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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목 차 ] 제1강(5/21)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7 제2강(5/28)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37 제3강(6/4) 남강 이승훈의 신앙 61 제4강(6/11) 이동휘의 생애 104 제5강(6/18)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125 제6강(6/25)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147 제7강(7/2) 1)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173 제8강(7/9) 역사란 무엇인가? 203 1) 7월 2일 강좌는 여운형의 생애와 신앙 으로 진행되었으며, 강사의 사정에 의해 기독교 신앙인 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원고로 대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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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역사 속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한국근현대사 제 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 강사 : 이 만 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2009년 5월 21일(목) 저녁 7시 서울YMCA 친교실(2층) 주최 : 서울Y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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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 한국기독교 민족운동 의 개념화를 위한 시론 이 만 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1. 머리말 기독교는 1880년대, 외국 선교사 주도로 전파된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선진적인 한국인들에 의해서 한국에 수용되었다. 한반도 주변에까지 전파된 기독 교는, 만주와 일본에서 성경의 일부가 번역되고, 그 곳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용기 있는 한국인들이 그 번역된 성경을 한국에 전함으로 비로소 개종의 역사가 일어 났다. 2)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는 외국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하여 수용하게 되 었지만, 한국의 경우는 한국인 스스로가 먼저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기독교의 역사에는 수용 초기부터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돋보였다. 기독교 수용의 이같은 특징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성격을 해명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기독교 수용에서 한국인들의 자기 필요성에 의한 측면이 강조될 수 있다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그들이 처한 상황과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연역될 수 있다. 그 필요는 영적 세계에 그치지 않고 민족공동체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었을 것이고 그 점에서도 활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가 초기부터 한국 사회의 시대적 과제와 맞물려 교호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 교호작용은 한 세기에 걸친 한국의 민족운동 그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수용된 이후 한국 사회는 여러 가지로 변화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 었다. 중세사회의 전통적인 유습을 개혁해야 한다는 수용당시의 당면한 과제에서 부터 시작하여, 한말에는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국권을 수호해야 했으며, 일제 강점하에서는 국권회복 민족독립이라는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식민지적 유제 청산을 비롯하여 민족적 전통의 창조적 회복과 통일된 민주국가의 2) 이 점에 대해서는 백낙준 김양선 등 여러 선학들이 증언해 온 것이지만, 필자가 1880년대 서 간도 한인촌 기독교공동체 연구 ( 한국 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등의 논문에 서 정밀하게 밝힌 것이며, 최근 한국의 기독교 수용과 그 특징 ( 亞 細 亞 硏 究 44호, 고려대 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에서 다시 정리한 바 있다

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건설해야 하는 등 중층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해방 초기의 식민 지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적인 과제는 독재 군사 정권 아래서는 인권 신장 민 주화의 과제로 발전되었으며, 분단이 민족공동체의 제반 사회적 조건들을 제약한 다는 것을 통절하게 깨달았을 때에는 무엇보다 통일국가의 실현이 가장 뚜렷한 민족사의 과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는 민족 구성원 으로서 뿐 만 아니라 기독교와 기독교인에게도 당연히 주어진 과제였다. 수용당시에 이미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을 보였던 한국 기독교는 민족사의 고비마다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 등한하지 않았다. 한국의 기독교 인 또한 이 같은 과제를 의식하고 수행함에 적극적이었다. 필자는 기독교회와 기 독교인들이 수행한 그 같은 과제들이 민족운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 착 안하고 그것을 한국기독교 민족운동 이라고 가정하고자 한다. 한국의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이 자신들 앞에서 주어진 민족사적 과제 앞에서 퇴영적 자세를 갖지 않 고 적극적으로 과제 해결에 나섰다는 뜻이다. 민족운동은 체질 언어 문화를 같이하고 있는 민족공동체가 정치적 사회 적 문화적 통합을 이룩하고 대내외적 주체성을 지키며 자체의 성장과 발전을 기 약하려는 제반 운동을 말한다. 그것은 대내적으로는 인간 평등을 전제로 공동체 의 균형과 정의, 인권과 자유를 신장시키려고 노력하는 운동이며, 대외적으로는 민족공동체가 주체성을 확보, 신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운동을 1차적으로 하여 민 족과 민족간의 화해와 협동을 증진시키고 인류와 세계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증진 시키려고 노력하는 제반 운동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민족운동을 이렇게 규정 할 때 기독교 민족운동 은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나 기독교인 같은 특정 집단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민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행한 운동을 특별히 기독교 민족운동으로 범주 화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런 문제의 제기에는, 기독교인 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하고 있지만 그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민족공동체에 속한 존재라는 점과 그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그런 민족운동을 주도하거나 참 여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다고 본다. 이런 전제를 유념하면서도 다 음과 같은 점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즉 앞서 말한 범주의 민족운동에서 기독교 공동체 혹은 기독교인에 의한 것이 같은 시대의 다른 이념 집단과 구별되 거나 비교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에 의한 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들의 운동을 새롭게

9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앞서 열거한 민족적 과제 수행에 대한 기독교(인)의 활 동은 필자를 포함한 여러 연구자들의 개별적인 논문과 단행본들에 소개되어 있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런 내용을 종합하고 개괄하여 그 요점을 간단하게 제시하 고 그것을 하나의 맥락으로 엮으면서 기독교인들의 그같은 운동이 기독교 민족 운동 이라는 개념설정을 가능케 할 것인가을 논의의 초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 글 이 넓은 의미의 기독교 민족운동 개념화설정을 위한 논의를 활성화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거듭 기대한다. 2. 한말 반봉건 사회개혁 운동 기독교가 수용될 때에 한국은 중세 말기의 모순과 부패로 사회적인 취약점이 드러나고 있는 데다가, 서구 제국주의의 서세동점 현상으로 민족족적으로 극심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사회적인 취약점과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자기 사회의 체질을 개혁하여 근대사회를 이룩하는 길이었다. 이를 위해서 는 대내적으로는 반봉건, 대외적으로 반외세(반침략)를 위한 사회개혁이 필수적이 었다. 사회개혁을 통해 근대적인 사회와 국가를 이룩하는 것만이 당시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말 기독교 수용 당시의 이같은 민족적인 과제는 기독교인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과제였다. 따라서 이 무렵의 기독교 의 민족운동적 성격은 결국 기독교가 이같은 한국의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사회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 하는 점을 검토하는 데서 시작할 수 밖 에 없다. 한말 봉건사회의 모순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당쟁 과 세도정치는 그런 모순을 더욱 촉진시켜 19세기에 들어서서는 각종 민란으로 통칭되는 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을 필두로 전국 각지 에서 일어난 민란 들은 봉건사회의 실정과 모순들의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다. 매관 매직으로 인해 인사상의 난맥과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철종조에 들어서는 임술년(1862) 한 해 동안에 37건의 민란 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원군이 등장하여 세도정치로 땅에 떨어진 조선왕조의 권위를 재건하고자 일종의 개혁정치를 과감 하게 실천하고자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왕비족인 여흥 민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둥지를 틀기 시 작했다. 어느 사회에나 한 파당의 전횡이 있는 곳에 독재나 부패가 만연할 수 밖 에 없다. 민씨 세도는 얼마 안가 국고를 탕진했고 인사의 난맥상으로 부정과 부

1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패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의 관리들의 부패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는 독립신문의 기사다. 혁파하라신 잡세를 여전히 무는 것은 관장들의 탐학하는 까닭이요, 돈 많은 부자들을 무단히 불효부제( 不 孝 不 悌 )한다고 잡아가두는 것은 그 부자가 다른 죄 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돈모은 것이 죄가 됨이요 한 동리 사람은 아무가 불효부제 인줄 모르되 먼 데 있는 관찰사와 군수들이 먼저 아는 것은 그 관원들이 다른 탁 이한 문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사야탁( 晝 思 夜 度 )이 다만 돈 먹을 생각 뿐인고로 동녹슬 밝은 눈이 먼 데 있는 돈구멍을 능히 밝게 봄이라. 3) 기독교는 한말 이같은 사회에 선교사에 앞서 먼저 성경이 번역, 보급되면서 수용되었다.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번역, 보급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한국이 기 독교 복음에 먼저 접근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뒤에 한국 기독교의 성격 을 규명하는 데에도 일정하게 유용성을 갖는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사 랑하는 그리스도인 (Bible-loving Christian) 혹은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 (Bible lovers)이라고 불려졌고, 또 한국의 기독교를 성경기독교 (Bible Christianity)라고 언급한 4)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선교사가 도래한(1885) 후 얼마 안된 1888년경부터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 신경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등의 교리서가 번역 출판되었고, 1890년대에서 1900 년에 이르는 기간에 성교촬리를 비롯하여 60여종의 전도문서들도 간행, 유포되었 다. 성경과 전도문서의 유포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서양문화와 함께 한국 사회에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문서들은 기독교의 중심교리 - 신론 기독론 성 령론 인간론 창조론 계시론 죄론 천사론 구원론 종말론 - 와 우상숭배 금 지 제사문제와 부모공경 안식일 준수 등의 종교적 주제, 및 인간평등과 남존여 비의 문제 결혼의 문제 자녀교육의 문제 등의 사회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 다. 5) 이런 주제들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인간이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십계명과 기독교 교리들은 한국 사회 3) 독립신문 4권 187호 ( ) 4). Matters of Moment" Bible in the World, Mar.1907.p.70 이 땅에서 발전되고 있는 기독교는 출중하게도 Bible Christianity이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하기 위해 가 져가는 것은 성경이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매일 먹고 마시는 양식은 성경이다. 5)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pp

11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의 봉건적 관행과 사회적 모순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정면으로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개혁에 미친 중요한 것의 하나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주 는 영향이다. 이것은 곧 근대사회 성립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 할 인민평등의 문제와 상통할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은 서로 평등하다는 전제가 근대사회를 성립 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가 수용되어 바로 이런 인 간관을 가장 먼저 가르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 음을 받았다는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의 존엄성과 천부적인 인권을 담보해주는 것일 뿐만아니라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기독교 는 백정과 종이 양반이나 주인과 같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평등권이 현실화되는 단서가 된다. 서울의 승동교회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 朴 成 春 )이 장로로 되었던 사례를 갖고 있다. 6) 그리고 그의 아 들 박서양( 朴 瑞 陽 )은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이 되어 한 때는 모교에서 가르치기까 지 했다. 이런 사례는 결혼의 풍속도 등 전통적인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과 함께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기독교회가 성립되는 곳에서 시작되고 있던 현상이다. 기독교의 수용은 인간관의 변화와 함께 직업관과 가치관의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이미 반상의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가졌던 직업관도 바뀌어 지기 시작했다. 일의 귀천에 관계없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일이라는 성경의 가 르침은 봉사와 희생을 기독교적 실천덕목으로 강조하는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기 독교인들의 삶의 영역에 파고 들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 가 되라 는 예수의 교훈은 배재학당의 당훈( 堂 訓 )이 되었고 이를 교훈 받은 자들 이 섬겼던 한국 사회의 가치관을 개혁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의료선 교사들의 콜레라 퇴치를 위한 헌신 봉사는 한국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은 물 론 직업관과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7) 한말 성경과 십계명, 기독교 전도문서들에 의해 정직과 신용, 근면과 절제를 기독교윤리로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은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는 능력을 배양해 갔 다. 이것은 물론 선교사들이 한국 사회에서 서양의 문화와 힘을 소개하면서 점차 양대인화( 洋 大 人 化 ) 하여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그 힘에 의존하게 되었던 점과 무 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독교인들의 부정 부패에 대한 항 6) 勝 洞 敎 會 百 年 史 (1996) p )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이만열, 기독교의 전래에 따른 한국사회의 개화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 (지식산업사, 1981) pp 참조

1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거는, 당시 오로지 복종만 강요당해 온 백성들의 자각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관장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서도 기독 교에 입교하는 경우가 더러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관장의 말을 믿다가는 큰 낭패를 보겠으니 다시는 관장의 말을 믿지 말고 외국교에나 들어가서 생명과 재 산을 보호받게 하자 8) 고 하는 가련한 백성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황성신문 도 당시 백성들이 외국교에 떼지어 들어가는 것은 관리들의 탐학에 고통받아 그 화 망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9) 한말에 기독교가 수용되어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서 전통적인 종교나 사상에 의한 갈등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었다. 서울 평양 수원 등지에서 일어난 기독 교에 대한 박해는 그 뒤에 지방관의 조종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갈등은 곧 선교 사와 지방 수령과의 갈등으로 압축되었고 급기야는 선교사가 승리하여 그들의 힘 이 한국인들에게 과시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따라서 서양 선교사 세력을 뒤로 한 기독교인들은 지방 수령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 과거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 다. 지방 수령 중에는 부정에 항거하는 기독교인들을 동학교도 라는 혐의를 뒤집어 씨워 투옥시키기도 했지만 부정부패한 지방관들 중에는 부정을 고발하는 기독교도 들의 항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매관매직하여 지방수령으로 발령 받은 일부 양반들은 야소교 있는 마을에는 부임하지 않겠다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 을에 갈 수 없나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 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히 빼앗기지 아닐 터 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이 까닭인 듯 10) 이런 사례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양 선교사들의 힘을 의지한 기독교도 들의 항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이 갖고 있는, 부 정과 부패에 대한 항거 정신 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사례들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거친 사회의 변화와 민중의 성장에 따 8) 독립신문 4권 185호 ( ) 9) 황성신문 광무 5(1901)년 3월 28일자 10) 대한크리스도인회보 3-9호 ( )

13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른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 인간관이나 가치관의 변화와 함께, 기독교인들에 의한 일종의 반봉건 사회개혁의 의미로 범주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3. 국권수호를 위한 항일 운동 반봉건 사회개혁 운동은 상황에 따라서는 반외세 국가자주 운동으로 나타나 게 된다. 양자는 표리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는, 시대가 좀 다르기는 하 지만, 몽고의 침입때에 청주성 전투의 승리의 예에서도 보인다. 청주성을 지키던 김윤후는 성 안에 있는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반봉건적 일종의 신분해방을 약속하 면서 노비들을 독려할 때에 노비들로 조직된 부대가 발분하여 몽고군을 물리쳐 승리하는 반외세 반침략와 연관되었다. 기독교인들이 반봉건운동에 나서게 되는 때가 1890년대 후반인데 바로 그 무 렵부터 기독교인들의 국가자주운동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11) 기독교인들은 1896년경부터 우선 왕의 탄신일을 맞아 그것을 축하하는 모임을 가지면서 충군애 국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독립협회와 협성회에 참석하여 민권신장을 통한 국가자 주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독립협회의 운동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지도부(윤치호 서재필)를 비롯하여 중간지도층(남궁억 이 상재는 아직 기독교에 입교하지는 않았으나 뒷날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다. 그 밖 에 주시경 이승만 등)과 대중동원층에 기독교인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배재 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에도 기독교 인재들이 많이 모였다. 12) 만민공동회에는 백 정 출신의 박성춘이 연설하는 것을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노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하고 일본의 배타적인 한국간섭이 노골화되어가자 기독교인들의 반외세 국가자주운동은 거의 항일운동으로 집약되었다. 한국교회의 항일운동은 종교적인 행위라고 할 기도회 등에서 나타났다. 일제 침략이 노골화 하자 1905년 9월에 모인 제 5회 장로회공의회에서는 길선주 장로의 발의로 그해 11월 감사절 익일부터 7일간 전국교회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로 결정했다. 을사 조약이 늑약된 후 정순만 전덕기 등이 그 철폐를 위한 기도회를 상동교회에서 개최했을 때 연일 수천명이 모였고, 순종 황제 서순( 西 巡 ) 때에도 환영예식을 거 행한 후 교당에 회집해서 나라위한 기도회 를 열었다. 이 때 평양 교회 김 장로의 11) 이 점에 대해서는 이만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動 態 化 과정 한국기독교와 민족의 식 (지식산업사, 1991) pp 참조 12) 이만열,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두레, 1998) pp ,

1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증언에는 교중에서 왕왕히 나라를 위하여 기도한다 는 내용도 있었다. 13) 나라 위한 기도회 의 전통은 그 뒤 1906년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조사와 박치 록 장로가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는 것으로 발전하는데 14) 이 또한 그 시기로 보아 서 나라위한 기도가 그 중요한 동기였다고 생각된다. 을사조약이 늑약되자 이를 무효화하기 위해 감리교회의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 懿 法 靑 年 會 )는 상소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진남포 교회 엡웟청년회의 총무였던 김구도 이 철폐운동에 참가했다. 15) 을사늑약 후 기독교인인 최재학 이 시영 등은 평양에서 올라와 조약의 철폐를 주장하는 격문을 살포하다가 70여일간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또 예수교인 김하원 이기범 김홍식 차병수 등도 이천만동 포에게 경고하는 글 을 뿌리고 운집한 시민들에게 격렬한 연설을 하다가, 일본 현 병들과 충돌, 일본군 사령부에 구금되었다. 16) 그런가 하면 일제의 침략에 울분을 참지 못하던 기독교인 우국지사 중에서 자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영효 귀국환 영 및 궁내부장관 취임 축연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한 이등박문이 나오지 않자 그 를 제거하려고 준비했던 정재홍이 목숨을 끊었는가 하면, 고종의 양위소식을 듣 고 대한문 앞에서 자결한 예수교인 홍태순 등의 예도 있다. 한말 기독교인의 항일운동은 여러 방면에서 이뤄졌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 서 항일운동을 들 수 있는데, 시장세반대투쟁 과 납세거부투쟁 그리고 적극적으 로는 국채보상운동 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선교사와 그 조 사들은 예수교도들에게는 특권상 폭자( 暴 者 )의 학대 그 중 일본 군대의 압박들을 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명적인 교의에 기초하여 생명 재산 등에 관한 권리 를 얻었음으로 전제적 정치의 법령 측 인도( 人 道 )에 반하는 금제( 禁 制 ) 및 가세 ( 苛 稅 )에는 복종할 수 없다. 17) 고 설교하면서 이미 통감부 지배하의 한국정부에 대한 조세저항까지 정당화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은 폭력적인 무력행사에서도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정 재홍이 이등박문을 암살하려 했던 것이나, 안중근과 뜻을 같이했던 우연준이 기 독교도였다는 사실, 스티븐스를 제거한 장인환이 기독신자였다는 데서 우선 그 13)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11일자 14) 金 麟 瑞, 靈 溪 先 生 小 傳 金 麟 瑞 著 作 全 集 5 ( 信 望 愛 社, 1976) p ) 金 九 씀 이만열 옮김, 백범일지 (역민사, 1997) pp 이 때 상동교회에 모인 인물 들은 전덕기 정순만 이준 이동녕 최재학 계명록 김인집 옥관빈 이승길 차병수 신상민 김태연 표영각 조 성환 서상팔 이항직 이희간 기산도 전명헌 유두환 기기홍 김구 등이었다고 한다. 16) 이만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두레, 1998) p ) 淸 津 理 事 官 機 密 警 察 月 報 (명치 42년 4월분) 발췌, 駐 韓 日 本 公 使 館 記 錄

15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을사조약 후 전덕기는 평안도 장사들을 모집하여 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으나 일본 병사들이 신변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 이재명 의사와 그의 동지들이 이완용과 이용구를 처단하 려 한 경우를 보면, 이재명 자신이 기독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뜻을 같이 행 동대원 중에는 이학필이라는 목사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기독신자였다. 18) 이같은 기독교인의 적극적인 항일투쟁은, 뒤에서 언급할 항일운동의 두 큰 흐름인 애국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에 비춰볼 때,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오 히려 뒷날 나타나고 있는 의열투쟁의 형태를 띄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한국 독립 운동사에서 의열투쟁이 1920년대에 적극화된다는 점에 비춰본다면 한말 기독교인 들의 의열투쟁은 매우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말의 이같은 기독교인의 의열투쟁은 일제 강점기에는 강우규 김상옥 편강열 같은 기 독신자들의 의열투쟁으로 이어진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한말 이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한 반침략적인 항일민족운동이 어떻게 가 능했겠는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일찍 부터 애국교육을 시켰던 것이 그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노일전쟁 이 일어나자 그것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와서 일제의 침략적 만행을 폭로하면 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서술했던 매켄지(F.A.Mckenzie)에 의해서 지적된 바가 있 다. 그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항일정신의 근거를 성경과 관련시켜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많은 수의 한국인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미션계 학교에서는 잔다아크 햄프던 및 조오지 워싱턴 같은 자유의 투사들에 대 한 이야기와 함께 근대사를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고 선동적인 서적인 성경을 보급하고 또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한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절멸( 絶 滅 )되던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던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 19) 한말 항일운동의 큰 두 흐름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굳이 기독교인들의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18) 이만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두레, 1998) pp ) F.A.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Yonsei Univ. Press, 1969, p

1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말 사립학교의 설비주체에서 기독교계의 사립학교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비교 적 높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일단 기독교계의 애국계몽운동은 더 언급할 필요없이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사립학교 교육 외에 애국계몽운동류에서 언급할 경제 정 치 사회 운동에서도 기독교계의 운동은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여기서 언급할 것은 한말 기독교계의 항일민족운동에서 개별적 비조직적인 의열투쟁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만, 조직적인 의병투쟁에서는 괄목할 만한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병의 배후에 선교사가 지원한다는 일본측의 정보가 있었고 교회가 의병운동을 지원한 듯한 일본측의 보고가 있었으며 교회가 의병운동으로 환란을 당한 경우가 있었다. 특이한 것은 의병의 지휘부에 기독교 인이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기독교인 중 구연영 구정서 부자와 우동선 등이 기독교인으로서 의병운동에 가담한 것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기독 교는 의병운동에 소극적이었다. 그것은 의병운동이 척사위정 이념을 기반으로 한 유생들 중심의 복고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음에 비해 기독교는 개화주의를 지향하 고 있어서 항일독립운동상의 목표와 방법이 상이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20) 4. 일제하 항일독립운동 일제하의 민족운동은 항일독립운동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대내적으로 평등 권 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운동들도 항일독립운동의 일환으 로 간주되고 있었다. 가령 사회주의 운동도 그 지향점이 반드시 항일운동과 일치 하지 않는 경우에도 항일독립운동의 범주에서 논의되었던 작금의 상황은 이런 이 해에 일말의 도움이 된다. 일제하의 항일독립운동에는 3.1운동 같은 거족적인 항일독립만세운동이 있었 다. 그 후에 항일민족독립운동이 본격화되는 단계에서는 임시정부운동과 외교운 동, 무장투쟁과 공산(사회)주의운동, 국내의 실력양성운동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이다. 이같은 항일독립운동상의 여러 흐름과 세력에서 기독교 민족운동이 갖는 위치는 어떤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제하의 기독교인이 관여한 민족운동은 3.1운동에서 그 역량을 발휘한 이래, 더러 준비론 혹은 개량주의로 흐르는 부류가 없진 않지만, 임시정부운동과 외교투쟁, 무장투쟁과 공산주의운동, 무실역행운동 20) 기독교의 의병운동에 대해서는 이만열, 의병운동 기독교대백과사전 (기독교문 사, 1984) 제 12권, pp 참조

17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과 절제운동 농촌운동 사회운동 독립운동자금 지원 및 기도회운동과 신사참배 반대투쟁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민족운동으로서의 신사참배반대투쟁 에는 기독교인만이 거의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기독교에 대한 회유와 탄압정책을 병행했다. 강점 후 일제가 사회단체와 언론기관을 해산 또는 폐쇄했지만, 구미제국을 의식하여 남겨놓은 기독교회에 대해서는 양면정책을 취했다. YMCA나 교회당의 건립에 보 조금을 지원한다던가, 기독교지도자들을 유람시킨다든가 하는 것은 일종의 회유 정책이었다. 한편 한말부터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기독교계에 대해서 는 철저하게 탄압하는 정책도 수반하였다. 그것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1911년에 터진 이른 바 105인사건 이었다. 21) 한말 비밀 독립운동 조직으로 창건 된 신민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었다고 하지만, 연루된 사람들은 서울과 서북 지방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계에 대한 이 조작된 음모사건은 혐의자에 대한 심한 고문 등 일제의 비문명국적인 야수성을 국제 사회에 노출시 키는 결과를 가져 왔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에 대해서는 언제든 지 탄압을 가할 수 있다는 엄포적인 효과는 충분히 거두었다. 강점 초기에 선교사를 포함한 기독교계에 보였던 회유정책은 점차 탄압정책으 로 전환되었다. 그들은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대해 간섭함으로 기독교 선교 자체 에 제동을 걸었을 뿐아니라 기독교계의 민족의식 제고와 민족운동에도 간접적인 제재를 가했다. 1915년 일제는 사립학교법 에 손대어 미션계 학교에서 성경교육과 종교의식을 금하도록 하는 한편 그 학교들이 제도와 시설을 보완하여 정규학교로 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회유정책도 폈다. 이것은 말하자면 채찍과 당근 을 같이 주는 정책이었다. 일제는 또 같은 해에 포교규칙 을 개정하여 종교기관의 설립이나 기관책임자의 초청에는 반드시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22) 이것은 다른 종교에 대한 제재라기보다는 기독교를 탄압하려는 것이었음이 명백했다. 3.1운동이 기독교계의 적극적인 참여로 발발하게 된 것은 기독교계에 대한 일 제의 이같은 탄압을 배경으로하고 있다. 3.1운동과 기독교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들이 있으므로 23) 여기서 그 내용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21) 105인 사건에 대해서는 尹 慶 老, 105 人 事 件 과 新 民 會 硏 究 ( 一 志 社, 1990) 참조 22) 이 점에 대해서는 윤선자, 1915년 <포교규칙> 공포 이후 종교기관 설립 현황 한국기 독교와역사 8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참조 23) <3.1운동 70주년기념 특집호> 韓 國 基 督 敎 史 硏 究 제25호(한국기독교사연구회, 1989) 및 <특집: 3 1운동과 제암리사건> 한국기독교와역사 제7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 참조

1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 점화단계에서나 지방으로 확산되는 단계에서 보인 기독 교계의 활동은 24) 3.1운동의 가장 뚜렷한 핵심세력이 기독교계임을 보여준다는 것 이다. 더구나 당시 기독교인의 수 20여만명을 민족종교라는 천도교의 교세와 비 교해 볼 때 이런 견해는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당시 천도교주 손병희는 법정 진술에서 녹명자( 錄 名 者 ) 300만 의무부담자 200만이라고 했는데 이 수자에 비춰 본다면 기독교인은 천도교인의 15분의 1 내지는 10분에 1에 불과한 셈이었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한국의 민족 민주 운동사 뿐만 아니고 세계 반제( 反 帝 )운동사에도 혁혁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우선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보면, 그 전에 척사위정 개화 민중 운동의 세 갈래로 진행되던 민족운동이 3.1운동을 계 기로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시켰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 한국민은 나라를 잃 고도 분개해 할 줄 모른다느니 일제의 개혁정치 에 열복한다느니 하는 기만적인 선전을 계속했는데 3.1운동은 이를 완전히 분쇄하게 되었다. 또 3.1운동은 이를 계 기로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이 임시정부운동 무장투쟁운동 무실역행운동 외교운동 등으로 새롭게 도출될 수 있게 되었다.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 뿐만 아니고 한국의 민주운동에서도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 때까지의 독립운동은 왕조를 회복한다는 의미의 복벽( 復 辟 )운동적 성격을 가졌었지만, 3.1운동은 백성 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정 이념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 주의 운동사에서도 큰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3.1운동은 또 세계 제 1차 대전후 새로운 강대국 중심의 질서로 재편하는 베르사이유체제에 항거한 사건으로 세계 반제운동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사 티야그라하 운동을 비롯한 필립핀 베트남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중요한 계기 를 마련했다. 기독교인들의 일제하 민족운동은 3.1운동 후의 임시정부 운동에도 적극적이었 다. 임정에 참여한 지도자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이승만 이동휘 안창 호 김구 김규식 손정도 현순 송병조 김병조 김인전 등 수많은 분들이 있 었다.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교회적인 배경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독립자금 또한 교회를 통해 모금되었다. 무장투쟁에도 기독교도들의 활약을 무시 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강우규 편강열 김상옥 열사를 비롯하여, 청산리 전투 24) 가령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라든가, 3.1운동이 진행되는 도중 6월 30 일까지의 투옥자 9,458명중 2,087명(22%)이, 이해 12월까지의 복역자 19,525명중 3,373명(17%)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당시 한국 인구 중 1.3%에 불과한 20만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과 함께 이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19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대한독립군 부대가 기독교도로 조직된 부대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국내 국산품애용운동을 포함한 무실역행운동에는 조만식을 비롯한 기 독교인들이 참여했을 뿐만아니라 추진과정에서도 교회와 기독교 기관들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일제하 기독교의 국내 농촌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1915년 한인사회당을 창건하고 뒤이어 고려공산당으로 발 전시킨 이동휘가 한 때 기독교 전도사로서 맹활략했다는 사실이나, 김일성의 가 계가 기독교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 25), 그의 젊은 시절의 활동에서 손정도 목 사와의 관련을 시사한 대목은 한국의 초기공산주의운동이 기독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1930년대 후반부터 강화된 전시체제 하에서 국내 민족운동은 위축될 대로 위 축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만이 일제의 통치에 계속 저항 했다. 기독교계의 저항은 주로 신사참배거부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26) 일제 말기 에 2천여명이 신사참배반대에 나섰으며, 신사참배반대로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 으며 50여명이 순교당했다는 통설에서도 보여주는 바와 같이 기독교계의 저항은 일제말까지 계속되었다. 일제의 황민화(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강제된 신사참 배강요에 대한 반대는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반대한다는 순수하게 교조적인 의미만을 고집했다 할지라도 그 파장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반 대의 의미가 부각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신사참배반대투쟁은 민족운동 의 선상에서도 이해됨직한 것이었다. 27) 일제가 신사참배반대자들을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몰아가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기독 교도들에 의한 신사참배반대투쟁은 국내에서 이뤄진 마지막 항일민족운동의 의미 를 지닌 것이었다고 해석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 기독교가 남긴 민족운동 이 당시 한국 기독교계의 주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들의 민족운 동에서 기독교적인 이념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점 과 관련, 민족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이 기독교계의 주류도 아니고 그들의 민족 운동이 기독교계의 합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그 25) 최영호, 김일성 생애 초기의 기독교적 배경 한국기독교와역사 제 2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 소, 1992) 참조 26) 이 점에 대해서는 김승태 엮음, 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 참조 27) 이상규,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한국기독교와역사 제 4호 (한국기 독교역사연구소, 1995) p. 67 주 2) 참조

2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것이 기독교계의 의사표시로 볼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일제하 독립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전체 한국인의 극소수라고 하여 한국에 독립운동이 없었 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하나, 기독교인의 민족운동에서 기독교 이념과의 연관성 문제는 일반적인 애국심이나 민족의식과의 경계선을 분명히하기 가 힘들지만 전혀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가령 3.1운동의 이념과 기독교 신앙의 관련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보며 기도하면서 이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사실 등은 이 점을 어렴풋 이 나타내 준다고 할 것이다. 28) 또 도산 안창호의 민족주의의 기저에는 기독교적 인 이념이 뒷받침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는 29) 것도 그 실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기독교인과 개량주의와의 관련성 문제와 기독교 민족운 동의 투쟁의 강도문제라 할 것이다. 이 문제과 관련,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굴절 한 인사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부터 보여준 타계주의적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갖는 화해적 성격이 타협적인 것으로 비친 데서 이러한 문제가 제 기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지만, 그 런 측면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타협과 굴절이 기독교인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느 냐고 변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서도 가령 신사참배반대투쟁을 민족운동의 차원 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면 기독교인의 민족운동을 타협일변도로 치부할 수 있겠는 가의 문제는 역제기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5. 식민잔재 청산과 민주화 운동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한 민족은 물론이고 갖은 핍박을 받고 있던 한국 기 독교계에는 무상의 복음 이었다. 일제가 그 해 8월 17일경에 신사참배반대에 앞장 선 옥중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다는 미확인된 주장에 비춰본 다면 해방의 타이밍에서 그 뒤 한국 교회의 정화를 위한 그루터기를 남기려는 섭 리마저 읽게 된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그렇듯이, 긴장이 풀리고 자유가 주어지면 자기의 정체성 을 확인한 바탕 위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거기 28) 이덕주, 3.1운동의 이념과 기독교 신앙문제 韓 國 基 督 敎 史 硏 究 제 25호(한국기독교사연구 회, 1989) 참조 28) 이만열, 도산 안창호와 기독교 신앙 도산사상연구 제 8집(도산사상연구회, 2002) 참조

21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 쉽지 않다. 한국 기독교계가 바로 그랬다. 해방을 맞았으 나 한국 기독교로서는 선교 종주국이라 해야 할 미국이 군정을 펴고 이어서 철 저한 기독교도로 자처한 적이 있는 이승만이 집권함으로써 일제하의 수치스런 과거를 철저히 청산하고 예언자적인 사명을 새롭게 회복하는 데에 도움은커녕 오 히려 방해가 되었다. 분단 상황이 일반사회의 부일협력자들을 제대로 청산할 수 없게 했다. 이 점은 기독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기독교계는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게 되었다. 해방 후 가장 중요한 민족사적 과제의 하나는 부일협력자를 포함한 일제 잔재 를 제대로 청산하고 정의로운 새 질서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일제잔재의 청산을 통한 정의로운 새 질서의 확립보다는 일제로부터 떠 안은 한국을 효율적 으로 통치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험있는 관료와 무조건 충성할 수 있 는 경찰 등의 권력의 도구가 필요했다. 해방 후 혼란상태는 일련의 정신도 줏대 도 없는 기능인을 필요로 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적어도 지배층 상호간에는 일 제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북쪽에서 부일협력자를 신속하게 처리한 것과는 달리 남쪽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으로 각처에서 분란이 야기되 자 오히려 부일협력자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분단상황이 결국 친일파를 온존시키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기에 친일세력이 분단체제의 고정화에 기여했고 또 분단체제는 친일세력의 기득권을 보호, 신장시켜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30) 는 지적은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지적 한 것이다. 약점이 많으면 자기 주장을 강하게 펴거나 실천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 리는 종종 권력이 약점 많은 자를 골라서 자기의 하수인으로 삼는 경우를 본다. 불의하고 정통성이 약한 권력일수록 그럴 뿐만 아니라 약점 투성이의 하수인을 많이 거느린 권력이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것 또한 역사의 교훈이다. 일제 강점 하에서 이민족에 부역하면서 민족을 배반하고 조국을 등졌던 사람들은 자신의 기 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들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체제에 무조건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새로운 체제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그 체제를 유지 하기 위해서는 약점가진 무리들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하의 부일세력들 이 분단정권과 결탁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점을 시사한다. 그들은 정당성의 문제 30) 김학준, 한국민족주의의 통일논리 (집문당, 1983) p

2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에서나 기득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동의 운명을 지니고 있었고 때문에 쉽게 결합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기독교계에서 일제하의 죄악을 회개해야 한다고 가장 먼저 주장한 이들이 신사참배에 앞장 섰던 친일파들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년 9월 2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경남교구장 출신인 김길창은 최재화 권남선 심문태 등을 끌어들여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 를 조직하고 일제하에서 행한 범 죄를 회개하고 정통신앙에 매진할 것을 주장하는 선언문 31) 을 발표하고 이어서 9 월 18일에는 경남재건노회를 조직하고 자숙안 32) 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출옥성도들이 남하하기 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신속한 변신의 계략 이었다고 지적된다. 33) 변신을 위한 이같은 계략은 한국 장로 교회가 신사참배 취소결의를 세 번( )이나 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진실성을 가진 것이었다고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 뒤의 그들의 행적이 그러한 행동이 진실이 아니었고 제스춰에 불과했다는 것을 증거했다. 한국 사회가 부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결과 민족정기를 세우지 못했고 새 질 서를 바탕으로한 조국을 건설하는 일에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도 일제 잔재 청산에 실패한 결과 것잡을 수 없는 혼란과 분열을 가져왔다. 한국 교회 분 열의 첫 머리에, 신사참배 회개를 외치고 친일잔재청산을 주장했던 출옥성도 중 심의 일련의 개혁주의자 들을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는 것은 한국 교회사가 갖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비해서 해방직후 기독교계는 민 족운동다운 민족운동을 펼치지 못했다. 다만 통일국가 건설운동에서 김구 김규 식 같은 평신도 지도자와 몇몇 목회자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31) 심군식, 세상 끝날까지 - 한국교회의 산 증인 한상동 목사 생애 (총회출판국, 3판, 1997) pp 이 때 모인 인사들은 권남선 김길창 한익동 최재화 김만일 김상순 강성갑 윤인구 노진 현 김두만 심문태 한정교 양성봉 우덕준 서명준 김기현 구영기 백낙철 김은선 주영문 등 20명이었고, 선언문은 과거 장구한 시일에 가혹한 위력하에 교회는 正 路 를 잃고 복음은 악마의 유린을 당하 고 신도는 가련한 곤경에 들어 있었다. 오늘까지 노예의 속박하에 끌려오던 모든 제도 일체 는 자연 해소의 운명에 이르고 말았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불순한 요소를 청산 배제하고 순복 음적 입장에서 교회의 근본 사명을 奉 行 하려는 의도에서 좌기에 의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 노회를 재건하려는 것이다. 라고 했고, 그들은 종교개혁의 정통신앙을 사수 하며 조선예수교장 로회 헌법을 전적으로 채용한다. 고 했다. 32) 심군식, 앞의 책, pp 내용은, 목사 전도사 장로는 일제히 자숙에 들어가며 현재 시 무하는 교회를 일단 사면할 것. 자숙기간이 지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하여 시무투표를 시행 하여 그 진퇴를 결정한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구호에 그쳤다. 33) 이상규,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한국기독교와역사 제 4호 (한국기 독교역사연구소, 1995) p

23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해방 후 정치 관료 법조 지식인 사회에서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하고 이들 을 온존시킨 결과 사회전반에 정의감이 상실되고 역사허무주의가 팽배하게 되었 으며 기회주의자와 보신주의자를 양산하게 되어 한국의 민주적 발전에도 부정적 인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교회대로 교권주의적 권력지향적 세력이 주도권을 장 악하면서 일제청산을 주장하는 개혁적인 세력은 주류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과거에 대한 회개와 청산을 외치고 시대마다 필요한 예언자적 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오히려 격에 맞지 않았다. 더구나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일부 교직자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등 교권과 정치권력이 유착하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하에서 정교유착을 벗어나지 못하고 부정 선거에 개입하게 되는 상황에서 기독교가 자기 목소리를 갖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독교가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갖게 되는 것은 1960년 4.19와 그 이듬해 5.16 군사 쿠테타를 계기로 해서 자기반성이 일어나면서부터다. 4.19혁명 후 기독교계 와 교계신문은 돌연 비판자로 변했다. 그러나 5.16군사쿠테타가 일어났을 때에 한 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군사쿠테타를 지지하였고, 심지어 기독공보는 자유를 희생 하더라도 방종한 무리들이 숙정되는 것을 보고 싶다 혹은 권위있는 정부 밑에 있게 되어 행복하다 고 아첨을 떨었다. 34) 이 때까지 교권을 쥐고 있던 인사들이 4.19로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활란 한경직 등 기독교계 대표는 미국 을 방문하여 군사정부를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5.16을 계기로 그 전까지 유착관계에 있던 기독교와 정권 사이에는 파열음이 일어났고, 군사정 권의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자세에 대한 기독교의 비판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군사정권이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경제성장을 이룩하 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성장을 국가적 과제로 삼고 거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수출위주의 산업구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변 명한다. 군사정권은 산업현장의 노동력 착취를 정당화하면서 노동자들의 인권은 물 론 산업현장의 민주적 의사결정 요구를 억압해 갔다.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 면서 자기를 상대화시켜 갔던 기독교계는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인권과 민주주의의 신장에서 찾았다. 여기서 군사정권과 기독교계의 대결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과 기독교계의 대립이 뚜렷해진 것은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 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경제성장을 서두르고 있던 박 정권 은,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원조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중 34) 기독공보 1961년 5월 29일자

2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재에 따라 한일회담을 서둘러 마무리지어 경제성장을 위한 자금을 일본측으로부 터 들여올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정중한 사과와 정당한 배상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군사정권이 굴욕적인 외교인 줄 알면서도 한일회담 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군사정권 하에서 이렇다 할 비판세력 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강요 등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한국 기독교계는 분연히 일어나 이 굴욕외교에 항거하게 되었다. 한일회담에 대한 기독교계의 비판은 1964년 2월 12일 한국기독학생회(KSCM) 가 발표한 일본기독자에게 보내는 공개장 에서 비롯되었다. 그 해 3월 6일 기독교 계인사들은 야당과 각계인사 200여명과 함께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 회 에 참여했고, 4월 17일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가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 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렇게 불붙게 된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그 이듬해 (1965) 6월 22일 조인을 앞둔 시기에 영락교회에서 연합으로 기도회를 개최했으 며, 이 열기는 7월까지도 계속되면서 반대성명을 발표하기도 35) 하고 금식기도회 로 모여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합동측의 승동교 회와 평안교회 등이 움직인 것을 보면, 한일회담 반대운동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 분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36)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사에서 진보와 보수의 경계가 뚜렷하게 되는 것은 1968년 박정희의 삼선개헌이 시도되면서부터다. 이 때부터 한국교회에는 권력에 대한 대 응에서 견해차가 분명해지기 시작했다고 지적된다. 37) 1968년 8월, 김재준 박형 규 함석헌 등 진보적 인사들이 3선개헌저지 범국민투쟁위원회 를 조직, 동 8월 15일에는 반대성명서를 냈다. 그러나 그 해 9월 2일에는 김윤찬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등 보수측 인사 242명이 개헌문제와 양심자유선언 을 발표, 앞서 김재준 등의 성명서가 순진한 성도들의 양심의 혼란을 일으키는 선동적 행위 라고 비난 하고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했다. 이 사흘 뒤인 9월 5일에는 앞서의 242명에 포함된 박형룡 김준곤 김윤찬 김장환 조용기 등이 대한기독교연합회 라는 단체 명의로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 을 발표하고 3선개헌을 지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앞서 그들 자신이 주장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는 내용과도 상치될 뿐아니라 급조된 대한기독교연합회 란 이름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와 35) 크리스챤신문 1965년 7월 9일자 36) 기독신문 1965년 7월 19일자 37) 이상규,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한국기독교와역사 제 4호 (한국기 독교역사연구소, 1995) p

25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비슷한 단체명이어서 국민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도록 했던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 이었다고 보여진다. 이를 계기로 한국 기독교계는 진보와 보수가 사회문제에 관 한 한 서로 냉소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38) 한국 기독교계의 인권 민주화운동은 1970년대 유신정권기 에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후 극단적인 인권탄압과 반민주적인 행태가 자행되고 있었다. 서슬퍼런 유신정권 아래서 누구도 인권과 민주화를 거론하지 못하던 때였다. 이를 박차고 나온 것이 기독교계였다. 이 대 한국 기독교회는, 비 록 그 일부이기는 하지만, 1973년 4월 22일의 남산부활절 예배사건을 필두로 개헌 청원운동, 민청학련사건, 오글 선교사의 추방, 3.1민주구국선언(1976), 도시산업선 교 활동 및 기독자교수해직사건(1977) 등으로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들에서 그 중 심에 서 있었다. 39) 이 무렵 민주화운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민중신학이 었고 민중신학은 인권 민주화운동의 진전에 따라 심화되어 갔다. 민중신학은 또 한 해방신학 등 일련의 정치신학과도 맥락을 닫고 있었다. 한국기독교계의 인권 민주화운동은 한국 기독교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서 한국 의 인권신장과 민주주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비판세력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군사정권 하에서 기독교계의 그런 운동은 한국 사회에 큰 희망이 었고,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공감대와 지원세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한국이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진출함에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의 측면에서 자신의 폐쇄성 을 극복하고 보편적인 가치관을 확보해가면서 소위 선진국 과 어깨를 겨룰 수 있 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인권 민주화가 이룩한 긍정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인권 민주화운동이 갖는 한계도 분명히 있었다. 한국 기독교계 가 이 문제로 말미암아 진보와 보수로 확연히 분열되었다는 것을 지적함과 동시 에 이 운동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이나 신앙적인 고백을 조율하지 못하고 사회문 제가 잇슈화될 때마다 거의 협력하지 못했다는 것을 일단 지적할 수 있다. 그리 고 이 운동이 기독교계가 자신을 상대화시키면서 예언자적인 기능을 회복하는 과 정에서 이뤄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객관성을 끝까지 담보하지 못하고 더 러는 이념적인 편향성을 노출하기도 하고 더러는 계급적 성향이나 지역성에서 편 가르기를 노골화하게 된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운동이 예언자적 순수성을 끝까지 담보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이유의 하나는 과거 이 운동에 적 38) 이상규, 위의 논문, p ) 이만열, 5.17김대중내란음모사건 의 진실과 그 역사적 의의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4호, 가을호)

2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극 참여했던 인사 중에는 그 뒤 문민정권과 국민의정부에 가담하여 정치적 오류 를 범한 사례가 보이기 때문이다. 인권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 기독교계는 이를 저해하는 세력의 논리 가 안보 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인권 민주화에 제동을 거는 집권세력의 논리가 안보논리 라는 것이다. 이 안보논리는 분단을 전제로 한 것이 며 그 배경에는 바로 민족분단이라는 절벽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인 권 민주화를 위해서는 그것을 가로 막고 있는 분단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 을 깨닫게 되었다. 분단의 벽을 허무는 것이 바로 통일운동이다. 여기서 인권 민 주화를 위해서도 통일운동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던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인권 민주화운동과 표리의 관계를 갖고 전개된 한국기독교 계의 통일운동은 년대의 기독교 운동의 축적된 경험과 그 동안의 자기한 계를 극복하려는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하여 얻은 값진 결실이었다. 6. 민족통일 운동 한국교회는 1980년대부터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스스로 통일운동을 전개하 면서 정부의 통일정책을 비판하고 자극하며 더러는 선도하였다. 이는 기독교가 한국에 수용된 이래 반봉건 개화의식과 반침략 자주의식을 성장시켜 왔고 군사정 권 후에 인권 민주화 운동을 계속해 온 연장선상에서 이룩한 것이다. 해방 후 한때 정경유착으로 기독교계가 예언자적인 사명을 망각한 적이 있지만, 1960년대 이래 군부통치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인들의 마비된 역사의식과 시대적 사명감은 회복의 수순을 밟았다. 기독교인들의 역사의식은, 군사통치 초기에는 인권, 민주 화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80년대에 들어서서는 통일운동에도 역점을 두게 되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인권 민주화운동에 제동을 건 것은 안보논리 때문이고, 안보논리가 자신의 정당성을 찾는 근거는 분단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족통일이야 말로 인권문제와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극복케 하는 중요한 요건이었다. 기독교계 통일운동을 말하자면 먼저 한국에서 전개된 기독교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부터 언급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최근의 것에 국한시키고자 한다. 기독교 통 일운동에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은 1972년 7 4남북공동성명 의 발표다. 이 때까 지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기독교계는 그 뒤 유신체제의 정착으로 남북대화가 중 단될 때까지 통일논의에 그런대로 적극성을 보였다. 7 4남북공동성명 이 발표된 2 주일 후인 7월 18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7 4공동성명에 대한 성명

27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서 는 통일문제를, 반공적인 여론을 억압하고 민주화를 후퇴시키는 빌미로 삼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보이고 있다.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 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통일을 위하여 우리의 민주적 이념을 경 시함을 의미할 수는 없다. 우리는 민주주의적이며 반공적인 질서와 교육을 소 홀히 할 수 없고, 대화의 밑바탕이 될 우리의 민주적 힘을 강화하여야 한다. 성급한 남북대화 때문에 반공적인 여론이 억압되는 경우에는 심히 우려되는 사태 가 벌어질 것이다. 40) 성명은 끝 부분에서 우리 기독교회는 원래 화해와 복음을 생명으로 하는 단 체이므로 우리는 7 4공동성명에 나타난 정신을 적극 지지한다 고 하여 마지 못해 그 성명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난처한 입장을 드러냈다. 통일문제는 종래 정부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계는 통일문제를 민간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1974년 초, 기독교청년 협의회 회원 약 3천여명은 <통일을 기원하는 예배>를 드린 후 가두데모를 감행 하였다. 통일문제로 데모를 감행한 것이다. 1976년 3월 1일에는 명동사건 에서 민 주구국선언서 가 발표되었는데 그 선언서에서는 민족통일의 긴급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국은 처리과정에서 이 문제를 간과해버린 채, KNCC 등 사회참여세력을 용공으로 몰아세우려 하였다. 유신체제가 극성을 부리던 1978년 10월 17일, 함석 헌, 문익환, 윤보선, 이문영 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재야인사 402명이 민주국민선언 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골자는 반독재 민주구국 투쟁과 민족염원 인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전반적으로 교회가 통일을 논의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연 장 술책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통일의 당위는 말하지만 통일활동 은 보류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기독교계가 민족통일에 공헌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기독교회가 변화된 의식을 기반 으로 민주화 못지 않게 통일운동에 나서게 되는 것은 1980년대를 기다려야 했다. 기독교인들의 통일운동에 하나의 계기를 만든 것이 해외에 거주하던 기독교인 40) 김상근, 민족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공헌 (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 창립70주년 1994), p.43에서 재인용

2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들이 북한동포를 만나 조국의 통일을 논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1 차는 1981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2차는 1982년 12월 3 일부터 5일까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만났는데 41), 이 때 발표된 공동성명에 서 참석자들은 북측의 주문에 따라 김일성 부자에 대한 비판에 신중한 반면 미 제국주의 비판, 미군 철수 및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임은 1991년 1월 30일-2월 3일의 프랑크푸르트 회의까지 10차나 회 합을 갖게 되었는데, 당시 국내 언론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 대화는 됫날 남 북 기독자들이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42) 한편 한국 기독교회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한 모임들이 있었다. 1981년 6월 8일-10일 서울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분단국에서의 그리스도 고백 이 란 주제와 죄책고백과 새로운 책임 이란 부제를 달고 <제4차 한 독교회협의회> 가 개최되었다. 이 협의회의 권고에 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2년 2월 26 일 산하에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이 해 9월 16일 운영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43) 1984년에는 제3차 한 북미교회협의 회 가 열려 미국이 한국을 분단시킨 나라라는 것과, 때문에 미국교회는 한국교회와 함께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남겼다. 이런 국제적인 모임을 배경으로 1984년 10월 29일부터 11월 2일까지 일본의 토잔소( 東 山 莊 )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문제위원회가 주관한 동북아시아 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Consultation on Peace and in Justice in Northeast Asia) 가 모여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 - 도잔소협의회의 보 고와 건의안- (일반적으로 도잔소 보고서 라 함)을 남겼는데 이 선언에서, 한반도 의 평화 통일은 화해의 복음의 구체적 실천의 결과요 목표라는 점 과 평화통일 은 남한 교회만의 일방적 선교과제가 아니고 남북한 교회 쌍방의 공동과제라는 점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 통일이 단순히 남북한만이 아닌 세계 교회의 공동 책 임이라는 점 등을 천명했다 44). 이같은 결의로 말미암아 토잔소선언은 한국 기독 41) 통일신학동지회 엮음, 제2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신자간의 대화 ( 통일과 민족교회의 신학 한울, 1990) p )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통일대화 10년의 회 고 (형상사, 1994) 참조 43) 박종화, 한반도 통일을 위한 남북교회의 실천-자료모음- ( 남북교회의 만 남과 평화통일신학-기독교 통일신학자료 및 평화통일 신학논문 모음집 한국기독 교교회협의회 통일위원회 편, 1990) p. 2 44) 박종화, 위의 논문 - 도잔소 보고서 전문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위원회

29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교 통일운동사에서 뿐만아니라 한민족 통일운동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남북교회는 1986년부터 2년 간격으로 세 차례에 걸쳐 스 위스 글리온에서 만나게 되었다. 남북교회의 만남은 1986년 9월 2일부터 5일까지 스위스 글리온에서 세계교회협의회 국제문제위원회가 주최한 평화에 대한 기독 교적 관심의 성서적 신학적 기반 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에 참석하는 형식으로 이 루어졌다. 제1차 글리온회의 로 불려지는 이 만남은 조선기독교도 연맹의 4인대 표 와 WCC회원교회 및 대한민국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대표하는 6인 대표 단 을 포함한 22명 이 참석하였으며, 악수와 포옹 을 나누고 교회의 일치와 인류 의 일치를 상징하는 표징으로서의 성만찬도 이뤄졌다. 제2차 회의는 1988년에, 제 3차 회의는 1990년에 각각 글리온에서 열렸다. 제 3차 회의에서 남북교회는 상호 방문, 남북당국간 상호불가침선언 채택 촉구, 사업추진 실무기구 설치 등 9개항에 달하는 희년 5개년 공동작업계획 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 뒤에 전개된 남북관계의 경색은, 1995년 3월 교토( 京 都 )회의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후속조치를 무산시 키고 말았다. 글리온 회의는 1995년을 통일을 위한 희년으로 설정하고 화해와 일 치를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여 이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민족통일운동사 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남북교회가 이렇게 만나고 있을 때 남측의 KNCC에서는 1988년 2월 29일 민 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 KNCC 통일선언 )이 선포했다. 이 선언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자세히 언급한 바 있기 45) 때문에 여기서는 더 언급 하지 않겠다. 다만 이 선언은 분단 반세기 동안에 남한 사회에서 민간부문에 의 해 제출된 최초의 본격적인 통일선언으로 획기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혹은 민간 차원의 통일논의의 물꼬를 튼 46) 것으로 평가되는가 하면, 이 선언이 제시 한 통일원칙은 지난 60년대 이후 남한교회의 진보세력이 주장해 온 통일의 기본 원칙을 수용 집약한 것 47) 이라고도 평가된다. 또한 이 선언은 민족통일운동에 종 사해 온 한국교회가 교회내부의 통일론을 수렴하는 한편, 그간의 정부 당국에서 편, 위의 책, pp 에 실려 있음. 45) 이 점에 관해서는 이만열,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의 의의 ( 基 督 敎 思 想 1995년 1월호) 참조 46) 박성준, 1980년대 한국기독교 통일운동에 대한 고찰 ( 神 學 思 想 71집, 1990), p ) 김흥수, 한국교회의 통일운동 역사에 대한 재검토 ( 기사연무크 9, 한국기 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91) p

3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내어놓은 통일정책 선언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민간차원에서 공포한 최 초의 통일선언이며 따라서 이 선언으로 통일논의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의 수 위와 지향점을 결정케 하는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 의의 48) 를 둘 수 있다. 따라 서 이 선언으로 한국 기독교회는 종래 진행시켜 왔던 통일운동을 정리하는 한편, 앞으로 새롭게 전개시킬 통일운동의 이념적인 근거를 마련했던 것이다. 1980년대의 한국 기독교의 통일운동은 1989년의 문익환 목사의 방북운동 49) 을 거쳐 1990년대에는 새롭게 다양한 통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90년대의 통일운 동은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기존의 KNCC를 중심으로 한 평화통일희년운동 흐름 과 기독교사회운동연합 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하고 있는 평화군축운동의 흐름, 남 북 해외의 범민족대회 흐름, 여성운동의 흐름 그리고 90년대 들어 새로운 운동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복음주의(보수주의)권의 흐름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50) 1990년대의 통일운동에서 주목되는 점은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북한의 식량 난이 겹치게 되어 한국기독교의 통일운동이 북한돕기 운동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과 북한돕기 운동에서 진보와 보수가 제휴하고 있다는 점, 통일운동의 일환으 로 한반도평화운동이 새로운 호소력을 가지고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7. 맺는말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지 어언 120여년이 넘어서고 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 인간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민족을 개혁하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하나님의나 라 는 이 땅에서 이렇게 확장되어 왔다. 한말에 수용된 기독교는 민족사가 전개되는 단계마다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단계마다 의식한 시대적 사 명은 당시의 민족적인 과제와 크게 어긋나지 않았고 오히려 제대로 의식한 것이 었다. 필자는 그것을 단순화된 용어로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몇가지 단계로 나누 어 설명했다. 즉 한말 반봉건 사회개혁 운동에서 시작하여 국권수호를 위한 항 48) 박종화, <해설-한반도 통일을 위한 남북교회의 실천>(위의 책), p. 4 49) 문익환 목사의 방북운동에 대해서는 진보와 보수측의 엇갈린 평가가 있는데, 보수측의 평가에 대해서는 이상규, 앞의 논문, p. 95 참조. 50) 박상증 외, <-특별대좌담 - 기독교 통일운동에 대한 총괄평가와 전망>(기사연 무크3, 1991) p. 21 참고

31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일운동, 일제하의 항일독립운동, 그리고 군사정권 하의 인권 민주화운동을 거쳐 20세기 말에는 민족통일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을 시대별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런 편년사적인 방식을 지양하고 달리 정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에 의한 민족운동이 이렇게 전개되었다고 해서, 기독교가 시대를 잘못 읽고 반역사적인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 의 이런 민족운동이 기독교인만의 것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위의 민족운동 중에 서는 기독교(인)가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도 있고 대세에 밀려서 따라간 것 도 없지 않다. 한말의 사회개혁 운동과 항일의열투쟁은 선구적 내지는 독보적이 라고 말할 수 있고, 일제 강점기의 전반적인 항일독립운동은 3.1운동을 제외하고 는 적극적이었다고 평가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에 전개된 인 권 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은 그 선진성과 적극성이 돋보인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전개한 민족운동이 기독교계의 주류 혹은 지도부에 의한 것인가 하는 점과 그 때문에 기독교인의 그런 운동을 기독교 민족운동 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동시에 제기될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성과 적극성을 보였던 한말의 의열투쟁이나 20세기 후반의 인권 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이 기독교계의 주류에 의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기독교계의 주 류가 한말 대부흥운동과 100만인 구령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기독교인 청년들 의 의열투쟁이 전개되었고, 안보논리를 벗어나지 못한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여의 도에서 수십만 수백만의 신자를 모아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를 외치고 있을 때 소수의 선각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해 인권 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이 감 옥을 벗삼아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운동에 참여한 수의 다과와 지도부의 참여 여부에 의해 기독교 민족운동 의 성격 여부가 결정되어야 한다면 답은 명백하다. 그러나 기독교 밖의 일반적인 민족운동도 삼천만 전부가 혹은 지배층이 그런 운 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것을 민족운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의 다 과와 지도부의 참여 여부만이 운동의 성격을 결정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비록 소수의, 비지도부가 주도한 운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시대적 소명과 자신들의 이념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 필자가 한 기독교인으로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자칫 편견일 수 있 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한 시대에 어떤 이념을 가진 공동체에서 시대적 인 소명에 충실한 사람들이 다른 이념적 공동체에 뚜렷이 구별되거나 수적으로 비교가 될 수 있다면 그 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3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더 직접적으로 말해서 한국의 기독교인이 일반 백성들이나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 서 시대적 과제 인식면에서나 그것을 실천하는 측면에서 구별되거나 비교될 수 있다면 그것을 기독교 라는 이름으로 개별화 내지는 개념화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따라서 기독교인들에 의한 민족운동도 이같은 관점에서 구별하여 하나의 민 족운동사의 장르로 개념화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의 흐름 을 역사적으로 구명하는 것 못지않게 그 운동을 기독교 이념과 관련하여 분석, 종합 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런 연구는 후일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가 인간과 사회를 변화, 개혁시키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나라 를 실현하 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기독교인은 그가 처한 민족과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시대상황에 따라 그런 단계적인 소명을 의식하면 서 자체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민족운동에 노력해 왔다. 앞으로도 기독교는 자신의 영적 영역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실천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각 시대마다 부과된 역 사적인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기독교가 민족사에서 생명력을 더 존속시킬 수 있느냐의 관건은 여기에 달려 있다.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시대 적인 과제는 인권 민주화와 통일 평화의 과제다. 이것들은 한말부터 심화시켜 온 자주 독립의 과제와 앞으로 세계를 향한 봉사 공생의 과제와 무관하지 않다. 한 국 기독교는 오늘도 민족과 세계를 향한 자신의 이러한 과제 앞에 서 있다. [이 글은 <한국기독교와 역사>제 18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에 게재 된 것임]

33 한국역사 속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한국근현대사 제 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 강사 : 이 만 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2009년 5월 28일(목) 저녁 7시 서울YMCA 친교실(2층) 주최 : 서울Y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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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51) 이만열 명예교수(숙명여대) 1. 머리말 이준( 李 儁, 1859~1907) 열사는 한말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그의 강직함을 드러 내었고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며 국력배양 국권수호에 앞장섰던 분이며, 1907년에는 화란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서 파견되었다가 소기 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한 애국열사이다. 이준 열사에 관한 연구로는 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의 사위되는 유자후( 柳 子 厚 )가 쓴 이준선생전 ( 李 儁 先 生 傳, 一 醒 李 儁 先 生 事 業 紀 念 會, 1947, 동방문화 사)과 해아밀사 ( 海 牙 密 使, 一 醒 李 儁 先 生 記 念 事 業 協 會, 1948)가 있고, 이어서 사 단법인 일성회( 一 醒 會 )가 간행한 일성 이준열사소전 ( 一 醒 李 儁 烈 士 小 傳, 1964) 이 있으며,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장 이선준( 李 善 俊 )이 쓴 빛나는 민족의 정 화, 일성 이준 열사 (세운문화사, 1973 ; 을지서적, 1994)가 있다. 이선준이 쓴 것 은 유자후가 쓴 이준선생전 과 내용이 비슷하다. 이 두 전기는 이준의 전반적 인 생애를 다룬 것이긴 하지만, 전기에서 흔히 보이는 과장과 미화, 기술의 오류 등이 독자의 객관적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대목도 없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접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밖에도 이준에 대한 전기류에 해당하는 간단한 글 이 당대인들의 것을 포함하여 더러 있다. 52) 한편, 이준 열사에 직접 관련된 논문으로는 김효전( 金 孝 全 )이 쓴 이준과 헌정연 구회( 憲 政 硏 究 會 ) 53) 와 윤춘병이 쓴 이준 열사의 민족운동과 기독교 신앙 54) 등 51) 이 글에서는 그리스도인 이준에 대해서 다루지 못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전택부의 토박이 신앙산맥 2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p. 137~140)와 연동교회100년사 (1995, p. 180) 및 윤춘병의 이준 열사의 민족운동과 기독교신앙 (이 글의 주4)을 참조. 52) 장지연이 쓴 李 儁 傳 ( 韋 菴 文 稿, 국사편찬위원회 편)과 張 志 淵 全 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 소편) 8권의 李 相 卨 日 記 抄 李 瑋 鍾 莊, 黃 玹 의 梅 泉 野 錄, 趙 素 昻 의 遺 芳 集 ( 中 國 南 京, 1942), 宋 相 燾 의 騎 驢 隨 筆 (국사편찬위원회) 등이 있으며 해방 후에 쓴 것으로서는 崔 永 植, 李 儁 (1859~1907 (한국근대인물백선, 신동아 1970년 1월호 별책 부록), 宋 炳 基, 돌아오지 않는 密 使 = 李 儁 ( 한국의 인물상 제6권, 신구문화사, 1972), 崔 鍾 庫, 一 醒 李 儁 ( 한국의 법 률가상 13, 사법행정 1983년 4월호) 등이 있다. 53) 김효전, 이준과 헌정연구회 - 당시의 신문 보도를 중심으로, 동아법학 5, 7호, 동아대학 교 법학연구소, 1987~

3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이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논문이라기보다는 이준 관계 자료를 나열하였다는 인상이고, 따라서 이 논문은 이준이 관여한 헌정연구회 의 실상을 밝히는 것을 목 표로 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밖에도 이준의 애국계몽운동과 헤이그밀사와 관련된 글들이 더러 보이는데, 55) 필자는 선학들의 이런 업적들을 토대로 이 글을 초한다. 보통 이준 열사'라고 하면, 헤이그에서 순국했다는 큰 사건에 그 전의 다른 많은 활동들이 가려져 있는 형편이다. 많은 전기에서 그러하듯, 이준의 생애에서도 그 의 최후가 그의 생애 전체를 미화 시키고 있다. 한 사람을 역사에서 객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점은 극복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최후는 그의 생애의 집약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준의 최후도 그의 생애를 총체화한 것이다. 그가 순국한 것은 일시적인 순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가 그런 죽음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 금까지 그를 인식할 때 그의 순국 이 모든 과거까지도 결정해버려 그 전의 활동 이 묻혀 버렸다. 그러나 그가 고국을 떠나 만리 이역에서 마지막 생명을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바치게 된 것은, 전에 그의 죽음을 두고 할복자살'했다고 했을 때에 받았던 인상처럼, 단번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오랜 동안의 준비와 활동 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본다. 이 글에서는 그의 전반적인 생애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그의 활동의 중요한 대목들을 정리하고 그의 생애의 극치를 이루었던 헤이그 밀사사건을 다루려고 한 다. 이와 함께 지금까지도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사인( 死 因 )에 대한 견 해를, 지금까지의 연구를 토대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2. 청소년시대(1959~1892)와 유학적 전통 이준 56) 은 철종 기미년 음력 12월 18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중산리[ 龍 田 里 ] 에서 부친 이병관( 李 秉 瓘 )과 모친 청주 이씨( 淸 州 李 氏 )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 54) 윤춘병, 이준 열사의 민족운동과 기독교 신앙,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나라와 교회를 빛낸 이들, 기독교대한감리회 상동교회, ) 대표적인 것으로는 최기영의 한국 근대 계몽운동연구 (일조각, 1997) 중 공진회와 반일진 회 운동 ; 헌정연구회의 설립과 입헌군주론의 전개 ; 국민교육회의 설립과 기독교 와, 윤병 석의 증보 이상설전 (전게) 중 제7장 해아 만국평화회의의 使 行 과 제15장 이상설의 遺 文 과 이준열사 등을 들 수 있다. 56) 그의 초명은 性 在, 자는 汝 天 이라 하였고, 鄕 科 를 볼 때에는 이름이 璿 在, 자는 舜 七 이었다. 뒤에 다시 英 俊 하다 는 뜻인 儁 으로 개명하였고, 호는 海 史, 海 玉, 靑 霞, 一 醒 이라 하였다. 일성 이란 한번 이 세상을 각성시키고야 말겠다 는 뜻이다(유자후, 앞의 책, pp. 7-8)

37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의 18대조가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형인 완풍군( 完 豊 君 ) 이원 계( 李 元 桂 )였다. 그 의 부친은 일찍이 백부( 伯 父 ) 이명집( 李 明 集 )의 양자로 들어갔으나, 선생이 3세 되던 해에 그의 부모가 돌아가셨고 양가조부( 養 家 祖 父 ) 또한 일찍 작고하였기 때 문에 선생은 생가조부( 生 家 祖 父 ) 이명섭( 李 明 燮 )과 숙부 이병하( 李 秉 夏 )의 양육을 받았다고 한다. 선생의 나이 7세 되던 해부터 동네 서당에서 훈도를 받게 되었으 나, 총명한 그가 벌써 서당의 고루 함에 싫증을 내게 되자 당시 북청의 거유 ( 巨 儒 )였던 조부는 자기 슬하에서 양육하기로 하고, 예세전가( 禮 世 傳 家 )의 정신과 가 정교육주의 로 가르치게 되었다. 57) 이준은 천자( 天 資 ) 영오( 穎 悟 ) 하고 성취( 成 就 ) 예속( 銳 速 ) 하여 어릴 때에 믿기 지 않은 전설 같은 일화를 남겼다. 선생이 7, 8세 되던 1865년과 1866년에는 러시 아가 경흥부( 慶 興 府 )를 통해 통상을 요구하고, 프랑스 함대를 파송, 역시 개국을 요구하였으며, 미국 또한 제너럴 셔먼호를 평양에 파송, 통상을 요구하게 되었는 데, 이 때 대원군은 쇄국 일변도로 나갔다. 어른들로부터 이를 전해들은 어린 이 준은 이 때 개국의 필요성과 이해득실을 역설하여 어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58) 이준의 성숙함은 그의 나이 12세 때에 사서에 능통 하게 되었고, 북청군에서 전군의 유림재사를 선발하는 향시 에 응하여 가장 우수한 성적을 냈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이를 계기로 부근의 신안 주씨( 新 安 朱 氏 ) 주만복( 朱 萬 福 )의 여식과 조 혼하여 문명( 文 名 )이 가장 고명한 처족의 친척인 주선생서숙( 朱 先 生 書 塾 )에 가서 절차( 切 磋 )와 탁마( 琢 磨 )를 계수( 繼 修 )하게 59) 되어 선생의 문장과 학문이 비범 초월하게 되어 1군 1읍이 용납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그는 대지( 大 志 )와 웅기( 雄 氣 )를 펴기 위해 서울행을 결심하고 비밀리에 도타( 逃 他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다시 수개월 동안 함흥 등을 유람하면서 서울로 올라갈 준비 를 했다. 그가 17세 되던 을해년에 상경하여 북청인의 수방도가( 水 房 都 家 )에 머물 며 그의 웅지를 펼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상경한 이준은 먼저 40년장( 年 長 )이나 되는 대원군 이하응( 李 昰 應 )을 찾아가 민 씨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대일외교에 대하여 비판적인 담론을 나누는 한편 가끔 찾아가 천하사( 天 下 事 )를 강론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안동 김문( 金 門 ) 으로 비교적 열려 있던 용암( 蓉 菴 ) 김병시( 金 炳 始 )를 찾아가 시국을 담론하였는 57) 위의 책, pp ) 유자후, 앞의 책, pp ) 위의 책, p

3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데, 김병시는 선생의 비범함을 인지하고 청성옥국( 靑 城 玉 局 )이라고 칭찬하면서 문 객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공거( 公 車 )를 치룰 때에 그를 대동하여 궁중의식과 조례절차를 익히도록 하였다. 이준은 또 면암( 勉 庵 ) 최익현( 崔 益 鉉 )과도 허교( 許 交 )하였고, 예조( 禮 曹 ) 강수관( 講 修 官 )인 홍우길( 洪 祐 吉 )과도 대일관계에 적극적인 시책을 펴라는 내용의 시론도 나누었다고 한다. 김병시 최익현 홍우길과 망년지교 ( 忘 年 之 交 )를 나눌 때에 주된 화제는 일본과의 통교를 반대하거나 일본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라는 것 등 항일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어서, 이 무렵 그의 대 일관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이때부터 형성된 그의 항일적 대일관은, 비록 정치적 으로 불우한 시기를 만나 일본으로 망명하여 와세다[ 早 稻 田 ]대학의 전신인 동경 전문학교에서 약 2년간 법학을 공부한 적이 있지만, 헤이그에서 순국하기까지 변 함이 없었다. 그의 이 같은 초기의 대일관은 최익현에게 보였다는 소장( 疏 章 )의 내용과 같이, 왜노( 倭 奴 )와 주화( 主 和 )함은 매국이나 다름이 없으니 도의로 회척 ( 懷 斥 )의 책( 策 )을 써서 물리친 후 부국강병에 전력하라 60) 는 것이었다. 대일관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아직도 척사위정적인 입장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이 무렵 서울과 북청을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젊을 때부터 웅지를 품었 던 그는 12세에 조혼하여 제대로 부부생활을 갖지 못한 듯, 27세 되던 1885( 乙 酉 ) 년에 가서야 장녀 송선( 松 鮮 )을 보게 되었고, 30세 되던 1888( 戊 子 )년에 장남 종 승( 鍾 乘, 후에 鏞 으로 개명)이 출생하였다. 장남을 보기에 앞서 선생은 29세 되던 정해년( 丁 亥 年, 1887)에 북청에 내려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북청 서원 유생들의 방해로 경사( 京 師 )의 회시( 會 試 )에 응시할 수 없었다. 이를 함경감사 조병식( 趙 秉 式 )에게 호소하여 조 감사의 협력으로 노봉서원( 老 峰 書 院 ) 별창( 別 創 )을 상소, 윤 허를 받아 노봉서원이 창건됨으로 북청 인사의 경사 진출의 기회를 넓히게 되었 고 따라서 북청의 개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이준은 김병시의 아들 김용규와의 불화를 계기로 조병식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61) 이 무렵(30세) 그는 담녕재( 澹 寧 齋, 璿 源 祠 )를 경학원( 經 學 院 ) 이라 개액( 改 額 )하고 노봉( 老 峰, 閔 鼎 重 ) 선생의 영정을 옮겨놓고, 그가 유사( 有 60) 유자후, 앞의 책, p ) 앞의 이준 선생전 이나 일성 이준 열사 등에는, 선생과 조병식이 좀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선생은 서울에서 문객으로 있던 김병시의 집에서 그 아들 용규와 불화 하게 되었는데, 이를 빌미로 김용규는 함경 감사 조병식에게 선생을 체포하여 벌을 주라고 통지 했다. 그러나 선생은 함흥 감영의 한 裨 將 을 통해 자신을 체포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태연 히 조병식을 찾아가 自 現 하러 왔다고 말하고 그와 對 酌 하고 시를 읊었는데, 이를 계기로 조병식 은 선생이 큰 그릇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39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司 )로 앉아 많은 인재를 양성하게 되었는데, 경학원 설립이 북청의 오도( 吾 道 )의 연원이 되었다 62) 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준은 30세가 되던 시기까지 전통적인 학문을 공부하였고, 척사 위정적인 인물과 교유하면서 그 자신 경학원을 설립, 전통적인 유학을 가르쳤다 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직까지는 전통적인 학문과 봉건적인 충군애국 단계 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그는 영오( 穎 悟 )하여 세계대세의 변화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는 있었으나, 국제관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오히려 수구적인 논리로 대응 하려 했다. 그는 당시 드러나고 있던 봉건적 모순과 제국주의 침략에 따른 민족 적 모순에 대응하는 근대적 지성을 갖추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당시 그의 입장 은, 척사위정론자들이 주장했던 내수외양론 ( 內 修 外 攘 論 )의 내수의 논리에 서서 시무( 時 務 )를 논하는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 법학 공부와 개화의 문제(1893~1904) 이준이 종래의 척사위정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세계와 한국의 사회변화에 새롭게 대응하는 때는 그의 나이 35세였던 1893년 무렵부터라고 할 것이다. 63) 북청의 경 학원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인재를 양성하다 1888년 가을에 서울로 올라온 그는 몇 년 동안 시국의 변화를 눈여겨보면서 그 동안 자신의 삶이 의지해온 구학( 舊 學 )과 척사위정적인 사고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하는 기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35세 되던 해 그는, 김병시의 중매로, 이일정( 李 一 貞, 17세)을 재취 하였다. 64) 초취부인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취한 그의 이 같은 결단을 단순히 당시의 관습 이나 주위의 강권으로만 핑계댈 수 있는 것인지, 문제를 던져 본다. 더구나 그는 62) 유자후, 앞의 책, p. 35. 여기서 吾 道 란 유학을 가리키는 것이다. 63) 이준의 이력 중 30세 되던 1888년부터 1893년까지 약 5년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를 소개 한 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유자후는 앞의 책(p. 35)에서, 이 해(1888년) 가을에 서울로 다 시 올라와 사방으로 雅 望 이 높은 인물들을 찾아 지성으로 교유하기로 하였었다 고 하면서 이 때 惺 齋 李 始 榮 과의 교유를 말하고 있는 정도이다. 1888년 장남 鍾 乘 이 태어났지만, 그 외에 가정사 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고 1893년에 재취하는 것으로 보아 그 어간에 초취부인과의 사이에 어 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분명치 않다. 64) 그의 再 娶 結 婚 에 대해서, 유자후는 이일정 여사를 再 娶 하니 鐘 鼓 之 樂 과 琴 瑟 之 情 이 매우 비 상하였을 뿐 아니라 聰 明 多 智 한 이일정 여사는 실로 동지와 같은 감을 갖게 되어 君 國 事 와 사회 운동에서 의논하여 공동히 활동함을 약속하게 되었었다. 참으로 是 夫 是 婦 의 觀 이었었다 (앞의 책, p. 36)라고 하여 재취가 초취와의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선준은, 김병 시가 중매에 나서자 이준이 고향에 처자가 있는 몸인데 어찌 또 결혼을 하겠습니까? (앞의 책, p. 40)라고 써서 중혼임을 분명히 했다. 한국여성사에서도 이일정이 이준의 별실 이라고 표현하 고 있다.(이선준, 앞의 책, p. 43에서 인용)

4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뒷날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먼저 법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근대 서구 법학의 초기 수용자로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행세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의문 은 당연하다고 본다. 하여튼 그에 관한 전기들은, 이 결혼을 통하여 국사( 國 事 )와 사회운동 등에 좋은 동지요 반려자를 얻었으며 그의 사회개혁, 정의실현에 큰 힘 이 되었다고 한다. 65) 1890년대는 우리 민족사상 대내외적으로 가장 큰 변화와 시련을 맞은 시기였다. 1894년에는 특히 더 했다. 동학농민운동이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을 계 기로 전국적으로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게 되었다. 이 때까지 유지되어 온 봉건 말기의 제반 모순이 이런 형태로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 이 일어나 우리나라의 일부는 전쟁터가 되었고 일본 전투 병력이 본격적으로 진 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는, 한 민족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세력권 다툼에서 결국 일본의 세력권으로 편입되는 결정적인 계기 가 되었다는 데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한편 한국에 군대를 파송한 일본은 무력 으로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여 내각인선에 압력을 가하고 갑오개혁 을 감행했다. 이는 한국을 그들의 세력권으로 편입하기 시작한 일본이 내정에 구체적으로 간여 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은 이렇게 한국이 군사 정치적으로 일본 세력권에 편입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내의 친일세력의 대두를 본격화하는 계기도 되었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으로 국내 정국이 어수선할 때 그는 이 해 8월 7일 의 외로 함흥에 있는 순릉( 純 陵 )의 참봉직을 제수받고 내려갔다. 66) 청일전쟁이 끝나 고 일본세력에 의해 수구파 정권이 물러나고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고 망명했던 박영효도 귀국하게 되었다. 이럴 즈음 그는 상경하였다. 이 때 정부에서는 갑오개혁의 후속 조치의 하나로 1895년 법관양성소 를 설립 하였다. 이준은 37세 되던 해에 법관양성소에 입교, 6개월간 공부한 뒤에 제1회로 졸업하였다. 38세 되던 1896년( 建 陽 元 年 ) 2월 3일 그는 한성재판소 검사보 주임 6등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관직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임명된 지 약 1개월만인 3월 5일 탐관오리들의 방해로 면관( 免 官 )되었다는 것이다. 67) 그가 임명되자 곧 부패한 관리들과 조정의 대관 중신들의 비행과 불법을 적발하여 숙 65) 이 점에 대해서는 이선준, 앞의 책, p. 43 참조. 66) 이렇게 된 것은 세상이 어수선하므로 얼마 동안 시골에서 쉬면서 천하의 흐름을 관찰하도록 김병시 대감이 배려한 보직 이라고 하였다(이선준, 앞의 책, p. 44). 67) 유자후, 위의 책, pp ; 이선준, 위의 책, p

41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청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의 면관은, 다음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아관 파천으로 친러정권이 들어서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관파천 전에 법관양성소를 설립했고 그를 검사보로 임명했던 친일정권이 붕괴되었기 때 문에 그가 사임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삼국간섭 이라는 의외의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오 랜 동안 각축하던 중국을 제거한 한반도 무대에 러시아가 등장한 것이다. 때를 같이하여 한국 조정에서는 새로운 기류가 나타났다. 삼국간섭에서 자신을 얻은 러시아가 한국 조정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조정에서는 친러세력이 형성되 었다. 청일전쟁 후 한국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둘 수 있다고 확신한 일본은 한 국을 두고 새로운 강적을 직면한 것이다. 일본은 러시아 세력의 뒤에는 한국 왕 실의 민비가 배후세력으로 있다고 믿었다. 1895년 7월에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고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 三 浦 梧 樓 ]가 부임한 한 달 뒤에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시해하였다( , 음력). 이어 서 11월 15일에는 단발령이 내려지고 이 해 말에는 양력이 시행(1896년 1월 1일 은 음력 1895년 11월 17일)되었다. 강원도를 비롯한 각처에서 민비시해와 단발령 에 반대하는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사 관으로 이어하는 아관파천 이 단행되고,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가 피체, 처형되는 등 친일정권이 몰락하고 친러정권(총리대신 김병시)이 성립되 었다(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준은 아관파천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안 되어 한성재 판소 검사보에서 물러났다. 이 대목에서 그의 행적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는 법 부대신 장박( 張 博 )의 망명을 돕는 형식으로 일본에 갔다. 68) 그곳에서 박영효와 장 박의 추천으로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동경전문학교에 입학, 법학을 공부하였다. 2 년 후(1898) 40세에 졸업한 그는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에, 동경전문학교 법과 에서 2년간 수학한 신지식인으로, 당시에 보기 드문 근대 서구법학의 수용자가 되어 69) 귀국하였다. 이같이 국내외에서 법학을 수학했다는 점은, 뒷날 그가 참여 68) 일본으로 간 데 대해서, 유자후는 당시 법부대신 장박과 함께 망명하였다고 썼고, 이선준은 김 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고 써서 두 사람 모두 망명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 나 당시 이준이 특별한 관직에 있지 않았고, 친일내각의 붕괴 후에 들어선 친러내각에는 김병시 가 총리대신으로 등장하였는데, 김병시와 이준의 관계로 보아 이때 이준이 망명했다는 것은 납득 하기 힘들다. 유자후, 이선준의 전기들에 의하면 1898년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도 이준과 김병시 의 사이는 변함이 없었던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후일로 미루겠다. 69) 최종고, 한국의 서양법 수용사, 박영사, 1982, pp

4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하는 국권회복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에서 드러나며, 나아가 헤이그밀사로까 지 발탁되는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된다. 귀국 후 이준은 독립협회에 관여하였다. 아마도 그가 개혁에 대한 뚜렷한 신념 을 가지고 개혁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것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는 이 해(1898) 독립협회에 가입,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는 가두연설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독립협회가 황국협회와 정부의 억압을 받고 해산되자, 그는 이 개혁운동의 불씨를 지속해 나가려고 노력하였다. 이 노력의 일단이 개혁 당 사건 으로 나타난다. 1902년에 일어난 개혁당 사건 은 그의 생애에서 독립협회 운동 시절과 보안회운동을 잇는 연결고리로 나타난다. 개혁당은 1902년 민영환과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로서 이준을 비롯하여 이상설ㆍ이동휘ㆍ양기탁ㆍ이갑ㆍ노백린ㆍ남궁억ㆍ장지연ㆍ박은식ㆍ이용 익ㆍ이도재 등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이범진ㆍ김석항ㆍ민병두ㆍ김병시ㆍ전덕기 등을 동지로 규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혁당운동은 초기에 도각운동( 倒 閣 運 動 ) 등 급진책을 세웠으나, 점차 완진( 緩 進 )주의로 방침을 바꾸어 독립회관 국민연설 대에서 영일동맹의 영향을 계몽하는 등 시간을 두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비 밀이 누설되어 이상재ㆍ이승인 부자가 경위원( 警 衛 院 )으로 붙들려 가 임인춘( 壬 寅 春 )에서 갑진년( 甲 辰 年 )까지 3년간 별별 악형( 惡 刑 ) 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빌미로 그 밖에 개혁파 인사들도 투옥되는 등 임인개혁당( 壬 寅 改 革 黨 )의 의옥사건( 疑 獄 事 件 ) 으로 비화하자 결국 대사거의 ( 大 事 去 矣 )되어 버렸고, 이로 인 해 이준도 두 달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70) 개혁당 사건 은 관련된 인사들 중에 독립협회계의 인사들이 많다는 것과 이들이 옥중에서 벙커(D. A. Bunker) 등의 선교사의 교화를 받아 옥중개종하고 뒤에 연동교회에 와서 국민교육회의 중 요한 멤버들이 되었다는 점에서, 71) 관련자료를 찾고 더 자세하게 밝혀야 할 의옥 사건 이라고 본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 문제를 두고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 다. 갈등이 전쟁으로 확대될 기미를 눈치 챈 한국은 1월 23일 엄정중립을 선포하 였다. 그러나 일제는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2.12)에 앞서 군대를 한국에 상륙, 배치시키고, 일본군의 한국내 전략요충지 수용인정을 골자로 하는 제1차 한일의 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어서 경의선 철도를 강제로 착공하는 한편 한러조 70) 유자후, 앞의 책, pp ) 이광린, 구한말 옥중에서의 기독교 신앙, 한국개화사의 제문제, 1986 : 최기영, 국민교 육회의 설립과 기독교, 한국근대 계몽운동연구, 1997, pp 참고

43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약의 폐기를 강제하는 등 내정간섭을 자행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준은 보안 회를 조직, 일제에 반대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게 되지만, 러일전쟁 초기에 이준 의 행동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보인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04년 3월에 그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전쟁에 참여한다고 하여 휼병비( 恤 兵 費 )를 모 금하다가 경무청에 구금되기도 할 만큼 일본을 지지 72) 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 게 한 것은, 1904년 12월 6일에 있은 공진회 연설 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바, 러일 전쟁이 청국 만주 한국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며, 이러한 인식은 당시 널리 유행한 아시아 연대론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 명되고 있다. 73) 아무리 선의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이 점은 그가 일제의 한국 침략 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하려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이준은 젊은 시절 전통적인 구학( 舊 學 )ㆍ구질서에서 벗어나 당시 유행처럼 되었던 개화의 흐름에 몸을 실었다. 법학을 공부하고 신여성을 재취하 였으며 아마도 이 무렵에 기독교에도 입교했을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의 겉모습 은 개화의 단계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반봉건적인 사상에 철 저하지 못했고 일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에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법학 공부와 검사보의 임명이 친일정권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아관파천 후에 일본에 가서 법학 공부를 하는 것과 아울러 일종의 일본편향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까. 또 러일전쟁 때 휼병비를 모금한 것은, 앞으로 이 문제 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통해 결론에 도달해야 할 것이지만, 적어도 이 시기까지 의 이준에게서는 그의 시대인식이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순진한 기대를 벗어나지 못한 단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4. 항일ㆍ애국계몽운동과 반봉건개혁운동(1904~1907) 이준이 일제의 한국침략의 의도를 분명하게 간파하게 되는 것은 러일전쟁 중 일제가 중립을 선포한 한국에 대해 한일의정서를 강요하고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 할 때라고 생각된다. 이때 그는 행동에 나섬으로써 자신의 항일의지를 분명히 했 다. 그는 이때부터 항일애국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데, 보안회ㆍ대한 협동회ㆍ공진회ㆍ헌정연구회ㆍ국민교육회ㆍ을사조약폐기상소운동ㆍ보광학교 설립 72) 황성신문 1904년 3월 23일자 잡보 義 捐 設 所 ; 3월 25일자 잡보 四 人 被 捉 (최기영, 앞의 책, p. 135, 주 53에서 인용). 73) 최기영, 앞의 주 참조

4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ㆍ한북흥학회ㆍ국채보상연합회의소ㆍ신민회 등에 차례로 관여하여 지도적인 역할 을 감당하였다. 한편 이 기간에 그는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 되는 등 국가의 기강확립과 개혁에도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그는 한 말의 정치ㆍ경제ㆍ교육ㆍ사회 등의 항일애국계몽운동에 관여하지 않은 곳이 없다 고 할 정도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만큼 그의 생애에서 다양하면서도 집중적인 생활을 영위한 때는 없었을 것이다. 1904년 6월, 일제는 한국영토의 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 하였다. 이 때 이준은 칙임시종( 勅 任 侍 從 ) 원세성( 元 世 性 )과 중추원의관 송수만( 宋 秀 萬 ), 이기( 李 沂 )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7월 13일 보안회를 조직하고 일제의 요 구에 항거하였다. 보안회는 처음 회장에 송수만, 부회장에 원세성이 맡았고 이준 은 제2선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앞서 6월 3일, 송수만은 백목전도가( 白 木 廛 都 家 ) 에서 군중을 모아 놓고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이 때 일본군이 보안회의소에 난입, 간부 등 80여 명을 체포하여 필동에 있는 일본군헌 병사령부로 넘기고 보안회의 해산을 강요하였다. 보안회는 다시 심상훈( 沈 相 薰 )을 회장, 이준을 도총무( 都 總 務 )로 하여 재기하였으나 심상훈의 탈퇴로 막을 내렸다. 이준은 8월에 이르러 이상설 등과 함께 개혁당 출신의 인사를 중심으로 대한협동 회를 다시 조직하여 74) 그 부회장을 맡아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저지시켰다. 일제는 러일전쟁 중 국권을 침탈하면서 한국에 그들을 외곽에서 돕는 단체를 급조하였다. 1904년 8월 20일에 결성된 일진회가 그 대표적인 친일단체다. 일진회 를 배척하고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12월 3일 종로의 입전도가( 立 廛 都 家 )에서 공 진회가 창립되었다. 75) 공진회는 처음 진명회( 進 明 會 )로 출발하였다가, 일진회가 12월 2일 진보회( 進 步 會 )와 합병하게 되자, 독립협회 계열도 합류시키면서, 상민 뿐 아니라 전 국민이 문명화에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공진회라 개명하였 다. 공진회의 주 회원층은 보부상이었고, 지도층은 과거 독립협회에 관여했던 인 물들이었는데, 이들은 한때 정치적으로 대립하여 무력충돌까지 일으켰던 적대세 력이었다. 이준을 회장으로 하여 창립된 공진회는 2개월 남짓 활동하다가 해산되 었고, 그 이듬해 5월에 조직되었던 헌정연구회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공진회는 황실의 지원하에서 일진회의 타도를 목적으로 한 세력 으로서 황실 74) 이 때 대한협동회의 조직은 회장 이상설, 부회장 이준, 총무 정운복, 평의장 이상재, 서무부장 이동휘, 편집부장 이승만, 재무부장 허위( 武 監 大 將 ) 등이었다. - 유자후, 앞의 책, p ) 공진회에 관해서는, 최기영, 공진회의 반일진회 운동,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 pp 을 주로 참조하였다

45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과 정부 그리고 국민의 권리와 한계를 규정하는 강령을 갖고 국민의 생명 재산 권의 수호 에 깊은 관심을 갖는 법률구조사업 을 펼치려고 했다. 이는 당시 한국 에서 보기 드문 서구 근대 법학의 이해자였던 이준이 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공진회는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어서 12월 15일의 통상회에서부터는 정부에 시정 개선을 요구하였다. 12월 24일 특별회에서는 궁정에 출입하거나 관직에 있는 무 술( 巫 術 )ㆍ복술( 卜 術 )ㆍ기양( 祈 ) 출신의 잡배를 축출하자는, 이른 바 숙청궁금 ( 肅 淸 宮 禁 )을 주장 하였고, 18명의 숙청대상자의 명단을 첨부한 상서문을 작성, 정 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숙청궁금에 대한 정부의 조치가 미진하자, 12월 22일에 궁 내부 특진관에 임명된 이유인( 李 裕 寅 )을 착거( 捉 去 )하는 고관착거사건 ( 高 官 捉 去 事 件 )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12월 25일 공진회의 지도층인 이준ㆍ윤효정ㆍ나유 석이 체포되었고, 28일 밤에 평리원은 재판 없이 이준ㆍ윤효정을 종신징역에, 나유 석은 교( 絞 )에 처하기로 선고하였다. 이준은 윤효정과 함께 유( 流 ) 3년의 황해도 철도( 鐵 島 )유배( 流 配 )가 결정되었으나 유배생활 1개월도 되지 않아 사면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이준 등에 대한 처벌이 논의되면서 정부가 일진회의 해산에 주 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일본군은 정부의 일진회 탄압을 중지할 것과 정부 대신들의 경질을 요구하게 되었다. 나아가 일진회 탄압으로 서울의 치안상 태가 동요된 것을 구실로 1905년 1월 3일 일본군은 서울 지역에 군사경찰제( 軍 事 警 察 制 )를 통고하고, 1월 5일 이를 고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진회는 지도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05년 1월 말에 정운복 ( 鄭 雲 復 )을 회장으로 선임하는 한편 공진회의 복설( 復 設 )을 위해 일본군사령부에 허가를 신청하였으나, 2월 2일 오히려 해산명령을 받게 되었다. 반일진회활동을 전개하던 공진회는 이로써 끝나고 말았다. 공진회의 복설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이준과 윤효정은 새로운 단체의 조직에 주력, 1905년 5월에는 헌정연구회를 발족 시키게 된다. 철도의 유배에서 풀려난 뒤 이준은 1905년 5월, 윤효정ㆍ양한묵 등과 입헌정치 체제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헌정연구회를 조직, 부회장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선도하였다. 76) 그가 헌정연구회에서 활동한 시기는 9월 말경까지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는 일본과 중국 상해를 오가며 을사조약을 방지 코자 노력 하였고,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영애( 令 愛 ) 아리스 양의 내한을 계기로 한미공 수동맹 ( 韓 美 攻 守 同 盟 )을 제의하기도 했다. 77) 76) 헌정연구회에 관해서는, 최기영, 헌정연구회의 설립과 입헌군주론의 전개 한국근대계몽운동 연구 참조

4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 을 강제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상동교회의 엡웟청년회가 중심이 되고 전덕기ㆍ최재학ㆍ정순만ㆍ이동녕ㆍ김구 등과 함께 을 사조약폐기운동에 돌입하였다. 이준이 상소문을 짓기로 하고 대한문 앞 등에서 일본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등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78) 이준은 1905년 이래 상동청년회에 관여하고 있었다. 79) 1906년에 들어서서 이준의 활동은 한층 활발해진다. 우선 4월경부터는 국민교 육회의 회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국민교육회는 1904년 8월 24일 연동의 게일(J. S. Gale, 奇 一 ) 목사 댁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80) 국민교육회는 1905년 일진회가 합방 을 청원하자 회장 이원긍의 이름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였고, 을사조약의 강 제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한 7충신 의 추도회를 개최하였으며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의 양위가 논의되던 1907년 7월 중순에는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 과 함께 연설과 시위를 하는 등 교육활동 외에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했다. 이준 이 회장이 된 후에는 대중 상대의 활동을 전개하고 교과서의 편찬을 추진, 1906 년에 2종을, 1907년에 4종의 교과서를 출간하였다. 81) 이준이 국민교육회의 회장으로 있을 즈음에 그는 검사직에 있었다. 그는 검찰 의 위상을 정립하고 부정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제와 결탁된 이하영 등 상 부세력에 의해 좌절된다. 82) 말하자면 내부개혁이 침략세력과 결탁된 관료층에 의 해 좌절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준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설태희 등과 함께 한북흥 학회를 설립, 함경도 지방의 교육구국ㆍ애국계몽운동을 벌였다. 한편 그는 교육구 국운동을 위해 보광학교( 普 光 學 校 )를 설립하였다. 1907년에 1월 대구에서 서상돈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 國 債 報 償 聯 合 會 議 所 )를 설립하고 책임을 맡아 모금운동을 벌였다. 한편 1907년 4월에는 전덕기ㆍ안창호ㆍ양기탁ㆍ김구ㆍ이승훈 등이 중심이 되어 비밀리에 신민회가 조직되자, 이준은 여기에 가입, 활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그는 국권회복의 방법론상의 문제를 깊이 고민했 77) 유자후, 앞의 책, p. 415, 附 錄 一 醒 先 生 年 表 참조. 78) 김구, 백범일지 79) 한규무, 상동청년회에 대한 연구, 1897~1914, 력사학보 126호, 1990, pp ) 국민교육회에 관해서는, 최기영 국민교육회의 설립과 기독교,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 참조. 81) 최기영, 앞의 책, p ) 김효전, 앞의 논문 제5호, pp 여기에는 주로 자료들이 나열되어 있다

47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을 것이다. 그가 헤이그밀사로 발탁된 것은 그의 식견과 지도력, 상대방을 향한 설득력이 평가를 받아서 이뤄졌겠지만, 그 스스로도 외교권의 회복을 통해 이미 침투해온 일제의 세력을 물리치기 전에는 국권회복은 물론이고 국내적인 반봉건 개혁운동도 힘들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이 서지 않았을까, 그래서 헤이그밀사 를 자원했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 5. 헤이그 밀사사건과 사인( 死 因 ) 문제 외교권을 늑탈하는 등 일제의 침략행위가 국권강탈에 있음이 노골화되자, 이를 저지하려는 한국의 저항은 점차 가열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이 강화되고 의병운동 이 일어났다. 이와 함께 왕실에서도 일본의 야욕을 세계에 폭로하여 그들의 지원 을 얻어보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밀사파견으로 나타났다. 1904년 12월에 고종이 미국에 첫 밀서를 보낸 이래, 1905년 6월에는 하와이 교포 8천명이 윤병구를, 1905년 말에는 고종이 헐버트를 밀사로 파견, 미 국무장관에게 밀서를 수교하였 다. 러시아에 대해서도 1905년 2월에 처음으로 밀사를 파견했던 것 같다. 1907년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가 파견된 것도 그런 과정 속에서 이뤄진 항일국권 회복운동의 일환이었다. 1907년 6월~10월까지 화란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 다. 1899년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어 열리는 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 세의 제의로 1907년 6월 15일부터 헤이그의 Binnenhof궁에서 세계 40여 개국 225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어, 중재재판( 仲 裁 裁 判 )ㆍ육전법규( 陸 戰 法 規 )ㆍ해전법 규( 海 戰 法 規 )ㆍ해전사유권( 海 戰 私 有 權 ) 등의 4부로 나눠 회의를 진행시켰다. 이 회의에 전의정부참찬( 前 議 政 府 參 贊 ) 이상설이 정사( 正 使 )로, 전평리원검사( 前 平 理 院 檢 事 ) 이준이 부사( 副 使 )로, 전( 前 ) 러시아 공사관참서관( 公 使 館 參 書 官 ) 이위종 ( 李 瑋 鍾 )이 통역으로 동행하였다. 당시 21세였던 이위종은 7세 때부터 그의 아버지 를 따라 유럽 각국을 다녔기 때문에 영어ㆍ프랑스어ㆍ러시아어에 능통하였다. 고종 의 위임장을 지닌 그들은, 1905년 11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하여 만국의 도움을 얻어 외교권을 회복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밀사들이 한국에서 출발한 날짜는 달랐다. 이상설은 1906년 4월에 떠났는데 회 의가 열리기 1년 전이었다. 이 때 그가 고종의 특사로서의 임무를 띠었는지는 확 실치 않다. 83) 이준은 1907년 4월 21일 84) 에 한국을 출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 설을 만나, 5월 21일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로 향하

4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여 6월 중순께 도착했다. 거기서 전 주러공사( 前 駐 露 公 使 ) 이범진( 李 範 晉 )과 그의 아들 이위종을 만나 전 주한공사였던 웨베르와 바파로프 등을 만나 그들의 알선 으로 러시아 외무대신과 황제를 만났다. 그들은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협조를 구했다. 세 특사가 6월 24 25일경 헤이그에 도착했을 때는 평화회의가 15일에 이미 개 회되고 난 뒤였다. 그들은 시내 배켄슈트라트가( 街 ) 124번지에 소재한 Jongs 호텔 에 투숙하여 태극기를 내걸고 공개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6월 27일경에 한국 특 사의 출현을 인지한 일본 대표들은 급전으로 본국에 알리는 한편 특사들의 활동 을 방해했다. 특사들은 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늑약 의 무효파기를 주장하려면 우 선 한국대표로서의 공식성을 인정받아 각 분과회의나 본회의에 참석하고 공식적 인 발언권을 얻어야만 했다. 그들은 평화회의 의장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방문, 후원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각국대표의 초청이 주최국인 화란 정부에 있음을 들 어 화란의 외무대신 후온데스에게 교섭하도록 권했다. 후온데스 역시 개인적으로 는 동정하였으나,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이양되었고 각국이 2년 간 단교한 사실이 있으므로 본회의의 한국 대표 참석을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 다고 완곡하게 사절했다. 85) 세 특사는 6월 29일 다시 의장 넬리도프를 찾아가 의장직권으로 회의참석이 가 능케 되도록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미국ㆍ프랑스ㆍ중국ㆍ독일 대표에게도 협 조를 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은 비공식적인 경로로 한국문제를 국제 문제로 부각시키기 위해 6월 27일 86) 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의 요구를 담은 공고 사( 控 告 詞 )와 그 부속문서를 세 특사의 연서로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내고 신문에도 공포하였다. 87) 83) 이 점에 관해서는 윤병석, 증보 이상설전 제7장 해아 만국평화회의의 사행 p. 61 주 7)을 참조. 84) 이준의 출발일자는 4월 20일( 한국독립운동사 제1권, 국사편찬위원회, 1983, p. 179), 4월 21일(윤병석, 앞의 책, p. 62), 22일(유자후, 앞의 책, p. 343) 등이 있다. 85) 윤병석, 앞의 책, p. 66. 한편 윤교수는 위임스의 헐버트전기 를 인용하여, 한국 대표가 3월 25일의 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에 참석, 한국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외교적 활동을 막는 일본의 비합법성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가 다루어지도록 요청하면서 고종의 친서를 전달 하였으 며, 평화회의 공식보고서에는 이 제안이 거부되었다고 기록되지는 않았다 고 기술하였다(윤병석, 앞의 책, pp ). 86) 공고사를 보낸 날짜를 윤병석(앞의 책, p. 67)과 유자후(앞의 책, pp )는 6월 27일로 보았고, 한국독립운동사 제1권 (국사편찬위원회, 1983) p. 183에서는 7월 5일로 보았다. 그 밖 에도 특사들의 활동과 관련된 날짜에는 많은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데, 예컨대 6월 29일 특사들 이 넬리도프를 찾은 것도, 한국독립운동사 제1권(p. 182)에서는 처음 찾은 것처럼 기술하였으 나, 윤병석은 다시 찾았다고 했다

49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세 특사와 비슷한 시기에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파리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한 헐버트는 특사를 도와 신문ㆍ잡지 등을 이용, 국제여론에 호소했다. 제1회 만국평 화회의 때부터 알려진 유명한 영국 언론인인 스테드(Wm. T. Stead)가 편집하는 평화회의보 는 공고사 전문과 특사들의 활동을 보도했는데, 평화회의의 공식 적인 기관지는 아니지만, 회의기사를 많이 취급하여 각국 대표들과 유럽인들에게 널리 읽혀져 영향력이 컸던 소식지였다. 특히 한국을 찬성하고 일본에 비판적이 었던 스테드의 글은 런던 타임즈와 뉴욕 헤럴드 및 유럽 신문들에 전재되었다. 그 밖에도 특사들은 7월 9일 프린세스그라트 6A에서 열린 각국신문기자단의 국 제회의의 초청을 받았고, 이위종이 그 자리에서 부르짖은 한국의 호소 는 즉석에 서 한국의 입장에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의 박수로 끌어내기도 했다. 특사들은 언론 홍보 등에 주력하면서 을사늑약의 강제성과 일제의 잔학성ㆍ무신 뢰성을 규탄하면서 세계의 군대가 그런 야만적인 폭력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하 였다. 이러한 활동에서 이준이 독자적으로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지에 대해서는 분 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7월 9일 국제협회의 귀빈으로 초대된 것까지는 확인 된다. 88) 그러나 그로부터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7월 14일에 이준은 순국하였다. 만리타향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다. 여기서 종전의 역사이해에 비추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는 한 국은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초청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과 관련, 종래 역사학계에서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한국은 초청되지 않았고, 따라서 특사들이 맨 먼저 노력한 것은 한국이 피초청국이 되도록 하여 발언권을 행사토록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 발굴한 자료의 제 2차 만국평화회의 피초청국 명단(사본) 89) 에는 12번째로 이름이 보인다. 이 자료 와 관련, 따로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믿는다. 둘째는 종래 특사들이 만국평화회의에 황제의 신임장을 제출함으로 그것을 확 87) 훌륭한 문장과, 한국의 입장과 요구를 분명하게 밝혀 한말 외교의 력사적 문서 (윤병석)로 평 가되는 이 공고사는,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일체의 정사를 일본이 한국 황제의 윤허 없이 마음대로 행사했다는 것,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본은 무력을 행사한다는 것, 그리 고 일본은 한국의 법률이나 풍속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 등을 중요 골자로 하고 있다. 부속문서에 보이는 을사조약 체결경위 부분은 이 사설이 경험한 實 談 으로 현존하는 을사오조약기록 관계문 헌 중 가장 정확하고 소상한 기록으로 평가 된다는 것이다. 공고사 및 부속문서는 전문이 윤병 석, 앞의 책, pp 에 원문과 함께 게재되어 있다. 88) Haagsche Courant (윤병석, 앞의 책, pp ). 89) 이 자료는, 1997년 8월 29일부터 30일까지 헤이그에서 거행된 만국평화회의ㆍ이준열사 순국 90주년 한민족 평화 제전 때에 만든 것인데, 필자가 이기항 관장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p. 20 에 피초청국 명단에 한국(Coree)이 보인다

5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인하는 기간동안 본회의장에서 만국의 대표들 앞에서 한국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발언을 했다는 기록이다. 이 때 일본대표가 거세게 항의하여 의장은 일본의 요구 에 따라 서울에 전보로 황제의 신임장 여부를 확인하게 되었고, 전보가 서울에 도착하자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통감부가 전보를 고종( 高 宗 )에게 아뢰지도 않고 특사들이 갖고 갔다는 신임장을 부인함으로 특사들이 발언 도중 쫓겨나게 되었다 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로는 그 같은 종래의 주장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 다는 것이다. 셋째, 앞의 문제와 관련된 이준의 할복자살설( 割 腹 自 殺 說 )이다. 서울에서 회답 으로 온 전보가 특사의 신임장에 하자가 있는 것으로 밝히자, 이것이 일제의 농 간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간파한 이준은 대표들 앞에서 연설 도중 소지하고 간 단도를 꺼내어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어 대표들 앞에 던지고 피를 뿌리고 순국하 였다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 과거 그의 할복자살'이 얼마나 미화되고 있었는지, 극적으로 묘사된 한 예만 들어보겠다. 그리고 지금 本 員 은 일신을 희생하여서라도 우리 동포들이 다 일본의 無 義, 無 道 와 항쟁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그 생명을 우리 국가에 바 치려는 결심이 있음을 세계 만국에 대하여 실제로 보이려 하는 바이다. 이는 非 但 우리 한국과 우리 한국민족만을 위함이 아니다. 모든 세계의 약소국가와 약 소민족을 위하여 세계열강들의 無 正 義 와 無 正 道 에 대한 항쟁임을 여기에 선언 하는 바이다. 이와 같이 최후의 비장한 말을 토하자마자 일직이 준비하여가지고 있던 懷 中 의 寶 刀 를 끄내들었었다. 참으로 전회장은 慘 憺 化 하여지며 全 員 은 啞 然 瞠 目 하 였었다. 열국대표들은 한국대표사절 이준 선생의 말 가운데서 본원은 일신을 희생하여서라도 우리 한국동포들이 다 저 왜적의 무의와 무도를 항쟁하여 최후 일인까지 그 생명을 우리나라에 바치려는 결심이 있음을 세계만국에 대하여 실 제로 보히려 한다 云 云 하는 말에 다소 의심스러운 기분이 없지는 아니하였었 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장에서야 그러한 일이 있으랴마는 설마 하는 생각을 하 고 있었는데, 그와 같이 별안간에 칼을 빼드니 너무나 의외의 일이었고 너무나 창졸간의 일로서 평화회의장에 滿 座 하였던 열국사신들은 일제히 경악하면서 달 려들어 제지하려 하엿으나 미처 손이 갈 사이가 없는 동안에 이준 선생은 만국 평화회의의 연설대상에 선채로, 대한독립만세 세계약소국만세 를 부르면서 一 氣 로 할복하여 신성한 보혈을 만국 사신 앞에 뿌리고 혼절하여 倒 地 하였었다. 이때 會 場 全 員 이 大 驚 急 救 하려 하였으나 인사를 不 省 하였었다. 이상설, 이위종 선생은 하도 기가 매켜 이준 선생을 붙들어 잡고 대성통곡하니 이준 선생은 이

51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때 잠간 回 醒 하여 가지고, 우리 한국의 독립을 회복할 자는 우리 동포 2천만 가 운데에 수백만의 청년동포가 있다. 하느님이시어 우리 한국의 독립의 원기를 培 養 撫 育 하여 주소서 내가 수만리 타방에 건너와 황은을 보답치 못하고 우리 동포 와 영원히 작별하거니와 내가 血 氣 男 兒 로 한국에 復 生 하여 우리 청년동포로 더 불어 우리 한국의 독립을 기어코 挽 回 하기를 하느님께 控 訴 하노라. 하느님이시 어 우리 한국의 독립을 회복케 하여주시며 세계 약소민족을 부흥케 해 주소서 하고 殞 命 別 世 하였었다. 그리하여 萬 國 은 驚 動 케하는 배달국가의 정의, 배달민 족의 정기로 얽힌 成 仁 의 역사의 날을 이루었었다. 그리하여 세계만국의 詠 史 大 家 들의 필봉과 文 陣 을 총동원하게 하여 비절하고도 壯 絶 한 절의와 快 絶 하고도 偉 絶 한 公 心 을 汗 靑 에 染 紅 케 하였었다. 참으로 우리 배달국가의 忠 烈 純 義 의 權 現 의 정기를 보이어 주었으며 참으로 우리 세계만방의 정의와 정도를 위하며 특 히 약소민족 약소국가의 억울한 群 像 들을 위하여 거룩한 주검의 성혈로써 위대 한 항쟁을 선포하여 녹이 쓸은 정의를 修 明 하며 때가 낀 正 道 를 磨 光 하여 세계 만방이 평등, 평화로 살 수 있도록 하자는 혈액을 천만세에 宣 流 하 것이었었다. 이와 같이 寶 血 로 成 仁 하니 이 때 이 만국평화회의에 參 列 하였던 각국 대표 들이며 각국 신문기자 기타 방청하던 貴 賓 碩 紳 들은 이 이준 선생의 義 魂 忠 魄 을 위하여 그의 명복을 비는 애도의 黙 禱 를 행하고 동시에 義 捐 하여 葬 儀 를 진행케 하였었다. 그리하여 화란정부의 호의로 海 牙 國 立 公 園 안에 특히 묘지의 허가를 얻게 되었었다. 만리해외에서 遽 猝 間 에 당한 일이라 主 喪 이 없음으로 이상설 이 위종 양 선생이 護 喪 하여 만국대표들과 국제기자단이며 해아국제협회회원 기타 해아의 市 民 歸 兒 들이 國 際 哀 를 발로하여 弔 臨 한 아래에 安 魂 慰 靈 의 奠 祭 를 성 대히 거행하고. 이 墓 標 앞에서 다시 追 悼 會 가 성대히 거행되니 의장 로국전 권 네리토푸 백작이며 미국전권 시옷트 씨를 비롯하여 간곡한 추도사가 있었 다. 90) 이렇게 자살설이 미화되고 민족적 전승으로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것은 당시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백 성들은 이준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을 통해 민족적 울분과 국권회복의 열망을 표출하려 했다. 동시에 이준 자살설 이 별 의심 없이 전승된 것은 전승자 자신도 민족독립ㆍ국귄회복을 위해 자살까지 각오하고 있다는 심리를 은연중 반영하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해방 후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일제식 민주의자들에 의한 식민주의사관도 바로잡아야 하지만, 동시에 과거 민족주의 내 90) 유자후, 이준선생전, pp

5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지는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되고 미화되어진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검증도 여러 분야에서 제기되었다. 이준의 사인( 死 因 )에 관한 문제도 이와 같은 추세에서 제기되었다. 더구나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화란 현지에서 확인된 내용은 지 금까지 전승되어 오던 내용과 차이가 있음을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더 이상 자살설로 국민을 설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학계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학계는 분사설 ( 憤 死 說 )로 일단 합의하고 그의 죽음을 순국 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91)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그의 순국 때부터 할복자살설 혹은 자살설이 지배적이었 던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독사( 丹 毒 死 )를 포함한 병사설( 病 死 說 )이 처음 부터 없지 않았으나 일제하의 민족의 독립의지를 고양하기 위해 자살설이 유포 내지는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1907년 7월 그의 죽음을 알리는 대한매일신 보 가 자살설을 유포시킬 때 단재 신채호가 개입되었다는 증언은 대단히 흥미롭 다. 즉 김수산( 金 水 山 ; 金 光 熙 )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블라디보스토크[ 海 蔘 威 ] 로 망명 갔을 때 이상설을 만나 이준의 사인을 물으니 종기( 腫 氣 ; 등창) 때문에 운명했다고 했으며, 다시 만주로 갔을 때 양기탁( 梁 起 鐸 )을 만나 이준의 죽음에 대한 과거 신문(대한매일신보)보도에 오류가 있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양기탁은 당시 주필이던 단재 신채호가 양씨 및 배설씨와 협의하여 이준 선생의 분사( 憤 死 )를 민족적 긍지로서 만방에 선양할 목적으로 할복자살로 만들어 신문에 쓰게 끔 하였다 92) 는 것이다. 6.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이준의 생애를 중심으로 그의 국권회복운동을 중점적으로 살 펴보았다. 함남 북청 출신의 이준은 어릴 때 전승받은 가풍과 전통적인 공부를 통해 유교적 세계관에 충실하였다. 그러다가 1894년 국내외의 큰 변화를 보면서 개화에 접근하게 된다. 서울의 새 결혼생활과 법학공부를 통해 개화를 경험하게 되지만, 아직도 근대화된 인간관과 사회인식을 철저히 갖지 못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일제가 한일협약을 강요하고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 는 것을 보면서 어느 정도 일본의 본질을 간파하게 된 이준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91) 이 점에 관해서는 국사편찬위원회, 이준 열사 사인 조사자료 ( )와 윤병석, 앞의 책, p. 92, 주 46)과 같은 책, 제15장 이상설의 유문과 이준 열사 에 자세히 밝혀 놓았다. 92) 한국일보 1956년 7월 18일자(국사편찬위원회, 이준 열사 사인 조사자료, pp )

53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항일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보안회ㆍ대한협동회ㆍ공진회ㆍ헌정연 구회ㆍ국민교육회ㆍ한북흥학회ㆍ국채보상운동 등의 활동에 깊이 관여하면서 항일 애국계몽운동에 나섰다. 이런 운동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에 관련된 것으로서 이준의 활동반경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이런 실천을 통해 그의 세계관을 넓혀갔으며, 반침략ㆍ국권회복운동이 애국계몽운동에 근거해야만 백성의 힘을 모을 수 있다는 것과 반봉건 사회개혁운동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깨 닫게 된다. 1905년 11월 을사오조약 이 강제 체결되자 이준은 김구 등과 함께 조 약무효화운동에 나섰고, 국채보상운동을 통해서 일제의 침략의도가 어디에 있는 가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또한 그가 배운 법학을 통해 반봉건적 사회개혁을 가속화시키려고 했다. 평리원 및 특별법원 검사로서 그의 상관을 기소할 정도로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지 만, 외교권을 빼앗긴 나라의 형편은 정당한 법의 행사도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통감부 하에서는 정당한 법집행이 곤란하다는 것을 통감하게 된다. 반개혁세력이 외세와 결탁, 국내의 반봉건개혁마 저 무산시키는 것을 목도하면서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여기서 그가 헤이그 밀사 로서 외교권을 회복하는 운동에 나서게 되는 이유의 일단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나라의 외교권 회복이 곧 국권회복운동의 중요한 핵심이며, 그것은 곧 국 내에 온존하고 있는 반개혁적인 친일세력을 극복하는 데까지 효과적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는 그가 배운 법학지식과 지금까지 운동을 통 해 축적한 실천적인 능력을 총동원, 헤이그 밀사로서 본격적인 국권회복운동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척사위정계 혹은 온건개화파 인물과의 접촉으로부터 시작하여 법학공부 후에는 온건개화파 인물인 민영환ㆍ이범진과의 교제로 확대되며, 애국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통해 축적된 힘으로 한말외교의 최고봉이라 할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특사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는 당시의 세계 역학관계로 보 아 실패가 처음부터 예상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의 세계관과 거기에 바탕을 둔 경륜은 충군애국적인 자신의 정열을 뒤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끝으로 이준의 인간성에서 상반되는 성격을 보게 되는데, 이를 테면 그는 보수 적인 정객(대원군ㆍ김병시ㆍ최익현 등)을 찾기도 하면서, 개화파 인사와도 가까이 지냈고, 항일적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친일개화파 정권(김홍집)이 붕괴될 때 그 도 망명하여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기도 했다. 이런 점들은, 진보와 변화라는 관점 에서 보면 별 문제가 없지만, 이런 것까지를 포함하여 이준에 대한 평가는 좀더

5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깊은 천착을 통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경술국치 90주년 학술심포지엄 이준 열사에 대한 역사적 조명 발표문(2000 년 8월 10일)]

55 한국역사 속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한국근현대사 제 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 강사 : 이 만 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2009년 6월 4일(목) 저녁 7시 서울YMCA 친교실(2층) 주최 : 서울YMCA

5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57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남강 이승훈의 신앙 이만열 명예교수(숙명여대) 1. 머리말 남강( 南 岡 ) 이승훈( 李 昇 薰, 1864~1930)은 자수성가한 실업가요, 오산학교( 五 山 學 校 )를 설립, 민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민족적 동량을 키운 교육자요, 105인 사건 과 3 1운동에서는 그의 고난과 투지로 하여 돋보여진 탁월한 민족주의 운동가였 다. 그는 제대로 학업을 닦지 못한, 자신의 표현을 빌면 불학무식( 不 學 無 識 )한 사람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위대한 선구자로 돋보여지도록 된 것은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에게 남다른 천재성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가 실업가로 대성( 大 成 )한 데에는 천성과도 같은 근면성이 있었고, 이재적( 理 財 的 ) 판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초기에 비교적 성공했던 그는 ( 守 成 )의 능력이 미흡하였던지 뒷날까지 실업가로서 명망을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남강으로 하여금 남강되게 한 것은 교육가 민족운동가로서였다. 이것은 도산( 島 山 ) 안창호( 安 昌 浩 )로부터 듣고 깨달은바 때문이었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역동성 을 부여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다고 생각된다.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그의 일생 을 관통하면서 그로 하여금 위대한 선구자로 돋보여지도록 한 에너지였다. 그는 신앙을 통하여 고난을 체험하면서도 그것을 인내 극복하는 법을 터득하였고, 고 난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갔다. 그는 신앙을 통하여 민족교육과 민족운 동을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릴 수가 있었다.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사상을 세련 되고 고상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의 행동에 절제의 미덕을 부여하였으며, 편파적 이기 쉬운 민족주의 운동을 보편성에 입각하도록 하였으며, 고집스러우리만큼 외 곬수의 모난 인격을 연마시켜 드디어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모든 것을 신 ( 神 )께 의탁하는 자기부정( 自 己 否 定 )의 인격자로 만들어 갔던 것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입교에서부터 그의 신앙이 어떻게 성장해 갔으며, 그의 신앙 의 성장에 따라 어떤 역사적 문제와 부닥치게 되는가를 살피면서, 그의 신앙의 성격이 어떻게 규정되어지는가를 살피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그 의 신앙이 역사적 정황을 극복해가는 에너지였음도 발견케 될 것이다. 그리고, 남

5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강의 신앙을 추적하는 것은 한말 일제하 격동기에 하나님이 한 인간을 어떻게 그 의 사람으로 들어 쓰셨는가 하는 새로운 모형도 보여줄 것이라 생각한다. 2. 서북인 남강의 입신( 入 信 ) 1) 서북지방인들의 기독교 접촉 남강이 활동한 중심 무대는 정주( 定 州 )를 비롯한 평안도 지방이었다. 이 지방에 서는 미국계의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부터 이미 기독교에 접촉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로 만주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1870년대 후반에 의주의 청년들 중에는 만주에 가서 이미 그곳에 선교사로 와 있던 로스(John Ross ; 羅 約 翰 )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 馬 勒 泰 )를 만나, 혹은 그들의 어학선생이 되기도 하고, 혹은 그들을 도와 성경의 한국어 번역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879년에 네 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백홍 준( 白 鴻 俊 )과 이응찬( 李 應 贊 )을 포함하여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사람들이다. 1882년에는 성경 인쇄와 그 보급에 힘을 쓰게 되었던 김청송( 金 靑 松 )과 서상륜( 徐 相 崙 )도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모두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그들 자신이 만주에 나가서 세 례를 받은 이들이다. 그들은 이때 세례받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선교사들도 수세자들에게 위험이 뒤따르는 이러한 세례를 베풀 때에는 세 례 청원자들로부터 단단히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앞서의 서북지방의 청년들은 그들의 목숨과 바꿀지도 모르는 이 일에 용기를 가지고 뛰어들었다. 이 무렵, 국경 의식이 비교적 덜했던지 한국인들 중에는 압록강 두만강을 건 너 만주지방에서 생활의 터전을 닦고 있었던 이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때로는 집단 적으로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또, 1882년 만주에서 누가복음 과 요한복음 이 간행된 뒤에는 백홍준 김청송 등이 이 복음서를 들고 전도하여 만주지역에서 많은 신자를 얻게 되었다. 뒷날 한국과 중국 간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면서부터 강북 쪽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이 대거 추방당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만주에 서 이미 기독교를 믿고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도 강남의 한반도로 이주하게 되었 다. 평안도 지역에서 일찍부터 기독교가 성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요인도 간과 할 수 없다. 이들은 대부분 뒷날 선교사들과 접촉하게 되어 서북지방의 교회 설 립을 추진하는 주체 세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93)

59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있던 서북지방에 미국계 의 선교사가 나타나게 된 것은 1887년부터이다. 1885년에 입국한 미 북장로교회 의 언더우드(H. G. Underwood ; 元 杜 尤 )와 미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 G. Appenzeller ; 阿 扁 薛 羅 )가 1887년에 처음으로 서북지방에 선교 여행에 나선 것이 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교금( 敎 禁 )으로 이 여행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정부의 분위기를 간취한 미국 공사가 급히 귀경( 歸 京 )을 명했기 때문이다. 서북지방이 장로교의 전도 지역으로 획정된 것은 이 지역 선교에 헌신한 마펫 (S. A. Moffett ; 馬 布 三 悅 )의 공헌이 크다. 그는 1890년 1월에 미 북장로교의 선 교사로 한국에 도착한 후, 몇 달 동안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이 해 8월 서북지방 으로 제1차 전도 여행을 감행, 의주에까지 다녀왔다. 그는 이 여행에서 백홍준의 소개로, 뒷날 한국 기독교의 초석의 한 사람인 한석진( 韓 錫 晋 )을 만나게 되어 그 의 서북지방 개척 선교에 결정적인 도움을 얻게 되었다. 제2, 3의 선교 여행 후, 그는 1893년 평양에 선교 거점(mission station)을 정하고, 갖은 박해를 무릅쓰며 전도한 결과 이 해부터 4~5명의 신도와 더불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고, 이 어서 널다리골( 板 洞 )에 가옥을 매입, 교회당을 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뒷날 장대 현교회로 불리어진 평양 최초의 교회였다. 마펫은 선교사 리(Graham Lee ; 李 吉 咸 ) 부처를 동역자로 하고 한국인 조사들의 도움을 받아 일찍부터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서북지방에 전도와 교회 건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표에 보 이는 바와 같이 서북지방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설립될 수 있었다. 선교 거점으로서의 평양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의 전지역의 선교를 도맡았기 때문에 교회가 흥왕함에 따라 선교팀이 보강되지 않을 수 없었다. 93) 朝 鮮 예수교 長 老 會 史 記 (1928), pp. 10~11, p.14에 나오는 義 州 지방의 초대 신자들과 32인의 압록강 위에서의 세례는 바로 이들 세력으로 간주된다

6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19세기 말 장로교회 설립 상황> 연도 평안도 황해도 기타 지방 평양~판동 ; 평원~한천 명당 ; 용강~죽본 강서~탄포리, 청산포 ; 평 원~외서창 재령~신환포, 상거동, 강 촌 ; 안악~교동, 덕산, 대 동, 읍내, 무석, 삼상 ; 장 연~칠곡, 장연읍 ; 봉산~ 당포 ; 문화~사평동 ; 송 화~덕안리 부산~초량 ; 원산~명석동 봉산~모동 ; 사리원 ; 곡 용인~백봉리 산~곡산읍 장연~의동 ; 재령~읍내, 대동~신흥리 ; 강서~대 항내동 ; 봉산~단산촌, 신 1895 안, 자덕 ; 용강~덕해 ; 원, 창촌, 간촌 ; 은율~중 경주~신대리~울산~병영 구성~신시 흥동 ; 평산~매화동 ; 안 악~금산, 상벌리 ; 서울~연동 ; 대구~남성정 강서~반석, 고창 ; 대동~ ; 전주~서문외 ; 함흥~읍 태평외리 ; 숙천~읍교 ; 황주~홍촌 ; 봉산~좌곡 ; 내, 문산 ; 안변~읍내, 고 1896 평원~삼관, 소죽, 주촌 ; 신천~정여동 산, 위북리, 낭성리, 사탁 진남포~노정 ; 삭주~읍내 리, 인두리 ; 신흥~동평리, ; 중화~대기암, 남창 창원~월백리 1897 의주~읍내 ; 선천읍 ; 철 산~읍내, 학암 ; 대동~장 천, 차리 ; 순안~동평리, 기탄 ; 평원~순안, 통호 리, 갈원, 덕지 ; 진남포~ 비석리, 억량기, 제현 ; 용 강~진지리, 현암 중화~읍내 ; 황주~서리, 석정, 용연, 연봉 ; 수안~ 두대동, 강진 ; 곡산~도리 동, 신천~문산 ; 안악~덕 리 ; 장연~태탄 고양~행주, 상당리 ; 김포 읍 ; 김제~송지동 ; 함안~ 사촌 ; 밀양~춘대리 의주~남산 ; 강서~송호리 ; 박천~남호, 구읍 ; 철 산~서평 ; 용천~동문외, 곡산~화천리 ; 은율읍 ; 신창 ; 강동~도덕리(열 목포~양동 ; 고원~덕지 ; 1898 송화~장촌, 태을리 ; 재령 파), 강동읍 ; 중화~요포, 이원~서호 ; 김해읍내 읍 ; 장연~의동, 중화동 장산리, 설매동, 용산리, 채송리 ; 대동~대원, 우천 리, 팔청리 ; 덕천~달하리 대동~빙장, 하리, 망덕리 ; 강서~이목동, 이로도 ; 진남포~예명, 고읍 ; 중 장연~백촌 함안~이령 1899 화~동상 ; 용천~서석, 덕 재령~광탄 나주~삼도리 천동 ; 정주읍 ; 위원~석 포동 ; 덕천읍 ; 평원~탑 현, 팔동, 마촌 계 * 자료 :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1928)에 의함

61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앞에서 이미 언급된 선교사들 외에 1900년까지 베어드(Rev. W. M. Baird ; 裵 緯 良 ) 부처, 스왈른(Rev. W. L Swallen ; 蘇 安 論 ) 부처, 휘트모어(Rev. N. C. Whittemore ; 魏 大 模 ), 웰스(J. H. Wells ; M. D. 禹 越 時 ) 부처, 헌트(Rev. W. B. Hunt ; 韓 緯 廉 ) 부처, 샤록스(A. M. Sharrocks ; M. D. 謝 樂 秀 ) 부처, 번하이젤 (Rev. C. F. Bernheisel ; 片 夏 薛 ), 렉크(Rev. G. Leck) 부처, 베스트(Miss M. Best ; 裵 貴 禮 ) 그리고 하우엘(Miss E. M. Howell) 등이 평양 선교부에 보강되어 일하게 되었다. 1897년 2월, 휘트모어는 선천을 순방한 이후 이곳에 선교 거점 설치를 모색하 다가, 1899년에 가옥을 사들이고 이곳에 이주하였다. 이어서 1901년에 의료선교사 샤록스가 선천에 이주하게 되어 본격적인 선교 활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선천에 선교부를 설치한 것은 이웃 정주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선천 선교부는 평북 일대의 선교를 겨냥한 것이었다. 선천 주변의 지역에는 이 선교부의 설치로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주에 교회가 설립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99년에 설립된 정주읍교회와 1900년의 염방교회 곽산교회 및 1901년의 청정교회의 설립이 그것이다. 94) 이리하여, 만주를 통하여 복음을 받았던 서북인들은 미국계 선교사의 진출로 체계를 갖춘 교회에 수용되게 되었다. 서북지방에 교회 설립이 왕성해졌고, 기독 교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된 것도 바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다소 자생적인 기독교 세력과 북상하고 있던 선교사 세력이 서북지방에서 만나 서로 제휴할 수 있었던 데서 그 원인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뒷날 남강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신앙생활을 한 지역적 배경에는 이러한 선 교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남강은 아마도 이러한 초기의 선교 활동과 함께 그의 유년 및 자립적인 소년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개화론자들의 입신 기독교가 전파되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들어갔다. 당시의 언론들은 그들의 입신 동기를 사회적 측면에서 주로 두 가지로 분석하였다. 그 하나는 개화를 통 해 나라의 부국강병과 독립을 유지하기 위함이었고, 또 하나는 당시의 부패한 관 리와 정부로부터 사람들이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자는 데에 있었다. 전자가 주로 양반 관료와 지식인의 입교 동기라면, 후자는 일반 민중들의 입교 동기였다고 대 94) 朝 鮮 예수교 長 老 會 史 記 (1928)의 해당 연도 참고

6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체로 분석된다. 95) 초기에는 관료 지식층의 기독교 입교가 쉽지 않았다. 워낙 기독교는 양이( 洋 夷 )의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기선( 申 箕 善 )이 쓴 유학경 위 ( 儒 學 經 緯 )에 이미 잘 나타나 있었다. 양반 사회에서 기독교에 입교한다는 것 은 그들의 생활의 기반을 벗어나는 것과 같았다. 더구나 제사에 의한 효순( 孝 順 ) 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예수교는 처음부터 제사를 우상 숭배로 규정하였으니, 양 반이 기독교에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관료진신들의 기독교 접근은 갑오개혁 이후에 두드러지게 되었다. 동학혁명의 회오리에다 청일전쟁,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유교적 체제가 흔들린 데다가 특히 이 러한 격동적 사건들로 하여 기독교 전파의 새로운 가능성이 제고되었기 때문이다. 양반 신분을 가지고 기독교에 입교한 사람으로 서재필과 윤치호를 꼽을 수 있 다. 이들은 외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귀국하여 독립협회 운동을 통하여 한 국의 개화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이들이 활약할 무렵 현직 관료 중에서 도 기독교에 입신, 기독교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우선 이무영 ( 李 懋 榮 ) 씨의 경우가 눈에 뜨인다. 그는 당시 궁내부 물품 사장으로서 양반들의 유교식 제사를 개혁하였을 정도로 깊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죠션크리스도 인회보 는 이렇게 증언한다. 현금에 궁 부 물품 쟝으로 잇 리무영씨 우리 교회 즁 랑 형뎨 라 음력 륙월 이십구일은 그 대부인의 대긔날인 그 형뎨가 망극 과 감구지회 억졔 수 업 지라 우리가 하 님을 셤기고 구셰쥬 밋은즉 다 른 사 과 치 음식을 버려노코 졔 지낼리 업거니와 부모의 대소긔 당 여 효 의 이 엇지 그져 지내가리오 이에 교즁 여러 형뎨 쳥좌 고 대텽마루에 등쵹을 키달고 그 대부인의 령혼을 위 여 하 님 긔도 고 찬미 며 그 대부인이 죤 여 계실 에 하 님을 밋음과 경계 든 말 과 현슉 신 모양을 각 며 일쟝을 통곡 고 교우들도 리무영씨 위로 며 하 님 긔도 며 경경히 밤을 지낼 그 모친의게 으로 졔 드 린지라 엇지 아름답지 아니리오 이 후에 다른 교우들도 부모의 대소긔 당 면 리무영씨와 치 기가 쉬울 듯 더라. 96) 95) 李 萬 烈, 韓 末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보성, 1986, p ) 죠션크리스도인회보

63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이무영 외에 법부 형사국장 및 경무사로 있던 이충구는 년전에 장로교회에 다 니며 서국 부인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는 신의 있는 크리스챤이었다. 97) 또 중국에 가서 성경을 공부하고 돌아와 죽산군수가 된 김홍수는 샹 셩을 맛난즉 진도 젼 고 리쇽을 랑 여 압헤 안치고 셩경을 강론 98) 하였고, 면천군수를 지낸 류제 또한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흉년당한 백성들의 유리함을 보고 수십 만냥을 풀어 기민을 구하였고, 동학혁명 때는 선유별관으로 사람을 많이 살렸으 므로 열읍 사람들이 청원하여 명천군수가 되었으며, 그를 위해 각처에 송덕비도 세워졌다. 류제는, 면천원을 갈닌 후에 덕산 내라 쵼에 거 여 하 님을 공경 고 사 을 랑 예수도를 린근읍 사 들이 그 소문을 듯고 쟈와셔 교회 도 가져가고 교회 리치도 뭇 사람이 잇 99) 정도로 인근 백성으로부터 칭송과 덕망을 받은 기독교인이었다. 개화 지식인들의 기독교 입교는 계속되었는데, 독립협회 사건 후 다수의 개화 파 지식인들이 보수적인 정부에 의해 투옥된 후 개종은 급증했다. 이원긍, 이상재, 유성준, 김정식, 이승인, 이승만, 안국선, 김린 등으로서 이들은 3년여 동안 감옥 생활 중에 기독교 선교사 벙커(D. A. Bunker)와 게일(J. S. Gale)을 접하며 개종 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 중 이승만이 옥중 학교와 옥중 도서실을 운영했다는 것 은 잘 알려져 있다. 100) 이 점과 관련 이원긍( 李 源 兢 )의 아들 이능화( 李 能 和 )는 이 렇게 전하고 있다. 光 武 五 年 辛 丑 之 春 三 月 에 先 考 府 君 (호 取 堂 前 韓 從 二 品 嘉 善 大 夫 法 部 協 辦 ) 及 李 商 在 氏 (호 月 南 前 韓 從 二 品 嘉 善 大 夫 議 政 府 參 贊 ) 兪 星 濬 氏 (호 兢 齋 前 韓 從 二 品 嘉 善 大 夫 內 部 協 辦 ) 金 貞 植 氏 (호 三 省 前 韓 警 務 官 ) 李 承 仁 氏 (호 竹 史 月 南 先 生 之 次 子 前 韓 爲 扶 餘 郡 守 卒 于 官 ) 洪 在 箕 氏 (호 斗 庭 前 韓 開 城 郡 守 卒 于 官 ) 李 承 晩 氏 ( 哲 學 博 士 ) 安 國 善 氏 ( 曾 經 郡 守 ) 金 麟 氏 ( 官 歷 未 詳 ) 等 이 一 時 被 97) 대한크리스도인회보 ) 죠션크리스도인회보 ) 죠션크리스도인회보 ) 이 점에 대해서는 李 光 麟 의 舊 韓 末 옥중에서의 기독교 신앙, 동방학지 합집과 徐 廷 敏 의 구한말 이승만의 활동과 기독교(1875~1904), 연세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1988 참조

6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拘 호야 同 逮 牢 獄 니 本 無 罪 案 之 可 構 오 唯 有 官 歷 之 是 咎 니 此 所 謂 莫 須 有 之 事 라 三 個 星 霜 鐵 窓 生 活 에 幽 鬱 慘 憺 야 苦 惱 畢 備 러니 幸 而 獄 法 에 許 看 宗 敎 書 籍 고 亦 許 洋 人 入 獄 布 敎 라( 時 米 國 人 宣 敎 師 房 巨 氏 D. A. Bunker 入 獄 傳 道 矣 ) 於 是 에 同 監 諸 公 이 相 與 硏 究 新 約 全 書 야 誓 心 決 志 야 領 洗 守 戒 니 是 爲 官 紳 社 會 信 敎 之 始 라 光 武 八 年 甲 辰 歲 初 에( 日 露 戰 後 開 始 之 祭 ) 始 得 釋 放 호야 得 見 天 日 야 遂 相 率 從 事 于 京 城 蓮 洞 敎 會 니( 時 奇 一 Gale 牧 師 主 幹 蓮 洞 敎 會 ) 後 自 蓮 會 로 分 向 各 方 야 獻 身 於 宗 敎 事 業 야 用 力 於 精 神 指 導 先 考 府 君 은 與 趙 鐘 萬 氏 ( 前 韓 成 川 郡 守 )로 於 沙 洞 ( 今 鳳 翼 洞 ) 敎 會 에, 月 南 先 生 은 與 尹 致 昊 氏 ( 前 韓 外 部 協 辦 ) 及 申 興 雨 氏 ( 文 學 士 )로 於 中 央 基 督 敎 靑 年 會 에, 兢 齋 先 生 은 與 朴 勝 鳳 氏 ( 前 韓 觀 察 使 )로 於 安 國 洞 敎 會 에, 三 省 先 生 은 於 東 京 神 田 基 督 敎 靑 年 會 에 各 自 從 事. 101) 이들은 옥중에서 자신의 고통보다는 나라 걱정을 더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찾게 된 것은 민족 구원의 소망을 여기에서 발견하려고 했기 때문 이다. 그들은 옥중 도서실에서 성서를 비롯한 기독교 관계 서적들을 읽으며 기울 어져 가는 조국의 장래를 신( 神 )께 의탁하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승만이 감옥 안에서 투고한 글에, 기독교를 두고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각기 그 몸이나 집안이나 나라이나 다 일체로 위태한 지경에 든지라 구원할 참 이치가 잇스니 밧 비 알아보고 밋어 행할지어다 102) 라고 하면서 기독교 구국론이 강력히 피력된 민 족 신앙 103) 을 주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반기독교적 입장을 취해 왔던 이상 재가 옥중에서 개종한 것도, 그 뒤의 행적으로 보아 일종의 기독교 구국론 에서 그 동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개화 구국을 목표로 하여 기독교에 입신했던 한말의 개화론자들 중에는 상당수가 더 굳건한 민족주의자로 변신해 갔던 것이다. 남궁억( 南 宮 檍 )이 그랬고 이상재가 그랬다. 이승훈이 기독교 입신 후에 더 강력한 민족주의자로 변해 갔던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사상이 보편주의적인 기독교 신앙 에 기반해 있었기 때문에 방법론상으로 부드러워, 때로는 타협주의적인 인상을 풍기기도 하였지만, 사실은 부드러움 속에서 오히려 꺾이지 않는 신념과 행동 원 칙이 그들을 철저히 인도해 갔던 것이다. 그들의 민족주의는, 기독교 신앙이 그러 101) 李 能 和, 朝 鮮 基 督 敎 及 外 交 史, 朝 鮮 基 督 敎 彰 文 社, 1928, pp. 203~ ) 서정민, 앞의 논문, p. 68에서 재인용. 103) 위와 같음

65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하듯이, 외유내강( 外 柔 內 剛 )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3) 남강의 민족적 각성과 입신 그의 전기들에 의하면 104) 남강은 궁핍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달 리 뛰어난 재기를 인정받았지만, 그는 한문 사숙에서 천자문( 千 字 文 ), 동몽선습( 童 蒙 先 習 )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전 반의 생애를 결정해 준 경제적 자립은 임일권( 林 逸 權 )의 상점에서 상업 경영의 훈련을 쌓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열 다섯의 나이에 보부상으로서 자립생활에 나서며, 강한 독립심과 고난 극복의 의지를 실천하였다. 거의 10여 년 간의 행상을 통해 남강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물정과 지리를 어지 간히 익혔다. 1887년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에 납청정 거리로 돌아온 그는 철산 ( 鐵 山 ) 오희순( 吳 熙 淳 )의 자금을 융통하여 공장과 상점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때로는 시련이 닥치기도 하였으나 약 15년 간은 사업이 번창하여 대무역상으로 등장, 전국의 경제권을 지배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무렵 오산의 용동 ( 龍 洞 )에다 여주( 驪 州 ) 이씨의 친족 촌락을 형성하는 한편,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서당을 마련하기도 하였고, 조정에서 수릉참봉( 水 陵 參 奉 )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이것들은 그의 재력 때문에 이룩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거상( 巨 商 )이 되긴 하였지만 그의 관심이 아직 개인적 영달과 씨족적 관념을 크게 벗어나지 못 하였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갈등 속에서 신 분 상승을 꾀해 왔던 그를 폄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무렵까지는, 뒷날 민족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남강에게서 이 때쯤이면 그 정체가 드러나고 있었을 외세 침략으로 인한 민족적 모순에 대한 고민이 그렇게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을 지적할 뿐이다. 남강이 적극적으로 민족 문제에 눈 뜨게 되는 것은 일본과의 관계를 거치면서 부터라고 하겠다. 1902년 부산에서 엽전이 품귀하게 되어 그 가치가 서울보다 2 배나 높게 되자, 그는 서울에서 수집한 엽전 1만냥을 부산으로 보냈다. 그러나 불 행하게도 그 엽전을 실은 배가 목포 근해에서 일본 영사관 소속의 배와 충돌, 침 몰하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오랫동안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지만 원금 1 만냥의 배상 밖에는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건을 통하여 그의 민족의식은 괄목할 정도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를 계기로 기업 경영에서 민족 문제를 104) 金 道 泰, 南 岡 李 昇 薰 傳, 1950 ; 金 基 錫, 南 岡 李 昇 薰, 1964 ; 나라사랑 12 남강 이 승훈선생 특집호,

6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발견하게 되었다. 외국 자본과 상품의 국내 침투를 막기 위해 민족 자본의 형성 과 민족 산업의 건설을 꾀한 관서자문론 ( 關 西 資 門 論 )을 구상한 것도 이런 시 련과 고민을 겪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무렵부터 그의 기업은 계속 위축되어 갔다. 국내외의 정세 변동 때문이었든 지, 그의 모험적인 상업활동은 번번히 시리( 時 利 )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황 해도의 수수( 高 粱 )를 매점( 買 占 )하였다가 제 때에 팔리지 않아 큰 손실을 보았는 가 하면, 명태를 독점 매입했다가 크게 실패하기도 하였고, 1904년에는 러일전쟁 을 이용, 우피( 牛 皮 ) 2만장을 사 놓고 시리를 기다렸지만 거기에서도 그는 실패하 였다. 근면과 남다른 사업 수완으로 한때를 떨친 그였지만, 급변하는 한국 상황은 그를 더 이상 사업의 성공자로 두지 않았다. 그가 42세 되던 1905년, 남강은 낙향하여 용동에 은거하게 되었다. 이 무렵 그 는 경서( 經 書 )를 읽었고, 율곡( 栗 谷 )에 심취하여 율곡전서 ( 栗 谷 全 書 )를 탐독하 였다고 한다. 그러는 한편, 국내외 정세의 변동을 살피기 위해 황성신문 과 대 한매일신보 를 구독하였다. 그리고 1906년 10월 관서지방 출신 인물들로 계몽단 체인 서우학회가 서울에서 창립되자 그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05) 웬만하면 좌절 했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남강은 자신의 실패를 반성하면서 새로운 일을 모색하 기 위한 기간을 이렇게 보내고 있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돌이켜보면 그의 거듭된 사업상의 실패는 하나님의 시작을 예고하는 조짐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지런하기가 그지없는 그에 게 용동 은거는 좀이 쑤셔서 못 견딜 일이었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을 박탈당하고 그 이듬해 통감부가 설치되었으며, 1907년에는 헤이그밀사사건으 로 고종의 퇴위 등 연쇄적인 사건이 터졌다. 그가 그의 생애의 방향 전환을 가능 케 한 도산 안창호를 만난 것은 이 무렵이었다. 106) 안창호가 국권수호운동을 하 기 위해서 미국에서 귀국한 것은 1907년 2월 20일이었고, 3월 2일 서우학회 제5회 통상회의에 참석하여 환영을 받고 강연을 하였다. 이승훈은 서우학회 회원이었기 때문에 이 회의에 참석하여 안창호를 만났을 가능성도 있다. 107) 그러나 더 깊은 만남은 도산이 그 다음 달부터 서북지역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신민회 가입을 설 득할 무렵이었다. 그는 도산의 권고로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승훈이 105) 西 友 제1호, 서우학회, , p ) 김승태, 남강 이승훈의 민족의식과 민족운동 방략,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9집, 독립기념 관, 2002, pp ) 西 友 제5호, 서우학회, , pp

67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신민회에 가입한 것은 도산의 인품과 권고에 감동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당시 시대적 과제였던 국권회복에 그 길이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새로운 일의 모색의 시기를 끝내고 다시 교육과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귀향하여 그해 12월 오산학교 ( 五 山 學 校 )를 세워 운영하고, 1908년 평양과 경성에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점원을 두고 운영하였다. 그의 이러한 극적인 전환 과 학교 설립 과정에 대해서는 여기서 굳이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 만 오산학교의 재단 설립과 관련, 그 지방의 유생들을 설득하여 향교 재산인 토 지와 승천재( 昇 薦 齋 ) 건물을 기부받을 수 있도록 한 당시 관찰사 박승봉( 朴 勝 鳳 ) 에 관해서만 한 마디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일찍이 관료로서 해외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서 서구 문명과 기독교에 접 했고, 선교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 때에 그는 궁내부 협판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 때문에 평안도 관찰사로 좌천 되었다. 영변에 부임한 그는 그곳의 선교사들과도 친분을 나누며 개화운동에 힘 썼다. 남강이 오산학교 설립을 위해 도움을 청했을 때 그가 향교의 토지와 승천 재를 알선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앞에서 이미 거론한 이상재, 이원긍, 유성준, 홍재기 등의 개화파 양반들이 기독교에 입교했는데, 이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던 박승봉도 이 무렵 입교하여 뒷날 장로로서 크게 활약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오산학교가 기독교에 관심 가졌던 박승봉에 의해 지원받았다는 점과, 뒷날 남강과 오산학교가 기독교와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남강에게 사상적 전환을 안겨다 준 도산 안창호(1878~1938)에 대 해서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겠다. 그는 평안남도 ( 江 西 ) 태생으로 1894 년 16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창설한 구세학당( 救 世 學 堂 )에서 수학, 이 학교의 조교가 되었는데, 이 무렵 그는 기독교에 입교한 듯하 다. 독립협회에 가입, 관서지부( 關 西 支 部 )을 설립하는 등 이미 이때부터 연설로 이름난 그는 경기 황( 黃 ) 평( 平 ) 지역을 순회하며 민중계몽에 힘썼고, 1899년에 는 강서에서 점진( 漸 進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언더우드, 밀러(F. S. Miller) 등 의 알선으로 1902년 미국에 건너갔던 그는 조선의 어려워가는 현실을 들으며 견 딜 수 없어 1907년 귀국하여 신민회( 新 民 會 )를 조직하고 대성( 大 成 )학교와 태극서 관( 太 極 書 館 ) 마산동 자기회사( 馬 山 洞 陶 磁 器 會 社 ) 등을 설립하는 등 3년간 애국 계몽운동을 벌이다 1910년 4월 망명의 길에 올랐다. 도산이 미국에서 귀국한 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여러 차례의 연설을 하였 다. 그의 연설은 대단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는데 심지어는 직무상 그 연설을 메모

6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하던 일본인 형사까지도 그냥 죽죽 눈물을 흘리고 울었다 는 것이다. 그의 연설 을 두고 오자일( 吳 子 一 )은 이렇게 썼다. 안 선생이 단에 올라서자 초만원을 이룬 극장 안이 떠나갈 듯이 우뢰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 당시 일본인들까지도 안창호는 三 寸 舌 로 백 만군의 힘을 낸다고 두려워하였으니 이로써 가히 안선생의 웅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입을 열자 그의 웅변은 마치 天 池 에서 샘이 솟듯, 三 千 尺 斷 涯 에서 폭포가 쏟아지듯, 그뿐만 아니라 그의 勇 姿 는 喜 怒 哀 和 의 표정 으로 청중을 虛 空 無 我 로 끌어갔고 감격 自 奮 케 하였다. 이 연설에 감복 한 나는 선생의 명령만 있다면 私 를 버리고 오직 복종하는 것이 영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108) 이러한 도산과 남강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이 같은 전환 과정에서 인간의 역사를 통할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 그 후 남강은 도산의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협조하여 신민회에 가입하고 평양과 서울의 태극서관 설립, 마산동의 도자기회사 창립에 참여하였다. 또 주목되는 것 은 신민회 등 그가 이 무렵에 관계했던 민족운동의 중추 세력이 도산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1907년 전국을 휩쓴 대부흥운동과 함께 남강이 기독교 신앙을 갖기로 결심한 중요한 계 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남강이 언제부터 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었느냐에 대해서 지금까지의 전기와 연 보, 연구들에서는 대체로 일제의 강제 병탄 직후인 1910년 9월로 보고 있다. 109) 그러나 이런 기록을 자료를 보완하여 면밀히 검토해보면 이승훈은 그보다 앞서 이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자료는 순종이 관서지방을 108) 吳 子 一, 감당하기 어렵소, 새벽 ; 주요한, 安 島 山 全 集, pp. 869~871에서 재 인용. 109) 김기석은 남강이 기독교를 믿게 된 시기와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남강은 여러 가지 산란한 심정 속에서 합방된 해 9월 평양에 나갔다. 산정재예배당에서 저녁 에 한석진 목사의 특별설교가 있다고 하여 뒤에 가 앉았는데 예상보다 사람이 모인 수가 적었다. 십자가의 고난 이라는 제목의 설교였는데,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괴로워하는 남강의 심령에 놀라운 감명을 주었다. 남강은 이날 저녁에 들은 설교를 기회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몇 해 전에 평양에서 나라에 헌신하기로 맹세했는데, 이제 또 같은 평양에서 교회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 金 基 錫, 南 岡 李 昇 薰, 현대교육총서출판사, 1964, pp. 299~300)

69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순행하던 중 1909년 1월 31일 평안북도 정주에 머물렀을 때 민심의 동향에 관한 일제 통감부 기밀 보고서 가운데 이승훈과 관련된 부분이다. 定 州 같은 어가가 머무는 곳( 御 駐 輦 場 )에서는 수십명의 奉 迎 者 를 朕 [순 종]이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하여 명령을 내려 特 志 者 로서 前 高 等 官 들 외에 특히 儒 生 長 盧 德 濟 耶 蘇 信 徒 로서 신교육 열심가인 李 昇 薰 이라는 자에게 拜 謁 하게 하시고 교육 및 단체 노년 등에게 다대한 하사금을 내렸기 때문에 크게 인심을 자극했다. 110) 이 자료에서는 남강 이승훈을 야소 신도로서 신교육 열심가 로 수식하고 있어 이 자료에 따르면 늦어도 1909년 1월 이전에 그가 기독교 신앙을 수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다른 자료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즉 한국장로교의 기본 사료인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주 오산교회의 설립을 1909년으로 보고 있다. 一 千 九 百 九 년( 己 酉 ) 定 州 郡 五 山 敎 會 가 成 立 하다. 先 時 에 本 處 人 李 重 浩, 金 鼎 鎭 등이 始 信 하고 初 에난 李 重 浩 家 에서 禮 拜 하더니 後 來 信 徒 漸 增 함 에 李 昇 薰 은 基 地 一 段 을 寄 附 하고 敎 人 은 合 心 捐 補 하야 禮 拜 堂 을 新 築 하고 敎 會 를 設 立 하니라. 111) 더욱이 그가 기독교 신앙 입문의 한 과정인 학습 (세례를 받기 전에 교리와 신 조를 공부하기로 서약하여 공인받은 사람)을 받은 것은 1911년 2월 안악사건 의 연루자로 체포되기 이전인 것으로 이승훈 자신이 증언했다고 하는데, 112) 당시 교 회의 관례상 원입교인(교회의 예배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이 된 지 4~5개 월만에 학습 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05인 사건 의 공판 기록에도 다음과 같 은 기록이 있어 그가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것이 1910년 9월 이전이었음을 시사 해 주고 있다. 문(재판관) : 피고는 明 治 43년(1910) 음력 8월 10일과 9월 15일, 10월 20일 경에 宣 川 에 간 일이 있는가. 110) 定 警 秘 發 제27호, 행행에 관한 상황보고 (1909년 2월 2일, 정주경찰서장), 통감부문서 9, 국사편찬위원회, 1999, p. 345, 111)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1928, pp. 208~ ) 李 贊 甲, 南 岡 은 信 仰 의 사람이다, 聖 書 朝 鮮 제64호, 1934년 5월호, p

7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답(이승훈) : 음력 8월 2일경에 예수교의 일로 宣 川 에 갔다가 4 5일간 체재 한 일은 있으나, 그밖에는 간 일이 없다. 113) 여기서 음력 8월 2일이면 양력으로는 9월 5일에 해당한다. 114) 그런데 그가 종래 의 주장대로 1910년 9월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기로 결 심했다면, 115) 그 달 초에 예수교의 일 로 선천에 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선천에는 1901년부터 미북장로회 선교지부가 설치되어 선교사가 상주하고 있었 고, 116) 1907년에 조직된 예수교장로회 노회 즉 독노회 의 제4회 정기회가 선천군 염수동예배당에서 1910년 양력 9월 18일부터 열렸다. 117) 그러면 이승훈은 예수교 의 어떤 일로 이 노회가 열리기 직전에 선천에 가 4~5일이나 머물렀을까? 자료 가 남아 있지 않아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노회를 앞두고 열린 연합사경회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이 사경회를 마치고 학습 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 다. 118) 남강의 회심 무렵의 일을 김도태는 이렇게 썼다. 나라는 망하고 民 族 은 分 散 되어 가는 이때 누구든지 인제는 方 法 이 없다. 인제는 왜나라의 政 策 에 順 應 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부르짖는 사람이 있게 되 고 본즉 모든 點 에 落 望 하게 되었다. 先 生 은 憤 然 히 우리가 落 望 만 하고 있 을 때가 아니라 우리는 爲 先 精 神 上 의 修 養 을 싸어야 하고 그 修 養 을 싸으려 면 예수 敎 를 믿어야 한다 하야 洞 內 에 예수 敎 會 堂 을 짓고 牧 師 를 모셔다가 說 敎 를 듣고 敎 徒 를 募 集 한 지 얼마 않이 되어 數 三 百 名 의 敎 徒 가 모이게 되 었다. 牧 師 로는 崔 聖 柱 趙 德 燦 等 이 熱 心 으로 引 導 하였고 敎 堂 안에서는 金 三 汝 金 順 西 等 이 여러 가지 일을 맡어 보았다. 119) 위의 증언은 조국의 위기를 맞았을 때에 취했던 남강다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어떤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을 역으로 뒤집어 볼 수 있었던 것이 남강다운 113) 대구복심법원 공판시말서, 1913년 7월 1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2, 국사편찬위원회, 1986, p. 284, 114) 한보식, 韓 國 年 曆 大 典, 영남대학교출판부, 1987, p ) 주 5)와 같음. 116) Harry A. Rhode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Vol. 1, 1884~1934, 1934, p ) 예수교쟝로회죠션국로회 뎨사회회록 (1910), p ) 김승태, 남강 이승훈의 신앙 행적에 관한 몇가지 문제,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17호,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2002, pp ) 金 道 泰, 앞의 책, p

71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모습의 하나라고 한다면, 그는 나라가 외세에 병탄당하는 현실을 맞아서도 범인 ( 凡 人 )처럼 낙망하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오히려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려 했던 것 이다. 그것이 기독교였다. 그리하여 국권을 상실하는 아픔 속에서, 기독교 신앙 속에서 우리는 남강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신앙인으로 발견되어지기까 지는 안창호와 같은 한국 기독교인의 선구자들이 그 주위에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면에서 남강의 입신은 한말( 韓 末 ) 여러 지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 로 국권회복의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국권 상실의 비극 과 고난을 겪으면서 더 깊어지고 굳어져 갔다. 3. 신앙과 고난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받으며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기독교는 고난의 축복이라고 가르친다. 더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축복으로 받는 값진 신앙 행위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 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120) 라고 가르친다. 참 신앙인은 예수가 가르친 여러 축복 가운데서 고난 을 가장 고귀한 축복으로 믿고, 고난의 삶을 신념과 용기와 기쁨으로 대결하며, 승리의 삶 으로 이끌었다. 예수는 자기를 따르려는 자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 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므로 그를 따르려는 자들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 예 120) 新 約, 마태복음 5장, 10~12절

7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수를 알기 전에는 양반의 지위를 탐했고 경제적 부를 누리며 기껏해야 일가 친족 의 영달을 기원했던 남강이 민족의 아픔에 참여하면서도 기쁨이 넘쳐 흘렀고 감 옥살이의 그 고난의 삶에서도 참 자유를 향유하며 나이를 먹어 육신이 후폐해질 수록 더 부지런한 봉사자로 젊어져 갔던 것은 그가 예수와 그 고난을 체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남강이 기독교에 입교한 것을 말했다. 그 때가 국권을 상실해 가던 시기였고, 교회사적으로는 1907년의 대부흥운동과 1909년의 백만인구령운 동 이 지속되던 때였다. 남강이 예수 믿기로 결단한 때에는 이미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정주와 선천에도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특히 러일전쟁으로 인하 여 선천과 정주에는 기독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는데, 이는 전 쟁의 피해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함이었다. 이 무렵 오산학교 근처인 모안이와 양지 마을에도 예배처소가 생겼고, 유영모 선생이 부임해서는 성경을 가르치고 교실에서 찬송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121) 남강은 오산학교에서 기독교적인 교육을 하였다. 남강은 학생들을 모아놓고 예 수를 믿기로 작정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학교에서 집회를 갖기로 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학교는 조그만 교회를 겸하게 되어 신앙을 가진 교직원과 학생 그밖에 교인들이 모여 목사 없는 집회를 이끌어 나갔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마침내 민족의 학원인 오산학교에 전해졌다. 선비들이 모여 경서를 읽던 경 의재 자리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찬송가 소리가 울려 나왔다. 나라 잃은 백성 으로서 마음 둘 곳이 없었던 스승과 제자들은 새로운 신앙에 돌아와 울면서 기도를 올렸고 목이 메어 주를 찾았다. 학교의 교실 한 구석에서 시작한 조 그만 모임이었건만 그들의 모임은 날로 불어 경건한 신앙의 불꽃이 불타오르 기 시작하였다. 122) 이렇게 남강에 이어 오산학교도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남강은 좋은 일이라면 이렇게 항상 서둘러 진행시켰는데, 이런 점이 남강다운 모습이었다. 한 말 일제하, 교회와 선교 학교가 세워질 때에 대부분 교회가 먼저 세워지고 거기 에 부설되는 형태로 학교가 뒤에 건립되었는데, 오산학교의 경우는 달랐다. 그것 은 오산학교가 먼저 세워졌고, 거기에 교회가 부설되는 형식으로 세워졌다는 것 121) 김기석, 앞의 책, p ) 김기석, 앞의 책, pp. 301~

73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이다. 123) 예수 믿기로 결심한 그는 정주교회에 출석하였고, 학교에서의 신앙 집회에 참 석하면서 마음의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특히 우리 민족이 겪는 고난이 성서의 여러 사실을 통해 점차 부각되어 왔다. 김기석은 이렇게 전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급에 가서 많은 고생을 했다는 것과 모세에게 이끌려 거기서 나왔다는 것과 예수가 마굿간에서 낳다는 것과 갈릴리 해변가에서 사 람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쳐 주었다는 것과 나중에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 과 이 이야기들이 처음에는 잘 알 수 없으면서도 차츰 어떤 감명을 가져 오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그 부르는 찬송가와 울리는 기도는 거친 마음을 한 없이 맑혀주는 것이었다. 남강은 이 조그만 신앙의 집회가 자기에게 다시없 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됨을 알었다. 124) 그는 이러한 집회와 성경 말씀을 통해 민족 문제에 대한 신앙적 접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던지, 남강의 신앙은 민족 문제보다는 용동 마을의 문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그의 이상향운동이었다. 남강의 이상향운동은 오산학교와 함께 자기가 사는 마을에도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적 윤리를 공동체에 적용시켜 보려는 데서 시도되었다. 그는 신민회 사건 으로 감옥에 갇히기 전에 이미 용동에다 자면회 ( 自 勉 會 )라는 동회를 만들어 일종의 새 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거기에는 청교도적인 엄격성이 있었다. 술과 담배를 금하고 교회에 나갈 것을 권하는 등, 일상생활과 농사에 관한 제반 계몽 이 있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오산학교의 연장 교육으로 남강의 이상향운동의 일 환이었다. 동네 전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남강이 집에 있을 때는 그들과 함께 예배 를 보고 기도를 드리고 어떤 때에는 예수교의 진리를 강의 하기도 하였다. 문맹 퇴치를 위하여 야학이 설치되었다. 용동 사람들은 교회의 야학에 나가 열심히 배 우고 부지런히 실천하였다. 김도태의 증언에 의하면, 용동의 남녀노소는 한 사람 의 문맹이 없게 되었고, 7 80의 노인으로 글자를 모르던 이라도 모두 성경을 읽 게 125) 되었다고 한다. 123) 김기석, 앞의 책, p ) 김기석, 앞의 책, p ) 김도태, 앞의 책, pp. 240~

7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아마도 1910년 국권이 상실될 무렵을 전후하여 시작된 듯한 그의 이상향운동은 대체로 3 1운동을 분기점으로 하여 그 전의 것을 소이상향으로, 그 후의 것을 대이상향으로 지적된다. 여기서 대이상향이라고 한 것은 그가 3 1운동으로 옥고 를 치른 후에 그의 이상향의 규모를 용동에서 나라 전체에로 확대시켰기 때문이 라고 한다. 126) 남강의 이상향운동의 바탕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바꿔 말하면, 남강은 기독교 신앙으로 오산학교와 용동 중심의 이상향운동을 하려 했다고도 지적할 수 있다. 국권을 상실한 한국 민족이 외세의 압제 하에서 험난한 시련을 겪으며 괴로워해 야 했는데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 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를 믿 기로 결단한 남강이 소이상향 운동에 안주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의 격에 맞지 않 는 선택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자세는 기독교 신앙을 물질적 축복의 수단으로 삼 으려는, 오늘날에도 보이는 신앙인들의 자세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은 이상향운동이나 하는 좁은 그릇으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더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한 단련이 필요하였 다. 하나님은 그를 더 크게 쓰시고자 고난을 예비하셨던 것이다. 그 고난은, 그가 고난을 겪으면서 그 의미를 체험적으로 깨달은 바와 같이 그에게 진실로 위대한 축복이었다. 그는 그 고난으로 더 위대한 신앙인으로 성장해 갔고, 용동마을을 생 각하는 데서 전민족의 아픔을 짊어질 줄 아는 지도자로 온축되어 갔던 것이다. 그의 신앙 인격을 단련하기 위한 고난은 신민회 사건으로 통칭할 수 있는 소위 안명근사건 과 105인 사건 을 통하여 주어졌다. 이 사건들의 경과와, 남강이 여기에 무고하게 연루된 경위에 대해서는 굳이 필자가 밝히지 않아도 될 부분이 다. 단지 이 단련을 통하여 그의 신앙이 보다 굳건하게 되었고, 그의 인간적인 폭 이 매우 넓어졌다는 것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남강은 1911년 2월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 安 明 根 )의 명함을 갖고 다 니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무관학교 사건 에 연루, 그 해 가을부터 서울에 옮겨 와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당했고, 1915년 2월에 감옥에서 나와 학교로 돌아갔다. 그 에게는 예수 믿고 난 뒤에 당하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두 사건 모두 무고 하게 걸려든 것이었다. 일제가 평소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예의 주시하다가 고의 126) 김기석, 앞의 책, p 남강의 제자였던 李 采 鎬 는 남강의 대이상향에 관해, 남강의 한 일 은, 1 교회로 민중의 무지를 깨치고, 2 학교로 교육을 일으키고, 3 산업으로 나라를 근대화하 는 데 있었는데, 이 세 가지는 다 남강의 대이상향 실현의 세 가지 요소 또는 단계가 된다 고 썼다

75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적으로 얽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족 문제로 억울하게 당하는 이 고난을 조 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과 인격의 성장을 위한 좋은 기회로 생각하였다. 남강은 제주도에 유배되어 가서 더욱 신앙이 굳게 되었다. 제주도에 내려 그가 먼저 찾아간 곳이 교회였다. 그는 제주교회 김 장로의 알선으로 교회당 옆에 있 는 조그만 숙사에 유숙하면서 낮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일을 도왔고, 밤에는 등잔 아래서 성경 공부와 기도로 날을 보냈다. 127) 그는 유배된 곳에서도 늘 즐거움이 변하지 않았고 찬미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128) 그가 즐겨 불렀던 찬송이 앞에서 적은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였다. 그는 그 곳에서 교회와 학교 로부터 강설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기회 있을 때마다 마치 용동 동리 사람들에 게 하듯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민족성 개조에 대하여 말하였다. 남강이 저녁에 한 교회에서 행한 강설이라 하여 김기석은 이렇게 전한다. 나는 제주도에 와서 산수가 아름답고 기후가 따뜻한 데 놀랐다. 제주도는 탐라고국으로서 한반도의 본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여기에 둔 것이다. 제주도가 한반도의 본이고 한라산이 산의 본인 것마냥 제주도 사람들은 한국 사람의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제주도로 하여금 한반도의 본이 되 게 하기 위하여 교회와 학교와 공장을 많이 세워야 한다. 제주도는 남해에 솟아 있는 섬이 되어 육지에는 목장과 약초 재배와 특수 농작이 적당하고 해 안과 바다에는 어항과 어장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얼마 전에 해안 선을 돌아보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 보았는데 제주도야말로 우리 신자성손 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는 모범 지역이다. 나는 우리들이 여기에 새로운 교 육기관을 많이 만들어 힘써 배우고 부지런히 일하면 겨레의 영광을 회복하는 놀라운 광명이 여기로부터 본토에 비칠 것을 믿는다. 129) 이런 강설은 유배된 사람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아니다. 유배 라는 고난을 초 월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말이다. 그 초월은 바로 신앙의 힘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의 이같은 강설은 지금도 제주도의 종교계나 교육계의 인사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니 그 감명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남강이 제 주도에 유배되어 있는 기간을 전후하여 전국의 사립학교가 1910년의 1,973교에서 127) 김기석, 앞의 책, p ) 김도태, 앞의 책, p ) 김기석, 앞의 책, pp. 96~

7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1914년의 1,242교호 줄어드는 추세 속에서 제주도에서는 11교에서 24개교로 늘어 났는데, 이를 두고 남강의 영향을 관련시키는 견해도 있다. 130) 남강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다시 소위 데라우치( 寺 內 正 毅 ) 총독 암살 미수사건 의 주모자로 연루되어 제주도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 다. 이 음모 사건 은 일제가 서북지방의 민족주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을 일망타 진하여 기독교 내의 민족주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심문이 진 행되는 동안 갖은 고문과 악형이 폭로되어 세계 여론의 지탄을 받았던 것이다. 남강은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에 기소되기 전 약 1년 동안 더 혹 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같이 연루된 사람들이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도 함구불언하고 이 고난을 인내로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이 고통 중에서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 하면서 인내하였다고 김도태는 증언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참은 것과 같이 나도 이 심한 고문에 참아 이기도록 나뿐 아니라 여기에 붓들려온 모든 사람들까지도 이 고난에 이기도 록 인내력을 주십시오 하는 기도였다. 그러다가 기운이 진하여 까무라치면 앞에 神 人 이 나타나 승훈아 참아라 그리하여 이겨라 너희들의 고난을 우리가 미리부터 알고 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 이기지 못하면 마귀에게 굴 복하는 것이다 하는 격려의 말을 듣고 깨고 나면 꿈이었다. 131) 이같은 기록이 남강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남강이 초기의 그 고문을 신앙의 힘으로 어떻게 인내하려고 하였 는가 하는 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목사 가 나와 거짓 증언을 하며 남강에게 자백을 강요한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그는 하나님 을 의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오죽이나 고문을 당했으면 저렇게 변하겠는가 하고 측은하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일본 경찰들의 심한 고문과 자백 강요를 당하 면서 남강은 속으로 이것이 모두 우리 선조 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비양 심적인 생활을 하고 나려오는 죄악의 결과로 하나님이 저 사람들을 보내어 우리 에게 벌을 주시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고, 이렇게 생각하니 그 경관들이 하나님 이 보내신 형리( 刑 吏 )같이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132) 그는 이즈음만 하더라도 130) 위의 책, p ) 김도태, 앞의 책, p

77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철저히 인과응보적 신앙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신앙은 주권의 상실 등 민족적 환란이 부닥칠 때 그것을 어떤 업보로 생각했던 기독교 입교이전의 신앙 형태와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이 점은 구약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는 쪽으로 경사했던 그의 신앙의 일면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남강이 안명근 사건으로 잡혀 제주도에 유배된 것이 1911년 2월이었고, 소위 총독 암살 미수사건 으로 경찰에 체포된 것이 같은 해 9월이었으며, 공판이 시작된 것은 1912년 10월이었다. 공판 결과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임치정 유동 열과 함께 남강은 10년의 징역을 언도받았다. 1912년 겨울은 대구감옥에서 지내 고, 그 이듬해 봄에 서울의 마포형무소로 이감되어, 1915년 2월 가출옥으로 출옥 할 때까지 그 곳에서 지냈다. 2년여의 감옥생활은 그에게 다시없는 신앙과 인격의 단련기간이었다. 그가 감 옥생활을 두고 감옥이란 이상한 곳인 걸, 강철같이 굳어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겨릅대같이 흩어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거든 133) 하고 술회한 바와 같이, 그는 성경 읽기 기도 금식 등의 성스러운 생활, 수양의 생활을 하면서 기 독교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이때의 감옥생활과 관련, 김기석은 이렇게 썼다. 그는 옥중에서 1913년 1914년 2년 동안을 순연히 신앙생활에 헌신하였다. 성 경 읽기와 기도가 중요한 일과로서 누구의 감시도 방해도 받음이 없이 조용히 이 생활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민족운동에 대한 신념은 도산을 만나고 나서 굳 어졌거니와 종교신앙은 감옥 속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감옥이 이를테면 남강의 혼의 탄생지였다. 남강이 성경을 여러 번 거듭 읽은 것도 감옥에서였고, 울면서 기도를 올린 것도 감옥에서였고, 동지들을 위로한 것도 감옥에서였고, 창살로 새벽빛이 비칠 때 그리스도의 성상을 멀리 우러러 본 것도 감옥에서였다. 남강 이 나중에 술회한 말이거니와, 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하여 자기 를 감옥에 둔 것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134) 감옥을 통한 이같은 연단은 3 1운동 뒤에도 부닥쳤는데, 그 때도 그는 감사함 으로 그 고난을 인내 극복해 갔던 것이다. 남강에게는 신의 뜻에 따라 들어가 는 한, 감옥은 더 이상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나 부자유한 곳이 될 수 없었 고 오히려 그 곳에서 기쁨과 자유와 그리스도와의 깊은 만남 을 체험케 하는 장 132) 위의 책, p ) 金 基 錫, 앞의 책, p ) 金 基 錫, 앞의 책, pp. 104~

7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소였다. 그러기에 그는 이 감옥생활을 통해 외세의 식민지하에서 고난당하는 자 기 민족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차원 높은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감옥생활과 관련하여 여기서 특별히 지적해야 할 것은 그가 신약전서만 백 번 이상 탐독하였다 135) 는 것이다. 그에게 처음 면회 온 사람은 나부열(Slacy L. Robert; 羅 富 悅 ) 목사였는데, 그는 1910년 남강이 제주도로 유배되기 전에 오 산학교 교장으로 모셔왔던 분으로 이 때 나부열 목사는 대구감옥으로 내려와 남 강에게 성경과 천로역정 을 들여보내 주었다고 한다. 136) 처음에 들여보내졌을 성경은 신약이었을 것이다. 신약은 1900년에 번역 완료되었고, 구약은 1911년에 번역이 끝났기 때문에 쉽게 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가 이렇게 감옥에서 성경을 탐독했던 것은 그의 신앙의 기반을 성경에서 굳건케 한 것으로 서, 그가 뒷날 3 1운동 때 다시 민족의 고난에 흔연히 참여할 수 있었고, 1920년 대 말 현실 교회에 대해 일정한 비판을 가하면서 성서조선 ( 聖 書 朝 鮮 )그룹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의 성경 탐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4. 정의와 민족 1) 평양신학교 시절 남강은 1915년 2월 가출옥하였다. 그의 나이 52세 되던 해였다. 1912년 말 105 인 사건에 연루되어 10년형을 언도받았으나 2년 수개월 복역하고 나온 셈이다. 이렇게 빨리 가출옥하게 된 것은, 그들을 얽어 넣은 소위 총독 암살 미수사건 자체가 일제에 의해 허위로 날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출옥한 남강에 게는 이제부터의 삶은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의미를 부여해준 그 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과 헌신의 삶이 더욱 돈독해진 것 은 이 때문이다. 한편 남강이 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 학교와 교회에도 변화가 있었다. 학교는 이광수( 李 光 洙 )가 떠난 후 나부열을 거쳐 조만식( 曺 晩 植 )이 경영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남강이 기독교에 입신한 후부터 오산학교에도 교회를 짓고 성경 과목을 정규 과목으로 가르쳤으며, 조회 시간은 기도회 시간으로 바뀌는 정도로 되었다. 오산학교를 기독교 학교로 이끄는 데는 유영모 선생의 성경공부가 큰 힘이 되었 는데, 그의 부친이 서울 연동교회의 장로였다고 한다. 137) 남강이 옥에 들어가 있 135) 金 道 泰, 앞의 책, p ) 金 基 錫, 앞의 책, p

79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는 동안 교회는 정기정( 鄭 基 定 ) 목사가 돌보고 있었는데, 그는 정주읍교회와 오 산 서면 세 교회를 맡아보았다. 오산교회는 김삼여( 金 三 汝 ) 영수와 강형묵( 康 亨 黙 ) 집사, 김순서( 金 順 西 ) 장로 및 오산학교의 교직원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남강이 출옥했을 때에는 2백이 넘는 교인에 청년회와 부인회도 조직되어 있었다. 남강이 출옥하면서 가정적으로는 그동안 소홀했던 부부의 정의가 매우 두터워지 는 한편, 신앙적으로도 외형상의 몇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김도태는 이렇게 썼다. 예수교회에 대하여 그 전에는 혹 宅 에 계실 때에는 출석하였으나 대개는 출 타함으로 성실히 믿지 못하였다. 이번에는 옥중에서 굳은 신앙을 얻은 까닭에 먼저 세례를 받고 一 句 詩 를 口 呼 하되 浴 恩 新 僕 獻 身 外 라 하는 글로 서약하였 다. 이어 본교회 교도들의 衆 望 에 의하여 장로에 선택되어 교회의 관리를 맡고 인제 몸을 교회에 바치어 여생을 여기에 바치려 하나 敎 理 를 모르고는 어두운 밤에 등불 없이 가는 것과 같다 하여 平 壤 神 學 校 에 入 學 하였다. 138) 즉, 1915~1916년에 걸쳐 남강은 세례를 받고, 장로로 피택되었으며, 평양신학교 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출옥한 후 학교와 교회에서는 그를 위하여 특별 예배를 보았다. 그 다음 주일에 남강은 정기정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앞에 쓴 일구( 一 句 )로써 자신의 믿음을 맹세하였다. 1916년 3월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39) 그 무렵 남강 은 향리 교회의 영수였으나, 1916년 가을 무렵에 장로로 장립되었던 것 같다. 140) 평양신학교는 1901년 마포삼열( 馬 布 三 悅 )이 창설하여 1907년에 길선주 방기 창 서경조 송린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등 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한 말 일제하에서는 장로교단의 유일한 신학교로서 존재하였다. 매년 3월에 시작하 여 3개월 보름간 학교에서 공부하며, 나머지는 현장 교회에서 목회실습을 하여 5 137) 오산칠십년사편찬위원회, << 五 山 七 十 年 史 >> (1978) p. 97. 유영모의 부친 柳 明 根 은, <<연동 교회 100년사 >>에 의하면, 1923년부터 영수로 봉사했고, 1933년만 장로명단에 보인다. 138) 金 道 泰, 앞의 책, pp. 264~ ) 馬 布 三 悅, 장로교회 신학교 요람, 야소교서회, 1916, p.43. 이 요람은 1916년 1학기가 끝 난 8월에 발행된 것으로 今 年 五 班 學 生 名 錄 의 1916년 3월 입학생인 一 學 年 生 二 十 六 人 명단에 李 昇 勳 年 52 居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산리 16통 2호 本 里 敎 會 領 袖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신학교입학당시 이승훈은 영수였고, 그 후에 장로로 피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0) 선천읍 남예배당에서 1917년 1월 31일에 모인 제11회 평북노회에서 오산의 이승훈이 장로로 안수받은 것이 보고되고 있으므로 그가 안수 받은 것은 그 직전해인 1916년 가을쯤이었을 것 이다. (김승태, 남강 이승훈의 신앙 행적에 관한 몇가지 문제,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17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2, pp.13-6)

8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년간 수업하였다. 초기에는 마포삼열, 나부열, 왕길지(G. Engel), 업아력(A. F. Robb), 곽안련(C. A. Clark), 레널즈(W. D. Reynolds) 등 서양인 교수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1920년대에 와서 남궁혁 박형룡 등 한국인 교수도 가르치게 되었다. 남강이 53세(만 52세)의 나이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정확한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감옥에서 읽은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고 또, 앞서 인용한 김도태의 지 적처럼, 교도들의 중망( 衆 望 )에 의하여 장로에 선택되어 교회의 관리를 맡고 인 제 몸을 교회에 바치어 여생을 여기에 바치려 하나 교리를 모르고는 어두운 밤에 등불 없이 가는 것과 같다 고 생각하고 예수교 교리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해서 입학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할 뿐이다. 남강은 평양신학교의 학업을 통해 기독교가 눌린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의 종교임을 깨달았다. 우리나라와 같이 이스라엘 역사에도 죄악과 포악한 통치와 우매한 백성 및 그로 인한 고난이 똑같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발견되지 않는, 왕조와 백성들의 불의를 날카롭게 고발한 예언자들이 있었 141) 음 을 그는 발견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통회의 소리 가 없다는 것이다. 남강은, 그리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율법과 예언자들에게 접근하게 되었고, 신약보다는 구약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구약을 통하여 하 나님의 의( 義 )를 터득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신앙과 교육, 민족 지도자로의 품격 의 기저를 이루게 되었다. 김기석은 이렇게 증언했다. 남강은 신학교에 있으면서 구약을 통하여 義 를 배웠다. 기독교는 義 의 종교, 여호와는 義 의 신이라는 생각이 났다. 남강에게는 여호와의 세계의 창조와 지배 와 심판이 모두 그의 義 에 이끌리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심도 義, 만물을 만드심도 義, 나중으로 사람을 만들어 만물 위에 두심도 義, 아담과 해화를 동산에서 쫓아내심도 義, 노아 홍수도 義,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義, 바로왕 때 내린 재앙도 義,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이끌어내심도 義, 예언자를 보 내심도 義, 나중에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러 오심도 義 로서, 만물은 이 여호 와의 義 에서 좇아왔고, 義 로 말미암고 義 속에 있다가 義 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남강은 다시 생각하였다. 모세의 율법이 義 였다. 예언자의 행함과 가르침이 義 였다. 거짓은 義 가 못 된다. 도적질은 義 가 못 된다. 간음은 義 가 못 된다. 이웃 을 괴롭힘은 義 가 못 된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만 잘 살려는 것은 義 가 못 된다. 義 속에서 살리라. 義 속에서 살리라.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학생들과 같이 141) 金 基 錫, 앞의 책, p

81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강의를 듣고 토론하고 방에 돌아와 성경을 읽고 기도를 올리고 하였다. 142) 김기석이 이 무렵의 남강의 사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했는지는 모르나, 이 무렵과 3 1운동의 옥고를 치룬 뒤 한때까지도 남강의 신앙은 하나님의 정의에 기초해 있었다. 때문에 아직도 그의 신앙은 율법주의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 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십자가는 있었지만 아직도 그 의미가 죄의 대가로서의 십 자가였지, 죄를 용서하시는 화해와 은총의 의미로서의 십자가는 아니었던 단계였 다고 생각된다. 의를 강조하는 신앙은 죄에 대한 심판을 강조하기 쉽다. 그 심판은 성경에 보 이는 최후의 심판 뿐만 아니라 이 지상에서도 죄에 대한 보응을 받는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말하자면 이것은 인과응보적 신앙으로 굳게 되고, 모든 재난을 죄의 결 과로 해석해 버리는 범신론적 신앙 단계와 구별되지 않게 된다. 초기에 기독교는 무속종교와 불교 등으로부터 이러한 인과응보적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또 정의 의 하나님만 강조하고 은총의 하나님을 발견하지 않는 한에서는 이 인과응보적 신앙사상이 끈질기게 기독교의 저변에 흘러온 것이 사실이다. 남강의 경우도, 적 어도 3 1운동 후의 어느 시점까지는 이 인과응보적 신앙을 초월하지 못하고 있 었다. 다음의 사례는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기석의 증언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3 1운동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때의 일이 었는데 볼 일로 안악에 나갔다가 金 善 亮 을 만나 춘원이 병으로 燃 燈 寺 에 와 있 다는 말을 듣고 같이 가기로 하였다. 마침 장마 때였는데, 연등사에 가서 춘원을 만나고 걸어서 돌아오면서 이렇게 물었다. 자네, 춘원이 왜 폐를 앓는지 아나, 죄가 있어 앓는 거야. 죄 값은 꼭 받게 되거든. 춘원이 앓는 것은 연애소설을 많 이 쓴 죄야. 그 좋은 재주를 가지고 나라에 유익한 글은 쓰지 않고. 내가 감옥에 간 것도 남들은 애국운동으로 갔다고 하나 그런게 아니고 죄 값이야. 젊어서 처 녀들을 버려주었거든. 그 죄로 감옥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감옥에서 나오니 어 떻게 마음이 시원한지 몰라. 춘원도 죄 때문이야 143) 참으로 남강다운 솔직함이다. 어릴 때부터 장사꾼으로 성장했던 남강, 그가 주판 알을 구르듯 선과 악, 죄악과 심판 등을 헤아리면서 기독교의 신앙을 정의의 측면 에서만 관조했을 때의 인과응보적 사상은 매우 자연스럽게 도출되었을 것이다. 142) 金 基 錫, 앞의 책, pp. 311~ ) 金 基 錫, 앞의 책, pp. 320~

8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한편 정의를 강조한는 신앙은, 정의의 참 모습이 그러하듯이, 불균형의 시정이 라는 폭발적인 힘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그가 신앙인으 로서 3 1운동에 과감히 돌진한 것은 그의 기독교 신앙이 정의의 관념에 바탕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식민지적 현실은 바로 불균형의 표본이자 불의의 상징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정의의 신앙을 갖고 있 는 한 이 민족적 불균형과 불의에 항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16년 3월경에 시작된 그의 평양신학 시절은 1919년 3 1운동 참여로 끝난다. 신학교 5년 과정 중 3년을 마친 것이다. 이러한 신학 수업은 그에게는 많은 것을 깨닫게 했고, 이 기간의 경험은 뒷날 그의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앞에서 말한 정의의 신앙 외에 다음 몇 가지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의 신앙 인격이 감사하는 인격으로 성장해 갔다는 점이다. 그는 신학 교 재학시에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래서 감사 선생 이란 별명을 들을 정도였다. 신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모든 사물에 대한 감사로 바뀌 면서 그는 점차 감사하는 인격으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감사는 인간으로 하여금 폭넓은, 그리고 포용력 있는 인간성을 갖게 하는 첩경이다. 그의 감사하는 인격이 뒷날 3 1운동의 대동단결을 결실하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신학교에서 가졌던 폭넓은 인간관계다. 비록 자신은 53세나 되는 나이 에 입학했지만 조금도 스스럼없이 연소한 동기 선후배와 교제를 나눌 수 있었으 며, 인격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 반 아래에 함태영( 咸 台 永 )이 있었는데, 이곳 에서 사귄 것이 뒷날 3 1운동에서 그들을 결속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 이곳에서 맺은 선교사들과 신학교 졸업생들과의 두터운 관계가 뒷날 그를 교 계의 중앙무대에 서게 한 기연이 되었다고 지적된다. 144) 그가 장로로 장립되어 오 산교회와 노회와 총회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물론, 3 1운동 때 기독교계를 대표하 는 인물로 활약하게 된 것도 그의 평양신학교 재학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2) 3 1운동의 주역 남강이 신학교에 들어간 1916년부터 수감생활로 신학수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된 1919년 3 1 운동 발발 시까지 남강은 신앙인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 다. 그는 이 무렵 오산학교를 세울 때처럼 교회의 일에 전심을 기울였다. 이때의 남강을 두고 김기석은 이렇게 썼다. 144) 金 基 錫, 앞의 책, p

83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인제 그에게는 학교가 교회였고 교회가 학교였다. 교회의 종각이 그대로 학교 의 종각이 되기도 했는데 이 종소리는 남강에게 한없이 정답고 고상하게 들렸 다. 그는 교회의 시무 장로로 자기가 세운 교회를 이끌었다. 그는 학교를 민족운 동의 간부 양성 기관으로 생각했던 것마냥 교회도 새 사람 새 백성을 만드는 모 범적인 정신의 가정으로 생각하였다. 주일예배와 삼일예배를 경건하게 보도록 했고 제직회를 위시하여 모든 집회를 시간을 지키게 했다. 예배는 믿음을 제일 로 했고 각종 집회는 민주주의 방식을 채택하게 하였다. 그리고 신자들 사이의 지나친 광신적인 경향을 경계했고 언제나 미신과 봉건 유습을 타파하는 개화주 의에 이끌었다. 남강은 학교도 하나의 교회로 생각했고 교회도 넓은 의미의 학 교로 생각하였다. 교회는 학교보다도 더 깨끗하고 조용하고 질서가 있어야 한다 고 하였다. 앉기를 줄을 지어 바로 앉으라 했고 연보 거둡는 채도 바로 들고 바 로 돌려야 한다고 하였다. 찬송과 기도와 설교에서부터 광고에 이르기까지 그 태도와 말과 내용이 부드럽고 근엄하고 정성스러워야 한다고 하였다. 학교가 그 런 것마냥 교회도 남강의 참과 정성이 구석구석에 비취어 있었다. 145) 남강이 교회에 정성을 쏟아졌을 때, 그 교회의 모습이 위의 글에서 역력히 나 타나고 있다. 그가 어떤 일을 맡으면, 직성이 풀리도록 그 일에 몰두하듯이, 장로 로서 교회를 맡았을 때에도 그랬다. 이것이 남강의 방식이었다. 그는 그의 직성대 로 오산교회를 전국에서 모범가는 교회로 만들기에 노력하였다. 시무장로로서 그는 자기 교회의 관리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교회 를 대표하여 노회와 총회에 가서 활약하였다. 아직 조직된 지 1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던 평북노회에는 산적된 문제들이 많았는데, 이 같은 문제들을 윤산온(G. S. McCune, 尹 山 溫 )과 한석진 목사, 그리고 남강이 거의 맡아 처리했다는 것이 다. 146) 그는 평북노회를 대표하여, 평양 혹은 서울에서 개최되는 총회에도 참석하 여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고 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그가 뒷날 3 1 운동 때 기독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노회 총회에 서 활약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남강이 3 1 운동의 주역으로 천도교 불교를 기독교와 접맥시켜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시킬 경위는 여기서 굳이 상론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의 이 같은 결단은 우선 그의 기독교 신앙과 옥중에서의 신앙적 단련을 통해 확고해졌 145) 金 基 錫, 앞의 책, pp. 319~ ) 金 基 錫, 앞의 책, p

8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는 어려운 결단을 내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 도했다. 1918년 12월 상해에 파견된 선우혁을 다시 평양으로 내보내면서 눈보라 에 묻힌 눈길 위에서 두 손을 붙잡고 올렸다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불쌍한 백성에게 독립을 허하시렵니까 안 허하시렵니 까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하시렵니까. 147) 라는 기도는 그 단도직입적인 성격에서 보이듯이 대단히 남강적이다. 또 그가 서울의 거사 계획에 참여하고 1919년 2월 13일 평양에 내려와 그 이튿날 평양의 몇몇 목사들을 만나 거사에 찬동하기를 청했으나 그들이 종교인임을 핑계로 난색 을 표하자 남강이 책상을 치며 내질렀다는,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 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느냐. 148) 는 질책의 내용도 대단히 남강적이다. 또 2월 27일 정동교회에서 모인 기독교 측 최종 회합에서 선언서에 서명할 순서를 두고 옥신각신 다툼이 났을 때,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 149) 라고 결단을 내린 것도 남강이 아니고는 내리기 어려운 단안이었다. 이러한 그 의 기도와 소신과 결단들은 신앙으로 자신을 비울 수 있었고, 소위 총독암살 미 수사건 으로 투옥된 뒤 사생을 넘는 고문과 고난을 극복한 데서 나온 신앙의 위 대한 힘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3 1 운동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계 대세 가 지향하는 민족 평등은 하나님이 인간을 내실 때 주신 천부적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한국을 이웃으로 하고 일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다음 과 같이 그의 입장을 재판정에서 밝혔다. 147) 위의 책, p ) 위의 책, p ) 金 基 錫, 앞의 책, p

85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내실 때 각각 자유를 주었는 데 우리는 이 존귀한 자유를 남에게 빼앗겼다. 자유를 빼앗긴 지 10년 동안 심한 고난과 굴욕이 우리를 죽음의 골짝으로 이끌었다. 일본이 오랜 옛날 한국으로부 터 입은 은의를 원수로 갚되 이렇게 심할 수 있느냐. 우리는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적의 칼 아래 쓰러질지언정 부자유 불평등 속에서 남에게 끌리는 짐승 이 되기를 원치 않노라. 우리의 이번일은 제 자유를 지키면서 남의 자유를 존중 하라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독립은 한국의 영광뿐 이 아니고 튼튼한 이웃을 옆에 갖는 일본 자신의 행복조차 되는 것이다. 150) 그의 신앙적 인품이 흐르는 대답이다. 그가 서두에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다 라고 한 말에, 어쩌면 그가 이 일에 주역으로 참여한 사상적 동기와 행동준칙 이 내포되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내신 세계를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사회로 만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남강이 일제의 소위 한일합방을 어떻게 보았느냐는 일제 관헌의 질문에 대 한 대답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는 공소공판( 控 訴 公 判 )에서 일한 합병을 반대하 였지 라는 질문에, 그렇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바가 있으니 오색 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망 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아니하며 더욱이 남의 나라의 병합된 자기 나라의 독 립을 바라지 아니하였으랴 일본정부에 대하여는 결코 악감정을 가지지 아니하 였다. 그렇지마는 칠팔년 전 총독부에서 심문을 당할 때부터 독립사상을 가졌었 다. 151) 라고 하면서, 그의 이러한 독립사상과 독립운동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바에 따른 것이라고 답변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답변들은 3 1 운동에 같이 참여한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과 구별되고 있다. 남강은 이미 이 때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특히 105인 사건 으로 감옥 에 들어가서 겪은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을 통해, 인간과 민족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깊은 확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가 민족독립 의 사상을 가진 것도,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것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 으로서 150) 위의 책, p ) 李 炳 憲, 三 一 運 動 秘 史 (1959), p

8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이룩한 것뿐이라고 담대히 역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한 것인 만큼, 3 1 운동의 주역의 한 사람으로서 옥 살이를 하는 것 또한 그에게는 괴로운 일일 수는 없었다. 믿음으로 자처한 일이 었기에 그가 감옥에서 춤을 덩실덩실 춘, 자족( 自 足 )의 생활을 했다는 표현은 하 등 과장되었거나 잘못 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감방에서 아침저녁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오히려 은혜 속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의 입에서는, 마치 빌 립보 옥중에서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기도하고 찬미했듯이, 즐거운 찬송이 흘러 나왔다. 그의 찬송은, 내주의 지신 십자가 세인은 안질까 십자가 각기 있으니 내게도 있도다 내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당 가겠네. 등의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달게 지겠다는 내 용이었다. 남강은 옥살이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을 가 둬놓은 감옥이 자신을 반성케 하고 훈련시켜 장차 더 크게 쓰임 받도록 하기 위 한 단련의 장소로 생각하였다. 남강이 옥에서 오히려 즐거운 듯이 행동했던 것은 그의 신앙의 힘에 의한 것이 겠지만, 한편으로는 민족운동으로 같이 들어 온 동지들과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 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최린이 옥중에서 사별시( 死 別 詩 ) 152) 를 써서 감방의 분위기 가 비감해졌을 때도 남강은 변기 위에 올라서서 커다란 목소리로 격려하는 말을 했고, 공판정에서 돌아와 풀이 죽어 감방에 들어가는 동지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우리가 죽을 각오 없이 감옥에 들어 온 것이냐 라고 하여 사형설로 공포에 쌓여 있는 동지들의 게으른 잠을 깨어주기도 하였다 는 것은 남강만이 가졌던 신앙과 인간애의 조화에서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기에 남강은 감옥에서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나라 잃은 백성과 감옥에 들어와 고생하는 동지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남강이 출옥하면서 백발이 성성하나 오히려 추상 같은 기개 로 다른 사람이 모두 출옥되고 나만 남아 있었는데 나는 실로 조석으로 기도하 152) 金 基 錫, 앞의 책, p

87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기를 이와 같이 나오게 되지 말고 하루라도 더 있으면서 우리 형제의 마음을 위 로코저 하였소. 지금 경성감옥에 있는 정치범이 수백 명인데 그 중에 종신징역 이 22명이요 그 외 10년 이상의 징역을 받은 사람이 수십명이라. 그들을 불덩이 같이 뜨거운 옥 속에 두고 나오는 생각을 하니 감옥문에 나서자 더운 눈물이 앞 을 가리어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 못하였소. 153) 라고 말했다는 것은 남강이 얼마나 평소에 입옥( 入 獄 ) 동지들을 위했으며, 감옥 생활을 통해서 그의 신앙 인격이 얼마나 원숙한 단계에 이르렀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남강은 3년여의 감옥생활을 통해서 구약을 열 번, 신약을 40번이나 읽는 등 많 은 독서를 했고, 자신과 사회 민족을 위한 새로운 구상을 하였다. <동아일보> 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가 감옥에 들어간 후에 한 일은 2천 7백여 페이지나 되는 구약을 열 번이나 읽었고 신약전서를 40독을 하였으며 그외 기독교에 관한 서적 읽은 것이 7만 페 이지는 될 터이니 내가 평생에 처음 되는 공부를 하였소. 장래 나의 할 일은 나 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에게 바치어 교회를 위하여 일할 터이니 나의 일할 교회 는 일반 세상 목사나 장로들의 교회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이 이제로부터 한 민족에게 복을 내리시려는 그 뜻을 받아 동포의 교육과 산업을 발달시키고자 하 오. 154) 5. 자기 부정의 신앙 남강은 1922년 7월 21일, 3 1 운동의 민족대표로는 맨 마지막으로 출옥하였다. 만 3년 4개월 20여 일 간 경찰서와 감옥에서 시달렸다. 출옥하자마자 그는 <동아 일보>에 4회에 걸쳐(7월 26~29일) 감옥( 監 獄 )에 대( 對 )한 여( 予 )의 주문( 注 文 ) 이 라는 글을 발표하여 자신이 겪은 감옥의 비인도적인 처우에 대해 그 개선을 주장 하였다. 가능한 한 오래 머무르면서 형제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했던, 그러면서 감 옥에 두고 온 조선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감옥문을 나서며 목이 메어 말끝을 마치지 못하고 쏟아지는 눈물을 씻 어야 했던 남강의 이타적( 利 他 的 ) 인격이 서둘 러 이 글을 발표케 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누구를 상대로 해서든 현존하는 모 153) < 東 亞 日 報 > 1922년 7월 22일자 154) < 東 亞 日 報 > 1922년 7월 22일자

8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순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실천가였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배들을 얻었지만,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몇 가지를 잃었다. 그가 출옥하기 1년 여 전 1921년 6월에 50평생 고락 을 같이 했던 부인을 잃었다. 또 1919년 3 1 운동 때에 그가 주역의 한 사람이라 는 이유를 곁들여 일제는 오산교회와 오산학교를 불살랐다. 그를 환호하는 많은 사람들의 영접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적으로는 비애를 맛보았을 것이다. 출옥 후 남강은 해운대 정양, 일본 시찰, 조선교육협회의 창립, 민립대학기성회 조직, 물산장려운동 지도와 동아일보 사장 피임, 장선경( 張 善 敬 ) 여사와의 재혼 등 민족 지도자로서의 영광과 기쁨을 잠시나마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 시일 뿐, 여러 가지 오해와 세인( 世 人 )의 눈총도 있었다. 출옥 후 남강 자신의 이 상도 변하고 있었거니와 그 못지않게 사회와 교회도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3 1 운동 후 한국 교회는 급격한 변신의 모습을 갖게 된다. 그 전까지만 하더 라도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은 어느 정도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3 1 운동에 한국 교회가 그토록 뛰어든 것도 민족주의와 신앙을 어느 정도 조화시킬 수 있었 기 때문이다. 그러나 3 1 운동은 그들이 기대했던 지상 나라의 독립을 가져다주 지 못했다. 일종의 메시아니즘에 대한 좌절감이 남게 되었다. 교회는 이 좌절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안주의( 彼 岸 主 義 )를 강조하였다. 길선주, 김익두 및 이용도 등 에 의해 추진된 부흥운동에서 내세( 來 世 )가 강조되고, 신비주의가 변형된 복음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세( 彼 岸 )주의적 입장을 강 조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현존적 인식을 매몰시켜 갔 다. 따라서 이 세상은 마귀의 나라요, 믿는 이들의 유일한 소망은 저 나라에 두어 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한에 있어서는 신앙은 현존과 무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대한 희망과 삶의 포기는, 이 세상을 개혁하고 하나님 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한다는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점은, 출옥 후 조선 사회에 이상촌을 건립해 보자는 남강의 이상과는 배치되는 것이었고, 따 라서 한국 교회는 남강의 이러한 이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출옥 후 남강은, 또 하나의 변화하는 사회를 느꼈다. 지식인 사회에서 사회(공 산)주의 사상이 만연되면서 종래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변모되고 있었다. 그들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을 내세우던 공산주의의 행태는 그가 세운 오산학교 에마저 밀려 들어와, 예전 같으면 남강의 말과 권위로 영도되던 이 학교도 상당 한 동요를 겪게 되었다. 사회주의의 팽배와 거기에 따른 지식인 교육계의 변 모는 민족주의자 남강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안겨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89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1920년대 교회와 사회의 이러한 변모 속에서 교회는 사회주의계 지식인들로부 터 혹독한 지탄과 비판을 받는다. <개벽>( 開 闢 )지는 예루살렘의 조선을 바라보 면서 라는 제목으로 당시의 교회를 이렇게 비판하였다. 요새 보면 종교로 달아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간다. 그 중에도 기독교로 몰 리는 청년들이 더욱 많다. 그런데 조선의 기독교로 말하면 이러한 인심들을 맞춰주기에 매우 적절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즉 현실 생활에 대한 도리와 엄폐 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회생활의 진리나 사회적 정의와 사회적 평화 를 현실의 투쟁 속에서 구하지 아니하고 투쟁의 현실을 떠나 기독교에 가서 구 한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학대를 받은 나머지 기독교로 몰려 안심 생명 의 길이나 구하는 이 무리들은 언제나 요단강을 건너나 하여 마음을 가공의 천 국에 매달아 두고 한갓 현실을 저주해 마지않는다. 실로 오늘날의 기독교회는 불안정한 생활을 안정케 하며 알력이 있는 사회를 평화롭게 하며 불공평한 사회 생활을 공평케 하는 힘을 현실 생활 속에서 투쟁에 의해 찾지 않고서 자기의 주 위를 도는 환상의 태양에게 일임하고서 그의 섭리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감상적 기도 속에서는 아름다운 희망이 될 런지는 모르나 사회의 알력과 생활의 불안정과 그것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참혹한 사회상의 이해가 서로 다른 빈부 두 계급의 대치관계로부터 원인되는 이상, 현실의 면전에서 투쟁수단을 의치 않 고서는 사회적 평화, 생활 안정을 바랄 수는 없는 것이요, 또 사회적 정의의 승 리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은 구름과 같은 초월적 세계 를 향하여 그 해결을 맡기고 있다. 그러고서 사랑을 말하며 온유를 말하며 정의 를 말하며 인류애를 말한다. 엄연히 있는 계급 대립 위에서 인류애를 말하는 이 딱한 사람들은 불합리한 사회현상에 대해 눈을 감고 현실을 도피한다. 그와 같 은 현실 도피, 현실 무시하는 현실 긍정, 현실 유지의 결과를 내는 것이다. 그렇 다. 오늘날의 기독교회는 현실 긍정과 참고 복종하는 것을 미로 추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 예루살렘의 조선은 권위추종자, 가난한 이를 짓밟는 외식적 소경 이 되어 남을 인도하는 위선자들의 준동하는 곳이 되었다. 기독교회여! 회칠한 무덤과 같은 예루살렘의 조선이여! 복있을진저 너의 집이 터만 남으리로다. 155) 이렇게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비록 계급투쟁을 주무기로 하여 그 이론을 형성 하고 있는 공산주의 계열의 시각이긴 하지만, 그 내용이 당시 한국교회의 실상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 때문에 1920년대에 서 30년대에 이르러 한국 교회는 농촌과 사회 문제에 일정한 관심을 표명해 왔으 155) < 開 闢 > 6-7, (1925)

9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며, 교단 내에서 농촌부를 설치하고 사회절제운동을 펴는 등의 활동도 벌였던 것 이 사실이다. 한국 교회가 앞의 예루살렘의 조선을 바라보면서 에서 지적되었듯이 현실도피 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으로서 투쟁을 강조하 는 공산주의 계열의 주장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가령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현실적 모순을 인식하는 기독교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혁명과 투쟁을 위주 로 하는 공산주의적 방법론에는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 로 당시 한국 교회를 대표하고 있던 장 감연합기구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가 발표한 사회신조에도 사회(공산)주의적 혁명방법에 대한 거부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156) 당시 한국 지식인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공산주의적 방법에 대해 동조 하지 않았던 분의 하나가 남강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남강은 한국 교회가 현실 도피적 피안 세계 위주의 신앙관을 가진 교회로 변모한 데 대하여 많은 회의를 느꼈다. 그럼에도 그것을 개혁하는 방법이 공산주의 계열의 투쟁과 혁명의 방법 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 성서를 탐독하였고, 1910 년대의 신앙 전통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오히 려 몇 차례에 걸친 감옥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무능력 한계를 깨달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출옥 후 그는 김기홍( 金 起 鴻 ) 등의 협조로 3 1 운동 때 소실된 오산학교 교사 의 약 4배가 되는 새 건물을 신축하고 운동장을 넓히고 소학교를 증축하는 등 학 교의 면모를 일신해 갔다. 또 고당 조만식을 교장으로 하여 교직원과 기숙사 자 치회 등도 정비해 갔다. 오산의 명망이 높아지자, 3 1 운동 때 타교에서 제적된 학생들이 오산을 찾기도 하였다. 평양고보에 다니다가 3.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만 세를 부르다가 다시 일제가 경영하는 그 학교에 차마 둘아갈 수 없어서 오산학교 로 온 함석헌( 咸 錫 憲 )의 경우도 그렇다. 157) 이럴 무렵 남강에게는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 高 普 )로 승격시키는 문제가 부 딪치게 되었다. 1915년부터 일제는 한국 내의 사립학교에 대하여 일정한 시설을 156) 1932년 9월 17일 예수교 연합공의회가 발표한 사회신조 는, 일본 교회의 것을 답습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교회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12개조의 실천요항을 갖고 있는 사회신조 는 그 서문에서 사회(공산)주의적인 방법이라 할 일체의 유물 교육, 유물 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 개조와 반동적 탄압 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 고 있다. -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 제 9회 회의록(1932)> p. 52 참조 157) 오산칠십년사편찬위원회, << 五 山 七 十 年 史 >> (1978) p

91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갖추도록 하여 자격 있는 학교 즉, 고보로 승격시켜 주고 있었다. 이것은 일제가 사립학교를 그들의 체제 속에 수용하려는 정책으로서, 거기에 응하지 않을 경우 진학과 취직에서 학력 인정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그 시행령이 발표되었을 때 대부분의 감리교 계통의 학교는 재빨리 그 정책에 순응하였으나, 숭실 신성 등의 장로교계 선교학교와 오산 등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논란 끝 에 남강과 고당은 1925년 오산학교를 고보로 승격시켰다. 그 과정에서 일제는 민 족주의자 고당을 교장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게 되어 남강은 부득이 자신이 관청에 드나들지 않을 수 없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남강이 학교 문제를 두고 일 제와 타협한다는 오해도 나올 수 있었다. 오해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남강이 출옥한 후 그는 출옥 때에 언명했던 바와 같이 자신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 교회를 위하여 일하되 그 교회는 하나님이 한 민족에게 내리시려는, 동포의 교육과 산업을 발달시키려는 것과 관 련되어 있었다. 남강은 오산학교를 고보로 승격시킨 그 무렵부터는 교육과 산업 의 연계 체제를 구상하면서 이 목표를 추진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었다. 그의 구상은 대오산( 大 五 山 )건설로서, 유치원과 여학교를 설치하고 농과대학을 갖추는 한편 토지 개간 등을 통하여 농장을 확보하는 등, 교육과 산업을 연결하는 일종 의 종합교육 계획이었다. 이것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일제 총독부에 드 나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 또한 남강에 대한 일반의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밖 에 없었다. 더구나 1926년 6 10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그 즈음에 남 강에 대한 오해는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자로서의 명성을 가졌던 남강이 처신하기란 매우 난 처했을 것이다. 민족에게 새 희망을 안겨다 주려는 이 산학협동 체제의 종합교육 계획을 실현하려면 일제 총독부에 협조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민족주의자로 서의 고고한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추호의 타협적 자세도 버리고 오직 투쟁 일변도의 길을 걸어야만 하는, 이것은 어쩌면 공유할 수 없는 길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판단하기로는, 남강은 일을 추진하는 쪽을 선택하여 자신의 고고 한 명예에 흠이 생길지도 모르는 어려운 길을 걸으려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지금 까지 그가 쌓아 온 명예를 포기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런 일을 추진하지 않고서 도 충분히 여생을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는데도 그가 자신을 포기 하는 선택을 감행한 데 대하여, 때로는 구조와 개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간적인 남강을 보게도 한다. 그의 선택은, 그것이 옳은 길인가 아닌가, 혹은 민족적인가 아닌가 하는 판단을 떠나서, 오히려 남강이 한 신앙인으로서 남긴 남강다운 삶이

9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요, 교훈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일제와 타협했다는 세간의 오해와 역사적 누명 을 조금이라도 개의했던들, 그는 오히려 세인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약삭빠른 판단을 선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결단은 세속적 영욕을 초월하는,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신앙 안에서만 가능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출옥 이후 그는 피안주의에 젖어가는 한국 교회에 실망하고 있었다. 피안주의 는 현실 타협의 또 다른 형태이다. 따라서 피안주의에는 현실 개혁의 의지를 찾 아보기 힘들게 된다. 입으로는 내세를 말하고 현실과의 단절을 말하지마는 이것 은 변형된 현실 안주의 방법이다. 한국 교회가 피안주의라는 가명을 쓰고 현실 안주에 급급하고 있을 때, 그는 그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참 기독교가 필요하였 다. 그것이 신우회( 信 友 會 ) 운동과 성서조선 그룹과의 연결로 나타났다. 그는 1927년 민족운동 단일체로서 신간회( 新 幹 會 )가 조직되었을 때에 조선의 장래를 오히려 기독교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의 말은 간단했다. 신간회니 무엇이 니 하지만은 기독교에서 일함이 참 큰일이지. 맘을 변화시키니까. 158) 그가 또 조 선 교회에서 칠칠하게 빼어난 인물들(그 중의 한 사람이 趙 炳 玉 이다)을 모아 신 우회 를 조직하여 전조선으로 일대 경성을 주며 운동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 나 얼마 가지 않아 깨끗이 실패했다고 한다. 159) 남강이 한국 기독교계에서 최후로 희망을 걸었던 곳이 성서조선 그룹이 아니었 던가 생각된다. 여기서 굳이 무교회파 ( 無 敎 會 派 )와 성서조선 의 한국 유포 과 정과 그 활동상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겠다. 남강이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들로부 터 한국의 당면한 문제가 빵 문제 해결이라고 도전받았을 때 그는 분연히 우리 는 지금 빵에 주려 있거니와 그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주려 있다 고 응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배우며 가르치는 기관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것이 성 서조선 그룹과 관련을 맺게 했던 것이다. 남강은 기성 교회와 YMCA 같은 것이 이제 그 사명을 감당할 시기가 지나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60) 오산학교의 성서조선 그룹 활동은 1928년 봄 함석헌이 동경고사( 東 京 高 師 )를 마치고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함석헌은 이찬갑( 李 贊 甲 ), 최태사( 崔 泰 士 ), 노정희( 盧 正 熙 ) 등 용동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청년들과 신상 철( 申 翔 哲 ), 현옥원( 玄 玉 元 ), 유효원( 劉 孝 元 ) 등의 학생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다. 158) 李 贊 甲, 남강은 신앙의 사람이다 산 믿음의 새 생활, (1983, 시골문화 사), p ) 李 贊 甲, 앞의 글, p ) 金 基 錫, 앞의 책, p

93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남강이 이들과 연계를 맺는 것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 번은 서 울을 다녀 온 남강이 함석헌을 불러 자신도 성서조선 지를 읽어 보았노라고 하 면서 신앙의 개혁을 위하여 그 방향이 옳다고 격려한 것이 그 계기가 아닌가 한 다. 성서조선 은 1929년 늦가을에 서울에 온 남강이 성서조선사를 찾았다는 것 과, 그 며칠 후에 성서조선 기자들이 남강이 유숙한 여관을 찾았다는 것을 보도하 였다. 161) 남강이 왜 기성 교회를 떠나 성서조선 그룹에 접근하게 되었는지는 명백하게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기성 교회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다는 다소 막연 한 설명만이 그 언저리를 맴돌 뿐이다. 이찬갑의 설명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궁금 증의 일부는 풀어준다. 그러나, 때마침 기이하게도 이 썩어가고 말라가는 朝 鮮 에서 남모르는 사이 고 요히 그러나 全 生 命 을 바쳐서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살아 자라는 한 포기 가운데 한 줄기인 또한 당신(남강을 가리킴-필자 주) 말마따나 믿음 만 몰아 나가는 것 을 발견케 되셨다. 그 참 산 그들에게 어쩔 수 없이 몰리어 가시게 되어 만나게 되니 그만 말할 수 없이 참된 하나는 벌써 통하게 되어 있 음을 보게 된다. 저들은 누구보다도 더 먼저 당신을 朝 鮮 의 참된 先 覺 者 요 信 仰 者 로 알아 先 知 者 의 대접을 진정답게 하였지마는, 당신도 분명히 바라보임이 있 어 당신이 용기있게 과거의 모든 것을 끊을 것 끊고 새 출발인 것으로 오산서도 일으키신 聖 書 硏 究 의 모임에서 나서시어서 그 전날 말의 설명과 같은 귀하신 증 거를 자세히 하셨다. 나는 예수 믿어. 監 獄 에 들어간 뒤 聖 經 을 보는 가운데 나 의 맘은 변하였다. 舊 約 스무 번 新 約 百 번을 보는 가운데서 변화하였다. 그것 은 예수께서 하셨는지, 聖 神 께서 하셨는지 나는 모른다마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믿는다. 하나님께서 義 로 다스리시는 것을 믿는다. 義 로 사는 것처럼 귀한 것이 어디 있어. 나는 주여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이기게 하여 주심 감 사합니다. 지금까지 오게 하심처럼 끝까지 이겨 나아가게 하여 줍소서 하고 기 도한다. 이것이 나의 기도이다. 하시고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말씀을 하셨다. 그 때에 나는 사실로 보았다. 무엇인지 아주 귀한 것이 더할 데 없이 기한이 찬 듯이, 이제 조금만 지나면 滿 開 될 듯한 것이었다. 방금 열리어질 듯이 준비되 고 꼭 차 있는 듯함이었다. 義 의 하나님이심을 그렇게까지 진정답게 알으심이었 다. 과연 福 音 그대로를 누리게 하고 싶음이었다. 얼마 멀지 않은 이제 조금만 하면 될 것이 너무도 잘 보임이었다. 나는 그 때에 어느 누구가 福 音 을 설명하는 161) 聖 書 朝 鮮 城 西 通 信

9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이상으로 福 音 의 眞 實 性, 福 音 의 참된 모양을 볼 수 있었다. 나아갈 수 있음을 보았다. 162) 옥중에서 구약 이십 번, 신약 백 번 이상을 탐독한 그가 조선을 성서 위에 라 는 슬로건 위에서 복음의 진실성을 추구하려는 성서조선 그룹과 관계를 맺는다 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명예에 의혹을 끼칠 수도 있는 앞서의 저 결단을 내리는 시기와 거의 맞먹는다. 그는 자신과 조국과 민족을 성경 위에 올려놓으려고 결단 함으로써 기성 교회가 전통에 의해 성경의 참 뜻을 훼손하고 있는 일종의 계율주 의적 신앙(금주 금연 등)에서 자신을 해방시켰을 뿐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과 성 경 앞에서 그 자신을 완전히 부정할 줄 아는 고귀한 신앙인이 되어 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찬갑도 그렇게 극찬해 마지않았던, 그의 동상 제막식에서 행했 다는 연설은 남강 신앙의 극치이자 기독교 신앙의 진수인 인간의 자기 부정을 잘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오늘날까지 온 것은, 내가 한 것은 조금도 없읍니다. 모두 神 이 나를 그 렇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나는 본래 不 學 無 識 합니다. 나는 이 뒤에 선 銅 像 과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으나 神 이 나를 이렇 게 이끌어서 오늘까지 왔읍니다. 과연 神 이 나를 지시하시며 도우심뿐입니다. 이후로도 그럴 줄 믿습니다. 163) 이런 고백을 가능하게 한 남강의 자기 부정의 철저한 신앙이야말로 자신의 죽 은 시체까지도 생물실의 표본으로 남기도록 유언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남강, 그는 기독교를 통하여 조선의 참 민족주의자가 되었고, 자신을 위해서는 자기의 명예나 몸의 한 부분까지도 남기지 아니하려 한, 그리하여 그의 스승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 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하신 말씀대로 민족을 위해 주어진 십자가를 달게 지 고, 최후에는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면서 인생을 살아갔던 조선의 신앙인이었다. 162) 李 贊 甲, 앞의 글, pp. 233~ ) 위의 글, p 남강이 자신의 동상 제막식에서 말했다는 내용은, 金 基 錫, 앞의 책, pp. 335~336과 金 道 泰, 앞의 책, pp. 316~317도 大 同 小 異 하게 전 하고 있으나, 필자는 남강의 말년에 그를 가장 가깝게 모시고 있던 李 贊 甲 의 증 언을 취한다

95 제3강. 남강 이승훈의 신앙 6. 맺는말 남강은 국권이 상실되어 가던 한말, 민족의 비운을 맛보며 기독교에 입문하였 다. 나라를 잃고 절망할 때인데도 그는 신앙의 힘으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갖 게 되었다. 기독교에 입신한 후 그의 모든 활동의 원동력은 기독교 신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세운 오산학교도 민족주의 교육과 기독교 교육을 병행 하게 되어 위대한 인물을 많이 양성하게 되었다. 학교뿐만 아니라 그가 사는 마 을도 기독교를 통해 변화시키는 일을 추진하였다. 기독교에 입문한 후 그는 안명근 사건, 총독 암살 음모사건 에 연달아 연 루되어 5년 간 유배 및 감옥생활의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이 고난은 그에게 오 히려 앞으로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단련의 기간이 되었다. 이 단련에서 그는 모진 고문을 극복하였고, 고난의 참 의미를 깨닫는다. 그 자신의 가문과 명예만 생각할 줄 밖에 모르던 남강이, 1910년의 국권의 상실과 총독암살 미수사건 같 은 민족적 모순을 겪으면서 기독교 신앙과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민족 문제를 위 해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아는 용기있는 민족주의자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그가 3 1 운동에 주역의 한 사람으로 흔쾌히 몸을 던질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1915년 감옥에서 풀려나온 그는 보다 알찬 신앙생활을 계획한다. 입옥( 入 獄 )될 때 학습 밖에 받지 못했던 그는 출옥하여 세례를 받고 이듬해 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가을에는 오산교회에서 장로로 피택, 장립된다. 그의 감옥생 활과 평양신학교 생활의 경험은 그가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서 활동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1 운동에 참여한 그는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임을 먼저 선포하였고, 그 러기에 하나님이 인류를 내실 때 주신 천부적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이 투쟁에 나섰음을 재판정에서 밝혔다. 그가 3 1 운동의 주역으로 참여한 사상적 동기와 행동적인 용기는 기독교 신앙과 깊이 관련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감옥생 활이 괴로운 것이 아니었고, 민족을 위한 것이기에 오히려 감옥 안에서 춤을 덩 실덩실 출 수 있었다. 3 1 운동의 48인 중에서 맨 마지막으로 출옥하면서, 감옥 에 더 있으면서 같이 고생하고 있는 동포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신앙인 남강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출옥 후 그는 급격히 변해 가는 사회와 교회를 체험하면서, 민족을 위한 새로 운 구상에 젖는다. 그리고 그의 구상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일제와 타협한다는 오

9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해도 빚게 되는데, 이미 사생( 死 生 )의 기로를 몇 번이나 넘은 그에게 이러한 의혹 과 개인적 명예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개인적인 영욕을 초월한, 어쩌 면 자기부인의 신앙의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거기에서 기성 교회와는 다른 새로 운 신앙운동으로서의 성서조선 그룹과 접촉이 시도되었다. 남강은 실업가요, 교육가요, 민족운동가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후반생을 남강답게 살도록 인도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자신을 부정하 면서까지 그리스도를 따랐던 사람이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고난을 감수하면 서 민족과 더불어 살아간 위대한 선구자였다

97 한국역사 속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한국근현대사 제 4강 이동휘의 생애 - 강사 : 이 만 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2008년 6월 11일(목) 저녁 7시 서울YMCA 친교실(2층) 주최 : 서울YMCA

9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99 제4강. 이동휘의 생애 이동휘의 생애 이만열 명예교수(숙명여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구한말 무관, 이후 구국계몽교육가, 전도사, 항일무장 투쟁가, 사회주의자라는 드라마틱한 삶을 산 李 東 輝 (1873~1935)의 인생역정은 격 동의 한국근대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동휘의 생애는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무관 생활 ( ) 이동휘는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에서 아전을 지낸 이승교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호는 誠 齋 이다. 지방 아전을 지낸 부친 이승교는 1910년 일제병탄 이전 보성관과 매일신문사 근무하면서 계몽운동 모색하였다. 3 1운동 당시 연해주에서 조직된 大 韓 人 老 人 團 대표로 국내에 들어와 종로에서 결연한 만세 시위를 했으며, 블라디보스톡 신 한촌에서는 3 1운동 1주년 기념행사 진행하는 등 아들에게 시범을 보이는 민족 운동가였다. 이동휘는 8세 때부터 향리의 大 成 齋 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이후 단천군수의 通 人 노릇을 하다가 봉건부패 관리의 행동에 분개하여 상전인 군수에게 화로를 집어 던져 울분을 터뜨리고 숨어 살다가,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에 올라와 李 容 翊 의 소개로 1896년, 한성무관학교에 입학, 그 이듬해 졸업, 동기생 13명과 함 께 參 尉 로 임관, 궁내부 수비대에 배속, 1899년 副 尉 로 승진하여 원수부 군무요원, 이 무렵 황제 주위에서 첨렴강직하고 충성스러운 무관으로 인정, 6개월 간이나 三 南 檢 査 官 으로 측파, 순회감시를 통해 14명의 부패군수를 파직시키고 50만냥의 부정엽전을 환수, 황제께 헌상하였다. 선생은 軍 職 에 있으면서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참여, 1902년에는 민영환 이준 이용익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던 改 革 黨 에 가입, 개화혁신의 정치활동을 펴기 도 했다. 1903년 육군 參 領 으로 江 華 鎭 衛 隊 대장에 발탁, 이듬해 從 二 品 의 품계에 올랐다. 그는 강화에 부임, 박능일 김경일 권신일 김우제 등 교회지도자들과

10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교류했고, 서울에 왕래하며 전덕기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김정식 등 진보적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164) 년에는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에 반대하던 대한보안회, 그의 후신인 대한협동회, 일진회를 박멸키 위한 공진회 등 에 적극 참여했다. 1905년 3월에는 8년간에 걸친 군직을 사임하였다. 부패한 강화 유수 尹 喆 奎 와의 충돌사건이 있은 데다가 일제가 고문정치 강요 후 2개사단 규모 의 한국군 25,000명을 8500명으로 감축시킨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때 이동휘가 이 끌던 강화진위대의 규모도 700명에서 50명으로 감축했고 대장의 직위도 參 領 에서 副 尉 로 격하시켰다. 이에 앞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동휘는 모두 8건의 遺 書 를 작성하 여 165) 각각 고종, 2천만 동포형제, 縉 紳, 법관, 매국공적, 각국 공사관 사절, 주한 일본공사 林 權 助 및 주한 일본군사령관 長 谷 川 앞으로 보냈다. 이전까지는 일본 에 대해 특별한 비판의식이 보이고 있지 않으나 일제의 침략성이 노골화면서 그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고종을 비롯한 2천만 동포의 각성과 자신의 울분을 토로하 고 있다. 2. 전도 활동과 계몽교육운동 ( )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급속하게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라보던 이동휘는 계몽단 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교육과 기독교 전도활동을 펼쳐가면서 독립전쟁 론의 실천체계를 가다듬게 된다. 그는 강화진위대장 시절부터 착수한 국권수호를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전심하기로 결심하고 교육구국 활동에 착수하였다. 그는 1903년 강화도 진위대 대장에 부임 후 얼마되지 않아 미국인 선교사 벙 커(A.D Bunker)와 박능일 166) 이 운영하던 사숙 岑 茂 義 塾 을 기반으로 강화도 최 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인 合 一 學 校 를 설립하였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를 접하게 되고 그 후 강화도 지방 전도사 김우제를 통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이후 강 164) 한규무, 李 東 輝 의 基 督 敎 社 會 主 義 ( 일제하 한국기독교와 사회주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2, ) 165) 윤병석, 이동휘의 생애와 傳 記 및 全 書 ( 誠 齋 李 東 輝 全 書 상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소, 10) 166) 박능일은 강화읍 잠두교회를 지도한 목회자로서, 교항에서 처음 믿기 시작하여 홍의교회를 개 척했고, 인천 제물포교회 학당에서 가르치던 중 강화읍교회가 개척될 때 초대 전도사로 부임했 던, 강화의 초기 선교현장에서 활동한 지도자였다. 때문에 그가 1903년 3월 1일 질병으로 돌아 갔을 때 신학월보는 미이미교회에서 기둥같은 선생 하나를 일헛스니 이런 불행한 일이 업나이 다 라며 비통해 했다. ( 강화기독교100년사, )

101 제4강. 이동휘의 생애 화도 진위대장 겸 감리교회 권사로 활동하면서 주민들을 신망을 얻었다. 그의 입 교는 여러 가지 증거로 볼 때 1905년 을사조약 이전인 것은 확실하다. E.M.Cable ( 奇 富 怡 ) 선교사가 쓴 1905년 보고서 "West Korea Ditrict"에는 이동휘의 입교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유명한 고도 강화읍에서 마른 뼈들을 움직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강화 읍 뿐 아니라 섬 전테에 영향력 있는 지도급 인사들이 교회를 찾아와 개종한 것 이다. 그 중에서 나는 이동휘라는 사람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는데, 그가 교인이 되 기 전에는 정부의 고위 관리이자 이 섬 방위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신실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교도와 기도교인 모두에게 유명하며 존경을 받고 있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 정부의 놀라운 부정부패를 알게 되어 마음의 병을 얻게 된 그는 진실을 알고 싶은 열정에서 황제를 찾아가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황 제는 주저하면서 그의 사임을 받아들였고, 강화로 돌아온 그는 본처 전도자인 김 우제를 찾아가, 그와 교회 앞에서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주 앞에 자신을 맡 기고 주를 섬기며, 마음의 진실된 변화와 진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깨닫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다. 그의 신실함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 그는 즉시 담배와 술을 끊었으며 이어 동료들에게 찾아가 자신의 그 동안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들의 용서를 빌었고, 그들에게 자신이 찾은 심령의 평 화가 어떤 것인지를 간증하면서 그들도 자기와 같은 평화를 얻도록 권면했다. 이 섬에서 그가 이교도로부터 받고 있던 존경과 덕망으로 인해 그는 善 한 사업에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하며, 만일 그처럼 높은 영향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 신실한 기도교인이 되었으니 그를 추앙하는 모든 사람들이 또한 그렇게 될 것으로 확신 한다. 내가 들은 바로는, 그가 개종한 이후 이 도시의 귀신 사당들이 여럿 파괴 되었고 옛부터 섬겨오던 먼지투성이 우상들이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졌는데, 이는 마치 귀신들조차 강화의 바울 에게는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동휘는 매우 영리하고 총명한 인텔리 젊은이이며 나는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히 선택하셔서 큰 우리를 세상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예수께로 인도하는 데 큰 영 향을 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67) 그 자신 국토 방위의 책임을 지고 있는 진위대 간부로서 일본의 무력적 침략 167) E.M.Cable, Official Minutes of the first Annual Session Korea Mission Conferenc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5,

10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에 효과적인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조선의 한계를 느끼며 안타까워 하던 차에 나 라를 구할 수 있는 방편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168) 즉, 당시의 지식 인들이 기독교를 문명부국강병의 종교로 인식하고 받아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 동휘도 기독교와 교육을 통해 국권회복을 도모하여 기독교에 입교했던 것이다. 한편 그의 회개는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감리교 부흥운동의 열기를 직접 체험 하면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된 후, 강화 사회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69) 그의 앞서 언급한 을사오조약 때의 유서 가운데 遺 告 二 千 萬 同 胞 兄 弟 書 를 보면 기독교를 개인과 나라를 위한 종교로 인식하고 그것을 믿을 것을 동포에게 당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휘는 일직부터 종교를 믿어왔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때 이것이 아니면 相 愛 之 心 이 없을 것이며 이것이 아니면 愛 國 之 心 이 없을 것이며 이것이 아니면 獨 立 之 心 도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自 修 自 强 도 이것에서 기인하고 忠 君 愛 國 도 이것에서 기인하고 獨 立 團 結 도 이것에서 기인하고 學 問 敎 育 도 이것에서 기인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동포들은 힘써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170) 성재 선생은 군대 사임 이후 1906년부터 본격적으로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1906년 결성된 대한자강회의 회원으로 그 지회를 강화도에 유치하고, 신채호 주 도의 국문잡지 가정잡지 에도 참여하였다. 또 국민교육회에도 1906년부터 관 여하여 이원긍 김정식 이 준 안창호 유승겸 등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교육운 동의 추진을 모색하였다. 국민교육회는 연동교회 게일(J.S.Gale) 목사의 집에서 1904년 8월 24일 창립총회를 갖고 연동교회 신자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학교설립, 교과서편찬, 서적 잡지 편찬, 교육계몽강연 등의 활동을 전개했 다. 이러한 국민교육회에 이동휘가 참여한 것은 이 시기 기독교 신앙과 교육활동 을 병행하던 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71) 또한 이동휘는 국민교육 회 참여에 앞서 상동청년회에서도 활약하였다. 상동청년회는 1897년 상동교회내 에 설치된 청년단체로서 종교활동 뿐 아니라 구국운동을 펼쳐오던 중 청년회가 168) 강화기독교100년사 ) 강화기독교100년사, ) 大 韓 帝 國 軍 參 領 李 東 暉 遺 疏 171) 신혜경, 대한제국기 국민교육회 연구 이화사학연구 20 21합집, 1993; 최기영, 한말 국민교육회의 설립에 관한 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1,

103 제4강. 이동휘의 생애 교회의 목적에 벗어나 정치조직으로 변질되었다 라는 이유로 1900년 무렵 해체되 었다. 그러나 1903년 전덕기를 위시하여 서상팔 정순만 등이 상동청년회를 재조 직하였고, 이동휘는 준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상동청년회는 중등교육기관 상동청 년학원의 설립, 을사조약 반대상소, 헤이그밀사파견 후원 등의 활동을 1914년 경까 지 펼쳤다. 그리고 이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던 회원 다수가 1907년 창립된 신민 회 회원이었고 신민회가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동 휘 또한 신민회 회원으로서 후술하겠지만 105인 사건 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172) 1906년 10월경 이준 吳 相 奎 兪 鎭 浩 등과 함께 漢 北 興 學 會 를 조직하고 173) 또 박 은식 이갑 정운복 노백린 등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西 友 學 會 에도 참여, 서우학 회 강화도지회를 설치하였다. 174) 뒤이어 두 학회를 합동하여 서북학회를 발족시키 고 각지를 순회하면서 지회를 설치하는 등 조직을 확장하고 교육구국 을 외쳤다. 계몽단체 활동을 통한 국권회복운동과 더불어 이 시기 이동휘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교육 및 종교활동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를 매개로 각종 학교를 세우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한편, 교육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가장 먼저 설립된 것이 1904년의 普 昌 學 校 였다. 특히 이동휘는 보창학교를 구 국인재 양성을 위한 모범학교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합일학교에 이어 그는 진위 대장직에 있으면서 普 昌 學 校 를 설립했던 것이다. 그는 을사조약 이 늑약되던 해 학생들을 인솔, 덕수궁으로 가서 고종을 알현하고 교명 과 왕실 보조금까지 얻게 되었다. 광무 9년에 진위대 참령 이동휘가 旣 辭 官 하고 始 設 私 立 育 英 學 校 하니( 舊 東 營 ) 즉 本 都 교육의 元 祖 라 越 明 年 乙 巳 春 에 교장 이동휘는 率 學 生 二 十 餘 人 하고 陛 見 德 壽 宮 하니 上 이 特 賜 普 昌 學 校 名 하시고 ( 英 親 王 殿 下 는 手 書 看 板 하시니라) 以 年 金 例 로 劃 內 帑 金 六 百 圓 하시다. 175) 보창학교의 설립연도와 관련, 위의 기록과 함께 선교사의 증언도 1904년으로 나타나고 있다. 선교사 케이블은 1905년 12얼에 이 학교를 소개하면서 1년 전에 172) 한규무, 상동청년회에 대한 연구, 역사학보 126, ) 서북학회월보 1908년 6월1일자; 동아일보 1935년 2월 15일자 174) 한국독립운동사 2, 국사편찬위원회, 1965, 623쪽. 175) 江 都 誌, 第 十 二 章, 23쪽

10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설립된 학교 로 증언하고 있다. 강화읍에 있는 남자 매일학교는 한국에서 가장 큰 매일학교 중 하나다. 이 학 교는 1년여 전에 설립되었는데, 전에 조선군 지휘관이었던 이[동휘]씨가 세웠다. 이씨는 개종한 이후 마음 속에 소년교육을 품고 있다가 음내에 있는 몇 개 매일 학교들을 하나로 묶어 출석학생수는 2백명을 넘게 되었다. 이씨가 관직에 있었다 는 것이 영향력을 발휘하여 정부로부터 학교 운영비로 매월 2백냥씩 보조를 받게 되었다. 176) 이 때 보창학교 학생들은 모두 단발했을 뿐만 아니라 교복을 입었고 교과목은 한문 한글 일본어 영어 산수 한국사 한국지리 기초과학 웅변술 등이었고 1905년 당시 교사 6명이 2백여명을 가르치고 있었다. 수업후에는 매일 한시간씩 군사훈련을 했다. 케이블은 앞의 글에서, 매일 오후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은 한 시간씩 군사훈련을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마음과 몸을 단련한다. 고 증언 하고 있다. 이렇게 보창학교는 이동휘의 이념에 따라 계몽적인 지식과 함께 군사 훈련을 통해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군사훈련을 겸한 이런 류의 학교를 강화 전역에 설립코자 했던 것 같 다. 다시 말하면 강화 전체를 항일투쟁의 근거지로 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선교 사의 증언이다. 이[동휘]는 이 학교를 강화의 중앙고등학교로 만들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 는 이미 지방 세 군데 이 학교의 支 校 를 세웠으며 곧 몇 군데 더 세울 것이다. 그는 훌륭한 교육계획을 갖고 있으며 교회에 비용을 청고하지 않고도 잘 꾸려가 고 았다. 그는 지난 계삭회 때 일어나 나라의 장래는 바로 아이들에게 달려 있다 고 하면서 부모들에게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가져 줄 것을 호소하는데, 얼굴에 눈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그는 회에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기를, 섬 어느 곳이든 교인들이 자기네 아이를 보내 먹을 것만 책임져준다면 그 나머지는 자신이 책임져 숙박비와 수업료는 받지 않고 가르치겠노라 하였다. 177) 176) E.M.Cable, "The Kang-Wha Boy's Day School", KMF., Dec. 1905, ) Minutes of the Annual Session of the Korea Mission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5,

105 제4강. 이동휘의 생애 이동휘에 의해 설립된 강화의 학교는 모두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어 그곳을 방 문하는 것이 기쁘다. 10명의 교사가 일련의 과정을 가지고 영어, 중국어, 조선어 그리고 일어를 가르치고 있다. 교사들 중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매우 능력있는 자들도 있다. 그곳엔 모두 210명의 학생들이 있다. 체육시간이 잘 운영되고 있는데 건강한 육체와 마음이 좀 더 능동적인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동 휘의 목표는 그곳을 강화에서 중심적인 고등학교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이미 3곳 의 학교를 그 지역에 세우고 곧 몇 개를 더 세울 것이다. 그는 교육에 관하여 칭 찬할만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지난 마지막 회의에서 그는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의 교육에 좀 더 관심을 가질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는 회의에 앞서 강화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보내면 그들 을 무상으로 기숙사에서 숙식을 제공하고 가르칠 것이라고 발표했다. 178) 강화 사람들은 닭 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一 洞 一 學 校 를 역설하던 이동휘의 열성에 감동, 마을마다 학교세우는 운동을 전개, 한 때 강화 전체에 사립학교만 72개나 되는 놀라운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에 대해 강도지 는, 광무 구년 甲 辰 에 參 領 이동휘 解 官 하고 叫 唱 敎 育 하야 始 設 江 華 私 立 普 昌 學 校 하니 實 爲 本 都 敎 育 界 嚆 矢 러라 自 是 以 後 수삼년간에 通 全 郡 設 立 者 多 至 七 十 二 校 하야 咿 晤 現 送 이 四 境 相 聞 하얏으니 可 謂 學 校 의 全 盛 時 代 러라 179) 라고 말하고 있다. 강화인들은 이동휘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양받아 이렇게 민 족교육에 매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보창학교는 갈수록 번창, 곧 학생수가 수백명에 달하였고 소학 중학 고 등과로 나누어 가르치다가 1908년 2월에는 3년제의 중학교로 개편하였다. 그밖에 1년제의 예비과와 사범속성과 야학과를 두었다. 이동휘가 교장인 강화읍에 세운 이 학교는 강화 전도에 보창학교 설립운동으로 번졌다. 1907년 6월경 감리교선교 사 스크랜튼(W.b. Scaranton)에 의하면 강화도 내 14개의 보창학교에 학생수가 800여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180) 그 밖에 개성에도 이동휘가 金 基 夏 등과 보창학 178) E.M.Cable, "West Kyeung-Keui and Cheung-Chung Ditrict", Official Minutes of the second Annual Session Korea Mission Conference Methodist Episcopal Church, ) 강도지, 제12장

10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교를 세웠으며 이후 황해도의 김천 장기 풍덕 안악 등지와 충청도 충주, 함경 도 함흥 등지에도 이와같은 유의 보창학교가 세워져 전국적으로 보면 90개교 안 팍의 보창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동휘의 구국인재교육과 계몽의식은 그대로 보창학교 학생들에게로 전달되어 애국심을 함양시켰다. 181) 또한 강화도에는 보창 학교 이외에도 仙 原 학교 恩 昌 학교 華 城 학교 進 明 학교 등 1촌 1교 운동으로 학 교를 설립하고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교육계몽강연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열 성으로 약 3년 동안 강화도 지역에는 72개의 학교가 세워졌고, 전국에는 170개 학 교가 세워져 구국인재교육이 착실히 실천되어 갔다. 이러한 이동휘의 활발한 교육활동은 그의 기독교 신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그는 기독교를 서양문물의 전달자, 계몽운동의 수단, 구국운동의 방 법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주로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통한 민중계몽운동 에 주력하면서 기독교 선교와 항일신교육 보급운동에 앞장섰다. 원산 성진 강 원도 각지를 순회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으라 예배당을 세워라..삼천리 강산 1리에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3천개의 교회와 학교가 세워지는 날이 독립이 되는 날이다. 182) 이에 영향을 받아 함경도 내에 50여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고 그런 학교는 대 개가 기독교 교회에서 세운 것이었다. 183) 또한 후일의 동아일보 와 매일신 180)...강화에 있는 The Boys' School은 당시 14개이고 그것들은 모두 교회 보고서에 여러가지 로 등록되어 있다. 이동휘는 자립(자영) 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아주 열정적이다. 800명의 학생이 있는 14개의 학교가 모두 우리 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그는 최근에 여학교 설립에 착 수하였다... (W.B. Scranton, "Seoul and Chemulpo Ditrict", Official Minutes of the third Annual Session Korea Mission Conferenc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7, p.34) 181)..북년 지방에 봄은 오고 상원달이 밝았는데 애국가 한 소리에 그 고을 풍호리에 있는 보창학생 오십 인이 모여 집을 보전할 마음을 나라에 옮긴다는 문제로 연설하다 가...개개히 애통하는 말로 서로 권장하더니 그중에 열닐곱 사람은 혈성이 더욱 발발 하야 하늘을 가르치며 맹세를 발하여 갈오대 한국을 반드시 건지리라, 우리라 우리 삼 천리 강산을 반드시 보전하리라, 우리가 우리 사천년 역사를 반드시 빛내리라 하고 각 각 찼던 칼을 빼어 손가락 한 개씩을 버혀 흐르는 피로 동맹하는 글을 썼다 하니... ( 논설: 학계의 꽃 대한매일신보 1908년 5월 16일자) 182) 유석인, 애국의 별들 교문사, 1965년, 184-5쪽. 183) 윤병석, 이동휘와 계봉우의 민족운동, 한국학연구 6 7합집 1996,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296쪽에서 재인용

107 제4강. 이동휘의 생애 보 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한손에는 성경을 잡고 또 한손에는 교육사상을 고취하는 서류를 잡은 후 이르는 곳마다 산천이 떠나갈듯한 목소리로 첫마디부터 열혈이 뚝뚝 떠러져서 수많은 청중이 흑흑 느끼며 울고 그 마당에서 반듯이 학교가 설립되었으니.. 184) (이동휘가) 서북학회에 종사하던 당시 영흥으로 순회강연을 갔었는데 그 때 미미한 조선의 교육열을 고취하기 위하여 눈물흘려 울어가며 열변을 토하야 이 때 감흥된 군민들은 그 후 72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一 邑 七 十 二 學 校 라는 문자가 지금도 영흥에서는 유행되고 있다 한다 185) 성재 선생이 혼신의 힘을 쏟아 눈물을 흘리며 강조한 것은 신앙(선교활동)과 교육이었다. 그에게 교육운동과 전도 활동은 따로 떼어내서 분리할 수 없는 하나 였다. 성재 선생의 이같은 보창학교 운동은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1907년 군 대 해산후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강화에 진주한 일본군은 보창학교를 접수, 그 들의 작전본부로 사용하는 한편, 의병운동과 관련된 교사와 학생들을 철저하게 수색 추격했던 것이다. 이 때 이동휘도 체포되어 서해안 떼섬에 유배당했다가 석 방된 후 함경도 쪽으로 피신, 선교사 R.G.Grierson( 具 禮 善, ) 밑에서 전 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186) 보창학교는 의병 진압 이 끝난 후에도 교사를 돌려받지 못하고 187), 설립된 지 12년만에 페교되었지만, 이 학교가 강화 사회에 끼친 공은 적지 않다고 한다. 교회와 사회의 유지들이 자기 마을에 학교를 세워 개화와 민 족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188) 선생은 1908년 8월부터 1909년 5월까지 서북학회의 파견으로 함경북도 지역을 184) 동아일보 1935년 2월 15일자. 185) 每 日 申 報 일자 186) 한규무, 앞의 글, ) 보창학교는 그 뒤 양로당으로 옮겨 수업했고, 일제 강점 후에는 금융조합에 내주고 貳 衙 營 옛 건물로 옮겼지만 학교유지비로 충당되던 적석사 재산이 일본측이 설립한 강 화공립보통학교 재산으로 넘겨져서 재정 곤란까지 당했다. 강화 유지들이 출연, 근근 이 유지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더 견디지 못하고 3.1운동 전에 폐교되었다. 강화기 독교100년사 ) 강화기독교100년사,

10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순회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캐나다 선교회 그리어슨(Robert Grierson) 목사를 찾아가 조사가 되기를 청하고 먼저 허술한 옷차림으로 짚신 신고 무거운 성경책 보따리를 걸머지고 매서인 노릇 부터 시작하여 그 후 더욱 적극적인 선교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189) 이동휘가 가는 곳마다 그의 강연에 감동한 동포들이 거수로 기독교 신자가 되기를 서약해였다. 그리고 이동휘의 영향으로 함경도 각 지역 주 민들이 교회와 학교를 세우는 일에 힘써 도처에 교회와 기독교 학교가 세워졌다. 1910년 한일합방 반대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이동휘는 이제 전도사의 신분 으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기독교를 통한 항일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주로 교회나 학교에서 열린 각종 집회를 통해 청중들에게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 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심지어 학생 군사훈련을 계획 하기도 하였다. 190) 또한 동경물리학교에서 수학한 오영선과 그밖에 기태진 홍우 만 등의 우수한 교사를 그리어슨 선교사가 세운 성진 협신중학교의 교사로 초빙 하고 이동녕과 함께 북간도 교육단을 지원하여 정재면 등을 그곳에 파견하기도 하는 등 선교와 병행한 교육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활동무대를 함경도는 물론 북간도 연해주까지 넓혀갔다. 이동휘는 그리어슨 선교사와 손잡고 간도지방 선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 어슨은 1908년 연해주 북간도 함경도를 포괄하는 韓 俄 淸 三 國 傳 道 會 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이동휘를 후원하였다. 이 전도회는 북간도 각지의 한국인 마을을 찾아 189) 이 때쯤 해서 이동휘라는 한국 사람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성진 지방의 토박이로서 굳 건한 기독교신자였다.... 그가 나를 찾아온 까닭은 그리스도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해 보겠다는 목적에서였다. 그의 큰 희망은 다른 애국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을 계몽시키는 데 있 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 없이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지방순회 전도인으로 써달라고 청했다. 나는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성서공회 사 업을 위하여 賣 書 人 하나가 필요한데, 선교부 인건비 예산을 일년 앞당겨 다 써버렸으니 그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일은 당신과 같이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맞지 않는 천직 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조금도 상관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곧 매서인이 되었다. 그는 허술한 옷차림으로 짚신 신고 무거운 성경책 보따리를 걸머지고 매서인 노릇을 시작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민중이 모여와 그의 전도 강연을 들었다... 그는 1912년까지 우리와 함께 일했 다. (Robert Grierson, Episodes on a long, long Trail, 1957, pp.33-34; 강만승 편역, 그 레슨 박사 선교수기, 청해출판사, 1970, 71-73쪽.) 190) 함경남도 북청군 교육회는 야소교 전도사 이동휘(전 육군 참령 강화도 진위대장)의 권유로 서 북학회 계열을 흡수하여 융희 2년 3월에 조직한 것으로 회원 약 140명을 가지고 매주 월요일 각 학교 생도를 모아 연설 토론 등을 하며 이번 동 부회장 고정휘 등은 생도 대대라는 것을 조 직하자고 제창하여 현재 생도수 및 자금액 등을 조사하고 있다. 이는 이동휘가 한국에는 兵 備 가 없고 또 병기는 모두 관에서 몰수하여 하루 아침에 일이 있더라도 그 변에 응할 수 없으므로 항 상 학생에게 병식 훈련을 실시하자고 제창한 것에서 교육회원이 이를 찬성하고 생도 대대를 조 직하려는 계획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高 秘 發, 제1154호의 1, 야소교 전도사 이동휘 융희 4 년 2월 15일, 내부경무국장 松 井 茂 (마쓰이)

109 제4강. 이동휘의 생애 다니며 민족 학교의 설립과 교회의 건립을 추진했으며 한국인들을 모아 강연회를 열고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동휘는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면서 특히 만주의 한국인들을 위한 농업진흥책과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11년에는 북간 도 전도총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는데, 이동휘는 전도총회에서 1909년 김약연 정 재면 박태환 등이 조직한 길동기독전도회를 한아청삼국전도회에 편입시키고 북 간도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항일 비밀결사체인 광복단을 조직하였다. 일제는 이상 과 같은 이동휘의 행동을 주시하였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일본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는 내용의 전도사 이동휘 의 연설 내용은 일일이 보고되었다. 191) 1909년 의병모의의 실패와 유배, 신민회 활동과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동휘는 국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1913년 국외로 망명한다. 192) 이 시기 이동휘의 활동을 살펴보면, 기독교 입교 이후 학교설립, 국민교육회, 상동청년회, 전도강연, 신민회 활동 등 당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밟은 길을 빠 짐없이 걷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이동휘을 연구하는 데 그의 기독교 사 191)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당일 전도사 이동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열설을 하였다. 각 사람은 열심히 우리 예수교를 전도 포교하고 다수로 하여금 야소교도가 되게 함으로써 속히 한국을 문명하게 해야 한다...우리 2천 만 동포가 야소를 믿는다면, 우리 나라는 문명국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는 것보다도 분명 하다. 여러분은 이 뜻을 잘 알아 매일 성경을 연구하고 동포를 권하여 야소교도가 되도록 하기 에 노력하기를 희망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라고 하고.. (헌기제715호, 함경북도 야소교의 근황 에 관한 건 (1910년) 3월 6일 경성분대장 보고) 우리 한국삼천리 강토는 현재 사실상 일본의 소유가 되어 있지만 한국민 전부가 야소교 신자가 된 다면 아마 옛날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헌기제 798호, 영흥에서 이동휘의 행동에 관한 건 ( ) 耶 蘇 敎 ニ 關 スル 諸 報 告 -문서철) (이동휘가-인용자) 일신관에서 연설 중에 한국은 현재 일본의 압박을 받아 참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다. 이 위험을 면하고자 하면 국민 모두 야소교에 가입해야 할 것이다 운운... 일본을 신뢰할 것이 없고 야소교를 믿으면 한국은 안전하게 된다 운운 (헌기제 824호, 서북학회원 전 보병 참령 이동휘 연설에 관한 건 ( ), 위의 문서철) 우리 대한 국민으로서 야소교도가 되지 않는 자는 자기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사지로 나가는 것과 같다. 우리는 속히 각성하여 모국( 某 國, 일본)의 보호를 벗어나 야소교에 의뢰하지 않을 수 없다 운운 (헌기제 878호, 함흥 재주 선교사 영국인 영재형(L.L.Young, 榮 在 馨 ) 및 성진 재주 전도 사 이동휘의 홍원 포교상황의 건, 위의 문서철) 함경남도 성진 거주 서북학회회원 야소 전도사 이동휘. 위 자는... 단천군 문도면 대성리에 사는 전 대한볍회 단천지회장 최병진 집에 숙박 체재중이며 단천읍 내외의 야소교도 및 중요한 유지자는 李 를 찾아가고 李 도 역시 거듭 한인측의 관민을 방문하며 기타 읍내의 각학교를 시찰하고 교원 생도 등에 대한 교육이 최대 급무하는 것과 충군애국심의 수양발달을 기해야 한다는 등을 연설 하고 또 야소학교에서는 자주 종교상의 강화를 하는 외에 치안을 해치고 민심을 미혹하는 것 같 은 행동은 하지 않으며, 그는 당분간 단천에 체재할 모양이므로 계속하여 주의 시찰중이다. (헌 기 제1345호, 주의 인물 이동휘 행동의 건 (1910., 6. 15, 위의 문서철) 192)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이 이 때 이동휘의 망명을 도왔는데, 이에 대해서는 홍상표, 북간도 독립운동약사 15-16쪽;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82-83참조

11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상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가 비록 종교적 깨달음 때문 이라기 보다는 구국의 방편으로 기독교를 수용했을지 모르지만, 전도사를 자처하 고 험한 매서인 노릇부터 시작한 것은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보 면 그가 단순히 기독교를 수단으로만 이용하려 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는 나라의 독립과 개인적 신앙을 분리시키지 않고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민족운동을 전개한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 민족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3. 항일투쟁-만주 노령지역 ( ) 북간도 연길현 용정 명동촌으로 망명한 이동휘는 재만한인을 위한 농업진흥책 을 강구하고, 광성학교 길성여학교 배영학교 종명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활동 을 계속 하던 중 부흥사경회 등을 통해 여성교육을 역설하면서 명동여학교 설립 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東 林 武 官 학교 密 山 무관학교 등을 설립하여 무장투쟁을 통한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1913년 연해주로 이동하여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단체로서 교육 경제 민족운 동의 중심이었지만 파벌로 나뉘어 내부 갈등이 있던 勸 業 會 를 단결시키고 광복사 업의 대기관으로 활성화시켰다. 1914년에는 이상설 이종호 이동녕 등과 함께 러일개전이 실행되면 러시아와 연합하여 일제와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대한광복 군정부를 조직하고 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제1 차대전이 일어나고 러시아 가 일본과 동맹국이 되어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 아갔다. 이후 독립운동의 기지를 상해로 옮기면서 이상설 박은식 신규식 등이 중심이 되어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였고 이동휘는 장춘지부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나 세계대전에서의 일제의 승리, 이에 따른 러시아 중국의 독립군 탄압으로 실패하 고 말았다. 국제정세에 따른 독립전쟁에 한계를 느낀 이동휘는 동녕현 삼분구에 北 賓 義 勇 團 을 설립하고 왕청현 나자구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훈춘지역의 이봉우 윤해 무장세력과 연해주지역의 황병길 무장세력과 연계하여 거병을 기도하기도 하고 김기룡 전일 등이 조직한 노동회의 지원을 받아 일련의 무장행동을 취하기도 하였다. 국제정세를 이용한 독립전쟁 수행이 여의치 않자 독립전쟁론 자체에 대해 근 본적으로 반성하던 이동휘는 일제에 의해 반러폭동을 기도하는 독일간첩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러시아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곳에서 볼셰비키를 통해 초기 공

111 제4강. 이동휘의 생애 산주의사상을 접하게 된다. 이후 사회주의를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적극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향후 그의 마지막까지 그 사상을 견지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그가 사회주의를 통한 독립운동에 전념하면서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동휘가 이후의 과정에서 기독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직 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공명 하여 믿어오든 예수교도 버리고... 라는 동아일보 의 기록이 전부이다. 193) 이전 의 기독교 신앙을 탈각하고 사회주의로 전향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를 전면 부인하고 비난했다고 보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약간 있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참고가 된다. 이동휘 선생이 소련으로 가실 때, 김목사님(주: 金 永 耈 )도 같이 가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동휘 선생이 국내로 들어가서 목사가 되라 고 했다는 겁니 다. 194) 창근아, 할 수 없구나....나는 그만 시베리아로 가보겠다.... 아무래도 광복 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질 성싶지 않구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공부해 가지고 목사 가 되어라. 일본놈들이 그 길이야 막겠니? 나는 혼자 가겠다. 그래서 송창근 소 년은 이동휘씨와 눈물로 이별하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195) 이동휘 자신은 비록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기독교보다 사회주의가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에서 사회주의로 전향하였지만, 측근들의 신앙생활은 부인하지 않았 음을 통해 기독교를 완전 배척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종교 자체에 대한 회 의로 기독교를 떠났다기 보다는 민족의 독립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그가 국권회 복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수용했던 기독교의 위치에 사회주의를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196) 193) (이동휘는) 그 후에 상해를 떠나 노령으로 건너가서는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공 명하여 믿어오든 예수교도 버리고 이 운동에 진력하였다. ( 동아일보 1935년 2월 15일자) 194) 문익환, 교육과 종교의 새바람-아버지와 어머니의 간도이야기 3 오늘의 책 8, 1985, 한길사, 155쪽. 195) 晩 雨 宋 昌 根, 만우 송창근선생기념사업회, 1978, 21쪽 196) 김방, 이동휘연구 참조

11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4. 사회주의 운동 ( ) 1917년 러시아혁명 후 독립전쟁론 실현을 목적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하였던 이 동휘는 1918년 4월 28일 한국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연해주에서 공산주의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8월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 리가 된 후 임정내의 동조 세력을 규합하여 기존의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임정의 국무총리직에 있는 동안 이동휘는 레닌으로부터 200만루블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기로 약속받아 임정의 강화와 공산주의를 임정 내에 확산 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동휘는 이러한 활동과 무장투쟁노선으로 임정내의 다수 민족주의 세력 및 반대론자들과 대립하게 되고 또한 레닌 원조자 금의 유용시비와 맞물려 사임하였다. 성재 선생은 임정 국무총리 사임후 북만주와 연해주를 주무대로 활동하면서 이후에도 계속 사회주의에 대한 공감을 기초로 하여 사회주의혁명과 민족혁명의 동시수행을 목표로 한 赤 旗 團 조직, 국제혁명자후원회 활동, 조선공산당재건운동 에 관여하였다. 이 시기 선생은 사회주의 이념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기보다는 사회주의 를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의도에서 사회주의와 코민테른이 독립운동을 전 개하는 데 많은 역할과 원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제와 전면적인 독립전 쟁을 벌이는 것을 최고 목표로 하면서 이를 위해 소련 및 코민테른과 연계를 맺 는 한편, 만주의 독립운동단체 및 무장부대와 연합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그에게 사회주의 이념은 이념 자체로서가 아니라 독립전쟁론에 결합되는 것이었으며, 이 는 그의 실천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견지되었다. 그는 사회주의 이념에 공감하면 서도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당시 사회주의자 그룹의 일군을 이루었던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에의 일방적인 종속을 보여주지 않았으며 적기단 활동을 통해 독립전 쟁의 근거지였던 만주와 러시아를 아우르는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요컨대 그는 항상 어떠한 이념보다는 민족의 이익을 앞세웠는데 그것은 기독교와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를 살펴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이동휘는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자택에서 고령과 피로 로 쓰러져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책자에 싣기 위해 에 재정리함]

113 제4강. 이동휘의 생애 참고문헌 윤병석 편, 城 齋 李 東 輝 全 書, 독립기념관, 1998 이영일(이동휘의 아들), 리동휘 성재선생 한국학연구 5 별집, 1993, 인하대 한국 학연구소 논문 金 邦, 李 東 輝 硏 究 국사관논총 18, 1990년 12월, 국사편찬위원회 金 邦, 李 東 煇 의 國 權 恢 復 運 動 (1905~1910)에 관한 一 考 察 한민족독립운동사논 총, 1992,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金 邦, 李 東 輝 의 國 外 에서의 抗 日 鬪 爭 (1911~1916)에 관한 一 考 察 건대사학,8집 1993 金 邦, 李 東 輝 의 국권회복운동(1906~1913) 한국근현대사연구 제6집, 1997년 6월 金 邦, 이동휘의 상해 임시정부 참여와 사회주의 활동 建 大 史 學 第 9 輯, 1997년 12월 김방, 李 東 輝 의 상해 임시정부 참여와 사회주의 활동 도산사상연구 제4집, 1997년 尹 炳 奭, 李 東 輝 의 생애와 李 東 輝 誠 齋 先 生 震 檀 學 報 第 78 號, 1994년 12월 尹 炳 奭, 李 東 輝 와 桂 奉 瑀 의 民 族 運 動 한국학연구 第 6 7 合 輯, 1996년 12월 인 하대 한국학연구소 尹 炳 奭, 李 東 輝 의 亡 命 活 動 과 大 韓 光 復 軍 政 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1집, 1997년 潘 炳 律, 李 東 輝 와 韓 末 民 族 運 動 韓 國 史 硏 究 87, 1994년 12월, 韓 國 史 硏 究 會 潘 炳 律, 李 東 輝 와 1910년대 海 外 民 族 運 動 ; 滿 洲 露 領 沿 海 州 地 域 에서의 활동(191 3~1918) 韓 國 史 論 33, 1995년 6월, 서울 大 學 校 人 文 大 學 國 史 學 科 潘 炳 律, 李 東 輝 와 3 1 運 動 韓 國 民 族 運 動 史 硏 究, 1997년 8월, 于 松 趙 東 杰 先 生 停 年 紀 念 論 叢 刊 行 委 員 會 徐 紘 一, 日 帝 下 北 間 島 基 督 敎 人 들의 民 族 敎 會 形 成 에 關 한 硏 究 (1906~1921) 國 史 館 論 叢 第 84 輯, 1999년 8월 김승태, 한말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과 일제와의 갈등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12호, 2000년 3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규무, 이동휘와 기독교사회주의 일제하 한국기독교와 사회주의,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1992 단행본 尹 炳 奭, 韓 國 獨 立 의 해외사적 탐방기, 1994년, 知 識 産 業 社 歷 史 問 題 硏 究 所 편, 人 物 로 보는 抗 日 武 裝 鬪 爭 史, 1995년, 歷 史 批 評 社

11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115 한국역사 속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한국근현대사 제 5강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 강사 : 이 만 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2009년 6월 18일(목) 저녁 7시 서울YMCA 친교실(2층) 주최 : 서울YMCA

11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117 제5강.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이만열 명예교수(숙명여대) 1. 머리말 " 萬 一 하나님이 我 等 을 爲 하시면 誰 가 能 히 我 等 을 對 敵 하리요" 大 韓 民 國 31 年 2 月 日 白 凡 金 九 위의 글은 김구가 쓴 여러 휘호 중의 하나로, 1949년 2월에 쓴 신약성경 로마서 8장 31절 하반절의 성구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에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쓰여져있다. 이 휘호를 썼던 시기는 김구가 좌절을 절감하고 있던 시기였다. 남북의 분단을 의미하는 단독정부 수립을 그토록 막아보려 했지만 실패하였고, 남북에서는 각각 분단정부를 세워 남북이 대결하고 있던 시기였다. 김구는 분단을 막아보려고 이 글을 쓰기 전 해인 1948년 4월에 평양으로 가서 남북협상을 진전시켰지만, 성공 하지 못했다. 백범은 분단조건하에서는 어떠한 자리도 맡지 않기로 결심했다. 때 문에 그는 남북협상이 실패한 후에 있었던 제헌국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에 같이 손잡고 일하자는 어떠한 제의에도 응하지 않았다. 한평생 조국의 완전자주독립통일을 위해 애썼던 결과가 분단국가로 끝장나버렸 기 때문에, 앞의 휘호를 쓸 무렵인 1949년 2월경에는 백범은 인간적인 절망과 고 뇌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남북에서 분단정권이 서게 되자 민족통일을 위해 백범 이 할 일은 더욱 분명해졌다. 전에 같이 고락을 같이 했던 동지 후배들도 분단현 실과 타협하여 백범의 노선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그들을, 이해관계를 위해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썩은 쥐를 먹듯이 부패에 젖어드는 올빼미처럼, 조합모리( 朝 合 暮 離 )하는 기회주의자 들이라고 지적하면서 자신의 심 경을 나타내는 휘호를 쓰곤 했다. 1948년부터 1949년에 이르는 기간에 집중적으 로 많이 쓴 휘호는 다음의 내용들이다

11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눈 덮인 광야를 지날 때에는,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나의 발자욱 은, 마침내 뒷사람들의 길이 되리니. (원문: 踏 雪 夜 中 去 不 須 胡 亂 行 今 日 我 行 跡 遂 作 後 人 程, 西 山 大 師 休 靜 의 詩 文 集 淸 虛 堂 集 중 五 言 絶 句 ) 영예와 치욕에 놀라지 아니하고, 한가로이 뜰앞에 피고지는 꽃을 본다. 가고 머뭄에 뜻을 두지 않고, 부질없이 하늘가에 걷히고 펼쳐지는 구름을 따른다. 맑 은 하늘과 밝은 달을 어느 곳엔들 날아가지 못하리오. 그런데 나는 나방이는 오로지 밤 촛불에 뛰어드는구나. 맑은 샘과 푸른 풀은 어느 것인들 먹고 마시 고 싶지 않으리오. 그런데 올빼미는 오직 썩은 쥐를 즐겨 먹는다. 아! 슬프다! 세상에 나방이와 올빼미 같지 않은 자 몇이나 되는가? (원문: 寵 辱 不 驚 閒 看 庭 前 花 開 花 落 去 留 無 意 漫 隨 天 外 雲 卷 雲 舒 淸 空 朗 月 何 處 不 可 翶 翔 而 飛 蛾 獨 投 夜 燭 淸 泉 綠 卉 何 物 不 欲 飮 啄 而 鴟 鴞 偏 嗜 腐 鼠 噫 世 之 不 爲 飛 蛾 鴟 鴞 幾 何 人 哉 ) 이같은 심경을 갖고 있던 때에 그는 앞에서 제시한 성구를 휘호로 쓰면서 하나 님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자신을 추스렸던 것이다. 2. 성장과 애국계몽운동 (1876~1919) 백범 김구( )는 신라 경순왕의 후예인 안동 김씨로서 황해도 해주 서 쪽 80리 지점의 백운방이란 곳에서 아버지 순영( 淳 永 )과 어머니 현풍 곽( 郭 樂 園 ) 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서당 교육을 받아 1892년 조선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 뒤 그는 풍수지리와 관상도 공부하고 밥벌 이를 위해 한 때 훈장도 하였으나, 1893년 초 동학( 東 學 )에 입문하였다. 그가 동 학에 입문한 것은 동학의 평등 이념과 인간존중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부터 그의 이름은 창수( 昌 洙 )로 부르게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황해도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동학도들이 궐기하였다. 이때 김구는 19세의 나이로 팔봉접주로서 해주성 공격에 앞장섰으나 실패하고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안중근( 安 重 根 )의 부친 태훈( 泰 勳 )의 호의를 받아 들여 부모와 함께 신천 청계동으로 들어가 잠시 우거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일생동안 사상적 영향을 받게 되는 척사위정( 斥 邪 衛 正 )계의 유학자 후조( 後 凋 ) 고 능선( 高 能 善 )을 만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백범은 그 무렵 청계동을 찾아온 김 형진( 金 亨 鎭 )과 의기투합, 평양 함흥 마운령 혜산진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119 제5강.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땅을 주유하면서, 강계 부근에서는 김이언의 의병부대와 국모의 원수 를 갚는 운 동에 참여하였으나 작전 미숙으로 실패하였다. 1896년에 이르자, 그 전해 8월에 일어난 을미사변 과 11월에 시행된 단발령에 백성들의 분노가 치솟아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백범은 국모보수 를 위해 대동강 하류인 치하포( 鴟 河 浦 )에서 일본인 육군중위 쓰치다( 土 田 讓 亮 )를 살해하였다. 이 로 인해 해주옥에 투옥되었다가 감리영이 있는 인천 감옥에 이감되었다. 옥중에 있는 동안 백범은 신학문에 눈뜨게 되었다. 일본의 압력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백범은 이듬해 3월 탈옥을 감행, 삼남 지방을 주유하였다. 그는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어 원종( 圓 宗 )이라는 법호를 받기도 하였으나, 일년여 후에 환속하였다. 백범이 25세이던 1900년 2월 김두래( 金 斗 來 )로 변명하고, 강화의 김주경을 찾아 갔다가 김주경의 동생이 진경의 집에서 서당 훈장을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김주 경의 친구 유완무를 만나고 그의 권유로 이름을 구( 龜 )로 고치고 자를 연상( 蓮 上 ), 호를 연하( 蓮 下 )로 하였다. 백범은 1902년 초 부친이 돌아간 후 이듬해 탈상을 하고, 그의 친구인 우종서( 禹 鍾 瑞 ) 조사( 助 事 )의 권유로 1903년 가을쯤 예수교에 입교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 는 백범 자신이 스스로 증언하고 있는데, 우종서가 백범을 전도하던 무렵, 백범 자신의 기독교관 및 우종서와의 관계에 대해서 백범일지 의 증언은 이렇다.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고, 신 문화 발전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거의 예수교에 투신하여서야 문을 꽁꽁 닫고 지 키던 자들이 겨우 서양 선교사들의 혀끝을 통해 문밖의 사정을 알게 된 사람들 이었다. 예수교를 신봉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중류 이하로, 실제 학문은 배우지 못한 우매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다지 숙달치도 못한 반벙어리 선교사의 말 이라도 선교사들이 문명족이기 때문에 그 말을 많이 들은 자는 신앙심 외에 애 국사상도 가지게 되었다. 애국사상을 가진 대다수가 이 예수교 신봉자였음은 숨 기지 못할 사실이었다. 우종서는 당시 전도조사였고, 나와 여러 해 친교한 사이 였기 때문에 예수교 신봉을 힘써 권했다. 나도 탈상 후에 예수도 믿고, 신교육을 장려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 白 凡 逸 志 이만열 옮김, 역민사, 1997, p. 175) 이로써 그는 종교적으로 풍수지리와 관상 공부, 동학과 유학, 불교를 거쳐 예수 교에 정착하게 되었다. 백범의 입교와 교회내의 활발한 활동에 대해서는 미국 북 장로회 선교부 평양지부의 1904년 9월 연례보고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

12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는데, 백범의 개종은 선교사들에게도 그만큼 주목되었던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안악 시찰 보고서에 의하면 작년(1903)에 개종한 김구와 오순형( 吳 舜 炯 )이라는 두 청년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 사업과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들은 좋은 집안 출신들로서 경제적 형 편도 안정되어 있으므로, 많은 시간을 성경 공부와 전도에 바칠 수 있다. 김 (구)씨는 작년 가을에 개종하였고, 평양 겨울 사경회를 비롯하여 여러 달 동안 사경회에 참석하였다. 올해(1904) 2월에 해주에서 장연읍으로 이사하였는데, 그 곳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전도하고 있다. (The Korea Field, , p 옥성득, 백범 김구의 개종과 초기 전도 활동 참조) 이 보고서에 나오는대로 백범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나서 적극적으로 성경공부 와 전도활동을 하였으며, 1904년 2월 장연으로 이사하고 나서도 그곳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전도하였다. 장연에서는 오순형과 함께 마을 전도에 힘써 그의 형 인 오인형 진사의 큰사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봉양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로서 활 약하였다. 이 무렵 백범은 평양에서 예수교 주최로 개최되는 이른 바 선생 공부 즉 사범 강습에 참석했다. 그는 이 때 방기창 목사의 집에서 유숙하면서 각지에 서 온 교회학교 직원과 교원들과 함께 강습에 참석했던 것이다. 백범은 또한 1905년경에는 당시 감리교회의 청년단체인 엡웟( 懿 法 )청년회에 깊 이 관여하면서 청년애국운동에도 힘썼다. 그가 진남포 감리교회의 엡웟청년회 총 무직을 맡고 있을 때,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외교권이 일제에게 강탈당하 게 되었다. 이 때 지방의 엡웟청년회 간부들이 서울 상동교회에 모여 을사조약 철폐운동에 앞장섰던 적이 있었다. 이 때0 엡웟(의법)청년회가 을사조약 철폐운동 을 전개한 데 대해서 백범일지 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나는 진남포 의범청년회 총무의 소임을 맡아 그 대표로 경성에 파견되었다. 경 성 상동( 尙 洞 )에 가서 에벳청년회의 대표 위임장을 제출했다. 그 때 각도의 청 년회 대표들이 모여 겉으로는 교회사업을 토의하는 것이었으나, 그 이면은 순 전히 애국운동이었다.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산림학자들을 구사상이라 하면, 예수 교인들은 신사상이라 하겠다. 그 때 상동에 모인 인물들은 전덕기 정순만 이준 이동녕 최재학(평양인) 계명륙 김인집 옥관빈 이승길 차병수 신상민 김태연(지 금은 홍작) 표영각 조성환 서상팔 이항직 이희간 기산도 전병헌(지금은 왕삼덕)

121 제5강.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유두환 김기홍 김구 등이었다. 회의결과 상소하기로 하였다. 상소문은 이준이 짓고, 제 1회 소수( 疏 首 )는 최재학이고 그 외 네명을 더해 이 다섯명이 신민( 臣 民 ) 대표 명의로 서명하여 1회, 2회로 계속할 작정이었다. 정순만의 인도로 회 당에서 맹세해 기도하고, 대한문 앞에 일제히 나아가서 서명한 다섯 사람만 궐 문 앞에서 형식상으로 개회하기로 하였다. 상소 의결하였으나 솟장은 별감들의 내응( 內 應 )으로 벌써 상감께 입람( 入 覽 )되었다. 갑자기 왜놈 순사대가 달려와 간섭하였다. 다섯 사람이 일시에 왜 순사에게 달려들어 내정간선의 무리를 공 박하는데, 금새 대한문 앞에 왜놈들의 검광이 번쩍이는 가운데 5인 지사의 맨 주먹 싸움이 시작되었다. 부근에서 호위하던 우리는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며, 왜놈이 국권을 강탈하고 조약을 억지로 체결하여 우리 백성을 원수의 노예가 되었다고 격분한 연설을 곳곳에서 하였다. 인심은 흉흉해지고 다섯 지사는 경 무청에 감금되었다. ( 白 凡 逸 志 (이만열 옮김, 역민사, 1997) pp ) 을사조약 철폐운동이 소기의 목적을 달하지 못하자, 그는 민족역량의 부족을 절감하고 민족역량을 키우기 위한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1906년 장연에 광진학 교를 세우고, 문화로 이사하여서는 서명의숙의 교사로, 1907년 김용제의 초청으로 안악으로 이사하여서는 양산학교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는 최 광옥 이광수 등을 초청하여 양산학교의 하기사범강습회 를 개최하여 교사양성에 도 힘썼다. 1908년 가을에는 황해도지역 교육자들과 함께 해서교육총회 를 조직하 여, 그 학무총감으로 활동하면서 환등기를 갖고 황해도 여러 지역에 계몽운동을 벌였다. 이에 대해 황해도의 여러 지방관들은 백범이 활동을 적극 지지하였다. 한편, 백범은 1907년에 안창호 전덕기 이승훈 등 서울과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 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에도 참여하여, 독립운동에도 적극 나서게 되었다. 신민회는 애국비밀결사로서 교육 실업 군사 등에서 국권회복 을 위해 노력했던 한말 일제강점 초기의 애국단체로서 백범에 의하면, 그 중심인 물은 안창호를 비롯하여 양기탁 이승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 옥 김홍량 외 몇 명이 중심인물이 되고 당시 4백여명 정수분자로 조직되었다고 했다. (( 白 凡 逸 志 (이만열 옮김, 역민사, 1997) p. 199) 1909년 10월 안중근이 하르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를 포살하자 일제는 검거선풍을 일으켜 백범도 잠시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무혐의로 곧 출감하였 다. 그러나 그 이듬해 말에 안악사건(일명 안명근사건) 에 연루, 수감되어 15년 징 역을 언도받았고, 다시 105인사건 에 얽어 또 2년을 추가로 언도받아 도합 17년의

12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징역형에 처해졌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백범을 찾아온 그의 어머니 곽씨는 아 들의 옥살이를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네가 경기감사를 하는 것보다 더 낫 다 고 격려하였다. 백범은 어머니의 이 말에 감동하여 일생동안 그 어머니의 뜻을 받들게 되었다. 그는 옥고를 치루는 동안에 이름을 김구( 金 龜 )에서 김구( 金 九 )로 바꾸고 호를 연하( 蓮 下 )에서 백범( 白 凡 )으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고, 호를 백범으로 바꾼 것은 우리나라의 하등사 회, 곧 백정( 白 丁 ) 범부( 凡 夫 )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의 정도는 되고야 완전 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소원을 가지자 는 뜻에서였다. 1914년 가석방되어 안악으로 돌아온 백범은 부인이 교원으로 있던 안신학교의 일을 돕다가 신천 동산평의 농감으로 갔다. 가난과 도박으로 찌든 이 마을은 백 범을 맞음으로 새로운 농촌으로 변해 갔다. 그는 농장 내의 소작인들의 폐풍을 바로잡고 그들에게 근검절약 상부상조의 질서를 가르치고 학교를 세워 자녀교육 에 힘썼다. 술과 노름으로 일삼던 그 농장은 백범의 담력과 지속적인 노력으로 새롭게 변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민족독립을 위해 중국 망명을 결행하였다. 허허실실( 虛 虛 實 實 )의 계략으로 왜경의 감시를 따돌리고, 3월 3일 사리원에서 경 의선 열차를 타고 망명길에 오른 그는 안동에서 이륭양행( 怡 隆 洋 行 )의 선박편으 로 4월 13일 황포( 黃 浦 ) 동마두( 東 瑪 頭 )에 도착, 임정에 합류하였다. 그 후 1945년 11월 23일 그의 나이 70세에 환국하기까지, 27년간이나 백범은 임정을 이끌며 민 족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 임시정부 시절 (1919~1945) 3 1운동이 일어난 그해, 백범이 상해에 도착한 4월 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건이 선포되던 날이었다. 백범은 임시정부의 문 파수 가 되기를 원했지만, 임시 정부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내무총장 안창호는 백범이 수감생활을 통해 왜 놈 의 사정을 잘 알 것이라고 하면서 경무국장에 천거하였다. 5년 여 동안 경무국 장에 재임하면서 백범은 홍구의 일본 영사관을 경계하면서 밀정들의 회유 위해 공작으로부터 임정과 임정요인들을 보호하였다. 블라디보스톡(노령의 국민의회 정부)과 서울(한성 정부) 그리고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각각 설립된 정부들은 논의를 거쳐 1919년 9월 상해에서 한성정부 의 법통을 잇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통합운동에는 임정의 공식기구

123 제5강.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의 노력이 있었지만 도산 안창호가 크게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출범한 임정 은 이승만의 문제를 비롯하여, 지역과 파벌의 문제,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운동 자금의 문제 등으로 갈등이 심화되었다. 임정이 내부의 갈등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자,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국민대표대회는 당시 분열과 혼미를 거듭 하고 있던 임정의 대안으로 대두된 것이지만, 3월부터 임정 문제가 등장하면서 창조파와 개조파 및 온존파로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상황에서 내무총 장 김구는 6월 6일 내무부령 제1호를 발포,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 해 8월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해 간 국민대표회의의 창조파는 정부를 구성했으나, 일본과의 관계를 꺼려한 러시아 정부의 태도 때문에 창조파의 정부 신설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925년, 이승만이 탄핵되자 임시대통령에 선출된 박은식은 헌법을 고쳐 대통령 제를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고쳤다. 백범은 의정원 의장 이동녕의 강권을 받았으나 국무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개정(1927)한 후 내각 구성에 성공하게 되었 다. 백범이 정부를 맡았을 때 재정상태는 말이 아니어서, 정부 청사의 집세 30원 도 못내는 형편이었다. 이 무렵, 백범은 자신의 처지를, 잠은 정청( 政 廳 )에서 자 고, 식사는 직업을 가진 동포들의 집에 다니며 걸식하고 지내니 거지도 상등 거 지였다. 나의 처지를 아는 까닭에 아무도 푸대접하는 동포는 없었 다고 썼다. 때 문에 많은 사람들이 임정을 떠났지만, 백범은 끈기있게 임정의 기둥을 지탱해 나 갔다. 신앙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범이 내무총장에 노동총판, 국무령에서 국무위원으로 옮기는 등 중책을 맡으 면서 임정의 중흥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그는 해외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그들의 지원을 끌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특히 하와이와 미주의 동포들은 백범 의 편지를 신뢰하게 되면서, 백범의 사업을 자금면에서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힘입은 백범은 독립운동계를 일대 전환시킬 경천동지( 驚 天 動 地 )할 사건을 준비하 게 되었다. 백범은 1931년초 국무회의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 파괴 등을 할 수 있도록 전권을 위임받고 다만 성공과 실패의 결과만 보고하도록 허락받았 다. 소위 특무공작이었다. 1932년에 들어서서 드러나기 시작한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비록 실패에 돌아가긴 했으나, 이덕주 유진식의 일본총독 암살계획과 유상 근 최흥식의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 本 藏 番 ) 폭살계획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이봉창 의사의 동경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는 백범일지 에 자 세히 나타나 있다. 이봉창의 동경의거에서 그 배후가 백범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12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후 백범은 낮에는 활동을 쉬고 밤에는 동지들의 집이나 창기 집에서 잤으며 식 사는 동포들의 집에 가서 얻어 먹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에는 백범에 대한 현상금이 60만원이나 붙게 되었고, 쫓기는 몸이 된 백범은 처음 피치 목사댁에 숨었다가 가흥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동경의거와 홍구공원 의거는 만보산 사건 등으로 극도로 악화되었던 한 중인의 감정을 호전시키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 기로 하와이와 미주 지역에 사는 교포들의 임정에 대한 납세가 늘어나고 백범에 대한 후원이 격증하였다. 중국과의 외교에도 좋은 기회가 되었다. 장개석과의 면 담이 성사되었고 이를 계기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 한국 청년 1백여명이 입교하게 되어 독립운동을 위한 무력적 역량을 한층 증대시켰다.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다시 단일대당( 單 一 大 黨 ) 조직과 임정해체의 문제가 등장하여 임정의 여당 역할을 감당해온 한국독립당을 곤혹스럽게 만들어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된다. 1935년에 이르면 임정은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 무렵 임정폐지운동을 가장 극렬하게 벌인 사람이 김두봉과 김원봉이었다. 이 때 백범 은 임정을 떠나 있었지만, 임정을 사수하려는 송병조 조완구 차이석 박찬익 등의 힘을 빌어 임정조직 개편에 착수, 먼저 국무위원을 보선하고 임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여당으로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 백범은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정당적 배경이 없기 때문이며, 이제 임시정부를 형성하였으니 정부 옹호를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1935년 11월 임정 사수파를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였다. 이 때부터 임정에서 백범의 지도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1930년대 초에 시작된 좌우합작운동은 분열상태를 극복하지 못한 채, 1937년에 는 우파연합으로 결성된(8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와 여기에 맞서 결성된(11월) 좌파의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이 결성되었다. 광복진선과 민족 전선은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이뤄지는 시기에 연합운동을 모색, 1939년 8월 기강 ( 綦 江 )에서 7당통일회의와 그 뒤의 9월 5당회의를 통해 전국연합진선협회(진선협 회)를 결성하였으나 그마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39년 8월 기강의 좌우합작운동이 결렬된 후, 3당통합 문제가 다시 진행되어 백범은 임정주석으로서 통합한국독립당의 당권도 장악하게 되었고, 1940년에는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9월 17일)하고, 10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약헌을 개정 (제 4차 개헌), 종래 국무위원들이 호선하던 주석을 임시의정원에서 선출토록 하 여 주석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켰으며, 미국 수도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설치, 이

125 제5강.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승만을 위원장으로 임명, 취임케 했다. 3당통합을 계기로 당의 활동이 임시정부의 운영으로 직결되었고 독립운동선상 에서는 당(한독당) 정(임정) 군(광복군)의 통합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좌익진영 의 대표적 단체인 민족혁명당도 1941년 12월 10일 임정에 참여하였다. 민혁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임정 참여에 이어 임정은 국무회의에서 1942년 4월에는 조선 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합편하게 되었고, 따라서 중국관내 무장세력이 대부분 광복 군으로 통합되어 군사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군사통일에 이어 정치통일도 이루어졌다. 임정과 한국독립당은 건국강령을 제 정( )하여 종래 한국독립당과 임정의 정치이념인 삼균주의를 구체화시 킴으로 민족혁명당과의 사상적 차이를 좁혀 나갔다. 이어서 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헌장을 개헌, 부주석제를 신설하고 국무위원 수를 11인에서 14인으로 증원하 였고, 주석에는 한독당의 김구를, 부주석은 민혁당의 김규식을 선임하였고, 국무위 원도 한독당 8명 민혁당 4명 해방동맹 1명 혁명자동맹 1명으로 배분, 좌우연 합정부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로써 임정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휘 통할할 수 있는 최고 영도기관이며 한민족독립운동의 대표기구로서의 위상 과 권위를 비로소 확립하게 되었는데, 임시정부가 이런 위상을 갖게 된 것은 백 범의 영도력 때문이었다. 해방 소식을 들었을 때, 백범은 크게 실망한다. 이 전쟁에서 우리 민족이 세운 무공으로는 연합국에 대해 전후 떳떳하게 권리주장을 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 문이다. 당시 광복군은 본토상륙작전을 계획하고 맹렬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 기 때문에 해방의 소식을 들었을 때 백범은 이 소식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 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 이었던 것이다. 당시 서안훈련소와 부양훈 련소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을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어가 게 하여 각종 공작을 개시하도록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는데, 이런 계획 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한 채 일본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의 정성이 너무 아 까웠던 것이다. 백범은 그 뒤 귀국하여 임정을 국민 앞에 바치기로 주장하고, 서울의 미군정이 요구하는대로 개인자격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중경을 떠나기에 앞서 중국 공산 당 본부에서 주은래 동필무 등의 송별연을 받았고,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 부처와 200여명의 요인으로부터도 중국기와 태극기를 교차한 가운데 융숭한 송별연을 대 접하였다. 1945년 11월 5일 중경을 출발한 백범 일행은 13년만에 상해 땅을 밟아 윤봉길의사에 의해 폭살된 백천 등이 올랐던 그 장소에서 6천여 동포들의 환영에

12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인사말을 하였고 프랑스 조계 안의 부인의 무덤도 돌아보는 등 10여일을 묵은 다 음 11월 23일, 27년만에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 임시정부 시절, 백범이 기독교적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는지는 확인 할 수 없다. 다만 임정에는 당시 기독교 지도자로서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이 많 았다. 3.1운동 33인의 한 분으로 3.1운동 발발과 함께 상해로 망명한 김병조 목사 는 물론이고 현순 손정도 같이 감리교의 지도자들도 있었으며, 의정원 의장을 역 임한 송병조 김인전 등이 장로교 목사로서 임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송병조 는 끝까지 백범 가까이에서 동지적인 신의를 지키며 그를 지지했던 사람이다. 이 러한 분위기는 백범에게도 어느 정도 기독교적 신앙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 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범은 처음 애국계몽운동의 차원에서, 민족운동의 방편으로 서 기독교에 입문했기 때문에 1932년의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서 그가 폭력 을 행사한 것은 그의 기독교적 신념과 전혀 상치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에 게는 기독교가 인간의 영혼을 구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그 못 지 않게 억압받는 민족을 해방하는 가르침이란 의미를 더 강조해 갔던 것이다. 4. 해방 후 건국 통일 운동 (1945~1949) 1945년 11월 23일 백범은 상해를 떠난 지 3시간만에 임정요인 제1진(15명)으로 김포 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 도착 시간이 알려지지 않아 많은 동동포들이 마 중하지는 못했다. 12월 2일 임정의 제2진(19인)도 환국하였다. 백범은 새문 밖 최 창학의 집 죽첨장( 竹 添 莊, 그 뒤 京 橋 莊 으로 개칭)에 숙소를 정하였고, 임정의 국 무원 일행은 한미호텔에 머물렀다. 백범은 도착한 날 이승만의 예방을 받고, 그 이튿날 24일 오전에 이승만의 돈 암장을 답방하였다. 이날 저녁 8시에 백범은 2분간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 앞에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것을 알리고, 안재홍 송진우 여운형 허헌 등의 예방을 받으며 임정에 건의하는 여러 사항들을 들었다. 그 이튿날은 주일이어서 엄항섭 과 함께 정동예배당에 출석, 정일형의 설교를 들었다. 백범은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지만, 임시정부를 이끌어 온 수반이요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대접받았다. 군정청에 소속된 각 기관과 정당, 사회단체, 교육계, 공장 등 각계가 빠짐없이 임정을 위한 연합환영회를 조직하였다. 12월 1일에는 서울운 동장에서 임시정부환국봉영회가 열렸고, 12월 19일에는 안재홍 홍명희 등이 주도 하여 임시정부귀국환영국민대회를 열었으며, 서울 거리에는 <임시정부환영>이라

127 제5강.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는 깃발을 높이 들고 수십만 동포가 시가를 행진하였다. 덕수궁에서 열린 환영연 에는 4백여개의 식탁에 하지 중장 이하 미국 군정 간부들도 출석하여 덕수궁 뜰 을 메웠다. 백범이 환국하였을 때 해방 정국은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8월 15일 여운 형 안재홍 등이 결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였고 조각 발표(9.11)에 이어 행정부서와 정강도 발표하였다.(9.15) 이것은 적어도 임정과 미군정을 의식한 두가지 점에서 기선을 제압하자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인공 자체를 부정하였고, 인공의 정부행세를 비합법적 이라고 거 부하였다. 백범의 귀국과 활동으로 불안을 느낀 인공은 12월에 들어서서 임정에 대해 두 정부(임정과 인공)를 해체하고 동등한 수로 합작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이 제의가 거부당하자 인공은 임정을 비민중적 생활의 노예 운운하면서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에 발표된 성명에서 임정은 봉건제도나 자본주의도 아닌, 인민대중에게 기초를 둔 정부를 조직 하려 하며 영국의 노동당보다 더 진보적인 정치포부 를 갖고 있음을 밝혔다. 백범에 앞서 입국하여 독촉중앙협의회를 조직, 세력을 강화하던 이승만은 속으 로는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임정 세력과 국내의 한민당 세력 과의 제휴를 모색하면서 인공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공산주의와도 관계를 끊었다. 백범이 좌우세력의 연합을 고려하고 있었던만큼, 처음 임정봉대를 주장했던 한민 당은 임정에 대해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계는 뒷날 신탁통치문제 를 거쳐 단정 문제에 임하는 자세로까지 연결되었다. 국내의 혼미한 해방정국 속에서 백범이 좌우합작과 민족대단결을 호소하는 동 안 12월 15일부터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회의는 전후 세계 문제와 한반도의 문제를 다루면서 미국이 제시한 한반도 문제의 해결방안으로서 의 신탁통치안을 결정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안은 처음에 임 정과 인공 및 전 한국민의 즉각적인 반대에 봉착하였다. 그것이 발표되던 12월 28 일 백범은 임정국무회의를 소집, 전 민족을 건 투쟁의 길 을 강조하는 한편 임정 주재하의 정당 종교단체 대표 및 신문기자의 모임을 주선, 반탁투쟁을 공동 결의 하고 그 이튿날에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따라 탁치를 반대하는 상인들의 철시파업과 서울시와 경기도청 직원의 휴근, 총사직 투쟁이 시작되었다. 12월 31일 백범이 선두에 서서 서울운동장에서 반탁시민대회 를 개최하는 한편 임정에서는 국자( 國 字 ) 1, 2호를 선포, 임정이 전국의 행정과

12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경찰기구를 접수한다는 것과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국민은 우리 정부 지도 하에 제반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고 발표하였다. 임정이 주권행사를 선언하 고 미군정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서울 시내 경찰관 대표들과 미군정청 한인 직원들도 백범의 지휘를 따르겠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반탁쿠테타 였고 이를 통해 백범의 존재가 더욱 부각되기 시작했다. 임정과 백범의 기습적이고 단호한 반탁운동에 놀란 하지는 임정요인 추방까지 를 고려하였으나, 1946년 1월 1일 백범과 하지의 요담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얻 게 되었다. 미군정이 평화적 반탁운동을 보장함에 따라 백범은 이날 방송을 통해 직장 복귀를 호소함과 동시에 장기적인 반탁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측의 지령에 따라 사흘만에 찬탁으로 돌아선 인공은 1946년 1월 2일 신탁통치를 지지 하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대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의 결정 안>을 발표, 백범을 비난하고 나섰다. 탁치정국이 좌우익의 대립구도로 대치되어 감에 따라 백범은 반탁 우익의 영수로 자리잡게 되었다.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제 1차 미 소공위가 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공위는 처음부터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협의할 대상인 민주적 정당 사회 단체 의 자격을 놓고 대립하였다. 미소공위가 진행되는 동안 백범은 정부수립에 대비하여 한독당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민족진영 제정당의 합당 운동을 추진하였다. 미소공위가 휴회에 들어가고 한독당을 확대한 후 백범은 조 국순례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오랜 동안 감옥생활을 했던 인천을 시작으로 공주 마곡사에 들렸고,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거사일에는 그의 본댁을 방문, 제단에 서 크게 통곡하였다. 이를 계기로 박열을 통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 골을 본국으로 봉환, 효창원에 안장하였고 이듬해에는 아들 신( 信 )을 시켜 중국 땅에 묻혀진 이동녕 차리석 그의 모친과 아내 장남 인( 仁 )의 유해를 봉환하였 다. 이어서 백범은 진해, 통영, 사천, 고성, 여수, 순천, 보성, 목포, 광주, 함평, 나주, 김제, 전주를 방문,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개성과 연안도 순회하였다. 제1차 미 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은 정계개편을 시도하게 되었다. 탁치 를 반대하고 자주정부 수립을 강행하려는 백범과 우익노선을 추구하는 이승만을 배제하고 중도세력인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였다. 미 소공동 위가 결렬되고 이승만이 정읍발언(6.3)에서 단정수립을 시사하자, 백범은 명백히 반대하면서도 이승만이 총재로 있는 민족통일총본부의 부총재직을 수락하였다. 그러나 백범은 좌우합작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이승만계나 공산당과는 달 리 좌우합작운동이 민족통일운동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고 성의있게 나설 것을

129 제5강.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당부하였다. 1947년에 들어서서 단정론이 다시 대두되었다. 46년말에 도미한 이승만은 미국 에서 단정론을 거듭 주장하면서 임정의 법통을 더 이상 고집한 필요가 없다고 주 장하였다. 미국 내에서도 단정론이 언론에 흘려졌고 국무장차관이 남한에 독자적 인 계획을 언급하는 가운데 3월 12일, 냉전체제의 돌입을 의미하는 트루만독트린 이 발표되었다. 그 뒤 단정론은 하지와 군정장관 러치에 의해서도 노골적으로 부 상되기 시작, 국내에서는 한민당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탁독 립노선을 견지하던 백범은 단정론이 대두되면서부터는 반탁독립노선의 토대 위에 서 통일독립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하였다. 한편 1차 미 소공위가 휴회된지 12개월만인 47년 5월 21일부터 제 2차 공동위 원회를 서울에서 열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백범은 5월 23일 미소공위 재개가 대국주의의 야합의 결과이며 한국을 식민지 상태로 이끌려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 승만과 함께 공위에 협력하는 전제로 신탁통치와 독립정부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 다는 사실과 한국에 세워질 민주주의 독립정부가 미국식인지 소련식인지를 먼저 밝혀 줄 것을 요구하는 공동질의서를 제출하였다. 이는 두 거두가 공위 불참의사 를 명백히 밝힌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 무렵 백범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닥쳤다. 두 거두가 공위불참 결정을 내렸지 만, 공위참여문제는 우익정파를 분열시켰다. 한민당은 군정과의 관계 때문에 참여 를 결정하여 우익의 단결을 깨뜨렸고, 한독당은 국내파와 해외파가 갈등, 분당(신 한국민당)에까지 몰려 백범의 지도력에 큰 상처를 입혔다. 백범은 47년 6월 임정 계 중심으로 조직된 반탁투위의 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백범은 한독당에서 탈퇴, 백의종군할 것을 결심하는 등 최대의 시련을 맞게 되었다. 제2차 미 소공위가 정체상태에 빠져 결렬되자 미국은 미소영중 4개국회담을 열어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독립정부 수립을 논의하자고 제안하였으나(8.26) 소련이 이를 거부하였다. 통일독립정부 수립을 염원했던 백범은 미국의 제안을 지지하면서 전에 미국이 흘린 바 있는 단독정부설을 재차 반대하는 한편 임정의 법통을 살려 그 후신인 국민의회를 입법기관으로 삼아 정부수립을 논의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백범의 생각은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소 집하려한 이승만의 민족대표자대회와는 입장을 달리하였다. 따라서 이승만은 이 제 노골적으로 임정계승 문제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그래도 의견을 가장 가까이했던 김구와 이승만은 단정수립문제와 임정계승문제를 두고 서서히 벌어지게 되었다

13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한국문제가 더 이상 미 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해결될 수 없게 되자 미국은 1947 년 9월 17일 한국 문제를 제 3차 유엔총회의 의제로 제출하였다. 미국측은 또 남 북한 총선거 실시 및 점령군의 철수를 감시하기 위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설 치하자는 안을 유엔에 제출하여 총회에서 43대 9(기권 6)로 가결되었다. 이런 상 황에서 이승만이 총선거추진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남한 단독선거를 위해 발빠 르게 움직인 것과는 달리 백범은 신중론을 펴면서 남조선 단독선거에는 반대한다 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9개국 대표들로 구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백범은 이 위 원단의 임무가 남북총선거를 감시하는 데에 있다고 성명하면서 통일정부의 수립 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이면 이승만과 미군정은 남한만의 총선거에 대비 하고 있어서, 미군정으로서는 백범에 대해 껄끄러운 자세를 갖고 있었다. 장덕수 가 피살되자( ) 그 뒤 이 사건에 연루시켜 백범을 재판에 소환한 것은 이 같은 미군정의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12.15) 국사원에서 그의 저작 백범일지 가 간행되었는데, 그것이 원문에 충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는 백범일지 상하권의 내용 외에 <나의 소원> 등 백범의 정치사상이 잘 나타나 있었다. 백범은 이 책자를 방문자들에게 서명하여 기증하였다. 1948년 1월 7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하자, 백범은 위원단과의 회 합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보내는 의견서>를 개진하였다.(1.26) 이틀 후에 공개된 그 의견서에는 총선거에 의한 통일된 완전자주정부의 수립을 전제로 총선 거는 인민의 절대자유의사에 의할 것, 남북한에 구금되어 있는 정치범의 석방, 미 소 양군의 즉시 철퇴와 공백기간의 유엔의 치안책임, 남북 한인지도자 회의 소집 등 6개항이 담겨 있었다. 백범은 남북협상안을 김규식과 함께 유엔한위에 다시 제출하고 협조를 요청하였다.(2.6) 이 때 단정을 추구하던 세력들은 미 소 군대를 즉각 철군시켜야 한다는 백범의 주장에 대해, 백범을 크레믈린의 신자 소련의 적화노선을 지지하는 자 라고 격렬히 비난하였다. 1948년 2월 10일, 백범은 저 유명한 <3천만 동포에게 읍고( 泣 告 )한다>를 발표 한다. 여기서 그는 미 군정의 앞잡이로 인정받는 한민당 이 주체가 되어 단정을 주장하는 소위 한국독립정부수립 대책협회( 韓 協 ) 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 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고 언명, 남한 단독정부의 수 립을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백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UN소총회가 1948년 2월 26일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32대 2로 가

131 제5강.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결하자,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민주주의의 파산을 세계적으로 선언 하는 것 이라고 비난하고, 자신은 조국을 분할하는 남한의 단선( 單 選 )도 북한의 인민공화 국도 반대한다. 오로지 정의의 깃발을 잡고 절대다수의 애국동포들과 함께 조국 의 통일과 완전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만 계속 분투하겠다 고 그의 결의를 천명하였다. 백범은 단정론이 한층 강화되는 내외의 정세를 거스르며 외로운 투 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백범의 남북정치요인의 협상 구상은 이렇게 남북분단 추 세가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백범이 남북협상을 주장한 것은 남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승만 한민당 진영의 단선단정의 주장만 의식한 것이 아니고 북 쪽에서 은밀하게 추진되고 있는 단정파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구 김규식이 북한에 남북협상을 제의하는 서신을 발송한 후 UN소총회가 개 최, 가능 지역의 총선거 안이 결의되었고, 총선거일로 5월 10일도 발표되었다. 유 엔소총회의 결정을 본 백범은 3월 10일 <안도산 선생 애도문>을 발표, 미군정 3 년과 유엔한위 특히 메논과 중국 필립핀 대표의 배신에 대해 분노하는 한편 남북 회담에 대한 비장한 각오를 피력하였다. 남북협상이 성사되자 백범은 4월 19일, 군중, 청년단체, 학생단체, 기독교단체 등의 만류를 빼돌리고 어렵게 북행길에 올랐다. 20일 평양에 도착하여 김두봉의 내방을 받고 인민위원회사무실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4월 19일 오후 6시 평양 모 란봉극장에서 <남북조선제정당 사회단체 대표표자연석회의>가 시작되었지만, 백 범은 4월 23일 이 회의에 나가 남쪽의 단선단정뿐아니라 북쪽이 준비하고 있는 단선단정에 대하여도 미리 경계하는 요지로 발언하였다. 대표자 연석회의가 끝난 다음날인 4월 26일부터 4월 30일까지 김구 김규식 등 의 요구로 남북인사 15인을 중심으로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가 개 최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남북요인회담이다. 지도자협의회는 양측의 최대공약수적 의견을 <남북통일에 대한 남북지도자의 공동성명>에 담아 5월 1일 남북조선 정 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명의로 발표하였다. 또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회담은 4월 26일과 30일 두차례 있었는데 거기서 논의된 내용은 공동성명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동성명의 내용은, 외국군대의 즉각적인 동시 철수, 외군 철수 후 전조선정치회의 소집과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등 4개항이다. 김 구와 김규식은 남북요인 회담의 결과에 만족하며 5월 4일 평양을 출발해 5월 5일 서울에 도착, 그 다음날 북행 결과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김구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낙관적인 성명을 발표하였지 만, 남북협상의 결과에 상관없이 미군정은 5월 10일로 예정된 단독선거를 진행시

13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켰다. 양 거두는 선거에 불참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자 5월 14일 이에 대한 북의 보복조치가 나타났다. 남북협상에서 합의한 송전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5.10선거로 성립된 국회는 5월 30일에 개원, 7월 17일에 헌법을 제정하였다. 7월 20일 시행된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백범이 대통령에 13표, 부통령에 60여표를 얻 었으나 그는 여기에 구애되지 않고 통일운동에 매진, 7월 21일에는 김규식과 남 북협상세력을 중심으로 통일독립촉성회를 조직해서 통일에 대한 굳은 의지를 포 기하지 않았다. 이 통일의지는 그 이듬해 신년사에서 우리 3천만의 절대다수의 유일한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 뿐 이라고 언명한 데서 극명하게 드러 나고 있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이 내외에 선포되던 날이었다. 그 때의 분위 기로 보아서 경축 일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三 千 萬 同 胞 에게 泣 告 함, )고 언명한 바 있는 백 범은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의 심정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새해를 맞으면서 주위에서 이승만 김규식과의 합작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이것을 조합모리( 朝 合 暮 離 )하는 무원칙한 기회주의 라고 배격하였다. 그는 자신이 취해온 결단과 여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우리의 걸어온 길은 정확하였다. 또 앞으로 나갈 길도 이것뿐이다, 이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새해 들어서도 그는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지도자가 사심없이 협상의 길에 나서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 지 않았다. 남북에서 분단정권이 서게 되자 민족통일을 위해 백범이 할 일은 더욱 분명해 졌다. 민족통일을 염원하며 노심초사하던 백범은 5월 피곤한 심신을 휴양하기 위 해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그는 이 무렵, 변함없는 주장과 태도로써 자주 민주의 원칙하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쟁취 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동족상잔의 유혈과 국토양단의 위기 를 의식하고 있었다. 6월 21일 10여명의 소장파 국회의원 이 공산당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구속되는 국회프락치 사건 이 일어나자, 백범이 여기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퍼뜨려지기도 하였다. 이 때쯤이면 그가 설립한 건 국실천원 양성소 도 제재를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족상잔 6.25가 터지기 1년전, 1949년 6월 26일 정오경에 안두희가 쏜 권총에 의해, 그가 그렇게도 염원 했던 조국의 완전자주독립통일을 보지 못한 채 순국하였다. 향년 74세였다

133 제5강.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5. 맺는말 백범은 귀국한 후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드러내면서 종교적인 행사에도 참여하 였다. 망명생활을 끝내고 중국에서 귀국한 첫 주일에 그는 엄항섭과 함께 정동교 회 예배에 참석, 정일형의 설교를 들었다. 그가 귀국한 후, 교회에서는 자주 그를 초청했던 것 같다. 1946년 부활절에는 어느 성결교 모임에 참석하여 <밀( 麥 ) 한 알이 따에 떠러저 죽으면>( 활천 1946년 6월호, 12~13)이라는 요지로 연설 한 적이 있다. 백범은 식량기근으로 주리면서도 은혜와 기쁨이 충만함을 보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한다 는 것과 의미깊은 부활주일에 초청에 응하게 된 것을 또한 감 사한다고 전제하고, 자신은 당시 38선을 넘어온 자들이 암살하려고 한다는 정보 를 종종 듣는다면서, 이런 소리를 들을 적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고로 거짓없는 내 량심은 내 죽음을 초월하고 나라를 사랑하였을지언정 내 나라를 파라먹는 자 는 아니라 고 대답한다 고 썼다. 그는 또 상해에서 일본군이 중국인의 트럭을 강 탈, 폭탄을 싣고 중국진중으로 가려고 할 때 운전수 왕하삼이라는 사람이 그 트 럭을 몰고 바다에 돌입했다는 예를 들면서, 자신의 생명도 그 운전수에 비유, 71 세된 자신이 총을 맞아 죽는 것이 더 이상 기쁜 일이 없겠다고 했다. 그 이유를 백범은 다름이 아니라 밀 한알이 따에 떠러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같이 (요 12: 24) 내가 죽은 후 나 이상의 애국자들이 많이 나겠는고로다 라고 했다. 백 범은 나를 위하야 여러 교회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여 준다니 참 감사한다. 여 러분이 눈물을 흘리면 나를 피를 흘리리니 이 눈물과 이 피로 우리들이 갈망하는 조선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보자"고 외쳤다. 백범의 연설 속에는 백범의 신앙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단편들이 있다. 그가 일반 기독신자들이면 사용하는 종교적 용어, 예를 들면 은혜와 기쁨이 충만, 감 사, 부활주일, 하나님의 나라 등을 사용한 것이나, 자신을 그리스도인 이라고 고백 한 것, 요한복음 12장 24절을 인용하여 자신의 삶의 의미를 강조한 것 등으로 보 아서 그의 신앙은 당시 평범한 기독신자들이 가졌던 신앙과 거리가 멀지 않았다 고 본다. 이같은 기독교 신앙적인 측면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가 임정시절에도 계속적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백범은 20세기 초 기독교에 입문한 이래 교회를 섬기면서 설교를 자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위의 요한복음서 구절을 인용한 것이나 로마서 8장 31절의 " 萬 一 하나님이 我 等 을 爲 하시면 誰 가 能 히 我 等 을 對 敵 하리요"라고 휘호를 쓴 것은 당시의 기독신 자들이 그랬던 것처첨 평소 백범도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13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백범은 이러한 기독교적인 신앙과 이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민족적인 이념을 구 축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는 기독교적인 신앙과 민족운동을 일치시키려 고 했던 것이다. 그가 입문할 때 가졌던 애국계몽 구국운동의 방편으로서의 기 독교와 한국기독교회가 갖는 타계주의적인 기독교 사이에는 괴리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한 때 민족주의적인 성격이 강할 때에는, 나는 공자, 석가, 예수 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 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 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천명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자신을 민족을 위한 희생물로 바치기를 결심하면 할수록 자 신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남북에 단독정부가 서서 민족통일국가 건설이 거의 희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 그가 하나님만이 통 일국가를 이룩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일하신다면 누 구도 대적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신념을 휘호로 보인 것은 이 때문이라고 본다. 이 휘호를 쓴지 4개월만인 1949년 6월 26일 그는 하나님 앞으로 갔다. 참고문헌 김구(이만열 옮김), 백범일지, 역민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백범 김구-생애와 사상, 교문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김구주석최근언론집, 김구, <밀( 麥 ) 한알이 따에 떠러저 죽으면>, 活 泉 230호 증간호, 옥성득, 백범 김구의 개종과 초기 전도 활동,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 제 47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백범김구전집, 대한매일신보사,

135 한국역사 속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한국근현대사 제 6강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 강사 : 이 만 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2009년 6월 25일(목) 저녁 7시 서울YMCA 친교실(2층) 주최 : 서울YMCA

13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137 제6강.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활동 이만열 명예교수(숙명여대) 1. 머리말 島 山 安 昌 浩 (1878~1938) 선생은 교육자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 독립의 방략을 다양화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민족운동가 로서, 그 운동의 기반으로서 도덕적 가치를 우선했으며, 운동의 방략도 급진적이 거나 과격한 것을 피하고 점진적인 것을 중요시했다. 그는 각종 운동을 주도하면 서 개인적인 인격의 성숙을 전제로 조직력을 중시했으며 따라서 그의 운동은 개 인의 인격연마와 함께 동맹수련을 강조하여 탁월한 조직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도 했다. 그는 민족을 중시한 민족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를 세계 평화에 기여토 록 해야 한다는, 말하자면 세계화를 지향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2005년 8월,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도산 선생을 지목했다. 광복 60주년을 맞는 이 달에 도산 안창호 선생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목한 것은 특 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지금까지 지내온 한국 민 족의 진로를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데는 도산 선생이 가 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미래의 진로와 관련, 앞으로 한 국 민족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도덕적인 수준을 높이고, 민족적으로는 통 일을 이룩해야 하며, 세계사적으로는 세계평화를 지향하면서 한국 민족이 바로 그 세계사적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국 민족의 진로를 이런 관점에서 풀이할 수 있다면, 거기에 부합되는 지도자를 독립운동사에서 찾는다면, 바로 도산 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선정했을 것으로 본다.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선학들의 연구와 저술이 있다. 197) 이 시기에 도산 선생의 생애와 활동 이라는 다소 진부한 제목으로 그를 되돌아보는 것은 광복 60주년이라는 환경에서 그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197) 이광수의 도산안창호 와 주요한의 안도산전서 를 비롯하여 최근의 야심적인 저술로 이명화, 도산안창호의 독립운동과 통일운동 (경인문화사, 2002)과 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 찬위원회 편, 도산안창호전집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이 있다

13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 변화될 수 있겠지만,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지 않는 한 그 인물에 대한 평가 는 기존의 연구를 크게 뛰어넘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이 글도 새 로 정리한다는 것 외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는 힘들 것으로 본다. 선생의 생애는 그 활동 지역이 넓고 그 활동 영역 또한 매우 다양하다. 때문에 그의 생애와 활동을 단순화시켜서 언급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이 글은 도산 선생의 생애를 그 시기를 따라 평면적으로 언급할 것이기 때문에 다소 연보적인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좋은 충고를 기대한다. 2. 서당 공부와 그리스도교 수용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草 里 面 七 里 도롱섬에서 태어나,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 부속병원에서 향년 60세를 일기로 돌아갔다. 그가 태 어난 해는 한국이 일본에 의해 개항한 1876년에서 보면 2년이 지난 해였고, 그 가 돌아간 해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그 이듬해였다. 그의 생애 전체가 일 제와의 관계를 떠나서 말할 수 없듯이, 그의 출생과 타계도 이렇게 일본과의 관 계를 시사하고 있었다. 60평생의 생애동안 그는 미국과 멕시코, 중국 일본과 러시 아 등을 활동의 무대로 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順 興 安 씨 安 興 國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글 잘 하고 엄한 할아버지 밑 에서 자랐고,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혔다. 金 鉉 鎭 문하에서 수학했던 198) 그는 뒷날 畢 大 殷 을 통해 신지식과 신사조를 넓히게 되었다. 그의 한학 실력은 梁 啓 超 의 飮 氷 室 文 集 을 그가 설립한 大 成 學 校 의 교재로 사용하면서 가르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선생이 받은 한학교육은, 그 뒤 서울의 예수교학당과 미국에서 받 은 교육과 함께 그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4년 17세 되던 해에 淸 日 戰 爭 을 겪은 그는 이해에 서울에 올라와 19세까 지 원두우학교 199) 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영어와 서양의 과학문명을 수업하 198) 도산선생 심문기 에서는 8세부터 13세까지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4세부터 16세까지 김현진의 문하에서 儒 學 을 배웠다고 했다. - 도산안창호전집 11권, 130쪽 199) 원두우학교 는, 도산선생 심문기 에 기재된 이름으로, 초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 드(H.G.Underwood, 元 杜 尤 )가 1886년에 기숙학교 형태의 고아원 으로 시작했고, 그 뒤 마페트 (S.A.Moffett, 馬 布 三 悅 ) 선교사가 이어받아 한 때 예수교학당 이라 불렀던 것을 1893년 밀러 (F.S.Miller, 閔 老 雅, 閔 爾 亞 ) 선교사가 인수받으면서 민로아학당 이라 불렀는데, 뒷날 경신학교 로 발전하였다. 이 학교는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고아원 주간학교 남학교 예수교학당 서울 학교(학당) 구세학교(학당) 원두우(언더우드)학교(학당) 정동학당 등으로 불렸다. 이 중 구세학당은

139 제6강.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게 되었다. 안창호는 이 학당에서 밀러 선교사로부터 정직성과 근면성을 인정받 아 접장이 되었고, 그 전의 접장보다 더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하여 학교에 열정 과 활력을 불어넣었다. 200) 이것이 인연이 되어 안창호는 밀러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 다. 201) 도미하기 하루 전 1902년 9월 3일에 밀러 목사 주례로 서울 제중원에서 李 致 歡 의 딸 李 惠 淑 (이혜련)과 결혼하고 같이 유학길에 올랐다. 젊은 안창호는 원두우학교(정동학당)에서 송순명이라는 접장을 통해 202) 예수교를 전도 받아 悔 心 의 체험을 갖게 되었으며, 나아가 예수교를 전도하는 열심까지 갖게 되었다. 당시 간행된 그리스도신문 은 이렇게 증언한다. 셔울 졍동 학당에셔 공부 안챵호라 사 이 작년에 와셔 리셕관을 져 보고 긔가 젼에 던바 모든 일이 죄로 말 암아 죽을수 밧긔 업던 셰 낫낫치 말 며 눈물을 흘니고 예수의 십 에 보혈을 흘니샤 셰샹 사 의 죄 쇽 야 주신 말 을 셰히 젼파 며 진심으로 권 니 리셕관이가 그 권 말을 듯다가 이 연 셩령의 감화 을 엇어 제죄 회 고 여러 사 을 진심으로 권 며 회당을 셜시 고 여러 곳으로 니며 젼도 203) 이렇게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선생은 그 뒤 평생 동지로 활동한 임기반 필대은 이강 등을 그리스도교로 인도했다. 204) 그가 믿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자신을 구하 고 민족을 구한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에 친구들을 권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앙에 귀의한 그는 일생동안 그리스도교적인 가치관을 떠 나지 않고 생활했다. 선생은 웅변가로서 그의 민족운동사상 계몽을 주로 그리스 도교회를 통해 전개했고, 흥사단 등의 조직을 창립하고 규칙을 정하며 문답식과 민로아 선교사 때에 불려진 이름이다. - 고춘섭, 경신사 (경신중고등학교, 1991) 123쪽 200) F. S. Miller, Report of Boys School of Mission, Korea Seoul, Oct (Reports and Letter from Korea Mission, PCUSA, )( 도산안창호전집 제5권, 53~66쪽)-이만 열, 도산 안창호와 기독교 신앙 ( 도산사상연구 제 8집, 도산사상연구회, 2002) 21-23쪽 201) 도산이 밀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하게 되었다는 것은 도산선생 심문기 에서 본 인이 증언하고 있다. - 도산안창호전집 11권, 135쪽 202) 도산언행유습 ( 도산안창호전집 11권, 158쪽). 이강은 이 회고에서 도산이 영향을 많이 받은 필대은 씨는 서울의 원두우학교에 들어와 도산 선생의 권유로 예수 를 믿게 되었다고 했다.- 도산안창호전집 11권, 쪽 203) 평양 보통문안 교회, 그리스도신문 ( 島 山 安 昌 浩 全 集 제 5권, 77쪽) 204) 주요한, 안도산전서 pp

14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인단식 서약례 등을 행하고 모일 때에 노래를 부르게 한 것 등은 그리스도교의 의 식을 본뜬 것이었다고 지적된다. 205)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릴 때에 한문 서당에서 배운 유교적인 가치관 예의범절과 함께, 선생의 인격과 활동을 이끌어온 윤리와 도덕을 더욱 독창적으로 승화시켰 던 것이다. 206) 그가 그 뒤 사회와 민족에 대해 무관심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향 해 일정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정직을 강조한 것이나 오랫동안 가족을 떠나 있는 중에서도 윤리 도덕적으로 거의 흠잡을 데 없는 생활 을 유지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 된다. 선생은 1897년에 조직된 독립협회와 관련을 맺고 활동하는 한편 그 후 5년간 경향각지를 유세하며 청년웅변가로, 애국운동자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 무렵 미국에서 귀국하여 활동하고 있던 서재필은, 뒷날 도산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 고 독립협회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도산 선생을 회상한 적이 있다. 서재필은 약 1 년간 드러내지 않고 자기의 강연을 들었던 도산에게 미국의 캘리포니아나 동부에 가서 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재필의 강연을 들 었던 도산은 자신의 생애를 한국의 재건에 투신하겠다고 맹서하면서 서재필의 권 고를 거절했다. 207) 고향으로 돌아온 도산은 漸 進 學 校 를 세워 경영하는 208) 한편 강서의 황무지개간 사업에도 손을 대었다. 그러다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밀러 목사의 주례로 이혜련과 결혼식을 올리고 그 다음 날 그는 미국 유학 길에 오르 게 되었다. 젊은 시절, 선생이 구세학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것은 인생관과 세계 관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의 인생 전체를 지배했다. 그가 인격 연단과 신문명 수용을 통해 민족에 봉사하게 된 것은 유교적인 교육과 교양을 넘어서서 205) 주요한, 안도산전서 25-26쪽 - 島 山 安 昌 浩 全 集 12권 513쪽 206) 이 점과 관련, 李 光 洙 는 島 山 선생을 두고 그의 道 德 的 檢 束 에 있어서도 그는 獨 創 的 이었다. 그는 聖 經 을 읽었고 儒 敎 經 典 도 읽어 어디서나 그의 糧 食 을 求 하였지마는 어느 한 곳에 一 偏 되지 아니하였다. 그는 무슨 道 德 律 이나 自 己 의 良 心 과 理 性 의 批 判 을 거쳐서 自 己 의 道 德 律 에 編 入 하는 것이었다 ( 島 山 安 昌 浩 全 集 12, 235쪽)고 평 한 적이 있다. 207) Philip Jaison, "My Impression of Ahn Chang Ho" The Korean Student Bulletin, Vol. XVII, April-May, pp. 1, 3. 이 기록은 도산안창호전집 (도산안창호선생전집위원회, 2000)에서는 빠져 있다. 208) 안창호가 고향에 세운 漸 進 학교는 후에 기독교 장로교에서 인계하여 일제 시대에도 계속되다 가, 해방 후 공산 정권의 손으로 폐쇄되었다. (주요한, 안도산전서, 32-33쪽.)

141 제6강.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를 통해 미래에 대한 비전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미국 유학의 길은 구세학당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미국 선교사와의 교제의 기회 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유학에 나설 때만 해도 교육학과 기독교의 奧 義 를 연 구 209) 하고 귀국하여 교육에 종사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을 보면 수용 초 기에 선생이 얼마나 그리스도교에 심취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3. 도미 유학과 동포 계몽 미국에 도착한 도산 부부는 하루하루의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눈물겨운 신혼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전에 한국에 왔던 이민국 의사 다울 을 건강진찰 중 만나게 되어 그 사람 집에 고용되어 소제하는 일을 맡아 하다가 그 후에는 다른 미국인 가정에 고용될 수 있었다. 210) 미국 생활에 차차 적응하면 서 그는 동포들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선생은 자기보다 먼저 미주본토에 와서 생활하고 있던 한인들이 서로 협동하지 않고 목전의 이해관계로 갈등 쟁투하면서 민족적인 품위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고국을 멀리 떠나온 이들이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다른 민족 앞에서 조 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조직과 계몽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 생은 1903년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항친목회를 조직, 회장에 피선되고 교민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에 비난받던 한인사회가 몰라볼 정도로 정 화되고 미국인들로부터 칭찬까지 받게 되었다. 이 때 한인을 지도하기 위해 사용 한 회관이 뒷날 예수교회당으로 되었다. 이는 도산이 교민 사회의 지도자로서 예 수교를 한인 조직과 계몽 교육에 활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신네 한인들의 생활이 일변하였소, 위대한 지도자 없이는 이리 될 수 없소 함으로 한인들은 안창호라는 사람이 와서 지난 1년동안 우리를 지도하였다고 대 답하였다. 그 미국인의 家 主 는 도산을 극구 稱 揚 하고 도산의 공적에 감사하는 뜻을 표하기 위하야 자기 가옥에 거주하는 한인의 집세를 매년 일개월분을 감하 겠다는 것을 선언하고 또 도산이 한인을 지도하기에 사용할 회관 하나를 무료로 209) 도산선생심문기 ( 續 篇 島 山 安 昌 浩 79쪽, 島 山 安 昌 浩 全 集 11권 135쪽) 210) 도산선생심문기 ( 續 篇 島 山 安 昌 浩 島 山 安 昌 浩 全 集 11권 소수) 130쪽. 그러나 주요한, 안도산전서, 53쪽에는 한 미국인 의사를 알게 되어 도산 부부는 그의 집에 들어가 집안 일을 도우면서 말을 배우고 식생활을 해결할 수 있었다고 했다

14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제공할 것을 자청하였다. 이리하야 얻은 집이 한인의 최초의 회관이오 예수교회 가 되었다. 211)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을 지도하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후 도산은 1904 년 3월에는 로스앤젤레스 인근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였다. 이 곳은 기후가 좋을뿐 더러 고학하기에 적당 했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그는 기독교 경영의 신학강습소 에서 영어와 신학을 수업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도미하면서 가졌던, 교육학을 연구하고 기독교의 奧 義 를 연구하 려던 뜻을 이루려고 했다. 선생이 로스앤젤러스로 옮긴 후 하와이에서 다수의 한인 노동자가 미국본토로 옮겨와 그들을 교육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치욕스런 일들이 자주 생겼다. 이 무렵 이 곳 한인들이 선생을 선발하여 그들을 교도하라 하므로 가족들은 로스앤 젤러스에 두고 단신으로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이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는 샌프 란시스코 한인들과 상의하여 종래의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1905년 4월 5일 共 立 協 會 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되었으며, 그 해 11월 14일에는 퍼시픽 가에 공 립협회 회관을 건립하고 11월 20일에는 공립신보 를 창간하게 되었다. 공립협 회는 뒷날 국민회를 거쳐 대한인국민회로 확대 개편되었고, 공립신보는 신한민보 로 발전하게 되었다. 선생이 일생동안 민족운동을 지도했던 방식이었던 조직과 계몽(언론 교육) 운동이 벌써 이 때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교민들을 지도하는 방안으로 예수교회를 소개하고 출석을 권장했고 마땅 히 삶의 근거를 갖고 있지 않았던 한인들은 예수교회를 통해 미국 교인들의 도움 을 받을 수 있었다. 하루는 한국인들이 다니던 교회의 미국 부인, 어머니같이 한국인을 돌보아 주던 그이가 교회에서 도산을 대접할 터이니 오라 하여. 미국인 목사가 말하기를 이곳 서 일하는 한국인을 일년 동안 지나 보는데 모두 좋은 사람뿐이니 놀라웁고 고마 운 일입니다. 한 과수원 회사 사장은 우리 회사는 금년에 한국 형제들의 덕 분으로 이익을 많이 보아 감사히 생각합니다... 교인들은 한국인에게 40권의 성 경과 찬미책을 기념으로 선사하고, 여자 교인들이 전부 나와 축하하였다. 도산은 대답하기를 당신들이 도와 준 까닭으로 일년 동안 우리는 잘 지내왔소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일하는 우리 동포들도 당신 같은 고마운 사람을 만나도록 부 211) 이광수, 도산 안창호, 31쪽

143 제6강.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탁합니다. 212) 선생은 교민들을 지도하되 그리스도교 신앙과 민족 의식을 통해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공립협회 같은 조직을 통해서도 교민들을 이끌어 갔다. 다시 말하 면 신앙와 민족 의식을 통해 개체의 인격을 깨워 성장시키고, 조직이라는 사회적 기속력을 통해 이를 더욱 공고화시키고 발전시키는 원리를 늘 적용해 갔던 것이 다. 이런 지도 원리가 선생이 입버릇처럼 미국의 과수원에서 귤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 고 강조했던 대목에서 드러났던 것이다. 도산 선생이 몇 번이나 미주에 있는 가족과 동포를 떠났다가 돌아와서도, 당대의 다른 지도자들과는 달리, 그의 지도력에 변함이 없었던 것은 자신의 삶 또한 교민들을 지도했던 그 원리에서 크게 떠나지 않고 생활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4. 귀국과 국권수호운동 선생이 도미하여 교민활동을 하는 동안 세계 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한국의 운 명은 점차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두고, 극동에서 자신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평한 노일전쟁은 한국을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필요불가 결의 교두보로 전락시켰고 끝내는 일제의 식민지화를 서두르는 계기로 만들었다. 그들은 국외중립을 선언한 한국을 전쟁에 협력토록 강박했고 군수물자 운반을 위 한 교통로 확보와 많은 한국인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노일전쟁 중에 그들은 각종 조약을 강제하여 한국의 자주권을 제약했고, 드디어는 獨 島 를 불법적으로 자국 영토에 편입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의 노골적인 한국 침략 기도는 러일전쟁 기간에 노골화했다. 대한제국이 국외중립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대일본 제국 정부는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형편에 따라서 수용한다 는 것을 골자로 한 한일의정서를 강제했다. 이어서 1905년 11월에는 乙 巳 勒 約 을 통해 한국의 외교 권을 빼앗아갔다. 이어서 1906년 2월 1일부터는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초대 통감 에 伊 藤 博 文 이 부임하여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를 서두르고 있었다. 한국에 선교 사를 파송했던 미국과 영국(영연방)은 러일전쟁 중에는 일본측에 서서 일본의 한 212) 주요한, 안도산전서, 48-49쪽

14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국에 대한 식민지화를 돕고 있었다. 1905년 7월 말에 체결된 가쯔라 태프트밀약 과 동 8월 12일에 갱신된 제 2차 영일동맹이 바로 그것을 웅변한다. 213) 미주에서 동포를 지도하며 조국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선생은 풍전등화 와 같이 위급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던 조국의 상황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귀국에 앞서 1906년 4월에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공립협회 회관이 불타 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클랜드로 본부를 옮기는 등 수습을 서둘렀다. 1907년 1 월 미주 공립협회의 조직을 완료한 선생은 국내에서도 침략세력에 대항할 국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리버사이드에서 李 剛 林 俊 基 등과 大 韓 人 新 民 會 를 발 기하여 통용장정과 취지서를 작성하고 뉴욕에서 하와이 토쿄를 거쳐 2월 20일에 귀국했다. 214) 귀국하게 된 동기는, 일제가 강제한 을사조약에 대해 미주의 공립 협회와 도산 자신도 반대하고 있던 터에, 도산에게 공립협회 회장 자격으로 이런 사정을 시찰 겸 본국의 세론을 조사하여 해내 해외의 한인이 호상 제휴하여 반대여론을 환기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 215) 하고 의뢰했기 때문이다. 귀국하는 동 안 하와이에서는 숙부인 안교점과 해후하고 토쿄에서는 동경한인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에서 애국연설회를 가져 많은 젊은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안창호의 귀국활동은 內 田 良 平 같은 일제의 밀정들에게 노출되어 통감부에서는 선생의 동향을 주목하게 되었다. 일찍이 조직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있던 선생은 독립운동에도 애국심을 결집하고 업무를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는 新 民 會 를 비밀애국조직으로 창건하는 한편 서울 대구 부 산 등지를 유세하며 동포의 자립자존정신 보급에 노력 했다. 신민회는 大 韓 每 日 申 報 尙 洞 敎 會 와 상동청년학원 李 東 輝 李 甲 柳 東 說 盧 伯 麟 曺 成 煥 金 羲 善 등의 무 관출신 서북지역의 李 昇 薰 安 泰 國 등의 민족자본가와 기독교계 인사 및 미주의 공 립협회 인사들이 참여하여 1907년 4월에 창건되었다. 216) 도산 선생이 귀국( )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도록 미국이 승인한다는 내용의 가쯔라 태프트 밀약은 잘 알 려져 있지만, 영일동맹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일본은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 상 및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갖기 때문에 영국은 일본이 이 이익을 옹호 증진하기 위하여 정당하고 또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도 guidance 감리 control 보호 protection 조치를 한국에서 행할 권리를 승인하되 이 조치는 항상 열국의 상공업에 대한 기회균등주의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 ( 日 本 外 交 文 書 38-1, 事 項 1 第 二 回 日 英 同 盟 協 約 締 結 의 件 )는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14) 도산선생 심문기 에는 1906년에 귀국했다고 진술했다. - 도산안창호전집 11 권 쪽 215) 도산선생 심문기 ( 도산안창호전집 11권, 쪽) 참조 216) 愼 鏞 廈, 新 民 會 의 創 建 과 그 國 權 回 復 運 動 韓 國 民 族 獨 立 運 動 史 硏 究 (을유문화사,

145 제6강.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년)하여 망명(1910년)할 때까지의 활동에 대해서는, 종래 신민회 창건 이외에 국 내외 정세를 설명하면서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각종 연설회와 대성학교 청년 학우회 마산도자기회사 및 태극서관의 설립 등 각종 애국계몽 무실역행 사업에 뛰 어드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는 애국계몽운동과 학교교육 산업활동을 통해 나라 의 힘을 키워 독립을 유지하고 국권수호를 다짐하자는 것이었다. 최근에 이 시기의 도산 선생의 행적에 대한 연구가 자료에 입각하여 더 구체적으로 진전되 었다. 217) 예컨대 도산은 이 시기에 최소한 17회의 연설회를 가졌고 거기에 대한 반향 같은 것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 1907년 6월 헤에그밀사 사건이 일어나 그 여파가 정미7조약의 늑약과 군대 해산으로 이어졌을 때, 남대 문 밖 김형제상회 에 유숙하고 있던 도산은 한국군의 저항이 수많은 인명살상으 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김필순 등과 함께 구호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07년에서 1910년 초까지 도산의 국내 활동에 대해서는, 그 증언의 정확성 여부는 문제가 있지만, 郭 林 大 의 안도산 218) 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그 분위기 를 이해할 수 있다. 도산이 귀국하여 활동한 시기는 통감부가 설치된 후였기 때 문에 통감부에서도 귀국한 도산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때문에 일제 의 통감부 문서에서도 도산의 이름은 자주 나타나고 있다. 219) 1985) 18~19쪽. 도산선생 심문기 에서는, 신민회와 관련, 본인이 귀국한 이듬해에 대한민 족의 자립하는 정신을 보급시킬 목적으로 경성에서 李 甲 柳 東 說 李 東 輝 全 德 基 李 東 寧 梁 起 鐸 등과 같이 조직 했고 양기탁이 중심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 도산안창호전집 11권, 쪽 217) 윤경로 교수의 도산연구의 새 지평을 위한 사례 연구-도산의 행적 추적을 중심으 로 도산사상연구 제 4집(도산사상연구회, 1997) 참조 218) 島 山 安 昌 浩 全 集 11권에 수록되어 있다. 219) 일제가 도산을 요시찰 인물로 감시하고 있다는 것은 統 監 府 文 書 (국사편찬위원회) 제 5권 이하에서 보이는 것만 해도 다음과 같다.(보고 날자와 수록된 책과 쪽수) 폭도진정 과 관련하여 평양에서 마페트 선교사를 만나다.( , 5-61), 대한신민회에 양기탁 안창호 등의 배일기 독신자가 가입권유하고 있다.( , 6-58), 안창호 양기탁 등이 베텔 추도식에서 연설하 다.( , 6-171), 평양 한국인과 일본인의 간친회에 안창호 안태국 일파와 야소교인들이 참석하지 않음( , 6-183), 평양 대성학교 하계휴업 폐교식 상황보고( , 6-224), 한국군부 학부 폐지설 및 이갑 안창호의 행동보고(1909, 7.26, 6-268), 안창호 양기탁 등의 청 년유지회 조직 유세계획 등의 건( , 6-297), 스티븐스 살해자에 대한 의연금 모집 ( , 6-394), 미국에서 귀국한 배일당 수령 林 永 根 에 대한 조사보고( , 6-408), 안창호의 체포에 대한 선교사 마페트의 소감( , 6-415), 서북학회의 이갑 안 창호 등 석방운동 결의 건( , 6-422), 대성학교 생도 金 明 善 이 제공한 안창호에 대한 정보보고의 건( , 6-422), 안창호 체포건( , 6-435), 하르빈사건 범행연루 자 체포건( , 7-42), 안창호 체포에 대한 외국선교사의 소감( , 7-138~ 140), 안중근의 2차 공술 중에 1908년 봄에 안창호를 2-3회 만났다는 내용( , 7-252), 안중근의 5차 공술 중에 안중근 언급( , 7-278), 이등 사건 연루자 조사 복명서 ( , 7-380). 이 밖에도 統 監 府 文 書 에는 도산에 관한 언급이 많이 되고 있으나, 이

14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이와 함께 1907년 11월, 당시 통감으로 있던 伊藤博文이 도산 선생과 회견하고 청년내각 의 조직을 요청했지만 선생이 이를 일축했다는 설이 주목받고 있다.220) 이 제의설이 어떤 경위로 나타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명화가 지적한 바 와 같이, 실증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그런 제의설은 전혀 알 수 없다. 이와 관련, 도산과 가까웠던 이강과 백영엽은 伊藤博文이 세 번이나 만나자고 해서 도산이 그를 찾아가 만났다고 말했지만 이들도 청년내각 제의설은 언급하지 않았다.221) 주요한은 그의 安島山全書 에서 伊藤博文과의 대화 내용을 예심 심문기 라는 것을 들어 자세히 전했다. 주요한은 伊藤博文이 당시 궁정 정치인들을 믿지 못할 것을 알고 민간의 청년 지사들을 시켜 국내 정치를 혁신할 눈치 를 보여 崔 錫夏 등이 중간에 서서 도산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과 또 伊藤이 李甲에게 안창 호는 바른 사람이요, 크게 될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이 와전이 아닐 것 같다고 추정하면서 소위 민간 청년 내각으로 하여금 혁신 청치를 시켜 본다는 안이 伊 藤의 보고로 일본 정부측의 숙제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는 견해를 조 심스럽게 적어 놓고 있다.222) 이 점과 관련, 1907년 헤에그밀사 사건과 정미7조약, 군대해산으로 소용돌이치 는 정세 아래서 국내 정치계도 소위 내각교체가 이뤄지고 있었다. 朴齊純이 參政 에서 물러나고 李完用이 參政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때 일본측에서는 한국의 정정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비상한 용단과 견일불발의 의지 가 필요하다고 보고 민간 정치단체와 악수하는 것 역시 일책 223)이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볼 때, 당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던 젊은 安昌浩 를 伊藤博文이 초청하여 만난 것이 사실이라면, 청년내각 이야기는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島山內閣說 은 그 뒤에 한 차례 더 나타난다. 寺內正毅가 통감으로 부임한 후 역시 明治大學 출신의 崔錫夏를 통해 安昌浩內閣 을 조직하여 일본과 협력케 하 후의 것은 도산이 망명한 뒤의 보고로서 대부분 도산의 대성학교와 관련된 것 등 도산의 실제 국내활동과는 무관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220) 이명화, 島山 安昌浩의 獨立運動과 統一運動 附錄-島山 安昌浩 年譜 (경 인문화사, 2002, 475쪽). 같은 저자가 쓴 <도산 안창호 연보> ( 島山 安昌浩 全集 13권, 897쪽)에는 청년내각 제의설이 있으나 실증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명기했다. 221) <도산 언행 유습> ( 島山 安昌浩 全集 11권, 쪽) 222) 주요한, 安島山 全書 (三中堂, 1963) 63-68쪽 - 島山 安昌浩 全集 12권, 쪽 223) 伊藤博文, <韓國內閣更迭事情通報의 件, >(外務省編纂, 日本外交文 書 제40권 1책, 557쪽)

147 제6강.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는 방안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苑 洞 李 甲 의 집에 도산을 비롯한 중요인물이 모인 자리에서 崔 는 寺 內 의 의향을 통고하고 토론토록 했다는 것이다. 이 회의에서 최 석하와 이갑 등은 好 機 勿 失 을 주장했지만 도산은 이를 일축하고 힘을 길러 장 래를 준비하자 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는 것이다. 224) 두 차례에 걸친 안창호 내각 설은 사실 여부를 더 확인할 수 없다. 두 경우 모 두 최석하가 등장한다거나, 도산 혹은 그의 친구가 옥중에 있어서 그들을 우선 석방시켜 달라는 대목이 보이는 것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어서 어떤 한 사건이 두 번이나 風 說 化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이것이 風 說 에 지나지 않는 다 할지라도, 해프닝 같은 이 사실에서 도산의 인품과 시대를 꿰뚫어 볼 줄 아는 혜안을 엿볼 수 있다. 1910년, 도산은 나라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면서 동지들과 함께 망명을 결심한 다. 4월 중순 경, 그는 거국가 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라, 중국의 위해위 천진 북경 을 거쳐 청도에 이르러 신민회를 같이 했던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담 을 개최했 다.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등 금후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하는 이 회 담은, 이 회의의 결과는 도산의 바라던 바와 같지는 못하였다 는 이광수의 표현 과 같이 225), 동지들간의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끝났다. 따라서 이 회담은 그 뒤 동지들 간에 독립운동 방략상의 차이를 노출하는 경계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회담에 참여한 인물들은, 증언자에 따라 출입이 있으나 거론된 인물들을 모두 열거하면, 도산을 비롯하여 柳 東 說 李 甲 申 采 浩 李 鍾 浩 李 鍾 萬 金 志 侃 曺 成 煥 李 剛 朴 英 魯 金 羲 ( 喜 ) 善 李 東 輝 등이었다. 이 회담에서 漸 進 論 과 急 進 論 實 力 養 成 論 과 卽 戰 卽 決 論 226), 경파 와 평파 227) 의 대립이 극복되지 못했다. 만주에서 독립군 기지를 마련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운동에 임한다는 도산의 방략은 청도회담이 있은 뒤에 당시 돈을 갖고 있던 李 鍾 浩 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 지 못하게 되었다. 228) 도산은 청도회담 후에 북경에 가서 비자문제를 해결하고 상 224) 李 光 洙, 島 山 安 昌 浩 ( 島 山 紀 念 事 業 會 刊, 太 極 書 館, 1947) 76-82쪽 - 島 山 安 昌 浩 全 集 12권, 쪽. 비슷한 내용을 주요한도 그의 安 島 山 全 書 ( 쪽) - 島 山 安 昌 浩 全 集 12권, 쪽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 설 또한 1907년 伊 藤 博 文 이 제시했다는 청년내각 설과 비슷한 점이 보인다. 225) 이광수, 島 山 安 昌 浩 93쪽 - 島 山 安 昌 浩 全 集 135쪽 226) 이광수, 島 山 安 昌 浩 93-95쪽 - 島 山 安 昌 浩 全 集 12권, 쪽 227) 곽림대, 안도산 (1968) 54쪽 - 島 山 安 昌 浩 全 集 11권, 510쪽 228) 이종호가 도산의 방략에 찬성하지 않아 자금을 지원하지 않게 된 시점도 두 갈 래로 증언된다. 곽림대는 청도회담 때에 이미 이종호가 재정부담을 거절 했다고 했

14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해 연태 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연해주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에 상당한 의욕을 보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생은 연해주에 도착하여 니콜리스크의 최관흘 목사를 방문, 그와 함께 국민회 확장과 기독교 전도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상해를 거쳐 블라 디보스톡으로 떠날 때에는 미주 귀환 계획을 확고하게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그가 이 곳에서 미주로 귀환하려고 한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 었을 것이다. 하여튼 1911년 5월 도산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치타 이르크츠 크 페테르스부르그 베를린 런던 글래스고우를 거쳐 9월에 뉴욕에 도착했고 시카고 를 경유, 새크라멘트의 한인 농장을 방문한 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향했으며 클 래어몬트 샌프란시스코 스탁톤 등지의 한인사회를 순방했다. 1911년 말에 가족을 해후하게 된 도산은 1919년 다시 미국을 떠나 상해로 향할 때까지 미국에서 한 민족의 민족적인 역량을 결집하여 독립운동의 기초를 닦는 한편 그의 생애에서 가족과 함께 가장 행복한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5.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미주에 돌아간 그는 그 곳의 동포들을 기반으로 하여 새롭게 독립운동을 실천 다. 그 때문에 도산은 수행했던 정영도를 시켜 국내에서 출발할 때 이종호로부터 받 았던 여비를 되돌려주었다고 했다.(곽림대, 안도산 55쪽 - 島 山 安 昌 浩 全 書 11 권, 511쪽) 이광수도 청도회담에서 이미 이종호가 도산의 실력양성론보다 즉전즉결 론에 기울어지고 말았다 고 증언했다.( 도산안창호전서 12권, 137쪽). 그러나 주요 한은 이종호가 블라디보스톡(해삼위)에서 출자를 거부한 것으로 증언했다.(주요한, 안도산전서 (1963) 115쪽 - 도산안창호전서 12권, 601쪽) 이렇게 쓴 것은, 속편 도산안창호 (1954)에서 보이듯이, 주요한이 이강으로부터 이같은 증언을 듣 고 참고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강은, 속편 도산안창호 (1954, 쪽 - 도산안창호전집 쪽)에서, 이종호가 거기(해삼위)까지 가서 배반했다 고 쓰고, 어떤 경우에도 별로 낙담하는 빛을 보이지 않던 도산이 이종호의 이 배신행위 를 보고 여간 비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청도에서 가져간 돈 5천원마저 동지들의 해 산여비로만 충당하라고 명하고 도산은 한 푼도 갖지 않고 미국으로 갔는데, 바로 이 돈이 지금 와서 배반한 이종호의 돈이었기 때문 이라고 증언했다. 이종호가 도산의 방략에 비협조로 나오게 된 때는, 도산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서 블라디보스톡까지 갔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뒷 증언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49 제6강.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하였다. 선생은 미국에 있던 교민들과 함께 大 韓 人 國 民 會 를 더욱 조직화하는 한 편 동맹수련을 위해 흥사단을 조직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두 단계에 걸쳐 이뤄졌다. 1908년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가 스 티븐스 저격사건을 일으킨 후 미주에서는 박용만 이승만 등이 중심이 되어 이 해 7월에 콜로라도 덴버에서 애국동지대표회의가 개최되었고 그 회의의 결의에 따라 미국에 산재했던 애국단체를 통합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해 10월 하와이 합성협회 대표와 미 대륙의 공립협회 대표가 모여 통합을 결의하고 1909년 2월 1일 국민회를 결성했다. 국민회는 총회 산하에 북미지방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를 두었다. 그 이듬해 5월에 대동보국회가 여기에 참가하면서 대한인국민회라 개칭 하게 되었다. 229) 도산은 1911년 재차 도미하여 그 이듬해 11월에는 대한인국민 회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중앙총회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4개 의 지방총회가 조직되었으나 그것을 연결해주는 유기적인 조직이 없어서 역량이 결집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도산은 4 지방의 대표들을 모으기로 했다. 샌프란시스 코의 북미지방총회(이대위 박용만 김홍균)를 비롯하여 하와이지방총회(윤병구 박상 하 정원명)와 시베리아지방총회(김병종 유주규 홍신언) 및 만주지방총회(안창호 강 영소 홍언) 등 12인의 명의로 중앙대의회를 개최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하고 230) 도산이 중앙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중앙총회까지 결성한 대한인국민회는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묶어 해 외 한인들의 대동단결을 이룩해 낸 결실이었다.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의 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한인국민회는 한 때 미국 정부로부터 한국인을 대표 하는 기관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대한제국이 망하고(1910) 대한 민국임시정부가 서기(1919)까지 그 가교적인 역할을 감당했다고 해서 지나치지 않다고 할 것이다. 도산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 장의 직위를 십분 활용하여 시국문제를 협의하고 파리강화회의와 약소국국민동맹 회 등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외교적인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런 활동은 도산이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데에 앞장서게 했을 것이다. 이 무렵 도산은 흥사단을 조직했다. 국내외에서 힘의 조직화를 통해 국권회복 의 방략을 강구하던 도산은 조직의 핵심이 사람이라는 것과 사람을 양성하는 일 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1913년 5월 13일에 8도를 대표하는 인사들과 함께 흥사 229) 주요한, 安 島 山 全 書 上 篇 132쪽- 島 山 安 昌 浩 全 書 618쪽 230) 이 때 시베리아 대표는 전권을 위임하였고 만주엣는 미주에 거주하는 안창호 이하 세 사람에 게 대리위임을 시켰다

15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단을 조직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에 앞서 그는 국내에서 신민회와 청년학 우회를 조직했고 미주에서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등을 조직했는데, 이 중에서 신민회와 공립협회 및 대한인국민회가 어떤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조 직된 것이라면, 청년학우회는 그런 목표와 활동에 참여토록 주의와 이념에 공감 하는 사람을 양성하고 발굴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흥사단이 청년학우회 를 계승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갖는다. 흥사단은 청년학우회의 전통 을 계승하면서 주의와 이념에 공감하는 인재를 발굴, 양성하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도산은 흥사단이 청년학우회를 계승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이렇게 썼다. 나는 점점 동지와 약속한 것을 네가 직히느냐 하는 양심의 책망이 더해져서 맛 츰내 靑 年 學 友 會 를 시작하엿소. 그러나 임홈을 興 士 단이라 하게 된 것은 첫재 靑 年 學 友 會 라 하면 本 國 잇는 젼 학우원들이 더 곤란을 밧지 아니할가 하는 념네가 잇고, 둘재 前 靑 年 學 友 會 員 中 에 이미 그 정신을 일흔 자가 잇는데 그 處 分 을 엇 지할가 하는 理 由 로 일홈은 다르게 하얏으나 졍신은 더욱 간졀하엿소. 내가 시베 리아를 지날 적에 내 마음이 이상히 비창하야져서 만흔 눈물을 흘녓소. 朴 泳 孝 金 玉 均 으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 한데 뭉친 단결이라고는 二 十 명이 업섯다. 이러고야 망하지 안을 수가 잇느냐, 우리 민족은 너머도 단결상 신의가 박약한 민족이다, 내가 죽는 날까지 다만 한 두 사람과 일을 하더라도 나 깨다른 主 義 대 로 徹 底 히 나갈 뿐이다. 네가 내게 복종하고 내가 네게 복종하야 한 主 義 에 모히 는 단톄를 만들어야 하겟다, 죽는 날까지 다만 한 두 사람을 만나고 말지라도 이 러한 간졀한 마음으로 흥사단이 발기되엿소. 地 方 的 이라는 말을 내지 못하게 하 기 爲 하야 各 道 에서 한 사람씩 委 員 을 뽑앗소. 231) 그는 단결 을 중시하고 단결상의 신의 를 강조하며 죽는 날까지 한 두 사람을 만나고 말지라도 자신이 깨달은 주의대로 철저히 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한 主 義 밑에 모이는 단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하였다. 그가 흥사단을 조직한 것은 미주에서 공립협회를 세우고 국내에서 신민회와 청년학우 회를 설립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그는 그 전에 단결과 조직에서 현실적인 저해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지방색이 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이역만리 미주에서 흥사단을 조직하면서도, 한민족이 231) 안창호, 本 團 歷 史 島 山 安 昌 浩 全 集 제 8권 53-54쪽

151 제6강.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지방색 때문에 단결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각도 인물을 고 루 핵심 조직에 포진시킴으로 지방색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반영했다. 흥사단은 동맹수련단체로, 무실역행 건전인격 단결훈련 國 民 皆 業 등을 목표로 하 였다. 흥사단 운동을 통해 많은 인재들이 양성되었으나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 겠다. 6.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와 통일 운동 도산의 업적 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과 그 후 독 립운동을 통일 하는 데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1919년 3 1운동이 발발하자 도산은 3월 9일 원동통신원 玄 楯 이 보낸 전보로 그 소식을 받게 되었다. 도산은 이 때(3 월 1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위원회를 열고 3.1운동을 계승하자 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민족독립운동을 위해 미주에 거류하는 동포들이 져야 할 책임을 다 음과 같이 강조했다. 북미 하와이 멕시코에 체류하는 한인은 미국에 있음으로써 우리는 지금으 로부터 준비하여 널리 유세하며 각 신문 잡지를 이용하여 여론을 일으키고 종교계 에는 지금 한국 교도의 악형받는 참상을 널리 고하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 기를 청구합시다. 재정공급이 또한 북미 하와이 멕시코 재류 동포의 가장 큰 책 임이올시다. 이천만 민족이 다 일어나는 이 때에 우리는 대양을 격하여 내왕이 임의로 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몸을 바치는 대신에 재정 공급의 중임을 담부하 였으니, 우리는 금전으로써 싸우는 군인으로 생각합시다. 지금 맨주먹으로 일어난 우리 독립군들은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어서 바다 밖에 있는 동포들이 도 와 주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터이니 우리가 금전으로 싸우는 것이 생명으로 싸우 는 이만큼 요긴합니다. 그래서 재정 공급이 가장 큰 책임이라 하는 것이올시다. 232) 재정 지원을 강조한 도산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울 것을 언급하고 있다. 즉 무슨 벌이를 하든지 매 삭, 혹 매 주간 수입에서 20분의 1을 거두어들이게 하되 4월부터 시작하도록 하고 이달(1919년 3월)에는 북미 하와이 멕시코 재류 동포 전 232) 3.1운동을 계승 ( 安 島 山 全 書 中 言 論 資 料 篇 p. 90)

15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체가 한사람 평균 10원 이상의 특별 의연금을 내게 하자고 제의하였다. 도산이 중심이 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워싱턴 유타 네바다 등 9개주에 대 표를 보내 교포사회에 3.1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신한 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등 대표단 소요경비로 3,500달러를 보내는 한편 도산을 중국에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도산을 파송함 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국내 러시아 만주지방에 그들의 원동사업 을 활발 하게 전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산은 4월 1일 黃 鎭 南 과 鄭 仁 果 를 대동하고 뉴욕 호놀룰루 홍콩을 거쳐 5월 25일 상해에 도착했다. 한국 민족운동사에서 획기적인 분수령으로 꼽혀지는 3.1운동은 그 뒤 한국 독 립을 위해 무장독립운동과 무실역행운동 및 임시정부 운동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 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 최초의 민주공화국 을 이루는 계기를 만들었 다. 3.1운동을 계기로 나타난 임시정부로는 漢 城 임시정부와 상해 임시정부 및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 등이 있었다. 도산은 분열되어 있는 임정들을 통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그는 재정 문제 등 급한 것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통 일과 단합을 강조했다. 233) 도산이 통일을 강조한 것은 상해에 도착한 지 열흘 후 인 6월 4일에 행한 연설에서도 234) 보인다. 도산은 임정 내무총장에 취임하라는 권고에도 불구하고 6월 28일에야 취임하 였다. 도산은 통합을 위해서는,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라는 것을 국제사회에 과시 하는 이승만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보고, 위임통치안을 제안했다고 하여 배척받고 있는 이승만에 대해 그를 배척하지 말고 후원하자고 설득했다. 이 때 도산은 외 교방침, 군사행동, 재정방침 과 함께 다시 통일방침 을 역설했다. 도산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한 후 미주에서 갖고 온 자금으로 임 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재정과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시정 방침과 법령의 제정 도 서둘렀다. 연통제와 교통국을 만들고 군구제를 마련하였으며 홍보기관을 마련 하고 역사편찬사업도 준비했다. 임정이 그런대로 틀을 갖추게 된 것은 도산 같은 조직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산이 상해에 도착한 이후 임정은 활기를 띠 게 되었고 정부로서의 면모도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대한국민 의회와 상해 임정 한성정부 등에서 정부수반으로 임명된 것을 기화로 곧바로 외교 활동에 들어가 구미위원부 설립을 선포하는 한편 국제사회에 대해서는 자신을 President 로 소개했다. 이같은 이승만의 행보는 위임통치문제와 겹쳐 연해주와 233) 제1차 북경로 예배당 연설 ( 安 島 山 全 書 中 言 論 資 料 篇 pp ) 234) 제2차 북경로 예배당 연설 ( 安 島 山 全 書 中 言 論 資 料 篇 pp )

153 제6강.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만주 및 중국에 있는 교민들의 거부감을 사게 되었다. 임정이 체제도 갖추기 전에 분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이를 감지한 안창호는 정 국의 안정을 위해 정부 통합작업을 서둘렀다.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살려서 상해 임정과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면 미주 하와이 만주 시베리아 등지의 분산 된 세력을 하나로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미주 방면의 대한인국민회는 자기의 영 향력으로 합작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235) 도산은 대한국민의회와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서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상해 에 오도록 노력했다. 통합논의는 우여곡절 끝에 성사되어 노령의 대한국민의회는 해산되었다. 이렇게 정부와 의회가 하나로 통일되자 도산은 8월 28일 국무총리 대리 자격으로 임정 개조안과 헌법개조안을 임시의정원에 회부했고, 한성정부의 조각에 따라 도산은 노동국총판을 맡았다. 직제상 노동국은 내무부 등 다른 부보 다 한 단계 아래이므로 도산은 부의 총장보다 격이 낮은 총판으로 강등 임명된 셈 이다. 이렇게 도산은 통일을 위해서 스스로를 낮추었다. 도산의 노력에 의해 정부통합 작업이 이뤄졌지만, 통합정부의 출범에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대한국민의회파의 반발과 통합정부 교통총장에 임명된 文 昌 範 의 취 임 거부, 거기에다 이승만에 반대하여 외무총장 취임을 거부한 박용만은 북경에 눌러 앉아 있었다. 도산은 일을 추진한 자신이 물러나는 것으로 이 분열을 막고 자 자신이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 개조된 통합정부는 국무총리 이동휘의 참여와 항주에서 신규식(법무), 북경에서 이동녕(내무), 이시영(재무)이 도산의 초청해 응 함으로 11월 3일에 합동 취임식을 거행하고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1919년 9월 임정의 진용이 정비되고 임정 각료로 임명된 독립운동가들이 상해로 모여들자 도 산은 노동국총판에 취임하였다. 한성정부가 조직한 대로 임정요인들을 맞으면서 도산은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노동국총판 자리를 지키며 임정을 뒷받침했다. 임정은 1920년에 들어서서도 안정되지 않았다. 상해에 와 있던 임정 국무위원 들조차도 단합되지 않았다. 도산은 임정 내의 이런 분열상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 하는 한편 통일집중사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 임정에 대한 국민의 지지기반을 정착시키고 임정을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위치지우고자 했 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도산의 그같은 관여를 월권 이니 지방열의 화신 이니 야 심가 로 비난하여 정무에서 손을 떼게 했다. 도산이 임정에서 사임하자 이제는 도 리어 총리가 되어 줄 것을 제의하는 기호출신 국무위원이 있었지만 도산은 이를 235) 주요한, 安 島 山 全 書 上 傳 記 篇 211쪽 - 島 山 安 昌 浩 全 書 제 12권 697쪽

15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거절했다. 도산은 이렇게 임정 안에 만연했던 지역주의의 희생물이 되어 갔다. 뒤 에 도산이 노동국 총판까지 사임( )하고 임정을 떠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산의 통일운동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통합임시정부를 사임한 후에 국민대표회의에 관여하기도 하고, 유일당운동 과 이상촌운동 좌우합작 통일노 선에도 일정하게 관여했다. 그의 통일운동은 사상적으로는 대공주의 로 연결되고 정치적으로는 통일대당 으로 나아갔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언급 한 236) 바 있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7. 시대를 초월한 겨레의 참 스승 - 맺는말을 대신하여 선생은 1924말에 미국에 귀환하여 1926년 초까지 약 1년 반 동안을 미주에서 지냈다. 그 후 하와이와 호주를 거쳐 1926년 4월에는 홍콩으로 들어와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다시 국권회복운동의 현장을 고수하게 되었다. 홍콩에 도착한 도 산은 임정의 국무령 취임 요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는 대신 임정을 돕기 위한 임시정부경제후원회의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어서 그는 독립운동의 통일을 기 하기 위해 유일당 운동에 나서서 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하였고 아울러 흥사단운 동과 대한인국민회 확장에도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의 활동은 중국 관내를 비 롯하여 북만주와 필립핀 등지에까지 미쳤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 및 민간기구와도 연대하여 항일투쟁을 강화시켜 나갔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던 날, 선생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서 체포되어 1935년 2월10일 가출옥될 때까지 거의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강론하는 한편 평남 대보산 송태산장에 거처를 정했다. 1937년 6월 28일 동우회사건 으로 경찰에 피체, 서대문감옥에 다시 수감되었다. 몇 년간의 옥고를 거친 데다 수감생활에 다시 들어가게 되자 지병이 악화되었고, 이해 12월 병보석으로 풀려나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으나 이듬해 1938 년 3월 10일 향년 60세로 서거했다. 선생의 생애는 활동한 지역이나 내용이 매우 넓어서 일일이 매거하기 힘들 정도 다. 이 글을 끝내면서 그의 생의 의미를 필자 나름대로 간단히 정리하려고 한다. 236) 이만열, 도산 안창호의 통일 운동과 한국민족통일 ( 도산사상연구 제 7집, 2001) 참조

155 제6강.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도산 선생의 인격을 형성하는 기본적 가치관은 그리스도교 신앙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정직과 성실을 강조했고 합리주의와 도덕을 근거로 극단적인 모 험주의를 배격토록 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도덕주의를 우선한 선생은 준비 론과 점진주의를 강조했고, 독립운동 방략에서 테러리즘을 배격하는 대신 그가 기껏 취할 수 있었던 것이 정당방위 차원의 무장투쟁이나 전쟁이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는 전영택이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 있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선생은 20년 전 소년시절부터 예수를 믿고 그리고 열심으로 전도를 했읍니다. 교회를 세우고 일심으로 전도를 하고 친히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의 뜻을 충성스럽게 행하는 것이라고 믿 었던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극히 사랑하고 애독하였읍니다. 특별히 의에 주 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한 말씀이나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한 말씀을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그의 좌우명으로 삼았읍니다. 그리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나니라 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민족지도 이념의 근본 사상이 되었던 것입니 다. 한국사람은 정치가나 교육가나 종교가나 문학자가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 에 옳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저한 신념이었읍니다. 그래서 그가 친히 성경을 애독하면서 청년들에게도 읽기를 권했읍니다. 선생은 우리 2천만 동 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을 가지는 날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고 웨친 일이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읍니다. 나라를 위하여 밤을 밝히면서 근심을 하고 회개를 하면서도 신앙과 희망을 가지고 기도로서 하나님께 간구하였 읍니다. 이 기도의 정신과 성경의 교훈은 그의 평생의 나라를 위한 활동을 지배 하였던 것입니다. 도산 선생은 애국자요 민족운동가이었으나 종교가는 아니라 고 하겠읍니다. 판에 박힌 소위 종교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정신과 그 생애로 보 아서 또 종교가라고 보아도 잘못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그 어른은 철두철미 자기 부정의 생활을 하였고 사( 私 )를 떠나서 오직 공 ( 公 )을 위해서만 살았으니 이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자기 부정( 自 己 否 定 )의 정신 남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높은 자기희생의 정신을 배와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하겠읍니다. 237) 237) 전영택, 안도산( 安 島 山 ) 선생, 크리스챤 , 도산안창호전집 제13 권, 431~432쪽

15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전영택은 도산의 생애를 예수교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그것이 도산의 인 격과 사상, 애민애족의 근간을 이루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도산은 예수교의 진 리와 가치관을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고 사회적이고 민족적인 이념으로 승화시켜 나가려 했다. 그가 나름대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으로 보았던 회개와 사 랑을 사회적인 에너지로 활용하려고 했다. 회개를 인격혁명 개조운동의 방편으로 등식화시켰고, 사랑을 정의돈수로 활용함으로 종교적인 가치를 사회적인 이념으 로 만들어 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맥락은 백범 김 구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일가 김용기 성산 장기려 등으로 이어지는 기독교 사 회 민족 운동의 계보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선생은 조직가로서 통합력을 발휘했다. 그는 수많은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방략을 제시했다. 도산은 미주에서 공립협회를 조직하는 데서부터 귀국해서는 신민회와 청년학우회를 결성했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성립시키 는 조직력과 통합력을 발휘했다. 국내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에도 지방색 을 극복하고 통일과 통합을 이룩하는 데에 특히 공헌하였다. 임정이 창건되자 그 는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서 초기에 임정의 조직체계를 실질적으로 구성하 였으며, 국내 만주와 연해주 미주 중국에 있던 여러 독립운동 정파와 세력을 하나 로 묶어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을 이루었으며 지방색과 파벌을 융화시켜 통일을 이 룩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도산은 또 민족유일당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한국독립당 을 결성하는 데에도 앞장 섰다. 이 또한 그의 독립운동에서 통일적인 세력을 형 성하려는 일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좌우합작의 단계에까지 자신의 사상과 실 천을 밀고 나갔다, 도산의 통일 운동은 우선 그의 인격과 사상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는 산발적 인 세력을 조직화하고 그것을 통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서로 신 뢰할 수 있어야 하며, 신뢰의 바탕에는 정직과 진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도산은 양보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언제나 갖고 있었다. 도산의 조직력과 통일역 량의 바탕은 정직성과 포용성이었다. 특히 초기 임정에서 드러난 지방색과 파벌 성을 극복하는 데에 그는 포용성과 겸손 양보의 미덕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민족유일당 운동에서나 독립단체를 유기적으로 통합함에는 이념적인 갈등을 극복 해야 하는, 말하자면 죄우합작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도산은 좌파 사회 주의자들의 평등 정의의 주장을 수용하여 우파 민족주의자의 민족독립의 주장에 접목시키려 했다. 여기에 이념적인 좌우를 초월하여 독립운동을 통합적으로 이끌 어 가려는 도산의 의지가 나타나고 있었다. 사상적으로 볼 때도, 도산은 민족주의

157 제6강.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자이면서도 사회주의적 이념을 수용하려 했다. 사회주의 사상과 자본주의 사상이 결합된 모습이 뒷날 임정의 건국강령 의 삼균주의 등에서 나타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적인 요소는 이미 도산의 대공주의 등에서 크게 영향받은 것 이었다고 본다. 도산에게서 나타나는 좌우를 포용 초월 통합하려는 사상적 지향성 은 오늘날 통일을 지향하고 있는 남북한이 공유 성장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말 일제 치하의 민족적 최대 과제라 할 국권회복 자주독 립통일 운동에서 영웅적인 혁혁한 성과를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러면서도 그이만 큼 넓고 깊은 영향을 미친 지도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인자한 스승같은 지도자였 다. 그는 시대를 알았고 거기에 대처할 개인의 능력과 민족적 역량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위해 준비하고 점진적으로 개조해 가야 한다는 것을 신념 으로 했다. 그를 준비론자 점진주의자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만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는 독립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도 주장했던 지도자였다. 그는 개인의 도덕적 힘을 강조했지만 그 못지 않게 산업과 조직적인 역량도 중시했다. 그는 민족과 나라가 자주독립하기 위해서는 민족구성원 개개인의 인격이 성숙해 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그런 인격을 양육하는 데에 힘썼다. 선생은 개인적인 역 량을 조직을 통해 집결시키는 방략도 제시하여 그것을 국가적 역량으로 제고시키 려 했다. 개인의 인격연마와 함께 동맹수련을 강조하여 탁월한 조직가로서의 면 모를 보였던 선생은 시대를 초월한 겨레의 참 스승이었다. [이 글은 2005년 8월 10일 8월의 독립운동가 기념 학술회의(서울역사박물관)에 서 발표한 것으로 도산학보에 게재된 것이다.]

15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159 한국역사 속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한국근현대사 제 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 강사 : 이 만 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2009년 7월 2일(목) 저녁 7시 서울YMCA 친교실(2층) 주최 : 서울YMCA

16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161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基 督 敎 信 仰 人 으로서 古 堂 曺 晩 植 이만열 명예교수(숙명여대) 1. 머리말 古 堂 曺 晩 植 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일제 강점기와 해방 초기에 걸쳐 교육 경제 언론 체육 정치 등 근대 한국의 민족 민주 통일 운동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선생이다. 그는 풍운이 감돌던 19세기 말 음력으로는 1882년 12월 24 일(양력 1883년 2월 1일) 평양의 진향리에서 한학의 조예가 깊었던 昌 寧 曺 氏 景 㶅 과 慶 州 金 氏 敬 虔 을 부모로 하여 외아들로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본적은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이었다. 그가 태어났던 1882년은 壬 午 軍 亂 으로 한국의 신구세력이 치열한 대결을 벌이 던 해이기도 하지만, 그 해 5월에 미국과의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져 한국 이 서양에 대해 문호를 처음 개방한 해이기도 하다. 1876년 일본과 국교를 튼 조 선은 청 나라의 권유를 받아들여 서양 제국과의 국교를 터서 개화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미국과 국교를 맺은 후 이어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도 국교를 맺게 되었다. 白 凡 金 九 가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이 맺어지던 해에 출생, 거 의 평생을 일본에 대결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고당 조만식은 미국과의 국 교가 트여진 1882년에 출생하여 미국 선교사와 기독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역 사에는 가끔 이렇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우연스럽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일 어나곤 한다. 고당 조만식에 대하여는 그분이 위대했던 그만큼 그 동안 수많은 연구가 이루 어졌고, 이번의 학술대회에서도 종합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그 동안 고당에 대한 연구가 거의 교육자로서 혹은 물산장려운동의 실천자로서 또는 해방 후의 정치가로서의 모습은 부각시켰으나, 이러한 그의 삶의 근원이 되는 기 독교 신앙과 관련해서는 단펀적으로밖에는 언급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 마도 이번 학술대회에서 종교인으로서의 고당 선생 을 발제의 하나로 올려놓은 데에는 종래 그에 대한 이같은 연구경향을 반성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그의 생애를 전환시킨 기독교 신앙과 그와 관련된 기독교 활동을 살 피는 데에 초점이 있다. 그는 기독교에 입신한 이후 곧 선교학교인 숭실학교과

16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관련을 맺었고 일본에 유학할 때에는 동경에서 장 감 연합교회를 설립하는 데에 협력하였으며, 귀국해서는 기독교학교인 오산학교와 숭인상업학교에서 가르쳤고 평양 YMCA 총무에 산정현교회 장로로 시무하였으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에는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를 격려하며 그가 용감하게 그 반대투쟁을 선도 하도록 뒷받침했던 것이다. 그의 생애를 일별해 볼 때, 대부분의 사회적 민족적 활동은 어쩌면 기독교 신앙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느낍조차 갖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 그의 일생의 활동을 기독교적인 활동 내지는 관점과 관련시켜 살펴보는 것은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반대로 이 글에서는, 그 의 생애에서 중요한 활동이지만 기독교와 관련되지 아니했다는 필자의 판단 때문 에 언급되지 않을 부분이 있을 것임을 미리 전제해 두고자 한다. 2. 기독교 신앙 입문 고당 선생의 연보에 의하면 그는 1888년 7세때부터 평양의 관후리에 있는 한 학자 張 正 鳳 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이 때 같이 공부했던 학우로는 뒷날 그의 기독교 입신의 계기를 마련해 준 韓 鼎 敎 와 평생을 그와 동지적 관계에 있던 金 東 元 이 있었다. 1896년 15세 때에 일단 한문수학을 마친 듯한데, 이 때에 익힌 한문은 40여세에 이르러 민족적인 고뇌로 괴로와할 때 때때로 익명의 한시를 남 기게 했다. 한문수학을 마친 그 이듬해 1897년부터 그는 상업활동에 종사하게 되었고, 1904년 2월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상업을 그만두고 3월 13일 가족을 따라 대동강 중류 베기섬( 碧 島 只 里 )로 피난하였다. 그가 기독교에 입신하고 곧 금 주 단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즈음인 듯하다. 그 이듬해 1905년에 그는 선교사 베 어드(W.M.Baird 裵 緯 良 )가 1897년에 설립한 숭실학교(중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보에는 없지만, 그가 선교사를 만나고 기독교적인 분위기를 감지하 게 된 것은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인 열한두살 때라고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 다. 장황하지만 뒷날 그의 기독교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용해 보겠다. 서양인을 처음 보던 감상은, 아이 때의 일이 되며 잘 생각되지 아니 하나 기억에 남아있는 몇가지만 말씀하면 이러합니다. 내가 서양인을 처 음으로 보기는 열한두살 되었을 때 즉 임진년(1892)인가 계사년(1893)인 가라고 생각되며, 보았던 곳은 대동문 안 술막골 한석진 목사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목사의 맏 자제 고 民 濟 兒 名 갑손이는 나의 글동무였습

163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니다. 이 집에 서양인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늘 놀 겸 구경 겸 자주 가 서 서양인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서양인이 아니고 洋 鬼 子 였지요. 이 양 귀자는 馬 布 三 悅 목사였는지 혹 다른 목사였는지 그 때는 물론이오 지금 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커먼 옷, 커다란 눈, 높은 코, 참말로 모든 것이 무섭다기보다는 놀랍고 이상스러운 눈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다가 그 때 일반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양귀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약을 먹여 서 미치게 하는데, 약 먹이는 방법은, 몰래 얼른 입에다 슬쩍 스치기만 하면 곧 미쳐서 양귀자가 하라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모양, 그런 말 때문에 더욱 자주 구경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때마다, 양귀자 냄새나는 책자를 줍디다. 지금 생각하니 이 책자는 한문 으로 번역하여 인쇄한 쪽복음 즉 마태복음 누가복음 기타 부속서류인 引 家 歸 道 臨 慧 入 門 (sic. 德 慧 入 門 인듯) 등과 같은 조그마한 전도서류이었는 데 洋 紙 냄새와 印 刷 墨 냄새들이 그렇게 변하여 양귀자 냄새로 되었던 것인데, 그 냄새가 역시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인가 하여 좀 맡아보고는 내어버리던 것이 어제와 같은데, 벌써 40여년 전(1890년경)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 묵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238)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1892년에 들어서면서 선교사 마펫(S.A.Moffett, 馬 布 三 悅 )과 그래함 리(Graham Lee, 李 吉 咸 )를 평양에서 활동하도록 하고 韓 錫 晉 을 조사로 이 곳에서 함께 활동하도록 하였다. 고당은 어린 시절 한석진의 아들 민 제를 글동무로 삼아 그의 집에 드나들면서 선교사를 만나 그가 주는 마태복음 누 가복음 등의 쪽복음 성경과 <인가귀도>와 <덕혜입문> 등의 전도문서를 접한 적 이 있어서 기독교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그 가 선교사를 양귀자 라고 회상하였던 것도 당시의 다른 문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선교사에 대한 그런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1894년 평양에서도 기독 교인 박해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239) 이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다 한때 그와 상업을 같이 한바 있는 어린 시절 글 돔무 한정교의 전도로 그는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아마도 술과 환락으로 그 의 상업이 거의 거덜난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상업에 실패하고 홧김에 놀음을 계속할 때에 어떤 분이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해보라는 권고에 그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숭실학교의 문을 두들겼다고 한다. 240) 그의 기독교입문과 숭실학교 238). 조만식, <서양인 처음 보던 인상> (신동아 ) - 고당 조만식 회상록 (이하 회상 록 으로 약칭함. 고당기념사업회, 1995) pp ). 김승태, <1894년 평양 기독교인 박해사건>(한국기독교사 연구, 제 15 16호, ) 참고

16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입학은 장사에 실패하고 난 뒤에 이루어진 변화다. 인간의 실패는 하나님의 시작 이라는 사실은 고당의 생애에서도 나타난다. 숭실학교 입학과 관련,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숭실학교에 입학할 결심을 했고 아버님에게 승락을 받은 선생은 지 금까지의 술동무, 화류계 동무들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명목으로 그날 밤 이 새도록 餞 別 酒 를 마셨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장관이거니와 밤새워 술을 마시어 아직 입에서는 술내새가 나고 발걸음을 갈지자고 걷게 되는 작취미성의 몽롱한 꼴을 하고도 좌우간 숭실학교를 찾아가 당시 설립자 요 교장이던 고 배위량( 裵 緯 良 미국인) 박사를 만나 입학을 요구했다. 배 박사는 조선생의 곤쓰고 주정뱅이 같은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공 부는 무엇하려구 하겠나 하면서 숭실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없다는 표시 이었으나, 조 선생은 지금에도 어떻게 그러한 걸작의 대답을 했는지 알 수 없는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소 하고 대답을 한 것이 배 박사 를 감격케 하여 좋소!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으로 공부하시오 하면서 조 선생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한다. 241) 이렇게 기독교 신앙생활과 숭실학교 교육을 받게 되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방 탕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242) 전혀 새로운 생애를 걷게 되었다. 그는 이 때부터 ). 고당 조만식 회상록 에 실린 선생의 연보에는 1904년 노일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기독교 에 입신하여 금주 단연하였고 그 이듬해(1905)에 숭실중학에 입학하였다고 하여, 기독교에 입문 한 후에 숭실에 입학하였다고 하였으나, 다른 기록 예를 들면 東 京 敎 會 七 二 年 史 ( 在 日 大 韓 基 督 敎 東 京 敎 會, 1980)에는 유명한 조만식 씨는 23세때에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면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열열한 신자가 되었다 (P. 103)고 하여 숭실학교 입학 후에 기 독교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고당 자신이 술회한 <청년에게 드리는 말(나의 젊은 시절)>(회상록 pp )에 의하면, 그는 숭실학교에 입학하여서도 교사 몰래 담배를 피운 듯하며, 신앙생 활을 재미의 일종으로 말하기는 좀 무엇하지만 그 당시 나는 너무 방탕하였던 관계로 처음으로 학생도 되고 신앙생활도 하게 되매 즉 방향을 아주 전화하매 참말 새생활 새 분위기에서 호흡하 게 되여 그 재미와 그 맛을 무엇이라고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지내는 재미야 말로 지금은 그러한 재미 그러한 기쁨의 만족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유감천만이라 하겠다 고 한 것으로 보아 숭실에 입학한 후에 기독신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241). 조선일보 1938년 1월 6일자 - 회상록 pp ). 참고로 <조만식 선생의 청년학도시대>(조선일보 1938, 1, 6, 회상록 63-64)에서는 그의 젊 은 시절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조만식 선생의 소년시대 내지 초기의 청년시대에는 싸움 잘 하기로 날파람 잘하기로 담배 잘 피우기로 술 잘 마시기로 유명했고 화류장에서도 장수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싸움판에서나 날파람터에서는 물론 석전판에서도 선생의 그림자만 한 모퉁이에서 나 타나면 마치 솔개가 지나간 뒤에 병아리들이 조용해지는 듯한 감이 없지 않아 그 당시의 선생의 존재는 일반에게 공포의 표적이 되었다 한다. 이렇게도 남이 싫다는 짓, 좋지 않다는 것은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선봉대장격이 되어 가지고 24세까지 매일 장취( 長 醉 )의 생

165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여년간 금주 단연하는 생활을 철저히 지속하였다. 243) 고당의 기독교 입신과 관련하여 연상되는 한두가지가 있다. 그것은 첫째 평안 도 지역에서 기독교의 수용이 우리나라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빠르고 광범위하 였으며 또 다른 지역보다도 신자화와 교회설립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평안도 지멱은 복음선교사의 입국 이전에 만주에서 번역, 보급된 성경의 영향과 서간도 지역에 진출했던 한국인들의 기독교 개종으로 광범위하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다. 244) 둘째로 이 지역은, 숭실학교를 건립한 선교사 베어드 (W.M.Baird, 裵 緯 良 )의 지적처럼, 일찍부터 자립적인 중산층(Independent middle class)'이 우세하였고 245) 이들은 새로 수용된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 었다. 이것이 바로 서북지방에 기독교가 번창하게 된 요인이다. 이들은 기독교가 이 지역에 보급되었을 때에 기독교를 통해 개화운동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앞장 서게 되었다. 조만식을 비롯하여 이승훈 안창호 등이 중산층 계급으로서 뒷날 기 독교에 입신하여 민족운동에 나섰던 것은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그가 숭실에서 어떤 신앙훈련을 쌓았는지 남은 기록이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가 1905년 입학했을 때에는 설립자 겸 교장이었던 베어드와 한국인으로 朴 子 重 이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베어드는 맥코믹 신학교 출신으로 당시 시카고의 진 보적인 신앙사조에 대항하여 설립된 그 학교의 출신답게 마펫 등과 함께 선교사 로서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당시 한국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감안, 교육 자로서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선교를 꾀하고 있었다. 조만식은 당시 선교사들 이 가졌던 보수적인 신앙과 함께 베어드가 가르치는 사회적 구원 의 신앙을 감명 활과 같이 상업을 계속하였다니 상업이 거덜이 났을 것은 분명한 일이거니와 원래 두뇌가 명석 하고 고집이 센 선생은 이러한 사도( 邪 道 )를 집어던지는 데에도 또한 상쾌하였다 한다. 243). 고당 선생은 40여년간 끊었던 술과 담배를 해방 후에 다시 시작하였 던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생이 갑작스레 변한 데 대하여는 모두 의아와 驚 異 로서 선생을 우러러 보았다 고 한다.(평안남도지편찬위원회 편, 平 安 南 道 誌 (평안남도지편찬위원회, 1977, p.280) 이 점에 대해 해방 후 고당의 권유에 의해 對 酌 한 바 있는 吳 泳 鎭 은 <고당 조만식 선생>에서 여하튼 곁에 있으면 떠나고 싶지 않은 분이었고 해방 후여러 사람과 접하시면서는 그들에게 부담감을 준다고 오래 끊으셨던 술과 담배를 일부러 조금씩 하실 만큼 상대방에 배려를 깊이 하신 분이 다 (고당 조만식 회상록, 29)고 증언한 바 있고, 安 基 榮 은 해방 후 각 시 군 위원장 서장 연석회 의에서 각지에서 혼란상태를 접하고 어찌나 상심하셨는지 단상에서 권연까지 피우시는데 큰 충 격이 아닐 수 없었다 (고당 조만식 회상록, 171)고 술회하였다. 244). 이 점에 관해서는 이만열, <1880년대 서간도 한인촌 기독교 공동체 연구> < 徐 相 崙 의 행적에 관한 몇가지 문제>(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등을 참조 245). 이광린, < 開 化 期 關 西 地 方 과 改 新 敎 - 개신교 수용의 一 事 例 ->(숭전대논문집, 제 5집, 인문 사회과학편) P.440. 이광린은 자립적 중산층 을 언급한 영문판 독립신문(The Independent) Vol 2, No. 59, May 20, 1987의 기사를 베어드의 글이라고 추정하였다

16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깊게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베어드가 말했다는, 내가 조선에서 전도할 새 조선인은 내세 영혼의 천당구원을 위함보다 현재의 사회적 구원 즉 실제생활 에서 구원을 얻으려함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246) 는 말을 인용하곤 하였다. 이것 은 그가 베어드로부터 어떤 점에서 감화를 받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고당이 학생이었을 때에 한국인 교사로서 박자중이 약 1년간 가르쳤을 것이 다. 그는 1895년에 기독교에 입신하였고 처음에 소학교 교사로 봉직하다가 1900 년에 중학교 교사로 전임하였다. 박 선생은 성품이 온화하고 지추가 청한하며 행 위가 단아하고 학문이 깊고 지식이 넓어 일찍이 세상에서도 꽃다운 이름을 얻 은 247) 분으로 교회에서는 장로추천까지 받았으나 1906년 56세로 돌아갔다. 장례 때에 숭실의 소중학교와 온 교우 형제자매 수천여명이 그 상여 전후에 호상한 것 으로 보아 그에 대한 흠모가 지극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교사 박자중도 고당 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당은 23세에 입학한 숭실에서 신학문 을 공부하고 기독교 신앙에 접함으로 세계관을 넓히고 과거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는 등 거듭난 생활이 시작되었다. 고당은 학생 시절을 회상한 적이 있다. 248) 학생 때에 개화한 사람은 양안경을 끼 어야 한다는 법이라 하여 미국으로부터 도수가 맞지 않은 금테 안경을 쓴 것이며, 숭실도서관 근처에서 쉬는 시간에 담배쟁이들이 모여 망을 보며 몰래 담배질을 하던 것이며, 운동회 때 紅 帽 를 쓰지 않도록 항의한 일 등도 있었지만 모든 학과 의 과목이 새롭고 새로우며 또한 신기하여, 이런 학문을 내가 왜 이제야 배우게 되었는가 하는 晩 時 之 歎 이 생 겨서 열심히 공부하여 無 等 (1학년의 예비급)으로 입 학한 그가 1년후에는 2학년으로 승급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을 통한 새 생활의 재미를 무엇이라 다 말할 수 없 을 정도로 느겼다는 것이다. 249) 신앙생 활을 통해 그는 많은 기쁨을 맛보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숭실 시절을 이렇게 결론내렸다. 공부하고 기도하고 또 전도하고 그러고는 학우들끼리 즐겁고 웃고 놀고 불규칙하나마 운동하고 이렇게 학우들은 친밀이 사귀며 지냈다. 여 기는 반목도 질투고 시기도 파벌도 彼 我 도 다 없는 참사귐이었으며 참 낙원이었다. 이것이 순진한 초대 학생이었는가 보다. 옛날의 그 일이 퍽 246). 조만식, <생산과 소비와 우리의 각오>( 월호 삼천리 - 회상록 p. 414에서 재인용) 247). <그리스도신문> 10권 25호( ) pp ). 조만식, <청년에게 드리는 글(나의 젊은 시절)>(회상록 pp ) 참조 249). 앞의 주 3) 마지막 인용문 참조

167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그리워진다. 250) 고당은 뒷날 白 光 지와의 인터뷰에서 숭실학교 시대에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 우를 소개하라는 질문에, 무어 가깝다는 것보다도 그 때 동기생으로 林 鍾 純 朴 尙 純 金 得 洙 故 孫 貞 道 등 제씨였지요 251) 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이 중 임종순 박 상순 손정도는 한국교회사 및 한국민족운동사에 남는 인물들이고, 김득수는 생물 학자요 교육자며 좋은 신앙인으로 평양의 광성중학교의 교장과 평양 YMCA 발기 인으로도 활약한 이다. 처음 무등으로 입학했을 때는 13명이었으나, 그가 월반하 는 등 변화가 있었으므로 숭실중학 5회로 같이 졸업한 이들은 23명이었고, 252) 고 당이 거론하지 않은 인물 중 이성휘 선우혁도 쟁쟁한 분들이었다. 이렇게 고당은 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어가는 시기에 숭 실에서 좋은 벗들을 사귀며 자신으로서는 새로운 신앙에 심취하며 내일을 준비하 고 있었다. 숭실과 기독교 신앙, 그의 생애에 함께 닥아왔던 이 두 사건은 조만식 을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제 그의 생은 이 렇게 수용한 기독교 신앙을 근거로 해서 전개되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3.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 - 東 京 유학생 시절 고당은 숭실을 졸업하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신앙으로 무장된 그는 처음 그가 숭실에 입학할 때 베어드 교장에게 약속했듯이 하나님의 일 을 하기 위하여 더 배워야 한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1908년 3월에 숭실을 졸업하고 4월에 동 경 세이소쿠( 正 則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거의 3년간 영어를 전공하였다. 이 때 고 당은 비로소 인도 간디의 자서전 을 읽고 그의 무저항주의와 채식주의에 철저히 공명하였다. 뒷날 그가 한국의 간디로 추앙받게 되는 것은 이런 계기가 있었다. 29세에 영어학교를 졸업한 그해 1910년 그는 다시 메이지( 明 治 )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였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도 같아 많은 우국지사들이 조국을 떠나 250). 조만식, <청년에게 드리는 말(나의 젊은 시절)>(회상록, p. 392) 251). 회상록 p ). 牟 義 理 (E.M.Mowry)를 편집 겸 발행인으로 하여 간행된 崇 專, 崇 實 卒 業 生 名 簿 (1938)에 의 하면, 1908년에 졸업한 崇 中 5회 졸업생으로는 金 應 道 金 得 洙 金 聖 益 ( 死 ) 金 贊 根 羅 頌 德 朴 尙 純 朴 永 一 ( 死 ) 方 承 幹 白 永 殷 白 允 弘 ( 死 ) 鮮 于 爀 孫 貞 道 ( 死 ) 安 昌 德 ( 死 ) 李 聖 徽 李 英 徽 ( 死 ) 李 惠 疇 林 鍾 純 張 根 ( 死 ) 張 信 國? 昌 浩 鄭 達 成 曺 晩 植 趙 成 範 등인데, ()안의 死 는 조사당시 永 眠 한 이 들이다

16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계속 일본에서 공부하려고 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었을 것이다. 논리 못지 않게 이를 가능하게 한 요인은 그 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일시적인 분노와 좌절을 절제할 수 있었기 때문 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그뒤 그가 한때 망명의 길을 택하려 했음에도 불구하 고 일제 강점기에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일신의 안녕을 포기하고 평 양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북한의 민중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선택하겠다고 결심한 데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평양에서 시작된 그의 신앙은 연륜을 쌓아감에 따라 점차 성숙되어 갔다. 신 앙은 듣고 가르침 받는 것을 통해서도 성장하지만, 봉사를 통해서도 성장하는 법 이다. 고당은 동경에서는 한인교회의 설립과 연합 그리고 영수의 책임을 맡았고, 귀국 후에는 오산 광성 등 기독교학교에서 성경교수와 설교를 통해, 산정현교회 의 장로로 그리고 평양 YMCA의 총무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한국 기독 교계의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한인들에 의한 동경교회 가 설립된 것은 1908년이며 유학생들과 관련이 깊었 다. 1876년 이래 한국인들의 일본유학이 시작되었는데, 1908년 교회가 설립될 때 에는 동경유학생이 관공립학교를 통털어 270명이나 되었다. 253) 유학생들을 위해 1906년 8월에 在 日 本 東 京 朝 鮮 基 督 敎 靑 年 會 가 창립되었고 254), 이 때 조만식은 청년회 창설자의 한 사람이었다 255). 청년회관에는 주일마다 학생들이 모여 예배 하고 있었다. 동경의 청년회 총무를 역임한 白 南 薰 의 증언에 의하면 256), 1908년에 鄭 益 魯 장로가 평양으로부터 국한문 옥편을 편찬하기 위해 동경에 와 청년회관에 유숙했다. 앞으로 유학생이 많아질 것에 대비, 정 장로는 교회를 세울 것을 권고 하였다. 논의 중에 장로교로 할 것인가 감리교로 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감리교 신자가 한 사람 뿐이므로 장로교로 하기로 하고 본국의 장로교회에 이를 보고, 목사의 파송을 요청하였다. 그 이듬해(1909) 5월에 韓 錫 晉 목사가 와서 김정식 조 만식 吳 舜 炯 을 領 袖 로, 金 顯 洙 莊 元 瑢 張 惠 淳 白 南 薰 을 집사로 하여 교회를 조직 하였다. 257) 253). 吳 允 台, 東 京 敎 會 七 二 年 史 ( 在 日 大 韓 基 督 敎 東 京 敎 會, 1980) p. 71. 참고로 1909년에는 323명, 1910년에는 유학생이 420명이나 되었다 한다. 254). 당시 총무는 金 貞 植, 간사는 張 惠 淳 으로 처음에는 일본기독교청년회관 사무실 한칸을 빌어 쓰다가 1907년 일본인 가옥을 세로 얻어 이사하였으며 1914년 9월 神 田 區 西 小 川 町 2 丁 目 5번 지에 2층 양옥 회관을 건축하여 그곳으로 옮겼다. 255). 대한 YMCA 연맹 엮음, 韓 國 YMCA운동사 (f 路 出 版 1986) p. 50: 全 澤 鳧,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정음사, 1978) p ). 白 南 薰, 나의 一 生 ( 解 慍 白 南 薰 先 生 紀 念 事 業 會, 1968) pp 및p. 121 참조

169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이렇게 장로교회로 출발하고 보니 뒷날 문제가 생겼다. 감리교인 학생들( 盧 正 一, 金 永 燮 외 6, 7명)이 왔다가 이 교회가 장로교회임을 알고 유학생 감독부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시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던 고당은 이를 알고 급 히 백남훈에게 편지를 띄우는 등의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고당은 일본 사람들 의 이목을 생각해서라도 따로 예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258) 고당의 이같은 노력의 결과, 본국의 장로교 감리교회와 교섭, 동경교회를 장 감연합교회로 만들 었던 것이다. 259) 고당의 에큐메니칼한 이념과 실천이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이 러한 의식이 뒷날 고향을 묻지 맙시다 라고 외치면서 예상되는 교파적인 분열은 물론 지역적 갈등도 대승적으로 승화시켜 민족적 화합을 주장하게 되었다. 4. 기독교 신앙교육과 실천성 - 오산학교 봉직 시절 1913년 명치대학 점문부 법학과를 졸업한 고당은 평북 오산학교 교사로 초빙 받아 부임하였다. 늦깍이로 배움의 길에 나섰던 그였지만, 이제 자신이 그동안 배 운 바를 나누고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왔던 것이다. 더구나 五 山 이라면 그가 존 경하고 있던 南 崗 이 창립한 학교다. 그로서는 배움의 길에 나선 이후 그 배움을 실천하는 첫 발걸음이 오산으로 향했기에 더욱 흔쾌한 마음으로 부임했을 것이다. 오산은 개교이래 선생과 학생이 함께 기거하는 전통을 세웠다. 고당은 이 전통을 더욱 견실하게 만들면서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신앙의 훈련을 강화하였다. 오산에 서 고당의 지도를 받았던 김기석과 김홍일은 이렇게 그들의 존경하는 스승을 회 상한다. 257). 吳 允 兌 는 그가 쓴 東 京 敎 會 七 二 年 史 에서 창립 당일 참석한 사람들은 한석진 목사와 영 수 집사 7명 외에 金 洛 泳 金 錫 泳 金 錫 晉 金 鴻 亮 李 容 彰 李 寅 彰 林 炳 日 張 膺 震 咸 錫 殷 등이 참석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p. 95). 한편 大 韓 예수 敎 長 老 會 獨 老 會 는 1909년 韓 錫 晉 목사를 東 京 에 파송하여 조선 유학생에게 3개월간 전도케 하였고( 郭 安 連, 長 老 敎 會 史 典 彙 集 p.7, 1909 史 ), 1910년 제 4회 독노회는 한석진 씨가 일본 동경에 교회성립과 신자의 형편과 전도사 청 구서를 보고하매 회중이 전도국에 맡기기를 동의하여 가로 결정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제4회독 노회록, 1910, p. 16)와 일본 동경에 박영일씨를 전도인으로 사개월 동안만 파송할 일 (동 노 회록, p. 14)을 보고받았으나, 박영일 장로는 유학생에 전도하다가 신병으로 귀국, 별세하였다 ( 郭 安 連, 長 老 敎 會 史 典 彙 集 p. 8). 258). 白 南 薰, 나의 一 生 ( 解 慍 白 南 薰 先 生 紀 念 事 業 會, 1968) p ). 그 뒤 이 교회의 목회자는 장 감이 교대해서 부임하였는데, 초대 朱 孔 三 목사로부터 2대 吳 基 善 목사, 3대 李 汝 漢 목사, 4대 오기선 목사, 5대 林 鍾 淳 목사 등이었다. - 白 南 薰, 앞의 책, p

17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그는 아침 6시에 학생들과 같이 일어나 아침체조를 같이 하고 학생 들 틈에 끼어 구보도 같이 하였다. 그 때 오산학교는 사환이 없고 청소 를 위시하여 난로피우기 장작패기 같은 일은 선생과 학생들이 맡아서 하 였다 고당은 여러 번 학생들을 데리고 제석산에 가서 오리나무를 베어 같이 날라왔다. 겨울에 눈오는 날 아침이면 고당은 맨 먼저 교정에 나와 선생과 학생들이 다닐 길을 내고 운동장 눈을 쓸었다. 그는 학생들을 가 르치고 생활을 지도하고 같이 장작을 패고 눈을 쓴 것뿐이 아니었다. 그 는 기도회를 주관하여 기도를 올리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였다. 그는 언제나 민족을 위하여 간구하는 기도를 올렸고 설교로 듣는 사람의 마음 에 맑은 물결을 일으켰다. 고당이 오산에 온지 1년이 못넘어 오산은 놀 랍게 변모되었다. 교직원과 졸업생은 다시 단결을 찾았고 학생들 사이에 는 검소한 기풍이 번져나가고 학교와 교회에는 새로운 신앙이 불타 올랐 다 260) 그는 교장이면서 사감이면서 사환과 교목까지를 겸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같은 돈독한 목자들이 나온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백인제( 白 麟 濟 )가 독일로 유학을 가고 朱 基 鎔 과 金 恒 福 이 교육에 헌신하기로 하고 金 弘 壹 이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 고 洪 鐘 仁 이 신문기자가 되고 李 鎬 와 林 克 濟 가 이과계통에 진학하고 한 것이 고당의 영향아님이 없었다. 이 예언자를 겸한 교육자는 언제나 제 자들에게 경건한 신앙과 높은 이상과 민족을 위하여 바치는 헌신의 감정 을 불어넣었다. 스승의 고매한 모습과 맑은 목소리는 제자들을 게으른 잠에서 깨어 일으켜 그들의 혈관 속에 새로운 피를 부어넣어 주었다. 고 당은 오산에 있으면서 보수를 받은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수 받는 동지들에게 보수를 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넉넉한 형편을 미안하 게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1926년 가을 고당은 전후 9년에 걸친 오산생활 을 그만두고 평양으로 나왔다. 261) 고당 선생께서는 그 때 오산중학에서 수신(도의)에 해당하는 성경을 가르치시고, 또 특별예배도 주도하셨는데, 하루 아침엔 수신시간에 들어 오셔서 성경을 가르치시며 '예수님이 人 子 로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교훈 은 눈물과 땀과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은 '눈물 즉 同 情 과 사랑, 피 즉 희생, 이 세가지는 우리가 본받아서 민족을 사랑하며, 나라를 위해 땀흘려 일을 해야 하며, 최후에 가서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각오 를 가져야 한다'고 침통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262) 260). 金 基 錫, <고당 조만식의 오산시절>(회상록, 1995) p ). 김기석, 앞의 글, p ). 김홍일, <눈물, 땀, 피의 교훈을 주신 분>(회상록) p

171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성경시간에 비록 전문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로서 가르친 것이었지만 고당은 기독교의 대속의 진리를 바르게 가르쳤고 기도회를 주관하고 특별예배를 인도하 는 등 오산인들을 신앙인으로 무장시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오 산을 졸업한 이들 중 민족과 인류를 위해 희생 봉사한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은 그의 이러한 신앙교육이 남긴 값진 유산 때문이요, 그가 세운 이러한 신앙 중심적인 학풍 때문이었다. 오산에 부임한 지 2년 후 그는 교장의 자리를 맡아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남강이 자기는 학교의 운영만 맡고 교육을 고당이 맡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김기 석은, 고당이 학교의 책임을 맡은 1915년부터 교장직을 물러나는 1919년까지 5년 간을 오산학교 교육의 황금시대 라고 하였다. 이 때 백인제 백봉제 김주항 주기용 박동진 주기철 김택호 이약신 김동진 한경직 임창선 김항복 김홍일 조진석 등 한 국의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263) 고당이 교장에 취임한 그 다음해(1916)에 입학한 한 경직은 스승 고당에게서 배운 성경과 지리 특히 사도행전 강의를 오랜동안 기억한 다고 하면서, 선생의 교육방침은 철저한 신앙으로써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며 학 문과 지식을 배워서 민족중흥에 투신할 수 있는 애국자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 264) 고 술회하였다. 고당은 오산에서 신앙과 실천에 바탕한 민족교육을 시행하였다. 5. 기독교 운동과 사회 활동의 접목 - 평양 YMCA 總 務 고당의 행적 중 필자에게 석연하게 설명되지 않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1919 년 2월 27일 都 寅 權 과 함께 상해로 가려다가 江 東 에서 붙잡힌 것이다. 이 사건으 로 그는 2년의 언도를 받았고 이듬해 1920년 1월에 가출옥되었다. 남강 또한 3 1 운동 주도자로서 감옥에 갇혀 있었기에 고당은 남강을 면회하고 이 해 9월 다시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돌아왔다. 3 1운동 때 오산학교는 일제에 만행으로 교사가 불탔다. 고당은 교사 학생과 함께 임시교사를 지었다. 그러나 일제는 민족주의자 조만식이 오산학교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인가하지 않아 1921년 4월에 오산 학교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평양YMCA 총무로 취임한다. Y는 1914년에 전국연합 회를 조직하였다. 평양 Y는 1920년 11월부터 준비하여 그 이듬해 3월 21일 남산 263). 김기석, 앞의 글, pp ). 한경직, <고당 선생의 신앙과 민족교육> (회상록) p

17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현 예배당에서 각 교파 교인들과 사회인사 8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발기회장 김 동원의 개회로 창립총회가 열렸는데, 이들은 평양 교계만 아니라 민족적인 지도 자들로서 장 감 양교파 지도자들이 이처럼 결속된 것 은 이채로운 일이었으며, 초 대 임원진은 회장에 김득수 부회장에 김동원 총무에 조만식이었다 265). 창립취지 문에서 그들은 자유와 인도 정의의 기치를 높이 들 것을 주장하고 만국청년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경천애인의 복음으로 經 을 삼고 청년의 지덕체 三 育 의 발달로 緯 를 삼았음을 강조하고 평양에서 늦게나마 시작된 이 청년회운동에 크게 호응하 기를 권고하였다. 조선의 제 2도시로 신문화 발전의 영원이요 기독교의 중심지인 우리 평양에 이러한 기관이 우금까지 설립되지 아니함은 실로 기괴한 사실이 요 또한 유감천만으로 여기던 바이더니, 다행히 작금 수년에 우리 청년 은 크게 각성한 바 있어, 혹은 부허경박하고 무위안일에 답하고, 혹은 사 리에만 급급하던 可 憎 可 憂 할 지경에서 초월하여, 자신의 수양과 사회활 동에 전심하려는 크게 경하할 경향이 있음을 본 오인은, 우리 청년은 이 제는 차차 세계의 청년으로 더불어 보조를 아울러 인류의 문화와 행복을 위하여 만분의 공헌이 있기를 바라며, 따라거 평양 청년을 위하여는 영 원무량의 행복이 되기를 위하여 평양기독교청년회 를 발기하노니, 오인 의 所 意 를 양해 공명하는 유지 청년 제군은 호응 찬동하기를 절망하노 라. 266) 고당은, 연보에 의하면,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1년간 평양의 기독교청년회 총무로 봉직하였다 267). 한편 그는 1925년 전국 Y연합회의 도시부 위원으로 활동 하였고 268) 1929년에는 황찬영씨가 기부한 2천여평의 토지에 콩과 고구마를 회원 265). 전택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정음사, 1978) p ). 전택부, 위의 책, p ). 고당의 기독교청년회 총무직 연한과 관련, 김기석은 고당이 1921년에서 1924년까지 4년동안 기독교 청년회 총무로 吳 允 善 김동원 金 性 嶪 金 炳 淵 같은 이사들과 손을 잡고 물산장려회 관서체육회를 조직 하였다고 하여 4년간임을 주장하였다(김기석, <고당 조만식의 오산 시절> 회상록, p.82). 그러나 전택부 는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정음사, 1978) p. 355에서 1929년에 평양 기독 교청년회는 회장 김동원 총무 조만식이었음을 언급하였고, 평양노회사 (평 양노회사 편집위원회, 1990)에도 고당이 1921년부터 11년간 평양Y의 총무였다 고 증언하고 있다. 268). 전택부, 앞의 책, p 이 때 그와 함께 한 도시부위원은 尹 致 昊 白 南 埰

173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공동으로 재배하였으며 대동군 청동리에서는 절약저금조합을 조직하기도 하였 다. 269) 그는 총무직을 사임한 후에도 계속 Y와 관례를 맺고 있었는데, 1932년 12 월 29일 서울의 중앙청년회 회관에서 전국 62명의 대표로 개최된 제 7회 조선 기 독교청년회 연합회 정기대회에서 고당은 윤치호 유억겸 양주삼 등 15명과 함께 연합위원에 선출된 적이 있고, 1938년에는 평양 Y의 이사로서 회장 김동원과 총 무 김취성를 도와 기독교청년회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당은 좋은 신앙은 좋은 인격을 낳는다는 신념을 가졌고 또 그것을 실천하였 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졌듯이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 했다. 그는 옳지 않고 바르지 않은 일에는 추호도 타협이 없었으며 거짓을 싫어 하고 꾸미는 것을 미워하였지만, 회무를 처리할 때에 늘 인화와 관용을 중요시하 였다. 최승만의 다음 회고에는 고당의 이러한 인격이 배어나 있다. 그리고 잊혀지지 않는 것은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위원회 때의 일이다. 그 때의 위원은 李 商 在 尹 致 昊 申 興 雨 兪 億 兼 李 舜 基 (함흥) 매큔 (선천) 金 東 元 고당 선생과 본인 등이었는데, 의논하는 일은 함흥에 있던 서양인 번스와 중앙에 있던 서양인 간사 내쉬에 관한 일이었다. 중앙의 신흥우 연합회 총무와 협동총무 반하드 씨는 번스와 내쉬도 간사직에서 파면시켜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이 때에 중앙과 지방의 의견이 대립되어 상당한 격론이 있었는데 그 때에 가장 열렬히 반대의 의견을 주장한 분 이 고당 선생이었다. 아직도 네 귀에 쟁쟁한 것은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 들에게 다소의 의견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를 면직시킨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니냐 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화평을 좋아하면서도 그릇되고 의 아 닌 일에는 모른 체하시는 어른이 아니었다. 결코 무사주의나 안일주의로 불의부정에 타협하시는 어른이 아니었다 270) 고당이 기독교 청년회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한 것은 다음 몇가지로 정 리될 수 있다. 첫째 상담을 통해 민중 들을 돕는 일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요 즘 말로 상담이지, 당시로는 억울하고 어려운 일들을 호소하는 것을 들어주고 해 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식민지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조선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들과 고난을 같이하는, 제사장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자세라 할 것이 梁 柱 三 具 滋 玉 등 5명이었다. 269). 전택부, 앞의 책, p ). 崔 承 萬, <향기로운 행적을 남기신 분> (회상록) pp

17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다. 그러기에 시민들은 고당이 그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얻었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吳 基 永 의 회상이다. 선생이 매일같이 기독청년회에 나와 앉아 있으면 그를 찾아오는 사 람은 정말 각 방면 인물이다. 억울한 호소, 딱한 의논, 입학시험에 낙제 한 학생의 부형, 낙제의 염려있는 학생의 부형, 지방에서 처음으로 평양 오는 사람의 방문, 심지어 년전에는 出 奔 한 계집 때문에 찾아 온 노동자 도 있었다. 선생은 반드시 이들과 악수하고 친절로써 그의 온화한 성품 을 발휘한다. 271) 두번째로 그는 기독교청년회에 있으면서 각종 민족운동을 주도하고 거기에 대 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고당이 기독교청년회 총무시절에 관여한 대부분의 민족운동, 예를 들면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회 운동, 신간회 운동 등과 또 오산학교 교장에 다시 취임하고 숭인상업학교 이사장으로 활략한 것은 기독교청년회 총무직과 병행하여 수행하였던 것 같다. 그는 기독교 청년회 총무 직에 무보수로 봉사하였으나 272) 그 총무직이 갖는 다양한 활동영역을 활용하여 민족운동에 헌신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으로 만들어갔음은 부정할 수 없다. 3 1운동을 전후하여 교회에서는 금주 금연 아편 축첩 매음 잡기 등의 사회악에 대한 정화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 8월 24일에는 평양의 조만식 김동원 등 50여명 의 기독교인들이 물산장려회를 창설하고 국산품애용운동에 나섰다. 물론 이 운동 은 1922년부터 자급 자족 운동과 병행하여 더욱 본격화되었고 1923년에는 전국적 인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에 국산품애용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평 양에서는 면려청년회와 평양노회 농촌부와 Y가 크게 협력하였다. 이 때부터 고당 은 말총모자와 짧은 수목두루마기와 편리화를 신어 유명하였다. 그가 물산장려운 동을 벌이는 기간은 그가 평양Y의 총무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민립대학 기성회(1922)에 관여한 것이나 민족운동 단일체인 신간회(1927)의 중앙위원 겸 평 양지회장으로 있었던 것도 Y총무 시절이다. 그는 Y를 매개로하여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과 민족의식의 사회화를 접맥시킬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및 민족의 지도자로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세번째로 고당은 Y총무 시절에 무엇보다 젊은이들을 깨우는 데에 주력하였다. 271). 吳 基 永, <조만식씨의 이꼴 저꼴>(고당 조만식 회상록) p ). 한경직, 위의 글, p

175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그는 전국 Y 제1회 하령회(1927)부터 3회(1929)에 이르기까지 계속 강사로 참여 하였다. 하령회에서 강연한 내용은 당시 기자가 청강하여 Y연합회 기관지인 靑 年 지에 계재하여 그가 외친 내용을 통해 그의 사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 다. 273) 그는 이러한 강연에서, 전래 초기에 猛 進 的 으로 우리의 제도와 생활을 변 화시키던 기독교가 이제는 睡 眠 중에 있다고 경고하는가 하면 274), 어느 박사가 조 선을 시찰하고 동경에 돌아와 조선 유학생들에게 했다는 "세계 어느 나라든지 조 선처럼 일 많은 나라는 없다. 동시에 조선청년쳐럼 사명이 큰 사람은 없을 것이 다" 275) 라는 말을 인용하여 젊은이들을 격려하였고 또 숭실학교 창립자 선교사 삐 드워드(베어드, W.M.Baird 裵 緯 良 ) 박사로부터 내가 조선인에게 전도함은 영혼 의 천당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今 世 에서 민족적 구원을 위함이라고 들었던 말을 인용하고는 기독교인인 우리는 何 事 를 하든지 此 福 音 을 압세우고 大 願 을 품고 진정한 봉사가 잇은 후에라야 진정한 수확을 得 할 것이다. 결론에 우리 생활은 좋은 신앙 좋은 수양을 가지고 진정한 봉사를 하라 함이다 276) 라고 강조하였다. 이 밖에도 고당은 숭실 대강당과 각 교회에서 부흥집회와 민중을 깨우치는 집회 를 자주 열었고 277) 지방의 강연에도 부지런히 내왕하여 청년들을 깨웠다. 278) 고당은 또 평양 소재의 광성학교와 숭인상업학교에서도 아침 예배를 볼 때에 가끔 설교를 하거나 혹은 강연할 때가 있었다. 채플 시간이 학생들에게 인기있는 시간이 아니었지만 고당 선생의 말씀은 대인기였다. 그의 말에는 언제나 새로운 273). 하령회에서 행한 조만식의 강연으로 靑 年 에 소개된 것은, 1927년 제1회 하령회에서 행 한 < 基 督 敎 와 實 生 活 >(1927년 9월호)와 < 朝 鮮 基 督 學 生 의 態 度 와 使 命 >(1929년 9월호) 및 < 基 督 敎 人 의 生 活 >(1935년 9월호)가 있다. 특히 1935년 8월 27일 30일 금강산 장안사에서 행한 강연 < 基 督 敎 人 의 生 活 >은, 靑 年 에는 두 페이지 밖에 소개되지 않았는데 비해, 基 督 申 報 에서는 1,032호( )부터 1,035호( )호까지 4회에 걸쳐 이 글은 YMCA 하령회에서 말슴한 그대로입니다 라는 편집자의 말과 함께 연재되었다. 274). 조만식, < 基 督 敎 와 實 生 活 >( 靑 年 ) p ). 조만식, < 朝 鮮 基 督 敎 學 生 의 態 度 와 使 命 >( 靑 年, ) p ). 조만식, < 基 督 敎 人 의 生 活 (4)>( 基 督 申 報 ) 제 5면 277). 金 萬 植, <역사깊은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회상록) p ). 전택부, 앞의 글, p 고당 선생의 지방 강연을 들었던 김재호 장로는 다음과 같이 회고 한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 YMCA총무로 계실 때 平 西 老 會 청년회에서 하기수양회를 필자 교 회인 용악읍교회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강사로 선생님을 두 주일동안(14일간) 모셨는데(65년전), 선생님은 물산장려로 일본인들의 상권에 대항해야 되고 우수하나 단합심이 부족하여 외국에 나 가서도 당파싸움을 하고 있다면서 미국에서의 이승만 박사 중심의 국민회의파와 안창호 선생 중 심의 흥사단의 갈등 등을 예화로 들면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단결하지 못하면 영영 일본의 노예 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아! 고당 선생님> (회상록) p

17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것과 유머와 풍자가 있었으며 젊은이들을 격려하였기 때문이다. 朴 在 昌 의 회고다. 그래서 선생은 늘 희망을 주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산을 높이 봐라, 보통 낮은 데에서 옆을 볼 때와 높은 산위에 올라가서 옆을 볼 때 와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높이 봐라 그리고 더 멀리 원대한 앞을 봐 라, 높이 멀리 크게 지금 당장은 암담하고 당장은 일본의 천지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은 크게 봐라 멀리 봐라( 高 遠 大 ) 라는 말씀을 늘 하셨 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태산을 움직이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신념이다 (성경 히브리서 11장 1절)라고 하셨던 말씀도 기억납니다 279). 이렇게 보면 고당의 평양Y 총무로서의 활동기간은 그의 기독교 이념을 사회 에 적응하는 한편 기독교 신앙에 바탕한 인격을 실험하는 때였고, 그가 조선의 조선의 기독교계 및 민족의 지도자로서 발돋움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는 1920년대 한국 기독교계가 가졌던 예수 천당 혹은 말세와 재림 신앙에 몰 입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사회와 민족 속으로 적극적으로 개방하는 기독교 신 앙인이었다. 그의 신앙체계가 당시의 보수적인 체질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으면 서도 사회와 민족의 아픔에 대하여 귀를 열어두고 거기에 동참하려는 자세를 늘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고당은 일제의 민족말살기에 들어서서 영적 지도자인 장 로로서의 위치를 굳굳하게 지켜나가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신앙과 민족적인 정절을 굳게 지키며 조용하게 영적 전쟁을 치루는 것이었다. 6. 신앙과 사회 경제 - 신앙과 사회운동의 접목 [ 試 論, 未 完 ] 기독교인 조만식은 그러면 어떠한 신앙을 가졌는가. 그는 숭실학교에서 성경 교육을 받았고, 동경교회에서는 영수의 직분을, 그리고 산정현교회에서는 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가져 교회 봉사와 신자들의 신령한 일들을 총찰할 수 있었다. 이 것은 그가 교리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정도를 유지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문 제는 고당이 민족문제를 생각하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그가 고백하는 기 독교는 사회운동이나 민족운동의 한 방편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어떠한 신앙고백을 남겼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279). 박재창, <높이 봐라! 멀리 봐라! 크게 봐라!>(회상록) p

177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代 贖 하신 피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보수적인 신앙고백의 터 위에 서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가 숭실에 입학한 당시로부터 1920년대까지에 이르 기까지 한국의 기독교는 서구의 보수적인 신앙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주로 미 국의 보수적인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신앙과 신학을 전수받은 서북지방은 기독 교의 근본교리들을 신봉하고 있었다. 장로교가 강조하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란 신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라는 것, 우일신 하나님과 삼위일체론,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피조물됨, 인간의 완전 타락과 예수 그리스 도의 보혈에 의한 代 贖, 성령의 역사, 구원역사의 예정, 세례와 성찬 중심의 성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날의 성도의 부활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280) 고당이 숭실학교에서 베어드로부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세계관과 역사의식의 폭이 넓 긴 하였지만, 그러나 신앙함의 본질에서는 앞서 언급한 장로교회의 신조를 중심 으로 그의 신앙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당에게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 행위나 실천과 별개의 것으로 남아 있 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신앙은 자신의 인격 속에서 肉 化 되어 실천적인 삶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당 신앙의 장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는 예 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자기의 인격으로 살려고 하였고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초기부터 칼빈주의적인 정교도 신앙과 그 실천을 받아 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신앙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281) 인간의 책임과 실천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가 남긴 대부분의 글에는 기독교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이 더 많이 눈에 뜨인다. 그의 칼빈주의적 청교도성은 생활의 절제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서 구의 칼빈주의가 갖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정직과 신의, 근면함과 절제 절약으로 집약된다. 고당은 생활의 절제성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그의 물산장려운동도 사실 은 이러한 절제운동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물산장려운동은 또한 민족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깊이 인식한 데서 나온 신앙적 소산이다. 고당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민족경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 였다. 그는 조선교회가 경제방면에 안목이 열리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280). 이것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로회가 1907년에 제정하여 그 이듬해에 완전 채용키로 한 12신 조의 중요한 교리이다. 281). 고당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신앙은 1937년 1월호 白 光 지와의 인터뷰에서 두 분 선생님 사이에 옥동자를 낳았으면 하는 희망이 계시겠지요? 라는 질문에 고당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말로 하면 하나님이 주시면 감사히받고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되겠지. 사람의 맘 대로야 안될 터이니까 라고 하는 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17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그 이유의 하나를, 협성신학교의 어느 학생이 선교사의 사업을 비판한 글에서 나 타난 바와 같이, 조선 선교사들은 경제관념을 우리이게 도무지 넣어주지 않은 것 이 금일 교회유지와 발전에 큰 장애라 282) 고 간주한 바가 있다. 그는 기독교인의 경제생활과 관련하여 의복제의 혁신과 근검절약, 경제책연구 및 교육혁신을 강조 한 바가 있거니와 더 나아가서 조선의 교회가 거교단적으로 조선의 경제를 살리 기 위한 획기적인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방안을 그 하나로 주장하였는데 장황하지만 살펴보자. (조선의 빈궁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 거기에 대한) 대책에는 희망 안과 가능안 두가지가 있는데 희망안은 다만 희망함에 불과하므로 가능 성이 거의 없고 가능안은 거의 가능한 것입니다. 가능안인데 이 가능 안은 즉 빈궁한 원인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일반 民 度 未 及 의 대책으 로서는 농민지도 계발 즉 농촌진흥책이 가장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매 미개하여 헤매는 자에게 광명과 생명의 도 외에는 다시 없음으로써 이다. 다음에는 복음전도인데 이 복음선전은 농촌진흥의 한 조건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구함에 오직 알파 요 오메가 일 것입니다. 즉 전적일 것입니다. 다음에는 一 洞 一 敎 會 주의 실현과 주일학교 대확장(주일학교 사 역자 양성필요)인데 10년 계획으로 일동일교회 실현을 꾀할 것이며 수량 도 수량이려니와 특히 이후부터는 질에 유의할 것입니다. 일찌기 배드워 드(베어드?) 박사는 말하되 내가 조선에서 전도할 새 조선인은 내세 영 혼의 천당구원을 위함보다 현재의 사회적 구원 즉 실제생활에서 구원을 얻으려함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과연 백성을 위하 여 눈물의 전도자, 熱 의 종교가, 사랑의 사역자, 情 의 설교자가 대량 산 출되어야 함이 필요한 사실입니다. 이렇듯 복음선전으로 농촌계발의 필 요를 부르짖게 된 실례는 많은데 그 좋은 예로는 利 川 의 三 洞 이 그것입 니다. 평안남도 대동군 추을미면 이천리의 1동 신자 극소 술집 두집 極 貧 30-40호 2동 신자 반수 술집 한집 少 貧 40-50호 3동 신자 거진 술집 없음 稍 富 40-50호 위에서 빈부의 원인과 그 비례현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 다. 얼마나 복음이 우리에게 미치는 바 그 힘의 큼을 가히 짐작할 것입 니다. 복음을 전도하자는 말은 보통 꽹과리식의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 는 자주 회집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 복음전도와 지도자 양성문제는 282). 조만식, <기독교와 실생활>( 靑 年, 1927년 9월호) p

179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느린 듯하나, 그러므로 나는 일생을 통하여 주창하는 바는 절약과 검소 그것입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조선인은 생산이 저능하면서도 소비 에는 대담하므로써이고 둘째 토지 가옥을 방매하여 일상용품을 買 用 하므 로써이고, 셋째 수입에 초과되는 지출을 함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선 대세로 보아서 물론 호경기라 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좋은 영향 을 주는 것이냐 함에 있어서 오인은 반대로 조선엔에게 남용과 사치의 악습관을 주는 악영향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남용과 사치를 방지하고 절약과 검소의 사상을 고취하여 이를 실현케 함에는 이하 몇 가지를 필요할 줄로 압니다. 첫째 지도자급(교원 목사 사회기관인, 청년 인도자 등)이 솔선하여 실천 감행할 것. 줄째 30만 기독교도가 단합 실행 하도록 통제할 것. 셋째 사회적으로 각 단체가 연합하여 이를 감행토록 할 것. 넷째 각처에 이상촌 건설을 대규모로 시행하여 절약, 검소룰 실천 케 할 일 등일 것입니다. 이상으로써 불완전하나마 빈궁조선을 구제 할 줄로 믿습니다. 요컨대 일반대중은 생존의 의식을 철저히 가지고 이 상적 대인물을 중심으로 한 집중결합이 또한 필요하며 그 중에서도 기독 교의 대선전과 30만 교도의 철저한 각성이 급선 要 務 라고 생각할 바입니 다. 283) 고당은 평등 사상과 사회정의 관념은 특정계급의 배제, 사유재산의 제한을 강 조하는 등 기독교 사회주의를 연상케 해주는 대목이 없지 않다. 그가 新 東 亞 와의 인터뷰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답변한 바가 있다. 설문에 대한 고당 선생의 답변(II) 만일 내가 세계의 독재자라면, 사회제도와 경제제도 개혁안, 이상계획의 지지책 및 반역자는 어떻게 취급할까? 조만식의 답: 위선 특정계급을 배제하는 동시에 국제적으로는 강폭한 민족을 억제하여 평 등과 평화를 유지하겠습니다. 사유재산을 제한하여 일가족이 10만원 이상의 치부 를 금하고 총 산업기관을 민중화하겠습니다. 위선 세계적 불경기 타개착으로는 국제간 개인간을 물론하고 일체의 公 私 債 를 절대로 해방하겠고 일부 국가에 偏 在 한 金 을 약소국가에게 최저 이부로 대부하도록 명할 터입니다. 이상의 계획으 실 시하기 위하여는 박애주의를 기초로 하여 적당한 법령들을 발포하겠고 以 黨 治 世 主 義 로 나가겠습니다. 반역자가 있으면 改 悛 할 때까지 禁 錮 해 둘 수 밖에 없겠습 니다. 인구가 너무 증가하는 것이 病 痛 이니까 물론 산아제한을 즉각으로 실시하 283). 조만식, <생산과 소비와 우리의 각오 삼천리>(회상록) pp

18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고 교양하며 선전할 것입니다. 284) 7. 신앙과 절조 - 순교자와 동행하고 순민의 길을 가다 고당은 1922년 그가 봉사하던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았다.285) 산정현 교회는 장대현교회로부터 1905년 분립해서 닭골에 설립된 교회로서286), 片夏薛 (C.F.Bernheisel) 韓承坤 安鳳周 姜奎燦 宋昌根 朱基徹 목사가 시무하였으며 한때 朴亨龍이 부목사로 봉사한 적이 있다. 장로로서는 초기에 金東元(1910-) 朴禎翊 (1913-) 吳允善(1922-) 조만식(1922-)이 있었고 1930년대에는 劉啓俊(1930-) 金鳳 淳(1930-) 鄭在允(1933-) 金燦斗(?) 홍정락(?) 있었다.287) 조만식은 오산학교를 사 임하고 평양 YMCA의 총무로 부임한 1921년부터 산정현교회의 집사로 봉사하다 가 그 이듬해에 장로가 되었다. 1922년 6월 14일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2회 평 양노회에서 오윤선 조만식 등이 장로 시취를 받았는데, 그는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지 아니면 장로를 원치 않았던지 장로시취에서 불합격하여 오윤선(6월 18일 장립)보다 6개월이나 늦게 그 해 12월 31일에 장립받았다288). 오기영의 증언이다. 선생은 장로교의 장로이시다. 일찍이 장로로 추천되어 그 문답을 받 을 때 요리문답에 낙제되어 다음 번에야 장로가 되었다. 다음 번에도 대 답이 장로답지 못한 것을 말하자, 특등 취급으로 準無試驗 장로가 되었 다. 물론 선생이 신앙이 부족한 까닭은 결코 아니다. 장로 문담에 낙제라 는 것도 선생이 아니면 없을 일이다. 그는 장로를 원하지 않았던 듯싶다. 그에게는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다. 289) 그는 장로로서 겸손히 교회를 섬겼다. 예배 때는 맨 앞자리에 앉았고 당회에 서는 말언을 별로 하지 않았으며 꼭 필요한 것만 말씀하였다. 黃聖秀는 장로로서 284). <신동아> 1932년 1월호 (회상록) pp ). 평양노회사 편집위원회 편, 평양노회사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 1990) p ).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上 pp "평양 산정현교회가 장대현교회에서 分立하다. 是 時에 예배당은 板洞舊會堂을 仍用하고(馬布三悅의 舊第라) 선교사 편하설, 영수 桂澤善, 李德煥, 집사 崔鼎瑞 金龍興 鄭利道 조사 한승곤 등이 시무할새 分立한지 불과 1년에 교우가 3백여인 에 達한지라 合力捐補하야 鷄洞 山亭峴上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移轉 會集하니 自此로 산정현교 회라 稱하다" 287). 평양노회사 편집위원회, 앞의 책, pp ). 평양노회사 편집위원회 편, 앞의 책, p. 275 참조 289). 吳基永, <조만식씨의 이꼴 저꼴> (회상록) P

181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의 그러한 고당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고당과 같은 장로가 있었기에 산정현교회에 그같은 훌륭한 목회자가 있게 되었고 특히 주기철 목사 같은 이가 출현하게 되었 다고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에는 평양 서문밖 교회에 나갔고 나중에는 산정현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의자가 없이 맨바닥에 앉던 시절이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언 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친(황보익 목사) 께서는 어린 나에게 그 분이 민족의 영도자요,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요 백성의 모범이다 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고당 선생님은 위대한 기독 교 지도자였습니다. 산정현 교회 장로님이신 선생님은 당회에서 별로 말 씀하신 일이 없으셨으나 그가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그리고 간혹 무게있 는 발언을 하심으로 그의 인격의 감화와 위력에 의하여 당회는 일치단결 하며 바른 결정을 하며 교인을 감독선도하였으며 특히 그러한 당회 후원 을 받아 교계의 거성인 강규찬목사, 박형룡박사(전 총신대학장) 송창근 박사(전 한신대학장) 그리고 한국기독교 순교사상의 샛별인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290) 고당은 장로로서 노회와 총회에도 참석하여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와 행정을 지도하는 데에도 일정하게 봉사하였다. 193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0회 총회가 금강산 온정리 기독교수양관에서 회집되었을 때 고당은 평양노회의 대표로서 참 석하였다. 291) 그는 변인서 홍택기 이인식과 함께 절차위원으로 선임되어 회기동 안 총회의 제반 회의과정을 점검하였다. 그는 또 총회에서 선임하는 이사로서 김 우현과 함께 세브란스의학교의 이사가 되었다. 또 평양노회의 보고를 통해 그가 교장 혹은 이사장으로 있던 숭인상업중학교를 30만원의 재단법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 총회에 보고되고 있다. 292) 1930년대에 들어서자 일제는 만주사변(1932)을 일으키고 중일전쟁(1937)을 확 대하였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전시체제의 구축은 더욱 악랄해졌다. 일제의 마수 290). 黃 聖 秀, <그가 있어 단합한 산정현교회> (회상록) pp ) 291). 이 때 총회의 회원은 목사 장로 각 66명 선교사 32인 합 164인 중 13 인이 미참하였다. 참고로 평양노회 대표는 목사 金 善 斗 羅 時 山 金 善 煥 方 敬 模 金 永 俊 金 政 七 李 仁 植, 장로 李 泰 圭 조만식 鄭 達 成 兪 正 穆 韓 時 英 趙 元 杰 李 溶 薰, 선교사 편하설 마포삼열 咸 日 敦 郭 安 連 등이었다. 292). 朝 鮮 예수 敎 長 老 會 第 20 會 總 會 錄 pp. 2, 58, 60 및 79 참조

18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는 신사참배 강요라는 형태로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뻗치고 있었다. 이 때 고당 은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셔와 그가 신사참배반대의 선봉장이 되도록 격려하면서 이 순교자와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고당과 주기철의 관계는 오산학교에서 시작된다. 경남 웅천 출신인 주기철은 고향에서 사립 開 通 小 學 校 를 졸업하고 1913년에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하였다. 고당이 明 治 大 學 을 졸업하고 오산에 부임하던 해에 주기철은 입학하 였고 졸업하는 3년간 고당의 지도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주기철은 고당의 제자 다. 주기철은 중학시대에 재주가 있고 웅변이 뛰어나 처음에는 정치방면에 유의 하였다. 293) 이는 일제강점하에 있는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한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 학교 창립자인 남강 이승훈과 그의 재학 당 시 이 학교의 교사요 교장이었던 고당 조만식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스승 의 지도를 받아 주기철은 장차 경제적으로 민족을 구하고자 연희전문 상과에 진 학하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의 안질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향해 있다가 金 益 斗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 크게 회개하고 중생을 체험하였다. 한 때 민족운 동에 열중하였지만 소명감에 불타는 294) 그는 1921년 평양신학교에 진학, 목회자 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졸업 후 그는 부산 草 梁 敎 會 를 거쳐 마산 文 昌 敎 會 에서 안정되고 부흥하는 목 회를 하고 있었다. 1936년 평양의 산정현교회는 宋 昌 根 목사가 사임, 부산으로 옮 기고 후임 목회자를 구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일제는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기독교 학교와 일부의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 기독교의 중심지요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을 대표하는 산정현교회는 이제 일 제의 이같은 기독교 핍박과 대결할 수 있는 목회자를 은연 중 요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 목사를 지목하고, 20여년 전 주목사의 은사였던 고당을 주목사의 청빙 위원으로 삼아 마산에 파송, 일을 성사시키게 되었다. 한 때 사제관계였던 두 사 람은 이제 한 교회의 목사와 장로로서 그 관계가 변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당 은 제자였던 주 목사를 잘 받들었다. 고당의 이러한 자세가 온 교회로 하여금 주 목사를 극진히 받들도록 만들었다. 김인서는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예전 서울 안국동 교회를 양반교회라 이르면, 평양 산정현교회는 민 293). 金 麟 瑞, < 一 死 覺 悟 朱 基 徹 牧 師 >( 金 麟 瑞 著 作 全 集 5, 信 望 愛 社, 1976) p ). 김인서, 앞의 책, p

183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족주의자의 교회라 이른다. 조만식 선생 외에 민족진영의 여러 거성이 장로로 시무하였다. 그래서 산정현교회의 전통은 그리스도 정신에 화한 민족애 그것이었다. 조 장로가 오산학교 교장시대에 주목사는 오산학교 학생이었으니 학교로는 조 장로가 선생이요 교회로는 주 목사가 선생이 다. 두 분이 서로 선생으로 모시는 미덕은 참 부러웠다. 그래서 주 목사 의 지도라면 일일이 순종하였고 입옥한 뒤에 전 교인이 효자가 아버지에 게 드리는 정성으로 받들었다. 예배당문은 봉쇄당하였으나 연보를 거두 어 주 목사의 가정은 물론 남녀전도사의 가정에까지 매월 생활비를 제공 하되 8 15 예배당문 열기까지 계속하였다. 경찰서에서는 일본에 반역하는 주 목사에게 생활비를 제공함은 背 日 행위라고 번번이 위협하였으나 信 義 一 貫 한 산정현교회는 이에 굴하지 아니하였다. 주 목사로 하여금 주 목 사되게 함에는 吳 부인의 격려와 산정현교회의 힘도 컸었다. 295) 김인서의 지적과 같이, 일제의 모진 핍박과 간섭 속에서도 산정현교회는 주 목사의 신사참배반대 투쟁을 격려하는 한편 가족들을 보살폈다. 산정현교회가 주 목사와 전도사 가족들에게까지 생활비를 제공하게 된 데에는 바로 고당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함으로써 신앙의 순결과 민족적 절조를 지키는 주 목사를 격려했을 뿐아니라 그 스스로도 민족적인 긍지를 지킴 으로 옥 밖에서 옥중 순교자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고당은 신사참배 와 창씨개명에 동참하지 않았고, 일제의 학병권유 제의에도 칭병하고 296) 나서지 않았으며 드디어는 시골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당과 산정현교회의 이같은 자 세는 그의 제자이기도 했던 주 목사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주 목사 는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산정현교우들과 함께 걸어갔던 것이다. 그러기에 신사참배 반대투쟁 정신사 를 쓴 安 道 明 은 주기철을 주기철되게 한 산정현교 회와 고당 조만식에 대해 이렇게 적절하게 썼다. 펑양 산정현 교회는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통치 하에서 강요한 신 새참배를 반대하고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교회다. 이 사실로 평양 산졍현 교회 함녀 교계에서뿐만 아니라 전 민족적으로 순교와 순국을 완수한 대 표적 교회로 알려졌다. 이 역사적인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고당 조 만식 선생이 그 교회의 장로였고 蘇 羊 주기철 목사가 그 고회의 당회장 295). 김인서, 앞의 책, pp ). 이 점에 관해서는 金 鳴 善, < 조만식 시국강연 의 날조와 진실>( 김명 선 교수 일화집 1992) - 회상록 pp 재수록 참조

18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같이 이러한 표본 이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라는 하나님의 뜻이, 조장로와 주 목사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양립되고 조화됨으로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 평양 산정현 교회 함녀, 역사적으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분가한 교회였지만, 관서 지방에서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민족주의 애국자가 집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명망을 가진 교회였다. 도산 안창호 선 생이나 南 崗 李 昇 薰 선생도 이 교회와는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또 이 교회 장로님들도 평양에서는 굴지의 유지들로 꼽히는 기라성과 같 은 인사들이었다. 이러한 평양 산정현 교회가 생긴 것은 그 중심역할을 고당 선생이 무언중에 했었기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에 전국의 모든 교회가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탄압이 치열 해지니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일본 제국주의 앞에 굴복을 했고 또 민족 적 지도자들도 하나씩 변절했다. 이러한 때에 고당 선생은 백설이 만건 곤할 때 독야청청하리라 하듯이 創 氏 改 名 도 하지 않고 민족지조를 지키 며 평양 산정현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고 있었다. 이 때에 고당 선생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선두로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는 다른 장로 네명(오윤선 박정익 유계준 정재윤)과 청년집사 네명(한원준 김승기 김경진 김성식) 도합 아홉명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사각오를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철두철미한 민족주의 학교로 꼽히 는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목사였고, 또 신사참배를 가장 강력 하게 반대하는 주 목사가 一 死 覺 悟 를 하고 당회장 목사로 부임해 왔다. 조 장로와는 오산학교에서의 사제관계의 인연을 가진 사이이다. 만약 그 때에 주 목사가 다른 교회에서,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하듯,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더라면 그 교회에서 내어 쫓았을 것이고, 또 반대로 평양 산정 현 교회는 주 목사 같은 목사가 아니고, 일제 앞에서 친일하며 어물어 물하는 목사였더라면, 당신 같은 목사는 필요없으니 우리 학교에서 나가 시오 하고 내어 쫓았을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라는, 하나님의 뜻이. 산 정현교회라는 場 에서 정치적인 면의 조만식 장로와 종교적인 면의 주기 철 목사의 양립과 조화로서 영광의 승리가 성취되었다. 평양 산정현 교 회와 고당 조만식 장로는 우리민족 역사에 길이길이 횃블이 될 것이다. 297) 297). 安 道 明, <산정현교회와 고당 조만식> (회상록) pp

185 제7강.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옥문 밖에서 순교자와 동행했던 고당은 해방 후 자신을 기대하는 수많은 백성 들을 위해 자기의 한 목숨을 버리는 殉 民 의 길을 걸었다. 한 몸이 살 수 있는 여 러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나 혼자만이 살기 위하여 이곳에서 고 생하는 동포들을 버리고 떠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일천만 북한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했소 라는 비장한 결심은 바로 일제하의 순교자의 길을 걸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전자가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존재도 숭배하지 않겠다는 崇 神 신앙 에 근거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러나 의지할 데 없는 민중들 을 끝까지 봉사하겠다는 活 人 신념 에 근거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 지는 모두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고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숭고한 신앙인의 길 이었다. 고당은 그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 부르던 찬송가의 가사, 내가 걱정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 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로운 피가 모든 것을 이기리라는 믿음으로 일제와 무신론자들을 이기는 삶을 살 아간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18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187 한국역사 속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한국근현대사 제 8강 역사란 무엇인가? - 강사 : 이 만 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2009년 7월 9일(목) 저녁 7시 서울YMCA 친교실(2층) 주최 : 서울YMCA

18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189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는 역사 이만열 명예교수(숙명여대) 한경직 목사라면 그리스도교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존경받는 분이 었다. 그가 생존해 계실 때에 어느 TV 대담에 나왔다. 질문자가 목사님께서 젊 은이들에게 독서를 권하신다면 성경책 외에 무슨 책을 가장 먼저 권하시겠습니 까 라고 했다. 그 때 그는 서슴치 않고 역사책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역사책이야 말로 인생의 경험과 교훈, 삶의 방향을 편견 없이 제시해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덧붙여 역사책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역사 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책 읽기를 권하고 역사적 지식을 토대로 인생과 우주에 대한 바 른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 같았다. 역사는 무한한 바다와 같은 보고다. 물질로 형성된 것이 아니어서 만질 수도 없고, 형상과 실체가 없어 눈으로 볼 수도 없지만,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은 너무 넓고 깊어서 온갖 보물들이 폐기물질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거기서 옥석을 가릴 지혜가 있다면 인간은 역사라는 시공 속에 뛰어들어 인간이 남긴 무한한 경험과 교훈을 찾아 공유할 수 있고 또 무한대의 상상력의 나래를 펴서 과거를 현재의 미래의 삶과 연결시킬 수도 있게 된다. 역사 공부를 하는 사람 치고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아보지 않은 사 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학에 입학하여 교양 있는 대학생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으로 권장되는 것이 영국의 역사학자 E.H.카가 쓴 <역사 란 무엇인가>라는 책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는 것은 거의 대부분 의 학생들이 대학생으로 입문하는 첫 관문이요 통과의례처럼 되어 있다. 그걸 읽 고 나면 새내기의 입에서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말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가에 관계없이,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 말이, 과거의 역사를 현재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해석하게 되는 것도 의미하게 되는구나 하는 뜻을 이해하게 된다. 현재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역사가 과거의 어느 시대를 살았던 흔적으로서 남겨진 동식물들의 화석마냥 의미 없이

19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그냥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재적인 입장에서 다시 돌아보 게 되고 재해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란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다시 나 타나게 되어 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새롭게 나타나고 해석되어지지 않 는 역사는 인간의 기술이나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은, 그야말로 굳어진 채 거기서 아무런 사실을 읽어내지 못하는 화석과 같은 존재다. 그러나 화석을 보고 그냥 스치지 않고 현재의 기술과 식견을 가지고 거기에서 생명체를 발견해내고 동식물 의 과거를 재생할 수 있을 때 화석은 더 이상 죽어있는 존재가 아니고 살아있는 존재로 다가오게 된다. 현재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재해석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의 미를 갖고 있다. 1. 왜 <내가 이해하는 역사>인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말은 그동안 너무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래서 어떻게 보면 그 말 자체가 진부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E.H.카 덕분에 그 질문은 이제 단순한 질문이 아니고 역사학적인 무게를 가지고 다가오고 있다. 때문에 그것이 주는 무게 또한 가볍지 않아 거기에 제대로 답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제법 식견을 가진 역사학자라 하더라도 그 질문의 핵심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답한다는 것은 어려움을 느낀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 한 인식과 식견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답하는 내용은 결국 자신이 갖고 있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식견으로 제대로 역사를 설명하지 못할 바에야 <역사란 무엇 인가>라는 거창한 의제로 설명에 임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이해하는 역사>라 는 말로 독자를 대하는 것이 편한 자세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이 해하는 역사>는 내가 독창적으로 이론화한 역사라는 뜻이 아니고 그 동안 수많 은 스승과 책을 통해 축적한 역사에 대해 내가 혼자서 정리해 본 역사적 식견을 말한다. 또 무한한 역사의 바다를 다 설명할 수는 없고 내가 헤엄쳐 본 역사바다 의 범위 안에서 설명하겠다는 뜻도 된다. 내가 이해하고 경험한 범위 안에서 내 나름대로 역사를 풀어보겠다는 뜻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자그마한 역사에 대 한 식견 이라 해서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내가 이해하는 역사만이 정확 하다든가 나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인식이라든가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앞선 학자들이 언급한 것이라 하더라도 나 스스로 거기에 동의하고 나의 지식으로 용해했다면, <내가 이해하는 역사>에 포함되는 것이다

191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2. 역사'란 말의 의미 역사 란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인류가 생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났던 일(사건) 그 자체를 말한다. 독일어의 일어난(geschen) 일 을 의미하는 Geschichte가 거기에 해당한다. 또 하나는 그 일어난 일을 기록해 두 는 것을 말한다. 기록을 말한다는 뜻이다. 영어의 History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한 다. 이 경우, 아무리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두지 않으면 역사일 수가 없다. 사건이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문자 아닌 회 화나 인각 등의 그림형태로라도 남겨졌다면 그 또한 기록으로 간주될 수 있다.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는 사건은 때때로 사람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전승될 수 도 있다. 그 기억은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집단적인 것도 있다. 기억 속에 저장된 사건은 때로는 잊혀지든가 아니면 구전( 口 傳 )의 형태를 띤 설화나 신화로 남겨지 기도 한다. 그것이 민담( 民 譚 )으로 계승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느 정도의 시기를 지나서는 다른 어떤 형태의 기록으로 남겨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흔히 신화나 설화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 대부분의 신화나 설화는 한 때 존재했던 그 사 건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남겨진 경우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그것을 복원시킨다면 사건의 원형을 이해할 수 도 있게 된다. 한국 문헌에는 사건 자체를 역사로 본다는 뜻으로 역사책의 이름이 전해지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기록으로 남겨야만 역사로 간주한다는 의미의 역사책 이름 이 더 많다. 역사를 사건으로 보고 이미 지나간 사건을 기록으로 새로 정리한 경 우가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가 대표적이다. 삼국유사라는 말은 <삼국시대에 남겨진 사건(일)>이라는 뜻이다. 책 이름에서 풍기는 것이 삼국시대의 사건이라는 점에 서 사건 자체를 역사로 이해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종류의 책들은 사건 자체를 역사로 이해한다는 의미보다는 사건의 기록을 역사로 본다는 뜻이 더 광범하게 나타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의 역사책은 삼국사 기( 三 國 史 記 )다. 삼국에 관한 역사기록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국보급 문헌도 아예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로소 수많은 사건 중에서도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사건은 아예 역사취급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는 것을 헤아릴 수 있다. 사건이 곧 역사라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기록되지 않은 사건은 역사로서 거의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에도 수

19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 중에서 기록으로 남겨지는 것은 후인들의 역사인식 의 대상이 되지만 기록 속에 남겨지지 않는 것은 가끔 기록된 역사의 앞뒤에 장 식되기는 하지만 역사의 주인공 취급을 받기힘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일기를 쓴다. 필자도 1982년부터 매일 일기를 써오고 있다. 하루 의 일상적인 경험들이 일기로 다 남겨지는 것은 아니다. 사건의 경중( 輕 重 )과 빈 도( 頻 度 )에 따라 기록으로 남겨지기도 하고 그렇게 되지 않기도 한다. 하루에 일 어나는 많은 사건들 중에는 일상성을 띤 것인가 아닌가, 기록으로 남길 만큼 특 수성을 가졌는가 않는가에 따라 기록으로 남겨지기도 하고 기록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가령 하루에 세끼 밥을 먹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어서 일기에 꼭 적을 필요 가 없다. 그러나 그 식사를 평소와는 다른 어떤 특수한 장소(상황)에서, 또 가족 외의 다른 사람과 가지게 되었다면 일기에 적을 수도 있다. 식구들과 나눈 대화 의 내용도 일상적인 것은 일기에 적을 필요가 없지만, 평소와는 다른 대화 내용 이었다든가 그 대화에 다른 사람이 함께 했다면 그 상황과 내용을 일기에 남길 수 있다. 3. 사건과 기록 여기서 사건과 기록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어떤 일을 했는가,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거기에 대한 기록이 없다 고 해서 그 사건 자체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건은 있었지만 거기에 대한 기록을 일일이 남기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 세계의 다른 공간에서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같은 공간에서도 시간에 따라 수많은 사 건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기록 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사건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이 유에서건 그 사건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남기지 못한 경우도 있다. 조선조 때에 사화( 士 禍 )가 자주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고 있 을 때, 사건의 중요성으로 봐서는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하지만 자신의 몸보신을 위해서 일부러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한국에서 이데올로기적인 대 립이 심할 때에도 기록을 꼭 남겨야 할 사건들이 많았지만 후환을 생각해서 전혀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군부정권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기록을 남겼 는데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강탈당했거나 아니면 망실되어 찾지 못하는 경우도

193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없지 않았다. 만약 사건이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아서 그 사 건의 전모를 모르게 된다면, 인류가 남긴 중요한 경험적 자산이 당대의 부주의로 망실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사건으로서의 역사건, 기록으로서의 역사건, 사건에 대한 기록이 중요하다는 것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기록이 중요하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라는 제도가 있다. 공적심사를 통해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국가적 서훈을 결정하는 제도다. 그런데 대부분의 독립운동가가 풍찬노숙( 風 餐 露 宿 )하면서 때로 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남기 지 못했다. 때문에 많은 경우, 한국 독립운동의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제가 작성한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독립운동 상황을 그 지배자였던 일제 에 의해 확인해야 하는 이 아이러니칼한 현실은 불행히도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제 도가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다.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색출 검거하고 독립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해 스파이들을 풀어 독립운동가들의 동정을 규찰하고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그 기록이 정확하지 못할 경우도 많고 때로는 왜곡되거나 과장된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런 왜 곡과 과장이 다른 문헌에 의해 수정 보완되지 못하면 그것 자체가 진실이 되어버 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더 안타까운 것은 독립운동을 하고도 일제의 첩보 망을 피한 경우, 일제측의 기록에 남겨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서훈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이들 독립운동가의 경우, 독립운동 단체에서 정확한 기록을 남겨두었거나 아니면 자신의 활동기록을 스스로 보존하고 있지 않는 한, 그 독립운동을 입증할 만한 자료적 근거가 거의 없다. 그래서 포상되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자체의 기록이 적으므로, 당시 타도의 대상이었던 일제의 수사 기관 기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4. 역사학의 자료(기록) 여기서 다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역사학은 기록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해 서 그 사건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이미 언급했다. 기록이 없어도 사건은 존재했고 여러 사람에 의해 그 사건이 기억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에 그것을 기록해 두지 않으면 그 실체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지장이 있다. 인간 의 기억이란 한계가 있는 것이어서 곧 잊어버리거나 다른 사건과 혼돈해 버리기

19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일쑤다.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고 시간과 공간의 순서나열이 혼란스러워진다. 이럴 때에 기록만이 그 사건을 복원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는 할 수 없고 또 기록만이 사건을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기록이야말로 지나간 사 건을 복원하는 데에 최상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을 복원하는 데는 기록이 없어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기록을 통하면 다른 어떤 방편을 통하는 것보다 정확하며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 최근 구술사( 口 述 史 )라는 학문 분야가 발전하고 있는데 그것도 기록에만 의존 하지 않고 역사를 복원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구술사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가졌던 경험을 기억을 더듬어서 사건의 경위를 풀어내고 사 실을 복원해보려는 시도다. 그럴 경우에도 그 당시 그 공간 속에서 남겨졌던 기 록이 있으면 구술의 진실 정도를 더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현장 혹은 주변에서 남긴 기록에 의해 검증이 되지 않으면 구술에 의한 역사복원은 그 만큼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구술사와 같은 역사연구 방법의 경우에도 기록에 의해 그 정확성이 담보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따 라서 전통적인 역사학은 물론 최근에 변형된 역사연구 방법론에서도 역사적 사건 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에 유 의해야 한다. 역사학이 기록이 없이는 성립하기 곤란한 학문이라는 것은 여기서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 5. 역사학의 필요성 역사를 지나간 사건 자체로 보든, 지나간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든,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역사가 왜 필요한가 하는 의문은 공동적으로 가질 수 있다. 아무런 조건 없이 과거를 아는 것만으로 역사는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호기 심이 많은 존재인지라, 자신의 과거가 어땠는지, 자신을 현재에 있게 한 조상들과 그 조상들이 남긴 과거사가 어땠는지 그런 점에 대해서 충분히 흥미를 느낄 수 있다. 아름다운 과거는 아름다워서, 그렇지 못한 과거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흥미 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 과거가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가, 그것을 설명하고 인식 하는 것은 충분히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 호기심에다 그런 과거 가 어떻게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는가, 혹은 발전되어 왔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면 역사학은 인간사회의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학문대상 이 된다. 이렇게 되면 역사가 본래 과거를 알기 위한 학문이었던 데서 이제는 다

195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시 그 과거가 오늘날까지 어떻게 진행 발전되어 왔는가를 살펴보기 위한 학문으 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역사학은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었는데 어느 새 과거의 연장인 현재를 다루는 것 같은 학문이 되어버린다. 역사학의 필요성은 여기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잠시 역사학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역사학이 발전된 경위를 살펴보자. 역사학은 처음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과거 이야기를 정리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를 설화적인 단계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는 역사는 이야기 그 자체였다. 가끔 새학기를 맞아 역사 수업 첫 시간에 학생들이 자주 요구하는 것이 있다. 선생님, 이야기해 주세요 라는 것이다. 여기서 학생들이 생각하는 역사는 곧 지나간 옛날 의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가 바로 역사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그 랬다. 헤로도토스(Herodotos)라는 그리스의 역사가가 방대한 책을 썼다. 그는 그 리스와 그 주변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채집하여 <역사>라는 책을 썼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역사란 이야기라는 단계에서 작성된 것이었다. 그 다음에 역사란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역사를 쓴 사람이 있었다. 투키디데스(Thukydides)라는 그리스의 사람이 <펠로폰네수스 전쟁사>를 써서 그 런 입장을 대변했다. 펠로폰데소스 전쟁사의 주무대는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 스 반도다. 그리스에서는 도시국가가 발전되면서 도시국가들끼리 동맹관계를 맺 어 외세와 대결하기도 했다.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이 쳐들어 왔을 때 그리스 지 역의 도시국가들이 동맹하여 마라톤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여 승리한 것은 대표적 인 예다. 그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병사가 아테네까지 km를 달려 가 그 소식을 전하고는 쓰러졌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마라톤이라는 경주가 생 겨났다. 그 후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동맹하여 서로 싸우게 되었고 이런 갈등과 투쟁 때문에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그런 큰 싸움 중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펠로폰네수스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동맹군이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동맹군을 이기게 되었다. 결국 그리스는 이 싸움을 계기로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되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수 스 전쟁사를 정리하면서 왜 그리스(도시국가)가 망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를 제대 로 써서 독자에게 교훈을 주려고 했다. 여기서 역사란 교훈을 주기 위한 의도로 쓰여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역사학의 목적은 그 다음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수집하고 교훈을 남기기 위한 단계에서 인류의 발전과정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더 나아가게 되 었던 것이다. <신국론>을 쓴 어거스틴(Augustinus) 이래 계몽주의 시대의 여러

19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서양의 학자들, 예를 들면 꽁도르세(Condorcet) 같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폈다. ' 역사의 발전' 개념과 관련하여 유신론( 有 神 論 )적 유한( 有 限 ) 발전과 무신론( 無 神 論 )적 무한 발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신의 심판과 함께 역사의 발전이 끝난다는 유한 발전을 주장하는 데 비해 후자는 인간의 끝없는 가능성에 유의하 여 역사가 무한하게 발전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역사가 이야기 수준이거나 혹은 교훈이나 발전을 설명해 주는 기록이거나 간에 이같은 이해가 서양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동양에서도 이 비슷한 인식 경향 이 있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동서양의 이해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 한다. 동양에서는 책 이름에서 그런 것이 나타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저 우리 주변에도 남겨진 사건 을 의미하는 책 이름이 있었다.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같은 이름이다. 그런가 하면 역사의 기록 이라는 의미의 중국의 사기( 史 記 ) 이래 그런 이름이 흔하게 보인다. 한국의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도 그런 것이다. 그러다가 교훈을 강조하는 이름이 나왔다. 주로 통감( 通 鑑 )이니 통감강목( 綱 目 )이니 하는 이름이 그런 것이다. 통감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시공을 비치는 거울이라는 뜻이 다. 거울을 통해 그 시대를 비쳐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교훈을 위한 역 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을 말하면서, 동 서양의 역사학에서 비교되는 측면이 있다. 동양이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고 인식한 반면 서양에서는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라고 보 았던 것이다. 서양의 것을 발전사관( 發 展 史 觀 )이라고 하는 것에 비해서 동양의 것 을 순환사관( 循 環 史 觀 )이라고 했다. 이같은 역사관의 차이가 동서양의 문화를 결정 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서양 중심의 역사로 세계사를 설명할 때, 서양이 진취적 인데 비해 동양은 퇴영적이며, 서양이 미래지향적인데 비해 동양은 과거지향적이 라고 예사롭게 언급했던 것은 바로 이런 역사관의 차이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는 다양한 성격을 갖고 있고 역사의 필요성도 여 러 가지 측면에서 거론된다. 지나간 이야기를 써 놓고 그것을 들려주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지나간 역사는 늘 후세에게 교훈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의 영광스 러운 일은 후세인들에게 그들도 그런 영광의 시대를 재현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 는가 하면, 과거의 실패는 타산지석( 他 山 之 石 )의 교훈을 주기도 한다. 또 역사를 살피는 동안 그 역사의 흐름이 어떻게 진전되어 왔으며 그것이 오늘의 시대에 어 떻게 연결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역사는 인류의 사상과 문 화의 흐름 및 발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평범한 역사 이야기는 교훈을 주기도 하고 인류의 발전상을 제시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 과

197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거의 발전 과정을 통해 어떤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면 현재와 미래를 더 잘 예견 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게 된다. 역사학은 바로 이런 역사적 통찰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6. 현재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학문이라고 했다. 흔히 하는 말로 과거를 모르면 현재도 미래도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역사 를 모르면 사람이든 사건이든 그 연원을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 사람과 사건이 형성된 현재도 알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 말은 과거란 현재와 미래를 규정하는 중요한 조건이요, 역사란 현재적 삶의 유래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어느 사건이든 그 현재는 그것이 과거로부터 쌓여진 산물 이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이뤄진 것도 조상적 가문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사람의 총체적 계승 관계에 의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그 사람(사건)의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그 과거를 돌아봐야 하고, 과거를 기록으로 남겨 놓은 역사 는 그 사람을 이해하 는 데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현재와 미래를 알아보기 위해서 과거 즉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어느 한 두 사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학문을 하더라도 그 학문의 연원을 이해하 기 위해서는 그 학문의 역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령 경제학을 공부한다 해도 그 경제학의 역사인 경제사를 먼저 공부한다. 역사학도 역사학의 역사가 있 다. 역사학의 역사, 사학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역사학의 대상이나 방법론, 역사 관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갖게 된다. 정치학이나 사회학 같은 사회과학 뿐만 아니라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심지어 예능분야도 그 학문의 연원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 학문 이해에 어려움이 있다 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자연과학에서 그것이 발전되어 온 역사를 공부하 는 것은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분석적인 방법을 추론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는 지 모르지만, 과학의 변화 발전이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전 세계 역 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이해하는 데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역사가 왜 필요한가. 역사는 마치 거대한 바다와 같아서 거기에 뛰어들면 인류 의 모든 경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애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성공과 실패를 교훈으로 얻을 수도 있다. 거기에는 힘센 자만이 세계를 지배한

19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것이 아니고 자그마한 사랑의 힘이 세상을 변혁시킨 사례도 웅변적으로 설명된다. 성공한 자만이 역사의 바다에 건재( 健 在 )하는 것이 아니고 실패한 자도 그 실패 로써 인류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때문에 그 바다에서는 역사를 상상으 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만나게 되고, 추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구체 적으로 대하게 된다. 그러니까 모든 경험된 사실은 그 역사의 바다에서 만나게 된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그 바다에서 보물을 캐내듯이 역사적 보고에 접근할 수 있다. 역사의 바다에서 사건을 정리하다 보면, 마치 생물을 류( 類 )와 종( 種 )으로 나누 듯이, 역사적 사건도 그렇게 정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주는 경험과 지혜를 범주화하면 새로운 인류의 보고를 차곡차곡 만들어갈 수 있다. 또 그 경 험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문학적인 상상력을 가미하게 되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새롭게 창출해 낼 수도 있다. 가령 동서양의 역 사는 고대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서로 만난 적도 없고 만날 수도 없었다. 그러 나 서로 만난 적이 없는 동서양의 역사를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서로 연결시 켜 주면, 그것이 비록 실재한 구체적인 사물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이전에는 도 저히 경험할 수 없었던 상상 속의 역사를 새롭게 창출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것은 마치 최근의 IT산업이 발전하면서 가상공간에서 이런저런 세계를 만들어가 듯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7. 역사 발전의 의미와 방향 흔히들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아주 쉽게 말하고 그것을 당 연시한다. 그러나 조금만 따져 봐도 우선 역사의 발전 이란 말 자체에서 걸리고 만다. 무엇을 두고 역사가 발전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역사의 발전 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역사의 발전과 관련하여 몇 가지를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과학 기기의 발 달로 효율적이고 편리한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을 두고 역사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역사의 발전을 두고 가장 염두에 둘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가 전( 家 電 ) 제품의 발달은 가사( 家 事 )혁명을 일으켜 주부들이 가사 외에 사회참여를 가능하게 했다. 교통 기관의 발달은 공간을 단축시켜 과거의 하룻길은 이제 절반 이상으로 줄였고 항공기와 고속철도의 발달로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경이적인 것은 통신 수단의 발달이다. 특히 인터넷과 이메일의 발달은

199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가히 혁명적이어서 세계를 이웃집으로 만들었다. IT 기술의 발달은 이런 과학 기 기의 변화를 혁명적으로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 인류의 생활이 얼마나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되었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를 두고 어찌 역사의 발전이라고 말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업의 발달을 들 수 있다. 농업을 비롯한 생산력의 발달과 인구증가의 적절한 통제는, 경제력을 높이면서 빈곤을 퇴치하고 인간을 기아로부터 해방시켜 가고 있다. 산업화에 따라 공장제품은 인간의 귀천고하를 막론하고 고루 향유할 수 있 게 되었다. 의료기술과 의약품의 발달은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가며 인 간의 평균 수명을 연장시키고 있다. 이런 것 역시 역사발전과 관련해서 언급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점들은 인류의 역사가 발전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과학기기의 발전이 인류에게 더 여유 있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는 대답을 주저하게 된다. 편리하게는 되었고 효율 적으로는 되었는데 그 때문에 인간은 더 여유 있게 되었다기보다는 전보다 두 배 세 배 더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또 스트레스도 더 심하게 되었다. 과학기 기의 발전이 결코 인간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만들게 하지 않았고 어깨를 무겁 게 했고 오히려 인간을 더 분주하게 만들어 버렸다. 교통 통신수단은 그것이 덜 발달했을 때보다 인간의 몸놀림을 몇 배 더 늘어나게 만들었고 육신과 정신은 더 혹사당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를 두고 역사가 진정으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이 더 행복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정직하게 그렇다 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생산력의 발달이 인간의 경제력을 증가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제도에 따 라 상대적 빈곤감은 심화되어 가고 있어서 행복지수는 경제력의 성장과 비례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생산력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를 재래 하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인류를 더 큰 재앙으로 몰아갈 것으로 예견된다. 그런 징조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고도 생산력의 발달을 역사의 발 전과 관련시켜 언급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또 인간의 수명을 늘어나게 한 현상은 인류의 오래된 소망을 이뤄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기기의 발달로 인간은 더 무 자비하게 살해되고 대량학살이 가능하게 되었다. 의약품의 발달은 도덕적 타락을 수반했고 생명윤리를 위협하고 있으며 정신적인 황폐화를 가져오고 있다. 인간이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고 수명을 연장한 결과가 이런 양태로 나타난다면 과연 이런

20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현상을 두고 역사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과학기기와 산업의 발달에 대해서 이런 소극적인 평가가 있다 하더라도 역사의 발전을 말할 때 이를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과학기 기와 산업의 발달은 역사 발전의 중요한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의 발전을 위에서 언급한 측면을 포괄하면서 인간이 주체화되어가는 과정으 로 말하려고 한다. 아울러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문제를 곁들여서 말하는 것도 좋겠다고 본다. 역사의 발전은 역사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이 수적으로 증대되어 가는 과정을 말하는 한편 역사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전보다 더 자유롭게 되 고 사회적으로는 전보다 더 평등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수적으로 증대되어 가고, 그 인 간이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이뤄나갈 때에 역사가 발전해 간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가 상상력으로 추론한 것이 아니고, 지 금까지 전개된 인류의 역사가 바로 그런 방향으로 진전되어 왔다고 보기 때문이 다. 인간의 역사가 바로 그렇게 진전되어 왔기 때문에 나름대로 이런 정의를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와 평등의 조화의 관계가 쉽게 성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역사가 발전한다고 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발전 되어 왔을까를 고민해 온 자그마한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고대 사회부터 소수의 지배자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그런 상 황에서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주체적인 위치에 있지 못했다. 그것은 곧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행세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황제나 군왕, 장군이 나 봉건영주에 예속된 존재로서 자신의 역사를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 지 않았고 그럴 권한이 없었다. 중세 봉건제 사회까지 인간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혈통신분제에 의해서도 예속된 존재였다. 그런 예속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면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본 다면 인간은 종래의 사회경제적인 그런 예속에서 벗어나 점차 자유화되었고 그런 발전을 통해서 자신과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점차 책임적인 존재로 발전해 갔다. 이것은 자신과 사회에 대해서 자유의 확대를 의미함과 동시에 자주적인 결단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인간이 자유인으로서 자기의 주체적인 입 장에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간 과정이야말로 역사가 발전해 갔다는 구체적 인 증거가 될 수 있다

201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이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행세하게 되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그 사회의 주인공으로 행세해 왔던 봉건영주나 지배층에게는 하등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 었다. 이것은 결국 그 사회의 피지배층인 민초( 民 草 )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들 민초들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예속된 상황에서 자주하게 되면서 자신과 공 동체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을 의 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란 바로 민초들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발돋움하도록 이끌고 도와주는 존재라고 할 것이다. 역사가 진행하는 방향에 부합하도록 민초 를 이끈 이런 지도자가 역사에 살아남아 존경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자가 되는 것은 결국 자유의 문제 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자유문제와 관련, 모든 인류는 각 사람이 그 지적 능 력이나 완력적인 힘을 꼭 같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 만큼, 인간의 자유가 확 대되면 될수록 평둥한 사회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능력 있고 힘센 존재가 자유를 이용하여 그 사회를 지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발전이, 인간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행세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또 역사의 주인 공으로 행세한다는 것이 자유의 확대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인간 사회는 불균 형적으로 전개되어 공동체 사회를 형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흔히 중세 이후의 역사를 근대자본주의 사회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가 자유를 무한정 인정한다면 인간의 불평등이 사라지는 이상적인 사회가 결코 될 수 없다고 보는 사회주의자 의 시각은 이런 데서 재래한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무제한한 자유의 확대로 극심한 불균형을 이룰 것으로 보았다.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사회를 구상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 다음 단계로 사회주의 사회를 구상한 것은 역시 이 때문이다. 불균형 불평등이 이뤄지는 과정을 역사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볼 수 없다. 자유의 확대가 역사발전의 불가결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역사 가 발전되었다고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그것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 발전의 개념을 정리하면서 두 번째 명제인 역 사의 주인공 노릇을 하는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자유를 확대하는 길이요, 사회적 으로는 평등한 관계를 더 추구해 가는 것이라고 부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 라서 앞에서 언급한 것을 종합하면, 인간중심으로 볼 때 역사의 발전이란 역사의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수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면서,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더욱 자유로워지고 사회적으로는 더욱 평등해지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20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이같은 역사 발전의 의미를 가지고 한국사를 바라보게 되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사건들이 많다. 예컨대 고려시대 <만적( 萬 積 )의 난>과 조선 후기의 <농민반 란> 그리고 <동학난( 東 學 亂 )>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만적의 난은 종래 만적 등 노비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식해 왔다. 고려 중기 무신란( 武 臣 亂 )과 더불어 신분 질서가 어지럽게 되자 만적은 노비들을 모아 놓고 경계( 庚 癸, 무신란이 일어나던 해) 이래 장상( 將 相 )이 어찌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고 외 치며 반란 을 계획했다. 이것은 종래 난 으로 봐 왔으나 역사의 발전이란 측면에 서 보면 신분해방운동으로 평가될 수 있다. 조선후기의 농민반란도 억압받는 농 민으로 하여금 그 억압을 벗어나 역사의 주체자가 되도록 하는 몸부림이었다는 점에서 농민운동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동학란 도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안으 로는 반봉건 사회개혁을 외치고 밖으로는 반외세 자주독립을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혁명운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렇게 역사가 진행되어야 할 방향을 어떻 게 보느냐에 따라, 또 역사 발전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역사적인 사실을 보는 관점도 달라지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게 된다. 역사발전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많은 사람들의 인생관을 바꾸고, 역사발전에 헌신, 기여하는 많은 사람을 만들었다. 역사발전의 방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자 신을 역사방향에 순응하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자기시대의 역사적 방향이 반역 사적( 反 歷 史 的 )으로 나간다고 판단될 때 거기에 투쟁하여 역사의 진전방향을 올 바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노력했다. 역사의 발전방향에 대한 신념은 반역사적인 거대한 세력 앞에서 고난과 희생을 각오하게 만들었고 최후에는 그 역사의 방향 과 함께 승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8. 역사의 발전 형태 그러면 역사는 어떻게 발전하며 역사의 발전방향은 어떤 것일까. 이 문제와 관 련해서도 많은 역사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설명해 왔다. 역사가 발전 하는 것을 형태로 설명한다면, 직선형으로 발전한다든가. 지그재그형으로 발전한 다든가, 싸이클형으로 발전한다든가, 혹은 나선형으로 발전한다든가 하는 말을 해 왔다. 이런 지적은 부분적으로는 다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직선형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마치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향해 똑 바로 진전해 가듯이 역사도 그렇게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오늘날

203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도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를 제외하고는 똑 바른 길도 발견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인간 집단이 힘을 합쳐서 공동으로 이뤄가야 할 역사의 향방을 직선적으로 발전 시켰다고 하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다만 무한한 역사의 발전에 비춰볼 때 순 간적으로는 굴곡과 퇴영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무한한 시간상에서 볼 때는 역 사가 직선적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역사가 지그재그형으로 발전해 갔다고 보는 관점이다. 원칙에 대한 변칙, 발전에 대한 반동, 순리에 대한 역리가 발전하는 역사에 끼어들면서 순간적 으로는 역사를 역행시킨 때도 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발전시켜 갔다는 것을 말하 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전체적으로 볼 때는 역사가 발전해 갔다고 보는 관 점이다. 인간 역사에는 얼마나 그런 현상들이 많았은지 모른다. 서양의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을 보면,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었음을 볼 수 있다. 영국에 서도 그랬거니와 프랑스에서도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무수히 되풀이된 혁명과 반혁명(반동)이 역사를 지그재그로 몰고 갔다. 그 점은 한국의 역사에서도 보인 다. 되풀이된 사화( 士 禍 )가 그런 성격을 갖고 있다. 한말 개항 이후 되풀이된 개 화파와 보수파의 갈등도 그런 성격을 갖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역사가 사이클을 그리며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에서 시간 의 변화를 X축이라고 할 때 역사의 진행은 X축의 상하로 넘나들며 곡선형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를 사이클형으로 발전한다고 보는 것이다. 지그재그형이 진 전과 반동을 되풀이하면서 역사가 진행 혹은 역행하는 것에 비해 사이클형은 역 사추진력의 강약에 따라 추진력이 세차면 곡선을 그리면서 상승하다가 추진력이 떨어지면 아래로 하강곡선을 그리기도 하고 다시 상승하고 하강하는 등 상승과 하강을 곡선을 그리며 반복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역사적 사건이 처음 시작될 때에는 강력한 추진에너지로 밀어붙이게 되면 상승하다가 추진동력이 떨 어지면 하강곡선을 긋고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추진 동력이나 계기를 얻게 되면 상승곡선을 그리며 고공행진을 계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그런 현 상들이 많다. 창업주( 創 業 主 )가 보통 상승곡선을 그리며 상향하다가 다음 대의 수 성기( 守 成 期 )를 거치면서 하강곡선을 그리게 되지만 다시 추진 동력을 얻게 되면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국가의 역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기업 이나 사회단체의 경우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는 역사발전 현상이다. 역사발 전을 설명하는 데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여러 형태의 발전모델과 함께 나선형( 螺 旋 形 )발전을 언급하고 싶다. 나사 가 진전하는 모습이 역사발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본다. 나선이란 나사를

20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끼우기 위해 원형으로 만들어진 테바퀴를 말하는 것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진전하 는 것을 통해서 조이거나 풀리도록 한다. 나사의 진행은, 첫째 빙글빙글 원을 그 리면서 진행하고, 둘째 그 진전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런 사 실에서 역사발전의 현상이 설명되고 있다. 빙글빙글 돌며 원을 그리면서 진전하 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요소를 아우르고 고려하면서 진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 다. 때문에 나선형발전은 어떤 개별적인 사물의 독자적인 발전이나 후퇴로 역사 전체가 갑자기 진전되거나 후퇴한다고 볼 수 없다. 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종 합적인 판단을 통해야만 그 진전과 후퇴를 설명할 수 있다. 나선의 진전이 매우 느리다는 것은 주변의 모든 조건을 고려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나선 형 발전은 종합적이고 모나지 않은 판단을 요하기 때문에 혁명적인 사건의 경우 에도 이 발전의 틀에서는 그 진전 상황이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사가 돌아갈 때 그 진전하는 것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어느 시점을 경과한 후 나사가 빙글빙글 돌 아 그 물건이 조여지거가 풀어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 나사가 진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역사발전을 나선형에 비유해서 역사발전을 설명하는 것은 총 체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과 역사발전 현상이란 너무 느려 눈 에 띄지 않고 또 진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시점에 가서 보면 그 발전 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위에서 예를 들어 설명한 여러 사례 중에서 나선형적인 진전이 역사발전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틀이라고 생각한다. 9. 역사 발전의 방법 그러면 역사는 어떻게 발전하는 것일까.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설명이 선호 되고 있다. 변증법이란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문답에 의해 진리에 도달하는 방 법 혹은 사유, 정신, 역사 등의 발전을 반대물 모순의 투쟁 종합으로서 파악하 는 사고법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변증법적 발전이란 어떤 사물이 자기모 순을 지양( 止 揚, aufheben)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진전 을 말한다. 자기가 먼저 있 고 거기에 자기모순이 일어나게 되면 그 둘은 대화 혹은 갈등과 투쟁을 통해서 재로운 발전단계로 올라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 정반합( 正 反 合 )의 방식 으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변증법에서는 어떤 원초적인 존재나 사건을 정( 正, these)이라 하고,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뀜에 따라 정( 正 )에 대한 비판, 즉 자기 모순과 비판세력 및 반대가 일어나게 마련인데 이를 반( 反, antithese)이라고 한

205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다. 정과 반 사이에는 대화와 타협,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게 마련인데 그러한 대 립구조를 통해 대화 갈등 투쟁이 한 단계 끌어올려진 상황으로 옮겨지면서 그쳐 진다. 이렇게 한단계 올려져서 지양된 상태를 합( 合, synthese)이라고 한다. 지양 된 상태는 앞서 있었던 정( 正 )도 아니고 반( 反 )도 아닌 제 3의 상태로 된 새로운 형태의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은 새로 나타난 정( 正 )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 ( 正 )에도 시간의 흐름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반( 反 )이 나타나게 되고, 정과 반은 대화와 타협, 갈등과 투쟁에 의해 다시 지양되어 제 3의 형태의 합( 合 )으로 발전 되어 간다. 이렇게 보면 역사적인 사건이란 되풀이되는 정반합( 正 反 合 )의 전개를 통해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먼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역사에서는 같은 사건이 되풀이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정( 正 )에 대한 반( 反 )은 본래의 정( 正 )자신의 자기모순을 통해 나타난다고 했다. 나라나 기업을 세웠을 때의 예를 들어보자. 처음에는 혁명정신에 의했건 창업정 신에 의했건 그 출발을 정력적으로 진전시켜 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바뀌면 처음의 혁명정신이나 창업정신은 흐려지고 거기에 자기모순이 나타나게 된다. 자각된 모순을 반( 反 )이라 할 수 있다. 반은 정에 대한 비판세력이 되는 셈 인데, 둘 사이에는 비판하고 대화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면서 제 3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 전보다는 진전된 형태의 새로운 존재, 합( 合 ) 이면서 새로운 정( 正 )이랄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반( 反 )은 자 기모순에 의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외세를 통해 혹은 외세와 함께 나타나기도 한 다. 한국사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외세는 바로 반( 反 )과 같은 존재로 한국사에 영 향을 미쳤다. 이렇게 정반합의 변증법적 역사발전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면, 독자들은 조선조 의 창업과 그 뒤의 역사전개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말 이래 일제 하의 한국사의 전개를 이런 관점에서 분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상 상의 나래를 펴서 다른 시대의 역사도 이같은 관점의 틀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이다. 단기간의 역사전개를 두고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장기간을 두고도 활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역사의 전개 방법을 이런 원리에 의해서 설 명하는 것만큼 합리적으로 풀이하는 것은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정반합( 正 反 合 )의 방법에 의해서 역사가 발전한다고 이해하게 되면 독 자들은 현재의 자기 주변의 삶과 시대적인 변화를 이해함에도 폭넓은 이해를 갖 게 될 것이다. 또 자기시대의 역사를 점검하는 데에도 퍽 관용적인 자세를 가지 게 될 것이다. 또 역사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당대의 사회상황을 바라보게 되면 젊

20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은이들의 유행이나 이해하지 못할 행동에 대해서도 역사발전을 위한 진통이겠거 니 하는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70대의 사람이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을 이해 하게 된다면, 자기와 다른 세대의 사람이 갖는 가치관과 행동 양식에 대해서 관 용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젊은 세대에 대해서 자기와 같은 가치 관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자기와는 다른 가치관이 있어야만 역사가 발전될 수 있 다는 확신도 갖게 된다. 또한 세대간의 차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자세를 갖게 될 것이다. 세대간의 차이와 마찬 가지로 지역간 의 차이도 자기( 正 )와 다르다( 反 )는 점에서 자기의 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반( 反 )으로 인식할 수 있게 때문이다. 정반합의 변증법적 원리를 적용하여 역사를 이해하게 되면 다른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유용성을 갖게 될 것이다. 10. 역사인식과 역사의식 흔히 역사인식과 역사의식을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를 더러 본다. 혼동해서 써도 별로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엄격히 따진다면 이 용어들은 차이를 갖고 있다. 역사인식이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일련의 지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적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은 소위 육하( 六 何 )원칙에 따른다. <누가> <언제> <어 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가를 밝히고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다. 역사인식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역사는 이런 사실 확인을 정확하게 하는 데서 학문적인 토대를 갖게 된다. 역사학에서는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고 인식하는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역사적 진실은 언제나 큰 힘을 갖게 된다. 역사학자들이 수많은 문헌과 증거를 끌어들여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역사인식이 정확하지 않으면 그 다 음에 뒤따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이나 의미부여가 뒤틀리게 된다. 그래서 이 사실 인식에 오류가 있게 되면 역사학 자체가 무너지게 될 수도 있다. 흔히 역사해석을 하는 이들이 해석을 서두르는 나머지 그보다 먼저 따졌어야 할 역사적 인과관계나 사실 인식을 소홀히 하는 경우를 본다. 이런 경우, 역사적 진실이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해석은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가령 원인에 해당하는 사실을 결과에, 결과에 해당하는 사실을 원인에 갖다 두고 그 역사에 대한 해석에 임한다든지, 사건의 선후로 봐서 옳은 순서가 아닌데 그 순서가 뒤 죽박죽이 된 채 그 역사가 주는 의미만을 추출하려고 하는 것은 온당한 자세가 아니다. 그런 해석과 의미는 가공의 것으로 역사와는 관련이 없다. 이런 오류들은

207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적인 연구방법를 훈련받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종종 본다. 역사인식이 역사적 진실을 찾는 데에 역점이 주어진 것이라면, 역사의식은 역 사가 주는 의미를 찾고 그것을 인간의 삶에 적용하는 문제에 그 영역을 확보하려 고 한다. 역사인식이 역사의 과학화에 주된 관심을 갖고 있다면 역사의식은 역사 의 생활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역사의식은 역사적 교훈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더 깊이 관여한다는 뜻이다. 역사의식은 정확한 역사인식을 기초로 그 역사가 오늘에 시점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따진다. 역사의식에서는 오늘의 시점에서 그 역사정신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 역사의 흐름으로 봐서 오늘이라는 시점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그 동안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전되어 갈 것인가, 이런 시점에서 역사에 순응하는 사고와 행동은 어떤 것인가 등을 따져보게 된다. 앞서 언급한 내용을 가지고 역사인식과 역사의식을 설명해 보자. 역사의 진전 (발전)방향은, 역사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이 수적으로 증대하고고, 역사 주인공 으로서의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자유를 확대하고 사회적으로는 평등화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어 왔다고 했다. 이러한 것은 역사인식의 영역이면서 역사의식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이런 역사인식(의식)을 현재적인 삶에 적용하는 데는 역사의 식이 큰 작용을 한다. 역사가 지금까지 이런 방향으로 진전되어 왔으니 앞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갈 것이며 그렇게 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역사에 순응하는 것이라 는 결론을 갖게 된다. 이것은 바로 역사의식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의식이 있는 사람은 역사가 지금까지 진전되어 온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려 는 것에 반대하고 역사가 순리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데에 힘쓰게 될 것이다. 만약에 역사의식을 제대로 갖지 못한 경우에는 과거의 역사흐름에 순응하려는 것 보다는 역사가 제 멋대로 흘러가도록 방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식이 있 는 사람이나 그런 시대는 자기 당대의 역사가 지금까지 진전되어 온 역사의 방향 과 다르게 진전될 것으로 판단되면, 그런 반역사적( 反 歷 史 的 )인 흐름(세력)과 투 쟁하면서 때로는 희생할 각오까지 하게 된다. 역사인식이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한 냉정한 지적 작업이요 역사의 과학화를 위한 학문이라면, 역사의식은 역사의 진실을 토대로 당대 역사의 방향을 찾고 역 사에 혼을 불어넣어주며 바른 역사 전개를 위해 인간을 행동화하도록 하고 인간 의 의식세계에 신념체계를 형성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역사의 식이 있는 사람은 자기 시대의 반역사적인 세력에 대해서 묵종하지 않고 거기에

20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맞서 싸우게 된다. 당대의 역사가 지금까지 진전되어 온 역사의 방향대로 움직이 도록 반역사적인 세력과 처절한 투쟁을 전개하여 고난을 겪게 된 사람들 중에 역 사의식이 투철한 사람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정확한 역사인식 을 토대로 하여 바른 역사의식을 겸비하게 되는 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대 단히 중요하다. 역사의식과 관련, 한국 민족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한말 이래 한국 민족사가 추구해온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말 한국 사는 대내적으로는 반봉건 사회개혁과 반침략 자주를 당면한 목표로 하고 있었 다. 오늘날도 한국사가 짊어지고 있는 당면한 과제는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체제 의 정착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미래를 향한 역사적 지향은 대내적으로는 민주 화와 인권을 신장시키고, 민족적으로는 평화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며, 대외적으로 는 자주독립을 이룩하여 이웃과 세계에 대해서는 나눔과 섬김을 통해 세계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11. 역사에 살아있는 사람 지배자들은 흔히 지금의 세대는 나를 알아주지 못할지라도 역사는 나를 알아 줄 거야 라고 말하곤 한다. 독재자일수록 이런 말 하기를 좋아한다. 정말 그럴까. 이런 말을 하는 독재자들일수록 역사의식이 빈곤한 자들이었으며 따라서 이 말은 자신이 당대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변명하는 말에 불과하다. 또 이 말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보다는 역사에 떳떳하기를 원하는 뜻을 내포하기 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남긴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자기시대보다는 역사에 남 겨지기를 원했지만, 그의 소원대로 역사에 살아남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역사에 살아남는 사람은 자기 시대에 역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사람들이다. 역사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역사에 올바른 진전 방향을 의식하고 거기 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살지 않았다. 그들은 도리어 다른 사람을 역 사의 주인공으로 들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들이다. 역사의 진행(발전)방향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행세할 수 있는 사람을 증대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에 살 아있는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도록 하기 위 해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이것을 두고 그들이야말로 현실적인 삶 을 살았던 사람 들이 아니라 역사적인 삶 을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와는 반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도 있다. 그 쉬운 예로 독재자들을 들 수 있

209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다. 어떤 형태의 독재든, 그들은 자기 혼자 역사의 주인공으로 행세하기를 원했고, 자기와 같은 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도록 하기 보다는 자기의 지배를 받으며 노예와 같이 살기를 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비주 체적인 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역사의 방향에 맞춰 역사 앞에 떳떳하게 역사적인 삶 을 살았던 존재가 아니고 반역사적( 反 歷 史 的 )이고 현실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종대왕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훈민정음( 訓 民 正 音 )을 제정하여 한국 문화를 독자적으로 건설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제정한 훈민정음은 우리 말이 중 국과 다르다 는 민족의식과 어리석은 백성이 제 뜻을 펴고자 하나 펼 바가 없다. 고 한 데서 보여준 위민의식( 爲 民 意 識 )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의 정음 제정의 참 뜻은 바로 백성을 위하는 위민의식에 있었다. 그의 이런 위민의식이 바로 한글제 정으로, 더 나아가 민족문화를 창건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세 종의 그런 뜻에서, 백성을 깨우쳐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모든 백성이 글을 깨우치게 되면 상하종횡이 소통하게 되고 모든 백성이 문자생활에 참여하게 되어 더욱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사회를 이루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은 한국 역사에 살아있는 지도자 라고 할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가나안땅으로 이끈 지도자 모세가 있 다. 그는 히브리인이었지만 이집트 왕 파라오의 딸의 아들로 입양되어 세상의 부 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의 노예가 되어 고난받고 있는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을 생각하면서 고민했다. 그는 장성하여 결단이 요구될 무 렵, 그 자신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누리는 이집트 왕궁 생활의 호화롭고 죄악된 낙을 거절하고 도리어 그의 백성과 함께 수모 받고 고난 받는 길을 선택했다. 고 난 받는 백성과 함께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이집트 탈출을 감행했기에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가 그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생 활에서 탈출시켜 당당하게 역사의 주인공으로 들어 올린 것은 그 자신이 이집트 왕궁의 호화 생활을 포기한 대가였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가 존재하는 한 그는 그 역사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가 이집트 왕궁의 호화 생활을 계 속 누렸다면 그는 역사에서 버림받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조선조 후기 실학시대를 보자. 그 시대에 수많은 정승( 政 丞 )을 비롯하여 이른 바 수많은 영웅 호걸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시대 역사에 살아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기껏 유형원( 柳 馨 遠 ) 이익( 李 瀷 ) 정약용( 丁 若 鏞 ) 등이 그 시대

21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역사에서 살아있을 뿐이다. 왜 그럴까. 그들이야말로 역사가 지향하고 있는 그 길 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다산( 茶 山 ) 정약용( )의 예를 들어 보자.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그의 나이 30대 후반까지 정조( 正 祖 )의 총애를 받으 며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정조의 승하 후 신해사옥( 辛 亥 邪 獄 )에 연루되어 20년 가까이 귀양살이를 했다. 그는 그런 귀양살이를 통해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던 민초들의 어려움에 눈뜨게 되었고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가 귀양살 이를 하면서 저술한 수많은 저술들은 바로 민초(백성)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끌 어올리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면서 쓴 것이다. 아마도 그가 귀양살이를 하지 않았 다면 그는 고난받는 민중들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다산의 귀양살이 20년은 당시에는 견디기 힘든 고난의 생활이었지만 그로 하여금 역사에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게 된 기회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역사적인 삶을 살기 위해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역사에 살아있는 사람 들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길은 험난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가 나아 가야 할, 이 역사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쉬운 길을 택했다. 좁은 길 을 택하지 않고 넓고 안전한 길을 택했다. 여기서 역사적인 삶, 역사에 살아남는 삶을 위한 역사의 길 과 그와 다른 현실의길 이 갈리게 된다. 12. 역사의 길과 현실의 길 한국 언론사에서 큰 획을 그은 인물 중의 한분인 송건호( 宋 建 鎬 )는 그의 <한국 현대인물사론>에서 역사의 길과 현실의 길 을 이렇게 말했다. 역사의 길이란 인간 및 사회의 발전에 무엇인가 기여하는 삶을 걷는 것을 의 미한다. 이 민족의 통일, 이 사회의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의 자주와 자유를 기준 으로 하여 문제 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역사의 길은 형극의 길이자 수난의 길이다. 사회의 온갖 세속적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역 사의 길을 택하지 않고 -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 현실의 길을 걷는다. 현실의 길은 안락의 길이자 세속적 영화의 길이다. 그러기에 수난의 일제 식민통 치하에서 얼마나 많은 유위한 인재들이 역사의 길을 버리고 현실의 길을 택했던 가. 그러나 현실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것을 택한 사람들은 갖가지 명분을 내세운 다. 그 길이 모두 민족을 위하는 길이고 독립을 향하는 길이며, 또 통일을 위하는 길이라고 강변한다. 민족을 배반하고 영구분단의 길을 걷는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211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같은 민족의 배신자도 자신들이 걷는 길이 역사의 길이라고 강변했던 것이다. 송건호가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역사가 보여주는 그 길을 걷기를 싫어 하고 세속적인 부귀와 영화를 약속하는 현실의 길을 택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속 인다. 현실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역사의 길인 것처럼, 현실에 영합하는 길인 줄 알면서도 역사가 지향하는 길을 걷는 것처럼 위장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것을 정직하게 드러내주고 폭로한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는 심판이라고 했다. 역사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역사가 진행(발전)되어온 방향에 대한 확고한 인식 을 가지고 그것을 자기의 역사의식으로 확실히 굳혀야 한다. 그리고 현재 진행되 고 있는 역사의 진행방향이 그 역사의 길과 일치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역사의 진행방향은, 거듭 말하거니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인간을 수적으로 증대 시키는 것과, 역사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좀 더 자유롭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좀 더 평등화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세력, 시대정신이나 제도 가, 동시대의 인간들을 예속화의 길로 인도한다든지, 불평등의 길로 이끈다면 거 기에 분연히 맞서는 것이 곧 역사의 길이다. 반대로 거기에 영합하는 것은 현실 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역사의 길은 현실의 길과 비교해 볼 때 비현실의 길이다. 비현실의 길이지만 역사의 길은 정도( 正 道 )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역사의 길을 선택할 때 그것이 현 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를 가지고 따져서는 안된다. 백범 김구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정도( 正 道 )냐 사도( 邪 道 )냐 하는 것으로 따져야 한다. 백범은 말한다. 비록 구절양장( 九 折 羊 腸 )일지라도 그 길이 정도라면 그 길을 택하여야 하는 것 이요, 우리가 망명생활을 30여 년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 줄 알면 서도 민족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과거의 일진회도 현실적인 길 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세상에 가장 현실적인 방법과 수단이 어찌 한두 가지에 그칠 것인가. 땀을 흘리고 먼지를 무릅쓰며 노동을 하는 것보다 은 행 창고를 뚫고 들어가 금품을 도취( 盜 取 )하여서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도 현실 적이라 할 수 있고, 청빈한 선비의 정실이 되어 곤궁과 싸우기보다 차라리 모리 배나 수전노의 애첩이 되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도 가장 현실적인 길일 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 도( 正 道 )냐 사도( 邪 道 )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하여야 한다. 역사에는 역사의 길을 걸어간 사람과 현실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을 잘 비춰주 고 있다. 한말 나라가 망하자 비록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지 않았던 저 시골 선

21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비 황현은 자결하여 역사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나라가 거덜났으면 의당 책임져 야 할 위치에 있었던 이완용은 일본이 주는 은사금까지 받아 챙기면서 현실적인 삶을 살았다. 히브리 민족을 위해 고난의 길을 자취( 自 取 )한 모세는 역사의 길을 걸어 천추의 역사에 남게 되었지만,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끝까지 저지하려고 한 당시 애굽왕 파라오는 역사에서 죽어있다. 실학시대의 저 초야에 묻혀 이름을 드 러내지 않고 민초들을 위해 노력했거나 귀양살이를 했던 실학자들은 역사에 살아 있지만 당시의 지배층의 반열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지배자들은 역사에서 죽 어 있다. 여기서 때로는 역사에 살기 위해 현실적인 삶을 포기해야 하는, 극단적 선택이 필요한 경우도 있음을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적인 삶의 유 혹을 뿌리치지 못해 역사에 살아남기를 거부했다. 이제 올바른 역사인식 위에서 바람직한 역사의식을 정립한 사람은 개인적인 영 달과 안녕을 위해 현실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오히려 힘이 들더라도 역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맞춰 삶을 영위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때로는 고난이 닥치겠 지만 역사는 그를 역사에 살아있는 존재로 우뚝 세울 것이다

213 제8강. 역사란 무엇인가?

214 2009년 YMCA 시민강좌 한국역사 속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발행일 : 2009년 7월 15일 발행인 : 강태철 편집인 : 신종원 편 집 : 주건일 발행처 : 서울YMCA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9 전화 / 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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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檀 國 大 學 校 第 二 十 八 回 학 술 발 표 第 二 十 九 回 특 별 전 경기도 파주 出 土 성주이씨( 星 州 李 氏 ) 형보( 衡 輔 )의 부인 해평윤씨( 海 平 尹 氏 1660~1701) 服 飾 학술발표:2010. 11. 5(금) 13:00 ~ 17:30 단국대학교 인문관 소극장(210호) 특 별 전:2010. 11. 5(금) ~ 20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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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AT¿¹Á¦Áý ȨÆäÀÌÁö °Ô½Ã (¼öÁ¤_200210) .hwp 변화 < : 19851999> 연도 고령취업자수 고령취업자 비율 계 남 여 농 가 비농가 1985 1,688 11.3 10.8 12.0 24.3 6.8 1990 2,455 13.6 13.1 14.3 35.9 8.3 1995 3,069 15.0 14.4 16.0 46.5 10.1 1996 3,229 15.5 15.0 16.2 48.2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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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발 간 사 먼저 경기향토사학 제16집이 발간되기까지 집필에 수고하신 경기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경기도의 각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신 김문수 경기도지사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기도는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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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본 작품들의 열람기록은 로그파일로 남게 됩니다. 단순 열람 목적 외에 작가와 마포구의 허락 없이 이용하거나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시 저작권법의 규정에 의하여 처벌받게 됩니다.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구 분 내 용 제목 수상내역 작가 공모분야 장르 소재 기획의도 용강동 정구중 한옥과 주변 한옥들에 대한 나의 추억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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