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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목 차 ] 제1강(5/21)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7 제2강(5/28)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37 제3강(6/4) 남강 이승훈의 신앙 61 제4강(6/11) 이동휘의 생애 104 제5강(6/18) 백범 김구-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생애 125 제6강(6/25) 도산 안창호와 그리스도교 신앙 147 제7강(7/2) 1)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173 제8강(7/9) 역사란 무엇인가? 203 1) 7월 2일 강좌는 여운형의 생애와 신앙 으로 진행되었으며, 강사의 사정에 의해 기독교 신앙인 으로서의 고당 조만식 원고로 대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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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역사 속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한국근현대사 제 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 강사 : 이 만 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2009년 5월 21일(목) 저녁 7시 서울YMCA 친교실(2층) 주최 : 서울Y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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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 한국기독교 민족운동 의 개념화를 위한 시론 이 만 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1. 머리말 기독교는 1880년대, 외국 선교사 주도로 전파된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선진적인 한국인들에 의해서 한국에 수용되었다. 한반도 주변에까지 전파된 기독 교는, 만주와 일본에서 성경의 일부가 번역되고, 그 곳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용기 있는 한국인들이 그 번역된 성경을 한국에 전함으로 비로소 개종의 역사가 일어 났다. 2)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는 외국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하여 수용하게 되 었지만, 한국의 경우는 한국인 스스로가 먼저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기독교의 역사에는 수용 초기부터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돋보였다. 기독교 수용의 이같은 특징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성격을 해명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기독교 수용에서 한국인들의 자기 필요성에 의한 측면이 강조될 수 있다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그들이 처한 상황과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연역될 수 있다. 그 필요는 영적 세계에 그치지 않고 민족공동체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었을 것이고 그 점에서도 활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가 초기부터 한국 사회의 시대적 과제와 맞물려 교호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 교호작용은 한 세기에 걸친 한국의 민족운동 그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수용된 이후 한국 사회는 여러 가지로 변화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 었다. 중세사회의 전통적인 유습을 개혁해야 한다는 수용당시의 당면한 과제에서 부터 시작하여, 한말에는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국권을 수호해야 했으며, 일제 강점하에서는 국권회복 민족독립이라는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식민지적 유제 청산을 비롯하여 민족적 전통의 창조적 회복과 통일된 민주국가의 2) 이 점에 대해서는 백낙준 김양선 등 여러 선학들이 증언해 온 것이지만, 필자가 1880년대 서 간도 한인촌 기독교공동체 연구 ( 한국 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등의 논문에 서 정밀하게 밝힌 것이며, 최근 한국의 기독교 수용과 그 특징 ( 亞 細 亞 硏 究 44호, 고려대 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에서 다시 정리한 바 있다

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건설해야 하는 등 중층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해방 초기의 식민 지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적인 과제는 독재 군사 정권 아래서는 인권 신장 민 주화의 과제로 발전되었으며, 분단이 민족공동체의 제반 사회적 조건들을 제약한 다는 것을 통절하게 깨달았을 때에는 무엇보다 통일국가의 실현이 가장 뚜렷한 민족사의 과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는 민족 구성원 으로서 뿐 만 아니라 기독교와 기독교인에게도 당연히 주어진 과제였다. 수용당시에 이미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을 보였던 한국 기독교는 민족사의 고비마다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 등한하지 않았다. 한국의 기독교 인 또한 이 같은 과제를 의식하고 수행함에 적극적이었다. 필자는 기독교회와 기 독교인들이 수행한 그 같은 과제들이 민족운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 착 안하고 그것을 한국기독교 민족운동 이라고 가정하고자 한다. 한국의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이 자신들 앞에서 주어진 민족사적 과제 앞에서 퇴영적 자세를 갖지 않 고 적극적으로 과제 해결에 나섰다는 뜻이다. 민족운동은 체질 언어 문화를 같이하고 있는 민족공동체가 정치적 사회 적 문화적 통합을 이룩하고 대내외적 주체성을 지키며 자체의 성장과 발전을 기 약하려는 제반 운동을 말한다. 그것은 대내적으로는 인간 평등을 전제로 공동체 의 균형과 정의, 인권과 자유를 신장시키려고 노력하는 운동이며, 대외적으로는 민족공동체가 주체성을 확보, 신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운동을 1차적으로 하여 민 족과 민족간의 화해와 협동을 증진시키고 인류와 세계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증진 시키려고 노력하는 제반 운동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민족운동을 이렇게 규정 할 때 기독교 민족운동 은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나 기독교인 같은 특정 집단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민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행한 운동을 특별히 기독교 민족운동으로 범주 화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런 문제의 제기에는, 기독교인 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하고 있지만 그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민족공동체에 속한 존재라는 점과 그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그런 민족운동을 주도하거나 참 여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다고 본다. 이런 전제를 유념하면서도 다 음과 같은 점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즉 앞서 말한 범주의 민족운동에서 기독교 공동체 혹은 기독교인에 의한 것이 같은 시대의 다른 이념 집단과 구별되 거나 비교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에 의한 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들의 운동을 새롭게

9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앞서 열거한 민족적 과제 수행에 대한 기독교(인)의 활 동은 필자를 포함한 여러 연구자들의 개별적인 논문과 단행본들에 소개되어 있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런 내용을 종합하고 개괄하여 그 요점을 간단하게 제시하 고 그것을 하나의 맥락으로 엮으면서 기독교인들의 그같은 운동이 기독교 민족 운동 이라는 개념설정을 가능케 할 것인가을 논의의 초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 글 이 넓은 의미의 기독교 민족운동 개념화설정을 위한 논의를 활성화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거듭 기대한다. 2. 한말 반봉건 사회개혁 운동 기독교가 수용될 때에 한국은 중세 말기의 모순과 부패로 사회적인 취약점이 드러나고 있는 데다가, 서구 제국주의의 서세동점 현상으로 민족족적으로 극심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사회적인 취약점과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자기 사회의 체질을 개혁하여 근대사회를 이룩하는 길이었다. 이를 위해서 는 대내적으로는 반봉건, 대외적으로 반외세(반침략)를 위한 사회개혁이 필수적이 었다. 사회개혁을 통해 근대적인 사회와 국가를 이룩하는 것만이 당시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말 기독교 수용 당시의 이같은 민족적인 과제는 기독교인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과제였다. 따라서 이 무렵의 기독교 의 민족운동적 성격은 결국 기독교가 이같은 한국의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사회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 하는 점을 검토하는 데서 시작할 수 밖 에 없다. 한말 봉건사회의 모순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당쟁 과 세도정치는 그런 모순을 더욱 촉진시켜 19세기에 들어서서는 각종 민란으로 통칭되는 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을 필두로 전국 각지 에서 일어난 민란 들은 봉건사회의 실정과 모순들의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다. 매관 매직으로 인해 인사상의 난맥과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철종조에 들어서는 임술년(1862) 한 해 동안에 37건의 민란 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원군이 등장하여 세도정치로 땅에 떨어진 조선왕조의 권위를 재건하고자 일종의 개혁정치를 과감 하게 실천하고자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왕비족인 여흥 민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둥지를 틀기 시 작했다. 어느 사회에나 한 파당의 전횡이 있는 곳에 독재나 부패가 만연할 수 밖 에 없다. 민씨 세도는 얼마 안가 국고를 탕진했고 인사의 난맥상으로 부정과 부

1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패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의 관리들의 부패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는 독립신문의 기사다. 혁파하라신 잡세를 여전히 무는 것은 관장들의 탐학하는 까닭이요, 돈 많은 부자들을 무단히 불효부제( 不 孝 不 悌 )한다고 잡아가두는 것은 그 부자가 다른 죄 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돈모은 것이 죄가 됨이요 한 동리 사람은 아무가 불효부제 인줄 모르되 먼 데 있는 관찰사와 군수들이 먼저 아는 것은 그 관원들이 다른 탁 이한 문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사야탁( 晝 思 夜 度 )이 다만 돈 먹을 생각 뿐인고로 동녹슬 밝은 눈이 먼 데 있는 돈구멍을 능히 밝게 봄이라. 3) 기독교는 한말 이같은 사회에 선교사에 앞서 먼저 성경이 번역, 보급되면서 수용되었다.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번역, 보급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한국이 기 독교 복음에 먼저 접근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뒤에 한국 기독교의 성격 을 규명하는 데에도 일정하게 유용성을 갖는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사 랑하는 그리스도인 (Bible-loving Christian) 혹은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 (Bible lovers)이라고 불려졌고, 또 한국의 기독교를 성경기독교 (Bible Christianity)라고 언급한 4)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선교사가 도래한(1885) 후 얼마 안된 1888년경부터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 신경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등의 교리서가 번역 출판되었고, 1890년대에서 1900 년에 이르는 기간에 성교촬리를 비롯하여 60여종의 전도문서들도 간행, 유포되었 다. 성경과 전도문서의 유포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서양문화와 함께 한국 사회에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문서들은 기독교의 중심교리 - 신론 기독론 성 령론 인간론 창조론 계시론 죄론 천사론 구원론 종말론 - 와 우상숭배 금 지 제사문제와 부모공경 안식일 준수 등의 종교적 주제, 및 인간평등과 남존여 비의 문제 결혼의 문제 자녀교육의 문제 등의 사회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 다. 5) 이런 주제들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인간이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십계명과 기독교 교리들은 한국 사회 3) 독립신문 4권 187호 ( ) 4). Matters of Moment" Bible in the World, Mar.1907.p.70 이 땅에서 발전되고 있는 기독교는 출중하게도 Bible Christianity이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하기 위해 가 져가는 것은 성경이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매일 먹고 마시는 양식은 성경이다. 5)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pp

11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의 봉건적 관행과 사회적 모순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정면으로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개혁에 미친 중요한 것의 하나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주 는 영향이다. 이것은 곧 근대사회 성립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 할 인민평등의 문제와 상통할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은 서로 평등하다는 전제가 근대사회를 성립 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가 수용되어 바로 이런 인 간관을 가장 먼저 가르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 음을 받았다는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의 존엄성과 천부적인 인권을 담보해주는 것일 뿐만아니라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기독교 는 백정과 종이 양반이나 주인과 같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평등권이 현실화되는 단서가 된다. 서울의 승동교회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 朴 成 春 )이 장로로 되었던 사례를 갖고 있다. 6) 그리고 그의 아 들 박서양( 朴 瑞 陽 )은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이 되어 한 때는 모교에서 가르치기까 지 했다. 이런 사례는 결혼의 풍속도 등 전통적인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과 함께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기독교회가 성립되는 곳에서 시작되고 있던 현상이다. 기독교의 수용은 인간관의 변화와 함께 직업관과 가치관의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이미 반상의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가졌던 직업관도 바뀌어 지기 시작했다. 일의 귀천에 관계없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일이라는 성경의 가 르침은 봉사와 희생을 기독교적 실천덕목으로 강조하는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기 독교인들의 삶의 영역에 파고 들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 가 되라 는 예수의 교훈은 배재학당의 당훈( 堂 訓 )이 되었고 이를 교훈 받은 자들 이 섬겼던 한국 사회의 가치관을 개혁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의료선 교사들의 콜레라 퇴치를 위한 헌신 봉사는 한국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은 물 론 직업관과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7) 한말 성경과 십계명, 기독교 전도문서들에 의해 정직과 신용, 근면과 절제를 기독교윤리로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은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는 능력을 배양해 갔 다. 이것은 물론 선교사들이 한국 사회에서 서양의 문화와 힘을 소개하면서 점차 양대인화( 洋 大 人 化 ) 하여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그 힘에 의존하게 되었던 점과 무 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독교인들의 부정 부패에 대한 항 6) 勝 洞 敎 會 百 年 史 (1996) p )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이만열, 기독교의 전래에 따른 한국사회의 개화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 (지식산업사, 1981) pp 참조

1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거는, 당시 오로지 복종만 강요당해 온 백성들의 자각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관장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서도 기독 교에 입교하는 경우가 더러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관장의 말을 믿다가는 큰 낭패를 보겠으니 다시는 관장의 말을 믿지 말고 외국교에나 들어가서 생명과 재 산을 보호받게 하자 8) 고 하는 가련한 백성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황성신문 도 당시 백성들이 외국교에 떼지어 들어가는 것은 관리들의 탐학에 고통받아 그 화 망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9) 한말에 기독교가 수용되어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서 전통적인 종교나 사상에 의한 갈등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었다. 서울 평양 수원 등지에서 일어난 기독 교에 대한 박해는 그 뒤에 지방관의 조종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갈등은 곧 선교 사와 지방 수령과의 갈등으로 압축되었고 급기야는 선교사가 승리하여 그들의 힘 이 한국인들에게 과시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따라서 서양 선교사 세력을 뒤로 한 기독교인들은 지방 수령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 과거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 다. 지방 수령 중에는 부정에 항거하는 기독교인들을 동학교도 라는 혐의를 뒤집어 씨워 투옥시키기도 했지만 부정부패한 지방관들 중에는 부정을 고발하는 기독교도 들의 항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매관매직하여 지방수령으로 발령 받은 일부 양반들은 야소교 있는 마을에는 부임하지 않겠다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 을에 갈 수 없나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 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히 빼앗기지 아닐 터 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이 까닭인 듯 10) 이런 사례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양 선교사들의 힘을 의지한 기독교도 들의 항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이 갖고 있는, 부 정과 부패에 대한 항거 정신 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사례들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거친 사회의 변화와 민중의 성장에 따 8) 독립신문 4권 185호 ( ) 9) 황성신문 광무 5(1901)년 3월 28일자 10) 대한크리스도인회보 3-9호 ( )

13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른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 인간관이나 가치관의 변화와 함께, 기독교인들에 의한 일종의 반봉건 사회개혁의 의미로 범주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3. 국권수호를 위한 항일 운동 반봉건 사회개혁 운동은 상황에 따라서는 반외세 국가자주 운동으로 나타나 게 된다. 양자는 표리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는, 시대가 좀 다르기는 하 지만, 몽고의 침입때에 청주성 전투의 승리의 예에서도 보인다. 청주성을 지키던 김윤후는 성 안에 있는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반봉건적 일종의 신분해방을 약속하 면서 노비들을 독려할 때에 노비들로 조직된 부대가 발분하여 몽고군을 물리쳐 승리하는 반외세 반침략와 연관되었다. 기독교인들이 반봉건운동에 나서게 되는 때가 1890년대 후반인데 바로 그 무 렵부터 기독교인들의 국가자주운동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11) 기독교인들은 1896년경부터 우선 왕의 탄신일을 맞아 그것을 축하하는 모임을 가지면서 충군애 국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독립협회와 협성회에 참석하여 민권신장을 통한 국가자 주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독립협회의 운동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지도부(윤치호 서재필)를 비롯하여 중간지도층(남궁억 이 상재는 아직 기독교에 입교하지는 않았으나 뒷날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다. 그 밖 에 주시경 이승만 등)과 대중동원층에 기독교인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배재 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에도 기독교 인재들이 많이 모였다. 12) 만민공동회에는 백 정 출신의 박성춘이 연설하는 것을 비롯하여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노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하고 일본의 배타적인 한국간섭이 노골화되어가자 기독교인들의 반외세 국가자주운동은 거의 항일운동으로 집약되었다. 한국교회의 항일운동은 종교적인 행위라고 할 기도회 등에서 나타났다. 일제 침략이 노골화 하자 1905년 9월에 모인 제 5회 장로회공의회에서는 길선주 장로의 발의로 그해 11월 감사절 익일부터 7일간 전국교회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기로 결정했다. 을사 조약이 늑약된 후 정순만 전덕기 등이 그 철폐를 위한 기도회를 상동교회에서 개최했을 때 연일 수천명이 모였고, 순종 황제 서순( 西 巡 ) 때에도 환영예식을 거 행한 후 교당에 회집해서 나라위한 기도회 를 열었다. 이 때 평양 교회 김 장로의 11) 이 점에 대해서는 이만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動 態 化 과정 한국기독교와 민족의 식 (지식산업사, 1991) pp 참조 12) 이만열,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두레, 1998) pp ,

1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증언에는 교중에서 왕왕히 나라를 위하여 기도한다 는 내용도 있었다. 13) 나라 위한 기도회 의 전통은 그 뒤 1906년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조사와 박치 록 장로가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는 것으로 발전하는데 14) 이 또한 그 시기로 보아 서 나라위한 기도가 그 중요한 동기였다고 생각된다. 을사조약이 늑약되자 이를 무효화하기 위해 감리교회의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 懿 法 靑 年 會 )는 상소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진남포 교회 엡웟청년회의 총무였던 김구도 이 철폐운동에 참가했다. 15) 을사늑약 후 기독교인인 최재학 이 시영 등은 평양에서 올라와 조약의 철폐를 주장하는 격문을 살포하다가 70여일간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또 예수교인 김하원 이기범 김홍식 차병수 등도 이천만동 포에게 경고하는 글 을 뿌리고 운집한 시민들에게 격렬한 연설을 하다가, 일본 현 병들과 충돌, 일본군 사령부에 구금되었다. 16) 그런가 하면 일제의 침략에 울분을 참지 못하던 기독교인 우국지사 중에서 자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영효 귀국환 영 및 궁내부장관 취임 축연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한 이등박문이 나오지 않자 그 를 제거하려고 준비했던 정재홍이 목숨을 끊었는가 하면, 고종의 양위소식을 듣 고 대한문 앞에서 자결한 예수교인 홍태순 등의 예도 있다. 한말 기독교인의 항일운동은 여러 방면에서 이뤄졌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 서 항일운동을 들 수 있는데, 시장세반대투쟁 과 납세거부투쟁 그리고 적극적으 로는 국채보상운동 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다. 선교사와 그 조 사들은 예수교도들에게는 특권상 폭자( 暴 者 )의 학대 그 중 일본 군대의 압박들을 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명적인 교의에 기초하여 생명 재산 등에 관한 권리 를 얻었음으로 전제적 정치의 법령 측 인도( 人 道 )에 반하는 금제( 禁 制 ) 및 가세 ( 苛 稅 )에는 복종할 수 없다. 17) 고 설교하면서 이미 통감부 지배하의 한국정부에 대한 조세저항까지 정당화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은 폭력적인 무력행사에서도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정 재홍이 이등박문을 암살하려 했던 것이나, 안중근과 뜻을 같이했던 우연준이 기 독교도였다는 사실, 스티븐스를 제거한 장인환이 기독신자였다는 데서 우선 그 13)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11일자 14) 金 麟 瑞, 靈 溪 先 生 小 傳 金 麟 瑞 著 作 全 集 5 ( 信 望 愛 社, 1976) p ) 金 九 씀 이만열 옮김, 백범일지 (역민사, 1997) pp 이 때 상동교회에 모인 인물 들은 전덕기 정순만 이준 이동녕 최재학 계명록 김인집 옥관빈 이승길 차병수 신상민 김태연 표영각 조 성환 서상팔 이항직 이희간 기산도 전명헌 유두환 기기홍 김구 등이었다고 한다. 16) 이만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두레, 1998) p ) 淸 津 理 事 官 機 密 警 察 月 報 (명치 42년 4월분) 발췌, 駐 韓 日 本 公 使 館 記 錄

15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을사조약 후 전덕기는 평안도 장사들을 모집하여 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으나 일본 병사들이 신변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 이재명 의사와 그의 동지들이 이완용과 이용구를 처단하 려 한 경우를 보면, 이재명 자신이 기독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뜻을 같이 행 동대원 중에는 이학필이라는 목사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기독신자였다. 18) 이같은 기독교인의 적극적인 항일투쟁은, 뒤에서 언급할 항일운동의 두 큰 흐름인 애국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에 비춰볼 때,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오 히려 뒷날 나타나고 있는 의열투쟁의 형태를 띄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한국 독립 운동사에서 의열투쟁이 1920년대에 적극화된다는 점에 비춰본다면 한말 기독교인 들의 의열투쟁은 매우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말의 이같은 기독교인의 의열투쟁은 일제 강점기에는 강우규 김상옥 편강열 같은 기 독신자들의 의열투쟁으로 이어진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한말 이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한 반침략적인 항일민족운동이 어떻게 가 능했겠는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일찍 부터 애국교육을 시켰던 것이 그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노일전쟁 이 일어나자 그것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와서 일제의 침략적 만행을 폭로하면 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서술했던 매켄지(F.A.Mckenzie)에 의해서 지적된 바가 있 다. 그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항일정신의 근거를 성경과 관련시켜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많은 수의 한국인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미션계 학교에서는 잔다아크 햄프던 및 조오지 워싱턴 같은 자유의 투사들에 대 한 이야기와 함께 근대사를 가르쳤다. 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고 선동적인 서적인 성경을 보급하고 또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한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절멸( 絶 滅 )되던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던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 19) 한말 항일운동의 큰 두 흐름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굳이 기독교인들의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18) 이만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두레, 1998) pp ) F.A.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Yonsei Univ. Press, 1969, p

1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말 사립학교의 설비주체에서 기독교계의 사립학교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비교 적 높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일단 기독교계의 애국계몽운동은 더 언급할 필요없이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사립학교 교육 외에 애국계몽운동류에서 언급할 경제 정 치 사회 운동에서도 기독교계의 운동은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여기서 언급할 것은 한말 기독교계의 항일민족운동에서 개별적 비조직적인 의열투쟁에서는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만, 조직적인 의병투쟁에서는 괄목할 만한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병의 배후에 선교사가 지원한다는 일본측의 정보가 있었고 교회가 의병운동을 지원한 듯한 일본측의 보고가 있었으며 교회가 의병운동으로 환란을 당한 경우가 있었다. 특이한 것은 의병의 지휘부에 기독교 인이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기독교인 중 구연영 구정서 부자와 우동선 등이 기독교인으로서 의병운동에 가담한 것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기독 교는 의병운동에 소극적이었다. 그것은 의병운동이 척사위정 이념을 기반으로 한 유생들 중심의 복고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음에 비해 기독교는 개화주의를 지향하 고 있어서 항일독립운동상의 목표와 방법이 상이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20) 4. 일제하 항일독립운동 일제하의 민족운동은 항일독립운동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대내적으로 평등 권 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운동들도 항일독립운동의 일환으 로 간주되고 있었다. 가령 사회주의 운동도 그 지향점이 반드시 항일운동과 일치 하지 않는 경우에도 항일독립운동의 범주에서 논의되었던 작금의 상황은 이런 이 해에 일말의 도움이 된다. 일제하의 항일독립운동에는 3.1운동 같은 거족적인 항일독립만세운동이 있었 다. 그 후에 항일민족독립운동이 본격화되는 단계에서는 임시정부운동과 외교운 동, 무장투쟁과 공산(사회)주의운동, 국내의 실력양성운동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이다. 이같은 항일독립운동상의 여러 흐름과 세력에서 기독교 민족운동이 갖는 위치는 어떤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제하의 기독교인이 관여한 민족운동은 3.1운동에서 그 역량을 발휘한 이래, 더러 준비론 혹은 개량주의로 흐르는 부류가 없진 않지만, 임시정부운동과 외교투쟁, 무장투쟁과 공산주의운동, 무실역행운동 20) 기독교의 의병운동에 대해서는 이만열, 의병운동 기독교대백과사전 (기독교문 사, 1984) 제 12권, pp 참조

17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과 절제운동 농촌운동 사회운동 독립운동자금 지원 및 기도회운동과 신사참배 반대투쟁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민족운동으로서의 신사참배반대투쟁 에는 기독교인만이 거의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기독교에 대한 회유와 탄압정책을 병행했다. 강점 후 일제가 사회단체와 언론기관을 해산 또는 폐쇄했지만, 구미제국을 의식하여 남겨놓은 기독교회에 대해서는 양면정책을 취했다. YMCA나 교회당의 건립에 보 조금을 지원한다던가, 기독교지도자들을 유람시킨다든가 하는 것은 일종의 회유 정책이었다. 한편 한말부터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를 표방했던 기독교계에 대해서 는 철저하게 탄압하는 정책도 수반하였다. 그것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1911년에 터진 이른 바 105인사건 이었다. 21) 한말 비밀 독립운동 조직으로 창건 된 신민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었다고 하지만, 연루된 사람들은 서울과 서북 지방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계에 대한 이 조작된 음모사건은 혐의자에 대한 심한 고문 등 일제의 비문명국적인 야수성을 국제 사회에 노출시 키는 결과를 가져 왔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에 대해서는 언제든 지 탄압을 가할 수 있다는 엄포적인 효과는 충분히 거두었다. 강점 초기에 선교사를 포함한 기독교계에 보였던 회유정책은 점차 탄압정책으 로 전환되었다. 그들은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대해 간섭함으로 기독교 선교 자체 에 제동을 걸었을 뿐아니라 기독교계의 민족의식 제고와 민족운동에도 간접적인 제재를 가했다. 1915년 일제는 사립학교법 에 손대어 미션계 학교에서 성경교육과 종교의식을 금하도록 하는 한편 그 학교들이 제도와 시설을 보완하여 정규학교로 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회유정책도 폈다. 이것은 말하자면 채찍과 당근 을 같이 주는 정책이었다. 일제는 또 같은 해에 포교규칙 을 개정하여 종교기관의 설립이나 기관책임자의 초청에는 반드시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22) 이것은 다른 종교에 대한 제재라기보다는 기독교를 탄압하려는 것이었음이 명백했다. 3.1운동이 기독교계의 적극적인 참여로 발발하게 된 것은 기독교계에 대한 일 제의 이같은 탄압을 배경으로하고 있다. 3.1운동과 기독교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들이 있으므로 23) 여기서 그 내용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21) 105인 사건에 대해서는 尹 慶 老, 105 人 事 件 과 新 民 會 硏 究 ( 一 志 社, 1990) 참조 22) 이 점에 대해서는 윤선자, 1915년 <포교규칙> 공포 이후 종교기관 설립 현황 한국기 독교와역사 8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참조 23) <3.1운동 70주년기념 특집호> 韓 國 基 督 敎 史 硏 究 제25호(한국기독교사연구회, 1989) 및 <특집: 3 1운동과 제암리사건> 한국기독교와역사 제7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 참조

1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 점화단계에서나 지방으로 확산되는 단계에서 보인 기독 교계의 활동은 24) 3.1운동의 가장 뚜렷한 핵심세력이 기독교계임을 보여준다는 것 이다. 더구나 당시 기독교인의 수 20여만명을 민족종교라는 천도교의 교세와 비 교해 볼 때 이런 견해는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당시 천도교주 손병희는 법정 진술에서 녹명자( 錄 名 者 ) 300만 의무부담자 200만이라고 했는데 이 수자에 비춰 본다면 기독교인은 천도교인의 15분의 1 내지는 10분에 1에 불과한 셈이었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한국의 민족 민주 운동사 뿐만 아니고 세계 반제( 反 帝 )운동사에도 혁혁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우선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보면, 그 전에 척사위정 개화 민중 운동의 세 갈래로 진행되던 민족운동이 3.1운동을 계 기로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시켰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 한국민은 나라를 잃 고도 분개해 할 줄 모른다느니 일제의 개혁정치 에 열복한다느니 하는 기만적인 선전을 계속했는데 3.1운동은 이를 완전히 분쇄하게 되었다. 또 3.1운동은 이를 계 기로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이 임시정부운동 무장투쟁운동 무실역행운동 외교운동 등으로 새롭게 도출될 수 있게 되었다.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 뿐만 아니고 한국의 민주운동에서도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 때까지의 독립운동은 왕조를 회복한다는 의미의 복벽( 復 辟 )운동적 성격을 가졌었지만, 3.1운동은 백성 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정 이념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 주의 운동사에서도 큰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3.1운동은 또 세계 제 1차 대전후 새로운 강대국 중심의 질서로 재편하는 베르사이유체제에 항거한 사건으로 세계 반제운동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사 티야그라하 운동을 비롯한 필립핀 베트남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중요한 계기 를 마련했다. 기독교인들의 일제하 민족운동은 3.1운동 후의 임시정부 운동에도 적극적이었 다. 임정에 참여한 지도자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이승만 이동휘 안창 호 김구 김규식 손정도 현순 송병조 김병조 김인전 등 수많은 분들이 있 었다.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교회적인 배경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독립자금 또한 교회를 통해 모금되었다. 무장투쟁에도 기독교도들의 활약을 무시 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강우규 편강열 김상옥 열사를 비롯하여, 청산리 전투 24) 가령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라든가, 3.1운동이 진행되는 도중 6월 30 일까지의 투옥자 9,458명중 2,087명(22%)이, 이해 12월까지의 복역자 19,525명중 3,373명(17%)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당시 한국 인구 중 1.3%에 불과한 20만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과 함께 이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19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대한독립군 부대가 기독교도로 조직된 부대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국내 국산품애용운동을 포함한 무실역행운동에는 조만식을 비롯한 기 독교인들이 참여했을 뿐만아니라 추진과정에서도 교회와 기독교 기관들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일제하 기독교의 국내 농촌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1915년 한인사회당을 창건하고 뒤이어 고려공산당으로 발 전시킨 이동휘가 한 때 기독교 전도사로서 맹활략했다는 사실이나, 김일성의 가 계가 기독교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 25), 그의 젊은 시절의 활동에서 손정도 목 사와의 관련을 시사한 대목은 한국의 초기공산주의운동이 기독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1930년대 후반부터 강화된 전시체제 하에서 국내 민족운동은 위축될 대로 위 축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만이 일제의 통치에 계속 저항 했다. 기독교계의 저항은 주로 신사참배거부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26) 일제 말기 에 2천여명이 신사참배반대에 나섰으며, 신사참배반대로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 으며 50여명이 순교당했다는 통설에서도 보여주는 바와 같이 기독교계의 저항은 일제말까지 계속되었다. 일제의 황민화(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강제된 신사참 배강요에 대한 반대는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반대한다는 순수하게 교조적인 의미만을 고집했다 할지라도 그 파장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반 대의 의미가 부각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신사참배반대투쟁은 민족운동 의 선상에서도 이해됨직한 것이었다. 27) 일제가 신사참배반대자들을 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몰아가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기독 교도들에 의한 신사참배반대투쟁은 국내에서 이뤄진 마지막 항일민족운동의 의미 를 지닌 것이었다고 해석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 기독교가 남긴 민족운동 이 당시 한국 기독교계의 주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들의 민족운 동에서 기독교적인 이념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점 과 관련, 민족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이 기독교계의 주류도 아니고 그들의 민족 운동이 기독교계의 합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그 25) 최영호, 김일성 생애 초기의 기독교적 배경 한국기독교와역사 제 2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 소, 1992) 참조 26) 이 점에 대해서는 김승태 엮음, 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 참조 27) 이상규,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한국기독교와역사 제 4호 (한국기 독교역사연구소, 1995) p. 67 주 2) 참조

2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것이 기독교계의 의사표시로 볼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일제하 독립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전체 한국인의 극소수라고 하여 한국에 독립운동이 없었 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하나, 기독교인의 민족운동에서 기독교 이념과의 연관성 문제는 일반적인 애국심이나 민족의식과의 경계선을 분명히하기 가 힘들지만 전혀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가령 3.1운동의 이념과 기독교 신앙의 관련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보며 기도하면서 이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사실 등은 이 점을 어렴풋 이 나타내 준다고 할 것이다. 28) 또 도산 안창호의 민족주의의 기저에는 기독교적 인 이념이 뒷받침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는 29) 것도 그 실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기독교인과 개량주의와의 관련성 문제와 기독교 민족운 동의 투쟁의 강도문제라 할 것이다. 이 문제과 관련,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굴절 한 인사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부터 보여준 타계주의적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신앙이 갖는 화해적 성격이 타협적인 것으로 비친 데서 이러한 문제가 제 기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지만, 그 런 측면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타협과 굴절이 기독교인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느 냐고 변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서도 가령 신사참배반대투쟁을 민족운동의 차원 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면 기독교인의 민족운동을 타협일변도로 치부할 수 있겠는 가의 문제는 역제기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5. 식민잔재 청산과 민주화 운동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한 민족은 물론이고 갖은 핍박을 받고 있던 한국 기 독교계에는 무상의 복음 이었다. 일제가 그 해 8월 17일경에 신사참배반대에 앞장 선 옥중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다는 미확인된 주장에 비춰본 다면 해방의 타이밍에서 그 뒤 한국 교회의 정화를 위한 그루터기를 남기려는 섭 리마저 읽게 된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그렇듯이, 긴장이 풀리고 자유가 주어지면 자기의 정체성 을 확인한 바탕 위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거기 28) 이덕주, 3.1운동의 이념과 기독교 신앙문제 韓 國 基 督 敎 史 硏 究 제 25호(한국기독교사연구 회, 1989) 참조 28) 이만열, 도산 안창호와 기독교 신앙 도산사상연구 제 8집(도산사상연구회, 2002) 참조

21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 쉽지 않다. 한국 기독교계가 바로 그랬다. 해방을 맞았으 나 한국 기독교로서는 선교 종주국이라 해야 할 미국이 군정을 펴고 이어서 철 저한 기독교도로 자처한 적이 있는 이승만이 집권함으로써 일제하의 수치스런 과거를 철저히 청산하고 예언자적인 사명을 새롭게 회복하는 데에 도움은커녕 오 히려 방해가 되었다. 분단 상황이 일반사회의 부일협력자들을 제대로 청산할 수 없게 했다. 이 점은 기독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기독교계는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게 되었다. 해방 후 가장 중요한 민족사적 과제의 하나는 부일협력자를 포함한 일제 잔재 를 제대로 청산하고 정의로운 새 질서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일제잔재의 청산을 통한 정의로운 새 질서의 확립보다는 일제로부터 떠 안은 한국을 효율적 으로 통치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험있는 관료와 무조건 충성할 수 있 는 경찰 등의 권력의 도구가 필요했다. 해방 후 혼란상태는 일련의 정신도 줏대 도 없는 기능인을 필요로 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적어도 지배층 상호간에는 일 제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북쪽에서 부일협력자를 신속하게 처리한 것과는 달리 남쪽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으로 각처에서 분란이 야기되 자 오히려 부일협력자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분단상황이 결국 친일파를 온존시키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기에 친일세력이 분단체제의 고정화에 기여했고 또 분단체제는 친일세력의 기득권을 보호, 신장시켜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30) 는 지적은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지적 한 것이다. 약점이 많으면 자기 주장을 강하게 펴거나 실천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 리는 종종 권력이 약점 많은 자를 골라서 자기의 하수인으로 삼는 경우를 본다. 불의하고 정통성이 약한 권력일수록 그럴 뿐만 아니라 약점 투성이의 하수인을 많이 거느린 권력이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것 또한 역사의 교훈이다. 일제 강점 하에서 이민족에 부역하면서 민족을 배반하고 조국을 등졌던 사람들은 자신의 기 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들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체제에 무조건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새로운 체제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그 체제를 유지 하기 위해서는 약점가진 무리들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하의 부일세력들 이 분단정권과 결탁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점을 시사한다. 그들은 정당성의 문제 30) 김학준, 한국민족주의의 통일논리 (집문당, 1983) p

2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에서나 기득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동의 운명을 지니고 있었고 때문에 쉽게 결합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기독교계에서 일제하의 죄악을 회개해야 한다고 가장 먼저 주장한 이들이 신사참배에 앞장 섰던 친일파들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년 9월 2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경남교구장 출신인 김길창은 최재화 권남선 심문태 등을 끌어들여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 를 조직하고 일제하에서 행한 범 죄를 회개하고 정통신앙에 매진할 것을 주장하는 선언문 31) 을 발표하고 이어서 9 월 18일에는 경남재건노회를 조직하고 자숙안 32) 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출옥성도들이 남하하기 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신속한 변신의 계략 이었다고 지적된다. 33) 변신을 위한 이같은 계략은 한국 장로 교회가 신사참배 취소결의를 세 번( )이나 한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진실성을 가진 것이었다고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 뒤의 그들의 행적이 그러한 행동이 진실이 아니었고 제스춰에 불과했다는 것을 증거했다. 한국 사회가 부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결과 민족정기를 세우지 못했고 새 질 서를 바탕으로한 조국을 건설하는 일에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도 일제 잔재 청산에 실패한 결과 것잡을 수 없는 혼란과 분열을 가져왔다. 한국 교회 분 열의 첫 머리에, 신사참배 회개를 외치고 친일잔재청산을 주장했던 출옥성도 중 심의 일련의 개혁주의자 들을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는 것은 한국 교회사가 갖는 일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비해서 해방직후 기독교계는 민 족운동다운 민족운동을 펼치지 못했다. 다만 통일국가 건설운동에서 김구 김규 식 같은 평신도 지도자와 몇몇 목회자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31) 심군식, 세상 끝날까지 - 한국교회의 산 증인 한상동 목사 생애 (총회출판국, 3판, 1997) pp 이 때 모인 인사들은 권남선 김길창 한익동 최재화 김만일 김상순 강성갑 윤인구 노진 현 김두만 심문태 한정교 양성봉 우덕준 서명준 김기현 구영기 백낙철 김은선 주영문 등 20명이었고, 선언문은 과거 장구한 시일에 가혹한 위력하에 교회는 正 路 를 잃고 복음은 악마의 유린을 당하 고 신도는 가련한 곤경에 들어 있었다. 오늘까지 노예의 속박하에 끌려오던 모든 제도 일체 는 자연 해소의 운명에 이르고 말았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불순한 요소를 청산 배제하고 순복 음적 입장에서 교회의 근본 사명을 奉 行 하려는 의도에서 좌기에 의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 노회를 재건하려는 것이다. 라고 했고, 그들은 종교개혁의 정통신앙을 사수 하며 조선예수교장 로회 헌법을 전적으로 채용한다. 고 했다. 32) 심군식, 앞의 책, pp 내용은, 목사 전도사 장로는 일제히 자숙에 들어가며 현재 시 무하는 교회를 일단 사면할 것. 자숙기간이 지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하여 시무투표를 시행 하여 그 진퇴를 결정한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구호에 그쳤다. 33) 이상규,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한국기독교와역사 제 4호 (한국기 독교역사연구소, 1995) p

23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해방 후 정치 관료 법조 지식인 사회에서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하고 이들 을 온존시킨 결과 사회전반에 정의감이 상실되고 역사허무주의가 팽배하게 되었 으며 기회주의자와 보신주의자를 양산하게 되어 한국의 민주적 발전에도 부정적 인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교회대로 교권주의적 권력지향적 세력이 주도권을 장 악하면서 일제청산을 주장하는 개혁적인 세력은 주류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과거에 대한 회개와 청산을 외치고 시대마다 필요한 예언자적 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오히려 격에 맞지 않았다. 더구나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일부 교직자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등 교권과 정치권력이 유착하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하에서 정교유착을 벗어나지 못하고 부정 선거에 개입하게 되는 상황에서 기독교가 자기 목소리를 갖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독교가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갖게 되는 것은 1960년 4.19와 그 이듬해 5.16 군사 쿠테타를 계기로 해서 자기반성이 일어나면서부터다. 4.19혁명 후 기독교계 와 교계신문은 돌연 비판자로 변했다. 그러나 5.16군사쿠테타가 일어났을 때에 한 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군사쿠테타를 지지하였고, 심지어 기독공보는 자유를 희생 하더라도 방종한 무리들이 숙정되는 것을 보고 싶다 혹은 권위있는 정부 밑에 있게 되어 행복하다 고 아첨을 떨었다. 34) 이 때까지 교권을 쥐고 있던 인사들이 4.19로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활란 한경직 등 기독교계 대표는 미국 을 방문하여 군사정부를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5.16을 계기로 그 전까지 유착관계에 있던 기독교와 정권 사이에는 파열음이 일어났고, 군사정 권의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자세에 대한 기독교의 비판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군사정권이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경제성장을 이룩하 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성장을 국가적 과제로 삼고 거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수출위주의 산업구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변 명한다. 군사정권은 산업현장의 노동력 착취를 정당화하면서 노동자들의 인권은 물 론 산업현장의 민주적 의사결정 요구를 억압해 갔다.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 면서 자기를 상대화시켜 갔던 기독교계는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인권과 민주주의의 신장에서 찾았다. 여기서 군사정권과 기독교계의 대결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과 기독교계의 대립이 뚜렷해진 것은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 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경제성장을 서두르고 있던 박 정권 은,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원조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중 34) 기독공보 1961년 5월 29일자

2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재에 따라 한일회담을 서둘러 마무리지어 경제성장을 위한 자금을 일본측으로부 터 들여올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정중한 사과와 정당한 배상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군사정권이 굴욕적인 외교인 줄 알면서도 한일회담 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군사정권 하에서 이렇다 할 비판세력 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강요 등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한국 기독교계는 분연히 일어나 이 굴욕외교에 항거하게 되었다. 한일회담에 대한 기독교계의 비판은 1964년 2월 12일 한국기독학생회(KSCM) 가 발표한 일본기독자에게 보내는 공개장 에서 비롯되었다. 그 해 3월 6일 기독교 계인사들은 야당과 각계인사 200여명과 함께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 회 에 참여했고, 4월 17일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가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 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렇게 불붙게 된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그 이듬해 (1965) 6월 22일 조인을 앞둔 시기에 영락교회에서 연합으로 기도회를 개최했으 며, 이 열기는 7월까지도 계속되면서 반대성명을 발표하기도 35) 하고 금식기도회 로 모여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합동측의 승동교 회와 평안교회 등이 움직인 것을 보면, 한일회담 반대운동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 분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36)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사에서 진보와 보수의 경계가 뚜렷하게 되는 것은 1968년 박정희의 삼선개헌이 시도되면서부터다. 이 때부터 한국교회에는 권력에 대한 대 응에서 견해차가 분명해지기 시작했다고 지적된다. 37) 1968년 8월, 김재준 박형 규 함석헌 등 진보적 인사들이 3선개헌저지 범국민투쟁위원회 를 조직, 동 8월 15일에는 반대성명서를 냈다. 그러나 그 해 9월 2일에는 김윤찬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등 보수측 인사 242명이 개헌문제와 양심자유선언 을 발표, 앞서 김재준 등의 성명서가 순진한 성도들의 양심의 혼란을 일으키는 선동적 행위 라고 비난 하고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했다. 이 사흘 뒤인 9월 5일에는 앞서의 242명에 포함된 박형룡 김준곤 김윤찬 김장환 조용기 등이 대한기독교연합회 라는 단체 명의로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 을 발표하고 3선개헌을 지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앞서 그들 자신이 주장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는 내용과도 상치될 뿐아니라 급조된 대한기독교연합회 란 이름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와 35) 크리스챤신문 1965년 7월 9일자 36) 기독신문 1965년 7월 19일자 37) 이상규, 해방 후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한국기독교와역사 제 4호 (한국기 독교역사연구소, 1995) p

25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비슷한 단체명이어서 국민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도록 했던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 이었다고 보여진다. 이를 계기로 한국 기독교계는 진보와 보수가 사회문제에 관 한 한 서로 냉소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38) 한국 기독교계의 인권 민주화운동은 1970년대 유신정권기 에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후 극단적인 인권탄압과 반민주적인 행태가 자행되고 있었다. 서슬퍼런 유신정권 아래서 누구도 인권과 민주화를 거론하지 못하던 때였다. 이를 박차고 나온 것이 기독교계였다. 이 대 한국 기독교회는, 비 록 그 일부이기는 하지만, 1973년 4월 22일의 남산부활절 예배사건을 필두로 개헌 청원운동, 민청학련사건, 오글 선교사의 추방, 3.1민주구국선언(1976), 도시산업선 교 활동 및 기독자교수해직사건(1977) 등으로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들에서 그 중 심에 서 있었다. 39) 이 무렵 민주화운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민중신학이 었고 민중신학은 인권 민주화운동의 진전에 따라 심화되어 갔다. 민중신학은 또 한 해방신학 등 일련의 정치신학과도 맥락을 닫고 있었다. 한국기독교계의 인권 민주화운동은 한국 기독교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서 한국 의 인권신장과 민주주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비판세력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군사정권 하에서 기독교계의 그런 운동은 한국 사회에 큰 희망이 었고,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공감대와 지원세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한국이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진출함에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의 측면에서 자신의 폐쇄성 을 극복하고 보편적인 가치관을 확보해가면서 소위 선진국 과 어깨를 겨룰 수 있 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인권 민주화가 이룩한 긍정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인권 민주화운동이 갖는 한계도 분명히 있었다. 한국 기독교계 가 이 문제로 말미암아 진보와 보수로 확연히 분열되었다는 것을 지적함과 동시 에 이 운동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이나 신앙적인 고백을 조율하지 못하고 사회문 제가 잇슈화될 때마다 거의 협력하지 못했다는 것을 일단 지적할 수 있다. 그리 고 이 운동이 기독교계가 자신을 상대화시키면서 예언자적인 기능을 회복하는 과 정에서 이뤄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객관성을 끝까지 담보하지 못하고 더 러는 이념적인 편향성을 노출하기도 하고 더러는 계급적 성향이나 지역성에서 편 가르기를 노골화하게 된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운동이 예언자적 순수성을 끝까지 담보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이유의 하나는 과거 이 운동에 적 38) 이상규, 위의 논문, p ) 이만열, 5.17김대중내란음모사건 의 진실과 그 역사적 의의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4호, 가을호)

2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극 참여했던 인사 중에는 그 뒤 문민정권과 국민의정부에 가담하여 정치적 오류 를 범한 사례가 보이기 때문이다. 인권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 기독교계는 이를 저해하는 세력의 논리 가 안보 라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인권 민주화에 제동을 거는 집권세력의 논리가 안보논리 라는 것이다. 이 안보논리는 분단을 전제로 한 것이 며 그 배경에는 바로 민족분단이라는 절벽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인 권 민주화를 위해서는 그것을 가로 막고 있는 분단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 을 깨닫게 되었다. 분단의 벽을 허무는 것이 바로 통일운동이다. 여기서 인권 민 주화를 위해서도 통일운동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던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인권 민주화운동과 표리의 관계를 갖고 전개된 한국기독교 계의 통일운동은 년대의 기독교 운동의 축적된 경험과 그 동안의 자기한 계를 극복하려는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하여 얻은 값진 결실이었다. 6. 민족통일 운동 한국교회는 1980년대부터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스스로 통일운동을 전개하 면서 정부의 통일정책을 비판하고 자극하며 더러는 선도하였다. 이는 기독교가 한국에 수용된 이래 반봉건 개화의식과 반침략 자주의식을 성장시켜 왔고 군사정 권 후에 인권 민주화 운동을 계속해 온 연장선상에서 이룩한 것이다. 해방 후 한때 정경유착으로 기독교계가 예언자적인 사명을 망각한 적이 있지만, 1960년대 이래 군부통치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인들의 마비된 역사의식과 시대적 사명감은 회복의 수순을 밟았다. 기독교인들의 역사의식은, 군사통치 초기에는 인권, 민주 화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80년대에 들어서서는 통일운동에도 역점을 두게 되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인권 민주화운동에 제동을 건 것은 안보논리 때문이고, 안보논리가 자신의 정당성을 찾는 근거는 분단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족통일이야 말로 인권문제와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극복케 하는 중요한 요건이었다. 기독교계 통일운동을 말하자면 먼저 한국에서 전개된 기독교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부터 언급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최근의 것에 국한시키고자 한다. 기독교 통 일운동에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은 1972년 7 4남북공동성명 의 발표다. 이 때까 지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기독교계는 그 뒤 유신체제의 정착으로 남북대화가 중 단될 때까지 통일논의에 그런대로 적극성을 보였다. 7 4남북공동성명 이 발표된 2 주일 후인 7월 18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7 4공동성명에 대한 성명

27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서 는 통일문제를, 반공적인 여론을 억압하고 민주화를 후퇴시키는 빌미로 삼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보이고 있다.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 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통일을 위하여 우리의 민주적 이념을 경 시함을 의미할 수는 없다. 우리는 민주주의적이며 반공적인 질서와 교육을 소 홀히 할 수 없고, 대화의 밑바탕이 될 우리의 민주적 힘을 강화하여야 한다. 성급한 남북대화 때문에 반공적인 여론이 억압되는 경우에는 심히 우려되는 사태 가 벌어질 것이다. 40) 성명은 끝 부분에서 우리 기독교회는 원래 화해와 복음을 생명으로 하는 단 체이므로 우리는 7 4공동성명에 나타난 정신을 적극 지지한다 고 하여 마지 못해 그 성명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난처한 입장을 드러냈다. 통일문제는 종래 정부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계는 통일문제를 민간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1974년 초, 기독교청년 협의회 회원 약 3천여명은 <통일을 기원하는 예배>를 드린 후 가두데모를 감행 하였다. 통일문제로 데모를 감행한 것이다. 1976년 3월 1일에는 명동사건 에서 민 주구국선언서 가 발표되었는데 그 선언서에서는 민족통일의 긴급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국은 처리과정에서 이 문제를 간과해버린 채, KNCC 등 사회참여세력을 용공으로 몰아세우려 하였다. 유신체제가 극성을 부리던 1978년 10월 17일, 함석 헌, 문익환, 윤보선, 이문영 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재야인사 402명이 민주국민선언 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골자는 반독재 민주구국 투쟁과 민족염원 인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전반적으로 교회가 통일을 논의하는 것은 독재정권의 연 장 술책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통일의 당위는 말하지만 통일활동 은 보류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기독교계가 민족통일에 공헌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기독교회가 변화된 의식을 기반 으로 민주화 못지 않게 통일운동에 나서게 되는 것은 1980년대를 기다려야 했다. 기독교인들의 통일운동에 하나의 계기를 만든 것이 해외에 거주하던 기독교인 40) 김상근, 민족의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공헌 (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 창립70주년 1994), p.43에서 재인용

2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들이 북한동포를 만나 조국의 통일을 논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1 차는 1981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2차는 1982년 12월 3 일부터 5일까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만났는데 41), 이 때 발표된 공동성명에 서 참석자들은 북측의 주문에 따라 김일성 부자에 대한 비판에 신중한 반면 미 제국주의 비판, 미군 철수 및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임은 1991년 1월 30일-2월 3일의 프랑크푸르트 회의까지 10차나 회 합을 갖게 되었는데, 당시 국내 언론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 대화는 됫날 남 북 기독자들이 만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42) 한편 한국 기독교회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한 모임들이 있었다. 1981년 6월 8일-10일 서울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분단국에서의 그리스도 고백 이 란 주제와 죄책고백과 새로운 책임 이란 부제를 달고 <제4차 한 독교회협의회> 가 개최되었다. 이 협의회의 권고에 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2년 2월 26 일 산하에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이 해 9월 16일 운영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43) 1984년에는 제3차 한 북미교회협의 회 가 열려 미국이 한국을 분단시킨 나라라는 것과, 때문에 미국교회는 한국교회와 함께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남겼다. 이런 국제적인 모임을 배경으로 1984년 10월 29일부터 11월 2일까지 일본의 토잔소( 東 山 莊 )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문제위원회가 주관한 동북아시아 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Consultation on Peace and in Justice in Northeast Asia) 가 모여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 - 도잔소협의회의 보 고와 건의안- (일반적으로 도잔소 보고서 라 함)을 남겼는데 이 선언에서, 한반도 의 평화 통일은 화해의 복음의 구체적 실천의 결과요 목표라는 점 과 평화통일 은 남한 교회만의 일방적 선교과제가 아니고 남북한 교회 쌍방의 공동과제라는 점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 통일이 단순히 남북한만이 아닌 세계 교회의 공동 책 임이라는 점 등을 천명했다 44). 이같은 결의로 말미암아 토잔소선언은 한국 기독 41) 통일신학동지회 엮음, 제2차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신자간의 대화 ( 통일과 민족교회의 신학 한울, 1990) p )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통일대화 10년의 회 고 (형상사, 1994) 참조 43) 박종화, 한반도 통일을 위한 남북교회의 실천-자료모음- ( 남북교회의 만 남과 평화통일신학-기독교 통일신학자료 및 평화통일 신학논문 모음집 한국기독 교교회협의회 통일위원회 편, 1990) p. 2 44) 박종화, 위의 논문 - 도잔소 보고서 전문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위원회

29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교 통일운동사에서 뿐만아니라 한민족 통일운동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남북교회는 1986년부터 2년 간격으로 세 차례에 걸쳐 스 위스 글리온에서 만나게 되었다. 남북교회의 만남은 1986년 9월 2일부터 5일까지 스위스 글리온에서 세계교회협의회 국제문제위원회가 주최한 평화에 대한 기독 교적 관심의 성서적 신학적 기반 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에 참석하는 형식으로 이 루어졌다. 제1차 글리온회의 로 불려지는 이 만남은 조선기독교도 연맹의 4인대 표 와 WCC회원교회 및 대한민국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대표하는 6인 대표 단 을 포함한 22명 이 참석하였으며, 악수와 포옹 을 나누고 교회의 일치와 인류 의 일치를 상징하는 표징으로서의 성만찬도 이뤄졌다. 제2차 회의는 1988년에, 제 3차 회의는 1990년에 각각 글리온에서 열렸다. 제 3차 회의에서 남북교회는 상호 방문, 남북당국간 상호불가침선언 채택 촉구, 사업추진 실무기구 설치 등 9개항에 달하는 희년 5개년 공동작업계획 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 뒤에 전개된 남북관계의 경색은, 1995년 3월 교토( 京 都 )회의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후속조치를 무산시 키고 말았다. 글리온 회의는 1995년을 통일을 위한 희년으로 설정하고 화해와 일 치를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여 이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민족통일운동사 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남북교회가 이렇게 만나고 있을 때 남측의 KNCC에서는 1988년 2월 29일 민 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 KNCC 통일선언 )이 선포했다. 이 선언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자세히 언급한 바 있기 45) 때문에 여기서는 더 언급 하지 않겠다. 다만 이 선언은 분단 반세기 동안에 남한 사회에서 민간부문에 의 해 제출된 최초의 본격적인 통일선언으로 획기적인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혹은 민간 차원의 통일논의의 물꼬를 튼 46) 것으로 평가되는가 하면, 이 선언이 제시 한 통일원칙은 지난 60년대 이후 남한교회의 진보세력이 주장해 온 통일의 기본 원칙을 수용 집약한 것 47) 이라고도 평가된다. 또한 이 선언은 민족통일운동에 종 사해 온 한국교회가 교회내부의 통일론을 수렴하는 한편, 그간의 정부 당국에서 편, 위의 책, pp 에 실려 있음. 45) 이 점에 관해서는 이만열,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의 의의 ( 基 督 敎 思 想 1995년 1월호) 참조 46) 박성준, 1980년대 한국기독교 통일운동에 대한 고찰 ( 神 學 思 想 71집, 1990), p ) 김흥수, 한국교회의 통일운동 역사에 대한 재검토 ( 기사연무크 9, 한국기 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91) p

3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내어놓은 통일정책 선언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민간차원에서 공포한 최 초의 통일선언이며 따라서 이 선언으로 통일논의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의 수 위와 지향점을 결정케 하는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 의의 48) 를 둘 수 있다. 따라 서 이 선언으로 한국 기독교회는 종래 진행시켜 왔던 통일운동을 정리하는 한편, 앞으로 새롭게 전개시킬 통일운동의 이념적인 근거를 마련했던 것이다. 1980년대의 한국 기독교의 통일운동은 1989년의 문익환 목사의 방북운동 49) 을 거쳐 1990년대에는 새롭게 다양한 통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90년대의 통일운 동은 다양성의 측면에서는 기존의 KNCC를 중심으로 한 평화통일희년운동 흐름 과 기독교사회운동연합 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하고 있는 평화군축운동의 흐름, 남 북 해외의 범민족대회 흐름, 여성운동의 흐름 그리고 90년대 들어 새로운 운동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복음주의(보수주의)권의 흐름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50) 1990년대의 통일운동에서 주목되는 점은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북한의 식량 난이 겹치게 되어 한국기독교의 통일운동이 북한돕기 운동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과 북한돕기 운동에서 진보와 보수가 제휴하고 있다는 점, 통일운동의 일환으 로 한반도평화운동이 새로운 호소력을 가지고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7. 맺는말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지 어언 120여년이 넘어서고 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 인간을 변화시키고 사회와 민족을 개혁하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하나님의나 라 는 이 땅에서 이렇게 확장되어 왔다. 한말에 수용된 기독교는 민족사가 전개되는 단계마다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단계마다 의식한 시대적 사 명은 당시의 민족적인 과제와 크게 어긋나지 않았고 오히려 제대로 의식한 것이 었다. 필자는 그것을 단순화된 용어로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몇가지 단계로 나누 어 설명했다. 즉 한말 반봉건 사회개혁 운동에서 시작하여 국권수호를 위한 항 48) 박종화, <해설-한반도 통일을 위한 남북교회의 실천>(위의 책), p. 4 49) 문익환 목사의 방북운동에 대해서는 진보와 보수측의 엇갈린 평가가 있는데, 보수측의 평가에 대해서는 이상규, 앞의 논문, p. 95 참조. 50) 박상증 외, <-특별대좌담 - 기독교 통일운동에 대한 총괄평가와 전망>(기사연 무크3, 1991) p. 21 참고

31 제1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일운동, 일제하의 항일독립운동, 그리고 군사정권 하의 인권 민주화운동을 거쳐 20세기 말에는 민족통일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을 시대별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런 편년사적인 방식을 지양하고 달리 정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에 의한 민족운동이 이렇게 전개되었다고 해서, 기독교가 시대를 잘못 읽고 반역사적인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 의 이런 민족운동이 기독교인만의 것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위의 민족운동 중에 서는 기독교(인)가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도 있고 대세에 밀려서 따라간 것 도 없지 않다. 한말의 사회개혁 운동과 항일의열투쟁은 선구적 내지는 독보적이 라고 말할 수 있고, 일제 강점기의 전반적인 항일독립운동은 3.1운동을 제외하고 는 적극적이었다고 평가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에 전개된 인 권 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은 그 선진성과 적극성이 돋보인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전개한 민족운동이 기독교계의 주류 혹은 지도부에 의한 것인가 하는 점과 그 때문에 기독교인의 그런 운동을 기독교 민족운동 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동시에 제기될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성과 적극성을 보였던 한말의 의열투쟁이나 20세기 후반의 인권 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이 기독교계의 주류에 의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기독교계의 주 류가 한말 대부흥운동과 100만인 구령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기독교인 청년들 의 의열투쟁이 전개되었고, 안보논리를 벗어나지 못한 보수적인 기독교계가 여의 도에서 수십만 수백만의 신자를 모아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를 외치고 있을 때 소수의 선각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해 인권 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이 감 옥을 벗삼아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운동에 참여한 수의 다과와 지도부의 참여 여부에 의해 기독교 민족운동 의 성격 여부가 결정되어야 한다면 답은 명백하다. 그러나 기독교 밖의 일반적인 민족운동도 삼천만 전부가 혹은 지배층이 그런 운 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것을 민족운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의 다 과와 지도부의 참여 여부만이 운동의 성격을 결정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비록 소수의, 비지도부가 주도한 운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시대적 소명과 자신들의 이념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 필자가 한 기독교인으로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은 자칫 편견일 수 있 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한 시대에 어떤 이념을 가진 공동체에서 시대적 인 소명에 충실한 사람들이 다른 이념적 공동체에 뚜렷이 구별되거나 수적으로 비교가 될 수 있다면 그 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3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더 직접적으로 말해서 한국의 기독교인이 일반 백성들이나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 서 시대적 과제 인식면에서나 그것을 실천하는 측면에서 구별되거나 비교될 수 있다면 그것을 기독교 라는 이름으로 개별화 내지는 개념화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따라서 기독교인들에 의한 민족운동도 이같은 관점에서 구별하여 하나의 민 족운동사의 장르로 개념화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의 흐름 을 역사적으로 구명하는 것 못지않게 그 운동을 기독교 이념과 관련하여 분석, 종합 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런 연구는 후일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가 인간과 사회를 변화, 개혁시키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나라 를 실현하 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기독교인은 그가 처한 민족과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시대상황에 따라 그런 단계적인 소명을 의식하면 서 자체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민족운동에 노력해 왔다. 앞으로도 기독교는 자신의 영적 영역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실천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각 시대마다 부과된 역 사적인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기독교가 민족사에서 생명력을 더 존속시킬 수 있느냐의 관건은 여기에 달려 있다.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시대 적인 과제는 인권 민주화와 통일 평화의 과제다. 이것들은 한말부터 심화시켜 온 자주 독립의 과제와 앞으로 세계를 향한 봉사 공생의 과제와 무관하지 않다. 한 국 기독교는 오늘도 민족과 세계를 향한 자신의 이러한 과제 앞에 서 있다. [이 글은 <한국기독교와 역사>제 18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에 게재 된 것임]

33 한국역사 속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민족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한 한국근현대사 제 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 강사 : 이 만 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2009년 5월 28일(목) 저녁 7시 서울YMCA 친교실(2층) 주최 : 서울Y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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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51) 이만열 명예교수(숙명여대) 1. 머리말 이준( 李 儁, 1859~1907) 열사는 한말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그의 강직함을 드러 내었고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며 국력배양 국권수호에 앞장섰던 분이며, 1907년에는 화란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서 파견되었다가 소기 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한 애국열사이다. 이준 열사에 관한 연구로는 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의 사위되는 유자후( 柳 子 厚 )가 쓴 이준선생전 ( 李 儁 先 生 傳, 一 醒 李 儁 先 生 事 業 紀 念 會, 1947, 동방문화 사)과 해아밀사 ( 海 牙 密 使, 一 醒 李 儁 先 生 記 念 事 業 協 會, 1948)가 있고, 이어서 사 단법인 일성회( 一 醒 會 )가 간행한 일성 이준열사소전 ( 一 醒 李 儁 烈 士 小 傳, 1964) 이 있으며,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장 이선준( 李 善 俊 )이 쓴 빛나는 민족의 정 화, 일성 이준 열사 (세운문화사, 1973 ; 을지서적, 1994)가 있다. 이선준이 쓴 것 은 유자후가 쓴 이준선생전 과 내용이 비슷하다. 이 두 전기는 이준의 전반적 인 생애를 다룬 것이긴 하지만, 전기에서 흔히 보이는 과장과 미화, 기술의 오류 등이 독자의 객관적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대목도 없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접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밖에도 이준에 대한 전기류에 해당하는 간단한 글 이 당대인들의 것을 포함하여 더러 있다. 52) 한편, 이준 열사에 직접 관련된 논문으로는 김효전( 金 孝 全 )이 쓴 이준과 헌정연 구회( 憲 政 硏 究 會 ) 53) 와 윤춘병이 쓴 이준 열사의 민족운동과 기독교 신앙 54) 등 51) 이 글에서는 그리스도인 이준에 대해서 다루지 못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전택부의 토박이 신앙산맥 2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pp. 137~140)와 연동교회100년사 (1995, p. 180) 및 윤춘병의 이준 열사의 민족운동과 기독교신앙 (이 글의 주4)을 참조. 52) 장지연이 쓴 李 儁 傳 ( 韋 菴 文 稿, 국사편찬위원회 편)과 張 志 淵 全 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 소편) 8권의 李 相 卨 日 記 抄 李 瑋 鍾 莊, 黃 玹 의 梅 泉 野 錄, 趙 素 昻 의 遺 芳 集 ( 中 國 南 京, 1942), 宋 相 燾 의 騎 驢 隨 筆 (국사편찬위원회) 등이 있으며 해방 후에 쓴 것으로서는 崔 永 植, 李 儁 (1859~1907 (한국근대인물백선, 신동아 1970년 1월호 별책 부록), 宋 炳 基, 돌아오지 않는 密 使 = 李 儁 ( 한국의 인물상 제6권, 신구문화사, 1972), 崔 鍾 庫, 一 醒 李 儁 ( 한국의 법 률가상 13, 사법행정 1983년 4월호) 등이 있다. 53) 김효전, 이준과 헌정연구회 - 당시의 신문 보도를 중심으로, 동아법학 5, 7호, 동아대학 교 법학연구소, 1987~

36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이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논문이라기보다는 이준 관계 자료를 나열하였다는 인상이고, 따라서 이 논문은 이준이 관여한 헌정연구회 의 실상을 밝히는 것을 목 표로 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밖에도 이준의 애국계몽운동과 헤이그밀사와 관련된 글들이 더러 보이는데, 55) 필자는 선학들의 이런 업적들을 토대로 이 글을 초한다. 보통 이준 열사'라고 하면, 헤이그에서 순국했다는 큰 사건에 그 전의 다른 많은 활동들이 가려져 있는 형편이다. 많은 전기에서 그러하듯, 이준의 생애에서도 그 의 최후가 그의 생애 전체를 미화 시키고 있다. 한 사람을 역사에서 객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점은 극복되어야 한다. 한 사람의 최후는 그의 생애의 집약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준의 최후도 그의 생애를 총체화한 것이다. 그가 순국한 것은 일시적인 순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가 그런 죽음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 금까지 그를 인식할 때 그의 순국 이 모든 과거까지도 결정해버려 그 전의 활동 이 묻혀 버렸다. 그러나 그가 고국을 떠나 만리 이역에서 마지막 생명을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바치게 된 것은, 전에 그의 죽음을 두고 할복자살'했다고 했을 때에 받았던 인상처럼, 단번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오랜 동안의 준비와 활동 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본다. 이 글에서는 그의 전반적인 생애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그의 활동의 중요한 대목들을 정리하고 그의 생애의 극치를 이루었던 헤이그 밀사사건을 다루려고 한 다. 이와 함께 지금까지도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사인( 死 因 )에 대한 견 해를, 지금까지의 연구를 토대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2. 청소년시대(1959~1892)와 유학적 전통 이준 56) 은 철종 기미년 음력 12월 18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중산리[ 龍 田 里 ] 에서 부친 이병관( 李 秉 瓘 )과 모친 청주 이씨( 淸 州 李 氏 )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 54) 윤춘병, 이준 열사의 민족운동과 기독교 신앙,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나라와 교회를 빛낸 이들, 기독교대한감리회 상동교회, ) 대표적인 것으로는 최기영의 한국 근대 계몽운동연구 (일조각, 1997) 중 공진회와 반일진 회 운동 ; 헌정연구회의 설립과 입헌군주론의 전개 ; 국민교육회의 설립과 기독교 와, 윤병 석의 증보 이상설전 (전게) 중 제7장 해아 만국평화회의의 使 行 과 제15장 이상설의 遺 文 과 이준열사 등을 들 수 있다. 56) 그의 초명은 性 在, 자는 汝 天 이라 하였고, 鄕 科 를 볼 때에는 이름이 璿 在, 자는 舜 七 이었다. 뒤에 다시 英 俊 하다 는 뜻인 儁 으로 개명하였고, 호는 海 史, 海 玉, 靑 霞, 一 醒 이라 하였다. 일성 이란 한번 이 세상을 각성시키고야 말겠다 는 뜻이다(유자후, 앞의 책, pp. 7-8)

37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의 18대조가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형인 완풍군( 完 豊 君 ) 이원 계( 李 元 桂 )였다. 그 의 부친은 일찍이 백부( 伯 父 ) 이명집( 李 明 集 )의 양자로 들어갔으나, 선생이 3세 되던 해에 그의 부모가 돌아가셨고 양가조부( 養 家 祖 父 ) 또한 일찍 작고하였기 때 문에 선생은 생가조부( 生 家 祖 父 ) 이명섭( 李 明 燮 )과 숙부 이병하( 李 秉 夏 )의 양육을 받았다고 한다. 선생의 나이 7세 되던 해부터 동네 서당에서 훈도를 받게 되었으 나, 총명한 그가 벌써 서당의 고루 함에 싫증을 내게 되자 당시 북청의 거유 ( 巨 儒 )였던 조부는 자기 슬하에서 양육하기로 하고, 예세전가( 禮 世 傳 家 )의 정신과 가 정교육주의 로 가르치게 되었다. 57) 이준은 천자( 天 資 ) 영오( 穎 悟 ) 하고 성취( 成 就 ) 예속( 銳 速 ) 하여 어릴 때에 믿기 지 않은 전설 같은 일화를 남겼다. 선생이 7, 8세 되던 1865년과 1866년에는 러시 아가 경흥부( 慶 興 府 )를 통해 통상을 요구하고, 프랑스 함대를 파송, 역시 개국을 요구하였으며, 미국 또한 제너럴 셔먼호를 평양에 파송, 통상을 요구하게 되었는 데, 이 때 대원군은 쇄국 일변도로 나갔다. 어른들로부터 이를 전해들은 어린 이 준은 이 때 개국의 필요성과 이해득실을 역설하여 어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고 한다. 58) 이준의 성숙함은 그의 나이 12세 때에 사서에 능통 하게 되었고, 북청군에서 전군의 유림재사를 선발하는 향시 에 응하여 가장 우수한 성적을 냈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이를 계기로 부근의 신안 주씨( 新 安 朱 氏 ) 주만복( 朱 萬 福 )의 여식과 조 혼하여 문명( 文 名 )이 가장 고명한 처족의 친척인 주선생서숙( 朱 先 生 書 塾 )에 가서 절차( 切 磋 )와 탁마( 琢 磨 )를 계수( 繼 修 )하게 59) 되어 선생의 문장과 학문이 비범 초월하게 되어 1군 1읍이 용납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그는 대지( 大 志 )와 웅기( 雄 氣 )를 펴기 위해 서울행을 결심하고 비밀리에 도타( 逃 他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다시 수개월 동안 함흥 등을 유람하면서 서울로 올라갈 준비 를 했다. 그가 17세 되던 을해년에 상경하여 북청인의 수방도가( 水 房 都 家 )에 머물 며 그의 웅지를 펼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상경한 이준은 먼저 40년장( 年 長 )이나 되는 대원군 이하응( 李 昰 應 )을 찾아가 민 씨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대일외교에 대하여 비판적인 담론을 나누는 한편 가끔 찾아가 천하사( 天 下 事 )를 강론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안동 김문( 金 門 ) 으로 비교적 열려 있던 용암( 蓉 菴 ) 김병시( 金 炳 始 )를 찾아가 시국을 담론하였는 57) 위의 책, pp ) 유자후, 앞의 책, pp ) 위의 책, p

38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데, 김병시는 선생의 비범함을 인지하고 청성옥국( 靑 城 玉 局 )이라고 칭찬하면서 문 객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공거( 公 車 )를 치룰 때에 그를 대동하여 궁중의식과 조례절차를 익히도록 하였다. 이준은 또 면암( 勉 庵 ) 최익현( 崔 益 鉉 )과도 허교( 許 交 )하였고, 예조( 禮 曹 ) 강수관( 講 修 官 )인 홍우길( 洪 祐 吉 )과도 대일관계에 적극적인 시책을 펴라는 내용의 시론도 나누었다고 한다. 김병시 최익현 홍우길과 망년지교 ( 忘 年 之 交 )를 나눌 때에 주된 화제는 일본과의 통교를 반대하거나 일본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라는 것 등 항일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어서, 이 무렵 그의 대 일관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이때부터 형성된 그의 항일적 대일관은, 비록 정치적 으로 불우한 시기를 만나 일본으로 망명하여 와세다[ 早 稻 田 ]대학의 전신인 동경 전문학교에서 약 2년간 법학을 공부한 적이 있지만, 헤이그에서 순국하기까지 변 함이 없었다. 그의 이 같은 초기의 대일관은 최익현에게 보였다는 소장( 疏 章 )의 내용과 같이, 왜노( 倭 奴 )와 주화( 主 和 )함은 매국이나 다름이 없으니 도의로 회척 ( 懷 斥 )의 책( 策 )을 써서 물리친 후 부국강병에 전력하라 60) 는 것이었다. 대일관을 통해서 볼 때 그는 아직도 척사위정적인 입장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이 무렵 서울과 북청을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젊을 때부터 웅지를 품었 던 그는 12세에 조혼하여 제대로 부부생활을 갖지 못한 듯, 27세 되던 1885( 乙 酉 ) 년에 가서야 장녀 송선( 松 鮮 )을 보게 되었고, 30세 되던 1888( 戊 子 )년에 장남 종 승( 鍾 乘, 후에 鏞 으로 개명)이 출생하였다. 장남을 보기에 앞서 선생은 29세 되던 정해년( 丁 亥 年, 1887)에 북청에 내려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북청 서원 유생들의 방해로 경사( 京 師 )의 회시( 會 試 )에 응시할 수 없었다. 이를 함경감사 조병식( 趙 秉 式 )에게 호소하여 조 감사의 협력으로 노봉서원( 老 峰 書 院 ) 별창( 別 創 )을 상소, 윤 허를 받아 노봉서원이 창건됨으로 북청 인사의 경사 진출의 기회를 넓히게 되었 고 따라서 북청의 개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이준은 김병시의 아들 김용규와의 불화를 계기로 조병식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61) 이 무렵(30세) 그는 담녕재( 澹 寧 齋, 璿 源 祠 )를 경학원( 經 學 院 ) 이라 개액( 改 額 )하고 노봉( 老 峰, 閔 鼎 重 ) 선생의 영정을 옮겨놓고, 그가 유사( 有 60) 유자후, 앞의 책, p ) 앞의 이준 선생전 이나 일성 이준 열사 등에는, 선생과 조병식이 좀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선생은 서울에서 문객으로 있던 김병시의 집에서 그 아들 용규와 불화 하게 되었는데, 이를 빌미로 김용규는 함경 감사 조병식에게 선생을 체포하여 벌을 주라고 통지 했다. 그러나 선생은 함흥 감영의 한 裨 將 을 통해 자신을 체포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태연 히 조병식을 찾아가 自 現 하러 왔다고 말하고 그와 對 酌 하고 시를 읊었는데, 이를 계기로 조병식 은 선생이 큰 그릇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39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司 )로 앉아 많은 인재를 양성하게 되었는데, 경학원 설립이 북청의 오도( 吾 道 )의 연원이 되었다 62) 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준은 30세가 되던 시기까지 전통적인 학문을 공부하였고, 척사 위정적인 인물과 교유하면서 그 자신 경학원을 설립, 전통적인 유학을 가르쳤다 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직까지는 전통적인 학문과 봉건적인 충군애국 단계 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그는 영오( 穎 悟 )하여 세계대세의 변화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는 있었으나, 국제관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오히려 수구적인 논리로 대응 하려 했다. 그는 당시 드러나고 있던 봉건적 모순과 제국주의 침략에 따른 민족 적 모순에 대응하는 근대적 지성을 갖추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당시 그의 입장 은, 척사위정론자들이 주장했던 내수외양론 ( 內 修 外 攘 論 )의 내수의 논리에 서서 시무( 時 務 )를 논하는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 법학 공부와 개화의 문제(1893~1904) 이준이 종래의 척사위정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세계와 한국의 사회변화에 새롭게 대응하는 때는 그의 나이 35세였던 1893년 무렵부터라고 할 것이다. 63) 북청의 경 학원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인재를 양성하다 1888년 가을에 서울로 올라온 그는 몇 년 동안 시국의 변화를 눈여겨보면서 그 동안 자신의 삶이 의지해온 구학( 舊 學 )과 척사위정적인 사고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하는 기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35세 되던 해 그는, 김병시의 중매로, 이일정( 李 一 貞, 17세)을 재취 하였다. 64) 초취부인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취한 그의 이 같은 결단을 단순히 당시의 관습 이나 주위의 강권으로만 핑계댈 수 있는 것인지, 문제를 던져 본다. 더구나 그는 62) 유자후, 앞의 책, p. 35. 여기서 吾 道 란 유학을 가리키는 것이다. 63) 이준의 이력 중 30세 되던 1888년부터 1893년까지 약 5년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를 소개 한 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유자후는 앞의 책(p. 35)에서, 이 해(1888년) 가을에 서울로 다 시 올라와 사방으로 雅 望 이 높은 인물들을 찾아 지성으로 교유하기로 하였었다 고 하면서 이 때 惺 齋 李 始 榮 과의 교유를 말하고 있는 정도이다. 1888년 장남 鍾 乘 이 태어났지만, 그 외에 가정사 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고 1893년에 재취하는 것으로 보아 그 어간에 초취부인과의 사이에 어 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분명치 않다. 64) 그의 再 娶 結 婚 에 대해서, 유자후는 이일정 여사를 再 娶 하니 鐘 鼓 之 樂 과 琴 瑟 之 情 이 매우 비 상하였을 뿐 아니라 聰 明 多 智 한 이일정 여사는 실로 동지와 같은 감을 갖게 되어 君 國 事 와 사회 운동에서 의논하여 공동히 활동함을 약속하게 되었었다. 참으로 是 夫 是 婦 의 觀 이었었다 (앞의 책, p. 36)라고 하여 재취가 초취와의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선준은, 김병 시가 중매에 나서자 이준이 고향에 처자가 있는 몸인데 어찌 또 결혼을 하겠습니까? (앞의 책, p. 40)라고 써서 중혼임을 분명히 했다. 한국여성사에서도 이일정이 이준의 별실 이라고 표현하 고 있다.(이선준, 앞의 책, p. 43에서 인용)

40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뒷날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먼저 법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근대 서구 법학의 초기 수용자로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행세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의문 은 당연하다고 본다. 하여튼 그에 관한 전기들은, 이 결혼을 통하여 국사( 國 事 )와 사회운동 등에 좋은 동지요 반려자를 얻었으며 그의 사회개혁, 정의실현에 큰 힘 이 되었다고 한다. 65) 1890년대는 우리 민족사상 대내외적으로 가장 큰 변화와 시련을 맞은 시기였다. 1894년에는 특히 더 했다. 동학농민운동이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을 계 기로 전국적으로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게 되었다. 이 때까지 유지되어 온 봉건 말기의 제반 모순이 이런 형태로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 이 일어나 우리나라의 일부는 전쟁터가 되었고 일본 전투 병력이 본격적으로 진 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는, 한 민족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세력권 다툼에서 결국 일본의 세력권으로 편입되는 결정적인 계기 가 되었다는 데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한편 한국에 군대를 파송한 일본은 무력 으로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여 내각인선에 압력을 가하고 갑오개혁 을 감행했다. 이는 한국을 그들의 세력권으로 편입하기 시작한 일본이 내정에 구체적으로 간여 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은 이렇게 한국이 군사 정치적으로 일본 세력권에 편입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내의 친일세력의 대두를 본격화하는 계기도 되었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으로 국내 정국이 어수선할 때 그는 이 해 8월 7일 의 외로 함흥에 있는 순릉( 純 陵 )의 참봉직을 제수받고 내려갔다. 66) 청일전쟁이 끝나 고 일본세력에 의해 수구파 정권이 물러나고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고 망명했던 박영효도 귀국하게 되었다. 이럴 즈음 그는 상경하였다. 이 때 정부에서는 갑오개혁의 후속 조치의 하나로 1895년 법관양성소 를 설립 하였다. 이준은 37세 되던 해에 법관양성소에 입교, 6개월간 공부한 뒤에 제1회로 졸업하였다. 38세 되던 1896년( 建 陽 元 年 ) 2월 3일 그는 한성재판소 검사보 주임 6등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관직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임명된 지 약 1개월만인 3월 5일 탐관오리들의 방해로 면관( 免 官 )되었다는 것이다. 67) 그가 임명되자 곧 부패한 관리들과 조정의 대관 중신들의 비행과 불법을 적발하여 숙 65) 이 점에 대해서는 이선준, 앞의 책, p. 43 참조. 66) 이렇게 된 것은 세상이 어수선하므로 얼마 동안 시골에서 쉬면서 천하의 흐름을 관찰하도록 김병시 대감이 배려한 보직 이라고 하였다(이선준, 앞의 책, p. 44). 67) 유자후, 위의 책, pp ; 이선준, 위의 책, p

41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청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의 면관은, 다음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아관 파천으로 친러정권이 들어서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관파천 전에 법관양성소를 설립했고 그를 검사보로 임명했던 친일정권이 붕괴되었기 때 문에 그가 사임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삼국간섭 이라는 의외의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오 랜 동안 각축하던 중국을 제거한 한반도 무대에 러시아가 등장한 것이다. 때를 같이하여 한국 조정에서는 새로운 기류가 나타났다. 삼국간섭에서 자신을 얻은 러시아가 한국 조정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조정에서는 친러세력이 형성되 었다. 청일전쟁 후 한국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둘 수 있다고 확신한 일본은 한 국을 두고 새로운 강적을 직면한 것이다. 일본은 러시아 세력의 뒤에는 한국 왕 실의 민비가 배후세력으로 있다고 믿었다. 1895년 7월에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고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 三 浦 梧 樓 ]가 부임한 한 달 뒤에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시해하였다( , 음력). 이어 서 11월 15일에는 단발령이 내려지고 이 해 말에는 양력이 시행(1896년 1월 1일 은 음력 1895년 11월 17일)되었다. 강원도를 비롯한 각처에서 민비시해와 단발령 에 반대하는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사 관으로 이어하는 아관파천 이 단행되고,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가 피체, 처형되는 등 친일정권이 몰락하고 친러정권(총리대신 김병시)이 성립되 었다(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준은 아관파천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안 되어 한성재 판소 검사보에서 물러났다. 이 대목에서 그의 행적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는 법 부대신 장박( 張 博 )의 망명을 돕는 형식으로 일본에 갔다. 68) 그곳에서 박영효와 장 박의 추천으로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동경전문학교에 입학, 법학을 공부하였다. 2 년 후(1898) 40세에 졸업한 그는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생에, 동경전문학교 법과 에서 2년간 수학한 신지식인으로, 당시에 보기 드문 근대 서구법학의 수용자가 되어 69) 귀국하였다. 이같이 국내외에서 법학을 수학했다는 점은, 뒷날 그가 참여 68) 일본으로 간 데 대해서, 유자후는 당시 법부대신 장박과 함께 망명하였다고 썼고, 이선준은 김 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고 써서 두 사람 모두 망명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 나 당시 이준이 특별한 관직에 있지 않았고, 친일내각의 붕괴 후에 들어선 친러내각에는 김병시 가 총리대신으로 등장하였는데, 김병시와 이준의 관계로 보아 이때 이준이 망명했다는 것은 납득 하기 힘들다. 유자후, 이선준의 전기들에 의하면 1898년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도 이준과 김병시 의 사이는 변함이 없었던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은 후일로 미루겠다. 69) 최종고, 한국의 서양법 수용사, 박영사, 1982, pp

42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하는 국권회복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에서 드러나며, 나아가 헤이그밀사로까 지 발탁되는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된다. 귀국 후 이준은 독립협회에 관여하였다. 아마도 그가 개혁에 대한 뚜렷한 신념 을 가지고 개혁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것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는 이 해(1898) 독립협회에 가입,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는 가두연설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독립협회가 황국협회와 정부의 억압을 받고 해산되자, 그는 이 개혁운동의 불씨를 지속해 나가려고 노력하였다. 이 노력의 일단이 개혁 당 사건 으로 나타난다. 1902년에 일어난 개혁당 사건 은 그의 생애에서 독립협회 운동 시절과 보안회운동을 잇는 연결고리로 나타난다. 개혁당은 1902년 민영환과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로서 이준을 비롯하여 이상설ㆍ이동휘ㆍ양기탁ㆍ이갑ㆍ노백린ㆍ남궁억ㆍ장지연ㆍ박은식ㆍ이용 익ㆍ이도재 등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이범진ㆍ김석항ㆍ민병두ㆍ김병시ㆍ전덕기 등을 동지로 규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혁당운동은 초기에 도각운동( 倒 閣 運 動 ) 등 급진책을 세웠으나, 점차 완진( 緩 進 )주의로 방침을 바꾸어 독립회관 국민연설 대에서 영일동맹의 영향을 계몽하는 등 시간을 두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비 밀이 누설되어 이상재ㆍ이승인 부자가 경위원( 警 衛 院 )으로 붙들려 가 임인춘( 壬 寅 春 )에서 갑진년( 甲 辰 年 )까지 3년간 별별 악형( 惡 刑 ) 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빌미로 그 밖에 개혁파 인사들도 투옥되는 등 임인개혁당( 壬 寅 改 革 黨 )의 의옥사건( 疑 獄 事 件 ) 으로 비화하자 결국 대사거의 ( 大 事 去 矣 )되어 버렸고, 이로 인 해 이준도 두 달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70) 개혁당 사건 은 관련된 인사들 중에 독립협회계의 인사들이 많다는 것과 이들이 옥중에서 벙커(D. A. Bunker) 등의 선교사의 교화를 받아 옥중개종하고 뒤에 연동교회에 와서 국민교육회의 중 요한 멤버들이 되었다는 점에서, 71) 관련자료를 찾고 더 자세하게 밝혀야 할 의옥 사건 이라고 본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 문제를 두고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 다. 갈등이 전쟁으로 확대될 기미를 눈치 챈 한국은 1월 23일 엄정중립을 선포하 였다. 그러나 일제는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2.12)에 앞서 군대를 한국에 상륙, 배치시키고, 일본군의 한국내 전략요충지 수용인정을 골자로 하는 제1차 한일의 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어서 경의선 철도를 강제로 착공하는 한편 한러조 70) 유자후, 앞의 책, pp ) 이광린, 구한말 옥중에서의 기독교 신앙, 한국개화사의 제문제, 1986 : 최기영, 국민교 육회의 설립과 기독교, 한국근대 계몽운동연구, 1997, pp 참고

43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약의 폐기를 강제하는 등 내정간섭을 자행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준은 보안 회를 조직, 일제에 반대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게 되지만, 러일전쟁 초기에 이준 의 행동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보인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04년 3월에 그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전쟁에 참여한다고 하여 휼병비( 恤 兵 費 )를 모 금하다가 경무청에 구금되기도 할 만큼 일본을 지지 72) 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 게 한 것은, 1904년 12월 6일에 있은 공진회 연설 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바, 러일 전쟁이 청국 만주 한국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며, 이러한 인식은 당시 널리 유행한 아시아 연대론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 명되고 있다. 73) 아무리 선의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이 점은 그가 일제의 한국 침략 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하려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이준은 젊은 시절 전통적인 구학( 舊 學 )ㆍ구질서에서 벗어나 당시 유행처럼 되었던 개화의 흐름에 몸을 실었다. 법학을 공부하고 신여성을 재취하 였으며 아마도 이 무렵에 기독교에도 입교했을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의 겉모습 은 개화의 단계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반봉건적인 사상에 철 저하지 못했고 일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에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법학 공부와 검사보의 임명이 친일정권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아관파천 후에 일본에 가서 법학 공부를 하는 것과 아울러 일종의 일본편향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까. 또 러일전쟁 때 휼병비를 모금한 것은, 앞으로 이 문제 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통해 결론에 도달해야 할 것이지만, 적어도 이 시기까지 의 이준에게서는 그의 시대인식이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순진한 기대를 벗어나지 못한 단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4. 항일ㆍ애국계몽운동과 반봉건개혁운동(1904~1907) 이준이 일제의 한국침략의 의도를 분명하게 간파하게 되는 것은 러일전쟁 중 일제가 중립을 선포한 한국에 대해 한일의정서를 강요하고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 할 때라고 생각된다. 이때 그는 행동에 나섬으로써 자신의 항일의지를 분명히 했 다. 그는 이때부터 항일애국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데, 보안회ㆍ대한 협동회ㆍ공진회ㆍ헌정연구회ㆍ국민교육회ㆍ을사조약폐기상소운동ㆍ보광학교 설립 72) 황성신문 1904년 3월 23일자 잡보 義 捐 設 所 ; 3월 25일자 잡보 四 人 被 捉 (최기영, 앞의 책, p. 135, 주 53에서 인용). 73) 최기영, 앞의 주 참조

44 2009년 상반기 YMCA 시민강좌 ㆍ한북흥학회ㆍ국채보상연합회의소ㆍ신민회 등에 차례로 관여하여 지도적인 역할 을 감당하였다. 한편 이 기간에 그는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 되는 등 국가의 기강확립과 개혁에도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그는 한 말의 정치ㆍ경제ㆍ교육ㆍ사회 등의 항일애국계몽운동에 관여하지 않은 곳이 없다 고 할 정도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만큼 그의 생애에서 다양하면서도 집중적인 생활을 영위한 때는 없었을 것이다. 1904년 6월, 일제는 한국영토의 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 하였다. 이 때 이준은 칙임시종( 勅 任 侍 從 ) 원세성( 元 世 性 )과 중추원의관 송수만( 宋 秀 萬 ), 이기( 李 沂 )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7월 13일 보안회를 조직하고 일제의 요 구에 항거하였다. 보안회는 처음 회장에 송수만, 부회장에 원세성이 맡았고 이준 은 제2선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앞서 6월 3일, 송수만은 백목전도가( 白 木 廛 都 家 ) 에서 군중을 모아 놓고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이 때 일본군이 보안회의소에 난입, 간부 등 80여 명을 체포하여 필동에 있는 일본군헌 병사령부로 넘기고 보안회의 해산을 강요하였다. 보안회는 다시 심상훈( 沈 相 薰 )을 회장, 이준을 도총무( 都 總 務 )로 하여 재기하였으나 심상훈의 탈퇴로 막을 내렸다. 이준은 8월에 이르러 이상설 등과 함께 개혁당 출신의 인사를 중심으로 대한협동 회를 다시 조직하여 74) 그 부회장을 맡아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저지시켰다. 일제는 러일전쟁 중 국권을 침탈하면서 한국에 그들을 외곽에서 돕는 단체를 급조하였다. 1904년 8월 20일에 결성된 일진회가 그 대표적인 친일단체다. 일진회 를 배척하고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12월 3일 종로의 입전도가( 立 廛 都 家 )에서 공 진회가 창립되었다. 75) 공진회는 처음 진명회( 進 明 會 )로 출발하였다가, 일진회가 12월 2일 진보회( 進 步 會 )와 합병하게 되자, 독립협회 계열도 합류시키면서, 상민 뿐 아니라 전 국민이 문명화에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공진회라 개명하였 다. 공진회의 주 회원층은 보부상이었고, 지도층은 과거 독립협회에 관여했던 인 물들이었는데, 이들은 한때 정치적으로 대립하여 무력충돌까지 일으켰던 적대세 력이었다. 이준을 회장으로 하여 창립된 공진회는 2개월 남짓 활동하다가 해산되 었고, 그 이듬해 5월에 조직되었던 헌정연구회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공진회는 황실의 지원하에서 일진회의 타도를 목적으로 한 세력 으로서 황실 74) 이 때 대한협동회의 조직은 회장 이상설, 부회장 이준, 총무 정운복, 평의장 이상재, 서무부장 이동휘, 편집부장 이승만, 재무부장 허위( 武 監 大 將 ) 등이었다. - 유자후, 앞의 책, p ) 공진회에 관해서는, 최기영, 공진회의 반일진회 운동,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 pp 을 주로 참조하였다

45 제2강.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과 정부 그리고 국민의 권리와 한계를 규정하는 강령을 갖고 국민의 생명 재산 권의 수호 에 깊은 관심을 갖는 법률구조사업 을 펼치려고 했다. 이는 당시 한국 에서 보기 드문 서구 근대 법학의 이해자였던 이준이 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공진회는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어서 12월 15일의 통상회에서부터는 정부에 시정 개선을 요구하였다. 12월 24일 특별회에서는 궁정에 출입하거나 관직에 있는 무 술( 巫 術 )ㆍ복술( 卜 術 )ㆍ기양( 祈 ) 출신의 잡배를 축출하자는, 이른 바 숙청궁금 ( 肅 淸 宮 禁 )을 주장 하였고, 18명의 숙청대상자의 명단을 첨부한 상서문을 작성, 정 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숙청궁금에 대한 정부의 조치가 미진하자, 12월 22일에 궁 내부 특진관에 임명된 이유인( 李 裕 寅 )을 착거( 捉 去 )하는 고관착거사건 ( 高 官 捉 去 事 件 )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12월 25일 공진회의 지도층인 이준ㆍ윤효정ㆍ나유 석이 체포되었고, 28일 밤에 평리원은 재판 없이 이준ㆍ윤효정을 종신징역에, 나유 석은 교( 絞 )에 처하기로 선고하였다. 이준은 윤효정과 함께 유( 流 ) 3년의 황해도 철도( 鐵 島 )유배( 流 配 )가 결정되었으나 유배생활 1개월도 되지 않아 사면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이준 등에 대한 처벌이 논의되면서 정부가 일진회의 해산에 주 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일본군은 정부의 일진회 탄압을 중지할 것과 정부 대신들의 경질을 요구하게 되었다. 나아가 일진회 탄압으로 서울의 치안상 태가 동요된 것을 구실로 1905년 1월 3일 일본군은 서울 지역에 군사경찰제( 軍 事 警 察 制 )를 통고하고, 1월 5일 이를 고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진회는 지도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05년 1월 말에 정운복 ( 鄭 雲 復 )을 회장으로 선임하는 한편 공진회의 복설( 復 設 )을 위해 일본군사령부에 허가를 신청하였으나, 2월 2일 오히려 해산명령을 받게 되었다. 반일진회활동을 전개하던 공진회는 이로써 끝나고 말았다. 공진회의 복설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이준과 윤효정은 새로운 단체의 조직에 주력, 1905년 5월에는 헌정연구회를 발족 시키게 된다. 철도의 유배에서 풀려난 뒤 이준은 1905년 5월, 윤효정ㆍ양한묵 등과 입헌정치 체제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헌정연구회를 조직, 부회장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선도하였다. 76) 그가 헌정연구회에서 활동한 시기는 9월 말경까지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는 일본과 중국 상해를 오가며 을사조약을 방지 코자 노력 하였고,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영애( 令 愛 ) 아리스 양의 내한을 계기로 한미공 수동맹 ( 韓 美 攻 守 同 盟 )을 제의하기도 했다. 77) 76) 헌정연구회에 관해서는, 최기영, 헌정연구회의 설립과 입헌군주론의 전개 한국근대계몽운동 연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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