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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 공모 주최 : 서울디지털대학교(SDU) 주관 : SDU 문예창작학부 문학 계간 시작 문학 월간 한국산문 서울디지털대학교는 21세기 한국문학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신인작가를 발굴하 기 위해 <제6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을 공모합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갈 참신한 상상력을 기다리며, 독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1. 응모요령 접수기간 : 2011년 월 일 ~ 2012년 월 일 보낼 곳 : [email protected] 입상작 발표 : 2012년 월 일 서울디지털대학교 홈페이지 유의사항 : 이미 발표된 작품이나 표절로 밝혀진 작품은 입상 결정 후에도 취소 됩니다. 원고 첫 장에 주소, 성명(필명일 때는 본명을 필히 기입), 연락처(전화번호) 등을 반드시 써야합니다. 원고는 한글 또는 워드로 작성하여 파일로 첨부하여야 합 니다.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2. 공모부문 시 : 5편 이상 생활기록문(수필, 수기) : 2편 내외 3. 공모대상 문단에 등단하지 않은 전 국민 4. 당선 상금 및 특전 당선작 : 각 부문 이백만원 시작 (시), 한국산문 (생활기록문)에 작품 게재 등단시인 및 등단 수필가로 인정 가 작 : 각 부문 일백만원 시작 (시), 한국산문 (생활기록문)에 작품 게재 등단시인 및 등단 수필가 인정 여부 작품 심사 후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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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차례 교수문단 시 황송문 포장마차에서 11 능선 稜 線 13 이재무 봄비 15 제부도 17 꽃그늘 18 오봉옥 달팽이가 사는 법 19 고양이 20 나를 던지는 동안 21 소설 이명랑 끝없는 이야기 23 동화 임정진 착착 붙여드려요 43 수필 임헌영 눈동자와 입술 48 김종완 좁은 공간에서 살아남기 51 5

6 학생문단 시 곽도경 산사에서 59 / 분홍의 말 60 권현옥 병아리 61 김미영 늘품 62 / 노래등 63 김형출 달거리 64 / 느그 아부지 65 / 가시박 66 / 애우 67 노종상 상여꾼 68 / 생일밥상 69 문정숙 동백꽃 한 잎 70 / 죄를 묻다 71 서진호 管 없는 구멍 72 / 몸 속의 낡은 비디오 75 / 농담이야 76 예시원 바람은 살아있음이다 84 / 바람 불어 좋은데이 85 유원희 우기엔 슬픔도 날개를 단다 86 / 옥수수 편지 87 최명희 세월 당기는 법 88 / 뼈있는 말 89 허소미 모과나무가 내게 90 / 프린터 저 여자 91 소설 정영서 문 95 권현옥 사랑골 해바라기 112 수필 김선옥 죽어도 못 갚을 빚 125 노정숙 내 침대 131 박승렬 가요 무대와 우리 가락 135 유시경 나 외로워 꽃구경 간다 139 임도순 티벳에서의 7일 144 정애령 고향 158 최해자 첫 눈 내리는 날 161 한성희 그리움을 보다 SDU 디지털 문학

7 서평 신상조 정의란 무엇인가 에 정의가 없다 171 백범일지 를 읽고 175 사이버문학상 최영정 대설특보 181 수의 182 망치를 맞다 184 유령도서관 185 장기 186 안미선 산세베리아 증후군 188 할머니의 식사법 190 비둘기는 심심해 192 중심이 기울다 194 와산교가 늘어졌어요 196 심 사 평 198 당선소감 200 강혜란 방관자, 그리고 이방인들 202 김수정 세족 洗 足 206 심 사 평 210 당선소감 2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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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교수문단 황송문 (시) 이재무 (시) 오봉옥 (시) 이명랑 (소설) 임정진 (동화) 임헌영 (수필) 김종완 (수필) 敎 授 文 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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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교수문단 포장마차에서 外 1편 황송문 그녀는 詩 를 쓰고 나는 雜 文 을 끄적였다. 잔잔한 눈으로 말하는 그녀의 詩 는 꿈이었다. 그녀가 호수 같은 눈으로 꿈꾸듯 속삭일 때 나는 허튼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玉 盒 속 깊은 水 深 을 알지 못한 나는 참새처럼 짹짹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 입을 막을 때 내 의식하기 싫은 의식의 세포들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군참새를 씹으면서 짹짹거릴 때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11

12 내 입에 들어가는 생활의 모래주머니 내 입에서 나오는 허튼소리를 변명하지 말았어야 했다. 交 感 의 불은 꺼지고 싸늘하게 식어 버린 멍든 가슴 씽씽 아파 우는 찬바람 야멸차도 차라리 변명하지 말았어야 했다. 생활의 거름 자리 후비던 발톱을 차라리 변명하지 말았어야 했다. 짹짹거리면 詩 가 되지 않는 공복에 술을 마시다가 검정 넥타이를 쓰다듬는다. 내 목을 감아 맨 내 喪 章 을 펴 들고 내 祭 祀 를 지내는 내 靈 魂 을 쓰다듬는다. 詩 의 불감증으로 죽어지내는 나의 祭 典 에 그녀는 술을 따르고 나는 부끄러운 잔을 받아 마셨다. 12 SDU 디지털 문학

13 교수문단 능선 稜 線 오르기 위해서 내려가는 나그네의 은밀한 탄력의 주막거리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결에도 살아나는 세포마다 등불이 켜지는 건널목이다, 날개옷이다 음지에서 물든 단풍같이 부끄럼을 타면서도 산뜻하게 웃을 적마다 볼이 파이는 베일 저쪽 신비로운 보조개 주기적으로 수시로 물이 오르는 뿌리에서 줄기 가지 이파리 끝까지 화끈거리면서 서늘하기도 한 알다가도 모를 숲 그늘이다. 13

14 불타는 담요를 담요처럼 깔고 덮고 포도주에 얼근한 노을을 올려보는 여인의 무릎과 유방 사이의 어쩐지 아리송한 등산광이다. 개살구를 씹어 삼킬 때의 실눈이 감길 듯이 시큰거리는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이어지는 산등성이의 곡선 쑤시는 인생의 마디마디 오르기 위해서 쉬어 가는 주막거리의 재충전이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 기침을 콜록이던 日 常 에서 어쩌다 눈뜬 저 건너 무지개 나무꾼과 선녀의 감로주 한 모금이다. 황송문 : 시인, 수필가, 소설가, 문학평론가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학부 교수 14 SDU 디지털 문학

15 교수문단 봄비 外 2편 이재무 1 봄비의 혀가 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 보라, 젖을수록 깊게 불타는 초록의 환희 봄비의 혀가 아직, 잠에 혼곤한 초록을 충동질한다 빗속을 걷는 젊은 여인의 등허리에 허연 김 솟아오른다 2 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에 가다오 그리하여 거기 하류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다오 살 속에 박힌 추억이 젖어 떨고 있다 교수문단 15

16 어떤 개인 날 등 보이며 떠나는 과거의 옷자락이 보일 때까지 봄비여,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 3 나를 살다간 이여, 그러면 안녕! 그대 위해 쓴 눈물 대신 어린 묘목 심는다 이 나무가 곧게 자라서 세상 속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가지마다 그리움의 이파리 파랗게 반짝이고 한 가지에서 또 한 가지에로 새들이 넘나들며 울고 벌레들 불러들여 집과 밥을 베풀고 꾸중 들어 저녁밥 거른 아이의 쉼터가 되고 내 생의 사잇길 봄비에 지는 꽃잎으로 붐비는, 이 하염없는 추회 둥근 열매로 익어간다면 나를 떠나간 이여, 그러면 그대는 이미 내 안에 돌아와 웃고 있는 것이다 늦도록 늦봄 싸돌아다닌 뒤 내 뜰로 돌아와 내 오랜 기다림의 묘목 심는다 16 SDU 디지털 문학

17 교수문단 제부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교수문단 17

18 교수문단 꽃그늘 꽃그늘 속으로, 세상의 소음에 다친 영혼 한 마리 자벌레로 기어갑니다 아, 그 고요한 나라에서 곤한 잠을 잡니다 꽃그늘에 밤이 오고 달 뜨고 그리하여 한 나라가 사라져갈 때 밤눈 밝은 밤새에 들켜 그의 한 끼가 되어도 좋습니다 꽃그늘 속으로 바람이 불고 시간의 물방울 천천히 해찰하며 흘러갑니다 이재무 : 시인, 1983년<실천문학>통해 작품활동시작 시집 위대한 심사 外 다수, 계간 시작 편집주간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학부 교수 18 SDU 디지털 문학

19 교수문단 달팽이가 사는 법 外 2편 오봉옥 나도 한 때는 눈물 많은 짐승이었다. 이슬 한 방울도 누군가의 눈물 인 것 같아 쉬이 핥지 못했다. 하지만 난 햇살이 떠오르면 숨어야만 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어둠 속에 갇혀 홀로 세상을 그려야 하고, 때 론 고개를 파묻고 깊숙이 울어야만 한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그런 천형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등에 진 집이 너무도 무겁다. 음지에 서, 뒤편에서 몰래몰래 움직이다 보면 괜시리 서럽다는 생각이 들고, 괜시리 또 세상에 복수하고 싶어진다. 난 지금 폐허를 만들고 싶어 당 신들의 풋풋한 살을 야금야금 베어 먹는다. 교수문단 19

20 교수문단 고양이 십이지간엔 왜 고양이 띠가 없는 걸까 고양이처럼 살아온 그녀 오 늘도 꽃방석에 앉아 졸고 있다 그녀의 눈엔 하늘의 달 두 덩어리 환하게 박혀 있다 그 달빛에 쏘 여 눈 먼 사람 여럿 있었다 곱다는 말 귀에 달고 살아서인가 딸네 집에 와서도 혼자서 거울 보 며 딸년 스카프나 둘러보곤 한다 세상에 그런 팔자 없었다 일평생 했던 일이라곤 남편 똥장화를 반 들반들하게 닦는 일 뿐이었다 오늘도 손주 녀석 재롱 보고 환하게 웃기나 한다 똥도 이쁘게 쌌다 고 호들갑을 떤다 똥 치우는 건 질색이다 딸년 부른다 20 SDU 디지털 문학

21 교수문단 나를 던지는 동안 1 그대 앞에서 눈발로 흩날린다는 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요 혼자서 가만히 불러본다는 게, 몰래몰래 훔쳐본다는 게 얼마나 또 달뜬 일인지요 그대만이 나를 축제로 이끌 수 있습니다 2 그대가 있어 내 운명의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그댈 보았기에 거센 바람을 거슬러 가려 했습니다 발가락이 떨어져나가는 아픔도 참고 내 가진 모든 거 버리고 뜨겁게 뜨겁게 흩날리려 했습니다 그대의 옷깃에 머물 수 있다면 흔적도 없이 스러져가도 좋았습니다 교수문단 21

22 3 그러나 나에겐 발이 없습니다 그대에게 어찌 발을 떼겠습니까 혹여 그대가 흔들린다면, 마음 졸인다면, 그대마저 아프게 된다면 그건 하늘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나에겐 발이 없습니다 나를 짓밟는 발이 있을 뿐 4 그대의 발밑에서 그저 사그라지는 순간에도 난 젖은 눈을 돌리렵니다 혹 반짝이는 눈물이 그대의 가슴을 가르며 가 박힐지 모르니까요 그 눈물알갱이가 그대를 또 오래오래 서성이게 할지 모르니까요 먼 훗날 그대 앞에는 공기방울보다 가벼운 눈발이 흩날릴 것입니다 모르지요, 그땐 그대가 순명의 자세로 서서 나를 만지게 될는지 오봉옥 : 시인, 1985년 창비 신작시집으로 등단, 시집 나 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外 다수,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학부 교수 22 SDU 디지털 문학

23 교수문단 끝없는 이야기 이명랑 옛날에 앞산에 메밀을 하얗게 심었다. 하야면 영감이다. 영감이면 꼬부라졌다. 꼬부라졌으면 새우다. 새우면 뛴다. 뛰면 고양이다. 고양 이면 새까맣다. 새까마면 까마귀다. 까마귀면 너풀거린다. 너풀거리면 무당이다. 무당이면 때린다. 때리면 대장장이다. 대장장이면 깊다. 깊 으면 게다. 게면 문다. 물면 범이다. 범이면 무섭다. 무서우면 곶감이 다. 곶감이면 먹는다. 먹으면 달다. 달면 엿이다. 엿이면 붙는다. 붙으 면 첩이다. 첩이면 싸움 난다. 싸움 나면 운다. 울면 상제다. 상제면 하얗다. 하야면 영감이다. 영감이면 꼬부라졌다. 꼬부라졌으면 새우다. 새우면 뛴다. 1) 병신 같은 게! 꼴에 오빠랍시고 입만 벌렸다 하면 오빠 타령이다. 오빠가 말이야, 오빠한테 감히, 오빠가 하는 일에, 등등 병신 같은 게 오빠면 다 되는 줄 안다. 넌 오빠가 평생 택시나 몰아야 되겠냐? 썅! 누가 평생 택시나 몰라 그랬어? 네 능력이 그것밖에 안되니까 1) 신동흔 엮음, 끝없는 이야기, 세계민담전집1-한국편, 황금가지, 2003, 403쪽. 교수문단 23

24 그런 거 아냐? 병신 같은 게 남 탓까지 하고 있어, 썅! 썅! 썅? 병신 같은 거의 입에서 썅 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에 나는 벌써 맘 속으로 두 번이나 썅 을 내뱉었기 때문에 병신 같은 거의 입에 서 썅 이 튀어나오자 정말이지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병신 같은 게 언제 독심술까지 배웠지? 놀라, 병신 같은 거를 쳐다봤다. 넌 꼭 이 오빠가 소릴 질러야 쳐다보냐? 오빠 말이 말 같지 않 어? 병신 같은 게 또 오빠 타령이다. 성질 나, 병신 같은 거를 째려봤다. 이걸 그냥 콱! 병신 같은 게 오른손을 확, 위로 치켜들었다. 짜작! 뺨 때리는 소리와 동시에 질끈, 눈을 감았다.. 안 아팠다. 얼얼하지도 않았다. 뭐야? 병신 같은 게 이제는 뺨도 제 대로 못 후려치냐? 그래, 썅, 때려라, 때려, 때리면 누가 못 개길 줄 알고? 눈을 부릅떴다. 부릅뜬 눈에 퉁퉁 부은 뺨이 보였다. 내 뺨은 여기 붙어 있는데? 눈앞에 있는 이 퉁퉁 불은 뺨은 누구 거냐? 내가 죄가 많아서. 엄마 뺨에 큼지막하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내 뺨은 멀쩡한데 엄마 뺨은 안 그랬다. 다 내 죄다. 내가 죽어야지, 죽어도 싸지. 병신 같은 거랑 말로 싸우든 치고받고 싸우든 나는 괜찮은데 엄마 는 안 그랬다. 엄마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엄마 눈에 눈물이 맺히면, 그러면 살맛이 안 난다. 살맛이 안 나면 그러면 죽고 싶어진다. 내가 죽고 싶어지면, 그러면 나만 믿고 사는 우리 엄마는 어떻게 되나? 누 굴 믿고 사나? 저 병신 같은 걸 믿고 사나? 아이, 썅! 엄마가 거기서 왜 튀어나와? 병신 같은 게 엄마 뺨 후려친 제 손을 이빨로 물어뜯는다, 벽에 짓 24 SDU 디지털 문학

25 찧는다, 아주 지랄을 했다. 그래도 패륜을 저지른 손에서는 피 한 방 울 안 나왔다. 꼴에 잘못한 줄은 아는지 이번엔 방바닥에 쾅쾅, 머리 를 박아댔다. 나 같은 놈은 죽는 게 낫다구요! 병신 같은 게 가지가지 다 한다. 병신 같은 게 머리로 방바닥을 박 든, 대못을 박든 나는 상관없는데 엄마는 안 그랬다. 아서라, 아서! 너 이러면 나 죽는다! 병신 같은 거의 머리가 방바닥에 한 번 쾅! 할 때마다 병신 같은 거 를 낳고 미역국 먹은 엄마는 컥, 컥, 숨넘어가는 소리를 했다. 병신 같은 게 그래도 계속 방바닥에 머리를 박아대자 엄마가 확 장롱 문을 열어젖혔다. 장롱 속 이불 사이에 푹, 쑤셔뒀던 농약병을 집어 들었 다. 너 진짜 엄마 죽는 꼴 볼래? 그 말은,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주면 될 거 아니야! 그리하여 지금 나는 개털이다. 병신 같은 게 오빠랍시고 내 2학기 등록금까지 가져가 버렸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제 새끼 머리 나쁜 줄은 모르고 과외 선생인 내 탓만 해대는 아줌마들, 아들 과외 선생한테도 찝쩍거리는 중년 아 저씨들,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치마 속 풍경을 고스란히 휴대폰 동영상 폴더에 저장해서 다니는 중학생 녀석들. 에잇, 말을 말자. 그래 놓고도 나는 계속 구시렁거린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이게 다 병신 같은 오빠 때문이다. 병신 같은 게 오빠랍시고 큰소리 만 탕탕 쳤지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다. 멀쩡한 4년제 대학을 나와 서 취직도 못했다. 비정규직으로 몇 군데 싸돌아다니더니 결국에는 그 나마도 못 해먹고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누구냐. 네 오빠 아니냐. 오빠가 말이야, 우리 영지 대학은 책 임진다! 교수문단 25

26 택시 운전대를 잡자마자 또 큰소리 뻥뻥 쳐대더니 대학을 책임지기 는커녕 내가 모은 등록금까지 가져가 버렸다. 제 말로는 뭐 선배랑 동 업으로 야식집을 한다나. 권리금도 없는 데다 전 주인이 배달 노하우 에 오토바이까지 넘겨주기로 했다면서 있는 돈 다 내놓으라는 거였다. 과외해서 번 돈, 다 털렸다. 오빠 야식집 계약금으로 다 들어갔다. 나는 개털이다. 개털이 된 나는 지금 편의점에 있다. 위에서 아래로 줄이 죽죽 그어져 있는 유니폼을 입고 소리친다. 아저씨! 거기, 라면 국물 쏟는 데 아니란 말이에요! 썅,이란 말은 안으로 삼키고, 나는 대걸레질을 한다. 술 취한 중년 아저씨가 구역질하듯 바닥에 쏟아놓은 라면 국물을 닦으며 생각한다. 이 짓이 나은가, 아들 과외 선생한테 찝쩍거리는 중년 아저씨한테 시 달리는 게 나은가. 손이라도 한번 만지게 해줬으면 안 잘렸을까. 요새 과외 구하기 하늘에 별 따긴데.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나. 에잇, 생각을 말자. 나는 죽죽, 위에서 아래로 줄이 그어져 있는 유니폼을 입고 죽죽, 대걸레질을 한다. 내 걸레질에 바닥이 깨끗해진다. 라면 국물도 닦여 나가고, 취객의 어지러운 발자국도 닦여 나가고, 엄마 뺨에 나 있던 큼지막한 손바닥 자국도, 오빠의 썅 소리도 걸레질 한 번에 말끔히 닦 여 나간다. 걸레질로 깨끗해진 바닥에 나는 새로 밑그림을 그려 나간 다. 오빠도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며 제대로 한 번 살아보겠다고 했으니 야식집은 대박이 날 거다. 오빠 야식집이 대박이 나면 등록금이 문제 겠냐. 어학연수도 꼭 다녀와야지. 내가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대기업에 취직도 하게 되면, 그러면? 그러면 엄마 눈에 웃음꽃이 피겠지. 엄마 눈에 웃음꽃이 피면, 그러면? 우리 집 장롱 속에 처박혀 있는 농약병 이 제일 먼저 사라지겠지. 그래 까짓 것, 이왕 쓰는 김에 좀 더 쓰자. 기분이다! 오늘 퇴근하면 오빠 야식집 바닥 청소는 내가 해준다! 모처럼 걸레질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는데, 번쩍번쩍, 우당탕쾅쾅, 세상 두 쪽 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걸레질을 멈춘다. 이, 이. 자동차 앞대가리가. 26 SDU 디지털 문학

27 이런 병신 같은 게. 따르릉! 따르릉, 쉴 새 없이 울려댔잖아? 이 귀로 들었잖아? 그런데 왜? 왜? 왜? 울리지 않는 거냐? 수화기를 한 번 들었다 놓는다. 전화는, 아무 이상이 없다. 그런데 왜 배달 주문이 없는 거냐? 전 주인 놈 있을 때는 따르릉 따르릉, 쉴 새 없이 울려대더니. 이 새끼, 정말 도망간 거 아냐? 썅!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온다. 나는 괜히 수화기를 집었다 놨다 한다. 괜히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야식집 문 앞에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다. 전 주인 놈 오토바이다. 그럼, 그렇지. 오토바이까지 놔두고 가긴 어딜 가. 조금 안심이 된다.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건 신경 쓰이는 거다. 밖으 로 나가, 전 주인 놈, 오토바이를 살펴본다. 살피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번호판도 떨어져 나가고 없다. 이런, 쌍! 입에서 또 절로 욕이 튀어나온다. 순간, 전 주인 놈 오토바이가, 쿵, 모로 쓰러진다. 뭐야, 이 새끼 이거 정말 내빼 버린 거야? 욕 처먹고 모로 쓰러진 오토바이에 대고 발길질을 해댄다. 그래도 분이 가시지 않는다. 분이 가시기는커녕, 전 주인 놈, 그놈 그 느글느 글한 목소리만 떠오른다. 배달은 걱정 말라니까 그러시네. 당분간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제가 같이 있으면서 도와드린다고 했잖습니까? 이런 동네라니요? 거, 뭘 모르시나 본데, 이 동네가 겉으로 보기에는 주택가 같지만 살림하는 사람은 몇 안 됩니다. 죄다 여관촌이에요, 여관촌! 여관이 어딨냐구 요? 이 아저씨 정말 시력 꽝인가 보네. 이리 나와 보세요. 보이죠? 저 기 저 여관들! 아, 진짜 이 아저씨 정말 왜 이러시나. 멀긴 뭐가 멀어 요. 어차피 배달인데. 제가 하나하나 다 가르쳐드린다니까요. 요새는 스티커 같은 거 안 뿌려요. 여관에 크리넥스 휴지를 대주잖습니까. 크 교수문단 27

28 리넥스 휴지 갑에 우리 야식집 전화번호하고 메뉴까지 인쇄해서 넣어 주는데 지들이 어떻게 다른 데서 시켜 먹어요? 여관이야 공짜로 휴지 생겨, 수수료 챙겨 손해 볼 게 뭐 있습니까? 수수료요? 당연히 줘야 죠. 그럼 수수료도 안 주고 야식집 하려고 했어요? 음식 값의 십 프 로는 여관에 줘야죠. 수수료 아까워하다가는 장사 못합니다. 전 주인 놈, 말은 뻔드르르했다. 공인중개사는 한 수 더 떴다. 권리금 없는 가게 얻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줄 아시우? 이 평수에 이만한 시설이면 못 줘도 권리금만 이천은 받아요. 주웠다, 생각하고 계약하셔. 거기서 이상하긴 했다. 그래서 내가 묻긴 물었었다. 왜 권리금도 안 받고 가게를 내놓은 거냐. 그랬더니 개 때문이란다. 개? 동업하기로 한 김 형도 나와 동시에 전 주인 놈을 향해 물음표를 날렸다. 전 주인 놈 왈, 개를 키우는데 그 개가 겁나게 비싼 개라는 거였다. 그런데 그 겁나게 비싼 개가 외로움을 타게 됐다나 뭐라나. 야식집 한 다고 밤마다 집에 혼자 놔두었더니, 우울증에 걸렸다고, 개 짖는 소리 를 해댔다. 오로지 그 개하고 같이 살기 위해 집까지 나왔는데, 이제 와서 돈 몇 푼 더 벌자고 가족 같은 개를 아프게 해서는 안 되지 않 겠느냐며 전 주인 놈은 눈에 눈물까지 매달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 형은 구경꾼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뭐가 됐든 택시 운전보다는 낫지 않겠냐며 같이 동업을 해보자고 나를 꼬 드겨서 거기까지 데리고 간 사람은 김 형이었다. 그런데 막상 야식집 안으로 들어서자 김 형은 벙어리가 됐다. 할 수 없이 내가 이건 왜 이 러냐, 저건 왜 저러냐, 따져 물어야 했다. 이것저것 묻고 따진 쪽은 나였다. 그런데 계약하자는 말은 김 형이 해버렸다. 계약합시다! 김 형은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렸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김 형을 향해 컹컹 짖어댔다. 미쳤냐. 장사가 되는지 28 SDU 디지털 문학

29 안 되는지 확인도 안 해보고 덜컥 계약부터 해버리다니. 주변 사람들 얘기도 들어보고, 며칠 지켜보면서 정말 배달이 많이 있는지 없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부터 해봐야지 저 사람들 말만 믿고 덜컥 계약을 해버리다니. 다 끝냈다. 김 형은 너덜너덜한 공책 한 권으로 싹둑, 내 말허리를 잘랐다. 야 식집 장부였다. 장부엔 언제 어디서 무얼 주문해 먹었는지 참 낱낱이 도 적혀 있었다. 야식집 주인한테서 장부까지 받아 확인도 끝마쳤다는 거였다. 이번엔 김 형이 나를 향해 컹컹 짖어대기 시작했다. 너는 이 자식아, 이 형님이 그럼 그런 것도 확인 안 해봤을 거 같냐. 벌써 다 조사를 해봤다. 어제는 새벽 내내 야식집에 붙어 앉아서 배달 주문이 몇 통이나 걸려 오는지까지 지켜봤다. 자, 이 장부 보이지? 그래, 거 기 적혀 있는 것들이 죄다 어제 새벽녘에 걸려 온 배달 주문이라 이 거야. 어제 새벽에만 해도 배달이 그렇게 많았는데 뭘 더 바라냐? 술 이나 사. 하여, 나는 김 형에게 술까지 샀다. 김 형이 그렇게 철두철미한 줄 몰랐다고 치켜세워 주기까지 했다. 딱 하나, 걸리는 게 있긴 했지. 이렇게 장사가 잘되는데 왜 내놨 지? 이상하잖아. 그런데 개라는 말을 듣자마자 답이 나와 버린 거야. 너, 텔레비전 같은 데서 못 봤냐? 개를 키우고 싶어서 집까지 나온 사 람 얘기, 너도 들어봤지? 그러고 보니 들어본 것도 같았다. 아까 그 생각이 나더라니까. 그 야식집 주인이 바로 그런 놈인 거 야. 그래도 나는 이해 안 가. 개 때문에 가게를 내놔? 너는 이해 안 가도 그런 사람들 많어. 그 뒤로 김 형의 말이 길게 이어졌더랬다. 영균이 너는 네가 왜 택 시 운전대를 잡게 됐다고 생각하냐. 4년제 대학까지 나온 놈이 왜 변 변한 직장 하나 잡지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다 영균이 너의 이 해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그런 거다. 요새는 온통 이해 안가는 것들뿐 인 세상이란 말이다. 나 보면 모르냐? 나도 이해를 못하면 받아들이 교수문단 29

30 지를 못하는 이 개 같은 성격 때문에 여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 지 않냐. 이해 안 가도, 무조건 이해하려고 들어야 온통 이해가 안 가 는 것뿐인 세상에서 그나마 뒤로 밀려나지 않고 살 수 있단다, 기타 등등, 암튼 무진장 잘난 척을 해댔다. 딴은,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했다. 김 형을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김 형은 이해 안 가면 받아들이지 못했다. 김 형은 택시 안에서 담배 피우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취객이 아무 데나 가자고 해도 이해 하지 못했다. 김 형이 모는 택시 안에서 담배 피우는 것들은 당장 내 려야 했다. 아무 데나 가자고 소리친 취객은 아무 데 말고 파출소 의 자에 곱게 뉘여졌다. 한마디로, 택시비 못 받을 때가 많았다는 거였 다. 고로, 이해 안 가도 무조건 받아들여야 사납금을 채워 넣을 수 있다 는 말은, 옳았다. 고로, 나는 받아들였다. 돈만 벌 수 있다면야 못 받아들일 게 없었 다. 개 때문에 장사 잘되는 가게를 권리금 한 푼 안 받고 내놨다는 말 을, 이해 안 가도 받아들였다. 내 동생 영지는 내 말이 이해 안 가도 야식집 계약금을 위해 2학기 등록금을 내놨다. 그런데 왜? 대체 왜? 왜 전 주인 놈은 온 데 간 데 없으며 왜 주문 전화는 한 통도 걸려 오지 않는 거며 왜 전 주인 놈 찾는다고 장부까지 들고 뛰쳐나간 김 형에게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걸까? 머릿속에 온통 물음표뿐이다. 왜? 왜? 왜? 취업에 미끄러졌을 때도, 해고됐을 때도, 왜? 왜? 왜? 물음표들이 따져댔다. 물음표들이 왜냐고 따져대기 시작하면, 그러면 골치가 아파 진다. 골치 아파봤자, 답도 없다. 답도 없는 거에 골치를 썩이면 아버 지 꼴이 나고 마는 거다. 그래서 난,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다. 다시 전화기 앞에 가 쪼그려 앉는다. 이놈의 전화통, 울리기만 해봐라. 무조건, 처음으로 주문하는 손님 한테는 얼마가 됐든 공짜로 쏜다! 위치 모르면 콜택시를 불러서라도 배달해 준다! 한 번 울리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울리기만 하면 30 SDU 디지털 문학

31 불통이 날 게 분명하다. 따르릉 따르릉, 울리기만 하면 영지 등록금도 후딱 해주고, 고향 내려가 빚도 갚아버릴 거고, 울 엄마 장롱 속에 콱 박혀 있는 농약병도 박살을 내버릴 거다! 울려라, 울리기만 해라! 울려 라, 울려! 따르릉 따르릉! 앗? 따르릉 따르릉, 전화가, 전화가, 첫 주문 전화가. 넷! 24시 야식입니다! 어디든 갑니다, 어디로 가져다 드릴까요? 수화기에 대고 하루 종일 연습한 말을 단박에 쏟아낸다. 육실헐, 제 동생 죽었다는 전화는 빨리도 받네. 수화기를 집어 들자마자 이해 안 가는 소리뿐이다. 첫 전화가 맞긴 맞는데, 주문 전화가 아니다. 엄마 전화다. 엄마 전화가 맞긴 맞는데, 이상한 소리만 들린다. 컥, 숨넘어가는 소리, 으허허, 울음소리, 이해 안 가는 소리뿐이다. 이런 썅! 그냥 콱! 뒈져? 장롱 속에서 꺼내 온 농약병을 움켜쥔다. 금세 손에서 힘이 빠져나 간다. 자식 앞세우고도 계속 살겠다는 거여, 뭐여? 다시 농약병을 움 켜쥔다. 왼손으로 농약병 뚜껑을 비튼다, 비튼다, 비이트은다아, 에고 고, 못 비틀고 털썩, 좌변기에 앉아버린다. 다리까지 후들거린다. 후들 거리는 다리로 다시 일어나 좌변기 뚜껑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다시 뚜껑 위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앉으니, 좀 살 것도 같다. 하여, 다시 농약병을 움켜쥔다. 움켜쥐고 보니, 농약병 움켜쥐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가깝게는 얼마 전, 영지가 등록금 안 내놓는다고 했을 때, 협박용으로 움켜쥐었던 일 에서부터 멀게는 감전된 것 마냥 사지를 떨어대다 콱, 뒈져버린 남편 눈꺼풀을 덮어주고는 그려, 이제는 내 차례다, 남편이 같이 먹고 죽자 며 건네줬던 걸 우지끈, 힘주어 움켜쥐었던 일까지, 십 년 동안의 일 이 오늘 일처럼 선명하게 전해 온다. 뒈져도 그때 뒈졌어야 했다. 교수문단 31

32 수가 없잖어. 남편이 박카스병 하나를 건네줬다. 남편도 똑같은 병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남편이 물었다. 내가 먼저 죽을까, 당신이 먼저 죽을까. 남편이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 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농약을 따 라 와도 왜 하필 박카스병에다 따라 왔을까. 돈 아까워서 잘 사 먹지 도 못하는 박카스를. 하여, 내가 물었다. 안에 들었던 박카스는 어쨌어? 내가 먹었지. 남편은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그러고는 재차 물었다. 내가 먼저 죽을까, 당신이 먼저 죽을까. 나는 남편과, 남편이 건네준 농약 든 박카스병을 번갈아 쳐다봤다. 속에서 부글부글, 거품 비스무리한 게 끓어올랐다. 박카스는 저 혼자 다 처먹고 농약은 같이 마시자는 거여, 뭐여?라 는, 말은 안으로 삼키고, 농약 든 박카스병을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순서 따질 거 뭐 있어? 하나 둘 셋, 하면 같이 마셔버리자구요. 자, 준비됐어요? 그런 다음에는 분명히, 같이 하나, 둘, 셋을 셌다. 그런데 내가 셋을 세는 사이에 벌써 남편은 사지를 떨어댔다. 박카스도 저 혼자 처먹어 버리더니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셋도 못 기다리고 농약꺼정 저 혼자 먼저 처먹어! 하여, 나는 간발의 차이로 죽지 못했다. 남편이 사지를 떨어대는 꼴 을 봐버린 다음에야 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까부터 저 인간들이 여기서 뭘 하나, 눈만 꿈뻑거리던 소들이 나를 대신해 음메에 하고, 길게, 오래도록 울어주었다. 그래, 울어라, 울어. 어차피 너희들도 며칠 살지 못할 텐데 원 없이 울기라도 해라. 사료값 폭등이다, 소값 폭락이다 해서 저희들 키워준 주인은 빚더미에 앉아 결국엔 콱, 죽어버렸는데 저희들이 울기라도 울 어줘야지. 나는 더 울라고 소들 대가리에 대고 주먹감자까지 먹이고 는, 고향을 떴다. 곧 죽을 소들 옆에 남편을 버려두고, 야반도주를 해 버렸다. 짐이라곤 브래지어 속에 쑤셔 넣은 박카스병 하나가 전부였 다. 32 SDU 디지털 문학

33 그때부터 농약 마실 각오로 서울살이를 해왔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마다 박카스를 사서 마셨다. 박카스 뚜껑을 열고, 안에 든 박카스를 입에 들이부을 때마다 셋 셀 때 못 마셨던 농약을 들이붓는 기분이었 다. 적게는 하루에 한 번, 많게는 하루에 두 번도 박카스를 사서 마셨 다. 박카스를 마시고 나면, 까짓것, 죽었다 살아났는데 무슨 짓을 못 할까, 신기하게도 힘이 솟았다. 하여, 힘든 일 있을 때마다, 억장 무너지는 일 생길 때마다, 장롱 속에 콱, 처박아 둔 농약병을 움켜쥐고 외쳤던 거였다. 너 진짜 엄마 죽는 꼴 볼래? 그런데 그건 순전히 말뿐이지 진짜로는 살자는 소리였다. 진짜로는 살자고 했던 그 소리가 딸년을 잡아버렸다. 그때 그냥 콱, 마셔버리는 건데. 다시 농약병을 움켜쥔다. 수전증 걸린 것마냥 손이 부들부들 떨린 다. 할 수 없이 농약병을 도로 잠바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잠바 주머 니 안쪽에서 신문지 조각이 부스럭거린다. 집이 딸 얘기 아냐? 동료 청소부가 가져온 신문지 조각이다. 엉겁결에 한 번 읽고 주머 니 속에 찔러 넣어뒀는데, 다시 읽어보니 또 부글부글, 거품 비스무리 한 게 끓어오른다. 6일 0시 19분께 서울 구로동에서 신길역 방향으로 달리던 01다 XXXX 승용차(운전자 유 모 씨 29)가 반대 차선을 넘은 뒤 편의점 으로 돌진했다. 이 사고로 편의점 안에 있던 종업원 김 모 씨(22)가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경찰은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은 유 씨가 커브 지점에서 핸들을 꺾지 못해 사고가 난 것으로 보 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또 부르르,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내 말이 바로 이거, 정확한 경위 를 조사해 달라는 거였다. 조사를 제대로 안 해주니까 조사를 제대로, 정확하게 해달라고 한 것뿐인데 오히려 협박이었다. 계속 이렇게 난동을 부리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거였다. 교수문단 33

34 이렇게 나오시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담당 형사의 말 한 마디에 우르르, 아들 같은 놈들이 달려와서는 겨 드랑이에 팔을 쑤셔 넣었다. 난 끌려 나가기 싫었다. 붙잡힌 두 팔을 위로 아래로 흔들어댔다. 소리도 질렀다. 기회는 이때다, 농약병도 들 이댔다. 우리 딸 안 살려내면 여기서 콱, 뒈질 거란 말이여!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담당 형사도, 그 형사 말 한마디에 우르르, 몰려왔던 젊은 것들도 죄다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래도 농약병 움 켜쥐고 소리소리 질렀다. 내 딸 살려 내라. 내 딸 살려 내라. 대꾸도 없었다. 상대를 안 해주니, 맥이 빠져버렸다. 하여, 나는 지금 경찰서 화장실 좌변기에 털썩, 엉덩이를 내려놓고 있다. 어디 가서 누구한테 하소연을 해야 될지,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 는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도 없었다. 술 처먹고 편의점 들이박 은 그 유 뭐시기라는 놈도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차도 대포차에 신 용 불량자였다니, 이건 뭐 살았어도 보상비 한 푼 받았을 거 같지가 않다. 편의점 주인은 주인대로 악을 썼다. 일하는 도중에 여기서 죽었 다지만 보상금은 줄 수 없다고 잡아뗐다. 출근하자마자 죽어버렸으니 직원이라 할 수도 없다고 우겼다. 보상금 몇 푼 받자면 소송이라도 해 야 될 판이다. 그때 그냥 콱, 마셔버리는 건데. 잠바 주머니에 쑤셔둔 농약병을 다시 꺼내 움켜쥔다. 그때, 그러니까 셋 셀 때 이 농약을 마셔버렸으면, 딸년 먼저 앞세 우는 꼴은 안 봤을 거였다. 그때, 그러니까 엄마 죽는 꼴 볼 거냐고 으름장만 안 놨어도 영지가 그 새벽에 편의점에 나가 일할 일은 없었 을 거였다. 그때, 그러니까 영균이가 해보겠다던 그 야식집 계약금만 있었어도 장롱 속에 콱, 쑤셔놨던 이 농약병을 꺼내는 일은 없었을 거 였다. 그러니까 그때, 남편 잡았을 때, 그러니까 그때 딸년 잡았을 때, 그러니까 그때. 돈만 있었으면 앞으로도 그러니까 그때, 그 34 SDU 디지털 문학

35 때 돈만 있었으면 하고, 없는 돈, 만져볼 일 없는 돈, 생길 리 없 는 돈에 목맬 일이 또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그때, 그 때 하고 애달파 해봤자 별수 없는 거다. 없는 돈을 있게 만들고, 만져볼 일 없는 돈을 식구 중에 누구라도 하나 만져보게 하려면 그냥 콱, 들이켜는 수밖에는 없는 거다. 훅,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내 딸 영지가 이름으로도 못 불리고 김 모 씨 라고만 적히게 된 신문지 조각을 잘 접어 잠바 안주머니 에 집어넣는다. 농약병 뚜껑을 연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은 죽은 남편도, 죽은 딸도, 살아 있는 아들 얼굴도 아니다. 보험설계사 얼굴이다. 분명, 자살해도 보상금이 나오는 보험이라고 했다. 하나, 둘, 셋! 이번에는 셋 셀 때 제때 들이부었다. 199원? 겨우? 그거밖에 안 된다고? 나는 이해 안 간다. 이해 안 가는 건, 이해 안 가는 거다. 이해 안 가는 걸 이해되는 척했다가 동생, 엄마 잡아버렸다. 나는 이해 안 가 는 건 무조건 이해 안 할 거다. 안 받아들일 거다. 거기 그 통장에 남아 있는 거 다 찾는다고요. 나는 은행 창구 여직원에게 다시 말한다. 네, 그러니까 여기 이 통장에 남아 있는 거 다 찾으면 199원이라 고요. 다 찾아드리면 되나요? 여직원의 얼굴에 슬슬 짜증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내 뒤에는 자기 차례가 되기만을 기다리며 내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번호판만 뚫어지게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는 걸. 그래도 이해 안 가는 건 이해 안 가는 거다. 이해 안 가는 건 무조건 안 받아들일 거다. 이해 갈 때까지 따질 거다. 그럼 그 통장에 있던 320만 원은 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는 창구 여직원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댄다. 여직원은 정말 이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자, 보세요. 10월 11일에 320만 원 입금됐고, 10월 13일에 147만 교수문단 35

36 5200원이 빠져나갔죠? 10월 16일에 또 152만 4601원이 출금되고, 199원이 잔고입니다. 여직원은 연필로 통장에 밑줄까지 그어가며 설명한다. 몇 번이고 말 해 주고 설명해 줘도 이해 못하는 학습 부진아를 대하는 선생님 같다. 나는 그래도 이해가 안 간다. 여직원이 밑줄까지 그어준 통장을 들여 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영어 단어 외우듯 소리 내어 읽어도 본다. 시월십일일삼백이십만원시월십삼일백사십칠만오천이백원시월십육 일백오십이만사천육백일원 십일월칠일백구십구원 이런, 썅! 절로 욕이 튀어나온다. 보험금만 날아간 게 아니라 통장 잔고도 몽 땅 날아간 거였다. 엄마가 보험 든 거는 알고 있었지? 보험 얘기를 해준 사람은 최씨 아줌마였다. 최씨 아줌마는 엄마와 한 건물에서 몇 년째 같이 화장실 청소를 해온 사이다. 화장실에서 몰 래 라면도 끓여 먹고 화장실에서 몰래 커피도 나눠 마시는 사이다. 그 외에도 둘이는 몰래 한 일이 많았고, 최씨 아줌마는 엄마가 나 몰래 자살해도 보험금이 나오는 보험에 가입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 나도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니까 그러네. 자살해도 나오는 보험이 라고 그랬다니까. 이번에 계 탄 거는 알고 있었지? 알기는 내가 뭘 아나. 엄마가 보험 든 것도 몰랐는데 곗돈 탄 건 어 떻게 아나. 최씨 아줌마는 화장터까지 따라와 엄마가 몰래 보험 든 거, 엄마가 몰래 곗돈 탄 사실을 속닥속닥 속삭여 주고는, 어여 보험회사로 가보 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엄마가 곗돈을 타긴 탔는데, 하필이면 1번을 타서 앞으로도 계속 곗돈을 내야 되는데, 그 곗돈은 어떻게 되는 거냐 는 말도 덧붙였다. 보험금이 몇 억이라는데 그깟 곗돈쯤이야. 나는 힘 차게 대답했다. 당연히, 내드려야지요. 나는 그 즉시 번호판 떨어진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보험회사로 달려갔다. 자살해도 보험금 나오는 보험은 맞습니다. 상담원은 참 또박또박 말도 잘했다. 그래도 나는 이해 안 갔다. 그런데요? 자살해도 보험금 나오는 보험은 맞지만, 아직 3개월이 지나지 않 36 SDU 디지털 문학

37 았습니다. 무슨 3개월이오? 보험든 지 1년도 더 됐다면서. 네, 맞습니다. 돌아가신 최옥분 씨는 2006년 11월 13일에 저희 회 사 생명보험에 가입하셨습니다. 가입 기간이. 그러니까 2년 1개월 이네요. 그런데요? 3개월이 지나지 않았다니 이상하잖습니까? 네, 가입 기간으로 생각하시면 당연히 이해 안 가실 겁니다. 최옥 분 씨는 2008년 7월부터 2008년 9월까지 3개월 동안 보험금을 못 내 셨습니다. 그러다 10월에 밀린 보험금 3개월 치를 한꺼번에 입금하셨 군요. 그런데요? 밀린 보험금까지 다 냈다면서요? 뭐가 문젭니까? 네, 밀린 보험금은 다 내셨습니다. 그런데 보상은 밀린 보험금을 낸 시점에서 3개월 뒤부터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따져 묻자, 상담원은 그제야 짧게, 잘 이해 가게, 한마디로 얘기했다. 보험금은 못 탄다는 거였다. 나는 통장을 다시 읽어본다. 시월십일일삼백이십만원시월십삼일백사십칠만오천이백원시월십육 일백오십이만사천육백일원 십일월칠일백구십구원. 통장 잔고는 밀린 보험료로 몽땅 빠져나간 거였다. 최씨 아줌마가 귀띔해 준 곗돈이 밀린 보험료로 모두 빠져나가 버린 거였다. 보험료 는 빠져나갔는데, 보험금은 못 탄다. 보험금도 못 타는데 통장에서 돈 은 빠져나갔다. 손님! 해지하시겠습니까? 다음 손님 기다리시는데. 은행 창구의 여직원이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묻는다. 나는 엉겁결에 여직원에게 통장을 건네준다. 여직원이 쟁반을 내민 다. 쟁반에 달랑 100원짜리 동전 두 개와 엄마 명의로 된 통장이 놓 여 있다. 200원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직원은 내가 쟁반에 담긴 100원짜리 동전 두 개와 엄마 명의로 된 통장을 챙기기도 전에, 띵똥, 벨을 누른다. 교수문단 37

38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번호판의 번호가 바뀐다. 곧이어 해당 번호 표를 손에 쥔 아줌마가 옆에 와 선다. 향수 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숨도 쉴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옆으로 몇 걸음 물러났더니 이 아줌 마, 벌써 제 볼일을 보기 시작한다. 내 앞으로 내밀어져 있는 쟁반에 제 통장을 올려놓는다. 쟁반에 놓여 있던 100원짜리 동전 두 개와 엄 마 명의로 된 통장이, 울 엄마 한평생이 알지도 못하는 낯선 여자의 통장 밑에 눌려버린다. 이런, 썅! 절로, 욕이 튀어나온다. 나는 낯선 여자가 내 쟁반에 올려놓은 통장과 도장을 집어 던진다. 손님 왜 이러십니까. 여직원이 소리친다. 이 사람 뭐야. 향수 냄새 지독한 아줌마가 삿대질을 한다. 나는 100원짜리 동 전 두 개를 쟁반에 받쳐 들고 소리친다. 우리 엄마 곗돈과 우리 엄마 보험금과 199원과 맞바꾼 우리 엄마 목숨을 고스란히 쟁반에 담아 들고 외친다. 1원짜리로 바꿔! 손님, 이러시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여직원이 발을 동동 구른다. 젊은 놈이 미쳐도 곱게 미쳐라. 향수 냄새 지독한 아줌마가 침을 뱉고 사라진다. 뭐야? 나보고 지금 달랑 동전 두 개 들고 나가란 말이야? 이 동전 두 개! 전부 1원짜리로 바꿔줘! 안 바꿔주면 나 여기서 꼼짝도 안 해! 여직원이 여기요, 여기요, 입구를 향해 손을 휘젓는다. 청원경찰이 뛰어온다. 1원짜리로 바꿔주란 말이야! 바꿔! 한 사람이, 울 엄마가 한평생 모은 돈인데, 최소한 최소한 한 움큼은 손에 쥐어볼 수는 있어야 되잖아! 겨드랑이 사이로 팔 두 개가 불쑥 솟아 나와 내 가슴을 움켜쥔다. 그 바람에 쟁반에 든 동전 두 개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바닥에 떨 어진 동전 두 개, 뱅글뱅글 맴돌다, 쪼르르 앞으로 굴러가는데, 의자 에 앉아 있던 늙수그레한 할아버지 한 분이 그중 하나를 지팡이로 콕, 집고는 헤버얼죽 웃고 있다. 38 SDU 디지털 문학

39 개소리하고 있네! 이런 개소리를 누가 들을 줄 알고? 벌금 고지서를 구긴다. 구겨서 안주로 시킨 두부김치 접시 위에 올 려놓는다. 안주 접시 위에 올려놓고 보니,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 지만 참 기발하다는 생각이 든다. 맞어. 이런 걸 안주로 씹지 않으면 어떤 걸 안주로 씹나. 나는 벌금 고지서를 안주로 삼아 소주를 마신다. 들이붓는다. 개새끼들. 내 돈을 내가 가져가고 싶은 대로 가져가겠다는데, 뭐 업 무방해? 200원이면 1원을 더 주는 건데 무슨 불만이냐고? 왜 불만 좀 가지면 안 되냐? 불만이 있어서 못 받아들이겠다는데 벌금을 때려? 1 원 더 주는 거 안 받겠다고 우겼더니 30만 원을 내라니, 이게 무슨 개소린지. 이해 안 간다. 이해 안 가. 이해 안 가는 걸 앞에 두고 앉아 있으려니 골치가 아프다. 골치가 아프면, 그러면.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 소주병은 또 금세 바닥이 나버린다. 바닥이 나버린 소주병을 들고 나는 외친다. 한 병 더! 몇 병을 비웠지만, 답이 없다. 벌금을 내, 말어? 벌금을 내면 내가 이해 안 가고, 벌금을 안 내면 내가 이해 안가는 놈이 된다. 이해 안 하는 게 낫나, 이해 안 가는 놈이 되는 게 낫나. 골치를 썩이는데, 진동으로 해놓은 휴대폰이 쩌르르, 옆구리를 찔러 댄다. 김 형이다. 야, 너 어디냐. 어디 있었는데 전화도 안 받아. 부동산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잘하면 가게 나갈 것도 같단다. 어떤 부동산은 어떤 부동산이냐. 우리한테 계약시킨 그 부동산이지. 어떤 놈이 계약하러 왔냐고? 몰라. 우리 같은 놈이 또 있나 보지. 잘하면 권리금도 몇 백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데? 권리금 몇 백 받게 되면 복비 들어간 거 랑 전단지값은 빠질 거 아냐. 밑져야 본전이라더니, 딱 우리한테 하는 말 아니냐? 술? 네가 지금 술 마시고 있을 때냐. 야식집으로 빨리 안 교수문단 39

40 튀어 와? 내일 아침 일찍 가게 보러 온다니까 청소라도 해놔야지. 오 토바이는 네가 갖고 갔어? 번호판이 있든 없든 뭔 상관이야.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게 낫지. 그거라도 있어야 배달을 했다고 우길 거 아니 냐. 잔소리 말고 얼른 튀어 와! 김 형은 제 할 말만 해대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나는 아직도 김 형 목소리가 울려대는 것 같은 휴대폰을 만지작거 린다. 두부 접시 위에 놓인 벌금 고지서를 내려다본다. 나 보면 모르냐? 나도 이해를 못하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개 같 은 성격 때문에 여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지 않냐. 이해 안 가도, 온통 이해가 안 가는 것뿐인 세상에서 무조건 이해하려고 들어야 그 나마 뒤로 밀려나지 않고 살 수 있지 그 말을 하던 순간에 김 형 눈에서 반짝하고 빛나던 거, 그러니까 그거랑 똑같은 게 지금 내 눈에 도 맺혀 있을까? 나는 안주 접시 위에 놓인 벌금 고지서를 집어 든다. 군데군데 김칫 국물이 묻어 있다. 행주로 닦아내어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번호판 떨어진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부릉부릉, 액셀을 밟는다. 나 속인 놈 오토바이 타고 나 같은 놈 속 이러 새벽을 가르고 달려간다. 뿌와앙. 폭주를 땡기는데,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겁나게 비싸 보이는 개가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개라는 말을 듣자마자 답이 나와 버린 거야. 그 야식집 주인이 바로 그런 놈인 거야. 김 형 말이 유턴 신호보다 먼저 시야를 메운다. 급히 유턴을 한다. 이런 썅, 너 거기 안 서! 나는 뒷주머니에 쑤셔둔 벌금 고지서를 꺼내 집어 던진다. 벌금 고 지서가 하늘로 붕 날아오르더니 오토바이 뒤로 빠르게 사라져간다. 뿌와앙. 나는 폭주를 땡긴다. 나한테 이해 안 가는 걸 이해 안 가도 받아들 이게 한 새끼를 쫓아 달려간다. 조금만, 조금만. 40 SDU 디지털 문학

41 이런 썅! 다 잡았었는데. 컹컹컹커엉. 개 소리가 멀어져 간다. 뭐 특별한 거 없나? 박은 컴퓨터 모니터 앞에 달라붙어 요 며칠간의 사건 사고란을 훑기 시작한다. 승용차 편의점 돌진 종업원 1명 숨져 6일 0시 19분께 서울 구로동에서 신길역 방향으로 달리던 01다 XXXX 승용차(운전자 유 모 씨 29)가 반대 차선을 넘은 뒤 편의점 으로 돌진했다. 이 사고로 편의점 안에 있던 종업원 김 모 씨(22)가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경찰은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은 유 씨가 커브 지점에서 핸들을 꺾지 못해 사고가 난 것으로 보 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경찰서 화장실서 60대 민원인 음독 사망 6일 낮 12시 35분께 경찰서 1층 민원실 앞 화장실에서 최 모 (63 여) 씨가 극약을 마시고 쓰러져 있는 것을 경비원이 발견, 병원 으로 옮겼으나 2시간여 만에 숨졌다. 서울지검에 따르면 화장실에서 화학약품 냄새가 난다는 한 민원인의 신고를 받고 경비원이 화장실에 가보니 최 씨가 쓰러져 있고, 주변에는 최 씨가 농약을 담아 온 것으 로 보이는 박카스 빈 병이 놓여 있었다. 20대 남자가 1원짜리 동전 199개를 달라며 소란을 피우다 30만 원 의 벌금 9일 지방법원에 따르면 형사 단독 이 판사는 업무방해 혐 의로 불구속 기소된 김 모 씨(27)에게 벌금 30만 원을 선고했다. 김 모 씨는 지난 7일 시내 모 은행 지점 창구에서 통장을 해지하며 은행 직원이 통장 잔고 199원 대신 200원을 내어주자 1원짜리 동전 199개 를 달라고 요구하면서 1원짜리 동전 199개를 주지 않으면 오늘 집에 교수문단 41

42 가지 않는다. 며 소리를 지르는 등 소란을 피운 혐의로 기소됐다. 또라이들. 사건 사고란을 훑어보는 박의 입이 한쪽으로 말려 올라간다. 박은 몇 년째 사건 사고란의 기사를 쓰고 있지만 정작 기사를 쓴 자신은 자신이 쓴 기사 속에 등장하는 범법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전부 이 해 안 가는 인간들뿐이다. 박은 시계를 올려다본다. 23시 49분. 쳇, 아무거나 하나 빨리 써버 려야겠군. 박은 출입하는 경찰서로 전화를 건다. 뭐 특별한 거 없나 요? 박의 전화를 받은 형사는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매일 터지는 게, 다 그게 그거지요. 그래도 뭐 아무거나 기사될 만한 거 하나 불러주세 요. 어떤 놈이 번호판도 안 달고 오토바이 몰고 다니다 편의점 들이받 은 거 하나 있는데, 불러드려요? 글쎄요 별로. 박은 다시 시 계를 올려다본다. 0시 17분. 늑장 부릴 시간이 아니다. 박은 할 수 없 다는 듯이 말한다. 그럼 그거라도 불러주세요. 박은 형사가 불러주는 대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술 취한 오토바이 편의점 돌진 종업원 1명 숨져 10일 0시 19분께 서울 구로동에서 신길역 방향으로 달리던 무면허 오토바이(운전자 김 모 씨 27)가 반대 차선을 넘은 뒤 편의점으로 돌 진했다. 이 사고로 편의점 안에 있던 종업원 이 모 씨(21)가 크게 다 쳐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경찰은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운전한 김 모 씨가 유턴 지점에서 미처 편의점을 보지 못해 사고가 난 것으 로 보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이명랑 : 소설가, 1997년 새로운 제1호를 통해 등단 1998년 장편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 출간 外 다수,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학부 교수 42 SDU 디지털 문학

43 교수문단 착착 붙여드려요 임정진 #1 끈끈이네 가족은 뭐든지 착 달라붙게 하는 재주를 가졌어요. 모두들 그 재주를 잘 이용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지냈어요. 끈끈이네 엄마는 우체국에서 일하는 힘 센 포장 테이프였어요. 끈끈이네 아빠는 초강력 딱풀이에요. 종이를 오려서 여러 가지를 만드는 꼬마 화가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어요. 큰 형 끈끈이는 찍찍이 벨크로테이프였어요. 운동화 끈이나 점퍼의 주머니에 달라붙어서 쉽게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게 도와주었어요. 끈끈이네 누나는 부끄럼이 많은 투명테이프였어요. #2 끈끈이네 막내는 커다란 양동이에 왕끈끈 찹쌀풀을 가득 담아서 큰 붓으로 여기저기 칠해보고 싶었어요. 막내는 찹쌀풀로 뭐든지 붙여보려고 애썼지요. 아이고, 리모컨이 어디로 간 거야? 걱정마세요. 제가 여기 탁자에 붙여 둘게요. 교수문단 43

44 자꾸만 사라지는 리모컨을 탁자에 딱 붙여 두어서 칭찬을 받기도 하고 빨랫줄에 왕끈끈풀을 발라 빨래가 날아가지 않게도 했어요. 하지만 그 빨래를 떼어 내느라 엄마는 무진 애를 써야 했지요. 막내야. 미안하지만 다음부터는 빨래집게를 이용해줘. 막내는 그날 하루 종일 시무룩했어요. #3 막내는 고민 끝에 더 큰 세상에 나가 새로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다 해봤으니까요. 다 붙여 드립니다. 절대 다시 안 떨어집니다. 막내 끈끈이는 그렇게 외치며 다녔어요. 대머리 아저씨가 막내 끈끈이를 불렀어요. 내 머리카락들이 자꾸 도망간답니다. 좀 붙여 주세요. 막내 끈끈이는 머리카락들을 다 주워서 왕끈끈찹쌀풀을 대머리 아저씨 머리에 바르고 머리카락을 척척 붙여 주었어요. 우와. 이제 나도 멋쟁이야. 멋쟁이. 대머리 아저씨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어요. 그런 인사를 받으니 막내 끈끈이는 기운이 솟았어요. #4 여기저기 다녀 보니 세상에는 떨어진 게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붙여 주어야 할 게 참 많았어요. 막내 끈끈이는 이제 물어 보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척척 다 붙이게 되었어요. 산에 가보니 도토리가 다 땅에 떨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척척 다 나무에 도로 붙여 주었고요. 참나무는 속이 터져 씩씩거렸어요. 하지만 말을 할 수 없어서 나뭇가지를 밤새 흔들었어요. 44 SDU 디지털 문학

45 #5 앗, 이거 뱀의 허물이잖아? 뱀은 어디 간 거야? 이런 걸 버려두고 가면 어떡해. 얼마나 춥겠어. 막내는 고생고생해서 뱀을 찾아 허물을 도로 뱀 몸에 붙여 주었어요. 몸이 커져서 새 껍질을 장만한 뱀은 다시 작은 허물을 쓰고 있어야 하니 답답해서 몸부림을 쳤어요. #6 곰발바닥이 지나간 자리를 보니 발자국이 뚝뚝 떨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그 자국도 도로 곰발에 다 붙여 주었어요. 곰은 기가 막혀서 입을 떡 벌리고 뒤로 자빠졌어요. 떨어진 나뭇잎도 도로 다 나무에 붙여 주었어요. 새 잎이 나올 자리가 없어졌겠지요. #7 알에서 나온 까마귀 새끼를 보고는 막내 끈끈이는 혀를 찼어요. 이런 알이 깨지다니. 내가 도로 붙여 줄게 걱정 마. 막내 끈끈이는 까마귀 새끼와 깨진 알을 잘 붙여서 동그랗게 만들어 주었어요. 막내 끈끈이는 참 흐뭇했어요. 하지만 새끼 까마귀는 숨이 막혀서 캑캑 거렸어요. 교수문단 45

46 #8 막내 끈끈이가 지나간 동네에 막내를 흉보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 소문은 곧 끈끈이네 가족들 귀에도 들어갔지요.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막내가 그렇게 말썽을 피우고 다니다니. 엄마 끈끈이는 너무나 속상했어요. #9 안 되겠어요. 도로 막내를 잡아와서 끈끈이 가문이 해야 할 일을 다 시 잘 가르쳐 줍시다. 아빠 끈끈이는 막내를 찾아 와야 한다고 말했어요. -왕끈끈 막내를 찾습니다. 찾아 주시는 분께 초강력 거미줄 한 다발을 드립니다.- 그렇게 포스터를 만들어 여기저기 붙여 두었어요. 막내가 갈 만한 곳에 강력 끈끈 빨랫줄을 여기저기 쳐 두었어요. 막내는 도대체 어디로 쏘다니는지 쉽게 잡히지가 않았어요. #10 그 때 막내는 폭포 아래서 한숨을 쉬고 있었어요. 아 저렇게 많이 물이 떨어지다니. 저걸 어찌 다 붙여주나. 세상엔 할 일이 너무 많군. 그런데 그 때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앗. 구름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큰일이다. 얼른 붙여 줘야지. 그런데 빗방울은 너무 많은 데다가 끈끈액으로도 잘 붙지 않았어요. 아무리 붙여도 끝이 없었고 또 금방 다시 떨어졌어요. 헉헉거리며 밤새 일을 하다가 막내는 병이 들고 말았어요. 46 SDU 디지털 문학

47 #11 말썽꾸러기 끈끈이 막내가 아파서 큰 바위 위에 누워 있다는 소문을 듣고 끈끈이 가족이 달려 왔어요. 막내는 아프면서도 끈끈이 양동이 손잡이와 붓을 꼭 쥐고 있었어요. 막내는 가족을 오랜만에 만나 기뻐서 기운을 내어 일어나 그동안 한 일을 자랑했어요. 아빠 엄마 형아 누나. 나 잘 했지? 응? 깨진 알도 다 붙여 주고 떨어진 나뭇잎까지 다 붙여 주었다니까. #12 끈끈이 부모님은 막내 끈끈이에게 막내야. 이 끈끈액을 아무 데나 쓰지 말고 좋은 데 써야지. 붙어야 좋은 게 있지만 떨어져야 좋은 것도 있단다. 하고 타일렀어요. 막내는 그 후로는 붙여야 좋은지 잘 생각해보고 일을 하기로 했어요. 그러다가 돌을 쌓아서 성을 새로 만드는 곳을 찾아갔어요. 돌들이 무너지지 않게 잘 붙여 주는 일을 하기로 했어요. 멋진 산성이 완성되면 놀러오세요. 임정진 : 동화작가, <해모수 파크를 탈출하라> 外 다수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학부 교수 교수문단 47

48 교수문단 눈동자와 입술 임헌영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 네 란 구절에 매료당하는 사람은 바람둥이거나 그럴 개연성을 가졌 다면 인생이 너무 삭막하니 차라리 낭만적이라고 얼버무릴까 보다. 눈 동자가 정신적인 운기를 상징한다면 입술은 자식을 비롯한 육체적인 기운을 담고 있기에 이 둘만 보면 한 인간의 전체상을 파악할 수 있 대도 지나치지 않다. 사랑스런 눈이기에 우안( 牛 眼 )이나 사목( 蛇 目 ), 삼백안( 三 白 眼 )이 아 님은 물론이고, 전택( 田 宅 ), 처첩( 妻 妾 ), 간문( 奸 門 ), 남녀( 男 女 ) 부위가 단아한데다 어미( 魚 尾 )와 와잠( 臥 蚕 )이 산뜻한 가운데 검은 동자가 자 그마하고 샛별처럼 총명했을 터이다. 입술은 뾰족하지도 넙적하지도, 삼각입술도, 아래 위 어느 한쪽이 더 두껍지도 않는 알맞게 긴장된 자 손의 관( 官 )을 지닌 모습이었음에 틀림없으렷다. 박인환이 이런 구절을 읊조렸던 서른 살도 못되던 한창 시절(그는 서른에 죽었다)의 배도 더 살아온 나로서는 그리 뛰어난 기억력이 아 닌데도 눈동자 입술은 몰라도(그럴만한 경력도 없지만) 이름은 알 것 같은데 어찌 그는 20대 후반의 총총하던 시절에 이렇게 고백했을까. 혹 이름을 대면 당사자 하나 이외의 서운해질 다른 눈동자와 입술 48 SDU 디지털 문학

49 을 가진(그걸 안 가진 사람도 있나?) 대상들이 떠올라 그들을 고려한 박애주의적 의도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름 밝히기가 싫었거나 그래 서는 안될 상대라 입막음용 수사법의 활용일까. 이런 해석은 무의식적으로 시인이 한 여인과 육체적 접촉이 있었다 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에다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을 연상하면 하루 이틀도 아닌 두 계절에 걸쳐 모종의 사연이 축적된 지라 더더욱 육감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러브 호텔이 없었던 시절이 라 가로등 그늘이나 벤치 위에서의 사랑이었겠지만 요즘처럼 애정의 속도전에 익숙한 사람들은 쉽게 당시의 실제 상황보다 더 진한 연출 장면을 상정하여 이를 기정사실화해 버릴 소지가 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시인과 여인은 그저 바라만 보던 관계였는 지도 모른다. 그들은 호숫가를 맴돌며 애틋하게 바라만 봤지 그 명경 지수( 明 鏡 止 水 )에게 한 점 부끄럼도 없었을 것이며(하기야 그 자체가 오히려 최대의 수치라고 우기면 할 말이 없지만), 벤치에서도 그 원래 의 기능을 이탈하여 다른 목적으로는 결단코 전용( 轉 用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무슨 근거에서냐고 따진다면 신체의 다른 부위가 아닌 눈동자와 입 술을 유독 부각시킨 점이 이들의 결백을 증명할만하다고 변호하겠다. 이런 고운 자태를 갖춘 사람이라면 가로등 그늘이나 호숫가의 옹색한 벤치에서 입술을 도둑맞지는 않았을 터고, 이만한 아름다움을 알아 볼 만한 미학적 식견을 가진 자는 그 초라한 무대에서 구차한 욕정을 억 제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들은 필시 입맞춤의 미수범일 것이다. 사람에 따라 처음 만날 때 상대를 유심히 관찰하는 신체적 부위가 다른데, 그게 어쩌면 그 인간됨을 은연중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나도 누굴 만나면 상대의 시선이 나의 어디를 관찰하느냐를 관찰하는 버릇 이 있다. 간혹 돋보이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유난히 특정 부위로 상대 의 시선을 끌어들이기도 하는데, 이 역시 해당 부위가 그 위인의 운명 을 상징한다고 치부해도 무방하리라. 요즘은 신체 부위보다 옷이나 장 신구로 상대의 시신경을 마취시키려는 위장전술도 빈번하지만 웬만 한 식견을 가진 인격체들은 이내 투시경으로 무장하여 그 허위성을 간파하고 만다. 교수문단 49

50 첫 시선이 가는 부위에 대한 통계는 안 내봤지만 대개 눈동자와 입 술에 가장 빈도수가 높지 않을까 싶은 건 그만큼 관상에서 이 부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데다 관찰하기에 제일 편하기 때문이다. 눈동자와 입술을 보여주는 게 어쩌면 최상으로 진솔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다 눈동자와 입술은 얼굴에서 가장 조화와 질서를 중시한다. 눈은 아름다우나 코가 못 생기거나, 입술은 좋으나 귀가 못 생긴 예는 흔하지만 눈동자가 예쁘면서 입술이 못난 경우는 드물다. 눈과 입술은 천상 운명을 함께 하는 것 같다. 코를 뛰어넘어 눈동자에서 바로 입술 로 시선을 머물게 하는 내력이 이렇다. 사진으로 본 박인환의 인상 또한 선량한 눈동자와 유혹에 잘 넘어 갈 듯한 입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의 남녀는 미처 유혹하거나 당할 여유도 없이 후닥닥 여름과 가을을 보내버렸고, 그 아쉬움이 시인으로 하여금 눈동 자와 입술을 그리워하도록 만든 것 같다. 이룩한 사랑의 추억에 못지 않게 그리워만 했던 사랑의 시도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기는 마찬가 지다. 인생은 이렇게 미완성 행위의 축적 위에서 예술을 잉태시킨다. 그 눈동자 입술은 정복되(하)지 않았기에 영원히 남은 셈이다. 임헌영 : 문학평론가, 저서 문단시대의 문학 外 다수, 한국평론가협회회장,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학부 교수 50 SDU 디지털 문학

51 교수문단 좁은 공간에서 살아남기 김종완 내 집은 서울 종로의 14평 아파트다. 원룸으로 된 이렇게 작은 평 수는 오피스텔인 줄 알았는데, 이건 아파트라 했다. 내가 보기엔 도시 가스가 들어온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집은 맨 꼭대기라 복층이다. 복층이라지만 두어 평 정도 크기의 다락방 하나가 위에 붙 어 있는 꼴인데, 다락방은 문도 없고 허리를 펼 수도 없는 공간이다. 아래는 사무실로, 다락은 잠자리로 이용했다. 명색이 잡지사고 출판사이므로 편집하는 직원이 필요했다. 직원을 채용했으나 이런 환경에서 오래 견디지를 못해 겨우 책 한 권 내고나 면 그만두었다. 그러길 몇 번, 그때마다 잡지는 체제가 흔들렸다. 그 렇다고 모든 걸 외주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지방에서 대학 다니는 막내를 불러 올렸다. 아이가 올라오자 위층의 잠자리를 그 놈 에게 양보하고 나는 아래로 내려왔다. 사실 막내가 딸아이여서 두 칸 짜리 전세방이라도 얻어 살아야했지만 서울의 주거비는 촌놈의 상상 을 초월해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생활의 공간이 없는 아이에게 너 무나 미안했고, 일이 다 끝난 다음 방을 가득 차지한 타원형 탁자를 한 쪽 벽으로 밀치고 의자들을 치우고 바닥에 잠자리를 까는 내 모습 이 초라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최소한의 경비로 버텨내야 했다. 교수문단 51

52 우리는 처음엔 그럭저럭 잘 지냈다. 아이는 내가 잠이 들어 이불이 라도 차내면 덮어주었고, 난 그놈을 키울 땐 되어 보지 못한 자상한 아빠가 되는 듯도 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놈은 여자고 나는 남자다. 나도 심한 야행성이지만 그놈은 더했다. 컴퓨터를 가지고 놀면서 밤을 꼬박 새웠다. 아래로 내려왔다가 위로 올라갔다가,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았다가, 그러다 새벽 두세 시엔 부 엌으로 내려와 딸그락거리며 식사를 하고, 다시 올라갔다가 또 내려오 고 똑 같은 일을 반복했다. 난 주로 밤에 일을 하는 체질인데다 내 일 이라는 게 집중을 요하는 것들뿐이다. 아이의 자판 두드리는 소리까지 귀에 거슬렸다. 아니 어쩔 땐 아이의 숨소리마저도 거슬렸다. 이건 동 물의 영역싸움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밤새 영역싸움을 하다 가 새벽에 내가 잠이 들면 아이는 늦은 아침까지 지켰다가 그때부터 잠을 자기 시작했다. 낮에 손님들이 와도 녀석은 잠을 자고 있는 경우 가 허다했고, 그럴 때마다 난, 아이가 밤샘을 했어요, 변명을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괜히 아이를 불러들여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자책감이 나를 죄었다. 그럴수록 이 좁은 공간에 대해서 화가 났고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 다. 어느 날 집에 있던 화분을 꽃가게를 하는 회원에게 부탁해서 전부 치워버렸다. 화분이 몇 개나 된다고, 그것들이 자릴 차지하면 얼마나 차지한다고, 그만큼도 공간을 내어줄 만한 여유가 나에겐 없었던 것이 다. 뿐만 아니라 난 그 푸른 생명들을 보살필 마음의 여유마저 잃어갔 던 것이다.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딸아이와 나는 너무나 사소한 일들 로 부닥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큰 소리가 나고 아이가 시골로 내 려가 버렸다. 무엇 때문에 그런 충돌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하찮은 의견 차이였거나 둘 중 하나가 조금 무례했을 게 틀림없 다. 아이는 내려간 다음 날 사과의 전화를 했고 난 또 그앨 불러올렸 다. 난 못난 애비라는, 아이는 불효했다는 자책감으로 한동안 서로 조 심하다가 다시 부닥치고, 또 아이는 내려갔다 돌아오고, 그러길 반복 하며 지냈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시선이란 마치 총구를 겨누는 것만큼이나 부 담스러운 거였다. 과장이라고? 결코 그렇지 않다. 좁은 공간이라도 서 52 SDU 디지털 문학

53 로 분리만 된다면 부닥침이 덜할 것 같았다. 발코니를 유리로 막아 창 고로 쓰던 곳을 치우고, 유리로 된 지붕과 벽을 두꺼운 스티로폼으로 싸고 바닥에는 전기보일러를 깔았다. 그리고 나는 그곳으로 거처를 옮 겼다. 경계엔 책장을 들여 시선을 완전히 차단했다. 이제 아랫방을 비 무장지대로 비어놓고 아이는 위층에 나는 발코니방에 서로의 몸을 숨 겼다. 나의 독서의 30%는 화장실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숨길 데 없는 몸뚱이의 눈물 나는 자구책이었던가. 방을 옮기고 나서 우선 눈 에 띄게 나의 화장실 점유 시간이 줄었다. 우리는 비로소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후 우리 부녀 사이에 평화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강도와 횟수가 줄었을 뿐이다. 화분을 모두 다 정리한 뒤에도 화분이 간간이 들어왔다. 그러면 며 칠 두고 보다가 누구에게 주어버렸다. 살아있는 것들을 좁은 공간에서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나름의 배려였다. 봄 세미나 때 제법 큰 화분이 하나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거였다. 할 수 없이 아랫방 현관 쪽 붙박이 옷장 앞에 두었다. 화분 가운데 앞쪽에는 두 촉의 양란, 뒤쪽으론 심비디움 그리고 양 옆으론 테이블야자와 산 호수가 심어져 있고 바닥엔 이끼를 깔아 놓았다. 가운데 뻗어 오른 두 줄기의 꽃대에는 화려한 꽃이 만발해 있었으나 일주일 정도 지나자 시들어 버렸다. 이번엔 심비디움의 잎새가 하나 둘 지기 시작하더니 둥치만 지저분하게 남았다. 봄과 여름을 지냈다. 딴에는 정성을 들인 다고 들이며 돌보고 있다. 꽃에 대해서 잘 안다는 분께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전문가가 잘 키우면 내년에 난에서 꽃을 피우지 않겠어요?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난은 이미 죽었을 거예요. 화분이 겉으론 그럴듯하지만 안은 스 티로폼으로 채워져 있어서 살기 어려워요. 그가 가고 난 후 가위를 들고 화분으로 갔다. 앙상하게 서 있는 양 란의 줄기를 보며 말했다. 이미 죽어 버렸니? 겨우 꽃만 피우고 바로 죽으면 어떻게 해. 새 끼만을 위한 삶이 아닌, 네 몫의 삶도 있어야 되는 것 아냐? 가위를 밑둥 깊숙이 넣어 잘랐다. 마치 죽은 자를 염하듯 경건하게. 교수문단 53

54 그런 다음 벌레라도 나올 것 같은 심비디움의 둥치들을 대강 다듬었 다. 더는 가위질이 불가능한 딱딱한 부분만이 뾰족뾰족 남겨졌다. 화 분은 가운데는 텅 빈 채 양 옆에만 푸른 기운이 팔팔했다. 가을에 접어들자 아이는 시골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아예 내려 가 버렸다. 아이가 내려가 버리자 난 해방감에 들뜨기까지 했다. 그렇 게 좁아 보이던 공간이 갑자기 넓어 보이지를 않나, 그렇게 어수선하 기만 하던 실내가 아늑하게만 느껴지질 않나, 심지어는 너무나 적요하 여 참선 삼매에라도 들 것 같았다. 이놈을 진즉 보내버릴 걸 그랬 어. 늦가을 어느 석양 무렵 난 의자에 앉아 탁자 너머에 있는 화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자기만큼 비쳐 든 햇살이 하필이면 화분만을 온전 히 비추고 있었다. 화분의 양 옆으론 테이블야자의 푸른 넝쿨들이 성 지의 입구를 장식하듯 서 있고, 그 뒤로 산호수의 숲이 우거져 있는데 바로 눈앞에 펼쳐 있는 듯 가깝고, 가운데 바닥에는 이끼들이 잔디처 럼 쫙 펼쳐져 있는데 마치 먼 지평선을 바라보듯 이상하게도 아득하 게 보였다. 그 시야의 끝머리쯤 회색으로 탈색된 심비디움의 남겨진 둥치들이 마치 무등산 서석대의 거대한 주상절리대가 상서로운 기운 을 내뿜으며 서 있듯 그렇게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절이라도 올리 고픈 장엄한 모습이었다. 나는 솟구치려는 샤만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억지로 피식 웃으며 다짐하듯 소리 내서 말했다. 이런 시선의 불균형이 어디 있담. 원근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 닌가! 이후에도 시선의 착각은 계속되었다. 어느 날 오후, 난 화분 속의 서석대를 보며 갑자기 쓸쓸해졌다. 난 아직 서석대를 오르지 못했어. 그런데 몸이 이래 가지고 더는 산을 탈 수 없을지도 몰라. 과연 살아 서 오를 수나 있을까? 그때 갑자기 서석대가 스톤헨지로 변하는 것 이었다. 난 하짓날 스톤헨지를 찾은 수많은 관광객들 중의 한 명이 되 어 우리네 탑돌이 하듯 스톤헨지를 돌고 돌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발코니 방의 창가엔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박스 위로 공룡 한 마리가 불쑥 내 시야에 뛰어 들어 왔다. 놈은 몸을 비틀면서 고독 54 SDU 디지털 문학

55 에 몸부림치듯, 혼란 중에 잃어버린 새끼를 찾듯, 분노와 애절함이 묻 어나는 몸짓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난 놀라지 않았다. 그 공룡과 나의 거리란 너무나 멀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나는 그 공간에 애당초 없었 다. 영화관객이 화면 밖에서 화면을 보듯 나는 구경꾼에 불과했다. 다 시 고개를 돌렸다. 놈은 언제 달려왔는지 바로 스톤헨지 앞의 넓고 넓 은 잔디밭 위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아득한 눈으로 쳐 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걸 어갔다. 궁금해서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연 저 공룡은 뭐란 말인가? 그것은 딸아이가 두고 간 헝겊필통이었다. 왜 이리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 자꾸 보이는 거야?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 알고 있다. 이제 내가 마음의 화평을 얻었다는 것. 아이 는 시골로 내려간 지 몇 주째고, 이제 아이가 보고 싶어졌다는 것이 다. 김종완 : 수필가, 문학평론가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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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학생문단 시 곽도경 권현옥 김미영 김형출 노종상 문정숙 서진호 예시원 유원희 최명희 허소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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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시 산사에서 外 1편 곽도경 둔철산 정취암에는 비내리는 밤에도 별이뜬다 절집 흙담에 기대어 세상을 보면 마을을 삼킨 어둠이 초롱초롱 별들을 토해낸다 정취암에서는 거꾸로 매달려 보지 않아도 산 아래 세상이 전부 다 하늘이다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서서 아득히 먼 밤하늘 내려다보면 전갈자리 큰곰자리 물병자리 밤새 잠 못 들고 깜박이다가 우우우 새끼 잃은 어미노루 울음소리와 함께 새벽예불에 든다 나무정취보살마하살 나무정취보살마하살 시 59

60 시 분홍의 말 빨강과 하양이 만났어요 둘은 첫눈에 반해 뜨겁게 한 몸이 되었어요 빨강이 하양이 되고 하양이 빨강이 되는 절정에서 나는 태어났어요 자, 이제 가슴을 열어주세요 그 치열하고 팽팽한 삶의 줄 잠깐 바닥에 내려놓고 두근대는 핑크빛 심장이 되어 보아요 정열과 순수가 낳은 아이 반항과 포용이 낳은 아이 언제든 쿵쿵 뛸 준비가 되어있는 나는 분홍이에요. 60 SDU 디지털 문학

61 시 병아리 권현옥 어미닭 그림자 아래 작고 따스한 것이 아른거린다. 아기 병아리가 살아온 것인가 하여 내어다보니, 노랑 개나리 꽃잎이 삐약 삐약 흔들리고 있네. 한 걸음 한 걸음 가슴 아리며 다가가니, 해질녘 노을빛에 나타났다 스러지는 네 모습! 몽실한 촉감에 자궁 속 냇가에는 자장가가 흐르네. 네가 묻힌 뒤뜰을 호올로 서성이며, 고통을 뚜욱 뚝 분지르고 분질러 그 끝자락마저 쓸어안고 가슴에 봉숭아 꽃물이 들도록 바라만 보는 나의 심정! 눈물은 고드름으로 맺혀 심장에 파편 되어 떨어지는데,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아아, 너는 개나리 꽃길 따라 가버렸구나! 시 61

62 시 늘품 外 1편 김미영 늘 하품만 한다고 머리통 쥐어박지 마세요. 늘 품고 있는 게 있다구요, 에디슨처럼. 꼴통! 이란 말 정말 듣기 싫어요. 이렇게 불러 주세요, 아빠. 늘품! * 늘품: 가능성 62 SDU 디지털 문학

63 시 노래등 또르르르 귓속이 환해집니다 또르르르 머릿속이 환해집니다 또르르르 가슴 골목이 환해집니다 또르르르또르르르 온몸에 걸리는 귀뚜라미 노래등. 시 63

64 시 달거리 外 3편 김형출 오늘은 그녀의 월수( 月 收 ) 찍는 날 구름에 가린 달빛 때문에 우물이 컴컴하다 달이 차면 기우느니 우물은 우울증에 어지럽다 그녀의 첫 월수 날은 선홍빛 어린 봄날 동백꽃 초경처럼 덜컹 겁이나 서럽게 울었고 수줍던 가슴엔 여린 꽃망울이 피었다 지금은 탱탱하게 여문 늦은 가을밤 겨울이 걱정되어 또 서럽게 울었다 월동준비에 허리가 아프고 아랫배가 아파 사랑이 아파온다, 성숙하게 우물 안에 달은 기억의 샘이다 밝은 동굴이다 동굴을 왕래하는 바람소리는 지아비가 찾고 있는 두레박 숨소리이다 찰랑찰랑 보름달이 기울고 달거리 유효기간이 끝났다싶더니 우물단지에 연꽃처럼 가섭의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다 자연의 일부인 그녀의 월수는 이젠, 초승달을 찍고 시각처럼 흘러가는 그믐달 나룻배 같은 동백꽃 월삭( 越 朔 )이다. 64 SDU 디지털 문학

65 시 느그 아부지 느그 아부지, 문디 사투리이다 달콤 쌉싸래한 첫맛이나 톡 쏘는 뒷맛은 무뚝뚝한 막걸리 맛, 텁텁한 호랭이었다 고래고래 내지르는 고함은 뭐할 끼고 장숫골 長 水 谷 *이 고마 오돌오돌 떨었지 막걸리에 취하면 오냐오냐 흥얼흥얼 만사가 다 좋다! 아부지에게 진 빚 갚을 길이 없다 원금 빼고도 이자가 불어나 그것처럼 세월만 퍼마셨지 이럴 줄 알았더라면 관 속에 문방구 백지수표라도 입금할걸 그랬어, 뽀얀 눈이 비틀비틀 내리는 이상한 춘삼월이면 노처녀의 히스테리처럼 느그 아부지 완두콩 같은 젖꼭지가 그리운 밤이다 지금, 느그 아부지, 폐주 廢 酒 됐다 막걸리 한 사발에 뿌린 기억처럼, *지명: 安 陰 (현 안의면)3동 중 한 곳, 일명 용추계곡( 尋 眞 洞 계곡) 시 65

66 시 가시박 여린 것이 참 별스럽다 하루에도 열 댓 번 그것 하는지 암내가 유별나다 낳았다 하면 녹색 파괴다 유들유들 가녀린 덩굴손에 덩치 값도 못하는 못난 나무야 바짝 엎드린 들풀들아 흔적없이 새는 시간처럼 소리 소문 없이당하고만 사는 그 고달픈 생이 아프다 천적이 없다는 것이 불공평하다 거미줄에 낚긴 죽음처럼 거미 덫에 걸려든 사슬처럼 생존법만은 가시박에 배웠어야 했다 너 아니면 나뿐이라는 요즈음 인간들 하는 짓거리들조차 닮았으니 욕해주고 싶다 결국, 채색된 것은 냉혹하게 고사하는 모순된 생존뿐이다 66 SDU 디지털 문학

67 시 애우 愛 雨 하늘과 구름은 모자간이다 지금 금지된 사랑으로 불이 붙었다 구름 자궁에서 잉태한 물방울은 대지를 임신시켰고 대지는 작물의 열매를 낳았다 제우스는 애우정액을 마구 쏟아놓은 아이기스라 * 주인이다 직선으로 떨어지는 제우스의 명령은 번쩍했고 투명한 유리창에 미리내알 같은 너 한 생명을 낳았다 잿빛하늘에 구름 자궁열리고 파란하늘은 산고중이다 대지를 임신시킨 그 자식 찢어진 우산 받들고 마구 떨어지는 정자 알 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비를 취급하는 산양가죽으로 만든 방패 시 67

68 시 상여꾼 外 1편 노종상 조류독감 발생으로 그대의 눈망울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할아버지가 타고 가신 상여 따르듯 오리 막사에 들어섰다 칼바람 머금은 온 세상은 꽃가루 날리는데 천당과 지옥을 미쳐 생각할 순간도 없이 멍텅구리 가슴에 빨간 대못을 박고 저승사자가 되어 진한 노을 묻어난 손으로 날 선 생명의 전율이 느껴지는 기다란 모가지를 잡아 날름거린 포대에 담았다 파인 땅속으로 밀어 넣었다 가시가 돋친 어둠 깔린 머나먼 저승 길목 천당에서 마실 나온 백의천사 무리 앞에서 묵직한 장부를 기재하고 있는 염라대왕 하는 말 어이 영감탱이 이제 온가 68 SDU 디지털 문학

69 시 생일밥상 눈 내리는 계절이니 바람 찬 꽃눈에 눈멀었나 보다 겨울바람 부는 계절이니 말 많은 바람에 귀 먹었나 보다 시래기 자리한 가슴 달래려고 달력의 음력 헤아리다 머리에 가득 찬 날짜 눈으로 쏙 들어온다 아아, 세상으로 나온 날 깜박 있었으니 별꽃으로 피어나신 어머니에 대한 불효다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하다 메일 검색하고 가끔 일상의 고요 흔드는 전화벨 울렸지만 어떤 메일, 어떤 안부전화 없었다 나 태어난 날도 그랬다고 들었다 오십 년 전, 가족 모두 집 비운 시간 문풍지 잔소리하는 방에서 홀로 나 낳으셨다는 어머니 산통을 다스리는 신령이 되어 마술 부리셨것다 기쁨과 서러움 넘치는 눈물로 미역국 끓이셨것다 내 삶이 사십 줄에서, 박수받지 못한 채 오십 줄로 넘어 가버렸지만 하늘나라에서 내려 다 보고 계실 어머니 앞에서 늦게 차려 먹는 생일 밥상 어머니 생각하며 꾸역꾸역 다 먹는 생일 밥상 시 69

70 시 동백꽃 한 잎 外 1편 문정숙 꽃잎만큼의 언어와 몸짓으로 하루의 계획을 세우고 아름다운 음감을 찾기 위해서 밤새 꽃잎 껍질을 뜯어보고 먹어보고 두드려본다 눈송이 한 마리 맨몸으로 뒤척이면 꽃은 시리운 영혼이 된다 바람도 벌떼도 겨울새도 햇살과 함께 다녀가고 나면 꽃잎은 오가는 자들의 사랑방이 된다 생의 중심에서 외곽으로 밀려난 한 그루의 동백꽃 일상이 빨갛게 곱다 70 SDU 디지털 문학

71 시 죄를 묻다 죽어서 하나님과 천사 앞에 서면 내가 지은 죄를 조사받아서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시듯 도마 위에서 꽁치 한 마리 푸른 죄수복을 입고서 칼자루의 심판을 기다린다 꼬리와 지느러미를 흔들며 살면서 지은 죄의 제목들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죄수 꽁치의 심장을 내리친다 쾅, 쾅, 내 손으로 나를 벌하는 칼자루 소리 내 심장 한복판을 가르며 지나간다 시 71

72 시 管 없는 구멍 外 2편 서진호 ( J는 두 사람입니다. 살인 중독자 J와 동성 강간 피해자 J가 있는 겁니다. 기억해 두세요. 두 사람의 공통점을 꼽자면 성장하면서 성적 흥분을 한 번이라도 느낀 적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몸을 이루는 어떤 구멍에 관한 이야기 ) 왜? 단 1미리라도 管 이 없으면 그건 구멍이 아닌가요? J들의 몸에 있는 구멍이 그런 구멍입니다. 구멍 없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통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 J가 구멍의 존재를 발견한 건 일상이 아주 지루해져 버린 지 1년쯤 지났을 때? 아마 그때쯤 살인 중독에 걸리고야 말았을 겁니다. 맞나? 아무튼 몸 전체를 감싼 구멍에서부터 그가 지금껏 죽여 왔던 사람들의 시신이 도로 쏟아져 나옵니다. 72 SDU 디지털 문학

73 문제는, 그가 깨달은 건, 그것들이 낯익은 생식기의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는 사실. (이 때 J는 어딘가 차가워짐을 느꼈다고 합니다.) J가 차가운 생식기 덩어리들을 치우며 구멍 안으로 얼굴을 들이 밀어 봅니다. J : 거기 아무도 없습니까? ( 기억해 두세요. 두 사람의 공통점을 꼽자면 성장하면서 성적 흥분을 한 번이라도 느낀 적이 있었다는 것. ) 그 다음, 살인 중독자 J가 구멍을 향해 연신 소리치다 겨우 한 번 대답을 얻어냅니다. J : 나는 지금껏 몇 번을 불렀는데 당신은 겨우 한 번 불러! 살인 중독자 J를 위로해 줘야 할 듯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살인 중독자 J가 구멍을 발견하는 데 미숙한 사람이라면 반대로 이 사람은 자신이 들여다보는 게 구멍인줄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그가 동성 강간 피해자 J입니다.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평생 강간당해 왔습니다. 그 강간의 가해자가 아빠이거나 자신보다 체구가 더 큰 남동생이거나, 혹은 어렸을 적 버스 정류장에서 잠깐 마주쳤던 밟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한 영감탱이 이거나 그런 건 아무렴 그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 똑같이 구멍이니까요. 시 73

74 ( 기억해 두세요. 두 사람의 공통점을 꼽자면 성장하면서 성적 흥분을 한 번이라도 느낀 적이 있었다는 것. ) 바보 J. 아직도 모릅니다. 혹은 당신에게는 아는 것이 곧 모르는 겁니까. 지금 얘기하는 그 구멍은 Circle 이 아녜요. 고정관념을 버린다면 보일 겁니다. 구멍이란 하나의 고체라는 사실요. 버스 정류장의 그 영감탱이가 다시 찾아온 날에도 분명 말해줬다던데요. 심지어 그 영감탱이도 말이죠. 74 SDU 디지털 문학

75 시 몸 속의 낡은 비디오 얼굴 뒤에서 먼지 쌓인 필름들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난 그 소리가 너무 싫었고 그럴때면 주구장창 낙서를 하곤 했다 내가 낙서로 그리는 것들이라곤 딱 두 가지 뿐이었는데 하나는 눈물 한 방울 크기의 작은 동그라미였고 또 하나는 가로로 누운 반달 문양이었다 낙서를 정신없이 할 때면 삐걱대는 필름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고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면서 커가는 몸집처럼 필름소리가 들리는 일이 점점 많아질수록 내가 낙서에 빠져있는 시간은 잦아져만 갔다 참고로 반달 문양은 휘어진 양 끝이 위로 향하도록 그릴 때도 있었고 아래로 향하게끔 그릴 때도 있었는데 둘 중 어떤 것을 더 많이 그렸는지는 까먹은 지 오래였지만 어쨌든 뭐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 뒤늦게 가서야 깨달은 거지만 반달을 귀찮게 매번 위 아래로 바꿔가며 그리는 것 보단 다 잊고 대신 거기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냥 그려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던 언젠가부터 나는 동그라미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일에만 도착증 환자처럼 빠져 있었으니까 시 75

76 시 농담이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색이 벗겨진 표지판 미칠 듯이 조급하게 발을 굴려 도로를 걷고 미칠 듯이 조급한 마음으로 표지판에게 다가간다 손에 들린 것은 페인트가 젖은 붓 눈에는 붓에서 흐르는 페인트방울과 함께 도로 위로 쏟아져 떨어지는 눈물 이 이야기는 표지판에 관련된 어떤 편집증에 대한 명제 1 NASA에서 화성으로 가서 살 지구인들을 모집한다고 했을 때 나와 친구들은 내기를 했다 가위 바위 보게임을 해서 우리 중 가장 많이 진 녀석은 NASA홈페이 지로 접속해 신청서에 자기 이름을 써 넣어야만 할 거라고 했다 지금 우리들의 이 바보 같은 가위 바위 보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 을 만큼 먼 행성으로 떠나게 될 거라고 했다 K. 그는 이 최고로 바보같은 놀이의 패배자였고 화성으로 갈 주인공이었다 그 날 이후 K는 무슨 일이든 주변 사람에게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76 SDU 디지털 문학

77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밥이 넘어 가겠어?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목욕이나 하게 생겼어?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학교가 문제야?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너네랑 놀 기분이 나겠어?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축구나 하고 싶겠어?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생일이 대수야?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어머니 상이 중요해? 마치 무엇에 굶주리기라도 한 것처럼 집요하고 날렵하게 생에서 화성의 힘으로 버려야 할 것들을 콕 콕 집어냈다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화성에서 화성에서 화성에서 화성에서 화성에서. 단 하루도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입술로부터 화성을 발음해 대던 K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낯설음의 장인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린 건 우리였다 마치 벌써부터 화성의 정착지를 지어둔 듯 나무판자를 못 박아 두른 그의 집으로 들어가자 거실 한 가운데에 앉아있는 그가 보였다 화성의 힘으로 모든 것들 버린 후 히키코모리가 된 K는 시 77

78 온 몸에 오랫동안 깎지 않아 마대처럼 길어진 수염이나 두발 같은 것 대신 화성에서 인생을 마감하게 생겼는데 지금,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모든 리스트를 적은 인쇄물들을 육체에 있는 온 구멍으로부터 잔뜩 뽑아내고 있었다 친구 중 하나가 그 인쇄물 한 장을 집어서 읽어본 후 인쇄기가 되어 잠든 친구를 향해 연민이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거였어? 이런 이질적인 언어들을. 우리는 집 뒤편에 있는 마당으로 인쇄기가 된 K를 데려간 다음 그의 몸을 해체시킨 뒤 그 앞에 나란히 앉았다 불에 타 소각되고 있는 K를 바라보던 또 다른 친구가 문득 얘기했다 어렸을 적에 뉴스에서 죽은 군인을 장례 치러줄 때 의장대가 하늘 위로 일제히 총 쏘는 광경을 보고 난 고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편지 로 써서 그 편지를 총알 크기로 구겨 쏴 날리는 건줄 알았어 너희도 그런 생각 한 번쯤 해보지 않았어? 동의하기에는 너무나도 무섭고 혼란스러운 그 말에 우리는 억지로 고 개를 끄덕였고 K도 마찬가지였겠지. 다만 그 기억을 견뎌낼 수가 없었던 거야. 그 래서 이렇게 화성이라는 어휘 속으로 떠나가버린거겠지 라며 친구는 마저 얘기했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있는 힘껏 K를 위해 통곡하는 소리를 내주었다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색이 벗겨진 표지판 미칠 듯이 조급하게 발을 굴려 도로를 걷고 미칠 듯이 조급한 마음으로 표지판에게 다가간다 손에 들린 것은 페인트가 젖은 붓 눈에는 붓에서 흐르는 페인트방울과 함께 도로 위로 쏟아져 떨어지는 눈물 이 이야기는 표지판에 관련된 어떤 편집증에 대한 명제 78 SDU 디지털 문학

79 2 얼마 뒤 K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부러움과 동경으로 다시 한 번 똘똘 뭉친 우리는 두 번째 가위 바위 보를 했다 그 동경이라는 것은 의장대의 총구 속에 든 구겨진 편지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보다 단지 차갑고 딱딱한 총알에 불과한 그 발사된 총구 속 존재의 실체에 한 방이라도 스스로 맞아보는 것, K는 그 총상을 처음으로 입어 본 행운아였고 그 지독하게도 외적인 시도를 성공한 것에 대한 동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우리는 남아있는 사람의 수만큼 행성을 마저 정한 뒤 가위 바위 보를 한 번 할 때마다 정해둔 행성 한 개 씩을 차례로 걸 었다 이윽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자기만의 목표 행성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 있게 된 우리는 얼마 뒤 매스컴으로부터 NASA의 중대발표를 듣게 되었다 NASA 연구진은 화성의 한 가운데에서 지구의 언어로 이루어진 문장 이 잔뜩 적힌 인쇄물들을 쏟아낸 인쇄기계 한 대가 발견되었다고 말 했다 우리는 그 발표소식을 듣자마자 매장 진열대 위 장난감을 들었다가 엄마의 꾸중소리에 다시 그것을 놔버리는 아이의 손짓처럼 우리들의 행성을 곧바로 손에서 놔버렸다 화성에 홀로 선 그 인쇄기가 토해낸 인쇄물의 문장들이 지구로 라는 주어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무서운 확신은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먼저 하려고 들지 않았다 시 79

80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색이 벗겨진 표지판 미칠 듯이 조급하게 발을 굴려 도로를 걷고 미칠 듯이 조급한 마음으로 표지판에게 다가간다 손에 들린 것은 페인트가 젖은 붓 눈에는 붓에서 흐르는 페인트방울과 함께 도로 위로 쏟아져 떨어지는 눈물 이 이야기는 표지판에 관련된 어떤 편집증에 대한 명제 Insert (Scene 1) 나는 문장을 짜듯 극본을 짜고 극본을 짜듯 배낭을 새로 짰다 문장의 주어를 떼 모아서 그것을 만들고 나머지 어절들은 배낭 밖으로 전부 쏟아냈다 농담이 싫다 농담이 무섭다 농담을 하는 사람은 무섭지 않지만 사람에게 가라앉아있던 농담이 무섭다 농담이란 늑대소년 같은 것이다 늑대 소년에게서 늑대를 필사적으로 뜯어낸 뒤 반드시 내가 갖고 싶은 어휘를 손에 넣겠다 이것은 /화성으로 떠나기 전/에 쓰는 마지막 일기가 될 것이다 외출 하루 전 이 부분을 꼭 찢어갈 것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색이 벗겨진 표지판 미칠 듯이 조급하게 발을 굴려 도로를 걷고 미칠 듯이 조급한 마음으로 표지판에게 다가간다 손에 들린 것은 페인트가 젖은 붓 눈에는 붓에서 흐르는 페인트방울과 함께 도로 위로 쏟아져 떨어지는 눈물 이 이야기는 표지판에 관련된 어떤 편집증에 대한 명제 80 SDU 디지털 문학

81 3 그날 밤 우린 모두가 같은 꿈을 꾸며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는 K가 등장했고 우리들 각자는 그와 마주보며 서 있었다 K는 이마 정 가운데에 종이로 만든 탄환을 박은 채 피를 흘렸고 시건방진 말투로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너희가 총을 좀 찾아와줘야겠는걸 우린 다시 한 번 K의 집으로 달려갔고 그의 방을 미친듯이 뒤지기 시 작했다 그리고 발견된 한 권의 일기 우리는 제일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나는 문장을 짜듯 극본을 짜고 극본을 짜듯 배낭을 새로 짰다 문장의 주어를 떼 모아서 그것을 만들고 나머지 어절들은 배낭 밖으로 전부 쏟아냈다 농담이 싫다 농담이 무섭다 농담을 하는 사람은 무섭지 않지만 사람에게 가라앉아있던 농담이 무섭다 농담이란 늑대소년 같은 것이다 늑대 소년에게서 늑대를 필사적으로 뜯어낸 뒤 반드시 내가 갖고 싶은 어휘를 손에 넣겠다 이것은 /화성으로 떠나기 전/에 쓰는 마지막 일기가 될 것이다 외출 하루 전 이 부분을 꼭 찢어갈 것 시 81

82 우린 일순간 분노에 휩싸였지만 이내 K를 미워할 도리가 없음을 인정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린 울며 겨자를 먹는 심정으로 노트의 찢겨나간 부분에 이렇게 써 넣어주었다 이것은 /지구와 이별하기 전/에 쓰는 마지막 일기가 될 것이다 외출 하루 전 이 부분을 꼭 찢어갈 것 그리고 바로 아랫줄에 이렇게 덧붙였다 -자넨 어쩜 그렇게 끝까지 이기적이기만 한가 나와 자네의 필체가 많이 닮은 편이 아니기를 바랄 뿐일세-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색이 벗겨진 표지판 미칠 듯이 조급하게 발을 굴려 도로를 걷고 미칠 듯이 조급한 마음으로 표지판에게 다가간다 손에 들린 것은 페인트가 젖은 붓 눈에는 붓에서 흐르는 페인트방울과 함께 도로 위로 쏟아져 떨어지는 눈물 이 이야기는 표지판에 관련된 어떤 편집증에 대한 명제 82 SDU 디지털 문학

83 4 모두가 떠나간 빈 방 빈 집 일기장의 찢어진 공간 속에 지금 막 새 집을 구한 귀부인처럼 그 공간을 품격 있게 어슬렁거리는 K가 있고 그는 혼잣말로 얘기한다 그렇다고 너무 생색은 내지 말게나 이건 단지 극본에 불과해 자네 들이 내게 준건 극본에 불과하다고 극본이란 게 뭔줄 아나 그건 아무리 쌓아올리고 또 쌓아올려도 형체가 없네 가지면 가질수록 허기가 진다고 자네들도 그 기분을 알겠지 덧칠은 완성되고 붓은 내려놓고 눈물은 닦는다 조급한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말라가는 눈물처럼 말라가는 낡은 표지판을 덮은 페인트칠 이 이야기는 표지판에 관련된 어떤 편집증에 대한 명제 시 83

84 시 바람은 살아있음이다 外 1편 예시원 정지된 섬과 살아있는 섬의 차이 흔들리는 깃발은 살아있음을 알림이다 살아있으면 바람이 분다 바람 불지 않는 섬은 죽은 섬이다 나 여기 있음을 알리는 깃발 기쁨의 손짓 생명의 약동은 바람이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살면 될 것을 무에 그리 사서 걱정인가 살아 있을 때 비로소 가슴이 벌렁거린다 산다는 건 바람이다 바람이 까불고 설친다는 건 살아있음이다 애써 길을 만들지 않아도 자연은 스스로 길을 열어준다 84 SDU 디지털 문학

85 시 바람 불어 좋은데이 인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돈과 힘이 전부가 아니다 바람 불면 부는 대로 살면 될 것을 무에 그리 걱정인가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하면 될 것을 왜 혼자 아파하나 바보 같은 사람아 딩가 딩가 딩가 소리치며 기타치고 노래나 부르자 뿌리가 깊으면 바람 불어도 좋다네 산자락에 노을이 드러누운 저녁 좋은 날은 좋은데이로 보내자 미안하데이 나는 니를 억수로 사랑한다 카이 시 85

86 시 우기엔 슬픔도 날개를 단다 外 1편 유원희 빗방울들이 늦은 저녁 밥상에 오르네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멸치 떼들 해물뚝배기에서 부글부글 끓어가요 촉촉한 눈망울의 스탠드 불빛이 잎사귀를 한껏 부풀리고 건너편 의자에 나방 하나 친절하게 앉았다 가네요 쿵, 쿵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천둥소리를 허벅지로 받아내요 허벅지 위로 멸치 떼들이 뛰어다녀요 피아노 건반을 핑퐁, 핑퐁 밟고 젓가락 철봉에서 오래 매달리기를 하다 소주잔에 퐁퐁퐁퐁 땀방울을 던져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멸치 떼들 해물뚝배기에서 부글부글 끓어가요 꼬르륵, 꼬르륵 온 몸이 소리를 내요 우기엔 몸이 악기가 돼나 봐요 86 SDU 디지털 문학

87 시 옥수수 편지 회색 앞치마를 걸친 김씨가 모락모락 솥을 등지고 앉아, 옥수수 껍 질을 한 겹, 두 겹 벗겨낸다 곱슬 수염 우체국 소인이 흔들거리는 옥 수수 편지를 한 겹, 두 겹 벗겨낸다 촘촘하게 박힌 사연들은 깜짝, 깜 짝 놀라며 쏟아진다 펑 터지면 귀를 막던 아이들이 하나, 둘 태어나고 까르륵까르륵 웃음이 골목을 구른다 옥수수를 물고 베트남 노래를 한 톨씩 깨물었던 여드름 그녀의 가랑가랑 웃음이 김씨의 가슴팍에서도 찰지게 쪄진다 옥수수 껍질이 월남치마로 흔들거린다 달아난 그녀의 미소가 꼬질꼬질한 옷깃을 빠져 나와 솥뚜껑 위에 소인처럼 찍힌다 솥뚜껑이 열릴 때마다 김씨 손이 붉어진다 찢어진 면바지 사이로 한 때의 즐거운 시간들이 빠져 나간다 한숨 가득 입에 문 전봇대가 <국 제결혼 비용저렴> 전단지를 곁눈질한다 옥수수 알들이 동지나해를 건 너는 철새처럼 발을 비비고 있다 시 87

88 시 세월 당기는 법 外 1편 최명희 바라보고 마주 서 있다가 나의 얼굴을 당기는 그 양 볼을 두 손으로 잡고 슬며시 귀 쪽으로 당긴다. 주름진 얼굴을 이렇게 죽 펴면 십 년은 젊어질 수 있을 거라며 굽이진 인생길을 죽 잡아당긴다. 멋도 모르고 끌려가는 볼 살 당겨도 다시 구겨질 수밖에 없는 긴 긴 시간이 웃음을 바르며 매끄러운 길을 만든다. 주름 진 세월을 손 밖으로 밀어내고 안타까운 마음 담아 웃게 하는 그 때문에 오늘, 나는 늙었어도 곧고 팽팽하게 세월 당기는 법을 배운다. 88 SDU 디지털 문학

89 시 뼈 있는 말 긴 교량도로에 바람이 떠나버려서 오토바이를 끌고 가는 남자 맨들 거리는 신발바닥 먼지도 없다. 지방질이 떠나버려 여러 겹진 얼굴 진땀 속도 높인 차들은 잘도 떠나가고 그의 번들거리는 머리 위로 정수리 땡볕 활짝 빛나고 있다. 팔에 유두박근 힘줄이 떠나버려 입원한 김 선생 문병 가면서 차 운전하던 박 선생 내 생전에 돈은 떠나버렸다 말하는 사이 깊게 숙인 몸으로 작은 발자국 떠나보내며 오토바이를 끌고 가는 남자 시 89

90 시 모과나무가 내게 外 1편 허소미 티격태격 서로의 잣대만 들이대는 모가 나는 사랑 역지사지로 그 매듭을 풀다 보면 산 첩첩 골 첩첩 가로막힌 철조망도 거추장스런 옷 벗듯이 스르르 걷어들고 합수되는, 그 날이 꿈처럼 오리라고 오늘 아침 문득 내 속뜰에 무성한 잎새 사이 동글동글 둥그런 세상바퀴 돌리며 들어서던 모과 모과나무 90 SDU 디지털 문학

91 시 프린터 저 여자 자궁만 빌려주는 대리모인지 몰라 시험관에서 수정된 기억의 정자들을 스풀러라는 자신의 해마에 착상시킨 그녀 모체에게는 암덩이 같을지 모르는 생명들을 아니 싱싱한 남의 기억들에 하나하나 씨톨을 박다 어미가 딱딱해서 독소를 빼내야 제 영혼이 잠잠해질 수 있다는데 늪가의 키 큰 부들이 스스로 제 몸의 몽둥이에 맞는 것처럼 몸부림같은 산통을 치루며 먹은 만큼 토해내는 성마른 그녀 지금 누에고치처럼 줄줄줄 하얀 기록들을 해산 중이다 한 번도 수태해보지 못한 석녀 제 아이는 끝내 못 가질 가련한 여자 시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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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학생문단 소설 정영서 권현옥 小 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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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소설 2011 영남일보 문학상 소설부분 당선작 문 정영서 아내가 나가자마자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힌다. 걸쇠가 흔들린 다. 도둑이라도 들면 큰일이다. 드라이버를 찾아 걸쇠의 나사를 조인 다. 현관에서 방까지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물건들 위로 햇볕이 내리쬔 다. 아내가 모든 소리를 쓸어가기라도 한 걸까. 집 안은 태풍의 눈처 럼 조용하다. 정적 속으로 소리들이 침투한다. 시계초침 소리, 냉장고 소리, 장롱이 몸을 뒤트는 소리. 점점 드세진 소리들이 바보, 등신이 라고 나를 비웃는다. 소리는 소리로 몰아내야 한다. 노래를 흥얼거리 며 컴퓨터를 켠다. 서둘러 하쿠나마타타 게임을 실행한다. 메인 화면이 열리며 집 안은 다른 소리들로 채워진다. 새 소리, 바람 소리, 풀잎 스치는 소리. 아프 리카 초원을 서성이는 얼룩말들을 보며 자연의 소리를 몸 가득히 받 아들인다. 하쿠나마타타는 스와힐리어로 '걱정하지 마'라는 뜻이다. 제 목이 그래선지 이 게임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게임의 기본설정은 게이머가 포토저널리스트나 동물학자가 되어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것 이다. 다큐멘터리를 찍듯 동물을 관찰하며 고객이 주문한 사진을 찍으 면 된다. 내가 이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게이머와 경쟁할 필요 소설 95

96 가 없고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이라면 현실에서 경험한 것만 으로도 충분하다. 베이스캠프로 들어가 노트북을 실행한 뒤 메일을 연다. 일이 들어왔 다. 네이처 파워 잡지에 실을 산악고릴라 사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미 고릴라 등에 업힌 아기 고릴라 사진이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주 문이 붙어 있지만 일을 하게 된 게 즐겁다. 휘파람을 불며 아프리카 필드 가이드에서 고릴라 정보를 모은 뒤 사파리 모드로 들어간다. 차 를 빌려 자이르의 비룽가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무리지어 달리는 누 (gnou)떼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실제로 사바나 초원 을 달리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룽가 국립공원 비소케 지역에 도착한다. 고릴라를 찾는 키워드는 잠자리 와 배변 이다. 우선 산악고릴 라가 자주 나타나는 숲으로 향한다. 하게니아나무 아래 이끼가 우묵하 게 눌려있다. 제법 큰 것으로 보아 고릴라가 쉬었던 곳이 분명하다. 그 주변에 떨어져 있는 배설물을 따라간다. 숲을 벗어난 배설물은 무 성한 잡풀 사이로 이어진다. 통로까지 생긴 걸 보면 무리 전체가 움직 인 게 틀림없다. 조심해서 풀숲을 기어간다. 제인 구달이라도 된 듯 온몸이 짜릿해진다. 갑자기 화면 전체에 붉은 비상등이 켜지며 윙윙 소리가 난다. 동물의 비명과 포효가 동시에 들린다. 잽싸게 뒤돌아 줄 행랑을 치지만 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무조건 옆으로 점프하고 보니 하필이면 가시덤불 숲이다. 곧 눈앞에 도망치는 버펄로와 그 뒤를 쫓 는 고릴라가 나타난다.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카메라가 없다. 어딘가 에 떨어트린 모양이다. 그제야 주의사항이 머리를 때린다. 고릴라가 만들어 놓은 길을 버펄로가 따라갔을지 모르니 특히 조심하라고 했었 다. 다시 고릴라를 찾아보지만 이미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화면에서 사라져 0과 1의 형태로 게임 데이터 어딘가에 잠복해 있을 것이다. 게임머니를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96 SDU 디지털 문학

97 전화벨이 울린다. 아내다. 또 게임하고 있지? 아내의 목소리에 짜증 이 가득하다. 눈치를 살피며 달력을 본다. 말일이다. 이달 보험계약실 적이 좋지 않은 걸까. 게임만 하지 말고 친구 좀 찾아봐. 아내의 목소 리가 뾰족하다. 우물쭈물 대답한다.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잖아. 그렇게 웅얼거리지 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아내는 송곳 같은 목소리를 내지르고 신호음 뒤로 사라진다. 아내가 이러는 것은 정말로 친구를 찾아보라는 뜻은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시 작된 푸념일 뿐이다. 나는 2년 전까지 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게임회사의 개발팀 팀장이 었다. 어느 날 회사에 경찰들이 들이닥쳐 개발팀 직원들을 모두 구속 했다. 사행성 게임을 개발했다는 혐의였다. 사장의 지시에 따랐을 뿐 이라고 항의했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찰은 없었다. 이틀 뒤 아 버지가 변호사인 직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풀려나 자마자 친구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해외로 도주한 뒤였다. 친구가 떼 어먹은 것은 직원들의 몇 달치 월급만은 아니었다. 회사 지분을 넘겨 주기로 하고 내 아파트를 담보로 빌린 돈이 꽤 되었다. 결국 나는 집 을 팔고 월세 아파트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가 이럴 수 있느냐며 억울해 하는 내게 아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은 늘 가까이 있는 법이야. 당한 사람이 바보지. 사파리 모드에서 나와 온라인 가상사진 코너로 들어간다. 게이머들 이 자기가 찍은 동물사진을 올려놓는 곳이다. 정기적으로 사진 콘테스 트도 열리지만 카메라 사용이 서툰 나로서는 그림의 떡이다. 오늘 올 라온 사진 중 자화상 이라는 제목을 클릭한다. 등의 털이 모두 은색 인 고릴라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수줍은 듯 웃고 있다. 고릴라 사진 의뢰를 받은 게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자세히 보니 게임에 나오는 그 래픽 고릴라 사진이 아니다. 고릴라의 주변으로 책상과 책꽂이가 있고 아치형 창문에는 흰색 레이스 커튼까지 드리워져 있다. 은색등이란 별명을 쓰는 이가 내게 대화를 신청한다. 고릴라 사진을 소설 97

98 올린 사람이다. 착해 보이는 고릴라의 눈을 보며 그의 대화 신청을 받 아들인다. 은색등은, 내 별명이 네안데르탈인이어서 대화를 하고 싶었 노라고 운을 뗀다. 대화창에 그의 문자가 올라오는 동안 컴퓨터에서 아카벨라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 흠이 흘러나온다. 흠은 하쿠나마타타 게임 세계의 언어다. 게임 개발자는 인지고고학자 스티 브 미슨의 이론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흠을 만들었다고 한다. 스티브 미슨은 초기 호미니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노래 같은 언어 를 사용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언어를 흠(Hmmmm)이라고 명명했다. 흠은 아기들의 옹알이와 비슷했을 거라고 한다. 그래선지 흠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 나이를 물어본 은색등은 자기가 몇 살 더 많다며 바로 말을 놓 는다. 고릴라와 네안데르탈인이 사촌간이니 자기가 나의 사촌형이라 는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그에게 사진은 어디에서 찍었는지 묻 는다. -영국 런던동물원 유인원연구소. 그곳에서 엄마 고릴라와 함께 살 았어. 아프리카에서 밀렵꾼들에게 잡혔는데 런던박물관 유인원연구소 소장에게 구출되었거든. 하쿠나마타타 게임에는 동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기능이 있다. 그는 게임에 빠져 자신이 고릴라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엄마 고릴라는 지금 무엇을 하나요? -동물원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죽었어. 밀렵꾼 올가미에 걸려서 목을 다쳤거든. 엄마가 죽은 뒤 몸을 웅크리고 아무 것도 먹지도 않는 내게 박사가 말했어. 엄마는 죽은 게 아니라 다른 생명체로 바뀐 거라 고. 아마, 엄마는 바람이 되었을 거야. 숨을 쉴 때마다 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거든. 98 SDU 디지털 문학

99 어쩌면 그는 너무 외로운 사람일지 모른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 을 때 나도 온 세상이 텅 빈 것처럼 막막했다. 이 세상에서 부는 찬바 람이 모두 내게 달려드는 것 같았다. -새 가족을 만들지 그래요. 나는 결혼 한 뒤에야 바람막이를 얻은 느낌이었어요. -나도 그러려고 했어. 등의 털이 어른의 성징인 은색으로 바뀌었을 때 암컷을 찾으려고 아프리카로 갔어. 그런데 고릴라 무리에 섞여들 수가 없었어. 동물원에서 사는 동안 너무 인간화됐거든. 친구에게 호되게 당한 뒤부터 나는 사람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일수록 더욱 경계하며 곁을 두지 않았다. 점점 증상이 심해져 대인기피증으로 발전했다. 요즘은 선글라스를 쓰 지 않고는 외출할 수도 없다.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면 가끔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요즘엔 집에서도 환청이 들린다. -인간화되면 좋은 거잖아요. 진화하는 거니까요.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는 거고. 나는 수컷 은색등 역할을 학 습하지 못했기 때문에 야생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어. 고릴라의 관점에 서 보면 도태된 거야. -지금은 어디에서 살아요? -5년 전까지 박사의 집에서 살았어. 그가 죽은 뒤로는 여기저기 떠 돌아다녔어. 지금은 S동물원 유인원관 근처에서 다시 동물원으로 들 어갈 방법을 찾는 중이야. 갑자기 모니터가 꺼진다. 검은 화면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비친다. 방을 채웠던 흠이 사라지자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만 소설 99

100 남는다. 정적을 가르고 시계초침 소리가 파고든다. 나의 내부로 침투 한 소리가 공포를 불러낸다. 점점 팽창하는 공포를 털어내기 위해 흠 을 하며 두꺼비집을 연다. 누전차단기의 스위치가 떨어져 있다. 누전 되면 전원이 차단되듯 내 삶도 어느 순간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버렸 다. 집과 직장을 중심으로 순환하던 내 삶의 열차가 일탈해 정체된 공 간에 멈춰서고 만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이곳에서 나는 다시 궤 도에 들어설 방법을 찾지 못하고 삶을 잠식하고 있을 뿐이다. 전화 진동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아내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이다. 짜증내서 미안하다는 내용이다. 점심 먹고 비타민도 챙겨 먹어. 산책 도 하고. 마지막 문장 끝에 찍힌 하트를 본다. 아내는 아직도 나를 사 랑하는 게 틀림없다. 2년이 넘도록 재취업이 안 돼 우울해 하는 내게 비타민 B6를 사다 준 것도 아내다. 비타민 B6가 불안감이나 우울증 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고객을 만나러 다닐 그 녀를 생각해서라도 빨리 바깥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비타민 B6 다섯 정을 입에 털어 넣은 뒤, 선글라스를 쓰고 집을 나선다. 막상 지하철역까지 나왔지만 딱히 갈 곳이 없다. 입구 앞을 서성이 며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양복과 서류 가방을 든 사람들에게는 직장인의 오래된 습관이 배어 있다. 그들은 앞을 바라보며 분주히 걷 다가 성큼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다. 급히 할 일이 있는 그들에게는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다. 예전엔 매일 습관에 의해 움직이는 게 답답 했는데 지금은 정상적인 시간 궤도 안에 머문다는 증거 같아 부럽다. 나도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급히 개찰구로 향해 걷다가 멈춰 선다. 나는 서둘러 가야 할 곳이 없 다. 돌아서려는데 누군가와 부딪친다. 나의 선글라스와 그의 가방이 동시에 떨어진다. 젊은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고 서 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데 거친 목소리가 들린다. 이 100 SDU 디지털 문학

101 거치적거리는 인간은 뭐야. 놀라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는 입을 다 문 채 가방을 줍고 있다. 복화술이라도 하는 걸까. 다시 소리가 들린 다. 에이, 재수 없어. 여전히 그의 입술은 움직임이 없다. 환청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숨이 차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남자가 어리둥 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밀치고 지나간다. 사람들이 흘깃거린다. 서둘러 선글라스를 주워 쓰고 사람들 시선을 피해 지하철 노선도 앞 으로 간다. 눈앞에 어두운 막이 생기자 호흡이 안정된다. 천천히 지하 철역 이름을 읽는다. S동물원역. 그곳에 가면 은색등이 있을 것이다. 그와는 두려움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유인원관이 있어야할 자리에 공사용 펜스가 쳐져 있다. 선글라스를 벗고 펜스의 이음새 틈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시멘트 구조물들이 반쯤 허물어지고 고릴라나 침팬지 우리를 알려주던 푯말들이 바닥에서 나 뒹군다. 쇠락한 것들이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사방에서 침묵이 쏟아진 다. 그곳 어디에도 은색등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온라인 게임에서 만 난 사람을 찾아 S동물원까지 오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펜스에서 물러나 주위를 둘러본다. 월요일 오전이라선지 관람객은 거 의 눈에 띄지 않는다. 공사용 펜스 중앙에 리모델링 중이란 안내문과 조감도가 붙어있다. 조감도 가까이 다가간다. 가운데 건물을 중심으로 각각의 유인원들 정원이 정글처럼 꾸며져 있다. 아시아 오랑우탄, 중 앙아프리카 침팬지, 콩고 고릴라, 이집트 망토원숭이, 마다가스카르 여우원숭이, 유인원 종류가 이렇게 많은 줄이야. 새로 개장할 그들의 공간은 내가 사는 아파트보다 넓어 보인다. 볼펜을 꺼내 그들의 우리 옆에 또 하나의 울타리를 그린다. 네안데르탈인의 계곡. 노래를 흥얼 거리며 계곡을 꾸미기 시작한다. 당신 네안데르탈인이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선 다. 멀지 않은 곳에 눈이 쑥 들어가고 인중이 긴 사내가 서 있다. 피 부가 검고 머리까지 헝클어져 있어 영락없는 고릴라다. 낙서를 몸으로 가리며 그에게 묻는다. 당신이 은색등인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본다. 요즘 나의 웅얼거림을 정확히 알아듣 소설 101

102 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 보며 말한다. 이 시간에 흠을 하며 낙서하는 것을 보면 사촌도 어지간 히 할 일이 없나보군. 급히 뒷걸음질하며 선글라스를 쓴다. 그가 윙크 를 하며 짓궂게 말한다. 사촌이 매트릭스의 스미스였어? 선글라스 다 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살핀다. 몰골은 흉해도 고약한 냄새는 안 난 다. 그가 턱으로 조감도를 가리킨 뒤 속삭인다. 낙서에 대해선 비밀 지킬게. 그 대신 점심은 사촌이 사. 이렇게 멀쩡하면서 자기가 고릴라 라고 주장하다니, 아무튼 재미있는 사람이다. 봄날 한낮이라선지 대부분의 동물들이 나른하게 늘어져 있다. 참 평 화롭지? 그가 숨을 길게 들이마신다. 많은 동물들이 있는 곳이지만 하쿠나마타타 게임에 접속했을 때와는 다르다. 동물의 포효도 긴박한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얀 벚꽃이 눈처럼 날린다. 너무 조용 해서 오히려 불안하다. 마침 유치원복을 입은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며 타조관 앞으로 몰려든다. 타조 한 마리가 아이들 가까이로 다가오더니 다리를 모으고 껑충 뛰어오른다. 아이들이 환호를 지르며 타조를 향해 먹이를 던진다. 은색등이 중얼거린다. 동물원에서 인기를 끌려면 특이 한 재주 하나는 있어야겠는걸. 그가 간이음식점으로 들어간다. 김밥과 잔치국수, 떡볶이까지 순식 간에 먹어치운 뒤 중얼거린다. 이젠 이런 음식과도 이별이야. 포만감 에 젖은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린다. 당분간 관람객은 유인원들 을 보기 어려울 거야. 모두 임시 우리로 옮겨졌거든. 내가 볼 방법을 아는데 함께 갈까? 그와 같이 있는 게 즐거워 고개를 끄덕인다. 앞서 나가던 그가 갑자기 현관 유리문을 들이받는다. 사람들이 황당해하며 그를 바라본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급하게 휴지로 그의 입술 을 누른다. 피는 곧 멎었지만 입술이 부풀어 오른다. 당황한 나와는 달리 그는 담담하다. 놀랐지? 내 문제는 이거야. 유리벽을 볼 줄 모르 거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벽을 세우는데 나는 매 번 맨몸으로 부딪쳐서 많이 다치곤 했어. 나도 나를 보호할 유리벽을 세울 줄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102 SDU 디지털 문학

103 음식점을 나온 그가 동물원 옆 등산로로 접어든다. 어디로 가는 거 예요? 이쪽으로 올라가면 동물원 뒤쪽으로 들어가는 낡은 철문이 나 와. 유인원을 보려면 그곳으로 몰래 들어가야 해. 걸음을 멈춘다. 그 렇게까지 원숭이를 보고 싶은 건 아니다.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내 대화 신청에 응한 사람도 나를 만나러 동물원까지 온 사람도 사촌 밖에 없었어. 그건 사촌이 간절하게 다른 세계로 옮겨가기를 원한다는 증거야.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문 앞까지 가면 내 말 을 이해하게 될 거야. 나는 오늘밤에 꼭 동물원으로 들어가야 해. 따 라오고 안 오고는 사촌이 결정해. 그는 다시 산을 올라간다. 잠시 머 뭇거리다가 그의 뒤를 따라간다. 집에 일찍 돌아가도 할 일이 없기 때 문이다. 점점 나무가 울창해지고 등산로 표시도 사라진다. 그가 잡풀이 무성한 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주변을 살피더니 돗자리 를 찾아와 깔고 앉는다.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그의 옆에 앉는다. 문 은 어디 있어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나타나. 무슨 문이 어두 워져야 보인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잘못 따라온 것 같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이상하게 그 주변만 하늘이 동그랗게 열려 있다. 불 안해하는 내 감정이 전달되었는지 그가 차분하게 설명한다. 그 문은 보통 문이 아니야. 다른 세계로 옮겨갈 수 있는 통로거든. 그 곳을 통 과해서 동물원으로 들어가면 자기가 원하는 동물이 되어 동물원에서 살 수 있어. 그의 표정과 어투에는 깨달음을 얻은 뒤 믿음을 전파하는 선지자 같은 확신이 담겨 있다. 세상에 동물원은 아주 많아. 그 많은 동물원에서 사육되는 동물들이 정말 다 야생에서 포획된 거라고 생각 해? 천만에. 그랬다면 야생동물은 벌써 씨가 말랐을 거야. 멸종 위기 에 처했던 동물들을 동물원에서 본 적 있지? 그것은 사람들이 문을 통해 동물원으로 들어가서 희귀 동물이 됐기 때문이야. 그런 문이 있 으면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다. 은색등은 일주일 전에 S동물원 유인 원관 앞에서 동물원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그 사람을 따라서 이곳까지 왔다가 정말 문을 봤다는 것이다. 이곳은 다른 세계 로 옮겨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고이는 장소래. 에너지가 많 이 쌓이면 세계의 경계에 문이 생기고, 문의 기운을 감지한 사람들이 소설 103

104 근처로 모여들게 되는 거지. 내가 그를 만나고 사촌이 나를 만난 것도 문의 기운 때문일 거야. 점점 그의 말에 솔깃해진다. 은색등에게 왜 동물원으로 들어가려느냐고 묻는다. 그가 곧 잊을 일 을 뭐하러 이야기하냐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드러눕는다. 유리벽 이야 기와 온라인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고릴라로 비유했을 뿐, 그의 삶은 대화 내용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 의 옆에 누워 동그란 하늘의 가장자리를 본다. 위에만 바람이 부는지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아. 사촌도 잠시 눈 좀 붙여. 그의 말이 최면술사의 암시라도 되는 듯 삽 시간에 눈꺼풀에 바위덩이가 얹힌다. 잠이 몰려온다. 그 문은 꼭 동물 원으로만 통하는지 물어보려는데 눈꺼풀이 닫힌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 동물 울음소리들까지 섞인다. 갑자기 휘파람이 불고 싶다. 입을 작게 모아 휘파람을 불자 소리들이 일시에 멈춘다. 잠시 뒤 답이라도 하듯 누군가가 좀 더 큰 소리로 흥 얼거린다. 이어 여러 소리들이 다시 들린다. 눈을 떠 보니 주위에 안 개가 깔려 있다. 은색등이 보이지 않는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어가 보니 낡은 철문이 나타난다. 철문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두꺼 비집이 달려 있다.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뚜껑을 열어 본 다. 스위치가 오프 로 떨어져 있다. 뚜껑 안쪽에 설명서가 붙어 있 다. 이 문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입니다. 이곳을 넘어가면 당신은 당 신이 선택한 동물이 되어 동물원에서 먹이를 제공받으며 살 수 있습 니다. 문을 넘어서는 순간, 이 세계에서의 기억은 모두 지워집니다. 문은 일주일 뒤 자정까지만 열려 있을 것입니다. 그 날 자정이 지나면 문은 닫히고 당신은 문에 대해서 완전히 잊을 것입니다. 104 SDU 디지털 문학

105 은색등은 벌써 문턱을 넘어간 걸까. 축제라도 벌어졌는지 동물원 쪽 이 떠들썩하다. 흥겨운 소리가 세일렌의 손길처럼 내 정신과 몸을 옭 아맨다. 저쪽으로 넘어간다면 행복할까. 문 너머를 기웃거린다. 안개 가 자욱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더 바짝 다가가 손으로 안개를 흐트러트리려는데 손전화가 진동한다. 아내다. 아홉 시까지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같이 저녁 먹어. 손전화 액정이 등대의 불빛처럼 환 하다. 이렇게 나를 챙기는 아내가 있는데 다른 세계로 옮겨가야 할 이 유가 없다. 아내의 부드럽고 따스한 몸이 그리워진다. 이 문은 아마 현실적응에 실패한 사람들이 불러낸 망상일 것이다. 문을 외면하고 서 둘러 산을 내려간다. 누전차단기 스위치를 온 으로 올리자 가전제품들이 동시에 울어 댄다. 전등을 켜고 거실을 둘러본다. 낯익은 물건들이 새삼 반갑다. 아내가 귀가할 때까지는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서둘러 밥을 안친 다. 곧 진동추가 움직이며 증기 빠지는 소리가 난다. 오늘 하루 동안 겪은 일들이 치직 소리와 소량의 증기에 묻혀 아득해진다. 날카롭고 뾰족한 송곳이 가슴을 헤집는 듯한 고통에 벌떡 일어난다. 식탁 의자에 앉은 채로 깜박 잠이 들었나보다. 고개를 흔들어 악몽을 털어내고 시계를 본다. 열한 시다. 어떻게 된 걸까. 아내는 아직 돌아 오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를 보내도 아무 신호도 없다. 불안이 회오리 바람처럼 일어난다. 흥얼거리며 청소를 한 뒤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 고 나간다. 낯선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 계단으로 내려간다. 1층 계단 으로 내려서려는 순간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 내가 아래층 남자에게 여의도 벚꽃 축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양복을 입은 남자를 보자 무릎이 튀어나온 운동복을 입고 음식물 쓰레기봉투 를 들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진다. 멈춰 서서 그들이 올라가기를 기다 린다. 아내의 목소리엔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교태가 묻어 있다. 자동 차 보험 만기되셨죠? 남자의 시선이 짧은 스커트 아래 드러난 아내의 소설 105

106 다리를 훑는다. 아내는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가슴 높이에서 그에게 건넨다. 침대에 앉아 여성 잡지를 읽는 아내에게 투덜거린다. 이렇게 늦을 것 같으면 미리 연락이라도 해주지. 아내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당 신, 요즘 왜 그래? 왜 말을 똑바로 못하고 웅얼거려. 친구 P가 갑자기 회사로 찾아와서 늦었어. 얼마 전에 호주로 여행을 다녀왔대. 그곳에 서 아랍 남자를 만나 청혼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부인이 이미 두 명 이나 있는 사람이었대. 내 생각으론 남자가 능력만 있다면 상관없을 것 같아. 귀로 들어온 말들이 나사못처럼 가슴에 박힌다. 꿈틀대며 일 어섰던 서운함이 제풀에 사그라진다. 말을 끝내고 쌜쭉한 표정으로 앉 아있던 아내가 잡지 페이지를 거칠게 넘긴다. 바람을 일으키며 넘어가 는 종이 소리가 가슴을 저민다. 눈치를 보며 거실로 나가려는데 아내 가 묻는다. 저녁은 먹었어? 어느새 아내의 얼굴이 부드러워져 있다. 잘못을 용서를 받은 아이처럼 고개를 주억거린다. 비타민도 먹었어? 비타민을 먹고 거실에서 텔리비전을 보다가 방으로 돌아가 보니 아내 는 잠들어 있다. 30대 중반에 접어들며 아내는 점점 아름다워지고 있다. 살이 붙은 몸매는 오히려 전보다 관능적이다. 아이가 있다면 덜 불안할텐데. 아 내가 몸을 뒤채자 발이 드러난다. 군살이 옹이같이 박힌 못생긴 발이 다. 아내의 발을 쓰다듬다가 몸을 낮추고 핥는다. 발에서 다리로 가슴 으로 거슬러 올라가도록 그녀는 바람 빠진 공처럼 늘어져 있다. 그녀 의 귀에 숨을 불어넣는다. 예전에 내가 직장 다닐 때 아내가 자주 하 던 행동이다. 피곤하다가도 숨이 귀로 스며들면 풍구질이라도 당한 듯 나의 녀석이 일어서곤 했다. 아내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귓불을 이로 살짝 깨문다. 아내가 낮게 신음을 토하며 몸을 꼰다. 은근슬쩍 아내 몸에 나의 녀석을 들이댄다. 갑자기 신음소리를 멈춘 아내가 달뜬 목 소리로 말한다. 콘돔 꼈어? 콘돔을 끼자마자 녀석이 고개를 떨어뜨린 다. 다시 세워보려고 하지만 더욱 움츠러든다. 아내가 짜증을 내며 나 를 밀쳐낸다.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감자 머릿속으로 소리들이 파고 106 SDU 디지털 문학

107 든다. 시계 초침 소리,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누군가 싸우는 소리. 모든 소리가 부딪치고 긁힌 것들이 지르는 비명 같다. 환청을 듣다가 도 옆에서 곤하게 잠든 아내만 보면 편해졌는데 오늘은 아내의 숨소 리까지도 거슬린다. 주말인데도 아내는 고객을 만나야 한다고 나갔다. 일요일 오후에 만 나는 고객은 누구일까. 고개 드는 의심을 털어내려고 하쿠나마타타 게 임을 하다가 기분만 상하고 말았다. 사자 뒤를 쫓다가 오히려 사자에 게 물려죽은 것이다. 게임 속 캐릭터가 죽은 것뿐이지만 내가 죽은 것 처럼 섬뜩하다. 꺼림칙함을 털어버리기 위해 흥얼거리며 텔레비전을 튼다. 요즘 S동물원에는 희귀 동물이 버려진다고 합니다. S동물원 이란 단어에 이끌려 소파에 앉는다. TV동물세계 가 방송되고 있다. 희귀 동물들이 버려지는 것은 사료비가 부담스러워져 일어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는 희한한 재주가 있는 고릴라가 들어왔다고 하네 요. 화면에 등이 은색인 고릴라가 비친다. 그가 걸어가다가 뭔가 부딪 친 것처럼 뒤로 벌러덩 넘어진다.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화면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씽끗 웃는다. 사육사가 과장된 목소리로 말한다. 꼭 개 그맨이 몸 개그를 하는 것 같죠. 유인원관이 새로 개장하면 S동물원 간판 캐릭터를 호랑이에서 고릴라로 바꿀 예정입니다. 많이 보러오세 요. 고릴라는 은색등이 틀림없다. 어쩌면 6일 전에 본 문은 환영이 아 니었을 지도 모른다. 아내가 주말마다 외출해 2주째 장을 보지 못했다. 아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도 많이 늦어? 반찬거리가 거의 바닥났어. 아무 런 답이 없다. 아내는 요즘 들어 부쩍 늦는다. 아내의 책상 서랍을 연 다. 보험계약서와 약관이 가득하다. 대부분 내 이름으로 가입한 것들 이다. 서류 중 하나를 읽는다. 선택특약 중 암, 수술, 입원, 전신마비 소설 107

108 가 체크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보험료를 부으려면 힘들 것이다. 옹이 가 가득한 아내의 발을 떠올린다. 내가 빨리 정상으로 돌아가 직업을 구해야 할텐데. 서류들을 다시 넣고 서랍을 닫는다. 라면을 다 먹었을 때쯤 아내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온다. 상담 중이 었어.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은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 밥 먹고 비 타민도 꼭 챙겨 먹어. 아내는 왜 이렇게 비타민 먹는 것을 꼬박꼬박 챙기는 걸까. 아내의 문자 메시지가 가슴을 묵직하게 누른다. 어쩌면 내가 환청에 시달린다는 것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비타민 다섯 정 을 입에 넣으며 통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본다. 섭취 대상자: 평소 육류를 많이 섭취하는 분, 우울증이나 불안 증상 이 있는 분에게 좋습니다. 권장 섭취량 및 섭취 방법: 식사 후 5정을 물과 함께 먹습니다. 좀 더 많이 먹으면 환청이 사라질지 모른다. 다섯 정을 더 입에 넣 고 물을 마시려다가 사레들린다. 연거푸 터져 나온 기침에 통을 라면 국물에 빠뜨리고 만다. 건져서 물에 헹구고 보니 스티커의 끝이 약간 벌어져 있다. 손톱으로 잡고 당기자 쉽게 떨어진다. 아래에 스티커가 한 장 더 붙어 있다. 내려놓으려다가 권장 섭취량을 다시 살펴본다. 하루에 1정. 그동안 먹은 양보다 열다섯 배나 적다. 음식으로 먹은 양 까지 합하면 하루에 1,700mg 이상을 먹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이 먹 어도 괜찮은 걸까. 컴퓨터 검색창에 비타민 B6 과다 복용 이라고 쳐 본다. 장기적 으로 과다복용하면 신체를 자각할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일종의 전신마비 증상과 비슷하다. 전신마비. 보험계약서에서 보았던 특약이 뇌리를 스친다. 뒷골이 서늘하다. 아내는 나를 보험금을 타내 는 도구로 쓰려는 걸까. 갑자기 러닝머신에서 윙 소리가 난다. 곧 누 108 SDU 디지털 문학

109 군가 등 뒤에서 달려들 것만 같다. 어쩌면 환청이 심해진 것도 비타민 과다복용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같이 약한 인간이 살기엔 이 세상은 너무 무섭다. 아내가 돌아오 기 전에 이 집에서 도망쳐야 한다. 동물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늘 자 정까지 열려있을 것이다. 서둘러 선글라스를 쓰고 전철역으로 향한다. 부지런히 걸으며 동물원에서는 어떤 동물로 살아야 할지 궁리한다. 은 색등이나 점프하던 타조를 보면 동물원도 나름의 경쟁은 있는 것 같 다. 그들은 이 세계에서 장애였던 요소를 동물원에서 특기로 살렸다. 나의 특기는 무엇일까. 흠! 흠을 하는 오랑우탄, 흠을 하는 곰, 흠을 하는 너구리.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동물원에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문득 구경거리가 되어 동물원에 갇혀 사나, 전신마비가 되 어 몸에 갇혀 사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귀 찮다.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한다. 그림자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발이 무겁다. 흥얼거리며 하쿠나마타타 게임을 연다. 아프리카 뷰어 모드로 들어 가 하게니아 숲 CCTV를 선택한다. 고릴라 가족이 보인다. 나이 든 우두머리 은색등이 나무 그루터기 위에 서 있고, 젊은 수컷들이 하게 니아나무 위에서 주변을 살핀다. 그들의 보호 때문인지 나이 어린 고 릴라들이 서로 엉겨서 장난친다. 어미 고릴라의 등에서 내려온 새끼고 릴라가 뒤뚱거리며 걸어간다. 어미고릴라는 짓궂은 표정으로 아기 고 릴라를 붙잡아 간지럼 태운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들은 이끼 위에 잠자리를 만든다. 나도 바닥에 요를 깔고 눕는다. 궁싯거리자니 서글퍼진다. 아내는 왜 이렇게 살벌해졌을까. 처음 내 방에 온 날 아내는 말했다. 초식동물 같은 네 눈이 마음에 들어. 그날 그녀는 내 귀에 숨을 불어넣으며 내 몸을 더듬었다. 나도 서둘러 아내를 안았다. 아내의 몸은 아늑하고 훈훈했다. 그 뒤로 아내 소설 109

110 는 수시로 내 방을 무단으로 점거했다. 특히 가족들 중 누군가와 다퉜 을 때는 며칠씩 진을 치고 돌아가지 않았다. 어느 날 술에 취한 그녀 가 말했다. 우리 부모는 최악이야. 자식이 네 명이나 되는데도 직업을 가진 적이 없어. 중학교 때 사촌에게 우리 가족이 하이에나 떼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땐 죽고 싶었어. 부모님이 친척들 돈을 떼먹으며 살았거 든. 그런데 그런 돈이라도 있는 게 나아. 환경이 척박하면 사람은 억 척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거야. 며칠 뒤 그녀는 내 방으로 아주 이사를 왔다. 그날 내 빗장뼈를 더듬으며 말했다. 너와 함께라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아내가 이렇게 그악스러워진 것은 내가 우두머리로서의 역할을 제 대로 못해서일 것이다. 보험금을 탄다면 아내만이라도 편히 살 수 있 을까. 마지막으로 가족을 위해 우두머리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남은 비타민을 모두 삼킨다. 졸음이 몰려온다. 문득 잠들었다가 깨면 문이 나타나고 그 문을 통과하면 하쿠나마타타 게임 속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곳에서 인간으로서 산 기억은 모두 잊고 네안데르탈인이 되어 살 것이다. 다른 네안데르 탈인들과 음악적인 언어로 소통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마음이 편해진 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 동물 소리. S동물원 뒷산에서 들었던 소리다.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난다. 방 안에 안개가 자욱하다. 모니터가 있던 곳에 철문이 서있다. 두꺼비집 뚜껑을 열고 설명서를 읽는다. 이 문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입니다. 이곳을 넘어가면 당 신은, 당신이 선택한 캐릭터가 되어 하쿠나마타타 게임 세계에서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으로서의 기억은 모두 지워질 것입니다. 당신 은 일주일 전에 이 문을 만났기 때문에 잠시 후 자정이면 문은 사라 질 것입니다. 110 SDU 디지털 문학

111 문 저쪽으로 한쪽 발을 내디딘다. 다른 쪽 발을 떼려는 순간 갑자기 불안해진다. 혹시 기억이 지워지는 게 함정은 아닐까. 어쩌면, 과거에 문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온 것은 아닐까. 초침소리가 요란하다. 곧 문은 사라질텐데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다. 문틀을 부둥켜안고 길게 흠을 한다. 소설 111

112 소설 사랑골 해바라기 권현옥 널래 날래 까우리로 까이라? 너랑 나랑 같이 한국으로 갈래? 그럴 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어진의 말에 타이 한은 쿵하는 천둥소리와 함 께 번쩍하는 번개의 예리한 빛에 온 몸이 감전된 듯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 듯 낯선 태국에 와서 살아온 나날은 회상하고 싶지도 않다. 가족의 생계를 위 해 일 달러를 벌려는 소녀들의 솜털이 아른거리는 살결을 지네 새끼 들이 물어뜯는 광경을 보며 울분을 터뜨렸다. 에이즈가 뭔지도 모르는 라후족 소녀들의 성( 城 )을 무너뜨리는 백인사내놈들을 깡그리 쓸어버 리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뚜쟁이를 하며 하루를 살고 나면, 머리가 구 멍이 숭숭난 스펀지처럼 물컹해졌다. 온 세상이 폐유가 끈적이는 하수 구 같았고 자신은 그 하수구의 걸레더미 같았다.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에 갈증을 느낄 때마다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듯이 대마를 피워댔다. 그럴 듯한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 포장이라는 것이 유치하고 너덜거려 오히려 타이 한의 알몸보다 못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창피한 포장지를 찢어버리 112 SDU 디지털 문학

113 고 그냥 알몸으로라도 그리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어진의 널래 날래 까우리로 까이라? 라는 말에 비상구를 찾은 듯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정리하여 도망치듯 떠났던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추석 연휴가 끝난 9월 하순의 한국의 한낮 의 날씨는 늦여름의 따사한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그 따뜻한 햇살을 코팅한 공기가 어머니의 젖가슴 체취처럼 향긋해서 타이 한은 연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들이마셨다. 어진은 타이 한에게 당분간 어진의 사무실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지 만 타이 한은 사양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보이는 자신에 대한 어 진의 배려임을 알기에 고마웠지만 다시 시작하는 한국에서 더 이상 어진과 얽히고 싶지 않은 것이 타이한의 솔직한 심정이다. 자신의 치 부가 드러나는 초라한 과거의 흔적을 보여준 사람과 더 이상의 인연 을 맺고 싶지 않았다. 어진도 타이 한의 심정을 알았는지 더 이상 타 이 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타이 한은 어진과 마지막 악수도 나누지 않고 말없는 눈빛 교감으로 이별의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갈 길을 향해 돌아섰다.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짙은 밤색 선글라스를 끼고 타이 한이 온 곳 은 동서울터미널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타이 한은 모자를 더욱 얼굴 아래로 내리 눌렀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지명 수배자처럼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타이한은 매표소 입구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며 서성거렸다. 어디로 가야 하나? 마치 방향을 정하지 못한 오발탄처럼 갈 곳을 몰라 방황 하였다. 제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채 잘못 발사되어 엉뚱한 곳 으로 훌쩍 날아가는 오발탄처럼 지금까지 정착을 못하고 살았다. 어디가시는 표를 드릴까요? 매표구 앞에서 멍하니 있는 타이 한에게 매표원이 상냥하게 물었다. 꿈에서 깨어난 듯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네, 청주요! 타이 한은 공황에서 환전한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를 건네었다. 왜 갑자기 청주 라고 했을까? 그는 무의식적으로 청주 표를 파 소설 113

114 는 매표구 앞에서 서성거렸고 매표원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청주행 표 를 달라고 했다. 타이 한은 버스에 올라 의자를 뒤로 한껏 젖히고 누운 듯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꿈을 꾸듯이 잠이 들었다. 그가 소녀들의 우상이었던 가수시절에는 김민이라는 예명으로 활동 했다. 이제 그는 김민도 아닌 타이 한도 아닌 그의 진짜 이름인 한세 진으로 살고자 한다. 그의 이름을 집어 던지고 산 세월이 너무 길게 느껴져서 그의 이름으로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낯설기도 했다. 그가 즐겨 부르던 너에게로 또 다시 돌아가기가 왜 이리 힘들었을까? 라 는 노래가사처럼 다시 한세진으로 돌아오기까지 숱한 시행착오를 겪 으며 방황의 날들을 보냈다. 음악을 사랑해서 가수가 되었지만, 그 음악이 그에게 족쇄가 되었 다. 그랬다. 음악을 성공의 수단으로 하고자 한 그의 잘못이었다. 음 악은 영특해서 그런 그를 거부했고 밀어냈다. 하늘은 아무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데 건방지게도 특별하게 사랑 받으려 했고 사랑받는 줄 착각하고 살았다. 인기는 가을날의 우스꽝스 런 허수아비다. 새는 더 이상 허수아비에게 속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 람들은 어리석게도 허수아비가 새를 쫒는다고 생각한다. 비웃으며 가 끔씩 은혜를 베풀 듯 바람을 타고 나는 시늉을 하는 것을 모르는 것 이다. 세진은 심리적으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 그것이 그가 사람들 을 많이 접하는 가수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 언뜻 보면 세진은 사교적이고 열정적이며 철없어 보이지만 그는 소심하고 냉철하며 생각을 깊게 하는 사람이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여린 병아리 모습을 한 여우의 심성을 지닌 고슴도치이다. 몽실한 여 린 모습 뒤에 도사린 미소 짓는 교활함으로 먹잇감을 노리는 족속을 세진은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들과 한 틀 안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 보다 두렵다. 그리하여 그냥 음악을 사랑하는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 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가 달만 바라보고 살 수 없게 했다. 삶의 고단함으로 스스로 6펜스의 노예가 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를 파멸 로 이끄는 첫 단추 여밈이 되었다. 114 SDU 디지털 문학

115 그는 상품이었다. 먹이사슬에 묶여 서서히 조여 오며 오장육부에 빨 간 압류딱지가 붙여지는 상품으로 전락했다. 세진은 미소 짓는 교활한 잔인함에 항거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심장에까지 빨간 딱지를 붙이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에게 입혀졌던 옷들과 그를 치장했던 장신구들은 그의 포주들에 의해 벗겨져서 그는 알몸으 로 버림받았다. 그 버림은 그에게 맘대로 숨을 쉴 수 있는 자유를 주 었다. 그는 초라해도 당당하게 살고 싶어 태국으로 왔지만 오히려 더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가 그토록 혐오하고 두려워했던 심장에 빨간딱 지를 붙이는 포주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 달러를 벌려다가 뭔 지도 모르는 병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라후족 소녀들을 상품으로 제시 하는 뚜쟁이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진에게 참으로 고맙다. 그녀가 타이 한에게 널래 날래 까우리로 까이라? 라고 물어주었기에 타이 한은 응답할 수 있었고, 한국으로 돌아와 잃어버렸던 이름인 한세진 을 찾았고 잊고 살았던 한세 진 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세진은 편의점 입구에서 한참을 헤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진이 울적하면 올라가 기타를 켜던 뒷동산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4~5층 의 건물들이 지어지고 그 건물 안에는 가야금 학원과 공인중개사 사 무실, 옹심이 식당 등이 북적대며 들어서 있었다. 유일하게 변함이 없 는 것은 그 건물들 틈에 왜소하고 초라하게 들어서 있는 빛바랜 회색 빛 기와집이었다. 언덕배기에 삐죽이 올라와 예전에는 제법 돋보였던 집이었지만, 지금은 쭉쭉빵빵으로 잘빠진 여자들 틈에서 검정치마 흰 저고리를 입은 늙은 조선 아낙네 같은 집이 되었다. 집에 비해 넓은 앞마당에는 사람 하나정도 다닐 수 있는 공간만 남겨놓고 온통 각종 채소와 잡초들이 우거져 있었다. 담벼락은 이 곳 저 곳 허물어져 있었 고 대문은 한 쪽으로 기울어져 부실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마치 배가 고파서 어지럼증이 있는 소아마비 환자가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 같았다. 세진은 조심스럽게 대문을 젖히고 마당에 웃자란 옥수수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걸어 들어갔다. 집안에는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적막함이 감돌고 있었다. 이윽고 툇마루에 올라 방문을 두드리며 나직하게 그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던 이름을 불렀다. 소설 115

116 어머니! 아무런 대답이 없다. 좀 더 소리 높여 불렀다. 엄마! 나 세진은 방문을 열려고 하니 안으로 잠겨 있었다. 연로한 할머니의 마른기침소리가 두어 번 나며 인기척이 났다. 거 뉘시유 나 세진이 방문을 열고 머리가 부스스한 모습의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고 개를 내밀었다. 세진을 발견한 그 표정은 마치 헛것을 본 듯이 멍한 모습이다. 이게 귀신이여 사람이여! 귀신이면 맘 두지 말고 냉큼 가기여! 엄마! 나여. 엄마 아들 세진이여! 세진은 다가가 어머니를 안았다. 세진의 가슴팍에 안긴 어머니는 책 갈피에 수년 동안 곱다랗게 누워 바싹 마른 은행잎처럼 바스라질 것 같아 꼬옥 껴안을 수가 없도록 애처롭다. 놔라 이눔아 소식 한 자 없이 사라지더니 소식 한 자 없이 겨들어 오구, 낯짝도 두껍네 네 눔 같은 아들 없으니 없어져 부려! 하며 고 목의 껍질 같은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그 내젖는 손짓이 세진에게는 어서 빨리 들어오라는 손짓으로 보였다. 세진이 방안에 들어오자 어머 니는 머리와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부엌으로 나가셨다. 방 한 쪽에는 보온밥솥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세진은 무의식적으 로 밥솥을 열어 보았다. 좀 오래된 낡은 밥솥은 보온 스위치가 꺼져있 어 온기가 없는 찬밥이 되는대로 담겨져 있었다. 그 옆의 보온이 따끈 하게 된 밥솥에는 스텐주발 뚜껑 가운데 福 자가 써진 밥공기 안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이 소담스레 담겨져 있었다. 세진은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늘 그리 하셨 다. 보온밥솥이 없던 시절에는 세진의 것으로 마련된 밥공기에 밥알을 솔솔 퍼 담아 福 자가 써진 뚜껑을 닫고, 가제 손수건으로 꼭꼭 싸 서 따끈한 아랫목에 놓고 담요를 덮어 보온을 하시곤 했다. 그래서 세 진은 언제나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엄마는 찬밥 한 덩이를 대 충 물에 말아 드시곤 하셨다. 속에 열이 많아서 더운밥을 먹으면 열불 이 난다고 하시면서 세진이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어머니는 하루도 116 SDU 디지털 문학

117 빠짐없이 세진의 밥을 먼저 퍼서 따뜻하게 보온을 하시곤 하셨을 것 이다. 어머니는 구부정한 허리로 세진의 밥상을 차려오셨다. 세진이가 좋 아하는 계란찜과 청국장이 차려져 있었다. 이 날을 위해 매일 보온밥 솥에 고이 모셔 두던 세진의 밥공기를 상에 올려놓을 때, 어머니의 깡 마른 손에서 여린 떨림이 보였다. 밥 향과 청국장 향에 세진은 허기가 몰려왔다. 너무도 오랜만에 맡아보는 고향의 냄새였다. 이눔아 얼른 와서 먹어라! 나가서 좋다는 거는 혼자 다 먹고 다녔 을 텐데 꼴은 삐쩍 말라서 턱주가리가 더덕 캐러가게 생겼구먼! 요즘 기집애들은 전나무처럼 길쭉하게 쪽 빠진 남자를 좋아해. 그 래서 엄마 아들한테 예전부터 기집애들이 달라붙잖여! 세진은 어머니에게 예전에 하던 예쁜 짓인 한 쪽 눈을 찡긋하며 고 른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 세진을 힐끗 보며 어머니도 엷은 미 소를 지으며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실친 놈, 말 뻔새는 여전하구먼! 참한 색시는 있느냐? 엄만 뭘 모르시네. 참한 여자는 머리만 아퍼! 생활력 강하고 돈 잘 버는 여잘 데려와야 나도 편하고 엄마 호강도 시키지! 허튼 소리 말거라. 여잔 뭐니뭐니해도 착하고 단정해야 된다. 드센 여자는 안 된다. 여자가 드세면 서방 잡아먹고 팔자가 기구해진다. 솜털 같아지던 분위기가 안개가 낀 뒷동산처럼 되었다. 세진은 묵묵 하게 밥만 먹었다. 여자가 드세면 서방 잡아먹고 팔자가 기구해진다 는 세진이가 어 릴 적부터 돌아가신 친할머니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친할머 니가 못 마땅한 며느리인 어머니에게 시도 때도 없이 하시던 말씀이 었다. 그 말이 지겹지도 않은지 이젠 어머니의 입에서 한탄처럼 흘러 나오는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다. 세진은 유복자였다. 세진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팔 개월 되던 해 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친할머니의 외아들로 지금의 명문 대인 S전문학교를 나온 집안의 희망이셨다. 친할머니 말씀처럼 씻은 배추 속처럼 끼끗하고 맑은 시냇물 같은 성품이었다. 그렇게 잘난 아 들을 땅 팔아가며 공부시켜서 키워놨더니, 옆집에 살던 미망인인 어머 소설 117

118 니와 눈이 맞은 것이다. 어머니는 결혼 한 달 만에 신랑이 군 입대를 하여 6.25 때 전사를 했다. 싸리나무 울타리 사이로 집안이 훤히 보이 는 옆집은 어머니의 친정이었다. 시댁에서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고 쫓 겨나 그림자도 쓸어안으며 지내던 뽀얀 살결의 어린 미망인이었다. 인 연은 막을 수 없음인지 어머니에게 첫 눈에 반한 아버지는 싸리나무 사이로 어머니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냈고, 그렇게 2년 동안 연애를 했다. 친할머니의 서슬 퍼런 반대가 있었지만,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 혼시켜주지 않으면 죽는다고 칼을 들고 맞서서 결국 결혼을 하게 되 었다. 그런데 결혼 후 일 년이 채 안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친할머니 는 팔자 드센 년이 들어와서 아버지가 죽었다며 어머니에게 악다구니 를 퍼부어댔다. 그나마 쫓겨나지 않은 것은 뱃 속에 있는 아이 때문이 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아이가 딸이 아닌 아들이라 한 씨 집안의 장손이 되었다. 어머니는 한 씨 집안의 귀신이 될 자격을 취득한 것이 다. 세진이가 잉태되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세진이가 어머니의 인생에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세진이는 어머니를 숨 막히게 옭아매는 올가미였다. 그날 밤 세진은 어머니와 한 이불을 덥고 잤다. 따로 자리를 펴 주 며 어머니가 자신의 품 속으로 기어드는 아들인 세진이를 밀쳐냈지만, 세진은 어리광을 부리며 아이처럼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졌다. 엄마 젖은 아직도 처녀가슴처럼 탱탱하네! 엄마 젖 만져본 사람이 나하고 아부지밖에 없어서 그런가! 나랑 아부지 손길이 닿은 것도 얼 마 되지 않으니 처녀 가슴이나 마찬가지지. 안 그래? 엄마! 시끄럽다 이눔아! 이눔의 자슥이 헷까닥 했나! 웬 헛소리를 해! 어머니는 세진의 손을 뿌리치며 돌아누우셨다. 세진은 어머니 등을 감싸 안았다. 세진의 눈에는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세진이 안은 어머 니의 등이 여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으로 어머니의 얼굴이 더듬으니 축축했다. 세진은 새벽녘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어머니가 일어 나셔서 장롱 서랍에서 뭔가를 찾고 계셨다. 세진은 잠든 척하고 그냥 누워있었다. 어머니는 뭔가를 찾아 정리하는 듯 했고 또 뭔가를 쓰는 118 SDU 디지털 문학

119 듯도 했다. 아침에 어머니는 세진의 생일도 아닌데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을 끊 여 주었다. 밥도 햅쌀인지 더욱 윤기가 흐르는 쌀밥으로 수북하게 담 아 주었다. 세진이가 미역국에 밥을 말아 입이 미어지도록 맛있게 먹 는 모습을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담담하게 바라보며 조용히 밥을 드 시고 계셨다. 평소의 어머니답지 않은 조용한 모습이었다. 난 나가봐야겠으니 밥 먹고 쉬도록 해라! 어머니는 몸뻬 바지에 스웨터와 조끼를 입으시고 작은 담요가 담긴 듯한 종이로 된 쇼핑백과 손가방을 드시고 밖으로 나가시는 듯 하시 다가, 내가 오늘 좀 늦을 수 있다. 밥솥에 네 밥을 따로 퍼 놨으니 제 때 챙겨먹고 장롱 맨 밑 이불갈피에 아주 중요한 것이 들어 있으니 집 잘보고 있거라! 하며 담담하게 당부하듯이 말씀하시고는 세진을 물끄 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구부정한 모습으로 천천히 나가 셨다. 세진은 트렁크를 열어 짐정리를 하고 앞으로 살아갈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점심나절이 되었다. 엄마 말씀대로 제 때 점심을 챙겨먹고 마당으로 나와 집 주변을 둘 러보았다. 세진의 집은 상가들이 있는 코너의 지대가 약간 높은 곳에 있었고, 대지가 100평이 넘는 제법 너른 터였다. 상가 건물 터로는 그 야말로 달걀노른자 같은 곳이었다. 옆 건물이 4층의 학원이고 앞으로 는 2~3층에 중소기업 사무실이 보이고 아래층에는 식당이 있고 공인 중개사 사무실이 보였다. 세진이가 가수를 한답시고 집안 재산을 팔아댈 때도 이 집 터는 어 머니가 절대로 못 판다고 하셨다. 공기 좋은 전원주택에서 편하게 사 시게 해 준다고 세진이가 여러 날 어머니에게 갖은 애교를 부려도 꿈 쩍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이 터가 그냥 터가 아니라고 했다. 어 머니의 청춘과 한이 서린 터라는 것이다. 아버지를 여위고 신랑이 군 대에 갔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의류 행상을 하여 한 푼 두 푼 모아 처 음으로 어머니의 소유로 마련한 터라는 것이다. 이 터와 이 집으로 시 작하여 재산을 일구기 시작하셨다고 했다. 실은 옆에 있는 학원건물이 소설 119

120 있는 땅도 어머니 소유로 있다가 세진이 명의로 해주었는데, 세진이가 가수를 한다며 집안 재산을 팔아치울 때 같이 헐값에 팔게 된 것이다. 세진이가 모든 재산을 잃었을 때, 어머니 소유로 되어 있는 이 집과 터는 남아 있게 되었다. 세진은 마당 왼쪽 담벼락에 붙어있는 허술한 창고를 발견했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차곡차곡 펴서 쌓아놓은 각종 박스와 빈 깡통과 빈 병들이 보였고, 그 옆에는 작은 리어커가 있었다. 아마 세진이가 태국 에 있는 동안, 어머니는 이것들을 길거리 등에서 수거하여 고물상에 팔아 생계를 유지하신 것 같다. 세진은 어머니의 남은여생을 위해서라 도 더 이상 뜬구름 잡는 인생을 살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동안 세진이 는 발을 땅에 딱 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둥둥 떠다니며 살았다. 그런데 엄마는 왜 이리 늦으실까? 세진은 해가 넘어가도록 집에 오시지 않는 어머니가 걱정이 되며 아침에 나가시면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장롱 맨 밑 이불갈피에 아주 중요한 것이 들어 있으니 집 잘보고 있거라! 세진은 장롱 맨 밑에 있는 이불 갈피에 손을 넣어보았다. 안쪽 깊숙 이에서 뭔가가 잡혀 꺼내보니 회색빛 비닐로 되어 있는 A4용지 크기 의 낡은 서류 봉투였다. 봉투 뚜껑에 붙은 똑딱이 단추를 떼고 내용물 을 보니 이 집 터 문서가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각모를 쓴 여학 생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 한 장과 편지가 있었다. 사진 속의 그 여학 생에게 세진의 시선이 꽂혔다. 그 여학생의 이목구비가 어디선가 본 것처럼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그리고 사진 뒤에 적혀있는 엄마 사랑 해 라는 글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세진은 어머니의 편지를 펼쳤 다. 연필로 꾹꾹 눌러쓰신 짤막한 글이 보였다. 뭔가를 더 썼다가 지 운 흔적도 있었다. 아들아! 에미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마. 하루 세 끼 따뜻한 밥 챙 겨먹거라. 어머니는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세진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어머니가 아버지와 신접살림을 한 곳이며, 세진이가 태어난 곳 인 아버지 산소가 있는 청주 근처의 사랑골로 갔다. 아침 안개가 뿌연 120 SDU 디지털 문학

121 산등성이를 오르려 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 수근거리는 말이 들렸다. 그 할머니가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었대. 암 치료도 제대로 못 했 다나 봐. 세진이 아버지와 결혼 전에 전 남편 소생의 딸이 하나 있었다고 하네. 무슨 놈의 팔자가 참 기구하기도 하지! 마지막 밤은 서방 곁에서 자고 싶었나베. 서방 무덤 옆에 잠들어 죽어 있으니 쯪쯪 해바라기처럼 살다가 결국 해바라기가 되었구먼. 그 때 사랑골에 어울리지 않는 은회색 자가용이 길 모퉁이로 쏜살 같이 들어오더니, 검정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급히 차에서 내렸 다. 그녀의 얼굴에 어머니와 다정하게 사진을 찍은 사각모를 쓴 여학 생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서 다가왔다. 어진 이었다. 소설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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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학생문단 수필 김선옥 노정숙 박승렬 유시경 임도순 정애령 최해자 한성희 隨 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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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수필 죽어도 못 갚을 빚 김선옥 내 바로 위의 언니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11월에 태어났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초겨울 추위가 찾아오면, 산후몸조리 를 하지 못해 얻은 출산후유증으로 어깨와 팔다리가 쑤셔 운신을 못 한다. 조카의 생일인 걸 몰랐다가도 몸이 더 먼저 알아챈다고 한다. 언니가 평생 동안 고치지 못하는 고질병을 앓게 된 원인은 모두 나에 게 있다. 내가 열 살, 내 남동생이 여섯 살 나던 해 가을 어느 날, 어머니는 칠 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남겨두고 스스로 세상을 등지셨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외도가 원인이었다. 아버지는 자포자기로 날이면 날마다 술로 사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큰언니는 결혼을 해서 고된 시 집살이를 하고 있었고 두 오빠는 군 복무 중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우리 형제들 중 최대의 피해자이며 최 고의 희생양은 작은 언니다. 다른 형제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 소한 고등학교를 마쳤는데, 작은언니만 중학교를 그만두고 집안 살림 을 떠맡아 하게 됐다.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도 불평 한마디 없이 물 지게로 물을 길어 나르고 청소와 빨래, 식사 준비 등 어머니가 안 계 수필 125

126 신 우리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나갔다. 아버지가 돈을 안 벌어 밀가루로 간신히 연명하던 때, 언니는 어머 니를 흉내내어 칼국수를 곧잘 만들었다. 대충 뭉쳐진 밀가루반죽을 도 마에 대고 여러 번 치대어 다듬이 방망이로 한껏 얇고 넓게 밀었다. 소금 하나만 달랑 넣고 끓여준 멀건 칼국수는 하루 종일 굶주린 우리 의 뱃속을 채워주기 바빴다. 언니와 나의 저녁 일과는 우리 가족들의 뚫어진 양말을 깁는 일이 었다. 지금은 양말의 질이 좋아져 여간해서는 구멍이 안 나고 설사 구 멍이 난다해도 양말을 기워 신는 사람이 흔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으 로부터 오십여 년 전에는 양말의 질이 나빠 하루만 신어도 어른 주먹 하나는 좋이 들어 갈 만큼 구멍이 펑펑 났다. 언니는 구멍난 양말과 색깔이 비슷한 헌 양말을 잘라서 내게 시침 질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백열등 전구를 양말뒤꿈치에 대고 빙 둘러가며 감칠 질을 해서 양말을 기웠다. 바느질 솜씨가 썩 좋아 기운 양말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기운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얌 전했다. 이렇듯 살림꾼 노릇을 야무지게 잘해주어 우리 형제들은 어머 니가 안 계신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하였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일이다. 학금은 어찌어찌 마련해서 냈지 만 책가방은 살 엄두도 못 내고 보자기에 책을 싸 가지고 다닐 판이 었다. 집에는 언니가 수를 놓던 책가방 크기만한 노란 색깔의 옥스퍼 드 천이 하나 있었다. 작은언니는 바느질 솜씨를 한껏 발휘하여, 손으 로 한 땀 한 땀 박음질을 해서 꽤 그럴싸한 헝겊 책가방을 만들어주 었다. 또 자기의 속치마를 줄여 내 교복 속치마도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한 이불을 덮고 자라 자매보다는 친구에 더 가까워 소꿉놀이나 인형놀이를 즐겨서했다. 손재주가 좋은 작은언니 는 종이인형이나 헝겊 인형을 참 잘 만들었다. 헝겊으로 인형의 틀을 126 SDU 디지털 문학

127 만들어 솜으로 살을 붙이고는, 팔과 다리에는 철사를 끼어, 몸을 자유 로이 놀릴 수 있게 만들었다. 머리카락은 헌 나일론 스타킹을 길게 잘 라 붙여, 내리고 틀어 올리거나 땋을 수 있게 했다. 인형에게 입힌 옷 모양에 어울리게 크기나 끈의 길이가 다른 여러 가지 가방을 만들기 도 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읽은 연애소설에다가 상상을 더해 티브이연속극처 럼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나는 작은언니가 인형놀이를 하면서 마음 속에 그리던 이상의 날개를 활짝 펴는 줄도 모르고 너무도 재미 있는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들었다 아마도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인형놀이를 통해서 이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돈을 벌고 싶어 했지만 인간의 가치를 가늠하는 잣대인 졸업장이 없어 취직을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음료수 배달하는 직장도 구하기 힘든,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시절 이었다. 졸업장이 없어도 되는 열악한 환경의 방직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런 데 언제부터인지 작은 언니의 행동이 이상해지고 늦게 집에 오는 날 이 잦아졌다. 가족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것을 우리는 꿈에도 몰랐다. 한 남자를 알게 되며 사랑에 빠진 것이다. 어느 날 그 남자가 우리 집에 왔다. 그 남자, 아니 지금의 형부는 작은언니가 임신을 했으니 결혼을 하게 해달라고 했다. 혼전 임신이 라니, 결혼도 하기 전에 감히 우리언니 몸에 손을 댔단 말이야, 짐승 같으니라고. 임신이라는 말에 형부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더럽게 느껴져 오악질이 날 것 같았다. 아버지 또한 노발대발하여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큰 소리를 지르며 길길이 뛰었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져 있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배가 점점 불러오는 작은언니를 차마 볼 수 없어 마지못해 결혼을 시켰다.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줄 알았던 그녀가 결혼을 해서 우리를 떠난 수필 127

128 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믿고 의지하며 살아 왔는데 그 렇게 쉽사리 형제들을 버릴 수 있는 지 이해하지 못해 서운하고 슬펐 다. 의지가지 없는 동생들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해 떠난 작은 언니 에 대한 배신감에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스물 두 살 작은언니는 내가 고등학교 때, 우리 곁을 떠나갔다. 아 주 가난한 연인인 두 사람은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 근처에 단칸 월세 방을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어떤 결벽증 때문이랄까, 순진한 작은 언니를 꼬여 임신시켜놓고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형부 또한 밉고 보기 싫었다. 채 십 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곳에 살았지만 한 번도 가지 않 았다. 철이 덜 났던 나는 남녀가 나이가 차면 이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가족을 떠나 새로운 한 가정을 꾸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밤사이 불어닥친 바람에 노랗게 단풍든 은행잎이 모두 떨어져버린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형부가 우리 학교로 나를 찾아와서 작은언니가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전해주었다. 나에게 조카가 생겼지만 조금도 기 쁘지 않았다. 그리고 백일이 다 되도록 조카를 보러가지 않았다. 작은 언니가 우리를 버린데 대한 일종의 앙갚음으로 미안한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작은언니가 철거민들이 사는 달동네 우리 집에 이사를 와서 살 때 의 일이다. 의붓어머니가 계셨지만 나는 학교가 파해 집에 돌아오면 물 긷고 빨래하고 청소와 저녁준비를 했다. 달동네 중에서도 그중 꼭 대기에 살아 산 아래 동네에 가서 우물물을 길어다 썼다. 의붓어머니 가 물을 길어오지 않으므로 학교에서 돌아오면 물 긷는 일이 주된 일 이었다. 그런 형편에 작은언니네 물까지 길어다 주기가 어려웠다. 작은언니 는 해산달까지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물지게로 물을 길어 날랐다. 나 는 둘째 조카를 낳은 며칠 동안만 물을 길어다주었다. 며칠 후 물 항 아리에 물이 떨어져 기저귀를 빨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애써 128 SDU 디지털 문학

129 모른 체 하고 물을 길어다 주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형부와 언니에 대 한 서운함과 미움이 남아있어서였다. 동생 눈치가 보여 물 좀 길어다 달라는 말을 차마 못한 작은언니는 내가 학교에 간 틈을 타서 물을 길어다 썼다. 아기를 낳은 산모는 사 대육신의 뼈가 다 물러난다고 한다. 산후 수발을 해줄 사람이 없어 아 기를 낳고 산후 조리도 제대로 못하는 판에 물까지 져 나른 작은언니 의 몸이 성할 리 없다. 몸이 아플 때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며 내게 대하여 얼마나 많이 야 속한 생각이 들었을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지고 두 조 카에게도 여간 미안하지가 않다. 아무리 작은언니가 밉고 보기 싫다고 해도 갓난 조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모진 행동을 하였는지. 아무 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동생을 기다리며, 외로움과 슬픔에 떨었을 것 을 생각하면 죄책감에 바늘로 가슴을 마구 후비는 것 같다. 때늦은 후 회에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얼마나 못된 동생이었나를 깨닫게 된 것은, 수년 후 내가 결혼 을 해서 내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다. 친정 엄마 없는 서러움에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작은언니 생각이 났다. 나보다 훨씬 더 여러 해 전에 아기를 낳으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많이 울지 않 았을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열일 젖히고 달려와 축하 해주길 얼 마나 고대했을까! 살아오면서 죄책감 때문에 두 조카에게 좋은 이모 노릇을 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고 해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감해지지 않는다. 작은언니는 내가 그렇게 못된 동생인데도 지금까지 나를 걱정해주고 잘해준다. 올 겨울은 다른 해 보다 유난히 추운 날이 많다. 칼바람이 뺨을 도 려 낼 것 같은 날이 계속될 때면 지난날 작은언니에게 했던 못된 행 동들이 떠올라 괴롭고 부끄럽다. 아무리 철이 덜든 소녀 시절의 일이 수필 129

130 라지만 그건 너무 심한 일이었다. 내가 작은언니에 대하여 가지는 미 안함과 죄책감은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영원한 빚으로 내 마음 속에 남아있다. 나는 작은언니에게 죽을 때까지도 갚지 못할 큰 빚을 지었다. 작은언니, 미안하고 또 미안해. 나 절대로 용서하지마. 130 SDU 디지털 문학

131 수필 내 침대 노정숙 아테네의 뒷골목이다. 아라베스크풍의 철문을 들어서는 순간 뒤통수를 당기는 한기를 느 끼긴 했다. 요괴 문양이 쌍으로 새겨진 침대를 보면서 죽음의 낌새를 알아챘어야 했다. 그때 벽마다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나 보다. 비릿한 냄새와 음울한 기운으로 인해 온 몸에 소름이 돋았을 때 는 이미 늦었다. 건장한 체격의 프로크루스테스를 어찌 당해내겠는가.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걸 잊었나. 짙은 눈썹에 우뚝한 코, 다정스러워 보이는 입매에 잠시 눈이 멀었나 보다. 순순히 끌려가 그의 침대에 누웠으니. 내 자라지 못한 키 때문에 침대의 아래 위가 한참 남았다. 얼른 위 로 당겨 눕는다. 나를 침대에 맞게 잡아당길 때는 아랫도리만 잡아 당 겨졌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도 허한 목에 찬바람이 지나간다. 괜찮아 괜찮아, 주문을 외지만 쿵쾅거리는 가슴은 터질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이 영영 이별의 순간이 된다 해도 그리 애통할 것은 없다. 아직 맑은 정신과 내 발로 움직일 수 있을 때 끝나는 것도 나쁘 진 않다. 내 생에 더 이상 좋은 날을 바라는 건 과욕이다. 가당찮은 호기를 부려보지만 오금이 저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수필 131

132 여행길에서 생을 마감하는 상상을 해본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노상강도로 여행자를 잡아다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침 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랐다. 자신만의 기준 으로 다른 사람을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의 비유로 쓰인다. 훗날 아테 네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자신이 저지른 수법으로 죽임을 당한다. 내 생각에 맞춰 상대가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결혼하고 10년쯤 지나서야 알았다. 미욱하게도 내 가치가 상대와 같지 않다는 것도 그 쯤에 터득했다.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나도 나만의 침대가 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은밀히 사람을 재는 나만의 척도다. 돈이 최고라며 열심히 모아야 한다는 어머니와 돈은 쓰기 위해 버 는 것이라는 남편의 논쟁은 언제나 결론이 없다. 서로의 절대가치가 팽팽하다. 나는 어머니처럼 돈을 모으는 재미도 모르고, 남편처럼 돈 을 쓰는 재미에 빠져보지도 못했다. 요즘은 모든 인사치레가 돈으로 해결되는 시대지만 내 절대가치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위에 좋은 사람이 없으면 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절대가치인 돈이 부와 동의어가 될 수 없음을 앨빈 토플 러의 부의 미래 에서 읽었다. 부란 돈으로 살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갈망까지 해소시켜 준다. 모든 가능성의 축적물인 넓은 의미의 부를 위해 돈을 투자해야 한다. 아마도 남편이 주장하는 맥락이 그것이 아 닐까. 돈에 대한 견해는 어머니 보다는 남편 쪽으로 기운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면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여행을 떠났다. 내 가 쓴 여행비용으로 인해 마이너스통장의 잔고가 불어나도 남는 장사 라고 계산한다. 여행은 보이지 않는 부를 쌓는 일이다. 내 보물창고에 는 언제든 가슴 뛰게 하는 사람들과 낯선 풍물이 그득하다. 내가 쌓은 재산이 어머니처럼 돈이 아니라서 나를 위해서는 넉넉하지만, 남을 위 해서 유용하지 못할까 걱정될 때는 있다. 능력과 재산은 나눌수록 불어난다. 칼칼한 성격 탓에 평교사만 하신 은사님, 이른 명퇴 후에 대안학교에서 봉사를 하신다. 여전히 열정적 인 은사님은 거침이 없으면서도 상대를 난감하게 하지 않는다. 은사님 을 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132 SDU 디지털 문학

133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면서 오랜 세월 꾸준히 돈을 모은 이복순 김 밥할머니, 우동장사 김복순 할머니의 기부금 쾌척을 보면 나는 속이 불편하다. 종군위안부 피해자인 김군자 황금자 할머니가 기증한 장 학금은 또 어떡하나. 나는 왜 이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다 못해 부아가 나는 걸까. 거액의 기부금 같은 건 대기업에서나 해야 마 음이 편한데 말이다. 이런 사람들을 내 침대에 눕혀본다. 그의 키에 맞춰서 내 침대를 기 꺼이 늘이거나 자를 것이다. 자신의 것을 나눌 때의 뿌듯함을 아는 사 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보이는 부와 보이지 않는 부, 모두 가진 사람 이다. 이렇듯 내게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난폭하게 하 는 사람도 있다. 모든 일에 부정적인 사람이다. 함께 있으면 세상이 어둡고 불안해진다. 애정 없는 비판은 야비한 비난일 뿐이다. 늘 툴툴 대는 그를 내 침대에 눕힌다. 가차없이 두 팔을 침대 밖으로 내려친 다. 누군가를 안아보지 못한 팔은 무용지물이다. 교만을 권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거드름에 고개 숙일 만큼 순 하지 못한 내 성깔을 자극한다. 이런 사람은 내 침대에 눕혀 목을 밀 어낸다. 고개를 숙여보지 못한 그의 목은 이미 굳어있다. 단칼에 내리 치고 잊어버린다. 이런 사람은 무시 하는 것이 약이다. 비겁하게도 나는 보이지 않는 가치에만 칼날을 휘두른다. 행여 미래에라도 부의 물결에 합류하려면 경제학자나 금융전문가를 따르는 것보다 내 잣대에 넉넉한 사람들과 손잡아야 한다. 토플러가 말했듯이 경제논리에 따라 살지 않더라도, 경제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의 한계를 늦게나마 알아차린 내 계산에 손해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니 나만의 침대도 바뀐다. 요즘 머리에 맴도는 것은 말랑말랑한 사람 이다. 머지않아 내가 들이대는 절대의 잣대가 또 바뀔지도 모른다. 수필 133

134 아테네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파르테논 신전, 육중한 돌 기둥 속 속들이 상처투성이다. 디오니소스 극장의 돌무더기 위에서 열렬하게 펼쳐졌을 비극을 읽는다. 지중해의 사정없는 햇살 아래서 나는 자꾸 힐끔거린다. 어디선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억센 손이 내 목덜미를 낚아 챌 것만 같다. 어서 아테네를 벗어나야겠다. 134 SDU 디지털 문학

135 수필 가요 무대와 우리 가락 박승렬 모 방송국의 TV 월요일 저녁 10시에 방영되는 가요 무대 는 잔 잔한 향기와 추억이 담긴 우리 전통가요의 뿌리를 지켜가는 프로그램 이다. 1985년부터 이어 온 가요무대가 지난 2010년 11월로 1,195회 를 맞았다고 한다. 중장년층의 가요 프로그램이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젊은 층에서도 인기가 있다고 하니 우리 민족성에 특별한 가락인자가 있는 모양이다. 초창기 가요 무대는 트롯 일색이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지만, 중장년 층의 전폭적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그들은 격동의 한국사를 몸소 겪었던 아픔을 담아낸 애잔한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눈물을 흘 러왔으며, 해외 근로자를 위한 리비아 첫 해외 공연 시 낯선 타국에서 땀 흘리며 가족을 그리워하던 근로자들은 가요무대를 보며 눈물바다 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미국 LA 공연, 오사카 공연 등으로 가요 무대는 미국, 일본, 독일, 브라질 등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 오지할 곳 없이 찾아다녔다고 한다. 이 노래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애환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지천명을 넘어 달리는 내게 있어 이 노랫 말들은 향수에 젖게 하면서 눈을 감게 한다. 우리 민족의 숨소리가 스 수필 135

136 며있는 노래,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화려하지 도 천하지도 않은 우리 가락이 국적불명의 노랫말과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랩과 테크노 댄스에 밀려 세계화에 쫓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우리 민족은 숱한 전란과 위기를 겪으면서도 잊지 않고 전승되어 온 수많은 가사와 노래 가락은 민족혼에 담겨져 오면서 뿌 리를 보전해왔다. 우리 민족은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백의민족이 다. 어느 곳이던지 아리랑이 흘러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떨려 옴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전율은 우리가 어려울 때 민족의 의식을 통합하는 구 심체 역할을 다 해왔다. 격동의 세월에 젖어있던 이 땅에도 서구 문명 의 이질기류가 상륙하여 지금은 어렵지 않게 우리 민족문화와 동화되 어 온 문화접변 현상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흐르고 있기도 하 다. 물론, 문명의 발달은 그 나라의 부의 척도로도 통하지만 의식구조 의 혼란은 민족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까 싶어 노파심이 발 동되기도 한다. 요즈음은 웬만하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각종 오디오시스템 등 전 자제품이 각 방마다 보유하는 가정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왜일 까? 대부분의 가정에는 기성세대인 부모,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다. 그리고 신세대인 자녀, 할아버지 할머니의 재롱 떨이인 손자, 손녀들 이 있다. 이들은 한 가족으로서의 구성원이지만 추구하는 취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공간이 뒤따라야 하는 불편함을 내재하고 있다. 한 예로 볼거리 제품 중의 으뜸인 텔레비전을 두고 살펴보자. 생활 의 많은 시간들 중 상당한 여가를 할애하는 부분이다. 주요 프로그램 을 볼 요량이면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의 TV채널 고정의 우선권을 두 고 보이지 않는 주도권의 시선 경합이 벌어지곤 한다. 기성세대는 향 수가 물씬 풍기는 전원일기나 가요 무대가 방영될 시간쯤에는 일찌감 치 채널을 고정시키는 반면, 신세대는 인기가요 순위나 젊은 층을 겨 냥한 프로그램이면 재빠르게 채널을 고정시키면서 선점을 고수하고 있다. 이쯤 되다보니 보상이 따라야 하는데 제한된 시간 내에서의 협 상조건을 내걸고 시간에 쫓기듯 불안스럽게 시청하곤 한다. 그러기 때 문에 볼거리 제품은 각각의 공간에서 서로가 편하게 시청하고 있는 136 SDU 디지털 문학

137 풍경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도 그 가운데의 한 구성원이다. 물론 중고 품이지만 신세대인 녀석들에게 밀려나는 억울함만은 면하기 위호서이 다. 우리와 같은 기성세대는 물론이지만, 부모님들의 가슴에 와 닿는 시 청 프로가 다름 아닌 가요 무대 이다. 우리들의 부모님은 그 시간만 큼은 꼭 시청한다. 흘러간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면서 좁은 공간을 그 시절로 이동시켜 동화되어 간다. 잠시 후 지그시 감은 눈가엔 알 수 없는 물방울들이 맺히던 모습, 무대 한 편에는 물안개가 내려앉고, 한복 옷고름의 나풀거림, 구슬프게 꺾여져 들려오는 가락에는 어느 유 행가 가사처럼 사랑도 있고, 눈물도 있고, 행복도 스며있는 것이다. 무대에 등장하는 그들은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지금까지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살아있는 가요계의 전령사들이다. 살포시 넘나드는 버 선발의 율동에 가냘프게 넘어가는 목소리는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저 멀리 해외에까지 울려 퍼지면서 용기와 희망을 돋우어 민족의 혼 을 전하고 있다. 가요 무대 방송시간에 항상 단골로 방청하시던 할머니 한 분이 계 셨는데, 카메라도 알고 있는 듯 방송 때마다 화면에 비추어 주시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노랫가락에 흥을 주시던 할머니 모습이 보이지 않았 다. 손뼉을 치시면서 눈시울을 적시던 할머니, 그 할머니는 바로 우리 들의 어머니였는데. 돌아가셨는지, 건강이 좋지 않으신지 지금까지도 궁금하다. 가요 무대 시간대 마다 행여 하는 마음으로 할머니 모습을 찾아보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바램이었다. 요즈음은 아이돌(Idol_주로 청소년에게 큰 인기를 얻는 가수를 말한 다. 우상을 뜻하며 가수, 영화 배우, 텔레비전 배우 등 연예계의 다양 한 분야에서 활동하기도 한다.)의 서구풍 노래들이 넘쳐나고 있다. 세 월이 흘러 기성화되면 또 다른 노래 풍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신체 는 그 나라의 토양과 기후에 맞추어져야 한다. 쓸데없는 걱정인가? 랩과 테크노댄스 가수들의 인기도는 단연 상종가를 올리고 있다. 수 년이 지난 후에 지금의 가요 무대나 이와 비슷한 프로그램에서 아이돌(Idol)의 전성기 때처럼 그들은 예전과 같이 열창을 하면서 몸 을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 아니면 기록 매체에 담겨진 채 사장 수필 137

138 될 것인가? 민족의 정서가 담긴 우리들의 노래 소리가 디지털 무대에 서 펼쳐지는 정보화의 바다에서 표류될 것인가? 전통가락에 일생을 바친 기성 가수들이 오랜 세월에 묻혀간 뒤, 차세대들이 이들을 이어 갈 수 있을까? 왜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일까? 두꺼운 외투를 감고 검 은 뿔테 안경을 쓴 고인 가수의 씁쓸한 미소로 흐르는 곡은 표지만큼 이나 낡아져 가고 있다. 138 SDU 디지털 문학

139 수필 2010년 6월 한국산문 등단작 나 외로워 꽃구경 간다 유시경 역 광장엔 별의별 사람들이 참 많이도 모여 있다. 그리고 그 별의별 사람들의 부류처럼 볼거리도 다양하다. 볼거리란 때때로 숨 쉬지 않거 나 의식이 없는 무생물까지도 포함한다. 동그랗게 연결된 광장 로터리를 따라 돌면 곧바로 택시정류장이 보 인다. 정류장엔 자신의 애마를 가지런히 정차시키고 승객을 기다리는 기사들이 있다. 택시 정류장 앞 두 개의 기다란 나무의자에 아무런 미 동도 없이 수 시간 동안 앉아있는 노인의 모자가 보인다. 소일거리하 나 없이 그저 한낮의 시간을 때우려고 자리를 메운 듯, 노인들의 뒷모 습엔 표정이 없다. 휴가를 받은 것일까. 저어기 아홉 시 방향으로 필 리핀 노동자들의 성긴 머리칼이 흔들리고 있다. 기사들은 때때로 운전석에서 내려 몸을 푼다. 인도와 차도 사이에 설치된 은빛 쇠기둥을 부여잡고 스트레칭을 한다. 때로 두툼한 허리에 두 손을 얹고 뱅글뱅글 돌리기도 하며, 때론 쇠기둥 밑의 경계 턱에 두 다리를 번갈아대며 뻐근해진 보폭을 조절하기도 한다. 때론 전철이 들어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손님들의 줄서기를 기다린다. 그러 다가 지치고 갑갑해진 기사 몇은 담배를 꺼내 피워 물기도 하고, 편의 점 앞 자판기에서 삼백 원짜리 커피를 뽑아다가 훌쩍훌쩍 들이켜기도 수필 139

140 한다. 유난히 깔끔한 성격을 지녔을 기사 한 명은 먼지떨이로 자동차 보닛을 털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운전석의 재떨이를 비우고는 사이드 미러를 점검하기도 한다. 어쩌다가 속살이 비칠 듯 말 듯 쫙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지나가는 아가씨의 발걸음을 따라 시선을 틀기도 한다. 한가해진 시간에 식당 유리창 밖을 내다보노라면, 늘 그렇게 얼추 비 슷한 얼굴을 가진 택시 기사들이 모여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다. 지난 팔월 중순쯤이었을까. 매양 운동을 하던 가무스름한 살빛의 젊 은 기사가 전철역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손가락 질을 하며 클클 웃는 거였다. 아가씨의 뾰족한 구두굽이 보도블록 사 이로 빠지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낮술에 전 노숙자들끼리 또 시비가 붙은 건가? 나는 기사들의 얼굴과 양미간에 띈 웃음의 모양을 관찰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유쾌하고 즐거운 미소가 아님이 분명하였다. 광장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일제히 그 한 방향을 바 라보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유리창에 오른 뺨을 바짝 붙인 채 목을 되는 대로 뽑고는 전철역 일번 출구를 바라다보았다. 계단 밑, 여름햇살이 직방으로 내리쪼이는 나무의자에 까슬하게 마른 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커다란 괴나리봇짐 을 두 개나 끼고 앉아 허공에 대고 삿대질하며 카릉카릉 고함을 지르 고 있었다. 여자 앞에는 중년의 한 사내가 곧추서서 걸쭉한 수작을 걸 고 있는 듯이 보였다. 비닐상표가 반쯤 벗겨진 막걸리 병 두어 개가 그 남자의 발뒤꿈치를 따라다니며 뒹굴고 있었다. 저들은 부부싸움이 라도 하는 걸까? 하긴 역 광장에서 싸우는 일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 다. 언젠가 우리 식당에서도 두 부부가 삼겹살을 굽다가 느닷없이 땅 바닥에 엎어져 머리채를 잡고 뒹굴던 사건이 있지 않았던가. 저 여잔 분명히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게 분명하다. 나는 같지도 않은 온갖 까닭 모를 짐작을 만들어내었다. 그 두 사람 주변에는 더 많은 사람들, 아니 좀 더 많은 사내들이 모 여들었다. 곧 저녁장사를 시작해야 함에도 나는 가만히 여자와 남자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심하게 여자를 나무라고 있었다. 이윽고 해괴한 상황이 포착되었다. 여자가 아주 재미있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 거였다. 그녀는 한 아름 안고 있던 비닐봉투를 열고는 뭔가 파란 것들 140 SDU 디지털 문학

141 -아마도 나물 같은 푸성귀 종류가 아니었나 싶다.- 을 한 잎씩 꺼내 앞에 선 남자들에게 던지고 있었다. 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식 당 문을 열고 광장으로, 그녀가 앉아있는 낡고 푸석한 나무의자 가까 이 한걸음씩 다가갔다. 야, 이 자식들아! 나를 왜 오라고 하는데! 니들이 나 가지고 그 짓 하려고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이, 나쁜 자식들아! 니들 손자, 자식 놈들한테 부끄러운 줄 알아라! 에잇, 염병할! 에잇, 더러운 것들! 에라, 퉤! 퉤! 그녀는 그들을 바라보며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쏘아붙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봉투 한가득 뜯어놓은 잡풀들을 계속해서 남자들에 게 던지는 거였다. 광장을 둘러싼 구경꾼들의 입에서 출처 없는 추측들이 불거져 나왔 다. 그녀가 필시 엄청난 충격을 받아 정신이 나갔을 거라며 쑤군거렸 다. 자식과 부모가 급사했다거나 아니면 폭행을 당했다거나 하는, 사 소하지 않은 사건이 여자에게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고들 하였다. 쯔쯧, 그늘에나 앉아있지. 땡볕 아래서 덥지도 않은지.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식당으로 들어서려는데 여자가 부스스 몸을 움 직인다. 잘 꼬인 단발파마머리를 곱게 올려 야무지게 묶는다. 푸성귀 봉투를 작은 손가방에 넣고 큰 봇짐 두 개를 들더니 유유히 일어선다. 그러곤 가로수 밑에 촘촘히 심어진 작은 꽃나무들의 이파리를 훑으며 걷기 시작하는 거였다. 대체 그녀가 왜 나뭇잎을 따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그녀의 움직임을 뒤로하곤 식당 안으로 들어 왔다. 후드득후드득, 덤프트럭에서 마지막으로 굴러 떨어지는 돌멩이 몇 알처럼 동네 사람들의 쑥덕거림이 뒷덜미를 파고들었다. 실성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고, 외모도 꽤 단정하고 옷도 말끔하니 차려입 었지 않느냐고, 저 정도라면 병원에서도 금세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젊은 여자가 정말 안됐다고 사람들은 한마디씩 내뱉었다.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뭔가 얘기를 좀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녀의 파릇한 가여움 때문에 장 사하는 내내 우울했다. 마치 오래된 벗 하나를 내팽개친 듯 기분이 영 수필 141

142 께름칙하기만 하였다. 며칠이 지나고, 잠시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 길에서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비쩍 마른 몸매에 민소매 티셔츠를 걸치고 얼룩덜룩한 군복풍의 짧은 반바지를 입고 서서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따가운 팔월의 햇살이 아스팔트를 찌르는 것처럼 그녀의 몸짓을 녹 이고, 양산 속의 매몰찬 시선들마저 덩달아 달구어내고 있었다. 온몸 이 구릿빛으로 잘 여문 그녀의 피부가 마치, 이까짓 여름? 햇볕? 흥! 하고 비웃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얇고 허연 담 배를 또 한 번 능숙하게 꺼내 깨문 그녀가 횡단보도 한 복판에서 몸 을 비틀더니 흥겨운 듯 한바탕 춤을 추었다. 누군가 물을 뿌려놓았는 지 습기를 머금은 아스팔트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 주 잠깐, 허리를 어수선하게 비꼬던 그녀가 봇짐을 양 손에 들고는 인 도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설핏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 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느새 핏기 없는 내 양산 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눈빛이 양산 속의 나를 뚫어지게 들여다보더니 샐쭉샐쭉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을 바짝 스쳐 지나가며 한마디 내뱉는 것이다. 나 외로워 꽃구경 간다아.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사람이 실성을 하 면 꽃을 좋아하게 된다고 하였던가. 머리에 꽃을 꽂고 마냥 신바람이 나서 춤추게 된다고. 그러나 그녀가 꺾고 다니던 건 꽃모가지가 떨어 져나간 이파리들뿐이었다. 나는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과연 그녀 는 멀뚱히 서있던 내게 어떤 의미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역 광장에는 수많은 외로움이 비켜간다. 때때로 그 외로움들 가운데 몇몇은 내가 일하는 식당에 들렀다 가기도 한다. 어떤 외로움은 잿빛 누비옷을 입은 채 시원한 맥주 한 잔 보시해 달라고도 하며, 어떤 외 로움은 두툼하고 낡은 성경책을 끼고서 허공에 머리를 주억거리다 간 다. 간혹 말쑥하게 차려입은 초로의 외로움 하나가 단돈 이백 원을 동 냥하기도 한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후텁지근한 아스팔트 142 SDU 디지털 문학

143 바닥의 물기처럼 어느 계절로 사라져버렸는지 모른다. 그녀의 외로움 에 대한 궁금증은 되풀이되는 일상을 따라 점점 잊히고 있었다. 시인 의 노래 한 구절처럼 언젠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나는 부디 그녀가 한 아름의 참( 眞 )꽃을 구경하길 바란다. 수필 143

144 수필 티벳에서의 7일 임도순 2010년 12월 11일. 제가 스스로 명명한 오지여행 을 떠났던 날 입니다. 영화 티벳에서의 7년 이 아닌 티벳에서의 7일 을 목표로 떠난 것이지요. 쉰 살 넘어 시작한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학부의 졸 업을 스스로 자축하고 그 4년 간의 열정어린 순간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직장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던 힘든 환경 속에서 어렵 게 이뤄 낸 졸업인지라 그 보람이 더욱 클 수밖에요. 그래서 저는 그 기쁨의 무게와 걸맞는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했습니다. 마침 회사에서 도 연말에 지급할 연가보상비가 적을 수 있으니 일부러라도 제발 휴 가가기를 바라는 눈치여서 때는 이때다 하고 가방을 챙겼던 것입니 다. 그러나 라싸는 즉흥적으로 얼렁뚱땅 해치울 만큼 여행이 쉬운 지역 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곳은 평균 4,000미터의 고원지대였습니 다. 그러기에 고산증이라는 불청객이 발목을 잡고 있어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었습니다. 144 SDU 디지털 문학

145 베이찡에서 간식용으로 산 과 자봉지를 보세요. 빵빵하게 부 풀었잖아요. 작은 몸뚱아리 숨 쉴 공기야 충분하겠지만, 우리 몸에 절대 필요한 혈액순환용 산소 밀도가 그만큼 낮다는 것 입니다. 열차가 아닌 시외버스 로 라싸에 가고자 한다면 해발 4,300미터 지역인 노동자의 읍 인 꺼얼무 라는 소도시를 통과해야하니 고산증의 강도가 더 심할 것으로 예상해야 합니다. 백두산이 해발 2,750미터이니 천지못 위로 흐르는 구름의 높이보다 훨씬 더 높은 지역입니다. 제가 30년 전 군 생활을 강원도 1,300고지에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만, 라싸에서는 이 고산증을 피할 길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습니다. 통증은 감기의 편두통 에 몸살을 더한 것과 비슷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구토에 링게르까지 차야 한다더군요. 하여튼, 라싸로의 여행은 설레이며 떠나게 되었습니다. 주위에선 제 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농담 같은 격려를 보낸 사람도 있었습 니다. 그만큼 저는 들떴고, 다녀 온 지금까지도 비슷한 감정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라싸가는 열차 안에서 보는 3일째의 풍경입니다. 차는 이미 고산지 대에 들어선지 오래입니다. 수압이 낮아서일까요? 차안의 저수조에서 물이 새어나와 복도에 물난리가 났습니다. 심상치 않은 행로입니다. 3 일간 양말, 양치질을 모두 하지 못했습니다. 씻지 못한 이런 여행은 처음이었으니까요. 밤중에도 문득 깨어나고 낮에도 문득 잠이 들었습 니다. 이미 비정상적인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낯선 역에 서는 열차가 한 삼십 분을 정차합니다. 어떤 때는 시속 40키로 정도 로 갈 때도 있습니다. 차안에서는 이미 식수가 바닥나서 마실 수가 없 었습니다. 이게 고원지대의 특성일까? 하는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 했습니다. 수필 145

146 저는 이미 5년 전에 페루의 안데스산맥을 비행기로 넘어 쿠스코 에서 고산증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다만, 여기의 고산증은 묵직한 바 위처럼 둔중하게 기대어 왔습니다. 고산증을 옆에 두고 물끄러미 창밖 을 바라봅니다. 긴 줄에 걸려 바람에 붉은 색깔을 내어 준 깃발이 멀 리 언덕에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깃발을 룽다 ( 風 馬 )라고 부르 는 데, 티벳땅이 시작된다는 표시입니다. 깃발은 바람에 오색색깔을 털고 있었고, 가축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황량한 조화의 터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라싸를 향한 순례자들의 고난의 행군을 염려하며 언제까 지나 그 자리를 지켜낸 불교왕국의 상징이자 어느 나라의 국경선보다 아름다운 철책이었습니다. 하루 전에 중국의 고원인 황토지대를 지났 습니다만 오늘 보는 회색빛 산야가 보기에는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산야에 늘어선 낮은 벽돌집들을 보면 그저 숨이 딱 멈춰집니다. 도저 히 사람이 살만한 집들이 아닌 듯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진 속에 본 산 정상 바위의 모습이 마치 수염 기른 상제님 같습 니다. 상제님 하니까 동화 수업 을 강설해주신 임정진 교수님이 생각나더군요. 임 교수님께서 저걸 보셨으면 분명 동화 한 편을 뚝딱 146 SDU 디지털 문학

147 완성하셨을 것입니다. 상제님 봉우리를 옆으로 제하 신들의 형상이 배 열된 것 같습니다. 마을에 이층집은 없습니다. 또한 이층집이 필요없 을 것 같기도 합니다. 여행을 떠나면서 저는 여행의 목적을 정했습니 다. 이 척박한 풍토에서 티벳인들은 과연 무엇을 가지고 사는가? 를 느끼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 주위에서는 넘쳐나는 과분한 사물들 을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풍요보다는 빈곤을 느껴 야 했습니다. 이 척박한 세상에서 정작 제게 없는 것이 있다는 것 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산소조차도 희박한 땅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 는 것들은 모두 내게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7년이 아닌 7일 가지고 무슨 깨달음이냐 하시겠지만 여행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 고 합니 다. 그렇다고 제가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아시겠죠? 많은 사진 중에서 하필 이것을 고른 것은 제 나름의 깨달음이 있어 서입니다. 사진은 겨울풍경이지만, 여기에 푸른 나무를 덧칠해 놓으면 우리의 농촌보다는 훨씬 산수가 수려한 지역처럼 보이겠다는 것입니 다. 단지 녹색이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60년대에 강조했 던 헐벗은 산의 산림녹화는 물론 없는 것보다야 좋을 수 있지만 꼭 좋을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흔히, 구구단 공식처럼 알고 있는 산야의 초목으로 인해 아파트가 밀집한 도시에 산소가 많아졌을 지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물론 미세할 정도지만 많아지긴 했겠지요. 하지만 산 림의 초목에서 발생한 산소를 초과하는 자동차의 매연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4대강 치수가 이모 李 某 씨의 환상설계 도처럼 완벽하게 성공한다면 언젠가는 태백산맥의 울창한 수림도 하 천의 다양한 생물군처럼 관리하기 귀찮은 존재로 전락할지 모르는 법 입니다. 지금 담요처럼 보이는 티벳의 키 작은 갈색 풀들은 모두 야크 와 양들의 먹이입니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의 풍족한 먹이입니다. 여 기에선 동물들이 인간을 보살피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수필 147

148 처음 보는 그림이지요? 무슨 나체화냐 하겠지요? 티벳에 불교를 정 착시킨 토번왕조 33대왕 송첸캄포 의 지혜가 담긴 라싸의 지형도입 니다. 그림에서 보이는 악마의 여신 심장부위가 바로 티벳 불교의 핵 심지인 조캉사원 입니다. 중국인 택시기사는 조캉사원 이라는 말 보다 따자오시( 大 昭 寺 ) 라는 말을 잘 알아듣는 듯이 보입니다. 라싸 에 사원이 많다보니 티벳어를 모를 수도 있겠지만 전략일수도 있겠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번을 통일한 티벳왕 송첸캄포 는 네팔에 서 두 공주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곧 불사 佛 事 를 일으키지 요. 그때가 당태종 시절 641년이니 백제멸망 19년 전입니다. 왕이 자 신의 반지를 늪지대에 던지자 탑(스투파)이 솟아오릅니다. 그러나 사 원건축공사는 매번 실패합니다. 그곳이 늪지대였기 때문이지요. 그 후 로 당태종의 조카딸인 문성 文 成 공주 가 들어와 그 늪지대에 12개의 나무기둥을 박고 불사를 일으켜 성공합니다. 그곳이 조캉사원이고, 티 벳인들의 오체투지의 최종목적지가 됩니다. 티벳인들이 오체투지 도 중에 죽으면 동료가 죽은 사람의 이를 뽑아 간직했다가 이 사원의 등 잔받이 밑에 몰래 올려놓기도 한답니다. 죽음도 부처에게 귀의하려는 열정을 막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148 SDU 디지털 문학

149 여기서 저는 이제까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열정을 가진 티벳인들이 설명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그저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구 떠들어대는 어느 한쪽 말만 듣 고 있다간 편견이나 오류에 빠지기 쉬운 법입니다. 마치 일제시대에 가문의 변절을 옹호한 기득권의 검은 요설에 현혹되는 것과 비슷하고, 아직도 이씨조선의 양반인양 현대판 당파싸움에 몰두하며 가진 자들 만의 이익에만 혈안인 집단의 주장과도 비슷합니다. 열세한 티벳인은 침묵한 채 그저 기도만하고, 실세인양 보이는 중국은 자신들의 행동을 미화시키기에 열성이니 말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TV로 차마고도 를 미리 접하고 인터넷 여행 정보를 훑은 저도 처음엔 중국식으로 인식했습니다. 文 成 공주가 불 상을 가져와 조캉사원에 모셔놓았고. 티벳인들이 그 불상에 오체투지 로 참배한다 는 구수한 연기자의 해설에 감동했으니까요. 특별한 이 야기도 없고 구성도 단순한 오체투지의 장면을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 보면서도 그때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건만, 막상 현장에 닿고 보니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반인의 인식을 오류로 유도하는 조캉사원 안에는 커다란 불상이 정면에 배치되어 있 었지만 그와 비슷한 불상이 사원 안에는 여럿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궁금한 문성공주의 초상이나 조각상은 없고 오히려 네팔의 두 공주가 송첸캄포 와 나란히 모셔져 있는 게 발견되었습니다. 문성공주의 초상은 조캉사원에서 멀리 떨어진 티벳박물관 에서 확인할 수 있었 습니다. 문성공주는 도교의 팔괘진 八 卦 陳 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 팔 괘진으로 본 라싸의 풍수지리가 바로 이 그림이며 악마의 여신을 꼼 짝달싹 못하게 하는 주요 관절부위에 부처의 열 두 사원을 배치하게 된 사연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문성공주가 팔괘진과 불상을 동시에 가 져왔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문성 文 成 이라는 이름에 서도 불교냄새는 전혀 나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수필 149

150 조캉사원 안에는 당나라 측천무후(문수보살의 현신이라 함)의 사원 파괴 압력에도 견뎌낸 순수한 초기의 불상이 안쪽에 따로 소중히 모 셔져 있었습니다. 조캉사원이 일어나고 그 뒤 200년 후에 티벳에 불 경을 전수한, 유명한 사자의 서 도 그중 하나지만, 파드마삼바바 고승의 모습과 티벳불교의 위대한 성자인 밀라레파 불상도 함께 있 었습니다. 밀라레파불상은 장난꾸러기 소년의 얼굴로 참배객들의 반 기고 있었습니다. 달라이라마 12조상과 수많은 불상 중에서 어느 것 이 문성공주가 가져 온 불상이고 어느 것이 흐린 눈을 맑게 하는 부 처인지, 어느 조각상이 송첸캄포왕 인지 파드마삼바바 인지 아는 것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누구라도 대웅전의 본존불상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한 한국식 가람배치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사찰 외부에 있는 주춧돌구멍에 귀를 대면 현재 조캉사원 지하로 흐르는 물소리와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다하기에 일부러 귀를 어렵게 대어 보았지만 천삼백 년 전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락사락 오가는 사람 들의 옷깃 스치는 소리만 들려왔습니다. 문성공주입니다. 친절한 티벳박물관에 걸려있습니다. 150 SDU 디지털 문학

151 거대한 현대식 건축물에 티벳박물관 이라는 문패를 건 사람들은 박물관이 자랑스러울 티벳인들이 아닐 것입니다. 마치 대한민국 국 호를 매단 대한민국에 독립의 주체들은 없고 외세를 등진 객체들이 설친 것과 비슷하지 않나요? 티벳왕들의 국새만 나란히 진열되어 있 었지만 그 많던 주인들의 초상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티벳인들은 라싸를 건설한 문성공주를 포용하면서 한편으로 는 중국의 협조를 얻어 낸 자신들의 송첸캄포 왕국에 대한 자부심을 더 크게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중국인들을 실력자로 인정 하고 숭배할 것이냐? 아니면 지금은 통치자로 있지만 과거 자신의 왕 국에 문성공주를 바쳤던 중국을 무력아래의 국가로 여길 것이냐?하는 것은 상당한 인식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이 되느냐? 종복이 되느냐?는 라싸가 대신 답변해 줍니다. 악 마의 심성을 누르고 일어 난 도시의 도로는 마치 불경의 행간처럼 뻗 어 있고, 바로 그 행간의 길을 끊임없이 걷는 그들은 불경 속의 잘디 잔 글자들과 부호들이었습니다! 6대 달라이라마는 비운의 달라이라마입 니다. 13세에 달라이 라마로 추앙받기 이전 에 이미 마음을 주어 버린 연인이 있었습니 다. 그는 21세에 요절 하여 절에는 아직 그 의 초상이 없다고 합 니다. 사원주변을 돌다 보면 유난히 노란 색 칠을 올린 티벳식 레스토랑 마키아미( 瑪 吉 阿 米 )MAKYE AME 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키아미 는 눈썹고운 연인의 이름입니다. 집 수필 151

152 앞에 내건 천을 걷어 올리고 살며시 밖을 내다 본 마키아미를 본 6대 달라이라마는 그만 상사병에 걸려 티벳 영혼의 지도자역을 제대로 수 행할 수 없었습니다. 티벳인! 그들에게도 불심으로 감히 억제하지 못할 사랑의 감성들이 있었습니다. 세라사원의 교육시간입니다.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한다는데, 이 정보를 모르고 가면 그냥 자갈마당만 구경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서있는 학승이 과장된 몸짓으 로 힘차게 손뼉을 치고 기선을 제압하듯 질문을 던지면, 앉아있는 상 대는 난처한 표정으로 쭝얼쭝얼 뭐라뭐라 고 답변합니다. 달라이 라마와 도올 김용옥의 대화 에서처럼 이들의 대화도 그런 식일 겁니 다. 형이상학적인 문답일 터이고, 벽암록 의 선문답쯤 될까요? 152 SDU 디지털 문학

153 조캉사원 의 오체투지장면은 주로 동영상으로 찍어 제대로 올릴 수가 없습니다. TV 차마고도 에서 보았던 그런 식을 막상 대하니 그들의 성스러운 모습에 함부로 카메라를 댈 수가 없었습니다. 가벼운 카메라렌즈를 들이대는 것이 죄스러웠다고나 할까요? 그들의 참배의 식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마치 산처럼 큰 얼음 속에 온통 울음을 가 둬 놓은 것 같은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중 국 군인들이 꽉 잡고 있는 소총의 총구가 더욱 차갑게 번득이는 것 같았습니다. 2년 전 독립운동이 벌어졌던 거리와 사원 광장을 완전무 장한 군인들이 5명 단위로 서너 팀이 일시에 순찰을 하고 있었습니 다. 까딱하면 그냥 드르륵! 갈겨버릴 양으로 방아쇠틀을 잡고 걷는 군 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청색 모자를 쓴 늙은 경찰들은 친절해 보였습니 다. 노인들을 부축하고 앉을 의자를 갔다주더군요. 하지만 어요 독수 리 같은 군인들의 눈빛은 참배객들보다 그 긴장감이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싸늘한 총구를 내리고 걸으며 날카롭게 두리번거렸지만, 오 체투지 참배객들은 그들의 눈총을 개의치 않는 듯이 막대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오체투지를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고무앞치마를 두 껍게 갑옷처럼 둘렀고, 무릎 아래를 감발한 불교의 군대였습니다. 이 른바, 물질문명의 총아인 손톱만한 에이케이 자동소총의 탄환과 티벳 수필 153

154 어 불경을 외운 불교 군대의 기도 중 어느 것이 강하느냐를 판가름하 려는 전쟁터 같았습니다. 중국 군인들의 긴장한 발걸음 아래로 쓰러지 듯 엎드린 어린 소녀들이 희뿌연 햇살에 밀려 눈에 밟혔습니다. 도대 체, 저 마키아미 와 같이 어린 소녀들이 무슨 염원이 그리도 깊어 연약한 팔꿈치와 무릎이 다 깨질 것 같은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스스 로 오체투지를 다 한다는 것인지요 나무판을 머리 위에서 딱딱 마주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체투 지는 이마와 팔꿈치와 무릎이 동시에 땅에 닿아야 합니다. 그들의 오 체투지는 우리식으로 손을 벌려 부처의 용돈을 받아들이는 인사법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그렇게 팔을 길게 뻗고 엎 드리고 맙니다. 그래서 완전한 귀의 歸 依 를 바란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가 진흙탕을 걸을 때 자신의 비단결 같은 검고 기다란 머리를 진흙탕 에 깐 성자와도 같은 행동입니다. 조캉사원 의 앞마당에서 얼마나 많은 귀의의 기도가 있었는지, 그 억센 화강암 바닥이 미끄럼틀처럼 맨질맨질하였습니다. 그 바닥에는 애수 哀 愁 와 연민의 눈물보다는 사 랑과 열정의 땀방울이 더 배여 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겁니다. 멀리 포탈라궁이 보입니다. 포탈라궁 담을 도는 할아 버지와 손녀입니다. 그들의 손과 손은 하나의 염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티벳의 오늘을 상징하고 있 는 듯이 보입니다. 이들에 게 화려한 명칭의 종교의식 일이 따로 없는 듯 합니다. 매일 매일이 의식일이고 해 뜨기 전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의식은 계속됩니다. 유치원도 불교고, 초 등학교, 중학교도 불교이고, 경로당도 시장도 거리도 온통 불교입니 154 SDU 디지털 문학

155 다. 그들은 끊임없이 절하고 시계방향으로 걷습니다. 포레스트 검 프 영화에서는 무작정 걷는 톰행크스가 나옵니다. 이별의 아픔을 잊 기 위해서였지요.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을 돌았다는 한비야 처녀 가 철도노동자의 읍인 꺼얼무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이 라싸로 몰래 스며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가 이해가 갈 듯합니다. 티벳인들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걷거나 오체투지하거나. 그것을 바라보는 게 얼마나 무료한 행위인지 알면서도 감히 오랫동안 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감동입니다. 왜 그것이 감동적인지 자문 했습니다. 함께 부딪히며 걸어봐야 알고, 또 왜 걸어야 하는지는 그만큼 아파봐야 알 것입니다. 아픔이 없는 산물은 제 주위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정성이 없는 것들이 주위를 지배하기 시 작하였습니다. 땀을 흘리지 않고 영혼을 저당 잡혀 빌린 이상한 명칭 의 욕망들이 주위에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른바, 유행이니, 권력이 니, 부귀공명이니, 금의환향 錦 衣 還 鄕 따위의 이상한 문패들이 효용과 편리와 풍요라는 북경가면으로 시야를 혼돈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누 구나 다 따르니까 나 역시도 그리해야하려니, 역사와 제도가 어련히 알아서 생활화 됐으려니 날 선 도끼처럼 믿었던 것들입니다. 여기에서 만일 발등 찍힐 것이다. 경고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혐오스런 사 회가 처음 맛본 이상한 음식을 뱉어버린 것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치 포탈라궁 앞마당을 온통 중국식 광장으로 만들어 버린 침략군으로부터 독립을 외친 젊은 가슴에 총질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 다. 다수의 힘 있는 집단이 만들어 놓은 광장에서 함께 놀아주지 않는 다하여 외면자들이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아웃사이더의 고통을 감내 해야 하는 허수아비 환경에서 유행과 권력이 그 수명이 짧다는 것을 억지로 부정하며 얼굴색을 숨겨온 나날들을 뒤돌아봅니다. 하지만 이 제는 그 거추장스러운 변명을 늘어놓으며 아직은 오지 않는 후회의 눈물들을 미리 위로할 넋두리 예언들을 챙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티 벳에서의 7일간 체험이 많은 힘이 되어주었으니까요. 그렇다고 그들 수필 155

156 처럼 오체투지하기에는 이제는 쉰을 넘긴 뼈들이 너무나 많이 손상되 었습니다. 설령 뼈가 손상되지 않는 설운 청춘의 나이일지라도 혼미한 정신이라면 차라리 뼈가 상함보다 못할 것입니다만 그나마 이제까지 정신의 끈을 놓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더욱 또렷해진 정신을 추슬러 라싸를 향해 오체투지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행 중에 많은 사진 을 찍게 되지만, 그럴 때 마다 제 모습은 없었습 니다. 후줄근한 모습을 남기지 않으려 한 싫은 이유도 있었고, 내세우 거나 자랑하려는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제자신이 없는 그림은 차라리 인 터넷 그림이나 우편엽서 가 훨씬 나았습니다. 화려한 우편엽서의 그림 밑에는 마키아미 의 연 정처럼 어딘지 아쉬운 부분이 항상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무리해서 저를 끼워놓고 포탈라궁을 찍었습니다. 노안수술을 한 눈이 저 압때문에 시야를 흐릿하게 했지만 오랜만에 현장감이 있어 좋아 보입니 다. 이제 제 인상에 대해서도 타인의 평가를 무시할 만큼 나이가 들었다 고나 할까요. 도착한 날 오후라 아직 추위를 못 느낀 상태입니다. 열차에서 3일 째 면도를 하지 못해 콧수염이 보입니다. 호텔에 면도기가 없어 7일 동안 면도를 못했습니다. 흰 수염이 많아서인지 버스 안이나 바깥에서 티벳의 노인들이 말을 많이 걸어왔습니다. 티벳어인데 하나도 알아듣 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져시달렌 인사는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 인 사를 할 때는 반드시 자신의 혀가 검지 않다는 것을 보일정도로 혀를 길게 내밀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사악한 사람은 혀가 156 SDU 디지털 문학

157 검다. 는 이들의 전설은 참으로 기막힌 교육적인 장치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색깔의 혀를 가지고 있을까요. 혹시 많이 배울수록 혀가 더 욱 검게 되는 교육시스템은 아닌지요? 조심스럽건데, 티벳인들은 중국에 결코 동화되지 않을 것으로 보입 니다. 사악한 것을 멀리하고 부처의 경전을 생활자체로 받아들이며 모 든 생명체에게 그 큰 사랑을 전하는 라싸 가 있는 한 티벳인은 장 차 어떤 식으로든지 독립을 하리라 믿어집니다. 아니 이미 중국의 영 향을 전혀 개의치 않는 순수하고 자존심 강한 독립 국가를 영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핵과 인터넷, 위성무기로 무장한 현대국가를 넘어 순수와 열정의 오색 깃발이 펄럭이는 바람의 국가로 말입니다. 수필 157

158 수필 김호연재 3회 백일장 동상 고향 정애령 나는 흙이 좋다. 어려서부터 아스팔트 위에서 살아 그런지도 모른 다. 흙은 생명을 키운다. 풀씨와 나무와 집을 품는다. 하늘에서 내려 오는 눈비나 산꼭대기 옹달샘에서 흘러내는 물방울마저도 제 안으로 스며들게 한다. 이 세상의 고향 같은 흙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빽빽한 아파트와 빌딩 사이에 동춘당 공원이 있다. 공원 입구에 이 르기까지는 딱딱하고 시커먼 아스팔트가 깔려 있지만 동춘당 대문 안 으로 들어서는 순간 드넓은 대지를 만나게 된다. 비록 흙먼지가 풀풀 날리기는 하여도 흙길을 걸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가끔 나는 그곳으로 초등학생들과 함께 답사를 간다. 항상 봄만 같 아라 는 뜻의 동춘당( 同 春 堂 )에서 동춘당 선생의 생애와 한옥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뒤 안채로 넘어간다. 아이들은 안채의 툇마루에 제비 새끼처럼 쪼르륵 앉아 해설하는 선생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간혹 막 대사탕을 입에 물고 친구와 발장난을 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다가 손에 들고 있던 안내문을 떨어뜨린 아이가 마당가로 내려 선다. 그때 아이가 멈칫거린다. 아침 햇살에 반짝거리는 백토를 본 것 이다.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흙 알갱이들이 넓은 마당에 펼쳐져 있다. 백토 위에 찍힌 다양한 모양의 운동화 자국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발 158 SDU 디지털 문학

159 자국 중에 자기 것도 있음을 발견한 것일까. 아이의 눈이 아름다운 흙 처럼 빛나고 있었다. 먼 훗날 아이의 추억 속에 흙은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나에게는 삶의 흙에 뿌리를 튼튼히 내리기도 전에 수많은 접목부터 시도하던 때가 있었다. 남들이 꽃 중의 꽃이 장미라고 하기에 나도 무 작정 좋아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빨강, 노랑, 분홍 등 다양한 색의 장 미가지들을 접붙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날이었다. 색색의 꽃 이 핀 나무 밑동에서 발견한 것은 한 줄기 찔레였다. 흙 가까이에 코 를 박고 자라고 있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은 어차피 접목을 한 것이니 줄기 하나마저 잘라 버리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왠지 그 하나 남은 찔 레꽃의 달콤한 향기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우유부단한 나는 지금까지도 잘라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에서야 찔레꽃에 대한 미련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찔레꽃은 순수했던 내 모습이었다. 착한 마음, 무엇이든 포옹하던 흙의 마음이 었다. 그러나 나의 소중함을 몰라서 지금까지 남의 것으로 나를 채우 기에 급급했다. 뒤늦게 나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때 내 것은 많이 잃어 버린 뒤였다. 그것은 어쩌면 아파트와 빌딩 숲으로 에워 쌓인 동춘당 공원의 흙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봄날의 흙처럼 감싸 안 으며 살아온 동춘당 선생의 마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흙이 있는 동춘당에 가면 훈훈해지고 편안해지던 것일까. 어느새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수많은 생명을 키워냈던 흙 위로 낙 엽이 쌓이고 있다. 하지만 낙엽 위에 눈이 내리고 겨울비가 퍼부을 것 이다. 그래도 흙은 봄이 오면 또 새로운 생명을 키워 낼 것이다. 흙이 있는 한, 살아 있는 흙이 있는 한, 세상은 풍요로울 것이다. 세 살짜리 어린 아이가 소대헌 뜰을 걸어간다. 젊은 부부는 흡족한 표정으로 지켜본다. 그들이 지나간 흙 위에 발자국이 새겨진다. 삼백 년 전에도 발자국은 있었을테고, 삼백 년 후에도 발자국은 남을 것이 다. 그 중에 내 것도 있으리라. 모두가 고향 같은 흙이 그리워서 찾아 온 것인가. 나는 높은 기단 위에 서서 담장 너머를 바라본다. 내 마음의 고향인 수필 159

160 흙과 동춘당, 그리고 내 후손들을 생각하며. * 동춘당 : 효종 때 예학에 밝고 글씨와 문장이 뛰어난 동춘당 송준길의 별당, 국가지정문화재 제209호로 지정되어 있음. 160 SDU 디지털 문학

161 수필 첫 눈 내리는 날 최해자 기상청은 서해안일대와 호남내륙지방에 첫 눈이 올 것이라는 예보 를 띄웠다. 그러나 전면 믿지는 않았다. 정확도의 유무보다는 남부지 방이라는 특성상 오늘 하루도 크게 기온이 떨어졌다거나 하는 체감온 도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기말시험을 치른 후 월동 준비 중 가장 번잡스러운 김장을 끝냈다. 전업주부이면서 학생인 나는 이제 부터 덤같이 찾아온 휴식기를 만끽하려는 것이다. 삼한사온이라는 기 후적인 여건대로 설령 혹한이오고 폭설이 내린다고 하여도 나름대로 겨울나기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이다. 12월이 지났는데 아직 눈다운 눈이 오지를 않는다. 겨울이면 고질 병처럼 따라다니는 청승떨기가 도지는 듯 설경을 만나고 싶다. 겨울이 할 일은 적당량의 눈을 데려다주고 쌩쌩 부는 칼바람도 불어와야 하 는데 좀체 수은주의 눈금이 내려가지를 않는다. 뺨이 얼얼하도록 추운 칼바람에 맞서 아이들은 얼음을 지치고 어른들은 내년을 살아갈 구상 을 하는 겨울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날씨가 추우면 당장 생계가 어려 운 이웃의 고생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겨울은 추울 만큼은 추워야 겨울다운 멋과 정취가 있는 것 아닌가 한다. 그래야 농사에 해 수필 161

162 를 입히는 해충들의 서식을 막아내고, 계절의 촉각 속에서 땅심도 기 경이 될 것이니 말이다. 겨울가뭄이 더 무섭다고 했으니만큼 내심 하 늘의 일정이 궁금하던 차였다. 일기예보는 적중했다. 어제 밤부터 하늘하늘 날리던 눈발은 제법 탐 스런 모양으로 내려 쌓이며 탁한 세상을 하얗게 덮는다. 매스컴은 지 극히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당장에 내일 아침 직장인들의 출퇴근길 대란이 예상된다며 야단법석이다. 하지만 세상 한 귀퉁이에서 없는 듯 존재하는 보통여자는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과는 상반되게 그저 첫눈 과의 미팅을 즐기자는 것이다. 어쩌면 배부르고 등따신 호사심리일는 지는 몰라도, 습성 적으로 길들여온 눈 내리는 날의 청승은 가는 세월 과도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이 버릇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고 있었음을 어머니의 고민을 통해서 알 수가 있었다. mp3에 CD음반을 끼워 넣었다. 첫 눈 오는 날의 분위기를 격상시 켜주는 첫 눈이 온다구요 라는 가요이다. 가수 이정석씨가 1986년 대학가요제에서 금상을 따낸 이후 히트곡이 되었던 노래시가 마음에 닿아 오늘 같은 날이면 반기는 나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슬퍼하지 마세요. 하얀 첫 눈이 온다구요 그때 옛말은 아득하게 지워지고 없겠지요. 함박눈이 온다구요 뚜렷했었던 발자국도 모두 지워져 없잖아요. 눈사람도 눈덩이도 아스라이 사라진 기억들 너무도 그리워 너무도 그리워 옛날 옛날 포근한 추억이 고드름 녹이듯 눈시울 적시네. 162 SDU 디지털 문학

163 슬퍼하지 말아요. 하얀 첫 눈이 온 다구요 그리운 사람 올 것 같아 문을 열고 내다보네. 나지막한 보륨의 선율이 음감으로 꽉 찬다. 한 번 우아해지고 싶다. 커피포트에 앉혀놓은 찻물이 살랑살랑 소리를 내며 협주를 한다. 프림 을 뺀 커피 한 잔을 연하게 저으며 작고 동그란 탁자위에 앉혀 놓는 다. 햇빛을 차단한 눈꽃이 희뿌연 입김을 모락이며 창가에 내리고, 키 큰 아파트 숲 벽을 가르는 센바람 등살에 수직낙하가 버거워서 몸살 을 한다. 눈꽃의 통증이 뼛 속 골밀도의 이탈같이, 삶의 군상들이 배 회하는 지난한 고뇌같이, 벌써 지상의 고통을 체감하는 양 흔들거리며 내린다. 살얼음 낀 시내를 팔짝 뛰어 또래들과 장난을 치며 들판을 건너 학 교에 다니던 해맑은 얼굴이랑, 장갑도 없이 눈덩이를 뭉쳐 굴리며 못 생긴 눈사람을 만들던 우리들의 푸르딩딩한 언 손이 달려와 어깨동무 를 한다. 수없이 인연했던 이웃들의 얼굴이 궁금한 세월사이로 와서는 멀어지고, 이곳에서 절반의 사랑을 놓아두고 돌아선 그 사람의 그림자 까지도 서성이고 있다. 일일이 다하지 못한 그리움을 따라 가노라면 어느 사이 순하디 순한 정수( 淨 水 )가 흘러내린다. 살아온 날은 대부분 다정하고 소박했던 것이 아니냐고 혹여 귀엣말이라도 놓아주는가 싶 어 나의 청승은 나긋나긋 팔짱을 끼고 쏘다니노라 바쁘다. 참 희고 깨끗한 눈꽃이다. 무엇이건 하늘에서 오는 것은 하얗다. 땅 이 미쳐 준비되지를 않았다. 땅의 불순요소들이 깨끗한 것을 그대로 놔두지를 않는다. 사랑도 첫사랑이 진수라고 했다. 그러므로 초심을 잊지 말자는 말들을 많이 한다. 첫 마음이 갖는 소중함이나 가치를 의 미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참 희고 고운 눈꽃은 저리도 내려서 이내 세상의 검은 먼지를 쓸어모아 탈수시키는 생리를 앓게 될 텐데, 자연 이 요구하는 순응의 법칙이 무언가 다복스러운 날, 잠깐 나이에서 빠 져나와 소녀처럼 꽃 숨을 쉰다. 수필 163

164 세상살이를 좀 어린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랬던 것인지 근래 들어서 자주 듣게 되는 인사말이 생각난다.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인 다는 기분 좋은 말인 것이다. 여자라면 누구나 듣고 싶어 하는 매력적 인 찬사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 역시 탄력이 붙는 말이다. 이런 배경엔 어린 듯한 나의 청승이 한 몫 해준 덕분일 터이고, 그런 청승기질이 노화를 방지해 주는 묘약 효과를 내준 것이 라면, 여전히 내 곁에 머물러 있어도 좋을 청승버릇이 아닌가 싶다. 첫 눈 내리는 날의 사유( 思 惟 )가 맘에 드는지 눈송이들도 제격의 음악 을 들으며 아주 친밀하게 공유해 주고 있다. 164 SDU 디지털 문학

165 수필 그리움을 보다 한성희 한참을 걸어가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다. 그 모습이 가물가물하게 그림 속 풍경이 되어 가슴에 새겨져 버렸 다. 서로가 헤어지지 못해 저만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있고, 가다가 뒤돌아보기를 반복한다. 두고 떠나는 마음과 보내야 하는 마음이 먼 허공 한 점에서 마주친다. 시린 칼바람이 가슴을 휙 긋고 지나간다. 이스라엘 아인 카림(Ein Karem)에서였다. 그는 성서의 인물 세례자 요한이 태어난 곳에 수도원을 짓고 광야생활을 했던 세례자요한처럼 살고 있었다. 이름도 성도 모른다. 단지 그는 한국인으로 사제였고, 서로의 느낌이 통하는 한국말로 미사를 드렸다는 것밖에는 없다. 단 하루의 만남이었다. 하루 동안 예수님이 묻혔던 작은 동굴에서 상대의 숨소리를 들어가며 기도를 드렸고, 광야로 오는 길안내를 받았 고, 같이 점심을 먹었고, 사진을 찍었을 뿐인데 왜 그리 헤어지기가 힘들던지. 마치 혈육을 떼어 놓고 돌아오는 것 같이 발걸음이 떨어지 지 않았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고국을 떠나 외로운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고향 이 그리웠을 게다. 오랜만에 찾아온 모국의 여행객이 얼마나 반가웠을 까. 눈빛만으로도 피가 도는 소통의 기쁨을 맛보며 하루를 보냈다. 그 수필 165

166 동안 토해내지 못해 목젖까지 차올라온 자음과 모음을 마음껏 발산하 고 들으며 나만의 작은 광야를 체험했다. 하루 종일 내리쬐는 햇빛에 달구어진 붉은 암벽과 험한 골짜기에 주먹만 한 돌돌이 굴러다니는 거친 사막은 단 몇 시간도 견디기 힘든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해주었 다. 이런 황량함 속에서 어떻게 그 많은 시간들을 채우고 있을까! 그의 광야는 풀 한 포기 없는 메마른 사막이 아니라 진리에 목말라 하는 마음의 사막이었다. 깨달음을 얻으려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수행하 는 스님들처럼 그도 구원의 한 복판인 구세주의 탄생지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들 꿀과 메뚜기만 먹으며 고행했던 요한처럼 그도 육신 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에너지만 섭취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정진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광야에 내 광야를 풀어놓았다. 깊고도 높 은 진리와 구원이라는 그의 넓은 광야에 비하면 나의 광야는 초라하 기 그지없었다. 나는 고작 내 가족과 내 이웃과, 내 주변의 사람들과, 나 자신의 틀에 박혀 안달복달하며 힘들다고 투정을 부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나를 토닥거렸다. 그와 내가 다르듯이 서로가 가는 길도 다르고 삶에 짊어진 짐도 다르다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광야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광야를 통해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새로움을 발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와 나는 잠깐 만나 인연을 맺고 스치는 바람이었다. 그가 고국에 온다 해도 다시 만날 기약이 없고, 내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아인 카림 으로 또 여행을 갈 리도 없기 때문이다. 저 멀리 그의 마지막 모습이 가슴에 새겨져 오래 오래 기억된 것은 아마도 외할아버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외갓집에 갈 때마다 동구 밖 까지 따라 나와서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계시던 모습. 하나의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시던 모습이 그와 함께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의 외할아버지는 진지를 드실 때마다 반주를 한 잔씩 하시던 분이었다. 벽장 속에서 큰 됫병에 든 소주를 꺼내 밥 을 안주 삼아 두서너 잔씩 드셨다. 그렇게 술을 드셔야 비로소 말문을 트셨다. 공부는 잘하고 있쟈. 얼굴이 불콰하게 붉어진 할아버지는 빙긋한 부처님 같은 미소를 띠 166 SDU 디지털 문학

167 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에는 딸을 시집보내고 자주 보지 못하는 애비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그 눈빛에는 외로움과 그리움과 뭔가를 마음껏 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숨 쉬고 있었다. 시집간 딸이 한나절 거리에 살건만 딸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일 년 에 한두 번, 오빠의 제사와 할아버지 생신날뿐이었다. 고된 시집살이 에 눌린 딸이 시댁 눈치 보며 잠깐씩 다녀가는 걸 알고 있는 할아버 지는 늘 마음이 짠 하셨다. 믿고 의지하려던 큰아들이 비명횡사하고 외할아버지는 술을 아들 삼아 한 잔 마시고 먼저 간 아들에 대한 노여움에 또 한 잔을 마시며 시름을 달랬다. 학교에 입학하고 혼자서 외갓집까지 오갈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어 머니는 나를 친정에 보내기 시작했다. 학교는 우리 집과 외갓집 중간 쯤에 있었다. 학교가 파하고 나면 외갓집으로 달려갔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알리려는 듯 잎 푸른 나무와 꽃들이 반겨주었다. 봄에는 고목나무가 되어 신작로에서도 훤히 보이는 벚꽃이 흐드러 지고, 여름에는 담벼락 밑에서 봉숭아와 맨드라미가 서로 키 재기를 하고 있었다. 갈 때마다 할아버지는 손수 음식을 만들고, 공부하는 동안에는 필통 속에서 연필을 꺼내 깎아주셨다. 그리곤 아무 말씀없이 나를 꼭 안아 주셨다. 자신의 딸 대신, 딸을 꼭 닮은 손녀에게서 딸의 체취를 맡으신 것인 지도 모르겠다. 해가 좀 수그러질 때쯤 대문을 나서면 할아버지는 동 구 밖까지 따라 나오셨다. 따뜻하면서도 공허하게 빛났던 할아버지의 눈빛. 그 눈빛을 그날 그의 눈에서도 발견했다. 큰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할아버지의 광야는 어떤 것이었기에, 그렇 게 마냥 동구 밖에 서계시다가 스스로 명줄을 놓아버리셨는지. 그를 두고 떠나면서 망부석처럼 서 계시던 외할아버지가 떠오른 것 은 그리움의 색깔이 같아서일까. 수필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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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학생문단 서평 신상조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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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서평 정의란 무엇인가 에 정의가 없다 신상조 지난해 6월부터 불기 시작한 정의란 무엇인가 란 책 한 권이 해 를 넘겨 가면서 더욱 한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지난 연 말에 이미 100쇄를 넘겼고 새해 들어서는 공익방송국(EBS)에서 책의 근원이 되는 저자의 강의를 녹화 방영 중이고 급기야는 대한민국 우 수논객 11명이 참여하여 이 책을 분석한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해 설서(?)까지 출판되었다. 사실 나는 가끔씩 서점의 구석자리에서 베스트셀러를 일람하는 즐 거움을 가진다. 그것은 잘 팔리는 책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하는 알고 싶은 욕망과 새로운 코드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의 표출 일 것이다. 이 책도 외예는 아니었다. 지난 7월인가 무더운 날씨인데도 서점 안은 시원하였다. 책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내가 이 책을 개괄한 소감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우리 속담에 어울리는 책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선 정의 를 말하면 서 공자의 仁 사상이나 맹자의 浩 然 之 氣, 노자의 道 德 經 정도의 동양철학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고, 백보 양보해서 만약 서평 171

172 이 책이 서양철학을 중심으로 논한 것이라면 로버트 오웬을 위시한 협동조합사상의 맛이라도 보여주었어야 옳다는 생각에서였다. 1인은 만인을 위하고 만인은 1인을 위하여 라는 협동조합의 기본사상을 말 하지 않고 어떻게 정의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이 책은 많은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정의로운 길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데 곤혹스럽다. 아니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정답이 없는데서 정답을 찍으라니 말이다. 사례들은 하나같이 극한 상 황이다. 허리케인, 전쟁터, 금융위기, 고장난 전차, 해난사고, 살인자에 거짓말 하지 않기, 그리스도인 사자 우리에 던지기 등등, 평상시에는 정의가 없어도 된다는 말인가. 왜? 의.식.주에 대한 복지나 환경 같은 실생활의 정의는 말하지 않는가. 이건 온전히 미국의 국내용이 아닌 가. 그렇다면 왜 오늘 한국에서 이 책을 두고 야단법석인가. 이런 생 각들이 나를 혼란스럽고 화나게 했다. 세 번째, 내 상식으로는 무릇 인문서란 저자 자신의 분명한 의사를 밝히고 왜 이런 주장이 옳으냐를 증명해나가야 하는데 이 책은 그게 아니다. 전반적으로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여러 철학들을 비교하는데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말미에 저자의 속내를 살짝 비추기는 하는 데 그것도 명확하지 않고 아리송하다. 그야말로 정의란 무엇인가? 하 고 질문만 던지는 격이다. 정의란 원래 그렇게 아리송한 것이 저자의 철학이라면 더 할 말은 없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욕구는 과연 정의란 그런 것이 구나 하는 공감을 얻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그런 데 이 책은 읽은 후에 오히려 평소 가지고 있던 정의에 대한 생각마 저 흩트리고 만다. 그래서 이 책은 제목답지 않게 정의가 없는 정의의 책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 책 47쪽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하여 고민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밝히 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독자의 책 제목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자, 사정이 이러한데 무엇이 이 책을 대한민국에서 영웅으로 만들고 172 SDU 디지털 문학

173 있는가. 도대체 그 동력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시점 이 왔다는 것이다. 흔히 이 책의 성공적 흥행을 두고 말하기를 먼저 하버드라는 브랜드에 주목한다. 책의 타이틀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 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이 타이틀에 다소의 끌림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하버드대 교수의 책이라 고 모두 이렇게 성공한 적은 없다는데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출판사의 마케팅이 주효했다는 주장이다. 일리 있는 말이 라 생각한다. 우선 책의 디자인이 무척 고급스럽다. 표지의 책 제목과 저자의 이름이 오렌지색으로 원어로 되어있다. 그리고 책 뒤표지 앞에 30분짜리 저자의 실제 강의 DVD가 부착되어 있다. 이것은 굉장한 아이디어다. 적어도 이 책에 있어서는 확실하다. 또한 이 출판사의 광 고 전략과 이미지가 돋보인다. 사실 나 자신부터 김영사 하면 좋은 책을 만드는 회사다. 읽어 보고 싶다 하는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그 렇다고 이 출판사의 책들이 모두 이처럼 성공적이지는 않다는데 또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로 현 우리 사회가 정의 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 이다. 이 부문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독서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삼십대 층에서는 더 많은 사람 들이 정의에 목말라 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 원인이 야 어디 있건 간에 지금 우리 사회에 청년 실업자가 얼마나 많은가. 정부에서는 말로는 청년 실업을 줄이겠다고 큰소리 치고 있지만 최근 자료에 의하면 그 숫자는 계속 늘어가고 있다 한다. 또한 말로는 공 정한 사회 를 외치지만 내용은 위장전입이요, 이중계약이요, 자기 식 구 감투세우기요, 강자의 횡포로 밀어 붙이기 경연장이 아닌가. 가히 현 정부는 말로만 정부라고 비판할만하다는 여론이 많은 것이 사실 아닌가. 이게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이 책을 이처럼 흥행시키 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유라면 이 책 아니라도 이보다 더한 책들이 많다. 왜 그들은 흥행하지 못하는가. 여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서평 173

174 그 외에도 이 책이 공전의 히트를 계속하는 이유로 몇 가지를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나 속 시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해를 보냈 다. 그런데 금년 초부터 EBS의 샌델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무 릎을 쳤다. 그의 저서에 비하면 강의는 너무나 완벽했다. 강의의 조 건, 토론식 강의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청중을 리드하는 강약의 조 절, 적절한 유머, 반론의 유도, 학생의 이름을 기억하는 섬세함, 사례 를 삽입시키는 적절한 타이밍 등은 이 강의를 쉽고 재미있고 유익하 게 느끼도록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 어떤 명화나 드라마보다도 그렇 다. 이것이 이미 유튜브를 통하여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보았을 것이 아닌가. 입소문을 통하여 말이다. 사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지속적으로 팔리고 있는 진짜 이유였다고 확신한다. 확 실히 샌델은 평범한 저자이지만 탁월한 교수다. 모름지기 교수는 강의 를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이제 미국의 한 철학자가 우리에게 정의 에 대해서 화두를 던졌 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말이다. 다음은 우리 차례다. 우리는 철 학을 논하고만 있을 시간이 없다. 현실이 급하다. 구제역이 급하고, 실업이 급하고, 노사문제가 급하고, 빈부격차가 급하고, 지역갈등이 급하고, 남북문제가 급하다. 과연 우리는 정의를 어떻게 세워야 할 것 인가. 그것은 우리들의 몫이지 샌델의 몫은 아니다. 나는 진정 샌델이 우리에게 위대한 존재로 남기를 바란다. 174 SDU 디지털 문학

175 서평 백범일지 를 읽고 2010년은 남북한 관계가 최악인 한 해였다. 3월에 발생한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긴장이 계속되던 상황에서 11월 23일 연평도에 북한이 무차별 포격을 가하는 충격적인 사고가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민간인 을 포함하여 4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연평도 주 민들이 인천으로 피난하는 등 정전협정 이후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 다. 이러다가 과연 한반도에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겪으니, 백범 김구 선생의 통찰력이 더욱 그리워진 다. 김구 선생은 1947년에 발표한 나의 소원 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 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 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 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 서평 175

176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말씀에서 보듯이 선생은 민족을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에 두었었 다. 그는 또 남한만의 단독 선거는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와 결국 내란 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어 선생은 5.10 선거를 거 부하고 1948년 4월 19일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북한을 방 문하였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이후 재야에서 민족통일 운동 에 전념하다가 애석하게도 암살당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경고는 정확 했다. 그가 암살된 지 만 1년 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남한은 이승만 선생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 다. 그의 정치사상은 민족 보다는 민주주의를 우선시 하였다. 그는 당 시 시점에서 북한과의 협력은 불가능하며, 만약 북한의 협력이 있어 남북한 동시 선거가 이루어지면 결국 공산주의가 정권을 잡을 것이라 고 우려하였다. 그래서 북한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남한 단독 정부 수 립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현실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 이었는지 모르나 어찌 보면 민족의 장래는 생각지 않고 권력욕에 빠 져있었거나 아니면 공산주의에 이길 자신이 없는 나약한 귀족주의자 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김구 선생은 민족주의자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요, 사상 가이며 또한 지극한 효자였다. 그는 아버님이 임종 전에 어머니 몰래 그의 허벅지 살을 스스로 떼어내어 살은 구어서 고기로, 피는 약으로 드시게 하였다. 그런 정성에도 부족하여 좀 더 큰 살점을 떼어내려고 다리에 칼을 대었으나 의지가 약하여 살을 도려내지 못하자 불효자라 고 한탄하였으니 과연 효자란 어떠해야 하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선생의 인생 역정은 한 편의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그의 선조는 본 디 안동 김씨로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후손이며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의 부마가 되었으니 고려에서는 귀족의 가문이었다. 조선에 176 SDU 디지털 문학

177 서도 양반으로 살아오다가 조선 중기 김자점의 옥 에 연류, 멸문지 화를 당하여 한양에서 황해도로 옮겨 살게 되면서 출신을 속이고 족 보없는 상놈이 되었다. 그러나 어려운 형편 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들 의 교육열과 양반이 되어야 한다는 선생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7세 때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과거장에서의 부정과 매관매직의 세 태에 회의를 느껴 이후 과거공부는 접고 관상과 풍수에 대한 책을 읽 었으며, 가문의 어린이를 모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후 동학에 입도 하여 접주로 활약하였고 21세 때 민비 시해 범인으로 치하포에서 일 인 한 사람을 맨손으로 죽인 죄로 투옥되었다가 23세에 탈옥하여 마 곡사의 중이 되었다. 28세 때 아버님 탈상 후에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29세에 최준례와 결혼, 이후 교회 활동과 교육사업 그리고 항일운 동에 투신하다가 1911년 그의 나이 36세 때에 소위 안악사건으로 체 포되어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 40세에 가출옥하여 아내가 교편을 잡 고 있는 안신학교로 간 이후 농사를 짓고 소작인들을 계몽하는 학교 를 세우는 등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지내다가 3.1 운동에 가담한 후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 망명 이후 임정활동을 하면서 선생은 이 승만의 외교 독립론을 반대하고 자주 독립론을 고수하였다. 그는 외국 의 힘으로 독립을 한다면 결국은 도와준 나라의 식민지로 전략할 수 밖에 없음으로 자주적으로 투쟁하여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 였다. 선생은 <백범일지> 발간사 에서도 민족의 철학을 강조하였다. 우 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 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최근 아시아의 리더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 아웅산 수치 여사는 국내 한 언론사(매일경제 1월 1일자)의 신년 특별인터뷰에서 남한과 서평 177

178 북한이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당신은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는가? 란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무엇보다 나는 서로 같은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공유한 한 민족이 서로 합쳐지지 않고 이처럼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매 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폭력을 통한 해결방법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비폭력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 내심과 상대 얘기를 귀 기울여 들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한다. 왜 같 은 역사와 문화를 가진 두 나라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눠야하는가.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지난 연말에 중국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 는 중국은 한국을 손봐줄 지렛대가 많다 그러니 우리말을 잘 들으라고 협박하 였다니 참으로 황당하다. 어디 중국뿐이겠는가. 일본도 심심찮니 우리 를 괴롭힌다. 러시아와 미국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안타깝지 만 이게 우리의 현실이니 어쩌겠는가. 그러나 절망하지 말자. 길은 있 다. 김구 사상이 그 길이 아니겠는가. 어렵더라도 민족의 문제는 민족 이 주인이 되어 풀어야 후환이 없을 것이다. 남북한 지도자들에게 년 초에 <백범일지>의 일독을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78 SDU 디지털 문학

179 제5회 사이버문학상 최영정 안미선 심사평 당선소감 강혜란 김수정 심사평 당선소감

180 제5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 발표 제5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이 막을 내렸습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임헌영 문학평론가와 시 부문의 유성호 문학평론가, 이재무 시인, 수필 부문의 김종완 수필가, 노정숙 수필가 그리고 예심위원인 문예창작학 부 교수 이명랑 소설가는 시 당선작으로 최영정의 <대설특보>외 4편을, 가작으로 안미선의 <산세베리아* 증후군>외 4편을 선정했습니다. 또한 생활기록문 부문의 당선작으로는 강혜란의 <방관자, 그리고 이방인들>, 가작으로는 김수정의 <세족> 을 뽑았습니다. 2011년 제5회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은 시 응모자가 402명, 응모작품은 2,032여 편에 달했습니다. 생활기록문은 응모자가 408명, 응모작품은 816여 편에 달했습니다. 이는 서울권 일간지 신문의 신춘문예나 유명 문예지의 응모수를 뛰어 넘는 수치입니다. 뜨거운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당선자들에게는 소정의 상금과 상패가 수여됩니다. 아울러 당선자에게는 계 간 시작 과 월간 한국산문 에 작품이 실릴뿐 아니라 등단 작가로도 인정 받는 특전이 주어지게 됩니다. 시상식은 2월 28일(월) 오후 5시 서울디지털대 학교 7층 대회의실에서 열립니다. 심사위원장 - 임헌영 문학평론가(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시 부문 심사위원 - 이재무(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생활기록문 부문 심사위원 - 임헌영(문학평론가), 김종완(수필가, 문학평론가), 노정숙(수필가, 예심) 이명랑(소설가, 예심) [시 당선작 - 최영정 대설특보 외 4편] [시 가 작 - 안미선 산세베리아 증후군 외 4편] [생활기록문 당선작 - 강혜란 방관자, 그리고 이방인들 ] [생활기록문 가 작 - 김수정 세족 ] 180 SDU 디지털 문학

181 제5회 사이버문학상_시 당선작 대설특보 外 4편 최영정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맨 꼭대기 층 강의실에, 우린 철새처럼 앉아 길을 묻어보곤 했다 점자를 짚어내듯 취업 공고문을 손 짚어 읽다보면 자주 길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그럴 때마다 간판도 없는 술집에 앉아 눈발이 거세지는 서로의 눈을 닦아주거나 촛불이 되어 대신 울어주며 발치할 수 없는 희망을 계산서에 빼곡하게 부적처럼 적어두곤 했다. 취할수록 편안해지는 거짓말이 늘수록 새 하얀 세상 자취방에 앉아, 바라본 창 밖의 검은 하늘 밤이 별의 관절 속에 못을 박고 있다. 사이버문학상 181

182 제5회 사이버문학상_시 당선작 수의 해두면 오래 산다는 말에 미리 지어둔 수의, 웃돈까지 주며 맞춘 것 치곤 너무 볼품이 없다. 헐벗은 것보다 그나마 조금 나은 가벼움마저 없다면, 빨래 걱정 덜어내 줄 욕심 없는 저 누런 빛깔이 아니라면, 무르자고 성화라도 낼 판인데. 시골에 둔 누렁이 쓸어주듯 곱다, 참 곱다 하신다. 일평생 처자식 뒷바라지만 알고 까막눈이 된 게, 이제 막, 새 옷 한 벌 얻어 입는 게 저토록 신명이 나는 일인 것일까. 이젠,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 같다하시더니 밑이 트인 자루처럼 먹은 걸 182 SDU 디지털 문학

183 자꾸만, 도로 게워내신다. 내 등에 업힌, 수위 한 벌 벌레 먹은 사과보다 가볍다. 사이버문학상 183

184 제5회 사이버문학상_시 당선작 망치를 맞다 액자의 뒤편처럼 어둠이 짙게 서린 야시장에는 못과 같이, 억척스레 삶을 붙들고 사는 이들이 밤하늘, 별들의 묵고 시린 기침보다 가득하다 처자식만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묵묵히 가정에 못 박혀 살아온 사내부터 허리가 한껏 휜 노인까지. 주어진 한 줌의 삶을 소란스럽게 흔들며 일구는 사람들. 그들이 쏟아내는 힘겨운 한숨마다 오지 않은 미래를 보는 듯 삶의 탁한 기후와 온기가 끈끈하게 전해진다. 그 모습을 보며, 이제껏 사소한 일에도 삐걱거리며 어긋나기만 했던 나를 가만히 망치 밑으로 들이밀어 본다. 망치질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184 SDU 디지털 문학

185 제5회 사이버문학상_시 당선작 유령 도서관 밤이 개관되면, 옥상 가득 펼쳐지는 별자리 우린 그 책을 빌린 적이 있다 연체된 지도 모르고 서로 다른 꿈을 달의 담벼락에 빼곡히 적어놓고, 밤새 여기 저기 꽃가루를 묻히며, 새벽이 짓눌린 골목에서 공기처럼 뛰어놓았다. 다른 이정표를 보며 걷다가, 학벌이 없다는 게, 뒤를 받쳐주는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 말 못할 아픔으로 퉁퉁 사랑니처럼 붓고 나서야 서울의 밤하늘에 밀서처럼 감춰진 별들을 꺼내어 읽어볼 수 있었다. 사이버문학상 185

186 제5회 사이버문학상_시 당선작 장기 영토가 장기판과 같이 둘로 나뉘고도, 한 수도 물러섬이 없는 지금 이 팽팽한 시점이 한데 나고 한데 지는 별들에게 얼마만큼이나, 낮 부끄러운 일인지 왜 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것일까. 지키지 못할 거짓말에 속고 우는 국민들은, 언제까지 경첩처럼 가슴에 못을 박고 살아야 하나. 문득, 네모진 칸칸이 서해안에 자리한 섬과 같아 보인다. 숨고를 틈 없이 온 사방에 철책선이 휘둘러 쳐진 그래도, 목숨을 담보 삼아, 근근이 바다로 나가 살던 사람들에게 186 SDU 디지털 문학

187 언제까지 정부는 무리수를 둘 것인가. 방치된 산새의 알처럼 겁에 떨며, 물방울로 웅크린 그 한 소년을 보고도 어찌 눈뜨고 태극기를 볼 것인가. 쉽게 들리던, 플라스틱 장기알이 천근만근이다. 사이버문학상 187

188 제5회 사이버문학상_시 가작 산세베리아* 증후군 外 4편 안미선 싹을 잘라 물 컵에 담근 산세베리아 하얗게 뿌리 내립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실눈 뜨는 산세베리아 그늘을 받아먹은 귀가 파랗게 자라고 우리 엄마 혓바닥도 퍼렇게 자라납니다 허둥지둥 시작한 오늘 아침 나는 한쪽 귀를 뚝 떼어 놓고 학교 갈 준비를 합니다 엄마 혓바닥이 자라 입 밖으로 나오기 전 떼어 놓은 내 귀에도 산세베리아가 돋아야 할 텐데 오늘따라 늑장 부립니다 잔뜩 웅크린 귓불이 결국 어제와 똑 닮은 아침을 만듭니다 나는 산세베리아 귀에 대고 말합니다 엄마, 학교 늦겠어요 꽁무니를 붙어 다니는 치와와가 따라 짖습니다 엄마도 쟁반에 토스트 한 쪽, 우유 한 잔을 담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188 SDU 디지털 문학

189 아침 한 끼 굶는다고 큰일이야 나겠어요 엄마는 혓바닥을 길게 내어 놓으며 수험생이 아침 거르면 안 된다고 합니다 남은 한쪽 귀도 어떻게 떼어 놓을까 고민합니다 하루쯤 귀 없이 산다 해도 별 일 없겠지요 엄마 혓바닥은 내일 아침에도 어김없이 자랄 텐데 나는 활짝 핀 산세베리아 귓불로 얼굴을 가리고 현관문을 나섭니다 가방 속에 몰래 숨겨두었던 또 하나의 귀 꺼내 붙이고 학교에 갑니다 *산세베리아: 영명 MotherinlawTongue로 잔소리를 많이 하는 장모의 혓바닥 같다는 뜻. 사이버문학상 189

190 제5회 사이버문학상_시 가작 할머니의 식사법 밥을 먹으며 그녀가 엄마를 큰 소리로 읽는다 숟가락을 뜰 때마다 활자가 조금씩 짙어진다 책갈피처럼 펼쳐진 밥상이 엄마처럼 가벼워지고 낱장마다 줄을 그으며 그릇에 담긴 엄마를 조금씩 덜어내는 일 언제나 낯설고 언제나 익숙하다 끼니때마다 책을 펴드는 그녀 오늘은 뒷장으로 넘기며 엄마의 어제와 그제를 거슬러 읽는다 벌써 십 이년 책표지가 열리듯 수술실 문이 펼쳐지고 백 년처럼 길었던 열다섯 시간이 찢겨졌다 두 손을 모아 잡고 있던 엄마 얼굴은 구겨진 책장이 되었다 낱말 빼곡히 들어찬 부록처럼 우리는 남겨진 채 마흔 둘째 쪽에서 굵은 제목의 아버지가 찢겨나갔다 190 SDU 디지털 문학

191 그때부터 그녀는 엄마를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우리는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문자 짜거나 싱겁게 몇 번이나 지워지고 다시 쓰여 갈피마다 너덜 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밥상에 오른 엄마라는 책, 서른여덟 쪽에서 책장을 덮는 그녀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책표지가 되라 한다 사이버문학상 191

192 제5회 사이버문학상_시 가작 비둘기는 심심해 주인님은 각본대로 신문지를 찢고 나를 꺼내요 처음인 듯 어리둥절하게 태어나는 나를 사람들은 천사라고 부르지요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태어나 잠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만 박수 소리와 함께 금방 지워지지요 머리부터 꼬리까지 바싹 구워진 한낮 장구밤나무가 나뭇잎으로 허겁지겁 부채질하고 흰 장갑 낀 주인님은 손바닥을 보이며 마술 부리죠 천 원짜리 지폐가 만 원으로 부푸는 손바닥 세상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가 유일한 출구예요 신문지 속에 빠진 내 깃털이 시들시들 말라가는데 사람들은 주인님 손끝만 보고 있어요 나에게 허공은 아무 의미가 없는데 날지 못하는 나를 왜 천사라고 하는지 아이들도, 어른들도 심심해서 그럴까요 192 SDU 디지털 문학

193 뜨거운 바람이 머리칼을 태우고 딩디기딩딩딩, 누군가 손가락을 튕겨요 문득 박자 맞추기에 턱없이 짧은 부리가 슬퍼졌어요 부리에 반사되는 햇빛 때문에 눈물이 났죠 눈물 맛도 심심해 무척 화가 났어요 나에게는요, 심심한 것만큼 슬픈 일은 없거든요 박수 소리는 아무리 쪼아도 허기를 채우지 못해 붉은 발톱으로 주인님 손가락을 움켜쥐었죠 하지만 곧 새장 속에 갇혀버려요 걱정하지 않아요 나만의 세상을 만들면 되죠 주인님을 공중에 날려 마음껏 쪼아 먹다가 아침이 되면 훅, 날리는 상상 멋지지 않나요? 사이버문학상 193

194 제5회 사이버문학상_시 가작 중심이 기울다 가슴에 봉곳한 두 칸짜리 방 기한이 남아있는데 철거 통보를 받았다 심장에 백기 한 장 꽂아두고 사후관리가 전문이라는 철거대책반 찾아갔다 철거 동의서는 대책반 임의대로 체결되었고 이제 짐 싸는 일만 남았다 미처 짐을 다 옮기기 전, 차디찬 기계음으로 방 한 칸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사후처방으로 특수기능이 첨가된 뽕브레지어로 문을 잠갔다 유선을 따라 부풀던 방,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남은 방이 여진으로 마구 흔들렸다 이미 마그네틱이 손상된 희망은 인식 기능을 잃은 마음 감식기를 끊임없이 긁어대고 그 자리에 타이커브*, 페미라*로 모든 가능성을 타진했다 기한이 표기되지 않는 권리증을 가졌던 시절 평생, 이 자리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194 SDU 디지털 문학

195 남아 있는 방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경고등마저 중독성이 강한 불안으로 먹통이 되었다 출입이 통제된 방 굳게 채워진 자물통의 무게로 기우뚱 거린다 불안한 중심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여간다 저울추 같았던 두 칸의 방 내 몸의 축이었다 *타이커브, 페미라 : 유방암 치료제 사이버문학상 195

196 제5회 사이버문학상_시 가작 와산교*가 늘어졌어요 와이퍼가 몸을 흔들어 빗물을 털어내요 라디오 볼륨을 타고 피아졸 라*의 젖은 목소리는 차창에 엉겨 붙어요 입술을 더듬어 내려와 젖가 슴이 춤을 추게 해요 빗물은 줄기 마디마디를 움직이고 부푼 엔진소리는 탱고를 추어요 물방울이 흐름새를 앞서며 입김을 불어요 가랑이를 벌리는 다리가 가 쁜 숨을 쉬고요 날숨의 부력으로 어둠이 발광을 해요 차창이 물광으로 화장을 해요 와산교가 행렬을 가늠해요 우산을 높 이 쳐들고 잡아당겨요 끌려가고 싶어 와이퍼를 더 빨리 작동해요 신 음하는 속도는 바퀴에 깔려버려요 196 SDU 디지털 문학

197 중심 잃은 속도가 손바닥에 엉켜 붙어요 손바닥과 와이퍼가 키스를 해요 우산 끝으로 와산교 꼬리가 길게 빠져나와요 한껏 흥이 난 피아 졸라는 엉덩이를 흔드는데 제기랄, 욕설처럼 늘어지는 저녁이에요 * 와산교: 은평구 증산동 불광천 다리 이름 * 피아졸라: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연주가이며 작곡가 탱고음악의 거장 사이버문학상 197

198 심사평 (시)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부와 계간 시작 에서 주관하는 2011년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 시 부문에는, 모두 402명의 지원자가 총 2,032편의 작품을 보내주셨다. 서울디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의 높 아진 위상을 실감케 하는 숫자라고 생각된다. 지원 작품의 대체적 경향 은, 구체적 실감이 중시되면서 사회적 상상력이 점증한 것이 예년에 비 해 새로워진 특징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경험적 구체성을 바탕으로 언 어 미학의 완성을 꾀하려는 의욕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점에서도 긍 정적 평가를 할 만하다. 하지만 세련된 미적 표현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미흡한 부분이 많아 앞으로 더욱 정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가 운데 심사위원들은 다음과 같이 당선작과 가작을 결정하였다. 심사위원의 이목을 끈 응모자는, 이름을 가나다순으로 밝히면 박은 영, 안미선, 이재흔, 최영정 씨의 작품이었다. 이분들의 작품이 마지막 까지 논의되었다. 이분들의 시편은 첨예한 상상력과 유려한 언어를 함 께 결속하여 긍정적 반응을 얻어내기에 족하였다. 언어를 이끌어가는 힘과 전언의 구체성에서도 한결같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여러 모로 미래적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당선작으로 뽑 기로 하였다. 하지만 더러는 작품들 사이의 균질성이 떨어지고, 더러 는 아직 완결성에서 미흡하였고, 더러는 신인으로서 패기가 모자라 다 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합의하였다. 198 SDU 디지털 문학

199 당선작으로 뽑힌 최영정 씨는, 응모작 전편이 매우 안정된 균질성과 함께 삶의 페이소스를 관찰하고 갈무리하는 따뜻한 시선과 언어를 매 혹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이미지 조형과 실감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다만 시가 훤히 트였다는 느낌보다는 안으로 단단히 결속되었 다는 느낌을 주어, 이 점은 앞으로 신인으로서 유념하여 고쳐가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우리 시대의 구체적 삶의 실감이 잘 녹아 있어서 미더움을 더 크게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가작으로 뽑힌 안미선 씨는, 상상적 원심력과 구체적 일상의 구심력 이 든든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삶의 비애와 그것을 심미적 감각으로 활달하게 살리는 힘이 느껴졌다. 기억과 감각 속에 사물이나 경험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능력도 좋아 보였다. 특별히 긴 호흡 속에서 시를 구성하는 능력에 신뢰가 갔다. 앞으로 다양한 소재 선택의 안목과 그 소재에 걸맞은 형상의 방법을 지속적으로 확장해가길 바란다. 당선하신 분들에게 축하를, 최종심까지 올라온 분들께는 위로의 말 씀을 전해드린다. 앞으로 더욱 좋은 작품들이 많이 응모되어, 서울디 지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의 위상이 점점 견고해지기를 희원한다. - 심사위원 : 이재무(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 사이버문학상 199

200 당 선 소 감 당선 - 최영정 사실 길을 걷으면서도, 방향을 자주 잃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겨우 목적지엔 다다랐을 때, 가까스로 펜 한 자루를 쥘 수 있었습니다. 문 득 그간의 바람과 부패한 눈빛들이 떠오릅니다. 지상에서 눈물이 가장 반짝이는 유일한 순간은, 시가 되었을 때인 것 같습니다. 한 장의 사진만 그토록 기다렸는데, 그 간절함이 드디어 카메라 플 래시처럼 갑작스럽게 터져 나왔습니다. 정말 눈부신 울음이었습니다. 흔들리는 것들에겐 분명 속력이란 게 있고, 밤하늘엔 소중하지 않은 별들이 없습니다. 더 많은 별을 만들고 더 많은 별을 고민하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전해 듣고, 어떤 자세로 어디에 어떻게 서있었는지. 구름 위를 걷으면서도 발이 빠지지 않아 불안한 지금, 가장 낮은 곳에서 큰 목소리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그런 시를 써나가겠다고 다짐해봅 니다. 심사위원님과 그리고 부모님,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김수복 교수 님, 강상대 교수님, 박덕규 교수님, 최수웅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저희 대학교 1기 김지훈, 임현준, 최정환 선배님 감사합니다. 또 한 외숙, 선미, 자민이, 경준이, 영호, 유리, 혜미야 고맙다. 끝으로 제 가 아는 그 한 사람이 정말 멋진 기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욱 시를 향해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 SDU 디지털 문학

201 가작 - 안미선 소식을 접하고 제 미욱한 손을 이끌고 시작( 詩 作 )의 출발선에 세워 주신 마음의 스승님께 전화 드렸습니다. 오랜 시간을 출발선에 비켜 서 있었던 저는 죄송함에 한참을 인사를 여쭙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못난 제자였지만 금방 음성을 알아주시는 따뜻함에 울컥, 콧날이 베인 듯 아렸습니다. 저는 타고난 글재주가 없기에 오로지 많이 읽고( 多 讀 ), 많이 쓰고( 多 作 ), 많이 생각( 多 想 )하는 삼다( 三 多 )를 죽기 살기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 저에게 가장 큰 무기는 죄송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쉽게 지치지 않는 인내심입니다. 이제 겨우 신발끈 하나를 묶고 출발 하려고 합니다. 나머지 끈도 단단히 묶어 시창작의 장기 레이스를 거 뜬히 치러 내리라 다짐해 봅니다. 졸작을 어여쁘게 보아주신 심사위원 두 분 선생님, 마경덕 선생님께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 드립니다. 근간에 시와 함께하느라 직분에 소홀 했던 회사, 친구, 문우들께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 드립니다. 앞으로 함께 가야 할 사람과 나의 가족들, 특히 무난한 사춘기를 보내는 딸에 게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선물을 곧 팔순을 맞으시는 우리 엄마 께 몽땅 드립니다. 사이버문학상 201

202 제5회 사이버문학상_생활기록문 당선작 방관자, 그리고 이방인들 강혜란 짧은 단발 머리에 그믐달 같은 눈썹을 가진 여자 외과의사의 흰 손 가락이 마우스를 움직이자 모니터의 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시 경을 통해 목구멍 깊이 뱀처럼 또아리 튼 고즈넉한 숲 길을 따라 내 려 갔다. 붉디 붉은 핏빛 물결 위에 희디 흰 한 점 꽃잎 같은 모습으 로 자리잡고 있는 선명한 세포의 사진 설명을 우리는 넋을 잃고 바라 보고 있었다. 외과 의사와의 짧은 눈맞춤에서 나는 처연한 절망감을 느꼈다. 95%의 수술성공 확률과 5%의 실패 경우를 이야기하며 위 절제 수 술 동의를 결정하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끝내고 일어서는 의사 의 모습이 흐릿해 보이기 시작했다. 시아버님과 아들 네 명은 한 소대 의 병사들처럼 무리 지어 다니기 시작했다. 당사자인 환자 본인에게는 정확한 병명도 알려 주지 않았고 아무런 의사도 묻지 않았다. 처음부 터 어머니께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한도 없 었다. 아들 네 명은 어머니에게 뱃 속에 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 꺼내 면 된다는 말로 거짓말을 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여유 있게 받아들 이며 안심했다. 오히려 갑자기 변해버린 시아버지의 태도에 마냥 행복 202 SDU 디지털 문학

203 해하셨다. 나는 5%의 수술 실패율이 마음이 쓰이며 신경이 예민해졌 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곰곰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는 어디 에서 오는 것일까? 나 자신도 의아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자식, 며느 리여서일까? 하고 스스로 반문도 해 보았다. 배움이 깊든 짧든 자신의 삶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유의지에 의 하여 움직이고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 니다. 21C 최첨단 과학의 발달과 빛의 속도처럼 빠르게 변해가는 세 상 속에서 남편이 모든 것을 결정하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TV 화면을 통해 위 절제 수술은 개시되었다. 어수선한 수술방 대 기실의 숨죽인 기다림. 입안이 바싹 타 들어갔다. 정확히 두 시간 뒤, 집도의가 보호자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당혹감 속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의사의 물기 어린 시선이 나를 따랐고 소독약 냄새가 뒤따 라 나의 코를 찔렀다. TV 드라마나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의 직감은 적중했다. CT상에서 볼 수 없었던 세포에서 깊게 전이된 부분이 있어 위 절제술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말. 초록색 옷과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이 병원 복도를 이리저리 부산스 럽게 움직인다. 창 밖을 내다보니 도로 위에서 열기가 이글거리며 올 라온다. 나는 여름 한 복판에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을 떠올린다. 어머니의 병명을 알려야 하지 않아요? 하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 보았다. 어머니는 남달리 생에 대한 애착이 강해 사실대로 말하면 절 망감이 클 것이라고 남편과 시댁 식구들은 반대를 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수술 후 며칠 뒤, 의사는 항암 치료를 하면 1년 6개월 정도, 치료를 하지 않으면 1년 정도 생을 살 수 있다고 선고를 했다. 수술 후 상처 가 채 아물기도 전에 식구들은 항암 치료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아들 사이버문학상 203

204 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게 갈렸다. 항암 치료를 하자는 표가 2명, 반대 표가 2명, 때문에 아버님의 의사표시가 결정적이었다. 또 힘든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나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주치의에게 치료 도중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만일 입장을 바꿔 박사님이 우리 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질문했다. 박사는 자신이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며 치료 중 환자의 건강 상태에 따라 사망할 수도 있다는 말 을 냉정하게 했다. 환자의 지금 상태로는 힘들다는 말과 함께 치료를 해도 후회, 하지 않아도 살면서 자식들이 후회하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말을 했다. 모든 것은 환자 본인이 결정하면 더욱 좋겠지요. 라고 박사는 말 을 끝냈다. 이번에도 아버지와 아들 네 명은 어머니의 의견은 물어보 지도 않고 결정을 내렸다. 나는 어머니에게 본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 다고 사실대로 병명을 말씀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며느리였기 때문에, 단지 며느리란 이유로.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한 풀 꺾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백치 아다다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속만 썩이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한 평생 장사 일로만 살아오신 어머니. 내사 돈이 제일 좋다. 돈이 힘이야! 어머니, 돈 필요 하세요? 아니! 내 손으로 번 돈, 내 돈이 제일로 좋지!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은 바뀌어 가고, 나와 시댁 식구들은 조금씩 병간호에 지치기 시작했다. 집안 살림은 조금씩 구멍 이 나기 시작했다. 남편과의 불화도 생기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불자 204 SDU 디지털 문학

205 어머니의 병세는 더욱 나빠졌다. 기력이 떨어지며 쇠약해지시는 모습 이 눈에 보였다. 말은 하지만 식구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나는 어머니에게 글씨로 써보라고 말씀을 드렸다. 손바닥에 글씨를 쓰시는 어머니, 글을 읽을 수가 없다. 어머니의 글은 어머니만 알아볼 수 있 는 어머니의 글이었다. 어머니! 이 땅의 한 많은 어머니들이여! 배우지 못해, 깨우치지 못해 인내와 수고로 삶을 사신 어머니.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호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체 고단한 육신은 지 상의 가난한 시간을 머리에 이고 빛 바랜 영혼은 천상의 영원한 아침 으로 날개를 퍼득이려 한다. 나라도 용기있게 사실대로 말씀 드렸다면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유의지로 선택해 어머니의 방식대로 삶을 정리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나는 방관자였다. 아니 우리 모두는 어머니에게 철저한 이방인이었 다. 사이버문학상 205

206 제5회 사이버문학상_생활기록문 가작 세족 洗 足 김수정 꿈을 꾸었다. 꿈에서 어머니가 살아계시는데 내가 모시고 살고 있었 다. 생전에 모실 때는 내 삶의 십자가가 무겁다고 어머니께 잘 못해드 렸는데, 그게 가슴에 못이 박혀 아직도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 는데 꿈에서 나는 어머니께 원도 한도 없이 효도를 해드렸다. 꿈이지 만 어머니 원하시는 것을 다 헤아려 해드렸고 어머니는 아주 행복한 모습으로 거기 계셨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머니의 발을 씻겨 드렸던 기억이다.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서 어머니의 발을 담그고 지극히 정성스레 씻겨드렸 다. 어머니는 즐거워하시며 크게 웃으셨다. 꿈을 깨고 나서도 어머니 의 웃음소리가 생생히 귀에 남았다. 마치 살아생전 그리 효도한 양 행 복한 마음까지 들었다. 돌아가신 후 여러 번 꿈을 꾸었는데 매번 꿈속 에서 힘들어 하시는 어머니를 보았는데 이번 꿈에서 어머니는 너무도 평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곰곰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가 나의 죄책감을 가엾게 여기시고 꿈에 서 다시 효도할 시간을 주셨나. 떨어져 사는 자식보다 모시고 사는 자 206 SDU 디지털 문학

207 식이 죄 많이 짓게 된다더니 정말 나는 어머니 가슴을 아프게 많이 했다. 우선 집에서 무뚝뚝하게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워낙 사람 상대 하는 게 서툴러 직장에서 말 많이 하고 집에 오면 파김치가 되곤 했 다는 변명을 해보지만 그 모든 것이 어머니를 초라하게 만들며 마음 에 상처를 드렸을 것이다. 마음으로 따뜻하게 못 해드린 거, 다정하게 대화하지 못한 거, 직장 다니는 나를 대신하여 살림해 주시는 것에 고마운 내색 하지 않은 거, 마음 상하셨을 때 죄송하다고 풀어드리지 못한 거. 그런 기억들이 송 곳처럼 양심을 찔러 돌아가신 후 많이 울었다. 그런데 그 꿈을 꾸고 나서 정말 효도를 해드린 것 같이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머니는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말라고 꿈결에 다녀 가셨나보다. 넓고 깊은 분이시라 그러고도 남으리라. 어머니의 기일 忌 日 은 아버지의 그것과 같은 날이다. 뇌지주막하 출 혈로 쓰러지신 어머니는 반년을 코마 상태로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돌 아가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날과 같은 날에 꼭 맞추어. 그래서 자식들 은 일 년에 한 번, 같은 날 연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기일을 같은 날로 맞추어주려 마지막까지 애를 쓰셨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아이를 조기유학 보낸 해에 쓰러지셨다. 지금도 우리 형제 들이 모이면 그런 이야기를 한다. 만일 아이가 한국에 계속 있었으면 어머니가 쓰러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어머니는 십여 년, 직장에 다니는 나를 대신하여 아이의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아이를 유학 보내 고 나서 어머니 그러셨다. 이제 내 할 일 다했다. 이제 좀 쉬고 싶 다. 긴장이 풀려서 그렇게 쓰러지셨을까. 동기간은 이미 이민을 떠난 후라 번갈아 들어왔다 나가며 주로 중 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는 내가 머무르게 되었다. 기도를 뚫어 인공호 흡기를 삽입하는 것도 울며 혼자 결정해야 했고 뇌에 관을 넣어 물을 빼는 수술동의서에도 홀로 사인을 해야 했다. 직장에 다니며 중환자 사이버문학상 207

208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루라도 못가 면 어머니 피가 역류하며 악화된다며 매일 기다리시는 것 같다고 간 호사가 귀띔을 해주어 거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중환자실에는 보호자 대기실이 있었다. 가운데로 통로가 있고 양쪽 으로 기다란 공간이 마루처럼 펼쳐져 있었다. 거기서 보호자들이 대기 하며 하루 2회 면회시간을 기다렸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 선 중환자들이라 보호자들이 그렇게 상시 대기하여야 했다. 면회시간 이 되면 중환자실 앞은 대기실에서 나온 보호자들로 침묵의 줄이 서 졌다. 중환자실 문이 열리면 묵묵히 줄을 맞추어 들어가던 행렬이 각 침대로 흩어졌다. 거기 어머니가 계셨다.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빛나는 은빛 머리칼은 어두운 잿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눈빛은 회색의 멍한 눈빛으로 공중에 떠 있었으며 육신은 힘없는 무기력함으로 침대 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 목은 절개되어 플라스틱 관이 꽂혀져 있었다. 그 참혹함에 눈물도 말라버렸다. 기도를 뚫어 인공호흡기를 삽입한 혼수상태의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비록 뇌사상태였어도 체온이 남아 있는 어머니의 하얗고 따뜻한 배, 거기 얼굴을 묻으면 그 따뜻한 체온 에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뇌에 관을 넣어 물을 빼는 수술도 하였지 만 어머니는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하셨다.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여러 보호자들 틈에 끼어 새우잠을 자다 가 갑자기 불이 켜지며 곡소리가 나면 모두 일어나 불안해했다. 거기 서 자던 보호자들은 황망 중에도 죽은 이가 누군지 확인하였다. 타나 토스*가 자기 가족을 비껴간 것을 확인하면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다시 몸을 누이며 잠을 청하였다. 중환자 보호자들도 그렇게 죽음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208 SDU 디지털 문학

209 세상의 모든 불행이 거기 모여 있는 듯하였다. 가건물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떨어져 뇌를 다친 초등학생은 일 년이 되 가도록 뇌사상태로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공사장에서 추락하여 전신마비가 온 중년가장의 가족들은 생계를 위한 갈등이 더욱 커 보였다. 오토바이 사고로 뇌사상태가 된 학생의 부모도 바짝바짝 피가 말랐다. 거기서는 순간순간 죽음을 겪고 일상처럼 죽어가는 모습들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지근거리에서 죽음을 겪으며 내 안의 생명도 조 금씩 빠져나가는 듯하였다. 너무도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겪고 돌아가 셔서 그랬는지 두고두고 어머니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미고 아파 저절 로 눈물이 흐르고는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리는 꿈을 꾸고부터는 세월로도 희석되지 않던 슬픔이 옅어지고 고통에 눌려 빛 을 바랬던 그리움이 짙어졌다. 정말 어머니는 꿈에 다녀가신 걸까. 어머니는 나의 눈물과 후회하는 마음을 알고 계실까. 꿈에라도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려 다행이다. 신 은 모든 곳에 계실 수 없기에 어머니를 보내셨다 한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께 사랑을 전하고 싶다. * 타나토스 Thanatos :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을 의인화한 신. 사이버문학상 209

210 심사평 (생활기록문) - 번민하며 관찰하기 - 이 세상에서 레프 톨스토이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매일 번민하 고 있다 고 한 건 바로 톨스토이 자신이다. 인간은 번민하는 존재다. 그 번민의 화두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번민 그 자체는 인간 생존의 표 상이다. 번민을 문자로 기록하는 것이 문학이다. 운율을 넣으면 시가 되고 줄글로 쓰면 산문이 된다. 산문을 묘사 위주로 쓰면 소설이 되고 서술 위주로 기록하면 수필이 된다. 물론 묘사와 서술의 차이는 오십 보 백 보다. 번민을 기록하자면 일단 관찰해야 된다. 관찰력의 중요성을 오에 겐 사부로( 大 江 健 三 郎 )는 소년시절 체험에서 털어놓는다. 시골에서 싫도 록 보던 나무들인지라 그는 자연을 관찰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문 화영화의 한 장면에서 벚꽃의 작은 가지나 꽃송이, 잎사귀가 가느다랗 게 계속 떨고 있는 걸 보고 촬영조수가 일부러 나무를 흔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봤던 나뭇잎이나 꽃은 바람이 세게 불지 않으면 떨 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 그는 관찰 하러 감나무 아래로 다가서 보니 전혀 바 람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도 어린잎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관찰하게 됐고, 그게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들었다고 했다. 210 SDU 디지털 문학

211 현대문학이란 곧 관찰의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다. 총 408명의 옹모자들이 816편의 작품을 보내왔다. 양적으로는 엄청난 성공이지만 수준은 예년에 비하여 고만고만했다. 사적( 私 的 )인 기록을 특색으로 하는 수필인 까닭이겠지만 가족관련 소재가 압도적으로 많았 다. 관찰의 시선을 고루고루 360도로 회전시켜 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예선을 거친 3편은 보통사람들보다 자신의 삶 속에서 겪은 이들에 대하여 남보다 더 예민하게 번민하고 남보다 더 깊이 관찰한 기록들 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도 역시 가족이나 그 주변 소재인 점에서는 예 외가 아니었다. 강희진의 <이 몹쓸 년! 빨갱이 동서의 묘를 벌초하다>는 우리 시대 의 아픔이 절절이 묻어나는 절규의 눈물이 수정처럼 고인 글이다. 전 문 작가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으로 탈락의 위로 를 보내고자 한다. 김수정의 <세족( 洗 足 )>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자 생전에 못해 드렸던 세족을 시켜드린 걸 부각시켜 만년의 병고의 고통을 회 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구성이나 문장에 무리는 없으나 번민과 관찰의 깊이가 좀 아쉬워 가작으로 뽑았다. 강혜란의 <방관자, 그리고 이방인들>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겪는 암 환자에 대한 가족들의 자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곧 생명의 불이 꺼져 가는 걸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도 정작 가장 먼저 알아야 할 당사자에게는 비밀로 부치는 위장의식 은 보기에 따라서는 환자에 게 위로를 주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을 정리할 기회를 박탈하기도 한 다. 강혜란은 이런 갈등의 심리를 번민하며 치밀하게 관찰하여 차분하 게 서술했다. 묘사와 서술의 중간에 해당되는 문장력이 안정적이어서 수필문학에 적합하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하여 당선작으로 뽑았으 니 앞으로 더 열심히 활동해 주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예심(이명랑, 노정숙), 본심(임헌영 글, 김종완) 사이버문학상 211

212 당 선 소 감 당선 - 강혜란 가버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남은 날에 대한 절실함으로 많고 많 은 날을 예술의 숲에서 문학을 향한 혼자만의 사랑으로 서성였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쩍쩍 갈라지는 마음 밭에 한 줄기 비처럼 내리는 수상 소식은 타는 목마름을 잠재웁니다. 새색시 같은 부끄러움과 떨림을 머 리에 이고 문학을 하는 이의 마음 밭을 갈고 닦으려 호미를 들고 봄 이 오는 들녘을 내다봅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고 추웠던 어느 겨울날 늦은 밤 전화통화로 글쓰기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분에게 기쁜 마음을 전합니다. 물에 젖 은 솜 같은 나날들 속에서 시의 향연에 수필의 바다에 온몸을 적시어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도록 많은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들께 또한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부족하고 모자람이 많은 저에게 큰 상을 주신 서울 디지털 대학교 사이버 문학상 심사위원님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바쁜 와중에도 늦깎이 학업에 많은 도움과 격려를 해준 가족들에게도 사랑 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212 SDU 디지털 문학

213 가작 - 김수정 죽어 흙 될 몸 아끼지 마라. 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라야 커서도 그리된다며 딸에게 진 일은 시키 지 않으셨던 어머니, 그러나 그 귀한 딸이 시집갈 때는 엄하게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딸은 돌아가신지 어언 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머니를 그리며 눈물짓습니다. 어머니께 서는 제가 글쓰기를 그리도 소망하셨지요. 어머니를 그리며 쓴 글로 좋은 소식 들으니 더욱더 그리움이 사무칩니다.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가장 먼저 뿌리를 북돋우고 줄기를 바로 잡는 일에 힘써야 한 다. 그러고 나서 진액이 오르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면 꽃을 피울 수 있게 된다. 나무를 애써 가꾸지 않고서, 갑작스레 꽃을 얻는 일은 절 대 일어나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처럼 나무를 가꾸는 정성으로 글 쓰는 어 려움을 간직하겠습니다. 부족하기만 한 제게 글을 쓸 수 있는 용기와 기회를 주신 서울디지 털대학교 사이버문학상 모든 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이버문학상 213

214 SDU 디지털 문학 제5호 2011 발 행 인 오봉옥 편 집 장 신민경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부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 560 TEL. (02) 인쇄 2011년 2월 발행 2011년 2월 제작 삼호인쇄 주소 서울 서초 양재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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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È£ 1~8 1È£š 협 회 2013년 5월 6일 월요일 5 사진으로 보는 제39차 정기대의원총회 2013년 3월 16일 개최된 제39차 정기대의원총회는 전국에서 올라온 대의원과 내외귀빈 등 300여명이 세종대학교 세종컨벤션센터를 가득 메운채 성황 리에 개최되었다. 보건복지부의 간호인력개편방향 발표로 그 어느 총회보다 보건의료 전문기자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파독간호조무사 선배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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