 특수효과와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 <킹콩>에서 '킹콩'으로 생생한 모션 캡처 연기를 보여주었던 앤디 서키스의 뛰어난 표정 연기가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다. 인간에겐 무슨 권리가 있는가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전작들에서 유인원이 어떻게 지구와 인간을 지배 하게 되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인간이 아닌 침팬지 시저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열대의 울창한 밀림 속에서 평화롭던 침팬지 무리 앞에 총으로 무장한 일군의 사냥꾼들이 나타난다.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던 침팬지의 일부가 사냥꾼들이 놓은 덫에 걸린다. 그리고 그들은 쇠창살 우리에 실려 바다를 건너 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소름이 돋는다. 인간은 누구로부터 어떤 권리를 부여 받았기에 다른 생명체에 대해 저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영화가 끝 인류의 멸망은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245

246 나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비단 동물뿐이겠는가. 과거 오랫동안 인간은 같은 인 간을 저렇게 포획하여 사고팔지 않았던가. 잡혀온 침팬지들은 제약회사의 임상실험 대상이 된다. 알츠하이머 치료약 개발 에 침팬지를 이용하던 도중 소동이 일어나고 실험실에 있던 모든 침팬지들은 안락사 당한다. 그러나 과학자 윌(제임스 프랭코)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새끼 침팬지 시저(앤디 서키스)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와 키우게 된다. <논어> '안연' 편에서 공자는 '기소불욕물시어인( 己 所 不 欲 勿 施 於 人 )'이라 하였 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의미다. 비단 이 구절이 사람에게만 해당되고 말 못하는 짐승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인가. 인간의 질 병을 고친다는 명목 하에 제약회사는 수많은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들을 억압하고 죽인다. 그러나 본질은 돈벌이다. 돈벌이를 위해 자연에서 평화롭게 살던 동물들을 동물원의 좁은 우리로 몰아넣고, 돈벌이를 위해 동물들을 대상으 로 실험을 가한다. 또 돈벌이를 위해 개발이라는 허울좋은 미명으로 곳곳에서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 가? 누가 그런 권리를 인간에게 주었단 말인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면 안 돼! 치매인 윌의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이웃을 공격한 시저는 결국 유인원 보호소로 보내진다. 시저는 그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한다. 사람의 집에서 사람과 같이 밥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고 살았지만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침팬지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억압받는 유 인원들의 처지에 분노한다. 시저와 유인원 무리는 보호소를 탈출하여 유인원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던 제약회사를 공격한다. 그러나 시저의 목표는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잔인한 인간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안식처를 찾는 것이었다. 금문교 위에서 인간들은 유인원들을 한쪽으로 몰아서 모두 죽 이려고 했지만, 시저는 인간을 죽이려는 무리를 막아선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을 시저는 보여주었다. 무리를 이끌고 시저가 향하는 곳은 금문교 너머에 있는 삼나무 숲이다. 바다 건너로 인간의 도시가 보이는 숲. 집으로 가자는 윌에게 시저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시저의 집은 여기야"이다. 수의사이자 윌의 아내인 캐롤라인이 윌에게 했던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면 안 돼"라는 말의 의미를 시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저는 늘 그랬듯이 삼나무 꼭대기에 올라 금문교 너머에 있는 인간의 도시를 바라다본다. 인간의 세계로부터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통 해 인간과 동물, 문명과 자연이 공존하는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멋진 장면이다. 결국 인류의 멸망은 시저와 같은 지능이 발달된 유인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잘못, 인간의 탐욕으로 빚어진 결과다. 엔딩 크레 딧에 지구 전체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항공노선을 따라 바이러스의 이동경로가 나타난다. 마치 몇 년 전 사스 바이러스나 신종플루가 전 세 계로 퍼져 나간 것처럼... 부디 지구를, 자연을, 동물을 괴롭히지 말자 인류의 멸망은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246

247 몇 달 전 영국에서 의약품 개발을 위해 생체실험에 동원되는 토끼들의 참상이 폭로돼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영국 생체실험 반대연합 (BUAV)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그동안 잔인한 동물실험에 반대해 왔다. 그리고 유럽의회는 지난해 9월 동물실험을 엄격히 제한하는 내용의 동물복지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유럽의회가 승인한 법안에 따르면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을 이용한 실험은 사실상 전면 금지되며 그 이외의 영장류를 이용한 실험도 암, 알츠하이머 등 질병 연구와 기초과학 등으로 엄격히 제한되고, 동물실험이 불가피할 때도 그로 말미암아 동물이 겪을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 도록 해야 한다. 지금껏 인간이 지구에서 한 일은 자연을 소비하고 파괴하는 것이었다. 인도양의 모리셔스섬에 살았던 도도새는 인간이 섬에 발을 들여놓은 지 7년 만인 1693년에 멸종했다. 남아프리카 남서부 케이프에 살았던 파란영양은 희귀한 파란 색의 모피 때문에 사냥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살육당한 결과 1800년에 멸종했다. 영국의 환경학자 노만 마이어스는 1990년대 초에 인간 때문에 멸종하는 동식물의 수가 일주일에 600종이 라고 주장했다.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인간의 탐욕이 불러올 재앙에 대해 말하고 있다. 침팬지의 진화가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빌미는 인간에게서 비롯되었다. 인간이 스스로 욕심을 제어하고 무분별한 자연파괴 등을 일삼지 않는다면 영 화는 영화에서 끝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먼 훗날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인간들이여. 부디 지구를, 자연을, 동물을 괴롭히지 말고 그대로 두자 목. 오마이뉴스 게재 인류의 멸망은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247

248 56 '학살'의 대명사 나치, 그 원조는 미국이었다

249 '학살'의 대명사 나치, 그 원조는 미국이었다 :28 [서평] 토착민이 쓴 인디언 절멸사 <그들이 온 이후> 우리 어머니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는 서부영화다. 특히 존 웨인이나 게리 쿠퍼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신다. 그런데 서부영화의 공식은 딱 한 가지다. 권선징악. 주인공인 백인은 용감하고 정의롭다. 반면에 주인공을 괴롭히는 인디언은 거의 언제나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호전적이 다. 19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디언을 바라보는 시각에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대표적인 영화가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늑대와 춤을>이다. 야만적인 악당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서부 수족의 순수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늑대와 춤을>에 나온, 시보다도 아름다운 수족의 기도문 일부를 보자.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의 노을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이 모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춰둔 교훈을 내가 깨닫게 하소서/ 다른 형제들보 다 내가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나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다할 때 내 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 품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소서 서부영화에서 보았던 잔인하고 야만적인 모습이 느껴지는가. 지난 300년 동안 백인들은 그들의 신대륙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미개척지 대 륙을 개척하고 야만인을 개화시키는 선한 이미지로 자신들을 포장하고 왜곡해왔다. 우리는 지금껏 강자의 이야기만 들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내주고 결국 절멸에 이른 토착민들의 가슴 아픈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치의 ' 원조' 는 콜럼버스 북아메리카 토착민으로 크리크족(부계)과 체로키족(모계) 혈통을 지닌 워드 처칠은 <그들이 온 이후>를 통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던 콜럼버스와 미국에 대한 통념을 산산이 깨뜨린다. 세상 사람들은 콜럼부스를 신대륙의 발견자라 하여 어린이 위인전기에 나오는 위인으로 부 르지만 저자는 콜럼부스를 '원조 나치'라고 부른다. 이유는 뭘까?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간 콜럼버스는 다음해 17척의 군함을 이끌고 다시 에스파뇰라섬(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 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토착 타이노족을 노예화하고 멸종시키는 정책에 착수했다. 이 정책으로 1493년에 800만이었던 타이노족은 1496년에는 300만, 1500년경에는 10만으로 인구가 감소했다. 그리고 1542년에는 겨우 200명 남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이들은 콜럼버 스가 처음 도착했을 당시 1500만 명에 달했던 카리브해 전역의 다른 인디언들과 함께 멸종되었다(본문 18쪽, 35쪽). 콜럼버스 친구의 아들로 아메리카 최초의 성직자였던 라스카사스가 쓴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에는 이들이 원주민들에 대해 얼마 나 잔혹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등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1억 명 이상의 원주민들이 학살 되었다. 과연 콜럼버스는 영웅인가? 스페인 사람들은 누가 한칼에 사람을 두 쪽 내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내장을 꺼낼 수 있느냐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 그들은 젖먹이 아기의 발 '학살'의 대명사 나치, 그 원조는 미국이었다 249

250 을 잡아 엄마 품에서 떼어내어 머리를 바위에 내동댕이쳤다. (줄임)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들을 함께 칼로 찔러 꼬챙이처럼 꿰기도 했다. - 본 문 20쪽 아메리칸 드림? 흥!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만이 주연했던 영화 <파 앤드 어웨이(Far and Away)>(1992)는 "그들은 꿈이라 했고,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사랑이라 부른다"라는 포스터의 문구와 함께 낭만적인 사랑의 대서사시로 기억되는 영화이다. 누구라도 말을 타고 먼저 가서 깃발만 꽂으면 내 땅이 된다며 아메리칸 드림을 얘기했던 그 영화. 그런데 그 땅은 원래 누구의 땅이었을까? 비어 있던 땅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1820~1830년대 미국은 토착민 전체를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강제소개( 强 制 疏 開 )함으로써, 미국 동부지방을 '청소'하여 백인 정착민들의 식민지역으로 만드는 정책에 착수했다. 백인 정착민들에게 땅을 빼 앗긴 체로키족은 1500마일의 '눈물의 행로'를 따라 강제 이송되면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본문 37쪽). 흔히 교회 성가로 알려져 있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는 '눈물의 행로'에서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토착민 체로키족의 피맺 힌 기도의 노래이다. 영화에서 톰 크루즈가 깃발을 꽂은 그 땅이 바로 이들이 쫓겨난 곳이다. 그러나 영화는 톰 크루즈의 꿈만 보여주고 처 절하게 죽어간 토착민들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히틀러는 생활권정책이라 하여 유대인들을 게토에 몰아넣고, 나중에는 아우슈비츠, 다하우, 부헨발트, 작센하우젠 등에 세워진 약 150개의 수 용소에 강제이주시킨 후 학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는 약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전쟁 후 미국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나치독일의 지도층을 '침략전쟁', '반인도주의 범죄' 혐의로 대부분을 처형하거나 투옥시키면서 전 세 계에 '백인기사'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독일의 이 생활권정책이 아메리카 토착민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따라한 것 이라고 아돌프 히틀러가 분명히 밝혔다는 점이다(본문 60~61쪽). 나치보다 더한 미국 UN이 채택한 제노사이드 조약 제2조는 국민 인종 민족 종교집단 전체 또는 부분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집 단 구성원에 대해 육체적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게 고의로 부과하는 것, 집단 내에서의 출생을 방지하기 위해 의도된 처치를 부과하는 것, 집단의 아동을 강제적으로 타 집단에 이동시키는 것이 제노사이드에 포함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뺏기 위해 그들을 학살했다. '운디드니 학살'을 비롯한 수많은 학살을 통해 백인들은 땅을 빼앗고 인디언들 을 좁은 '보호구역'으로 몰아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1970년대에는 인디언 가임여성의 약 40%를 대상으로 강제적 불임 프로그램을 시행하여 토착민을 말살하고자 했다. 또한 토착민의 사회문화적 일체성을 파괴하기 위해 인디언 아기들을 비인디언 가정에 입양시켜 인디언 혈통이 밝혀지지 못하도록 하였고, 어 린이들을 자기 집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기숙학교에 강제로 보내 10년 넘게 기숙사에서 살게 하면서 인디언 말이나 종교의식을 금지시켜 정 체성을 찾지 못하도록 하였다(본문 40~41쪽, 299~301쪽). 미 연방정부의 통계에 따르더라도 인디언들은 북아메리카 전체 인구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실업률은 가장 높고 취업을 해도 급여수준이 가장 낮으며 교육수준이 가장 낮다. 그 결과로 인디언들은 영양실조, 당뇨병 및 결핵 발병률, 유아사망률, 전염병 발생률이 가장 높다. 1980년에 보 호구역에 사는 토착민 남성의 평균기대수명은 44.6세, 여성은 그보다 3세 많았다.(43 ~ 44쪽, 301쪽) '학살'의 대명사 나치, 그 원조는 미국이었다 250

251 저자는 수많은 통계와 자료, 그리고 각종 기록을 통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토착민을 절멸시키려는 미국의 오랜 시도를 논리적으로 전개 하고 있다. 자신을 '토착민주의자'라 밝힌 저자는 인디언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토착민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토착민주의는 자연에 순응하며 타인을 존중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관이라고 설명한다. 최근 중국을 방문한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쓰촨대 강연에서 중국의 인권문제를 언급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은 그동안 북미 관계를 개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북한 내 인권문제를 꼽아 왔다. 그런데 과연 미국이 다른 나라의 인권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고사하고 자국 내 토착 인디언들에게 행했던 수많은 학살과 탄압에 대해 미국은 어떠한 반성의 기미도 없다. 남에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미국. 자기 눈의 들보부터 뽑고 남의 눈의 티를 빼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그들이 온 이후>(워드 처칠 씀, 황건 옮김, 당대 펴냄, 2010년, 19000원) <오마이뉴스> 게재 '학살'의 대명사 나치, 그 원조는 미국이었다 251

252 57 생각없이 보라는 영화... 마지막 자막에 '헉'

253 생각없이 보라는 영화... 마지막 자막에 '헉' :20 [리뷰] 김한민 감독의 ' 액션활극' ' <최종병기< 활> 국제양궁연맹(FITA)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단체전과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딴 김수녕을 '20세기 최고의 선수'로 선정하였다. 김수녕은 올림픽에 서만 금메달 네 개, 은메달 한 개, 동메달 한 개를 획득하면서 그야말로 신궁으로 불린 우리나라의 대표궁사이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서향 순이 금메달을 따면서부터 우리나라는 양궁부문 최정상을 지켜왔다. 2008년 북경 올림픽 당시 중국 언론들은 "한국 양궁, 이길 방법이 없 다"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후한서> 등의 중국 사서에서는 우리 민족을 동이( 東 夷 )라고 불렀다. 중국 중심의 관점에서 변방의 이민족들을 동이( 東 夷 ), 남만( 南 蠻 ), 서융 ( 西 戎 ), 북적( 北 狄 ) 등으로 불렀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민족은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큰 대( 大 )자에 활 궁( 弓 )자를 합하여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이란 의미로 동이( 東 夷 )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극락도 살인사건>으로 데뷔한 김한민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최종병기 활>(이하 활)이 2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며 인기몰이에 나서고 있 는 것도 어쩌면 우리 피 속에 신궁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영화의 인기 때문인지 인터넷에도 <활>에 대한 리뷰 들이 많이 올라와 있다. 대부분은 스릴 넘치는 액션 활극이라는데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다들 손에 땀을 쥐며 두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백성을 버린 임금은 더 이상 임금이 아니다 <활>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저물어가는 명과 새로이 떠오르는 청 사이에서 균 형감 있는 중립외교를 펼치며 실리를 추구했지만, 당시의 조선 조정은 이런 국제적 시각보다는 자신들의 권력획득에만 몰두하였고, 숭명배금 과 광해군의 패륜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서인세력은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등극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영화는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광해군 편에 섰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남은 남이(박해일)와 자인(문채원)은 개성에 사는 아버지의 친구 김 무선(이경영)의 집에서 숨어 살게 된다. 13년의 세월이 흘러 1636년 자인과 김무선의 아들 서군(김무열)의 혼롓날,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면 서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자인과 서군은 백성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간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청나라의 군대가 침입해 와도, 백성들이 끌려 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의 상태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636년 12월 1일 심양을 출발한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평양, 개성을 지나 한양근교에 이르기까지는 단 열흘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12월 13일이 되어서야 청군의 침입사실을 알게 되고, 그 다음 날 바로 임금이 피난을 떠나니 이를 온전한 나라라 볼 수 있을까.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와 조정은 결국 포위된 지 45일 만에 청 태종 앞에 무릎 꿇고 삼전도에서 항복하게 된다. 맹자는 '민위귀 사직차지 군위경( 民 爲 貴 社 稷 次 之 君 爲 輕 )' 즉 '백성이 귀중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임금은 대단치 아니하다'라고 하였건만 생각없이 보라는 영화... 마지막 자막에 '헉' 253

254 임진왜란 때도, 병자호란 때도 조선의 왕들은 백성을 돌보지 않았다. 그저 제 한 몸 숨기고 도망치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이러한 역사를 본받아 국민들에게는 '국군이 반격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방송을 내보내 고 자신은 한강철교를 끊은 뒤 부산으로 피난하지 않았던가. 영화 <최종병기 활> c 다세포클럽, 디씨지플러스 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영화에서 남이도 말하지만 백성을 버린 임금을 임금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는 역사성이나 역 사의식에 큰 무게감을 두고 있지는 않다. 백성들의 목숨은 나라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 스스로 지키고 살아남아야 하니 그래서 아마 도 제목이 '활( 活 )'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남이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활 하나만을 들고서 청나라 군대에 끌려간 여동생을 찾아야 한다. 자인을 구출하기 위해 청나라 왕자 도르곤(박기웅)을 살해한 남이를 쫓는 청나라 명궁 쥬신타(류승룡)와 그의 정예부대 니루의 추격장면은 쟁여진 활의 시위처럼 팽팽했다. 이 팽팽함을 배가시키는 것은 음향효과였다. 남이가 숨죽이고 활을 당길 때 나는 파찰음, 활시위를 떠난 화 살이 바람을 가르고 청나라 군사의 가슴팍을 꿰뚫는 타격음, 쥬신타가 쓰는 활촉만 여섯 량(약 240g)인 '육량시'의 묵직한 진공음은 객석의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일등공신이다. 또한 남이의 궁술은 경이로웠다. 방향을 알 수 없게 휘어오는 곡사술에서는 <원티드>의 안젤리나 졸리가 떠올랐고, 화살수를 계산하며 화살 하나로 두 명을 넘어뜨리는 장면에서는 <반지의 제왕> 레골라스의 화신인 듯싶었다. 쥬신타의 화살이 팔다리를 절단하는 무시무시한 파괴력 을 지녔다면 남이의 화살은 가볍고 날렵하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유약승강강( 柔 弱 勝 剛 强 )'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바람부는 평원, 자인을 사이에 두고 남이의 활과 쥬신타의 활이 서로 를 응시한다. 남이는 아버지가 남긴 "두려움은 직시하면 그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를 되뇌며 최후의 화살을 날린 생각없이 보라는 영화... 마지막 자막에 '헉' 254

255 다. <활>은 시종일관 가슴 떨리는 긴장감과 속도감으로 객석을 압도한다. 쥬신타를 비롯한 청나라 군대가 만주어를 사용하고 남이와 자인도 그들 과 만주어로 대화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지금은 거의 사어가 되어버린 만주어를 되살려낸 감독의 열의는 박 수 받을 만하다. 하지만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 12월(양력으로 1월)의 일인데 자인의 혼례식이 겨울 아닌 가을날의 풍경을 담고 있는 모습은 디테일에 약한 블록버스터 영화의 묘미라고 해야 할까? 또한 느닷없이 나타나 남이의 수호신이 되는 호랑이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작품에서 결말을 짓거나 갈등을 풀기 위해 뜬금없는 사건을 일으키는 플롯 장치)'가 아닐까? 영화 <최종병기 활> c 다세포클럽, 디씨지플러스 활 21세기형 병자호란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김한민 감독은 인터뷰에서 <활>의 관전 포인트를 "거두절미하고 마음을 내려놓고 그리고 생각을 많이 하지 말고, 의자에 앉아서 온몸을 맡기 고 화면과 소리에 젖어들면 된다"고 말한다. 감독의 말처럼 깊은 고민이나 사색 없이, 숨 가쁘게 뛰고 쫓는 속도감에 몸과 정신을 맡기고 그 속에 빠지기만 하면 이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고 나오기에는 마지막 자막이 뒷덜미를 잡는다. 병자호란 기간동안 50만 명의 조선인들이 인질과 포로로 끌려갔지만 송환은 없었다. 다만, 소수만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왔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하면서 20세기 세계를 제패했던 미국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반면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력에서도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생각없이 보라는 영화... 마지막 자막에 '헉' 255

256 그러나 한국의 집권세력은 1636년의 인조와 조선 조정처럼 지금도 오로지 미국만 바라보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21세기형 병자호란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실리를 추구한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절실하다 (목) 오마이뉴스 메인 게재 두번째 영화평...^^ 생각없이 보라는 영화... 마지막 자막에 '헉' 256

257 58 목구멍 속에 박힌 칼, 당신은 어떻게 빼낼 텐가

258 목구멍 속에 박힌 칼, 당신은 어떻게 빼낼 텐가 :45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 전쟁과 증오, 그리고 용서 영화 <그을린 사랑>의 한 장면 그을린 사랑 개봉 3주 만에 3만 5000명의 관객이 찾은 캐나다 영화 <그을린 사랑>(원제 Incendies)이 조용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화제작으로, 그리고 올해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주목을 받은 < 그을린 사랑>은 <지구에서의 8월 32일>(1998)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및 토론토영화제 등 35개 국제 영화제에 초 청되며 화려하게 데뷔한 천재감독 드니 빌뇌브의 작품이다. <그을린 사랑>은 작품성과 흥행 면에서 전 세계의 극찬을 받은 와이디 무아와드의 연극 'Incendies'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제는 '그을린'이지만 한국에서는 <그을린 사랑>,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노래하는 여인>, 스칸디나비아에서는 < 나왈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다. 그리스 신화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하는 <그을린 사랑>은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 던져진 한 여인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목구멍 속에 박힌 칼, 그것은 과거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난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하겠고, 끝내 진실을 보아야만 하겠다"고 말하는 오이디푸스처럼 진실을 아는 것은 그것이 결국 비극적 운명을 드러내는 행위일지라도 멈출 수가 없다. 어머니 나왈의 유언에 따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아 중동으로 떠난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은 어머니의 과거를 추적 하면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처참한 비극과 맞닥뜨린다. 목구멍 속에 박힌 칼, 당신은 어떻게 빼낼 텐가 258

259 "사람이 죽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모두 흔적을 남긴다. 과거란 목구멍 속에 박힌 칼처럼 빼내기 힘든 것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이 한 마디를 통해 영화의 실체를 드러낸다. 수학자인 잔느에게 '1+1=1'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어머니 나왈의 목구멍에 칼처럼 박힌 과거이자 자신의 현재와 미래인 것이다. < 그을린 사랑>은 전쟁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처절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레바논 내전을 추측하게 하면서도 영화는 정확한 시대와 장소를 드러내지 않는다. 기원전 3000년 경부터 페니키아인들 이 도시국가를 세웠던 곳인 레바논은 194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줄곧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의 정권쟁탈을 위한 갈등과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곳이다. 여기에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주변 아랍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레바논은 어느 한 순간도 편안할 날이 없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인터뷰에서 "원작은 레바논 내전과 관련한 실제의 사건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분노의 연쇄 고리 라는 주제에 보편적인 힘을 부여하기 위해 실제 사건들을 시적으로 변용했다. 영화로 각색하면서 나는 정치적으로 중립 의 입장을 지키는 데 힘을 쏟았다. 주제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비정치적이어야만 했다"라고 밝혔다. 그만큼 레바 논과 주변 중동의 정세는 예민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텅 빈 듯한 커다란 눈망울 속에 분노와 애수를 담은 어린 소년이 화면을 뚫을 듯이 응시하고 있다. 그 눈빛 사이로 라 디오헤드의 'You and Whose Army?'가 흘러나오는 오프닝은 꽤나 강렬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종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에 대한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무수한 전쟁의 중심에는 종교가 있었다. 그 무수 한 살육의 현장에서 종교는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는가 라는 의문이 남았다. " 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왜 이래야 합니까" 영화 <그을린 사랑>의 한 장면 그을린 사랑 한국전쟁을 다룬 최근의 영화 <고지전>에서 북한군 중대장 현정윤이 생사의 기로에서 은표에게 말한다. "나도 처음에는 목구멍 속에 박힌 칼, 당신은 어떻게 빼낼 텐가 259

260 분명히 알았더랬어. 왜 우리가 싸우는지 말이야. 근데 하도 오래 싸우다보니까 왜 싸우는지 그걸 잊어버리고 말았지"라 고... 인류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산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전쟁이 있어왔지만 그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알까? 왜 전 쟁을 하며 왜 싸우고 있는지를? 증오가 증오를 낳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 끔찍한 악몽의 순환 고리를 끊는 것은 결국 모성에서 비롯된 용서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사람이다. 전쟁에서 비롯된 처절한 비극적 운명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결국 나왈의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라는 한 마디이다. 진실을 알게 됨으로써 고통은 따르지만 그로 인해 잔느와 시몽은 자유로워지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깊이가 생긴다.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흡입력 있게 관객을 몰아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객석에는 움직 임이 없었다. 모래먼지 이는 황량한 벌판의 살육 현장이 끔찍했다면, 평화롭게 보이는 수영장 장면에서는 전율이 느껴졌 다. 나왈의 할머니가 부절처럼 새겨놓은 발뒷꿈치의 점 세개를 확인하는 순간 온몸에 흐르던 그 전율. 지금도 세상 어딘 가에서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런 비극적 운명들이 되풀이되고 있지 않겠는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리비아와 시리아 등 세계는 아직도 전쟁 중이다. 또한 연평도에서는 며칠 전에도 포성이 울렸 다. 종결되지 않은 전쟁의 시간을 살면서 누구라도 전쟁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누군들 그 끔찍한 악몽에서 자신은 비껴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가? 마지막으로 영국 폭동에서 아들을 잃은 무슬림 타지크 라한의 눈물진 호소를 되 새겨 보고 싶다. "나는 아들을 방금 잃었습니다. 하지만 흑인이든 아시아인이든 백인이든 우리는 모든 같은 지역 사회에 함께 살고 있습 니다. 왜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합니까. 왜 우리는 이런 일을 저지릅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앞으로 나와보십시오. 자신의 아들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장 앞으로 나와보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이제 자제하고, 집으로 돌아갑시다. 부탁입니다. 제발." <덧붙이는 글 > <그을린 사랑>에서 감독은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어머니의 유언장을 공증한 공증인의 사 무실에 3대째 보관된 개인기록들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전쟁 중에 불탄 고아원에서 나온 기록들이 국립기록보존소에서 온전히 보관되는 모습 등 영화 곳곳에서 감독은 진실을 찾기 위한 장치로 기록을 남겨둔다. 전쟁 중의 상황에서도 기록 을 보존하려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기록연구사로서 우리의 기록관리에 대한 무관심을 반성해 본다. <오마이뉴스> 게재 나의 첫 번째 공식 영화평이다. <오마이뉴스>에서 으뜸기사로 채택해 주었다. 흐뭇하다. ㅋㅋㅋ 목구멍 속에 박힌 칼, 당신은 어떻게 빼낼 텐가 260

261 기록연구사의 책과 영화 이야기 Welcome to my Ireland 아나스타샤 :37:02 블로그 저자 발행일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와 전재를 금합니다.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차례 1~3쪽 머리말 4 1. 계대 연구자료 7 가. 증 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진공 사적기 7 나. 족보 변천사항 9 1) 1416년 진양부원군 신도비 음기(陰記)상의 자손록 9 2) 1605년 을사보 9 3) 1698년 무인 중수보 9 4) 1719년 기해보 10 5) 1999년 판윤공 파보 10 - 계대 10 - 근거 사서 11 (1) 고려사 척록(高麗史摭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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